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2. 14. 08:09ㆍ상량문,제문,비문 등
龍洲神道碑(趙絅)
公諱絅。字日章。姓趙氏。本漢陽人。趙氏始大於高麗。有僉議中書事之壽。是爲始祖。中書二世
敦厚禮讓。惟孝惟友。以篤親仁。奉君無私。秉心貞白。不緇不磷。博文古雅。本之道德。參以典墳。忠言直道。可表百代。名立德尊。不忮不求。好德康寧。彌年壽考。善始善終。積仁累義。天道之報。辛亥仲春之月傍死魄二日。孔巖許穆。撰
용주(龍洲)公 신도비(神道碑)
공은 휘가 경(絅), 자는 일장(日章), 성은 조씨(趙氏)로 본관은 한양(漢陽)이다. 조씨는 고려에 와서 비로소 번창해서, 첨의중서사(僉議中書事)
공은 만력(萬曆) 14년(1586, 선조19) 10월 6일에 한양의 숭교방(崇敎坊)에서 태어났다. 유 부인이 어질고 또 자식을 가르치고 기르는 데 방도가 있어서 난 지 5세 되는 해에 취학(就學)하였고, 10세에는 배움이 이미 이루어져서 능히 자력으로 독서하였으며 이외에는 달리 취미나 놀이가 없었다. 13세에 유 부인이 작고하였는데 거상(居喪)에 슬퍼함이 꼭 성인과 같았다. 이듬해에 찬성공이 송 부인(宋夫人)을 맞이하였는데, 부인의 부친 송공이 보고 감탄하기를,
“이 아이가 후일 반드시 귀히 되어 집안이 크게 보답을 받으리라.”
하였다. 약관에 벌써 문장이 훌륭하다는 성가(聲價)가 있어, 백사(白沙
27세(1612, 광해군4)에 사마시에 뽑혔고, 이듬해 4월에 찬성공이 작고했다. 이이첨(李爾瞻)이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공과 사적으로 친숙히 지내려고 한 지 오래였는데, 공의 상중(喪中) 예절을 보고는 예를 지키는 선비라 예가 아니면 친숙할 수 없다 여겨, 후히 예로 대접하고 봉급(奉給)을 두터이 하여 깊이 친교를 맺으려 하였다. 광해의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이이첨의 용사가 오래 가자, 공은 친교를 끊고 영남의 거창(居昌)에 돌아가 다시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세상을 피하였다.
계해년(1623, 인조1) 인조(仁祖)가 난을 평정하고 재학사(才學士)들을 불러 모을 때, 공이 유일(遺逸)로서 고창 현감(高敞縣監)과 경상 도사(慶尙都事)에 연이어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해에 형조 좌랑에서 목천 현감(木川縣監)으로 전직되어, 백성들의 고통을 묻고 학교를 정비하니 고을 사람들이 치적을 칭송하였으나 1년 만에 돌아왔다.
병인년(1626, 인조4) 상이 선비를 친히 시험 보였는데, 공이 장원으로 선발되어 연이어 양사(兩司)에 재직하였다.
정묘년(1627, 인조5) 건주 오랑캐가 동쪽을 침입하여 안주(安州)와 평양을 연이어 함락하였다. 전년에 국가에서 비로소 호패법(號牌法)을 시행하였는데, 적이 평양에 이르자 백성들이 호패를 풀어 성가퀴에 걸어 놓고 모두 흩어졌다. 이때 공이 사서(司書)로 있었는데, 문학(文學) 김육(金堉)과 함께 상소하여 호패법을 혁파하여 인심을 수습할 것을 말하니, 이에 호패법이 혁파되었다.
상이 강도(江都)로 출행(出幸)하면서 세자를 시켜 호외(湖外)에 내려가 무군(撫軍)케 하니, 공이 수행하였다. 적이 얼마 후 강화를 맺고 돌아갔다. 공이 지평으로 상소하여, 공신이 종횡하여 명을 받지 않고 호서 절도사 유림(柳琳)이 선왕의 능침을 벌거숭이로 만들었는데도 후한 뇌물을 받고 가볍게 용서해 준 것과 간판 윤황(尹煌)이 척화(斥和)를 주장하다 상의 뜻을 거스르자 이조에서 상에게 아첨하여 주문사(奏聞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의망(擬望)한 것을 말하고, 이어서 강홍립(姜弘立)의 죄상을 논하니, 상소가 주달되자 지평에서 체직되었다.
무진년(1628, 인조6) 교리로서 별묘(別廟)를 주장하는
“전날 혼조(昏朝) 재위시에 사람을 모함할 때는 반드시 ‘역적을 두둔한다’ 하니, 그때에 상헌이 앙옥절탄(仰屋竊歎 어떻게 할 수 없어서 들보만 쳐다보며 탄식함)한 지가 오래였는데, 오늘날 자기가 스스로 그것을 답습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 상헌을 체직시키소서.”
하였다. 옥당이 둘 다 체직시키기를 청하자 상이 특별히 모(某)는 체직치 말게 하니, 공이 다시 인피하자 이에 체직하였다.
신미년(1631, 인조9) 헌납에서 이조 좌랑으로 전직되었다가 얼마 후 정랑으로 승진되었다. 장묘(章廟)를 추존하는 일로 해서 상이 쟁론하는 자에게 화내어 옥당관(玉堂官) 다섯 사람을 잡아들여 다스리게 하니, 공이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사친(私親)을 높이는 방법이 나라를 망친 전철(前轍)에 가깝지 않습니까? 신이 옥당에 있을 때, 추숭(追崇)하자는 의론을 배척하기를 여러 신하들과 다름이 없이 하였으니 같이 그 죄를 받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회답이 없다가 얼마 후 부교리로 개임하니 동료인 오전(吳竱) 등과 차자를 올려서 전례(典禮)의 옳지 못함을 논하였다.
상이 특별히 지례 현감(知禮縣監)으로 내보내니, 양사가 쟁론하여 유임시키기를 청하다가 상이 노하니 두려워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옥당은 그래도 논집(論執)하여 마지않았으나 상이 그대로 임명하였다. 이듬해에 통제사(統制使) 변흡(邊潝)이 장정을 검열하는데 독책하기를 무상하게 하므로 공은 사직하고 돌아왔는데 흡의 상소로 인하여 끝내 하옥되고 이어서 파면되었다.
계유년(1633, 인조11) 다시 이조 정랑이 되었다.
을해년(1635, 인조13) 집의가 되어, 낙수(洛水 낙동강)가 마르고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히고 목릉(穆陵)과 유릉(裕陵)에 변이 있는 것을 인하여 상소하여 유연(遊宴)과 후궁을 선발한 것과 영조(營造)에 관한 일을 말하면서,
“전하의 명철하심으로도 홀로 깨닫지 못하고 이런 일을 행하며 의심치 않으시니, 어찌 하늘이 전하의 마음을 꾀어 나라를 망치고야 말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집의에서 체직시켰다. 얼마 후 다시 집의가 되어 감시(監試)에 불법(不法)이 있다 하여 파방(罷榜 과거에 급제된 사람의 합격을 취소함)할 것을 논하니 상이 듣지 않았다. 대사헌
상이 또다시 문천 군수(文川郡守)로 내보내니, 정온(鄭蘊)이 차자를 올려 간하기를,
“전하는 모(某 조경을 가리킴)를 어떠한 사람으로 여기십니까? 그 사람은 효도와 우애를 독실히 행하고 몸가짐을 청고(淸苦)하게 하고, 또 문학과 박람(博覽)이 좌우에 두고 고문에 응하게 할 만한데, 그 한마디 말이 지나치게 고지식하다 해서 선뜻 호오(好惡)의 마음을 보이셔서야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를 받아들여 군기시 정에 임명하였다. 암행어사로 호남 지방에 나갔다가 복명하자, 상이 말하기를,
“모(某)가 민간에 출입하여 수령의 정치와 민생의 질고(疾苦)를 자세히 알아서 다른 어사가 미치지 못한다.”
