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8. 12. 09:43ㆍ독서후기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
■ 이근후 지음
0 이화여대 명예교수
0 이화여대 교수이자 정신과 전문의로 50년간 환자를 돌보고 학생을 가르침
0 1950년대 고등학교 시절 부 사망으로 어렵게 공부
4‧19, 5‧16 시위로 감옥 생활
0 76세의 나이에 고려 사이버대학 문화학과 수석 졸업
0 30년 넘게 네팔 의료봉사, 40년 넘게 광명 보육원 지원
0 10년 전 왼쪽 시력 상실, 당뇨, 고혈압, 통풍, 허리디스크 등 7가지 병과 함께 생활
0 퇴임 후 아내와 함께 사단법인 가족 아카데미아를 설립하여 청소년 성 상 담, 부모교육, 노년을 위한 생애준비 교육 등의 활동
0 결혼한 자녀 부부와, 네 명의 손자 손녀 까지 3대 13명의 대가족 생활에 서 화목함의 비결은 딱 하나 “스스로 행복하기 위해 거절하는 법부터 실 천” 즉 상호 불간섭주의와 독립성 보장
■ 김선경 엮음
0 경제학 전공
0 출판계 입문 : 좋은 생각, 좋은 친구, 행복한 동행, 문학사상 등 월간지와 단행본 출판 참여.
0 저서 : 서른 살엔 미처 몰랐던 것들
■ Prologue - 당신은 어떻게 나이 들고 싶은가
물의 깊이는 알 수 있으나 사람 속마음은 헤아리기 어렵다는 말이 있다. 정신과 의사는 그 사람 속을 들여다보는 직업이다. 사람들은 50년 정신과 의사로 살아온 내가 사람 속을 훤히 꿰뚫어 보고 삶의 지혜를 통달한 줄 안다. 게다가 나이 들면서 적당한 주름과 은빛 머리칼까지 갖추니 원숙해 보이는 나의 풍모가 그런 오해를 더하는 듯하다
인생을 잘사는 비결 하나쯤 기대하고 질문을 던진 이들은 아마도 나의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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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이 싱겁기조차 할 것이다. 가령 어떤 이들은 “요즘 하루를 어떻게 여십니까?” 라고 묻는데, 뻔한 하루를 특별하게 시작하는 방법을 알려 달라는 속셈이다. 나는 대답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텔레비전을 켭니다. 이불 속에 서 좀 더 자볼까 싶고 또 오늘 할 일에 대한 부담이 떠올라 눈을 뜨기 싫지만 뉴스를 들으며 차츰 잠에서 깨어납니다. 출근 준비를 하다보면 어느새 무거웠던 마음은 ‘하루가 시작되었구나’ 하는 감사와 다행감으로 가벼워지지요.”
여든을 바라보는 나도 여전히 인생의 이런저런 불안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그럼에도 습관적인 하루에 지치지 않으려 애쓴다는 것, 나로서는 솔직한 고백이다. 나이 듦에 대한 물음도 비슷하다. “나이 들면 뭐가 좋은가요?” 하고 묻지만 나는 “나이 들면 뭐가 좋겠습니까? 좋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라고 답한다. 그러나 나의 답은 계속된다.
“나이 든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좋은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오는 것이기 때문에 이 또한 받아들여야 할 생의 궤적입니다. 나이 들어 좋은 점이라기보다 나이 들면서 좋은 일 즐거운 일을 만들어 가겠다는 마음가짐이 훨씬 중요하지요.”
정신과 의사로 은퇴한 뒤 나에게 감투를 주려는 단체들이 몇 군데 있었지만 모두 거절했다. 나이 들어 좋은 점은 딱 하나, 더 이상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다는 점이다. 자존심을 세워주는 그럴 듯한 자리라도 나는 명예보다 즐거움, 책임보다는 재미를 택하면서 살기로 했다.
생각해 보면 젊은 날의 나는 무엇이든 재미를 택하려고 애썼다. 재미있는 일만 골라 한 것이 아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을 재미있는 쪽으로 만들어 갔다.
정신과 폐쇄 병동을 개방 병동으로 바꾸고, 환자들이 속마음을 털어내는 사이코드라마를 시도하고, 정신이 아플 뿐 몸은 건강한 환자들을 위해 체력 단련실을 만들었다. 일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나는 신이 났고 즐거웠다. 한마디로 ‘재미있게 견디기’다. 그래서 나는 50여 년의 정신과 의사 생활에서 지치지 않을 수 있었다. 러셀은 말했다. “재미의 세계가 넓으면 넓을수록 행복의 기회가 많아지며 운명의 지배를 덜 당하게 된다” 고.
그런 재미를 추구한 덕분에 노년이 된 지금, 나는 심심하지 않게 잘 살고 있다. 요즘 가장 재미있는 일을 꼽으라면 컴퓨터를 가지고 노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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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집에서 한 시간 떨어진 북악스카이웨이 천천히 걸어서 다녀오기, 30년 동안 의료 봉사를 해 온 네팔 1년에 한 번 방문하기, 한 달에 한 번 시 낭송 모임, 40년 동안 봉사해 온 보육원에 들러 아이들과 놀아주기, 주말마다 네 자녀 가족과 돌아가며 식사하기, 보고 싶은 사람 불쑥 방문하기 등, 지금도 재미있는 일들이 많다.
우리는 평생 시험, 취업, 결혼 준비 등 많은 준비를 하지만 정작 나이 듦의 준비는 소홀하다. 나이 드는 것도 반드시 ‘선행 학습’이 필요하다. 아무리 준비해도 막상 닥치면 당황하고 실수하기 마련인데, 나이 든 후에 시작한다면 너무 늦다.
그동안 나는 정신과 의사로서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왔다. 정신 질환을 앓는 이들은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공통점이 있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끝없이 들어 주며 내가 말할 수 있는 기회를 기다렸다. 그들이 내 말을 듣기 시작하면 치료의 문은 조금씩 열리는 것이다. 늘 그렇게 많은 사람의 말을 들어온 내가 이제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게 되었다. 특별할 것 없는 보통 할아버지가 살아온 이야기지만, 사람들에게 내어 놓을 수 있는 이야기가 있으니 한편으로는 지난 내 삶에 대한 아쉬움을 조금 덜어 내는 기분이다. 나의 이야기가 인생 선행 학습의 작은 치료로 활용되어 ‘나는 어떤 모습으로 나이 들어갈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작은 불씨가 된다면 아주 기쁠 것이다.
2013년 2월의 이침에 이근후
Chapter 1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재미없는 나이가 어디 있으랴. 인생은 어느 시기건 그에 알맞은, 그때만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그것을 충분히 느끼며 산다면 성공한 인생이다.
■ 뭐가 그리 억울한가
아침이면 태양을 볼 수 있고 / 저녁이면 별을 볼 수 있는 / 나는 행복합니다. / 잠이 들면 다음날 아침 깨어날 수 있는 나는 행복합니다.(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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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과 슬픔과 사랑을 느낄 수 있고 / 남의 아픔을 같이 아파해 줄 수 있는 가슴을 가진 나는 행복합니다.
- 김수환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 중에서
“나이 들어 보세요. 재미있어요.”
백발의 노신사가 젊은이에게 한 말이다. 젊을 때는 나이 드는 것이 싫고 노인의 부정적인 모습만 떠올리지만, 실제 나이 들어보니 재미있다는 말이다. 그렇다. 태어나서죽을 때까지 삶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재미없는 나이가 어디 있으랴 물론 스무 살의 즐거움과 마흔, 쉰 살이 되었을 때 느끼는 삶의 즐거움은 전혀 다르다. 그러나 달라서 더 특별하고 가치가 있다. 그걸 모르고 현재 나의 상태를 다른 시기와 비교한다면 우리는 일생토록 후회하고 억울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지금을 살면서도 한 번도 제대로 살지 못하는 슬픈 삶이다. 인생은 어느 시기건 그에 알맞은, 그때만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그것을 충분히 느끼며 산다면 성공한 인생이다.
중년 이후를 ‘바로 본다’는 것은 나이 들어 좋아지는 것과 나빠지는 것을 구별하고 이해하는 데 있다. 나이가 들면 분명 나빠지는 것들이 있다. 가장 확실하게 나쁜 것은 바로 육체의 노화다. 사실 나이 들면 건강이 나빠질 일만 남았지 거꾸로 좋아지지 않는다. 이는 누구나 알지만 스스로에게 적용하기란 쉽지 않다. 입으로는 받아들이면서도, 마음 한쪽에서는 그래도 나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에 계속 붙들려 있으면 억울함과 애석함만 커질 뿐이다. 노화, 즉 몸의 변화에 맞서는 가장 좋은 방법은 순응이다. 탤런트 김혜자 씨가 이런 말을 했다.
“(나이가 들어) 불편한 것은 돋보기를 꺼내야 하니 책 보는 게 거추장스럽죠. 하나님은 다 좋은데 늙어서 눈은 나쁘게 하지 말지, 그걸 왜 그랬을까 곰곰 생각해본 적이 있어요. 나이 먹어서 책을 보면 많이 알게 되고 그러면 앞에 나서게 되니, 그냥 뒤에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눈을 나쁘게 했나 보다라고요.”
김혜자 씨의 부드러운 미소와 딱 맞아 떨어지는 생각이다. 이런 자세라면 나빠지는 청력과 시력에 별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보청기를 끼고 돋보기를 쓸 것이다. 보청기와 돋보기는 보통 거추장스러운 게 아니다. 오히려 젊어서 듣지 못했던 소리, 보지 못했던 세세한 것까지 보도록 노력하게 만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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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운 물건이다. 또 하나 나이 듦이 두려운 이유가 기억력이 떨어지는 뇌력 저하다. 흔히 기억 상실, 건망증 등으로 불리는 현상들.....
그런데 온갖 것들을 수십 년 동안 뇌 속에 쌓아, 용량이 꽉 차 과부하에 걸린 상태에서 이젠 나의 뇌가 알아서 자동으로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지우고 입력시키지 않을 뿐이라고 생각하면 편해진다. 생각이 느려지고 행동이 둔해지는 것도 당연하다.
한창 때의 젊은이처럼 행동하지 않는다면 이 또한 나이 듦의 미덕이다. 생각해보라. 나이 들면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 적어지고 나를 찾는 사람도 줄어드니 바삐 서두를 것은 없지 않은가. 무슨 일이든 천천히 해도 혼낼 사람이 없으므로 마음 푹 놓고 하면 된다. 사실 나이 들면서 가장 넉넉해지는 재산은 시간이다.
나이가 들면 좋은 점은 생활이 단순해진다는 것이다. 책임도 의무도 줄어든다. 시간이 늘어나고 인내심이 많아지고 감정이 섬세해진다. 평소에 바쁘다는 핑계로 하지 못했던 일들을 불어난 시간에 하나씩 해 보는 재미를 누리는 것도 좋다. 여행을 하고 글을 쓰거나 악기를 배워도 좋으리라. 더디 진도가 나가도 누가 뭐라 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새로운 시작을 칭찬해 주리라. 나이가 들면서 긴 시간이 드는 일을 찾아 제대로 시작해 보라. 잘 안 되도, 서툴러도 시간이 넉넉하므로 ‘내 자신’을 기다려 줄 수 있다.
요즘 나는 매일 아침 잠자리에서 눈을 뜰 때마다 신기하다. 주위에는 밤에 자다가 세상을 떠난 동창이나 선후배가 많다. 나 또한 내일이 반드시 예약되어 있지 않다. 그래서 아침에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와! 눈을 떴구나! 하하하’하고 쾌재가 터져 나온다. 그 순간의 찰나적인 신비감이라니!
한 살 한 살 나이가 들어간다고 억울해 하지마라. 제대로 살지도 못했는데 벌써 이렇게 나이 들었다고 후회하지 마라. 누기 뭐래도 우리는 할 수 있는 만큼 살았고 일했고 즐겼다. 지금 내 나이에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을 찾아내는 것이 더 급하다. 내가 쓸 수 있는 인생의 시간은 지금 이 순간에도 줄어들고 있다.
