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7. 26. 16:23ㆍ독서후기
행복의 충격
■ 김화영 산문집
0 서울대 불문과, 동대학원 석사
0 프랑스 엑상프로방스 대학 문학박사
0 30여 년 동안 고려대 교수
0 문학평론가, 번역가
0 저서 : 바람을 담는 집, 김화영의 알제리 기행, 시간의 파도로 지은 성,
소설의 숲에서 길을 묻다 등.
0 번역서 : 알베르 까뮈 전집(전 20권), 내 생애의 아이들, 섬, 걷기 예찬, 마담보바리, 어린 왕자 등 90여 권.
■ 개정판 서문
이 책은 1975년 6월 민음사에서 처음 출간되었다. 소설가 김승옥이 장정한 ‘오늘의 산문선’ 시리즈에 포함된 나의 첫 저서였다.
나이가 서른일곱이 되도록 이 책은 자취를 감추지 않고 서점의 한구석에서 꾸준히 기다리며 독자를 맞아왔다.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본 적은 없지만 이 책은 그 긴 세월 동안 한 번도 절판되지 않았다. 이 책이 나온 이듬해 나는 결혼했고 다시 엑상프로방스로 돌아가 신혼살림을 차렸다. 그곳에서 태어난 첫딸보다 나이를 먹은 이 책을 이제 문학동네에서 더 젊은 모습으로 다시 펴낼 수 있게 되어 기쁘다.
“바다, 언제나 다시 시작하는 바다!” 언제나 다시 시작하는 젊음의 목소리가 이 책 속에서 출렁이길 바란다. 열흘 뒤면 나는 다시 프로방스로 떠난다. 그곳에서는 아직도, 행복은 습관이 아니라 충격이다. 행복은 이 땅 위에 태어난 우리의 하나뿐인 의무다.
2012년 6월 김화영
■ 책머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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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이나 지식이나 견문을 넓히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이 책이 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이 책은 또한 능률적이고 경제적인 여행안내에도 기여하지 않는다.
영혼의 깊숙한 곳에서 일찍이 꿈꾸어본 일이 없는 풍경이나 공간을 우리는 참으로 볼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하나의 꿈이 어떤 현실의 풍경과 서로 만나는 사랑의 기록이다.
‘지중해’는 그러므로 한 지리 공간만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체험적 시간만도 아니다. 그 양자 사이에 창조된 자장 속에 지중해는 있다. 가득찬 현재로 풍부하게 있다.
1975년 3월 김화영
■ 지중해, 나의 사상
나는 언제나 이국(異國)의 어느 도시에
아무 가진 것 없이 홀로 도착하는 것을 꿈꾸었다. - 장 그르니에
‘다른 곳’은 공간에 있어서의 미래이다. ‘다른 곳’과 ‘내일’ 속에 담겨 있는 측정할 길 없는 잠재력은 모든 젊은 가슴들을 뛰게 한다.
떠난다. 문을 연다. 깨어 일어난다. 라는 동사들 속에는 청춘이 지피는 불이 담겨 있다. “이것은 모든 젊은 사람들이 가지는 최초의 욕망이다. 젊은이는 그의 소원들이 다른 곳에 가면 충족되리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행복해질 수 있고 사랑할 수 있는 장소가 이 세상의 어느 곳에 따로 있다는 말일까? 그러나 젊은이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랑곳없다. 청춘은 그 자체가 자기 스스로의 정당화가 된다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 청춘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믿을 수 있는 이유를 얻으며, 자기가 믿는 것을 증명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이 특권을 이해하지 못하는 때가 오면 우리들의 모든 변명에도 (지혜라든가 조심성이라든가 분별 같은 것의 이름으로) 불구하고 우리는 이미 늙기 시작한다. 두 번 다시 되풀이할 수 없는 것들의 수가 늘어나고, 속 깊은 공포감을 안락의 방 속에 감추려 한다. 그리고 늦가을 바람이 옷깃에 스며들 때면 가슴속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쓰러지는 소리를 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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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의 귀를 막고 그 쓰러지는 나뭇등걸의 소리를 듣지 않으려 애쓰며 등불을 켜고 지나간 시절의 빛바랜 사진첩을 연다.
아아, 이미 떠나지 않는 청춘. 문을 걸어 닫고, 책상다리를 하고 아랫목에 앉은 청춘, 잠들어버린 청춘이 그 사진들 속에 갇혀있다. 그때 사그라져가는 불등걸 같은 가슴에 껴안아보는 ‘행복’이란 말 속에는 청춘이 벗어놓고 외출한 옷이 걸려 있을 뿐, ‘행복’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라는 것을 이미 이해하지 못할 때는 너무 늦었다.
너무 늦기 전에, 겨울이 오기 전에 나는 모든 젊은 사람들처럼 떠났다. “나두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는 아마도 아름다운 시(詩)는 아닐지 모르나 저마다의 가슴속 진동하기 쉬운 핏줄을 두드리는 외침임에는 틀림없었다.
1969년 가을. 이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을을 등으로 밀어내면서 나는 지중해를 향하여 떠났다. 그러나 그때 나는 지중해로 가는 여정이 그토록 머나먼 길인 줄은 아직 이해하지 못하였다.
우리들이 참으로 ‘떠난다’는 일은 쉽지 않다. 떠나는 방법을 아무도 가르쳐 줄 수 없는 것이다. 수없이 떠나본 사람에게도 모든 ‘떠남’은 항상 최초의 경험이다. 떠나는 방법은 자기 스스로에게도 교육할 수 없는 것이다.
‘미지의 것’ ‘다른 것’ ‘다른 곳’이 감추고 있는 ‘새로움’은 우리들의 모든 유익하였던 경험들을 무용하게 하는 데 그 힘이 있다. 행복을 향하여 미래를 향하여 새로운 낙원을 향하여 떠나는 자는 사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 그 공포를 지불하는 순간에 가슴을 진동시키는 놀라움을 향하여 떠나는 것이다.
그러나 멀리 떠나면서도 절대로 떠나지 않는 자들의 시대가 이제는 오기 시작했다. 이런 시대는 그 독특한 이름으로 부끄러움도 없이 내걸 줄도 안다. 관광의 시대. 오직 저마다 은밀한 영혼 속에서 회오리바람처럼 오고, 소용돌이처럼 뒤집히고 충격과 혁명을 불러일으켜야 할 것들이 이제는 집단적으로 소비되기 시작한다.
한 생애의 방향을 바꾸어 놓는 변혁의 출발이 될 수도 있는 ‘떠남’을 회사가 ‘경영’하기 시작한다. 관광안내서와 광고가 ‘떠남’을 조직하고 교육한다. 모든 위험, 모든 예기치 않은 일, 모든 낭비, 모든 두려움이 제거되고 예방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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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호텔이 예약되고 왕복 여객기, 일정이 직업적으로 안정된다.
은밀한 속내 이야기를 구하는 여행자의 시대가 끝나고 관광객 떼들의 시대가 오는 것과 함께 우리들 속 깊은 곳에 충격과 경이와 그에 수반되는 가장 드높은 의미의 고독과 공포감도 끝이 나버린다.
이제는 이미 답사되지 않은 곳이 없는 듯싶어 보이는 우리들의 별. 자전을 하고 있다는 이 별의 도처에서 회비를 낸 모든 손님들은 안심한다. 추억도 집단적으로 저장된다. 일상의 거리에서 보는 것과 다른 찬란한 버스가 광장에 도착한다.
어느 날 하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천천히 에펠탑 앞 광장을 지나가보라. 버스에서 왁자지껄 내리는 백발의 노파나 중년의 일본인들, 빠르고 익숙한 솜씨로 탑을 배경으로 가서 서고 찰칵, 코닥회사의 가벼운 사진 상자도 아사히 펜탁스의 무거운 제품도 다 같은 풍경, 다 같은 추억을 125분의 1초 만에 저장한다.
사람들은 그래도 마지막 개별성, 마지막 ‘소유’를 위하여 ‘내가 들어가 있는 풍경’, ‘나의 추억’을 제조하기 위해 사진을 찍고 그러고 일 분 후면 버스에 오르고 관광회사가 문을 닫는 시간을 향하여 떠난다.
