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잊어도 좋겠다
이제는 잊어도 좋겠다
- 나태주 인생이야기 -
■ 풀꽃 시인 나태주
0 1945년 충남 서천 생
0 1963 공주사범 졸 43년간 초등 교직생활
0 1971 서울신문 신춘문예 <대숲 아래서>가 당선
0 50여 년간 수천 편의 ‘시’ 발표
0 <풀꽃> :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
0 펴낸 책 : 시집, 산문집, 동화집, 시화집 등 150여 권
0 공주 문화원장 역임
0 현재 한국 시인협회장
0 김달진 문학상, 소월 시문학상, 정지용 문학상, 박용래 문학상,
유심 작품상, 한국 시인협회장상, 등
0 공주 풀꽃 문학관 설립 운영
0 풀꽃 문학상, 해외 풀꽃 시인상 등을 제정‚ 시상하고 있다.
■ 프롤로그 : 망각에 바친다
내 나이 벌써 77세, 70세를 고희(古稀)라 하고 77세를 희수(稀壽)라 한다. 예부터 드문 나이를 지나 아주아주 드문 나이에 도달한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은 자꾸만 기억이 가물거린다. 두 번 인생을 산 사람처럼 전생의 일인 양 옛날 일들이 까마득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다. 특히 단어가 그렇고 그중에서도 유독 사람 이름이 가물가물해진다.
더구나 요즘은 자꾸만 내가 할 일을 잊는다. 건망증이 새로 생겼다. 먼 일을 잊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일을 잊는다. 가령 아침저녁으로 반복적으로 먹는 약이 있다 하자. 그 약을 자주 잊는다.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조차 잊는다. 그리고 약속이나 전화 내용을 자주 놓친다. 노트에 기록하지 않으면 영락없이 내가 약속하거나 말해 놓고서도 엉뚱한 소리를 한다. 큰일 아닌가. 습관적인 건망증인 것이다. 어쩐다? 기억이 더 흐려지기 전에 무언가를 기록해야만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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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인생이란 기억으로 점철된 그 무엇이라고 할 수 있겠다. 누구든 자신의 인생, 지난날들을 차근히 한 번 뒤돌아보시라. 과연 무엇이 남았다 하는가? 물건인가? 그 어떤 행동인가? 흐릿한 대로 아련한 기억과 기억을 따라다니는 느낌과 소리와 빛깔의 자취만이 그 주변을 맴돌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인생은 기억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기억만이 인생이다. 기억만이 참된 인생의 가치요, 재산이다. 그러므로 날마다 최선을 다해 정성껏 자신의 인생을 갈고 닦으면서 살아야 한다. 그렇게 자신에게 주문을 걸며 다그치며 살아온 날들이다. 하지만 기억처럼 끈적거리고 성가신 존재도 없다. 기억은 지나치게 몸피가 크고 무겁다. 그것들을 버리고 좀 더 가벼워지고 싶다. 이제 나는 그것들을 모두 환원시켜야 한다. 그런 후 망각의 늪에 주저없이 내던져야 한다.
나는 지극히 집요하고 에고가 강한 인간이다. 그래서 일생 시를 쓰는 사람으로 살아와야만 했다. 무언가 자신이 남과는 다르면서 특별해져야 한다고 턱없이 믿었던 허영덩어리였지만 이제는 평범하고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가야 한다. 덕지덕지 묻어있는 기억의 얼룩들을 닦아 말끔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 길이 바로 이 책을 끝까지 제대로 쓰는 일이다.
신은 분명 나의 소원을 들어주시리라 믿는다. 나의 좋으신 독자분들 또한 나의 글을 믿어주실 줄 알고 읽으시는 분에게 축복과 감사의 말씀을 미리 올린다. 다시금 이 책이 내가 되게 하고 나는 지극히 가벼운 존재, 망각이 되기를 소망한다. 나는 한 개의 민들레 홀씨처럼 가벼워지고 싶고 작아지고 싶다.
◎ 1장. 바람이 잠든 새벽 흰 감꽃이 날리면
■ 돌연변이
왜 나는 시인이 되었을까? 시인일 수밖에 없었을까? 그 연원(淵源)과 그 까닭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물론 나 자신의 일이고 나 지신의 정신적 소산인 것이라서 매우 주변적인 면을 벗어나기 어려운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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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 철없던 나이에 시인이 되겠다고 소원을 세웠노라 말하곤 하는 나다. 그로부터 장장 50년의 세월이 흘렀다. 스스로 돌아보았을 때 단 하루도 시를 생각하지 않고 넘어간 날이 없고, 한 번도 시를 쓴 것을 후회해 본 적이 없다.
참으로 놀랍고 신기한 노릇이다. 어쩌면 지극히 어리석은 게임, 제한적인 세상, 자신 없는 투자에 온 생애를 걸었을까.
그 시절이야 모두가 빈한했지만 우리 집은 유난히 썰렁했다. 농토도 많지 않아서 여섯 마지기, 게다가 식구들이 많았다. 그야말로 누추한 오두막집에 헐벗고 굶주린 짐승 같은 식구들 여럿이 우글거리며 사는 집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게다가 할머니는 선무당 비슷한 일을 하는 분이었다. 식구들 모두가 그 할머니를 교주처럼 모시고 살았다.
본가가 있는 곳은 충남 서천군 기산면 막동리, 속칭 ‘막꿀’이라고 부르는 동네에서도 ‘집너머’라고 부르는 작은 동네, 전체 동네가 열 가구를 넘지 못하는 작은 두메였다. 나는 어려서부터 그런 우리집이 싫었다.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었고 숨고 싶었다.
그렇게 도망쳐 숨어들고 싶었던 집이 바로 나의 외갓집이었다. 그곳은 외할머니가 혼자 기거하시는 집으로 남의 집 접방살이를 하는 신세였다. 그렇지만 외갓집은 고요한 분위기가 좋았다. 오직 나 하나만을 위해주시고 떠받들어 주시는 외할머니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마을에서 나는 외할머니의 외동아들처럼 자라면서 초등학교를 마쳤다. 네 살 때부터 열두 살 때까지는 인생에서 가장 꿈이 많고 중요한 시기다. 인격 형성이 제대로 되기 이전으로, 인간적 가소성이 가장 강한 시기라 할 수 있다. 그 시기의 경험들이 나로 하여금 일생 동안 시를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안내하지 않았을까? 스스로 그렇게 생각해 본다.
나는 처음부터 나의 집안과 가족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런 아이였고 자라서도 내내 그렇게 살았다. 조그만 이단아였으며 반항아였다. 그렇다고 자라서 문학이나 글쓰기를 전공하는 학교에 들어가 배운 적도 없다.
■ 첫 번째 기억 : 외할아버지의 마지막 해바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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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 물어볼 것도 없이 우리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자산은 시간이다. 인생 전체가 시간의 덩어리라 할 수 있다. 그 시간의 덩어리들이 부서져서 1년이 되고 하루하루가 되고 순간이 된다. 역사상 현자들의 모든 생각이나 충고 가운데 공통점은 오늘이란 시간에 마음을 모아 살아야 하고 순간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 또한, 시간에 대한 중요성을 말함이다.
나의 첫 번째 기억은 집 나이로 쳐서 네 살 때, 외할아버지에 대한 것이다. 나는 마루 같은 곳에 앉아 있었나 보다. 햇빛이 밝게 비치는 한 낮, 건너편 마당가에는 장독대가 보이고 여러 개 모여 있는 장 항아리들이 눈부신 반사광을 내 뿜고 있었다. 그런데 그 그림 속에 불쑥 등장하는 한 사람이 있다. 겨울 외투 같은 검고 두꺼운 옷을 걸친 그가 느린 걸음으로 마당을 가로질러왔다. 그러고는 장독대 앞으로 가서 쭈그리고 앉았다. 지팡이를 손에 쥐고 있었을까.
그 남자 어른이 누구였는지 그 장소가 어디였는지 나중에 어른들 말씀을 듣고 알게 되었다. 그는 바로 나의 외할아버지였다. 외할아버지는 비교적 단신이었으나 단단한 체구에 건강한 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복막염이 발생하는 바람에 제때 치료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고 한다.
나의 친가는 외가에 비해 매우 한미한 집안이었다. 그렇다고 외가가 대단한 집안이란 말은 아니다. 다만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다.