■ 죽음의 위기를 몇 차례 넘기며 깨달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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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적이라는 말을 믿습니다. 그 기적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며 간절히 원하고 기도하는 자에게만 허락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겸허해야 하며, 절대 욕심부리지 말아야 하며, 더러는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 엄홍길. ‘괜찮아, 살아 있으니까’
‘세상에서 가장 힘들면서도 아름다운 말, 도전’ 중에서
사춘기 시절 내 키는 이미 170센티미터를 넘어섰다. 그러나 키만 컸지 한여름에도 소매가 긴 옷을 입고 다닐 만큼 병약했다. 제대로 할 줄 아는 운동도 없었다. 혹시나 변을 당할까 물 근처에도 못 가게 했던 어머니 때문에 수영도 못 배웠다. 그래서 꿈속에서 헤엄을 치는 게 다였다. 덩치 좋은 건달들에게 맞은 적도 여러 번이다. 잘못도 없이 용서를 구하는 모멸감도 당했다.
고등학교 2학년 무렵에는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 대학 진학은커녕 밥도 굶어야 할 형편이었다. 학교를 그만둘까 말까, 내 얼굴에 걱정이 잔뜩 묻어 있었는지 하루는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근후야, 쌀이 없어도 쌀뒤주는 보지 말거라.”
쌀이 없는 걸 아는데 왜 굳이 빈 뒤주를 보고 걱정하느냐는 말이었다. 걱정만 해서 해결될 일은 없다는 걸 어머니는 가르쳐 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내 삶에는 많은 위험이 있었다. 전쟁, 가난, 병, 천재지변, 사고 등 그 위기의 순간들을 나는 옹케 잘 지나왔다.
다섯 살 때 장티푸스에 걸려 거의 다 죽다 살아났다. 일제의 가미카제 소년병으로 초등학생들이 차출되어 갔을 때 나는 열한 살이어서 제외되었다. 학교에서 장난치며 놀던 나보다 고작 한 살 많은 아이들은 그길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대학 시절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기상관측이 시작된 이래 그때까지 가장 센 태풍으로 알려진 사라호 태풍이 불어닥쳤다. 사망자와 실종자는 800명이 훨씬 넘었고, 이재민도 37만 명이 넘었다. 그 어마어마한 태풍이 한반도를 지날 때 나는 독도행 배를 타고 있었다. 70톤 경비정은 엄청난 비바람에 낙엽처럼 흔들렸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갑판위에서 잠들어 있었다. 뱃멀미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저마다 살려 달라 기도를 올리는 중에도 나는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배가 뒤집힐 것 같은 시세에 한 선원이 나를 흔들어 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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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요 헤엄칠 줄 알아요?”
“저 수영 못 하는데요……”
그러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배가 뒤집히기라도 하면 그대로 죽을 게 틀림없었다. 그렇지만 ‘에잇, 모르겠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다시 잠이 들었고 눈을 떴을 때는 파도의 기세가 한층 누그러져 있었다. 아마도 내가 깨어 있었다면 죽음의 공포에 패닉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당황해서 우왕좌왕하다가 물에 빠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눈을 꼭 감고 순응하니 위험 상황이 지나갔다.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다면 순리를 따르라.’ 그때 나는 터득했다. 뒤주를 보지 말라는 어머니의 마음도 거의 같은 뜻일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좋아졌어도 ‘하마타면 큰일 날 뻔한’ 일들을 겪으며 산다.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후 나는 ‘내 인생은 덤’이라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그래서 매사 후회가 적고 만족할 수 있었다. 내 행복의 비결을 하나 꼽으라면 바로 이것이다.
몇 년 전, 나는 심장 혈관이 막혀 큰 수술을 받았다. 50퍼센트의 죽음과 삶, 그 두 갈래 길에서 나는 살았다. 또 한 번의 덤이었다. 언젠가는 이 덤도 끝날 테지만 그때까지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지금은 나이 들고 아프고 기력도 쇠했다. 그러나 삶은 죽음보다 나은 것이다. 나나 당신이나 우리는 아직 살아 있는 행복한 존재다.
■왜 외롭다고 말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가
“낭비된 인생이란 없어요. 우리가 낭비하는 시간이란 외롭다고 생각하며 보내는 시간뿐이지요.” - 미치 앨봄 ‘천국애서 만난 다섯 사람’ 중에서
한 신문사에서 우리 부부를 인터뷰했을 때 아내는 나를 이렇게 소개했다. “백이면 백 명 모두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이에요.”
‘그래?’하고 곰곰 생각해 보니 역시 아내의 눈은 정확했다. 나는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관심이 있다. 한 번 왔다 가는 기자의 이름과 나이, 취미 등을 물어보고 기억해 둘 정도다
지난 2월, 구정 무렵 휴전선 근처 연천에 사는 최오균 선생 집에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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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50대 후반으로 10여 년 전, 네팔 의료봉사를 함께 가면서 알게 되었다. 며칠째 추운 날이 계속되었지만 나는 연천행을 감행했다. 날이 풀린 후에, 따뜻한 봄이 되어 찾아가도 될 일이었다. 누구에게나 배려 받을 수 있는 특권을 가진 ‘노인’인데 약속 좀 미뤘다고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섬진강 근처에 살 때도 언제 한번 찾아가겠다던 약속을 나는 지키지 못했다. 지금 출발하지 않으면 또 약속을 어기게 될 것만 같았다.
그는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나를 보는 눈빛과 행동에 기쁨이 묻어 있었다. 진심으로 맞아주기에 나 또한 반갑고 좋았다. 그는 비무장지대에 얽힌 마을의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사이 그는 연천 홍보대사가 되어 있었다.
그는 몸이 약한 아내를 위해 시골 살림을 선택했다. 2층에 다락방까지 있어 참 좋지만 남의 집이라 아쉽다기에 내가 말했다.
“누가 소유하고 있느냐는 별 의미가 없지요. 그 집을 사용하는 사람이 임자 아니겠소.”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봉사라는 인연으로 만나 이심전심 서로 통하는 사이가 되어 이 추운 겨울, 지척에 비무장지대를 두고 홍합짬뽕을 나눠 먹는 나와 최 선생, 인연이란 참으로 묘하다 싶었다.
짬뽕 한 그릇을 다 비운 뒤 우리는 근처 ‘화이트 다방’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리고 해가 지기 전에 악수를 나누고 눈 덮인 들판을 달려 서울로 돌아왔다. 온기가 가득한 집 안으로 들어서자 몸이 노곤했지만 마음은 뿌듯했다.
나이가 들면 내가 사람을 찾아가야 한다. 노년의 삶을 가장 어렵게 만드는 것이 외로움이다. 고독사(孤獨死)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그런데 인간을 병들게 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원인이 꼭 외로움이겠는가? 혼자기 때문에 건강이 나빠지고 외로워서 인생이 불행해 지는 것이 아니다. 혼자 있는 게 두렵고, 외로움이 무섭다면 외롭지 않으려고 노력하면 된다. 이 당연한 이치를 회피한 채 ‘나는 왜 외로울까, 인생 헛살았나’ 하고 찾아오지 않는 사람을 원망하는 것이야말로 불행을 자초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외로움은 돈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외로움을 없애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을 너무 거창하고 형이상학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사랑은 궁금증과 관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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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시작한다. ‘저 사람은 왜 저럴까? 저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할까?’ 이런 궁금증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 사랑이다.
정신과 전문의 수련을 받던 제자가 나에게 물었다. “선생님, 환자를 언제 퇴원시키면 됩니까?” 그에 대한 교과서적인 기준은 있다. 하지만 나는 종종 교과서에 없는 기준을 이야기하는데 그때도 그랬다. “환자가 사랑하는 능력이 생기면 퇴원시켜도 좋습니다.”
부연하자면 정신과에 입원하는 환자들은 대개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자기애가 지나친 사람들이 많다. 이들에게 사랑하는 능력이 생긴다는 증거는 주변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자기가 아닌 타인에게 관심을 갖고 자기 정서를 표현하며 관계를 형성해 나간다면, 이 환자는 사랑하는 능력이 생긴 것이므로 이제 그만 퇴원해도 된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다른 사람이 먼저 내 삶에 관심을 가져주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나는 만나고 싶은 사람에게 먼저 연락 하고 만나기를 즐긴다.
물론 혼자 있을 때 까닭 없이 눈물이 나곤 한다. 그것은 나이 먹은 이들이 느끼는 온갖 감정이 눈물 한 방울로 솟아나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무서워하고 두려워할 감정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밀려오는 외로움을 견디기 힘들다면 제발 푸념만 늘어놓지 말고 생각나는 사람을 찾아가라. 전화나 문자 한 통이어도 괜찮다. 그리운 이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때로 위안을 얻기도 하니까 말이다.
■ “늙으면 죽어야지”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는 당신에게
아기가 엄마에게 말한다. “엄마, 바쁘신데 젖은 나중에 주세요. 나는 배가 고프지만 엄마는 지금 바쁘잖아요.” 이렇게 어른스럽게 말하는 아기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 같은 어른은 있다. 매사 아이처럼 우는 방식으로 갈등을 해결하려는 사람들 말이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과 욕구를 겉으로 드러내 풀고자 한다. 어른스럽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외면한 채 오로지 나 좀 봐 달라고 하소연하고 불평하고 화를 내는 등 감정을 쏟아내는 것이다. 그들을 향해 우리는 ‘애처럼 군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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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된다는 것은 삶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의 해결 방식을 더 많이, 다양하게 섭렵해 간다는 듯이다. 그 많은 방법을 제쳐두고 불평, 불만, 무시, 외면 등 유아기적 방법을 쓰고 있지 않은지 살펴보라. 나이가 들면서 약해진 몸과 마음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이 방법을 쓰게 되니 더욱 조심해야 한다.
오늘도 하루 종일 앓는 소리를 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라. 그리고 더 시간이 흘러 본격적인 노년기에 접어들었을 때 일상의 고통을 어떻게 표현할지 미리 생각해 보라. 힘든 것을 남이 알아주길 절대 바라지 마라. 이것이 바로 나이든 자의 자존심이다.
■ 우리 가족 삼대 열세 명이 한 지붕 아래 사는 비결
멀리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오히려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항상 사랑하기란 쉽지 않습니다.(중략) 여러분의 가정에 사랑을 가져오십시오. 이곳이야말로 우리 서로를 위한 사랑이 시작되는 장소이니까요.
- 마더 데레사 ‘모든 것은 기도에서 시작됩니다’ 중에서
딩동! 우리 집 반장에게서 메일이 왔다. 이번 주 토요일 가족 모임을 북악스카이웨이의 한 경양식 집에서 할까 하는데, 별다른 의의가 없으면 그곳에서 만나자는 내용이다. 스테이크가 맛있기로 유명한 그 경양식 집은 내가 젊었을 때부터 자주 이용하던 곳이다. 당뇨 때문에 고기 요리를 마음대로 먹지 못하는 나를 배려한 메뉴임이 틀림없었다. 나는 흔쾌히 ‘OK’ 답장을 보냈다.
반장은 나의 맏아들이다. 장남이라서 반장을 맡은 것은 아니다. 식구들이 6개월에 한 번씩 돌아가며 반장을 한다. 집안의 연락책이자 조율자 역할이다. 반장 제도는 10년 전 우리 가족이 한 지붕 아래 모여 살면서 시작되었다. 식구는 우리 부부와 두 아들과 두 딸 내외, 그리고 손자들까지 모두 삼 대 열세 명이다.
아마도 요즘 세상에 찾아보기 힘든 대가족일 것이다.
삼 대 열세 명의 식구가 한 집에서 산다고 하면 반응은 제각각이다. 왜 장성한 자식을 몽땅 껴안고 사느냐며, 나를 고리타분한 전통 수호자쯤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가장 흔하다. 또 아이들 눈치 보지 말고 노부부끼리 오붓하게 살지 왜 자식 시집살이를 사서 하느냐며 걱정해 주는 이들이 있고,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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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문제없이 사느냐고 속사정을 듣고 싶어 하기도 한다. 대체로 부러워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우리 부부와 네 자녀 내외는 심사숙고했다.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부모와 장성한 자녀들이 한 공간에서 생활하면서도 각자 독립적인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서로에게 짐이 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영향을 주고받는 새로운 가족공동체 모델을 만들어 보고자 했던 것이다.
1980년대 출간된 앨빈 토플러는 ‘제3의 물결’에 미래의 가족에 대해 나온다. 이 책에서 앨빈 토플러는 미래 사회에는 대가족이 한 지붕 아래 산다고 예측했다. 개인주의가 극도로 발전한 미래 시대에 ‘대가족’이라는 말이 어딘지 구닥다리 같아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앨빈 토플러가 말하는 미래는 곧 정보화 사회를 뜻한다. 개인이 얼마나 정확하고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느냐에 따라 경쟁력이 형성되는 사회다. 그러니까 여럿의 개인이 모인 가족이 서로의 정보를 결합하면 여러 방면에서 유리하다는 것이다. 농경시대 우리 조상들은 노동력 때문에 대가족을 이루며 살았다. 현대 사회의 정보력은 바로 옛날의 노동력과 같은 개념이다. 생각해보라. 1인 가족과 5인 가족 가운데 누가 더 부자겠는가.
