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그램의 용기

2015. 4. 4. 10:31독서후기

반응형

 

 

1그램의 용기

■ 한비야

0 33세, 직장의 승진을 앞두고 육로로 세계일주 도전

0 42세, 국제 NGO 월드비전 구호팀장 - 세계 곳곳의 재난 현장 활동

0 2007년, 세계 시민학교를 열다

0 52세, 미국 유학, 미국 터프츠대학교 ‘플레처스쿨’에서 석사학위

0 2012년부터 1년의 절반은 대학에서 학생 교육, 나머지 절반은 해외 현장 에서 구호 전문가로 일함

0 네티즌이 만나고 싶은 사람 1위, 대학생이 존경하는 인물 1위, 평화를 만 드는 100인에 선정, YWCA 젊은 지도자 상 수상, 2014 차세대 리더 100 인 선정

0 저서 : 그건, 사랑이었네.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한비야의 중국 견문록, 바람을 딸, 우리 땅에 서다.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전 4권)

■ 1그램의 용기를 보탭니다.

“겨우 1그램이라고요? 이왕 주는 김에 한 1킬로그램쯤 주면 안 될까요?”

1킬로그램이 아니라 1톤이라도 줄 수만 있다면 당연히 주고 싶다. 그런데 아는가? 1그램이면 충분하다. 아예 용기를 낼 생각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1톤의 용기를 쏟아 부어도 소용없다. 그러나 꼭 해보고 싶은 일, 오랫동안 마음먹은 일임에도 불구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할까 말까 망설이는 사람들에게는 1그램만으로도 하자는 쪽으로 확, 기운다. 그 1그램의 용기가 앞으로 한 발작 내딛게 만드는 거다.

나는 모세가 홍해를 건너는 장면을 생각한다. 이집트에서 해방된 수많은 유대민족을 이끌고 가다가 홍해와 맞닥뜨리는 장면이다. 뒤에서는 혈안이 된 이집트 기마병과 전차부대가 쫓아오고 앞에는 거대한 홍해가 가로막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그때 모세는 지팡이를 높이 들고 바닷물 속으로 성큼성큼, 함 걸음을 내딛었다. 그 순간 홍해가 양옆으로 쫙 갈라지면서 길이 열렸

- 1 -

다. 길이 있어서 한 발을 내디딘 게 아니라 한 발을 내 디뎌 길이 생긴 것이다.

모세도 사람이니 하느님 명령이라 하더라도 두려웠을 것이다. 그 두려움을 한 발작으로 반전시킨 것이다. 이렇듯, 우리가 정말로 용기가 필요한 순간은 두려움에 가득 차 끝이 안 보일 때가 아니라 하고 싶은 마음과 두려움이 50대 50으로 팽팽할 때다. 이때 정신을 바싹 차려야 한다. 너무나도 작은 일과 작은 생각이 너무나도 중요한 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마지막 순간에 그만 용기를 잃고 되돌아서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물가에서 망설이는 사람에게 건네는 “한 발짝만 들어와 봐. 일단 들어와서 나갈지 말지는 그때 결정하면 되잖아?”라는 한 마디가 결정적인 힘이 되는 거다. 진짜 용기는 두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그 두려움을 이겨내는 거니까 말이다.

이 책은 <그건 사랑이었네>를 쓴 후부터 6년 동안의 이야기다.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면 공부하다가 현장에 갔다가, 또 공부하며 회의 하다가 학생들 가르치다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렇게 애쓰는 내가 마음에 들기도 하고 짠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어느 날부터 그동안의 경험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전업 작가가 아니라서 책을 쓰고 싶다고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디지털 카메라 메모리가 꽉 차서 더 이상 한 장도 찍을 수 없을 때 공간을 비우지 않으면 안 될 때처럼, 책을 쓰고 싶은 마음이 차고도 넘칠 때 그래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가 되어야만 비로소 책이 써진다.

나는 이 책 전체를 통해 온기를 전해주고 싶었다. 그동안 사람들에게 받은 친절과 위로, 내가 두 손으로 정성껏 전해주고 싶었던 사랑 그리고 인생의 여러 고비에서 많은 사람들과 주고받았던 작은 용기에 대해 말해주고 싶었다. 용광로처럼 살을 태울 만큼 뜨겁고 한여름 한낮의 태양처럼 눈부시게 강렬한 책이 아니라 아침 햇살처럼 맑고 따사로운, 기분 좋은 책이 되었으면 한다. 무엇보다 가능성과 두려움이 50대 50으로 팽팽할 때 하고 싶은 마음과 망설이는 마음이 대등하게 줄다리기를 할 때, 내 책에서 딱 1그램의 용기를 얻었으면 좋겠다. 그 1그램의 용기, 기꺼이 보태드리고 싶다.

