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소원

2009. 4. 20. 21:04독서후기

반응형

             세 가지 소원

                 - 작가가 아끼는 이야기 모음 -


■ 박완서

0 경기 개풍 생, ‘50 서울대 국문과 입학, 한국전쟁으로 중퇴

0 ‘70 마흔이 되던 해에 여성동아 소설 공모에 ’나목‘으로 등단

0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꼴찌에    게 보내는 갈채. 나는 왜 작은 일에만 분개 하는가. 등 다수  

0 이상 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황순원 문학상 등


■ 큰 네모와 작은 네모


0 미술시간이 끝나고 아이들이 제출한 그림을 한 장 한 장 들춰 보시던 선    생님은 슬기의 그림 앞에서 고개를 갸우뚱 손길을 멈추셨습니다.

   슬기는 미술학원에 다닌 적도 없다는데 그림을 아주 잘 그립니다. 학기    초에는 아이들이 선생님 얼굴을 그리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하라고 했더    니  별의별 선생님 얼굴이 다 나왔는데 선생님은 그 중에서 슬기가 그림    그림이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슬기야, 이 그림 선생님한테 선물하지     않을래? 그랬더니 슬기는 기분 좋게 으스대며 그러겠다고 했고. 지금 그    그림은 선생님 방 벽에 붙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그림은   좀 이상합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나서 첫 미술    시간이라 될 수 있으면 방학 동안에 가 본 곳이나 즐거웠던 일을 그려 보    라고 했는데 스케치북 한 장을 온통 짙은 하늘색으로 칠하고 그 안에 여기저기 회색 네모들이 떠 있는 그림입니다. 슬기는 상상력이 자유로운 아인데 여러 개의 연을 이렇게 회색으로만 칠했을 리가 없죠. 연이면 줄이    있어야 될 터인데 그것도 안 보입니다.


0 전에도 한 번 슬기는 선생님을 난처하게 한 적이 있습니다. 가족이라도     좋고 친구라도 좋으니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 얼굴을 그려 보라고 했    는데 슬기는 아무것도 안 그린 흰 도화지를 냈습니다. 이럴 리가 없는데    한참 찾다가 겨우 네모난 도화지 맨 밑 한가운데서 조그만 발바닥을 발견   

                           - 1 -

  했습니다. 선생님은 슬기를 불러 선생님이 얼굴을 그리랬지 언제 발가락    그리라고 했느냐고 불어 보셨습니다. 슬기는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아빠     얼굴이 잘 생각나지 않아서 대신 발가락을 그렸다고 대답했습니다. 아빠는 회사 일이 너무 바쁘셔서 얼굴 보기가 어렵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주말에는 온 종일 이불 쓰고 낮잠만 주무신다나요. 그러니까 도화지 전체가 이불인 셈이지요. 슬기가 아빠를 깨우려고 하면 아빠는 십 분만, 아니    오 분만 더 자자고 사정을 하면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기 때문에    발가락만 보인답니다.


0 혹시  보는 사람을 웃길 기발한 뜻이 담겨 있는 게 아닌가 해서 선생님은    연방 고개를 갸우뚱. 수수께끼를 풀려는 어린이 같은 표정이 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수께끼가 풀리지 않자 선생님은 슬기를 불러다가 그 네    모난 것들이 무엇인지 물어 보았습니다.

   “ 방학 때 놀러갔던 바다에서 헤엄치는 갈치잖아요. 갈치는 제가 제일    좋아하는 생선이거든요. 그 맛있는 갈치가 바다에서 난다는 걸 엄마가 가    르쳐 주셨고요. 안 가르쳐 주셨어도 거기가 갈치의 고향이라는 걸 알았을    거예요. 바다에선 엄마가 갈치를 씻을 때 나는 냄새가 났어요. 그렇지만    갈치가 어떻게 헤엄치는지는 못 봤어요. 엄마가 위험하다고 먼 바다까지    못 나가게 했거든요.”