내가 자녀들과 한 집에서 살기로 결정한 데는 이런 속생각도 있었다. 자식들과 정보를 나눈다는 것, 그 말은 곧 소통이다. 장성한 자식과 부모는 같이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서로 떨어져 사는 게 편하다고 입을 모은다. 그런데 사랑하는 부모, 아들, 딸인데 왜 같이 살기 싫은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있는지 묻고 싶다.
나는 우리 부부와 자식들이 진심으로 소통하고 있다면, 또 소통하려 노력한다면 큰 문제없이 한 지붕 아래 함께 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자녀들의 현실적인 문제 해결과 정신과 의사로서 가족공동체를 실현해 보고 싶은 나의 뜻이 어우러져 우리는 2002년 봄, 대가족으로 재탄생했다.
가족이 모여 살기로 하면서 내가 자녀들에게 강조한 것은 상호 불간섭주의와 독립성 보장이었다. 우선 함께 살 공간을 마련하는 것도 모두의 힘을 보태기로 했다. 나는 내가 살던 집터를 내 놓았다. 집을 새로 짓는 비용은 네 자녀가 대출을 받는 등 각자 형편대로 마련했다. 각 가구의 거주 공간은 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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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만큼 평수가 정해졌고 내부 구조와 출입문 또한 각자의 취향대로 했다. 한 지붕 아래 살더라도 철저하게 개인 생활을 보장하기 위해서였다.
너무 가까이 끌어안으면 고슴도치처럼 부지불식간에 서로를 찌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상호 불간섭의 원칙은 철저하게 지켜졌다. 부모인 내가 자식 집에 갈 때도 비록 계단 몇 개만 올라가 문을 두드리면 되었지만 반드시 전화를 걸어 자녀들에게 허락을 먼저 구했다. 그리고 각 가정의 일과 개인의 일이 가족 전체의 일보다 우선하도록 했다.
대가족을 이루고 산 지 10년이 지났다. 가족공동체로서의 실험은 비교적 성공했다고 자부한다. 무엇보다 노년이 되어 각종 병을 달고 사는 내가 최고의 수혜자인 것만은 틀림없다. 자식들이 잘 돌봐 주고 있기에 연구소 활동과 봉사,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자식들 또한 안정적인 주거 확보와 자녀 교육에도 도움을 받았다. 또 대학교수, 의사, 미술치료사, 치과의사, 상담전문가 등 여러 분야에서 종사하는 자녀들은 일하면서 얻는 다양한 정보와 경험을 가족들과 나누었다. 나는 이 점이 매우 만족스럽다. 내가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을 다른 식구들의 눈을 통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천문학자인 큰 아들과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종종 토론을 벌였다. 이메일로 내 생각을 보내면 아들이 답장을 보내는 식이었다. 우주를 연구하는 천문학자와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정신과 의사, 거시와 미시, 극과 극을 연구하는 두 사람이다 보니 이야기가 꽤나 다양하고 재미있다.
가장 큰 성과는 소통이다. 가족의 믿음은 서로를 존중하고 유무형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으려는 배려 위에 세워졌기에 아주 단단하다. 얼마 전 아내가 밖에서 먹거리를 선물 받아 왔다. 보통의 모성이라면 자식들과 똑같이 나누려 하거나, 특별히 마음이 가는 자녀에게 주면서 다른 형제들을 모르게 하라고 쉬쉬 했겠지만, 아내는 집에 들어와 이메일로 공지를 했다. 필요한 가정에서 필요한 만큼 가지고 가라고 말이다.
가족이 모여 살면 답답하고 행복하지 않을 거라고 미리 단언하지 마라. 중국의 극작가 백인보가 말했다.
“내 집이 넓다고는 말 할 수 없다. 여분의 침실도 없으니까. 하지만 내 집이 좁다고도 할 수 없다. 열 식구가 충분히 편안하게 살 수 있으니까.”
바로 내 집 이야기다. 자식들을 내 품안에 두고 사는 나는 누구보다 호사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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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며느리에게 거절하는 법부터 가르쳤다
진정한 가족을 이어 주는 끈은 혈통이 아니라 서로의 삶에 대한 존중과 만족이다. - 리처드 바크, ‘환상’ 중에서
언젠가 선배 교수가 연구소를 찾아왔을 때 일이다. 나와 한담을 나누던 중 마침 그 자리에 있던 며느리가 시어머니, 그러니까 내 아내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게 되었다. 아마도 아내가 무슨 일을 부탁하는 것 같았다. 며느리는 “예? 그건 언제까지 하면 되나요?”라고 묻고는 이렇게 답했다.
“어머니 그건 안 되겠는데요.”
며느리가 자리를 비우자 선배는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내가 듣기에는 자네 며느리가 버르장머리가 없는 것 같아. 며느리 교육 한번 제대로 시켰구먼.”
선배의 눈에는 시어머니의 부탁을 미안한 기색도 없이 단박에 거절하는 며느리가 마뜩찮았던가 보다. 정작 시아버지인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선배 교수 말대로 며느리 교육은 내가 ‘제대로’ 시켰다. 큰 아들이 결혼한 뒤 나는 며느리에게 거절하는 법부터 가르쳤다. 거절은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덕목이다. 우리는 거절에 익숙하지 않다. 내 뜻은 감추고 상대의 말만 수용하면 마음에 앙금이 쌓인다. 억눌린 마음은 죄책감이나 상대에 대한 원망을 키우고, 갈등은 미움으로 변한다.
아니요. 안돼요. 싫어요. 시간이 없어요 등 몇 마디 안 되는 이 말을 마음이 약해서 혹은 불이익을 당할까 봐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러나 솔직하게 ‘No’를 말할 수 있어야 ‘Yes’도 진짜 예스로 믿을 수 있다. 이 믿음의 토대에서 진정한 인간관계는 가능해진다.
소위 고부갈등은 서로에게 싫다, 좋다의 뜻을 정확하게 전달하지 못하는 데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싫어도 좋은 척, 미워도 아닌 척하면서 그렇게 가면을 쓰고 5년, 10년 지내다 보면 상대의 얼굴만 쳐다봐도, 목소리만 들어도 싫은 감정이 솟구친다. ‘시’자만 들어도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사정을 들여다보면 시부모나 며느리나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다. 그냥 싫고 미운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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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어떤 중년 부인은 시부모의 외투조차 만지기 싫다고 했다. 아무리 웃는 얼굴로 좋은 말을 해도 부정적인 쪽으로만 해석되는 것이다. 오랫동안 자기 본심을 속여 그 감정이 누적된 결과다.
나는 며느리에게 분가하기 전 6개월 동안만 같이 살자고 청했다. 엄연한 가족이 되었는데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없으니 한집에서 서로를 공부하는 시간을 갖자고 한 것이다. 무슨 음식을 좋아하고 성격은 어떤지, 시시콜콜 솔직히 보여주자고 했다. 먼저 며느리에게 친정에서 하던 대로 똑같이 지내라고 했다. 시부모 앞이라고 잔뜩 긴장해서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고 하면 단 며칠도 못 버틸 테고, 그 건 나도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도 며느리도 눈치 보지 않고 평소처럼 생활하겠다고 했다.
나는 평소처럼 러닝셔츠 바람에 반바지로 돌아다녔고 거실에 벌러덩 누워 낮잠을 잤다. 내 자식에게 하듯 말하고 행동했다. 짜증도 내고 아프면 엄살도 부렸다. 집에서는 교수도 의사도 아닌 평범한 노인일 뿐이었다. 며느리는 처음에 어색해 했지만 차츰 적응했다. 며느리도 반바지를 입고 집에서 활보했다.
며느리가 마음을 연 것은 식사 당번 때다. 우리 부부와 아들 내외가 모두 일을 했기 때문에 나는 네 사람이 돌아가면서 식사 당번을 하자고 했다. 당번이 어떤 밥상을 차리든 싫은 내색 하지 말고, 당번은 건강 따지고 칼로리를 계산하면 복잡하니 자기가 먹고 싶은 음식을 준비하자고 했다. 중국 음식을 배달해도 좋다고 했다.
하루는 내가 당번이라 주방에서 밥을 하고 있는데 며느리가 슬그머니 옆에서 채소를 다듬었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너 당번 아니잖니? 나 도와주려고? 그러려면 당번을 왜 정했겠니? 시아버지 당번 때 도와주고 시어머니 당번 때 나서고 신랑 일한다고 거들면 앞으로 너는 계속 식사 당번해야 한다.”
그러자 며느리는 얼른 손을 털고 주방에서 나갔다. 아마도 그때 며느리는 ‘아, 우리 시부모님에게는 속마음을 드러내도 되겠구나’ 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누구나 거절은 불편하다. 그래서 연습이 필요하다.
훈련을 통해 거절을 잘 하고, 잘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웬만한 거절에도 상처받지 않는다. 이런 토대 위에서 시부모와 며느리는 인간 대 인간으로 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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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배려를 할 수 있게 된다. 서로를 행복하게 해 주려는 진정한 마음이 자동으로 나온다. 소로(‘월든’의 작가)가 말했다. “사랑은 솔직하고 정직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성립한다.”
며느리는 지금도 나에게 거절을 많이 하는 ‘좋은 며느리’다.
■ 당당하게 아파라
나는 당뇨병이 내게 주신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중략) 내 게으른 성격을 잘 알고 계시는 하느님이 내게 평생을 통해서 먹고 마시는 일에 지나치지 말고 절제하라고 숙제를 내주신 것이다.
- 최인호, ‘산중일기’ 중에서
나는 지금 일곱 가지 병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왼쪽 눈의 실명, 당뇨, 고혈압, 관상동맥협착, 담석, 통풍, 허리디스크가 바로 그것이다. 그 외에도 소소한 몸의 이상 신호들이 때때로 나를 괴롭힌다.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이나 다름없다. 사람들이 일곱 가지 병을 달고 산다고 하면 도대체 건강관리를 어떻게 했느냐고 생각할 것이다. 생활 습관이 엉망이거나 게으르고 운동 안하고 기름진 음식을 좋아할 거라고 짐작하면서 말이다. 게다가 직업이 의사라는 걸 알면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볼 것이다.
이쯤 되면 나도 억울하다.
여기서 노화와 질병을 정확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노화는 육체적 쇠퇴의 한 과정이며 세월의 흐름과 함께 진행된다. 분명 질병과는 다르다. 그런데 우리는 알게 모르게 노화를 병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늙음을 부정적으로 보는 원인이기도 하다.
내가 안고 살아가는 일곱 가지 병은 오히려 너무 열심히 살아 온 증거라는 게 의사로서의 내 소견이다. 노화로 생긴 허리 통증을 치료하기 위해 장기간 복용한 약이 당뇨와 고혈압을 차례로 유발시켰다. 왼쪽 눈의 시력을 잃게 된 것은 2003년 네팔에 의료봉사를 갔을 때다 한쪽 시력이 부쩍 떨어지고 답답해 고산병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귀국 후 병원을 찾았더니 눈의 혈관에 이상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저런 검사 도중 심장에 더 큰 문제가 발견되었다. 선천적으로 심장 혈관이 좁은 것을 우연히 발견한 것인데 당장 수술을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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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할 만큼 급박했다. 두 가지 수술을 받았지만 결국 한쪽 눈의 시력은 잃고 말았다.
어떤 사람은 병에 걸리면 ‘내가 왜 이 병을 앓게 되었을까, 건강관리를 제대로 못한 탓일까, 그때 그걸 먹지 말 것을, 운동을 열심히 해 볼 것을……’ 하면서 원망하고 자책한다. 그 스트레스로 인하여 병은 더 깊어지기도 한다.
나를 찾아온 병의 첫 번째 치료는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노화로 인한 병은 대부분 만성질환인데 이 경우에는 단박에 치료되기가 어렵다. 병의 원인을 제거하기는커녕 고통을 누그러뜨리거나 증상을 완화시키는 치료를 받는 게 전부일 때도 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실망하여 자제력을 잃고 화를 내거나 스트레스를 일으킨다. 몸으로 느끼는 고통과 불편을 말로 다 하지 못하겠지만 어쩌겠는가. 잘 달래는 수밖에 없다. 번번이 짜증을 내고 얼굴을 찡그리고 한숨을 쉬며 “아이고”를 내뱉지 말아야 한다.
