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2. 17:10ㆍ독서후기
잊혀진 질문
- 내 가슴을 다시 뛰게 할 -
■ 차동엽 신부
0 서울대 공대 기계학과에서 공부하다가 사제의 길로 방향을 바꿈
0 오스트리아 빈 대학교에서 신학 공부
0 가톨릭 사제이자 대중작가 및 강연활동
0 밀리언 셀러가 된 자기계발서 ‘무지개 원리’ 외...
■ 프롤로그 : 도대체 무엇을 위한 인생인가?
2년 전쯤이었을 것이다. 지인을 통해서 다섯 쪽짜리 프린트물이 필자의 손에 건네졌다.
‘삼성 이병철 회장이 1987년 타계하기 전 절두산 성당 박희봉 신부께 보낸 질문지’
하필이면 왜 故 이병철 회장은 그 물음 꾸러미를 절두산으로 보냈을까?
무슨 까닭에 굳이 절두산이었을까?
소설가 김훈의 절두산에 대한 소회에서 그 힌트를 만났다.
“옛 양화진 자리에 강물을 향해 불쑥 튀어나온 봉우리가 있는데, 누에 대가리 같다고 해서 이름이 잠두봉(蠶頭峰)이었다. 140여 년 전에 무너져가는 나라의 정치권력은 이 봉우리에서 ‘사학(邪學)의 무리’를 목 자르고 그 시체를 강물에 던졌다. 죽임을 당한 자들이 1만 명이 넘었다. 서쪽에서 낯선 시간을 거슬러 올라오던 한강은 피로 씻기었고 봉우리의 이름은 절두산(切頭山)으로 바뀌었다.(……) 비 오는 날에는 절두산 벼랑이 빗물에 번들거리고 그 아래 자유로를 따라 서울로 드나들 때마다, 이 한 줌의 흙더미는 나의 일상을 심하게 압박하였다. 이 소설은 그 억압과 부자유의 소산이다.(……)”
김훈의 소설 ‘흑산’의 후기를 읽는 순간, 나는 소름이 끼쳤다.
평생 종교를 갖지 않았던 삼성 이병철 회장이 1987년 타계하기 전 가깝게 지내던 신부님께 남긴 인생에 관한 절실한 질문 24가지가 있다. 그런데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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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철 회장은 안타깝게도 이에 대한 속 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24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으나 이 질문들은 여전히 우리를 인생의 의문 속으로 밀어 넣는다.
이 책은 이러한 다섯 페이지 분량의 물음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사실상 우리 고달픈 인생들의 흉금을 대변하는 물음들이다. 뭐랄까. 생의 밑바닥을 흐르는 거부할 수 없는 물음들! 그것들은 실상 절망 앞에 선 ‘너’의 물음이며 허무의 늪에 빠진 ‘나’의 물음이며, 고통으로 신음하는 ‘우리’의 물음이었다. 그리하여 저자는 우리들이 처한 ‘삶의 자리’에서 가장 절박한 이 물음들의 답을 탐사하는 도전에 임하기로 했다.
- 해 뜨는 마을에서. 舞之開 차동엽 -
■ 이병철 회장 물음의 전문
1. 신(하느님)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똑 똑히 드러내 보이지 않는가?
2. 신은 우주만물의 창조주라는데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3. 생물학자들은 인간도 오랜 진화 과정의 산물이라고 하는데, 신의 인간 창 조와 어떻게 다른가? 인간이나 생물도 진화의 산물이 아닌가?
4. 언젠가 생명의 합성, 무병장수의 시대도 가능할 것 같다. 이처럼 과학이 끝없이 발달하면 신의 존재도 부인되는 것이 아닌가?
5. 신은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6. 신은 왜 악인을 만들었는가? (히틀러, 스탈린 또는 각종 흉악범들)
7. 예수는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죽었다는데, 우리의 죄란 무엇인 가? 왜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내버려 두었는가?
8. 성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9. 종교란 무엇인가? 왜 인간에게 필요한가?
10. 영혼이란 무엇인가?
11. 종교의 종류와 특징은 무엇인가?
기독교(천주교, 개신교), 유태교, 불교, 회교, 유교, 도교
12. 천주교를 믿지 않고는 천국에 갈 수 없는가? 무종교인 무신론자, 타 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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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인 중에도 착한 사람이 많은데 이들은 죽어서 어디로 가는가?
13. 종교의 목적은 모두 착하게 사는 것인데, 왜 천주교만 제1이고 다른 종 교는 이단시하나?
14. 인간이 죽은 후에 영혼은 죽지 않고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는 것을 어 떻게 믿을 수 있나?
15. 신앙이 없어도 부귀를 누리고, 악인 중에도 부귀와 안락을 누리는 사람 이 많은데 신의 교훈은 무엇인가?
16. 성경에는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을 약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했는데, 부자는 악인이란 말인가?
17. 이탈리아 같은 나라는 국민의 99%가 천주교도인데 사회혼란과 범죄가 왜 그리 많으며, 세계의 모범국이 되지 못하는가?
18. 신앙인은 때때로 광인처럼 되는데, 공산당원이 공산주의에 미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19. 천주교와 공산주의는 상극이라 하는데, 천주교도가 많은 나라들이 왜 공 산국이 되었나?
20. 우리나라는 두 집 건너 교회가 있고, 신자도 많은데 사회범죄와 시련이 왜 그리 많은가?
21. 로마 교황의 결정엔 잘못이 없다는데, 그도 사람인데 어떻게 그런 독선 이 가능한가?
22. 신부는 어떤 사람인가? 왜 독신인가?
수녀는 어떤 사람인가? 왜 독신인가?
23. 천주교의 어떤 단체는 기업주를 착취자로, 근로자를 착취당하는 자로 단 정, 기업의 분열과 파괴를 조장하는데, 자본주의 체제와 미덕을 부인하 는 것인가?
24. 지구의 종말은 언제 오는가?
* 책의 편집 과정에서 'Big Q' 와 ‘Real Q'라는 용어로 정리하여 모양새를 갖추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질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물음을 'Big Q'라 표현하였고, 그다음 동시대인의 가슴에서 터져 나오는 물음을 'Real Q'로 표현하였다.
PART 1, 생명의 몸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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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 Q 1. 한 번 태어난 인생,
왜 이렇게 힘들고 아프고 고통스러워야 하나?
독일의 유명 작가이자 시인인 에리히 케스트너는 인간의 ‘숙명’을 군더더기 없는 단문으로 노래합니다.
“요람과 무덤
사이에는
고통이 있었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과장일까요? 내 생각엔 아니기도 하고 그렇기도 합니다. 고통에 대한 성찰의 깊이에 따라 생각이 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가운데 과장법을 아무리 많이 써도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 바로 고통입니다. 고통은 그때그때 우주의 중심입니다. 왜. “내 얼굴에 난 뾰루지가 다른 사람의 엉덩이에 난 종기보다 더 아프다”라는 얘기도 있지 않습니까? 요즈음 특히 2040세대의 고충을 많이 이야기하지만 10대의 고달픔이라고 전혀 덜하지 않으며, 5060이후의 세대가 겪는 애환이라고 가뿐하지 않습니다. 크건 작건 많건 적건, 고통은 언제나 버겁다는 얘기입니다.
고생으로 치자면 나도 빠지지 않습니다.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습니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지게로 연탄배달을 했습니다. 가난했기 때문에 공고에 진학했습니다. 공고에서 대학 진학을 꿈꾸며 몇 곱절 어렵게 공부해야 했습니다. 20대 말부터 B형 간염 보균자, B형 간염, 간경화로 진행하고 있는 육신을 동무삼아 건강인 이상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사제의 본령상 다른 사람이 겪는 고통을 내 것인 양 함께 아파하는 것에 익숙합니다.
사는 것 자체가 고통이라는 이야기도 흔히들 합니다. 태어날 때(生) 울고, 나이 들도록(老) 온갖 인연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겪고, 병(病)들어 고통 속에 신음하다가, 마지막 죽음(死)마저 고통 속에 맞이합니다.
더욱이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도 겪습니다. 경제적 어려움, 이별, 상실, 질병, 사고, 좌절의 아픔, 외로움, 누군가로부터의 배척이나 소외 등등으로 잠을 뒤척이고, 괴로워하고 신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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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이 물음의 답을 고뇌하기 전에, 고통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것이 순서일 것입니다.
일단 고통은 신의 조화가 아니라 철저히 자연현상임을 확인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지진과 해일로 엄청난 인명피해와 재산 손실이 초래됩니다. 그 결과가 고통으로 체험됩니다. 그런데 현대 과학은 그 지진과 해일이 신이 일으키는 조화가 아니라 엄연한 자연현상임을 보여줍니다. 또 사회적으로도 이혼, 이별, 상처 등의 고통을 겪습니다. 이것 역시 철저하게 사회적인 과정입니다. 그러니까 고통은 3차원 공간을 사는 모든 존재들이 서로 부대끼면서 ‘생명의 몸살’로 겪게 되는 자연발생적인 현상이라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 고통의 책임을 신에게 돌리는 대 익숙합니다. 여기에는 나름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즉, “신은 왜 태초에 고통이라는 것을 허락했는가?”를 따져 묻거나 “왜 전능한 신이 내 고통을 막아주지 않는가?”하고 원망하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고통은 자연현상이며 사람의 몫입니다.
고통에는 여러 기능이 있습니다.
첫째, 보호의 기능입니다. 고통이 있어서 몸의 어디가 고장 났는지 알고 위험으로부터 지켜줍니다.
둘째, 단련의 기능입니다. 박지성 선수의 옹이 발바닥, 발레리나 강수진의 붕대 발가락, 최경주 선수의 휘어진 엄지발가락은 고통을 이겨낸 단련의 상징입니다.
셋째, 정신적 성장의 계기로서의 기능입니다. 인류 문명의 발달은 고난극복의 역사입니다. 작가 최인호는 이렇게 말합니다.
“계곡이 깊어야 산이 높듯이 깊은 고통에서 절망하지 않고 일어서서 버티고, 창조하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신의 보다 큰 영광을 누릴 수 있다.”
고통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의대한 정신적 성장을 가져와 오늘이 문명이 생겨난 것입니다.
넷째, 고통은 지구 생태계 보전을 위해 꼭 필요합니다.
