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편지

2009. 3. 13. 07:29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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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의 편지


- 이황, 백광훈, 유성룡, 이식, 박세당, 안정복, 박지원, 박제가, 김정희     등 학자, 관료, 문인이기 이전에 ‘아버지’였던 조선 선비 들이 아들에    게 쓴 편지 -


■ 정민, 박동욱 공저

0 정민 : 충북 영동 생, 한양대 교수

         죽비소리, 미쳐야 미친다. 한시이야기 등

0 박동욱 : 서울 생, 한양대 교수

          표암 강세황 산문전집 공역 외 다수


            ≪ 이황의 편지 ≫ 


■ 이황 (李滉  1501 - 1570 )

0 시호 문순, 호 퇴계, 도옹(陶翁), 퇴도(退陶), 청량산인(淸涼山人)

0 영남학파의 학맥 형성, 일본 유학계에 큰 영향 

0 시문, 글씨에 뛰어남, 영의정에 추증, 문묘 및 선조의 묘정에 배향, 퇴계    전서, 도산십이곡 등

0 슬하에 3남을 둠 : 준, 채, 측실소생 적

0 준이 18세 때부터 48세 때까지 321통의 편지를 남김, 마지막 편지는 1570    년 퇴계가 70 세로 타계한 해에 쓰여 짐


0 편지는 대부분 장남의 공부와 처신을 주로 다루고 있다. 과거시험을 보라    고 채근하고, 산사에 들어가 공부하라고 권유하는 모습에서 엄정한 자세 를 엿볼 수 있다. 또 처가살이를 하는 아들을 준열하게 꾸짖으며, 백성들을 대하는 지방관의 자세에 대해서도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대개는 몸가짐과 처신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며느리의 선물을 직접 챙기는 살가운 모습에서는 퇴계의 인간미를 느낄 수 있다. 죽기 직전의 편지는 매우 인상적이다. 아버지를 생각해서 조금이라도 소용이 될 만한 물건을 챙겨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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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려는 아들의 마음과 그것을 알면서도 혹시라도 민폐가 있을까봐 걱정이    되어 도리어 꾸짖는 아버지의 마음이 따뜻하면서도 감동적이다.


■ 네 처가 만들어 보낸 단령을 받았다 (준에게)


0 네 처가 만들어 보낸 단령(團領 : 옷깃이 둥근 관복)을 받으니 마음에 위    로가 된다. 하지만 궁한 살림에 어찌 이를  만들었더냐. 도리어 미안하     다. 올 겨울 나는 내려가지 않고 일 없이 집에 있으려 하니 네가 만약 시    험 보러 오는 벗들과 함께 온다면 오는 김에 눌러 앉아 겨울을 나도 좋을    것이다. 흰 접부채 두 자루와 옻칠한 부채 두 자루, 참빗 다섯 개, 먹 한    정, 붓 한 자루를 보낸다. 접부채와 참빗은 네 처에게 전해 주면 좋겠구    나. 이만 줄인다.


1540년 퇴계 40세 때 아들 준에게 보낸 답장이다. 당시 퇴계는 한 해 사    이에 정언에서 지제교를 거쳐 형조좌랑이 되었다가 교리가 되는 등 참으로 바쁘게 보냈다. 여러 차례 경연에도 입대했다. 아들 준은 당시 18세였다. 아들이 산사에 들어가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 소식과 며느리가 정성 들여 지어 보낸 단령을 받고 기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또 겨울에 과거 시험 길에 벗들과 동행해서 상경했다가 아예 서울 집에 머물며 한 겨울 공부를 하고 가라는 당부를 했다. 아버지는 또 며느리에게 줄 선물을 마련해서 어여쁜 뜻을 보였다.       

 

■ 몹시 실망스럽구나. (준에게)


0 서둘러 조카 완이나 그 밖에 뜻이 독실한 벗과 함께 책 상자를 지고서 절    로 올라가 삼동의 긴긴 밤을 부지런히 독서하도록 해라. 내년 봄에 복이 등이 모두 올라오려 한다니, 너도 그때 함께 서울로 와서 동접들과 여름을 나면 아주 좋을 것이다.

   네가 지금 부지런히 공부하지 않으면 세월은 쏜살같이 흘러가서 한번 가    면 뒤쫓기가 어렵다. 끝내 농부나 병졸이 되어 일생을 보내려 한단 말이    냐? 천번 만번 마음에 새겨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가을걷이 같은    일은 비록 성근 구석이 있더라도 공부하는 사람이 마음에 두어서는 안 된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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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42년 아들에게 보낸 편지다. 바로 산사로 들어가 겨우내 발분해서 공    부하라고 다그쳤다. 추수 따위의 집안일은 다소 문제가 생겨도 상관 없으     니 공부에만 몰두하라고 주문했다.


■ 빈궁은 선비의 상사다. (준에게)


0 네가 처가에 얹혀사는 것은 본래 좋은 것이 아니다. 네 형편이 어렵기 때    문에 그럭저럭 지낸 것이 여러 해인데, 이제 와 네 형편이 더욱 어려워졌    으니 어찌하겠느냐? 하지만 빈궁은 선비의 상사(常事)니라. 또한 어찌 개    의 하랴? 네 아비가 평생 남에게 비웃음을 받은 적이 많았다. 하물며 네게 있어서야? 마땅히 굳게 참고 순리로 대처하여 스스로를 닦아 천명을   기다리는 것이 옳을 것이다.


☆ 1545년, 퇴계 45세 때 쓴 편지이다. 여러 해째 처가살이를 하고 있는 아    들 걱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빈궁은 선비라면 늘 있는 일인데 가난을 핑계대고 처가살이를 벗어나지 못한데서야 남의 웃음거리밖에 더 되겠느냐 고 타일렀다. 없으면 없는 데로 살되. 견인불발하는 굳센 의지와. 순리를 따르는 처신. 그리고 자기 할 도리를 다 하고 나서 천명을 기다리는 자세를 지닐 것을 촉구했다.


나아가지 않으면 물러나는 법 (두 아들에게 보낸 답장)


0 너희도 보았듯. 뜻있는 선비가 어찌 모두 부형이 곁에서 독책한 뒤에라야    공부를 했다더냐? 너희는 모두 가까이서 효과를 볼 만한데도 뜻과 기운이    나태해서 그럭저럭 날을 보내고 있으니 자포자기함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구나. 옛 사람은 공부란 “나아가지 않으면 물러난다.”고 했다. 너희가 날마다 나아갈 줄 모르니 날로 퇴보하여 마침내 하잘것없는 사람이 되고 말까 걱정된다.


☆ 1547년 퇴계 47세 때 쓴 편지이다. 학문은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와     같다. 그러니 나아가지 않으면 도리어 뒤로 물러앉게 된다. 아버지는 옛   사람의 이 말을 끌어다가 날로 진보하지 않으면 나날이 퇴보함이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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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어서 마침내 군자의 길에서 멀어져 볼품없는 사람이 되고 말 것이라고    경고했다.


■ 학업을 향한 뜻을 폐해서는 안 된다. (준에게)


0 네 한 몸으로 제사를 받들고 학업을 닦으며, 한 편으로 집안일까지 맡아    다스리려니 마음이 흔들려 가라앉는 때가 있음을 면치 못할 듯싶구나. 마    땅히 적의함에 따라 순리로 처리해서 평소 품은 뜻과 일정한 학업을 폐해    서는 안 될 것이다. 만약 세속의 잡무에 휘둘려 학업을 향한 뜻을 폐하는    자는 마침내 향리의 진부한 사람이 될 뿐이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느     냐?


☆ 1547년에 쓴 편지이다. 아들이 집안 제사 지내랴. 공부하랴. 집안 대소    사까지 챙기랴 바쁜 것을 미안해하며. 아무리 바빠도 공부를 손에서 놓으    면 안 된다고 다짐을 받았다. 잡무에 휘둘려 공부를 그만두면 쓸모없는    사람이 될 뿐이라고 했다. 당시 퇴계는 빈혈 같은 증상으로 건강을 잃었던 모양이다.


■ 무리에 휩쓸려 한 통속이 되면 안 된다. (준에게)


☆ 51세 때인 1551년에 나이가 서른이 다 되어 과거 준비를 하는 아들(준)    을 위해 쓴 편지이다. 요동돼지에 관한 고사는 이렇다. 요동의 어떤 돼지    가 머리 흰 새끼를 낳았다. 주인이 이상하게 여겨 임금께 바치려고 하동으로 갔다. 그런데 그곳의 돼지가 모두 머리가 흰 것을 보고 부끄러워서    돌아 왔다는 고사이다. 곧 안목이 부족해서 다른 이의 손가락질을 받는다는 의미로 썼다.     

   늦은 나이에 젊은이들과 함께 과거 공부를 하기 위해 떠나는 아들에게     젊은 애들과 휩쓸려 한 통속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 같은 무리 중에서    는 그래도 어른 축에 속하니 몸가짐을 바로 해야 한다는 당부, 그리고 무    엇보다 현재의 부족한 공부를 부끄럽게 알아 노력을 배가하라는 다짐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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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찌 무녀가 드나드느냐 (준에게)


0 듣자니 무녀가 드나든다더구나. 이 일은 가법(家法)에 몹시 해롭다. 내     어머님 이래로 전혀 믿지 않았다. 내가 늘 금하여 끊고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은 옛 가르침을 따르려 한 것일 뿐 아니라 또한 가법을 감히 무너 뜨릴 수 없어서였다. 네가 어찌 이러한 뜻을 알지 못하고 경솔하게 바꿀 수 있단 말이냐?


0 대저 사군자는 마땅히 소박하고 우아한 문풍과 담박하고 욕심 없는 마음    으로 자처하면서 그 나머지 여가에 생업에 종사한다면 해될 것이 없다.     만약 문아(文雅 : 시문을 짓고 읊는 풍류의 도)함과 함께 깨끗함을 지키기를 까맣게 잊고서 재산 경영이나 복식 같은 말단의 일에만 몰두한다면    이는 시골의 속된 사람이나 하는 것이니 어찌 유가(儒家)의 기풍이 있겠느냐?


☆ 51세 때인 1551년에 아들에게 보낸 별지(別紙)이다. 별지란 편지 외에     따로 당부할 말을 적은 내용을 말한다. 집안에 무당이 들락거린다는 말을    들었던 모양으로 어머니 대에도 있지 않던 일을 어찌 경솔하게 하느냐며    통렬하게 나무랐다. 무녀가 집안에 들락거리는 일은 가법에 없는 일이라며. 가장으로 아녀자 단속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야단쳤다.

   바깥일에 붙들려 공부에 매진하지 못하는 아들을 타일렀다. 선비가 고아    한 문풍과 담박한 마음은 없이 그저 돈 많이 벌고 근사한 옷 해 입는 데만 신경을 쓴다면 속물일 뿐 더 이상 선비일 수 없다고 나무랐다.

 

■ 깊이 경계해야 할 것이다 (준에게)


0 요사이 관청의 여러 일은 어떠하냐? 나라의 곡식은 진실로 납부를 재촉하    지 않을 수가 없고, 곡식 또한 가려서 받지 않을 수가 없다. 하지만 엄하    게 독촉함이 너무 지나치거나 가려 받는 것이 지나치게 가혹하면, 이 같은 흉년에 백성들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반드시 큰 원망이 일어날 것이다. 모름지기 마땅함을 헤아려서 행하도록 해라.      

   관청에 바치는 것 또한 그러하다. 대저 인심은 편중되는 바가 있게 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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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사이에 어느새 폐단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관청의 일이 지극히 피폐하    고 보니 네가 보치(補治)에 마음을 두는 모양인데 이는 네 마음이 중하게    여기는 것이 보치에 있기 때문이다. 폐단과 병통이 여기에서 생겨나지 않    을 줄 어찌 알겠느냐?   


☆ 1569년 69세 때 쓴 편지이다. 지방관으로 나가 있던 아들에게 환곡을 거    두는 문제에 대해 충고한 내용이다. 관가의 재정이 엉망인지라 아들은 보    치 즉 부족한 것을 보충해서 채우는 일에 중점을 두어 백성들의 환상, 즉    곡식 납부를 재촉했던 모양이다.

   그 와중에 아들이 보내려 한 꿩도 백성의 원망이 담긴 것에서 취한 것이    라면 받지 않겠다는 뜻을 피력했다.


■ 공연히 하는 말로 생각하는 게냐? (준에게)


0 이번에 온 여러 물건은 보내기에 몹시 마땅찮은 것들이다. 번번이 이리하    니, 내가 네 다스리는 고을을 번거롭게 하지 않으려는 본뜻에 어떠하겠느    냐? 내가 짐짓 겉으로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는 게냐? 옛 말에 이르기를      “모든 일은 어버이의 뜻을 따르라”고 했다. 네가 이를 생각지 않느냐?   이후로는 다시 살피도록 해라. 


