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방 (2)

2017. 6. 21. 18:34카테고리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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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방 (2)

■ 박완서 지음

순명의 아름다움

- 소리 내어 외치지 않되, 잠들지도 않고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선한 이들이 암흑 속에서 힘겹게 깨어 있다는 걸 굽어 살피소서.

■ 별을 보여 주세요

-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에게 경배하러왔습니다.

(마태 2장 1-12절)

우리는 별을 볼 수 없게 된 지 오래이다. 공기 오염 때문이라고 하지만 보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별이 뜨기를 기다리지 않기 때문에 못 보는 것이 아닐는지 별보다 더 크고 뚜렷한 달도 어느 날 문득 고층 아파트 모서리에 걸려 있는 걸 보면서 저기다 웬 나트륨을 달아 놓았을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한 적이 있다. 우리가 달을 못 보고 사는 것도 공기 오염 때문이 아니라 달빛이 그다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명이 만든 불빛이 이렇게 휘황하고 아름다운데 달빛 별빛이 무슨 소용이fi 싶은 세상이란, 바로 신이 필요 없는 세상이 아닐까?

박사들이 멀리 동방에서 예루살렘까지 아기 예수를 경배하러 온 것은 그분의 별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궁에 사는 헤로데 왕은 그별을 보지 못했다. 변방에서 보인별이 왕궁의 은성한 불빛 속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현명한 박사들은 이 세상을 변화시킬 분을 기다렸을 테지만, 왕에게 그런 분은 반갑지 않은 위협이었을 것이다. 왕권이 필요로 하는 것은 천년만년 계속되는 현상유지이지 변화가 아니니까. 구원의 별빛은 권력과 부의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고장에서 보였고, 기다리는 사람, 고뇌하는 사람에게만 보였다.

올해의 소원은 별을 보는 것이다. 별을 보며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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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의 음성이 들리면 제일먼저 하고 싶은 말은, 당신이 도대체 계시기는 하는 거냐고, 계신 곳만 알 수 있다면 지금부터라도 순례의 길을 떠나겠다는 간청이다. 아아, 그러나 나는 아직도 위선을 떨고 있다. 나는 네 안에도 있고, 네 이웃 중 가장 보잘 것 없는 이웃 안에도 있다고 말씀하실 줄 뻔히 알면서도 그걸 인정하기가 싫어서 짐짓 요망을 떨고 있는 것이다.

주님, 별을 보기엔 너무 교만해져버린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 길

-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마르 1장 7-11절)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너 크면 무엇이 될래. 라고 묻기를 잘한다. 직업이나 사회적 신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어린 나이엔 곧잘 아빠가 될래요. 또는 엄마가 될래요. 라고 대답한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 다닐만해지면 선생님이 되겠다는 아이들이 많다. 거의가 자기가 속한 울타리 안에서 가장 사랑하고 싶고 우러러 보이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 그러나 비판의식이 생기고 부터는 엄마 아빠처럼은 되지 않겠다. 선생님 노릇은 절대로 하기 싫다는 소년 소녀도 생겨나게 마련이다. 엄마 아빠가 되고 싶다.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꿈이 오래가는 아이는 복받은 아이들이다.

핏줄이라는 운명적 만남이나 학교라는 사회적 만남이 다 행복하게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과학자가 되고 싶다. 음악가가 되고 싶다. 정치가가 되고 싶다는 포부가 생기는 것도 자기 안에 꼭 그렇게 된 사람한테 감명을 받거나 특별히 근사해 보이는 그런 전문가 중의 하나를 동경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되는 수가 많다.

하늘 무서운 공포감, 죽음에 대한 두려움, 어두움이나 침목 고독에 대한 섬뜩한 전율 등에서 벗어나기 위해, 특정한 어떤 종교를 선택하기까지는 여러 가지 길이 있는 것 같다. 그 종교의 경전을 열심히 읽고 크게 깨달을 수도 있고, 돌연 어떤 계시를 받았다고 여겨지는 신비 체험을 한 경우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성직자나 먼저 신앙을 가지 사람의 언동을 보고 감동을 하거나 저렇게 살고 싶다는 존경심을 갖게 된 게 직접적 계기가 된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세례를 받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책임감을 통감하게 된다. 세례를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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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나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특권을 갖거나 별안간 진리를 깨우친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다. 좋은 교인이란 자신이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겸손히 진리에 이르는 길의 일부가 되는 게 아닐까. 탄탄대로가 아니라도 좋으니 예쁘고 아기자기한 오솔길이라도 되고 싶다.

■ 말의 힘

-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마르 1장 14-20절)

우리 어렸을 때는 지금과는 댈 것도 아니게 사는 형편이 어렵고 구질구질했다. 특히 우리 집처럼 시골에서 무작정 상경한 일가족은 서울 변두리에서 빈민굴을 형성하고 문자 그대로 아귀다툼을 하며 살았다. 극빈한 생활 속에서도 우리 어머니는 학교에 내는 월사금이나 교과서 값만은 하루도 밀리는 일 없이 제 날짜에 내도록 했고, 자식들 배도 곯리지 않았다. 또 자식들을 때리거나 욕하는 법이 절대로 없었다. 워낙 인심이 흉흉하고 식량난이 심했던 일제 말기라서 더했겠지만 당시의 빈촌 사람들은 자식들을 두들겨 패기를 잘했다. 학교가기 싫어해도 때리고, 월사금을 달라고 해도 때리고 군것질 하고 싶어 해도 때리고, 가뜩이나 더럽고 냄새나는 동네가 거친 욕지거리와 아이들의 울음소리로 온종일 시끌시끌 아수라장 같았다.

“아이고, 착한 내 새끼가 왜 이렇게 잔뜩 부어 있을꼬. 뭘 해주면 좋을까? 옛날 이야기나 해주련?”

어머니는 우는 아이 입을 틀어막을 단 한 알의 사탕도 없었으므로 그 대신 이야기를 미끼로 삼으려 하셨다. 어머니는 옛날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었고, 거기다가 어머니 나름의 입김을 불어넣어 독특한 재미를 만들어 냈다. 그 궁핍했던 시절, 어머니의 이야기는 나에게 크나큰 외로가 됐을 뿐 아니라 힘이 되고 희망이 되었다.

소설가가 된 후에 입교를 하게 되었기 때문인지, 종교에 너무 깊이 빠지면 소설을 못 쓴다고 걱정해 주는 이가 더러 있었다. 그러나 나는 생명력 있는 말엔 힘이 있다는 걸 믿고 있다는 점에서 문학과 종교는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잘 통하는 사이라는 것을 막연하게나마 느껴왔기 때문에 그런 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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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 안 했다. 어머니의 이야기가 나에게 위안과 꿈과 힘이 되었던 것처럼 내가 만든 이야기도 독자들과 만나 그렇게 되길 바라며, 진실한 이야기엔 사람의 마음도 낚을 수 있다는 힘이 있다고 믿고 있다.

■ 우울한 전망

- 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분이십니다. (루카 2장 22-40절)

방학 동안에 손자들을 며칠 집에 데리고 있었다. 아이들은 할머니가 으레 저희들을 재미있게 해주길 바라는 것 같은데, 나는 그 애들이 원하는 게 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먹고 싶은 것이나 하고 싶은 것, 가고 싶은 데가 있으면 말해보라고 했다. 아이들은 일제히 눈썰매장에 가고 싶다고 했다. 저희 애미 애비하고 벌써 몇 번이나 가본 데고, 나는 가본 적은 없지만 그곳엔 얼마나 아이들이 많고 오래 기다려야 되는지, 또 바가지요금은 얼마나 극성스러운지쯤은 들어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을 달래고 꼬셔서 데리고 간 데가 서울 근교의 농촌이었다.

명랑한 웃음소리, 지칠 줄 모르는 장난질, 힘차고 유연한 팔다리, 왕성한 식욕은 다 태어난 지는 얼마 안 되고, 살날은 듬뿍 남은 어린싹들의 건강한 생명력의 발산이어서 보기만 해도 얼마만큼은 옮아 붙는 것 같았다.

어느 애도 미운 놈은 한 놈도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을 망막에 새겨 두고 싶게 다들 잘 생기고, 예쁘고, 행복한 최고의 상태에 있었다. 나는 너무도 아이들이 예쁜 나머지 그 애들은 장차 근심이나 걱정, 빈곤 따위는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면서 곱게 곱게 자라 이 세상의 온갖 좋은 것들을 마음껏 누리게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얼마나 어리석은 늙은이의 망상일까? 바로 내 자식만은 고생 안 시키고, 험한 꼴 안 보게 하고, 온갖 좋은 것만 누리며 살게 하고 싶다는 우리들의 욕심이 이 세상을 얼마나 살 만하지 못하게 일그러뜨리고 말았나를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저 어린 것들이 다들 지독한 이기주의자가 된다면 모를까. 남과 더불어 잘 살기를 꿈꾸는 올바른 인간이 되려면 아마 굉장한 고난을 각오해야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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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이들이게 물려줄 것은 우리가 지은 잘못을 바로잡아야 하는 고통스러운 책임밖에 없다. 그러고도 듣기 좋은 덕담만 하고 싶어 하니 딱한 노릇이다.

