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2. 1. 10:42ㆍ독서후기
세계가 사랑한 한국
- 외국인 전문가 10인이 한국을 말하다 -
☆ 들어가는 말《 한국을 브랜딩 하라 》
♣ 필립 라스킨 (Phillip Raskin )
0 미국 보스턴 대학 역사학 전공. 커뮤니케이션 전문가
0 1990년부터 출판, TV, IT 분야 업무
0 1997 버슨 마스텔러 한국법인에 근무하면서 한국과 인연
* 버슨 마스텔러 : ‘2007 올해의 글로벌 홍보회사’에 선정된 세계 굴지의 PR 컨설팅 전문업체
0 현재 버슨 마스텔러 코리아 사장
0 한국 브랜드 위원회 외국인 자문단의 일원
■ 미지의 땅에 오다
전문가의 눈으로 볼 때. 한국의 브랜딩은 만만치 않은 과제이다. 한국은 이웃한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국가 인지도가 떨어진다. 급격한 경제발전과 사회의 변화로 인해 현재의 모습은 완전히 서구 문화에 기울어 있는 듯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그 안에 동양적인 색채 또한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문제는 한국을 생각하면 바로 떠오르는 이미지나 상징이 없다는 점이다. 한국의 에펠탑, 한국의 자유의 여신상, 한국의 오페라하우스가 없다. 영화의 배경 화면으로 친숙하게 접했던 경치도 없고, 밋밋한 산에 세워진 ‘할리우드’의 사인도 없다. 한국을 직접 접해 보지 못한 많은 세계인들에게 한국은 여전히 아리송한 ‘미지의 땅’이며 ‘은자(隱者)의 왕국’이다. 어쩌면 한국의 가장 인상적인 특징이 간단하게 상징화하기 어려운 것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세계인들의 뇌리에 한국을 대표하는 국가 이미지가 박혀 있지 않다는 것은 세계가 아직 한국을 뚜렷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내가 한국 땅을 처음 밟은 것은 1998년 11월,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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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 신분인 아내가 한국에 발령받으면서의 일이다. 나로서는 아시아에 온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아무런 정보도 없이 ‘외교관’이라는 다소 특수한 입장에서 한국을 접하긴 했지만, 얼마 되지 않아서 우리는 턱없이 적었던 사전 정보를 무색케 하는 강렬하고 복잡한 한국의 실제 모습을 직접 체험하며 배울 수 있었다. 제일 먼저 강한 인상을 받은 것은 한국이 이웃 나라들과 뚜렷이 구별되는 독자적인 역사와 문화를 지닌 나라라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실제로 한국에서 생활해 가면서 한국의 매력을 점점 더 깊이 느낄 수 있었다. 한국은 이방의 외국인을 따뜻하게 맞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가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는 곳에 존재하는 듯했다. 밝은 동시에 어두운 느낌, 한국은 단순 명쾌한 하나의 상징이나 이미지가 아니라 이처럼 복합적인 느낌으로 다가왔고, 한국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만큼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 한국을 맛 본 사람은 한국에 돌아온다.
한국에 대해 전혀 모르고 시작했던 첫 번째 한국 생활이 끝나고 우리 부부는 일단 한국을 떠났지만, 몇 년 안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주위에서도 그런 경우를 많이 본다. 한국을 좋아하는 외국인 중에는 나처럼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사람이 많은데, 전해 들을 때는 알 수 없는, 직접 살아 보아야 느낄 수 있는 매력 때문일 것이다.
한국은 국내의 경험을 국외에서 완전하게 재창조하지 못하고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한국의 입장에서 가장 효과적인 브랜딩 유형의 하나로 거론되는 것이 ‘강제적인 관광’ 이다. 국제행사나 회의 등을 개최해서 그런 기회가 아니면 한국에 오지 않을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예를 들어 ‘88 서울 올림픽’ 가난과 분쟁에서 벗어나 발전과 안정의 단계로 접어든, 그야말로 ‘한강의 기적’을 이룬 한국의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당시 한국을 찾았던 이들이나 텔레비전으로 올림픽을 시청했던 외국인들에게 이 경험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한국에 대한 인상을 결정짓는 중요한 체험으로 남아 있다. 한국의 올림픽 유치는 경제적 이득과 국가 이미지 향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성공적 사례로 손꼽히며, 많은 나라들이 오늘날까지도 한국의 사례를 염두에 두고 올림픽 경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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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하고 싶어 한다.
그 외에도 월드컵, 국제 영화제, G20 정상회의 등 국제행사를 통해 한국이 세계에 알리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명확히 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글로벌 시대를 맞아 국가 브랜드의 가치는 세계적으로 더욱 높아지고 있는 추세이다. 이런 시점에 한국은 국가 브랜드를 구축하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해야 할까? 충분한 매력과 잠재력을 지녔음에도 국가 브랜드 구축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이 어떤 접근 방식을 택해야 성공할 수 있을까? 이 글에서 나는 한국의 진정한 매력을 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 국가 브랜드 구축의 중요성과 그 방법에 대해 말해 보고자 한다.
■ 브랜드를 조직하는 철학
브랜딩의 역사는 아마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서로에게 이름을 붙이고 상대의 눈에 나를 돋보이게 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을 때 이미 ‘브랜딩’ 개념은 탄생한 셈이다. 자신을 홍보하는 기술은 엄청나게 진화하고 있지만 기본 전제는 언제나 같다. 브랜드의 핵심은 ‘가치의 명확한 표현’이라는 사실이다. 오늘날 세계 시장에서는 제품이나 서비스의 장점, 다른 것과 구별되는 특징을 최대한 짧은 시간 안에 인상적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세계적인 브랜드 컨설팅 기업의 창업주인 월터 랜도(Walter Randor)의 브랜드의 개념이 널리 통용되고 있다. 그의 이름을 딴 회사는 수 십 년 동안 수많은 기업들에게 시각적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만들어 주었다. 랜도는 말한다. “간단히 말해서 브랜드는 약속입니다. 이 제품, 이 서비스가 우리 회사 것이라고 인정하고 보증함으로써 훌륭한 품질로 고객을 만족시키겠다고 약속하는 것이죠.”
이 ‘약속’은 고객이 그 기업에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 이러한 ‘약속’이 머릿속에 고착된 이미지와 어긋나면 고객은 당황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디즈니가 제작한 영화에 섹스와 폭력이 난무한다면 관객은 충격에 휩싸일 것이다. 디즈니는 반세기가 넘도록 건전하고 가족 친화적인 이미지를 강화해 왔기 때문이다. 이런 이미지가 바로 디즈니가 고객에게 한 약속이다. 이것은 고객 자신이 의식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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릿속에 저장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디즈니 영화를 볼 때면 자연스럽게 고품질의 애니메이션이나 맑고 명랑한 분위기, 현명한 등장인물, 긍정적인 교훈을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좋은 브랜드는 자신이 기업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객 스스로 알아차리게 한다.
브랜딩은 18세기 후반 산업혁명 때부터 시작되어 TV의 발달과 함께 1950년대 중반 미국의 광고 붐에서 본격적인 진가를 발휘한다.
이 시기에 전성기를 맞이했던 미국 마케팅 협회는 1960년에 공식적으로 브랜드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제품이나 서비스를 식별하고 경쟁자의 그것과 구별하기 위해 붙인, 상징, 디자인 또는 그것들의 결합.” 이것이 오늘날 가장 자주 인용되고 있는 브랜드의 정의이다.
■ 국가 브랜딩은 왜 어려운가.
제품 브랜딩 : 소비자의 감정과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제 요소들을 ‘브랜드의 접점’이라 하는 데 그 제품 모두가 일정 기준에 도달하도록 생산, 운송, 판매 및 광고, 마케팅, 포장 등 전 과정에 거친 엄격한 관리가 필요하다.
기업브랜딩 : 제품 브랜딩 보다 훨씬 어렵고 광범위하며 기업의 가치, 비즈니스 활동, 기업의 유니폼을 입고 다니는 사람, 그 사람이 지닌 명함까지 기업이 추구하는 방향과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국가브랜딩
- 2009 국가 브랜드 순위 : 1위 미국, 2위 독일, 3위 프랑스, 4위 영국, 5위 일본, 6위 이탈리아, 7위 캐나다, 8위 스위스, 9위 호주, 10위 스웨덴, 스페인, 31위 대한민국
- 국가 브랜드는 국가의 정치적 행동, 경제, 위치, 관광지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국민까지, 고려해야 하는 요소가 너무나 많다. 사실상 한 국가의 인상은 이러한 요소들에 대한 종합적인 평가로 결정된다기보다 일부 항목만을 근거로 형성될 때도 많다. 우연히 어떤 나라에 방문했다가 무례한 국민 한 사람을 만나면 그 나라에 대한 이미지는 일시에 추락해 버린다. 결국 현재 국내와 해외에 살고 있는 5,000만 명의 한국인 모두가 한국의 국가 브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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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대표하게 되는 것이다.
국가 브랜드 순위는 기준이 모호해서 그 순위가 반드시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국가 브랜드는 일부분 한 나라의 경제, 사회 여건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군사적 갈등을 끊임없이 겪는 나라보다는 오랫동안 안정을 유지해 온 나라의 이미지가 더 나은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
■ 국가 브랜드의 본질
예를 들어 한 국가로서 프랑스를 브랜딩하려 한다면 와인이나 에펠 탑, 크레이프에만 초점을 맞출 수는 없다. 이런 특징 외에도 기나긴 갈리아 역사, 전쟁으로 피폐했던 근대 역사, 유럽의 지배구조, 민주주의, 철학, 샹송이나 음식 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특징까지 고려하려면 한 국가의 슬로건을 만든다는 것은 훨씬 복잡한 일임을 금방 깨달을 수 있다. 관광의 분야를 넘어서는 한 국가의 브랜드를 구축한다는 것은 그래서 어렵다. 한국이 직면한 문제도 바로 이것이다.
* 크레이프(Crepe) : 겉면에 오글오글한 잔주름을 잡은 직물, 주름진 비단의 일종, 밀가루에 계란, 설탕, 우유, 버터 등을 섞어서 살짝 구운 것. 등....
데이비드 아커와 케빈 켈러의 브랜딩 모델
- 브랜드의 다양한 요소를 몇 가지 주요 개념으로 집약한 것을 ‘브랜드의 본질’이라 함. 예를 들어
맥도날드 - 기쁨, 나이키 - 스포츠맨 정신, 디즈니 월드 - 마술같은 재미 등 고객이 브랜드와 마주했을 때 느끼는 핵심적인 감정
- 따라서 국가 브랜딩의 과제는 국가의 여러 특징들을 모두 내포하는 적절한 상위 개념을 만드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결과적으로 매우 포괄적이고 효과적인 브랜드가 생겨날 때가 많다. 한국 역시 국가 브랜드를 구축하기 위해 일단 자국의 브랜드 본질을 파악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본다.
