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아프게 하는 것이 나를 강하게 만든다

2013. 7. 15. 17:31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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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아프게 하는 것이 나를 강하게 만든다

■ 알렉상드르 졸리앙 지음

0 1975년 스위스 생

태어나면서 탯줄이 목에 감긴 채 태어나 그 후유증으로 뇌성마비

3-17세, 장애인 요양시설에서 생활

0 1998 프라이부르크 대학 인문학부에서 철학 전공

2001-2002 같은 대학에서 철학, 고대 그리스 공부

2004 예술학 석사 학위

0 2004 아내 코린과 결혼, 세 명의 자녀

0 1999년 ‘약자의 찬가’로 모따르 상과 몽티옹 문학철학상 수상

0 저서로는 인간이라는 직업, 벌거벗은 철학자, 기쁨의 철학 등

■ 성귀수 옮김

0 서울 생, 연세대 학사 및 박사

0 1991 시인 등단

0 옮긴 책 : 이교도 회사, 오페라의 유령, 천안문의 여자, 빛과 돌, 아르센 뤼팽 전집 등

■ 들어가는 말 - 그냥 그대로 있는 것

저는 글쓰기가 점점 힘들답니다. 어떤 날은 컴퓨터 자판이 마치 고문 도구처럼 보이기도 하죠. 반면 입으로 이야기를 하면 삶의 흐름을 타는 기분이랄까요. 실존 속에 자신을 내려놓는 느낌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래요, ‘내려놓는다’는 말……. 책이나 대화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표현이지요. 역설적이게도, 제게는 그것이 아주 거창한 삶의 기획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결국에는 나를 지치게 만들 뿐인 싸우고 발버둥치는 짓을 멈추고, 현실을 더 부정하지 않는 법,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받아들이는 법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이제부터 제가 여러분께 들려드리고자 하는 이야기의 주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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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세 살 때 들어간 요양시설에서 모든 것이 시작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저는 뇌성마비를 앓고 있었지요. 평생을 악착같이 붙어다니는 그 이미지 때문에 ‘저’라는 한 인간이 축소, 고정되는 것이야말로 제 인생의 가장 큰 상처 중의 하나이거든요. 누구든 저를 바라보는 순간, ‘장애인’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떠오를 테니까요 제 의지와는 무관한 그 장애로 인해 저는 17년 동안을 요양시설에서 불구자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부모님과 떨어져 지내야 하는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참으로 놀라운 사실들이 저를 감동시키더군요. 예를 들어 온 몸이 마비된 사람들이 더 없이 충만한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가는 겁니다. 저도 당장 그런 즐거움을 맛보고 싶었죠. 그때부터 제 삶의 모토는 ‘무조건적인 즐거움을 누려보자’라는 스피노자의 명언이 그런 제 인생 목표와 일맥상통하는 셈이죠.

오늘 저는 책으로 가득 들어찬 제 서가를 보면서 영혼의 풍요로움이란 ‘채워 넣음’ 보다는 ‘비워냄’을 통해 이루어짐을 깨닫습니다.

불교 신자들은 우리 모두가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다 말하는데, 참 훌륭한 생각입니다. 하나의 인격을 만들어 세운다거나 즐거움 혹은 안정을 찾아 밖으로 나서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으로 뛰어들고, 깊은 내면으로 가라앉아, 그곳에서 희열과 평화, 궁극의 선(善)을 취하라는 이야기지요. 그런 면에서 볼 때 우리는 모두가 붓다입니다.

오늘날 제 인생의 중요한 숙제는 내려놓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내려놓는다는 것은 결코 포기나 단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지요. 지금 이 순간 자신을 흔쾌히 내려놓을수록 더 능동적이 되고, 삶의 여러 상황에 보다 적절히 반응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내려놓기 위한 일종의 학습서라고나 할까요.

영혼을 밟아야 할 과정에 정해진 길은 없습니다. 매뉴얼 같은 게 있을 리 없지요. 오로지 매일매일 치러야 할 일상의 고행이 있을 뿐입니다. 자기 자신으로부터, 다시 말해 스스로 뒤집어 쓴 가짜 이미지들, 진짜 현실을 가두어버린 자의적 판단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시행착오 말입니다. 본격적인 이야기로 들어가기에 앞서, 니체의 ‘즐거운 지식’에서 제가 좋아하는 구절을 하나 인용해 볼까 합니다.

“오로지 너 자신만을 따르라. 그리하면 나를 따르게 될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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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 남은 모든 것을 버리다

그대가 앉아 있을 땐 앉아 있어라.

그대가 서 있을 땐 서 있어라.

그대가 걸을 땐 걸어라.

무엇보다 서둘지 마라.

운문(雲門 : 중국 五代 때의 선승, 운문종 창시 종장)

요양 시설에서는 저에게 자꾸 ‘나를 내려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땐 그게 구박하는 소리로 들렸지요. 많은 교사들이 하는 이야기가 ‘삶을 받아들여라!’, ‘그냥 놓아버려야 한다!’ 였습니다.

요즘 들어 삶을 받아들이는 것, 자신을 놓아버리는 일에 관한 책들이 참 많이 나오더군요. 그러다 보니 그 또한 지나친 요구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요양 시설에 있을 때는 그런 요구가 마치 학대처럼 느껴졌던 게 사실입니다. 가뜩이나 하루하루 사는 것 자체가 버거운데 새로운 짐을 어깨에 얹어주나 싶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모든 것을, 정말로 모든 것을 시원스레 놓아버리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때로 화장실에서 물을 두 번 연거푸 내려야 할 때의 바로 그 기분으로 말이죠! 놓아버리는 일 자체까지도 놓아버리자는 얘깁니다.

제가 내려놓는 삶에 좀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된 데에는 책 한 권의 도움이 컸습니다. 내려놓는 삶, 그건 사실 그렇게 다가가기 어려울 만큼 대단한 게 아니거든요. 제겐 아이가 셋 있는데, 그 아이들을 바라보노라면 셋 모두 내려놓는 삶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듭니다. 셋 다 삶에 단단히 밀착되어 있지요. 그래서 즐거울 땐 그냥 즐거워합니다. 슬플 땐 그냥 슬퍼하고요. 놀 땐 아무 생각 없이 신나게 놀죠. 운문이라는 선승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대가 앉아 있을 땐 앉아 있어라. 그대가 서 있을 땐 서 있어라. 그대가 걸을 땐 걸어라. 무엇보다 서둘지 말라.”

이제 저를 ‘내려놓기’와 가까워지도록 만들어준 책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붓다의 말씀이 담긴 책인데 ‘금강경’이라고 합니다.

이 책에는 어떤 문장 하나가 반복해서 자주 등장하는데요. 제가 한 번 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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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겠습니다. “소위 ‘붓다의 실재’라 부르는 ‘붓다의 실재’에 관하여, 여래께서 이르시기를 이는 ‘붓다의 실재’가 아니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를 ‘붓다의 실재’라 부르니라 하시더라.” 이걸 두고 사람들은 웃어넘기거나 괴이하다고 여길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정말 이 글로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제가 저 자신의 장애를 인정하는 것은 물론 기꺼이 끌어안기까지 가장 큰 도움이 된 글이기도 합니다.

‘금강경’에서 인용한 대목은 붓다의 말씀 중 끊임없이 되풀이 되는 문장인데, 이렇게 요약되기도 합니다. “붓다는 붓다가 아니니, 바로 그래서 내가 이를 붓다라 이르니라.” 결국 집착이 없는 삶의 자세를 말합니다.

살면서 제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에 이 문장의 의미를 적용하기 전까지는 그것이 얼마나 과격한 문장인지 실감하지 못했답니다. 바로 이렇게 말이에요. “ 내 아내는 내 아내가 아니다. 바로 그래서 나는 이를 내 아내라고 부른다.” 제 아내가 실제로 제가 생각하는 그대로의 존재는 아니라는 얘깁니다. 만약 제가 “내 아내는 바로 이런 존재다”라고 말한다면, 저는 그녀에게 집착하는 것이요. 몇몇 꼬리표로 가두는 것이며, 결국엔 그녀를 죽이는 꼴입니다. 세상의 꼬리표들이 사람과 사물을 가둔다는 걸, 즉 죽여버린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에야 비로소 우리는 그 꼬리표를 올바로 사용할 줄 알게 됩니다. 말이라는 게 곧 꼬리표에 지나지 않음을 바로 알 때에만 고양이를 고양이라 부를 수 있다는 이야기죠. 아주 구체적인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제가 버스를 타면 사람들은 저를 무슨 괴물 보듯 합니다. 그럼 저는 속으로 중얼거리죠. ‘장애는 장애가 아니다. 그래서 이를 장애라 부른다.’ 장애란 제가 한때 생각한 것처럼 더럽고 흉한 무엇이 아닙니다. 장애는 모든 일이 잘 되어갈 때 제가 받았다고 느낀 축복 또한 아니지요. 무엇이든 확정하지 말되, 그렇다고 부정하지도 않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집착이 없다는 건 바로 그런 태도를 말합니다.

