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후기

빅터 프랭클의죽음의 수용소에서

보해성산 2023. 11. 6. 16:16
반응형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 죽음조차 희망으로 승화시킨 인간 존엄성의 승리 -

■ 빅터 프랭클 지음

1905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났고, 빈 대학에서 의학박사와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과 아들러의 개인 심리학에 이은 정신 요법 제3학파라 불리는 로고테라피 학파를 창시했다. 유대인이었던 그는 나치의 강제 수용소에서 겪은 죽음 속에서 자아를 성찰하고, 인간 존엄성의 위대함을 몸소 체험하였다. 저서로는 <삶의 의미를 찾아서>, <의미를 향한 소리 없는 절규>, <심리의 발견>등이 있다.

■ 이시형 옮김

0 경북대 의대 졸, 미국 예일대 신경정신과 박사학위

0 경북대 의대 교수, 서울대 의대 출강, 강북 삼성병원장,

사회정신건강연구소 소장, 한국 정신의학연구재단 이사장 등 역임

0 대한민국 정신의학계 권위자.

0 2009년 세로토닌 문화원 설립, 현재까지 대표로 있음

0 저서 : 세로토닌하라. 공부하는 독종이 살아남는다. 행복한 독종.

0 옮긴 책 : <삶의 의미를 찾아서> 등

◎ 1984년 판에 부친 서문

이 책의 영어판이 73쇄에 이르렀다. 그동안 번역판도 19개 언어로 출판됐으며 영어판 하나가 250만 부나 팔리는 기록을 세웠다.

나는 이 책이 나에게 문학적인 명성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내가 원했던 것은 독자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심지어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이 잠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인 예를 통해 전

- 1 -

달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만약 강제 수용소와 같은 극단적이 상황에서 이것이 입증된다면 사람들이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겪은 일을 기록해 놓을 책임을 느꼈다. 왜냐하면 그것이 절망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평소에 나는 학생들에게 거듭해서 이렇게 타이르곤 한다.

“성공을 목표로 삼지 말라. 그것을 표적으로 하면 할수록 그것으로부터 더욱 더 멀어질 뿐이다. 성공은 행복과 마찬가지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것이다. 행복은 반드시 찾아오게 되어 있으며, 성공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에 무관심함으로써 저절로 찾아오도록 해야 한다. 나는 여러분이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소리에 따라 확실하게 행동할 것을 권한다. 그러면 언젠가는, 얘기하건대 언젠가는! 정말로 성공이 찾아온 것을 보게 될 날이 올 것이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성공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친애하는 독자들에게 말하건데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에서 나는 아우슈비츠에서의 체험으로 얻은 교훈을 보여 줄 것이다. 그리고 그에 앞서 이 서문에서는 의도하지 않았던 베스트셀러가 된 데서 얻는 교훈을 이야기하고 있다.

■ 옮긴이 서문

이 책과 나의 첫 번째 만남은 여기서부터였다. 전쟁이 휩쓸고 간 거리, 추위와 굶주림에 고픈 배를 움켜잡았다. 어지럽고 메스꺼워 더는 걸을 수가 없었다. 가판대에 놓여 있는 헌 책 한 권이 겨우 눈에 들어온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나는 앉은 채로 읽어 내려갔다. 전율과 감동으로 몸서리치며 정신이 번쩍든다.

‘아, 그래도 거기보다는 여기가 낫지 않은가.’

널브러져 앉은 내 꼴이 부끄러워서 벌떡 일어났다.

두 번째 인연은 정신과 수련의 시절에 읽은 <빅터프랭클의 로고테라피>였다. 내가 접한 어떤 정신 치료 서적보다 설득력이 있고 실용적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정신과 임상에서 내가 가장 많이 인용하는 기법이다. 연단에서 떠는 환

- 2 -

자에게 ‘더 떨어 보라’라는 그의 역설 기법은 나의 대인 공포 클리닉에서 사용하는 핵심치료 기법이다.

세 번째 만남은 빈 대학에서 열린 세계정신 의학회장에서였다. 프랭클의 강연장은 초만원이었고, 이윽고 들어선 그는 겸손과 따뜻함이 넘쳐흐르는 너무나 평범한 시민의 모습이었다. 인간으로서 그리고 정신과 의사로서 내가 가장 존경해 왔던 대학자와의 만남이 드디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네 번째 만남은 2002년 아우슈비츠에서였다. 참혹했던 당시 모습이 너무나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의 책에서 읽은 아픔이 그대로 전달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이 다섯 번째 인연이다. 얇은 책 한 권이 한 인간에게 오랜 세월 큰 감동을 주기란 쉽지 않다. 이 책은 그만큼 진실하고 설득력 있다. 이론이 아닌 극한의 상황을 겪어낸 그의 체험담이기 때문이다.

그는 수용소 네 곳을 전전하면서도 끝까지 삶의 품위를 잃지 않고 성자처럼 버티어 나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생환해 온 산증인이다. 지난 1997년 92세로 생을 마칠 때까지 그의 영혼은 호수처럼 맑았다고 후학들은 전한다.

빅터 프랭클은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삶의 의미와 존재 가치를 일깨워 주는 대학자이자 평범한 시민이었다. 그가 강제 수용소에서 한 경험은 이제 개인의 경험이 아닌 인류의 경험이 됐다.

- 이시형

 

1. 강제 수용소에서의 체험

■ 강제 수용소에 있었던 보통 사람 이야기

이 책은 어떤 객관적인 사실이나 사건에 대한 보고서가 아니다. 개인적인 체험, 즉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시시때때로 겪었던 개인적인 체험에 관한 기록이다. 그리고 생존자 중 한 사람이 들려주는 강제 수용소 안에서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동안 너무나 많이 들어왔던–믿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던-끔찍한 공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겪었던 고통에 관한 이야기이다. 다시

- 3 -

말해서 이 책은 강제수용소에서의 일상이 평범한 수감자들의 마음에 어떻게 반영됐을까 하는 질문에 답하려고 쓴 것이다.

여기에 나온 이야기 대부분은 규모가 큰 수용소나 이름 있는 수용소에서 있었던 일이 아니다. 대량학살이 실제로 자행됐던 소규모 수용소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위대한 영웅이나 순교자의 고난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관리인 행세를 하며 특권을 누렸던 카포들이나 유명한 수감자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다. 저명인사의 시련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름도 없이, 기록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사람의 희생과 시련, 죽음에 관한 이야기다. 소매에 신분을 구별해 주는 특별한 표시조차 달지 못한 채 카포들의 멸시를 받았던 보통 수감자의 이야기다.

■ 카포, 우리 안의 또 다른 지배자

보통 수감자에게 먹을 것이 아주 조금 있거나 아예 없을 때에도 카포들을 절대로 굶는 일이 없었다. 그들 인생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 카포들은 오히려 수용소에 있을 때 가장 영양 섭취를 잘 했다고 한다. 감시하는 병사보다도, 나치 대원보다도 카포들이 수감자에게 더 가혹하고 악질적인 경우가 많았다. 물론 카포는 수감자 중에서 뽑았다. 일단 카포가 되면 그들은 금세 나치 대원이나 감시병들을 닮아갔다.

