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16. 08:59ㆍ독서후기
남자의 물건
- 김정운이 제안하는 존재확인의 문화심리학 -
■ 김정운
0 62년생. 고려대 심리학과. 베를린자유대학교 문화심리학 박사.
동 대학 전임강사. 현재 명지대 교수 및 각종연구소장
0 중앙, 한겨레, 조선, 동아 등 신문과 잡지에 칼럼 연재, KBS1,2 및 tvN 등의 메인 MC 등...
0 노는 만큼 성공한다.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일본 열광 등. 저서
■ 프롤로그 : 왜 ‘남자의 물건’인가?
문명사에서 ‘인간은 이야기를 통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불과 얼마 전 일이다. 비트겐슈타인 이후의 이야기다. 이를 일컬어 ‘내러티브 전환(narrative tum)’이라고 한다. ‘인간은 생각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하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류 문명이 가능했다는 거다. 우리가 그림을 그리고, 영화를 보고, 축구를 보는 것도 다 나중에 이야기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다. 아침마다 신문을 들추며 ‘쯧쯧’거리고, 뉴스를 보며 주먹을 불끈불끈 하는 이유도 다 이야기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자기 이야기가 풍요로워야 행복한 존재다. 할 이야기가 많아야 불안하지 않다. 한국 남자들의 존재 불안은 할 이야기가 전혀 없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모여서 하는 이야기라고는 정치인 욕하기가 전부다.
사회적 지위가 그럴듯할 때는 그래도 버틸 만하다. 자신의 지위에서 비롯되는 몇 가지 이야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적 지위가 사라지는 순간 그 이야기도 끝이다. 남자가 나이 들수록 불안하고 힘든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도무지 할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자의 물건’이다.
‘여자의 물건’이라면 여러 가지가 떠오른다. 목걸이, 반지, 가방, 구두, 화장품 등등. 그래서 여자들은 삶이 흥미로운 거다. 여행을 가도 남자들보다 훨씬 더 재미있다. 볼 것도 많고, 이야기할 것도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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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이라면 도무지 떠오르는 게 없다. 대부분 잠시 당황하다가 은밀한 곳의 ‘그 물건’을 떠올린다. 너무 서글픈 일 아닌가?
다양한 분야의 대표적인 열 분을 찾았다. 이어령, 신영복, 안성기, 차범근, 조영남, 유영구, 이왈종, 박범신, 김문수, 문재인, 개인적으로 일일이 다 찾아 뵙고 의도를 설명했다. 열 분 모두 기꺼이 인터뷰에 응해주셨다. 정말 감사할 뿐이다. 내 예상대로였다. 그분들 각자가 펼쳐 놓은 물건 이야기는 너무 흥미진진했다. 인터뷰를 정리하고, 책을 써나가는 내내 참으로 즐겁고 행복했다.
한 달 전 큰 아들이 군대에 갔다. 지금 아주 추운 전방 사단에서 훈련 받고 있다. 그 녀석 입영날짜가 결정된 다음날, 북한의 김정일이 갑자기 죽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거 남의 일처럼 손 놓고 있을 일이 아닌 듯 했다. 아들에게 전화해서 입영 날짜를 연기해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천하의 아빠가 왜 그래?” 그런다. 녀석이 아주 폼 나 보였다.
의정부에 있는 보충대로 머리 바짝 깎은 아들 들여보내고 돌아 나오는데, 눈이 많이 내렸다. 날씨도 갑자기 추워졌다. 그날 저녁, 내 연구실에 앉아 눈 내리는 바깥을 내다보려니 자꾸 마음이 울컥해지며 눈물이 나오는 거다. 그러다 아예 엉엉 울었다. 추운데 고생할 내 아들 생각에만 그런 것은 아니다. 꼭 30년 전, 내가 군대 갈 때의 내 아버지의 마음도 이랬을 거라는 생각이 느닷없이 떠올라서다.
이제까지 나는 어머니만 슬퍼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도 그러셨다.
“너희 엄마가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첫 면회하고 오던 날은 눈이 어찌나 오던지, 화천에서 서울까지 오는데 열 시간도 더 걸렸다.” 아버지는 그 이야기만 지금까지 수십 번도 더 했다. 매번 어머니만 울었다고 했다. 아버지 당신의 마음이 어떠했는지는 한 번도 이야기 한 적이 없다. 그래서 난 아버지는 하나도 안 슬펐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버지가 참 좋다. 내 아들도 언젠가는 나처럼 자기 아버지를 참 좋아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 책을 내 아버지, 내 아버지의 아들, 그리고 그 아들의 아들 이 세 사람에게 ‘헌정’하고 싶다. 이런 경우 ‘헌정’이라는 단어가 맞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아버지와 아들을 둔 여자들도 꼭 읽어야 하는 ‘남자들의 책’이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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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남자에게
■ 늙어 보이면 지는 거다
최근 몇 년 사이 내 친구들이 급속히 늙어간다. 이제 아무도 늙어가는 것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않는다. 심리적으로 포기하고 나니 몸이 더 빨리 망가진다.
몸과 마음이 무너지면 인상조차 훨씬 나이 들어 보이게 된다. 더 심각한 것은 나이 들어 보이는 만큼 일찍 죽는다는 사실이다. 실제 연구해봤더니 그렇다는 거다. 최근 덴마크의 심리학자 크리스텐센은 1995년부터 2008년까지의 종단 연구를 통해 같은 나이일지라도 늙어 보이는 사람이 먼저 죽는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연구 내용은 간단했다.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이 쌍둥이의 사진을 보고 나이를 평가하게 하고 그 평가된 나이와 이 쌍둥이가 실제 사망한 나이를 비교하는 방식이다. 2008년까지 약 225쌍의 쌍둥이가 사망했다. 숨질 당시의 나이를 비교해 보니 쌍둥이 중 늙어 보이는 사람이 일찍 죽었다. 뿐만 아니다. 늙어 보이는 만큼 더 빨리 죽었다.
나이보다 늙어 보이는 이유는 삶이 재미없는 까닭이다. 정력적으로 살던 이들이 은퇴한 뒤 갑자기 늙어버리는 모습을 자주 본다. 자신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적 지위가 높았던 사람일수록 은퇴한 뒤 더 빨리 늙는다. 존재 불안의 우울함 때문이다. 우울한 사람이 심장병에 걸릴 확률은 보통 사람에 비해 2~4배나 된다고 한다. 건강한 사람이 우울해질 경우 심장병에 걸릴 확률은 훨씬 더 높아진다.
최근 나는 배꼽 위로 올라오는 ‘아저씨 바지’는 다 버렸다. 허리 아래쪽에 걸리는 청바지만 입는다. 불편해도 참는다. 머리에 파마도 했다. 사실 처음에는 탈모로 엉성해진 머리 안쪽을 가리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파마한 뒤 내 행동은 사뭇 과감해졌다. 이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옷도 용감하게 사 입는다. 불과 몇 주 동안 역기와 아령을 들고는, 가슴 큰 남자들만 입는 쫄티도 사 입는다. 거울만 보이면 팔뚝에 힘을 잔뜩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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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우울하고 허전한 생각이 비집고 들어오는 것은 한순간이다. 방심하면 한 방에 ‘혹’간다. 우리 나이에는 특히 더 그렇다. 그래서 내 인생은 크게 둘로 나뉜다. 파마하기 전과 파마한 후.
■ 이 쩨쩨한 인생은 도대체 누가 결정했나?
나는 수첩을 아주 자주 바꾼다. 조금 쓰다가도 지겨우면 바로 바꿔버린다. 한 달에 서너 개 이상은 족히 바꾸는 것 같다.
좀 한가한 어느 날, 내가 도대체 왜 이러는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알아냈다. 내 인생에 내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서 그렇다.
교수가 된 것도 그렇다. 처음부터 되려했던 것도 아니고, 몇 번이나 그만 두려했으나 다들 말린다.
내 삶의 다른 부분들도 마찬가지다. 한 번 결혼하면 마누라는 참 바꾸기 힘들다. 내 주위에 바꾼 친구들을 보니 바꾸는 게 더 힘들고 어렵다. 그냥 참고 사는 게 남는 장사다. 자식들은? 자식들은 절대 못 바꾼다. 아무리 마음이 안 들어도 죽을 때까지 내 자식이다. 집은? 집은 내 맘대로 바꿀 수 있나? 절대 아니다. 그것도 다 마누라 마음대로다. 집값 상승 요인과 애들 교육환경 등을 고려해 전적으로 아내가 결정한다. 내 출퇴근 환경, 내 삶의 즐거움 등은 아예 안중에도 없다. 고작해야 자동차나 내 맘대로 바꿀까? 그러나 그것도 돈이 되는 한도 내에서 많이 바꿔야 평생 서너 번 정도다 그래서 수첩이나 자주 바꾸는 거다. 돈 얼마 안 든다.
요즘에는 수첩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아 만년필도 자주 사 모은다. 일년에 수십 자루는 족히 사는 것 같다.
내 인생이 지금처럼 잘나간 지는 불과 몇 년 안 되었다. 그때까지는 정말‘거지(?)’ 같이 살았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 맘대로 해볼 꿈도 못 꿨다. 무조건 참고 살았다. 이제 나이 오십에 겨우 내 맘대로 쓸 수 있는 용돈 좀 벌어, 그렇게 하고 싶었던 것 한번 해보는데 그걸 어찌 뭐라고 하는가? 그것도 ‘쪼잔하게’ 문구점 한 구석에서 만년필이나 만지작거릴 뿐이다. 서러운 마음에 욕이 저절로 튀어나온다.