창세기에는 인간의 추락을 결정지은 원죄가 있지 않습니까. 제 생각에 그것은 윤리적으로 비난받을 짓을 의미한다기보다,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 자신들이 알몸 상태인 것을 깨닫게 된 아담과 이브의 의식 자체를 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창세기’ 3장 7절의 “자신들이 알몸인 것을 알았다”는 유명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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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을 떠올려보세요. 달리 말하자면, 졸지에 똑똑해져버린 우리의 조상님께선 ‘내가 바로 세계의 배꼽이다’라는 자기중심적 질환에 걸리고 만 겁니다.

여러분도 다 알다시피, 아담과 이브는 남자와 여자의 결합으로 태어난 존재가 아니죠. 그러니까 그들에겐 ‘배꼽’이 있을 리 없습니다. 어쨌든 ‘창세기’의 이야기가 자기 배꼽만 들여다보며 살지 말기를 우리에게 권하고 있다는 건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그게 뭐가 됐든 자신만의 전유물이라고 여기는 것에 집착하지 말라는 이야기지요. 때때로 저는 바보 중의 상바보일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말이죠…… 바보 중의 상바보는 바보 중의 상바보가 아니랍니다. 그래서 제가 이를 바보 중의 상바보라 부르는 거지요. 그렇게 해서, 저는 이번에도 저 자신의 이미지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삶은 계속되고요……바보는 제 갈 길을 뚜벅뚜벅 걸어갈 뿐입니다.

■ 나쁜 친구는 나를 완성시킨다

모든 언행을 칭찬하는 자보다

결점을 친절하게 말해주는 친구를 가까이 하라. -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는 친구란 인생의 소금이라고 말했습니다. “제 인생을 돌아보면서, 그걸 가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은 자식과 가족 이외엔 역시 친구밖에 없다는 걸 깨닫습니다. ‘친구’라는 단어를 입에 올릴 때마다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는데요, 바로 혜능(慧能) 스님의 전설입니다. 문맹이었던 이분은 어려서부터 고된 일을 해서 생계를 이어가야 했습니다. 하루는 나무를 하러 다니는데, 어디선가 ‘금강경’ 읽는 소리가 들렸다지요. 다름 아닌 그 유명한 ‘집착 없는 삶’에 관한 구절이었습니다. 순간, 혜능은 정신이 번쩍 깨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이른바 ‘깨달음’을 경험한 것이죠. 훗날 그분이 남긴 말씀을 제자들이 책(육조단경)으로 엮었는데, 거기서 혜능은 아주 빛나는 표현을 합니다. 바로 ‘참벗(육조단경의 선지식 즉 불법의 의미를 알고 행하난 사람)’이죠. ‘참벗’은 무엇을 하는 존재이며, 무엇이 ‘참벗’을 만들까요? 여기서도 역시 ‘금강경’의 문장을 떠올려야 합니다. 참벗에 집착한다든지, 누군가에게 다가가 ”나는 참벗을 원합니다“라고 말해서는 안 되겠죠. 그냥 살면서, 존재의 새로운 단계로 나를 이끌어 줄 참벗이 나타나는 것을 그냥 그렇게 지켜보는 겁니다. 저는 집을 나설 때는 물론이고 귀가할 때도 속으로 종종 이렇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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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거립니다. ‘삶이 내게 좋은 안내자를 안겨줄 거야’라고 말이죠. 그러면 거의 실망하는 적이 없게 되더군요. 하긴, 좋은 안내자 역시 좋은 안내자가 아니기에, 제가 좋은 안내자라 부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따금, 자칫 저 자신을 망가뜨릴 수 있었을 잘못된 만남을 경험할 때가 있는데, 그땐 오히려 그 만남 덕분에 저의 가장 깊은 곳에서 그만큼의 성장이 이루어졌음을 느낍니다.

마음속에 그려지는 ‘참벗’은 두 팔 활짝 펴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안아주는, 그리하여 조건 없는 사랑을 나누어주는 모습이네요. ‘참벗’이란 아무 조건 없이 애정을 주는 사람입니다.

■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자신이 친구라고 생각하는 상대에게

자기 자신에 대한 것과 같은 신뢰를 보내지 않는다면

진정한 우정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 세네카

조건 없는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지금 저는 ‘내려놓는 삶’에 이르는 여정에서 조건 없는 사랑의 ‘예스(yes)’라는 대답이 매우 중요함을 예감합니다. 오랜 세월 저의 삶에서 조건 없는 사랑은 그저 ‘빛 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도저히 거머쥘 수 없는 이상이었고, 쫓아갈수록 끝없이 뒤로 물러나기만 하는 지평선이었지요. 한마디로 구체성이라곤 전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인생의 한 에피소드가 제게 조건 없는 사랑의 취향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저는 우리가 타인과 맺는 관계에는 종종 이해타산이 개입한다고 생각합니다. 세네카도 그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이해득실이 사라지는 순간, 모든 관계가 끝나고 마는 타인을 대부분 ‘친구’라고 부른다고 말이죠.

아낌없이 주는 사랑…… 그것은 아이들을 향한 제 마음속에 이미 뿌리를 내린 그 무엇이었습니다. 저는 오귀스탱, 빅토린 그리고 셀레스트를 사랑합니다. 아빠의 사랑을 받기 위해 그 아이들이 특별한 누군가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오귀스탱에게 종종 이런 말을 하지요. “얘야, 네가 만약 집에 불을 지른다 해도 아빠는 너를 사랑할거야.” 물론 거의 동시에 이렇게 덧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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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니다. “그렇다고 집에 불을 지르라는 건 아니니 명심해라!”

아낌없이 주는, 조건 없는 사랑을 저 자신의 삶과 육체를 위해 베풀어야 한다는 걸 실감한 적이 있습니다. 어느 역에 나가 있었는데, 그날따라 제가 남의 시선에 유난히 민감하더라고요. 제가 가진 이 몸뚱어리가 창피했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베네딕토 수사님께 전화를 걸었죠. 그리고 다짜고짜 저의 불편한 심정을 쏟아놓았습니다. 스포티한 근육질의 미남, 어떤 문제도 없는 사람이 되고 싶어 미치겠다며 마구 퍼부어댔습니다. 수사님이 묻더군요. “만약 오귀스탱에게 장애가 있다면 그래도 그 아이를 사랑하겠나?” 저는 대답했습니다. “그걸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그야 당연하죠.” 그러자 수사님이 또 묻습니다. “그 아이를 돌보아줄 텐가?” “여부가 있습니까! 지금보다 훨씬 더 잘 보살펴줄 겁니다!” 그러자 수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럼, 오늘 당장, 지금 그 역에 있는 자네 몸뚱어리를 자네 자식처럼 보살펴주게.” 저는 그날 전화를 끊자마자 역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습니다. 자 몸뚱어리가 보살피고 아껴주어야 할 아이라는 것을 갑자기 깨달은 겁니다.

전에는 이 아이에게서 오직 즐거움과 이득만을 끄집어내려고 안달했을 뿐, 편히 쉬게 해준다거나 매일 녀석이 해내는 것을 존중해줄 생각은 전혀 안 했어요. 몸뚱어리가 제게 남겨준 상처와 장애는 제 손으로 들고 갈 쟁반 위의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때 그 역에서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깨달은 건, 제가 아무 조건 없는 눈으로 저 자신의 몸과 존재를 바라봐 줄 수 있다는 사실이었어요. 쇼윈도를 통해 드러나 보이는 제 모습, 그것은 온전한 저의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네가 만약 집에 불을 지른다 해도 아빠는 너를 사랑할 거야”라고 오귀스탱에게 한 말이 꼭 그 아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괜찮다는 뜻이기보다는, 그 정반대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역설적이지만, 조건 없는 사랑은 반드시 어떤 기대치를 동반한다고 봅니다. 저는 오귀스탱을 너무나 사랑하여 그 아이가 오귀스탱답지 않거나, 잘못을 범해 밉상이 되는 걸 참아내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제 존재 자체도 너무나 사랑하기에 더 나아지기 위하여, 즐겁고 자유롭지 못하게 만드는 것에서 훌훌 벗어나도록 온갖 노력을 다하게 됩니다.

조건 없는 사랑, 그것은 무작정 관용을 베푸는 것과는 다릅니다. 절대적인 관용이 아니지요. 지금 여기 존재하는 것에 전적인 온정을 베푸는 것입니다. 과거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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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의 상처를 끌어안을 용기가 필요하다

청년 시절, 저는 약한 것에 대한 예찬, ‘약자의 찬가’를 책으로 펴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저는 보다 신중해졌습니다. 상처를 가진 약함이 사람을 아프게 하고 때론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거든요. 따라서 ‘내려놓기’에 입문하려면 그만큼 만만치 않은 삶의 기술을 갖춰야 합니다. 운명의 장난처럼 갑자기 떨어지는 기왓장에 머리가 깨지지 않으려면 말입니다. 제 경우는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도, 가장 도움이 되는 건 내려놓는 삶의 자세와 참된 벗이더군요.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다행히 제게는 이렇다 저렇다 잔소리 하나 없이 저를 향해 마음을 활짝 열어주는 아내가 곁에 있었습니다. 조건 없는 사랑을 경험한 셈이죠. 보통 누군가 곁에서 괴로워하면 우리는 곧바로 사회적 역할을 자임해가며 온갖 담론들로 그 고통을 채워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 비슷한 상처들이 파도처럼 고개 드는 것을 침묵으로 지켜봐주는 대신 말입니다. 이따금 그것이 나약함의 파도일 때, 저는 버둥거리다가 다시금 그 속에 휘말리고 맙니다.

