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6. 17. 09:02ㆍ독서후기
할 喝 (2)
■ 최인호 지음
제4장 보려고 하는 자가 누구냐
- 불세출의 선승, 만공
■ 도암 소년, 불가에 들다
경허의 세 제자 중 만공(滿空)은 가장 막내에 속한다. 그의 맏형인 수월과, 차형인 혜월과는 달리 풍부한 법문과, 풍부한 기록과, 많은 행장이 오늘날 까지 남아 전하고 있다. 스승 경허와 얽힌 선화를 가장 많이 남긴 사람도 만공으로 알려져 있으며, 경허의 기록들이 오늘날까지 남아 전하는 것도 모두 막내 제자 만공의 덕분이다.
스승 경허가 열반하자 금강산에 있는 선원 유점사의 조실로 있던 만공을 중심으로 한 수법제자들이 모여 ‘경허집’ 출판 불사를 추진했는데, 남긴 사진 한 장 없는 경허의 모습을 일일이 입으로 구술하고 묘사하여 당시 유명한 인물 화가였던 설산 최광익으로 하여금 경허의 진영을 그리게 한 사람도 만공이었으며, 그려진 경허의 진영을 금선대에 봉안한 사람도 만공이었다. 오늘날까지 남아 전하는 ‘경허집’을 편찬한 것도 만공이었으며, 만해 한용운으로 하여금 ‘경허집’ 초판본에 서문을 쓰도록 한 사람도 다름 아닌 만공이었다.
만공의 말이다.
“나는 경허 큰스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것이다. 만약 전쟁이 나 깊은 산중에서 모시고 살다가 양식도 떨어져 공양을 올릴 것이 없어진다면 나의 살점을 점점이 오려 스님께 마시게 하여 생명을 보존하셔서 세상에 나가 여러 중생들을 제도하시게 할 자신을 갖고 있다.”
그렇다. 경허가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큰 빛을 떨칠 수 있게 된 것은 이와 같은 막내 제자 만공의 위법망구(爲法亡軀)의 헌신적 태도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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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경허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살과 피를 바쳐 위법망구하겠다는 만공은 1871년, 신미년 3월 7일 전북 태인군 상일리에서 출생했다. 속성은 송(宋) 씨 본관은 여산(礪山)이었다.
어머니 김 씨가 신령한 용이 구슬을 토하면서 눈부신 광명을 뿜어대는 꿈을 꾸고 만공을 잉태했으므로 아버지는 만공이 어릴 때부터 “이 아이는 장차 세속의 일을 하지 않고 불문에 들어가 고승이 될 것 같소.”하고 걱정했다.
만공의 어릴 때 속명은 도암(道岩), 13세 되던 1883년 겨울, 도인 하나가 집으로 와서 “이 아이는 단명할 상으로 스무 살을 넘기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어머니 김 씨는 몹시 걱정하면서 물었다.
“단명을 면할 좋은 방도라도 없겠습니까?”
그러자 도인은 말했다.
“이 아이를 데리고 김제에 있는 금산사를 찾아가 올해의 과세(過歲)를 하면 운명이 바뀌어 장수 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부모는 할 수 없이 도암을 데리고 금산사로 갔다.
* 금산사(金山寺) : 모악산에 위치한 전북 최대의 사찰. 백제 법왕 원년 599년 창건. 견훤이 아들 신검에 의해 감금되었던 곳. 진표 율사가 머물렀던 절
* 진표 율사 : 신라 경덕왕 무렵, 서기 700년대의 고승. 완산주 출생으로 속성은 정(井) 씨. ‘삼국유사’ 및 ‘송고승전’에도 그의 기록이 있음
- 진표는 12세 되던 해, 사냥꾼인 그의 아버지를 따라 사냥을 하다가 잠시 밭두렁에 앉아 쉬게 되었다. 그때 개구리가 많은 것을 보고 장난 삼아 그 개구리를 잡아 버드나무 가지에 꿰어 사냥이 끝날 때 가져가기 위해 물 속에 담가 두었다. 그러나 사냥을 하던 그는 집으로 갈 때 다른 길로 갔기 때문에 그 개구리 들을 곧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듬해 봄 진표는 또다시 사냥을 나갔다가 물속에서 우는 개구리 소리를 듣고 그 물 속을 들여다보았다. 그곳에는 30여 마리의 개구리들이 꿰미에 꿰인 채 그때까지도 살아서 울고 있었던 것이다. 진표는 그때서야 작년의 일을 생각해내었으며 크게 잘못을 뉘우치고 곧 개구리들을 풀어주었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금산사의 숭제 법사를 찾아가 출가할 뜻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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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단명할 상을 벗기 위해 부모와 함께 도암 소년이 찾아간 곳이 바로 금산사, 이때 도암의 나이 13세였으니, 천 년 전 진표가 12세의 나이로 출가의 뜻을 품고 금산사를 찾았던 기연과 일치하지 않음인가.
이때의 기억을 만공은 훗날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생후 처음으로 대웅전에 모셔진 금색 불상과, 미륵전에 모셔진 본존불과 좌우 협시보살상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환희심이 솟아올랐다. 그뿐인가. 염의(染衣)를 입은 스님들을 본 순간 나는 마치 고향에 돌아온 듯했다.”
절에서 며칠을 지낸 도암 소년은 집으로 돌아와 부모 앞에서 출가의 뜻을 밝혔다. 부모가 크게 놀라자 도암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 년 전 진표는 저보다 한 살 어린 나이에도 금산사를 찾아가 출가의 뜻을 밝혔습니다. 그러니 무엇을 놀라시고 무엇을 걱정하십니까.”
부모는 크게 당황하여 도암을 집안에 감금했다. 그러나 야반삼경에 초동의 지게를 지고 집을 도망쳐 나온 소년이 찾아간 곳은 봉서사, 그러나 그 절과는 인연이 없었던지 다시 전주 종남산에 있는 송광사를 거쳐 진암 스님이 있는 논산 쌍계사로 찾아갔다.
스승을 찾아 쌍계사로 간 도암 소년은 그곳에서도 진암 스님을 만나지 못했다. 쌍계사에 이르자 스님들이 전하는 말, 진암 노스님은 얼마 전에 계룡산 동학사로 옮겨가셨다는 말 뿐.
또다시 도암 소년은 길을 떠나 계룡산으로 갔다. 스승을 찾아 네 개의 절을 거치는 동안 어느덧 도암 소년은 14세가 되었으며 마침내 동학사에서 진암 스님에게 받아들여져 비로소 행자 생활을 하게 되었다.
■ 경허를 스승으로 모시고 화두를 품다
도암 소년은 동학사에서 6개월 동안 머리를 기른 동자로서 행자 생활을 했는데 그가 평생 스승이었던 경허를 만나게 된 것이 이곳 동학사에서 행자 생활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이 무렵 절의 살림이 어려워 양식마저 떨어지게 되었는데 탁발하러 나가는 젊은 스님을 따라 함께 나선 도암 소년이 10여 일만에 엽전 여덟 냥을 손에 쥐고 돌아오자 진암 노스님은 도암의 손을 잡고 탄식하여 말했다고 한다.
“이 못난 늙은 것이 남의 집 귀한 자제를 데려다가 머리를 깎고 중을 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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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전에 동냥부터 시켜 거렁뱅이를 만들고 있구나. 나처럼 박복한 놈은 아마도 이 세상에 없을 것이다.”