2015. 봄. 한비야

- 2 -

1장 소소한 일상

■ 밀크커피, 24일, 보름달 …

‘아, 좀 쉬고 싶다.’

한 해 일정이 일주일 단위로 촘촘히 짜여 있기 일쑤인 내가 이따금 하는 혼잣말이다. 그러다 잡혀 있던 일정이 취소되면 그때가 바로 쉬어가는 시간, 숨 고르는 시간이다.

몇 년 전 남수단 톤즈 파견 근무를 앞두고도 그랬다. 떠나기 직전 국경지대에서 북쪽 수단과 무력 충돌이 벌어져 예정보다 두 달이나 출발일을 미뤄야 했다.

덕분에 갑자기 계획에 없던 시간이 하늘에서 선물처럼 뚝 떨어졌다. 파견 근무 가는 줄 알고 공적, 사적 약속을 하나도 잡지 않아서 그 두 달은 오롯이 내 시간이었다.

이게 웬 떡이냐. 그동안 집에서 빈둥빈둥하면서 책도 실컷 읽고, 산으로 들로 섬으로 다니면서 실컷 야영도 해야지 마음먹었다. 역시 머리 식히며 노는 데는 야영이 최고니까.

그 일환으로 설악산 마등령에서 공룡능선을 넘어 희운각까지 열 시간에 걸쳐 산행을 했다. 저녁 여덟시가 넘어 희운각 대피소에 도착 짐을 풀고 저녁을 먹으러 밖으로 나왔는데 사방이 야구장에 야간 라이트를 몽땅 켜 놓은 것처럼 눈부시게 밝았다. 산중에서 해가 지면 반드시 착용해야 하는 해드라이트가 필요 없을 지경이었다. 능선 위로 둥실 떠오른 보름달 때문이었다. 푸른 밤하늘에 찬란하게 빛나는 노란 달이라니, 하루 종일 걸어 피곤했지만 대피소 창문으로 폭포처럼 쏟아지는 달빛 때문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견디다 못해(!) 한밤중에 따끈하게 차를 한 잔 타서 밖으로 나와 침낭에 몸을 두르고 앉아서는 한참 달구경을 했다.

손에 든 건 녹차 한 잔, 몸에 두른 건 야영 침낭이지만 세상 어떤 것도 부럽지 않은, 돈으로는 절대 살 수 없는 느긋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예전에 본 TV프로그램 중에 <행복해 지는 법>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국민의 40%이상이 행복의 제일 조건은 돈이라고 했는데, 놀랍게도 한 달에

- 3 -

400만 원이 될 때 까지는 행복지수가 상승하지만 그 이상이 되면 오히려 더 낮아진다고 한다. 결혼도 마찬가지다 2년간은 행복지수가 급상승하지만 그 후에는 이전으로 돌아가거나 현격하게 떨어진다고 한다.

행복은 늘 이렇게 유효기간이 있는 걸까?

행복은 돈이든 외모든, 사회적 위치든 외부 조건만으로 채울 수 있는 걸까?

세상에 지속 가능한 행복이란 정녕 없는 것일까?

나는 있다고 믿는다. 남에게 행복을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나 스스로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말이다. 일생을 기다렸다가 단 한 번 느끼는 행복감이 아니라 매일매일 소소하게 느끼는 작은 기쁨과 만족감이 진정한 행복이란 걸 깨닫기만 하면 말이다.

다행히 나는 그것만 있으면 하루 종일, 혹은 한 달 내내 충분히 행복한 몇가지 ‘소소한 행복의 조건’이 있다. 들어보면 별 것 아니지만 내게는 소중하기만 한 것들이다.

첫 번째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마시는 밀크커피다.

두 번째는 자기 전에 마시는 와인 한 잔.

밀크 커피와 와인 한 잔이 내 하루의 시작과 끝을 책임지며 행복한 하루를 만들어 준다면 한 달에 한 번씩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도 있다.

하나는 보름달이고 하나는 매달 24일이다.

초등학생 때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하면서 달에 대한 관심이 폭발했는데 그때 숙제로 달 관찰일기를 쓰면서 흥미가 생겼고 각별한 애정이 싹텄다.

보름달은 언제 어디서 봐도 예쁘다. 푸른 겨울 밤하늘에 노랗게 뜬 보름달도, 까만 한여름 밤하늘에 뜬 보름달도 예쁘다.

언제부턴가는 보름달이 내게 좋은 일을 가져다준다고까지 믿게 되었다. 하기야 예쁜 달을 보고 있으면 절로 좋은 생각이 나서 좋은 글감이 떠오르고 마음이 너그러워지고 기도까지 잘 되니 그럴 수밖에, 그래서 매달 설레는 마음으로 달이 차오르기를 기다린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바로 앞이 북한산이고 정동향이라 산 위로 보름달 뜨는 모습이 환상적으로 보인다. 혼자 보기 아까워 달빛이 온 집 안을 가득 채우는 보름 전후에는 가까운 친구들을 초대해 ‘달빛 와인파티’를 열곤 한다.

