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강물처럼

2008. 12. 2. 19:42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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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흐르는 강물처럼

♣ 파울로 코엘료 지음


0 10대 : 세차례 정신병원 입원

0 청년기 : 브라질 군사 독재에 반대, 수감 및 고문

0 히피, 저널리스트, 록스타, 배우, 희곡작가, 연극 연출가, TV프로듀서      등... 38세에 세계적 음악회사 중역자리를 박차고 순례행

0 연금술사,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11분 등 발표

  그의 작품은 160여 개국 66개 언어로 번역, 세계적 작가

0 자선사업, ‘07 유엔 평화대사로 활동


♣ 박경희 옮김


■ 방앗간 집에서의 하루


0 얼마전 나는 방앗간을 개조한 집 한 채를 샀다. 매일 아침 닭 울음소리에    깨어나 아침 식사를 하고 소와 양떼들을 지나 옥수수밭과 초원 사이를 거    니는 것이 내 일과다. 많은 사람들과는 완전히 딴 판인 생활이다. 이    곳에서 나는 내가 누군가를 잊는다. 질문도 답도 없이 온 몸으로 순간을    살고, 일 년에 사계절이 있다는 것을 새삼스레 확인하며 (명백한 사실이    지만 우리는 가끔 그걸 잊을 때가 있다.) 나를 둘러싼 자연과 하나가 되    어간다.


0 나는 방앗간집 옆을 흐르는 시냇가에 앉는다. 프랑스에서만 오천 명을 죽    음에 이르게 한 살인적인 폭염의 여름,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다. 나는    일어나서 활쏘기 연습을 한다. 활쏘기를 통한 명상은 내 일과에서 짧지     않은 시간을 차지한다.


0 점심때가 되어 가벼운 식사를 하고 나면 그것을 가까이 하지 않으려고 가    능한 한 버텨보지만 어느새 초고속 통신에 연결된 전원을 누르고 나는 또    다시 세상과 브라질 신문, 책, 인터뷰 일정,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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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 청탁 건, 비행기 표가 내일 도착한다는 연락, 연기하거나 급히 처리    해야 할 사안들에 접속한다. 


  해가 지고 전원을 끄면 어느덧 세상은 풀 내음과 소 울음소리, 방앗간집    옆 우리로 양 떼를 모는 양치기의 소리만 메아리치는 시골 마을이 된다.

   나는 궁금해한다. 전혀 다른 두 개의 세상이 내 삶의 하루 동안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것이 내게 크나큰 기쁨을 준다는 것, 이    글을 쓰는 동안 내가 아주 행복하다는 사실 외에는.


■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주소서


0 나는 정원의 풀뽑기 작업에 열중한다. 그러다 불현듯 나는 스스로에게 묻    는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과연 정당한가?

   우리가 ‘잡초’라 부르는 것들은 몇 백만 년이라는 시간을 거쳐 자연     속에서 살아 남은 식물들이다.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 걸까?

   누군가 이 정원을 만들었다. 그게 누군지는 몰라도 내가 이 집을 샀을     때 정원은 주변의 산과 나무와 조화를 이룬 채 이곳에 꾸며져 있었다. 내    가 일 년 중 몇 달을 지낼 요량으로 이 방앗간집에 처음 이사 왔을 때,     잔디밭은 흠잡을 데 없이 정갈했다.

   이 일이 내 몫이 된 지금도, 철학적인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과연     나는 정원을 만든 사람의 공로를 존중해야 할까. 아니면 자연이 ‘잡초’    라 불리는 저 식물에게 부여한 생존 본능을 인정해줘야 할까.


0 예수는 신약에서 밀알과 가라지를 골라, 가라지는 불에 태워야 한다고 했    다. 성경을 내 행위의 근거로 삼든 말든 간에, 지금 내가 직면한. 인류가    늘 마주하게 마련인 구체적인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은 과연 자연    에 얼마나 깊이 관여할 수 있을까? 그런 간섭은 언제나 부정적인 걸까.     아니면 때로 긍정적이기도 한 걸까?


■ 활쏘기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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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활쏘기의 동작은 머릿속의 생각을 몸으로 구현하는 것이다. 그때는 사소    한 몸짓 하나가 우리를 배반할 수 있으므로 모든 동작을 끊임없이 연마하    고 하나하나를 머릿속에 그리며 기술을 직관적으로 구사할 수 있게 될 때    까지 갈고 닦아야 한다. 직관이라는 것은 타성과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기술을 초월하는 마음의 상태다. 그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연습과 반복    이 필요하다. 


0 솜씨좋은 대장장이를 보라. 모르는 이들의 눈에는 그가 매번 똑 같은 동    작으로 망치질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활쏘기로 마음을 갈고닦은 사    람은 안다. 그의 망치질의 강도가 매 순간 다르다는 것을. 대장장이의 손    은 같은 동작을 반복하지만 그는 강하게 칠 때와 부드럽게 칠 때를 정확    하게 구분한다.  


0 궁수는 과녁을 수없이 빗맞혀도 조급해하지 않는다. 같은 동작을 수천 번    반복해야만 실수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그럼으로써 비로소 활과 자     세, 시위, 과녁의 맥락이 통째로 머릿속에 자리잡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    기 때문이다.


0 시위를 당기는 순간, 궁수는 활 속에서 온 세상을 본다. 그의 눈이 날아    가는 화살을 뒤따를 때 세상은 그에게 가까워지고 그를 보듬고 책임감을    완수했다는 충일감을 안겨준다.  

   책임을 완수하고 생각한 바를 행동으로 실천했을 때 궁수는 어떤 두려움    도 느끼지 않는다. 그는 해야 할 일을 했고 두려움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    다. 과녁을 빗맞혔더라도 그에게는 새로운 기회가 올 것이다. 그는 비겁    하지 않으므로.


■ 연필 같은 사람


0 할머니가 편지 쓰는 모습을 지켜보던 소년이 문득 물었다.

  “할머니 우리 이야기를 쓰고 계신 거예요? 혹시 저에 관한 이야기인가     요?”

   할머니는 쓰던 손길을 멈추고 손자에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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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너에 대한 이야기지. 하지만 무슨 이야기를 쓰느냐 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쓰고 있는 이 연필이란다. 이 할머니는 네가 커서 이 연필 같    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소년은 의아한 표정으로 연필을 주시했지만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은 없었    다.

  “하지만 늘 보던 거랑 다를 게 하나도 없는데요!”

  “그건 어떻게 보느냐에 달린 문제란다. 연필에는 다섯가지 특징이 있어.    그걸 네 것으로 할 수 있다면 조화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게야.”

          

  첫째, 네가 장차 커서 큰 일을 할 때, 이 연필을 이끄는 손과 같은 존재    가 있음을 알려주는 거란다. 명심하렴 우리는 그 존재를 신이라고 부르     지. 그 분은 언제나 너를 당신 뜻대로 인도 하신단다.


  둘째, 가끔은 쓰던 걸 멈추고 연필을 깎아야 할 때도 있다는 사실이야.     당장은 좀 아파도 심을 더 예리하게 쓸 수 있지. 너도 그렇게 고통과 슬    픔을 견뎌내는 법을 배워야 해.    


  셋째, 실수를 지울 수 있게 지우개가 달려 있다는 점이란다. 잘못된 걸     바로잡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야. 오히려 우리가 옳은 길을 가도록 이    끌어 주지.


  넷째, 연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외피를 감싼 나무가 아니라 그 안에 든     심이라는 거야. 그러니 늘 네 마음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렴. 


