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리더십 선비를 말하다

2011. 5. 23. 13:43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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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리더십 선비를 말하다

                 - 정옥자 역사에세이 -


■ 정옥자

0 1942 춘천 生, 서울대 사학과 졸, 동대학원 석사. 박사

0 1981-2007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0 1999-2003 서울대학교 규장각 관장

0 2008-2010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0 현,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명예교수

0 저서

조선후기 역사의 이해. 역사에세이. 조선후기 조선중화사상 연구. 역사에서   희망 읽기. 정조의 문예사상과 규장각.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선비.     조선 후기 중인문화 연구. 오늘이 역사다. 등

0 2007 국무총리 공로상, 2010 제1회 민세상(안재홍) 수상 (학술부문) 등


■ 책머리에    


올 해 우리 나이로 70이 되었다. 옛 시인도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 읊었듯이 사람이 70까지 사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은가 보다. 아홉 살에 6․25 전쟁이 나 집안이 풍비박산 난 후 60년 세월을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다. 이제 와 돌이켜보니 “열심히 살았다”는 말밖에 따로 덧붙일 말이 없는 것 같다. 돌아볼 겨를이 없었으니 후회할 겨를도 없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느낌으로 돌아보니 옛 성현의 말씀이 새삼스럽게 마음에 와 닿는다.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라는 구절이 유독 머리에서 떠나지 않음은 무슨 이유일까? 내 마음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상식에 크게 어긋나지 않은 상태는 얼마나 편안한 경지일까? 일마다 속셈하고 따지고 후회하는 속 끓임이 없으니 얼마나 좋을까? 나이 70이 된다고 누구나 거저 되는 것이 아닐진대, 70이 되면 그런 경지에 이르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라는 충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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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從心所慾不踰矩 ( 踰 : 넘을 유. 矩 : 곡척 구, 법, 법도)

  공자가 나이 70에 얻었다는 대자유의 경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규범과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는 뜻


그래서 날마다 마음을 비우는 연습을 하고 있다. 역사의 거울에 비춰보는 것이 그 하나의 방법이다. 예부터 역사는 거울이라 했다. 현재의 나를 비춰 보고 미래의 모습까지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이다. 역사에서 좋은 역할 모델을 찾아내어 항상 나를 비교해 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역사가는 결국 역사라는 거울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역사라는 대롱으로 세상을 관조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학들은 그런 글을 모아 독사관견(讀史管見)이니 독사여적(讀史餘滴)이니 하는 제목을 붙였다. 역사책에 통감(通鑑)이란 제목을 많이 붙인 것도 그런 맥락이다.  

필자가 평생 천착해온 주제가 조선시대 지식인인 선비와 그 사상. 그들이 관료가 되어 사대부로서 그 이상을 어떻게 실현해 가며 한 시대를 이끌어갔는가 하는 문제였기에 내 글 전체에 이런 의식이 깔려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우리의 문화 인자로 면면하게 유전되고 있는 선비 정신이야말로 우리가 계승해야 할 정신적 자산이고 다가오는 평화의 시대, 문화의 시대에 꼭 필요한 한국적 리더십이라 생각된다.

            -  2011년 초봄  봉의산 문소재(聞韶齋)에서 정옥자 -


제1장 화이부동(和而不同)을 꿈꾸며  


■ 나와 4․19 혁명과 한국 현대사


1960년 봄, 나는 동대문 밖 숭인동에 있는 동덕여고 3학년에 다니고 있었다. 대학 진학을 코앞에 두고 있어서 다른 생각은 할 겨를이 없던 절박한 시기였다. 중학교를 고향 춘천에서 마치고 낯선 서울의 고등학교에 진학한 처지였기에 늘 ‘타교생’ 이라는 딱지가 붙어 다녔다. 타교생이라는 말엔 이질감과 소외감이 묻어나곤 했지만, 나는 별로 개의치 않고 열심히 학교생활을 했다.

양풍이 거세게 불고 경쟁이 치열해지던 1950년대 말임에도 학교는 유교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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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풍을 고스란히 갖고 있었다. 아침 조회 때마다 조동식 교장선생님의 훈화가 있었는데, “옛 성현의 말씀에……”로 시작되는 훈화의 내용은 거의 유교 경전 뜻풀이였다. 조동식 선생님은 당시 교육계의 원로로서 사회적 존경을 한 몸에 받고 계셨다. 그런 존경심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가정교육 때문이었는지, 나는 교장선생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하면서 귀를 기울였다.

그분이 말씀하시던 옛 성현은 거의 공자를 지칭한 것이었고, 그 내용은 거의 ‘논어’의 한 구절을 쉽게 풀어 설명하시며 예화를 든 것이었음을 훗날에야 깨달았다. 그때는 ‘논어’를 통독하기 전이었다. 반장으로 맨 앞에 서서 꼼짝 못하고 경청하다가 어느 덧 그 말씀에 빠져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선생님들도 툭하면 “공부만 잘하면 무엇하니? 인간이 되어야지. 공부 잘해서 일류 대학 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것이다”라고 역설하셨다. 그 학교의 목표는 ‘현모양처’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대학 입학률로 일류, 이류를 따지던 치열한 경쟁에서 약간 비켜선 듯한 학교였다. 

그런 분위기여서 내 고등학교 생활은 항상 넉넉했다. 공부에만 매달리지 않고 내가 좋아하던 책을 마음껏 읽고 문예반 활동을 하거나 합창반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미술반에 가서 그림을 그렸다. 당시 학교에는 좋은 선생님 들이 여러분 계셨다. 일류 대학을 고집하며 학생들을 볶아 대지도 않았다. 그렇게 목련꽃 그늘 아래서 노래를 부르던 아름다운 여고시절은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마자 터진 4․19로 산산조각 났다.


그때 나는 학생회장이 되어 있었다. 바로 그 자리가 화근이었다.  동대문 밖에 있던 동덕여고는 고려대학교 관할이었던 듯 고려대 학생회장이 소집하는 회의에 참석하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불려다녔다. 정작 괴로운 일은 학교 내부에서 일어났다. 불만들이 터져 나왔다. 어느 교과목의 선생님 교체, 동덕여대를 학교 밖으로 내보내기, 학교교칙(두발길이 등)완화, 급기야는 동맹 휴학과 이에 따르는 나에 대한 무성한 유언비어……, 심지어 빨갱이의 사주를 받고 있다는 말까지…….

그해 여름은 잔인했다. 그 잔인했던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자 사태는 진정되기 시작했다. 나는 그 경험을 통해 사람의 신념이라든가 주장이 얼마나 꺼지기 쉬운 거품 같은 것인지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 대학 입시라는 눈앞의 거대한 벽 앞에서 학생회 간부들은 모두 맥없이 무너졌다. 결국 회장 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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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지일관, 시작이 있었으니 끝을 맺어야 한다고 고집하는 꼴이 되었고, 나 하나만 접으면 되는 일이었다.


나는 점차 이단아로 낙인찍혔다. 유교적 교풍의 학교 분위기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고, 학생회장인 나에게 모든 책임이 전가되었다. 세 번이나 교무 회의에서 퇴학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다행히 무기명 투표라 부결되었다고 한다. 그 후 3개월 동안 나는 죽을 듯이 공부에 열중했고 내가 원하던 대학에 들어갔다. 내 인생의 중대 위기가 지나갔던 것이다.

졸업식엔 고려대학교 학생회장이 꽃다발을 들고 찾아와 축하해 주었다. 문과에선 내가 1등이었고 이과 1등보다 평균 점수가 6점이나 많았지만 이과 1등이 졸업생 대표로 상을 받았다. 이과가 문과보다 어렵다는 논리로 나를 설득하려 들었지만, 나는 이미 ‘데모한 애’로 기피 대상이 된 그 속내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일이 20년도 훨씬 지나서 1980년대 교수 생활에 학생들을 이해하는 열쇠가 될 줄 누가 알았으랴?


대학 1학년 새내기 때 5․16이 터졌다. 학교는 혼란에 빠졌고 학생운동은 거세게 일어났지만 나는 이미 고등학교 때 열병을 앓고 난 것 같은 초연한 기분이 들었다. 그 후 오불관언 도서관에 파묻혀 책과 씨름하며 강의실에만 들락거렸다.

어느새 대학교 4학년이 되어 졸업 논문을 써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 되었다. 사학과의 졸업 논문은 엄격하기로 소문나 있었다. 학부 졸업 논문이 지금의 석사 논문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겨졌다. 졸업 논문 제대로 못써서 졸업을 못하는 경우가 속출했다. 졸업 논문 부정행위자까지 나와 소동이 벌어지는 일도 있었다. 나는 평소 졸업 논문만은 제대로 써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난산 끝에 ‘신사유람단고’라는 논문을 완성시키고 나니 그 성취감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컸다. 더구나 지도 교수님이었던 한우근 선생님의 칭찬까지 듣고 ‘역사학보’ 27집에 실리고 나서 하늘을 나는 듯 기고만장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현실의 벽에 부딪혀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고 곧이어 결혼했다. “여학생은 키워야 소용없다”는 선생님들의 탄식을 뒤로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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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졸업 논문을 쓴 경험과 성취감은 다시 학교에 돌아와 공부하게 된 중요한 동인이 되었다.  10여 년의 전업주부 생활 끝에 1970년대 중반에 대학원에 들어갔다. 그전에 태동고전연구소에서 작고하신 임창순 선생님께 3년 동안 한문을 배운 끝에 다시 공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서 한 선택이었다. 10여 년 소시민의 삶은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소박한 생활인의 안정된 삶이었기에 6․25 전쟁 이후 고달팠던 내 삶에 휴식이자 위안이었고 재충전기였다.

대학원 생활은 녹록치 않았다. 아들 둘을 좀 키워 놓고 난 뒤 대학원 다니면서 딸을 낳고․․․․ . 그런 삶의 무게를 이기고 석사를 거쳐 박사과정에 들어갔다.


그제야 내 학부 졸업 논문이 1960년대의 화두였던 ‘근대화’와 관련 있음을 깨달았다. 사람은 누구나 시대를 비켜가지 못한다는 말이 나에게도 적용되었지 싶었다. 그래서 이른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19세기 외세에 대한 대응 이전 조선 문화의 정체성과 특수성을 찾아 떠나는 길고도 험한 여정을 선택했다. 18세기 조선 후기 문예 부흥기로 거슬러 올라가, 문치주의(文治主義)를 채택한 조선 왕조의 본질에 다가가려는 연구를 시작했다.

그 길목에서 규장각 고도서들이 훌륭한 안내자가 되어 주었다. ‘조선왕조실록’ 같은 연대기는 물론 문집 등 수많은 고서를 섭렵하면서 비로소 조선 왕조의 실체에 접근했다. 그 바탕에는 식민사관으로 얼룩진 조선 왕조의 역사를 바로 세워야겠다는 일념이 깔려 있었다. 이러한 방향 전환은 4․19 이후에 불어 닥친 민족주의 열풍과도 관련 있는 역사학계의 변화와 맞물려 있다.  전쟁 사관인 식민 사관을 극복하고 문화 사관과 평화 사관을 구축해 가는 과정이었던 셈이다.


