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질문 (2)

2012. 3. 6. 18:58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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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잊혀진 질문 (2)

                     - 내 가슴을 다시 뛰게 할 -


■ 차동엽 신부


PART 3, 내 인생의 비밀코드


Big  Q 8,  이 세상에 신이 있다면

           대체 어디에 숨어 있나?


1970년대 말 명동에서 들은 함석헌 선생님의 노자 강의를 잊을 수 없습니다. 거기서 선생님은 동서양을 넘나들며 철학자들의 사상을 자유분방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때 들은 노자의 도덕경 첫머리의 해설은 당시 내 사고의 지평이 확 트이도록 해 주었습니다.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를 도라고 부를 수 있으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고 ,

  이름을 이름으로 부를 수 있으면 그것은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여기서 ‘도’는 무엇이고, ‘상’은 무엇을 가리키는지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나는 그런 논의와 관계없이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개념 안에 실재를 담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깨달음은 우리의 지식, 지혜, 언어, 개념이 지닌 한계를 확연히 인식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신(하느님)의 존재를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이 물음에 답하기 전에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물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과연 신의 존재는 증명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실망스럽게도 그 답은 ‘No!’입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방금 앞에서 언급한 개념의 한계 때문입니다.     


이를 가리켜 8세기 이슬람교 성인 라비아 알 아다위야는 간명하게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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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하는 자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그의 존재 속에서 네가 지워져버리고

그리고 그의 존재 속에서 네가 여전히 존재하는,

어떤 것의 진정한 형태를 어떻게 묘사할 수 있겠는가?”


그의 표현대로 신은 한마디로 ‘그의 존재 속에서 네가 지워져 버리고, 그리고 그의 존재 속에서 네가 여전히 존재하는, 어떤 것’입니다. 그렇거늘 누가 그의 ‘진정한 형태’를 ‘묘사할 수’ 있겠습니까? 따라서 ‘설명하는 자는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 논리를 따른다면 ‘증명’하려는 그 어떤 시도도 궁극적으로 ‘설명’의 범주를 벗어날 수 없으니 결국 ‘거짓말’에 다름 아니라는 얘기가 됩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사상가 카를 힐티는 같은 통찰을 보다 직설적으로 전합니다.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신의 본질이다. 그렇지 않으면 신은 신이 아니며, 신을 설명할 수 있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

같은 취지를 아우구스티누스는 삼단논법으로 말합니다.

“인간은 유한하다. 하지만 신은 무한하다.

유한한 것은 결코 무한한 것을 밝혀낼 수 없다.

따라서 유한한 인간은 결코 무한한 신을 밝혀낼 수 없다.”


경험주의 철학자 베이컨은 말합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신은 철학의 문제가 아니라네. 신은 철학 바깥에 존재하기 때문이지. 철학의 대상은 인간과 우리 눈에 보이는 자연에 한정되어야 한다는 뜻이야. 알지도 못하고, 보이지도 않는 것에 대해 논한다는 것은 돈으로 집을 사겠다는 생각과 다를 바 없다네.”       


한 번은 고해소에 있는데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저는 하느님의 존재를 의심했습니다. 하느님이 정말 계신지 안 계신지 확신이 들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몇 년 하셨죠?”

“한 30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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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30년 동안 꼬박 하느님의 존재를 의심하면서 지냈단 말입니까?”

“네 잘 믿어지지 않아서.”

“그건 죄가 아닙니다.”

“네? 죄가 아니라구요?”

“그럼요 죄가 아니라 손해입니다.”

“손해요?”

“아무렴요. 30년이라는 귀한 세월을 의심만 하느라 허송하여, 일단 믿으면서 시작되는 기도의 도움, 평화와 행복 그리고 은총, 이렇게 좋은 것들을 못 누리셨잖아요. 그러니까 손해를 보신 거죠.”

풀리지 않는 문제 때문에 첫걸음도 떼지 못했으니 누가 알겠는가. 일단 의심의 강을 넘고 나면 혹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체험될지.


“신은 왜 자신의 존재를 똑똑히 드러내 보이지 않는가?”

답을 대신하여 환기할 겸 잠시 자연계로 눈을 돌려 봅시다. 상상의 나래를 타고 잠시 그들의 세계로 들어가 봅시다.

개미는 2차원의 곤충이고 코끼리는 3차원 존재입니다. 개미는 코끼리 몸을 아무리 기어다녀도 실체를 파악하기 보다는 부드러운 바위 평원쯤으로 느끼지 않을까요? 그런데 개미가 코끼리의 존재를 파악할 수 없는 것은 누구의 책임입니까? 당연히 개미의 한계 탓입니다.

현대 물리학의 연구 성과를 따르면 지금까지 우주는 11차원까지 파악되었다고 합니다.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그 너머의 차원까지 관통하여 실재할 것임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이에 비할 때 인간은 단지 3차원적 존재일 뿐입니다. 남는 문제는 3차원적 존재가 11차원적 존재를 어떻게 인식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개미가 코끼리의 실제를 파악하는 일보다 더 어려울 것입니다. 결론은 간단합니다.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인간은 신의 존재를 부분적으로는 체험할 수 있다. 하지만 완전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의 존재 인식과 관련된 이런 인간의 가능성과 한계성을 생텍쥐페리는 이렇게 설파합니다. 저 유명한 ‘어린왕자’의 한 부분입니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단지 껍데기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사람이 어떤 것을 정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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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볼 수 있는 건 오직 마음으로 볼 때이다.”

그가 말하는 ‘마음’은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이를 일컬어 ‘영안(靈眼)’이라 부릅니다. 파스칼은 오감을 넘어선 ‘여섯 번째 감각’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전통적으로 서양에서는 이를 라틴어로 ‘senses fidei’ 곧 ‘신앙감각’이라 불러왔습니다.

어떻게 부르건 인간은 이 특별한 눈을 통해 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편린들을 단서 삼아 신의 존재를 직감합니다. 여기서부터는 신은 ‘증명되는 존재’가 아니라 ‘체험되는 존재’로 인식됩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제 ‘신의 증거자’로 자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신은 숨바꼭질하는 존재입니다. 계신 듯 아니 계신 듯, 알 듯 모를 듯 존재하는 분이 신이기 때문입니다.

소설가 최인호가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힙니다.

“이런 종교적 우화가 있다. 하느님이 지상으로 내려와 자신의 존재를 감추고자 하셨다. 하느님은 인간이 쉽게 발견할 수 없는 곳에 숨기로 하셨다. 하느님은 바닷 속에 숨을까 아니면 깊은 산 속에 숨을까 망설이다 마침내 인간이 발견하기 힘들어할 만한 좋은 장소를 발견하셨다. 바로 인간의 마음속이었다.

인간은 하느님이 너무나 가까운 장소에 숨어 계셔 오히려 하느님을 찾지 못한다. 우리의 눈이 사물을 볼 수 있지만 눈 자체는 볼 수 없듯이 우리의 칼이 무엇이든 벨 수 있지만 칼 자체는 벨 수 없듯이.”


Big  Q 9   신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증거가 있나? 


유다인 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느님이 우주를 창조하시기 전 천사들을 먼저 창조하시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내가 세상을 창조하고 그 세상에서 가장 으뜸 되는 피조물로 인간을 창조하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의’의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하느님, 인간을 창조하지 마세요. 그들은 온갖 불의로 이 세상을 망쳐 놓을 거예요.”

‘거룩’의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하느님, 인간을  창조하지 마세요. 그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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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갖 더러움으로 이 세상을 망쳐 놓을 거예요.”

‘빛’의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하느님 인간을 창조하지 마세요. 그들은 온갖 어둠으로 이 세상을 망쳐 놓을 거예요.”

그때 ‘사랑’의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하느님 인간을 창조하셔야 합니다. 인간을 창조하시면 이 세상은 불의하고 더러워지고 어둠에 잠길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들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새로워지고 하느님께서 기대하시는 사람이 되도록 그들을 하느님 앞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모든 만물이 다 그를 포기해도 하느님은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려줄 것입니다.”

사랑의 심오한 본질을 꿰뚫어 안다면 창조주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메시지가 담긴 이야기입니다.


신이 우주만물의 창조주임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요?

만물의 창조주로서 신의 존재는 사실 이론적인 ‘증명’의 문제가 아니라 체험의 문제였습니다. 체험한 사람들의 고백이었던 것이지요. 바로 이런 의미에서 칼릴 지브란은 “믿음이란 마음속의 앎이요. 증거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앎이다.”라고 진술했습니다.

그 체험이라는 것이 ‘착각’일 수도 있고 ‘작위’일 수도 있고 ‘허구’일 수도 있습니다마는. 여하튼 제삼자가 어떤 사람의 체험고백 자체를 부인하거나 평가할 권리는 없습니다.

하느님의 숱한 발자국들을 우리는 그냥 스쳐 지나갈 수 있을까요?

민족시인 만해 한용운은 대자연의 아우라에 휘감겨 ‘알 수 없어요’를 노래했습니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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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에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불자 만해 한용운의 고백 아닌 발견은 성경의 다른 진술과 통하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로마 1.20)    

자연세계가 창조주의 증명입니다.