■ 치열한 생존 경쟁의 각축장

일정한 수의 수감자를 다른 수용소로 이동시킨다는 공식 발표가 났을 경우를 살펴보자. 그러면 사람들은 최종 목적지가 당연히 가스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희생자 명단에서 자기 이름이나 친구 이름을 지우는 것이다. 한 사람을 구하려면 다른 사람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수송을 할 때마다 인원은 정해져 있었다. 수감자에게는 모두 번호가 있었고, 그들은 번호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했다. 때문에 누가 수송되느냐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수용소로 들어올 때-적어도 아우슈비츠에서는 그랬다-수감자

- 4 -

신상을 적은 기록은 소지품과 함께 압수됐다. 따라서 수감자는 가짜로 이름이나 직업을 댈 수 있었으며, 여러 가지 이유로 실제 그렇게 하는 수감자들이 많았다.

앞에서 말했지만, 카포는 인간의 부정적인 측면을 기준으로 선발한 사람이다. 수감자 중에서 가장 성질이 난폭한 사람에게 이 일이 돌아갔다. 온 좋게 가끔 예외적인 경우도 있었지만, 나치 대원이 행하는 카포 선발과는 별도로 수감자 사이에서도 시시때때로 자체 선발이 행해지고 있었다.

이 수용소에서 저 수용소로 몇 년 동안 끌려다니다 보면 결국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양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만 살아남게 마련이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잔혹한 폭력을 일삼고 도둑질을 하는 건 물론, 심지어 친구까지 팔아넘겼다. 운이 아주 좋아서였든 아니면 기적이었든 살아 돌아온 우리들은 알고 있다. 우리 중에서 정말로 괜찮은 사람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을….

■ 이 책을 쓰게 된 동기

수용소에 있었던 사람들은 말한다.

“우리가 겪었던 일에 대해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그 안에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으니까요. 밖에 있었던 사람들은 우리가 그때 무엇을 느꼈는지 그리고 지금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잘 모릅니다.”

이 주제를 논리정연하게 설명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정신 의학은 과학적인 객관성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 자신이 수감자로 갇혀 있으면서 이 모든 것을 목격한 사람이 과연 객관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을까? 밖에 있었던 사람들이라면 물론 공정한 시각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은 진정한 가치를 지닌 증언을 하기에는 문제 핵심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 책 내용에서 객관적인 이론을 도출해 내는 일은 다른 사람의 몫으로 남겨두기로 한다. 이 이론들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연구가 시작돼 우리에게 ‘철조

- 5 -

망병’증후군으로 널리 알려진 수형생활의 정신 의학에 일정한 공헌을 할 것으로 보인다. 제2차 세계대전 덕분에 우리는 ‘집단 정신 병리학’에 대한 이해의 폭을 훨씬 넓힐 수 있었다. 왜나하면 이 전쟁은 우리에게 신경과민 상태와 강제 수용소를 경험하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 믿음을 상실하면 삶을 향한 의지도 상실한다

이 이야기는 평범한 수감자였던 나 자신의 체험을 기록한 것이다. 자랑할 일은 못 되지만, 나는 수용소에서 마지막 몇 주를 제외하고는 정신 의학자 노릇은 물론이고, 심지어 의사 노릇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밝힌다. 내 동료 중에는 난방이 형편없기는 했지만 그래도 응급 구호실에서 휴짓조각으로 붕대를 만드는 일을 하는 행운을 누린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119, 104번이었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철로에서 땅을 파고 선로를 부설하는 일로 보냈다. 한 번은 도로 밑에 수도관을 묻으려고 다른 사람 도움 없이 혼자서 굴을 파기도 했다.

그 일로 나는 보수를 받았다. 1944년 성탄절 직전에 소위 말하는 ‘상여 배급표’를 받은 것이다. 이 표는 우리가 사실상 노예로 팔려간 건설회사에서 주는 것으로, 수감자 한 사람 일당 50페니히에 해당했다, 그 표를 모아 몇 주 후, 담배 여섯 개비로 바꿀 수 있었다. 그때 나는 무려 담배 열두 개비를 바꿀 수 있는 표를 모았다. 그것은 수프 열두 그릇과 바꿀 수 있는 가치였고 그것이면 한동안 굶주림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도살장 아우슈비츠에 수용되다

수많은 수감자가 직접 목격하고 경험한 것을 기록해 놓은 방대한 자료를 조사해 보면, 수용소 생활에 대한 수감자의 심리 반응이 크게 세 단계로 나누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수용소에 들어온 직후이며, 두 번째 단계는 틀에 박힌 수용소 일과에 적응했을 무렵, 세 번째 단계는 석방돼 자유를 얻은 후이다.

 

첫 번째 단계의 구체적인 예로 내가 수용소에 들어갔을 때의 상황을 이야기 해 보겠다.

- 6 -

1,500명의 사람들이 기차를 타고 며칠 밤낮을 계속해서 달렸다. 열차 한 칸에 80명이 타고 있었다. 사람들은 마지막 남은 소지품을 담은 짐꾸러미 위에 누워 있었다. 열차 안이 너무나 꽉 차서 창문 위쪽으로 겨우 잿빛 새벽의 기운이 들어올 수 있을 정도였다. 잠시 후 기차가 덜컹거리며 옆 선로로 들어갔다. 종착역이 가까워진 것이 분명했다. 바로 그때 불안에 떨고 있던 사람들 틈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우슈비츠야, 저기 팻말이 있어.”

그 순간 모든 사람들의 심장이 멈췄다. 아우슈비츠! 가스실, 화장터, 대학살, 그 모든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이름, 아우슈비츠! 기차는 망설이는 것처럼 천천히 움직였다.

새벽이 되자 거대한 수용소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길게 뻗어 있는 몇겹의 철조망 담장, 감시탑, 탐조등 그리고 희뿌연 새벽빛 속에 미지의 목적지를 향해 뻗어 있는 황량한 길을 따라 질질 끌려가고 있는 초라하고 누추한 사람들의 행렬, 가끔 고함과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다.

마침내 우리는 역 안으로 들어갔다. 최초의 정적이 고함치는 명령으로 깨졌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모든 수용소에서 그 거칠고 날카로운 고함을 끊임없이 듣고 또 들어야 했다.

열차 문이 열리자 몇 사람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모두 줄무늬 수의를 입고 머리를 깎았지만 영양 상태는 좋아보였다. 그들은 유럽 여러 나라의 말을 사용했고 우스갯소리를 던지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 사람들은 아주 신수가 훤하군. 괜찮은 사람들처럼 보여. 심지어는 웃고 있잖아. 누가 알아. 내가 저 사람들처럼 혜택받는 처지에 있게 될지.

