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4. 6. 17:12ㆍ독서후기
남자의 물건 (2)
제2부 남자의 물건
◈ 남자의 물건을 꺼내면 인생이 살만해진다.
- 김갑수의 커피 그라인더, 윤광준의 모자, 김정운의 만년필 -
시인은 딱히 하는 일도 별로 없고 먹고 살기 궁핍해도 어딜 가도 대충 폼 난다. 스스로 자신을 시인이라고 소개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주위 사람들이 알아서 시인이라고 얘기해 준다. 그저 그 옆에서 우중충한 표정만 하고 있으면 된다. 그래야 시인은 폼 난다. 특히 시인을 대하는 여인들의 반응은 아주 특별하다.
나를 ‘교수’라고 소개하면 여인들의 반응은 “아, 예”로 바로 끝난다. 그러나 옆에 있는 갑수 형을 ‘시인’ 이라고 소개하면 “어머, 그러세요?” 하며 아주 반갑게 아는 체한다. ‘시인’이라는 단어에는 여인들로 하여금 감동의 표정을 짓게 하는 묘한 마법이 있다. 여운도 참 길다. 다들 뭔가 ‘사랑과 고독’에 관해 이야기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다. 시인 김갑수는 아무 말 없이 담배연기를 하늘로 뿜어대며 여전히 우중충한 인상만 쓰고 있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다.’
젠장, 한번 시인도 영원한 시인이다. 서울 마포 언저리 지하 작업실에서 자신의 존재 자체가 고독이라고 주장하는 갑수 형도 시인이다. 그는 매일같이 목을 뒤로 젖혀 천장을 올려다보며 음악만 듣는다. 시인이라지만 20여 년 전에 시집 한 권 낸 게 전부다. 그런데 여태까지 시인이다. 그 시집 제목도 ‘세월의 거지’다 정말 제목 한번 거지같다.
사진작가도 시인이나 해병과 마찬가지다. 한번 사진작가면 죽을 때까지 사진작가다. 사진작가는 궁핍 모드의 시인보다는 좀 더 폼 난다. 전문가용 고급 카메라의 후광이 한몫하기 때문이다. 광준이 형도 사진작가다. 그런데 돈 받고 사진 찍는 일은 그리 자주 하지 않는 듯하다. 딱 먹고 살 만큼만 번다.
- 1 -
그러나 사진작가 윤광준은 전혀 궁색해 보이지 않는다.
일단 스타일이 죽인다. 머리는 면도로 깔끔하게 밀고 다닌다. 어설프게 빈 머리 가리느니 차라리 깨끗하게 밀고 다니겠다는 거다. 머리카락이 없는 대신 수염은 폼 나게 길렀다. 머리에는 특이한 모자, 얼굴에는 동그란 안경, 어깨에는 사진기 한 대 걸치고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전화하면 항상 지방 아니면 외국이다. 사진 찍으러 갔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놀러 다니는 게 분명하다.
나이 들수록 ‘시인’ ‘사진작가’ 같은 직함이 부러워진다. 이들의 직함은 평생가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직업은 대충 55~60세 사이에 그만 두게 된다. 일반인들이 체감하는 심리적 정년퇴직 평균 연령은 48.2세라고 한다. 정년 이후에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방법이 거의 없다. 그래서 한국 남자들은 명함이 사라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요즘 나는 ‘교수’ 보다 ‘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이라는 직함을 더 자주 내민다. 교수는 길어야 65세까지 할 수 있지만 이것은 죽을 때까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거나 내키는 대로 이야기해도 된다. ‘여러 가지 문제’에 속하지 않는 문제가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어떤 상황에서든 자기 존재가 확실하게 확인될 수 있다면, 삶은 아주 살만해진다. 어떤 것이든 평생 써먹을 수 있는 직함을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다.
시인 김갑수에게는 음악을 들을 때 꼭 마셔야 하는 커피를 맛있게 해주는 커피 그라인더가 있다. 사진작가 윤광준에게는 차가운 바람을 쐬면 아주 고통스러워지는 민머리를 감싸주는 모자가 있다. 내게는 ‘여러 가지 문제를 명료하게(?) 정리할 수 있게 해주는 만년필이 있다.
우리 셋은 공통의 관심사가 참 많아 할 이야기가 끝이 없지만, 서로의 성격은 사뭇 다르다. 음지의 삶을 추구하며 지하에 박혀 사는 시인이 한쪽 끝에 있다면, 그 반대편에는 평생 바람처럼 떠돌아다니는 콧수염의 사나이 윤광준이 있다. 나는 대충 그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두 사람을 흉내 내며 살고 있다. 다행히도 수입은 내가 제일 좋다. 그래서 밥은 항상 내가 산다.
■ 시인 김갑수의 커피 그라인더
- 2 -
시인 김갑수는 음악을 들으며 거의 온종일 커피를 마신다. 한 10여 년간 에스프레소 기기에 미친 듯 달려들더니, 몇 년 전부터는 퍼컬레이터 커피에 열중한다. 뭐든 한번 빠지면 그렇게 미친 듯 몰입한다.
결핍이다. 이제 친구들은 손주를 보기도 했을 텐데, 여전히 애정결핍이다. 그 결핍은 물건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진다.
시인은 생두를 직접 볶아 원두를 만든다. 전문용어로는 ‘로스팅한다’고 한다.한번에 몇 킬로그램씩 사다가 매일 볶는다. 나한테는 밥 한번 사는 법 없지만, 커피 원두 인심은 아주 후하다. 다 볶으면 가까운 사람들에게 한 봉지씩 나눠준다. 그리고 또 볶는다. 그의 지하 작업실은 그래서 늘 커피향이 가득하다. 그는 자신은 매일같이 커피 볶고 LP판(그의 작업장 사면 벽에는 수만 장의 LP판이 잘 정리되어 있다.) 닦으려고 태어났다고 아주 진지하게 이야기 한다.
커피 볶는 일에서, 커피 가는 방법, 내리는 방법 그리고 그 과정마다 달라지는 커피의 향과 맛을 직접 혀와 손으로 느껴 보고 싶은 욕심..... 그러다 보니 커팅 방식의 싸구려 그라인더로부터, 맷돌 같은 게 돌아가며 으깨는 방식(Burr) 방식의 그라인더까지 다양하게 모으게 되었다. 그동안 김갑수가 모아 놓은 커피 그라인더는 죄다 낡은 것들이다. 1880년대에서 1930년대까지 미국, 스페인, 체코, 영국, 독일, 그리스, 일본 등 그의 시집처럼 거지 같이 낡은 기계들의 국적이 그렇게 화려할 수가 없다. 그의 자세한 설명을 끝까지 감탄하며 잘 들어줘야 돌아갈 때 커피 한 봉지라도 얻어갈 수 있다.
커피 그라인더를 모으면서 그에 얽힌 자랑이 한도 끝도 없다. 도대체 이런 물건들을 자꾸 ‘왜 사냐(to buy)’하고 물었다. 물론 바보 같은 질문이다. ‘왜 사냐(to live)’는 질문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내 질문은 다른 뜻이 있다. 이런 컬렉션은 경제적 여유가 있는 이들이 하는 거다. 김갑수의 돈벌이는 내가 잘 안다. 그리 시원치 않다. 아무리 부지런히 원고 쓰고, 공용방송 출연해서 하루 종일 이야기해도 버는 돈이 한 가족 먹고 살기에도 턱없이 부족하다. 형편이 그런데 왜 죽어라 LP를 모으고 그 고물 커피 그라인더를 미친 듯이 사느냐는 거다.
그의 대답은 정해져 있다. 남들처럼 집 사고 차 사고 술 마시는 거 안 한다는 거다. 물건이나 도구가 자신의 쾌락에 기여하는 게 아니라 김갑수 자신이 이 물건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삶을 산다고 대답한다. 이 무슨 귀신 씨
- 3 -
나락 까먹는 “B&G 뻥&구라” 인가? 나 역시 누구에게 쉽게 밀리지 않는 “B&G”의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전 국민을 상대로 하는 공중파에서 이미 검증되었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김갑수의 “B&G”가 국내 최고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도구가 자기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김갑수의 물건 철학은 다르다. 도구에 헌신하고 도구를 위해 희생하다 보면, 자기 자신의 일상은 아주 사소하고 하찮은 게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면 행복해지느냐고 내가 물었다. 또다시 황당한 “B&G”를 시작한다.
“사람은 행복해지기 위해 산다는 것처럼 거짓말은 없는 것 같아. 자신이 행복한가, 불행한가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부터 불행해지기 시작하는 거야. 시간, 공간을 인식하는 순간부터 인간은 불행해질 수박에 없어. 시간, 공간은 제한되어 있기 때문이지.
물건에 헌신하다 보면 내가 사라지지. 행복과 불행에 대해 생각하지 않게 되는 거야. 빠지고 몰입하는 거라고. ‘자아’라는 주제로 사는 게 아니라 대상에 함몰되는 거지. 돈이나 밥이 아닌 다른 것에 함몰되는 것은 참 근사한 거야.”
시인이 외로우면 시를 써야지. 시는 안 쓰고 왜 자꾸 구닥다리 물건만 모으는 거냐고 물었다.
“시를 쓰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아. 평생 훈련했으니, 그동안 끼적거린 것을 모아서 시집 한 권 내는 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지. 구태여 이야기를 하자면, 아무리 통속하고 먹고 살기 급급해도 모든 사람에겐 순결해지는 대목이 하나 있거든. 그게 나한테는 시였는데…… 시인은 ‘詩人’이라고 사람 ‘人’자를 쓰잖아. 시인은 무엇을 만드는 ‘作家’가 아니야. 사람 자체, 존재 자체가 시인이야. 그래서 계속 기다리는 거야 언젠가는 쓸 수 있겠지.”
시인 김갑수는 요즘 시는 그저 집착과 강박의 삶 자체로 쓰고 있다고 했다. 혼자의 삶을 견뎌가며 지하실에서 커피 그라인더, 오디오, 양초, 램프와 같은 물건과 이야기를 하며 산다고 했다. 그게 바로 자신의 시라는 거다. 아, 오해할 것 같아서 한 마디 더 붙이자. 그에게는 아주 멀쩡한 가족이 있다. 아내는 의사고, 아들은 전교 일등, 전교 회장을 한다고 만날 때마다 자랑한다. 그런데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그렇게 각종물건을 ‘닦고, 조이고, 기름 치며’ 지하실에서 보낸다. 시를 쓰기 위해서, 한번 시인은 영원한 시인이니까.
- 4 -
■ 사진작가 윤광준의 모자
원조 ‘아웃도어’ 인간 윤광준은 머리가 없다. 민머리가 추워서 모자를 쓰기 시작했다. 그의 머리는 아주 일찍부터 빠지기 시작했다. 30대 중반부터 빠졌다. 한창 직장 생활을 할 때인데 머리가 빠지니, 모자로 가리고 다녔다. 그때 막 크고 있던 회사인 ‘웅진’에 다녔다. 회사의 새로운 프로젝트를 기회로 김갑수가 그를 스카우트했다. 각각 부서장을 하기도 했다.
웅진에서의 6년이 너무 행복했다고 윤광준은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이야기 한다. 그런데 회사 사장할 때까지 버티겠다던 김갑수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 그 후 꼭 1년 뒤, 윤광준도 머리 빡빡 밀고 회사를 때려치운다.
회사가 나를 먹여 살리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나를 먹여 살려야 하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을 그때서야 문득 하게 된 거다. 나오면서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냥 작가가 아니라 사진도 찍고 글도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욕심이 났다.
죽을 고생을 했다. 실력이 안 되니 무한대의 시간을 퍼부을 수밖에. 매일 글을 써 반복으로 단련시킨 글쓰기가 문장과 내용이 되더군. 마흔 살 이후의 시간은 의자에 궁둥이를 붙이고 살았고 너덜너덜해진 컴퓨터 자판을 다섯 개나 갈아치웠어. 남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분야가 내가 할 일이더라고... 세상이 무엇을 필요로 할까를 생각하지 않았어.
작가와 사진가로 윤광준은 이것저것 다했다. 프리랜서의 삶이 자리를 잡아갈 무렵, 훌륭한 결정을 한 자기 자신이 너무 기특했다. 자신에게 상징적인 선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염이다. 윤광준에게 콧수염은 자유인의 상징이다. 그의 콧수염을 보며, 아무리 먹고 살기 어려워도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자유인’임을 확인하곤 한다.
빡빡이가 되고 나서 모자를 쓰기 시작했다. 모자는 더 이상 탈모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도구가 아니었다. 패션이 된 것이다. 그 후로 수백 개의 모자를 샀다. 거울에 비친 자신을 아주 뿌듯하게, 그리고 자주 볼 수 있는 ‘적극적 자아’로의 회귀다.