☆ 퇴계가 70세 나던 1570년에 쓴 편지이다. 퇴계는 이해 12월 8일에 세상    을 떴다. 당시 지방관으로 나가 있던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 매번 이런저런 물건을 챙겨서 보내왔던 모양이다. 그러지 말라는 뜻으로 누차 일렀는데도 아들이 다시 물건을 보내오자. 이번에는 정색을 하고 야단을 쳤다.    공연히 하는 말이 아니다. 민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 어버이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다시는 이렇게 하지마라. 이미 나이가 들어 고을살이를 나가 있는 자식의 어버이 위하는 미쁜 뜻도 바른   도리로 다그치는 그 마음이 도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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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광훈의 편지 ≫    


■ 백광훈 (白光勳  1537 - 1582)


0 백광훈은 조선 중기의 문인이다. 본관은 goal, 호는 옥봉(玉峰)으로 최경    창, 이달 등과 함께 삼당시인으로 불렸다. 그의 시는 당나라 천재시인 이    하(李賀)에 견주어지곤 했다. 1564년 진사가 되었다. 문집에 옥봉집이 있    다.


0 3남 2녀를 두었으며 아들은 형남, 진남, 흥남. 둘째 진남이 시인 서예가    로 유명


0 편지는 주로 공부와 처신에 관한 것이다. 과거 공부를 산사에 들어가서     준비하라고 권하거나 공부에 대한 구체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멀리  떨어져 지내는 아들이 남을 업신여기는 태도가 있고, 남의 잘못을 쉽게    말한다는 말을 듣고는 따끔하게 야단을 쳤다. 아내의 건강과 며느리의 산후조리 걱정도 보이고, 꽃과 나무를 심으라는 권유도 있다. 가난을 달고살아 도토리를 주워서 겨울을 나라는 말에서는 안쓰러움마저 느껴진다.


■ 한 겨울 공부는 평생 쓰기에 족하다. (형남과 진남에게) 


0 애비는 어제 상심한 채 길을 가다가 비를 맞고 고을로 돌아왔다. 한번 거    처 정하기가 천리 길보다 어려우니 서울에는 닿지도 못할까 걱정이다. 너    희는 다행히 형님을 모시고 산에 들어가게 되었구나. 한 겨울 석 달 공부    는 평생을 쓰기에 족한 법이다. 천만 노력하도록 해라. 흥남이도 더 노력    하도록 권면해서 마침내 성취함이 있도록 하는 것은 부형의 책임이다. 진    남이는 백발백중의 가망이 없다면 내년 봄에 굳이 힘들게 멀리까지 올 것    없다. 올 적에 서울서 머물 계획도 늦추어서는 안 된다. 이만 줄인다.


☆ 한 겨울 삼동을 산사에서 나며 하는 공부는 평생의 든든한 밑천이 된다.    산사에 들어가 공부를 하련다는 아들의 소식을 듣고 백광훈이 기뻐서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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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리다. 그저 해서는 안 되고 천번 만번 마음을 다잡아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동생도 함께 잘 이끌어서 성취시키도록 해라.


■ 장막을 내리고 반딧불이를 모아서


0 너와 헤어진 지 이제 며칠이더냐. 네가 나를 그리는 마음으로 나의 괴로    움을 헤아려 보렴. 네 어미는 2월을 어찌 지내셨더냐. 소식 몰라 곱절이    나 걱정이로구나. 네 처는 무사히 해산 했느냐? 산후의 조리는 특히나 어려운 법이니 한시도 마음을 놓아서는 안 된다.

   오늘날 과거 시험을 보는 사람을 살펴보니, 대충 노는 사람이 바랄 수     있는 것이 아니더구나. 너희가 만약 과거에 생각이 없지 않다면 단지 장막을 내리고 반딧불이를 모아서 밤낮없이 노력해야만 할 것이다.


☆ 43세 때인 1579년 큰아들 형남에게 보낸 편지이다. 네가 아비를 그리는    마음을 미루어, 아비가 너를 얼마나 보고 싶어 하는지 가늠해 보라는 말 이 뭉클하다. 아내의 건강과 며느리의 산후 조리 문제를 걱정하고, 과거시험을 준비 중인 아들에게 엔간한 준비로는 합격을 꿈꾸지도 말라고 쐐기를 박았다.


■ 놀랍고 비통하여 죽고만 싶구나


0 봉사(奉事)가 와서 너희가 잘 있다는 소식을 자세히 들으니 몹시 기쁘다.    다만 사람들에게 듣자니 너희가 자못 남을 업신여기는 태도가 있고, 게다    가 남의 허물을 즐겨 말한다더구나. 사람이 배우는 것은 이 같은 병통을    없애기 위해서이다. 그런데도 너희가 만약 이와 같다면 비록 책 만 권을    배워 문장이 뛰어나 그날로 과거에 급제한다 한들 그 사람을 어디다 쓰겠느냐? 놀라고 비통하여 죽고만 싶구나.


0 이 후로도 너희가 능히 이 버릇을 통절하게 없애지 않아 혹시라도 이러쿵    저러쿵 하는 자게 있게 되면 맹세컨대 다시는 너희를 보지 않겠다. 천 번    만 번 경계하고 삼갈 것은 단지 이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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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세 때인 1579년에 쓴 편지이다. 멀리 떨어져 지내는 아들이 남을 업신    여기는 태도가 있고, 남의 잘못을 쉽게 말한다는 말을 듣고 따끔하게 야단을 친다. 공부를 하는 까닭은 이런 태도를 몸에 붙이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그런 행동을 하니 그렇게 해서 출세를 한들 그런 사람을 어디다 쓰겠느냐고 다그쳤다. 딱 끊어 고치지 않으면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하며, 놀라고 비통해서 죽고만 싶다고까지 말했다.


■ 글을 자주 지어 보아야 한다. (형남과 흥남에게) 


0 ‘통감’과 ‘문선’의 부(賦)를 외우고, 또 자주 글을 지어 보아야만 독    서가 효과를 보게 된다. 읽기만 하고 짓지 않으면 날마다 더 생소해질 것    이다. 집이 가난하고 동생과 누이가 많은데다. 나이마저 점차 많아지니 너희가 어찌 편안하게 날을 보낸단 말이냐? 진남이는 도회지에서 서당에 다니면서 다섯 번째로 시험을 보는 것이니 초시에 붙을 것은 의심이 없 다. 아주 기쁘구나. 시부(詩賦)로 두 번이나 장원을 차지했는데 명성이   실정보다 지나쳐서 웃을 만하다. 형남이는 지금 무슨 책을 읽고 있느냐?    무릇 집안의 요역(徭役 : 나라에서 남자에게 시키던 노역)은 절대로 늦추어서는 안 된다.


☆ ‘통감’과 ‘문선’의 부를 부지런히 읽고 외워서 주제를 선택해서 지    어보는 연습을 많이 하라고 했다. 또 읽기만 하고 작문 연습을 게을리 하    면 글쓰기가 뻑뻑해져서 안 되니 되든 안 되든 부지런히 써 볼 것을 권유    했다.


■ 밥이 넘어가질 않는구나. (형남과 진남에게)


0 흉년이 들어 곳곳이 다 그렇지만. 내 생각에 우리 집의 환곡 갚기도 부족    하여 거듭 욕을 당할까 염려되는구나. 생각이 이에 미치니 밥이 목구멍을    내려가지 않는다. 여러 집과 함께 의논해서 배를 구해 섬에 들어가 도토리를 많이 주워 나온다면 그 달의 목숨은 살릴 수가 있을 것이다. 또한    소홀히 생각지 마라. 도토리가 두 말이면 쌀 한 말이 된다. 능히 십여 가마만 얻는다면 구황에 도움이 되는 것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높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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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 올라가지는 마라. 집 뒷산에서도 주울 수가 있다. 구황의 대책으로 이    만한 것이 없다.      


0 내가 대여섯 말을 주워 이를 빻아 가루를 냈더니 서 말쯤 된다. 밥에 섞    고 술도 빚고, 쪄서 먹기도 하니 안 될 것이 없다. 문 참봉이 가는 편에   편지 한 통을 부쳤는데 너희가 받아 보았는지 모르겠다. 재상(宰相) 또한    하늘이 내는 법은 없다. 오직 너희가 힘쓰는 데 달린 것이니라. 이만 줄인다.


☆ 44세 나던 1580년에 쓴 것이다. 서울의 고단한 하숙집에서 아버지는 고    향의 병든 아내, 못 미더운 자식 걱정으로 한숨만 늘어 간다. 시험 공부를 부지런히 하라는 말, 결석하지 말고 꼬박꼬박 출석하란 당부는 지금의    아비와 다를 바 없다. 출석 체크는 각 지역별로 향시에 급제한 유생의 출결을 점검하기 위해 출석부에 둥근 점을 찍던 일을 두고 한 말이다. 이   점의 숫자를 헤아려 일정한 수를 넘어야 서울에서 열리는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생겼다. 


   가을걷이 때가 되어 봄에 관에서 꾼 환곡을 갚아야 하는데, 다 거둬 탈    탈 털어도 제 입에 넣기는커녕 빚 갚기도 부족할 판이다. 그래도 아비는   아무런 대책을 못 내주고 그저 배를 빌려 섬에 들어가서 도토리를 몇 섬주워와 그것을 빻아 온 식구가 겨울을 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딱한 소리만 했다. 사정이 오죽 답답했으면 자신도 도토리를 몇 말 주워 와 밥에     섞어 먹는다고 적었다. 사람은 다람쥐가 아닌데 도토리로 어찌 온 식구가   겨울을 난단 말인가?    


■ 젊은 시절은 머물지 않는다. (진남에게)


0 너를 보낸 다음날 승정원에 들어갔더니, 승지와 주서, 한림이 모두 네 글    씨와 시문이 아름답다고 칭찬하더구나. 비록 뛸 듯이 기뻤다만 도리어 실    지도 없이 칭찬만 받았나 싶어 걱정이 되었다. 율곡을 만났더니 또한 네   가 아낄 만하다고 칭찬 하더구나.너는 모름지기 잠깐 사이도 쉬지 말고    이같이 무거운 이름에 부합하도록 기약해야 한다. 세월은 물같이 흘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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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젊은 시절은 머물게 할 수가 없다. 너희는 이제 스물이니 빨리 떨쳐    이루기를 생각지 않겠느냐? 


☆ 45세 때인 1581년에 둘째 아들 진남에게 부친 편지이다. 아버지를 닮아     필재가 있었던 아들의 글씨와 시문에 대한 칭찬을 듣고 흐뭇함을 숨기지     않았고 명실이 상부하도록 더 노력할 것을 당부했다.


■ 속이지 말라는 가르침을 늘 염두에 두어라. (진남에게)


0 시험장에 들어갈 때 초장(初場)에서 서로 도와주자고 권하는 자가 있더라    도 절대 들어서는 안 된다. 네 형은 능히 쓰지 못하므로 아비의 마음 같아서는 너를 들여보내 서로 힘을 보탠다면 얼마나 좋겠느냐. 하지만 사군자의 일거일동을 어찌 분수에 넘치게 할 수 있겠느냐. 평생 어쩔 수 없더라도 이 같은 일을 할 수는 없다. 무릇 집안일과 몸가짐을 속이지 말라는    가르침을 늘 염두에 두도록 해라. 부부간에는 더욱 마땅히 서로 공경하고    어려워하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 절대로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 답안지로 쓸 종이는 찰방 이경선이 약속하고 갔는데. 다만 영남이 아주 멀어    어찌 기일에 맞춰 보내오려는지 걱정이다. 이만 줄인다.


☆ 45세 때인 1581년 5월, 자식의 과거를 앞두고 노파심에서 부친 편지이     다. 가을에 치르는 향시에 응시하는 준비 상황을 점검하고 시험장에서의    바른 처신을 일러주었다. 누가 서로 도와주자고 해도 응하지 말 것과, 마음 같아서는 형제가 서로 도와주면 좋겠지만 그래도 옳지 않은 행동을 할    수는 없다며 솔직한 속내와 결연한 다짐을 함께 말했다. 부부간에 서로     공경하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는 가르침, 스스로를 속이고 집안을 속이는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일깨움은 지금도 음미해야 할 말씀이 아닐 수 없다.


        ≪ 유성룡의 편지 ≫


■ 유성룡 (柳成龍  1542 -16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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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조선 중기 문신, 본관은 풍산, 호는 서애(西厓), 이황의 문인으로 김성일    과 동문수학,

0 1564년 생원, 진사가 되고 1566년 별시 문과 급제, 승정원권지부정자, 문    장, 덕행, 글씨로 이름을 떨쳤고 영남 유생의 추앙을 받음.