도암 소년의 손을 잡고 눈물짓던 노스님은 이 순간 때가 오면 도암 소년을 다른 곳에 보내겠다고 결심했는데 그 기회가 찾아온 것은 그해 시월 초순의 일이었다.
만추의 어느 날, 객승 하나가 동학사로 들어서면서 고함쳐 말했다.
“객승 문안드리오!”
그 객승을 맞아들인 것은 14세의 도암 행자였는데 그는 이때의 느낌을 훗날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우뚝 큰 키에 기골이 장대했으며 고인(古人)의 풍모를 갖춘데다가 뜻과 기운이 과감하고 굳세게 보였으며 변재(辯才)를 갖추었고 위풍이 당당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안광이 빛나고 있었다.”
객승, 그는 36세의 청년으로 3년 전 천장사에서 보임 생활하던 중 활연대오하여 주장자를 꺾어버린 후 호서지방을 행각하고 있던 경허 화상이었다.
경허를 맞이한 진암 노사는 마침내 도암 소년을 거둬줄 진정한 스승이 나타났음을 깨닫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 밑에서 행자 생활을 하고 있는 소년이 하나 있는데 내 눈에는 ‘불 속에 피어난 연꽃(火中生蓮)’임에 틀림없을 것 같소이다. 그러나 나는 이미 늙고 병들어 비범한 기틀을 가진 동량재를 가르칠 힘이 없으니 그 행자를 데려다가 제자로 맞아들여 부디 해탈케 하여주시오.”
간곡한 진암 노사의 청을 받은 경허는 쾌히 승낙하고 도암을 행자로 받아들였다.
마침내 경허의 제자가 된 도암은 스승을 따라 바람처럼 구름처럼 절들을 떠돌아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12월 8일, 천장사에서 경허의 형님이었던 태허 스님을 은사로, 경허 화상을 계사(戒師)로 하여 사미계(沙彌戒)를 받고 득도(得度)케 되었는데, 경허는 이 나이 어린 사미승에게 월면(月面)이란 법명을 내려주었다. 이로써 드디어 경허의 법제자로 세 명의 달(月輪)이 태어나게 되었다.
월면은 천장사에서 10년 동안 사미승으로 지냈다. 그는 경허 스님에게 맡겨지긴 했으나 아무런 지도를 받지 못했고, 경허는 전국을 돌아다니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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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제자를 본 척도 하지 않았다. 월면에게 새로운 계기가 생기게 된 것은 그의 나이 22세가 되던 1893년 11월 1일의 일이었다.
월면보다 나이가 서너 살 어려 보이는 어린 소년 하나가 천장사에 와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는데 그날 밤 그 소년이 월면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것은 하나로 돌아간다. 그런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萬法歸一 一歸何處)라는 말의 뜻을 아십니까?”
소년의 질문을 받은 월면은 앞이 캄캄했다. 그는 지금껏 천장사에서 나무하고, 밥하고, 빨래하는 허드렛일만 했지 공부와는 담을 쌓고 지냈으며 선이 무엇인지, 정진이 무엇인지 배운 것도 들은 것도 없었던 것이다. 소년이 월면에게 말했던 그 화두는 조주(趙州)의 유명한 선화에서 비롯된다.
어쨌든, 이 일이 있은 후로 월면에게 마침내 화두 하나가 생기게 되었다. 그는 ‘모든 것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리하면 이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 라는 의단(疑團)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그는 밤이나 낮이나, 잠을 자나, 밥을 먹으나, 일을 하나 항상 머릿속으로는 이 화두에 매달리고 있었다.
이때의 심정을 만공은 훗날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화두의 종류는 1,700가지나 있는데 내가 처음으로 듣던 화두는 ‘만법(萬法)이 귀일(歸一)하니 이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고’ 였다. 나는 이 화두를 의심하다가 한 가지 방법을 깨닫게 되었다. 이 화두는 이중적 의심으로 뭉쳐져 있으므로 순일하게 사념이 집중되지 아니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갔다고 하니 이 하나는 과연 무엇인고’ 라고.”
당시 월면은 어른들을 층층이 시봉하느라 제대로 공부에 열중할 수 없었다. 월면은 생각 끝에 천장사를 떠나 온양에 있는 봉곡사로 거쳐를 옮긴 후 그야말로 불철주야 무서운 정진에 들어갔다.
만공은 이 절에서 두 해의 겨울을 지내고 1895년 7월 25일 새벽, 면벽 정진을 하던 중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는 이때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나는 그때 서쪽 벽을 바라보면서 화두에 침잠하고 있었다. 나중에는 화두를 들고 있다는 생각조차 없는 무념처에 이르게 되었는데 망상은 이미 옛 사당의 차디찬 향로와 같이 고요하게 되었으며 화두는 성성하게 되어 밝은 달이 허공에 또렷이 드러난 것같이 되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눈앞에 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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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 벽이 사라지고 텅 빈 허공이 되었으며 그리고는 하나의 일원상(一圓相)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월면은 모든 법이 돌아가는 하나의 원점을 발견한 것이었다.
■ 스승 경허로부터 선지식 인가 시험을 받다
월면은 분명히 견성을 했지만 활연대오한 것은 아니었다. 선가에서 흔히 내려오는 ‘크게 의심하면 크게 깨치고 작게 의심하면 작게 깨친다’는 말처럼 월면은 의심했으되 작게 의심했고, 깨치기는 깨쳤으되 작게 깨쳤으며, 그래서 아직도 미혹이 완전히 가셔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 월면은 더 이상 허드렛일을 맡아 하지는 않았다. 그는 봉곡사에 머무르고 있는 스님들을 붙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해진다.
“내게 희유(稀有)한 일이 일어났었소. 나는 일원상을 보았소. 만법이 돌아가는 그 하나의 하나를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았소. 그러하니 나와 함께 공부함이 어떻겠소.”
그러자 대중들은 월면의 경지를 알지 못하고 모두들 비웃어 말했다.
“어제까지 멀쩡하던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미쳐버렸구나.”
월면은 더 이상 봉곡사에 머무르고 있을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지리산 청학동으로 가려고 했으나 그 일대가 동학란으로 모두 전란에 휩쓸려 있었기 때문에 잠시 공주 마곡사에 들러 쉬어가려 했다. 이때 마곡사에는 보경(普鏡)이라는 노스님이 한 분 있었는데 그는 떠나려는 월면을 붙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토굴 하나를 뚫었으니 그곳에서 공부토록 하시오.”
월면을 그 토굴에서 두 해를 보냈다고 전해지고 있다. 스스로 밭을 갈아 씨를 뿌려 먹고 그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으며 보임 생활을 했는데 마침내 2년을 보낸 병신년 7월 15일 스승인 경허를 그곳에서 만나게 된다. 그때 월면의 나이는 26세였고 스승 경허와는 실로 5년 만의 상봉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스승 경허의 모습은 가관이었다. 머리를 기르고 수염은 가슴까지 내려오도록 기르고 있었는데 이는 지난해 내린 단발령에 대한 저항 때문이었다. 경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은 세속의 사람들과 머리를 달리 하여야 한다. 중이 머리를 삭발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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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세속의 사람들이 머리를 기르기 때문이다. 이제 나라에서 영을 내려 사람들의 머리를 깎으려 하므로 중인 나는 할 수 없이 머리를 기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경허의 특징으로 되어 있는 유발과 긴 수염의 전형적인 모습은 이 무렵 형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월면은 오랜만에 만난 스승 앞에서 세 번 큰 절을 올리고 그간 자신이 공부했던 것을 모두 고백했다. 선가에서는 스스로 활연대오 했다고 해도 눈이 밝은 선지식으로부터 그 깨달음의 경지를 인가 받지 않으면 아무도 그 깨달음을 인정해 주지 않는 불문율이 있었다. 월면은 오랜만에 만난 스승 경허에게 자신이 깨달은 경지를 인정받기 위해 이른바 선불장(選佛場)에 나선 것이었다.