그리 오래 전은 아닙니다만, 한 때 지독한 좌절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다. 무척 두렵더군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난 어떡하면 좋지?” 친구가 대답했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마, 그냥 가만히 기다려!” 그때 불현듯 저는 내려놓는 기분을 이해했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침대로 가서 똑바로 누워 발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합니다. 아무 것도 바꾸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죠. 역설적이지만, 결국 그렇게 하는 것이 상황을 변화시키는데 가장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냥 거기 그렇게 있도록 노력하는 것. 아니, 노력도 하지 말고 그냥 거기 그렇게 있는 것.

내려놓는 삶의 태도란 어쩌면 자신의 나약함을 더 이상 물리쳐야 할 적으로 여기지 않는 자세를 말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상처를 거북하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기꺼이 끌어안는 자세 말이죠.

이따금 참지 못하고 안달하는 저 자신이 원망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어쩌면 바로 그 지점에서 진정 거대한 인내가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참지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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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자신의 조급한 성향을 꿋꿋이 버텨내면서부터 말입니다. 석가모니 붓다는 ‘금강경’에서 “거대한 인내 속에는 인내하는 자가 없다.”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중요한 삶의 도구를 건네줍니다. 달리 말해서 인내란 노력이나 긴장이 아니며, 있는 그대로 두는 것, 내려놓는 그 자체를 뜻한다는 이야기지요.

■ 내게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는가

‘양지바른 이 자리는 내가 임자야’라고 말하는 순간

온 세상을 향한 침탈이 시작되는 것이다. - 파스칼 -

저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어떤 단어의 의미를 잠시 음미해봅니다. 바로 연습이라는 단어지요. 가령 ‘감사 연습’이라는 표현을 생각해보죠. 저는 행복이 쟁취를 통해 얻는 것이라고 종종 생각해왔습니다. 무언가를 소유하고, 차지하고, 쟁취해야만 한다는 것. 그런데 우리는 어쩌면 있는 그대로의 상황에 마음을 활짝 열고, 일상에 자신을 내줌으로써 기쁨을 누리는 게 아닐는지요. 제가 보기에 기쁨이란 쟁취보다 받아들이는 행위를 통해 더 잘 얻어지는 것 같습니다. 요컨대 삶이 베푸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줄 아는 우리의 능력은 바로 ‘감사 연습’을 통해 활짝 피어나는 것이 아닐까요?

우선 우리 주변을 잘 관찰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플라톤은 ‘고르기아스’에서 밑 빠진 통이라는 아주 그럴듯한 이미지를 사용하고 있죠. 그 안에는 무얼 넣어도 죄다 새어나가고 맙니다. 삶 역시 그러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긁어모은 것도 우리를 채워주진 못하죠. 우리는 삶이 건네는 과실, 선물들을 그 밑 빠진 통으로는 받아낼 수 없습니다. 과연 우리가 밑 빠진 통일까요? 이것이야말로 원초적인 의문이 아닐까 합니다! 때로 우리의 깊은 내면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공허와 결핍이 그 밑 빠진 통의 정체성에서 비롯된다는 생각 말입니다.

얼마 전부터 저는 유도 강습을 받고 있답니다. 지금은 노란 띠죠. 누구든 제 지갑을 슬쩍하려는 사람은 그 노란 띠의 의미를 곧바로 깨닫게 될 겁니다. 강습을 받던 초기에 저는 바닥에 떨어질 때마다 웃음이 터져나와서 혼났답니다. 옛날에 의사가 우리 부모님께 “이 아이는 걷지 못할 겁니다”라고 귀띔해준 이야기를 떠올리면서 거의 깔깔대며 일어서곤 했지요. 제 경우에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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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란 이 몸이 어디에서 났으며, 삶으로부터 무엇을 부여받았는지 깨닫는 데서 시작합니다. 잘 생긴 상대 선수를 제가 아무리 선망의 눈으로 본다한들, 그보다 유도 급수도 한참 낮은 데다 그와 같은 멋진 몸을 가질 수 없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지요. 최고의 식이요법을 실천하고 근육 강화 훈련을 해도 결코 저는 그러 체격을 갖추지 못할 겁니다. 대신 체육관 바닥에 곤두박질칠 가능성을 불사한 채 그곳까지 가려고 힘겹게 발을 내디딘 - 정말 글자 그대로 말입니다 - 걸음들을 떠올린다면 제가 느낄 희열의 정도는 아마 가늠하기조차 어려울 겁니다.

블레즈 파스칼의 무척 아름다운 문장 하나가 저를 감사하는 자세와 집착 없는 마음가짐으로 이끌어줍니다. “‘양지바른 이 자리는 내가 임자야’라고 말하는 순간, 온 세상을 향한 침탈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삶을 거저 주어지는 선물이 아닌 당연히 제 것인 권리로 여기는 순간, 그리하여 “양지바른 이 자리는 내가 임자야”라고 말하는 순간 고통은 물밀듯 밀려드는 법입니다. 삶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모든 걸 내려놓아야 한다는, 이것 하나는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자명한 사실이거든요. 따라서 모든 것을 삶 자체에 맡기는 편이 낫습니다. 아이들은 물론 우리 자신, 친구들 모두의 건강도 당연히 주어져야 할 몫이기보다는 엄청난 선물로 여기는 게 좋아요. 요컨대 감사란 그동안 받은 ‘선물’을 새롭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되새겨보는 자세를 뜻합니다. 집착하지 않고 매달리지 않으면서, 모든 걸 더욱 충만하게 누리는 지혜가 그 안에 있습니다.

■ 행복한 아이는 인생의 의미를 떠올리지 않는다

장미는 ‘왜’ 냐는 물음 없이 장미입니다.

꽃이 피어나기에 꽃이 피어날 뿐입니다.

자기를 걱정하지 않으며,

‘내가 잘 보여요?’라고 묻지 않습니다. - 안겔루스 질레지우스

아이들이 노는 관경을 바라보노라면 삶과 그 아이들의 순진무구한 관계가 제게는 아득하게만 느껴집니다. 아이들과 같은 순수하고 무상(無償)한 태도를 어떻게 하면 되찾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아이처럼 삶을 마음 편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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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닐 수 있는지요? 도원선사께서 말했듯 “아무 목적 없이, 아무 이해타산 없이” 말입니다.

저는 어차피 이루지도 못할 온갖 목표들로 머릿속만 복잡한 터라, 매일 아침 정신 수양 겸 저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건네지요. ‘내게 허락된 이날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교황 요한 23세께선 1962년 12월 23일 자신의 ‘영혼의 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오늘은 어제보다 덜 나빴다. 그런 오늘보다 내일은 좀 더 나을 것이고, 그렇게 계속 나아질 것이다. 하느님의 은총이 함께 하기를. 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하나의 원칙만을 고수할 것이다. 마치 살아서 다른 할 일이 없는 사람처럼, 주님이 나를 세상에 내신 이유가 오직 그것뿐인 것처럼, 그리하여 오로지 그 하나를 이루는 일에 나의 구원이 달려 있는 것처럼, 모든 사소한 일, 작은 기도, 세세한 규칙들을 철저히 수행해 나갈 것이다.” 그러고는 또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이 원칙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자각하고, 자기가 하는 일에 전력을 다하며, 신이 지켜보는 앞에서 굳건히 매진할 것을 내게 요구한다. 하지만 정작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는 그런 원칙이 일상의 처음 취하는 동작에서부터 꼼꼼히 적용되어야만 한다.” 그야말로 불교의 정신과 놀랄 만큼 유사한 말씀이지요. 구체적인 행위에 존재 자체를 몰입시키면서 어떻게 역설적으로 무상한 마음가짐으로 자신을 놓아둘 수 있을까요? 여기에는 ‘무소유(無所有)’라는 불교 용어가 많은 도움을 줍니다. 이는 곧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마음이 없는 상태’를 일컫는데 바로 이 용어를 통해 모든 걸 꿰뚫어 볼 수가 있습니다.