하였다.
병자년(1636, 인조14) 사간으로 응지(應旨)하여 봉사(封事)를 올려서, 왕자의 전택(田宅)이 제도를 벗어난 것과 장릉(章陵)의 빈전(殯殿) 역사에 대한 상격(賞格)이 법도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이어서 좌상 홍서봉(洪瑞鳳)이 뇌물을 받고 벼슬을 판 것까지 언급하고, 무인
“대하가 말을 바친 일은 숨길 수 없으니, 그의 고향에서 이를 전하는 자가 한두 사람이 아닙니다. 신이 비록 용렬하나 남의 말을 인용하여 그 말을 증명하겠습니다. 우리나라 2백 년 간에 간관을 이렇게 대우한 적이 없었으며, 이전에 등롱금(燈籠錦)의 일은 당개(唐介)가 풍문에 들은 것인데도 문언박(文彦博) 같이 어진 사람을 상의 앞에서 맞대 놓고 배척하였지만, 문언박은 사죄할 뿐이었고, 그 자식을 시켜 자신을 변명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며, 인종(仁宗)이 비록 당개를 좌천시키기는 했지만 힐문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신이 들은 바는 당개에 비해서 더욱 절실하고 서봉의 탐오는 또 말 한 필을 받은 데 그치지 않습니다.”
하고, 인하여 홍서봉 부자의 탐오하고 방종하여 거리낌이 없는 상태를 차례로 열거하였다. 대신 중에,
“모(某)는 이미 간관에서 체직되었고 왕부(王府)의 일은 엄중한 것이니 불러서 힐문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는 사람이 있어서 공이 마침내 투옥되었다. 그러자 동지의금부사 민형남(閔馨男)이 상소하여,
“간관을 가둔 것은 우리나라 2백 년 간에 없던 일입니다.”
하였고, 경연관 유백증(俞伯曾)도 상에게 그렇게 말하니, 상이 말하기를,
“그를 가두게 한 것은 대신이다.”
하므로 유백증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어째서 대신의 말을 따르십니까? 나라 사람들이 분해하며 이 일을 말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자,
“모(某)가 이미 서봉(瑞鳳)에게 잘못하였으므로, 그가 정승의 자리에 있게 되자, 스스로 배척당할까 의심하여 무실(無實)한 말을 주워 모아 한번 헐뜯어서 자기의 뜻을 관철시키려 한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공은 사실 홍서봉에게 잘못한 일이 없었으므로 상이 답하지 않고, 이튿날 교서를 내려,
“상헌이 감정을 품고 서로 헐뜯어서 그 말이 분노에 차 있으니 한심스러운 일이다. 이조 판서 상헌을 체직하고 백증 또한 체직하라.”
하였다. 상은 공이 충직하고 다른 마음이 없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나, 홍서봉이 원공(元功)으로서 상이 총애하여 남달리 대우하던 터였으므로 너그럽게 용서해 주었고, 공도 또한 문책하지 않았다.
정축년(1637, 인조15) 남한산성의 포위가 풀리고 묘당(廟堂)에서 척화자(斥和者) 10인의 죄를 의론할 때, 공이 일찍이 망녕된 말로 묘당을 헐뜯었다 하여 또한 의론 대상에 끼어 있었다. 도승지
“이 사람은 착한 무리이온데, 또한 이것으로 이 사람을 죄준다면 인심이 승복치 않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나도 또한 옳지 못하게 여기니, 죄주지 말라.”
하였다.
무인년(1638, 인조16) 사간으로서 들어가 사례하였다. 상이 문정전(文政殿)에서 인견하고 국가의 치욕을 말하자, 이에 상에게 아뢰기를,
“사람들이 간혹 조정과 중국이 이미 관계가 끊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으니, 중국과 통신하여 잊지 않고 있다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상이 말하기를,
“일을 비밀리에 붙여서 아는 사람들이 없지만, 이미 앞서서 행하였다.”
하였다. 봉양을 위하여 군(郡)을 청하자, 흥해 군수(興海郡守)를 삼으니, 대신(臺臣)이,
“모(某)는 뜻이 굳고 곧아서 조정에 두면 허물을 바로잡아 보익(補益)됨이 매우 많으니 외직(外職)에 두는 것은 마땅치 않습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사정이 절박하니 보내야 한다.”
하였다. 이때 대간에서
“거가(車駕)가 성을 나올 때, 지조가 굳었던 자는 정온(鄭蘊)과
하였다.
기묘년(1639, 인조17) 사직하고 거창(居昌)으로 돌아갔다. 경진년(1640, 인조18)에 사간으로 또 상소하여 시무책(時務策) 10조를 올렸다.
계미년(1643, 인조21) 일본(日本)에 통신부사(通信副使)로 파견되었다. 부산에서부터 수륙(水陸) 4천 리를 가서 그 나라 국도(國都)에 도착하여 사명(使命)을 전하자 크게 연회를 베풀고 마술과 교묘하고 기이한 여러 가지 놀이를 벌여 환심을 사려 했으나, 공이 하나도 거들떠보지 않으니 왜인이 마음으로 경계하고 꺼려서 다시는 음기(淫技)를 벌이지 않았다. 지나는 길에 유숙할 때, 선물을 모두 받지 않았다. 《일본기행(日本記行)》에 관백설(關白說)이 있다. 돌아와 부산에 이르렀다. 대마 도주(對馬島主) 종의성(宗義成)이라는 자가 온갖 간교를 다 부려서 미덥지 않았으므로 공이 안색으로 용납하지 않고 사양하고 받는데도 의리가 있으니 종의성이 마음으로 부끄럽고 분하게 여겨서 문서를 통해 자못 공을 헐뜯는 말을 하니, 조정에서 물리쳤다. 공이 복명하자, 멀리 사신 갔다 온 공로를 포상하여 통정(通政)으로 승진시키고 형조 참의에 임명하니, 사퇴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얼마 후 김제 군수(金堤郡守)로 삼았는데, 대신이 상에게 아뢰어 도내(道內)를 탄압하기 위하여 전주 부윤(全州府尹)으로 전직시켰다. 이때 판관(判官) 기진흥(奇震興)이라는 자가 평소 공을 두려워하고 미워했으므로 방백(方伯)에게 참소하여 아속(衙屬)이 너무 많은 것을 문책하자, 공이 곧 사직하고 아산(牙山)으로 돌아가니, 부임한 지 겨우 18일 만이었다. 공에게 망제(亡弟)의 처와 어린아이가 있었는데, 모친이 차마 떨어질 수 없다 하여 공이 조정에 청하여 함께 데리고 갔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을유년(1645, 인조23) 5월에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상(喪)에 분곡(奔哭)하고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상소하여, 백성의 곤췌(困瘁), 재이(災異), 변괴와 임금이 가까이하는 사람들이 뇌물 받는 것과 상이 조회 보기를 게을리 하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 이어서 권계하는 말 수천 마디를 진술하니, 상이 깊이 느껴 받아들이고 지론(至論)이라 하였다. 궁중에 옥사가 있자 환관에게 맡겨 다스리게 하니, 또 상소하기를,
“궁중에 옥사가 있는 것은 한(漢) 나라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는 쇠하는 나라의 정치입니다. 마땅히 유사에게 회부하여 정형(政刑)이 한곳에서 나오게 하여 정치의 대공 무사함을 보이소서.”
하였다. 또 궁금(宮禁)을 맑게 하고 뇌물을 근절시킬 것을 말하니, 상이 그대로 따르고, 체직하여 대사성에 임명하였는데, 모친의 병환으로 돌아왔다. 얼마 후 형조 참판에 임명하였다가 대사헌으로 전직시켰다.
