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편하게 말해요 (2)
우리, 편하게 말해요 (2)
■ 이금희 지음
◎ 제3장 때로 작은 구원이 되어
불안이 영혼을 잠식할 때 가장 좋은 항불안제는 믿음일 겁니다. 나를 믿어주세요. 그리고 다독거려주세요. 나이가 어떻든, 상황이 어떻든 말이죠
마음은 내 것이니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다스려야 하지 않겠어요. 남에게 휘둘리지 마세요.
■ 명왕성이나 천왕성 같은 존재
자아를 찾다가도 한 번씩 무너지는 순간, 인간관계에서 실패했을 때입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헤어질 때는 마음이 더 아프고 자신감도 떨어지죠.
“어느 날 자려고 누워서 보니까 네가 사준 게 너무 많더라. 입고 있는 수면 바지부터 머리맡의 미니 가습기까지. 이제 그만 좀 사.”
이런 핀잔 아닌 핀잔을 주던 선배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친했는지 짐작할 만하지요. 서로 일상을 공유하고 연애사를 다 알고, 헤어진 남자 친구 때문에 울고불고하면서 전화를 걸라치면 곁에서 말려주던 사이, 시시콜콜 얘기도, 인생 갈림길의 고민도 주고받던 사이였죠. 그러던 선배와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참 힘들었어요. ‘스몰토크’라고 하지요. 별것도 아닌 얘기를 나누면서 웃고 우는 것 말이죠. 누구는 ‘농담 뜨개질’이라고도 하더군요. 농담 반 진담 반 섞어서 뜨개질하듯이 이야기를 엮어나가는 관계. 그때는 남자 친구도 없었지만, 남자 친구가 있다고 해도 속속들이 말할 수 없는 게 있잖아요. 그런 소소한 일상을 함께하던 사람이 없어졌지요. 펑펑 울고 관계를 회복해보려고 노력도 해 봤지만 쉽지가 않았어요.
그때 그런 상황을 다 아는 또 다른 선배가 이런 말을 해줬어요. “명왕성이나 천왕성이라고 생각해.”
‘나 = 지구’라고 가정하면서 내 주변에는 달도 있고, 토성, 목성, 금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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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겁니다. 지금까지는 나와 그 사람의 자전이나 공전주기가 비슷해서 서로 자주 만나고 그러다 보니 점점 더 가까워졌다는 거죠. 그런데 어쩌다 보니 빅뱅까지는 아니어도 뭔가 변화가 생겼고, 지구 근처에 있는 줄 알았던 그 별이 멀리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는 겁니다. 명왕성이나 천왕성 정도로요.
한때는 누구보다 가까웠지만 이런저런 사연으로 멀어진 사이가 있을 겁니다.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멀어지는 게 고통스럽지요. 독립적인 편인 저도 너무 힘들었는데 의존적인 성향이라면 이별의 무게는 몹시도 무거울 겁니다. 그럴 때면 명왕성을 떠올려보세요. 주기가 비슷해진 어느 날 다시 가까워질지도 모르지요.
선배든 후배든 동료든 친구든 원치 않는 헤어짐으로 힘이 든다면 “나는 지구다”라고 되뇌어 보세요. 그리고 꾸준하고 성실하게 내 궤도를 도는 겁니다. 명왕성이나 천왕성 어느 곳에 가 있을 그 사람도 그러기를 바라면서.
■ 저는 아침 월급형 인간이었습니다
“성격이 곧 운명이다.”얼마 전에 읽은 소설에 나오는 구절이었어요. 셰익스피어가 한 말이라는데, 작가는 셰익스피어가 너무 많은 책이랑 희곡을 쓰고 온갖 말도 남겨서 실은 한 사람이 아니라 열 사람이라는 말도 있다고 했어요.
성격은 일종의 성향이고 선택일 거예요. 내향적인 사람은 나서지 않는 걸 선택하겠죠. 선택이 쌓이면 일상이 되고 일상이 쌓이면 개인의 역사가 되겠죠. 그러니 성격이 곧 운명이라는 말은 맞는 말일 겁니다.
“괜찮아. 괜찮지. 괜찮을 거야.” 노래 가사에도 종종 등장하는 이 말을 저는 좋아합니다. 저만의 기본 옵션이라고나 할까요. 어떤 일이 벌어지든지 받아들이는 것 외에 달리 어찌할 수 없을 때 제가 제 자신에게 해주는 말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렇게 믿습니다. 최악의 상황에도 좋은 점 하나는 있을 거야.
제가 18년간 진행해온 프로그램에서 하차하자 주변에서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내심 예견하고 있었고, 앞으로 살아갈 긴 날에 지금보다 더 좋은 일을 찾기로 했습니다. 가장 먼저 찾아낸 좋은 점은 아침에 늦잠을 잘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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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거였어요. 4,500여 일 동안 울리던 알람을 듣지 않고 푹 잘 수 있다니. 오랫동안 새벽에 일어났던 저는 제가 아침형 인간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만 둔 바로 다음 날 아침 9시에 눈이 떠지더라고요, 저는 아침 월급형 인간이었던 겁니다.
그다음으로 좋은 점은 오전 시간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는 거였어요. 그리고 못 만났던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뭔가 새로운 기회가 생겼다는 거였어요. 1~2년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하고 싶지 않아서 몇몇 제안도 죄송하지만 거절했어요. 그러다 운 좋게 예능 프로그램 섭외가 들어왔고. 그 후로 지금까지 새로운 마음으로 즐겁게 일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 꾸준히 기회를 주신 라디오 프로그램과 청취자에게는 늘 고마운 마음입니다.
