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3. 19. 23:09ㆍ독서후기
대장경, 천년의 지혜를 담은 그릇
■ 오윤희
0 연세대 철학과 졸업 후 봉선사 월운강백 문하에서 한문불전 공부
0 1980년대 말부터 불전 전산화에 뜻을 둠
0 1993 해인사에서 고려대장경 연구소 설립에 참여. 불교문헌 자동화 연구 실 및 비백교학 연구소 창립
*비백교학연구소 ; 현대선불교와 비판불교 논쟁에 대한 연구
불교의 학문적 연구와 불교자료의 전산화 연구
0 2005 고려대장경연구소 소장 취임 이후 2010년까지 한일 공동 고려초조대 장경 디지털화 사업 완료
0 고려대장경 지식베이스, 고려대장경 이미지 지원 시스템.
고려대장경-돈황 사본 대조연구 지원 시스템 등의 프로젝트 기획 추진
0 저서 : 메트릭스, 사이버스페이스, 선 등.
■ 추천의 글 - 이어령
인간은 세 가지 종류의 ‘시간’을 산다고 합니다. 하나는 체력에 의존하는 개인의 생명인데 이것은 대개 10년 단위로 계산됩니다. 물론 100세 이상 사시는 분도 있지만, 대개는 10년 단위로 계산이 됩니다.
두 번째는 개인의 체력이 아닌 국력을 중심으로 한 나라의 시간입니다. 이것은 대개 100년을 단위로 계산이 됩니다. 세 번째로는 1,000년 단위로 계산되는 시간인데, 그것은 바로 국력을 넘어선 문화의 힘 혹은 종교의 힘과 관련됩니다. 이러한 문화의 힘을 일러 ‘소프트파워’라고 하고 국력은 ‘하드파워’라고 합니다. 몽고의 침입으로 인한 고려의 국난은 무력을 토대로 한 ‘국력’즉 ‘하드파워’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보다 더 긴 시간대의 힘인 ‘문화의 힘’ 즉 ‘소프트 파워’로 이겨냈습니다. 당시에 고려에 쳐들어와서 감히 대장경을 불사른 몽고의 하드파워를 지금은 어디에서 그 흔적이나마 찾아볼 수 있겠습니까?
고려대장경 천 년의 해를 여는 즈음에 선보이는 이 책, 이 안에 담긴 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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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들, 고려대장경이 아니었다면 영영 잊혀졌을 기억들, 천 년을 이어온 글자들에 담긴 기억들을 통해, 천년만년 억겁의 꿈을 함께 꾸어 가기를 바랍니다.
■ 이야기를 시작하며 - 오윤희 -
장(藏)이라는 글자는 묘한 매력을 가진 글자다. 창고나 그릇이라는 뜻에서부터 시작해, 말의 무더기, 기억의 뭉치처럼 쓰이다가, 생각으로, 마음으로 번지는 듯하더니, 어느새 진리가 되고 세계가 된다. 그러다가 문득 ‘藏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으로까지 이어진다. 글자 하나에 이 세상 모든 것을 몽땅 다 담을 수 있고, 이 글자 하나로 세상 모든 일을 다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
장(藏)이라는 글자는 불교의 기억이 한문으로 막 번역되기 시작하던 시절, 후한의 낙양에 온 인도 승려 축법란이나, 페르시아 왕자 안세고가 번역했던 초기 문헌들 안에도 들어 있다. 얼추잡아 1900년의 세월이다. 이 글자가 걸어온 시간의 길이는 길고, 생각의 폭은 깊고 넓다. 우리는 아직도 1900년의 세월을 넘어, 이 글자를 읽기도 하고 인용하기도 한다. 글자는 변함없는 바로 그 글자이다. 1900년 전 페르시아 왕자가 골라 썼던 그 글자의 뜻과 지금 우리가 짐작하는 뜻은 과연 같은 것일까?
2천 년, 밀레니엄의 순간이 얼마쯤 지나서였다. 그때도 놀이처럼 습관처럼, 대장경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있었다. 어느 순간, 고려초조대장경을 조성하기 시작했다는 시간(1011년)이, 괄호 속에 갇혀 있던 숫자가 괄호를 벗어나, 종이를 벗어나 허공으로 솟아오르는 것과 같은 환상을 보았다. ‘아! 2011년이면 초조대장경을 조성을 시작한지 천 년이 되는구나. 고려대장경이 천 년의 생일을 맞는구나. 또 다른 밀레니엄, 고려대장경의 밀레니엄이구나.’ 천 년의 순간은 그렇게 불쑥 찾아왔다. 천 년을 채우는 해, 2011년이면 뭘 해야 하나. 십 년도 아니고 백 년도 아니고, 천 년인데, 뭔가 색다른 기념을 하긴 해야 할 텐데 …….
그런 생각의 여정에서 열두 살의 왕자 승통, 대각국사 의천을 발견했다. 의천의 결집, 의천의 고려대장경, 의천의 천 년, 의천의 장(藏), 이런 모든 것들이 의천 안에 담겨 있었다. 이를 빗대어 과거의 천 년, 현재의 천 년, 미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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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 이 세 가지 천 년을 그려볼 수 있었다. 이런 상상 속에서 의천은 화려한 슈퍼 히어로였다. 그는 세 가지 천 년, 광대한 기억의 세계를 넘나들며 미래의 후학들을 위해 큰 일을 성취했다. 천 년을 이어온 과거의 기억들을 천 년의 미래로 넘겨주는 일이었다.
기억이 끊기면 과거의 기억이 되고, 과거의 기억은 미래로 이어질 수 없다. 전생의 석가모니가 노래 반 구절을 듣기 위해 절벽 아래로 몸을 던졌듯이, 숱한 사람들이 기억 한 조각을 찾아서 목숨을 걸고 사막과 설산을 넘나들었다. 대장경은 그들의 모험담이었다. 그들의 모험이 끊이지 않았기에 기억은 늘 생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의천은 다시 좀먹어 가는 기억들을 되살려 미래로 전해 주었다. 그런 일이 의천의 일, 천년의 일이었다.
물론 이 모든 일을 의천이 혼자서 다할 수는 없었겠다. 수천 수만이나 되는 좀 먹고 찢긴 더러운 책장들, 수집하고 정리하고 교정하여 목판에 새겼던 사람들, 그 일을 후원했던 왕실과 조정, 멀고 가까웠던 스승들, 의천은 다만 그들의 상징일 뿐이다. 대장경 안에 담긴 이야기들, 석가모니로부터 시작된 숱한 사람들의 기억과 지혜들, 대장경은 그들 모두가 힘을 합해 만들어 낸 공동의 창작물이다. 천년의 대장경, 고려대장경은 장경각에 갇혀 있는 과거의 문화재만은 아니다. 이천오백 년, 아시아대륙을 망라하던 기억의 바다이다. 기억에 대한 태도가 들어 있고, 기억을 다루던 기술도 들어 있다.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도 이런 일은 없었다.
장에 대한 몽상은 살아 있는 기억에 대한 몽상이다. 살아 있는 기억을 산 채로 다시 천년의 미래로 넘겨주기 위한 몽상이다. 우리가 써 가야 할 우리의 모험담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생물학적 유전자, 진(gene)에 빗대어, 문화적 유전자 ‘밈(meme)’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썼다. 우리 안에는 고려대장경이나 의천 같은 밈들이 담겨 있다. 아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바로 그런 밈의 바다, 큰 장(藏)이라는 편이 좋겠다.
- 2011. 정월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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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장, 장(藏) 이야기 》
■ 대장경은 그릇이다.
금구옥설(金口玉說)은 본래 만들거나 망가뜨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금구옥설이 담기는 곳은 그릇(器)입니다. 그릇이 만들어지거나 망가지는 것은 자연의 운수입니다. 망가지면 다시 만드는 것도 그런 까닭입니다.
이규보가 지은 ‘대장각판군신기고문’이라는 글의 한 부분이다.
- 대장경판을 새기면서 임금과 신하들이 함께 올린 기고문으로 522자
- 金口玉說 : “금으로 된 입으로부터 나오는 말씀” 곧 부처님의 입과 그가 하신 말씀을 높여 부르는 표현
* 대장경을 정의하거나 설명하는 용어로는 ‘불경의 집성’ ‘불교의 총서’ 같은 정의들이 널리 사용되고 있지만 뭔가 미흡하다. 그래서 이규보의 ‘그릇’이라는 표현이 단순하고 명쾌하다.
말씀은 비록 망가지지는 않지만 담을 그릇이 없다면 찾아 볼 수도 없다. 물을 담은 그릇이 깨지면 거기에 담겼던 물은 땅 속으로 스며들거나 하늘로 증발하고 말 것이다. 그릇이 깨진다고 물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당장 마실 물은 없다. 말씀이야 어디엔가 남이 있겠지만 대장경이 없다면 내가 들을 말씀도 없다. ‘대장경은 그릇’이라는 단순 명쾌한 정의가 의도하는 것이 그런 것이다.
그릇은 물건이다. 언젠가는 망가지게 마련이다. 이규보는 이를 ‘자연의 운수’라고 표현했다. 대장경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대장경은 글자를 새긴 목판을 가리킨다. 이것도 물건이다. 망가지게 마련이다.
금수만도 못한 달단, 곧 몽고군대가 침략하여 부인사에 소장되어 있던 대장경을 고스란히 태워 버렸다. 대장경은 나라의 큰 보배이다. 소중한 보배가 망가졌으니 후회해도 소용없고, 일이 어렵다고 미룰 수도 없다. 힘이 들어도 애를 써서 새로 만드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 글을 쓴 이규보, 위로는 임금과 아래로 백관의 신하들이 하고 싶은 말이다. 부처님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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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현, 삼십삼천에게 기원의 말씀을 고하는, 이를테면 기도문이다.
기원의 내용은 흉악한 달단의 무리가 물러가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대장경과 전쟁이 이렇게 해서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되었다.
초조대장경은 현종 2년(1011년) 거란의 침입을 앞두고 조성되었고, 이규보의 기고문을 시작으로 만든 재조대장경 안에는 거란이 새긴 대장경에 대한 언급, 단장(丹藏)이나 단본(丹本)과 같은 표현이 무수하게 등장하고 있다. 재조대장경은 초조대장경과 거란의 대장경, 북송의 대장경을 정교하게 대조하고 교정하여 조성한 이른바 교정대장경이기 때문이다.
‘대장경은 그릇’
- 대장경 : 큰 그릇 안에 담긴 큰 말씀들
- 큰 그릇 ; ‘세 개의 그릇(三藏)’에서 유래
- 삼장(트리피타카 Tripitaka) : ‘트리’는 셋이라는 뜻이고 ‘피타카’는 광주리 바구니를 뜻함. ‘삼장’이나 ‘법장’이라는 용어는 인도 말에서 유래
- 경 = 수트라(Sutra) : 실이나 끈, 엮거나 짜거나 꿰기 위한 실, 곧 부처님 말씀. 경(經)이라는 한자도 ‘실’을 가리킴
- 수트라라는 표현에는 실에 꽃을 꿰어 꽃다발을 만들 듯, 말을 꿰어 말다발을 만든다는 비유가 담겨 있다. 끈이나 실은 꽃을 꿰고, 묶고, 엮어 주는 수단이다. 피타카가 담는 그릇이었다면, 수트라는 또 다른 형태의 그릇이다. 모아진 상태를 유지시켜 주는 수단이다. 장(藏)으로 법(法)을 대변했듯이, 실로써 가르침을 대변한 것이다.