경허는 묵묵히 부채를 부치면서 월면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때는 7월 보름이라 더위가 한창으로, 경허는 더위를 쫓기 위해 부채를 부치면서 듣다가 혼잣말로 탄식하여 말했다.
“과연 불 속에서 연꽃 하나가 피어났도다. 화중생련(火中生蓮)이로다.”
그러고 나서 경허와 월면 사이에는 과연 제자가 견성했는가를 알아보는 무섭고도 준엄한 선문답이 진행되었다.
깨달음의 경지는 깨달은 사람만이 알 수 있다.
한참 대화를 나누어본 경허는 월면이 초견성(初見性)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월면의 대답 한 소리에 간파했으며, 월면이 아직도 알음알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한참을 묻고 답하던 월면이 마침내 항복의 백기를 들고 겸손을 보이자 경허는 소리 높여 말했다.
“‘만법귀일 일귀하처’라는 화두는 더 이상 진보가 없으니 새로운 화두를 하나 주겠다.”
제자는 공부할 화두를 스승으로부터 전해 받는 것이 보통이다. 월면은 그 화두를 스승 경허로부터 결택(決擇) 받지 않고 우연히 절에 들른 초립동으로부터 귀동냥으로 얻어들어 이를 스스로 공안으로 삼고 참선했던 것이다.
그날 스승 경허가 만공에게 준 새로운 화두는 바로 조주 스님의 ‘무(無)’자 화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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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침내 도를 이루다
깨달음의 경지를 인정받으려던 월면은 스승 경허로부터 오히려 혼이 났으며 그 후부터 월면은 ‘무자’ 화두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혼자서 머무르고 있는 태화산의 마곡사에서는 더 이상 진보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마곡사 : 선덕여왕 9년 자장율사가 창건. 보철화상이란 사람이 이곳에 머무를 때 율법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삼대(麻)와 같이 빽빽하게 찾았다고 해서 마곡사라 함
- 최근에는 백범 김구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 군인을 살해하여 체포된 뒤 감옥에 갇혔다 탈옥하여 잠시 이 절에 들어와 머리를 깎고 중노릇을 하며 은신했던 절임
당시 경허는 서산에 있는 도비산(島飛山) 부석사(浮石寺)에 주석하고 있었다. 월면은 혼자서 공부하지 않고 스승 곁에서 ane고 배우면서 공부해 나가리라 결심했다. 5년 만에 또다시 스승 경허의 문하에서 정진을 하기 시작한 월면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으며, 훗날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나는 날마다 경허 화상에게 법을 물어 가르침을 받았으며 현현한 묘리를 탁마(琢磨)해 나갈 수 있었다.”
월면이 스승 경허의 당부대로 조주스님의 ‘무자’ 화두를 통하여 대오하게 된 것은 그 이듬해 여름 동래 범어사로부터 스승 경허가 하안거를 지도해 줄 선지식으로 초청 받은 데서 비롯되었다.
* 범어사 : 금정산에 위치한 신라 화엄십찰 중 하나로 삼국유사에 기록. 왜구를 진압하는 비보사찰. 구산선문의 본찰.
이때 월면은 침운(枕雲)이란 제자와 함께 경허 스님을 모시고 범어사로 갔다. 범어사로 가던 도중에 일어났던 일화는 경허의 장난기를 엿볼 수 있는 유명한 행장 중의 하나이다.
스승 경허와 월면, 침운 두 제자는 부산까지 먼 길을 가야 했으므로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자 다리는 아프고 날은 저물고 하여 한 발짝도 옮겨 걷기가 싫증이 날 정도로 지쳐버렸다. 그러자 느닷없이 경허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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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빨리 걷는 축지법을 가르쳐 주겠네.”
“스님, 제발 그 도술 좀 가르쳐 주십시오.”
그때였다. 세 사람의 앞으로 마을 처녀가 물동이를 이고 걸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경허는 달려가서 물동이를 인 처녀의 양 귀를 잡고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었다. 처녀는 너무나 놀라 ‘에구머니나’ 비명을 지르면서 물동이를 떨어뜨렸고 때문에 깨진 동이에서 쏟아져 내린 물이 경허의 몸을 흠씬 적셨다. 처녀의 비명을 정자나무 밑 그늘에서 앉아 쉬고 있던 마을 사람들이 마침 듣게 되었으며 그들은 길을 가던 세 사람의 중들이 벌인 해괴한 짓거리를 낱낱이 보게 된 것이었다. 순간 마을 사람들은 들고 있던 농기구를 세워 들고 쫓아오기 시작했다.
“저 중놈들 잡아라.”
난데없이 축지법을 가르쳐 준다고 하여 이를 지켜보던 월면과 침운 두 제자는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다리야 날 살려라 하고 함께 도망치기 시작했다.
마침내 쫓아오는 사람도 없고 마을도 보이지 않게 되자, 경허는 나무 밑동에 털썩 주저앉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떠한가, 내가 가르쳐 준 축지법이. 그토록 먼 길을 단숨에 달려오지 않았나.”
경허의 농세(弄世)는 그것에만 그치지 않았다. 범어사까지 가는 길 도중에 갑자기 비를 만난 일행은 비를 피하기 위해 마침 근처에 있는 바위굴에 들어갔다. 그런데 경허는 매우 근심스런 얼굴로 바위굴의 천장을 자꾸만 올려다 보고 있었다.
“스님께서는 왜 자꾸 천장만 쳐다보십니까?” 월면이 의아해서 묻자, 경허는 “쏟아지는 비로 이 바위가 내려앉아 우리 세 사람이 바위에 깔려 죽어버릴까 염려가 되어서 그러네.”
“스님 이처럼 큰 바위가 비로 내려앉다니요.”
그러자 경허는 말했다.
“이 사람아, 가장 안전한 곳이 가장 위험한 곳이란 말일세.”
이 말 한 마디, ‘가장 안전한 곳이 가장 위험한 곳’ 이라는 무심한 한 마디가 제자 월면이 평생을 간직하는 촌철살인의 법어가 되었다.
마침내 범어사에 이른 세 사람은 계명암 선원에서 하안거를 지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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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면과 침운은 하행(夏行)에 정진하기 시작했고, 경허는 전국에서 모여든 납자들을 지도하기 위해 주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명색이 하안거를 지도하는 큰스님이었으면서도 경허는 조실인 금강암에만 머무르고 있지 않았다.
당시 범어사에는 경산(擎山)이라는 스님이 머무르고 있었는데, 이 사람은 기골이 장대하고 걸승으로 소문난 사람이었다고 한다. 두주불사의 호주인 그는 경허 스님이 평소에 곡차를 많이 드신다고 하니 도대체 얼마나 드시는가 한번 시험해 볼 요량으로 해운대의 바닷가나 돌아보고 오자고 경허를 유혹했다. 무엇에나 걸림이 없는 경허는 이를 허락하고 함께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경산은 계획적으로 주점이 있는 곳마다 들러 경허에게 대접했다고 한다. 경산의 의중을 알아챈 경허는 들르는 주점마다 동이째 술을 가져오라하여 단숨에 이를 들이켜고 경산에게는 한 잔씩만 마시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 어귀에도 못 미쳐 경산은 인사불성이 되었고 경허는 오히려 말짱한 정신으로 경산을 빈 바구니 들듯 치켜들고 금강암에 올려다 재워놓았다. 이 일화는 범어사에서 오늘날까지 회자되고 있다.