안겔루스 질레지우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장미는 ‘왜’냐는 물음 없이 장미입니다. 꽃이 피어나기에 꽃이 피어날 뿐입니다. 자기를 걱정하지 않으며, ‘내가 잘 보여요?’라고 묻지 않습니다.” ‘왜 사느냐?’는 질문에는 종종 ‘다른 누군가를 위해’가 개입합니다. 결국 우리는 하찮은 존재입니다. 조만간 명줄이 끊긴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행복하려면 이걸 해야 한다”든가, “올해 이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내 인생은 종치는 거야” 따위의 어떤 목적의식에 압도당할 때, ‘왜라는 물음 없이 사는 것’은 큰 힘이 되어 줍니다. 삶은 종치는 법이 없습니다. 삶은 성공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산다는 것 자체가 이미 궁극의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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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기저귀를 갈면서 발을 버둥거리는 셀레스트를 보니, 함박웃음을 머금고 있더군요. 꼼지락거리는 자기 발가락, 손가락을 쳐다보는 아이의 모습은 환희와 믿음 그 자체였습니다. 그냥 주어진 그대로 경이로운 생명이었습니다. ‘나는 왜 존재할까? 같은 의문은 거기에 들어설 틈조차 없습니다. 아빠가 보는 앞에서 예쁜척하지도 않습니다. 거기에 발랑 누워 기저귀를 가는 동안, 삶에 자신을 활짝 열어젖혀 웃을 뿐입니다.

아기의 단순함이야말로 무상성(無償性)의 표본입니다. 아기는 아무런 보호수단 없이 날것으로 세상에 ‘주어진’ 존재입니다. 그런 존재의 믿음을 우롱하는 것은 정말 참혹하고 파렴치한 짓이지요. 항상 현재를 사는 아기는 인간의 스승입니다. 셀레스트는 살기 위한 준비를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냥 살죠. 무상성은 이미 주어진 무엇입니다. 우리는 그저 손을 내밀기만 하면 됩니다.

■ 자책하지도, 자만하지도 말고……

누군가로부터 당하는 비판은

나에게 실보다 득이 될 가능성이 크다. - 에피쿠로스

겸허라는 빛나는 미덕을 생각할 때마다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바로 거울입니다. 불교에서는 텅 빈 거울을 이야기하지요. 사실 거울은 실재를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반영합니다. 거기서 무얼 특별히 취한다거나 제외시키지 않지요. 거울 앞에 오물을 갖다 놓아도, 거울은 깨끗합니다. 거울 앞에 다이아몬드를 갖다 놓거나 한 눈에 반할 미인을 데려다 놓아도, 거울은 자신이 바라보는 대상 때문에 흔들리는 법이 없습니다.

제가 보기에 겸허란, 우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비추면서 자기 자신을 적확하게 파악하는 것입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의 삶을 살펴보면, 있는 그대로의 존재를 볼 줄 아는 지혜와 진실 속에 거하는 자세에서 느껴지는 겸허함의 이미지가 그려집니다. 우리 내면의 혼돈은 물론, 세상 모든 것과의 공존을 체험케 해주는 겸허함은 그 자체로 자신에게 매몰되는 것을 막는 일종의 영적수행법입니다. 겸허란 무엇보다 진실함을 일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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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하다는 것은 진실하려고 ‘애쓰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무얼 보태지 않는 겁니다. 마치 거울이 실재에 아무 것도 덧붙이거나 빼지 않는 것처럼 말이죠.

겸허함을 방해 하는 것은 지나친 포부 자체입니다. 가령 자기 삶을 좌지우지 하겠노라 큰소리친다든지, 남의 생각을 바꾸겠다며 욕심을 부릴 때, 그만큼 저는 땅에서 멀어지는 셈입니다. ‘겸허’를 뜻하는 프랑스어 ‘위밀리테(humilite)’는 ‘위미스(humus)’ 즉 ‘땅’을 뜻하는 어근을 갖는데, 이는 ‘유머(humour)' 라는 단어와도 연결되지요. 유머는 남을 조롱하기 위한 것만 아니라면 우리를 있는 그대로의 소탈한 모습, 즉 땅을 디딘 자세로 쉽게 환원시켜줍니다. 어떤 영국 작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화장실은 겸허함을 배우는 장소다.” 겸허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제자리에 있음을 뜻합니다.

자기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은 행복과 동의, 존재의 희열과 쾌감을 바깥 세상에 구걸하기 마련입니다. 반면 겸허한 마음의 소유자는 언제나 현실에 밀착하기에, 바깥에서 행복을 들여올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을 비난하는 자 못지않게 자만하는 자 역시 겸허와는 거리가 멉니다. 전자가 타인을 중시하여 자신과 단절되어 있다면, 후자는 자기만 중시하여 세상으로부터 단절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남의 지적을 결코 불쾌하게 여기지 않고, 작금의 현실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자세가 겸허라는 사실에 저는 만족합니다. 저는 어제의 제가 아니고, 내일의 저 또한 아닐 것입니다. 저는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저 자신일 때 겸허합니다. 그렇게 겸허히 존재한다는 것은 곧 전적으로 충만하게, 환희에 넘쳐 존재함을 의미합니다.

■ 불편한 진실 끌어안기

주여,

제가 변화시킬 수 있는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와,

제가 변화시킬 수 없는 모든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겸손과,

그 차이를 알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소서. - 성 프란체스코

제 마음에 큰 변화를 가져다 준, 시인 잘랄 아드딘 아르 루미(13c 이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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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시 구절 하나는 지금도 늘 가슴을 설레게 만듭니다. “한 인간 안에 사랑, 고통, 불안, 소망이 존재하나니, 그가 수십만 우주를 소유하는 한, 휴식과 고요를 누릴 수는 없으리라.” 휴식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부족함이 없는 상태는 어디서 구해야 할까요? 아마도 더 이상 평화를 찾지 않거나, 내적인 혼돈을 억지로 진정시키려 들지 않는 가운데 얻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즉 그렇게 편안히 공존하는 법을 터득함으로써 말이지요. 요컨대 편안하지 못한 상태를 편안하게 만들려고 애쓰지 말아야 비로소 편안함이 찾아든다는 발상이 저는 마음에 듭니다.

내면의 적이 아닌 내면의 적, 그렇기에 제가 내면의 적이라 부르는 그것들, 제 안에 도사리는 것으로 보이는 건강하지 못한 성향들, 이런저런 상처의 흔적들, 거리에서 마주친 사람들의 기분 나쁜 표정들, 무뚝뚝한 얼굴로 일관하던 서점의 여종업원 등 제 인생의 사건들 하나하나가 형제나 자매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제 아무리 잘난 존재라 해도 삶이라는 흥겹고 고된 조건 앞에서는 저와 다르지 않은 입장입니다. 무조건적인 희열은 달리 얻어지지 않습니다. 완전한 세상도, 루미가 말하는 수십만 우주도 그것을 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어설픈 의혹과 자잘한 상처들 가운데 무조건적인 희열이 숨어 있습니다. 그것을 추상적 개념이 아닙니다. 무조건적인 희열이란 바로 지금입니다. 지금 당장요.

■ 나는 강요된 선행은 거부한다

미덕을 실천하는 것은 대가를 위해서가 아니네.

올바른 행위에 대한 임금은 그것을 행한 것, 그 자체라네. - 세네카

프랑스어로 ‘온정(溫情, bienveillance)’은 라틴어 ‘베네 볼렌스(benevolens )’에서 왔습니다. 같은 어원을 갖는 ‘베네볼라(benevolat, 자원봉사)’ 는 무엇보다 남들에게 선을 베푸는 것이죠. 자원봉사란 자신의 때깔을 치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의 이로움을 원하기에 취하는 행동입니다. 사랑과 우정의 참된 정의는 바로 그런 것에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베푸는 이의 시각을 강요하지 않고, 순수하게 타인의 이로움을 도모하는 선행(善行). 여기서 또다시 ‘금강경’의 구절을 떠올리게 됩니다. “善은 선이 아니니, 그래서 나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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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선이라 부른다.” 누군가를 도와줄 때 선행에 대한 자기만의 시각을 내세운다면, 그 도움은 타인의 진정한 이로움과는 멀어지는 결과로 치닫기 마련입니다. 선행도 무작정 강요해선 안 되는 이유죠.

한번은 제가 방에 있다가 갑자기 요구르트를 먹고 싶어진 적이 있습니다. 저는 아들에게 좀 도와 달라고 했죠. 녀석은 요구르트를 제가 쓰는 명상 주발 뒤쪽에, 숟가락도 없이 가져다 놓더군요. 그래서 제가 이랬죠. “오귀스탱, 아빠에게 장애가 있는데, 거기 놔두면 내가 집을 수 없지 않니.” 그제야 우리 꼬마는 앙증맞은 손으로 요구르트를 집어 들어 제 앞에 다시 놓아주었습니다. 저는 무뚝뚝하게 또 말했지요. “근데 요구르트를 떠 먹을 숟가락은 어디다 둔 거냐?” 녀석은 멀뚱멀뚱 쳐다만 보더군요.

아빠가 장애인이라 남들처럼 행동하지 못한다는 걸 깨닫기 시작하는 오귀스탱을 보면서 저는 그 깨달음에 적지 않은 슬픔이 배어 있음을 느꼈습니다.

요구르트의 경험은 다름 아닌 받아들임의 경험이 되었던 겁니다. 어차피 저는 남들처럼 요구르트병의 뚜껑을 열지 못합니다. 그걸 하기 위해서는 여섯 살짜리 아들 녀석의 도움이 필요하지요. 하지만 고통스러운 경험이란 게 가끔은 행복하고 유쾌한 경험과 종이 한 장 차이일 때도 있다는 것이 세상 사는 재미 아닐까요!

