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높이뛰기
언어의 높이뛰기
- 신지영 교수의 언어 감수성 향상 프로젝트 -
■ 신지영 지음
0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0 런던대학교 박사과정
0 언어 학자로서 시민들의 소통능력 향상을 위해 노력
- 고려대학교에서 ‘고다운 스피치 아카데미’ 진행
- 중학생 꿈나무 말하기 축제 진행(문체부)
- 다다다 발표대회 기획 실천(서울시)
0 이 책에는 지난 20년 동안 언어 감성을 높이고자 발견하고 성찰한
내용을 정리함
◎ 프롤로그 : 당신의 언어 감수성을 위하여
■ 다소 엉뚱한 출발
필자가 처음 강단에 선 것은 서른두 살, 막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때였다. 그리고 5년 동안의 구직 기간을 거쳐 서른일곱 살 때 처음 대학의 전임교수가 되었다. 사람들은 필자를 늘 나이보다 어리게 보았다. 그러다 보니 교수가 된 초창기 한동안은 자주 학생으로 오해를 받곤 했다.
첫 직장인 나사렛대학에서는 채플에 참석하기 위해 동료 교수들과 함께 채플실에 들어가다가 학생들에게만 주는 채플 카드를 혼자 받아서 동료 교수들의 빈축을 샀다. 그리고 교수가 된 초창기 한동안은 연구실 문을 열고 두리번거리다가 필자에게 교수님은 어디 계시냐고 묻는 사람도 많았다. 교수라는 직업의 특성상 평균연령이 높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지만 교수의 대부분이 남성이라는 점도 필자를 학생을 보게 하는 이유였던 것 같다.
■ 나의 오해는 전적으로 당신의 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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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런 오해를 한 사람들이 필자가 교수임을 알게 된 후의 반응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수를 만회라도 하려는 듯이 필자에게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정말 어린 나이에 교수가 되셨네요!”
“교수님 피부가 너무 좋으세요!”
“어쩜, 그렇게 주름살이 없으세요?”
“너무 동안이시네요!”
이런 말들은 모두 어리고 학생이라는 이유로 아무렇게나 취급당해도 된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는 만큼, 불쾌하고 화가 났다. 필자가 어리고 학생일 때는 느끼지 못했는데 나이가 들고 학생이 아닌 상황이 되어서야 우리 사회에서 나이가 어려 보이는 사람들, 그래서 지위가 낮아 보이는 사람들은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 피부 민감도 말고 언어 민감도!
또한, 이런 말을 자주 듣게 되면서 문득 언젠가부터는 우리 사회가 상대의 ‘피부’와 ‘주름살’에 특히 주목하며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모두 텔레비전 대형화와 고화질 디지털 방송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맥락을 살피는 과정에 미디어 환경이 사람들의 피부에 주목하게 함으로써 피부 민감도를 높인 것처럼, 사람들을 언어에 주목하게 함으로써 언어 민감도를 높이게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즉, 사람들이 피부에 민감한 것처럼 언어에 민감하게 만들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고민을 하게 된 것이다.
■ 언어 감수성 향상 프로젝트
사람들의 언어 민감도, 즉 언어 감수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먼저 내 자신의 언어 감수성을 높이는 일이 필요했다. 그리고 높아진 언어 감수성을 통해 발견하고 성찰하게 된 이야기들을 많은 사람과 나누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평소에 ‘언어 감수성’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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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시작된 언어 감수성 프로젝트는 지난 20년 동안 필자와 함께 조금씩 성장했다.
■ 지인의 반경을 넘어
2018년에 출간한 <언어의 줄다리기>는 새로운 도전의 시작이었다. 책을 낸 후에 인터뷰도 마다하지 않았고 이전에는 온갖 핑계를 대며 나가지 않았던 방송에도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도전해 가면서 조금은 못하는 나를 만나는 일에도 관대해졌고 ‘어떻게 처음부터 잘하겠어, 하다 보면 잘하게 되겠지’하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새로운 시도를 통해 새로운 생각이 쌓이게 되었고 쌓인 생각들을 더 많은 사람이 편안하고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도록 책을 써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 언어, 상대를 향하는 일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어는 ‘언어 감수성’이다. 언어 감수성이란 언어에 대한 민감도를 의미한다. 그런데 왜 우리는 언어 감수성을 높여야 할까?
말이든 글이든 언어는 상대를 전제한 행위다. 우리가 말을 하고 글을 쓰는 이유는 상대에게 들리고 읽히기 위해서다. 결국, 언어는 나를 향하는 일이 아니라 상대를 향하는 일이다. 그러니 상대의 감수성에서 어떻게 들리고 읽히는지를 점검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민감도는 서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격차가 크다. 특히 서로에게 민감한 부분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필자는 늘 이렇게 생각한다. 세상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두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일 거라고 말이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사람을 이어주는 것이 바로 언어 감수성이다. 언어 감수성을 갖추는 일은 ‘왜 내 말을 오해하고 난리야!’가 아니라 ‘왜 내 말이 그렇게 이해됐을까?’를 곰곰이 따져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런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차근차근 맥락을 짚어보면서 생각을 확장해 나갈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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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번째 강의
왜 반말 하세요?
- 나이가 권력인 우리 -
■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우리는 처음 만나는 사람과 서로 나이를 묻고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름만큼이나 상대의 나이를 확인하려고 한다. 왜 우리는 사람을 만날 때 나이부터 궁금해할까?
우리는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는 반말을 하고 존댓말을 기대한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는 존댓말을 하고 반말을 들어도 당연하다고 여긴다. 말의 위계로 드러나는 권력의 위계, 연령으로 결정되는 관계의 위계, 평등의 가치를 추구하는 대한민국에서 불평등 관계를 전제하는 말들이 너무나 당연한 듯이 쓰이고 있는 건 아닐까?
■ 작가는 당연히 어른일까?
00 방송국에서 방송된 예능 프로그램 <같이 펀딩>의 2019년 10월 20일 방송은 내게 특별한 깨달음을 주었다. 펀딩의 취지를 잘 살릴 수 있는 그림을 에코백에 담기 위해 세 명의 연예인 진행자들은 작가를 만나러 제주도의 한 갤러리로 향한다. 갤러리에 도착한 진행자들은 작가를 기다리는 동안 작가의 작품을 감상하며 펀딩의 취지를 살릴 수 있는 작품을 기대한다. 그때 그 갤러리로 어른 한 명과 아이 한 명이 들어온다. 갤러리 직원은 진행자들에게 작가님이 오신다고 알린다.
진행자들은 자연스럽게 어른에게 다가가 ‘작가님’이라고 부르면 인사를 한다. 그러자 그 어른은 자신은 작가가 아니라고 하면서 아이를 가리킨다. 진행자들은 모두 당황스러워했고 어린 작가에게 못 믿겠다는 듯이 전이수 작가가 맞냐고 확인한다. 작가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진행자들은 상상도 못했다면서 전이수 작가에게 처음 뵙겠다며 악수를 청한다.
■ 아이는 어른에게 반말을 하면 안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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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작가의 동생이 갑자기 나타나 반말로 “안녕?”하며 인사를 건넨다. 어른들은 동생의 반말을 듣고 약간 당황스러워했지만 애써 무시하며 전이수 작가에게 나이를 묻는다. “실례지만 나이를 물어봐도 되나요?” 진행자의 존대말에 전이수 작가는 “열두 살”이라고 반말로 답한다.
전이수 작가와 동생이 모두 반말을 하자 진행자는 “말을 되게[ 편하게 하네”라며 당황스러워한다. 이어서 “우리도 편하게 해도 될까”라고 말하며 자연스럽게 말을 놓기 시작한다.
진행자들이 전이수 작가를 만나는 장면을 보면서 필자는 갑자기 많은 질문이 떠올랐다. 왜 작가는 어른이어야 할까? 왜 아이는 어른에게 존댓말을 써야 할까? 왜 아이들이 어른에게 먼저 반말을 하면 안 될까? 왜 어른들은 아이를 만나면 꼭 나이는 묻는 걸까?
방송에 나온 것처럼 우리나라 어른들은 아이를 처음 만나면 거의 대부분 나이를 묻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이름을 묻기도 전에 몇 살인지부터 묻는 것이 그리 낯설지 않다. 그리고 아이를 만나면 거의 대두분이 다짜고짜 반말을 사용한다.
왜 초면에 다짜고짜 아이들의 나이를 묻고 반말을 하는 어른은 무례하다고 여기지 않으면서 초면에 어른에게 나이를 묻고 반말을 하는 아이들은 버릇없고 무례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 나이가 궁금한 우리
한국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겪게 되는 가장 이상하고 불편한 일은 초면에 나이를 묻는 일이라고 한다. 한국 사람들은 왜 처음 만나서 나이를 묻는지 모르겠다고, 정말 이상하고 무례하다고 불평을 쏟아낸다.
아이들이 자기 또래의 친구들을 처음 만났을 때 “몇 살이야?” 혹은 “몇 학년이야?”하고 묻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어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비슷한 또래 사람들이 처음 만난 경우에는 서로가 서로의 나이를 탐색한다. 어른이 되면 조금 세련돼져서 직접 몇 살이냐고 묻기보다는 돌려서 묻는 경향이 있기는 하다. 무슨 띠인지 묻는다든지, 몇 학번이냐고 묻는다든지, 2002년 월드컵 때 뭘 했냐고 묻는 등 나이를 추정할 수 있는 질문을 던져서 그 답에서 나이를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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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력관계가 드러나는 질문, “몇 살이세요?”
이처럼 일견 초면인 관계에서 나이를 묻는 것이 한국어 사용자들에게 매우 익숙하고 허용적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잘 관찰해보면 초면에 나이를 묻는 행위가 무조건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누가 누구에게 나이를 묻는가,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누가 누구에게 나이를 물을 수 있는가를 확인해 보면 우리 사회의 권력 관계가 그대로 드러난다. 아울러 우리 사회에서 나이가 얼마나 큰 권력으로 작용하고 있는지도 확인할 수 있다.
대체로 권력이 큰 쪽이 작은 쪽에게 나이를 묻는 것은 허용되지만, 권력이 작은 쪽이 큰 쪽에게 나이를 묻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나이를 묻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쪽이 나이를 묻기 위해서는 뭔가 뚜렷한 목적이 있거나 나이를 통해 상대를 칭찬하려는 의도가 있어야만 무례하다는 소리를 듣지 않는다. “와~동안이시네요” 혹은 “연세보다 아주 젊어 보이세요”, “그 연세에 정말 대단하세요!”가 가장 대표적이다.
■ 나이를 묻는 진짜 이유
나이를 묻는 질문이 가장 불쾌하게 느껴지는 때는 맥락 없이 갑자기 나이를 묻는 경우이다. 이 경우는 대체로 나이가 많은 쪽이 나이가 어린 쪽에게 자신이 권력자임을 확인시키고자 하는 목적으로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질문은 ‘너와 나의 나이 차이를 자각하라’, ‘내가 권력자인데 왜 내 권력에 도전하느냐!’, ‘잔말 말고 복종하라’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연령 권력만으로 상대를 찍어 누르고자 하는 “당신 몇 살이야?”가 유효한 표현으로 기능하는 것을 통해 우리 사회에 연령 권력이 굳건히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나이가 권력이 되는 사회, 그 사회를 만든 언어
이처럼 한국 사회는 나이가 권력으로 작용하는 사회다. 나이가 권력이니 상대의 나이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나이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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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왜 우리는 이토록 나이가 권력이 되는 사회를 만들게 되었을까?