- 4 -

그러나 보름달 구경하기에는 산이 최고다 예전에 북한산 야간 산행을 할 수 있을 때는 산 친구들이랑 ‘보름달 클럽’을 만들어 매달 보름 초저녁에 북한산 능선에 올라 밤늦게 까지 휘영청 밝은 달과 놀곤 했다.

매달 찾아오는 보름달과 함께 매달 24일 역시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24는 나와 인연이 깊은 내 행운의 숫자다.

- 고등학교 3년 내내 24번, 대학 다닐 때 살던 아파트도 24번, 학교 도서관 사물함 번호도 24번, 9년 동안 다닌 월드비전도 여의도 24번지. 제네바로 UN회의 갈 때 탔던 비행기 좌석도 24-A, 숙소도 224번.

실제로 24일이 되면 생각지도 않은 좋은 일이 생기거나 꼬였던 일이 술술 풀린다. 그래서 나는 24일을 손꼽아 기다린다.

■ 오래 사귄 친구처럼

마지막으로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클래식 음악이다.

클래식 음악에 빠져든 것은 고등학교 졸업 직후였다. 어느 날 잡음 심한 AM라디오의 주파수를 이리저리 맞추다가 첼로 연주가 흘러나오는 채널에서 동작을 멈췄다. 아니, 감미롭고도 품위 있는 첼로 소리가 나를 홀리듯 끌어 당겼다.

이건 뭐지? 늦은 시간이었지만 그날부터 그 방송을 꼬박꼬박 챙겨 듣기 시작했다. 하루도 거르지 않는 것은 물론 아나운서가 소개하는 곡의 작곡자와 연주자를 정성껏 받아 적었는데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아서 클래식 음악 해설서를 구해 독학을 시작했다,.

그 당시에는 명동에 ‘필하모니아’라는 클래식 음악 전문 감상실이 있었는데 그곳이 내게는 교향곡이나 협주곡의 전 곡을 들을 수 있는 유일무이한 곳이었다.

그러나 그곳도 자주 갈 수는 없었다. 네댓 개의 아르바이트를 동시에 하며 돈을 벌어야 하는 바쁜 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역 근처를 걷고 있는데 어느 클래식 다방 문 앞에 붙어 있는 광고가 눈에 확 들어왔다.

- 5 -

‘DJ 구함.’ 순간 가슴이 콩당콩당 뛰었다.

그곳은 그 후 대학 들어가기 2년 반 이상, 하루에 5시간씩 매일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돈을 벌 수 있는 곳이어서 너무 좋았다.

하지만 유명 교향악단이나 연주자들의 공연은 단 한 번도 가 본적이 없었다. 당연히 가고 싶었지만 정말로 돈이 없었다. 처음으로 공연장에 간 것은 훨씬 후인 1989년 유럽 여행 중 모차르트의 고향 잘츠부르크에서였다.

가장 싼 곳에서 묵고 가장 싼 음식을 먹고 잠은 주로 야간 기차 안에서 자면서 다니는 ‘거지 여행’중이었지만 거의 일주일치 여비에 해당하는 돈을 기꺼이 지불해 공연 입장권을 샀다. 연주곡이 모차르트 교향곡 40번 평소 즐겨듣던 곡들이라 더욱 그랬다. 공연 관람 후 나의 지름신(충동구매욕구)에 감사했다. 흑백사진만 보다 난생처음 컬러 사진을 봤을 때처럼 충격적이고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교향악단의 공연을 실컷 본 건 아이러니하게도 살인적으로 공부하던 보스턴 유학시절이었다. 하루 두세 시간만 자며 시간 을 쪼개 공부해도 수업을 따라갈까 말까 했지만 격주 목요일 저녁 어김없이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러갔다. 세계 수준의 다양한 공연을 1만 원 정도로 즐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내게 클래식 음악은 오랫동안 사귄 친구같이 편안하고 든든하다. 기쁠 때는 물론이고 힘들고 마음이 어지러울 때면 어김없이 곁으로 와서 따뜻하게 어깨를 감싸 안아주곤 한다.

TV 프로그램 ‘행복해지는 법’은 이렇게 결론 내리고 있다. 매일 행복해야 평생 행복할 수 있다고 행복은 멀리 있는 거창한 게 아니라 내 손 안의 작은 새라고, 어쩌다 한번 맛보는 큰 행복이 아니라 매일 가까이에서 작은 행복을 느끼는 사람만이 진짜 행복할 수 있다고. 이 말대로라면 나는 썩 잘하고 있는 거다. 소소하기 짝이 없는 밀크커피 한 잔, 와인 한 잔, 보름달 그리고 매달 어김없이 찾아오는 24일. 라디오만 켜면 언제든 들을 수 있는 클래식 음악이 나를 평생 행복하게 해주는 보물단지라니, 난 정말 삼팔광땡을 잡았다.