0 저서는 서애집, 징비록 등

0 본처에 4남 2녀, 측실에 2남 1녀


0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난리를 겪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공부를 할 것을 주    문했다. 그래서 편지 대부분은 독서와 공부에 대한 것으로 채워져 있다.    무엇보다도 경서에 대해 거듭 중요성을 제기했다. 의문을 가지고 공   부하는 것과 꼼꼼히 읽는 것 등의 공부 방법에 대해서도 친절하게 일러주고 있다. 자식들의 나이를 자주 언급하면서 분발을 촉구하는 모습은 호랑    이처럼 무섭다.


■ 서둘지 말고 쉬지도 않고 (세 아들에게)


0 “3경까지 자지 않으면 피가 심장으로 돌지 않아 초췌해진다.”고 했다.    나아감이 빠르면 물러남도 신속한 법이다. 꾸준히 그만두지 않고 해서 유    익한 것만 못하다. 기운을 헤아려가며 해서 근심을 끼치지 않도록 해라.


☆ 공부는 서둘러 하는 것이 아니다. 후끈 달아올랐다가 싸늘히 식는 그런    공부를 하지 말고 꾸준히 쉬지 않고 서둘지도 않으며 하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 마땅히 힘을 쏟을 뿐


0 옛사람은 “책을 천 번 읽으면 의미가 절로 드러난다.”고 했다. ‘시      경’에서는 “큰 밭을 갈지 마라. 가라지(강아지풀)가 무성하다.”고 했    다. 너희도 나이가 벌써 들었으니, 느긋하게 지내면서 정밀하고 익숙한     공부에 힘쓰지 않는다면 한갓 수고롭기만 할 뿐 아무 유익됨이 없을 것이다. 공을 이루는 것은 하늘에 달렸으니 오직 마땅히 스스로 힘을 다하여    야 할 뿐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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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고 또 읽어 의미가 완전히 내 속으로 걸어 들어오게 해야 한다.    이것저것 집적거리기만 하면 큰 밭에 씨만 잔뜩 뿌려놓고 김을 매지 않아    가라지만 무성해지는 꼴이 되고 만다. 그러고도 알찬 추수를 기대할 수     있겠느냐?  마음을 더 다잡아야 한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그저    대충 시늉이나 하는 공부로는 이룰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덤벙거리지마라. 진득하니 눌러 낮아 하나를 배워도 네 것으로 만들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고생만 하고 보람이 없다.                 


■ 빨리 되는 방법만 찾는다. (여러 아들에게)


0 경신년(1560) 겨울에 ‘맹자’한 질을 가지고 관악산으로 가서, 몇 달 동    안 스무 번을 읽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외울 수가 있었지. 산을 내려와     서울로 들어설 때 말 위에서도 다른 일은 생각하지 않고 처음 ‘양혜왕     장’부터 끝 편인 ‘진심장’까지 모두 마음에 담아 외웠다. 비록 능히     정밀한 뜻을 깊이 알 수는 없었어도 이따금 마음에 와 닿는 곳이 있었다.    이듬해 하회에 와 있으면서는 ‘춘추’를 삼십여 차례 읽었다. 이때부터    글 짓는 가닥을 조금씩 이해하여 요행히 과거에 급제했다. 이제 와서 늘    안타까운 것은 당시 세월의 공력을 더욱 보태 사서를 백여 번씩 읽지 못한 점이다. 이렇게만 했더라면 그 성취가 반드시 오늘날의 보잘것없는 것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매번 너희에게 사서를 읽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 ‘맹자’와 ‘춘추’를 꼼꼼히 읽어 내 것으로 만든 일을 계기로 비로소    공부의 깊은 재미를 느낀 자신의 경험을 말했다. ‘사서’는 모든 공부의    기본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 생각하지 않으면 의문도 없다.


0 너희 셋 모두 ‘맹자’를 읽었느냐? 배움은 정밀하게 따지고 살펴 묻는     것을 소중하게 여긴다. 너희가 일찍 따져보지 않기 때문에 의문이 생기지    않고 의문이 생기지 않으므로 물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와 같다면 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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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 많이 읽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힘쓰도록 해라. 득남이에게도 부    지런히 읽도록 권면해야 할 것이다.


☆ 질문도 머릿속에 든 것이 있어야 나온다. 공부는 질문에서 시작되어 질    문으로 끝이 난다. 질문이 있으려면 의문이 있어야하니 의문이 없으면 질    문도 없다. 그저 글자나 읽는 도능독(徒能讀)의 공부는 하나마나한 공부    다.  의문이 생겨야 발전이 있다. 책을 읽다가 궁금한 것이 생기고 궁금    증이 의문으로 이어져 스승을 찾아 묻고 스스로 따져 해결하면 다시 한    단계 더 나아가게 된다.


■ 향상하려는 용기가 없이는


0 사서는 유자(儒者)의 곳집이니 모름지기 통째로 외우기를 날마다 되풀이    해야만 한다. 그 다음은 ‘시경’과 ‘서경’이고 또 그 다음은 송대 유학자의 글에 통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자는 자기에게 완전히 무젖어 들어    제 말처럼 외워야 한다. 이렇게만 한다면 글짓기가 무에 어렵겠느냐? 과거 시험장의 공부도 내 손안에 있게 될 것이다. 노력하고 노력하도록 해라.


☆ 사서를 다 외우고 나면 ‘시경’과 ‘서경’을 외우고, 그러고 나서는     송나라 학자들의 글을 외우라고 했다. 아예 입에 붙어서 마치 제 말하듯    외워야 하니 이렇게만 한다면 글짓기는 붓 아래 놓이게 된다고 적었다.     지금도 글쓰기 교육은 글 쓰는 요령을 익힐 게 아니라 생각의 힘을 기르고 식견을 틔우는 공부가 우선이다. 사람들은 늘 반대로 하지만 말이다.


■ 산사의 등불 하나 (두 아들에게)


0 며칠 간 이런저런 생각으로 마음이 괴롭다. 산사는 조용하고 편안하니 책    읽기가 안온하냐? 일찍이 퇴계 선생이 손자에게 준 시에서 “소년 시절     산사의 즐거움 가장 아끼나니. 푸른 창 깊은 곳에 등불 하나 밝았구나.     평생에 허다한 그 모든 사업들이, 이 등불 하나에서 발원하여 나온다       네.”라 한 것을 아꼈었다. 너희가 이를 본받기를 깊이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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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부의 진진한 맛은 한 겨울 산사에 고드름 떨어지는 소리 들으며 등불    밝혀 글 읽는 가운데 있다. 발분하여 삼동 동안 책 읽고 돌아오면 젊은이    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한 번 재미를 붙인 공부에 가속도가 붙는다.     아들을 산사로 보내놓고. 독려의 뜻으로 보낸 편지이다.



           ≪ 이식의 편지 ≫  


■ 이식 ( 李 植  1584 - 1647 )


0 이식은 조선 중기 문신이다. 호는 택당(澤堂), 본관은 덕수, 시호는 문정    (文靖). 1610년 문과 급제 대사간으로 있다가 좌천, 1642년 김상헌과 함께 척화를 주장하여 청국에 잡혀 갔다가 탈주해 돌아옴  

0 슬하에 2남 3녀. 맏이 면하는 진사, 둘째 신하는 행적이 남아 있지 않고.    가장 유명한 인물은 막내 단하로 여러 관직을 거쳐 좌의정에 오름


0 농사일을 비롯한 소소한 집안일에 대한 당부가 심심치 않게 보인다. 어려    운 세상을 살아가는 처신에 대한 조언도 빈번하다. 책을 읽으라는 당부는    빠지지 않고, 독서와 작문의 요령에 대해 찬찬히 설명하기도 했다. 책을    읽지 않았다고 꾸짖을 때는 엄한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이다. 과거에 꼭     응시해서 자신의 실력을 가늠해 보라고 조언했다. 무엇보다도 전시(戰時)에 가족을 걱정하며 노심초사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 우러러 푸른 하늘을 믿을 뿐이다

    (포위된 남한산성에서 아우와 두 아들에게)


0 14일에 어가(御駕)를 호종하여 성에 들어온 이후로 아득히 소식을 듣지     못했다. 성은 이미 포위당해  이제 해가 바뀌었건만, 적을 물리칠 기약은    없구나. 전해 들으니 살육과 약탈이 벌써 2,3일 거리까지 미쳤다 하니 내    고향 또한 보전하기 어려울 듯싶구나. 양근의 동쪽으로는 그래도 관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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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리와 모습은 있지만 어떤 상황인지 몰라 가슴을 치며 말을 할 수 없구    나. 어머님께서는 내가 위급하다 하여 반드시 마음을 못 가누고 계실 테    니, 너희가 모름지기 편안하게 십분 위로해 드려야 할 것이다. 날씨가 갈    수록 푹해진다. 모쪼록 잘 지켜 봉양하도록 해라.


0 길을 돌려 제천과 영춘 사이로 가서 농사를 지을 만한 깊숙이 외진 곳을    찾아서 안돈할 계획을 세워보도록 해라. 모든 일은 편의함을 헤아려 하는    것이지 꼭 내 방식에 얽매일 것은 아니다. 다만 형세가 강도에 있을 때와    는 다르니 더더욱 멀리 가지 않을 수가 없겠다. 


0 나는 나라를 위해 한 번 죽을 것을 평생토록 다짐했었다. 비록 천리 밖에    있다 하나. 어찌 살기만을 꾀하려는 사람이겠느냐? 이제 양궁(兩宮)을 모    시고 함께 성을 지키고 있다. 성패나 길흉이야 단지 한 조각 붉은 마음으    로 우러러 푸른 하늘을 믿을 뿐이다. 만약 어버이를 그리는 일념만 아니 라면 가슴속에 달리 괴로움은 없다. 의승(義僧)이 나가는 편에 이 편지를    부친다. 앞서도 편지를 보냈지만 받아 보지 못했다니, 이 또한 기필하기는 어렵겠구나. 대저 이 성안에 있는 승려 희안 등이 뒷날 내 소식을 알려 줄 게다.


☆ 병자호란이 일어난 이듬해인 1637년 1월 6일에 청병에게 포위당한 남한    산성에서 동생과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살육과 약탈의 흉흉한 소문    속에 노모와 자식들의 안위를 알지 못하는 가장의 초조한 심사가 잘 나타    나 있다. 전쟁 상황은 갇힌 성 안에서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고, 자신 때문에 불안해하실 어머님 생각을 하면 황황한 마음을 거둘 길이 없다. 그래도 그는 전달될 기약없는 편지를 쓰기로 한다. 마침 의병으로 나선 승려가 성의 포위를 뚫고 밖으로 나가는 인편에 쓴 글이다. 동생과 자식들    에게 제천과 영춘사이의 외진 곳을 찾아 들어가 농사나 지으며 일단 자리    를 잡으라고 당부했다.


■ 책을 한 권도 못 봤다니 실로 가석하다.(면하에게)


0 책을 한 권도 보지 못했다니 이것은 실로 가석한 일이다. 읍내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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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기’와 ‘고려사’ 쯤은 읽어볼 수 있을 텐데. 어찌 책이 전혀 없다고    말하느냐? 네 몸은 벌써 옛 호걸들이 사업을 이루던 나이이다. 양생으로    농사를 배워 제 몸과 집안을 꾸리고, 독서로 지혜를 더해 몸을 깨끗이 하여 때를 기다리는 것이 어찌 어려운 일이겠느냐? 나는 벌써 늦었고 진사인 단하 또한 소년이 아니다. 사람일은 믿기가 어려우니, 다만 너 스스로    자강불식하는 데 달려 있을 뿐이다. 절대로 게으름을 부려서는 안 된다.    내 서책 중 당대에 받은  백색과 홍색의 두 책을 조진사에게 청하여 장정을 꾸미게 하니. 때때로 통독하도록 해라. 이 두 책은 종신토록 근심을     잊게 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 읽어야 할 책은 안 읽으면서, 책 없다는 핑계만 대는 것도 못마땅했다.    옛 영웅들은 네 나이에 벌써 사업을 이루었는데 너는 여전히 구실만 대면    서 노력하지 않으니 그래서야 무엇을 이루겠느냐고 나무랐다. 자식은 늘    부모 눈에 반도 안 차는 것이 고금의 상정인 것일까?


■ 독서야말로 인간의 지극히 좋은 맛이다 (면하에게)


0 나는 이 같은 근심과 번뇌 속에 있으면서도 오히려 책을 보며 날을 보내    느라 일찍이 쉬지 않았다. 다만 잡다한 손님이 괴로울 뿐이다. 너희 또한    책 보기를 그만 두지 않도록 해라. 이것이야말로 인간 세상의 지극한 맛    이니라. 만약 이 맛을 알지 못한다면 장차 세상을 피해 산 속에 들어 가 더라도 근심과 괴로움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 모름지기 문리가 활짝 열리는 것을 위주로 해야 한다.