  다섯째, 연필은 항상 흔적을 남긴다는 사실이야. 마찬가지로 네가 살면서    행하는 모든 일 역시 흔적을 남긴다는 걸 명심하렴. 우리는 스스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늘 의식하면서 살아야 하는 거란다.


■ 산을 오르는 열한 가지 방법


1) 내가 오르고 싶은 산을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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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 산이 더 멋져’‘ 저 산이 더 쉽겠는데.’이런 타인의 말에 현혹되     지 않는다. 목표에 이르기 위해 우리는 많은 힘과 열정을 쏟아야 하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우리의 몫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일에 확신을 가져야 한다.


2) 산에 이르는 길을 찾는다.

   산은 멀리서 보면 멋있고 재미있어 보이고 도전의식을 불러 일으킨다.      하지만 막상 가까이 다가가면 훨씬 복잡해진다. 오솔길이든 샛길이든 가     리지 말고 더듬어가야 한다. 오르고자 하는 봉우리에 설 때까지.


3) 먼저 간 사람에게 배운다.

  아무리 독창적인 것을 꿈꾸더라도 언제나 똑같은 꿈을 그보다 먼저 꿨던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그들이 남긴 자취는 산을 오르는 우리의 발걸음을    가볍게 해 준다. 산을 오르는 사람은 우리자신이며 그 경험에 대한 책임    을 지는 것 역시 우리 자신이다. 그럼에도, 언제나 우리가 타인의 경험으    로부터 도움을 받는다는 것을 잊지 말자.


4) 위험은 언제 닥칠지 모르지만, 예방 가능하다.


5) 변화하는 풍경을 마음껏 누린다.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갈수록 시야는 넓어진다. 이를 통해 지금까지 인식     하지 못했던 사물을 발견해 보면 어떨까.


6) 자신의 몸을 소중히 돌본다.

   몸의 가치를 알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만이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삶은      우리에게 충분한 시간을 준다. 그러니 몸에 무리한 요구를 하지마라. 서     두르다보면 지치고 포기하게 된다. 반대로 너무 늑장을 부리면 어둠이      내려 길을 잃는다.


7) 자신의 영혼을 믿는다.

   산을 오르는 동안 끊임없이 ‘난 해낼 거야’하고 되뇔 필요는 없다. 우     리의 영혼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까.  산을 오르는 긴 여정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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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 자신을 성장시키고 자아의 지평을 넓히고 스스로의 한계에 도전하면     된다. 집착은 산을 오르는 즐거움을 앗아갈 뿐 목표를 달성하는데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한다.  

            

8) 조금만 더 가면 된다는 마음을 갖는다.

   산봉우리에 이르는 길은 언제나 생각보다 멀다. 하지만 앞으로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마음먹으면 큰 장애가 되지 않는다.


9) 정상에 오르면 마음껏 기쁨을 맛본다.


10) 한 가지 약속을 하자.

   남은 생애 동안 이 경험이 반드시 유용하게 쓰일 것이라고, 그리고 또      다른 산을 찾아 새로운 모험에 도전하겠노라고


11) 우리의 경험을 타인과 나누자.


■ 눈을 맞추세요


0 테오 비에레마는 한 마디로 끈질긴 남자였다. 그는 바르셀로나에 있는 내    에이전시 사무실로 오년 동안이나 줄기차게 편지를 보내왔다. 네델란드     헤이그에 와서 강연을 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곤란하다는 답장으로 일관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미 책    과 기사에 다 썼는데 굳이 강연까지 다닐 필요가 있을까. 어쨌든 테오는    내가 네델란드의 한 방송국과 촬영 예정이 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촬영을    하러 호텔 로비에 내려왔을 때 그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0 그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맺었다.

  “그렇습니다. ‘만남’이 필요한 거죠. 제가 오 년 내내 실수했던 게 바    로 그 부분이었습니다. 당신에게 그저 이메일만 보낼 게 아니라 제가 피    와 살을 가진 존재라는 걸 보여드려야 했는데 말이죠. 한 번은 유명 정치    인에게서 대답을 기다리다 못해 직접 찾아가 그의 방문을 두드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가 내게 이렇게 말하더군요. ‘뭔가를 원한다면, 먼저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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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와 눈을 맞추십시오’그의 말대로 한 다음부터는 좋은 일만 생겼습니     다. 세상의 어떤 소통 방식도 눈을 맞추는 것보다 나은 것은 없습니다.”


■ 칭기즈칸과 그의 매


0 얼마 전 카자흐스탄을 방문했을 때 나는 아직도 매를 이용해 사냥을 하는    사냥꾼들과 동행할 기회가 있었다. 지금 나는 사냥이라는 것에 대해 왈가    왈부할 생각은 없다. 그저 자연에는 나름의 돌아가는 방식이 있다는 정도    만 덧붙여 두련다.

   그날은 통역자가 없어서 오히려 득이 된 경우였다. ‘시바구치’라고 불    리는 매사냥꾼들과 말이 통하지 않았던 덕분에 그들의 행동을 더 유심히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0 사냥꾼의 팔뚝에서 훌쩍 날아오른 매는 공중을 몇 바퀴 맴돌다가 쏜살같    이 내려와 포획물을 덮치더니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가가     보니 매는 암여우 한 마리를 발톱으로 움켜쥐고 있었다. 나는 그런 장면    을 그날 아침 거듭해서 목격했다.


0 마을로 돌아와 나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하지만 소용없는 질문이었다. 누    구도 그것을 명쾌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그저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기술이라는 것이었다. 저 멀리 펼쳐진 눈 덮힌 산, 말과 기수의 실루엣,    팔뚝에 앉아있던 매가 기수의 팔을 떠나 정확히 포획물을 덮치던 모습 그    것은 결코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0 나를 초대한 사람중 하나가 칭기즈칸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칭기즈칸은 부하들과 함께 사냥을 나갔다. 그날따라 그들은 단 한 마리의    포획물도 건지지 못한 채 막사로 돌아왔다. 칭기즈칸은 실망한 채 혼자     사냥을 나갔다. 목이 말랐다. 여름 가믐으로 시냇물이 말랐는데 기적처럼    바위를 타고 흘러 내리는 물을 발견했다. 그는 즉시 매를 내려 놓고 물을    받아 입에 대는 순간 매가 날아 올라 그의 손에 들린 은잔을 채어 떨어뜨    리는 것이 아닌가. 한 번, 두 번, 세 번.... 화가난 칭기즈칸은 검을 빼    어 단숨에 매의 가슴을 내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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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리니 흐르던 물줄기가 끊어져 있는게 아닌가. 마실    물을 찾으려고 벼랑을 기어 오른 칭기즈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놀라    웠다. 물 웅덩이 근방에 독하기로 소문난 독사가 죽어 있었던 것이다. 물    을 마셨다면 그도 죽었을 터였다. 

   칭기즈칸은 죽은 매를 옆구리에 끼고 막사로 돌아와 금으로 매 형상을     뜨게 하고 한쪽 날개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새겼다.

  “분노로 행한 일은 실패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다른 날개에는 이렇게 새겼다.

  “설령 마음에 들지 않는 행동을 하더러도 벗은 여전히 벗이다. ”


■ 남의 정원을 돌보시느라


0 아랍에 이런 경구가 있다.

  ‘바보에게 천 가지 지혜를 가르쳐준들 그가 원하는 것은 정작 네 것뿐이    리니.’