■ 광야

-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마르 1장 12-15절)

며칠 전 저는 여덟 살짜리 제 귀여운 손녀와 함께 우리 동네 슈퍼마켓에 가고 있었습니다. 오십을 넘겼음직한 처음 보는 남자가 손녀를 보고 아는 척을 했습니다. 손녀도 그분한테 예쁘게 미소 지으며 인사를 하길래 누구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 아이의 대답은 처음 보는 할아버지라는 거였습니다. 저는 공연히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우리 아이를 보고 웃던 그분의 미소조차 능글맞고 싫게 느껴졌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손녀에게 우격다짐으로 타일렀습니다.

“너 모르는 사람보고 함부로 웃지 말아라. 모르는 사람이 같이 놀자거나 뭐 사준다고 해도 절대 따라가는 게 아니다.”

그래도 불안해서 한마디 덧붙였지요. 혹시 모르는 사람이 억지로 네 손목을 잡아끄는 일이 있으면 그 사람의 손등이라도 물어뜯어야 한다고요.

그러고 나서 저는 제가 한 말에 그만 소름이 끼치고 말았습니다. 저는 사랑하는 제 손녀에게 사람의 법도를 가르치기에 앞서 이리의 길을 가르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고급차가 길을 메우고 , 백화점엔 온 세상의 사치품이 넘쳐흐르고, 거리마다 배부르고 옷 잘 입은 사람이 넘쳐난다 해도 서로가 서로에게 이리인 세상이라면 광야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주님 아무리 이 땅이 주님 보시기에 죄 많고 척박하다 하여도 다만 몇 사람의 의인이라도 있거든 임하소서. 주님이 임하시지 않은 인간의 허한 마음으로는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을 도무지 모르겠나이다.

■ 우리에게 평화를

-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루카 24장 35-48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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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산뜻해지면서 저절로 미소가 떠오르는 대목이 있는데, 그건 예수님이 제자들뿐 아니라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하고도 기꺼이 음식을 나누는 구절들입니다. 심지어는 사람들이 기피하고 무시하는 세리하고도 그가 초대하기도 전에, 오늘은 내가 네 집에서 머물겠다고 자청을 하십니다. 그의 집에 머무르셨으니 응당 식사도 같이하시지 않았겠습니까. 음식 층하를 하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음식을 나누는 것 자체를 즐기셨으리라고 추측되는 구절을 읽을 때마다 사람의 아들 예수님께 훈훈하고도 평화로운 친근감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지나가던 길손과도 스스럼없이 밥과 나물을 나누던 예전의 우리 농촌 사람들은 비록 그 당시에는 주님을 모르고 살았다 해도 주님 안에 살았던 게 아닌가 싶어지기도 합니다.

먹을 것을 나눈다는 것은 곧 생명을 나누는 것과도 같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신 예수님, 당신의 생전에도 제자들, 이웃들, 군중과 더불어 식사하시기를 그다지도 즐기시더니 부활하신 후에도 도처에서 식사를 하시는군요.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당신을 만난 두 사람도 당신이 빵을 떼어 주실 때에야 비로소 당신이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는 걸 알아봅니다.

요새 외신을 통해 간간이 전해지는 북한 동포들의 실상을 보면 점점 더 소말리아 난민처럼 참혹하게 여위어 가는 게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우리 땅의 반쪽에 사는 동포가 다만 거기 몸 붙여 살게 됐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렇게 초근목피로도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다면 우리 식탁이 아무리 맛있고 기름진 것으로 넘친다 해도 어찌 거기에 평화가 있다 하겠습니까?

주여 이 땅을 어여삐 여기시어 우리에게도 한 말씀만 하소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요.

■ 두려운 자유

-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요한 15장 1-8절)

콩 심은 데 콩 나고 밭 심은 데 팥 난다고 하듯이 민들레 씨앗이 제비꽃을 피울 수 없고, 사과나무에 포도가 열린 적도 없다. 장미가 아름답다고는 하나 온 세상에 장미만 있다면 장미가 아름답다는 걸 어떻게 느꼈을까. 지금 온 세상은 창조주의 뜻대로 피어나고 돋아난 꽃과 풀과 나무들이 그 아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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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의 절정에 달해 있다. 하느님이 삼라만상을 창조하신 후 보시니 참 좋았다는 말씀에 저절로 공감하게 되는 빛나는 계절이다. 하느님은 그 많은 걸 창조하시면서 일일이 그 씨앗 안에 미리 피조물의 운명을 정해 놓으셨다. 채송화 씨앗이 아무리 키 큰 해바라기를 선망해도 해바라기로 피어날 수는 없도록. 그건 아마 키 큰 해바라기를 선망해도 해바라기로 피어날 수는 없도록.그건 아마 전체적인 조화 때문이었을 것이다.

모든 아름다움 중에 자연의 아름다움이 최고인 것은 어느 한 나무나 꽃의 빼어난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라 이름 모를 들꽃까지 참여한 더불어 살기, 한데 어우러지기의 그 완벽한 조화 때문이다.

하느님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다. 인간의 자유의사에 따라 악한 열매도 선한 열매도 맺을 수 있고 심지어는 아무 열매도 못 맺고 불구덩이에 던져질 수도 있다. 인간에게 열매란 무엇일까. 그건 열매를 보고 그 나무를 알듯이 사람도 그 행동을 보아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는 예수님 말씀대로 사람에게 있어서는 행동이 바로 열매이다.

자유란 인간에게만 부여된 누릴 가치가 있는 존엄하고 좋은 것이기는 하지만 책임이요, 운명이기도 하다. 세상을 왜 이렇게 부조리하게 만드셨느냐고 하느님을 원망할 건 없다. 우리의 자유의사가 그렇게 만들었을 뿐이다. 그래도 하느님은 당신이 창조하신 인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을 차마 못 버리시고 인간의 영혼이 살아남기 위해 접붙여야 할 참생명의 나무로서 외아들까지 내 놓으셨다.

■ 빈방

- 선생님께서 드실 과월절 음식을 저희가 어디 가서 차렸으면 좋겠습니까?

(마르 14장 12-16, 22-26절)

주님은 얼마 안 되는 공생활 동안 사람을 안 가리고 될 수 있는 대로 여러 사람과 음식을 나누십니다. 저는 성서에서 주님이 음식을 나누시는 대목을 가장 좋아합니다. 음식을 드셨으니까 화장실도 가셨겠지. 하는 버르장머리 없는 생각과 함께 주님을 체온이 통하는 아빠나 초등학교 적 선생님처럼 스스럼없이 가깝게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최후의 만찬 장면은 다릅니다. 그 장엄함과 비통함이 저희를 전율스럽게 압도합니다. 그리하여 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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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마다 주님의 성체를 영하고 성혈을 받아 마시는 의식을 정성스럽게 봉헌함으로써 자신을 거룩하게 정화했다고 믿고자 합니다.

그러나 정작 주님이 최후의 만찬을 드신 장소는 후세에 아무도 고증할 수 없는 익명의 장소로 돼 있군요. 주님은 당신이 당하실 위대한 고난을 미리 내다보신 것만치나 확실하게 어딘가에 마련돼 있을 빈방을 예언하십니다. 주님께 군말 없이 2층 방을 내준 그는 누구일까요?

그러나 그가 익명으로 남아 있는 걸 보면 필요로 하는 이에게 빈 방을 빌려주는 것은 그 시대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 결코 특별한 일이 아니었을 거란 생각도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누구였을까. 새삼 궁금한 것은 지금 저희는 한두 식구가 방이 다섯 개 여섯 개 있는 집에 살아도 남에게 내 줄 방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그네에게 하룻밤의 쉼터를 내 주는 심성을 잊은지 오래입니다. 나그네는커녕 따로 사시는 부모나 형제에게도 방을 내주기를 꺼립니다. 심지어는 생일이나 돌잔치도 밖에 있는 음식이나 호텔의 방을 빌려서 치릅니다. 초대한 손님에게조차 주인이 방을 내놓기를 꺼립니다.

빈방이 많아 사는 게 이렇게 매일매일 허전하고 허망한 줄 알면서도 남에게 내 줄 빈방은 없습니다. 내 마음이 춥고 시리고 고달플 때 식구나 친구나 이웃의 마음에 있는 빈방에 들어가 쉬며 위안 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면서도 남을 위해 내가 내줄 빈방은 없습니다.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빈방이라면 잠긴 방과 무엇이 다르리까.

■ 공과 사

-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 (마르 3장 20-35절)

주님, 제가 주님을 좋아하고 마침내 주님을 믿기로 마음을 정한 후로는 주님이 하신 말씀, 주님이 하신 일은 뭐든지 옳고 거룩하게 느껴졌습니다. 아니지요 주님을 믿고 나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 주님에게 그렇게 홀딱 반해버렸기 때문에 신앙을 가질 용기가 생겼다는 게 맞는 말일 겁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군중에 둘러싸여 계실 때 밖에서 주님을 찾는 어머니에게 주님이 하신 냉랭한 말씀만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가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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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입니까. 도처에서 기적을 행하시고, 여지껏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말씀으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불을 지르자, 군중 사이에선 당신이 미쳤을 거라느니 악령에 사로잡혔을 거라느니 갖가지 수상한 소문이 떠돌 때 아닙니까. 어머니께서 어찌 불안하시지 않으셨겠습니까.

내 아들이 그렇지 않다는 걸 눈으로 직접 확인 하고 싶으셨을 겁니다. 당신의 진실한 눈빛만 잠깐 보여드려도 될 것을 “누가 내 어머니이고 내 형제들이냐?”라고 반문하시다니요.

