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12. 28. 20:57ㆍ서예이론
제3절 王羲之의 서예 미학 사상――尙意의 미학
漢나라 시대 서체의 形象과 體勢를 중심으로 탐구하던 서예 미학은 西晉시대에 이르러 차츰 창작 주체의 心意를 중시하게 되었다. 창작 주체의 心意와 서예 작품의 意韻을 중시하는 사상은 ‘尙意’ 미학으로 정립되었고 왕희지에 이르러 집대성되었다. 서예 미학 이론에서 창작 주체의 心意와 작품의 意韻에 관하여 토론하기까지는 당시의 玄學을 기초로 한 ‘言不盡意’, ‘意以象盡’의 문예 사상이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王羲之는 衛鑠이《筆陣圖》에서 제출한 ‘意前筆後’의 관점을 창작 주체의 心意를 더욱 강조하는 ‘意在筆前’의 주동적 관점으로 발전시켜 ‘尙意’ 미학으로 완성하였다. 그는 玄學 사상을 바탕으로 西晉 이후의 ‘心’과 ‘意’에 대한 심미적 탐구 이론을 계승하여 ‘心意’를 숭상하는 ‘尙意’의 서예 미학 이론 체계를 확립하였다. ‘尙意’의 인식은 서예의 창작과 감상이 더 이상 서체 외형의 아름다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사상과 정서, 그리고 심미적 염원까지 표현하고 감상되어야 하는 예술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왕희지의 서예 미학 이론에서 ‘尙意’ 사상은 기법론, 창작론, 심미론, 비평론 등 다양한 영역에서 나타났다. 그는 서예의 창작에서 창작 주체의 심령인 ‘心意’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心意’는 장군이다.……서예를 하려면 먼저 먹을 갈면서 정신을 가다듬고 조용히 사고하면서 글자의 크기, 높낮이, 수평, 움직임 등을 생각하고 書勢가 서로 잘 이어지게 해야 한다; 뜻이 붓보다 먼저 이루어 진 다음에 글씨를 써야 한다. 만약 수판과 같이 크기가 가지런하고 앞뒤가 딱 맞으면 서예가 아니라 점획일 뿐이다.
(心意者, 將軍也. ……夫欲書者, 先乾硏墨, 凝神靜思, 預想字形大小, 偃仰、平直、振動, 令筋脈相連; 意在筆前, 然後作字. 若平直相似, 狀如算子, 上下方整, 前後齊平, 便不是書, 但得其点劃耳.<題衛夫人[筆陣圖]後>)
서예는 고요하고 맑은 것이 좋다. 뜻이 붓보다 먼저이고 글자는 뜻보다 뒤에 오게 하여 글씨를 쓰기 전에 마음속에 자형이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
(書貴乎沈靜, 令意在筆前, 字居心後, 未作之始, 結思成矣.<論書>)
서예의 창작에서 창작 주체의 心意를 전장에서의 장군에 비유한 것은 전쟁의 승패가 최고 지도자의 전술 전략에 달려 있는 것과 같이 서예 창작의 승패도 창작 주체가 글씨를 쓰기 전에 마음속으로 구상하는 것에 달려 있다고 인식한 결과이다. 글자를 쓰기 전에 문장의 내용과 글자의 수에 따라 서체를 결정하고 자형의 크기, 필획의 굵기, 章法 등을 마음으로 안배하는 것이 창작의 승패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 왕희지가 강조한 창작 미학인 ‘意在筆前’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意在筆前’의 창작 미학은 창작 주체가 일상의 활동 가운데에서 천지 만물의 내면에 함축된 심미적 범주를 융화하여 필획으로 표현하는 것을 중시한 미학이다.
서예의 창작 미학에서 ‘尙意’를 강조한 왕희지는 서예의 감상과 비평에서도 작품의 내면에 함축되어 있는 心意의 미학을 중시하였다. 그는《論書》에서 하나의 작품에서도 모든 글자마다 서로 다른 여러 가지 心意를 갖추길 요구하였고(每作一字, 須用數種意) 意가 같지 않아야 된다(須字字意別, 勿使相同)고 강조하였다. 또한《自論書》에서는 점획 사이에서도 서로 다른 意가 있는 작품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한 작품.(點劃之間皆有意, 自有言所不盡.)으로 평가하였다. 왕희지가 意를 중시한 미학 사상은《全晉文》에서도 나타난다.