■ 모든 장점을 가진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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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외국인의 신분으로 한국에 살고 있고 또한 홍보 전문가이기에 “한국을 어떻게 브랜딩 해야 할까요?” 하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사적인 자리에서든 공적인 자리에서든 이런 주제를 놓고 토론을 벌이다 보면 느끼는 점이 있다. 대개 한국인은 이 질문에 대한 구체적인 답을 원한다. 어떤 단어, 어떤 상징물, 어떤 이미지가 한국을 브랜딩하는 데 제일 잘 먹힐까? 사찰이 좋을까? 아니면 김치? 산이나 휴대전화로 할까? 그것도 아니면 ‘다이내믹’이란 단어일까?
대개 이런 토론에서 거론되는 한국의 이미지는 전통적인 부분과 현대적인 부분을 넘나든다. 종종 한국은 두 가지를 결합하려 애쓰지만 외국인, 특히 서구인에게는 어느 한쪽도 제대로 와 닿지 않고 뒤죽박죽일 때가 많다. 한국에는 유서 깊은 전통 문화가 있지만, 다른 국가의 역사에 비해 그다지 두드러지는 것은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인터넷과 무선 인프라가 세계 일류 수준인 것은 사실이지만, 제조업이나 서비스업 전반에 걸쳐 다 일류인 것도 아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한국을 바라보는 관점은 조금 다르다. 그들은 특정한 상징, 제품 등이 아니라 한국인을 통해 드러나는 한국의 정신이야말로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한국만의 매력이라고 이야기 한다. 새벽 3시에도 여전히 생동감 넘치는 거리. 2차를 외치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포장마차, 불가능에 가까운 일을 해내기 위해 밤낮없이 열성적으로 일하는 기업 등에서 그들은 한국만의 정신을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예들은 한국의 전반적인 특징을 나타내는 모습들이긴 하나, 여기저기 산만하게 흩어져 있고 일견 사소해 보이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커와 켈러의 모델에서처럼 이러한 요소들을 묶어줄 상위 개념이 필요하다. 이 상위 개념이 바로 한국의 브랜드 본질인 것이다.
■ 한국을 나타내는 세 가지 표정
내가 전에 몸담았던 기업에서는 한국의 국가 브랜드 구축을 위해 기존의 정부 정책을 조사하고 외부 전문가의 의견을 구했다. 또한 2만 5,000명 이상을 대상으로 설문을 실시하고, 연구 보고서, 백서, 브랜드 모델 등을 검토했다. 한국 브랜드에 대해 실시한 이 연구는 수십 건의 조사를 거쳐 한국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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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된 주요 특징을 40개 정도로 압축한 뒤 최종적으로 세 가지 요소를 선정했는데 그 중 첫째는 예상대로 ‘역동성’이었다.
역동성은 한국인이 자신들의 특징으로 믿고 있는 동시에, 실제로 국가 홍보에 이미 사용되고 있는 요소이다. 우리가 조사를 거치면서 발견한 한국의 역동성은 국가 이미지에만 한정되지 않고 한국인 개개인의 생활에도 해당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한국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머지 두 가지는 ‘유대감’과 ‘성취욕’이었다. 특히 성취욕은 다른 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특징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서 훨씬 뚜렷하고 강력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밝혀졌다.
60년 전 전쟁의 폐허에서 연이어 달성한 경제성장, 불과 두 세대 만에 이룬 ‘한강의 기적’ 1997년 IMF 때 전 국민이 자발적으로 기금을 조성하는 모습 등,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기질이 바로 한국을 정의하는 정신의 일부이다. 한국인은 거대한 꿈을 꾸고 이런 큰 꿈에 생명력을 불어 넣을 줄 안다. 역동성, 유대감, 성취욕은 오늘날 한국을 있게 한 세 가지 핵심요소이다.
■ 한국의 ‘록키’가 사랑 받지 못하는 이유
미국인은 자신의 노력으로 역경을 극복한 이야기에 열광한다. 출판 거절 편지로 도배한 저자의 이야기나, 몇 번에 걸친 파산 끝에 마침내 수백만 달러짜리 회사를 건립한 사업가의 이야기나, 가난을 딛고 일어난 국가 지도자의 이야기처럼 말이다. 그런 면에서 1976년에 발표된 영화 ‘록키’는 미국을 가장 잘 대표하는 이야기 일지도 모른다. 실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주인공이 굴하지 않고 자신을 믿고 노력함으로써 마침내 남들의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런 정신을 자국 브랜드로, 또는 자국의 이상으로 사용한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의 국제선 터미널에서 수하물을 찾으려고 기다리는 동안 보았던 텔레비전 영상이 생각난다. 이 미국 홍보 영상에는 첨단 기술이나 역사적인 건물이 등장하지 않았다. 대신 서로 대화하고 어울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비추어졌다. 행복, 자유, 다양성, 기쁨을 표현하는 장면이었다. 그것은 미국의 철학이자 국가 브랜드 그 자체였다.
그렇다면 미국의 ‘록키’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는 데 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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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한국의 ‘록키’가 서먹서먹한 부정적 반응을 동반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한국의 이야기도 미국만큼이나 진실하고 훌륭하다. 한국인이 60년 동안 역경을 극복해 온 이야기는 미국인이 온갖 장애를 무릅쓰고 목표를 성취한 이야기만큼이나 인상적이고 강렬하다. 하지만 한국인 ‘록키’는 미국인 ‘록키’처럼 모두에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코리안 드림은 사실상 한국인만을 위한 것이다.
내가 한국을 향해 건네는 조언은 과거의 방식을 모두 바꾸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해 온 것을 발판으로 노력의 방향을 전환하라는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만을 더 부유하고 강하게 만들기 위해 힘을 쏟기보다 세계를 개선하는 데 주력해야 한다. 유대감을 느끼는 대상에 외국인을 포함시킬 수 있는 포용력을 발휘해야 한다.
한국은 세계로 나가는 단계를 이미 밟고 있다. 비슷한 경제력을 갖춘 다른 국가에 비해 국제 원조 규모는 훨씬 적지만, 차츰 국제적인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해외 자원봉사가 늘어나고 있으며 국제기구, 특히 유엔에서 두드러지게 활약하고 있다.
한국이 앞으로 세계에 보여 주어야 하고 또한 내가 보고 싶은 것은 국제 문제에 대한 한국식 해결이다. 한국은 대부분 외국 기업으로부터 국내에 필요한 원유와 가스 전량을 수입해야 한다. 그동안 달성했던 경제 실적으로 판단해 볼 때, 기술 자원과 추진력을 겸비한 한국이 자국을 시험 무대로 삼아 앞으로 10년 안에 완전한 전기 자동차와 충전시스템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왜 생각 못 할까? 자국의 IT 인프라를 바탕으로, 기술적 자원에 목말라 하는 다른 국가와 인터넷을 통한 지식 공유를 도모할 것이라고 믿는다면 어리석은 일일까? 분단의 아픔을 몸소 체험하고 있는 한국이 국제 분쟁 해결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되리라는 기대가 헛된 것일까? 이 모든 것은 한국의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문제일지는 몰라도, 분명 한국인의 능력을 넘어서는 문제는 아닐 것이다.
■ 먼저 세계를 포용하면
한국이 먼저 열린 태도로 세계를 사랑할 수 있을 때 세계 또한 한국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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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하게 된다. 전 세계를 진심으로 포용하라. 그러면 깊은 존경을 받을 만한 강력한 국가 브랜드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그 방법은 사방에 존재한다. 한국에 세계 여러 국가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세계가 한국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결정될 것이다.
민감한 주제에 대해서도 때때로 웃어넘길 수 있고 대범하게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의 운동선수가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멋진 일이다. 하지만 운동선수가 승리하지 못하더라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았다면 이 또한 똑같이 멋진 일이다. 기업에서도 마찬가지다. 커다란 성취를 이루는 것만이 국가 브랜드를 높이는 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한국이 자국 문화에 자부심을 갖는 것은 좋지만, 다른 국가 또한 그들 문화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 한국만이 아니라 다른 국가에도 예외 없이 고유 음식이 있고, 고유 예술과 언어가 있고, 고유 문화가 있다. 한국이 토론에서 상대를 배려하지 않고 자신의 견해만을 주장하는 사람처럼 행동한다면 이는 국가 브랜드에 좋지 않다. 한국은 특히 문화적인 측면에서 외부의 무조건적인 호응을 바랄 때가 많다. 하지만 외국인이 김치를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다른 나라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태도이다.
프록터앤갬블 사의 CEO였던 A.G 래플리는 브랜드를 소유하는 것은 조직이 아니라 소비자라고 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한국의 소비자는 세계이다. 세계가 한국의 브랜딩 경로를 결정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한국은 즐거움이 가득하고 멋진 이야기와 역동적인 사람들로 넘쳐나는 놀라운 나라이다. 그것을 세계와 소통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세계는 한국을 이해하고 한국의 가치를 인정할 수 있다. 그래야 다음 단계에 이르러 한국은 스스로 미래를 결정하고 높이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이다.
☆ 음식 《 밥상의 미학 》
♣ 마이클 페티드 (Michael Pett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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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하와이대학교에서 한국 문학을 주제로 문학박사 학위
0 2003부터 뉴욕주립대 아시아 학과 부교수
0 전근대 한국 역사와 문화 ․ 문학에 대한 연구
0 저서 : ‘한식 : 그림과 함께하는 역사’
‘운영전 : 조선시대 왕궁에서의 밀애’
■ 생초보 외국인, 한국 밥상을 만나다.
내가 처음 한국에 발을 디딘 것은 거의 30년 전이다. 당시 한국에 대한 나의 지식은 백지 상태에 가까웠다. 그나마 알고 있던 몇 안 되는 지식도 1970년대 미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텔레비전 시리즈 ‘매시’를 시청하며 얻은 것이 전부였다. 사실 ‘매시’는 한국 전쟁을 배경으로 했을 뿐 한국에 대한 이야기는 제대로 다룬 것도 아니다.
