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8. 13. 20:12ㆍ독서후기
내 생애 단 한번
- 때론 아프게, 때론 불꽃같이 -
■ 장영희 에세이
0 서강대 영문과 졸, 뉴욕 주립대 영문학 박사, 컬럼비아대학 번역학 1년
0 서강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번역가, 칼럼니스트, 중고교 영어교과서 집필
0 문학의 숲을 거닐다. 생일. 축복.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등
0 2009. 5. 9. 암투병중 59세로 사망
■ 꿀벌의 무지 - 서문 -
꿀벌은 몸통에 비해 날개가 너무 작아서 원래는 제대로 날 수 없는 몸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꿀벌은 자기가 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당연히 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열심히 날갯짓을 함으로써 정말로 날 수 있다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 말인지 모르지만, 내가 글을 쓰는 것도 어쩌면 꿀벌의 무지와 같은 것이다. 영문학을 공부하면서 대학 다닐 때부터 글쓰기는 곧 영어로 쓰는 것을 의미했고, 한 번도 우리말로 글 쓰는 것에 관심을 가지거나 훈련을 받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나는 꿀벌과 같이 그냥 무심히 날갯짓을 한다. 그러므로 나의 글은 재능이 아니라 본능이다. 그래서 머리 속에 있는 말보다는 마음속에 있는 말을 고르지도, 다듬지도 않고 생긴 그대로 투박한 글로 옮긴다.
생활 반경과 경험이 제한되어 있는 까닭에 내 글의 소재는 대부분 나 자신이다. 문학을 공부하지만 창의력이 부족하여 나 자신 이외에는 아는 것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글은 곧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그래서 이 글들은 바로 나다. 발가벗고 일반 대중 앞에 선 나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의 악몽은 항상 내 몸과 다리를 지탱해 주는 목발, 그리고 보조기와 연관된 것이었다. 꿈속에서 나는 길바닥에 앉아 있고,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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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은 길을 가다 말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너무 창피하고 부끄러워 도망가고 싶지만, 목발과 보조기 없이는 꼼짝도 할 수 없다.
이 글들을 책으로 엮으면서 꼭 그와 같은 느낌이 든다. 마치 나는 땅바닥에 앉아 있고, 다른 사람들이 그런 나를 에워싼 채 보고 있는 듯한 느낌, 얼른 일어나 도망가고 싶지만 일어설 수도, 도망갈 수도 없는 당혹감, 너무 부끄러워 당장이라도 땅속으로 꺼지고 싶은 심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책을 엮게 된 것이 무척 자랑스럽다. 재능도 재주도 없으면서 ‘꿀벌의 무지’만으로 쓴 글들을 남에게 보인다는 것은 참으로 어불성설이지만, 그래도 스스로 날지 못하는 줄도 모르고 무작정 날갯짓을 하기 시작한 나의 무지와 만용에 스스로 갈채를 보낸다. 못한다고 아예 시작도 안 하고, 잘 못한다고 중간에서 포기했다면 지금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을까.
제1장 아프게 짝사랑하라.
■ 하필이면
몇 년 전인가 십대들이 즐겨 부르던 유행가 중에 ‘머피의 법칙’이라는 노래가 있었다. 확실히 기억은 안 나지만 가사가 대충 이랬다.
“화장실이 있으면 휴지가 없고, 휴지가 있으면 화장실이 없고, 미팅에 가도 하필이면 제일 맘에 안 드는 애랑 파트너가 되고, 한 달에 한 번 목욕탕에 가도 하필이면 그날이 정기 휴일이고” 등등 “무슨 일이든 어차피 잘못되게 마련이다”라는 ‘머피의 법칙’을 코믹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 노래에 나오는 ‘하필이면’ 이란 말은 분명히 ‘왜 나만?’이라는 의문을 전제로 한다. 그러니까 남의 인생은 별로 큰 노력 없이도 모든 일이 잘 되어 나갈뿐더러 가끔은 호박이 넝쿨째 굴러 오는 것 같은데, 왜 ‘하필이면’ 내 인생만은 아무리 기를 쓰고 노력해도 걸핏하면 일이 꼬이고, 그래서 공짜 호박은커녕 내 몫도 제대로 못 챙겨 먹기 일쑤냐는 것이다.
그런데 억울하기 짝이 없는 것은 그게 내 탓이 아니라는 거다. 순전히 운명적인 불공평으로 인해 다른 이들은 벤츠 타고 탄탄대로를 가는데, 나는 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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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난 딸딸이 고물차를 타고 비포장 도로를 가고 있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나도 ‘머피의 법칙’을 생각할 때가 많다.
‘하필이면’ 큰 맘 먹고 세차한 날은 갑자기 맑은 하늘에서 비가 오고, 무엇을 사기 위해 줄을 서면 바로 내 앞에서 매진되고, 더욱이 얼마 전에는 길거리를 걸어가다가 내 어깨에 새똥이 떨어지는 일도 있었다. 나는 망연자실, 한동안 서서 나의 ‘하필이면’의 운명에 경악했다. 1천만 서울 시민 중에 새똥 맞아 본 사람은 아마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일 텐데 ‘하필이면’ 그게 나라니!
물론 이보다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하필이면’도 있다. 남들은 멀쩡히 잘도 걸어다니는데 왜 하필이면 나만 목발에 의지해야 하고, 어떤 사람은 펜만 잡으면 멋진 글이 술술 잘도 나오는데 왜 하필이면 나만 이 짤막한 글 하나 쓰면서도 머리를 벽에 박아야 하는가.
그렇다고 다른 재주가 있느냐 하면 노래, 그림, 손재주 그 어느 것 하나 네세울 게 없다. 하느님은 누구에게나 나름대로의 재능을 골고루 나눠주신다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하필이면’ 나만 깜빡하신 듯하다.
언젠가 치과에서 본 여성지에는 모 배우가 화장품 광고 출연료로 3억 원을 받았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3억 원이면 내가 목이 쉬어라 가르치고 밤새워 페이퍼 읽으며 10년 쯤 일해야 버는 액수인데, 여배우는 그 돈을 하루 만에 벌었다는 것이다.
나는 내가 잘빠진 육체는 가지지 못했어도 그런대로 꽤 아름다운 영혼을 가졌다고 생각하지만, 아마 내 아름다운 영혼에는 3억 원은커녕 3백 원도 주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어차피 둘 다 못 갖고 태어날 바에야 아름다운 몸뚱이를 갖고 태어날 일이지 왜 ‘하필이면’ 3백 원도 못 받는 아름다운 영혼을 갖고 태어났는가 말이다.
그래서 ‘하필이면’ 이라는 말은 내게 한심하고 슬픈 말이다.
그런데 어제 저녁 초등학교 2학년짜리 조카 아름이가 내게 던진 ‘하필이면’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길거리에서 귀여운 팬더 곰 인형 하나를 사서 아름이에게 갖다 주자 아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런데 이모, 이걸 왜 하필이면 내게 주는데?”하는 것이었다. 다른 형제나 사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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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도 많고, 암만 생각해도 특별히 자기가 받을 자격도 없는 듯한데,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는 아름이 나름대로의 고마움의 표시였다.
외국에서 살다 와 우리말이 아직 서투른 아름이가 ‘하필이면’이라는 말을 부적합하게 쓴 예였지만, 아름이처럼 ‘하필이면’을 좋은 상황에 갖다 붙이자, 나의 ‘하필이면’ 운명도 갑자기 찬란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누리는 많은 행복이 참으로 가당찮고 놀라운 것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도대체 내가 전생에 무슨 좋은 일을 했기에,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이면’ 내가 훌륭한 부모님 밑에 태어나 좋은 형제들과 인연 맺고 이 아름다운 세상을 살고 있는가. 아무리 노력해도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들이 그토록 많은데 왜 ‘하필이면’ 내가 무슨 권리로 먹을 것 입을 것 걱정 없이 편하게 살고 있는가.
또 나보다 머리 좋고 공부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왜 ‘하필이면’ 내가 똑똑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가.
게다가 실수투성이 안하무인인데다가 남을 위해 하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는 나. 장영희를 ‘하필이면’ 왜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고 사랑해 주는가.
‘하필이면’의 이중적 의미를 생각하니 내가 지고 가는 인생의 짐이 남의 짐보다 무겁다고 아우성쳤던 좁은 소견이 새삼 부끄럽다.
창문을 여니, 우리 학생들이랑 일산 호수공원에 놀러 가기로 한 오늘, ‘하필이면’ 날씨가 유난히 청명하고 따뜻하다.
■ 약속
아침에 눈을 뜨면 문득 이유 모를 공포를 느낄 때가 있다. 마치 심장이 천천히 오그라드는 듯, 뻐근하게 옥죄어 오다가 온 몸이 무너져 내리는 듯한 두려움과 공허감 말이다. 이 주변머리 없는 성격으로 또 다시 오늘 하루를 살아갈 일이, 아니 앞으로 지상에서의 남은 나의 삶을 하루하루 헤쳐 나가야 할 일이 아득하다.
