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방을 찾아서

2012. 7. 2. 14:34독서후기

반응형

변방을 찾아서

■ 신영복

0 1941 경남 밀양 생. 서울대 경제학과 동 대학 경제학 석사

0 숙명여대 경제학과 강사. 육사 경제학과 교관

0 1968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형, 20년 복역, 1988. 8. 15 특사

0 1989년부터 성공회대학 교수. 2006년 정년 후 석좌교수로 재직

0 감옥으로 부터의 사색. 나무야 나무야. 더불어 숲. 강의. 처음처럼.

사람아, 아, 사람아! 등의 저서

■ 책머리에

이 책은 ‘경향신문’에 연재한 ‘변방을 찾아서’의 글들을 모은 것이다. 내가 쓴 글씨가 있는 곳을 찾아가서 그 글씨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낸 글이다. 모두 8회의 연재로 마감했기 때문에 분량이 많지 않다.

연재 글을 읽은 독자라면 ‘변방을 찾아서’라는 기획의 의미를 알고 있을 것이다. 취재 대상을 선정하는 기획 단계에서 알게 된 것이지만, 내가 쓴 글씨들이 대체로 ‘변방’에 있었다. 그래서 기획 연재의 제목이 자연스럽게 ‘변방을 찾아서’가 되었다. 지역적으로도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또 그곳의 성격 또한 주류 담론이 지배하는 공간이 아니었다. 내게 글씨를 부탁했던 사람들도 중심부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기도 했을 것이다.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해남의 땅끝 마을이었다. 완벽한 변방이다. 해남 송지초등학교 서정분교의 교실에 ‘꿈을 담는 도서관’ 이란 작은 현판이 걸려 있었다. 서울공화국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땅끝임에 틀림없고, 정치적 경제적으로 낙후해 가는 농촌이며, 폐교 직전의 시골 초등학교 그것도 분교였다. 현판이 걸려 있는 곳도 사람들이 자주 찾는 커피숍이 아닌 도서관이었다.

두 번째로 찾아간 강릉의 ‘허균 ‧ 허난설헌 기념관’ 역시 변방이었다. 허균(許筠 1569 - 1618)과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 - 1589)은 조선 시대의

- 1 -

변방이었을 뿐 아니라 강릉을 대표하는 오죽헌(烏竹軒)의 변방이었다. 소설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은 역적죄로 처형당했다. 그의 누이 허난설헌 역시 조선에 태어난 것을 恨하고 여자로 태어난 것을 한하며 스물일곱 나이로 요절한 불우한 시인이다.

‘박달재는’ 찾는 사람도 없었다. ‘울고 넘는 박달재’의 구성진 노래만 주변 산천을 가득히 울렸다. 그 애절한 가락과 노랫말은 그곳을 500년 전으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더구나 지금은 터널이 뚫려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동차로 박달재 밑을 관통하고 있을 뿐 고개에 오르는 일이 없다. 박달재를 일부러 찾는 사람들 외에는 발길이 끊어진 고개이다.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가는 선비들의 이야기도 까마득히 잊혀진 옛날이야기다. 하물며 박달과 금봉이의 애달픈 순애보는 더 이상 없다. 바로 그런 시실 때문에 박달재는 오늘의 삶을 돌이켜 보게 하는 변방 특유의 관점을 갖는다.

‘벽초 홍명희 문학비’는 비문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먹빛이 바래어 있었다. 우선 비문에 먹을 넣는 일부터 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잊혀진 비였다. 현란한 영상의 시대에 문학의 위상 자체가 변방일 수밖에 없다. 더구나 한국 현대사의 도도한 반공, 반북 논리 속에서 월북한 벽초(碧初) 홍명희(洪命熹 1888 - 1968)의 문학비는 설 자리가 없다. 비가 서 있는 장소도 그랬고 비의 크기도 작았다. 작가회의 회원들이 뜻을 모아 어렵게 벽초 문학비를 세우자 금방 깨뜨리겠다는 보훈단체의 항의에 직면하게 된다. 월북한 인사일 뿐 아니라 북에서 부수상까지 역임한 그의 경력이 문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오대산 상원사의 ‘문수전’은 막상 상원사를 찾아가는 아침까지도 글 쓸 일이 걱정이었다. 상원사라는 조계종 사찰의 대웅전 현판을 변방과 연결하기가 어려웠다. 더구나 불교는 한국 최대의 종단이 아닌가. 그리고 또 하나의 고민은 문수전 현판이 상징하는 ‘지혜(智慧)’의 변방성에 관한 것이었다. 지혜란 깨달음이고 깨달음의 세계는 한없이 넓고 깊다. 그 넓고 깊은 세계의 중심이 지혜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을 변방이라 하자니 참으로 난감했다. 그러나 막상 상원사에 도착하여 스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리고

- 2 -

사찰을 찾아온 불자들의 모습을 접하면서 차츰 생각의 갈피가 잡히기 시작했다. 역시 현장의 역동성이었다.

오대산은 가지고 있던 생각을 내려놓게 했다. 우선 고속으로 달려온 우리들을 무색케 했다. 그 속에 안겨 있는 모든 것들이 더디고 말이 없었다. 노구를 이끌고 산사를 찾아온 불자들의 모습도 어느새 산을 닮아 있었다. 지나온 세월을 돌이켜 보는 듯 그분들의 눈길은 하나같이 자신의 내부를 응시하고 있었다. 서울에는 없는 눈빛이었다. 단풍철도 지나 을씨년스런 산사의 풍경이 보여 주는 것은 놀랍게도 ‘서울’이었다. 어둠이 북극성을 보여 주듯이, 지혜의 신 미네르바의 부엉이가 황혼에 날개를 펴듯이 변방은 변방 특유의 조망(眺望)을 가지고 있었다. 자본주의라는 소유의 사회에서 무소유의 주장은 비현실 그 자체이다. 새로운 정보와 지식이 끊임없이 밀려오는 정보사회에서 결코 디지털화할 수 없는 ‘지혜’라는 이름의 고독한 깨달음이 설 자리는 없다. 무소유든 지혜든 그것의 결정적인 결함은 ‘상품’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상품이 못 되는 것은 팔리지 않고 팔리지 않는 물건은 살아남지 못하는 법이다. 그러나 참으로 역설적인 것은 무소유의 지혜는 팔리지 않으면서도 살아남는다는 사실이다. 팔리지 않는다는 것은 그 역설적 반 시장 논리가 상품의 허상을 드러내면서 스스로 그 대척점(對蹠點)에 선다.

무소유는 소유의 물질성을 제거하고 지혜는 반대물인 우직함으로 전화(轉化)한다. 그것이 바로 변방의 지혜일 것이다.

용과 고래의 한판 승부라는 타종의 엄청난 굉음을 좇아가 이윽고 도달한 곳은 묵언(黙言)이었다. 어느 시인의 고백처럼 소리의 뼈는 침묵이었다. 충격에서 시작하여 긴 여운을 거쳐 정적으로 끝나는 생성과 소멸의 여정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탈주와 접속의 장이었다. 그런 점에서 지혜는 자기와의 불화(不和)이고 시대와의 불화이다. 지혜가 고요와 깨달음의 초월 공간이라고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지혜에 대한 오해이다. 마찬가지로 무소유 역시 사회와의 불화이다. 타인의 불행으로부터 자신을 안전하게 격리시켜 주는 소유라는 이름의 요새(要塞). 그 완고한 요새를 향한 싸움이다. 성채가 무너지는 것은 대체로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고립(孤立)이고, 둘째는 내분(內紛)이다. 고립은 스스로 자초하는 것이며, 내분은 더 큰 소유를 부르는 자기 논리 때문이다. 소유는 소유를 부르고 불안은 불안을 낳기 마련이다. 소유는 사람과 물건이 맺는 관계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이 만들어 내는 관계이다.

- 3 -

전주에는 전북대학교 교정에 이세종(1959 - 1980) 열사의 추모비가 있고, 또 전북대학교에서 10여분 거리의 덕진공원에 김개남(金開南 1853 - 1895) 장군의 추모비가 있다.

