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는 어떻게 몰락하는가

2020. 12. 24. 10:20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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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는 어떻게 몰락하는가

- 자신들이 정의라는 독선! 공정을 무시하는 반칙과 특권!

자기들도 믿지 않는 평등의 위선

■ 진중권 지음

0 우리시대의 미학자이자 논객

0 서울대 미학과 졸업, 서울대 석사

0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에서 ‘언어구조주의’ 이론 공부

0 저서

미학 스캔들, 감각의 역사, 이미지 인문학 (1,2). 미학오딧세이(1,2,3)

서양미술사 (1, 2, 3, 4) 외 다수

-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 : 강양구, 권경애, 김경율,

서민, 진중권 공저

0 정의당, 선거대책 위원장 등

◉ 아니라고 말 할 사람

조국 사태로 진보는 파국을 맞았다. 믿었던 정의당마저 그의 임명에 동의했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조용히 탈당계를 내는 것뿐이었다. 그로부터 한 달 후 JTBC 기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처음에는 확인을 거부했지만, 그의 설득에 결국 마음을 바꾸었다. 탈당이라는 정치적 행동을 해 놓고 그 사실을 감추는 것도 비겁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을바람이 불 무렵 나의 정의당 탈당 사실이 밖으로 알려졌다. 팔로워 86만에 달했던 트위터 계정마저 닫고 3년 동안 조용히 지내던 차였다. 게다가 이번엔 대중의 뒤에 권력이 있었기에 싸울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 즈음에 낸 책의 서문에 이렇게 쓴 것으로 기억한다.

“불의를 정의라 강변하는 저 거대한 맹목적 힘 앞에서 완벽한 무력감을 느낀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광기를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싸움을 시작하려고 마음먹고 주변부터 정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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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과 탈당을 마치고 10년간 놀렸던 페이스북 계정을 되살려 글질을 시작했다. 반응은 뜨거웠고, 여기저기서 기고 요청이 들어왔다. 그중 중도적인 <한국일보>를 골랐다.

최근 세상이 많이 낯설어졌다. 얼마 전 한 가수가 고대 철학자를 불러내 물었다. “세상이 왜이래?”그만의 느낌은 아닐 게다. 이 책의 글들도 바로 그 물음에서 출발했다. 세상이 왜 이렇게 변했는가. 사회는 왜 아직 이 모양인가. 정권의 지지자들은 왜 저렇게 극성스러운가. 민주당은 어쩌다 저 꼴이 됐는가. 대통령은 대체 뭐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많던 지식인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랭보는 시인을 ‘보는 자’(le voyant)'로 규정한 바 있다. 논객도 다르지 않다. 그의 사명도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을 조직하는 데에 있다. 논객은 나팔수가 아니라 보는 자가 되어야 한다.

여당 지지자들은 나를 ‘극우 논객’이라 부르나, 예이CM 시 속의 아일랜드 비행사처럼 “나는 내가 맞서 싸우는 사람들을 증오하지 않고, 내가 위해서 싸우는 그 사람들을 사랑하지도 않는다.”그저 “그 모두 진정이라 우겨”말할 때 “홀로 일어나 ‘아니’라고 말할” 사람이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버티고 있을 뿐이다.

2020년 가을 진중권

◉ 제1부 진리 이후의 시대

01 대안적 사실 - 실재보다 강렬한 허구

■ 이른바 ‘대안적 사실’

내가 근무하던 대학에서 교수가 자기 딸의 대학 입시를 위해 총장의 표창장을 위조 했다. 그녀가 위조한 것은 표창장만이 아니었다. 딸과 아들의 상장과 수료증 일체를 위조하거나 허위로 발급했다. 이번 일이 터지기 전, 이미 학교에는 그에 관한 소문이 나돌았다고 한다. 이것이 동양대 ‘안’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 즉 사실(fact)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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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학교 바깥에는 이와는 전혀 다른 사실이 존재하고 있었다. 거기에 따르면 표창장은 진짜이고, 총장이 거짓말을 했으며, 그 배후에는 자유한국당과 검찰 권력이 있다. 이들 적폐세력이 개혁을 좌절시키기 위해 법무장관을 공격했으며 정경심 교수는 그 더러운 음모의 순결한 희생양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학교 ‘밖’을 지배하는 또 다른 사실, 즉 ‘대안적 사실이다.

문제는 존재하는 ‘사실’보다 허구에 불과한 이 ‘대안적 사실’의 효과가 더 강렬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강렬했던지 그것이 허구임을 밖으로 알리기 위해 내가 학교를 그만 둬야 할 정도였다. 당시 MBC의 <피디수첩>, TBS <뉴스공장>, ‘유시민의 알릴레오’, ‘오마이뉴스’등 친여 매체와 친문 유튜브 채널들이 이 ‘대안적 사실’의 제작과 유포에 조직적으로 가담했다.

■ 기꺼이 속고 싶은 대중의 욕망

왜 그랬을까. 그들 모두 정경심 교수의 거짓말에 속은 것일까. 아니다 그들도 그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이는 그들이 보도에서 뭘 드러내고 뭘 감추려 했는지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정 교수의 PB(Private Banking 은행에서 거액 예금자를 상대로 수익을 올릴 수 있도록 해주는 금융포트폴리오 전문가) 김경록씨의 녹취록을 공개할 때 유시민 씨는 그가 “내가 봐도 증거인멸이 맞죠”라고 말한 부분은 의도적으로 뺐다. 감추어야 할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동양대 표창장도 마찬가지다. 유시민 씨는 이미 그게 위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내가 알렸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때 그가 취한 태도, 문제의 표창장이 가짜라 하더라도 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대안적 사실’을 제작하여 현실에 등록하면 그것이 곧 새로운 사실이 된다는 투였다. 그는 그 일을 해 낼 수 있을 것이라 자신하며 ‘아무 걱정 말라’고 불안해하는 나를 안심시키기까지 했다.

사실을 뜻하는 팩트(fact)의 어원은 라틴어 팍툼(pactum)이다 . 팍툼은 ‘만들어진’이라는 뜻이다. 사실이란 ‘이미 일어난 일로 변경할 수 없는 것’이지만, 유시민 씨에게 사실이란 ‘얼마든지 제작할 수 있고 언제라도 변경할 수 있는 것’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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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을 그들은 사실을 날조하는 ‘기만’이 아니라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는 ‘실천’으로 이해한다.

대중의 상당수는 이렇게 유시민, 김어준 같은 선동가의 말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거기에 속아주고 있다. 하긴, 자기부터 솔선해서 속아줘야 제 주변의 대중도 따라서 속을 것이 아닌가. 그렇게 하여 주변의 모든 사람이 선동가들의 말에 속거나, 아니면 최소한 속은 척을 해줄 때 그들이 제작한 대안적 사실, 즉 ‘표창장이 진본’인 가능 세계는 정말로 현실이 되는 것이다.

■ 기술적 상상력은 미래를 향해야

우리 눈앞에 펼쳐진 디지털의 현실도 한때는 한갓 잠재성, 즉 스티브잡스 같은 IT그루들의 상상으로 존재했다. 그 가상이 어느 새 현실이 된 것이다. 이렇게 오지 않은 미래의 버전을 기술로 실현하는 능력을 ‘기술적 상상력’이라 부른다. 디지털 시대의 대중은 이 기술적 상상의 뜨거운 욕망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그 욕망을 선동가들이 반동적 목적에 오용하고 있는 것이다.

기술적 상상력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향해야 한다. 그리하여 언젠가 다가 올 미래에서 바람직한 사회적 비전을 가져와 지금 여기에 실현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선동가들은 대중이 가진 이 기술적 상상의 욕망을 흘러간 과거로 데려가, 이미 벌어져서 되돌릴 수 없는 과거의 잘못을 부정하고 은폐하고 변명하는 가망 없는 노력에 낭비하게 만든다.

선동가들은 대중이 가진 이 기술적 상상의 욕망을 고작 반동적인 목적에 사용하고 있다. 그것으로 그들은 다른 이들의 입을 틀어막고, 사회를 편으로 갈라 아마겟돈의 결전을 벌인다.