장애의 경험이 오히려 우리 부자의 완벽한 동지 의식을 일깨울 기회가 되어준 겁니다.

‘금강경’의 구절은 선행 자체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저는 참 고약하고 형편없는 남편인 동시에 지극히 모범적인 남편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그 어떤 태도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냥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죠. 형편없는 남편은 형편없는 남편이 아니니, 그래서 우리는 이를 형편없는 남편이라 부르는 것이니까요.

■ 삶을 짓누르는 사소한 것들에 대하여

모든 것이 쓰러지는 곳에서는

당연히 아무 것도 쓰러지는 것이 없다. - 몽테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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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일 아니야!” 툭하면 이렇게 말하는 친구가 한 명 있습니다. 그 말만 들으면 저는 늘 마음이 편해지고, 지속적으로 뭔가를 배우는 느낌입니다. 그 친구를 보면 엄청난 어려움 속에서도 항상 차분하고 의연한 태도를 취합니다. “별 일 아니야!”라는 말은 손을 놓는다든지, 포기하는 표현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 차분하기만 한 친구는 언제나 현실 속에 두 발을 디딘 채, 여차하면 더 나아지기 위한 행동에 뛰어들 태세로 살지요. 그건 분명 새로운 형태의 절제된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까다롭게 보지 않는 것이죠. 어려움이 닥칠 때일수록 무언가를 더 보태지 않는 것. 난관을 부정하지는 않되 현실 그 자체로 돌아와, 지금껏 자신의 상상이 놀라 날뛰는 말처럼 실제 상황을 제멋대로 휘두르며 지배해왔음을 직시하자는 것입니다.

저의 일상에서 평소 같으면 불행한 사태로 여길 만한 일들이 ‘별일 아니야!’로 인해 흐지부지되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기차를 놓칩니다. ‘별일 아니야!’는 저로 하여금 차분히 다음 기차를 기다리게끔 만들어주지요. 도대체 ‘나’의 기차라며 고집하는 이유가 뭡니까? 승객이 모두 합해 350여 명인, 나의 기차라고 하면 그 기차가 정말 내 소유물이 되기라도 한단 말인가요? ‘별일 아니야!’는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도록 저를 돕습니다. 상황에 대한 적절한 해법을 찾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지요.

‘별일 아니야’는 인생을 살면서 저 자신을 내려놓는 가운데 해결책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것이 바로 제가 좋아하는 이 보잘것없는 문장의 기막힌 효능이지요! 몇 해 전부터, 어림잡아 10여 년은 됐을까요, 아침에 일어나면 제가 버릇처럼 중얼대는 소리가 “아, 지긋지긋해!”입니다. 그만큼 사는 게 힘겹고 피곤해서인 게죠. 이런 와중에 ‘별일 아니야’가 일종의 ‘절제된 삶의 자세’를 들고 나섰습니다. 무엇보다 쓸데없는 생각을 덧붙이지 말자는 거죠. “별일 아니야!” 아직도 솔직히 지긋지긋하지만, 최근 언제부터인가 ‘별일 아니야’와 친숙해지다 보니 지긋지긋하다는 게 왠지 그렇게 지긋지긋하지만은 않더라고요!

■ 타인의 아름다움을 탐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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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님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무언가 결핍되어 있지요.

정확히 말해 시력 말입니다!

……

그럼 당신에게는

날개가 결핍되어 있다고

할 수 있나요? - 스피노자

괴로움을 키우고 결함을 만들어 내는 것, 그것이 바로 비교입니다. 스피노자가 아주 기막힌 말 했는데, 제가 끊임없이 마음속으로 되뇌는 명언이죠. “실제성과 완전성을 나는 같은 것으로 이해한다.” 다시 말해서 현실은 그 자체로 완전하다는 뜻입니다. 장애, 결핍 같은 것은 분명 존재합니다. 다만 저 자신을 제 옆이나 앞에 앉아 있는 사람과 비교할 때 그런 것들이 더 악화되고, 고통스럽게 변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저의 인생행로는 제 존재를 받아들이는, 아니 끌어안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로부터 아무것도 내치지 않고서 말이죠. 아름다움도, 즐거움도, 그것들이 드러난 만큼만 찾는 겁니다. 이 몸뚱어리, 이 존재, 이 삶 안에서 말이죠. 한껏 이상화하거나, 꿈꾼 삶에서 찾는 것이 아닙니다. 즐거움은 평범한 일상 속에 있습니다. 제 인생에서 일대 전환점이라 하면, 더는 이런 식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내게 무엇이 필요할까?” 대신 이런 질문을 하지요. “지금 여기서 어떻게 하면 즐거울까?”

스피노자와 서신을 주고받았던 블리옌베르크는 저 유명한 ‘장님의 사례’를 들어 다음과 같이 반박했지요. “그러나 장님은 완벽하지 않습니다. 무언가 결핍되어 있지요. 정확히 말해 시력 말입니다!” 이에 스피노자는 이런 요지의 반문을 합니다. “그럼 당신에게는 날개가 결핍되어 있다고 할 수 있나요?” 만약 누군가 제게 그런 질문을 했다면 저는 지체없이 대답했겠죠. “그건 아니죠. 제게 날개가 결핍되었다고 말할 순 없지요.” 이로써 스피노자는 자신을 제외한 세상 모두가 날개를 가지고 있을 경우에만 그것을 결핍으로 볼 수 잇다는 점을 블리예베르크에게 납득시킨 셈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원래 결핍된 것이 아님에도 내가 스스로를 타인과 비교하는 순간 결핍으로 느껴진다는 이야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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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다시 만들고 싶다며 보잘것없는 에너지를 낭비하는 사이, 우리는 지금 누릴 수 있는 즐거움, 당장 주어진 그것들을 지나쳐버리고 맙니다. 비교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저의 처방전입니다.

저는 제 아이들을 비교하지 않고 사랑해줍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독자적인 존재로서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가령 사랑하는 대상을 미의 규범과 비교해가며 사랑하는 것은 아니지요. 마음 수행을 하다보면 깨닫게 되는 것이, 실재하는 현실을 우리의 이상이나 관념에 연계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입니다. 참된 벗은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현실을 이러쿵저러쿵 판단하는 것은 곧 신의 옥좌를 차지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은데, 그곳은 이미 임자가 있는 자리라네.”

■ 순수한 열정을 되찾기 위하여

자신이 단순하게 살아야

남들도 단순하게 살 수 있다. - 간디

벗어던진다는 것 또한 제게는 언감생심, 넘볼 수 없는 엄청난 과제였습니다. 그 경지에 도달하려면 수도승이라도 되든지, 초연함의 화신처럼 굴어야 한다고 막연히 생각했지요. 적어도 물질에 속하는 것은 모조리 포기해야 할 거라고 상상했습니다. 그러다가 정작 내가 초탈해야 할 그 ‘엄청난 과제’가 곧 나 자신임을 깨닫는 날이 닥칩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애써 연기해온 ‘나’라는 역할이 문제였지요. 그즈음 알게 된 한 친구가 이런 이야기를 해줍니다. “관계가 많아질수록 이로움은 적어진다.” 실제로 그때까지 저는 결핍이랄지 마음의 상처, 소외나 상실감에 대한 치유책을 구하기 위해 서점이나 슈퍼마켓, 대형 할인 매장 같은 장소를 찾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관계가 많아질수록 이로움은 적어진다.”는 말을 듣는 순간, 이제는 말끔하게 가지치기하고, 과도함에서 하루하루 벗어나는 길을 택하겠다는 자각이 들더군요. 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바로 그 직관, 즉 우리 모두가 불성을 타고 났다는 위대한 깨달음과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타고 났다’는 표현은 소유의 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은 행복하기 위해 지금 있는 것에 무언가를 보태는 개념이 아니지요. 우리 자신이 이미 붓다의 본성이란 얘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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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세상 모든 이가 붓다의 본성입니다.

정확히 말해 불교의 모든 철학 전통에서 말하고 있는 벗어던짐이란 해탈의 길을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 만물, 요컨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덧씌우며 살아가는 모든 정신적 표상들로부터 해방되는 것 말입니다.

벗어던짐이란 곧 벌거벗는 것을 의미합니다. 최근에 펴낸 ‘벌거벗은 철학’이라는, 적나라한 제목의 책에도 제가 그렇게 썼지요. 내적 고요함은 이미 내 안에 영구한 상태로 존재한다고 말입니다. 그런 걸 나 아닌 바깥에서 찾는다면 결코 성실한 태도라고 볼 수 없지요. 벗어던진다는 것, 그것은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발가벗음으로써 우리보다 먼저, 우리 안에 내재해온 희열의 꽃망울을 활짝 피어나게 하는 것이지요. 희열을 경험하기 위해 바깥을 두리번거릴 필요가 없습니다. 처음부터 그것은 있어야 할 곳에 있어왔거든요. 스피노자가 말한 순수한 열정은 억지로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지금까지, 내면의 깊숙한 곳에 이미 넘치도록 주어져 있는 것을 굳이 바깥에서, 겉모습에서, 온갖 잡다한 영적 수행 방법을 동원해 찾으려 했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도원 선사 는 초연함의 길을 가는 것이 곧 축복이라 했지요. 간디는 이런 심오한 말을 했답니다. “자신이 단순하게 살아야 남들도 단순하게 살 수 있다.” 이쯤에서 제 친구가 해준 말을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관계가 멀어질수록 이로움은 적어진다.” 그 말의 본질적 의미에 눈뜨고 나서부터 저는 제게 소중한 물건인 책을 남한테 주는 시도를 해봅니다.