   삶의 정원을 일궈나가다 보면 우리는 문득 어디선가 우리를 엿보는 이웃    을 의식하게 된다. 그는 제 할 일은 제쳐둔 채 우리에게 언제 행동의 씨    앗을 뿌려야 하는지. 언제 생각의  비료를 줘야 하는지. 언제 성취의 물    을 부어야 하는지 충고하는 데 열을 올린다.


0 그의 말에 귀 기울이다 보면 결국 우리는 그를 위해 일하는 것이나 다름    없게 되고 우리 삶의 정원은 이웃의 뜻대로 되어갈 것이다. 그리하여 끝    내는 비땀을 The고 축복의 거름을 주고 일군 우리의 땅을 알아보지도 못할    지경에 이르게 된다. 땅 한 뼘 한 뼘에 정원사의 인내 어린 손길만이 풀    어갈 수 있는 비밀이 서려 있음을 까맣게 잊고 해와 비와 계절의 변화를    살피는 대신 울타리 너머 우리를 곁눈질 하는 이웃의 충고에만 매달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남의 정원에 대해 말하기 좋아하는 그 바보는 제 뜰의    꽃과 나무는 안중에도 없다.


■ 판도라의 상자


0 나는 세계 도처에서 폭력을 목격했다. 이스라엘 레바논 전쟁 직후,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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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쇠울라 사드라는 친구에게 함께 초토화된 베이루트의 거리를 걸었다. 친    구는 도시가 파괴된 것이 벌써 일곱 번째라고 했다. 나는 농담 삼아 집을    다시 지을 생각일랑 말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는 편이 낫지 않느냐고     했다. “우리의 도시인 걸요.”그녀가 대답했다. “조상이 묻힌 땅을 경    외하지 않으면 영원히 저주에서 풀려날 수 없어요.”  


0 성서의 이브처럼 판도라 역시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했다. 그녀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상자의 뚜껑을 여는 순간 세상의 모든 죄악이 튀어나와 인간    세상을 뒤덮었다. 그때 단 한 가지 상자안에 남은 것이 있었다. 희망이었    다.

  희망 그것은 사이비 지식인들이 ‘자기기만’의 동의어로 사용하는 말이    며, 지키지 못할 게 뻔한 공약을 내세우는 정부가 써 먹는 일이기도 하     다. 그것은 아침부터 우리곁에 머물다가 상처투성이의 하루를 보낸 뒤 저    물녘에 숨을 거둔다. 그리고 새벽 여명에 다시 살아난다. 그렇다 ‘말로    서 폭력에 대적할 길은 없다.’ 하지만 이런 말도 있다. ‘삶이 있는 곳    에 희망도 있다.’       

  

■ 파자마를 입고 죽은 남자


0 2004년 6월 10일 도쿄 인터넷 신문에 “남자는 자신의 침실에서 파자마를    입고 죽어 있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비극적 면모는 지금부터다.

  고인은 파자마만 걸친 해골이었다. 그의 옆에는 1984년 2월 20일의 신문    이 펼쳐져 있었고 그 옆 탁자에는 같은 날짜의 달력이 놓여 있었다.   

  그는 20년 동안 그 곳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

  20년 동안 아무도 그를 찾지 않았다.

  그는 그 건물을 지은 건축회사의 직원으로 밝혀졌다. 1980년대 초에 이혼    한 직후부터 그는 그 집에 살았다. 그리고 신문을 읽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그날, 남자의 나이는 겨우 오십대 초반이었다. 


0 전처는 한 번도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그가 일했던 건축회사를 찾아간    기자는 당시 회사가 집을 한 채도 팔지 못해 건물 완공 직후 부도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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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는 사실을 알아냈다. 때문에 그가 출근하지 않은 것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은 것이다. 기자가 찾아낸 그의 친구들은 그가 그들에게서 돈을    빌려간 후 갚지 못해 잠적을 한 게 아닌가 추측했다.

   기사는 전처가 그의 유해를 인수 했다는 내용으로 끝났다. 나는 그 마지    막 문장을 곱씹어 보았다. 그녀는 살아 있었다. 그런데도 20년 동안 단     한 번의 연락도 없었다. 인생이 그런 것일까?


0 다시 파자마를 입고 죽은 남자를 떠 올렸다. 찾는 사람도 없이 20년 동안    의 그 완벽하고 철저한 고립에 대해. 배고픔이나 갈증, 실업이나 실연의    상처나 절망보다 더 끔찍한 것은. 어느 누구도, 세상의 단 한 사람도 자    신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느낌이리라. 

   그를 위해 조용히 기도를 올리자. 그리고 친구의 소중함을 돌이켜 볼 기    회를 준 그에게 감사하자.


■ 고독한 불씨


0 후안은 일요일마다 꼬박꼬박 예배에 참석했다. 그런데 어느날 부터인가     목사가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한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고, 차차 교    회에 발길을 끊게 되었다.

   두 달이 지난 어느 추운 겨울 밤, 목사가 그를 찾아왔다.

  ‘보나마나 다시 교회에 나오라고 온 거겠지.’후안은 생각했다. 교회에    발길이 뜸해지게 된 솔직한 이유는 차마 밝힐 수 없었다. 똑같이 반복되    고 있는 설교 때문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후안은 속으로 핑곗    거리를 찾으며 벽난로 앞에 의자를 두 개 가져다 놓고 날씨 얘기를 꺼냈    다.

   목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화를 시도하려던 후안 역시 입을 다물    었다. 두 사람은 거의 반시간 동안 말없이 불만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목사가 몸을 일으켜 아직 타지 않은 장작개비로 불씨 한 조각을 꺼낸 것    은.

   열기를 잃은 불씨는 스르르 꺼지기 시작했다. 후안은 불씨를 급히 벽난    로 속으로 다시 집어 넣었다.

  “안녕히 주무세요.”목사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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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녕히 가세요. 감사합니다.”후안이 대답했다.

  “제아무리 맹렬히 타오르던 석탄이라도 불에서 꺼내면 결국 꺼지고 맙니    다. 제아무리 영리한 사람이라도 형제들에게서 멀어지는 순간, 온기와      불꽃을 잃게 되지요. 다음 주일에 교회에서 뵙겠습니다. ”


■ 규칙보다 더 중요한 것


0 2003년 가을의 일이었다. 어느 날 저녁 아내와 스톡홀름 시내로 산책을     나갔다가 스키폴을 짚고 다니는 여자를 보았다. 처음에는 사고로 다친 게    아닌가 했다. 하지만 여자는 (물론 아스팔트 위에 있기는 했지만)스키를    타듯 빠르고 일정한 리듬으로 걷고 있었다. 결론은 명백했다. “좀 모자    란 여자군. 안 그러면 저렇게 시내 한복판에서 스키타는 시늉을 하고 있    겠어?”

   호텔로 돌아와 나는 출판사 대표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모자란    쪽은 그녀가 아니라 나였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 여자는 ‘노르딕 워      킹’이라는, 다리를 비롯해 팔, 어깨와 등 근육까지 움직이는 전신운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0 어느 날 활쏘기에 필요한 물건을 사러 스포츠용품점에 들렀다가 나는 등    산용으로 출시된 가벼운 알루미늄 스틱을 보았다. 카메라 삼각대처럼 접    고 펴기 편하게 되어 있는 제품이었다. 머릿속에 ‘노르딕 워킹’이라는    운동이 떠올랐다. 안 될 것도 없잖은가. 나는 아내 것 하나, 내 것 하나    해서 두 쌍의 스틱을 구입했다. 우리는 스틱 길이를 몸에 편하게 맞추고    화창한 어느 날 산으로 나갔다.