그는 주로 동대문 의류 상가에서 개성적인 캡 모자를 사서 쓴다. 아웃도어에는 캡 모자가 최고란다. 최신 스타일의 모자가 넘치는 동대문에서 마음에
- 5 -
드는 모자를 고르는 재미가 취미로 변했다. 나도 모자를 쓰고 싶다고 했더니, 한 가지 충고한다. 모자를 쓸 때, 절대 남에게 “나 어때?” 물어보지 말라는 거다. 내가 맘에 들면 되는 거란다. 남에게 물어보는 이는 모자를 쓸 자격이 없단다.
윤광준은 회사를 그만 둔 이후 10여 년 동안 아홉 권의 책을 썼다. 거의 매년 쓴 거다. 첫 책부터 성공적이었다. 오디오에 관한 책 ‘소리의 황홀’이었다. 오디오에 관한 책을 쓴다는 것도 그 당시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오디오는 ‘하는 것’이지 책으로 쓰는 게 아니었다. 그러나 윤광준은 듣는 오디오를 사진으로 찍어 글로 푼 책을 쓴 것이다. 머리를 깎인 삼손과는 반대로 스스로 머리를 밀어버린 빡빡이라 가능했다.
윤광준은 자신을 사진작가라 부르는 걸 불편해 했다. 사진으로 돈 번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이란다. 먹고 사는 것은 주로 인세와 강연으로 해결하니 ‘글 쓰는 작가’에 가깝다는 거다. 돌아다닐 돈이 쌓이면 모자 쓰고 카메라 들쳐 메고 다시 길을 나선다. 그가 돌아다니면서 하는 일은 그의 블로그에 아주 성실하게 업데이트 한다.
■ 김정운의 만년필
내가 만년필을 좋아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아버지의 영향이다. 어릴 적, 아버지 손에 항상 들려 있던 은색 파카 만년필이 난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당시로는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아주 귀한 물건이었다. 그때 난 그랬다. 나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다른 것은 다 필요 없고 아버지 은색 파카 만년필과 아버지 서재의 오리지널 브리테니커 백과사전 전집만 유산으로 달라고도 했다. 그렇게도 아버지의 만년필이 부러웠던 거다.
거의 30년이 지난 작년 가을, 아버지의 옛날 만년필과 똑 같은 모양의 은색 파카 뉴소네트를 가까운 친구로부터 선물 받았다. 너무 갖고 싶었지만 내 돈으로 사면 안 될 것 같았다. 그건 아버지의 그늘을 인정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만년필이 실제 내것이 되니 너무 좋았다. 손바닥으로 느껴지는 그 은색 표면의 느낌이 여전히 근사하다.
볼펜은 주인을 몰라보는‘개 같은’ 느낌이다. 누가 써도 차이가 없다. 그러나
- 6 -
만년필은 ‘길들인다!’고 한다. 만년필촉의 방향이 사람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이 쓰던 만년필은 다른 사람이 쓰기 힘들다. 이미 촉의 방향이 결정났기 때문이다. 소풍가면 혼자 도시락을 먹을 정도로 변변한 친구 하나 없었던 나는 중고등학교 내내 혼자 만년필과 씨름했다. 만년필은 내 유일한 기쁨이었다.
내가 유학을 떠나고 박사 학위를 받자 아버지는 금색 몽블랑 만년필로 축하해 주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파카 만년필이 최고인줄 알았다. 독일에서 공부했지만 독일제 몽블랑 만년필의 귀함을 모를 때였다. 손에 잡힌 금색 몽블랑을 통해 어릴 때의 만년필에 대한 그 기억이 되살아났다.
사실 요즘은 일상에서 만년필을 쓸 일이 그리 많지 않다. 글 쓰는 일이 내가 하는 일의 대부분이지만, 거의 대부분 컴퓨터의 자판을 두드린다. 그러나 내가 항상 주장하는 이야기가 있다. “비데 나왔다고 화장실 휴지가 사라지는 게 아니다”는 거다. 오히려 화장실 휴지는 더 고급이 되어야 한다. 비데를 쓰고 휴지를 싸구려 쓰면 그곳에 뭔가가 자꾸 낀다. 몹시 불쾌해 진다.
디지털 시대에 적응하지 못할 것 같았던 아날로그 상품인 만년필은 화장실 휴지처럼 고급화 전략을 취한다. 특히 몽블랑이 그렇다. 볼펜 한 자루도 몇십만 원이다. 스페셜 에디션은 100만 원을 훌쩍 넘는다. 그래도 사람들은 산다. 난 너무 화려한 봉블랑보다는 파버카스텔을 더 선호한다. 파버카스텔 만년필은 ‘독일제’의 둔탁한 느낌을 제대로 전해준다. ‘미제’ ‘일제’는 익숙한데, 어째 ‘독일제’는 입에 딱 붙는 용어가 아니다. 그렇다고 ‘독제’라고 말 수는 없다. 아무튼 파버카스텔은 독일의 전형적인 중소기업이다.
그러나 특이한 것은 이 회사가 1761년에 시작되어 250년이 되도록 오직 필기구만 생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육각형 연필을 처음 생산한 회사다. 둥근 연필이 자꾸 굴러 떨어져 열 받은 비스마르크에게 선물한 게 그 시작이다.
몇 년 전 일본 와세다대학교에 가 있을 때 구입한 대나무 만년필도 내가 각별하게 아끼는 만년필이다. 일단 손끝에 와 닿는 대나무 마디의 그 느낌이 기가 막히다. ‘삶의 마디를 만들라’는 교훈도 더불어 얻는다. 중학교 때 시도했던 대나무 주사기 창작 만년필과 같은 재료여서 내겐 더 특별하다.
요즘, 커피 한잔 앞에 놓고 종이 질이 아주 좋은 수첩에 만년필로 끼적거릴
- 7 -
때처럼 행복한 순간은 없다. 만년필마다 궁합이 맞는 종이가 따로 있다. 아, 잉크도 매우 중요하다. 카트리치를 사용하면 편하기는 하지만 폼이 안 난다. 잉크 주입용 컨버터를 잉크병 안에 깊이 넣고 몇 번 돌렸다 뺀 후 잉크를 꽉 채우고, 펜촉을 꺼내 휴지로 닦는 그 모든 과정을 여유롭게 즐길 수 있어야 진짜 만년필을 사용하는 거다.
내가 요즘 겨우 그 느낌을 아는 단계에 들어섰다. 앞으로 돈 들어 갈 일 많다. 이제 겨우 60개 정도 모았다. 그것도 다 싸구려다.
◈ 이어령의 책상
“세상에 외롭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를 만나 이야기가 길어질 때면 외롭다는 이야기를 꼭 한 번씩은 했던 것 같다.
“사람은 누구나 외로운 거여.”
예의 그 충청도 어투였다. 논리적이고 사변적인 이야기를 할 때, 그는 정확한 표준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정서적 표현이 들어가기 시작하면 그의 어투는 아주 진한 충청도 사투리로 변한다. 외롭다고 할 때 특히 그렇다.
“생명이 있는 것은 유한한 거여, 유한한 것은 모두 슬픈거여.” 그러고는
“아, 나는 도무지 남하고 어울릴 수 없는 사람이구나!”하는 생각이 자주 든다고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바로 서재로 올라가 책상에 앉는다. 함께 ‘창조학교’를 준비하면서 그가 외로워하는 모습을 자주 봤다.
돈 받는 일도 아니고, 누가 알아주는 일도 아니다. 그저 더 늙기 전에 한국 사회에 창조의 밑거름을 꼭 뿌리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엄청난 아이디어를 혼자서 현실화하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번은 그게 내게 이런 메일을 보냈다.
“김 교수, 내가 혼자 하는 것은 정말 잘하는데……지금까지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데…… 다른 사람들 하고 같이 일하는 것은 매번 이렇게 힘이 드네. 다시는 사람들 하고 함께 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속으로 맹세했는데…… 그가 메일을 보낸 시간은 새벽 3시였다. 이렇게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일을 시도하고, 흥분하고, 즐거워하고, 동시에 자주 상처 받고 우울해한다.
이어령은 외롭다. 그에게 책상은 위안이다. 이어령에게는 어린 시절 친구가
- 8 -
없었다. 섬처럼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살았다. 재잘대는 또래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못 견디겠다 싶으면 굴렁쇠를 굴리며 들판을 내달렸다. 아무하고도 어울리지 못하던 그 소년은 88올림픽개막식 때 정적 속에 우뚝 선 굴렁쇠 소년이 된다. 80에 가까운 그는 여전히 혼자 논다. 책상은 외로운 그의 놀이터다.
그가 그렇게 아끼는 책상 사진을 찍기 위해 아침 8시에 그의 서재를 방문했다. 그의 시간을 빼내기란 여전히 그렇게 어렵다. 그의 서재에는 책상이 앞뒤로 있었다. 그는 앞의 것을 책상 뒤의 것을 작업대라고 불렀다. 앞뒤로 총 여섯 대의 컴퓨터가 있었다. 전시용이 아니다. 지금도 여전히 사용하고 있는 것들이다. 작업대에 나란히 정렬해 있는 네 대의 모니터는 나름대로의 특별한 기능을 수행한다.
맨 왼쪽 컴퓨터는 일본어용이다. 일본의 인터넷 사이트를 검색하거나 일본어로 된 책을 쓸 때 사용한다. 아무리 외국어 자판 사용이 시스템적으로 좋아졌다 해도, 여전히 글자가 깨져 나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두 번째 컴퓨터는 최초의 모니터와 본체가 통합된 올인원 컴퓨터다 이 컴퓨터의 운영체계는 ‘윈도우미(window me)’다. 꽤 오래된 이 시스템을 아직도 사용하는 이유는 이 운영체제에서만 돌아가는 옛날 자료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어령이 요즘 가장 많아 사용하는 컴퓨터는 세 번째 것이다. ‘윈도우XP’를 사용한다. 새로운 운영체제로 업그레이드를 하지 않는 이유는 그동안 축적해 놓은 모든 데이터가 망가지기 때문이다. 가장 오른쪽에 있는 컴퓨터가 최신 운영체제로 돌아간다. 그러나 자주 쓰지는 않는다.
이 네 대의 컴퓨터는 ‘스마트싱크’라는 프로그램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한 컴퓨터의 데이터베이스에 변화가 생기면 모든 컴퓨터가 따라 변한다. 어느 컴퓨터를 사용하든 동일한 내용으로 작업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수시로 업그레이드되는 운영체제상의 변화로 생기는 문제를 피하기 위해 그는 이런 작업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내가 방문한 날 그는 아주 희한한 프로그램을 자랑했다. 종이 위에 글을 쓰면 그 내용이 컴퓨터에 바로 입력되는 프로그램이다. 완벽한 ‘디지로그’다. 컴퓨터 자판을 사용해 입력하는 게 아니다. 내가 종이 위에 쓰는 아날로그 내용이 컴퓨터로 디지털화되어 입력되는 것이다. 누구나 경험한다. 종이 위
- 9 -
에 쓸 때와 자판을 통해 컴퓨터에 입력할 때의 내용이 서로 달라지는 것을. 종이 위에 사각대는 연필 소리와 그 마찰의 느낌에 따라 그 쓰는 내용이 전혀 달라지기도 한다. 이어령의 디지로그는 바로 그 차이에서 새로운 문명의 가능성을 찾는다. 사변적 어휘가 아니다. 자신이 실제로 이런 최첨단의 기기들을 사용하며 개념화한 것이다.
작업대에 놓인 네 대의 컴퓨터 이외에도 두 대의 컴퓨터가 더 있다. 앞쪽으로 향한 책상에는 세로로 세워진 모니터가 있고, 아주 작고 얇은 넷북이 놓여 있다. 뿐만 아니다. 아래 서랍을 여니 또 다른 노트북이 나온다. CD나 DVD를 굽고 프린트하는 기계도 서랍에서 나온다.
아, 여든 가까운 어른의 정보화 수준이 이렇다. 기껏해야 이동식 저장장치로 데이터나 옮기는 게 전부인 나는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 천하의 이어령도 책상에 발을 올려놓고 딴 생각만 한다.
“난, 장군이야. 책상위에서 병사들의 사열을 받지.”
사주를 보는 사람이 이어령을 보고 ‘수천, 수만 명을 거느리는 장수’라고 했다. 그는 실제로 자신이 장군이라고 한다. 그의 부하는 언어다. 수천 수만의 언어들이 “줄 서!” 하면 줄을 서고 “돌격 앞으로!” 하면 일사분란하게 돌격한다. 이 부하들은 전사하지도 않는다. 가끔 오타나 오식이 생기기는 하지만.
언어를 다스리는 장군, 이어령에게 책상은 사열대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책상을 한국에서 가장 큰 것으로 만들었다. 3미터. 매일같이 그는 그 큰 책상 위에서 책들의 사열을 받는다. 그는 자신을 알렉산더와 자꾸 비교했다. 알렉산더가 아무리 세계를 정복한 위대한 왕이라지만 책상만큼은 자신의 것이 더 크다고, 이 자랑을 하는 그의 표정은 자신의 책상을 처음 갖게 된 어린 아이의 표정이다.