이세종 열사의 추모비에는 “다시 살아 하늘을 보고 싶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 묘비명은 이세종의 학우였고 계엄군이 난입하던 날 밤에 전북대학교의 학생관에 함께 있었던 김성숙 선생의 글이다. 자기가 이세종이라면 어떤 마음일까를 생각하면서 지은 글이라고 했다. 마침 청명한 가을이어서 가을볕을 담뿍 받고 있는 “다시 살아 하늘을 보고 싶다”는 글귀는 이세종의 육성이었다. 그리고 전북대학교에서 10여분 거리에 있는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라는 김개남 장군의 묘비명도 마찬가지였다. ‘개남아’를 반복해서 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새겨 놓은 것이다. 당시 널리 불렸던 ‘새야 새야 파랑새야’의 대구이기도 하다.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 수천 군사 어디 두고 짚둥우리가 웬말이야”라는 묘비명에서는 수천 군사를 휘몰아 거칠 것이 없던 김개남 장군이 새끼줄에 묶여 짚둥우리가 되어 끌려가는 모습을 탄식하는 농민들을 보게 된다. 이세종 열사와 김개남 장군의 묘비명에서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전주는 내게 각별한 도시이기도하다. 20년 수형 생활을 마치고 출소한 곳이기 때문이다. 본문에서도 밝혔듯이 애환(哀歡)이 교차하는 도시이다. 출소 당일. 8월의 햇볕 속으로 걸어 나오면서 20년 수형 생활은 이제 추억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그것이 단지 추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만 전주는 내게 아픈 기억을 송별하는 별리(別離)의 장소이면서 8월의 햇볕을 만나는 새로운 시작의 장소이기도 하였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경찰 병력이 난입할 것이고 지명수배된 총학 간부들이 우선검거 대상임은 물론이다 그래서 총학 선배들이 검거를 피해 미리 학생관을 빠져 나갔다. 불침번이었던 이세종은 각 방으로 뛰어다니며 학우들을 깨웠고, 그것이 계엄군으로 들이 닥친 공수단의 표적이 되었다. 그는 학생관 옥상으로 달아났지만 결국 붙잡혀 집단 구타를 당한 뒤 추락사하게 된다. 학생관에서 그 참상을 목격한 학우들과 먼저 빠져나와 더 무거운 죄책감에 시달리는 선배들이 그동안 해마다 5월 17일이 되면 어김없이 추모비를 찾아오고 있었다. 벌써 30년이 지나서 아픈 상처가 아물고도 남을 세월이지만 오

- 4 -

히려 더 처연해진다고 했다. 이제는 당시 이세종 학우가 아니라 자신의 자녀의 모습으로 다가온다는 것이다.

추억이란 세월과 함께 멀어져 가는 강물이 아니다.

서울 시장실에 걸려 있는 ‘서울’이란 작품은 내게 매우 애착이 가는 글이다. 그러나 글씨가 있는 곳이 시장실이어서 그동안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1995년에 작품을 서울시에 기증하고 난 후 이번이 처음이다. 17년 만에 만나는 셈이다. 서울 시청은 임시 청사여서 옛날처럼 넓지도 않았다.

‘서울’이란 작품은 ‘서’와 ‘울’을 각각 북악산과 한강수로 형상화하고 각각의 의미를 방서로 풀어냈다.

“북악무심오천년(北岳無心五千年) 한수유정칠백리(漢水有情七百里). 북악은 왕조 권력을 상징하고, 한수는 민초들의 애환을 상징하는 것으로 대비하였다. 북악과 한수, 무심과 유정, 5천 년과 칠백 리로 대비하여 왕조와 백성의 정서를 대치했다. 조선이 서울을 도읍으로 삼은 기간이 500여년이기는 하지만, 북악은 우리 역사 전반에 걸쳐서 군림한 정치권력 그 자체를 상징하기에 충분했다. 그에 비하여 저 멀리 가장 낮은 곳으로 굽이굽이 흐르는 한강수는 고단한 삶을 뒤척이는 백성들의 몸부림이기도 할 것이다. 북악산과 그 일대에 위용을 자랑하는 궁궐들은 권력의 중심부이다 권력 투쟁이 거기서 영위되는 정사(政事)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성들의 애환은 뒷전이었고 그것이 탁상에 오른 경우에도 권력투쟁의 방편에 불과 했다. 그런 북악을 멀리 두고 한강수는 유유히 흘러간다.

나는 이 작품이 서울 시청에 걸려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서울시는 북악보다는 한강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권력의 중심이기보다는 시민들의 삶을 껴안고 흐르는 강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본문에서 산수대우(山水大友)를 예로 들어 산과 물은 오랜 친구(大友)이기 때문에 서로 환포(環抱)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자연에서와는 달리 역사적으로 북악과 한수가 환포하는 경우는 없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한수는 북악을 신뢰하지 않고 북악은 한수의 강물 소리를 듣지 않는다. 이상적인 산수의 관계는 차라리 반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한수가 무심하고 북악이 유정해야 맞다. 노자(老子)는 도덕경에서 가장 좋은 정치란 임금이 있기는 하되 그가 누군지 백성들이 모르는 경우라 했다. (太上 不知有之). 그렇기 때문에 북악은 유정하되 한수는 차라리 무심한 것이 좋다.

- 5 -

서예작품으로서의 ‘서울’은 디자인을 전공하는 사람들로부터 많은 칭찬을 받았다. 한문 서예의 경우는 한자 자체가 상형문자이기 때문에 그 내용과 형식을 일정하게 조화시키는 일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갑골문(甲骨文)이나 전서체(篆書體)는 글자가 곧 그림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글 서예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한글은 기호의 조합이다. 각박한 기호에 불과한 한글을 형상화했다는 점을 전문가들이 가장 먼저 평가해 주었다. 그리고 서울을 북악산과 한강으로 압축하여 표현하고 그 위에 다시 무심한 왕조 권력과 민초의 애환을 대비시킴으로써 역사적 함의(含意)를 더했다는 점도 높이 평가해 주었다. 서울 정도 600년을 기념하여 서울을 주제로 한 초대전을 기획한 예술의 전당 서예부 이동국 학예실장으로부터 출품 청탁을 받을 때만 해도 나는 출품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내가 서예를 본격적으로 사사받은 정향(靜香) 조병호(趙炳鎬 1914 - 2005) 선생님의 지론이 그랬다. 우리나라 역사에 서예가란 없다는 것이다. 직업인으로서는 사자관(寫字官), 녹사(錄事)가 있었을지언정 예술 작품으로서의 서예를 직업으로 하는 문화란 없다는 것이 선생님의 지론이었다. 붓을 일상적인 필기도구로 사용했기 때문에, 선비 중에 글씨를 잘 쓰고 그 학문과 인품이 뛰어난 사람의 글을 사람들이 애장하면서 서예가 예술성을 더해 갔다는 것이다. 그러한 경로 때문에 서예 작품은 항상 사람과 글씨가 아울러 평가되는 인문학적 경지에 올랐다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인격과 무관하게 평가되는 서양 예술 작품과 구별된다는 지론을 자주 펼쳤다. 물론 당신 스스로는 서예가가 아니라 학자(學者)로 자처하셨다. 당시 우리나라 서예가로서 중국의 고궁박물관에 글씨가 소장된 유일한 분이었고, 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 1786 - 1856)의 맥을 잇고, 우하(又荷) 민형식(閔衡植 1875 - 1947) 선생과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 - 1953) 선생께 사사하신 분이었다. 완당,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 - 1777)를 비롯하여 우리나라의 명필은 서예가이기 이전에 학자였고 처사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 역시 서예가란 생각이 아예 없었다.

인류사는 언제나 변방이 역사의 새로운 중심이 되어 왔다. 역사에 남아 사표가 되는 사람들 역시 변방의 삶을 살았다. 일일이 열거하지 않아도 도처에서 얼마든지 만날 수 있다. 오리엔트의 변방이었던 그리스 로마. 그리스 로마의 변방이었던 합스부르크와 비잔틴. 근대사의 시작이 되었던 네델란드와 영국, 그리고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에 이르기까지 변방으로 이동해 온 역

- 6 -

사다. 우리는 왜 문명이 변방으로 이동하는지, 변방이 왜 항상 다른 문명의 중심지가 되는지에 대하여 고민해야 한다. 그것이 변방에 대한 즉물적 이해를 넘어 그것이 동학(動學)을 읽어내는 것이기도 하다. 동학은 운동이고 운동은 변화이다. 문명도 생물이어서 부단히 변화하지 않으면 존속하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변방이 공간적 개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변방은 변방성, 변방 의식의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비록 어떤 장세(場勢)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경우라 하더라도 모름지기 변방의식을 내면화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크게 보면 인간의 위상 자체가 기본적으로 변방이기 때문이다. 우주의 광활함과 구원함을 생각한다면 인간의 위상 자체는 작은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변방 의식은 세계와 주체에 대한 통찰이며 그렇기 때문에 변방의식은 우리가 갇혀 있는 틀을 깨뜨리는 탈문맥이며, 새로운 영토를 찾아가는 탈주(脫走)그 자체이다. 변방성 없이는 성찰이 불가능하다. 이것은 세상에서 생명을 부지하는 하나의 생명체로서도 그러하고, 집단이든 지역이든 국가나 문명의 경우든 조금도 다르지 않다. 스스로를 조감하고 성찰하는 동안에만, 스스로 새로워지고 있는 동안에만 생명을 잃지 않는다. 변화와 소통이 곧 생명의 모습이다.

