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서예사에서 추사의 위치

2009. 8. 2. 19:39서예이론

반응형

추사체(秋史體)

① 정의(定意)

영조시대(英祖時代)를 절정기(絶頂期)로 난만(爛漫)하게 꽃피웠던 진경 문화(眞景 文化)는 그 사상적 기반(思想的 基盤)인 조선 성리학(朝鮮 性理學)이 말폐(末弊)를 노정(露呈)하며 조락(凋落)해가자 그와 함께 쇠퇴(衰退)해 갔고, 이에 대체(代替)할 신사상(新思想)으로 청조고증학(淸朝考證學)을 받아들이려는 움직임이 집권층(執權層)의 연소신예(年少新銳)한 자제(子弟)들로부터 일어나기 시작함

정조대(正祖代)에 북학(北學)이 서서히 뿌리를 내려가면서 서예(書藝)도 정조(正祖)의 돈실원후(惇實圓厚)ㆍ졸박무교(拙樸無巧)의 취향(趣向)에 따라 전ㆍ예서(篆隸書)나 안진경체(顔眞卿體)가 유행(流行)하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진경 문화(眞景 文化)를 주도(主導)했던 노론(老論) 핵심 가문(核心 家門)의 학예전통(學藝傳統)을 가학(家學)으로 이어받은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 1786~1856)는 안진경체(顔眞卿體)와 한(漢)나라 예서체(隸書體)를 바탕으로 진경시대(眞景時代)의 여러 서체(書體)를 아우르는 한편, 청(淸)나라로부터 참신(斬新)한 비학이론(碑學理論)을 수용(受容)하여 독창적(獨創的)이고 졸박청고(拙樸淸高)한 서체(書體)를 창출하였는데, 이를 일컬어 ‘추사체(秋史體)’라 하는 것임

② 추사(秋史)의 서예론(書藝論)

㉠ 추사(秋史) 서예론(書藝論)의 뿌리는 남북서파론(南北書派論)

추사(秋史)는 중국(中國)을 다녀온 후, 당시 청(淸)나라 학예계(學藝界)를 휩쓸고 있던 운대 완원(芸臺 阮元 : 1764~1849)의 유명(有名)한 남북서파론(南北書派論)과 북비남첩론(北碑南帖論)을 금과옥조(金科玉條)로 받아들였으며, 그리하여 북파(北派)를 지지(支持)한 추사(秋史)는 고졸(古拙)하고 준경한 멋을 추구(追求)하여 북파(北派)의 전통(傳統)을 지켜온 구양순(歐陽詢)에 경도(傾倒)되면서 남파(南派)의 조종격(祖宗格)인 왕희지(王羲之)의 법첩(法帖)을 모본(模本)으로 삼던 종래(從來)의 글씨를 배격(排擊)하게 되었는데, 다음은 ‘남북서파론(南北書派論)’의 내용(內容)임

글씨 쓰는 법(法)이 변천(變遷)되어 그 흐름이 마구 뒤섞였으니 그 근원(根源)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어떻게 옛날의 올바른 법(法)으로 되돌아갈 수 있겠는가. (모본은 여러 사람이 각 시대마다 복사한 것이니 그 원본에 비하여 많은 변화가 있을 수 밖에 없으나, 비석은 원본 그대로이니...비석 글씨를 연구하는게 서예 근본을 찾아가는데 길잡이로 옳다는 논리. 그런데,일반적으로 생각해보면 서예라는 예술에서 법칙이 있고, 시대의 취향에 따른 변형이 있는데,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다양한 형태의 기교가 혼재해 있다 보니 서예를 공부 함에 있어서 어느 것을 기준으로 삼고 나아가야 하는지 혼란 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때에 서예를 하는 길을 설명하는 것인데, 결국 서법을 정확히 알고 넘어야 개성 표출이라는 올바른 예술성을 얻게 된다이러한 길을 가려면 재능만을 길러서는 안되고 공부가 필수이다. 서법을 무시하고 재능을 믿고 개성적 표현을 중시하면 흉내만 내다 말게 되거나,운이 없거나, 무원칙하게 되거나, 속(俗)되게 된다.)

 대개 예서(隸書)로부터 시작하여 정서(正書 : 楷書)와 행서(行書), 그리고 초서(草書)가 되었는데, 글씨가 이렇게 바뀜은 모두 한말(漢末)과 위(魏)ㆍ진(晋) 사이에 있었다.