* 아마겟돈 : 용, 짐승, 거짓 선지자 등의 악의 세력과 하느님이 대적하여 싸울 최후의 전쟁터

대중은 그들이 지어낸 허구를 자신의 세계로 알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 꿈에서 굳이 깨어나고 싶어하지 않는다. 눈을 떠봤자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비루한 현실뿐이라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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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2 실재의 위기 : 지루한 현실과 재밌는 허구

■ 신뢰도에서 선호도로

KBS에서는 분기마다 ‘미디어 신뢰도 조사’라는 것을 한다. 그런데 지난해인 2019년 4분기 조사 결과에서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JTBC의 추락과 MBC의 상승이다. 2019년 후반 JTBC는 신뢰도가 급락(20.6% →11.7%)한 반면 MBC는 신뢰도가 대폭 상승(5.1%→12.7%) 했단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요인은 하나 조국 사태밖에 없다. 서초동 집회 현장에서 군중들이 JTBC 기자에게 몰려가 “물러가라”고 외치던 장면, 그 충격작인 장면은 이 상황을 시각적으로 상징한다.

돌아보건대 조국 사태 국면에서 JTBC는 저널리즘 원칙에 충실하게 사실을 보도했다. 그런데 결과는 신뢰도 급락으로 나타났다, 반면 MBC는 노골적으로 당파적 입장에서 피의자에게 유리한 ‘대안적 사실(허구)’을 창작했다. 특히 ‘피디수첩’은 그 목적을 위해 야바위에 가까운 날조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데도 MBC의 신뢰도는 같은 시기에 급격히 상승했다. 이는 대중의 상당수는 사실보다 허구를 즉 날조된 대안적 사실을 더 신뢰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뉴스의 비판적 수용자는 사라졌다. 오늘날 대중은 자신을 콘텐츠의 소비자로 이해한다. 그들이 매체에 요구하는 것은 사실의 전달이 아니라 니즈의 충족, 그 니즈란 물론 듣기 싫은 ‘사실’이 아니라 듣고 싶은 ‘허구’다. 그 수요에 맞추어 매체들은 대중에게 듣기 좋은 허구, 흥미로운 대안적 사실을 창작해 공급하게 된다. 이번 조사에서 신뢰도가 오른 매체들은 대체로 그랬다. MBC의 상승폭이 컸던 것은 날조의 정도가 그만큼 심했다는 뜻이다.

■ 비루한 현실에서 신나는 환상으로

“현대의 대중들은 사실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비루한 일상에 충분히 지쳐있다. 그들에게 제공해야 할 것은 멋진 환상이다.” 괴벨스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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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디지털 시대의 대중은 진위가 아니라 호오의 기준으로 세상을 본다. 그들은 ‘지루한 사실’보다는 ‘신나는 거짓’을 선호한다.

호오의 감정이 이성적 판단을 대체할 때 대중의 정신은 유아의 단계로 퇴행한다.

우리의 어른들은 정의의 기준에 따라 진영을 판단하지 않는다. 먼저 진영부터 정하고 거기에 정의의 기준을 뜯어 맞추려 한다.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대중은 결국 확증 편향에 빠져 제 믿음에 배치되는 사실은 배제하고, 제 견해에 위배되는 의견은 배척하게 된다.

인터넷 대안 매체들은 심의 규정을 준수할 의무가 없어 비교적 자유로이 ‘허구’를 창작한다. 문제는 매체가 전하는 사실과 대안 매체가 만드는 ‘대안적 사실’이 번번이 충돌한다는 데에 있다.

■ 레거시 매체(인쇄매체)의 위기

 

심각한 문제는 최근엔 레거시 매체들마저 대안매체의 행태를 뒤쫓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2017년 정권교체 이후 대안 매체의 운영자들이 대거 레거시 매체로 진출 했다. 나꼼수 멤버 정봉주는 SBS의 <정봉주의 정치쇼>, 김어준은 SBS <블랙하우스>와 TBC의 <뉴스공장>, 주진우는 MBC의 <스트레이트>, 김용민은 SBS <뉴스브리핑>과 KBS의 <김용민 라이브> 의 진행을 맡았다. 이들을 통해 이른바 ‘나꼼수 스타일’이 그대로 레거시 매체로 옮겨졌다.

한국의 미디어 시장에는 이들 방송에 대한 탄탄한 수요가 존재한다. 객관성을 잃은 편파적 진행, 왜곡에 가까운 당파적 보도의 적절성을 묻는 질문에 김용민은 그것은 “시청률로 판단해야 한다”라고 대답했다.

올바름은 시청률로 증명 된다. 원래의 레거시 매체마저 시청률로 입증되는 그들의 올바름(?)을 보고 결국 그들의 방식을 그대로 따르게 된다. 예를 들어보자. 2018년 김어준의 <블랙하우스>는 성추행 의혹을 받던 정봉주 전 의원의 알리바이를 조작해 주었다가 들통이 난 적이 있다.

김어준이야 그렇다 치자. 문제는 다음이다. 1년 반 후 MBC <피디수첩>도 같은 수준의 조작방송을 내보냈다. 수법도 비슷했다. 전문가를 내세워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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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않은 원본 표창장에 실제 인주가 묻었음을 증명(?)한 것이다. ‘고로 위조일 리가 없다.’ 충격적인 것은 이 날조의 주인공이 한학수 피디였다는 사실이다. 황우석 사태의 저널리즘 영웅이 일거에 제2의 김어준으로 전락한 것이다. 하나의 극에서 반대의 극으로, 이카루스의 추락이 이보다 더 극적일까?

 

■ 버티고 현상

유시민 씨는 대안 매체가 대중에게 신뢰를 받는 것은 그동안 레거시 매체(인쇄매체)가 거짓말을 해 온 탓이라고 주장한다. 한마디로 레거시 매체가 전달해 온 세계가 가짜이고, 대안 매체가 창작하는 ‘대안적 세계’야말로 진짜라는 것이다.

원래 대안매체는 레거시 매체를 흉내 낸 짝퉁이었으나 그 짝퉁이 어느 새 원본의 자리를 가로채고 외려 원본을 짝퉁이라며 배척하는 셈이다. 대안 매체가 허구를 창작해도 조회수가 높으면 현실에 사건으로 등록된다.

◉ 03 매트릭스와 저지 전략

세계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 매트릭스 리로디드

사실 문재인 정권은 ‘촛불정권’이라 하기 어렵다. 원래 민주당 사람들은 탄핵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조국 교수는 세 가지 이유를 들어 ‘탄핵불가’를 외친바 있다. 먼저 소추안 통과에 필요한 의석이 부족하고, 통과돼도 황교안 당시 총리가 권한을 대행하며, 헌법재판소의 구성상 인용을 장담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이 정권사람들은 원래 ‘촛불’을 든 민중의 힘을 믿지 않았다. 말이 촛불정권이지 문재인 정권은 이른바 ‘친노폐족’이 운 좋게 국정농단 사태를 만나 권력을 거저 얻은 것에 더 가깝다.

그런데도 권력은 자신을 성공적으로 ‘촛불정권’이라 브랜딩 했다. 그리고 스스로 적폐청산의 역사적 사명을 짊어졌다. 개혁의 주체는 자신, 대상은 물론 전 정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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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업이 일단락되자 그들은 새로 검찰, 경찰, 법원, 언론을 청산해야할 적폐로 꼽았다. 청산 작업의 논리적 전제는 ‘정권은 깨끗하고 바깥은 더럽다’라는 것, 권력이 40% 지지자들의 머릿속에 날조해 심어준 환상이다.

조국 사건도 비슷하다. 그의 아내가 표창장을 위조하다가 발각되었다. 이는 노무현에서 조국으로 이어지는 신통기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돌발사태였다. ‘혹시 이 거룩한 분도 실은 적폐가 아닐까?’ 이 의심의 확산을 막으려 권력은 대학총장의 뒤를 캐 그를 거짓말쟁이로 만들어 버렸다.

울산 시장 선거개입 사건도 마찬가지다. 정권의 지지자들은 그런 짓은 ‘이명박 근혜’의 적폐정권에서나 하는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그 환상을 깨는 돌발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은 검찰의 서랍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 사건이 1년 8개월 만에 서랍에서 나왔을 때만 해도 권력은 이 일련의 돌발 사태가 무난히 저지되리라 믿은 듯하다. 검찰총장을 세운 것이 바로 자기들이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총장이 하필 윤석렬이었다. 그들의 프로그램에서 윤석렬은 곧 치명적 버그(Bug 악령)로 드러난다.