주님, 그러니 주님이 옳았다는 걸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주님도 아마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는 아버지의 가업을 돕고 어머니 말씀에 순종하는 효자였을 겁니다. 그러나 당신의 그릇이 한 가정의 선량한 구성원으로 마냥 머무를 수 없다는 아버지의 지엄한 뜻, 구세주로 태어났다는 그 남다른 운명에 순종하기로 하고 부터는 사정이 달라집니다.

구세주와 효자 노릇을 함께 할 수 없다는 가혹한 양지 택일 앞에서 결국은 구세주의 길을 가십니다.

공과 사의 구별이 지엄하신 주여, 바로 그렇지 못하여 실패만 되풀이 하는 이 나라의 역사에도 자비를 베푸소서.

■ 주여 저희들을 쟁기질 하소서

- 하느님 나라를 무엇에 견주며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

(마르 4장 26-34절)

몇 년 전 아프리카의 살기 어려운 나라에 다녀온 적이 있다. 내란과 여러 해 동안의 가뭄으로 국토가 사막화되어가고 있어 극심한 식량난을 겪고 있는 나라였다. 게다가 이웃 나라는 내란 중이어서 난민까지 흘러들어 와 그들의 가난을 가중 시키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살상가상이었다. 난민촌에서는 우리 눈앞에서 뼈에 가죽만 입힌 아이가 숨을 거두었고 그 부모는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사람이 이럴진대 그 국토의 모습은 말해 무엇하랴. 내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그 나라를 전 국토의 반 이상이 울창한 숲으로 덮혀 있고, 그 안에는 온갖 희귀한 짐승들이 사는 아름다운 숲의 나라라고 배웠다. 그런 땅이 사막화 되어가고 있었다. 단 한 동이의 물을 얻기 위해 거의 온 종일을 허비해야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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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고장도 있었다. 그나마 깨끗한 물도 아니고 부연 구정물이었다.

그때가 마침 봄이었다. 돌아온 우리나라는 하늘에서 내려다보아도 아름다웠고 비행장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도 아름다웠다. 매연이고 교통 체증이고 전에는 싫던 것들도, 진달래가 피고 수양버들이 연연한 녹색으로 살랑대는 이상 견딜 만했다.

그런 내 나라 내 땅이 너무도 고맙고 반가워 꿇어 엎드려 경배하고 싶었다. 방문하는 나라마다 우선 그 나라의 국토에 경건히 입을 맞추시는 교황님이 왜 그러시는지 알 것 같았다. 우리 안에 떨어진 말씀을 윌 영혼이 생명 있는 것으로 키운다면 주님도 우리를 그렇게 예뻐해 주시지 않을까.

주여 저희 영혼이 딱딱하게 콘크리트화 되어가지 않도록 자주자주 쟁기질 하소서.

■ 우리의 소원

-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 (마태 18장 18-22절 )

우리가 “6·25 때는 말야…”하는 잔소리를 못 참게 되는 것도 아이들이나 젊은이들이 먹을 것을 귀한 줄 조금도 모르고, 너무 많이 버리는 걸 볼 때입니다. 전쟁 후 오늘날까지의 기적적인 경제성장도 우리 세대들이 다시는 배고프지 않으려고, 우리 지식들만은 절대로 배고픈 맛을 모르게 하려고, 뼈빠지게 일한 결과라고 감히 자부 합니다.

북쪽 공산주의라면 치가 떨리게 싫어하는 투철한 반공정신 또한 우리 세대들의 못 말리는 사상적 특징일 겁니다. 하지만 북쪽의 식량난이 얼마나 참혹한지 모른다는 소리를 들으면 진정으로 마음이 아프고, 흥청망청 먹고 쓰고 버리는 과소비 문화에 죄의식마저 느끼는 것 또한 우리 세대인 까닭은 배고픈 설움이 무엇인지 알게 된 생생한 체험 때문일 테지요.

“너희 중의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모아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든 다 들어 주실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주여, 남과 북이 더불어 한마음으로 기도하게 하소서. 주님만이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셨듯이 기도만이 오랜 원한 관계를 화해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믿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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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녘 동포가 만일 주님의 이름을 모른다면 단지 하늘을 우러러라도 기도하게 하소서. 하늘을 우러러 어찌 미움을 말하리까. 주여. 남과 북이 한 마음으로 구하는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소서.

■ 예수님의 변덕

-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 이십니다.

(마태 16장 13-19절)

성서에 나타난 예수님과 베드로의 관계처럼 속된 말로 흥미진진한 것도 없을 것입니다. 이상적인 사제지간처럼 보이기도 하고 우정보다 한 단계 높은 지기의 관계처럼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만 결국에 가서는 신과 인간의 관계로 환원되고 맙니다. 그 까닭은 베드로도 뛰어 넘을 수 없는 인간적인 한계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장차 당신의 교회를 세울 반석이라 명명하시고, 하늘나라의 열쇠를 약속하셨습니다. 딴 제자들이 들은 것은 사람의 말이었지만 베드로가 들은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음성이었다고 예수님은 생각하셨겠지요.

그러나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정차 당신이 예루살렘의 율법학자들과 대사제들에게 고난을 받으시고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살아나실 것을 예언하자, 애제자답게 펄쩍 뛰며 반대하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사탄아 물러가라.”고 크게 노하십니다. 천국의 열쇠까지 약속하신 수제자한테 사탄이라니요?

예수님이 어쩌면 이렇게 변덕스러울 수가 있단 말인가. 실망스럽고 황망스럽다가도 곧바로 그것이 베드로도 뛰어 넘을 수 없는 우리 인간의 한계였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 그 민족에 속한 게 아니라 시대를 초월해 만민을 위한 해방자여야 한다는 아버지의 명령에 따름으로써 아버지와 하나가 되셨습니다. 예수님, 고로 당신이야말로 홀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 정보의 안개

- 아니,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요한 6장 41-51절)

마음을 비우라고 말하긴 쉽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마음을 비우기는 쉽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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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니다. 마음을 비운 상태는 도대체 어떤 상태일까. 상상하는 것조차도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마음을 비운 상태를 지갑을 비운 상태보다 더 두려워하고 불안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처음 만날 때만 해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도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만나기를 꺼립니다. 그래서 우선 명함이라는 게 있고, 중간에 다리를 놓는 소개라는 게 있고, 소문이라는 게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 사람에 대한 정보로 마음을 가득 채운 후에 만납니다.

명함에는 그럴듯한 직함, 학벌, 높은 공직의 이름, 누구의 자손이라는 족보까지 들먹여 가며 자신을 장식하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지개에 대해 그게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이고 어떤 빛깔로 나뉘어 있고 어떤 모양을 하고 있다는 걸 아무리 줄줄 욀 수 있다고 해도 비갠 하늘에 돌연 걸린 무지개를 실지로 보고 가슴이 울렁거린 체험이 없다면 그따위 지식이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예수님은 당신의 본질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라고 장엄하게 선포하십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예수님의 육성으로 직접 듣고도 못 알아듣게 한 것은 바로 예수님에 대한 사전 지식, 고정관념이었습니다.

"아니,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부모도 우리가 다 알고 있는 터인데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니 말이 되는가?"이렇게 말입니다.

■ 우리 모두 돌아가야 할 곳

- 육적인 것은 아무 쓸모가 없지만 영적인 것은 생명을 준다.

(요한 6장 60-69절)

사람의 운명 중 죽음처럼 확실하고 평등하게 예약된 미래는 없습니다. 그 미래의 시점이 탄생 후 얼만큼 길고 짧으냐 하는 차이가 있을 뿐인데, 그 차이는 철저하게 불평등합니다. 인간의 욕망 중 오래 살려는 욕망처럼 집요한 것도 없고 '나도 설마 죽을까?' 싶은, 자기는 마치 안 죽을 것 같은 환상을 누구나 조금씩은 갖고 있습니다. '오늘 죽을 줄 모르고 내일 살 줄만 안다,'는 우리의 속담은 인간의 이런 어리석음을 잘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다고 해도 인간은 철저하게 살 궁리만 하지 죽음에 대해서는 예비는커녕 생각하기도 싫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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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KAL기 참사를 겪으면서도 저도 그 살아남은 자의 피할 수 없는 몫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도 평소에 친하게 지냈을 뿐 아니라 존경하고 영향을 많이 받은 친지를 그 사고로 잃었습니다.

요즈음도 하필 그가, 여러 사람들과 제자들로부터 그렇게 사랑 받던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다가도 그가 돌아갔다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 마음의 평화를 얻곤 합니다. 돌아간다는 건 전에 있던 곳으로 다시 간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인간이란 과연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가장 신선하게 우리를 엄습할 때는 신생아와 처음으로 대면할 때입니다. 저애는 어디서 온 것일까? 하는 의문이 황홀하기까지 한 것은 그 아이의 육체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순결한 정신, 온갖 위대한 가능성 등 영혼의 시원(始原)에 대한 물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그곳으로부터 왔건만 그곳에 대한 기억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면 그곳은 반드시 있을 터이고, 뿌린 만큼 거둠으로 써 우리의 삶과 이어지고 있는 데라는 건 의심할 나위가 없습니다.

■ 소금과 부패균

-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여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구나.