조선시대 최고의 사상가이자 문필가로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 - 1805)을 꼽는데 이의가 없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연암이 16세 때까지 ‘글을 못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문맹은 아니었지만 반가의 자제가 읽어야 하는 독서량에 비해 대단히 빈약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열여섯에 장가를 들었는데 처가 쪽 사람들이 연암의 독서 수준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고 한다. 장인인 이보천(李輔天)에게 ‘맹자’를 배우고, 처삼촌인 이양천(李亮天)에게 ‘사기’를 배웠다는 기록이 과정록(過程錄)에 전한다. 연암의 이 이야기는 오히려 열하일기로 대표되는 연암의 창조성이 어디서 온 것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연암의 어린 시절이 오히려 당시 선비들이 갇혀 있던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이나 고문 투에 갇히지 않을 수 있게 하였고, 더구나 교조화 된 성리학의 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했다.

사실은 조선의 건국 자체가 변방성을 토대로 한 것이다. 이성계는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20세까지 함길도 변방에서 호복(胡服) 변발(辮髮)을 한 원나라

- 7 -

신민이었다. 뿐만 아니라 고려 말의 개혁파들만 하더라도 당대 사회의 변방인이었다. 역성혁명파였든 온건개혁파였든 일단은 친원파 권문세족과는 분명히 구별된다는 점에서 중심부가 아닌 변방인이었다. 그리고 위화도 회군 이후에 다시 갈리게 되는 역성혁명파와 온건개혁파의 차이도 변방과 중심부로 나눌 수 있다. 역성혁명파가 농민적 성격이 강했던 반면 온건개혁파는 지주적 성격이 강했다. 특히 신분에 있어서도 정몽주 등 온건개혁파에 비하여 역성혁명파는 대체로 서얼의 핏줄을 잇고 있어서 중심부에서 한 발 비켜난, 이를테면 변방 혈통이었던 셈이다.

개혁군주 정조(正祖)대왕의 개혁 중심 기관인 규장각에는 사검서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서이수도 모두 서얼 출신이었다. 당시 중심부를 장악하고 있던 노론 사대부들이 자기들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개혁 주체가 될 수 없었음은 물론이다. 사실 정조 자신이 비록 임금이기는 하였으나 변방의 군주였다. 노론 집권세력의 집요한 음해에도 불구하고 기적적으로 즉위하였지만, 임금으로 즉위한 이후에도 그들의 포위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결국은 자신의 정치적 포부를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죽음에 이른 임금이었다. 정조의 이러한 변방성이 조선조 최고의 개혁군주, 철인(哲人)군주의 면모로 남는 것이다.

변방은 그런 것이다. 비록 변방에 있는 글씨를 찾아가는 한가한 취재였지만 나로서는 취재를 마감하기까지의 모든 여정이 변방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돌이켜 볼 수 있었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이 그런 상념을 담는 데 훨씬 못 미치는 것은 물론이다. 글의 양도 부족하고 붓글씨라는 한가한 소재자체가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모든 글들은 독자들의 것이다.

- 8 -

꿈은 가슴에 담는 것

■ 해남 송정초등학교 서정분교

‘변방을 찾아서’ 제일 첫 번째 방문지로 찾아간 곳은 전라남도 땅끝 마을 해남이었다. 그것도 초등학교의 분교였다. 사실 어디를 첫 방문지로 할 것인가를 고민하였다. 우선 제목에 걸맞게끔 ‘변방’이어야 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크지 않은 글씨가 있는 곳이어야 했다. 작은 목소리로 시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변방’기획은 내가 쓴 글씨기 있는 곳을 찾아가서 그 글씨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다. 먼저 내 글씨가 있는 곳을 하나하나 점검한 다음 그중에서 대상지를 선정하고 다시 취재 순서를 정하는 방식으로 전체 기획을 짰다. 그렇게 해서 첫 방문지로 정한 곳이 해남 땅끝 마을이다 땅끝 마을은 이름 그대로 변방임에 틀림없었다.

더구나 농촌의 분교였다. 농촌은 줄곧 인구가 줄고 노령화 되고 있다. 농촌인구의 감소와 노령화는 바로 초등학교의 폐교로 이어졌다. 그중에서도 분교는 폐고 1순위였다.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서정리 서정분교의 도서관에 내가 쓴 작은 현판이 걸려 있었다.

2007년이었을 것이다. 한때 목동아파트 단지에서 이웃으로 지내던 오숙희 박사가 글씨를 부탁해 왔다. 해남 땅끝 마을에 있는 서정분교의 도서관 간판 글씨였다. 마침 어느 단체에서 책을 기증받게 되어 도서관을 만들기로 했다는 것이다. 분교의 작은 도서관이라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다. 도서관 이름도 참 좋았다. ‘꿈을 담는 도서관’. 낡은 풍금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나는 변방의 작은 도서관에 어린이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책 읽고 있는 그림을 연상하면서 현판 글씨를 썼다. 너무 멀어서 도서관 개관식 때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지금 현판 글씨를 찾아가면서도 그때 쓴 글씨의 모양이 떠오르지 않았다. 개관 후 감사 편지와 함께 고구마 두 상자를 보내왔는데 현판 사진은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변방은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주변부로 인식된다. 당연히 낙후된 지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변방에 대한 관심은 사회적 약자와 마이너리

- 9 -

티에 대한 온정주의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이번의 ‘변방을 찾아서’라는 기획은 바로 이러한 감상적 관점을 반성하려는 것이다. 변방을 낙후되고 소멸해 가는 주변부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의 전위(前衛)로 읽어 냄으로써 변방의 의미를 역전시키는 일이 과제가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변방보다는 변방성(邊方性)이라는 표현이 적절할지도 모른다. 변방을 공간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부터 바꾸어야 하기 때문이다. 공간적 의미의 변방이 아니라 담론 지형에서의 변방, 즉 주류 담론이 아닌 비판 담론, 대안 담론의 의미로 재구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중심부의 주류 담론인 속도와 효율성만 하더라도 그것이 문화가 되어 있는 중심부 한복판에서는 깨닫기 어려운 법이다. 바깥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변방을 찾아가는 의미가 그런 것이다.

우리가 찾아간 서정분교는 생각보다 아름다웠다. 놀라운 것은 학교 전체에서 풍겨오는 풋풋한 흙냄새였다. 서울의 학교 운동장에는 없는 냄새였다. 운동장에서 자유롭게 뛰어놀던 어린이들이 달려와 반갑게 인사를 하고 스스럼없이 말을 걸어왔다.

우리들 앞에 펼쳐진 서정분교는 발랄하고 행복했다. 전교생이 5명으로 줄어 폐교 직전까지 갔던 학교가 지금은 전교생 66명에 교직원도 13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미황사(美黃寺) 금강 스님이 우리의 도착 시간에 맞추어 학교로 내려왔다. 도서관 글씨를 부탁한 장본인이다. 뿐만 아니라 서정분교의 폐교를 막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지금의 모습으로 만들어 낸 분이다. 금강스님으로부터 그간의 사정을 자세히 들을 수가 있었다.

서정분교는 마을 사람들이 울력으로 세운 학교였다. 교정의 돌과 나무 하나하나가 모두 마을 사람들이 달마산에서 캐어 와서 심은 것이었다. 서정분교는 40여 년 동안 지역공동체의 중심이었다. 폐교를 막고 학교를 살리는 운동도 마을 사람들과 함께 추진되었다. 그 결과 지금은 단지 폐교를 막은 사례로 읽혀지기보다는 대안학교의 모범이 되고 있다.

이들은 곧장 집으로 가지 않는다. 교실에서도 놀고, 운동장에서도 놀고, 학교 근처 냇가로 가서 고기를 잡기도 한다. 참으로 잘 놀고 있었다. 추석을 앞두고 교실에서 송편을 쪄 내고 우리 일행을 환영하는 합창도 들려주었다.

- 10 -

숙제와 수험 준비 그리고 학원을 전전하는 서울 어린이들과는 전혀 다른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끼어들어 운동장에서 아이들과 함께 축구를 했다.

서정분교가 소문이 나면서 젊은 학부모들이 다투어 자녀들을 입학시켰고 한동안 유배지로 알려졌던 서정분교에 교사들이 기꺼이 자원했다. 해남 읍내에서 통학하는 학생을 위해 통학 버스까지 마련했다. ‘구름이’라고 크게 써 붙인 초록색 통학 버스가 학교 운동장 한쪽에 서 있다. 이 버스를 구입한 과정도 소개했다. 미황사의 산사 음악회 때 노영심 씨의 공연을 CD로 만들어서 그 판매 수익금으로 지금의 버스를 마련했다고 한다. 서정분교는 마을 사람들의 애정이 담겨 있는 마을의 중심이었다.