아프지 않고 장수할 수 있다면 정말 보배로운 일이다. 그러나 건강하지 못하다고, 한두 가지 병을 앓는다고 해서 불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건강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 그것이 나이 들어 새롭게 맞이한 인생에서 해야 할 일이다.
죽을 때까지 아프지 않고 살면 좋겠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거기에 열심히 산 결과로 생기는 병은 어쩌겠는가! 나이 들어 몸에 찾아드는 신체적 고통은 좀 고약한 친구라고 생각해야 한다. 병에 걸렸더라도 내 몸이 할 수 있는 만큼의 일을 하면 된다.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만 있다면 어떤 명의보다 낫다. 병에 대한 고정관념도 바꾸자. 병은 훈장도 아니요, 인생을 잘못 살았다는 증거는 더더욱 아니다. 그냥 같이 가야 할 삶의 조건이 추가되었을 뿐이다. 아파도 하루하루 긍정적인 자세로 생활한다면, 상황이 더 나빠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적인 면에서 가족을 덜 고생시킬 수 있을 것이다.
영화배우 이대근 씨가 아파 누운 늙은 어머니의 소변을 받아 내다가 냄새가 역해 얼굴을 찡그렸단다. 그 모습을 본 어머니가 껄껄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네 기저귀가 얼마나 구수하던지 코에 대고 킁킁 맡기까지 했단다.”
그제야 이대근 씨는 자신이 그동안 겉으로만 효도 운운했다는 걸 알았다. 나는 어머니가 껄껄 웃었다는 대목에 주목했다. 아들 앞에서 샅을 보이는 일이 민망했을 텐데도 아랑곳없이 웃음을 터뜨리는 노모, 그 어머니의 당당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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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에서 병을 받아들이는 씩씩하고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짐작할 수 있다.
나이 들어 아프고 병을 앓는 것은 자연의 이치다. 일곱 가지 병과 함께 살아가는 나는 삶이 다할 때까지 즐겁게 살고 싶다. 아내와 아이들, 손자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내 친구들과 더불어 말이다.
■ 일흔 넘어 시작한 공부가 제일 재미있었던 까닭
소크라테스는 독약이 준비되고 있는 동안 피리로 음악 한 소절을 연습하고 있었다. “대체 지금 그게 무슨 소용이오?” 누군가 이렇게 묻자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래도 죽기 전에 음악 한 소절은 배우지 않겠는가?” - 이탈로 칼비노, ‘왜 고전을 읽는가’ 중에서
2011년 2월 29일 나는 고려대학교 사이버 대학 문화학과를 졸업했다. 50년 만에, 생애 두 번째 쓰는 학사모였다. 나는 1125명의 졸업생 가운데 76세의 최고령자이자 문화학과 수석 졸업자로 화제가 되었다. 신문에도 기사가 났다. 학위증을 받으러 올라간 연단에서 나는 총장에게 꽃다발을 건넸다. 축하 받아야 할 내가 되레 총장에게 꽃다발을 주자 장내에서는 폭소가 터졌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의 쏟아지는 관심에 머쓱해진 마음을 줄여 보고자 함이었다. 또 나이 들어 새로운 공부를 할 수 있게 해 준 사이버 대학에 대한 고마움과 4년 동안 지도해 주신 교수들에 대한 내 나름의 인사이기도 했다. 최고령 나이에 1등까지, 정말 대단하다 치켜세워 주니 그날 나는 종일 ‘칭찬받은 고래’ 처럼 춤을 추고 싶은 심정이었다.
생각해 보면 교수 시절 나는 슬라이드나 OHP를 이용해서 학생들을 가르치길 좋아했다. 학습효과도 좋고 준비하는 나도 즐거웠다. 흑판에 백묵을 썼던 시절임을 감안하면 나에겐 꽤 혁신적인 면이 있었던 것 같다. 그 때문인지 정년퇴임을 하고 얼마 뒤, 손녀딸을 유치원에 데려다 주는 길에 사이버 대학 간판을 발견하고 눈이 번쩍 띄었다. ‘저거다!’ 싶었다.
정년퇴임을 하고 여러 대학과 단체에서 이런저런 제안을 받았다. 대개는 수장으로서의 역할이었다. 나의 경륜과 학식을 높이 평가해 준 귀한 제안이었지만 모두 거절했다. 교수직에서 물러났다는 것은 누군가를 가르치지 않아도 된다는 뜻, 나는 이제 막 얻은 자유를 포기하기 싫었다. 게다가 이름만 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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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마담, 명예직이라면 아무리 폼 나는 자리여도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나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가르치지 못하게’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배우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사이버 대학 입학은 나에게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주위 반응이 영 탐탁지 않았다. 박사 학위까지 받아 놓고 또 무슨 공부냐, 노욕(老慾)이다 라며 핀잔하는 이들도 있었고, 어떤 이는 입학은 하되 편입해서 2년 과정으로 후딱 공부를 끝내라고도 했다.
딱히 졸업장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 왜 서둘러 공부를 끝내라는 말인가. 공부가 목적인 나에게는 졸업장도 학점도 중요하지 않았다. 내가 선택한 자유로운 공부, 그 생각에 이르자 앞으로 할 공부가 얼마나 신나고 재미있을지 기다가 되었다. 그 즐거움을 왜 2년으로 줄이라는 말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4년 동안 천천히 공부의 즐거움을 누려보기로 작심했다. 또 한 가지, 세상은 자꾸 변화하고 발전하는 데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이미 옛날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새로운 것을 듣고 배우는 일은 또 얼마나 신선할지 나는 조금 흥분하기까지 했다.
나는 월요일, 화요일 이틀 시간을 정해 놓고 공부했다. 스스로 규칙과 강제를 부여한 사이버 강의는 100% 자발적인 공부였다.
처음 문화학과에서 수석을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는 솔직히 창피하기도 했다. 다른 이들 눈에 ‘노인네가 얼마나 용을 썼으면 1등을 했을까’라고 비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즐기면서 공부했을 뿐인데 과분한 결과를 얻은 거라고 말해도 그것은 명문대 수석 합격생이 “교과서에 충실했어요”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할 터이니 머쓱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놀듯이 공부하라”고 한 공자의 말을 인용하며 1등의 부끄러움을 면해 볼 뿐이다.
일생 동안 해 온 공부의 단계를 놓고 보면, 일흔 넘은 나이에 사이버 대학에서 시작한 공부가 제일 재미있었다. 나이가 들면 순수하게 즐기면서, 놀듯이, 오로지 공부만을 위한 공부를 할 수 있게 된다.
나이 들어서 공부는 뭣에 쓰려 하느냐.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들 한 다. 그런데 공부가 꼭 쓸데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톨스토이는 노년에 이탈리아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어의 어떤 매력이 호호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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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톨스토이의 호기심을 건드렸을 것이다.
글을 모르는 70세 할머니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할머니는 하루도 결석하지 않는다. 열 칸 노트에 자기 이름 석 자, 남편 이름 석 자를 쓰는 할머니의 얼굴에는 기쁨과 뿌듯함이 가득하다. 그 할머니의 한글 공부와 나의 문화학 공부는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인간에게는 살아 있는 한 전진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나이가 들어 몸은 늙어도 생각은 녹슬지 않는다. 체력에 부담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생각을 발전시켜야 한다. 은퇴 뒤 넉넉해진 시간이 ‘쓸데없는 공부’를 하기에 가장 좋은 때다.
■ 무모하게 사는 것이 가장 안전한 길이다
안전이란 십중팔구 미신이다. 자연에는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
서 길게 보자면 위험을 피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에 맞서려고 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 삶이란 “위험을 무릅쓴 모험일 뿐.” - 헬렌 켈러
나이가 들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좀 보인다. ‘지금 아는 것을 그때
알았더라면……. 하고 젊은 날을 아쉬워하는 것은 바로 그런 깨달음의 표현
이다. 그러나 지금 알고 있는 것을 젊은 날에 알았다면 정말 내가 원하는 인
생을 살 수 있었을까? 완벽한 삶을 완성할 수 있었을까? 내 답은 ‘아니요’다.
시간이 지나야 얻을 수 있는 지혜를 청년이 처음부터 가지고 있다면 그는
이미 청년이 아니기 때문이다. 청년의 가장 큰 미덕은 모른다는 것. 그리고
미래가 있다는 것 두 가지다. 그 무지함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한 걸음씩 내딛을 수 있는 용기가 된다.
의과대학 재학 시절, 정신과에 지원하겠다고 하자 “미쳤어? 정신과 의사를
하게?” 하는 소리를 들었다. 정신과 의사도 정신질환자와 같이 도매금으로
넘겨지던 때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나는 정신과를 택했다. 출세와 명예를
바랐다면 내과나 외과 쪽을 지원해야 맞다.
4‧19 당시 시위 주동자로 수감되었을 때 같은 방을 쓰게 된 사형수와 도둑
을 보면서 왜 어떤 이는 작은 어려움 앞에서도 분노하고 힘들어 하는데, 어
떤 이는 큰 어려움도 편히 받아들이는지 궁금했다. 그때 나는 인간이란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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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대해서, 삶에 대해서, 그리고 나에 대해 비로소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
다. 이때의 강렬한 체험이 나를 정신과로 이끌었던 것 같다. 또 ‘의사처럼 보
이지 않는 의사’ 가 되면 좋겠다는 엉뚱함도 내가 정신과 의사의 길을 가는
데 한몫했다.
정신과 전공에 게다가 전과자 딱지까지, 내 삶은 순조롭지 못했다. 외국 유
학길도 막혔고 좋은 병원에 취직하기란 더더욱 어려웠다. 좋은 병원에 가지
못한다는 것은 뛰어난 스승, 실력 있는 선배 의사와 교류를 못한다는 뜻이기
도 했다. 내가 원하는 가장 좋고 가장 쉬운 길은 모두 막힌 셈이었다. 나는
일면식 없는 국립 정신병원장에게 편지를 썼다. 당시 국립 정신병원은 의대
생이 기피하는 곳이었지만 그렇다고 전과 경력이 있는 의사를 받아 줄 리는
없었다.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기에 부딪혀 볼 뿐이었다. 뜻밖에도
병원장은 나를 받아 주었다. 부족한 병원 인력 때문이라고 한들 나에게는 고
마운 기회였다.
그런데 막다른 골목, 바닥이라고 생각했던 그 병원에서 오히려 나는 좋은
스승과 많은 환자들을 접하며 풍부한 임상 경험을 쌓았다. 국립 병원인 덕에
나라에서 계획하는 여러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다른 병원에 있는 이름난 의
사들을 직접 만나 배울 수 있었다. 대학 병원에 속한 의사라면 한두 사람의
스승에게서 수학할 뿐이지만 나는 전국 방방곡곡에 있는 여러 유명한 교수
들의 연구실을 들락거리며 배웠다. 내 인생의 걸림돌이자 제약이었던 전과가
나에게 역전의 기회를 가져다 준 셈이다.
그래서였는지 정신과 의사가 되어 내가 벌인 일들은 파격적이었다. 폐쇄적
인 정신과 병동을 개방 병동으로 바꾼 일, 사이코드라마 치료법 도입, 정신
질환 치료에 사회적 관심을 유도한 한국정신치료학회 설립, 해외여행이 자유
롭지 않던 시절 시작한 네팔 의료 봉사 등.
1970년대 이화여자대학교 병원 정신과 주임교수로 재직할 때였다. 정신과
병동의 쇠창살을 뜯어내고 환자들이 자유롭게 오가는 공간을 마련하여 병실
을 개방적으로 바꾸겠다고 하자 뜻밖에도 환자 가족과 동료 의사들이 반대
하고 나섰다. 나는 그들을 설득했다. 환자를 묶고 가두는 것은 환자 보호가
아니라 관리자의 편의를 위한 것일 뿐이라고. 결국 모두의 우려 속에 병원
꼭대기 층에 개방병동을 열었다. 환자들의 자유 공간인 쉼터에는 공중전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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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치하여 외부와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게 했다. 헬스 시설도 마련하고 쉼
터에서 음악회를 열기도 했다. 지금은 아주 당연한 것들이지만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무엇보다 정신질환자에 대한 편견을 변화시킨 계기가 되었다.
젊은 날, 나는 끊임없이 일을 저질렀다. 특별한 재주나 능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자신감도 아니었다. 다만 환자들을 위해 필요한 일이면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래서였는지 젊은 날엔 많은 것을 내 힘으로 이루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나 혼자 이룬 일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사실 내
힘으로 이룬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나에게서 시작되었지만 많은 사람들의 판
단과 지혜, 에너지가 더해졌다.
