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아, 가슴 뛰는 일을 찾아라(2)

2012. 4. 23. 21:00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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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춘아, 가슴 뛰는 일을 찾아라(2)

          - 신장 134Cm 국제사회복지사의 희망 멘토링 -


■ 김해영 지음


세 번째 이야기, 開

  전문 사회복지사가 되는 꿈을 품고 미국으로 날아가다.


■ 여유로운 일상, 이것이 바로 위기일지도 모른다.


 ‘이 자리를 떠나야겠다.’

아프리카 보츠와나에서 살기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다. 평안하고 안정된 생활의 발판이 마련되어 모든 것이 순조롭다. 직업학교의 교장이란 직책은 참으로 버거웠지만 정부와 지역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여 학교를 잘 발전시켜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문제는 바로 ‘더 이상 무엇을 바라거나 소망하지 않아도 되는 인생이 된 것’이었다. 이 얼마나 행복한가. 그런데도 문제라니……배가 불러 터지는 소리라고 할지도 모른다.

 어려서부터 고생하며 힘들게 살아오는 중에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해준 삶의 경험은 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열정이 없이 살다니! 안 돼. 그것은 아주 불행한 일이야’라고. 현실에 안주하는 삶이 맞이하는 미래는 뻔하다.


아무 문제가 없는 그 순간 불행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일상의 행복에 묻혀 살아가는 중에, 더 이상 간절하게 소원하는 것이 없을 정도로 내 인생이 잘 굴러가고 있던 그때에. ‘앗, 뜨거워라!’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이 자리를 떠나야겠다.’라는 생각이 계시처럼 따라왔다.

 편안하고 안온한 생활은 원래 내 것이 아니다. 내가 떠나도 그 학교가 잘 운영되어갈 수 있도록 서서히 준비에 들어갔다. 약 3년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 특별히 현지인 교사들이 그 학교의 주역이 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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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을 훈련했다.

 2003년 12월, 굿 호프 직업학교의 마지막 수업이 끝났다. 80여 명의 학생들과 교사들에게 미국에 공부하러 간다고 하며 작별인사를 했다. ‘다시 돌아오게 될지 약속할 순 없지만 다시 굿 호프에서 살게 되면 좋겠다.’고도 했다. 두 남매의 부모가 된 남동생 부부에게 학교 일을 맡겼다. 2001년도부터 피아노 수리 및 조율 학과를 개설해 가르치고 있는 박 군에게는 학교의 행정과 재정을 부탁했다.


 보츠와나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나 계획도 없이, 미래를 생각할 틈도 없이 잠시 단기 자원봉사자로 들어왔다가 만 14년 만에 그 자리를 떠나게 되었다. 그 세월 동안에 참으로 많은 것을 경험하고 체험했다. 이런 것을 두고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고생’이라고 하던가.

 그들은 나를 조그만 동양여자로, 신체 장애인으로 취급하지 않고 자신들과 동등한 사람으로 대접해 주었다. 그 땅 사람들이 나를 사람으로 대해준 것을 잊지 못할 것이다. 이 감동은 나로 하여금 14년의 시간을 그 땅에서 살게 했던 힘이었다.          

 내가 가르친 기술이 그들의 삶에 얼마나 유용했는지는 세월이 말해줄 것이다. 기독교 복음을 전했다고는 하지만 그 또한 하나님만이 아실 일이다. 분명한 것은 칼라하리사막에서 보낸 세월과 내가 살아낸 인생은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인생이라는 것이다.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자신만의 고유한 인생, 그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내가 추구해온 것이 아니었던가! 신체장애도, 칼라하리사막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고난이나 역경을 삶의 지렛대로 삼아 뛰어올라 섰다. 


 이러한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더 큰 꿈을 꾸게 되었다. 아프리카에서 일한 경험을 전문적으로 살리기 위해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목표는 사회복지 학사/석사 과정이었다. 목적한 소정의 교육과정을 다 마치면 다시 아프리카를 비롯한 여러 개발국가로 돌아가서 남은 인생을 전문적인 자원봉사자로 일하고 싶다는 꿈을 세웠기 때문이다.

 이 꿈은 아프리카에서 가르친 수백 명의 청소년들이 갖게 해주었다. 그들의 눈동자에서 발견한 희망이자 꿈이었다. 나에겐 그들의 희망과 꿈을 내 꿈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꿈으로 만들 책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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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야 넌? 맨해튼에서 나와 맞장 뜨다.


 “어떻게 영어를 배우셨어요?”

 “보츠와나에서 현지인에게 배웠어요.”

 “그래서 좋은 성적이 나왔군요. 입학을 축하합니다.”

 나약 대학 입학담당자 그레이스는 매우 친절했다. 한국 학생 중에서는 영어 실력이 좋다는 격려의 말을 덧붙였다.

 2004년 1월, 뉴욕에 위치한 나약 대학 맨해튼 캠퍼스를 찾아갔다. 이 학교는 외국인 학생들에게 영어 입학시험을 치르게 한다. 적정 수준의 토플 점수를 제시할 경우에는 이 시험을 볼 필요가 없다. 보츠와나에서 현지인들에게 기술을 가르치면서 영어실력을 쌓았다. 그때까지 코스를 이수하거나 공식 시험을 본 적은 없었다. 생각보다 시험 결과는 좋게 나왔고 무난히 통과했다.


 ‘입학 허가는 받았다. 미국 대학에서 공부할 만한 영어 실력이 된다 이 말이지?’ 제법 의기양양해졌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영어실력과 상관없이 실질적인 문제가 내 앞에 놓여 있었다.

 ‘이제부터 학비와 생활비를 어떻게 마련하지?’

 별다른 묘수나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학교를 나와 맨해튼의 빌딩 숲 사이를 천천히 걸었다. 모든 것이 막막하고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터벅터벅 걸었다.

 걷다가 건물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유리에 비친 거지같은 저 사람은 누구인가? 유리에 비친 사람이 말해온다. 아프리카 사막에서 살다온 사람이다. 거기에서 생존과 싸워서 이기고 온 사람이다. 죽지 않고 살아서 여기, 뉴욕까지 온 사람이다.

 거울에 비친 나를 다시 돌아보았다. 대학입학 영어 시험을 치른 날, 나는 나와 맞장을 떴다. 앞날에 대한 걱정과 추위에 떨고 있는 신체지만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다.

 “나처럼 살아온 사람 있으면 나와 봐!”


 무엇을 걱정하는가! 사막에서도 행복하게 살았다면 뉴욕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결코 잊을 수 없는 순간이다. 나 자신이 누구인가를 깨우치는 것보다 더 멋지고 가슴 벅찬 일이 어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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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걱정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일시에 사라졌다. 자신이 대견해 보였다. 비록 신체는 꾸부정하지만 건강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내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자신을 믿는 것! 잘할 것이라고 믿는 것!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자신의 참 모습을 인정하는 것! 앞으로 모든 일은 잘 될 것이다. 그 자리에서부터 나의 유학생활은 시작되었다.


■ 첫 학기 학비만 4,950달러, 이를 어쩐다.


 뉴욕에서 처음으로 4월을 맞았다. 다시 찾은 나약 대학에서 그레이스가 가을학기 수업표를 짜서 건네준다. 다섯 과목, 총 15학점이다. 이어서 재무 부서에 가서 등록금 고지서를 찾아 확인하고 ‘학비를 입금하면’ 유학생 비자를 발급받기 위해 필요한 1-20양식을 발급해 준다고 한다.

 2층으로 올라가서 이름을 확인하고 가을학기 학비가 적힌 종이를 받아 들었다. 항목이 꽤 많다. 모든 외국 학생에게 주는 여행경비 장학금 1,500달러, 세례 교인 장학금 500달러, 도합 2천 달러가장학금 명목으로 기재되어 있다. 기타 자잘한 명목 아래 더하고 빼고 해서 실제 금액이 맨 끝에 나와 있다. 4,950달러. 헉. 이걸 어쩐다.

 나약 대학은 미국 동부에 위치한 바이블 칼리지로 1882년에 맨해튼에 설립되었다. 후에 뉴욕의 허드슨 강변에 위치한 나약으로 옮겨 본교 캠퍼스로 발전했고 맨해튼 캠퍼스까지 합해서 모두 약 3,400여 명이 재학하고 있는 단과대학이다. 나약 대학이야말로 전통이 있고 확실하게 기독교 교육을 받을 수 있다고 해서 다른 학교는 아예 찾아보지도 않고 입학 신청을 했다. 그런데 학비가……정말 비싸다.


 수중에는 전 재산이자 비상금인 3천 달러가 있었다.

 등록금을 해결할 기회는 빨리 왔다. 첫 학기 학비로 고민하고 있는 것을 알고 몇몇 곳에서 “학비를 대어 줄 테니 같이 일하자. 원하면 영주권도 받을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전해왔다. 조건이 상당히 좋다. 이렇게 좋은 기회가 오다니.

 잠깐 그런데 생각해보자. 기회가 쉽게 왔다는 것은 위기를 포함하고 있다는 뜻이다. 내 귀에 그 제안들은 기회를 가장한 위기로 보였다. 그 제안의 이면은  바로 이런 것이다. ‘일주일에 마흔 시간 또는 그보다 더 많이 같이 일 합시다. 그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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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안을 해온 분들에게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그저 고맙다고만 했다. 그리고 참된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미국에서 돈 벌면서 공부하기는 생각보다 어렵다. 공부를 마치면 반드시 더 어렵고 힘든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일하기로 작정했기에 공부만 할 수 있는 기회가 오리라 믿었다. 그러던 차에, 뜻하지 않은 곳에서 연락이 왔다.

 시카고에서 1988년도부터 4년마다 한인 세계선교대회가 열린다. 가을학기가 시작되기 전까지 돈을 벌어야 했지만 그 대신, 그해 여름동안 선교대회 본부에서 일하기로 했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기회라는 느낌이 왔다. 미국에서 큰 대회를 진행하는 본부에서 일하면서 많은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등록금 걱정은 잠시 잊기로 했다.


 대회 본부 일을 배우고 팀워크를 다지며 일하고 있던 어느 날, 워싱턴에서 이영호 박사님이 부인과 아드님을 대동하고 뉴욕으로 찾아오셨다. 몇 년 전부터 보츠와나 직업학교를 위해 기도하고 후원하던 소그룹을 이끄는 분들이다. 반가운 인사를 주고받고 같이 예배를 드렸다. 이 박사님의 부인이 떠나기 전에 내 옆에 다가와 앉으셨다. 그러곤 조용히 내 귀에 대고 물어오셨다.

 “첫 학기 등록금으로 필요한 돈이 얼마지요?”

 나는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모두 5천 달러인데 지금 3천 달러가 있으니까 2천 달러가 더 필요합니다. 그 정도라면 우선 등록이 가능할 것 같아요.”

 “네 알겠어요. 학비 때문에 걱정하지 마세요. 좋은 일이 있을 거예요.”

 기도를 마치고 나니 두 분은 벌써 자리를 뜨고 없었다. 걱정하지 말라니? 무슨 뜻일까?


 두 분이 뉴욕을 다녀가고 일주일이 지난 뒤 워싱턴에서 카드가 왔다. 축복의 말과 함께 5천 달러짜리 수표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카드에는 한국에서 받은 유산이 있는데 그것을 처분해서 공부를 마칠 때까지  필요한 장학금으로 내놓겠으니 열심히 공부하라는 당부의 말이 적혀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방으로 들어가서 한 시간 쯤 울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렇다 앞으로 일을 하지 않고 공부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공부만 할 수 있다니…….