1981년 7월 1일 부로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사학과 전임강사로 부임했다. 공교롭게도 신군부가 출범한 해였다. 이후 10여 년 교정은 민주화의 함성 속에 최루탄 가스와 시위로 얼룩졌다.


1990년대 우리 사회가 민주화의 단계에 접어들자 학생운동도 한 풀 꺾이고 진정기로 접어들었다. 그리하여 나는 규장각에 드나들며 공부에 열중할 수 있었다. 학문 후속 세대를 제대로 키워야겠다는 각성도 들었다. 내 학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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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하지만 후생을 키우는 일은 국가 백년대계가 아니겠나 싶어 강의에 주력했다. 이때가 가장 결실이 많았던 시기다.

1999년 규장각 관장직을 맡아 평생 규장각에 진 빚을 갚을 기회도 얻었다. 규장각은 내 학문의 요람이었다. 지금도 규장각이란 말만 들으면 가슴이 뛴다. 몇 백 년의 세월에도 어제 만든 것 같이 생생하고 격조높은 서적들, 그 좋은 책들이 눈에 선하고 후배들이 더욱 더 그 자료들을 잘 정리해 많은 성과를 거두길 바라고 있다. 규장각에서의 행정 경험과 노하우가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직을 수행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정년퇴직하고 고향에 내려가 있다가 국사편찬위원회에 갈 때 스스로에게 다짐한 것이 ‘국가와 민족을 위한 마지막 봉사’였다. 국사는 국어와 함께 우리 정체성의 근간이다. 일제 강점기에 우리 선조들은 독립운동을 하면서 우리말과 우리 역사는 혼(魂)이고 나라는 백(魄)이라고 혼백(魂魄)의 개념으로 설명하면서, 비록 일시적으로 ‘백’이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혼’만 살아 있으면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고 역설했다. 선조들은 우리역사를 혼의 일부로 끝까지 놓지 않았으며 결국 광복을 쟁취했다.

언제부터인가 교과 과정에서 국사가 위축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지금과 같은 세계화 시대에는 더욱 자기 역사를 알아야 한다. 선조들이 ‘혼’의 일부라고까지 했던 우리 역사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다면, 우리 역사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 주어야 하는 이때 오히려 역사 교과를 축소한다면, 시대에 역행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자부심 없이 무엇으로 정신 무장을 하고, 어떻게 세계화의 거센 파도를 넘을 수 있겠는가?  


■ 공부의 왕도

흔히 ‘공부엔 왕도가 없다’는 말을 한다. 이 말은 공부엔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보편적인 방법보다는 개개인의 능력과 환경에 따른 개별성이 강하게 작용한다는 뜻이 함축된 것 같다.

공부에 왕도가 있다면 누구나 그 왕도에 따라 공부하고, 그리된다면 공부 못하는 사람이 없게 될 터인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 공부엔 왕도가 없다는 말이 맞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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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공부 잘하는 사람은 여전히 있고 또 점점 불어나는 추세다. 각종 시험에서 변별력이 문제되는 것도 이러한 사실을 반증한다. 아마도 학습 방법이 나날이 진보하는 것 아닌가 싶다. 그러am로 공부를 더 잘하기 위해서는 각자에게 맞는 공부법을 개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공부 잘한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공부 잘해서 일류 상급학교에 진학 한다거나 1등 하겠다는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만 책 읽기를 좋아해서 주변에 있는 활자로 된 것은 모조리 주워 읽었다. 중학교 땐 학교 도서관의 시집, 소설은 물론 오빠와 언니  친구집까지 원정하여 주로 장편 소설을 빌려 밤새워 읽고 다음날 돌려주는 일이 잦았다.

다음 날 친구들에게 소설 내용을 요약해 들려주는 즐거움 또한 읽는 재미 못지 않았다. 친구들이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으로 결말을 재촉하고 감탄사를 연발하면서 추어주면 나는 어느새 변사가 되었다. 책 속엔 재미와 정보가 함께 있었고, 친구들에게 봉사하는 즐거움까지 더했으니…….

그러다 보니 나는 어느새 이야기꾼으로 유명해져 있었다. 이 덕분에 유명세만 탄 것이 아니라 공부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는 부수입까지 올렸다. 우선 내용을 요약하는 능력이 생겨났다. 우리에게 허용되는 시간에 따라 길게 자세하게 이야기하기도하고 짧고 간단하게 이야기하기도 하는 등 임기응변술을 익혔다. 다음으로는 책 속의 정보들을 수집 암기하여 부교재로 활용했다. 그리하여 또래 집단에서는 꽤 유식하다는 평을 들었다. 또한 집중력을 키울 수 있었다. 재미있는 스토리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날밤을 세우기 일쑤였는데, 독서삼매경에 빠지면 옆에서 굿을 하는지 떡을 치는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무아지경에 빠지곤 했다.

사춘기의 이러한 훈련은 훗날 학문의 길로 들어선 뒤 중요한 능력으로 작용했다.       


나는 요즈음 학생들에게 공부 방법으로 ‘반일독서 반일정사(半日讀書 半日 靜思)’라는 옛 공부법을 권하곤 한다. 하루의 반은 독서하고 나머지 반은 조용히 생각하라는 뜻이다. 이미 축적된 지식과 정보는 책 속에 있으므로 독서로 습득해야 한다. 그러나 책만 읽으면 기존의 지식과 상식의 틀에서 헤어나기 어렵다. 그러므로 조용히 생각하고 익힐 시간이 필요하며 앞으로 나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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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창조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옛날 선비들은 독서하기 전에 의관을 정비하고 주변을 깨끗이 정리했다. 산만한 환경에서는 제대로 공부할 수 없다는 인식에서였다. 또한 드러누워서 책을 읽는 행위를 ‘와간(臥看)’이라 하여 불경스럽다고 생각했다. 반듯한 자세로 책상에 앉아 안광(眼光)이 지배(紙背)에 철하도록, 다시 말하면 눈빛이 종이 뒷면까지 꿰뚫도록 진지하게 책을 읽어야 머리에도 잘 들어오고 제대로 된 공부법이라고 했다.

공부라는 말에 빛을 불어 넣은 사람은 송나라의 주희(朱熹 : 1130-1200)다. 통상 주자로 불리는 그는 평생을 학문에 바쳐 많은 책을 냈고, 그러한 자신의 행위를 공부라는 단어로 요약했다. 공부의 사전적 의미는 학문이나 기술을 배워서 연습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나아가 품성을 수양하고 의지를 단련하는 행위도 포함한다. 옛 선비의 수기(修己)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수기란 선비가 학문과 인격을 함께 닦는 것을 말한다.

전통시대 학자들은 지식의 습득뿐만 아니라 인격을 닦는 것을 함께 했다.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사람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인정받지 못했다. 여고 시절 선생님들이 늘 “공부만 잘하면 뭐하냐? 사람이 되어야지”하던 말씀의 원류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뭐니 뭐니 해도 공부의 종착역은 논어의 첫 구절인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면 불역열호(不亦說乎)아’의 경지가 아닐까 싶다. ‘배워서 때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라는 공자의 말씀은 공부의 즐거움을 대변한다. 학습의 기쁨을 알지 못하면 그 공부는 공허한 학문인 허학(虛學)이 되고 말 터이니…….


■ 교수의 기쁨과 슬픔   


대학에 몸담은 지 어언 사반세기에 가까워질 무렵 정년을 코앞에 두고 있을 때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가 좋아서 기쁘게 한 일보다 떠밀려 마지못해 한 일이 더 많은 것 같았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좋아하는 새로운 교과목을 신설해 남은 기간 즐겁게 강의해 보자는 거였다.

그리하여 소녀 시절부터 꿈꾸던 문학을 역사에 접목해 ‘역사와 역사소설’이라는 강의를 개설했다. 현대의 장편 역사소설을 주제의 시간성에 따라 선정했다. 이광수의 ‘단종애사’부터 김동인의 ‘운현궁의 봄’까지 문학성을 평가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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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작품은 물론, 대중적 작품도 넣고 동일한 작가의 작품은 중복되지 않도록 조정했다.


3학점짜리 강의로 일주일에 75분 강의를 두 번에 걸쳐 하게 되어 있어, 첫 시간에는 스토리텔링을 하도록 하고 두 번째 시간에는 팩트(사실)와 픽션(허구)을 구별해 보고 역사적 개연성 등에 대한 종합 토론을 하도록 했다. 스토리텔링은 상황극을 해도 좋다고 했다.

놀라운 것은 학생들이 연극을 좋아 한다는 사실이었다. 학생들은 극적인 장면을 골라 연극으로 꾸미곤 했다. 마분지로 만든 왕관을 비롯해 사약, 이름표 등 소도구를 구비해 실감나게 연극을 벌여 시간마다 요절복통할 일이 생겼다. 어떤 시간에는 너무 웃어서 아귀가 아픈가 하면 시간 내내 웃다가 끝나는 때도 있었다.

그렇게 즐거운 강의는 내 교수 생활을 통틀어 처음이었다. 그러나 즐거움의 시간이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으로 이어졌다. 종강을 하고 성적을 처리해야 하는 순간이 되었던 것이다. 문제는 학생들의 변별력이 크지 않다는 것이었다. 결석도 지각도 안 한 학생이 2/3가 넘고, 발표도 모두 열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숙제나 보고서도 잘 써낸 학생이 대부분이어서, C학점 이하 학생이 열 명도 안 되었다.

그런데 제도적으로는 C 이하 점수를 수강생의 30%에게 주어야 성적이 입력되었다. 나는 눈물을 머금고 B인 학생 중 일부를 C로 떨구는 작업을 했다. 말하자면 트집 잡기였다.


전통 시대에도 점수를 매겼다. 우리 어려서만 해도 숙제를 해가면 선생님이 빨간 색연필로 동그라미를 그려줬다. 동그라미가 몇 개인지 비교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강제로 점수를 깎는 일은 없었다.

이 강의를 두 학기 더 하고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학생들과의 즐거운 추억 만들기를 위해 개설한 교과목이 내 멍에가 되어 버렸다. 학생들과 함께하는 강의의 기쁨에 대한 기대 못지않게 성적 처리의 먹구름을 드리웠다.


■ 우리 학문의 주변성 문제


동양 사회의 근대화 과정은, 한마디로 서구화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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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그것은 국가 체제, 제도 문물, 문화 전반에 걸쳐 진행되었지만, 그 핵심엔 학문 체계의 서구화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이는 우리 학계도 서구 중심 학문 체계의 주변부로 편입되었음을 뜻한다. 

1894년 갑오경장으로 학제가 변경되어 지금까지 학문과 교육의 중심에 있던 성균관의 위상이 추락하고 기술학과 어학이 부상하자 당대의 지식인들은 “신발과 모자가 바뀌었다”라고 까지 비판했다. 우리 전통 학문의 뿌리는 이때부터 시들어 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이후 우리 시대에 뒤졌다고 생각한 우리의 전통 학문을 스스로 폐기 처분해 가며 1세기 이상 서양 배우기에 골몰했다.


