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 생 수 업

2013. 12. 2. 08:30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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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생 수 업

- 잘 물든 단풍은 봄꽃보다 아름답다 -

■ 법륜

0 1988 정토회 설립

0 2000 만해상 포교상, 2002 라몬 막사이사이 상, 2007 민족화해상,

2011 포스코 청암상, 통일 문화대상

0 스님의 주례사, 엄마수업, 깨달음, 기도 내려놓기, 금강경 강의, 반야심경 이야기, 붓다 나를 흔들다, 행복하기 행복 전하기 등의 저서

프롤로그 : 인생의 황금기는 지금이다

젊을 때는 시간이 지루할 만큼 안 가는데, 나이가 들면 시간이 아주 빨리 간다고 느낍니다. 같은 시간인데 왜 다르게 느껴질까요. 어릴 때는 보통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나이도 좀 올리고 “내가 형님이다. 내가 언니다.”우기기도 합니다. 그렇듯 어른이 되기를 기다리니까 시간이 안 가는 듯한 겁니다.

막상 어른이 되면, 그때부터는 한 살이라도 낮추고 싶어 합니다. 어릴 때 시간의 흐름은 성장을 가져오지만, 나이 들어서는 노화가 따르잖아요. 팽팽하던 얼굴에 주름이 생기고, 검던 머리카락에 흰머리가 하나 둘 생기고, 밤을 새워도 끄떡없던 체력이 하루가 다르게 약해집니다. 마음은 여전히 청춘인데, 몸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걸 느낍니다.

그러면 ‘해 놓은 것도 없이 나이만 먹었구나.’ 하는 생각에, 미래가 두려워지면서 마음이 과거로 향합니다. 그래서 흔히 나이 들면 지난 이야기를 하면서 추억에 잠기고 지난 세월을 그리워해요.

‘그때가 좋았어’라고 그리워하는 바로 그때는 과연 행복했을까요? 어릴 때, 젊을 때는 다 행복한 걸까요? 중고등학생, 그리고 대학생에게 행복하냐고 물어보세요. 다 힘들다고 해요. 지난 시간은 다 아름답고 좋은 것 같아도 실제 그 시간에 늘 행복했던 것만은 아닙니다.

후회는 지금의 나,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합니다. 한 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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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 조사에서 10대부터 50대까지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게 무엇인가요?” 하고 물었을 때 세대와 상관없이 1위가 바로 “공부 좀 할걸”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때 놀지 말고 공부했다면’ 지금 훨씬 더 잘살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10대, 20대, 30대, 그 시기에는 늘 힘들고 괴로워하지만, 지나고 보면 ‘그래도 그때가 좋았다’고 그리워합니다. 지금 40, 50대가 나이 들었다고 한탄하는데, 한 이삼십 년 지나고 보면 바로 지금 시절이 한창때였음을 알게 됩니다. 지금 60, 70대가 나이 들었다고 서러워하는데, 10년 지나면 ‘내가 10년만 젊었어도’ 하면서 그때를 그리워합니다. 이렇듯 늙었다는 건 상대적인 겁니다. 청춘인 고3이 고2에게 심부름을 시키면서 이렇게 말하잖아요. “젊은 네가 해라. 늙은 나는 쉴란다.”

아이가 어른을 흉내 내며 현재를 살지 못하는 것도, 또 젊은 사람이 험난한 세상살이가 힘들다고 ‘나도 빨리 나이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늙어서 ‘젊었을 때가 좋았다’고 젊음을 부러워하는 것도 지금 주어진 행복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이제 내 중심을 잡고 인생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지금까지 삶의 우선 순위였던 재물, 출세, 명예, 건강, 등에 대한 욕구를 뒤로 돌려야 합니다. 이 욕구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어서 그것을 해결하기에 급급해서 정작 중요한 것이 보이지 않았던 겁니다. 그 욕망들을 내려놓아야 그 순간 눈이 열리고, 어떻게 해야 행복해지는지 비로소 인생의 길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오늘을 허투루 보내고 있지는 않은지 자신을 돌아보세요. 죽음의 순간은 언제 올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오늘 최선을 다해야 하고, 그 마음을 잃지 않아야 내일 죽어도 후회 없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추구하는 성공과 상관없이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살아갈 때 그것이 바로 좋은 인생입니다. 늘 오늘의 삶이 만족스러우면 그게 곧 행복한 인생이지요.

제1장 지금, 당신은 행복합니까?

■ 왜 사느냐 다시 묻고 싶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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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왜 살아야 합니까?”

젊을 때 많이 하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또다시 묻는 시기가 있습니다. 사십대, 오십대, 혹은 갱년기에 접어들어 ‘사는 게 뭔가, 대체 인생이란 무엇인가.’하는 회의가 들면서 다시 묻게 됩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는 답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삶이 ‘왜’라는 생각보다 먼저이기 때문이에요. 즉 존재가 사유보다 먼저 있었기 때문이지요. 살고 있으니 생각도 하는 건데, ‘왜 사는지’를 자꾸 물으니 답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니라 이미 태어나 있습니다. 한국 사람이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라 이미 한국 사람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왜 한국 사람이 됐지?’ 이렇게 물으면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즐겁게 사는 게 좋다. 그럼 어떻게 하면 즐겁게 살지?’

이것이 이미 살고 있는 존재로서 건강한 사고방식입니다. 풀도 그냥 살고 토끼도 그냥 살고 사람도 그냥 삽니다. 또 때가 되면 죽습니다. 살고 싶어서 살고 죽고 싶어서 죽는 게 아니라, 삶은 그냥 주어졌고 때가 되면 죽는 거예요. 결국 주어진 삶에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괴로워하며 살 것인가, 즐거워하며 살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 속에는 ‘나는 특별하다’는 생각이 숨어 있습니다. ‘나는 특별하다. 그래서 특별한 인생을 살아야 한다. 그런데 그러지 못해서 괴롭다.’ 결국 나의 삶에 스스로 부담을 주는 겁니다.

길가에 자라난 풀 한 포기나, 산에 살고 있는 다람쥐나 인생살이나 다 똑같습니다. 자기 자신은 스스로 특별한 줄 알지만 사실은 별 거 아니에요. 아무리 잘난 척해도 100일만 안 먹으면 죽고, 코가 막혀 10분만 숨을 못 쉬면 죽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는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러면 특별해져야 한다는 부담 없이 가볍게 살아갈 수 있고, 어떤 사람을 만나든 어떤 일을 하든 편안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왜 사느냐’는 질문으로 시비를 거는 대신 ‘어떻게 하면 오늘도 행복하게 살까’를 생각하는 것이 삶의 에너지를 발전적으로 쓰는 길입니다. 그것이 내 인생에 대한 책임과 권리를 지닌 주인으로 사는 것이기도 합니다.

■ 오늘을 견디면 내일은 달라질 거라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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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는 ‘어른만 되면 행복할 거야’라고 생각합니다. 학창 시절에는 ‘대학만 들어가면 좋아질 거야’라고 생각해요. 그러고는 ‘대학만 졸업하면’ ‘결혼만 하면’ ‘애만 낳으면’ 하면서 내일을 기약하면서 견디는 겁니다. 이렇게 지금까지 열심히 달려왔습니다. 그러다 나이를 들고 보니 ‘내가 잘 살고 있는 건가?’하는 생각이 든다는 분이 많습니다. 한 분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어떤 생이 성공적이고 좋은 인생인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면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위, 권력, 인기를 얻으면 성공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와 같은 성공은 상대적 가치입니다.