■ 검찰개혁의 프레이밍

권력은 얼마 전까지 개혁의 ‘주체’였던 검찰을 개혁의 ‘대상’으로 격하해 버렸다. 적폐를 청산하던 검찰은 졸지에 적폐로 전락했다. 권력을 향한 수사는 개혁에 대한 저항으로 간주됐고, 그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권력은 지지자들을 서초동(촛불 집회 장소)으로 불러냈다.

솔직히 나는 ‘촛불 정권’의 환상을 깨고 싶지 않았다. 외려 권력이 이 방식을 사용해 그 환상을 계속 유지하기를 바랐다. 그렇게 했다면 ‘촛불 혁명’이라는 그 권력의 연극을 도울 의향까지 있었다. 하지만 권력은 부패한 자들을 품에 끌어안았다. 그리고 자기들을 맹신하는 40% 지지자만을 위해 ‘그 부패한 자들이 부패하지 않은 대안세계’를 날조하기 시작했다.

■ 두 개의 꿈

권력은 부끄러움을 감추는 대신 아예 모르기로 한 모양이다. 비리가 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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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아니고, 부패가 부패가 아니며, 범죄가 범죄가 아니라고 강변하다가 사실과 도덕의 기준마저 무너뜨렸다. 그로써 사회는 논리와 윤리의 아노미 상태에 빠져 들었다.

◉ 04 세계를 만드는 방법

공작정치, 세계를 날조하다

1933년 2월 27일 독일 제국의회 의사당이 화염에 휩싸인다. 방화의 흔적이 뚜렷했다. 경찰은 현장에서 한 네델란드 청년을 체포했다. 마리누스 판데르 루베. 그는 벽돌공이자 공산주의자였다. 소식을 듣고 히틀러와 괴링 등 주요 나치 인사들이 현장에 속속 도착했다. 불타는 의사당을 보며 괴링은 “공산당의 봉기가 시작되었다”라고 말했다. 히틀러는 앞으로 공산당들은 보이는 족족 쏴 죽일 것이라며 “사민당원들도 봐주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 그는 정말 방화범이었을까

제국의회 방화사건은 나치 독재의 신호탄이었다. 이를 빌미로 베를린에서만 1,500명의 공산당원이 체포된다.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처음으로 강제수용소가 지어진다. 그 뒤로 언론, 출판, 집회, 결사 등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광범위하게 제한하는 조치들이 이어졌다. 그 네델란드 청년이 나치가 그토록 원하던 일을 알아서 해준 셈이다. 히틀러는 이 사건을 “신이 주신 신호”라 불렀고 괴벨스는 일기에 “하늘이 주신 기회”라 적었다.

나치는 처음부터 이 사건을 공산당의 소행으로 몰아갔다.

정말 루베가 방화사건의 범인이었을까? 법정에서 그는 “독일 노동자 계급의 투쟁을 촉구하기 위해” 저 혼자 한 일이라고 말했다. 최근 그 현장에 있었던 나치돌격대(SA) 장교의 일기가 새로 발견되었다. 거기에는 자기들이 청년을 그리로 데려갔으며 현장에 도착했을 때 의사당은 이미 타오르고 잇었다고 적혀 있었다. 진실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설사 이 청년이 방화를 한 게 사실이라도 그 배후에 공산당이 있다는 나치의 주장은 근거 없는 모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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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이 사건은 ‘음모론’을 활용해 세계를 날조하는 방식의 전형을 보여준다. 청년은 결국 사형선고를 받고 기요틴에 목이 잘렸다.

■ 수사지휘권 발동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히틀러처럼 화를 내며 수사지휘권을 발동했다. 검찰청 법에는 “법무부 장관이 구체적 사건에 대하여는 검찰총장만을 지휘감독”하게 되어 있다. 검찰의 중립성을 보장해주려고 독일과 일본의 법을 참조해 만든 조항이다. 이 조항의 원조인 독일에선 이제까지 수사지휘권이 발동된 사례가 아예 없다. 일본의 경우 1954년 뇌물 청치인의 사건을 불구속 지휘한 사례가 유일하다. 당시 법무대신은 여론의 비난에서 사퇴했다.

이렇게 엄청난 수사지휘권을 고작 사건을 배당하는 데에 썼으니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수사의 대상도 사기꾼과 정치꾼과 어용언론의 협잡으로 지어낸 잡스러운 사건(강요미수). 결국 모기 한 마리 잡겠다고 ICBM을 발사한 격이다. 흥미롭게도 장관은 아직 수사도 안 끝난 상황에서 벌써 사건의 셩격을 “검언유착”으로 규정하고 들어갔다. 결론은 이미 내려져 있다는 이야기다. 당연히 수사도 이분의 뜻에 맞추어 진행되었다.

수사자문단 소집도 불허하고, 대검의 지휘도 중단시키고, 특임검사 제안도 거부하고 수사를 제 사람에게 맡겼다. 권력의 지시에 따른 편파수사와 무리한 기소 , 자기들이 개혁해야 한다고 조장했던 그 부정적인 검찰상을 몸으로 보여준 셈이다. 공소장의 공개를 막았던 장관은 이번엔 아마 공소장을 공개할 것이다. 피의사실 공표를 비난하던 어용언론들은 피의사실을 대대적으로 떠들어댈 것이다. 뭐가 달라졌는가.

한편, 그 사건의 또 다른 절반인 지 씨와 MBC에 대한 수사는 거의 진전이 없다. 제보자 지 씨는 소환에 불응한 채 SNS로 검찰을 조롱하는 재미에 산다. “술 한 잔 하실 분들 12시까지 대학로 여기로 오세요. 서울지검 검사님들도 오시면 ‘제보자X’현장 체포 가능합니다. ‘법무부장관과 서울중앙 지검장이 제 편이라 믿는 게다. 여기서 우리는 상대에게는 가혹하고 내 편에는 관대했던 과거 검찰의 모습을 다시 본다. 이게 개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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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력은 늘 그 자리에

개혁한다고 그 난리를 치더니 고작 검찰을 다시 권력의 개로 길들여 놓았다. 그래도 자기들이 검찰의 독립성을 훼손했다는 것은 아나보다. 민주당 윤호중 의원이 애써 변명한다. “검찰은 중립을 지켜야지, 독립성을 지켜야 할 조직이 아니다.” 이게 무슨 헛소리인가. 검찰에 독립성이 필요한 것은 그것이 중립성의 전제이기 때문이다. 독립성 없는 조직이 어떻게 중립적일 수 있겠는가. 식민지 조선이 어디 스위스였던가?

슬픈 것은 권력을 감시해야 할 언론이 세계를 날조하는 이 권력의 공작을 외려 적극 거들었다는 것이다. 검찰 종장에 대한 1차 공격은 <한겨레>를 통해 이루어졌다. <한겨레>는 총장에게 성접대 누명을 뒤집어 씌웠다. 2찰 공격은 ‘뉴스파티’가 맡았다. 타킷은 총장의 장모였다. 본인이 안 되니 가족을 공격한 것이다. 3차 공격에는 MBC가 동원되었다. 이번에는 총장의 측근이 타킷이 되었다. 도대체 공작을 하지 않으면 정권유지가 안 되나.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조국 사태 때는 금융시장의 수상한 브로커들을 앞세워 언론 플레이를 했다. 이번 사건에는 사기, 횡령, 협박 등 전과 5범이 ‘제보자’로 기용되었다. 한명숙 복권운동에서는 7년이나 지난 시점에 복역 중인이가 느닷없이 폭로를 하겠다고 나섰다. 그의 법률대리인은 신장식 변호사, 제보자 지 씨의 법률 대리인과 같은 법무법인 민본 소속이다. 이게 그저 우연에 불과할까? 패턴이 반복되니 수법이 빤히 들여다보인다.

지금 권력으로부터 공격을 받는 검사들은 과거 ‘적폐청산’수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던 이들이다. 그때는 그들을 입에 침이 마르게 칭송하더니 그 칼이 자기들을 겨누자 태도가 돌변한다. 어지간히 급했나 보다. 정권은 바뀌어도 이렇게 권력은 늘 그 자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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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5 음모론의 시대 : 과학을 대신하는 이야기

■ 원인 대신 범인을 찾아라

음모론이란 소수의 사람 혹은 집단이 은밀한 공모로 세상을 움직인다고 보는 이론이다. 하지만 어디 세상이 인간의 뜻대로 움직여지던가. 인간이 어떤 행동을 하던 그 행동은 대개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 이어지곤 한다. 이렇게 인간의 행동이 의도에서 벗어나 종종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낳기에 그 변수를 통제하려고 사회과학이 존재하는 것이다.