미운 사람보고도 반가운 척 웃고, 하고 싶지 않은 말도 꼭 해야 할 때가 있고, 지키지 못할 약속인줄 알면서도 무조건 남발하고, 누군가의 말에 상처 받고 또 누군가에게 상처 주는 이 ‘살아감의 절차’를 다시 되풀이해야 할 일이 한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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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푸스의 비극은 산꼭대기에서 굴러 내려오는 돌을 또다시 혼신의 힘을 다해 올려 놓는 행위 자체가 아니다. 그의 비극은 그가 힘겹게 밀어 올리는 돌이 다시 굴러 떨어지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나의 두려움도 같은 이유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루하루 힘들여 돌을 밀어 올리지만 내일이면 그 돌은 다시 산 밑으로 내려와 있을 테고,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차라리 굴러 내려오는 돌 밑으로 몸을 던져 버리고 싶은 마음이다.
태어남은 하나의 약속이다. 나무로 태어남은 한여름에 한껏 물오른 가지로 푸르름을 뽐내리라는 약속이고, 꽃으로 태어남은 흐드러지게 활짝 피어 그 화려함으로 이 세상에 아름다움을 더하리라는 약속이고 짐승으로 태어남은 그 우직한 본능으로 생명의 규율을 지키리라는 약속이다.
작은 풀 한 포기, 생쥐 한 마리, 풀벌레 한 마리도 그 태어남은 이 우주 신비의 생명의 고리를 잇는 귀중한 약속이다. 그 중에서도 인간으로 태어남은 가장 큰 약속이고 축복이다.
불가에서는 모든 생명 중에서 인간으로 태어날 가능성이야말로 넓은 들판 가득히 콩알을 널어놓고 하늘 꼭대기에서 바늘 한 개를 떨어뜨려 콩 한 알에 박히는 확률과 같다고 한다.
억만 분의 일의 확률로 태어나는 우리의 생명은 그러면 무엇을 약속함인가. 다른 생명과 달리 우리의 태어남은 생각하고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기회의 약속이다. 미움 끝에 용서할 줄 알고, 비판 끝에 이해할 줄 알며, 질시 끝에 사랑할 줄 아는 기적을 만드는 일이다. 괴물같이 어둡고 무서운 이 세상에 빛 동그라미들을 만들며 생명의 약속을 지켜 가는 일이다.
■ 두 번 살기
오래 전 동생들이 내게 붙여 준 별명은 ‘삼치’ 이다. 여기서 ‘삼치’는 먹는 생선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석 삼(三)’ 에 ‘백치 치(痴)’ 즉 세 분야에 관한 한 완벽한 백치라는 말이다.
첫째 나는 동서남북을 가늠 못하고 헤매는 방향치이고, 둘째 요즘처럼 멀티미디어 시대를 살아가는 게 너무나도 버거운 기계치이고, 셋째 숫자라면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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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고 보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수치이다.
흔히 사람들은 목발을 짚고 천천히 걸어다니는 나를 안타까워하며 “얼마나 불편하고 힘드냐”고 위로하지만, 솔직히 말해 나의 ‘삼치’ 때문에 일상 생활에서 겪는 불편에 비하면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목발을 짚고 다녀 기동력이 좀 떨어져도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이해해 줄 뿐 아니라 기꺼이 나서서 도와주는 장애이지만, 나의 ‘삼치’는 상식을 벗어나는 정도이기 때문이다.
방향치로 말하면, 한 번은 정문 앞에서 학생들이 데모를 하는 바람에 뒷문으로 나갔다가 길을 잃어 보통 때 같으면 15분 걸리는 집을 두 시간 쯤 헤매다가 급기야는 차를 버리고 택시를 타고 온 적이 있고, 기계치로 말하자면 자동차 안전벨트 매는 것부터 CD플레이어 켜는 일에도 모든 지력을 동원해야 하고, 수치로 따지자면 내 휴대폰 번호나 주민등록 번호도 기억을 못해 항상 조교에게 물어봐야 한다. 그래서 나는 가르치고 점수 매기는 일 외에 모든 생활을 조교에게 의지하고 있다.
‘삼치’ 외에도 나는 심각한 건망 증세로 무엇이든 잘 잊거나 잃어버려 깨어 있는 시간의 3분의 1은 무엇인가를 열심히 찾는 데 소비한다. 오늘만 해도 중요한 전화를 받을 일이 있어 학교에 휴대폰을 가져간다는 것이 무심코 침대 놓여 있는 텔레비전 리모컨을 핸드백에 넣고 가는 바람에 하루 종일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렸다.
‘삼치’만 가지고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불편하기 짝이 없는데 거기다 더해 요즘에는 급기야 ‘사치’로 한 단계 승진(?)할 참이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눈치’ 없기로 꽤 소문이 나서 가끔 집에서 ‘둔치(둔한 눈치)’로 불린다. 눈치의 어원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지만 상황 판단을 하는 순발력이나 통찰력을 말한다면, 나는 사실 최악의 ‘둔치’이다. 이것이 요즘 들어 더 심해진 듯하다.
그런데 ‘삼치’의 경우에는 그저 나만 사는 게 고달프고 불편하면 되지만, 눈치가 없다는 것은 나뿐만 아니라 다fms 사람들에게까지 피해를 줄 수 있기 때문에 내가 가진 ‘치’ 가운데 제일 민망한 것이다.
삼치와 둔치로 실망하는 나를 보시고 어머니는 이렇게 위로 하신다.
“늦게 배우지만 한 번 배우면 확실하게 한다.” 물론 어머니로서는 무능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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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을 위로하고자 하신 말씀이었지만,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 일리 있는 말이었다. ‘삼치’와 ‘둔치’이면서도 그래도 그나마 이제껏 큰 과오 없이 살아 온 것은 시간이 걸려도 열심히 끝까지 배우고자 하는 근성, 아무리 못하고 모자라도 실망하지 않고 연습하고 또 연습한 덕이 아니었나 싶다.
그러나 말하면 무엇하나, 어차피 삶은 한 번 뿐이고, 연습은 없는 것을. 오늘도 나는 ‘삼치’에 ‘둔치’로 이리 헤매고 저리 넘어지지만, 내 생애 단 한 번 오는 2000년이라는 숫자는 너무 가슴이 벅차고, 넘어지면서 보아도 수평선 너머로 떠오르는 해는 여전히 아름답다.
■ 눈물의 미학
이 나이에도 나는 여전히 감정의 기복이 심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기분 내키는 대로 크게 웃어 남의 눈총을 받기도 하지만, 또 주책없이 눈물을 흘리기도 잘한다. 특히 우는 버릇은 어렸을 적부터 고질적이어서, 어머니는 아직도 가끔씩 “자식 여섯 키우면서 너같이 울음 끝 질긴 애는 처음 봤다. 도대체 한 번 울기 시작하면 하루 종일 자지도 먹지도 않고 울어댔으니…….” 하고 혀를 내두르신다.
내가 기억하기에도, 어렸을 때 나는 꽤 자주 울었고, 일단 울기 시작하면 빨리 그치지 않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 우는 이유야 여러 가지 였겠지만, 한번 울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왜’ 우는가는 별로 중요하지 않고 순전히 울기로 한 나의 결정에 충실하기 위해 일부러 슬픈 생각까지 해 가며 우는 일에 열중했었다.
어머니는 항상 “넌 한평생 흘릴 눈물을 어렸을 때 다 흘렸으니 네 팔자에 이제는 울 일이 없을 거다.”라며 말씀을 맺곤 하신다. 그러니 이제 ‘웃을 일만 남은’ 내 팔자지만, 그리고 이제는 체면 때문에 드러내 놓고 잘 울지도 못하지만, 그래도 사는 게 그게 아닌지 여전히 찔끔거리기를 잘한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도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어렸을 때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정말로 어른답게, 그리고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답게,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나누는 연민의 눈물이나 세상의 불의를 보고 흘리는 비탄의 눈물 아니면 내가 범한 잘못을 뉘우치는 통회의 눈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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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갑자기 발작처럼, 사는 게 슬퍼져서 우는 감상의 눈물이거나, 삶을 내 맘대로 휘두르지 못해 억울해서 우는 오만의 눈물이거나, 아니면 문득 이 세상에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 낯설어서 우는 두려움의 눈물이다. 또 감상적인 책이나 영화를 보면서 속으로는 ‘참 웃기지도 않네, 사람 울리려고 별 짓 다 하네’ 하고 욕하면서도 어느새 눈에 맺히는 그저 습관적인 눈물일 뿐이다.
‘어린 왕자’의 작가 생 텍쥐페리는 슬픔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살아 있다는 증거이고, 남을 위해 흘리는 눈물은 모든 사람들의 가슴속에 숨어 있는 보석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의 눈물은 그저 눈물을 흘리기 위한 눈물이요. 순전히 자기 연민의 의미 없는 눈물이니 보석은커녕 아마 버려도 아깝지 않은 자갈쯤 될 것이다.