상이 강씨(姜氏)를 사사(賜死)하자 공이 두 개의 봉사(封事)를 올렸는데, 하나는 진계(進階)를 사양한 것이었고, 하나는 강씨를 사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한 것이었다. 소가 주달되자 대사헌에서 체직되었다.
이산(尼山)의 상변사(上變事)가 있자 상이 출병케 하니, 공이 즉시 입경(入京)하였다. 이에 이조 참판에 임명하니 또 모친의 병환으로 사직하고 돌아갔다. 대제학에 임명하고 다시 대사간을 삼으니 상소하여 사퇴하고 또 이응시(李應蓍)와
“전하께서 간쟁하는 말을 들으시는 것이 점점 게을러져서, 이제 게으를 뿐 아니라 간하는 자를 억누르고 꺾고 내몰아서 스스로 이목(耳目)의 총명을 가리십니다.”
하니, 대사간에서 체직되었다.
정해년(1647, 인조25) 도승지에서 대사간으로 전직되어 미처 사은하기도 전에 특별히 형조 판서에 임명되니, 상소하여 사퇴하고 인하여 시무(時務)를 아뢰면서, 일을 말하다 죄를 받은 이경여(李敬輿)ㆍ홍무적(洪茂績)ㆍ심로(沈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세 아들이 무슨 큰 죄가 있어서 해도(海島)에 안치합니까? 용서하고 데려오소서.”
하였으나, 상이 듣지 않았다.
하루는 상이 대신들을 인견할 때, 대신들 대다수가 이형장(李馨長)이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한 일을 말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형장은 국가를 미봉(彌縫)했다고는 할 수 있지만 충성을 다 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턱을 끄덕이며,
“그 말이 옳다.”
하였다. 이형장은 당초 상인(商人)으로
“소현세자의 세 아들은 어디에 있소. 구왕(九王)이 데려다 기르려 하오.”
하므로, 공이 정색을 하면서,
“하국(下國)의 일을 상국에서 어떻게 미리 알고서 이런 말을 하시오.”
하였다. 정명수가 누차 물었으나 계속 대답치 않으니, 정명수가 노한 빛을 띠고 다시 세 아들에 대한 일은 말하지 않았다. 정명수가 항상 공에게 분노를 품고 말하니, 공이 이를 알고는 나라에 우환을 끼칠까 염려하여, 상소하여 문형(文衡)과 주사(籌司)의 임무를 면해 줄 것을 청하였다. 정명수가 세 아들에 대하여 물은 것은 이미 몰래 그 사실을 알려 준 자가 있어서였다.
무자년(1648, 인조26) 좌참찬으로 전직되었는데 인대(引對)하는 길에, 정온이 죽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깊은 산속에 은거하여 중과 같이 고통을 감수하며 몸을 마쳤으니 그 충성심이 포상할 만함을 말하고, 또 상소하여 그 일을 말하였으나, 회답이 없었다. 대사헌으로 전직되었다. 이때 남방에 홍수가 나서 수성(修省)하라는 내용의 상소 수천 자를 올렸다.
기축년(1649, 인조27) 5월에 상이 위독하였다. 공이 내의원의 일을 관장하고 있었는데 크게 악화되어 입시(入侍)하자 상이 훙(薨)하였다. 대신이 고사를 인용하며 유교(遺敎)를 짓고자 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유명(遺命)이 없는데 유교를 짓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였다. 성복(成服)을 마치자, 내지(內旨)가 있어 대상(大喪)을 위하여 무당을 모아 기양(祈禳)하면서 이것이 궁중의 전례라 하니, 공이 말하기를,
“선왕의 법에 ‘귀신을 빌어 대중을 미혹시키는 자는 목을 벤다.’ 하였습니다.”
하고, 상소하여 물리쳤다.
김자점(金自點)이 죄로 정승에서 면직되자, 공이 복상(卜相)되었으나 다시 이조 판서가 되었다.
“유태가 이런 사람을 소인이라 하니 길인(吉人)이 아니다.”
하고, 공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그해 9월에 장례에 참석하여 우제(虞祭)와 졸곡(卒哭)에 찬례(賛禮)하고 사직하니, 대제학을 체직하고 좌참찬을 삼았다. 장릉(長陵)의 지석문(誌石文)을 지은 공로로 정헌(正憲)으로 승진되었다.
경인년(1650, 효종1) 북사(北使)가 왔는데 사문(査問)하는 일로 이유를 삼았다. 도착하여 삼공ㆍ육경(六卿)ㆍ정원(政院)ㆍ양사(兩司)를 모아 놓고는 벌여 앉자 타락죽[駱漿]을 대접하는데 공이 홀로 이를 받지 않았다. 사신이 노한 빛을 띠고 지난해에 대행왕(大行王)을 조제(吊祭)할 때 곡하지 않은 것을 책문(責問)하므로, 공이 말하기를,
“이에 대해서는 《오례의(五禮儀)》에 실려 있습니다.”
하니, 사신이 말이 없다가 또 묻기를,
“사표(謝表)에 황부왕(皇父王)의 조문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이며, 표(表)를 지은 자는 누구요.”
하므로, 승문원에 알아보니 유계(俞棨)인데, 현재 직책이 없이 외방에 있었다. 또,
“표를 지은 후, 먼저 표를 본 자는 누구요.”
하고 묻자, 공이 천천히 대답하기를,
“대제학이 먼저 보았소. 이것으로 허물을 삼는다면 내가 책임을 지리다.”
하였다.
영의정
원두표(元斗杓)가 사신으로 연경(燕京)에 이르러 장계를 올려서,
“섭왕(攝王 구왕(九王)을 가리킴)이 두 신하(조경ㆍ
하고 돌아와서는 또,
“저들이 그대로 그만둘 것 같지는 않으니, 보전하려면 일이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들을 생각해 눈물을 흘리며 사신을 보내어 변명할 것을 의론하게 하고, 또 말하기를,
“두 신하를 변명하되, 경중(輕重) 어느 쪽에도 치우침이 없게 하라.”
하였다. 이때 마침 중국 사신이 도착하였으므로 변명하려던 일은 그만두었다. 그 칙서에는, ‘성을 수리하고 군사를 모은 것은 본래 왜(倭)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요, 진정으로 나와 상대하여 힐난하자는 것이다.’ 하고는 어떻게 하라는 말은 없었다. 정명수가,
“대군(大君)이 사신으로 오면 일이 해결됩니다.”
하였다. 이때 대군은 연경에서 돌아온 지 겨우 한 달 남짓하였는데, 상이 꼭 보내려 하고 대군도 가기를 청하였다. 상이 변방의 추위를 묻고 후사(厚賜)하였다.
11월에 정경부인이 졸(卒)하였다. 우상(右相) 이시백(李時白)이 상에게 아뢰어 유사로 하여금 부물(賻物)을 내리고 본도(本道)에 명하여 장례의 예를 갖추게 하였다.
다음달에 대군이 사행(使行)에서 돌아왔는데, 두 신하의 방환(放還)은 허락하였으나 영원히 서용(叙用)하지 못하게 하였다. 상이 또 후사(厚賜)하고 말하기를,
“북경(北京)의 기별을 들으니 기쁨을 이루 말할 수 없도다.”
하였다. 공이 백마산성에서 돌아오자 상소하여, 자신이 일을 그르쳐 국가에 치욕을 끼친 것을 말하고, 또 서토(西土)의 인심과 풍속을 말하면서
상이 군직(軍職)을 주어 서울에 있게 하였으나 공이 고향에 돌아가기를 청하매 수사(修史)하는 일로 부르니 공이 청 나라의 문책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으로 사퇴하였다. 응지(應旨)하여 상소하여 시사(時事)를 말하고, 이어서 노릉 육신(魯陵六臣)을 정표(旌表)할 것과 정온(鄭蘊)에게 시호를 내릴 것을 말하였다.