   선생님은 슬기의 얼굴만 보고도 장난을 치고 있는 게 아니라 정말 그렇    게 믿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요다음 자연시간에는 수산시장으로 현장학습을 나가서 갈치가 어떻게 생긴 생선인지 갈치의 전체를 보여 주어야겠다고 속으로 벼르셨습니다. 


■ 세 가지 소원


0 용구는 성사를 받는 일이 싫어서 계속 미루고 있었지만 엄마의 말을 듣고    정해진 날 상사를 받으러 갔습니다. 고백소 앞에는 용구 또래의 아이들이    길게 줄을 서 있습니다. 용구는 좀 두렵기도 하거니와, 고백할 잘못도 없    는데 거기 줄 서 있다는 게 약이 올라 무엇을 잘못했는지 돌이켜 볼 새가    없었습니다.

   어느 틈에 제 차례가 되어 고백소에 들어서니 준비 없이 들어 왔다는 두   

                             - 2 -

  려움 때문에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신부님의 음성이 들    리지 뭡니까. 자세히는 못 알아들었지만 어서 고백을 하라는 말씀처럼 들    려서 황급히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당장의 불만을 말했습니다.

   “저요, 제 잘못은요. 고백성사 하는 걸 싫어하는 겁니다. 왜 해야 되는    지 모르겠습니다. 죄 지은 생각은 안 나고, 조그만 실수는 맨날맨날 저지    르지만 고백한다고 다시는 안 저지를 자신도 없는데요.”


   “맨날맨날 세수는 왜 합니까? 곧 다시 더러워질 텐데.”

   신부님의 음성입니다. 보속은 이 해가 가기 전에 좋은 일을 세 번 하라    는 거였습니다.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세 번 좋은 일 하는 건 나중이고,    성사를 보고 나니까 마음이 정말로 세수를 하고 난 것처럼 개운해지지 뭡니까. 마음에도 얼굴이 있나 봅니다.


0 “참 너희 엄마 못 됐구나. 자식한테 좋은 일도 안 시키고. 그럼 한번 좋    으신 성모님한테 부탁해 보렴. 좋은 일 좀 하게 도와주세요. 하고.”

   엄마의 그 말씀이 용구에게 솔깃하게 들렸습니다. 판공성사도 했겠다.     성모님께도 꿀릴 게 없으니 그 정도의 부탁은 해도 되겠지. 그래서 성모    님, 성모님, 좋은 일 하나만. 아니 한꺼번에 세 개만 하게 해 주세요. 이    렇게 빌다가 좋은 일 나와라 뚝딱. 어리광도 부렸다가 온종일 중얼거리면    서 돌아 다녔습니다. 그때 누나가 난처한 얼굴로 제 방에서 나오더니 막    짜증을 부리면서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할머니가 내일 모레 컴퓨터 실기시험을 보신다고 나보고 좀 와 보래.     나도 내일부터 시험인데 할머니가 날 쉽게 놔 주시겠어?”

    엄마도 난처한 얼굴입니다. 이 집에서 컴퓨터 도사는 누나보다는 용구    입니다. 할머니가 그걸 몰라보시다니. 용구는 그게 섭섭했지만 누나를 도    와주고 싶습니다. 그게 누나에게 좋은 일이다 싶으면서 번개처럼 성모님이 기도를 들어주셨다는 확신 같은 게 생겼습니다. 대신 가기를 자청하니까 온 집안 식구가 대환영입니다. 누나는 너무 좋아 용구를 얼싸 안고 펄쩍펄쩍 뜁니다.


   할머니가 누나를 대신한 용구를 안 반기면 어떡하나 걱정한 것과는 달리    대환영입니다. 아이고. 내 새끼 이게 얼마만이냐고 반기신 후에는 당신    

                           - 3 -

  자랑부터 하십니다. 구민회관에서 하는 컴퓨터 교실에서 실기시험에 앞서    필기시험을 먼저 봤는데 할머니는 최고령으로 거뜬히 합격하자 모두 축하    해 주고 부러워하고 야단법석이랍니다.


