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0. 26. 16:05ㆍ독서후기
리더라면 정조처럼
■ 김준혁
0 한신대 교수
0 정조와 화성(華城)전문가
0 중학교 역사 교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역사공부
0 중앙대 문과대 사학과 졸
0 ‘조선 정조대 장용영’ 연구로 박사 학위
0 1997년 화성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후 수원시 학예연구사 임용
0 현재 국제 기념물협회 위원, 민예총 문학위원회 위원, 역사 에세이스트
0저서
- 화성, 정조와 다산의 꿈이 어우러진 대동의 도시
- 정조가 만든 조선의 최강군대, 장용영
- 정조, 새로운 조선을 디자인하다. -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
- 정조는 왜 화성을 쌓았을까. - 한반도의 운명을 바꾼 전투
- 알기 쉬운 화성이야기 등
■ 프롤로그
정조는 비극적인 개인의 삶을 뛰어 넘어 역사에 이름을 남긴 훌륭한 군주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자신에 대한 반대 세력들의 온갖 음모와 폐출 위기를 겪었고, 나아가 국왕이 된 이후에도 1777년(정조 1)‘존현각 시해 기도사건’(정유역변)등 숱한 죽음의 위기를 맞이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조가 당대 개혁군주로서 한 시대를 이끌고, 현재까지 우리 역사상 최고의 지도자로 인정받는 것은 그만이 가지고 있던 특별한 리더십과 정치적 기술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소한 행동이라 해도 군주의 사적 행위는 곧 공적 행위일 수 있다. 때문에 정조는 말과 행동에 있어 매사 신중하고, 늘 근엄함을 잃지 않았다. 정조는 신료들에게 늘 ‘사중지공(私中之公) 손상익하(損上益下)’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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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조했다. 사적인 일로부터 시작하지만 반드시 공적인 것으로 연결 되도록 강조했고, 윗사람은 덜 가져도 아랫사람에게 더 많은 이익이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공적인 일을 하면서 사적인 이익을 취하는 사람들, 그리고 이익을 얻었을 때 함께한 이들에게 고른 분배를 하지 않고 독식하려는 사람들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정조는 소통을 중요시 했고, 군신공치(君臣共治)를 내세우며 신하들과 함께 국정을 운영하였다. 국왕으로서 사적인 이익을 철저히 배제하고 오로지 공적인 이익만을 추구하며 누구보다 따스하면서도 친인척과 측근들의 잘못은 추상같이 다스리는 위엄도 보여주었다. 특히 그는 군주로서 엄청난 양의 정무를 소화하면서도 학문에 소홀하지 않았고, 신체단련도 충실히 했다.
또한 불교와 도교, 그리고 서학(西學)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무조건 배척당하던 그 시대에 정조는 성리학만이 세상을 움직이는 사상은 아니라고 단호히 이야기 했다. 성리학, 그것도 주자 성리학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고 배척하고 죽이던 그 시대에 군사(君師)를 자처했던 조선 역사상 최고의 유학자 군주가 또 다른 사상과 종교를 인정한 것이다. 그러한 정조의 정신은 보다 높은 단계의 실학으로 발전하였고, 정조시대 조선의 문화는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전했다.
한편 정조는 조선 역사상 매우 특별한 신궁(神弓)이었다. 그가 활을 쏠 때면 50발 중 49발을 쏘아 명중 시켰다. 그런데 마지막 한 발은 과녁을 향해 쏘지 않고 허공으로 날리곤 햇다. 초종 박제가는 그의 문집에서 정조가 50발 중 49발을 쏜 것은 겸양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50발을 모두 명중시킬 수 있었으나 스스로 겸손하기 위해 마지막 한 발을 쏘지 않은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필자가 생각할 때 정조의 본 의도는 그것이 아니라고 본다. 여기에는 주역(周易)에 통달했던 정조의 깊은 뜻이 숨어있다. 주역 점(占)을 칠 때는 보통 시초(蓍草)라고 하는 50개의 산가지를 이용하는데, 그중 한 개는 태극(太極)을 상징해 사용하지 않고 49개의 산가지만 가지고 주역 점괘를 뽑는다. 그리고 그 점괘를 통해 세상의 이치와 변화의 숨은 뜻을 찾아낸다. 정조는 여기에 착안해 50개의 화살을 들고 다녔고, 마지막 한 발을 제왕의 산가지로 여겨 아예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여기에 바로 ‘정조의 리더십 코드 5049’가 숨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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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장 공부하는 군주
■ 01 엄청난 독서를 통해 지식을 넓히다
정조는 천성적으로 책을 통해 지식 얻기를 좋아한 것도 있지만 스스로 노력도 엄청나게 했다. 정조는 어린 시절부터 공부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 영조가 감탄할 정도였다. 아들인 사도세자가 공부를 하지 않은 것에 반해 손자가 독서에 집중하니 얼마나 좋았겠는가?
<정조행장>에 영조가 손자인 정조가 얼마나 책을 많이 읽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 있다.
“세손의 성품이 보통과는 아주 달라 털끝만큼도 법도를 이탈하려는 생각이 없는 사람이다. 금원(禁苑)에 꽃이 필 때도 나를 따라서가 아니고는 한번도 구경 나가는 일이 없고 날마다 독서가 일인데, 그것은 그렇게 하려고 노력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영조는 손자인 정조가 독서를 열심히 하는 것은 단순히 책을 읽어야한다는 의무감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천성적으로 책을 좋아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정조 행장>에 보면 정조가 어린 시절 얼마나 엄청나게 책을 읽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5~6세 된 정조가 얼마나 책을 많이 읽는지 사도세자와 혜경궁은 잘 알고 있었다. 부부는 아들이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 대견스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어린 아들이 너무 공부를 하다가 병이 날까 걱정을 했다. 그래서 해가 지면 책을 읽지 않고 잠을 자게 하려고 저녁에 촛불을 켜지 못하게 했다. 정조는 너무도 책을 읽고 싶어 방문을 이불로 가려 촛불 빛이 새나가지 못하게 하고 책을 읽었다.
국왕이 된 후에도 정조의 책읽기는 지속되었다. 신하들은 정조가 건강을 해칠까 염려하여 더 이상 책을 보지 말라고 건의하자고 했다. 그러나 정조는 여전히 사대부들과 더불어 경전을 논의하고 함께 책읽기를 즐겼다. 책을 읽다보면 자신의 마음에 꼭 드는 말을 발견하곤 했는데 이때마다 피곤함을 잊고 다시 책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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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정조의 독서법은 어떠한가?
정조는 어린 시절부터 반드시 책을 두 번씩 보았다. 이는 정조와 혜경궁의 기록으로 알 수 있다. 혜경궁은 어린 시절 정조가 책을 다 읽으면 떡을 해서 나누어 주었다. 일종의 책거리를 해준 것이다. 정조는 일단 책의 전체적인 내용을 한 번 익히고, 두 번째로 다시 정독을 해서 그 책이 갖고 있는 내용을 깊이 파악하는 방법을 취했다.
일득록(日得錄)에 “나는 하루에 어떤 글을 몇 번 읽고, 어떤 글을 몇 줄 읽는다고 반드시 과정을 정해 놓고서 아무리 바쁘더라도 그만둔 적이 없다이는 문자(文字)공부에 유익할 뿐 아니라 마음을 잡는 공부도 된다.
정조는 여인들과 놀고 즐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정무를 끝낸 여가시간에 홀로 책읽기를 즐겼다. 어린 시절에는 사서삼경 중 경전 공부에 충실했고, 동궁으로 있는 동안에는 역사 공부에 치중했다.
“역사책은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선한 일을 보면 문득 감동하는 바가 있고, 악한 일을 보면 문득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당(唐)나라는 환시(宦侍) 때문에 망했으니 경계하여 멀리하고, 송(宋)나라는 소인(小人) 때문에 망했으니 거울삼아 물리친다. 나라를 다스리는 도(道)는 생각이 반이다. 그러니 말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고 실행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정조가 얼마나 역사 공부를 중요시 여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역대 국왕들의 제왕학 교육의 70%가 역사교육이다.
정조는 독서를 함에 있어 글 뜻을 깊이 음미하려면 참을 성 있게 독서를 해야 하는데 이를 잘 기억하려면 반드시 기록해 놓아야 한다고 했다. 자신이 어떤 책을 읽고 어떤 대목에 감동받았는지, 혹은 깊이 생각할 내용이 무엇인지 기록을 했다. 그 기록들의 상당수가 그의 문집인 <홍제전서>에 수록되어 있다.
정조는 독서에 있어서는 책을 많이 읽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밀하고 치밀하게 읽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리고 신기한 것을 보려고 힘쓸 것이 아니라 평상적인 것을 보아야 한다고 했다. 정밀하고 치밀하게 읽다 보면 절로 환히 깨닫는 곳이 있고, 평상적인 내용 중에 자연히 오묘한 부분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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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당대의 사대부들이 책을 읽을 때 대부분 많이 보려고만 들고 치밀하게 읽는 데는 힘쓰지 않으며, 신기한 것만 좋아하고 평상적인 것을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에도(道)를 얻을 수 없는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많은 책 보다도 한 권을 깊이 있게 읽어 그 안에서 저자가 이야기하는 세상의 진리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 것이다.
정조는 책을 읽는 독특한 방식이 있었던 듯하다. 그는 늦은 밤 글을 읽을 때 무릎을 쳐서 장단을 맞추어가며 글을 읽었다. 음률을 적용하여 읽었던 듯하다. 이렇게 읽다보면 음악을 연주하는 분위기가 된다고 했다.
여름 더위를 식히는 방법도 독서가 가장 좋고 깊은 겨울밤 적막할 때도 책을 읽으면 좋다고 했으니 천생 독서광이었다고 할 수 있다.