19세기 알래스카의 한 섬에 50-60 마리의 순록이 살았는데 이 순록을 잡아먹고 살던 늑대를 모두 죽이자 순록의 숫자가 급격히 불어났습니다. 그러자 풀밭은 황무지가 되고 결국은 수많은 순록이 굶어 죽고 20여 마리만 살아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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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컨대 자연은 도태의 법칙을 따라 존속합니다. 자연 도태의 메커니즘은 죽음과 소멸과 약육강식에 의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철두철미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니 피하려고만 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도 고통을 이기는 한 방편일 것입니다. ‘행복의 나라로’ 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장막을 걷어라
너의 좁은 눈으로 이 세상을 떠보자
창문을 열어라
춤추는 산들바람을 한 번 또 느껴보자
가벼운 풀밭위로 나를 걷게 해주세
봄과 새들의 소리 듣고 싶소
울고 웃고 싶소 내 마음을 만져 주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
접어드는 초저녁
누워 공상에 들어 생각에 도취했소
벽의 작은 창가로
흘러드는 산뜻한 노는 아이들 소리
아 나는 살겠소 태양만 비친다면
밤과 하늘과 바람 안에서
비와 천둥의 소리 이겨 춤을 추겠네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
고개 숙인 그대여
눈을 떠 봐요 귀도 또 기울이세
아침에 일어나면
자신 찾을 수 없이 밤과 낮 구별 없이
고개 들고서 오세 손에 손을 잡고서
청춘과 유혹의 뒷장 넘기며
광야는 넓어요 하늘은 또 푸르러요
다들 행복의 나라로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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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의 동경이 고동치는 이 노래에는 절마다 ‘장막을 걷어라’, ‘비와 천둥의 소리 이겨 춤을 추겠네’, ‘청춘과 유혹의 뒷장을 넘기며’ 등 고통과의 씨름이 담겨 있습니다.
이 노래의 작사자요 작곡가인 괴짜 가수 한대수 씨.
나는 그를 모 방송국 라디오 프로에서 처음 대면했습니다. 손숙 씨와 함께 진행을 맡았던 그는 연신“하하하하” 호탕한 웃음을 웃어댔는데, 왠지 나는 그에게서 찐한 진정성을 느꼈습니다. 나는 그에게서 괴짜가 아닌 위대한 멘토의 풍모를 발견했습니다.
그에게는 아픈 현실이 있습니다. 알코올중독자로 정신병원을 들락날락하는 외국인 아내, 그 사이에 태어난 딸내미, 그리고 천식과 고지혈증을 앓고 있는 자신의 늙은 몸뚱어리 등.
그에게는 쓰디쓴 과거가 있습니다. 그가 태어남과 동시에 실종된 아버지, 조부모 슬하에서의 성장, 아버지의 발견으로 다시 시작된 그러나 모든 사랑으로부터 철저히 유리된 미국에서의 청소년기 그리고 그 이후의 방랑 등등.
하지만 그는 행복합니다. 누가 뭐래도 행복합니다. 그게 무슨 행복이냐고 손가락질해도 결코 주눅 들지 않는 그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가 열일곱 살 때쯤인가 미국의 광활한 대지를 달리는 기차 안에서 작사, 작곡했다는 ‘행복의 나라로’는 그의 운명 같은 희망이며, 유난히 고달픈 인생을 살고 있는 한국인의 노래입니다.
이슬람 최고의 신비주의 시인 루미는 이렇게 말합니다.
“때로 우리를 돕고자, 그분은 우리를 비참하게 만든다.
물이 흐르는 곳이면 어디든지
생명이 피어난다.
눈물이 떨어지는 곳이면 어디든
신의 자비가 드러난다.”
눈물을 신의 자비가 드러나는 생명의 물로 바라본 그의 시선이 고요하고도 선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좋은 뜻이 아무리 많다 해도, 막상 고통이 닥치면 피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피하고 싶다고 피해지지 않으니 그 괴로움은 더 커집니다. 최선의 선책은 고통의 피해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감내하는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아주 좋은 방법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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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마음속에 해결되지 않은 모든 것을 향하여 인내하라. 그리고 문제 자체를 사랑하려고 노력하라.(……) 답을 찾으려 하지 말라. 그것은 너에게 주어질 수 없다. 왜냐하면 너는 그 답과 더불어 살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그대로 모든 것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문제 속에서 그냥 그대로 살자. 그러면 먼 훗날 언젠가 너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서서히 답 속에서 살게 될 것이다.”
설령 고통의 의미가 우리 앞에 훤히 드러난다 해도, 아직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면 그것은 우리의 답이 되지 못합니다. “제자가 준비되어 있을 때 스승이 나타날 것이다”라는 선불교의 말이 있듯이 때가 되어야 알아듣는 법입니다.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 왜 고통과 불행과 죽음을 주었는가?”
묻는 이에게 역시 고통은 속앓이의 복판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에게도 고통과 불행과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주제였습니다. ‘신이 인간을 사랑했다면’이라는 전제로 미루어보건대, 묻는 이는 어렴풋이 그 답이 사랑에 있다는 역설적인 진실을 직관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고 보니 김용택 시인이 독백처럼 내뱉은 저 다짐 안에 속 깊은 지혜가 번득이고 있군요.
“내 가슴은 늘 세상의 아픔으로 멍들어야 한다.”세상의 고통을 끌어안으라.
“멍이 꽃이 될 리 없다.” 그런다고 불행과 죽음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으로 나는 늘 세상의 고통 속에 있어야 한다.” 그래도 세상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라. 그것이 사랑이며 그 사랑이 결국 모든 걸 소멸시키리라.
1-1 Real Q 사는 게 고달플 땐
생의 모멘텀을 어디서 구해야 하나요?
* 모멘텀 : ‘국면, 동기, 이유’등 변화의 긍정적 요소를 의미함
불과 10년 전 나는 인생의 수수께끼를 절묘하게 노래한 철학자 칼 야스퍼스의 시를 음미하면서 ‘죽자고 일만 하는’한국인의 초상을 그려본 적이 있습니다. 야스퍼스는 이렇게 읊조렸습니다.
“나는 왔누나
온 곳을 모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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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있누나
누군지도 모르면서
나는 가누나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나는 죽으리라
언제 죽을지 모르면서”
짧지만 이 시는 실존적 면제를 잘 그려내고 있다고 평가 받습니다. 즉, 사람에게 생각할 과제를 잘 던져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면 자신이 어디에서 온 존재인지, 도대체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언제일지 모르는 죽음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를 늘 새롭게 묻고 궁굴리며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00년 전 나는 아마도 야스퍼스가 한국 사람이었다면 둘째 연과 셋째 연 사이에 다음과 같이 한 연을 더 넣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일 하누나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세계 어느 민족보다도 한국인은 열심히 일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코리안’ 하면, 일밖에 모르는 민족, 일하는 기계, 부지런한 민족 이라는 별칭이 따라다닐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이 애칭도 무색할 판이 되어버렸습니다. 일할 기회조차 얻지 못하거나 잃어가고 있는 형국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일만 해야 했던 10년 전보다 더 암울한 현실에 처해 있습니다.
하지만 ‘생활고’에서 간과할 수 없는 또 하나의 결정적인 변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기(士氣)입니다. 나는 이미 이 사기의 힘을 내 눈으로 보았습니다.
2008년 여름쯤 글로벌 금융 위기가 한반도 상공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을 때, 나는 그 비상구는 오직 ‘희망’임을 직감했습니다. 당시는 마침 ‘무지개 원리’가 국민적 사랑을 받으면서 연 600여 회의 강연을 다니던 터였습니다.
나는 강의의 말미에, 그리고 연재 중이던 일간지 칼럼, 각종 인터뷰와 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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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에서도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는 희망을 절규했습니다. 또한 희망 논리를 강화하기 위해 엠마 골드만의 시를 인용했습니다.
희망이 없는가? 소망이 없는가? 꿈이 없는가?
그러면 만들어야 한다. 반드시 만들어야 한다. 꼭 만들어야 한다.
너무 절망스러워 도저히 희망과 소망이 없어 보일지라도
찾아보고 또 찾아야 한다.
그래도 없다면 억지로라도 만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더 이상 꿈을 꿀 수 없음은 죽음의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결론은 ‘그러니 아무거나 붙들고 희망이라고 우깁시다!’하는 것이었습니다. 청중 가운데는 정‧재계 인사, 오피니언 리더, 일반 시민, 대학생들도 꽤 있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2009년 말 전 세계 경제전문기관들은 대한민국이 OECD 국가 가운데 가장 훌륭한 성적으로 글로벌 금융위기를 탈출했음을 선언하였습니다.
간디가 어느 날 많은 사람들과 함께 거리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길에 엎드려 슬피 우는 한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이를 본 간디는 주머니에서 수건을 꺼내 할머니의 눈물을 닦아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이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지만 나에게는 손이 모자라는군요.”
이 말 한 마디가 가난과 질병에 고통당하는 인도인들에게 한줄기 희망의 빛을 던져주었습니다. 인도인들은 간디의 이 말에서 힘을 얻어 분연히 일어섰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기’라는 변수입니다. 그러니 사기를 잃지 않고 오히려 의욕을 충전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시인이라는 말보다 현자라는 말이 더 어울릴 성싶은 미국 시인 롱펠로, 그는 ‘때로는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라는 제목의 시를 통해 우리에게 그 까닭을 밝혀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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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만이 가득할 것 같은 특별한 날에도
홀로 지내며 소리 없이 울고 싶은 날이 있습니다.
(……)
호흡이 곤란할 정도로 할 일이 쌓여 있는 날에도
머리로 생각할 뿐 가만히 보고만 있을 때가 있습니다.
(……)
가끔은 흔들려보며 때로는 모든 것을 놓아봅니다.
그러한 과정 뒤에 오는 소중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시 희망을 품은 시간들입니다.
다시 시작하는 시간들 안에는 새로운 비상이 있습니다.
흔들림 또한 사람이 살아가는 한 모습입니다.
적당한 소리를 내며 살아야 사람다운 사람이 아닐까요.