율은 비나야(毘奈耶 Vinaya)를 번역한 말. ‘없애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몸과 입, 생각으로 지은 잘못을 없앤다는 뜻이다. 계율에 관한 가르침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논은 아비달마(阿毘達磨 Abhidharma)를 번역한 말이다. ‘대법(對法’이라고도 번역한다. ‘법에 대한 의논’이라는 뜻이다. 법이 가지고 있는 의미들을 해석하고 논의한다는 뜻이다.
어쨌건 꿰거나 담는 이유는 후세에 남겨 전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저기 흩어진 것을 모아 두기 위해서이다. 이것이 장의 목적이고, 장의 쓰임이다. 꿰거나 담지 않으면 흩어져 사라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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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장경이라는 표현은 어색한 표현
인도에서 전해진 ‘삼장’이라는 전통적 표현이 한문식으로 ‘큰 그릇’이라는 표현으로 바뀌면서, ‘삼장’의 일부분인 ‘경’이라는 글자가 ‘대장경’에 붙어서 부분인 ‘경’이 더 커진 전체를 대변하는 이름이 됐으니 모순이다 .
* 삼장(三藏)
인도불교 성전의 총칭으로 경(經), 율(律), 논(論) 셋을 잘 간직하고 담고 있 는 광주리
- 經 :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 등 經 자가 붙은 것으로 1500여부
- 律 : 불교도들이 지킬 규칙 및 교단의 계율, 경의 1/5 정도
- 論藏 : 삼장 이외에도 잡장(雜藏 본생, 인연 등을 모은 역사 전기류)과 주 장(呪藏 주문과 다라니 류로 경장에 포함할 수도 있음)
* 대장경은 불교의 바이블?
해인사 팔만대장경은 ‘Tripitaka Koreana'라는 표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이 말은 더 어색하다. 고려대장경을 서구어로 번역하면서 만든 표현일 텐데, 트리피타카라는 범어에다 고려의 라틴어식 표현을 엇대어 놓았다. 뜻으로만 따지자면 ’고려 삼장‘이 되겠다. 어쨌든 대구는 잘 맞아서 서양 사람들이 부르기는 편할지 몰라도 아무튼 이상하다. 무엇보다 삼장과 대장에는 거리가 있다. 삼장은 대장경의 일부분이고, 대장경에는 삼장이라는 그릇들, 그 범주 안에 담기기 어려운 수많은 문헌, 예를 들면 사전류, 목록류, 전기류, 역사책, 여행기, 심지어 이교도의 성전까지 다양한 문헌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대장경은 이 모든 얘기들을 통칭하는 표현이다. 대장경이라는 그릇에는 이전의 삼장은 물론, 시간으로 치자면 2-3천 년, 공간으로 치자면 아시아 전역을 아우르는, 오래되고 광범위한 말씀들, 말씀들에 대한 기억이 담겨 있다. 대장경이라는 말이 삼장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은 틀림없지만, 대장경을 삼장, 트리피타카로 번역하는 데는 무리가 있다. 그래서 일본이나 중국에서는 서구어로 번역하지 않고 ‘따짱징’이나 ‘다이조쿄’처럼 그냥 소리나는 대로 적기도 한다.
■ 아난이라는 그릇, 다문장(多聞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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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난 비구는 내 동생으로 내 일을 도와 준 지 20여 년 동안, 얻어 들을 수 있는 법(法)은 모두 다 받아 지녔다. 마치 엎지른 물을 한 그릇에 담는 것과도 같다. 아난은 내 법을 담는 그릇이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을 당시는 목판인쇄술은커녕 종이도 문자도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담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람의 기억뿐이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의 말씀을 아난에게 담아 두었다. 그 시절에는 스승의 가르침을 노래로 만들어 늘 외우고 부르고 다녔다. 굳이 노래로 만들었다기보다는 아예 처음부터 이야기를 노래라는 수단을 통해 나누었을 것이다. 부르기도 좋고 듣기도 좋았겠지만, 무엇보다 그편이 기억하기가 편했기 때문이다.
석가모니는 29세에 출가하여 6년간의 수행을 거쳐 35세에 큰 깨달음을 성취했다. 다섯 비구를 위해 처음으로 가르침을 편 이후 20년이 흘렀다는 말이다. 그의 나이로 따지자면 55세가 되는 때이다. 그 나이에 부처님을 시봉할 시자, 급사를 뽑겠다고 한다. 세 가지 조건이 있다. 그 중에 첫 번째가 바로 부처님의 말씀을 모두 받아 지니는 일이다.
“교진여, 사리불, 목련 등 상수제자들과 5백 나한들이 모두 부처님을 모시겠다고 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미 아난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아난이 부처님의 그릇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20여 년 동안 흘린 물을 한
방울도 빠짐없이 모두 담고 있을 만큼 그릇의 재질이 출중했기 때문이다. 부
처님은 그 재질을 칭찬하면서, 20여 년 동안 숱한 경전을 설하였지만, 아난
은 한 번 들으면 두 번 묻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그만큼 아난은 좋은 그릇이었다. 그에 걸맞게 부처님도 최고의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물론 아난의 기억력이 그만큼 뛰어나기 때문이겠다. 수많은 제자들 중에서 ‘총명제일’로 꼽혔던 아난이었다. 그러나 기억력만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집중도 해야 하고 판단도 해야 한다. 담는다는 일은 일방적인, 수동적인 일만은 아니다. 받아서 담아야 하듯, 능동적인 작용이 더해져야 한다. 부처님은 아난이라는 그릇의 덕성을 이렇게 여덟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믿음의 뿌리가 단단하다. 둘째, 그 마음이 소박하고 바르다.
셋째, 몸에 병의 고통이 없다. 넷째, 늘 부지런히 정진한다.
다섯째, 외우려는 마음을 갖추었다. 여섯째, 마음에 교만함이 없다.
일곱째, 정(定)과 혜(慧)를 성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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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째, 들은 것으로부터 지혜를 얻는 능력을 갖추었다.
아난은 이렇게 많은 장점을 고루 갖춘 그릇이었기 때문에 20여 년간 부처님을 시봉하면서 들은 말씀들, 경전들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받아 담고 지닐 수 있었다. 부처님은 이후로도 25년간 가르침을 계속 폈다. 그리고 그 동안 아난은 엎지른 물을 하나도 남김없이 주워 담듯이 가르침을 기억했다.
■ 여래의 그릇, 여래장(如來藏)
부처님이 아난을 그릇으로 선택한 시기는 설법을 시작한 지 20년이 되던 때였다. 이 무렵까지 부처님에게는 그릇도 없었고 급사도 없었다. 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사람들의 능력에 맞춰 얘기를 했고, 가르침을 주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급사가 필요했고 그릇이 필요하게 된 것일까?
부처님을 부르는 말 중에 여래(如來)라는 말이 있다. 깨달음을 성취한 채로 중생들에게 잘 오셨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것을 ‘여래의 법장(法藏)’이라고 부른다. 여래가 가진 보물창고, 가르침의 창고이다. 부처님이 하는 말씀들이 법이고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그런 가르침은 부처님의 말의 창고, 법의 그릇으로부터 나온다. 그 안에 담겨 있는 법의 총체, 그동안 하고 다녔던 말씀들을 통칭하는 표현이다. 가르침을 편다는 것은 여래의 장, 여래의 창고를 열어젖히는 일이다. 창고를 열고 그 내용을 남김없이, 감춤없이 제자들에게 건네주는 일이다.
그런 일을 해온 지 20년, 부처님은 다시 담는 일에 주목한다. 아난을 선택하여 말씀들을 남김없이 기억하도록 하는 까닭은 그 목적이 미래에 있기 때문이다. 미래의 중생들, 부처님의 가르침을 직접 들을 수 없는 중생들을 위한 배려이다. 아무튼 여래의 그릇, 부처님의 그릇으로부터 아난의 그릇으로 말씀과 기억을 옮기는 일은 그 후 20여 년 간 지속된다.
■ 여래의 그릇에서 아난의 그릇으로
부처님의 창고, 부처님의 그릇은 한약방에 가면 볼 수 있는 약장을 닮았다. 부처님은 가르침의 기능을 의사의 역할에 비유한다. 응병여약(應病與藥),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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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따라 약을 주는 일이라고 했다. 의사는 병을 치료하기에 앞서 환자의 병을 알아야 한다. 그 후 치료 방법을 선택하여 약을 지어 준다. 약의 재료들
은 빽빽하게 구분된 약장 안에 들어 있다. 감초처럼 많이 쓰이는 약재는 큰 서랍 안에, 귀한 약재들은 작은 서랍 안에 종류별로 분류되어 있다. 병에 따라 치료 방법에 맞춰 서랍을 열고 약재들을 꺼내어 약을 짓는다.
부처님이 했던 일이 그런 일이다. 약장을 열어 약을 지어 중생들에게 주는 일이다. 중생들의 고통을 진단하고 생각과 말을 골라 가르침을 조제한다. 그렇게 환자에 맞춰 조제된 가르침, 맞춤 가르침은 환자들의 고통을 치유하여 깨달음으로 인도한다.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 그 안에 담긴 생각, 부처님의 법은 계획된 것이고 정제된 것이다. 여래의 약장 안에는 귀한 약재들이 즐비하지만 감춰둔 약재는 없다. 여래의 약장은 중생들을 위해 열린, 공개된 창고이기 때문이다. 약을 아끼지도 않지만 치료를 멈추지도 않는다.
그러나 여래의 약장을 열어 약을 짓고 병을 치료하는 일이 무한히 이어질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의사가 사라지면 치료도 사라진다. 약장도 사라지고 약장 안에 담긴 약재들도 뿔뿔이 흩어져 버린다. 부처님이 걱정했던 일이 바로 그런 것이다. 언젠가 열반에 들 때가 올 것이다. 부처님의 그릇이 깨지는 때이다. 부처님의 그릇이 깨지면 말씀과 가르침도 함께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을 담아 둘 그릇이 필요하게 되었다. 의사가 떠나도 약장과 약재가 건재하다면, 의사가 조재하던 처방들이 남아 있다면, 치료도 계속될 것이고 덕분에 중생들은 건강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때에 세존이 아난에게 고하여 말씀하셨다.