한국에 와서 실제로 접한 한국 문화는 놀랍고 신선한 것 투성이였다. 하루하루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들과 만나는 일상의 모험 속에서도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이 바로 한국식 밥상이다. 그 당시 처음 접했던 밥상의 맛과 인상이 생생이 기억난다. 붉은 실고추와 잣으로 장식된 다채로운 요리, 뜨거운 뚝배기 속에서 보글보글 끓는 찌개와 석쇠에서 지글지글 소리를 내는 쇠고기, 많은 요리를 한 상 가득 받은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서구문화에서는 빵, 샐러드와 수프, 메인 요리 등 식사 순서에 따라 요리가 나오는데 채소, 밥, 고기, 국이 한꺼번에 좍 펼쳐진 광경에 혼란스러웠다. 어떤 순서로, 얼마만큼씩, 밥과 함께 아니면 따로 먹어야 할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젓가락 다루는 기술도 늘고, 좋아하는 요리의 이름을 정확한 한국어 발음으로 자신 있게 댈 수 있게도 되었다.
이 정도면 적극적으로 한식을 즐기는 외국인 축에 든다고 해야겠지만, 나의 연구 분야는 주로 전근대 한국의 역사와 문학이었기 때문에 한국 요리에 대해 처음에는 생각해 볼 일이 없었다. 몇 년이 지나 학문적 관심이 한국의 생활방식에까지 이어진 후에야 자연스럽게 음식에 대해서도 연구하게 되었다. 한식은 뛰어난 맛이나 영양뿐 아니라 한국의 문화와 사회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에서 깊이 연구할수록 강한 매력을 내뿜는 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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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쌀과 채소와 발효식품
0 밥의 존재감 : 조리된 쌀을 뜻하는 ‘밥 = 한 끼 식사’를 가리키는 용어
0 풍부한 채소 : 밭과 산야의 모든 재료가 그대로 또는 김치라는 발효식품으로 식탁에 오르고, 대용 식량으로 자리매김
- 고려 시대 이후 불교 신도들에 의 한 채식문화가 일반화 됨
- 3세기 문서에 김치에 대한 기록이 나오고 조선시대에는 150 종의 김치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음
0 요리의 맛을 더하기 위해 사용하는 양념 중에서 ‘장’이라 불리는 것 역시 한식을 특징짓는 꼭 필요한 재료이다. 과거에는 각 가정마다 간장, 된장, 고추장 같은 장을 직접 만들어 다량으로 보관했는데, 집집마다 고유의 장맛이 있었다. 장맛이 음식 맛을 좌우한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한식에서는 중요한 요소이며, 갖가지 양념과 혼합되어 요리의 맛을 돋운다.
■ 한식의 키워드는 조화로움
한식의 가장 큰 매력은 ‘조화로움’이다.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이라도 요리 자체나 식사 형태에 있어 나름의 질서와 조화를 추구하지만, 한식의 조화로움은 ‘밥상의 미학’ 이라 일컬어도 좋은 정도로 여러 감각을 아우르며 철저하게 추구되고 있다. 이런 조화로움은 식사의 형태에도 녹아 있어 한국의 사회와 문화적 특징을 엿볼 수 있다.
먼저 밥상을 예로 들어 보자. 한국 가정의 일반적인 상차림에서는 밥과 국, 생선이나 고기 요리와 함께 김치와 몇 가지 반찬이 나온다. 밥상의 조화는 부드러운 음식(익힌 무나물)과 딱딱한 음식(김 튀각), 싱거운 음식(밥)과 매운 음식(김치), 뜨거운 음식(국)과 차가운 음식(도라지 생채), 기름진 음식(전)과 담백한 음식(콩조림)의 대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미각적 조화 외에도 다양하다. 구운 김을 씹을 때 나는 파삭파삭한 소리와 양념한 깻잎을 먹을 때 나는 나직한 소리의 대조에는 청각의 조화가 존재한다. 마늘과 붉은 고추의 톡 쏘는 냄새와 나물이 가진 은은한 냄새의 대조에서는 후각의 조화가 느껴진다.
또한 고명으로 색깔의 균형을 맞추는 데서 시각적 조화를 위한 노력을 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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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할 수 있다. 한식은 동양 철학의 음양오행 사상 가운데 오행을 바탕으로 한 푸른색, 붉은색, 노란색, 흰색, 검은색의 오색으로 색을 맞춘다. 초록 고명으로는 파, 호박, 오이 등을 사용하고, 붉은 고명으로는 고추, 당근, 대추 등을 써서 시각적 효과를 낸다. 노랗고 흰 고명으로는 달걀의 노른자와 흰자를 분리해서 얇게 부친 지단을 이용하고 검은 고명으로는 목이, 석이, 표고버섯이나 김을 사용한다.
밥상을 앞에 두었을 때, 다양한 음식의 모양, 맛, 냄새, 소리, 질감을 즐기는 것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서구식 식사 형태는 한국인에게 이상적인 식사가 아니다. 한국 밥상은 한꺼번에 다양한 감각적 자극을 즐기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한국식 밥상의 체계는 채소 반찬의 수에 따라 3첩, 5첩, 7첩 등으로 전통적인 격식이 있는데, 재료나 조리법이 중복되지 않는 것을 좋게 여긴다. 한쪽으로 치우친 것, 특정한 무엇이 과다한 것은 조화롭지 못하며 균형이 깨진 것이다.
이처럼 서로 다른 것들이 어우러져 조화와 균형을 이룬다는 생각은 앞에서 언급한 오행을 바탕으로 음식뿐만 아니라 한국문화 곳곳에 속속들이 배어 있다. 한국의 전통적인 의학에서는 음식과 약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며, 신체의 조화로움이 무너졌을 때 병이 생긴다고 가르친다.
한국의 음식 문화에서 눈에 띄는 또 한 가지 ‘조화로움’은 여러 사람이 함께 식사하는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사람들이 한 데 모여 음식을 먹는 것은 흔한 풍경이지만, 한국 문화에서 함께 먹는 행위의 의미는 두드러지게 눈에 띈다. 우선 요리를 나눠 먹는 관습을 보자. 밥상의 찌개, 반찬, 고기 요리는 다른 사람과 나누어 먹도록 한 그릇에 나오는 게 보통인데, 이때 한국인들은 큰 그릇에 나온 요리를 각자의 접시에 덜지 않고 바로 입으로 가져간다. 서구인들의 눈에는 비위생적인 모습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한국인들은 한 상의 음식을 나누어 먹는 행위에서 특별한 공유의식과 끈끈한 정을 다진다. 여기에서 음식은 한 개인이나 가족을 넘어 공동 사회를 조화롭게 하는 역할을 한다.
‘한솥밥’ 말고도 한국인들은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에 익숙하다. 대보름의 오곡밥과 약밥 나누기, 동지의 팥죽 나누기, 이사 후 이웃들에게 떡을 돌리는 풍습 등은 공동체의 조화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수단으로 기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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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한식은 세계화 되지 못하나?
최근 동아시아를 강타한 한류의 바람을 타고 한국 문화는 바야흐로 국경을 넘어 세계로 진출하고 있다. 음식 또한 그에 발맞추어 한식에 대한 세계인의 인식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이다. 한식이 해외에 진출한지는 오래되었지만 한인 교포들이 밀집한 지역을 벗어나 주류 시장으로 범위를 확장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이제는 미국 대부분 지역의 슈퍼마켓에서 김치를 판매하고, 한국식 바비큐를 판매하는 음식점 또한 전역에 퍼져 있다. 하지만 이런 경향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한국 음식점의 수와 질은 일본이나 태국 음식점에 비해 상당히 뒤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왜 그럴까?
0 미국에서 일본요리가 인기를 끄는 이유
- 초밥, 회가 건강에 좋다는 인식. 일본 문화의 인기. 몇 몇 독특한 일본 음식점에서 요리사들이 연출하는 현란한 묘기
0 태국과 배트남 음식은 건강에 좋고 메뉴가 다양하다는 인식
0 한식이 서구권에서 인기를 끌지 못하는 이유
- 한국 요리는 지나치게 맵거나 고추와 마늘의 강한 맛에 움츠러들거나. 한국 음식은 김치뿐이라는 오해
- 과거 한국 음식점은 고객을 끌려는 노력은 거의 하지 않았음
- 그러나 최근에 와서 세계 주요 대도시에 세련된 한국 음식점등이 속속 들어서고 있다. 멋진 분위기와 외국인을 배려한 메뉴, 거기다 훌륭한 맛으로 한국인을 물론 외국인 손님 모두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이렇듯 국제무대에 나선 한식에 대한 인식과 여건이 많이 개선되었음에도, 외국인들에게는 여전히 일식이나 중식이 더욱 가까이에 있다.
한식이란 이런 것이라는 새로운 인식을 심어 주는 것이 당면 과제이다 한식만의 고유한 개성과 이미지가 확립되지 않는 이상 세계화에 성공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세계화를 위해 한식은 어떤 전략을 써야 할까?
■ 외국인의 입맛에 맞추지 마라.
일반적으로 고유의 토착 음식이 세계화를 시도할 때에는 두 가지 접근 방법이 있다. 한 가지는 지역에 상관없이 진정성에 초점을 맞추고 요리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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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가능한 한 많이 보존하는 것이다. 음식은 문화로 향하는 창구이기 때문에 음식에는 이를 발달시킨 문화가 반드시 반영되어야 한다. 또 다른 방법은 해당 음식을 소개할 지역 사람들의 기대나 기호를 충족시키기 위해 요리를 얼마간 변형하는 것이다.
한국 음식의 국제화를 놓고도 비슷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 음식을 코스 요리로 바꾸어 하나씩 차례로 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특정 요리에서 독특한 양념이나 냄새를 제거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반찬을 더 이상 내놓지 말자고 하는 사람도 있다. 미국에서 한국 음식이 이미 이런 식으로 변형되고 있지만, 나는 이것이 한국 음식을 국제화시키는 최선책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진정한 한식의 세계화를 위해서는 한식이 본래의 맛과 형태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다. 요리에 담긴 필수적인 맛을 바꿔서는 안 되고 오히려 한식의 고유한 멋을 강력하게 홍보해야 한다. 예를 들어 외국인들은 일본인만큼이나 와사비 찍은 회를 좋아하며, 태국 카레 역시 태국에서만큼이나 풍부한 향료를 사용함으로써 오히려 외국인들의 입맛을 사로잡는다. 한식 역시 국제화에서 이런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 매운맛, 쓴맛, 신맛, 단맛, 짠맛을 외국인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변형할 것이 아니라 한국 음식의 중요한 일부로 보존해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떡볶이를 수출 상품으로 홍보하는 한국 농림수산식품부의 노력은 아쉬움을 남긴다. 지난 5월에 농림수산식품부가 주최하고 한국 쌀가공 식품협회가 주관한 ‘2010 서울 떡볶이 페스티벌’에서는 매운 떡볶이를 알리기는 했지만 그것을 한국 음식의 대표로 내세우기는 부족함이 많다. 외국인이 특이하다고 생각할 것 같은 음식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한국 음식만이 가진 독특한 점과 두드러진 특징에 홍보의 역점을 두어야 한다.