“괜찮아. 괜찮지. 괜찮을 거야.” 제가 좋아하고 자주 하는 이 말처럼 여러분에게도 그런 말이 있겠지요. 괜찮다고 말하고 생각하려 했더니 정말 괜찮아졌어요. 오히려 더 나아지기도 했고요. 말은 씨가 되고 열매를 맺고, 나는 내가 말하는 대로 되는 것 같아요. 그렇게 만들어진 성격이 곧 운명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 흙탕물이 가라앉을 때까지
좋아하는 말을 스스로 해 주면 괜찮아지고 아니면 무너지기도 하는 것, 내 마음이죠. 마음은 뭘까요 마음은 내 것인데 왜 뜻대로 안 될까요. 멘탈 관리를 잘하는 사람이라도 늘 평온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흔히 강철 멘탈 혹은 유리 멘탈처럼 요즘은 ‘멘탈’이라고 많이 표현합니다. 예전에는 마인드 콘트롤이라고 했어요. 마음 다스리기, 심기 관리라고 해도 될 텐데요. 뭐라고 부르든 비슷합니다. ‘이너피스(Inner Peace)!’ ‘마음의 평화!’를 되뇌며 깊은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해봐도 흐트러진 마음을 정리 정돈하는 게 쉽지는 않을 겁니다.
이럴 때 해야 하는 일은 딱 한 가지,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해요. 마음을 가만히 둬야 합니다.
연못이 있어요. 바람이 세게 불지 않으면 잔잔합니다. 그런데 누가 돌을 던져요. 그럼 어떻게 됩니까? 흙탕물이 막 일어나잖아요. 연못물을 다시 맑아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기다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까지? 흙탕물이 가라앉을 때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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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오오. 나는 그대의 흰 그림자를 안고 옥같이 그대의 뱃전에 부서지리다.”
가곡으로 만들어지기도 한 <내마음>이라는 시에 이런 표현이 나오잖아요. 돌만 던져도 일렁이는 마음에 노를 젓는다니 아무리 작더라도 배 한 척이 내 마음에 띄워졌다는 뜻이잖아요. 세상에! 노를 한 번 저을 때마다 얼마나 큰 파장이 일렁일까요. 그러니 사랑에 빠지면 제정신이 아닌가 봅니다.
일렁이다가 뒤집혔다가 다시 흔들리면 얼마나 산란하겠어요. 이럴 때는 어떻게 한다고요? 그렇죠. 가만히 있어야죠. 그러면서 깨달아야 합니다. ‘아, 지금 내 마음에 파문이 일고 있구나. 내 마음이 흔들리고 있구나!’ 그 상황을 먼저 인지해야 한다는 겁니다.
“먼저 깨닫는다. 다음, 바라본다. 그리고 가만히 둔다.”
마음은 뭘까요. 마음은 내 것인데 왜 내 마음대로 안 될까요. 이럴 때 해야 할 일은 딱 한 가지.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해요. 마음을 가만히 둬야 합니다.
■ 내가 너를 믿듯이
인생길이 다르니까 인생 시계 역시 저마다 달라야 합니다. 나에게는 나만의 시계가 있습니다. 그리니치 천문대에서 정한 표준시는 남들과 약속을 정하고 맞추는 데에만 씁니다. 인생 시계는 달라요. 누구는 20대 초반에 결혼할 수 있습니다. 저처럼 아예 결혼 자체가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친구들이 아이를 대학에 보낼 때, 나는 임신을 할 수도 있습니다. 저처럼 인생에 아이가 없는 사람도 있고요.
인간은 미래에 중독된 종(種)이고, 현재가 아닌 미래를 사는 비용(대가)이 바로 불안이라고 어느 공학박사가 말했습니다. 불안이 현대인의 디폴트(기본값)라니 좀 덜 불안한가요. 그래도 스멀스멀 불안이 영혼을 잠식할 때 가장 좋은 항불안제는 바로 믿음입니다. 나(스스로)를 믿어주세요.
■ 잘못 탄 기차가 목적지에 데려다 준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야 하는 생방송 일정은 아무래도 압박감을 줍니다. 알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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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분 단위로 맞추고도 혹시 안 울리면 어쩌나 싶어 사발시계까지 맞추고 자야 안심할 수 있으니까요. 다행히 잠복은 있는 편이라서 머리를 베개에 대는 즉시 잠에 빠져들긴 했지만 말이죠.
저도 기계가 아닌 사람인데 규칙적인 일상을 살다 보면 일탈을 꿈꾸는 순간이 왜 없었겠어요. 하지만 휴가도 일주인 온전히 가기가 쉽지 않았어요.
“잘못 탄 기차가 목적지에 데려다준다.” 기차 시간표처럼 인생에 계획표가 있어서 정해진 시간에 떠나고 정확한 시간에 도착하면 규칙적이고 안정적이겠지요. 기차는 그럴지 몰라도 인간은 그럴 수 없어요. 시간을 헛갈리고 기차를 잘못 타고 엉뚱한 시간, 뜻밖의 장소에 도착할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이지요.
지금 당신의 일상은 만족스러운가요. 가만히 떠올려보세요. 지금 내 모습이 어린 시절 꿈꾸던 그대로인가요. 만약 그렇다면 앞으로 당신의 인생이 예상과 달라질 수 있다는 걸 기억하기 바랍니다. 만약 기대하던 것과 다른 삶이라면 당신은 기차를 잘 못 탄 걸까요.
지금 거기가 당신의 목적지가 아니었을지라도 또 다른 출발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있는 그곳은 괜찮은 경유지가 되겠지요. 지금 거기가 마음이 든다면 거기까지 오기 전에 들렀던 곳들은 꽤 튼튼한 환승역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방황과 실수를 받아들이며 다음을 향하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도달해 있지 않을까요. 저 또한 그런 마음으로 기차에 몸을 실어봅니다.