아버지는 이목구비가 뚜렷한 인물과 남다른 재능이 외할아버지의 눈에 띄어 데릴사위로 결혼을 했던 것이다. 당시는 일제강점기였기 때문에 일본식 호적 정리 방법에 따라 데릴사위가 되면 아예 성씨를 따르도록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의 이름은 ‘나승복’이 아니라 ‘김승복’ 나 또한 광복 이전에 태어났으므로 일본식 이름인 ‘수웅’이란 이름 앞에 ‘김’씨가 붙어 ‘김수웅’으로 호적에 올려졌다. 말하자면 나는 외할아버지 말년에 오직 자랑스런 존재 였던 것이다. 어찌나 외손주를 사랑하고 자랑했던지 동네 어른들이 ‘외손주 사랑하느니 전라도 방앗고를 더 사랑해라’라고 입버릇처럼 말해주었다고 한다.
외할아버지가 임종을 앞두고 이제는 나라도 해방되었고 호적 정리 방식도 바뀌었으니 다시 호적을 정리하여 본래대로 돌아가도 좋다고 허락을 하시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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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나는 다시 김씨에서 나씨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혈혈단신 되신 외할머니를 홀로 둘 수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내가 외할머니댁에 남기로 하였다. 물론 그것은 나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어른들끼리의 약속에 의한 것이었다.
■ 두 번째 기억 : 외할아버지의 재맛잇날
나는 낯선 아낙네 품에 안겨 울고 있었다. 어둠 속이었다. 눈물 고인 눈으로 고개를 돌려 둘레둘레 돌아보아도 사방은 어둠뿐이었다. 머리 위로 높은 처마가 있는 것 같았고 왼쪽으로 커다란 방이 보였는데 그 방 역시 어두컴컴했다. 모든 것이 낯설고 두려웠다.
마당을 가로질러 환한 빛이 보였다. 사방은 모두 어두운데 오직 그곳만이 눈부셨다. 몇몇 어른들이 모여 허리를 구부리고 손에 지팡이 하나씩을 짚고 울고 있다. 옷도 보통 때 입었던 옷이 아니고 색다른 옷이다. 머리에는 이상한 모자를 쓰고 있다. 이것 역시 나중에 외할머니에게 들어서 안 일이지만 그날이 바로 외할아버지 사십구재 드리는 날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내가 본 모습은 외할머니와 아버지와 어머니가 외할아버지가 생전에 쓰시던 물건과 옷가지 들을 절 마당 귀퉁이에 모아놓고 종이돈과 함께 태우면서 울고 있던 모습이었다.
그 뒤로 외할머니는 종종 그날의 행사를 ‘외할아버지 재맛잇 날’이었다고 회상하셨다. 49세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니 그 남은 인생 동안 다시 태어나 누군가 다른 사람의 자식으로 살고 있을 것이란 믿음에서 하시는 말씀이었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난 외할아버지 보다 더 안쓰러운 분은 외할머니였다. 38세에 남편을 잃고 청상과부의 처지로 33년을 더 사시다가 71세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 외로움과 한스러움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러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고독한 일생과 더불어 나의 한 생이 시작되었고 또 이어져서 오늘에 이르렀다. 참으로 감사하고도 눈물겨운 일이다.
■ 접방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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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분명히 가난하고 불우한 가정의 맏이로 태어나서 출발한 인생이다. 그런데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흐릿한 대로 가난하거나 불행했다는 느낌보다 평온하고 부드럽고 따스한 기억이 우세하다. 누군가로부터 한없이 보호받고 있었다는 믿음이 있었다. 역시 어른들 말씀을 떠올려보면 나는 어려서 일찍 글을 깨쳤고 엉뚱하고 성숙한 말을 자주 해서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곤 했단다.
나는 가끔은 울기도 했는데, 울고 나서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고 한다. “울어땡 땀났네.” 말하자면 ‘울었더니 땀이 났다’는 말인데 그런 걸로 보아 어린시절 나는 언어 발달이 다른 아이보다 빠르지 않았나 싶다. 또 이런 점이 집안 어른들에게 영리한 아이로 평가받게 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나는 영리한 아이라고 하기보다는 무슨 일이든 집중을 잘 하는 아이가 아니었나 싶다. 이 역시 외할머니 말씀에 의한 것이지만 어머니 젖이 떨어지고 방바닥에 앉아 있을 때부터 혼자서 노는 것을 잘했다고 한다.
그 시절은 누구나 춥고 배고프게 살던 시절이었다. 그런데도 나의 어린 시절은 마냥 포근하고 편안하게만 느껴진다. 생각하면 이상하게도 행복하기까지 하다. 왜 그럴까? 그 중심에 외할머니가 계시기 때문이리라. 낳아서 젖을 먹여서 기르기까지는 어머니의 몫이었지만, 그다음 네 살부터는 외할머니가 나를 받아서 키워주시고 보살펴 주셨던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모성은 어머니가 아니고 외할머니다. 이 점이 평생을 두고 나를 힘들게 했고 심리적으로 고달프게 했다.
모성은 하나로 족한 것이다. 그런데 그 모성이 둘이라는 건 불행한 일이다. 하나의 갈등이고 모순이다. 오죽했으면 뒷날 내가 ‘외할머니는 둥글고 어머니는 네모지다’라고 어떤 글에서 썼을까. 마음은 언제나 외할머니를 향해 있었고 그걸 알기에 어머니는 내내 섭섭하게 여기셨던 것이다.
외할머니는 틈만 나면 마실을 가곤 했다. 그때마다 나를 데리고 갔는데, 그 짧은 거리도 당신은 꼭 외손주를 안거나 등에 업고 가셨다. 아주 어렸을 때는 물론이거니와 나이가 예닐곱 살이 될 때까지 외할머니는 나를 업어주셨다.
외할머니의 등은 넓고 아늑하고 한없이 푸근했다. 외할머니 등에 업히기만 하면 세상 모든 근심이 사라졌고 걱정이 멀어졌다. 외할머니의 등이 나의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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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이었고 놀이터였고 잠의 터전이었다. 그렇다. 나는 외할머니의 등에 업혀서 자주 잠들곤 했다.
■ 외할머니
시대가 어수선하고 좋지 않은 때였다. 내가 태어나던 해에 조국 광복이 이루어져 일본인들이 물러가고 새로운 세상을 만났지만 정작 사람들은 새롭게 찾아온 국가 독립과 민족자존에 대해 오히려 어리둥절하고 낯설어했다. 구태를 벗고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과제가 그들 앞에 놓여있었을 것이다.
안정되지 못한 국가의 정치체제와 사회, 거기에다 국제정세까지 신탁이니 반탁이니 흔들리고 있던 시절이었다. 혼돈의 세기, 그건 분명 어지러운 세상이었다. 그러한 판국에 전쟁까지 일어나게 되었다.
1950년, 6•25 한국전쟁, 어떠한 전쟁이든 전쟁은 나쁜 것이다. 전쟁은 인간을 가장 불행한 상태로 빠지게 하는 원인을 제공한다. 일단 전쟁이 일어나면 제일 먼저 희생되는 사람은 병든 사람과 약한 사람들이다. 노인이나 아이, 여성들이 곤란을 당하기 쉽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것은 내가 여섯 살 때였다. 당연히 먹고 입고 사는 일이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에게는 전혀 그런 기억이나 느낌이 없다. 다만 따스하고 편안한 느낌일 뿐이었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면 그 중심에 또 외할머니가 계셨다.
외할머니는 당신의 가슴에 나를 포근히 안거나 등에 나를 찰싹 업고 계셨다. 그렇게 할머니의 품과 등은 나의 세상 그 자체, 전부가 되었다.
외할머니야말로 내 인생 최초이자 최후의 보루 같은 분이었다. 그분에게 진 빚이 너무 많았다. 살아서 하나도 갚지 못한 빚, 송구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이다. 어떻게 하든지 잘 살다가 가는 길이 그분에게 진 빚을 갚는 길이라 여겨진다. 나에게 외할머니가 없는 어린 시절은 없다. 존재 자체가 불가능하다.
나중에 내가 자라 시인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어릴 때 외할머니의 육아 방법이나 가정환경에 근원이 있다고 본다. 게다가 외할머니는 이야기를 즐기셨다. 시골 마을에서 전해져 오는 민간 설화나 재담을 좋아하셨고 또 가끔은 혼자만 아시는 전설 같은 것을 나에게 들려주시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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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꾀꼬리 전설만 해도 그렇다. 첫여름, 나무에 신록이 퍼져 나뭇잎이 햇빛에 반짝일 무렵 꾀꼬리기 찾아와 울기 시작하면 외할머니는 꾀꼬리에 대해서 말해주시곤 했다.