계사년(1653, 효종4) 부모 봉양을 위하여 회양 부사(淮陽府使)가 되었다. 이듬해 봄에 풍악(楓嶽 금강산)을 유람하고 이어서 사직하고 돌아왔다. 겨울에 기내(畿內)에 비린내 나는 안개가 사방에 자욱하였다. 상소하여 말하기를,
“김홍욱(金弘郁)이 하옥되어 죽은 후로, 군도(君道)가 날로 지나치고 국사(國事)는 날로 그릇되며, 재이는 날마다 나타나고 인심은 날로 흩어지며, 충언과 곧은 의론은 전하의 뜰에서 아주 끊어져 버렸습니다.”
하니, 상이,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근심함이 늙을수록 더욱 독실하도다.”
하였다.
을미년(1655, 효종6) 공이 이미 70을 넘으니 기로(耆老)라 하여 상이 본도(本道)에 명하여 쌀과 고기를 하사하고 이듬해 봄에 또 하사하였다. 가을에 또 월봉(月俸)을 내리니 공이 사양하며 받지 않고 열 번이나 상소하였으나 상이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영돈녕부사 김육(金堉)이 차자를 올려 재이(災異)를 말하였는데 상이 화를 내므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공이 상소하여 간하고 이어서 심성(心性)을 닦으라는 경계를 올리니, 상이 말하기를,
“농촌에 있으면서도 간할 것을 잊지 않으니 충신의 마음이다.”
하였다.
정유년(1657, 효종8) 상소하여
무술년(1658, 효종9) 가을에 기로소에 오로회(五老會)가 있었으니, 영의정 김육(金堉) 79세, 판중추부사 윤경(尹絅)은 92세, 해은군(海恩君) 윤이지(尹履之)는 80세, 공이 73세, 판서 오준(吳竣)이 72세였다. 공이 또 상소하여 월봉을 사양하고 인하여 청심과욕(淸心寡慾)의 경계를 올렸다.
기해년(1659, 효종10) 5월에 상이 승하하였다. 공이 나아가 성복(成服)하고 돌아왔다. 시책문(諡册文)을 짓게 하고 숭정(崇政)으로 승진시켰다. 겨울에 치사(致仕)를 청하여 상이 이조에 내리니 판서
경자년(1660, 현종1) 크게 기근(飢饉)이 들었다. 상소하여 기근을 구휼하는 일에 대하여 말하고 도융(屠隆)의 《황정고(荒政考)》를 올리고 월봉을 면해 주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신축년(1661, 현종2)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는데 사퇴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태왕태후의 옥책문(玉册文)을 짓기 위하여 불렀다. 이때 크게 가물었으므로 상이 정전(正殿)을 피하고 원옥(寃獄)을 다스리고 교서를 내려 구언(求言)하니, 공이 상소하여 의견을 말하고 이어서 윤선도(尹善道)의 일을 말하기를,
“선도(善道)의 죄는 무슨 죄입니까? 선도는 종통(宗統)과 적통(嫡統)으로 효묘(孝廟 효종)를 위하여 동의한 것이온데, 선도가 소(疏)를 올렸을 때 누가 전하에게 소를 불사르라는 계책을 올렸습니까? 고려 공민왕(恭愍王)은 이존오(李存吾)의 소를 불살랐고 광해(光海)는 정온(鄭蘊)의 소를 불살랐는데, 공민과 광해는 나라를 망친 임금이 아닙니까? 현재 조정의 신하들이 스스로 능하다고 자부하면서 요순(堯舜)의 도로 전하를 인도하지 않고 반대로 망국(亡國)의 전철로 전하를 인도하는 것은 어째서입니까? 신은 후인이 오늘을 볼 때, 오늘날 우리가 전날을 보는 것과 같이 되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승지
“모(某)는 시골에 있으니 척출하더라도 그에게는 손해가 없고 나라에만 손해가 있습니다.”
하였고, 좌상
“모는 삼조(三朝 인조ㆍ효종ㆍ현종)를 섬긴 노신(老臣)으로, 상이 교서를 내려 말하기를 청해놓고서, 일을 말한 것으로 죄를 준다면 이는 망국(亡國)의 처사입니다.”
하였다. 윤비경(尹飛卿)ㆍ곽지흠(郭之欽) 등이 용사자(用事者)들에게 아첨하여 다투어 공을 공격하는 것으로 공로를 삼았다. 삼사에서 먼 곳에 유배할 것을 논한 것이 4월에서 6월까지 갔으나 상이 끝내 듣지 않았다.
갑진년(1664, 현종5) 비로소 서용(叙用)하는 명이 있었다.
을사년(1665, 현종6) 공이 이때 80세였는데, 집의 오시수(吳始壽)가 상에게 아뢰어 가자(加資)와 월봉(月俸)의 명이 있고 숭록(崇祿)에 승진되니 삼사의 공격이 다시 일어났다. 공이 상소하여 극력 월봉을 사양하여 세 번 상소하니 상이 이에 허락하였다.
무신년(1668, 현종9) 일찍이 시종신을 지낸 자로서 부모 나이 70세 이상인 자는 모두 물건을 하사하거나 가자(加資)하는 명이 있었다. 공의 아들 조위봉(趙威鳳)이 일찍이 간원에 재직하였으므로 공이 보국(輔國)에 가자되었다. 가을에 백운산(白雲山)에 들어갔다가 그대로 자운(紫雲)의 천석(泉石)을 유람하고 문암(文巖)에 이르고자 하였는데, 입산한 지 3일 만에 상이 온천에 행행한다는 말을 듣고 돌아왔다. 이듬해 2월 4일에 공이 졸(卒)하니 향년 84세였다. 염습에 심의(深衣)와 폭건(幅巾)을 쓰고 외침(外寢)의 중당(中堂)에 초빈하였다. 부음이 전해지자 상이 공을 위하여 2일 간 조회와 시전을 파하였다. 그해 4월에 선영(先塋)의 북쪽 10리에 있는 녹문산(鹿門山) 동쪽 기슭에 남향으로 장사하였다.
정경부인 김씨는 본관이 안동(安東)으로, 국초(國初)에 좌정승을 지낸 김사형(金士衡)의 9세손이며 이조 판서 김찬(金瓚)의 딸이다. 온순하며 삼가고 근칙에서 말소리가 문밖을 나가지 않았고, 시부모를 섬길 적에는 가정에서 이간시키는 말이 없었다. 50년 동안 뽐내거나 사치하지 않았고, 공이 조정에서 현달하여 구경(九卿)의 지위를 넘었어도 여알(女謁)을 행하지 않았고 뇌물을 가까이하지 않았다. 공이 칭찬하기를,
“내조(內助)의 법도는 옛사람에 비해 손색이 없다.”
하였다. 부인은 만력 12년(1584, 선조17) 월 일에 태어나서 우리 효종 원년(1650) 월 일에 졸(卒)하니, 향년이 67세였다. 처음에 선영의 곁에 장사 지냈다가 이때 공과 합장하였다.
부인은 3녀 1남을 두었으니, 세 사위는 위솔(衛率)
공은 간정(簡靜)하여 한가히 있을 때도 마치 재계하는 것 같아서 일체의 사물이 마음에 머물지 않았고, 성색(聲色)과 완호(玩好)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경술(經術)에 침잠하여 세리(勢利)에는 담담히 동요되는 바가 없었다. 말하지도 웃지도 않고 단정하게 앉아서 종일토록 게으른 빛이 없었다. 늘 하는 말은 효제(孝悌)ㆍ절행(節行)ㆍ시서ㆍ예의였고, 천하의 많은 책을 읽어 학문이 박흡(博洽)해서 식견이 더욱 높아졌다. 공이 말을 하거나 일을 행할 때는 고인(古人)에 비춰 보아 옳지 않으면 하지 않았다.