‘공간’을 담는 기계는 생산되었으나 ‘시간’과 ‘기간’을 담는 기계가 생산되지 않은 덕분에 우리는 모두 같은 추억들을 보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인생이 살과 피와 영혼에 가장 와 닿는 시간, 내 피부를 껴안아오는 그 공간의 그 참다운 비밀을 맛보지 못하는 대신 ‘효율’과 ‘시간과 경비의 절약’에 성공한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관광회사들은 ‘우연’을 배제하고 안락한 ‘기지(旣知)의 필연 속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참으로 떠난다는 것은 두렵다. 몸이 떠난다고 해서 늘 풍경을 떠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지중해에 도착하는 데 수년이 걸렸다는 말은 내가 나의 풍경으로부터 떠나는 데 그리도 오래 결렸다는 뜻이 된다. 그것은 오직 공포 때문이다.
낯선 공간으로 이동하는 공포, 몸에 익은 공간으로부터 밖으로 나가는 자의 공포이다. 이 공포는, 말은 쉬우나 쉬 극복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공포는 아마도 정신적 공포가 아니라 몸의 공포일지도 모른다. 우리들의 두뇌가 쉬 잊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공간이 사실은 우리들의 살 속에 새겨져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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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몸이 기억하고 있는 세계, 살이 담고 있는 공간을 우리는 떠나면서도 끌고 가기 쉽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들은 달팽이 같은 면을 가지고 있다. 떠나면서도 항상 ‘저의 집’에 살고 있는 그 완만한 동작의 달팽이를 지켜본 일이 있는가?
달팽이에게는 집이 따로 없다. 그의 몸의 일부가 그의 영원한 집이다. 그러나 우리들 몸이 기억하는 풍경은 저기 어느 곳에 따로 있고 그 풍경을 떠나 있는 우리들을 그곳으로 끌어 당긴다. 회향병이니, 고향이니, 조국이니, ‘나의 집’이니 하는 것들은 떠나 있는 자들을 끊임없이 떠나지 않게 하는 구심점이다.
그러나 달팽이는 세상의 어느 곳에서도 ‘저의 집’ 속에 있고 어디를 가나 저의 고향, 저의 조국 속에 살고 있다. 그래서 그의 집은 주소가 없다. 달팽이는 쉬 떠나지 못하는 붙박이, 겁 많은 여행자보다는 유랑하는 유목민이나 집시나 남사당 같은 이들에 가깝다.
20여 년 동안 내 살이 기억하고 있는 한국을, 무명(無名)의 공간, 그러나 유일한 내 생의 구심 공간으로 지닌 채 열일곱 시간 뒤 나는 지구의 반대편 파리에 와 있었다. 내 공간은 흔들리기 시작하였고, 오랫동안 구경해보지 못했던 지구본의 그 추상적인 기하학을 무용하게 머릿속에서 돌리면서 파리의 거리, 여자들이 무릎까지 오는 장화를 신고 이상한 화장품 냄새로 가득 채우며 지나가는 그 대도시의 거리에서 문득 ‘미아’의 생래적 고통을 이끌고 나는 걸어 다녔다.
파리의 늦가을은 써늘하다. 이상한 일이다. 방향감각이 혼란되면 더욱 춥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할 때 나의 눈은 보지 않는다. 사물을 보는 나의 눈은 나의 밖에 있는 사물만 보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동시에 본다. 나와 사물과의 통제할 수 있는 거리를 우리는 이상하게도 친밀감이라고 부른다. 그때 내 몸은 그 친밀감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나와, 내가 건너서고 있던 예술교(퐁데자르), 나와 저 아래 검게 번득이며 흐르던 센 강 강물 사이의 거리를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오직 상하류로 터진 강물 위의 빈 공간을 쓸며 내 목덜미를 쑤시던 늦가을 바람만을 나의 살은 느끼고 있었다. 빨리 파리를 떠나서 이르고 싶었다. 이르러 정착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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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프로방스 까지는 멀다. 서울에서 받은 전보에는 전보 특유의 간략한 몇 마디 속에 나의 행선지인 ‘엑상프로방스’라는 지명이 적혀 있을 뿐이었다. 내가 소유하고 있던 1959년도판 라루스 백과사전은 “인구 5만 4천 2백, 주교구(區), 대학, 기술학교, 뛰어난 기념물……로마인들이 기원전 123년에 건설”로 이 도시를 설명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내가 가진 나의 목적지에 대한 지식의 전부였다.
지도책을 펴놓으면, 파리에서 지중해를 향하여 내려가 마르세유에 이르기 전 작은 동그라미를 쳐놓고 긴 복합어 ‘Aix-en-Provence’가 쓰여 있는 것이 보인다. 그러나 기차는 어렴풋한 새벽, 이미 마르세유에 도착해 버렸다. 당황한 나에게 옆에 앉은 니스행 아주머니는 설명해주었다. 마르세유에서 내려 ‘엑스(엑상프로방스의 약칭)’행 기차를 갈아타고 다시 조금 위로 올라가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아직 해가 완전히 뜨지 않은 새벽의 어렴풋한 시간, 마르세유에서 엑스로 가는 그 빨간 완행 기동차 속에서 문득 나는 길인 줄 알고 따라갔다가 남의 안마당에 도착해버린 사람처럼 민망하였다. 파리발 로마행 국제열차 속에서 나는 직업적인 장거리 여행자들 중 하나라는 보편성을 느낄 수 있었고 사람들은 저마다 잠 속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새벽잠에서 깨어나 하루 일과의 리듬을 시작하는 이 기동차 속 승객들은 모두 저희들끼리만 낯익은 사람들 같았고, 황색 피부에 이미 국적을 써 붙이고 있는 듯한 나는 문득 이방의 틈입자였다. 수년 후에는 내 청춘의 가장 행복한 시절이 늙지 않고 잠겨 있는 곳이 될 이 소도시에 나는 이처럼 수줍고 말없이 도착하였다. 그러나 나의 도착은 무명의 것이 아니었다. 뿌연 새벽의 기차에서 내려서 고개를 떨구고 무겁게 피로한 몇 걸음을 옮겨 놓을 때 내 귀에 찾아와 신기하게도 제자리에 놓이는 것은 나의 이름이었다.
개찰구에서 기다릴 것으로 상상하였던 친구 K형이 객차 앞에 와서 웃는다. 비행기, 국제열차, 기동차를 갈아타고 멀리 도착한 이국의 소도시, 예기치 않은 장소에서 문득 당신을 무르는 모국어의 이름은 기적의 목소리에 실려오는 듯싶다.
내가 처음 발 디딘 엑스 시는 나를 개선장군이나 대사(大使)나 귀한 손님처럼 맞이하지는 않았으나 내 귀에 가장 익숙한 한국어. 나의 ‘이름’으로 반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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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도시나 그곳에 처음 접근하는 교통수단의 선택에 따라서 그 도시에 대한 인상은 달라진다.
어떤 도시의 관문인 기차역은 의외로 한 교통수단을 지나서 그 도시의 첫 번째 표정이 된다. 그런데 가령 국제 열차의 급행이 가지고 있는 규모를 버리고 조그만 기동차로 갈아타보라. 이내 당신은 어떤 대도시에 부속된 위성도시나 시골로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기동차의 좌석 배열이 그러하고 트렁크 대신 휴대용 손가방을 든 승객들이 그러하다.
그리고 한 시간 후 선로란 왕복 두 줄밖에 없는 작은 역에 기동차를 다 비우는 한 움큼의 사람들과 더불어 홈에 내려서면 이미 당신의 공간적 위치는 머릿속의 세계지도 위에서 생략된 곳이 되어버린다. 무엇보다도 역을 통하여 도시에 도착하는 사람이 경험하는 진입의 확실한 인상은 그 움직이지 않는 건물인 역사(驛舍) 특히 개찰구가 담당한다. 철도회사가 발행하는 빳빳하고 손 안에 쑥 들어가는 그 승차권은 단순한 추상적 물건이 아니라 원거리에까지 나를 데려다줄 것을 보증하며 나와 동반하는 공식적인 권위, 여행에의 초대를 웅변한다.
그리고 최초로 나의 여행이 끝났다는 것을 인식하게 하는 곳이 개찰구이다.
기차표의 반환에 덧붙여 새로운 도시로의 진입을 상징적으로 실감케 하는 것은 검표하는 역무원의 제복이다. 이 제복은 도시에 처음 접근하는 사람에게는 철도회사의 직원이라는 신분표시 이상으로 마치 도시의 성문을 열어주는 수문장과 같은 역할을 한다.