신의 존재에 대한 가장 강력한 증거는 죽음의 증언입니다. 소설 ‘흑산’에서 나는 그 증거의 일단을 발견했습니다. 정약종은 실존인물입니다. 형은 정약전, 아우는 정약용, 당대 유교의 명가 출신이었습니다. 서학(西學) 박해 시절, 그는 신의 존재를 부인하면 살 수 있었지만 극구 죽음의 길을 택했습니다.

“정약종은 위관의 심문에 이끌리지 않았다. 정약종은 자신의 마음과 행동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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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진술했고, 그 이외의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매를 불렀고 다시 침묵으로 매에 대답했다.

……정약종, 너의 사호는 무엇이냐?

……아우구스티노다. 사호가 아니라 세례명이다.

……해괴하구나. 네 아비가 지어준 본명을 버린  까닭이 무엇이냐.

……본명으로 돌아간 것이다. 새롭게 태어남이다.

……정약종, 너는 반가의 자식으로 태어나 어려서 ‘소학’을 배웠고 반듯한 인성을 갖추었을 터인데, 어찌 그리 황잡한 헛것에 들려 있는가. 너의 이른바 천주가 실재해서 세상을 주관하고 있음을 네가 증명할 수 있느냐?

……증명할 수 있다. 쉬운 일이다. 어린아이가 웃으면서 걸어올 때 나는 천주가 실재함을 안다. 그대들이 국법의 이름으로 백성들을 가두고 때릴 때 저들의 비명과 신음이 천주를 증명한다. 그대들의 악행을 미워하고 또 가엾이 여기는 내 마음을 통해서 천주는 당신을 스스로 증명하신다.(……)

정약종은 칼을 받을 때, 하늘을 바라보며 누워서 죽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형리가 그의 청을 받아들였다. 이승에서의 마지막 사치였다. 

……주여, 어서 오소서.

정약종은 하늘을 우러르며 웃으면서 칼을 받았다. 도성 쪽으로 날이 저물고 서강 쪽 하늘에 노을이 번져 있었다. 그의 웃음은 평화로웠고 큰 상을 받는 자의 기쁨으로 피어나 있었다.”

당대를 대표하던 천재 가문 3형제 중 둘째, 유불선에 달통했던 정약종에게 신의 존재는 목숨과 바꿔도 아깝지 않은 진리였던 것이다.


9-1 Real  Q  내가 사는 이유를 찾을 방법이 있을까요?


내 젊은 시절 나의 꿈에 대해 고민하던 사춘기의 끝 무렵 나는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물음을 만났습니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래서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내가 희망으로 삼아도 좋은 일은 과연 무엇일까? 인간은 무엇인가?”

나는 이 정신적 몸살을 장장 5년 동안 앓았습니다. 그러다 해군 학사장교 때 사제가 되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드디어 평생 사명을 발견한 날이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이날을 기억하며, “인생 최고의 날은 자신의 사명을 발견하는 날이다”라고 했던 카를 힐티의 말에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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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 헤매던 대학 시절 내게 절실히 필요했던 것은 멘토였습니다. 하지만 내 주변에는 멘토가 없었습니다. 워낙 엉뚱한 고민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꿩 대신 닭이라고 나는 책이나 대중매체에서 멘토를 발견하고 짝사랑하듯 모셨습니다. 이순신 제독의 ‘백의종군’, 도산 안창호의 ‘무실역행’, 김홍섭 판사의 ‘고뇌하는 양심’, 김수환 추기경의 ‘겸손과 용기’, 그리고 근현대 중국 사상가 오경웅 박사의 ‘스케일 있는 학문’ 등이 지금껏 내  인생의 가이드라인이었습니다. 내 인생 멘토들의 가르침은 그대로 내 삶에서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이제 본래 물음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자기 인생의 목적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각자의 목적은 선택하는 것인가. 주어지는 것인가? 나는 일단 둘 다 맞는다고 말해두고 출발하겠습니다.

먼저 우리는 각자 자기 인생의 목적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바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목적으로 삼는 것입니다.

1960년부터 20년 동안 미국 브루클린연구소에서 아이비리그 예비 졸업생 1500명을 대상으로 ‘직업선택 동기에 따른 부의 축적여부’를 조사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어떤 소신 하에 얼마나 벌었는가를 알아보았다는 것이지요. 1500명의 졸업생 중 1245명(83%)은 ‘돈을 많이 버는 일’을 선택했고, 255명(17%)이 ‘좋아하는 일’을 선택하였습니다. 20년이 지난 1980년, 그 1500명 가운데 백만장자가 된 사람은 101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놀라운 결과가 발견되었습니다. 백만장자 101명 중 100명이 ‘좋아하는 일’을 선택한 사람이었고, 나머지 단 1명만이 ‘돈을 많이 버는 일’을 선택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의미 있는 통계입니다. ‘돈을 많이 보는 일’을 선택한 사람보다 ‘좋아하는 일’을 선택한 사람이 의외로 크게 연연하지 않았던 백만장자가 될 확률이 백배나 높다니 말입니다.


대학 졸업 후 박물관 마룻바닥 청소를 하며 새 인생을 출발했던 청년이 있었습니다. 첫날 그는 박물관장으로부터 이런 핀잔을 들어야 했습니다.

“대학씩이나 졸업한 사람이 어떻게 이런 일을……. 쯧쯧.”

청년은 맑은 미소로 대답했습니다.

“박물관 마루라면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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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은 매일 한 시간씩 일찍 출근하여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박제과에 자리가 생겨 정식 직원이 되었고 몇 년 후엔 고래를 연구, 세계적인 고래박사가 되었습니다. 그 후에는 세계 유일의 공룡 알을 발견, 동물 연구에 큰 공헌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바로 미국 자연사박물관장을 지냈으며 세계적인 동물학자로 이름을 떨친 로이 채프먼 앤드루스입니다.


또 이런 얘기도 있습니다. 세계적인 과학자 파스퇴르는 파리의 에콜 노르말에서 물리와 화학을 공부했고, 다방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인 학자였습니다. 그는 프랑스 정부에서 세운 파스퇴르연구소의 소장까지 지냈지만 생활은 언제나 가난했습니다. 하루는 제자가 그의 집을 방문하고서는 만망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지금까지 연구한 업적만으로도 많은 돈을 벌 수 있는데 왜 돈 벌 생각은 안 하십니까?”

그러자 파스퇴르는 껄껄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자네는 처음 돈을 벌기 위해 과학자가 되었나? 분명 아닐 걸세. 발견하는 기쁨, 진리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서는 것에 흥미를 느껴서일 거야. 내가 돈을 벌려고 마음먹었다면, 특허권을 따 엄청난 부를 쌓을 수도 있었겠지. 대신 나는 돈에만 정신이 팔려 그 많은 연구를 해내지 못했을 걸세. 신이 내게 준 임무는 세계 인류의 구원과 행복을 위해 지금처럼 이렇게 연구에 매진하는 것일세.”


선택이 되었건 사명이 되었건, 자신의 목적을 발견한 사람은 이미 절반을 이룬 셈입니다. “시작이 반이다”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이 새로운 눈으로 늘 새롭게 재조명될 필요가 있음을 암시합니다.             

“발견이라는 진정한 항해의 목적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

우주적 여운을 남긴 채 우리 곁을 떠난 故 스티브 잡스는 마치 단명을 자위하듯 말합니다.

“여정은(목적지로 향하는 과정이지만, 그 자체로) 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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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  Q 10,  창조와 진화에 대한 생각은

                영원히 평행선인가? 


물리학자 장회익 교수 (서울대 명예교수)와 ‘다윈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는 대담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나는 그날의 대담을 요약하는 것으로, 앞의 질문에 답하고자 합니다. 대담을 정리한 기사의 말머리는 이렇습니다.

“종교(창조론)와 과학(진화론)은 상대를 어떻게 바라보나?”


■ 신이 인간을 빚었나?


성경은 창세기 1장 27절에서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했다. 반면 진화론자들은 빅뱅 이후 지구 생물의 진화 과정에서 인간이 나왔다고 본다. 창조론과 진화론은 출발역부터 갈린다. 과연 성경 속 창세기 편은 양쪽은 어떻게 볼까.

장 교수 :

피카소의 그림을 보라. 사람 얼굴을 실제와 달리 찌그러뜨렸다. 왜 그런가. 피카소는 사실을 그린 게 아니기 때문이다. 예술적 직관을 그린 거다. 성경도 마찬가지다. ‘나는 누구인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에 대한 종교적 직관을 기록한 거다. 그게 창세기의 내용이다.   

차신부 :

그건 정확한 이해다. 성경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기록됐는지를 알면 쉬워진다. 성경은 창세기가 아니라 출애굽기(모세가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이집트를 탈출하는 편)부터 쓰였다. 해방 사건이 먼저 있었고, 이 엄청난 기적을 통해서 하느님을 깨닫게 된 거다. ‘그 누군가가 누구냐?’ ‘그가 하늘과 땅을 지어낸 분이다’란 인식과 함께 성경을 기술한 것이다.


■ 빅뱅과 천지창조 : 공존할 수 있는가?