우리의 삶이 재미없는 이유는 ‘선택의 자유’를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자들은 모이면 군대 이야기다. 이 선택의 자유를 박탈당한 트라우마를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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떻게든 해결하고 싶기 때문이다.
선택의 자유는 인간 존재의 근거다. 내 삶의 의미는 내가 선택했는가, 아닌가에 의해 결정된다. 그래서 등산가들은 죽어라고 그 높은 산 정상에 오른다. 자신이 선택한 일이기 때문이다. 심리학에서 이 ‘선택의 자유’와 아주 비슷하게 쓰이는 개념이 있다. ‘내적 동기’다. ‘재미’나 ‘즐거움’과 같은 내면의 욕구를 의미한다. 요즘이 ‘내적 동기’의 전성시대다. 자신이 진짜 원하는 일을 선택해서 하라고 곳곳에서 부추긴다.
재미있어서 선택하는 게 아니라 선택하면 재미있어진다. 아무리 재미없는 행동도 내가 선택하면 재미있어진다. 요즘 유행하는 행동경제학의 ‘넛지(nudge)' 같은 개념은 바로 이 선택의 자유에 관한 경영학적 변형이다. 방향만 은근슬쩍 제시하고 최종 결정은 스스로 내리도록 해야 행복해한다는 것이다.
선택의 자유를 박탈당한 이들에게 나타나는 심리 현상은 좌절이다. 좌절한 이 땅의 사내들은 밤마다 옹기종기 모여앉아 다양한 폭탄주를 제조한다. 내 돈 내고 마시는 술이라도 한 번 내 맘대로 섞어보자는 거다. 그래서 요즘 자꾸 드는 의문이 있다. 술도 못 마시고 고작해야 수첩이나 바꾸며 만족해야 하는 ‘이 쩨쩨한 인생은 도대체 누가 결정했는가’ 하는 아주 심각한 질문이다. 잘 모르겠다. 이런 젠장. 이제 내 나이 오십인데…….
■ 시키는 일만 하면 개도 미친다
‘파블로프의 개’, 먹이를 줄 때 종소리를 울려주면 어느 순간부터 종소리만 울려도 침을 흘리게 되는 참으로 멍청한 개다. 파블로프는 그 개를 가지고 좀 더 복잡한 실험을 시도했다. 이번에는 종소리가 아니라 원을 보여주면서 먹이를 줬다.
어느 순간부터 개는 원 모양만 보아도 침을 흘리게 되었다. 이번에는 원과 타원형을 구별하도록 타원형일 때는 먹이를 주지 않았더니 원과 타원형을 정확히 구별하게 되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파블로프는 타원 모양을 점점 원에 가깝게 했다. 구별이 어려워지자 개는 아무 때나 침을 흘렸다. 그리고 낑낑거리며 오줌을 싸거나 물건을 물어뜯는 등 신경증환자가 보여주는 행동과 유사해졌다. 파블로프는 이 증세를 ‘실험적 신경증’이라 불렀다. 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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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오줌을 가리기 어려운 상황이 되면 정신병에 걸린다는 얘기다.
미국 심리학자 셀리그만이 우리에 갇힌 개에게 한 실험은 좀 더 잔인하다.
A집단의 개 : 코로 지렛대를 누르면 전기 고문을 멈출 수 있게 함.
B집단의 개 : 꽁꽁 묶어 놓고 그냥 전기 고문을 당하게 함.
이번에는 우리의 문을 열어 놓고 전기 고문을 가하자 A집단의 개는 그대로 달아났으나, B집단의 개는 풀어 놓았는데도 달아나지 않고 그대로 전기고문을 당했다. 셀리그만은 이를 ‘학습된 무기력’이라고 물렀다.
실험적 신경증과 학습된 무기력은 개의 정신질환이 아니다. 인간의 상황을 개에게 적용한 것이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는 상황에 오랜 기간 처하면 누구나 이 병에 걸린다. 스스로 차를 운전하면 절대 멀미를 하지 않지만, 남이 운전하는 차를 타면 멀미를 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다. 도무지 차가 언제가고 언제 서는지 예측할 수 없이 그저 앉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 남자라면 누구나 약한 정도의 ‘신경증’과 ‘학습된 무기력’에 사로잡혀 있다. 어려서부터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한 경험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어서는 더하다. 집안 문제든, 사회 문제든 도무지 내가 어떤 결정에 주체적으로 관여해본 경험이 전혀 없다. 어떻게 밀려 살다 보니 여기까지 온 거다.
개도 시키는 일만 하면 미친다. 이제라도 뭐든 스스로 결정하며 살자는 거다! 내 삶을 주체적으로 사는 일에 제발 쫄지 말자는 이야기다!
■ 아이폰과 룸살롱
모든 동물의 수컷들은 불안하다. 암컷의 경우, 자신이 낳은 새끼는 반드시 자기 피가 섞여 있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수컷은 다르다. 지금 키우고 있는 자신의 새끼가 정말 제 새끼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다.
지난 2001년, 독일 테니스 스타 보리스 베커가 런던의 한 화장실에서 러시아 모델을 임신시키고 아이까지 낳아 독일 사회에 큰 파문이 일었던 적이 있다. 보리스 베커는 사실이 아니라고 강변했지만 유전자 검사 결과 사실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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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재미있는 현상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당시까지 유전자 검사는 그리 일반화된 검사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사건 이후로 독일 사회에 유전자 검사가 유행처럼 번졌다. 특히 아버지들의 의뢰가 대부분이었다. 안타깝게도 검사의 절반 이상이 지금 키우고 있는 자녀와 아버지의 유전자가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다.
자신이 키우고 있는 아이가 진짜 자신의 아이가 아닐 수 있다는 수컷의 보편적 불안에 집단적으로 휩싸인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수컷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어떻게든 ‘씨’를 뿌리려고 하는 것이다.
암컷들은 불안해 하는 수컷들의 몸에 자신의 몸을 비벼대며 위로한다. 원숭이의 경우 이런 접촉을 ‘그루밍(grooming)’이라 한다. 서로의 털을 다듬는 이 행동은 권력관계를 확인하는 행동일 뿐만 아니라 서로의 불안을 해소하는 고도의 심리적 전략이기도 하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끌어안거나 어깨를 두드리거나, 악수를 하는 등…….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 남자들에게 만지고 만져지는 것은 거의 모든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금지된다. 미국의 어떤 주에서는 학교의 남자 선생님이 여학생의 머리를 쓰다듬는 행위까지 금지한다.
한국의 철없는 사내들은 이 박탈된 터치의 경험을 룸살롱에서 만회하려고 한다. 한국의 남자들은 룸살롱에 술 마시러 가는 게 절대 아니다. 술을 마시려면 포장마차나 음식점에서 마실 일이지, 왜 꼭 룸살롱에서 옆에 여자를 앉혀놓고 마시려 하는가? 만지고 만져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룻밤에 적게는 수십만 원, 많게는 수백만 원을 내고 룸살롱에 가는 것이다. 아무도 나를 만져주지 않기 때문이다. 아닌가? 남자들이 룸살롱에 가는 이유를 나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으면 나와 보라!
서로 만지고 만져지는 ‘터치’는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의사소통 행위다. 사람들이 아이폰, 아이패드에 열광하는 심리학적 이유는 바로 이 터치 때문이다. 신체적 접촉이 사라진 디지털 세상에서 내 손 끝의 세밀한 움직임에 반응하는 기계가 생겨났다. 손가락을 벌리고 좁힐 때마다 화면의 변화가 일어나고,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새로운 상이 열린다. 반드시 맨손으로 만져야 반응한다. 정말 눈물 나도록 감격적이지 않은가? 그래서 40대 중년 남자들이 아이폰에 더욱 열광하는 것이다. 주위를 돌아보라. 요즘 아저씨들은 제각기 아이폰만 만지작 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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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롬살롱과 아이폰의 공통점은 바로 ‘터치’를 통한 위로다. 나는 이를 ‘배려경제’라고 정의한다. 오늘날 이 배려경제의 범위는 엄청난 규모로 확장되고 있다. 곳곳에 널려 있는 발마사지, 스포츠마사지, 타이마사지, 안마시술소가 바로 그것이다. 좀 더 넓은 의미에서 ‘코칭’ ‘상담’ ‘심리치료’와 같은 ‘마음의 터치’와 관련된 각종 산업도 이 배려경제에 해당된다.
■ 설레는가? 그럼 살 만한 거다!
어떤 뛰어난 건축가도 개미의 건축 능력을 뛰어 넘을 수 없다. 개미가 집단으로 이뤄내는 건축물은 완벽하다. 그러나 인간이 개미보다 위대한 이유는 건축물의 완성된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상상할 수 있다는 거다.
유학 시절 독일어 원문을 쩔쩔매며 읽었던 마르크스의 ‘자본론’ 어딘가에 있는 내용이다. 행동을 하기 전에 목표를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이라는 이야기다. 이와 관련해 마르크스 심리학에서는 ‘행동’과 ‘행위’를 구별한다. 반사적 혹은 본능에 따른 움직임은 ‘행동’이고 목적이 전제된 움직임은 ‘행위’다.
목적과 상상력, 이 두 가지가 인간 행위의 본질이다. 목적을 떠올리고 그 목적을 향한 행위를 가능케 하는 그 힘의 실체는 무엇일까? 그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느껴지는 심리적 경험의 내용은 과연 무엇일까? 이를 심리학에서는 ‘모티베이션’이라는 개념으로 다룬다. 그렇다면 ‘모티베이션’ 혹은 ‘동기’로 번역되는 이 실행 동력의 한국식 조작적 정의는 과연 어떤 것일까?