일본 음식을 생각하면 즉각적으로 초밥이 떠오른다. 이탈리아 하면 피자가 생각나고 인도 하면 카레가 생각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렇다면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은 무엇일까? 나는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은 김치도 떡볶이도 아닌 ‘밥상’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맛, 냄새, 질감, 온도의 조화로운 혼합으로 이루어진 밥상이야말로 한국 음식을 완벽하게 대표하는 요리이다. 한국 정부는 떡볶이처럼 주로 길거리에서 판매하는 음식을 세계에 홍보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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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는 밥상에 담긴 한식의 진짜 매력인 ‘조화로움’을 홍보하는 것이 훨씬 현명한 처사일 것이다. 한국의 밥상이 소개된다면 전 세계 사람들에게 즉각적인 호응을 얻을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외국의 한국 요리 음식점은 먼저 손님들이 한국 음식을 맛보는 경험을 온전히 즐길 수 있도록 가게를 꾸미고 설계하는 것이 좋다. 한국의 미학을 반영한 실내 디자인에, 방석을 깔고 바닥에 앉을 수 있도록 테이블을 낮춰야 한다. 이렇게 키가 작고 상대적으로 넓은 테이블을 비치하면, 손님들이 찌개와 요리를 나눠 먹으면서 한식의 맛은 물론 그 문화적 정취까지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한국의 요리를 맛볼 수 있는 식당이라면 손님이 직접 요리에 참여할 수 있는 독특한 경험을 내세워야 한다.
■ 막걸리, 한국적 경험의 또 다른 가능성
한식의 국제적 대중화는 요리뿐만 아니라 한국의 전통주의에서도 적극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일본은 초밥만큼이나 사케가 유명하다. 독일 하면 맥주, 프랑스는 와인이 바로 떠오른다. 한국에도 이처럼 세계적으로 널리 애용될 수 있는 술이 있다. 바로 막걸리다. 막걸리는 대중에게 널리 사랑받으며 오래도록 이어져 온, 한국에서 가장 긴 역사를 자랑하는 술이다. 고단한 서민들을 달래 주던 술의 이미지를 벗고 최근에는 웰빙 열풍과 함께 건강에 좋은 술로 인식되며 새롭게 인기를 끌고 있다. 전통을 외면하던 한국의 젊은 세대까지 사로잡은 것은 물론 일본에도 진출해 한국의 전통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쌀을 발효해서 만든 술인 만큼 다른 술에 비해 부드럽고, 톡 쏘는 천연 탄산의 느낌은 갈증을 풀어 주는 데도 그만이다. 막걸리가 일본에서 받고 있는 호평도 한국의 전통주만이 보여줄 수 있는 이러한 독특한 맛 덕분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막걸리의 진정한 매력은 그 안에 숨어 있는 한국의 술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술자리에서 서로 술잔을 주고받는 모습은 한국 문화만이 지닌 고유하고 아름다운 모습인 동시에 한국을 방문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 번쯤 접해 보는 경험이다. 특히 막걸리에는 이처럼 함께 어울리고 서로를 위안하며 나누어 마신다는 느낌이 강하게 배어 있다. 이는 전통적으로 막걸 리가 한국에서 서민의 술로 인식되어 있다는 점 때문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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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하다.
한국의 요리와 그 식사 문회에 조화로움이 배어 있듯, 한국에서 술잔을 주고받으며 왁자지껄하게 막걸리를 나누어 마시는 모습에서 나는 그러한 조화로움의 미덕을 발견한다. 막걸리는 식사 자리나 술자리를 훨씬 유쾌하게 만들고, 함께 있는 친구나 동료와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해 주는 훌륭한 매개이기도 하다. 사케나 와인을 마실 때와는 또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서민적인 한국의 술 문화에 녹아 있는 이러한 특별한 정취는 놓쳐서는 안 될 막걸리만의 매력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전통주인 막걸리에 대한 인식을 높인다면 한식을 외국에 전파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한국 음식이 지닌 최고 장점을 국제무대에 선보여야 한다고 믿는다. 세계에 한국 음식을 홍보한다면서 한국 음식에 담겨 있는 수세기의 지혜를 무시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한국 음식에 언제나 중요했던 점을 강조하는 것이 국제무대에서 대중성을 확보하는 가장 성공적인 방법이다. 식사와 관련된 관습뿐만 아니라 한국 요리의 근본적인 요소는 한국 음식에 들어 있는 다양한 맛과 감각의 조화이다. 밥상위에서 어우러지는 요리의 조화, 그리고 밥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조화, 이것이 한식의 가장 강력한 매력이다. 전통주인 막걸리 역시 고유한 맛뿐 아니라 다른 사람과 상호 작용하려는 조화의 욕구에 진정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요리를 넘어서 문화까지 전파할 수 있다면 한식은 분명 국제무대에서 세계인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다.
☆ 대중문화 《 한류, 중국을 달구다 》
♣ 진징이 (金景一)
0 중국 연변대 중문학부 졸. 북경대 국제관계학 박사. 국제 정치법학 박사
0 일본 게이오 대학 객원 교수
0 한국 중앙연구원 방문 교수. 경남대 극동문제 연구소 방문교수. 현재 북경 대 한국 언어문학부 교수 겸 한반도문제 연구 센터 부주임
0 저서 : 중국 조선족 문화론,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 기원, 한류와 한풍의 상호 역동관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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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천 년 만의 역류
새 밀레니엄의 첫 10년, 중국을 휩쓸고 간 한류 열풍은 뜨거웠다. 한국 드라마가 시청률 1위를 기록하며 중국인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대장금을 즐겨 본다는 중국의 국가 주석과 이영애의 이름이 함께 언론에 오르내리며 주목을 받는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한류 스타 비가 중국 최고의 스타들과 함께 무대에 올랐으며, 한국 드라마의 주요 배경으로 등장한 제주도는 매년 중국 관광객이 급증해 최근 중국 항공사들이 일제히 제주 직항편 전세기를 투입하기에 이르렀다. 드라마와 음악에서 시작된 한류는 음식, 패션, 여행, 문화에 이르기까지 전 분야를 아우르며 급속히 중국인들의 생활 깊숙한 곳까지 파고들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 1992년 한 ․ 중 수교를 맺은 지 20년, 양국의 교역규모는 22배, 중국에서 활동하는 한국의 기업 수는 4,600여개, 한국인 거주자는 100만을 돌파했다. 그리고 1990년대 중반, 중국을 중심으로 돌아가던 아시아의 문화 흐름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이제까지 문화 주변국이었던 한국이 아시아를 강타한 것이다. 한국 문화는 국경을 넘고 이념마저 초월해 수억 명의 중국인들을 열광시키며 한류(韓流)라는 말을 탄생시키기에 이른다. 이제 한류는 아시아의 문화뿐만 아니라 경제 사회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문화는 끊임없이 움직인다. 경계를 넘나들며 시시때때로 변화하고 재창조된다. 한때 대륙을 뜨겁게 달궜던 한류의 열기도 한풀 꺾여 일부에서는 한류의 거품이 꺼져 간다는 예측이 나오고 있다. 또한 최근 중국에서는 ‘염한류(嬚韓流)’의 뉴스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한류의 문화적 역류는 정말로 그친 것일까? 한국 문화가 중국의 방벽을 넘은 지 10여년이 흘렀다. 한류가 단순한 유행에 그치지 않고 진정한 문화 교류로 거듭나기 위해 한류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한 시점이다.
■ 한국문화, 한국제품, 한국인
문화혁명이 막바지이던 1970년대 초반 북한 문화가 모든 예술 활동이 금지된 중국에서 반짝 인기를 끌었다. ‘꽃 파는 처녀’, ‘사과 딸 때’, ‘로동 가정’ 등의 북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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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중국인들이 받아들인 북한 문화가 한국의 전통적 가치관에 사회주의 사상이 합쳐진 것이었다면 20세기 막바지에 노도처럼 몰아친 한류는 한국의 가치관에 서구 자본주의가 결합된 문화였다. 그 첫 물결은 바로 드라마와 음악이었다. 1993년 한국 드라마 ‘질투’가 최초로 중국 전파를 탔지만 반응은 미미했다.
1997년 중국 공영방송 CCTV에 ‘사랑이 뭐길래’가 방송되면서 위상을 떨치기 시작한 한국 드라마는 가족 드라마가 전무했던 중국에 신선한 충격을 주며 시청률 1위를 기록했다. 99년의 ‘별은 내 가슴에’ 는 폭발적 성공을 거두며 배용준 신드롬과 한국 관광 붐을 일으키고 2003년 ‘겨울 연가’ 2004년 ‘보고 또 보고’ ‘인어 아가씨’ 2005년 이영애의 ‘대장금’을 필두로 송혜교의 ‘풀 하우스’등.....
대중가요 부문에서 한류의 원조는 단연 H.O.T. 였다. 2000년 H.O.T.의 베이징 공연에는 1만 3,000명의 팬들이 몰렸고 그들의 패션이 대유행했다. 중국 최초의 한국 가수 팬클럽도 이때 만들어졌다.
그 이후 동방신기,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원더걸스, 2NE1 등의 아이돌 그룹으로 한류 가수의 계보는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드라마와 대중음악에 이은 한류의 두 번째 물결은 미디어가 아닌 실생활에서 몰아쳤다. 패션, 전자 제품, 자동차, 음식, 온라인 게임, 성형 수술 등 드라마를 통해 이미 친숙한 한국 제품들이 중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모든 소비자들이 드라마 속 주인공이 입은 옷을 입고, 화장품을 사용하고, 한국 배우의 얼굴과 비슷하게 성형해 그들처럼 예뻐지기를 원했다. 기업들은 이에 따라 중국에서 인기 있는 한국의 가수와 배우들을 모델로 기용하여 상품을 홍보하였다. 한류 스타의 존재가 중국인들이 상품을 구매하는 중요한 기준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한류 스타들은 드라마 속에서 상품을 홍보하고, 중국인들은 그 상품을 소비함으로써 드라마의 일부가 되었다.
한류의 세 번째 물결은 한국인들의 중국 진출이다 수십만 명의 한국인들이 중국을 찾으면서 곳곳에 생겨난 코리아타운은 1,500년이라는 시간을 넘어 현대판 ‘신라방’을 연상시킨다. 이곳에 가면 마치 한국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이다.
개인뿐만 아니라 기업의 차원에서도 중국 진출은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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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삼성, 현대, LG, SK와 같은 굴지의 대기업은 물론 중소기업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 활동하는 한국 기업은 이미 상당수이며,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다.