한여름을 스승과 함께 보낸 월면은 하안거를 마치자 양산에 있는 통도사로 갔다.
* 영취산 통도사 : 옛날 부처님이 설법하시던 산의 모습과 통하므로 영취산 이라함. 646년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창건. 부처님의 진신사리인 불신을 모신 금강계단이 불교 최대의 성지임.
- 금강계단 뒤쪽 대웅전 주련에는 자장율사가 직접 지은 불탑게(佛塔偈)가 걸려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萬代輪王三界主 만대의 전륜왕 삼계의 주인
雙林示寂幾千秋 쌍림에서 열반하신지가 몇 천추던가
眞身舍利今猶在 진신사리 오히려 지금도 남아 전하니
會使群生禮不休 널리 중생 예배 쉬지 않게 하리.
통도사는 부처님의 진신을 모신 사찰로 유명하여 ‘불보사찰(佛寶寺刹)이라 불리는데, 범어사에서 하안거를 끝낸 월면은 일찍이 자장율사가 노래했듯 부처에게 예배하기 위해 통도사에 들르게 되었던 것이다.
통도사에는 산내 암자가 13개 있는데 그중 통도사에서 가장 먼 암자가 6Km 떨어진 백운암이다. 암자 밑에는 금수(金水)라는 약수가 있는데 그 맛이 일품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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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면은 금강계단에 이르러 부처에게 예배를 드린 후 곧바로 외진 암자인 백운암으로 떠났다. 백운암에 이르러 금수를 한 잔 마신 월면은 또다시 늦장마를 만나 보름 동안이나 꼼짝 없이 이 암자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동안 월면은 마침내 조주의 ‘무자’ 화두를 타파하여 활연대오 하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런 후 월면은 곧바로 스승 경허가 머무르고 있는 범어사를 향해 보은의 큰 절을 세 번했다.
도를 이룬 월면은 자신의 본사인 천장사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이때의 생활을 그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피곤하면 잠을 자고, 홀로 거닐며 자재했다.”
■ 만공의 신통력을 경허가 꾸짖다
월면이 서른세 살이 되던 1904년 2월, 스승 경허가 난데없이 천장사에 들르게 되었다. 실로 5-6년 만에 이루어진 만남이었다.
* 이무렵 경허의 족적
- 영남 최초의 선원 범어사를 개설, 하안거를 지도하는 사좌(師佐) - 해인사 조실 및 국왕의 칙명으로 추진하는 장경불사를 증명 - 조계산 송광사 점안 불사 - 호남 지방의 지리산 화엄사, 천은사, 백장암, 실상사, 영원사, 벽송사, 쌍계사, 태안사, 덕유산 송계암 등의 사찰을 주유하고 - 다시 영남으로 돌아와 통도사, 내원사, 백운암, 표충사등을 순력하며 선풍을 크게 떨치고, 해인사 조실로 있으면서 사불산 대성사, 불명산 윤필암, 팔공산 동화사, 파계사에도 선방을 창설
이무렵 경허의 나이는 56세로 그는 자신의 소명이었던 전국 사찰에 선풍을 일으키는 역할을 이제 막 끝내고 마치 고향으로 돌아오기라도 하듯 천장사로 돌아온 것이었다.
제자월면은 난데없이 나타난 스승 경허를 보자 맞아들여 큰 절을 세 번 올려 예를 갖춘 후 자신이 그동안 공부하고 보임한 것을 낱낱이 아뢰었다. 경허는 이미 월면의 모습에서 제자가 활연대오했음을 알고 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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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을 고향과 다름없는 천장사에 머무르고 있던 경허는 갑자기 일어나 말했다.
“난 가야겠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제자 만공이 걱정스레 묻자 경허는 웃으면서 말했다.
“자네가 한 번 내가 갈 곳을 알아 맞혀 보시게나.”
경허가 헤어지는 마당에 만공에게 그렇게 말했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만공은 평생 동안 스승 경허로부터 두 번 크게 혼난 적이 있었는데 한 번은 마곡사에서 스승에게 깨달음을 인가 받으려고 선문답했다가 초주검을 당했던 것이었고, 또 한 번은 그보다 일찍 천장암에서 경허를 모시고 시자 생활을 할 무렵이었다. 그때 만공은 스무 살이 넘은 청년이었는데 공부를 하다 어느 날 갑자기 식(識)이 맑아지고 타인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는 타심통(他心通)이 열려 시림의 마음과 세상일을 보지 않고도 손바닥 위에 놓고 들여다보듯 환하게 아는 경계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여러 사람들의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순조롭게 풀어주고 심지어 곧 죽게 되는 함정에서도 능히 살 수 있는 지혜를 일러주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경허는 갑자기 그를 불러 법당으로 들인 후 무릎을 꿇게 하고는 꾸짖어 말했다.
만공 자네가 타심통이 열려 신통을 부릴 수 있다 하더라도 이는 요망스럽고 괴이한 일이며, 지엽적인 일이며, ‘모난 나무로 둥근 구멍을 막으려는 것’과 같은 사술에 불과한 일이니 앞으로는 절대로 술법을 행하지 말 일이야.
도인이 아무리 훌륭한 도기 있더라도 술법을 행하면 이미 귀신이니 이를 믿을 수가 없는 법이네. 그러니 그대가 살고 남도 살려주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앞으로는 절대 그러한 짓은 하지 말 것이다.
이때 만공은 스승으로부터 어찌나 혼이 났는지 모골이 송연해 졌다고 한다.
그날 “난 가야겠다.” 라는 작별 인사,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경허는 그 길로 천장암을 떠나 행적을 감추었으며 만공은 다시는 스승을 만난 적이 없다. 만공이 경허를 다시 만난 것은 그로부터 8년 뒤인 1912년, 살아서 만난 것이 아니라 죽어 있는 시신과의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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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좌진과 만해 한용운
스승 경허로부터 마침내 활연대오했음을 인가 받은 만공은 경허가 천장암에서 사라져 종적이 묘연해지자 다시 암자를 떠나 모든 산천을 유력하다가 그의 나이 34세 되던 1905년에 덕숭산 수덕산 뒤편에 작은 모암(茅庵)을 지어 금선대라 이름하고 그곳에서 보임을 했다. 사방에서 납자들이 모여들어 그에게 설법하기를 간청하거늘 마침내 법좌에 올라 개당보설(開堂普說)을 시작했다. 이무렵 김좌진과 만공이 힘겨루기 팔씨름을 벌인 사실은 유명해 오늘날에도 하나의 전설로 내려오고 있다.
백야 김좌진은 충남 홍성군 고도면 상촌리에서 출생했다. 당시 이곳은 김씨들이 번성하고 있었는데 김좌진은 이미 15세 때 집안에 있던 가노들을 모두 해방시켜줄 정도로 진취적인 청년이었다.
훗날 청산리 전투에서 대첩을 거둘 만큼 천하무적의 용맹과 힘을 지니고 있었던 김좌진은 20세 나이에 그 누구도 당할 자 없는 천하장사가 되어 있었다. 구 척 장신에 황소 같은 체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힘이 센 장사가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불원천리하고 찾아가 겨루는 열혈 청년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힘이 무지무지 하게 센 장사가 수덕사에 잇다는 소문을 듣고 수소문해보니 그는 다름 아닌 이제 말 개당(開堂)한 만공이었다.
