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3. 9. 21:12ㆍ서예작품방
아름다운 동구전
장소; 대구동구문화체육회관
일시; 2009년 4월 4일 - 19일
公山千丈倚峻層(공산천장의준층) 팔공산 천길 높이 가파르게 솟아 있고
積雪漫空沆瀣澄(적설만공항해징) 쌓인 눈 하늘 가득 이슬 되어 맑구나
知有神祠靈應在(지유신사영응재) 사당 모시니 신령님 應感 있어
年年三白瑞豊登(연년삼백서풍등) 해마다 서설 내려 풍년을 점지하네
沆瀣(항해) : 이슬기운
三白瑞(삼백서) : 정월에 오는 서설
豊登(풍등) : 오곡이 많이 잘 여묾, 풍작
八公山은 大邱盆地(대구분지)의 東北部를 병풍처럼 가리고 있는 산줄기이다. 新羅 때는 아버지의 산, 즉 父岳(부악)이라 하였다가, 나라의 중앙에 있다 해서 中岳(중악)이라고 불렀고, 또 여기서 나라의 公的儀式(공적의식)인 祭天壇(제천단)을 설치하게 되어 公山이라 하였다.
그 후 후삼국시대에 王建(왕건)과 甄萱(견훤)의 이곳 공산 전투에서, 王建이 포위당하여 죽게 된 것을 申崇謙(신숭겸), 金樂(김락)등의 여덟 공신이 장렬히 전사하고 王建을 구했다 해서 八公山이라 부르게 되었다.
최정상인 비로봉이 해발 1,192m로 중앙에 우뚝 서 있고, 좌우로 염불봉, 삼성봉이 양어깨처럼 펼치고 東西로는 동봉, 서봉이 東南으로 관봉, 노적봉, 인봉, 수봉, 북으로 시루봉, 西로 파계봉을 너머 가산에 이르는 環狀山脈(환상산맥)을 이루어 영천, 달성, 군위, 칠곡을 깔고 앉은 靈山(영산)이다. 동화사, 파계사를 비롯하여 부인사, 송림사, 갓바위 등의 크고 작은 사찰, 암자와 기암절벽 및 계곡, 폭포로 사시사철의 절경을 이루고 또한 정상 바로 아래까지 케이블카가 운행되는 등, 대구 시민에게는 가장 큰 휴식처와 등산로를 제공해 주고 있다.
大邱十景(대구십경)
第一景 : 琴湖泛舟(금호범주, 금호강의 뱃놀이)
第二景 : 笠巖釣魚(입암조어, 입암의 낚시)
第三景 : 龜峀春雲(귀수춘운, 거북산의 봄 구름)
第四景 : 鶴樓明月(학루명월, 금학루의 밝은 달)
第五景 : 南沼荷花(남소하화, 남소의 연꽃)
第六景 : 北壁香林(북벽향림, 북벽의 향림)
第七景 : 桐華尋僧(동화심승, 동화사의 중을 찾음)
第八景 : 櫓院送客(노원송객, 노원의 송별)
第九景 : 公嶺積雪(공영적설, 팔공산에 쌓인 눈)
第十景 : 砧山落照(침산낙조, 침산의 저녁노을)
大邱十景을 노래한 徐居正의 七言絶句 十首가 傳해오고 있다. 원래 十詠인 것을 大丘十詠, 大丘十景, 達城十詠, 達城十景 등으로 말하기도 한다. 당시는 大丘로서의 邑城이 축조되지 않았고 達城(현재의 달성공원일대)이 그 堡障이 되어 慶尙道都觀黜陟使(경상도도관찰출척사)가 巡察할 때이며, 大丘邑에는 知事를 두고 있던 때이다. 일찌기 達城이 達城徐氏의 世居地였음을 지금의 달성공원 경내에 1971년에 세워진 達城徐氏遺墟碑(달성서씨유허비)가 그 來歷을 말해주고 있다.