서양 운동인 축구의 4강 진입, 음악 영화 등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젊은이들로 지난 세월의 변방의식을 깜빡 잊어버리기도 하지만 학문 분야에서는 아직도 심한 변방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국제대회를 열어놓고도 주인 노릇을 제대로 못하고, 큰 비용을 들여 세계적 석학을 초청하지만 일회용 행사로 끝나고, 얻어 듣고 배우는 단순한 목적도 달성하지 못하는 일이 부지기수다. 학문의 종속화를 불러들이고 학문의 식민지로 전락하려는 몸부림으로 보인다.

최근 우리 학계에도 이런 현상을 극복하려는 움직임이 보인다. 세계 학계에 진입해 그 학회에서 주도권을 장악하는 일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한 예로 세계지리연합회(IGU) 사무총장에 당선된 류우익 교수를 들 수 있다.

이 학회는 각국의 지리학회가 모여 구성된 연합체로 4년에 한 번씩 돌아가며 세계지리학대회를 여는데, 우리나라에서는 2000년에 열렸다. 그때 열린 전시회에 규장각에 있던 고지도를 협찬한 인연으로 그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 후 류우익 교수는 일본 후보와 치열한 경합 끝에 사무총장의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그런데 강의 부담등 대학교수의 신분 때문에 운신의 폭이 좁고, 규정이 없어서 임무 수행이 어렵다는 것이다.

1871년 탄생한 이 학회는 영토문제에 개입해 막강한 힘을 행사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지리학에는 국적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한다. 지리학에는 국경이 있다는 말이다. 독도나 동해의 표기 문제 등 현안도 외교적 노력 이전에 학술적 연구를 통한 이론의 힘이 보태지지 않으면 해결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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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도 지난날의 군사․정치적 외교에서 벗어나 통상 외교로, 이제는 문화․학술․외교 쪽으로 무게 중심이 이동하는 추세다 이런 환경 변화는 우리에게 희망적이다. 언제까지나 서구 중심의 세계관 속에 웅크리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그곳에서 뛰쳐나올 것인가? 우리는 갈림길에 서 있다.

규정은 만들면 된다. 지금까지 이런 규정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서구 학문의 주변부라는 변방 의식을 아직도 갖고 있다는 징표다.


■ 제국주의 세계질서와 문화재 약탈           


18세기 조선 왕조는 고유문화인 진경문화를 창달하여 조선이 문화적으로 세계 최고라는 자부심을 한껏 고양했다. 우리 역사상 변방의식을 완전히 불식한 대역전의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그러나 달도 차면 이울고, 꽃도 만개하면 곧 시드는 법, 19세기에 조선은 사양길로 접어들고, 시대사상으로 기능하던 조선 성리학은 새로운 변화 논리인 북학 사상으로 전환되고 있었다. 청나라의 신학문인 고증학과 청나라가 수용한 서구 과학 기술을 조선에 도입해 기술적인 낙후성을 극복해 보고자 했다.

이 사상이 뿌리내려 결실을 맺기도 전에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물결은 ‘은자(隱者)의 나라’로 그들이 이름 지은 조선 사회에도 어김없이 밀려왔다.


- 19세기 중엽부터 이양선(異樣船)이 우리 근해에 출몰하기 시작 - 1860년 영․불 연합군의 북경 점령 - 1866. 7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 사건 발발 -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침입한 이 상선은 평양 주민을 약탈하고 살육을 자행했다. 분노한 평양 주민과 관군은 합세해서 배를 불사르고 선원을 모두 살해했다. 

- 대원군의 강경 대외정책(쇄국정책)  ; 서구 열강의 조선 침략은 천주교가 관련되었다는 판단 하에 프랑스 신부 및 조선인 신도를 처형하고, 병자호란 때의 척화론(斥和論)을 계승해 척화비를 건립하였다. 그들을 양이(洋夷)로 규정한 까닭은 종족적 차원이나 편견이 아닌, 무력으로 난입한 국제적 무법자라는 인식에서 나온 판단이었다.

- 이에 프랑스 정부는 로즈 제독에게 극동함대 7척과 천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1866년 9월 강화도를 점령케 했으며, 조선 정부에 대한 요구조건은 프랑스 신부 살해자 처벌과 통상조약 체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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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대원군은 군대를 보내어 치열한 전투 끝에 프랑스 군을 격퇴함으로써 병인양요는 종식되었다.


프랑스군은 40여일 만에 물러가면서 강화도 일대에 약탈과 방화를 자행했다. 강화도에 있던 행궁(行宮)의 전각들을 불태우고 20만 프랑 상당의 은괴와 정조 때 설치한 외규장각의 귀중 도서들을 약탈해 갔다. 외규장각에는 6천여 책의 귀중한 자료들이 보관되어 있었는데, 대부분 불태우고 의궤(儀軌)류 3백여 책을 약탈해 나폴레옹 3세에게 바쳤던바, 지금 파리 국립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2011년 일부 돌아 옴)

의궤는 조선 왕조의 각종 국가 행사를 그림으로 그려 놓은 기록화와 행사 기록을 함께 엮어 놓은 책이다. 3백여 년의 세월에도 어제 만든 듯 깨끗하고 질긴 종이, 아름다운 활자, 당대 제일의 화원들이 그려 넣은 기록화 등 그림과 글씨, 내용의 정밀함이 어우러진 다목적 문화재다. 어람용(御覽用 : 임금이 친히 보는 용도) 의궤는 비단으로 된 화려한 장정과 장식으로 프랑스 군의 관심을 끌어 불행 중 다행으로 소실되는 운명을 면하고 이역만리로 약탈 반출 되었던 것이다.

약탈 문화재는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 강탈당한 물건은 당연히 사과를 받고 돌려받아도 죄는 남는다.


19세기부터 제국주의가 지배 논리가 된 후 문화재 약탈이 1세기 동안 자행되었다. 현재 선진국이라고 하는 나라들이 박물관에 진열된 물건 대부분이 바로 이 시기에 전 세계에서 약탈․발굴․수집한 것들임은 너무 잘 알려진 사실이다. 남의 물건으로 박물관을 차려 놓고 허장성세하며 관광 수입을 올리고 있는 나라들은 선진국으로 행세할 자격이 없다. 이들이 유일하게 주장하는 바는 보전 기술과 보전 능력이 탁월해 문화재 원 소유국보다 훨씬 잘 보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현실론은 일시적인 변명이나 미봉책에 불과하다.

문화재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하고 원래의 자리에서 잘 보존하는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인류의 양심이다. 지금까지 남의 문화재로 자신의 문화를 살찌웠다면 이제는 주인에게 돌려주고 지금까지 향유한 값을 치러야 한다. 그 방법은 원소유국에 보존 기술 또는 보존 시설을 지원해 주는 등 다양한 각도에서 모색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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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문화재를 다량 약탈한 나라들은 세계의 최강국도 아니다. 냉전시대 동서 진영의 대표격인 미국이나 러시아도 약탈문화재에 의존하여 박물관을 꾸며 놓은 나라는 아니라고 알고 있다. 강국으로 부상하는 중국은 오히려 피해국 중의 하나다. 피해국이 다수지 약탈국이 다수가 아니다. 남을 침략하거나 약탈한 전력이 없는 우리나라는 앞으로 전개될 국제 질서에서 도덕적 입지가 강하다. 평화 공존을 지향하리라 전망되는 신질서에서 발언권을 높일 만한 상황에 있다는 말이다. 국제적인 관심을 높이고 세계인의 공감을 얻어 연합 전선을 구축할 수도 있다.

새로이 시작된 21세기다. 지난날 세계를 제패하며 다른 나라의 문화재를 약탈해 소장하고 있는 서구 열강들은 지난날의 악업을 청산하고 평화와 화합의 시대를 여는 의미에서 문화재 반환에 눈을 돌려야 한다.


■ 책을 위하여         


책에 대한 믿음과 연모를 평생 갖고 있어서인지 책과 함께하는 학자의 길을 걸었고, 책과 관련된 일을 많이 하게 됐다.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 간행물 윤리상 심사를 맡은 일로 수상자들의 수상 소감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인문학의 위기에 대응하는 소명을 다하기 위해 10년째 소신 출판을 해 오던 출판인은 너무 힘들어 인제 그만 접어야겠다고 마음먹자 수상하게 되어 몹시 착잡하다고 심경을 토로했다. 특별상을 탄 ‘TV 책을 말하다’ 팀의 실무자는 이 프로그램의 존속 여부에 고민하고 있었다.

사실 우리나라만큼 책을 우대한 전통을 가진 나라도 드물다. 조선 왕조는 기본적으로 지식 기반 사회였다. 조선 왕조가 국교로 채택한 유교의 근본정신은 평화 공존을 위한 문치주의(文治主義)였다 문치란 글로서 다스린다는 것이니, 글이란 지식을 의미하고 그것은 책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책을 통해 습득한 지식이 국가 사회 운영의 기초였고 ‘박학다식하다’ 거나 ‘유식하다’는 말이 인물평에서 최고의 칭찬이었다. 주경야독(晝耕夜讀)이라 하여 낮에는 밭 갈고 밤에는 책을 읽는 것을 장려하는 사회분위기였다.


조선시대 국왕은 하루에 세 번 조강(朝講), 주강(晝講), 석강(夕講)이라 하여 신하들의 강의를 들으며  책을 읽어야만 했다. 박학다식한 신하들의 말귀를 제대로 알아듣고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도 그 자신이 유식하지 않으면 안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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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이 조선 국왕들의 운명이었다.

책에서 얻는 지식 정보가 사회 운영의 기조로 작동했던 만큼 책에 대한 수요가 증대되고 이를 충족시키기 위한 정책이 중요한 국가 정책으로 채택되었다. 18세기 정조대의 규장각은 바로 책의 출판과 그 지식 정보를 활용하는 문화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세워진 대표적인 기구였다. 책과 붓으로 대변되는 문치주의에 기초한 우문정치(右文政治)의 방향성은 오늘날 지식기반 사회의 지향과도 일치한다. 


지식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는 것은 결국 책을 우선순위에 둔다는 뜻이다. 책과 책에 담겨 있는 지식이 중요한 생존 전략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좋은 책을 제대로 읽혀야 하는 것은 국가적 고민이고 범국민적 과제이다.


■ 날씨 이야기만 하라


율곡(栗谷) 이이(李珥 : 1536-1584)는 16세기 후반 조선의 격변기를 살았다. 강릉의 외가에서 태어났고, 어머니 신사임당은 사림 가문의 딸이었다. 신사임당은 경학과 역사에 능통하고 조선시대 예술가들의 이상형인 시․서․화 삼절의 효시가 된 인물이다. 그녀의 초충도는 그녀 이후 조선시대 초충도의 전범이 될 정도였다. 그녀는 예술가로 대성했을 뿐만 아니라 자녀 교육에 열성을 바쳐 영재교육에도 성공했다. 최근 5만 원 권에 등장해 어머니와 아들이 나란히 화폐의 주인공이 되어 회제가 되었다. 모자가 함께 화폐의 주인공이 된 경우는 세계에 유례가 없다고 한다.