도시의 안과 밖을 단절하는 개찰원은 우리를 내려놓고 다시 여행을 계속하기 위하여 떠나버리는 버스의 승무원과는 얼마나 다른가!
한국 시골의 간이역을 아는 손님은 엑상프로방스의 조그만 역사로 인하여 시골에 도착했다는 생각을 할 터이고 손바닥만한 광장을 건너 왼쪽의 돌담을 떠나보내며 작은 카페의 테라스에 드문드문 나앉은 사람들 곁을 지나 빅토르 위고 로(路)를 따라 무거운 가방을 끌고 나아가는 여행자는 단지 흔한 도시에 도착하였다고 여길 것이다.
그리고 시의 심장부인 해방광장에 당도해보라. 드넓은 광장 한복판에 3층의 크고 드높은 분수, 그 위로 영원히 푸른 프로방스의 하늘을 등에 받들고 이제 막 목욕을 마치고 일어서는 반라 여인들의 조각상들, 그 아래 세차게 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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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는 물줄기에 흐드러진 갈기를 털고 일어나며 포효하는 듯한 청동의 사자들, 아름드리 플라타너스가 길 양옆으로 늘어서서 흐드러진 잎새로 하늘을 덮는 쿠르 미라보의 드넓은 포도(鋪道)를 천천히 걸어올라 그 왼쪽에 수없이 많은 어느 카페테라스 의자에 지친 몸을 앉혀 보라.
아아 나는 프로방스의 심장에 도착하였다. 라고 속으로 나직이 속삭여보라. 그리고 고개를 들어 당신의 두 눈 속으로 저 햇빛, 저 하늘이 속으로 천천히 흘러들게 해보라.
그 햇빛을 타고 플라타너스 잎새 속에 자욱이 날아다니는 새소리가, 청명한 새소리가. 기나긴 여행 동안 당신의 귀청 속에 남은 엔진 소리를 천천히 닦아낼 것이다.
관광안내서가 소개하는 생 소뵈르 대성당도 건축의 전문가가 아니라면 노트르담이나 샤르트르의 대성당을 구경한 후에는 헛된 노력이 될 것이며, 이 도시에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난 화가 폴 세잔의 생가를 고생스럽게 찾아간들, 우선 굳게 잠긴 대문의 손잡이를 몇 번이고 잡아 흔들어야 메마르고 키 큰 여자가 나와 당신을 안내한 후 입장료 1프랑을 요구할 것이고, 2층 화실에 오르면 평범한 방 하나에 낯익은 그림하나 전시된 것 없고 다만 몇 통의 친필 서한이 먼지 앉은 유리 상자 속에 전시되어 있을 뿐 창턱의 이곳저곳에 썩히고 있는 수많은 사과들이 막연하게나마 세잔의 정물화를 연상시킬 뿐이다.
혹 서울에 두고 온 친구 화백에게 동봉할 기념물로 사진 한 장이라도 찍으려고 해보라. 그 깡마른 키다리 여자는 당신에게 사진을 찍을 권리를 허락하기 위하여 다시 1프랑을 ‘규정에 의하여’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에게 남은 얼마간의 시간 여유가 있거든, 그리고 애써서 물어물어 찾아온 그 언덕바지 길의 피로를 풀고 싶거든 세잔의 집에서 바로 대문 앞에 가지런히 놓인 마당으로 나서서 눈앞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수목이 자욱한 궁륭 아래로 보일 듯 말 듯한 좁은 길이 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작은 숲길을 따라가면 아담하고 친근한 정원의 숲 속에 문득 공터의 풀밭이 나타날 것이고 그 고요한 가운데에서 당신은 문득 혼자가 된다. 당신은 서양 사람들에게 항상 성역과 같은 누군가의 ‘사유지’에 허가 없이 침입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처럼 만에 세잔의 담장이 보호해주는 아늑한 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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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서 한가로움을 맛보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안도하여보라.
벼락부잣집 정원의 값비싼 정원수, 발도 들여놓기 거북하게 손질한 잔디밭은 당신에게 멀다. 항상 기하학적인 대칭을 이루는 층계나 체육대회의 카드섹션처럼 기하학적 무늬를 다져 꽃을 심어놓은 프랑스 특유의 지나치게 인공적인 조원가(造園街)에서도 당신은 멀리 있다. 때때로 나는 주머니 속에서 1프랑짜리 은화를 잘랑거리면서 세잔네 정원을 찾아가 호젓한 저녁나절을 보내곤 하였다.
파리에서 누군가에게 ‘Aix(엑스)’를 아느냐고 물으면 그는 물론 엑상프로방스를 머리에 떠올린다. ‘아름다운 도시’ ‘다정한 도시’라고 대답하는 파리 사람들의 표정 속에는 꿈과 선망이 담겨 있다. 그 꿈은 어느 여름 오후를 보낸 쿠르 미라보 카페, 그늘지고 조용한 구시가의 작은 골목에로의 산책, 벤치 위에 내리는 햇빛의 반점들, 서점에서 만난 초록빛 눈의 처녀, 부활절 무렵부터 늦봄까지 피는 코클리코 붉은 야생화, 자동차로 15분이면 항상 눈앞에 출렁거리는 지중해, 근교의 푸른 하늘을 물들일 보랏빛 라벤더의 광활한 고랑들, 언덕배기에 자욱한 향로 텡(타임)의 그윽한 냄새, 토르네 성으로 넘어가는 언덕길 양 옆의 숲 속에 드문드문 자리잡은 하얀 별장들, 작열하는 태양에 빛이 바랜 붉은 기와, 시 인구의 반을 차지하는 학생들이 이 소도시를 가득 채우는 영원한 청춘의 설렘, 카페의 카운터 앞에 서서 낯선 사람과 어깨를 툭툭 치며 웃으면서 마시는 차디차고 독한 파스티스, 목마른 자에게 물의 정수를 맛보여주는 녹색의 박하수, 골목골목에 나직이 고요의 소리를 보태는 분수, 그리고 아, 그리고 모든 것, 은밀하면서도 다정한 것들, 바쁜 관광객들에게는 쉬 내보이지 않는 비밀들, 이 모든 기억들 쪽으로 그의 꿈은 남몰래 열려 있다.
그러나 엑상프로방스는 능률을 찾는 자, 시간이 바쁜 사람, 견문을 넓히려는 교양인, 소유의 노예들, 그리고 돈으로 살 수 있는 모든 것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일체의 환상을 거부한다.
역사의 유물이나 쉬 눈에 띄는 장관, 관광안내서가 말하는 감동, 이국 풍물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그가 버스에서 내리는 바로 그 자리에서 엑스는 알몸을 벗어 보이고 나서 이제 그만 떠나라고 권한다. 물론 햇빛에 굶주린 음산한 북쪽 사람들 대도시의 하염없이 흐린 하늘과 영원한 가랑비에 지친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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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들은 “햇빛!”이라고 목젖을 떨며 프로방스 하늘을 쳐다본다.
누구나 영원한 봄, 영원한 여름을 프로방스의 자산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참으로 햇빛이 우리들의 눈이 아니라 프로방스의 속담처럼 ‘나의 살을 노래하게 하는 것’이 되기 위해서 모든 부질없는 허영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프로방스는 완전히 절망한 사람이 올 곳은 아니다. 오직 행복한자, 아무 것도 소유한 것 없이도 이 땅위에 태어난 것이 못 견디게 기뻐지는 자들만이 올 곳이다. 아니 적어도 많은 절망의 한구석에 아직 저 필사의 모든 생명들이 공유하는 생명의 행복감, 우리들의 건강한 육체가, 죄 없는 육체가 아는 행복감의 씨앗을 아직 죽이지 않는 자들만이 올 일이다.
행복한 사람들, 행복해진 사람들이 서로서로 웃고 입 맞추고 손짓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이 마을에 절망한 자가 온다면 참으로 외로울 것이다.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은 남을 ‘위로’할 시간은 없다. 빛 속에 누려야 할 우리들의 행복의 시간도 촉박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곳에서 처음으로 슬픔뿐만 아니라 행복도 함께 나눌 수 있는 것임을 확인하게 된다.
프로방스의 매 순간이 사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행복의 축제’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였다. 죽어야 할 육체를 가진 인간의 가득한 행복만이 우리가 가진 진정한 조건, ‘비극’의 참의미를 가능하게 한다.