“영주야, 꾀꼬리는 전생에 예쁜 여자였단다. 옆집 총각을 좋아하다가 죽어서 꾀꼬리가 되었는데 지금도 그 총각을 잊지 못해 저렇게 애타게 우는 거란다. 들어보렴. 꾀꼬리 울음소리가 꼭 이렇게 들리지 않니? 고추밭에 머리 곱게 빗은 저 도령! 고추밭에 머리 곱게 빗은 저 도령!”
외할머니는 잠이 없는 밤이면 호롱불 아래서 옛날이야기 책을 읽어주셨다. 그것은 시장의 난전에서 구해온 육전소설류, 숙영낭자전, 눈물전, 무궁화전, 추월색 같은 책 이름들이 얼핏 기억에 남는다.
서른 여덞에 혼자 되신 분이다. 지금 세상 같으면 결혼도 하지 않았을 나이인데, 이미 결혼하여 딸 하나를 낳아서 길러 시집보내고 남편마저 잃고 혼자되신 분이다. 청상과부, 지극히 서럽고 안타까운 이름, 게다가 함께 살 자식이나 시댁 식구들조차 없는 처지, 오직 당신 곁에는 네 살 먹은 어린 외손자가 있었을 뿐.
■ 감꽃
세상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어른들의 삶이야 어떻든지 아이들의 세상은 다르다. 고달프고 근심 걱정 많은 어른들의 세상과는 아예 다른 것이 아이들 만의 세상이다. 그들끼리의 독립적인 세계가 있다. 특히 나처럼 바람막이로서 외할머니 같은 어른과 함께 산 아이는 더욱 그랬을 것이다. 식민지 체제에서 독립된 나라로 바뀌고 그 소용돌이 속에서 사람들이 갈등하고, 거기에 더하여 생명까지 위협하는 전쟁이 일어났지만 나는 그런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른 채 그 시절을 살아낼 수 있었다. 이 얼마나 고마운가. 이런 데서 부형의 고마움, 가족의 사랑을 느끼게 된다.
궉뜸 마을엔 나무들이 많았다. 집 뒤란에 심겨진 대나무. 대나무 수풀, 뒷동산에는 소나무와 참나무, 마을 길을 따라 참죽나무가 줄지어 서 있었다.
감나무는 외할머니네 친정집 뒤란에도 있고 외할머니가 이른 아침 물동이를 이고 물을 긷기 위해 가는 동네 공동 우물터 부근에도 있었다. 아주 오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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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늙은 감나무다. 감나무는 봄이 되면 시커먼 가지에서 새로운 줄기를 내밀고 잎을 피우고 꽃을 피운다.
새로 나는 가지는 야들야들 아주 부드럽고 연한 초록이다. 거기서 감나무 이파리가 나온다. 그 감나무 잎이 자라 나무 전체를 초록빛으로 덮을 때 감꽃이 피어난다. 정말로 감꽃은 부끄럼쟁이 꽃이다.
때가 되면 감꽃은 땅으로 떨어진다. 불쑥불쑥 풀숲으로 내려앉는 감꽃들, 그러나 감꽃은 사람이 보고 있을 때는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한 저녁을 보내고 아침이 왔을 때 감나무 밑을 찾아가면 새하얗게 감꽃들이 떨어진 것을 볼 수 있다. 감나무가 아이들에게 주는 선물이다.
감꽃은 아이들에게 유용했다. 우선은 군것질거리로 쓰였다. 감꽃을 씹어보면 달착지근하고 비릿한 게 먹을 만했던 것이다. 그런 다음, 감꽃은 장식품으로도 활용됐다. 먹다가 남은 감꽃을 실에 꿰어 목에 걸면 감꽃 목걸이가 되었다. 새하얀 감꽃 목걸이를 목에 걸고 웃고 있으면 외할머니도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바라보시곤 했을 것이다.
아이들의 군것질거리가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산이나 들로 쏘다니며 아이들은 자연에서 군것질감을 얻었다. 물오른 소나무 가지의 껍질을 벗겨 그 안에 들어 있는 속껍질을 발라 먹었고 아카시아 꽃이나 골담초 꽃을 따서 먹기도 햇다. 또 싱아 풀잎을 잘라 먹거나 새로 돋아나 통통한 찔레 순이나 무순을 꺾어 속을 발라 먹었고 심지어는 삘기를 뽑아 먹기도 했다.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은 / 감꽃이 많이 떨어졌다.
바람이 잠든 새벽 아침에 / 아이들은 깨어 / 뿌연 물안개 속에
바구니 하나씩 들고 감꽃을 주우러 / 감나무 밑으로 모인다.
감나무 아래 / 가슴 두근거리며 두근거리며 /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는 하얀 감꽃들
바구니 하나 가득 감꽃을 주워들고 / 돌아오는 뿌듯한 이 기쁨!
이 감꽃으로 무엇을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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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안에 집어넣고 자근자근 씹으면 / 떨떠름하고 달착지근한 감꽃 내음 /
실에 뀌어 목에 걸면 / 화안한 꽃다발.
야, 내가 왕자님 같잖아! / 갑자기 가슴이 밝아오는 / 아아 웃는 얼굴
바람이 부는 날 / 바람 소리 속에 아이들은 일찍 일찍 잠들곤 했다./
새벽에 일어나 / 감꽃을 주우러 가야 하기 때문이다.
- 나태주 <감꽃> 전문
■ 솜틀집
궉뜸 마을에서 어린 내가 마음 놓고 드나들 수 있는 집은 풍조형네 집 말고는 접방살이하는 집 옆집인 솜틀집이었다. 이 집엔 낡은 솜을 새로운 솜으로 바꿔주는 솜틀 기계가 있었다. 그래서 동네 어른들은 이 집을 솜틀집이라 부르고 아이들은 떨거지집이라고 불렀다. 솜을 타려면 기계에서 떨거덕 떨거덕 소리가 크게 났기 때문이다.
실은 이 솜틀집은 외할아버지가 지으신 집이다. 처음 외할아버지가 청주에서 이사 와서 자리를 잡은 집은 지금 접방살이를 하는 완순네 집이다. 그 집에서 살다가 옆의 땅을 사서 새로 지은 집이 바로 솜틀집이었다. 외할아버지는 당신의 형님 되시는 분에게 먼저 살던 집, 완순네 집을 드렸다. 그리고 당신은 지금의 솜틀집으로 이사 가서 살았다. 그 집이 바로 내가 태어난 집이다.
어쨌든 외할아버지는 대단한 분이었다. 한 마을에 와서 한 채의 집을 사들이고 두 채의 집을 새로 짓다니! 집들을 가까운 가족에게 주었다니! 하지만 외할아버지의 형님 되시는 분은 당신이 받은 집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완순네한테 팔아 넘기고 더욱 깊은 산골로 들어가 새로 움막집을 짓고 산다고 했다. 말하자면 파산을 한 셈인데, 이를 두고 가끔 외할머니는‘지각이 없고 속을 못 차려서 멀쩡한 살림살이를 들어먹었다’고 말씀하곤 했다.
솜틀집에는 감나무가 많았다. 마당가에도 한 그루 서 있지만 뒤뜰에도 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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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의 감나무가 있었다. 이것도 실은 외할아버지가 처음 집을 짓고 심어 놓은 감나무라 했다. 감꽃이 떨어질 때는 감꽃을 주우러 갔고 풋감이 떨어질 때는 풋감을 주워 우려먹는 재미로 나는 자주 솜틀집을 드나들었다. 뒤뜰에서 아이 발자국 소리가 들려도 그것이 나라는 것을 알면 솜틀집 어른들은 그러려니 눈감아주곤 했다.
■ 풋감 떨어질 때
감꽃이 피었다 지고 나면 그 자리에 감알이 열린다. 초록빛 구슬처럼 둥그스럼한 열매다. 감알은 사람들 눈길을 피해 감 이파리 뒤에 숨어서 몸통을 키워간다. 풋감이다. 그러다가 어느 때쯤 되면 그 풋감은 땅바닥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감나무 스스로 감당이 안 되는 열매를 적당히 솎아내는 것이다. 군것질감이 부족한 아이들이 그 풋감을 버려둘 리 없다. 떨어진 감알의 크기가 제법 커지면 그 풋감들을 주워다가 군것질감으로 삼았던 것이다.
