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일 오후 시간을 잡아 고희전을 준비 중인 남석(南石) 이성조 선생을 찾았다.
고속도로에 차를 올려 그 분이 계신다는 대구의 공산예원을 향하며 온갖 상념에 젖어들었다.
나이 60세 당시 안동 ‘현불사’ 노스님의 “글이 너무 경직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연구 끝에 눈을 감고 글씨를 쓰는 암중휘호에 빠져들어 새경지에 이른 서예가.
3년 동안 ‘묘법연화경’ 6만9천384자를 168폭의 병풍에 담아 완성한 집념의 서예가.
이분은 도대체 어떤 분일까?
상념에서 깨어나 팔공산 기슭에 다다르니 대문 없는 2층 한옥에 공산예원이란 이름이 붙어 있고, 잔디 깔린 마당을 넘어 2층 서실에 올라서니 찾아온 지인들과 담소를 나누는 맑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고향에서 찾아온 손님에 대한 배려로 지인들이 자리를 비워줘 그분에게 예를 갖추고 고개를 드니 단단한 체구의 환한 얼굴이 인자한 웃음을 머금고 있다.
순간 오래전부터 문안을 드려온 선배님처럼 편안함이 가슴을 적셔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편안한 그분의 마음처럼 여기저기 글씨들이 흩어져 앉아 있고 작업대 없는 서실 땅바닥에서 제자인 듯 보이는 남자가 붓을 들고 있다.
뒤쪽 책장엔 고서들이 나란히 꽂혀 있고, 옛날 화롯불을 담던 것으로 보이는 화로가 재떨이 되어 그분의 옆에 다소곳이 자리하고 있었다.
차를 나누며 세계적인 관심을 받는 전시회이긴 하지만 2천여점을 한꺼번에 전시하면 희소가치가 없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묻는 기자에게 남석 선생은 고요한 눈길로 “작품세계에서 희소적 가치란 말은 이해하기 어렵다. 예술을 하는 자는 예술인이 되어야지 예술을 빙자하여 재물을 탐하는 생활인이 되어서야 되겠느냐”고 반문 했다.
더 나은 작품을 위해 죽을 때까지 연구하고 창작하는 자가 곧 예술인이며, 그렇게 만든 작품이 2천이든 2만이든 무엇이 문제이며 그 작품 모두가 걸작이라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환하게 열려진 그분의 널찍한 가슴과 호탕한 기풍에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다.
◈남석(南石) 이성조(李成祚. 70세)
1938년 밀양시 청도면 고법리에서 출생하여 인산초등학교, 무안중학교, 경남상고를 거쳐 1959년 국립부산사범대 미술과를 졸업했다.
18세 때 한국 서예계의 큰 어르신인 청남 오제봉 선생(91년 작고)을 통하여 서예계에 입문하여 남석이란 아호를 받았고, 1959년 제8회 국선에서 최연소로 입선하였으며 이후 13번에 걸쳐 입·특선의 수상 경력을 갖게 된다.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수상경력은 이것 외에도 무수히 많다.
사범대학을 졸업한 그는 생계 때문에 35세까지 미술교사로 있었지만 붓을 놓지 못하였고 결국 속세를 떠나 성철스님을 은사로 출가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 길이 그분의 길이 아니었던지 1년 채 못 되어 환속하였지만 법화경을 통하여 화엄사상에 심취하게 된다.
1966년 부산공보관에서 가진 제1회 개인전을 시작으로 미국, 서울, 부산, 대구, 울산, 안동, 영주, 포항, 경주, 구미 등지에서 총32회에 걸친 전시회를 가졌다.
그 중 1981년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 초대전에 노산 이은상 선생과 함께 한국 예술계를 대표하여 참석했을 때가 가장 전성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당시 뉴욕과 LA에서 75일간 서예전을 열었다.
이후 선생은 어렵게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보원행원품 60폭 병풍’과 ‘독립선언문 36폭 병풍’을 선보이는 전시회를 가졌고, 그 전시회에서 당시 문공부차관 이였던 허문도씨의 소개로 한진그룹 조중훈 회장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병풍의 가격을 묻는 조회장에게 “돈보다 맘 편히 글을 쓸 수 있는 작업실 하나 만들어 주면된다”고 답하였다. 조회장은 1983년 당시로는 상당한 액수인 4천만원을 전해주었다.