‘설렘’이다. 가슴이 뛰고, 자꾸 생각나고, 목표가 이뤄지는 그 순간이 기대되는 그 느낌을 우리말로는 ‘설렘’이라고 한다. 설렘이 있어야 상상 속의 목표가 구체화되고 현실화된다. 설렘이 있어야 목표를 이뤄나가는 과정에서의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 행복과 재미의 구체적 내용도 설렘이다. 설레는 일이 있어야 삶이 행복하고 재미있다는 이야기다.
행복과 재미에 관한 어떤 사회문화적 담론이 존재하지 않는 이 사회에는 감각적이고 말초적 재미만 남아 있다. 딸 같은 걸그룹 허벅지나 아들 같은 아이돌 초콜릿 복근이나 이야기하는 방식으로는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 모여 앉으면 막장드라마 이야기를 반복하고, 허구한 날 정치인 욕하는 방식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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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는 삶이 절대 흥미진진해지지 않는다. 폭탄주 마시며 롬살롱에서 아가씨 아랫도리나 비비는 방식으로는 절대 즐거워지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설렘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삶이 재미없는 이들은 대부분 세상이 뒤집어지는 어마어마한 재미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그런 재미는 없다. 행복을 거창하게 생각해서는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 내가 좋아하는 게 분명해야 설레는 삶을 살 수 있다. 방법은 간단하다. 지난 한 주간 내 일상에서 가장 기분 좋았던 순간을 떠올려 보면 된다. 내가 가슴 설레며 기다렸던 일을 기억해내면 된다. 바로 그 일들이 내가 재미있어 하는 것들이다. 그 설레는 일들을 끊임없이 계획하며 살면 된다. 설렘이 없다면 살아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계절이 바뀌는 것이다 설레라고 ……
■ 세상의 모든 아들은 아버지를 들이 받는다
아들을 팼다. 아직도 마음이 아프다. 때린 손은 더 아프다. 야단쳤다든가, 혼낸 것이 아니다. 팼다. 아버지로서, 아니 남자로서의 자존심이 형편없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고3인 아들의 일상문제로 목소리를 높이다가 내가 무척 흥분했던 모양이다. 내가 때릴 듯 손을 치켜들자, 아들은 내 손목을 꽉 잡았다. 키는 물론 몸집이 나보다 훨씬 큰 아들에게 내가 힘으로는 당할 수는 없었다. 정말 꼼짝하기 어려웠다. 당황한 내거 어쩔 줄 몰라 하자 슬그머니 손을 놓는다. 그 상황에서도 아들은 아버지인 내 체면을 지켜준 것이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아버지는 기존 질서에 대한 상징이다. 아들이 새로운 세상의 주인이 되려면 기존 질서를 부정해야 된다. 아버지를 죽이는 상징적 살해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리 만만한 대상이 아니다.
자신의 세계를 열어가려면 아들은 어떤 방식이든 아버지를 치받아야 한다. 문명사적 딜레마다. 그래서 역사의 위대한 인물은 대부분 아버지가 없다. 그들의 아버지는 가정 폭력을 일삼거나 무책임하게 집을 나간다. 의붓아버지 밑에서 자라기도 한다. 심한 경우, 알을 깨고 태어나거나 우물가에서 주워 온다. 나는 내 아들이 나보다 훨씬 더 잘되기를 원한다. 그렇게 되려면 어떤 식으로든 나와 갈등해야 한다. 그러니 매번 이런 식이라면 나는 너무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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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차두리의 경기 장면을 해설하는 아버지 차범근의 이야기를 넋을 놓고 들었다. 월드컵 기간 내내 차두리 아빠 차범근 감독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아들을 가진 사내들은 모두 ‘누구의 아버지’로 불리고 싶어 한다. 정신분석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런 일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축구공이다. 그들에겐들 어찌 갈등이 없었을까? 그러나 즐겁고 재미있는 일을 공유하는 부자에겐 갈등의 내용도 그 해결 방식도 다른 것이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나는 내 아들이 아주 어릴 때를 제외하곤 함께 즐겁고 행복했던 기억은 별로 없다. 받아들이기 참 어렵지만 인정해야 한다. 자업자득이다.
■ 자기 열등감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다.
누구나 약점은 있다. 내게도 유일한(?) 약점이 있다. 욱하는 성격이다. 잘 나가다가도 성질나면 확 뒤집어엎는다.
가끔 만나는 고등학교 동창들은 나를 ‘이유 없이 기분 나쁜 녀석’으로 기억한다. 내 맘에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씩씩거리며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때 내 모습만 이야기 한다. 학창시절, 난 정학, 제적을 다 당했다. 다 그 모난 성격 탓이다. 그러니까 그때나 30년이 훨씬 지난 지금이나 난 하나도 안 변한 것이다.
사람은 절대 안 변한다. 나는 심리학자다. 심리학의 발생지인 독일에서 13년간의 유학생활을 포함해 30년째 심리학을 공부하고 있다. 이런 내가 요즘 내린 결론이다. 철든 이후 내 성격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바꿀 수도 없다. 그런데도 사방에서 ‘나를 바꾸라!’고 한다. 살아남으려면 ‘마누라’와 ‘애’만 빼고 다 바꾸라고 한다. 그러니 환장하겠다는 거다. 삼성에 다니는 내 친구는 ‘마누라와 애만 빼고 다 바꾸라’는 구호가 잘못됐다고 투덜거린다. 가장 바꾸고 싶은 마누라만 빼라는 것이 잘못됐다는 거다. 흠, 이 맥락에서 난 별로 할 이야기가 없다. 난 이미,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는 책을 쓴 사람이다.
최근 결함모형에 기초한 현대 심리학에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 ‘긍정심리학’이다. 이제까지 인간의 약점과 부정적 측면에 초점을 맞춰 연구해왔던 현대 심리학의 접근 방식에 대한 반성이다. 인간의 약점을 고치기보다는 각 개인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자꾸 키워나가는 편이 훨씬 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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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적이라는 이야기다. 누구에게나 약점이 있는 것처럼 누구에게나 장점이 있다. 이 장점을 끌어 올리면 약점은 저절로 개선된다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엄밀한 심리학이 되기에는 아직 많은 이론적 약점이 있지만, 긍정심리학은 평생 ‘나 자신이 문제’라는 자괴심에 시달려온 내겐 큰 위로가 된다.
세게 모든 문화권에는 ‘겸손하라!’는 도덕적 명령이 존재한다. 그러나 뒤집어보면, 겸손은 본질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덕목이기 때문에 그런 도덕적 명령이 존재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잘난 멋에 사는 거다. 잘난 체하며 폼 나게 살고 싶어 한다. 아닌가? 겸손한 사람이 진짜 교만한 사람이다. 스스로 얼마나 교만하면, 그 속내를 숨길 수 있을 만큼 여유가 있느냔 말이다.
잘난 척하거나 교만한 것은 그리 나쁜 게 아니다. 가장 인간적인 덕목이다. 세상에 진짜 무서운 것은 남과 비교하며 괴로워하는 ‘자기 열등감’이다. 자기열등감에 한번 빠지면 웬만해선 헤어나기 힘들다. 남과 비교하고 괴로워하고 또다시 비교하고 또다시 괴로워하는 자기부정의 악순환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내 모난 성격을 고칠 마음이 전혀 없다. 지금까지 ‘자~알’살아온 것처럼 앞으로도 그대로 그렇게 살 것이기 때문이다.
■ 새벽에 자꾸 깬다. 신문이 오려면 아직 멀었다.
잠이 오지 않는다. 몸이 아무리 피곤해도 한 번 깬 잠은 다시 오지 않는다. 일어난다. 아내가 돌아눕는다. 아들 방, 부엌과 거실을 오가고 소파에 누웠다 일어나며 동트기를 기다린다. 신문이 오려면 아직 멀었다.
안팎의 자극에 지나치게 예민해지고 초조해하며 수면장애, 불안, 두통, 피로 등이 동반되는 이런 종류의 증상을 ‘신경쇠약’이라고 한다.
몸은 갈수록 느려진다. 노안으로 인해 신문 한 장을 보려 해도 안경을 올렸다 내렸다 하며, 공사가 다망하다. 가까운 이들의 이름을 기억해 내지 못해 끙끙대는 일도 잦아진다. 휴대폰을 사용한 이후로는 제대로 외우는 전화번호도 없다. 이런 낡은 아날로그적 신체로 급변하는 21세기적 삶의 속도를 쫓아가려니 그토록 힘드는 것이다.
삶의 속도가 급변하여 생기는 문화병의 치료법은 의외로 단순하다. ‘걷기’다. 수백만 년에 이르는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우리의 몸과 마음은 ‘걷는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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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에 적응해 발달해왔다. 감당하기 어렵게 빠른 삶의 속도는 불과 지난 몇백 년 동안의 일일 뿐이다. 인류 역사를 하루로 보면 겨우 몇 초 전에 시작된 변화라는 이야기다. 요즘 그래서 ‘올레길’ 등을 찾아다니며 걷느라 난리다. 아주 오래되고 익숙한 삶의 속도를 회복하고 싶은 까닭이다.
내가 최근에 찾아낸 아주 좋은 방법이 있다. 맨발로 걷는 거다. 얼마 전, 가까운 산을 찾았다가 맨발로 걸어봤다. 발바닥으로 느껴지는 흙의 느낌이 그렇게 상쾌할 수 없었다. 그저 한 시간 남짓 걸었을 뿐인데 그날 밤 더없이 깊은 잠에 빠졌다. 잠이 들 때, 잠의 나락에 한없이 떨어지는, 아주 기분 좋은 느낌도 되살아났다. 아침 신문보다 일찍 깨는 새벽이 자꾸 늘어나 괴로운 이들에게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꼭 권하고 싶다. 맨발로 걷기, 온천보다 더 좋다. 새벽에 자꾸 깨지 않고 푹 잘 수 있는 것처럼 행복한 일은 세상에 별로 없다.