성경에는 천지 창조에 7일이 걸렸다고 기록돼 있다. 마지막 날은 하느님도 일을 마치고 쉬셨다고 했다. 반면 과학자들은 빅뱅으로 말미암아 이 우주가 생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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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신부 :

빅뱅으로 말미암아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이 우주가 생겼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이는 신이 없다고 한다. 그게 아니다. 하느님은 빅뱅 이전부터 계신 분이다. 또 천지창조에 24시간씩 실제 7일이 걸렸다고 믿는 기독교인도 있다. 성경 해석 방법이 미숙한 거다. 그건 은유적 표현이다. 창조론과 진화론은 대립하지 않는다. 우리는 진화론 속에도 창조론의 손길이 있다고 본다.

장 교수 :

과학자들은 정말 이 우주에 엄청나고 놀라운 질서가 있음을 느낀다. 그건 알아나갈수록 더 높아지고, 더 심오해진다. 그래서 궁극적 결과에 대해 미리 단정 짓지 않는다. 과학자들은 계속 찾아갈 뿐이다. 성경에 ‘내 형상을 함부로 만들지 말라’는 게 이 뜻이 아닌가 싶다. 우주는 계속 변화하고, 무언가를 향해 나가고 있다.

차 신부 :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다. 그걸 철학적, 신학적용어로 ‘초월성’이라고 한다. 점점 더 새로운 것이 열린다는 거다. 그래서 과거의 것을 자기 스스로 파괴할 줄 알아야 한다.


■ 신의 존재? : 성경인가 자연인가?


장 교수 :

초기 과학자들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성직자도 꽤 있었다. 그 시대에는 하느님이 쓰신 두 권의 책이 있었다. 하나는 ‘성경(Book of Scripture)’이고 또 하나는 ‘자연의 책(Book of Nature)’이다.

‘스크립처’와 ‘네이처’서로 운율도 맞다. 성경과 자연, 그 속에서 과학자들은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 했다. 자연 속에 하느님이 새겨 놓은 말씀을 읽으려 했다.

차 신부 :

과학은 자연법, 종교는 영원법을 다룬다. 그런데 둘은 양자택일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가톨릭)는 영원법 안에 자연법이 있다고 본다. 창조론 안이 진화론이 있다고 본다.

1916년과 80년 뒤인 1997년 두 차례에 걸쳐 ‘과학자들의 신앙’을 조사 했더니 똑같이 40%가 유신론적 입장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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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교수

아인슈타인은 ‘신’이란 단어를 많이 썼다. 그는 말한다. “자연의 질서를 함

부로 벗어나는 게 신이 있다는 증거가 아니다. 오히려 자연의 오묘한 질서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신이 있다는 증거”라고 했다.


■ 생명과 신, 나와 우주의 관계


차 신부 :

이스라엘은 중동이다. 유럽이 아니라 아시아다. 그래서 성경은 동양적 사고에 더 가깝다. 그리스와 로마의 이분법적 사고가 아니라 동양 특유의 통합적 사고다. 그래서 종교도 ‘부분’과 ‘전체’를 함께 보는 시야가 필요하다.

장 교수 :

공감한다. 개인적으로 내겐 ‘생명이란 무엇인가’가 큰 숙제였고 화두였다. 우주는 끊임없이 변화한다. 모든 게 놀랍고 신비하다. 그중에서도 ‘생명’이 특히 그렇다. 생명을 볼 때도 ‘부분’과 ‘전체’를 함께 봐야한다. 생명은 낱낱으로 떨어져 존재하는 게 아니다.

‘낱 생명’인 내가 진정한 생명이 되기 위해서는 태양과 지구로 구성된 생명의 전체 틀, 곧 ‘온 생명’ 안에서 그 한 부분으로 엮어져 있어야 한다. 마치 나뭇잎이 나무 전체를 떠나 나무 노릇할 수 없는 것과 같다.


■ 진화와 창조, 그 궁극의 지향점


성경에는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란 구절이 있다. 알파는 시작, 오메가는 끝으로 풀이된다. 종교와 과학, 창조와 진화는 어떨까. 그 끝에 과연 궁극적인 종점이 있을까.

차 신부 :

‘오메가 포인트’에 대해 철학자들은 진, 선, 미가 하나가 되는 곳이라고 했다. 신앙적 측면에서 보면 요한묵시록 21장 4절(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에 나오는 ‘눈물도 없으리라’는 세계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본다.

장 교수 :

모든 것의 근원이고 모든 걸 포괄하는 어떤 것, 과학은 그 최종 원리를 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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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할 수는 없다. 최종 원리는 항상 가정으로 남는다. 우리는 과정 중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겸손함’과 ‘열려 있음’이 중요하다. 그래서 과학은 초월과 종교에 대해서도 문을 열어 놓고 있다. 차 신부의 말대로 종교가 과학을 바라보며 문을 열어두고 있듯이 말이다.


‘저절로’는 궁극적인 답이 되지 못합니다. 우주가 ‘저절로’ 생겼다고 해명하는 것은 우리의 궁금증을 온전히 해소해주지 못합니다. 우리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확실히 해소해줄 답은 오직 창조주 하느님이십니다.

다시 우주론적 고뇌에 잠겨봅니다.

우주의 무수한 별이 본래 있었던 어떤 물리학적인 원리에 의하여 한순간 생겨났죠. 그리고 저토록 치밀하게 운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라고 믿어버리면 모든 것이 다 설명되는 것인가? ‘됐다!’하고 손 탁탁 털고 일어설 수 있는 것인가? 어떻게 저 오묘한 천체계의  질서가 우연일 수 있단 말인가? 하느님의 창조 없이 그게 가능한 일인가?

죽어 있는 물질이 생명체가 되어서 수백 수천의 식물과 동물이 생겨났고 마침내 말할 줄 알고 노래하고 즐거워할 줄 알며 고뇌할 줄 알 뿐 아니라. 문명을 창조할 줄 아는 인간이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단지 우연의 어리석은 장난 때문이었을까요? 하느님의 창조 없이 가당한 일이었을까요?


Big  Q  11, 과학이 더 발달하면

            세상이 완전히 달라질까?


1970년대 말 타임지에서 읽었던 내용이다.

“바야흐로 과학자들은 여태 아무도 오르지 못했던 산 정상을 오르기 직전에 이르렀다. 빅뱅이론 이것이야말로 현대 과학의 쾌거다. 그 정상에 오르면 창조의 비밀이 드러날 것이다. 그런데 산 정상에 오르게 되면 과학자들은 경악할 것이다. 신앙의 성자들이 정상 온천수에 몸을 담근 채 유유자적 목욕을 하면서 창조주를 찬미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니.”

1980년 졸업과 동시에 타임지는 끊었지만 그해 기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사실을 전하고 있습니다.

“신이라고? 신은 마르크스에 의해서 하늘에서 쫓겨났고, 프로이트에 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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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으로 추방되었으며, 니체에 의해 그 죽음이 선포되지 않았던가? 또한 다윈은 신을 경험의 세계 밖으로 내 쫓지 않았던가? 그런데 상황이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언제부턴가 사유와 논증의 세계에서 조용한 혁명이 일어나 신이 되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20년 전만 해도 이런 혁명이 일어나리라고 예측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더 재밌는 사실은 이런 일이 신학자들과 일반 신자들 사이에서가 아니라, 총기 발랄한 전문 철학자들로부터, 즉 지식인들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이들은 신의 존재가 자신들의 수준 높은 토론에는 맞지 않는 주제라고 금기시했던 무리였다. 그러나 이들 철학자 사이에서 이제는 신의 존재 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이전 세대보다 훨씬 가치 있는 문제로 존중되고 있다. 

         

약 100년 전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철학계에는 기고만장한 과학만능주의에 편승하여 무신론이 급격히 확산되었습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종교는 마침내 소멸되리라는 예측이 유포되었습니다.

그러나 1960년대를 정점으로 하여 그 추세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사라질 것으로 예견되었던 종교가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가파른 기세로 확장되었습니다. 종교 인구가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이와 더불어 생활 전반에서 종교성을 상실해가는 현상을 뜻하는 ‘세속화’ 현상은 ‘탈 세속화’ 현상으로 역전되어 버렸습니다.

지난 세기 80년간 이뤄진 과학발전의 총량은 가히 그 이전까지 인류가 이뤄온 총량을 훨씬 능가한다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엄청난 변화에도 신의 존재를 믿는 과학자의 비율은 전혀 줄지 않았습니다.


“과학이 끝없이 발달하면 신의 존재도 부인되는 것이 아닌가?”

이는 과학과 종교의 관계에 대한 물음입니다.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더듬어보면 크게 3단계의 과정을 거쳐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먼저 과학이 종교의 그늘에서 발전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고대에서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과학은 ‘천동설’을 당연한 진리로 여기며 그 틀 안에서 무리 없이 발전했습니다.

그러다가 우주 과학과 천체 이론이 소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루고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오랫동안 종교와 과학은 서로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종교는 천동설을 부인하는 과학을  무신론적이라고 몰아붙였고,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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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은 점점 기고만장해지면서 더더욱 무신론 쪽으로 치달았습니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와서 종교와 과학은 긴 세월의 우여곡절 끝에 화해관계에 들어섰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중세 교황청은 지동설을 주장했다고 갈릴레오를 파문했지요. 그런데 1992년, 수백 년이 지난 그 일에 대해 사과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을 해서 유명해진 프랜시스 베이컨이 뼈 있는 말을 했습니다.

