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니까 청춘이다 (2)

2011. 7. 18. 12:19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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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니까 청춘이다 (2)

               - 인생 앞에 홀로 선 젊은 그대에게 - 


■ 김난도 지음


Part 3    기적이란 천천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 작심삼일 당연하다,

   삶의 방식이란 결심이 아니라 연습이니까.


인터넷에 떠도는 유머 한 토막.

어느 초등학교 국어 시험에 다음과 같은 문제가 나왔다.

<‘결심한 마음이 사흘을 가지 못하고 곧 느슨하게 풀어져버리는 것’을 무엇이라고 할까요? 다음 □안에 들어갈 말을 쓰세요.  작□삼□ >

답은 물론 ‘작심삼일(作心三日)’이다.

그런데 어떤 학생이 이렇게 적었단다. 작(은)삼(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 집에 ‘작은 삼촌’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맞아, 맞아!” 하며 박장대소한다. 생각해보면 정말 그렇다. 대체로 집집마다 작은삼촌들이 문제다.

그대 역시 이런저런 결심을 했다가, 며칠 못 가서 흐지부지해진 경험이 있을 것이다. 아침마다 운동을 하겠다든지. 하루에 몇 시간씩은 꼭 영어 공부를 하겠다든지. 담배나 술을 끊겠다든지……. 하지만 그 결심이 며칠이나 갔던가?

그대가 가장 최근에 했던 결의가 무엇인지 떠올려보라. 이번에 처음인 것인가? 아마도 아닐 것이다.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결심은 과거 언젠가 했던 것을 반복이다. 그것도 여러 번의 작심삼일을 거친…….

학기초엔 그렇게 붐비던 도서관이, 시간이 지날수록 빈자리가 많아진다. 월초마다 빠지지 않겠다고 그렇게 다짐하며 등록했던 학원 새벽반을 거르기 위해 얼마나 창의적인 핑계들을 스스로에게 만들어내야 했던가? “내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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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달라질 거야!”라는 작심삼일을 열 번 하고 나면 그대의 20대가 저문다.  


우리는 대개 무언가를 하기 위해 먼저 작심(作心), 즉 마음을 먹는다. 삶을 사는 방식이 ‘결의’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살아야겠다’고 굳건하게 결의하면 실천은 따라온다는 식이다. 그리고 그 실천에 실패하면 자신의 의지가 나약하다고 자책한다.

하지만 삶의 방식은 결의가 아니다. 연습이다. 마치 수영을 배우는 것과 비슷하다. 수영을 잘하는 법에 대한 책을 달달 외우고. “내일부터 수영을 잘 할 테다!”하고 결의하면 박태환 선수처럼 될 수 있을까? 물론 천만의 말씀이다. 수영을 잘하려면 연습해야 한다. 매일매일 연습하면서 조금씩 자기 자신을 바꾸어나가야 한다. 중간에 일이 생겨서 하루이틀 거르더라도 새롭게 마음을 다잡고 다시 시작해가면서.

아직 3일 연습해서 수영 잘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작심삼일 했다고 너무 자책하지는 말 일이다. 중요한 것은 처음의 결심을 며칠 실천하지 못했더라도 실망하지 않고 다시 계속해나가는 태도다. 공부, 금연, 절주, 다이어트 등 유혹을 이겨내야 하는 습관들은 결의로 해결해야할 문제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관리해나가야 할 문제다.


이 점을 받아들인다면, ‘오늘’이 중요해진다. 많은 사람들이 ‘내일’부터 실천하겠다고 한다. “오늘까지만 먹고 내일부터 처절한 다이어트에 돌입하겠어!”하는 식이다. 이 경우 “내일부터‘의 결의는 마음의 위안일 뿐이다.

수많은 작심삼일이 존재하는 진짜 이유는 그 결의가 실은 오늘의 나태를 합리화하는 방편이었기 때문이다. 연습은 많은 ‘오늘’들이 모여서 만들어진다. 내일은 없다. 그러므로 내일부터가 아니라 오늘 조금이라도 한번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 땅의 수많은 ‘작은삼촌’들이여, 결심이 아니라 연습을 시작하라. 오늘부터. 지금부터.


■ 혼자 놀지 마라       


이런저런 이유로 혼자 노는 것이 더 편한 친구들이 많아지고 있다. 학과행사나 단체활동에는 시큰둥하고 그냥 혼자 지내는 것이 더 편하다며, ‘아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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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를 자처한다. 내가 오랫동안 가르쳐 온 교양수업에도 혼자 수업 듣는 친구들이 옛날보다 무척 많아졌다. 공강시간, 점심시간을 친구랑 함께하느라 일정이 틀어지느니 차라리 혼자가 더 편하다는 것이다. 팀플을 할 때에도 옛날에는 기어코 친한 친구들끼리 조를 하려고 애를 썼는데, 요즘엔 “그냥 교수님이 짜 주세요.” 하는 친구들이 많다. 그렇게 팀을 만들어 제출하는 보고서에는 각자의 기여도가 10%, 40%, 50% 하는 식으로 적혀 있다. 커피 전문점에 가 봐도 노트북을 들여다보며 혼자 앉아 있는 젊은 친구들이 많다. 실로 ‘혼자 놀기’의 전성시대다.

하지만 문제는, 여전히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사회는 혼자 노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을 학습해야 한다. 혼자 놀면서 차곡차곡 스펙을 모아 취직하면 그만인, 그런 청춘은 없다. 오히려 중고등학교에서 배우지 못했던 다양한 인간관계를 체험해야 한다.


대학에 ‘자살방지 핫라인 전화’를 24시간 운영한다는 뉴스를 들을 때마다 정신이 아뜩하다. 싸이의 1촌이 수백 명이고 트위터 맞팔 상대가 수천 명인들 무엇 하겠는가? 자살을 생각할 만큼 절실한 고민을 밤새 들어줄 친구는 하나도 없는데 말이다.

그대 부대껴야 한다. 수시로 오프행사에 기웃거리고 얼굴을 내밀어야 한다. 스펙에 도움이 되는 클럽이 아니라, 사람 냄새가 물씬 나는 모임에 가입해야 한다. 설령 거지같이 재미없더라도 축제기간엔 학교에 나와 구경이라도 해야 한다. 구세대의 낡은 습관이라 여길지언정 직장 동료와 함께 밥 먹으러 움직이고, 상사의 ‘번개’도 재미라고 받아 들여야 한다.


나는 가끔 제자들의 주례를 서는데, 그때마다 주례사에서 빼놓지 않는 말이 하나 있다. 좋은 관계를 위해서는 역지사지(易地思之), 즉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단 부부뿐 아니라 사람 사이 모든 관계의 기본은 역지사지라고 생각한다. 간단하다. 남이 나에게 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말과 행동을 하고, 남이 나에게 했을 때 즐겁지 않은 짓은 하지 않는 것이다.

그대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한없이 미숙한 ‘귀한 자식’들이다. 서로가 마음에 들지 않고 설혹 갈등이 있다 하더라도. 그때마다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고 양해해줘야 한다. 좋은 친구란 그리고 변치 않을 인간관계란 어딘가에서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노력하며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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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혼자 놀지 말라. 혼자 밥 먹지 말라. 혼자 카페 가지 말라. 만약 제자들이 졸업장 말고 대학에서 또 가져가야 할 단 하나의 아이템을 말해달라면, 나는 단연 ‘좋은 인간관계’를 고르겠다. 왜 감정 없는 반쪽짜리 로봇이 되려고 하는가? 컴퓨터를 끄고, 이어폰을 빼고, 온 몸을 던져 사람들 사이에 그대를 내던져라.


■ 비린 듯 산뜻한 잉크 냄새로 아침을 맞으라.

요즘 친구들은 대부분 종이 신문을 읽지 않는다. 뉴스와 정보는 인터넷이나 TV를 통해 얻으면 되지 굳이 신문을 읽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기성세대들은 어른이 되고 나서 디지털 매체를 익히기 시작한 ‘디지털 이주민’인 반면, 요즘 젊은 세대는 어릴 때부터 익숙하게 디지털 매체를 사용해 온 ‘디지털 원주민’이다. 그러니 종이라는 매체보다 모니터라는 매체를 훨씬 더 익숙하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디지털 이주민의 푸념이 아니라, 인생 선배의 충언으로 말한다. 신문을 읽어보라. 신문은 그대가 ‘원하는’ 정보를 넘어, ‘알아야 할’ 정보를 가장 저렴하고 효율적으로 제공하는 매체다.