책상을 주문하며 한국에서 가장 큰 책상을 만들고 싶었다. 지식 영역을 상징하는 책상만큼은 한국 최고, 세계 최고여야 한다는 욕심이다. 큰 책상에 대한 그의 욕심은 모든 남자들이 가지고 있는 공간 점유의 욕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는 남녀 차이를 ‘상자’와 ‘책상’으로 비교해 설명한다. 여자의 물건은 대부분 ‘상자’다. 상자는 여자의 자궁 같은 것이다. 생명을 잉태해 시간을 소유
- 10 -
하는 것처럼 여자는 상자 안에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보석을 담는다. 생명을 잉태할 수 없는 남자는 시간을 소유하는 대신 공간을 정복하려 한다.
5.16 이후 이야기다. 실세 김종필이 문화예술인들을 모아 간담회를 열었다. 쿠데타를 일으킨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문화예술인들의 지원을 얻으려는 의도였다. 김종필은 그들에게 각각 필요한 것을 이야기해보라고 했다. 도와준다고 했다.
이어령 순서가 왔을 때, 그는 책상을 달라고 했다. 문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몇 뼘 되지 않는 책상이 전부라고 했다. 군인이지만 오히려 문인에 가까웠던 김종필은 이어령이 달라는 책상이 어떤 것인지 바로 알아들었다. 그는 웃으며 이야기 했다.
“허허, 그럴 자유는 제게도 없습니다.”
고향도 같고, 같은 학교 출신이며, 인간적으로 서로 호감을 느꼈던 김종필과의 관계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책상위의 자유는 그가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존재의 보루인 것이다.
책상은 자유다 누구도 그의 생각을 방해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더 욕심 부린다. 가장 넓은 책상, 가장 큰 서가, 제일 많은 언어를 담은 책상을 갖고 싶은 것이다.
“책상에서 주로 뭘 하세요?”
내 경우, 책상은 서류를 정리하는 곳이다. 솔직히 내가 책상에서 책을 읽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의 경우는 어떨까. 자못 궁금하다. 이 황당한 질문에 이어령은 허허 웃으면서 대답한다.
“내게 책상은 족상이여 족상!”
책을 올려놓는 상이 아니라 발을 올리는 상, 즉 족상이란다. 와우, 천하의 이어령도 책상에 발을 올려놓고 딴 생각만 한단다. 이런 위로가!
오늘도 장군 이어령은 잘 나오지도 않는 볼펜, 잉크가 말라버린 만년필, 심이 부러진 연필을 들고, 3미터 책상 위에서 그의 부하들에게 호령을 한다. 그의 언어들은 잘 훈련된 군사다.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진군한다. 그래서 그는 책상 앞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
■ 이어령은 정이 많다. 그만큼 상처도 쉽게 받는다.
- 11 -
인간 두뇌에는 단기 기억과 장기 기억이 있다. 현재진행형의 일들은 두뇌의 단기 기억에서 처리 되고, 일단 처리가 끝난 일들은 장기 기억에 저장되어 필요할 때마다 꺼내어진다.
인간의 기억 방식과 비교하면 책상은 단기 기억이고, 책장은 장기 기억이다. 지금 보고 있는 책은 책상 위에 올라가 있고, 일단 한번 읽은 책은 책장에 꽂히게 된다. 문제는 한번 장기 기억에 들어가게 되면 다시 꺼내기가 그리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나이 들수록 기억력이 쇠퇴하는 경우다.
이어령의 책상에는 이두 작업 영역을 보완하는 또 다른 비밀장치가 숨어 있다. 책상 아래 별도의 책장이다. 한 번 처리한 정보라도 얼마 후 다시 사용될 가능성이 있는 것들을 저장하는 곳이다. 기억을 연구하는 인지 심리학자들은 단기 기억과 장기 기억 이외에 별도의 기억 장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작업 기억’이 바로 그것이다. 작업 기억은 장기 기억의 최근 것들을 다루며, 단기 기억과의 소통이 이뤄지는 곳이다. 인지심리학의 최신 연구에서 밝혀진 작업 기억이라는 이 새로운 기억 장치를 이어령은 이미 오래전부터 책상 아래 작은 책장으로 구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서랍은 엉망이다. 거의 쓰레기통 수준이다. 온갖 것들을 버리지 못하고 죄다 모아둔다. 뭘 한번 찾으려면 전부를 뒤집고 헤매야 한다.
버릴 것을 제대로 버리지 못하는, 그의 모질지 못한 성격은 사람관계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정이 많다. 자신을 찾아오는 이들의 부탁은 웬만하면 다 들어 준다. 그의 도움으로 성장한 문화예술계 인사들은 셀 수 없이 많다. 가능성이 보이면 적극적으로 밀어준다. 그의 주변에는 그런 사람이 참 많다. 어느 무명작가의 전시회에서 감동한 그가 그 작가를 수소문해 어떻게든 도와주려 하는 것을 가까이서 본 적이 있다. 그 사람 어떠냐고 물으면, “그 사람 영혼이 참 맑아” “아주 강직해, 바른 사람이야”라고 답한다. 그가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은 매우 추상적이며 정서적이다.
정이 많은 만큼 이어령은 자주 삐친다. 어른에게 ‘삐친다’는 표현 또한 ‘귀엽다’는 표현만큼 무례하다. 하지만 그가 잘 삐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화를 내는 것과 삐치는 것은 다르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일이 진행되지 않을 때 바로 그 자리에서 불같이 화를 낸다. 그러나 불과 몇 분이 지나면 바로 후회한다. 미안해하는 내색이 너무 분명해 오히려 상대방이 더 미안해진다. 그래서 ‘삐친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주변 사람들은 그
- 12 -
가 아무리 무섭게 화내도 별로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 순간만 지나면 바로 미안해하기 때문이다.
정이 많은 사람은 사람관계에서 많은 상처를 받는다. 이어령도 마찬가지다. 매번 사람들에게 상처받는다. 사람에게서 지친 이어령에게 책상은 고립을 통한 위안을 준다. 그의 책상위에는 오래전 김남조 선생이 선물한 촛대가 두 개 있다. 마치 제단의 촛대처럼 놓여 있다. 책상은 그에게 위로의 제단이다.
책상을 통해 회복과 치유를 얻은 그에게 책상 때문에 잃어버린 것도 있다.
자녀들과의 관계다. 아직도 이어령은 자녀들에게 미안해한다. 자녀들이 자라면서 본 것은 아버지의 뒷모습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의 자녀들은 “안녕히 주무세요!”하고 인사하며 서재 문을 열었다가 매번 이내 닫고 돌아섰다. 퇴근하면 바로 서재로 들어가 스탠드 불빛 아래 글쓰기에 몰두하는 아버지를 방해해선 안 되기 때문이다. 그의 자녀들이 자라면서 어머니에게 들은 아버지 관련 이야기는 이게 전부다. “아버지 글 쓰신다!”
◈ 신영복의 벼루
신영복의 대표적 저서인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어보면, 무기수 신영복은 그렇게 맑은 사람일수가 없다. 어머님, 아버님, 형수님, 계수님, 조카에게로 이어지는 짧은 편지들이 가족들에게 쓰는 편지라기에는 너무 정갈하다. 세상을 보는 그의 따뜻한 시선에 끝없는 감동을 받게 된다. 사형 언도를 받고 무기수로 20년을 복역하면서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맑고 깨끗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 너무 궁금했다. 득도의 경지에 이르지 않고서야 감옥에 앉아서 어찌 그리 좋은 생각만 할 수 있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신영복을 마주하고 앉자마자 물었다 도대체 그 내면의 분노, 좌절은 어딜가고 그렇게 아름답고 고귀한 생각만 할 수 있었느냐고.
그래요. 그거 잘되었네요. 이런 기회에 설명 좀 해야 하는데…… 다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통해 저를 알게 되고, 그런 시각으로 보는데…… 그 책은 가족에게 보낸 옥중 서간집이죠. 결과적으로 그 편지의 최종 수신자가 가족, 그러니까 저를 걱정하는 거족들이에요.
그 가족들에게 괴로운 이야기, 뭐 그런 걸 쓴다는 게 이렇게 감옥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불효막심한데…… 그래서 가능하면 반듯하게 있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게 좋겠다…… 하는 게 일차적인 거고, 또 하나는 그 편지가 교
- 13 -
도소 당국의 검열을 반드시 거치니까 검열하는 사람들에게 뭔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그런 고집도 있고.
신영복에게는 편지 쓰는 것 이외에는 자신의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삶에 가장 중요한 물건도 쓰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벼루다.
■ 신영복의 벼루는 ‘세계(世繼)’다.
성공회대학교는 아주 작은 대학교다. 그러나 특별한 교수들이 많아 유명하다. 주로 진보진영의 교수들이다. 신영복도 그곳의 교수였다. 감옥에서 나온 후 줄곧 성공회대 교수로 있다가 2006년 정년퇴임했다. 지금은 석좌교수로 일주일에 한두 번씩 강의하고 있다. 그의 연구실 옆에는 후배 교수들과 학생들에게 붓글씨를 가르치는 공간이 있다.
신영복은 그 탁자 위에 자신의 아버지가 쓰시던 벼루를 올려놓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글에서 나타나는 모습 그대로, 아주 따뜻하고 조심스러운 인상이었다.
왜 벼루일까? 한국의 근대사는 단절이 역사다. 식민지를 겪으며 강요된 근대화는 필연적으로 전통과의 단절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신영복은 벼루를 통해 할아버지, 아버지의 세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실제로 벼루는 ‘世繼’ 즉 ‘세대를 잇는다’는 뜻이 있다고 그는 설명한다. 그는 한학자였던 할아버지의 방에서 붓글씨를 배웠다. 장남과는 달리, 차남이었던 그는 할아버지의 말동무였다. 할아버지는 늘 어린 신영복을 자신의 사랑방으로 불러들였다. 소일삼아 어린 손자에게 명심보감, 천자문도 가르쳤다. 이렇게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훨씬 전부터 신영복은 할아버지 방에서 잔심부름도 하고, 먹을 갈며 붓글씨도 배웠다. 그래서 그에게는 유난히 할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많다. 특히 봄날에 할아버지를 따라갔던 ‘답청(踏靑)’의 기억은 아주 특별하다.
봄날이 되면 옛날 점잖은 노인들은 ‘봄의 파란 풀을 밟고 거닌다’는 의미의 답청을 하곤 했다. 할아버지가 친구들과 답청을 나갈 때면 어린 신영복도 그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들의 답청은 좀 특별했다. 그의 고향 밀양의 남천강 하류에는 아주 고운 백사장이 있었다.
- 14 -
그 백사장에 마당 쓰는 비와 비슷한 ‘죽필’을 가지고 맨발로 보행서를 써나가는 아주 독특하고 우아한 놀이였다. 할아버지는 손자 신영복을 위해 작은 대나무 붓을 만들어주고 뒤따라오게 했다.
신영복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그 장면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꿈을 꾼다. 할아버지 뒤를 따라 백사장에 글씨를 정신없이 써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 혼자이고, 혼자인 게 너무 무서워 눈을 떠 둘러보면 감옥인거다. 고향의 푸른 잔디 위를 행복하게 뛰어놀다가 눈을 떠보면, 사방이 회색 벽으로 둘러싸인 감옥 안이라는 톰 존스의 Green Green Grass of Home 과 똑 같다.
이런 신영복에게 할아버지를 통한 문화 학습은 그의 평생을 좌우하는 아주 결정적인 체험이 된다. 그래서 그는 집안에 이어져 내려오는 벼루를 ‘세계(世 繼)를 잇는다!’라고 해석하는 것이다.
신영복은 교도소에서 ‘재소자 준수 사항’등 필요한 글들을 써 주는 붓글씨 노역을 하다가 한국 서예계의 전설인 정향 선생을 만난다.
정향 선생은 추사의 전통을 잇는 분이었다. 그 당시 생존자로서는 유일하게 중국 고궁 박물관에 그의 글씨가 들어가 있는 분이었다. 새로 온 교도소장이 글씨를 받을 욕심으로 정향 선생을 교도소에 청했다가, 아주 특이한 재소자 한 명을 그에게 소개한 것이다. 정향 선생은 신영복을 옛날의 선비가 귀양 온 것처럼 여겼다. 처음 몇 번을 와서 글씨를 가르쳐 주다가, 그 후로는 아주 정기적으로 방문해 매주 신영복의 붓글씨를 지도했다. 그 인연은 신영복이 대전교도소에서 전주교도소로 이송되기까지 7년 동안 지속되었다. 할아버지 이후로 제대로 된 붓글씨 하드트레이닝을 받게 된 것이다.
■ 신영복의 한글 서체는 세상과 내면을 일치시킨 결과물이다.
대전교도소에서 신영복은 정향 선생을 통해 전, 예, 해, 행, 초의 한문 서체를 체계적으로 배우게 된다. 그러던 중 그는 새로운 문제의식에 부딪힌다. 현재의 한글서체가 일반 민중들의 삶을 표현하기에는 너무 제한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저도 처음에는 한글은 다른 사람들처럼 궁체와 고체, 고체는 훈민정음 판본체를 말하는 겁니다. 그 외에 언간체 라는 체도 있습니다만 ……이런 걸 체본으로 썼었어요. 그런데 박노해의 시라든가, 신동엽의 시, 신경림의 시 같
- 15 -
은 것을 궁체로 쓰니까 시의 내용과 글자라는 형식이 서로 잘 안 맞아요.