돈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목표했던 돈을 다 모으면 소원이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이 없는 사람은 돈이 있는 사람들을 보면, ‘무슨 걱정이 있겠느냐고 생각합니다. 그럼 돈 있는 사람들은 근심 걱정이 없을까요. 어쩌면 돈이 있는 사람들이 더 근심 걱정이 많을 수도 있습니다. 자기 돈을 지키느라 걱정하고 또 자기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과 비교해서 부족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논 99마지기 가진 사람이 한 마지기 가진 사람에게 논을 달라고 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추구하는 성공은 남의 평가와 본인이 느끼는 것이 다를 때가 있습니다. 남으로부터는 성공했다고 평가 받을지 몰라도 자신의 삶은 피폐해진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 늙거나 병들었을 때 ‘내 인생은 참 보람 있었다. 다시 태어난다 해도 그 일을 하겠다’는 것보다는 지나온 삶이 허망하다 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내가 공연히 쓸데없는 데 인생을 낭비했구나.’ 후회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럼 진정으로 성공적인 인생, 좋은 인생이란 어떤 걸까요. 세상에서 추구하는 성공과 상관없이 자기가 만족하면 좋은 인생입니다. 흔히 도시에서 돈을 많이 벌어 큰 아파트에서 살면 성공했다고 생각하지만, 시골에서 농사짓고 살면서도 만족한다면 성공한 인생이에요.

‘나는 참 행복하다. 좋은 공기 마시고, 깨끗한 물 마시고, 오염되지 않은 농산물 먹고, 자유롭게 일하니.’

그러니까 행복을 내일로 미루지 않고 오늘 자기 삶에 만족하면 잘 사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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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을 하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일이 있으면 그 일을 하는 거예요.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면 힘들어도 즐겁습니다. 군사훈련 받느라 산에 올라갔다 오든 등산하러 산에 갔다 오든 육체적으로 고된 것은 같습니다. 그런데 군사훈련 하느라 산에 갔다 오면 힘들고 괴롭지만, 등산을 하면 고되지만 즐겁잖아요.

요즘 사람들은 허세도 심하고 헛된 욕망에 팔려서 인생을 낭비하고, 늘 남과 비교하며 자기를 학대하고 삽니다. ‘나는 능력이 없다’는 생각에 빠져 무기력하게 살거나 남을 원망하고 살면서 자기를 비참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세상의 성공 기준에 나를 맞추고 나의 욕구가 충족된다고 행복해지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욕구를 버리거나 기대를 낮추는 만큼 기쁨이 일어나고 만족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계속 바깥 세상 탓만 하지, 자기 내면을 돌이켜보고 만족하는 힘이 없습니다.

■ 나이 들면서 얻은 것과 잃은 것

모든 것은 변해갑니다. 그런데 예전 생각만 하고 지난 것을 고집하면 거기에서 괴로움이 생깁니다. 어릴 때 우정으로 뭉쳤던 친구들도 세월이 가면 자기 살기 바빠서 흩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다 보면 예전처럼 모여도 반갑게 만나지 못하고 시들합니다. 물론 우정은 있겠지만, 어릴 때와 같은 관계는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은 나이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상대방을 내 뜻대로 하려하고, 내 취향에 맞는지를 너무 따지면 인생살이가 피곤해서 병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먼저 친구들과 늘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자유로워집니다. 같이 있으면 대화할 수 있어서 좋고, 혼자 있으면 혼자 있어서 좋아야 합니다. 그러면 곁에 사람이 있든 없든 아무런 상관이 없고, 언제 만나든 편할 수 있어요. ‘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 잡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관계를 아무렇게나 내버려두라는 게 아니라, 주어진 인연을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사람관계가 변하는 것을 억지로 잡으려고도 하지 말고, 떠난다고 아쉬워하지도 말고, 집착하지도 않아야 편안한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새로운 인연도 만날 수 있어요.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면 내 마음이 답답해지고 상대를 이해하면 내 마음이 시원해집니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내 마음에 기쁨이 일어나고, 누군가를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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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하면 내 마음에 괴로움이 생깁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오랫동안 부정적으로 마음을 쓰다보니 상대를 이해하기보다 내 생각을 고집하기 때문에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내는 데 익숙합니다.

그럴 때 ‘아, 내 마음에 안 든다고 미움이 일어났구나.’ ‘같이 있어주지 않는다고 원망하는구나’라고 마음을 살피면 도움이 됩니다. 그러다 보면 우정에 대한 집착도, 친구에 대한 미움도 점점 사라집니다.

■ 남들 다하는 결혼, 못하면 죄인?

20대든 30대든 40대든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흔히 결혼에 대한 고민과 환상이 많습니다. 한 30대 여성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제가 결혼해서 잘살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결혼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입니다.” 주위에 결혼할 사람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아직 없는데요.”

결혼할 사람도 없는데 결혼 걱정을 하면 뭐합니까. 아직 오지도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고 우울해 하는 사람을 좋아할 남자가 있을까요? 아마 심각하고 어두운 얼굴빛에 질려서 다가오려고도 안 할 거예요.

떠 어떤 여성은 결혼을 하고 싶은데 남자를 못 만나서 괴롭다고 하소연했습니다. 이때 조심할 것이 있는데, 결혼에 대한 조급한 마음 때문에 남자를 잡으려고 덤비면, 남자는 부담스러워서 도망간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결혼에 너무 집착하고 마음이 급하면 오히려 결혼을 그르칠 수 있습니다.

요즘은 혼자 살아도 좋은 세상이잖아요. 혼자일 때는 ‘혼자여서 좋구나.’ 하면서 재미있게 살면 됩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늘 생글생글 웃고 살면 남자가 아니라 누구라도 좋아하겠지요. 좋다고 매달리는 사람이 있으면 같이 살면 되잖아요. 그러니 결혼을 한다. 안 한다 혼 자 고민할 필요도 없고 언제 결혼하겠다고 결론 내릴 필요도 없습니다. 혼자 결론 내린다고 그대로 되는 것도 아닌데 결혼을 심각하게 생각하면 공연히 인생을 어둡게 사는 거예요.

한 40대 여성은 결혼을 못해서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진다고 고민을 털어 놓았습니다.

‘마흔이 넘도록 결혼을 안 했다는 건 잘한 것도 아니고, 잘못한 것도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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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성공도 아니고, 실패도 아니고, 다만 그것일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결혼하지 않은 것을 자랑삼으니까 잘한 게 되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부족함이라고 생각하니까 스스로 초라해지는 거예요. 마흔이 넘도록 결혼을 안 한 게 초라한 것이 아니고 자기가 초라하게 생각한 데서 비롯한 겁니다.

자신을 초라하게 여기면 마음이 무거워져서 다른 사람을 만나기도 힘들어집니다. 이런 분은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거두고 마음을 가볍게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요즘 여성들은 사회활동으로 결혼을 늦게 하는 경우도 있고, 자기 일이 있을 때는 결혼에 대한 생각이 크지 않다가 나이 들어서 결혼을 생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58세인데 혼자 사는 외로움 때문에 폭식을 하는 것 같고, 지금이라도 결혼하고 싶은데 괜찮을지 물은 분이 있었어요.

결혼에는 적령기가 따로 없습니다. 58세가 됐는데 외로움을 탄다면 결혼을 해도 됩니다. 그런데 결혼 생활이 원만하기는 조금 어렵다는 것을 알고 해야 합니다. 혼자 살아온 습관이 너무나 오래 몸에 배었기 때문에 나이 들어서 남과 같이 사는 데 적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자기 하고픈 대로 살았지만 결혼하면 상대에게 맞춰야 하잖아요. 외로움은 해소될지 몰라도 생활을 같이하다 보면 불편한 점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결혼을 하든 안 하든 이런 문제도 있고 저런 문제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후회를 남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혼자 사는 생활과 함께 사는 생활을 다 경험해 가면서 자기 마음을 정리하는 게 좋습니다.

■ 구멍 난 가슴에 찬바람이 드는 나이

남편은 자기 할 일로 바쁘고 아이들도 다 커서 별로 할 일이 없을 때, 40대 가정주부들은 우울증을 겪기도 합니다. 자기 존재감이 없어지면서 ‘나는 뭐 하고 살았지.’ 하며 우울해지는 겁니다. 이때 겪는 갱년기 장애는 신체에서도 오지만 절반은 정신적인 것에서 옵니다.