   놀라운 경험이었다. 우리는 산을 오르내리며 온몸 구석구석이 움직이는    걸 느꼈다. 균형 감각이 살아나는 반면, 걷는 데서 오는 피로도 줄어 들    었다. 우리는 한 시간 동안 평소의 두 배 거리를 걸을 수 있었다. 나는     전에 오르려다 지천에 깔린 돌 때문에 포기하고 말았던 마른 계곡이 떠     올랐다. 스틱을 이용하면 수월할 것 같았다. 그리고 내 추측은 옳았다.


0 어느 날 저녁, 나는 재미 삼아 누르딕 워킹에 관해 검색을 했다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동호회와 서클, 토론, 갖가지 모델의 장비 및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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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칙에 관한 검색 결과가 수페이지에 이르렀다.       

   나는 규칙에 관한 내용을 모조리 출력하고 공부했다. 다음날은 그대로     해 보았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규칙 때문에 정작 좋아하는 것들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칼로리를 소모하고, 근육을 움직이고, 척추의 특정 부위를    사용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던 것이다. 나는 배운 것을 모조리 잊기    로 했다. 요즘 우리는 스틱과 더불어 세계 곳곳을 누비며 우리 몸이 반응    하고 움직이는 대로 운동한다. 나는 내 방식대로 노르딕 워킹을 하며 긴    장을 풀고 행복을 느낀다.

  왜 우리 인간들은 매사 규칙을 만들지 못해 안달인지 모르겠다. 


■ 다시는 펼쳐지지 않을 책


0 나는 장서가가 아니다. 몇 해 전, 나는 삶의 질은 최대한 높이고 소유물    은 최소한으로 줄이겠다고 결심하고 몇 가지 결정을 내렸다. 그렇다고 수    도승처럼 살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였다. 소유물을 대거 처    분하고 나면 날아갈 듯 홀가분하다.


0 나는 서가의 책을 사백 권으로 제한하기로 결심했다. 어떤 책은 감정적     가치 때문에, 또 어떤 책은 틈만 나면 되풀이해 읽는 것이라 서가에 남았    다. 내가 이런 결정을 내린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중 하나는 한    평생 정성을 다해 꾸민 서가라도 주인이 죽고 나면 결국 무게 단위로 팔    아 치우는 모습이 안타까워서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런 모든 책을 집에    모셔 놓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친구들에게 교양을 과시하려고? 내가    산 책들은 내 집에서 보다도 공공도서관에서 훨씬 널리 읽힐 것이다.        과거에는 자료 때문이라도 책을 가까이 두어야 했다. 하지만 요즘에는     컴퓨터를 켜고, 검색어 한두 개만 입력하면 필요한 것들을 찾을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도서관 인터넷 덕분이다.


  당연히 지금도 나는 책을 산다. 그러나 그것을 다 읽고 나면 여행을 떠나    보낸다. 누군가에게 선물을 하거나 공공 도서관에 기증하는 것이다. 인심    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다. 책에는 그것 나름의 길이 있고 꼼짝없이 책꽂    이에 묶여 있게 해서는 안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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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다시는 펼쳐지지 않을 책’-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시 -


     이젠 기억에도 아득한 베를렌의 시구가,

     더는 발길 닿지 않을 거리가,

     내 얼굴을 마지막으로 비춰본 거울이,

     다시는 열지 않을 문이 있다.


     내 눈 앞 저 서가에

     다시는 펼쳐지지 않을 책들이 있다.


0 내가 책을 떠나보낼 때 느끼는 감정과 정확히 일치하는 시다. 나는 그 책    들을 다시 펼쳐보지 않을 것이다. 새롭고 흥미로운 책들은 부단히 쏟아져    나오고. 나는 그런 책들을 계속 읽고 싶기 때문이다. 물론 서가를 갖는다    는 것은 대단히 멋진 일이다. 어린아이들이 생애 처음으로  호기심을 가    지고 펼쳐보게 되는 책들은 대개 그림과 글씨가 섞인 그림책 전집류라고    한다. 하지만 사인회 때, 손때로 반질반질해진 내 책을 들고 오는 독자들    을 만나는 것 역시 멋진 일이다. 이 손에서 저 손으로 돌아다닌 책. 그     책을 쓰는 동안 작가의 영혼이 여행을 했듯이 책 역시 나름의 여행을 한    것이다.


■ 우물 속의 여자


0 모로코에서 온 사람에게서 들은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사막에 사는 한    부족이 원죄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이야기다.     

  이브가 에덴 동산을 거닐고 있는데 뱀이 다가와 말했다.

  “이 사과를 먹어봐.”

  신에게 가르침을 받은 대로 이브는 거절했다. 그러자 뱀이 우겼다.

  “먹어 보라니까. 그래야 네 남자의 눈에 예뻐 보일 수 있어.”

  이브가 대답했다.

  “그럴 필요 없어. 그에겐 나 말고 다른 여자가 없으니까.”

  뱀이 비웃었다.

  “정말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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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뱀이 믿으려 하지 않는 이브를 데리고 우물이 있는 언덕 꼭대기로 갔다.

  “이 우물 안에 그 여자가 있어. 아담이 여기 숨겨 두었거든.“

   이브가 허리를 굽혀 우물 안을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우물물에 비친 아    리따운 여자를 보았다. 그녀는 즉시 뱀이 권한 사과를 먹었다.

   부족 전설에 의하면, 우물에 비친 자신을 인식하고 더는 자기 자신을 두    려워하지 않는 이는 다시 낙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한다.


■ 죽음에 감사하라


0 1986년 산티아고를 다녀온 후부터, 사실 나는 죽음에 대한 생각을 늘 곁    에 두고 지내왔다. 그전까지는 언젠가 모든 것이 끝날 수도 있다는 생각    으로 두려움에 떨었다. 산티아고의 길을 순례하던 도중, 나는 산 채로 매    장되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체험해 볼 기회가 있었다. 그것은 강렬한 체    험이었고 그때의 체험을 통해 내 안의 두려움은 사라졌다.


0 그러므로 나는 매 순간이 내게 주어진 마지막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오늘    할 일이나 경험할 수 있는 것 - 기쁨, 직업적 의무, 내가 상처 입힌 누군    가에게 사과하는 것 등 - 을 내일로 미루지 않는다.


0 “당신이 만일 오늘 여기서 죽게 된다면 어떤 장례식을 원하십니까?“

  “아내가 화장해서 내 유골을 바다에 뿌려줄 겁니다.”

  “그럼 묘비는요?”기자가 물었다.

  “화장할 테니 묘비명이 새겨진 묘석 따위는 없겠죠. 타고 남은 재가 바    람을 타고 훨훨 날아갈 텐데요. 하지만 굳이 묘비에 새길 한 문장을 택하    라면 이 말이었으면 좋겠네요.”

  ‘그는 살아서 죽었다.’