모든 것을 놓고 ‘가만히 보고만’ 있노라면 ‘흔들림’과 ‘적당한 소리’가 어우러지는 가운데 ‘새로운 비상’이 함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슬픔에는 눈물이 명약입니다. 그러기에 영국의 정신과 의사 헨리 모슬리는 눈물을 가리켜 “신이 인간에게 선물한 치유의 물”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느 조사에 의하면, 월 5.3회의 눈물을 흘린다는 미국 여성은 월 1.4회만 운다고 하는 미국 남성보다 평균 5년을 더 산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웃음이 파도라면 눈물은 해일이다’라는 말까지 있습니다. 웃음을 훨씬 능가하는 눈물의 강력한 효능을 일컫는 경구입니다.
눈물을 많이 흘릴수록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건강해지고 행복감이 충만해진다는 것입니다. 눈물은 유해 호르몬을 몸 밖으로 배출하여 건강에 이롭게 하고 평상심을 회복하게 하며, 긍정적인 마음을 가져다준다고 합니다.
우는 행위 자체가 이미 치료과정입니다. 1997년 고통사고로 다이애나 황태자비가 사망했지요. 그즈음 영국 내 우울증 환자의 수가 갑자기 절반으로 줄었다고 합니다. 영국 시민 대다수가 그녀의 죽음을 애도하며 눈물을 흘렸던 까닭입니다. 이를 전문가들은 ‘다이애나 효과’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그리스의 대표적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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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바꿀 수 없다. 현실을 보는 눈은 바꿀 수 있다.”
모든 것은 보는 눈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더욱이 긍정의 눈으로 볼 때, 상황은 역전됩니다. 상황뿐 아니라 결과까지 달라집니다.
하루는 공자가 하급 관리로 일하고 있는 조카 공멸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일하면서 얻은 것이 무엇이며 잃은 것은 무엇이냐?”
공멸이 대답했습니다.
“얻은 것은 하나도 없고 세 가지를 잃었습니다. 첫째는 일이 많아 공부를 못 했고, 둘째는 보수가 적어 친척 대접을 못했으며, 셋째는 공무가 다급해서 친구 사이가 멀어졌습니다.”
공자는 공멸과 같은 벼슬을 살고 있던 제자 자천에게 물었습니다. 자천이 대답했습니다.
“저는 잃은 것은 하나도 없고 세 가지를 얻었습니다. 첫째는 배운 것을 실행해보게 되어 배운 내용이 더욱 확실해졌고, 둘째는 보수를 아껴 친척을 대접하니 그들과 더욱 친숙해졌고, 셋째는 공무의 여가에 친구들과 교제하니 우정이 더욱 두터워졌습니다.”
이 일화는 공자 시대에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구직대란’, ‘실직난’을 운운하는 이 시대에 더 흔할 법한 일입니다.
세일즈맨으로 크게 성공하여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낸 미국 작가 오그 만디노는 그의 저서 ‘위대한 상인의 비밀’에서 자신의 비결을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나의 성취 비결은 다음의 글을 벽에 써 붙이고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한 번씩 큰 소리로 읽었기 때문이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슬퍼지면 소리내어 웃자. 기분 나쁘면 곱빼기로 일하자. 두려우면 문제 속으로 뛰어 들자. 열등감을 느끼면 새 옷을 갈아입자. 불안하면 고함을 두세 번 지르자. 무능을 느끼면 지난날의 성공을 되살리자. 나 자신이 보잘것없이 느껴지면 내 평생의 목적을 기억하자.’”
이렇듯 긍정의 메아리는 결국 자신을 향환 최고의 모멘텀이 되어줍니다.
미국의 대통령 버락 오바마는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가져오는 변화나 더 좋은 시기를 기다리기만 한다면 결국 변화는 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 자신이 바로 우리가 기다리던 사람들이다.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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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자신이 바로 우리가 찾는 변화이다.”
변화의 더 좋은 시기가 오기만을 기다려봤자 영영 오지 않을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나의 삶, 우리 사회에 변혁을 가져올 구원투수는 지금 불펜에 없다는 선언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나이기 때문입니다.
위기 극복에 관한 한 나의 영원한 멘토는 미국의 제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입니다. 미국 대공황 시절, 하루는 루tm벨트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 기자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각하께선 걱정스럽다든가 초조할 때 어떻게 마음을 가라앉히십니까?”
대통령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습니다.
“휘파람을 붑니다.”
기자는 의외라는 듯 다시 질문을 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대통령께서 휘파람 부는 것을 보았다는 사람이 없는데요?”
“당연하죠. 난 아직 휘파람을 불어본 적이 없으니까요.”
루스벨트의 이 한마디에서 그가 얼마나 무한한 긍정과 희망의 정신을 지닌 인물이었는가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가 대공황의 절정에서 국민을 향해 던졌던 희망 메시지는 오늘 생활고에 짓눌려 있는 우리를 위한 격려이기도 합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있는 장소에서. 지금 우리가 가진 것을 사용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합시다.”
지금 우리가 있는 장소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개념있는 비판보다 솔선하는 대안 실행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것은 절망과 문책과 비난이 아니라 희망과 격려와 위로입니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포기와 중단이 아니라 인내와 새 출발입니다.
1-2 Real Q 불안과 두려움이 끈질기게 따라올 때
극복할 방법은 있는 걸까요?
두려움에 대하여 독일 소설가 장 파울이 위트 넘치는 말을 했습니다.
“소심한 사람은 위험이 일어나기 전에 무서워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위험이 일어나고 있는 동안에 무서워한다. 대담한 사람은 위험이 지나간 다음부터 무서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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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은 그대로 진실입니다.
불안의 순기능을 클로즈업 해보겠습니다. 심리분석가 리치 리만은 ‘불안의 심리’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불안은 우리의 발전에서 특별히 중요한 지점들에서 제일 먼저 의식 속으로 들어온다. 즉 친숙한 옛 궤도들을 떠나는 곳에, 새로운 과제를 담당하거나 변화하는 지점에 불안이 온다. 발전, 성장, 성숙은 그러니까 명백히 불안 극복과 깊은 관계가 있다. 어느 연령에서든 그 나이에 상응하는 성숙을 위한 걸음이 있으며, 그 걸음은 있게 마련인 불안을 수반한다. 걸음을 내 딛자면 그 불안을 다스려 이겨내야만 한다.
불안의 역기능은 만만치 않습니다.
첫째로, 불안은 사람을 안절부절못하게 하여 결국 도전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공학기술자 헨리 포드의 말이 딱 들어맞습니다. “미래를 두려워하고 실패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활동을 제한 받아 손도 발도 움직일 수 없게 된다.”고 했습니다.
둘째로, 불안은 사람의 심신을 해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쟁으로 말미암아 죽은 청년의 수가 30만 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들과 남편을 일선에 내보내고 , 염려와 불안과 근심에 빠져 심장병으로 죽은 미국 시민이 100만 명을 넘었다고 합니다. 총탄이 사람을 꿰뚫어 죽인 수보다 불안과 공포가 죽인 사람의 수가 훨씬 많았습니다.
그러기에 넬슨 만델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용감한 사람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두려움을 정복하는 사람이다.”
지지 않으려면 정복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불안감을 덜 수 있을까요? 나는 인생의 위대한 멘토들의 지혜를 빌리는 것 자체가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첫째 방법은 강력한 희망과 꿈으로 불안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몇 년 전 모 방송사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 ‘인간의 두 얼굴 : 착각’ 편을 제작한 정성욱 PD는 '긍정적인 착각‘의 효과를 밝혀냈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도화지에 손가락 하나 없는 손을 그리고 다섯 살짜리 아이들에게 보여주면서 물었습니다. “10년 후에 이 손가락은 어떻게 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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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요?” 일부 아이들은 어른들의 예측을 뛰어넘는 엉뚱한 대답을 했습니다. 바로 “손가락이 자라나요?” 라고요. 실험 결과 손가락이 자란다고 대답한 아이들이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 지능지수가 높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긍정적 착각입니다. 이는 살아가면서 겪는 실패와 좌절의 상황에서 스스로를 감싸는 보호막 역할을 합니다. 정 PD는 말합니다.
“긍정적 착각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고 발전시킨다는 결론을 얻었다. 우울증 환자들은 절대 착각에 빠지지 않는다. 그들은 언제나 주변의 상황을 냉철하게 보기 때문이다.”
둘째 방법은 불안을 신께 맡기는 것입니다.
미국 토론토 대학 심리학과 마이클 인즐릭트 교수 팀은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들이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불안과 걱정에 덜 시달린다는 연구 결과를 얻어냈습니다. 인즐릭트 교수는 “신앙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테스트에서 실수를 하거나 잘 모르는 것이 나와도 크게 걱정하지 않는 것 같다.”는 결론을 얻어냈습니다.
어떤 사람이 옥중에서 성경을 읽으면서 “두려워 말라”는 말씀이 수없이 기록된 것을 보고 도대체 몇 번이나 씌어 있는가를 세어보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꼭 365번이 기록되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1년 365일 매일 한 번씩에 해당하는 숫자입니다. 그럴듯한 수치적 일치입니다. 우연이긴 하지만, 신은 불안에 떠는 우리를 최소한 매일 한 번씩 위로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메시지를 은근히 전해줍니다.
영국의 역사학자 베로니카 웨지우드의 말을 기억해둘 것을 권합니다.
“불안과 무질서는 절망의 징후가 아니라 에너지와 희망의 징후다.”
체념한 사람에게는 불안이고 뭐고가 없습니다. 불안은 희망을 가진 사람이 누리는 특권, 곧 생의 에너지인 것입니다.
1-3 Real Q 가슴속에 분노가 가득한데
이 분노를 다스릴 수 있을까요?
“화가 치밀 땐 어떻게 해야죠? 별별 방법을 다 써 봐도 잘 안 되거든요.”
“화낼 일을 만들지 마세요. 그게 상책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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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어머니는 대뜸 이렇게 나옵니다.
“지금 저에게 농담하시는 거죠? 화낼 일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서 나를 겨냥하고 만든다니까요? 애들, 남편, 시어머니, 시누이……. 나는 가만히 있는데 다들 돌아가면서 내 화를 돋운다고요!”
대학을 졸업한 지 3년이 넘도록 취업을 하지 못한 젊은이는 화를 버럭 내며 되묻습니다.
“지원서를 벌써 백 번이나 썼다구요. 이 사회가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데, 내가 화 안 나게 생겼냐구요.”
직장인들은 코웃음 치며 반발합니다.
“한번 짐승 같은 상사 밑에서 말끝마다 쌍소리 들으며 일해보세요. 그래도 그런 말씀이 나오는지.”