이들 삶의 축제를 관장하는 두 개의 신(神), 행복과 비극은 프로방스가 고대 그리스에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프로방스 사람들도 고대의 그리스인들처럼 말한다.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목욕하지 못한다.”라고.
그들은 혹은 알프레드 드 비니처럼 생각한다. “우리가 사랑할 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사랑하여야 할 것은 지나가버리는 것이다.”라고.
그러나 프로방스 사람들은 지식인의 태(態)를 철인의 태를 부리지 않는다. 그들의 몸, 그들의 몸짓, 그들의 웃음이 그 모두를 말한다.
■ 내 청춘의 고향, 프로방스
20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있어서 ‘기계문명이 초래한 해독(害毒)’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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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표현은 참으로 익숙하다. 그러나 선진국일수록 이 문제가 심각하리라고 예상한 나에게 엑상프로방스는 오히려 기계문명의 소외감에서 완전히 보호된 피풍 지대 같이만 보였다. 아마도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마주치며 이룬 골짜기의 과수원에서 사철 꽃과 과일과 떨어지는 잎과 내리는 눈, 그리고 해빙……이 행복한 시간의 리듬 속에서 보낸 유년 시절 이래, 나는 20년 가까운 대도시 서울 생활에 절을 대로 절어 있어서, ‘기계문명’이라는 수입된 용어에서 비참한 시정(詩情)마저 느끼고 있었는지 모른다. 가령, 가로수라고는 눈 닦고 보아야 찾을 길 없는 서울, 아니 서울에서는 왜 가로수를 그리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일까? 다른 나라에서는 구경한 일도 없는 식목일이 있고 모든 집단이 성스러운 행렬로 동원되어 도시의 가로에, 산과 들에 심은 그 나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애송이 플라타너스를 심어놓고 각목으로 테두리를 하고 책임 관리자의 푯말까지 달아두었던 길가의 희망은 항시 단명하였다. ‘5000년 역사’의 그 마술 지팡이 같은 전통 속에 자라온 이 나라에 대규모의 궁전이나 가옥이 없다는 것은, 잦은 전쟁이 목재의 문화유산들을 쉬 불태웠기 때문이라지만, 그러면 500년 도읍지 서울에 자라던 모든 나무도 불타버린 것일까?
나는 거의 20년 만에 처음으로 여권을 소지하고 비행기에 실려 지구를 돌아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온 격이 되었다.
그러나 프로방스가 나의 고향처럼 느껴지기 위해서는 수년이 걸렸다.
사철 밝은 햇빛이 구름을 타고 내려와 베란다 위에, 풀밭에, 거리에, 카페에 잘도 내리비치고, 소나무와 잡목림이 곳곳에 무성하며, 아름드리 가로수가 드넓은 포도위에 그 너그러운 그늘을 드리우고, 아르크의 실개천이 엑스 시를 굽이 돌며 그 빛 밝은 전원 풍경을 안고 흔들어 재우는 풍경이라고 묘사해 놓고 보면 나의 불안한 마음은 더욱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요컨대 나는 갑자기 병풍그림이나 외국의 원색판 사진첩이나 화집 같은 곳에 그려진 행복한 풍경 속으로 나 자신도 모르게 들어오게 된 틈입자만 같아서 안절부절못하였다. 수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나는, 그때의 얄궂은 저항감이나 불안정감은 아마도 내가 최초로 받은 ‘행복의 충격’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프로방스에 도착하기 전 나의 반생은 참으로 행복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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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이런 표현이 허용된다면 내가 때때로 경험한 행복은 단순하지 않고 반드시 어떤 아이러니컬한 형용사가 동반된 것들. 즉, ‘어두운 행복’ ‘비참한 행복’ ‘젖어 있는 행복’ ‘눈물겨운 행복’ 같은 것들이었다.
그 당시 나에게 있어서 ‘행복’이란 말은 이상하게도 ‘안정’이라든가, 또는 죽은 자들에 대하여 신문 기사들이 “좋은 남편이요 좋은 아버지였다”라고 회고하기 일쑤인 사람들의 ‘단란한 가정생활’, 혹은 ‘아담한 집, 따뜻한 방’ 따위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것은 잘 보호된 세계, 닫힌 공간을 뜻하는 것이었다. 거기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대학 시절 어디선가 읽은 장 폴 샤르트르의 말, “빤들빤들한 마누라와 동글동글한 자식들을 거느린, 볼 장 다 본 녀석”의 편안하고 문제없고 의미 없는 생활과도 행복은 그리 무관한 것이 아닌 듯 여겨졌다.
나는 무엇이 행복인지 알지 못하였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무방비 상태로 도착한 나에게 프로방스는 여유를 주지 아니하였다. 여기서는 행복이 완만한 속도로 꽃향기처럼 스며나오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행복의 외침으로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이 열린 풍경, 아무 것도 감춘 것 없는 전라의 풍경 속에서, 나는 오직 어리둥절했을 뿐이었다. 참으로 이곳에는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 아니 ‘지금’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은 올 것이 아니다. 이곳은 내일의 행복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올 곳은 아니다. 지금 당장, 여기서, 행복한 사람, 가득하게, 에누리 없이 시새우며 행복한 사람의 땅, 프로방스는 그리하여 내게는 그토록 낯이 설었다.
머나먼 미래를 준비하기 위하여 현재의 행복을 끊임없이 희생하며 살아온 사람들에게 지중해안의 사람들은 철부지 같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과거의 추억, 이미 떠나버린 사람, 이미 죽어버린 자들의 기억 속으로 저만큼 떠나 있어서 오히려 현재의 삶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사람들에게 프로방스 사람들은 감정이 메마른 사람들 인정 없는 사람들같이 느껴질지도 모른다.
과연 프로방스에는 어딘가 삭막한 데가 있고 피폐의 냄새가 난다. 우거진 숲도 이 풍경들의 심장부를 특징짓는 메마르고 모진 백골의 인상을 지우지 못한다.
아침마다 잠에서 깨면 나는 빛이 가득히 흘러드는 창가에 서서 시원하게 창문을 열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면 멀리 생트 빅투아르 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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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벗은 자태가 바라보였다. 이 석회질 많은 바위산의 백청색 모습은 항상 지극히 다감한 맛과 삭막한 맛을 한꺼번에 풍기는 것이어서 매일같이 이 산을 바라보면서도 그것을 어떻다고 형용하기 어려웠고 그 모습이 도무지 ‘이해’되지를 않았다. 나는 이 산을 바라보면서 이 산을 끊임없이 그리던 세잔 영감의 만년을 생각하였다. 이 바위산의 소박하고 단순한 형태 속에, 자기의 불안과 비탄을 숨길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인 깊은 현실감을 표현하고자 한 세잔은 생각하였다……우리들의 예술은 흘러가는 시간의 전율을 표현해야 한다. 자연을 그의 영원의 모습으로 환원시켜야 한다. 자연의 이 모든 현상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마도 모든 것이 담겨 있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진실이란 것은 그의 본질에 있어서는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색채만이 그 자신을 표현할 수 있다. 색채는 이 세계의 뿌리이다……라고 그는 생각하였다.
한국어로 ‘메마르다’라는 표현에는 긍정적인 뜻이 없다. 그러나 이 지방의 풍경, 이 지방 사람들의 감성을 부정적인 뜻을 담지 않고 표현하는 데 ‘메마르다’라는 말 이외에는 적당한 표현이 없다. 생트 빅투아르 산은 바로 이 메마르고 강직하고 비정한 고전(古典)의 감성을 물리적인 표정 속에 담고 있다.
“우리들 정신의 신전이며 제단인 생트 빅투아르의 암석이여, 에테르로 투명하게 닦이고 부푼 산이여, 새벽이 그대에게 정기를 주고 지는 해가 그대 심장에 불을 태우니 그대는 안개의 모자를 쓴 태풍을 거느린다. 생트 빅투아르여 그대는 눈에 보이는 영혼이요 살아 있는 얼굴이니, 그대 속에는 시간과 계절이 그 섬세한 표정을 비추인다. 풍경 속에 들어앉은 그대의 존재는 진정한 마법이니 아아 우리들의 눈은 흡족하여라.”