(마르 7장 1-8절)

강남의 어느 상가 책방에서 본 일입니다. 사람들이 상류층의 부자 동네라고 다 알아주는 아파트 단지 상가 안에 있는 책방이었습니다. 젊고 아름다운 엄마 셋이서 책방에 들어오더니 별로 고르지도 않고 얇은 월간지를 한 권씩 샀고, 그 자리에서 십만 원짜리 수표를 몇 장씩 척척 세어서 봉투에 넣어 책갈피에 끼워 놓더군요. 그런 일은 전에도 정기적으로 있어온 듯 책방 주인은 "또 때가 왔나보죠?" 하면서 말을 건넸습니다. 그때마다 물꼬가 터진 듯 주인과 손님이 주거니 받거니 부패할 대로 부패한 이 나라의 교육풍토를 성토하기 시작했습니다. 알고 보니 그들이 몇 장씩 책갈피에 끼워 넣은 수표는 자녀들의 담임 선생님에게 건네줄 돈이었습니다. 제 자식 잘 봐 달라고 그렇게 돈을 쓰는 젊은 엄마들의, 그 돈을 받을 선생들에 대한 경멸과 저주는 하도 거침이 없어서 듣기가 민망할 지경이었습니다. 능멸과 하대를 지나 사람 취급도 아니었습니다. 그런 선생님에게 자식을 맡기느니 차라리 집에서 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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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시키는 게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학교의 부패 구조에 대한 그들의 비판은 신랄하고도 무자비했습니다.

저는 이제 자식을 학교에 보내본 지가 하도 오래돼서 그렇게 까지 교육계가 썩었는지 아닌지는 잘 모른다고 해도 그들의 자녀가 다니는 학교에서 돈을 밝히지 않는 선생님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그들의 단정에는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학부모의 돈 봉투를 어떻게 피차 낯 뜨겁지 않게 거절하느냐를 심각하게 고민하는 선생님을 여러분 알고 있고, 돈 봉투를 거절당함으로써 자기 자식이 불이익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학부모로부터 당한 모멸감을 못 이겨 천직이라고 생각하던 교직을 떠난 사람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입으로는 공동선의 외치면서 행동으로는 '내 자식만은……' 하는 이기주의가 부패균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여도 마음은 나에게서 멀리 떠나 있구나." 예수님께서 이사야 예언을 빌려 위선자를 질책하신 말씀이 오늘에도 딱 들어맞는다는 게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 꽃보다 아름다운 계절

-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마르 10장 2-16절)

늦더위도 말끔히 가시고 참으로 좋은 계절로 접어들었습니다. 꽃보다 아름다운 계절이어선지 청첩장이 유난히 많이 날아오는 요즈음입니다.

어제도 저는 하루에 두 군데의 식장을 오가느라 문자 그대로 동분서주했습니다. 두 결혼식이 다 기독교식이어서 비슷한 주례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고로 남자는 그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는 뜻의 주례사는 기독교식이 아닌 결혼식에서도 가장 많이 인용되는 성경 구절입니다.

예수님,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서 행복한 까닭 중의 하나는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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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번도 여자를 단지 여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차별하거나 경멸하거나 외면한 사실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가난한 사람이 단지 가난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차별하거나 경멸하거나 외면한 적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친정한 친구가 되어 그들의 존엄성을 지켜주셨듯이 여자들한테도 그러하셨습니다.

■ 가난한 사람은 우리의 쓰레기통이 아니다

-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마르 10장 17-30절)

유치원 다니는 손자 아이가 끼니때마다 한 숟갈도 넘는 밥풀을 밥그릇에다 덕지덕지 붙여서 남기길래, 깨끗이 먹으라고 타이른다는 게 이 지구 상엔 배고파 우는 어린이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렇게 밥 귀한 걸 몰라서 쓰겠느냐는 투의 구닥다리 설교를 하고 말았다. 아이는 그런 소리를 다른 데서도 여러 번 들은 듯 왜 걔네들은 바보처럼 맨날 배가 고프냐고 물었다.

비가 너무 안 오거나 너무 많이 오면 논밭에서 곡식이 자라지 못해 먹을 것이 모자란다고 했더니 슈퍼나 식당에 가면 피자도 있고, 빵도 있고, 짜장면도 있는데, 걔네들은 왜 바보처럼 논밭에서 나는 것만을 좋아하냐고 했다. ‘바보처럼’이라는 소리를 두 번이나 했다.

이런 철부지를 데리고 자못 심각하게 군 게 슬그머니 열없어져서 두어 번 혀를 차고 말았지만 뒷맛은 허전했다.

이제 우리가 능력껏 추구하는 풍요는 밥이나 고깃국 수준이 아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그런 것은 공기나 물처럼 저절로 있는 것으로 돼 있다. 우리가 열심히 이룩한 경제 발전 덕이지만 그걸 고마워할 아이들도 아니다. 돈을 한 푼도 벌지 않는 십 대들의 씀씀이는 날로 불어나 어떤 소비재도 그 애들의 욕망을 사로잡지 않고는 돈을 벌 수 없을 정도가 돼버린 게 잘 사는 나라의 현실이다.

일전에 돌아가신 마더 테레사는 스스로 최하층의 가난뱅이가 되지 않고는 가난한 이들을 도울 수 없다고 생각했다. 수녀님은 우리가 약간이라도 높은 자리에서 내려다보듯이 베푸는 자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날카로운 비판을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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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을 우리에게 불필요한 것을 버릴 만한 쓰레기통쯤으로 여기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는 먹기 싫은 음식이나 상하려고 하는 음식을 그들에게 줍니다. 유효기간이 지난 음식, 그래서 해를 끼칠 수도 있는 것들이 쓰레기통으로, 다시 말해 가난한 사람들에게 갑니다. 이런 것을 보면 가난한 사람들을 우리 주인으로 여기면서 존중하는 게 아니라 그들을 열등하게 여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도망칠 수 없는 당신

-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마태 28장 16-20절)

나는 신자가 되어 달라진다는 게 나에게 든든한 백이 하나 생긴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인 줄 알았다. 그래서 나에게 아쉬운 일이나 곤란한 일이 생겼을 때 투명 인간 같은 분이 제꺼덕 뒤에서 힘을 써주시려니 했다. 설사 알아서 도와주지는 않더라도 애타게 부르면 도와주시려니 했다. 그래서 나보다 먼저 믿은 분한테서 들은, 주님은 무서운 분이 아니라 아빠 같기도 하고 엄마 같기도 한 분이라는 소리가 제일 솔깃하게 들렸다.

자식이 울고불고 보채도 안 들어준다면 엄마 아빠가 아니지 않나.

또 하느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 확실하진 않아도 만약 계시다면 당신을 믿겠다고 약속한 신자한테 괜히 벌이야 주시지 않겠지, 하는 마음도 있었다. 일종의 보험처럼 들어둬서 해로울 게 없다는 식이었다. 그런데 눈여겨보니 아주 열심히 믿거나 누가 보기에도 착하게 사는 사람한테도 재난이나 불운이 시도 때도 없이 닥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남들은 계시나 응답도 잘 받는다는데 나는 한 번도 그런 신비 체험이 없었다. 그렇다고 침묵은 답이 아니었을까. 아니다. 나에게 가장 적절한 해답은 바로 침묵이었다. 나는 내 안에서 해답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그때 비로소 내 안에 그분이 같이 계시다는 걸 느낄 수 있었으니까

하느님이 계시다는 걸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누구에게나 “그럼 계시다는 걸 믿고말고요.”하고 순순히 긍정하게 되기까지는 나잇값도 한 몫을 했으리라고 생각한다.

■ 지도자에게 겸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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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이제 머지않아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실 분이 오신다. (루카 3장 10-18절)

주님, 당신을 믿고 따르겠다는 약속이 얼마나 진실되지 아닌 가짜 약속이었다는 걸 오늘날처럼 뼈저리게 느낀 적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여러 형제자매들의 축복 속에 영세를 받으면서 기쁨에 넘쳤고, 주일을 경건하게 지켰고, 주님 오신 날을 1년 중 가장 기쁜 날로 즐거워하는 걸로 신자의 도리를 다했다고 믿었나 봅니다.

주일날에야 겨우 성서 봉독에 귀를 기울였다고는 하나 말씀을 행위로 옮기거나 이미 행한 일을 반성할 생각은 추호도 없이 그냥 듣기만 했으니 그건 안 들은 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고약한 자식이 부모 앞에 꿇어앉아 야단맞으면서, 훈계의 참뜻이 하나도 귀에 안 들어오고 제 발 저린 것만 억울해 어서 끝나기만 기다리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너무도 쉽고 지당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타락한 시대에는 천둥소리처럼 지엄하여 어디라도 좋으니 머리를 처박고 숨어버리고 싶은 말

씀입니다. 저희들은 이렇게도 단순 명료한 사람 사는 도리를 탐욕과 쾌락에 눈이 어두워 미처 지키지 못했습니다.

주님, 요새 아이들은 조부모는 안중에도 없고, 부모의 말은 덮어놓고 구식이고, 형하고도 세대 차를 느낀다고 껄끄러워 합니다. 그런 세상에 당신만이 이천 년의 세월을 뛰어 넘어 날로 새롭고 힘차게 살아계십니다. 당신 말씀은 힘도, 가진 것도 없는 이들에게는 부드럽고 따사로우나 권력과 금력을 거머쥔 이들에게는 칼날처럼 서슬 푸르십니다. 그때 백성들은 속으로 하도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요한이 그리스도였으면 하고 바랐습니다. 그때 요한은 자기는 나중에 오실 그리스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는 몸이라고 자신을 낮춥니다.

주님 이 겸손을 오늘의 지도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귀애 말뚝을 박은 것처럼 제 목청만 높일 줄 알았지, 남이 그들을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 뭐라고 비난하는지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마음껏 독선적이고 오만불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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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명의 아름다움

- 모든 여자들 가운데 가장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또한 복되십니다.