오래 전 나훈아는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노래했지만 거꾸로 눈물은 사랑의 씨앗이 아닌지, 진정 남을 위해 흘리는 눈물이 자갈밭같이 메마른 내 가슴을 촉촉이 적시길 소망한다.
■ 진짜가 되는 길
내가 좋아하는 성프란체스코의 ‘평화의 기도’ 중에는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고,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라는 구절이 있다. 꼭 이 기도문은 아니더라도 이 말은 어렸을 때부터 주위 어른들에게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고, 이제는 내가 어른이 되어 걸핏하면 입에 올리는 말이기도 하다.
‘사랑을 받기 보다는 주는 사람이 되라. 그리고 이왕 주는 사랑이라면 타산적이고 쩨쩨하지 않게 ’제대로 된‘ 사랑을 주라.’
나 자신도 제대로 사랑할 줄 모르면서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이 참으로 어쭙잖지만, 그래도 가끔은 스스로에게 상기시키는 말이다. 사실 내가 업으로 삼고 있는 문학의 궁극적인 주제도 결국은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가야 하는가’의 문제로 귀착되니, 내 삶의 주제는 단연 ‘사랑하라’가 될 것이다.
사랑하는 일은 막대한 시간과 에너지를 요한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항상 배려하는 마음, 그 사람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궁금한 마음, 너무나 보고 싶은 마음-어떤 행동이나 말을 해도 항상 의식의 언저리에 있는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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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지배를 받는 것은 대단한 영혼의 에너지를 요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고작 차 한 두 대 굴리는 석유나 연탄 같은 눈에 보이는 에너지는 아까워하면서, 막상 이 우주를 움직이는 사랑이라는 에너지는 그저 무심히 흘려버리기 일쑤다.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서양 동화 중에 ‘벨벳 토끼’라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는 어떤 아이가 갖고 있는 장난감 말과 토끼가 나누는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진짜 토끼가 되고 싶어. 진짜는 무엇으로 만들어졌을까?”
잠자는 아이의 머리맡에서 새로 들어온 장난감 토끼가 아이의 오랜 친구인 말 인형에게 물었다.
“진짜는 무엇으로 만들어 졌는가는 아무 상관이 없어 그건 저절로 일어나는 일이야.”
말 인형이 대답했다.
“진짜가 되기 위해서는 많이 아파야 해?” 다시 토끼가 물었다.
“때로는 그래, 하지만 진짜는 아픈 걸 두려워하지 않아.”
“진짜가 되는 일은 갑자기 일어나는 일이야? 아니면 태엽 감듯이 조금씩 조금씩 생기는 일이야?”
“그건 아주 오래 걸리는 일이야.”
“그럼 진짜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해?”
“아이가 진정 너를 사랑하고 너와 함께 놀고, 너를 오래 간직하면, 즉 진정한 사랑을 받으면 너는 진짜가 되지.”
“사랑 받으려면 어떻게 하면 되지?”
“깨어지기 쉽고, 날카로운 모서리를 갖고 있고, 또는 너무 비싸서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하는 장난감은 진짜가 될 수 없어. 진짜가 될 즈음에는 대부분 털은 다 빠져 버리고 눈도 없어지고 팔다리가 떨어져 아주 남루해 보이지. 하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아. 왜냐하면 진짜는 항상 아름다운 거니까.”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사랑받는다는 것은 ‘진짜’가 될 수 있는 귀중한 기회이다. 모난 마음은 둥그렇게, (‘사람’이라는 단어의 받침인 날카로운 ㅁ 을 동그라미 ㅇ 으로 바꾸면 ‘사랑’이 되듯이) 잘 깨지는 마음은 부드럽게, 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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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싸서 오만한 마음은 겸손하게 누구러뜨릴 때에야 비로소 ‘진짜’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진짜’는 사랑받는 만큼 의연해질 줄 알고, 사랑받는 만큼 성숙할 줄 알며, 사랑받는 만큼 사랑할 줄 안다. ‘진짜’는 아파도 사랑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남이 나를 사랑하는 이유를 의심하지 않으며, 살아가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가진다.
한 번 생겨나는 사랑은 영원한 자리를 갖고 있다는데, 이 가을에 내 마음 속에 들어올 사랑을 위해 동그랗게 빈자리 하나 마련해 본다.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할 줄 아는 ‘진짜’됨을 위하여.
■ 아프게 짝사랑하라.
신학기가 시작되어 캠퍼스는 다시 북적대고 활기에 넘친다. 생기에 넘쳐 빛나는 얼굴들, 희망과 기쁨에 찬 화사한 미소들, 단지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해 보이는 젊은이들을 보며 나는 다시 봄이 왔음을 실감한다.
아낌없는 계절의 순환 속에서 속절없이 세월은 흐르고, 나는 어느덧 그들의 젊음이 부러운 나이가 되었음을 깨닫는다.
어느 시인이 말하기를, 인생행로에 있어 청춘을 마지막에, 즉 60대 뒤쯤에 붙이면 인간은 가장 축복받은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했다. 육체가 가장 아름답고 왕성한 힘을 발휘하는 청춘에는 미래에 대한 방향설정과 불확신으로 고뇌하고 방황하며 어설프게 지내고, 이제 어느 정도 인생의 깊은 맛을 알게 될 때는 이미 몸과 마음이 시들대로 시들어 참된 인생을 즐길 수 없다는 말이다.
영작문을 가르칠 때 나는 언제나 학생들에게 영어로 일기를 쓰게 하고 한 달에 한 번씩 점검한다.
내가 읽을 것을 전제로 하는데도 학생들은 아주 솔직하게 자기 표현을 하고, 일기 대신 편지로 직접 상담을 구하기도 한다. 그들의 일기는 대부분 몇 가지 주제 - 공부에 관한 어려움, 전공에 대한 회의, 동아리 생활, 가정 생할, 그리고 물론 사랑 이야기 - 들로 겹쳐진다.
그 중에서도 자주 대하는 것은 짝사랑에 대한 고뇌와 슬픔 또는 좌절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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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남보다 잘 생기거나 예쁘지 못해서, 키가 작아서, 집안이 가난해서, 성격이 너무 내성적이라서, 등등 여러 가지 이유로 혼자 누군가를 짝사랑하면서 괴로워하거나 지독한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그런 학생들에게 어떤 말을 해 준들 위로가 되겠는가마는, 내가 안타깝게 느끼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의 슬픔에 취해서 자신들이 얼마나 소중한 경험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짝사랑이야말로 젊음의 특권 아니 의무라는 사실을 말이다.
나도 그 나이에는 짝사랑하면서 슬퍼하고 깨어진 꿈에 좌절하면서, 마치 이 세상의 모든 번민은 모조리 내 가슴속에 쌓아 놓은 듯 눈물까지 떨구어 가며 일기장에 괴로운 속마음을 토로하곤 했었다.
그러나 이제 중년의 나이가 되어 하루하루를 그저 버릇처럼 살아가는 지금 그 ‘괴로운’ 짝사랑들은 가슴 저리는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짝사랑이란 삶에 대한 강렬한 참여의 한 형태이다. 충만한 삶에는 뚜렷한 참여 의식이 필요하고, 거기에는 환희뿐만 아니라 고통 역시 수반하게 마련이다. 우리 삶에 있어서의 다른 모든 일들처럼 사랑도 연습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짝사랑이야말로 성숙의 첩경이고 사랑 연습의 으뜸이다. 학문의 길도 어쩌면 외롭고 고달픈 짝사랑의 길이다. 안타깝게 두드리며 파헤쳐도 대답 없는 벽 앞에서 끝없는 좌절감을 느끼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나아가는 자만이 마침내 그 벽을 허물고 좀 더 넓은 세계로 나갈 수 있는 승리자가 된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이여, 당당하고 열정적으로 짝사랑하라. 사람을 사랑하고, 신을 사랑하고, 학문을 사랑하고, 진리를 사랑하고, 저 푸른 나무, 저 높은 하늘을 사랑하고, 그대들이 몸담고 있는 일상을 열렬히 사랑하라.
사랑에 익숙지 않은 옹색한 마음이나 사랑에 통달한 게으른 마음들을 마음껏 비웃고 동정하며 열심히 사랑하라. 눈앞에 보이는 보상에 연연하여, 남의 눈에 들기 위해 자신을 버리는 사랑의 거지가 되지 말라.
언젠가 먼 훗날 너의 삶이 사그라질 때 짝사랑에 대해 허망함을 느끼게 된다면 미국 소설가 잭 런던과 같이 말하리라. “먼지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재가 되겠다”고. 그 말에는 무덤덤하고 의미 없는 삶을 사는 것보다는 고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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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반하더라도 찬란한 섬광 속에서 사랑의 불꽃을 한껏 태우는 삶이 더 나으리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 장영희가 둘
얼마 전 동료 교수 하나가 어떤 학생이 나에 대해 한 말을 전했다.