0 할머니가 실기시험을 잘 치시고 싶어 아무리 연습해도 안 되는 게 있는데    그건 한글을 치는데도 자꾸만 영어가 나오니 고물 컴퓨터 하나 얻은 게     고장이 난 것 같다는 거였습니다.

   용구는 그 까닭을 단박에 알아냈습니다. 할머니는 배운 대로 양손을 다    써서 자판을 누르는 것 까지는 좋은데 왼손 보다는 오른손을 약간 빠르게    눌러서 자음보다 모음을 먼저 치게 되어 그렇게 되는 거였습니다.

   용구는 참을성 있게 할머니가 오른손 보다 왼손을 먼저 칠 수 있도록 도    와드렸습니다. 간발의 차이니까 할머니는 곧 익숙해졌습니다. 할머니는     오랫동안 지켜봐 주고 가르쳐 준 용구를 몇 번이나 칭찬하고 기특해 하면서 가다가 뭐 사먹으라고 돈을 삼천 원이나  주셨습니다. 오다가 보니 전철역 계단에 불쌍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용구는 그 사람 앞에 놓인 동전    밖에 없는 소쿠리에 삼천 원을 다 넣어 줄까 하다가 천 원은 군것질하려    고 남기고 이천 원을 넣어 주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비로소 성모님이 세    가지 소원을 다 이루어 주셨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 참으로 놀랍고 아름다운 일


0 비밀은 비밀답게 각기 자기 나름의 방법으로 사물 속에 감춰져 있습니다.    어떤 비밀은 겹겹의 두꺼운 껍질 속에 숨어 있기도 하고, 어떤 비밀은 마    치 허드레 물건처럼 밖에 나와 있기도 합니다. 사물의 비밀과 만나는 일이야말로 세상을 사는 참맛이라고 할머니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밤의 비밀은 따끔따끔한 밤송이와 두껍고 빤들빤들한 겉껍질과 떫은 속    껍질 속에 숨어 있는 달콤하고 고소하고 오돌오돌한 밤의 맛입니다. 무엇    이 사람으로 하여금 몇 겹의 난관을 뚫고 제일 처음으로 밤알의 맛을 보    게 하였을까요? 몽둥이와 돌멩이였을 거라고요? 꼬챙이였을 거라고요? 아니, 원시인의 억센 이빨이었을 거라고요? 아니 아니 그 일은 원시인의 뾰족한 손톱 아니면 안 됐을 거라고요?



                              - 4 -

0 다 옳은 소리입니다. 그러나 몽둥이나 돌멩이, 이빨이나 손톱이 제일 처    음의 것은 아닙니다.

   제일 처음의 것은 사람들의 꿈이었다고. 저 험악하게 생긴 것 속에 어쩌    면 가장 맛 좋은 것이 숨어 있을 수도 있다고 꿈 꾼 사람들의 꿈이었다     고. 할머니는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0 딱딱하고 무섭게 생겼을 뿐만 아니라 모진 발톱으로 사람들에게 덤비는     게의 딱지 속에서 제일 처음으로 맛있는 살을 후벼 파내게 한 것도 결코    돌멩이와 꼬챙이라는 연장이 아니라 사람들의 꿈이었다고 할머니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많은 사물과 만나도 그 속의 비밀과 만나지 못함은 헛것이고, 그런 헛만남만 연속되는 삶이라면 아무리 오래 살아도 헛산 것이라고 할머니는 생각합니다

   헛만남이란 마치 수박의 겉을 핥기만 하고 나서 수박 맛을 보았다고 생    각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만약 꼭꼭 숨어있는 비밀을 만나지 못하고,    겉만 보거나 핥는 것으로 과일과 만난다면 수박은 참외보다 위대하고, 참    외는 사과보다 위대하고 사과는 앵두보다 훌륭할 것입니다.    