어쩌면 ‘나이 듦’은 내 힘으로 이뤘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면 나 혼자 이
룬 일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이 아닌가 싶다. 그때 그 일이 내가 잘해서
성사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시간의 강물을 따라 하나하나 드러나는 것이
다.
■ “노후엔 못 해 본 여행이나 다니며 살아야죠”
라고 말하는 당신에게
노후의 시간은 생각보다 아주 길다. 노후는 사전적 의미로 늙은 뒤의 시간
을 말하며, 생활 능력이 없어지거나 떨어지는 때를 뜻한다.
하지만 현실의 노후는 여전히 밝고 힘이 있고 능력이 있다. 그래서 현대인
들에게 노후는 무언가 의미 있고 나에게 여전히 필요한 일(그게 취미든 봉사
든 돈벌이든)을 계속하는 시간들이다.
생각해 보면 나는 정년 이후에 더 많은 일을 의욕적으로 해 왔다. 병원과
학교를 떠난 뒤 더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살아왔다. 상담과 네팔 의료봉사,
보육원 아이들 돌보기, 석불 연구, 사이버 대학 입학, 청소년 성 상담 활동,
노인교육 등 그 가짓수도 무척 많다.
그런데 그 일들을 누가 불러 줘서 시작한 일이 아니다. 모두 내가 자청해서
만들고 실행한 일들로, 아직도 나는 그 일들을 즐겁게 하고 있다. 그래서 하
루하루가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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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긴 노년의 시간을 잘 보내고 싶다면 막연한 바람이나 환상을 떨
쳐버리고, 시간을 편안히 보내겠다는 생각 대신 시간을 마음껏 쓰겠다고 생
각하라.
■ 30년 만에 만난 힐러리 경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
꿈을 밀고 가는 힘은 이성이 아니라 희망이며, 두뇌가 아니라 심장이다.
우리에겐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그 가능성을 스스로 믿는 만큼 성공하고
행복해지는 것이다. - 표도르 도스트옙스키 (러시아 작가)
봉사를 내 삶의 한 축으로 삼게 된 데는 몇 가지 사연이 있다. 중학교 3학
년 때 한국 전쟁이 일어나 온 가족이 피난을 가던 중에 광명보육원을 알게
되었다. 전쟁고아들을 수용한 그곳은 참담했다. 어머니는 그대로 지나치지
못하고 보육원에서 봉사하며 아이들을 돌보았다. 병들고 더러운 아이들을 씻
기고 먹였다.
전쟁 중에 제일 불쌍한 사람은 부모 잃은 아이들이라며 마음 아파했다. 그
런 어머니의 모습을 지켜보며 내 마음속엔 다른 사람을 도우며 살아야 한다
는 막연한 생각이 자리한 듯하다.
그런데 훗날 군의관으로 입대하여 발령받은 곳이 뜻밖에도 광명보육원 옆
이었다. 무척 놀랐다. 어떤 운명이 나를 이곳으로 이끌었음이 틀림없었다. 군
생활 동안 틈틈이 보육원에서 봉사했다. 아이들의 건강을 보살피며 놀아 주
던 것이 오늘에 이르러 광명보육원 이사직 감투(?)까지 쓰게 된 사연이다.
또 네팔 의료 봉사를 시작하게 된 계기 가운데 하나가 에드먼드 힐러리 경
이다. 그는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등반가이자 탐험가이며, 그 공로
로 영국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그가 에베레스트 등반에 성공했을 때, 나는 고
등학교 2학년이었다. 3년 째 계속되는 한국전쟁으로 온 국토가 피에 물들던
암울한 시기였다. 전쟁 뉴스에 밀려 신문 한 귀퉁이에 조그맣게 보도된 힐러
리 경의 등반 성공 소식은 누구도 눈여겨보지 못하던 때였다. 그 소식을 교
장 선생님이 아침 조회 시간에 소개해 주었다.
“여러분들도 에드먼드 힐러리처럼 웅지를 가지고…….”
그 훈시가 나를 움직였는지, 휴전이 이루어지고 대학에 진학하면서 나는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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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오르기 시작했다. 거의 모든 주말을 산행으로 보냈다.
그리고 힐러리의 이름을 들은 지 30년이 지난 1982년 4월, 나는 그를 실
제로 만났다. 그는 에베레스트로 가는 길목인 팍팅에서 다리를 수리하고 있
었다.
힐러리 경에게 나를 소개한 뒤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힐러리 경은
에베레스트 등반에 성공한 이후 네팔에 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반핵 운동을
하는 환경 운동가로 변신해 있었다.
그를 만나기 위해 기다렸던 세월이 30년 이라면 그와 실제 만나 이야기를
나눈 것은 고작 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 짧은 만남은 나에게 또 다른 자극
을 주었다. 진정한 봉사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그와 헤
어지기 전에 주머니에 있던 100달러 중 반을 그에게 주면서 말했다.
“지금 내가 가진 돈을 반으로 나누어 드리겠습니다. 이 돈을 당신이 하는
일에 쓰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봉사하듯 나도 봉사하는 일로 당신을 기억하
겠습니다. 좋은 생각이 좋은 행동을, 좋은 삶을 이끈다는 것은 정말 맞는
말이다.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마음에 진정으로 새겨 놓는다면 그 새김은 이
미 자신을 바꾸어 놓을 힘을 잉태하는 것이다. 비록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소망이라도 간직하고 바란다면 그것을 구체적으로 현실화시킬 기운과 힘이
생긴다.
■ 내가 ‘최선을 다하라’라는 말을 싫어하는 이유
실수와 불행은 자기 능력보다 120% 해내려는 데서 시작한다. 우리에게는
80%의 능력 발휘를 목표로 세울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120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의 절망감, 80 이상 해냈을 때의 뿌듯함, 그 다음에 이어질 자신
감은 어느 선택에서 커질까.
- 크리스티네 바이너 ‧ 카롤라 쿠퍼, ‘삐삐의 법칙’ 중에서
언론 인터뷰 때 꼭 받는 질문이 ‘좌우명이 뭐냐. 삶의 철학은 무엇이냐’는
것들이다. 평생 마음이 아픈 환지들을 진찰하고, 학생들을 가르쳐 온 노학자
에게 무언가 삶의 특별한 비결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 듯하다. 그러나 ‘철학
은 정장 입은 상식‘이라는 말이 있듯, 밥 먹고, 일 하고 공부하는 일상의 상
식이 철학이다. 그런 점에서 특별히 내세울 만한 삶의 철학은 없다.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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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묻는다면 나의 답은 언제나 같다. “차선(次善)으로 살자” 그러면 상대
는 좀 뜻밖이라는 듯한 표정으로 되묻는다. 세상은 최선을 다해 살라고 하는
데 왜 당신은 차선으로 사느냐고.
나는 최선이라는 말이 싫다. 최선은 내가 가진 100을 다 쓰라는 말이다.
그러면 씨앗을 먹어치운 농부처럼 내일을 기약할 수 없게 된다. 차선이라
고 해서 적당히 하다가 내키는 대로 그만 두는 것은 아니다. 무엇이든 완벽
에 매달리기보다 잘하는 정도에서 즐기고 만족한다는 뜻이다. 최선을 다하고
자하면 1등, 최고를 추구하게 되고 그것은 경쟁을 부추길 뿐 행복감을 주지
는 못한다.
차선으로 살아서인지 나는 무슨 일이든지 오래도록 꾸준히 하는 습관이 있
다. 중, 고등학교 시절에는 미술반에서 그림도 제법 그렸고, 시인을 꿈꾸기도
했다.
대학에 입학한 뒤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나의 주도로 대학 산악부가 만들
어졌고 1982년 히말라야에 올랐다. 당시에는 산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는 것
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나는 등산하는 행위 자체에서
기쁨을 느꼈다. 그래서 매번 즐겁고 유쾌한 기분으로 산에 안겼다.
네팔 의료봉사를 시작하고 네팔 캠프를 열어 우리나라와 네팔 문화 교류를
활발하게 만들었는데, 이 또한 정상 등정이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했
던 일이다. 산을 오르면서 네팔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을 도와주고 싶은 마
음이 우러나 의료봉사를 시작했다. 또 그들의 삶을 직접 대하고 대화를 나누
면서 네팔의 역사와 문화 수준이 높음을 알게 되었고, 이를 우리나라에 소개
하기에 이른 것이다.
의사가 된 뒤에도 그림과 시와 산은 늘 함께 했다. 환자 치료에 그림과 글
을 인용하기도 했다.
의사로 일하면서 의학적 치료에 더하여 예술적인 환경을 만들어 치료 효과
를 높인 것은 나의 예술적 감수성 덕분이 아닌가 싶다.
보육원 봉사를 하면서 ‘무하문화사랑방’을 열게 된 것도, 14년 째 이어오는
한 달마다 한 번씩 가졌던 시 낭송 모임도 같은 맥락이다.
내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늘 나의 능력을 30% 가량 아껴 두었기
때문이다. 한 가지를 완벽하게 해내려면 그 일에 시간과 능력을 전력투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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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한다. 1등을 하기 위해 바닥까지 짜내다 보면 옆을 바라보지 못하게 된
다. 풍경의 즐거움도 인생의 다른 가치도 놓쳐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애면글
면 경쟁하며 최고가 되려는 노력을 조금 덜어내 여유를 갖고 살면 많은 것
을 보고 느낄 수 있다. 인간애, 즐거움, 가족애, 봉사심, 일의 성취감 등 그
가지치기는 무한하다.
지금 나는 건강 때문에 산 높은 곳까지 오르지 못한다.
산에 오르지는 못하지만 산을 바라볼 수 있는 차선의 기쁨을 즐긴다. 그것
은 나에게 또 다른 차원의 즐거움이자 아직 나에게 허락된 즐거움이다. 세월
이 흘러 자리에 눕는 날이 오게 되더라도 나는 침대위에서 히말라야의 동영
상을 보며 머릿속으로 신나게 등반할 것이다.
■ 내 마음 속에는 지금도 철들지 않은 소년이 살고 있다
어린 시절, 동무들과 밤하늘에서 별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그 별을 주우
러 간 적이 있다. 몇 시간을 달려가 풀밭을 헤매는데 한 친구가 “별이다!”라
고 소리를 질렀다. 우르르 몰려가자 친구가 작은 돌 하나를 내밀었다. 너도
나도 한 번씩 만져 보았다. 조금 따뜻한 것 같았다. 그때 별똥별을 줍던 소
년은 백발의 노인이 되었다. 옆에는 그 소년 또래의 손녀딸이 “할아버지 별
똥별은 유성이고요, 지구로 떨어질 때 대기권에서 다 타버린답니다“라고 똘
똘하게 일러준다.
기특한 손녀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은 나, 그래도 나는 여전히 별똥별 줍던
소년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 아직도 유성은 별이 누는 똥이라고 생각하는
소년이 내 안에 살고 있다. 그 소년 말고도 내 마음속에는 수많은 제자들 앞
에서 두 세 시간 열강을 하는 젊은 청년 의사도 있으며, 안방처럼 드나들던
히말라야 고산에서 가쁜 숨을 쉬며 ‘이제 산은 무리다’라고 인정하는 나이
든 산악인도 살고 있다. 인생의 시기마다 수많은 경험을 하며 우리는 성장하
고 성숙해 진다. 열 살 때는 스무 살의 마음을 모르고, 30대에는 중년의 마
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게 당연하다. 세월의 흐름을 따라 인간은 익어가는
것이다.
제자들의 회갑 잔치를 스승인 내가 치러 준 적이 있다. 나의 회갑을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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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 것에 대한 나름의 나의 보답이었다. 어느 날 우연히 내가 처음 가르친 제
자들이 60세가 되었음을 알았다. 아, 나의 첫 제자들이 어느 새 회갑이라니!
감회가 유별났다.
나는 제자들에게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찍은 사진을 20장씩 가져오라고 했
다. 나는 그 사진에 글을 첨부하여 ‘아~! 60년’ 이란 제목의 CD를 구웠다.
그리고는 예약한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서 회갑 기념으로 CD를 선물했다.
나는 내가 스승이라는 이유로 목에 힘만 주고 싶지 않았다. 나의 마음에는
장난을 좋아하고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해 주고 싶어 안달하는 소년이 살고
있다. ‘아, 이렇게 하면 재미있을 거 같아’라는 생각을 나이 들었다고 억누
를 필요는 없다. 물론 평상시에도 소년의 치기로 살아간다면 문제겠지만 가
끔 모두에게 행복함을 주는 느슨함은 꼭 필요하다.