신영복은 이때부터 새로운 한글 서체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다. 상형문자인 한자에 비해 내용과 형식을 일치시키기 어려운 한글이지만 신영복은 한글과 그 한글이 지시하는 대상과의 관계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글씨를 쓰려고 시도했다. 예를 들어 ‘서울’의 글씨를 ‘서’자는 북악산 같이 쓰고 ‘울’자는 한강처럼 쓰는 방식이다.
감옥에서 개발한 신영복식 한글 서체는 출소 후 빛을 보게 되고 마침내 ‘처음처럼’이라는 소주 브랜드의 서체로 쓰이게 된다. 두산소주는 ‘처음처럼’을 로고로 쓰는 대신 학교에 1억 원의 장학금을 제공했다
신영복의 한글 서체는 성공회대학교 디지털콘텐츠학과와 직지소프트가 함께 컴퓨터 폰트로 개발되어 공개된 지 꽤 되었다. ‘엽서체’다. 국민대학교의 김민 교 수가 그의 정갈한 엽서 글씨를 보고 ‘엽서체’라는 아름다운 폰트를 만들어 공개했다.
“제가 근대적인 교육을 받았잖아요. 타자화(他者化)하고, 대상화하고, 분석하고 이런 거죠. 그래서 감옥에 가서도 처음에는 저 사람의 죄명이 항상 궁금하고, 형기가 얼만지, 가정은 결손가정이었던가. 또 학력은 어느 정도인가 부단히 분석했어요. 그게 아주 근대적인 사고로 굳어져 있었지요.
그런데 이사람들하고 긴긴 겨울밤,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들으면서 아, 나도 저 사람과 같은 부모를 만나서 저런 인생 역정을 겪었으면 똑 같은 죄명으로 그 자리에 앉아 있겠구나 하는 그런 공감을 갖게 되요. 아마 한 5,6년 걸리지 않았나. 그때쯤 제가 왕따를 면하게 되요. 처음에는 왕따인 줄도 몰랐지. 아주 친절하고, 부지런하고, 다른 사람 잘 도와주고 이러니까 몰랐는데, 나중에 보니까 다들 내게 일정하게 거리를 뒀더라고…….
그 시절에 내가 아주 흐뭇했던 것은 ‘내가 발전했다!’ 그런 느낌을 가졌어요. 드디어 머리에서 가슴까지,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을 마쳤다. 그렇게 생각했죠.”
서구 근대성이 필연적으로 끌고 들어온 내용과 형식의 괴리를 극복하려는 신영복의 1차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이었다. 대상화, 타자화, 분석에서 이해, 공감으로의 변화다. 그런데 그것만큼이나 더 먼 여행이 또 신영복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슴에서 발’까지의 2차 여행이었다.
- 16 -
“제가 목공장에서 목수 일을 배울 땐데, 나이 많은 목수 한 분이 나한테 집 짓는 설명하면서 꼬챙이로 집을 그리는데, 순서가 완전히 반대인 거예요. 먼저 주춧돌을 그리고 기둥, 도리, 들보, 서까래……지붕은 제일 나중에 그리는 거예요. 우리는 지붕부터 그리는데, 이분은 주춧돌부터 실제 집짓는 순서와 그리는 순서가 같은 거지요.
이해와 공감이라는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1차 여행이 변화와 발전이라는 ‘가슴에서 발까지’의 2차 여행으로 이어지는 데 또 수년이 걸렸다. 그 변화와 발전은 인간관계 속에서 가능하다는 것을 신영복은 반복해서 강조한다.
■ 벼루에 먹을 갈듯 삶의 과정 그 자체가 중요하다.
신영복에게 물었다. 무기수라면 미래가 없는 사람이다.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사람이 도대체 무슨 동기로 20년을 한결같이 그런 편지를 쓸 수 있었느냐고 물었다.
“충분히 그런 질문이 가능한데요. 유기징역, 소위 말하는 2,3년 후에 출소하는 단기수들 하고 무기수들 사이에는 결정적 차이가 있어요. 단기수들에게 징역이란 빨리 끝나면 좋을 기간이죠. 아무 의미를 담지 않고 오로지 출소만 생각해요. 반면 무기수는 출소 날짜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뭔가 살아갈 의미가 있어야 해요.
결과적으로 인생이란 게 그런 게 아닌가 해요. 삶 자체가 아름다워야 하고,뭔가 자부심을 느낄 수 있어야, 깨달음도 있어야 하고 ……그래서 아마 무기수라는 어쩌면 굉장히 절망적인 상황이 인생에 대한 또 다른 시각을 열어주기도 하지 않을까 그런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신영복은 ‘과정으로서의 삶’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뒤통수를 맞는 느낌이었다. 삶이란 목적을 사는 게 아니라 과정을 사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유기수에게는 출소라는 정해진 목적이 있다. 따라서 교도소의 삶이란 그저 참고 견디는 것일 따름이다. 그러나 무기수는 출소가 정해져 있지 않다. 그저 교도소에서 버틸 수 있는 한 버텨야 한다. 즉 그곳이 무기수에게는 삶의 전부인 것이다. 어찌 충실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는 ‘여기, 현재’를 사는 거다 미래를 사는 게 아니라는 통찰이다.
- 17 -
벼루에 먹을 갈 때도 마찬가지다. 먹을 가는 그 과정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으면 먹을 제대로 갈 수 없다. 신영복에게 할아버지는 ‘먹은 앓는 사람이 가는 게 가장 좋다’고 가르쳤다. 먹은 힘 있게 가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빨리 갈아, 빨리 글씨를 써야지 하는 마음으로는 먹이 제대로 갈리지 않는다. 그래서 옛날 어른들은 ‘먹을 푼다!’고 했다. 분말이 고와야 하고 벼루의 연순(硯脣 : 벼루의 가장자리)에 먹이 튀어 묻으면 안 된다. 벼루도 ‘인수(忍水)’를 잘해야 한다. 물을 잘 참아야 한다는 뜻이다. 벼루가 물을 먹지 않고 뚜껑을 닫아 놓았을 대 물이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묵을 갈면 발묵(潑墨 : 먹물이 잘 퍼지고 번짐)이 잘되어야 한다. 벼루 바닥이 거칠어서 세게 갈려도 안 된다. 미끈미끈 하지도 않아야 고운 분말이 아주 잘 나온다. 묵을 가는 사람의 마음도 아주 차분해야 한다.
신영복의 할아버지는 숙묵(宿墨)을 썼다. 먹을 갈아 호리병에 넣어 하루 정도 묵히는 것이다. 하루쯤 지나면 먹 알갱이 분말이 퍼져 먹이 훨씬 고와진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내친김에 이번 책의 제호도 신영복체로 폼 나게 써줄 수 없느냐고 부탁했다. 기꺼이 그러겠노라 했다.
일주일이 지난 후 아주 멋진 ‘남자의 물건’ 제호가 내 사무실로 도착했다. 세로로 쓰니 아래로 축 늘어진 게, 참 ‘남자의 물건’스러워 보였다. 이 책의 앞에 있는 바로 그 글씨다. 내용과 형식이 일치된 느낌이다.
◈ 차범근의 계란 받침대
1987년 내가 독일에 유학 갔을 때다. 독일 사람들은 ‘코리아’에서 왔다고 하면 다들 갸우뚱했다. 베트남 혹은 인도네시아는 알아도 한국은 몰랐다. 기껏해야 남북한이 독일처럼 분단되어 있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내가 발끈해서 “차붐 모르는가? 차붐이랑 같은 나라 사람이다!”하면 다들 신기하게 아는 체했다. 그러면서 아주 반가워했다. 그들은 ‘붐근 차’라고 읽는 것을 어려워했다. 그저 간단히 제멋대로 줄여 ‘차붐’이라고 불렀다. 그러면서 “차붐, 슈넬!”이란다. 빠르다는 거다. 최고라며 엄지 손가락도 추어올렸다.
지금도 독일 사람들은 차범근의 본명을 모른다. ‘차붐’은 독일 사람들에게 동양의 성실하고 선하고 축구 잘하는 아주 특별한 인간의 대명사다.
- 18 -
요즘 젊은이들은 차범근이 분데스리가에서 어떤 존재였는지 잘 모른다. 맨유에서 활약하는 박지성이 최고인 줄 안다.
차범근이 독일에서 활약하던 시절에는 기자들이나 겨우 국제전화로 연락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해외 특파원도 몇 명 없던 때였다. 띄엄띄엄 그의 활약이 국내로 전해질 따름이었다. 그러나 인터넷을 검색하면 바로 나오는 그의 대표적 기록들을 적어보자.
1972년 최연소 국가대표, 분데스리가 308경기 출장 98골, 아인트라호트 프랑크프르트 UEFA컵 챔피언(1980년), 바이에르 리버쿠젠 UEFA컵 챔피언(1988년), 1980년 독일 축구 잡지 <키커>선정 세계 최고선수 11명중 1위, 1985-1986시즌 분데스리가 MVP, 전설의 루메니게나 베켄바우어와 같은 수준의 연봉, FIFA선정 아시아 최고의 축구선수, 20세기 세계 축구를 움직인 100인…….
차범근, 요즘은 ‘차두리 아빠’로 더 유명하다. 성공한 아빠다. 남자가 나이 들면서 누구의 아빠가 된다는 것처럼 즐거운 일은 없기 때문이다. 차범근을 보면, 하늘이 너무 편파적이라는 느낌도 든다. 젊어서는 세계적으로 이름난 훌륭한 선수, 나이 들어서는 훌륭한 아빠, 이젠 ‘손주바보(손주를 보는 할아버지 할머니는 모두 바보처럼 좋아한다는 뜻)’까지. 그런데 희한한 것은 이 잘난 차범근을 싫어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 차범근의 인생에 가장 행복한 순간은
축구와 별로 관계없다.
차범근을 인터뷰하러 한남동에 있는 그의 ‘차범근 축구교실’을 찾아갔다. 탁자위에 놓여 있는 그의 물건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러고는 정말 ‘차범근스러운(!)’ 물건이라는 생각에 미소가 절로 나왔다. 그에게 가장 중요하고 가장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귀한 물건은, 한국 사람들에게 생소한 ‘계란 받침대’였다. 독일 아침식사에 필수로 나오는 삶은 계란을 올려놓는 받침대다.
독일 사람들은 노른자만 살짝 익힌 삶은 계란을 이 받침대 위에 올려놓고 나이프로 계란의 1/3 되는 부분을 톡 때려 잘라낸다. 이때 깔끔하게 잘라내는 것도 실력이다. 유학생들끼리는 그 계란 자르는 솜씨로 서로의 유학 경력을 짐작하곤 한다. 그리고 소금을 조금씩 뿌려가며 작은 스푼으로 계란 속을
- 19 -
떠먹는다. 정말 감칠 나는 특별한 맛이다.
이렇게 아침 식사를 할 때 삶은 계란을 스푼으로 떠먹는 것은 필수 코스다. 차범근은 바로 이 계란 받침대(독일어로는 ‘아이어베커’)가 자기의 가장 중요한 물건이라는 것이다.
차범근에게 가장 행복했던 때가 언제냐고 물었다. 최연소 국가대표 선정도 아니었다. 두 번에 걸친 UEFA의 우승컵도 아니었다. 유럽에서 UEFA 우승은 월드컵 우승에 맞먹는 엄청난 일이다. 한 선수가 두 번이나 그 우승컵을 들었다는 것은 월드컵을 두 번 우승한 것과 마찬가지의 영광이다. 실제로 한 선수가 각기 다른 팀에 소속되어 UEFA컵을 두 번 우승한 것은 차범근이 유일하다. 차범근은 그 우승에 매번 결정적으로 기여한 선수였다. 그런데 그 감격의 순간조차 차범근의 가장 행복한 순간 순위에서는 뒤로 밀린다. 차범근 인생의 절정은 독일에서 가족들과 함께 한 따뜻한 아침식사였다.
“빵 사오고, 계란 삶고, ‘프리슈틱(아침식사의 독일어)’은 독일에서 선수생활하면서도 내 담당이에요.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면 부엌에 가서 다 준비해 놓고, 그 다음에 빵 사러 가죠. 그동안에 애기 엄마가 애들 깨워 놓으면, 내가 계란을 팔팔 끓는 물에 딱 3분 스톱워치로 재서 삶고, 꺼내면 속이 노릿하게 적당하게 익어가지고……. 그렇게 해서 먹지요. 그걸 먹고 나면 아이들 또 학교에 데려다주고, 난 운동하러 가지요. 정말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에요. 겨울이면 아침에 빵집에 딱 기다렸다가, 그 따뜻한 빵을 품에다 안고…… 하하하…… 그랬던 기억. 이 물건만 보면 그런 행복한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죠.”