“대지가 메마른 곳에는 가장 현명하고 가장 탁월한 영혼이 있다.”라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을 후세인들은 “메마른 영혼이 가장 좋은 영혼이다”라고 번역하였다. 가장 메마르고 가장 견고한 그들의 영혼을 영원 속에 새겨두기 위하여 그리스인들은 수많은 신전과 수많은 조각상들을 깎아 세웠지만, 반면 그들은 이로써 그들의 건장하고 행복한 육체가 썩는다는 사실에 대한 가장 깊고 비통한 이해를 표현하였다. 알제의 젊은이들처럼 그리스인들도 행복이라는 도박을 그들의 육체에 걸었고 그 도박에서 실패하고 말 것이라는 것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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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들의 행복에는 희망이 없고 그들의 사랑에는 내일이 없고 그들의 기쁨에는 위안이 없다. 그리하여 그들은 매순간 가득하고 에누리 없고 회한 없는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비극적인 일생을 마치고 콜로누스에서 장님이 되어 죽어가면서 “그래서 참으로 모든 것은 좋았다”라고 결산한 오이디푸스 왕자는 그리스인이었다.
생트 빅투아르 산을 바라보면서, 나는 왠지 내가 사는 행복한 소도시 엑상프로방스는 사막의 한가운데 세워진 오아시스 같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주변에 물이 없는 것도 아니고 광대한 모래와 돌자갈의 사막이 가까이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늘을, 이 순간을 사는 사람들의 투철한 현재성, 뼈를 드러낸 것 같은 암석, 쥐어짜듯이 몸을 틀며 자라는 그 단단하고 강인한 올리브나무들, 건조한 땅에 자라는 소나무, 가시 같은 잎을 가득이 달고 선 향초 로즈메리, 평원에 드문드문 오직 하늘을 향해 모진 가슴 조이며 자라나는 삼목 등 모든 요소들이 단단하고 메마른 직립의 풍경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생트 빅투아르 산을 오르면서 카뮈가 영원히 잊지 못할 이미지로 조탁(彫琢 : 시문 따위를 아름답게 다듬음)한 도시 ‘오랑’의 산타크루스 바위산을 생각하였다. 사막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오랑에서부터 다사로운 지중해는 끝나고 신비스럽고 야성적이고 불가사의한 태초의 세계가 시작한다고 경이감과 함께 카뮈는 몇 번이고 강조하였다.
산타크루스 정상에 도달하기 직전 우리들은 조마조마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 세상에 너무나 많은 것이 가득차 있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들의 정신이 멀리 가지 못하고 다해버리는 것 같기 때문이다. 정신은 많은 것을 담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정신이 할 수 있는 것이란 측정하는 일뿐이다. 너무나 광대한 풍경은 우리들 마음을 가득 채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속을 다 비워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산타크루스에서는 한계가 파괴되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는 이와 같은 대(大) 장관 앞에서 눈을 감고 스스로를 그 속에 몰입시켜 자연 자체가 되고 그 영향을 얻고 싶어질 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후일 그 대장관 없이도 살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 대장관은 우리들 자신이 되어버렸을 테니까.
그러나 아직 생트 빅투아르는 산타크루스가 아니요 프로방스는 사막이 아니다. 불타의 사막이나 마호메트의 사막, 혹은 강인한 유목민들의 사막은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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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더 이상 찾을 길 없다. 인간이 그 힘과 지혜를 자랑하며 구현한 지배욕으로 인하여 우리들의 별에는 신비가 점차로 감소되어 간다.
나는 늘 말만 듣던 뤼베롱 산악지대를 찾아가 내 눈으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다행히도 우연이, 정말 우연 중의 우연이 나를 뤼베롱 기슭으로 안내 하였다. 지금은 ‘다행히도’ 라고 말 할 수 있지만 그 당시는 오히려 ‘불행히도’ 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적합할지 모르겠다. 그것은 프로방스에 도착한 이래 나의 최초의 실연(失戀)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짧고 행복하였던 부활절 방학의 끝은 나에게 다시 한 번 ‘실연 소질’을 확인시켜 주었다. 프로방스에서 실연 소질이 있는 사람은 낭만주의적 경향의 지방에서처럼 그의 슬픔을 위안 받을 수가 없다. 사람들은 실연을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실연에 관하여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끝난 일일 뿐이다. 쉬 머무를 수 있고 쉬 떠날 수 있는 곳이 지중해이다. 과거도 묻혀버리고 미래도 계산되지 않는 것이 프로방스의 사랑이다.
지중해의 사람들은 약속하지 않는다. 과거의 추억을 반추하지도 않는다. 떠날 때 어깨를 툭툭 치며 악수를 하면 그냥 돌아서서 간다. 수년이 지나도록 편지 한 장 없는 수가 많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어떤 카페의 테라스에서 마주치면 씩 웃으면서 마치 잠시 전에 헤어졌던 사람처럼 말한다. 그동안 왜 그리 소식이 없었느냐고 물으면 변명하지 않고 “다 알잖아?”라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들이 항상 지중해에서 다시 만날 것을. 생명이 있는 한 다시 만날 것을 다 알지 않느냐는 확신을 뜻한다.
지중해에서 사람들은 헤어지지 않는다. 지중해는 사람들이 만나는 땅이다. 세계사의 한 고향 지중해에는 영원한 현재만이 있을 뿐이다. 하나의 현재. 하나의 사랑이 끝나면 또 하나의 현재. 또 하나의 사랑이 항상 새로 시작한다는 확신을 가진 돈 후안은 지중해의 사람이었다. 광대한 평원의 한복판에 외따로 세워진 스페인 수도원의 협소한 방에 갇혀 노쇠한 돈 후안이 창밖으로 가슴을 떨며 내다보는 것은 사라져버린 사랑들의 환영이 아니라, 스페인의 저 찬란한 대지, 과거도 미래도 영혼도 구원도 없는 인간의 대지, 인간이 그의 최후의 순간까지 그의 죽어야 할 육체로 껴안고 있고 싶어하는 현재, 현재의 사랑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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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언제나 다시 시작하는 바다!” 라고 노래한 발레리도 지중해 사람이었다. 강물은 지나가나 바다는 남는다. 지중해 바닷가에 서면 개인은 항상 죽지만 인간은 현재에 살고, 현재에 사는 ‘인간’은 영원하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그런 고장에서 ‘실연 소질’이라는 낭만주의적 경향을 가진 사람은 참담하다. 역시 헤어지는 방법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그냥 돌아서서 가는 것’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우리는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내 친구는 위로의 말을 하는 대신 나를 자동차에 밀어 넣었고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떠나는 차창 밖에는 프로방스의 좋은 봄바람이 떠남의 속도를 노래한다. 멀리 보이는 평원에 외로이 서 있는 시푸레나무의 상승, 올리브나무의 과수원들은 반 고흐를 생각하게 한다. 가장 행복하고 가장 비극적인 수년을 프로방스에 와서 보낸 북유럽인 반 고흐의 소용돌이치는 태양, 그의 인상주의는 이 고장에서 받은 행복의 충격을 표현한 것이었다.
“북 프랑스에서 차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첫 번째 올리브나무를 만나는 곳에서 너는 프로방스에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라고 그는 고향에 두고 온 동생 테오에게 편지 하였었다.
생명의 기운이 점차로 희귀해지는 고장을 계속 달리던 우리들의 눈앞에 문득 아름다운 마을이 하나 나타났고 그 한가운데 신기한 고성이 하나 우뚝 솟아 있다. 동으로는 소(小)뤼베롱, 서쪽으로 우람한 대(大)뤼베롱 산줄기가 마주치는 이 거대한 무덤 같은 골짜기에 하나의 고도(古都)가 그의 수십 세기에 걸친 인내력을 과시하고 있다. 도로표지판은 그곳이 ‘루르마랭’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마을 입구의 곳곳에 복숭아꽃과 배꽃이 만발하여 부드러운 봄바람에 자욱이 흔들리고 있었다.
루르마랭이면 바로 카뮈의 묘지가 있는 곳이다. 카뮈의 작품 연구를 이제 막 시작한 나는 우연히도 그의 생애가 끝난 지점에 벌써 도착하였다. 카뮈가 뤼베롱과 루르마랭을 알게 된 것은 2차 대전과 극렬하고 고통스러운 레지스탕스가 끝난 후 대시인 르네 샤르를 알고 난 뒤였다. 프랑스 동남부의 지하운동 조직에 가담하고 있었던 카뮈의 우정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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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뮈는 르네 샤르의 고향 지방에 고가(古家) 팔레름을 세내어 한동안 체류하기도 하였다. 1957년 노벨상을 받자 그 이듬해 그는 꿈에 도 그리던 루르마랭에 시골집을 장만하게 되었다.