0 말장난이나 모순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나는 일하고 먹고, 열    심히 일상을 꾸려나가면서도 살아 있지 못한 사람들을 많이 봐왔어요. 그    들은 하루하루 펼쳐지는 삶의 기적에 대해 되새겨보기 위해 잠시 멈추지    도 않고 다가오는 시간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순간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이해하지 못한 채 기계적으로 살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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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우리는 언제가 될지 모르는 죽음의 순간에 조금씩 다가서고 있다. 그러니    항상 그것을 의식하고 일 분 일 분에 감사해야 한다. 그뿐 아니라 죽음에    게도 감사해야 한다. 죽음이 있기에 우리는 결단의 중요성을 되새길 수     있으니까. 할 것이냐 말 것이냐. 죽음은 우리로 하여금 ‘산 송장’으로    머물러 있지 않도록 북돋우고, 우리가 늘 꿈꿔왔던 일들을 감행하게 한     다. 우리가 원하든 말든, 죽음의 사자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 날이 밝는 순간


0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서 노벨평화상 수상자 시몬 페레스가 들    려준 이야기다.

  한 랍비가 제자들을 모아 놓고 물었다. 

  “밤이 끝나고 날이 밝는 정확한 순간을 어떻게 알아낼 수 있느냐?”

  “양 Ep 사이에서 개를 가려낼 수 있을 때입니다.”

  어린 소년이 대답했다.           

  한 제자는 이렇게 말했다.

  “아닙니다. 멀리서도 무화과나무와 올리브 나무를 구별할 수 있어야 날    이 밝은 겁니다.”

  “둘 다 신통치 못한 대답이다.”

  “그럼 정답은 뭔가요?”

  제자들이 묻자 랍비가 대답했다.

  “한 이방인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을 때, 우리가 그를 형제로 받아들여    모든 갈등이 소멸되는 그 순간이 바로 밤이 끝나고 날이 밝는 순간이       다.”


■ 아무 것도 아닌 동시에 가장 중요한 일


0 오늘은 딱히 할 일이 없다.

  나는 초조해졌다. 뭐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닐까. 굳이 할 일을 찾자면 없    는 것도 아니었다. 돌아보면 일은 언제나 있다. 전구 갈아끼우기, 낙엽     쓸기, 책 정리, 컴퓨터 파일 정리. 하지만, 한번 쯤 그저 천장만 바라보    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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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나는 젖은 잔디 위에 앉아 머릿속을 부유하는 생각들을 항목별로 정리해    본다.

1) 나는 쓸모없는 인간이다. 다른 사람들은 이 순간 모두 바쁘게 열심히 일    하고 있다.

  답 ; 나도 열심히 일 한다. 어떤 때는 열두 시간씩 일하기도 한다. 오늘    은 어쩌다 일이 없는 것이다. 


2) 지금 내 곁엔 친구가 없다. 나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작가 중 한 사람    이지만 여기서는 혼자다. 전화벨도 울리지 않는다.

  답 ; 내게도 당연히 친구는 있지만 내가 프랑스 생마르탱에 소재한 옛방    앗간 집에 있는 동안 그들은 내게 고독이 필요하다는 점을 존중해 준다.


3) 풀을 사러 가야 한다. 그렇다 어제 풀이 떨어졌다는 것이 막 떠올랐다.    차를 타고 근처 시내로 갈까? 나는 거기서 생각을 멈췄다. 가만히 앉아서    좀 쉬는 게 왜 이리 어렵단 말인가?


0 이런저런 생각들이 스쳐갔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 때문에 미리 걱정하는    친구들, 터무니없이 보이는 일로 인생을 낭비하는 지인들, 의미없는 대화    들, 자릿값을 하느라 일을 만들어 내는 상사들, 하루라도 중요한 업무를    맡지 못하면 책상이 없어질까 초조해하는 직장인들, 저녁에 아이들을 내    보내고 전전긍긍하는 어머니들, 공부와 시험에 시달리는 학생들.

  

0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놈의 풀을 사러 문구점으로 달려가지 않기 위해    나 자신과 싸워야 했다. 초조함이 극에 달했지만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몇 시간만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서서히 불안은 사라졌    고 나는 내 영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내 영혼은    내게 할말이 많았을 텐데, 나는 너무나 오랫동안 바빴다.


■ 기품에 관하여


0 사람들은 흔히 기품을 겉모습이나 패션에 관련된 말이라고 여기곤 한다.    그건 심각한 오해다. 인간이란 존재는 무릇 행동과 자세에 기품이 있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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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다. 기품이란 훌륭한 취향, 우아함, 균형과 조화의 동의어다.


0 인생에서 중요한 한 걸음을 내디딜 때, 우리는 여유와 기품을 갖추고 행    동해야 한다. 물론 손동작은 어떤지, 앉아 있는 모습은 괜찮은지, 미소가    어색하지 않은지 매순간 전전긍긍하라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    체도 언어를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타인이 그것을 통해 무의식적으로    나마 말을 넘어서서 표현하려는 무언가를 읽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    해 둘 필요가 있다.


0 기품을 거만함이나 속물근성과 혼동하지 않았으면 한다. 기품은 우리의     거동을 완벽히 하고 발걸음을 굳건히 하고, 함께하는 사람들에 대한 존경    을 표하기 위해 갖춰야 할 자세다. 그것은 불필요한 것들을 떼어내고 단    순함과 집중력을 발견해야만 성취될 수 있다. 단순하고 절제된 동작일수    록 아름다운 법이다.

   눈은 흰색 하나로 이루어진 단색이라서 아름답고, 바다는 수면이 고요할    때 아름답다. 하지만 바다나 눈에는 모두 깊이가 있고 그들만의 특질이     있다.

 

0 주저하거나 두려워 말고 즐겁게 확신에 찬 발걸음을 내디뎌라. 한 걸음     한 걸음 더불어 나아갈 때마다 동반자들이 함께할 것이며 필요하다면 우    리를 도울 것이다. 그러나 적이 우리를 주시하고 있음을, 우리가 굳건할    때와 두려움에 떨 때를 알아 본다는 것을 잊어선 안된다. 긴장되면 숨을    깊이 들이쉬고 평정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으라. 그러면 불가해한 기적을    통해 우리의 내면은 고요함으로 가득 차오를 것이다.

 

■ 나의 기도문


0 주여, 우리의 의심을 지켜 주소서. 의심 또한 기도하는 한 방법입니다.     의심은 우리를 성장하게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의 문제에 대한 많은    답들과 두려움 없이 마주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주여, 우리의 결정을 지켜주소서. 결정 또한 기도하는 한 방법입니다.     우리의 의심을 이기고, 이 길과 저 길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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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 능력을 주소서. 우리의 긍정이 늘 긍정이도록, 우리의 부정이 늘 부정    이도록 하소서. 한 번 결정한 길은 뒤돌아보지 않도록, 후회가 우리의 영    혼을 잠식하지 않도록 하소서. 그러기 위하여..... 

   주여 우리의 행동을 지켜주소서. 행동 또한 기도하는 한 방법입니다. 우    리의 일용할 양식이 우리가 맺는 가장 좋은 열매가 되게 하소서. 노동과    행동을 통해 우리가 받은 사랑을 나누게 하소서. 그러기 위하여....

   주여 우리의 꿈을 지켜주소서. 꿈 또한 기도하는 한 방법입니다. 나이와    외적 조건에 상관없이 가슴속에 성스러운 희망과 인내의 불씨를 품게 하    소서. 그러기 위하여.....

   

   주여 우리의 열정을 지켜주소서. 열정 또한 기도하는 한 방법입니다. 우    리를 하늘과 땅, 어른이나 어린아이들과 결합케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니,    열정은 우리의 욕구가 중요함을 일깨워 주고 최선을 다하도록 북돋워줍니    다. 우리가 하는 일과 혼연 일체가 되어 있는 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열정은 재삼 확인해 줍니다. 그러기 위하여.....     