■ 그리움을 아는 자만이 기쁨을 안다.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언어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를 ‘그리움’ 이란 뜻의 ‘Sehnsucht’를 꼽곤 한다. 영어로는 ‘갈망’ ‘열망’을 뜻하는 ‘longing’ 으로 번역되나, 정확한 뜻을 전달하지는 못한다. ‘그리움’은 한국어로도 참 아름다운 단어다. 그리움은 ‘그림’ 혹은 ‘글’과 그 어원이 같다. 종이에 그리는 것은 그림이나 글이 되고, 마음에 그리는 것은 그리움이 된다.
인간은 도대체 언제부터 생각하는 능력이 생긴 것일까? 태어나면서부터 바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기가 머리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고 판단하는 심리학적 기준은 ‘흉내내기’에 있다. 아기가 어느 순간부터 타인의 행동을 흉내 내기 시작한다. 그것도 한참 전에 봤던 타인의 행동을 흉내 내는 것이다. 이를 ‘자연모방’ 이라고 한다.
자연모방은 타인의 행동이 머릿속에 그림처럼 남아 있었다는 뜻이다. 이를 스위스 심리학자 피아제는 ‘표상’이라고 정의한다. 표상이란 말 그대로 어떤 대상을 머릿속에 표현하는 것, 즉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생후 약 9개월부터 이 표상 능력이 나타난다. 그러니까 인간은 생후 9개월부터 머릿속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된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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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에 그림을 그린다는 의미로 보자면 ‘그리움’과 ‘생각’은 같은 단어다. 살면서 도무지 그리운 게 없다면 아무 생각 없이 산다는 이야기가 된다. 요즘 내가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멍하니 지내는 것도 도무지 그리운 것이 없기 때문이다. 내 삶의 어느 순간부터 가슴 시린 그리움의 감정이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얼마 전 제주도에 워크숍을 갔다가 서귀포의 이중섭 미술관을 찾았다. 한쪽 벽에 이중섭이 일본에 있는 아내에게 보낸 편지가 전시되어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 피난 온 서귀포에서의 2년이 채 못되는 시간이 이중섭에겐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꿈같은 나날이 된다. 어쩌지 못하는 가난 때문에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서귀포의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이중섭의 편지는 그의 일본인 아내에게 보낸 것이다. 네 장을 빽빽하게 쓴 편지에는 입국 허가와 관련된 단 한 문장을 빼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가족에 대한 그리움뿐이다. 특히 아내에 대한 애틋함은 그녀의 발가락에까지 닿아 있다. 이중섭은 아내의 발가락을 ‘아스파라가스군’이라 부르며 이렇게 쓰고 있다.
“나의 아스파라가스군에게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살뜰한 뽀뽀를 보내오.” “나만의 소중한 감격, 나만의 아스파라가스군은 아고리(이중섭의 별명)를 잊지나 않았는지요?” “아스파라가스군이 춥지 않도록 두텁고 따뜻한 옷을 입혀주오. 그렇지 않으면 다음에 아고라가 화를 낼 거요.”
이 따뜻하고 유머러스한 발가락의 에로티시즘과 행려병자로 홀로 죽어간 이중섭의 초췌한 모습이 오버랩되며 가슴 끝이 꽉 조여든다.
네 장을 가득 채우고도 못내 아쉬운 이중섭의 그리움은 편지지의 귀퉁이마다 작은 삽화로 다시 그려진다. 떨어져 있는 세 식구를 향해 팔을 벌린 자신의 모습, 네 식구가 서로 껴안고 있는 모습, 아내의 얼굴을 구석구석에 채워 넣었다. 특히 발가락을 따뜻하게 하지 않으면 화를 낸다는 문장 뒤에는 화를 내는 듯한 자신의 모습을 귀엽게 그려 넣었다.
그의 아내는 이 편지를 받고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또 보고 싶은 마음에 얼마나 울었을까? 쓸쓸한 이중섭은 가족과의 행복은 채 느껴보지도 못하고 평생 그렇게 그리워하다 죽어갔다. 벌거벗은 아들이 게, 물고기와 노는 장면을 수없이 반복해서 그린 이중섭의 그림들은 그래서 더 처연하다.
그리움을 아는 자만이 자신의 삶에 감사할 줄 안다. 그래서 가끔은 외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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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한다. 가슴 저린 그리움이 있어야 내가 이제까지 살아온 삶에 대한 기쁨, 내 가족에 대한 사랑, 내가 소유한 모든 것들에 대한 감사가 생기는 까닭이다. 나이 들수록 내 삶이 허전한 이유는 그리움이 없기 때문이다. 도무지 그리운 게 없으니 삶에 어떤 기쁨이 있고, 무슨 고마움이 있을까.
■ 루저를 위한 달걀 프라이는 없다.
지난 시절, 한국 남자를 지켜온 세 가지 자부심이 있었다. 우선 생산인으로서의 자부심이다. 누가 뭐래도 오늘날 대한민국이 이 정도까지 된 것은 한국 남자들의 희생 때문이다.
50-60년 전, 우리가 미군 ‘찌프차’를 따라 다니며 “기브 미 초콜릿!”을 외치던 때, 장충체육관과 광화문 오른쪽의 쌍둥이 건물(미 대사관과 문화관광부 건물) 은 필리핀 사람들이 지어주었고 태국 사람들도 식량 등 우리에게 큰 도움과 함께 어깨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들이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을 찾고 있다.
그런데 그때의 주역들이 지금은 떨고 있다. 자신의 목숨까지 바칠 수 있었던 회사에서 언제든지 잘려나갈 수 있다는 불안감에 오늘도 전전긍긍하고 있는 것이다. 젊었을 때는 회사에서 밀려나는 것에 대해 어떤 두려움도 없었다. 내가 온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젠 아니다. 나 없이도 회사는 아주 잘 돌아간다.
두 번째 자부심은 가장으로서의 자부심이다. 바깥에서 아무리 비굴하게 돈을 벌어도 , 집에 들어서는 바로 그 순간부터 우리 아버지들은 왕이 되었다.
아버지는 그러셔야만 했다. 우리 가족의 운명은 오직 아버지의 어깨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의 아내들은 더 이상 남편들을 위해 밥을 짓지 않는다. 오직 아이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한다. 아내가 내가 그렇게도 좋아하는 청국장찌개를 끓여주지 않은 지는 정말 오래 되었다. 아이들이 청국장 냄새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아이들이 좋아하는 스파게티는 매주 쉬지 않고 식탁에 오른다. 느끼한 스파게티 소스를 내가 그토록 싫어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이 없다. 이제 스파게티와 붉은 토마토소스나 희멀건 크림소스에 질릴 만도 하지만 아이들은 매번 피자 아니면 스파게티다. 결국 난 식탁 한 구석에서 김치와 남은 반찬을 긁어 밥 한 공기를 때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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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자존심은 수컷으로서의 자부심이다. 누가 뭐라 해도 남편은 아내를 만족시켜줄 수 있었다. 아니, 그렇다고 생각했다. 밥을 먹다가도 식탁을 치우고 “하자!”하면 바로 할 수 있었다. 아내는 넘쳐나는 남편의 성욕을 귀찮아하고 부담스러워했다. ‘짐승’같다고도 했다. 아, 그런데 그게 전혀 아니었다. 어린 아내는 아무 것도 몰랐을 따름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정은 달라진다. 달라져도 그렇게 달라질 수가 없다.
옛날처럼 내키는 대로 그냥 “하자!”고 했다간 큰일 난다. 촛불도 켜야 하고 분위기 있는 음악도 배경음악으로 깔아야 한다. 깨끗이 샤워하고 향수도 뿌려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게 있다. 아주 오래 기술적으로 잘 버텨야 한다. 갈수록 어려워진다. 두려워진다.
‘호주제’도 폐지되었다. 아이들이 아빠의 ‘성’이 맘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버꿀 수 있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자신이 여전히 가족을 대표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 호주제가 사라진 것이다. 더 이상 자신이 자동적으로 가족을 대표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부단히 노력하고 애쓰지 않으면 그 대표 자리‘는 단번에 날아간다.
이젠 동양 남자 특유의 짧은 다리까지 문제가 된다. 키가 180Cm 안되면 ‘루저(loser)’라는 거다. 미치고 환장할 일이다.
어쩔 수 없다 이제까지 남자들의 눈길에 맞춰 가슴에 소금물 주머니 삽입하고, 엄지발가락이 휘어지도록 높은 하이힐을 신어 엉덩이를 치켜세워야 했던 여인들이 지금까지 참고 있었던 이야기를 아주 조금씩 내놓고 하기 시작했을 뿐이다.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라는 이야기다. 이 엄청난 문화 변동의 소용돌이 앞에서 철없는 사내들은 그저 ‘루저’라는 단어에 씩씩댈 뿐이다. 이젠 더 이상 달걀 프라이 안 해 준다고, 게 껍데기에 밥 비벼 먹지 못한다고 ……. 이런 루저 같으니라고 …….
* 루저(loser) : 실패자, 불량품, 손해 보는 사람
■ 이러다가 정말 한 방에 훅 간다!
최근 남자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던 대기업 부사장, 노벨상 후보로도 꼽혔다는 교수, 탁월한 능력의 의사가 자살한 기사를 연달아 읽었다.