그의 일생을 괴롭히던 폐질환을 다스리기에 좋은 이곳의 건조한 기후도 기후려니와 가난을 참을 수는 있어도 수도권의 메마른 인심과 북구적(北歐的) 어둠을 견디지 못하는 그의 어머니를 알제리로부터 모셔 오기에도 적당한 곳이었다. 그리하여 오랜 불모의 침묵에 종지부를 찍고 이제 바야흐로 ‘대작’의 원대한 꿈을 설계하며 그가 지금은 미완의 유고가 되어버린 ‘최초의 인간’을 집필하기 시작한 것도 루르마랭의 집이었다.
1959년 말 카뮈는 버리지 못할 그의 연극에 대한 집착 때문에 ‘최초의 인간’ 집필과 병행하여 젊은 시절부터의 꿈이었던 도스트옙스키의 ‘악령’을 각색해 무대에 올렸다. 에르베르 극단이 공연하고 카뮈가 연출한 이 극이 파리의 앙트완 극장에서 유래없는 성공을 보이자 지방 순회의 길에 올랐다. 랭스 시의 공연에 이어 로잔에 도착하자 카뮈는 소설 집필을 위하여 루르마랭으로 돌아갔고 극단이 다시 마르세유에서 막을 올리자 북아프리카공연 때나 다시 만나기로 하였던 카뮈는 남몰래 관중들 속에 섞여 앉아 연극을 은밀히 관람하였다. 그를 관중 속에서 발견한 신문기자들이 찍은 사진이 그의 마지막 사진이 될 줄은 그때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
1960년 1월 4일. 월요일 오후 1시 55분 상스에서 파리로 가는 국도 위를 지나가던 행인은 ‘끔찍한 소리’를 들었다. 자동차 한 대가 가로수를 받고 부서졌고 그 차의 뒷자리에 앉았던 한 승객이 즉사했다. 그의 주머니에서 확인한 이름은 나이 마흔 여섯의 작가 알베르 카뮈였고 다른 주머니에서는 사용하지 않은 그날의 파리행 기차표가 발견되었다.
카뮈가 세상을 떠난 후 사흘 동안 순회공연을 계속하던 극단은 생전의 카뮈가 루르마랭에서 보낸 편지들이 뒤늦게야 차례로, 그들이 도착하는 무대로 배달되는 것을 받아보았다. 카뮈는 아직도 루르마랭에, 그 햇빛 속에 살아 있다는 듯이 쓰고 있었다.
“용기를 내십시오. 열심히 일하십시오. 나는 당신들을 잊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들이 가는 곳에는 항상 함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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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신가는 아니지만, 그러므로 아마도 우연히 참으로 우연히 였겠지만, 우리들이 탄 자동차가 무작정 들어선 동네의 어느 외딴 곳에서 고장이 났다. 내 친구가 자동차 엔진을 점검하는 동안 나는 내 앞의 볕바른 담장을 따라 걸었다. 잠시 후 내가 그 담이 바로 이 마을 묘지의 담장임을 깨닫고 그 입구에 섰을 즈음, 여덟 살쯤 먹어 보이는 귀여운 한 소년이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다가왔다. 그의 품 안에는 화사한 금빛 수선화가 한 아름 안겨 있었다. 나는 그 묘지가 혹 카뮈의 무덤이 있는 곳이 아닐까 하여 소년에게 물어보았다.
“카뮈가 누구지요?” 라고 반문하는 소년에게 나는 다만 어디에서 그 많은 꽃들을 꺾었느냐고 물었다. 소년은 기쁨에 찬 얼굴로 묘지 옆 들판에 한없이 많다고 자랑하면서 그 꽃을 좋아한다면 내게 다 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그 꽃을 선물받아 안고 묘지 안으로 들어갔다. 소년은 무덤 같은 것은 아랑곳없다는 듯이 다시 저쪽 꽃밭으로 사라졌다. ‘나의 사랑하는 남편에게’ ‘우리들의 영원한 친구에게’ 등의 헌화 장식이 어지러운 묘지에는 소박하고 평범한 묘석이 하나 놓여있고 그 위에 ‘알베르 카뮈. 1913~1960’ 이라는 내용만이 비바람에 닦여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그 묘석 앞에 앉아 나는 카뮈가 그의 산문집 ‘안과 겉’속에 그린 그의 할머니의 장례식과 묘지를 떠올렸다.
“그때는 햇살이 비치던 아름다운 겨울날이었다. 하늘의 푸른 빛 속에서 노랗게 빛나는 추위가 느껴지고 있었다. 묘지는 시가지를 굽어보고 있었으며, 마치 젖은 입술처럼 빛을 받아 진동하는 항만 위로 아름다운 햇빛이 투명하게 내리비치고 있었다. (……) 누구에게나 다 찾아오는 죽음, 그러나 각자에게는 저마다의 죽음. 하여간, 그렇기는 해도 역시 태양은 우리의 뼈를 따뜻하게 덥혀준다.”
그 산문이 ‘아이러니’라는 표제를 달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무거운 돌 밑에 잠든 죽음을 지워버리고 싶었다.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오는 죽음, 그러나 카뮈에게는 카뮈의 죽음. 지금 나의 뼈를 덥히는 루르마랭의 따스한 햇빛. 후일 파리에서 카뮈의 부인 프랑신 카뮈를 만났을 때 나는 이 우연한 묘지방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 부인은 마치 카뮈가 잠시 외출중인 듯이 말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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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언제나 나의 정신 속에는 프로방스라는 다정한 이름과 함께 노란 수선화와 그 꽃같이 신선한 소년의 웃음과, 다른 한 편 그 행복, 그 유열(愉悅)속으로 문득 찾아오는 ‘끔찍한 소리’, 비바람에 삭은 돌 밑에 젊은 얼굴을 땅에 묻고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버린 죽음이 한 데 엉켜 있을 것이다. 인간이 쉬 와서 머물고 쉬 사랑하고 그리고 문득 떠나버리는 땅을 우리는 아마도 낙원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낙원에는 꽃과 죽음이 함께 햇빛을 받는다.
내가 처음 모롱 부인을 알게 되었을 때 그분은 내게 단순히 불문과의 사무장 겸 강사에 지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조용히 이야기할 기회를 가지고 나서야 비로소 그분이 내가 대학시절에 대단한 놀라움을 가지고 읽었던 심리비평의 대가 샤를 모롱 교수의 부인임을 알게 되었다. 모롱 교수는 이미 2년 전에 작고하였고 부인이 지금은 그의 위업을 이어 심리비평을 강의하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14세기 이래 명문이었던 집안에 태어난 모롱은 2차 대전 때 장님이 되었으나 그 장애를 이겨내고 ‘고정관념적 메타포에서 개인적 신화에 이르기까지’라는 대저(大著)를 발표한 후 학계에 센세이션을 일으킨 것을 비롯하여 라신, 말라르메, 보들레르, 반 고흐 등과 함께 대가로 손꼽히며 동시에 르네 샤르, 피에르 에마뉘엘 등과 친숙하게 지냈던 시인이기도 하였다.
내가 프로방스를 단순히 외면을 지나, 더 깊숙이 사랑하게 된 것은 모롱 부인과 후일 나의 친구들이 된 그의 아들 3형제 클로드, 니콜라, 세비스티앵 덕분이었다.
엑스에서 서북쪽으로 약 60Km 떨어진 그들의 집 생레미로 가는 길은 프로방스 특유의 그윽한 소로(小路), 갈대를 엮어 만든 방풍벽과 과수장, 띄엄띄엄 보이는 산정의 촌락, 옛 풍차들, 유서 깊은 교회들, 아득한 방목의 평원들, 해 질 녘이면 부끄러운 듯 빨갛게 타오르는 거대한 저녁 해가 끝없이 따라오는 지평선, 멀리 보이는 고독한 시프레나무의 정경, 모든 것이 자연과 외로움과 눈물이 흐를 것 같은 지상의 행복을 말하고 있었다.