“약간의 과학은 사람을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더 많은 과학은 그를 하느님께 다시 돌아가게 만든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 법입니다. 부족한 과학이 종교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종교 없는 과학은 온전히 걸을 수 없으며, 과학 없는 종교는 온전히 볼 수 없다.”는 명언은 영구적으로 유효할 것입니다.

“언젠가 생명의 합성 무병장수의 시대도 가능할 것 같다. 이처럼 과학이 끝없이 발달하면 신의 존재도 부인되는 것이 아닌가?”

이미 앞에서 기술한 내용으로 얼추 답변이 된 셈입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종교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신의 존재도 부인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말년의 아인슈타인이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제자가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이미 그렇게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계신데 어째서 배움을 멈추지 않으십니까?”

이에 아인슈타인이 재치 있고도 뼈있는 대답을 했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이 차지하고 있는 부분을 원이라고 하면 원 밖은 모르는 부분이 됩니다. 원이 커지면 원둘레도 점점 늘어나 접촉할 수 있는 미지의 부분이 더 많아지게 됩니다. 지금 저의 원은 여러분 것보다 커서 제가 접촉한 미지의 부분이 여러분 보다 더 많습니다. 그러나 모르는 게 더 많다고 할 수 있지요. 이런데 어찌 게으름을 피울 수 있겠습니까?”     


아인슈타인의 경우와 같이 과학자는 일단 첨단 지식을 접할수록 우주의 실체와 생명의 기원 문제가 점점 더 미궁으로 빠집니다. 모르는 것이 점점 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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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경험할 수 있는 무언가의 배후에 우리 마음이 파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으며, 그 아름다움과 숭고함이 오직 간접적으로만 그리고 희미하게만 우리에게 도달한다고 느낄 때, 그것이 바로 종교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종교적이다.” 


PART 4,  피할 수 없는 물음


Big  Q 12, 악인의 길과 선인의 길은 미리 정해져 있나?


철학자 니체는 아직 중세의 먹구름이 걷히기 전, 그가 살던 시대의 구역질  나는 사회적 병폐를 참다못하여 마침내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일체의 악과 불행의 책임을 신에게 돌리는 관점들은 혹은 점잖게 혹은 거칠게 혹은 저항적으로 제기되었습니다.

시인 박인환의 ‘검은 신이여’는 차라리 온건한 신앙고백에 속합니다.


“저 묘지에서 우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저 파괴된 건물에서 나오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검은 바다에서 연기처럼 꺼진 것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내부에서 사멸(死滅)된 것은 무엇입니까.

일 년이 끝나고 그 다음에 시작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전쟁이 뺏아간 나의 전우는 어데서 만날 수 있습니까.

슬픔 대신에 나에게 죽음을 주시오

인간을 대신하여 세상을 풍설(風雪)로 뒤덮어 주시오.

건물과 창백한 묘지 있던 자리에

꽃이 피지 않도록.

하루의 1년의 전쟁의 처참한 추억은

검은 신이여

그것은 당신의 주제일 것입니다.”  


참담한 학살극에 우리의 ‘당신’은 침묵만 하는 듯이 보여도 여전히 그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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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주제’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신은 왜 그것을 ‘당신의 주제’로만 여길 뿐 미리 막지 않는 걸까요?


나는 이 물음을 예수님을 배반한 이스카리옷 유다의 경우와 연결시켜 고민해 봅니다.


유다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

0 유다는 카리옷 시몬의 아들, 열두 제자 중 꼴찌, 회계담당

0 한때 하느님의 능력을 받아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친 일이 있음

0 어느 날 예수께서 베타니아에 있는 마리아 집에 갔을 때 마리아가 비싼     옥합 향유를 예수님 발치에 뿌리고 ……. 유다는 이것을 보고 돈 계산으로    들어간다.(요한 12.5)

0 성경에는 유다가 도둑이었고 돈주머니도 맡고 있으면서 가로채곤 했다.       (요한 12.6)


■ 배반의 변주곡

0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긴 이유 : “이제 예수님은 한 물 갔구나, 자꾸 죽    는다는 얘기만 하시고……. 이 분 따라 다녀봐야 남는 것도 없겠구나.” 하    고 결론 내리며 사탄의 꾐에 넘어 갔음을 시사. (요한 13.2)    

0 예수님이 사형 선고를 받자 덜컥 겁이 난 유다는 은전을 돌려주며 물리자    고 한다.(마태 17.3~4) 그러나 거절당한다.(마태 27.4)

0 유다의 최후 : 자살했다.(마태)

  거꾸로 떨어져 배와 내장이 터졌다.(사도행전)

0 유다가 버리고 간 은전은 ‘불경한 돈’이라 하여 그 돈으로 산 땅을 ‘피의    밭’이라 부르고 이방인의 묘지가 된다.

 

■ 미련을 품는다.

사실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긴 것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배반한 것이 더 면목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베드로는 살아난 반면 유다는 자기 연민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비운의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유다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오늘날 이 시대에도 유다처럼 절망한 사람이 있다면 자아의 늪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 그럴 수 없다면 구제불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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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유다의 슬픔을 이렇게 묵상해본다.


미련을 품는다. 아니 희망을 품는다.


“나는 죄인입니다.”(마태27.4) 유다는 뉘우치며 고백했다.

“없었던 일로 합시다. 그건 본의가 아니었습니다.”

유다는 은전 서른 닢을 그들에게 돌려주었다. 

그들이 거절하자 유다는 절망하였다.

그리고 유다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마태 26.24)

더 좋았을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유다의 죽음은 애처롭다.

유다의 잘못은 배반보다 자책에 있었다.

그는 ‘자아’의 늪에 갇혀 있었다.

그는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 하였다.

그의 죽음은 스스로가 초래한 비운이었다.

유다의 눈물은 그래서 더 처연하다.


유다의 죽음은 우리를 위한 경종이다.

진짜를 보지 못하고 가짜를 탐욕하는 우리.

잇속에 눈멀어 제 꾀에 넘어가는 우리.

매양 소탐대실하는 헛 약은 우리.

바로 우리를 위한 스캔들이다.


유다의 죽음은 준열한 가르침이다.

이 시대의 유다들, 유다의 후예들을 위한 일침이다.

면목 없기로는 더할 나위 없었을 베드로를 보라는.

자기 심판의 눈물 너머 회개의 눈물을 흘리라는.

벌이 아닌 자비의 하느님을 바라보라는 .

‘피의 밭’으로가 아니라 기회의 벌판으로 향하라는.

내일의 유다들을 위한 뼈아픈 교훈이다.

‘혹여’의 토 달린 쓰라린 초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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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련을 품는다. 아니 희망을 품는다.


이 글을 읽으면서 짐작하였겠지만 우리의 출발점을 “신은 왜 악인을 만들었는가?” 라는 물음의 답은 인간이 지닌 ‘자유의지’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처음 유다를 부를 때부터 그가 스스로 목숨을 끊을 때까지 시종일관 그에게 자유를 허락하셨습니다. 유다는 자신의 가치관과 노선에 따라 그때그때 자신의 결정을 내렸습니다. 삥땅치기도, 배반도, 후회도, 자책도, 급기야 절망도 자신의 자유가 선택하는 대로 취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앞에서 세 번 배반한 이후 그는 크게 뉘우쳤습니다. 이후 그는 모든 자유를 반납하고 하느님의 처분대로 살았습니다. 그는 자기 심판의 눈물 너머 회개의 눈물을 흘렸고, 벌이 아닌 자비의 하느님을 바라보았고, ‘피의 밭’으로가 아니라 기회의 벌판으로 향했습니다. 그리하여 훗날 베드로는 첫 번째 교회의 수장이 되었습니다. 제1대 교황이 된 것입니다.


여기서 악인과 선인의 전형적인 차이가 발견됩니다.

악인은 끝까지 하느님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여 모든 결정을 자신의 의지로만 내립니다. 소통도 의논도 반납도 일절 없습니다. 바로 자유의지의 독점적 남용입니다.

이에 반하여 선인은 자신의 자유의지를 하느님과 소통하며 사용합니다. 때로는 의논하고 때로는 반납하면서 자유의지를 지혜롭게 운용합니다. 바로 자유의지의 조화로운 선용입니다.   하지만 악인의 길과 선인의 길은 미리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선택입니다. 자유의지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결단하는 순간 그 길이 갈리는 것입니다. 그 조차도 일관되고 항구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변덕에 따라 수시로 바뀔 수 있습니다.


“신은 왜 악인을 만들었는가?”

이제 답의 절반은 말한 셈입니다. 신은 악인을 만든 것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을 만들었을 뿐입니다. 악인도 선인도 신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선택과 결단이 만드는 것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근세기 들어 수많은 전쟁과 학살을 지켜본 현대인들은 ‘전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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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신 하느님’에 회의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은 선하시다고 하는데 어떻게 세상에 히틀러 같은 살인마가 나왔는가? 하느님은 왜 히틀러가 600만 명의 유다인을 학살할 때 그 비극을 저지하지 않으셨는가? 무고한 사람들이 고통당하도록 왜 카다피와 김정일 같은 독재자를 용납하시었는가? 왜 전능하신 하느님이 세상의 극악한 폭력에 대하여 침묵만 하시는가? 왜 저 많은 사람이 억울하고 처참한 죽음을 당하도록 구경만 하신단 말인가?