아무리 항의가 빗발쳐도 한 고집하는 나는 또 말합니다.
“화가 나시겠죠. 그래도 그런 화나는 일들을 화낼 ‘거리’로 받아들이지 않는 게 상책입니다.”
“나 원, 차암. 무슨 얘기를 그렇게 어렵게 하세요. 쉽게 좀 말씀해주세요!”
얘기인즉슨 이렇습니다. 방금 소개한 것은 실제로 내가 쓰는 방법입니다. 이는 매뉴얼이 아니라 나름의 지혜입니다. 감히, 그러나 겸손하게 말합니다마는. 나는 이미 내 인생철학인 ‘무지개 원리’로 세상만사를 처리하는 지혜를 소개한 셈입니다. 그 핵심은 이것입니다.
‘그 무엇도 ’내 허락‘ 없이는 나를 불행하게 만들 수 없다.’
이 한 문장이 나에게는 모든 감정의 문제를 처리하는 마스터키입니다.
분노도 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 누가 나에게 화나게 하는 행동을 합니다. 욕설, 폭행, 사기, 모독, 멍청한 행동 등등.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런 행동은 일단 ‘판단’이라는 첫 번째 관문을 통과한 후 ‘선택’이라는 두 번째 관문을 통과해야 내 안에서 ‘화’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이 점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이때도 나는 순간적으로 자신에게 말해줍니다.
“나는 저 사람의 저 행동이 나로 하여금 화나게 하도록 ‘허락’하지 않노라. 내가 왜 그 행동 때문에 ‘화’를 내서 나의 소중한 하루를 망쳐야 한단 말인가. 화내는 것은 나의 의무가 아니다.”
나는 욕도 잘 먹고(?). 박해도 잘 견디고 안티들도 미워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안 좋은 얘기를 들어도 두 발 뻗고 잠을 잘 잡니다. 정말입니다. 스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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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해주는 위로의 말 한마디면 족합니다.
“아무리 그래 봐라. 그것보다 내 행복과 평화가 더 소중하다. 이 두 가지를 천하의 무엇과도 안 바꿀란다.”
정말입니다. 거짓말 같이 통합니다. 나에게 이런 마음 다스리기를 가르쳐준 분은 소크라테스입니다.
소크라테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의 일입니다. 놀란 제자들이 찾아와 통곡하며 말했습니다.
“스승님 이게 웬일입니까? 아무런 죄도 짓지 않으셨는데 이렇게 감옥에 갇히시다니요. 이런 원통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소크라테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제자들을 달랬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내가 꼭 죄를 짓고 감옥에 들어와야 속이 시원하겠느냐?”
이렇게 분노의 가능성을 초전봉쇄하는 이유는 분노의 폐해가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분노를 그냥 덮어둬서는 안 되는 이유는 그것이 포화상태이 이르면 폭력, 울화병, 우울증 등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분노의 메커니즘은 그 자체로 무거운 심적 고통을 안겨줍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롭기 위해서는 중용(中庸)의 덕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중용이란 화살로 과녁의 중심을 맞췄을 때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그러나 중용은 중도(中道)를 뜻하지 않습니다. 좌와 우의 중간 어중간한 상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를 중용이라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중용은 객관적인 사실에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부합하는 판단입니다. 즉 내 입장과 상대의 입장을 모두 고려하여 식별하고 판단할 때 중용에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중용은 냉철한 ‘지성’을 요구합니다.
이런 취지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화를 낼 수 있다. 그것은 쉬운 것이다. 그러나 올바른 상대에게 화를 내는 것, 적재적소에서 화를 내는 것, 올바른 목적으로 화를 내는 것, 그리고 올바른 방법으로 화를 내는 것, 그것은 누구나 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절대로 쉬운 것이 아니다.”
한 마디로 올바른 판단이라는 객관적인 확신이 없으면 분노를 품지 말라는 뜻입니다.
사막의 은수자(隱修者) 모세 압바는 너무 쉽게 남의 잘못을 판단하고 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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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해 돌이킬 수 없는 분노를 품는 우리의 악습을 통쾌하게 폭로합니다.
어느 수도사가 죄를 지어 그의 잘못을 심판하기 위해 지도자들이 모였습니다. 그들은 모세에게 심판을 청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몇 번이나 거절하다가 마지못해 참석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날 모세는 구멍 난 낡은 자루에다 모래를 가득 채워서 어깨에 메고 갔습니다. 마중 나온 사람들이 의아해하며 물었습니다.
“사부님 이게 무엇입니까?”
모세 압바가 대답했습니다. “내 죄가 내 뒤로 흘러내리고 있는데도, 나는 그 죄들은 보지 못한다네. 허나, 오늘 나는 다른 사람의 죄를 심판하러 왔네.” 이 말을 듣고 크게 깨우친 지도자들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더는 문책하지 않고 용서하기로 했습니다.
‘탈무드’에는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제시합니다.
그 첫째는 키이소오(돈주머니), 둘째는 코오소오(술잔), 셋째는 카이소오(노여움)입니다.
참고로 히브리어는 자음으로만 기록되고 읽을 때 모음을 붙여서 읽습니다. 이를 감안하면 이는 모두 영어 알파벳 K와 S라고 쓰인 동일한 단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기준에는 일종의 언어유희도 있는 셈이지요.
어쨌든, 먼저 카이소오(돈주머니). 사람의 인격을 측정하는 가장 좋은 방법 증 하나로, ‘돈’을 줘보면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코오소오(술잔), 돈 못지않게 사람을 흔드는 게 ‘술’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술에 좌우되어 숱한 일들을 저지르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카이소오(노여움). ‘노여움’ 역시 그 사람의 본 모습을 판단하는 척도가 됩니다. 화가 날 때 그것을 처리하는 것으로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돈과 술은 가시적인 것입니다. 허나 노여움은 보이지 않는 내면의 것입니다. 그 많은 감정적 인자 가운데 ‘노여움’이 유일한 척도로 꼽혔다는 것은 그것이 그만큼 사람 됨됨이의 결정적인 변수라는 것을 강조하는 셈입니다.
1908년 안중근이 독립군 참모중장으로 활약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교전하던 중 일본군 포로들을 붙잡았는데 그는 그들을 모두 석방하며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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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국공법에 사로잡은 적병을 죽이라는 법이 없다.”면서 이들을 석방하고는 자신의 신념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을 물리치고, 어진 것으로 악한 것을 물리친다.”
안중근 의사는 ‘의’가 무엇인지 알았던 대범한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의로움’에는 한 사람의 생명이라도 소중히 여기는 사랑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것도 이런 마음이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로 인하여 너무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게 될 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특히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에게 이런 시선을 보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름’을 너무 쉽게 ‘틀림’이라는 말로 마칩니다. 우리가 의를 가지고 편가름을 하고 노선사움을 하는 것도 다름을 틀림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선진국이 되려면 ‘다름’이 ‘틀림’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미성숙을 넘어 성숙한 사회가 될 때 서로의 행복이 살아납니다.
미국 16대 대통령 링컨은 남북전쟁 당시 한 전투에서 참모총장과 의견이 대립하였습니다. 서로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한 치의 양보도 없었습니다. 링컨은 자신의 작전을 강행했는데 안타깝게도 참패를 하고 희생자가 발생했습니다. 그는 비서를 통해 참모총장에게 메모를 보냈습니다.
“I am sorry."
링컨은 비서에게 물었습니다.
“그래, 쪽지를 받고 참모총장이 뭐라고 말하던가?”
비서는 주저했지만 차마 거짓말을 할 수 없어 사실대로 말하였습니다.
“그가 ‘멍청한 녀석’이라고 하였습니다.”
비서는 긴장하였습니다. 링컨이 화를 낼 것이라고 예상한 거죠. 그런데 뜻밖에 링컨은 껄껄 웃더니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하하, 그 사람, 사람 하난 잘 보는군!”
이것이 중용입니다. 링컨은 ‘멍청한 놈’ 소리를 듣고도 성질을 내지 않았습니다. 왜? 스스로 생각해도 ‘멍청한 놈’이었으니까요.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줄 아는 능력, 그것은 바로 ‘정의’의 기본이기도 합니다.
Big Q2 착한 사람은 부자가 될 수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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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 황상민 교수가 ‘한국인의 심리코드’에서 대한민국 부자의 유형을 분류해 놓은 것을 재미있게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의 표현을 그대로 살려 요약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 배고픈 부자 : 부자인데 배가 고프다고? 그렇다. 물질적으로는 부자이지만 마음으로는 부자가 아닌 사람들이다.
- 철없는 부자 : 배고픈 부자의 자녀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부자의 모습이다.(……)이들은 자신이 부모가 만들어준 부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쉽게 충족할 수 있다. 항상 자신의 주장이 옳다고 우기며, 스스로 특별한 무엇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이든 인물 그 자체로는 주위사람들에게 비호감형이다.
- 품격부자 : 돈 자체를 좇기보다는 자신의 분야에서 나름의 전문성을 가지면서 세상사를 현명하게 처리하며 살고 싶어 한다.
- 보헤미안 부자 : 품격 부자의 코드에 충실한 부모의 자녀에게서 흔히 볼 수 있다. 이들을 상징하는 단서들은 ‘삶의 고민 없음’, ‘독특함’, ‘심사숙고’, ‘고지식함’, ‘드러내기 싫어함’, ‘외로움’, ‘개성’, ‘향수’, ‘후한 인상’, ‘서류’ 등의 단어들이다.
-존경받는 부자 : 돈을 모으는 부자가 아니라 돈을 잘 쓸 줄 아는 부자, 우리나라 사람이 부자에 대해 가장 뚜렷하게 가지고 있는 심리코드로, 단순히 돈만 많다고 해서 부자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존경받는 부자는 ‘여유’, ‘당당함’, ‘떳떳함’, ‘자유’, ‘풍요’, ‘경제력’, ‘존경’, ‘절제(자기관리)’, ‘만족’, ‘편안한 삶’같은 단어들이 상징된다.
- 나쁜 부자 : 나쁜 부자를 나타내는 단어들은 ‘비호감’, ‘나쁜 가족관계’, ‘불법’, ‘악순환’, ‘졸부’, ‘구두쇠’, ‘과소비’, ‘드라마’, ‘드러내기 싫어함’, ‘개인적 탐욕’ 등의 이미지와 중첩되었다.