(루카 1장 30-45절)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해서 서로 축복의 인사를 나누는 장면은 뛰어나게 아름답습니다. 덜 것도 보탤 것도 없는 충만한 아름다움입니다. 내 안에 생명을 받아 모신 여인만이 느낄 수 있는 생명에 대한 경이와 공경, 생명을 관장하는 분에 대한 찬양과 순종이야말로 모든 아름다움 중에서 으뜸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순명 때문에만 아름다운 게 아닙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의 축복이 응답한 마니피카트(마리아 찬가)에는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데 대한 놀라운 직관력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도 주님을 그렇게 정확하게 파악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주님이 어쩐 분이시라는 것을 알지 않고서는 처녀의 몸으로 잉태한 사실을 그렇게 두려움도 의심도 없이 전적으로 수락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을 안다는 것은 곧 주님만이 관장할 수 있고 주님의 입김이 아니고서는 털끝 하나도 우리 힘으로 보태거나 덜어낼 수 없는 생명에 대한 공경과 수락을 의미합니다.

이 정보화시대에도 대부분의 임산부가 태교를 믿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가끔 너무 유난스러운 게 아닐까 싶은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손끝 하나 까딱 안 하고, 좋은 음악 듣고, 좋은 음식만 골라 먹을 수 있는 특권처럼 여기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태중에서부터 아이를 부모 마음대로 교육시키거나 개조할 수 있다고 믿는 태교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교육은 일찍 시킬수록 경쟁력이 생긴다는 정보에 따라 어린이에게 지식을 주입시키는 시기가 세 살, 두 살, 한 살, 몇 개월로 점점 낮아지다가 태아에게까지 미치는 경우도 드물지 않습니다. 그런 이기심은 과학과 결탁해서 생명의 신비를 파헤치고, 원하지 않는 생명은 말살시켜버리는 만행까지도 두려움 없이 행하게 합니다.

■ 그 어머니에 그 아드님

-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 (루카 2장 41-52절)

예수님의 소년 시절 얘기는 루카 복음에만 나옵니다. 자세히 읽으면 비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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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만 당장은 너무도 보통 소년과 다름없었다는 게 신기하여 저절로 미소 짓게 됩니다. 아마 명절을 지내러 예루살렘에 간 것은 예수님의 가족 뿐 아니라 일가친척과 이웃 사람까지 포함한 큰 집단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돌아오는 길에 소년 예수가 일행에서 멀리 떨어져 예루살렘에 남아 있다는 것도 모르고 하룻길이나 갈 리가 없겠지요. 마리아 또한 아드님이 으레 일행을 따라오려니 별로 신경 안 쓴 걸로 봐서 아드님이 그때까지 부모님 걱정을 별로 안 시키고 자란 순종적인 소년이었다는 것과, 부모님 또한 눈에 불을 켜고 내 자식만 챙기는 과보호와는 거리가 먼 그 시대의 평균치 부모였다는 것을 쉽사리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당신의 아들이 보통 아이가 아니라는 걸 잉태할 때부터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율법에 따라 아기를 봉헌하러 성전에 갔을 때 예언자 시므온의 입을 통해서도 그 아기가 빛이 되고 영광이 되리라는 걸 확인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귀하고 중한 아기인 줄 알면서도 마리아가 그 아기를 특별히 떠받들고 애지중지 유난스럽게 키우지 않고 보통 아이처럼 대범하게 길렀다는 게 이 대목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그것은 마리아의 현명함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아드님이 장차 이루고자 하는 일은 왕궁의 영화나 권력자의 위세가 아니라, 가난하고 소외당하고 억눌린 이들을 위로하고 해방시키는 크나큰 사업이었습니다. 그는 사회적으로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연민의 마음을 가지고 마침내는 자기 자신을 내주기까지 이릅니다. 마리아는 아들에게 이런 크나큰 사랑의 바탕을 마련해 준 것입니다. 보잘것없는 사람들과 이웃해서 일상의 기쁨과 근심을 나누는 서민 생활의 체험 없이 어떻게 그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으로부터 우러난 것이라 하겠습니까. 진실한 연민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자기 자신을 내주는 사랑의 극치를 보여줄 수가 있겠습니까. 그 어머니는 그 아들에게 가장 적절한 교육을 한 것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언

나이 칠십이 임박해지면서 달라진 건 풀숲에서 살아 쉼 쉬는 작은 들꽃과 미물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개안과도 같은 깊은 감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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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입관에 대하여

- 어떤 예언자도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루카 4장 21-30절)

선입관 없이 남을 대하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내가 안다고 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은 선입관의 덩어리일 뿐 진정한 그들의 모습은 아닙니다. 선입관을 안 가지고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익명의 타인일 뿐, 그 익명성을 타파하고 한걸음만 다가가려해도 어디서 뭐해먹고 사는 누구일까. 라는 정보를 얻어야 안심이 되는 게 저의 인간성의 한계입니다.

예수님이 너무도 명백히 뛰어나서 인간을 초월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선입관 없이 사람을 꿰뚫어 볼 수 있는 그 놀라운 형안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를 고르실 때도 어디서 뭐 해먹고 살던 뉘집 자식인가 하는 이력서 따위도, 현재 재산이 얼마이고 한 달에 얼마를 벌까 하는 소유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선입관 없이 곧장 그가 누구라는 인간성의 본질을 화살처럼 정확하게 명중 시켰습니다.

인간의 어리석음 중 선입관을 예수님이 얼마나 실망스러워 하셨는지는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쓸쓸한 탄식 가운데 너무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 예수님의 미끼

- 너는 이제부터 사람들을 낚을 것이다. (루카 5장 1-11)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이제부터 사람들을 낚을 것이다.” 예수님이 두려워하는 베드로에게 하신 이 말씀이 이천 년이나 지난 오늘날까지도 우리들의 가슴을 떨리게 하는 힘이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가슴이 떨린다는 것은 기쁨인 동시에 두려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게 기쁘기만 한 게 아니라 두려운 것은 그분이 던진 미끼만 따먹고 그 이상의 희생은 하기 싫은 속셈 때문이 아닐까요. “예수를 믿으니까 그저 매사가 기쁘기만 하더라.” “집안의 자잘한 근심이 사라지고 아이들도 착한 일만 골라서 하니까 아빠의 사업까지 덩달아 잘 되더라.” “병원에서도 손든 이름 모를 병도 예수를 믿고부터 씻은 듯이 낫더라.” 이런 소리들은 예수를 막 믿기 시작한 ‘왕초보’들이 흔히 하는 간증입니다. 그게 사실과 다르다고 의심하려는 게 아니라 그건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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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님이 우리를 낚으려는 미끼일 뿐, 정작 그분의 계획은 그걸 다 버리고 당신을 따르라는 게 아닐까요. 전적인 내어줌, 몸과 피까지도…….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가장 확실한 본이 바로 그런 지엄한 것들이니까요.

■ 자화상

-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루카 6장 27-38절)

주님 원수를 사랑하고 보복하지 말라니요. 누굴 바보로 아십니까. 우리는 인간이고 인간 중에도 맹수이 서식지나 다름없는 이 무서운 경제사회에서 좌충우돌 도처에 원수도 만들면서 요령껏 살아남은 약아빠지고도 질긴 인간이올시다. 이렇게 살아남는 동안 가장 큰 힘이 된 게 있다면 원수진 이들을 미워하고 언젠가 복수해줘야지, 하는 앙칼진 앙심이었습니다. 그런 복수심 없이 어떻게 오늘날 까지 살아남아 이만큼 살림을 일굴 수가 있었겠습니까.

아무리 주님 말씀이라 해도 그것만은 따를 수가 없어서 저는 주님 곁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멀어질수록 불안해 집니다. 추운 날씨도 아닌데 떨리기까지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멀어질수록 든든한 백을 잃은 것처럼, 양지에서 음지로 쫓겨난 것처럼 초라하고 온몸이 시립니다.

주님이 뭐관데 저는 얼마 못가서 다시 주님을 돌아다봅니다. 아직도 주님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너희를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해주고 너희를 학대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라. 그리고 누가 뺨을 치거든 다른 뺨까지 내 주고 누가 겉옷을 빼앗거든 속옷까지 내주라고요? 아이고 주님, 점점 더 하시는군요. 아무리 주님 말씀이라도 그리는 못하겠습니다. 누구 거지 되는 꼴 보시겠습니까.? 한때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주님은 또 그 지겨운 설교를 계속하십니다.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그 말씀에 저는 도망치기를 단념합니다. 아이고 주님, 저는 별수 없이 주님의 발아래 몸을 던집니다. 저는 살아오면서 수많은 원수를 만들었습니다. 하다못해 자식까지 저는 매일매일 원수질 짓만 하면서도 저는 원수로부터 용서받기를, 사랑받기를 갈구해 마지 않았습니다. 아아, 그것을 반대로 할 수 있다면 주여, 제 영혼이 당장 나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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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안과 밖

- 나는 너희를 위하여 피를 흘리는 것이다. (루카 22장 14-23절)

예수님이 사람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걸 얼마나 즐기셨는지 성경 도처에 기록된 대로입니다. 오죽해야 완고한 율법학자들로부터 아무하고나 먹고 마신다는 비난을 들었겠습니까? 그러나 만일 예수님이 먹지 않고도 배부른 도술을 부리는 분이거나 사람 안 보는 데서 혼자서 점잖게 식사하는 분이었다고 해도 우리가 지금처럼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의 아들다운 것은,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는 걸 그렇게 열심히 설하시면서도 말씀만으로는 배부를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어여삐 여기시어 당신을 따르는 이를 결코 배고픈 채로 돌려보낸 적이 없다는 것 아닐까요.