■ 02 끊임없이 공부하여 군사(君師)의 지위를 얻다
1. 정조는 어렵게 국왕이 되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은 그를 죽게 한 세력들에 의해 아들인 정조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2. 아들을 미워한 영조는 사도세자의 죽음 후 13년 동안 세손인 정조를 그 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산소 참배도 못하게 함
3. 미움의 근원
- 아들인 사도세자가 제왕학 공부에 소홀
- 사도세자가 자신에 대한 지지가 충분치 않은 소론과 연대
- 나경원의 상소를 믿음 : 사도세자가 자신을 죽이고 왕이 되려했다는
4. 결과적으로 노론은 정조의 등극을 원하지 않음
5. 노론의 정조 등극을 막는 명분 만들기
- 팔자흉언(八字凶言) : 역적지자 불위군왕(逆賊之子 不爲君王)
죄인지자 불위군왕(罪人之子 不爲君王)
- 이 말을 퍼뜨린 사람들은 당연히 사도세자를 죽인 세력들이다.
- 국왕을 거의 허수아비로 두고 나라의 정치 경제,사회, 문화 모든 분야를 장악하고 있던 세력
6. 정조 즉위 후 자객들이 경희궁 존현각에 침입하여 정조를 죽이려 한 사 건부터 정조의 왕세자인 문효세자의 죽음 그리고 구선복의 모반사건 등, 정조를 시해하여 권력을 장악하고자 하는 노론 세력들의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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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들을 극복하기 위해 정조는 자신이 신하들보다 학문적 우위에 있어 야겠다고 생각했다.
조선 시대는 과거를 보기 위해 경전 공부를 하지 않고서는 과거시험 답안을 쓸 수 없었다. 과거 시험이 국가 정책을 제시하는 것이 대부분이지만 이를 답안지로 작성하기 위해서는 경전에 있는 성현들의 온갖 말씀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모두 학자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학문적으로 우위에 있는 사람들이 보다 중요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 조선의 특징이기도 했다.
정조는 자신의 정통성이 취약한 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학문의 우위로 신하들을 제압하기로 했다. 어려서부터 영조에 의해 착실하게 제왕학 교육을 받았고, 스스로가 학문 연구를 즐겨했던 정조였기에 당대의 기라성 같은 학자들을 제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참으로 특이한 것은 조선시대 학자 관료들은 과거에 합격한 후부터는 공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매우 유명한 학자관료들은 관료로서의 역량도 뛰어났고, 학문적으로도 뛰어났는데 그런 이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정조는 이러한 사대부들의 이중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조는 자신이 이들을 교육하는 스승으로서의 역할을 하고자 했다. 그래서 문치의 나라 조선 그 자체를 이용하고자 했다.
조선은 건국초기부터 경연제도(經筵制度)를 실시했다. ‘경연’이란 국왕이 산하들로부터 학문을 배우는 것을 말한다. 동궁시절부터 동궁 시강원을 만들어 당대 최고의 학자 관료들을 임명하여 그를 스승으로 삼는데 그렇게 되면 평생 국왕의 은사가 된다. 효종의 사부인 고산 윤선도와 우암 송시열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니 경연제도는 사실상 신하들이 우위를 독점하는 시간이었다. 신하들의 질문과 가르침은 국왕에게 매우 큰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국왕의 왕권을 침해하기도 한다. 가르침을 받는 국왕의 입장이기 때문에 스승인 관료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국왕은 비록 신분은 더할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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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없는 지존이지만 조선의 임금은 끊임없이 학문을 닦고 가르침을 받아야 할 학생과 다름없었다.
그런데 정조는 이러한 관계를 역전시켜버렸다. 즉위 6년 후부터 경연시간을 유지하되 관료들에게 배우는 국왕의 모습이 아니라 가르치는 스승으로 변신한 것이다. 군사(君師)즉 임금이자 스승이 된 것이다.
동양의 가장 이상적인 국왕은 바로 요순(堯舜)이었다. 요임금과 순임금은 중국의 영향을 받는 국가에서는 가장 이상적인 군주였다. 정조도 요임금을 가장 이상적인 군왕으로 인정하고 이를 따르려 했다. 그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 바로 화성(華城)이었다. 화성의 이름은 요임금과 매우 밀접한 인연이 있고, 요임금의 수도와 같은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화성의 공간을 계획했다.
그에 앞서 영조는 요순과 주나라 문왕과 같은 군사론을 갖고서 자신이 취약한 정통성을 해결하고자 했다. 영조 역시 경종을 죽이고 조선의 국왕이 되었다는 콤플렉스가 있었고, 자신이 국왕으로 등극하는 데 결정적 지원을 한 노론 세력으로부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군사론’을 내세워 강력한 국왕이 되고자 했다. 그래서 영조는 더욱더 사도세자의 학문적 능력을 키우기 위해 가혹하리만큼 공부를 강요한 것이다. 그러나 영조는 학문적 자질과 능력 그리고 끊임없는 노력을 했음에도 군사로서의 모습을 확고히 보여주지 못했다. 신하들의 대응이 너무도 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조는 당대 최고의 학자들을 충분히 제압할 실력이 있었고 따라서 그는 경연시간을 자신이 신하들을 가르치는 시간으로 전면 재조정했다. 정조의 문집인 <홍재전서 弘齋全書>의 상당 부분이 바로 신하들을 가르친 내용이다. 신하들에게 과제를 주고 그 과제에 대한 신하들의 견해를 수정해 주거나 보완해주는 스승으로서의 모습이 대부분이다.
정조의 리더십은 이때부터 강력해지기 시작했다. 정조의 군사론은 성공한 것이다.
■ 03 무예수련으로 신체를 단련하다
리더는 신체적으로 건강할수록 좋다. 강건한 육체가 없다면 자신이 하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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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일을 계획대로 추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게 된다.
세종은 심한 비만에 당뇨가 있었고, 그로 인하여 일찍 시력이 저하되어 노년에는 정무를 제대로 보기 힘들었다. 그가 나름의 체력 관리를 위해 승마 등의 운동을 하긴 했으나 건강을 회복하지는 못했다.
리더가 건강이 좋지 않으면 조직이 다른 구성원들에 의해 관리가 되는데, 이때 원래의 목적과는 다르게 운영될 수가 있다.
정조는 공부도 많이 했지만 신체 단련을 위한 운동도 중요시 했다. 정조가 가장 많이 한 신체단련은 단연코 활쏘기이다. 활쏘기는 정조에게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었다. 정조는 “활쏘기는 우리 왕실의 오랜 가법(家法)이다.”라고 하며 매우 중요시 여겼다. 그러나 활쏘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정조는 검술과 창술도 함께 연마했다. 기초적인 체력훈련을 지속적으로 한 것이다.
정조가 이처럼 검술, 창술, 활쏘기 등의 훈련을 집중적으로 한 것은 사도세자의 영향도 있다고 본다. 사도세자는 무예광이었다. 실제로 엄청난 무예의 고수이기도 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18기 무예라고 하는 것이 바로 사도세자가 정리한 무예이다.
사도세자는 임수웅이라는 금위영 교련관과 함께 조선의 무예와 중국 무예 그리고 일본 무예를 정리하여 조선의 군사들을 위한 18기 무예를 정립하고 군사들에게 보급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본인이 먼저 무예의 달인이 되어야 했다.
사도세자는 어린 시절부터 효종을 닮았다는 소리를 들으며 성장했다. 효종은 북벌을 꿈꾸며 스스로 무예인이 되고자 했다. 그는 관우가 사용했던 72근 청룡언월도를 만들고 이 언월도로 무예 훈련에 집중했다.
효종이 죽고 난 후 이 청룡언월도는 저승전(儲承殿 왕세자의 생활공간)이란 창덕궁 전각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사도세자는 15세에 대리청정을 하면서 이 언월도를 사용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다양한 모습을 모두 계승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정조는 어린 시절부터 공부에 열중하면서 아버지처럼 검술과 창술 연마도 열심히 했다. 정조가 이덕무, 박제가, 백동수에게 <무예도보통지>를 간행할 것을 명령한 것도 본인이 무예에 정통했기 때문에 지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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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조는 보통 무예인들보다 더 높은 수준의 무예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일반 문반들은 물론이고 무반들 역시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정조가 신체단련을 위해 가장 힘을 많이 쓴 부분은 활쏘기이다. 정조의 활쏘기는 태조 이성계의 수준과 비슷하다고 헐 수 있다. 정조는 신하들과 함께 할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혼자 활쏘기를 하였다. 활쏘기를 하면 두 가지 좋은 점이 있다. 신체를 단련하는 것과 정신을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조는 신하들과도 수시로 활쏘기를 하면서 자신의 체력도 강화하고 신하들과의 소통도 했다. 이렇듯 몸으로 신하들과 함께 움직여서 공동체 연대를 만들어 내는 것이 정조의 가장 큰 리더십 중의 하나이다.
정조는 <홍재전서>에서 “나는 활쏘기에 숙업(宿業)이 있어 맞힐 때마다 좌우의 신하들에게 상을 내리곤 했는데 이것이 세속에서 말하는 고풍(古風)의 옛 사례라는 것이다.”
‘고풍’이라는 것은 역대 군주들이 신하들과 활쏘기를 하고 상을 내리는 것을 말한다. 정조는 시간을 정해 놓고 활쏘기를 하면서 같이 활을 쏜 신하들에게 상을 내렸다. 활을 잘 쏜 신하들에게 꿩, 농어, 숭어 등 음식물을 하사하고, 연회 중 먹던 음식을 싸서 집으로 보내 주기도 했다. 참으로 특별한 행동이었다.
활쏘기를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성정이 나타난다. 조급해 하는 사람, 버럭 화를 내는 사람, 조용히 잘 인내하는 사람, 남을 배려하는 사람…. 아무리 국왕이 앞에 있다 하더라도 타고난 본성을 감출 수 없기 때문에 활쏘기를 통해 참된 신하를 뽑는 것이다. 정조도 역시 이와 같은 연유로 신하들과 아름다운 연대를 하는 동시에 그의 심성도 확인 할 수 있었다.
정조는 엄청난 명사수로서 50발을 쏘면 49발을 명중시키고 한 발은 허공으로 날려 보냈다. 정조는 이런 자신의 행동에 대해 “활쏘기는 참으로 군자의 경쟁이니, 군자는 남보다 더 앞서려 하지 않으며, 사물을 모두 차지하는 것도 기필(期必 어떤 일을 꼭 이룰 것을 때를 정하여 약속함)하지 않는다.”고 했다.
정조의 무예능력이 신하들보다 우위에 있고, 이것이 군주로서의 정치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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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한 영향을 주었음을 정조가 죽은 이후 그의 일대기를 기록한 대제학 이만수가 정리한 행장(行狀)에도 나와 있다.