“뭐라고 중이 힘이 세다고? 나물 먹는 중이 고기 먹는 나를 어찌 당할 수 있단 말인가?”
그길로 김좌진은 수덕사를 찾아가 금선대를 방문 했다고 한다.
“어찌 오셨소?”
“스님께오서 천하장사라는 소문을 듣고 힘을 겨뤄볼까 해서 찾아왔소이다.”
김좌진의 목소리는 쩌렁쩌렁 힘이 넘치고 있었다.
“나는 법(法)을 알 뿐이지 힘은 모르오.”
만공이 천하장사라는 소문이 전 고을에 돌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였다. 일찍이 만공이 천장암에서 경허 스님을 시봉하고 있을 때였다. 그 무렵 젊은 여승 하나가 천장암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마을에 볼일이 있어 내려갔다가 며칠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걱정 끝에 경허는 만공에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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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공, 자네가 가서 그 비구니를 찾아오시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찾아와야 하네. 찾아오지 못한다면 아예 암자로 돌아오지 말게.”
스승의 명은 곧 절대의 법.
만공은 그길로 산을 내려가 수소문 끝에 그 여승이 갈산 김 씨의 양반 자제들에게 감금당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심심풀이로 처음 보는 여승이 예쁘기도 하고 나이도 젊었으므로 파계시켜 동리의 어느 홀아비에게 붙여주려고 며칠을 꾀고 있는 중이었다.
만공이 김 씨 댁을 찾아가 여승의 행방을 물었다. 그러나 그들은 한결같이 빙글빙글 웃으며 시치미를 뗐다. 그러자 만공은 그들을 향해 소리쳐 말했다.
“정히 그렇다면 나도 할 말이 있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우리는 부모처자마저 버리고 평생을 수도에 정진하기로 몸을 바친 승려들이다. 나는 단몸이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큰 소리로 일갈하며 마침 뜰에 놓여 있는 쇠로 만든 절구통을 한 손으로 단숨에 들어 올려 보였던 것이다. 그 절구통은 김 씨 댁 하인 서너 명이 들어야만 겨우 옮길 수 있는 물건이었는데 그 무거운 쇠 절구통을 한 손으로 번쩍 들어 올리는 만공의 괴력을 보자 양반 댁 자제들은 입을 딱 벌리고 사과하여 말했다.
“우리들의 장난이 지나쳤습니다.”
그러고 나서 여승을 내주었는데 이 일이 있은 후로 호서 지방 일대에 만공이 천하장사라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힘겨루기를 하려고 찾아온 김좌진은 한 눈에도 만공이 자신과 같은 체격을 갖추었고, 한 손으로 쇠 절구통을 들어 올렸다는 말을 상기하자 새삼 전의가 솟아올랐다.
“무엇으로 힘을 겨뤄보시겠소?”
만공은 여간해서는 물러서지 않을 김좌진의 기개를 보자 할 수 없이 입을 열어 말했다.
그러자 김좌진은 말했다.
“무엇이든 좋습니다. 씨름, 팔씨름, 무거운 것 들어 올리기 등……”
만공이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팔씨름으로 합시다. 그리고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진 사람은 이긴 사람에게 무엇이든 해 주기로 내기합시다.”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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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좌진을 따라온 하인들, 수덕사의 거의 모든 승려들, 수덕사에 모시고 있던 만공의 어머니 김 씨 등 많은 사람들이 이 천하의 진풍경을 구경하고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두 사람은 팔을 잡고 서로 팔꿈치를 평상위에 고정시켰다. 황소 같은 체격을 지닌 두 사람이 힘을 겨루기 위해 평상을 가운데 놓고 버텨 있는 모습은 실로 가관이었다.
일단 팔씨름이 시작되자 곧 진기한 광경이 벌어졌다. 김좌진은 있는 힘을 다해 만공의 팔을 넘어뜨리려고 용을 쓰고 있었지만 만공은 지고 이기는 데 마음이 없다는 듯 그저 김좌진의 팔을 붙잡고만 있을 뿐이었다. 김좌진의 얼굴은 이내 붉게 충혈되었으며 온몸에서는 땀이 흘러나오고 이마에서는 붉은 핏줄이 솟아올랐지만 만공의 몸에서는 아무런 요동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표정도 여전했으며 온몸에 힘을 준 기색도 전혀 없음이었다. 그런데도 그의 팔은 요지부동이었다. 만공의 손은 바위와도 같았으며 준령과도 같았다. 그의 팔은 석불과도 같았으며 태산과도 같아 난공불락이었다. 김좌진은 그야말로 젖 먹던 함까지 다해 만공의 팔을 쓰러뜨리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었으나 만공의 팔은 단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마침내 갖은 애를 쓰다가 제풀에 지친 김좌진이 만공의 손을 놓으면서 깨끗하게 말했다.
“스님, 내가 졌소이다.”
그러자 만공이 손을 풀면서 말했다.
“지시다니, 이기고 진 사람은 피차 아무도 없소. 팔을 꺾어 땅에 누인 사람이 없는데 어디에 이기고 진 사람이 있단 말이오.”
그러나 김좌진은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내가 스님의 팔을 꺾어 넘어뜨리지 못했으니 내가 졌습니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도 당신의 팔을 넘어뜨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이기고 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구경꾼들의 눈으로 보면 팔씨름은 분명히 만공의 승리였고 청년 김좌진의 패배인 것이 확실했다. 힘뿐 아니고 고집도 황소인 김좌진이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내가 분명히 졌으니 약속대로 내기를 거십시오. 이긴 사람은 진 사람에게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진 사람은 이긴 사람이 무엇을 시키든 그 말에 따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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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약속했으니 스님께오서는 의중에 있는 대로 요구하십시오.”
김좌진이 물러서려 하지 않자 만공이 입을 열어 말했다.
“정히 그러하시겠다면 한 가지 요구를 하겠는데 내가 무엇을 요구하더라도 이를 따르시겠소?”
“그렇습니다.”
“설혹 내가 목숨을 요구하더라도…….”
“물론입니다.”
“그러하다면 완산아, 가서 삭도를 가져 오너라.”
시자 완산이 삭도를 가져오자 만공은 말했다.
“완산아, 그 청년의 머리칼을 깎아 주어라.”
“머리칼을 깎다니요, 스님.”
“무엇이든 시키는 대로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제부터 청년의 머리를 깎아 중으로 만들 참이오. 골상이나 두상을 보니 중노릇을 하면 틀림없이 고승이 될 상이오. 그러나 머리를 깎지 않으면 천하를 호령하는 호랑이가 될 상이긴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아이구.”
김좌진이 비명을 질렀다.
“스님 모든 것을 다해도 머리 깎고 중 되는 것만은 내 못하겠소.”
그러자 만공이 껄껄 웃으면서 곁에 서 있던 어머니를 불러 말했다.
“진 사람도 이긴 사람도 없으니 수박이나 먹읍시다. 어머니, 찬 수박이나 좀 가져오십시오.”
경내에서는 때 아닌 수박 공양이 벌어졌다.
그 후 김좌진과 맺은 우정은 계속되어 만공은 가끔 산을 내려가면 갈산 김 씨 댁에 들러 가기도 했다. 이 무렵 갈산 김 씨 댁 사랑에는 구한 말 벼슬길에 올랐던 무리들이 떼 지어 몰려들어 바둑이나 장기, 골패 같은 노름으로 소일하고 있었고, 이들은 무위도식으로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마침 이곳을 자나던 만공이 김 씨 댁을 두드렸다.