워낙 인상이 좋은 차범근이다. 물론 이회택 선수 이후로 차범근 선수는 미남과는 가장 거리가 먼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의 선한 표정은 세월과 더불어 미남, 추남을 넘어서는 얼굴이 되었다. 그런데 이 계란 받침대를 들고 이야기하는 그의 표정은 바라보는 나조차 따라서 행복한 표정을 짓게 된다. 그래서 행복은 전염된다고 하는 거다.
세계적인 스타, 국가대표 감독, 프로축구 감독, 축구 해설위원 등 정말 많은 것을 성공적으로 이뤄낸 차범근이지만, 행복이란 바로 가족과 함께 했던 아침식사였다는 이야기다. 계란 받침대는 바로 그 행복의 증거물인 것이다. 그
- 20 -
러나 한국에 돌아오니 본인은 본인대로,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서로 바빠져 그 소중한 아침식사가 사라졌다. 도대체 뭐가 그리 바쁜 일들이 있어 한국 사람들은 죄다 그 행복한, 가족과 함께하는 아침식사를 희생하며 살아야 하는지 차범근은 몹시 아쉬워하는 표정이다.
■ 차범근에게는 무섭고도(!) 각별한 부인이 있다.
차범근도 CF를 많이 찍었지만 최근에는 차두리가 대세다. 특히 “간 때문이야!”라는 차두리의 CF는 반응이 대단하다. 그 ‘우루사’를 만드는 대웅제약의 윤재훈 부회장이 내 가까운 친구다. 내가 차범근을 인터뷰한다고 하니, 그는 그 경상도 말투로 그런다.
“야, 차범근 감독은 오은미 여사가 무서워! 차두리, 차범근은 그냥 꼭두각시야! 오은미 여사 없으면 둘 다 쓰러져!”
그러면서 꼭 ‘오은미 여사’라고 한다. ‘여사’의 호칭은 그 엄청난 차범근, 차두리를 한손에 흔드는 여인에 대한 경외의 표현이다.
무서운 오은미 여사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었다. 나 역시 차범근에게 직접 연결될 수는 없었다. 매니저이자 경호원에 비서까지 겸직하고 있는 오은미 여사의 전화번호가 먼저였다.
그런데 무서운(?) 오은미 여사가 된 사연이 있었다. 차범근이 독일에서 임대주택 두 채를 샀는데 엄청난 손해를 보게 되는 사기 사건에 휘말렸다. 회사는 부도내고 사라지고, 국가적 문제로 불거졌다. 이때 오은미 여사가 레버쿠젠과 결정적인 담판을 벌인다. 당시 차범근의 실력이면 1부 리그의 바이에른 뮌헨이나 함부르크와 같은 최고의 팀에 이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차범근은 1부 리그 하위 팀인 레버쿠젠에게 그 문제의 빚 덩어리 집 두 채를 넘겨버리는 조건으로 이적하게 된다. 당시 20대 후반에 불과했던 어린 아내가 신통치도 않은 독일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레버쿠젠의 능구렁이 디렉터를 상대로 이뤄낸 놀라운 협상 결과였다.
차범근의 선한 표정과 차두리의 사람 좋은 웃음은 오은미 여사의 사나운 집요함과 강단있는 추진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이야기다. 지금도 차범근이 오은미 여사에게 뭔가 반항이라도 할라치면, 차두리는 그런단다.
- 21 -
“아빠, 해도 아무 소용없는 일을 왜 자꾸 하려고 해?”
부부의 권력관계는 아이들이 항상 더 정확하게 안다. 한 집안의 권력관계는 키우는 강아지도 분명하게 아는 법이다. 어리석은 남편들만 모른다.
■ 차범근은 눈에 보이는 모습이 전부다.
차범근의 진실함은 순수함에서 나온다. ‘차붐’의 전설도 바로 그 순수함에서 비롯된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차범근은 최고의 기량을 보여줬다. 한두 시즌이 지나자 상대팀 선수들은 차범근을 상대로 무조건 테클을 걸어왔다. 1981년 UEFA컵에 우승한 그 다음해, 차범근은 요추 뼈가 부러지는 엄청난 부상을 당한다.
아시아의 탁월한 선수를 비겁하게 쓰러뜨린 이 사건은 그 후 일주일 내내 독일 언론을 달궜다. 분데스리가가 외국인에게 이토록 거칠어서 되겠는가 하는 반성도 나왔다. 그러나 정작 차범근에게는 긴급한 생존의 문제가 발생했다. 프로선수가 다치고 6주가 지나면 구단에서는 더 이상 월급을 지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프로선수들은 이 경우를 대비해 개인 보험을 들어 놓는다. 그러나 이런 시스템에 무지했던 차범근은 이제 병원에 앉아 손가락만 빨게 되어버린 것이다. 유일한 방법은 상해를 입힌 겔스도르프 선수를 고소하는 것뿐이었다.
“구단에서 고소를 해야 한다고 해서 사인을 하라고 서류를 가져 왔는데…… 나도 많은 생각을 했지. 아아…… 이게 뭐 화도 나고, 이렇게 끝나면 빈털터리로 돌아가야 하는 거고…….”
차범근의 그 인터뷰 장면을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볼 수 있었다. 정말 순수하게 생긴 청년이 예의 그 착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저는 그 선수를 고소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용서합니다!”
통역이 독일어로 그 이야기를 전달했다. 그 장면이 TV를 통해 나가자 독일인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런 표현 자체가 독일어에는 낯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시아의 알지도 못하는 가난한 나라에서 온 순박한 청년이 독일 사회 전체에 엄청난 ‘휴머니즘’에 관한 문제 제기를 한 것이다.
이튿날, 차범근의 집 앞에는 애들이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수많은 독일 팬들이 꽃을 들고 줄을 섰다. 언론에서도 그 이야기를 반복했다. 독일인들은
- 22 -
그 사건 이후로 ‘차붐을 사랑한다!’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 아시아의 한 축구 선수를 ‘좋아한다!’가 아니라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 후로도 수많은 외국인 선수들이 분데스리가를 스쳐갔지만, 독일인들은 지금까지 차붐을 기억하는 것은 바로 그 일 때문이다.
아 그런데, 그 순수한 청년 차범근도 이제 손주를 셋이나 둔 할아버지가 되었다. 차범근을 뚜렷하게 기억하는 많은 이들도 마찬가지로 나이 들어간다. 차범근의 ‘계란 받침대’는 아름답게 늙어가는 것에 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 안성기의 스케치 북
1987년 봄, 나는 어렵게 복학한 대학의 마지막 학기를 다니고 있었다. 매일같이 시내 하늘은 최루탄의 매운 연기로 뒤덮였다. 그런데 서울 한복판에, 정말 기가 막혀 말도 안 나오는 영화 제목이 나붙었다. ‘우리 기쁜 젊은 날’이었다.
이런 젠장, 우리 젊은 날이 기쁘단다. 학교에 가면 도서관에 가방을 풀어놓고 이내 교문 쪽에 몰려가 내 또래의 전경들에게 돌을 던져야 했다. 밤이면 술집에 모여 분노와 좌절의 노래만 불렀다. 연애는 무슨 얼어 죽을. 옥바라지를 할 수 있는 동지적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었다. 모두의 미래는 암울했다. 이 한심한 우리의 젊은 날을 도대체 누가 기쁘다고 한단 말인가.
배우 안성기를 인터뷰하기로 한 후, 내가 바로 기억해 낸 그의 영화는 ‘우리 기쁜 젊은 날’이었다. 새벽부터 서클 후배 여학생을 불러내 조조할인으로 본 그 영화에서 황신혜는 눈부셨고 안성기는 바보처럼 슬펐다. 영화를 보며 나는 촌스럽게 울고 또 울었다.
당시 최루탄이 자욱하던 교정도, 단성사 입구에서 만난 서클 후배 여학생도, 술집에서 목 놓아 부르던 자유와 민주도 이제는 모두 ‘내 기쁜 젊은 날’이다. ‘만다라’ ‘깊고 푸른 밤’과 같은 안성기의 영화도 내 기쁜 젊은 날에 빠져서는 안 된다. 호스티스 영화가 주류였던 시대에 그가 주연한 영화는 특별한 문화적 가치를 갖고 있었다.
- 23 -
■ 안성기는 혼자 조용히 중얼거리며 그림을 그린다.
안성기와 이야기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그에겐 아주 독특한 언어 습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단 신음 소리가 참 많다. 음……아……음……끙……등등. 절제된 표현만을 사용하려다보니 그런 것이다. 내가 거친 용어로 질문하면, 그는 이내 표준어로 번역해서 대답한다. 예를 들어, 내가 “열라 힘들지요?” 하면, 그는 “음, 아주 많이 힘들지.” 하는 식이다. 자주 맥이 빠진다.
내 이야기에 강하게 부정하는 경우도 없다. “그럴 수도 있지.” 혹은 “거 참, 그러네. 그렇게 보면 또 그래,” 하는 식이다. 상대방이 내 이야기에 “아니지, 그게 아니지.”해야 이야기가 흥미진진해진다. 이런 종류의 인터뷰는 특히 더 그렇다. 그러나 그는 시종 ‘겸양의 표현’만 한다. 내가 영어 문법을 처음 배울 때 가장 어려워했던 바로 그 겸양의 표현을 그는 매번 사용한다.
그만큼 그는 매사가 진지하고 조심스럽다.
촬영이 없을 때, 안성기는 주로 집에만 있다. 배우라는 직업이 그렇다 촬영이 있을 때는 사흘 낮 사흘 밤을 꼬박 몰두해야 하지만, 작품이 없을 때는 대책 없이 쉬어야 한다. 배우라면 누구나 이 무료한 시간을 효율적으로 보내는 나름의 ‘휴(休) 테크’가 있다. 안성기에게는 그림이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는 경우는 거의 없다. 친구들과 몰려다니지 못하는 자신이 스스로도 조금 이상한 듯해, 얼마 동안 친구들과의 술자리를 따라다녔다. 함께 있어보니 영 아니었다. 매번 이미 한 이야기 또 하고, 또 할 뿐이었다. 그 후로는 친구들과의 모임이 2차 3차로 이어지면 슬그머니 빠져나와 집으로 향한다.
남겨진 시간에는 스케치북에 낙서하듯 그림을 그린다.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는 일은 그에게 운명 같은 일이다.
그가 그리는 그림은 자화상을 비롯해 아들, 가족, 자연, 정물 등 아주 착한 주제들이다. 최근에는 악기를 집중적으로 스케치한다. 특히 첼로와 바이올린을 주로 그린다. 첼로의 몸체가 여인의 둔부와 비슷하다고 하니,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짓궂은 마음에 무의식적 욕망의 표현이냐고 물었다. 그는 모른 체한다. 매번 이런 식이다.
안성기의 그림의 주제가 가족인 것은 당연하다.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 자
- 24 -
체가 가족이기 때문이다. 그는 조각을 하는 그의 아내와 관심을 공유하기 위해 그림을 시작했다. 신혼 시절, 동숭동 학림다방 근처의 한 화구점에 아내의 미술 재료를 사러 갔다가 오일파스텔을 집어든 것이 시작이었다. 아내와 같은 것을 한다는 느낌이 너무 좋아서였다. 그런데 그 아내는 지금 조각을 그만 두었다. 곁에서 구경하다 시작한 안성기는 요즘도 여전히 그림을 그린다. 그는 아내가 아이들을 키우느라 그 아까운 재능을 포기했다는 사실이 많이 안타깝다.
혼자 중얼거리는 것을 심리학에서는 ‘자기중심언어’라고 한다. 자신이 내면의 느낌을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 박탈된 경우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도덕적 책임이 큰 사람에게 많이 나타난다. 이들에게는 자신의 내면을 자연스럽게 표현할 수 있는 대체 수단이 필요하다. 그림이 가장 대표적인 경우다. 어릴 때부터 익명성을 포기하고 산 안성기에게 그림은 아주 중요한 내면의 표현 수단이다. 그러나 희한하게도 그의 그림은 여전히 평화스럽고, 착하고, 또 예쁘다.
도대체 힘들고 괴로운 일이 없느냐고 물었다. 없단다. 세상에 힘들고 괴로운 일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몇 번이고 물어도, 없단다. 아주 미안해 하며 그런다.
“어쩌지, 암만 생각해도 없는 것 같아. 그래서 난 모든 게 너무 감사하고, 고맙고 그래.” 그러고는 혼자 중얼거린다. “없어……암만 생각해도 없어……거참……괜히 미안해지네.”
■ 안성기는 교만하다. 그의 자화상은 정면을 보고 있다.
아는가? 제2차 세계 대전이 아마추어 화가들의 전쟁이었음을. 우선 영국의 처칠이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혼자 있을 때, 그는 항상 캔버스 앞에 앉아 있었다. 한 손으로는 굵은 시가를 잡고 한 손으로는 낙타털 붓을 잡았다. 처칠은 낭만적인 석양의 풍경화를 주로 그렸다. 그림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처칠은 없다. 철저하게 고독했던 그에게 그림은 구원이었다.