나치 시대에 아우슈비츠를 경험했고 1986년 노벨평화상을 받기도 했던 유다인 엘리 위젤은 이 물음에 대한 대답 대신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슬픈 천사의 얼굴을 한 어린이가 교수형을 당하는 것을 목격한 날, 무시무시한 날들 중에서도 가장 소름끼치는 그날, 소년은 뒤에 있던 어떤 사람이 신음하듯 내뱉는 말을 들었다.

“하느님은 어디에 있는가?”   

그때 내 안에서 어떤 목소리가 대답하는 것을 들었다.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고? 여기 교수대에 매달려 있지.”

이처럼 유다인이 발견한 대답은 하느님은 사람들이 고통 받는 순간에 못 본 체하고 침묵만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은 교수대에서 함께 처형된 것입니다.

나치 시대에 ‘암살범’으로 몰려 처형당한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고통 받지 않는 하느님은 인간을 고통에서 해방시키지 못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역설입니다.

왜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왜 못 이길까요? 힘이 모자라서 못 이길까요? 아닙니다. 사랑 때문에 못 이기는 것입니다. 사랑 때문에 져 주는 것입니다.


자유의지의 선택이 어떻게 운명을 바꾸는지를 잘 드러내 주는 얘기가 있습니다. 천재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최후의 만찬’을 그릴 때의 이야기입니다. 예수의 모델을 찾기 위해 애를 쓰던 그는 교회에서 용모가 수려한 성가대원을 발견했습니다. 그를 모델로 삼아 그림을 그리려고 마음먹었는데 그 청년이 로마에 가서 공부를 하게 되어 모델을 바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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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이 걸려 그림은 거의 완성되었으나, 예수를 배반한 제자 이스카리옷 유다만 그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빈치는 아주 타락한 모습의 어떤 사람을 발견하고 그를 모델로 하여 그림을 완성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유다의 모델은 오래전 예수의 모델로 삼으려던 바로 그 청년이었습니다. 청년은 유학시절 방탕한 생활을 한 탓에 심성이 나빠져 얼굴마저 변해버렸던 것입니다.  

같은 사람이 자신의 자유의지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예수의 얼굴이 될 수도 있고 유다의 얼굴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12-1 Real  Q  다 용서하면 행복해 진다고요?


많은 사람이 용서를  일생의 숙제로 안고 살고 있음을 봅니다. 어떤 사람은 “죽어도 그를 용서할 수 없다”고 이를 박박 갑니다.

어떤 사람은 “용서를 하고는 싶은데 잘 안 된다”고 하소연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미 용서했는데, 갑자기 미움이 되살아났다”며 어쩔 줄 몰라 합니다.

어떤 때는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가 더 그럴듯하게 들리기도 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이런 내용의 대사가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나는 온 인류를 사랑할 수 있다. 그들 모두를 나는 사랑한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단 한 사람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그가 나에게 한 잘못은 내가 아무리 용서하려 해도 용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이 어려운 일이다.”

자신과 크게 상관이 없는 일에 대해서는 용서하기가 어렵지 않지만 자신과 관계된 일에서는 하찮은 것도 용서되지 않는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공식적으로 사과하기 전에는 절대!”라며 문을 걸어 잠근 채 보복의 가슴앓이로 뒷걸음질 칠 때가 너무 많습니다.

“당한 건 난데 왜 내가 먼저 용서해야 해?”

그렇게 버티며 꿈쩍도 하지 않으려 합니다.

“저 사람은 이번 일을 통해 무언가 깨달아야 해. 한동안 속 좀 끓이게 내버려둬야지, 본인한테도 이게 이로울 거야. 행동에는 결과가 따른다는 걸 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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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 해. 내가 먼저 손을 내미는 건 말이 안 되잖아.”

이렇게 용서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나는 두 가지를 지적합니다.

우선, 산수를 못하니까 용서를 못하는 것이라고.

“한번 계산해보세요. 만약 미움이 내 맘속에 있어 계속 품고 살면 누가 잠을 못 잡니까?  내가 잠을 못 잡니다. 그러면 누가 병에 걸립니까? 바로 납니다. 내가 병에 걸리면 이제 누가 일찍 죽습니까? 이것 역시 납니다. 내가 이렇게 되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내가 미워하던 그놈이 좋아합니다. 딱 계산이 나오잖아요. 그러니 용서를  안 하면 나만 손해 보는 것입니다.”

“결국 용서는 나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그놈에겐 아무 득도 되지 않으니 아까워하지 마세요. 내가 살기 위해서, 내가 평화롭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한번 눈 딱 감고 해보세요. 그러면 기쁨이 와요! 행복이 솟아요!”


용서라는 말뜻이 재미있습니다.

한자로 容恕는 받아들이고 소화하고 수용하는 것을 의미하는 ‘容’과 헤아려서 이해하는 것, 그 마음을 알아주는 것(如心)을 의미하는 ‘恕’가 더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동양적인 의미에서 용서는 소화하고, 헤아려주고, 마침내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영어로 용서는 'Forgive'입니다. ‘위한다’는 ‘For’와 ‘주다’ 라는 뜻의 ‘give’의 합성어입니다. 또 ‘pardon’이라는 단어도 있는데 ‘don’은 라틴어 ‘donum’. 즉 선물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거저 베푸는 것이 용서라는 겁니다.


거듭 말하지만, 용서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결단입니다.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용서할 줄 압니다.

용서하지 않으면 그 분노와 미움이 독이 되어 본인을 헤치기 때문입니다. 용서의 길을 몰라서 화병이 들어 죽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미국 존스홉킨스대학 연구팀에 따르면, 화를 잘 내는 사람은 55세 이전에 심장병이 발병할 확률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3배나 높고 심장마비에 걸릴 가능성 역시 5배나 높다고 합니다. 하버드 대학의 미틀만 박사도 분노를 잘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은 심장마비를 일으킬 확률이 2.3배 증가 한다는 연구 결과를 내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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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다니엘 호손은 ‘주홍글씨’에서 증오가 인간의 영혼을 어떻게 황폐화시키는지 잘 보여줍니다. 아내 헤스터에게 배반당한 칠링워스는 죄의 심판을 하느님께 맡기기를 거부하고 평생 복수심으로 삽니다. 그 결과 그는 결국 악마처럼 되어 불행을 자초했습니다. 용서만이 살 길입니다.


시인이자 구도자인 칼릴 지브란은 예수님께서 이르셨듯이 용서라는 문제를 가장 근원적으로 해결하는 길은 아예 단죄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우리의 섣부른 판단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이렇게 경고합니다.

그대들은 누구에겐가 잘못을 저지른다.

또한 그대 자신에게도

의로운 자가 사악한 자의 행위 앞에서

전혀 결백할 수 없으며

정직한 자가 그릇된 자의 행위 앞에서

완전히 결백할 수는 없는 것.

그대들은 결코 부정한 자와 정의로운 자를

사악한 자와 선한 자를 가를 수 없다.

이들은 다 태양의 얼굴 앞에 함께 서 있기 때문이다.

(……)

정의란, 그대들이 기꺼이 따라가려는

법의 정의란 무엇인가?

바로 뉘우침이 아니겠는가?

죄인의 가슴에서 뉘우침을 빼앗지 마라.

뉘우침이란 청하지 않아도

한밤중에 찾아와

사람들을 깨우며 스스로를 용서하도록

만들고 있으니.


그렇습니다. 용서하는 것, 이전에 판단하지 않는 것. 단죄하지 않는 것이 더 지혜로운 길입니다. 그럴 때 상대에게 뉘우침의 기회가 생깁니다.


Big Q 13,  자유로운 마음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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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한 사실은, 죄의 있고 없음은 몰라도, 최소한 ‘죄의식’은 있다는 것입니다. 옛날 어느 수도원의 원장이 많은 수도원생 가운데 유독 한 제자만을 특별히 사랑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원장이 인간 차별을 한다고 뒤에서 투덜대며 그 제자를 미워했습니다.  

어느 날 원장은 모든 제자에게 새를 한 마리씩 나누어주며 “아무도 없는 곳에서 죽여 오라”고 했습니다. 얼마 후 모든 제자가 새를 죽여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원장이  사랑하는 제자만 산 채로 가지고 왔습니다. 제자들은 그가 원장의 말씀에 불순종했음을 비난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습니다. 원장이 사랑하는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자네는 왜 새를 죽여 오지 않았나?”

“원장님 ,저는 아무도 안 보는 곳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디를 가도 하느님이 저를 보고 계셔서 새를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이 제자는 벌써 죄의식의 괴로움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무도 없는 곳’이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어디를 가도 하느님의 눈을 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프로이트는 정신질환의 원인은 ‘죄의식’이고 죄의식은 원초본능(id/libido)과 초자아(super ego : 전통, 관습, 종교)의 갈등에서 생긴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죄의식에서 벗어나려면 인간의 본능인 종교(전통, 관습)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본래 선도 악도 없는데 종교가 인위적으로 만들어 왔다는 것입니다.