물론 인터넷 포털에 주요 일간신문의 기사들이 모두 실린다. 한 신문만 읽는 것보다 포털에서 이것저것 클릭하는 것이 다양한 견해와 정보를 얻는데 더 유익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한 신문을 정독하는 것이 포털의 여러 기사를 검색해 읽는 것보다 훨씬 장점이 많다.

인터넷뉴스의 근본적 문제는 ‘자기주도적’ 정보검색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포털 화면에 올라 있는 수많은 기사제목 중에서 재미있을 것 같은 기사를 클릭해 해당 내용을 읽는다. 읽을 내용을 자기가 결정하는 의미에서 인터넷 검색은 자기주도적이다. 자기주도적 검색의 가장 큰 문제는 자기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주제에 대한 정보만 접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편협한 정보만을 접하게 된다는 것이다.


반면 신문에는 내가 관심 없는 정보일지라도 일단 종이 가득 실려 있기 때문에, 요즘 무엇이 중요한 이슈인지 쉽게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자세한 내용은 읽지 않고 지면을 넘기더라도 기사의 제목이나 면 구성을 흘깃 넘겨보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맥락적 정보를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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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신문은 중요성에 비추어 다루는  기사의 양을 조정하므로, 얼마나 많은 지면을 차지하고 있는가를 보며 해당 이슈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인터넷 뉴스에 달리는 댓글이 이와 비슷한 기능을 하지만, 알다시피 댓글은 선정적인 이슈에 더 많이 달린다.           


신문을 처음 읽을 때는 익숙하지 않아서 불편하고 재미없다. 하지만 꾸준히 구독하여 신문 고유의 매체적인 특성에 익숙해지면 나름 아날로그적 기쁨도 느낄 수 있다. 그러니 적어도 한 종류의 신문을 정해 두고 꾸준히 정독하라. 요즘에는 신문사별로 논조가 극명하게 다르므로, 대조적인 견해를 싣는 신문 두 종류 정도를 함께 읽는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미디어가 곧 메시지다. 그대가 어떤 정보를 얻는가 하는 것만큼이나, 어떤 매체로 정보를 받아 들이느냐도 중요하다. 약간 비린듯하면서도 산뜻한 신문 잉크 냄새로 아침을 여는 청춘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신문은 여전히 힘이 세다. 


■ 글은 힘이 세다


그대가 어떤 일을 하든 반드시 익혔으면 하는 단 하나의 역량을 들라면, 나는 주저 없이 글쓰기 능력을 들고 싶다. 요즘에 대학 입시에 논술과목이 있어서 고등학교 때 글쓰기 훈련을 하고, 대학마다 교양과목에 글쓰기나 작문 과목이 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어느 정도 글을 쓴다. 하긴 유치원 때부터 한글을 배워왔으니 글 쓰는 교육을 받으라는 것이 새삼스럽기도 하겠다. 하지만 ‘제대로’ 혹은 ‘충분히 잘’ 글을 쓰는 사람은 많이 보지 못했다.

흔히 글을 잘 쓰는 것은 작가나 학자의 덕목이지, 본인하고는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특히 이공계나 예술계 쪽이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언뜻 글과 멀어 보이는 전공자가 글을 잘 쓰면 대단한 시너지 효과를 낸다.


여러분이 잘 아는 한비야 씨. 잘 다니던 직장 그만 두고 7년간의 세계 여행. 그리고 그가 쓴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 이라는 책은 단지 베스트셀러가 되어 돈을 벌고 이름을 나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의 꿈을 이루게 해 주었다. 월드비젼 구호팀장, YWCA선정 지도자 상, 환경 재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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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한 ‘세상을 밝게 만든 100인’에 선정 되는 등…….

하지만 만약 그의 글 솜씨가 아주 형편없어서 그런 책을 출간할 엄두를 내지 못했더라면, 그냥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한낱 여행객에 지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진정한 봉사가 그를 만들었다면, 글쓰기는 그를 우리에게 알린 것이다.


비단 한비야 씨뿐이 아니다. 생물학자 최재천 교수, 동양미술가 김병종 교수, 첼리스트 장한나 씨처럼 자기 전공에서 일가(一家)를 이룬 대가들이 명쾌한 언어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할 때, 그 울림은 예사롭지 않다. 또, 대가들만이 울림을 주는 것만도 아니다. 평범한 농부나 요리사, 선생님들도 자기 직업에서 느끼는 삶의 여러 가지 단편들을 소박한 글에 담아 우리의 마음을 두드릴 때도 많다.

이러한 감동도 감동이지만, 글쓰기가 필요한 더 큰 이유는 따로 있다. 자신을 가장 설득력 있게 표현하고 알리는 데 글만 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비단 소설가들에게만 좋은 글쓰기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대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이다.

글은 여러모로 힘이 세다.


책 한 권 쓸 수 있을 만큼의 작가 같은 글솜씨를 가지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키보드를 두드린다고 모두 글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쯤은 알아야 한다. 적어도 조리 있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해서 다른 사람을 설득시킬 수 있는 글은 쓸 줄 알아야 한다. 그대가 무슨 일을 하든 말이다.

글을 잘 쓴다는 것은 단지 표현의 문제가 아니다. 글을 잘 쓰려면 생각에 깊이가 있어야 하고, 논리와 구성이 탄탄해야 한다. 글을 잘 쓸 수 있으면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설득력 있게 자기를 표현할 수 있다. 이는 사회생활을 할 때 가장 필수적이고 중요한 능력이다.

그러므로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특단의 노력을 기울여 좋은 글을 쓸 수 있는 역량을 키워라. 그대가 어떤 전공을 하고 있든.

글은 여전히 힘이 세다.


■ 네 이웃의 지식을 다양하게 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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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깨달은 것이 두 가지 있다. 첫째, 세상에는 정말로 다양한 전공이 존재 한다는 사실. 둘째, 그 다양한 전공의 사회적 중요성은 보통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첫째, 세상에는 정말로 많은 전공이 있다.

요즘엔 대학마다 학과별보다는 광역화된 모집단별로 입시를 치르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잘 모르는 경우가 많지만, 대학에는 학과가 참 많다. 더구나 요새는 오래된 학과 이름을 새로 짓기도 하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학과의 정체성을 바꾸기도 해서, 새로운 명칭의 다양한 학과가 많이 생겼다. 특성화된 학과가 많은 전문대학에는 스마트폰학과, 통합예술치료과 같은 학과도 있다.

의류학과의 예를 들어보면

- 디자인 하는 예술가

- 패터닝(의복구성 : 몸에 맞도록 치수를 재고 패턴을 만드는)을 위한 통계    전문가

- 섬유의 특성을 연구하는 과학자

- 인체에 대한 기능 섬유만 연구하는 의학자

- 패션 마케팅 전문가

- 드라마의 복식을 연구하는 복식 사학자 등.

전공이 이처럼 다양하다 보니, 똑 같은 학과를 졸업하더라도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이 매우 다양하다. 여기에 복수 전공을 택해서 2-3개의 전공을 하게 된다면, 졸업 후 설계할 수 있는 활동 영역의 범위는 무궁무진하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도 특정 학과나 전공에 대해 많은 사람들, 심지어는 대학생들조차 편협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둘째, 이처럼 다양한 각 전공이 나름대로 사회적 기여를 하고 있는데, 그 양상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많이 다르다. 예를 들면 국어교육과 교수 한 분이 외국어에 매우 능통하고 해외 출장이 빈번해서 국어 교육에 왜 외국어가 필요하고 해외출장이 많으냐고 물었더니

- “국력향상, 한류 등으로 세계 각국에 한국어 전공을 설치하느라고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다.”는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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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전공에는 ‘서열이 있다’는 오해이다.