   주여 우리를 지켜주소서. 생명은 우리가 당신의 기적을 다시 펼쳐 보일    유일한 길입니다. 이제까지 그랬듯 땅이 씨앗을 낟알로 여물게 하시고,     밀알을 빵으로 만들게 하소서.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사랑이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러니 우리를 외롭게 하지 마소서. 언제나 우리 곁에 머물    러 계시며, 의심하고 행동하고 꿈과 열정을 품은 사람들, 매일매일 당신    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이들과 더불어 함께하게 하소서.

   아멘.


■ 가난한 마음은 행복하다


0 아내와 내가 그녀를 만난 것은 코파카바나의 콘스탄트 라모스 거리 모퉁    이에서 였다. 예순 살 가량의 여인은 군중에 둘러 싸인 채 휠체어에 앉아    있었다. 아내가 도와 드릴까요? 하고 묻자 여인은 산타 클라라 가로 데려    다 달라고 했다.    

   휠체어 등받이에는 비닐 봉지 몇 개가 덜렁덜렁 매달려 있었다. 우리와    함께 가면서 여인은 말했다. 그 봉지에 들어 있는 것이 자신의 전 재산이    라고, 잠은 상점 현관에서 자고, 동냥을 해서 먹고 산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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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여인이 가자는 곳에 도착하니 거지들이 모여 있었다. 그녀는 비닐 봉지에    서 실온 보관 우유 두 팩을 꺼내 그들에게 나누어주며 우리에게 말했다.

  “받은 게 있으면, 베풀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죠.”


■ 그는 살아서 죽었다


0 어림잡아 보건데, 독자들이 이 책 한 페이지를 읽는 데는 삼 분 정도가     걸릴 것이다. 통계에 따르면, 그 시간 동안 약 300명이 죽고 620명이 이    세상에 태어난다.

   내가 이 한 페이지를 쓰는데는 약 반시간 정도가 걸린다. 나는 정신을     집중하며 컴퓨터 앞에 앉아 있고 옆에는 책들이 흐트러져 있고, 머릿속에    는 영감이 떠오르고, 밖에는 자동차들이 지나간다. 모든 것이 지극히 평    범한 상태다. 그럼에도 그 삼십분 동안 삼천 명이 죽고 육천이백 명이 세    상의 빛을 본다.


0 얼나마 이상한 일인가. 우연히 눈에 띈 단순한 통계로 인해 나는 갑작스    레 상실과 만남, 미소와 눈물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돌보는 손길 하나    없이 자기 방에서 홀로 죽어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보는 눈을 피해    태어나 고아원이나 수도원 문 앞에 버려지는 아이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


0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사는 동안 쓸데없는 일들을    걱정하고, 일을 미루고, 중요한 순간들을 인식하지 못한 채, 늘 푸념하면    서도 막상 행동하기는 두려워한다. 모든 것이 달라지길 바라면서도 스스    로는 변화하려 들지 않는다.


0 인디언들은 이렇게 말한다. ‘세상을 떠나기에 특별히 좋은 날은 없다.’    한 현자는 이렇게 말했다. ‘죽음은 언제나 당신 곁에 있다. 그리고 당신    이 무언가 중요한 일을 할 때 필요한 힘과 용기를 주는 것은 바로 그 죽    음이다.’ 

   나는 그 경지에 이르기를 바란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어리석다. 우    리 모두가 이르든 늦든 언젠가 죽는다. 그리고 그 사실을 받아 들이는 자    만이 삶 앞에 준비된 자이다.


                               -19 -                                 ■ 꿈을 좇은 사나이


0 신약성서에 ‘꿈’이라는 말이 다섯 번밖에 나오지 않는데 그 다섯 번 중    에 네 번은 목수 요셉과 관련해서 등장한다. 천사는 매번 요셉에게 그가    원래 하려던 바와 정반대로 행동하라고 설득했다. 심지어 누구의 씨앗인    지도 모르는 아이를 가진 아내를  떠나지 말라고까지 했다.

   그리고 천사는 요셉을 이집트로 보냈다. ‘나는 나사렛에 자리잡은 목수    이고 내 단골도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란 말입    니까?’ 그때도 요셉은 이렇게 반문할 수 있었을 테지만 짐을 꾸려 낯선    땅으로 떠났다.


0 천사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했을 때도 그는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제 겨우 자리 잡아 살 만해졌고 부양할 식구들도 있는 처지    에 나더러 뭘 어쩌라는 거지?’

   요셉의 꿈 이야기는 세간의 눈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꿈을 좇았다.


0 훗날 그의 아내와 아들은 기독교의 모퉁잇돌이 되었다. 가족의 세 번째     기둥이었으며 목공 기술자였고, 아들을 키운 아버지는 성탄절 마구간 장    면에서나 기억될 뿐이다.     

   나는 꿈을 좇은 그가 선한 사람이었으리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요셉    은 솜씨 좋은 목수, 선량한 남편, 그리고 이 세상을 그가 태어나기 이전    과 이후로 나누게 한 한 소년의 자상한 아버지였다.


■ 허물고 다시 짓기


0 시마 반도에 있는 이세 신궁에 초대 받았을 때의 이야기다. 신궁에 도착    한 나는 어리둥절했다. 멋진 건물이 숲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었는데 바로    옆은 황무지였다. 저 땅은 뭐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이랬다. 

  “우리가 다음 건물을 지을 땅입니다. 이십 년마다 한 번씩 우리는 지어    놓은 건물을 허물고 그 옆에 새로 건물을 짓지요. 그럼으로써 목수, 미장    이, 설계 기술을 가진 이들이 기술을 연마하고 전수할 기회를 얻는 겁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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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동시에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진리를 보여주지요. 건물도 끊    임없이 개량할 필요가 있고요.”


■ 기도하라, 모든 것이 헛될지라도


0 헨리 제임스는 경험을 의식의 방에 걸려 있는 거대한 거미줄에 비유한 바    있다. 필요한 것만 걸리는 게 아니고 공기중의 먼지처럼 미세한 것들까지    다 걸린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가 ‘경험’이라 부르는 것들은 실패의 합계일 때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미 너무나 많은 실수를 저지른 듯 두려움에 가득 차 다    음 단계로 발을 내디딜 용기를 내지 못한다. 그럴 때마다 솔즈베리 경의    말을 기억하자. ‘의사들 말만 믿으면 위생적인 게 없고, 신학자들 말만    믿으면 죄 아닌 게 없으며, 군인들 말만 믿으면 안전한 곳은 없다.’


0 계속 기도하라 의무감에서든 두려움에서든, 그 어떤 이유로도 상관없다.    그저 계속, 기도하라. 모든 것이 헛되어 보이더라도 기도하라.

   우리의 말을 수신하고 믿음의 기쁨을 관장하는 천사가 잠시 소풍을 간     것뿐이다. 그러나 천사는 곧 돌아 올 것이고 그가 우리를 찾아내려면 늘    입술에 기도나 간청의 말을 올리고 있어야 한다.


■ 길을 여는 열쇠


0 마이애미 항구에서 함께 바다를 바라보던 친구가 말했다.

  “가끔 사람들은 영화에서 본 것만을 기억하고 실체가 어땠는지를 잊어버    리지. 영화 ‘십계’기억하나?”

  “그럼, 모세 역을 맡은 찰턴 헤스턴이 지팡이를 들자 바닷물이 쩍 갈라    졌고,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건넜잖아.”