정조에게 있어 활쏘기는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스승이자 정신수양 그리고 신하들과의 참다운 교유였다. 이러한 무예수련과 활동을 통해 그는 역경과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으며, 국가의 정사를 공명정대하게 펼칠 수 있었다.
■ 04 검소함을 실천하다
정조는 가장 높은 존재이자 모든 것을 다 소유한 국왕의 신분으로 일반사대부보다도 더 검소하게 생활한 그를 우리는 깊이 살펴보아야 한다. 정조의 검소함은 그대로 조정의 관료들이게 이어지고 나아가 조선의 전 백성들에게 전파 되었다. 한 사람의 힘이 널리 퍼진다는 홍재(弘齋)라는 말의 의미가 단순히 학문적 상황이나 정치적 모습만이 아닌 일상생활에 까지 널리 퍼진 것이다.
1776년(정조 즉위년) 3월 16일, 정조는 자신이 즉위하기 전에 궁중에 있던 내시와 액정서 소속의 인원 108명과 궁녀들을 줄이라는 뜻밖의 하교를 내렸다. 군주가 자신을 도와주는 내시와 액정서 소속의 인원, 여기에 더해 궁녀들을 줄이라고 하는 것은 조선시대 왕실에서 매우 특별한 일에 속한다. 왜냐하면 군주기 이런 일까지 신경 쓸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도와주는 내시와 궁녀는 많을수록 편한 것인데, 이들을 대거 궁에서 내보내라고 하니 아주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 정조가 내보낸 궁녀가 무려 300여 명이었으니, 이는 왕실 궁녀의 절반 가까이 해당되는 인원이었다. 정조가 이렇게 내시와 궁녀들을 많이 내 보낸 것은 다름 아닌 국가 재정 때문이었다.
정조가 즉위하고 국가 재정에 대한 전반적인 보고를 받았는데 당시 호조 예산의 56%가 국방비로 사용되고 있었다. 엄청난 비용이 군대와 장수들의 급여로 고스란히 나가는 것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한양 일대의 군대에 대한 통폐합을 단행하는 구조조정을 하였다. 그리고 내시와 궁녀를 대궐 밖으로 내보내 이들에게 지출되는 경비를 줄이는 것이었다. 내시와 궁녀들은 거의 정3품의 봉록에 해당되는 급여를 받았기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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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에 이들을 대폭 감축하는 것은 국왕에게는 불편한 일이지만 재정 측면에서는 적지 않은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정조는 국왕으로 즉위한 지 얼마 뒤에 하루 두끼, 그리고 한 끼 당 반찬을 다섯 가지만 먹겠다고 선언했다. 국왕의 아침과 저녁 수라는 고기와 반찬 11가지 이상 들어가는 최고의 음식이었다.. 국왕의 건강을 생각한다면 최고의 음식을 마련하는 것이 당연한데, 정조는 이를 거절하고 최소한의 식사만을 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정조가 국왕으로 있는 24년간 변함없이 지켜졌다. 정조는 여기에 더해 비단 옷을 입지 않기로 했다. 고급 비단옷 대신에 그는 무명옷을 입었다. 정조 스스로 자신은 비단옷이 곤룡포와 강사포(임금이 입는 붉은 색의 조복) 말고는 없었다고 할 정도로 그는 평소에는 무명옷을 입고 살았다.
정조는 무명옷만을 입은 것이 아니라 옷이 헤지거나 버선에 구멍이 나면 이를 버리지 않고 꿰매어 입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늘 굻어 앉아 책을 읽었다. 그러다보니 으레 바지 무릎이 먼저 떨어졌다. 나이가 먹어도 이같은 행동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계속 바지의 무릎과 버선 끝이 먼저 헤지게 되었다. 한 나라의 군주가 옷과 버선이 헤어지면 꿰매어 입었다니 이는 상상이 가지 않는 일이다.
정조가 몸이 아팠을 때 약원의 도제조인 채제공은 정조의 이불을 보고 너무도 놀라 입이 떡 벌어졌다. 국왕의 이불이 너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한말을 직접 들어보자.
“삼가 우리 전하께서 쓰시는 이불을 보고 우러러 존경하다 못해 황송하고 부끄러운 생각까지 듭니다. 우리 성상의 검박한 덕은 본디 나라 사람들이 다들 알고 있는 일이지만, 그래도 이처럼 검박한 줄은 생각지 못했습니다. 전하는 한 나라의 임금 자리에 계시어 만물의 주인이신데도 이렇게 검박함을 숭상하고 있는데 신들은 도리어 그렇지 못합니다. 일반 사람들 중에도 대부분 명주로 이불을 만든 사람들이 많은데 어찌 황송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때 정조는 “나는 장복(章服)에 대해서는 정결한 것을 취하지만, 조용히 거처할 때는 좋고 나쁜 것을 가리지 않는다. 그것은 검박함을 숭상한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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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도 아조(我朝)의 가법(家法)을 준수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자신의 검소함이 조선 왕실의 가법일 뿐이라고 겸손해 한 것이다.
정조의 검소함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자신이 거처하는 작은 방을 화려하게 꾸미지 않고, 냇가에서 나는 부들로 만든 돗자리를 깔고 살았다. 창경궁 안에 있는 침전인 영춘헌(迎春軒)이 하도 낡아 비가 오면 빗물이 방안으로 스며들어 시간이 지나면서 곰팡이가 슬기도 했다. 그러나 정조는 이를 개의치 않고 산하들에게 “나는 천성이 검소한 것을 좋아한다”라고 하며 새로 도배를 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국왕이 검소하게 생활하니 자연스럽게 궁중의 모든 이들이 검소하게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정조는 이렇게 모은 돈을 궁중 재산으로 두지 않고 모두 호조로 보내 백성들을 위해 사용하게 했다.
그런 정조의 검소함을 생생하게 옆에서 지켜본 정약용은 훗날 자신의 자식들에게 “거친 음식과 헤진 옷을 부끄러워하는 이들과 찬구를 맺지 말라”고 했다.
현대에도 사회의 지도층은 정조처럼 더욱 검소하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검소함을 통해 얻은 이익을 어려운 이들과 함께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노블레스 오불리주 이다.
◉ 2장 시대의 변화를 읽다
■ 05 국가 개혁의 이념을 명확히 밝히다.
공자가 “정(政)은 정명(正命)이다”라고 한 것은 정치를 함에 있어 이름을 먼저 내세울 것이 아니라 올바른 명분을 세우고 정치를 하라는 것이다.
정조는 정치를 함에 있어 명분을 충분히 마련하고 이를 재위 내내 실천하기 위해 수많은 개혁정책을 추진했다. 그가 국왕이 된 후 천명했던 명분, 즉 4대 개혁정책은 정조시대 가장 중요한 정당성이었다.
1778년 1월1일은 정조가 국왕이 된지 햇수로 3년째 되는 날이었다. 그는 이전 국왕들과 달리 새해 첫날 백성들을 위한 특별 신년사인 윤음을 전국에 하교했다. 사실 정조는 자신이 아무리 개혁의 의지를 가지고 국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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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더라도 1년 만에 국가의 개혁을 이룰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인조반정 이후 오랫동안 노론이 권력을 독점해 온 상황에서 자신이 국왕이 된 지 만 2년도 안 되어 개혁을 할 수 없는 구조인 것을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5년 내지 7년이 돼도 개혁이 될 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백성들이 개혁을 학수고대하고 있는 것만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정조는 스스로가 부족한 국왕임을 이야기하며 바로 지금이 국가 개혁을 추진할 때라고 강조했다.
개혁의 의지를 천명한 정조는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기 위한 경제 활성화 정책을 제시했다. 농업과 잠업을 활성화 할 수 있는 경제적 토대를 만들고, 국가의 토목공사에 강제로 노동하는 각종 요역(徭役)과 세금을 가볍게 해 주는 정책을 마련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가혹하게 수탈당하는 고통을 없게 하고, 백성들의 살림을 넉넉하게 하여 안정된 생활의 wmf거움을 만들어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을 국왕 혼자 할 수는 없는 일이니 중앙의 관리들과 지방의 관리들이 모두 함께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조의 삼년상을 마치고 정조는 1778년 6월 4일에 처음으로 대소신료들을 모아놓고 인정전에서 조회를 개최했다. 정조는 이 자리에서 국왕으로서 지신이 해야 할 4가지 개혁의 방향을 이야기 햇다. 이른바 ‘경장대고(更張大誥)’라는 것이다. ‘경장’은 개혁을 말하는 것이고, ‘대고’ 백성들에게 크게 고한다는 의미이다.
정조는 당시의 조선은 큰 병이 든 사람이 진원(眞元)이 허약해져서 혈맥이 막히고 혹이 불거진 상황과도 같다고 인식했다. 언제든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러니 이를 고치는 것이 국왕이 할 일이라고 정조는 생각하고 개혁을 선언한 것이다.
정조는 양반 사대부 중심의 사회에서 ‘민국(民國)의 주체인 백성 중심의 사회로 만들고 싶었다. 더불어 백성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노론 위주의 기득권층을 압박하여 조선의 변화를 추진하고자 했다.
정조는 이를 위해 국가가 반드시 해야 할 4대 과제를 제시했다. ‘민산(民産)’ ‘인재(人才)’ ‘융정(戎政)’‘재용(財用)’의 네 가지 개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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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백성들의 재산을 풍부하게 하고, 인재를 육성하여 나라 발전의 기반이 되게 하고, 국방을 개혁하고 국가 재정을 안정시키겠다는 것이다. 이중에서 정조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바로 국방개혁이었다.