김좌진이 뛰어나가 반겨 맞았을 것은 당연한 노릇, 선비들은 도인이 왔다는 말에 모두 나와 만공을 한가운데로 하고 둘러앉았다. 그들은 대부분 유생들이었으므로 만공을 바라보는 눈은 호기심 반, 경멸 반이었다. 그 당시 승려는 천민의 신분이었고, 그들은 자신들을 선비라고 생각하고 있던 양반들이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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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므로 은근히 마음속으로 만공을 깔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만공은 대들보를 흔들 만큼 쩌렁쩌렁 큰소리로 입을 열어 법문을 시작했다.
“이 세상엔 도둑놈들이 많이 있소이다. 그 중에서 가장 큰 도둑은 나라 도둑인데 남의 집 담을 넘어 물건이나 훔쳐가는 놈은 좀도둑에 불과하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밤낮으로 내기 장기나 두고 골패나 치며 놀고먹는 양반들이야말로 큰 도둑놈이오. 보시오. 농부들은 일 년 내내 전 가족이 피땀을 흘려가며 농사를 지어도 봄이 되면 먹을 것이 없어 초근목피로 입에 풀칠을 하며 살아가거늘 하물며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게다가 놀고 먹는 당신들 같은 양반 부스러기들이먀말로 도둑 중에서 제일 큰 나라 도둑이오.”
훗날 김좌진은 29세의 나이에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정예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광복에 목숨을 바치게 되었으며, 만공 역시 조선 불교를 말살하려는 총독부의 획책에 불굴의 투지로 맞서 싸워나갔다. 당시 총독부는 조선의 승려들을 일본 승려처럼 아내를 거느린 대처, 고기를 먹는 식육, 그뿐인가. 술을 먹는 음주까지 허락케 함으로써 불교를 단순히 생활 종교로 전락시키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937년 3월 11일, 총독부 회의실에서는 전국 불교 31본산 주지 회의가 열렸다. 회의 의제는 ‘조선 불교 진흥책’. 참석한 사람은 당시 총독이던 미나미를 비롯하여 13도 도지사, 그리고 31본산 주지들이었다.
미나미는 회의 벽두부터 강압적인 자세로 전국에서 모여든 승려들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전 총독 데라우치는 사법(寺法), 사찰령(寺刹令) 등을 제정함으로써 조선불교 진흥에 큰 공을 이루었다. 그러므로 앞으로 조선 불교는 일본 불교와 합병하여 보다 큰 진흥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전국에서 모여든 31본산 주지들은 누구 하나 감히 반박하려 하지 않고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이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회의석상을 두 손으로 내리치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마곡사 주지로 회의에 참석한 만공이엇다. 만공은 총독을 한 손으로 가리키면서 다음과 같이 할(喝)했다.
“청정이 본연커늘 어찌하여 산하대지가 나왔는가.”
(淸淨本然 云何怱生山河大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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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나서 만공은 총독과 고위관리들, 그리고 입을 다물고 앉아 있는 승려들을 향해 꾸짖어 말했다.
“전 총독은 우리 조선 승려로 하여금 아내를 얻게 하고 고기에 술까지 먹도록함으로써 온 승려들을 파계시킨 죄인으로 그는 지금 죽어 무간아비지옥에 떨어져 한량없는 고통을 받고 있을 것이오. 이런 자들을 지옥에서 구하고 조선불교를 진흥 시키는 길은 오직 조선 승려들이 수행을 엄히 하고 정진하여 견성 성불하는 길밖에 없는 것이오. 총독부는 조선 불교를 간섭하지 말고 우리 조선 승려에게 전부 맡기는 것만이 유일한 진흥책이니, 이것이 바로 정교분립인 것이오.”
이날 밤 만공이 머무르고 있는 선학원으로 만해 한용운이 찾아왔다. 그는 만공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하도다, 사자후여. 총독을 사자후로 꾸짖어 간담이 떨어지도록 했구나, 한 번 할을 하매 여우 새끼들의 간담이 써늘했도다. 그러나 비록 일갈도 좋았지만 한 방망이 후려침이 더 좋았을 것이 아니었을까.”
만공은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이 사람아 어리석은 곰은 방망이를 쓰지만 사자는 일갈을 사용한다네.”
일찍이 홍성에서 태어나 동학에 참여했다가 실패로 돌아가자 17세 나이로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갔다가 다시 20세 때인 1905년 백담사에서 연곡을 은사로 중이 되고 만화로부터 법을 받은 만해 한용운은 한일합병이 되자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군의 군관학교를 방문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했던 독립운동가이자 승려였다. 그는 3 ‧ 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가 체포되어 3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기도 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로 시작되는 명시 ‘님의 침묵’을 남기기도 한 만해 한용운은 퇴폐적인 서정성을 배척하고 불교적인 ‘님’을 자연으로 형상화 했으며 고도의 은유법을 구사하여 일제에 저항하는 항일 문학에 앞장섰던 승려이자 시인이기도 했는데, 그는 만공의 기개를 찬탄 하면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만공에게 보냈다.
남아가 이르는 곳마다 내 고향인데 男兒到處是故鄕
몇 사람이나 객의 수심 가운데 지냈던고 幾人長在客愁中
한 소리 큰 할에 삼천대천세계를 타파하니 一聲喝破三千界
눈 속에 복사꽃 조각조각 나네. 雪裏桃花片片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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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만공이 스승 경허의 어록을 편수하고 ‘경허집’을 출간 했을 때 출판 서문을 만해 한용운이 쓰게 된 것은 이렇듯 만공과 한용운 간에 이루어진 도반으로서의 우정 때문이었던 것이다.
■ 만공이 남긴 일화와 법훈들
만공이 남긴 일사(逸事)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있다. 만공이 스승 경허를 닮아 매사에 걸리는 바가 없어 젊은 여자의 허벅다리를 베고 잠을 자기도 했었다는 이야기는 하나의 전설로 되어 있다. 어떤 날은 일곱 여자의 허벅다리를 베기도 하고 침대 삼아 깔고 잠을 자기도 해 이른바 ‘칠선녀와선(七仙女臥禪)’이란 문자도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만공은 여색을 굳이 멀리하지는 않았으되 이에 물들지는 아니했다. 만공의 이러한 태도는 선가에서 흔히 내려오는 선화 하나를 떠올리게 한다.
‘지월록(指月錄)’이란 책속에 있는 이 선화는 이른바 ‘고목선(古木禪)’이란 화두로 발전된 것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느 청신녀(淸信女)인 한 노파가 조그만 암자를 지어 그 토굴 속에 젊은 선객(禪客)을 모셨다. 20년을 한결같이 뒷바라지 하며 공부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했다. 20년이 흘러 그 선객이 어느 정도 공부가 이루어졌으리라 생각한 청신녀는 그의 묘령을 딸을 시켜 시험해 보기로 했다.
“얘야, 오늘은 공양구(供養具)를 가지고 가서 스님을 한 번 껴안아 보고 수행정도를 시험하여 보거라.”
딸은 엄마의 명령대로 아침 공양을 들고 암자에 올라가 공양을 마치기를 기다려 스님을 껴안아 보았다. 아무런 반응이 없자 여인은 스님의 품속에 스스로 안기면서 어리광을 부리며 말했다.