이이는 이런 어머니를 스승으로  삼은 행운아였다.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불리며 각종 시험에 아홉 번이나 일등을 해서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그러나 열여섯 살에 맞은 어머니 신사임당의 죽음은 그에게 천지가 무너지는 청천벽력이었다. 어머니의 삼년상을 치른 뒤 그는 금강산에 입산했다. 금강산 사찰들에 소장되어 있던 불경을 읽으며 그는 어머니의 명복을 빌고 인생의 무상함에 일찌감치 눈떴을 것이다.

그가 의도했든 안 했든 그의 학문 세계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성리학은 송나라 때 유학이 도교와 불교의 형이상학적 요소를 받아들여 이기론(理氣論)이라는 우주론을 형성하면서 이루어진 학문 체계다. 성리학의 한계를 극복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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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면 애초에 영향 받은 대상인 불교철학에서 실마리를 찾는 것이 첩경임은 자명하다.


금강산에 있던 수많은 불경을 독파한 이이는 비로소 성리학의 한계에 눈을 떴고, 일생에 단 한 번 만나 스승으로 모셨던 당대의 대학자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에게서 학문적 시사점을 얻었던 것으로 추론된다. 이황은 이이보다 35년이나 연상으로, 스승이자 라이벌이 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들의 제자들이 각기 영남학파(퇴계계)와 기호학파(율곡계)로 형성되어 동인과 서인의 양대 정파로 전환된 후 정쟁을 하면서 생겨난 오해다.

이후 이이는 학계와 정계를 넘나들며 눈부신 활약을 했다. 그에게는 기묘사화로 희생된 조광조가 반면거울이 되었다.

그는 42세 때 해주 석담에 귀향하여 잠시 정계에서 떠나 있을 때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썼다. 그 서문에 인순(因循)에 빠지지 않기 위해 이 책을 쓰노라고 밝히고 있다. 인순이란 오늘날 말로 매너리즘이다. 학문적으로 대성하고 정치적으로도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제자를 키워 낸 대학자 이이가 자만에 빠지지 않기 위해 자기 자신에게 얼마나 엄격하고 자신을 단속했는지를 보여 주는 대목이다.

바로 이 책에서 이이는 자신이 아무리 진실하게 착한 마음으로 대해도 세상에는 헐뜯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라고 전제한 뒤, 그런 사람을 만나면 다른 얘기는 일절 하지 말고 날씨 이야기만 하라고 충고한다. 말꼬리 잡는 사람이라고 말을 아예 안 하면 그 자체가 또 시빗거리가 되므로 항상 웃는 얼굴로 날씨 이야기만 화제로 삼으면 시비할 일이 없다는 충고다.   


■ 권력병에 대한 단상


대학교 때 일이다. 서양사를 전공하겠다던 1년 선배가 연단에 나와 “역사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역사다”하고 소리치는 게 아닌가? 그 말은 지금까지 내게 충격으로 남아 있다. 그 이후 인간을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이분하는 것이 과연 옳은 방법인지 늘 머릿속을 맴도는 화두가 되었다.

전통 시대 동양에서의 정치는 권력과 지배의 차원이 아니었다. 특히 조선 시대 지식인인 선비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을 기본으로 하여 사대부가 되었다. 수기(修己)란 학문과 인격을 닦는 행위로, 선비라면 누구나 당연히 거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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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한다. 치인(治人)은 수기한 선비가 관료인 대부가 되어 남을 다스리는 행위다.

여기서 문제는 치인의 해석이다. 다스릴 치(治)자는 가지런히 하다. 정리하다. 어지러운 사태를 수습하여 바로잡다. 등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치료․치병에서는 병을 보살펴 낫게 한다는 뜻이고, 치산치수는 산과 물을 다스려 재해를 예방하는 토목 공사를 뜻한다. 치란 난을 평정하여 편안하게 한다는 뜻이며, 치죄는 죄를 밝혀 규찰한다는 뜻이다.

치국은 국가․사회․가정을 보살펴 관리한다는 뜻이니, 치인은 오늘날의 개념으로 보면 남을 위해 봉사한다는 것과 가장 가깝다. 권력을 갖고 남을 지배한다는 뜻과는 거리가 먼데도 그렇게 해석하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으니, 오늘날 만연한 권력병이 오염시키는 현상이다.


어느 학술 대회에서 있던 일이다. 조선 후기에 국가가 지식 보급에 힘썼다는 대목에서 한 일본 학자가 “지식도 권력인데 국가가 일반 국민에게 지식, 즉 권력을 나누어 주었겠느냐?”하고 되물었다. 고 반박했다. 나는 “지식은 권력이 아닌데 지식을 권력의 도구로 악용하는 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되물었다.

조선만큼 지식을 중요하게 여긴 나라도 드물다. 그래서 조선을 문치주의 국가라 했다. 문치의 전통이 없고 무를 숭상한 무사의 나라 일본의 학자다운 반응이 아닐까 싶은 한편, 지식의 권력화 문제가 대학에서 자행되고 있는 현실과 관련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 중에서도 도제교육적인 시스템에서 권력병은 아주 심각하다. 의대나 공대 등 기술을 전수하는 교육에서 도제 교육은 필수적이다. 기술뿐만 아니라 공부하는 방법까지 가까운 거리에서 전수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부산물로는 인간관계를 돈독하게 하고 상호 보험의 의미까지 추가된다. 이 도제교육에서 지도교수가 권력병에 오염되어 힘을 남용하게 되면 그야말로 지배와 피지배 관계로 전락해 살벌한 생존 경쟁의 싸움터가 되어 버린다. 교수는 제자의 에너지를 짜내 이용하려 혈안이 되고, 제자는 사람에 따라 대응 방식이 다르다. 그 지배 밑에 노예가 되거나 반항하여 튀어 나가거나, 아니면 아파하다 망가지고 병이 난다.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도제교육의 후유증은 집단 이기주의를 낳고 밥그릇 싸움으로 전락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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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권력병은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고 오염시키는 병균과 같은 존재다. 자신이 권력병에 걸렸다는 자각도 못한 채 힘을 남용하는 권력무자각증 환자도 많을 것 같다. 남을 지배하겠다는 저급한 욕망을 버리는 것만이 권력병에 걸리지 않는  길이다. 상호 존중의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일구어 지배와 피지배의 이분법이 우리 사회에 발붙이지 못하게 했으면 싶다.


■  개혁에 대하여     

최근 수년 동안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많이 쓰인 말 중 하나가 ‘개혁’이 아닐까 싶다. 개혁의 사전적 뜻풀이는 ‘새롭게 뜯어 고침’이다. 새롭게 뜯어 고치는 목적은 지금까지 쓰고 있던 문물제도 등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정도로 껍질이 두꺼워졌거나 낡아 버렸기 때문에 더욱 적합한 대체물을 만드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기존의 것이 시의성을 잃었을 때 그 시대에 맞게 뜯어고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 사회를 규정하고 있는 제도 문물은 어디에서 출발하고 있는지 먼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는 바로 말하면 1894년 갑오경장에서 비롯된다. 갑오경장이야말로 세계를 제패하던 서구 제국과 그에 편승해 서양화의 길을 걷고 있던 일본의 문물제도를 수용한 기점이다. 경장(更張) 역시 개혁과 동의어에 가까우므로 자의든 타의든 이로써 20세기 제국주의 시대에 적응할 체제로 개혁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이에 조선 사회의 구체제는 서구 문물제도로 대체되고 그 이후 대한제국 시대에 전통 체제를 일부 복원하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이미 대세가 된 서구화 물결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요청이 되었던 것이다.  1910년 이후 일제 강점기에 이러한 흐름은 더욱 가속화 되었다.

우리는 광복 후 지금까지 새로운 국가  청사진을 만들어 내지 못했다. 물론 남북이 분단되고 동서의 냉전 체제 속에서 이념 대립의 희생양이 된 우리 현실에서 실현 가능성이 희박해 보인다. 그렇더라도 선견지명을 갖고 우리의 생존 전략이라는 전제하에 이러한 기초 작업은 있어야 했다. 광복 50년이 넘도록 우리는 국가 설계도도 없이 남의 흉내만 내고 있었다는 결론이다.


근본적 구도는 변함없는데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개혁 한다고 한다. 큰 개혁을 하려면 19세기 말에 만들어진 문물제도, 구체적으로 말하면 갑오경장 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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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에 대한 반성에서부터 출발해 일제 강점기와 광복 후 현대사의 전개 과정에서의 시행착오를 조명하고, 21세기 우리가 가야 할 방향성을 모색하여 바람직한 국가 모형을 개발해야 한다. 바로 그 모형에 맞추어 개혁의 잣대를 만들어 가는 거시적인 잣대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전 정권의 실정을 단죄하는 차원에서 진행되는 작금의 개혁은 개혁이 아니라 개악이 될 수도 있고 상처만 남는다.

늦었더라도 이제 우리의 후손들이 어떠한 세계 질서 속에서 어떤 국가를 경영하며 살아가야 할까 심사숙고할 때다. 무엇보다 먼저 국가 청사진을 만들어 그 설계 도면에 따라 차근차근 개혁을 추진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정권 차원이 아니라 국가의 운명을 걱정하는 차원에서 비롯되어야 하고, 당장 실현되기를 바랄 일이 아니라 다음 세대가 완성할 일로 남겨 두고 기초 공사나 튼튼히 할 일이다. (1999년 2월)


■ 과학기술에 대한 역사학자의 관견(管見)


19세기 말 서구 열강이 전 세계로 세력을 확장하며 서세동점 할 때 동양은 그 가공할 힘에 밀리면서 그들의 힘의 원천인 대포와 군함이 과학과 기술에서 나왔음을 실감하였다. 그때부터 서구의 앞선 과학과 기술은 학습의 대상이 되었다. 중국에서는 중체서용(中體西用)론으로, 일본에서는 화혼양재(華魂洋才)론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동도서기(東道西器)론으로 나타났다.

그 후 백 년이 훌쩍 지나면서 동양은 과학 기술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서양 따라잡기에 어느 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학습의 단계에서 모방의 단계까지는 왔지만 창조의 단계에 안착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창조의 단계는 인재의 창의력 제고와 더욱 큰 도전 정신으로 무장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리라.


우리의 전통 사회로 현재와 가장 가까운 조선시대 직업은 사(士)․농(農)․공(工)․상(商)으로 구분되었다. 조선은 지식에 기반을 둔 문화 국가였으므로 지식 생산자로서 국가를 이끌어 갈 선비인 사,  산업 구조는 농경을 주업으로 하여 농민이 절대 다수였기에 농민인 농, 그 다음에 오늘날의 과학 기술에 해당하는 공, 그리고 유통에 종사하는 상으로 크게 나누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해가 생겨났다. 사농공상을 신분구조로 오해하고 공상을 천시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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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다는 것이다.