■ 교차로에서 만난 것뿐이에요
1~2년이면 인사이동으로 자리를 옮기는데 어찌 된 일인지 그 부장님은 움직이지 않고 3년 차에 접어들 때였습니다. 다른 팀 후배와 단둘이 밥을 먹게 되었는데, 이런저런 얘기 끝에 그 부장님 얘기가 나왔지요. 다른 팀에서도 그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더라고요. 앞서 있었던 팀에서도 그 부장님은 다들 껄끄러워했다고 하더군요. 3년째 접어드니까 도저히 못 견디겠다며 푸념을 늘어놓는 저에게 후배가 해 준말이 이랬습니다. “교차로에 있다고 생각하세요, 선배.” 군 복무 중 선임 때문에 힘겨워하던 자신에게 다른 선임이 해 준말이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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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했어요. 그저 그러려니 하면서 뚜벅뚜벅 걸어가는 수밖에. 그 선임, 그 부장도 마찬가지겠지요. 자신이 가야 할 길을 걸어간다는 거죠. 그러다 보면 거짓말처럼 꽉 막힌 도로도 어느새 뚫리고 서로 헤어져 가뿐하게 가던 길을 계속 가게 된다고요. 상대도 마찬가지겠지요. 나 같은 운전자 때문에 답답했던 도로를 벗어나 시원하게 달리게 되겠지요.
그 부장님은 어떻게 되었느냐고요. 4년 차에 접어들 무렵 다른 부서로 옮겨 가셨어요. 그러고 나서 이런 근거 있는 자신감이 생겼답니다. ‘우리 회사에서 제일 힘든 사람이랑 3년이나 일했는데, 누군들 같이 일을 못 할까. 누구라도 버틸 수 있게 된 거야, 이제 난!’
■ 동그라미, 동그라미뿐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기 전, 그러니까 4년 전이었나 봐요. 여름방학 때 혼자서 나름의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방송하는 후배들 20명을 만나서 인터뷰하기! 다른 이유는 없었어요. 입사 시험을 치른 지 너무 오래되어서 학생들에게 제 경험담이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거든요. 방송 생활 10년 미만 아나운서나 기상 캐스터 후배들을 만나 한 시간 남짓 인터뷰를 했습니다.
먼저 깨달은 점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다르지 않네, 하는 거였습니다. 요즘 즐겨 쓰는 표현대로라면 ‘방송에 진심인 사람’이 결국 방송을 하게 된다는 것 말이지요. 그게 저는 참 고맙고 반가웠습니다.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유명해지고 싶어서, 이런 것을 넘어서는 일종의 믿음이나 조촐한 사명감이 요즘 후배들에게도 있을까 했던 저의 오해는 바로 풀렸습니다. 방송의 가치를 알고 자신이 해야 할 몫을 고민하는 후배들이 대부분이었어요.
프로젝트 중 만난 신입사원 후배가 뭘 꺼냈습니다. “혹시 도움이 될까 해서 가지고 나왔어요. 제가 입사 시험을 준비할 때 썼던 다이어리예요.”
이름하여 ‘자존감 다이어리’입니다.
방법은 이렇습니다. 매주 일주일 치 계획을 세우는데 아주 쉬운 계획부터 세우는 겁니다. 매일 토익 공부 10분, 한국어 능력 시험공부 10분, 신문 읽기 10분, 이런 식으로요. 한 시간씩 공부하기는 힘들어도 10분 하는 건 상대적으로 쉽잖아요. 그날 목표를 달성하고 나서는 그 항목에 동그라미를 치는 겁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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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일주일이 지나고 나면 생활 계획표에는 모두 동그라미뿐이겠죠. 그게 익숙해지고 편안해지면 각각 15분, 또는 20분으로 늘리고 다시 동그라미를 남기는 겁니다. 중간중간 면접 대비 질문과 답변, 간단한 시사상식 같은 것도 적어 넣습니다.
대학 4년 내내 아나운서를 꿈꾸며 준비하다 보니 이 길이 맞는 걸까. 스스로 의심하게 되었답니다. 한 번 두 번 낙방 경험이 쌓이면서 자존감도 낮아졌고요. 이러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되겠다 싶어 다이어리를 쓰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이름하여 ‘자존감 다이어리’입니다.
■ 100가지 장점이 있는 사람
이런 자존감 다이어리도 있습니다. 오래전 티타임 때 만난 학생에게 권해준 것이었습니다. 그는 늘 비교를 당하며 살아왔다고 했습니다. 두 살 터울 언니가 모든 면에서 뛰어났다고요. 공부도 잘했고, 외모도 예뻤고, 재능도 뛰어나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학교에 다니고 있다고요. 어릴 때부터 시작된 비교는 대학 때까지 이어져 부모님은 물론 친척들도 무조건 언니를 칭찬하고 자신은 미미한 존재라고 했습니다.
문제는 예술적 기질을 타고난 언니가 감정 기복이 심하다는 거였습니다. 기분이 좋을 땐 한없이 잘해주다가도 기분이 나쁘면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집어 던진다고 했어요. 그럴 때면 자신은 그저 당하는 수밖에 없다고요.
20년 이상 이어진 이런 관계는 동생의 자존감 형성에 매우 나쁜 영향을 줬습니다. ‘내가 참아야지, 나만 참으면 돼. 그럼 모두 편안해져.’ 언제나 그런 마음으로 언니 눈치를 본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학생을 도울 수 있을까? 순간, 탁자 위에 올려놓은 다이어리가 눈에 띄었습니다.
“다이어리에 한 달 일정을 적는 데가 있잖아. 아무리 약속이 많아도 오른쪽 아랫부분은 비어 있을 거야. 거기에 오늘 밤부터 하나씩만 적자.”
“나는 밥을 잘 먹는다.” “나는 똥을 잘 싼다.” 학생은 피식 웃었습니다.
“그렇게 딱 100일만 해봐. 그럼 나에게 100가지의 장점이 있다는 걸 알게 될 거야.” 학생의 눈빛이 반짝였습니다. 3월, 학기 초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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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6월, 학기 말이 되었습니다. 기말고사를 대체한 팀 발표를 했죠. 눈여겨보았던 그 학생도 팀 내에서 제 몫을 훌륭하게 해냈습니다.
그리고 그 학생에 대한 팀원들의 환호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00 언니, 언니가 없었으면 우리 팀 분위기가 이렇게 좋을 수 없었을 거야. 팀 분위기 메이커가 되어줘서 고마워요.”
