독서후기

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

보해성산 2021. 12. 27.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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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

- 밀라논나 이야기 -

■ 장명숙 지음

0 1952년 생

0 밀라노에 패션디자인 유학

0 이화여대, 이탈리아 밀라노 마랑고니 패션스쿨 졸업

0 덕성여대, 동덕여대, 한국예술종합대학, 등에서 강의

0 에스콰이어 삼풍백화점. 삼성문화재단에서 디자인고문 및 구매디렉터

0 86아시안 게임 개폐회식 의상디자인

0 아이다, 춘향전, 돈주안, 등 수많은 연극, 오페라무용 공연의 무대 의상 디자인

0 한·이탈리아 다양한 문화 및 산업교류 코디네이터

0 2001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명예기사 작위 받음

* 밀라논나의 뜻 ; 밀라노의 할머니

■ 여는 글 : 내일이 궁금한 삶

나는 1952년생 장명숙이다. 한국전쟁 중 지푸라기를 쌓아놓은 토방에서 태어나 이른 살 언저리에 유튜버가 되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또 얼마나 재미있을까?’설레고 저녁에 몸을 누이면 ‘오늘 난 잘 살았나?’ 돌아보고‘내일 또 어떤 일이 펼쳐질까?’ 기대하곤 한다.

내가 살아온 날을 되돌아보았다. 얼굴은 작고 입은 유난히 커서 어릴 때부터 못생겼다는 소리를 들었다. 몸도 약해서 잦은 병치레로 고생도 좀 했다. 그런데 이런 외모를 가지고 태어나서일까?

확실한 건, 그런 환경이 준 콤플렉스가 나를 패션계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덕분에 화려한 조명도 받았고 세상의 어두운 그림자도 보았으며 나를 가꾸고 아끼고 사랑하는 법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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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아들이 생사를 넘나드는 대수술을 받았을 때도 이듬해 내가 근무하던 삼풍백화점이 무너졌을 때도 어떻게든 살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그때 소외된 사람들에게 베풀며 살겠다는 기도를 했고 그때의 다짐을 차근차근 행동으로 옮겼다.

이 나이가 되니 곳곳에서 ‘사는 게 뭘까?’라고 묻는다. 사는 게 뭐 별것일까. 태어나졌으면 열심히 사는 거고 어려운 이들을 돕고 살면 좋고, 내 몫을 책임져 주지 않을 사람들의 말은 귀담아두지 말고.

인생의 고비마다 되풀이하던 말이 있다. “그래, 산이라면 넘고 강이라면 건너자. 언젠가 끝이 보이겠지.” 늘 발을 동동 구르며 살았던 지난 날, 힘들 때마다 외웠던 구상의 시 <꽃자리>를 읽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지금 내가 걷는 이 길이 가시밭길이어도,

어느 날 돌이켜보면 꽃길 같겠지.’

조심스럽게, 담담하게 말하고 싶다. 매 순간 나는 성실히, 알뜰히, 정성껏, 내 인생을 살기 위해 노력했다고. 그리고 이제부터 소외된 약자들을 위해 내가 가진 힘을 오롯이 쏟아보려고 한다.

죽을 때까지 선량한 사랑의 서사를 이어가고 싶다. 이 책은 그런 서사의 일부이다.

2021햇빛 좋은 날에

밀라논나 장명숙

◎ 논나의 이야기 1. 자존

하나뿐인 나에게 예의를 갖출 것

■ 울고 있는 제자에게

옛 제자가 찾아왔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은 상하고 초췌해 있었다. 사연인즉 공황장애와 우울증으로 병원 신세를 졌단다.

중년이 된 제자는 바위처럼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보수적인 시댁은 용돈 액수에만 관심이 있고 남편의 태도는 결혼 전과 백팔십도 달라졌다. 가정 안팎의 궂은일은 모두 자신이 맡아야 한다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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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벌이가 아닌 맞벌이 부부라 분명 경제적으로 넉넉한데 이 풍족함을 남편 혼자만 만끽하는 현실에 온갖 회의만 밀려올 뿐이라고 했다. 여기저기서 청탁은 밀려오고 보기 싫은 사람을 만날 일은 계속 생기고 밤마다 업무를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아 불면증에 시달린다는 하소연을 이어갔다.

제자는 전형적인 워커홀릭이었다. 오랜 세월 자신을 돌보지 않고 과부하가 걸린 줄도 모르고 앞만 보며 달려왔다.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어디를 향해 가는지, 방향을 잃고 허둥대다가 번 아웃이 온 것이다.

● 워커홀릭(workaholic) : 지나치게 일하기, 일 중독자

● 번 아웃 : 어떤 활동이 끝난 후 심신이 지친 상태

이렇게 번 아웃이 오면 불면증을 겪게 되고, 불면증에 시달리다 보면 번 아웃 증상은 더 심해진다. 알코올로도 신경안정제로도 다스려지지 않으며 우울증이 깊어져 극단적인 상상까지 하게 된다.

완벽주의 콤플렉스, 전능감 콤플렉스가 작동해 자신에게 높은 수준의 기대를 걸거나 스스로를 극한까지 몰아붙인다.

그런 제자에게 저녁 내내 나의 고군분투기를 제자에게 들려주었고, 이런 조언과 격려의 말도 전했다.

무엇보다 나를 위해 산다는 대명제를 세우라고, 나의 자식, 나의 남편 앞에 ‘나’라는 한 음절이 붙는 건, 내가 없어지면 나의 우주도 멸망한다고.

실패해도 창피해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서 도전한 자신을 칭찬해주라고 쓸데없이 ‘착한사람 콤플렉스’를 끌어안고 전전긍긍하다 보면 내 어깨에 온갖 궂은 일이 얹히게 되는 법이라고.

타인의 시선, 타인의 평가에 나를 내맡기지 말고, 내 마음부터 따뜻하게 달래주고 품어주며 앞으로 나아가고 싶게 하는 에너지를 만들라고. 힘에 겨워 넘어지면 넘어진 채로 잠시 쉬어가고, 주변 산천경개도 구경하며 내 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라고.

며칠 뒤 그 제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선생님 말씀대로 하고 있어요. ‘실수해도 괜찮아 넘어져도 괜찮아. 넘어지면 잠시 쉬었다가 툴툴 털고 일어나면 돼.’이렇게 저를 계속 다독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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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힘을 내고 있어요. 내 몸과 내 마음이 무엇을 원하는지 느끼고 들여다보려고 노력합니다. 감사합니다. 곧 더 밝은 얼굴로 찾아뵐게요.”

■ “남이 보더라도”라는 말

“남이 보더라도…”

이 소리를 들으면 나는 핏대를 올리게 된다.

“남이 보는 게 뭐가 중요한데?”“왜 내가 남을 의식해야 하는데?”

“왜 내가 남하고 똑같아야 하는데?”

“남이 내 인생을 살아줘>”

“내가 아플 때 남이 같이 아파해줘?”

“그 대단한 남이 나에게 뭘 해 주었는데?”

“왜 내가 남의 눈치부터 봐야 하는데?”

그 대단한 남 때문에 내가 당했고 겪어내야 했던 분노를 쏟아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알지만, 나의 사고, 나의 행동을 왜 남의 기준에 맞춰야 하는가! 이것이 분노의 근원이었다.