우리는 이튿날 새벽 여명을 가르며 땅끝 마을을 떠나왔다. 학교와 마을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잠들어 있었다. 머지않아 아침 해가 밝게 떠오를 것이다. 서정분교는 틀림없이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꿈을 담는 학교로 밫날 것이다.

스테판 에셀(Stephane Hessel)은 그의 작은 책 ‘분노하라’의 마지막 구절에서 “저항이야말로 창조이며 창조야말로 저항이다” 라는 명언을 남겼다. 서정분교는 저항이었으며 창조였다.

나는 도서관 현판 앞에서 아이들에게 물었다. “꿈을 담는 도서관이라고 했는데 어디다 꿈을 담지?” 가방에다 담는다는 아이도 있었고 머리에 담는다는 아이도 있었다. 내내 배우기만 하던 내가 처음으로 가르쳤다 꿈은 가슴에 담는 것이라고. 그러나 생각해 보면 서정분교 자체가 꿈이었다. 서울 아이들의 꿈이 바로 서정분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우리 시대에도 계속 호출해야 하는 코드

■ 강릉 허균 ‧ 허난설헌 기념관

현판은 허난설헌(許蘭雪軒 : 1563 - 1589) 생가 터에 새워진 기념관 입구에 걸려 있다. 기념관은 자그마한 한옥이다. 많지 않은 관광객이 떠나고 난 뒤 나는 현판을 혼자서 대면해 본다, 허균 ‧ 허난설헌 선양회의 유선기 이사의 부탁으로 2006년에 쓴 것이다. 액자도 없이 평판에 죽각으로 새긴 소박한 현판은 마치 허균(許筠 1569 - 1618)남매의 모습이듯 잔잔한 감회를 안겨 준다. 유선기 이사와 임영민속연구회의 김남식 선생은 크지 않은 기념관

- 11 -

을 못내 서운해 하지만, 나는 마당 가득히 고여 있는 초가을 햇볕 속을 걷는 동안 변방 특유의 한적함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저만치서 안내자의 핸드마이크를 따르던 20여 명의 관광객이 사라지고 나자 허난설헌 생가는 문득 빈집이 된다. 우리들은 영정에 분향한 다음 아예 허난설헌의 방으로 들어가 앉았다. 마치 시간 여행으로 당시를 방문한 듯 감회가 심상치 않다.

허난설헌이 조선에 태어난 것을 한(恨)하고 여자로 태어난 것을 한하였다는 이야기에서부터 허균의 호민론(豪民論)에 이르기까지 우리들의 대화는 마치 그들과 함께하는 듯 했다.

허균의 호민론은 백성을 항민(恒民), 원민(怨民), 호민(豪民)으로 나눈다. 항민은 순종하며 부림을 당하는 백성, 원민은 윗사람의 수탈을 원망하지만 행동으로 나서지 못하는 나약한 백성임에 비하여, 호민은 허균이 찾는 이른바 변혁 주체라 할 수 있다. 사회 부조리를 꿰뚫고 때를 기다렸다가 백성들을 조직 동원하여 사회변혁을 영도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가 쓴 소설 ‘홍길동전’의 홍길동이 바로 호민으로 캐스팅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 허난설헌 : 허균의 친 누나로 본명은 초희(楚姬), 호는 난설헌(蘭雪軒). 300여 수의 시와 수필 등을 남겼고 서예와 그림에도 뛰어났음. 15세에 김성립과 결혼 했으나 남편은 기방출입과 풍류로 방탕했고, 시어머니의 학대가 심했다. 어린 남매를 일찍 잃고, 유산까지 하고, 친정이 옥사에 휘말리고 허균이 귀양을 가버리자 27세로 요절했다.

*허균 : 조선 중기 문신.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 喬山), 성소(惺所), 학산(鶴山), 백월거사(白月居士) 등. 우리나라와 중국의 문학에 대한 비범한 통찰력을 갖춤. 광해군 집권세력인 대북파의 핵심 인물로 형조판서 좌참찬에 올랐으나 역모 죄로 처형당함

강릉에 와서 다시 확인하는 것이, 도도한 주류 담론은 역시 율곡(栗谷 李珥 1536 - 1584)과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 - 1551)이라는 사실이다. 오죽헌(烏竹軒)의 관광객이 압도적으로 많기도 하고, 우리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지향하는 가치도 사임당과 율곡임에 틀림없다. 율곡은 학자이면서도 정치인이었고 신사임당은 훌륭한 자녀를 길러낸 뛰어난 학부모였다.

- 12 -

돌아오는 길에 잠시 들른 오죽헌은 그 규모부터 대궐같이 성역화 되어 있었다. 주차장에 세워진 관광버스와 승용차들이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한국의 변방인 강원도, 다시 그곳의 변방인 초당동 기념관에서 허균 ‧ 허난설헌의 추억이 안겨 주는 감회에 젖는다. 스물일곱 한 많은 생애를 마감한 난설헌 허초희, 그리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간 허균의 생애는 역사의 비극이며 아직도 청산되지 못한 우리 현실의 단면을 보여 주는 듯 하였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고 또 여행의 계절이라고 한다. 내가 쓴 기념관 현판을 인연으로 맺어진 허균 ‧ 허난설헌과의 만남은 마침 청명한 가을 날씨와 함께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안겨 준 ‘역사 여행’이었고 ‘가을의 성찰’이었다.

세상에는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이 두 종류의 사람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에 자기를 잘 맞추는 사람이고, 어리석은 사람은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이다. 세상을 자기에게 맞춘다는 의미가 세상을 인간적으로 바꾸려고 하는 것이라면 글자 그대로 어리석기 짝이 없다. 그러나 역설적인 것은 이처럼 우직한 사람들에 의해서 세상은 조금씩 새롭게 바뀌어 왔다는 사실이다.

허균과 허난설헌은 분명 어리석은 사람이며 비극적인 인물이다. 불의한 사회에 타협하지 않고 그것을 인간적인 것으로 바꾸려 했던 ‘시대와의 불화’가 비극의 진정한 원인이라 할 것이다. ‘광해군일기’가 기록하고 있는 패륜과 역모는 패배자가 뒤집어쓸 수밖에 없는 오명이기도 하지만 오히려 시대를 뛰어넘으려는 자유와 저항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허균과 허난설헌이 지금도 호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허균의 시비가 있는 애일당(愛日堂)으로 가는 길에 교뮨암(蛟門岩)을 찾았다. 교산(蛟山) 자락이 동해로 벋어 내리는 곳에 교문암이 있다. 교산과 고문암을 잇는 산자락이 해변 도로에 의해 잘려 있고, 백사장에는 교문암이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의 잘린 머리처럼 파도에 철썩이며 바다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허균의 삶을 재현하고 있는 듯하다.

허균의 시비가 있는 애일당은 인적이 끊어진 지 오래인 듯 그곳에 이르는

- 13 -

오솔길도 희미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애일당 옛터에는 오후의 가을 햇살이 눈부시게 고여 있어 그 이름을 방불케 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허균은 이 햇볕 속에서 어머니 몸에 태이고, 나고, 자랐던 것이다. 애일(愛日). 그가 사랑했던 것은 햇볕이었고 해방이었고 새로운 세상이었을 것이다. 허균의 아호 교산(蛟山, 蛟 교룡 교)과 애일당은 어쩌면 허균의 일생을 미리 보여준 상징이 아니었을까. 애일당을 뒤로 하고 내려오는 길에 나는 다시 한 번 초입에 서 있는 ‘홍길동’을 바라보았다. 홍길동은 ‘산불조심’ 팻말을 들고 있었다.

통한의 비련, 그 비극적 파토스

■ 박달재

2008년 벌써 4년 전의 일이다. 제천시 문화관광과로부터 부탁을 받고 ‘박달재’에 관한 글씨를 쓸 때였다. 글씨를 쓰기 전에 먼저 ‘울고 넘는 박달재’노래를 찾아 들어 보았던 기억이 있다. 노래의 정서를 조금이나마 글씨에 담을 수 있디 않을까 해서였다.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널리 알려진 한국인의 애창곡이다.