조선이 선비를 키우기 위하여 국가와 국민이 함께 노력했고 선비들도 관료가 되어 사대부로서 국가에 이바지했듯이 과학과 기술 분야의 인재 키우기에 정부는 물론 국민도 각성하지 않으면 어렵다고 본다. 나아가 과학기술인 자신들의 자부심과 기술인으로서의 한계를 뛰어 넘으려는 의지가 중요하다고 본다.

항상 개탄하는 일이지만 문과는 법대, 이과는 의대에 대한 쏠림 현상이 국가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법관이나 의사는 응용학의 범주여서 최고의 인재가 아니라도 노력을 하면 가능한 직업이고 대단한 창의력이 필요한 직업은 아니라고 본다. 기초 학문이 부실한 상태에서 응용 학문만 비대해진다면 사상누각처럼 위험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우수생들이 이 분야로 몰리는 것은 국가 전략상 안타까운 일이다.

다음엔 이미 뜻있는 분들이 제기한 문제지만 고등학교에서 문과와 이과를 나누는 교육을 더는 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전공을 세밀하게 파고들어야 하는 시대에 교육적 필요성보다 입시 전략상 나누어졌던 문과 이과의 분반은 이미 오래 전부터 문제가 나타났다.

더구나 통합적인 사고를 하고 학문의 융합에서 시너지 효과를 창출해야 하는 현 시점에서 이미 낡아버린 문과 이과의 틀을 과감하게 깰 필요가 있다.

창의력은 인문적 상상력에서 분출 할 수도 있다. 앞으로는 인문학에서 문․사․철을 아우르는 통유가 필요한 것 이상으로 문과 성향과 이과 성향을 공유한 인재가 창의력을 발휘하는 시대가 올 것임이 분명하다. (2010년 12월)


■ 기업 문화의 필요성


     들국화 필 무렵에 가득 담갔던 김치를

     아카시아 필 무렵에 다 먹어 버렸다.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있던 시구인데 가끔 생각난다. 처음엔 가을날 들국화가 피거나 무르익은 봄날 아카시아 꽃이 필 때만 생각나서 계절을 노래한 시로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 들어 이 시가 은연중에 우리의 저장 문화를 은유한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농경사회이고 저장문화가 발달했다. 그래서 가을에 추수가 끝나면 곡식을 저장했을 뿐만 아니라 밥에 어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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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반찬으로 여러 가지 김치를 담가 땅에 묻어 놓고 겨우내 그리고 봄까지 먹었기에 이런 시가 나오지 않았나 싶다.

  

이런 문화 습관은 사고방식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개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재벌들도 그동안 팽창과 축적에만 관심을 쏟은 것 아닌가 싶다. 그 과정에서 정치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정경 유착의 관계를 맺어 온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정치의 계절이 되면 경제인들이 심심찮게 정치권에 대해 과거와 다르게 처신하는 모습들이 눈에 띈다. 눈치작전을 접고 분명한 어조로 자기 소신을 밝히는 것이 돋보인다. 더는 명분 없는 정치 자금을 낼 수 없다던가, 시장 경제에 대한 분명한 비전을 제시하는 후보를 재계가 지지하겠다는 언급도 보인다. 아울러 경제인의 도덕성을 말하기 시작했다.

경제계의 이러한 변화는 우리 사회의 발전에 중요한 계기가 되지 않을까 기대하게 된다. 사실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재벌이나 기업들에 대한 이미지는 그렇게 좋은 것이 아니었다. 개별적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기업인에게 크게 기대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이제 기업은 지금까지 사회에 이바지한 부분은 무엇이며 앞으로 어떤 지향성을 가져야할 것인지 고민할 때다.


상공업이 주요 기간산업이 된 현대 사회에서 상공인이 대접받는 사실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현재는 직업의 위계질서에서 상공인이 차지하는 위상이 가장 높다. 그래서 상공인 단체나 경제인 연합회는 때로 정치 집단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하기도 하고 상공인 출신 정치인도 많다. 이렇게 사회의 주축이 된 상공인들이 그 사회적 위상에 걸맞은 구실을 하고, 기업이 그 축적된 자본을 사회에 환원하고 이바지한다면 우리 사회는 건강성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전통 시대에는 지방 곳곳에 산재했던 만석꾼 천석꾼이 집에 과객들의 무료 숙식을 위한 행랑을 항상 개방하여 사회봉사를 했다. 김삿갓이 죽장에 삿갓 쓰고 삼천리강산을 방랑할 수 있었던 것도 열두 대문 문간방에서 무료 숙식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러한 풍토가 사랑방 문화의 온상이 되기도 했다. 이 대가들은 거의 사대부 양반집이었고, 그 재원이 농사에 있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전통시대의 사농(士農)에 대체된 현대 상공인의 기업들은 하루바삐 기업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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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의 꽃을 피울 준비를 해야 한다. 기업의 자금력이 있어야 하는 일들이 곳곳에 널려 있다. 우선 문화재로 눈을 돌려 보자. 일제 강점기에 훼철(毁撤)된 문화재를 복원하는 일들이 곳곳에 널려 있다. 왕궁이나 행궁, 왕릉 등 왕실 관계 문화재는 물론이고 서원이나 향교 등도 헐리거나 경역이 축소되어 있다. 문화재로 지정하고 보호 구역을 넓히기 위해서는 사유지를 사들여야 한다.

전통시대의 그림물감인 석채 등 자연 물감이 거의 사라져 일본이나 독일에서 사다 쓰고 있다. 전통 그림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원료를 채취하고 재배하는 일부터 해야 한다. 문화재를 수리하는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일도 시급하다. 이러한 일을 국가 기관에만 맡겨 놓아서는 그 예산 규모로 보아 부지하세월이다. 기업들이 이런 일에 발 벗고 나선다면 기업 문화는 꽃을 피워 머지않아 열매도 거둘 것이다.


■ 문화 선진국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17세기 전반 중국에서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건국된 것은 중국 자신은 물론 동아시아 전체의 충격이었고 국제 질서의 재편을 몰고 왔다. 특히 청나라는 북방 민족인 여진족이 무력으로 건국한 군사 대국이었다. 조선은 유학적 세계관을 공유한 명나라와 동맹국이어서 그 충격이 특히 컸다.

유교 문명권의 세계관은 화이론(華夷論)이었다. 인간다운 품위와 인륜을 지키는 존재 즉 문화적 존재는 중화(中華), 침략과 약탈을 일삼는 존재, 즉 야만적 존재를 이적(夷狄)이라 분류하여 이적은 금수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인식이었다.

더구나 청나라가 중원을 제패하는 과정에서 두 번이나 침입하여 정묘호란 때는 ‘형제의 의’를 관철시키더니 병자호란 때는 ‘군신의 의’를 강요하였으니 조선으로서는 참을 수 없는 굴욕이었다. 결국 전쟁은 패전으로 끝나고 국왕 인조가 삼전도에 내려와 청 태종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이후 조선 사회는 상처받은 국민의 자존심 회복이 국가적 과제가 되었다. 평화적 국제질서를 파괴한 청나라에 심복할 수 없다는 국민 정서는 오히려 문화 국가로 국가 재건의 방향타를 잡는 기틀이 되었다.


청나라는 일단 중원을 장악하여 건국에는 성공했지만 무력으로 한족을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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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하기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한족 지식인의 주류가 강남으로 은거해버린 상황에서 소수의 만주족으로 한족 다수를 지배하며 국가를 경영하기란 그야말로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청은 대대적인 문화 사업을 기획하여 추진했으니 ‘사고전서(四庫全書)’를 간행하는 일이었다.

   

이 사업으로 강남으로 은거한 한족 지식인들을 국가에서 포용하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문화국가로 거듭나지 않고서는 국가 경영이 어렵다는 것을 절감하고 대대적인 도서 간행 사업을 벌였다. 기존의 모든 서적을 정리하여 새로 간행하는 책 정리 사업으로 이른바 18세기 건륭문화를 꽃피웠던 것이다.

오랜 기간에 걸쳐 이루어진 이 책의 간행에 지대한 관심을 두고 있던 정조 대왕은 연행사에게 이 책을 입수해 오라는 명령을 내린다. 당시 중국과 조공 형태로 행하던 공무역에서 조선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던 품목이 책이었다. 중국도 이에 비교적 호의적이었지만 ‘사고전서’만은 예외였던 모양이다. 아직 간행 중이라는 이유로 거부되었던 것이다. 최신 정보라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이에 사신 일행은 국왕의 지엄한 분부를 다른 방식으로라도 받들기 위하여 북경의 유리창에서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이라는 책을 구매하여 귀국했다. 꿩 대신 닭으로 구매한 이 책은 현재 희귀본으로 중국에서도 보기 어려운 책이 되었다.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당시에는 그렇게 귀한 대접을 받던 사고전서가 흔하디흔한 책으로 전락한 것과 대조된다. 책도 운명이 있어서 새옹지마(塞翁之馬)의 법칙이 작용되나 보다.

청나라가 사고전서를 간행한 것은 군사 대국에서 문화 국가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었다. 만약 청이 계속 군사 대국에 머물렀다면 그 수명은 훨씬 짧았을 것이다. 서적 수입에 그렇게 열정을 쏟은 조선은 자체 제작하는 책이 넘쳐나면서 더는 청나라에서 책을 사올 필요가 없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유교 문명권의 정통을 자부하고 문화국가로서 문예부흥을 구가하며 조선의 고유문화를 이룩했다. 책이 국가 운명과 얼마나 밀접하게 작용하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우리나라는 책을 읽는 행위를 높이 평가하는 전통을 갖고 있다. 조선 왕조는 책 읽는 선비가 국가의 주도층이었다. 지식에 기반을 둔 문화국가 였으므로 지식 생산자인 선비를 우대했다. 칼의 나라가 아니고 붓의 나라였다. 어떤 사람에 대하여 “불학무식(不學無識)한 놈‘은 큰 욕이었고 ’박학다식(博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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多識)한 사람‘이라는 평가는 큰 칭찬이었다. 유식하거나 무식의 갈림길은 책을 읽느냐 아니냐에 있으므로 책은 항상 끼고 살아야 하는 존재였다.

1986년 병인양요 때의 일이다. 종군 화가로 왔던 프랑스 해군 장교 앙리 쥬벨은 귀국하여 남긴 견문기에서 “자존심 상한 일은 아무리 초라한 초가집에도 책과 종이가 있다는 것이었다.” 고 기록하였다. 오늘날 세계의 문화 국가로 자부하는 프랑스 장교가 불과 150년 전에 본 조선은 책 읽는 나라였던 것이다. 대포와 군함이라는 무력으로 강화도를 짓밟고 거기 있던 6천여 책을  불태우고 의궤 등 3백여 책을 약탈해 간 병인양요의 와중에서도 프랑스의 밝은 눈은 책 읽는 나라의 미래와 가능성을 보았다.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 경제력은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문화 능력으로 채워 넣어야 선진국이 될 수 있다. 문화능력은 책읽기에서 길러진다. 교양과 품위는 책을 읽지 않고는 함양될 수 없고 구성원모두가 품격 있는 교양인이 되어야 비로소 고품격 사회가 되어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2010년 12월)   


■ 광화문 현판은 한자로

   

우스갯소리지만 김영삼 정부가 제일 잘한 일은 옛 총독부 건물을 철거해 버린 것이란 말이 있다. 광복 후 중앙청이란 이름으로 우리 행정부의 중심 건물로 쓰인 역사성을 무시할 수 없다는 점, 중요한 근대 문화유산이라는 건축사적 의미, 또 아직도 쓸모 있는 튼튼한 건물을 왜 국민 세금 축내며 헐 필요가 있느냐는 현실론 등 만만찮은 여론에도 용단을 내렸다는 점에서 우리 현대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평가될만하다.