“너는 고통스러워하면서 ‘하늘과 사람의 스승께서 열반에 들게 되면 이제 다시는 해탈할 기약이 없다.’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내가 이야기했던 모든 법장(法藏)을 내가 열반에 든 이후에도 생각하고 받들어 지켜, 부지런히 수행 정진하면 머지않아 반드시 해탈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열어서 흘리는 일과 모아서 담는 일의 차이이다. 부처님이 하는 일과 아난이 하는 일의 차이. 부처님은 흘리고, 아난은 담는다. 그러는 까닭은 열반 이후를 준비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그릇으로부터 흘러나온 말씀들을 아난이라는 다른 그릇에 옮겨 담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일은 부처님의 그릇이 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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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때를 예비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열반에 들면 아난의 그릇에서 퍼내 쓰면 된다. 사람은 비록 평범하지만, 법은 부처님과 같다. 마치 병에 들어 있는 물을 전해 주는데, 흘린 물을 다른 그릇에 담는 것과 같다. 병은 비록 다르지만 흘리는 물은 한가지다.
■ 삼장의 결집, 여래의 법장을 지킨다.
아난이 법상에 올라 이제 막 돌아가신 부처님의 유훈에 따라 생전에 했던 가르침들을 결집하려는 바로 그 순간이다.
사부대중이 둘러앉고 부처님의 유훈에 따라 승단을 이끌게 될 가섭과 고명한 대덕들이 모여 있다. 게다가 도솔천에서 미륵이 내려오고 제석천과 범천왕까지 자리했다. 스승을 먼저 보내고 슬픔에 겨워 흐느끼던 아난은 어느 순간 그 입을 통해 부처님의 사자후가 울려 퍼진다. 부처님이 오래전부터 준비해 둔 일이다. 아난은 당당하고 밝은 빛으로 기억을 풀어 놓기 시작한다.
아난이 끝도 없이 경을 설하니
누구라 한꺼번에 기억할 수 있으리
내 이제 마땅히 세 가지로 분류하고
열 가지 경전을 한 노래로 부르리
경전이 한 부분, 계율이 둘째 부분, 아비달마 셋째 부분
과거 부처님도 셋으로 나눴으니, 경율론 삼장이라
경전은 마땅히 네 단으로 나누리니
젓째는 중일아함, 둘째는 중아함,
셋째는 장아함 영락이 무성하고, 잡아함 경은 마지막 네 번째
아난 존자 생각하니 여래의 가르침 망가지지 않겠네.
눈물이나 찔찔 짜던 아난이 아니다. 기억은 쏟아져 나오지만 치밀하고 주도면밀하다. 많이 듣고 총명한, 좋은 그릇, 아난의 진면목이다.
가섭은 부처님이 열반한 이후의 일을 책임질 실질적인 승단의 책임자이자 최고 지도자이다. 여기에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 온다. 이른바 ‘분반좌(分半座), 부처님이 자신의 자리를 가섭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말이다. 부처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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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는 법을 설하는 자리이다. 법을 설하는 자리를 나누었다는 것은 법을 나누었다는 의미가 있다. 이 일을 계기로 승단 내에서 가섭의 지위는 절대적인 권위를 지니게 된다.
지혜와 안목을 갖춘 가섭과 여래의 그릇 아난이 힘을 합해 말씀과 기억을 결집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름답고 좋은 일이다. 하지만 이와는 전혀 딴판인 이야기들도 있다. 훨씬 더 고통스럽다. 갈등이 있고 다툼이 있다. 가섭과 아난의 갈등과 아픔이다.
■ 그릇을 깨라, 말씀을 받아 내라
대가섭이 아나율(阿那律) 가전연(迦栴延)과 함께 의논하였다.
“아난이 부처님을 따른 지 가장 오래되어 혼자만이 부처님을 가까이 모셨습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침을 널리 펴셨지만 아난은 모두 기억하여 작은 일이라도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아난으로부터 법과 계율을 받아 자세하게 기록해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난은 아직도 공부하는 사람이어서 탐내는 마음이 남아 묘한 말씀들을 감추고 모두 이야기 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비구 스님들이 말했다.
“반드시 깨뜨려서 무너뜨려서 말씀들을 받아내야 합니다.”
이 이야기는 ‘간곡히 청하고 마지못해 응락하고’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니라 무엇보다 아난에 대한 강한 불신감을 밑에 깔고 있었다. (불반니원경의 내용)
첫째, 아난만이 유독 부처님과 오랫동안 친밀하게 지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기억들을 배타적으로 독점하고 있다. 은장묘어(隱藏妙語), 곧 묘한 말씀들을 몰래 감추고 있다.
둘째, 아난은 비록 많은 말씀을 들어 기억하고는 있지만, 아직 수행이 모자란 사람이기 때문에 욕심이 남아 있다.
셋째,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에 대한 기억, 말씀에 대한 기억들을 순순히 풀어 놓지 않을 것이다.
넷째, 아난이 감추고 있는 기억들을 듣기 위해서는 특별한 방법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
다섯째, 그런 특별한 방법에는 승단의 원로들은 물론, 대중 모두가 함께 대처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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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단의 거물들이 모여 공모한 내용이다. 이들은 합의 하에 이를 실천에 옮긴다. 먼저 대중들에게 아난의 허물과 의심을 공개하고, 대중들의 동의를 구한다. 그리고 대중들도 적극적으로 공모에 참여한다. 그렇게 공모하여 내린 결론은 우리가 아는 두타제일의 인격자, 대가섭이 했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천박해 보인다. 어리석은 아난 하나를 두고 벌이는 왕따 놀음 같기도 하고, 아무튼 수행자들이 하기에는 조금 비겁해 보이기까지 한다. 아무리 목적이 고상하다고 해도 말이다.
아난은 그릇이다. 그게 아난의 역할이고 아난이 부처님 옆에 딱 붙어 있었던 이유이다. 그릇의 역할은 담아 두는 일이다. 담아 두는 까닭은 언젠가는 꺼내서 쓰자는 것이다. 꺼낼 수도 없고 쓸모도 없다면 방법은 하나다. 그릇을 깨뜨려야 한다. 자발적으로 열지 않으니 억지로라도 깨뜨려야 한다. 우여곡절을 거쳐 드디어 아난이 말문을 연다. 기억들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내가 이렇게 들었다‘는 말 한 마디에 대중들은 새삼 부처님이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그렇게 아난의 그릇은 깨졌다. 그렇게 삼장의 결집이 시작되었다.
결집, 모으는 일의 뒷면에는 이렇게 깨뜨리는 일, 깨지는 아픔이 있었다. 옮겨 담기 위해서 겪을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아픔이다. 이처럼 모으는 일은 깨지는 일이기도 하다. 결집의 과정에 있었던 갈등에 관한 이런 이야기들, 사실 이런 이야기들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다. 말투나 내용이 거칠기도 하거니와 기록마다 어감에 사뭇 차이가 나기도 한다.
삼장의 결집이 아난의 기억을 중심으로 이뤄졌듯, 이후의 전승도 기억에 의존한다. 결집의 자리에 모였던 스승들, 그들이 기억했던 이야기들이 사람을 따라, 집단을 따라 옮겨 간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이나 집단 사이의 관계가 소원해지면 기억의 전승도 따라서 고립되게 마련이다. 삼장의 전승은 오랜 기간에 걸쳐 광범위한 지역에서 이뤄져 왔다. 어떤 기억은 넓은 지역에 오래도록 이어지기도 했고, 어떤 기억은 특정한 지역에 고립되기도 하였다. 당연히 기억의 전승에 미묘한 차이들이 생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대승과 소승의 이야기에 차이가 나는 것도 마찬가지다. 전승의 계통이 다르기 때문이다.
■ 또 다른 그릇 성중(聖衆)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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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聖衆 : 성중이라 불리던 스승들 즉 오백 아라한
* 아라한(arahan 산스크리트어) = 나한 : 수행자 가운데 가장 높은 경지에 오른 사람. 존경을 받을 만한 공덕을 갖춘 성자. 생사를 이미 초월하여 배울만한 법도가 없게 된 경지의 부처
한문대장경의 전통에서 결집에 관한 전승은 대개 세 가지 종류의 전거에 의존한다. 첫째는 아함경과 부처님 열반의 시기를 기록한 열반경 류. 둘째는 율장. 셋째는 대승경론의 전승 등이다. 열반경도 소승계열의 것과 대승계열의 것이 따로 전해 온다. 물론 내용에도 차이가 있다. 전승에 따라 내용에 차이가 나긴 하지만, 삼장의 결집이 가섭과 아난, 그리고 부처님의 제자들을 대표하는 아라한들의 합의하에 이뤄졌다는 이야기의 큰 줄거리는 변하지 않는다.
아난의 기억이 부처님의 자발적인 가르침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채워진 것이었다면 이들 성중의 기억은 자의반 타의반 갈등을 겪으며 깨뜨려져 나왔다. 아난이 스스로 이억을 내놓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성중의 삼장은 새로운 그릇, 여래표 공식 인증 그릇이 되었다.
가섭은 아예 아난을 배제시켜 버렸다. 그릇만 깨뜨리면 된다고 했다. 완전한 기억기계, 아난을 제쳐두고 기억력도 시원찮고 의견들도 분분한 대중을 선택했다. 가섭의 선택이라고 했지만 결집에 관한 기록들을 살펴보면 가섭과 대중은 늘 한 편으로 그려지고 있다. 가섭은 부처님과 대중이 함께 인정한 대중의 대표자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섭의 의견은 개인의 의견이라기보다는 종종 ‘가섭과 오백성중은’ 이라는 복수의 주어로 표현된다. 주어로만 따지자면 가섭과 성중은 당연한 선택이다. 여래의 법장, 45년간 설했던 숱한 얘기들, 그 얘기들은 대중에게 했던 얘기들이기 때문이다. 아난에게 해 준 얘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아난은 다만 그걸 담고 있었을 뿐이다. 그게 아난의 기능이고 아난의 역할이었다. 여래의 법장은 처음부터 대중을 향해 활짝 열려 있었다. 무소장적(無所藏積), 처음부터 갇혀 있었던 말씀, 비밀은 하나도 없었다. 법장의 진짜 주인은 대중이었다는 말이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그렇다. 여래의 법장은 중생들의 법장이다. 부처님이 누누이 했던 말이고, 아난이나 가섭, 오백성중도 다 아는 얘기다. 이처럼 법장은 아난이 독점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듯, 가섭의 오백성중이 독점할 물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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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아니다. 말세의 미래중생을 포함하여 모든 중생들이 공유해야 할 공통의 기억이다.
■ 모도잡아 다라니, 기억의 기술
* 총지여래장(總持如來藏)
총지 곧 ‘모도잡다’ 라는 말은 다라니(陀羅尼 dharani)를 번역한 말로 ‘기억하다’라는 말에서 유래
문지(聞持)는 곧, 말을 듣고 말을 기억하는 일이다. 보통 ‘받아 지니다’라고 번역하는 말도 마찬가지다. 말을 받아 지닌다거나 잡아 가지는 일 모두 잘 듣고 잘 기억한다는 뜻이다. 총지는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간, 조금 더 강한 표현이다. 놓치거나 흘리는 일 없이 몽땅 한꺼번에 기억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함경에는 총명한 제자들을 묘사하면서 박문총지(博聞總持), 곧 ‘두루 듣고 몽땅 기억 한다’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이런 표현들은 모두가 문자를 쓰지 않던 시절 입으로 얘기하고 귀로 듣던 시절, 기억 외에는 남길 방법이 없었던 시절의 유산이다.