“학교에 들어오기 전에 영자 신문이나 다른 글들을 통해 알았던 장영희 선생님하고 수업 들으면서 뵙는 선생님은 영 딴판이에요. 글 속의 선생님은 아주 온화하고, 낭만적이고, 감상적이기까지 한데, 교실에서 만나는 선생님은 아주 엄격하고, 철저하고 점수도 되게 짜요.”
사실 내가 이런 말을 듣는 것은 처음이 아니다. 인간 장영희와 글 쓸 때의 장영희를 둘 다 알고 있는 사람들이 가끔 내게 농담처럼 하는 말이다. 학생의 말처럼, 글 속의 장영희는 섬세하고 부드럽고 따뜻한 대 반해 실제로 만나는 장영희는 아주 무뚝뚝하고 직설적이고 비판적이라는 것이다. 나도 간혹 누가 진짜 장영희인지, 아니면 적어도 어느 쪽에 더 가까운지 생각해 보곤 한다.
일상 속에서 나는 깐깐하고 엄격한 선생님, 논리적으로 처분하기 좋아하는 원칙론자, 감상을 배제하고 효율성을 따져 이성적으로 결정하는 기능주의자, 실수를 용서하지 않는 완벽주의자, 다른 사람의 감정에 무감각한 실리주의자, 속전속결의 현실주의자, 무슨 말이든 삐딱하게 받아들이는 회의론자이다.
내겐 분명히 그런 구석이 있다. 그렇지만 또 다른 나의 모습도 있다. 그것은 말 한마디에도 상처받을 정도로 마음이 여리고 다른 사람들의 역경을 안타까워하며 잠을 설치고, 부끄럼 잘 타고 누가 무슨 말을 하든 문자 그대로 믿는 순진무구함, 게다가 구제 불능의 낭만주의자. 이상주의자, 감상주의자, 실수투성이에 후회 덩어리 ……그것도 분명 나다. 그러니 어느 쪽이 진짜 나인지 나도 단정짓기 힘들다.
그래서 나는 항상 무엇인가 걱정하고 조바심하고, 주저하고 결단하지 못하고 불확신에 차있다.
그렇다면 왜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은 나 아닌 나를 나라고 생각하는가?
없는 글재주로 설명하려고 하기 보다는 짧은 글 하나를 소개하는 것이 나을 듯싶다. 영어로 씌어진 글인데, 오래 전 어떤 잡지에서 읽고 복사해서 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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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에 끼워 두었던 것이다. 누가 쓴 것인지 원전이 어디인지조차 알 수 없지만, 내 마음을 가장 잘 대변하고 있는 글이다.
가면
나한테 속지 마세요. 내가 쓰고 있는 가면이 나라고 착각하지 마세요. 나는 몇 천 개의 가면을 쓰고 그 가면들을 벗기를 두려워한답니다. 무엇 무엇하는 ‘척’ 하는 것이 바로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이죠. 만사가 아무런 문제 없이 잘 되어 가고 있다는 듯, 자신감에 가득 차 있는 듯 보이는 것이 내 장기이지요. 침착하고 당당한 멋쟁이로 보이는 것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임이지요. 그렇지만 내게 속지 마세요.
나의 겉모습은 자신만만하고 무서울 게 없지만, 그 뒤에 진짜 내가 있습니다. 방황하고, 놀라고, 그리고 외로운.
그러나 나는 이것을 숨깁니다. 아무도 모르는 비밀입니다. 나는 나의 단점이 드러날까 봐 두렵습니다. 당신이 나를 무시하고 비웃을까봐 두렵습니다. 당신이 나를 비웃는다면 나는 아마 죽고 싶을 겁니다. 나는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게 밝혀지고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로부터 거절당할까봐 겁이 납니다. 그래서 나는 당당함의 가면을 쓰고 필사적인 게임을 하지만, 속으로는 벌벌 떠는 작은 아이입니디.
나는 중요하지 않은 일에 관해서는 무엇이든 얘기하고 정말 중요한 일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안 합니다. 하지만 그럴 때, 내가 말하는 것에 속지 마세요. 잘 듣고 내가 말하지 않는 것, 내가 말하고 싶은 것, 내가 말해야 하지만 할 수 없는 것들을 들어 주세요.
그렇지만 나는 가면 뒤에 숨어 있는 것이 싫습니다. 나는 내가 하고 있는 게임이 싫습니다. 나는 순수하고 자유로운, 진짜 내가 되고 싶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나를 도와 줘야합니다. 내가 절대로 원하지 않는 것 같이 보여도 당신은 내게 손을 내밀어 주어야 합니다. 당신만이 내가 쓰고 있는 가면을 벗어버리게 할 수 있으니까요. 당신이 친절하고 부드럽게 대해 주고 나를 격려해 줄 때, 정말로 나를 보듬어 안고 이해해 줄 때 나는 가면을 벗어 던질 수 있습니다. 당신이야말로 내 속의 진짜 나를 다시 살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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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내가 숨어서 떨고 있는 벽을 허물고 가면을 벗어 던지게 할 수 있는 사람도 당신뿐입니다. 당신은 나를 불안과 열등감, 불확신의 세계에서 해방시켜줄 수 있습니다. 그냥 지나가지 말아주세요!
그것은 당신께 쉽지 않습니다. 오랫동안 쌓인 두려움과 가치 없는 인생을 살고 있다는 회의의 벽을 무너뜨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당신이 내게 더욱 가까이 올수록 나는 더 저항해서 싸울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랑과 용납, 관용은 그 어느 벽보다 강합니다.
부드러운 손으로 그 벽들을 무너뜨려 주세요. 내 속에 있는 어린아이는 아주 상처받기 쉽고 여리기 때문입니다. 내 가면을 벗기고 나를 받아들이고 나를 사랑해 주세요.
나는 받아들여지고 사랑 받기를 원합니다.
나는 당신이 아주 잘 아는 사람입니다. 나는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입니다. 나는 바로 당신입니다.
■ 천국 유감
하루 일과를 끝내고 잠자리에 들기 전 잠시 눈을 감고 하루를 돌이켜 보면 안도감과 허탈감을 동시에 느낀다. 그나마 커다란 실수 없이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는 안도감과 또 한편으로는 속절없이,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하루를 허비했다는 허탈감이다.
그야말로 화살같이 흐르는 나날들. 허무할 뿐 아니라 죄의식마저 느낄 정도이다. 장영희가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장영희가 이 세상에 태어나 무엇을 하였는가. 귀한 생명 받고 태어나 한평생 살다가, 죽을 때 이 세상에 손톱자국만큼이라도 살다간 좋은 흔적을 남길 수 있는가. 그저 시간되면 일어나 기계처럼 학교 가고, 기계처럼 학생들 가르치고 기계처럼 회의에 참석하고, 하루 종일 사람들과 일에 치여 밤이 되면 지쳐 잠들고…….
그런데 아이로니컬한 것은 이렇게 천편일률적인 삶 속에도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은 왜 그리 힘든지. 항상 시간에 쫓겨 잠은 늘 부족하고 급하게 수업준비 하느라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학생들 야단치고 눈 흘기고, 원고 마감 일자 못 지켜 조바심하고, 누군가를 미워하고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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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하며 울고 웃고, 항상 기승전결 없는 연극처럼 극적인 하루하루인데, 돌이켜보면 그저 물 흐르듯 흔적 없이 사라져 버린 세월이다.
오늘도 바쁜 일을 끝내고 오후 2시 경에야 매점에서 산 김밥을 먹고 있는데 선미가 들어왔다.
병으로 1년 휴학하고 오니 남자 친구는 다른 여자 친구가 생겼다 하고, 부모님은 취업을 강요하고, 정말 살기 힘들다는 하소연 이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선미가 말했다.
“천당에만 갈 수 있다면 못 죽을 것도 없지요.”
선미가 간 후에야 문득 오래 전에 읽은 이야기 하나가 생각이 났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유대인 작가 아이작 싱어가 쓴 ‘바보들의 천국’이라는 단편이다.
바보들의 천국
아첼은 어느 부자 상인의 외아들인데, 천성이 게을러서 일하거나 공부하는 것을 끔찍이 싫어했다. 그는 자기가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아야 할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은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유모로부터 천국에 가면 일할 필요도 없이 매일 놀고 먹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귀가 번쩍 띄었다. 그러고는 죽어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말에 천국에 가고 싶은 나머지 죽기를 바라며 오랫동안 꼼짝 않고 침대에만 누워 있었다. 아첼의 부모는 걱정이 되어 현명한 의사와 상의 하였고, 의사는 처방법을 알려 주었다.
아첼이 다음날 깨어 보니 자신이 아름답게 장식된 방에 누워 있는 게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 곁에는 등에 날개가 달린 천사들(사실은 하인들)이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죠?” 아첼이 묻자 한 천사가 “여기는 천국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아첼은 천국에 온 것이 너무나 기뻤다. 하루 종일 아무 일 안 해도 잔소리 하는 이가 없었고, 잠잘 때가 되면 천사들이 들어서 포근한 침대에 눕혀 주었고, 식사 때가 되면 금접시 은접시에 산해진미가 들어왔다.