나이가 권력이 되는 사회를 만든 이면에는 사실 한국어가 숨어 있다. 한국어는 나이에 의해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비대칭적인 권력관계를 설정하고 이를 ‘높임법’이라는 문법을 통해 드러낸다. 한국어 높임법에서 존댓말과 반말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하는 것은 나이다. 나이가 작은 사람은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존댓말을 하고 반말을 듣는다. 반면에 나이가 많은 사람은 나이가 적은 사람에게 반말을 하고 존댓말을 듣는다.
이렇게 한국어에는 비대칭적인 언어 권력이 존재하며 한국어 사용자들은 한국어를 학습하는 과정에서 이를 당연시하고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그리고 매일매일의 언어 사용을 통해 연령에 의한 권력관계를 일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한국어 사용자들에게 있어서 연령 차별은 언어를 통해 학습되고 언어 사용으로 강화되며 일상화되는 특징을 갖는다. 일상화된 차별은 차별에 대한 감수성을 무디게 만들어서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한다. 그래서 연령 차별은 한국어 사용자들에게 가장 무서운 차별이다.
■ ‘선량한’ 연령 차별주의자를 만드는 높임법
한국어 사용자들을 소위 ‘선량한’ 연령 차별주의자로 만드는 데 가장 크게 기여하는 것은 바로 한국어에 발달되어 있는 ‘높임법’이다. 한국어 높임법은 언어의 서열을 통해 사람의 서열을 가르치고 고정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적절한 말을 하기 위해 필요한 말의 서열을 결정짓는 요소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한다. 나이에 민감한 것도, 나이의 많고 적음을 사람의 서열로 생각하는 것도, 나이를 불가침의 권력이라고 생각하는 태도도, 그래서 연령 차별이 우리에게 일상화되어 있는 것도 사실 그 중심에 한국어의 ‘높임법’이 존재했던 것이다.
초면에 아이가 어른에게 반말을 쓴 것이 문제가 된 이유는 한국어의 문법, 즉 한국어 사용 공동체가 세운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의 문법에 의하면 나이 요인이 가장 중요한 높임법 선택의 기준이라서 아이는 어른에게 반말을 하면 안 된다.
■ 바뀌어 온 언어, 바뀌어 갈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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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문법은 한국어 사용자들에게 의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한국어 사용자들의 합의에 의해 그간 바뀌어 왔다. 언어는 금과옥조도, 불가침의 성역도 아니다.
예를 들어 신분제를 세계관으로 가지고 있던 시절, 신분은 높임법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신분이 높은 사람은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 반말을 써야 했고, 신분이 낮은 사람은 신분이 높은 사람에게 존댓말을 써야 했다. 이때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신분제가 폐지된 갑오개혁으로부터 127년이 지난 오늘의 세계관에서 생각해 보면 타고난 신분에 따라 말의 높임과 낮춤이 존재했다는 것, 그것이 당시의 문법이었다는 것이 그저 생경할 뿐이다.
■ 말로 각인되는 사람의 서열
이제 한국어 높임법에 신분의 차별은 없어졌다. 하지만 이를 대신하는 연령의 차별은 건재하다. 연령이 높은 사람은 연령이 낮은 사람에게 높임말인 존댓말을 들을 것을 기대하고 이를 당연시한다. 그리고 상대에게 낮춤말인 반말을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하대한다. 반대로 연령이 낮은 사람은 연령이 높은 사람에게 밤말을 듣지만 자신은 존댓말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를 당연시 한다. 그리고 상대에게 존댓말을 쓰며 상대를 존대한다. 아울러 상대로부터 공손성을 극도로 요구당한다. 만약 존대하지 않거나 요구하는 만큼의 공손성을 충분히 드러내지 않으면 그 말을 듣고 있는 ‘윗사람’은 불쾌해하면서 상대의 무례를 꾸짖고 노여워한다.
한국어 연구자들은 흔히 높임법이 발달되어 있는 것이 한국어의 특징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높임법의 순기능으로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와 예의 바른 태도를 드러낼 수 있다는 점을 든다. 하지만 이는 높임법 중 ‘높임’에 방점을 찍은 해석이다. 사실은 한국어 높임법은 높임을 표현하는 기능을 하기도 하지만, 낮춤을 표현하는 기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밑에 사람 있다
이러한 차별적인 사고는 높임법에 대해 설명하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드러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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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높임법의 설명 과정에서 우리는 ‘아랫사람•윗사람’, ‘높은 사람•낮은 사람’ 혹은 ‘손아랫사람•손윗사람’이라는 표현을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상대 높임법의 경우도 화자와 청자의 관계를 따져서 아랫사람 혹은 낮은 사람은 윗사람 혹은 높은 사람에게 존댓말을, 윗사람 혹은 높은 사람은 아랫사람 혹은 낮은 사람에게 반말을 사용한다고 설명한다. 사실 필자도 한국어의 높임법을 설명하면서 ‘아랫사람•윗사람’, ‘높은 사람•낮은 사람’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우리는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평등’의 가치를 대한민국이 추구하는 가치로 배우고 가르쳐왔다. 그리고 이 가치는 우리 후세에게 물려주어야 할 가치라고 생각하는 데 이견을 두지 않는다. 그런데 한국어 사용자들은 매일매일의 언어 사용을 통해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밑에 사람 있다는 생각을 지속적으로 확인하게 된다. 지금의 한국어는 이처럼 한국어 사용자들이 추구하는 이념을 담지 못하고 우리를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연령 차별주의자로 만들어 버린다.
언어는 생각을 담는 도구다. 그런 데 그 도구가 생각을 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언어가 우리의 생각을 담지 못한다면 언어를 바꾸어야 할까?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할까?
■ 높임법을 없앤다면 어떤 말로 통일할까?
한국어 사용자들이 높임법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연령 차별주의자가 된다는 점을 자각하게 된 후에 필자의 다음 생각은 높임법을 없앤다면 어떤 말을 없애고 어떤 말로 통일하는 게 좋을까 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틈이 날 때마다 사람들에게 의견을 구했다. 의견을 구한 사람들은 다양한 연령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대체로 연령에 따라 의견이 나뉘었기 때문이다. 대체로 연령이 낮은 사람들은 반말로 통일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주었다.
또 어느 쪽이 나은가도 중요하지만 어느 쪽이 현실성이 있는가도 생각해 봐야 한다는 의견도 많았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나이가 어린 사람들에게 반말을 듣는 것이 불편해서 저항이 심할 테니 반말로 통일하기 보다는 존댓말로의 통일이 더 현실성이 있다는 지적이었다.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인 1921년 박승빈이라는 국어학자는 계명 구락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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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간행한 잡지 <계명>에 논문 한 편을 발표한다. 그 논문에는 보통학교에서 아동 상호간에 존댓말을 쓰게 하고 교사를 비롯한 학교 구성원 모두가 아동에게 존댓말을 쓰자는 제안이 담겨있다.
박승빈의 이러한 생각은 김기전, 방정환을 통해 천도교 어린이 운동에 적극 수용된다. 천도교 소년회는 회원 상호간에 경어를 사용하자는 원칙을 세워서 실천했고, 방정환은 어린이날을 알리는 전단지에 ‘어린 사람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부드럽게 하여 주십시오’라는 문구를 넣게 된다.
한편, 반말로의 통일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반말이라는 말부터 수정할 것을 주장한다. 반말이 아니라 ‘평어’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평어가 훨씬 평상시 말에 가깝기 때문에 존댓말로 통일하는 것보다는 평상시에 사용하는 말인 평어로 통일하는 것이 훨씬 부담이 적다는 논리다.
여러분의 의견은 어떤가? 하나로 통일해 간다면 존댓말이 좋을까? 반말이 좋을까?
◎ 두 번째 강의
‘민낯’이 불편한 말이 된 이유
- 곱씹을수록 불편해지는 단어들 -
■ 당신이 한 말은 옳지 않습니다
내가 한 말을 듣고 누군가 문제를 지적한다면 어떨까?
별것도 아닌 말에 왜 그토록 예민하게 반응하는지, 모두가 그렇게 사용하고 있어서 그렇게 말한 것뿐인데, 불쾌하고 심지어 억울한 생각까지 들 때는 없었는가?
매일매일 사용하는 언어 표현은 너무나 익숙하고 일상적이어서 문제의식을 갖기 어렵다. 그러나 아무렇지 않게 써 온 표현이 누군가에게는 불편함, 당황스러움, 불쾌감을 줄 수 있다.
이제 내가 무심코 쓰는 그 표현들을 예민하게 들여다보고, 그 표현들이 누구의 관점에서 만들어졌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자. 언어 감수성을 가지고 내가 한 말들과 내가 쓴 글들을 곱씹어 볼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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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날 갑자기
아마 누구나 이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일상적으로 써왔던 표현이 갑자기 낯설어지거나 갑자기 불편해지는 경험을 말이다. 언어 표현이 담고 있는 이데올로기에 관심을 가지고 표현을 톺아보는 일을 하다 보니 남들보다 이런 경험을 자주 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가장 최근에 이런 불편함을 경험하게 해 준 표현이 바로 ‘민낯’이었다.
그날 필자는 ‘민낯’이라는 단어를 무심코 글에 담고 있었다. 흔히 사회문제의 숨겨진 실체가 드러난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우리 사회의 민낯이 드러난다’고 표현하거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숨겨진 추한 실체가 드러나는 것을 ‘권력자들의 민낯이 드러난다’고 표현하는 것처럼 그날 필자도 이런 표현을 문장에 담고 있었던 것이다.
■ 민낯이 왜 나쁘지?
민낯이란 ‘화장을 하지 않은 얼굴’을 말한다. 그러니까 ‘우리 사회의 민낯이 드러난다’는 표현은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우리 사회의 모습이 사실은 화장을 통해 꾸며진 것이고, 실체가 아니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화장을 지우고 드러난 실체는 화장을 통해 가려졌던 것과는 달리 결함이 가득하고 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왜 화장을 하지 않은 얼굴, 즉 ‘민낯’이 이처럼 부정적인 맥락에서 사용되면서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화장을 하지 않은 얼굴이 진짜 자기 모습인데 왜 우리 사회는 그 진짜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숨겨야 할 실체가 민낯이라면, 결함이 있는 민낯을 화장으로 감추지 않고 그냥 드러내는 것에 대해서 이 표현을 만든 사람들은 어떤 입장을 취하고 있는가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화장은 왜 나쁘지?
잘 생각해 보면 ‘민낯’만이 아니라 ‘화장’을 하는 일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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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을 동시에 드러낸다. 화장이란 민낯의 결함을 가리고 숨기기 위한 의도적인 행위이기 때문이다. 화장이란 실체를 숨기는 ‘눈속임’이라는 것이 이 표현에 담겨 있는 관점이다.
그런데 왜 화장을 하는 것이 비난을 받아야 하는 일일까? 이런 질문이 떠오르면서 결국, 숨기고 가려야 할 것이 많은 민낯도, 그 결함을 가리고 숨기기 위해 화장을 한 것도 모두 이 표현을 통해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처럼 화장에 대한 우리 사회의 태도는 긍정적이라고 하기 어렵다.
흔히 사용되고 있는 ‘분식(粉飾)회계’라는 표현을 통해 그러한 관점을 확인 할 수 있다. 분식회계란 회사의 실적이 좋아 보이도록 장부를 조작하여 거짓으로 꾸미는 일을 말한다. 실제보다 좋게 보이도록 실적을 부풀리고 비용을 누락시키는 등의 장부 조작 행위를 분칠하는 행위에 비유한 표현이다. 분칠이란 화장을 상징하는 것이다.
분식 회계 또한 분칠을 하지 않거나 분칠을 지우면 결함과 추함이 드러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만큼, 화장하는 행위를 비하함과 동시에 화장을 하지 않은 것 또한 비난하는, ‘민낯’의 불편함과 같은 불편함을 주는 표현이다.