   붓 두 자루를 보낸다. 너희가 종이와 붓을 사치스럽게 쓰니 몹시 걱정이    다. 이후에는 조심하도록 해라. 거처에 평량자(平涼子 : 패랭이)와 부채    같은 물건을 미리 놓아두었다가 황모필과 바꾸면 좋을 것이다. 왜국의 벼루갑은 너무 사치스러우니 늘 사용할 수가 없고, 또한 우리 집에 맞지도    않겠기에 내가 그 아들에게 돌려주려 한다. 부채 네 자루를 보낸다. 두    자루는 하사받은 것으로 각각 도원도(桃園圖)가 그려져 있다. 때때로 부    친다면 산에 사는 괴로움을 잊을 만할 게다.


☆ 산 속에서 농사지으며 지내자니 힘들겠구나. 그래도 애비처럼 걱정스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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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야 하겠느냐? 애비는 이 와중에도 책 읽기를 잠시도 그만 둔 적이 없     다. 책 읽기야말로 인간 세상의 지극한 맛이다.


■ 어디고 배울 것 없는 곳은 없다 (면하에게)


0 아침에 밭 갈고 밤중에 책 읽는 것은 옛사람도 드물었다. 농사일에 골몰    하다 보면 책 공부에 미치기가 어렵게 마련이다. 다만 배운다면 대충 읽기만 해서는 안 된다. 어디든 배울 것 없는 곳은 없는 법이다. 강학하여    밝히고, 이를 지켜 행한다면 이치 아님이 없을 것이다. 부형과 선대에게    들으니 글 쓰는 재주 같은 것은 잘하고 못하고를 따지지 말고 날마다 시  한수나 작은 문장을 지어보는 것이 묘결이라 하셨다. 내가 간사한 자들의    모함을 입어 심양에서 저들의 성냄이 다급했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벗어나 돌아오는 방편이 있었으니, 어찌 하늘이 시킨 것이 아니겠느냐? 평생의 운명이 대흉에 이르지는 않을 것이니 마음 쓸 것 없다. 나머지는 모름지기 농사에 힘을 쏟되, 강습을 폐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 이식은 1642년 청음 심상헌과 함께 척화를 주장하여 심양으로 잡혀갔다    가 돌아왔다. 의주에서 다시 붙잡혀 갇혔으나 탈출하여 돌아온 일이 있었    다.


■ 과거는 꼭 보도록 해라


0 과거 시험은 어느 날로 정해졌다더냐. 만약 가까운 곳에서 치러진다면 시    험 삼아 중장(中場 : 사흘에 나누어 보던 과거 시험의 둘째 날의 시험장)    을 보는 것이 좋겠다. 선배들은 비록 실학을 알지 못해도 한양에서 시험   보는 날은 감히 들어가지 않음이 없었다. 오늘날 재주 있는 선비들은 시험장에 들어가지 않는 것을 고상한 운치로 여기니 참으로 어리석다 하겠다. 시험을 볼 것 같으면 감히 한가롭게 노닥거리지 못하고, 대략이라도    외우게 마련이니, 보탬이 적지 않다. 혹 다행히 합격하는 수도 있다. 그래서 매번 보는 것이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 아들에게 과거 시험에 응시할 것을 권하며 쓴 편지이다. 시험이 있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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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장해서 공부하게 되고, 공부의 과정에서 발전이 이루어진다. 게다가 운    좋게 합격이라도 하게 되면 더 바랄 것이 없다. 그러니 기회가 있을 때마    다 빠짐없이 응시해서 자신의 기량을 연마해 나가라고 주문했다.


■ 흉년이니 연명하여 살 것을 생각해라 (면하에게)


0 올해도 흉년의 조짐이라 하늘 뜻이 망극하다. 마음을 썩혀본들 어찌하겠    느냐? 너희가 다행히 합격했으니 삶의 인연이 쓸쓸하지만은 않구나. 다만    생각하기에는 이러한 때에 살아나가려면 남들이 미워하는 일을 하지 말     고, 십분 공부해서 감당해나가야 할 것이다. 무논에는 일찍 밭 갈아 파종    하고, 밭곡식도 일찍 갈아 김을 매주어서 육진(六鎭) 사람들이 농사짓듯    해야 할 것이다. 정녕코 경계하노니 내 말을 허투루 들으면 안 된다. 비록 마른 밭이라 해도 인분이나 재 같은 것은 크게 나쁘지 않다. 지내는     곳에서 재를 마련할 수 없다면 모름지기 아이종을 시켜 그 일을 전담케 해라. 큰 섶나무를 해오지 말고, 솔잎만 써서 군불을 때면 재를 많이 만들 수 있다. 자주 마구간을 쓸어서 태우면 또한 재를 만들 수가 있다.


☆ 전쟁의 끝, 흉년의 조짐, 자식들의 과거 합격에 위안, 농사에 대한 자질    구레한 걱정, 벼슬길에 있으면서도 아버지는 생각이 참 많다. 높은 벼슬    이 가족의 생계조차 해결해 주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 절대 원망의 말을 꺼내지 마라. (신하와 단하에게)        


0 내 걸음이 여기까지 견뎌낼 줄은 생각지 못했다. 내일 압록강을 건너면     틀림없이 심문을 받을 것이다. 저들의 말과 뜻을 가만히 살펴보니, 가지    위에 가지가 돋아, 내가 산성을 내려가지 않은 것을 가장 큰 죄라 하고     회은군 이덕인을 보낼 것을 권하고, 김상헌의 석방을 도모한 죄를 그 다음이라고 하더구나. 이후로 또 어떤 죄목을 끼워 넣을지 모르겠다.

   너희는 절대로 원망하는 말을 입 밖에 내면 안 된다. 가만히 스스로 갇    힌 듯이 있는 것이 좋겠다. 나는 심양으로 들어갈 것이 분명하다. 다만     죽음에 이르지는 않겠으나 죽는다 해도 다행일 것이다. 나랏일이 측량키    어려워 손 쓸 데가 없구나. 나의 이번 액운은 가장 작은 것이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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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로 인해 한 차례 더 노여움을 입게 된다면 불행이 아닐 수 없겠다. 병    때문에 글이 엉망이로구나.


☆ 1642년 10월 청나라 장수가 세자를 대동하고 봉성까지 나와 우리나라 조    신(朝臣)들을 조사했다. 당시 이식의 혐의가 가장 무거웠다. 그들은 병자    호란 당시 항복하지 않았고 김상헌이 잡혀갈 때 길을 막았던 일과, 최근    회은군의 석방운동을 주청한 것 등의 문제를 물고 늘어지며 위협을 서슴지 않았다. 죽지는 않겠지만 죽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다. 아버지는 이렇게 아들에게 말하면서 원망을 입에 담지 말고 의연하게 처신할 것을 당부했다. 그들에게 뇌물을 써서 벗어날 생각도 못하게 엄중히 경계했다.


■ 가난을 편히 여기고 마음을 기르는 방책 (신하에게)


☆ 아버지의 안위에 전전긍긍하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아들에게 부친     편지이다. 아들은 아버지를 안심시키느라 마음에도 없는 이야기를 해서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편지를 보냈다. 아버지는 그 속내를 가늠해서. 내    걱정 말고 네 마음이나 잘 다스리라고 보듬어 주었다. ‘정심광지(定心廣    志)’ 마음을 안정시키고 뜻을 확장시키라는 것이 아버지가 아들에게 내린 처방이다. 먹을 것이 없으면 안 먹으면 되고, 잠이 안 오면 안자면 그만이다. 공연히 전전긍긍 조바심 낼 것이 없다. 이것이 가난을 견디면서    마음을 기르는 방법이다. 그러려니 하면서 마음을 차분하게 먹고, 이럴    수는 없지 하며 뜻을 굳세게 다진다면 건너가지 못할 역경이 어디 있겠는가?

 


          ≪ 박세당의 편지 ≫


■ 박세당 ( 朴世堂 1629 - 1703 )


0 조선 중기 문신, 본관은 반남, 호는 서계(西溪) 시호는 문정(文貞)   

0 현종 1년 문과 장원, 형조참의 공조판서 등 판중추부사로 기로소에 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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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사변록에서 주자를 비판했다가 사문난적으로 몰려 삭탈관직, 유배도중 사    망


0 슬하에 3남2녀, 아들은 태유,태보, 태한

  태유는 효성이 지극하고 명필, 태보는 인현왕후 폐위 반대로 유배도중 사    망,후일 영의정으로 추증


0 박세당의 삶은 고난의 연속 : 21세 모친상, 38세에 부인 사망, 58세 61세    에 장자와 차자가 이어서 사망


0 그의 편지는 글쓰기에 대한 것이 빠지지 않는다. 서예 연습에 대한 독려    와 역사책 읽는 방법에 대한 편지도 보인다. 몸가짐을 단속하라는 말도    적지 않다. 특히 차남 태보의 성정을 근심하는 내용이 인상적이다. 태보가 불의의 사건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하기 전에 자식을 위태롭게 바라보는 아버지의 심정이 수시로 드러난다. 장남 태유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지방으로 좌천된 아들의 안부에 조바심하는 아버지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 역사책을 보는 방법


0 역사책을 보려 하는 줄 알겠는데 이는 실로 네가 여태껏 잘 모르던 부분    이다. 이제 만약 여기에 뜻을 둔다면 반드시 크게 유익함이 있을 것이다.    실로 마음이 놓이는구나. 하지만 역사책을 보는 방법은 한 차례 훑어 본   뒤에 마음속에 그 핵심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보지 않은 것이나 진배없다.    오늘 본 것은 밤중이나 혹 이튿날 아침에 가만히 앉아 생각해 보도록 해라. 또 역사책을 보다가 기뻐할 만한 일과 마주치거든 그 사람의 언행 중에 본받을 만하거나 경계로 삼을 만한 것을 모두 마음에 간직해 두어야    한다. 그리한다면 잊지 않을 뿐 아니라 또한 자기의 언행에도 큰 보탬이    될 게다. 무릇 책을 읽는 방법은 마음에 간직함을 벗어남이 없을 뿐이다.


☆ 박세당이 38세 때인 1666년 12월 9일에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당시    상중에 있던 자식들의 건강을 염려하고 역사책을 읽으려 한다는 말을 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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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대견해하며 그 방법을 알려 준다.


■ 글은 주제를 벗어나면 안 된다.


0 과거 날짜가 멀지 않았다. 공부를 부지런히 해야 할 텐데, 아픈 사람이     어찌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겠느냐? 다만 글을 지을 때는 반드시 생경하    고 궁벽한 병통을 없애야만 한다. 글을 평이하게 펼쳐서 온건하고 순순하    게 하기를 힘써야 문체가 절로 좋아지는 법이다. 또 특히나 처음과 끝을    상세히 점검해서 글의 귀결이 입의 즉 주제의 맥락을 잃지 않도록 해야만    한다. 이것이 작문에서 매우 긴요한 지침이다.


☆ 47세 때인 1675년에 쓴 편지이다. 당시 둘째 태보는 22세였다. 아들에게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자세에 대해 일러준 내용이다.


■ 남자의 사업이 여기에 그쳐서는 안 된다.


0 어제는 소식을 얻지 못해 혼자 생각에 오늘쯤은 합격자 방이 나붙으리라    고 여겼다. 아침에 두성이를 시켜 알아보았지만 그래도 답답함을 견딜 수    없었다. 이제야 기쁜 소식을 듣고 보니 이 마음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느    냐. 하지만 남자의 사업이 이처럼 작은 기쁨에 그쳐서는 안 된다. 모름지    기 이 뜻을 알아두도록 해라. 또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는 절대로 신중하고 침묵해야 한다. 무릇 합격자 모임에도 반드시 모두 참석할 필요는 없다. 혹 한 번 가고 그치는 것이 좋고, 절대로 자주 가서는 안 된다. 내가    바로 들어가 보지 못하니 몹시 답답하구나.      


☆ 47세 때인 1675년에 쓴 편지이다. 아들의 생원시 합격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과 함께 이런저런 염려도 함께 적고 있다.

■ 평범한 것에 힘을 쏟아라 (태유에게)


☆ 1681년 53세 때 큰아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글이 잘 써지지 않아 걱정이    라는 아들의 편지를 받고 그 처방을 일러 주었다. 글이 뻑뻑하게 나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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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않는 것은 공부를 놓은 지 오래 되었기 때문이다. 공부가 본 궤도에 올라    가면 글에 윤기가 붙고 야물어진다. 글을 쓸 때 특별히 유의할 것은 멋진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점이다. 반대로 어찌하면 평범하게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글을 쓸 수 있을까를 신경 쓴다면 글을 쓰다가     막히는 일이 없을 것이다. 좋은 글은 글쓴이의 생각이 잘 살아 있고 앞뒤로 조리가 정연하며 읽어서 걸리는 부분이 없이 매끄러워야 한다. 글을     쓸 때는 처음 보는 괴상한 표현, 공연히 고상한 체하는 태도를 걷어내야만 한다. 오로지 평범하게, 하지만 맥락을 놓치지 말고 쓸 것을 생각해야    한다.