그리고 정서(正書 : 楷書)와 행서(行書)ㆍ초서(草書)로 나뉘었던 것이 다시 남북 양파(南北兩派)가 되었으니, 곧 남조(南朝 : 동진(東晋)과 양(梁))의 글씨를 남파(南派)라 하고, 위(魏)ㆍ수(隋)의 글씨를 북파(北派)라 한다. 남파(南派)는 종요(鍾繇)ㆍ왕희지(王羲之)ㆍ왕헌지(王獻之)로부터 우세남(虞世南)에 이르렀고, 북파(北派)는 종요(鍾繇)ㆍ삭정(索靖) 등으로부터 구양순(歐陽詢)ㆍ저수량(楮遂良)에 이르렀다.……

남파(南派)는 글씨에 강남(江南)의 풍류(風流)가 있어서 소탈(疎脫)ㆍ분방(奔放)하며 곱고 미묘(微妙)하여 장계(狀啓)나 서독(書牘)을 쓰는 데 뛰어났고……북파(北派)는 중원(中原)의 전통(傳統)인 옛 법칙(法則)을 지켜 내려온 것으로 구속(拘束)하듯 고졸(古拙)하여 비문(碑文)과 방문(榜文)을 쓰는 데 뛰어났다.……

이와 같이 양파(兩派)가 판연(判然)하게 다른 것은 양자강(揚子江)과 황하(黃河)가 다른 것과 같아서 남북(南北)의 세족(世族)들은 서로 통하여 익히지 않았다.

㉡ 중국 서체(中國 書體)에 대한 당대(當代)의 평가(評價)

한편, 당시 청(淸)나라 사람들이 인식(認識)하고 있던 중국(中國) 서체(書體)에 대한 평가(評價)는 청(淸)나라 양헌(梁?)이『평서결(評書訣)』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극명(克明)한 정의(定意)로 그 요체(要諦)를 이해(理解)할 수 있음

晋尙韻 진(晋 : 왕희지(王羲之))나라 사람은 운(韻)을 숭상(崇尙)하고
(진상운)
唐尙法 당(唐 : 구양순(歐陽詢)ㆍ저수량(楮遂良))나라 사람은 법(法)을 숭상(崇尙)
(당상법) 하고
宋尙意 송(宋 : 소동파(蘇東坡)ㆍ미불(米?))나라 사람은 의(意)를 숭상(崇尙)하고 ,=개성.
(송상의)
元明尙態 원(元 : 조맹부(趙孟?))ㆍ명(明 : 동기창(董其昌))나라 사람은 태(態)를 숭상(崇尙)했다.태=조형.
(원명상태) 

즉 왕희지(王羲之) 시대(時代) 글씨에는 신운(神韻)이 감돌고, 구양순(歐陽詢) 시대(時代) 글씨에는 법도(法道)가 있고, 소동파(蘇東坡) 시대(時代) 글씨에는 작가(作家)의 의지(意志)가 반영(反影)되어 있고, 조맹부(趙孟?)와 동기창(董其昌) 시대(時代)의 글씨는 자태(姿態)가 아름다웠다는 의미(意味)임.

(내 생각...보통 철학에선 원칙과 현상으로 나누어서 보는데,

              예술이라서 시대적 유행을 중심으로 나누어 놓았는데,

            예술적 서예가 완성되고...글자 모양이 예술이 됨을 확립.

                                               동양 붓 자체  뽀족함을 이용하여 글 모양에서 예술성을 보임. 

            서법이라는 원칙이 생김.... 사용의 원칙을 세움. 

            개성적 표현...붓의 사용=필법의 운용의 미가 드러남.

            서예의 변화 모색....이전의 붓 사용 법에서  글자 자체에서 예술성을 찾으려 함.

            글자 모양을 그림처럼.. 글자의 공간 배치=조형미가 들어감, 현대 회화 같은 서예,..김정희 )

 

&&&

글을 쓰는데는 보통..붓이다. 그러나, 반드시 =모필 으로만 글을 쓰지 않아도 된다. 그것은 예술에선 전각에 의한 철필이라하고, 요즘은 인쇄술,자판기이다. 붓과 전각은 서예=글씨 예술의 영역에 속한다.