1. 민산(民産) : 농업과 상업의 개혁. 토지제도 개혁
- 정조 즉위 초에 궁방전(宮房田-왕족에게 내려지던 토지)개혁
- 호남, 영남의 토지 측량 사업(양전 : 농지 조사 및 측량) - 노론 중심지 인 경기 충남은 제외
2. 상업정책 개혁 : 1791년(정조 15)1월에 시전 상인들의 독점권인 ‘금난 전권’을 혁파하고 백성 모두가 난전을 차려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하도 록 하는 ‘신해통공’을 선포
- 기간산업은 국가의 기획과 관리 하에 두되 세부 산업은 시대의 변화에 조 응하여 자율화와 개방화를 허용함으로써 백성들의 경제력 향상을 추구
3. 인재양성 개혁
- 규장각 설립 : 왕실 도서관과 인재양성이 목표
- 산림세력과 문벌세력을 대신하는 친위세력 양성
- 서얼허통 : 인재양성과 평등정신 두 가지 목적
- 노비추세관 혁파 : 도망간 노비를 인간 사냥하던 제도 혁파 및 장기적으 로 노비를 없애는 파격적인 개혁 주창
4. 국방개혁 : 당시 국가재정의 56%는 군사비용, 백성들의 군역의무가 폐단 으로 흐름
- 정조는 국왕으로 재임하는 동안 군사 통수권을 장악하는 한편 군제개혁을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천명
- 군비 축소를 통한 민간경제 활성화에 노력
- 군권 일원화 적극추진 : 국왕 - 병조판서 - 오군영 대장
- 국왕이 오군영의 대장을 통제하게 된 것은 비정상적인 노론 위주의 정치 체제를 전면적으로 교체한 것으로 단순한 군사 지휘권을 확보한 것만이 아닌 군제개혁의 전반을 주도할 수 있는 권한을 국왕이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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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재용(財用) : 국가 재정의 안정을 위해 왕실 재정부터혁파
- 정조는 국영 농장인 둔전(屯田)이 궁방전으로 빠져 나가 축소되는 것을 막고 그 토지를 다시 둔전으로 훤원
- 왕실 재정의 대규모 감축 : 즉위 후 궁녀의 반을 내보내는 등
이처럼 정조는 국왕으로 등극할 때 내 세웠던 개혁의 명분과 구호를 끝까지 지켜냈다. 이는 처음 제안한 개혁의 명분이 백성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실천할 수 있었다.
■ 사적인 감정을 배제하고 탕평의 시대를 열다
1776년(정조 즉위년) 3월 10일, 경희궁 숭정전에서 정조가 조선의 22대 국왕으로 등극했다. 구장복을 입고 면류관을 쓴 그는 숭정문을 지나 숭정전으로 올랐다. 천천히 몸을 돌려 조정의 대신들을 바라본 그는 굵고 웅장한 목소리로 즉위 첫 일성을 토했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그 순간 조정의 신하들은 모두 부르르 떨었다. 그 자리에 있는 인물들 치고 사도세자의 죽음과 무관한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즉위 이전부터 죽음의 위기를 수시로 겪으며 살았다. 동궁시절 자신의 전각에서 책을 볼 때면 동궁을 죽이겠다는 익명의 편지가 책상에 놓였고, 궁녀와 내시들의 끊임없는 감시가 있었다. 하다못해 영조가 동궁인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라고 명령을 내린 전교를 좌의정 홍익한이 임금을 속이고 찢어버린 일도 있었다. ‘역적지자(逆賊之子) 불위군왕(不爲君王)’ 역적인 사도세자의 아들은 국왕이 될 수 없다는 흉언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그러니 그가 포효한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는 조정 대신들에게 저승사자의 음성과도 같았을 것이다. 하지만 정조는 자신의 원한을 가볍게 풀어내지 않았다. 자신을 반대한 사람들을 모조리 제거하는 것은 백성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의 뒤를 이어 탕평을 하고자 했다.
탕평정치의 시작은 아이러니하게도 영조를 죽이기 위한 이인좌의 반란으로 시작되었다. 전주이씨 이자 명문가 후손이었던 남인 이인좌는 영조가 숙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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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아들이 아니며 선대왕인 경종을 독살하고 왕이 되었기에 국왕을 교체하여 새로운 왕실을 만들어야 한다고 난을 일으켰다가 사형을 당했다. 이인좌는 영남지역 의 남인과 충청 지역 소론들을 설득하여 내란을 일으켰고 이들에 대한 백성들의 지지는 예상외로 대단했다.
숙종 연간 조선의 당파는 군자당, 소인당 하는 철학적 싸움에서 피비린내 나는 목숨을 건 싸움으로 변질 되었다. 각 당파들은 자신들이 지지하는 차기 대권 유력자를 지지하여 그로 하여금 국왕이 되게 하고 권력을 얻고자 했다. 그러한 결과로 나온 것이 바로 소론에 의한 경종의 등극이었고, 경종 사후 노론에 의한 영조의 등극이었다.
경종은 매우 허약한 체질이었다고 <인현황후전>에 나오듯이 실제 성기능을 할 수 없었던 국왕이었다. 그러다 보니 왕위를 이을 왕세자를 만들어 낼 수 없었기에 노론 신하들이 경종을 협박하여 숙종의 둘째 아들인 연잉군(영조)을 왕세제로 책봉하게 하고 4년 뒤 경종이 죽은 이후 조선의 21대 국왕이 되게 했다. 결국 영조를 국왕으로 만든 공로로 노론 세력들이 조정의 권력을 잡은 것은 너무도 당연했다. 이에 소론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난 난이 이인좌의 난이었다.
영조는 생각지도 못했던 내란을 해결하기 위해 군사력을 집중하여 이들을 가까스로 막아냈다. 하지만 내란을 마무리하고 스스로 생각해보니 자신이 처음 즉위했을 때 모든 세력을 아우르는 정책을 펼쳤으면 이러한 피비린내 나는 내란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판단을 했다. 그래서 영조는 어느 한 당파가 정권을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정치 세력들이 고루 정치에 참여하여 백성들을 부유하고 행복하게 하는 탕평책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추진했다. 이것이 바로 탕평책 추진의 배경이자 과정이었다.
정조는 영조의 탕평을 계승하며 보다 발전된 탕평정책을 쓰기로 햇다. 그래서 친인척들을 배제하고 필요한 인재들로만 채웠다. 정조는 경연시간에도 수시로 탕평을 강조했다.
“나는 침실(寢室)의 이름을 새로 지어 탕탕평평실이라 했다. 동인지 서인지 남인지 북인지, 신지 짠지, 관대한지 준엄한지를 막론하고 오직 인물을 고르고 오직 인재를 취하여 온 세상으로 하여금 함께 협력하여 일을 해 나가 모두 대도에 이르러 길이 화평의 복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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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탕평을 통한 고른 인재 등용도 적극 추진했다. 그래야만 올바른 인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한 사람을 등용하는 즈음에는 실제로 편벽되이 매이는 뜻이 없고 오직 인재만을 취한다. 그래서 전첩에 ”팔황을 뜰이나 앞길처럼 밝히고 호월을 일기처럼 여긴다.(庭衢八荒胡越一家 정구팔황호월일가) 라는 여덟 글자를 써놓았다. *구(衢 네거리 구, 갈 구,길 구)
*팔황 : 팔방의 너른 범위, 온 세상
팔황과 호월은 모두 오랑케를 뜻하는 것이니 이러한 오랑캐들도 모두 한 가족처럼 친하게 지내고, 이들 중에서도 좋은 인재를 찾아내어 등용하겠다는 것이다. 참으로 통 큰 마음이아닐 수 없다.
정조는 붕당의 입장에 따라 임용되는 폐단을 지적하고 서얼을 비롯해 ‘침체되어 있는 사람’을 소통시키겠다고 말했다. 특히 이조전랑과 한림등의 청요직이 ‘판서와 재상으로 진출하는 자리’로 이용되고 있으며 편파적 등용의 폐단을 낳고 있다고 보았다. 청요직 혁파라는 정조의 개혁 인사정책은 이처럼 고른 임용이라는 목적과 함께 대신권을 강화하여 관료제의 기강을 확립하려는 의도 하에 추진되었다.
■ <자율전칙> 제정으로 사회복지를 강화하다
정조는 11세 어린 나이에 아버지 사도세자를 잃어서인지 부모 없는 아이들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전염병이 발생해 부모가 죽고 홀로 남겨진 아이들이나, 흉년과 가난 때문에 부모로부터 버려진 아이들을 누구보다도 애틋하게 여겼다. 그리고 이 어린이들을 국가가 책임지고 길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조가 왕이 되기 전 영조시대는 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웠다. 영조 이전인 현종대부터 조선의 기후는 심각한 어려움이 있었다. 하늘의 재난을 인간이 막을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다. 현종대에는 전염병으로 무려 100만 명 가까이 죽어나갔다. 숙종대에도 전염병이 창궐했고 영조대도 그에 못지않았다. 그리고 기후 이상으로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었다. 그러니 가난한 이들은 더욱 가난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이 되면 양민의 자식들이라도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양반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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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의 노비로 들어가는 경우도 많았다. 부모가 죽으면 어린 자식들은 고통의 늪으로 빠지거나 아예 같이 죽을 수도 있었다.
조선의 국왕과 조정 관료들이 이런 안타까운 상황에 그저 눈을 감고만 있었겠는가? 그렇지 않았다. 그들 역시 가난한 백성들의 삶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건국 후 만들어진 경국대전에도 어린이를 구제하는 법령이 제정 되었다. 요즘으로 치면 아동 복지 정책이다. 경국대전 혜휼조(惠恤條)에 부모가 죽은 아이들을 보호하는 내용이 들어 있으나 매우 소략하고 구체적인 내용이 없었다.