과연 죄는 없는 것일까? 이를 밝히려면 먼저 ‘죄’라는 말의 뜻을 확인하고 들어가야 합니다.

성경적인 의미로 죄(특히 히브리어 ‘hata’와 그리스어 ‘hamartia')는 과녁을 벗어난 상태를 뜻합니다. 과녁, 즉 어떤 특정 기준을 벗어난 것이 죄의 정의인 셈입니다. 성경에서 그 과녁에 해당하는 것은 하느님이 주신 십계명인 것이구요.

한자로 죄(罪)는 씨줄과 날줄로 이루어진 그물(四)의 벼리(綱)가 ‘아닌 非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벼리(강 綱)는 천륜과 인륜을 뜻하는 것입니다. 강상죄인(綱常罪人) 즉 ‘삼강오륜을 범한 죄인’이라는 말이 있듯이 천륜과 인륜에 어긋나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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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죄’의 성립에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척도가 되는 하느님의 존재여부, 그리고 천륜과 인륜의 보편타당성 여부입니다. 하느님이 존재한다면 죄라는 것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계명(천륜과 인륜)이 보편타당하다면 죄라는 것이 성립되는 것입니다. 이들을 거스르는 것이 바로 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존재합니다.             

부인하는 이들도 적지는 않지만 인류의 절대다수가 이를 믿어왔습니다. 또한 양심, 계율, 천륜과 인륜 등은 동서고금을 통해 인정되어 왔습니다. 오늘날 비교종교학의 연구 결과도 이 사실을 뒷받침해 줍니다. 그러므로 죄는 있습니다.


용서는 태초 이래 인류의 염원이었습니다.

불교에는 업보 사상이 있습니다. ‘업業, Karma’이란 중생이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선악의 소행을 말하며, 그것이 선업이냐 악업이냐에 따라서 응보의 대가가 있다고 합니다. 이 세상은 ‘환幻, Maya’으로서 사람들은 그 환의 속박 안에서 여러 가지 형태의 색욕과 욕망 속에 빠져들어 감각적인 생활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행위와 말과 뜻으로 업인(業因)을 쌓고 그에 대한 응보로서 영원한 윤회의 수레바퀴 속을 돌고 도는 숙명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불교는 이 업이 우주를 지배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결국 인간은 윤회의 굴레 안에서 악업과 선업에 대한 책임을 질 수밖에 없고, 죄 많은 인간은 그 질곡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단 불교가 아니라도 죄를 어쩌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현실입니다.


구약성경의 상선벌악에 대한 믿음도 업보 사상과 비슷합니다. 유다인은 의인은 보상을 받을 것이며 악인은 벌을 받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악인들은 그들의 그릇된 생각 때문에 벌을 받을 것이다.”(지혜 3,10) “의인들은 영원히 산다. 주님이 친히 그들에게 보상을 주시며 지극히 높으신 분이 그들을 돌봐 주신다.” (지혜 5,15)    

이것이 구약성경의 믿음이었으며 이후 유다교의 믿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이는 세계의 모든 종교가 믿는 바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동서를 막론하고 죄인은 죗값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죄인에게 미래는 곧 ‘심판’의 때요 ‘좌절’의 때일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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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이 용서를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는 인간의 죄들을 모두 짊어지시고 십자가 제물이 되셨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죄지은 사람 대신 소와 양이 희생 제물이 되어 죽임을 당하는 대속(代贖)의 방법이 있었습니다. 이는 죄의 값으로 초래된 죽음을  대신하여 제물을 죽여 피를 흘림으로 죄인의 죄를 용서해 주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스스로가 우리 모든 죄인의 죄를 도맡으신 후 우리가 받아야 할 무서운 진노의 심판을 대신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악, 불의, 폭력에 대해 비폭력적인 용서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그 용서를 통해서 무조건적인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났습니다. 바로 이 사랑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어가시면서도 당신을 죽이는 바로 그 사람들의 용서를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주십시오! 사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루카 24,34)

예수님은 십자가 제사로 용서를 완성하시고 나서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요한 19,30)

이로써 ‘상선벌악’의 굴레가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끔히 청산되었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복수의 법칙을 용서의 법칙으로 바꾸어놓으셨습니다. 그 법칙이 해방의 길이며 생명의 길임을 몸소 드러내셨습니다.


Big  Q 14  천국과 지옥이

           우리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죽음은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숙명입니다. 죽음은 각자의 인생에 종지부를 찍는 일이며 불가피하고 필연적인 것입니다. 천수를 꿈꾸며 온갖 노력을 다 쏟은 이들, 이집트의 파라오들이며 중국의 진시황제도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죽음에 대한 우리말 표현에서 우리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죽음’을 가리키는 여러 어휘가 있습니다. 그중 ‘돌아가시다’, ‘별세(別世)하다’, ‘타계(他界)하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런 어휘들은 옛적부터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를 잘 나타내 줍니다.

‘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 즉 육체는 흙에서 왔으니까 흙으로 돌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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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세 3,19) 영혼은 하느님께로부터 왔으니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또 죽음은 ‘별세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선 사람들은 영혼이 육체와 이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표현은 말 그대로 세상과 이별한 뒤 특별한 세상으로 가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 죽음은 타계하는 것입니다. 즉 ‘다른 세계로 떠나는 것’입니다. 죽음은 소멸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죽음은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요. 새로운 시작입니다.

어떤 이들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죽으면 미련 없이 끝이라는 겁니다. 소멸된다는 겁니다. 또 어떤 이들은 ‘죽으면 윤회한다’고 믿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죽으면 영적인 세계로 돌아간다’고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이들은 ‘죽으면 하느님의 품으로 가서 영원한 삶을 누린다’고 믿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온 행실(믿음)에 맞갖은 영원한 삶을 누린다는 신념, 곧 그리스도교의 내세관입니다. 

  

그런데 대체로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는 사람들은 “인생을 실컷 즐기겠다”는 자세를 취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런 사람들을 빗대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다면 ‘내일이면 죽을 테니 먹고 마시자’ 해도 그만일 것입니다.” (코린 15,32)

교황 요한 23세는 임종시에 지극히 평범한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이제 나의 여행 채비는 다 되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죽음을 앞두고 생뚱맞은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그대들도 행복하십시오.”


“인간이 죽은 후에 영혼은 죽지 않고 천국이나 지옥으로 간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

이 물음의 가장 강력한 증거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12사도)의 순교입니다. 역사가 에우세비우스는 그의 책 ‘교회사’에서 12사도의 순교 내용을 사실적으로 기록하였습니다.           

그들의 죽음은 한결같이 자발적인 죽음이었습니다. 누가 강요한 것이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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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습니다. 왜, 무엇을 위하여 그들은 장렬한 순교의 길을 택하였던 것일까? 무엇 때문에 배척과 핍박을 감수했고, 무엇 때문에 죽음까지도 불사했을까?

그 답은 간명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있다!” 이 하나를 증거하기 위하여 그들은 하나뿐인 목숨을 잃었던 것입니다. 아니 바쳤던 것입니다.

본래 그들도 영락없는 인간이었습니다. 높은 자리를 욕심내고(마태 20,20-28) 무사 안일에 안주하고 싶어하고(마태 16,22,26,40,43), 무엇보다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한낱 인간이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들은 예수님이 체포 연행되었을 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도망갔습니다.(마르 14, 43-52), 살기 위하여 예수님을 부인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마태 26, 69-75) 그런데 이들은 모두 돌연 어느 한 순간 극적으로 전향하였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증거자로 나선 것입니다. 무엇이 이들을 변화시켰는가? 바로 “예수는 부활했다!”라는 사실이 뒤집힐 수 없는 진리라는 확신, 그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속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거짓에 속아 최면에 걸린 이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목격자였습니다. 그랬기에 그들은 그것이 ‘절대 사실’임을 입증하기 위해 순교까지 불사했던 것입니다.


Big  Q 15,  지구의 종말이 오긴 오는 것일까?


몇 년 전 故 서정주 시인의 시 ‘단편(斷片)’을 우연히 읊조리다가 애써 눈물을 참은 적이 있습니다.


“바람뿐이드라. 밤허고 서리하고 나 혼자뿐이드라.

거러가자. 거러가보자. 좋게 푸른 하눌속에 내피는 익는가.

능금같이 익는가. 능금같이 익어서 떠러지는가.

오~ 그 아름다운 날은……내일인가. 모랜가. 내명년인가.“


고독의 전율이 느껴지면서도 또한 통쾌하고, 처량맞게 들리면서도 또한 웅혼한 기운이 느껴지는 그의 독백이 내 마음을 울렸던 것입니다. 나는 그날 이렇게 메모를 남겼습니다.

“노상 뻑적지근한 향연을 즐기듯 살고 싶어하지만 마지막에 남는 것은 바람임을 깨닫게 되는 날, 그날은 필경 생의 베일이 벗겨지는 날일 터다. 겹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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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먹구름을 뚫고 마침내 햇살이 쨍하니 비춰오는 날일 게다.