오늘 아침 박달재 현판을 보러 가기 전에 나는 다시 한 번 박달재 노래를 들어 보았다. 왕거미가 집을 짓고, 부엉이가 울고, 도토리묵을 싸고, 성황님께 비는 등 그 서사적 표현이 박달재의 애달픈 사연을 그림처럼 보여준다. 낮은 음에서 서서히 음계를 높여 가는 가락도 그렇다. 서서히 높아가던 음정이 절정에 이르면서 노래는 절규가 된다. 아픔의 절정에서 이성은 파탄되고 감정은 독립한다. 나는 노랫말 중에 가장 마음 아픈 대목이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비에 젖는 구나” 라는 구절이다. 물항라 저고리는 물들인 항라로 지은 저고리이다. 항라는 반투명에 가까운 얇은 옷감이어서 비에 젖은 물항라 저고리는 한사코 우는 금봉이를 더욱 애처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 울고 넘는 박달재 : 반야월 작사. 김교성 작곡. 1948년에 박재홍이 부름

이 노래가 애창되는 까닭이 그 속에 담긴 통한의 비련 때문임은 물론이다. 운명 같은 만남과 사랑 그리고 운명 같은 죽음이 그것이다. 아름다운 재회를 기약했건만 과거 시험에 낙방한 박달은 면목이 없어 돌아오지 못한다. 기다

- 14 -

리다 지친 금봉이는 벼랑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그리고 뒤늦게 돌아온 박달 역시 금봉이의 환영을 좇아 벼랑에서 떨어져 죽는다. 두 사람 중 어느 누구도 탓할 수 없는 순애보다. 이처럼 가슴 아픈 사연을 글씨에 담는다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가 아닐 수 없다. 나는 다만 정직하게 쓰려고 애썼던 기억만 남아 있을 뿐이다.

박달재는 제천시 봉양읍과 백운면을 잇는 해발 453미터의 고갯마루로 문경 새재와 함께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박달재 현판을 달고 있는 일주문은 봉양 쪽과 평동 쪽에 각각 하나씩 2개가 서 있다. 우리는 평동마을 쪽 일주문을 통하여 박달재를 올랐다. 고갯마루에는 동상이 된 박달과 금봉이가 다정하게 서 있고 ‘울고 넘는 박달재’의 애달픈 노랫소리가 인근 산천을 온통 점령하고 있었다. 마침 현장에 나와 있는 제천시 문화관광과의 해설원 두 분이 반갑게 맞아 주셨다. 이야기도 후하고 자상했다.

박달재의 역사적 의미는 이곳에서 김취려(金就礪) 장군이 거란의 대군을 물리쳤고 별초군(別抄軍)이 몽고군을 격퇴했을 뿐만 아니라 1천여 명의 동학군이 평동 마을에서 묵어가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곳은 사방이 험준한 산으로 에워싸인 방어와 항쟁의 요지여서 구한말 호서의병의 본산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지세가 암반이어서 사람들의 기질도 강하다고 한다.

그래서 제천 사람들은 1995년 창의(彰義) 100주년 때부터 제천문화제를 의병제(義兵祭)로 통일하여 진행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 두 분 해설원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금봉이의 이야기로 이끌고 갔다. 벼랑에 몸을 던지는 금봉이는 평동마을 처녀가 아니라는 버전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평동마을 처녀라면 한양으로 치고 올라갔으면 갔지 투신할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금봉이가 투신자살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은 실연의 아픔도 아픔이지만 아기를 잉태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춘향이가 몇 년이고 이 도령을 기다릴 수 있었던 것은 아기를 갖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조선조 중엽은 미혼모가 자신과 아기의 삶을 지켜가기에는 너무나 혹독한 사회였기 때문에 투신자살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러저러한 버전들은 어쩌면 오늘날의 세태를 촘촘히 엮어 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겠다며 서울 가신 오빠는 사실은

- 15 -

친오빠가 아니라는 버전도 그런 것이다.

생각하면 우리의 산천 곳곳에는 고개마다 수많은 별리(別離)의 전설이 있고 그런 전설은 하나같이 비극적 사연들로 점철되어 있다. 이를테면 비극미(悲劇美)가 서민들의 압도적 정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서민들의 삶을 정직하게 담고 있어야 전설이 될 수 있고, 또 세월을 건너서 전승될 수 있음은 물론이다. 그런 점에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춘향전’은 서민적 서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늘은 평일이기도 하지만 박달재를 찾는 사람이 거의 없어 한산하기 그지없다. 지금은 고갯마루 문화도 사라지고 주막 문화도 없어진 지 오래다. 더구나 터널이 뚫린 뒤로는 자동차로 박달재 밑의 땅속을 질주할 뿐 이곳에 오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직선과 속도라는 효율성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고갯마루의 곡선과 주막 문화의 유장함은 아득한 변방 문화의 정형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더 이상 박달과 금봉이는 존재하지 않는다. 곤혹스럽기도 하고 차라리 다행스럽기도 하다.

‘메달릴 줄 알았지?’ ‘역겨워, 착각하지 마!’ ‘집착 없이 사라져 줄게.’ 요즈음의 노랫말에 더 이상 비련(悲戀)은 없다. 한사코 우는 금봉이는 어디에도 없다. 사랑은 뜨겁지 않고 차가운 것이다. 더 멋진 사람 만나 너를 후회하게 만들어 주거나, 네가 망가지라고 빌고 빈다. 금봉이의 뜨거움(hot)도 곤혹스러운 것이지만 젊은 세대의 차가움(cool) 또한 섬뜩하기 짝이 없다. 물론 실연이 목숨을 걸 만한 것은 아니겠지만, 문제는 이처럼 차가운 언어가 오히려 반어(反語)처럼 들린다는 사실이다. ‘이태백’ ‘삼팔선’ ‘사오정’이라는 은어, 그리고 수백만의 비정규직으로 표현되는 오늘이 열악한 상황이 만들어 낸 불행한 언어인지도 모른다. 하루에 42명이 자살하는 우리의 참담한 현실에서도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차가운 감성으로 무장하고 있는 셈이다. 아픔과 좌절마저 단단한 껍질을 쓰고 있어야 할 정도로 우리의 현실은 정직한 정서 자체를 용납하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 16 -

탈근대의 독법으로 읽는 ‘임꺽정’

■ 벽초 홍명희 문학비와 생가

‘벽초 홍명희 문학비’는 1998년 홍명희(洪命熹 1888 - 1968) 사망 30주기 ‘임꺽정 연재 70주기를 기념한 제3회 홍명희 문학제 때 건립되었다. 그때는 글씨만 써 보내고 제막식에는 참석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번이 초행이었다. 찾기가 쉽지 않았다. 문학비는 주차장이 되어 있는 텅빈 제월대(霽月臺) 광장 가장자리에서 혼자 가을볕을 안고 있었다. 나는 미리 준비해 간 붓으로 글자에 먹을 넣기 시작했다. 비문은 먹빛이 바래고 빗물에 씻기어 읽기 어려울 정도였다. 취재팀 일행 세 사람도 작업에 동참했다. 작업이 거의 끝날 무렵에 문학비 건립 추진위원회의 운영위원이기도 한 도종환 시인이 당도했다.

“98년 비를 세울 땐 도지사와 군수도 참석하고 제월리 마을 사람들이 국밥 500인분을 끓이고 그릇을 내오기도 하는 등 문학비 건립은 지역민의 성원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벽초(碧初) 가문은 지금까지도 홍판서 댁으로 불리고 있을 정도로 마을 인심을 잃지 않았는데, 특히 벽초가 북으로 가면서 농지 17만 평을 소작인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하고 떠났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비를 세우고 난 다음다음해 보훈단체 회원들이 현충일 날 태극기와 망치를 들고 와서 문학비에 표기한 해설문을 문제 삼았다.

“세 군데 문제 제기를 했습니다. 하나는 ‘평생 민족을 위해’라는 구절에서 ‘평생’을 빼라. 그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선생’이란 말을 빼라. 문인들한테는 선생이지만 우리한텐 선생이 아니다. 그것도 좋습니다. 뺀다. 그다음에 ‘전범(戰犯)’이란 말을 넣으라고 했는데 그건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결국 두 곳을 고치고 동판을 다시 만들어 부착했습니다.”

벽초 홍명희는 이처럼 자유롭지 못하다. 그가 태어나고 3‧1 만세 시위를 준비했던 생가도 지금은 선친의 이름을 딴 ‘홍범식 고가’로 복원되어 있을 뿐 벽초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다. 경술국치를 당하여 자결한 선친의 뜻을 명심하고 항일운동에 투신한 이래 수차례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며 특히 신간회의 창립 주역으로 좌우의 민족역량을 집결했던 그의 업적은 높이 평가된다.

- 17 -

그러나 남북협상회의 때 월북하고 북에 남아 부수상까지 역임한 그의 이력이 항상 문제가 된다. 그러나 홍명희 연구자들은 그를 진보적 민족주의자, 또는 사회주의에 공명한 민족주의자로 평가한다. 뿐만아니라 겸손하고 부드러운 인품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일치한다.