■ 독서와 글씨 연습으로 근심을 잊어라


0 적어 보낸 시를 보았다. 다만 시에 쓰는 표현은 말을 특별히 삼가야만 한    다. 옛사람은 말이 잘못되어 저촉됨이 없기가 어려운 줄을 알아, 경계하여 아예 하지 못하게 한 일이 있었다. 객지에서 마음을 달래고 근심을 잊는 데는 독서와 글씨 연습만 한 것이 없다. 이 또한 하늘이 네게 편의를    빌려준 것이니 그저 지나보내서는 안 된다.


☆ 50세 나던 1678년에 쓴 편지이다. 아들 태보는 25세 였다. 당시 그는 선    천에 유배 가 있었다. 아들의 시를 읽고 그래도 시 속의 표현에 불평한     기운이 느껴졌던 모양이다. 말조심을 다시 한 번 당부했다. 공연히 시를    써서 구설에 오르지 말고 책을 읽고 글씨 연습을 하면서 소견하라고 타일렀다. 꺼내 보여주려 들지 말고 오히려 마음속에 무언가 깃들이는 데 힘쓰라고 한 것이다. 박태보는 이해 5월에 해배되었고 12월에 다시 서용되었다.


■ 세 번 부르시면 그때 나가거라.


0 새로 제수 받은 관직은 실로 분수에 넘쳐 두렵다. 또 풍랑이 닥치면 엎어    지는 것을 면치 못하겠구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네게 근심하는     바는 늘 경솔함에 있었다. 사려가 일에 두루 미칠 수 없으면 진실로 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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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게 움직인다 해도 허물이 적을 수 있겠느냐? 두 번 불러도 나아가지 않    는 것이 좋을 성 싶고, 세 번 부르시면 나가도 괜찮다.


☆ 52세 때인 1680년에 쓴 편지이다. 당시 27세이던 박태보는 복상(服喪)을    마치자마자 부수찬에 임명되었다. 아버지는 앞서도 직언으로 미움을 받아    유배되었던 아들의 불같은 성정을 잘 아는지라, 기쁨보다 걱정이 앞섰던    모양이다. 벼슬을 내린다고 덥석 받지 말 것, 가볍다는 말을 듣지 않도록    신중하고 진중하게 처신할 것, 사려 깊게 행동해서 허물을 줄일 것을 아들에게 당부했다. 벼슬이 내려도 두 번까지는 사양하고 세 번째 이후에야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 어쩔 수 없었다고 핑계대지 마라.


0 조정의 잘잘못은 비록 말할 만한 것이 있더라도 진실로 마땅히 깊이 생각    해서 매번 어쩔 수 없는 뒤에라야 말하도록 해라. 그래야만 시끄럽게 날뛰는 병통이 없다. 어찌 입에서 나가기만 하면 문득 많은 세상일에 얽혀    들면서도 아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핑계 대는 게냐?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기대하는 바가 스스로 얕지 않아야 하니, 요컨대 온축하여     드러내지 않는 곳이 있어야만 바야흐로 먼데까지 이를 수가 있는 법이다.    모름지기 공경과 삼감으로 몸가짐을 지닐 것을 생각하도록 해라.


☆ 52세 때인 1680년에 쓴 편지이다. 성질이 급하고, 옳다고 생각하면 물불    을 가리지 않는 과격한 아들의 성격을 걱정한 아버지는 틈만 나면 말조심    이야기를 꺼낸다. 


■ 풋 앵두를 따서 저자로 보냈다.(태보에게)


0 어제 편지에 마음이 놓인다. 여기서 근근이 지내고 있다만 양식이 떨어져    서 내일 저녁밥은 또 대기가 어려울 듯하다. 풋 앵두를 한 말 남짓 따서    저자로 보냈는데 몇 되의 쌀과 바꿀지 모르겠다. 답답하구나.


☆ 53세 때인 1681년에 쓴 편지이다. 이해 2월 충청도 관찰사와 대사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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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노자 도덕경’에 주석을 내면서 묻혀    살았다. 양식이 떨어져서 풋 앵두를 따서 몇 되의 쌀과 바꾸는 가난 속에    서도 자꾸만 자식들 곁으로 다가서는 재변의 기미를 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불안하기만 하다.


■ 진달래가 피려면 한참 멀었다.


0 풍토가 맞지 않는 것도 이만저만한 걱정이 아닌데, 원기마저 본시 단단하    지 못해 더욱 쉬 몸을 상할 테니 어찌한단 말이냐. 날씨가 안 좋은 것은    이곳도 그러하다. 진달래가 피려면 아직도 한 참 멀었다. 음산한 한기다 눈까지 흩날리니 언 땅이 다 풀리질 않는구나. 밤중에는 물이 얼어붙어 아침이면 차서 손가락이 아플 지경이다. 어째서 절기의 어긋남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모르겠다. 


☆ 57세 때인 1685년에 쓴 편지이다. 큰아들 태유는 38세였다. 여러 차례     상관을 탄핵하여 당시 그는 고산도찰방으로 좌천되어 가 있었다. 거기서    도 그는 낮은 지위를 무릅쓰고 남병사(南兵使) 이하를 모두 탄핵하고, 감사의 잘못까지 규탄해 감사가 스스로 사직하는 일까지 있었다. 아버지는    자식의 그런 강직한 성격도 걱정이었지만, 물선 이역에서 추운 날씨에 건강을 상해 어려움을 겪고 있던 아들의 안부가 더 조바심이 났다. 박태유는 고산(高山)의 기후가 맞지 않아 병이 악화되고 이듬해 3월 결국 아버지에 앞서 세상을 떴다.


■만금을 얻은 것만 같구나. (태한에게)


0 몹시 기다리던 차에 일을 맡긴 하인이 왔다. 편지를 보고서 새아기가 무    사히 해산한 것을 알았다. 또 사내아이를 낳았다니 기쁘고 다행스럽다.     나는 이미 늙었는데 네 형들이 잇달아 요절하는 화를 당하고 보니 자손이    고단한 것을 늘 상심하고 아파했었다. 이제 이 아이를 얻었으니 만금을     얻은 것만 같구나. 새로 낳은 아이 이름은 다손(多孫)이라 하는 것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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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3세 때인 1691년에 쓴 편지이다. 태보와 태유 두 아들이 아버지 보다     먼저 불의의 화를 당해 세상을 떴다. 혼자 남은 늙은 아버지는 하나 남은    아들의 득남 소식에 불에 덴 듯한 상처가 떠 올라 다시 마음이 아프다.     새로 낳은 손자 이름을 ‘다손’이라고 지어주는 할아버지의 마음이 슬프    다.



         ≪ 안정복의 편지 ≫        

    

■ 안정복 (安鼎福 : 1712 - 1791 )


0 본관 광주, 호는 순암, 상헌.  시호는 문숙

0 이익의 문인으로 실학자. 경학(經學)과 사학(史學)에 뛰어남

0 저서로 하학지남(下學旨南), 잡동산이(雜同散異), 동사강목(東史綱目) 등


0 슬하에 1남 1녀 : 아들은 경증 생원시 합격, 사위는 권일신으로 천주교     순교


0 순암집(順菴集)에는 아들에게 보낸 8통의 편지가 실려 있다. 이중 일부를    소개한다. 옛날 주자가 큰아들에게 준‘큰아들 수지에게’의 일부 내용을    간추려 여섯 조목으로 된 훈계를 내린 편지가 인상적이다. 주자는 언행과    몸가짐, 교우의 도리에 대해 말했는데 험난한 세상살이에 대한 충고와 조    언은 지금에도 새길 만한 것이 많다. 순암의 편지는 아들을 다그치는 내용이 많다. 1777년 그의 나이 66세에 아들이 먼저 세상을 뜨자 아들의 묘지명을 지어 애도했다. 살아 있을 때는 가혹하게 야단만 치다가 죽고 없는 아들에게 뒤늦은 칭찬을 하게 되었으니 그의 묘지명은 그래서 더 눈물겹다.


■ 안일에 빠짐은 독약과 같다.


0 부부의 사이는 온갖 복의 근원이다. 처음을 삼가는 도리는 조심하지 않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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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가 없다. 예로써 공경함을 모두 잊고, 갑자기 서로 함부로 친하게 대하    면 바로 금수가 되고 만다. 이름을 망치고 가문을 실추시킴이 항상 여기    에 말미암으니, 어찌 삼가지 않으랴. ‘중용’에서는 “군자의 도리는 부부에서 비롯된다.”고 했다. 남명 조식은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평상시에 처자식과 함께 거처하면 안 된다. 비록 자질이 뛰어난 사람도 타성에 빠져서 성취할 수 없게 된다.”허후는 그의 아내와 더불어 서로 대하기를 손님처럼 했다. 늙어서도 점점 더 지극해져서 여태껏 사람들이 이를 칭찬해 마지않았으니 이것이 가장 본받을 만하다.


0 지금 내가 너를 보내는 것은 시속에 따라 처가에서 맞아 청하는 예를 치    르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니다. 윤장(尹丈)이 다행히 한 이웃에 계시는지     라. 네가 훈도를 받게 되기를 바라서일 뿐이다. 마땅히 날마다 문안을 드    리면서 ‘논어’ 읽은 것을 아침저녁으로 배우기를 청하도록 해라. 집에    있을 때처럼 멋대로 들락거리며 빈둥빈둥 날을 보내 이 기간을 헛되이 보내서는 절대로 안 된다. 한 번 선배 어른들에게 예모 없는 사람으로 여겨지면 앞으로는 발붙일 곳이 없게 될 테니 조심해야 한다.              


   첫째, 거처에서는 모름지기 공경스러워야지, 건방지거나 태만해서는 못    쓴다. 말은 모름지기 꼭 맞고 합당해야지, 시시덕거리며 시끄럽게 떠들 면 안 된다.

   둘째, 모든 일은 겸손하고 공송해야 한다. 기운을 돋워 남을 능멸해서     스스로 치욕을 불러들여서는 안 된다.     

   셋째. 술 마시며 함부로 굴어 학업을 폐해서는 안 된다. 또한 말실수를    해서 자신을 잃고 남을 거스를까 걱정되니, 특히나 깊게 경계할 것이다.

   넷째, 남의 허물이나 악행, 다른 집안의 장단점과 옳고 그름을 말해서는    안 된다. 와서 알려주는 사람이 있더라도 또한 대꾸하지 말라.

   다섯째, 교유하는 사이에는 더욱 마땅히 깊이 가려야만 한다. 비록 동학    이라고 해도 또한 친하고 소원한 구별이 없을 수가 없다.

   여섯째, 다름 사람의 아름다운 말이나 착한 행실을 보거든 공경하고 사    모하여 이를 기록해 두어라 남의 좋은 글로 나보다 나은 것을 보거든 빌려 와서 꼼꼼히 살펴보고 혹 베껴두어 이를 자문하고, 그와 똑같이 된 뒤    에야 그만두리라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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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여섯 조목은 주자께서 자식을 가르친 글이니, 날마다 마땅히 외우고    생각하여 체득해서 행하도록 해라. 낡은 종이 위에 적힌 진부한 말로 보    아서는 안 된다.


☆ 안정복이 36세 때인 1747년에 당시 16세로 장가를 들기 위해 신부 집으    로 떠나는 아들 경증에게 준 편지이다. 이어서 여섯 조목으로 된 훈계를    내렸다. 이 글은 주자가 큰 아들에게 준 ‘큰아들 수지에게’의 일부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주로 언행과 몸가짐에 관련된 내용과 벗 사귀는 도리에 대해 말했다. 옛사람의 말이라 고리타분하게 여기지 말고 마음에 새기고 몸으로 실행할 것을 당부했다. 

  

■ 날짜로는 부족해도 햇수로는 넉넉하다.


0 무릇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그 의리를 궁구해야 하고, 글을 짓는 사람은    반드시 그 지름길을 따져 보아야 한다. 그런 뒤에라야 내 것이 되어 다른    갈림길로 현혹되지 않게 된다. 일과를 세워 하는 공부는 가장 긴요하고     또 중요하다. 옛사람이 “날짜로 헤아리면 부족해도 햇수로 따져 보면 넉넉하다.”고 말한 것은 참으로 맞는 말이다. 하루 사이에는 얻는 것이 비록 적지만, 오늘과 내일이 여러 날 쌓이면 그 얻은 바가 어떠하겠느냐?     바라건대 너희는 한번 옛 습관을 바꾸어 일상생활의 사이에 반드시 엄하게 과정(課程)을 세워서 부지런히 힘써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한다. 이렇게    한다면 이 마음이 또한 의지하여 설 바가 있어, 오로지 제멋대로 뒤집어지는 지경에 이르지 않을 것이다. 