이럴 때 집에 있으면 자꾸 아이나 남편을 문제 삼기 쉬우니까, 자원봉사 같은 활동을 하면 우울하고 허전한 마음을 치유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돈을 안 벌 뿐이지 자기 일이 있고, 자신의 봉사가 다른 사람에게 참 귀중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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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이는 경험을 하면 우울증에 빠지지 않고 생기를 얻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시간과 열정을 세상을 위해서 아주 의미 있게 Tm다보면 보람 있게 자기 실현을 할 수도 있습니다.

정토회 봉사자들 가운데 99%가 여자분들입니다. 특히 가정주부들은 돈을 벌지 않고 살아서 돈을 받지 않는데 익숙합니다. 그러나 남자들은 늘 돈을 벌고 살았기 때문에 돈 버는 일에 관심이 많고 나이가 일흔이어도 ‘어디 돈 벌 데 없나.’ 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물론 나이 들어서도 일자리를 찾아서 일하는 것도 좋지만, 최소한으로 먹고 살 수만 있으면 남을 위해 일하고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을 함께하면 활력이 생기고 마음이 젊어집니다. 그러면 몸도 덜 늙습니다.

지금까지 내 인생, 내 남편, 내 자식, 내 부모만 알고 열심히 착실히 살았습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나 가족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나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잘못 산 것이 아니라 단지 개인적으로 살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남은 인생은 좀 더 큰마음을 내서 이웃과 세상을 위해서 살아보는 것도 좋습니다. 내 울타리를 깨고 나가면, 시야도 넓어지고 인생도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자식이 시험에 떨어졌다고 해도, 심지어 배우자가 세상을 떠나는 일이 생겨도, 오래 힘들어하지 않고 잘 극복해 갑니다. 인생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든 거기에 덜 구애받을 만큼 내면의 힘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 잘나가던 옛날로 돌아가고만 싶다

“요즘 몸과 마음이 많이 약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어떻게 하면 젊게 살 수 있을까요?” 한 여성분이 물었습니다. 나이 들어가면서 젊을 때처럼 살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면, 오늘이 불행해 집니다.

또 한 분은 사는 낙이 없다면서 “예전처럼 좀 많이 웃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하고 물었습니다. 물론 웃으며 즐겁게 사는 건 좋지만, ‘예전처럼’ 이란 단서를 다는 게 바로 불행의 원인입니다.

항상 현재에 있어야지, 옛날에 잘 나갔을 때, 좋았을 때를 생각하면 현재의 삶에 장애가 됩니다. 옛날에 행복했을 때, 옛날에 예뻤을 때, 옛날에 부자였을 때, 옛날에 지위가 높았을 때, 옛날에 부부관계가 좋았을 때와 같이 자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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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을 생각해서 예전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은 진취적인 것이 아니라 후퇴하는 겁니다. 부부도 흔히 ‘앞으로 아이를 어떻게 키우며 살 것인가’를 의논하지 않고, “당신 결혼하기 전에 나한테 뭐라고 했어?” 이런 식으로 과거를 물고 늘어지면 갈등만 심해집니다. 계속 지나간 얘기 하며 서운해하며 다투면서 결혼을 잘못했다고 생각하면 스스로 불행에 빠집니다.

흔히 나이 들면 과거에 집착하고 젊음에 대한 욕망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는데, 과연 나이 들어가는 게 괴로운 걸까요? 아니에요. 나이가 좀 들어야 인생의 맛을 알잖아요. 젊을 때는 미숙했지만, 나이 들어가며 이것저것 경험해봐서 조금 완숙한 맛이 있습니다.

술도 익어야 맛있고 된장도 숙성해야 맛이 나고 밥도 뜸이 푹 들어야 맛이 있듯이 인생도 늙어야 제 멋이 나는 겁니다. 나이 들어가면서 내가 초라해지느냐, 아주 원숙해지느냐는 몸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늙음은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오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인데, 계속 봄이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 여름으로 바뀌면 괴로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계절의 변화가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봄에 집착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는 거예요. 젊음에 집착하기 때문에 늙음이 괴로움이 되는 겁니다.

■ 일어난 일은 언제나 잘된 일이다

햇살이 쨍쨍 하다가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고, 빗방울이 한두 방울 떨어지더니 폭우가 쏟아지기도 하고, 비바람이 불고 천둥번개가 치다가 금방 맑아지는 경우도 있고, 비가 올 듯 올 듯 하면서 오지 않고 찌뿌둥한 날씨가 하루 종일 계속될 때도 있습니다.

예측할 수 없는 날씨처럼 우리 인생에도 예기치 않은 사건들이 많이 생겨납니다.

우리는 늘 인생이 내 뜻대로 되기를 바라고, 거기에 행복과 불행을 연결 짓습니다. 그러나 세상 일이 다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어떤 건 됐다가 어떤 건 안 됐다 하니까 늘 행과 불행이 왔다 갔다 합니다. 그래서 인생을 ‘고락’이라고 해요. 괴로울 때도 있고, 즐거울 때도 있어서, 고락이 늘 되풀이되므로 윤회한다고 말합니다.

지나온 삶에서 행불행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잘 살펴보세요. 지금 일어난 일이 나쁜 것 같고, 저 일은 좋은 것 같은데, 지나고 보면 나쁜 일이었던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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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나에게 더 이득이 되는 경우가 있고, 좋은 일 같았던 게 더 손해가 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을 알고 나면 행복에 집착하고 불행에 괴로워하는 감정기복이 좀 줄어듭니다.

저는 예전에 고문을 당하기도 하고 감옥에 가서 몇 달 살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힘들었지만 그 경험이 법문거리든 수행의 과제든 모든 면에 도움이 됩니다. 또 세상을 이해하는 데도 굉장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제가 교도소에 가서 법문을 할 때 감옥에 들어가 보기 전에는 “당신들이 나쁜 짓을 했지만 지금이라도 반성하면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 이랬을 겁니다. 그런데 제가 그 안에 있으면서 일반 재소자 12명이 있는 방에 함께 있은 적이 있습니다. 그 방 사람들은 도둑질이나 이런저런 위법행위를 하고 들어온 사람으로, 보통 잡범이라고 부르지요. 그런데 그들 모두 하는 말이 자기는 죄가 없다는 겁니다. 다 억울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 제가 수감자들에게 법문을 한다면 첫마디를 이렇게 할 겁니다.

“여러분 다 억울하시지요?”

그럼 그 사람들의 마음에 확 다가갈 수 있겠지요. 이것은 책을 보고는 얻을 수 없는 경험입니다.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경험을 하니까 나이가 들면 원숙해진다고 합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은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좋습니다. 이미 일어나 버렸는데 그걸 부정적으로 생각한다고 해서 바뀌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다고 ‘무조건 잘된 거다.’ 하는 낙관이 아니라, ‘일어나버린 일은 항상 잘된 일이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보고 거기서부터 출발하면 어느 상황에서든 배울 수 있고, 그 풍부한 경험을 토대로 지혜로운 조언도 해 줄 수 있게 됩니다.

■ 인생의 우선순위를 다시 생각할 때

수없이 고민하고 괴로워하며 살아온 인생입니다. 그러면 그 숱한 경험 속에서 ‘이것을 깨달았다’하고 내 놓을 게 있습니까. 내가 젊어서 방황했던 시절처럼 이제 내 자식이 20대가 되고 30대가 됐는데, 어떤 교훈을 들려줄 수 있을까요. 자신이 인생에서 시행착오를 하며 배운 것은 통해,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할 만한 것이 있어야 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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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결혼해 보니 그거 할 거 아니더라. 너는 결혼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해라.”