■ 집행 유예 망상

정신 의학에는 ‘집행 유예 망상’이라는 것이 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가 처형 직전에 집행 유예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망상을 갖는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실낱같은 희망에 매달려 마지막 순간이 그렇게 나쁘지는 않을 것이

- 7 -

라고 믿었다. 불그레한 뺨과 통통한 얼굴을 한 그들을 보는 순간 우리는 크게 용기를 얻었다. 그 사람들이 수감자 중에서 특별히 뽑힌 사람들이라는 것과 수년 동안 매일같이 이 역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책임지는 접대반이라는 사실을 그때는 전혀 몰랐던 것이다.

그들은 새로 들어온 사람과 그들의 짐을 처리했다. 귀한 물건이나 몰래 가지고 들어온 보석도 압수했다.

1,500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기껏해야 200명 정도밖에 들어갈 수 없는 가축우리 같은 건물에 구겨 넣어졌다. 우리는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렸다. 바닥에 드러눕기는커녕 앉을 자리조차 없었다. 나흘 동안 우리가 받은 양식이라곤 5온스짜리 빵 한 개가 전부였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이 건물을 책임지고 있는 고참 수감자가 백금과 다이아몬드로 된 넥타이핀을 놓고 한 접대 반원과 흥정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이렇게 해서 번 돈의 대부분을 ‘슈냅스’라는 술을 사는 데 썼다.

그런데 수용소 안에 있는 사람 중에는 나치 대원으로부터 거의 무제한으로 술을 공급받는 사람도 있었다. 가스실이나 화장터에 배치된 사람이었다. 그들은 언젠가 자기들이 다른 사람으로 대치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강요된 사형 집행인의 역할이 다른 사람에게 넘겨지고, 대신 자기가 그 희생자가 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짐을 모두 열차 안에 두고 내린 다음 두 줄(한 줄은 남자. 한 줄은 여자)로 서라는 명령을 받았다. 친위대 장교에게 검열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용감하게도 빵 한 봉지를 외투 속에 감추는 용기를 발휘했다.

■ 삶과 죽음의 갈림길

드디어 장교와 마주 섰다. 장교는 군복이 꽤 잘 어울리는 마른 체격의 키 큰 사람이었다. 그는 오른손을 들고 집게손가락으로 아주 느리게 오른쪽 혹은 왼쪽을 가리켰다. 마침내 내 차례가 됐다. 누군가 내게 오른쪽은 작업실 행이고, 왼쪽은 병자나 일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가는 특별 수용소행이라고 알려주었다.

친위대원은 나를 보면서 약간 망설이는 듯 했다. 그는 내 어깨에 손을 올렸

- 8 -

다.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민첩하게 보이려고 애를 썼다. 그러자 그는 내가 오른쪽으로 똑바로 바라볼 수 있을 때까지 내 어깨를 돌렸다. 그래서 나는 오른쪽으로 가게 됐다.

그것이 우리가 경험한 최초의 선별, 삶과 죽음을 가르는 첫 번째 판결이었던것이다. 함께 들어온 사람의 90%는 죽음을 선고받았다. 왼쪽으로 간 사람들은 역에서 곧바로 화장터로 직행했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들은 바로는 화장터 문에 유럽 여러 나라 말로 ‘목욕탕’이라고 쓰여 있다고 했다.

수용소로 이송된 사람 중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던 우리 생존자들은 저녁이 되어서야 진상을 알게 됐다. 나는 그곳에 먼저 와 있던 사람에게 내 동료와 친구 P가 어디로 갔는지 물었다.

그러나 그가 손가락을 들어 몇백 야드 떨어진 곳에 있는 굴뚝을 가리켰다. 굴뚝은 폴란드의 회색빛 하늘 위로 불기둥을 내뿜고 있었다. 불기둥은 곧 불길한 연기구름으로 변했다.

■ 무너진 환상 그리고 충격

첫 번째 선별 과정을 무사히 통과한 우리에게는 정말로 목욕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집행 유예에 대한 우리의 환상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나치 대원들도 모두 호의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곧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우리의 손목 시계를 보고 그것을 달라고 좋은 말로 설득하는 동안에만 친절했던 것이다.

우리는 가축우리 같은 방에서 기다렸다. 그곳은 소독실로 들어가기 전에 대기하는 방이었다. 나치 대원이 오더니 담요를 펼쳤다. 우리는 거기에 가지고 있던 소지품과 손목시계, 보석들을 모두 던졌다. 하지만 결혼반지나 메달 혹은 호신품 같은 것을 그냥 가지고 있어도 되느냐고 묻는 순진한 사람도 있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일을 도와주려고 왔던 고참 수감자가 웃었다.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압수 한다는 사실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한 고참 수감자에게 비밀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그에게 살며시 다가가 외투 안주머니에 있는 원고 뭉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보세요 이건 과학책 원고입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원고를 지켜야 하거든요. 제가 심혈을 기울여 연구한 것이 모두 여기에 들어 있습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 9 -

그래. 이해하는 듯했다. 희미한 미소가 그의 얼굴에 번져나갔다. 처음에는 동정어린 빛을 띠더니 점점 장난스러운 웃음으로 바뀌었다. 이 웃음이 경멸과 비웃음으로 바뀌는 듯하더니 입에서 다음과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수용소 생활을 체험했던 사람 사이에서 아직도 통용되고 있는 말이다. ‘빌어먹을 놈!’

우리는 주먹질을 당하며 목욕탕 대기실로 쫓겨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잇던 나치 대원 앞으로 모였다. 곧이어 그가 입을 열었다.

“앞으로 2분간 여유를 주겠다. 내 시계로 잴 것이다. 2분 동안 입고 있는 옷을 모조리 벗어서 가지고 있던 물건과 함께 자기 자리에 내려놓도록. 신발과 머리띠, 멜빵과 탈장대를 제외한 모든 것을 벗는다. 자 시작.”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사람들이 옷을 벗었다.

이어서 우리는 다른 방으로 옮겨졌다. 거기서 머리털뿐만 아니라 몸에 난 털이란 털은 모조리 다 깎아야 했다. 그런 다음 샤워를 하려고 다시 줄을 섰다. 서로를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우리 중에는 샤워기에서 진짜로 물이 나오는 것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쉬는 사람도 있었다.

나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안경과 벨트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벨트는 나중에 빵 한 조각과 바꾸어 먹고 말았다.

신발 문제도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았다. 물론 자기 신발을 가져도 좋다는 허락을 받기는 했다. 하지만 신기에 편하고 좋은 신발은 으레 빼앗겼으며, 대신 발에도 맞지 않는 신발을 신어야 했다.

이런 일을 당하면서 그때까지 갖고 있던 환상이 하나둘씩 차례로 무너져 갔다. 그 다음에는-이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인데-섬뜩한 농담기가 우리를 찾아왔다. 우리는 우스꽝스럽게 벌거벗겨진 몸뚱이 외에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지기 시작했을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서로를 재미있게 해주려고 그야말로 안간힘을 썼다. 어쨌든 샤워기에서 정말로 물이 시원하게 쏟아지고 있지 않은가!

■ 냉담한 궁금증

절체절명의 순간 가장 먼저 궁금증이 생겼다. 이 위기에서 내가 살아날 수

- 10 -

있을까? 아니면 두개골이 박살 날까? 부상을 당한다면 어떤 부상일까? 이런 것이었다.