화장을 하지 않은 민낯은 숨겨야 할 결함이 가득한 것이고, 그 결함을 숨기는 화장이라는 행위는 실체를 가리는 일이니 옳지 않다는 생각이 바로 ‘우리 사회의 민낯을 드러낸다’는 표현과 ‘분식 회계’에 담겨 있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 부정적인 시선이 향하는 곳
화장이란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 특히 성인 여성들이 하는 행위라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아이들이 화장을 하거나 성인 남성이 화장을 하는 것에 대해 우리 사회는 그다지 허용적이지 않다. 그러니 ‘민낯’의 대상이 되는 자의 성별도, 민낯의 결함을 가리고 숨기기 위해 ‘화장’을 하는 행위자의 성별도 자연스럽게 여성이 떠오르기 마련이다.
더 나아가 그 여성의 화장 뒤에 숨겨진 민낯은 결함이 가득하고 추한 모습이라는 것을 상상하게 된다.
■ 민낯의 사전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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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표준국어대사전
<뜻풀이> 화장을 하지 않은 얼굴
<용 례> • 민낯으로 다녀도 얼굴이 고운 여자
•선을 보러 온 처녀답지 않게 얼굴에 찍어 바른 것이 없는 민낯이어 서 볼수록 잡티가 없고 수더분해 보여서 다행이다.
(이문구, ‘산 너머 남촌’에서)
나. 고려대한국어대사전
<뜻풀이> • 화장을 하지 않은 본디 그대로의 얼굴
<용 례> • 그녀는 민낯이 더 예쁜 것 같다.
다. 연세현대한국어사전
<뜻풀이> • (주로 여자의) 화장하지 않은 얼굴
<용 례> • 여인은 화장이 없는 민낯이 청순한 이미지를 주었다.
• 처녀는 선을 보러 온 처녀답지 않게 얼굴에 찍어 바른 것이 없어서 볼수록 수더분해 보였다.
• 분이 벗겨진 민낯에 가발을 얹을 겨를도 없이 달려온 기생의 모습은 초라하였다.
■ ‘민낯’과 ‘화장’에 담긴 주류의 관심
결론적으로 우리 사회는 결함을 감추기 위해 화장을 하는 것도, 화장을 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난 민낯도 모두 비난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다.
그리고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는 행위자의 성별은 모두 ‘여성’이었다. 그러니까 민낯을 드러내는 것도, 화장을 하는 것도 비난을 받아온 것은 다름 아닌 성인 여성들이었다.
이렇게 ‘우리 사회의 민낯이 드러난다’는 표현에는 화장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 일반적인 주류 세력(남성 기득권 세력)의 생각이 반영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화장은 여성의 전유물이며 화장을 하는 것도 하지 않는 것도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 ‘프로불편러’라는 이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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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기야 최근에는 그런 불편함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프로불편러’라는 이름으로 조롱하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이 글을 쓰는 필자는 ‘프로불편러’인가?
누군가 필자에게 그렇게 묻는다면 필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이다.
“네 저는 프로불편러가 되기 위해서 공부하는 사람입니다”라고 말이다.
언어 감수성을 높여서 익숙한 표현을 담고 있는 다수자의 횡포를 지적하고 소수자의 관점이 소외되어 있음을 자각하려는 것이 최근 필자의 주요 관심사이다.
이는 비단 필자의 경우로만 한정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늘보다 더 성장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사실 프로불편러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혹시 나의 편안함이 타인의 불편함 위에 만들어지는 것은 아닌지 감수성을 가지고 예민하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갖기 위해 애쓰는 것이니 말이다. 특히, 가장 일상적이어서 감수성을 갖기 어려운 것이 언어인 만큼, 언어 감수성을 가지려는 시도는 최고의 프로불편러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배운대로 말할 뿐이라고?
그 이유는 간단하다. 집단적 방어기제가 발현된 까닭이다.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라 배운 대로해야 한다. 그러니까 배운 대로 말한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죄의식을 갖기 어렵다. 또 언어 표현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고 지적하고 사회에 호소하는 사람의 수와 익숙하고 편안하게 문제의식 없이 사용하는 사람의 수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큰 차이가 난다. 프로불편러가 되는 것이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로불편러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문제를 지적한 사람이고, 프로불편러라고 조롱하는 사람들은 문제를 지적받은 사람이다.
우리는 ‘민낯이 드러난다’는 표현을 통해 ‘민낯’과 ‘화장’에 대한 우리 사회 주류가 지닌 부정적 태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부정적 시선이 향하는 곳에 ‘여성’이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했다. 가장 일상적이어서 문제의식을 갖기 어려운 표현에 대해 감수성을 가지고 예민하게 생각해 보는 과정에서 그 표현이 누구의 관점에서 만들어진 것인지, 이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성찰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져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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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낯은 언제부터 사용된 말일까?
1977년 9월 20일 <조선일보> 3면에는 ‘잠자는 우리말’ 명사 편이 실려있다. 잘 사용되지 않고 있는 고유어 명사 약 70여 개를 가나다순으로 소개한다. 이 가운데 ‘민낯’이라는 단어가 발견된다. 신문에는 ‘민낯’의 뜻을 ‘단장하지 않은 여자의 얼굴’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이것이 신문 기사에 등장하는 ‘민낯’의 첫 번째 사용 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키워드 검색을 통해 검색된 ‘민낯’은 앞서 살펴본 1977년 기사를 제외하면 2건이 더 있을 뿐이다. 이 시기에는 민낯보다 ‘민얼굴’이나 ‘맨얼굴’이라는 표현이 더 많이 사용된 듯하다.
흥미롭게도 1990년대까지 이렇게 사용 빈도가 낮았던 ‘민낯’이 2000년대 이후 급증하는 양상이 관찰된다.
빅카인즈 검색 결과 ‘민낯’은 1996년 1회, 2008년까지 12년간 충 27회의 사용을 보였다. 하지만 2009년 갑자기 증가하여 한 해 동안 98회의 사용 빈도를 보인다. 그리고 2010년 1,229회, 2011년 3,136회, 2012년 2,274회, 2013년 4,845회를 보이다가 2014년 7,742회로 정점을 찍은 후 2015년에는 7,630회를 보이고 2016년 부터는 매년 5,000회 전후가 사용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렇게 민낯의 사용이 증가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하나는 2006년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쌩(생)얼’이라는 신조어가 ‘민낯’으로 대체되어 간 결과다.
이렇게 사전에서 잠자고 있던 고유어 단어 ‘민낯’이 ‘쌩얼’이라는 신조어를 대체할 수 있는 대안 표현으로 제안되면서 그 사용이 확대되었고, 그 확대된 사용으로 인해 비유적 표현으로서 각광을 받으며 사용 예를 늘려온 것이다. 하지만 비유적 표현으로서의 ‘민낯’은 화장에 대한 일반적인 주류 세력의 부정적 관념이 담겨있다는 자각 없이 그 사용을 확대하며 오늘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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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번째 강의 : ‘아메리카노’가 나오시는 나라에서
- 공손성이 문법성을 이길 때 -
■ 어디를 가나 들리는 이상한 말들
0 카페에 가면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나오셨습니다”
0 옷 가게에 가면
“이 옷은 신 상품이세요.”
“올해 유행하는 올리브색도 있으세요.”
0 신발을 사러 가도
“이 신발은 12만 원이세요.”
“신상품이지만 작년 상품보다 저렴하게 나오셨어요.”
0 이번에는 병원으로 가 보았다.
“신지영 님, 진료실로 들어오실게요.”
“신지영 님, 주사실로 이동하실게요.”
“신지영 님, 돌아누우실게요.”
이 말들 어색한데도 널리 사용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 어색한 말이 널리 쓰이는 이유
“아메리카노 나오셨습니다”로 대표되는 이런 표현들이 없어지기는커녕 왜 더 널리 사용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문법을 어긴 표현들이 문법을 지킨 표현보다 사용에서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언어 사용자들이 생각하기 때문이다.
카페나 옷 가게에 가서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나오셨습니다”, “이 옷은 신상품이십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자. 혹시 이 말이 문법에 맞지 않는 말이라는 걸 모르느냐고 말이다.
그들의 답이 정말 놀랍다. 그 말이 잘못된 말이라는 건 익히 들어서 잘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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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소위 말하는 ‘사물 존대 표현이 아니냐고 전문가처럼 말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다시 물어본다. 틀린 걸 알면서도 왜 그렇게 말하냐고 말이다.
그들의 답이 흥미롭다. 손님 중에는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불쾌해하면서 혼내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문법에 맞게 한다고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라고 말하면 손님 중에는 왜 말을 제대로 높여서 하지 않느냐고 화를 낸다는 얘기다. 손님과 시시비비를 가리면서 논쟁을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냐고 한숨을 쉰다.
병원에 가서 물어봐도 마찬가지다.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분들도 상점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들과 똑같이 말한다. “신지영 님, 진료실로 들어오세요”라고 말해야 맞다는 걸 알지만 그렇게 말하면 손님 중에는 “어디서 오라 마라 명령질이야!”하면서 불쾌해하는 경우가 있어 조심스럽다는 것이다. 그래서 좀 어색해도 “신지영 님, 진료실로 들어오실게요”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역시 병원에서도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었다. 틀린 말인 줄은 알지만 틀린 말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 똑똑하면 손님을 잃어요!
앞서 이야기한 대로 사물인 아메리카노는 당연히 말하는 카페 직원보다 높은 존재일 수 없어서 “아메리카노 나오셨습니다”류의 말은 문법에 맞지 않는다. 하지만 인터뷰를 했던 카페직원의 말처럼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라고 문법에 맞게 말하면 불쾌해하는 손님이 있다는 것이 문제다. 만약 ‘-시-’를 안 들으면 자신이 충분히 존대를 받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래서 손님에게 불쾌감을 줄 수 있다면, 게다가 불친절하다고 혼까지 나게 된다면 ‘-시-’는 카페 직원에게 꼭 필요한 ‘필수 아이템’이 아닐 수 없다.
요즘 들어 많은 사람이 잘못 사용하고 있는 ‘제가 아시는 분’을 통해 이러한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사실, ‘제가 아시는 분’이라는 표현은 심지어 말하는 사람 자신을 높이고 있으니 정말 황당한 표현이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이 말을 듣는 사람이 ‘나’를 높여 주려고 ‘-시-’를 썼구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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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사람이 스스로를 높이는 “제가 아시는 분이 해 준 얘기예요”라는 말을 듣고도, 듣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이 ‘나’를 높여 주는구나 생각하는데. “아메리카노 나오셨습니다”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사물 존대를 하는 멍청한 직원은 손님을 잃지 않지만, 높임법을 문법에 맞게 잘 구사하는 똑똑한 직원은 손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불친절한 직원이 되어 손님을 잃게 된다. 그러니 문법에 맞지 않는 어색한 말이 문법에 맞는 말보다 훨씬 효과적이라는 결론이다.
■ 나의 명령이 아니라 당신의 의지입니다
다음은 병원에서 듣게 되는 “들어오실게요”류의 표현을 살펴보자. 이 표현은 모두 듣는 사람에게 행동을 요구하는 말이다. 병원에서는 내원자들에게 행동을 요구하는 말을 많이 할 수밖에 없다.
듣는 사람에게 행동을 요구하기 위해 사용하는 가장 전형적인 문장은 “명령문”이다. 그런데 명령문은 명령을 내리는 자와 명령을 수행하는 자의 관계를 설정하게 된다는 문제가 있다. 명령이 공손함과 공존하기 어려운 이유다.