“00 언니는 우리 팀 개그맨, 언니 덕분에 한 학기 동안 많이 웃을 수 있었어요.” 제 눈을 의심하며 다시 한번 읽었죠.
4월의 모습, 5월의 표정, 강의실에 들어설 때마다 살며시 눈치챘던 그 학생의 변화가 떠올랐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밝아지던 모습, 마치 어두운 곳에 조명을 비춰 서서히 조도를 높이는 것만 같았거든요. 학기 말로 갈수록 웃는 모습도 볼 수 있었고요.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구나. 진짜 이렇게 많이 달라졌구나.”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 발목에 묶인 실을 풀어버린 것처럼
저는 20대 중반에 아나운서가 되어 당시 방송이 원하던 아나운서의 모습으로 살아왔습니다. 참하고 얌전하고 말도 조용조용히 하면서요.
그러다 보니 제 본 모습을 잊어버렸던 것 같아요. 여기서 중요한 건 제가 답답했다는 겁니다. 어쩐지 무거운 옷으로 몸을 짓누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그러다가 40대 초반, 교육 다큐멘터리 시리즈의 내레이션을 맡을 때였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저는 과학이나 심리 다큐멘터리를 좋아해서 원고를 받자마자 탐독했습니다. 그중에 타고난 본성대로 사는 것이 편안하다는 내용이 있었습니다. 본성은 사회화가 되기 전 어린 시절의 모습이라고도 했고요. 직성이 풀린다는 말이 있지요 타고난 본성대로 해야 속이 시원하다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걸 읽고 생각해 봤습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어땠지?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 시절의 저에게 붙여주신 별명이 떠올랐습니다. 뚱딴지. 엉뚱한 행동이나 생각을 많이 했던 모양입니다.
조금 더 자라면서 <톰 소여의 모험>이나 <허클베리 핀의 모험>, <장발장>이나 <소공녀>같은 책을 읽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했지요. 초등학교 고학년 시절 저의 보물은 계림문고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소년 소녀 명작동화 100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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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으니까요. 엉뚱하고 상상하기 좋아하는 기질이 동화를 읽으면서 더 커졌을 것입니다.
40대 초반에 떠올린 ‘어린 시절의 나’는 이후 저를 자유롭게 했습니다. 마치 발목에 묶여 있던 실 같은 걸 풀어버린 느낌이었달까요. ‘그래, 나는 원래 좀 엉뚱한 사람이지, 명랑하고 발랄해. 그동안 사람들이 원하는 아나운서 모습으로 사느라 자신을 잃어버렸네. 그러면 안 되지.’ 그런 생각을 하니 방송에서도 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요즘은 라디오 진행할 때 어이없는 성대모사도 하고, 웃음소리도 마음껏 냅니다. 가끔 시끄럽다고 청취자가 타박하실 정도로요.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꾸미지 않고 편안하게 말하게 되고요. 나를 찾고 나니 홀가분해졌습니다.
어찌 보면 인생은 끊임없이 나는 찾아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어요.
◎ 제4장 말하기를 제대로 배운 적 없기에
- 22년 강의 실전 연습 -
사회생활, 특히 입시와 면접을 치르다 보면 꼭 필요한 것이 말하기가 아닐까요. 스스로 눌변이라고 생각하는 분도 좌절하지 마세요. 꾸준히 애써보면 말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됩니다. 이제 말하기 연습을 위한 실용적인 이야기를 나눠보겠습니다.
■ 발표는 기 싸움입니다
발표는 결국 기 싸움입니다. 사람이 10명이든 100명이든 나와 그 사람들 간의 기 싸움이에요.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하는 순간부터입니다. 자신감 있게 시작해야지요. 자신감은 충분히 준비하고 연습하면 키울 수 있습니다.
저는 뮤지컬 보러 가는 걸 정말 좋아합니다. 당시 스타였던 배우를 보고 물었지요. “어쩌면 그렇게 무대에서 자신감에 넘치세요?”
답은 한 가지, 연습이었습니다. 노래 한 곡을 만 번씩 불러 본다는 것입니다. 만 번을 부르고 나면 이런 마음이 된답니다. ‘빨리 무대에 올라서 이 노래를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어’
또 다른 사례는 <개그 콘서트>입니다. KBS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개그 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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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에 ‘생활의 발견’이라는 코너가 있었습니다. 한 번은 그 코너에 출연 제안을 받았습니다. 5분 남짓한 코너에 제가 등장하는 장면은 기껏해야 2~3분 이었습니다.
대본을 미리 받아 혼자 외운 후 연습실에 갔던 날, 깜짝 놀랐습니다. 전문가들이니 한두 번 맞춰보고 녹화하는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무려 30번이나 연습을 하더군요. 하도 연습을 많이 하니까 나중에는 대사가 입에서 저절로 나왔어요.
함께 출연하는 개그맨에게 살짝 여쭤봤어요. 도대체 연습을 몇 번이나 하냐고요. 코너마다 다르지만 100번에서 200번을 한다더군요. 그렇게 연습을 많이 하면 어찌 될까요. 걱정할 필요도 없이 조건반사처럼 내 입에서 대사가 술술 나옵니다. 뇌에 저장하는 게 아니라 세포에 새기는 느낌이었습니다.
■ 벽을 뚫어라
그렇게 얘기하고 나면 학생들은 걱정 반 기대 반의 눈빛으로 저를 봅니다. 1만 번의 노래와 100번의 연습을 할 수는 없지 않을까 하는 기대입니다.
1만 번이나 100번은 몰라도 혼자 하는 개인 발표라면 30번, 40번, 50번이라도 연습하라고 권합니다. 입을 열면 나도 모르게 줄줄줄 말이 나올 정도로 말입니다. 팀 연습도 10번이고 20번이고 다 같이 모여서 해보면 좋을 겁니다.
팀 발표를 앞두고 저는 마지막 발표 준비, 즉 리허설을 꼭 함께했습니다.