한국 문화, 한국 제품, 한국인은 바로 이렇게 한류를 타고 중국으로 진출하여 새로운 문화가 되어 가고 있다. 실로 수천 년 양국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던 흐름이다.
■ 한류는 우연이 아니다
수천 년 전부터 중국의 중요한 사상들은 모두 한국으로 전래되어 한국인 가치관의 근간이 되었다. 양국의 교류가 시작된 이래 언제나 중국은 한국의 문화에 영향을 미쳐 왔고 그 반대의 흐름은 미미했다. 그런데 어떻게 한류는 이러한 문화의 흐름을 뒤바꿀 수 있었을까?
중국은 근현대사를 통해 아편전쟁, 신해혁명, 문화대혁명 이라는 혼란을 겪으며 오랫동안 중국을 지탱해 주던 유교적 가치관을 민중의 개성을 해방한다는 명목하에 여지없이 무너뜨렸다.
사실 그 무렵에 한국에서도 신문화 운동이 일어났지만, 일본의 식민 통치하에 일어난 한국의 신문화 운동은 중국과 달리 개화 운동인 동시에 독립운동이었다. 독립 정신을 고취한다는 것은 자국의 전통을 올곧게 지켜 나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한국의 유교적 가치관은 중국처럼 결정적 타격을 받지 않고 오늘날까지 보존될 수 있었다.
신문화 운동으로 무너진 중국의 유교적 가치관은 계속되는 내란과 혁명의 열기 속에서 더욱 약화되었다. 결국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전통적 가치관과 서구적 가치관을 전면 부정하는 문화 대혁명의 10년을 겪으면서 중국의 문화는 암흑기에 접어들게 된다. 문화대혁명의 슬로건은 ‘파사구(破四舊)’ 즉 낡은 사상, 낡은 문화, 낡은 풍속, 낡은 습관을 타파한다는 것이고, 이는 곧 전통과의 단절의 의미했다.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적인 서구 문화까지 모두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1976년 마오쩌둥의 죽음으로 문화대혁명은 종식되고 중국은 개혁과 개방이라는 새로운 문화 충돌을 경험하게 되는데 바로 이 시기에 대만, 홍콩, 미국, 일본의 드라마가 상륙하지만 일시적인 유행에 그치고 만다. 잃어버린 유교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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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관의 부흥을 남몰래 갈망한 중국인들의 숨은 갈망을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과 중국이 수교를 맺은 1992년은 덩샤오핑이 남순강화(南巡講話)를 통해 더욱 본격적인 개혁과 개방의 길로 들어선 해다. 중국은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린 한국의 경제적 발전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주목한 것은 경제뿐만이 아니었다. 많은 나라가 한국의 ‘수출 주도형 경제 성장 전략’에 관심을 가질 때 중국은 남들이 보지 않는 것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바로 중국의 신문화 운동 시기에 사라져 간 유교 문화였다.
유교 문화의 발원지는 중국이었지만 이제 이를 완벽하게 계승한 쪽은 한국이었다. 그리하여 이윽고 한국 가족 드라마가 소개되자 유교의 종주국인 중국이 한국 드라마를 통해 자신들이 잃어버린 유교적 가치관을 다시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 중국학자들은 한류를 중국의 유교적 가치관의 부활로 보기도 한다. 바로 이것이 일본이나 미국 등 다른 문화에 비해 한류가 지속적이고 광범위하게 중국에 영향을 미친 이유이다.
■ 한류 드라마 성공의 비밀
H.O.T.와 ‘별은 내 가슴에’ 에 열광했던 청소년부터 ‘목욕탕 집 남자들’과 ‘대장금’에 빠졌던 중년층까지 중국인들은 남녀노소 모두 한류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한류는 어떻게 중국인들의 마음을 이토록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영국의 인류학자 에드워드 타일러는 문화를 ‘도구와 같은 물질을 포함하여 인간의 정신적인 산물을 총칭’한다고 정의했다. 여기서 정신적인 산물이란 창조자의 가치관을 뜻한다. 즉, 문화의 핵심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가치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중국인들을 사로잡은 한류의 매력을 알고 싶다면 우선 한국의 가치관을 살펴보는 것이 좋다.
한국의 전통 가치관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질서와 서열을 중시하는 권위주의, 가족과 나라를 우선시하는 공동체 정신, 그리고 도덕과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태도이다. 사실 이는 유교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중국의 전통적 가치관과도 별반 차이가 없다.
해방 후 지금까지 한국의 전통적 가치관은 서양의 가치관과 만나면서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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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혼란을 야기 하였지만 권위주의, 공동체 정신, 정신적 가치에 대한 주류는 크게 흔들림이 없다.
한국 현대화의 큰 밑그림을 그렸던 1970년대의 새마을 운동, 1997년 금융 위기 때의 금 모으기 운동은 공동체 정신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특히 부도날지도 모르는 국가를 위해 국민들이 사유재산을 내놓았던 금 모으기 운동은 전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공동체 정신은 여전히 현재 한국인들의 생활 속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한국인들은 자신의 관심사에 따라 여러 가지 모임에 참여하는데, 이러한 모임을 ‘동아리’ 라고 한다. 동아리는 인터넷 동호회, 친목회, 조기 축구회, 마을 운영위원회, 학교 운영위원회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도 매우 다양하다. 몇 명만 모여도 모임의 이름을 정하고 임원을 뽑고 회비를 모으는 한국인들이 외국인들의 눈에는 낯설지도 모르겠다. 한국 포털 사이트의 카페와 클럽 역시 외국에서는 찾기 어려운 사례이며, 한류 스타 펜클럽의 운영 방식도 한국의 동아리 문화가 변형된 예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권위주의는 어떤가? 현대 한국 사회에는 권위주의와 민주주의의 가치관이 조화롭게 공생하고 있다. 1970년대 한국은 의회 민주주의 체제 하에 독재 정치를 경험하였다. 사회는 독재와 민주로 나뉘어 큰 혼란을 겪었다. 역사적으로 이와 유사한 정치적 갈등을 겪은 나라는 선진국이든 개발도상국이든 필연적으로 경제 성장이 둔화된 것과 달리, 한국은 이 시기 8~9%의 고도 경제 성장을 이룩했다. 이는 오랫동안 한국 사회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권위주의적 사회 질서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가족, 학교, 직장, 사회의 위계질서는 외부의 혼란 속에서도 굳건하게 국가를 유지하고 경제를 성장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중국인들은 한국 드라마에서 이러한 권위주의를 재발견하였다. 한국 드라마에 등장하는 모든 집단은 유교적 질서를 강하게 보여준다. 장유유서(長幼有序)로 말할 수 있는 생활화된 위계와 서열을 보여 주는 한국 드라마는 잊혀져 가는 유교적 가치관에 대한 중국인들의 향수를 자극하였다.
유교적 가치관이 집안의 질서를 지켜 주고, 할아버지 세대와 젊은 세대의 중간에 위치한 중년층이 갈등을 슬기롭게 해결하며 결국 갈등은 충돌이 아닌 조화로 이어진다. 이런 모습은 전통적 가치관과 현대적 가치관의 융합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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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적인 가치관은 서양의 가치관과 충돌하면서 발전해 왔다. 우리가 한류에서 볼 수 있는 한국 문화는 결코 전통문화의 재현이 아니다. 서양 문화와 얽히고설키며 재창조된 새로운 현대 문화이다. 한국 드라마는 한국 사회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유교적 가치관을 가정생활에 접목해 새로운 사고방식과 행동 양식을 표현해 냈다. 이것이 바로 중국인들을 사로잡은 한류의 매력이다.
■ 한풍(漢風)에서 배우는 새로운 한류로
한류(韓流)가 중국에 상륙했던 때와 달리 이제 중국은 경제 대국이 되었다. 전 세계인이 하루라도 중국 제품을 쓰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시대가 온 것이다. 경제 성장과 함께 중국의 문화 또한 ‘한풍(漢風)’을 타고 세계로 뻗어나갔다. 이러한 지각 변동은 한국과 중국 간에 새로운 관계 정립을 요구한다. 중국에서의 한류 역시 이러한 변화에 맞춰 끊임없이 발전 해야만 그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 만약 한류가 한 곳에 계속 머물러 있다면 중국 문화의 발전에 밀려나 결국 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의 많은 학자들이 한류를 지속시킬 방안을 연구하고 있는 이유도 이러한 우려 때문이다.
한류에 있어서 중국의 발전은 새로운 도전이자 성장의 기회이다. 중국의 부상에 발맞춰 한류 역시 발전하며 새로운 문화의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바로 새로운 중국 문화, 즉 한풍과의 교류이다. 지금까지의 한류가 일방적인 흐름이었다면, 앞으로의 한류는 한풍과의 쌍방향 교류를 통해 범아시아적인 시너지 효과를 창출해야 하는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한국 문화는 서구 가치관과의 융합을 통해 아시아인들을 매료하는 고유의 특색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때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한류는 중국의 경제 성장에 따른 아시아의 새로운 문화적 판도 앞에서 다시 한 번 합리적인 변화를 모색해야 할 곳이다. 중국은 물론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과 쌍방향적인 소통을 통해 변화를 계속해 나간다면 한류의 바람은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 전통음악 《 영혼의 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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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더 A. 월로비 (Heather A. Willoughby)
0 1986 선교차 한국방문에서 판소리를 접한 후 브리검영대학교 의학부에서 음악교육으로 방향전환
0 컬럼비아대학교 민족음악 박사학위
0 한국에서 8년간 소리꾼을 찾아 사사
0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문화인류학 및 음악학과 부교수.
판소리 및 국악 연구
■ 음(音)을 통해 전해지는 감정의 세계
내가 판소리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서울에서 조금 떨어진 한 대학교를 찾은 것은 1986년 가을의 일이었다. 그때도 교정에는 시위가 한창이었는데, 내가 보게 될 판소리 공연 또한 이러한 학생 시위와 깊은 관련이 있었다. 기독교 선교사로 파견되어 있던 나는 당시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한 표면적인 지식만 있었을 뿐 시위의 명분이나 학생들의 분노를 깊이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 그런 내게 한국 학생들, 시위자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해 준 것이 그날의 공연이었다.
막이 오르자 체구가 작은 70세가량의 여인이 고수 한 명과 함께 무대에 올랐다. 곧이어 나는 여인의 목소리와 존재에 완전히 압도당했다. 그 당시 나는 한국에 온 지 5개월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노랫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가사는 몰라도 그녀의 노래는 나에게 형용할 수 없는 거대한 감동을 선사했다. 그때까지 여러 나라의 민속 음악을 듣고 콘서트도 수백 번 넘게 다녔지만 이토록 가슴을 쥐어짜는 듯 비통한 음악을 듣기는 처음이었다.