외할머니는 조그만 단지 하나를 건네주셨다. 질그릇 단지. 풋감을 우릴 때는 그냥 던지애 물을 넣기만 하면 안 된다. 그 물에 된장을 한 숟가락 퍼서 풀어야 한다. 그런 다음 불을 피우고 미지근한 부엌의 이마 부분 한 귀퉁이(어른들이 이를 맛독이라 부르는)에 그 단지를 놓아두어야 한다. 때로 외할머니가 물 길러 가는 길에 풋감을 주워다 주시기도 했다.
아이들은 단지 안에 익어가는 풋감을 진득하게 기다리지 못한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 제일 먼저 해보는 일이 감의 단물 우려내는 단지 뚜껑을 열고 감알들을 차례로 꺼내어 밑동을 깨물어 보는 일이다.
어느 날 잠결에 무슨 소린가 들렸다. 방문 밖에서 외할머니와 또 한 사람이 이야기 나누는 소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지였다. 아, 아버지가 왔다! 나는 긴장해야만 했다. 아버지는 나와 열아홉 살 차이, 그때 내 나이가 집 나이로 쳐서 일곱 살이었으니 아버지는 스물 여섯이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무뚝뚝하다. 무섭다. 자주 만난 기억도 없고 언제나 멀게 느껴지는 남자 어른이다. 그런데 아버지가 이른 아침에 외갓집에 찾아온 것이다. 무슨 일일까? 밖에서 외할머니와 아버지가 나누는 소리가 계속 들려왔다.
“이 아침 댓바람에 웬일인가?” “아이를 데려가려구요. 데려다가 학교에 넣으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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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외할머니가 차려주는 밥상을 아버지와 마주 앉아서 먹었다. 그런 다음엔 외할머니가 챙겨주시는 옷가지 보퉁이를 옆구리에 끼고 외갓집 마을을 떠났다.
아버지가 무서워 차마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땅만 보며 걸었을 것이다. 조금씩 외갓집과 멀어지는 길, 울고 싶엇지만 울지도 못했다. 내내 마음속으로 생각나는 건 기껏 우려만 놓고 먹어보지도 못하고 온 외갓집 그 접방살이 부엌의 단지 속 풋감. 그 풋감을 외할머니는 어떻게 하셨을까. 당신이 드셨을까? 버리셨을까?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릿하게 보랏빛 물감으로 물든다.
■ 소왕굴 들
외갓집에서 아버지네 집으로 가려면 커다란 들판을 하나 지나야 한다. 소왕굴 들. 소왕굴이란 마을 앞에 있는 들판이라 해서 소왕굴 들이다. 큰 내라고 부르고 작은 내라고 부르는 개울이 이 들판에 있고, 또 봉선 저수지 무넴기(무넘이)에서 흘러 넘치는 커다란 수로가 마을 앞에 있다. 이 길을 따라 우리 집 식구들은 얼마나 오랫동안 오갔는지 모른다.
지금은 물론 자동차가 다니는 큰 길이 뚫려 자동차를 타고 다니도록 되어 있지만 나로서는 그리운 길이 아닐 수 없다. 어린 마음에 그랬다. 외갓집에 가면 막동리 집이 궁금하고 막동리 집에 있으면 외갓집이 그립고, 어쩌면 나는 그 길 위에서 그리움이란 걸 배웠는지 모른다.
지금도 기억이 나는 건 무넴기 둑길이 끝나는 곳쯤에 있는 다리다. 사람들이 다리가 길어서 진다리라고 부르는 다리다. 다리가 길어서 ‘긴다리’인데 시골 사람들 발음대로 ‘진다리’라고 불렀다. 이 다리를 지나려면 오금이 저리도록 무섭다. 다리가 길고 높기도 하지만 허술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처럼 시;멘트로 만들어진 튼튼한 다리가 아니다. 산에서 나무를 베어다 두 줄로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생나무 가지를 꺾어다 바닥을 놓고 흙을 얹어서 만든 다리다. “빨리빨리 안 따라오고 뭐하는 거냐!”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질 때마다 나는 후둘거리는 다리를 가누며 다리를 건넜다. 개울 바닥이 보이는 다리도 무서웠지만, 더 무서운 건 아버지였다. 그렇게 해서 나는 외갓집을 떠나 막동리에 있는 아버지 집에서 잠시 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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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이학교
아버지 집은 외갓집에서 시오 리쯤 떨어진 곳, 북청매라 불리는 마을 뒷동네 10개의 가구가 모여서 사는 조그만 마을이다. 북청매 강씨네 집 뒤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집너머 마을’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아버지 집은 집너머 마을 10여 가구 중에서도 중앙 부분에 있는 집, 가대家垈가 제법 크고 자리가 좋다. 나는 아버지 집, 친가에서 처음부터 국외자였다.
외가에서 살다 온 아이라 해서 식구들이 낯설어했고 나 또한 가족들이 낯설기는 마찬가지였다. 동생들도 나를 편하게 대하지 않았다. 언제나 특별한 아이, 특별대접을 해 주어야 하는 아이로 통했다.
아버지 집은 먹고 입고 사는 모든 일이 불편했다. 넉넉하지 않았다. 궁핍하고 힘든 시절이라 그랬지만 외갓집에서는 오로지 외할머니의 보살핌이 있었다. 가난해도 가난하지 않았고 추워도 춥지 않았고 불편해도 불편하지 않은 날들이었다. 식구들은 또 왜 그리도 많았던지 할머니 두 분에다가 아버지 어머니 삼촌 둘, 동생이 셋, 열이나 되는 식구가 둥근 도래상(두레상) 하나에 둘러앉아 밥을 먹을 때면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영주야, 이제부터 너는 학교에 다녀야 한다. 네가 다닐 학교는 이사리에 있는 이사리 분교다. 그런데 너에게 미리 말해줄 것은 네 이름이 학교에서는 영주가 아니고 수웅이란 것이다. 호적의 이름이 그러니 그렇게 알아라.”
어리둥절하고 낯설었다. 아버지는 그런 내 마음을 짐작할 까닭이 없어 나를 데리고 학교로 갔다.
“영주야, 이제부터 너를 가르쳐주실 선생님이다. 인사드려라.” 나는 아무 말도 않고 앞에 있는 남자 어른에게 고개만 숙여 인사를 드렸다.
“이 아이가 제 아들입니다. 선생님, 잘 좀 가르쳐주십시오.” “아니 나형에게 벌써 이렇게 큰 자녀가 있었나요?” 처음 보는 선생님은 의아한 듯 아버지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그분이 바로 나의 첫 번째 선생님인 김상규 선생님이었다.
조금 있다가 입학식이 열렸다. 학교 운동장 가의 벚나무 그늘, 아이들이 줄지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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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초등학교 입학식이 풋감 떨어지는 늦여름에 열렸는지 잘 모르겠다. 당시의 학제가 그래서 그런 건지, 아니면 6•25 전쟁이 일어나고 그 다음 해여서 그랬는지, 어쨌든 그렇게 해서 나는 어른들이 간이학교라고 부르는 이사분교의 1학년 학생이 되었고. 영주란 이름에서 수웅이라 불리는 아이가 되었다. 그렇지만 학교에 입학한 것이 9월이었으므로 1학년 공부를 반년밖에 할 수 없었다.
나중이 어떤 선배에게 들어보니 그 당시엔 9월에 초등학교가 입학하는 제도가 잠시 시행되었다고 한다.
■ 목화 열매
간이학교는 이사리, 시골 마을 중간쯤에 덩그러니 서 있는 네모난 상자 갑 같은 집이었다. 교실이 한 칸, 교실 옆에 딸린 교사실이 한 칸, 교실은 크고 교사실은 작다. 그렇지만 다 같이 썰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학교는 선생님이 맡고 일을 보는 이씨 아저씨 한 분이 더 있어서 그분이 시간에 맞춰 종을 쳐주기도 하지만 그분이 없을 때는 선생님이 직접 시간에 맞춰 교사실 앞 처마 밑에 매달린 놋쇠 종을 쳐서 수업이 시작되는 시간과 끝나는 시간을 알렸다.
간이 학교는 1학년부터 4학년까지 한 교실에서 함께 공부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좀 더 큰 형들하고 같은 교실에서 공부했던 것만은 확실하다.
교과서가 어떠했고 공책이며 필통이 어떠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동네에서 다른 아이들이 쓰던 교과서를 물려서 썼을 것이고 오늘날처럼 필통이란 것이 따로 있지 않아서 공책이나 교과서에 연필이나 지우개 하나를 대충 끼워 넣어갖고 다녔을 것이다. 또 가방이란 것이 따로 없어서 집에서 쓰는 보자기에 학용품을 담아 둘둘 말아서 허리춤에 매달고 다녔다.