바요론 쥐프케는 남자들이 한 번 빠지면 도무지 헤어 나올 수 없는 심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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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를 4단계로 설명한다. 우선 자신의 내면을 외면하기 시작한다. 이 ‘감정 부정’ 혹은 ‘감정 회피’의 결과는 두 번째 단계로 넘어 간다. ‘남성적 외양화’다. 과도하게 ‘사내스러움’을 지향한다는 이야기다. 술만 먹으면 욕하면서 터프함을 과장하는 이들을 자주 본다. 맛이 가기 시작할 때 나타나는 증상이라는 거다. 이 상태가 극에 달하면 ‘영웅주의’와 ‘지배욕구’라는 독단적 이데올로기의 세 번째 단계로 이어진다. 웬만큼 돈도 벌고 사회적 지위를 얻으면 다들 정치하려고 달려드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 영웅주의의 실체는 ‘무기력감’이다. 자신의 무기력을 숨기려는 감정 방어의 결과란 이야기다.
여기까지 온 남자들에게 남겨진 마지막 네 번째 단계는 ‘남성 우울증’이다. 이 우울증은 아내에 대한 정서적 의존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아내는 결코 자신의 안식처가 아님을 알게 된다. 자신을 귀찮아하고 힘들어하는 아내의 속마음이 느껴지면 배신감과 분노를 느끼게 된다. 이런 식의 아내에 대한 애증의 모순적 감정 또한 마지막 단계에서 나타나는 특징이다.
비요튼 쉬프케의 결론은 이렇다. ‘아내 혹은 여성으로부터 독립하라.’
나이 들어가며 자꾸 아내에게 정서적으로 의존적이 되는 것은 자신의 내면과 마주치는 게 두려운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강조한다.
‘늙으면 마누라밖에 없다’고 하는 사내들은 아내로부터 실망, 허전함, 더 나아가 배신감을 느낄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정서적으로 홀로 서란 이야기다. 어차피 혼자라는 뜻이다. 내 아내를 비롯한 한국의 여인들은 독일의 그 뻣뻣한 여인들과는 다르다며 중얼거렸지만, 뭔가 뒤끝이 계속 켕기는 느낌은 왜일까?
■ 한국 남자들이 말 귀를 못 알아듣는 이유
살다 보면 그런 인간 꼭 있다. 도무지 남의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 한 이야기 하고 또 해도 매번 같은 자리다. 가슴이 답답하다 못해 터질 것 같다. 특히 나 같은 교수들이 더 그렇다. 평생 남을 가르치기만 할 뿐 남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모든 직업에는 어쩔 수 없는 직업병이 있다. 강력반 형사를 경찰서 바깥에서 만나면 인상이 험악해 보이는 경우가 많다. 매일같이 강력범들을 상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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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보니 그렇다. 표정이 밝은 의사들은 별로 없다. 매일같이 찌푸린 얼굴의 환자들만 대하다 보니 그렇다.
의사소통 장애는 교수의 직업병이다. 나름 알량한 교수인 나에 대한 내 가족의 불만도 마찬가지다. 매번 자기 이야기만 한다는 거다. 그래서 서울에서 부산까지 양 100마리를 끌고 가는 것보다 교수 3명 설득해서 데리고 가는 게 훨씬 어렵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교수뿐만이 아니다. 대부분의 한국 남자들이 그렇다. 나이가 들수록 고집만 세지고 남의 말귀는 못 알아듣는다. 이 심각한 의사소통 장애의 원인은 단순하다. 의미 공유가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할 때, 내가 이해하는 ‘사랑의 의미’와 상대방이 생각하는 ‘사랑의 의미’가 같다고 누가 보장해주는가?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고 생각한다. 사랑에 관한 암묵적 의미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수록 부부관계가 삐걱대는 이유는 서로 이해하는 사랑의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결혼 25년차인 내게 사랑은 ‘아침식사’다. 집에서 아침식사를 못 얻어먹으면 더는 사랑 받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내 아내에게 사랑은 ‘배려’다. 자신과 아이들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과 배려가 사랑의 기준이다. ‘아침 식사’와 ‘배려’의 의미론적 구조는 전혀 다르다. 그래서 힘들다.
말귀 못 알아듣는 한국 남자들의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의 내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에 대해 너무 무지하다는 사실이다. 내가 도대체 뭘 느끼는지 알아야 타인과 정서를 공유할 수 있을 것 아닌가? 자신의 내면에 무지한 이들에게 나타나는 결정적인 문제는 판단력 상실이다.
내 내면의 느낌에 대한 형용사가 다양해져야 남의 말귀를 잘 알아 듣게 된다. 자신의 느낌을 표현하는 단어라곤 기껏해야 쌍시옷이 들어가는 욕 몇 개가 전부인 그 상태로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는 거다.
■ 제발 ‘나’ 자신과 싸우지 마라!
새해는 결심하라고 있는 거다. 결심하지 않으면 절대 새해가 아니다. 그런데 새해에 결심한 일들은 죄다 작심삼일이다. 도대체 왜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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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의 결심이 좌절되는 이유는 내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그 옹골찬 계획을 이뤄내기 위한 방법론에 뭔가 치명적인 오류가 있는 까닭이다. 나 자신과 싸우려고 달려들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나 자신과의 투쟁’이 하나의 문화 트랜드가 되었다.
새해에는 즐거운 결심을 해야 한다. 새해 첫날부터 백도대간 종주를 계획하거나 차가운 바닷물에 다이빙 하지 말자는 거다. 제발 나를 괴롭히며 싸워 이기려고 달려들지 말자. 이미 충분히 많아 싸웠다. 나 자신은 절대 싸워 이겨야할 적이 아니다. 조곤조곤 이야기하며 설득해야 할 아주 착하고 여린 친구다.
“새해에는 내거 좋아하는 일만 한다.”
세상에 어찌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이 엄청난 결심을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 행복해진다. 그동안의 내 소심함과 비겁함이 한 방에 날아가는 느낌이다. 너무 통쾌하다. 세상을 다 가진 느낌이다. 그래, 새로운 한 해는 바로 이런 기분으로 시작하는 거다.
■ 공부 못하는 자녀를 둔 부모들에게!
옛날에는 무조건 공부를 잘해야 했다. 좋은 대학을 나온 게 인생의 행복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그때는 인생이 진짜 짧았다. 지금 학부모 세대가 대학에 다니던 1970-1980년대의 한국인 평균 수명은 60세를 겨우 넘긴 수준이었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은 100세를 넘겨 산다. 아주 오래 산다는 이야기다. 평균 수명 60세 때의 20세와, 평균 수명 100세 때의 20세의 존재론은 전혀 다르다.
우리의 자녀들은 전혀 다른 세상을 살아간다는 이야기다. 굵고 짧게 사는 세상이 아니다. 길게, 행복하게 살아야 하는 세상이다. 인생의 기회도 여러 번 온다. 좋은 대학 가는 것보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게 훨씬 더 행복한 세상이다. 오래오래 살아야 하는 세상에서 젊어서 일찍 잘되는 것처럼 위험한 일은 없다.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말 솔직한 한마디 더 보태자. 나도 내 아들이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갔다면 이런 이야기 절대 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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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이 언제부터 미친 걸까?
시간이 미쳤다. 갈수록 정신없이 빨리 간다. 왜 나이가 들수록 시간은 자꾸 빨리 가는 걸까? 심리학자들의 대답은 아주 단순명료하다. 기억할 게 전혀 없기 때문이다.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는 내용이 많으면 그 시기가 길게 느껴지고, 전혀 기억할 게 없으면 그 시기가 짧게 느껴진다. ‘회상효과’다
인생에서 어느 시절의 기억이 가장 뚜렷하냐고 물으면 대부분 학창시절을 언급한다. 노인들도 학창시절의 기억은 아주 생생하게 이야기 한다. 가슴 설레는 기억이 많은 그 시절의 시간은 아주 천천히 흘렀다. 모두가 새로운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생의 어느 시기부터 시간은 아주 미친 듯 날아가기 시작한다. 당연하다. 정신없이 바쁘기만 했지 기억할 만한 일들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죄다 반복적으로 어쩔 수 없이 처리해야 하는 일들뿐이었다. 이런 식이라면 올 한 해도 불 보듯 뻔하다. 일 년 뒤, 난 또다시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미친 시간’에 한숨 쉴 것이다.
시간이 빨리 지나간다고 느낄수록 긴장해야 한다. 의미 부여가 안 되니 쉽게 좌절하고, 자주 우울해지고, 사소한 일에 서운해진다. 이런 식이라면 ‘성격 고약한 노인네’가 되는 것은 아주 순식간이다. 삶의 속도와 기억의 관계에 관한 심리학자들의 주장이 옳다면 이 ‘미친 시간’을 천천히 흐르게 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기억할 일들을 자꾸 만들면 된다. 평소에 뻔하게 하던 반복되는 일들과는 다른 것들을 시도하라는 이야기다. 인생과 우주 전반에 관한 막연하고 추상적인 계획은 아무 도움 안 된다. 아주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경험을 시도해야 한다.
오늘도 술잔 앞에 두고 부하 직원들에게 한 이야기 하고 또 하지 말자는 거다. 이제 다 외울 지경인 윗사람 이야기 참고로 들어줘야 하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잘 알면서 도대체 왜들 그러는가. 이 추위를 뚫고 집까지 한 번 걸어가 보는 거다. 올레길을 걷는다며 돈 들여 제주도까지 갈 일이 뭐가 있겠는가. 오늘 직접 해보는 거다. 너무 무모하다. 추위가 두려워 비겁해지면 한강 다리라도 한번 걸어서 건너보자. 도대체 평생 살면서 한강 다리를 걸어서 건너본 기억이 있긴 한가. 미술관과 전시회에는 몇 번이나 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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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공하려면 왜 꼭 참고 인내해야만 할까?