며칠이 지나 아첼은 갓 구운 빵, 버터, 커피가 먹고 싶다고 했으나 천사는 “천국엔 그런 음식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실망한 아첼이 “지금 몇 시나 됐소? 밤이오? 낮이오?” 하고 물으니, “천국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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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고 답했다. 그러자 아첼이 다시 물었다. “그럼 난 이제 뭘 하지?” 그러자 천사가 말했다. “천국에서는 ‘할 일’이 없습니다.”
산해진미만 먹고 온종일 침대에 누워 잠자는 일밖에는 할 일이 없자. 아첼은 생전 처음으로 무엇인가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그러나 천사들은 “천국에서는 일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하고 말할 뿐이었다. 그렇게 가짜 천국에서 일주일을 보낸 아첼은 마침내 참지 못해 소리쳤다.
“이렇게는 못 살겠어! 차라리 죽는 게 낫겠어!”
“천국에는 ‘죽는다’는 것이 없습니다.” 천사의 대답이었다.
8일째 되는 날 아첼의 부모는 아들을 다시 ‘지상’으로 데려왔고, 7일 동안의 천국 경험은 아첼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
“사는 것이 이렇게 재미있고 좋은 것인지 몰랐어.”
그 후 아첼은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사는 사람이 되었다.
천국이란 데가 그런 곳이라면, 그곳에는 걱정거리 하나 없고, 미워할 사람도 없고, 완벽하게 아름답고, 나쁜 일이나, 슬픈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곳에는 훌륭하고 좋은 사람들만 있어, 남을 비판하거나 질시하지도 않고, 언제나 인자하고 따뜻한 미소를 띠고 상냥한 말만 한다.
그런데 이런 천국에서 정말 살고 싶은지 생각해 볼 일이다. 소나기 한 번 내리지 않고, 거센 바람 한 줄기 불지 않는 완벽하게 아름다운 평원을 보며, 희로애락의 감정 표현 없이 언제나 미소만 짓는 사람들, 원하는 모든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아니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아예 그 무엇도 ‘원할’ 필요가 없는 곳. 지상의 시간 개념으로 한 사흘만 살면 숨이 막힐 것 같다.
질시의 아픔을 알기 때문에 용서가 더욱 귀중하고, 죽음이 있어서 생명이 너무나 소중하고 실연의 고통이 있기 때문에 사랑이 더욱 귀중하고, 눈물이 있기 때문에 웃는 얼굴이 더욱 눈부시지 않은가. 그리고 하루하루 극적이고 버거운 삶이 있기 때문에 평화가 값지고, 희망과 꿈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 누구도 천국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죽으면 지옥이 아닌 천국이라는 데로 가고 싶다. 그러나 천국에 가기 전에 지금 내가 바로 여기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지금, 여기, 내 책상 위에는 교정 봐야 할 원고와 학생들 페이퍼가 잔뜩 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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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있고, 옆방에서는 어머니가 텔레비전 소리를 크게 틀고 드라마를 보시다가 “얘, 부엌에 뭐가 탄다!” 며 소리 지르고, 5년 기다려 둘째 아기를 가진 동생은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오늘 정기 검진 갖다 온 얘기를 하다가, “아이쿠, 찌개”하며 부엌으로 달려가고, 이층에서는 다시 전화벨이 울리고, 여섯 살짜리 개구쟁이 조카는 바로 내 옆에서 로봇을 가지고 놀며 ‘지지주주’ 이상한 소리를 내고 있다.
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축복 받은 시간이고 천국은 다름 아닌 바로 여기라고 …….
■ 은하수와 개미싸움
내가 어렸을 때 나보다 여섯 살 위인 오빠가 늘 나를 업고 다녔다. 어느 날 밤 전깃불이 나가고 양초를 사러 가던 길에서 오빠가 걸음을 멈추더니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영희야, 저것 봐라, 은하수다!”
아, 나는 그때 봤던 은하수를 평생 잊을 수 없다. 칠흑 같은 하늘 위로 휘몰아치듯 굽이진 별무리는 그야말로 거대한 빛의 흐름이었다. 그때 오빠가 유난히 반짝이는 별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북극성 보이지? 북극성은 1100광년이래. 그러니까 지금 네가 보고 있는 별빛은 1100년 전에 저 별을 떠난거야.”
나는 물론 그때 ‘광년’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오빠 역시 나의 이해를 기대하고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아름다운 은하수를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로는 한 번도 그런 장관을 본 적이 없다.
그날 이후 나는 밤하늘을 볼 때마다 그때 본 은하수를 떠올리고, 1100광년짜리 북극성을 찾는다. 1100년 전에 여행을 떠난 빛이 빛의 속도로 여행하여 마침내 오늘 나의 눈에 들어와 반짝이는 별로 보인다는 것은 암만 생각해도 너무나 경이롭다.
1100년 전 통일신라 시대 때 떠난 빛이 드디어 지구에 도착, 내 눈에 들어온다. 어느 화랑이 사랑하는 처녀를 그리며 쳐다보았을까, 또는 짚신 메고 산천을 떠돌던 나그네가 동서남북 찾으려고 쳐다보았을까. 그러나 물론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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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지금 먼지 하나의 흔적도 없다.
끝없는 은하계 속의 지구는 한낱 미세한 점만도 못한데, 그 점 속에서 우리들은 마치 우주를 다 가진 듯 큰소리치고 잘난 척한다. 마치 실같이 가느다란 개미굴 속에 사는 개미왕이 지구를 다 가졌다고 으스대는 꼴이다.
지금 이 순간 저 별을 떠나는 빛은 앞으로 1100년 후, 그러니까 서기 3100년쯤. 지상에서 밤하늘을 쳐다보는 누군가의 눈과 만날 것이다. 내가 지금 존재하고 있는 이 짧은 시간 이 하나의 점 같은 공간이 우주인줄 알고 도대체 왜 날 건드리느냐고, 왜 날 못 잡아먹어 안달이냐고 조목조목 따지고 침 뱉고 돌아서려던 나의 개미 마음이 부끄럽다.
■ 이해의 계절
사랑이 이우는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우리들의 슬픈 영혼은 이제 지치고 피곤합니다.
헤어집시다. 정열의 시간이 우리를 잊기 전에
수그린 당신의 이마에 입맞춤과 눈물을 남기고.
이 시는 이번 학기에 내가 가르치는 시인 W. B. 예이츠가 쓴 ‘낙엽’ 이라는 시의 귀결 부분이다. 수많은 시인들이 가을에 대해 썼지만 대부분 예이츠와 같이 이별, 우수, 이루지 못한 꿈, 죽음 등의 어두운 주제와 연결시키고 있다.
그렇지만 가을은 이처럼 슬프기 때문에 더욱 아름다운 계절이다, 그 어떤 화려하고 찬란한 색깔의 꽃이 가을 들판에서 남몰래 피었다 지는 작은 들국화의 깊고 은은한 아름다움에 비할 수 있을까. 생명력 넘치는 짙푸른 신록이 아무리 아름다운들 서서히 죽어가는 잎들이 이루는 단풍의 신비한 색의 조화를 좇아갈 수 있을까. “죽음은 종말이 아니라 성숙의 결정(結晶)이다.”라는 키츠의 말처럼 성숙은 어차피 아픔과 죽음을 수반하게 마련인지도 모른다.
가을에 관한 말 중 내게 가장 인상 깊은 말은 미국의 저널리스트 핼 볼랜드가 어느 수필에 쓴 “가을은 이해를 위한 계절이다.(Autumn is for understanding.)” 라는 글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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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가을을 이해의 계절이라 했을까. 계절의 순환을 인생에 비유한다면 봄은 새로움에 대한 설렘과 희망의 시간이요. 여름은 삶에 한껏 부대끼며 죽도록 사랑하고 미워하며 지내는 치열한 대결의 시기이고, 가을은 지나간 나날을 뒤돌아보고 반추하며 드디어 진정한 삶의 의미를 이해하는 시기라는 뜻일까. 삶의 풍요로움과 가치는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뿐만 아니라 예기치 않은 고통과 뼈아픈 고뇌 속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한다는 뜻일까. 아니면 언제나 바로 눈앞의 길 모퉁이에서 자취를 감춰 버리는 삶을 좇다 지쳐 넘어져 결국 혼자 남는 허무함과 외로움을 이해한다는 뜻일까.
■ 사랑합니다.
영어 회화 시간에 구두 시험 주제로 “만약 내일 죽어야 한다면 오늘 무엇을 하겠는가?” 라는 질문을 주었다.
학생들은 특유의 영특함과 순발력으로 재미있고 기발한 대답들을 쏟아냈다.
그중 한 여학생의 말이 특별히 가슴에 와 닿았다.
“오늘이 가기 전에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꼭 ‘사랑해요’ 라는 말을 하겠습니다.”