입고 다니는 옷도 어른들이 입다가 남긴 옷을 줄여서 만든 옷이거나 허름한 한복이었다.
학교 공부가 끝나면 아이들은 우루루 교실을 빠져나와 운동장을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간다. 운동장 가에는 벚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을 뿐 교문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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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급생 아이들보다 나이도 한 살 어리고 키도 작은 나는 부지런히 아이들 뒤를 따라가야만 했다. 집으로 가는 길은 자칫 잘못하다가는 좁은 산길이나 들길, 지나는 사람들도 없는 길로 혼자서 갈 때도 있었다. 간이학교 주변에는 띄엄띄엄 인가가 있었지만 조금만 더 가면 골짜기가 나오고 그 사이로 고샅길이 나 있었다.
언덕을 오르는 골짜기 옆 좁은 밭에는 목화밭이 있었고 언덕 위 너른 밭에는 고구마가 자라고 있었다. 목화는 초여름에 분홍 꽃이 피고 그 꽃이 진 자리마다 둥그스름한 열매가 열린다. 이른바 목화 열매다. 이 목화 열매가 가을에 익으면 목화솜이 된다.
목화밭 옆을 지날 때였다. 앞서가는 아이 하나가 발길을 멈추고 목화밭 속으로 한 발을 넣었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목화 열매를 땄다. 뒤따라 가던 아이들도 목화 열매를 땄다.
입안에 넣고 씹으면 달짝지근한 맛이 나던 목화 열매는 아이들의 좋은 간식거리였다.
아이들 뒤를 따라가는데 고구마 막 안에서 담배 연기 같은 것이 가늘게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본능적으로 ‘아, 저 안에 사람이 있다’는 느낌이 왔다. 혼자서 아이들 뒤를 따라갔기에 나만 그 연기를 목격했을 것이다. 나는 더럭 겁이 났다.
얼른 조끼 주머니에 들어있는 목화 열매 두어 알을 꺼내어 길옆에 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들이 고구마 막 옆을 지나갈 때 고구마 막의 가마니 문이 펄럭 밖으로 열리면서 안에서 사람이 불쑥 나왔다. 남자 어른이었다.
“이놈들, 거기 섰거라!” 남자 어른이 다짜고짜로 호통을 쳤다. “너희들 모두 이리 와서 한 줄로 서봐.” 나도 아이들 뒤에 섰다.
“이제부터 호주머니 검사를 하겠다! 모두 자기 호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것들을 꺼내 봐.” 아이들은 머뭇거리다가 다시 떨어진 남자 어른의 호통에 하나둘씩 호주머니 속의 물건들을 꺼내놓기 시작했다. 조금 전 고샅길 옆 목화밭에서 딴 열매들이 하나둘 나왔다.
남자 어른은 아이들에게 두 팔을 들고 그 자리에 서 있으라고 시켰다 벌이었다. “그런데 맨 뒤에 있는 너, 쪼끄만 아이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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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만 호주머니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지 착한 아이인가 보구나, 너는 집으로 가도 좋아.”그렇게 해서 그날 나만 구사일생 혼자 풀려나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다음 날부터 아이들의 눈빛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날부터 나는 여러 날 아이들과 떨어져 혼자서 학교에 다녀야 했다.
◎ 2장. 그리운 외갓집
■ 떡나무와 꿀강아지
지극히 가난하고 힘들게 살던 시절이었다. 이른바 춥고 배고프고 헐벗던 시절, 누구네 집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세상이 혼란스럽고 어지러워 어떻게 처신해야 좋을지 모르던 시절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9•28 서울 수복, 1•4후퇴 그리고 간이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외갓집에서 집을 찾아 온 것도 그 후의 일이었지 싶다. 지금 생각하면 꿈만 같은 일인데 그렇게 어렵고 힘든 삶 속에도 우리 집에 손님이 찾아왔다.
더러는 떠돌이 장수들이 와서 하룻저녁 묵어가기를 청했고 한끼의 밥을 청하기도 했다. 우리 식구 먹기도 힘겨운 판에 그래도 어른들은 그들을 내치지 않고 밥상 앞에 앉히기도 했고 건넌방 한구석에 잠자리를 내주기도 했다. 참으로 그것은 아름다운 시절이고 고마운 날들이었다.
전쟁 중에도 가을은 오고, 가을이면 논에서 벼를 베거나 온갖 곡식을 거두어 들였다. 암울하고 아무런 희망도 없는 날들이지만 추수하는 날 어른들은 잠시 마음이 밝았고 기분이 좋았다. 어른들이 기분 좋으면 아이들도 따라서 기분이 좋아진다. 집안 분위기가 그렇게 만들어졌다. 더하여 추수한 볏짚으로 지붕을 새롭게 얹는 날은 잔칫집 분위기가 된다.
그런 날이면 용케 알았다는 듯 찾아오는 손님이 있었다. 말머리 아저씨 . 장항이란 곳에서 산다고 했다. 아버지가 형님이라고 부르는 걸 보면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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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아저씨 뻘이 되는 분이다. 재봉틀 고치는 일을 한다고 했다. 그렇다고 우리 집같이 가난한 집에 재봉틀이 있을 까닭이 없었다. 한 동네에 한 집이나 두 집 있을까 말까 했던 것이 재봉틀이다. 그러니까 말머리 아저씨는 이 동네 저 동네 다니며 재봉틀이 있는 집을 찾아 재봉틀을 손봐주고 약간의 돈을 받는 일을 하는 분이었다.
말머리 아저씨는 마루에 들고 온 가방을 턱하니 내려놓으며 앉는다. 그런 뒤로는 있는 듯 없는 듯 며칠 동안 윗방에서 삼촌들과 지낸다. 식구가 많아 양식이 부족해도 그 누구도 말머리 아저씨를 구박하거나 빨리 돌아가라고 눈치를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냥 한 가족처럼 여러 날 우리 집 식구들과 함께 있다가 어느 날 훌쩍 떠나곤 했다.
말머리 아저씨 말고도 우리 집에 가끔 오는 손님이 있었다. 승모 아저씨 아버지와 항렬이 같아 우리가 역시 아저씨라 부르는 분인데, 재 넘어 대종중의 재실을 지키며 사는 분이라 했다. 승모 아저씨가 사는 대종중엔 기와집이 여러 채라고 했다.
며칠 후 승모 아저씨는 사립문을 빠져나가 골목길로 해서 등성이 길로 천천히 걸어서 사라져 갔다. 승모 아저씨가 넘어간 언덕길에 뉘엿뉘엿 해가 지고 있었다. 그 뒤로 승모 아저씨는 마을에서 볼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 뒤에 들려오는 소식은 6•25 때 전사했다고 했다.
■ 자치대장
10살 나이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소년 가장이 된 아버지 위로 형님이 한 분 있었지만 돈 벌어 오겠다며 집을 나가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소식이 있을 뿐, 그 뒤로 소식이 끊겨 어쩔 수 없이 아버지가 집안의 가장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씻은 듯 가난한 집안이었다. 여섯마지기 논이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소작으로 부쳐먹던 논이었다. 아버지는 겨우 초등학교 교육을 마친 뒤 동갑인 어머니와 결혼하여 데릴사위로 살면서 외할아버지의 지원으로 서울의 체신 양성소라는 데서 잠시 공부를 하고 서천 우체국에 공직자로 근무하기도 한 이력이 있다. 하지만 아버지의 꿈은 초등학교 선생님. 그러나 초등학교 졸업할 때의 나이가 너무 많았고 친일파인 지역 유지의 추천에 실패하여 꿈을 접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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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혼란스럽고 전쟁까지 일어나면서 우리 집에서 제일로 곤란을 겪은 사람은 아버지였다. 그때 아버지의 나이는 스물다섯, 이미 세 아이의 아버지였다.
소작농 집안의 아들, 건장한 신체와 명석한 두뇌, 이보다 좋은 조건이 있을 수 없었다. 실지로 북한의 군대가 마을까지 들어오지는 않았다지만 한동안 세상은 북쪽 사람들의 세상이었고 공산주의 사상을 지닌 사람들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 아버지가 마을 청년들의 우두머리로 뽑힌 것이다.
자치대장, 마을의 청년들을 모아 군대식 훈련을 시키기도 했다. 그것은 목총을 들고 정렬하여 제식훈련 같은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1952년 2월 1일. 그로부터 얼마 뒤 아버지는 논산의 육군훈련소에 입대하여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국군이 되었다.