대학입시 때 배치고사 커트라인에 의한……. 그런데 일단 입학을 하고 나면 사회적으로 어떤 전공이 얼마나 중요하냐는 전적으로 해당 학과에 대한 수요와 공급에 의해 결정된다. 사회에서 많이 필요로 하는데 공급되는 전공자가 부족하면 ‘뜨는’ 학문이고, 사회의 수요보다 더 많은 전공자가 배출되면 ‘지는’ 학문이다. 이 간단한 수요-공급의 원리를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다.

전공과 직업의 관계에 대해 많은 이들이 갖고 있는 또 하나의 선입관, 예를 들자면 기자가 되려면 신문방송학과에, 변호사가 되려면 법학과에, 외교관이 되려면 정치외교학과에 가야 한다고 믿는 식이다. 반드시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이 역시 매우 폭 좁은 생각이다. 실제로 자연과학을 전공하고 과학분야의 전문기자로 활약하거나, 가족학을 전공하고 독보적인 가족문제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는 경우도 있다.

자기 전공의 가치에 대해 그대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지금의 전공과 다른 어떤 전공을 접목시키면 최대의 시너지가 날 수 있는가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는가? 


학문의 수요와 공급은 계속해서 바뀐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전공이 다양해지는 것은 현대 학문이 세분화되기 때문이다. 학문이 세분화 되는 것은 사회가 전문화되면서 새로운 지식을 계속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사회가 굉장히 빨리 변하기 때문에 완전히 새로운 수요가 발생하는 경우도 자주 있다. 그때마다 일일이 학과나 전공을 만들 수는 없기에, 대학은 학생들에게 복수의 전공을 이수해 새로운 학문을 받아들일 것을 장려한다.

나는 학생들의 전과는 말리지만, 복수전공 등 다양한 전공을 섭렵하는 것은 적극 권한다. 다시 말하지만, 현대는 통섭과 융합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대 이웃의 지식을 다양하게 탐하라. 전공의 서열 따위는 냉큼 집어 던져라. 지식에는 서열이 없다. 시대의 수요가 있을 뿐이다.


■ 29,220 피스의 퍼즐


우리 인생을 스포츠에 비유하는 경우가 많다. 극적인 승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야구든, 축구든, 복싱이든, 게임을 즐기다 보면 흐름을 바꾸어 놓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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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승부처가 꼭 있다. 넉 점짜리 역전 만루 홈런이나, 인저리 타임에 나오는 결승골, 혹은 필살의 카운터펀치 같은 것들 말이다. 인생에는 대학입학, 취직, 결혼 등과 같은 큼직한 전환점이 삶의 흐름을 바꾸는 승부처일 테다.     하지만 스포츠 경기를 꼼꼼히 들여다보면, 승부를 뒤집는 그 ‘한 방’은 매우 작은 차이들이 쌓여서 만들어진다. 눈에 크게 띄는 승부처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하루하루의 훈련과 준비가 수없이 모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인생을 스포츠보다는 모자이크 퍼즐에 비유하기를 좋아한다. 큰 ‘한 방’이 아니라 ‘하나하나’가 쌓여야 하는, 대략 29,220피스를 맞춰야 하는 커다란 퍼즐 말이다. 요즘 평균 수명이 80세쯤 되니까, 365x80=29,200 이고 여기에 2월 29일을 20번 더해서 나온 숫자다. 그대가 평균 수명에 관심을 기울일 때쯤이면 의학이 훨씬 발달해 있을 테니 아마 3만 피스를 넘을 것이다. 인생이란, 하루라는 작은 조각을 맞춰서 커다란 그림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퍼즐과 같다.

물론 차이점도 있다. 퍼즐은 어떤 그림으로 맞춰야 하는지 완성된 그림을 미리 보여주지만, 인생은 그렇지 않다는 것. 그 조각을 다 맞출 때까지 어떤 그림이 나올지 누구도 알 수 없다. 자기 자신은 더더욱.


많은 사람들이 빨리 성공하고 싶어 한다. 젊은 나이에 빨리 출세하는 것이 예로부터 최고의 소원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얼마나 빨리 가고 있는가를 점검하기 위해 자꾸만 시계를 본다.

하지만 시계보다 필요한 것은 나침반이다. 삶의 성공이란 퍼즐의 마지막 피스를 채웠을 때 판가름 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얼마나 빨리 가느냐’ 보다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느냐’가 훨씬 중요하다.

나아가 나침반 보다 더 필요한 것이 있다면 거울이다. ‘지금 내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가’를 수시로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거울보다 나침반을, 나침반 보다는 시계를 더 찾는다.

인생에서는 획기적인 전환점이나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순간적인 깨달음을 기다리지 말고, 작은 실천을 먼저 행하라. 해결방법이 보이지 않는 문제가 앞에 있을 때 ‘어떻게 하지? 하고 고민하지 말라. ’이걸 위해 오늘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지?‘ 하고 고민하라.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어느 누구도 과거로 돌아가서 새롭게 시작할 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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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지만, 지금부터 시작해서 새로운 결말을 맺을 수는 있다.”

그렇다. 지금부터 그대의 새로운 그림을 그려나가라. 이 세상을 떠나는 날 보게 될 그대 인생의 커다란 그림을 생각하라. 오늘 하루 때문에 그 멋진 완성품의 한 구석이 듬성듬성 비어 있다고 생각하면 너무 아깝지 않은가?


■ 너무 바빠서 시간이 없다는 핑계에 대하여


나는 내가 늘 너무 바빠서 다른 일을 할 시간이 없다고, 적어도 박경철 씨의 기사를 읽을 때까지는 그랬다.


외과의사이면서 ‘시골의사’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경제평론가 박경철  씨는 대단한 분이다. 그의 한 마디에 수십만 명이 주식을 매매하고 통장을 바꾼다. 그런 만큼 그는 참 바쁜 사람이다. 매일 아침 2시간씩 라디오 방송, 주 2회 TV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방송인이고, 신문과 잡지에 고정칼럼만 15개를 쓰는 칼럼니스트다. 전국을 누비며 해야 하는 강연이 월 평균 30건이고, 토요일엔 반드시 안동의 병원에 내려가 본업인 진료를 한다. 친구와의 오랜 약속 때문이란다. 더구나 그는 매년 1~2권의 책을 펴내는데, 그냥 가벼운 책이 아니라 항상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는 깊이 있는 저서들이다.

비결이 뭘까? 한 사람이 하나도 하기 힘든 수준의 1인 4~5역을 소화한다. 그러면서도 날카로운 분석이 필요한 독서와 사색의 시간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어떻게 그 많은 일을 한꺼번에 할 수 있는 것일까? 어느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2000년 0시를 기해 전 다섯 가지를 끊었습니다. 술, 담배, 골프, 유혹, 도박입니다. 이 중 금연이 마지막까지 잘 안 되더군요. 그래도 술 안 먹고 골프 안 하고, 딴 마음 안 먹으니까 시간이 많이 남아요. TV는 원래 안 보았고요. 그 시간에 책 보고 글 쓰고 하는 거죠. 책은 하루에 한 권 정도 읽어요. 화장실, 이동하는 차 안 등 토막시간마다 책을 펼치죠. 매년 10월에 책 한 권 내는 게 목표이기 때문에 매일 200자 원고지 20~30장 분량의 글을 써서 저장해 둡니다. 이렇게 생활하다 보면 1인 다역을 할 수 있어요. 제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시간 없다’입니다.”       


나는 특히 마지막 부분을 읽을 때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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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시간 없다’입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그대는 어떤가? 혹시 ‘시간이 없어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을 못하고 있지는 않은가?            

‘성공한 사람의 하루는 25시간, 실패한 사람의 하루는 23시간’이라고 했다. 인생을 어떻게 살았느냐는 별 게 아니다. 결국 하루 24 시간을 어떻게 썼느냐의 문제다.

그래서 효율적으로 시간관리를 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몇 가지 방법을 적어보고자 한다. 그래도 시간을 통제해야 하는 교수라는 직업을 10년 넘게 하면서 터득한 노하우가 몇 가지 있어, 그 이야기를 간략히 들려 드릴까 한다.


1. 시간 관리는 목표의 함수다.