- 1664년(현종 5) 북관어사 만정중은 왕에게 자식을 낳아도 먹고 살기가 힘들어 아이를 버리고 도망가는 부모가 많은데 관에서 경제적 지원을 해주어야 한다고 주장
- 1695년 (숙종 21) 유기아 수양법, 1696년(숙종 22) 수양임시사목으로 아동구휼은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
- 1783(정조 7) 버려진 아이를 구제할 자휼전칙(字恤典則)이라는 법 제정
정조는 자휼전칙이라는 법령이 만들어 졌음을 전 백성들이 알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결국 민간에 보급하여 백성들이 귀와 눈으로 접할 수 있도록 하고, 보고 듣는 대로 각기 구제할 방도를 찾을 수 있게 했다. 한문으로 만들어진 자휼전칙을 훈민정음으로 번역하여 일반 백성들도 읽을 수 있게 했다. 정조 시대는 훈민정음의 배급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전국 배포를 위하여 지역별로 책을 나누어 줄 수 있게 제목을 쓰게 하고 어보를 찍게 했다. 다른 책들은 어보를 찍은 사례가 별로 없는데 버려진 아이를 구제하는 법령이 들어간 자휼전칙은 어보를 찍어 배포한 것이다. 정조의 의지가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이로 인하여 정조시대 버려진 아이들은 10살이 될 때까지 안정되게 살아갈 수가 있었다. 지금이야 10살이라고 하면 아직 어린아이들이지만 조선시대의 10살이면 산에 가서 나무를 하고 논에 나가 일을 하며 충분히 제몫의 일을 할 수 있는 나이였다. 그러니 정조시대 10살까지 국가가 책임지고 키워준 것은 일할 나이가 될 때까지 최소한의 안정된 삶을 보장해 준 것이라고 하겠다. 물론 비용이 상당히 들어갔다. 그러나 가난한 아이들도 나라의 백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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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에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이 자휼전칙의 반포와 시행은 그 어떤 구휼보다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정조는 이 정책뿐 아니라 경제적 어려움으로 결혼하지 못하는 30세 이상의 남녀를 지방 수령의 책임 하에 결혼시키게 하는 법률까지 제정하는 등 소외 계층에 대한 전면적인 개혁정책을 단행했다. 정조의 복지정책은 시대의 변화와 인간에 대한 존중 의식을 그대로 법령에 투영한 것이다.
■ 08 금난전권을 혁파하여 경제를 개혁하다
조선시대 최고의 개혁을 많은 이들이 광해군 때의‘대동법(大同法)’이라고 한다. 잘못된 세금제도의 개선은 정말 대단한 개혁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대동법과 쌍벽을 이룰 만한 개혁이 바로 정조 때의 ‘신해통공’이다.
신해년은 1791년, 즉 정조 즉위 15년이 되는 해이다. ‘통공’이란 백성들이 자유롭게 장사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1791년 이전까지는 조선의 모든 백성들이 자유롭게 장사를 하지 못했다는 것인가? 그렇다. 우리가 흔히 시전상인 이라고 하는 국가로부터 공인받은 상인 즉 도고를 제외하고 조선의 백성들은 장사를 할 수 없었다. 상인들은 국가의 정책을 결정하는 조정 관료들과 연대하여 그들에게 정치적 자금을 지원하고 경제적 이익을 독차지 했다. 요즘으로 치면 정경유착인 셈이다.
이 ‘신해통공’은 조산 건국 후 399년 만에 이루어진 개혁이었다. 그러니 얼마나 대단한 개혁인가? 지금 우리 정부나 기업 등도 과거에 만든 정책에 묶여 과감하게 개혁을 하지 못하는 일이 허다한데 정조는 399년 동안 이어진 잘못된 정책을 단숨에 혁파해 버렸다. 이와 같은 규제개혁은 우리가 절대적으로 배워야 할 대목이다.
조선시대에는 독점권을 갖고 있는 시전상인들에게 특별한 권한을 주었다. 이것이 바로 ‘금난전권(禁亂廛權)’이다. 바로 난전을 금하는 권리이다. 백성들이 팔고자 하는 물품을 가져와 난전을 만들어 팔려고 하면 시전상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권한을 내세워 무력으로 장사를 못하게 했다. 그러니 일반 백성들은 장사를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시대가 갈수록 금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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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을 가진 상인들의 권한은 더욱 커져 나갔다. 기득권들이 자신들의 힘을 계속 키워나간 것이다.
이들이 특정 가문과 정치 관료들에게 경제적 후원을 하고 있었으므로, 금난전권의 유지는 탕평정책을 하는 개혁 세력들에게는 반드시 없애야 할 제도였다.
금난전권을 혁파하려던 논의는 영조대인 1764년(영조40)에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이 때를 전후하여 금난전권을 제한하려는 ‘통공발매(通共發賣)’의 이론이 나타났던 것이다. ‘통공발매’란 독점상권을 누려왔던 시전에 대한 전매특권을 폐지하고 상인에게 자유로운 상품매매를 허용하는 시장정책이었다. 그러나 조정 관료들의 강력한 반발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정조 시대에 들어와 통공발매론은 1787년(정조 11)에 일부 시행되었고 이를 ‘정미 통공’이라 한다.
물론 당시 대부분의 정치인들도 금난전권의 문제를 알고 있었고 개혁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개혁을 하자고 대놓고 주장하는 이들은 없었다. 금난전권을 혁파하자고 의견을 내는 순간 엄청난 후폭풍이 몰려올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확실한 상업 개혁을 준비하던 체재공은 신해년(1791, 정조 15)에 시전 상인들이 도매장사하는 법을 파하기를 청했다.
채제공은 시전상인들이 가지고 있는 금난전권을 혁파하고 상인이 되고자 원하는 백성들이 자유롭게 상업행위를 한다면 상인들은 서로 매매하는 이익이 있을 것이고 백성들도 곤궁한 걱정이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전 상인들의 원망은 스스로 담당하겠다고 다부진 결의를 했다.
채제공의 문집인 번암집을 보면 실제 시전 상인들이 채제공에게 법을 제정하지 말라고 호소하면서 집과 거리를 메우고 원망하고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채제공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이 정책을 밀어붙였고, 1년쯤 지나서 물화(物貨)가 모여들어 일용품이 날마다 넉넉해지니 백성들은 크게 기뻐하여, 비록 전에 원망하고 저주하던 자들일지라도 공의가 훌륭했다고 했다. 결국 조선 건국 후 399년 만에 신해통공은 실시되었고, 백성들은 새로운 경제체제를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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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민으로서 상인이 되어 돈을 버는 이도 생겨나고, 독점권이 사라져 물품의 가격이 안정되게 유지되엇다. 정조와 그의 관료들이 시대의 변화를 정확히 읽어내고 그 시대에 맞는 정책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처럼 리더들은 시대의 변화와 잘못된 관행과 정책을 혁파할 용기와 지혜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리더가 해야 할 일이다.
■ 09 공(公)과 사(私)를 철저히 구분하다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
유교사회였던 조선이 도덕주의를 강조하고 아무리 선악에 대한 확고한 명분을 이야기해도 혈연과 지연, 권력과 부에 따른 불공정한 재판이 오늘날보다 훨씬 더 많이 있었다. 이러한 시대에 오늘날처럼 삼심제로 운영되던 조선의 최종 재판은 국왕에 의한 결정이었다. 그러니 국왕은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최종 권한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정조는 매우 특별한 재판관이었다. 그는 늘 백성을 위한 재판을 하기 위해 꼼꼼하게 재판 기록을 들여다보고 공정한 재판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홍재전서>의 <일득록>을 보면 정조가 자신의 재판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나는 감영에서 올라온 판결문을 경전 대하듯 읽었다.”
정조가 재판을 해야 할 때가 되면 매번 8도에서 올라온 재판기록인 옥안(獄案)이 정조의 책상에 가득 쌓였다. 정조는 이 기록들을 직접 살펴보고 조사하였는데, 종종 밤을 새워 아침까지 이어질 때도 있었다. 여러 신하들이 모두 걱정하고 염려했으나 감히 말을 하지 못했다.
정조는 죄인들의 재판기록들이 대부분이 죄인을 더욱 악인으로 만들어 살릴 수 없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혹시라도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길은 재판기록을 반복해서 읽음으로써 그 속에 숨어 있는 잘못된 것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읽고 또 읽은 것이다. 그 과정에서 살인에 대한 기록은 더욱 꼼꼼히 읽어보았다.
이처럼 생명을 살리기 위한 노력은 다른 재판에도 영향을 주었다. 정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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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사를 다스릴 때 관대하게 용서하는 쪽으로 재판을 했다. 혹 이미 죄상을 자백했더라도 의심할 만한 점이 있으면 대부분 용서하여 풀어 주었다. 여러 신하들이 이를 문제 삼았지만 정조는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엄청난 고통이 가해지면 없는 사실도 거짓으로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완벽하지 않은 내용은 무죄로 해야 한다고 했다.
■ 10 민주주의 제도의 기반을 마련하다
우리식 민주주의 제도는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체로 우리나라에 정착된 민주주의 제도가 서구에서 들어온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물론 아주 틀린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만주주의 제도가 무조건 서구식 민주주의 재도를 받아들여 장착했다고 하는 것은 정답이라고 할 수도 없다.
우리의 잘못 된 인식의 하나가 민주주의 제도가 우리나라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고, 오로지 미국 등 서구에서 들어온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는 맞지 않는 이야기다. 우리는 동학혁명 과정에서 민주주의 제도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는 집강소(執綱所)가 설치되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실시되고 있는 지방자치제도의 원형이 바로 집강소의 설치와 운영이었다.
시장과 도지사 등 광역자치단체장과 시장 군수 등 지방 자치단체장을 시민들이 직접 선발하는 현재의 민주주의 제도는 120여 년 전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고 조정과 협의하여 집행된 집강소 설치와 그 궤를 같이 한다. 조정에서 국왕에 의해 임명된 수령들에 의해 통치되던 현실에서 백성들이 직접 고을의 지도자를 뽑아 집강으로 명명하여 그들에 의해 운영되는 제도는 현재의 지자체 제도와 매우 유사하다. 이러한 모습을 보자면 우리의 민주주의 제도는 서구의 민주주의 제도보다 훨씬 선진적이었다.
동학의 집강소보다 더욱 앞서서 민주주의적 기반을 마련하여 운영되었던 것이 수원 화성의 북쪽 들녘인 대유둔(大有屯)운영제도였다.
정조는 1795년 몇 십만 평에 이르는 대유둔을 운영하기 위해 대유둔 도감이라는 기관을 설치하고 대유둔 마름은 화성유수가 임명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직접 선출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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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놀라운 것은 양반인 둔 도감에게는 매달 쌀 한 가마, 장교인 도감에게도 쌀 한 가마를 지급하게 했으나 그들이 선출한 마름에게는 쌀 두가마를 지급하게 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제도였다.
200여 년 전 정조는 명망 보다도 일을 담당하는 마름에게 더 많은 급여를 주었다. 백성들에 의해 추천된 현명한 사람을 더욱 존중하고 그로 하여금 합리적으로 일을 하게 하여 국영 농장인 대유둔이 더욱 발전하여 쌀의 생산량을 늘릴 수 있게 하고자 함이었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와 문화를 기억하면서 21세기 새로운 민주주의 제도와 시민에 대한 존중을 갖는 제도를 만들어내고 운영을 해야 할 것이다. 온고지신이란 어려운 것도 아니고 먼 곳에 있는 것도 아니다.