그날은 과연 언제 올까.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유치원 놀이터에서 휑한 고독을 조숙하게 느끼는 아이의 어느 날 오후일 수도 있고, 애석하게도 임종이 코앞에 왔는데 아직일 수도, 그날을 끝내 못 만날 수도 있다.


시객(詩客) 서정주가 시간의 허공 속에서 우두커니 만난 밤, 서리 그리고 혼자라는 자각, 그것은 차라리 존재로부터 내려오는 새벽의 감로수일터다.

그러기에 허무의 밑바닥에서 생의 욕망은 벌써 일어나 ‘거러가자. 거러가보자’를 노래한다. 기개가 장하다! 자신 안에 미친 존재감으로 흐르는 ‘피’가 저 ‘좋게 푸른 하눌속에’서 능금같이 익어 떠러질 그 지대(Zone)에까지 가볼 심산이니.

이윽고 시객이 머리서부터 예감하고 기대하는 ‘오- 그 아름다운 날’은 나의 갈망으로 남고 우리 모두의 희구로 약동한다.”       

      

나는 송창식이 노래로 부른 미당의 시 ‘푸르른 날엔’을 좋아합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저기 저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짙어 단풍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저기 저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짙어 단풍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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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당은 이 시를 유독 아꼈다고 합니다. 자신의 시를 노래 작곡에 안 주기로 소문난 시인께서는 송창식을 불러 작곡을 요청했고, 송창식이 헌사하여 흡족해했다는 뒷이야기가 있을 정도입니다.

여하튼 이처럼 호기 어린 서정을 품었던 그가 저런 마음 한자락을 펼쳐놨으니 그야말로 인생무상입니다.


“오- 그 아름다운 날!”

이날을 우리는 종말이라 부릅니다.

“지구의 종말은 언제 오는가?”

그날이 언제 올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확실한 것 하나는 그날을 한평생 기다려오던 희망의 사람들에게는 정녕 환희의 날이 될 것이되, 그날을 부정하고 거부하고, 혹여 두려워하던 역천(逆天)의 사람들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회한의 날이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을 명징하게 알지 못하던 동양의 현자들도 이 사실만은 엄중하게 설파하였습니다. 자고로 우리 민족은 자녀들에게 이것을 확실히 훈육하고자 했습니다.

공자가 말하기를 “착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복을 주시고, 악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재앙을 준다.”고 하였습니다.

(孔子曰 爲善者天報之以福 爲不善者天報之以禍)

맹자가 말하기를 “하늘을 순종하는 자는 살고, 하늘을 거역하는 자는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孟子曰  順天者存 逆天者亡)

장자가 말하기를 “만일 사람이 착하지 못한 일을 해서 이름을 세상에 나타낸 자는 사람이 비록 해치지 않더라도 하늘이 반드시 죽일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종말에 관한 성경의 진술 가운데 그 뜻이 자명한 것을 추려보면 세 가지가 꼽힙니다.

첫째, 언제 올지 어떻게 올지 아무도 모른다. 오직 하느님만 아신다.

둘째, 기회는 단 한 번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이고 그 뒤에 심판이 이어지듯이(히브 9,27)” 종말은 한 사람의 일생에서 ‘단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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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 주어지는 소중한 기회라는 말입니다.

셋째, 그날 우리의 지상 삶이 평가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심판은 단죄가 아니라 사필귀정의 질서가 완성되는 과정을 말합니다. 그때에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처럼 빛날 것이다.” (마태 13, 43) 종말에 있을 일에 대해서 이 이상의 것을 말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미국 케네디 전 대통령의 취임식에서 자작시를 낭송하기도 했던 로버트 프로스트는 ‘국민시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았던 인물입니다. 하루는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강연 요청을 해왔습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글을 쓸 시간이 없어서 시인이나 작가가 되지 못했다’고 생각해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날 프로스트는 말했습니다.

“나는 마치 도둑놈처럼 시간을 좀 훔쳤습니다. 식사 시간도 좀 훔쳐오고, 잠자는 시간도 좀 훔쳐오고, 사람들과 잡담하는 시간도 좀 훔쳐왔지요. 그리고 훔쳐온 그 시간을 용감하게 휘어잡고 시를 썼습니다.”

청중이 무언가에 얻어맞은 듯 멍한 상태가 되어 대꾸 한마디도 못하자 프로스트는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자신이 늘 바쁘다고 생각하지만, 필요한 시간은 언제라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저처럼 말입니다.”

필요한 시간을 언제라도 ‘훔쳐와서’ 사용했다는 시인의 말에 재치가 넘칩니다. 동시에 정곡을 찌릅니다.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로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그 무엇이 아니고, 삶의 인과관계를 파악하는 하나의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와 미래라는 것은 인간의 의식 안에서만 존재할 뿐 우주 어디에도 없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현재뿐!


15-1  Real  Q,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좌절의 순간

                  출구는 어디에 있나요? 


2011년 1월 중순경, 미국인의 심장에 대한민국의 자긍심을 새겨주고 있는 강영우 박사 일행과 오찬을 가졌습니다.

강영우 박시는 2006년 7월, 미국 루스벨트 재단이 선정한 ‘127인의 공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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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에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포함된 인물입니다. 이 127인에는 록펠러, 맥아더 장군,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 빌 클린턴과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코피아난 유엔 사무총장 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는 부시 대통령 당시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를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그가 시각장애인이라는 점입니다. 그는 중학교 재학 중 외상에 의한 망막 박리로 실명한 후, 사회의 편견과 차별이라는 온갖 시련을 굳은 신앙과 의지로 극복, 세계적인 재활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1972년 2월 결혼을 하고 그해 8월 한국 최초 장애인 정규 유학생으로 아내와 함께 도미, 3년 8개월 만에 피츠버그대학에서 교육학 석사, 심리학 석사, 교육전공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 1976년 4월 한국 최초의 맹인 박사가 되었습니다. 그의 영문판 자서전인 ‘빛은 내 가슴에’는 미국 의회 도서관 녹음 도서로 제작 보급되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2001년 세계 저명인사 인명사전에도 수록되었습니다.

그는 현재 루스벨트 재단에서의 탄탄한 입지를 기반으로 한 ‧ 미 우호증진을 위해 민간외교관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는 나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는 시련 속에서 사명을 찾았기에 자신은 물론 두 아들까지 미국 사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축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는 시각장애인입니다. 하지만 그는 비장애인인 우리보다 훨씬 더 밝은 기쁨과 희망으로 의욕 넘치게 살고 있습니다. 그는 일반 신자입니다. 하지만 그는 성직자보다 더 뜨거운 소명감으로 매일 하느님의 뜻을 묻고 있습니다.

장애인인 그가 오히려 비장애인을 환한 표정으로 위로하고, 평신도인 그가 오히려 성직자를 삶으로 나무라고 있습니다. 그런 그였기에 미국에서도 내로라하는 名家를 일궜습니다.

시련을 원망하면 거기서 주저앉고 말지만, 시련을 기회로 삼으면 거기서 위대한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는 것입니다.


흔히 호사다마라고 합니다. 좋은 일에는 마가 많이 낀다는 말입니다. 나는 아예 이 말의 순서를 바꾸어서 마음 채비를 해두고 있습니다. 다마호사, 안 좋은 일이 자꾸 생기는 것은 좋은 일이 일어날 징조다! 이렇게 말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이 통념상 재수 없는 일이라고 손으로 꼽는 것들도 나에게는 무조건 상서로운 징조, 곧 길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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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 역시 나에게는 100% 좋은 일이 일어날 징조인 것입니다.

또 시련 자체가 지니는 긍정적인 의미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봄 가뭄이 식물에게는 매우 유익하다고 합니다. 모름지기 농사를 모르는 도시인들은 봄비가 많이 내려야 씨앗이 자라는 데 유익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농부들은 경험상 봄날의 좋은 날씨가 오히려 식물들로 하여금 뿌리를 얕게 내리게 하여 생존력을 약화시킨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태풍이 왔을 때 곡식이 쉽게 뽑히고 맙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충분히 비를 맞지 못한 식물은 물과 양분을 얻기 위해 땅속 깊이 튼튼하게 뿌리를 내리려고 합니다. 그리하여 태풍이나 가뭄이 와도 끄떡없이 견뎌낼 수 있게 됩니다.

봄날의 악천후가 식물들을 강인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나는 변심을 모르는 고난예찬론자입니다. 나의 침 튀는 예찬에 어느 조경 전문가가 맞장구를 쳤습니다. ‘아, 저 소나무 굉장히 멋있다. 아주 멋지다’해서 정원에 가져다 심는 나무들은 하나같이 비정상적으로 발육된 나무라는 겁니다. 풍파를 겪느라 뒤틀린 나무들 말입니다.

이 무슨 아이러니입니까? 건강하고 곧게 쑥쑥 자란 나무들은 잘라서 건축 재료로나 쓰이는데, 풍파 겪으며 꼬인 나무들을 ‘아름답다!’ 찬탄하니까요.

고가의 나무들은 시쳇말로 기형들입니다. 바위틈이나 그늘에서 햇빛을 향해 가지를 뻗느라 몸이 굽고 뒤틀려 자라난 것이죠. 그런데 사람들은 그 오묘한 멋스러움에 더 환호합니다.