 

■ 인간은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다

수용소에 들어온 사람들은 이것 말고도 비슷한 놀라운 일들을 많이 경험했다. 나 같은 의학도가 수용소에서 제일 많이 배운 것은 우리가 공부했던 ‘교과서가 모두 거짓’이라는 사실이었다. 교과서에는 사람이 일정 시간 이상 잠을 자지 않으면 죽는다고 적혀있다. 하지만 완전히 틀린 말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내가 세상에서 정말로 할 수 없는 일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없으면 잠을 잘 수 없고, 이것 혹은 저것이 없으면 살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생각했다.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첫날 밤에 우리는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침상에서 잠을 잤다. 각 층(길이 6.5피트에 폭이 8피트인 곳이다 : 가로 2m 세로 2m 44cm)마다 9명이 함께 잤다. 담요는 단 두 장.

당시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견뎠는지 보여주는 놀라운 사례 몇 가지를 더 들어 보자. 수용소에서 우리는 이를 닦을 수 없었다. 그리고 모두 심각한 비타민 결핍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잇몸은 그 어느 때보다도 건강했다. 셔츠 한 벌로 반년 동안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될 때까지 입었다. 수도관이 얼어붙어 세수는 고사하고 손 하나 제대로 씻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흙일을 하다가 어쩌다 찰과상을 입어도-동상에 걸린 경우만 제외하면-상처가 곪는 법이 없었다.

밖에서 생활할 때 잠을 제대로 못 잤던 사람이 있었다. 옆방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들어도 잠을 깰 정도로 예민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수용소에서는 그런 사람이 동료의 몸 위에 엎어져 불과 몇 인치 떨어진 곳에서 나는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아주 깊이 잠을 잤다.

만약 인간을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는 존재로 묘사한 도스토옙스키의 말이 사실이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물론입니다. 인간은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방법에 대해서는 묻지 말아 주십시오.”

- 11 -

■ 절망이 오히려 자살을 보류하게 한다

수용소에 있던 사람 중에서 잠깐이라도 자살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상황,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 다른 사람의 죽음을 보고 나에게도 죽음이 임박했다고 생각하면서 겪는 고통이 자살을 생각하게 했다.

나는 개인적인 신념을 가지고 수용소에 도착한 날 밤 절대 ‘철조망에 몸을 던지는’ 짓은 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철조망에 몸을 던진다는 말은 고압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에 몸을 댄다는 뜻으로, 당시 수용소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자살 방법을 이야기하는 관용어구였다.

아우슈비츠 수감자들은 첫 번째 단계에서 충격을 받은 나머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면 가스실조차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된다. 오히려 가스실이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살을 보류하게 했다.

■ 죽음에의 선발을 두려워하지 말라

자기 ‘구역’을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엄격한 규칙이 있음에도 나보다 몇 주 먼저 이곳에 온 동료 한 사람이 몰래 내 막사로 숨어들어왔다. 그는 우리를 안심시키려고 몇 가지 말을 해 주었다. 몸이 너무 말라 있어서 처음에는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익살스러우면서도 저돌적인 말투로 정보를 알려주었다,.

“겁내지 말게! 선별을 두려워하지도 말게! 의사 M(친위대 주치의)은 의사에게는 약하다네!”

“그렇지만 단 한 가지만은 자네들에게 당부하겠네.” 그는 말을 이었다.

“가능하면 매일같이 면도를 하게. 유리조각으로 면도해야 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것 때문에 마지막 남은 빵을 포기해야 하더라도 말일세. 그러면 더 젊어 보일거야. 뺨을 문지르는 것도 혈색을 좋아 보이게 하는 한 가지 방법이지. 자네들이 살아남기를 바란다면 단 한 가지 방법밖에는 없어. 일할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야. 예를 들어 만약 자네들 발뒤꿈치에 물집이 생겼다고 해

- 12 -

보자. 나치 대원이 그것을 알게 되는 날이면 당장 따로 분류하고, 그 다음 날 틀림없이 가스실로 보낼 거야. 자네들은 ‘회교도’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나? 불쌍하고 비실비실하고, 병들고 초라해 보이는 사람들 그래서 고된 노동을 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을 ‘회교도’라고 한다네.

조만간, 아니 대개 아주 빠른 시간 안에 회교도들은 가스실로 보내지지. 그러니까 늘 면도를 하고 똑바로 서서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게.

■ 혐오감

수용자 대부분에게는 줄무늬 수의가 입혀졌다. 허수아비나 어울릴 듯한 넝마 같은 옷이다. 수용소 막사와 막사 사이에는 오물로 뒤덮여 있는데 오물을 치우려고 하면 할수록 더 많은 오물을 묻혀야 했다. 수용소에 처음 들어온 사람들은 화장실을 청소하고 시궁창의 오물을 치우는 일에 배정됐다. 늘 있는 일이지만 땅이 울퉁불퉁 하기 때문에 오물을 버리러 가는 동안 똥물이 얼굴에 튀기도 했다. 조금이라도 싫은 기색을 보인다거나 얼굴에 묻은 똥을 닦아 내려고 하면 카포가 가차 없이 주먹질을 해 댔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사람들 사이에서는 어떤 일에 대해 정상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는 현상이 가속화됐다.

■ 무감각

처음에 사람들은 다른 그룹 사람들이 줄지어 행진하며 단체 기합을 받는 것을 보면 고개를 돌렸다. 진흙탕 속을 몇 시간씩 헤매면서 걸핏하면 주먹질 당하는 광경을 차마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며칠 혹은 몇 주가 지나면 사정이 달라진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 한 사람이 같은 반 동료들과 함께 행진을 나가려고 문 앞에 서 있었다. 바로 그때 비명과 함께 동료 한 사람이 쓰러졌다가 다시 일으켜 세워지고 또 쓰러지기를 반복하는 것을 보았다. 도대체 왜그러는 거지? 알고 보니 그 사람에게 열이 있었는데, 그 사실을 병실 담당자에게 말한 시간이 적절치 못했던 것이다.

또 다른 이야기, 12살짜리 소년이 동상에 걸려 의사가 시커멓게 썩은 살을 하나씩 끄집어냈다. 하지만 그 광경을 바라보는 우리는 정말로 혐오감과 공포,

- 13 -

동정심 같은 감정을 더는 가질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괴롭힘을 당하거나 죽어 가거나 또 이미 죽은 것을 너무나 일상적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수용소에서 생활한 지 몇 주가 지나면 그런 것들 때문에 더 이상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지 않게 된다.

■ 주검과 수프

나는 발진티푸스 환자를 돌보려고 한 막사에서 얼마 동안 보낸 적이 있었다. 환자들은 고열에 시달렸으며 종종 혼수상태에 빠졌다. 그들 중 상당수는 산송장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다가 한 사람이 숨을 거두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 감정 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죽음은 그 후로도 계속 이어졌는데 그때마다 매번 그랬다.