 두 분은 학비뿐만 아니라 미국에 혼자 떨어져 지내는 나를 위해 때마다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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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카드를 뉴욕으로 보내 주셨다. 나의 미국 유학이 가능했던 데는 진실로 이 박사님 부부의 도움이 컸다. 남은 평생을 사는 동안 결코 잊을 수 없는 큰 은혜를 입었다. 이렇게 이 두 분에 대한 글을 쓰면서도 조심스럽고 감동하는 마음이다. 그분들의 생애에 나를 만난 것이 기쁨이 되길 바라고 있다.      

■ 학비는 워싱턴, 생활비는 휴스턴, 집세는 반의 반 값에


 드디어 가이드라인을 세웠다. 사실 이것은 미국 유학 오기 전에 이미 결심한 일이다.

 첫째는, 일과 공부가 상충될 경우, 무조건 공부하기다. 즉 돈이 필요하다고 강의를 다니거나 도움이 필요하다고 사람을 만나지는 않기로 했다. 둘째는 사람들이 요구하는 일들에 대해 단호하게 노(No) 라고 말하기다.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선의로 대해주는 일들에 과감하게 “안 됩니다.”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잦은 미국 방문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뉴욕에 도착한 이후, 교회 관계 사람들에게 연락을 취하지 않고, 유학생으로서 생활을 해나갔다.

 마지막으로 목적한 공부가 끝나면 반드시 이전의 그 자리로 돌아가겠다는 뜻을 정했다. 이 결심은 미국에서 유학생으로 생활하면서 제안 받았던 영주권 획득이나, 좋은 직장을 가질 기회 등에 전혀 눈길을 주지 않게 해 주었다. 좋은 교육을 받기 이전에 이미 아프리카에서 보람 있는 삶을 살았다. 그렇다면 이제 더 좋은 교육을 받으면 이전보다 더 힘들고 더 어려운 곳과 사람들을 찾아가서 일하는 것이 올바른 삶이라 믿었다.      


 이러한 가운 데 휴스턴에서 기쁜 소식이 날아들었다. 보츠와나 직업학교 개발사업의 후원자로 도움을 주고 있던 휴스턴의 한인 교회에서 나의 유학을 위해 매달 500 달러를 책정해서 보내 주겠다는 연락이었다. 보츠와나를 후원하던 소규모 그룹의 청년들도 이제 막 이민을 와서 힘들고 어려운 외국생활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매월 꼬박꼬박 모아서 보내준 돈은 내 한 달 생활비가 되었다.

 유학 초기에는 교회 안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에서 공짜로 숙식을 해결했다. 1년 반이 지나서 독립하려고 할 때 이선애 박사님을 만났다. 그녀는 방을 찾고 있다는 내 말에 지금 당장 빈 방이 있다며 나를 그리로 데리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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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8월달에 그 집으로 이사해 공부하는 동안 내 집처럼 지냈다. 매월 랜트비를 냈다고는 하지만 박사님께서 먹을 것을 갖다 주시고 이모저모 챙겨주시고 필요한 것을 대신 나서서 해결해주신 그 보살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집도 공짜로 살고 나온 셈이었다. 오히려 소정의 랜트비를 받아주신 것은 내 자존심을 위한 지극한 배려였다고 믿는다.


 사람은 진실함에 공감하고 참되고 거짓이 없는 것에 마음이 끌리는 법이다. 얼굴도 본 적이 없는 많은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거두어 보내 주고, 필요한 돈을 가방에, 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학비를 보내 주시는 워싱턴의 박사님 부부도 그러했을 것이고, 이민자가 되어 막 자리 잡고 살기 시작한 청년들이 만나본 적도 없는 나를 위해 기도해주고 그들의 적은 수입 중에서 얼마를 거두어 보내 주는 마음도 그러했을 것이다. 가슴이 따뜻해지고 눈물이 나는 이야기다. 그 무수한 작은 도움들이 이렇게 해서 이루어졌다고 믿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착해서, 좋은 일을 많이 해서, 기도를 많이 해서, 신을 믿는 믿음이 좋아서 큰 복을 받고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고도 말했다.


 나의 미국 유학 시절은 대학생으로 살 수 있어 무척 행복했다. 그 행복을 누리기 위해 내가 지불한 것은 전혀 대책이 없는 일상생활의 긴장과 무수한 이해관계가 얽힌 인간관계 사이에서 ‘살얼음판’ 걷듯이 신념에 위배되지 않게끔 산 삶의 자세다. 내 속에 있는 뜻과 바깥으로 나타나는 내 행동의 일치점을 유지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도 할만했다. 아프리카 보츠와나에서도 했는데, 미국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었다.


■ 가능성이 없다고? 꿈과 목표를 갖고 두드리니 열리더라.


 공짜로 공부했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데는 나 자신의 노력도 만만치 않았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기적 같은 도움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나를 도와주는 사람들과 내게 유학의 기회를 준 하나님조차 이렇게 말해오는 듯했다.

 “자 여기까지, 나머지는 당신 힘으로 해보세요.”

 마치 자로 잰 듯이 정말 ‘거기까지’만 도움의 손길이 왔다.

 ‘아니 도와주려면 제대로 도와주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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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거기까지’온 그 크고 작은 도움들을 진심으로 감사하게 받아들였다. 자원해서 나를 도와 준 사람들에게 그것은 그저 “기도해드릴게요.” “힘내세요.”와 같은 허황한 말이 아니라 매우 실질적이었기 때문이다. 즉 현금이나 수표가 손에 들어온다는 것을 뜻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액수가 어떠하든지 진심으로 감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계속 연구하고 길을 찾아나갔다.


 2학년이 되어 장학금을 신청했다. 물론 일정수준의 학점을 유지해야 한다. 다른 장학금은 500달러인데 장애인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1,000달러 장학금이 있었다. 다행히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학년마다 1,000달러씩 학비를 면제 받았다.

 또 학점이 3.5이상이 계속되면 일정비율 학비를 감면해 주었다. 이 때문에 매년 학비가 인상되었지만 나는 5-6천 달러의 학비로 다닐 수 있었다. 즉 다른 학생보다 30%를 덜 내고 다녔던 셈이다.

 그 외에도 남가주 밀알선교회 장학금 매월 300달러를 3년간 받는 등 각종 장학금을 찾아가면서 공부하는 동안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은 미국 대학은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공부하는 학생과 그 공부를 잘 한다고 증명된 학생에게 더욱 기회를 열어준다는 것이다. 또 어떠한 어려움이든지 길을 찾고 있으면 해결이 된다는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     

 미국의 유학생으로 공부하면서 작은 수입이나마 기대할 수 있는 또 다른 길이 있다. 그것은 학교에서 제공하는 각종 아르바이트를 신청해서 하는 것이었다.


■ 사회복지의 시작은 진정한 마음으로부터 하는 자원봉사로부터


 사회복지사가 되는 전 단계는 봉사활동을 해보는 것이다. 자원봉사활동이야말로 무보수에 순전한 동기로 일하면서 자아를 실현하는 좋은 기회가 된다. 물론 사회에도 보탬이 되는 활동이다.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 유학생으로 생활하게 되었을 때도 쉬지 않고 한 일은 자원봉사활동이었다.

 가까운 친구들이 플러싱의 한 아파트 거실에 모여 앉았다. 거실 테이블에는 갖가지 신선한 야채와 과일, 새우, 고기 등이 잘 다듬어져 커다란 접시에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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례로 담겨 놓여 있다. 뉴욕에서 만난 친구가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모인 송별회 자리다. 친구는 이십 대 후반의 미혼여성으로 미국에서 석사를 마친 엘리트였다.  

 그녀는 나보다 열 살 정도 어렸지만 가장 마음을 터놓고 친하게 지냈다. 우리 둘은 조용하며 말수가 적은 점이 비슷했다. 마음이 넓고 따뜻하고 지혜로웠던 그 친구는 후배들을 가르쳐야 한다며 중국의 연변 과학기술대학으로 돌아갔다. 미국에서 보장된 삶을 접고 떠난 것이다.

 며칠 후, 조선족 선교회에서 연락이 왔다. 뉴욕에 거주하는 조선족을 대상으로 무료 영어교실을 운영하고 있는데, 교사가 모자란다며 자원봉사 좀 해줄 수 있겠느냐고 했다. 뉴욕에 거주하는 조선족을 대상으로 무료 영어교실을 운영하고 있는데 교사가 모자란다며 자원봉사 좀 해줄 수 있겠느냐고 했다. 당연히 승낙했다. 두 번 생각해볼 것도 없는 제안이다. 떠나간 친구를 통해 조선족에 대한 이해를 키워왔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저녁마다 기초생활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했다. 학생은 모두 30대에서 50대 정도의 성인 남녀로 많을 때는 한 반에 열 명이 넘었고, 적을 때는 서너 명이 오기도 했다. 가르친다는 말은 배운다는 말과 같다고 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함께 공부하며 내가 전혀 알지도 못했던 사람들과 조선족의 문화 그리고 미국 이민자로서 그들의 애환 등을 이해하고 배우게 되었다.         


 미국의 중‧고등학생들은 어떤 식으로든 사회봉사를 해야만 한다. 대학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활동 내역을 기재해야 하기에 봉사활동이 체계화되어 있고, 활성화되어 있다. 

순수한 봉사활동이라도 결국 자기 자신에게 이익이 되기에 하는 것이다. 전공과 같은 분야의 봉사라면 졸업 후에 직장을 구하는데 상당히 플러스가 된다. 다른 분야라면, 특별한 경험이라고 해서 그것도 구직에 도움이 된다. 봉사활동이 실제적인 이익을 당장에 가져다주지 않는다고 해서 그 일을 안 하거나 그만두지도 않는다. 일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고 세상을 배워간다고 믿으면서 수많은 비영리 기관에서, 국제기구에서 일정 기간 무보수로 일하는 대학생들이 많다. 인턴과는 별개다. 미국의 대학생들에게는 학교생활 못지않게 관심을 갖고 경험을 키워나가는 중요한 활동 분야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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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복지는 특별히 소외계층을 많이 다룬다. 학계에서 경쟁의 대상이 되는 것은 누가 더 색다른 주제를 다루고 알려지지 않은 소외된 계층을 찾아내어서 연구 하는 가다. 대학원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보츠와나에서 온 한국인이 미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에 대해 실제적인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국제사회복지전문가로 발돋움하는 데는 이렇게 순수한 동기로 시작했던 자원봉사가 큰 밑거름이 되었다. 무엇이든지 배워두고 열심히 해놓으면 언젠가는 써먹는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내게 마음을 터놓는 사람들


 “선생님은 왜 이렇게 키가 작아요?”

 아이들은 항상 내게 친밀하게 다가온다. 마치 ‘당신은 나랑 키가 같으니까 내가 상대할 수 있어요’라는 자세로 말이다. 내 키는 대부분의 초등학생들과 비슷해서 아이들과 같이 서 있으면 눈높이가 맞다. 아이들은 내가 다른 어른들처럼 내려다보거나 위협적이지 않으니까 마치 동급생을 대하듯이 자연스럽게 나에게 다가온다. 처음에는 데면데면 대하지만 곧 관심을 나타내며 친밀감을 보인다.

 대학 4학년 한 해 동안 뉴욕 플러싱의 ‘뉴욕가정상담소’에서 인턴으로 일했다. 이곳은 뉴욕에 거주하는 아시안 이민자 가정을 위한 상담실과 기타 지역 주민을 위한 복지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여기에서 나는 방과 후 학교 프로그램에 참석하는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사회성 개발 및 그룹치료 그리고 청소년 개인 상담 등의 과정을 실습했다. 사회복지사가 하는 기본일 중에 상담이 있는데, 이때의 인턴과정은 놀이치료 기술을 개발하고 익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일주일에 이틀 동안 아이들을 만나고 놀이치료법을 실습하면서 나는 나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기도 했다. 나는 종종 어린 시절이 생략된 것처럼 느끼곤 했는데, 따뜻한 가정에서 보호받으며 공부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하는 경험들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 큰 어른이 되어서야 자신도 모르게 잠재해 있던 그 아픔과 기억들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나는 내가 마치 초등학생이 된 것처럼 즐겁게 게임이나 놀이에 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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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기한 것은 아이들과 놀면서 나의 어린 시절의 아픔들이 치유되어 갔다는 점이다. 아이들도 그런 나를 정말 좋아하고 잘 따랐다. 물론 효과적인 상담결과는 덤이다. 이것은 사회복지사가 누리는 특권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면서 자신의 삶도 변화시켜가는 것 말이다.