“스님 이럴 때의 기분은 어떠하세요?”
“굳이 표현해야 아는가, 내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여인은 다시 어리광을 부리며 말했다.
“그래도 스님의 말을 듣고 싶습니다. 그리고 소녀는 오래전부터 스님을 사모하여 왔습니다. 저를 한 번 안아주시겠습니까? 제가 드리는 정을 받아주실 수 없겠습니까?”
그러자 선객은 일언지하에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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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고목나무가 엄동설한에 찬 바위를 기대고 선 것과 같소. 불씨 꺼진 재처럼 따스한 기운이 전혀 없으니 썩 물러가시오.”
딸은 하는 수 없이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면서 스님을 칭찬했다.
그러나 딸의 얘기를 들은 어머니는 노하여 소리쳐 말했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보고 20년이나 맹추 같은 날속한(俗漢)을 공양했구나.” 노파는 곧 암자로 달려가 그 선객을 내쫓고 암자를 불 질러 버렸다.
이 선화는 노파의 소암(燒庵)이라 하여 선가에서는 하나의 공안으로 널리 회자되고 있는데 이 선객은 20년 동안 여인을 멀리하는 수행에는 철저하면서도 여인을 위한 한 점 자비심은 익히지 못했던 것이다. 여인을 따뜻하게 대하는 것과 여인에게 빠지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여기에 살아있는 선(活禪)이 아니라 죽어 있는 선(死禪)을 ‘고목선’이라 부르는 용어가 생겨난 것이다.
만공이 일곱 여자의 무릎을 베고 침대 삼아 깔고 잠을 자기도 해 이른바 ‘칠선녀와선’이란 문자를 만들었다는 것은 물론 과장이겠지만 여인을 평등한 인간으로 대한 것이지 여인을 욕망의 대상으로 본 것은 절대 아닌 것이다.
여인을 평등하게 바라보는 만공의 시야는 그가 오랫동안 머무르고 있던 덕숭산에 한국 최초의 비구니 선원인 견성암을 건립하여 훌륭한 여성 수도자를 배출케 함으로써 한국 비구니의 본산이 되게 한 태도에서 보아도 알 수 있다.
만공은 덕숭산의 비구니 선원인 견성암에서 훌륭한 여성 수도자를 많이 배출케 한 선각자였다. 특히 김일엽(金一葉)과의 인연은 유명해 그녀를 출가시킨 일화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아직까지 남아 전하고 있다.
김일엽의 본명은 원주(元周)로 평남 용강 출신이었다. 일찍이 진남포의 삼숭여학교와 이화학당에서 수학하고 일본에서 유학했다. 24세 되던 해 신여자(新女子)란 잡지를 창간하여 여성 해방을 부르짖었으며 스스로 자유연애를 구가했다. 몇 편의 단편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결혼에 실패한 후 이른바 자유연애에 환멸을 느껴 수덕사에 휴양 왔다가 만공을 만났다고 한다. 만공의 권유로 입산 출가하게 된 그녀는 만공으로부터 일엽(一葉)이라는 법명을 얻었으며 마침 만공이 건립한 견성암에 들어가 여승으로 생애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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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일엽이 만공 스님과 불전에 정좌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만공이 불상을 쳐다보면서 탄식하여 말했다.
“부처님 젖통이 저렇게도 크시니 올 겨울 수좌들 양식 걱정은 없겠구나.”
그러자 이를 듣고 있던 일엽이 무심코 입을 열어 물었다.
“무슨 복으로 부처님의 젖을 얻어먹을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만공은 큰 소리로 꾸짖어 말했다.
“도대체 이 무슨 소린가?”
일엽도 만만하게 물러서지는 않았다. 일엽이 물어 말했다.
“복업(福業)을 짓지 않고 어떻게 부처님에게서 젖을 얻어먹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만공이 무릎을 치면서 한탄하여 말했다.
“네가 부처님을 건드리기만 하면서 젖은 얻어먹지도 못하는구나.”
어찌 보면 육담 같은 이 이야기를 통해 만공은 부처님의 불법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절에나 안치되어 잇는 불상은 으레 풍만한 젖가슴을 갖고 있게 마련이다. 뿐만 아니라 남성으로서는 보기 드문 유두까지 갖고 있는데 이를 빗대어 만공은 여승인 일엽에게 부처님을 건드리기만 하면서 가장 중요한 부처님의 젖은 얻어먹지 못한다고 꾸짖고 있는 것이다.
부처의 젖.
만공은 부처가 설법한 불법의 진리를 젖으로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불법의 진리를 부처의 젖으로 비유한 만공의 선풍은 그가 덕숭산 꼭대기에 위치한 정혜사 뜨락에 발우형(鉢盂形) 석조수조를 만들어 놓은 것에서도 엿볼 수 있다.
바위 밑에서 흘러 나오는 약수를 받는 발우형 수조를 만들어 놓고 그 위에 만공은 친필로 다음과 같이 정자의 이름을 명명한다.
‘불유각(佛乳閣)’
직역을 하면 ‘부처님의 젖이 나오는 정자’ 라는 뜻의 이 이름을 보아도 부처의 말씀을 부처의 젖으로 비유해 일엽에게 말한 만공의 농은 실은 불교의 핵심을 꿰뚫어 보인 선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만공에게는 이와 비슷한 일화가 또 한가지 더 있다.
그 당시 수덕사 밑 사하촌에는 나무꾼들이 나무를 하면서 다음과 같은 음담의 노래들을 부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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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산의 딱따구리는
생나무 구멍도 잘 뚫는데
우리 집 멍텅구리는
뚫린 구멍도 못 뚫는구나.
이 노래는 문자 그대로 노골적인 육두문자(肉頭文字)의 패설가였다.
당시 만공에게는 시봉하던 나이 어린 사미승(오늘날 수덕사 방장으로 있는 眞性)이 하나 있었는데 그 철부지 소년이 노래를 배워 오나가나 부르고 다녔다.
어느 날 사미승의 이 노래를 들은 만공은 손뼉을 치면서 감탄하여 말했다.
“그 노래 참 좋은 노래다. 절대로 잊어버리지 말거라.”
어느 꽃피는 봄날, 왕가의 상궁들과 나인들이 수덕사로 내려와 만공을 찾아 뵙고 그에게 법문해줄 것을 청했다. 이를 쾌히 승낙한 만공은 수많은 궁녀들이 모인 법당에 진성을 불러들여 법당 한가운데 세우더니 바로 그 ‘딱따구리의 노래’를 부르도록 했다.
신이 난 사미승은 목청이 터지라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왕궁의 청신녀들은 한편으로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한편은 재미있기도 하여 웃기도 하고, 너무 노골적인 노래 가사로 낯이 붉어지며 어떤 여인들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기도 했다. 각양각색의 반응을 살피던 만공은 법상에 올라 엄숙한 얼굴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노래는 절 밑에 살고 있는 나무꾼들이 나무를 하면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얼핏 들으면 상스런 노래인 것 같지만 이 노래 속에는 인간을 가르치는 만고불역(萬古不易)의 핵심 법문이 깃들여 있는 것입니다.
“……뚫려 있는 구멍, 뚫려 있는 이치를 찾는 것이 바로 불법이오. 탐욕, 분노, 어리석음의 삼독과 환상의 노예가 되어버린 어리석은 중생들이야말로 뚫려 있는 구멍을 뚫지도 못하는, 딱따구리보다 못한 불쌍한 멍텅구리인 것이오, 진리는 이처럼 지극히 가까운 데 있소. 대도(大道)란 막힘과 걸림이 없어 원래 훤칠히 뚫린 것이기 때문에 지극히 가깝고, 따라서 이 노래는 뚫린 구멍도 못 찾는 어리석은 세상 사람들을 풍자한 기막힌 법곡(法曲)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오.”