부자는 악인인가?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이미 앞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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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 분류에서 발견했을 것입니다. 부자도 부자 나름이라는 말입니다. 부자에는 선인도 있고 악인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답은 명쾌합니다. 여기서 끝입니다. 부자가 편의상 악인 축에 속할 것이냐 선인 축에 속할 것이냐는 그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한 마을에 많은 재산을 조상에게 물려받아 풍요롭게 사는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 옆집은 무척 가난했어요. 그런데 가난한 주제에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여유가 넘치는 걸 보며 부자는 늘 못마땅했습니다.
“자기도 제대로 먹지 못하면서 여기저기 나눠주는 꼴이란!”
부자가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궁금한 게 그거라고요. 우리 집은 쌀이 그렇게 많아도 남한테 줄 쌀이 한 톨도 없는데, 그 집은 쌀이 거의 없어도 항상 남에게 줄 쌀이 있잖아요.”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쉽다.” (마르 10.25 참조)
이 비유는 바로 부자의 이런 달레마를 풍자적으로 그것도 과장법이라는 수사를 동원하여 표현해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부자는 나눌 줄 알아야 한다는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늘나라’의 본래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말한 하늘나라는 죽어서 가는 천국을 의미하기도 했지만. 살아서 누리는 천국을 가리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살아서 천국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죽어서도 천국을 누리지 못한다는 깨우침을 기회 있을 때마다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살아서 누리는 천국은 어떤 천국일까요? 바로 행복과 평화의 극치, 사랑과 화목의 충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탐욕’에 사로잡힌 자는 결코 천국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고 보셨습니다. 그래서 부자 운운했던 것이지요.
다시 황상민 교수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부자 중의 부자는 ‘존경받는 부자’일 것입니다. 이런 부자에게는 ‘악인’의 꼬리표가 따라다니기는커녕 오히려 ‘선인’의 훈장이 자랑스럽게 빛날 것입니다.
요컨대 부는 악이 아닙니다. 선을 행할 기회입니다. 나쁜 것은 그 기회를 의도적으로 외면하거나 거부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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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Real Q 선한 ‘부’와 악한 ‘부’가 따로 있다면
재테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한 기자가 미국 최대 부호였던 록펠러의 딸에게 물었답니다.
“당신은 모든 여성이 부러워하는 사람입니다. 실제로 행복하십니까?”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이렇게 답했답니다.
“행복하다고요? 누가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나요?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 중에는 돈의 힘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 얼마든지 많아요. 나는 행복하지 못해요. 나를 부러워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말을 전해주세요.”
확실히 경제는 딜레마입니다. 궁하면 불편하고, 그것에 홀딱 매이면 더 중요한 것을 잃을 판이니까요. 그런 것이 돈이며 부입니다.
내 젊은 시절, 미래를 고민하고 있을 때 책 속에서 만난 숱한 멘토들은 내게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을 깨우쳐주었습니다. 나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인생을 돈벌이에만 전념하는 것은 야망의 빈곤을 드러낼 뿐이다. 부자가 되기만을 꿈꾸는 것은 스스로에게 너무 적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더 큰 야망을 가지고 더 큰 뜻을 품어라. 너의 가능성은 돈 보다 위대하다.”
나는 이런 기준에 따라 직업을 택하고자 했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나에게 아직도 직업을 고를 기회가 있다면 여전히 이 생각을 굽히지 않을 것입니다.
삼포세대 : 돈 때문에 연애와 출산, 결혼까지 포기하는 세대.
88세대 : 월 평균 88만원을 받는 20대 비정규직
이구백 : 20대 90%는 백수
장미족 : 장기간 미취업자
삼팔선 : 38세가 되면 퇴출 대상
나는 고상한 말로 열심히 일하는 직장인들을 기죽이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경제전문가도 아니니 부자가 되는 법을 전수해줄 요량도 없습니다.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어떻게 하면 가장 풍요롭게 누릴 수 있는가에 대해서입니다.
“어떻게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 이것은 경제전문가에게 들어야 하는 재테크 조언입니다.
“어떻게 하면 현재 가진 것으로 최대의 행복 효과를 얻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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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각자가 찾아야 하는 재테크 지혜입니다.
황상민 교수는 조선일보의 한국갤럽. 글로벌마켓 인사이트의 조사 결과를 토대로 한국인은 “돈=행복”이라는 공식의 포로가 되어 꼼짝달싹 못하고 있다고 결론 내립니다.
* 조선일보와 여론조사 기관인 한국갤럽 글로벌마켓 인사이트의 조사결과
( 세계 10개국 5190명 대상 )
- 나는 매우 행복하다 : 한국 7.1%로 최하. 브라질 60%로 1위
- 마이크로소프트와 빌 게이츠가 가장 행복한 사람으로 꼽는 나라 : 한국 49.3%로 1위. 대부분 나라들은 ‘나’ 자신 33.9%
- 행복한 사람으로 ‘나’를 지명한 사람은 : 인도네시아 56.1%, 배트남 46%, 말레이시아 40.1%
- 돈과 행복은 무관하다 : 한국이 7.2%로 최하
돈과 행복이 전혀 무관하다고 보는 것도 좀 무리는 있겠으나 이처럼 자신의 행복을 몽땅 돈에다 걸어 놓으면, 우리의 행복은 경기의 흐름에 따라서 롤러코스터를 타게 마련입니다. 일시적으로 행복하다가도 언제 다시 불행의 골짜기로 곤두박질칠지 모르는 위태위태한 행복이라니! 가슴이 아려오는 것을 어쩌지 못하겠습니다.
이 불행에 또 다른 인자들이 가세합니다. 바로 비교와 경쟁심입니다. 막상 먹고살 만큼 돈을 벌었어도 여전히 행복하지 못한 이유를 애드 디너 미국 일리노이주립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는 이렇게 보았습니다. “한국인은 사회 구성원과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해 남을 이기는 것이 행복해지는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쯤 되면 우리의 근본적인 문제는 경제가 아니라 돈에 대한 태도, 즉 가치관과 비교, 경쟁의식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흔히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그 다음에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아닌 것 같습니다. 미국 작가 얼 쇼리스가 창립한 ‘클레멘트 코스’는 노숙인들을 대상으로 의식주가 아닌 ‘살아야할 이유’를 깨우쳐 주는 것을 우선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는 타인과 소통하는데 가장 중요한 ‘자신에 대한 성찰’과 ‘자존감의 확보 및 회복’이라는 것. 그리고 ‘인문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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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취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노숙인들이 만들고 판매하는 ‘빅 이슈’라는 잡지를 통해 현실화 되고 있습니다. 전 세계 28개국, 최근 한국에도 상륙했습니다.
이 대범한 역발상이 이제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돈보다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고, 부자가 되는 것보다 보람 있는 삶을 더 꿈꾸면, 일시적인 경기 침체 때문에 그토록 스트레스를 받거나 우울증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의 경험에서 배우거나, 현자들에게 지혜를 청하거나, 오늘날도 존재의 향기를 풍기는 실존 인물들에게 비결을 물어 내가 도달한 잠정 깨달음은 이렇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자체를 즐기라.
배를 곯을지언정 의미 없는 일은 하지마라.
돈만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은 영혼을 잃기 쉽다.
명예를 구하여 일하는 사람은 기쁨을 잃기 쉽다.
권세를 탐하여 일하는 사람은 친구를 잃기 쉽다.
자기가 사랑하는 일을 하고, 일을 위하여 일하라.
그러면 나머지 것들은 저절로 따라올 것이다.
이는 처세술이 아니라 삶의 원리를 제시하는 경구입니다. 처세술은 일시적으로 통하지만 원리는 영원히 통합니다. 그러므로 즉효를 보지 못하더라도 우직하게 실행해봄이 현명한 선택일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에게는 성공보다 행복에 더 우선순위를 두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흔히 “성공하면 행복할 것이다”라는 가설을 세워놓고 삽니다. 하지만 성공한다고 해서 행복해질 거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행복하면 성공할 것이다”로 발상을 바꿔보는 것입니다. 실제로 통계에 의하면 행복한 사람이 성공할 확률은 매우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니 행복을 먼저 선택하는 지혜를 가진 자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셈입니다.
나는 행복의 비결이 영어 단어 ‘Happiniss’에 함축되어 있다고 역설하고 다닙니다. 행복을 뜻하는 이 단어의 어원은 ‘발생 한다’는 뜻을 지닌 ‘Happ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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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니다. 이는 “행복은 발생하는 것이지 쟁취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시사 합니다. 행복은 쟁취나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발생되고 창조되는 것입니다. 획득은 어려워도 발생은 쉽습니다. 그냥 웃고, 그냥 행복한 척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행복의 감정이 발생합니다. 우리의 뇌에서는 거짓으로 행복한 척해도 실제 행복할 때와 같이 도파민, 엔도르핀 등의 행복호르몬이 분비된다고 합니다.
과장되게 말하자면, 우리가 직관하는 진실은 이것입니다.
“손바닥 안에 주어진 것에서 풍요를 만끽할 줄 모르면, 우주를 소유한들 배고픔은 여전하다.
PART 2. 고독한 영혼의 초월 본능
Big Q 3. 우리는 왜 자기 인생에
쉽게 만족하지 못할까?
“영혼이란 무엇인가?”
첫 번째 관점은 인간은 결국 ‘물질적인 존재’로 보는 ‘유물론’의 주장입니다. 심리학자 프로이트나 공산주의자 마르크스 등이 이런 주장을 펼쳤습니다. 이들은 인간의 지성, 정신, 영혼이라는 것들도 결국은 ‘물질’이 거듭 발전해 나가는 과정에서 생겨난 산물이라고 봅니다. 단백질 덩어리가 고도로 진화하여 오늘날 인간의 문명을 이뤄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의 ‘육신’이 수명을 다하면 인간의 ‘정신’도 소멸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주장에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관점은 만물의 영장으로서 인간 고유의 가치를 놓치기 때문입니다.