 대학원 입학을 준비하는 동안 플러싱의 발병원에서 9개월가량 메디컬 보조원이자 통역사로 일하게 되었다. 발이 이상이 생겨 치료하기 위해 병원을 찾았다가 치료받는 중에 인터뷰를 하고 취직을 했다. 선한 인상의 닥터 한센은 여러 가지 질문을 해 오더니, 일을 찾고 있냐며 여기서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치료하는 환자에게 그것도 몇 마디 이야기해보고 자기 사무실에서 일하지 않겠느냐고 하다니 … 갑작스러웠지만 반갑고 놀라웠다. 실제로 대학원 입학 전까지 일을 찾고 있던 참이었다.

 내가 장애를 가진 것이 분명이 보였을 텐데도, 나를 지목하여 일을 준 것이 약간은 신기하게 생각이 되었다. 발병원에는 일주일에 3일만 출근했는데, 그 병원에서 일하는 동안 다정하고 심성 좋은 사람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의사 사무실은 작았지만 미국인 할머니 유대계 러시아인 할머니, 콜롬비아에서 온 간호 대학생, 에콰도르에서 온 미국인 그리고 한국 사람인 나처럼 다국적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대부분 미국에서 오래 살아온 사람들이라 인종이 다르다고,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상대를 무시하거나 편협하게 대하지 않았다.

 의사를 비롯하여 사무실 직원들 모두가 그랬다. 같은 한국 사람들 사이에서는 경험하기 어려운, 평등하고 동등한 의식을 갖고 미국 사람들과 일했다. 닥터 한센과 일한 경험은 나중에 대학원에서 만난 대다수의 백인 교수님들과 자연스러운 관계를 만들어가는 데 큰 함이 되었다. 이것으로써 청소년, 어린이. 노인층과 두루 일한 경험을 쌓게 되었다. 아울러 아시아인과 흑인들 위주로 일해 왔던 경험을 넓혀서 백인들과도 함께 일하며 인종의 벽도 무리 없이 뛰어 넘었다.


■ 대책 없는 대학원 학비, 그래도 일단 공부하자.


 미국 동부에 관광 오는 사람들이 초,중,고, 대학생이라면 예외 없이 방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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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곳이 맨해튼의 업타운에 위치한 컬럼비아 대학교다. 그 대학교에서 입학허가를 받았고, 가등록까지 마쳤지만,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아직 돌아보지 못했다.  ‘캠퍼스를 한번 돌아보아야지’하고 마음먹고 있는데, 6월 초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있다고 했다.

 오리엔테이션은 사회복지대학원의 지하층에 위치한 국제수준의 대강당이자 화의실인 강의실에서 네 시간 정도 진행되었다. 1년간의 학사 일정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주의 사항을 전달받았다. 신입생들은 모두 사회복지학 학사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끝내고 온 학생들이어서 교수들도 우리를 단순한 신입생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8월 한 달 동안의 여름학기가 끝나면 바로 2학년 과정의 졸업반과 함께 수업을 듣게 된다. 오리엔테이션이 끝난 뒤 대학원 입학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토머스를 만났다. 내가 세 번째 허들 앞에서 주저앉아 컬럼비아 대학원 지원을 포기하려고 할 때 나를 일으켜 세워준 은인인 그는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심리학 석사를 마쳤다. ‘공부하고 책을 읽는 것이 좋아서’ 5년 동안 다녔다고 했다. 당연히 어디서 무엇을 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그 후에도 토머스와는 가끔 만났다. 그는 내가 그 학교에 들어가는 데 직접적인 동기를 부여한 데 책임을 느꼈는지 졸업할 때까지 여러 가지로 신경을 써주었다.


 첫 학기는 8월 한 달 동안 6학점을 듣는 여름학기였다. 매일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들었는데, 시간마다 토론과 발표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총 600시간의 인턴 활동과 33학점을 이수해야 졸업할 수 있는 석사 향상반 과정은 사회복지학 전공 학사과정 학점이 탕감되고 대학원의 전공필수 과목의 학점만 따면 되는 조건을 갖춘 학생들이 입학 허가를 받았다.

 한 달 동안 한 학기 분량의 수업을 끝냈다. 끝내고 보니, 4년 동안 배운 것을 압축해서 리뷰 해준 시간이었다. 그러면서도 새로운 내용도 있다고 하며 학생들의 학문적 열의를 일깨웠다. 앞으로도 간단하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원에서 공부하면서 넘어야 할 네 번째 허들을 만났다. 공부가 아니라 돈 문제였다. 이 학교에 들어오면서 예상은 했지만, 1년간의 순수 학비만 48.000달러였다. 기타 생활비, 책값, 식비, 차비 등을 계산하면 아무리 아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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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다고 해도 1년에 약 2만 달러가 든다. 즉 1년에 7만 달러 이상이 든다는 계산이다. 8월 여름학기 비용만 해도 대학 때의 한 학기 학비에 해당했다.

 9월 달, 가을학기 등록도 했다. 학비를 위해 예정된 금액은 5천 달러 뿐이었다. 나머지는 미지수였다.

 가을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일주일간 휴식 기간이 있었다. 이때를 맞아, 내 형편을 알리고 기도를 부탁하는 이메일을 ‘그야말로’전 세계에 띄웠다. 미국은 물론 한국, 일본, 보츠와나, 남아공, 중국 등 멀고 가까운 친구나 잠시라도 인연이 있었던 모든 사람들에게 내 형편을 알리고 학비가 잘 마련되어 공부를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했다. 유학 오면서도, 대학 때도 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만큼 빠르고 확실한 사람들의 선한 도움이 절박했다.

 가을학기에 들어갔다. 대학원 과정은 체력과 지력, 그리고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내 앞이 닥친 돈 문제를 사람들에게 도와달라며 던져 놓고 공부와의 싸움이 들어갔다. 재무담당자를 찾아가 “언제까지 공부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가을학기 등록을 했으니까. 최소한 이번 학기 동안은 공부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럼 오케이. 공부하자.


 더 이상 절약할 수 없을 만큼 아껴 쓰는 생활이 이어졌다. 대학 때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무엇이든 소액의 수입을 만들어갈 수 있었고, 가능한 시간도 있었다. 하지만 1년 만에 석사를 끝내야 하는 대학원 형편에서는 어떤 아르바이트도 가능하지 않았다. 일주일에 3일은 인턴 장소에서, 3일은 학교에서 지냈다. 집에 머무는 하루도 교회를 다녀온 뒤에 바로 공부에 들어갔다.


■ 위기가 계속되지만 절대 굴하지 않아


 전에 있던 곳에서는 통학에 왕복 3시간이 소요되어 체력에도 무리가 오고 공부 시간을 다 잡아 먹었다. 학교 기숙사로 이사했다. 경비를 다 지불하고 나니 수중에 남은 돈이 달랑 50달러뿐이다. 이곳 형편에서는 하루나 이틀의 용돈이다.

 과연 나머지 학비를 마련하고 계속 공부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잘 알 수 없는 상황과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 미리 안 된다고 포기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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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 간 지 얼마 안 되어 학교 캠퍼스에서 공부할 만한 장소를 찾아냈다. 사회복지대학원의 도서관이 문을 닫으면, 근처에 있는 티처스 칼리지의 로비로 가서 공부했다. 거기도 문을 닫으면 스물네 시간 오픈하는 버틀러 도서관으로 옮겨 갔다. 학생회관도 늦게까지 공부하기에 좋았다. 혼자 앉아서 공부하다보면 질리거나 외로워지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집은 숙사 역할만 했다.

 공부는 여러 사람이 있는 데서 해야 제맛이 난다. 캠퍼스의 어느 곳을 가도 공부하는 학생들이 앉아 있다. 미국 학생들이 숨 돌릴 틈 없이 공부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아니, 제들이 저렇게나 열심히 공부해! 그렇다면 나는 두말할 것도 없지.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다가도 다시 앉았다.


 무엇이든 잘하는 사람 위에 즐기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가 없다고 했다. 컬럼비아의 문화는 학문에 정진하게 하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나는 이런 고풍스런 분위기에 젖어 학문하는 즐거움을 깨우쳐가고 있었다. 지겨울 정도의 공부가 즐겁고 그 속에서 보람이 느껴졌다.

 암담하고 가난한 대학원생의 현실이었지만 내 인생이 있어 진실로 행복한 나날이었다.

 대학원은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게다가 아이비리그다. 명문대라는 간판을 하루아침에 단 학교가 아니다. 학생들도 그 누구든지 자부심이 대단했다. 학생 구성원도 반 이상이 백인 여학생들이었다. 그리고 기타 남미, 아시안, 소수의 흑인 학생들이 있었다. 학교에서 주류를 이루는, 상류 사회의 배경을 가진 학생들을 만나 공부하면서 ‘이런 세상도 있구나’ 하거나. ‘허거덕’하고 놀랄 만한 일들을 많이 겪었다.


■ 오직 세 마디, 아프리카, 14년, 봉사


 가을학기는 서로 다른 교수님과 학생들을 만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첫 수업은 돌아가면서 짧게 자기소개를 하고 특징이 될 만한 멘트로 마무리 했다. 내 차례가 왔다.

 “한국인이며, 아프리카의 보츠와나에서 14년 동안 살았고, 자원봉사자로, 직업학교 교장으로 일한 경험이 있습니다. 공부를 마치면 그곳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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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수님과 학생들은 보츠와나, 14년, 자원봉사란 단어를 빨리 스캔했다. 그리고 그 세 단어 안에 압축된 의미를 간파했다. 예비 사회복지사 학생들은 ‘이 사람은 경험이 대단하군! 아프리카로 돌아간다고!’하고 나를 자신들의 경쟁 상대에서 제외시켰다. 즉 내가 자신들의 경쟁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빨리 알아차렸다.


 학교 수업은 토론 중심이었다. 교수님이 질문을 던져 놓으면 그 질문은 자동적으로 굴러갔고 저마다의 견해가 개진되었다. 교수님은 토론 과정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도록 지도하는 역할만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사고를 발전시켜나가는  과정은 흥미로웠다. 또, 학생 모두가 공부의 주체가 되어 수업시간마다 한 마디라도 해야 하는 분위기는 압도적이었다.

 자신의 생각을 적절한 말로 간단명료하게 주장하고 말하는 것은 대학원생이라면 가지고 있어야 할 기본적인 자질이다. 질문하고, 토론에 나서고, 자신의 주장을 말하고, 다른 학생의 주장을 반박하거나 설득하는 과정이 매 시간 되풀이 되었다. 

 질문과 토론에 익숙한 대부분의 학생들 사이에서 용기를 내어 손을 들기가 쉽지 않았다.