나이답게 사는 것이 언제나 엄숙하게 살라는 말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
래야 마음이 건강하다. 인생이 재미있다. 그것을 잘 조율할 줄 아는 것이 진
짜 어른이다.
Chapter 2 이렇게 나이 들지 마라
■ 나이 드는 게 두렵기만 한 사람들에게
노인이 되어서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있다. 내게 필요한 것은 내가 살
고 일하고 느끼는 것이 내 나이에 맞는지 알아내는 감각이다. 노인이라고
해서 갑자기 호호 할아버지를 흉내 낼 필요는 없다. 또는 젊은이들을 따라
할 필요도 없다. 나는 내 나이만큼 늙었다 그 뿐이다.
- 안셀름 그륀, ‘노년의 기술’ 중에서
노인의 몸이 젊은이와 다른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체력이 떨어지고 순발력
이 둔해지고 몸 여기저기 고장이 난다.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옛날에는 이러
지 않았는데 하면서 억울해 하거나 서글퍼할 일이 아니다. 예전의 몸으로 돌
아가고자 안간힘 쓸 일은 더더욱 아니다.
인간의 육체는 어느 시기가 지나면 점점 쇠약해진다. 정점을 찍고 나면 하
강 곡선을 그리며 마지막 숨을 내쉬는 지점까지 떨어진다. 그러니 나이가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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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 시간의 흐름을 따라 약해지는 몸을 보살피며 쉬엄쉬엄 살아가는 수밖
에 없다. 몸의 변화는 누구보다 내 자신이 가장 빨리 눈치챈다. 그걸 부정하
거나 외면하면 안 된다. 머리에 검은 물을 들이고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걸어도, 사실 내 몸이 늙어 가고 있음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젊은이 못지않은 우람한 근육을 자랑하는 노인이나 턱
걸이 수십 개를 거뜬히 해내는 할아버지를 본다. 붉은 립스틱을 바른 할머니
는 몸에 달라붙는 에어로빅 복을 입고 신나게 몸을 흔들어대거나 두 다리를
높이 들어 보이며 유연성을 보여 준다. 이들은 정말 특별한 사람들이다. 평
균 노인의 모습에서 벗어난 이들이다. 문제는 방송에서 누구든 노력만 하면
이런 젊음을 쟁취할 수 있다고, 그렇지 못한 것은 당신의 게으름 때문이라
고 은근히 조장한다는 점이다. 과연 노력만으로 가능한 일인가?
단언하건대, 나이 듦의 상징은 육체적 쇠약에 있다. 나이 들면 얼굴에 주름
이 가득하고 근육이 무르고 뼈가 약해진다. 거기에 한두 가지 병이 있다면
더더욱 노인답다. 그러니 노익장을 과시하는 사람들 앞에서 기죽거나 자책하
지 마라. 또 나이 들어서도 젊어 보여야 한다는 강박은 되도록 빨리 버려라.
24시간 젊게 보이는 데만 신경 쓰느라 삶을 돌보지 못하면 그게 더 안타까
운 일 아니겠는가.
■ 나이 들면 약해진다는 생각부터 버려라
1959년 티베트에서 중국의 침략을 피해 80이 넘은 노스님이 히말라야를 넘
어 인도에 왔다. 그때 기자들이 놀라서 노스님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 나
이에 그토록 험준한 히말라야를 아무 장비도 없이 맨몸으로 넘어 올 수 있
었습니까?”그 노스님의 대답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어서 왔지
요.” - 법정, ‘홀로 사는 즐거움’ 중에서
언젠가 한 젊은 작가가 장인에 대해 쓴 글을 읽었다. 수입이 많지 않은 예
술가 사위의 살림에 도움을 준 장인에 대한 고마움을 담았는데, 문장 중에
‘연로하셔서 몸이 힘드신 장인어른’ 이란 표현이 있었다. 그런데 앞뒤 내용
을 따져 헤아리니 장인의 나이가 50대 후반이었다. 백발에 허리가 구부정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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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라 연상한 노인이 고작 예순 살도 되니 않았다니! 헛웃음이 나왔다. 이 젊
은 작가의 상상력이 곧 우리 사회의 노인에 대한 인식을 대변한다. 도대체
몇 살부터 노인으로 대우해야 할까?
문제는 노년에 이른 당사자 역시 같은 생각을 하는 데 있다. 50세가 넘고
60세에 가까워지면 스스로 노인으로 치부하고 사회에서나 가정, 나아가 삶
에서 한 발 물러날 준비를 한다. 자신이 늙었다고 생각하며 무슨 일에서든
몸을 사리는 것이다. 50도 안 된 사람들이 “몸이 예전 같지 않아”, “기억력
이 부쩍 떨어졌어”등을 입에 달고 생활한다. 스스로 늙기를 자청하는 형국이
다. 그렇게 염원하지 않아도, 늙음을 자청하지 않아도 우리 몸은 점점 쇠락
해지는 데 말이다.
그런데 노년이 되어도 우리가 상상하는 것만큼 신체적, 지적 능력이 뚝 떨
어지지 않는다. 몇 년 전 보건복지부에서 조사한 결과 우리나라 60~70대 초
반까지의 노인 가운데 건강 때문이 일상생활에 제약을 받는 비율은 100명
중 7~8명에 불과했다. 자잘한 병이야 달고 살겠지만 일상에 큰 불편을 줄
만큼은 아니다. 대부분은 건강하게 무리 없이 살아간다는 말이다. 게다가 눈
부시게 발전한 의술로 예전에는 고치지 못했던 병도 치료되는 세상 아닌가.
우리 사회 전체에 ‘나이 든 사람들이 반드시 연약한 것은 아니다’라는 생각
이 뿌리내려야 한다. 나이 듦에 대한 고정관념이 바뀌어야만 노인을 고용하
는 직장이 늘어나고 노후 인력도 적극 활용될 것이다. 당연히 노년의 빈곤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노인은 약하다. 그러니 일을 못한
다’는 사회적 고정관념이 나이든 사람들을 정말 힘없이 만든다. 의존적이고
혼자 살지 못하게 만든다. 경로석을 만들고 자리를 양보하는 것보다 늙었으
니 아무 것도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 나이 든 사람에 대한 진정
한 배려다.
■ 자식의 인생에 절대 간섭하지 마라
나의 기대가 그에게 족쇄로 채워져서는 안 된다. 내 사랑이 그를 가둬 버
리면 안 된다. 내 꿈이 사랑하는 이를 짓누르는 수레바퀴가 되어서는 안 된
다. 그에 대한 믿음으로 그에게 자유를 주라. 내가 할 일은 그를 짓누르는
수레바퀴를 치워 주는 것. - 헤르만 헤세 ‘수레바퀴 아래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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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울증에 시달리는 중년의 환자가 찾아왔다. 그는 대학 교수로 꽤 성공한
축에 들었다. 그의 아버지 또한 전직 장관에 대학 총장을 지낸 분으로 이름
만 대면 알만한 교육자였다. 그런데 아버지에 비하면 아들의 성공은 미약했
다. 아들은 아버지를 존경하면서도 아버지와 비교 당하는 것에 은연중 스트
레스를 받았다. 그러면서도 부모에게 누가 되지 않으려고 신경을 곤두세우며
아버지의 일거수일투족에 민감해했다. 그런데 생각만큼 환자의 조울증 치료
가 잘 되지 않았다. 선배 의사에게 치료 방법에 대해 자문을 구하자 “그 아
버지가 죽으면 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아버지가 살아 있으면 자식은 결코
그 그늘을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선배의 말대로 훗날 아버지가 돌아가
신 뒤 환자는 별다른 치료 없이 병이 나았다.
자식에게 부모는 하나의 벽이다. 벽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한 자식은 성인이
되어서도 습관처럼 벽을 의식한다. 벽은 보호막도 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자식의 앞길을 막아서는 걸림돌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자식이 그 벽을 뛰어
넘으면 완벽한 성장을 이루게 되지만 벽이 높고 튼튼할수록 부모에게 기대
는 습관이 몸에 밴 자식은 부모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공자가 말했다. “젊어서는 부모에게 의지하고, 늙어서는 자식에게 의지하
라.” 자식에게 의지하지 말고 살자는 게 요즘 대세지만, 나는 이 말을 참 좋
아 한다. 달리 말하면 어릴 적에는 부모의 보호를 받고 나이 들어서는 자식
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것인데, 보호 받는다고 해서 모든 것을 자식에게
내맡기고 기대어 살라는 말은 아니다. 자식에게 의지하라는 것은 자식을 존
중 고 신뢰하라는 뜻이다.
부모는 일정 기간의 양육과 보호가 끝나면 자녀가 스스로 인생을 살도록
내버려둬야 한다. 모든 일을 자식이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
부모와 지식 모두가 행복하게 사는 길은 의외로 쉽다. 부모와 자녀가 각자의
인생을 충실하게 살면 된다. 물론 자녀의 삶이 불행해지면 부모가 걱정을 하
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지만 그럴 때조차도 부모 세대가 해결해 줄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이준익 영화감독의 아들이 정육점을 운영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유명 감
독의 아들과 정육점, 얼핏 어울리지 않는 조합 같았다. 아들은 대학교 1학년
때 이 감독에게 “아버지,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직업이 뭘까요?” 라고 묻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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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장사’로 결론을 내렸단다. 그러고는 대학을 그만 두겠다고 하더니 냉면
집, 한식, 일식, 중식당 주방에서 일했다. 그릇 닦는 일부터 안 해 본 게 없
는 아들은 온몸으로 터득한 경험을 바탕 삼아 정육점을 운영하기에 이르렀
다. 이준익 감독은 아들이 항상 웃는 얼굴이라며, 그것이야말로 아들이 행복
하다는 증거가 아니겠냐고 말했다.
■ “내가 자식을 어떻게 키웠는지 아냐”며 억울해 하는 부모에게
많은 부모들이 자식에게 쏟아 부은 정성을 희생으로 여긴다. 아이를 자신의
분신으로 여기고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하면서 억울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 누구를 위해 희생한다는 것 자체가 착각이다. 자녀를 위해 희
생하는 것이 아니라 자녀가 성년이 되어 홀로 자신의 생활을 해 나갈 때까
지 돌보는 것이 부모의 도리다. 이는 부모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지 희생이
아니다. 그리고 자녀는 나의 분신이 아니다. 자녀는 자녀가 가진 인격 수준
대로 이 세상을 살아갈 권리가 있는 독립적인 단위다.
그러니 자녀가 독립할 때가 되면 기꺼이 자식을 떠나보내라. 억울해 할 일
도, 섭섭하게 느낄 일도 아니다. 그것이야말로 부모가 자식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다. 자식이 부모에게서 독립하려고 애를 쓰듯, 부모도 어느
순간부터는 자식에게서 독립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 무작정 돈을 모으기 전에 생각해야 할 것
지금 우리에게 무엇이 부족한가. 단지 남들처럼 살려고 하는 상대적 빈곤
감과 욕심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이다. 능력이 없어 욕심이 닿지 않으면 마
음을 고쳐먹고 편해 질 줄도 알아야 한다.
- 도현 ‘조용한 행복’ 중에서
아버지 사업이 망하기 전까지 나는 부잣집 외동아들이었다. 의식주 무엇 하
나 부족하지 않았다. 그런데 돈을 손에 쥐어 본 기억이 없다. 어머니는 부족
함 없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지만 아들이 돈을 만지는 것을 싫어했다.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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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낼 돈이 있으면 꼭 봉투 안에 넣어 주었다. 아마도 어머니는 아들이 돈을
모르기를 바라셨던 것 같다.
결혼한 뒤에는 아내에게 월급봉투를 주고 용돈을 타 썼다. 아내 또한 내 어
머니처럼 돈에 관한 모든 것을 알아서 관리해 주었다. 평생 그렇게 살았다.
정년 때 받은 퇴직금이 얼마였는지조차 모른다. 부끄럽지만 나는 두 여인 덕
분에 돈을 몰랐다. 돈이 늘 넉넉했던 것은 아니었다. 돈이 없어 아이들 장난
감도 사 주지 못해 서글펐던 적도 있다. 하지만 돈 때문에 힘들고 괴로워했
던 기억이 없다. 천성적으로 나는 돈에 대해 무감각했다. 돈을 중심으로 인
생을 설계한 적도, 돈을 많이 벌겠다거나 부자로 살고 싶은 생각은 단 한 번
도 해보지 않았다.