자신을 벗어난다는 것은 자기에게서 무언가를 앗아가버리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결핍되고 빼앗긴 상태로 가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자신의 모습 앞에 몸과 마음을 활짝 여는 걸 뜻합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상(像)을 너무 지나치게 만들어내서 순전히 마조히즘적으로 처신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닌 모든 허울을 벗어던짐으로써 진정한 우리의 모습을 찾는 것이지요. 벗어던지는 일은 일상의 소소한 행동과 더불어 시작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더 큰 벗어던짐으로 우리를 인도하지요. 내가 나일 거라고 믿는 나, 발가벗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막아서는 나를 벗어던지도록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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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이든 악착같이 긁어모으려고 애쓰는 탓에 삶이 진정으로 베푸는 것을 거머쥐지 못합니다. 걸인이 아닌 걸인, 장애인이 아닌 장애인, 삶이 아닌 삶, 벗어던짐이 아닌 벗어던짐 - 그래서 내가 이를 벗어던짐이라 이릅니다만 - 바로 거기에 길이 있습니다.

■ 불가능한 것은 잊고 최선의 것을 욕망하라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면

그의 재산을 늘려주는 것보다

그의 욕망을 줄여주는 것이 낫다. - 에피쿠로스

욕망에는 나쁜 평판이 따라붙지요. 다들 그것을 경계합니다. 영적 수양의 세계에서는 아예 욕망의 싹을 잘라버리자는 주장도 허다합니다. 과연 보다 나은 욕망의 활용법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요? 이 점에서 스피노자가 명시한 구분법은 제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는 적확한 욕망과 부적확한 욕망을 분리했지요. 적확한 욕망이란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욕망으로, 바깥에서 흘러들어온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가 눈여겨 살펴보아야 할 것은 바로 그런 욕망이겠지요. 욕망에 대한 이와 같은 고찰은 우리 존재 깊숙이 자리한 욕망의 정체를 따져보는데 큰 도움이 되어줄 것입니다. 존재의 심연에서 진정으로 갈망하는 것과 현실적으로 추구하는 대상 사이에는 종종 넘기 어려운 괴리가 있기 마련입니다. 살면서 근본적인 욕망에 귀 기울일 시간적 여유가 없다면, 그 삶이 만족스럽지 못한들 전혀 놀랄 일이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 첫 번째 단계는, 저를 특징짓는 욕망들에 귀 기울이면서 그것들 하나하나를 자식처럼 살피는 것입니다. 제 아이들을 볼 때, 저는 어떤 선입견도 가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욕망들이 제 안에서 움트는 것을 느낄 때마다 저는 그것들을 무작정 계도하고, 다스리고, 길들이려고만 하지요. 도대체 왜 좀 더 여유를 갖고 지켜볼 수는 없는 걸까요?

욕망에 대한 생각은 단순히 살면서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 겪고자 하는 욕망의 결과 일수도 있습니다. 사실 저 자신을 관찰해보면 그와 같은 욕망이 매우 집요해서, 고통 자체보다 오히려 더 저를 고통스럽게 만들기도 합니다. 고통을 겪지 않으려는 욕망이 너무 강하다 보니 늘 저 자신을 삶으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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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키려 애쓰는 편이거든요. 그리고 결국에는 그 삶을 만끽할 수 있게 해주는 태도, 즉 내려놓는 삶의 자세에서 나도 모르게 멀어지곤 합니다.

결국 욕망이란 현실에 다시 발붙이기 위한 도구일수도 있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것이 아닌, 최선의 것을 욕망한다면요. 이는 숙명론에 빠져 이런저런 넋두리를 늘어놓는 것과는 무관합니다.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을래.” “나는 더 이상 아무 것도 바라지 않아.” “그래봤자 모두 소용없어.” 등등……. 반대로 최선의 욕망은 자유의 도구로 삼을 수 있습니다. 저는 제 안에 들끓는 온갖 정열의 준동 속에서 보다 많은 자유를 갈망합니다. 그 갈망을 통해 성숙해진 제가 이렇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 긴장감을 놓아도 죽지 않는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이완될 수 있도록 돕는 것.

- 스와미 프라냔파드 (인도의 요기이자 유명한 구루)

침실 문에 아내가 작은 팻말을 걸어 놓았는데, 거기에 새겨진 문구가 평소 제게 큰 도움을 줍니다. “이완은 이완이 아니니, 바로 그래서 내가 이를 이완이라 이르니라.” ‘이완(弛緩)’이란 제게 무척 중요한 단어입니다. 저는 무엇보다 긴장을 푼 상태, 상황을 받아들이는 데서 삶의 희열이 생겨난다고 믿습니다.

선(禪)의 전통에서는 대상이 없는 명상을 좌선(坐禪)이라고 하지요.

좌선이란 정좌한 자세로 취하는 명상입니다. 하지만 상체를 똑바로 유지하기 어려운 저로서는 누워서 명상하는 것에 만족해야 합니다. 하루는 데시마루 선사(파리, 스위스 등에 최초의 선원을 세운 일본인 선사)의 제자 한 명을 우연히 만난 적이 있는데, 제가 누워서 좌선한다고 얘길 했더니 상당히 거북해하더군요. 그러나 붓다가 만인을 상대로 가르쳤음을 생각해볼 때, 저처럼 누워서 명상을 하는 사람들도 아마 다 용서해주실 거라고 믿습니다. 절름발이든 아니든 우리 모두가 불성을 타고 났다면, 각자 자신의 본성에 부응하는 것이야말로 명상의 기본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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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을 피해야 한다는 점을 또 강조해야겠군요. ‘진정한 이완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생각 말입니다.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는 한, ‘젠장, 지금 난 이완되지 못한 상태야’라는 생각이 언제라도 느닷없이 떠오를 수 있고, 그 순간 이전보다 더욱 더 긴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완이 자기도 모르게 이루어진다는 바로 그 점이야말로 좌선이 아름다운 이유입니다. 이완은 진정한 만남의 열매입니다. 불교 신자들이 흔히 말하듯, 그것은 자신의 진짜 얼굴과 대면하는 것, 자신의 진짜 본성을 발견하는 것이지요.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이완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 했습니다.

■ 지금의 결심을 끝까지 지키는 법

1000걸음 나아가다

999걸음 물러나는 것,

그것이 바로 전진이다. - 앙리 프레데릭 아미엘 (철학자)

불교에는 지관타좌(只管打坐)라는 마음을 다잡아 주는 수행법이 있습니다. 이는 ‘오로지 앉아 있음’ 즉, 좌선을 할 때 잡념 없이 집중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가끔, 특히 일이 잘 안 풀릴 때, 우리는 뭔가를 닥치는 대로 바꾸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외모를 바꾸고, 화장을 고치고, 분위기를 전환해서 완전히 새 모습으로 탈바꿈 합니다. 하지만 마음을 다잡는다는 것은 무엇보다 지속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유지하면서 계속 전진하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지금 그렇게 내딛는 발걸음 자체입니다. 내일은 내일이고, 어제는 지난 과거일 뿐이니까요. 마음을 다잡는 일은 불교에서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입니다. 지금 이곳에 정좌한 채, 불성이 저절로 솟아오르게끔 하는 것이죠. 인위적인 행동이 아닌, 능동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행동한다는 것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는 뜻입니다. 능동적 자세라는 것은 두 발을 땅에 딛고 그냥 앞으로 나아간다는 뜻이지요. 어떻게든 새로운 무언가를 이루겠다는 욕심 없이 말입니다.

저는 의사를 만날 때마다 진료가 끝날 무렵 이런 질문을 즐겨 합니다. “지금 당장 제가 무엇을 해야 조금 더 나아질까요?” 목덜미가 뻐근하다든지 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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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기게 괴롭히는 삶의 문제가 있을 때, 마음을 다잡는 수행법은 저로 하여금 좀 더 나은 상태를 향해 일단 한 걸음 내디딜 수 있게끔 해줍니다. 보폭이 크든 작든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저는 ‘내려 놓는 삶의 태도’와 ‘마음을 다잡는 자세’가 서로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미덕을 실천함으로써 사람은 미덕을 쌓는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자신감이 담긴 행동들을 반복함으로써 자신감이 있는 사람이 되지요. 저의 경우는 종종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있어야 자신감 있는 행동을 하지……. 하지만 진실은 그 반대이지요. 매일 조금씩이라도 삶에 신뢰를 담는 행동을 쌓아갈 때, 삶을 향한 신념이 고개를 드는 것입니다. 바깥에서 억지로 끌어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있는 믿음에 눈을 떠야 하는 것이죠.