 미국의 대학원에서 교수님에게만 배우려고 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생각을 바꾸는 것이 좋다. 같은 반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에게서 절반 이상을 배운다고 보면 된다. 다른 말로 하면, 내가 내는 학비에는 동급생들이 배운 것을 나에게 가르쳐 주는 비용도 포함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수업 준비를 제대로 해 가지 않거나 아무런 의견도, 질문도 하지 않는 것은 문제가 된다. 다른 학생에게 도움이 안 되는 것이다. 명석한 아이들은 이것을 빨리 알아차린다. 다른 학생이 불성실하게 수업을 준비하거나 수동적으로 수업에 임하면 자신에게도 마이너스가 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배울 것이 없는 사람과 같이 공부하는 것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내 경우는 아프리카, 14년, 자원봉사, 이 세 마디면 교수님이나 명석한 아이들이라도 ‘너는 됐어’하고 인정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사실 교수님들이나 학생들은 ‘동양에서 온 장애인 여성이 아프리카에서 14년 살다 컬럼비아에 앉아 있는’ 이것만으로도 사회복지학을 공부해야 하는 뚜렷한 사례를 보는 것이었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무시할 수 없는 학생으로 인정받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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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게 공부하는 일은 개명천지 하는 일


 신문기자 출신인 글쓴이는 아프리카 대륙을 여행하고 와서 그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끔찍한 현실’을 전문가의 견해와 각종 문헌을 참고해서 사실감 있게 전했다. 에이즈와 각종 질병으로 죽어가고, 단 돈 몇 달러가 없어서, 아스피린, 항생제 한 알이 없어서 죽어가는 어린이들의 마지막 순간을 매우 객관적으로 기술했다. 작가는 울분도, 흥분도 하지 않고 그저 담담히 이야기 했다. 그리고 선진국에서 이 아이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자고 했다.

 두 장짜리 A4 용지 앞뒤에 작은 글자로 인쇄된 이 내용은, 국제사회복지대학 수업에 읽어 가야 할 수많은 논문 내용 중 하나였다. 그 과목에만 다섯 개의 논문과 교과서 그리고 두 개의 참고도서가 더 있었다. 아직 읽어야 할 페이퍼가 몇 개 더 있었다.


 인턴에서 돌아오자마자. 읽을거리를 들고 카우치에 비스듬히 앉아서 네 시간째 논문을 읽고 있었다. 배가 고프다. 챙겨온 바나나를 먹고, 다시 또 읽기 시작했다. 밤 11시 20분이다. 그러던 중에 아프리카 이야기를 읽게 되었다.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거기가 어떤 곳이었던가!

 허다한 생명이 그 가치를 알기도 전에 스러져가던 곳 나 자신조차도 죽을 뻔 했던 일이 다반사였던 곳, 스스로 돕기에는 너무 척박해서, 가진 자들을 향해, 배운 자들을 향해 간절한 도움의 손길을 바랄 수밖에 없는 땅이 아닌가.

 그 땅을 다녀온 가진 자. 배운 자가 지성을 일깨우고 있었다.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려고 사는 사람들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러한 사람들도 있었구나. 눈물이 났다. 아프리카 사람들 때문에 눈물이 났고, 선하고 양심이 있는 지성인의 태도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지성인들은 지금도 끊임없이 이 지구상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돌아다니고, 기사를 쓰고, 글을 쓰고, 연구하고 있다.


 눈물은 감동과 감격 때문에 흐르는 것이었다. 아프리카에서 살다 온 나로서는 그 한 사람, 그 지성인의 목소리가 얼마나 큰 힘이 있는지를 피부로 깨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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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었다. 14년 동안 피 터지게 싸우고 살며 애태우다가 보낸 세월보다 그렇게 한 사람의 지성인이,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말로 또 다른 사람들을 설득하고 있는 글을 읽으면서 ‘눈앞을 덮고 있던 희미한 꺼풀이 벗겨지는 것’과 같은 감동을 느꼈다.

 ‘이것이구나. 이것 때문에 공부를 해야 하는구나. 이 길고 지루한 시간을 참고 견뎌야 하는구나.’

 이러한 깨달음은, 왜 이렇게 힘들게 공부해야 하는지를 한순간에 알게 해주었다. 공부해야 한다. 그 많은 날들의 안타까움을 울분과 흥분이 아니라, 객관과 논리를 가지고 서술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다. 지성인이 되어 연구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더 큰 세계가 눈에 보였다.

 학문하는 일이 인간생활에, 인류의 발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한눈에 이해가 되었다.


 석사 공부는 짧은 시간에 엄청난 일을 소화해야 하는 과정이었다. 그래도 이 과정에서 받은 학문적 도전은 등록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개명천지 했다고 말할 수 있다. 사회복지사가 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 나의 지성을 일깨우고 더 나아가 인류의 양심을 일깨우기 위해서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다.


 캄캄한 학문의 세계에 기꺼이 발을 들여놓았다. 한 단어에 집중하고 한 문장 때문에 몇 시간을 고민하면서 구체적이고 논리적으로 사고를 발전시켜나가는 그 과정의 아름다움을 체험했다. 눈물이 어릴 정도로 행복했다. 정말 학문을 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딱딱하고 재미없는 논문을 읽다가도 마치 희뿌연 안개가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같이 개명되는 느낌을 받았다. 

 아! 이러한 것이 배움이구나. 생각을 발전시키고 연구하는 것이 이러한 것이구나! 하고 거듭 깨달았다.

 더욱이 전통적 교육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아프리카에서 일하면서 느꼈던 무의식 깊숙이 자리했던 무지에 대한 처절하고 안타까운 자격지심을 비로소 벗어던졌다. 알지 못해서. 배우지 못해서 얼마나 많은 고통과 손실과 눈물과 아픔이 따랐는가! 저절로 공부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 컬럼비아대학원 졸업, 인생은 꿈을 따라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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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양 여동생이자 동급생인 징웬과 함께  학생회관 지하에 있는 서점에 들렀다. 대학원 졸업식 가운을 사러 간 길이다. 기성품이라 가운은 비싸지 않았고 키가 작은 나한테도 잘 맞았다. 졸업 가운은 스카이블루의 바탕에 앞가슴 양쪽으로 까만색 바탕의 컬럼비아 대학교 왕관로고가 달려 있다. 석사모까지 받아서 써보며 졸업식 날의 기쁨을 미리 느껴 보았다. 아직 졸업식까지는 약 한 달이 남아 있었지만 기분은 무척 좋았다.

 하지만 마음 한 편에 무엇인가 무거운 것이 매달려 있었다. 학생과에 가서 다시 한 번 물어보았다.

 “정말 졸업식에 참석할 수 있는 거예요? 그날 이미 많은 사람들을 초대했는데……. 정말 걱정입니다.”

 가을학기 학비는 가까스로 완납했다. 덕분에 봄학기를 등록했고, 이제 졸업식을 앞두고 있다. 학과 공부도 잘 돌아가고 있고 오히려 여유가 있을 정도다. 형편만 된다면 계속 공부하고 싶을 정도로 행복하고, 연구하고 리서치 하는 일이 마음에 들었다. 한 가지 말 못할 고민만 빼고는…….

아직 봄학기 학비를 완납하지 못했다. 졸업식에 참석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하고 적이 고민하고 있었다.


 같은 교회에 다니면서 알게 된 김 군이 어느 날 불쑥 말했다. 학비 걱정을 하던 나에게 자기가 장가가려고 모아 놓은 돈을 가져다 쓰란다. 고맙지만 정중하게 거절했다.

 결혼을 앞 둔 남자 청년이 쌈짓돈을 내놓겠다고 했다. 그 돈은 쓰지 않았지만 이미 쓴 것과 다를 바 없는 큰마음을 받았다. 김 군의 제안은 나에게 인생에 대한 큰 믿음을 더해 주었다. 김 군의 예는 내가 받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도움 중의 한 가지일 뿐이다. 이렇게 사람이 도우려고 하는데, 하늘도 돕지 않겠는가.

 나의 믿음이 헛된 것이 아님을 세월이 증명했다. 학교는 마지막 학기의 학비는 졸업 후에 낼 수 있도록 유예해주고 있었고, 학점을 다 이수했으면 졸업식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 사실을 김 군에게 전했다. 김 군과 나는 한숨을 돌렸다. 나는 마지막 학기를 최선을 다해 마무리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배운 점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애정 어린 관심과 선의를 이끌어내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꿋꿋하게 걸어가는 인간다운 삶을 살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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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열심히 살아가는 것을 보고 도와준 사람들이 내게서 얻은 것은, 나도 저 사람처럼 꿋꿋하게 살아갈 거야 하는 용기이며 희망이지 않았을까!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공부를 마치고 보니 알게 되는 것이 있다. 이 세상에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과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혹 도움을 줄 수 있는 바로 그 사람이 도움을 필요로 할 것이고, 도움이 필요한 바로 그 자신이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결코 숫자나 금액으로 환산될 수 없는 것이 인생이고 인간의 삶이다. 살아가다 보면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고, 도움을 줄 수 있는 때가 있다. 아프리카에서 행한 그 많은 자원봉사의 날들에 대한 하늘의 은혜를 미국 유학생활 중에 한인들을 통해서 돌려받았다고 믿는다. 이제 더 잘 개발된 지성과 감성과 신앙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더욱 잘 도와줄 수 있는 앞날을 약속하고 꿈꾸고 있다.

 3천 달러를 들고 미국 유학길에 올라서 약 18만 달러의 비용이 든 공부를 마쳤다. 대학을 마친 뒤의 1년간의 경비와 생활비를 포함하면 20만 달러가 넘는다. 이 경비는 개인의 장학금과 내가 신청해서 받은 여러 가지의 장학금, 특강 강사로서 받은 강사비, 교회가 보내온 정기적인 지원금, 비정기 후원금 등 모든 것을 포함해서 계산해본 것이다.


 이 모든 재정이 움직이는 동안 내가 한 일은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었다. 지난 세월 동안 돈 걱정을 하고 학비를 벌어가면서 공부하지는 않았다. 공부해야할 명분은 뚜렷했다. 아프리카에 선물로 가지고 갈 공부를 하고 있다. 즉 가난하고 불우하고 꿈을 꿀 여력조차 없는 제3세계 어린이들과 청년들을 위해 하는 공부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해 온 대로 최선을 다해서 하루하루 걸어가는 것이 내가 할 일이라고 믿으면 지내온 세월이다.

 뉴욕에서는 유일하게 잔디밭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는 컬럼비아 대학교의 256회 졸업식은 2010년 5월 18일에 있었다.

 오전에 전체 졸업식을 마치고 오후에 체육관에서 사회복지대학원 졸업식을 가졌다.


 졸업식이 끝나고 얼마 후에 석사학위서를 찾을 수 있었다. 한국의 동생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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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모았고, 형편을 들은 교회에서 다시 한 번 큰 헌금을 해 주셨고, 한남 직업학교에서, 그리고 기타 여러 군데에서 크고 작은 금액을 모아서 보내 주신 덕분이다. 그 학위서 뒤에는 참으로 많은 글들이 적혀있다. 나만 알 수 있는 내용이다. 배움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이 만들어낸 꿈이었고 그 꿈을 따라가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얻게 된 값진 열매였다.


■ 해외 유학을 준비하는 청년들에게 전하는 한 마디


 유학가려면 꼭 준비해야 할 것들이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돈이다. 외국에 유학가려면 당연히 학자금과 생활비 등이 엄청나게 든다. 수년간의 유학생활을 지탱해 줄 충분한 재정이 확보된다면 문제될 것이 전혀 없다. 실력이 부족하거나 영어를 못하면 재정을 가지고 하나씩 보충해나가면 된다. 대단히 길이 많다. 과장해서 말한다면 시간 있고 돈 있으면 누구나 미국 유학 가는 것이 가능하다. 돈의 힘을 잘 알지 않는가. 미국만큼 이것이 철저하게 실행되는 나라가 또 있을까! 이것도 저것도 안 되면 이건 좀 극단적이긴 하지만 기부입학이라도 하면 된다. 미국 유학의 시작은 누가 뭐라고 해도 돈이니까.

 “돈은 준비된 것이 없고 ……가서 일하면서 공부하면 …….”

 “당신은 공부를 끝낼 생각이 없거나 그저 떠나보고 싶은 거군요.”

 나는 냉정하게 이렇게 말해준다.