.  그러나 앵두는 앵두의 비밀이, 사과엔 사과의 비밀이 있기 때문에 앵두    는 수박에 비해 형편없이 작은 과일이지만 수박과 동등합니다. 수박과 앵    두는 서로 다른 자기만의 비밀을 가지고 있을 뿐, 결코 누가 잘나고 누가    못난 비밀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비밀은 사물을 제각기     없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떳떳하게 독립시키고 평등하게 합니다. 수박은    아무리 커도 앵두나 사과를 자기에게 속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앵두는     앵두의 비밀이 있기 때문에 수박한테 주눅들 필요가 없습니다.


0 사물은 제각기 가진 비밀 때문에 서로 평등할뿐더러 자유롭습니다. 사물    의 비밀은 이렇게 제각기 사물이 있게끔 하는 목숨 같은 것이기 때문에     함부로 나와 있기 보다는 꼭꼭 숨어 있으려 듭니다. 사람의 꿈만이 꼭꼭숨은 사물의 비밀을 여는 열쇄가 될 수 있습니다.


■ 다이아몬드


0 갈고 닦지 않고  빛나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불타는 듯한 루비의    

                             - 5 -

  매혹적인 붉음도 애수와 순결을 같이 갖춘 사파이어의 투명한 청색도, 사    람의 혼백까지 삼켜 버릴 듯한 에메랄드의 심연처럼 깊은 녹색도. 모두     우수한 연마사의 뛰어난 솜씨를 거친 후에 비로소 사람들의 눈에 그렇게    비치게 된 것입니다.


0 다이아몬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연마를 거쳤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    이 찬란한 보석의 왕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물질 중에서 가장    단단하다는 그 비할 데 없는 경도 때문에 딴 보석에 비해서는 그 연마의    역사가 짧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도대체 무엇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것을 갈고 닦을 수 있겠는가?

   다이아몬드의 원석이 인류에게 발견된 것이 지금으로부터 오천 년 전인    데 그것을 연마하는 기술이 발명된 것은 15세기경이라니 거의 사천 년을    넘게 그 돌은 야성인 채로도 충분히 아름다워, 그 신비한 빛과 아무도 흠을 낼 수 없는 단단함으로 사람들로부터 숭배와 사랑을 받는 한편. 요괴로운 전설을 낳기도 하고 부와 힘의 상징이 되기도 했습니다.


0 그는 야성으로 있을 때도 그 희귀한 경도와 아름다움으로 숱한 이야깃거    리를 남겼듯이 연마법의 발견에도 한 슬픈 이야기가 따릅니다. 그 이야기    가 정말 있었던 이야기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만. 화려하고    오만한 보석에 따름직한 이야기이기에 여기에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야기    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조금씩 더해지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전하는 사람이 거짓말쟁이라서가 아니라 상상력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 역시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당초의 이야기 보다는 보태진 이야기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0 15세기 경 베니스의 가난하고 착한 젊은 금속공은 자기 상전의 아름다운    외동딸에게 한 눈에 반하였습니다.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화살처럼 그의    심장에 박힌 그녀의 눈동자는 커져만 가고, 시름시름 앓던 젊은이는 목숨을 건 용기로 그의 상전에게 자기의 사랑을 호소하였습니다.

   그의 상전은 젊은이의 사랑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그의 외동딸을 일개    직공에게 내 줄 생각은 전혀 없었고, 궁리 끝에 불가능한 제안을 하게 되    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다이아몬드를 연마하라는 것이었습니다.

  

                               - 6 -

  얼마나 악랄한 거절입니까? 손에 닿을 듯이 희망적이면서 가장 절망적인    거절. 자기 딸과 일개 직공과의 넘을 수 없는 신분 차이를 교묘한 제안으    로 거절하는 상관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랑으로 분별력을 잃은 사나이는 상전의 이런 교묘한 거절을 눈    치채지 못합니다. 젊은이는 상전과 약속을 합니다. 자기가 그 방법을 발    견할 때까지 그의 딸을 시집보내지 않겠다고.