당시 아버지는 집 나이로 스물다섯, 아이까지 넷이나 딸린 가장이었다. 거기다 아래로는 남동생이 둘, 모셔야 할 어머니가 두 분이다. 식구들 먹여 살리는 일이 급했지만 그런 일들을 뒤로 미루고 징집 영장을 받고 군인이 되었다. 오늘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런 결단과 단행은 참 잘 하신 일이라고 여겨진다. 마을의 자치대장으로 한때 자생적인 공산당에 동조한 이력을 남겼지만 여러 차례 인민보국대에 동원되어 인근 공주지역, 보령까지 가서 노역하고 나중에는 퇴각하는 북한군에 끌려가다가 보령 주산면 부근 산길에서 꾀를 부려 탈출한 뒤 그러한 과오를 과감하게 밝히고 대한민국 국군이 되었다는 것은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 나일론 양말
학교 공부를 마친 아이들이 우루루 교실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아이들은 무엇이 그리도 바쁜지 우당탕탕 빠르게 움직인다. 한 시간 수업을 마치고 잠시 쉬는 시간이 되어 선생님이 교사실에 가 계신 동안에도 아이들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책상이나 의자에 올라가기도 하고 뛰어다니기도 하고 장난을 치기도 한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런 아이들을 크게 나무라거나 야단치시지 않는다. “얘들아, 교실에서는 좀 얌전히 있으려므나.” 김상규 선생님은 겨울철이면 검정색 한복 두루마기를 단정히 입고 다니시던 분으로 매우 인자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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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년은 달라도 학교 공부는 한꺼번에 끝이 났다. 오전 시간 공부를 마치면 선생님이 아이들을 하교시켰던 것이다. 같은 마을에 사는 아이들이 모여서 자기 동네로 돌아갔다.
운동장 주변 벚나무 아래를 지나면 바로 거기가 개울, 개울을 가로지른 조그만 돌다리 하나를 건너면 또 들길과 밭길, 며칠 전에 내린 눈이 아직 다 녹지 않아 길은 미끄럽고 또 질척거렸다.
아이들은 한결같이 검정 고무신 차림, 모두 맨발이었다. 나도 물론 맨발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양쪽 허리춤에 양말 한 짝씩을 끼고 있었다는 것이다. 나일론 양말이다. 외할머니가 설빔으로 보내준 양말, 아침에 신고 나왔는데 학교 오는 길에 눈을 밟아 젖어버린 탓에 수업 시간에는 벗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직 양말이 마르지 않아 신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시만 해도 버선이나 목양말을 신었다. 그런데 버선은 불편했고 목양말은 쉽게 망가졌다. 하기는 목양말도 귀하고 비싸서 아무나 아무 때나 신는 것이 아니었다. 명절 때나 겨우 한 켤레 얻어 신을 수 있었다.
그즈음에 등장한 것이 나일론 양말이다. 나일론 양말은 우선 질긴 것이 특징이었는데 색깔도 고와서 모두가 신고 싶어했다. 그런 양말이기에 나는 소중히 허리춤 허리띠에 한 짝씩을 끼고 길을 걸었던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조금이라도 물기가 말랐으면 좋겠다 싶어서 그랬을 것이다.
■ 검정 지우개
외할머니와 함께 살던 집은 남의 집 사랑방 한 칸에 작은 부엌 하나가 전부였는데 아버지, 어머니와 사는 막동리 집은 제법 규모가 큰집이었다. 아버지 열 살 때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지으신 집이라 했다. 처음엔 그야말로 방 두 칸에 부엌이 달린 초가삼간이었지만 식구들이 늘면서 집을 키웠을 것이다. 바로 그 키운 부분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쓰시는 사랑방이다.
안방은 식구들이 모여서 밥을 먹기도 하고 할머니 두 분과 동생들이 잠을 자기도 하는 방이다. 웃방은 삼촌 두 분이 일하면서 쓰는 방이고 나는 사랑방에서 아버지 어머니와 그리고 갓난애기 여동생과 함께 지냈다. 개다리소반이라고 불리는 조그만 밥상을 가져다 놓고 글씨 공부를 하던 방도 바로 그 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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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방 골방에 어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온 장롱이 있었는데, 장롱 위에는 이불이며 베개가 얹혀져 있고 장롱 안에는 어머니와 식구들의 옷가지가 들어 있었다.
그 어머니의 장롱 맨 끝자리에 내가 쓰는 공책 몇 권과 연필 그리고 내모난 검정 지우개가 들어있었다. 그 검정 지우개를 명운이 형이 가지고 오라는 거였다. 처음엔 자랑삼아서 해본 얘기다. 그런데 나일론 양말을 잃었다가 찾던 날 맹운이 형이 그 대가로 나에게 지우개를 달라고 말했던 것이다.
마지 못해 억지로 그렇게 하겠다고 한 대답이었다. 그렇지만 앞으로도 맹운이 형을 따라서 학교에 다니려면 그 청을 들어주어야만 했다.
■ 눈길
어린 시절엔 어쩌면 그리도 눈이 많이 내렸는지 모른다. 한 번 내렸다 하면 어김없이 발목이 빠지고 종아리까지 묻히도록 흐무지게 눈이 내리곤 했다. 왜 그랬을까? 눈은 그때나 지금이나 비슷하게 내렸지만 어린 시절 사람의 몸이 작아서 그랬던 것이 아닐까.
어차피 인간은 지극히 주관적인 존재다. 사물에 관한 판단의 근거가 자기 자신이고 세상살이의 기준 역시 자기 자신이다. 그러기에 엇비슷하게 내리는 눈도 많이 내린 것처럼 느끼기도, 또 적게 내린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것일게다.
할머니가 쓰시는 막동리 집 안방 문을 열면 울타리 너머로 들판이 보이고 그 위로 아스라이 산봉우리가 건너다보였다. 유두날이면 할머니가 목욕하러 가는 강태공 샘물이 있는 산봉우리다. 기린봉, 눈이 내린 아침이면 그 산봉우리가 가깝게 보이곤 했다.
“어머니, 나 외갓집에 가고 싶어요.” “누가 데려다 주어야 하는 데 어쩐다냐.” “아니에요. 나 혼자서도 갈 수 있어요. 아버지랑 여러 번 왔다 갔다 한 길인 걸요.” “그래? 그럼 너 혼자서 다녀 올 수 있겠니?” “네.” “그럼 이번 토요일에 한 번 갔다 오려므나.” 그렇게 해서 토요일 간이학교 공부를 마친 다음. 외갓집에 간 일이 있다.
간이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풋감 떨어질 무렵 갑자기 떠난 외갓집이다. 그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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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나서 눈이 내리는 겨울철에 다시 왔으니 그동안 반년쯤 시간이 지난 셈이다. 막동리 집에 외할머니도 오시지 않으셨으니 참 오랜만에 만나는 외할머니다.
어떻게 토요일 하룻밤을 보내고 어떻게 또 일요일 한 날을 보냈는지 모른다. 꿈결같이 보낸 시간들이었다. 외할머니는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셨다. 우선은 부엌 아궁이에 불을 지펴 방안을 따뜻하게 해 주셨고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만들어 주셨다.
그 다음날은 월요일, 학교에 가는 날이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 부엌으로 나갔다 오신 외할머니가 말씀하셨다. “영주야, 큰 일 났다. 밖에 눈이 많이 왔어. 너 학교 가야 하는데 어쩐다냐!” 밤사이 사람들을 깊은 잠에 빠뜨리고 하늘이 또 눈을 내려주신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옆에 외할머니만 계시면 모든 일이 해결되었으니까 걱정은 애당초 내 몫이 아니었던 것이다. 외할머니가 차려주시는 아침밥을 먹고 마을 길로 나왔다.
그런데 혼자서 외갓집 마을에서 간이학교까지 가는 길은 만만한 길이 아니었다. 눈이 내리지 않았을 때도 제법 먼 길인데 눈이 내리니 학교가 더욱 멀게 느껴졌다. “영주야 눈이 많이 내린 날이니 할미가 바래다주마.” 외할머니가 앞장서서 눈길을 걸어갔다.
한참을 그렇게 걸었을 것이다. 마을 길을 나와 면사무소 앞 신작로를 지나 큰 내 작은 내가 있는 소왕굴 들 앞쯤에 왔을 때 외할머니가 가던 발길을 멈췄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이대로 가다가는 너 학교에 늦겠다. 내 업어서 데려다주마.” 외할머니가 돌아서더니 그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그러자 당장 눈앞에 넓은 외할머니의 등이 나타났다. 막동리 집으로 가기 전까지 날마다 업히던 등이다. 내가 미안해 머뭇거리자. “뭐하냐? 얼른 업히지 않고.”