 경비에 대한 뚜렷한 대책 없이 유학을 간다는 것은 많은 가능성이 열려 있는 그 사회에서 자신의 귀중한 시간을 허비할 확률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유학을 생각하는 것만도 대단 하지만 돈이 받쳐주지 않는 유학 생활은 아직 꿈이다.


 둘째는 엄청나게 공부를 잘 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것은 특출하고 튀는 재능이 있는 경우도 해당된다. 누구보다도 명석하고 똑똑하고 공부 잘하는 것이 확인되면 미국의 대학교들은 유학 생활을 지탱할 만한 충분한 재정이 없어도 장학금을 주면서 오라고 연락할 것이다. 이런 경우는 많이 보았다. 이런 경우 돈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어떤 대학은 생활비까지 줄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영어를 끝내주게 잘하면 좋다. 충분한 재정도 없고 공부도 그저 그렇게 하는 경우라면 그저 대화만 통하거나 회화를 잘하는 수준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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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어도 토플시험 성적이 100점(IBT기준) 이상이면 공부를 하거나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지도 모른다. 운이 좋으면 아르바이트하면서 충분히 공부하고 졸업하는 날도 맞이할 것이다. 영어권의 가난한 나라에서 미국 유학을 와 성공적으로 자리 잡고 사는 경우가 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것들은 하수들이 택하는 방법이다. 상수는 미국 대학이 찾는 학생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해 보는 것이 아닐까?


 이 세상을 빠르게 움직이는 주체는 사람이다. 나라의 문화, 정치, 사회가 달라도 그 안에 살고 있는 주체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인류의 가장 보편적인 가치는 시대가 변해도 달라지지 않는다. 약속한 말은 아무리 힘들어도 최선을 다해서 지키려고 한다. 해야 할 일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정직하게 실행한다. 시간과 돈과 사람을 소중하게 여긴다. 이와 같은 생활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미국 유학을 꿈꾸어도 된다.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 꿈을 이룰지도 모른다.


 ‘이 사람의 노력은 진실하다. 이 사람을 도와주면 보람이 있겠다’라는 생각을 사람들에게 갖게 하는 데 정직함과 성실함, 그 이상의 것이 어디 있겠는가! 인간은 시대와 환경이 바뀌어도 그 보편적인 성품과 인성은 바뀌지 않는다. 나는 이것을 일본에서, 아프리카 보츠와나에서 생활하며 확인했다. 미국으로 건너갔다고 다르겠는가! 아니다 그 나라 사람들이야말로 가장 보편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으로 사고하며 사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학문하는 세계로 갈수록 그 보편타당한 진리가 올바르게 적용된다.

 내가 경험한 미국의 대학, 대학원은 정직하고 성실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인생을 인간답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고, 용기를 주며 가르쳐서 앞으로 나아가게 도와주는 곳이었다. 내가 그 증거라고 말할 수 있다.


네 번째 이야기, 進

     국제사회복지개발 전문가의 일터, 지구촌    


■ 저 너머에 있던 세계, 내 앞에 펼쳐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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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어도 문제없다. 만국공통어도 능통하다. 석사학위도 받았다. 나이도 이만하면 적기다. 가족도 없다. 지구촌을 돌아다니는 데 아무런 제약이 없다. 국제사회복지개발 전문가가 되었다. 내 일터는 지구촌이다.

 어려서부터 꿈꾸어 오던 그 세계가 내 앞에 펼쳐져 있다. 내 인생의 저 너머에 있어서 보이지도 않았고 도달할지 어떨지도 모를 멀고 먼 나라였다. 그런데 이제 내 앞에 선명하게 그 세계가 펼쳐져 있고 발을 내딛고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

 2010년 5월에 대학원을 졸업하고 약 3개월 동안 쉬면서 다음 행선지를 기다리며 준비하고 있었다. 8월 달에 미국 중부 댈러스에서 개최된 선교대회에 참석했다. 대회 시작 직전에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전화기 저쪽에서 한 남자가 자신을 댈러스에 거주하는 재미 사업가라고 소개하며 반가운 인사를 해왔다.

 “부탄이라는 나라에 한 번 가보시겠습니까? 제가 지난달에 사업차 부탄에 다녀왔는데 그 나라에서 섬유를 전공한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김해영씨가 생각나서 소개했더니 큰 관심을 보이더군요.”


 다음에 떠날 나라가 대략 부탄으로 결정이 되었다. 국제사회복지전문가가 되어 맡은 첫 번째 일감이고 첫 번째 나라다. 이제부터는 어느 나라에 적을 두고 살든지 그것은 이제 중요하지 않다. 내가 가서 살고 있는 그 나라가 내 땅이고 내 일터가 될 테니까.


■ 마음대로 쓰세요. 사람이 종잣돈.


 2010년 9월,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에 나의 멘토였던 모이라 커튼 교수님께 인사드리러 학교에 갔다. 미팅을 앞두고 카페테리아에서 여유를 부리며 책을 읽고 있는데 그동안 힘이 되어주던 분에게서 전화가 왔다.

 “저, 사실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네, 말씀하세요.”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서 새로운 사업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미국에 있어도 될 분이……. 많이 감동했습니다. 그래서 저와 집 사람이 좀 의논을 했습니다. 지난 1년 동안 사업이 잘되어서 모아놓은 자금이 좀 있습니다. 아무래도 새로운 일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실 것 같네요. 괜찮으시다면 이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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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드리고 싶습니다. 앞으로 하시는 일에 종잣돈이 되었으면 합니다.”

 “네! 종잣돈이라고요?”

 “네, 아무 부담 갖지 마십시오. 하시고 싶은 일에 마음대로 쓰세요. 그것은 저희 부부의 약속입니다.”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이미 지난 세월 동안 수없이 경험한 일들이지만 이 역시 기적 같은 일이다. ‘아이고 참말로’ 내가 잘 쓰는 감탄사다. 아이고 참말로. 서로 누구인지 자세히 알지도 못한다. 그런데 마음대로 쓰라니. 1년 동안 일해서 차곡차곡 모은 돈을 쓰라고 보내준다니. 진정 아이고 참말로다.


 미국 유학생활을 정리하고 짐을 싸고 비행기 티킷을 끊고 나니 수중에 남은 돈은 처음 미국에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종잣돈으로 사용하라니. 그것도 마음대로 사용하라고 돈을 보내 준다고 한다. 다시 한 번 펄쩍 뛰었다. 대학원을 졸업하면서 작정한 것이 있다.

 ‘월급을 받지 않고 일하기’

 이 결심을 하늘이 알아주고 사람들이 알아주고 있었다. 공부한 것을 공짜로 풀어내려 하는 뜻을 사람들이 알아주고 있다는 증거였다.

 약속시간보다 조금 앞당겨 커튼 교수님께 달려갔다. 반가운 인사를 나누기도 전에 얼굴 표정으로 먼저 말하고 있었다. 교수님은 무슨 좋은 일이 있느냐고 물어왔다.

 “종잣돈 2만 달러를 기부해 주겠다는 연락을 방금 받았습니다.”

 교수님은 뛸 듯이 기뻐하시며 포옹해 주셨다.

 “마음대로 쓰라고 합니다. 이런 조건이 다 있다니 믿을 수가 없어요.”

 “아마, 무엇을 하든지 잘 할 것이라고 믿어서 그럴 것입니다.”

 교수님도 기뻐하시며 덧붙였다.

 그렇다 기부금의 액수보다 더 큰 것은 믿음에 근거해서 이루어지는 관계다.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얻는 것보다 더 큰 삶의 자산이 어디 있을까! 뉴욕에서 사는 분들의 마음도 같았다. 하나라도 더 가지고 갈 수 있도록 애써주셨다.

  진실한 종잣돈은 사람들이자 그분들이 보내주는 믿음이라는 사실을 체감했다. 돈은 들어오고 나간다. 많아졌다가 없어졌다가 한다. 그러나 사람 사이에 생긴 믿음은 한번 들어오면 나가지 않게 해야 한다. 생겼으면 지켜야 하고 없어지지 않도록 서로 노력해야 한다. 국제사회복지사로서 활동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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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실제 종잣돈도 생겼지만 가장 중요한 자산은 역시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 부탄, 은둔의 왕국에서 공주를 만나다.


 부탄을 소개받고 약 한 달 반 동안 리서치를 했다. 서점에 들러 불교철학 역사와 불교 경전과 몇 권의 불교 관계 책부터 구입했다. 아는 만큼 보인다. 그 나라에 들어가기 전에 가능한 한 많은 것들에 대해 알고 준비해야 마땅했다. 이 일을 하기 위해 그렇게 피터지게 공부했다. 써먹어야 하는 것은 당연했다.

 2010년 10월에 김 사장과 부탄 비즈니스에 관심이 있는 재미 교포 정 양과 함께 부탄을 방문하기로 했다. 그 나라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같이 일할 사람들은 누구인지 만나보게 될 것이다.

 미국 댈러스에서 오는 두 사람을 인천공항에서 만났다,

 “저는 부탄 입국 비자가 안 나왔습니다.” 

 김 사장이 전했다.

 “네?”

 “물론, 방콕에서 부탄 파로공항으로 들어가는 비행기 좌석도 확정되어 있지 않고요.”

 참고로 부탄을 방문한 사람은 6개월 이내 재입국이 금지되고, 매년 정해진 숫자의 외국인만 입국이 가능하다.

 마침 부탄의 칼마씨가 공주에게 초대장을 내어 달라고 특별히 부탁한 것이 성사되어 우리 일행 세 사람에게 급행 비자가 발행되었다.

 공주 초청이므로 VIP가 된 것이다. 물론 방콕발 파로행 좌석도 다 확보되어 있었다. 암담하고 불분명한 상태에서 급반전이 이루어졌다. 공항에서 되돌아올 뻔 한 신세에서 공주가 초청하는 국빈이 되었다. 이런 것을 두고 전화위복이라고 하는 걸까.

 공주님의 파워를 실감하면서 히말라야 산 중턱에 자리한 부탄으로 날아갔다. 수도 팀푸의 하늘은 청명하고 아름다웠다. 공항에 내려서 올려다본 히말라야 산맥의 만년설은 경이로웠다.


 부탄은 왕족국가이면서도 2008년부터 입헌군주제가 이루어져 자유민주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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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실시하기 시작한 아주 작은 나라다. 그러나 실상은 100여 년 이상 왕족의 통치 아래 단결해온 부탄 국민들은 부탄의 전통문화를 지키는 데 자부심을 갖고 있다. 또, 나라 전체가 오랜 세월 동안 불교를 믿어온 불심이 대단한 민족이다.

 현재는 4대왕과 그의 여왕 4명 그리고 5대 왕을 비롯한 왕족들이 결혼을 통해 결속하여 부탄의 땅을 대부분 소유하고 있다. 그들의 존재는 부탄의 어느 곳에서도 막강하여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서 왕을 돕고 있었다. 부탄 국민들은 모두 ‘카라’와 ‘고’라는 전통복을 입고 생활한다. 히말라야 산속 깊은 곳에서 어린 학생들이 전통복의 옷자락을 휘날리며 학교로 향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꿈속의 광경인 것처럼 아름다웠다.

 부탄에서의 하루하루는 몇 달에 맞먹을 만큼 비중이 있고 무거웠다. 칼마 씨는 한순간도 헛되이 보내지 않도록 세심하게 일정을 짜 우리들을 데리고 다녔다. 일정 중에는 우리 일행을 초청해준 왕모 공주를 면담하는 시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수도 팀푸의 상류 계곡 언덕에 머물고 있는 공주님을 만나러 가기 위해 일행은 모두 부탄 전통복을 갖추어 입었다. 왕족다운 품위와 기품이 풍기는 공주님과의 면담은 예상보다 세 배나 더 많은 한 시간 반 동안 이루어졌다. 미국에서 유학하고 있는 공주님의 두 자녀 이야기로부터 부탄 전통의상에 이르기까지 화제는 다양했다. 팀푸칼리지를 설립하여 교육발전에 힘쓰고 있는 공주님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우리에게 부탄 여행이 어떠한지 자세히 물어왔다.