또한 먹는 행위를, 배를 채우는 생리적인 욕구에 국한시키지 않고, 더불어 먹음으로써 친교의 경지로 끌어 올리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초대했거나 초대받은 식탁은 서너 사람이 앉았건 오천 명이 앉았건 하나의 생명체같이 살아 있는 공동체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최후의 만찬은 분위기가 사뭇 다릅니다. 빵과 포도주를 서로 나누는 기쁨과 만족감, 친밀감 대신 어딘지 불안한 긴장감이 감돕니다. 유언과도 같은 예수님의 비장한 말씀 때문만은 아닙니다. 딴마음을 품은 배신자와 식탁을 함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문화권에서 예로부터 13이라는 숫자를 불길하게 여기는 풍습도 배신자까지 합친 최후의 만찬장 인원이 13명 이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13분의 1의 배신은 결코 낮은 비율이 아닙니다.

모처럼 내안에 있는 유다의 비울을 따져 보았습니다. 하느님이 차려주신 소박한 식탁에 앉아 악마가 차려주는 기름진 미식을 꿈꾼 적은 없던가? 물질을 위해 자유를 판적은 없던가? 집 안의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여봐란 듯이 십자가를 모셔놓고 속으로는 세상에 믿을 건 금송아지 밖에 없다고 여기고 있는 건 아닌가? 남을 칭찬할 때보다 욕을 할 때 더 쾌감을 느끼지 않았나? 이렇게 따져가다가 저는 그만 아이고 주님, 하면서 두 손을 들고 말았습니다. 강도의 마음으로 의인의 얼굴을 하고 산 건 바로 저였습니다. 그러나 주님, 제가 주님을 몰랐더라면 저는 아마 계속해서 제가 의인인 줄 알았을 겁니다. 주님, 제게 반성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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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위를 이기는 건 물뿐

- 너희는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루카 24장 1-12절)

꽃은 잎보다 훨씬 약하고 부드럽습니다. 그러나 겨울을 이기고 봄소식을 먼저 알려주는 일은 잎보다 꽃입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남자들보다 먼저 겁 없이 찾아간 것도 여인들이었고, 부활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무서워하면서도 기쁨에 넘쳐서 소식을 전한 것도 여인이었습니다. 여인들 중에서도 귀부인이나 돈 많은 이가 아니라 보잘 것 없는 신분의 여인이었습니다. 바위도 소리 없이 부술 수 있는 건 물뿐이듯, 부드러움만이 강한 걸 이길 수 있다는 자연의 이치가 인간의 몸을 빌려 교묘히 구현된 것처럼 느껴지는 게 바로 부활 사건이 아닐까요.

그러나 진리요 사랑이신 주님, 진리는 아무리 죽여도 새로 태어난다는 것을, 당신의 사랑은 가장 낮은 이들 사이에서 살아 움직인다는 것을 저희들이 어찌 믿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 오늘도 마음이 여리고 지위가 미소한 이들 사이에 먼저 임하시어 큰 찬미 받으소서.

■ 내가 꿈꾸는 부활

-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요한 20장 19-31절)

종교를 가진 사람은 종교를 안 가진 사람으로부터 당신네들은 죽을 때 회개하고 죽기만 하면 천당 가는 건 떼어놓은 당상일 테니 얼마나 좋겠느냐는 말을 들을 적이 가끔 있습니다. 부러워서 하는 소리인지 비꼬는 소리인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종교를 가질 때, 천당까지는 바라지 않았다고 해도 조금은 우아하고 의연하게 죽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아 아주 없었다고는 못 하겠습니다.

실상 품위 있는 죽음이란 이승의 몫이지 저승의 문제는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품위 있게 죽을 자신조차 없으니 사후의 일에 대해 무엇을 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천당에 대한 확신이 있는 분이 천당을 마치 골고루 답사하고 온 것처럼 구체적으로 그려 보이는 설교를 들어본 적도 있습니다만 어쩐지 하나도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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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차지 않고 차라리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라는 원색적인 속담이 훨씬 설득력 있게 들리는 걸 어쩔 수 없습니다.

죽음이 무서운 것은 혼자 가야한다는 데 있습니다.

주님 저에게 천당을 허락하지 않으셔도 좋으니 부활의 희망만은 죽는 날까지 버리지 않게 하소서. 제가 어찌 주님처럼 이 세상과 인류를 송두리째 달라지게 하는 부활을 꿈이나 꾸겠습니까. 그런 큰 영광은 오로지 주님의 몫입니다.

제가 꿈꾸는, 제게 합당한 부활은 저의 전체 중 가장 미소한 일부인 저의 좋은 점으로 하여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스며들게 하는 것입니다.

■ 궁금한 예수님의 얼굴

-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 21장 1-19절)

부활하신 예수님은 여기저기 여인들에게, 또는 제자들에게 나타나 보이십니다. 두려워서 떨기도 하지만 못 알아보기도 합니다. 호숫가에 나타나신 예수님을 딴 사람도 아닌 베드로까지 못 알아보다니요. 엠마오로 가는 길에 나타나시어 먼 길을 함께 동행까지 한 예수님 또한 제자들을 못 알아봅니다. 도대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셨기에 못 알아볼 수가 있을까 궁금하면서도 못 알아보는 장면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아름답게 느껴지는 건 무슨 까닭일까요.

오랫동안 어둠에 갇혔던 사람을 갑자기 밝은 데로 끌어내면 눈이 먼다고 합니다. 그 사람이 다시 사랑하는 이들의 얼굴을 보게 하려면 희미한 빛부터 시작해서 차츰 빛에 적응하도록 하는 게 최소한의 배려라고 합니다.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씩이나 물어보신 예수님에게선 우리네 인간과 다름없는 짓궂음 같은 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물으신 건 짓궂어서도, 베드로의 사랑을 못 믿어서도 아니고 “내 양들을 잘 돌보아라.”는 말씀을 하시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요? 예수님은 있는 그대로의 베드로를 사랑하셨고, 베드로가 당신을 정말 사랑한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오죽 베드로를 골고루 알고 계셨으면 그 격정적이면서도 마음 약한 베드로에게 반석이란 이름을 주셨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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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언

- 나는 할 말이 많지만 지금은 너희가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요한 16장 12-15절)

어렸을 때도 그랬었고 한참 나이 들고도 마찬가지였는데, 노인들이 하시는 말씀 중 가장 듣기 싫은 게 “너도 늙어봐라.” “너도 겪어보면 알게 될 거다.”라는 소리였습니다. 인간사나 사물의 간단한 이치도 연륜이 쌓여 스스로 겪어보지 않고는 모른다는 소리였는데 그 소리가 왜 그렇게 듣기 싫었는지요. 아마 노인네들보다 내가 더 많이 배웠다는 젊음의 오만과 미숙 때문이었을 테지요.

예수님께서 잡혀 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남기신 말씀은 아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언일 겁니다. 그중에서도 “나는 할 말이 많지만 지금은 너희가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젊었을 때 지겨워하면 들은 노인들의 잔소리와도 닮아 있는 것 같아서 슬며시 웃음이 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연의 품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깊은 위안과 평화를 얻습니다. 저도 그런 사람 중 한 사람입니다만. 나이 칠십이 임박해지면서 달라진 건 풀숲에서 살아 숨쉬는 작은 들꽃과 미물들의 아름다움에 대한 개안과도 같은 깊은 감동입니다. 그것들이 어찌나 보기 좋은지 이 세상에 태어난 걸 무조건 감사하게 됩니다. 가히 성서 첫 장에 자주 반복되어 나오는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라는 창조의 현장에 동참하고 있는 것 같은 기쁨이 경지입니다. 칠십 년을 살고 비로소 성서 첫 장을 이해하다니, 저는 지진아입니다. 그러나 이런 늦은 깨달음이나마 제힘으로 얻은 게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신비 체험은 생전 처음이거든요.

이 체험이야말로 삼위일체의 기쁨이 아닐는지요. 이건 저의 성령 체험이고, 성령은 저에게 가장 맞는 방법으로 오셨다는 걸 저는 믿습니다. 물이 대양에는 가없이, 항아리에는 항아리 모양으로 종지에는 종지 모양으로 담기듯 성령도 사람에 따라 그 사람에 맞게 각양각색으로 임하는 게 아닐까요.

■ 우리가 구해야 할 기적

-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루카 9장 11-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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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 중 우리가 가장 좋아하고 또 가장 자주 인용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또 딴 기적에 비해 합리주의적인 사고로 해석할 여지가 많은 사건이라 그런지, 자주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는 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성서에 거짓 기록이 있을 리 없고, 또 복음서마다 한결같이 같은 사건을 증언하고 있는 이상 문자 그대로 믿어야 한다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감동한 군중이 혼자만 먹으려고 숨겨가지고 있던 먹을 것을 내놓았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잇습니다. 후자의 생각이 빵 다섯 개를 예수님의 능력으로 천 배 이상 불렸다는 것보다 훨씬 현대인의 구미에 맞는 합리적인 해석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정말 중요한 건 예수님이 무에서 유를 창조했을까 안 했을까보다는 “너희가 막을 것을 주어라”가 아닐까요. 배고픈 이가 이웃에 있을 때 우리가, 바로 먹을 것을 주어야 한다는 주님의 명령에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습니다. 그 말씀에는 기적 여부나 따지고 있는 우리의 속물근성을 단박 뛰어 넘게 하는 권위가 있습니다. 참다운 권위란 바로 이런 거다 싶습니다.