벽초의 정치적 정체성과는 달리 소설 ‘임꺽정’에 이르면 이론의 여지가 없다. 문학비는 그에 관한 모든 포폄(褒貶)을 뛰어넘는 곳에 있다. 한마디로 ‘임꺽정’을 넘어선 대하역사소설이 아직 없다는 것이 문학계의 통설이다. 도종환 시인은 ‘임꺽정’은 반상의 두 세계를 넘나드는 벽초만의 스케일을 보여 줄 뿐 아니라 그 자체가 풍부한 우리말의 보고라는 점을 지적한다. 비문에 새겼듯이 한마디로 ‘조선 정조(情調)에 일관된 작품’이다. 등장인물의 다양함과 풍부한 어휘도 그렇지만 더욱 감동적인 것은 대하(大河)와 같은 서사 양식의 도도함과 그 속에 흐르는 파란만장한 삶의 실상들이 아닐까. 구술문학의 서사 양식이 그처럼 친근하게 말을 걸어온다는 사실은 감동이 아닐 수 없다.

‘임꺽정’은 1928년 조선일보에 처음 연재된 이후 몇 차례 중단되었다가 미완으로 끝난 작품이다. 최초의 대하소설이면서도 궁정비사를 중심으로 하던 당시의 소설과는 그 판을 달리했다. 더구나 그 주인공이 하층민이라는 사실은 충격이었다. 처음 연재되던 당시만 하더라도 동아일보에는 춘원 이광수의 단종애사가 연재되고 있었다.

‘임꺽정’은 단 한 번도 주인공이었던 적이 없는 천민을 소설의 ‘중앙’에 앉혀 놓은 작품이었다.

임꺽정이 사회적 약자이고 또 그 동무들인 일곱 두령들이 가렴주구와 포악한 지배 권력에 저항하는 무리이기는 하다. ‘명종실록’에도 반적(叛敵)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러한 계급의식은 이러저러한 충돌 지점에서 짧게 돌출할 뿐 사회 변혁 의식으로 발전하거나 일관되고 있지는 않다. 당시의 미성숙한 민중의식의 현주소이기도 할 것이다.

‘임꺽정’의 탁월함은 그러한 계급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구속하는 일체의 사회적 문맥 자체를 시원하게 뛰어넘는 곳에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임꺽정’에는 주의해야 할 함정이 없지 않다. 임꺽정은 결코 강자가

- 18 -

아니라는 사실이다. 임꺽정은 비범한 무예와 담력을 지닌 ‘강자’의 초상으로 우리들에게 남아 있다. 더구나 소설 ‘임꺽정이 미완으로 끝나기 때문에 임꺽정은 계속 살아 있다. 그러나 그는 실상 약자이다. 기름진 들판에 살기에는 너무나 연약한 백정의 자식이었을 뿐이다.

실제의 임꺽정 역시 관군의 토벌에 쫓기다 무수한 화살을 맞고 체포되어 처형당한 비극의 주인공이다. 그곳이 청석골이라는 험처라고 하더라도 그곳은 어쨌든 평지가 아닌 산골짝이고, 변방이고, 사회적 약자들의 피신처이다. 그래서 어느 시인은 “기다리는 사람은 모두 산으로 갔다”고 노래하였다.

‘임꺽정’에서 만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 유전과 시절 인연은 그것이 무용담이기보다는 그들이 얼마나 연약하고 가여운 삶의 주인공인가를 눈물겹도록 보여준다. 더구나 나는 ‘임꺽정’에서 나의 겨울 감방을 추억한다. 일곱 두령들의 파란만장한 삶의 이력을 읽으면서 춥고 긴 겨울밤 눈물겹게 해후 했던 감방 동료들의 기막힌 인생 유전들을 추억하기 때문이다. 나는 종종 교도소는 ‘산’이라고 대답한다. 쫓기는 사람들이 내일을 기다리는 곳이다. 산적에서부터 화전민, 천주학쟁이, 동학꾼…… 그리고 오늘날은 도시의 거대한 원심력에 밀려난 사람들이 주말마다 산을 찾고 있다.

그런 점에서 산은 변방의 전형이다. 그러나 산에는 꽃이 있다. ‘산유화(山有花)가 그것이다. 그렇다 산은 꽃이 있는 변방이며, 변방은 기존의 관념에 얽메이지 않는 자유와 창조의 공간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쓴 다음에 도종환 시인에게 메일을 보냈다. 자상한 설명에 감사드리고 , 11월 5일로 예정된 제16회 벽초 문학제를 아름답게 마무리하도록 기원했다. 문학제 즈음에 비가 와서 혹시 비문에 넣은 먹이 번질 수 있지만 비누 묻힌 천으로 비면을 닦으면 곱게 지울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언젠가는 다른 방법을 강구해서 바래거나 씻기지 않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전했다.

- 19 -

지혜, 시대와의 불화

■ 오대산 상원사

오대산 상원사(上院寺) 문수전(文殊殿) 현판은 월정사(月精寺) 주지인 정념 스님의 부탁으로 썼다. 벌써 10여 년 전의 일이다. 당시는 정념스님이 상원사 주지로 계실 때였는데, 상원사가 화재를 입고 나서 법당과 선원을 분리해 지으면서 현판을 다시 달아야 했다. 상원사 입구의 표석 글씨도 그때 함께 쓴 것이다.

문수보살은 지혜의 보살이다. 불자가 아닌 나로서는 ‘지혜’의 의미를 현판에 어떻게 담아야 할지 난감했다. 달포 이상 장고했다고 기억된다.

월정사에는 그 후 두 번 들른 적이 있지만 여러 해 만의 방문인 셈이다. 오대산은 이번 가을 유난히 잦았던 돌풍 때문에 이미 단풍이 많이 졌다고 했다. 우리는 월정사에서 정념스님과 혜원스님의 안내로 먼저 상원사 입구에 서 있는 표석을 찾았다. 표석은 참으로 아름다운 자연석이다. 키가 3m가 훨씬 넘고 너비도 두께도 황금 비율을 이루고 있다. 오랜 세월 계곡에 반쯤 묻힌 채 누워서 일어서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돌이라고 했다. 표석에는 ‘오대산 상원사’, ‘적멸보궁’ 그리고 ‘문수성지’ 세 글귀를 써야 했는데 글씨 배치가 쉽지 않았다. 역시 장고 끝에 오대산 상원사를 세로글씨로 쓰고 그 밑에 적멸보궁과 문수성지를 낙관처럼 놓았다. 낙관은 원래 인주로 하는 것이어서 주문(朱文)이 되어야 하지만 정념스님은 벽사(辟邪)의 색인 금색으로 입혀 청정 도량의 의미를 돋보이게 했다.

표석 글씨에 관한 이야기를 잠시 나눈 다음 곧이어 상원사로 올라갔다. 문수전 앞마당에 오르자 관연 명당의 기가 느껴진다. 오대산 다섯 봉우리에 에워싸여 있으면서도 겹겹의 원근 능선이 수묵화처럼 펼쳐진다. 스님들이 선호하는 안거(安居) 1순위 사찰이 바로 상원사이다. 한 시간을 덜 자더라도 정신이 맑을 뿐 아니라 안개와 바람까지 잦아든다고 했다. 글자 그대로 깨달음의 성지이고 지혜의 전당이다.

피부병으로 고생하던 세조가 상원사 계곡에서 몸을 씻고 있을 때 문수보살

- 20 -

이 어린 동자로 현신하여 세조의 몸을 씻어 주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지만 오대산의 1만 문수보살은 지금도 이곳을 찾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씻어 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문수전에는 여느 법당과 달리 부처님 대신 문수동자와 문수보살을 나란히 주존으로 모시고 있다. 한 몸이 둘로 나뉘어 있는 셈이다. 정념스님은 한 몸을 둘로 나누어 모시고 있는 것이 바로 인(因)과 과(果)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연기법이라고 했다. 그리고 문수동자상은 ‘석굴암 본존불’, ‘금동미륵보살 반가사유상’과 함께 우리나라 불교 예술의 3대 걸작 중 하나라고 했다. 단아한 이목구비와 비소 그리고 유려한 수인(手印)에 이르기까지 과연 빼어난 예술적 경지를 보여 주고 있다.

범종은 중생의 어리석은 마음을 부처님 품으로 이끌어 주고 듣는 이의 마음을 맑게 한다고 한다. 그것이 곧 깨달음이고 지혜이기도 할 것이다.