철학자들은 영혼(靈魂)을 지닌 인간의 위상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무릇 식물이 지닌 생명원리를 생혼(生魂)이라 불렀고, 동물이 지닌 생명원리를 각혼(覺魂)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생혼’이란 생명을 관장하는 기운을 가리키고, ‘각혼’이란 감각을 관장하는 기운을 가리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병렬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상위의 혼이 하위의 혼을 내포한다는 점입니다. 즉 ‘각혼’에는 이미 ‘생혼’이 내포되어 있고, ‘영혼’에는 이미 ‘생혼’과 ‘각혼’이 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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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관점은 물질을 넘어서는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되 육체를 나쁘게 보는 ‘이원론적’ 입장입니다. 이는 플라톤을 위시한 그리스 철학자들의 견해입니다. 플라톤은 ‘영혼 불멸설’을 내세웠습니다. 영혼들이 본래 이데아(idea)의 세계에 선재(先在)하다가 죄를 짓고 그 벌로 잠시 이 세상에 와서 육체라는 감옥에 갇혀 있게 되었다고 본 것이죠. 육체는 악에서 기원한 것으로 영혼의 감옥이요. 속박이며 무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혼은 육체에 얽메여 있는 욕망을 이성의 힘으로 극복해야 하고, 영혼이 자유로워지는 길은 결국 육체를 떠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는 부정적이고 염세적인 육체관으로 중세 그리스도교 사상에 크게 영향을 끼쳐서 고행을 장려했습니다.
셋째,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는 동시에 육체를 나쁘게 보지 않는 일원론적 관점입니다. 곧 인간을 영혼과 육체의 ‘완전한 합일체’로 보는 입장입니다. 성경은 인간을 철저하게 영혼과 육체의 통합체로 봅니다.
충족을 모르는 욕망의 근본적인 원인은 영혼이 실재하기 때문입니다. 비극은 많은 이들이 마치 영혼이 실종된 듯이 살고 있으며, 게다가 그 사실 자체를 깨닫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사람들은 닭이나 개 한 마리가 나가면 찾으러 다니지만 마음이 도망가면 찾으려 하지 않으니 서글프구나.(人有鷄犬放 知求之 放其心而不知求 哀哉)”하였던 맹자의 말은 모름지기 이런 실태를 두고 한 개탄이었을 것입니다.
집 나간 ‘마음’, 곧 ‘영혼’을 되찾아서 우리에게서 다시 사람 냄새가 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참 ‘사람 냄새’는 ‘영혼’ 이라는 실재를 매개로 하여 ‘하늘 냄새’가 됩니다.
법정 스님은 ‘하늘 냄새’라는 시에서 영혼의 향기를 이렇게 노래합니다.
“사람이 하늘처럼 맑아 보일 때가 있다.
그때 나는 사람에게서
하늘 냄새를 맡는다.
사람한테 하늘 냄새를 맡아본 적이 있는가. 스스로 하늘 냄새를
지닌 사람만이 그런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아무래도 맑은 영혼에서 맑은 내가 나고, 탁한 영혼에서는 탁한 내음이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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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입니다. 흔히 “그 사람 참 영혼이 맑다”는 표현을 합니다. 영혼이 맑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동화작가 故 정채봉은 노래합니다.
우선 특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산을 산이라 하고 물을 물이라 합니다
몸을 옷으로 감추지도 드러내 보이려 하지도 않습니다
물음표도 많고 느낌표도 많습니다
사금파리 하나도 업신여기지 않고 흙과도 즐거이 맨손으로 만납니다
높은 하늘의 별을 우러르기도 하지만 청마루 밑 같은 낮은 데에도
곧잘 시선이 머뭅니다
마른 풀잎 하나가 기우는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고 옹달샘에 번지는
메아리결 한 금도 헛보지 않습니다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오늘은 무슨 좋은 일이 있을까’ 그 기대로
가슴이 늘 두근거립니다
이것을 지나온 세월 속에서 잃었습니다
찾아 주시는 분은 제 행복의 은인으로 모시겠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고요? 흔히 이렇게들 부릅니다
‘동심’
이 영혼을 잘 갈무리하여 자신의 마음에서 피어오르는 하늘 향기를 맡아 보기를 권합니다.
일상에서 고독을 즐기는 법을 터득한 사라 밴 브레스낙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도 속담에 따르면 모든 사람은 육체, 정신, 감정, 영혼이라는 네 개의 방을 갖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한 방에서만 산다. 하지만 인생을 풍요하게 살아가려면 날마다 네 개의 방에 규칙적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억지로가 아니라 자연의 섭리에 따라 말이다.
당신은 지금 어느 방에 있는가? 누군가 등을 떠밀어 원하지도 않는 방에 틀어박혀 있는 건 아닌가? 방의 주인은 오직당신이다.”
이젠 영혼의 방에 머무는 즐거움도 누려볼 때입니다. 우리는 육체의 방, 정신의 방, 감정의 방에는 매일 섭섭하지 않을만큼 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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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방!
그것은 조용히 홀로 있을 수 있는 고독의 공간을 말합니다.
한 두 시간도 좋고, 30분도 좋고, 정 어려울 땐 다만 몇 분이라도 좋습니다. 꼭 뭔가를 얻으려 하지 말고, 꼭 뭔가를 이루려 하지도 말고, 그냥 머무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성 알퐁소가 즐겼던 그 고독을 위한 경구가 달리 보일 때가 올 것입니다.
“모든 것을 가지고 들어가라 intrate toti.
혼자 머무르라 manete soli.
다른 사람이 되어 나가라 exite alii.”
고독에 머물다 보면 어느새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을 것입니다. 고독안에서 불안이 변하여 평화가, 미움이 변하여 사랑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움틀 것입니다. 고독의 열매는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느새 맺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잠시 멈춰 영혼을 추슬러볼 일입니다.
“너는 구구인가?”라고 누군가가 물을 때 그 답을 구성하는 문장 중심에 “나는 영혼이다”를 서슴지 않고 적을 줄 아는 사람은, 비록 땅 위에 살고 있어도 이미 하늘의 사람입니다.
3-1 Real Q 외로움과 고독은 어떻게 다른가요?
섬세하게 언어 선택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은 소극적인 의미로, ‘고독’은 약간 적극적인 의미로 느껴집니다. 적어도 이 글에서는 그렇게 약속을 해두겠습니다.
‘외로움’ 또는 ‘외톨이’의 심리적 현실을 공감하고자 굳이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사실은 바로 ‘나’와 ‘너’가 그 당사자이기 때문입니다.
요란한 척, 바쁜 척, 친구가 많은 척하지만 깊은 내면에서 이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오죽하면 루소가 “사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사는 것보다 훨씬 덜 힘들다”고 말했을까요. 독일 작가 마리엘라 자르토리우스의 말처럼 외로움은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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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과의 관계 속에 있을 때 엄습하게 마련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정신분석가 이승욱의 분석은 실제 현상과 딱 맞아떨어집니다.
“외로움이란, 내가 말할 대상이 없는 데서 비롯된 상처가 아니라, 내가 누구에게도 말 걸어지는 대상이 아니라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했다. 말 걸어지는 대상이라는 것은, 존재감의 확인이다. 우리에게는 말 걸어주기를 진정 원하는 사람, 오직 한 사람, 또는 소수의 몇 명이 있다.(……) 그러나 자신의 일부만이 받아들여지는 느낌은 어중간한 외로움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많은 이들의 외로움은 대체로 어정쩡하다. 절절이 외롭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외롭지 않은 것도 아니다.”
이 외로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없을까요? 있습니다.
나는 에둘러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길은 바로 외로움을 고독으로 승화시키는 것입니다. 즉 떠밀려서 당하던 외로움을 이제 좋아서 즐겨보는 것입니다. 고독은 외로움의 변형일 뿐입니다. 이제껏 당해왔던 것을 즐기는 것입니다.
나는 어차피 ‘외로움’에 던져진 사제입니다. 그래서 그 ‘외로움’을 ‘고독’의 차원으로 끌어올려 아예 신나게 즐기기로 했습니다. 기왕이면 아무 방해도 받지 않는 절대 고독의 시간을 즐기기로 더 욕심을 내봤습니다. 나에게 그 시간은 새벽입니다. 그래서 새벽 일찍 일어나 적막 가운데 홀로의 시간에 한껏 잠겨보기로 했습니다.
다음으로 나는 침묵과 맞대면합니다. 나에게 침묵은 신의 얼굴이며 신의 음성입니다. 나는 이 맞대면의 시간에 내 오감에 달린 기도의 문들을 활짝 열고 천상의 지혜를 들으며 그 지혜를 활자로 옮기는 저술 작업을 합니다.
그 침묵의 바다에서 나는 지난 세기 하반기에 문학계의 거두로 존경받았던 구상 시인의 신세계를 힐끗 보았습니다.
“ 이제사 비로소
두 이레 강아지만큼
은총에 눈을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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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시들하던 만물만상이
저마다 신령한 빛을 뿜고
그렇듯 안타까움과 슬픔이던
나고 죽고 그 덧없음이
모두가 영원의 한 모습일 뿐이다.
이제사 하늘의 새와 꽃만을 먹이고 입히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공으로 기르고 살리심을
눈물로서 삼사하노라.(……)”
시인이 ‘두 이레 강아지만큼’ 눈 떠서 접한 ‘은총’은 온전히 내 것이 되어 내 세계관과 삶의 지혜를 바꾸어놓았습니다. 냉철한 이성으로 생로병사에 깃든 영원의 편린을 꿰뚫어 보게 하였으며 천진의 감성으로 ‘하늘’의 보살피심에 눈물 흘리게 하였습니다.
외로움은 ‘홀로 혼자’이기에 위로와 사랑을 필요로 합니다. 하지만 고독은 ‘더불어 혼자’이기에 더 이상 위로와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외로움은 타인의 고통을 품지 못하지만, 고독은 타인의 고통을 품습니다. 테레사 수녀가 50년간 기쁨보다 고통 속에서 살았다는 고백은 역설적으로 그녀가 그만큼 깊은 고독에 칩거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리하여 나는 지금도 고독 예찬론자가 됩니다.
외로움은 사랑의 필요를 호소하는 원초적 욕구입니다.
고독은 그 사랑의 샘을 자기 안에서 발견하는 탐색의 장입니다.
외로움이 영글 때는 육신이 처절하게 흐느끼지만, 고독이 영글면 영혼이 기쁨에 벅차 흐느낍니다.
그리고 그리고, 외로움은 손을 안으로 오그라들게 하지만, 고독은 손을 밖으로 내밀게 해 줍니다.