부모님과의 갈등은 결혼식 전후로 극에 달했다.

“남이 보더러도 예단을 이 정도는 해야지.”

“남이 보면 자식 잘못 가르쳤다고 흉본다.”

내가 보기엔 예단과 혼수를 장만하는 비용이 너무나 아까웠다. 그래서 정성스레 혼수를 준비하시는 친정어머니와 이에 불만을 갖던 나는 사사건건 부딪칠 밖에 없었다.

친정아버지는 내가 직접 디자인 한 웨딩가운 뿐만 아니라 예식에 착용한 모자까지도 못마땅해 하셨다. 그 당시 누구나 다 쓰는 베일이 아닌 하얀 토크(toque : 주교님들이 쓰는 테가 없고 둥근 모자) 모양의 모자를 보시곤 남들이 모두 쓰는 베일을 썼으면 좋겠다며 얼마나 노여워하셨는지 모른다.

나는 항상 ‘남 때문에’ 공연한 꾸지람을 들었고 약간의 문제아 같은 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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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을 받아 적잖이 위축된 채 살았다.

그래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대학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남자와 결혼하면서 ‘적어도 보수적이기지는 않겠지’하며 은근히 기대를 했다.

하지만 웬걸! 남편은 친정아버지보다 한 수 위였다.

나는 타인의 시선을 끊임없이 의식하며 알맹이 없는 삶을 살고 싶지 않다. 남이 보더라도 괜찮은 삶보다 내가 보더라도 만족하는 삶을 사는 게 낫지 않을까? 내가 이런저런 논리로 반박을 하니 “남이 보더라도”라는 말을 하던 남편이 조금은 수그러들었다. 이제라도 남편이 저 소리를 멈추어주길 바랄뿐이다.

■ 삭발이 어때서

우리 집안은 대대로 머리숱이 없고 머리카락이 빨리 하얗게 변하는 유전자가 있다. 의학적으로 보자면 멜라닌 색소가 빨리 부족해지는 현상이다.

친정어머니는 갸름한 얼굴형과 단정한 이목구비를 지닌 대단한 미인이셨다. 눈치 없는 분들이 내 면전에서 따님이 어머니를 못 따라간다고 말씀하실 정도였다. 나는 아쉽게도 부계를 닮았다.

그런 친정어머니도 말 못하는 고민이 있으셨으니, 바로 머리숱이 부족한 거였다. 살짝 비밀을 공개하면 친정어머니는 50대 초반부터 가발을 쓰고 다니셨다. 절대 남에게 보여주지 않으셨지만 큰 딸인 나에겐 가끔 답답하다며 가발 벗은 모습을 보여주실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면 나는 걱정이 태산이다. ‘나도 어머니처럼 되면 어쩌나?’

고민하던 중 아주 특별한 어떤 모습을 보게 되었다. 외국어대 이탈리아어과에 한 교수님이 계셨다. 그분이 치매를 앓게 되어 부천의 한 노인요양병원에 입원을 하시게 되었다. 나는 그 요양원에 드나들면서 어르신들의 외관을 보다가 공통점을 발견했다. 어르신들의 머리는 관리하기 편하게 대부분 짧았고 머리색은 모두 염색하지 않은 천연백발이라는 것,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삶의 본질만 보고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어차피 나이 들어가는데 그냥 받아들이자.’ 그렇게 마음을 굳게 먹고 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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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고 벼르던 삭발식과 함께 염색 해방식을 감행했다. 삭발하지 않으면 흰 머리카락, 헤나로 염색한 머리카락, 탈색되지 않은 검은 머리카락까지 세 가지 색의 향연을 몇 달은 견뎌야하기에 성질 급한 내가 선택한 해결책이 삭발이었다. 그때 내 나이 쉰다섯 살이었다.

삭발하고 염색에서 해방된 뒤 친정어머니로부터 어쩌자고 그리 추하게 늙어 보이려고 하는 거냐는 꾸지람을 들었다. 할아버지 같다는 이야기도 두 번이나 들었다. 한 번은 내가 자주 가는 보육기관에 사는 꼬맹이가 “흰머리가 짧은 건 할머니가 아니지! 할아버지지!”라고 정의를 내렸다.

염색하지 않은지도 15년이나 흘렀다. 이제는 흰머리가 멋있다고 말해주는 사람들이 더 많다. 할머니면 어떻고 할아버지면 어떤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편안함이 있는데! 이것이 진정한 자유로움 아닐까

 

■ 엄친아에 대하여

‘엄마 친구 아들’의 준말인 엄친아는 집안, 성격, 외모 등 완벽한 조건을 갖춘 캐릭터를 뜻하는 말이다.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제발 엄친아라는 말을 쓰지 말자고 권유한다. ‘엄마 친구 아들’은 말 그대로 엄마친구 아들이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내 자식을 왜 남의 자식과 비교해서 초라하게 만드는가.

“엄마 친구 아들은 말이야”라는 말로 자식의 자존감을 무너뜨리기 전에 그 아이의 엄마가 어떤 환경에서 자식을 키우는지, 어떤 태도로 아이를 대하는지 관찰하라고 말해주고 싶다.

내 자식을 내 친구 자식과 비교하기 전에 나부터 내 친구와 비교해보자! 사실 비교할 가치가 없다. 그는 그고 나는 나니까. 내 자식이 나를 향해 “내 친구 엄마는…”

하며 다른 친구 엄마를 부러워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세상 모든 인간에게는 고유함이 있다. 각자의 고유함을 인정해 줄 때 존재감이 형성된다. 내가 존중받으며 성장할 때 타인도 나를 존중하는 법이다. 나는 엄친아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엄친아 부르기 금지 캠페인’을 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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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에서는 양육자가 피양육자를 이렇게 부른다. 미아 스텔라 Mia Stella, 우리말로 하면 ‘나의 별!’이다.

미오 아모레 Mio Amore, 나의 사랑!

미아 조이아 Mia Gioia, 나의 기쁨!

미오 테조로 Mio Tesoro, 나의 보물!

따사롭지 않은가.

“너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야.”

“네가 있어 별이 뜨고 보물도 생기는 거야.”

사랑, 별, 보물, 기쁨 등으로 불리니 아이들 자존감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얼마 전 영화평을 읽다가 밑줄을 크게 그어 놓았다. “비교는 인생의 기쁨을 훔쳐가는 것.” 더 나아지기 위해 내가 비교해야 할 대상은 남이 아닌 어제의 나다.

“비교는 기쁨을 훔치는 도둑이다.”(미국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

■ 세 명의 멘토가 가르쳐준 것

나는 멘토라는 단어가 주는 편안함, 관대함, 신뢰감, 푸근함을 무척 좋아한다. 멘토라는 단어를 들으면 밤바다의 등대가 떠오른다. 어두운 밤바다를 항해하는 이들이게 안도감과 위안을 주고 항해의 방향을 가르쳐주는 등대 같은 존재, 내 인생에도 여러 명의 멘토가 계셨다.

그 중 한 분이 마랑고니 패션스쿨의 브라가 선생님이다.

그는 밀라노 중산층 가정에서 자란 여성으로, 옷 입는 법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람을 대하는 태도 또한 품격이 있으시다. 어떻게 교양을 쌓는지 알고 싶을 때 이분을 뵈면 답이 나온다.