“자식이 어릴 때 부부간에 다투니까 자식에게 나쁜 영향을 주어서 나중에 힘들더라. 너는 결혼을 하거든 애는 낳지 말든지, 낳으려면 부부간에 무슨 일이 있어도 화목해야 한다.”

이런 교훈이나 인생 경험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지금 또 자신의 부모가 한 것과 똑같이 “빨리 시집가라.” “빨리 장가가라.” “돈 많은 사람이 최고다”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지 않습니까. 결혼해서 이삼십 년 살았으면, 거기서 얻은 교훈이 있어야 하는데, 달라진 게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30년이 아니라 300년, 3천 년이 지나도 똑같은 모습으로 돌고 도는 거예요. 그래서 윤회 전생한다는 겁니다.

내가 부모에게 물려받은 업이 안 좋다면, 그 나쁜 업은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데, “자랄 때 엄마가 오빠만 챙기고 나는 딸이라고 제대로 안 챙겨줬다”고 불평해놓고 자신도 아들만 챙기고, 시어머니가 시집살이 시킨다고 힘들다면서 자신도 며느리에게 똑같이 하고, 그렇게 반복하며 삽니다. 아버지가 술주정을 하면 싫어해놓고 자기도 그대로 닮아 술주정하고, 성질이 급한 엄마 때문에 힘들어했으면서도 결혼해서 자신도 엄마와 똑같이 합니다. 인생을 좀 살았으면 그것을 통해 지혜가 생겨야 하는데, 늘 괴롭고 서운한 것투성이예요.

그러니 자식과 후대에게 지혜로운 조언은커녕 내 문제, 내 외로움, 내 고민도 아직 해결하지 못해서 늘 괴로워하고 눈물짓습니다. 또 그 괴로움을 자식에게 그대로 물려주어 고통을 대물림합니다.

인생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먼저 지금까지 욕심내고 중요하게 생각해온 것들에 대해 삶의 우선순위를 뒤로 매겨야 합니다. 자식에 대한 걱정, 미래에 대한 불안을 내려놓아야 시야가 열리면서 진정으로 행복해지는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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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생로병사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법

■ 내일 죽어도 후회 없는 인생 살기

어떤 분이 매우 고생한 끝에 성공했습니다. 그런데 그 성공의 기쁨을 제대로 누리기도 전에 그만 병이 났습니다. 병원에 가니까 암 말기라 1년밖에 못 산다는 겁니다. 주위 친구분들이 “고생 많이 한 후 성공했는데 시한부 인생이라니 정말 안됐다.”고 병문안을 가서 환자를 위로했습니다.

그런데 그중 한 분이 병문안 후 돌아가는 길에 교통사고로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니까 돌아가신 분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은 하루밖에 못 사는데 친구가 1년 밖에 못 산다고 안타까워하면서 위문한 셈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한 치 앞을 모릅니다. 다른 사람의 죽음을 걱정하다 바로 자신의 죽음에 맞닥뜨릴 수도 있습니다.

저는 중고등학교 다닐 때 몸이 아주 약했습니다. 100미터 달리기만 해도 온 몸에 파랗게 반점이 생기고 하늘이 노래져서 쓰러질 정도였어요. 몸도 허약한 데다, 어느 스님이 제가 단명할 거라고 어머니에게 이야기 하셨기 때문에 늘 그 말씀이 마음에 남아 있었습니다. 스님께서 몇 살 까지라고 얘기는 안 했지만, ‘단명한다면 마흔 전후이겠구나.’ 하고 혼자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게 두려움이라기보다는 굉장히 열심히 사는 계기가 됐습니다.

‘다른 사람은 칠팔십 사는데, 나는 마흔 이내니까 남보다 두세 배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몇 번이나 과로로 쓰러져서 의식을 잃을 만큼 열심히 생활했습니다. 그런데 마흔이 넘어도 살아 있으니까 살 만큼 살았다는 안도감이 들면서, 그때부터는 조급함도 없어지고 편안해 졌습니다. 살아 있으니까 열심히 일하지만 갑자기 죽는다 해도 아쉬울 게 없는 거예요.

어떤 분이 1년 밖에 못 산다는 시한부 인생의 판정을 받았을 때 본인이나 주위 사람들이 범하는 오류는 ‘1년 밖에 못 살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니라, 1년 밖에 못 산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괴롭게 살다가 아까운 시간을 다 보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동안 남에게 신세진 것도 갚고, 칭찬 못했던 것도 좀 해주고, 영원히 살 것처럼 움켜쥐었던 것도 베풀고, 이런 식으로 1년을 정말 기쁘게 산다면 그게 남은 인생을 정말 잘 사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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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영원히 살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오늘 하루를 허투루 보내지만 죽음의 순간은 언제 올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오늘을 마지막처럼 최선을 다하다 보면 내일 죽어도 후회 없는 인생을 살 수가 있습니다.

■ 지금부터의 삶은 덤이다

나이가 들면 몸의 기능이 약해지면서 체력이 떨어집니다. 그리고 여기저기 아픈 곳이 많이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그러다 보면 몸에 대해 지나치게 걱정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갖게 됩니다.

“몸이 안 좋아서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결과가 걱정됩니다. 혹시 암이 아닌가 해서요.”

그런데 미리 암이면 어떻게 하나, 죽지 않을까. 이런저런 걱정을 하면 여기저기 더 아픈 것 같고 마음도 불안하고 초조해집니다. 이럴 때는 몸에 대해 집착하는 나를 돌아보는 게 좋습니다.

‘이 몸이 영원할 줄 알았더니 허물어질 수밖에 없는 거구나.’ 생각하면서 육신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마음, 오래 살고 싶다는 생각을 내려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한 부인이 남편이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면서 고민을 털어놓았습니다.

“의사가 3~6개월 산다고 했는데, 자연식을 해서인지 병원의 치료가 좋아서인지 많이 좋아져서 6개월 넘게 살아 있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자연식으로 치료하는 게 좋겠다. 병원 말을 들어야 된다. 의견이 분분한데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정답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의사 말을 들어서 죽고, 어떤 사람은 의사 말을 듣지 않다가 죽었으니까요. 또 산에 가서 살다가 산 사람도 있고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를 단정 지어서 말할 수가 없어요. 고민이 될 때는 자연과 가까운 생활을 하면서, 의사 치료를 받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버려야 할 생각이 있습니다. 바로 완치를 시키겠다는 생각입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사는 데까지 한번 해보겠다.’ 하고 마음을 가볍게 가지는 것이 좋습니다., 원래 의사가 3개월에서 6개월 산다고 했는데 6개월이 지났으니 일단 성공한 거잖아요. 그러니까 한 달을 더 살든 두 달을 더 살든 ‘이제부터는 덤이다. 아, 지금 살아 있는 것만 해도 감사하다.’ 이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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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기분 좋게 생각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살면 남편도 사는 동안 행복하게 살 수 있고 본인도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일단 생명의 한계를 극복했으니까 그 다음은 보너스라 생각하고 하루를 살아도 기뻐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도 ‘부처님 남편 살려주세요.’ 이렇게 하면 안 되고 ‘부처님 감사합니다. 지금 이대로도 기쁩니다. 부처님 은혜로 덤으로 삽니다.’ 하며 감사하면서 자유롭게 살면 됩니다.

인생이란 오래 살고 싶다고 오래 사는 것도 아니고, 오래 사는 게 중요한 것도 아닙니다. 하루를 살더라도 마음 편하게 살다 죽는 게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오래 살겠다는 집착을 놓아버리면, 몸과 마음이 가벼워져서 오히려 더 오래 사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 치매, 무의식의 세계에서 옛날 영화를 보는 것

나이가 들면 어린애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의식이 점점 희미해지고 무의식의 세계에 빠져들면서 일어나는 현상인데, 바로 치매가 그런 경우입니다. 현재의 의식작용이 가끔 멈추면서 무의식이 꿈처럼 떠올라 과거 속에 머뭅니다.