학생들은 강의실 앞쪽 강단에 서고 저는 일부러 맨 뒤 가운데 자리에 앉습니다. 학생들이 발표(사실은 리허설)를 시작하면 1분 안에 멈추게 합니다. 그리고 말하죠. “안 들려요! 지금 이렇게 강의실이 비어 있는데도 안 들리면 학생들로 꽉 찬 수업시간에는 더 안 들릴 거예요.” 그러면서 팁을 줍니다. “내 소리가 강의실 뒷벽을 뚫고 나간다는 느낌으로 말해야 해요. 그게 기 싸움에서 이기고 단박에 기선을 제압하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단전은 아니어도 아랫배 깊숙한 곳에서부터 끌어 올리는 소리, 즉 복식호흡으로 발성하면 훨씬 더 쉽습니다. 갓 태어난 아기는 모두 복식호흡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온종일 울어도 괜찮다는 겁니다.
복식호흡을 하던 아기는 자라면서 흉식 호흡을 하게 되고, 깊은 곳에서 길어 올리는 맑고 깨끗한 소리를 잃어버린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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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소리를 찾으려면 배우고 연습해야 합니다. 오페라 무대에 서는 성악가들을 보면 마이크를 쓰지 않고도 넓은 공연장에 울려 퍼지게 노래를 부르지요. 복식호흡 덕분입니다. 판소리를 완창하는 명창들은 한두 시간이 아니라 예닐곱 시간을 공연하고도 목이 멀쩡하지요. 복식, 아니 단전호흡 덕분이라고 합니다.
■ 팀워크는 리엑션
팀워크가 좋은지 아닌지 어떻게 판단할 수 있을까요. 발표하지 않는 사람을 보라고 했습니다. 팀워크가 안 좋으면 발표하는 사람이 말하는 동안 다른 팀원들은 각자 다음 순서에서 자기가 맡은 부분을 외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팀워크가 좋으면 한 사람이 발표할 때 다른 모두가 그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만약 발표자가 틀리거나 헤맨다면 곧바로 그 부분을 자연스럽게 수정하거나 메워줍니다 그게 팀워크입니다.
그걸 저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축구 중계를 볼 때 카메라는 뭘 따라가나요? 우리의 시선은 뭘 따라가나요? 그렇죠. 축구공을 따라갑니다. 공이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서 경기의 승패가 결정되니까요. 발표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발표할 때 우리는 뭘 따라가야 할까요? 그렇죠. 말을 따라가야 합니다. 말하는 사람을 쳐다봐야 합니다. 팀원들이 모두 말하는 사람을 보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 발표는 좋은 발표입니다.
팀워크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아니라 팀’입니다.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는 축구의 오래된 격언을 굳이 꺼내지 않아도 다들 알 거라 믿습니다. 팀 발표에서 제일 중요한 건 그래서 ‘리액션’입니다. 축구공을 따라가는 선수들의 눈빛이나 발놀림처럼 발표자의 ‘말’을 따라가는 팀원들의 리액션은 결국 그 발표를 성공으로 이끌 테니까요.
■ 문장을 쓰지 마세요
팀 발표에서 제일 안 좋은 방법은 말할 내용을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원고를 그대로 외는 겁니다. 그것은 말하기가 아니라 읽기입니다. 이렇게 준비하는 사람은 대개 말에 자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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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어서 글에 의존하는 겁니다. 당연히 제대로 읽기도 어렵습니다.
말을 할 때는 에너지가 들어갑니다. 읽기에 들어가는 에너지의 몇 배는 될 겁니다. 읽기에는 에너지가 별로 필요하지 않거든요.
예전에는 교과서를 줄줄 읽는 선생님도 계셨습니다. 주로 연세가 많은 선생님이었어요. 그런 수업에 집중이 되던가요. 앞서 말했듯이 말하기에는 화자의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화자의 에너지는 곧바로 청자에게 연결됩니다. 몰두와 흥미를 부르죠.
그럼 어떻게 말을 해야 크고도 오래가는 에너지를 전달해 사람들을 쥐락펴락할 수 있을까요. 첫 번째 연습 방법은 바로 단어를 문장으로 만들기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할 말을 문장으로 쓰지 말고 단어로만 써보세요. 그리고 단어와 단어를 연결해 가면서 말해보세요. 문장을 쓰면 거기에 의존하게 되고 ‘말하기’가 아니라 ‘쓰기’ 실력만 자라날 뿐입니다. 손으로 쓰거나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지 말고 머릿속으로 써보세요.
요즘도 하는지는 모르지만, 아나운서 시험에 합격하고 교육을 받는 한 달간 저희는 매일 3분 스피치를 했습니다. 오후 5시쯤 선배 아나운서들이 둥그렇게 모여 앉으면 한 사람씩 그 앞에서 주어진 주제로 3분간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주제는 즉석에서 정해지지요. 뒤로 갈수록 유리할 것 같다고요? 천만에요. 다음 사람에게는 다른 주제를 줍니다. 소용이 없어요.
처음에는 1분을 넘기기가 어렵지만 한 달이 지나고 나면 3분쯤은 거뜬히 채울 수 있습니다.
말하기에는 화자의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몰두와 흥미를 부르죠. 그러다 말하는 사람의 기운과 에너지가 조금씩 떨어지면 듣는이의 집중과 재미도 조금씩 떨어집니다. 그만큼 말하기에는 크고도 지속적인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 그래요, 강아지의 힘
팬데믹 상황에서 우리는 모두 힘들었습니다. 실습 위주 수업을 하는 저도 그랬습니다. 직접 만나 얼굴을 볼 수 없으니 답답했습니다. 발음할 때 입 모양도 언급하고, 말하기 실습과 피드백도 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으니까요.
온라인 수업을 하며 어떻게 하면 학생들이 ‘실습’할 수 있게 만들까 고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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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일주일에 하나씩 녹음 과제를 내주었습니다. 매주 주제를 정해 1분 남짓 녹음하여 저에게 메일로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녹음 파일을 일일이 듣고 피드백을 적어서 다시 학생 하나하나 답장을 보내주었죠.