   상전은 사랑의 열정이란 그 수명이 얼마나 짧은가를 너무도 잘 알고 있    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딸이 그 약속에 매이게 되리란 근심 같은 것    은 할 턱이 없습니다. 그날부터 사나이의 고생은 시작됐습니다. 닥치는     대로 딴 물질을 흠집 내고 할퀴고 할 뿐. 스스로는 연마는커녕 먼지만큼의 상처도 입으려 들지 않는 이 악마와 같은 돌과의 싸움으로 피투성이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0 그러던 어느 날, 사나이는 하나의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지극히 평범한.    지극히 금속공다운 진리였습니다. 즉 철을 마음대로 자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에 생각이 미친 것입니다.

   철은 강철에 의해서 비로소 절단되지 않는가. 그러면 강철이란 무엇인     가? 강철 또한 철에 지나지 않는 것을.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가장 쉬운 이치를 찾아 그는 그렇게 오랫동안 고    심 참담한 세월을 보낸 것이었습니다.       

   그 이치에 따라 다이아몬드는 다이아몬드에 의해서만 갈고 닦을 수 있으    리란 것을 깨닫게 되고, 다시 침식을 잃고 연구한 끝에 다이아몬드끼리의    마찰에서 생긴 미세한 다이아몬드 분말로 다이아몬드를 연마할 수 있기까    지에 이르렀습니다.

   이 단단하고 아름다운 돌은 저희끼리의 마찰에 의해서만 비로소 미세하    나마 분말을 떨어뜨리고, 그 미세한 분말에 의해서만 연마 될 수가 있습니다.

   연마된 다이아몬드는 상전의 예언대로 과연 눈부신 빛살을 발했습니다.    사나이는 내기에 이긴 것입니다. 맹세를 지킨 것입니다. 사나이는 또 하나의 맹세를 위해 연마된 다이아몬드를 자랑스럽게 받쳐 들고 상전을 찾아갔습니다.



                             - 7 -

0 그동안 사나이가 모르는 사이에 너무 많은 세월이 흘렀나 봅니다. 상전은    이미 늙어 죽고. 소녀가 넓은 저택의 여주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맹세에    의해 소녀는 아직 독신인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아아. 그러나 그동안 너무 긴긴 세월이 흘러갔나 봅니다. 소녀는 아직     독신일 뿐 , 아직도 소녀는 아니었습니다.


0 손댈 수 없이 퇴락하고 더러운 작업장 한가운데에서 사나이는 허망감으로    뼛속까지 시립니다.

   그때 사나이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몰골을 봅니다. 저건 또 누구란 말인    가? 준수한 젊은이는 어디로 가고 저 나이도 알 수 없이 늙어빠진 사나이    는 누구란 말인가? 때 묻은 백발, 벗겨진 정수리, 짓무른 눈, 수없이 많은 주름살, 활처럼 굽은 등, 저 늙은이는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0 헛수고..... 도대체 어쩌라는 길고도 고된 헛수고였을까? 사나이는 탄식    하며 다시 한 번 사람이 산다는 것의 허망함에 몸을 떨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사나이의 헛수고를 비웃어서는 안 됩니다. 사나이를 어리석다고     경멸해선 안 됩니다. 사람이 고생하고 살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다이아몬드도 아름다운 소녀도 아닙니다. 열심히 고생해야 기껏 아주 작은 이치를 얻어 내는 데 불과합니다.

   사나이는 다이아몬드에 저항할 수 있는 것은 다이아몬드뿐이란 이치를     얻어냈습니다. 그만하면 아무도 사나이의 삶이 아주 허망하다고는 말 못    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다이아몬드에 저항할 수 있는 것은      다이아몬드뿐이라는 사실입니다.

   

* 이 책에는 동화처럼 순수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몇 편 더 실려 있습니    다. 비록 짧은 이야기 이지만 글 속에 숨은 뜻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 끝 -





                             - 8 -

                                        

반응형

'독서후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바보가 바보들에게   (0) 2009.05.31
스물일곱 이건희처럼   (0) 2009.05.28
부처를 쏴라   (0) 2009.04.06
아버지의 편지   (0) 2009.03.13
사랑 두 글자만 쓰다가 다 닳은 연필   (0) 2009.0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