음모(conspiracy)라는 말 속에는 '함께(con)+숨쉬다(spirare)'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음모란 소수의 사람들이 숨 닿을 거리에서 끼리끼리 속삭인다는 뜻이다. 사회란 각 개인, 계층, 계급의 욕망이 필연적 법칙이나 우연적 계기와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합력(合力)에 의해 움직인다. 하지만 고대에는 사회과학이 없었기에 그 시절 사람들은 모든 사회현상을 신화로, 즉 신들이 끼리끼리 속닥거려 세상을 움직인다는 ‘이야기’로 설명하곤 했다.

음모론의 절반은 사실, 나머지 절반은 상상이다. 절반의 거짓이 그냥 거짓이듯이 절반의 사실도 실은 허구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이 허구는 사실의 자격을 요구한다. 그 요구를 반박하는 것은 아주 번거롭고 피곤한 일이다.

■ 음모론적 상상 VS 합리적 추론

음모론은 일견 합리적 추론의 외양을 띠나 그것과 구별되는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음모론은 대개 비경제적이다. 그것은 설명해 주는 것보다 설명해야 할 것을 더 많이 남긴다. 가령 개표조작 음모론은 득표율에 보이는 이상 현상을 설명해준다.

둘째, 음모론은 편집증적이다. 그래서 고려해야 할 수많은 요인 중 특정한 것에만 집착한다. 예를 들어 어느 의사는 MRI사진 한 장만 보고 박주신의 병역비리를 확신했다. 민주당 인사의 자제가 어떻게 이명박 정권하에서 병무청의 특혜를 받고, 공개검증에 참여한 세브란스 의료진을 어떻게 소문도 안 나게 전원 매수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오직 MRI 사진에만 사로잡힌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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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머리에는 이런 상식적인 물음들이 떠오를 자리가 없다.

셋째, 음모론은 명상적이다. 그리하여 음모의 효과를 과대평가한다. 이 세상은 소수의 몽상가들이 움직이기에는 너무나 거대하고 복잡하다.

■ 과학 이후의 이야기

우리나라에서 음모론의 대명사는 김어준이다. 그의 음모론은 어느 감독의 손에서 영화 <그날 바다>로 빚어졌다. 누군가 세월호를 고의로 침몰시켰다는 이야기다. 최근 발표된 2탄 <유령선>에서는 상상력이 더 대담해진 모양이다. 세월호 항적을 속이려 무려 1,000여 척의 선박 데이터를 조작했단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에 앞서 이들이 대답해야 할 상식적 질문이 있다. ‘대체 박근혜 정부에서 세월호를 고의로 침몰시켜 얻을 이익이 뭔가?

2012년 18대 대선 후에도 그는 음모론을 펼친바 있다. 분리기에서 나온 미분류표 중 박근혜 표가 문재인 보다 1.5배(K값)가 나왔는데, 이것이 정권에서 개표를 조작한 증거라는 것이다.

음모론은 ‘과학 이후’의 이야기라서 과학(?)의 지원을 받곤 한다. 전문가들의 개입은 사실과 상상이 뒤섞인 허구에 과학의 외관을 입힌다. 그들의 권위에 기대어 시민들은 자기가 합리적으로 추론한다는 착각에 빠진 채 미신을 믿게 된다. 이렇게 음모론에 동원되는 순간 과학은 신화의 도구로 전락한다. 이는 위험한 일이다.

■ 공공의 영역에 침투한 음모론

종교적 심성이 유난히 강한 사람이 있듯이 남달리 음모론적 감성이 강한 이들이 있다. 그래서 사회에는 늘 이러저러한 음모론이 제기되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다만 새로운 것이 있다면 최근에는 음모론이 진지해야 할 공론의 장에까지 침투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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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팬덤의 정치

◉ 06 팬덤 정치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지난 1월 광주의 지하철역에 대통령의 68회 생일을 축하하는 광고란다. “밝은 달은 우리가슴 일면단심일세” 67회에는 서울역 옥외전광판에 “그대와 함께 만드는 미래에는 단 한 번도 등 돌린 적 없음을.” 66회 생일 축하에는 뉴욕의 타임 스퀘어까지 진출한 광고에 “당신을 지켜드리기로 맹세합니다. 우리를 믿으세요.”

■ 이이돌이 된 정치인

영화나 대중음악, 스포츠영역에 존재하던 팬덤(스타를 쫒는 팬들의 무리)이 정치로 옮겨온 것이다. 팬덤은 그냥 팬이 아니다. 팬이 개인으로서 제공된 문화 콘텐츠를 수동적으로 소비한다면 팬덤은 그 콘텐츠를 팬픽이나 팬아트 형태로 스스로 생산하고 가공하고 공유한다. 제작사의 ‘궂즈’를 구입하는 것은 물론이고, 그것을 스스로 생산해 팔기도 한다. 문재인 팬덤 역시 팬 아트를 창작하고 ‘이니궂즈’를 제작해 판매한다.

팬덤은 상상의 공동체다. 팬에게는 오직 팬 객체만이 중요하지만, 팬덤에는 그 대상을 사랑하는 이들의 공동체에 속한다는 느낌이 중요하다. 이 집단 정체성이야말로 팬 현상과 구별되는 팬덤의 본질이다. ‘정체성’은 본디 배타적인 것, 그 옛날 H.O.T의 팬덤이 젝스키스나 god 팬덤과 치열한 사이버 대전을 치렀듯이, 문재인 팬덤 역시 ‘달빛기사단’과 ‘문꿀오소리’의 정체성을 가지고 매일 적들과 패싸움을 벌이는 보람에 살아간다.

■ 나르시시즘이 과대망상으로

팬덤은 일종의 나르시시즘 현상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연인에게 하듯이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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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어루만진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나르시시즘은 유아기의 자기성애에서 타자 성애로 옮겨가는 과도기 현상이란다. 즉 아이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을 통해서 타인을 사랑할 준비를 시작하는 셈이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의 리비도가 저 아닌 외부를 향할 수도 있다. 나르키소스가 물 위에 투사한 자신의 완벽한 미소에 반하듯이, 팬덤은 팬 객체에 투사한 제 이상적 자아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 사랑은 글자 그대로 광적이다.

이유아적 망상이 현실의 정치인을 만나면 꽤 현실성을 띠게 된다. 대통령에게 권력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그들은 대통령을 지키기만 하면 세상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는 주술적 믿음에 빠진다.

“우리 이니 하고 싶은 것 다해.”

■ 노사모는 ‘지지’ 문팬덤은 ‘사랑’

노사모 활동은 ‘팬에 기초한’정치였을 뿐 팬덤 정치는 아니었다. 노사모는 다른 커뮤니티와 싸우지 않았다. 남의 커뮤니티에 들어갈 때는 예의를 지켰고, 들어가서는 그곳 사람들을 ‘논리’로 설득했다.

문재인 팬덤은 다르다. 노사모의 토대가 후보의 철학에 대한 ‘이성적 지지’라면, 문 팬덤의 토대는 후보의 이미지에 대한 ‘정서적 유착’이다. 그러니 그를 ‘감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그들은 대통령을 지지하는 게 아니라 사랑한다. 그러니 그가 무슨 일을 하든 그를 옹호할 게다.

■ 상상계를 파괴한 죄

그들이 조국을 끝내 놓지 못하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조국은 그들에게 시효가 다해가는 대통령 대신에 자신들을 투사할 새로운 객체였기 때문이다. 팬 객체의 요건은 ‘호감성’이다. 훤칠한 외모, ‘쌔끈한’학벌, 강남 사는 죄파, 조국은 팬 객체에 필요한 요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문팬들은 그에게서 자신들의 나르시시즘적 과대망상을 계속 유지시켜줄 새로운 팬 객체를 본 것이다. ‘노무현의 꿈 문재인의 운명 조국의 사명.’ 팬덤은 지지자가 아니라 구축자다. 그들은 팬 객체를 통해 자신들의 상상계를 실현하려 한다.

조국 일가의 비리가 드러났을 때 그들은 그 안에서 조국이 완전무결한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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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계를 실현하려 서초동이 모였고, 팬덤을 쫓던 민주당은 그 망상에 들러리를 섰다.

검찰을 향한 그들의 광적인 증오도 마찬가지다. 윤석렬의 죄는 그들의 상상계를 파괴한 데에 있다. 자기들을 살아 있게 해주는 나르시시즘의 쾌락을 부정한 죄, 그 죄는 죽음으로도 다 갚지 못할 것이다.