徐居正(서거정, 1420-1488)의 字는 剛中, 號는 四佳亭 또는 亭亭亭이다. 世宗 2년(1420)에 태어났고, 太宗의 王權確立에 佐命一等功臣인 陽村 權近의 外孫이기도 한 그는 世宗 26년(1444) 式年文科에 오른 후 9代 成宗까지 6朝의 임금을 섬기는 동안 6曺判書를 두루 지냈으며 兩館大提學과 左贊成에 佐理功臣三等으로 達城君에 封해지고 諡號(시호)는 文忠이다. 그의 학문은 天文(천문), 地理(지리), 醫藥(의약), 卜筮(복서), 星命(성명)등에 능통한 대학자로 海東의 奇才라 일컬을 만큼 국가의 高文大冊이 거의 그의 손에서 나온 것이니 歷代年表(역대년표), 經國大典(경국대전), 東國通鑑(동국통감), 筆苑雜記(필원잡기), 東文選(동문선), 新撰輿地勝覽(신찬여지승남), 四佳集(사가집) 등외에도 많은 저서가 있다.
大邱의 十景은 成宗 12년(1481), 王命에 의해 盧思愼(노사신)등이 중국 明나라의 大明一統誌(대명일통지)를 본 떠서 만든 各道의 地理誌인 東國輿地勝覽(동국여지승람)을 中宗 25년(1530)에 역시 왕명에 의해 보완하여 증보한 新增東國輿地勝覽(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다.
大邱(대구)는 이른바 內凌盜地(내릉도지)로 新川을 軸으로 하여 北東部의 八公山 줄기와 南의 最頂山(최정산) 및 琵瑟山(비슬산)줄기로 둘러 싸여 있고 西쪽으로 약간 트여 있는 나팔모양을 하고 있다.
新川은 비슬산 줄기에서 發源하여 南部山地의 谷口인 嘉昌(가창)에서 龍頭부리(용두방천)를 거쳐 시내로 들어 와서 배나무 샘(지금의 梨泉洞)과 水道山(대구수도관리소가 있는 산, 기린의 모양을 하고 있다 해서 기린산이라 했음) 동쪽 기슭을 스쳐 건들 바위를 지나 이곳에서 한바퀴 돌아 깊은 물 구비를 만들고 다시 連龜山(연구산, 제일여중이 있는 산), 蛾眉山(아미산, 대구 향교가 있는 산, 모양이 나비눈썹 같다고 하여서) 밑으로 해서 東山(신명여고 일대의 산)을 지나 달성공원 앞으로 해서 날뫼(飛山洞)로 하여 達川(達西川)으로 흘러 八達津(팔달진, 팔달교부근)에서 琴湖江(금호강)과 合流하던 것을 正祖 1년(1777)에 大丘判官(대구판관)으로 부임한 이서가 1778년에 사재를 들여 해마다 겪는 대구지방의 물난리를 막고자 물길을 지금의 新川으로 돌렸고 新川을 현재의 백사부리(서변 잠수교와 침산교부근)에서 琴湖江으로 流入되게 하였다. 그 공덕을 기리기 위해 그가 죽은 3년 후인 1797년에 李公堤碑(이공제비)가 세워지고 지금까지 매년 1월 14일에 대백프라자 부근인 중구 봉덕 1동 655번지의 新川堤防(새내둑)에 移建된 李公堤碑閣(이공제비각)에서 방천시장 번영회가 중심이 되어 祭를 올리고 있다.
그런데 新增東國輿地勝覽(이하 新輿覽이라 약칭함)의 山川條(산천조)에서 笠巖(입암, 삿갓바위)을 「在新川中其形如笠故名(재신천중기형여립고명)‥‥‥」이라 했다. 그렇다면 여기서의 新川은 무엇이며 248년 후인 正祖 2년(1778년)에 判官 李淑(이숙)가 私財를 들여 대구의 수로를 변경하여 당시 교동에 있었던 孔子廟(공자묘, 향교)의 侵水 위험까지도 막았다던 新川은 무엇이냐 하는 의문이다. 新川이 되기 이전의 내 이름을 알길 없어 1778년 이후의 新輿覽의 重刊 과정에서 이미 굳어진 新川으로 改字했는지 아니면 1530年의 新輿覽에서도 대구의 수로를 변경한 적이 있어 新川이라고 하였고 그 후의 李判官(이판관)의 수로 변경도 新川이라고 아울렀는지, 아니면 「새내」의 뜻에서 다른 뜻이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그나마 大邱十景(대구십경)이 있었기로 근 500년 전의 大邱風光(대구풍광)이 이러했으리라고 나름대로 그 情景을 그려볼 수 있게 됨은 다행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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