또 한 명의 멘토는 가장 친하게 지내는 친구의 어머니다. 세간의 기준으로 봐도, 주관적인 기준으로 봐도 일곱 남매를 모두 훌륭하게 키워내신 놀라운 분이다.

옷차림은 단출하지만 정갈하고 멋스러웠다. 일곱 남매를 키우며 쌓인 내공일까. 언제 어떤 고민을 말해도 막힘없이 답을 주셨다. 자유로운 사고를 갖고 있는 온고지신의 표본이고, 자식들에겐 진취적인 기상을 강조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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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한 분은 가장 친한 이탈리아 친구의 어머니다. 이 분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삶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준 분이었다.

손님을 초대했을 때 어떻게 식탁을 차려야 하는지. 밀라노의 점잖은 계층은 윗사람을 어떻게 공경하고 아랫사람에게는 어떻게 인간적으로 대접하는지 등을 자신이 직접 실천하여 보여주셨다.

내가 봉사를 하러 아프리카에 간다는 걸 아시곤 후원금을 듬뿍 찬조해 주시기도 했다. 나는 이분께 자식문제, 신앙문제 등, 내가 겪는 모든 문제를 여쭤볼 수가 있었다.

멘토라는 말은 그리스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스 이타카 왕국의 왕인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에 참가하면서 자신의 아들인 텔레마커스를 잘 보살펴 달라고 어떤 친구에게 부탁했는데, 그 친구의 이름이 멘토였다고 한다. 멘토는 인생을 이끌어주는 지도자, 현명하고 신뢰할 수 있는 상담자, 지혜를 나눠주는 스승이라는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 특혜보다는 자유를

1980년대 후반 내 나이 서른여섯 살 때, 당시 가장 유명하고 규모가 큰 토털 패션 회사에서 나를 고문으로 모시고 싶다고 제안했다. 회사 측은 매일 오전 9시에서 오후 5시까지 근무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나는 그건 어렵다고 했다.

매일 출퇴근 할 형편이 안 될뿐더러, 대학 강의도 놓치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 무대의상 작업 또한 계속하고 싶었다. 회장님께서 내게 근무 조건을 제시해달라고 하셨다. 나는 주 3일 근무를 말씀드렸다. 흔쾌히 근무조건을 받아주신 화장님이 갑자기 의전 차량에 대해 물어오셨다. 회사 상무이사 직급의 임원에게는 국내 생산의 고급 세단을 제공하고 운전기사분도 따로 배정해 주신다고 했다. 특히 나는 상무급 고문이니 더 특별하게 차종과 색을 선택하라고 말씀하셨다. 예상치 못한 대우에 적잖이 당황했다.

나는 잠깐 생각해 볼 시간을 가진 뒤 의전차 제안을 정중히 사양했다. 회장님께서 놀란 표정으로 물으셨다. “보통은 의전차 제공을 요구하거나 더 큰 차를 제공할 수 없는지 묻는데 사양하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차종이 마음에 안 들면 말씀해주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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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양하는 이유를 말했다. “제가 평생 누릴 수 있는 편의가 아니고 언젠가 되돌려줄 호사라면 애초에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재직하는 동안 최선을 다해 회사의 이익을 위해 일하겠습니다.”

예부터 집안의 어른들이 항상 말씀하셨다. 분수껏 살아야 탈이 없고 뱁새가 황새 쫓아가면 가랑이가 찢어진다고.

그 후 회사에 들어가 열심히 즐겁게 일하다가 훗날 내가 떠나고 싶을 때 과감히 떠났다. 미련하나 없이 자유로웠다.

 

“내 자유를 빼앗기지 않을 만큼 받으면서 동시에 내 자유를 지킬 수 있다면 자신의 가치비용은 조금 할인해 주세요. 조금 더 받아서 내 자유를 빼앗기지는 마세요. 훗날 직장을 떠날 때 아쉬움이 남을 것 같은 특혜는 더더욱 받지 마세요.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이 있다.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저자 빅터 프랭클은 극한 상황에서 자유를 포기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빼앗겨도 자유만은 빼앗기지 않았다. 나를 나답게 만드는 자유는 이토록 소중하다.

■ 비혼주의자들에게

나는 부모님의 강권으로 조혼을 했지만 본래 비혼주의자 혹은 만혼주의자였다. 막상 결혼하고 나니 모래주머니를 달고 뛰는 듯 고단했다. 일과 가정을 모두 챙겨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혼과 결혼 중 무엇이 더 좋냐고 묻는 이들에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하지 못한다. 다만 조심스럽게 제안해 본다.

‘나는 죽을 때까지 비혼’이라는 장담은 보류하면 어떨까.

요즘 젊은이들은 견문도 넓고 지혜롭다. 그래서인지 여러 가지 이유로 비혼을 선택한다. 취업난, 주거문제, 자녀 양육비 등 현실적인 이유도 있지만 어느 한 가지 때문에 비혼을 선택한다고 콕 집어 말하기 어렵다.

결혼이 무엇인지 객관적인 정의를 되새겨본다. 특정한 이성을 만나 그 이성과만 성생활을 하고, 자식을 낳아 가정을 꾸리겠다는 선언 아닌가. 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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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만나 자식을 낳지 않고 평생을 살겠다는 결정 아닌가. 그렇게도 중요한 일생일대의 결정인데 누가 이래라 저래라 말할 자격이 있을까?

비혼주의자들에게 꼭 묻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긴 인생을 어떤 여정으로 채울 것인가? 어떤 경험을 하며 살아갈 것인가? 삶의 목표는 확실한가? 수도자들처럼 이타적으로 살기 위해 비혼을 선택하는 삶을 나는 존중하고 존경한다. 나는 비혼주의자들에게도 이렇듯 확고한 철학이 있냐고 묻고 싶다.

비혼주의자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비혼, 결혼 둘 중 하나만을 정해두지 않길 바란다. 사랑하면서 함께 살고 싶은 사람이 생겼는지, 사랑하면서 행복하고 싶은지, 여기에 집중하면 좋겠다. 혼자 살아도 좋고, 함께 살아도 좋다. 그게 꼭 결혼일 필요는 없다.

다만, 자식을 낳아 소중하게 기르는 경험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귀한 일이다. 얼마 전 작고한 프랑스의 불세출의 패션 디자니어 피에르 가르뎅도 이렇게 말했다.

“자식을 가져보지 못한 게 가장 후회스럽다.”

하지만 자식을 낳아 책임지고 보살필 자신이 없다면 자식을 낳지 말아야 한다. 나의 불행을 자식에게 전염시키지 말아야 하니까.

피에르 가르뎅이 한 말을 입 밖으로 꺼내기 전에 나 자신을 되돌아보며 반성부터 해본다. 나, 그리고 우리 사회의 어른들이 젊은이들의 종족보존의 본능까지 억제하게끔 세상을 망친 건 아닌가 하고.

■ 선택할 수 있는 것과 선택할 수 없는 것

뜻대로 할 수 없는 일이 많다. 부모를 선택하는 일, 국적을 선택하는 일…. 우리는 자신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거의 선택할 수 없다. 죽는 날을 선택하는 것도 그러하다. 물론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도 있을 수 있고, 이민을 떠나 귀화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애초에 태어난 국적은 어찌할 수가 없다.