발음하기, 발성하기, 주제를 정해놓고 말하기, 키워드(핵심 단어) 한 개로 말하기 또는 세 개로 말하기 같은 과제를 대부분 성실히 수행해 준 학생들, 고마웠습니다. 저로서는 품이 많이 들었지만, 그래도 학생들이 실력 향상을 느끼게 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을 겁니다.
어떤 분야든 마찬가지겠지만 실력은 한꺼번에 쑥쑥 늘지 않습니다. 극소수의 천재들은 그럴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안 그래요. 마치 아주 완만한 경사로를 올라가는 것 같지요. 올라가고 있는 건가? 의심하는 그때 실력이 약간 향상됩니다. 완만한 경사로가 아니라 계단참이 아주 아주 긴 계단을 올라가는 거라고 여기는 게 나을까요. 올라가고 싶은데 계단참에서 제자리걸음만 지루하게 한다고 느낄 때쯤 겨우 한 계단 올라서니 말입니다.
더러 놀랍게 껑충 뛰어오르는 학생이 있어요. 1주 차와 7주 차 과제물이 완전히 다르죠. 다른 사람이 한 듯 실력 향상이 두드러지는 경우가 드물지만 있습니다. 그럴 때면 궁금해서 어떻게 한 거냐고 물어봐요. 그중 한 학생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말을 하려면 상대가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비대면 수업을 하고 친구들도 못 만나서 혼자 사는 저로서는 말할 상대가 없었어요. 생각다 못해 제가 키우는 강아지를 붙잡고 연습을 했어요.” 그래요 강아지의 힘입니다.
■ 후배에게 배웠어요
반려동물도 안 키우고 만날 사람도 별로 없다고요? 그렇다면 인형을 하나 마련하세요. 반려동물처럼 붙잡아 앉히고 말을 할 수 있는 정도의 크기로요. <나혼자 산다>에 나오는 윌슨 정도면 될까요? 그렇게 크지 않아도 됩니다. 손바닥만 한 인형이라도 내 이야기를 날마다 할 수 있으면 되니까요. 중요한 건 날마다 꾸준히 연습하는 겁니다.
그것도 어렵다면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지하철역이나 버스 정거장에서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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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지 걷는 동안 말을 하는 겁니다. 5분이든 10분이든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꾸준히! 이때 중요한 건 실제로 ‘말’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을 하듯 마음속으로 웅얼거리기만 하면 도움이 안 돼요. 무슨 말을 하냐고요? 그것도 날마다? 주제는 정하기 나름입니다. 영화를 보고 온 날은 영화 줄거리를 요약해도 좋고,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면 그날 점심 얘기도 좋습니다.
스스로 묻고 답해 보세요. 무엇을 묻고 답할까요. 그것부터 말하기의 공부가 됩니다.
스스로 질문을 만들어 냈다면 거기에 걸맞은 답변도 만들어 내야죠. 어떻게 하냐고요? 준비하고 공부하고 노력해야지요. 날마다 하나씩 질문을 만들고 답변을 한다면 6개월 후 180개, 1년 후 360개가 넘는 질문지와 답변지를 갖게됩니다. 이런 사람이라면 면접장에서 면접관이 무엇을 물어본들 어렵지 않게 대답할 수 있겠지요. 여러분도 할 수 있습니다.
■ 원로 아나운서의 연습법
원로든 중견이든 새내기든 마찬가지일 겁니다. 방송은 참 어렵습니다. 생방송이든 녹화나 녹음방송이든, 목소리만 나오든 얼굴까지 나오든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해온 텔레비전 프로그램 진행이나 다큐멘터리 내레이션에는 기본 원고(대본)가 있습니다.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에도 기본적인 원고는 있습니다. 오프닝 멘트나 코너 구성원고, 앞뒤 연결 멘트를 작가가 미리 써두지요. 생방송 도중에 청취자 여러분이 보내주시는 문자나 글도 아주 훌륭한 대본이 됩니다.
대본이 없는 프로그램도 있습니다. 짐작하시는 대로 스포츠 중계방송이지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폐막식 날 오전에 열린 남자 마라톤 중계방송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답니다. 마라톤은 우리나라가 메달을 기대하는 종목이 아니었기에 방송사에서도 출발, 중간지점, 골인 지점 중계 정도만 예상했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 우리나라 마라토너가 내내 상위권을 달리더니 선두 그룹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며 골인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예상과 달리 두 시간 내내 중계방송을 해야 했던 아나운서, 이제 더는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금메달 획득을 눈앞에 두고 중계를 멈출 수는 없었지요. 주 경기장에 들어오는 선수를 보며 아나운서는 이렇게 말을 이었습니다. “(선수의 발걸음에 맞춰서) 왼발, 왼발, 왼발, 왼발!” 그래도 아직 골인하지 못했죠. “황영조!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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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조! 화~앙 여~엉 조~오!” 그렇게 수십 번을 외친 끝에 드디어 황영조 선수가 제일 먼저 결승점을 통과했습니다.
이렇게 중계방송은 어렵고도 어렵습니다.
■ 100장이었는데 1장입니다
얼마 전 유튜브 <마이금희>라이브 방송에서 후배와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그날 <마이금희> 라이브에서 저는 100장을 1장으로 줄이는 방식을 말씀드렸어요. 예전 IMF 당시 금 모으기 특별 방송을 맡았을 때나, 1년간 50명 남짓 초대 손님을 인터뷰했던 <파워 인터뷰>를 진행할 때 이용한 방법이에요. 한 사람에 관해 혹은 주제 하나를 놓고 A4 용지 100장 분량의 자료를 모읍니다.