‘사랑해요.’ 아,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그러나 또 얼마나 하기 어려운 말인가. 날 사랑해 주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 싸여 살면서도 나는 이제껏 한 번도 그 누구에겐가 ‘사랑합니다’ 라는 말을 입 밖에 내 본 적이 없다.
‘사랑하다’와 ‘살다’라는 동사는 어원을 좇아 올라가면 결국 같은 말에서 유래 한다고 한다. 영어에서도 ‘살다(live)’와 ‘사랑하다(love)’는 철자 하나 차이일 뿐이다. 살아가는 일은 어쩌면 사랑하는 일의 연속인지도 모른다. 신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장미, 괴테, 모차르트, 커피를 사랑하고……. 우리들은 사랑하기 때문에 끝없이 아파하고 눈물 흘리기 일쑤지만, 살아가는 일에서 사랑하는 일을 뺀다면 삶은 허망한 그림자 쇼에 불과할 것이다.
“사랑해요 나의 부모님. 사랑해요, 나의 형제들. 사랑하는 나의 친구들 . 나의 학생들. 그리고 사랑합니다,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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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막다른 골목
■ 어느 거지의 변
“어느 부자가 공원을 산책하다가 벤치에서 웅크린 채 자고 있는 거지를 발견했다. 부자는 거지의 소원이 무엇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거지에게 소원을 묻자, 거지는 단 하룻밤만이라도 따뜻한 잠자리에서 자 보는 것이라고 했다. 부자는 그날부터 거지가 최고급 호텔에서 잘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그러나 다음날 부자가 호텔에 가 보니 거지는 다시 공원 벤치로 돌아가고 없었다. 왜 돌아왔느냐고 묻는 부자에게 거지가 무엇이라고 대답했겠는가?”
수업에 들어가 이 질문을 하자 학생들은 제각각 기발하고 재치있는 대답들을 했다. “ 자리가 바뀌어 잠을 잘 수 없었다.” “부자의 호기심의 대상이 되어서 자존심이 매우 상했다.” “편한 데서 자 보니 더 이상 꿈이 없어졌다.” “차라리 돈으로 달라.” 등등……. 그런데 갑자기 민식이가 큰 소리로 말했다.
“한 번 거지는 영원한 거지다! (Once a beggar, always a beggar!)”
학생들은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말 식으로 영어를 한다 하여 별명도 ‘미스터 콩글리시’인 민식이가 이번에는 완벽한 영어로 말한, 참으로 실소를 금할 수 없는 대답이다.
하지만 꽤 그럴듯한 메시지가 숨어 있는 말이기도 하다. 타고난 운명은 거역할 수 없고, 어쩔 수 없이 순응해야 한다는 운명 철학을 담고 있는 명언이 아닌가.
‘거지’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이 단어가 연상시키는 불결함, 남루함, 슬픔, 고독, 절망 등과 함께 오래 전 어떤 기억을 떠올리게 된다.
1984년의 어느 무더운 여름날, 유학중에 여름 방학이라 잠시 집에 돌아와 있던 나는 윈도 쇼핑이나 하자면서 잡아 끄는 동생을 따라 명동 주변으로 갔다.
달리 입을 것이 없었던 나는 군데군데 거의 올이 보일 정도의 낡은 청바지에 내 몸이 둘은 들어갈 정도의 넉넉한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생전 처음 명동에 간 나는 양장점과 구두 가게들이 즐비한 거리를 외계인처럼 두리번거리며 걷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동생이 어떤 진열장에 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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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흰색 원피스를 가리키며 입어 보겠다고 했다. 마침 그 가게 앞에는 내가 올라갈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높은 문턱이 있어서 나는 그냥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문 밖에 서서 안쪽을 들여다보니 아주 아름다운 중년 여인이 만면에 미소를 띠며 동생을 반겼다.
그런데 동생을 탈의실로 안내한 후 무심히 돌아서던 그녀가 문에 기대서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나를 보고는 흠칫 놀라는 것이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지면서 내뱉듯이 말했다.
“나중에 와요. 손님 있는 거 안 보여요?”
그제나 이제나 눈치 없기로 소문난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그저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었다. 그러자 그녀가 이번에는 한 옥타브 더 높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나중에 오라는 말 안 들려요? 지금은 동전이 없다구요!”
순간 그 소리를 들은 동생이 옷을 입다 말고 탈의실 문을 박차고 나왔다.
“뭐라고 그랬어요. 지금, 우리 언니를 뭘로 보는 거냐구요!”
나는 그제야 주인이 나를 가게 앞에서 구걸하는 거지로 착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을 어떻게 보고 하는 소리예요? 우리 언니는 박사예요. 박사. 일류 대학을 나오고, 글도 쓰고, 책도 내는…….”
길다란 흰색 원피스를 한 쪽 어깨만 걸친 동생은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분노의 여신 같았다. 주인 여자는
“목발을 짚으신데다 입성까지 그러셔서” 하며 공손하고 겸연쩍게 사과했지만, 못내 억울한 표정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녀의 입장에서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었다. 신체 장애는 곧 가난, 고립, 절망, 무지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사회에서, 그것도 유행의 최첨단을 걷는 거리에서 구멍난 청바지에 낡은 티셔츠를 걸친 것만 해도 뭣한데, 결정적으로 목발까지 짚고 서 있었으니 거지의 모든 필요조건을 다 갖춘 셈이 아닌가.
어쨌거나 여름날의 그 경험은 나의 생활 패턴을 바꿔 놓았다.
학위를 마치고 귀국한 바로 다음날부터 나는 청바지를 벗어버리고 정장을 했다. 옷을 선택할 때는 실용성보다는 문자 그대로 ‘거지처럼 보이지 않는’ 데 기준을 둔다. 로션 하나 안 바르던 얼굴에 화장도 한다. 학생들 말마따나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거지로 보일 확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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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줄이고자 하는 시도이다.
■ 나와 남
아주 옛날, 대장장이 프로미시우스가 인간을 빚으면서, 각자의 목에 두 개의 보따리를 매달아 놓았다고 한다. 보따리 하나는 다른 사람들의 결점으로 가득 채워 앞쪽에, 또 다른 보따리는 자신들의 결점으로 가득 채워 등 뒤에 달아 놓았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앞에 달린 다른 사람들의 결점은 잘도 보고 시시콜콜 이리 뒤지고 저리 꼬투리 잡지만, 뒤에 달린 보따리 속에 자기 결점은 전혀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아무리 평판 좋고 훌륭한 사람일지라도 마음만 먹으면 비난거리는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인간 성향이라는 게 모두 양면적이라서 마음 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서로 상반되는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주 겸손하고 나서기 꺼려하는 사람은 카리스마가 부족하고 자신감이 없다고 비난하고, 반대로 박력 있고 당당한 사람은 겸손하지 못하고 되바라졌다고 욕한다.
그런가 하면 쾌활하고 잘 웃으면 사람이 가볍고 신중하지 못하다고 욕하고, 잘 웃지 않고 진중하면 괜히 무게 잡는다고 욕한다. 상냥하고 사근사근하면 내숭떨고 여우같다고 욕하고. 상냥하지 못하면 뻣뻣하고 여자답지 못하다고 욕한다. 너그럽고 많이 베푸는 사람에겐 잘난 척하고 우월감을 갖고 있다고 비난하고, 잘 베풀지 않는 사람은 또 구두쇠이고 편협하다고 욕한다. 신앙심이 깊은 사람은 위선적이고 혼자 거룩한 척한다고 욕하고, 신앙심이 없으면 믿지 않는 사람은 별 수 없다고 손가락질 한다.
‘남’이기 때문에 안 되고 ‘나’이기 때문에 괜찮다는 논리는 어쩌면 인간의 본능인지도 모른다. 많은 학생들 앞에서 강의할 때 나는 가끔 엉뚱한 생각을 한다.
누구나 다 똑같이 얼굴에 눈 두 개, 코 한 개, 입 한 개가 있다. 그런데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 조합으로 그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다 제각기 다를 수 있는가.
그런데 두뇌 과학자들에 의하면 우리의 속 모습은 겉모습보다 더 차이가 난다고 한다. 얼핏 보기에는 똑같이 큰골 작은골로 이루어져 있고 생김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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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하게 보이지만, 두뇌마다 제각각 조금씩 찌그러진 정도나 굴곡, 주름잡힌 정도가 달라서, 절대로 두 개의 두뇌가 완벽하게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사람마다 살아가면서 제각각 다른 경험을 하고, 그 경험에 따라 갖는 느낌, 기억, 생각이 두뇌에 작은 선이나 주름을 하나씩 만들기 때문에, 억만년이 지나도 똑 같은 두뇌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비슷하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도 비슷한 우리들, 앞뒤로 보따리 하나씩 메고 돌아다니면서 열심히 앞 보따리를 뒤적거려 보지만, 결국은 앞이나 뒤에 들어 있는 건 매한가지이다. 이렇게 보면 장점이고 저렇게 보면 단점이다. 장단점이 따로 없지만, 어차피 세상을 판단하는 기준은 자기 자신이다.