총지는 말씀 전체를 체계적으로 몽땅 기억하기 위하여는 물론 특별한 재능이나 기술, 방편이 필요하다. 다라니는 그런 기술이나 방편, 나아가서 기술과 방편을 익히고 체득하는 과정을 가리킨다.
여래장은 여래의 그릇이다. 여래의 그릇을 몽땅 받아서 한꺼번에 기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아난은 증일의 법을 오롯하게 기억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총지, 여래의 가르침을 통째로 몽땅 기억할 수 있다고 한다.
사실 이런 식으로 따지고 들자면 불교는 그저 기억의 기술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기억하는 일이다. 그렇다고 그냥 들은 대로 기억하라는 것은 아니다. 특별한 방편, 특별한 기술을 통해 체계적으로 전체를 기억하자는 것이다. 모든 경전은 ‘여시아문 - 내가 이렇게 들었다’라는 말로 시작하여 ‘수근신기 신수봉행 - 근기에 따라 믿고 받아서 받들어 행하였다’라는 말로 끝난다.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는 말이 있다. 이런 것이 바로 기억의 기술, 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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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기술을 터득한 경지이다. ‘증일아함경’에서는 숫자를 따라 하나씩 더해 가는 기술이다. 그 기술에 전념하면 하나로부터 열하나까지 전체의 여래장을 기억하고 알게 된다.
실존했던 석가모니 부처님, 그의 법장은 그 자체로 온전한 전체였다. 모든 가르침이 석가모니로부터 나왔고 그에게 의존했다. 아난의 기능도 마찬가지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했던 말씀들을 온전히 전체로 기억하는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난의 기억을 다른 제자들의 기억과 구별하여 ‘법장을 담는 그릇’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이제 그 법장이 결집이라는 과정을 거쳐 성중의 기억으로 옮겨 갔다. 부처님으로부터 아난을 이어 온전한 근원으로서의 법장을 대중이 함께 통째로 기억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은 총지여래장, 모도잡이 기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 미래를 위한 설계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큰 원칙은 그냥 듣고 믿고 따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법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 여러 경전과 비교하여 허실을 따져보고, 계율과 법에 의거하여 본말을 헤아려 보아서 법과 상응하는지 위배되는지를 반드시 따져 봐야 한다. 경전이 법과 상응한다면 잘 기억하고 널리 이야기하고 지켜야 하지만, 위배된다면 기억해서도 이야기해서도 안 되고 당장 잊어버려야 한다. 이것이 가르침을 따르는 큰 원칙이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여러 대중들이 나에게 원하는 것이 있는가? 어떤 사람이 ‘내가 대중들을 지키고 다스린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대중들에 대하여 가르침이나 명령이 있어야 할 것이다. 여래(如來)는 ‘내가 대중들을 지키고 다스린다’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어찌 대중들에 대하여 가르침이나 명령이 있겠는가? 아난아. 내가 법(法)에 대해 이야기한 것은 안팎으로 모두 다 끝냈다. 그래도 내 스스로 소견(所見)이 통달했다고 한 적은 없었다. 나는 이제 늙어 나이가 팔십이나 되었다. 마치 낡은 차를 방편으로 고쳐서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처럼 내 몸도 마찬가지로 방편의 힘으로 잠깐 더 목숨을 연장하고 있다. 내 힘으로 정진하여 이 고통을 견뎌냈다. 모든 생각을 끊고 무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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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想定)에 드니 그때 내 몸이 편안해지고 괴로움과 근심이 사라졌다. 그러므로 아난아, 의당 자신의 불을 밝히고 법의 불을 밝혀야 하며 다른 불을 밝혀서는 안 된다. 의당 자신에게 돌아가 의지하고 법으로 돌아가 의지하며, 다른 것에 돌아가 의지하여서는 안 된다.”
자등명(自燈明) 법등명(法燈明).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아 자기 자신과 법에 귀의해야 한다는 부처님의 마지막 유언으로 널리 알려진 구절이다. 솔직하고 간결하고 단호하다.
어느 문명세계나 나름의 신화와 전설들을 전통으로 이어오고 있지만 불교의 상상력은 말 그대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물론 그런 상상력의 중심에 부처님이 있다. 그가 평생에 했던 숱한 이야기들이 있다 탄생으로부터 큰 깨달음을 거쳐 특별한 교화의 방식으로 오랫동안 숱한 사람들을 이끌고 길러왔던 부처님이다. 신통력이나 상상력으로만 따져도 부처님은 그 방면의 초절정 고수이다. 그러나 그가 보여 주는 마지막 모습은 평범하다 못해 초라해 보인다. 신격화나 우상화 따위의 여지는 눈꼽만큼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런 몸을 이끌고 부처님은 아난에게 얘기 한다.
“법에 관한 이야기는 안팎으로 모두 다 했다.”
다 끝난 이야기, 그 이야기들을 모도잡아서 법장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한 방울의 흘림도 없이 아난이라는 그릇에 담겨 있다. 미래를 위한 준비는 모두 끝났다. 법에 비추어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실천할 수만 있으면 된다. 이외에는 달리 부처님도 필요 없고, 교주도 필요 없고, 교단을 이끌 노승도 필요 없고, 하물며 늙고 망가진 노인네는 더더욱 필요 없다. 이 마지막 유언을 빼놓고는 유별난 신통력도 가피력도 아무것도 소용이 없다. 이것만이 미래의 중생들을 위해 예비한 일이다.
모도잡아 여래장, 아난은 숙련된 옹기장이가 그릇을 빚듯, 삼장을 빚어 대중들에게 들려주었다. 대중의 기억 속에 통째로 남은 부처님의 법장, 아난과 가섭, 오백아라한은 법장에 기대어 허실을 따져 보고 본말을 헤아리는 일, 이 일을 위해 삼장을 정교하게 설계하고, 설계에 따라 법장을 결집했다. 이로서 불교는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이 세상에 남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미래 중생들을 위한 준비도 이로써 모두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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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문장(聲聞藏), 보살장(菩薩藏), 그리고 대장경(大藏經)
총지여래장, 부처님이 평생 했던 모든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 전체를 통째로 기억하는 일, 앞에서도 잠깐 언급하고 넘어가긴 했지만,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그 많은 이야기들을 기억하는 일도 그렇거니와 ‘여러 경전으로부터 허실을 따져 보고, 계율에 의지하고, 법에 의지하여 본말을 깊이 헤아리는 일’은 더더욱 어려워 보인다. 아난이나 가섭은 특별한 사람들이다. 총명제일, 지혜제일 따위의 호칭이 그냥 생기지는 않을 것이다. 삼장의 결집이 미래의 중생들을 위한 것이라지만, 중생들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아난이 그랬고 가섭이 그랬듯, 그런 일은 특별한 능력을 가진 특별한 스승들의 몫이다. 하나도 빼놓지 않고 기억하는 일, 그리고 기억한 법의 창고로부터 따지고 헤아리는 일, 그런 일들을 법을 지키는 일이라고 했다. 그래서 삼장의 설계와 결집은 법을 지키는 일, 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사람들의 일일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교단의 엘리트들이다. 오백 명의 아라한, 이른바 성문(聲聞)의 무리들이다.
문수사리가 말했다.
“사갈라 용왕의 딸은 나이 여덟 살에 뛰어난 지혜로 중생들의 어려가지 행업(行業)을 잘 알았고, 다라니를 얻어서 여러 부처님들이 말씀하신 매우 깊은 비장(秘藏)을 모두 받아 지닐 수 있었다. 선정(禪定)에 깊이 들어 모든 법을 깨닫고 찰나의 순간에 보리심(菩提心)을 내어 물러서지 않았다.”
용왕의 딸 여덟 살 먹은 용녀는 아난 가섭을 비롯한 오백 아라한, 그리고 부처님이 생전에 가장 신임했던 측근 사리불도 함께한 자리에서 총지여래장을 바탕으로 선정에 들어 깨달음을 얻고 법을 결단할 수 있는 능력도 한꺼번에 보여준다. 어린 용녀가 부처님과 똑같은 깨달음을 성취했다는 말이다 가소로운 일이다. 모두 그를 타이른다.
그때 모인 대중들은, 용녀가 순식간에 남자로 몸을 바꿔 보살의 수행을 모두 마치고 남쪽 무구세계(無垢世界)로 가서 보배 연꽃에 앉아 등정각(等正覺)을 성취하고, 삼십이상(三十二相) 팔십종호(八十種好)를 갖추어 시방(十方)의 중생들을 위해 묘한 법을 연설하는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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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가 실려 있는 ‘법화경’은 이른바 대승의 경전이다. 용녀가 서원했던 일도 대승의 가르침이고, 가고자 했던 길은 보살의 길이다. 어린 용녀가 사리불에 맞서듯 대승의 경전들은 성문이 주도했던 삼장의 결집에 맞서 있다. 용녀의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주체는 문수사리보살이다. 아난이나 가섭, 성문의 무리들은 실존했던 근거라도 분명한 분들이다. 문수사리는 성문의 무리들과 존재하는 방식 자체가 다르다. 문수사리는 오랜 옛날, 불교식으로 표현하자면 무량무변 불가사의의 아승지겁 이전에 부처를 이뤘던 분이다. 사백사십만 년 동안을 살면서 숱한 중생들을 제도했다고 한다. 부처님이 가섭에게 해 주는 이야기다. 가섭과는 체급 자체가 다르다는 말이다. 문수사리는 환상적인 숫자와 환상적인 이야기로 포장된 환상적인 존재이다.
이와 함께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 80년 전후를 오고가던 숫자들이 갑자기 헤아릴 수도 없는 아승지겁으로 확장된다. 왕사성이나 사위국처럼 익숙하던 동네를 벗어나 수미산과 용궁을 오고 간다. 이런 얘기들을 어떻게 읽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사리불이 용녀 앞에서 말을 잊었듯, 사리분별에 익숙한 사람들, 성문의 삼장에 익숙한 사람들도 말을 잊을 수밖에 없겠다. 이거 부처님이 한 말 맞아? 유언대로 법에 견주어 스스로 판단해 볼 도리밖에 없겠다.
대승의 경전에서는 이런 법장을 아난과 가섭의 법장, 곧 성문의 법장과 구별하여 보살장이라고 부른다. 대승이니 소승이니 하는 말이 후대에 나왔던 말이듯, 성문장이니 보살장이니 하는 표현들도 후대에 나온 말이다. 아니 대승경전의 입장에서 보자면 후대라는 말도 맞지 않는다. 문수사리의 경우를 보더라도 대승의 이야기들은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어 있기 때문이다. 시공의 한계를 넘든 말든, 어쨌든 아난과 가섭이 삼장을 결집하던 순간에는 없었던 표현들이다. 시간과 공간의 한계 안에서, 실제로 존재했던 말에 대한 기억만을 따지자면, 대승의 법장은 황당무계하다.