   시경에도 “시작이야 다 있어도, 끝 있기는 드물다네.”라고 했으니 삼    가 힘쓰도록 해라.


☆ 1750년 외지에 나가 있을 때 집에 보낸 편지이다. “날짜로 따져보면 부    족해도 햇수로 헤아리면 넉넉하다.”는 말은 ‘후한서 장제기’에 나온     다. 적소성대(積小成大)라는 말이 있듯, 공부는 꾸준한 것이 중요하다.     작은 것이 쌓여 크게 되니 티끌을 모아서 태산을 만든다. 매일 보기는 하찮아도 이 하찮은 것이 쌓여서 큰 학문을 이룬다. “시작이야 다 있어도,    끝 있기는 드물다네.”는 작심삼일을 경계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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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방심 공부에 힘써라 (아우와 아들에게)


0 맹자께서 말씀하신 구방심(求放心). 즉 ‘마음이 제멋대로 나대는 것을     구하라.’는 가르침을 마땅히 생각하고 생각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박지원의 편지 ≫


■ 박지원 ( 朴趾源 1737 - 1805 )


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반남, 호는 연암(燕巖)

0 1780년 청나라에 갈 때 쓴 열하일기(熱河日記)는 기행문의 명저. 북학파    의 영수로 이용후생의 실학을 강조, 특히 기발한 문체를 구사하여 당대와    후세에 큰 영향을 미친 최고의 문장가 

0 슬하에 2남 2녀, 장남인 종의는 연암의 큰형에게 양자 감. 둘째 종채는     연암에 대한 기록인 과정록(過庭錄)을 남김                


0 편지는 연암의 병력과 인간적 면모, 교유사실과 숨김없는 인물평, 글쓰기    와 관련된 정보 등을 다루고 있다. 그 중에 눈길을 끄는 것은 무엇보다     아버지로서의 인간적 면모이다. 광주의 처가와 연암협의 집, 그리고 계산    초당과 서울 집에 얽힌 이런저런 걱정을 담은 내용, 집안의 혼사나 인사치레에 대한 걱정도 쉴 새 없다. 그 밖에 연암이 앓았던 질명과 지방관의    여러 고충 그리고 평생을 가까이 지냈던 박제가 유득공 등에 대한 솔직한    인간평에 이르기까지 새롭고 의미있는 내용이 서간첩에 풍부하게 실려 있다. 직접 고추장을 담근 일부터 서책 구입과 자식의 과거시험 걱정, 한글을 몰라 한글 편지를 쓰지 못했던 일에 이르기까지 소소한 내용들이 꾸밈없이 그려진다. 특히 안의현감 시기에 얻은 손자 효수에 대한 애틋한 사랑은 편지 곳곳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 내 귓속에는 다만 대바람 소리뿐 (종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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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석치 정철조(1730-1781)의 두 첩과 그림 두루마리는 잘 받아 보았다. 지    난번 보내온 나빙(羅聘 1733-1799)의 대나무 그림 족자는 기이한 솜씨더구나. 온종일 강물 소리가 울부짖는데, 마치 몸이 배 가운데 앉은 것처럼    흔들흔들 했다. 대개 고요하고 적막하기 짝이 없어서 강물 소리가 그렇게    들렸던 것이다. 문을 닫아걸고 숨을 죽이며  이 두루마리를 때때로 펼쳐    감상하지 않았더라면 무엇으로 이 마음을 위로했겠느냐? 대개 날마다 열 번씩은 말았다 폈다 하니, 작문의 요령을 익히는데 큰 도움이 된다.       

0 비록 한가한 고을이라 해도 장부 정리도 때에 맞추어야 하고 공문 처리하    기에도 겨를이 없다. 여러 고을이 대부분 같아서, 진실로 덜하고 더한 차    이가 없다. 붓을 들고 종이를 하나 펴니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오르는데,     미처 한 글자도 적기 전에 창밖에서는 형방이 무릎을 꿇고 “하삷오며(爲    白乎㫆 : 이두문자로 ‘하옵시며’라는 뜻))”나 “저저자자(這這刺刺 :    이 저, 찌를 자)”의 소리를 내며 읽고 있고, 개구쟁이 아이가 진한 먹에    붓을 적시고 종이 모서리를 비스듬히 잡고 있으니, 나는 먹으로 돼지 모양 비슷하게 수십 개의 서명을 바쁘게 한다. 물러나 생각해 보면 앞서 가슴속에 있던 미처 쓰지 못한 한 편의 좋은 문장은 애석하게도 어느새 만길 지리산 너머로 달아나 버렸으니 어찌한단 말이냐?

0 재선(在先) 박제가의 집에 있는, 우리나라로 건너온 중국 사람의 시필(詩    筆) 몇 첩을 빌려 볼 수만 있다면 마땅히 요 며칠 사이의 답답증을 누그러뜨릴 수 있을 것 같구나. 하지만 그 인간이 꼴 같지 않고 무도하니, 어찌 지극한 보물을 잠시인들 손에서 내 놓겠느냐? 그렇다 하더라도 모름지기 이를 빌려 오도록 해라.

   아전 수십 명이 온 종일 내 앞을 종종걸음 치며 다녀도, 내 눈 속에는     적막하게 한 사람도 없다. 방울을 울리면 대답하는 소리가 자못 떠들썩하    지만, 내 귓속에는 다만 새와 시내, 그리고 대나무가 바람에 우는 소리만    들린다. 이는 나의 큰 병통인데, 늙어갈수록 더욱 심해지니 뉘 능히 이를    말리겠느냐?


☆ 1796년 2월 15일, 안의에서 큰아들 종의에게 보낸 편지이다. ‘연암선생    서간첩’에 실린 30편의 편지 중 제4신이다. 연암 특유의 경쾌하고 발랄    한 필치가 살아있는 편지이다. 모두 여섯 단락으로 되어 있는 각각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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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연중의 일부이다.     

   석치 정철조와 청나라 화가 나빙의 그림을 보는데 온종일 강물 소리가     울부짖고 몸이 배 가운데 앉아 흔들흔들 하는 듯하다고 했다. 너무나 적막한지라 강물 소리가 그렇게 들렸다고 한 대목, 그리고 하루에도 열 몇    번 씩 접었다 폈다 하며 작문의 요령을 익혔다는 말도 재미있다. 그림을    보면서 작문법을 깨닫는 연암식의 독화법(讀畵法)이 흥미롭다.


   그 다음 단락도 자못 운치가 있다. 일없이 바쁜 지방관의 고달한 일과를    해학적 필치 속에 절묘하게 그려냈다. 공문을 처리하려고 종이를 펴자 갑    자기 좋은 글의 구상이 떠오른다. 그래서 생각의 끄트머리를 잡아 적으려    는데 창밖에서 형방은 밀린 문서의 처결을 요청하며 “하삷오며” 또는     “저저자자”하며 처리할 문서를 읽어댄다. 또 그 곁의 완동(頑童)은 먹    에 붓을 찍어들고 빨리 서명할 것을 재촉한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쓰려던 글을 밀쳐 두고 묵저 즉 돼지 비슷한 모양으로 수결하여 서명하고 말    았다. 간신히 서류 처리를 끝내고 좀 전의 구상을 떠올려보면, 쓰지 못한한 편의 좋은 글은 벌써 지리산 너머로 달아나버리고 말아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연암 특유의 넉살과 장면 포착이 돋보이는    글이다.


■ 직접 담근 고추장 한 단지를 보낸다.(안의에서 종의에게)


0 ‘소학감주(小學紺珠)는 간신히 베낀 것인데 잃어버렸다니, 어찌 애석하    지 않을 수 있겠느냐? 네가 서책에 대해 성의 없기가 이와 같으므로 늘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나는 문서를 살피는 여가에도 오히려 한가한 일에    까지 미쳐 때때로 책을 저술하고 혹 법첩을 임서하며 붓글씨 연습을 한 다. 너희가 1년 내내 무슨 일을 일삼고 있는 게냐? 너희가 심심하게 날을    지내며 그럭저럭 세월을 보내는 생각을 하니 어찌 매우 애석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젊을 적에 이와 같다면 장차 늙어서는 어찌 지내려는 게냐? 허    허!

   고추장을 작은 단지로 하나 보낸다. 사랑에 놓아두고 밥 먹을 때마다 먹    으면 좋겠다. 이것은 내가 손수 담근 것인데 아직 잘 익지는 않았다. 말린 고기 세 접, 곶감 두 접, 볶은 고기 한 상자. 고추장 한 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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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96년 2월 15일에 아들 종의에게 보낸 편지이다. 아들이 자신이 애써     베껴 쓴 ‘소학감주’를 분실한 일을 심하게 나무랐다. 끝에는 직접 담근    고추장 단지를 비롯해서 이런저런 먹을거리를 챙겨 보낸 내용이 실려 있    다. 특히 끝 대목이 흥미롭다. 자신이 직접 담근 고추장을 작은 단지에     담아서 보내니, 사랑채에 놓아두고  밥 먹을 때마다 함께 먹으라 했다.     남아 있는 연암의 초상화를 보면 호랑이 상에 기골이 장대하다. 곰살궂은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것 같은 그가 자식을 위해 땀을 뻘뻘 흘리며    고추장을 담그는 장면은, 아무리 생각해도 유쾌하기 짝이 없다. 그는 함께 육포와 곶감, 볶은 고기를 포장해서 서울 집으로 올려 보낸다. 섬세한    부정이다. 연암의 다른 글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인간미가 느껴진다.


■ 응애하는 울음소리가 종이 위에 가득하다.


0 초사흘에 관가의 하인이 돌아오면서 기쁜 소식을 가져왔더구나. 응애응애    하는 소리가 종이 위에 가득하다. 인간의 즐거운 일이 이것보다 더한 것    은 없을 게다. 육순의 늙은이가 이제부터 엿을 물고 구슬을 희롱할 뿐 달리 무엇을 구하겠느냐? 또다시 초이틀에 써 보낸 것을 보니, 산부의 여러    증세가 괴롭기 짝이 없다고 했더구나, 걱정스럽기 그지없다. 산후의 복통에는 반드시 생강나무를 달여 먹이도록 해라. 두 번만 복용하면 뚝 멎을게다. 이것은 네가 태어날 때 시험해 본 것으로 노련한 의원 채응우가 시킨 것이다. 써보니 신통한 효험이 있었기에 말해둔다.


0 오늘이 바로 내 손자의 삼칠일이로구나. 이백여 명의 관속들에게 아침에    국과 밥을 먹였더니 좋아하며 떠들썩하게 축하해주더구나. 그제야 나도     경술년에 순조 임금께서 막 태어나셨을 때 산해진미로 기쁨에 넘쳐 즐거    워하면서 억조창생을 고무케 하시던 성심(聖心)을 가늠하겠더니라. 다 쓰    지 못한다.


☆ 1796년 3월 10일 아들 종의에게 보낸 편지이다. 며느리의 순산 소식을     기뻐하며 종이 위에서 응애응애 하고 우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고 적어,    손이 귀한 집안에서 손자를 본 기쁨을 숨기지 않았다. 이어 산후의 병증    으로 몸져누운 며느리를 위해 조리 방법을 친절하게 설명했다. 이때 얻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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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자의 이름 효수(孝壽)였다. 연암은 이어지는 여러 편지에서 이 손자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숨김없이 표현했다.


■ 어째서 알려주지 않는 게냐? (종의에게)


0 네 첫 번째 편지에는 아이가 태어났는데 미목이 밝고 수려하다 하고, 두    번째 편지에서는 점점 충실해져서 사람 꼴을 제법 갖추었다고 했더구나.    종간(차남 종채)의 편지에도 골상이 비범하다고 했다 대저 이마는 넓고     솟았으며 정수리는 평평하고 둥근지, 어째서 하나하나 적어 보이지 않는    게냐? 답답하구나.


0 전후해서 보낸 소고기 볶음은 잘 받아서 아침저녁 찬거리로 했느냐? 어째    서 한 번도 좋다는 뜻을 보여주지 않느냐? 답답하고 답답하구나. 나는 육    포나 장조림 등의 반찬보다 나을 거라고 생각한다. 고추장도 내가 손수     만든 것이다. 맛이 어떤지 자세히 알려다오. 두 물건은 인편에 따라 계속    해서 보낼 생각이다.


☆ 1796년 안의현감으로 있을 때 서울 집에 있던 아들 종의에게 보낸 편지    이다. 환갑의 나이에 처음 본 손자 소식을 듣고 연암은 상당히 흥분했던    모양이다. 도대체 손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왜 자세히 알려주지 않느냐고    아들을 닦달했다. 아들이야 제 자식이야기로 호들갑을 떨기가 머쓱해서     그랬겠지만 먼 데 있는 할아버지는 갓 태어난 손자의 두상도 궁금하고 생김새도 궁금했다.