한 유행가 가사에서 ‘남’에서 점을 하나 빼면 ‘님’이 된다고 했다. 아닌게 아니라 인간관계는 우리 여섯 살짜리 조카가 갖고 노는 자석 글자판의 글자 놀이와 같은 건지도 모른다. ‘남’에서 받침을 하나 빼면 ‘나’가 된다. 점 하나를 옮기면 ‘너’가 된다. ‘남’의 획을 잘 못 갖다 붙이면 ‘놈’이 된다.
사람 사는 게 엎어치나 뒤치나 마찬가지고, ‘나’ ‘너’ ‘남’ ‘놈’도 따지고 보면 다 그저 받침 하나, 점 하나 차이일 뿐이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악착 같이 ‘나’와 ‘남’ 사이에 깊은 골을 파 놓고 그렇게 힘겹게 살아가는지 모르겠다.
■ 연애 편지
지난 주 과에서 발행하는 잡지에 나에 대한 기사를 싣겠다고 인터뷰를 하러 온 학생 기자가 재미있는 질문을 했다.
“교수님은 대학교 다닐 때 연애 편지를 받아 보시거나 써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예기치 않은 질문에 내심 당황했다. 그래서 대학교 때는 써 보지 못했지만 오히려 지금은 자주 쓴다. 학생들이 내게 보내는 편지에 ‘사랑하는 선생님’이라고 써 주고 나도 군대 가거나 유학 간 학생들에게 편지 쓸 때 ‘사랑하는 ……에게’라고 시작하는데, 그게 연애 편지가 아니고 뭐냐고 버무렸다.
연애 편지…….
물론 학생들이 ‘사랑하는 선생님’ 이라고 정답게 써 보내 오니 그것도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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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 편지’라고 우기긴 했지만. 그건 안타깝게도 이 세상에 태어나 딱히 ‘연애 편지’라고 이름붙일 만한 것을 한 번도 받아 보지도 써 보지도 못한 사람의 자위일 따름이다.
진정한 연애 편지는 역시 사랑과 낭만에 듬뿍 젖은 두 남녀가 서로를 열망하며 온 마음 다 쏟아 부어 정성스럽게 쓰는 글이라야 제격이다.
마침 오늘 2학년 영문학 작문시간 주제가 ‘사랑의 톤(tone, 분위기, 목소리)’이어서 내친김에 학생들에게 현실 혹은 가상의 상대에게 연애 편지를 쓰라고 했다. 영어로 쓴 편지지만 몇 개 번역하여 소개해 본다.
나는 밤낮으로 당신을 생각합니다. 거리를 걸으면 사람들 사이에서 당신 모습이 보입니다. 책을 읽을 때는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당신의 얼굴이 있습니다. 오늘 이 아침엔 길을 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는데, 가로수에서 떨어진 노란 은행잎 속에서 당신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당신, 어젯밤 다시 전화했지만 당신은 집에 없었습니다. 사흘이나 당신이 웃는 모습을 보지 못했고, 이틀이 지나도록 당신의 달콤한 목소리를 듣지 못했습니다. 이제는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을까봐 두렵습니다. 내 가슴 속에 고통을 느낍니다.
당신과 함께 별을 바라보았던 그 여름날을 기억합니다. 결코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면서도 당신은 약속을 어겼습니다. 오늘도 밤하늘을 보면 차가운 별들이 당신의 차가운 마음 같아 보입니다.
다음은 위인이나 유명한 작가들의 연애 편지를 소개해 본다.
나는 단 하루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단 하룻밤도 당신을 포옹하지 않고 잠든 적이 없습니다. 군대의 선두에서 지휘할 때에도, 중대를 사열하고 있을 때에도, 내 사랑하는 조제핀은 내 가슴속에 홀로 서서 내 생각을 독차지하고 내 마음을 채우고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조제핀에게. 1788년)
사랑하는 당신, 나에게 운율을 만드는 재주가 있었으면 합니다. 당신과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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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에 빠진 이후 내 머리와 가슴 속에는 언제나 시(詩)가 있습니다. 아니, 당신이 바로 시입니다. 당신은 자연이 부르는 달콤하고 소박하고 즐거운 노래와 같습니다. (너새니얼 호손이 소피아 피바디에게. 1839년)
사랑하는 당신이여,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토록 나를 괴롭히십니까? 오늘도 편지가 없군요. 첫 번째 들어오는 우편에도 두 번째 우편에도 말입니다. 이토록 나의 마음을 아프게 하시다뇨! 당신이 보내는 단 한 글자라도 보면 내 마음은 행복해질 텐데요! 당신은 내가 싫증이 난 것입니다. 그 외에 다른 이유를 생각해 낼 수가 없군요.
(프란츠 카프카가 펠리스 바워에게. 1912년)
눈과 서리 사이에서 꽃 한 송이가 반짝입니다. 마치 내 사랑이 삶의 얼음과 악천후 속에서 빛나듯이, 어쩌면 오늘 가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난 잘 있고, 마음도 편안합니다. 그리고 어제보다 오늘, 오늘보다 내일 당신을 더 사랑합니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샤를로테 폰 슈타인에게. 1780년 경)
아무리 봐도 내용이 좀 유치할 정도로 상투적이고 단순해서, 복잡하고 난해한 작품으로 정평이 나 있는 작가들에 의해 씌어졌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편지들이다. 나폴레옹, 카프카, 괴테 등 귀에 익은 이름들을 빼고 보면 사실 학생들의 편지들과 구별이 힘들 정도이다.
물론 작가들이 들으면 무덤 속에서 발끈할 일이지만, 그들의 문체도 학생들이 쓴 편지와 별반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건 아마 사랑 자체가 아주 순수하고 단순한 감정이기 때문일 것이다. 불후의 명작을 남긴 서양의 대문호이든, 그 작가를 공부하느라 밤새우는 한국의 대학생이든. 늙었든 젊든, 부자든 가난하든, 사람이면 누구나 느끼는 본능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누군가 말했듯이 “손은 마음의 대행자”. 못 쓰는 글씨라도 직접 펜을 들고 흰 종이 위에 그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며 한 자 한 자 정성 들여 쓰고, 쓰다가 마음에 안 들면 다시 또 쓰고, 다 쓰고 나서도 몇 번씩 읽어 보고, 그러고 나서야 제일 예쁜 봉투에 넣어 살짝 침 발라 봉해서 빨간 우체통에 집어 넣기까지……. 이렇게 연애 편지를 쓰는 과정은 달콤하고 가슴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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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런 과정은 사실 번거롭고 복잡하다. 지금처럼 빛의 속도로 돌아가는 통신 시대에 이 방법은 좀 바보스럽게까지 느껴진다.
하지만 원래 사랑하는 마음 자체가 어리숙하고 바보스럽지 않은가. 빨리 내 마음에 들어오라고 해서 때맞춰 얼른 들어오고, 이제 됐으니 나가달라고 하면 영악하고 신속하게 나가 주는 게 아니다. 느릿느릿 들어와 어느덧 마음 한가운데 턱하니 버티고 앉아 눈치 없이 아무 때나 불쑥불쑥 튀어나오고, 힘들고 거추장스러우니 제발 나가 달라고 부탁해도 바보같이 못 알아듣고 꿈쩍도 않는다.
오늘같이 추적추적 비 내리는 가을밤은 ‘사랑하는 당신에게’로 시작하는 편지로 바보 같은 마음을 전하기에 안성맞춤인 시간인 것 같다.
■ 선생님도 늙으셨네요
신촌에서 우연히 몇 년 전에 졸업한 남학생을 만났다. 나를 보자마자 대뜸, “선생님도 늙으셨네요”하는 것이었다. “선생님도 늙으셨네요.” 매우 비외교적인 말이지만, 따지고 보면 재미있는 말이기도 하다. 즉 선생님은 안 늙으실 줄 알았는데 늙었다는 실망의 말도 되고, 아니면 나도 늙었는데 선생님도 늙었다는 안도의 말도 된다. 아마도 전자 쪽에 속하겠지만 솔직히 말하면 나도 내심 놀란 것이, 두 세 살짜리 여자 아이를 안고 예쁜 아내를 동반한 그 졸업생은 어느덧 몸도 불고 머리도 벗겨지기 시작하여 그야말로 ‘아저씨’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아직 20대 초반의 젊은이들, ‘늙는다’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는 그들의 세계 속에서 바쁜 일상에 쫓기다 보면 사실 나이 드는 것은 잊고 살 뿐 아니라 내 모습이 어떻게 변하는지도 신경 쓸 틈이 없다.
그런데 최근 나도 늙어가고 있음을 실증하는 몇 가지 예가 있다.
- 학생들이 주는 생일카드……
“선생님 언제까지나 젊은 열정으로” “항상 소녀 같은 미소로” 등등에 서 → “교수님 만수무강 하십시오” “부디 오래오래 사십시오”
- 학생들의 선물 ……
꽃, 인형, 초콜릿, 향수, 립스틱에서 → 홍삼차, 솔잎 엑기스, 주름살 제 거 크림 등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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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충격적인 것은 군대 간 학생이 보낸 편지의 머리글이다
“나의 어머니 같은 선생님”
■ 희망을 버리는 것은 죄악이다.