문학을 논할 때는 진한(秦漢) 이후로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ㆍ창려(昌黎 한유(韓愈))ㆍ봉주(鳳洲
집안에서는 은의(恩義)를 중히 여기고 내외를 엄히 구별할 것을 가르쳤고, 아랫사람을 대할 때는 위엄이 있으면서도 너그럽고 소탈해서 번거롭지 않아서 사람마다 스스로 편안하게 여겼다. 평생 인정이 후하고 선을 좋아하며 예와 사양함을 숭상하고 인륜에 독실하였다. 부모를 섬기되 잠자리를 편케 하고 마음을 즐겁게 해서 반드시 뜻을 받들어 태만한 빛을 보이지 않았다. 찬성공(賛成公)이 별세했을 때는 몹시 슬퍼하여 모습이 말이 아니었고 곡을 하여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장사를 마치고도 질대(絰帶)를 벗지 않았고 거친 음식을 먹으며 3년간 무덤을 지켰다. 찬성공의 병환이 위독할 때 감을 찾았으나 절기를 지나 구해드리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후 죽을 때까지 차마 감을 먹지 못하였다.
송(宋) 부인은 연세가 많아서 공이 현달한 후로 봉양한지 40년에 별세하였다. 공도 이때 80세였으나 최마(衰麻)를 입고 자리에 나아가 곡읍하였으며, 상중(喪中)의 예절은 공경을 으뜸으로 삼았다. 제사에는 신병이 아니면 남이 대신 제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대신 제사하게 할 때에는 반드시 일찍 일어나 손 씻고 양치질하고 관복(冠服)을 갖추고 앉아 제사가 끝나기를 기다렸으며, 재계에는 반드시 조심스럽게 하였으며 제사를 행할 때에는 반드시 엄숙하게 하였다.
공의 어린 아우 조구(趙緱)가 있었는데, 찬성공의 유복자이다. 공이 무육(撫育)하되 우애롭게 하면서도 교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조구는 재주와 학식이 있었으나 불행히 요절하였다. 또 그의 아들 조위명(趙威明)이 어려서 고아가 되었으므로 공이 자식과 같이 가르쳤는데, 현재 급제해서 모관(某官)으로 있다.
공은 임금을 섬길 적에는 대체(大體)에 힘썼고, 임금의 앞에서 직간하기를 좋아하였으며, 일을 아뢰고 물러 나와서는 자제들과 그 일에 대하여 말한 적이 없었다. 정도(正道)로 조정에서 용납되지 않아 사환(仕宦) 40여 년에 조정에 있은 것은 겨우 7, 8년이었다. 환난에 처해서도 태연히 한가해서 조금도 기미를 말과 얼굴에 나타내지 않았다. 일찍이 전선(銓選)을 맡고 있을 때는 마음가짐이 공정해서 현량(賢良)을 천거하였고 문에는 사사로운 청탁이 없었으며, 나가 지방관이 되었을 때는 청정(淸靜)을 좋아하여 한결같이 교화를 일으키고 풍속을 아름답게 하는 것으로 임무를 삼았다. 벼슬이 높아져서도 전원(田園)과 집이 조금도 불어난 것이 없어서 처자가 기한을 면치 못하였으므로 효종이 특별히 월봉(月俸)을 내리니, 극력 사양해 마지않아 직책이 없이 녹을 받아먹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만상(灣上 의주(義州)에 있는 백마산성을 가리킴)에서 돌아온 후로 고향에 은거하면서 집을 이름하여 ‘관거(寬居)’라고 하였다. 공은 산수 유람을 좋아하였는데, 백로주(白鷺洲)ㆍ삼부락(三釜落)ㆍ화적연(禾積淵)ㆍ백운동(白雲洞)은 모두 공이 유람한 곳이라 한다. 상이 예우를 더욱 융성히 하여 다시 등용할 것을 생각하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고 재이(災異)나 궐실(闕失)을 들을 때마다 반드시 모두 말하여 조금도 꺼리지 않았다.
훌륭하도다. 그 고결한 지조, 강직한 기개(氣槪), 뛰어난 효성, 태양을 꿰뚫을 만한 충성, 시종(始終)을 한결같이 잘한 학문, 진퇴(進退)를 신중히 한 절조가 깨끗이 더러운 곳에서 벗어났으니 ‘완부(頑夫)는 부끄럽게 하고 나부(懦夫)는 입지(立志)하게 한다.’는 것은 바로 이 사람이리라. 바로 이 사람이리라.
골짜기의 어귀에 시내가 흘러 내려와 이루어진 와룡담(臥龍潭)이라는 못이 있으므로 자호를 용주(龍洲)라 하였고, ‘관거(寬居)’가 고요히 금주산(錦柱山)을 마주 보고 있으므로 주붕노인(柱峯老人)이라고도 하였다. 유문(遺文) 10권이 전한다.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敦厚禮讓 惟孝惟友
돈후예양효도우애
以篤親仁 奉君無私
독실히도 어진 이를 좋아하였네
임금을 받듬에 사심 없었고
秉心貞白 不緇不磷
마음가짐 곧고도 결백하여서
검어지지도 않았고 닳지도 않았소
博文古雅 本之道德 參以典墳
넓은 학문 고졸한 아취는
도덕에 바탕두고 분전을 겸해서라오
忠言直道 可表百代 名立德尊
충언과 직도는 백대의 사표
그 이름 그 덕 높이 섰구나
不忮不求 好德康寧 彌年壽考
시기도 구함도 없이 덕을 좋아하고 편안하여
장수하였네
善始善終 積仁累義 天道之報
시종을 그토록 잘 마친 것은
쌓고 쌓은 인의에 하늘의 보답이리
신해년(1671, 현종12) 2월 2일에 공암(孔巖) 허목(許穆)은 찬한다.
포천이 고향인 용주龍洲 조경趙絅선생은 1586년(선조19) 10월 6일 한양 숭교방(崇敎坊) 흥덕동(興德洞, 현 명륜동)에서 한양조씨 한평부원군 6대손인 아버지 찬성공(贊成公, 휘 翼男)과 어머니 문화(文化) 유씨(柳氏)와의 사이에서 2남 4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자는 일장(日章), 호 용주(龍洲). 주봉(柱峯)이다.
13세살 때 어머니 문화 유씨를 여의고, 15세부터 계모 진천(鎭川) 송씨(宋氏) 슬하레서 자랐다. 24세에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의 가르침을 받고, 1612(27세) 사마시 급제하여 성균관 입학하였으나 다음해인 1613(28세) 아버지가 거창에서 별세하자 포천으로 장례모시고, 유복자 동생 구가 출생하였다. 찬성공께서 돌아가시기 전 우환 중에 홍시를 찾았으나 구해 드리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조용주는 일평생 감을 입에 대지 않았으며 돌아가신 후에도 용주공의 양위분의 제사에는 지금까지 감을 쓰지 않는다고 한다.
1616(31세) 부친상 3년간의 여막(廬幕)생활을 마치고 성균관에 복학하였으나 이이첨이 광해군의 폭정에 동조하여, 국사가 어지러워지자 이이첨을 바른 길로 이끄는 것이 그의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하고 여러 번 직언(直言)을 하였음에도 듣지 아니함으로 할 수 없이 그와의 연(緣)을 끊고 과거도 안 볼 결심으로 성균관을 나와 거창(居昌)에 은거 하였다.