아미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1000걸음 나아가다 999걸음 물러나는 것, 그것이 바로 전진이다.” 고삐 풀린 욕망이라면 단번에 앞서나가, 우리가 가진 내면의 상처를 깡그리 치유하는 것을 바라겠지요. 하지만 그건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치유가 꼭 아니더라도, 상처와 더불어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음을 깨닫는 일이지요. 마음을 다잡는다는 것은 어쩌면 한 치 앞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자욱한 안개 속을 무작정 걸어 나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때 저를 도와주는 것이 바로 지관타좌(只管打坐 : 오로지 앉아 있음, 좌선할 때 잡념 없이 집중하는 상태)이지요. 누구든 지관(只管)을 몸소 실천할 수 있습니다. ‘단지 거기 있기’, ‘단지 아빠로 존재하기’, ‘단지 친구로 존재하기’, ‘나 자신이기를 방해하는 욕망의 개입 없이 단지 조금 나아지기’ 등이 모두 지관 수행에 해당합니다. 저는 무한한 인내심을 갖고 저 자신이 되기로 마음을 다잡습니다.

■ 나는 무엇을 믿는가

바깥으로 달아나지 말고

너 자신 속을 파고들어라.

진리란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 - 성 아우구스티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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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 신앙이 있을까요? 이따금 한밤중에 저는, 이 우주가 말할 수 없이 광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기에 나라는 존재가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후닥닥 잠을 깹니다. 그러다 아침이 되면 자신감에 충만한 가슴으로 일어나지요. 신이 아니기에 내가 신이라 이르는 바로 그 신이 분명 존재하며 무한히 자애로우시다는 확신을 갖고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제게 신앙이라는 것이 있는 걸까요? 대답은 ‘예스’ 이면서 또한 ‘노’입니다. 어떤 날은 아침에 일어날 때 신앙인이었다가 또 어떤 날은 잠자리에 들 때 무신론자가 됩니다. 그런데 깊이 생각해보면 답은 ‘예스’쪽으로 기웁니다. 가슴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분명 저는 신의 존재를 확신하는 것이 맞아요. 하지만 합리적인 차원에서는 문제가 좀 더 복잡해집니다. 가슴과 머리 사이의 이런 괴리를 감지했을 당시 저는 엄청 기뻤습니다. 그것 자체가 존재의 본질을 향해 저를 이끄는 것으로 보였거든요. 마치 바다가 그러하듯, 수면에는 숱한 파도가 일렁이지만 저 깊은 심저(心底)는 어마어마한 고요가 지배하지요. 저는 기쁜 마음으로, 평화로운 가슴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옳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가슴은 결코 ‘노’라는 말을 하지 않더군요. 저의 현실, 신체적 장애, 그로 인한 고통, 조롱과 시선들을, 가슴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것들을 거북하게 바라본 건 제 머리였지요. 정신 자세랄까요. 그 알량한 심리학을 억지로 끼워 맞춰서 말입니다.

저에게 기도란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고 신 앞에 알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요. 저 역시 건강을 기원하고, 번영을 기원하며, 아이들이 무사하게 크기를 매일같이 기원합니다. 한데 ‘금강경’을 읽은 다음부터 기도란 이것저것 달라고 조르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무얼 달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전체로부터 스스로를 단절하고, 고착시키며, 어떤 결과에 자신을 가두고 맙니다. 정녕 하느님이 존재한다면, 아마 우리의 기도를 시원스레 척척 들어주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우리가 가진 욕망의 대상을 깔끔하게 쟁반에 담아, “자, 너희가 주문한 음식이 나왔단다!” 하며 내놓으실 분이 아니지요. 그보다는 아마 이러실 겁니다. “기도는 기도가 아니니, 바로 그래서 내가 이를 기도라 이르니라.” 다시 말하자면 “기도에 대한 응답은 기도에 대한 응답이 아니니, 바로 그래서 내가 이를 기도에 대한 응답이라 이르니라” 가 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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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문장 하나가 저에게 많은 도움을 줍니다. “바깥으로 달아나지 말고 너 자신 속을 파고들어라. 진리란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이 말씀에 따르려고 합니다. 영혼의 잠수함을 타고 저의 깊은 심연으로 내려갑니다. 온갖 변덕의 소용돌이 속에서 제게 구체적인 길이 아닌 하나의 방향을 가리켜주고, 내디뎌야 할 첫걸음을 암시해 주는 조용한 충고에 귀 기울이는 것이죠. 그리하여 기도는 기도가 아니니 바로 그래서 내가 이를 기도라 이른다는 말이 또다시 중요해지는 겁니다. 예전에는 기도를, 이것저것 해달라는 절박한 주문처럼 여겼습니다. 그러나 만약 기도가 정녕 그런 거라면, 그것은 신의 위대함은 물론 인간의 자유마저 철저히 부정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 나를 파괴하는 생각들에 대하여

두려운 것은 죽음이나 고난이 아니라,

고난과 죽음에 대한 공포이다. - 에픽테토스

하루는 마티외 리카르(달라이 라마의 통역관. 파스퇴르 연구소에서 유전공학을 연구하던 과학자였으나 티베트로 떠나 승려가 됨) 스님이 제가 수없이 읽고 또 읽은 내용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주었습니다. 그분의 입을 통하니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더군요. 명상 수행이란 텅 빈 상태를 바라보는 일이며, 텅 빈 상태에서 모든 긴장을 이완시키는 거라는 이야기 말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생각들을 새를 보듯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이기도 합니다. 새가 지나가고 나면 항상 광막한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지요. 불안과 두려움이란 여전히 그 새들한테만 시선이 고정되어 있음을 뜻합니다. 정작 중요한 것이 무언지를 잊은 거죠. 바로 하늘 말입니다. 고민이란 시야를 가린 새 떼에 불과합니다. 잠시 숨을 고르고 정신 속을 들여다보면, 거기 까마귀, 맹금류를 비롯한 온갖 새들이 무리를 이루어 날갯짓하는 게 보일 겁니다. 제가 친구한테 물었습니다. “새 한 마리 지나가는 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 하지만 그 수가 무진장일 땐 어떻게 해야 그 너머의 텅 빈 하늘을 볼 수 있지?” 친구가 이러더군요. “새들하고 싸우지 마. 날개 달린 짐승들은 함부로 쫓는 게 아니야. 그냥 낮에 파란 하늘 한 귀퉁이 살짝살짝 드러날 때를 틈타 한 번씩 쳐다보는 게 나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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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을 들은 후로 새들만 응시하는 버릇은 없어졌습니다. 어차피 한 곳에 머물지 않고 휑하기 지나가버리는 떠돌이들이니까요. 대신 저는 드문드문 보이는 파란 하늘 조각에 집중합니다. 오래전부터 그곳에 있어온 평화, 붓다의 본질 말입니다. 제 인생에 그토록 짙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다는 걸 깨닫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새 떼들 뒤쪽에 펼쳐진 푸른 하늘을 본다고 해서 불안과 고뇌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자꾸 시야를 제한하고, 안 좋은 것에만 집중하는 고질적인 버릇을 뜯어고치자는 것이죠. 스즈키 순류 선사(1960년대 미국 최초의 선원을 창설한 일본 승려)는 정신이란 광대하다고 말했습니다. 거기에 불안을 입힐수록 스스로를 가두고 제한하는 것이죠. 말이야 쉬워도 실행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한 마리 한 마리 또 한 마리 새가 날아가는 것을 지켜보노라면 어느 새 그 너머 광대한 정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날이 오지 않겠습니까?

■ 가장 비극적인 순간에도 웃음은 존재한다.

기쁨이 내 안을 지나가고, 슬픔 역시 내 안을 지나간다.

그것들은 모두 오고 가나니, 그 어디에도 정착하지 않는다. - 혜능

웃음은 자유의 도구가 되어줄 수 있습니다. 영적 수양을 이끄는 지도자들과 철학자들이 웃음을 불신하는 요즘의 상황이 저는 안타깝습니다. 다 그렇다기보다는, 일부 저자들에게서 그런 경우를 목격할 수 있지요. 저 역시도 예전에는 웃음을 불신하는 편이었습니다. 어렸을 적의 웃음은 두 가지 양상으로 나타났습니다. 우선 저의 몸뚱어리 때문에 터지는 웃음입니다. 평소 지나다니는 길목에서 저는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몸을 숨겨야 한다는 절박함에 종종 시달리곤 했습니다. 저를 업신여기고 심지어 잔인하게 죽여버릴 수도 있는 그 웃음을 유발하지 않으려고 말이죠. 또 다른 양상은 겉으로만 웃는 웃음입니다. 저는 공립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종종 어릿광대 노릇을 해야 했습니다. 심각하게 보이지 않으려고 말입니다. 서먹한 분위기를 떨쳐버릴 약간의 유머 기질을 발휘했다고나 할까요. 그러다 보니 유머라는 것도 존재의 심연, 즉 불성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우스꽝스러워지려고 애쓰는 것보다 더 서글프고 한심한 일은 없습니다. 보통의 경우, 비참함을 느끼기 마련이지요. 그럼에도 저는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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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소리를 하고 저 자신을 회피하려고 애씁니다. 삶을 심각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지요.