이게 얼마 만에 업혀보는 외할머니의 등인가! 들판에 쌓인 눈 위로 비치는 겨울 햇빛이 눈부셔 살그머니 눈을 감았다. 외할머니의 등에 닿은 앞가슴이 따스했다. 든든한 양어깨를 붙잡고 오른쪽 볼을 어깨에 대고 가만히 외할머니의 등에 찰싹 붙어 있으면 따스한 체온에 갑작스레 졸음이 몰려오기도 했다. 그렇게 얼마 동안 길을 갔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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섶다리를 건너 봉선 저수지에서 물을 내려보내는 수로의 둑길을 조금 걸어가자 저 멀리 간이학교가 건너다 보였다.
“영주야, 저기 네 학교가 보인다. 여기서부터는 혼자서 갈 수 있겠지?” “그럼요, 나 혼자서 갈 수 있어요.” 간이학교는 검정색 네모난 상자 모양의 집. 모든 지붕에 눈이 쌓였지만 마을의 초가지붕들 사이에서 유독 더 눈에 띄었다. 나는 둑길에서 내려 산기슭으로 난 길로 접어들었다. 그 길을 따라가면 마을 길이 나오게 되어 있었다. 내가 한참 길을 가고 있을 때까지 외할머니는 그 자리에 서 계셨다.
외할머니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을 때쯤 나의 발길은 학교 앞에 다다랐고 외할머니와 완전히 헤어져 학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날 학교에서 공부하면서도 내내 외할머니에 대한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외할머니는 나를 업고 왔던 그 길을 혼자서 타박타박 걸어서 접방살이 그 집으로 돌아가셨을 것이다.
■ 아버지 면회
봄비가 내리던 날, 학교 가기 싫다고 처마 밑에서 비를 맞으며 울다가 어머니가 던진 신발에 코를 맞고 코피를 많이 흘린 날 이후로 나는 학교에 가지 않아도 좋은 아이가 되었다. 집에서 놀면서 책을 뒤적이거나 동생들 하고만 굼실굼실 지내면 되었다. 무엇보다도 그 무서운 문둥이 고개를 넘지 않아도 되는 일이 좋았다.
건너막꿀 아이들을 따라 다니지 않아도 되었고 무엇보다도 맹운이 형의 매서운 눈초리를 벗어날 수 있어서 자유로웠다. 그렇게 얼마를 지냈을까. 여전히 집안에서 나는 찬물에 도는 기름 신세였다. 동생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하고 막내 삼촌과도 사이가 불편했다. 너는 너, 나는 나, 그저 무덤덤한 인간관계였다 할까.
그러던 어느 날 식구들이 아버지 면회를 간다고 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그 이듬해. 아직은 전쟁의 포연이 남아 있던 시절이다. 한번 전쟁터에 나가면 온전히 살아서 집에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던 시절이다. 그만큼 뒤에 남은 가족들의 마음은 불안하고 초조하고 안타까웠을 것이다. 날짜가 잡히고 드디어 면회 갈 식구들이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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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은 할머니와 어머니, 젖먹이 누이동생 연주, 그리고 외할머니와 나. 그렇게 다섯 사람. 특별히 내가 일행에 낀 것은 아버지의 부탁에 의한 것이다. 어떤 방식으로 소식이 왔는지는 모르지만 아들 아이가 보고 싶으니 면회 때 꼭 데려오라는 아버지의 부탁이 있었다고 했다. 전쟁터에 나가는 사람으로서 당신의 후계자격인 맏자식을 마지막으로 보고 싶었던 것이리라.
아버지 면회 가는 일이 준비되었다. 무엇보다도 아버지에게 대접할 음식이 중요했다. 인절미 떡을 만들고 닭을 잡고 반찬을 만들고. 음식 익힐 조그만 양은솥과 그릇들을 챙기고. 그러고는 삼촌에게 부탁하여 불쏘시게와 잘 마른나무 장작을 가늘게 쪼개어 땔나무를 한 단 만들기도 했다. 아버지를 만나면 양은 솥에 음식 재료를 넣고 익히기 위한 연료가 필요 했던 것이다.
아침 일찍 일어나 길을 떠났다. 우선은 막동리 집에서 이른 아침을 먹고 다섯 사람이 걸어서 자동차를 타러갔다.
그것은 내가 맨 처음 탄 자동차였다는 점이 특별했다. 그리고 그 자동차가 버스같은 것이긴 했지만 오늘날 같은 버스가 아니고 트럭 같은 차를 개조한 것이었다는 점이 달랐다. 덜커덩 덜커덩 자동차 바퀴가 굴러갈 때마다 자동차가 흔들리고 자동차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흔들리고 짐짝들은 더욱 흔들렸다.
자동차는 털털거리며 끝없이 달렸다. 노선으로 본다면 서천군의 장항이나 서천 읍내에서 부여군의 세도나루까지 가는 자동차다. 거기가 종점, 더는 갈 수가 없었다. 거기는 금강이 가로막고 있었던것이다.
자동차를 실어나르는 거룻배도 없던 시절, 오로지 사람이 배를 타고 건너야만 했다. 처음 가는 길이다. 사람을 만나 물어가는 길이다. 주로 말수가 많은 외할머니가 물었을 것이다. “말 좀 물어유. 논산 훈련소는 어디루 가야 한 대유?” ……
걷고 또 걷고 ... 어느 결에 우리는 논산훈련소 앞에 도착했고 그 다음은 훈련병 면회를 하는 움막같은 면회소 안에 앉아 있었다. 바닥에는 멍석이 깔려 있었고 문짝도 없는 출입구 쪽으로는 훈련소의 전경이 펼쳐져 있었다. 어린 눈에 그것은 너무나 삭막한 풍경이었다. 하늘은 잔뜩 찌푸린 채 구름을 머금은 잿빛이었다. 넓고 황량한 연병장엔 먼지와 낙엽 같은 것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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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보이는 언덕에는 면회 온 사람들이 솥단지를 걸어 놓고 나무를 때어 음식을 만든 흔적인 양 시커멓게 그을린 돌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아버지에게도 그렇게 돌을 모아 집에서 준비해 온 양은솥을 걸어놓고 음식을 대접했으리라. 두 분 할머니는 멀찌감치 앉아 있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가까이 앉고 그 뒤로 내가, 어머니 가슴에 젖먹이 동생이 안겨 있었다.
우리가 어떤 얘기를 하고 어떤 일을 했는지는 모른다. 아버지 면회는 그쯤에서 끝이 나고 아버지는 집에서 준비해 온 인절미 떡 동구리를 들고 부대 안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 아버지가 부대 안으로 들어갈 때 내가 아버지를 따라 들어가겠다면서 크게 소리내어 울었다고 한다. 이 일은 실제로 내 기억에 없는데 아버지가 오래전 일을 떠올려 나중에 여러차례 말씀해주신 내용이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런 내가 별로 귀찮지 않았다고 한다. 어디를 따라온다고 그러느냐 나무라기는 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오히려 좋았고 아들을 둔 것이 보람있고 자랑스럽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혈육의 마음이고 정이다. 그렇게 아버지의 면회는 짧게 어이없이 끝나고 긴 하루가 저물었다.
돌아오는 길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다만 다리가 많이 아팠다는 것과 발바닥이 헐어서 진물이 터졌다는 것과 새끼발가락에 티눈이 박혀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는 것이 기억에 남는다. 여덟 살 먹은 아이에게 그것은 너무나도 벅찬 노정, 하나의 오랜 기억의 훈장 같은 것이었다. 아버지 면회갔던 길. 그것은 내가 태어나서 맨 처음 겪은 아주 특별한 일이었고 가장 멀리까지 갔던 여행이었다.
■ 그림 부채
지난봄, 비가 유난히 많이 내리던 날에 학교 가지 않겠다고 처마 밑에서 고집부리며 울다가 어머니가 던지신 고무신짝을 맞고 코피가 터지는 사건이 있었다. 피를 얼마나 많이 흘렸는지 웃옷에 남은 선연한 핏자국의 흔적이 아직도 다 지워지지 않았을 정도다. 그 후 식구들은 나에게 여러모로 관대하게 해 주었다. 어차피 함부로 다뤄서는 안 되는 유리그릇 같은 아이라는 생각에서 그랬을 것이다. 어머니는 물론이거니와 할머니며 삼촌, 동생들까지 그렇게 보아주는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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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어른들을 따라 아버지 면화를 다녀온 뒤로는 식구들이 더 잘 해주었다. 아버지가 일부러 나를 특별히 만나 보겠다고 한 것도 그렇지만, 일곱 살 짜리가 어른들을 따라서 그 먼 길을 걸어 아버지를 면회하고 온 것을 대견하게 여겨서 그랬지 싶다. 늘 엄격한 집안의 규칙에서도 치외법권인 아이, 외갓집에서 살다 온 아이, 그런 배려 아닌 배려 같은 것이 가족들 사이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지 않았나 싶다.