1623(38세) 인조반정 후 초야(草野)의 지조(志操)와 재주가 있는 학사들을 발탁할 때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고창(高敞) 현감과 경상도사(慶尙都事)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아니 하였으나, 1624(39세) 이괄(李适)의 난(亂)이 일어나자 임금을 모시고 공주(公州)까지 갔다. 환도후 형조좌랑을 거쳐 목천현감에 부임하였다. 1626(41세)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급제하여 정언(正言). 헌납(獻納) 제수 받고, 다음해에 사서(司書)로 있을 때 금(金)나라 군사가 침입(胡亂)하여 호패법(戶牌法)으로 민심이 혼란해지자 문학 김육(金堉)과 더불어 이를 폐지할 것을 상소하여 호패법(號牌法)을 폐지하게 되었으며. 인조는 강화도로 파천(播遷)하고 세자는 육지에서 군사를 무마케 하였는데 이때 용주는 세자를 모셨다. 1629(44세) 독서당(讀書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암행어사(暗行御史)로 황해도 지방의 민정(民情)을 살폈으며, 1634(49세) 사간(司諫)을 배수하고 정온(鄭蘊)의 무죄를 상소하였으며, 다음해 50세 때 집의(執義), 문천군수(文川郡守), 군기시정(軍器寺正)을 거쳐 호남지방의 암행어사로 나가 서정을 살폈다. 1636(51세)년에는 좌의정(左議政) 홍서봉(洪瑞鳳)이 이대하(李大廈) 등으로부터 뇌물을 받은 비리(非理) 등에 대하여 상소하였으며, 병자호란으로 호적(胡賊)이 한양까지 침입하자, 사간(司諫)으로 척화(斥和)를 주장했고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포위당하자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집하여 항전을 독려하였고, 이듬해 집의로서 일본(日本)에 청병(請兵)하여 청나라 군대를 격퇴하고자 상소했으나 허락받지 못했다.
1637(52세)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하고 소현세자가 볼모로 끌려가고 환궁 뒤에 조정에서는 청(淸)과의 화친에 반대한 조경(趙絅)과 정온(鄭蘊) 등 척화10신(斥和十臣)에 대한 논죄(論罪)가 있었으나 도승지 이경석(李景奭)의 계주(啓奏)로 무사하게 되었다.
1643(58세) 홍문관 전한(典翰) 재임 중 일본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임명받으나, 일본 통신사행은 1413년 1차를 시작으로 이번이 13차의 사행을 다녀왔다. 사행(使行)의 목적은 조선 측은 우호유지와 청조(淸朝)의 견제, 국정의 탐색인 것에 반해, 일본 측은 도구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탄신 축하와 일광묘(日光廟)의 증축이었다. 통신사행(通信使行) 인원 477명은 4월 27일 부산을 출발, 11월 8일 귀국하였는데. 일인(日人)들은 크게 환대(歡待)하며 온갖 기교와 음탕한 희롱을 베풀어 환심을 사려 했으나, 공은 조금도 돌아보지 않았고 관청에서도 선물공세를 폈으나 모두 물리쳐 일인들이 그 결백에 탄복하였다고 하며, 특히 일왕(日王)과 도구가와 정권(德川政權)은 공의 탁월한 학문과 시문(詩文)에 감동하였으며, 공은 기행문인 유명한 동사록(東槎錄)을 남겼다.
이에 대하여 일본의 사학자 오다끼 기요꼬(大瀧晴子)가 조선통신사에 대한 연구과정에서 특이하게 청백(淸白)했던 용주선생에 대한 인상과 행적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있던 중 1984년 가을 공의 11세손 학윤(學允)씨의 초청을 받고 3박 4일간 문간공 묘소와 별묘, 그리고 용연서원(龍淵書院) 등을 참배한바 있다고 전한다. 한편 양주동선생의 동사록(東槎錄) 해제를 보면 이 동사록의 저자는 조경(趙絅 1586 선조 19 -1669 현종 10), 용주龍洲는 그의 호요, 본관은 한양, 윤근수尹根壽의 문인門人이다. 그는 광해군 4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의 난정亂政으로 문과를 단념, 거창居昌에 물러가 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형조좌랑刑曹佐郞과 목천현감木川縣監 등을 지내고 1626년(인조 4)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장원壯元급제하여 정언正言, 지평持平, 교리校理, 헌납獻納 등을 역임하고, 독서사가讀書賜暇를 한 후, 1630년 이조좌랑吏曹佐郞, 1632년 이조 정랑正郞을 지내고 1636년 병자호란때 척화를 주장했으며, 이듬해 사간司諫으로 일본에 청병(請兵)하여 청병(淸兵)을 격퇴하자고 상소했으나 허락받지 못했고, 그 뒤 응교應敎, 집의執義등을 지냈다. 1643년(인조 21) 통신부사通信副使로 일본에 갔다 왔는데 이 동사록은 그 도중에 지은 시문詩文들을 엮은 것이다. 일본에 다녀와서 형조참의刑曹參議를 거쳐 김제군수金堤郡守, 전주부윤全州府尹을 지냈으며 이듬해 형조 참판參判, 대제학大提學, 1647년에 형조 판서判書로 이도쇄신吏道刷新에 힘썼으며 1648년 우참찬右參贊을 지내고, 1650년(효종 1년) 청나라 사문사査問使의 척화신斥和臣 처벌요구로 의주 백마성白馬城에 위리안치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나와 1653년 회양부사淮陽府使가 되었다가 포천에 은퇴했다. 그 후 1658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현종 10년 영의정에 추서되었고 숙종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으며 시문에 능하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라고 적고 있다. 용주공은 1644(59세) 형조참의를 제수 받았으나 사양하고 김제 군수를 거쳐 전주부윤으로 나아갔다. 이때 용주는 홀로 된 계수와 어린 조카(松泉公, 威明 12살)와 차마 떨어질 수 없어 조정에 청하여 허락을 받고 함께 임지로 갔으나 이때 평소 공을 두려워하고 미워하든 판관(判官)이 딸린 식구가 많다는 것을 방백(方伯, 觀察使)에게 일러 바쳐 구설(口舌)을 피해 부임한지 18일 만에 사직하고 말았다.
그러나 공은 다음해인 60세에 대사간, 대사헌에 제수 받고, 그 다음해인 1646(61세) 성균관 대사성(大司成), 형조참판, 이조참판, 도승지,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 겸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를 배수 받고 사양소(辭讓疏)를 올렸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에는 형조판서 사직소를 올렸으나 윤허되지 않고. 예조판서 겸 내의제조재성청당상(內醫提調裁省廳堂上), 이조판서를 역임하면서 이도(吏道)를 쇄신하고 관리등용의 공정을 기해 명망(名望)을 얻었다.
1649(64세) 인조가 승하하고, 효종이 즉위하자. 예조판서로 국장도감(國葬都監)을 맏으셨고. 1650(65세) 청(淸)나라 사문사(査問使)의 척화신에 대한 처벌요구로 영의정 이경석과 함께 의주의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유배되었으며. 이때 정경부인(貞敬夫人) 안동(安東) 김씨(金氏)가 과천에서 별세하였다. 이때 동지사(冬至使)로 북경에 간 인평대군(麟坪大君)이 “이경석(李景奭)과 조경(趙絅)을 다시는 조정에 서용하지 않는다는 영불서용(永不敍用) 조건으로 귀양살이에서 풀어주라”는 황제의 허락을 전해왔다.
1651(66세) 백마산성 유배에서 풀려나 2년 후인 1653(68세) 봉친(奉親)을 위하여 회양(淮陽) 군수로 나갔다가 1655(70세)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나 다음해인 71세 때 효종이 여러 차례 월봉(月俸)과 물자를 하사(下賜)하였으나 책무없이 녹봉을 받는 것은 불가하다 하여 사양하였다. 1659(74세) 효종이 승하하고 현종이 즉위하여 효종의 시책문(諡冊文)을 지었고, 1661(76세)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제수 받고 사양하였으나 윤허되지 않고 이때 윤선도(尹善道)를 변호(辯護)하는 상소문(上疏文)을 올렸고. 옥책문(玉冊文)을 지을 것을 하명 받았다.
고산 윤선도가 73세 때인 1659년이던 기해년(己亥年)에 10년 재위의 효종이 승하 하여 장사를 치르면서 산릉(山陵)의 문제가 발생하였고, 자의대비의 복제 문제가 서인과 남인의 당쟁으로 격화되면서 예학자로서 윤선도의 학설은 남인계열의 중심이론으로 정리되었다. 송시열·송준길 등의 서인들 주장은 인조의 장자 소현세자가 죽어서 자의대비가 3년 복을 입었으니 효종은 인조의 차자(次子)이므로 기년의 복을 입으면 된다고 결정했다.