“시어머니가 86세신데, 자꾸 옛날 것을 고집하고 초등학교 동창을 찾아가시려고 하고, 시어머니의 아버지 산소에 가시려고 해서 힘이 듭니다.”

이 분의 시어머니는 어릴 때의 기억이 무의식으로 작용하면서 의식을 지배하고 있어서 어릴 때 친구 얘기, 아버지 얘기를 하는 겁니다.

어릴 때 기억은 오래 갑니다. 그래서 동요 같은 것은 나이 들어도 잊어버리지 않고 잘 따라 부릅니다. 그리고 옛날 기억 중에서도 행복했던 기억보다 고생했던 기억, 상처 입은 기억이 오래 남아요.

어머니가 어릴 때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의식이 흐려져서 그런 거니까 그냥 ‘어머니가 연세 드셨구나, 어린 시절이 그리운 거구나’ 생각하면서 어머니 이야기에 맞장구를 쳐주면 돼요. 꿈을 꾸듯 하는 이야기를 잘했니 못했니, 고치라느니 따질 일이 아닙니다. 상대는 무의식에 빠져 하는 이야기인데, 괜히 거기에 시비를 일으킬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치매라는 것은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가서 5살, 7살짜리가 되어 엄마를 그리워하고 아버지를 보고 싶어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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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정신이 없어 서 묻는 건데 쓸데없이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답이 참이냐 거짓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묻는 말에 그럴듯하게 응대를 하면 됩니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치매에 걸렸다는 것을 이해하고, 치매의 특성을 이해하면 괴로워할 일이 없습니다.

누구나 나이 들어서 정신이 맑기를 바라고, 치매에 안 걸리기를 바랍니다. 어떤 이는 “수행을 하면 치매에 안 걸리나요?” 라고 묻기도 하는데, 수행한다고 치매에 안 걸린다는 근거는 없습니다.

치매는 유전적인 요인도 있고, 신경을 과다하게 쓸 때 오기도 합니다. 마음이 편안한 사람보다는 마음이 불안하고 초조한 사람이 걸릴 확률이 더 높다고 할 수 있지만 수행을 하면 반드시 치매에 안 걸린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수행이란 어떤 조건이든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몸이 건강해도 좋고, 병이 나도 ‘몸뚱이가 아플 수도 있지.’ 이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 사후세계에 대한 두려움 떨치는 법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할까요? 죽고 나면 모든 것이 없어진다고 생각하니 타인에 대해서도 아쉬움이 일어나고, 자기에 대해서도 아쉬움이 지나쳐 두려움이 생기는 겁니다. 결국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니까, 이 두려움을 극복하려고 내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게 아니겠어요. 내가 죽으면 끝이 아니고 더 계속된다든가, 더 좋은 데 간다고 생각하면 죽음이 좀 덜 두렵잖아요.

내세가 있는가, 없는가는 핵심이 아닙니다. 보통사람들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라는 게 더 중요합니다.

사후세계 얘기는 그것이 실제냐 아니냐로 접근하기보다는 그것이 사람들에게 유익한가 유익하지 않은가 하는 측면에서 살펴보는 게 좋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유익한 면이 있다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인류가 수천 년 동안 죽음이라는 이생의 마지막 상황에서 일어나는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내 놓은 방법들을 그냥 받아들이는 게 좋다고 봅니다.

물론 그것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많은 부작용이 따릅니다. 천국 가는 티켓을 판다듣지, 49재 비용이 지나치게 많이 든다든지 하는 것인데 삶들의 두려움을 종교의 이름으로 이용하는 측면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교에서도 사후세계에 대해 많이 이야기합니다. 죽으면 극락에 간다.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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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다고 하는데, 그건 증명할 수가 없습니다. 또 종교마다 달리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각자 좋은 대로 생각하면 됩니다. 증명할 수 없는 걸 갖고 “이게 옳다. 저게 옳다.” 밤새도록 이야기해도 결론이 안 납니다.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저 성스러운 강가강에서 목욕하면, 때가 씻기듯 죄가 싹 씻겨버려 하늘나라에서 태어난다. 그러나 아무리 착한 일을 해도 강가강에 가서 성스러운 목욕을 안 하면 천국에서 태어나지 못한다.”

이것은 부처님 당시, 인도 사람들이 대부분 믿고 있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강에 가서 성스러운 목욕을 하고, 살아서 못하면 죽은 시체라도 물에 한 번 적셔서 태웁니다. 그래야 하늘나라에 태어난다고 믿어서예요.

이런 말을 들은 한 사람이 부처님에게 가서 과연 브라만의 말이 맞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옳다 그르다 말하지 않고 빙긋이 웃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말이 맞다면 강에 사는 물고기가 가장 먼저하늘나라에 나겠구나.”

성스럽다는 물에 한 번 적셨다고 하늘나라에 갈 것 같으면, 물에서 태어나 평생 산 물고기가 제일 먼저 하늘나라에 갈 거라는 말씀이에요. 바로 여기에서 깨우침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지금 어떻게 사느냐에 달렸습니다. 오늘 내가 잘 살면 내일도 좋아집니다. 오늘 못 살면서 내일 좋기를 바라는 것은 허황된 욕심이에요. 못된 짓 실컷 했으면 지옥 가서 벌을 받는 게 마땅한데, 죄 짓고 벌 받아야 할 사람이 “나는 벌 안 받을래요. 극락 보내주세요.” 하는 것은 심보가 고약한 겁니다. 극락 갈 일은 하나도 하지 않고 극락에 가겠다 하고, 지옥 갈 일은 잔뜩 해놓고 지옥에 안 가겠다는 건 썩은 씨앗을 뿌려 놓고 좋은 열매를 거두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마음 짓는대로 업이 생기고 그 지은 업에 따라 과보를 받을 줄 아는 불자라면, 내일 어떻게 될 것인지 걱정할 것 없이 오늘 마음을 바르게 닦으면 됩니다. 그러면 내일이 좋아질 거니까 걱정할 일이 없는 겁니다.

■ 삶과 죽음은 하나의 변화일 뿐

‘오래 살고 싶다’는 욕망에는 인연 맺은 사람들과 헤어지고 싶지 않다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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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이 존재합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이래저래 괴로워하면서도 애착이 있는 이곳을 떠나기 싫은 거예요. 그래서 자식이 결혼할 때까지 살면 좋겠다. 손주 볼 때까지 살면 좋겠다. 손주가 대학갈 때까지 살면 좋겠다. 손주가 결혼할 때까지 살면 좋겠다. 이렇게 이별을 자꾸 뒤로 미룹니다.

아무리 죽음에 대한 생각을 피하려 해도, 가까운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볼 때면 인생의 허무감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다시금 느끼게 됩니다. 피골이 상접해서 물도 못 넘기는 가족을 보면서 “이 육체와 함께 정신도 사라지는 것인지, 다 사라진다면 지금 이 생에서 굳이 이렇게 애쓰며 살아갈 필요가 있는지 모르겠다”는 분이 있었습니다.

죽어가는 과정에서 몸이 조금씩 말라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지 나쁜 게 아닙니다. 죽은 뒤에 관에 들기도 수월하고, 화장할 때 에너지도 적게 들어요. 자기가 가진 에너지를 소진하고 꺼져가는 등불처럼 조용히 사라지는 게 좋고, 숨이 넘어갈 때까지 정신이 맑으면 더 좋습니다.

반야심경에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영원히 변하지 않고 영원히 지속된다는 의미가 아니고, ‘생하고 멸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생하는 것도 아니고 멸하는 것도 아니다’는 뜻입니다.