자신을 희화 하는 것이지 타인을 비웃는 것이 아닙니다. 한 친구가 종종 이런 말을 합니다. “무얼 가지고 웃어도 좋지만, 남을 비웃어서는 안 된다.” 웃음이란 결코 타인을 해치는 것이 아닙니다. 웃음은 삶을 위해 봉사합니다.

해를 거듭할수록 제게 자양분이 되어주는 아름다운 텍스트가 하나 있지요. 유태인을 돕다가 아우슈비츠에서 죽음을 맞이한 작가 에티 힐레숨이 쓴 일기의 일부입니다.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도 어떤 문제 하나로 인해 삶이 정체되어 있으면 안 된다. 삶의 거대한 흐름은 결코 멈춰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는 육조 대사의 유명한 원칙이기도 합니다.

“기쁨이 내 안을 지나가고, 슬픔 역시내 안을 지나간다. 그것들은 모두 오고 가나니, 그 어디에도 정착하지 않는다.”

그럼 이제 우리 삶의 중심에 과연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보기로 하죠. 생활을 온갖 문제들일까요. 우리 자신의 콤플렉스일까요. 우리가 맡은 사회적 역할들일까요, 아니면 타인의 존재일까요? 내 인생의 중심은 무엇일까요? 내 인생에 방향을 부여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분명 웃음은 집착하지 않게 합니다. 먼저 우리 자신을 두고 웃는 일부터 시작해보죠. 그 자체로 건설적인 일이거든요. 근심 걱정이 틈입할 여지는 없습니다. 자신을 두고 웃는 바로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은 수행이 됩니다. 저는 저 자신의 아집을 놓고도 웃을 수 있습니다. 비웃음과는 달리, 웃음은 모든 자아도취적 집착을 뿌리째 뒤흔들어 우리로 하여금 앞으로 나아가게 해줄 삶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 질문은 그만! 그냥 행복하라

니체가 쓴 다음 문장은 제게 삶의 길잡이가 되어 줍니다.

“단순한 삶이란 어려운 것이다. 그것을 누리려면 아주 지적인 사람들보다 더한 사고력과 창의력을 가져야 한다.”

단순하다는 것은 복잡한 현상입니다. 벌거벗은 상태로 대면하는 것은 복잡한 일입니다. 삶을 복잡하게 만들고, 온갖 비교를 해가며 일어나지도 않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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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을 기다리는가 하면, 영영 지나가버린 과거를 후회하느라 우리의 정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죽도록 고생하지 않나 싶습니다. 단순한 삶을 사는 것은 매사에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는 것입니다. 회한을 없애고 싶어 하는 마음조차 가지면 안 됩니다. 마음속에 회한이 스며들면 그대로 두는 것이죠.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 삶은 계속되고 나는 나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간다

지금 앉은 자세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냥 받아들여 그 자세를 그대로 취하십시오. - 하라다(原田) 선사

우리의 탐구를 마무리 하면서 제가 행해온 마음수행을 특징짓는 몇 가지 중요한 생각들을 한자리에 모아보는 것은 어떨까 합니다. 제가 선을 접하게 된 것은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성인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 ‘당나귀 형제’ 때문, 아니 덕분이라고 하겠습니다. 제가 처한 육체의 현실은 보시다시피 감당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당나귀 형제를 등지면서 툭하면 관념 속으로 줄행랑치는 성향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좌선을 간략히 소개하는 자리에 참석했는데, 앉아서 하는 명상(제게는 누워서 하는 명상이지만)을 시도해보니, 세상에! 온갖 철학적 개념들을 통해 그토록 추구해온 평안이 제 가슴 깊숙한 곳에 버젓이 자리하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마도 당나귀 형제인 육체가 그 평안에 이르는 여러 수단 중 하나였던 게지요. 아무 것도 이루려 하지 말고, 누군가가 되려는 욕심도 없이, 허세를 다 걷어내고, 앉든 눕든, 그냥 거기 그대로 있는 몸, 바로 그것입니다. 결국 저는 명철한 이성이나 논리보다 어리석은 당나귀 형제에게 더 큰 빚을 진 셈입니다. 덕분에, 평화가 아니기에 비로소 평화라 부를 수 있는 내면의 평화를 만나게 되었으니까요.

매일 반복하는 저의 수행은 세 가지 중요한 원리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아니, 원리보다는 지침이라는 말이 낫겠군요.

그 첫째는 육조대사 혜능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문맹이셨던 그분은 ‘육조단경’을 구술하면서 자신만의 수행법을 펼치셨지요. 그중 한 문장이 저에게는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우리가 하나의 생각에 멈추는 순간, 하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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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 자체가 멈추고 만다. 이것을 바로 집착이라 부른다.” 이를테면 처음 명상을 하려할 때 저는 먼저 정신을 비워야 하고, 잡다한 사념들과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혜능께서는 제 머릿속 생각이 중구난방으로 흩어져, 내일에서 모레로, 기쁨에서 슬픔으로 순식간에 옮겨가고, 오락가락 갈피를 잡을 수 없다 해도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자체가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요. 짧은 순간에 온갖 일들이 머릿속에서 일어나지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정작 문제는, 그 중 하나에 제가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발생합니다. 그중 하나에 저를 고정시킬 때 말이죠. 분노를 그냥 지나치도록 놔두지 않을 때, 슬픔이 제 갈 길을 가도록 있는 그대로 살아버리지 못해 내 안에 자꾸 지체하게끔 만들 때, 문제가 일어난다는 얘깁니다.

티베트 불교에서는 우리 안에 출몰하는 생각들을 마치 어린아이들이 노는 광경을 구경하듯 바라보라고 가르칩니다.

둘째 지침은 이 책에서 언급된 것으로, 저의 인생을 구원해준 내용입니다. 다름 아닌 ‘금강경’의 유명한 후렴이죠. “붓다는 붓다가 아니니, 바로 그래서 내가 이를 붓다라 이르니라.” 우리가 실재에 대해 안다고 믿는 모든 것은 바로 그 실재를 고착시키는 꼬리표들에 불과합니다. 삶을 그냥 놔두어야 합니다. 삶을 고정시키려는 욕심을 버리고, 삶과 더불어 그냥 춤추어야 합니다.

‘금강경’의 후렴은 제가 가진 편견과 저의 세계관을 폭파시키라고 끊임없이 권합니다. 저는 제 아내를 두 번 이상 만나지 못합니다. 제 아내가 순간순간 변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마음 같아서는 사진첩 속의 사진처럼 그녀를 고정시키고, 이전 모습으로 되돌리고 싶지만, ‘금강경’은 그런 저더러 완전히 새로운 눈으로 아내를 바라보라고 타이릅니다. 실은 저 역시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죽고 또 태어나는 존재이지요. 삶에 모든 걸 내주고 그로써 모든 걸 받아내야 합니다. 삶을 차지하려고 애쓸수록 삶으로부터 얻어낼 것은 줄어듭니다.

셋째 지침은 운문 선승의 말씀에서 비롯됩니다. “그대가 앉아 있을 때 앉아 있어라. 그대가 서 있을 땐 서 있어라. 그대가 걸을 땐 걸어라. 무엇보다 서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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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에게 ‘금강경’의 후렴은 매일매일 살아가도록 도와주고 구원해주는 특별한 도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금강석이 자르지 못하는 것은 없습니다. 금강석은 세상과 저 자신에 대해 제가 스스로 만들어낸 온갖 상념과 망상의 격자들을 싹둑싹둑 잘라내 허물어 버립니다. 금강경의 말씀을 배운다는 것은 곧 집착하지 않는 법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금강경’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우리는 우리를 엄습하는 고통에 더 이상 얽매이지 않게 되지요. 고통뿐 아니라 기쁨 속에서도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는 법이 없습니다. 그 무엇에도 정착하지 않습니다. 텐트를 치고 그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순간, 고통이 시작되니까요. 우리는 대개 자기가 가진 것을 잃을까 봐, 생각한 것을 잊을까 봐 두려워하는데, 그건 곧 삶의 움직임을 피해 도망가는 것입니다.

하라다 선사는 명상을 시작하는 법에 관한 아주 탁월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앉으십시오. 그리고 보다 잘 앉으려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좀 더 제대로 앉으려는 마음이 생깁니다. 지금 앉은 자세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냥 받아들여 그 자세를 그대로 취하십시오.” 이 가르침을 저는 삶에 대한, 그냥 존재함에 대한 전적인 긍정의 정수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삶에 대한 판단을 내리며 살아가지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거부하게끔 자아가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무언가 항상 잘못 돌아가고, 양에 차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요.

이상 제 나름대로 요약한 선 수행의 세 가지 지침은 있는 그대로 소탈하게, 삶에 바짝 다가가, 실존 속으로 돌아갈 것을 우리에게 권하고 있습니다.

2013. 7. 14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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