한 사람이 숨을 거두자 나머지 사람들이 아직 체온이 남아 있는 시신 곁으로 다가갔다.

1. 한 사람이 죽은 사람이 먹다 남긴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감자를 낚아 챘다.

2. 다음 사람은 시신이 신고 있던 신발을 바꾸어 갔다.

3. 세 번째 사람은 죽은 사람의 외투를 가지고 갔다.

그리곤 시체를 치우는 사람이 울퉁불퉁한 바닥 위로 시체를 질질 끌고 문 쪽으로 갔다.

 

당시 나는 막사 맞은편에 있었다. 바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창문 옆에서 얼어붙은 손으로 뜨거운 수프가 담긴 그릇을 들고 맛있게 먹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창밖을 봤다. 방금 전 밖으로 옮겨진 시체가 동태 같은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시간 전에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다시 수프를 먹었다.

■ 죽음보다 더한 모멸감

수감자들은 마침내 매일같이 반복되는 구타에 대해서도 무감각해진다. 이런

무감각을 수단으로 삼아 사람들은 곧 주위에 꼭 필요한 보호막을 쌓기에 이

른다. 구타는 아주 사소한 이유로 일어났으며, 어떤 때는 전혀 이유가 없는 경

- 14 -

우도 있었다. 한 가지 예를 들겠다. 빵이 작업장까지 배달되면 배급받는 데 줄

을 서야 했다. 그런데 한 번은 내 뒤에 섰던 사람이 줄에서 약간 밖으로 삐져

나갔던 모양이다. 그런데 줄이 삐뚫어졌다는 사실이 감시병의 비위를 상하게

했다. 나는 내 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랐는데도 갑자기 무언가가 내 머

리를 두 번이나 강타하는 것이 아닌가? 그제야 나는 몽둥이를 휘두른 감시병이 내 옆에 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때 정작 힘든 것은 육체의 고통이 아니다. 부당하고 비합리적인 일을 당했다는 생각에서 오는 정신적 고통이다.

정말로 이상한 것은 흔적도 남지 않은 단 한 방의 구타가 어떤 상황에서는 그보다 심한 흔적을 남긴 구타보다 더 상처를 준다는 사실이다.

구타당할 때 가장 괴로운 것은 그들이 주는 모멸감이었다. 한번은 얼어붙은 철로길 위로 길고 무거운 도리를 옮겨야 했다.

같이 일하는 동료가 유난히 무거운 도리를 들고 철로 위에서 절뚝거렸다. 자기가 넘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까지 함께 넘어뜨릴 것 같았다. 마침 그때 나는 도리를 옮기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곧바로 그를 도와주려고 달려갔다. 그런데 바로 그때 등으로 한 방이 날아왔다. 감시병이 나에게 심하게 욕하면서 자리로 돌아갈 것을 명령했다. 나를 때란 감시병은 불과 몇 분 전에 우리를 향해 멸시하는 투로 너희 같은 ‘돼지들’에게는 동지애가 전혀 없다고 욕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 한 카포에게서 받았던 작은 혜택들

나에게 다행한 일 중 하나는 우리 작업반 카포가 내 신세를 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막사에서 작업장까지 먼 길을 행진하는 동안 나는 그의 연애 이야기와 결혼생활의 불화에 얽힌 이야기를 조용히 들어주었다. 나는 그의 성격을 진단하고 정신 요법을 진단해 주었다. 그 일이 있은 후 그는 나에게 고마워했으며, 나는 그로부터 작은 혜택을 받을 수 있었다.

280명 정도 되는 우리 작업반이 줄을 설 때 그는 앞에서 다섯 번째 줄 안에 있는 자기 자리 옆에 나를 세워 주었다. 그런 호의는 대단한 것이었다. 일을 나가려면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이른 아침에 줄을 서야 했다. 우리는 늦게 가서 뒷줄에 서는 것을 두려워했다. 힘들고 궂은 일을 하게 될 상황이 생기면

- 15 -

고참 카포가 와서 대개는 뒷줄 사람들을 데려갔기 때문이다. 이렇게 뽑힌 사람들은 동료들과 떨어져 다른 작업장으로 가야 했으며, 낯선 감시병들의 감시를 받으며 힘든 일을 해야만 했다.

그밖에 또 다른 혜택도 있었다. 수용소 안에 있는 수감자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부종 때문에 고생하고 있었다. 다리가 심하게 부었으며, 그 부분의 피부가 팽팽하게 당겨져서 무릎을 구부리지 못할 정도였다. 신발 끈을 풀어야만 부어오른 발이 들어갈 수 있었다. 양발이 없기도 했지만 만약 있다고 해도 양말을 신은 발은 들어갈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맨살이 드러난 발은 늘 젖어 있었고, 신발 안은 항상 눈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당연히 동상에 걸려 터질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계속해서 미끄러졌고, 따라가던 사람들이 그 위로 엎어졌다. 감시병 중의 한 명이 즉각적으로 개머리판을 휘둘렀다. 앞줄에 설수록 도중에 행진을 멈추어야 하는 일이 적게 일어났다.

내가 그를 도와주고 받는 혜택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점심시간에 우리 작업반에서 수프를 나누어 줄 때면 그는 국자를 수프 통 밑바닥까지 집어넣어 콩알 몇 개를 내 수프에 더 넣어주곤 했다.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기는 가운데 적어도 한 번은 그의 도움을 받았다. 감독과 싸웠던 바로 그다음 날 그는 나를 몰래 다른 작업반으로 옮겨 주었다. 감독 중에도 우리를 측은하게 여기고, 우리 상황을 개선해 주려고 최대한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 수감자들이 가장 흔하게 꾸는 꿈

두 번째 단계의 주된 징후인 무감각은 자기를 방어하기 위한 도구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이 불확실하면 오로지 한 가지 과제에 모든 노력과 감정이 모아진다. 즉 내 생명과 친구의 생명을 보존하겠다는 과제이다.

밖에서 정신 분석을 배운 적이 있는 동료수감자들은 수용소에 있는 사람들이 보이는 ‘퇴행’ 현상에 대해 자주 이야기한다. 이것은 정신세계가 원시적인 수준으로 퇴보하는 것을 말한다.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이 가장 자주 꾸는 꿈이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는가? 빵

- 16 -

과 케이크, 담배 그리고 따뜻한 물로 하는 목욕이었다. 하지만 꿈을 꾼 사람들은 꿈에서 깬 다음 수용소 생활이라는 현실로 돌아오고, 꿈속의 환상과 현실이엄청나게 다르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 먹는 것에 대한 원초적 욕구

심한 영양실조로 고생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의 정신이 온통 먹고 싶다는 본능에 집중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수용소 생활이 후반부에 접어들었을 때 우리는 하루에 한 번 아주 묽은 수프와 전처럼 적은 양의 빵을 배급받았다. 그러다가 가끔 ‘특별배급’이라는 것을 받을 때도 있었다. 마가린 0.75온스, 보잘것없는 크기의 소시지, 작은 치즈 조각, 가공 벌꿀 조금, 묽은 잼 한 숟갈 등 그때마다 달랐다. 이런 식단은 열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었다. 허름한 옷을 입고 추위에 떨면서 맨손으로 중노동을 하는 우리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말이다. ‘특별 간호’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작업장으로 가지 않고 임시 막사에 남아 있는 환자에게 주는 음식은 더 형편없었다.