바다에 가면 파도를 볼 수 있습니다. 파도가 일어나고 사라지고 또 일어나고 사라지지요. 그런데 바다 전체를 보면 파도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만 물이 출렁거릴 뿐입니다. 바다 전체를 보듯이 인생을 관조하면 삶도 없고 죽음도 없습니다. 그러나 파도 하나하나를 보면 분명히 파도가 생기고 사라지듯 인생도 언뜻 보면 생하고 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실재가 아닌 인식의 문제일 뿐입니다.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생멸의 관점을 갖고 세상을 보기 때문에 생겼다고 기뻐하고 사라졌다고 슬퍼합니다. 그러나 그 과정을 전체로 보면 변화일 뿐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생불멸’이라고 합니다. 즉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도 아닌 변화일 뿐이라는 거예요.

숨이 끊어져 몸이 흩어지는 것이나 하루하루 세포가 바뀌는 것이나 똑같은 변화입니다. 지금 세포가 바뀌는 것은 소나무 잎이 새로 생기면서 그 전의 잎이 떨어지기 때문에 늘 푸르다고 느끼는 것과 같아요. 또 몸이 급속도로 해체되는 것은 가을에 낙엽이 떨어지면서 나무가 죽어버린 것처럼 느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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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과 같습니다. 실재하는 건 변화뿐인데, 보이면 살았다고 하고, 안 보이면 죽었다고 하고 안 보이다 보이면 태어났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 죽을 때까지 사랑하자.’ 약속해도 시간이 지나면 그 마음은 사라집니다. 그런데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나,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헛된 생각을 고집하는 겁니다. 변하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는 거예요.

늙음도 죽음도 단지 변화일 뿐임을 알고 나면,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 자살, 못마땅한 나를 살해하는 것

한국 사람은 하루에 43명 꼴로 자살한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특히 한창 도전하고 꿈꾸어야 할 10대 청소년, 20대 청년의 자살이 늘어간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대체 왜 삶을 포기하는 걸까요? 개인적인 원인은 바로 ‘자신에 대한 인식의 오류’에서 비롯합니다. 우리에게는 다음과 같은 상이 있습니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나는 이런 사람이 돼야 해.’

‘나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어.’

남이 나를 뭐라 하든 관계없이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정해진 상이 있습니다. 이를 자아, 자아상, 자아의식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상상의 자기를 만들고, 그 상상의 내가 진짜인 줄 착각합니다. 문제는 이것이 대부분 높게 설정돼 있다는 겁니다.

자기가 그린 ‘자아상’과 밥 먹고 성질내고 화내고 슬퍼하는 ‘현실의 나’와의 사이에 간격이 너무 벌어지면 자아가 현실의 나를 못마땅해 합니다.

그것이 극에 이르면 ‘나 같이 쓸모없는 건 없어져야 해.’ 하는 심리로 발전하고 결국에는 자신을 죽여버립니다. 자아의식이 현실의 자기를 죽여버리는 게 자살입니다.

자살은 살인과 동일한 범죄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때문에 처벌할 수 없을 뿐입니다. 더 나아가 불특정 다수에 대해서 “나만 죽기 억울하니까 너도 죽이고 나도 죽겠다”는 쪽으로 가기도 합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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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른바 묻지마 살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자살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면 자아상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자아의식에 맞게 현실의 자기를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라, 이 자아의식이 허위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이걸 버림으로써 현실의 자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오히려 문제가 해결됩니다.

지금 중고등학생이나 대학생들이 심리적인 억압상태는 어른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큽니다. 주위로부터 늘 너무 많은 것을 요구받고, 그 요구에 자기를 맞추려다 보니까, 또는 자기를 너무 높이 상정하고 거기에 맞추려다 보니까, 이게 안 될 때 좌절하고 절망해서 자신을 포기해버리기 쉬운 상태인 거예요. 그런 면에서 부모나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노력해라, 노력해라.”하는 게 꼭 옳은 건 아닙니다.

“아, 괜찮아. 지금도 괜찮아. 그 정도면 좋아.”

이렇게 가볍게 얘기 하면서 어른들이 청소년, 청년들의 무거운 짐을 덜어주고, 좀 가벼운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 ‘죽고 싶다’는 말은 ‘살고 싶다’는 신호

가정에서는 부모의 정서불안이 아이의 심리 불안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부모가 심리적으로 불안하면 아이도 심리적인 불안정성이 선천적으로 생기다시피 합니다. 그러면 어려움이 닥쳤을 때 견디지 못하고 자기를 버리는 행위를 하기가 쉽습니다.

아이의 정서적인 안정을 위해서는 엄마의 마음이 편안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남편이 아내의 마음을 편하게 해줘야 하고, 사회는 아기를 잘 키울 수 있는 안정된 환경을 엄마에게 마련해 줘야 합니다.

먼저 엄마는 ‘아이에게 나는 신과 같은 절대적인 존재다’라는 것을 늘 자각하고, 아이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헌신할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아이의 정신적인 씨앗이 튼튼해서, 세상의 어려움 속에서도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어릴 때부터 “공부, 공부”하면서 아이를 지나치게 억압하면 정신질환이 발병하기 쉽습니다.

세 번째, 지금은 승자가 되려고 목숨 걸고 경쟁하는 시대입니다. 옛날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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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돕는 공동체 정신은 없어지고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주의가 심해서, 심리적 약자들은 치열한 경쟁구도를 이기지 못해 좌절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쉽습니다.

자살 충동은 곧 병이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옆 사람에게 “죽겠다”고 말하는 것은 죽을 것 같은 상황에 빠져들 때, ‘살고 싶다’는 신호를 보내는 거예요. 그럴 때는 외면하거나 “그럼 죽어라.”하지 말고 살펴줘야 합니다. 실제로 죽는 건 아니라 해도 죽고 싶은 심리상태이기 때문에, 이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이때 제일 좋은 것은 화제를 바꿔주는 겁니다. “너 왜 자꾸 죽는다고 그러니? 힘내.” 이런 말은 도움이 안 됩니다. 자살 충동 심리에 빠져들 때는 수렁에 빠져들듯이 하기 때문에 힘내라고 격려하는 것도 도움이 되지 않아요. 그때는 화제를 바꿔서 “지난번에 우리 둘이 영화 봤을 때 있잖아. 그 장면 생각나?” 이런 식으로 아예 이야기의 발향을 돌리면, 수렁에 빠지던 심리가 흔적 없이 사라져버립니다.

제3장 사흘 슬퍼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 쌀과자처럼 바삭한 이별

부모가 살아 계실 때는 얼마나 소중한지, 얼마나 감사한 존재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다 부모가 돌아가시고 나면 그 빈자리를 느끼고 후회합니다. 또 남편이나 아내도 곁에 있을 때는 고마운 줄 모릅니다. 내가 늘 원하는 대로 안 되는 몇 가지 문제만 보면서 불평불만을 갖습니다. 자녀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이가 건강하면 공부 잘 하기를 원하고 공부를 잘하면 더 뛰어나기를 원합니다. 늘 부족한 것만 보고 다그치다가, 아이가 죽고 없으면 그 동안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뼈저리게 깨닫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곁에 있을 때는 고마운 줄 모르고 불평하며 미워하다 후회하고 괴로워합니다.

살아서 곁에 있을 때는 불평불만을 갖다가, 떠나고 나면 후회하면서 자신을 괴롭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미 죽은 사람이 너에게 상처를 많이 받아서 힘들어서 죽었다고 이야기했을까요? 떠난 사람은 말이 없는데, 혼자 지난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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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새기면서 스스로 죄책감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죄책감을 갖는 것도 내 생각일 뿐이고, 그리워하는 것도 내 생각일 뿐입니다. 이미 떠난 사람과는 아무 관계가 없어요. 그러니까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더 이상 미련도 후회도 갖지 않고 잘 떠나갈 수 있도록 가벼운 마음으로 보내주는 게 좋습니다.