이런 얘기는 밑도 끝도 없다. 한 번에 다할 수 있는 얘기들도 아니고, 아무데서나 아무렇게나 시비를 붙을 일도 아니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보살장이라는 새롭다면 새로운 법장은 부처님의 마지막 유언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성문의 권위에 기죽지 말고 법장에 기대어 자신이 ‘직접’ 허실을 판단하고 본말을 따져보라는 유언이다. 보살장도 그렇게 따져서 나온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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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아난이나 가섭, 오백성중이 그 자리에 있었건 있지 않았건,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들었건 말았건 그런 것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부처님의 법장이 의도했던 본말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말해 주어야 한다.
* 보살장 ; 대승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경전
* 성문장 : 소승의 “
* 전기록(傳記錄) : 부처님이 열반에 든 후에 제자들이 짓거나 모은 것 들. 三藏의 正典은 아니지만 부처님의 교화에 도움을 준다. 다섯 가지 종류가 있다. 전기록은 대승과 소승 모두에 통한다.
최초의 목판대장경인 개보대장경(송나라)은 ‘개원석교록’의 분류방식을 따라 조성되었다.
‘개원석교록’은 서기 730년에 저술된 목록이다. 저자 지승은, 서기 67년부터 664년간 번역, 저술된 문헌들의 집성이라고 못 박는다. 그것이 지승의 대장경이다. 초기의 고려대장경은 지승의 대장경이었다. 그의 목록에 따라 집성한 대장경을 복각한 대장경이기 때문이다. 가섭의 삼장이 지승의 대장경과 다른 까닭은 새로 결집한 기억들을 차례로 추가시켜 왔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대장경의 역사는 지승의 대장경에서 멈추지 않았다. 시간과 공간은 서기 730년, 당나라 장안으로부터 또 흐르고 확장됐기 때문이다. 고려대장경도 여러 차례 증보와 수정을 거쳐 해인사 팔만대장경으로 이어졌다. 마찬가지로 고려대장경만 대장경이 아니다. 산스크리트나 팔리어, 한문은 물론, 서하(西夏)나 서장(西欌), 몽고, 여진, 언해본 불전이나 현대의 한글대장경까지 숱한 언어 숱한 민족들이 대장경을 조성했다.
고려대장경의 목록 체계는 좀 복잡하다. 체계라고 하기에는 뭔가 부족하고 어수선한 부분들도 많이 있다.
■ 진화하는 그릇
성문장과 보살장, 거기에 후대에 저술된 현성집까지 대장경 안에 담긴 문헌들의 성격을 따져 보면 큰 그릇으로서의 대장(大藏)의 그림이 그려진다. 부처님이 직접했던 말, 경장(經藏)에서 시작한 그릇, 곧 藏의 역사가 아난의 다문장과 성문의 삼장을 거쳐 보살장으로 이어지고, 현성집으로 확장된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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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야기를 모두 담은 그릇이 바로 큰 그릇, 대장경이다.
* 현성집 : 대장경에는 대소승 삼장 외에, 후대에 저술되어 삼장의 구분에 포함시키기 어려운 문헌들을 ‘현성집’이라는 항목으로 나누어 포함시킴
대장경이라는 표현이 언제부터 쓰이기 시작했는지는 사실 명확하지 않다. 이전에는 이런 저런 장들을 묶어서 일체경(一切經)이라는 표현을 썼다. 물론 경장(經藏)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시간과 공간이 확장하면서 누적된 기억들을 몽땅 담는 것이다. 기억들을 결집하고 집성하는 까닭은 그 목적이 모도잡이, 총지여래장에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과 법의 총체, 오래도록 기억되어 중생들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흘림없이 몽땅 모아야 했기 때문이다.
아난으로부터 시작하여 가섭의 성중으로 이어지던 기억의 역사는 몇 차례의 논란과 결집을 거쳐 확장되고 변화된다. 세월이 가면서 양적인 변화와 함께 질적인 변화가 이루어지는데 가장 큰 변화는 기억을 문자로 기록하기 시작하면서 시작됐다. 소통의 수단이 말로부터 글자라는 매개를 거치게 됨으로써, 소통하는 방식이나 생각하는 방식도 함께 바뀔 수밖에 없었다. 소리를 통해, 귀를 통해 직접 소통하는 일과, 글자의 매개를 통해 빛과 눈으로 소통하는 일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인쇄술의 등장은 문자의 그릇이 가져온 변화만큼이나 큰, 후대에 끼친 영향으로만 치자면 오히려 훨씬 더 큰 변화를 초래했다. 불교문헌의 역사에서 인쇄술은 곧 목판인쇄술을 의미한다.
* 10세기 전후, 중국의 방산석경, 우리나라의 화엄석경 등 석판인쇄술도 있었고, 이어진 목활자나 금속활자의 발명도 있었지만 목판인쇄술의 영향력은 아주 크다.
* 1450년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서구사회에 매체혁명과 지식해방을 가져왔다면, 불교문헌 나아가 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는 그와 비슷한 일이 10세기 목판인쇄술에서 벌어졌다고 할 수 있다.
불교문헌 인쇄술은 20세기에 들어와 일본 ‘대정신수대장경’의 조성을 계기로 불교문헌을 다루는 방식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이는 근대식 장정으로 출간함으로써 데이터의 선정, 교정, 분류 방식 등을 합리적으로 개선시켜 국제적 표준의 성격과 지위를 지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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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의 장, 그릇의 역사에서 빠뜨리기 쉬운 또 하나의 장이 있다. 선불교(禪佛敎)가 만들어 낸 이야기들, 선장(禪藏)이라는 범주 안에 들어가는 기억의 역사이다. 이른바 언어도단(言語道斷) 심행처멸(心行處滅), 언어의 길이 끊기고 마음이 움직이는 자리가 사라진 세계, 그래서 삼장이나 대장경을 ‘부처의 말’이요. 말의 흔적일 뿐이라는 사람들의 기억들이다.
이들의 기억은 양만 따져도 대장경 안에 담긴 보살장(菩薩藏)보다 크고, 후대에 끼친 영향, 특히 동북아시아 한문문화권에 끼친 영향은 강하고 진하다.
아무튼 이제 컴퓨터와 인터넷 이른바 디지털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그릇의 시대이다. 그릇 이야기가 새삼스러운 것은 우리가 사는 시대가 바로 그릇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디지털이라는 요령부득의 그릇으로 인해, 그릇의 세계가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폭발적으로 요동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그릇들을 불편하고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담고 담기는 환경,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 질과 양에서 너무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이른바 진화하고 있다.
《 제2장. 대장경, 기억을 찾아가는 모험의 역사 》
■ 구스리 바회예 디신
다음은 2007. 4. 3 세종문화회관, ‘고려대장경천년의 해 선언식’ 행사에서 당시 공동준비 위원장 이었던 이어령 선생의 기조연설의 일부이다.
저는 새천년, 세계가 모두 축하했던 기독교의 밀레니엄 행사를 한국에서 총 주관했던 새천년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천년이라는 말이 한국인에게 있어선 기독교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깊은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고려 가요를 보면 ‘즈믄 해’라고 하는 말이 나옵니다. 이제는 잊어버렸지만, ‘하나’ ‘열’ ‘온’그 다음에 ‘천’이 순수한 우리나라 말로 ‘즈믄’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한자의 영향 밑에서 천 단위까지 못 가고 백 단위 ‘온’에서 우리나라 말을 잊어버렸지만 고려 때의 가요를 보면 ‘천’을 의미하는 ‘즈믄’이라는 순수한 우리말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오늘 고려대장경 초조본 발원한 지 천 년을 기리는 것은 바로 즈믄 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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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있어서의 영원한 한국인의 하나의 정신적 단위였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려가요에는 “구스리 바회예 디신 긴힛 그츠리잇가” 구슬이 바위에 떨어진다 하더라도 그 끈이야 끊어질 리야 있겠습니까? “즈믄 외오곰 녀신 신(信)잇 그츠리잇가”천년을 혼자 외롭게 지낸들 님과 나와 맺어진 그 사랑의 끈이야 끊어질 리가 있겠습니까? 하는 아주 아름다운 시가를 남기고 있습니다.
그 증거로 우리는 고려대장경 천 년의 끈, 천 년이라고 하는 한국인의 영원의 단위였던 그 천년의 해가 지난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것도 바로 그 고려가요에서 연년이 읊어지던, 하나하나의 구슬은 깨어져 사라져도 그것을 맨 끈은 끊어질 리 없다는 그러한 끈으로 하여 오늘 우리는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역사 교과서에도 실려 있듯, 천 년 동안 소실되어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던 대장경, 깨어져 흩어진 구슬처럼 이리저리 흩어져 고향에서는 존재조차 잊혀졌지만, 타국의 수장고에 감추어져 있다가 천 년의 생일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오는 사연.
구슬이 바위에 떨어진들 끈이야 끊어지리까.
천년을 외롭게 지낸들 믿음이야 끊어지리까.
고려 초조대장경을 비장(秘藏)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초조대장경이 일본의 한 사찰 수장고 안에 감춰진 채 오랜 세월 동안 그 정체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본 교토에 있는 남선사라는 사찰이다. 바로 그 남선사의 비장(秘藏)에서 초조대장경의 일부를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에 산질(흩어져)되어 전하던 초조대장경을 발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1965년, 이때가 한국 학자에 의해 초조대장경의 존재가 처음으로 확인되는 순간이다. 이때까지 초조대장경은 공식적으로 ‘몽고군의 침략 때 소실된 대장경’이었다. 물론 이전부터도 일부 학자들 사이에는 초조대장경 인쇄본의 일부가 일본에 보존되어 왔다는 정도는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보지 않으면 알 수도 없다.”
고문헌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하는 말이다. 고문헌이라는 것이 어디 여기저기 널려 있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란다. 한 개밖에 없는 물건이라면, 그런데 볼 수가 없다면, 물론 알 수도 없다. 물건을 가진 사람이 내어 놓지 않으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보지 않으면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고 이론도 없고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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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도 없다. 초조대장경이 그랬다. 한 번 본 이후로 이 땅에서 발굴된 초조본만 해도 삼백 권에 달한다. 그때 남선사 스님들이 비장을 열어 초조본을 공개하지 않았다면, 아직도 그저 그런 오래된 두루마리려니 했을 것이다. 알고 보니 오리가 아니라 백조였던 셈이다. 실제로 그 두루마리들은 그 뒤에 국보가 되고 보물이 되었다.
일본에는 5만여 종이 넘는 우리 문헌들이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그 가운데 적지 않은 자료들이 아직도 공개되지 않은 채 이곳 저곳에 비장되어 있다. 그래도 이 정도나마 윤곽이 드러난 것도 일본의 한 학자가 오랫동안 절치부심 자료를 정리한 결과이다. 이 땅에서 출간된 문헌들, 지난 날 우리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자료들이다.