③ 추사(秋史)의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필결(筆訣)』비판(批判)

추사(秋史)의 서론(書論)을 말할 때 사람들이 가장 먼저 꼽는 것은 원교 이광사(圓嶠 李匡師 : 1705~1777)의『필결(筆訣)』을 비판(批判)한「원교필결후(圓嶠筆訣後)」인데, 다음은 그 주요 내용(主要 內容)임

원교(圓嶠)는『필결(筆訣)』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나라는 고려 말엽(高麗 末葉) 이래로 다 언필(偃筆 : 붓을 뉘어서 쓰는 것)의 서(書)이다. 그래서 획(劃)의 위와 왼편은 붓 끝이 발라가기 때문에 먹이 짙고 미끄러우며, 아래와 바른편은 붓의 중심(中心)이 지나가기 때문에 먹이 묽고 까끄러움과 동시에 획(劃)은 치우쳐 완전하지 못하다.”

이 설(說)은 하나의 가로획(劃)을 네 가지로 나누어 말하므로 미세(微細)한 데까지 분석(分析)한 것 같으나 가장 말이 안 된다. 위에는 단지 왼편만 있고 바른편은 없으며 아래에는 단지 바른편만 있고 왼편은 없단 말인가? 붓 끝이 발라가는 것은 아래에 미치지 못하고 붓 중심(中心)이 지나가는 것은 위에는 미치지 못한단 말인가?……

북비남첩론(北碑南帖論)에 입각(立脚)하여 북파(北派)를 지향(志向)하는 추사(秋史)로서는 남파(南派)에 뿌리를 둔 원교(圓嶠)를 비판(批判)할 수밖에 없었으며, 또 원교(圓嶠)의 시각(視覺)이 조선(朝鮮)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해 바야흐로 국제적 시각(國際的視覺)에서 글씨를 논(論)하고 예술(藝術)을 펼치고 있던 추사(秋史)가 보기에는 못마땅했기 때문임

추사(秋史)가 원교(圓嶠)를 비판(批判)한 요지(要旨)를 보면 우리나라 서가(書家)들은 북비(北碑)에서 직접 배울 생각은 못하고 왕희지(王羲之) 글씨로 만든『황정경(黃庭經)』ㆍ『악의론(樂毅論)』같은 법첩(法帖)에 의지(依支)해왔는데, 사실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는 오래 전에 없어졌고 우리가 알고 있는 왕희지(王羲之) 법첩(法帖)이란 판각(板刻)에 판각(板刻)을 거듭하면서 변질(變質)되어 사실상(事實上) 가짜인데도 그것조차 모르고 있으니 한심하다는 것으로, 이리하여 추사(秋史)는 그 한심함을 다음과 같이 질타(叱咤)하였음

요사이 우리나라에서 서예가(書藝家)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이르는 진체(晋體 : 왕희지체(王羲之體))니 촉체(蜀體 : 조맹부체(趙孟?體))니 하는 것은 모두 이런 것이 있다고 여겨 표준(標準)으로 받들고 있는 것이 마치 썩은 쥐를 가지고 봉황(鳳凰)새를 으르려고 하는 것[부서혁봉(腐鼠?鳳)] 같으니 어찌 가소롭지 않은가.

글씨를 배우는 자가 진(晋 : 왕희지(王羲之))을 쉽게 배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당(唐 : 구양순(歐陽詢)ㆍ저수량(楮遂良))을 경유(經由)하여

                           진(晋)으로 들어가는 길을 삼는다면 거의 잘못됨이 없을 것이다.

구양순(歐陽詢)ㆍ저수량(楮遂良) 등 여러 사람은 무시(無視)하고 위로 종요(鍾繇)와 왕희지(王羲之)에 접속(接續)하려 드는 것은 문(門) 앞 길도 거치지 않고 곧장 방 아랫목에 앉겠다는 격(格)이니 그것이 말이나 되는가. (서예의 법도를 모르고서 왕희지체를 하겠다는 것은 흉내내기 밖에 더 의미없다란 말.

       아무리 재능이 있어 기교를 잘 부려도, 공부가 없으면 ( 전통을 개인적 습관으로 굳게 만들어 속되게 되)

         운이 살지 않아..서격이 없다란 의미.

       또 다른 의미로는 서예는 붓 글씨를 많이 써서 실력을 향상하게 되면 구양순(=서법)을 만나야 하고,

                               이 구양순을 넘어야 격이 생기고.

                                                          격이 생긴 후에야  왕희지(=기운 깃듬)에 이를수 있고.

                               왕희지에 이르러야 개성=일품을 얻을수 있다는 의미다.)