왜 인간은 그와 같은 소위 ‘기형 소나무’에 끌리는 것일까요? 인간 안에는 고난의 미학을 볼 줄 아는 천부적인 눈, 곧 심미안이 있기 때문입니다.


15-2  Real  Q,  꿈을 향해 달려가지만 꿈은 자꾸 도망가고

                 이를 어찌해야 하나요?      

2011년 여름, 줄기차게 쏟아지는 소나기를 맞으며 양평 ‘소나기 마을’을 찾았습니다. 대한민국 문학계의 거목 황순원 선생님 문학촌인 그곳에, 작가 안영 선생이 촌장으로 봉사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언젠가 안영 선생과 통화를 하다가 황순원 선생님 묘소 근처에 나무를 심고 싶다는 얘기를 들었던 터여서 한 지인으로부터 30년 정성껏 키운 것들이라며 기증받은 멋들어진 철쭉 일부를 꼭 나눠드리고 싶었어요. 그래 벼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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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르다 그날 직접 수송 작전을 감행(?)했습니다.

역사관에서는 황순원 선생님을 대변할 수 있는 단어가 ‘순수’, ‘절제’, ‘나라사랑’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역사관에서 나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무엇보다도 그분이 열일곱 소년 시절에 처음으로 발표했다는 시 ‘나의 꿈’이었습니다.

전문을 읽는 순간 나는 전율을 느꼈습니다. 순간적으로 ‘아, 이 시가 작은 거목 황순원 선생님의 삶을 초지일관 비장하고 단호하게 관통하고 있었던 것이로구나!’ 하는 깨달음이 뇌리를 스쳤습니다. 내가 그것을 고스란히 알아챌 수 있었던 것은 나 역시 ‘무지개 원리’에 입각한 여러 강연에서 그토록 강조하던 주제가 ‘선하고도 원대한 꿈을 품으라’ 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누구에게나 ‘꿈’은 와 닿을 수밖에 없는 단어겠지만, 꿈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다니던 나에게는 더욱더 각별하게 느껴졌습니다.  

나의 가슴을 지진처럼 뒤흔든 그분의 시 전문은 이렇습니다.

꿈, 어젯밤 나의 꿈

이상한 꿈을 꾸었노라.

세계를 짓밟아 문지른 후

생명의 꽃을 가득 심으고

그 속에서 마음껏 노래를 불렀노라


언제든 잊지  못할 이 꿈은

깨어 흩어진 이 내 머리에도

굳게 박혔노라.

다른 모든 것은 세파에 스치어도

나의 동경의 꿈만이 존재 하나니.


얼마나 원대하고 호방하고 심지어 건방진 꿈입니까! 하지만 황순원 선생님은 마치 약속을 지키는 심정으로 이 꿈을 한평생 살아낸 것입니다. 그분은 그 꿈의 성취를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문학의 외길을 걸었습니다.

나는 묘소 참배를 마치고 방명록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선생님의 꿈, 제가 사겠습니다. 철쭉 두 그루에.”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잃어버린 순수를 회복한 환희에 내내 흥분을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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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앉히지 못했습니다. 내 여생을 동반해 줄 위대한 멘토를 만난 기쁨에!!!

“세계를 짓밟아 문지른 후

생명의 꽃을 가득 심으고

그 속에서 마음껏 노래를 불렀노라.”

세계를 개간하여 그 위에 생명 꽃 심고 개선가 아닌 태평가를 부를 그날을 이미 확신했던 황순원 선생님.  

희망에 관한 한 나는 개척자입니다. 모두가 절망을 말할 때 나는 희망을 말했습니다. 아무도 희망의 근거를 발견하지 못할 때에도 나는 ‘아무거나 붙잡고 희망이라고 우깁시다.’ 라고 기회 있을 때마다 선동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어느 대학교 강연에서 한 학생이 물었습니다.

“나는 꿈을 향해 계속 달려가는데 꿈은 나에게서 도망갈 때.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하죠? 지금 우리 현실이 딱 그렇거든요.” 이는 그 학생만의 물음이 아니었습니다.


“얼마나 힘들지 공감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습니다. 나는 인류 고난의 역사를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역경을 이겨낸 인생 선배들의 이야기도 꼼꼼히 추적해 보았습니다. 결론은 이것입니다. ‘꿈은 스스로 포기하지 않는 한 반드시 이루어진다!’ 다만 전제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시간이라는 변수 안에서!’ 그러니 이제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딱 하나입니다. 바로 버티는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답은 ‘버티기’입니다.”


“잠긴 문이 한 번 두드려서 열리지 않는다고 돌아서서는 안 된다. 오랜 시간 큰 소리로 문을 두드려 보아라. 누군가 단잠에서 깨어나 열어줄 것이다.”

여기서 누군가가 과연 누구인지를 음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누군가는 애매모호한 ‘남’이 아닙니다. 자신 안에 잠자고 있는 기인일 수 있고, 시회일 수도 있고, 사필귀정의 주관자이신 하느님일 수도 있습니다.

꿈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받을 실망감에 겁을 내고 아예 꿈을 꾸려 하지 않는 이들도 많습니다. 지식인들 중에는 한국 사회의 현실적인 장벽에 초점을 맞추면서 젊은이들에게 허황된 꿈을 장려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데 허파에 바람만 잔뜩 들면 무슨 소용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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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똑똑한 말보다 오히려 소설가 마크 트웨인의 호기를 더 좋아하는 편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20년 후 당신은, 했던 일보다 하지 않았던 일로 더 실망할 것이다. 그러므로 돛 줄을 던져라. 안전한 항구를 떠나 항해하라. 당신의 돛에 무역풍을 가득 담아라. 탐험하라. 꿈꾸라. 발견하라.”

꿈에 관한 한 “가다가 중지 곧 하면 아니 감만 못하리”는 맞지 않습니다. 간 만큼 기쁨이며 보람입니다. 설령 꿈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도전해봤다는 사실은 여한을 남기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나이 탓을 합니다.

“이 나이에 꿈은 무슨 꿈. 이미 꿔오던 것도 정리해야 할 판인데.”

현명한 판단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심장의 맥박이 뛰고 있는 한, 세상에 너무 늦은 것은 없습니다.

미국의 자동차 산업을 크게 일으킨 찰스 키터링은 83세 생일을 맞았을 때 그의 아들이 은퇴하기를 청하자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만 생각하는 사람은 흉하게 늙는다. 나는 항상 미래를 바라보면서 오늘을 생활한단다.”

흉하게 늙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 도전하지 않는 순간부터 사실상 우리는 이미 흉하게 늙기 시작한 겁니다.


건강한 여든 살 노인의 뇌는 젊은이의 뇌가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일을 해낼 수 있다고 합니다. 분명 젊은이에 비해 속도는 더디고 기억력과 집중력이 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제약들 정도야 가뿐히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칸트는 쉰일곱 살에 처음으로 철학에 관한 저서를 집필했으며.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아흔 살에 구겐하임 미술관을 설계했다고 합니다.

스페인의 유명한 첼로 연주가인 파블로 카잘스는 아흔한 살이 되어도 날마다 첼로 연습을 했습니다. 그러자 한 제자가 묻더래요. “선생님은 왜 아직도 연습을 하시는 겁니까?” 그에 대한 카잘스의 대답이 일품입니다. “요즘도 조금씩 실력이 향상되기 때문이라네.”

17세기 네델란드와 유럽 회화를 대표하는 화가 렘브란트, 그가 유명해지고 난 뒤 한 미술학도가 그에게 찾아와 물었습니다.

“어떻게 그림을 그려야 좋겠습니까?”

렘브란트는 주저 없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붓을 잡고 지금 시작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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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필로그


오스트리아 비엔나대학에서 박사 학위 통과 시험을 치르던 당시의 이야기다. 나는 학위 취득을 위해 전공서적 30여 권을 깨알 같은 글씨로 요약해 가며 빈틈없이 준비하였다. 그런데 구두시험 현장에서 내가 받은 질문은 그에 비해 너무도 파격적이었다. 필자의 논문지도 교수이며 시험 주심이기도 했던 P.M. 쭈레너 교수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그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단 한 단어로 말해보시오.”

“오늘날 전 세계를 지배하는 현상들의 배후에 작용하는 가치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한 단어로 말해 보시오?”

“……………………”

그리고 스무고개처럼 교수님의 질문이 이어졌다.


돌이켜 보니 교수님의 질문은 시험이 아니라 마지막 강의였던 셈이다. 그 수업의 추억은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되어 오늘도 내 가슴에서 고동치고 있다.

“늘 한 단어 핵심을 파악하려고 노력하라. 많이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결정적인 인자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속 물으라. ‘여기서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이지?”


처음 이 글을 시작할 때 나는 추격전에 나선 형사 같았다.

내가 추적해야 할 상대는 그 ‘한 단어’.

그러나 정신없이 추격전을 벌였지만 결국 그 상대는 놓쳐버린 어설픈 형사 꼴이 되고 말았다.

독자들에게 미안하고 송구스럽다.

그리고 감사하다.    

    

                             2012.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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