- 시간관리 = 치밀한 계획 = ▫ ▫ 몇 시간, ▵▵몇 시간

- 위와 같은 계획을 위한 계획은 실패할 확률이 높다. 시간관리란 목표에 따라 우선순위를 두는 일이며 우선순위를 정한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포기하는 것이다. 곁가지가 많으면 큰 나무가 되지 못한다. 시간관리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여기저기 곁으로 쓰는 시간이 많으면 큰 꿈을 이룰 수 없다. 봄이면 정원사들이 거침없이 가지치기를 해주듯, 우리의 시간도 냉정한 구조조정을 해줘야 한다.


2. 의미 없는 습관으로 굳어진 취미를 청산하라.

내가 되도록 하지 않으려고 하는 행동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버릇이 들어 하게 되는 행동. 다른 대안이 없어 하게 되는 행동. 그리고 다른 사람 때문에 할 수 없이 하게 되는 행동이다. 의미 없는 습관으로 굳어진 취미를 ‘삶의 유일한 즐거움’ 이란 식의 변명으로 감싸지는 말라. 세상에서 가장 큰 즐거움이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그것은 성장하는 즐거움이다. 성장에 꼭 필요한 양분인 ‘시간’을 빼앗는 일이 즐거움의 원천이 될 수는 없다. 그냥 때우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존재의 두께는 얇아진다. 무의미한 반복이 계속되는 취미 혹은 시간 때우기를 당장 그만둬라.

다음은 내가 되도록 하지 않으려는 행동, 되도록 하려는 행동을 정리한 리스트의 일부다. 그대들에게 참고가 될까 하여 실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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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보다는 독서를.

인터넷 서핑보다는 신문을.

TV 시청보다는 신문 읽기를.

공상 보다는 사색을.

수다보다는 대화를.

골프보다는 빨리 혹은 느리게 걷기를.

다이어트보다는 운동을.

사우나보다는 반신욕을.

늦잠보다는 피로를 푸는 토막잠을.

취하기 위해서가 아닌 분위기를 돋우기 위한 술을 택한다.  

     

3. 15분은 길다

조금 애매한 시간들이 있다. 한 15분 남은 시간. 뭔가 새로 하기도 그렇고, 그냥 있기도 그렇고…….

요즘 사회는 바쁘다. 끊임없이 약속이 생기고 어딘가로 이동해야 한다. 뭉텅이 시간이라곤 없이 조각조각 토막 난 자투리 시간만 남게 되는 것은 그대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시대의 보편적 특징이다. 그런 사회에서 결국 시간관리란 곧 ‘자투리 시간을 어떻게 쓰느냐’의 동의어다. 충분한 시간이 날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 틈틈이 나는 작은 시간을 그러모아야 한다.


내가 가장 먼저 실천하겠다고 마음먹고 세운 것은 ‘15분 내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지금 바로 해결한다’는 원칙이다. 이따가 해야지, 하고 생각한 것치고 제대로 한 적이 별로 없다. 지금 하기 싫은 일은 이따가도 하기 싫기 때문이다. 차라리 지금 끝내고 잊어버리는 편이 스트레스가 적다.

찜질방 사우나에 들어가 얼마나 버텨 보았는가? 15분은 무지하게 긴 시간이다. 1~2시간 이상 긴 시간이 날 때까지 기다리지 말라. 자투리 시간을 잘 써라.


4. 바빠야 시간이 난다

“언젠가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있는데 시간이 없어 못하고 있다. 나중에 시간이 나면 반드시 할 거다.”

이렇게 말하지 않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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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자. 정작 이유가 생겼을 때, 계획하던 그 일을 제대로 한 적이 있었는가?

바빠야 오히려 시간이 난다는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그렇다. 바빠야 하고 싶은 일의 소중함이 비로소 절실해진다. 더욱 중요한 점은 바빠야 생활이 치열해져 시간관리가 제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시간이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그것을 ‘제대로 사용 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가할수록 쓸 수 있는 시간은 더 생길지 몰라도 치밀한 시간 관리의 의지가 함께 줄어들기 때문에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일이 자주 벌어진다.


그리고 사실 생각해보면 ‘한가한 시간’이라는 것은 애초에 없다. 한가하다는 것은 급하게 혹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상대적으로 줄었다는 의미일 뿐이다. 하지만 ‘백수가 과로사하는’ 세상이다. 여기저기 시간도둑이 정말 많다. 그 시간도둑을 잡지 못하면 시간은 많았는데 한 일은 없는 황당한 경우가 계속 반복된다.

바쁠 때가 오히려 무슨 일이든 시작하기 좋을 때다. 나중에 한가해지면 하겠다는 생각은 결국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자신의 게으름에 대한 유보의 구실이다. 가장 바쁠 때 시간을 쪼개 ‘그 일’을 시작하라. 그렇다. 바로 지금 말이다.

지금 아니면 영원히 하지 못한다.

인간의 삶에서 시간을 빼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시간은 우리 영혼을 만드는 재료라고 했다. 시간이 전부다. 그대의 내일은 오롯이 오늘의 24 시간에 달려 있으므로. 그러므로 그대의 시간은. 어쩌면 그대보다 소중하다.


■ ‘카르페 디엠’사용법


요즘 친구들의 미니 홈피나 블로그의 대문글로 가장 많이 적혀 있는 문구는 무엇일까? 통계를 내 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카르페 디엠(Carpe Diem)’ 이라는 말이 아닐까? 여기저기서 참 많이 봤다.


‘카르페 디엠’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의 송사에 나오는 ‘오늘을 잡아라(seize the day)’라는 의미의 라틴어인데,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괴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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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 키팅의 대사로 유명해졌다. 호라티우스의 시에서는 ‘시간이란 덧없는 것’ 이라는 의미로, 영화에서는 ‘평범한 삶을 살지 말라’는 취지로 사용됐지만, 많은 사람들은 ‘현재를 즐겨라’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나도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글귀지만, 현재를 즐기라는 의미가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무척 다양하게 해석되는 듯 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듯하다.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을까? 현재를 어떻게 즐기라는 말일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지나간 나날에 대한 후회로 현재를 채워서는 안 된다. 할 수 없는 일에 대한 필요 없는 의무감으로 현재가 흔들거려서는 안 된다. 자신의 목표를 확고하게 하고, 그 목적지를 향해 순간순간의 발걸음을 뚜벅뚜벅 옮길 수 있을 때 현재를 즐길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카르페 디엠’을 하려면 자신에 대한 믿음이 확고해야 한다. 비록 꿈의 내용이 구체적이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자신감만큼은 구체적이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현재를 즐길 수 있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카르페 디엠’이다.


■ 기적이란 천천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는 사법고시 공부도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4학년이 되니까, 갑자기 불안해지고 문득 영어라도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980년대의 법과대학이란 원서 한 권 교재로 쓰지 않는 곳이어서, 대학 졸업반이 된 내 영어 실력은 고3 때보다도 못했다. 그러던 내가 어느 날 갑자기, 누가 뭐라 한 것도 아니었는데 영어를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을 불현듯 했다.

매일 1시간씩은 영어 단어를 외우고 시사주간지를 읽어나가기로 했다. 참 신통한 것이, 다른 일에는 그렇게 나태하던 내가 1년 동안 그 숙제를 매일 했다. 그때 영어가 무척 늘었다. 그 후로 나는 영어 덕을 많이 보았다. 당시 서울대 행정대학원 경쟁률이 15대 1쯤 되었는데, 행정학 교양수업도 한 번 듣지 못했던 내가 수많은 행시 준비생들 틈에서 꽤 좋은 성적으로 붙었다. 영어시험 성적이 좋았던 덕이다. 또 ‘석사 장교’라는 제도가 있었는데 석사학위를 받고 국사, 영어, 제2외국어 이렇게 세 과목을 치르는 시험에 합격하면 단 6개월 만의 훈련으로 장교계급까지 주며 군복무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영어 점수가 좋았던 덕분에 치열한 경쟁을 뚫고 합격통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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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박사과정에 진학하고 유학을 떠나고 학위를 받을 때까지, 영어는 참으로 여러 번 효자 노릇을 했다. 1986년, 하루 1시간의 1년 투자가 이후 꽤 오랜 기간 나를 먹여 살렸다.