그것으로 건축된 것이 바로 기자가 찾아온 대구 팔공산 기슭의 공산예원이다. 지금은 큰 도로가 지나가는 번화가의 위쪽이지만 그때만 해도 깊은 산속이였다.
20년이 넘도록 세상사를 벗어나 이곳에서 오로지 서예와 더불어 은거한 것이다.
50년이 넘도록 붓을 손에서 놓지 않고 오직 한 길만을 고집해온 서예계의 거성(巨星) 남석 이성조 선생.
그가 오랜 침묵을 깨고 고희를 맞는 지금 세상으로 걸어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분의 삶에 엮여진 수많은 사연을 이 지면에 다 토해내기는 역부족이라 간략히 정리할 수밖에 없음이 못내 아쉽다.
그의 生을 불교TV에서 다큐멘터리로 제작하여 방영하였고, 10월 18일(목): 새벽1시, 오후 5시30분/ 10월 20일(토): 오후 1시30분/ 10월 21일(일): 오후 8시50분의 시간대를 통해 새로이 방영한다.
◈제33회 남석 이성조 고희전
10월 23일부터 28일까지 대구문화예술회관 1전시실과 6,7,8,9,10실 모든 공간에 선생의 작품이 전시된다.
작품으로는 반야심경 1,080점, 반야심경 8곡 병풍 108점, 불망지제현 및 문중제자 685점, 보현행원품 60곡(30m), 국내작가 합작병 20곡(월전, 강암, 금봉, 벽격 등), 도연명시 10곡, 이태백시 10곡, 금강경 10곡, 반야심경10곡, 출사표 10곡, 퇴계성학십도 12곡으로 총 작품수가 무려 2천여점에 이른다.
그 중 가장 크게 화제가 되고 있는 작품은 묘법연화경(법화경) 전7권 28품전문이 담긴 168폭의 병풍이다. 길이가 120m나 되고 표구제작비만 4천8백만원이 들어간 대작이다.
1999년부터 2001년까지 2년간 6만9천384자를 가로71cm 세로240cm의 전지에 붓을 통해 혼을 불어 담은 것이다.
그동안 50자루의 붓이 대작에 소요되었고, 눈이 그 강한 집념에 못 견뎌 2번이나 수술을 받아야 했다.
고행과 참선 그리고 깨달음의 경지가 부처라면 곧 그 병풍 자체가 부처가 아니겠는가?
전시품 중 성철 스님 등 자신이 평생 잊지 못하는 사람들과 제자들 500명에게 헌정하는 작품도 소개되어 각별한 의미의 눈길을 끌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번 전시회를 통하여 그 분만의 다채롭고 독특한 필체가 또 다른 서예의 기풍으로 선보이게 될 것이다.
전시의 의미를 묻는 기자에게 “예술을 널리 알리고 그 예술의 향기를 느끼게 하는데 의의가 있을 뿐이다”며 조용한 눈길을 보내왔다.
오늘 나를 찾아온 사람이니 기록을 남겨놓으라는 말씀에 인쇄된 양식에 따라 기록하다 옆을 보니 23일 오후2시에 갖는 초대식에 참석예정자로 보이는 이들의 이름자가 심상치 않아 물었다.
국빈급으로 정부에서도 전시회 방문에 긴장하는 캄보디아의 왕사(王師)와 태봉 큰스님을 비롯한 외국인사, 한나라당 박근혜 전 총재를 비롯한 정치계, 조계종 지관(智冠) 총무원장, 천태종 정산(正山) 총무원장과 전국신도회장을 비롯한 불교계, 경북도지사 및 대구시장을 비롯한 시·도 기관장, 강부자씨를 비롯한 연예계 등 많은 인사들의 참석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냥 전해주어도 될 초대장의 겉봉에 붓으로 정성껏 이름을 새겨 전해주는 따스한 온정을 가슴에 담고 연이어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누가 될까 예를 갖추고 일어났다.
대문 앞에 나와 돌아보니 공산예원이 자리 잡은 팔공산 기슭의 터에서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감돈다. 어떤 포근함이 전해져 옴은 선생의 편안함과 따사로움이 묻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 남석 선생이 세상사를 벗어나 은거해 온 공산예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