■ 11. 먼 미래를 내다보고 식목정책을 추진하다
조선의 붉은 산은 제국주의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고 조선의 나무를 베어낸 결과이기도 하지만 실제 조선시대에는 나무가 거의 없었다. 국가의 토목과 건축사업 그리고 백성들이 땔감등으로 사용하기 위해 무분별한 나무 베게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조정에서는 풍수적인 면과 함께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나무를 공급받기 위하여 서울 주변의 사산(四山)과 왕릉 또는 특별히 지정한 곳에서 나무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했다. 사산이란 북쪽의 북악, 남쪽의 목멱산(남산), 서쪽의 인왕산, 동쪽의 낙산을 말한다.
한편 산에 나무를 베고 불을 질러 밭을 만드는 백성들 때문에 물의 근원이 모두 끊어져 산에 나무가 무성하지 못했다. 이에 산에다 불을 놓는 자를 죄로 다스리게 했다. 소나무 등 나무가 손상되는 것은 벌채로 인한 것도 있지만 송충이에 의한 피해도 많았다.
조정에서는 금지된 곳의 나무를 베어가는 자를 엄중히 처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조대에 사직단 내의 소나무를 몰래 베어간 사람이 있기도 했다. 권력자들이 국법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나무를 베기도 했다. 백성들은 왕릉의 나무도 베어갔다. 왕릉의 나무 가운데 10그루 이상을 베면 사형에 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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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법을 만들었으나 백성들은 무서워하면서도 왕릉의 나무를 몰래 베어갔다. 정말 충격적인 것은 세종대왕의 능인 영릉도 봉분 뒤쪽 숲의 나무를 모두 베어가 민둥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정말 나무가 귀한 시대였다. 그래서 조정은 금산정책 혹은 금송정책을 만들어 시행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효종대에 온돌이 널리 보급되고 나서부터는 더욱 나무가 귀해졌다. 부엌의 아궁이에서 때는 물로 밥을 짓고 방을 따스하게 데울 수 있는 온돌은 주거문화의 측면에서는 매우 좋은 발명이었지만 산림을 파괴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후 온 나라가 벌거숭이 산이 되어갔다.
숙종대에 소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는 금송정책(禁松政策)을 실시했지만 그 효과는 그리 크지 않았다.
정조는 금송정책의 한계를 뛰어넘어 식목정책을 추진하기로 했다. 나무를 베지 못하게 하는 것보다 나무를 많이 심어 산림을 푸르게 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시대를 읽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정책을 만드는 것이다.
정조는 먼저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 일대에 나를 심기 시작했다. 당시 경모궁에 심은 나무와 죽은 나무 그리고 어떤 나무가 심어졌는지를 모두 조사하여 책으로 만들었다.(경모궁 식목 실총 : 지금은 전해지지 않음) 정조는 이 책을 발간하고 식목을 강조했다.
경모궁을 중심으로 나무를 심은 정조는 자신이 만든 시범도시 수원을 중심으로 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팔달산 자락에 있는 화성행궁 후원과 팔달산에도 많은 나무를 심었다. 소나무, 뽕나무, 잣나무 등 목재로 사용할 수 있는 나무와 유실수를 적극적으로 심었다. 특히 뽕나무는 양잠의 효과와 더불어 군사용 활의 주 재료이기도 했기에 더 많이 심었다. 탄력성이 강한 뽕나무는 대나무와 함께 활의 주재료 였다.
정조는 자신의 친위도시이자 혁신도시로 조성한 수원부터 우선 나무를 심고 수원 인근의 7개 고을인 광주, 용인, 과천, 진위, 시흥, 안산, 남양에도 나무 심기를 시작했다. 관료들과 시전상인 등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에게 묘목을 기증 받았다.
1789년 7월부터 심기 시작한 나무는 1795년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정조는 정약용에게 그동안 심어진 나무의 숫자를 정리하도록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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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숫자는 놀라울 정도로 많았다. 여러 종류를 합쳐 1천 2백만 9712그루였다. 이로써 수원과 주변 고을은 온통 나무가 가득했고 풍요의 기반이 조성되었다. 이후로도 정조는 계속해서 나무를 심었다. 그리고 관료와 백성들에게 나무 심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정조는 나무를 심는 것은 백년 뒤를 위한 것이 아니라 만년을 내다보는 계획이라고 했다. 정말 길게 내다보는 안목이었다. 조선 후기 나무가 없어지면서 다시 붉은 산이 되었다. 조선의 산은 정조대에 다시 푸르러졌다. 그러나 일제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산은 다시 붉은 산으로 변했다. 정조가 그토록 정성을 들여 가꾸었던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융릉)의 소나무도 일제가 5년간 벌목을 하여 완전히 빈산과 들판으로 만들어 버렸다. 해방이후 나무를 다시 심으면서 국력이 되살아났다.
■ 백성을 위해 새로운 법전을 만들다
1785년(정조 9) 9월 11일 조선의 새 법전이 만들어졌다. 이날 형조판서 이명식은 국왕 정조에게 새로운 법전 <대전통편>이 완성되었으니 이 법전을 반포하여 시행하라고 건의했다.
하루 뒤인 9월 12일에 정조는 경복궁 인정전에서 <경국대전> <속대전> <대전회통>과 함께 조선의 4대법전의 하나로 평가받는 <대전통편> 편찬에 참여7한 여러 신하들에게 전해 받는 의식이 거행되었다. 그리고 정조는 이날 <대전통편>을 반포하라고 지시하고 호남 영남 관서의 감영에 명하여 번각하여 판본을 간직하게 했다.
<대전통편> 풀이하자면 국가의 법전인 대전을 새롭게 편집 정리하여 편찬했다는 것이다.
영조는 조선 건국 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기득권층에 대한 백성들의 의식수준이 높아지고,, 농업중심에서 상공업의 발전이 사회전반에 영향을 주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 건국 이후 354년 만에 새로운 법전인 <속대전>을 완성하여 반포했다. <경국대전>을 계승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속대전>을 반포한지 40년도 안되어 다시 전면 개정을 했을까? 이유는 간단했다. 시대의 변화가 너무나 빨랐기 때문이다. 18세기 후반의 변화와 사회체제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 정조와 조정의 관료들은 <속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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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으로는 법을 준용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특히 다양한 형사사건을 판결하는 형전의 내용이 당대 현실과 너무도 맞지 않았다.
정조는 비록 선대왕의 주도로 만든 것이기는 하지만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백성들에게 억울한 일이 없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경국대전> <속대전>과 자신의 시대에 새롭게 정리한 법전을 모두 하나로 묶어 대전통편을 만든 것이다. 정조는 “차라리 너무 자세하게 하더라도 소략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지시하며 백성들이 법으로 인하여 억울한 피해를 입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정조는 경장(更張)즉 사회의 개혁을 위해 반드시 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개혁을 빨리 단행하지 않으면 조선은 혈맥이 막힌 사람처럼 곧 동맥경화로 죽을 운명임을 정조는 알았다. 지방 백성들의 자존감과 도시는 발전하는데 이를 뒷받침할 법도 없었다. 시대가 변하는데 전혀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나라의 근본법이 그대로라 발전이 가로막히고 있었다. 그래서 정조는 국와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강력하게 법을 개혁했다.
◉ 3장, 인재등용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다
■ 13. 신분을 초월하여 인재를 등용하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니 천하에 이보다 억울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
허균의 소설 홍길동에 나오는 길동이의 탄식이다. 홍판서의 아들로 태0어났으나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정실 자식이 되지 못하고 과거에도 나아갈 수 없어 국가를 위해 제대로 일할 수 없는 처지인 길동이는 끝내 혁명을 꿈꾸는 이가 되었다.
조선이 건국되고 처음부터 서얼제도가 존재한 것은 아니었다. 태조 이성계의 이복형들과 동생들은 조선 건국의 주체였고, 할머니가 천민이었던 정도전도 조선 건국의 주체이자 총재가 되었다. 그러나 제1차 왕자의 난 이후 태종은 비록 부친은 명문거족이기는 하나 외가 쪽으로 천민의 피를 이어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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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정도전 같은 이들이 나타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정실 부인 이외의 자식들은 조정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다 이것이 서얼제도의 시초이다.
처음에는 비록 작게 시작했지만 정실 자식들이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서 서얼들을 배척하기 시작했다. 양민 첩에서 낳은 아들은 서자이고 천민의 딸에서 낳은 자식은 얼자가 되었다. 그래서 이둘을 합쳐 서얼(庶孼)이라고 했다.
그런데 처음 경국대전을 만들 때 서얼을 양반 사대부의 자손이라고 표기를 해서 손자까지로 정했었다. 그 아래의 자손에게는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양반 적자들은 이를 이렇게 해석하지 않았다.
1555년 (명종 10)서얼차별 문제가 논의 되었을 때 자손이라는 말을 ‘아들과 손’만이 아닌 ‘자자손손’으로 해석했다. 그래서 ‘자자손손’이 서얼로 확정되었고, 이들의 신분은 제약에서 영원히 헤어날 길이 없게 되었다.
서얼차별은 이후 계속 정치적으로 문제가 되었고 차별을 철폐하자는 서얼허통 논의도 끊임없이 전개되었다.
정조는 즉위 후 발표한 4대 개혁과제의 두 번째가 인재육성이었기 때문에 서얼 허통을 통한 인재 찾기가 매우 중요했다. 그 과정에서 정말 뛰어난 인재들을 두루 찾을 수 있었다. 성균관에 서얼 출신들이 입학을 했다. 성균관에서 서얼 출신들을 뒤로 앉게 하여 배척하려는 적자들의 횡포에 대해 정조는 성균관 안에서는 적서의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며 모두 나이 순서대로 앉게 했다. 정조의 평등사상과 인재육성 계획이 실현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정조의 서얼허통은 현실에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정조는 1785(정조 9) 2월 17일에 서얼허통을 강력하게 시행하라는 특별 명령을 다시 내렸다, 조정의 관료들이 법을 시행하지 않는 것에 대한 강력한 경고인 것이다. 이러한 정조의 강력한 의지로 서얼 허통은 본격적으로 추진 될 수 있었다.