그때부터 나는 ‘1-1원칙’이라는 것을 갖게 되었다. ‘하루에 한 시간씩 1년간 투자하면 무엇이든 꽤 잘할 수 있게 된다’는 원칙이다.

나는 이 원칙으로 운동을 해서 식사조절 없이 요요현상 없는 7Kg 감량에 성공했던 기특한 기억도 가지고 있다. 물론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일이든 일주일에 한 번 7시간 몰아 하는 것은 쉬워도, 매일 1시간씩 꾸준히 계속하는 것은 어렵다. 실은 나도 결의만 하고 중도에 포기한 경험이 훨씬 많다.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라는 책에 보면 ‘1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것이 나온다. 비틀즈나 빌 게이츠 같은 비범한 인재들, 즉 아웃라이어(outlier, 正常을 벗어났다는 것이 원래 의미다.) 의 성취는 모두 1만 시간의 연습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가 타고난 천재로 알고 있는 모차르트도 실은 1만 시간의 연습을 통해 재능을 발휘했다고 한다.

1만 시간은 하루 3시간, 일주일에 20시간씩 10년간 모아야 이룰 수 있는 시간이다. 아무나 실천하기 어려운 연습량이다. 거기에 비범한 재능도 겸비해야 한다. 이것에 비하면 하루 1시간씩 1년 모두 더해도 365시간은 참으로 인간적이지 않은가? 물론 1만 시간을 투자해 김연아 선수처럼 된다면 바랄 것이 없겠지만, 모든 사람이 비틀스나 모차르트 같을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 소박한 삶에서 나름의 성취감을 느끼면서 살기에 1-1 원칙이란, 하나의 최소한이 아닐까?


연습하는 자와 저축하는 자는 절대로 지지 않는다. 연습과 저축은 모두 미래의 달콤함을 위해 기꺼이 현재의 고통을 감수하는 행위다. 그리고 그 감수는 1만 시간처럼 무지막지한 양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

그대도 한 번 실천해보지 않겠는가?

기적이란 천천히 이루어지는 것이다.


■ 마시멜로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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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마시멜로 실험 알아? 마시멜로란 초코파이 사이에 든 하얀 설탕젤리 같은 건데, 미국에서는 이걸 불에 살짝 구워 먹어. 정말 달콤해서 미국 아이들이 속된 말로 ‘레알’ 환장하지. 이 마시멜로를 갖고 미국 스텐퍼드 대학의 월터 미셸이라는 학자가 실험을 했어. 애들에게 마시멜로를 주고 “지금 먹어도 좋지만, 15분만 참으면 하나를 더 줄게.” 라고 했데. 어떤 애들은 참지 못하고 바로 먹었고, 다른 아이들은 용케 15분을 참아서 한 개를 더 받았다는 거야. 그리고 15년이 흐른 뒤. 이 아이들의 수능(SAT) 성적을 추적해 봤는데…. 어떤 일이 벌어졌을 것 같아?

15분을 참아 마시멜로를 하나 더 받은 어이들의 성적이 800점 만점에 평균 125점 이상 압도적으로 높았다는 거야. 놀랍지 않아? 이 ‘만족 유예’ 실험은 ‘마시멜로 이야기’라는 책에 소개되어 우리나라에서도 무척 유명해졌지.

나는 이 마시멜로의 교훈이 인생 성공의 핵심이라고 생각해.

‘미래를 위해 현재의 고통을 감수할 수 있는 능력.’


Part  4   ‘내일’이 이끄는 삶, ‘내 일’이 이끄는 삶


■ 네가 내린 결정으로 삶을 인도하라


엄마, 하고 부르면 마음부터 짠하다. 단지 낳아주고 키워주신 분이라서가 아니다. ‘엄’하고 입술을 오므리는 순간, 우리에게 지금까지 나눠주셨던 애절한 희생이 전율처럼 온 몸에 전해 온다. 우리에게 그렇게 절실한 존재가 또 있을까, 엄마 같은 존재가.


아기를 낳고, 먹이고 재우는 일도 얼마나 고되랴마는, 엄마의 희생은 우리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절정이었던 것 같다. 새벽부터 흔들어 깨우는 그 목소리가 한없이 원망스러웠지만, 엄마는 항상 나보다 늦게 잠들고 일찍 깨야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곤히 잠들어 있는 엄마 모습을 본 적이 몇 번이나 됐던가? 학원비나 과외비를 마련하느라 늘 빠듯한 가계부를 이리저리 붙잡고 씨름하던 모습은 애써 외면했다. 어느 날엔가 오직 나를 위해 기도하시던 엄마의 모습을 보기라도 하는 날에는…….

쌓여가던 대입 스트레스를 풀 데가 엄마 말고 또 어디 있겠는가? 만만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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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 우리는 왜 또 그렇게 못되게 굴었던지. 엄마도 가끔씩 언성을 높이긴 했지만 그게 다 ‘나 잘되라고’ 하셨던 희생이요 봉사다. 대학에 입학하던 날, 엄마는 이제야 한시름 놓았다고 숨을 몰아쉬시며 눈물마저 글썽거렸다.

엄마야말로, 우리 생에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다. 앞으로도 아주 오랫동안 그래주실 것이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래서는 안 된다.

이제는 엄마를 넘어서야 한다.


요즘 중고등학생 엄마들을 보면 꼭 연예인 매니저 같다. 다이어리에는 스케줄을 빽빽이 적어 놓고, 여기저기 휴대폰으로 전화를 하면서, 아이들을 뒷자리에 태우고 이 학원 저 학원 실어 나르느라 바쁘다.

이건 ‘세계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미국에서도 사커맘이니, 하키맘이니, 미니벤맘이니 하는 용어가 자주 쓰인다. 모두 비슷한 뜻이다. 커다란 미니벤을 몰며 아이들을 축구장이나 하키장에 데려다 주는 것이 일과인 극성 엄마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얼마 전 미국 부통령으로 출마했던 페일린도 자신을 하키맘이라 소개했다.

요즘에 헬리콥터맘이라는 용어고 나왔다. 자식 주위를 헬리콥터처럼 맴도는 엄마들이란다. 그 극단에 블랙호크맘이라는 것도 있다고 한다. 초고성능 정보기기로 무장하고 있다가 자식에게 조금만 수상한 동향이 보이면 곧바로 제재에 들어갈 수 있는 엄마다.


서울대학고 아동가족학과 친구들이 2010년에 했던 학생심포지엄의 제목은 ‘어른 아이, 사랑에 빚지다 : 대학생 자녀가 인식하는 부모의 과잉기대, 간섭이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과 그로 인한 갈등’이었다. 이 연구는 스스로를 성인으로 인지하고 독립하려는 욕구는 있으나 부모로부터는 여전히 생활전반에 걸쳐 직접적인 간섭을 받는 대학생을 ‘어른 아이’라 명명하고, 이 어른 아이들이 받는 부모의 기대와 간섭을 실증적으로 분석했다. 오늘날 대학생 부모의 과도한 간섭은 한 마디로 ‘사랑의 빚’이라는 것이다.


“너희는 공부만 열심히 해, 나머지는 엄마가 다 알아서 해줄게.”

사실 엄마가 자식에게 가르쳐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란 (공부는 선생이 가르치는 것이므로) ‘공부를 제외한 다른 모든 능력’ 들인데. 엄마들은 그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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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거세시키고 있다. ‘이게 다 너를 위한 것’이라면서.