이에 윤선도는 종통(宗統)을 부인했다고 송시열을 비난하며 강력한 반대 상소를 올린다. 윤선도 주장의 핵심은 서인들이 '비주이종(卑主二宗)'의 잘못을 저질러 나라의 예(禮)를 완전히 무너지게 했다는 지적이었다. 즉 임금에 오른 효종이 종통(宗統)을 잇는 것이므로 효종의 상사에 당연히 3년복을 입어야지 기년(朞年)의 복을 입음은 종통을 두 개로 갈리게 하는 죄를 짓고 만다는 것이었다. '임금을 낮추고 종통을 둘이게' 했다는 윤선도의 주장은 송시열 계열과 대립하던 미수 허목 등의 중심논리를 제공한 선구적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런 윤선도의 주장은 그가 평안도 끝의 삼수(三水)로 귀양 가는 불행을 안아야 했다. 효종이 붕어(崩御)하자 풍수(風水)에 밝았던 윤선도에게 간산(看山:묘자리 선정)의 일이 맡겨졌다. 윤선도는 수원(지금의 사도세자 묘소)에 길지가 있음을 말하고 그곳으로 장지를 정하자고 했으나 송시열 일파는 그것도 반대하며 다른 곳으로 정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러나 서인들의 권력남용은 극도에 이른다. 역사에 없는 악한 일이 벌어졌으니, 윤선도의 복제설에 대한 상소문을 정원에서 임금께 올리지도 않고 불태워버린 사건이 발생하였다. 상소 내용에 잘못이 있다면 그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되고, 그에게 벌을 내리면 되지, 그것을 불태우는 일은 역사에 없는 일이었다.
그런 패악한 권력에 맞서 윤선도는 싸울 수밖에 없었다. 1660년(현종1) 74세의 윤선도는 삼수로 귀양 가게 되고 그 다음 해에는 함경도 북청으로 이배되려 했으나 취소되고 더 무겁게 가시울타리를 씌우는 위리안치 형에 이른다. 그 이유는 남인으로 대제학을 지내고 이조판서에 올랐던 용주선생이 윤고산의 억울함을 아뢰는 상소를 올렸다가 삭탈관작 되는 사건이 일어난 이유에서다.
서인과 남인이 복제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절에, 송시열 일파와 맞서 탁월한 예론(禮論)으로 그들을 압박했던 남인 사학자(四學者)가 있었으니, '비주이종'의 이론을 세운 이들은 미수 허목의 평생 동지이자 학우였던 용주 조경(龍洲 趙絅)을 비롯하여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 미수 허목(眉叟 許穆), 백호 윤휴(白湖 尹鑴)가 바로 그들인데 학문으로나 정치적 영향으로도 그 네 분이 남인을 대표했기 때문이었다.
용주 조경은 윤선도를 비호하다 삭탈관작을 당했으나 언제나 윤선도가 옳다고 주장한 학자였고, 미수 허목은 우의정에 오른 학자였으나 뒷날 윤선도의 '신도비명'을 지어 그의 일생을 찬양하였다. 또한 77세의 윤선도가 삼수에서 귀양 살던 현종 3년 남파 홍우원(南坡 洪宇遠 : 1605-1687)은 윤선도의 석방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금고(禁固)를 당하는 화를 맞기도 하지만 뒤에 윤선도의 시장(諡狀)을 지어 그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정확하게 기술하기도 하였다. 용주 조경이 윤선도를 평했다는 말이 허목의 신도비에 전해진다. "예로부터 나라가 흥망의 기로에 선 시기에는 하늘이 반드시 한 인물을 내려 보내 목숨을 걸고 예의를 지키게 하여 한 세상에 경종을 울려주고 후세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주었는데, 바로 윤선도 같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라고 했다.
윤선도의 일생은 바로 조경의 이 한 마디에 모두 정리되었다.
현종 6년 79세의 윤선도는 평안도의 삼수에서 전라도 광양으로 유배 장소가 옮겨졌다. 거기서 3년을 보낸 뒤, 81세의 윤선도는 임금의 특명으로 마침내 귀양살이가 풀렸다. 81의 노령으로 8년에 이르는 긴긴 유배생활을 마감하고 고향 해남으로 돌아온 윤 고산은 다시 보길도(甫吉島)의 부용동(芙蓉洞)으로 들어가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기며 우국충정을 달래며 살았다.
가곡을 지어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부르고 시를 읊으며 노년의 안온한 삶을 보냈다. '五友歌'를 부르며 '漁父四時詞'도 읊고, '산중신곡' '속산중신곡'을 읊조리면서 부용동 생활에 만족하였다.
한편 용주선생은 많은 시문을 남겼는데 그중 동사록(東傞錄)은 1643년 그가 통신부사로 일본에 갔을 때의 기록이다. 여기에는 화루선설(畵樓船說), 답도춘서(答道春書), 일본국임도춘원서(日本國林道春原書), 중답임도춘서(重答林道春書), 임도춘원서(林道春原書), 관백설(關白說), 제일본성씨록(題日本姓氏錄), 왜국삼도설(倭國三都說) 및 시(詩) 55수가 실려 있으며, 그 외에 용주선생 유고(遺稿)가 전하는데 이들 문집을 보면, 용주공의 많은 탁월한 특질을 볼 수 있다. 용주선생은 첫째는 관인으로서의 합리성(合理性)이다. 신흥 청조(淸朝)의 강압이 인조조에 가하여져 왕조가 위난의 와중에서 용주선생은 대외세력균형(The Balance of Power)의 외교책을 헌언(獻言)한 국제감각은 실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으며, 수발(秀拔)한 판단력은 우리의 귀감이 되며. 또한 통신사행 부사로서의 방일에 있어서는 일본천황과 도구가와정권의 법제적 층서(層序)에 관하여 "관백비국왕(關白非國王)"이라고 명확하게 인식하였으며, 또 덕천정권의 언무(偃武)의 설명에 대하여도 소년까지도 대검(帶劍)을 하는 습성으로 보아 정권의 본질을 무위(武威)로 하고 있다는 그의 판단과
둘째는 학식인으로서의 심오성(深奧性)이다. 동사록 화방누선설(畵舫樓船說)에서 선비(船備)를 설명하면서 인생론에 언급한 바 있고. 타지정자(0之正者), 남북순기주(南北順其宙), 심지정자(心之正者), 좌우봉기원(左右逢其原), 반시칙주불안의(反是則舟不安矣), 신불수의(身不修矣), 즉 학리學理와 처생관處生觀의 통일을 볼 수 있다. 또 일본의 최고 유학자인 하야시(林羅山)와의 학술, 시문의 응수(應酬)는 저명한 바 있지만 하야시 문집에 의하면 용주선생으로 부터의 교시(敎示)와 격려에 하야시는 감격하였다고 하였다. 동사록에서 볼 수 있는 일본 사행중(使行中) 풍물을 읊은 시문(詩文)에는 도처에 유연한 감각과 풍부한 문학적(文學的) 교양이 넘쳐 있어서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학식인 으로서의 본질을 나타내는 것일 것이다.