훗날 미국의 대통령이 되는 아이젠하워 장군도 그림을 그렸다. 처칠과 아이젠하워는 만나면 주로 그림이야기를 했다. 아이젠하워는 오늘날 ‘이발소 그
- 25 -
림’ 이라 불리는 주제들을 그렸다. 자작나무가 듬성듬성 있는 겨울 풍경, 황폐한 헛간, 실개천이 흐르는 들판, 실제로 그의 그림은 크리스마스카드로 인쇄되어 팔리기도 했다.
히틀러도 화가였다. 젊었을 때, 히틀러는 빈 미술대학에 두 번이나 지원했다가 떨어졌다. 총통 재임시, 그는 자신의 수채화집을 내기도 했다. 전쟁 중에도 그는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인터넷에 ‘히틀러의 그림’으로 검색하면 지금도 그의 그림을 볼 수 있다. 그는 아름다운 호수를 배경으로 한 고성이나 빈 오페라하우스와 같은 웅장한 건물을 주로 그렸다. 히틀러라는 이름을 가리고 보면 상당히 뛰어난 실력임을 부정할 수 없다.
수백만 명이 죽어간 전쟁에서 각 진영의 최고 사령관들이 한결같이 그림을 그렸다는 이야기다.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는 최고의 자리에 있는 이들은 고독하다. 높을수록 절대 고독이다. 그러나 고독에 절대 위축되지 않는다. 고독을 두려워하는 순간 지도자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하기 때문이다. 20세기 세계 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자신만만하고 가장 고독한 이 세 사람이 모두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안성기는 고독하다. 그러나 그 고독 뒤에는 전쟁의 최고사령관과 같은 고집과 자신만만함이 숨어 있다. 많은 사람들은 안성기가 배우 겸손하다고 이야기한다. 잘 모르고 하는 이야기다. 모든 사람이 겸손하다고 하는 사람은 결코 겸손한 사람이 아니다. 누구도 나와 비교할 수 없다는 내면의 절대적 자만이 있어야만 모든 사람에게 겸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안성기의 스케치북을 펼치면 바로 첫 페이지에 자화상이 나온다. 겸손한 사람은 절대 자화상을 그리지 못한다. 더군다나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는 자화상은 아무나 그릴 수 있는 게 절대 아니다. 범죄자는 거울 속의 자신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인류 역사에 초상화가 등장한 것은 르네상스 이후다. 종교적 주제를 주로 다뤘던 회화의 주제가 인간 개인의 초상으로 넘어온 것은 인간 스스로에 대한 엄청난 자의식이 생겼기 때문이다. 초상화의 완성은 자화상이다. 자화상에서 화가는 자신이 그림의 주체인 동시에 객체다.
안성기의 자화상은 정면을 보고 있다. 웃고 있지만 절대 웃고 있는 게 아니다. 상대방을 압도하는 그림 속의 눈빛은 그가 얼마나 자신만만한가를 보여준다. 철저한 자기 절제와 인내로 이뤄낸 오늘날의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 26 -
다. 소설가 최인호는 안성기를 보면 가톨릭 신부와 같은 느낌이 난다고 했다. 옷의 모든 단추를 모두 채워야 맘이 놓이는 그는 가톨릭 신부보다 더 성직자스럽다.
◈ 조영남의 안경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한국은 그냥 이뤄진 게 아니다. 경제적 기적만 이야기하지만, 그 기적을 가능케 했던 문화적 변동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
서구에서 수백 년에 걸친 경제적 근대화를 우리가 불과 50년에 해치웠다면, 서구의 문화적 모더니티 또한 불과 50년 만에 한국의 모더니티로 변형되어 자리 잡았다. 그 한국적 모더니티는 두 갈레로 진행되었다. 한쪽은 ‘이미자, 나훈아’ 계열이고, 다른 한 쪽은 ‘조영남, 패티김 계열’이다.
일제 강점기의 강요된 모더니티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1960년대에서 1970년대를 거쳐 1980년대까지 지속된 이미자, 나훈아식 모더니티의 정서는 한마디로 ‘이유 없는 슬픔’이다. 한 번 떠난 사랑은 돌아오지 않고, 마냥 기다리려니 그저 서글플 뿐이다. 왜 그때는 그 사랑이 그렇게 많이 떠났는지에 관해서는 아직까지 별로 알려진 바 없다. 사랑은 그저 ‘눈물의 씨앗’일 뿐이고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밤을 울다 지쳐’ 쓰러질 뿐이다. 내가 슬픈데 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는가에 관해서는 아무런 설명이 없다. 한번 떠나온 고향도 이제는 돌아갈 수 없다. 왜 떠났는지, 왜 돌아갈 수 없는지 역시 알 수 없다. ‘꽃피고 새가 우는 강촌에 살고’ 싶지만, ‘사랑하는 부모형제 이몸을 기다리는’ 고향에 갈 수 없어, 그저 ‘한잔 술에 서름을 타서 마시며’ 견딜 뿐이다. 이미자 나훈아 계열의 모더니티가 노래한 정서는 시대적 변화에 어쩔 수 없이 따라야만 했던 ‘집단적 좌절’이었다.
이미자, 나훈아와 똑같이 사랑과 고향을 노래하지만 조영남, 패티김 계열의 모더니티는 많이 다르다. 이들의 모더니티는 미팔군 등을 통해 직접 수입된 오리지널 서구 모더니티다. 일본이라는 필터로 걸러진 모더니티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슬프지만 그저 슬퍼하지만은 않는다. 더 이상 이유 없는 슬픔은 없다. 슬픔과 상실의 원인이 보다 적극적으로 표현된다는 이야기다.
내가 슬픈 이유는 그녀의 ‘불 꺼진 창’에 ‘희미한 두 사람의 그림자’ 때문이다. 불 꺼진 그녀의 방에 내가 아닌 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처럼 분명한
- 27 -
사유는 없다. 그러나 떠나간 사람은 이제 ‘어쩌다 생각이’ 날 뿐이고, 가끔 ‘그날 밤, 그 언약을 생각하면서 지난날을 후회’할 따름이다. 아니 이제는 배신한 이를 가만 두지 않겠다는 ‘복수에 불타는 마음’을 분명하게 이야기하기도 한다.
떠나온 고향은 조영남, 패티김 계열의 모더니티에서도 여전히 그리운 곳이다. 그러나 그 고향은 따지고 보면 내 진짜 고향이 아니다. ‘1 ‧ 4 후퇴 때 피난 내려와 살던 곳’일 따름이다. 한국 근대사에서 자신의 고향이 분명한 사람이 뭐 그리 많겠는가. 고향이란 그저 동생과 메뚜기 잡던 아름다운 추억이 있는 곳일 따름이다. 또한 고향은 더 이상 상처받은 몸과 마음을 추스르려고 돌아가는 곳이 아니다. ‘내 아내와 내 아들과 셋이서 함께’ 금의환향하고 싶은 곳이다.
새로 정착한 서울도 더 이상 소외되고 낯선 장소가 아니다. ‘꽃이 피고, 종이 울리는’곳이다. 이 ‘정다운 거리, 아름다운 서울’에서 이제는 맘 붙이고 잘 살겠노라고 노래한다. 조영남, 패티김이 노래하는 슬픔은 더 이상 강요된, 어쩔 수 없는 슬픔이 아니다. 내 마음 먹기에 따라 사랑과 고향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주체적 자각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내 생각과 느낌은 내 것이다.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자의식이 미국식 모더니티의 외피를 입고 수입된 것이다.
패티김과 조영남이 노래한 미국식 모더니티의 정서는 유사했지만 패티김의 경우, 대부분 길옥윤이라는 걸출한 자곡가의 노래를 주로 불렀다. 조영남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그는 자신이 직접 선택한 팝송에 원작의 가사와는 별 상관없는 가사를 자기 마음대로 붙여 ‘딜라일라’ ‘내고향 충청도’ ‘제비’와 같은 노래들을 만들어 불렀다. 지금이야 ‘번안가요’로 한 급 아래로 치는 느낌이지만, 당시로서는 아무나 접할 수 없었던 고급 문화상품이었다.
■ 크고 네모난 안경은 죄다 ‘조영남 안경’이다.
멀리서 무대 위를 바라보면 조영남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안경만 보였다. 처음부터 조영남의 크고 두꺼운 뿔테 안경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수십 년 동안 같은 모양의 안경만 고집한다. 크고 네모나게 각진 안경, 그래서 우리나라 어느 안경점이라도 들어가서 ‘조영남 안경 주세요!’ 하면 모두 같은 안경을 내보여 준다.
- 28 -
조영남 안경은 이제 일반명사가 된 것이다.
‘딜라일라’로 히트를 쳤을 때도 안경을 안 썼다고 한다. 서울대학교에 입학하기 전, 잠시 다녔던 한양대학교 시절에 악보를 밤새 등사기로 미는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눈이 나빠진 줄도 모르고 있었다. 돈을 벌고 나서 눈이 나빠진 것을 알았고 그때부터 네모나게 각진, 알이 무척 큰 안경을 쓰기 시작했다. 왜 그런 안경을 고집하느냐고 물었다. 항상 그렇듯이 대답이 심드렁하다. 그냥 그런 스타일이 좋았다는 거다.
조영남처럼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대중적 필요를 충족시켜 주는 이는 드물다. 그가 여전히 TV에 출연하는 이유는 그만큼 대중이 필요로 한다는 이야기다. TV는 정말 무섭다. 대중이 피로해 하는 순간 바로 끝이다. 그러나 조영남은 자기 전공인 노래뿐만 아니라 각종 토크쇼, 문화예술 프로그램에까지 영역을 넓혀 종횡무진 활약하고 있다. 그는 낼 모래 칠십 노인이 된다.
조영남 특유의 비현실적 낙관주의 덕분이다. 자신은 죽을 때까지 행복하리라는 그의 무조건적인 신념은 모든 이들을 편안하고 즐겁게 한다. 모든 사람은 불안하다. 특히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불안한 이들은 근거가 있든 없든 간에 자기 확신에 찬 사람을 편안해 한다. 그거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아진다.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연예인은 이런 낙천적인 사람이 대부분이다. 남 비판을 일삼거나 일희일비하거나. 비관주의자는 절대 장수하는 연예인이 될 수 없다. 대중은 보면 바로 느낀다.
■ 조영남은 영원한 ‘경계인’으로 살 것이다.
“너 그러다 조영남처럼 된다.”
학창 시절, 음악도 좋아하고, 미술도 좋아하고, 글쓰기도 조금 재주를 보이던 내게 어머니는 항상 ‘조영남처럼’ 된다고 경고 하셨다.
그때 ‘조영남처럼’ 이란 ‘인생이 엄청 꼬인다’와 같은 뜻이었다.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는 조영남에 대한 중년 여인들의 심리적 저항이 아주 거셀때였다. 내 어머니는 그림도 그리고, 책도 쓰고, 노래도 하는 조영남처럼 재주 많은 사람은 평탄하게 사는 법이 없다고 했다.
내 어머니에게 조영남은 ‘한 우물’이 아닌 ‘여러 우물’을 파다가 망한 대표
- 29 -
적 케이스였다. 그러나 21세기에는 이도저도 아닌 ‘크로스오버’ ‘통섭’ ‘융합’과 같은 방식이 먹히는 세상이 된다는 것을 내 어머니는 잘 모르셨다. 결국 나는 내 어머니가 경고하는 ‘조영남과 같은 운명’을 피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중에 가장 못하는 공부만 죽어라 했다. 독일에서 내 청춘을 다 날리며 겨우 박사학위 받고 지금까지 어설프게 교수하고 있다.
조영남은 경계인이다. 그 경계가 어디인지 동물적으로 안다. 그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오가며 지금까지 살고 있다. 애당초 시작부터 그랬다. 서울대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하다가 1969년 ‘딜라일라’를 번안해 가수로 데뷔한다. 지금도 성악가가 대중가요를 부르면 그 세계에서 왕따를 당한다. 그 당시에는 오죽했을까? 그때 떠난 서울대학교 졸업장은 먼 훗날 명예졸업장을 받는 것으로 대신한다. 그러나 조영남은 성악 발성으로 대중가요를 부르는 그 경계인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대중의 사랑을 독차지한다.
화가 조영남도 마찬가지다. 남들 다 그리는 방식으로는 도무지 성에 차지 않아 느닷없이 ‘화투’를 그림의 주제로 들고 나와 화가를 자처한다. 그림의 ‘예술적 완성도’와 같은 평론가들의 평가는 사실 그의 관심 밖이다. ‘화투’를 주제로 삼아 그린 자신의 그림을 보는 이들이 그저 즐거워하면 된다는 철저한 엔터테이너(연예인, 예능인)적 예술관이다.
작가로서의 조영남도 철저하게 경계를 오간다. 그가 쓴 책은 열 권이 훨씬 넘는다. 대중가요에 대한 책을 쓴 게 아니다. 1970년대 중반 가수로 잘 나가다가 느닷없이 신학공부하겠다고 미국에 갔다 오더니, 기존 신학계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조영남식 신학을 설파한 ‘예수의 샅바를 잡다’라는 책을 쓴다. 맨날 시뻘건 화투짝을 그리다가는 느닷없이 자신만의 현대미술론을 정리한 ‘현대인도 못 알아먹는 현대미술’이라는 이란 엄청 두꺼운 책을 낸다. 뿐만 아니다.