왜 성공한 사람들은 하는 이야기가 다 똑 같을까? 마치 서울대 수석 합격자가 ‘잠은 충분히 잤으며, 학교 공부를 충실히 했다.’고 대답하는 것처럼, 한국 사회의 성공 네러티브는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있다.
일단 성공한 이들은 젊은 시절 엄청나게 고생한다. 고생하지 않으면 성공이 아니다. 그들의 부모는 대부분 찢어지게 가난하다. 젊은 시절 의욕만 가지고 무모하게 달려들다가 처절하게 무너지고, 실패가 반복된다. 믿었던 사람에게 철저하게 배신을 당한다. 몇 번의 부도도 필수다. 좌절한 주인공은 한강 주변을 기웃거리기도 한다.
다시 굳게 마음을 다져먹고 정말 열심히 일한다. 남보다 늦게 자고 먼저 일어난다. 참고 인내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일이 잘 풀려 나간다. 한 번 풀리기 시작하더니 이젠 걷잡을 수 없다. 성공한 주인공은 맨 마지막에 항상 힘 줘 이야기한다.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며 노력했다고.
왜 성공한 사람은 재미라고는 전혀 없는 성직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가? 왜 재미있고 즐거워서 성공했다고 이야기하는 경우는 전혀 없을까? 왜 꼭 실패와 역경을 딛고 성공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일까? ‘여유’ ‘재미’ ‘나눔’과 같은 풍요로운 이야기는 왜 한국식 성공 내러티브에는 전혀 포함되지 않는 걸까?
이젠 ‘근면’ ‘성실’ ‘고통’ ‘인내’ 같은 지난 시대의 내러티브와는 구별되는 새로운 차원의 성공 내러티브가 필요하다. ‘재미’ ‘행복’ ‘즐거움’의 내러티브가 진짜 성공한 삶의 조건이다.
* 내러티브(narrative) : 이야기. 이야기체의 화술. 사건의 전말 경험담 등을 흥미 있게 이야기하는 것.
■ ‘아저씨’ 개념의 해석학적 순환
개념을 읽어내면 세상의 변화가 보인다. 특히 문화를 비교할 때 개념분석은 아주 효과적인 해석학적 도구다. 예를 들어 다른 문화에서 발견되지 않는 개념이 우리에게 있다. ‘情’이다. 서구의 ‘사랑’과는 구별되는 아주 독특한 개념이다.
한국인들은, 적어도 중년 이상의 부부들은 서로 사랑하지 않아도 함께 살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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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놈의 정’ 때문이다. 요즘 이혼율이 늘어나는 이유는 ‘그놈의 정’이 개념적으로 더는 유효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과 한국적 현실의 해석학적 순환이 이제 막을 내렸다는 뜻이다. ‘정’이라는 권력 담론이 해체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 변화의 결과는 고스란히 중년 남자들의 몫이 된다.
더 이상 ‘정’이란 개념의 ‘권력 프리미엄’을 누릴 수 없는 불안한 한국 중년 남자들을 설명하는 개념이 새롭게 구성된다. ‘아저씨’다. 물론 이전에도 ‘아저씨’라는 호칭은 존재했다. 그러나 문화적으로 특별한 의미를 갖는 개념은 아니었다. 지금 아내들이 남편을 ‘아저씨’라 부르는 호칭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상상에 맡긴다.
■ 망사스타킹 - 보이지만 안 보이는 것으로 하기
여자들은 왜 망사스타킹을 신는가? 왜 가슴골이 깊게 파인 옷을 입는가? 왜 그토록 짧은 치마를 입는가? “남자들 보라고……”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다가 주위의 여인들로부터 집단 테러(?)를 당한 적이 있다. 여인들의 비난이 옳다. 절대 남자들 보라고 망사스타킹을 신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그 여인들의 주장처럼 ‘자기만족’을 위해 입는 것도 절대 아니다. ‘자기만족’론은 ‘남자들 보라고’론 보다 더 어설프다. 설득력도 전혀 없다.
‘보이지만 안 보이는 걸로 하기’다. 빤히 보이지만 절대 내놓고 들여다봐서는 안 된다. ‘발정기의 기호학적 매개’의 미학적 완성은 바로 망사스타킹과 같은 ‘훔쳐보기’와 ‘드러내기’의 변증법적 긴장에 있는 것이다. 그 유명한 샤론 스톤의 ‘다리 바꿔 꼬기’야말로 이런 미학의 20세기적 결정판이다. 눈앞에 빤히 드러내지만 안 보이는 걸로 하자는 것이다.
트위터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관음증과 노출증의 21세기적 방식이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스마트폰과 같은 디지털 기기를 통해 자신만의 은밀한 느낌, 생각, 행위를 적나라하게 알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또 서로 훔쳐본다. 서로의 내밀한 세계를 디지털 기기의 액정 화면을 통해 쓰다듬고 어루만지는 ‘디지털적 애무’가 대낮에 사방에서 실시간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봄에는 좀 야한 생각을 해도 된다. 매일같이 컴퓨터 화면을 통해 ‘훔쳐보기’와 ‘드러내기’에 몰두하면서, 더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봄날의 에로티시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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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술꽁지 내리며 엄숙하고 근엄한 척하지 말자는 거다.
개나리가 노랗게 올라오고 목련이 하얀 속살을 드러내는데도 가슴설레지 않는다면 도대체 언제 살아있음을 느낄 것인가? 봄에는 곁눈질로 망사스타킹을 좀 훔쳐봐도 된다. 그러라고 봄이 오고, 산에 들에 진달래도 피는 거다.
■ 그러니까 친구가 없는 거다.
친구가 많으려면 남에게 ‘순서’를 제때 줄 줄 알아야 한다. 상대방이 폼 날 때 순서를 줘야 한다는 이야기다. 어떤 인간을 만나고 나면 온종일 기분이 나쁘다. 자기만 이야기 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어떤 이를 만나면 참 상쾌하다. 내가 폼 날 때 순서를 주기 때문이다. 유머감각이 좋아야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유머는 남에게 ‘웃을 순서’를 주는 가장 훌륭한 순서 주고받기의 수단이기 때문이다.
방송에 출연할 경우, 사회자가 누구냐에 따라 난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얼마 전 한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한 적이 있다. 그 사회자는 내가 헤맬 듯 하면 날 시켰다. 어려운 이야기만 나오면 꼭 내게 ‘순서’를 주는 것이었다. 난 매번 “네?” 만 연발 할 뿐이었다. 방영되는 화면을 보며 난 열 받아 죽는줄 알았다. 화면에 비치는 나는 완전 바보였다. 요즘 난 가는 곳마다 그 인간을 욕하고 다닌다. 아주 죽도록 밉다.
리더는 훌륭한 사회자가 되는 것을 뜻한다. 상대방을 폼 나게 만들어 줘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남에게 순서를 안 준다. 폼 날수록 자기만 이야기 한다. 가끔 머쓱해서 썰렁한 농담을 던져보지만, 아무도 안 웃는다. 이는 설득력 없는 정치인들이 갖고 있는 공통된 문제이기도 하다. 어설픈 진보도 마찬가지다. 이 경우, 상대방의 반응은 대부분 이렇게 된다.
“그래 당신 말이 다 맞아. 그래서?”
이해는 했지만 안 받아들이겠다는 이야기다. 인간은 절대 이런 방식으로 설득당하지 않는다. 대화가 아니라 강요 혹은 계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적 지위가 높아질수록, 스스로 옳다고 생각할수록,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생각할수록 친구가 없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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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는 ‘개’ 아니면 ‘애’다.
‘사회적 참조’는 사회의 규범과 가치들을 매개해 성숙을 가능케 하는 ‘문화 학습’이다. 문제는 이 사회적 참조에 엄청난 남녀 차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여자아이들의 사회적 참조는 문화적으로 장려된다. 남자아이들에 비해 정서적 표현이 훨씬 자연스럽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반면 남자아이들의 정서 표현은 문화적으로 억압된다.
남자아이들이 울면 부모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다 “울지 마! 사내놈이 왜 울어!” 좋아서 막 날뛰면 도 그런다. “사내놈이 왜 그렇게 가볍게 까불대니!”
도대체 우는 것과 즐거움을 표현하는 것이 ‘사내놈’과 무슨 상관이 있는 것까? 자신의 내면을 표현하는 능력이 애초부터 억압되어 있으니 어찌 남의 정서를 읽을 능력이 발달할 수 있을까? 남자들에게는 사회적 가치, 도덕적 규범을 내면화하는 사회화 절차가 기초부터 꼬여 있다는 이야기다. 사회적 참조가 불가능한 남자들에게 성숙한 의사소통을 기대하는 것은 참으로 무모한 일이다. 철없는 남자들에게 남겨진 방법은 둘 중 하나다. 개처럼 으르렁거리거나 애처럼 징징대거나…….
내 원고를 찬찬히 읽어보던 내 아내는 이렇게 한 마디 덧붙인다. “당신은 개이면서 동시에 애야!” 아, ‘개’이면서 동시에 ‘애’를 한마디로 줄이면 이렇게 된다. “개…0…끼!”
■ 진짜 무서운 건 늙은 수컷들의 질투다!
남자의 질투가 더 무섭다고 한다. 그렇다. 질투는 유치하고 비겁한 인간의 특징이 아니다. 인간 문명의 동력이다. 성서에 나오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질투와 문명의 상관관계에 관한 심리학적 알레고리다. 최초의 인간 아담의 맏아들인 카인은 동생 아벨을 죽인다. 신이 동생의 제사만 받자, 카인은 질투한 나머지 동생을 뒤에서 때려 죽인 것이다.