마지막 남아 있던 피하 지방층이 사라지고, 몸이 해골에 가죽과 넝마를 씌워놓은 것같이 됐을 때 우리는 자기 몸이 자기 자신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장 기관이 자체의 단백질을 소화시켰고 몸에서 근육이 사라졌다. 그러자 저항력이 없어졌다. 같은 막사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죽어 나갔다. 우리는 모두 다음에는 누가 죽을 것인지. 자기 자신은 언제 죽을지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저 사람 오래 못 갈 것 같아.”

“다음 차례는 저 사람이군.” 우리는 이렇게 수군거렸다.

매일 저녁 몸에 있는 이를 잡으면서 우리는 자기 알몸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여기 있는 이 몸뚱이, 이제 정말로 송장이 됐구나. 나는 무엇일까?

이와 비슷한 경험을 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굶주림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경험했던 영혼을 파괴시키는 정신적 갈등과 의지력의 충돌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를 것이다.

- 17 –

수용소 생활이 후반부에 이르렀을 때에는 하루에 한 번 밖에 빵이 배급되지 않았다. 우리는 그 빵을 어떻게 먹을까 하는 문제로 끝도 없이 논쟁을 벌였다. 생각은 두 편을 나뉘었다. 그중 한 편은 그 자리에서 빵을 다 먹어치우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비록 잠깐 동안이기는 하지만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극심한 굶주림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도둑맞거나 잃어버릴 염려가 없다는 장점이 있었다. 반면에 다른 한 편은 배급받은 빵을 나누어서 먹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편 중에서 나는 결국 후자에 들기로 했다.

수용소 생활의 24시간 중 가장 끔찍한 시간은 바로 기상 시간이었다. 아직 밖이 깜깜할 때 날카롭게 울리는 세 번의 호루라기 소리가 잠이 부족한 우리 몸을 달콤한 꿈에서 깨우곤 했다. 그런 다음 우리는 부종으로 부어오른 아픈 발을 젖은 구두 안에 쑤셔 넣으려고 한바탕 씨름했다.

영양실조가 수감자들의 정신을 먹는 것에 집중시키는 현상만 초래했던 것은 아니다. 수감자들에게 성욕이 없었던 원인도 아마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초기의 충격이 성욕을 감퇴시켰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모든 남자 수용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던 이 형상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영양실조밖에는 없다. 남자들만 있는 다른 집단 예를 들어 군대와는 대조적으로 수용소에는 성도착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 꿈에서도 섹스를 하는 것 같지 않았다.

■ 메마른 정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원시적인 생활을 하면서 목숨을 부지하는 일에 정신을 집중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그 목적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관심한 태도를 취했다. 수감자들의 정서가 완전히 메마르게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아우슈비츠에서 다하우에 있는 수용소로 이송될 때에도 나는 이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우리를–약 2천 명 정도-태운 기차는 빈을 통과하게 되어 있었다. 그 기차는 내가 태어난 거리와 내가 오랜 세월 살았던, 실제로 수용소에 끌려가기 전까지 살았던 동네를 지날 예정이었다.

내가 있던 열차 칸에는 50명 정도 타고 있었으며 벽에는 밖을 내다볼 수 있는 구멍이 두 개 뚫려 있었다.

- 18 -

나는 발뒤꿈치를 들고 다른 사람의 머리 위로 창살을 통해 아주 짧은 시간 내가 태어난 고장을 볼 수 있었다. 그때 우리는 모두 삶보다는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몇 시간 지체 후 다시 기차가 출발했다. 그런데 거기에 내가 자라고 살았던 바로 그 동네가 있었다. 밖을 내다볼 수 있는 구멍 주위에는 등 뒤에 수용소 생활의 햇수를 알리는 번호를 붙인 젊은이들이 서 있었다. 이런 여행이 꽤 신이 났는지 열심하 구멍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때 나는 아주 잠깐만이라도 좋으니 앞에 세워 달라고 그들에게 사정하고 애원했다. 바로 그 순간에 창문을 통해 밖을 보는 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들에게 설명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들은 무례한 태도로 비웃으며 내 간청을 묵살했다.

“여기서 살았다고? 그렇다면 벌써 실컷 봤겠네!”

■ 수용소 안에서의 정치와 종교

수용소에는 대체로 ‘문화적 동면 현상’이라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여기에 두 가지 예외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정치와 종교였다. 정치에 관한 이야기는 어디서나 시도 때도 없이 들을 수 있었다. 그 이야기는 대개 소문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이런 소문들이 어디선가 시작돼 끝도 없이 퍼져나갔다. 전쟁 상황에 관한 소문은 대개 모순된 것들이었다. 그러나 아주 빠른 속도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지면서 수감자들의 마음을 신경과민 상태로 만들었다.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는 낙관적인 소문이 사람들의 마음에 실망을 안겨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희망을 포기한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보다 더 분통터지는 사람들은 도저히 못 말리는 낙관주의지들이었다.

 

한편 일단 종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아주 진심으로 그 속에 빠져들었다. 종교와 관련된 의식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은 막사 귀퉁이나 자물쇠가 채워진 컴컴한 가축 운반용 트럭 안에서 행해지는 임시 기도나 예배였다. 넝마 같은 옷을 입은 채 멀리 떨진 작업장에서 피곤하고 굶주린 얼어붙은 몸을 이끌고 막사로 돌아가는 바로 그 트럭 안에서 즉석 예배와 기도회가 이루어지곤 했다.

1945년 겨울과 봄에 발진티푸스가 퍼져 거의 모든 수감자에게 전염됐다. 오랜 시간 중노동에 시달려 왔던 병약한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이 죽었다.

- 19 -

이 병의 증상 중에서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음식에 참을 수 없는 거부감과 무서운 정신착란 증세를 보인다는 것이었다.

■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 안에서, 사랑을 통해 실현된다

수용소에서는 신체적으로나 지적으로 원시적인 생활을 할 수밖에 없지만 영적인 생활을 더욱 심오하게 하는 것이 가능했다. 밖에 있을 때 지적인 활동을 했던 감수성 예민한 사람들은 육체적으로는 더 많은 고통을 겪었지만 정신적인 측면에서 내면의 자아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비교적 적게 손상당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혹한 현실로부터 빠져나와 내적인 풍요로움과 영적인 자유가 넘치는 세계로 도피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별로 건강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체력이 강한 사람보다 수용소에서 더 잘 견딘다는 지극히 역설적인 현상도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생애 처음으로 나는 그렇게 많은 시인들이 시를 통해 노래하고, 그렇게 많은 사상가들이 최고의 지혜라고 외쳤던 하나의 진리를 깨달았다. 그 진리란 바로 사랑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이고 가장 숭고한 목표라는 것이었다. 나는 인간의 시와 사상과 믿음이 설파하는 숭고한 비밀의 의미를 간파했다.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을 통해서,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

그때 나는 이 세상에 남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그것이 아주 짧은 시간이라고 해도) 여전히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극단적으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주어진 고통을 올바르고 명예롭게 견디는 것만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일 때, 사람은 그가 간직하고 있던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으로 충족감을 느낄 수 있다. 내 생애 처음으로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의 의미를 이해하게 됐다.