0 “성서에서는 그와 달라.” 친구가 말했다. “성서에 따르면 신이 모세에    게 이렇게 명령했어. ‘이스라엘 자녀들에게 말하라, 앞으로 나아가라      고.’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나서야 모세는 지팡이를 들었지. 홍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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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 라진 건 그 다음이야. 결국, 길을 갈 용기가 있는 자에게만 길이 열리    는 법이지.”


■ 보이지 않는 책


0 1890년의 한 설교에서 목회자 헨리 드루먼드는 창조주와의 만남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 순간 인간 존재가 당면하는 가장 큰 질문은 ‘얼마나 열심히 믿었는    가’가 아니라 ‘얼마나 사랑했는가’입니다. 종교의 궁극적 질문은 종교    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했느냐. 무엇    을 믿었느냐. 무엇을 성취했느냐가 아니라, 살아가면서 얼마나 사랑에 인    색했느냐는 것입니다. 저지른 죄에 대해서는 추궁 당하지 않습니다. 심판    의 자리에서 헤아리는 것은 우리가 행한 잘못이 아니라 행하지 않은 선     (善)입니다.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요. 사랑을 내 안에만 가두어두    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혼을 부정한 것이고, 우리가 진정 그를 알지 못했    고, 그가 우리에게 베푼 사랑이 무의미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0 도덕경을 읽고 감동한 한 일본 승려가 그 책을 일본어로 번역하고 출간     하겠다는 원력을 세웠다. 그가 도덕경을 출간하는데 필요한 돈을 모으기    까지 꼬박 십 년이 걸렸다. 그런데 그 무렵 나라에 역병이 창궐했다. 승    려는 모은 돈을 치료비로 쓰고, 다시 돈을 모으는 데 또 십 년이 걸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지진이 일어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자 그 돈을 기부    했다. 세 번째 십 년이 지나서야 그는 원력을 이룰 수 있었다.

  

0 현자들은 말한다. 그 승려는 ‘도덕경’을 세 권 펴냈다고. 두 권은 보이    지 않는 책이고, 한 권은 보이는 책이다. 그는 자신의 유토피아를 믿었     고, 선한 싸움을 계속했고, 목표를 향한 신념을 잃지 않았고, 그러면서도    주위 사람들을 잊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바를 잘 보    여 준다. 가끔은 보이지 않는 책, 타인을 향한 관용으로 이루어진 책이     서재에 꽂혀 있는 그 어느 책보다도 중요하다.


■ 다르게 여행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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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철들기 전부터 나는 최고의 배움은 여행에서 얻어 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나는 순례자의 영혼을 간직하고 있다. 여기 나와 같은    순례자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내가 얻은 여행에 관한 몇가지 교훈    을 나누고자 한다.


1) 박물관을 피한다

  당신이 낯선 도시에 있다면 그 도시의 과거보다 현재가 더 흥미진진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은 박물관에 가는 걸 의무처럼 여기고 여행이란 그런 문    화를 찾아다니는 것이라고 배워왔다. 그러나 박물관에 가려면 목표를 가    지고 충분히 공부하고 가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보기는 봤는데 무엇인지    모른채 그곳을 나서고는 곧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2) 술집에 간다

  술집에 가면 그 도시의 삶이 보인다. 오순도순 술잔을 기울이며 대화할     분위기가 있는 그런 술집에서 오가는 사람들을 보자. 누군가 말을 붙이     면, 별로 중요하지 않은 내용이라도 응하자.


3) 마음을 열자

  최고의 가이드는 현지에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이 사는 곳에 자부    심을 느끼며 여행사를 위해 일하지 않는다. 거리를 나서자 마음을 열고     그들에게 말을 걸자.


4) 여행은 혼자서 가되 결혼한 사람이라면 배우자와 간다.

  그래야만 그 나라를 안다. 단체로 몰려 다니는 것은 여행하는 시늉만 낸    것이 된다. 모국어를 쓰고, 인솔자가 하라는 것만 하고 방문한 나라의 얘    기 보다 함께 간 사람들의 이야기(모국의 이야기)만 한다면 진정한 여행    이 아니다.


5) 비교하지 말자

  물가도, 위생도, 삶의 질도, 교통수단도 그 어느 것도 비교하지 말라. 여    행의 목적은 그곳의 그러함을 보고 느끼고 그들의 현실과 삶에서 본 받을    것을 배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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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모두가 우리를 이해한다는 것을 이해하자

  그 나라 말을 못한다고 겁내지 말자. 나는 한마디도 소통할 수 없는 많은    나라들을 여행했지만, 결국 언제나 나를 도와주고, 안내해주고, 유용한     조언을 해주는 이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호텔 명함을 잘 챙겨라.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다면 택시를 세우    고 그 명함을 보여주면 그만이다.


7) 너무 많이 사지 말자

  돈은 운반할 필요가 없는 것들에 쓰라. 좋은 공연, 근사한 식사, 피크닉    등 .....


8) 한 달 안에 전 세계를 다 보려고 하지 말자

  나흘 닷새씩 한 도시에 머무는 것이 일주일 안에 다섯 도시를 도는 것 보    다 낫다. 도시는 변덕스런 여자 같아서 그 모습을 드러내기 까지는 시간    이 걸린다.  


9) 여행은 모험이다.

  거리로 나서자. 골목길로 들어가 미지의 무언가를 탐색할 자유를 만끽하    자. 우리가 마주칠 그 무언가가 분명 우리의 인생을 바꾸게 될 것이다.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


0 기원전 250년 경, 중국 어느 지역에 황제 자리에 오를 왕자가 있었다. 그    는 법에 따라 즉위 전에 결혼식을 올려야 했고 곧 나라에 간택령이 내려    졌다.


0 왕자는 현자의 조언에 따라 인근의 처녀들을 불러 모으라고 영을 내렸다.    내로라 하는 집안의 어여쁜 규수들은 미모를 뽐내며 아름다운 옷과 값진    보석으로 치장한 채 모여 들었다. 그 중에 왕자를 진심으로 사모하는 수    수한 차림을 한 늙은 여인의 딸도 섞여 있었다.

   왕자가 말했다.

  “그대들 모두에게 각자 씨앗 한 알씩을 주겠소. 그 씨앗으로 여섯달 안   

                               - 24 -

  에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워오는 이가 장래 이 나라의 황후가 될 것이      오.”


0 처녀는 씨앗을 가져와 화분에 심었다. 정성을 다했지만 석달이 지나도 여    섯달이 지나도 싹도 트지 않았다. 그래도 그녀의 사랑은 어느때 보다 무    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여섯달 후 새로이 모인 자리에서 처녀는 빈 화분    을 들고 나타났다. 다른 후보자들은 저마다 멋진 꽃이 자란 화분을 들고    있었고 그 꽃들은 어느 것 할 것 없이 모두 아름다웠다.

   드디어 왕자가 결과를 발표했다. 왕자가 지목한 신붓감은 늙은 여인의     딸이었다. 왕자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 여인이야말로 황후의 미덕이라는 꽃을 피워낸 사람이오. 바로 정직    이라는 꽃, 내가 그대들에게 나눠 준 씨앗은 싹을 틔우지 못하는 것이      었소.”

  

■ 하느님의 돋보기


0 나는 시드니 항구에서 두 도시를 이어주는 아름다운 다리를 보고 있었다.    그때 호주 사람이 다가와 신문에 나온 광고를 읽어 달라고 했다.  