그래서 나온 말이 “들어오실게요”류의 말이다. 평서문을 가지고 명령문처럼 행동을 요구하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고안한 문장이다. 평서문이란 정보를 전달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문장이라서 말을 하는 사람도, 그 말을 듣는 사람도 별 부담이 없다. 그러나 평서문으로 원하는 기능, 즉 요청 기능을 수행할 수만 있다면 금상첨화다.
즉 말하는 사람의 의지를 표현하는 ‘-게요’를 가지고 듣는 사람의 의지를 표현하는 듯이 말하는 것이다. “들어오실게요”라고 하면 왠지 말하는 사람의 명령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 자신의 의지로 그 행위를 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되어 부담감이 확 줄어들게 된다. 문법에 맞지는 않지만….
결국 문법에 맞지 않아 이상한 말이라고 비난을 받아온 표현들이 사라지기는커녕 세력을 확대해 가고 있는 이유는 비난을 감수할 만큼 충분한 효과가 있기 때문이었다.
■ 공손성의 요구 뒤에 숨은 일상의 갑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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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것이 있다. 앞서 살펴본 말들이 모두 서비스 장면에서 사용되는 말들이라는 점이다.
서비스 장면은 친절함과 공손함을 요구한다. 즉 불친절하다거나 불손하다는 비난을 듣는 것이 비문법적인 말을 한다는 비난을 듣는 것보다 훨씬 더 큰 비용이 드는 장면이다. 그러니 친절하고 공손하기 위해 문법성을 훼손하는 일 정도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공손성은 문법성을 이기게 된다.
결국 공손성이 문법성을 이기도록 문법을 파괴하게 만들고 문법을 파괴한 표현이 세력을 넓히게 한 사람이 어쩌면 서비스 제공자인 ‘그들’이 아니라 서비스 이용자인 ‘우리’였을지도 모른다.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혹은 “들어와 주세요”에 만족하지 못한 ‘우리’가 ‘그들’에게 “아메리카노 나오셨습니다” 혹은 “들어오실게요”라는 문법에 맞지 않는 어색한 말을 만들게 했고, 또 그 사용을 넓혀가게 한 것일지도 모른다.
혹시 우리는 ‘손님은 왕이다’라는 철 지난 표어에 속아서 돈을 내고 서비스를 제공받는 것을, 전제 군주가 되어 갑질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사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이 갑질을 당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처럼,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도 갑질을 할 권리는 없다.
손님은 왕이 아니다. 손님은 손님일 뿐이다.
◎ 네 번째 강의 ‘여사’의 변모
- 우리 사회는 여성을 어떻게 불러 왔나? -
■ 2017년 <한겨레>의 ‘씨’ 논란
<한겨레> 신문이 문재인 대통령 취임 직후, 대통령의 부인을‘김정숙 씨’라고 표기한 기사를 내보냈다. 이를 보고 독자들이 대통령의 부인을 ‘김정숙 씨’라고 표현하는 것은 무례하다. ‘김정숙 여사’ 정도는 표현해야 하지 않냐는 내용의 댓글을 달기 시작했다. 이에 <한겨레>는 이와 같은 표기 원칙은 1988년 창간 이래 계속 지켜왔던 원칙이라고 해명한다. 대통령 부인에 대해 ‘영부인’이나 ‘여사’라는 권위주의적인 경칭을 사용하지 않고 그냥 ‘대통령 부인 000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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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표기하는 것이 내부적 원칙이며, <한겨레>는 그것을 지금까지 지켜 왔다는 것이다. 한겨레의 해병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과거 <한겨레>의 기사를 모두 검색하여 <한겨레>가 원칙을 지키지 않고 대통령 부인에게 여사를 썼던 경우를 찾아냈다. 정치권도 합세하여 비난의 소리를 더한다.
‘씨’ 논란이 절독 운동으로 번지는 양상을 보이자 <한겨레>는 심각성을 깨닫고 내부 논의를 시작했다. 그리고 2017년 8월 25일 ‘알림’을 통해 창간 이래 지켜오던 대통령 부인에 대한 존칭 원칙, 즉 ‘영부인’이나 ‘여사’처럼 권위주의적인 존칭을 쓰지 않고 ‘씨’를 쓰겠다는 원칙을 바꾸겠다는 내용을 발표한다. ‘씨’와 ‘여사’ 논란은 <한겨레>가 창간 이래 29년간 유지했던 편집 방침을 바꾸는 것으로 일단락된다.
■ 사실은 1999년부터 : ‘이희호 씨’인가 ‘이희호 여사’인가
한겨레가 대통령 부인에 대한 ‘씨’ 호칭 논란은 2017년이 처음은 아니었다.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 때도 같은 문제 제기가 있었다.
1999년 12월 7일자 <한겨레>에는 김대중 대통령의 부인을 ‘이희호 씨’라고 부르는 것이 예의에 벗어난 것 겉이 보기 좋지 않다는 독자의 목소리가 실려있다.
이때에도 <한겨레>는 ‘답합니다’를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독자들에게 전한다. ‘나쁜 감정’이나 ‘차별의식’ 때문이 아니라 ‘영부인’이나 ‘여사’처럼 권위주의 적인 말을 될수록 쓰지 않는다는 내부적 원칙에 따라 창간 때부터 지위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씨’라는 존칭을 써 왔다는 짧은 답변을 내놓았다.
■ 2017년에 또다시 : ‘권양숙 씨’ 논란
이후 대통령 부인에 대한 ‘씨’ 호칭 논란이 <한겨레> 신문에 다시 등장한 것은 2007년이었다. 2007년 10월 7일 자 기사 중에는 ‘권양숙 씨가 뭡니까?’ 라는 제목의 기사가 있다. 이 기사는 당시 남북 정상회담을 위해 평양을 방문했던 노무현 대통령 부부의 소식을 전하면서 대통령 부인을 ‘권양숙 씨’라고 칭한 것에 대한 독자들의 질문과 항의의 내용, 그리고 이에 대한 <한겨레>의 입장이 정리되어 있다. 이 기사는 ‘편집국에서’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고 작성자는 박찬수 정치부문 편집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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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부가 힘이 없어도 그렇지 대통령 부인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거 아니냐며 8명의 독자들이 표기 문제 때문에 <한겨레> 신문의 구독을 끊겠다는 통보까지 했다고 기사는 전하고 있다. 1999년 ‘이희호 씨’ 때보다 독자의 반응이 더 거셌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에 대한 한겨레의 입장은 이전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 글은 2009년 5월 31일에 한 번 더 실리게 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사실을 보도하는 과정에서 전 대통령의 부인을 ‘권양숙 씨’로 보도하는 <한겨레>에 다시 독자들의 항의가 빗발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역시 <한겨레>의 편집원칙을 바꾸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 ‘씨’ 논란에서 짚어보아야 할 두 가지
<한겨레>와 독자 사이에 이어진 1999년부터 2017년까지 약 18년간의 ‘씨’와 ‘여사’ 논란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꼭 짚어보아야 한다.
우선은 호칭에 있어서의 호칭어와 지칭어의 차이다. 호칭어는 누군가를 부르는 말이고, 지칭어란 누군가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호칭어와 지칭어는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딸의 배우자’는 ‘사위’인데 ‘사위’는 지칭어 즉 가리키는 말일 뿐, 호칭어 즉 대면하여 부르는 말로는 쓰이지 않는다. 대체로 사위를 대면하여 부를 때에는 ‘유 서방, 김 서방’처럼 ‘성’에 ‘서방’을 붙여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기업의 대표이사를 지칭할 때는 ‘△△주식회사 000 대표’같이 표기하지만 대면하여 부를 때는 ‘000 대표님’ 혹은 ‘000 대표’와 같이 달리 부를 수 있다.
■ 호칭어와 지칭어의 차이
신문 기사에는 당연히 지칭어가 사용되지 호칭어가 사용되지는 않는다. 신문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글말이지 입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사에서 대통령의 부인을 ‘김정숙 씨’라고 지칭하는 것을 해당 신문사가 원칙으로 삼는다고 해서 해당 신문의 기자가 대통령 부인을 만나 대면하는 상황에서까지 ‘김정숙 씨’라는 호칭어를 사용한다는 뜻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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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세 번 혹은 네 번을 이어간 <한겨레>와 독자간 ‘씨’와 ‘여사’의 호칭 논란은 호칭어와 지칭어를 혼동한 데서 오는 오해가 증폭된 측면이 없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 여사의 과거
다음으로 짚어야 하는 것은 ‘여사’라는 호칭어 혹은 지칭어 자체에 대한 것이다. 고대 중국에서 후궁을 섬기어 기록과 문서를 맡아보던 여성 관료를 의미하던 ‘여사(女史)’라는 단어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것처럼 ‘결혼한 여자를 높여 이르거나 사회적으로 이름있는 여자를 높여 이르는 말’로 쓰이게 된 것은 1880년대 중반 일본에서부터였다.
영어 ‘bluestocking(블루스타킹)’을 일본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여사’를 사용한 결과였다. ‘블루스타킹’이란 1700년대 후반 전성기를 누린 영국의 여성 지식인 모임에서 유래된 말로 문학을 좋아하는 여성이나 여성 문학가를 이르는 말이 되었다. 당시 그들은 일반적으로 신었던 흰색 스타킹 대신 파란색 스타킹을 신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블루스타킹’의 일본어 번역어였던 ‘여사’는 여성 학자나 정치가 예술가 등의 이름 뒤에 붙어서 경칭의 의미로 일본에서 사용되기 시작했고 1900년대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를 지나면서 사용 영역을 넓혀 나갔다. 일본에서 수입된 ‘여사’는 대체로 두 가지 경우 여성의 경칭으로 사용되었다.
1. 사회 저명인사인 여성 : 시인 000 여사, 장관 000 여사, 등
2. 지위가 높은 남성의 배우자 여성을 지칭하는 경우
■ ’여사‘의 현재
현재 ‘여사’는 매우 극단적인 두 가지 용법으로 주로 사용되고 있는 듯하다. 하나는 남편의 지위가 높은 여성의 호칭으로 사용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호칭어가 마땅치 않은 중년 이상의 여성을 대면하여 부를 대 호칭어로 사용되는 경우이다.
전자와 같은 용법은 현재 사용의 영역이 점차 축소되어가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후자, 즉 특별한 호칭어를 찾기 어려운 중년 이상의 여성을 대면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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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를 때 사용되는 ‘여사’는 이전 시기보다 훨씬 그 사용이 확대되어 가는 경향이 뚜렷하다.
두 번째 용법의 ‘여사’는 이전 시대에 사용되었던 ‘아줌마’를 대체한 것으로 이해된다. 부르는 사람도, 불리는 사람도 늘 불쾌했던 이전 시기의 ‘아줌마’라는 호칭어가 빠르게 ‘여사님’으로 대체되어 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다음에 2부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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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높이 뛰기(2)
- 신지영 교수의 언어 감수성 향상 프로젝트 -
■ 신지영 지음
◎ 다섯 번째 강의 : 너를 너라고 부를 수 없음에
- 타인의 신상정보가 절박한 이유 -
상대와 말을 하려면 상대를 불러야 한다. 상대를 부르려면 상대를 부를 말이 필요하다. 이름을 부를 수 없는 상대와 대화해야 할 때, 그 사람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
호칭어는 상대와 나의 관계를 나의 입으로 직접 고백하는 일이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관계를 여실히 드러낸다. 직업, 직함, 나이 등 상대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할 때 우리는 어떤 호칭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 당신은 너의 높임말이 아닌가요?
한 외국인 학생이 질문을 했다.
“‘당신’은 ‘너’를 높이는 말 맞죠? 그런데 왜 교수님에게 ‘당신’이라는 말을 쓰면 안 되는 건가요?”