한갓 나무꾼들이 부르는 패설가를 통해, 생나무 구멍을 잘 뚫는 딱따구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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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대어 자신의 욕정 하나도 제대로 만족시켜줄 줄 모르는 남편을 빈정거리는 육두가를 통해 불법의 진리를 꿰뚫어 설법한 만공이야말로 대단한 선풍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불법에 관해 만공이 남긴 법훈이 하나 있다.
‘들려오는 노랫소리가 다 법문이요, 삼라만상의 모든 물건이 다 부처님의 진신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불법을 만나기가 백천만겁에 어렵다고 하니 그 무슨 불가사의한 도리인가.’
■ 자네와 내가 이제 이별할 인연이 되었구려
만공도 세월과 더불어 늙어갔다.
어느 해 여름, 만공은 상경하여 선학원에서 같은 경허의 제자인 한 스님과 나란히 앉아 있었다. 스님이 만공을 한참 보더니 불쑥 입을 열어 말했다.
“만공 자네도 이미 많이 늙었구료.”
그러자 만공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허공도 또한 늙었거니 색신이야 어찌 늙지 않겠소이까.”
나이가 들면서 만공은 그가 남긴 선시 중에서 가장 유명한 노래 한 수를 남긴다. 제목 하여 ‘참회게문(懺悔偈文)’이라 했는데, 만공도 나이가 늙어가자 아직 참회할 죄업이 남아 있음을 문득 느끼기라도 했음일까.
일체가 바람으로 좇아나고 一切隨風生
일체가 바람으로 좇아 멸하는 것이니 一切隨風滅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요달하면 了得風來處
생도 없고 또한 멸도 없으리라 無生亦無滅
이렇게 불러 답을 얻을 때가 此召得答時
법안으로 성품을 보는 때이리라. 法眼見性時
말년에 만공은 서산 앞바다에 있는 간월암을 복원하고 중창했다. 간월암은 조선조에 들어와 배불정책의 화를 입어 절이 헐리고 그 자리에 묘가 들어서 있었던 것이었다. 만공은 이 옛 절터에 간월암을 복원하고 그 첫 사업으로 1942년 여름부터 조국해방 천일기도를 올리기 시작했는데 천일기도를 끝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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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회향 3일 만에 8 ‧ 15 해방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해방을 맞은 만공은 덕숭산 산정에 전월사(轉月寺)란 띳집(茅屋)을 짓고 그 곳에서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이 무렵 만공은 자신을 찾아온 어느 학인과 그가 남긴 선화 중 가장 유명한 선문답을 나누게 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떤 학인이 전월사로 만공을 찾아와 물었다.
“불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다못 네 눈앞에 있느니라(祈在目前).”
“내 눈앞에 있다는데 어째서 저에게는 보이지 않습니까?”
“너에게는 너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느니라.”
“그러하면 스님께서는 보셨습니까.”
“너 혼자만 있어도 안 보이는데 나까지 있다면 더욱 보지 못하느니라.”
그러자 학인이 다시 물었다.
“나도 없고 스님도 없다면 볼 수 있겠습니까?”
만공은 꾸짖어 말했다.
“나도 없고 너도 없는데 보려고 하는 자가 누구냐? (無我無汝 可求見是何誰)”
이 선문답을 통해 집작할 수 있듯 만공은 불법을 ‘자기 속에 들어 잇는 나를 찾아가는 길’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하여 만공은 ‘나를 찾아야 할 나’에 관한 법문들을 수없이 남겼다.
‘사람이 만물 가운데에서 가장 귀하다는 것은 나를 찾아 얻을 수 있는 데 있다.’
‘나 라는 존재는 절대 자유로운 것이며, 모든 것은 내 마음대로 자재(自在) 할 수 있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도 자유가 없고, 무엇하나 임의로 되지 않는 것은 망아(忘我)가 주인이 되고 진아(眞我)가 종이 되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뛰어난 학식과 인격으로 존경을 받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기 자신의 나를 찾지 못하면 그 사람은 정신을 잃어버린 미친 사람에 불과할 따름이다.’
‘각자가 다 부처가 될 성품을 지녔지만 내가 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부처를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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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를 대상으로 구경(究竟, 사리의 마지막)에 이르면 내가 곧 부처인 것이 발견되나니 결국 내가 내 안에서 나를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보고 듣고 얻는 지식으로써는 나를 찾아낼 수 없는 것이다. 나라는 생각만 해도 그것은 벌써 내가 아닌 것이다.’
‘나 속에 들어 있는 진짜의 나’를 찾는 길이야말로 부처를 이루는 길이라고 설법하는 만공의 역설은 ‘너 자신을 알라’고 외치는 소크라테스의 목소리를 떠올리게 한다.
만공은 1946년 10월 12일, 시자들을 보고 물을 떠오라고 했다. 시자들이 목욕물을 떠오자 스스로 몸을 씻어 자신이 평생토록 입고 가던 육신의 옷을 씻어 내렸다. 목욕을 하고는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단좌한 후 거울을 가져오라고 했다. 거울을 가져 오자 만공은 물끄러미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더니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자네와 내가 이제 이별할 인연이 되었나보구려. 그럼 잘 있게나.”
그러고 나서 만공은 문득 입적했다.
이때 만공의 나이는 세수(世壽)로는 75세, 중의 나이 법랍(法臘)으로는 62세였다. 만공의 최후는 그가 입적하기 4년 전인 1942년의 일을 떠올리게 한다.
그해 겨울은 눈이 몹시 왔었다. 여승들의 수도처인 견성암에서 공양 청반(請飯)하기 위해 지명이라는 비구니가 만공을 만나러 왔었다. 그때 비구니들은 견성암으로 내려가는 눈길을 말끔히 쓸어놓고 스님을 모시러 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노스님, 눈길을 깨끗이 쓸었습니다. 어서 가십시다.”
그런데 만공은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내려가는 눈길을 깨끗이 쓸어놓았대두요. 어서 가시지요.”
그러자 만공이 말했다.
“나는 너희들이 쓸어 놓은 길로는 안 가련다.”
그러자 지명이 어리둥절해 물었다.
“그럼 스님께서는 어느 길로 가시겠습니까?”
이에 만공은 딴전을 부리면서 말했다.
“너희 절 부처님의 모양이 하얗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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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짧은 선화에서도 알 수 있듯 평생 남이 쓸어 놓은 길‘로는 다니지 않던 만공, 남이 만들어 놓은 길로는 다니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 길 없는 길을 가던 만공은 열반에 듦으로써 독자적인 삶의 길을 떠나게 된 것이다.
다비를 모시던 그 즉시 흰 연기가 안개처럼 피어오르고 홀연히 백학 한 마리가 나타나 공중을 배회하다 오색광명이 하늘을 수놓았다던가, 어쨌다던가.
문도(門徒)들이 영골을 모아 덕숭산 산록에 둥근 석탑을 만들어 봉안하고 만공 월면을 상징하는 둥근 달 모양의 만공탑을 건립했는데, 어쨌든 이로써 경허의 수법제자인 세 명의 월륜은 영원히 하늘을 올라 어둠을 비추는 세 명의 달이 되었다.
2013. 6. 16.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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