정조는 서얼 출신들을 자신의 개혁 근거지인 규장각의 검서관으로 임명했다. 검서관은 규장각 초계문신과 달리 규장각의 모든 서적을 정리하고 연구하는 자리였다. 규장각 초계문신이 집중적인 학문 훈련을 위해 선발 되었다면 규장각 검서관들은 이보다 뛰어난 학문의 소유자로서 초계문신의 공부를 도와주며, 독자적인 서적 연구와 도서발간에 중심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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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검서관은 바로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서이수 등이었다.
같은 서얼출신인 백동수는 이덕무의 처남이면서 박지원, 박제가, 유득공 등과 어울리는 사이였다.
당대 최고의 무사로 평가받던 백동수는 협객을 자처하며 의리로 일관했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피해를 입기도 했지만 그의 탁월한 무예실력은 정조의 인정을 받아 국왕의 친위군영 장용영 초관으로 박탁되었다. 백동수는 ‘무(武)로서 문(文)’을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학문에도 조예가 깊었던 무인이기도 했다.
처남 매부 사이인 이들은 우리 역사 속에 매우 큰 족적을 남겼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 역사상 가장 대표적인 무예서인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한 일이다. 정조는 1790년에 장용연에서 이덕무와 백동수로 하여금 조선과 중국 그리고 일본 무예를 총화하여 24가지 기예를 정리하게 했다. 무예의 달인 백동수가 시연하고 이덕무와 그들의 친구이자 후배인 박제가가 정리했다. 오늘날 <무예도보통지>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로 사라지게 된 조선의 무예를 복원하는 일차 사료가 되었다.
정조는 필요한 인재를 서얼에서만 찾지 않았다. 평민 중에서도 찾아내어 국왕 본인과 나라를 위해서 활용했다.
백성들과 나라가 발전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인재이다. 정조가 능력있는 인재를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발탁했듯이 오늘 이 사회의 모든 분야의 리더들도 사사로운 인연으로만 사람을 선발하지 말고 능력과 인품을 갖춘 이를 뽑아 나라와 사회를 위해 일하게 했으면 한다.
■ 정치적 조율을 위한 핵심 인물을 발탁하다
1788년(정조 12) 2월 11일 한 인물을 위하여 정조는 직접 글을 썼다. 정조가 쓴 어필은 사관이 들고 나가 어필을 담아 운반하는 용정에 올려놓았다. 용정이 출발하자 곧이어 장악원 소속의 악대가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용정의 뒤를 따랐다. 임금의 행차나 마찬가지인 모습의 어필을 담은 용정은 한양 도성문을 지나 명덕산으로 향했다. 바로 번암 채제공의 집으로 향한 것이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죽은 날 채제공과 세손이었던 정조를 불러 채제공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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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진실로 나의 사심 없는 신하이고 너의 충신이다."라고 했다. 11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죽은 당일, 할아버지 영조가 가장 신임할 사람이라고 추천했으니 이때부터 정조는 채제공을 마음속 깊이 담아 두었다.
우의정 특별임명 8년 전부터 이곳에 은거해 있던 채제공은 임금의 어필을 받고 감개무량했다. 이제 다시 세상에 나가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게 된 것이다. 정조는 자신의 개혁을 위해 과감한 결단을 내려 채제공을 특별 채용하여 중앙 정치무대에 복귀시킨 것이다.
정조의 이와 같은 특별명령에도 불구하고 교지를 전해야 할 좌직승지 조윤대와 홍인호가 정승을 임명한 전교를 되돌리고는 합문에 나아가 국욍에게 직접 항의하는 반기를 들었다. 도승지 심풍지, 우승지 윤행원, 동부승지 남학문 등 승정원의 모든 승지들이 채제공의 임명을 반대하는 태도를 취하기도 했다.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노론의 조직적 저항이 심각하게 드러난 것이다. 노론은 사도세자를 지지하는 채제공이 임명될 경우 자신들과 정쟁하게 될 것이기에 채제공에게 있지도 않은 죄를 만들어 덮어씌우려 했다. 이들은 정조의 개혁보다는 자신들의 정치적 기득권 유지가 더 중요했다. 정조는 이런 생각을 가진 정치세력들과는 백성을 위한 개혁을 함께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정조는 단호하게 이들 모두를 파직시키며 채제공의 우의정 임명을 강행했다.
정조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복권이었다. 정조는 사도세자의 복권을 위한 가장 중요한 일로 사도세자의 묘소인 영우원의 천봉을 우선시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조선후기 정조시대의 정치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인물 중의 하나가 번암 채제공이다. 남인의 영수로서 정조의 탕평정치의 중심인물이었으며 성호 이익의 학통을 이은 '경세치용' 실학의 주도자이기도 했다. 채제공이 있었기에 이가환, 정약용 같은 남인 계열의 실학자들이 배출될 수 있었고 정국의 안정을 가져올 수 있었다. 특히 채제공은 영조가 사도세자를 폐위시키고 죽이려 할 때 도승지로서 사도세자의 죽음을 반대했던 의리의 인물로 정조로부터 깊은 존중을 받았다. 그런 측면에서 조선 후기 정치사에 있어 채제공은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채제공은 조선 문화의 난숙기에 그 시대가 배출한 전형적인 성리학 정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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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채제공에 대한 당대의 평가 역시 높았다. 정약용은 채제공을 고금에 유례없는 하늘이 내린 인중호걸로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가득하고 모든 백성들과 소통하며 만물을 포용하는 도량이 있는 큰 정치인으로 평가했다.
정약용이 저술한 <혼돈록>에 의하면 남인의 영수 채제공과 노론의 영수 김종수는 정파적으로는 적대적 관계이지만 서로의 실력을 높이 평가하고 정조의 개혁정책에는 함께 연대했다. 이는 높은 경지에 있는 인물들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채제공을 등용하고서야 정조가 가장 소원하던 사도세자의 묘소 이전이 가능해졌다. 정조는 1789년 (정조 13)7월 15일에 영조의 부마인 금성위 박명원의 상소를 계기로 사도세자의 영우원을 수원도호부 읍치(고을의 치소가 있는 곳)가 있는 화산으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우선 수원도호부 관아를 화산 일대에서 교통이 유리한 팔달산 일대로 옮기기로 했다.
정조는 1793년(정조 17) 새해가 시작되고 사도세자의 기일에 즈음하여 수원도호부로 행차를 했다. 이 자리에서 정조는 수원을 유수부로 승격시키고 좌의정으로 재임하고 있는 채제공을 초대 유수로 임명했다.
채제공은 화성유수로 임명받은 뒤부터 아예 수원으로 이주하여 살았고 축성시에도 이곳에 거주했다. 화성에서 거처하면서 화성을 정조의 친위도시로 삼아정국운영의 중심이 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채제공은 화성을 쌓을 때 중요한 3대 원칙을 제시했다.
"빨리 서두르지 말 것, 화려하게 하지 말 것, 기초를 단단히 쌓을 것."
이렇게 해야 축성 이후 백년이나 천년이 지나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 15 개혁을 책임질 핵심인재를 중용하다
◈ 조심태
0 1740(영조 16)이 태어남, 본관 평양,
- 고조 조정익 :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직, 좌승지에 추증, 시호 충숙
0 증조 조유 : 무과급제, 경기수사, 전남우수사 등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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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부친 조경 : 전라병사, 곡산부사, 금군별장, 평안도 병사, 청백리로 천거
0 조심태
- 4세 때 부친별세, 22세 때 모친 별세
- 8척 장신(185Cm), 성격이 장중 과묵
- 28세 선전관, 29세 무과급제, 함경도 부령부사, 흉년에 백성을 구휼하는 데 모범이라는 암행어사의 보고
- 정조는 그를 조정으로 불러 그에게 문과 무를 겸할 수 있게 배려, 45세에 홍충도(충청도) 수군절도사, 46세에 홍충도 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하고 북병사 삼도 수군통제사를 거쳐 좌포도대장으로 임명 조선군영의 중심인물.
- 수원도호부에 향군 5초를 설치하는 주역으로
- 정조는 수원도호부 건설에 열성을 보인 조심태에게 황금갑옷을 선물
(역사상 전무후무한 선물
- 조심태를 더욱 빛나게 한 것은 도시계획 전문가로서 정조의 염원인 화성 신도시 건설을 마무리 함
■ 미래를 이끌어갈 젊은 인재를 양성하다
'풍운지회(風雲之會)'
바람과 구름이 만나 백성을 위한 비를 내리는 것이니 참으로 귀한 만남이다. 다산 정약용연구의 최고봉인 박석무 이사장은 정조와 다산의 만남을 ‘풍운지회’라고 규정한다.
이 두 사람의 만남은 백성을 위한 운명적 만남이다. 1783년(정조 7) 세자 책봉을 축하하기 위한 증광감시에 합격한 이들을 어전으로 불러들였을 때였다. 처음 정약용을 본 정조는 고개를 들라고 하며 “몇 살인고?”라고 물었다. 사실 조선시대 국왕이 대과에 급제한 신하도 아닌 기껏 생원시에 합격한 미관의 청년에게 자신의 용안을 보여주는 일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정약용은임오생이라는 대답을 햇고, 정조는 사도세자가 죽은 임오년, 즉 1762년에 태어난 그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 후 성균관 유생들 전체에게 정조가 <중용>에 대한 80여 조의 질문을 내렸을 때, 최고의 점수를 정약용에게 주면서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남인은 퇴계의 학설을 따르고 노론의 경우는 율곡의 학설을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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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는 것이 조선 후기 사회의 일반적 현실이었다. 서로 한 마을에 살아도 당파가 다르면 평생을 인사도 하지 않고 살던 시대였다. 그러한 시대에 다산은 남인의 명문가 자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율곡의 학설이 옳다고 생각하고 그를 따랐으니 정조의 입장에서 균형을 가진 신하로서 조정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인물로 평가했던 것이다.