그리고 읽으면서 밑줄을 쳐요. 밑줄 친 부분만 모으면 10장 안팎으로 줄어들죠. 그 10장을 다시 3~4장으로 줄여요. 문장이 아니라 광고처럼 짧은 문구로,
이때부터는 직접 손으로 쓰죠. 결국 딱 한 장으로 만듭니다. 그럼 그걸 완전히 머릿속에 저장됩니다. 생방송 중 언제든 꺼내 쓸 수 있지요. 만약 생각나지 않는다면 그땐 큐카드에 적어둔 핵심 단어를 살짝 찾아보면 되지요. 빼기의 힘입니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도전해 보세요.
■ 혼자서 해보는 방송
어떤 프로그램을 맡아도 제 몫을 해내는 방송인이 쓴 책에서 읽은 비법 하나를 공유하려 합니다. 어떻게 하면 말을 잘할 수 있을까. 그는 이런 방법을 고안해 냈다고 합니다. 말하며 행동하기. 행동하며 말하기, 자신의 일상을 방송중이라고 생각하며 혼자 중계하는 겁니다. 1인 방송이나 SNS가 없던 시절이었으니 연습하기 위해서 그랬던 셈입니다.
예를 들어 김치찌개를 먹으려 해요. 그럼 그걸 말로 표현하면서 행동하는 겁니다. 냉장고를 열며 말합니다. “오늘 점심 메뉴는 김치찌개입니다.” 김치통을 꺼내며 말합니다. “찌개를 끓이기에는 갓 담근 김치보다 약간 신 김치가 제격인데, 김치가 어느 정도 익었을까요?”…….
뉴스 관련 논문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였던 우리나라 방송 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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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는 요즘 청취자가 들으면 아주 어눌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느리게 뉴스를 진행했다고 합니다. 전달 속도 측정결과 1분에 217음절을 말했다고 해요. 낭독하듯 똑독 끊어 읽었대요. 그러다가 2,000년대에는 앵커가 1분에 평균 373음절을 말했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세상은 급해지고 우리는 빨라진 겁니다. 그러니 우리가 30분 정도 쉬지 않고 계속 말을 한다면 무려 1만 음절가량을 말할 수도 있는 겁니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가끔 나오는 구구단 문제, 언제나 백발백중인가요? 초등학교 때 그렇게 외워서 지금도 입에서 술술 나올 것만 같은 구구단조차 안 쓰면 잊어버립니다.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용불용설, 안 쓰면 줄어들고 쓰면 늘어납니다. 어휘도 그렇고 대회도 그래요. 안 쓰다 보면 잘 알고 있던 단어조차 잊어버립니다.
말을 잘하기 위해, 말에 부담감을 덜기 위해,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순발력을 키우기 위해 이렇게 중계를 해보는 겁니다. 초보일 때는 줄이는 건 쉽지만 늘리는 건 어렵습니다. 숙련된 후에는 늘리는 건 쉽지만 줄이는 게 어려워지지요. 말을 줄이기가 쉽지 않네, 느낄 정도로 말을 많이 해보세요. 혼자서라도. 말이 어렵지 않게 느껴지도록 연습해 보세요.
■ 호흡은 말의 리듬
박찬욱 감독이 영화 <헤어질 결심> 개봉을 앞두고 했던 라디오 인터뷰에서 디제이가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감독님 영화에서는 호흡이 아주 중요한 것 같아요. 영화 <박쥐>에서도 그렇고, 이번 <헤어질 결심>에서도 그랬지요?” 박감독님은 이렇게 답했어요.
“언제부턴가 저는 호흡도 대사의 일부라고 생각을 했어요. 아마도 <공동경비구역 JSA> 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배우들에게 따로 부탁합니다. 호흡도 신경 써서, 대사의 일부로 해달라고요.
놀랐습니다. 제 생각도 그렇거든요. 연기를 잘하는 배우의 대사를 귀 기울여 들어보면 그런 걸 느낍니다. 연기 잘하는 배우는 대사를 잘한다. 대사를 잘하는 배우는 호흡을 잘한다. 대사가 한 줄이든 열 줄이든 어디에서 호흡을 주고 어디에서 호흡 없이 몰아치듯 말하는지 말의 리듬을 명 배우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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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무대에 오랫동안 섰던 배우들이 특히 그런 호흡 처리를 잘합니다. 연기뿐 아니라 다큐멘터리 내레이션에서도 호흡은 중요합니다. 어디서 끊어 읽고 어디서 붙여 읽어야 하는가. 어디서 얼마만큼 쉬었다가 가는가. 이런 세밀한 부분이 결국 내레이션 전체의 흐름을 결정짓고, 편안하기 듣거나 반대로 불편하게 듣게 만들거든요.
띄어 읽기와 관련해서 유명한 문장이 있지 않습니까.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신다’를 잘못 띄어 읽으면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신다’가 되잖아요. 사람이 가방에 들어가는 거죠. 그것도 아버지가! 오래된 개그 중에 ‘아기다리/ 고기다리/ 던/’도 있지요.
저는 원고를 받으면 지금도 습관적으로 제일 먼저 띄어 읽기 표시부터 합니다. 아나운서나 성우 대개가 그러할 겁니다. 각자 자신만의 표시를 하지요. 저는 세 가지를 씁니다. 오래 쉬는 곳에는 ‘//’, 그보다 덜 쉬는 곳에는 ‘/’. 아주 살짝 쉬는 듯 마는 듯하면 거기에는 ‘√’ 표시를 작게 합니다.