흥미롭게도 신은 카인을 벌하지 않는다. 오히려 특별한 상징을 부여해, 다른 사람들이 카인을 죽일 수 없게 만든다. ‘카인의 징표’다. 카인은 신이 만든 에덴동산을 떠나 새로운 도시를 건설한다. 인간 문명은 질투로 시작되었
다는 이야기다. 결국 질투를 뜻하는 ‘카인의 징표’는 인류가 지속되는 한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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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히 떼어낼 수 없는 인간 심리의 본질인 것이다.
영국 심리학자 크리스토퍼 보이스는 12,000명을 대상으로 돈과 행복의 관계를 연구했다.
- 숙련공 K씨는 한 달에 200만원을 받는데 자기회사에서 최고다. 친구 C씨 는 은행에서 300만원을 받는데 은행원 중 중간쯤이다. 누가 더 행복한가? K씨다.
- 결론은 비교집단의 보수와는 상관없이 소석 집단의 수입이 늘어나야 또 소속 집단에서 상위라야 행복하다.
친구들과 놀 때에도 잘나가는 인간들과는 안 만나는 게 최고다. 내 비교 집단에서 아예 제외해버리는 것도 행복의 한 방법이라는 이야기다. 비교 자체가 아예 불가능한 사람들과 노는 것도 괜찮은 대안이 된다.
그리고 매력적인 여인들이 있는 곳에는 웬만하면 함께 모이지 않는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아름다운 여인 앞에서는 다 같은 수컷이기 때문이다. 아는가? 세상에 무서운 게 늙은 수컷들의 질투라는 사실을.
■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가슴 철렁하지 않는가? 휴가철에 읽을 책을 추천해달라는 원고 청탁을 받을 때마다 내가 꼭 추천하는 책의 제목이다. 그대는 도대체 어떤 어른인가? 아침마다 ‘남의 돈 따먹기 정말 힘들다’며 머리카락 휘날리며 달려 나가려고 어른이 된 것은 아니지 않는가? 평생 이렇게 먹고 살기도 바쁘게 살다 가려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언젠가 책방의 판매대 구석에 꽂혀 있는 이 책의 제목을 보는 순간, 뒤통수를 호되게 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독일어로 된 책의 원 제목은 좀 생뚱맞다. ‘오늘 존슨은 오지 않는다’는 원제목을 이처럼 기막힌 한글 제목으로 바꿨다. 책 내용은 아주 한가로운 노인의 세상을 보는 따뜻한 시선에 관한 이야기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차이에 관대해지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그렇다. 미국 텍사스 주립대학 심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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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제임스 페네베이커 교수 등은 8세부터 85세까지 3280명의 일기 같은 기록과 유명작가 열 명의 작품들은 분석했다. 일반인들이 사용한 3800만 단어와 작가들의 900만 단어를 나이에 따라 분류해보니, 나이가 들수록 긍정적인 정서를 더 많이 표현하고 있었다. 분노, 좌절, 슬픔과 같은 단어들은 젊은이들의 언어였다.
나이가 들수록 ‘나’ ‘나의’ ‘나에게’와 같은 단어들은 줄어들고 ‘우리’와 같은 공동체 관련 단어들이 늘어났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과 관련한 단어들도 줄어들었다. 시간에 덜 쫓긴다는 이야기다. 동사의 시제에서도 차이가 났다. 동사의 과거형은 젊은이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고, 중년은 현재형을, 노년으로 갈수록 미래형을 더 많이 사용한다는 것이다. 젊은이들이 미래를 더 많이 이야기하고 노인들이 옛날이야기를 더 많이 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정반대라는 것이다. 페네베이커 교수는 이런 변화를 ‘지혜’라고 표현한다. 지혜롭게 나이가 든다는 것은 내면의 시간이 아주 많아지는 것을 뜻한다.
태풍에 뿌리째 뽑힌 나무는 한결같이 아름드리나무다. 폼나 보이지만 의외로 쉽게 무너진다. 승승장구하던 사람이 어느 날 맥없이 생을 마감한다. 그는 성공했는지는 몰라도 자신의 내면을 위한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나무는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부러지지 않는다. 채 몇 센티미터도 되지 않는 가는 줄기가 높게는 수십 미터까지 올라간다. 마디가 있는 까닭이다. 마디가 없는 삶은 쉽게 부러진다. 아무리 바빠도 삶의 마디를 자주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주말도 있고, 여름휴가도 있는 거다. 시간이 아주 많은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 삶의 마디를 잘 만들어 ‘가늘고 길게’ 아주 잘 사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옛날이야기는 죄다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았답니다’라고 끝나는 것이다.
한국 사회 모든 문제의 원인은 ‘굵고 짧게’ 살려는 이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사회적 변비다. 그래서 곳곳이 꽈~악 막혀 있는 것이다.
■ 그 표정으로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인간의 감정은 아주 쉽고 간단하게 전염된다. 실제 연구 결과가 그렇다. 삶이 즐겁고 행복한 친구가 반경 1.6Km 안에 있을 경우 내가 행복감을 느낄 확률은 25%높아진다고 한다. 니컬러스 크리스타커스와 제임스 파울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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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부터 2003년까지 21-70세 성인 5124명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다. 행복하고 즐거운 감정은 표정, 몸짓, 말투로 전염되기 때문이다. 오래 산 부부가 서로 닮아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생긴 게 닮아가는 게 아니다. 정서 표현의 방식이 닮아가는 것이다.
긍정적 정서보다 부정적 정서가 더 빨리 전염된다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 주위에 삶이 우울하고 꼬인 인간을 두면 내 인생이 불행하고 시커멓게 될 확률은 훨씬 더 높아진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남자들의 표정은 아주 심각한 위기 상황이다.
요즘 휴가지나 마트에서 유모차나 카트를 끌고 아내 뒤를 조용히 따르는 젊은 아빠들을 흔히 볼 수 있다. 내가 칭찬했더니 아내가 아니란다. 그 젊은 아빠들의 태도가 전혀 아니란다. 남자들의 표정이 그런 건 하나도 안 즐겁기 때문이다. 의무와 책임으로 어쩔 수 없이 하는 태도는 감각기관을 통해 그대로 전달된다. 인간 상호작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얼굴 표정, 몸짓, 말투다. 심리학자 메라비언은 상대방과 이야기할 때 시각이 55%, 청각이 38%의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정작 전달하고 싶은 말의 내용은 고작 7%라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시각과 청각의 비언어적 표현을 읽어내는 시간은 0.1초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미 말을 꺼내기 전에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가 결정된다는 이야기다.
기분 좋은 느낌, 상쾌함을 먼저 전달해야 내 이야기를 듣는다. 이건 억지로 꾸민다고 되는 게 아니다. 순식간에 전달되기 때문이다. 나 스스로가 진정으로 즐겁지 않으면 상대방을 설득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제발, 자기 자신부터 설득하란 이야기다.
■ 마음의 정기 검진이 시급하다.
40대부터는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전립선이며 대장검사를 받았다. 병원을 나서며 생각했다. 소변줄기가 막히는 것도 그렇게 두려워 그 난감한 전립선 검사조차 마다 않는데, 온통 상처투성이인 마음에는 왜 정기검진이 없을까? 건강검진뿐만이 아니다. 자동차도 때 되면 정기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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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를 받는다. 길바닥에 느닷없이 차가 서버리는 황당한 상황이 두려워 아주 철저하게 닦고 조이고 기름 친다. 그러나 내 마음이 도대체 어떤 상태인지 검사해볼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그토록 힘들고 외롭고 고통스러운 시간들을 지금까지 버텨온 내 마음이 아무 이상 없을 거라는 그 황당한 믿음은 도대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내 마음이 제대로 작동하는가를 판단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마음의 건강은, 하루에 도대체 몇 번이나 기분 좋게 웃는가로 판단한다. 우리는 즐겁고 행복하려고 산다. 행복과 재미의 신체적 증상은 웃음이다. 그런데 종일토록 제대로 웃었던 기억이 전혀 없다면 그건 뭔가가 분명 잘못된 거 아닌가? 기껏해야 비웃음, 쓴웃음 아니던가? 마음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데 어찌 몸이 제대로 작동하겠는가? 마음의 질병은 반드시 몸의 질병으로 이어진다는 게 ‘심신의학’의 핵심이다.
그래서 든 생각이다. 마음의 건강검진도 의료 복지 차원으로 의무화 하는 거다. 이젠 그럴 때가 됐다. 결국은 마음의 문제라고 다들 이야기하면서 사방에 이토록 마음이 아프다고 아우성인데…….
■ 불안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인간은 불안하다. 유한한 존재는 죄다 불안하다. 그 불안의 실체는 시간이다. 도무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불안도 마찬가지다. 모든 사람은 죽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잘 들여다보면 죽는 것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두려운 것이다. 죽음에 대한 불안 또한 그 본질상 시간에 대한 불안이다.
도무지 어디로 흐르는지 모르는 시간이 시계라는 3차원의 물건에 들어가자. 시간은 이제 반복되는 게 되었다. 그것도 매일 반복되는 거다. 오늘 잘못되면 내일 다시 시작하면 된다. 그것도 잘 안 되면 내년에 또다시 시작하면 된다. 정말 그럴까? 사람들은 이야기 한다. 그렇게 그저 반복되는 방식으로는 안 된다는 거다. 뭔가 좀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거다. 성장과 발달의 개념은 역사의식과 더불어 나타난 근대적 발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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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대부분은 이제 100살까지 살 수 있다. 그러니 계속 발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발달심리학의 새로운 경향인 ‘전 생애 발달’이론의 핵심 내용이다. 어디로 발달할 것인가는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그러나 계속 발달하지 않으면 삶이 너무 두렵고 고단해진다. 그래서 요즘 우리가, 아니 내가 그렇게 불안한 거다.