최근에는 한국 현대시 가운데 가장 난해하다는 이상의 모든 시를 자기 나름의 해석학으로 풀어낸 ‘이상은 이상 이상이었다’라는 책을 썼다. 그 책을 쓰는 데 너무 열중한 나머지 뇌졸중으로 쓰러지기도 했다.
조영남은 정말 여자를 좋아한다. 그러나 보통 남자들이 여자를 좋아하는 방식과는 다르다. 두 번의 이혼 그리고 방송에서 조영남이 농담으로 던지는 어
- 30 -
설픈 여자 이야기로 조영남을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다. 사랑이 먼저고, 법과 제도는 나중이다.
그 순서를 아는 조영남은 여자를 진짜 사랑하는 법을 안다. 철학자들이 폼 잡고 이야기하는 사랑 말고. ‘선데이 서울’식 사랑 이야기 말고, ‘진짜 사랑’이 어떤 건지 나이가 아무리 들어도 잘 모르겠다면, 조영남의 ‘어느 날 사랑이’란 책을 읽어보길 권한다.
우리 시대에 진짜 사랑을 이토록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조영남 같은 사람이 적어도 한 명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즐겁다. 나는 촬영차 떠난 이집트의 호텔방에서 하룻밤에 그 책을 다 읽었다. 그리고 그에게 바로 국제전화해서 이야기했다. “존경합니다. 형님!”
◈ 유영구의 지도
내겐 연구소가 몇 개나 된다. 휴먼경영연구원, 여가문화연구센터, e스포츠연구센터 등, 관심 분야가 자꾸 다양해지기 때문이다. 나는 한 때 우리 대학에서 연구 프로젝트가 가장 많은 교수이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연구소 운영이 만만치 않다. 몇 명 되지도 않는 사람 관리가 너무 골치 아프다. 그래서 모든 연구소를 통합하고 운영을 간소화했다. 미래지향적 간판도 야심차게 붙였다. ‘여러가지문제연구소’. 앞으로 더 이상 새로운 연구소를 만들 이유가 없다. 이름 그대로 이 지구상의 모든 문제를 다 연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구원들과의 인간관계가 너무 피곤하다. 항상 드는 생각이라곤 ‘왜 내 밑에는 나 같은 놈 하나 없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든 생각이다.
‘왜 내 밑에는 나 같은 놈 하나 없나’의 문제에서 시작한 내 생각은 결국 내 스스로도 밑에 두고 싶지 않은 ‘나 같은 사람’을 채용한 명지 학원의 유영구 이사장에게 다다랐다. 그는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중고등학교의 교사들을 포함해 전문대학, 대학교, 대학원의 모든 교수들의 인사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다. ‘나 같은 사람’은 정말 셀 수 없이 많은, 아주 골치 아픈 조직의 책임자다. 도대체 그는 그 복잡한 조직을 어떤 철학으로 운영하고 있는 것일까. 스트레스는 또 어떻게 견디고 있을까.
- 31 -
■ 유영구는 지도 속에 숨겨진
‘세상을 보는 관점’을 수집한다.
유영구는 명지학원 이사장을 거쳐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를 맡기도 했다. 그는 고지도를 수집한다. 물론 한반도가 포함된 고지도다. 지금까지 약 140개 정도를 수집했다. 모두 정말 구하기 힘든 것들이다.
지도는 절대 객관적이지 않다. 항상 그리는 사람의 의도와 관점이 숨겨 있기 마련이다. 독일 유학 당시 내가 받았던 첫 번째 문화적 충격은 지도였다.
내 어린 시절 교실에서 보고 자란 세계지도는 태평양이 한 가운데에 있는 것이었다. 태평양을 중심으로 아시아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이 양쪽으로 있었다. 유럽과 아프리카는 왼쪽 가장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독일에서 본 세계지도는 달랐다. 이제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형태였다. 대서양이 중심에 있었다. 물론 유럽이 가운데 있었고. 한국과 일본은 오른쪽 가장 끝자리에 있었다.
대서양이 중심에 놓인 지도를 보고서야 왜 한국이 속한 지역을 극동아시아라고 부르는지 이해되었다.
우리는 북쪽을 위쪽으로 한 지도가 당연한 것 같지만, 이는 나침반이 보편화된 이후의 일이다. 그 이전에는 각 문화권에 따라 서쪽을 위로한 지도(일본), 남쪽을 위로한 지도(중국) 등이 있었다. 호주의 스튜어트 맥아더라는 지도학자는 호주 대륙이 항상 밑에 그려지는 ‘북향지도’에 열받아 거꾸로 된 수정본 세계지도를 제안한다.
절대 객관적일 수 없는 동서남북의 방향설정처럼 지도상의 면적도 절대 객관적이지 않다.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세계지도는 메르카도르 투영도법에 의한 지도로 적도 지방은 정확도가 높지만 극지로 갈수록 실제보다 넓게 그려진다. 그린랜드는 아프리카의 1/14이지만 거의 비슷한 면적으로 나타나고, 북아메리카는 아프리카의 2/3밖에 안 되지만 거의 같은 크기로 보이고, 유럽도 실제보다 많이 크게 그려져 있다.
유영구의 지도에 대한 관심은 무엇보다도 한국을 바라보는 세계의 관점이 어떻게 변화했나를 밝히는 데 있다. 서양의 지도에서 한국이 섬이나 대륙에 매달린 고드름 모양의 그림으로 형상화된 것은 한반도의 존재가 중국이나
- 32 -
일본을 통해 전달되었기 때문이었다. 한반도는 그 당시 서구의 관점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1937년 프랑스의 지리학자 당빌의 ‘신중국지도첩’에서부터 한반도는 아주 제대로 그려지기 시작했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130년이나 앞 선 당빌의 지도에 나타난 한반도는 유영구의 고지도 컬렉션 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다. 동해의 독도와 울릉도가 제대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영토 문제와 관련된 아주 귀중한 지도도 있다. 1740년 제작된 프랑스 왕실의 지리학자 보곤디가 제작한 지도다. 흥미롭게도 보곤디의 지도에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 서간도와 동간도까지 조선의 영토로 표시되어 있다. 뿐만 아니다. 울릉도, 독도가 분명하게 표시되어 있고 동해를 '한국해(corean sea)'라고 분명하게 표기한 지도도 유영구는 조심스럽게 꺼내 펼쳐 보였다.
고서와 고지도에 대한 유영구의 관심은 명지대학교에 국내 최초의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의 설치로 발전된다. 한국 사회가 제대로 발전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역사적 기록물들의 관리가 제대로 되어야 한다는 게 유영구의 생각이다.
■ ‘멀티플 퍼스펙티브’로 세상을 바라봐야 갈등이 해결된다.
유영구의 지도 컬렉션에는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아주 귀중한 지도가 또 하나 있다. 북한의 ‘5만분의 1 지도’다. 현존하는 가장 자세한 북한지도다. 1970년대 소비에트에서 제작된 이 지도는 항공 측량과 지상에서의 삼각 측량을 동시에 동원해 만든 아주 정교한 것이다. 제작 기간만 10년이다 보통 군사지도 이외에는 ‘5만분의 1 지도’를 만들지 않는다. 일반적인 군사지도에는 하천의 폭이나 수심만 기록되지만 이 지도는 유속, 수풀의 수종까지 기록되어 있다. 아주 정밀한 군사지도란 이야기다.
총 410장으로 이뤄진 이 지도를 처음 본 국정원의 담당자는 있을 수 없는 지도라며 놀라워했다. 소비에트가 무너진 후, 일본으로 유출 된 이 지도를 ‘나우카’라는 일본 고서점에서 구했다. 이 지도는 원래 일본 자위대에 넘겨지기로 되어 있는 것이었다. 유영구는 서점 주인을 몇 번이나 찾아가 설득한 후에 겨우 구할 수 있었다. 그는 당시 북한 지도와 함께 유출된 ‘25만분의
- 33 -
1’ 중국 지도를 함께 구입하지 못한 것을 지금도 아쉬워한다. 개인이 구입하기에는 너무 고가였다. 당시 정부 기관을 찾아다니며 꼭 사와야 한다고 이야기 했지만,자신만 우스운 사람이 되고 말았다며 아직도 섭섭해 한다.
- 멀티플 퍼스펙티브(multiple perspective)
오늘날의 지도에서는 ‘시점’이 하나로 존재하지 않는다. 쉽게 말해 원근법의 소실점 반대편에 위치하는 통일된 관찰자의 시점이 없다는 얘기다. 곡면으로 된 지구를 평면에 그리다 보니 다양한 방식의 투영법이 개발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지도는 한 점에서 바라본 세상이 아니다. 면에 편제된 시점으로 ‘투영’된 세상이다. 제대로 된 지도는 관점의 편재화 즉 다양한 관점에 열려 있어야 한다.
■ ‘한 상에 둘러서 먹고 마셔’야 친한 거다.
유영구는 KBO 총재가 되어 ‘야구의 지도를 그리기도 했다. 이제까지 KBO 총재는 정치인이 주로 했다. 2009년 2월 전임 총재가 물러나자 야구인들은 한국 야구 역사상 최초로 야구인들 스스로 총재를 추대하기로 의결하고, 소문난 야구광인 유영구 명지학원 이사장을 총재로 추천한다. 이후 정부와의 마찰, 사퇴 그리고 재추대의 우여곡절을 거쳐 유영구는 KBO 총재를 역임한다.
- 유영구는 고교시절부터 야구광 : MBC 청룡 팬, 청룡이 LG에 인수될 당 시 LG 고문, 박용오 총재 시절 돔 구장 추진위원 등
하루 일과의 대부분이 사람 만나는 일인 유영구에겐 혼자 지내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래서 그는 주말이면 약수동 시장 한 가운데 있는 그의 작은 사무실에서 혼자 보낸다. 전화도 받지 않는다. 주로 커피를 볶는다. 술 담배와는 거리가 먼 그에게 다양한 커피를 볶고 마시는 일은 유일한 사치다. 아, 그가 즐기는 사치가 또 하나 있다. 머그잔을 모으는 일이다. 지금까지 약 1,500개 정도 모았다. 외국 여행이나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꼭 몇 개씩은 사온다, 가방이 꽉 차 더 이상 가져오기 어려우면, 아내가 잠든 사이 아내의 가방에 몰래 넣어두었다가 혼나는 일도 자주 있었다.
혼자 보내는 시간을 즐기지만 주말 식사는 꼭 가족과 함께 해야 한다. 그는
- 34 -
‘한 상에 둘러서 막고 마셔’라는 찬송가 구절을 가장 좋아한다. 그는 개를 열 마리 넘도록 길러봤지만 아무리 훈련 잘 받은 훌륭한 품종의 개도 다른 개들과 절대 밥은 같이 못 먹는다며, 인간만 함께 식사를 할 줄 안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아무리 친해도 밥을 함께 먹지 않으면 친한 게 아니라는 아주 독특한 철학이다.
서재 가득한 고서와 고지도, 야구장의 환호성, 다양한 머그잔과 직접 만드는 커피, 그리고 사랑하는 이들과 한 상에 둘러서 먹고 마시는 식사, 그를 만나면 마음이 참 편해지고, 아무리 복잡한 문제를 이야기해도 문제가 바로 간단해지는 느낌이 드는 까닭은 바로 이 네 가지 때문이다. 참 많이 부러운 남자의 물건이다.
◈ 이왈종의 면도기
도대체 왜 한국 남자들은 행복하지 못할까? 왜 다들 이토록 일사불란하게 침울한 표정일까? 나이가 들수록 자꾸 우울해 지는 까닭은 또 왜일까?
내 문화심리학적 분석은 아주 단순하다. 끝없이 타인의 눈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남들과 다른 것은 틀린 것’이라는 획일화의 굴레가 한국 남자들의 일상을 지배한다. 그래서 식당에서 혼자 밥도 못 먹는다. 음악회는 물론, 극장에 혼자 가는 것도 쉽지 않다. 남들이 나를 ‘사회 부적응자’로 볼까 두려운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자. 누구도 내가 혼자 밥 먹는 것, 혼자 음악 듣는 것에 관심 없다. 그런데도 그들의 눈길을 두려워한다. 정말 희한한 현상 아닌가? 타인의 눈길을 두려워하는 한국 남자들의 심리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수염이다.
정치제도의 민주화만이 전부가 아니다. 다수의 억압과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내적 민주화가 진정한 민주사회다. 타인의 눈길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타 자유로운 사회가 진정한 민주사회란 이야기다.
여자들은 화장을 하고 남자들은 면도를 한다. 여자들의 화장만큼이나 면도는 남자들의 중요한 일상이다. 그러나 남자의 면도라고 다 같은 면도는 아니다. ‘털을 미는 것’과 ‘수염을 깎는 것’은 전혀 다른 행위다 어쩔 수 없이 매일 털을 밀어야 하는 남자들에게 면도는 의무와 책임이다. 이런 종류의 면도는 일회용 면도기나 전기면도기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수염을 기르는 이들
- 35 -
에게 면도는 미학이다.