저에게도 실은 내레이션을 일주일 만에, 그러니까 딱 한 번 해보고 잘린 경험이 있습니다. 입사 2년 차쯤 되었을 때였습니다. 담당하던 선배 언니가 출산 휴가에 들어가면서 운 좋게 제가 대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딱 한 번 해본 후 다큐팀 부장님이 바로 다음 주에 저를 하차시켰습니다.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습니다. 무엇보다 궁금했습니다. 왜 잘렸을가? 왜 기회를 더 주지 않았을까?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알게 되었습니다. 그건 잘하고 싶다는 의욕이 넘치고 힘이 잔뜩 들어간 내레이션이 얼마나 부담스러웠을까요. 운동할 때도 무조건 힘부터 빼고 부드럽게 해야 하는데 말하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드럽게, 욕심부리지 말고,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몇 년이 지나고 맡은 프로그램이 <인간극장>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제가 내레이션을 전담으로 한 건 아니었고 유명한 성우나 배우들이 돌아가며 내레이션을 하다가 저에게도 기회가 왔습니다. 이번에는 잘해야겠다는 욕심 대신 저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여기서 내 역할은 무엇이지?’ 몇 주 동안 생각하며 답을 찾았습니다. ‘아, 나는 시청자들보다 먼저 인간극장을 보는 사람이지. 첫 번째 시청자인 셈이야.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다큐를 처음 본 사람으로, 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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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지 못한 사람에게 설명해 줘야지.’ 그런 마음으로 일해서였는지 9년 6개월이나 <인간극장>을 할 수 있었습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 한 번 더 물어봐도 괜찮아
오랫동안 면접관으로 일해온 인사 담당자와 차를 마셨습니다. 궁금한 걸 여쭤볼 수 있었어요. 어떤 지원자에게 높은 점수를 주시나요? 질문의 포인트를 정확히 알아채는 사람에게 높은 점수를 준다고 했습니다. 당연한 말처럼 들리지만, 의외로 뭘 물어보는지 모르는 사람도 많다고 했습니다. 다들 긴장하니까요. 긴장하면 포인트를 못 알아챈다고 했습니다.
면접관의 질문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그럴 때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죄송하지만 한 번 더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물어보는 게 낫다고 하더군요.
똑 같은 질문을 두 번이나 들었는데 그래도 모르겠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잠깐만 생각을 정리해 보겠습니다. 시간을 조금만 주셔도 되겠습니까?” 예의 바르게 여쭤보고 양해를 구하면서 면접 페이스를 자기 쪽으로 가져온 후에 말을 하는 게 낫다고 합니다. 길어야 5초쯤 면접관을 기다리게 하는 건 괜찮다고요. 조금 안심됩니다. 그럼 어떤 지원자에게 낮은 점수를 주시는지요. 저의 다음 질문이었습니다. A라는 답을 해야 하는데 자꾸 자기가 외워온 B를 말하려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또 면접관들은 일부러 정답이 없는 질문을 할 때가 있다고도 했습니다. 그런 경우는 지원자에게 정답을 원하는 게 아니라, 그가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어떻게 설득을 하는지 제세와 태도를 본다고 했습니다. 지원자도 판단할 줄 알아야 하겠지요. ‘아, 이 질문은 내가 어떻게 답하는지를 보려고 하는구나.’
마지막으로 일부러 지원자를 당황하게 만들 때도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본 모습은 그럴 때 나오는 법이라서요. 지원자로서는 당황하기도 하고 ‘이건 좀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겠지만 그렇게 나온다면 좋은 점수를 받기 어렵다고 합니다.
억울한 마음도 들겠지만 어쩌겠습니까. 준비된 모습만이 아니라 준비되지 않은 모습까지 보고 싶어 그러는 거니까요. 그럴 때 이렇게 말을 하면 제일 높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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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수를 주게 된다고 해요. “그 말씀도 맞는 말이지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왜냐면….”
■ 정리 또 정리 다시 정리
어떻게 말을 할까 생각해 봤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이겁니다. “무엇을 말해야 할까?” 영어 공부를 예로 들어볼까요. 영어를 잘하기 위해서 단어를 외고 문법도 익히고 회화도 연습합니다. 그리고 원어민과 회화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무슨 얘기를 할까요? 날마다 만나서 “How are you? Fine, thank you. And you?” 이러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요. 요즘 그 나라 사람들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아니면 그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알아야 대화를 이끌어갈 수 있습니다.
정리하는 습관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 책 한 권을 읽더라도, 영화 한 편을 보더라도 재밌네, 하고 넘길 게 아니라 분석도 해보고 생각도 해보는 겁니다. 만약 내가 주인공이라면? 실제로 이런 질문은 면접에서 나오기도 합니다. 많은 관객이 본 영화, 그해 베스트셀러에 오른 책은 면접관들이 즐겨 물어보는 단골 질문 소재가 되기도 하지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정리하는 습관을 들이면 영화 한 편, 책 한 권이 내 것이 됩니다. 생각하는 습관을 들이면 나만의 언어가 나옵니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시인들이 교통사고를 당할 확률이 높다는 미확인(!) 통계가 있다고 합니다. 시(詩)어 하나를 내내 생각하고 다니느라 교통신호를 제대로 보지 못해서라고 합니다. 적확한 시어, 시적인 언어인 시어를 찾는 일이 어렵다는 뜻일 겁니다. 그래서 시는 그렇게 인상적이고 강렬하고 아름답고 신비로운가 봅니다.
힘이 있는 글, 인상적인 문구라면 광고도 빼놓을 수는 없지요. 유명한 광고 문구는 한 시대를 풍미하는 유행어가 되고, 시대를 넘어 다른 세대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런 문구를 만들어 내는 카피라이터들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실제로 그들 사이에서 통용되는 말 중에 이런 게 있답니다. “어딘가에 있다. 지금 내가 못 찾을 뿐이지.”
그래요. 우리도 찾아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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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닫는 말
33년 방송 일을 하며 쌓아온 경험과 22년 6개월간 겸임 교수로 강의를 하며 알게 된 노하우가 후배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지 않겠냐는 마음이 강단을 떠난 후에야 들었습니다. 강의할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젊은이들에게는 늘 빚진 마음입니다. 기성세대로서 열심히 살아오며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었지만,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세상을 살아가게 한 것만 같아서요. 젊은이들에게 빚을 갚는 심정으로 기억을 더듬어 썼습니다.
영화감독 아스가르 파르하디의 말이라고 합니다.
“관객에게 답을 주는 영화는 극장에서 끝날 것이다. 하지만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는 영화는 상영이 끝났을 때 비로소 시작한다. - 끝 -
2023. 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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