부모가 돌아가신 뒤 제일 서럽게 우는 사람은 바로 불효자입니다. 살아 계실 때는 찾아뵙지도 않다가 돌아가시고 나면 아쉬워서 울고불고 하는 거예요. 효자는 안 웁니다. 평소에 할 만큼 했기 때문에 울 일이 없거든요. 돌아가신 뒤에 소란스럽게 묘를 크게 쓴다든지 제사상에 음식을 많이 올린다든지 해봐야 돌아가신 분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부모가 살아계실 때 찬물 한 그릇이라도 떠서 드리는 것이 효도이고, 돌아가시거든 “안녕히 가세요.”하고 편안히 보내 드리는 것이 진정으로 부모를 위하는 길이고 진정한 천도(遷度)입니다. 설사 아쉬움과 후회가 남았더라도 이미 지난 일이니 털어버리는 것이 자신을 위해서나 떠난 사람을 위해서도 좋습니다.

남편이 죽든 자식이 죽든 장례가 끝나면 웃으면서 “잘 가요.” 이렇게 얘기해야 합니다. 이별이 잘 안 되니까 입던 옷도 태우고 정리하는 겁니다. 잘 가라고 마음에서 정을 끊어버리면 죽은 사람의 물건을 써도 괜찮은데, 죽은 사람의 물건을 보면 슬퍼하니까 집착을 끊으라고 불태우는 거예요.

살아 있을 때는 후회 없이 잘해주고, 죽고 나면 더 이상 잡지 않고 잘 보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살아 있을 때는 속 썩이고 죽으면 또 고혼(孤魂)이 되라고 끄집어 당겨서 애를 먹입니다. 제사도 죽은 사람을 위한 게 아니라 산 사람을 위한 것이고, 천도도 산 사람의 마음을 위해서지 죽은 사람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산 사람이 안 잡으면 죽은 사람은 알아서 갑니다. 그런데 슬퍼하며 잡아서 문제가 되는 거예요. 미련 없이 마음에서 떠나보낼 때 비로소 진정한 천도가 되는 겁니다.

■ 누구를 위해 제사를 지내는가

“첫째 아이가 자다가 심장마비로 죽고, 아이를 화장한 날 하혈을 했어요. 병원에 가니까 또 동생이 태중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태중의 아이를 생각하면 마음을 다스려야 했는데 어리석어서 열 달 내내 너무너무 힘들게 지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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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둘째 아이가 다른 형제들에 비해 예민하고 감정이 격한데, 이것이 엄마 탓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잘 살펴보려고 애쓰는데도 힘이 듭니다.”

엄마로서 아이를 잃고 마음이 아프겠지만, 이미 일어나버린 일이고 돌이킬 수 없는 일입니다. 이미 떠난 아이에 대한 집착을 버렸으면 둘째 아이라도 건강하게 키웠을 텐데, 이렇게 후회할 일을 스스로 만든 겁니다.

엄마가 임신 중에 거의 우울증 상태였기 때문에 자칫하면 둘째 아이에게 신경쇠약이나 우울증 같은 게 오기 쉽습니다. 그런데 지금 또 그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슬퍼하고 후회하면, 제3의 화를 불러옵니다. 이제는 지난 일에 대한 슬픔과 후회를 딱 끊고 마음을 다잡아야 합니다.

자식을 잃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결국 제2, 제3의 화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한 어머니는 큰 아들이 죽은 뒤 제사를 지내는 문제로 상담을 해왔습니다.

“6년 전 고1이던 큰아들을 학교에 보내려고 깨우니까 저 세상에 가 있었습니다. 너무 가슴이 아파서 내가 제사를 지내야겠다 마음먹었는데, 막상 제사를 지내려고 장을 볼 때마다 마음이 너무 괴로운 거예요. 또 작은 아들이 절을 안 하겠다고 해서 어떻게 제사를 지내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고요.”

제사 때마다 형의 죽음을 떠올리고 괴로워하는 동생과, 제사상을 차리면서 슬퍼하는 어머니, 그래서 유교에서도 결혼 안 하고 죽은 사람의 제사는 지내지 않습니다.

큰 아이가 밤에 자다가 죽었다면, 고통 없이 간 겁니다. 고통스러운 것은 바로 나예요. 병원에도 한 번 못 데려가 보고, 아침에 죽어 있는 걸 본 내가 괴로운 겁니다. 죽은 아들을 위해서 제사를 지낸다고 하지만, 사실은 살아있는 내가 괴로워서 지내는 것이지 고통 없이 세상 떠난 아들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일이에요. 엄마가 아쉬움이 남으니까 그걸 해결하는 방식으로 지금 무엇이든 해보려고 하는 겁니다.

이제는 ‘자식을 더 이상 괴롭히지 않고 놓아야겠다.’ 생각하고, 마음 정리를 해야 합니다.

■ 딱 3일만 슬퍼하고 정을 끊어라

어떤 이유로 죽든 죽은 사람에 대해서는 정을 딱 끊어야 합니다. 그래야 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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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을 가든, 천당을 가든, 따로 몸을 받든 이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빨리 갑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중생이라 마음 정리가 잘 안되니까, 사람이 죽으면 3일까지는 슬퍼해도 된다고 한 것이 3일장입니다. 좀 유명한 사람은 국민들이 다 가슴 아파하니까 사흘 가지고 안 돼서 5일 또는 7일까지 하는 겁니다.

그때까지만 슬퍼해주고, 끝나면 웃어야 좋은 일이 생깁니다. 부모가 죽었든 자식이 죽었든 남편이 죽었든 아내가 죽었든 스님이 죽었든 다 똑같아요.

얼마 전에 남편이 30대에 사고로 죽었다고 부인이 초재 지내러 와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딴 남자를 만나서 즐겁게 사세요.”

“운다고 남편이 살아와요?”

“한 살짜리 아이가 있다면서요? 엄마가 울면 아이 심성에 슬픔이 쌓이고 엄마가 웃으면 아이 가슴에 기쁨이 쌓이는데 엄마로서 울어야겠어요, 웃어야 겠어요? 아이 입장에서는 엄마가 누구를 만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고 엄마가 지금 웃는 게 중요해요. 엄마가 정말 아이를 사랑한다면 웃어야 합니다.”

남편이 죽었다고 맨날 눈물로 살면, 자기 인생을 자기가 망치고 학대하는 겁니다. 남편은 제 명대로 살다가 죽었기 때문에 내 죄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내가 죄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웃으면서 지내야 자식이 잘 큽니다. 그러지 않고 슬픔에 빠져 있으면 아이들의 정신에 아주 나쁜 영향을 줍니다.

그래서 엄마는 자식을 위해서 남편이 죽어도 아무렇지 않은 듯이 행복하게 웃으면서 지내야 합니다. 자식이 엄마를 걱정하더라도 “내 걱정할 것 없어. 나는 괜찮으니 네 걱정이나 해라.”할 정도로 당당하게 살아야 자식이 건강하게 성장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건 슬픈 일이지만, 그 슬픔을 놓아버려야 더 이상 그 슬픔과 괴로움 속에서 허우적거리지 않게 됩니다. 또 떠난 사람을 위해서도 훌훌 털어야 합니다. 그 사람에 대한 좋은 기억은 할 수 있지만 집착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나는 그리워서 우는데 영혼은 허공을 떠돌게 됩니다. 그를 위해서라도 가볍게 떠나 보내줘야 하고, 남은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도 더 이상 붙잡지 않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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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이 주고 간 큰 선물

우리는 생로병사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데, 이런저런 욕심으로 인생에 후회를 남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어머니가 아들을 잃고 연거푸 어려운 일이 닥쳤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어머니는 아들의 입시를 위해 공부 잘하라고, 좋은 대학 가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죽을 줄 알았다면, 공부가 문제가 아니라 죽지 말고 건강하라고 기도했겠지요. 그러니까 자식이 살아 있으면 그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모르고, 좋은 대학 가느냐 못 가느냐를 가지고 욕심을 냅니다. 그런데 자식이 죽고 보니 공부 잘하고 못하고, 좋은 대학 가고 안 가고, 그런 게 하등 중요한 문제가 아니잖아요.