 우리는 부탄의 전반적인 일들과 며칠 동안 보고 느낀 것에 대해 자유롭게 대화하며 서로의 생각을 나눌 수 있었다. 우리의 부탄 방문은 비교적 성공적이었다. 왕모 공주는 앞으로 내가 부탄에서 일하게 된다면 적극적으로 도와 주겠다고 약속해왔다.

 우리는 가지고 간, 정성이 깃든 선물을 전해 주었다. 김 사장은 왕모 공주의 자선사업활동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며 적지 않은 금액을 기부했다. 왕모 공주도 우리에게 부탄의 역사가 담긴 책을 답례로 전해 주셨다.

 대학에서 국제사회복지학과 공동체 지역 프로그램 개발 분야를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앞으로 부탄에서 사회사업가로서 직업전문학교를 설립하는 일을 하게 된다면 내가 가진 고급 편물기술과 아프리카에서 직업학교를 운영한 경험이 커다란 자산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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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제사회복지개발 전문가의 일터, 지구촌


 한국에 입국하자마자 다음 날 중국 길림성 연변으로 날아갔다. 연변과학기술대학의 영어과 김화 교수와는 미국 유학 때 만나 친구가 되었다. 그녀는 연과대학의 첫 번째 입학생 중의 한 명으로 미국에서 석사를 받고 지금은 그 학교의 교수가 되어 후배들을 가르치고 있다. 연과대의 교수 숙사에 머무르면서 일주일 동안 그녀를 통해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 사람들 중에 연변에서 가장 큰 삼자교회의 류두만 목사님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실명하고 미국 유학을 거쳐 복음 사업을 하고 있는 분으로 나의 이야기를 듣고 중국에 있는 조선족 청년들에게 말 할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수백 명이 모였다.


 무슨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까?

 크게 고민할 것은 없었다. 아프리카 청소년들에게 들려주던 그 이야기면 되었다. 성공한 이야기보다 불행한 이야기가 더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예수님 이야기나 성경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살아온 이야기만 하는데도 이십 대 초반의 청년들은 눈물로 웃음으로, 미소로 그리고 박수로 환영하고 공감해 주었다.

 ‘그렇다 그런 일이다. 이 일을 하면 된다.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고 꿈을 꾸게 하는 일 말이다.’


 연변에서는 주로 학생들과 청년, 교수 위주로 만남을 가졌다. 매우 도전이 되고 보람 있는 만남의 연속이었다. 연변의 청년들과 대학생들이 눈을 반짝이며 나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이 진정으로 듣고 싶어하는 것은 ‘꿈꾸는 자의 미래는 밝다는  믿음의 이야기’다. 나의 삶이 꿈을 따라 살고 싶어하는 청년들에게 좋은 모델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다음 행선지는 일본이었다. 숭실공생복지재단에서 해마다 여는 한일 사회복지사 포럼에 초정해주었다. ‘고향의 집’ 재단을 이끄시는 윤 이사장님께서 만나자고 하셨다. 반가운 일이다. 한국에서 사회복지사들과 재단 관계자들이 공항에 모여서 교토로 가 포럼에 참석했다.

 포럼에 참석한 사람들은 대부분 사회복지사들이었고 관계자들이었음에도 내가 그곳에 앉아 있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하고 “왜, 여기 와 계세요?” 하고 물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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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보니 내가 달라져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여전했다. 심지어는 사회복지사들까지도 나는 여전히 ‘교육 받지 않은 장애인 여자’라는 범주에 속했다.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대접했고 그것이 당연했다. 그러니 포럼에 참석하거나 회의 자리에 끼어 있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내가 누구인지 잘 모르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내가 그곳에 있는 것을 의아해 하거나 더러는 불편해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들은 극진히 대접해주었지만 말이다.

 상황은 언제나 반전된다. 포럼 중간 쉬는 시간에 윤 이사장님께서 나를 소개해 주셨다. 그제야 사람들의 안색이 달라진다.

 내가 누구인지 몰라도 동등하게 대접해 주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일본 방문은 또 다른 것을 깨우쳐 주었다. 사회복지사로 일하려면 같이 일하는 사회복지사들부터 깨우쳐야 하는구나 하는 것. 사회복지의 혜택을 입고 있던 사람이 사회사업을 하는 주체가 되어 보는 것은 좋은 경험이다. 앞으로 내가 할 일이 추가되었다.


■ 마음 따뜻한 프로페셔널, 다양한 문화에서 배우다.


 사람은 자신이 살고 있는 주변 환경에서 영향을 받고 그것을 많이 닮아간다고 한다. 보츠와나에서 머무는 세월이 늘어날수록 내 마음은 느긋하고 너른 벌판을 닮아갔다. 아프리카의 대자연 안에 있으니 내가 자연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보츠와나에서 일하는 동안 월급은 받지 않았다. 그러나 월급으로 계산할 수 없는, 아프리카 사람들이 주는 애정과 관심을 받았다. 먼 외국에서 온 나에게도 관대한 대자연을 선물로 받았다.

 칼라하리 사막에서 살아본 세월은 결코 공짜가 아니었다. 사막은 내가 누구인지 들여다볼 수 있도록 나 자신을 겸허하게 만들었고, 나에게 신을 정직하게 대면하는 시간을 주었다.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며 사는 인간으로 성숙해가도록 만들었다. 인간으로 태어난 보람이 있다면 바로 그런 것이리라. 그 힘이 나로 하여금 유학을 결정하게 했고 전 세계의 아이들과 청소년들을 위해 살고 싶은 꿈을 꾸게 했다. 꿈을 이루어나가는 데 꼭 필요한 것은 자신이 갖고 있는 강점이 무엇인지 아는 일일 것이다.

 나의 장점 중의 한 가지는 다양한 문화권에서 생활한 경험이다. 이십 대 중반까지는 한국에서 살았고, 이후에는 아프리카 대륙으로 가서 14년을 살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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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다시 미국에서 7년을 살았다. 이렇게 살다 보니 아시아권과 아프리카, 그리고 북미 문화를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되었다. 각 나라의 언어를 포함하여 다양한 생활습관이나 삶 등을 체험하게 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굿 호프 직업학교를 배경으로 만나는 사람들은 다양했다. 또, 직업이나 빈부의 차이를 염두에 두지 않고 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내 의식의 밑바닥에 깔린, 아프리카 사람들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과 인식은 많은 실수를 불러왔다. 특히 그 사람들이 인간으로서 생활하는 규칙과 문화를 무시하고 겉으로 나타난 것만 보고 판단하거나 한 수 접고 대하고 있음을 알아 차렸다.

 언젠가 초라한 행색의 흑인 할아버지를 인사도 하지 않고 지나쳤다. 초라해 보여서 노동자로 여긴 것이다. 나중에 “너는 왜 그분에게 인사하지 않았나?” 하고 실수를 꼬집어준 것은 백인이었다. 인사도 하지 않고 지나친 이 할아버지는 몇 달 후 주미 대사가 되어 미국의 워싱턴으로 갔다. 지금 생각해도 부끄러운 일이다. 겉모습으로만 판단당하는 일에 민감하면서도 아프리카에 가서는 나조차도 그렇게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일상생활에서 아프리카 사람들이 영어가 서툰 아시아인들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듯 한 태도를 갖고 대하는 것도 경험했다. 일부 보츠와나 사람들은 그곳에 와서 살고 있는 중국인들을 아주 우습게 여겨 마구 대하는 경향이 있다. 보츠와나에 진출해서 일하고 있는 중국인들의 대다수가 교육적 배경이 좋지 못한 건설현장 노동자들이다. 그들이 영어를 잘 할 리가 없다. 사실 이것은 한국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다. 동남아에서 한국에 와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어떤 대우를 받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북미주의 경우 그 나름대로의 특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뉴욕이 최첨단 문화, 경제의 중심지이고, 엄청난 배움의 기회와 삶의 다양성을 접할 수 있는 곳이지만 살다 보면 결국 타성에 젖게 된다. 도시생활은 오히려 칼라하리사막보다 더 외롭거나 메마르게 느껴 질 때가 있었다. 뉴욕에서 만난 한국 사람들은 학벌이나 경제, 또는 같은 직업군, 같은 이해관계에 바탕을 둔 인간관계를 맺는 그들끼리의 만남이 일반적이었다.               

 다른 사람을 돕는 국제사회복지사가 되려면 이런 서로 다른 문화, 언어,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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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 그리고 역사 속에서 보편적인 양심과 이해를 바탕으로 각 나라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무엇보다도 따뜻하고 성실하게 동등한 인격으로 대하는 것이 가장 좋은 인간관계를 만들어 준다.


■ 전문가의 기본 언어는 키높이 언어와 눈높이 언어


 “정말이세요? 4개 국어를 하신다는 말이?” 그 말에 정색하고 한 마디 했다.

 “어머, 누가 그래요? 그건 잘못된 말인데요. 사실은 …… 오 개 국어가 가능합니다. 만국공통어 하나 더 추가합니다. 이게 제일 쉬워요. 잘만 배우면 말입니다.”

 한국어와 영어 그리고 일본어와 츠와나어…….

 그런데 사실은 전 세계 어느 나라 사람들과도 소통이 되는  만국공통어에 능하다고 자신한다. 국제사회복지사에게 가장 중요한 언어는 이것이다.

 얼굴 표정이나 손짓, 눈빛이 전하는 뜻은 말보다 더 진실이 담겨 있고 들리는 소리보다 더 솔직하다.


다국적 인종이 거리를 활보하는 뉴욕에 사는 사람들은 인종이나 학벌, 경제적 지위, 신체적 장애, 등에 따라서 ‘만국공통어’를 잘못 사용했다가는 큰일이 난다. 상대가 흑인이라고 해서 무시하는 눈길을 보내거나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홈리스 곁을 지나가면서 무슨 쓰레기 옆을 지나가듯이 행동했다가는 오히려 개무시를 당하기 쉽다. 이는 무심결에 지나치는 사람들에게조차 자신이 만국공통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며, 상대방은 이것을 민감하게 알아차린다.

 미국에 있는 동안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내 의사를 전달하며 살았다. 그 많은 만남과 대화를 가지며 가장 행복하고 즐거웠던 때는 역시 만국공통어를 잘 사용하는 사람들과 함께할 때였다.

 작은 내 키에 맞추어 포옹해 주고 내 눈에 맞추려고 무릎을 구부리고, 딱딱한 의자가 불편할까봐 쿠션이 있는 의자를 찾아다 주는 등의 이루 말할 수 없는 따뜻한 배려와 행동들은 말로만 하는 친절보다 백 배 이상 더 진실하게 감동으로 다가왔다.

 사람들은 어떻게 외국어를 배웠느냐고 묻는다. 나는 세 가지로 요약한다. 첫째는 어차피 내 나라 말이 아니니까 배우는 사람으로서 자신 있게 말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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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둘째는 말하고자 하는 바를 성심껏 이야기 하는 것이다. 이것은 외국어가 능숙한지 아닌지의 문제가 아니다. 상대방을 향해서 진심과 성의를 다해서 말하는 것이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고 대화를 통하게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는, 이 만국공통어를 잘 사용하는 것이다. 몸을 바로 해서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면서 이야기 하는 사람은 물리침을 받지 않는다. 얼굴에 온화하고 다정한 미소를 머금고 인사를 하는 사람은 어디서나 환영을 받는다.