이 질문을 듣고 그 공대 교수님은 당황했다고 한다. ‘당신’이라는 말이 분명 ‘너’보다는 상대를 높이는 말임에 틀림없는데, 만약 학생이 자신에게 ‘당신’이라고 한다면 왠지 부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싸움을 부르는 ‘당신’
외국인 학생의 말처럼 ‘당신’이 ‘너’의 높임말로 사용되는 것은 사실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당신’을 찾아보면 2번 풀이에 ‘부부 사이에서, 상대편을 높여 부르는 이인칭 대명사’라고 되어 있고, 3번 풀이에 ‘문어체에서, 상대편을 높여 이르는 이인칭 대명사’라고 되어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와 이야기하는 사람을 ‘당신’이라고 불렀다가는 싸움이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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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지도 모른다. ‘당신’은 ‘너’의 단순한 높임말이 아니다. 내 앞에서 내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 면전에서 ‘당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높임이 아니라 낮춤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의 4번 풀이에는 바로 이 당신의 의미가 나와 있다. ‘맞서 싸울 때 상대편을 낮잡아 이르는 대명사’라고 말이다.
■ 존중의 의미를 내포한 ‘당신’의 예
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 요.(노래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의 첫 부분)
나. 당신의 관심이 가정 폭력을 예방할 수 있습니다. (여성가족부 광고)
다. 알고 있나요? 우리는 언제나 당신 곁에…. (한국산업인력공단 광고)
(가)에 보인 노래를 듣고 “뭐라고? 당신이라고? 언제 봤다고 나보고 당신이래?” 이렇게 화를 낼 사람이 있을까? (나)와 (다)에 보인 것은 광고에 쓰인 당신이다. (나)는 동영상 광고고, (다)는 인쇄물 광고다. 광고에 쓰인 ‘당신’이 지칭하는 것은 그 광고를 보고 듣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 광고를 보고 듣는 사람이 ‘당신’ 때문에 불쾌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오히려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한다. 왜 어떤 ‘당신’은 듣는 사람을 불쾌하게 해서 싸움을 부르고, 어떤 ‘당신’은 듣는 사람을 존중해 주는 것처럼 들리게 하는 것일까?
■ 안 되는 ‘당신’과 되는 ‘당신’의 차이
두 ‘당신’을 잘 살펴보면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 되는 ‘당신’, 즉듣는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고 싸움을 부르는 당신은 특정한 사람, 즉 특정 대화 상대자를 가리킨다. 반면에 되는 ‘당신’, 즉 듣는 사람을 존중해 주는 당신은 듣는 나를 특정하여 가리키지 않는다. 그냥 그 노래를 듣는 모든 사람, 그 광고를 듣거나 읽는 모든 사람이다. 불특정 다수가 ‘당신’으로 칭해지고 있다.
한국어에서 ‘너’나 ‘당신’과 같은 이인칭 대명사는 사용이 매우 제한적이다.
‘너’는 친한 친구나 동생, 자녀에게 쓸 수 있고, ‘당신’은 부부 사이에서 쓸 수 있는 정도다, ‘너’나 ‘당신’과 같은 이인칭 대명사는 공손한 장면에서 절대로 사용할 수가 없다. 이것이 한국어가 지니는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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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손성에 따른 이인칭 대명사의 구분
전 세계 언어를 이인칭 대명사가 공손성에 따라 어떻게 범주화되는가를 기준으로 나누어 보면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1. 공손성에 따른 구분이 없는 언어 수
대표적인 예로 영어를 들 수 있다. 영어는 대화 상대자를 구분하지 않고 그가 누구든지 ‘you’로 부르면 된다. 조사대상 207개 언어 중 136개 언어로 66% 이다.
2. 다음으로 많은 유형은 이인칭 대명사가 공손성에 따라서 두 가지의 구분을 갖는 언어다. 불어가 대표적이다.
3. 공손성에 따라서 세 가지 이상의 이인칭 대명사가 존재하는 언어.
인도, 아리아어에 속한 마라티어가 대표적이다. 207개 언어 중 15개에 불과하다
4. 공손성을 이유로 이인칭 대명사를 기피하는 언어 유형으로 공손성이 요구 되는 대화 장면에서 이인칭 대명사를 사용하지 않는다. 207개 언어 중에서 7개 언어가 해당 된다. 한국, 일본, 인도네시아, 베트남, 태국, 크메르, 버마어
■ 이제는 답할 수 있다
‘당신’은 ‘너’의 높임말이 맞다. 하지만 한국어는 공손성을 이유로 이인칭 대명사의 사용이 제한되는 특징을 지닌 몇 안 되는 언어다. 그래서 공손성이 필요한 장면에서는 ‘너’든 ‘당신’이든 이인칭 대명사로 대화 상대자를 부르면 안된다. 그래서 학생이 교수를 ‘당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단 광고나 노랫말에 들어간 ‘당신’처럼 불특정 다수를 의미하는 ‘당신’은 존중의 의미를 갖는다. 이 ‘당신’은 특정 대화 상대자를 의미하지 않기 때문에 그 말을 듣고 사람들이 불쾌해하지 않는 것이다.
■ 호칭어 메뉴판
한국어로 대화 상대자와 성공적으로 말을 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호칭어의 선택이 매우 중요하다. 잘못 쓴 호칭어는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기 때문에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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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로운 대화를 기대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 호칭어의 메뉴판에는 우리 입맛에 딱 맞는 메뉴들만 있는 게 아니다. 변화된 우리의 입맛에는 더 이상 맞지 않는 오래된 메뉴들이 한가득 있기도 하고, 변화된 우리의 입맛에 맞는 새 메뉴가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기도 하다.
상대의 나이는 호칭어 선택에 중요한 기준이 된다. 대체로 상대가 학교에 다닐 정도의 나이라고 판단되면 ‘학생’이라는 호칭어로 상대를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상대를 이렇게 부르는 사람 자신이 학생일 리는 없다.
상대가 학생을 벗어난 나이라고 판단되면 대체로 상대의 성별과 대우 정도에 따라서 남성은 ‘아저씨’ 혹은 ‘사장님’, 여성은 ‘아줌마’ 혹은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과거에는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빠르게 바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는 성별을 불문하고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화되어 가고 있는 듯하다.
혹자는 ‘누구에게나 ’선생님‘이라니 호칭어 인플레이션 심각한 것 아니냐’고 걱정을 하지만 호칭어란 어차피 듣는 사람을 위한 것이니 더 가치가 있는 호칭어로 상대를 대접하는 것이 나쁠 건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말 대접이 박한 것이 문제지 후한 것이 문제가 될 리는 없지 않을까?
■ 제가 왜 당신의 언니인가요?
가족관계 호칭어가 확대 사용되는 흥미로운 상황 중 하나가 상품 판매 상황이다. 상인들 중에는 손님을 ‘언니’, ‘오빠’, ‘누님’, ‘형님’, ‘어머님’, ‘아버님’과 같이 부르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 자신과 손님의 연령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 가족관계 호칭어를 통해 친근성을 강조하는 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이런 호칭어가 판매영역에서 사용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1984년 3월 26일 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당시 이미 판매영역에서 이러한 호칭어가 사용되고 있음이 확인된다.
‘언니’라는 호칭어가 쓰이는 가장 어색한 장면은 식당에서 중년의 남성이 식당의 여성 종업원을 부르는 경우다. 주로 이들은 ‘언니’를 넘어 ‘언니야’라고 하는데 이 호칭어는 언뜻 봐서는 정말 이상하기 짝이 없다. 성별도 맞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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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도 맞지 않으니 말이다. 중년 남성들의 이 호칭어에 식당 종업원은 불쾌하기 짝이 없어 한다. 그 이유는 ‘언니’라는 말이 술집의 여성 종업원을 칭하던 데서 기원했기 때문이다. 술집에서 술 시중을 하는 여성 종업원들을 술집 주인이 ‘언니’라고 표현했고 이 표현을 따라서 술집을 찾은 손님들도 이들을 ‘언니’라고 부른 데서 기원했기 때문이다.
호칭어가 듣는 사람을 불쾌하게 만든다면 굳이 호칭어를 쓸 이유기 없다. 오히려 적절한 호칭어를 찾기 어렵다면 ‘저기요, 여기요’를 사용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실제로 2017년 국립국어원의 실태조사에서도 낯선 사람들을 부를 때 ‘저기요, 여기요’라고 부르는 비율이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 여섯 번째 강의 : 가족 호칭에 숨은 불편한 진실
- 왜 부르면 부를수록 멀게만 느껴질까? -
■ 아주 오래된 미래
1966년 2월 17일 자 <동아일보>에는 20대 여성으로 추정되는 독자의 기고문이 실려 있다. 서울시 성동구 도선동에 사는 미혼자로 자신을 밝힌 윤형연이라는 분의 기고문이다.
기고문은 7남매의 맏며느리가 된 친구가 오랜만에 친정으로 나들이를 와서 미혼의 친구들이 그 친구의 집에 모여 시집살이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 시작한다. 글쓴이는 특히 친구의 이야기 중에서 네 살짜리 시누이에게 ‘애기씨’소리가 차마 안 나오더라는 얘기에 주목한다. 7남매의 맏이다 보니 형제 중 막내가 네 살이었던 모양이다.
결혼을 하면 새로운 가족 구성원이 되니 시부모님을 부모님처럼, 시동생을 내 동생들처럼 사랑해야 하는데 하녀가 아닌 바에야 동생들에게 도련님이나 작은 아씨라고 부르는 것보다는 이름을 불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얘기였다.
하지만 자신의 이런 생각에 대해 친구의 어머니는 “그 시고 떫은 소리들 말라. 우리도 다 그렇게 살아왔어”라는 반응을 보인다.
■ 그 많던 ‘윤형연’은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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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무려 만 55년 전에 기고된 글이다. 그런데 이 글에 등장하는 20대 여성들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남편 동생을 ‘아가씨’, ‘도련님’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데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 기고자의 당시 나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기고 당시에 20세라고만 해도 기고자와 기고자의 친구들은 2021년 현재 75세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많던 ‘윤형연’은 어디로 간 것일까? 아직도 결혼 후 배우자의 동생들에[게 사용해야 하는 ‘아가씨, 도련님’으로 대표되는 불평등한 거족 호칭어 문제가 명절 때마다 화제가 되고 있으니 말이다.
■ ‘저는 당신의 자녀입니다’ 대 ‘저는 당신의 자녀가 아닙니다’
결혼을 하면 배우자의 가족들과 새로운 가족의 인연을 맺는다고 한다. 그래서 결혼은 두 남녀의 만남이 아니라 두 사람의 가족과 가족이 만나 새로운 가족을 이루는 일이라고들 한다. 그래서 결혼 후 배우자의 부모님을 자신의 부모님처럼 대해야 한다고들 하고, 내 자식의 배우자를 새로운 자녀로 맞이해야 한다고들 한다.
그런데 서로를 부르는 호칭어를 보면 흥미로운 점들이 발견된다. 우선 여성은 결혼을 해서 배우자의 부모님을 보통 ‘아버님, 어머님’이라고 부른다. 반면에 남성은 결혼해서 배우자의 부모님을 ‘장인어른, 장모님’이라고 부른다. 여성과 남성이 배우자의 부모님을 다른 방식으로 부르고 있다. 남성이 배우자의 부모님을 부르는 호칭에는 부모님이란 의미가 들어있지 않다.
2017년 국립국어원의 언어 실태조사 결과
남성이 배우자의 아버지를 장인어른 이라고 부르는 비율은 62.7%, 아버님이라고 부르는 비율은 41.2%이고 배우자의 어머니를 장모님이라고 부르는 비율은 더 높아서 67.6%, 어머님이라고 부르는 비율은 37.0%였다.
두 호칭 모두에 사용한다는 사람이 있어서 100%를 넘을 수 있다.