팬덤은 그저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인을 따르는 데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들의 나르시시즘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인을 직접 만들어 내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은 또 자기들의 환상을 유지시켜줄 정당을 스스로 ‘제작’하려 한다. 열린 민주당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민주당은 팬덤의 쾌락을 만족시키는 자위 도구가 되었다. 팬덤을 쫓아 그들의 망상 속으로 따라 들어가버렸다.

◉ 07 소비자 민주주의 : 유권자에서 소비자로

“정치에 있어서도 소비자 민주주의가 성립될 때 그 정치가 올바른 민주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정치는 구매자가 따로 없기 때문에 정치의 소비자를 유권자라고 합니다. 서비스를 향유하는 사람이 서비스에 대한 최종적 평가를 유권자로서 선거와 투표로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말이다.

■ 네트워크에서 빅데이터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소비자 민주주주의’를 이야기한 것은, 결국 정치가 공급자(정당인) 중심에서 소비자(유권자)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의 표명이었던 셈이다. 그 정권이‘참여정부’를 자처한 것은 그 때문이다. 한때 진보주의자들은 인터넷의 민주주의적 속성에 열광했다. 하지만 20여 년이 지난 지금 인터넷의 주인이 된 것은 네티즌이 아니라 검색엔진이었다. 깨어있는 시민들은‘구글신’에게 데이터를 갖다 바치는 존재가 되었다. 먼저 기업들이 이 데이터들을 마케팅에 활용했고 정당들도 곧 기업의 마케팅 기법을 벤치마킹했다. 그 결과 인터넷이 정치의 ‘주체’로 세운 유권자들은 빅 데이터 통해 다시 마케팅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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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케팅으로서 정치

정치의 무분별한 마케팅화는 결국 정치과정을 시장 논리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21대 총선 전 민주당에서는 비례대표 선거 시뮬레이션에 기초해 별도의 위성정당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의 근거는 정당업계 매출 1위 자리를 놓치지 않겠다는 판매전략이었다. 여기에 정치적 명분이나 도의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 공당이 일종의 사기업이 되어버린 셈이다.

 

■ 장사가 된 정치

정치가 마케팅이 되면 정당은 기업이 된다. 기업의 목적은 회사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에 있다. 그렇기에 정당이 기업이 되면 ‘공공선’은 더 이상 활동의 목적은 아니게 된다. 최근 민주당의 행태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물론 정당들은 예나 지금이나 ‘공공선’을 빙자하여 당리당략을 추구해 왔다. 하지만 그때에도 빙자할 ‘공공선’ 자체는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조국 사태에서 우리가 본 것은 그것의 노골적 폐기다.

정당이 기업으로 행동하고 유권자가 소비자로 행동하면, 당연히 소비자의 ‘사적’ 성격이 ‘공적’ 정치과정을 결정하게 된다. 청문회과정에서 공공선을 대변했던 현직 의원은 공천을 받지 못했다. 반면 선거개입 사건에 연루된 경찰인사, 조국을 위해 ‘개싸움’을 벌였던 변호사. 인턴증명서로 기소당한 전직 공직기강비서관, 부동산 투기로 물러난 전직 청와대 대변인은 공천을 받았다. 마지막 한 사람을 빼고 모두 당선까지 되었다.

소비는 사적 행위이기에 남이 뭐를 사든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그가 불량품을 사더라도 내게 해가 되지 않는다. 정치는 그와 달라 공적 성격을 띤다. 즉 정당은 세금으로 운영되기에 내가 사지도 않은 물건의 대금이 내게도 청구된다. 그래서 투표는 ‘공적’활동이어야 하나, 정치의 마케팅화는 이를 불가능하게 한다. 그 결과 많은 이들이 불량품 구입을 강요당하거나, 남이 한 소비의 대금을 함께 치르며 좌절하게 된다.

■ 서비스업이 된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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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마케팅화는 정당의 이념과 정책에 대한 지지를 ‘브랜드 충성도’로 바꾸어 놓는다. 민주당 지지자들은 더 이상 ‘노무현 정신’을 지지하지 않는다.

열린민주당에서는 엉뚱하게 광고에 노회찬의 사진을 실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노회찬’ 정신이 아니라 ‘노회찬’이라는 브랜드이고 그 브랜드는 물론 정의당의 표를 빼앗기 위한 것이다. 그들의 마케팅을 통해 노회찬은 졸지에 조국이 되었다. 둘 다 정치검찰의 희생자라는 것이다. 6411번 버스를 탔던 노회찬은 그렇게 ‘검찰개혁’의 미명하에 권력의 비리를 덮는 도구로 활용되었다.

* 6411번 버스 : 새벽 4시외 4시 5분에 출발하는 만석의 버스로 구로구 가로수 공원에서 출발하여 강남을 거쳐 개포동으로 가는 가난한 노동자들이 이용하는 노선버스

마케팅 정치는 공적사안을 사적 용무로 바꾸어 놓는다. 공적활동으로서 정치가 사적 소비행위로 사라질 때 위기에 처하는 것은 공화국의 이념이다. 지금 우리는 그 위기의 불길한 조짐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 08 게이미피케이션 : 인간장기 게임이 된 정치

■ 정치의 게이미피케이션

“우리의 문명은 놀이 속에서 탄생하여, 놀이로서 전개되었다.”<호모루덴스>의 저자 요한 하위징아의 말이다. 하위징아에 의하면 철학은 원래 지혜를 겨루는 현자들의 수수께끼 놀이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전쟁도 과거에는 스포츠와 비슷해 신사적 규칙에 따라 수행 되었다. 사법이나 정치에는 편을 갈라 겨루는 놀이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다. 멀지 않은 과거만 해도 노동에는 춤과 노래가 따랐고, 공동체의 삶에는 축제와 놀이가 동반되었다.

하지만 놀이하던 인간들이 언제부턴가 놀 줄을 모르게 되었다. 오늘날의 공장에서는 노동요를 들을 수가 없다. 스포츠마저 요즘은 놀이가 아니라 진지한 비즈니스가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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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미피케이션은 놀이의 특징인 ‘재미’를 게임이 아닌 영역에 적용해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로 오늘날 교육, 연구, 훈련, 비즈니스등 다양한 영역에 활용되고 있다. 로베르토 베니니 감독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에는 게이미페케이션을 활용해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기발한 예가 등장한다.

거기서 주인공 귀도는 아들과 함께 유태인 수용소로 끌려간다. 다섯 살 먹은 아들에게 그는 혹독한 수용소의 현실을 게임이라 속인다. “저 독일군이 이기면 상으로 탱크를 받는 거야.”하지만 수용소 생활에 지친 아이가 어느 날 “게임 그만하고 집에 가자” 라고 조른다. 그러자 귀도는 집에 가는 척 짐을 싸며 이렇게 말한다.“아깝다 거의 다 이겼는데.”이 말에 아이는 게임을 계속하고, 결국 수용소로 진주한 미군의 탱크에 올라타게 된다.

■ 거대한 매직 서클

매직 서클은 마법이나 놀이의 공간으로, 그 안에서는 일상의 공간과는 다른 특수한 법칙이나 규칙이 적용된다. 예를 들어 ‘오징어’놀이가 벌어지는 공간에서 아이들은 깨금발로 다녀야 한다.

디지털 시대에는 현실 자체가 거대한 VR(가상현실)과 AR(증강현실)게임으로 바뀌어 간다.

정치도 예외는 아니다. 게에미페케이션을 처음 도입한 후 오바마와 클린턴 등 민주당의 대선 캠프에서는 그동안 이 기술을 유세에 적극 활용해 왔다. 원리는 다른 게임과 다르지 않았다. 지지자들에게 캠프의 콘텐츠를 퍼나르는 등 유세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임무’를 부여하고 그‘보상’으로 참여자에게 배지를 부여하거나, 리더보드에 그들의 이름을 올려주는 것이다.

한국은 정치 자체가 아예 거대한 컴퓨터 게임으로 변했다.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가 그랬다.