Big Q4 눈으로 보이지 않는 세계를
알 필요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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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근원적인 것에 대한 열망을 품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종교심입니다. 일찍이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사람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그 무엇을 진선미(眞善美)라 하였습니다. 이 진선미의 특성을 온전하게 지닌 존재를 절대자 또는 신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품고 있는 절대적으로 참된 것(眞), 절대적으로 선한 것(善), 그리고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것(美)에 대한 욕구는 곧 하느님에 대한 욕구인 것입니다.
우리는 인류 역사를 통해 인간이 종교적 동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종족이건 어느 민족이건 간에 자신들 고유의 종교를 신봉해왔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힘이 센 짐승을 믿을 수도 있습니다. 이를 토테미즘이라 합니다. 자연 속의 정령을 믿을 수도 있습니다. 이를 애니미즘, 곧 정령신앙이라 합니다.
서낭당의 잡신 또는 우상을 믿을 수도 있습니다. 이를 민간 신앙 혹은 미신이라 합니다. 또 우주에 편만한 신적인 존재를 믿을 수도 있습니다. 범신론이라 합니다. 그리고 창조주 하느님을 믿을 수도 있습니다. 이를 유일신 신앙이라 합니다.
이렇듯 다양하게 나타나는 종교심은 인간에 내재한 본능으로서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바로 이러한 종교심에서 출발하고 있는 셈입니다.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여론조사이니 한 번 통계치로 정리해볼까요?
미국 해외선교연구센터(OMSC)의 ‘세계종교인구 및 세계선교연례통계’를 따르면 2010년 현재 세계 인구 총 68억 5245만 7천명 가운데 종교별 분포는 이슬람교 22.61%, 천주교 16.86%, 힌두교 13.84%, 개신교 11.50%, 중국종교 6.84%, 불교 6.68%, 정교회 4.00%, 민족종교 3.81%. 성공회 1.26%, 기타 기독교 0.50%, 유대교 0.21% 순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무신론자는 2.02% 였습니다.
종교인의 숫자가 무신론자의 숫자보다 압도적으로 높게 나타난 것은 집단적인 착각 때문이었을까요?
서강대 석좌교수 정의채 몬시뇰은 이렇게 말합니다.
“학문이라는 것은 고색창연한 분화유산과 같습니다. 장구한 역사 속에서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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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 한 장 한 장 쌓여 건물이 된 것입니다. 세월의 풍상을 겪으면서 지혜가 베어들고 이끼도 끼고 하여 거대한 문화가 창출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철학이라는 것, 종교라는 것, 신학이라는 것들은 책 몇 권 읽고 그렇게 쉽게 얘기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것들이 아닙니다. 10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대학자들이 ‘한 우물’만 파서 달성한 경지들이 집성되어 일련의 학문적 전통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인류 역사를 더듬어 보건데 역사의 심판은 냉엄했습니다. 아무리 그럴듯한 사상도, 아무리 강력한 세력도 한두 세기를 지속하며 추앙받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습니다. 이단사설은 반드시 역사의 심판을 받고 사라져야 했습니다. 억울하게 재판받았던 진리는 또 긴긴 역사 속에서 반드시 복권되었습니다. 그런데 2000년은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기간의 시험을 거쳐 살아남은 종교를 세계 4대 종교하고 하지 않던가요! 그래서 인류는 오늘날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불교, 유교의 진리성을 공히 인정해주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요! 이렇듯 참 종교는 장구한 역사를 통해서 그 진정성을 검증받았습니다. 여기에 20세기 최고의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이 가세합니다. 그는 자신의 물리학적 천재성으로 우주를 만나고 그 신비에 대하여 이렇게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감정은 신비다. 그것은 모든 진정한 예술과 과학의 원천이다. 이 감정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최고의 지혜와 가장 빛나는 아름다움으로 현현하지만. 우리의 둔한 능력으로는 그것의 가장 원시적인 형태밖에 파악할 수 없는 불가해한 것이 정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아는 것…… 이런 앎과 느낌이야말로 모든 진정한 종교성의 핵심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독실하게 종교적인 사람이다.”
그는 인간의 종교성을 지극히 과학적인 접근법으로 옹호한 셈입니다.
아무리 그럴듯한 논증 앞에서도 종교는 여전히 선택의 대상입니다. 갖고 안 갖고도 선택이며, 어느 종교를 가질 것인지도 역시 선택입니다.
일찍이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이 둘 사이의 싸움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아아, 두 개의 혼이 나의 가슴 속에 살고 있다. 그리고 서로멀어지고 서로 반발한다. 하나는 강한 집념으로 애욕에 사로잡히어 현세에 집착한다. 또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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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억지로 이 속세를 떠나서 높은 서조의 영계로 올라간다.”
파우스트의 마음은 또한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땅에 집착하는 의지와 하늘을 동경하는 의지, 지상적 쾌락의 갈망과 천상적 복락의 희구, 이 두 가지가 서로 대립하며 공존하는 것입니다.
20대가 저물어갈 무렵, 나는 영국 시인 프랜시스 톰슨의 시에 홀딱 매료된 적이 있습니다. 마약중독자였던 그는 자신을 절망의 나락까지 끈질기게 추적하는 신을 ‘하늘의 사냥개’로 비유합니다.
나는 그로부터 도망쳤다.
밤과 낮과 오랜 세월을 그로부터 도망쳤다.
내 마음의 얽히고설킨 미로에서
눈물로 시야를 흐리면서 도망쳤다.
나는 웃음소리가 뒤쫓는 속에서
그를 피해 숨었다.
그리고 나는 푸른 희망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 올라갔다가
그만 암흑의 수렁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틈이 벌어진 공포의 거대한 어둠으로부터
힘센 두 발이 쫓아왔다.
서두르지 않고 흐트러짐이 없는 걸음으로
유유한 속도, 위엄 있는 긴박감으로
그 발자국 소리는 울려왔다.
이어 그보다 더 절박하게 울려오는 한 목소리.
나를 저버린 너는 모든 것에서 저버림을 당하리라!(……)
“나를 저버린 너는 모든 것에서 저버림을 당하리라!”
섬뜩한 말입니다. 하지만 저주가 아닙니다. 신이 자신을 등지는 이를 내치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부모를 잃은 고아의 처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니, 굴러온 복을 차버린 사람의 영원한 회한을 말하는 것입니다.
선택은 자유지만 그 결과는 판이할 것입니다. 나는 종교라는 하늘 아래 모든 인간은‘ 우물 안 개구리의 처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물 안 개구리라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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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똑 같지는 않습니다. 그들 중에는 우물 안에서 태어나서 산 개구리가 있고, 우물 밖에서 살다가 어쩌다 빠져 갇히게 된 개구리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개구리는 각각 사는 차원이 다릅니다. 우물 안에서 태아닌 개구리에게는 자기가 보는 하늘이 전부인 반면, 우물 밖에서 살다가 들어간 개구리는 저 밖에 무엇이 있는지 압니다. 우물 밖을 볼 줄 아는 이 안목을 이름하여 초월적 사유 또는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기가 막힌 얘기 아닙니까!
고주망태 시인 천상병은 그 우물 밖 하늘을 힐끗 보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라고 귀천(歸天)을 노래했습니다.
4-1 Real Q 기도는 어떻게 하는 건가요?
내가 사람들에게서 받아본 질문 중 가장 자주 듣는 것이 기도에 관한 것입니다.
“남편 승진을 위해서 기도해도 되나요? 그런 건 기복기도가 아닌가요?”
“아이 좋은 대학교 가도록 기도해도 되나요? 너무 이기적인가요?”
“기도를 말로 해야 하나요? 하느님께서 다 아실 텐데.”
“왜 하느님께선 다 아시면서 기도하지 않으면 안 주시나요?”
내 답은 한결같습니다.
“세상에 틀린 기도는 없답니다. 다 나름대로 맞는 기도입니다. 다만 수준이 낮은 기도와 수준이 높은 기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죠.”
그러면서 나는 성경의 두 인물이 바쳤던 대조적인 기도를 예로 들려줍니다.
우선 ‘고생하며 낳았다’는 뜻을 지닌 야베츠는 이름부터 ‘팔자 사나운 인생’을 암시합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부디 저에게 복을 내리시어 제 영토를 넓혀주시고, 손수 액운을 막아 어려운 일 당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1역대 4,10:공동번역)
그가 구한 것들은 철저히 세속적인 것들이었습니다. 복, 땅, 액땜, 순탄 등.
놀라운 것은 이 기도가 어떤 전제조건 없이 응답받았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께서 그가 구한 것을 이루어주셨다.” (1역대 4,10 :공동번역)
다음으로 아구르라는 현자의 소박한 기도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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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는 당신께 간청할 일이 두 가지 있습니다. 그것을 제 생전에 이루어 주십시오. 허황된 거짓말을 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마십시오. 먹고 살 만큼만 주십시오. 배가 물러 ‘야훼가 다 뭐냐?’ 하며 배은망덕하지 않게 너무 가난한 탓에 도둑질을 하여 하느님의 이름에 욕을 돌리지 않게 해주십시오.” (잠언 30.7~9 : 공동번역)
야베츠가 하느님께 ‘현세적인 축복’을 청한 반면, 아구르는 ‘오로지 하느님을 잘 섬기고 살 수 있도록 해달라’는 기도를 바쳤습니다. 성경에서는 이 두 기도가 모두 훌륭한 기도의 전형으로 꼽힙니다. 이 사실 역시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어떤 경우 우리는 현실적인 ‘이해관계’ 때문에 기도합니다. 하느님께는 이 두 기도 모두가 정당하고 가치롭습니다.
기도의 힘은 의탁에 있습니다. 미국의 한 영성가 헨리 나우웬이 어느 날 그의 아버지와 함께 서커스 구경을 갔습니다. 공연에서 그네타기 곡예사 다섯 명이 멋진 묘기를 보여주었습니다. 그 중 세 명은 ‘나는’ 역이었고, 두 명은 ‘잡는’ 역이었습니다. ‘나는’ 사람들은 공중으로 높이 치솟았습니다. ‘잡는’ 이의 강한 손에 붙들리기 전에는 모든 것이 아슬아슬했습니다.
나우웬은 곡예사들의 용기에 감탄했습니다. 또한 이 아름다운 공연을 보고 ‘맡김’의 원리를 깨달았습니다.