나와 같은 사람이 여러 나라와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인정받고 성공을 이루어나가는 비법은 바로 이 언어를 능통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초등학생 눈높이를 가지고 있는 내가 본 어른들은 이 언어에 능숙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다fms 사람들이 보내는 몸짓, 눈짓, 손짓을 읽어내지 못한 채 자기 이야기만 한다. 음성이 되어 나온 말과 귀로 들려진 말은 한 인간의 마음 밑바닥에 있는 ‘정말’을 담아내지 못한다. ‘정말’은 내 앞에 앉아 있는 인간이 몸으로 말하는 그 언어로 알아들을 수 있다. 


■ 부탄 개발 프로젝트, 본격적으로 가동하다.


 2010년 9월부터 11월은 한국, 중국, 일본, 그리고 부탄 방문으로 바쁘게 보냈다. 부탄으로의 일차 방문을 앞두고 한국일보 사회부 기자가 인터뷰를 요청했다. 서울 시내 호텔 로비에서 이태무 기자를 만났을 때는 부탄에 가지고 갈 선물을 산다고 인사동을 하루 종일 헤맨 날이었다. 지쳐서 만났지만 기자의 질문에 답하다 보니 생기가 돌았고 여러 가지 이야기가 나왔다. 질문은 어린 날의 기억을 더듬게 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2010년 10월 21일자 한국일보 사회면에기사가 나왔다 금요일 출국을 앞둔 이틀 전이었다. “의지만 있다면 누구나 기적의 주인공”이란 기사는 인터넷에도 떴다. 순식간에 리플이 달리면서 추천이 천 명을 넘어 갔다. 나도 깜짝 놀랄 만한 반응이었다. 아침에 나간 신문 기사를 보고 서울에 있는 출판사의 편집장 몇 사람이 “책을 냅시다.”하고 연락을 해왔다. 예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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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책을 내는 일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글을 쓰는 일은 어려서부터 잘한 것 중의 한가지다, 십 대 때부터 거의 30년 넘게 일기를 써왔다. 공장을 전전하고 다닌 형편에 비하면 제법 많은 양의 책도 읽었다. 그러나 그것과 책을 쓰는 일은 별개의 일이다. 작가가 되기 위해, 글을 쓰기위해 제대로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한편으로는 책을 써야 하는 명분도 생겼다. 월급을 안 받고 일하는 만큼 어디선가 재정이 공급되어야 했다. 강의나 집회를 통한 수입은 한계가 있다. 더구나 내가 일하는 분야는 지역공동체 개발과 프로그램 개발이다. 푼돈이 들어가는 프로젝트가 아니다. 그런데 책을 낸다는 것은 사회복지사로서 정당한 수입원을 갖게 되는 일이다. 그러면서 좋은 글을 써서 책을 낸다면 세 가지의 시너지 효과를 일으킬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먼저 책을 읽는 독자에게 용기와 꿈을 심어줄 수 있다. 그리고 책이 잘 팔려 정당한 수입원을 갖게 되고 거기서 들어오는 인세를 제3세계의 청소년과 어린이들을 위해 사용하면, 독자들을 자동적으로 인류의 생활 개선과 사회복지 사업의 일원으로 끌어들이는 셈이다. 꼭 해야 할 일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그 후 두 달 동안 미국에 머물면서 부탄에 관한 리서치를 하고 어떤 식으로 일을 해나갈지 다녀온 정보를 바탕으로 개발 계획서를 만들기 시작했다. 아울러 보츠와나에 있을 때 써 놓았던 ‘자서전’이라고 할 만한 원고를 꺼냈다. 여기저기 써 놓은 것을 합해보니 적지 않은 분량이었다. 일단 무엇이라도 해보자!

 나는 마치 시험을 앞 둔 수험생처럼 도서관에 처박혀서 12월과 1월을 보냈다. 가끔 일을 하다보면 새벽이 와 있었다. 두 가지의 일에 집중하면서 진행하다 보니 일은 진전이 빨랐다. 한국에서 돌아다니면서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 맞았다.


■ 비자 못 받았다고요? 그럼 작품만이라도 보내주세요.


 버틀러 도서관에서 리서치와 글쓰기를 하면서 두 달 가까이 시간을 보내고 나니까, 대강 윤곽이 잡혔다. 두 달 간의 미국 방문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서울 남산동에 있는 초전섬유퀼트박물관으로 향했다. 부탄을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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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소개하고, 직조작품 전시회를 열기로 하고 디자이너 칼마 양첸 씨를 한국으로 초청했다. 칼마 씨는 부탄을 대표하여 해외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며, 수공예품의 디자인과 작품성을 인정받아 여러 번 수상한 경력이 있다. 특히 부탄의 유일한 항공사 스튜어디스의 유니폼은 그녀가 디자인한 문양을 바탕으로 한 디자인을 채택해 사용하고 있다.

 3월 24일을 전시회 오픈 날짜로 잡고 모든 일을 진행했다. 칼마 씨의 입국예정일을 일주일 남겨 두고 부탄에서 전화가 왔다. 한국 비자가 거절되어 갈 수가 엇다는 거였다. 부탄, 인도, 미국 그리고 한국 등 가능한 노력을 다했으나 날짜에 맞추어 올 수는 없었다.

 “이번에 날짜에 맞추어 한국 입국이 어렵다면, 당신의 일정을 진행하십시오. 그 대신 이번 전시회를 위해 준비한 작품을 택배로 보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거야 어렵지 않습니다. 준비가 다 되었으니 바로 부치겠습니다.”

 칼마 씨는 흔쾌히 허락했다. 전시회 오픈은 4월 5일로 재조정 되었다.


 칼마 씨가 보내온 박스를 뜯어서 낱개로 잘 포장되어 있는 작품들을 하나씩 꺼내어 확인했다. 사진을 일일이 찍으면서, 놀라울 만큼 아름다운 수공예작품 약 오십여 점을 하나씩 펼쳐 볼 때마다 감탄하면서 다음 날 전시회를 준비해 나갔다. 그 작품들 중에는 지난 번 방문 중에 접견한 왕모 공주가 박물관에 선물로 보내는 기증품이 두 점 있었다. 칼마 씨는 작품 외에 관장님과 나를 위해 두 점의 보츠와나 전통의상을 선물로 보내 주었다. 물론 자필 카드도 적어서. 칼마 씨의 일하는 솜씨는 국제적으로 손색이 없었다. 비자가 거절되어 들어오지 못한 것은 다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부탄 섬유전시회를 오픈 하는 날에는 박물관 관계자와 염색을 공부하는 60여 명의 그룹이 자리를 같이 했다. 관장님은 전시회가 열리기까지의 과정을 전하며 이 일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이 조그만 사람’ 덕분이라고 소개해 주셨다.

 간단히 내 소개를 하고, 전시장에 있는 작품들에 관해 브리핑을 하고 부탄에서 보내온 섬유관계 자료 비디오를 보며 부탄을 소개했다.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전시장을 돌면서 각 작품을 소개하는 일은 내가 할 일이었다. 갑작스럽게 큐레이터의 역할을 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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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탄 섬유전시회에는 개인과 방문객, 관광객, 한남직업전문학교 전통의상과 학생들, 친구들, 서울에 있는 후원자들이 찾아왔다. 필요에 따라 부탄과 작품들을 소개하면서 이미 부탄 사람이 된 듯이 그 일을 하는 것이 자랑스럽고 보람이 있었다.         

 서울에 돌아와서 초전박물관에 출퇴근하다시피 하면서 3개월을 보냈다. 부탄 섬유전시회를 준비하고 기획하고 진행하기 위해서다. 이 과정에서 관장님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내 나이의 두 배쯤 되시는 관장님은 한국의 섬유발전사에 한 획을 그으신 분이며 여성의 지위향상과 장애인의 복지에도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셨다. 삶의 지혜가 가득 들어 있는 보물창고 같은 그분의 이야기들은 꼭 새겨들을 만했다. 김순희 관장님은 편물 명장으로서 한 평생을 한국의 편물과 섬유발전을 위해 노력해 오신 지도자이자 교육자다.

 부탄 섬유전시회는 취소 위기를 넘기고 4월 5일부터 28일까지 초전박물관에서 열렸다. 비록 디자이너는 오지 못했지만 작품들을 보내와 긴박하게 준비한 결과다.


 전시회는 잘 끝났다. 김 관장님은 가난한 나라에서 온 귀한 수공예품을 기증도 받고 감사의 마음으로 기부도 하셨다. 제법 큰 기부금액을 부탄에 송금했다. 부탄을 위해 일단 이렇게 시작했다.


■ 교실 밖에서, 소나타를 켜는 아이들, 나보다 더 억울해!


제천에서 이메일이 날아왔다. ‘교실 밖 소나타’란 주제로 서울에서 바이올린 연주회를 가지게 되니 참석해달라는 내용이다.

 아! 제천. 약 10년 전에 그 학교 선배들 12명이 보츠와나에서 한 달 동안 머물면서 연주회를 가진 적이 있었다. 전화를 걸었더니 안면이 있는 선생님이 받으셨다.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불쑥 물어보았다.

 “한 3개월 정도 가서 일하고 싶은데 자리가 있어요?”

 부탄에 들어가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걸릴 것 같았고 들어가기 전에 책의 원고를 마무리해야 했다. 제천 송학면 오미리 산속에 위치한 이 학교는 두 가지, 일하기와 글쓰기를 하기에는 딱 알맞은 곳이었다.


 5월 중순, 남학생 30명과 교사 10여 명이 단체로 서울에 올라와 관계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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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부모님들, 친척, 친구들을 초청해서 바이올린 연주회를 가졌다. 연주자들은 십 대 청소년들로 아동보호치료시설인 청소년학교에서 6개월 단기 훈련을 받고 있는 중에 악기를 배우며 인성교육을 받고 있었다. 범죄에 연루된 청소년들이 소년법에 따라 재판을 받고 6호 처분을 받으면 입소하여 교육을 받는  곳이다. 

 연주회는 외부의 합창단이 찬조출연까지 해서 짜임새 있게 진행되었다.


 좋은 일을 하려니까 하늘도 돕는 것인지 타이밍이 절묘했다. 6월 6일에 제천 산속으로 향했는데 다음 날 KBS 1TV에서 아침마당 프로그램의 작가와 피디 등 일행 3명이 출연 일정을 잡겠다고 달려왔다. 두 시간에 걸친 사전 인터뷰는 학교 마당에 있는 담소정에서 이루어졌다. 김 작가와 피디는 노련했다.      

 6월 14일 아침에 청소년 학교 아이들과 교사들은 모두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았다. 방송에 등장하는 내 모습을 보기 위해서였다.

 ‘이것이 왜 내 잘못이야?’

 ‘내가 무엇을 잘못했지?’

 ‘도대체 어디서 잘못된 것일까?’

 할아버지는 쓸데없는 여자아이를 태어나게 한 것이 어머니의 잘못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술에 취해 어린 아기였던 나를 벽으로 집어 던졌다. 하지만 어머니는 내가 잘못해서 그리되었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했다. 어머니는 일곱 살 때 사고로 머리를 다쳤고, 이는 정신분열과 우울증으로 이어졌다. 어른들은 이 일도 내가 잘못해서 일어났다고 했다. 열네 살 때 아버지는 우리 5남매를 남겨 놓고 자살했다. 엄마는 이 모든 일이 내가 태어나서 그렇다며 더 심한 구타와 구박을 일삼았다.


 정말 아버지는 나 때문에 자살하신 것일까? 내가 잘못해서……. 아무리 생각해도 이치에 맞지 않았다. 납득할 수 없는 말들이었다. 누구도 속 시원하게 대답해 주지 않는 질문이었다. 어른들이 하는 말과 세상 사람들이 하는 말에는 무언가 잘못된 것이 있다는 생각이 거듭 들었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나고, 여자로 태어나고, 이 집안에 태어난 것이 내가 정해서 내 마음대로 한일인가? 내 몸에 장애가 있다고 사람들은 자꾸 놀리는데, 내가 내 몸을 던져서 일부러 이렇게 만들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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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게 왜 내 잘못이야.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단 말이야!’