‘네 장래에 대한 고민은 다 알아서 해줄 테니, 너는 그저 따라오라.’는 식이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속담도 있는데, 요즘에 부모 이기는 자식을 별로 본 적이 없다.  자식들도 물론 독립하고 싶은 욕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엄청난 생활비와 학자금, 결혼자금을 부모에게 의존하고 있는 이상 홀로 서는 것이 사실상 가능하지도 않다. 이건 고학력의 소위 성공한 부모들이 훨씬 더하다. 지식이나 경험에서 워낙 압도적이니 많은 딸아들이 항변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아예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으므로 요즘 젊은이들을 캥거루족, 혹은 위성세대라 부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건 아무리 세계적인 현상이라 하더라도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 엄마에게도 그리고 아이에게도……. 인생이란 결국 엄마가 다 알아서 해주기로 했던 ‘공부’이외의 나머지 것들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지금 20대 들의 엄마는 40대 후반에서 50대 후반까지다. 그대들과는 전혀 다른 시대를 살아낸 세대다. 그래서 엄마들은 잘 풀리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 매우 안정적인 직업을 선호한다. 성공 가능성을 최대화하기 보다는 실패 위험을 최소화하는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결국 엄마들이 제시하는 자식의 미래란 항상 비슷비슷하다.


백보 양보해서 설령 엄마의 판단이 옳다고 하더라도, 그대가 엄마를 넘어서야 하는 당위는 분명하다. 내 인생의 주인은 나이기 때문이다. 인생은 크고 작은 만족과 슬픔이 씨줄과 날줄로 엮여 있다. 이것을 감내하는 것은 결국 오롯이 나다. 희로애락으로 촘촘히 짜인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그 삶이 ‘내가 내린’ 결정이어야 한다.

인생의 핵심은 주체성이다. 설령 등짝에 천근 쇳덩이를 지고 있더라도, 그것이 자기 짐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으면 솜처럼 가볍다. 하지만 남이 지워준 무게라고 생각하면, 우산 위에 내려앉은 눈조차 무거운 법이다.


엄마를 넘어서라. 명심하라. 지금부터는 엄마가 그대의 가장 큰 적이다. 이제 엄마라는 목발을 놓고, 힘들더라도 그대의 발로 단단히 서라. 처음에는 엄마의 부재에 나 홀로 남은 불안이 엄습하고, 금단현상마저 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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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한 발짝, 한 발짝 자신의 걸음을 걸어야 한다. 그 경주의 끝에 비로소 온전한 그대가 있다.


■ ‘내일’이 이끄는 삶, ‘내 일’이 이끄는 삶


내 이력을 아는 사람이면 대부분 다 묻는다. 어떻게 법대를 나와 행정학을 전공한 사람이 소비트랜드를 연구하고 있느냐고. 내가 대학생 때부터 소비자학, 특히 소비트랜드를 전공하게 되리라고 생각했던 것은 물로 아니다. 그저 오늘 보기에 인기 있는 일이 아니라 ‘내일’ 중요하게 될 일을 하고자 했고, 남들이 좋다고 하는 일이 아니라 ‘내 일’이라 여길 수 있는 재미있는 일을 하고자 한 결과이다.


나는 기성의 성취에 안주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사회가 나에게 필요로 하는 일을 찾아 올인 해 왔다. 어제와 오늘에 안주하지 않고 ‘내일’이 이끄는 삶, 남들이 좋다는 주제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 일’이라고 여겨지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삶, 그것이 내 인생의 지향이었다. 


잊지 말라. 알은 스스로 깨면 생명이 되지만, 남이 깨면 요리감이 된다고 했다. ‘내 일’을 하라. 그리고  ‘내일’이 이끄는 삶을 살라. 

                     

■ 찌질이 ‘알파’들


우리 학교에서는 1년에 한 번씩 ‘학부모 초청행사’라는 걸 한다. 학부모들을 모시고 학교소개도 하고, 문화행사도 하고, 교수와 학부모의 대화 시간도 갖는 행사다.

그들의 자녀를 교육하는 교수이면서도, 나 역시 중고등학생을  자녀로 둔 부모이기 때문에, 좋은 학생의 부모를 만나면 솔직히 부럽기도 하다. 그분들은 나를 보며 “교수님 우리 아이 잘 부탁드립니다.” 하면서 연방 고개를 굽히시지만, 나는 나대로 그분들은 보면 “무슨 비결이 있어서 아이를 이렇게 잘 키우셨나요?” 하는 말이 절로 나온다.

특히 그중에서도 소위 알파 걸(alpha girl)이니 알파 보이니 하고 불리는, 공부도 잘하고 리더십도 있고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친구들의 부모를 직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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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면 , 같은 부모로서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이런 ‘알파’ 학생의 부모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씀이 있다. “우리 애가 몸만 컸지. 하는 짓은 아직 애예요. 교수님께서 잘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혹은 “이 아이가 공부는 잘하는지 몰라도, 그 외에는 뭐 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어요. 모쪼록 교수님께서 많이 지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대부분 이런 얘기다. 절대 겸손이 아니다. 이분들은 진심이다.

나는 내심 놀란다. 학점도 아주 좋고 영어도 참 잘 해 소위 최고의 스펙을 자랑하는 친구들이, 부모의 말을 들어보면 그 외의 일에는 아주 젬병이라는 것이다. 가까울수록 영웅이 없다는 말도 있기는 하지만, 뭐든지 완벽할 것 같은 친구들이 실제 생활에서는 형편없다는 말을 들으면, 사실 참 의외다. 그런데 주위를 보면 실제로 그런 친구들이 매우 많은 것 같다.


소위 찌질한 알파보이, 알파걸들이다. 밖에서는 잘할지 모르지만 개인 차원에서 놓고 들여다보면 속빈강정 같은 존재들, 교실 밖에서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헛똑똑이 청춘들, 연애나 대인관계에 답답할 만큼 미숙하고, 소비나 경제생활은 대책 없이 충동적이고, 생활을 하면서 부딪힐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크고 작은 문제에 대한 지식도 거의 없는 찌질하기 짝이 없는 친구들이 오로지 ‘공부만’ 잘한다는 것이다.

연애를 시작했지만 서툴기 그지없다. 매사에 자신만만하던 모습은 간 데 없고, 질질 짜기만 한다. 충동적이고 표피적인 이벤트와 스킨십으로만 관계를 연명하다가 쉽게 상처 주고 상처 받는다. 조금만 사이가 꼬이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다가 냉전으로 확산되기 일쑤다.


친구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미니홈피나 블로그에서는 그렇게 능숙하던 대인관계가 막상 만나서는 미숙하기 그지없다. 실생활에서는 또 어떤가? 원룸 임대계약 같이 복잡한 일은 말할 것도 없고, 할인점에서 간단한 환불요구도 제대로 못한다. 요리, 청소, 빨래 같은 건 도무지 해본 적이 없다. 돈으로 해결하는 것도 한 두 번이다. 직접 해보겠다고 나섰다가 일만 저지르기 일쑤다. 그러니 결국…… 엄마만 찾는다.     

직장에서 일 잘하는 것은 학교 다닐 때 공부 잘했던 것과는 그다지 상관이 없다는 것을, 그대들의 직장 선배들은 누구나 다 안다. 어른으로서 자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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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질 줄 모르는 사람은 아무리 스펙이 좋아도 소용이 없다. 그런데도 이 찌질이들은 대학시절은 물론, 심지어는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누군가에게 기대려는 경향이 있다.  

직장을 구하기까지는 어느 정도 스펙이 필요할지 몰라도, 그 이후의 성공과 행복을 좌우하는 것은 전적으로 스펙 이외의 것들이다. 그러므로 그대는 영어에만 능숙할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에도 능숙해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지식만 높일 것이 아니라 인생의 지혜도 함께 높여야 한다.


■ 대학은 그대에게 결승선인가, 출발선인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그는 눈에 띄지 않았다. 불러주는 대학팀이 없어서 애를 태우다 가까스로 명지대학교에 입학했다. 허정무 감독이 2000년 그를 국가대표로 발탁했을 때, 사람들은 “명지대 감독하고 바둑 두다가 뽑았느냐?”고 비아냥대기까지 했다고 한다.

워낙 유명한 에피소드라서 많은 사람들이 누구 이야기인지 알 것이다. 대한민국 최고의 실력을 갖춘, 인기 절정의 ‘국민캡틴’ 박지성 선수가 국가대표에 발탁된 사연이다. 그는 어렵게 들어간 대학, 그곳에서 꽃을 피웠다. 그에게 대학은 황홀한 전성기를 알리는 시작이었다.