그리하여 일제가 총독부를 짓기 위하여 훼철한 조선 왕조의 정궁 경복궁이 복원되기 시작하여 지난 10년 동안 지속적으로 복원 사업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150년 전 고종대에 중건된 규모를 되찾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조선 왕궁 복원은 조선 왕실 후손을 위해서도 아니고 복벽조의(復辟主義 : 왕조를 복구 하자는 주의)도 아니다. 일제에 의해 훼철된 문화재를 복원하여 국민의 자부심을 되찾는 일이다. 그러한 국민적 염원으로 정문인 광화문도 복원하여 작년에 그 현판까지 만들어 달았다.

그런데 석 달도 못되어 균열이 발견되어 논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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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글씨는 ‘경복궁영건도감의궤’에 1865년 고종 때 중건 책임자인 임태영이라는 사람이 썼다는 기록은 있지만 글씨는 남아 있지 않다고 한다. 그래서 옛 사진을 디지털로 복원하다 보니 글씨의 생동감이나 기운이 없다는 전문가의 의견도 한몫했을 터이다. 그러자 이참에 글씨를 바꿔야 한다는 여론이비등하면서 글씨체를 이 시대 명필이 써야 하느냐 아니면 옛 글자를 집자해야 하는 문제가 제기되더니, 이번엔 한글로 해야 하느냐 한자로 해야 하느냐로 의견이 분분하다.

당연히 한자로 해야 한다. 문화재를 복원하는 것은 그 문화재 원래의 모습을 되찾는 것이다. 문화재 복원에 한글 문제가 왜 끼어드는지 모르겠다. 우리 시대의 창조물이라면 당연히 한글로 해야겠지만 말이다. 광화문 현판 문제는 문화재 복원 문제이므로 원형 복원의 문제일 뿐이다.


우리는 한글을 쓰는 것은 민족 문화를 지키는 것이고 한자를 쓰는 것은 사대주의라고 가끔 혼동한다. 그렇다면 지금은 왜 모두 영어에 목을 매는가? 결국 세계화와 보편성의 문제가 아닌가? 조선 시대는 한자 유교 문화권에서 살던 시대로 한자는 당대의 세계문자였다. 특수성과 보편성의 문제를 민족주의라는 잣대로 농단해서 편협한 국수주의로 오해받지는 말아야 할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한글이 홀대받았다고 해서 한글 전용을 외치고 한자 교육을 등한히 한 결과 우리의 젊은이들이 한자를 몰라 어휘 이해에 문제가 생기고 지식인들조차 전통 문맹자가 되어가고 있는 현실을 되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2011년 2월)


■ 가족 개념의 뿌리와 가족 의미의 재정립         


아득한 옛날부터 지금까지 인류의 삶에서 가족처럼 중요한 존재도 드물 것이다. 가족은 동물의 세계에서도 확인되고 있지만 정교하게 짜여 의미 부여를 하며 영위되는 경우는 인간의 세계에서만 가능했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으로 전망된다. 흔히 원시 사회를 공동체 사회로 규정하는데, 이는 결국 가족을 기본 단위로 하는 씨족 공동체에서 출발한다.

동양의 유교 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가족임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유교의 강령인 삼강오륜에서 절반 이상이 가족 관계에 할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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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는 것이 이를 대변한다. 삼강에서 군위신강(君爲臣綱)만 빼면 부위부강(夫爲婦綱), 부위자강(父爲子綱)이 가족관계다.

오륜(五倫)에서도 군신유의(君臣有義)와 붕우유신(朋友有信)을 뺀 부자유친(父子有親), 부부유별(夫婦有別)이 가족관계이고 장유유서(長幼有序)는 가족윤리이자 사회 윤리로서 양면성을 갖고 있다.


남편은 아내의 벼리가 되고 아버지는 이들의 벼리가 된다는 말을 수직 관계나 지배 관계로 해석했지만 벼리란 말은 그물을 유지하는 큰 줄을 말하는 것으로, 버팀목 이라는 뜻에 가깝다. 또한 부부유별도 부부 역할의 차별성을 말하는 것이지 상하 관계를 말하는 것이 아님에도 여성 차별의 원인으로 오해되었다.

이는 중세 농경 사회를 유지하는 기본 단위로서 가족의 의미에 큰 비중을 둔 윤리 체계로서 평화와 안정을 최고 가치로 한 동양 사회의 운영 논리로 기능했다. 우리나라는 가족이 확대 재생산 되면서 씨족이 되어 동족 마을을 형성했고, 씨족이야말로 농사를 위한 공동 노동의 기초 단위였다.

흔히 동양 사상을 관계론으로 규정하고 서양 사상을 존재론으로 규정하는데, 이런 관점에서 보면 동양 사회가 인간 사회의 모든 문제를 사람 사이의 올바른 관계 설정에서 실마리를 찾아 해결하려 하고 현재도 그러한 전통은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반면 존재론의 탐구에 매달린 서구에서 실존주의와 개인주의가 발달하게 된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최근에 와서 개인주의가 한계에 부딪히고 행복은 사람 사이의 바람직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가능하다는 때늦은 자각이 일면서 사람 사이 관계 설정의 최초 단위인 가족에 대한 관심이 부쩍 커지고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황폐해지고 있는 사람들의 삶에 한줄기 서광이 아닐까 생각한다.


■ 화이부동(和而不同)을 꿈꾸며             


1980년대 초 자욱한 최루탄 연기가 가실 날이 없던 어느 날 학부 학생들이 연구실에 떼로 몰려왔다. 의자가 모자라 어쩔 줄 몰라 하는 내게 보란 듯이 옆에 있던 신문지를 바닥에 깔고 천연덕스럽게 앉았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시골에서 올라왔다는 한 학생 왈 “난 예전에 대학교수가 대단한 존재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별거 아니더라”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나도 교수야”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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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니 그 학생은 좀 당황한 듯 얼굴을 붉혔다.

그러던 학생들이 사회인이 되어 찾아와 하는 말이 선생님은 한 번도 ‘운동’이라든가 ‘민중’이라는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왜 자기들이 선생님을 적대시 하지 않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면서 “선생님의 휴머니즘이 우리의 운동권 논리보다 컸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고 하는 게 아닌가? 나는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제 그들은 어른이 되었고 나는 늙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사회의 이념 과잉 사태는 또다시 나를 우울하게 한다.

진보든 보수든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는 방편 중의 하나일 뿐 그것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다. 진보와 보수의 양분법 외에 다른 선택이 없다는 생각도 아집이자 독선이다. 모든 사람을 두 줄로 세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좌든 우든 선택하지 않으면 비겁한 사람, 기회주의자로 낙인찍히는 세상이 되었다. 광복 직후의 상황이 되풀이되는 것이다.

어느 국가,  어느 사회든 건전한 진보와 건전한 보수가 균형을 맞춰야 병들지 않고 생존력을 키워 갈 수 있을 것이다. 진보의 과격성은 기존 가치 체제와 국가 가치 체제를 지키려는 보수의 안정성이 중화제로 작용해 위험 요소를 덜어 낼 수 있고, 반대로 기득권에 안주하려는 보수의 정체성을 뛰어 넘는 발전의 원동력은 진보가 불을 지펴야 가능하다. 그래서 진보와 보수는 상호 보완 역할을 하게 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좌우 대립은 이상하게도 외세와 관련되어 있다. 좌파는 북한과 우파는 일본, 미국과의 관계를 배제하고는 설명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물론 대한민국이 처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겠지만 어쩐지 개운하지 않다. 나라의 내공을 키우는 방법론의 문제로 좌우로 노선이 갈리는 것이 아니라 국제 관계 속에서 논란이 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중용의 중화(中和)는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균형 감각이며 적중(的中)이 필요요건이다. 적중은 활을 쏘는 이가 마음을 비우고 고도의 집중을 하지 않으면 적중하기 어렵듯이 중화란 마음을 비우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에 어렵다. 그래서 중화의 가치에 입각한 중도의 길은 멀고도 가깝다.

논어의 ‘君子는 和而不同하고 小人은 同而不和라’ 즉 ‘군자는 화합하되 붙어 다니지 않고 소인은 붙어 다니되 화합하지 못한다’는 명언을 떠올리며 모든 사람이 군자가 될 수는 없지만 화합의 정신을 살려 이제는 진보냐 보수냐 편 가르고 좌냐 우냐 이상한 줄을 세우기에 국력을 낭비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을 품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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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참을 수 없는 역사의 가벼움


■ 3․1절을 맞아

광복절 준비를 위한 어느 모임에서 독립운동가의 3세대쯤 되어 보이는 젊은이가 부모 뻘 되는 회원들 앞에서 “독립운동 장소도 보존 못하면서 무슨 광복절 이벤트를 준비하겠다는 거냐?”하며 고함을 치며 나왔다. 처음엔 불쾌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해가 되면서 몇 가지 문제점이 떠올랐다. 우선 우리 모두의 무관심이 문제였다. 일제의 서슬 퍼런 칼날 앞에 죽음으로 맞선 독립운동가들이 아니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존재할 수조차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까마득히 잊은 채 사는 게 아닌가 싶은 반성이 들었다. 태화관이 고층 빌딩으로 변하도록 무심했다가 그 앞에 표석 하나 달랑 세워놓고 할 일 다한 듯 잊고 지냈다.

기미독립운동은 1919년 2월 8일 도쿄 한국인 유학생들의 독립 선언에서 시작해 3월 1일을 정점으로 5월 말까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가 218개 군에서 2백여만 명이 1천5백 차례 시위에 참가했다. 따라서 관련 유적이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어 다 보존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주요 유적지는 반드시 보존해야 옳다. 후생들을 위한 산교육재로 독립운동의 현장만큼 좋은 것은 없다. 아무리 교과서에서 독립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가르쳐도 현장에서 설명하는 만큼 생생하고 현실감 있는 교육은 되지 않는다.

활발하게 움직이는 지자체들이 이 일의 중요성을 일깨워 참여시키는 방법도 있다. 손톱만한 역사적 근거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경쟁적으로 테마 공원을 만드는 마당에 전국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의 현장을 발굴하여 보존하는 일이야말로 의미 있는 작업이 아닐 수 없다.