■ 우리는 야단맞아 쌉니다

- 쟁기를 잡고 뒤를 자꾸 돌아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 (루카 9장 51-62절)

가끔 말 못할 고민이나 가족 간의 갈등에 대해서 상의를 해 오는 이가 있습니다. 이만저만한 문제가 있고, 이러저러한 기로에 서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인생 선배로서 또는 작가로서의 조언을 다급하게 구하는 사람을 대할 때처럼 난감할 때가 없습니다.

기계가 고장 났을 때는 기술자를 부르는 게 상책입니다만 인생이라는 다양하고도 복잡한 항로에 차질이 생기거나 난관에 부닥쳤을 때는 자기 자신 이상의 기술자가 없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이 꼬이고 빗나간 원인은 실로 다양하고도 복합적입니다. 심지어는 본인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마련된 운명적인 불행도 적지가 않습니다. 그걸 타인에게 정확하게 설명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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럼에도 불구하고 혼자 감당하기에 벅찬 일을 털어놓고 싶어 하는 이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는 것은 털어놓는다는 그 자체에도 얼마큼의 치유효과가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들어주는 것 이상의 처방이나 충고를 삼가는 또 다른 이유는 말하는 이의 공정성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닐지라도 그는 항상 자기편에 서 있기 때문에 남의 허물은 과장하고 자기 허물은 축소합니다. 또한 자기 이익을 대변하기에 급급하기 때문에 잘못은 다 남에게 있고 억울한 건 나라는 걸 전제로 문제를 풀어나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남의 충고가 먹혀들 것 같지 않은 사람일수록 남의 말이나 생각에 신경을 씁니다. 그는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건 욕망과 이기심이 가리키는 쉬운 길이고, 그는 그 길을 택하고 싶은 겁니다. 그런데 그의 깊은 마음속에 있는 근원적인 양심, 하느님을 닮은 본바탕은 그게 아니라고, 이타적인 길, 손해나는 길이야말로 살길이라고 간곡하게 속삭입니다.

예수님은 옳은 일을 하기에 앞서 이 핑계 저 핑계로 비적거리는 우리의 약하고 비열한 마음을 준엄하게 꾸짖으십니다. 핑계로 시간을 벌려는 건 안 하겠다는 것과 다름없다는 걸 간파해버리신 거죠.

아이고 주님, 그러니까 주님의 옷자락이라도 잡고 멸망의 길에서 헤어나 보려는 거 아닙니까.

■ 또 하나의 기회

- 사람이 제아무리 부유하다 하더라도

그의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주지는 못한다. (루카 12장 13-21절)

일전에 다정한 친구로부터 제주도 풍란이라는 걸 선물 받았습니다. 식물이고 동물이고 살아 있는 걸 선물로 받는다는 건 고마운 일입니다만,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거두고 보살펴야 하기 때문이고 잘못하면 죽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친구는 자꾸만 제 코 밑에 그걸 갖다 대면서 냄새를 맡아보라고 했습니다.

당장은 향기를 잘 느낄 수 없었지만 좋은 향기를 맡은 것처럼 환한 표정을 지어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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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제 한 구석에 놓아둔 지 며칠이 지났습니다. 한밤중에 별 볼일 없이 서재 문을 열었습니다. 깜깜한 어둠 속에 이 세상의 것 같지 않은 그윽한 향기가 가득 고여 있었습니다. 그동안 잊고 있던 풍란 생각이 났습니다. 내 코는 난의 향기를 못 맡는 코는 아니었나 봅니다.

꽃도 숨을 쉬고, 날 숨 때는 그 향기가 고조된다는 걸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났습니다. ‘풍란의 참았던 향기가 소리 없이 폭발하면서 나를 불러냈구나!’ 나는 한밤중의 이 은밀한 만남에 황홀한 기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조용히 생각했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만난 것은 나의 자유의사였을까 부르심이었을까 하고요.

하느님은 우리에게 수시로 하늘나라냐. 파멸이냐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그건 바로 현세에 재물을 쌓을 것인가. 하늘나라에 재물을 쌓을 것인가. 나 자신을 위해 재물을 쌓을 것인가. 나보다 못한 이웃, 보잘것없는 이웃하고 나눌 것인가를 결정할 기회입니다.

우리는 예로부터 혼자 먹는 도시락도 고수레를 하고 먹었으며, 나무의 열매도 날짐승 몫을 남겨 놓는 고운 마음씨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살만해지자 곧 아흔아홉 냥 가진 자가 한 냥 가진 이의 것을 빼앗는 욕심쟁이가 되었습니다. 지금이라도 한 쪽의 콩도 나누던 마음으로 돌아갈 수 만 있다면 하늘나라를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지 않을까요.

■ 주님의 양면성

-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 (루카 12장 49-53절 )

이백여 년 전 우리의 선조들이 천주교를 처음 받아들이고 나서 겪은 처절한 순교의 역사를 보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도무지 상상이 안 됩니다. 그러다가도 “나는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왔다.”는 예수님 말씀이 이 땅에서 그대로 구현된 게 아니었나 싶어 신비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순교자들 중 상당수가 천민들과 여자들과 어린이들이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사람대접을 못 받고 억눌려 살아온 그들에게 있어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고 존엄하다는 말씀만으로도 목숨을 걸고 싶은 복음이었을지 모릅니다. 선비들도 가문과 일신의 몰락을 각오하면서까지 이 외래 종교를 지켜낸 건 무슨 까닭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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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불의 광휘를 본 사람이 암흑에 갇혀 사는 것은 죽느니만 못할 것입니다. 한 번 진리를 깨치고 나면 다시 무지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불을 지르러 오셨고 사람들 사이에 분열을 일으키러 오셨다는 말씀의 참뜻을 우리가 깨닫지 못한다면 원수를 사랑하고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까지 내놓으라는 말씀 또한 허약한 패배주의에 불과할 뿐 그다지 아름답게 들리지는 않을 것이다.

■ 염량세태

-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루카 14장 7-14절 )

어떡하든 정년퇴직 전에 자녀를 결혼시켜야 한다는 것이 우리나라 보통 부모들의 공통된 소망입니다. 결혼이야 당사자가 하고 싶을 때 하는 것이고, 또 일생을 같이 살고 싶을 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야 하는 법인데 부모의 사정에 맞추고 싶어 하는 것은, 축의금 액수와 하객을 어떤 사람으로 모실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체면치레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결혼 비용이 많이 들 뿐 아니라 비용의 상당 부분을 축의금에 의존하는 우리의 실정을 감안할 때 사람들이 축의금에 신경 쓰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을 것입니다. 허나 현직에 있을 때 자식의 결혼 뿐 아니라 심지어 부모의 상까지도 치렀으며 하는 게 지위나 권세가 높을수록 오히려 더하다는 것은, 그런 기회를 빌려 여봐란 듯이 자기 세력을 과시하고 자기 권세의 덕을 본 사람들로부터 몇 배로 되돌려 받고 싶은 야비한 욕심 때문이 아닐까요.

지위나 소유에 따라 남을 차별하는 데 능한 이일수록 자기가 초대됐을 때 상대방에게 어떤 대접을 받나에 민감합니다. 심지어는 사전에 비서를 시켜 어떤 자리에, 누구 옆의 자리가 마련됐는지 알아보고 흡족하지 않으면 더 높은 자리로 요구하고, 그게 여의치 않으면 불참하겠다고 위협을 하는 명사까지도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앉고 초대를 하려거든 친척이나 잘 사는 이웃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이나 불구자를 초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대신 갚지 못할 사람이지만 하느님께서 대신 갚아주실 거란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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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곧 우리는 지금 부자나 권력자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게 아니라 가난한 이, 몸이 성치 못한 이들에게 빚지고 있다는 말씀이 아닐까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앉은 자리는 가장 낮은 자리, 가난뱅이 불구자와 동격의 자리였습니다.

■ 신의 겸손

-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루카 17장 11-19절 )

사마리아 사람들과 유대인들이 오랫동안 적대관계에 있었다는 건 우리가 아는 대로입니다.

그러나 적대관계란 서로 대등하게 싫어하고 미워하는 관계라고 생각할 때 유대인과 사마리아인과의 관계에는 들어맞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성서에 드러난 두 나라의 관계는 교만한 유대인이 일방적으로 사마리아 사람들을 미워하고 경멸하는 것으로 나와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에게 말을 거는 것조차 있을 수 없는 일처럼 창피하게 여겼다고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도처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을 두둔하십니다. 사람을 미워하신 일이 없는 예수님도 교만만은 미워하고 경계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유대인 중에서도 바리사이파를 교만의 상징처럼 여기셨다면 반대로 불쌍히 여기고 어여삐 봐주신 건 사마리아 사람들이 아니었을까요.