자기만의 독특한 수염 형태를 유지하는 일은 아주 특별한 노력이 동반된다. 타인과 구별되는 자기만의 독특한 세계관이 없다면 그 귀찮음을 감내하기 힘들다. 이들에게 손에 딱 잡히는 면도기는 필수다. 17년째 똑같은 면도기만
쓰고 있는 사람을 만났다. 이왈종 화백이다.
■ 이왈종은 무소의 뿔이다. 그렇게 그는 혼자 간다.
‘숲 속에서 묶여 있지 않은 사슴이 먹이를 찾아 여기저기를 다니듯이 지혜로운 이는 독립과 자유를 찾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숫타니타파의 시에 나오는 내용이다. 서귀포에는 그렇게 혼자 작업실에 주저앉아 새벽부터 저녁까지 사슴과 노루, 푸른 바다와 달개비, 동백나무를 그리는 화가가 산다. 이왈종이다. 참 특이한 이름이다. ‘曰’자가 이름에 들어가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이름의 뜻은 ‘鐘이 울린다’일 테지만 이름의 음은 아주 고집스럽게 들린다.
이름만큼이나 그의 모습도 고집스럽다. 신선 모양의 눈썹과 허옇고 짧은 수염 때문이다. 자신이 이제 나이가 들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부터 이왈종은 수염을 길렀다. 그러나 아주 오래된 수염처럼 자연스럽다.
그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이고 싶어 서귀포에 내려왔다. 서울서 잘나가던 대학교수 다 때려치우고 아무 연고도 없는 서귀포로 내려온 것은 1990년도다 이왈종은 1945년생이다. 그러니까 마흔다섯에 서귀포로 내려온 것이다. 남들은 안정된 생활을 시작하고, 자신의 능력을 즐기기 시작할 때, 그는 그 황당한 결정을 한 것이다.
요즘에야 사정이 많이 달라졌지만, 20년 전만 하더라도 교수라는 사회적 지위는 그리 만만한 게 아니었다. 딱 5년만 자기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원 없이 그리고 싶었다.
당시 그가 교수 생활로 모은 재산으로 삼청동에 집이 하나 있었다. 그것이면 5년 동안 굶지 않고 그림을 그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내와 가족이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저 그림만 그리고 싶을 따름이었다. 그렇게 5년만 원 없이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죽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외롭지 않았냐고 물었다.
- 36 -
“처음에는 서울 생각이 많이 났지. 복잡하고 번잡해서 그렇게 싫어서 내려왔는데도, 그 바쁘게 돌아다니던 생각이 자꾸 나더라고. 그래서 릴리프 작업을 했어요. 부조 작업이지. 그게 엄청난 노동이에요. 근데 서울 생각이 자꾸 나서, 몸을 힘들게 해야 잠에 곯아떨어지고, 서울 생각을 잊을 수 있으니……부조는 한국화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근데 그게 전시회를 하는데, 다 팔려버리더라고. 그때 내가 힘을 얻었지. 이건 된다. 그런 확신이 생겼지.”
그때 팔려고 했던 삼청동 집은 아직도 그의 소유로 남아 있다.
서귀포에서 혼자의 삶이 익숙해지기까지 그동안 그를 도와준 그 고마운 이는 김철호다. 그는 지금은 사라진 ‘소라의 성’이라는 서귀포 근처 가장 아름다운 절벽에 있던 식당의 사장이었다. 그리고 서귀포의 소문난 예술애호가이기도 했던 김철호는 밥은 먹고 그림을 그려야 한다며 아침, 점심, 저녁으로 그를 불러댔다. 둘은 8년간 거의 매일 만났다. 하루에 세 번씩 만날 때도 많았다. 새벽에는 등산길의 친구로 동행했다. 점심때가 되면 손수 밥을 해놓고 전화했다. 저녁이면 목욕탕에서 만났다. 그의 후원은 각별하고 친절했다.
지금 이왈종이 사용하는 면도기가 바로 그 김철호가 선물한 것이다. 그가 일본 여행에서 다녀와 선물한 면도기는 이후 이왈종이 가장 아끼는 애장품이 되었다. 1998년 김철호가 뇌출혈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이후로는 더더욱 그렇다.
그가 죽은 후, 이왈종은 절에 가서 초제부터 49제까지 치러줬다. 뿐만 아니
다. 자신의 방 한쪽 벽에 그의 사진을 걸어 놓고, 1년 동안 향을 피웠다. 이
왈종은 각별하게 김철호를 기억했다. 향을 피우다 보니 향로가 맘에 안 들
었다. 인사동을 뒤져도 마땅찮았다. 수천만 원을 들여 도자기 가마를 사 들
였다. 그렇게 시작한 향로 만들기가 이제 그의 특별한 작품 세계가 되었다.
이왈종은 지금까지 그림으로만 그렸던 서귀포의 새, 물고기, 달개비, 동백
꽃, 등을 향로의 한 귀퉁이에 그려 넣는다. 어떤 향로 꼭대기에는 남녀가 사
랑하는 모습도 만들어 올린다. 그 사이를 비집고 향이 올라오는 모습은 참
희한하다.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아주 묘한 에로티시즘이다.
■ 이왈종은 섬세하다. 그래서 익숙하고 오래된 면도기가 좋다.
- 37 -
“제주에 와서 그림을 그리는데 ……처음에는 자주 자전거를 타고 밀감 밭
이나 숲 속을 혼자 다녔어요. 가만히 앉아 하릴없이 잡초를 들여다보니, 서
로 엉켜 있는 것 같은데, 아무도 서로 다치지 않더라고, 아무 것도 아닌 게
서로 질서가 있어요. 서로 엉켰는데, 서로 다치지 않게… 올려다보니 나무도
그래요. 서로 상처 주지 않고……이런 식으로 세상을 보니 아주 마음이 편해
지고, 남한테 의지하거나 기대하지 않게 되고…… 아주 좋더라고.”
이왈종의 그림에서 꽃과 풀은 서로 다치지 않게 조화롭다.
이왈종은 정이 많다. 또한 아주 섬세하다. 그가 자신의 면도기에 집착하는
이유도 섬세하기 때문이다.
이왈종은 자신의 그림과 관련해 왜곡과 비난을 받기도 한다. 당연한 일이
다. 전통적인 한국화에서는 다룰 수 없는 입체적인 부조 작업도 하고 돌조각
도 하기 때문이다. 2~3 미터 보자기에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 소재도 기존
의 한국화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을 다룬다. 그가 그리는 단순한 형태의
새, 물고기는 전통적 한국화에서는 볼 수 없다. 뿐만 아니다. 자동차, 배, 전
화기, TV도 그의 그림에는 빠지지 않고 나온다.
그는 자신의 그림을 여전히 ‘한국화’라고 이야기 한다. 진경산수만이 한국화
가 아니다. 시대가 변하면 내용도 바뀌는 것이다. TV나 자동차가 없을 때
그림을 그렸으니 산이나 폭포만 있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인들이 사는 모습
을 그리면 바로 그것이 한국화라는 것이다.
매주 서귀포시 평생교육센터에서 열리는 ‘이왈종 그림교실’에는 제주도 아
이들이 들어오고 싶어 난리다. 이 그림 교실에 지원하기 위해 엄마들이 밤을
세워 기다리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가 서귀포 한
구석에서 초등학교 아이들과 이렇게 씨름하며 지낸다. 그러나 이왈종은 아이
들을 가르치며 오히려 배운다고 한다. 그의 그림이 동시처럼 편안한 까닭도
바로 이런 그의 따뜻한 일상 때문이다.
이왈종 자신에게 최고의 찬사는 ‘평생 주색에 시달린 사람’이라고 한다. ‘주
(酒)‘는 물론 술이다. 그는 술을 참 좋아한다. 그러나 그가 이야기하는 ’색
(色)은 여자가 아니다. 그림의 색깔을 뜻한다. 자신만의 색을 찾기 위해 서귀
포에 왔고, 지금까지 그 색만 들여다보고 있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주색에 시달린’ 얼굴로 거울 앞에 서서 면도를 한다.
- 38 -
서귀포의 삶을 가능케 해준, 잊지 못할 친구 김철호가 선물해준 엄지 검지에
딱 붙는, 세상에 하나뿐인 그 면도기를 잡고.
◈ 박범신의 목각 수납통
우리나라에서 아마도 가장 많은 베스트셀러 소설을 쓴 ‘성공한 작가’ 박범
신에게 물었다. 다시 태어나면 소설을 쓰겠느냐고. 아니란다. 절대 안 쓴단
다. 박범신은 다시 태어나면 세 가지는 절대 안 한다고 한다.
첫째는 아버지다. 철이 없어서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애를 줄줄이 난 거지.
세상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았더라면 절대 애를 안 낳았을 거라고 한다. 애들
이 아직 어릴 때, 줄줄이 누워 자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이 험난한 세상
에서 이 애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서 ‘도대체 내가 무슨 짓을 했나’하는 생각에 앞이 캄캄해지더라는 거다.
두 번째는 결혼이다. 애를 안 낳으려면 결혼도 당연히 안 하는 거 아니냐고
내가 물었다. 결혼해도 애를 안 낳는 경우도 많고, 낳고도 결혼 안 하는 경
우도 많다며, 결혼과 출산을 연결시키는 내 낡은 편견을 지적한다. 그럼, 사
랑은? 사랑도 안 하는 거냐고 물었다. 사랑을 어떻게 멈출 수 있느냐. 사랑
의 열망은 멈추는 법도 없고 멈춰서도 안 되는 거라고 한다. 아, 이건 괜찮
은 것 같다. 가능한 한 많은 여인과 사랑하고 싶다는 이야기다. 멋있다.
세 번째가 소설이다.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라는 거다. 물론 소설 때문에 즐
거운 일도 많고, 소설 쓰는 순간만큼은 행복한 시간이었지만 다시 태어나면,
절대 하지 않을 거란다. “그럼 다시 태어나면 뭐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나무를 만지는 목수 일을 하겠다고 한다. 목수와 소설가. 잘 어울리지 않는
다. 그러나 박범신은 실제로 목공예에 몰두했던 적이 있다. 베스트셀러 작가
로 날리던 80년대, 목공예 작품전에도 출품할 정도로 나무 만지는 일에 몰
두했다.
“내가 원래 나무를 좋아해요. 내가 어렸을 때, 우리 큰 매형이 목수였거든.
시골에서 장난감도 없는데, 매형이 나무로 인형을 깎아 주고, 그래서 어려서
부터 나무에 대해 굉장히 친근감을 가졌던 것 같아요. 나무를 만지는 걸 참
좋아하는데, 나무를 파내야 하니까, 이걸 하고 나면 며칠 동안 팔이 떨려요.
- 39 -
이게 집중력이 강해야 해요. 칼을 가지고 하니까.
소설이라는 게 논리가 가득 쌓여 있고 논리의 그물망 속에 작가가 들어 있
는 거지. 소설을 쓴다는 게 굉장한 압박이에요. 그런데 목공예를 하고 있으
면 그런 논리로부터 해방감을 느끼지.”
박범신은 당시에 만들었던 목각 수납통을 보여준다. 보통 수준이 아니다. 여러 가지를 만들었는데, 오는 사람마다 하나둘씩 집어가, 현재 남아 있는 게 몇 가지 안 된다며 아쉬워한다.
이 목각 수납통은 그의 곁에서 참 오래 살아남았다. 서재에 들어서서 뭐든 주머니에서 꺼내면 바로 이곳에 먼저 들어간다. 라이터, 담배, 볼펜, 수첩, 뭐든 받아주는 수납통을 자기 손으로 직접 파고, 깎아서 만든 거다. 그래서 더욱 특별한 남자의 물건이다. 뭐든 다 받아주는!
예전에는 열 받고 상처 받고 쪽팔리면 바로 때려 치웠다. 그러나 이젠 때려치울 것도 별로 없다. 지난 여름 막내 장가보내면서 아버지도 내려놨고, 교수직도 내려놨다. 이젠 나무 깎고, 다듬으며 목공일하며 지내면 된다. ‘열 받으면 바로 때려치우는’ 자학의 전략에서 ‘나무 만지기’라는 새로운 존재 유지의 전략으로 변화한 거다. 그래서 고향 논산에 은퇴 후 머물 수 있는 집도 마련해 놨다. 고향은 그러라고 있는 거다.
2012. 3. 24.
* 문재인의 바둑판, 김문수의 수첩 편은 생략합니다.
- 40 -
'독서후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춘아, 가슴 뛰는 일을 찾아라(2) (0) | 2012.04.23 |
---|---|
청춘아 가슴 뛰는 일을 찾아라 (0) | 2012.04.11 |
남자의 물건 (1) | 2012.03.16 |
잊혀진 질문 (2) (0) | 2012.03.06 |
잊혀진 질문 (0) | 2012.03.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