   “글씨가 너무 작아서요. 뭐라고 쓴 건지 통 모르겠어요.”

  나도 읽어 보려고 했지만 돋보기를 집에 두고 온 터였다. 나는 남자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별 말씀을요.” 남자가 말했다. “그런데 내 생각엔 하느님도 눈이 나    빠 고생인 것 같아요. 늙어서가 아니라 일부러 그러시는 거겠지만요. 그    래야 사람들이 잘못을 저지르는 걸 봐도 잘 안 보인다고 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결국 사람을 용서 하시는 것일 테고요. 불의와 타협하    고 싶진 않으실 테니.” 

  “그럼 사람들이 잘한 일들은 어떻게 되는 걸가요?”

  내가 물었다.

  “아, 그럴 땐 말이죠.”그가 웃으며 걸음을 뗐다. “하느님은 그럴 땐     돋보기를 집에 두고 오시는 법이 없답니다.” 

  

■ 우리는


                               - 25 -

0 다도의 명인 오카쿠라 가쿠조는 이렇게 썼다.

  “우리 안에 악마가 있음을 알고 있기에 우리는 타인 안의 악마를 볼 수    있다. 우리는 우리를 해치는 사람을 용서할 수 없다. 우리 역시 그럴 경    우 용서 받을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면의 고통스러운 진실    을 털어 놓는다. 그것을 감추고 싶어하는 자신의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강건함을 과시한다. 누구도 우리의 허약함을 볼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우리가 형제를 심판할 때 피고석에 선 것은       우리 자신임을 깨달아라.”


■ 아이들의 질문


0 아이들과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대답만 주려하지 말고 아이들이 무엇을     궁금해 하는지 알아 내려고 노력하라.

  장 폴 세토가 몇 몇 학교를 방문하여 아이들의 질문을 적고 그 결과물을    모아 ‘항상 질문하는 아이’라는 책을 펴냈다. 그 질문들은 다음과 같     다.

- 우리가 죽으면 어디로 가나요?

- 왜 우리는 외국인들을 두려워 하나요?

- 화성인과 외계인은 존재 하나요?

- 하느님을 믿는 사람도 사고를 당하는 이유는 뭔가요?

- 신은 어떤 존재 인가요?

- 우리가 결국 죽을 거라면 왜 태어나야 하나요?

- 하늘의 별은 몇 개나 되나요?

- 누가 전쟁과 행복을 만들어 냈나요?

- 하느님은 같은 하느님(가톨릭의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말도 들어    주나요?

- 왜 가난하거나 병든 사람들이 존재하나요?

- 왜 하느님은 모기와 파리를 만들었나요?

- 우리의 수호천사는 왜 우리가 슬플 때 곁에 없나요?

- 왜 우리는 어떤 사람은 사랑하고 어떤 사람은 미워하게 되나요?

- 여러 가지 색깔에 이름을 붙인 사람은 누구인가요?

- 하느님이 천국에 있고 돌아가신 우리 엄마도 천국에 있다면 하느님은 어   

                               - 26 -

  떻게 살아 있을 수 있나요?


0 만약 이 글을 읽는 분들 중 선생님이 있다면 똑 같이 한번 해 보라고 권    하고 싶다. 우리 어른들이 갖고 있는 우주에 대한 이해를 어린이들에게     강요하는 대신, 우리는 우리가 어린 시절에 갖고 있던, 아직 대답을 듣지    못한 질문들을 떠 올리게 될 것이다 .

  

■ 우리 생을 이루는 얼굴없는 자들


0 다음은 시인이자 서예가였던 아이다 미쓰오의 시이다.

     

     그토록 강렬한 삶을 살았으므로

     풀은 말라버린 후에도 지나는 이들의 눈을 끄는 것.

     꽃은 그저 한 송이 꽃일 뿐이나

     혼신을 다해 제 소명을 다한다.

     외딴 골짜기에 핀 백합은

     누구에게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다.

     꽃은 아름다움을 위해 살 뿐인데

     사람은 ‘제 모습 그대로’ 살지 못한다.

     

     토마토가 참외가 되려 한다면

     그보다 우스운 일이 어디 있을까.

     놀라워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아닌 다른 무엇이 되고 싶어 하는지.

     자신을 우스운 꼴로 만들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언제나 강한 척할 필요는 없고

     시종일관 모든 것이 잘 돌아가고 있음을 증명할 필요도 없다.

     다른 이들이 뭐라고 하건 신경 쓰지 않으면 그뿐.

     필요하면 울어라.

     눈물샘이 다 마를 때까지.

     (그래야 다시 웃을 수 있는 법이니)

                               - 27 -

0 가끔 TV를 통해 터널이나 다리의 준공식에서 축하 리본을 자르는 것을 본    다. 거기에는 장관이나 주지사, 지역 정치인들이 줄을 선다.

   하지만 공사중에 땀흘려 일한 사람들, 곡괭이와 삽을 쥐었던 사람들. 한    여름 더위와 겨울 추위를 견뎌내고 일을 마친 사람들이 전면에 나서는 경    우는 없다. 생색을 내는 것은 언제나 땀흘려 일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나는 그만두지 않으리라, 보이지 않는 얼굴, 명성도 영예도 좇지 않고     자기 일을 묵묵히 하는 그 얼굴들을 지켜보는 사람이기를. 나는 그런 사    람이고 싶다. 우리 생을 이루는 중요한 것들은 결코 얼굴을 드러내지 않    는 법이니까. 


■ 인간 존재의 흥미로움


0 한 남자가 내 친구 제이미 코언에게 물었다.

  “사람의 가장 우스운 점은 뭐라고 생각 하십니까?”

  코언이 대답했다.

  “모순이죠. 어렸을 땐 어른이 되고 싶어 안달하다가도, 막상 어른이 되    어서는 잃어버린 유년을 그리워해요. 돈을 버느라 건강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가도, 훗날 건강을 되찾는데 전 재산을 투자합니다. 미래에 골몰하느    라 현재를 소홀히 하다가, 결국에는 현재도 미래도 놓쳐버리고요. 영원히    죽지 않을 듯 살다가 살아보지도 못한 것처럼 죽어가죠.”


■ 변하지 않는 가치


0 카산 자이드 아메르가 들려준 이야기다.

  한 강사가 강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이십 달러짜리 지폐를 들고 물었다.

  “이 이십 달러짜리 지폐를 갖고 싶은 분 있습니까?”

   여러명의 손이 올라가는 것을 보고 강사가 말했다.

  “드리기 전에 할 일이 좀 있습니다.”

  그는 지폐를 구겨 뭉치고는 말했다.

  “아직도 이 돈 가지실 분?”

  사람들이 다시 손을 들었다.

  “이렇게 해도요?”

  

                               - 28 -

  그는 구겨진 돈을 벽에 던지고, 바닥에 떨어뜨리고, 욕하고, 발로 짓밟았    다. 이제 지폐는 더럽고 너덜너덜했다. 그는 같은 질문을 반복했고 사람    들은 다시 손을 들었다.

  “이 장면을 잊지 마십시오.”

  그가 말했다.

  “내가 이 돈에 무슨 짓을 했든 그건 상관없습니다. 이것은 여전히 이십    달러짜리 지폐니까요. 우리도 살면서 이처럼 자주 구겨지고 짓밟히고 부    당한 대우를 받고 모욕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    리의 가치는 변하지 않습니다.”

  

                                              - 끝 -























                               - 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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