■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10가지 비밀
서구 식당의 웨이터는 대부분 월급을 받지 않는다. 팁으로 받는 돈이 곧 월급이다. 능력 있는 웨이터는 가장 뛰어난 심리학자다. 그들의 10가지 비결을 살펴보자.
1. 옷을 다르게 입어라. 단순히 옷에 액세서리만 달리해도 팁이 평균 17% 올랐다. 나만의 트레이드마크가 있어야 한다.
2. 자기 이름을 소개하라. 웨이터가 지기 이름을 소개하며 주문을 받았을 때 팁이 평균 2달러 올랐다. 아무리 비즈니스라도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는 느 낌이 들어야 한다.
3. 무조건 많이 팔아라. 손님은 자신이 먹은 음식의 총량에 비례해서 팁을 계산하기 때문이다. 주문을 받으면서 계속 무엇인가 제안해야 한다. ‘오늘 은 이런 요리가 좋다’. ‘이런 음식에는 이런 음료가 좋다’ 등등......그 결 과 팁이 25% 올랐다. 상대방에게 투자한 시간만큼 마음을 움직일 수 있 다.
4. 식탁 옆에서는 무릎을 꿇어라. 눈길을 맞추라는 이야기다. 돈을 내는 손 님이 웨이터를 올려다보며 이야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5. 손님을 만져라. 손님의 어깨나 팔을 살짝 건드리는 행동만으로도 팁은 16%나 올랐다. 만져야 마음이 움직인다. ‘터치’는 인간 의사소통의 기원이 다. 오늘날은 만지는 것이 사라졌다. 그래서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것이다.
6. 손님의 주문 내용을 따라 말해라. 그리고 고개를 끄덕거리고, 시선을 맞 추거나 맞장구치기 등... 손님이 하는 이야기를 성의 있게 받아들인다는 느 낌이 들게 한다. 팁은 두 배로 오른다.
7. 신용카드사의 로고가 적힌 계산서를 사용하라.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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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22%가 더 오른다고 한다.
8. 입을 가능한 한 크게 벌려 웃는 표정으로 이야기 하라. 무표정으로 할 때 보다 팁은 140%나 올랐다. 웃는 얼굴을 보면 웃는 얼굴을 하게 되어 있 다. 웃으면서 팁을 내는데 어찌 인색할 수 있겠는가.
9. 좋은 날씨를 예보하라. 사람들은 무조건 긍정적인 이야기를 좋아한다. 비판하거나 부정적인 말은 삼가라.
10. 손님에게 초콜릿을 선물하라. 손님에게 계산서를 내밀 때 초콜릿을 함께 내미는 것만으로도 팁은 21%나 올랐다. 당연하다. 사람들은 아주 작은 것 을 받아도 빚진 것 같은 생각이 들게 된다.
마지막으로 위의 십계명을 다 지켜도 팁이 오르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웨이터를 그만 두어야 한다. 체질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가 하는 일에 어떤 재미도 느끼지 못한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내가 하는 일을 즐겨야 한다는 사실이다.
내가 재미있어야 상대방도 즐거워진다. 결국 자신의 삶이 재미있는 사람들만 다른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 ‘내 그럴 줄 알았지!’에 대한 변명
어느 날 아침, 나는 컵을 잘못 건드려 식탁에 주스를 쏟았다. 아내는 눈을 치켜뜨며 소리친다.
“내 그럴 줄 알았어!” 열 받은 나는 바로 대답한다.
“그럴 줄 알았으면 제발 미리 좀 이야기해 줘!”
어릴 때는 엄마가 꼭 그랬다.
“너 그렇게 까불다가 그렇게 될 줄 알았어!”
도대체 자식이 잘되길 바라는 엄마라면 미리 이야기해 줬어야지. 꼭 다 엎어진 다음에 그러신다. 엄마나 아내나. 세상의 모든 여자들은 일이 어떻게 될지 미리 다 알면서도 꼭 사건이 터진 다음에야 이야기한다. 도대체 왜들 그럴까?
엄마나 아내의 ‘그럴 줄 알았다’는 말처럼 약 오르는 이야기는 없다. 컵이 엎어진 다음에 누군들 그런 이야기 못 하겠는가. 같은 이유로 난 자칭 주식전문가들의 분석을 신뢰하지 않는다. 주식 전문가들의 분석은 대부분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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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일이 다 일어난 다음에 ‘내 그럴 줄 알았어!’하는 뒷북치기란 이야기다.
아직도 우리를 힘들게 하는 미국발 세계경제위기의 원인에 관한 설명도 한결같이 ‘그럴 줄 알았어!’뿐이다. 그 훌륭한 설명들을 경제위기 이전에는 왜 전혀 들을 수 없었던가.
일이 다 타진 다음에 그럴듯한 설명을 갖다 붙이는 뒷북치기야 어디 주식전문가만의 문제겠는가. 헤겔은 해가 진 다음에야 겨우 날기 시작하는 ‘미내르바의 부엉이’에 철학자의 역할을 비유했다. 합리적 설명이란 일이 다 지나간 다음에야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아무리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아무리 얄미워도 엄마나 아내의 그 뻔한 ‘내 그럴 줄 알았어!’를 귀담아 들어야 한다.
아침 식탁에서 매번 같은 방식으로 티격태격하는 엄마와 아빠를 보고 자란 내 아들들은 먼 훗날 나와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을 거라는 희망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경제 전문가의 그 뻔한 ‘그럴 줄 알았다’는 해설을 읽으려고 신문을 들춘다.
■ 치료 내러티브와 성공 내러티브
내가 고정으로 연재하던 칼럼에서 스티브 잡스를 ‘난봉꾼’에 비유했다가 네티즌의 비난에 시달렸다. 정말 열화와 같은 반응이었다. 도대체 국내 어느 정치 지도자, 혹은 종교 집단을 공격한들 이런 극심한 비난을 받게 될까?
스티브 잡스는 우리의 구체적 삶과 정말 아무 상관없다. 더구나 어떻게든 자사 제품을 많이 팔고 싶어 하는 미국의 한 기업가일 뿐이다.
한 때 그와 경쟁자였던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는 자선 사업에 열중한다. 그러나 스티브 잡스의 애플이 자사의 이익을 환원한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스티브 잡스가 한국인에게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세계에 널린 수많은 소비자의 일부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많은 한국인들이 스스로 ‘잡스 교도’를 자처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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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주를 모욕했다고 이토록 거세게 항의해 온다. 20년이 넘도록 애플 로고가 찍힌 컴퓨터를 사용하는 나조차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도대체 왜일까?
잡스교의 본질은 ‘감정 자본주의’에 있다.
스토리텔링은 감정 저본주의의 핵심인 치료 내러티브의 정수를 보여준다. 감정 자본주의의 시대에 내면의 상처와 고통, 좌절이 희망으로 극복되는 이야기, 즉 ‘치료 내러티브’에 사람들은 열광한다. 2005년 스탠퍼드대학교 졸업식에서 행한 그의 연설은 바로 이 치료 내러티브의 전형을 보여준다. 차고(車庫)에서 시작한 컴퓨터 사업의 성공, 사업 실패, 췌장암 그리고 화려한 복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잡스는 외친다. 늘 배고프라고, 늘 우직하라고, 와우! 정말 감동적이지 않은가? ‘치료 내러티브’와 대비되는 것은 ‘성공 내러티브’다.
본격적 감정자본주의가 나타나기 이전, 사람들은 ‘가난뱅이가 열심히 노력해서 부자가 되었다’ 와 같은 성공 내러티브에 열광했다. 빌 게이츠의 스토리텔링은 이런 성공 내러티브의 전형이다. 열심히 노력해서 성공하고, 성공을 자선사업으로 전환해 사회적 의미를 얻어가는 방식이다.
논리적으로 자세히 따져보면 빌 게이츠가 스티브 잡스보다 훨씬 더 사랑받고 존경받아야 마땅하다. 스티브 잡스의 스탠퍼드 졸업식 연설과 빌 게이츠의 2007년 하버드 졸업식 연설을 비교해 보라. 잡스의 연설은 고통, 열등감, 공격성으로 일관된 개인의 삶에 대한 이야기다. 반면 게이츠의 연설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 빈곤 퇴치, 환경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도덕적으로 빌 게이츠의 연설이 훨씬 우아하고 폼 난다. 그러나 감정 자본주의에서는 다르다.
빌 게이츠의 스토리텔링은 오래된 록펠러 방식에서 그리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내면의 고통에 관한 이야기가 빠져 있다.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아무리 사회적 지위가 높아도 내면에는 우리와 똑같은 문제로 좌절하고, 고민하고, 때에 따라서는 그 성공으로 인해 보통 사람들보다 더 큰 고통을 당한다는 내러티브에 사람들은 감동한다.
한국 기업에 빠져 있는 것은 바로 이 감정 자본주의적 특징들이다. 독거노인을 찾아가고, 연탄을 나르고, 노숙자에게 밥을 퍼주는 구태의연한 ‘사회공헌’ 방식으로 감정 자본주의에서 살아남기란 그리 쉽지 않다. 기업의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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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기업 경영에 정서적 스토리텔링이 존재하지 않으니 ‘느낌’이 있는 물건을 생산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 더, 애플의 승승장구에 배 아파하는 이들에게 그래도 약간의 위로가 되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사람들은 치료 내러티브에 쉽게 감동하는 만큼, 쉽게 질린다. 오래 못 간다는 이야기다. ‘잡스교’도 마찬가지다. 아이돌 스타의 눈물 젖은 빵에 열광했던 팬들이 불과 몇 년 후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처럼. 잡스교도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
그게 바로 사람의 느낌에 기초한 감정 자본주의의 본질이다.
2012년 3월 12일 제1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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