‘천사들은 한없는 영광 속에서 영원한 묵상에 잠겨 있나니.’

■ 나를 그대 가슴에 새겨주오

앞에 있던 남자가 비틀거리자 뒤에 오던 사람들이 그 위로 넘어졌다. 감시병

- 20 -

이 달려와 채찍을 휘둘렀다. 그래서 내 생각이 잠시 중단됐다. 하지만 그후 곧 내 영혼은 수감자 신세에서 또 다른 세계로 가는 길을 찾아 되돌아갔다. 나는 내 사랑하는 사람과 다시 대화를 시작했다. 내가 물으면 그녀가 대답했다. 다음에는 반대로 그녀가 묻고 내가 대답했다.

“정지.”

드디어 작업장에 도착했다. 모두 더 좋은 연장을 차지하려고 캄캄한 광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리고 곡괭이와 삽을 들고 나왔다.

“이 새끼들, 빨리빨리 움직이지 못해?”

우리는 전날 일했던 배수구 위치를 찾아서 갔다. 얼어붙은 땅이 곡괭이 끝에서 깨지는 소리를 냈다. 그러자 불꽃이 일어났다. 모두 말이 없었고, 머리는 마비돼 있었다.

그래도 내 마음은 여전히 아내의 영상에 매달려 있었다.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 스쳤다. 나는 아내가 아직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몰랐다. 그러나 한 가지만 알고 있었다. 그것은 그때야 깨달은 것인데,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육신을 초월해서 더 먼 곳까지 간다는 것이었다.

“나를 그대 가슴에 새겨주오. 사랑은 죽음만큼이나 강한 것이라오.”

■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니

이렇게 내면세계를 극대화시킴으로써 수감자들은 멀리 과거로 도피해 자기 존재의 공허함과 고독감 그리고 영적인 빈곤으로부터 피난처를 찾을 수 있었다.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치며 과거 일들을 회상했다.

나는 상상 속에서 버스를 탔고, 열쇠로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문을 열었다. 걸려오는 전화를 받고 전등을 켰다. 우리 생각은 대개 이런 자질구레한 일들에 집중돼 있었고 이런 기억들이 때로 우리 마음을 감동시켜 눈물을 흘리게 했다.

그리고 그 영향으로 때로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끔찍한 상황을 완전히 잊기도 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아우슈비츠에서 바바리아 수용소로 이송되는 도중 호송 열차의 작은 창살 너머 석양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잘츠부르크 산 정상을 바라보는 우리 얼굴을 보았더라면, 그것이 절대로 삶과 자유에 대한 모든 희망을 포기한 사람의 얼굴이라고 믿지 않았을 것이다.

- 21 -

어느 날 저녁이었다. 죽도록 피곤한 몸으로 막사 바닥에 수프 그릇을 들고 있는 우리에게 동료 한 사람이 달려왔다. 그러더니 점호장으로 가서 해가 지는 멋진 풍경을 보라는 것이었다. 밖에 나가서 우리는 서쪽에 빛나고 있는, 짙은 청색에서 핏빛으로 끊임없이 색과 모양이 변하는 구름으로 살아 숨 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진흙 바닥에 패인 웅덩이에 비친 하늘의 빛나는 풍경이 잿빛으로 지어진 우리의 초라한 임시 막사와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감동으로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니!”

그날도 우리는 참호 속에서 일하고 있었다. 잿빛 새벽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우리 위에 있는 하늘도 잿빛이었고 창백한 새벽빛에 반사되는 눈도 잿빛이었다. 바로 그 순간 수평선 저 멀리 그림처럼 서 있던 농가에 불이 들어왔다. 바바리아의 동트는 새벽, 초라한 잿빛을 뚫고 불이 켜진 것이다.

“어둠 속에서도 빛은 있나니!”

나는 또다시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자 점점 더 그녀가 곁에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그녀는 정말로 내 곁에 있었다. 그녀를 만질 수 있을 것 같았고,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느낌이 너무나 생생했다. 그녀가 정말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새 한 마리가 날아와 내가 파놓은 흙더미 위에 앉았다. 그리고 천천히 나를 바라보았다.

■ 강제 수용소에서의 유머

강제 수용소에 예술 비슷한 것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워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술뿐만 아니라 유머도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더욱더 놀랄 것이다. 비록 그 흔적이 아주 희미하고 몇 초 혹은 몇 분 동안만 지속되지만, 유머는 자기 보존을 위한 투쟁에 필요한 다른 무기였다.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유머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그것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능력과 초연함을 가져다준다.

유머 감각을 키우고 사물을 유머러스하게 보려는 시도는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기술을 배우면서 터득한 하나의 요령이다. 고통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 22 -

수용소에서도 이런 삶의 기술을 실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한번 유추해보자. 인간의 고통은 기체의 이동과 비슷한 면이 있다. 일정한 양의 기체를 빈 방에 들여보내면 그 방이 아무리 큰 방이라도 기체가 고르게 방 전체를 완전히 채울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고통도 그 고통이 크든 작든 상관없이 인간의 영혼과 의식을 완전하게 채운다. 따라서 고통의 ‘크기’는 완전히 상대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사소한 것에서 느끼는 상대적인 행복

아우슈비츠에서 다하우에 있는 한 수용소로 갔을 때다. 2박 3일의 여행을 끝내고 비교적 작은 규모(수용 인원이 2,500명 밖에 안 됐다)의 이 수용소에 도착했을 때, 나이 많은 사람으로부터 들은 첫 번째 소식은 그곳에는 살인용 오븐도 화장터도 가스실도 없다는 것이었다! 그 말은 곧 몰골이 ‘회교도’로 변한 사람도 곧바로 가스실로 갈 염려가 없다는 것을 뜻했다. 아우슈비츠로 돌려보내기 위한 ‘환자 수송차’가 올 때까지는 적어도 안전하다는 것이다. 이 기쁜 소식이 우리 기분을 들뜨게 했다. 아우슈비츠에 있던 우라 고참 관리인이 소망하던 것이 드디어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는 아우슈비츠와는 달리 ‘굴뚝’이 없는 그 수용소로 가능한 한 빨리 뛰어 들어갔다. 그 후 몇 시간을 아주 힘들게 보내야 했지만, 그 와중에도 우리는 웃으면서 농담을 주고받았다.