무슨  과제가 제기될 때마다 예산 문제가 앞서는데, 과거사 정리 사업에 드는 예산으로 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역사라면 될 일을 ‘과거사’라는 이상한 이름을 만들어 친일파 명단이나 만들고 광복 후의 민주화 문제 등에 치중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나라가 있고 나서 민주화 운동도 있고 인권운동도 있는 것이다. 일제로부터 나라를 찾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독립 유공자에 대한 유적지 보존이 우선순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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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10월 1일 법률 제 53호로 국경일로 제정된 3․1절의 의미는 해가 갈수록 퇴색하고 있다. 틀에 박힌 엄숙한 기념식만이 ‘민족정기’를 불러일으키는 길은 아니다. 다시 3․1절을 맞아 그 의미를 진지하게 성찰하고 대한민국의 활력을 충전하는 경축일로 거듭나게 하면 어떨까 싶다. 이제는 일제에 대한 피해 의식에서 벗어나 모든 국민이 참여하는 다채로운 행사를 마련해 광복절과 3․1절을 국민 축제일로 탈바꿈시켜도 좋지 않을까?


■ 21세기 우리의 지향과 역사 전통


19세기 말부터 1세기 동안 진행된 우리 사회의 근대화란 서구화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그 서구화도 일제 강점에 의한 타율적인 서구화로 시작되었다는 것이 우리의 특수성이다. 이 서구화가 우리 사회에 과연 얼마만 한 순기능과 역기능을 가져왔는가가 문제다. 우리 역사상 외래문화의 수용은 기존의 전통 문화라는 거름종이에 걸러 내어, 보다 우수하다고 인정될 때에만 주체적인 입장에서 이루어져 왔다. 전환기마다 개방과 자기 보존 문제로 고민하면서도 우수한 외래문화를 받아들여 고유문화의 한계성을 탈피했다.


그러나 19세기 말의 상황은 전 시대의 문화 보강 작업과 전혀 맥락이 닿지 않는 전대미문의 지각 변동이었다. 유교 문화권에서 자급자족하는 안정적인 농경 사회를 이루었던 조선사회는 사․농․공․상의 직업 위계질서를 형성하고 있었다. 여기에 물적 기초를 최고 가치로 삼은 상․공․농․사의 정반대 직업 분화로 구성된 서구 자본주의는 충격적이었다. 더구나 전통적으로 약탈과 침략을 일삼아 ‘야만’으로 간주하던 일본이 서구화를 통해 ‘선진국’이 되고, 그 여세로 한국에 진출하면서 강요한 근대화는 일본화에 맞물리는 중층 구조로 전개되었고, 결국 일제의 강점으로 귀결되었다.

당시의 제국주의가 군사 정치적 제국주의라면 현재 진행되는 세계화는 경제 문화적이라는 차별성은 있으나 거대 구도로 통합되는 과정은 같다. 역사적으로 볼 때 세계화는 대국의 논리다. 정치적이든 문화적이든 하나의 통합단위로 만들어 가는 제국주의적 거대 구도에서 주도적인 대국의 언어가 공용어가 되고 대국의 문물이 보편적 기준이 될 것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결국 약소국의 측면에서 보면 세계화는 현실 적응의 선택이자 예속화를 뜻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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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갑오경장으로 학교 제도가 변경되자 어느 지식인은 기술학과 외국어학이 성균관의 상위에 있음으로써 신발과 모자가 거꾸로 놓이게 되었다고 갈파했다. 기술이 근대의 총아인 과학문명의 자식이고 외국어는 외국 문화 수입의 도구일진대, 기술과 어학은 이 시대 가장 필요한 시무(時務)였을 것이다. 그래서 인문 정신과 인간 교육을 우선하던 전통교육기관 성균관은 더 필요 없는 존재로 치부되어 하위 기관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그야말로 본말이 전도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는 오늘날 우리의 자화상이 잘 보여 주고 있다. 민족 자부심을 상실하고 정체성이 해체된 상태에서 물신을 숭배하면서 비인간화 되고 있는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경쟁에 몰리면서 겨우 생존 문제를 해결해, 가난과 열등감에서 벗어난 것으로 착각할 즈음 우리 사회를 강타한 IMF 체제는 우리의 허장성세를 생생하게 증언해 주었다.


이제 우리의 관심사는 21세기에도 이러한 시행착오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제국주의 시대에 열강들이 짜 놓은 틀 속에서 남의 뒤를 숨가쁘게 따라가며 결국 혼란으로 귀결된 20세기 오류를 극복해야 한다. 그 방향은 오히려 전통에서 찾을 수 있다.

19세기 말 서세동점의 시기에 이르러 우리는 전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에 직면했다. 대한 제국이 성립되어 광무개혁을 시도했으나 국력이 뒷받침되지 않았고, 서구 제국주의의 팽창과 동양 진출이라는 거센 파도에 휩쓸려 영세 중립국의 꿈은 무산되고 결국 전통적으로 힘의 논리에 익숙해 재빨리 서양 제국주의에 편승한 일본에 강제 병합되었다. 평화공존도 힘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교훈을 뼈아프게 되새겨야 했던 것이다.

앞으로 다가오는 세상에는 지난 세기와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질지도 모른다. 역사의 창으로 보면 변하지 않는 것은 없어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드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간의 진행에 따라 눈에 보이는 현상이 아무리 변하여도 이 세상에는 변치 않는 가치나 원칙이 있다. 예컨대, 진(眞)․선(善)․미(美)와 같은 가치나 효도의 의미는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변치 않는 진리일 터이고, 인류애나 애국심도 변치 않는 가치라고 생각된다.


세계 여러 민족과 국가는 나름의 민족적 특성과 고유문화를 갖고 있어서 각자의 우수 문화를 개발, 발전시켜 세계 문화에 이바지하도록 하되 그 고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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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정체성을 지키도록 배려할 때 세계 문화는 더욱 다양해지고 풍부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기초가 다져질 때 세계의 모든 민족은 더불어 살아가고 함께 번영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주의나 세계화의 논리가 대국이나 강국의 목소리에 불과하다는 한계성을 경각하되 민족 이기주의와 민족 간의 갈등과 투쟁이라는 근대적 민족주의의 함정에 침몰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대국의 세계화 논리에 현혹되어서도 안 되지만 편협한 종족 우월주의나 민족 이기주의에 빠져서도 안 될 것이다. 그야말로 균형 감각을 갖고 상호 존중과 상호 협력을 이끌어 내어 애국심을 기초로 한 인류애를 높이는 역할에 21세기 바람직한 한국인상의 밑그림이 있다. 이러한 한국인상은 우리 역사 속에서 계속되어 온 원형적 한국인상의 재현이므로 더욱 실현 가능성이 큰 것이다.

우선 시급한 일은 왜곡된 우리 역사와 전통 문화에 대한 올바른 이해다. 이를 바탕으로 근대 이후 단절된 전통문화의 맥락을 잇는 작업이다. 이러한 작업은 민족의 정체성을 세우는 일과 맞닿아 있으며 민족 공동체를 새롭게 인식하는 데 이바지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남북이 같은 뿌리임을 재확인하여 통일의 공감대를 넓히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강대국에 둘러싸여 망국의 뼈아픈 경험에 분단의 아픔까지 품고 있으며 아직도 그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우리 민족은 남을 약탈하고 침략한 전과가 없다. 이 명분은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면 그 진가를 발휘할 것이다. 그리하여 제국주의를 극복하고 평화 공존의 시대를 여는 세계 질서 재편기에 그 대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문화 전통이 우리에겐 커다란 저력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 질서에서 우리는 동북아 경제 중심이라는 가치에서 한 걸음 진전하여 동북아 평화․문화 중심으로 거듭날 날이 올 수 있다. 3세기 전에 조선이 동아시아 문화 중심국으로 우뚝 섰듯이 21세기 대한민국은 도덕적 문화국가로 세계 평화를 선도해야 한다.

개인에게 뜻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듯이 국가도 뜻이 분명해야 한다. 이상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 이상을 향한 청사진이 필요한 것이다. 국제 사회에서도 제 목소리를 내려면 국가의 방향성이 분명해야 한다. 그 방향성을 국민에게 설득하고 꿈과 희망을 심어 주어야 한다. 그 힘을 모으기 위해서도 국민 대통합 화해의 장을 마련해야 한다. 어려울 때에 강한 것이 우리민족의 강점임을 재확인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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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의 빛과 그림자


가끔 시간이 날 때 18세기 진경산수의 대가 겸재 정선이 그린 ‘경교명승첩’의 그림들을 보며 시간 여행을 떠나곤 한다. 경교(京郊)란 문자 그대로 서울의 성 밖을 말하는 것이다. 당시의 서울은 사대문을 경계로 한 도성 안을 뜻하는 것이므로 성 밖은 경교로 규정되고 경기도에 속하는 곳이었다. 이 그림첩은 경교 중에서도 한강 가의 명승들을 그려 놓은 그림 묶음이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수되는 양수리 부근의 녹운탄에서 시작해 독백탄․우천․미호․광진․송파진․압구정을 거쳐 한강 하구인 행호(행주)에 이르는 한강의 명승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 산천경개의 아름다움에 취하고 유장한 세월의 무게에 기대어 온갖 걱정과 시름에서 벗어나 한자락 위안을 얻곤 한다.

녹운탄은 대청탄으로, 독백탄은 족자섬으로 이름조차 바뀌었지만 독백탄에서 보이는 운길산과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수종사, 그 옆의 예봉산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광진의 아차산은 시루떡 같은 모양을 하고 온달 장군의 전설을 머리에 인 채 당대 유력자들의 별서(別墅 : 별장)들을 품고 있다. 이들 별장은 지금의 워커힐 호텔이 되었으니 예나 지금이나 사람의 눈과 마음은 같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송파진의 한강은 매립되어 석촌호수로 남았지만 남한산성의 성곽은 370년을 훌쩍 뛰어넘어 1636년 병자호란의 아픔을 되새겨 준다. 한강 가의 명승 중에서도 가장 경치 좋기로 유명했던 압구정은 성종대 권신 한명회에서 고종대 박영효까지 대대로 권력자들의 소유였지만 아파트 단지로 개발되어 이제는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이렇게 그림 여행을 하다 보면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면서 흥망성쇠의 역사적 교훈 앞에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3백여 년이 흘렀으니 강산이 변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데도 사라져버린 경관이 아깝고 아쉽다. 거기에 깃들어 살며 당대를 호령하던 인물들도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리고 역사적 심판 앞에 그 이름이 초라해져 있음에 가슴이 서늘해진다. 그리고 경교 명승의 대부분이 이제는 서울로 편입된 사실에 아연해진다. 서울이 얼마나 비대해졌는지 실감하곤 한다. 이 얘기는 상대적으로 경기도가 줄어들었다는 말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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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운 한강 - 경강(京江)                


이미 다 알고 있는 바지만 실용성을 내세운 한강 개발은 한강의 운치를 송두리째 앗아 갔다. 시멘트로 싹싹 바르고 길을 낸 강기슭엔 도무지 사람이 접근할 틈이 보이지 않는다. 고작 두어 군데 ‘아! 저기로 접근하면 되겠구나’싶은 곳이 있기는 하지만, 한강은 남쪽으로 올림픽 대로와 북쪽으로 강변 북로를 양쪽에 끼고 도도하게 흘러갔다.  여의도는 남쪽에 바짝 붙어 있어 섬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밤섬만이 유일하게 자연의 풍광을 내뿜었다.