나를 사로잡은 것은 여인의 목소리뿐만이 아니었다. 노래에 따라 음성이나 억양, 표정, 몸동작을 미세하게 바꿔 가며 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표현해 내는 것도 너무나 신기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창하는 사람이 관객의 감정을 정확히 파악해 그것을 노래에 담아내는 과정이 가장 흥미로웠다. 그 나이드신 할머니 소리꾼의 노래에는 시위의 목적, 젊은이들의 울분, 그리고 그녀의 감정과 관객의 감정이 하나 되어 녹아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내가 왜 그토록 판소리에 빠져들었는지 정확하게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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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없었다. 그로부터 15년 후,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 민족음악을 공부하는 대학원생으로서 판소리를 깊이 연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통해 차츰 판소리의 진짜 매력을 이해하게 된다.
■ 판소리는 판소리다
한국에 존재하는 많은 음악 가운데서도 판소리는 정교함과 깊이, 감정 표현 면에서 단연 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판소리란 과연 무엇일까?
1966년 판소리의 정의와 범위를 명확히 하기 위한 심포지엄이 열렸다. 참석자들은 판소리가 시인지, 드라마나 오페라인지, 이야기나 노래인지, 아니면 이들의 조합인지를 놓고 고민을 거듭했다. 하지만 유명 학자들과 음악가들이 며칠 토론을 벌인 끝에 내린 결론은 “판소리는 판소리다.”라는 것이었다. 판소리의 독창성과 예술성을 말하는 데 이보다 더 적절한 일화가 있을까! 이처럼 판소리는 여러 가지 요소가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공연 형식이다.
판소리의 중심은 소리꾼이다. ‘광대’ 또는 ‘창자’라고 불리는 소리꾼은 노래(창), 연극조의 사설(아니리), 몸짓(발림)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한다. 이때 고수는 주로 북으로 장단을 맞추며 흥을 돋운다. 판소리는 종종 ‘1인 오페라’라고 불리는데 이는 소리꾼 혼자서 등장하는 모든 인물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춘향전’을 부른다고 하면 소리꾼은 춘향이부터 이몽룡, 심지어는 변학도나 아전들까지 모든 역할을 다 해 내야 한다. 북장단에 맞추어 혼자 울고 웃으면서 노래하는 판소리는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힘든 성악 장르이다.
18세기 중반에 이르러 양반도 판소리를 즐겨 듣게 되었지만, 원래 판소리의 공연자와 관객은 대부분 농민과 상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판소리에는 화려한 무대나 장치가 있을 수 없었다. 소리꾼은 주로 시장이나 양반집 앞마당에 멍석을 깔아 놓고 노래를 불렀다. 소리꾼이 사용하는 표현도구라고 해봤자 부채가 전부였다. 소리꾼은 부채를 펴고 접으며 사물, 경치, 생각, 감정 등을 표현했다. 소리꾼의 부채는 상황에 따라 칼이 되기도 하고, 책이 되기도 했다. 노래를 들으며 고수와 관객은 “얼씨구” “좋다” “그렇지” 등 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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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우는 추임새로 소리꾼과 소통을 나눴다.
■ 마음으로 보는 것
나는 한국의 전통 음악 중에서도 판소리가 가장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판소리는 관객들에게 공연자와 감정을 공유하는 특별한 경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소리꾼은 감정을 오롯이 전달하기 위해 평생을 판소리에 헌신해야 하고, 득음에 이르기까지 고통스러운 희생을 감내해야 한다. 그래야만 자신과 판소리 속 주인공 사이의 상호 관계를 이해하고, 자신의 인생 경험을 소리에 투영시킬 수 있다.
대사는 단순히 말하고 노래하는 것으로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를 소리꾼 본인이 직접 경험하고 직접 느껴서, 마치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 하듯 표현해야 한다. 2008년 젊은 명창 이주은이 탐욕스러운 형과 인정 많은 동생에 얽힌 이야기인 ‘흥보전’을 완창했다. 이주은은 프로그램의 해설을 통해 ‘흥보가’를 완창하기 위해 먼저 대사를 몸으로 이해해야 했다고 말했다. 다음은 이주은의 글에서 인용한 내용이다.
“음(音)은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것이라는 사실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나 봅니다.”
판소리의 이야기는 아무런 의미도 없이 그저 예쁘게 포장된 동화가 아니다. 등장인물은 허구일지라도 그들이 겪는 경험과 감정은 삶의 진실을 반영한다. 그러므로 명창은 사건과 대화를 현실적으로 묘사하는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 이야기를 몸소 체험하고 자신의 삶에서 그것을 구체화해야 한다. 하지만 판소리에 담긴 감정은 소리꾼의 개인적인 감정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판소리는 소리꾼의 삶을 초월하여 한국인들의 삶에 존재하는 공통 정서를 반영하기도 한다.
■ 소리에 서린 한(恨)의 정서
판소리에 담긴 많은 정서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요소는 恨의 개념이다. 사전적으로는 ‘몹시 원망스럽고 억울하거나 안타깝고 슬퍼 응어리진 마음’ 으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한’은 정확하게 묘사하기 어려운 한국인 특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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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이다. 한은 심미적 관념이자 이를 표현할 수 있는 감정과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때때로 예술 창작을 위한 강력한 동기가 되기도 한다. 한의 이러한 특성들은 판소리, 소설, 가면극, 인형극 등의 다양한 전통예술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60년대 초, 젊은 지성인 이오영은 ‘이 지구, 저 바람을 타고 : 이것이 한국이다.’ 라는 논문 속에서 恨을 이렇게 말한다.
“한국인은 슬퍼도 울고, 배고파도 울고, 노여워도 운다. 기쁠 때조차도 운다. 울음을 빼고선 한국인을 논할 수 없다 .한국인은 울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울음으로 듣는다. 게다가 한국인은 그냥 눈물을 흘리지 않고 매우 ‘음악적인 방식’ 으로 의식을 갖춰 운다.”
이오영은 도발적인 질문으로 결론을 맺는다. “도대체 우리는 왜 울까? 우리는 왜 울음을 미화하고, 일상의 삶에 눈물을 끌어들일까? 눈물 속에서 싹트고 자라온 우리의 예술과 문화가 수정처럼 맑다고 말할 수 있을까?”
판소리의 대사는 슬픔, 한탄, 비통, 후회, 분노로 표현되는 한의 정서가 짙게 묻어난다. 이는 보통 사람들이 매일 겪는 일상적인 감정의 대변한다.
음악은 단순히 개인의 감정이나 신념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회가 집단으로 공유하는 경험을 전달한다. 따라서 판소리의 진정한 힘은 한국인의 뿌리 깊은 감정을 반영하고 그런 감정을 관객과의 호흡 속에 재창조하는 데 있다. 관객들은 음악을 통해 공연자의 감정뿐만 아니라 한국의 정서를 느낀다. 이는 한국인이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인식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 산조, 흩어진 가락을 짜다.
판소리처럼 구체적인 줄거리나 주제를 전달하지 않고도, 오직 멜로디만으로 공연자의 감정과 한국인의 정서를 표현하는 음악 장르도 있다. 이런 음악중의 하나가 바로 산조라 불리는 기악 독주곡이다.
산조는 판소리, 사물놀이와 더불어 국내외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의 전통 음악 중 하나이다. 산조는 글자 그대로 ‘흩어진 가락’을 뜻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산조에 뚜렷한 가락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산조 연주자들은 음악의 골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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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 놓고 그 위에 즉흥적으로 세부적인 가락을 더해 살을 덧붙인다. 과거의 음악가들은 이렇게 소리를 구성하는 과정을 ‘음악을 짠다.’고 말했다. 이 음악을 ‘짜는’ 능력이야말로 산조의 매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즉흥 연주가 줄어들어 특정 유파로부터 전해진 고정된 유형에 맞춰 공연하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이다.
산조는 이야기를 하거나 사건이나 경험을 묘사하려는 의도를 가진 ‘계획된’ 음악이 아니다. 계획을 배제함으로써 음악의 본질에 도달하고, 전통 음악의 미학과 순수성을 획득한다. 산조의 음은 휴지기 없이 하나의 선을 이루고 이 선이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며 감정을 고조시킨다.
산조의 또 하나 뛰어난 점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소리를 음악적으로 표현해 낸다는 것이다. 산조 공연에서는 비, 천둥, 새의 지저귐, 말발굽 소리, 심지어 으스스한 메아리 소리를 떠올리게 하는 음조나 연주 기술을 들 수 있다. 결국 산조는 판소리와 마찬가지로 음악을 통해 한국인의 정서를 표출하고 자연과의 교감도 담아낸다. 다만 그것은 하나의 음으로 이루어진 소리의 세계이다. 공연자와 관객은 민족 차원의 공동 경험을 바탕으로 심미적 가치를 공유하고, 한국인은 소리를 통해 그것을 표현하고 듣는 것이다. 한국의 이러한 아름다운 예술은 좀 더 넓은 세계무대에 선보일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 한국 음악을 세계무대에
한국 음악은 방대하고 다양하다. 유교 의식에 연주되는 느리고 장중한 음악, 무당굿에서 비롯된 정열적인 기악곡, 학자들이 철학적으로 사색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거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부르는 서정시, 논밭이나 바다에서 일하는 일꾼들의 흥을 돋우기 위한 민요 등이 그것이다. 이 글에서는 판소리와 산조 음악의 아름다움과 그 의미의 일부를 소개하는 데 그쳤지만, 내가 한국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배우게 된 것은 바로 이 경이로운 음악을 통해서였다. 이 글을 읽고 공연장으로 달려가 한국 전통음악을 경험하고 싶은 마음이 우러났길 진심으로 바란다. 판소리에서 등장인물이 비탄에 잠겨 쏟아내는 뼈에 사무치는 통곡소리를 들어도 좋고, 산조에서 한 악기의 음이 전달하는 ‘완전하게 독립적인 음악 형식’을 체험하는 것도 좋다. 그러면 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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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음악이 한국인의 감정과 정서를 그 소리로 전달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경험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정부나 개인의 지원을 받아 전 세계를 순회하며 한국 전통 음악을 알리려는 노력은 1970년대부터 시작하여 2001년에는 150여건에 이르고, 작은 공연장부터 2010년의 상하이 세계박람회 공연등 대규모 행사에 까지 참여하고 있다. 사물놀이에 집중되던 장르도 판소리, 민요, 산조를 비롯하여 다양해지면서 한국 전통음악에 대한 인기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 경제 《 전쟁의 폐허에서 G20 주최국으로 》
♣ 트로이 스탠가론 ( Troy Stangarone )
0 멤피스 대학에서 경제학 정치학 전공, 런던 경영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 석사
0 미국 뉴저지 주지사 보좌관, 상원의원 수석 입법 보좌관으로 활약
0 현재는 한미경제연구소의 의회 및 무역부문 연구부 이사
■ 결코 고요하지 않은 경제 발전
‘고요한 아침의 나라’. ‘은자의 왕국’. 외부에서 바라본 옛 한국의 모습은 이러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 현대사의 질곡을 딛고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래 지난 60년 동안, 한국은 밝은 미래를 개척하기 위해 해외로 눈을 돌렸고 실로 떠들썩한 발전을 거듭했다. 그 덕택에 이제 한국은 가난한 작은 나라라는 허물을 벗어 던지고 세계 경제 무대에서 당당하게 활약하고 있다. 오늘날 세계 여러 나라 국민들이 거리에서는 한국 자동차를 타고 가정에서는 한국산 텔레비전으로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시청하며, 그들의 아이들은 한국산 휴대전화로 친구들과 문자를 주고받는다.