셋째 인간으로서의 지순성(至純性)이다. 용주선생은 판서와 중추(中樞)에 영진하면서도 전지(田地), 저택(邸宅)의 증식을 탐하지 않고 청렴결백한 태도는 우리의 귀감이 되는 대목이다. 또 방일(訪日)에 있어서도 여정(旅程)의 각 역참(驛站)에서 공찬(供饌)을 끝내 거절하여 일본인들을 두렵게 하였고. 특히 감명이 깊은 것은 계모(繼母)인 어머니 병환의 개호(介護)를 위하여 인조의 소환까지도 사퇴하고 그 침두(枕頭)에서 국정에 관한 십조문(十條文)의 상소를 올린 효도의 실천은. 인간으로서의 공(公)의 자질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상과 같은 여러 현상에서 용주선생은 조선왕조 후기에 드문 존재이었다고 말하더라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한 선생께서는 1666(81세) 66년간 지성으로 모셨던 계모 진천 송씨의 상(喪)을 당하였고, 3년 뒤인 1669(84세) 현종 10년 2월 5일 파란만장한 80평생을 마감하니 조정에서는 2일간 휴정(休廷)하였고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용주 조경은
“청문고절(淸文苦節)로 한 시대의 추앙을 받았다. 총재(冢宰)의 지위에 올랐고 문형(文衡)을 지냈는데, 경인년에 청나라에 죄를 받아 서쪽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돌아온 뒤에는 청(淸)에서 서용(敍用)하지 못하게 하였다. 부모 봉양을 위하여 회양(淮陽) 군수를 청하여 나갔는데 얼마 후 포천으로 돌아가 만년을 보냈다. 나이 80세에 상(喪)을 당하였으나 남들이 따를 수 없을 만큼 예를 잘 수행하였다. 고령으로 품계가 승급되었고 음식물의 하사도 있었는데 이때 나이 84세로 졸(卒)하였다. 조경의 문장(文章)은 고상하면서도 기운이 넘쳐 고문에 가까웠으며, 그의 맑은 명성과 굳은 절개는 당대의 추앙을 받았다. 그런데 윤선도(尹善道)를 변호하는 상소를 올린일 때문에 시의(時議)에 크게 거슬림을 받아 간사(奸邪)하다고까지 지목되었으니 이것이야 말로 사인(邪人)이 정인(正人)을 간사스럽고 못됐다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기록되어 있다.
1676(숙종 2)년 3월 6일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고 10월 4일 문간(文簡)의 시호(諡號)를 받고 1695(숙종 21)년 7월 11일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용주선생은 포천인으로서는 처음 견성지(堅城誌)를 착수 하였고. 1984년에 건립된 사당은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 264번지에 있으며, 사당 내에 봉안된 영정(影幀)은 1657년 73세에 그린 상반신 상으로 가로42cm 세로66cm로서 350여 년 전의 선생의 모습을 잘 나타낸 영정이다. 묘는 조경선생과 부인 안동 김씨의 합장묘로 포천시 신북면 만세교리 1-1번지 신평리 함바위에 있다. 묘 앞에는 증(贈) 영의정 행(行) 판중추부사 겸 이조판서 대제학 문간공(文簡公) 용주선생(龍洲先生) 한양 조경(趙絅)지묘, 증(贈) 정경부인 안동 김씨 부좌(祔左)의 묘비명이 있다. 묘에서 약2km 떨어진 마을 입구에 세워진 신도비(神道碑)는 평생지기인 미수(眉叟) 허목(許穆) 찬(撰), 조종석 서(書)로 되어 있으며, 포천 용연서원을 비롯하여, 흥해 곡강서원, 춘천 문암서원 등에 봉향되어있다. |
■龍洲先生遺稿卷之十三 / 祭文 祭夫人文(안동김씨)
維年維月若日。 漢陽趙絅爲文于白馬圍籬中。 送諸京家。 使外孫仲虎奠酌而告于亡室貞夫人金氏之靈曰。 嗚乎。 夫人享年幾七十矣。 封爵至貞夫人矣。 有子有女。 外孫侁侁。 可謂有年而兼福祿矣。 顧計較平生。 契活艱窮則反不如寒士之妻。 追思之不覺悼痛。 夫人爲婦于吾家四十九年於此矣。 遭時多艱。 不常厥居。 或于果川。 或于牙山。 或于嶺南。 或于洪陽。 流離中生理。 可勝言哉。 我本疏闊。 不唯不治生產作業。 朝夕之資。 亦不知從何出也。 夫人之朝糲飯而夕菜粥。 固其所也。 及余入仕而登第之後。 出宰郡縣者亦數矣。 夫人亦無一完裙一完衣。 是雖由於夫人之才拙。 而亦不可不謂之性儉勤而順我志也。 及余濫蒙天恩。 位至二品。 至於秉銓。 而苞苴不敢近於我門。 未嘗妻族一人之來我干請。 吾今而後知夫人爲內相之道無媿於人也。 已矣已矣。 今不復見夫人也。 我之被謫也。 上堂拜辭。 就夫人與訣。 則是時夫人病甚。 雖不能語。 亦能心解其事。 而有茫茫悵惘之色矣。 其後威鳳之再來。 及得兒孫屢度書札。 則皆以爲病勢一樣。 言語似漸分明云。 吾意以爲天其或者哀憐吾家。 而少緩夫人之疾以待我生還也。 豈知遽至於斯乎。 痛哉痛哉。 夫人常時冬衣。 必後一家諸少。 雖盛寒。 足不襪而處。 吾常怪之。 而又幸其無小小疾病。 不復一問諸醫而試一藥矣。 夫豈知釀成中風之病根。 及乎衰老而一朝猝發。 終至於不可救藥也。 是乃余之不明。 悔恨曷及。 聞訃前數夜夢。 宛見夫人行步如常。 起居老親房門外。 或治絲絮而向我言。 此必告終之兆也。 痛哉痛哉。 尤可痛者。 夫人寢疾二載。 口不能言。 而心則不晦。 旣與吾作死生別。 而眼看獨子威鳳奔走於千里塞外。 悲苦一念。 亦必焦煎於病中心肝矣。 死若有知。 豈能瞑目。 嗚呼。 白首偕老之義一朝斷絶。 而斂不親見。 哭不憑尸。 奠不親觴。 吾雖生。 腸內蝕矣。 然幽明感泣者。 聖上特軫吾家之有喪。 至垂格外之賵賻。 且命有司以庀葬事。 是古之命婦之所未能得者也。 死若有靈。 必不悼其不幸於土中哉。 眷彼抱川。 上下好丘。 祖先安於是。 一家中先逝者亦葬於是。 嗚呼亡靈。 惟永寧哉。 意無極而文不能盡意。 千里緘辭。 使兒孫代書以祭。 嗚呼尙饗。
연보에 따르면 용주 선생은 인조 15년(1637년) 척화파로서 일본의 군대를 빌려서라도 청나라를 공격할 것을 상소한 일이 있는데, 효종 1년(1650년)에 척화를 주장한 사람들을 처벌하기 위해 청나라 관리가 조선에 들어오자 이경석(李景奭)과 함께 백마성(白馬城)에 위리안치되었다고 합니다. 그 직후인 1650년 11월 정부인 안동김씨께서 돌아가시자 용주 선생은 이 제문을 지어 배위 안동김씨의 넋을 위로했습니다. 당시 용주 선생은 원지(遠地)에 위리안치된 처지라 이 제문을 서울 집에 보내 외손 이중호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했다고 적었습니다. 정부인 안동김씨께서는 용주 선생 댁의 며느리로서 49년을 살면서 온전한 치마 한 벌, 변변한 의복 한 벌 없을 정도로 근검하고, 용주 선생의 뜻을 받들어 뇌물이 선생 댁 문앞에 근접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또한 부인의 내조 덕분에 처가의 일족 단 한 사람도 용주 선생을 찾아와 청탁한 일이 없었으며, 용주 선생께서는 부인의 부음을 듣고도 몸소 갈 수 없는 처지라 소식을 듣기 며칠 전 꿈에 부인을 만난 내용 등을 애절하게 적었습니다. |
백대진(白大璡)ㆍ1595년(선조28)~1666(헌종7) | |
본관은 수원, 자는 계헌(季獻), 참의(參議) 인영(仁英)의 증손으로 지금의 포천 나무골에서 태어났다.
용주 조경(龍洲 趙絅)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를 지었다.
武夫辭退 未前聞 무부가 사퇴함을 전에는 듣지 못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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