이 수용소에는 굴뚝이 없고, 아우슈비츠는 여기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

한번은 한 무리의 죄수들이 우리 앞으로 지나는 것을 보았다. 그때 그들과 비교해서 우리의 고통이 상대적으로 얼마나 커 보였는지 우리는 그 죄수들이 누리는 상대적으로 잘 규정된, 안전하고 행복한 생활을 부러워했다. 저 사람들은 틀림없이 정기적으로 목욕을 할 거라고 생각하니 내 신세가 처량해졌다. 분명 칫솔과 옷솔을 갖고 있을 거야. 매트리스도 각자 하나씩 있겠지. 그리고 한 달에 한 번씩은 편지를 받을 거야. 가족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아니 적어도 그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알 수 있는 그런 편지 말이야. 우리는 아주 오래전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런가 하면 또 우리는 공장에 들어가 안전한 실내에서 일하는 사람을 얼마나 부러워했는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그런 한 조각의 행운을 얻는 것이 당시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이었다.

- 23 -

우리는 아주 작은 은총에도 고마워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 이를 잡을 시간을 준다는 것도 반가운 일이었다. 물론 이를 잡는 일 자체는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이를 잡으려면 천정에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린 추운 막사에서 옷을 벗고 서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를 잡는 도중 공습경보가 울리지 않아 전등불이 나가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만약 이 시간에 이를 제대로 잡지 못하면 하룻밤의 절반을 꼬박 깨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수용소 생활에서 느끼는 작은 행복은 소극적인 행복(쇼펜하우어가 ‘시련으로 부터의 자유’라고 했던)이었고, 다른 것과의 비교를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상대적인 행복이었다. 진정한 의미의 행복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거의 없었다.

■ 상대적 행복을 느꼈던 환자 생활

새벽 5시, 밖은 아직 어둠에 묻혀 있었다. 나는 70명의 사람들이 ‘치료받고 있는’ 흙으로 만든 막사의 딱딱한 판자 위에 누워 있었다.

우리는 병에 걸렸기 때문에 일하러 가지 않아도 됐다. 행진에 나갈 필요도 없었다. 하루 종일 막사 한 귀퉁이에 누운 채로 졸면서 그날 분의 빵(물론 병자에게는 다른 사람보다 적은 양의 빵이 배급된다.)과 수프가 배급되기를 기다렸다. 그때 우리는 얼마나 이 상황을 흡족하게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 모든 불편함에도 우리는 행복했다. 우리는 불필요한 체온 저하를 막기 위해 몸을 꼭 밀착하고, 손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은 나른한 상태에서 이제 막 돌아온 야간 당번들이 점호를 받고 있는 운동장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호루라기와 구령 소리를 들었다.

병동에 누워 있은 지 사흘째 되는 날, 나는 야근 당번에 편성됐다. 그런데 바로 그때 주치의가 달려와 발진티푸스 환자를 수용하고 있는 다른 수용소에서 의료 자원봉사자로 일하지 않겠느냐고 물어왔다. 친구의 간곡한 만류에도 나는 가기로 결심했다. 나는 내가 작업반에 들어갈 경우, 짧은 시간 내에 죽게 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만약 내가 죽어야 한다면 나는 내 죽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의사로서 동료들을 돕다가 죽는 것이 그전처럼 비생산적인 일을 하는 노동자로 무기력하게 살다가 죽는 것보다 확실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 24 -

■ 생존을 위해 군중 속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가치를 위협하고, 또 그것을 의혹 속으로 내던져버린 정신적 혼란에 시달리고 있었다. 인간의 생명과 인간의 존엄성이 지닌 가치가 더 이상 인정을 받지 못하는 세계, 인간의 의지를 박탈하고 그를 단지 처형 대상으로 전락시킨 세계, 이런 세계에서 개인의 자아는 끝내 그 가치를 상실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매우 위험한 무리들이 사방에서 이들을 감시하고 있다. 이 무리들은 고문을 하는 것과 남을 괴롭히는 방법에 아주 능통한 자들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고함치고 발길질과 주먹질을 해대며 무리를 뒤에서 앞으로 몰아간다. 그리고 양떼인우리들은 오로지 두 가지 생각만 한다. 어떻게 하면 저 무서운 개들을 피할까, 어떻게 하면 음식을 먹을 수 있을까.

따라서 자신의 목숨을 구하려고 우리는 글자 그대로 군중 속에 자신을 파묻으려고 애를 썼다. 이런 일은 대오를 형성할 때 거의 무의식적으로 일어났다. 하지만 때로는 이런 일이 수용소 안에서 가장 절박한 자기 보존의 법칙에 따라 의식적으로 행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법칙은 될 수 있는 대로 눈에 띄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나치 대원들의 눈에 뜨이지 않으려고 항상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 나 혼자만의 공간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혼자 있게 되기를, 혼자서 사색에 잠길 수 있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들은 자기만의 개인적인 공간, 혼자 있는 고독을 열망했다. 소위 말하는 ‘요양소’로 옮긴 후 나는 한 번에 5분 정도 혼자 고독을 즐기는 흔치 않은 행운을 누리게 됐다.

내가 일하는 막사에는 약 50명의 정신 착란증 환자가 수용돼 있었다. 막사 뒤 수용소를 두 겹으로 둘러친 철조망 한 귀퉁이에 아주 조용한 곳이 있었다. 이곳에는 시신 여섯 구(수용소에는 하루 평균 이 정도의 사람들이 죽는다)를 보관하려고 기둥 몇 개와 나뭇가지를 엮어서 세운 임시 천막이 있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배수관으로 통하는 구멍도 있었다. 나는 일이 없을 때마다 아 구멍의 나무 뚜껑 위에 쭈그리고 앉아 있곤 했다. 그냥 앉아서 꽃이 만발한 초록빛 산

- 25 -

등성이를 바라보거나 철조망의 마름모꼴 그물 눈 안에 들어가 있는 먼 바바리아 푸른 언덕을 바라보았다. 나는 간절하게 꿈을 꾸었다. 그러며ᅟᅣᆫ 내 마음은 북쪽에서 북서쪽, 나의 집이 있는 방향으로 날아갔다. 그러니 보이는 것은 구름뿐이었다.

옆에 있는 시체, 이가 득실거리는 그 시체도 나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감시병이 지나가는 발소리만이 나를 꿈에서 깨울 수 있었다.

■ 번호로만 취급되는 사람들

수용소에서 사람 목숨이 얼마나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지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다 죽어가는 병자의 몸은 바퀴 두 개 달린 수레에 던져진다. 동료 수감자가 그 수레를 끌고 대개는 눈보라가 몰아치는 길을 몇 마일이나 걸어서 다른 수용소로 옮긴다. 만약 병자 중 한 명이 수레가 떠나기 전 죽는다 해도 마찬가지로 수레에 던져진다. 리스트에 올린 번호와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번호 뿐이다. 오로지 죄수 번호를 가지고 있을 때에만 그 사람이 의미 있는 것이다.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여전히 일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은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는데 온갖 수단을 다 사용해야만 했다. 그들은 절대로 감상에 빠지는 일이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이 전적으로 감시병들의 기분 –운명의 노리개라고나 할까? - 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것이 그들 자신을 환경이 강요하는 것보다 훨씬 더 비인간적으로 만들었다.

 

2023. 11. 4. 다음에 2편이 이어집니다.

 

 

 

- 26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