이렇듯 한국인은 반세기가 넘는 세월을 부지런히 일했고 결국 사막이나 다름없던 불모지에서 출발해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경제를 일으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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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난 후에 한국이 달성해 온 경제 성장을 이보다 잘 묘사하는 예는 없을 것이다. 자국 영토에 미국 대사관을 지을 능력조차 없던 나라가 이제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버즈 두바이뿐 아니라 그 전에 세계에서 가장 높았던 건물 두 개를 모두 지었을 정도로 부상했다.
한국이 20세기 눈부신 성공 사례의 주인공인 것은 사실이지만, 성공과정이 늘 쉬웠던 것만은 아니다. 초기에는 고난과 희생을 견뎌야 했고 그 후로는 성공과 위기를 번갈아 겪어야 했다. 하지만 결국 한국은 성공했다. 모두들 가난과 경기 침체에서 결코 헤어나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국가가 지금은 세계 13위의 경제 대국이자 세계 10대 무역국으로 성장한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재건할 길을 찾던 한국에게 이런 날이 찾아오리라고 예측한 사람은 없었다.
■ 전쟁의 폐허 위에
1953년 7월 27일. 마침내 한국 전쟁의 포성이 멈췄다. 당시의 피해 상황을 돌아본 사람이면 누구나 재건이 엄청난 과제라고 느꼈을 것이다. 한국은 일본의 손아귀에서 야만적인 식민 통치에 시달렸고, 냉전의 결과로 나라가 둘로 분단되는 아픔을 겪었으며, 북측의 동포에 맞서 3년 동안 전쟁을 치러야 했던 반세기의 역사를 딛고 일어섰다.
- 미 군정장관 대리 찰스 헬믹 장군 : “한국은 높은 생활수준에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경제를 향상시킬 기술과 사람이 전무하다.”
- 종전 당시 이승만 정권은 국가를 재건할 자본이 전혀 없었고, 천연자원 및 일제시대에 발달했던 대부분의 산업도 북에 있었다.
- 세계 최빈국 한국은 전쟁으로 100만 명이 죽고, 500만 명이 길거리에, 30만 명의 과부, 10만 명의 고아, 100만 명의 북한 피난민 등이 미국에서 지원하는 우유가루와 옥수수 가루로 연명 했다.
박정의 정권의 등장
- 해외 원조나 지원 중심의 경제에서 외채 중심의 적극적 개발정책 실천
- 은행 국유화, 경제기획원 설립 및 부총리 승격
- 65년 한 ․ 일 국교 정상화로 무상공여, 차관, 민간지원 등 8억 달러 확보
- 배트남 참전으로 상당한 경제적 이권 획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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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출주도의 경제정책 전개
■ 경제개발 5개년 계획
0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 62년,
- 직물, 신발, 의류 등 경공업 제품 중심
0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 67년
- 석유화학, 기계, 선박, 전기장비 등 중공업 중심
- 한일 국교 정상화 자금 투입으로 포항제철소 건립
한국은 중화학 공업 계획의 시행으로 산업 기반을 다지면서 두 차례에 걸쳐 5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정부는 8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세계에 경제를 개방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과정에서, 재벌은 경제 발전을 추진하는 동시에 세계 수출 시장에서 경쟁하는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많은 재벌은 전쟁 이후에 설립되어 상대적으로 젊었다. 또한 대개가 가족 중심 운영 체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설립자의 다수는 21세기 들어서기까지 운영에 깊이 참여했다가 최근에 들어서야 차세대에 운영권을 넘겨주고 있다.
재벌의 대대적인 추진력이 없었다면 한국 경제는 그토록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을 비판하는 목소리 또한 만만치 않다. 한국인들 사이에는 재벌이 스스로 모험을 감수해서 성공했다기보다 박정희 정권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혜택을 입었다는 의식이 많다. 그러나 재벌 기업들의 부상을 둘러싸고 불편한 감정이 존재할지라도, 그 재벌들이 원래 큰 기업이 아니라 변변찮은 기업에서 출발해서 부단한 노력을 통해 이룩했다는 점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
결과적으로 한국에는 불과 수 십 년 만에 세계 리더의 자리에 오른 기업이 생겨났다. 오늘날 한국은 세계 최대 선박 제조국이자 세계 5위의 자동차 생산국이다. 선박과 자동차 모두 분단 당시에는 한국에 존재하지 않았던 산업이다.
* 1965년 매출액 기준 기업 순위
1. 동명목재 2. 금성방직 3. 판본방직 4. 경성방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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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대성목재 6. 양회수출조합 7. 동일방직 8. 동신화학
9. 대한제분 10. 제일제당 11. 충주비료 12. 조선견직
13. 대한양회 14. 조선방직 15. 제일모직
* 1996년 (2006년) 매출액 기준 기업 순위
1. 한전 (삼성전자) 2. 포철 (posco)
3. 삼성전자 (국민은행) 4. 대우 (한전)
5. 현대자동차 (신한지주) 6. LG 전자 (우리금융)
7. SK (SK텔레콤) 8. LG 화학 (현대자동차)
9. 대우중공업 (하이닉스) 10. 현대건설 (KT)
■ 두 차례의 금융위기를 뚫다
금융위기가 닥치자 한국의 외환 보유액은 바닥나고, 외국 자본이 떠나고 많은 재벌이 파산했으며, 금융시장은 신뢰 상실과 진통을 겪었다. 한국인들은 자국 외환 보유액의 고갈을 막기 위해 힘을 합해 시계, 귀걸이, 목걸이, 특히 경화 구매에 사용되는 금제품을 기증했다. 비록 2년 안에 경제가 회복되어 돌아가기 시작했지만, 이시기에 경제 성장률은 6% 축소되었고 30년에 걸쳐 이룩한 눈부신 경제 성장은 정지한 듯 했다.
위기가 끝나자 한국과 기타 아시아 국가들은 미래의 금융 위기로부터 자국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첫째, 외화 보유고를 확보하기 시작했다. 이는 아이러니컬하게도 2008 금융 위기의 원인 중 하나인 글로벌 임밸런스, 즉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와 아시아 신흥국들의 경상수지 흑자로 대비되는 지역 간 불균형 현상을 촉진하는 조치였다. 둘째, 치앙마이 이니셔티브로 불리는 통화 외환 협정을 체결했다. 1997년 금융위기 같은 위기가 또 발생하는 경우, 외화를 이용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기 위해서였다.
2008년 후반 들어 국제 금융 위기가 강타했을 때 한국은 폭풍우를 견뎌내기에 훨씬 좋은 상황에 놓여 있었다. 지난 20년 동안 일본의 경제 성장을 지연시켰던 일본 금융 위기와 1997년의 외환 위기로부터 이미 중요한 교훈을 얻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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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속하게 위기에 대처한 덕택에 한국은 경제 성장률을 회복한 몇 안 되는 국가에 속하게 되었다. 또한 한국에 대한 국제 평판도 향상되었다. 위기 초반에 이명박 대통령은 위기를 악화시킬 가능성이 있는 잠재적인 보호 무역 정책의 확산을 막기 위해 G20 정상회의의 개최를 막후에서 추진했다.
■ 동북아시아의 중심으로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인 한국은 지정학적 이유로 오랜 기간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국은 이런 지역적 특성을 장점으로 전환해서 안정과 번영을 가져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국은 경제활동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중국 동부 연안 도시와, 일본 사이에 위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구 100만 명이 넘는 50개 이상의 도시와 비행기로 3시간 30분밖에 되지 않는 거리에 있다. 또한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하면 철도로 한국과 유럽을 연결할 수 있어서 전 유라시아 경제 통로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유통 부문에서 동북아시아의 중심이 되겠다는 한국의 결정은 합리적인 선택으로 보인다. 한국은 동북아시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천 국제공항과 부산항 등 세계적으로 번화한 항구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이 유통과 금융 서비스의 중심이 될 수 있을지는 아직 불확실하지만 동북아시아에서 자유무역협정(FTA)의 중심국가가 될 가능성은 크다. 2003년 이전만 해도 세계무역기구(WTO) 회원국 중에서 다른 국가와 FTA를 체결하지 않았던 국가는 한국과 몽골뿐이었다. 그때까지 한국은 WTO와 그 전신인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 협정(GATT)을 통해서만 무역 자유화를 추진해 왔다.
한국의 경제 성장은 무역에 크게 의존한다. 지난 10년 간 국가가 무역 확대를 위해 사용했던 통상적인 방법은 FTA 체결이었다. FTA는 국가 사이의 무역을 증대시키지만 다른 교역국과의 무역에는 방해가 되는 것이 사실이다. 설사 그들이 좋은 제품을 더욱 낮은 가격에 제공할 수 있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한국은 FTA를 가동시키면서 두 가지 정책 목표를 동시에 추진할 수 있었다. 첫째, 무역 상대국과 FTA를 체결함으로써 자국산 제품을 경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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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낮은 관세율로 외국 시장에 수출할 수 있게 되었다. 둘째, 큰 국가들과 FTA를 체결하기 시작하면서 OECD 국가 중 발전이 가장 늦은 서비스 부문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과거에 FTA를 체결한 경험이 없는 한국은 우선 경제 규모가 작은 교역국과 협상을 벌이기 시작했다. 외국과의 치열한 경쟁으로부터 부정적인 영향을 받게 될 부분을 예측하고, 협상 경험을 얻기 위해서였다. 2003년 들어 한국은 칠레와 첫 FTA를 체결했다. 그리고 싱가포르, 뒤이어 유럽 자유무역 연합, 동남아시아 국제 연합과 차례로 FTA를 체결했다.