  다 늙어 벼슬길에 올라 지방의 멀리 작을 고을살이를 살러 내려왔다. 막    상 고을 현감의 쥐꼬리 월급으로는 토색질을 하지 않는 한. 가족들 생활비도 해결할 수 없었다. 혹여 아버지의 월급에서 생활비의 도움을 기대하는 자식에게 이런저런 지출로 보태주기는커녕 빚만 안 져도 다행이겠다고    썼다. 먹고 살 길이 하도 막막해서 나선 벼슬길이었다. 막상 별 도움이     못 되는 게 민망했던 아버지는 손수 고기를 볶고, 고추장을 담가 보냈다.    하지만 아들이 자신이 보낸 반찬에 대해 쓰다달다 말이 없자. 아버지는     그만 입이 잔뜩 나와서 투덜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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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반전’이나 ‘호질’의 서슬 푸른 풍자도 허생전의 날카로운 질타는     가족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모습 앞에서는 찾을 길이 없다. 소고기 볶음을    맛있게 먹었는지, 고추장은 맛이 어땠는지, 아무 답장이 없는 아들의 무뚝뚝함에 대한 서운함만 있다. 또 손자의 생김새를 자세히 안 알려주는     것에 화가 난 할아버지의 심통도 보인다. 

   

   손자 효수는 태어나 준 것만으로도 효자인 귀한 아들이요 손자였다. 연    암의 편지를 보면 온통 손자 이야기뿐이다. 문집 속에서는 결코 만나볼     수 없는 연암의 살가운 모습이다 하지만 그 손자는 할아버지의 바람을 저버리고 어려서 죽었다.


■ 사탕은 다시 돌려보낸다.


0 며칠 밤 이래로 달빛이 대낮 같아서, 두 선비와 더불어 풍헌에서 휘파람    불면서 밤중까지 즐거운 얘기를 나누니 나그네 회포를 위로하기에 넉넉했    다. 빌릴 만한 융장(戎裝)에 필요한 여러 도구를 적은 것은 이미 앞선 인    편에 들여보냈으니, 모름지기 잘 대조하여 점검함이 어떠하냐? 도장 돌은    비록 곱돌이라도 괜찮으니 약국에 물어보아 한 덩이 얻어 보내지 않겠느    냐? 사탕은 어찌 아이들 먹을거리로 남겨두지 않은 게냐? 이번에 돌려보    낸다.


☆ 1797년 7월 16일 면천 관아에 도착해서 큰아들에게 부친 편지이다. 수군    조련에 참석하기 위해 융장을 갖추어야 하는데, 거기 소용되는 바람막이    나 담비 털목도리 같은 물품조차 개인적으로 조달했던 모양이다. 서울서    이런 저런 물건을 구하고 빌려서 내려  보내라는 기별을 보냈으니, 차질없이 준비하라는 이야기, 그리고 약국에 가서 약재로 갈아 쓰는 곱돌이라    도 구해 도장 재료로 보내라는 당부를 했다. 아들은 단 것을 좋아하는 아버지를 위해서 사탕을 구해 봉지에 싸서 보냈고, 할아버지는 손자들 먹이라고 다시 돌려보낸다. 그 궁상이 민망해도 오가는 정이 따뜻하다.


■ 휴가를 퇴짜 맞아 갈 수가 없겠다.(면천 관아에서 아들에게)



                               - 34 -

0 편지를 받아 본 지가 꽤 오래 되고 보니, 그립고 답답한 마음을 가눌 길    이 없구나. 하늘은 높고 해는 빛나는데 서리 기운이 점차 다가오니, 온     집안 살림에 별일은 없느냐?  과거의 기한이 이미 가까웠으니, 또한 정신을 한데 집중해야 한다. 맹랑한 일을 하지는 않았겠지? 과거에 합격 여부에 상관하지 말고 다만 들고 나는 것을 잘 해서 욕을 당하지만 않는다면    괜찮다.              

   이곳은 먹고 자는 것이 전과 다름없다. 생각 같아서는 말미를 청해 광주    의 산소를 직접 가 보려고 제수도 모두 마련해 두었다. 장차 근현(勤峴)    의 계부와 종형의 두 산소를 차례로 살펴보려고 제물 또한 다 싸 두었다.    그런데 갑자기 휴가를 신청한 것이 퇴짜를 맞았다. 가을 일이 한창이기     때문이고, 조칙(朝飭)도 지엄하기 때문이라고 하는구나. 결국 쭈그리고     앉아 멍하게 도모할 수 없게 되었으니 어찌 하겠느냐? 이제는 어쩔 수 없이 내년 봄을 기약할 뿐이다.


☆ 1797년 8월 15일 면천 관아에서 보낸 편지이다. 과거 시험은 떨어져도     좋으니 들고 나는 것을 잘 해서 집안에 먹칠하는 일만 없다면 괜찮다고     했다. 연암 자신도 과거 시험에 응시했다가 백지를 제출하거나 답안지에    엉뚱하게 그림만 그리다가 나온 일이 있었다. 그의 생각에 지금은 선비가    과거를 해서 자신의 뜻을 펼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렇다고     양반 체면에 과거 시험을 전혀 안 볼 수는 없었으니 모순된 이야기이다.    성묘를 핑계로 휴가를 신청했다가 퇴짜를 맞아 계획했던 일들을 처리할   수 없게 된 것을 난감해 했다.


■ 장 담그는 일은 누이와 상의해라. (면천 관아에서 아들에게)


0 길을 따라 강도의 발생이 빈번하니 벌건 대낮에 약탈해가도 어찌해볼 도    리가 없다. 비록 진영(鎭營)에서 사람을 내보내도 장교 하나 병졸 하나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네댓 명이 무리를 지어 가는 것을 보고도 감히 붙잡    아 힐문하지도 못하고 짐짓 모르는 체하며, 한갓 마을 사이에서 밥만 토색질 한다. 비록 대신이 임금께 아뢰어 포도청에서 엄한 공문을 내도 한  갓 헛글일 뿐이니 어찌하겠느냐? 너는 과거를 앞 둔 선비라 올 수가 없고, 네 동생이 혹 망동코자 하여도 절대로 생각도 하지 말게 하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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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떠하냐?


0 장 담그는 일은 네 누이동생과 둘째 며늘아기와 상의하도록 해라. 만약     ㅇㅇㅇ할 것 같으면 (원문에 세 글자가 빠짐) 비록 빚을 내어 담가도 괜찮다.


☆ 1797년 8월 15일 면천 관아에서 보낸 편지이다. 백주 대낮에 도적떼가     횡행해서 양민의 재물을 약탈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던 것이 당시 조선의 치안 상태였다.


   장 담그기는 한해 온 식구의 먹을거리와 관련이 있어. 연암이 특별히 신    경을 썼던 모양이다. 고추장도 직접 담가 보냈던 그가 아닌가. 장 담그기    는 누이동생과 둘째 며느리에게 상의 하라고 적었다. 하지만 막상 장을     담글 비용 마련이 어려워 빚을 내서라도 담그라고 한 언급이 읽기에 안쓰럽다. (연암은 51세에 상처한 후 당시에는 드물게 재혼하지 않았고, 이   편지를 쓸 무렵에는 맏며느리도 일찍 사망함)



        ≪ 박제가의 편지 ≫  


■ 박제가 (朴齊家 1750 - 1805 )                     


0 조선 후기 문신, 본관은 밀양, 호는 초정(楚亭)

0 연암 박지원 문하에서 실학을 연구,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등과 교류

0 ‘한객건연집’ ‘북학의’ 등을 저술


0 슬하에 3남 2녀, 아들은 장임, 장릉, 장암 : 큰 아들이 아버지의 연행 과    정에서 청대 문인과 주고받은 ‘호저집’ 간행

0 초정 박제가는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1801년 종성에 유배 되었다가 1805년    해배되고 그해 4월 25일 사망

    


                               - 36 -

0 초정이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는 모두 유배지에서 쓴 것이다. 여기에는 유    배지에서의 감회와 정경이 드러나 있다. 얹혀사는 집의 주인이 돌변하는    태도나 자신을 괴롭히는 지방관의 행태들이 생생히 보인다. 그리고 열악    한 환경 때문인지 일상용품을 보내 달라는 내용이 제법 많다. 무엇보다     식구들에 대한 그리움이 편편마다 깔려 있는데 특히 시집간 딸에 대한 그리움이 눈물겹다. 이러한 그리움은 살갑게 표현되지 않고 늘 탄식과 당부로 나타난다. 유배에서 벗어나면 훌훌 떠나서 은거 하겠다는 다짐도 눈에    띈다. 이러한 흔들리는 마음을 경전을 통해 추스르려는 모습도 인상적이다. 복잡한 심경 속에서도 자식들에게 공부 열심히 하라는 당부는 후렴구    처럼 빠지지 않는다. 아버지의 깊은 정은 물론, 집 소식에 자꾸 흔들리니    차라리 집 소식을 알리지 말라는 눈물겨운 내용에서는 인간적인 나약함도    엿볼 수 있다.


■ 늘 두려운 마음을 지녀야 한다.


0 나는 24일에 배소에 도착했다. 도중에 그 많은 산과 물을 지나오면서도     능히 끄떡없었다. 다리의 상처는 조금 나아져서 이제는 측간에 갈 때 남    의 부축을 받지 않아도 괜찮다. 다만 의원과 약이 없고 침놓는 사람이 없어서 완전히 아무는 것은 더디니, 이것이 염려될 뿐이다. 조밥과 짠지를    먹지만 평소처럼 편안하니, 너희는 절대로 내 걱정은 하지 마라. 다만 두    아우를 부지런히 가르쳐서 공부를 그만두지 않게 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야 한다. 네가 여기로 오는 것도 급할 것이 없다. 다만 내년 봄에 한번    쯤 오는 것은 정리 상 막기는 어려울 듯하구나. 다만 삼사(三司)의 논의가 매서우니 너희는 두려운 마음을 늘 갖고 있어야 한다. 또 기회를 틈타    몰래 해코지 하는 무리들이야말로 정말로 두려워하지 않으면 안 된다.


0 이곳에서 이미 바깥사람과 통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보니, 서책도 빌려    볼 수가 없다. ‘규장전운(奎章全韻)’과 ‘구경(九經)’그리고 유리 안경 좋은 것을 가져 왔으면 좋겠다. 둘째 누님의 병은 말기가 되었는데 돌아갈 날을 가늠할 길이  없으니, 이러다가 죽어서 영영 이별할까 걱정이    되는구나. 이것이 가장 마음 아픈 일이다. 남내(南內 : 남중근에게 시집간 딸)가 가장 보고 싶구나. 약한 몸이 크게 놀랐을 테니, 내 마음이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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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 어지럽기 짝이 없다.


☆ 박제가는 1801년 9월 신유사옥에 연루되어 함경도 경원 땅으로 유배 되    었다. 당시 그의 나이 52세였다. 의금부에 투옥되어 매를 맞고 부축 없이    는 걸을 수도 없는 상태에서 귀양지로 떠났다. 정조가 갑자기 서거한 후,    모든 세상이 숨을 죽이던 시절이었다. 옳고 그름은 문제의 핵심과 거리가    멀었다. 광풍이 휘몰아치던 세상이었다.

   주인은 미리 겁을 내어 단속이 심하고, 영문에서도 공연히 닦달을 그치    지 않는다. 편지에는 그저 평안하다는 말이나 적지, 다른 말은 써서는 안    된다고도 적었다.


■ 책을 읽을 때마다 꼼꼼히 메모해라. (장암에게)


0 새 사또가 도임한 날이 초사흘이었으니, 네 편지를 받은 것이 또 꼭 한     달 만이로구나. 네 걸음이 21일에 서울에 도착한 것을 알았으니 참으로     빠르다 하겠다. 하물며 손자 얻은 소식까지 얻고 보니 위로됨을 말로는     다 할 수가 없다. 다만 능히 볼 수가 없으니 더욱 안타까울 뿐이다. 오늘  제사 지내는 일은 네가 여러 아우들을 데리고 가서 참석하였더냐? 나라     제사가 또 하루 건너이고, 집안의 제사가 잇달아 있고 보니, 소재 노수신    상국의 “불충한 신하에다 불효한 자식이 되었다.”하는 구절이 떠올라     애간장이 굽이굽이 꼬이는 것만 같다.     

  손자 녀석 이름은 원향(願鄕) 으로 했으면 좋겠구나. 소동파의 시에서     가져온 말이다. 초 4일에는 새 사또가 내가 점고에 나오지 않았다고 느닷    없이 주인에게 곤장 석 대를 때렸다. 그래서 15일에 내가 직접 갔더니만    이번에는 또 문을 닫아걸고 만나보지 않으려 하면서. “이 후로는 주인이    대신 점고를 하게 해도 괜찮다.”고 하더구나. 경박하기가 이와 같으니     말해 무엇 하겠느냐. 


0 너도 책을 읽을 때마다 메모를 남겨 허투루 지나쳐서는 안 된다.