고도(古都) 아를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이 지방은 기원전 3세기의 골족과 그리스인의 유적이 낳은 곳이며 유명한 로마 유적인 개선문과 모졸레 기념물은 벚꽃이 가득 핀 그 언덕에 우뚝 솟아서 지나간 지중해 문명의 광영을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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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준다. 모롱 가는 바로 개선문과 모졸레에서 약 20미터 떨어진 반 고흐 가 73번지에 있다. 그 후 나는 여러 차례 그 댁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고 그때마다 나는 모롱 부인, 혹은 세바스티앵과 함께 집 뒤의 언덕바지에 올라 반 고호가 그 광란의 시절에 그림을 그리고 혹은 치료를 받았던 당시의 정신병원(수도원 겸한 곳) 생폴의 뒷길을 지나 로마 시대의 글라눔 폐허 길을 산책하곤 했다.
강 건너에는 프랑스가 변경을 지키며 침공을 노리던 보케르의 성이 있고 타라스콩 강안(江岸)에는 루이 성왕의 치하에서 행복을 구가하던 프로방스의 성이 있다. 프랑스가 프로방스를 합병한 뒤에 그의 고유한 언어 ‘프로방살’을 소멸하기 위하여 취했던 악랄한 정책이며 그에 수반된 모멸의 일화들을 모롱 부인이 내게 들려줄 때 나는 일본인들이 한국어를 소멸하기 위하여 자행한 각종 욕스러운 방법을 강조하였다.
단테가 처음 ‘신곡’을 쓰려고 결심하였을 때 애초에 생각한 언어가 프로방살이었다는 사실도, 후일 노벨 문학상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미스트랄의 감동적인 시도, 오늘날 프로방스 지방의 서점에서 간혹 보이는 프로방스어 소설들도 흘러간 시절의 어쩔 수 없는 추억이 되고만 이 문화, 이 언어의 진면목을 되찾지는 못하고 있다. 모롱 부인의 소개를 받아서 알게 된 프로방스의 대시인 막스필리프 델라부에는 나를 바라보면서 “나는 당신이 동양에서 왔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이 많은 공부를 했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도 아닙니다. 당신이 시인이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도 아닙니다. 당신이 젊기 때문에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당신의 청춘에 질투를 느낍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 소유하는 것이라고 해서 청춘이 흔한 것은 아닙니다. 청춘보다 더 높은 긍지는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최근에 간행한 그의 시집 두 권을 나에게 주면서 “늙은 나무가 젊은 태양에게 바침”이라고 서명하였다. 나는 내 반생 동안 이보다 더 큰 찬사를 받아본 일이 없다.
■ 침묵의 공간
생레미드프로방스에서 알피유 산봉우리를 바라보며 잡목이 뒤덮인 협곡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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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져 남쪽으로 나오는 길은 다소 동해에서 넘어오는 진부령을 상기시킨다.
잔잔한 저녁나절 햇빛이 가득 고이는 프로방스의 침묵 속에 외롭게 가는 나그네의 등이 보이고 그 뒷모습 어딘가에는 반 고흐의 시선이 느껴진다. 그러나 붓을 잡고 화폭 앞에 앉은 고흐 영감의 모습이 아니라 고통과 광기가 정신의 심연 속에서 피를 흘리는 시각의 그 눈길이다. 생레미의 수도원 겸 병원의 고요한 입구에 세워진 고흐의 동상은 한쪽 귀가 잘려나간 것으로 과장되어 있어서 우스웠지만 알피유 협로의 저녁 길에는 그 광기와, 다른 한편 그에 상극하는 한가로움이 이상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알피유 바위산의 반대편으로 나서면서부터 풍경은 급격하게 드라마틱해진다. 인적이 끊어진 광대한 평원 한가운데 산맥의 줄기가 툭 끊어져나가 절벽으로 깎아선 이 이상한 덩어리는 자연암 같으면서도 어딘가 이상한 종족의 인간이 손질한 듯한 자취가 있다. 여기가 저 유명한 중세의 성 혹은 선사시대의 이상한 도시 레보드프로방스이다. 어디부터가 자연의 바위이며 어디부터가 인간이 쌓은 성벽인지 분간할 수 없게 뒤엉킨 이 바윗덩어리의 여기저기에는 어린 시절 내가 해안 절벽에서 발견하곤 하였던 새들의 집 같은 구멍이 뚫려 있다. 이곳저곳에 놀랍게도 아치의 문들이 나 있는 곳도 있다. 카스텔리의 고인돌이며 ‘요정들의 구멍’이라 불리는 암벽 속의 작은 혈구(穴口)들, 두 개의 구름다리를 쳐들고 있는 바르베갈의 지하대(台), 코르드 산에 있는 선사시대의 성벽들, 무당들의 집……
이 모든 것이 숱한 전설과 신비와 확인할 길 없는 지난날의 수수께끼를 담고 있으니 프로방스의 시가(詩歌)에서 이곳이 유별난 위치를 점하는 까닭을 곧 알 수 있을 터이다.
선사시대의 유물에 관해서는 아직 완전한 고증이 이루어지지 못했다지만 그래도 켈트 족과 로마인들이 프로방스를 정복하기 이전에 이 영토를 점령하고 있었던 고대인들이 오늘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와는 전혀 다른 어떤 문명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수십 세기에 걸친 역사를 거슬러 이 고대 성(城)의 폐허는 증언하고 있다. ‘지옥의 계곡’이라고 불리는 이곳 양편의 거대한 바윗덩어리 곳곳에서 아직도 선사시대인들이 거주한 각종의 자취들이 발견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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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세기의 바람에 찢기어 누더기처럼 된 레보드프로방스의 암벽 위에 서서 나는 또 하나의 사멸한 도시 ‘제밀라’를 생각하였다.
지중해를 사이에 두고 아프리카 쪽 해안에는 제밀라가, ‘코트다쥐르’라는 이름의 푸른 해안에는 레보드프로방스가 우리들을 죽음과 가장 가까운 곳에 이르게 한다. 비극적인 죽음도 아니요, 살의 고통도 아니요, 질병도 아니다. 다만 삶의 한가운데로 들어와 우리들의 의식을 가득히 함몰하는 죽음…….
‘의식적인 죽음’이란 바로 고대인들이 그들의 생이 끝나가는 자리에서 눈길을 딴 곳으로 돌리지 않고 전신으로 운명과 정대면 하며 죽음의 전체를 공포 없이 껴안고 청춘을 탈환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전면적인 죽음의 의식만이 마지막 조약돌, 마지막 생명의 이온을 영원한 현재 속에 복귀시킨다.
의식적인 죽음을 창조한다는 것은 나와 세계 사이의 거리를 좁히는 일이다.
강가의 나무에 매여 형벌을 받는 거역의 신 탄탈로스에게 물어보라 그는 대답하리라. 우리를 삶으로 치달리게 하는 것은 물이 아니라 우리들 영혼 속에 불타고 있는 영원한 ‘갈증’임을. 생명은 부유한 자의 소유가 아니라 위로받지 않으려는 자, 영원함 속의 굶주림을 간직한 자의 것임을.
지난해 한국을 방문한 일간 ‘르몽드’지의 특파원은 동적이면서도 그윽한 한국의 전원 풍경을 극구 찬양하면서 자연 풍경을 손상하지 않고 공격성 없는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초가집의 지극한 조화미를 몇 번이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가 쓴 기사의 마지막 구절은 더욱 놀랍다. “한국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마지막으로 찬미하고자 하는 프랑스 사람은 지체하지 말고 곧 한국으로 떠날 일이다. 머지않아 그들은 그 아름다운 초가집들이 거대한 켐페인에 의하여 자취를 감추고 대신 조야한 색의 페인트를 칠한 기와집으로 둔갑한 것을 목격할 뿐일 것이다.”
프랑스를 방문할 한국인들에게 레보드프로방스에 관한 한 나는 같은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거대한 미국 자본이 개입된 프랑스 굴지의 페시네 회사는 프랑스 전국에 돈벌이가 될 만한 곳이면 들쑤셔 검은 연기, 악취, 화공약품으로 변모시키는 데 앞장서고 있는데 이번에는 또 레보드프로방스에서 보크사이트 탄광을 발견하여 여론의 반발 따위는 아랑곳없이 트럭과 중장비를 투입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이다. 내가 그곳에서 발견한 정신의 광막한 사막, 그 신비스러운 침묵이 머지않아 보크사이트의 막대한 생산고로 치환된다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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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 그것은 나의 책임이 아니다. 그렇다. 세계의 곳곳에 사막의 공간은 좁아져 간다. 석가의 공간도 베드로의 공간도, 마호메트의 공간도 좁아져 간다. 이 속에서 “사회를 변모시키는 것은 찬성이지만 세계를 변모시키는 것은 반대다”라고 말한 카뮈의 목소리는 너무나 나지막하게 들린다.