누군가는 부유한 나라의 국적을 갖고 태어나 세계어디를 가나 대접을 받고 누군가는 가난한 나라의 일원으로 태어나 지구촌 곳곳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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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부색도, 부모도, 국적도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었던 존재가 자신의 미래를 설계하고 싶어 목숨을 건 선택을 한 모습에는 경외심까지 들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내가 가진 몇 푼으로 도와주는 일밖에 없다는 생각에 힘이 빠진다.

내가 이탈리아에 있을 때, 슈퍼마켓 앞에서 구걸하던 나이지리아 출신의 학사까지 마친 걸인에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는지 물었다. 그의 대답이 이렇다.

“나이지리아에는 일자리가 없어서 넓은 세상을 찾아 여기까지 왔어요. 신께 감사한 일이지요. 여비를 더 모으면 스웨덴처럼 시급을 높게 주는 곳으로 떠나려고 해요.” 그가 희망찬 어조로 말했다.

또 다른 한명은 필리핀이 고향인데 청소부로 일하고 있다. 그는 영문학 학사 출신으로, 쌍둥이 딸과 아들 하나. 이렇게 세 남매를 키우는 가장이었다. 그런 그는 항상 웃는 얼굴로 나를 반겨주었다. 내가 힘들지 않느냐고 물으니 대답은 간단했다.

“내가 일해서 가족이 행복하니까 더 바랄게 없어요.”

이탈리아에 사는 삶이 어떤지 물으니 철학자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것들에 신경쓰며 고통받고 싶지 않아요. 내가 해결할 수 없으니까요.

장 폴 샤르트르가 말하지 않았는가.

“인생은 ‘B’ birth와 ‘D’death 사이의 ‘C’ choice(선택)이다”

그래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걸 붙들고 불평하지 말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걸 심사숙고해 선택하여 그 택한 일에 후회하지 말자. 나의 행복을 스스로 지켜나가자.

■ 꿈을 바꾸게 만든 삼풍백화점 참사

구체적으로 꿈을 꾸는 건 즐겁게 사는 데 자양분이 된다. 청년기에는 이기적인 꿈, 노년기에는 이타작인 꿈, 나에겐 언제나 꿈이 있었다. 이렇게 쓰고 보니 마틴 루터 킹의 명언 “I have a dream.”이 떠오른다.

패션디자이너가 되겠다는 꿈은 이기적인 꿈이었다. 못 생겼다는 콤플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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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극복하고 싶은 욕구에서 생긴 꿈이었다. 간호사나 자선사업가가 되는 꿈은 이타적인 꿈이었다. 어릴 적 주변에서 흔하게 봐왔던 어려운 이들을 접하며 생긴 꿈이었다.

패션계에서 일하다가 남은 세월을 어떻게 보낼 것인지 고민하던 중 1995년 6월에 나의 일터였던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하루아침에 내가 나가던 직장이 없어졌다.

하늘로 떠난 이들 중엔 나와 함께 일하던 동료와 동창도 있었다. 그때 화려한 분야의 일만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반대쪽 일도 해보자고 생각했다.

그 후 큰 아들이 수술을 받았고 수술실 앞에서 신께 무릎 꿇고 했던 약속을 실행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나의 50대 60대를 사회복지 기관에서 봉사하며 보냈다. 호스피스 자격증도 따 두었다.

말이 봉사자지, 사실 봉사가 아니라 취미였다. 봉사는 남을 위해 노력하는 행위가 아닌가. 그런데 나는 내 스스로 시간을 정해 놓고 순전히 내가 좋아서 보육기관을 찾았다. 그러니 봉사보다는 취미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

갈 때 즐겁고, 가서 즐겁고, 돌아올 때 즐거우니 이런 멋진 취미가 또 있을까.

시인 랠프 월도 에머슨은 그의 시 <무엇이 성공인가>에서 이렇게 말했다.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좋게 만들고 떠나는 것 당신이 살았으므로 해서 단 한 사람의 인생이라도 더 행복해 지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 백조가 되고픈 미운 오리

내가 어릴 때 친정어머니는 새 옷을 사와서 나에게 입히시며 말씀하셨다.

“너는 너무 마르고 얼굴도 작아서 새 옷을 입혀도 태가 안 난다.”

어쩌다 오빠와 싸우다 울면

“입이 큰 여자애가 메기 아가리처럼 된다.”

그런 말씀을 하실 때마다 나는 안데르센 동화 속 <미운 오리 새끼>를 떠올리며 ‘난 꼭 예뻐져야지. 미운 오리 새끼에서 백조가 되어야지’ 속으로 다짐하며 어머니를 향해 입을 삐죽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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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 엄격한 친정아버지는 “명숙이를 현모양처로 키워야지”라고 하시면서 교풍이 엄하기로 유명한 학교로 진학시켰다. 문제는 그 학교의 교복이 전혀 예쁘지 않았다는 점이다.

중고등학교 진학을 결정하는 데에는 결국 순종했지만 대학을 결정할 때는 많은 고민을 했다. 여자들만 가는 대학의 가사과를 졸업해서 시집가는 수순을 밟으라고 아버지는 강권하셨지만…….

결국 여자들만 가는 학교의 미술대학을 선택했고 다행히 미대에 합격했다.

미술대학 4년 동안 멋도 실컷 부리고 예쁜 것을 찾아 열심히 돌아다녔다. 중고등학교시절 답답한 교복에 갇혀 살았던 갈증도 풀고, 미운 오리새끼에서 백조로 변신하기 위해 좌충우돌하며 지냈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결혼을 하고 밀라노로 떠나 유학생활까지 마쳤다.

내 자신이 미운 오리새끼가 된 것처럼 여겨졌지만 더 이 악물고 노력했기에 지금의 내가 만들어졌으리라. 이 땅의 젊은이들이 그때의 나처럼 천하에 못생겼다고 구박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힘냅시다! 당신은 미운오리가 아니라 가능성이 있는 오리이고, 존재 자체로 아름다운 사람이니까요.

 

■ ‘숙제처럼’ 말고 ‘축제처럼’

누구도 혼자 살 수 없고 남과 어울려 살아야 한다. 그런데 나는 이 말 끝에 ‘그러나’를 붙이고 싶다. 장 폴 샤르트르가 말했던가. ‘타인은 지옥’이라고 혼자 있으면 평화롭다가 함께 있으면 끔찍해질 때가 종종 있다.

결혼하자마자 어른들이 나에게 건넨 말씀.

“결혼하면 아기 낳아야지.”

첫 아이를 낳자마자 어른들이 나에게 했던 말씀.

“아유, 자식이 둘은 있어야지.”

둘째를 낳고 ‘이제는 어른들이 아이 얘기는 안 하시겠지?’

그런데 이게 웬걸?

“아들이 둘이면 나중에 쓸쓸해. 딸은 하나 있어야지.”

그때 ‘으아악!’ 속으로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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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두 아들을 둔 지금은 매우 좋다. 두 명 모두 커서 제몫을 하며 제 갈 길을 가고 있으니 고마울 뿐이다. 허리가 휠 정도로 헉헉대던 날들이 과거가 되어 이제는 홀가분하다.