■ 너는 이제 ‘신생아’란다
그렇다면 부모님들은 새로 자녀의 인연을 맺은 이들을 어떻게 부르고 있나?
결혼한 여성부터 보자. 여성들은 배우자의 부모님들로부터 ‘새아가, 아가, 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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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아기, 얘야’와 같이 불린다. 결혼을 해야 진짜 어른이 된다고 하더니 결혼을 하고 나니 어른은커녕 아기가 되었다. 그것도 ‘새아가’….
사위에게는 사위의 성에 ‘서방’을 붙여 부른다. ‘장인어른, 장모님’이라고 부르며 ‘저는 당신의 자식이 아닙니다’라고 선을 긋는 사위에게 배우자의 부모님도 남을 부르듯 거리를 두어 부른다. ‘00 서방’ ‘자네라는 하게체의 말’로 불리며 다른 대접을 받는다.
■ 우리집 서열 최하위는 누구인가?
배우자의 동생을 부르는 말을 비교해 보면 더욱 큰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여성은 배우자의 동생들을 성별에 따라 ‘아가씨, 도련님’이라고 부른다. 반면에 남성은 배우자의 동생들을 성별에 따라 ‘처제, 처남’이라고 부른다.
‘아가씨 도련님’과 ‘처제, 처남’의 호칭어는 서로 다른 높임말을 이끄는 호칭어다. ‘아가씨 이리로 오세요’, ‘도련님 저리로 가세요’가 자연스럽지 ‘아가씨 이리로 와’, ‘도련님 저리로 가’는 어울리지 않는다.
반면에 처제 처남은 자연스럽게 반말을 사용하도록 이끈다.
동생들에게 ‘아가씨,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동기간을 부르는 호칭이 아니라 신분제가 없어진 지가 언젠데 하인이 주인집 자녀를 부르는 말로 동생들을 부르고 있었으니 말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호칭을 통해 여성들은 결혼을 하면서 시집에서 정확히 어떤 신분이 되었는지를 확인받게 된다.
■ 가족 서열과 나이 서열의 역전
가족 호칭의 문제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형제자매들이 결혼을 하면 상황이 더 심각해질 수 있다. 결혼을 통해 만들어진 가족 서열은 대체로 배우자를 중심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며느리 사이에서 벌어지는 호칭어 관련 갈등이다. 남편의 형이 결혼한 배우자의 나이가 자신의 아내보다 어린 경우 동서지간에 벌어지는 갈등이 대표적이다. 이때는 나이에 무관하게 남편의 서열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 소위 ‘전통’이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손위 동서랍시고 ‘동서’라고 부르며 만나자마자 반말을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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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부르는 말 즉 호칭어는 말끝의 상대 존대를 결정하기 때문에 ‘동서’라고 부르면 해체나 해라체 혹은 아무리 높여도 하게체를 쓰며 하대를 하는 것이 한국어의 문법이다.
둘만의 문제라면 서로 터놓고 서로 편한 대로 부를 수도 있겠지만 가족 호칭어 문제는 당사자들 사이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다.
남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결혼을 해서 아내의 오빠나 언니가 지신보다 나이가 한참 어린 경우 똑같은 문제가 벌어진다. 아내와 나이 차이가 많은 경우에는 더욱 그럴 가능성이 높다. 이럴 경우도 아내의 가족 내 서열에 따라야 한다. 아내의 오빠에게는 ‘형님’, 아내의 언니에게는 ‘처형’이라고 불러야한다. 한참 어린 아내의 오빠에게 ‘형님’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면 문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남성의 경우는 여성의 경우보다 이런 상황을 피하기가 훨씬 쉽다. 반면에 여성의 경우는 피하기가 쉽지 않다.
■ 가족 호칭어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그까짓 호칭이 뭐라고!’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호칭어, 특히 가족 호칭어 문제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가족의 행복을 좌우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행복한 가족의 한 가지 공통점은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소통이다.
소통이 원활하려면 기본적으로 서로 말을 해야 한다. 말을 하지 않는데 소통이 원활할 수는 없다. 서로 말을 하려면 서로 불러야 한다. 그런데 한국어는 공손한 장면에서 너를 너라고 부르기 어려운 몇 안 되는 언어라서 상대와 이야기하기 위해 ‘너’를 대신할 호칭어가 필요한 특징이 있다. 그리고 한국어의 높임법은 호칭어와 이 호칭어가 이끄는 말끝으로 실현된다.
남성의 가계를 중심으로 모이게 되는 가부장적인 명절 풍속이 낳은 명절 증후군 중 하나가 가족 호칭 문제가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지난 몇 년간 명절 때마다 가장 많이 소비되는 기사 중 하나가 성별 비대칭적인 가족 호칭의 문제라는 것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집안이 어떻다. 전통이 어떻다는 훈수를 두는 남편 본가 어른들 속에서 ‘새아가, 아가, 며늘아가’는 그야말로 ‘아가’와 같은 마음을 갖지 않으면 버티기가 힘들다. 노동에 있어서도 성 불평등하고 성별 비대칭적이라는 문제를 눈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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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켜보며 몸으로 체험 중인데 말까지 지적을 받으며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하니 속이 그야말로 부글거린다.
■ 가족 호칭어는 왜 달라지지 않을까?
가족 호칭어 문제에서는 첫째 가족 호칭어 모두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둘째 문제가 되는 호칭어는 대부분 결혼으로 새 가족이 된 여성과 관련되어 있다. 셋째 1966년 가족 호칭어 문제에 공감했던 20대들이 지금은 70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가족 호칭어 문제가 세대간 갈등 요소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문제는 말이란 문제의식을 갖기 어려운 존재고, 문제의식을 갖는다고 해도 지속적인 사용을 통해 익숙해져서 입에 붙어버리게 되면, 즉 습관화되면 문제의식이 희석된다는 데 있다. 가족 호칭어 역시 사용해야 하는 시작점에서 느꼈던 불편감은 지속적인 사용을 통해 입에 붙게 되면서 문제의식이 사라진다.
더욱이 나이가 들수록 가족 호칭어의 불편함은 더 이상 자신의 문제가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 문제의식을 가졌던 젊은 여성은 이제 새 가족을 맞이하는 중년의 여성이 되어가기 때문이다. 관계의 역전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권력자들은 문제를 제기하는 젊은 여성을 두고 ‘호칭이 뭐라고 그 난리들이냐. 그냥 불러주지. 그게 뭐 어려운가? 불러주는 데 돈이 들어. 입이 고장 나? 은근히 우리 집안을 무시해서 저러는 거 아냐? 그럼 왜 결혼했어? 결혼하면 당연히 그렇게 불러야 하는데 말이야. 나도 다 그렇게 살았는데 문제가 없잖아. 요즘 애들이란!’이라며 혀를 찰지도 모른다.
■ 불편하다는 당신에게
첫째, 그렇게 부른다고 그런 뜻이 아니다. 둘째, 그렇게 배웠으니 그렇게 써야 한다. 셋째, 뭐 그렇게 예민하게 구느냐. 넷째, 별것도 아닌 것 가지고 문제를 만든다. 그리고 덧붙여 가족 호칭어 문제에는 한 가지 더 있다. 다섯째, 우리의 전통인데 전통을 무시하는 것인가! 전통은 지켜져야 한다.
우선 그렇게 부른다고 그런 뜻이 아니라는 말은 그 표현이 문제가 되는 뜻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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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좀 불편해도 더 그 뜻에 맞는 말로 바꾸는 것이 더 옳은 태도일 것이다. 새로 고침에 드는 비용이 너무 크다고 생각해서, 즉 나의 불편한 때문에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까?
그렇게 배웠으니 그렇게 써야 한다면 우리는 왜 그간 우리의 세계관을 담지 못하는 그 많은 표현들을 새로고침해 왔을까?
예민하게 구는 것은 어려운 것이지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아니다. 언어는 사용을 통해 습관화되면서 감수성이 무뎌지는 특성이 있는 만큼, 감수성을 가지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남들이 갖지 못한 능력을 가진 것이다. 대부분이 못 짚은 것을 대신 짚어준 것이니 칭찬하고 고마워해야 할 일이지 비난하고 조롱해야 하는 일은 아니다.
우리의 전통이니 무시하지 말고 지켜야 한다는 이야기가 가족 호칭어 문제에서는 꼭 등장한다. 그런데 불평등과 차별의 세계관에 기반한 전통도 전통이니 지켜야 하는 것인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렇다면 왜 대한민국은 오랜 군주제의 전통을 지키지 않고 민주주의의 전통을 새로 세웠을까?
■ 추구하는 가치가 담긴 언어를 위해
언어는 개인이 바꾸어야 하는 것이지만, 개인적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언어는 사회적 약속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사회적 합의가 없이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진다면 하루아침에도 바꿀 수 있는 것이 언어다. 하루아침에 우리는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바꾸었고, 간호부를 간호원으로 그리고 간호원을 다시 간호사로 바꾸어 왔다. 이렇게 사회적 합의를 통해 일제강점기의 잔재를 언어에서 걷어 내왔고 차별과 불평등의 언어를 지속적으로 새로 고침 해 가고 있다. 이제는 가족 호칭어에 숨어 있는 불평등과 차별의 요소를 걷어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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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곱 번째 강의 : ‘외국인’은 누구인가?
- 언어로 준비하는 대한민국의 미래 -
■ 외국인의 페르소나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는 미국 국적을 가진 교수 한 명이 있다. 제프리 할러데이(Jeffrey Holliday) 교수다.
할러데이 교수는 한국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고 있는 ‘외국인’이라는 단어가 매우 흥미롭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한국 사람들은 흔히 ‘외국인’이라는 단어를 세 가지 의미로 사용하는 것 같다고 했다.
① 대한민국 국적을 가지지 않은 사람, ② 한민족이 아닌 사람, ③ 한국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 특히 한국 사람들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민족의 정체성, 즉 외모를 가지고 외국인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이어서 그는 한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외국인에 대한 고정관념 중에 흥미로운 것이 ‘외국인은 영어를 할 줄 안다’. ‘외국인은 한국어를 못한다’는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했다.
■ 내국인만 보세요
경주에 가서 여행 정보를 얻으러 안내소를 들렀을 때였다고 했다. 안내소에 들어가니 안내 책자가 구비되어 있는데 안내 책자의 구분이 흥미로웠다는 것이다. 안내 책자가 ‘내국인용’과 ‘for foreigner’로 나뉘어 진열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내국인용’이라고 표시된 곳에는 한국어로 안내된 안내 책자가 진열되어 있었고 ‘for foreigner’라는 표지가 붙어 있는 곳에는 한국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된 안내 책자가 놓여 있었다고 했다. 자신은 한국어로 된 안내 책자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궁금해서 한국어 책자를 잡고 싶었다. 그런데 그 안내 책자는 ‘내국인용’이라고 쓰여 있는 곳에 진열되어 있어서 집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한국어를 못하는 내국인은 내국인이 아닌가? 또 영어를 못하는 사람은 ‘for foreigner’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할까? 안내 책자의 분류 기준은 언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냥 언어별로 분류해 두면 안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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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급자 중심의 분류 기준
안내 책자를 만들어 관광 안내소에 비치하는 일은 그 자체로 친절을 베푸는 일에 속한다. 그러니 사용자들에게 소외감을 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런 분류를 했을 리는 없다. 오히려 그냥 비치하지 않고 나름대로 사용자들의 편의를 고려한 행위였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사용자들이 사용하면서 소외감을 느꼈다면 소외감을 주고자 하는 의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변명이 되지 못한다.
■ ‘외국인’의 사전적 의미
가. 외국인 ① 다른 나라 사람.