왕희지의 서론에 나타난 서예의 창작 미학을 근거로 할 때 그의 미학 이론 체계에서 ‘意’는 ‘有意’임을 알 수 있다. ‘有意’는 이성적 작용으로 이루어지는 思考이기 때문에 창작에서 ‘意在筆前’를 강조하는 것은 사전에 계획적인 안배를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서예는 이미 자연 물상의 외형을 묘사하는 전통 회화의 단계에서 진화하여 점획과 점획의 구성을 통하여 창작 주체의 예술적 영감을 표현하는 예술이다. 따라서 반드시 창작 주체의 주관적 성분인 ‘心意’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와 같은 ‘心意’는 언어와 같은 객관적 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작품과 영감이 서로 통할 때 인식되어진다는 것이 왕희지의 미학 사상이다.
그러나 왕희지의 감상 미학을 근거로 하면 그가 창작과 감상 미학에서 중시한 ‘意’는 서로 같은 개념이 아니라 相輔相成하는 변증적 개념이라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意在筆前’과 같이 창작 미학에서 ‘意’를 강조한 것은 서예의 창작을 창작 주체의 性情, 心態, 情緖 등을 나타내는 주관적 요소가 강한 예술로 인식한 것이다. 이는 명나라 시대의 項穆이 서예의 마음(書心)을 외적인 형태로 이루어 지이 않은 마음속의 형상(未形之相)이라 하고 서예의 형상(書相)을 외적으로 이루어진 마음(旣形之心)이라 한 것과 같은 것이다. 서예는 천지 만물의 외형적 형태가 아닌 그 심미적 범주를 필획과 자형으로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필획과 자형은 곧 창작 주체의 마음에 이루어져 있는 심미적 범주이다. 따라서 ‘意在筆前’의 ‘意’는 필묵의 형태는 물론 심미적 범주도 포함하는 것이다.
왕희지가 강조한 ‘意’의 또 다른 하나의 개념은 서예 작품의 객관적 意趣인 書意이다. 이는 후대의 비평가들이 흔히 말하는 ‘尙韻’의 ‘韻’과 상통하는 개념이다. 그가 “用數種意.”, “字字有別”, “美不可再”, “學書有意”라 한 것은 모두 서예 작품에 표현된 심미적 意趣를 중시한 것이다. ‘意’에 관한 이와 같은 미학 관점은 당시 虞安吉이 제시한 書意의 서예 미학 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虞安吉은 書意를 이해하지 못하면 점획이 상형의 근본을 추구하게 되기 때문에 좋은 서예를 할 수 없다고 하였다.”라 하여 ‘書意’를 중시하였다. 그가 제출한 ‘書意’는 王羲之가 서예의 감상 미학 이론에서 제출한 ‘意’와 일치하는 개념이다. 이와 같은 미학 사상은 서예의 심미적 요구와 취향이 더 이상 ‘法象’의 미학에 머무르지 않고 ‘言不盡意’의 정신적 경지인 ‘心意’와 ‘意趣’에까지 미치고 있었다는 것을 상징한다. ‘書意’의 미학은 莊子의 사상에 나타나는 것과 같이 인간이 추구할 수 있는 매우 높은 정신 예술로 천지 자연과 만물의 조화와 정수에 통달하여 얻어지는 ‘意以象盡’의 경지이다.
왕희지의 창작과 감상 미학에서 강조된 주관과 객관의 ‘尙意’ 미학은 淸나라 시대 鄭板橋의 畵論에서 매우 잘 조명되고 설명되었다. 그는 ‘意在筆前’을 아무런 계획이 없는 ‘胸無成竹’에서 주관적 형태가 있는 ‘心中有數’ 즉 ‘胸有成竹’의 단계를 거쳐 일정한 형태나 법칙에 얽매임이 없는 無心의 경지인 ‘胸無成竹’의 단계에 이르는 과정 가운데의 ‘胸有成竹’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마음속에 형성된 형상(胸有成竹)이 눈으로 본 형상(眼中之竹)이 아니듯이 마음 속으로 계획(意在筆前)한 필획과 자형도 결코 글자가 상징하고 있는 사물의 형상(眼中之竹)은 아니다. 아무런 계획이 없는 ‘胸無成竹’의 단계에서 얽매임이 없는 ‘胸無成竹’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胸有成竹’의 과정을 거쳐야 하듯이 ‘意在筆前’의 과정을 지나면 일정한 법칙에 얽매이지 않는 ‘筆無定法’의 경지에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왕희지의 미학 사상이다.
이상의 고찰로 우리는 西晉시대의 서예 미학에서 조금씩 형성되기 시작한 ‘尙意’의 미학은 東晋시대에 이르러서는 衛鑠과 王羲之 뿐 아니라 당시의 보편적 미학 사상으로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東晋시대는 漢나라 시대부터 이미 싹트기 시작한 ‘法象’의 미학에서 ‘尙意’의 미학으로 전환되었으며 왕희지가 ‘尙意’의 미학을 집대성하였다.