1980년데 부동산 광풍이 몰아칠 즈음, 당시 집 한 채 값의 적금을 타서는
아내와 함께 유럽 여행을 떠나 몽땅 써버렸다. 가난한 남편에게 시집와 산에
서 텐트를 치고 신혼 첫날밤을 보내야 했던 아내에게 세계 여행을 시켜 주
겠다던 약속을 지킨 것이었다. 만약 그때 그 돈으로 말죽거리 어딘가 땅을
샀더라면 수백억대 자산가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돈이 있으나 없으
나, 말죽거리 땅이 내 것이든 아니든 나의 일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
이다.
그 후 돈암동 산꼭대기에 전셋집을 처음 마련했을 때도 그랬다. 아내의 알
뜰함으로 장만한 우리 집에서 처음 자던 날 밤, 벅찬 기쁨 속에 오늘의 마음
을 잃지 말자고 다짐했다. 몇 십 년이 흘러 그때보다는 훨씬 부자가 되어 그
집을 다시 찾았을 때 나는 좀 놀랐다. 이 작고 허름한 집을 마련하고는 그
토록 좋아했다는 게 믿겨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 집에서 보낸 첫날 밤 ‘오늘
의 마음’을 잃지 말자던 나와의 약속이 지금, 현재에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이
었음을 나는 비로소 알았다.
분수를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내 형편을 알고 그에 맞게 사는 것이다. 모
자라지도 않으면서 더 많이 욕심을 내는 것 또한 분수를 모르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돈을 제대로 다루는 훈련이다. 나는 부모에게서 그런
훈련을 받지 못했다. 나의 손자들은 어리지만 돈에 대한 분명한 목적을 갖
고 있다. 돈으로 뭐할 거냐고 물으면 나름대로 계획이 있다. 그렇게 차곡차
곡 주체적으로 돈을 다루는 법을 알아 가면 돈에 휘둘리지 않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언제나 돈이 부족하다고 느끼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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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에 대한 균형 감각이 진짜 행복을 만들어 준다. 노후에 유용하게 쓸 수
있는 것은 지난날의 저축이다. 그런데 돈만 저축할 게 아니라 마음도 저축해
야 한다. 돈이 없으면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각오도 다져야 한다. 돈만 저축
하면 노후가 편할지 몰라도 마음을 저축하지 않으면 돈이 있어도 불행하다.
■ 젊은이를 가르치려 들지 마라
평화는 상대방이 내 뜻대로 되어지길 바라는 마음을 그만둘 때이며
행복은 그러한 마음이 위로 받을 때이며
기쁨은 비워진 두 마음 부딪힐 때이다. - 황대권 ‘야생초 편지’ 중에서
아마존 숲 속의 한 부족은 사냥을 하면 가장 나이 많은 연장자에게 먼저 바
친다. 연장자가 현명하게 고기를 나눠 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척박하고
험한 환경에서 살아남은 자의 연륜과 지혜에 기대는 것이다. ‘가족 가운데
노인이 있다면 그 가족은 보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라는 중국 속담이 있
다. 아프리카에는 ‘노인 한 사람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불에 타 없어지는
것과 같다’는 말도 전해진다. 생존에 필요한 정보를 연장자에게서 전수 받아
야 했던 시절에 노인이 가진 지식과 정보, 지혜를 칭송하는 말이다.
그런데 시대가 달라졌다. 예전에는 확실히 부모 세대가 자식보다 많은 정보
와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요즘은 거꾸로다. 나와 같은 노인 세대가 손수레
를 끌고 발로 뛰며 살아왔다면, 요즘 젊은이들은 스포츠카를 타고 고속도로
를 맹렬하게 달려가는 격이다. 젊은 세대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어마어마
한 양의 정보를 흡수하며 산다.
이러한 첨단 시대에 “노인은 보석이다. 도서관이다” 라는 말을 썼다가는 무
안을 당할 것이다. 그것은 머지않아 죽은 말이 될지도 모른다. 삶의 노하우,
생존방식, 온갖 정보와 지식은 노인의 머릿속이 아니라 버튼 몇 개만 누르면
결과를 자동으로 보여주는 스마트한 기기들 속에 아주 방대하게 쌓여 있다.
젊은 세대들은 광속과 같은 변화의 속도에 빠르게 적응하며 삶의 방법이나
양식을 개발한다. 그들은 새로움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바로 이 점이 나이
든 사람들과 젊은이들을 가른다. 나이가 들면 민첩함이 떨어지고 행동이 느
려지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과거에만 사로잡혀 내 경험만이 특별하고 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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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생각으로 젊은이를 바라보는 데 있다. 이런 이상한 고집이 젊은 세대를
이해하고 그들과 소통하는 데 장애를 일으킨다. 나아가 두 세대 간의 갈등을
만들고 나이든 이들은 자기 세계에 고립되고 만다.
“요즘 애들은……”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젊은
세대를 나약하다, 이기적이다. 무례하다. 도전할 줄 모른다고 비판한다. 그래
서 “내가 젊었을 때는”으로 시작하는 충고를 늘어놓는다. 그러나 통하지 않
는다. 왜 그럴까?
두 세대는 청춘 시절이 다르기 때문이다. 나와 같은 노인 세대는 전쟁과 가
난을 겪으며 엄청난 고생을 했다. 이런 고생이 결코 훈장은 아니다.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니다. 단지 우리 세대가 만난 시대적 어려움이었으며 우리는 그
속에서 살아남았다. 그 뿐이다. 물질과 문화적 풍요로움을 누리며 살아가는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아무리 전쟁과 가난, 고통, 극기와 인내를 이야기한들
따분한 소리로밖에 안 들린다.
요즘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라. 꿈과 공부, 경쟁, 상대적 가난, 인간관계, 연애, 취업문제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고 있다. 노인 세대가 굶주림과 생존, 이념의 공포와 싸우며 살았다면 젊은 세대는 또 다fms 면에서 삶의 위협을 받고 있는 것이다. 또 사회 문화적 현상과 가치관들도 급격하게 변했다.
돌이켜보면 어느 시대에서나 청춘은 힘들고 불안하고 어렵고 두려움에 찬 시기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런 시기를 지나가야 한다. 특정한 시대라서 더 불운하지는 않다. 예로부터 시대적 어려움과 혼란은 언제나 있어 왔다. 그런 시기를 통과한 연장자로서 나는 요즘 젊은이들이 겪는 고민과 좌절, 갈등이 안쓰럽다. 불안과 미래와 씨름하는 청춘들에게 연민을 느낀다.
한편으로는 ‘아프니까 청춘’ 이라고 하면서 안간힘 쓰며 살아 내는 그들이 대단하다. 이들에게 이렇게 살라, 저렇게 살라, 명령하듯 가르치려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나이 든 사람들이 젊은이들에게 해 줄 것은 우리는 이렇게 살았으니 너희도 이렇게 살라는 것이 아니다. 너희는 잘 하고 있다는 격려다.
인생은 드넓은 바다다. 내가 젊은 날 알고 있던 고기떼가 몰려다니는 해역은 해류나 환경의 영향으로 언제든 달라질 수 있다. 또 나만의 고기 잡는 방식도 오늘날엔 비상식적일 수도 있다. 거친 바다로 새롭게 고기잡이를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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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어부들에게 늙은 어부가 들려줄 것은 생생한 바다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 이야기에서 젊은이들이 보석 같은 삶의 노하우를 발견한다면 그것은 그의 행운일 따름이다.
■ 오늘을 어제의 기분으로 살지 마라
나이 아흔을 넘기며 맞는 / 하루하루 /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뺨을 어루만지는 바람 / 친구에게 걸려 온 안부 전화 / 집까지 찾아와 주 는 사람들 / 제각각 모두 / 나에게 / 살아갈 힘을 / 선물하네
- 시바타 도요 ‘약해지지마’ 중에서
“ 오늘도 또 깨끗한 새 정신으로 공부해 주기 바란다.”
이 말은 내가 초등학교 때 조회 시간에 들었던 교장 선생님의 훈시다. 내가 4학년 때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았다. 그해 새로 부임해 온 교장 선생님은 아침마다 운동장에 전교생을 모아 놓고 조회를 했다. 아침 체조가 끝나면 교장 선생님의 훈시가 이어졌는데 매일 같은 내용이었다.
같은 말이 지겨워진 우리는 교장 선생님이 단상 위에 올라가면 선수를 쳐 그 말을 합창하고는 깔깔거렸다. 그럼에도 교장 선생님은 아랑곳 않고 “학생 여러분, 오늘도 깨끗한 새 정신으로 공부해 주기 바랍니다” 라고 결연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결국 나는 한 편의 코미디를 보듯 졸업할 때 까지 3년 내내 그 훈시를 들었다. 그리고 졸업과 동시에 교장 선생님의 말씀은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갔다.
수십 년이 흘렀다. 퇴임을 한 어느 날, 연구실에 혼자 앉아 있다가 문득 교장 선생님의 말이 떠올랐다.
“매일 아침 깨끗한 새 정신으로 공부하기 바란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절묘한 말이었다. 깨끗한 새 정신을 가지라는 말은 머리를 맑게 비우라는 것이다. 어제의 기분을 오늘로 이어가지 말고 새로운 마음 가짐으로 시작하라는 뜻이다.
그 옛날 교장 선생님이 들려준 훈시는 삶을 지루하지 않게 살아가는 지혜였다.
의대생 시절 공부하던 전공 교과서에 ‘환자를 진찰할 때 언제나 처음 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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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처럼 대하라’는 지침이 있었다. 환자에 대한 선입견을 갖지 말되, 오로지 그 환자에게 집중하라는 의미다. 깨끗한 정신으로 하루를 맞으라는 것은 오늘 하루에 집중하라는 뜻도 된다.
똑같은 하루지만 누군가에게는 어제의 연장일 뿐이고, 또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하루의 시작이다. 누구의 하루가 더 활기차고 즐거울지는 분명하다. 나이가 들수록 하루하루가 비슷하게 흘러간다. 일상에 큰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 어제가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이다. 늘 반복되는 생각이 지겹다. 내 자신이 마뜩찮게 느껴진다. 왜 이렇게 사는지 자괴감에 빠지기도 한다. 여기서 멈춰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오늘 하루뿐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존 러스킨은 ‘인생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채워지는 것’이라고 했다. 하루하루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무엇으로 채워 가는 것이다. 하루하루 ‘깨끗한 새 정신’으로 살아야 좋은 인생을 살 수 있다. 65년 전 교장 선생님의 훈시를 지금에야 그 뜻을 깨닫고 가슴에 새긴다. 늦었지만 기쁜 통찰이다.
■ 내가 나이 듦에 대처하는 방식
나이를 먹어 좋은 일이 많습니다. 조금 무뎌졌고 조금 더 너그러워질 수 있으며 조금 더 기다릴 수 있습니다. (중략) 고통이 와도 언젠가는, 설사 조금 오래 걸려도 그것이 지나갈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 공지영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 중에서
네팔 룸비니 동산에 갔을 때다 룸비니 동산은 석가모니 부처가 태어난 불교의 성지다. 2600년 전 석가족의 왕비 마야 부인은 친정으로 아기를 낳으러 가다가 이곳에서 산통을 느끼고 사라수 나무 밑에서 석가모니를 낳았다. 아름다운 숲이 우거진 낮은 언덕을 상상했는데 막상 보니 룸비니 동산은 밋밋한 정원처럼 보였다. 문득 앞서가는 한 무리의 여행객들 사이에서 낯익은 한국말이 들렸다.
“여기가 룸비니 동산이야? 볼 게 하나도 없네.”
실망한 목소리다. 성지라기에 잔뜩 기대하고 왔는데 신비롭기는커녕 네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시골 풍경에 지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불교를 조금이라도 알고 이해한다면 구석구석 성스럽지 않은 곳이 없다. 넓은 땅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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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서 있는 사라수 나무는 2600년 전 석가모니의 탄생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오히려 성스러움과 신비함은 아주 평범하거나 그보다 못한 환경에서 나온다. 예수 또한 베들레헴의 시골 마을 마구간에서 탄생하지 않았나. 평범한 풍경 속에 감춰진 2600년 전 시간을 더듬어 보고 느낄 수 있다면 룸비니 동산은 볼거리가 무궁무진하다 반대로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 헤아린다면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나이 들어 맞이하는 인생은 룸비니 동산과 비슷하다. 발견하고자 한다면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찾아낼 수 있다. 나이를 먹으면 늙고 병들고 무기력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나이 듦의 전부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노년은 잔잔한 호수를 떠가는 나룻배다. 나룻배는 동력이 거의 없다. 젊은 날에 소진했기 때문이다. 조금 남아 있는 힘으로 저어야 하는 나룻배는 천천히 갈 수밖에 없다. 배의 속도에 맞춰 주위 풍경도 천천히 흘러간다. 평소 보지 못한 많은 것들에 눈길이 닿고, 작은 소리도 가깝게 들려온다. 나무의 푸른 이파리, 나무에 둥지를 튼 새들의 지저귐, 일렁이는 물결, 그리고 노를 젓는 내 손등에 도드라진 힘줄까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노년은 인생에서 느린 속도가 허락된 시간이다.