전통 시대에는 서울 부근 한강을 경강이라 했는데 뚝섬․두모포․용산․서강․마포 등은 경강 상인의 근거지였다. 경강은 언제라도 서울 사람들의 휴식처가 되어 주었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한강은 자연 그대로였다. 뚝 섬에 수영하러 다녔었다. 여름이면 사람으로 바글대던 한강대교 부근 백사장의 모래는 희고 고왔다. 맨발로 걷던 모래사장의 감촉은 지금도 기억 속에 아련하게 남아 있다.


겸재 정선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한강의 풍경은 더 말해 무엇하랴. 그가 그린 ‘경교명승첩’에서 현재의 서울에 해당하는 지역을 살펴보자. ‘광진’은 시루떡처럼 층층을 이룬 아차산을 배경으로 언덕 숲 속에는 한옥의 별서들이 즐비하다. 강변의 섭울타리로 둘러친 작은 초가집은 몇 그루 노송으로 하여 더욱 고즈넉한데 강 위에 떠 있는 돛단배들과 대비되어 적막감마저 감돈다. 광주로 가는 나루라 하여 광진이라 이름 지었는데, 광진교가 옛 자취를 대변하고 있다.


아름다운 경승은 정지된 경치만이 아니다. 그 위치에서 보이는 경치에 어우러진 자연의 변화와 함께 감상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팔경 시리즈가 다 그렇거니와 현재도 지방마다 계속 팔경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목멱조돈(木覓朝暾)이 단연 돋보인다. 나이 65세에 양천 현감으로 간 겸재는 초봄 이른 아침에 남산에서 솟아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그 장관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강변에 우거진 버드나무는 겨우 초록빛을 머금기 시작했고 남산 중턱에서 숨바꼭질하듯이 나타난 아침 해의 붉은 기운이 강 가운데에 드리워져 있다. 상쾌한 아침 기운과 여명의 잔영이 어우러진 새벽 분위기가 갓 세수한 것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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럼 맑다. 시야를 가리는 것 없이 시원하게 터진 조망과 부지런한 어부가 일찍이 낚싯배를 노 저어 나오는 한강 풍경이 신선하다.


서울시가 한강 르네상스 프로젝트를 수립했다고 한다. 잃어버린 한강, 특히 경강의 옛 모습을 얼마나 되찾을지 모르겠지만 인공 구조물은 가급적 피했으면 싶다. 푸른 자연과 곳곳에 있던 정자 등 전통문화를 되살려 멋진 한강 명승을 복원하길 바란다. 사람들이 쉽게 접근해 도시 생활에 찌든 때를 씻어 내고 자연과 벗하여 마음을 순화시키는 장으로 한강-경강이 거듭나길 고대 한다.


■ 서원․향교의 활성화를 위한 제언


대원군은 1865년부터 1871년까지 서원 개혁을 단행했다. 전국에 넘쳐나던 서원을 당론의 원천지로서 면세․면역의 특권을 누리며 국가 재정을 좀먹는 원흉으로 지목해 사액 서원 47곳만 남겨 놓고 모두 철폐했다. 조선 왕조의 말기적 폐단으로 국가의 철퇴를 맞은 서원들은 쇠퇴 일로였고, 근대에 이르러 망국기를 거치면서 존재 가치를 상실했다.

그럼에도 아직 서원들이 남아 있고 또 문화재라는 이름으로 계속 복원되고 있다. 또한 전국에 산재한 향교도 복원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서원, 향교들은 대부분 산수 좋고 햇볕 잘 들고 배수 잘 되는 명당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런데 제사를 지낼 때 외에는 인적을 찾아볼 수 없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이 빠른 속도로 퇴락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새로 복원된 서원이나 향교조차 사람의 손길에서 벗어나 퇴락하고 있다.

성균관이나 서원이나 향교 할 것 없이 모든 전통 시대의 교육관은 제사 공간, 교육 공간, 그리고 기숙사, 도서관 등 기본 시설을 갖추고 있다. 제사 공간에 해당하는 대성전은 유교 성현의 위패를 갖추고 정기적으로 제의를 행했다. 제의를 통한 인성 교육의 장이었다. 명륜당 등 교육 공간에서는 지식 교육이 이루어졌다. 오늘날은 대성전의 기능만 살아남아 1년에 몇 번 제사 지내는 것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하여 전국적으로 산재해 있는 서원과 향교는 대부분 빈집으로 방치 되어 있다.


그 이유는 첫째, 이들을 문화재라는 틀에 넣어 보호 대상으로만 여기는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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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관청의 고정 관념을 들 수 있다. 물론 문화재는 보존되어야 하고 보호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것이 건물일 때는 사람이 살면서 지속적으로 관리해야지 빈 집으로 보존될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보호가 아니라 방치되기 십상이다.        

둘째 이들에 대한 주인 의식을 가진 유림의 보수성이다. 한문 교육이나 예절교육 이외에는 용납하지 않는 풍토가 아직도 남아 있다. 물론 돈이라면 귀신도 움직인다는 이 눈먼 자본주의의 시대에 이리저리 휘둘려 그나마 갖고 있던  자존심마저 손상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셋째, 이들 서원․향교의 품위를 손상하지 않으면서 그 순기능을 살려 우리의 삶이 이바지하는 좋은 아이디어를 창출해 내려는 고민과 노력이 우리 모두에게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 부분은 국가, 사회, 개인을 불문하고 사장된 국가 자산의 활용이라는 측면에서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우선 전통문화 체험교실을 운영하는 방법도 있다. 고급문화와 기층문화를 아우르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면 흥미진진하게 진행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한문 교육과 예절 교육은 이들 건물군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기본적이고 중요한 일이지만 엄숙주의를 벗어나기 어렵고 다양성이 부족하다. 여기에 주변의 산수를 활용한 삼림욕과 명상 프로그램을 만들어 건강과 휴식의 의미를 더하면 좋겠고, 나아가 서예와 그림, 국악교실을 운영하여 그 결과를 시화전이나 백일장, 음악회 등으로 분출시키도록 결집해도 괜찮을 듯싶다.

동재와 서재 등 기숙사 시설을 현대화하여 숙박 기능을 강화해 소수 정예로 나가면 휴가를 알차게 보내려는 사람들을 흡수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 선비, 한국적 리더십의 전형       


지금 우리 사회는 리더십의 실종으로 혼란을 겪고 있다. 무엇이 진정한 리더십인가에 대한 논의조차 실종된 것으로 보인다. 리더십의 문제는 비단 우리만의 절실한 문제가 아니다. 세계 여러 나라가 이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세월 우리는 어떤 문제의 해결에서 외국의 예를 드는 것을 당연한 상식으로 여겼다. 물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기꺼이 밖의 모범 사례들을 모아야겠지만, 그보다 앞서서 우리가 해야 할 작업은 우리 역사와 전통에서 긍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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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인 역할 모델들을 찾아내는 일이다.


그런 예를 우리 역사에서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음에도 때로는 무지한 까닭으로, 때로는 게으름 때문에, 때로는 자기 비하 의식에 기인한 열등감 탓에 그러한 노력을 포기하거나 소홀히 해 오지 않았나 싶다. 그 대표적인 예 중의 하나가 조선시대 지식인인 선비와 그들이 갖고 있던 선비 정신이다.

선비 정신에 대한 외면은 제국주의적 식민 사관과 민중 사관의 흐름을 아직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학계의 현실이 그 걸림돌이라는 생각이 든다.   제국주의의 정반대라 할 수 있는 문치주의 시대인 조선의 선비는 한국적 리더십의 전형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한국적 역할 모델로 재조명이 필요한 바람직한 욕사 전통이다.

선비란 고품격 인성과 지성을 겸비한 지식인을 말한다. 그 특징을 한 마디로 규정하자면 맑음의 미학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지향처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이다. 어려서부터 철저한 인성교육을 받고 학문을 연마하는 ‘수기’의 단계를 거쳐 완성된 인격체에 이르러야 남을 다스리는 ‘치인’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 기본 입장이었다. 여기에 치인이란 권력 개념이라기보다 봉사 개념에 가깝다. 수기의 단계에선 사(士)이고 치인의 단계로 나가면 대부(大夫)이므로 사대부(士大夫)로 규정되었다.


선비의 배움은 학문과 예술을 일치시키려는 학예일치를 추구했으니 전공필수로 문학․역사․철학을, 교양필수로 시․서․화를 연마했다. 전자를 통해 이성 훈련을, 후자를 통해 감성 훈련을 했다. 이성 훈련은 의리(義理)의 구현으로, 감성 훈련은 인정(人情)의 구현으로 나타난다고 보았다. 의리와 인정은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 갖춰야 할 덕목이고, 선비는 이 두 가지를 균형 있게 조화시킬 수 있는 인간형을 말했다.

그리하여 선비는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 서릿발 같은 기개와 꼿꼿한 지조로 외경의 대상이 되는가 하면, 어려운 사람이나 고통받는 이를 위해서 따뜻한 인정을 베푸는 사람이었다. 합리적이면서도 인간적인 전인적 인간형을 설정하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지식인으로서 사회적 역할의 극대화를 위해 공적인 일을 우선하고 사적인 일을 뒤로 하는 선공후사(先公後私)와 공평무사(公平無私)를 생활신조로 삼았고 최종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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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기복례(克己復禮)하고자 했다. 자신을 이기고 예로 돌아가겠다는 것이니 이기적인 욕망을 이겨 내고 타인과의 바람직한 관계를 확장하려는 것이었다.

겉으로는 한없이 부드러우나 내적인 강인함을 간직하려는 외유내강(外柔內剛), 청빈과 검약을 생활신조로 삼고 자신에게는 박하고 남에게는 후하게 하는 억강부약(抑强扶弱), 모든 구성원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려는 공생공존의 정신, 옳은 명분은 반드시 지키고 명분에 맞지 않는 일에 함부로 뛰어들어 질서를 무너뜨리지 않으려는 명분주의 등 선비가 추구하던 생활 태도와 가치들은 오늘날 지식인 사회에서조차 외면당하고 퇴색했다.

특히 선비들의 청빈정신,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하고야 마는 서릿발 같은 기개, 일관된 지조 지킴과 종교적이라고 할 만한 진실성과 엄숙주의, 그 속에 간직한 유머와 여유로움, 탁월한 자기 제어력, 타인에 대한 배려를 우선시하는 생활 태도 등 파고들면 들수록 그 세계는 새롭고 맑은 느낌으로 다가 온다. 인정과 의리를 중심축으로 삼은 선비의 삶과 선비정신은 오늘날의 지식인들에게 주는 경종임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이 시대에 선비다운 지식인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한 주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회적 요구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고 선비다운 선비는 되지 못하더라도 지식인에게 주어진 책무는 여전히 막중하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도 국가의 비전을 제시하고 시대적 책무를 다한 집단은 지식인 그룹이었다. 한국의 지식인이라면 선비를 전범으로 삼아 학문과 행동을 일치시키려는 학행일치 정신으로 실천하는 한국적 리더십의 전형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2011. 5. 12.              - 제1부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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