얼마 전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선덕여왕 이야기, 이런 상상력조차 일본 어딘가로 유전하던 이야기책에서 얻어 온 것이라고 한다. 초조(初雕)라는 말은 ‘처음으로 새긴’이라는 말이다. 목판에 도장을 새기듯 글자를 새기고, 도장을 찍듯 찍어서 책을 만드는 이른바 ‘목판인쇄술’로 만들었기 때문에 ‘새겼다’고 부른다. 초조대장경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고려 현종 2년(1011)에 새기기 시작했던 목판대장경으로, 송나라 개보대장경(開寶大藏經)에 이어 역사상 두 번째로 새겨진 대장경이다. 이 대장경을 초조 ‘처음 새긴 대장경’이라 부르는 까닭은, 두 번째로 새긴 재조 대장경이 있기 때문이다. 해인사에 보존되어 있는 팔만대장경이 그것이다. 세간에서는 보통 해인사의 대장경을 그냥 고려대장경‘이라고 부른다. 굳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겠다. 그것도 ’고려시대에 만들었던‘ 대장경이기 때문이고, 넓은 의미로 고려대장경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일반 사람들이 보통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을 고려대장경이라고 부르는데 비해, 학자들은 초조대장경과 재조대장경 그리고 그 중간의 교장(敎藏)이라고 부르는 또 다른 대장경(속장경)을 합하여 ’고려대장경‘이라고 정의한다. 우선은 이런 정도로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천 년의 세월이다. 말도 많고 사연도 많을 수밖에 없다.
고려대장경 연구소에서는 2004년부터 2010년까지 일본 교토의 하나조노대학 국제선학연구소와 공동으로 ‘초조대장경 디지털화사업’을 추진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지원으로 추진된 이 사업의 핵심은 남선사 소장 초조대장경 인쇄본 1,800여 권과 국내 소장본 300여 권을 정밀하게 촬영하고 조사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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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었다. 연차적으로 촬영한 디지털 이미지들을 기반으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 2008년부터 인터넷으로 서비스를 하고 있다.
지금은 ‘책 권’이라고 부르는 글자는 원래 ‘두루마리’를 의미했다. 고려대장경을 만들던 당시에는 인쇄한 종이들을 길게 이어 붙여 두루마리로 만들어 유통하였다. 초조대장경은 6,000여 권의 두루마리 책으로 구성된, 큰 규모의 총서이다. 현재까지 남선사의 1,800여 권과 국내 소장본 300여 권, 그리고 이외에도 일본 대마도에 600권 정도가 확인되고 있다. 이들을 다 합하면 3,000권에 가까운 분량이 된다. 초조대장경 전체 분량의 절반에 육박하는 양이다.
목판은 타버렸지만, 그 인쇄본은 절반이 멀쩡하게 남아 있었다. 생각할수록 기이하고 고맙다.
■ 한문대장경
고려대장경은 ‘Tripitaka Koreana' 즉, 고려삼장과는 어원도 의미도 다르다. 대장경은 한자 문화권에서 생겨난 새로운 용어이다. 삼장은 물론이고 인도에서 저술되어 번역된 문헌과 이후 한문으로 저술된 문헌들을 포함하는 더 포괄적인 결집의 소산이다. 대장경은 인도나 남방불교에서 사용하는 트리피타카의 전통과는 엄연히 다른 새로운 체계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일본 학자들이 남방불교의 팔리삼장을 ‘팔리대장경’이나 ‘남전대장경’이라고 표현했던 것도 비슷한 오해를 불러 일으킨다. 대장경이라는 말과 삼장이라는 말을 굳이 구별해야 한다고 강조를 하는 까닭은, 대장경을 삼장과 동일시하게 되면 대장경이 지닌 특성들을 무시하거나 간과하게 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대장경이라는 용어가 보편적으로 쓰이게 된 것은 10세기 목판대장경이 출현한 이후라고 할 수 있다. 이전에는 일체경(一切經)이라는 표현을 주로 썼다. 초조대장경본을 다수 포함하고 있는 일본 남선사의 대장경도 공식 명칭이 ‘남선사일체경’이다. 이후 10세기가 흐르도록 대장경이란 용어 자체에 대해 정의를 내리거나 구체적으로 집어 의심을 한 사람은 없었다. 다만 대장경 안에 들어 있는 문헌들의 성격에 준해, 전통적인 삼장에 일부 중요한 문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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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포함시킨 ‘불교문헌의 집성’ 정도의 공감이 있었을 뿐이다.
대장경을 불교라는 특정 종교의 성전(聖典), 또는 성전의 집성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굳이 틀렸다고 할 필요까지야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런 선입견이랄까 오해로 인해 오랜 세월에 걸쳐 축적된 숱한 이야기들이 속된 말로 도매금으로 넘어가는 경향이 있었다. 경(經)이라는 글자가 주는 선입견이 주된 원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삼장의 하나인 경장은(經藏)은 분명 불교의 교주 석가모니가 직접 했던 말씀들, 세속적인 의미에서 성전이라 불러도 무방하겠다.
고려대장경 안에는 삼장에 속하지 않는 문헌들 가운데, 인도와 서역에서 저술한 문헌 68종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 가운데 46종이 경(經)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대장경의 역사가 계속 발전하여 대장경을 새로 조성해야 할 필요가 생길 수 있다면,미래의 대장경 안에는 기독교의 신약성서라든지 이슬람의 코란 등은 물론이고, 종교간의 대화나 논전에 대한 기억들이 포함될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때도 이런 기억들을 통칭하여 경(經)이라고 부를 것이다.
실제 근대에 들어 일본 대정신수대장경을 편찬하면서 경교(景敎)의 문헌 3종을 대장경 안에 포함시켰다. 중국 당나라 때 장안으로 들어와 정착했던 기독교의 일파, 이른바 네스토리우스 파의 성서들이다. ‘서청미시소경(序聽迷詩所經)’은 ‘메시아가 설한 경’이란 뜻으로, 역시 ‘경’이란 이름을 달고 있다. ‘경교삼위몽도찬(景敎三威蒙度讚)’의 삼위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三位)를 가리킨다 삼위일체를 찬양하는 찬송가이다. 이들 문헌들은 1900년 돈황 천불동에서 발견된 돈황 사본들이다. 프랑스의 펠리오가 거쳐 간 이후 프랑스에 보존되어 있다. ‘경교삼위 몽도찬’은 이후 곡을 붙여 찬송가로 사용되기도 했다.
묘신(妙身), 황부(皇父 ) 아라아(阿羅訶) 응신(應身) 황자(皇子) 미시아(彌施訶) 증신(證身) 노아령구사(盧訶寧俱沙)에게 경례합니다. 이상의 세 몸은 함께 한 몸으로 돌아갑니다.
* 訶 : 꾸짖을 가
7세기 기독교의 성경, 아라아, 미시아 등의 구절을 한문대장경 안에서 읽는 일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이런 문헌들을 대장경 안에 포함시키는 까닭은 이들이 불교의 석굴사원에서 대량의 불전과 함께 발견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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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으로 번역된 이들 기독교 성경들은 역시 한문으로 번역된 불전들과 아주 닮았다. 중동에서 유래하여 서구에서 단련된 기독교와 인도에서 유래하여 서역에서 단련된 불교가 당나라 장안에서 만났던 기억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개방적이고 역동적이던 서역과 장안의 지적 종교적 분위기도 담겨 있다. 대정신수대장경에 포함된 기독교의 성경들은 한문대장경의 전통을 충실히 따른 것일 뿐이다. 필요한 기억들을 사라지지 않도록 정리하여 후세에 물려주는 일이다.
어쨌거나 대장경의 경(經 )은, ‘수트라-경을 포함하여 기타 등등 불교를 기억하고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문헌들’ 정도로 애매하고 넓은 의미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저런 문헌들을 대표하여 ‘경’이라고 지칭했다는 말이고, 부처님이 했던 말씀으로서의 상식적인 경전이나 성전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애매해 보이는 표현은 삼장의 결집으로부터 시작된 독특한 지식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말에는 생각이 담기고, 기억이 담긴다. 그리고 생각이나 기억은 다시 부처님의 체험, 깨달음을 담는 그릇이다. 담고 담기는 일, 부처님은 말에다 생각과 의도를 담아서 얘기 하고, 제자들은 말을 받아서 말로부터 생각과 의도를 해독 해 낸다. 그리고 해독해 낸 생각과 의도를 자기 몸에 재현시키기 위해 실험을 계속한다.
그것이 수행이고 그 결과가 해탈이고 그렇게 가르침이 완성된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부처님의 가르침, 불교는 담고 담기는 일, 장(藏)을 매개로 부처님의 기억을 내 몸에 재현시키기 위한 실험, 끊임없는 시뮬레이션의 과정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릇에 담는 기술, 그릇에서 꺼내는 기술, ‘대비바사론’과 같은 초기 논서(論書)에는 그 같은 기술들을 자세히 논의하고 있다. 말하자면 ‘모도잡이 여래장’의 기술이다.