이런 논지(論旨)에서 완당(阮堂)은 구양순(歐陽詢)을 글씨의 규범(規範)으로 삼았고, 또 그를 통하여 추사체(秋史體)의 골격(骨格)을 확립(確立)하였음

④ 추사체(秋史體)에 대한 일반인(一般人)들의 인식수준(認識水準)

추사체(秋史體)는 대단히 개성적(個性的)인 글씨로 일반적(一般的)인 아름다움, 평범(平凡)하고 교과서적(敎科書的)인 미감(美感)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추사(秋史)의 글씨에서 차라리 괴이(怪異)함과 당혹감(當惑感)을 느끼는 것이 정상(正常)인데, 그런데 바로 그 괴이(怪異)함이 추사(秋史)의 예술적(藝術的) 개성(個性)이자 높은 경지(境地)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이며, 또한 우리는 흔히 한마디로 ‘추사체(秋史體)’라고 쉽게 말하지만, 추사체(秋史體)의 실체(實體)는 매우 다양(多樣)하여 과연 어떤 글씨를 ‘추사체(秋史體)’라고 할 수 있는지 한 마디로 정의(定意)내리기는 무척 힘듬

추사(秋史)는 정통적(正統的) 순미(純美)ㆍ우미(優美) 아니라

                  반대(反對) (醜),

                                    미학 용어(美學 用語)로 말해서 미적 범주(美的 範疇)로서의

                                                                              추미(醜美)를 추구(追求)했는데,

                  즉 파격(破格)의 아름다움, 개성(個性)으로서 (怪)를 나타낸 것이

                      추사체(秋史體)의 본질(本質)이자 매력(魅力)이라 할 수 있음

⑤ 유최진(柳最鎭)의「추사체 특질론(秋史體 特質論)」

추사(秋史)와 동시대(同時代) 인물(人物)인 초산 유최진(樵山 柳最鎭 : 1791~1869)이「추사(秋史) 글씨 편액(扁額)에 부쳐[제추사영편(題秋史楹扁)]」라는 글에서 추사체(秋史體)의 특징(特徵)을 다음과 같이 설명(說明)하였는데, 이 글은 추사(秋史)의 예술세계(藝術世界)를 가장 극명(克明)하게 요약(要約)한 최고(最高)의 비평문(批評文)이라 할 수 있음

추사(秋史)의 예서(隸書)나 해서(楷書)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는 자(者)들은 괴기(怪奇)한 글씨라 할 것이요, 알긴 알아도 대충 아는 자(者)들은 황홀(恍惚)하여 그 실마리를 종잡을 수 없을 것이다.

원래 글씨의 (妙)를 참으로 깨달은(=동양미학으로 하면..경계) 서예가(書藝家)란 법도(法道)를 떠나지 않으면서, 또한 법도(法道)에 구속(拘束)받지 않는 법(法)이다. 글자의 획(劃)이 혹은 살지고 혹은 가늘며, 혹은 메마르고 혹은 기름지면서 험악하고 괴이(怪異)하여, 얼핏 보면 옆으로 삐쳐나가고 종횡(縱橫)으로 비비고 바른 것 같지만, 거기에 아무런 잘못이 없다.

추사(秋史) 선생(先生)이 소사(蕭寺)에서 남에게 써준 영어산방(穎漁山房)이라는 편액(扁額)을 보니 거의 말[두(斗)]만한 크기의 글씨인데, 혹은 몸체가 가늘고 곁다리가 굵으며, 혹은 윗부분은 넓은데 아래쪽은 좁으며, 털처럼 가는 획(劃)이 있는가 하면 서까래처럼 굵은 획(劃)도 있다. 마음을 격동(激動)시키고 눈을 놀라게 하여 이치(理致)를 따져본다는불가(不可)하다.

 (내 생각 ;;동기창은 말하였다, 정자(正字)를 통하여 올바름을 말하는 것보단 틀린 글자로 알켜 줌이 좋다고....여기서 보듯이 추사는 올바름에서 예술성을 찾는 것은 무의미하고, 올바름을 알고 난후에 예술성 표현은 (얼핏보면)올바르지 않으면서도 (정확히 알고 보면)틀리지 않은 표현으로 개성을 들어 낸것 같다.자연스럽게)

마치 머리를 산발(散髮)하고 의복(衣服)을 함부로 걸쳐서 예법(禮法)으로는 구속(拘束)할 수 없는 것과 같았다. ……감히 비유(比喩)해서 말하자면 불가(佛家)ㆍ도가(道家)에서 세속(世俗)을 바로잡고자 훌쩍 세속(世俗)을 벗어남과 같다고나 할까.