레보드프로방스에서 지방도로를 따라 서남쪽으로 아를을 향하여 불과 몇 킬로미터를 달리면 점차로 알피유 고원을 벗어나면서 풍경이 부드러워지기 시작한다.
문득 돗자리를 깔고 장기판을 마주한 동네 영감들이라도 나타날 법한 늙은 소나무 숲이 길 앞에 보이는 품이 꼭 한국 어느 농가의 동구(洞口)를 연상시킨다. 이곳에서 다리 하나 건너면 프로방스의 흔한 소읍들 중 유별난 것이라곤 없어 보이는 마을인 풍비에이유이고, 그와 직각으로 꺾어진 언덕배기로 눈을 들면 네 개의 날개를 허공에 펴고 있는 풍차 하나가 구름을 향하여 그 뾰족한 지붕을 뻗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조금 앞서 본 그 드라마틱하고 공포감 서린 풍경과 대조적으로 정답고 애틋한 사방의 풍경이 이상한 저녁 안개에 싸인 듯 마음을 달래는 것을 느끼면서 이내. 아! 나는 도데의 고장에 왔구나 실감한다.
무더운 7월 한여름 밤에도 모닥불을 지펴야 하는 서늘한 산정에서 불침번을 서는 야영의 병정이었을 때 나는 알퐁스 도데를 처음 접하였던 국어교실의 ‘별’이후 최초로 ‘영혼의 수레’라 불리는 대웅좌를 바라보곤 하였다.
문학 전공의 병정인 나뿐만 아니라 불침번을 서던 전방 병정 모두가 그 별들을 바라보았다. 시계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산정에 서 있는 고목들의 가지를 표적으로 하여 그 별들의 운행에 따라 불침번 교대 시간을 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생각하였다. 스무 살의 병정과 스무 살의 목동을, 그 비교는 참담한 데가 있었지만 스무 살 가슴속에는 항상 가장 곱고 가방 밝은 별이 있는 법이다. 아아 그 후 나의 가슴속에는 얼마나 많은 별들이 반짝이다가 다시 꺼져버리곤 하였는지를 …… 나는 도데의 풍차 쪽으로 가는 언덕길을 오르면서 생각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 가슴 설레게 하던 편지의 발신지에 당도하고 있었다.
1840년 프로방스의 고도(古都) 님에서 태어나 아홉 살까지 그 지방에서 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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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시절을 보낸 후 리옹을 거쳐 1857년 파리에 정착한 도데는 프로방스에 대한 애착을 버리지 못하여 이곳에 자주 찾아들었다. 스무 살 되던 해 프로방스의 대시인 미스트랄을 알고 난 후 더욱 프로방스는 그의 영혼이요, 그의 스승으로 여겨졌다.
1863년 여름 그는 친척인 앙브루아 가에 와서 머무는 동안 비로소 시인다운 눈으로 이곳의 분위기며 정경, 그의 어린 시절이 몸담고 있던 인정 어린 세계와 더 깊은 접촉을 갖게 되었다. 자기 사촌 댁으로부터 그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그는 광야의 한복판에 버려진 하나의 풍차, 사람들이 티소 풍차라고 부르는 풍차를 하나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 이후 그곳은 그의 산책길에 가장 자주 찾는 꿈의 요람이 되었다. 그리하여 시인은 풍차와 그 풍차가 들어앉은 풍경의 여성적이면서도 집요한 아름다움을 서정적인 편지 형식의 이야기로 엮어 파리에 있는 친구들에게 전하고자 하였다.
조엘 바르너는 갈색 머리, 푸른 눈에 좀 환상적인 표정을 한 젊은 대학생 아가씨였다. 그의 풍만한 가슴 때문에 나는 뜻 없이 바람둥이 아가씨겠구나 하고 짐작했지만 사실은 지극히 얌전하고 반듯한 생활로 일관하는 면학도에다 프랑스에서 보기 드문 신교도였다.
내가 그를 알게 된 것은 어느 날 저녁 대학식당에서 였다. 식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 어떤 아가씨가 내게 다가와서 한국 사람이냐고 물었다. 놀라는 나에게 한국 사람이 엑스 시에 한 사람 있다는 얘기를 듣고 오래 찾고 있었는데 나의 친구 크리스를 통해서 알았다는 것이었다.
그 여자를 나에게 보낸 크리스가 식당 저쪽 구석에서 손을 쳐들어 보였다. 조엘은 즉시 나를 자기 아파트에 초대하여 차를 대접한 후 이야기를 꺼냈는데 실은 오빠가 한국 고아를 입양하려는데 그 수속에 필요한 몇 가지 서류를 번역해줄 것과 한국에서 어린 아이를 키우는 방법 등을 문의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나는 이미 똑같은 일로 다른 도시를 방문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곧 무슨 일인지 알 수 있었고 기꺼이 도와주기로 했다. 그 일이 끝난 뒤에도 우리는 마침 둘 다 불문학 전공이어서 종종 만나 할 수 있는 이야기는 많았다.
이듬해 봄, 조엘이 우리들을 페불랑에 있는 그의 부모의 별장 원유회 만찬에 초대하였다. 원유회는 참으로 행복하고 깊은 봄의 축제였다. 의사인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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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어머니는 인사를 짤막하게 끝낸 뒤 프로방스의 즐거움 속에서 늙은이가 떠벌리는 소리는 기쁨을 반감한다면서 먼저 자리를 떴고 그의 형제들과 친구들로 이루어진 젊은이들만이 남아 쟁반을 들고 이 식탁 저 식탁의 음식들을 담아 먹었다.
해묵은 ‘코트드론’ 붉은 포도주나 ‘코트드프로방스’의 장밋빛 포도주에서 론 강물 소리가 들리느냐고 웃으며 한나절 취하였다. 우리들이 파티를 열고 있는 들판 한가운데 솦 속에는 노란 금잔화가 자욱이 피어 벌 떼를 부르고 앞뜰에는 야생화 코클리코가 핏빛으로 낭자하였다.
나중이 우리는 집 앞 수로를 따라 오래 거닐었는데 곳곳에 아름다운 별장들이 많이 보였다. 길 끝에 나타난 마지막 집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뜰에는 잡초가 무성하였고 뽕나무에는 푸른 잎이 빠른 속도로 면적을 넓히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집 뒤안에는 석류꽃이 저 홀로 한창이었다. 그런데 그 집은 굳게 잠긴 채 벽은 헐고 집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조엘과 그의 언니 자클린은 눈을 가늘게 뜨면서 이 집은 그들이 아주 어린 시절부터 이렇게 잠겨 있다고 했다.
조엘은 어렸을 때 부모에게 꾸지람을 듣거나 속상한 일이 있을 때면 이 폐가의 앞뜰에 와 앉아 종일토록 꽃 더미를 만들며 저녁이면 쓰러지는 성을 짓곤 했단다. 깨어진 창문 안에는 밀짚을 실어 나르는 농가의 수레가 아직도 적막하게 놓여 있다. 모든 것이 주인이 두고 간 그대로남아 있다. 20여년의 세월 동안 아무도 열어보지 않은 문, 죽어버린 사람들의 추억이 먼지가 되어 그 어디엔가 가득히 쌓인 채 잠겨 있다.
그날, 그 폐가의 방문이 끝나고 원유회도 끝나고 갑자기 바람이 몰고 온 소나기, 그 소나기에 쓰러진 야생화의 1년도 끝나고, 봄도 끝난 후 나는 줄곧 조엘을 다시 만나지 못하였다. 그의 아파트에 찾아가 보았으나 이사를 떠나고 없었다. 그리고 여름방학이 왔고 무더운 기숙사 방에서 타이프를 치느라 진땀을 빼고 있던 어느 날 난데없이 조엘의 편지가 왔다. 마르세유의 어느 정신 병원에 입원한 지 오래되었는데 곧 어디론가 병원을 옮길 예정이라는 사연뿐, 서명을 하고 난 편지의 끝에는 지난봄에 같이 가본 폐가의 석류꽃은 아름다웠노라고 써 있었다. 그 후 나는 두 번 다시 그를 만나지 못하였다.
2013. 7. 25. - 다음에 2부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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