세상의 풍경이 바뀐 지금, 젊은이들에게 여전히 과거에 내가 들었던 멘트를 날리는 어른들을 보면 지발 그러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왜 굳이 정해진 틀에 모든 젊은이를 끼워 넣으려고 하세요? 적성에 맞지 않은 일을 하면 불행해질 텐데, 그들이게 불행을 강요하지 마세요. 편하게 살게 두세요. 기성세대는 인생을 숙제 풀 듯 살았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축제처럼 살게 해줍시다. 경계선을 잘 파악하시고 선을 남지 않을 때 어른 소리를 듣습니다. 요즘 세상에서 어른이 되는 건 정말 힘든 거래요.

■ 유년의 기억

초등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동창과 데이트를 했다. 같은 골목에 살아서 각별하게 지냈던 인연으로 거의 한평생 이어온 우정을 기념하는 시간을 보냈다.

가장 먼저 57년 만에 졸업한 초등학교를 찾았다. 그렇게 넓어 보였던 운동장은 <걸리버 여행기>의 소인국처럼 작아 보였다. 초등학교 운동장을 거인처럼 큰 폭으로 걷다 보니 초등학생 때의 기억이 수채화처럼 퍼져나갔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4·19혁명이 일어났고, 3학년 때 5·16군사정변이 일어났다. 어린 시절에 겪은 이런 경험은 내 안에 두려움을 만드는 요소로 작용했다.40대 초반이었을까. 내 가슴에 묵직하게 똬리를 튼 두려움과 씨름을 할 때, U.G 크리슈나무르티의 책을 읽다가 이런 문장을 발견했다.

‘두려움은 내 마음 안에 있다. 내 마음 바깥에 있는 게 아니다.’

문득 깨달았다. 내 마음의 감옥에 갇힌 나를 누군가 꺼내 줄 수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감옥에서 나와야 한다는 사실을.

친구와 운동장을 둘러본 뒤 내가 결혼하기 전 동네를 찾아가기로 했다.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귀가 할 때는 멀게만 느껴졌는데 오랜만에 만난 벗과 밀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단숨에 고향집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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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년 전까지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이었지만, 지금은 내가 모르는 다른 분이 거주하고 있었다. 사는 사람은 바뀌었지만 집의 모습은 거의 그대로였다. 고향집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반가운 마음에 코끝이 찡했다.

갑자기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못 생겼다는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해 항상 천방지축 튀려고 안달하던 딸에게 해주셨던 아버지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선한 의지를 갖고 최선을 다한 거기까지가 자신의 몫이다.”

“진정한 용기는 눈앞의 현실을 직시하며 회피하지 않는 것이고,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반성하며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발끈하며 반응하지 말고, 사태판단을 지혜롭게 한 뒤 대응하는 게 현명하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처초연하며 자신을 삶의 중심에 둬라.”

“생활이 어려운 이웃은 꼭 보살펴줘라.”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못한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마라.” “돈이 사람을 쫓아오게 해야지, 사람이 돈을 쫓아가면 치사해진다.”

“인간의 가장 귀한 가치는 지고지순한 사랑이다.”

“어떠한 부정적인 경험도 자기가 어떻게 승화하느냐에 따라 치욕의 과거가 될 수도 있고, 빛나는 월계관이 될 수도 있다.”

* 경주 최부자의 육연(자신을 지키는 지침)과 육훈(집안을 다스리는 지침)을 강조함

어려운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 소년가장으로 사셨던 아버지의 삶에 대한 자세를 떠올리니 그제야 그 옛날 하셨던 말씀이 가슴에 와 닿았다.

문득 아버지께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동서고금 어느 성현의 말씀보다 더 좋은 훈계를 듣고 자랐건만 그 가치를 모르고 천방지축이었음을 용서해 주십시오.’

■ 고민이 깊어지는 실버 유튜버

어리둥절한 요즘이다. 집 밖을 나서는 순간 긴장하게 된다. 이른바 내가 인기 유튜버란다. “유튜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같이 사진 찍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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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아미치(Amici : 유튜브 <밀라논나> 채널에서 구독자를 아미치라 부른다. 이탈리아어로 ‘친구들’이라는 뜻)에요.”

언제 어디서 어떤 분이 다가와 인사를 건넬지 모르기에 외출할 때 한 번 더 옷매무새를 설펴본다.

‘인생 계획에 없던 유튜버가 되어 이런 칭찬을 듣는구나!’

응원의 댓글을 읽다보면 입가에 미소가 번지고 한없이 고마운 마음이 밀려온다.

칭찬을 들으면 여전히 쑥스럽고 오히려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기성세대가 얼마나 젊은이들에게 실망감을 안겨 주었길래 내같은 맹탕 할머니에게 인생 멘토라는 과분한 이름을 달아줄까. 어쩌다 기성세대가 동방예의지국, 장유유서의 미덕을 현실에 맞춰 슬기롭게 이어가지 못하고, ‘꼰대’라는 말을 들으며 비난의 화살을 맞게 되었을까.

유튜버로서 천착(깊이 살펴 연구함)해봐야 할 화두들이 늘어난다. 진지하게 고민하고 담담하게 들여다보면 아마도 그 답이 나오지 않을까.

◎ 논나의 이야기 2.

24시간을 알뜰히 살아볼 것

■ 날마다 걷는다

하루에 한 시간 이상 걸은 지 15년째, 비가 오나 눈이 내리나 어김없이 걷기 위해 집 밖을 나선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신발 끈을 묶을 때마다 콧노래를 자연스레 흥얼거린다.

젊을 때 나는 걷기를 어지간히 싫어해서 걸핏하면 피곤하다는 핑계로 택시를 자주 탔는데, 이제는 웬만한 거리는 죄다 걸어 다닌다. 그렇게 열심히 걸어온 덕일까 걷는 자세가 반듯하고 등이 곧아서 사람들로부터 좋아 보인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내가 매일 걷기 시작한 사연은 이렇다. 15년 전 아침 침대에서 일어났는데 오른쪽 골반에서 다리를 따라 발뒤꿈치까지 개미가 기어가듯 가렵고 바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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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이게 무슨 일이지? 걱정이 엄습해 병원에 갔더니 척추전방전위증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으니 통증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고, 허리 근육을 강화하는 방법이 최선이라고 전문의는 말했다.

똑바로 걷고 골반이 틀어지지 않게 바르게 앉고, 무거운 것은 들지 말아야 하고, 한 자세로 오래 않아 있지 말고, 다리를 꼬지 말아야 한다는 처방이었다.

정신줄을 바짝 붙잡고 정말 완치될 수 없는지 물었다.

“매일 꾸준히 걸어보세요. 그러면 허리 근육이 튼튼해져 고통이 줄어들 수 있어요.”

이 대답을 듣고 그때부터 나의 평생 걷기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신발장을 정리했다. 옷맵시를 돋보이게 해 주는 하이힐을 모두 꺼내 내 발 사이즈와 똑같은 주변 이들에게 이사시켰다. 높은 구두에 어울리는 스커트도 나누어주었다. 7년간 타던 차도 처분했다. 차를 판 대금은 아프리카 카메룬에 보냈고, 부모를 잃은 아이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하는데 썼다. 그리고 즐겁게 걸을 수 있는 집근처의 장소를 물색했다.