② <법률> 우리나라의 국적을 갖지 않은 사람. 법률상의 지위는 원칙적으로 한국인과 동일하지만, 참정권, 광업소유권, 출입국 따위와 관련된 법적 권리에 대해서는 제한을 받는다.
나. 내국인 : 자기 나라 사람을 다른 나라 사람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
이처럼 외국인의 뜻풀이 어디에도 외모나 모국어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일상적으로나 법률적으로나 외국인인지 아닌지를 가르는 기준은 대한민국 국적의 소지 여부다.
■ ‘외국인 주민’은 누구일까?
행정안전부는 통계청의 인구주택총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매년 11월 1일 기준 ‘지방자치단체 외국인 주민 현황’을 발표한다.
<2019년 외국인 주민 유형별 현황>
0 외국인 주민 합계 : 남 1,184,176명 여 1,032,436명, 계 2,216,612명
(53.4%) (46.6%)
0 한국 국적을 가지지 않은 자 : 외국인 근로자 515,051명, 결혼 이민자 173,882명, 유학생 160,610명, 외국 국적 동포 303,245명,
기타 외국인 626,13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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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한국 국적 취득자 185,728명
0 외국인 주민 자녀(출생) : 251,966명
실제로 ‘한국 국적 취득자’는 한국 국적자임이 너무나 분명하고 ‘외국인 주민 자녀’ 또한 통계설명자료에서 용어 조회를 해 보면 ‘외국인 또한 귀화한 자의 자녀로서 국적법 제2조(출생에 의한 국적취득)에 따라 출생과 동시에 한국 국적을 취득한 자’라고 되어 있는 만큼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사람이다.
결국, 행정안전부가 발표한 외국인 주민 통계는 그 표현을 통해 엄연한 대한민국 국적자를 외국인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었다. 한국 국적 취득자, 즉 귀화자와 출생과 동시에 국적을 취득한 대한민국 국민을 한국 국적을 가지지 않은자, 즉 외국인과 동시에 묶어서‘외국인 주민’이라고 칭하면서 말이다.
■ 내가 왜 외국인 주민일까?
외국인 주민 통계 자료에 제시되어 있는 주민 중에는 외국인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적자인 대한민국 국민이 다수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부는 원래 외국인이었지만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여 더 이상 외국인이 아닌 사람이고, 일부는 나면서부터 대한민국 국적을 가졌기 때문에 한 번도 외국인이었던 적이 없는 사람이다.
특히 ‘외국인 주민 자녀’라고 분류된 사람들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부모의 과거 혹은 현재의 국적 때문에 외국인 주민의 범주로 분류되어 ‘외국인 주민’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었던 것이다.
귀화자들을 외국인 주민으로 분류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당신은 대한민국 국적을 얻었다고 해서 당신이 대한민국 국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귀화자나 결혼 이민자의 자녀를 외국인 주민의 범주에 넣는 것은 ‘부모 모두가 원래부터 대한민국 국적자가 아니면 아무리 당신이 태어나면서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다 하더라도 당신은 대한민국 국민이 아닙니다’라는 이야기를 전하는 일이 된다.
■ 다문화 다인종 국가가 코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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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 29일 행정안전부 사회통합지원과에서 낸 보도 자료에 따르면 2019년 11월 1일 현재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소위 ‘외국인 주민’, OECD의 표현에 따르면 ‘이주 배경인구’(외국인, 이민 2세, 귀화자 등)의 수는 222만 명인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는 총인구 대비 4.3%에 해당하는 수치라고 한다.
OECD는 총인구 중 이주 배경인구가 5%가 넘는 것을 기준으로 해당 국가를 다문화 • 다인종 국가로 분류한다.
다음 자료는 2006년부터 2019년 사이 13년 동안의 총인구 대비 소위 ‘외국인 주민’ 비율의 변화 추이를 보여주고 있다.
2006년 외국인 주민 54만명 비율 1.1%. 2010년 외국인 주민 114만명 2,3%
2015년 외국인 주민 171만명 비율 3.4%. 2019년 외국인 주민 222만명 4.3%
2006년부터 자료를 조사한 결과를 보면 지난 13년간 거의 4배 가까운 수치로, 꾸준히 가파르게 외국인 수가 증가한 것을 보면 수년 내에 OECD의 기준에 따른 ‘다인종, 다문화 국가’로 진입할 것이라는 추론은 어렵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다인종 다문화 국가로 진입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 우리의 현실은?
우리는 일상에서 너무나 쉽게 고정관념에 근거하여 타인의 국적을 판단한다. 그래서 흔히 볼 수 있는 대한민국 국적 소유자와 외모나 말씨가 조금 다르면 확인도 하지 않고 너무나도 쉽게 그 사람을 외국인이라고 판단해 버린다.
그리고 그런 외모나 말씨를 가진 사람이 한국 국적자임을 알게 되면 호들갑스럽게 반응한다. “한국 사람이었어요? 한국 사람처럼 안 생겼는데” 혹은 “한국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왜 말이 그래요?”라고 말이다.
또 외모가 일반적인 한국인과 달리 생긴 사람이 한국어를 사용하면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놀란 표정으로 아주 쉽게 “한국어 잘하시네요?”라고 말한다.
이런 질문은 대한민국의 국적을 소지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외모와 말씨를 가져야 한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거듭 강조하지만 외모나 말씨는 대한민국 국적 취득의 필요조건이 아니다.
생각할수록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잘못된 근거와 기준으로 내린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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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그릇된 판단을 두고 왜 자신의 판단 근거와 기준이 옳지 않은지 그 설명을 오히려 상대방에게 요구하는가? 이건 스스로 반성할 일이다.
■ 다양한 사람이 함께 살아갈 대한민국
한두 가지 색깔로만 꽉 채워진 단조로운 미래가 대한민국이 지향하는 미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대한민국의 미래는 더 다양한 사람들이 자신들만의 색깔을 활짝 펼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는 데 이견을 가질 사람은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양한 사람들이 지닌 다양한 색깔을 존중해야 한다. 그리고 그 색깔들이 서로 조화롭게 빛날 수 있어야 한다.
대한민국을 더 살기 좋은, 그래서 더 살고 싶은 곳으로 만드는 것이 대한민국 구성원들의 바람이라면 그 바람이 잘 이루어질수록 대한민국은 더 빠르게 다문화, 다인종 국가가 되어갈 것이다. 더 다양한 사람들이 대한민국의 구성원이 되고자 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대한민국 국적을 가지고 있어도 다수가 아닌 외형적 특징을 지니지 않는다면 아주 쉽게 ‘외국인’이라고 치부해 버리는 한, 또 한국어가 서툴고 말씨가 일반적이지 않다면 바로 ‘외국인’이라고 판단해 버리는 한, 그 사람의 이전 국적이나 그 사람의 부모가 어떤 국적을 가지고 있는가로 그 사람을 규정해 버리는 한, 우리는 아직 그 다양성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고 할 수 없다.
◎ 여덟 번째 강의 : ‘당선인’이 되고 싶은 ‘당선자’
- 언론, 누구의 목소리를 대변하는가? -
■ 이명박 대통령직 인수 위원회 : ‘당선인이라고 불러 주오’
2007년 12월 19일은 제17대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날이다. 열 명의 후보 중 그날 선거에서 국민의 선택을 받은 후보는 48.67%의 득표율을 기록한 이명박 후보였다.
그런데 이명박 당선자 측은 12월 25일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를 꾸린 후 대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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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을 통해 언론에 특별한 요청 하나를 했다. 바로 취임식을 하기 전까지 붙게 되는 호칭을 ‘당선자’가 아니라 ‘당선인’으로 해 달라는 것이었다.
인수위원회 측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법에 당선인으로 되어있다는 점과 중앙선거관리위원회도 당선인증을 발급한다는 점을 들어 당선인으로 표기하는 것이 맞다는 입장을 설명하며 당선인으로 표기해 줄 것을 언론에 당부한다.
하지만 더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당선자의 ‘자(者)’자가 ‘놈 자’이기 때문에 대통령이 될 사람에게 ‘놈 자’ 자가 붙은 표현을 쓰는 것이 불경스럽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사람 인(人)’자가 있는 ‘당선인’으로 불러 달라는 것이 인수위원회 측이 언론에 요청한 진짜 이유였다.
■ 헌법재판소 : ‘당선자라고 써 주오’
그런데 얼마 뒤인 2008년 1월 10일 헌법재판소는 인수위원회 측과는 상반된 내용을 언론에 요청했다. 헌법재판소의 김복기 공보관은 이명박 특검법 관련 헌법 소원에 관한 결정 선고 내용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가급적이면 헌재 결정과 관련해서는 ‘대통령 당선인’보다 헌법에서 규정하는 표현을 써달라”고 취재진에게 요청한 것이다.
실제로 헌법 제67조 제2항과 제68조 제2항에는 대통령 선거에 당선된 사람을 ‘당선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의 당선자 표현 요청 다음 날인 11월 11일, 인수위원회 측은 이동관 대변인을 통해 전날 있었던 헌법재판소의 요청에 대한 인수위원회의 입장을 밝혔다. 헌법재판소의 요청과 관련하여 인수위원회 간사단 회의에서 호칭과 관련해 논의를 벌였으나 ‘당선인’을 당분간 쓰기로 했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2007년 12월 19일 대통령 선거 후 꾸려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당선인’표현 요청, 그리고 1월 10일 헌법재판소의 ‘당선자’ 표현 요청, 그리고 1월 11일 인수위원회의 ‘당선인’ 표현 고수 입장 표명으로 이어진 일련의 호칭 관련 논란 속에서 언론은 과연 어떤 표현을 사용했을까?
■ 언론, 누구의 요청을 수용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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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말 인수위원회의 요청 이전에는 선거에 당선된 사람을 ‘당선자’라고 표현했다. 1990년부터 2007년 사이에 언론 보도에서 사용된 당선자, 당선인의 사용 비율을 비교해 보면 당선자의 사용이 압도적임을 알 수 있다.
해당 시기 11개 중앙지, 5개 방송사가 사용한 당선자와 당선인의 사용빈도 총 3만 8,502회 중 당선자는 총 3만 8,225회, 당선인은 총 277회의 사용빈도를 관찰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언론은 2007년 12월 말 인수위원회의 요청을 받아들이며 빠르게 ‘당선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2008년 1월 10일 헌법재판소가 ‘당선자’라는 표현이 더 헌법에 맞는 표현이라는 입장을 밝혔지만, 이러한 헌법재판소의 입장은 언론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한 듯하다. 언론은 오히려 헌법재판소의 요청 다음 날 이루어진 인수위원회 측의 입장, 즉 ‘당분간 당선인으로 호명하겠다’는 입장을 더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당선자보다 당선인이라는 표현을 선호하는 양상을 보였다.
* 2007년 12월 : 당선자 98.3%, 당선인 1.7%
2008년 1월 : 당선인 84.5%, 2008년 2월 : 당선인 88.9%
■ ‘유권자’가 뽑았는데 ‘당선자’가 싫다니!
사실 선거에 당선된 사람을 일컫는 당선자라는 표현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者’자의 새김이 비록 ‘놈’이기는 하지만 ‘者’에는 비하의 의미가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자’가 비하의 표현이라면 ‘과학자, 철학자, 교육자, 언어학자’ 등 지식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의 직업에 ‘자’ 자가 붙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노동자, 참석자, 후임자, 승리자, 낙관론자, 운명론자’ 등에 쓰인 ‘자’ 자를 두고 문제를 삼는 사람은 없다. 심지어 ‘자’가 비칭이니 ‘인’을 써달라고 요청한 대상이 하필 ‘기자(記者)’였지만 그 요청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기자들은 자신들을 ‘기인’으로 불러 달라고 하지는 않는다.