그건 결코 감정적인 편애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까닭이 바로 소외당하고 박해받는 이들, 병들어 슬퍼하는 이들, 가난하여 무시당하는 이들을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바로 구원을 애타게 기다리는 목마름입니다. 샘물이 목마름을 만나지 못한다면 샘물의 가치가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선 당신 안에 있는 무진장한 생명의 샘물을 퍼주고 싶으셔서 목마른 이를 직접 찾아 나서십니다. 그 가장 극적이고도 아름다운 대목이 요한 복음 4장 8-9절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거는 장면입니다. 그때 예수님이 여인에게 준 샘물은 말 걸기 그 자체였습니다. 유대인 남자가 천한 사마리어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는 것은 남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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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에, 계층 간에, 민족 간에 완강하게 가로놓인 장벽 허물기였습니다. 여인은 비로소 자기가 목말라하고 있었던 게 뭐라는 걸 깨닫습니다. 그건 사람 대접이었습니다. 평생 처음 받아보는 사람 대접에 여인은 자신이 비로소 구원받은 걸 실감하게 됩니다.

샘물은 결코 인색하거나 교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선 병을 고쳐주시고 나서도 ‘내가 너를 고쳐주었으니 내 은혜를 잊지 말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뽐내는 일이 한 번도 없으셨습니다. 한결같이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고 하십니다. 겸손도 이쯤되면 신의 겸손이라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 자비심

-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루카 18장 9-14절)

요새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광장이나 전동차 안 같은데서 예수를 믿으라고 열렬하게 선교하는 사람을 심심찮게 봅니다. 지금부터라도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고 천당 간다는 소식은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종교적 열정이 지나친 나머지 자기는 옳고 남들은 온통 죄인 취급함으로써 듣는 사람에게 적대감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저런 사람하고 같이 천당에 가느니 차라리 안 들어가고 말지, 하고 노골적으로 눈살을 찌푸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들은 좋은 소식을 알리면서 이렇게 환영을 못 받는 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자신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나보다 믿으면 천당가고 안 믿으면 지옥 간다는 너무나 단순한 이분법 때문이고, 따라서 안 믿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죄인 취급을 하는 독선 때문입니다. 남을 단죄하기 좋아하는 사람에게 자비심이 있을 리 없습니다. 자비심 없는 종교란 나쁜 정치 못지않게 사람을 억압할 따름입니다. 신앙인들이 가장 빠지기 쉬운 오류도 해방의 소식을 도리어 억압의 수단으로 삼는 일이 아닐까요.

■ 회개와 행동

- 이 독사의 족속들아! 닥쳐올 그 징벌들을 피하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마태 3장 1-12절 )

대림절은 성탄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시기입니다. 일 년 중 가장 엄숙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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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 때이기도 하지만, 지난 일 년을 돌이켜보며 마음으로나 물질로나 빚진 것을 정리하고 넘어가야겠다는 의무감으로 바쁘고 경황이 없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들떠 있는 것은 아직 인생의 시름을 모르는 아이들뿐입니다. 아이들을 위해 선물도 준비해야 하고, 아이들 보란 듯이 이웃 사랑도 실천하고 싶습니다.

이래저래 쪼들리는 마음을 풀어주겠다고 손짓하는 모임이 촘촘히 대기하고 있는 것도 대림절 동안입니다. 이른바 송년회니 망년회니 하는 모임입니다. 세월은 우리가 보내주지 않아도 총총히 흘러가며, 붙든다고 붙들리지도 않건만, 한 해를 보낸다는 명목으로 한바탕 요란을 떨게 됩니다. 형체도 빛깔도 없는 세월을 있다고 느끼는 것은 기억 때문이거늘, 살아온 유일한 자취인 기억마저 지우고 싶어 망년회를 준비하는 것은 또 무슨 까닭인지요.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사람에게조차 “이 독사의 무리들아!”라고 외친 요한이 만일 우리가 대림절을 지내는 걸 본다면 무어라고 할지 잘 상상이 안 됩니다.

회개라는 말은 요새도 길거리나 전철 안에서 심심찮게 들을 수 있는 흔해빠진 말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그보다 더 무서울 수는 없었을 거라 싶을 정도로 우리를 모조리 악마 취급하며 회개를 권고하는 소리를 들은 적도 있습니다. 곧 성탄절 판공성사가 있을 테고 그때는 틀림없이 우리들 입술에도 회개라는 말이 가볍게 올라앉았다가 스러지겠지요.

이렇게 쉽게 아무 데서나 듣고 말할 수 있는 회개라는 말이 요한의 입을 통해 들을 때는 난생처음 듣는 것처럼 새롭고 두려운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그건 곧 우리가 아직 한 번도 진정한 회개를 못해봤기 때문이 아닐까요. 진정한 회개. 즉 행실로 증거를 보일 수 있는 회개 말입니다.

■ 요한의 의심

- 너보다 앞서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네 갈 길을 닦아놓으리라.

(마태 11장 2-11절 )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끼리도 세상을 보는 눈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다를 뿐 아니라 정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세상이 점점 더 살기 좋아진다는 문명에 대한 낙관론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는 비관론이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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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만 있으면 안 되는 게 없고 심심할 새도 없을 만큼 오락거리가 충만해 있는 걸로 부자에게는 천국 같은 세상이라고도 합니다. 부자가 아니더라도 이미 문명의 편의를 맛본 우리는 입으로는 옛날을 그리워할 적이 있을지라도 단 일이십년만 뒤떨어진 문명 속에 데려다놓아도 못 살겠다고 아우성을 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 줄 뻔히 알면서도 우리 마음속에는 단순 소박하게 살던 시절이 향수처럼 자리하고 있어 언제고 돌아가야 할 고향처럼 평화와 희망의 원천이 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온갖 편리가 보장된 이 발달된 산업사회를 살아가면서 가장 견디기 힘들고 피곤한 일은 뭐니 뭐니 해도 매사를 ‘이게 진짜일까, 가짜일까.’ 끊임없이 의심해야 하는 일입니다.

공산품은 함량을 믿지 못하겠고 상표나 가격도 의심스럽습니다. 실생활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는 아이들도 가짜 세상, 사이버 공간에 들어가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열광합니다. 사물을 놓고 진짜와 가짜를 구별 못하는 고민은 그래도 약과입니다.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없는 게 이 시대의 가장 큰 고민이 아닐까요. 사람의 말을 믿을 수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 의인과 악인을 가려낼 수가 있겠습니까.

세례자 요한은 태중에서부터 성령을 가득히 입어 역시 태중의 예수를 알아봅니다. 청년 시절에는 광야에서 기도와 고행으로 자신을 준비하며 부름 받을 때를 기다린 수행자였으며, 메시아의 선구자였습니다. 자신의 전 존재가 오직 메시아가 오실 길을 예비하고 증거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음을 앞둔 감옥에서 예수님에게 사람을 보내어 오시기로 한 사람이 선생님이 맞냐고 묻도록 합니다.

이 의심 많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아하, 요한도 옥중에서 예수님이 진짜 메시아인지 가짜인지 문득 의심을 한 게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자기가 이 세상에 온 뜻이 완성됐다는 걸 확인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뒤로 캐보지 않고 정면으로 묻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당신이 하신 일을 듣고 본 대로만 가서 알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듯이 행동을 보고 사람을 알아보란 말씀은 예수님이 여러 번 설하신 말씀과도 일치하며, 말만 무성하고 행동이 가려진 이 시대에 더욱 빛나는, 등불 같은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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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천애인

-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 (마태 1장 18-24절)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는 것을 빼면 너무도 평범한, 당시의 흔한 민초에 불과한 평균치의 서민 가정의 아들이었습니다.

신동이나 장사도 아니었을 뿐 아니라 말썽꾸러기도 아니었다는 사실은 예수님이 고향에 가서 가르치셨을 때 고향 사람들이 반응에 아주 잘 나타나 있습니다.

교향 사람들은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가족들도 다 우리 동네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저런 모든 지혜와 능력이 어디서 생겼을까?” 하면서 예수님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지상에 오신 것은 부강하고 찬란한 왕국의 건설하려는 것도, 무력으로 천하를 통일하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민초들을 그릇된 권력과 인습의 억압에서 해방시켜 자유로운 인간의 기쁨과 존엄성을 돌려주려 오신 것이었습니다. 몸소 민초가 되어 살아보지 않고는 민초를 사랑하여 목숨까지 내 놓을 수 없다는 게 하느님의 뜻이 아니었을까요.

그렇더라도 마리아와 요셉을 구세주의 부모로 택하신 것은 결코 아무렇게나 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의 가정에서 우리는 하느님이 보시기에 어떤 가정이 가장 마음에 드셨을까. 하는 아름다운 가정의 전형을 봅니다.

그 가정의 특징은 경천애인으로 요약될 수 있는 게 어닐까요. 마리아가 하늘을 공경하고 순명할 줄 알았다는 것은 예수님의 잉태를 받아들인 사건에서 이미 충분히 드러난 대로입니다. 요셉 또한 하늘을 두려워할 줄 알았기 때문에 마리아를 아내로 맞을 수 있었겠지만 그 전에 마리아의 잉태를 알고서 요셉이 취한 태도가 특히 인상적입니다.

약혼자가 처녀의 몸으로 잉태한 걸 알았을 때 분노하여 세상에 드러내 창피를 주는 게 강직한 사람이 흔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조용히 아무도 모르게 파혼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그 한가지로써 그가 얼마나 심지가 깊고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어진 마음으로 이웃과 화목하며, 정직한 노동으로 가족을 부양하는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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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와 자식을 지극히 사랑하되 떠나보낼 때가 되면 떠나보낼 줄도 아는 부드럽고도 강한 어머니가 구존하는 가정을 하느님은 특히 어여삐 여기시어 그 가정에 합당한 축복을 내리셨습니다. - 끝 -

2017.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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