약속장소 까지는 가능한 한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도착역보다 두 역 앞에서 내려 30분 정도 걷는다.

이렇게 15년 동안 매일 걸으니 가장 좋은 건, 허리 근육이 튼튼해져 장시간 여행도 할 수 있고 내가 원할 때 밀라노로 날아갈 수도 있게 되었다. 게다가 햇볕을 쬐며 걷는 습관을 들였더니 다리도 튼튼해지고, 자세도 곧아지면서 골다공증 증세도 호전됐다. 더불어 불면증 증세도 나아졌다.

역시 내 좌우명이 맞았다. 걸림돌을 디딤돌로! 징징 거리지 않고 앞으로 전진! 어차피 인생은 후진도 반복도 못하는 일회성 전진만 있지 않은가.

■ 햇살 멍 때리기

모처럼 오전 일정이 없는 날이다. 거실 모퉁이에 앉아서 하염없이 햇살 멍을 때린다. 어린 시절에 즐겨 앉던 자세를 하고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햇살을 느낀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가 이해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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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대왕이 디오게네스를 찾아와 소원을 말해 보라고 하자. “햇볕을 가리지 말고 옆으로 한 걸음만 비켜주시오.” 이렇게 말하며 멍 때리기에 집중했다는 일화가 떠오른다.

“쓸데없는 욕심 버리고, 지금 이 순간을 만족하며 즐기고,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는 게 행복”이라는 디오게네스의 말이 새삼스레 가슴에 와 닿는다.

모닥불을 우두커니 바라보는 불 멍, 숲을 가만히 응시하는 숲 멍, 흐르는 물을 그저 쳐다보는 물 멍,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소리 멍, 여기에 햇살 멍을 추가해보자.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멍 때리기다.

초 단위로 아득바득 일하며 살던 때가 있었다. 그때는 출퇴근하기도 바빠서 햇살 멍을 때릴 겨를조차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시시각각 변해가는 햇살을 보고 느끼고 있으니 더할 나위 없이 명료하게 아- 행복하다.

■ 시간 관리자로 사는 방법

일간지 기사에서 하루 여섯 시간도 못 자고 부단히 일했던 나를 ‘시간 빈곤자’라는 말로 압축하여 표현하였는데 나는 이 말이 다소 불편했다.

나는 ‘시간 빈곤자’가 아니라 ‘시간 관리자’다. 30,40대에 나누어 두 아들의 엄마, 한 남자의 아내, 부모의 딸, 시어른의 며느리, 대학교수, 무대의상 디자이너, 패션 디자이너, 패션 컨설던트, 패션 칼럼니스트, 의류회사 고문, 백화점 고문 겸 바이어까지 정말 많은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다. 그 당시엔 하고 싶은 게 많고 호기심도 많으니 주어진 시간을 쪼개 쓰는 수밖에 없었다.

바삐 산 덕분에 택시 기사님들만큼 서울 지리를 꿰뚫게 되었다. 건빵은 어느 제과회사 제품이 내 입맛에 맞는지를 알게 되었다. 점심 식사할 시간이 없으면 차 안에서 가장 먹기 편하고 배를 든든히 채울 수 있는 건빵을 자주 먹었기 때문이다.

저녁형 인간이라는 게 늦게 자는 건 어렵지 않은데 새벽에 일어나는 건 정말 고역이었다. 한상 잠은 부족했고 시간별로 일 처리를 하는 습관이 있었다. 이렇듯 발을 동동거리며 살았지만 단 한 번도 시간이 부족하다고 불평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내가 ‘시간의 주인공’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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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든, 빈자든, 여성이든, 남성이든, 아이든, 어른이든, 전 세계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유일한 것이 ‘하루’라는 24시간이다. ‘어제 세상을 떠난 이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한 내일이 바로 오늘’이라 하는데, 오늘도 나는 공평하게 주어진 하루 24시간을 어떻게 하면 효율적이고 생산적으로 쓸지 머리를 굴린다.

내가 좋아하는 고 피천득 시인은 <인연>이라는 책에서 ‘위대한 사람은 시간을 창조해 나가고 범상한 사람은 시간에 실려 간다’고 말했다. 나는 위대하진 않지만 내 시간의 주인공은 바로 나여야 한다.

■ 오감만족! 행복 타임

청각이 발달한 체질은 좋은 음악을 들으면 즐거워지고 소음에 더 예민하게 반응할 터이다. 후각이 발달한 체질은 향기로운 꽃향기를 맡을 때 입꼬리가 올라갈 것이고 미각이 발달한 체질은 맛난 음식을 먹을 때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행복이란, 매 순간 내 오감이 만족할 때 오는 것 아닐까? 자기 몸에 집중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를 갖고 살며, 내 오감 중 어떤 감각이 가장 발달했는지 깨달을 정도로 자신을 관찰하고 사랑해야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

머리만 굴리며 살지 않고 몸으로 느끼며 살아야 한다. 자기 자신의 몸을 토닥이고 쓸어주어야 행복해진다.

 

또 아주 특별하고 중요한 한 가지!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가 시 <오데즈>에서 말한 카르페 디엠(carpe diem)을 실천하는 것이다. 현재를 산다는 건 매 순간의 느낌을 놓치지 않는다는 의미다. 어찌 항상 오감 만족을 하겠는가. 안분지족도 행복감을 느끼는 한 가지 방법이 아닌가.

* 카르페 디엠 : 지금 이 순간에 충실 하라.

 

■ 제로 웨이스트를 생각하던 날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둘째 아들이 첫 데이트를 하고 귀가한 저녁이었다. 퇴근 뒤 냉장고를 열어보니 유명한 찜닭집의 포장 백이 떡하니 자리 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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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다. 둘째 아들을 불러 사연을 들어보니 저녁으로 찜닭을 먹었는데 남아서 싸 왔다는 것이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말처럼 자식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며 자란다더니! 웃음을 참으며 둘째 아들에게 물었다.

“어찌 첫 데이트를 하는 날, 남은 음식을 싸왔어>”

“엄마도 항상 남은 음식을 싸 달라고 하시잖아요. 버리기 아깝고, 돈이나 다름없다고.”

나는 다소 걱정되는 마음으로 물었다.

“네 여자 친구가 흉보지 않을까?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떡해?”

“이상하게 생각하면 안 맞는 거죠. 그런 것쯤은 이해해야 오래 만날 수 있는 친구가 되죠.” 너무나 간단명료한 답에 순간 명해졌다.

새삼 절약과 궁상의 경계선에서 중심을 잡고자 했던 내 삶을 다시 돌아보았다. 나는 알뜰한 할머니와 부모님 밑에서 자라 음식뿐만 아니라 물건도 쓰임새가 다할 때까지 사용해야 한다고 배웠다.

“지구의 한 편에 굶어 죽는 아이들이 있는데, 삼시 세끼 부족함 없이 먹을 수 있음에 감사해라.” 식탁 앞에서 어른들이 자주 하시던 말씀을 듣다보니, 남김없이 먹고 쓰는 습관이 생겼다.