더욱이 유권자들이 대통령을 뽑았는데 유권자의 ‘자’는 괜찮고 당선자의 ‘자’는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고 본말이 전도된 생각이다.
■ 진짜 바꿔야 할 것은 한자의 새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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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 ‘자’와 ‘인’의 쓰임을 통해 ‘자’에 대한 오해를 풀 필요가 있다. 우리는 흔히 한자 ‘者’를 ‘놈 자’라고 새긴다. 지금 우리의 말 감각에 ‘놈’은 어감이 좋지 않다. 사전을 찾아봐도 ‘남자를 낮잡아 이르는 말’ 혹은 ‘사람을 홀대하여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되어 있다.
하지만 옛말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세종대왕이 지으신 훈민정음 언해본 서문에 등장하는 ‘놈’을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가 있다. 모두 훈민정음 언해본에 있는 ‘제 뜻을 시러 펴지 못할 놈이 하니라’의 ‘놈’을 기억할 것이다.
이 시기 ‘놈’은 평칭이지 비칭이 아니었다. ‘놈’은 평칭으로 일반적인 사람들을 이르는 말이었다. 한자의 새김(훈)에 있는 ‘놈 자’는 평칭일 때 만들어 진 후 그냥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 뿐이다. 그래서 ‘놈 자’ 자가 붙은 것이 비칭인 것 같은 오해가 생긴 것이다.
만약 ‘놈 자’가 불편하다면 현재의 말로 바꿔서 ‘사람 자’라고 하면 된다. 실제로 요즘 아이들은 ‘사람 자’로 배우고 있다.
사실 ‘자’에는 ‘과학자, 언어학자, 교육자’등의 용법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 방면에 전문적 지식을 가진 사람들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경우 ‘자’는 오히려 존대의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니까 애꿋은 당선자를 당선인으로 바꿀 게 아니라 ‘者’의 새김을 ‘놈’에사 ‘사람’으로 바꿀 일이다.
◎ 아홉 번째 강의 : ‘언택트’와 ‘빠던’이 던지는 질문
- 언어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 -
■ 앵커의 입에서 나온 조금은 낯선 단어
2020년 저녁 뉴스, 전날 개막한 한국 프로 야구에 대한 미국 팬들의 반응과 뒷이야기를 전하는 내용이었다. 보통 3월에 개막하는 프로 야구가 코로나 19로 인해 개막이 미뤄지다가 전날인 5월 5일 어린이날 무관중으로 시작한 터였다. 무관중이기는 했지만 오랜 기다림으로 개막전에 쏠린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그런데 한국 프로 야구 개막전에 관심을 가진 것은 한국의 야구팬들만이 아니었다. 코로나 상황이 심각했던 상황이어서 한국 프로 야구의 개막은 전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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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야구 팬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날 저녁 뉴스는 개막전에 대한 미국 야구 팬들의 다양한 반응을 소개했다.
그날 무엇보다 화제가 된 것은 미국 프로 야구에서는 금지된 ‘배트 던지기’ 일명 ‘빠던’에 대한 미국 팬들의 반응이었다. 영어로는 ‘bat flip(배트 플립)’이라고 하는 행위는 타자가 타격을 마치고 홈런성 타구라고 짐작하는 경우 1루로 출루하면서 야구 방망이를 던지는 행위를 일컫는다. 한국 프로 야구에서는 일종의 팬 서비스로 행해지는 이 행위가 미국 프로 야구에서는 상대 팀 투수를 자극한다는 이유로 금지된 행위라서 미국 프로 야구 팬들에게 매우 이색적으로 비친 모양이다.
뉴스를 전하는 앵커의 입에서 나온 ‘빠던’이라는 이 단어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속어 같은 느낌을 주는 단어를 앵커가 말한다는 것도 흥미로웠지만, 그날 뉴스에서 처음 접한 단어인데도 익숙하고 쉽게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빠던’이 정확히 언제 만들어진 말인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국립국어원이 2015년 3월에 발표한 2014년 신어로 선정된 것을 보면 2014년 즈음에 만들어진 단어인 것으로 보여진다.
■ ‘새말’에 대한 두 가지 반응
빠던만이 아니다. 다양한 새말이 지금도 곳곳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새말들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부정적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말이란 누구에게나 불편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부정적인 반응을 요약하면 크게 둘로 나뉜다. ‘너무 어렵다’와 ‘너무 저속하다’가 그것이다.
외래어 투성이의 전문 용어는 영어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면 의미 단위를 쪼개어 그 뜻을 추론할 수 없다. 게다가 소리의 배열이 익숙하지 않아서 입에도 잘 안 붙고 기억도 잘 되지 않는 문제가 있다. 그러니 이 말을 처음 접한 일반 시민들은 어렵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저속하다는 느낌을 주는 새말은 아주 다른 전파 경로를 갖는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만들고 일반적인 사람들이 동조하면서 빠르게 확산되는 특징을 보인다. 최근에는 주로 인터넷 공간에서 만들어지고 전파되는 양상이 두드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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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 단어는 왠지 저속하다는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쉽기 잘 학습되는 특징이 있다.
■ ‘다듬어 써야 할 말’ 대 ‘사라져야 할 말’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두 유형의 새말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아주 다르다는 점이다.
어렵다류의 새말들은 외래어가 대부분이어서 순수한 우리말을 어지럽히는 주범으로 지목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 말들은 한국어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저속한 말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지는 않는다. 대체 표현이 필요한 말이라고 인식될 뿐, 없어져야 할 말이라는 비난을 받지는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반면에 저속하다류의 새말에 대한 태도는 아주 다르다. 같은 새말이지만 이들은 한국어의 품격을 떨어트리는 말이라고 손가락질을 받는다. 다듬어 써야 할 말이 아니라 그냥 없어져야 할 말로 생각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이런 말들은 공식적인 자리에서 쓰는 말로 사용되면 안 되는 말로 인식된다.
‘빠던’이 저속하다류 새말의 예라면 ‘언택트’는 어렵다 류 새말의 예가 될 수 있다. 언택트는 코로나 19초기인 2020년 상반기에 가장 많이 사용된 새말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2020년에 만난 두 단어, ‘언택트’와 ‘빠던’을 통해 우리가 지닌 단어에 대한 태도, 그리고 말이 말해주고 있는 우리의 모습에 대해 생각해 보려 한다.
■ ‘새말’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어렵다류를 대표하는 새말인 언택트는 부정의 의미를 가진 영어의 접두사 ‘un-’과 접촉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영어 단어 ‘contact’의 뒷부분인 ‘tact’와 합쳐져서 만들어졌다. 이런 단어 만들기 방식을 융합이라고 한다.
융합을 통해 만들어진 외래어는 특히 어렵다. 외래어 단어 자체도 낯선데다가 그 단어들을 가지고 새말을 만드는 방법도 우리에게는 익숙한 방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융합 이전 단어를 들어도 다른 나라의 말이니 어려운데 그 단어의 일부만을 합해서 만든 말의 의미를 그 소리와 연결하여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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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코로나 상황에서 언택트 외에도 ‘팬데믹’ ‘인포데믹’, ‘웨비나’ 등 융합의 방법으로 만들어진 외래어를 많이 접했다.
이 단어들도 예외 없이 다듬은 말의 명단에 올랐다. 국립국어원 새말 모임을 통해 ‘언택트’는 ‘비대면’으로 ‘펜데믹’은 ‘(감염병)세계적 유행’으로, ‘인포데믹’은 ‘악성 정보 확산’으로 ‘웨비나’는 ‘화상 토론회’로 다듬어졌다.
한편 저속하다류를 대표하는 빠던은 야구 방망이를 의미하는 ‘빠따’의 ‘빠’와 ‘던지다’의 ‘던’이 결합하여 만들어진 단어다. 같은 류의 표현으로 ‘먹방(먹는+방송)’, ‘갑분싸(갑자기+분위기+싸해짐)’, ‘문상(문화+상품권)’, ‘노조(노동+조합)’ 등등이 이런 방법으로 만들어진 대표적인 새말이다.
이렇게 따져보니 언택트와 빠던은 똑같이 새말이고 긴말을 줄여서 만든 말이다. 그런데도 두 말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아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쪽은 어려우니 다듬어 쓰자고 하고, 다른 한쪽은 저속하니 없애자고 한다.
그렇다면 그 말이 저속하다는 평가를 받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 저속하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
어렵다류의 단어와 저속하다류의 단어를 누가 만들었는지 비교해 보면 저속하다는 평가가 무엇을 두고 이루어졌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어렵다류의 새말은 전문가집단에서 시작되고 전문가집단이 주로 사용하다가 일반에게 퍼진다는 특징이 있다. 반면에 저속하다류의 새말은 일반인이 만들어 일반인 사이에서 퍼지는 것이 특징이다.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말에 주로 한자어와 외래어가 사용되다 보니 한자어와 외래어는 고상하고 고급스럽다는 느낌을 갖게 한다. 반면에 일상에서 주로 사용되는 고유어는 상대적으로 급이 낮다는 인상을 갖게 한다. 이러한 생각이 말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고정관념을 만들어간 것이다. 그리고 그 태도와 생각이 다시 사용되는 말로 인해 각인되는 악순환의 고리가 이어지게 된 것이다.
결국, ‘언택트’는 전문어처럼 느껴지고 ‘빠던’은 전문어가 되기에는 뭔가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게 한 것은 말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가진 말에 대한 태도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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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이브스루 진료’는 왜 ‘차타고 진료’가 될 수 없을까?
코로나 상황에서 대한민국은 창의적인 방법으로 소위 K-방역을 만들어갔다. ‘드라이브스루 진료’도 대표적인 성공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 감염이 의심되는 사람들이 자신의 차를 스스로 운전하고 와서 차에서 내리지 않고 차를 탄 채로 손쉽게 검사를 마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곳이 바로 ‘드라이브스루 진료소’다.
알아듣기 어려운 이름을 붙인 탓에 시민들은 입에도 붙지 않는 말에 소외감을 느꼈고 정부는 그 방법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쓸데없는 노력을 해야 했다. 시민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게 ‘차타고 진료(소)’ 혹은 ‘차탄채 진료(소)’ 같은 이름을 붙였다면 어땠을까?
‘드라이브스루’에 이어 ‘워크스루’도 개발했다. 걸어가면서 진료를 받는 방법이다. 그런데 왜 대한민국 국민들을 위해 만든 진료소 이름이 ‘워크스루 진료(소)’가 되어야 할까? ‘걸어서 진료(소)’ 혹은‘걸으며 진료(소)’라고 하면 모두 쉽게 알아들을 수 있지 않았을까?
만약 ‘차타고 진료(소)’ 혹은 ‘차탄채 진료(소)’와 같은 방법으로 새말을 만들면 단어 같지 않고 뭔가 어색하고 전문성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일까? 정말 그럴까?
■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외래어를 쓰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언어 순혈주의를 고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말 때문에 정보로부터 소외되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다. 쉬운 말이란 듣고 그 뜻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 외래어는 재료 자체가 낯설어서 그 말을 듣고 무슨 뜻인지 쉽게 짐작하기 어렵다.
전문어와 일반어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일반인들의 접근성은 낮아질 수밖에 없다. 정보 접근성이 낮아지게 되면 일반인과 전문인 사이에 정보 비대칭성이 커지면서 두 집단 사이에 정보 격차가 발생하게 된다. 그리고 정보 격차 크기만큼 정보를 가진 쪽이 권력을 갖게 된다.
한국어 사용자들은 익히기 쉬운 문자인 한글 덕분에 문자 접근성에 있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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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글자를 몰라서 글을 읽을 수 없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다. 하지만 일상적이지 않은 어려운 전문어 탓에 전문 영역에 대한 정보 접근성은 매우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2024.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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