‘尙意’의 미학을 중심으로 하여 王羲之가 추구한 심미적 이상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氣韻生動’이라 할 수 있다. 이는 衛鑠이 ‘筋’과 ‘骨’의 조화를 심미적 이상으로 인식한 미학 사상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그는 서예의 창작에서 氣韻生動의 표현으로 다양한 변화를 조건으로 하는 동태미를 요구하였다.
《論書》에서 “夫書字貴平正安穩. 先須用筆, 有偃有仰, 有欹有側有斜, 或小或大, 或長或短.”
“爲一字, 數體俱入. 若作一紙之書, 須字字意別, 勿使相同. 若書虛紙, 用强筆; 若書强紙, 用弱筆. 强弱不等, 則蹉跌不入.”
“每書欲十遲五急, 十曲五直, 十藏五出, 十起五伏, 方可謂書.”
《題衛夫人<筆陣圖>後》“若平直相似, 狀如算子, 上下方整, 前後齊平, 便不是書, 但得其點劃而.”
이와 같이 그는 서예의 창작에서 필획, 결구, 결자, 자형 등의 변화는 곧 창작주체의 다양한 의취를 표현하는 수단이라 인식하고 서예의 창작에서 다양한 영역의 변화를 중시하였다. 서예가 비록 平正安穩의 조화가 중요하지만 그것이 다양한 변화 속에서 이루어 질 때 더욱 가치가 있으며 만약 천편일률적인 算子와 같으면 생동적인 의취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필획과 자형의 다양한 변화를 요구한 왕희지의 미학이론에서 관건이 되는 것은 ‘書意’의 구별이라 할 수 있다. 서예의 창작에서 다양한 운필의 변화가 이루어지고 또 다양한 자형을 구성할 때 ‘書意’는 자연히 달라진다는 것이 “字字意別”의 미학이다. 필획과 자형이 아무런 변화를 이루지 않고 평정한 산자와 같으면 ‘意別’은 이루어 질 수 없으며 ‘意別’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당연히 기운이 생동하는 작품이 탄생할 수 없다는 것이 왕희지가 강조한 변화의 미학사상이다. 그는 이와 같은 변화를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三過折筆, 擊石波者, 隼尾波등의 필법을 제출하고 서예의 동태미를 요구하였다.
《題衛夫人[筆陣圖]後》에서 “每作一波, 常三過折筆; 每作一□, 常隱鋒而爲之; 每作一橫劃, 如列陣之排雲; 每作一戈, 如百鈞之弩發, 每作一點, 如高峰墜石; □□□□, 屈折如鋼鉤; 每作一牽, 如萬歲枯藤; 每作一放縱, 如足行之趣驟.”
“若欲學草書, 又有別法. 須緩前急後, 字體形勢, 狀如龍蛇, 相鉤連不斷, 仍須棱側起伏. 用筆亦不得使齊平大小一等.”
“其草書, 亦復須篆勢八分古隸相雜. 亦不得急. 令墨不入紙. 若急作, 意思淺薄, 而筆卽直過.”
“惟有章草及章程行狎等, 不用此勢, 但用擊石波而已. 其擊石波者, 缺波也. 又八分更有一波, 謂之隼尾波.”
이와 같이 그는 서예의 필획, 결구, 포치에 있어서 변화를 요구하여 遒麗流便한 動態美를 추구하였다. 楷書에 있어서는 隱鋒, 陣雲, 弩發, 墜石, 鋼鉤, 萬歲枯藤, 趣驟등의 동태미를 요구하였고 緩急과 起伏의 변화와 筆勢의 끊이지 않는 흐름을 요구하였으며 이와 같은 요구가 충족될 때 비로소 氣韻生動의 작품이 탄생한다고 하였다. 다양한 변화속에서 필묵이 靈動할 때 비로소 창작주체의 주관적 의취가 표현될 수 있으며 주관적 의취가 표현되어야 다양한 書意가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이 왕희지의 미학체계에 나타난 변화와 동태미 그리고 書意의 관계에 관한 미학사상이다. ‘尙意’의 미학을 바탕으로 변화와 동태미를 추구한 왕희지는 서예의 창작실천에서도 그대로 응용하였다고 평가받고 있다.
이상의 토론을 통하여 본 결과 衛鑠과 왕희지가 추구한 서예미학사상은 당시에 성행하던 玄談의 ‘言不盡意’, ‘意以象盡’ 사상을 토대로 한 ‘尙意’를 중심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진시대에 형성된 尙意의 서예미학사상은 남조시대의 서예미학에도 직접적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중국서예미학의 핵심사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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