 억울했다. 왜 내 잘못인가. 아니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이런 항변들이 엄마에게 매를 맞을 때마다, 거리로 쫓겨나와 떠돌아다닐 때마다, 동생들이 창피하다고 같이 다니지도 않을 때마다 내 마음 속에서 치받쳐 올라왔다. 하지만 나를 장애인으로 만든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어린 아기인 동생들을 업어서 키웠다. 엄마가 아무리 때리고 쫓아내도 엄마라고 불렀다. 그래도 이 세상은 어린 나에게 시원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아침 생방송은 끝났다. 그날 오후에 바로 제천으로 내려갔다. 저녁식사 시간에 아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무엇인가 다른 점이 느껴졌다. 다음날 아이들을 교실에서 다시 만났다. 태도들이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됐어. 이 녀석들이 이제야 내가 누구인지 감이 왔나보군.

 이 아이들이 겪었을 세상의 부조리와 비합리와 자기 자신에 대한 몰이해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바로 내 이야기다. 다시는 그러한 마음 아픈 일을 겪지 않고  올바른 사람으로 성장해가기를 바라며 나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너희들 여기 와 있는 것 억울해?”

 “아니오.” 아이들이 합창한다.

 “너희들 나보다 더 억울해?”

 “아니오.”

 아이들이 더 높은 소리로 대답한다. 그래, 억울해하지 말고 나아가라 지금도 결코 늦지 않다.


 일주일에 두 번, 세 시간씩 아이들을 3개월간 만났다. 두 달간은 검정고시 준비반의 수업에 매일 들어가서 고등학교 과정을 숨 가쁘게 리뷰 해주었다. 8월 초에 시험 본 녀석들이 합격했다고 나더러 “한턱내시라.”고 말해온다. 참 기분 좋은 일이다. 가르친다고 했지만 한 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다정하게 웃어준 것. ‘그래 내 맘 알아!’ 하고 이해해준 것. 뭐 하고 싶은 말 있어 하고 물어 보아준 것이었다.

 “우리를 존중해 주어서 감사합니다.”

 “조그만 아줌마라고 욕했는데, 배울수록 많이 뉘우치고 새로운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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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업 시간에 장난을 치기도 했지만 다 들었습니다. 가르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칼라하리사막, 거기에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니!


 부탄에서 일을 진행하고, 제천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여름을 보냈다. 여러 가지 일들 속에서 한숨을 돌리고 보니 떠나온 보츠와나가 그리워졌다. 아프리카는 언제나 나를 손짓해 부르고 있는 것 같다.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짐을 꾸렸다.

 초가을이 시작되는 9월 초에 보츠와나에 도착했다. 나는 이 기회에 보츠와나를 위해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하고 찾아보기로 했다.

보츠와나 직업학교는 2007년 그 프로그램을 종료하고 지금은 초등학생 대상 방과후 프로그램과 어린이와 청소년,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도서관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었다.


 여행 중에 또다시 여행을 떠났다. 보츠와나를 한 바퀴 도는 배낭여행은 이전에 여기서 살 때는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다. 걸어 다니는 일도 힘든데 장거리 배낭여행을 하다니. 예전에 마을도 잘 돌아다니지 않았던 것에 비하면 정말 기적 같은 일이다. 그만큼 건강이 좋아졌다는 것이다.

 아침에 칼라하리사막의 중앙 도시인 깡에서 배낭을 챙겨 버스를 타고 오다가 중간 지점인 세코마에서 내렸다. 보츠와나에 입국하여 칼라하리사막을 돌고 있는 지 벌써 2주째다. 이제 마지막 여행지 짜봉마을을 남겨두고 있었다. 하얀색 승용차가 내 앞에 섰다.

 “어디 가요?”

 운전자가 외쳤다. 나는 벌떡 일어나 달려갔다.

 “짜봉 갑니다. 당신은?”

 “오케이 나도 짜봉 갑니다. 갑시다.”

 보츠와나에서 히치하이크는 배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중학교 가정학 교사인 운전자 브이 깡요 덕분에 민박까지 얻었다. 짜봉에 도착한 후 간단한 음식을 사서 막 먹으려는 데 누군가 자동차 문을 당기며 내 이름을 불렀다. 한참 말을 주고받으며 기억을 더듬었다. 

 “나예요. 기억납니까? 후꾼찌에서 온 아이들 4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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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내가 기억할 만한 단서들을 나열했다. 그녀가 더 이상 이야기 하지 않아도 기억이 줄줄이 따라나왔다.

 “아! 맞아. 당신은……그러면, 세르왈레디? 맞지요?”

 말하는 내가 더 놀랐다. 1990년대 중반, 칼라하리사막에서 살다가 온 부시맨 부족의 십 대 아이들 4명. 남학생 둘, 여학생 둘이 학생으로 와서 입학했다. 그 순진한 4명의 아이들의 이름은 물론 2년간 함께한 기억들이 너무나 선명하다. 세월을 훌쩍 뛰어 넘어서 만났는데, 나는 그녀가 여전히 십 대의 소녀처럼 보였다. 너무도 반가운 얼굴인 데다 뜻하지 않은 자리에서 만나게 되어 눈물이 어릴 정도로 기쁘고 반가웠다.

 그녀는 중년이 되었고 보츠와나 전기국에서 일하고 있다고 전했다. 나와 그녀가 알고 있는 사람들의 안부를 하나하나 물었다.

 짜봉에서뿐만이 아니었다. 어느 마을에 가도 나를 알아보고 인사하는 사람들이 꼭 있었다. 


 결혼해서 이미 한 가정의 주부이자 사회활동가로 살고 있는 수제자 푸테호가 저녁식사에 나를 초대했다. 그녀는 오후 내내 이것저것 정성스럽게 음식을 준비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그 마을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이모저모 연구했다.

 그녀는 마을마다 노인들이 방치되어 있다고 했다.

 나는 굿 호프 마을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어 진심으로 기뻤다. 또, 나 대신 일해 줄 사람들, 제자들이 거기에 있었다.

 인간관계에서 신뢰만큼 무거운 것이 있을까! 나는 여전히 그 마을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었다. 나 역시도 힘과 용기를 얻었다. 나는 그녀의 제안에 따라 굿 호프 마을의 노인 인구를 위한 리서치를 하고 기획서를 만들어서 주고 일의 진행 순서를 잘 알 수 있도록 설명했다. 자! 일은 이렇게 시작하는 거야. 이 일도 잘 되어갈 것이다,

 아자!


■ 담대한 마음이 꿈을 이루게 한다.


 역시 여행은 사람을 철들게 하고 생각을 키운다. 미국 뉴욕에서 공부하고 현장을 돌아보니 모든 게 새롭게 다가왔다. 늘 보았던 사람도 도시들도 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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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14년간이나 살았던 굿 호프 마을도 전혀 다른 풍경으로, 느낌으로 다가왔다. 내 정신이 달라진 것이다. 마치 지난 세월 동안 아프리카를 흐릿한 눈으로 바라보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모든 각도에서 깨우침이 일어났고 감동이 생겨났다. 그렇다 교육을 통해서 개안된 눈으로 다시 아프리카를 바라보니 매우 선명하게 아프리카가 보였다. 먼저 별빛이 더 아름다웠다.

 보츠와나에 있는 동안 가장 행복했던 시간은 저녁마다 마당에 나가 누워서 보낸 시간이다. 은하수 무리가 뚜렷이 보이는 밤하늘의 별들을 잊지 않기 위해 눈에 마음에 담았다. 나는 그때껏 살아오면서 보지 않았던 별자리들을 찾으면서 매일 밤 제자리에서 빛나는 별들을 고마워했다. 인생의 귀중한 시간과 돈을 들여서 그 먼 나라까지 가서 별들만 올려다보고 돌아왔겠는가!


 여기저기 돌아보고 사람 사는 형편을 보았다. 그렇다. 사람이 보였다. 사람.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사람. 사람과 같이 있어야만 하는 사람.

 미국에 가서 그 비싼 공부를 거저 했겠는가!

 보츠와나 아이들이 나에게 심어준 꿈을 잊었는가!

 아니다 나는 결코 잊지 않았다. 잊지 않을 뿐 아니라 그 꿈을 이제 어떻게 펼쳐야 할지 잘 알게 되었다. 나와 같은 아이를 찾아서 나와 같은 사람을 만들어야지. 이것이 나의 꿈이다. 국제사회복지학이 전공이며 지역사회개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내가 하는 일이다. 이 과정을 통해 사람을 만날 것이며 사람을 찾아내고 사람을 만들어갈 것이다.


나는 나를 미워하지 않았고 싫어하지도 않았다. 부모님이 물려준 그 모든 불행과 환경에 대해 용서하고 장애인인 나도 용서했다. 내가 나를 정의롭게 대접하지 않고 나의 나됨을 용서하지 않고서는 인생을 살아나가기가 참으로 힘들 것이라는 사실을 열다섯 살에 깨달았다. 기독교에 귀의하고 나서다. 하나님이 용서한 나를 내가 용서하지 않는다면 참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서부터 시작했다. 나 자신을 용서하고 받아들였는데, 어찌 다른 사람들의 못남과 괴팍함과 무례함을 용서하지 못할까!

 용서하고 사랑하고 믿으며 살아가는 것은 그렇게 하는 사람의 생활과 정신을 고양시켜준다. 나 자신 또한, 여러 가지 힘겹고 어려운 일들을 잘 헤쳐나올 수 있었던 것은, 매일의 생활을 통해 끊임없이 배우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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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습관화된 긍정적인 삶의 자세는 좋은 기회를 자꾸 가져다주었고 좋은 사람들을 끊임없이 만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렇게 잡은 기회들을 또 최선을 다해 내 것으로 만들었다. 혼자 공부하는 데 이력이 붙었던 세월을 보내고 마침내 ‘월급 3만 원’ 식모가 ‘컬럼비아 석사’가 된 것은, 인생을 끊임없이 배우고 있었기에 일어난 일이라고 믿는다.


■ Epilogue


 책 쓰기

 월급 안 받고 일하기

 유명해지기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다. 지난해 여름부터 꼬박 이 책을 쓰면서 시간을 보냈다. 글쓰기 공부도 하고, 리서치도 하고, 출판사 사람들을 만나고, 여러 권의 책도 읽으며 이 책을 쓰고 있다. 책을 출판해야 하는 당위성은 부탄 사람들이 제공해 주었다.

 부탄은 불교 국가다. 불교와 힌두교 외에 타 종교가 공공활동을 하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된 나라다. 때문에 사회복지사인 내가 들어가서 해야 할 일은 순수한 지역사회개발이 될 것이며 그것이 당연하다. 그것에만 집중하여 계획을 짜고 있다. 나의 순수한 의도는 잘 전달이 되었다. 모든 것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나는 스스로 나 자신의 참된 가치를 찾아왔다. 세상이 보는 나와 내가 알고 있는 내가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나도 역시 내 인생의 나머지를 계속 살아가야 한다. 내 인생의 참된 가치를 계속 만들어 가면서, 쓸데없이 이 세상에 여자로 태어난 덕분에 장애인이 되었지만,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을 탓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온 덕분에 컬럼비아 대학원까지 마쳤다. 지금은 책도 쓰고 공부도 하고, 월급을 안 받으면서도 잘 먹고 잘 살면서 보람 있게 일하고 있다. 국제사회복지 전문가로서 여러 나라 사람들을 상대로 일하고 있다. 지나온 세월을 공짜로 살지 않았다는 증거다. 공짜로 살지 않은 덕분에 진짜 세월을 살고 있다.

                        2012. 4. 23일 새벽 다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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