정치의 게임화는 민주주의를 더 생동적으로 만들어 준다. 정치가 게임이 될 때 수동적 투표자로 머물렀던 유권자는 능동적 플레이어로 바뀐다. 1

■ 정치적 착란

정치의 게임화는 진영논리를 강화한다. 골대 앞에서 우리 편이 넘어지면 무조건 패널티킥이고, 상대편이 넘어지면 무조건‘할리우드 액션’이다.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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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편에게 휘슬을 불면 ‘공정한 심판’이고, 우리 편에게 휘슬을 불면 ‘매수된 심판’이다 이 운동장 마인드로 무장한 이들은 정치에서도 ‘팀플레이’를 강조한다. 거기서 아군을 비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이른바 ‘팀 킬’을 하면 우리 편에게 보복당하고 상대편에게는 조롱당한다.

■ 닌겐쇼기

게임과 놀이는 성격이 서로 다르다. 게임은 하릴없는 ‘놀이’이지만 정치는 진지한 ‘일’이다. 게임에서는 승리 자체가 목적이나, 정치에서 승리는 그저 수단일 뿐이다. 정치의 목적은 그 승리로 얻은 권력으로 공동체의 과제를 해결하는 데에 있다. 하지만 정치가 게임이 되면 이 본연의 목적은 뒷전으로 밀린다. 정치인 과 유권자 모두 또 다른 승리를 위해 바로 다음 게임에 돌입한다. 그러니 국회나 정부가 매번 ‘역대 최악’의 기록을 경신 할 밖에.

정치를 게임으로 여겨 몰입한 이들은 일본에서 행해지는‘닌겐쇼기(人間將棋)’의 말들을 닮았다. 언뜻 보면 말들이 스스로 행마를 하는 듯하나, 사실 그들은 장기판 밖의 기사(棋士)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 있을 따름이다.

◉ 09 은유와 환유의 정치

노무현이 어쩌다 조국이 됐나

정치에도 종종 문학적 비유가 사용된다. 대표적 용례가 바로 정치 포스터다. ‘조국 대전’에서도 대표적 용례가 바로 정치포스터다 ‘조국 대전’에서도 은유나 환유를 활용한 다양한 포스터가 등장했다. 윤석렬 총장을 조폭으로 묘사한 것도 있고 5 ․ 18 진압군에 비유한 것도 있다. 그런가 하면 ‘윤짜장’이나 ‘검찰 춘장’이라 비하한 것도 있다. 거기서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노무현, 문재인, 조국을 성(聖) 삼위일체에 비유한 포스터 거기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노무현의 꿈, 문재인의 운명, 조국의 사명.”

■ 은유에서 이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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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은유란 “두 개의 다른 사물 사이에 불현듯 닮음을 찾아내는 능력”이다. 가령 그녀가 아름답다, 꽃도 아름답다. 그때 우리는 ‘그녀는 꽃’이라 말한다. 눈동자가 맑고 호수도 맑다. 그때 우리는 ‘그대의 눈은 호수’라고 말한다. 이렇게 은유는 한 사물의 속성을 다른 사물에 빗대어 더 돋보이게 한다. 물론 은유는 사실이 아니다. ‘그녀가 꽃’이라는 말을 우리는 그녀가 식물이라는 뜻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소설 <돈키호테 1605>는 유럽인의 사유가 은유에서 이성으로 이행하던 시기의 문학적 기록이다. 거기서 돈키호테는 ‘유사 = 동일’의 원칙에 따라 풍차를 거인으로, 양떼를 군대로, 여관집 소녀를 귀부인으로 여긴다. 은유를 현실로 착각하고 무용담을 살아가는 노기사는 소설 속에서 이미 착란에 빠진 시대착오적인 인물로 가차 없이 비웃음을 당한다. 하지만 바로 한 시대 전만 해도 이 광인이 서구인의 평균적 사유모드를 대표했다고 한다.

■ 이성에서 은유로

조국 대전에 참전한 전사들을 지배하는 것이 이 돈키호테적 사유다. 그들에게 조국은 노무현, 문재인, 조국으로 이어진 진보 신통기의 적통이다. 조국은 개혁의 기사, 그의 적은 검찰이다. 노 기사의 눈에 풍차가 거인으로 보이듯 그들의 눈에 검찰은 악마로 보인다. 풍차와 거인 사이에 닮은 점은 ‘크다'라는 것밖에 없듯이 윤석렬과 이인규, 우병우(노무현 서거당시 대검중수부장)의 닮은점이란 '검사'라는 것밖에 없으나, 그들에겐 그것만으로도 동일성의 충분한 증명이 된다.

“노무현의 꿈, 문재인의 운명, 조국의 사명.”전사들은 무용담을 산다. 그들은 개혁의 돈키호테를 도와 그의 사명을 함께 이루는 산초판자들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비극적인 죽음, 그의 이루지 못한 꿈, 그 꿈을 대신 이뤄야 할 문재인의 운명, 그 과업을 이어 완수해야할 조국의 사명, 그들의 이야기에는 슬픔, 원한, 복수와 마침내 회복되는 정의의 드라마가 있다. 이 은유적 착란 속에 신파는 현실이 되고, 조국은 졸지에 현생 노무현이 된다.

그러나 은유는 사실이 아니다. 조국이 노무현일 수는 없는 일이다.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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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 노무현은 누구처럼 학벌에 집착하지 않았다. 딸이 시험을 망쳐도 그는 "수학을 못해서 그렇지 좋은 딸"이라 말했다. 누구처럼 책임을 가족에게 지우지도 않았다. 외려 가족의 잘못까지 뒤집어썼다. 누구처럼 저 하나 살겠다고 진보를 죽이지도 않았다. 노무현 자신이 죽어도 진보는 살아야 하기에 그 절망적 순간에 지지자들을 향해 '이제 나를 버리라'고 요구했다.

■ 환유적 상상

은유와 환유로 빚은 세계에서 조국은 노무현이 되고 윤석렬은 우병우기 되었다. 하지만 조국이 노무현이 아니듯 윤석렬은 우병우가 아니다. 외려 정치검사들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온 게 윤석렬이다. 그렇게 살았다고 그를 칭찬했던 그 입들이 갑자기 돌변 이제는 그가 악마라고 떠들어댄다. 왜? 칼끝이 자기들을 향했기 때문이다. 부패한 권력이 '선'한 척하려면 부패를 잡는 검찰부터 '악'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조국이 맡았다는 "사명"의 실체다.

■ 은유의 효과는 교호적이다

조국 = 노무현 이라는 은유도 마찬가지다. 그 은유는 조국에게 노무현 이미지를 덧씌우는 것을 넘어, 거꾸로 노무현에게 조국의 이미지를 덧씌우게 된다. 조국을 노무현 만들려다가 노무현을 조국으로 만든 것이다.

'노무현'이라는 상징 자산은 그렇게 더렵혀졌다. 문제는 그 짓을 자칭 '어용지식인'이 '노무현재단' 이사장 자격으로 그 재단의 공식채널을 통해 한다는 데 있다. 굳이 그 일을 해야겠다면 그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마땅하다. 부패는 어느 정권에나 있으나, 이 정권은 한 가지 점에서 남다르다. 즉 윤리의 기준 자체를 무너뜨려 아예 불법을 불법이라, 비위를 비위라 부르지 못하게 한다는 점이다. 하늘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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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개인의 해체 : 한입으로 두 말하는 분열자들

■ 구조적 망각의 실천

2019년 검찰총장 인사청문회 당시 '뉴스타파'에서 윤석렬 후보의 장모와 관련된 의혹을 보도한 적이 있다. 그 기사 밑에는 이런 댓글이 달렸다. "장모가 어떤 일을 하는지 사위가 어떻게 알아. 기자들은 너그들 장모 사생활 다 아니?" 그런데 이 글을 올린 그 사람이 최근에는 이런 댓글을 올렸다.

"윤석렬" 장모는 기소도 안 했다며? 동영상 증거가 있어도 김학의는 무죄. 한국에서 법이란 검사를 위한 끼리끼리 해먹는 것?"

비슷한 사례는 많다. "장모 하는 일을 사위가 알아야 하냐?" 라고 따지던 이가 지금은 그를 김선달보다 더 사기꾼"이라 부른다. "윤석렬이 있어 검찰의 앞날을 밝게 본다"던 이가 지금은 "수십 곳 압수수색하던 놈이 수백억 잔고증명 위조한 것은 모른 척 하냐?"라고 타박이다. 장모를 공격한다는 것 자체가 본인 흠결이 얼마나 없는지" 보여준다던 이가 지금은 "잔고증명조작이 불법인 걸 모를 리도 없거니와 설사 몰랐더라도 처벌의 대상"이라고 말한다.