젊은 시절에 이런 느긋한 여유를 즐기기란 쉽지 않다. 늘 내일내일, 다음다음을 생각하느라 몸과 마음이 바쁘기 때문이다. 학부시절부터 본 때 묻은 책들, 목욕탕에 가득한 하얀 김, 아들내외가 간식거리로 사 온 전병과자, 어렸을 때 어머니에게 떼를 쓰며 울던 기억들……. 나이가 들어 비로소 눈뜬 오감은 인생의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고 맛보게 한다.
그런데 나이가 들었다고 모두 이런 즐거움을 느끼며 사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원하지 않으면 절대 구할 수 없다. 룸비니 동산처럼 말이다. P. 맥스웰이란 사람이 한 말이 있다. “나이 먹는다는 사실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노년기는 발견의 시간이라고 말해 주고 싶다. 만약 그가 무엇을 발견하라는 말이냐 묻는다면 나는 ‘혼자 힘으로 발견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발견이 아닐 테니까요’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동감이다.
노년은 일상적이고 사소한 것에서 충만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시기다. 생물학적으로 늙는다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적인 현상이지만 우리가 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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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가는 모습은 제각각이다. 세월은 많은 것을 가져갔다. 건강과 에너지, 일과 의욕 그리고 미래, 그러나 나에게는 남은 것이 있다. 많은 시간과 깊어진 눈과 즐길 줄 아는 여유다. 그것으로 남은 인생을 즐기며 살아갈 것이다.
■ 내가 웃으면 아내도 웃고, 아내가 웃으면 나도 웃는다
서로 다른 점을 각자의 타고난 개성으로 인정하지 않고 ‘틀린 점’으로 취급하는 순간, 상처가 자리잡기 시작한다. 처음 만났을 때의 마음처럼 ‘다르다’를 ‘다르다’로 기쁘게 인정하자. 세월이 흘러 ‘다르다’가 ‘틀리다’로 느껴진다면 이전 보다 꼭 두 배만 배려하는 마음을 갖자.
-최일도 ‘참으로 소중하기에 조금씩 놓아주기’ 중에서
주방에서 커피를 타며 흘깃 바라본 아내는 눈이 잘 보이지 않는지 등을 움츠려 모니터 가까이 다가간다. 결혼한 지 50년, 아내와 함께 살아온 세월이다. 그동안 아내는 이 고집불통인 남자를 어떻게 받아 주었는가! 언젠가 아내에게서 자신은 지난 30대 시절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다.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으며, 네 명의 아이들을 낳고 키우고 살림하느라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몰랐다는 것이다. 아내의 기억 속에 남편인 나는 결국 시국 사건으로 감옥에 가 있거나, 쥐꼬리만 한 월급을 가져다주거나, 병원 일에 정신없는 모습으로 그려질 뿐이었다. 30대가 삭제된 것 같다는 말에 나는 미안하고 또 미안했다. 늘 믿음직스럽고 지혜로운 아내에게도 그늘이 있었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팠다.
아내는 여동생의 친구였다.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다가 아내가 대학에 들어가면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편지가 오갔다. 아내는 서울대학교를 나는 대구에서 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아내가 선을 본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프러포즈를 했다. 편지에 아무 것도 적지 않고 ‘나는 너와 ㅇㅇ 하고 싶다. ㅇㅇ를 채워 보라’는 문제만 썼다. ㅇㅇ에 들어갈 말은 많았지만 아내는 ‘결혼’이라고 생각했단다. 지금 생각해보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프러포즈다.
둘 다 가난했던 우리는 예식장을 빌리기도 어려웠다. 신혼여행도 등산복 입고 텐트를 짊어지고 기차 타고 산으로 갔다. 깊은 산, 바람에 펄럭이는 텐트 안에서 첫날밤을 보내며 내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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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다음에 돈 많이 벌면 우리 세계 일주하자.”
아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면 아내와 나는 뜨거운 감정보다 오누이처럼 편안하고 다정했다.
부부 싸움을 하게 되면 우리는 먼저 말을 멈췄다. 다음에는 존댓말을 썼다. 부부 싸움을 하는 순간 마음속에는 상대에 대한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일어난다. 존댓말은 그런 나쁜 감정을 누그러뜨리는 데 효과적이었다. 아내와 나는 갈등을 없애는 합리적인 싸움을 하려고 애썼다. 시간이 흘러 그런 노력들이 쌓이면서 서로를 애틋해하는 결실로 맺어진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결혼은 한 인간과 인간이 만나, 배우자를 통해 풍부한 인생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행복한 결혼을 결정짓는 것은 경제력이나 학벌이 아니다. 행복은 생의 기쁨과 슬픔, 괴로움을 함께 나누면서 서로 주고받는 긍정적인 상호작용이다.
나이가 들면 남녀의 모습이 바뀐다. 남성은 중년기로 접어들면서 공격적인 성향이 관계 지향적으로 변한다. 여성은 감정 표현이 자유로워지며 거침이 없어진다. 그러니 남편은 권위적인 자세를 고집해서는 안 되며 예전의 수동적이고 온순한 아내의 모습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아내 또한 은퇴 후 남편들이 정서적으로 많이 기댄다고 해서 부담스럽게 여기지 않아야 한다. 즉 서로의 변화를 인정하고 그러한 변화에 적응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나에게 아내는 내 인생의 동료였다. 아쉬운 것은 우리 사이에 알콩달콩 아기자기함이 없었다는 점이다. 팔순 가까운 나이에 늙은 아내에게 너스레를 떨며 온갖 아양을 부려 보지만 아내는 못 봐주겠다는 표정이다. 돌이켜 생각하면 부부사이에 사소한 재미가 많아야 노년이 즐겁다.
지금, 내가 웃으면 아내도 웃고, 아내가 웃으면 나도 웃는다. 참 감사한 일이다.
■ 배우자가 먼저 죽을까 봐 걱정되는 당신에게
1960년대 우리나라 남성의 평균 수명은 51.1세였고, 여성은 53.7세로 수명 차이가 2.6세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2000년 조사에는 남성이 71.7세, 여성은 79.2세로 여성이 평균 7.5세를 더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 여기에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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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 남성이 여성보다 서너 살은 많으니 여성은 남편 없이 혼자 10여 년을 더 사는 셈이다.
여성은 남편 없이 혼자 살아가는 생활이 어려울 것이다. 돈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혼자보다 부부가 함께할 때 정서적 안정감은 높다. 서로를 향한 잔소리와 원망이 자극과 활력이 되기도 한다.
백년해로라는 말이 골동품처럼 취급되는 요즘이지만, 나는 평생 연분은 인간만이 만들어 가는 것이며, 한 사람에 대한 평생의 사랑과 봉사는 여전히 아름다운 가치라고 생각한다. 아내가 차려주는 따뜻한 밥을 먹고 살려면 아내의 말에 귀 기울이고 애지중지 아껴줘야 한다. 또 늙은 과부가 되기 싫으면 남편 기 살려주고 건강관리 해 주는 등의 노력을 해야 한다.
■ 노인의 귀가 큰 까닭
60여 년 전, 아버지 손을 잡고 대구 경북중학교에 입학시험을 보러갔다. 문득 아버지가 학교 입구에 서 있는 버드나무를 가리키며 당신이 이 학교에 다닐 때 심은 거라고 하셨다. 나는 버드나무를 올려다보며 꼭 이 학교에 입학해 아버지가 공부하던 교실에서 공부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중학교 입학 후 칠성동에 종합운동장이 건설되었다. 운동장 둑에 플라타너스를 심는데, 우리 학교 학생들이 동원되어 나도 몇 그루를 심었다. 훗날 결혼하여 아버지가 되고 나서 아들과 함께 종합운동장을 찾았다. 나는 플라타너스 앞에서 “이 나무는 아빠가 중학교 다닐 때 심은 거란다”하고 말해 주었다.
그런데 아들은 “그래요?” 할 뿐, 내가 왜 자기를 이곳에 데려 왔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소년 시절의 나는 아버지가 어린 시절 심었다는 나무를 보고 감동했는데 같은 상황에서 내 아들은 별 느낌이 없었다. 나에게 동기를 부여해 준 아버지의 방식이 내 아들에게는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부자지간의 정을 근사하게 느끼게 해 주고픈 아비의 마음은 싱겁게 끝나 버렸지만 얻은 것이 있었다. 같은 상황에서도 아들과 내가 느끼는 감정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이다.
상대의 감정에 이입해 생각하는 것이 공감이다. 또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상대가 나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배려다. 공감과 배려의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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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인생의 경험과 비례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나이가 들면 육체적, 정신적으로 나약해지면서 성격이 수동적으로 변한다. 누군가에게 기대려 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한다. 자신의 욕구에 반하는 상황에서는 쉽게 노여움을 타기도 한다. 그래서 노인이 되면 어린아이가 된다는 말도 있다.
나이가 들어 다른 사람과 갈등이 생길 때 가장 좋은 해결 방법은 말하는 것보다 많이 듣는 것이다.
사람의 몸에서 귀는 제일 늦게까지 성장한다고 한다. 그래서 노인의 귀는 크다. 귀가 큰 사람일수록 장수하는 것이 아니라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귀가 커지는 것이다. 그런데 귀가 크다는 것은 그만큼 듣기에 치중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 이젠 그만 자신에게 너그러워져라
나이가 들면 자신에게 너그러워져야 한다. 너그러움에는 나의 지난 잘못을 마주할 수 있는 것도 포함된다. 나 자신을 솔직히 바라볼 수 있다면 진짜 제대로 나이를 먹은 것이다.
내 인생의 전반부에 나에게 강의를 들었던 학생과 후반에 강의를 들은 학생들은 전혀 다른 내용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젊은 시절 나는 학생들에게 내 인생의 좋은 면, 상공 사례만을 주로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서는 실패 사례를 많이 이야기했다. 부끄러운 점, 감추고 싶은 점을 있는 그대로 말해 주었다. 그런데 후반부에 내 강의를 들었던 학생들의 호응도가 더 높았다. 학생들은 안도했다. ‘교수님에게도 저런 모습이 있었구나’ 하며 동질감을 느끼고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라고 결심했던 것이다. 한 번은 내가 사이버 대학 게시판에 글을 올렸는데, 거기에 이런 댓글이 달렸다.
“선생님은 남들이 보기에 치부라고 할 수 있는 걸 어쩌면 그렇게 솔직하게 이야기하나요. 정말 고맙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세 가지 일은 증오를 사랑으로 갚는 것, 버려진 자를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자기 잘못을 시인하는 것이라고 한다.
인생에서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적은 시점에 이르면 실수와 실패, 잘못된 일들을 돌아보면 좋겠다. 기록으로 남기는 것도 좋다. 후회 혹은 속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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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기록이다. 그게 진짜 회고록이다.
■ ‘그때 나는 왜그랬을까?’라며 자꾸만 후회하는 당신에게
누구에게나 나쁜 과거, 아쉬운 기억, 후회가 있다. 나이가 들어 갈수록 회상, 아쉬움, 불만 등 기억의 가짓수는 늘어 간다. 우리는 곧잘 과거 속에 빠진다. 이미 지나간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과거는 곧잘 현실을 가로막는다.
불가에 ‘지금 네가 선 자리를 꽃방석으로 만들라’ 는 말이 있다. 과거도 미래도 보지 말고, 지금을 보라는 말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니 노력해야 한다. 과거는 우리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는다. 미래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늘 오늘을 살 뿐이다.
과거는 과거다. 살아온 시간이 길수록, 몸이 바쁘지 않을수록 과거 속에 살기 쉽다. 제일 좋은 것은 과거를 잊어버리는 것이지만 완전히 잊기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갖고 놀아라. 과거는 심심할 때 잠깐 불러내 가지고 노는 것쯤으로 생각하면 어떠한가.
2013. 8. 10.
다음에 chapter 3, 4, 5 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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