다산에 대한 정조의 사랑은 조정에서 발간한 여러 책들을 모두 주어 더 이상 줄 책이 없자 “그렇다면 술이나 한잔 하자꾸나.”라고 말할 정도였고, 술 한 잔 마시고 시를 지을 때는 자신의 어탁을 내어주기도 했다.
이렇게 정조가 다산을 총애한 것은 그가 단지 학문이 높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실제 정조는 다산을 통해 암행어사와 목민관의 모범을 세우려고 했다. 정조는 자신의 총애를 믿고 백성을 괴롭히는 수령들을 다산으로 하여금 탄핵하게 하고, 금정찰방과 곡산부사로 보임하여 백성을 위한 목민관의 역할에 충실하게 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은 다산으로 하여금 채제공의 뒤를 이어 정승을 삼아 자신과 국사를 함께하기 위함이었다.
정조는 정약용을 비롯한 젊은 문신들이 학문만 중요시하고 무예를 천시한다면 장차 나라를 이끌어갈 올바른 인재로 성장할 수 없을 것이라 여겼다. 이들이 처음 훈련도감에 가서 활쏘기를 배울 때 손가락이 부르트고 팔뚝이 붓고 말 타는 솜씨도 서툴러서 보는 사람들 중에 크게 웃지 않는 자가 없었다. 정약용은 며칠이 지나자 활시위를 당기는 솜씨가 점점 능숙해져서 1순을 쏘면 세발을 맞히는 수준이 되었다.
정조는 그 내용을 보고 하루에 100발씩만 쏘게 하고 여가에 시경(詩經)연구를 시키고 마침내 열흘 만에 훈련도감에서 풀어주었다. 모자라는 것을 채워 주어 균형을 갖추게 하는 정조의 인재 육성법이 성공한 것이었다.
1797년 윤 6월 황해도 곡산은 전임 수령의 잘못으로 이계심이란 인물을 중심으로 민란이 일어났다. 그런데 백성들이 그를 얼마나 꼭꼭 숨겨주는지 그를 체포할 수가 없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민란을 일으키고 산으로 도주한 이계심을 잡기 위해 오군영의 병사들을 파견했으나 잡을 수 없었다. 그렇던 그가 정약용이 곡산부로 들어가는 길 앞에 스스로 나타났다.
정약용은 이계심을 포박하거나 목에 칼을 채우지 않고 관아로 데려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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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유를 물었다. 이계심은 정약용에게 백성들의 고통을 적은 12조목을 건넸다. 정약용은 이런 정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이계심을 무죄 방면했다.
이계심의 무죄 석방 소식이 전해지자 백성들은 반겼지만 조정에서는 수령의 권위를 무너뜨렸다고 그를 파직해야 한다는 정쟁까지 일어났으나 정조가 정약용을 칭찬하면서 정쟁은 일단락 됐다. 정약용은 이때의 일을 기반으로 <목민심서>와 <경세유포>를 쓸 수 있었다.
훗날 위당 정인보 선생은 두 사람의 관계를 이렇게 표현했다.
“정조는 정약용이 있었기에 정조일 수 잇었고. 정약용은 정조가 있었기에 정약용일 수 있었다. 무릇 리더는 자신과 함께 하는 동료 및 후배들이 무엇이 뛰어난 자질이 있는지 파악하여야 한다. 또한 무엇이 부족한지도 알아야 한다. 넘치는 부분은 덜어내야 하고 모자라는 부분은 채우게 해야 한다.
■ 규장각 건립과 초계문신 임명으로
인재육성의 기반을 마련하다.
1778년(정조 2) 6월 4일, 창덕궁 인정전 안과 전각 밖의 마당에는 만조백관들로 가득했다. 할아버지 영조의 3년 상을 마친 정조가 자신의 국정운영에 대한 생각을 천명하기 위해 모든 관료들을 모은 것이다.
이 자리에서 정조는 네 가지 개혁과제를 천명했다.
1. 백성들의 재산을 부유하게 하겠다.
2. 인재를 육성하겠다.
3. 국방개혁을 통한 자주국방을 이루겠다.
4. 국가 재정을 안정시키겠다.
이 네 가지는 재위 기간 정조의 핵심과제였고 지속적으로 개혁을 추진했다.
정조는 자신이 국왕으로 등극한 18세기 후반의 상황이 중병에 걸린 환자와도 같다는 시대의 진단을 내리고 인재 양성이라는 비전을 제시했으며, 교육이라는 해결 방안을 통해 변화를 추구했고 이러한 비전의 성취방안을 규장각과 초계문신제에서 찾았다.
정조는 인재 육성이 조선의 개혁에 가장 소중한 것이라 생각했고, 이를 위한 기반을 조성했다. 그것이 바로 규장각이었다. 원래 규장(奎章)이란 임금의 어필과 어제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것을 모아두는 제도는 중국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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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었다. 하지만 고사를 따른다는 명분에 의지해 실질적으로는 새로운 정치적 문화적 기구를 마련했던 것이다.
규장각이란 역대 국왕의 어필과 초상화 등을 보관하는 동시에 왕실 소유의 다양한 서적들을 소장하기 위한 도서관도 겸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는 겉모습에서 드러난 형태이고 실제 규장각설치의 본래 목적은 바로 정조의 개혁정치의 이데올로기를 만들고 다양한 정책을 개발하고 유학 및 실학의 발전을 연구하는 곳이었다.
규장각이라고 하면 흔히 왕립 도서관의 기능을 떠올리지만 실제로는 조선의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는 학술기관으로서의 기능도 강하고 특히 정조의 개혁정치를 뒷받침하기 위한 젊은 인재들을 육성하고 정조의 정책을 지지하는 정치기구로서의 기능도 존재했다.
정조는 파격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그것은 바로 38세 미만의 학자들을 선발하여 초계문신으로 임명하고 이들을 집중적으로 학습시키는 것이었다. 이들 학자들은 모두 문과 급제자들이었으며 대과에 합격하여 어느 정도 관료 생활을 했던 이들 중에서 장래에 조선을 위해 일할 만한 인재들을 초계문신으로 선발했다.
초계문신은 1781년(정조 5)에 20명을 선발한 것을 시작으로 정조 말년인 24년까지 모두 138명이 선발되엇다.
초계문신으로 선발된 이들은 조정으로부터 정상적인 급여를 받고 오로지 공부만 했다. 물론 이 공부는 국왕 정조와 함께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국왕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기 위한 연구가 이들 초계문신을 훈련시키는 것이었고, 이들은 훗날 조정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정약용, 정약전, 이승훈 등 남인 계열의 학자들과 훗날 정조의 사돈이자 순조의 장인이 되는 김조순과 순조를 낳은 생모유빈 박씨의 오빠인 박종경 등 노론의 젊은 학자들, 뛰어난 행정가이자 중농주의 실학을 깊이 실천한 서유구를 비롯한 소론 계열의 학자들이 모두 망라되어 학습을 진행했다.
정조 자신이 솔선수범함으로써 초계문신에게 학문을 독려했으며, 초계문신을 교육함에 있어 열정과 헌신의 자세로 임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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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 유생의 의견도 깊이 새겨듣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훌륭한 인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훈련이 바로 청람(聽覽)이라고 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본시 날 때부터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 주는 이들도 있지만 이러한 사람은 흔하지 않다. 청람을 하는 것은 훈련을 통해 이루어지기 마련인데 리더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정조는 달랐다. 당대 최고의 지위에 있고, 누구보다 뛰어난 지식을 지니고 있으며 자신이 키운 엘리트 집단 또한 있음에도 불구하고 초야에 은거한 이들의 의견을 적극 수용하고자 했다.
그는 즉위 10년에 자신에 대한 어떠한 비난도 좋으니 국가를 위한 좋은 제안을 해달라고 했다. 이때 엄청난 제안이 들어왔다. 이때의 제안 중에 박제가의 ‘병오소회 丙午所懷)’가 가장 유명한데, 정조는 이 많은 제안들을 모두 읽고 국가 정책에 반영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자 한 것이다. 정조는 시골에 은거한 유생들의 의견도 적극 들었다.
조선에 성리학이 수임된 지 300여 년이 지나 고루하고 비생산적인 학문으로 평가되는 성리학을 대신하여 ‘실학’이라는 이름으로 ‘경세치용(經世致用)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위한 학문이 등장했다.
우리가 흔히 중농주의와 중상주의로 이야기하고 있는 실학은 조선 후기 문명을 한 단계 성장시켰으며 백성들의 민권의식과 사회전반의 경제를 향상시켰다.
■ 지역차별을 철폐하여 인재를 키우다
정조가 했던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가 바로 지역 차별을 극복하는 통합의 정치를 한 것이다. 정조시대 이전에 극심했던 지역 차별은 평안도 함경도 지역 그리고 영남지역의 백성들에게 크나큰 고통을 주었다. 정조는 즉위하면서 이러한 차별부터 없애버렸다. 비록 선대왕대에 추진되었던 정책이었다 하더라도 백성들의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라면 과감하게 없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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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것이 바로 정조의 통 큰 리더십이다.
정조 시대 이전에 가장 큰 차별을 받은 곳은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이었다이징옥과 이시애의 난 이후 서북 사람들의 무과 시험을 금지 시켰다. 그 결과 서북지역 사람들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도 의병활동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적들에게 협조하기도 하였다. 1788년 (정조 12) 친위군영인 장용영을 창설 하면서 서북 무사들을 적극 활용하였다. 그리고 영남 지방의 사대부 등용도 추진되었다.
실제 영남 지역의 남인들은 무신란에 깊숙이 개입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영조는 그들이 매우 깊이 참여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영조는 영남지역 남인들의 문과 시험 금지를 명령했다. 입신양명은 조선 사대부들에게 최고의 가치였는데 문과 시험을 볼 수 없다니 이런 충격이 어디 있겠는가.
정조는 영조대 영남 지역에 대한 차별을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다. 탕평정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여러 과정을 거쳐 영남 남인의 등용에 저극적인 태도를 취했고 그 대표적인 예가 도산별과의 시행이다. 응시자만 7,228명이었고 시권만 3,632장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정조는 직접 시권을 살펴보고 합격자를 격려했다.
영조대에 무신란으로 영남 남인은 정치적으로 소외되었지만 정조대 탕평책의 적극적인 시행으로 다시 중안정계에서 부각되었다.
제1부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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