■ 영원한 현재에 산다

악플러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 의혹을 직접 취재해봤다는 주진우 기자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제가 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에게 자료도 받고 정리도 하고 취재를 해봤다. 깊게 해봤는데 신빙성이 하나도 없다. 문제 제기한 사람은 대법원에서 벌금 1,000만원 유죄 확정을 받았다. 그러니까 장모에 대해 막 이야기 하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자동으로 명예훼손에 걸릴 사안이다." 이 발언 역시 기자의 머리에선 벌써 지워졌을 게다.

요즘 윤석렬 총장을 "식물총장"이라 조롱하는 재미에 사는 유시민 작가, 그런 그도 2016년 박영수 특검 때는 그를 '명언제조기'라 극찬했었다. "저는 조직에 충성하는 사람이지 사람에게 충성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유시민

이 '명언'이라 평가했던 이 발언이 지금은 제 업무엔 별 관심이 없어 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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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어느 정치검사에게 "조폭논리"취급을 당한다. 왜들 그럴까. 이게 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현재'를 치열하게 살려는 몸부림이다.

검찰총장을 공수처의 '제1호 수사대상'으로 삼겠다고 협박하는 전직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 그의 인사검증을 담당한 게 자신이라는 사실을 기억에서 벌써 지웠다. 대통령까지 이 '구조적 망각'을 실천한다. 검찰총장을 임명하며 그는 이렇게 당부했다. "우리 청와대든 정부든 집권여당이든 만에 하나 권력형 비리가 있다면 그 점에 대해서는 정말 엄정한 자세로 임해주시기 바란다." 이 말이 그의 머리에서 지워지는 데에는 채 두 달이 걸리지 않았다.

 

제3부 광신, 공포, 혐오

◉ 11 종교적 광신 " 이 세상의 신 노릇하는 그들

신천지 교단이 코로나 19의 슈퍼 전파자로 떠올랐을 때 이만희 교주의 말이다. "금번 병마 사건은 신천지가 급성장함을 마귀가 보고 이를 저지하고자 일으킨 마귀의 짓"이라고 규정했다.

■ 눈에 보이는 신

'이단' 만이 아니다. 기성교단의 목사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창원의 어느 목사는 중국 시진핑이 하나님 눈에 악한 정책을 만들었다"라며 전염병은 범죄한 백성들과 그 시대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로, 하나님이 지금 중국의 때리고 시진핑을 때리는 것"이라 주장했다.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동안 대형교회 목사들은 큰 재해가 있을 때마다 빠지지 않고 주옥같은 망언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들의 의식 속에서 동남아 쓰나미는 “이교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요. 뉴올리언스 홍수는 “동성애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다. 이렇게 재해를 ‘신의 징벌’로 해석하는 것은 명백히 중세적이다.

오늘날 우리는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데에 신이라는 가설을 사용하지 않는다. 창세기는 빅뱅이론으로, 창조론은 진화론으로 대체되었다. 코로나 19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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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의 원인부터 확산의 과정, 나아가 치료법까지 과학의 힘으로 얼마든지 밝혀낼 수도 있다. 그 현상을 설명하는 데에도 굳이 신이라는 가설을 끌어 들일 필요가 없다. 자연의 모든 현상은 이미 과학으로 설명이 가능하거나 , 아니면 언젠가는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그럼 신은 존재하지 않는가. 그렇지 않다. 그저 “숨어 계시는 것뿐이다.”

■ 숨은 신을 끌어내는 사이비 종교

우주 비행의 시대에도 여전히 신이 살아 있는 이유는 뭘까. 과학이 답하지 못하는 물음들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리라. 가령 죽음의 공포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 물음 앞에서 과학은 완벽히 무력하다. 이때 종교는 인간에게 부활과 영생을 약속한다. 삶의 근원적 부조리는 어쩔 것인가. 천하의 악당이 부귀를 누리고 선한 자들은 고통스러운 삶을 산다. 인간의 정의를 피한 자들은 신의 심판에 밭길 수밖에 그래서 종교는 천국과 지옥을 발명한 것이다. 그 일을 과학이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인간의 과학이나 기술에는 한계가 있다. 그 한계 너머의 일들을 우리 연약한 인간들은 신에게 맡긴다.

사이비 종교일수록 숨은 신을 끌어내 사람들에게 현시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여러분 중 바이러스에 걸린 사람이 있느냐. 그러면 다음 주에 예배에 오라. 주님이 다 고쳐주실 것이다.” 직접 하나님의 목소리로 듣는다는 전광훈 목사의 말이다.

■ 기독교, 중세적 광신에서 벗어나라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마태복음 6: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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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와 우리 사이에는 엄청난 지역적, 시간적 간극이 존재한다. 그 때문에 신이 고대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신 말씀을 오늘날의 한국인의 메시지로 번역하는 데는 정교한 해석의 작업이 필요하다. 하지만 사이비 목자들에게 그런 해석학적 능력이 있을 리 없다. 그 결과 고대인의 세계관이 현대를 사는 신도들의 지배하게 되고, 맹신과 광신에 빠진 신도들은 종교적 상징과 비유를 그대로 물리적 현실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 12 정치적 주술 : 왕의 목을 베라

■ 현대의 주술, 모상의 저주

흔히 사람을 이롭게 하는 주술을 ‘백(白)주술’, 사람을 헤치는 것을 ‘흑(黑)주술’이라 부른다. 목적은 서로 달라도 모상을 통해 실물을 지배한다는 발상은 한가지다. 문자가 발명되고 문명이 시작되어도 주술은 사라지지 않았다. 성리학이 지배하던 조선에서도 왕궁에서 주술을 이용한 저주 사건은 끊이지 않았다. 사극에는 종종 장희빈이 인현왕후의 초상이나 인형에 활을 쏘는 장면이 등장한다. 꾸며낸 이야기라 하나, 이 이야기는 어쨌든 모상을 통해 실물을 지배한다는 주술적 관념을 잘 보여준다. 이 모두 아득한 고대의 관습일 뿐이지만, 아직도 이 원시적 심정은 남아 있나 보다.

탄핵 촛불집회에도 이 원시적 제의는 어김없이 등장했다. 누군가 박근혜 대통령의 머리인형을 막대기 끝에 달아서 들고 나온 것이다. 이제까지 경험한 집회문화 중에서 이 효수극(梟首劇)보다 더 끔찍한 것은 없었다. 2019년 12월에는 한 반미 단체에서 해리스 미국 대사 ‘참수경연대회를 열었다. 하지만 이 몰취향에 비난이 쏟아지자 결국 참수극은 대사의 콧수염을 뽑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행사가 계획대로 진행되었다면 그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해리스 인형의 목을 따는 꼴불견을 봐야 했을 것이다.

■ 왕의 목을 베라

과학이 없던 시절 사람들은 ‘원인’을 찾는 대신 ‘범인’을 찾아 제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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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조선시대에도 기근이 들면 왕이 이를 자신의 부덕으로 여겨 머리를 풀고 거적위에 앉아 석고대죄를 했다지 않는가. 중세의 마녀 사냥 또한 이상저온으로 인한 대흉작이 그 배경이었다고 한다.

지금이라고 다른가. 코로나 19가 확산되자 원인이 아니라 범인부터 찾는다. 범인은 물론 대통령, 이게 다 대통령이 중국을 봉쇄하라는 어느 이익단체의 말을 따르지 않은 탓이란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선거의 표를 늘리는 주술이 아니다. 다음에 올 바이러스에 더 잘 대처하게 해 줄 방역의 과학이다. 외국에서는 한국의 투명한 정보 공개와 공격적 방역 태세를 평가한다. 중국과 달리 우리는 대구를 봉쇄하지 않았다. 이것이 민주주의와 전체주의의 차이다. 당국을 믿고 책임은 나중에 논하자 어차피 책임은 대통령에게 돌아간다. 예나 지금이나 분노하고 좌절한 이들은 책임을 물을 범인을 원하기 때문이다. 믿어도 된다. 인간은 생각보다 많이 진화하지 않았다.

◉ 13 파니코스 : 공포와 혐오의 정치학

■ ‘목신의 오후’ 깨트리는 파니코스

파니코스(panikos)는 신과 마주치는 공포를 말하기도 한다.