대장경은 부처님의 말씀에 대한, 말씀에 담긴 생각과 의도에 대한 기억들을 재현하기 위한 새로운 결집의 소산이다. 아난과 가섭의 시대에는 삼장으로서 모두가 만족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이 확장되면서 이에 따라 기억들도 확장되었다. 확장된 기억들을 위해서는 당연히 새로운 그릇, 삼장보다 훨씬 더 큰 그릇이 필요했다. 대장경이란 용어는 그런 요구들을 담고 있다. 미래로 갈수록 확장될 수밖에 없는 기억들을 충분히 담을 수 있는 큰 그릇이 대장(大藏)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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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초의 목판대장경에서 디지털 대장경까지
불교가 불교인 까닭은 이것이 가르침인 탓이다. 가르침은 언젠가 어느 누구가 했던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벌어졌던 현실의 일이고,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교리(敎理). 만고불변의 진리 앞에 가르침을 앞세운다. 진리를 얘기해도 가르침의 일부로서 이해한다. 가르침을 넘어서는 이치는 없다. 가르침의 역사를 저버리면 더 이상 불교는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가르침의 흔적, 가르침의 기억을 더듬어 사막과 설산을 헤맸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교(敎 와 리(理) 사이에 뒤집힘이 벌어진다. 보편의 진리에 대한 확신만 있다면, 더 이상 기억을 흔적들을 찾아 사막과 설산을 헤맬 필요가 없다. 손오공의 술법도 필요 없다. 여기에도 있는 진리를 찾아서 멀리 갈 필요가 있겠는가. 지금 이 자리에서도 마찬가지다. 기억의 흔적을 따르는 자들은 못난 자들일 뿐이다. 필요한 것은 기억이 아니라 기억을 살려내는 일이고, 내 몸에 실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 목판대장경
송(宋) : 개보장(開寶藏, 5048권, 971-983) ⇒ 숭령장(崇寧藏, 6108권, 1080-1104) ⇒ 사계장(思溪藏, 5940권, 북송 말년-1132) ⇒ 적 사장(磧沙藏, 6362권, 1225-1322)
고려 : 고려초조대장경(1011-1029) ⇒ 고려초조대장경( - 1087, 초조의 교 정증보 6000여권) ⇒ 고려교장(1094 전후, 고려 속장경 4-5천권) ⇒ 고려재조대장경(1236-1251, 해인사 팔만대장경, 6798권)
요(遼) : 거란장(1032-1055, 1062년 고려 문종 때 도입)
금(金) : 조성장(1149-1173, 6980권)
원(元) : 보령장(1277-1279, 6004권)
명(明) : 흥무남장, 1372-1398,7천여 권) ⇒ 영락남장(1408-1419, 6331권) ⇒영락북장(1421-1440, 6930권) ⇒ 경산장(1589-1676, 총 12600 여권)
일본 : 천해장(1637-1648, 6323권) ⇒ 황벽장(1669-1678, 7334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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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淸) : 청장(1735-1738, 7168권)
* 활판대장경
청 : 빈가장(1909-1913, 8416권) ⇒ 비릉장(20세기 초, 청장의 증각본)
일본 : 홍교장(1880-1885,8538권) ⇒ 만자장(1902-1905,6990권) ⇒ 만속 장(1905-1912, 7143권) ⇒ 대정장(1924-1934, 9006권)
* 디지털 대장경
한국 : 고려대장경 지식 베이스
일본 : 대정신수대장경
대만 : 대정신수대장경, 만속장경
■ 만국무쌍(萬國無雙)의 고려대장경
“당․송․원 세 나라의 대장경들이 오래 전에 우리 땅에 들어와 아직까지 훼손되지 않고 여러 지역 명산 고찰에 남아 있다. 그러나 이들 경본들은 지극히 아름답기는 하지만, 지극히 완전하지는 않다. 또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당,송, 원나라 20여 종의 대장경 외에 조선교정각판장본이 있다. 우리나라 여러 지역, 십여 사찰에 남아 있어 간간이 볼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아름다움의 극치일뿐더러 완전함의 극치이다. 만국에 견줄 데가 없는 완전한 경본이다.”
앞에 인용한 구절은 일본의 인징(忍澂 1645-1711)이라는 학승이 남긴 말이다. “지극히 아름답고, 지극히 완전한, 만국에 비길 데가 없는(萬國無雙)완전한 경본(經本)”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정토종의 승려였던 인징은‘심지관경’이라는 경전을 읽으면서 당시 일본에 유통하던 ‘황벽장’에서 다수의 오류들을 발견하고 교정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후 대장경의 대교(對校)를 필생의 대업으로 생각하다, 1706년부터 1710년까지 4년에 걸쳐 고려대장경과 명북장(明北藏)에 대한 대교를 완성하였다. 여기서 ‘조선교정각판장본’이 바로 고려대장경이자 재조대장경 곧 해인사 팔만대장경이다. 당,송,원 등 오랜 세월에 걸쳐 조성되었던 어떤 나라의 어떤 대장경도 고려대장경에 필적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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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도 인징 이전부터 고려대장경의 우수성에 대하여는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징은 어쨌거나 그와 같은 우수성의 심증을 대교를 통해 입증했다. 그렇기 때문에 인징의 찬탄은 남다른 데가 있다. 실제 ‘가장 정확한 고려대장경’이라는 우리의 자부심, 세계적인 평판 밑에는 인징의 노고가 있었다. 인징의 찬탄과 노고가 없었다면 고려대장경은 아직도 전설이나 신앙의 영역에 남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인징은 고려대장경을 ‘교정각판장본’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명칭은 교정본(校正本)이라는 측면과 목판대장경이라는 또 다른 측면을 묶어 지칭하는 것으로 고려대장경의 특성과 가치를 적절하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교정본이라 함은 대장경이 담고 있는 내용에 대한 평가이며, 각판장본이라 함은 내용을 담는 매체에 대한 평가이다.
고려대장경에 대한 인징의 평가는 두 가지 측면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 인징은 고려대장경이 다른 판본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무결한 교정본이라는 사실을 철저한 대교를 통해 과학적으로 입증했다. 이러한 과학적인 평가가 있었기 때문에 이후 일본에서 출간한 대장경들이 고려대장경을 저본으로 삼게 되었다. ‘만국무쌍의 선본’이라는 선언은 말하자면 ‘불교문헌의 표준화’ 선언이었다. 고려대장경이 국제표준 이를테면 글로벌 스텐다드였다는 말이다.
둘째, 고려대장경에 대하여 분명한 가치평가를 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만 하더라도 고려대장경이라는 명칭을 비롯하여, 팔만대장경, 초조, 재조, 속장경 등의 명칭이 있지만, 모두가 가치평가를 담고 있지 않다. 이에 반해 인징은 능소 양면에 걸친 고려대장경의 특성을 미와 선이라는 가치 기준으로 평가했다. 이것이 ‘교정각판장’이라는 명칭이 갖는 두드러진 의의이다.
* 능소(能所)양면
- 담고 담기는 관계
- 각판장 : 담는 것으로서의 능장(能藏)의 측면
- 교정장 : 담기는 것으로서의 소장(所藏)의 측면
■ 태워버려도 상관없는 물건
인징이 찬탄했던 고려대장경, 노사신(盧思慎)은 태워버려도 상관없는 물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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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고 주장한다. 대장경을 원하는 일본 사절에게 대장경을 주는 일은 쓸모 없는 물건을 ‘버리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유생들도 있다. 아마 조선의 유생들은 대부분 팔만대장경을 그저 태워 없애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대장경뿐만 아니라 이 땅에 있는 모든 불교 관련 문헌들을 일본이든 어디든 쓰레기로 처분하고 싶었을 것이다.
다만 그들의 관심은 이웃 나라에 쓰레기를 수출하는 데 따르는 도덕적 책임감만 있었을 뿐이다. 태워버리고 싶다는 욕망이 일말의 양심조차 압도해 버린 것인지, 아무튼 그들은 조선의 불전들을 몽땅 이웃에 버리고 말았다. 미혹한 무리들을 이끌어 줄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던 모양이다.
대장경이라는 키워드로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하면 150건의 결과가 나온다. 대부분 조선 초기에 집중되어 있다. 고려대장경의 운명이랄까, 조선시대 고려대장경의 지위를 단적으로 웅변해 주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기사들은 초기의 몇 건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대장경을 구하러 온 일본 사절에 관한 것들이다. 성종 때 피크를 이루다 명종 이후로는 단 한 건도 언급이 없다. 전쟁을 치르면서 일본과의 외교관계가 나빠진 까닭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더 이상 줄 대장경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졸라도 주어야 할 의지도 능력도 사라졌다는 뜻이다. 실제 중종 이후에는 우리나라에 대장경은 물론 변변한 불교 관련 책은 거의 씨가 말랐다고 해도 무방하다.
일본 사절들은 대장경 한 질을 얻어 가기 위해 별짓을 다했다. 그리고 그렇게 얻어 간 대장경을 방방곡곡의 사찰에 모셨다. 그런 연유로 만국무쌍이라는 찬탄도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비해 우리는 대장경에 대해 할 말이 없다. 스스로 원해서 버린 물건이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고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실제 최근 몇 년을 제외하고 대장경에 관한 ‘모든’ 연구는 일본으로부터 나왔다. 고려대장경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을 비롯해서 주변에서 모을 수 있는 자료는 다 모았기 때문에, 일본 외에는 연구를 진행할 자료조차 없었다. 일본이 불교를 숭상하는 국가라서가 아니다. 우리가 전쟁을 치르면서 가난에 허덕이는 동안 대국으로 성장한 일의 국력 때문만도 아니다. 우리는 정말 대장경에 대해 할 말이 없다. 우리가 스스로 버린 자식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쓰레기라고 치부하며 버린 자식이다. 몇몇 고지식한 유생들 얘기만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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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는 50여 부의 고려대장경이 남아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됐다는 월정사본 고려대장경도 19세기에 인출한 것이다. 데라우치 총독의 주도로 인출하여 그의 도장이 찍힌 대장경이 서울대 규장각에 남아 있고, 그 외에는 모두 1960년대 이후에 인출한 것이다.
사실 여기에 자식이란 비유가 적합한지도 잘 모르겠다. 천 년의 해를 맞아 우리의 찬란한 유산이라고들 하니 하는 말이다. 만국무쌍, 진미진선, 말이야 반갑긴 해도 솔직히 우리 입으로 따라하기엔 민망한 면이 있다.
■ 고려대장경은 짝퉁이다.
고려대장경 천 년의 해. 많은 얘기들이 오고 간다. 좋은 얘기들이다. 물론 고려대장경도 좋은 물건이다. 게다가 천 년의 생일 아닌가? 그렇다 해도 마냥 좋아할 일만도 아니고 마냥 자랑할 일만도 아닌 것 같다. 천 년을 앞두고 사람들 관심도 높아 가는데 자랑을 하더라도 알 것은 알고 할 일이다.
무엇보다 고려대장경은 짝퉁이다. 요즘 시쳇말로 치자면 말이다. 그것도 짝퉁의 본고장이라는 중국 물건의 짝퉁이다. 그나마 고려대장경이 안팎으로 칭찬을 받는 까닭은 오리지널보다 진화된 짝퉁이라는 점 때문이다. 오리지널은 남아 있는 것이 몇 개 안 되지만 짝퉁은 천 년을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짝퉁은 짝퉁이다. 흥분할 일은 아니다.
세계 문화유산을 두고 짝퉁이라니. 심하긴 좀 심했다. 그래도 이런 험한 말로 얘기를 시작하는 까닭이 있다. 우리 것에 대한 민족적 집착이랄까? 그런 감정이 점점 심해지는 것 같아서이다. 비단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지난 북경올림픽 개막식 때 장이모 감독이 인쇄문화를 주제로 연출했던 행사에는 신중국의 신중화주의라는 비판도 있었다. 세계의 손님을 모셔놓은 자리이다. 자랑이 지나치면 손님들 감정이 상하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좋은 감정을 감추기도 어렵다. 말은 좀 심했을지라도 조심할 것은 조심하자는 것 외에 다른 뜻은 없다.
- 고려 초조대장경은 송나라 개보대장경을 엎어 놓고 베낀 것. 그 후 두 차 례의 업데이트가 있었음
- 팔만대장경(재조대장경)은 초조대장경을 베낌, 초조대장경과 뒤섞여 있으 며 목록도 누더기 수준으로 체계가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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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사람이 쓴 것 같은 웅혼한 구양순체라느니 하는 팔만대장경의 글자꼴 에 대한 자화자찬도 송나라 오리지널에 돌아가야 할 찬탄임. 베낀 것은 베 낀 것이다.
- 고려대장경은 오자가 없다? 교정별록 즉 대장경을 교정한 기록에도 오자 자가 있다면?