“상대방이 자신의 손을 잡으려면 일단 내가 잡고 있는 그넷줄을 놓아야 한다. 움켜쥐었던 손을 펴야 비로소 새로운 차원의 삶에 들어설 수 있다. 내가 붙들고 있는 ‘그네’의 줄을 놀아야 ‘잡는 이’ 야훼 하느님이 내 손을 잡고 아름다운 비행을 할 수 있다. 그래야 꿈의 세계를 날 수 있다.”
그는 완전한 맡김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도에서 최고의 승부처는 맡기느냐 못 맡기느냐의 고개입니다. 이 고개를 넘으면 새로운 세계가 나타납니다.
항상 자기 그림자를 벗어 던지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그림자를 없애기 위해 별 짓을 다했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때 한 현자가 말했습니다.
“자신의 그림자를 벗어 던지고 싶으면 그림자 뒤로 숨으려 하지 말고 큰 나무 그늘로 들어가면 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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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그늘 속으로 들어가는 지혜, 이것이 바로 맡김의 축복입니다.
동양과 서양을 아우르는 기도의 대가 십자가의 성 요한은 기도의 절정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늘도 내 것이고, 땅도 내 것이며, 국가들도 내 것입니다. 모든 것이 내 것입니다. 하느님 자신도 내 것이고, 그분께서는 나를 위해 존재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내 것이며 모든 것이 내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 내 영혼아. 그런데 너는 무엇을 청하며 무엇을 추구하느냐?”
4-2 Real Q.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만 하는‘얌체기도’에도
응답이 있을까요?
명동 성당 주임을 역임한 유명한 신부님에게서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행색이 멀쩡한 여자분이 찾아와서는 대뜸 이렇게 묻더랍니다.
“신부님, 저희가 이 동네에 새로 이사 왔는데, 한 번 오셔서 미사 좀 드려 주시면 안 될까요?”
“안 될 거야 없지요. 날짜를 맞춰보시죠.”
그래서 사무장에게 시켜 방문 일자를 정하고 약속된 날 미사도구를 꾸려 알려준 장소로 찾아갔답니다. 집안을 들어가 보니 전혀 신앙인 가정의 분위기가 나지 않더랍니다. 집 주인은 절차나 예법도 모르고요. 스스로도 당황스러웠던지 이렇게 경위를 밝히더랍니다.
“사실은요. 제가 좀 망설였죠. 이사를 와서 복도 빌고 싶은데, 무당을 불러 굿을 할까 하다가 요즘에 서양식이 대세니 서양식 굿을 한번 바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신부님을 모신 거예요.”
“네~에!”
그 신부님이 미사를 드려주었는지 아닌지는 기억에 없습니다. 여하튼 성격이 호방하셨던 신부님은 이 사건을 부정적으로 폄하하여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한국인 가슴에 유전 인자처럼 대물림되어온 아름다운 종교심이라고 주석을 다셨습니다. 누구에게나 복을 빌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출발점입니다.
우리가 피해야 할 것은 하느님의 소관을 우리가 침범하여 되고 안 되고를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얌체기도’니 ‘기복기도’니 ‘이기적인 기도’니
‘잘못된 기도’니 하며 남의 기도를 판단하는 것은 금물입니다. 그것은 월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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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그 응답과 상관없이 이미 그 자체로 위로이며 보상입니다.
러시아 작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소설 ‘닥터 지바고’의 한 장면에서 그 극단적인 예가 발견됩니다. 부유한 변호사에게 유혹을 당한 라라가 절망적인 상태가 되어 교회로 도망치는 장면이 이렇게 그려집니다.
“라라는 신앙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교리도, 교회의 전례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삶을 지탱하기 위해서 내면의 음악이 필요했다. 인간은 이러한 음악을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결코 작곡할 수 없다. 라라는 삶에 대한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이러한 음악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녀는 교회로 갔다. 그곳에서 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는 하느님의 품입니다. 그러기에 교리를 잘 몰라도, 전례를 잘 몰라도 그냥 가서 그분의 터치를 만나면 우리 안에서 음악이 나오는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작곡되는 곡조 없는 흐느낌의 음악이.
진정한 내면에서 들려오는 음악, 하느님만이 작곡할 수 있는 전율의 음악, 이 음악 속에서 라라는 하염없는 위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Big Q 5. 악한 사람이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례는 대체 뭔가?
“악인이 부귀와 안락을 누리는 사람이 많다면, 신의 교훈은 무엇인가?”
악인이 부귀와 안락을 누리는 꼴, ‘이 더러운 세상’이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하는 불공정사회, 그런데 이런 사회를 만든 것은 인간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의 탐욕과 착취가 그 배후인 것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때 인간은 그 책임을 신에게 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묵인한 신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이 공인된 정통 코스입니다. 누구도 이런 반응에 대하여 의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만일 신이 있다면 왜 이런 현상이 용납될 수 있을까요? 초간단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신은 벌을 주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현세에서는 말입니다.
흔히 신은 상선벌악(賞善罰惡)으로 인간의 행위에 보응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상선벌악의 시행은 궁극적으로 사후 또는 종말의 때에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 정설입니다. 현세에서 그 중간 평가가 이루어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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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닙니다. 오직 마지막 때로 유보되어 있을 뿐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죄인 또는 악한 사람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기 위한 신의 자비가 그 이유입니다. 언젠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마음을 고쳐먹기를 기다려주는 신의 자비가 바로 그 답답한 침묵의 이유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마태 5,45)
이제 자명하여 졌습니다 .
만일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악인 중에도 부귀와 안락을 누리는 사람이 많다면’, 그것은 그만큼 한국 사회가 아직도 불공정 사회라는 뜻입니다. 이를 책임지고 개선해야 할 주체는 하느님이 아니라 엄연히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내 생각에 토마스 데 아퀴노 만큼 正義의 定義를 똑바로 내린 사람은 없다고 봅니다.
“각자에게 그의 것 cuique suum!”
이것이 그의 정의입니다. 완벽합니다. 각자 자신이 땀 흘린 딱 그만큼 권리가 돌아가고, 각자에게 마땅히 해야 할 의무가 에누리 없이 분배된 상태. 이것이 정의라는 것입니다.
Big Q 6. 극단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나?
신학교 시절 수업 시간에 지금은 대주교님이 되신 한 교수님이 대뜸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누구인줄 아십니까?
“.....?.....? ”
“딱 책 한 권 읽고서 뭘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듣고 보니 그럴듯했습니다. 이후 살아가면서 그 교수님 아니 대주교님 말씀에 다시금 맞장구를 칠 때다 많았습니다. 결국 광신자나 골수 공산당원의 의식구조도 딱 책 한 권 읽고서 뭔가를 주장하는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균형 있는 교리를 내세우는 종교에서도 광신자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개인적인 성격이 이성보다는 감성에 치우쳐 무엇이건 오버하는 성향이 있을 때, 아무리 바르게 배워도 광신자가 될 확률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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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인은 때때로 광인처럼 되는데, 공산당원이 공산주의에 미치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100% 긍정합니다.
공산주의를 주창한 마르크스는 젊은 시절 주로 분노, 파괴, 야만을 주제로 하는 시를 썼다고 전해집니다. 그 가운데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하느님처럼 뻐기면서 다니겠네.
이 세계의 황무지 사이로
내가 하는 말에 강력한 힘을 부여하면
창조주와 똑같은 기분이겠지?“
광신도의 심리와 공산당원의 심리가 어떻게 흡사한지를 보여 주는 좋은 예라 할 것입니다.
경험에 비추어 보건데, 평소 ‘오직’을 강조하는 사람이 광신도가 될 소지가 많습니다. ‘오직 믿음’도 ‘오직 실천’도 ‘오직 성장’도, ‘오직 복지’도. ‘오직 우’도 ‘오직 좌’도. ‘오직 사랑’도 ‘오직 정의’도 다 위험합니다.
바야흐로 지식 융합 시대가 무르익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종교간 소통이 점점 소중해지는 시대로 진입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종교에 열심할 권리는 있으나, 타 종교에 대하여 배타적 증오심을 품을 권리는 없습니다.
Big Q 7. 우리나라는 종교가 번창한데 사회문제는
왜 그렇게 많나?
“우리나라는 두 집 건너 교회가 있고, 신자도 많은데 사회범죄와 시련이 왜 그리 많은가?”
나는 이 물음 역시 교회만 겨냥한 것이 아니라고 여깁니다. 종교의 사회정화 기능에 관해서 묻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종교는 건강한 사회문화 조성에 얼마나 영향을 끼치고 있을까요?
2007년 통계청 자료를 분석한 종교와 범죄율의 상관관계를 보면 비종교인은 15명당 1명, 원불교는 30명당 1명, 불교는 31명당 1명, 개신교는 39명당 1명, 천주교는 105명당 1명으로 나왔습니다. 그리고 2009년 대검찰청 종교별 범죄 통계에서도 비슷한 결론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사회범죄와 시련의 책임이 직접적으로 종교인에게만 돌려져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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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된다는 점을 강변하고 있습니다.
종교는 사회에 과연 어떤 기능을 하는가? 이를 역사‧사회‧문화적으로 조사해봤더니 흥미로운 결과가 나왔습니다.
첫째로, 건강한 사회 기강을 위해서 ‘종교의 보호벽’이 필요합니다.
둘째로, 종교가 인간의 행복한 삶에 크게 기여한다고 합니다.
셋째로, 종교가 질병의 치유를 촉진한다는 사실입니다.
20세기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는 “나는 그리스도는 좋아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좋아하지 않는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말입니다. 이에 대해 영국의 유명한 추기경 뉴먼이 뼈 있는 말을 하였습니다.
“믿음은 ‘실재동의(實在同意)’이지 ‘개념동의(槪念同意)’가 아니다.”
믿음은 어떤 교리를 머리로만 끄덕이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늘 자신의 부족을 성찰하며 완전을 향하여 하루하루 나아가는 겸손한 걸음을 멈추지 말아야 하는 것이 종교의 유무와 상관없이 모두가 견지해야 할 자세일 것입니다.
“교회는 죄인들을 위한 병원이지 성자들을 모신 박물관이 아니다.”
누구의 말인지는 모르겠으되 이 말은 뭇사람들에게는 양팔 벌린 초대이며, 신앙인들에게는 자기성찰의 거울입니다.
2012. 2. 22.
PART 3. 내 인생의 비밀코드
PART 4. 피할 수 없는 물음
은 다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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