협상중인 FTA와 계획 중인 FTA를 체결하고 나면 한국은 매우 포괄적인 무역 네트워크를 보유하게 된다. 이들 네트워크는 주요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모두 포함하기 때문에 한국 기업은 지속적인 경제 성장에 필요한 주요 천연자원을 보유한 국가뿐만 아니라 선진국 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특혜를 누리게 될 것이다.
이렇듯 포괄적인 FTA 네트워크는 한국에 여러 이익을 안겨 줄 것이다. 첫째, 한국 기업은 좀 더 국제적인 경쟁에 노출되어, 장기적으로 외국 기업과 경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될 것이다. 둘째, 외국 기업이 해외 시장에 내 놓을 제품을 제조하는 장소로서 한국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한국의 FTA 네트워크를 이용하면 개발도상국의 매력적인 시장에 우선적으로 접근할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수출 다각화를 통해 자국의 경제적 미래가 어느 한 나라에 좌지우지되는 현상을 줄일 수 있다.
■ 한국의 앞날을 좌우할 도전들
한국이 아시아 금융 위기를 극복했다고 해서 예전과 같은 두 자릿수 경제 성장률을 기대해서는 안된다. 한국의 경제 성장 둔화는 금융 위기가 미친 피해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만큼 경제가 성숙해졌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성장률 감소는 선진국에 가까워지면서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아시아 금융 위기와 2008년 국제 금융 위기를 겪은 한국은 세계 주요 경제국의 하나로 부상하고 1인당 국민 소득도 2만 달러의 문턱을 곧 넘어설 것이다.
한국은 현대 경제 체제로 발전하는 데 성공했지만 앞으로 여러 도전에 직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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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수 십 년에 걸쳐 한국은 훨씬 경쟁이 치열한 국제 사회에서 인구 통계상의 도전, 지리적 환경의 도전, 세계화와 산업 불균형에 관련된 도전에 맞딱뜨려 이들을 해결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우선 인구 통계상의 난관이 한국을 기다린다. 중국은 부유해지기도 전에 노령화가 시작된 세계 최초의 나라가 되리라고들 한다. 한국은 이런 난관에 빠지지는 않겠지만, 인구가 감소하고 고령화되는 경향에 직면해 있는 것은 사실이다.
- 평균 수명 : 1960년 52.4세 → 2007년 79.6세
- 65세 이상 인구 비율 2000년 7% → 2018년 14.4%
- 인구수는 2018년 4,940만 명으로 정점을 찍고 감소세로 전환 예측
한국이 인구 통계상의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또 다른 선택은 이민 개혁이다. 한국은 단일 민족 사회로서 아직까지는 이민자를 거의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지만 22세기로 전환되는 시점에서 인구가 절반으로 감소할 수 있다는 추정까지 나올 정도로 한국의 장기 인구 경향은 암담해 보인다. 이민 문호를 더욱 넓게 개방한다면 인구를 유지하고, 과세 기반을 확대하고, 개인에게 돌아가는 조세 부담을 줄이는 데 유용한 동시에 잠재적으로 경제 성장률 향상에도 기여할 것이다.
■ 세계화와 산업 불균형 문제
한국이 제조 생산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얘기는 그만큼 서비스 부문을 소홀히 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OECD 국가에서 서비스 부문은 GDP의 평균 70%를 차지한다. 한국의 서비스 산업은 2007년에도 GDP의 58%에 불과했다. 한국의 서비스 부문은 전반적으로 비효율적이어서, 2006년 노동 시간을 기준으로 산정한 한국의 노동 생산성은 미국의 34%에 지나지 않았다.
서비스 부문의 비효율성은 한국이 경제 개발을 추진하는 과정에 떠안은 만성적인 문제이다.
최근 한국은 자국의 서비스 산업이 안고 있는 만성적 문제를 잘 인식하고 문제 해결에 초점을 맞추었다. 따라서 금융 서비스 산업의 개혁을 위해 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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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통합법을 시행하는 동시에, EU와 미국을 상대로 FTA 체결 협상을 벌이면서 서비스 부문을 세계 시장에 개방하고 국제 경쟁력을 갖춘 분야로 성장시키려는 분명한 목표를 세웠다.
■ 북한과의 불확실한 미래
한국 경제와 관련해서 고려해야 할 잠재적인 난제는 바로 북한의 영향이다. 북한은 한국에게 있어서 예측하거나 통제하기 어려운 요소이다. 외부에서는 북한의 도발적 행동이 국제시장에서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초래하여 한국 제품의 가격을 낮춘다고 추정한다. 한국 전쟁이 끝나고 몇 년 동안, 전쟁이 언제든지 재개될 수 있다는 우려는 일리가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북한의 도발은 더 이상 남한의 사업과 투자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실제로 북한이 최근에 핵무기시험을 감행했을 때에도 본질적으로 남한 경제는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다. 디스카운트 요소가 여전히 존재할지는 모르지만, 대체로 투자자와 사업가들은 북한의 행동을 이미 염두에 두고 결정을 내리고 있다.
북한이 남한 경제에 안기는 진정한 문제는 북한의 붕괴가 한국 경제에 미칠 영향이다.
통일로 인해 발생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은 서독이 할 수 없었던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북한을 향한 포용 정책의 일환으로 비무장지대 바로 너머 북한 지역에 공동 공업단지를 조성한 것이다.
개성 공단은 북한의 노동력과 남한의 자본과 노하우를 적절히 활용하고 있다. 개성 공단 조성의 목표는 북한의 소득을 점진적으로 증가시키고, 북한을 시장 경제에 노출시켜서 통일 과정의 부담을 줄이려는 것이다. 개성 공단 프로젝트의 성공 여부를 판단하기는 시기적으로 이르다. 하지만 이는 통일이 초래할 난관을 최소화하려는 긍정적인 노력의 일환이라고 보아야 한다.
■ 국제사회에서 더욱 커진 한국의 역할
사회가 진통과 조정을 겪고 있기는 하지만, 한국은 경제적으로 성공 했다. 노동력, 기술력, 창의력, 강력한 교육체계, 효율적인 계획을 통해 한국은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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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의 빈곤국으로부터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의 하나로 자립했다. 한국의 경제 규모는 10억 달러를 약간 상회하던 정도에서 1조 달러까지 성장했다. 과거에 100달러 미만이었던 1인당 소득은 2010년에 다시 2만 달러를 넘어서리라 예측되고 있다.
국민의 생활이 향상된 외에도 경제 성장으로 인해 국제 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이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예로 한국은 아시아 국가로는 최초로 2010년 G20 정상회의 개최국이 되었고, 외무부 장관이었던 반기문이 유엔 총장에 선출되었다. 또한 1988년 올림픽 경기를 개최했을 뿐만 아니라 2002년 FIFA 월드컵 대회를 일본과 공동 개최했다. 그리고
- 1966년 OECD 가입으로 한국의 경제적 성취를 시계에 인정받음
- 2009년 바젤 은행위원회와 금융안정화 포럼 가입으로 국제 은행 감독에 발언권을 갖게 되고
- 2010년 아시아 국가로는 처음으로 G20 정상회의를 개최하고 국제적인 토론을 위한 의제를 수립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 한다.
국제 기관으로서 G20 정상회의의 역할은 현재 당면한 위기의 결과로 더욱 커진 상태이다. 과거 G20은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의 회합으로 국제금융 안정을 촉진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세계 금융 위기로 인해서 세계 지도자들이 국제 경제 문제에 대해 토의하기 위한 포럼으로 자리 잡으면서 그 역할이 G8보다 중시되고 있다.
■ 한국 경제의 미래는
자원 고갈과 환경문제에 대비해서 한국은 ‘녹색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한국의 국제적 리더십을 보여줄 수 있는 부문으로 저 탄소 녹색 성장을 지목하기도 했다. 실제로 한국은 녹색 기술의 개발과 생산 분야에서 리더가 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한국은 녹색 기술과 사회 기반 시설에 매년 GDP의 2%를 투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경제 성장 엔진으로 재생 가능한 저탄소 에너지, 발광 다이오드 기술, 녹색 교통수단 등의 영역에 초점을 맞추겠다고 발표했다. 재생 에너지 영역에서는 전체 전력 공급 중 재생 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율을 현재 2.6%에서 2030년에 11%까지 끌어 올린다는 목표를 수립했다. 한국이 재생 에너지원의 개발에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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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현재 거의 100%에 달하는 외국 에너지원에 대한 의존도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이 중점을 두는 또 다른 영역은 원자력 기술이다. 세계가 이산화탄소의 배출을 줄이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에 다수의 국가가 동력원을 확보할 목적으로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원자력 기술로 눈을 돌리고 있다. 세계 원자력 협회의 예측에 따르면 2030년까지 세계적으로 430개의 원자력 발전소가 추가로 건립되어서 2050년에 이르면 모두 1,400개에 이를 것이라 한다. 2010년에 한국은 최초로 원자력 발전소를 아랍에미리트 연합국에 수출했고, 2030년까지 80개의 발전소를 수출할 계획이다.
한국 정부가 미래성장 엔진으로 겨냥하고 있는 또 다른 영역은 고부가 가치 서비스, 특히 관광 관련 서비스이다. 녹색 성장 목표에 맞춰 녹색 관광 분야를 개발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한국에는 생태 관광객의 관심을 끌 만한 지역이 많다. 남북 분단으로 말미암아 아마도 세계에서 생태학적으로 가장 잘 보존된 지역 중 하나로 비무장지대도 여기에 포함된다.
기타 관광 분야 후보로는 의료 서비스와 세계 컨벤션 산업이 있다. 마지막으로 한국은 지식 기반산업의 발달에 집중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주로 정보 기술, 바이오 기술, 나노 기술 등 첨단 기술 부문이 통합되는 영역을 중심으로 이뤄질 것이다. 공상 과학 개념이 점차 현실로 나타나는 시대를 맞이해서 기술 통합 영역의 연구는 한국의 미래 성장에 중요한 기반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의료 서비스가 개인의 필요에 맞춰 특화됨에 따라 정보를 저장 ․ 분류 ․ 분석하기 위한 새로운 정보 기술이 필요할 것이다. 이런 정보는 환자에게 나노 수준으로 특화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원래 통신, 무선 기술, 인터넷, 컴퓨터의 통합으로 혁신적인 스마트폰이 만들어졌듯이, 기술 통합을 통한 진보는 앞으로 수 십 년 안에 의학 분야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끌어 낼 가능성이 크다.
* 이 책은 도서출판 파이카 대표 이규빈, 김혜원이 2010년 G20 정상회담에 맞추어 1년 전부터 기획, 출판한 책입니다.
2011년 1월 30일 제1부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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