또 이탈리아 유학 생활을 하면서 이런 내 습관은 더욱 공고해졌다. 각자의 접시에 먹을 만큼만 덜어서 설거지하기 쉬울 정도로 깨끗이 싹싹 긁어 먹고, 심지어 소스가 접시에 남으면 빵으로 소스를 찍어서 말끔히 접시를 비우는 이탈리아인들을 보고 동서고금, 음식을 남김없이 먹는 게 미덕이구나, 되새기게 되었다.

새삼, 둘째 아들이 그날 보여준 행동 때문에 지난날의 기억이 떠오르며 여러 생각이 들었다. 쓰레기를 남기지 않는 삶, 제로 웨이스트(zero waste)를 실천하는 삶, 먹고 소비하는 태도만 바뀌어도 내 인생도, 우리 지구도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 버려진 식물들을 키우며

우리 집에는 세월을 고스란히 간직한 식물들이 있다. 33여 년 된 벤자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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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나무, 40여 년 된 보스턴 고사리, 38여 년 된 켄차야자, 40여 년 된 스킨답서스, 둘째 아들 낳았을 때 구입한 대만 고무나무도 40여 년 가까이 되었다.

식물 대부분이 길가에 버려져 있던 것들이거나 선물 받은 것이다. 어느 가게 주인이 폐업하면서 버린 화분을 집으로 가지고 와 지금까지 키우고 있다. 동물 유기만큼 식물유기도 문제다.

식물을 잘 키우려면 적당한 화분과 적절한 양분이 필요하다. 화분이 너무 크면 뿌리가 많이 자라고 과습이 된다. 화분이 너무 작으면 나무가 원하는 만큼 영양분을 흡수하지 못한다. 식물도 사람처럼 자기 그릇에 딱 알맞은 공간에서 편암함을 느낀다.

고기를 조리하기 전 찬물에 담궈 우려낸 핏물이나, 쌀을 씻을 때 생기는 쌀뜨물, 요거트를 먹고 난 뒤 요거트 통을 씻은 물을 주는 건 나만의 특별한 팁이다. 잎사귀는 햇볕을 향해 자라니 한 쪽으로 쏠리지 않도록 화분을 수시로 돌려준다. 햇빛을 받지 못해 누렇게 변한 잎사귀는 잘라준다. 죽은 잎사귀는 양분을 앗아갈 뿐이나 미련 없이 잘라주는 게 좋다.

식물도 소리를 듣는다. 미국의 과학자 도로시 리톨랙이 호박에게 클래식 음악을 들려주었더니 호박 덩굴이 스피커를 감싸며 자랐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식물에게 말을 건다.

“어머, 잘 지냈어?”

“우리 친하게 지내자.”

“오늘은 더 예쁘네.”

잎사귀를 만져주며 정서적 교감을 나눈다. 식물도 좋은 말을 해 주면 더 잘 자라는 듯하다. 오랜 시간 나와 함께한 식물은 나의 기쁨과 슬픔을 알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두고 갈 이 식물들을 나중에 누가 키워줄지 궁금해진다. 아니, 그 전에 좋은 사람들에게 이사를 보내야 하나?

■ 정리하면 삶도 명료해지더라

내가 정리에 빠진 이유는 1중학교 학년 때 내가 좋아하던 담임 선생님이 훈화 시간에 해주셨던 말씀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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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에 신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으면 도둑이 들어왔다가도 멈칫하게 됩니다. 모든 물건이 가지런하면 도둑이 긴장하게 되어 훔칠 물건을 찾기가 쉽지 않고 주인에게 금방 잡힐 수 있다고 판단하기에 돌아서 나가겠지요?”

그 말씀을 듣고 물건뿐만 아니라 주변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습관을 들였다. 물론 이런 훈화말씀을 듣는다고 해서 모두 곧바로 철저히 정리하는 습관을 시작하는 건 아닐 테니, 아무래도 약간 타고난 천성도 있는 듯하다.

이렇듯 어릴 때부터 나는 줄을 가지런히 맞춰야 마음이 편했고 정리정돈이 되어야 안심을 했다. 아이를 키우면서도 집 안을 뒤죽박죽 만들지 않았다. 주변 정리를 잘 해주면 아이들 심리가 안정된다는 육아법을 배우고 나서 더 열심히 아이들 방을 정돈했는데 조금은 강박증이 될 정도였다.

물건을 정리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모든 것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치매 예방법을 공부하면서부터다. 치매를 예방하려면, 규칙적이고 단순하게 살며 즐거운 자극을 수시로 받으면서 많이 움직일 것, 그리고 부정적이고 우울한 감정은 털어내야 한다고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모든 게 정리돼 있어야 안정감을 느끼는 성향인데 정리가 바로 치매 예방법 중에 하나라니, 얼마나 나에게 딱 맞는 비법인가!

서서히 집안 구석구석에서부터 인간관계까지 정리를 시작했다. 있는 것을 비워내고 필요한 것만 남기는 인생의 정리, 먼저 부엌 살림살이부터 정리를 시작했다. 노년에 입을 수 없는 옷도, 관절에 천적인 높은 구두도 쓸모없는 가구도 정리했다.

그 다음 인간관계도 정리했다.

나를 흔들리게 하는 사람도, 불쾌함을 남기는 관계도, 매번 같은 주제만 반복하는 모임도 정리했다. 정리하고 나니 그때부턴 시간을 내어서라도 만나고 싶은, 무언가 배울게 있고 본받을 게 있는 인연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렇게 물건, 인간관계, 삶의 태도 등 나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정리하니 삶이 단순 명료해졌다. 나름 기준을 세워 정리하고 나면 그렇게 편하고 좋을 수가 없다.

나 또한 모든 걸 정리한다고 이렇게 말하고는 있지만 가끔씩 버리지 못하는 것도 있다. 하지만 쌓아두고 소유하려고 집착하지는 않는다. 그럴 땐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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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유효기간을 어림잡으며 집착하지 않으려 나를 설득한다.

비우자고……, 텅 빈 충만을 만끽하자고.

■ 욜로와 파이어, 무엇을 선택하든

한 때 ‘욜로 YOLO’라는 단어가 우리 사회를 휩쓸었다. ‘You Only Live Once’ 의 약어로 ‘인생은 한 번 뿐이다’라는 의미의 줄임말이다. 현재라는 찰나가 너무 빨리 지나가 금세 과거가 되고 멀게만 느껴졌던 미래가 금세 찾아올 거라는 걸 알기에 노후 준비와 미래 준비는 하되 지금 이 순간을 충실히 즐기자! 하고 말하고 싶지만…사실 참 어려운 문제다.

부모는 자식이 자립할 때까지 제 갈 길을 찾아가도록 돕다가, 이후 자신의 노년기를 스스로 책임지며 안온한 삶을 영위하는 것을 가장 원할 텐데 과연 그런 이상적인 삶의 형태가 가능할까?

부모님에게 의존하는 캥거루족도 많고, 여러 가지 이유로 자식에게 부담을 주는 부모들까지 참으로 다양한 문제들을 지니고 있을 거라 생각된다.

진정한 자유를 누리려면 우선 경제적, 육체적, 정서적인 자립부터 기본이 되어야 한다. 생활비가 얼마나 있어야 죽을 때까지 소박하되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은행원이셨던 친정아버지는 자식들에게 경제관념에 대해서 누차 강조하셨다. “1천원을 벌어 1천 2백 원을 쓰면 항상 적자 인생이지만 1천 원을 벌어 8백 원을 쓰면 항상 흑자인생이다.”