정말 자식을 사랑하는 엄마라면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요.

‘우리 아이가 살아 있어서 감사합니다. 아이가 살아만 있다면 저는 다른 건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미 일어난 일은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 말도 잘 듣고 착한 아이였으니 좋은 곳에 갔을 거라는 믿음을 갖고 보내야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누가 와서 다리를 걸어 넘어뜨려도, “아들 죽고도 사는데 그만한 일에 뭘 못 살겠어요!”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제 인생에 겁날 게 없잖아요. 아들 죽고도 싱글싱글 웃고 사는데, 재산이 날아간다고 못 살겠어요. 집에 불이 난다고 못 살겠어요. 이게 바로 떠난 아들이 나에게 준 큰 깨달음이고, 아들이 나에게 주고 간 큰 선물인 겁니다.

아들 때문에 울고 있으면 아들이 나에게 고통을 주고 간 거고, 아들을 통해서 인생의 지혜를 얻으면 아들이 엄마에게 큰 선물을 주고 간 게 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 때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잖아요.

‘우리 아들이 준 선물이구나. 내가 예전 같으면 이런 일에 울고불고 난리 칠 텐데, 아들 잃고 마음을 깨치고 보니 이런 일은 아무 것도 아니구나.’

우리에게 일어난 일은 좋은 일도 아니고 나쁜 일도 아닙니다. 일어난 일은 다만 일어난 일일 뿐이에요. 그것을 좋게 생각하면 좋은 일이 되고 나쁘게 생각하면 나쁜 일이 됩니다. 좋은 일 나쁜 일은 결국 내가 만드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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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떠난 사람을 위한 이별 방식

부처님이 돌아가실 무렵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장례는 어떻게 치를까요?”

그러자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건 걱정하지 마라. 신심 있는 재가 신자들이 알아서 할 거다.”

재가 신자는 세속 사람을 말하는데, 그들이 알아서 할 거란 것은 그들의 풍속대로 장례를 치를 거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돌아가신 뒤 인도의 풍습대로 화장을 했습니다. 만약 부처님이 우리나라에서 살다가 돌아가셨다면 매장을 했을 겁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주로 진리에 대한 내용이고, 특별히 문화적인 것은 없습니다. 불교가 시작된 곳이 인도니까 그곳의 전통문화를 수용하면서, 인도의 전통문화가 불교문화가 되었을 뿐입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화장은 불교문화가 아니라 인도의 전통 장례문화이고, 49재는49일 안에 망자를 구원한다는 의미가 있고, 망자는 살아 있을 때 어떤 행위를 했느냐에 따라 9등급으로 구분된다고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죽어서 다음 생에 극락세계에 태어나고 싶다고 간절하게 바라면 누구나 다 극락세계에 태어날 수 있다. 그런데 똑같이 태어나는 것은 아니고 이 세상에서 자기가 한 행위에 따라 아홉 등급으로 나뉜다.”

- 상, 중, 하 : 상에 상중하, 중에 상중하, 하에 상중하

- 첫 등급 : 죽자마자 바로 극락세계에 태어남. 이 방문을 열고 저쪽 방문으 로 들어가는 것과 같음

- 2등급은 열두 시간 안에, 3등급은 하루만에, 4등급은 3일 만에, 5등급은 일주일 만에, 6등급은 삼칠일 만에, 7등급은 칠칠일 즉 49일 만에 태어남

- 49재 :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의 빚을 좀 갚아서 극락에 태어나도록 도와 주기 위해서 지냄

- 7월 15일 백중 기도를 하는 까닭 : 8등급과 9등급이 극락세계에 태어나 기 위해서는 지옥에 가서 뜨거운 맛을 좀 보고 와야 하는 데, 이들을 지옥 에서 구제하기 위해서 지내는 기도

이것이 진짜인가 거짓인가는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의 신앙이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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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믿고 싶으면 믿고, 믿기 싫으면 안 믿으면 될 뿐입니다.

장례문화도 종교마다 나라마다 다양합니다. 인도에서는 화장을 하고, 티베트는 조장(鳥葬)을 합니다. 조장은 시체를 잘게 잘라서 높은 바위에 갖다 놓고, 매나 독수리가 쪼아 먹도록 하는 겁니다. 사막 지역에서는 풍장을 하는데, 시신을 판자 위에 얹어 밖에 내놓고 1년 정도 지나 뼈만 남았을 때 장례를 치르며, 섬에서는 수장(水葬)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장례문화는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 조장 : 새를 통해 높은 하늘나라에 간다고 생각

- 매장 : 영혼들이 사는 세계를 지하라고 생각

- 화장 : 윤회를 믿기 때문에 육신이 있으면 집착을 하니까 집착을 빨리 끊 어버리고 새로 태어나라는 의미

장례를 어떻게 치르든, 사람이 죽으면 그걸로 이 세상과는 끝입니다. 끝이라는 말은 ‘내생이 없다.’ ‘극락에 못 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일단 숨을 거두면 이 세상과의 인연은 끝이라는 겁니다. 기독교식으로 말하면 천국에 가버리니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고, 불교식으로 말하면 다른 생명으로 태어나니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미 떠난 사람에 대해서는 ‘이제 인연이 다했구나.’ 하고 생각하고, 내 마음에서 보내주는 것이 가장 좋은 이별입니다.

■ 벗어 놓은 헌옷에 집착하지 마라

가족이 여럿 있으니까 장례 문제로 의견이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이럴 때 가족들의 의견을 모아 원만하게 푸는 게 좋습니다. 죽은 사람의 육신은 낡은 옷과 같습니다. 그것을 태우고 싶으면 태우고, 땅에 묻고 싶으면 묻고, 물에 버리고 싶으면 버리면 됩니다. 아무 의미가 없어요. 옛날부터 땅에 묻는 습관이 있는 사람은 땅에 묻으면 되고, 태우는 습관이 있는 사람은 태우면 되고, 물에 버리는 습관이 있는 사람은 불에 버리면 됩니다.

기독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부활해서 천당에 간다고 합니다. 불교로 말하면 극락왕생한다고 합니다. 그럼 이미 가버린 겁니다. 또 힌두교 식으로 말하면 윤회해서 새로운 생명을 받아버렸잖아요. 그런데 남아 있는 헌 옷을 태우든 묻든 뭐가 중요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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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뒤에 장례를 크게 치르든 제사를 거창하게 지내든 그건 살아있는 사람들의 문제입니다. 장례 의식은 산 사람들의 섭섭함에 대한 보상이지 영가(靈駕)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어요.

원효대사가 비를 피하기 위해서 어떤 동굴에 들어가서 잠을 잤는데, 아침에 일어나 그곳이 무덤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옛날에 고구려식 부여 계열의 무덤은 광개토대왕 무덤처럼 지상에 무덤실을 만들었기에 그곳에 비를 피해 들어갈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튿날 원효대사가 자는데 자꾸 귀신이 나타나는 겁니다. 그래서 원효대사가 깨달았다고 합니다. ‘무덤이라 생각하기 전에는 잠을 편히 잤는데, 무덤이라 생각하니까 번뇌가 일어나는구나. 모든 게 다 한 마음에서 일어난다.’ 무덤은 말이 없습니다. 다만 문제가 있다 생각하면 문제가 있는 거고, 문제가 없다 생각하면 문제가 없는 겁니다. 돌아가신 뒤에 어떻게 장례를 치를지, 또 남은 흔적은 어떻게 어디에 모실지, 그 형식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남은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은 이런저런 형식의 문제로 갈등하지 말고 잘 합의해서 보내드리는 겁니다. 그것이 가장 좋은 마무리입니다.

2013. 11. 29.

다음에 4, 5, 6장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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