  (이 부분에서는 몇 가지 예를 들어 메모의 필요성을 설명함)

  금년 겨울에는 굳이 올 필요가 없다. 비록 온다고 해도 어찌 물길로 오는    것을 의논할 수 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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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방이 차일피일 미뤄지는 사이에 새 사또가 부임했다. 처음에 군기를     잡으려고 그랬는지 난데없이 죄인이 왜 점고에 참석하지 않느냐며 주인을    매질했다. 그래서 점고를 받으러 갔더니  이제는 주인을 대신 내보내라며    만나주지 않았다. 

   손자 얻은 소식에 접하고는 기뻐서 이름을 원향으로 지어 보냈다. 고향     에 돌아가기 소원이라는 뜻이다. 겉으로 말로는 석방되어도 집으로 돌    아가지 않겠다. 집안일은 잊고 살겠다. 했지만 손자 소식에 금새 속내를    드러내고 만다.              

   이 무렵 초정은 경서 공부에 재미를 느껴 여러 경전의 정리를 거의 끝내    고 마무리 단계에 있었다. 그러면서 자식들에게 메모의 중요성을 설명하    고 허투루 지나치지 말고 메모를 남기라고 당부한다.


■ 어찌해야 아비에게 허물이 없게 하겠느냐 (장임에게)


0 편지를 받고 또 달을 넘겼구나. 내가 죄인의 명단에서 빠지는 날을 돌아    올 날로 알고 있겠지. 죄인의 명단에서는 이미 지워졌지만 부(府)에서 관    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지라 쉬 떠나지는 못할 듯싶구나. 하늘의 보살핌    은 어두운 곳도 밝게 비추지 않음이 없어 구덩이에서 건져내어 임석(衽席    : 잠을 자도록 마련한 자리)에 둘 것이니 또 어찌 곧장 돌아가지 못하는    것을 유감스럽게 여길 수 있겠느냐? 절로 때가 있는 법이니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라. 


0 다만 너희가 독서를 즐겨하지 않아 아비의 뜻을 잇지 못하는 것이 한탄스    럽다. 어찌하면 늙은 애비에게 허물이 없게 할 수 있겠느냐? 일전에 듣자    니 집을 팔았더구나. 집안일로 내가 마음을 쓰고 싶지 않은데다 이곳에     있는지라 내 뜻과 같을 수야 없었겠지. 내가 만약 돌아가게 되면 구름처럼 팔도를 유람하게 될 것이다. 나 스스로 먹고 살 계획은 있으니 너희는    염려할 필요없다. 다만 부지런히 쉬지 않고 의리를 궁구하여, 먹고 사는    일에 휘둘리는 일은 없도록 해라. “농사를 지어도 굶주림은 그 안에 있다.”는 공자의 가르침을 흘려들어선 안 된다.


☆ 죄인의 명단에서 지워진 지는 이미 오랜데, 석방 통보는 감감무소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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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 다만 걱정은 자식들이 독서를 즐기지 않아 그 허물이 온전히 자신에    게 돌아오는 것이라고 적었다. 아들은 궁한 살림을 견디다 못해 집까지     팔아 치웠던 모양이다. 늙고 힘없는 아비까지 돌아가서 숟가락을 축내는    일이 없도록, 석방되더라도 집으로 가지 않고 구름처럼 팔도를 유람하겠다는 것이다.



         ≪ 김정희의 편지 ≫


■ 김정희 (金正喜   1786 - 1856 )          


0 조선후기 학자, 서예가, 본관은 경주, 호는 완당(阮堂) 또는 추사(秋史)

0 실학파 학자이며 금석학자, 추사체 대성

0 저서로는 완당집과 금석과안록 등

0 제주도 북청 등지에서 오랜 유배생활


0 슬하에 2남 1녀 : 아들은 상무(양자), 상우(서자)


■ 굳게 제켜 실추하지 않기 바란다.(상무에게)


0 천륜(天倫)이 크게 정해져서(양자로 들인 일) 종사를 의탁할 곳이 있게     되었다. 아직은 한 기운이 서로 통하는 것은 보지 못했다만, 산천이 갈라    놓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부쳐온 편지를 보고 알았다. 내가 이곳에 있고    보니, 대면해서 네게 명할 수는 없구나. 다만 네 병드신 어머니를 잘 봉    양하고, 네 중부의 훈계를 삼가 따라 선대를 봉양하고 어른을 섬기는 도 리에 공경하고 삼가야 할 것이다. 우리 집안에 전해오는 옛 가르침은 곧은 도리로 행하는 것이니, 조심조심 굳게 지켜 다만 실추하지 않기만을     밤낮으로 바란다.


☆ 1842년 제주도 유배지에서 지난해 양자로 들인 상무에게 부친 편지이다.    유배 온 이듬해에 서둘러 양자를 세웠지만 부자는 서로 얼굴도 보지 못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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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였다. 양아들 상무는 제주도 유배지까지 아버지를 찾아와 부자간에 첫    상봉을 했다. 아직 낯설어 어쩔 줄 모르는 아들에게 산천조차 갈라놓을     수 없는 정리를 말했다. 병든 어머니 봉양과 선대로부터 이어온 가업을     잘 지켜 실추시키지 않을 것을 당부했다.


■ 답답하기 짝이 없다. (상무에게)


☆ 1844년, 아내의 삼년상을 마치며 쓴 편지이다. 아내의 마지막 자리를 곁    에서 지키지도 못한 못난 지아비로, 멀리 이역에서 삼년상의 탈상까지 맞    고 보니, 처연한 심사를 말로 할 수 없었을 법하다. 떨어지지 않는 감기    증세로 괴로운 형편과, 제삿날만 되면 특히나 애통한 심사를 적었다. 뭍  과는 달리 물길에 따라 소식이 끊겼다 이어져, 오래 집안 소식을 듣지 못    해 안타까운 심사를 두서없이 적었다. 


■ 귓가에 그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상무에게)


☆ 63세 때인 1848년 제주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이다. 아우 상희의 회갑이    있었다. 동생은 유배 8년째로 접어들던 형님을 뵈러 멀리 제주까지 왔었던 모양이다. 환갑의 동생을 떠나보내고 특별히 더 허전했던 듯, 평소와    다른 텅 빈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가만히 자식들 생각하면 글 읽는 소리가 귀에 암암히 들리는 것만 같다. 몸은 늙었고 해묵은 위장병에 시력까지 나빠져 자신감은 점점 줄어만 간다. 끝에 제주에서 가르친 제자 이시형을 과천 집으로 올려 보내며 함께 공부할 것을 당부했다.


■ 난은 붓을 세 번 굴려야 한다. (상무에게)


0 난을 치는 법은 또한 예서 쓰는 법에 가깝다. 반드시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있은 뒤에라야 얻을 수 있다. 또 난치는 법은 그림 그    리는 방법을 따르는 것을 가장 꺼린다. 만약 그림 그리는 법으로 한다면    아예 붓질을 한 번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 양자인 상무에게 보낸 편지이다. 난초 치는 법을 배우겠다고, 아들이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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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한 다발을 보내 체본을 청 했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고작 몇 장만 그    려 주면서, 난초 치는 법에 대해 한 수 가르쳐 준다. 난초는 예서 쓰는     법으로 해야지 그림 그리는 법으로 해서는 안 된다. 예서의 가로획을 그을 때 붓을 역입해서 한 번 꺾고, 중간에 한 번 꺾고, 다시 끝에 가서 한    번 꺾어 모두 세 차례의 마디를 둔다. 이와 마찬가지로 난초 잎을 칠 때도 반드시 삼전(三轉)의 맺히는 지점이 있어야 한다. 그저 환쟁이들이 주문에 따라 되는 대로 이리 뽑고 저리 뽑아 썩썩 그리는 방법으로 난초를    치려거든 아예 그릴 생각도 하지 말라고 했다. 난초에는 문자향과 서권기가 필요하다. 인문적 교양과 인격이 잎사귀 하나에도 녹아들어 있어야 그    것이 난초의 진경이다. 붓을 마구 휘두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선비의 맑은 운치와 고상한 정신이 함께 깃들여야만 한다. 예술가로서 추사의 염결(청렴하고 결백함)을 잘 보여주는 편지이다.


■ 설렁설렁 넘어가면 안 된다, (상우에게)


0 네가 말한 “겨우 몇 글자만 쓰면 글자마다 제각각 달라 마침내 하나로     돌아가지 않는다.” 고 한 것은 바로 네가 입문하는 진경(進境)이 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모름지기 마음을 쏟아 힘껏 좇아 이 한 관문을 참고    넘은 뒤에라야 통쾌하게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절대로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물러서지 말고 더욱 공력을 쏟아야만 한다. 나는 60년을 했어도 여전히 한곳으로 귀결되지 못하거늘, 하물며 너는 이제    막 배우기 시작한 사람이 아니냐? 다만 너의 이 말을 내가 몹시 기뻐하니, 얻는 바가 반드시 이 한 마디 말에 있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절대로 허투루 보아 설렁설렁 넘어가지 않는 것이 묘체가 된다.


0 예서는 서법의 모체이다. 만약 서도(書道)에 마음을 두려 한다면 예서는    알아두지 않을 수 없다. 예서의 법은 반드시 각지고 굳세며 고졸한 것을    높이 쳐 준다. 그 졸렬해 보이는 곳도, 또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나라 예서의 묘처는 오로지 졸렬해 보이는 곳에 있다. ‘사신비가 진실로 좋고, 이 밖에도 ‘예기비’‘공화비’ ‘공주비’등이 있다.    하지만 촉도(蜀道)의 여러 석각은 몹시 고졸하니, 반드시 먼저 여기로 부터 들어간 뒤에라야 속된 예서나 팔분체의 번드르르한 자태나 속된 기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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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 없앨 수 있다. 또 예서의 법은 가슴속에 청고(淸高)하고 고아한 뜻이    있지 않으면 손을 댈 수가 없다. 가슴속의 청고하고 고아한 뜻은 또한 가    슴속의 문자향과 서권기가 있지 않고는 팔뚝 아래와 손가락 끝에서 능히    발현될 수가 없으니, 또 평범한 해서 같은 것과는 비할 바가 아니다. 모름지기 가슴속에 먼저 문자향과 서권기를 갖추는 것이 예서 쓰는 법의 바탕이 되고 신묘한 비결이 된다.


0 “봄날은 짙어 이슬 무겁고, 땅은 풀려서 풀이 돋누나. 산은 깊은데 날은    길어서, 고요한 중에 향기 스민다.”이것은 조이재(趙彛齋)의 말이다.

   옛 사람은 난초를 칠 때 한두 장에 지나지 않았다. 일찍이 다른 그림들    처럼 여러 폭을 포개서 잇대지 않았으니, 이는 억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난초 그림을 원하는 자들은 이같은 경계가 지극히 어려운 줄도 모르고, 혹 여러 장의 종이를 가지고 심지어는 여덟 폭을 억지로 청하기까지 하나. 모두 할 수 없다고 사양해 버린다.


☆ 아들 상우에게 글씨 공부하는 법과 난초 치는 법에 대해 꼼꼼하게 설명    했다. 아들이 글씨 연습을 하다가 몇 글자만 쓰면 저마다 들쭉날쭉해서     도대체 가늠을 할 수 없다고 했던 모양이다. 추사는 아들의 이 말을 기특하게 여겼다. 우선 들쭉날쭉하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고, 이를 가지런하게    만들려는 노력을 글씨의 입문처로 이해한 까닭이다. 부족함을 자각하고     이를 개선하려는 노력이 뒷받침 될 때, 공부는 비로소 방향을 얻게 된다.    자신은 60년을 썼는데도 여태 한결같지 않은데, 이제 막 시작하는 네가     어찌 가지런하기를 바라겠느냐고도 했다.


   이 글에서도 추사가 입만 열면 하는 말은 문자향 서권기이다. 마음속에    문자향 서권기가 깃들어야 글씨를 써도 운획이 되고 난초를 쳐도 격조가    산다. 그렇지 않고 손재주만 가지고 무작정 예쁘게 쓰고 똑같이 쓰려고만    해서는 안 되고, 바탕 공부를 꾸준히 다져야만 글씨 공부가 힘을 얻게 된다고 강조했다. 해서는 구양순의 ‘구성궁예천명’을 출발점으로 삼고 예서는 한나라 때 것 중에도 ‘사신비’를 첫 손에 꼽았다.  추사는 난초에    특히 애착을 가졌는데, 이 또한 문자향과 서권기 없이는 한 붓조차 댈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앞의 편지와 마찬가지로, 한꺼번에 여러 장 그릴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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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없는 것이 또한 난초라고 도 했다.  


   예술가로서 추사의 결벽에 가까운 염결성을 잘 보여주는 글이다. 작품의    근저에 깔린 문자향 서권기의 울력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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