중고등학생들이 읽을 만한 명작 한 권을 추천해 달라는 어려운 부탁을 받았다. 그 많은 명작중에서 딱 한 권이라니……. 고심 끝에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를 추천 했다. 그 이유는 이렇다.
‘20세기 미국 소설’의 학기말 시험에 호기심 삼아 한 학기 동안 읽은 작품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책을 적고 그 이유를 짤막하게 적으라는 문제를 냈다.
그런데 여섯 편의 소설 중 ‘노인과 바다’가 단연 가장 많은 투표를 얻었다. 학생들은 그 이유로 ‘길이가 짧아서’ ‘다른 작품에 비해 영어가 쉬워서’라는 엉뚱한 이유들과 함께 ‘노인의 인내심이 존경스러웠다.’ ‘이야기를 통해 삶에 대한 근성을 배웠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 등등의 이유를 댔다.
학생들이 말하듯 부담 없는 길이에 쉬운 문체 그리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주는 책’ 헤밍웨이의 후기 대표작이자 1954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하다.
이야기의 귀결만 보면 일반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헤밍웨이의 허무주의 사상과 맥락을 같이하는 작품처럼 보이지만, 거대한 물고기와 인간의 끈질긴 대결에서 헤밍웨이가 강조하는 것은 승부 그 자체가 아니라 누가 최후까지 위엄 있게 싸우느냐는 것이다.
망망대해에서 인간과 물고기가 벌이는 이 비정한 싸움에서는 승리나 패배라는 것이 있을 수 없고, 오직 누가 끝까지 비굴하지 않게 숭고한 용기와 인내로 싸우느냐가 중요하다. 물고기의 몸에 작살을 꽂고 밧줄을 거머쥔 채 물고기가 수면 위로 떠오르기를 기다리는 노인, 작살에서 벗어나기 위해 용틀임치는 거대한 물고기, 물고기와 노인의 이러한 팽팽한 대결은 서로가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영예로운 싸움이다.
그래서 노인은 스스로 곤경에 몰리면서도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투쟁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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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에게 사랑과 동지애를 느끼며 외친다.
“아, 나의 형제여. 나는 이제껏 너보다 아름답고, 침착하고, 고귀한 물고기를 본 적이 없다. 자, 나를 죽여도 좋다. 누가 누구를 죽이든 이제 나는 상관없다.”
노인은 물고기와 자신이 같은 운명의 줄에 얽혀 있다고 느낀다. 물고기는 물고기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리고 자신은 어부이기 때문에 각자 자신의 규범에 순응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다. 사흘 밤낮으로 이어진 싸움 끝에 결국 물고기는 죽어 물 위로 떠오르지만, 노인은 승리감보다는 물고기에 대한 연민을 느낀다. 때문에 상어가 돛새치의 몸을 물어뜯을 때마다 마치 자신의 살점이 잘려 나가는 듯한 고통을 느낀다.
이 작품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은 물고기와 싸우면서 노인이 되뇌는 말.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라는 말이다. 인간의 육체가 갖고 있는 시한적 생명은 쉽게 끝날 수 있지만 인간 영혼의 힘, 의지, 역경을 이겨내는 투지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죽지 않고 지속되리라는 결의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내가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말은 노인이 죽은 물고기를 지키기 위해 혼신을 다해 상어와 싸우며 하는 말, “희망을 갖지 않는 것은 어리석다. 희망을 버리는 것은 죄악이다. (It silly not to hope. It is a sin.)”
소설이라기보다는 마치 한 편의 장엄한 서사시 같은 작품 ‘노인과 바다’에서 노인은 고통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침착성과 불굴의 용기로 진정한 인간다움을 가르쳐 준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내가 학생들에게 간과하지 않도록 주의시키는 인물(?)이 또 있다. 그것은 돛새치의 피 냄새를 맡고 쫓아오는 상어 떼이다. 긴박하고 위험한 투쟁을 택하기 보다는 남의 전리품을 약탈하기 위해 배를 공격하는 상어 떼는 노인과 돛새치의 정정당당한 싸움과는 대조적이다. 이미 죽은 물고기의 살을 뜯어 먹기 위해 노인을 쫓는 상어 떼는 비열하고 천박한 기회주의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어린 학생들이 ‘어떻게 하면 상어 떼처럼 살아가지 않을 수 있는가’에 관한 교훈을 얻었으면 한다. 어른들이 걸핏하면 써먹는 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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떼와 같은 수법, 즉 노력하지 않고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다 남의 것을 덥석 새치기하는 야비한 기회주의, 남이야 아파하든 말든 목적 달성을 위해서라면 주저하지 않고 남을 짓밟고 일어서는 비열한 편의주의, 그리고 어차피 세상은 혼자 싸우기에는 너무 무서운 곳이라고 미리 단정짓고 불의인 줄 알면서도 군중에 야합하는 못난 패배주의를 배우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노인의 상처투성이 손을 잡고 연민의 눈물을 흘리며 계승을 다짐하는 소년의 마음이 우리 학생들의 마음이었으면 좋겠다.
■ 막다른 골목
현철에게
오늘 오후, 사는 것이 너무 힘겹다고, 이제는 아무런 희망도 없이 ‘막다른 골목’에 들어섰다고 마침내 눈물을 보이던 네게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선생으로서 제자에게, 아니 그보다 인생의 선배로서 후배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을 법도 한데, 그 어떤 학위나 연륜도 삶이 제멋대로 부리는 변덕을 해석하기에는 너무 어설펐기 때문이다.
신은 하나의 문을 닫으면서 또 다른 문을 열어 놓는 법이라고 말한들, 그 말이 지금의 네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그보다는 너보다 너댓 살 위인 전성균이라는 젊은이에 대해 이야기해 주고 싶다.
정읍에서 열두 살 때 소년 가장이 된 그는 열다섯 되던 해 병중에 있던 아버지가 자살하자, 동생과 함께 무작정 상경, 새벽에는 우유배달, 낮에는 정비공장에서 일했다. 그의 배달 구역에 위치한, ㄷ대학을 지날 때마다 그는 언젠가는 꼭 그 대학의 학생이 되겠노라고 다짐했고, 6년 후 그의 꿈은 실현되었다.
그러나 입학한 지 한 달 만에 그의 무허가 오두막에 불이 나 동생이 타 죽고 말았다.
그가 내게 편지를 쓰기 시작한 것은 대학 2학년 겨울, 자신이 중증의 폐병 환자인 것을 발견하고 휴학, 투병 생활을 시작한 때였다. 4년 전쯤 여전히 요양중이던 그가 쓴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
개구리 세 마리가 우유통에 빠졌습니다. 첫 번째 개구리는 자신의 운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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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탄하고 헤엄쳐 볼 시도도 하자 않은 채 스스로 빠져 죽었습니다. 두 번째 개구리는 하느님이 구해 주실 것을 굳게 믿고 기적이 일어나기를 빌고 또 빌었습니다. 그러나 기다리던 기적은 끝내 일어나지 않았고, 그 개구리는 기다리다 지쳐서 죽었습니다. 세 번째 개구리는 어떻게든 우유통에서 빠져 나오려고 버둥대며 뒷발로 우유를 휘젓고 도 휘저었습니다. 마침내 우유가 딱딱하게 굳자 개구리는 그것을 딛고 빠져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읽고 나서 나는, 솔직히 말해 그가 너무 애처로웠다. 아니, 이런 터무니없는 이야기에서나마 희망과 위안을 찾으려는 그가 어리석다고까지 생각했다.
그러나 현철아, 나는 그의 필사적인 투쟁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깨닫고 있단다. 그가 지난번에 보낸 편지에는 드디어 9년 만에 대학을 졸업하고 원하던 직장을 얻었다는 소식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편지 마무리에는 삶이 또다시 자신을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기”는커녕 싸워 이길 자신이 있노라고.
현철아 ‘막다른 골목’이 갖는 역설적인 의미를 이해하겠니? 이제는 정말이지 아무런 희망이 없고 ‘막다른 골목’에 도달했다고 느껴질 때 차라리 우리의 선택은 쉬워질는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택은 단 두 가지뿐이다. 완전히 좌절하고 삶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그 상황을 또 다른 시작의 계기로 삼는 일이다. 그리고 최후의 승리는 두 번째 길을 택하는 자에게 돌아간다고 나는 확신한다.
현철아 힘내라. 언젠가 네가 문득 눈을 들어 저 파란 하늘을 쳐다보는 그날. 삶의 한가운데 서서 당당하고 치열하게 살았던 오늘을 떠올리며 살아가는 일이 아름답다고 느낄 그날을 위하여.
너를 사랑하는 장영희 선생 씀
2011. 8. 12. 제 1 ~ 2 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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