거의 모든 교장선생님들의 졸업축사에 꼭 등장하는 표현이 있다. ‘졸업은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인데, 이 말은 나름 근거가 있다. 졸업식을 영어로 'commencement'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시작’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나는 이 중의(重義)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입학하는 친구들에게 특히 잘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미성년으로서의 인생의 한 시기를 마감하고, 성년으로서 사회적 출발을 하는 시기에 서 있기 때문이다.

분명히 말하자. 대학은 결승선이 아니다. 새로운 출발선이다. 어느 대학 학과를 졸업하느냐 그 자체가 인생의 최종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학이란 우리가 행복한 삶 혹은 성공한 인생을 살기 위한 여러 ‘수단’ 중 하나다. 그런데도 다들 ‘학벌’ 즉 출신 대학을 필요 이상으로 중요하게 여긴다. ‘좋은 대학 나와야 성공할 수 있다’고 하면서.

대한민국에서 학벌이 중요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좋은 대학을 나와야 성공한다’는 말이 100% 정확한 것은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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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 말은 좋은 대학을 나오지 못하면 성공할 수 없다는 의미인데,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굳이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좋은 대학을 나오면 특정 영역에서 성공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정도다.    


대학원에 다닐 때, 나는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운영하는 ‘국가정책과정’이라는 최고경영자과정의 운영조교를 담당했다. 이 과정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역사가 깊고 권위도 높은 편이어서 항상 ‘성공한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구체적으로 이 과정의 입학자격은 다음과 같았다.

‘국회의원, 정부 및 각 기관의 3급 이상 공무원, 각 군의 장성, 정부 투자기관의 장 및 임원, 언론기관의 고위 간부, 사기업체의 장 및 임원, 사회단체 지도자, 기타 이에 준하는 지위에 있는 자.’

조교인 나는 이들의 지원자 일람표를 만들 때마다 내심 놀랐다. 소위 SKY라고 하는 명문대 출신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어느 신문에 ‘잭 웰치 부부의 성공 어드바이스’라는 연재가 있었는데, 거기에 ‘MBA의 효과는 단 1년 뿐’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명문대에서 MBA를 받은 인재는 좋은 일자리와 높은 초임을 보장받는 것 같지만 그 후광효과는 잠시, 길어야 1년 정도일 뿐이며, 그 이후에는 학벌에 관계없이 회사에서 성과를 내는 사람이 승진하고 대우 받는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명문대 효과’가 정확히 그렇다. 좋은 대학, 인기 학과의 졸업생이라는 스펙은 취업할 때에만 도움이 될 뿐, 일단 취직하고 나면 얼마나 인간관계가 원만하고 업무를 솜씨있게 처리하느냐에 성공여부가 결정된다. 물론 우리나라 사람들이 인맥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어서 같은 학교 후배들을 이끌어준다는 불평이 다소 들리지만, 요즘에는 좋은 회사일수록 인사에 그런 영향이 없도록 철저히 막고 있다. 결론적으로 스펙은 입사할 때는 중요할지 몰라도, 그 이후에 미치는 영향은 시간이 갈수록 줄어든다. 더구나 요즘에는 회사마다 심층면접 등 다양한 전형 방법을 개발하고 있어 학벌이 입사하는 데 미치는 영향력도 줄어드는 경향을 보인다.


■ 스펙이 아닌, 그대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라.           

         

수시 입학시험 서류평가를 하다 보면 실로 엄청나게 다양한 경력을 자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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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지원서를 만날 때가 있다. 하지만 수(數)만 많았지 가점(加點)을 받을 만한 알맹이는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서 합격에 도움이 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냥 ‘애랑 엄마랑 무지 고생했겠다’ 싶은 생각이 들 뿐이다. 안타깝지만 헛  고생을 한 것이다.


20대라는 시기 전체가 스펙을 위한, 스펙에 의한, 스펙의 나날로 변해가는 것만 같다. 심지어 로스쿨 학생들도 취업을 원활히 하기 위해 어학인증, 수상경력, 실무실습 등 스펙을 쌓아두지 않으면 불안해서 못 견딘다고 하니, 그 광풍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것이다.

모든 스펙이 무의미하다는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신의 적성과 목표에 대한 고려가 없는, 다다익선(多多益善) 식의 마구잡이 스펙 쌓기는 돈과 시간의 낭비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그렇다면 어떤 스펙이 필요할까? 입장을 바꿔, 그대가 사람을 뽑거나 물건을 구매한다고 생각해보라. 그대 같으면 어떤 사람을 뽑고, 어떤 상품을 사겠는가?

마케팅의 핵심은 자기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자가 그것을 구매할 이유를 딱 한 가지라도 제대로 알리는 것이다. 그 이유가 제품에 제대로 녹아들었을 때, 그게 바로 제대로 된 브랜드가 된다. 취업도 똑 같다.

취업을 위한 설득도 스펙을 나열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마케팅하고, 자기 이름을 하나의 브랜드로 만드는 작업이 필요하다. 면접관을 움직일 수 있는 자기만의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곧 브랜드를 만드는 주요 기법인 ‘스토리텔링’인 것이다.

         

기업은 어떤 인재를 원할까? 아니, 어떤 이야기를 원할까? 기업에서 궁극적으로 뽑고 싶은 인재는 ‘회사의 성장에 기여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그럴 가능성이 엿보이는 이야기다. 초등학교만 나왔더라도 회사의 매출 신장에 크게 기여하리라는 확신이 100%라면 모든 기업이 그를 뽑을 것이다. 문제는 그 100%의 확신을 어떻게 할 수 있느냐다.

스펙이란 어떤 사람의 기여 가능성을 판단하기 곤란할 때, 이를 점칠 수 있게 하는 대리지표일 뿐이다.

인사 담당자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업무수행 능력이지, 스펙이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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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모든 이들이 입사를 희망하는 기업의 사장도, 사석에서 만나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다. ‘인재가 정말 없다. 좋은 학생 있으면 꼭 추천해 달라’는 것이다.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최고의 스펙을 갖춘 인재가 그렇게 몰리는데 정작 기업에서 뽑을 만한 인재가 없다고 한다.

그 사장이 추천받고 싶은 인재가 과연 ‘스펙이 더 좋은 인재일까? 아니다. 진정으로 회사에 기여할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이 구직난 속의 인재난이 의미하는 진실은, 기업 입장에서 스펙이란 하나의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여주어야 하는 것은 스펙의 목록이 아니라, 그 스펙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나의 ’기여 가능성‘이다. 그것을 ’자신만의 이야기‘를 통해 드러내 보여야 한다.

무조건 많이 쌓은 스펙이 좋은 것이 아닌데도 많은 젊은이들이 이점을 간과하고 있다. 취업의 장을 스펙의 경연장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수단이 목적으로 변해버리는 전형적인 예다.


그러므로 모든 분야를 두루두루 갖췄다고 자랑하며 스펙을 모으기보다는, “이것 하나는 내가 제일이다!” 라고 어필 할 수 있는 증거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스펙을 쌓겠다면 넓고 얕은 스펙보다는 좁고 깊은 스펙이 낫다.  이러한 정략을 사용하려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 있다. 자신이 무엇을 제일 잘하는지 빨리 깨달아야 한다. 스스로의 지향점이 분명해야, 주위에서 다들 쌓는 스펙이 아니라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 자기 인생의 지향점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막연한 불안감에 피라미 떼처럼 몰려다니며 좋은 학원을 알아보기에 앞서, 하얀 노트에 자신의 꿈과 적성을 먼저 적어보라.

답은 그대 안에 있다.


■ 우리에게 대학이란 무엇인가?


대학, 중고등학교 때부터 그렇게 청소년기를 다 바쳐 준비해왔던 그 대학.

그대에게 질문을 하나 해 보자.

대학이란 무엇인가?

대학을 한자로는 大學이라고 쓴다. 그대로 해석하면 ‘큰 배움을 얻는 곳’이라는 뜻이다. 그냥 배움이 아니라 커다란 배움을 얻어야 하는 곳이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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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나아가 청춘을 바쳐 꼭 해야 할 세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커다란 지식, 커다란 책임, 그리도 커다란 꿈.