“한 번 살림규모를 늘리면 줄이기가 힘들다. 항상 저축하며 검박하게 살아야 노후가 비참해지지 않는다.

이 가르침이 진정한 자유로 이끈다는 걸 이제야 체감한다.

사는 게 특별하지 않다. 배고프면 간단하게 요기하고, 추우면 따뜻하게 입고, 더우면 시원하게 입고, 자고 싶을 때 작은 내 한 몸 편안하게 누울 잠자리만 있으면 되는 것 아닌가.

사회에 해를 끼치지 않고 건강한 구성원으로 살아간다면, 누가 그들 삶에 손가락질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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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떼는 말이야”

카페 메뉴판에 있는 라떼 수난의 시대다. ‘나 때는 말이야!’라는 말이 ‘라떼는 말이야’라는 말로 변형되어 ‘라떼’가 비웃음을 당하고 있는 요즘이다. ‘나 때는 말이야’라고 말하는 사람은 꼰대가 되어 버린다.

‘꼰대’는 나이와 권위를 앞세워 아랫사람에게 군림하려는 연장자, 기성세대, 어른 , 선생님, 등을 풍자한 은어이다.

꼰대의 어원은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조선시대 말에 유럽의 귀족문화가 일본을 통해 들어왔는데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으로 나뉘는 서양의 귀족 서열도 함께 들어왔단 설이 있다.

이때 백작을 의미하는 프랑스어 ‘콩테 comte’의 말음이 일본식으로 바뀌어 ‘꼰대’가 되었다는 의견이다. 그런가 하면 번데기의 영남 사투리 ‘꼰데기’가 어원이라는 견해도 있다.

예전에는 당연히 나이가 많은 사람을 어른이라고 여겼다. 어른은 공경과 신뢰의 대상이었고, 힘든 상황에서 지혜와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존재였다. 곁에만 있어도 푸근해지고 매달리고 싶고 거친 풍파를 막아주는 울타리 같은 존재였는데, 언제부턴가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전락했다.

기성세대 젊은이들과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해야지, 수직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목에 힘을 주기 시작하면 꼰대가 된다.

‘나 때는 말이야’라고 말하는 사람을 보면 ‘그래서 어쩌라고요?’라고 묻고 싶어진다.

언제든지 젊은이들이 아쉬운 게 있어 손을 내밀 때 아무 말 없이 손을 따뜻하게 잡아 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꼰대라는 말 대신 어른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 같다.

위계질서가 완고하면 사회는 경직되고 위계질서가 파괴되면 사회는 무너질 것이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존중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존중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랑받는 덕목이니까.

■ 골프보다 더 즐거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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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와 친정아버지께서는 내 귀에 못이 박하도록 말씀하셨다. “적선지가(積善之家) 필유여경(必有餘慶)이란다.”

“선을 많이 쌓은 집에는 반드시 경사가 생긴다. 후손이 잘 되길 바란다면 어려운 이들에게 후하게 베풀거라. 후한 뒤끝은 후하기 마련이고, 악한 뒤끝은 악하기 마련이다. 거지에게 돈을 줄 때는 두 손으로 공손히 주어라.”

이런 환경에서 자라서인지 사회생활을 하면서 수입이 생기는 순간부터 우리사회의 약자 혹은 소외된 이들에게 일정 후원금을 기부하기 시작했다. 사실 약간의 이기심도 있었다.

“늙으면 골프 칠 일밖에 없다우. 같이 골프나 배우러 다닙시다”라고 한 선배가 말했을 때 나는 웃으면서 속으로 혼자 되뇌었다. ‘돈도 들고 시간 도 써야하는 골프에 쏟을 에너지를 저는 좀 다른데 쓰고 싶네요. 저만의 방식으로요’

골프 대신 내가 찾은 일은 봉사하기였다. 골프장에서 하루 만에 모두 쓰게 될 만큼의 비용으로 관심이 고픈 어린이들에게 좋은 추억을 만들어 줄 수 있었고 친부에게 성폭행을 당해 증오의 기억을 떨치지 못해 끊임없이 면도칼로 자해를 감행한 소녀를 보며 그 아이의 손목에 새겨진 송충이 같은 흔적을 지워주기도 했다.

호화로운 외식을 줄인비용으로 부모에게 버림받아 영혼에 구멍이 난 어린이가 치유 받을 수 있도록 심리상담 비용을 보탰다. 가능한 한 내게 투자하지 않고 절제하여 모은 비용으로 구순구개열로 태어난 아이의 수술도 지원했다. 수술 뒤 밝게 웃는 아이의 모습을 볼 때의 희열이 어찌 고급 옷을 입는 즐거움에 비길 수 있을까.

25년 동안 봉사를 하면서 얻은 깨달음이 있다. 어떤 돈은 시류에 휩쓸려 쉽게 사라지지만 어떤 돈은 누군가에게 힘을 준다는 사실이다. 내가 아껴 모은 돈으로 누군가를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도왔다는 것. 봉사로 충만해지는 내 삶이 나는 좋다.

■ 찬란하게 나이 들기

‘여생을 편안히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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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원에서 여생을 한가로이 보내고 있다.’ 과거 젊은 시절에 나는 신문이나 매체에서 이런 문장을 접할 때마다 마음 한 구석이 불편했다.

일단 ‘여생’ 혹은 ‘전원’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나른함, 게으름, 노곤함, 무료한 느낌이 싫었다.

노년의 삶은 비생산적이고, 무가치하고 그저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으니 그런 문장을 보자마자 착잡해지곤 했다.

그래서 여생이라는 단어를 접할 때마다 나는 절대로 여분의 삶을 살지 말아야지…사회에서 나를 밀어내도 내 몫의 일거리를 찾아서 움직여야지…한가롭게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은 보내지 말아야지…굳게 다짐을 하곤 했다.

그런 다짐을 했던 내가 이제 여생이라 불리는 시간대에 도착했다. 연금 수혜자, 지공족(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나이)으로 불리는 나이가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젊었을 때 다짐했던 대로 노년을 보내고 있나? 조심스럽게 그렇다고 말할 수 있겠다.

지금 나는 내 리듬에 따라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고 느긋하게 아침식사를 하고, 뉴스 혹은 음악을 들으며 우아한 척을 한다. 식사 메뉴도 내 입맛에 맞는 것으로 택하고 시간도 내 마음대로 조절한다. 음악회도 전시회도 여행도 내 기분대로 즐긴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으며, 의무와 시간에 쫓기던 과거에 미처 해보지 못한 것들을 경험하며 산다. 젊을 때 그토록 갈망하던 24시간이 온전히 내 것이니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다. 지금 나는 진정으로 내 삶의 주인공이다.

누가 노년을 여생이라 부르며, 노년을 무료한 이미지로 떠올리도록 만들었을까? 소파에 누워 기운 없이 리모컨만 돌리는 삶이 아닌,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시간이 노년이다.

심신이 건강하기만 하다면, 인생의 가장 찬란한 때가 바로 노년이다. 원한다면 가만히 앉아 하루 종일 햇살도 볼 수 있으니 눈이 부시지 않은가.

2021. 12. 12.

* 다음에 2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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