⑥ 박규수(朴珪壽)의「추사체 변천론(秋史體 變遷論)」

환재 박규수(?齋 朴珪壽 : 1807~1876)는 추사체(秋史體)의 형성(形成)과 변천 과정(變遷 過程)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證言)하였음

……완옹(阮翁 : 추사(秋史))의 글씨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그 서법(書法)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어렸을 적에는 오직 동기창(董其昌)에 뜻을 두었고, 중세(中歲 : 스물네 살에 연경(燕京)을 다녀온 후)에는 담계 옹방강(覃溪 翁方綱 : 1733~1818)을 좇아 노닐면서 열심히 그의 글씨를 본받았다. (그래서 이 무렵 추사(秋史)의 글씨는) 너무 기름지고 획(劃)이 두껍고 골기(骨氣)가 적다는 흠이 있었다.

그리고 나서 소동파(蘇東坡)와 미불(米?)을 따르고 이북해(李北海 : 당(唐)의 이옹(李邕))로 변하면서 더욱 굳세고 신선[창울경건(蒼鬱勁健)]해지더니……드디어는 구양순(歐陽詢)의 신수(神髓)를 얻게 되었다.

만년(晩年)에 (제주도(濟州道) 귀양살이로) 바다를 건너갔다 돌아온 다음부터는 (남에게) 구속받고 본뜨는 경향(傾向)이 다시는 없게 되었고…… 여러 대가(大家)의 장점(長點)을 모아서 스스로 일법(一法)을 이루게 되니 신(神)이 오는 듯, 기(氣)가 오는 듯, 바다의 조수(潮水)가 밀려오는 듯하였다.

⑦ 추사체(秋史體)의 미적 특질(美的 特質)

제주(濟州)로 간 이후(以後)의 글씨는

                         추사(秋史)가 평소에 주장(主張)하던 청고고아(淸古高雅)한 서풍(書風)이

                                                     일변(一變)하여 기굴분방(奇?奔放)한 자태(姿態)를 보이기 시작하여

                                                          세인(世人)을 놀라게 했는데,

                       전통적(傳統的)인 글씨가 의관(衣冠)을 단정(端整)히 차린 도학군자(道學君子)같다면

                       추사(秋史)의 글씨는 예절(禮節)과 형식(形式)을 무시(無視)한 장난꾼처럼 보였을 것이지만,

                                                   이것이 곧 추사(秋史)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정(感情)이

                                                                  그대로 붓을 통해 표현(表現)된 것이자

                                                   붓을 잡았을 때의 추사(秋史)의 개성(個性)이 그대로 살아 있었던 것임

 

추사(秋史)의 작품(作品)은 점(點)과 획(劃)의 운용(運用)이 강철(鋼鐵) 같은 힘을 가졌고,

                                     공간 포치(空間 布置)에 대한 구상(構想)은 모두 다 평범(平凡)을 초월(超越)한

                                                                     창의력(創意力)이 넘쳐

                                                                     그대로 현대 회화(現代 繪?)와 공통(共通)되는

                                                                     조형미(造形美)를 갖추었으니

                                    이는 과거(過去)의 어느 작가(作家)도 시도(試圖)해보지 못한 새로운 경지(境地)임

⑧ 불계공졸(不計工拙)

추사(秋史)는 과천 시절(果川 時節)로 들어서면서 비로소 자신(自身)이 스스로 허물을 벗었다고 이재 권돈인(?齋 權敦仁 : 1783~1859)에게 자신감(自信感)을 표(表)하였으며, 그 경지(境地)를 “잘되고 못되고를 가리지 않는다”는 ‘불계공졸(不計工拙)’이라 하였는데, 이 말이야말로 ‘추사체(秋史體)’의 본령(本領)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추사(秋史)가 강상 시절(江上 時節)에 글씨에서 새롭게 발견(發見)한 경지(境地)는 ‘(怪)’의 가치(價値), 즉 개성(個性)의 구현(具顯)이었지만 과천(果川)으로 돌아온 시점(時點)의 추사(秋史)는 ‘졸(拙)’을 말하고 있었던 것임