1. 커다란 지식

대학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기관이 아니다. 고등학교보다 더 어려운 내용을 가르치는 교육기관 정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대학이 다른 교육기관과 본질적으로 다른 점은, 새로운 학문적 진리를 탐구하는 ‘연구’를 수행 한다는 데 있다. 창조적인 지식을 생산하는 일은 사실 교육에 앞서는 대학의 가장 본질적인 기능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이 기본적으로 길러내고자 하는 인재는 기업이나 사회에서 원하는 기능인이 아니라, 그런 학문적 연구를 할 수 있는 지성인이다. 이를 ‘학문후속세대’라고 한다.

그런데도 기업과 사회는 물론 대학생 스스로도 자꾸만 직장생활에 필요한 도구적 지식만이 대학에서 배워야 할 지식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수요자가 이렇게 변하고 있으니, 공급자인 대학 역시 큰 지식을 주지 못하고 당장 취업에 도움이 될 ‘작은 지식’에만 집중하고 있다.


2. 커다란 책임

역사적으로 대학은 사회로부터 많은 특혜를 받아왔다. 물질적인 지원이나 정신적인 존중은 물론, 제도적으로도 보호를 받는다. 헌법에조차 ‘대학의 자율성은 법률에 따라 보장 받도록’ 명시돼 있다.

대학이 이처럼 사회의 지원을 받는다는 사실은 사회에 대해 일정한 책임을 져야 함을 의미한다. 날선 비판의식으로 사회의 방부제를 자임해야 하고, 나라 발전과 사회 변화의 견인차 역할을 수행해야 할 커다란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다.       


세계사에 유래가 없다는 한국의 경제적 성장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한 저변에는 대학의 역할이 매우 컸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가 어느 정도 경제적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난 이후부터, 대학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의식이 많이 약화된 듯하다. 하지만 대학이 모래알처럼 흩어져 자기 이익만 생각하는 이들의 집합소여서는 안 된다. 책임 있는 리더십과 팔로워십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미 대학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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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로워십(follower ship) : follower(따르는 사람)란 leader의 반대되는 개념으로 단순한 주종관계나 수직관계에서 벗어난 협조자를 뜻한다. 


3. 커다란 꿈

대학이 과도한 자율을 누리고 있다는 비판이 있는데, 그것은 대학의 미래지향적 속성을 간과한 시샘이라고 생각한다. 대학이 권력과 자본과 세속에서 독립되지 못하면, 큰 꿈을 꾸지 못한다. 대학이 근시안적으로 변하면 종국적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은 대학을 품고 있는 국가와 사회이다. 그것을 알기에 대학에 먼 미래를 내다보라고 과분한 자율을 주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대학 스스로의 책임도 막중하다.


■ 교정을 나서는 그대에게


졸업식 날, 이제 교정을 나서려는 그대는 한아름 꽃다발 속에 파묻혀 환하게 웃고 있지만, 나는 마음이 시리다.

취업을 확정하지 못하고 졸업을 ‘당하는’ 친구들도 마음이 편치는 않겠지만, 설령 원하는 직정에 다니게 되더라도 세상은 전혀 녹록지 않음을 온몸으로 경험해야 할 것이다. 쉽게 돈을 주는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공부머리 다르고, 일머리 다르다고 했다. 대학에서의 경험은 그대의 성공적인 사회생활을 전혀 보장하지 않는다. 앞으로 그대는 수많은 것들을 엄청난 시행착오를 겪으며 새로 배워나가야 한다.

그래서 나는, 입으로 축하한다고 말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은 이렇게 시리다.

……졸업을 축하한다.


요즘 기업경영자들을 만나면 다들 하는 말이 있다. “요즘 신입직원들은 왜 그렇게 인내심, 애사심, 협동심, 패기, 예의, 도전정신, 기타 등등. 그런 것들이 모자라냐. 요즘 대학생들은 왜 다 그러냐.” 대충 이런 불만들이다.

이런 불만에 대해 전혀 다른 가치관과 시대에서 자란 신세대들은 좀 억울하다. 사실 우리 사회의 조직문화에는 문제가 많다. 개인의 희생을 너무 많이 요구한다. 조직과 개인이 더불어 행복한 조직으로 바뀔 필요가 있다. 새로운 가치관을 가진 새로운 세대가 나라의 각 분야에 자리 잡게 되면 그러한 방향으로 차차 개선되리라 믿는다. 바로 그대들의 손으로, 그대들이 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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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켜야 한다.      

나는 성공적인 인생이란 사회적 성취와 개인적 행복을 어떻게 조화시키는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엄마가 있어 좋다. 나를 예뻐해 주셔서. 냉장고가 있어 좋다. 나에게 먹을 것을 주어서. 강아지가 있어 좋다. 나랑 놀아 주어서.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어느 초등학교 2학년 학생이 썼다는 시가 화제가 됐던 적이 있다. 아마 그 아빠는 일만 열심히 한 전형적인 ‘한국 아빠’였을 것이다. 그렇게 자신을 희생해가며 일에만 몰두한 것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사랑하는 딸과 가족을 위해서였다고 본인은 항변하겠지만, 정작 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가족을 잃은 것이다. 일단 성공하고 뭔가 이루고 나면 나중에 자기 삶을 찾겠다는 식의 생각은 매우 위험하다. 뭔가 이룬 시점이란 도대체 언제인가? 그런 시점은 오지 않는다. 없다.

요즘은 55세 정도에 정년을 한다. ‘사오정’ ‘오륙도’라는 말이 있을 만큼 은퇴가 빨라졌다. 앞의 인생시계에서 55세면 고작 오후 4시 반이다. 이후 엄청난 시간과 삶이 기다리고 있는데, 자신과 가족을 잃어버리면서 얻어내는 성취란 해변에 지어놓은 모래성처럼 허망한 것이다.


학교와 사회는 다르다. 사회는 정답이 있는 문제에 올바른 답을 적어내면 거기에 맞는 학점이 나오는 그런 곳이 아니다. 학교에서는 나태 속에 분주함이 있다.  생활은 다소 늘어지지만 대신 자기 인생을 어떻게 가져갈 것인가에 대해 바쁜 모색을 계속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에서는 분주함 속에 나태가 있다. 하루하루 일상이 너무 분주하면 그것을 처리하는 데 시간과 정열을 다 써버리고, 정작 자기를 비판적으로 돌아보는 일에는 나태하게 된다는 것이다. 바빠서 게으르다. 그렇게 바쁜 시간을 보내다가 어느 날 거울을 들여다보면 ‘뚱뚱한 가죽부대에 담긴 어색한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마음의 거울을 자주 들여다보라. 지난 꿈을 회상하고, 다가올 미래를 항상 설계하라. 주어지는 기회가 기회인줄 알 수 있도록 늘 준비하라. 그런 노력들이 하나둘씩 모일 때, 그대의 직장생활은 팽팽한 줄 위의 균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균형의 끝자락에 성공과 보람의 조화가 닿아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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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을, 그대는 알게 될 것이다.


교정을 떠나는 젊은 그대여, 청춘이여.

졸업을 축하한다.

그리고 건투를 빈다.


아직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목표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확신이 서지 않더라도 다양한 도전을 계속했으면 좋겠어. 그런 도전을 평생 끊임없이 계속했으면 좋겠어.


“If you don't know where you're going, just go.”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 나오는 말이야.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면 그냥 가라.” 


그래 그냥 가. 실수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거야. 배는 항구에서 더 안전하지만, 그것이 배의 존재 이유는 아니라고 했어. 배는 폭풍우를 견디며 바다에 있을 때 비로소 가치 있는 거야. 문이 아무리 많아도, 열지 않으면 그냥 벽이야. 되도록 많은 벽을 두들기고, 되도록 많은 문을 열어 봐. 청춘이라는 보호막이 너의 실수를 용인해줄 거야.


내가 만약 스무 살의 나에게 딱 한 번만 전화를 걸 수 있게 된다면 나는 청춘의 나에게 이 한 마디를 해주고 싶어.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그러므로 너무 흔들리지 말라고. 담담히 그 성장통을 받아들이라고 그 아픔을 훗날의 더 나은 나를 위한 연료로 사용하라고.



                            2011. 7. 17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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