정념스님은 혜원스님을 시켜 열쇠를 가져오게 하여 종메를 풀었다. 종메는 고래(鯨)요. 종은 용뉴(龍紐)에 틀고 앉아 있듯이 용(龍)이다. 용과 고래의 한판 승부가 바로 타종이라는 것이다. 나는 생전 처음 타종의 경험을 하게 된다. 종소리는 과연 정념스님의 설명처럼 용과 고래의 충돌이었다. 엄청난 충격이 전신을 강타했다. 단정하고 겸손한 모습과 달리 종소리는 높은 파도가 되어 온몸을 덮쳤다. 깨달음이란 우선 이처럼 자신이 깨뜨려지는 충격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옳다. 종소리는 나를 깨뜨리고 멀리 오대산 정체를 품에 안았다. 나는 나를 남겨 두고 종소리를 따라가고 있었다. 오대산 1만 문수보살의 조용한 기림(起立)이 감은 눈에 보이는 듯하다. 종소리는 긴 여운을 이끌고 가다가 이윽고 정적(靜寂)이다. 소리가 없는 것을 정(靜)이라 하고 움직임이 없는 것을 적(寂)이라 한다. 1만 문수보살은 다시 산천으로 돌아가고 세상은 적멸이다.

‘소리의 뼈는 침묵이다’는 시구를 남기고 요절한 시인의 죽음이 생각났다. 지혜의 끝 역시 참묵이 아닐까. 그러나 내가 따라가 본 종소리의 끝은 침묵이 아니었다. 그것이 침묵이고 고요이고 적멸이긴 하지만 그곳에서는 감동의 ‘장(場)’이 펼쳐지고 있었다. 문수보살이 보현보살을 만나고 다시 비로자나불을 만나고 삼라만상을 만나고 이승과 저승이 만나는 거대한 만남의 ‘장’이

- 21 -

전개되고 있었다. 타종은 협소한 주아(主我)를 끊는 탈주(脫走)이면서 동시에 더 큰 것과 만나는 접속(接續)이었다. 탈접동시라고 했던가.

몇 년 전의 일이다. 한밤중에 전화가 울려 왔다. 한밤의 전화는 예사로운 것이 아니다. 깜짝 놀라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놀랍게도 편안한 목소리가 나를 맞았다. “선생님 달 보냈습니다. 받으세요.” 그 한마디만 남기고 전화는 끊어졌다. 월정사의 현기스님이었다. 아파트 베란다에 나갔더니 과연 중천에 보름달이 와 있었다. 현기스님이 보낸 달이었다. 소유란 무엇인가? 달(月)의 정(精)이란 자기가 깨닫는 것만큼 가질 수 있을 뿐이다. 자기가 변화한 것만큼 몸으로 가지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현판 글씨의 인연으로 다시 찾은 상원사의 가을은 내게 참 많은 생각을 안겨 주었다. 내려오는 길에 우리는 사진 기자의 요구로 섶다리 건너 오솔길로 들어섰다. 월정사에서 상원사에 이르는 9km의 숲속 길이다. 정념스님은 이 좁은 오솔길이 ‘지혜의 길’이 될 것이라고 했다. 월정(月精)에서 문수(文殊)에 이르는 길, 달의 정기를 만나고 문수보살을 찾는 마음이 곧 지혜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지혜의 길에서 내내 울적한 심사를 달래지 못한다. 범종 소리가 깨우쳐 준 묵언의 지혜가 서울의 정보 홍수 속에서 과연 어떤 정처(定處)를 얻을 수 있을까. 더 많은 생산, 더 많은 소비를 갈구하는 욕망과 소유의 고해에서 무소유의 설법이 어떤 여운으로 사람들의 가슴에 남을 것인가 산사의 가을에서 만나는 생각이 부질없고 쓸쓸하기가 이와 같았다. 마치 인적 없는 변방의 그것이었다. 그러나 또 한편 생각하면, 진정한 깨달음이란 근본에 있어서 시대와의 불화(不和)이어야 하리라. 사건과 같은 충격 그리고 충격 이후에 비로소 돌출하는 후사건(後事件)이 깨달음의 본 모습이 아닐까.

우리가 반성해야 하는 것은 깨달음마저도 소유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 아닐까. 끊임없는 불화와 긴장 그 자체가 지혜인지도 모른다. 용과 고래의 한판 쟁투가 우리 시대가 치열하게 고민해야 하는 지혜의 현실적 모습인지도 모른다.

- 22 -

역사의 꽃이 된 죽음 앞에서

■ 전주 이세종 열사 추모비, 김개남 장군 추모비

전주는 20년 수형 생활의 마지막 3년을 보내고 출소한 곳이다. 그래서 지금도 전주는 내게 커다란 햇볕이다. 신문지만 한 햇볕 한 장 무릎에 얹고 마냥 행복해하던 겨울 옥방의 그것에 비하면 8월의 뜨거운 햇볕은 환희였고 생명이었다. 그리고 전주교도소에는 또 하나의 추억이 있다 노래 ‘떠나가는 배’가 그것이다. 출소 일주일 전쯤 우리는 신입자로부터 이 노래를 배우게 된다. 그러다가 석방 이틀 전 가족 접견 때 은밀한 출소 소식을 듣는다. 우리 감방에서 내가 가장 오래 복역했지만 차마 출소 사실을 입 밖에 내지 못한 채 함께 노래를 불렀다. “언제 다시 오마는 허튼 맹세도 없이 봄날 꿈같이 따사로운 저 평화의 땅을 찾아…….” 내개 전주는 햇볕과 평화의 땅이었다.

그러나 오늘 전주행은 마음이 무겁다 두 개의 추모비를 찾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하나는 전북대학교 학생회관 옆의 이세종(1959 - 1980) 열사 추모비이고, 또 하나는 덕진공원의 김개남(金開南 1853 - 1895) 장군 추모비이다. 이세종 열사는 1980년 5 ‧ 18광주항쟁의 최초 희생자이고, 김개남은 전봉준, 손화중과 함께 갑오농민 혁명의 지도자이다. 이 두 개의 비는 모두 비극적 죽음을 증거하는 추모비이다. 이세종 열사는 1980년 5월 18일 새벽 1시 전북대학교 교정으로 진입한 계엄군에게 쫓겨 학생관 옥상에서 집단구타를 당하고 의문의 추락사를 하게 된다. 그리고 김개남 장군은 갑오농민전쟁의 참담한 패전과 함께 1895년 1월 8일 전주감영 마당에서 ‘횃불 아래 반역의 부릅뜬 눈으로 목 베여’ 육시를 당한다.

오늘 햇볕과 평화의 땅에서 추모비를 마주하는 마음이 당혹스럽다. 더구나 이세종 열사의 추모비는 거기 새겨진 비문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다시 살아 하늘을 보고 싶다.”김성숙 선생은 학우였던 이세종의 마음이 되어 이 비문을 만들었다고 했다. 나는 이세종 열사 대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침 너무나 푸른 가을 하늘이 차라리 슬픔이었다. 오늘 추모비 앞에 모인 당시의

- 23 -

학우들도 같은 표정이었다. 30년이 지나 아픔이 한결 가셨을 법도 하건만, 반가운 인사마저 서로 조심스러워 하고 있었다. 단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을 면할 수 없었던 세월이었다.

김개남 장군의 추모비가 있는 덕진공원은 전북대학교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다. 자연석 추모비는 이끼가 돋고 비바람에 바래어 글씨가 얼른 눈에 띄지도 않았다.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라는 비문에서 역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이 글귀는 당시 “새야 새야 파랑새야”와 함께 불리었던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 수천 군사 어디 두고 짚둥우리가 웬말이냐”라는 노래의 1절이다 비문의 글씨도 식별이 어려울 정도였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에는 김개남이 김개주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글씨를 부탁한 ‘신택리지’의 저자인 향토문화연구회 신정일 선생이 원주의 박경리 선생과 전화 통화를 통해 확인한 이야기는 이렇다.