‘파니코스’에서 유래한 말이 ‘패닉(panic)’이라는 단어다. 케임브리지 사전에 의하면 패닉이란 “갑작스레 찾아와 이성적 사고나 행동을 방해하는 강한 공포감”이다. 패닉은 개인적으로 찾아오기도 하고 집단적으로 벌어지기도 한다. 건강한 이도 일생에 몇 번은 패닉을 겪는다고 한다. 물론 그 일이 너무 자주 일어나면 병원에서 ‘공황장애’ 진단을 받게 된다. 한편 이런 의학적 맥락의 밖에서 ‘패닉’이라는 말은 대개 갑자기 집단적으로 발생하는 사회적 공포를 가리키는 데에 사용된다.

패닉은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켜 논리적 사고를 할 수 없게 만든다. 공포에 사로잡힌 이는 극도의 흥분에 빠져 원시적 본능으로 상황에 대처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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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패닉이 부른 인종주의 혐오

패닉과 바이러스는 서로 닮았다. 패닉도 바이러스처럼 전염성이 강해 한 사람의 패닉이 순식간에 집단으로 번지기도 한다. 발달한 IT기술은 원자화한 개인의 패닉을 전국적 전 지구적 규모로 금방 확산시킨다. 사회적 패닉의 발생에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왜곡된 정보와 조작된 뉴스다. 전염병 보다 무서운 것이 바로 정보전염병이라지 않는가. 문제는 이 패닉이 이성의 성취를 뒤엎고 문명사회에 온갖 종류의 원시적 감성과 야만적 행동을 다시 불러들인다는 데 있다.

얼마 전

- 이탈리아 주유소에서는 중국인이 ‘너는 바이러스를 가졌으니 들어오면 안 된다’는 말과 함께 병으로 머리를 얻어맞는 일이 벌어졌다.

- 호주에서는 중국 유학생이 현지인에게 맞아 광대뼈가 함몰 되었다.

- 런던에서는 싱가포르 유학생이 현지인 청년들에게 피멍이 들도록 얻어 맞 았다.

- 네델란드에서는 한국인 여성이 두 남자에게 “중국인”이라는 말과 함께 폭행을 당했다.

이 모든 폭력의 바탕엔 ‘바이러스 = 중국인 =아시아인’이라는 부당한 등식이 깔려있다. 공포에 사로잡힌 마음이 바이러스의 역학을 이해할 리가 없다. 그래서 이해하기 힘든 ‘원인’대신 당장 눈에 띄는 ‘범인’을 색출하려 원시적 희생양의 제의를 벌이는 것이다.

◉ 14 파르마코스 : 만인의 평화를 위한 마이너스 1

원시 사회는 공동체의 위기를 희생양 제의로 극복하곤 했다. 희생양 제의 는 원시사회가 ‘하나’를 제거함으로써 ‘모두’의 평화를 유지하는 장치였다. 마이너스 1의 평화, 문명이 시작되어도 그 제의는 사라지지 않는다.

희생자로 꼽힌 것은 주로 저항할 힘이 없는 약자들, 가령 고대 그리스에서는 기근이나 역병이 돌면 장애인 수감자 중 하나를 골라 추방 혹은 처형하곤 했다. 그 희생양을 ‘파르마코스’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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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르마코스

0 중세에는 여성 : 마녀 사냥

0 나치시절에는 유태인 : 국가를 좀먹는 해충

0 관동 대지진은 조선인 : 일본인 집에 불을 지르는 방화자

0 코로나 19사태에서는 아시아인

0 한국에서는 동성애자가 파르마코스가 되어 전 세계가 칭찬하는 K방역을 망친 주범으로 언어폭력을 당하고 있다.

 

◉ 코로나 독재 : K방역과 코로나 보안법

K팝, K뷰디, K푸드, K드라마 등 세계를 휩쓰는 한류에 또 하나의 아이템이 합류했다. 코로나바이러스 대응의 모범으로 떠오른 한국식 방역, 거기에는 재빨리 ‘K방역’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외국 언론에서 한국의 사례를 관심있게 보도했고, 세계 곳곳에서 한국의 검사, 격리, 치료의 노하우를 구하는 요청이 쇄도했다. 한동안 K진단키트, K방호복과 K글러브등 국산 의료용품의 수출이 급격히 늘기도 했다.

■ 한국식 방역의 성취

성공적 방역으로 인해 나라에 대한 국민의 자부심도 부쩍 늘었다. 그럴만도 하다. 그동안 우리가 ‘선진국’으로 알고 있던 나라들에서는 여전히 매일 엄청난 수의 감염자와 사망자가 발생하고 있다. 방호복이 떨어져 쓰레기 봉투를 대신 뒤집어쓰고 환자를 돌보는 그곳 의료진의 모습은 우리가 아는 선진국보다는 차라리 ‘제3세계’라 불리던 개발도상국의 풍경과 가까워 보였다.

‘민도’가 높다는 서구인들도 마스크와 생활용품 사재기를 한다. 아시아인을 향해 인종주의 폭력을 휘두른다. 그런가 하면 사육제 전날 한껏 고기와 술을 즐기던 중세인들처럼 봉쇄령 시행 전날 집단으로 축하 파타도 연다. 그들이 자랑하던 ‘합리성’은 다 어디로 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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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국뽕이 묻어버린 개인의 권리

얼마 전 프랑스의 한 매체에는 ‘한국은 개인의 인권을 무시하는 감시국가’라는 내용의 칼럼이 실렸다. 그 시각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개인정보 공개를 필요한 범위에서 최소한으로 제한하고 감시자인 국가를 역감시하는 시스템만 있다면, 디지털 시대에 ICT 이용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가 방역의 필요에서 ‘개인’의 인권문제가 소홀히 해온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국이 자랑하는 철저한 추적 시스템이 다른 나라에서도 가능한 것은 아니다. 감염경로의 추적에 개인정보를 사용하는 것은 서구에서는 생각하기 힘든 일. 그들은 이를 ‘개인’의 인권침해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코로나 19로 인해 우리는 일상의 소중한 일부를 잃었다. 그 못지않게 안타까운 것이 바로 코로나 공포로 인해 헌법적 권리의 소중한 일부를 잃어가는 것이다.

여당의 지자체장들이 바이러스에 대한 대중의 공포를 부추기는 것은 매우 위험하면서도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 바탕에는 물론 대중을 시원하게 해주어 지지율을 끌어올리려는 포퓰리스트 욕망이 깔려있다. 사이비 종교의 신도에게도 헌법이 보장하는 신앙의 자유와 인신의 자유, 공권력의 남용으로부터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하지만 이 상식은 무시되고 분노한 대중의 열렬한 호응 속에서 이 초법적 조치들은 간단히 정당화 되었다.

■ 헌법위의 떼법

8 ․ 15 광화문 집회에서 대규모 감염사태가 발생하자, 대중의 분노는 이 집회를 허용한 판사에게 쏟아졌다. 청와대에는 바로 8 ․ 15 집회 허가 판사 해임 청원이 올라왔다. 이 청원에는 무려 40만 명이 동의했다고 한다.

서울 행정법원에서는 “집회의 자유는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이고, 감염병예방법에 따라 집회를 제한할 때도 필요한 최소 범위에서 이뤄져야 한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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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보안법

문제는 사태의 이성적 해결을 추구해야 할 정치권마저 대중의 이 뜨거운 감정에 편승해버렸다는 데에 있다. 정세균 총리는 “그 판사가 잘못된 집회를 허가 했다”라고 말했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도 사법당국이 “사태를 안이하게 판단”했다고 비판했다. 민주당 이원욱 의원은 그들을 ‘판새(판사새끼)’라고 막말을 퍼부었다. 그는 아예 집회를 허가한 판사의 이름을 따서 ‘박형순 금지법’을 발의하기까지 했다. 다들 미쳤다.

법무부에서는 보수단체에서 신청한 드라이브스루 시위를 아예 금지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는 헌법에서 금하는 ‘과잉금지’에 해당한다. 법무부의 이 위헌적 발상은 여론이 자기들 편에 있다는 판단에서 나왔을 게다.

자유주의를 표방하는 정권에서 버젓이 사법부의 독립성을 침해하고 개인의 기본권을 무시하는 언동을 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민주당이 더 이상 과거의 민주당이 아닌 게다. 실제로 이 정권 사람들의 ‘민주주의적’ 관념은 우리가 아는 민주주의와는 많이 다르다. 그들에게 민주주의란 다수결을 통해 인민 일반의지를 직접 대변하는 것을 의미할게다. 여전히 운동권 시절에 가졌던 인민 민주주의 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얘기다.

2020. 12. 12

* 다음에 2부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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