학교에 가지 않는 대신 어머니가 베를 짜는 사랑방에 앉아서 교과서를 꺼내 놓고 그것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어머니의 얼굴에는 미소같은 것이 잠시 스쳐지나곤 했다.
쏘내기 맞고 오는 / 한산 세모시 / 치마 저고리
/ 가는 눈썹이 곱던 어린 시절의 내 어머니
베를 짜고 계셨다. / 호박넌출이 기웃대는 되창문 열고
/ 어쩌면 하이얀 그림이나처럼 / 땀도 흘리고 숨도 쉬는 꽃송이나처럼.
아버지 군대 가시고 / 남겨진 우리 네 남매 / 보리밥도 없어 서로 많이 먹으려다 다투고 / 어머니 한테 들켜 큰놈부터 차례로 매맞아 / 시무룩히 베틀아래 놀고 있는 한낮.
무성히 자란 여름 수풀 속 / 그 해 따라 유난히 무성하던 매미소리여,/
울다 만 눈으로 바라보던 / 옷 벗은 흰구름의 알몸뚱이 들이라니!
- 나태주, <매미 소리> 전문
■ 경기
아버지 어머니는 재산이나 돈복은 부족했지만 두 분이 정이 두터웠고 자식 복 또한 많은 분들이시다. 내 나이 75세 때 어머니가 먼저 세상을 뜨셨으니 적어도 75년 동안 한결같은 마음으로 산 분들이다. 슬하에 6남매를 두었는데 신기하게도 아들을 먼저 낳고 딸을 이어서 규칙적으로 낳아 아들 셋 딸 셋을 두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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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터울로 넷째까지 2년 만에 하나씩 정확히 아이를 낳으셨다. 그런데 험한 세상에 한 아이도 잃지 않고 잘 기르셨다. 당시만 해도 유아 사망률이 높던 시절인데 그렇게 한 아이도 놓치지 않고 기르신 것을 보면 자식을 키우는 정성이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내동생 선주는 어려서부터 경기를 자주 앓았다고 한다. 경기란 젖먹이 어린 아이가 주로 일으키는 풍으로 의식을 잃고 몸을 떠는 병증을 말한다. 나도 어린 시절 경기가 심했다고 하는데 선주의 경우는 더욱 심했던 모양이다. 한두 번이 아니라 간헐적으로 자주 생기는 증상이었다. 한번은 경기가 너무 심해서 의원도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이어서 마지막 수단으로 극약 처방을 했다고 한다.
기다리다 못한 의원은 돌아가고 이제는 살아날 가망이 없어진 아이를 윗목에 이불을 덮어서 밀쳐 두었다 한다. 그런데 얼마 뒤에 아이가 살아 났다는 것이다.
그런 뒤로 선주는 별 탈 없이 잘 자랐다. 몸이 튼튼했다. 하지만 유독 말이 늦어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도 발음이 어눌했다. 한글도 2•3학년에 가서야 겨우 깨쳤다. 그러나 인생에는 놀라운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선주는 대학을 마친 후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었다. 그리고 정년퇴임 때까지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다.
■ 풍조 형
막동리 집에서 1년 정도 살았을까. 막동리 집은 외갓집과 아주 많이 달랐다. 식구도 많고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잠자리가 모두 불편하고 부족했다. 하루도 잊어버리지 않았던 외할머니와 외갓집이었다. 외할머니라면 이러지 않았을 텐데, 외갓집에서라면 이러지 않았을 텐데. 그것은 양쪽 집을 비교하는 마음이고 불행한 마음이었다. 마음이 항상 멀리 가 있었다. 그리움의 시작이었다. 막동이 집에 정을 붙이지 못하고 빙빙 도는 아이가 어머니도 내심 불편하고 못마땅했을 것이다
어머니보다는 어머니의 어머니인 외할머니한테서 더욱 정다운 모성을 느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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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것, 그것은 행복감이었으면서도 한 편으로는 아릿한 아픔이거나 섭섭함, 상실감 같은 것이었다. 어머니와 외할머니도 나를 사이에 두고 약간의 긴장 된 감정을 느끼고 조금은 경쟁심 같은 것으로 일관했던 것 같다.
끝내 어머니가 지고 말았다. 몇 달을 두고 학교에도 가지 않고 빈둥빈둥 놀기만 하는 아이를 더는 두고 볼 수 없었지 싶다. 그래, 다시 저 아이를 외갓집에 보내자. 군대에 간 아버지와 편지로 상의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다시 외갓집으로 돌아가 살게 되었다.
내심 바라던 일이었다. 막동리 가족들 역시 무던했을 것이다. 우선은 먹을 양식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니 밥 먹을 입을 하나라도 줄여야 할 판이었다. 할머니 또한 모르는 척 내가 외갓집으로 돌아가는 걸 묵인하셨을 것이다. 외갓집에 돌아와 보니 변한 것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아이들 놀이는 달라져 있었다. 우악스러워졌다. 무서워지기까지 했다. 남자아이들은 항복 장난이란 걸 했다. 막동리에서는 보지 못하던 놀이였다. 오늘날 레슬링 같은 건데 두 아이가 엉켜서 몸으로 누른 채 부둥켜안고서 어떻게 하든 상대방이 항복! 하고 소리내어 포기할 때까지 공격하는 경기였다.
막동리 집으로 가기 전보다 아이들의 성격이 많이 거칠어졌다. 서로가 서로에게 함부로 대했다. 어쩌면 그것은 전쟁의 한 영향이 아닌가 싶다. 세상이 흉흉하다 보니 아이들의 놀이가 변하고 아이들의 심성까지 그렇게 변했지 싶다. 그런 중에서도 유독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주고 잘해준 사람은 풍조 형이다. 풍조형이게는 내 또래의 동생이 하나 있었다. 태조란 아이다. 태조는 풍조형과 달리 성격이 거칠고 사나웠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 한 번도 풍조 형을 만나지 못했다. 풍문으로는 태조는 군대에 갔다가 사고를 당해서 세상을 뜨고 풍조 형만 인천 어딘가에서 살고 있다는데 발이 닿지 못해 만나지 못했다. 만약에 사람을 찾아주는 이벤트를 하는 티브이 프로그램에 나가 누군가 찾을 사람이 있다면 나에게는 단연 풍조형이다. 어린 시절 나에게 그렇게 좋은 친구이자 동네 형이 있었다는 사실이 참 다행스럽고도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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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애순 선생님
풍조 형은 자기 반 담임선생님 자랑을 자주 했다. 선생님의 이름은 구애순. 학교 건너편 마을 신곡리에 사는 분이었는데, 체구가 통통하고 얼굴형이 둥그스름해서 마치 보름달 같은 분이라 했다. 그 시절엔 얼굴형이 둥근 여성을 가장 미인으로 여겼고 또 그런 여자를 일컬어 부잣집 맏며느릿감이라고 했다. 풍조 형은 자기 선생님을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선생님이라고 말했다. 아이들이 크게 잘못하거나 많이 떠들거나 숙제를 해오지 않는 날이면 선생님은 반장을 시켜 교실 벽에 걸어 놓은 회초리를 가져오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교단에 올라가 선생님 스스로 종아리를 걷고 그 회초리로 자신의 종아리를 치신다고 했다. 너희들이 잘못했으니까 선생님이 대신 벌을 받아야 한다며 그러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풍조 형네 반 아이들은 교실에서도 쥐죽은 듯 조용히 하고 공부도 다른 반 보다 잘하고 선생님 말씀도 잘 듣는다고 했다. 어떻게 하든지 담임 선생님이 자신의 종아리를 걷어 회초리로 때리는 일이 생기지 않게 하려고 애쓴다는 것이었다.
구애순 선생님은 오랫동안 내가 다니던 시초초등학교에 계시다가 나중에 결혼을 하면서 학교를 떠나셨다. 안타깝게도 나는 한 번도 구애순 선생님이 담임을 하는 학년의 학생이 되지 못했다. 그것이 나에게는 못내 섭섭한 일이 되었다.
* 2022년 1월 1일,
* 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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