‘불계공졸(不計工拙)’은 기교(技巧)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기교(技巧) 감추고 (拙)함을 존중(尊重)하는 것이니, 이는 곧 노자(老子)가 말한 ‘대교약졸(大巧若拙 : 큰 재주는 졸(拙)해 보인다)’의 ‘졸(拙)’이며, 후학(後學)들이 추사(秋史)의 글씨를 꾸밈이 없다고 한 이야기는 바로 이 점을 말한 것인데, 따라서 추사(秋史) 글씨의 본질(本質)은 ‘(怪)’와(拙)’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으며, 다만 ‘괴(怪)’는 작위적(作爲的)이고 의식적(意識的)인 ‘괴(怪)’가 아니라 자연(自然)스럽게 우러나온 개성(個性), 즉 ‘허화(虛和)’여야 한다는 것임

⑨ 동양 서예사(東洋 書藝史)에서의 추사체(秋史體)의 위치(位置)

‘조선시대(朝鮮時代)의 4대 명필(四大 名筆)’로는 안평대군 이용(安平大君 李瑢 : 1418-~1453)ㆍ봉래 양사언(蓬萊楊士彦 : 1517~1584)ㆍ석봉 한호(石峰 韓濩 : 1543~1605)ㆍ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 1786~1856)를 꼽고 있고, 또 ‘우리나라 4대 명필(四大 名筆)’로는 신라(新羅)의 김생(金生 : 711~791(?))ㆍ고려(高麗)의 대감국사 탄연(大鑑國師 坦然 : 1070~1159)ㆍ조선(朝鮮) 전기(前期)의 안평대군(安平大君)ㆍ조선(朝鮮) 후기(後期)의 김정희(金正喜)를 꼽고 있으며, 여기서 또 그 중 둘을 고르라면 ‘김생(金生)’과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만 남고, 그러면 한 명만 꼽으라면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라 할 수 있음

우리나라 서예사(書藝史)에서 추사(秋史)의 업적(業績)은 낡은 법첩(法帖)을 따르는 매너리즘(Mannerism)과 향토색(鄕土色)에 젖어있던 어딘지 촌티나는 조선(朝鮮)의 글씨를 비문(碑文) 글씨의 고졸(古拙)하고 준경한 기품(氣品)을 간직한 개성적(個性的)인 서체(書體)로 구현(具顯)하여 국제적 감각(國際的 感覺)의 신풍(新風)을 일으켰다는 점임

중국(中國)의 서예(書藝)가 ‘진상운 당상법 송상의 원명상태(晋尙韻 唐尙法 宋尙意 元明尙態)’라는

논리(論理)를 인정(認定)할 때, 이를 청(淸)나라에 적용(適用)해보면

             청(淸)나라 사람은 (學)을 숭상(崇尙)했고, 그들이 지향(志向)한 글씨는 ‘입고출신(入古出新)’이며

                                      개성(個性)으로서의 괴(怪), 즉 고전(古典)에 입각(立脚)한

                                                                 근대정신(近代精神)의 감성적 표현(感性的 表現)이었지만,

 실제로는 어느 누구도 청대(淸代)의 서예(書藝)를 대표(代表)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중국(中國)에서 입고(入古)가 강한 이는 출신(出新)이 약했고, 출신(出新)이 강한 이는 입고(入古)가 약해 진정(眞正)한 입고출신(入古出新)의 개성적(個性的)인 글씨,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서예가(書藝家)가 없었기 때문이며, 오히려 조선(朝鮮)의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만이 완벽(完璧)한 입고출신(入古出新)의 서예가(書藝家)였음

따라서 동양 서예사(東洋 書藝史)의 대맥(大脈)에서 말한다면

          남북조 시대(南北朝 時代)에는 왕희지(王羲之)ㆍ왕헌지(王獻之)가 있고,

          당(唐)나라에는 구양순(歐陽詢)ㆍ저수량(楮遂良)이 있고,

          송(宋)나라에는 소동파(蘇東坡 : 1036~1101)ㆍ미불(米?)이 있고,

          원(元)나라에 조맹부(趙孟?)가 있고

          명(明)나라에 동기창(董其昌)이 있다면

          청(淸)나라에는 완당 김정희(阮堂 金正喜)가 있는 것임

출처 : 서예세상
글쓴이 : 芝香 원글보기
메모 :
반응형

'서예이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팔병(八病)  (0) 2009.08.29
[스크랩] 고구려 서풍의 특징과 독창적 미의식  (0) 2009.08.27
[스크랩] 비초서 (조일) 1  (0) 2008.12.27
[스크랩] 비초서 (조일) 2  (0) 2008.12.26
[스크랩] 서예용어  (0) 2008.1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