고려대장경에도 물론 적잖은 오자들이 있고, 문맥이 맞지 않는 부분들도 있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랑할 일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부끄러워할 알도 아니다.
그래도 고려대장경이 상대적으로 정확도가 높은 것은 사실이다. 교정대장경이기 때문이다. 물론 고려대장경만 교정을 본 것은 아니지만 교정대장경이라는 사실에 대하여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겠다.
팔만대장경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대장경이란 얘기도 있다. 이것도 굴지의 중앙 일간지에서 본 얘기다. 뭐 생각하고 따지고 할 것도 없다. 오리지널 보다 더 오래된 짝퉁도 있을까? 한 발 물러서서 이해를 하자고 하면 말이 전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팔만대장경처럼 목판이 온전하게 보존된 경우를 따지자면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오해의 소지가 남는 말, 그런 건 피하는 게 좋겠다. 팔만대장경은 ‘온전하게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목판대장경이다. 초조대장경은 역사상 두 번째로 조성된 목판대장경이고, 팔만대장경은 송나라 대장경과 요나라 대장경, 금나라 대장경 등에 이어 새겨진 목판대장경이다. 2세기 이상 차이가 나니 줄을 서도 한참 뒤에 서야 한다.
사실 이런 얘기들은 어제 오늘 불쑥 튀어나온 얘기도 아니다. 일본이나 중국의 학자들이 누누이 했던 얘기들이고, 우리나라 학자들의 논문에서도 간간이 지적했던 얘기들이다. 그런데 어째서 아직도 짝퉁 자랑이 멈추질 않는지 모르겠다. 이런 자화자찬의 가장 큰 피해자는 어린아이들이다. 마냥 좋다는 말만 듣고 덩달아 자랑하다가 망신을 당할 날이 온다. 바야흐로 글로벌시대 아닌가? 짝퉁 들고 으스대다 글로벌 왕따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고려대장경은 그저 고려에 있었던 대장경이라는 뜻 외에 더 이상의 뜻은 없다. 대장경은 아시아인, 세계인의 공동 창작물이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이, 우리 선조가 혼자서 창조한 물건이 아니다. 우리가 고려대장경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아시아인, 세계인이 우리에게 그런 선물을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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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우리의 고려대장경을 자랑할 수 있다면, 그 까닭은 우리의 선조 고려인들이 받은 선물을 잘 포장하여 세상에 다시 선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기나긴 종교적인, 지적인, 문화적인, 기술적인 우호와 교류의 역사에 우리도 동참하여 한 수 거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몫을 주장하려 한다면 그저 그 중의 한 표만 가져 오면 된다. 고려대장경 목판을 우리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긴 시간을 몽땅 우리 것이라고 우길 수는 없다. 대장경은 우리 민족, 우리나라보다 더 큰 우리가 함께 만들고 가꿔 왔던 물건이다.
■ 숨은 그림 찾기
앞에서 고려대장경이 중국의 대장경을 베꼈다고 했다. 베낀다는 말을 한문 투로는 복각(復刻)이라고 한다. 고려대장경은 송나라 때 사천성에서 새긴 개보대장경을 복각한 것이다. 순서대로 따지자면 초조대장경이 개보장을 복각했고 재조대장경은 초조대장경을 복각한 것이다.
지금 남아 있는 개보장은 10여권, 다행히 일본 남선사 일체경 가운데 개보장 ‘불본행집경’ 19권이 남이 있어, 같은 부분의 월정사 소장 재조본 19권 및 남선사 소장 초조본 20권(19권은 없음)의 내용을 비교해 보니 개보본과 재조본은 언뜻 보아 어느 게 어느 것인지 착각할 정도로 똑 닮았다. 특히 모양이 특이한 글자들을 꼼꼼히 비교해 보면, 같은 저본을 복각했다는 사실을 수긍하게 된다. 이미지를 잘 다룰 줄 아는 사람이라면 크기를 맞춰 겹쳐 보는 방법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개보본과 재조본 사이에는 몇 가지 분명한 차이도 있다. 사실 그 차이를 찾는 것이 이 놀이의 가장 흥미진진한 대목이다. 개보본을 복각하면서 뭔가를 새로 고쳐 넣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재조대장경을 조성할 때 했던 교정의 흔적들을 찾는 일이다.
개보본과 재조본을 비교한 그림에는 여러 개의 흔적들이 담겨 있다. 만국무쌍의 고려대장경, 그 비밀을 풀 수 있는 증거이고 누구도 지목하지 않았던 특징들이다. 이제는 고려대장경 지식베이스 사이트에서 입맛대로 골라볼 수 있다. 그 교정의 흔적들 다른 점을 찾는 것은 숨은 그림 찾기 놀이이다.
이 놀이는 일찍이 일본의 오노 겐묘가 1936년부터 시작해서 고려대장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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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 개보장의 ‘복각’이라는 학설을 제기했고, 이제는 학자들 사이에 정설로 통하게 되었다.
후일 금나라 때 새긴 조성장(趙城藏)의 제 19권도 고려대장경과 닮아도 너무 닮았다. 같은 저본을 바탕으로 복각을 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고려 제조대장경에는 대략 삼백여 명 정도의 판각자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담겨진 이야기에 대해서도 대략 그 시대의 왕조, 편역자의 출신지역 및 이름 등 89%가 이런 규칙에 따라 기록했다. 이런 규칙성은 개보장(송), 금장(금) 등 어느 나라의 대장경에 비해 고려 재조대장경의 확연히 드러나는 특징이며 무엇인가 의도가 담겨 있다.
재미삼아서 재조대장경 편역자 표기에 등장하는 출신 지역들을 골라서 소개해 본다. 강거국, 게빈국, 안식국, 오장국, 부남국, 남해파릉국, 우전국, 황룡국 등 낯선 이름들이다. 이들 이름들을 현재의 위치와 대조하여 보면 아시아 전역에 걸쳐 넓고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름은 낯설어도 뿌리가 있고 근거가 있는 이름들이다.
앞에서 얘기했던 개원석교록에는 664년 동안 활동했던 176명의 번역자들에 대한 ‘매우 상세하고 흥미진진한’ 전기(傳記)를 소개하고 있다. 이들에 대한 기억은 이외에도 고승전이나, 사전류, 주석서 등의 사이사이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이들을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해야 하는 까닭은 이들이 없었으면 대장경도 없고, 불교에 대한 기억도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별을 보고 눈을 밟으며 줄지어 오고가면서, 참된 가르침을 거듭 번역하여 크게 선양했습니다. 그 공이 참으로 크고 그 이익이 참으로 넓었습니다.”
‘별을 보고 눈을 밟으며’ 사람들은 그곳에서 이곳으로, 이곳에서 그곳으로 오고 갔다. 별을 보는 까닭은 중간에 죽음의 사막이 가로막혀 있기 때문이다. 눈을 밟는 까닭은 설산을 넘어야 했기 때문이다. 오고 가는 일, 그 자체가 목숨을 걸어야 했던 모험의 시대였다. 저 많은 낯선 이름의 땅에서 기억을 챙겨들고 동쪽으로 온 사람들, 기억을 찾아서 서쪽으로 간 사람들, 이 모두가 그 사람들 덕택이라고 한다. 열아홉 살 대각국사 의천은 그 사람들을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아시아 전역에 걸치는 광범위한 지역, 무려 천 년 동안 이어진 모험가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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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렬, 그들이 주고 받은 기억 덕택에 대장경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 의천의 기억과 재조대장경의 규칙성을 바탕으로 상상을 해 본다면, 재조대장경의 편집자들은 낯선 동네와 낯선 이름들을 책 머리에 분명히 박아 두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을 수도 있겠다. 그들의 기억을 더욱 분명하고 확실하게 후대에 전하고 싶어 했다는 말이다.
대표적인 모험가 현장의 얘기로 돌아가 보자. 현장의 눈에 비친 서역의 풍속은 오랑캐들의 풍속이다. 출가한 스님이지만, 그의 눈에는 문명세계의 선입견이 시종일관 강하게 개입한다. 언뜻 보아도 불교적인 선입견이라기 보다는 우리에게 익숙한 유교적인 선입견과 닮았다. 다른 동네에 다른 사람들이 사는데 어찌 다른 풍속이 없겠는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텐데 대뜸 오랑캐 타령이다.
‘서유기’ 이야기는 오랑캐 풍습에 대한 극단적인 견해를 상징한다. 오랑캐의 풍속이 아무리 비루하다 하더라도 그래도 사람의 탈을 쓴 사람의 풍속이다. ‘서유기’, 저 이야기 속에서는 아예 사람의 흔적을 지워 버린다. 그래서 ‘서유기’에는 시점과 종점밖에 없다. 대당(大唐)의 서울 장안이 시점이고, 부처님의 나라 천축이 종점이다. 그리고 다시 부처님의 나라로부터 부처님의 기억을 가져 오는 이야기, 어찌 보면 ‘서유기’는 장안에서 시작해서 장안에서 끝난다고도 할 수 있다. 장안과 천축, 그 사이의 지역은 야만의 공간일 뿐이다.
당 삼장 현장은 장안으로 금의환향한 이후, 막강한 권력을 배경으로 대규모의 역경 사업을 야심차게 추진한다. 이 과정에서 천축과 서역의 기억은 대당 장안의 기억이 되어 간다. 대당삼장이 주도하는 일이다. 기억의 주인이 바뀌는 일이다. 사실일 리야 없겠지만 번역이 끝난 후 범어 원전을 완전히 폐기했다는 전설도 있었다. 한문으로 바뀐 기억. 이전의 기억은 잊고 싶다는 의도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실크로드는 끊기고 기억도 희미해졌다. 그곳은 사람이 살 수 없는 야만의 공간이 되었고, 가르침의 기억은 중원의 기억이 되었다.
그러나 편역자들의 분포, 낯선 동네의 낯선 이름들, 현장은 그저 그들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고려대장경을 비롯하여 한문대장경의 역사를 이끈 주체는 바로 저 길 위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전부 장안의 사람들이었던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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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그렇다고 천축의 사람들만도 아니었다. 대장경은 그 세계의 사람들, 그 길을 오고간 사람들이 함께 만든 공동의 기억이었다.
고려 재조대장경이 보여 주는 편역자의 표기 방식, 그 안에는 어쨌건 낯선 동네의 낯선 이름들, 그 이름들에 얽힌 세계에 대한 기억이 담겨 있다. 세계에 대한 그리움과 열망, 그리고 그 세계와 소통하기 위해 떨쳐나섰던 모험가들의 이야기들이다. 대장경을 펼치면 그런 이름들과 다시 만나게 된다. 고려의 사람들도 대장경을 통해 그런 세상을 꿈꾸었다. 한문의 세계만이 아니다. 그 세계는 만리장성과 서역의 관문, 타클라마칸 사막과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로 페르시아로 터키로 이어지는 광대한 세계였다. 대장경이 없었다면 알 수도 없었던 이름과 세계,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그런 이름이 가져다주는 그리움과 간절함은 여전히 생생하다.
2011. 3. 18 (금) 제 1 부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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