박경리 선생은 통영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김개남 장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으며 자랐고 그래서 ‘토지’에 그 양반을 썼다는 이야기. 김개남 장군은 세계적 혁명가이며 후배 작가들에게 작품화를 권고하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광철 전 국회의원은 김개남 장군이 동학농민전쟁의 탁월한 지도자임에 틀림없지만 그에 대해서는 부정적 평가도 없지 않다는 것을 지적했다. 승패의 분수령이 된 우금치 전투에 합류하지 않고 후방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전봉준(全琫準 1855 - 1895) 장군이 우금치에서 수십 차례의 공방을 거듭하며 혈전을 치르고 있는 동안 김개남 장군은 전주에서 포병 8천 명을 거느리고 금산, 청주를 거쳐 서울로 진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전력을 집중하지 못한 것이 참담한 패배로 이어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 전봉준과 김개남의 현실 인식에 있어서의 차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봉준이 일본의 침략에 대응하여 반봉건 투쟁을 일단 유보하고 항일 반제 투쟁에 주력하는 이를테면 주요 모순 우선 노선임에 비하여, 김개남은 어디까지나 계급 모순을 중심에 두는 기본 모순 우선 노선이다. 그래서 이름도 개남(開南)으로 바꾸어 남쪽에 새로운 나라를 연다는 뜻을 담았다. 남원부사를 비롯하여 순천부사, 고부군수 등을 차례로 처단하는 등 그의 비타협적 의지는 전봉준의 근왕주의적(勤王主義的 태도와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그것 역시 부정적 평가의 근거가 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패전 이후 최후까지

- 24 -

끈질기게 항쟁의 맥을 이어간 부대가 바로 김개남 포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다. 비록 패배로 막을 내리긴 했지만 갑오농민혁명은 그 후 의병전쟁. 3‧1 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 4‧19 혁명 등 역사의 도도한 흐름으로 이어진다.

햇볕 속으로 걸어 나온 전주에서 오늘 10분 거리에 있는 두 개의 추모비와 100년 간격의 역사를 동시에 만나면서 다시 한 번 삶과 역사의 엄청난 인연에 숙연해진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강물의 표면에 투영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심히 흘려보내고 있는 수많은 사연들에 생각이 미치면 우리들 자신이 마치 강물에 떠내려가는 한 잎 낙엽이 된다. 생각하면 우리의 삶이란 인연이면서 우연이고 우연이면서 또한 필연인지도 모른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엮는 사람들과의 인연이 그렇거든 하물며 역사의 인연이야 오죽하랴. 거대한 산맥이 서로 밀고 당기듯 그 우람한 역사의 인연은 운명이라고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추모비에 새겨진 글귀는 수많은 사람들의 아우성이 되어 햇볕처럼 가을 하늘에 울려 퍼진다.

“다시 살아 하늘을 보고 싶다.”

“개남아 개남아 김개남아.”

민초들의 애환 700리 한강수

■ 서울특별시 시장실의 ‘서울’

1994년은 조선조 태조가 수도를 개성에서 서울로 옮긴 지 600년이 되는 해이다. 예술의 전당에서는 서울 정도(定都) 600년을 기념하는 서예전이 기획되었고 나는 주최 측으로부터 출품 요청을 받았다. 서울을 주제로 한 작품을 출품해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물론 서예가가 아니고 또 저명인사도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사양하였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출품과 관계없이 나 혼자서 서울을 주제로 한다면 어떤 작품을 만들 수 있을까 고민을 하게된다. 당시 서예전을 기획하고 추진했던 이동국 차장의 청탁이 간곡하기도 했다.

- 25 -

생각하면 서울은 참으로 아름다운 풍수지리를 갖추고 있고 그 위에 600년 역사가 켜켜이 누적된 땅이다. 서울의 600년 역사를 돌이켜 보면 더욱 감개가 깊다. 다시 한 번 땅과 역사를 돌이켜 보게 된다. 북한산에 오르면 서울의 경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너무 많은 건물들이 들어차서 산수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상보다는 땅이 꺼지지 않을까 걱정이 앞서지만, 북악을 주산(主山)으로 하고 낙산과 인왕산을 좌청룡 우백호로 거느리고 있는 지세는 단연 명당의 전범(典範)이다. 그 한가운데를 청계천이 명당수(明堂水)로 흐르고, 명당수 건너 안산(案山)으로 남산을 놓고, 그 너머 객수(客水)인 한강이 명당수와는 반대 방향으로 흐른다. 멀리 남천(南天)에는 객산(客山)인 관악산이 반공(半空)을 가르고 있다.

천시(天時), 지리(地利), 인화(人和)를 삼재(三才)라 하지만 그중에서 인간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지리이다. 땅이 곧 삶의 터전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구속력이 컸던 옛날에는 더욱 그랬다. 서울을 주제로 한다면 단연 산천을 중심으로 삼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서울의 산천이라면 역시 북악과 한강이었다. 나로서는 출품 약속을 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부담감이 없었다. 나는 아예 ‘서울’이라는 글자를 북악과 한강으로 형상화하기로 하고 시필(試筆)하였다

여러 차례 실패를 거듭한 끝에 ‘서’자를 산처럼, 그리고 ‘울’자를 강물처럼 나름대로 형상화하였다. 그리고 시 한 구절을 지어 방서(傍書)하였다.

“북악무심오천년(北岳無心五千年) 한수유정칠백리(漢水有情七百里)”가 그것이다. 북악산은 오천 년을 무심하지만 한강수는 700리 유정하구나. 작품과 함께 주최 측에 제출한 작품 해설에는 “북악은 왕조를 상징하고, 한수는 민초를 상징한다. 북악은 오천 년 동안 백성들의 고통에 무심하였지만 한수는 민초들의 애환을 싣고 700리 유정하게 흐르고 있다.” 라고 썼다. 산천에 더하여 천시(天時)와 인화(人和)의 역사를 담은 셈이다.

생각하면 600년 서울의 역사는 참으로 파란만장하다. 북악산 성곽 길을 따라 걸어가면 경복궁을 비롯한 왕궁들이 아래로 굽어보인다. 북악의 품에 안긴 왕궁은 화려한 문물의 전당이면서 동시에 권좌를 에워싼 권력 투쟁의 장이다. 정변과 사화가 끊이지 않았고, 숱한 사람들이 형틀에 묶여 국문을 당

- 26 -

하고 뒤주 속에서 세자가 죽어가기도 한 역사의 현장이다. 그리고 눈을 들어 조금 더 멀리 바라보면 한강이 보인다. 북악의 비정한 덩치와는 상관없이 고단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민초들의 애환이 상물처럼 흐른다.

백성들은 마치 한강이 서울을 안고 흘러가듯이 나라를 걱정하며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 눈물겨운 삶을 이어오기도 했다.

서예의 법을 한마디로 표현하는 ‘서여야(書如也)’란 금언이 있다. 무릇 글씨는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같다’는 것은 물론 글씨의 형식과 내용이 같아야 한다는 뜻이지만, 그러한 형식과 내용의 조화뿐만 아니라 서예란 다른 모든 예술과 마찬가지로 그 시대의 고민을 담아야 하고 그 글씨를 쓴 사람이 그 속에 담겨야 한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옳다. ‘서울’이라는 작품이 물론 그러한 법을 충실하게 체현하고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기호에 불과한 ‘서’와 ‘울’을 산과 강으로 형상화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디자인을 전공하는 지인들이 일정하게 평가해 준다. 그 외에도 서울을 관악과 한강으로 추상화했다는 점, 북악과 한강을 다시 완조 권력과 민초의 애환으로 대비함으로써 조선조 역사의 일단을 담았다는 사실. 그리고 그러한 역사가 오늘의 정치 현실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리라 믿는다.

초대 민선 시장인 조순 전 시장 취임 초였다. 북한산 산행에 동참한 적이 있다. 뜻밖에 조순 전 시장으로부터 이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특히 시장 취임 이후에는 방명록에 이 방서의 시구를 쓰기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서 이 작품을 서울시에 기증하기로 약속했다. 그 글씨가 있을 곳이 서울 시청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후 이 ‘서울’ 작품은 계속 시장실에 걸려 있으면서 벌써 여러분의 시장을 맞이하고 보내고 있다.

북악이 권력의 상징이라면 멀리 낮은 곳으로 흐르는 한강이야말로 우리가 회복해야 할 소통과 화해의 상징이다. 나는 서울시청이 북악이기보다는 한강수이기를 바란다. 민초들의 애환과 함께 유정하게 흘러가는 700리 도도한 강물이기를 바란다. 우리 시대가 잃고 있는 공감과 소통의 다정한 공간이기를 바란다.

산수는 대우(大友)라고 한다. 산과 물은 오래된 친구라는 뜻이다. 물이 없이

- 27 -

어떻게 산이 수목을 키울 수 있으며 산이 없이 어찌 물이 흐를 수 있으랴. 북악과 한강이 서로 환포(環抱)하듯이 서로가 서로를 감싸고 어루만져야 진정한 벗이 될 수 있는 법이다.

- 끝 -

2012. 6. 30 모처럼 비오는 날

- 28 -

반응형

'독서후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음을 비우면 얻어지는 것들   (0) 2012.07.31
마음을 비우면 얻어지는 것들  (0) 2012.07.31
탄허록(呑虛錄), 2  (0) 2012.06.25
탄 허 록  (0) 2012.06.16
책은 도끼다(2)  (0) 2012.0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