- 6 -

■ 다 합해서 1만 6,500원

2014년 3월 초, 7개월간의 남수단 현장 근무를 마치고 돌아욌다. 600억 원의 지원금으로 800여 명의 직원이 함께하는 대규모 구호활동이니 일도 만고 탈도 많고 사연도 많았다. 게다가 잠시나마 월드비전 남수단의 총책임자 역할을 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총을 든 강도가 국제 직원을 감금하고 몸값을 요구하질 않나, 한 달 사업비를 넣어둔 현장 사무실 금고를 도난당하질 않나, 지역 무장 세력에게 타고 가던 차를 빼앗기질 않나, 우리 사업 지역에서 부족 간에 총격전이 벌어져 한밤중에 긴급히 철수해야 하질 않나…….

돌아보면 처음 당하는 일이라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던 적도 많고 일이 마음대로 안 돼서 분하고 화나고 눈물이 쑥 빠질 만큼 힘들 때도 많았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다는 생각에 마음 뿌듯하고 짜릿한 순간들이 훨씬 많았다.

그렇게 사연 많은 현장을 떠날 생각을 하니 아쉽기도 했지만 한국행 비행기표를 예약해 놓고는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물론 가족이나 친구들이 보고 싶었지만 한국 가서 하고 싶은 일도 많았다.

비행기가 새벽에 도착하니 짐 내려놓자마자 일단 집 앞 북한산에 가야지. 내려와서는 동네 사우나에서 때 미는 목욕을 할 거다. 그러고는 집에서 느긋하게 짜장면 곱빼기를 시켜 먹어야지. 마음껏 공상의 나래를 펴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라, 내가 하고 싶은 일은 하나같이 돈이 별로 안 드는 일이네?”

산은 공짜고 목욕은 6,000원, 짜장면 곱빼기는 5,500원, 산에서나 목욕탕에서 마시는 음료수 값을 5,000원이라고 쳐도 내가 벼르고 벼르던 일을 하는 데 2만 원이 채 안 들었다.

“정말 2만 원이 큰돈이구나.”

2만 원이란 말에 남수단의 수도 주바의 세 한국 수녀님들이 떠올랐다. 물도 전기도 없는 주바 근교에서 극빈자를 위한 무료 진료소를 운영하고 계시는 데, 동네 사람들에게 인기 만점이었다.

남수단으로 떠나기 전 우연한 기회에 수녀님들이 소속된 수녀원에 갔다가

- 7 -

이 수도원 수녀님들의 한 달 용돈이 2만 원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의식주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경비는 수녀원에서 대겠지만 이들도 사회생활을 하는여잔데, 소소하게 돈 쓸 일이 좀 많을까?

“어머? 한 달에 2만 원으로 어떻게 살아요?”

“호호호, 그래도 우리는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아요.”

내가 눈을 휘둥그레 뜨니까 같이 있던 20여 명의 수녀님들이 생글생글 웃으며 앞다퉈 이야기 한다.

“저는 매달 책을 한 권 사요.”

“저는 1만 원은 공부하는 수녀님들에게 ‘김밥 장학금’으로 써요.”

“저는 구슬과 작은 십자가들을 사서 묵주를 직접 만들어 선물해요.”

“저는 7월부터 12월까지 모은 돈을 결식아동을 돕는 단체에 후원하고요.”

단돈 2만 원을 저렇게 풍성하게 쓰다니, 처음에 한 달 용돈이 2만 원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살짝 가엽게 생각했는데 그 쓰임새를 당당하면서도 재미있게 말하는 수녀님들이 오히려 부러웠다.

■ 그래, 나 길치다

나는 지독한 길치다. 수십 번 갔던 친구 집도 갈 때마다 긴가민가할 정도니 처음 가는 길을 헤매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9년간 다니던 직장 사무실도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왼쪽으로 가야 할지 오른쪽으로 가야 할지 번번이 헷갈리고, 대기업 회장과 만나 고액의 후원금을 잘 전달받고 나와서는 건물 밖으로 나가는 길을 못 찾아서 다시 회장실로 들어간 적도 있다.

백두대간 종주 때도 그랬다. 곳곳에 이정표가 있고 샛길에도 나뭇가지에 산꾼들이 표식이 달려 있어 길을 잃기가 대단히 어렵거늘 나는 구간마다 최소한 한 번은 다른 길로 빠져 한밤중에야 산에서 내려오곤 했다. 그러니 세계 여행 중에 난생 처음 가는 길을 , 그것도 말도 안 통하는 오지를 다니면서 어떤 고생을 했을지 쉽게 상상이 될 것이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볼까? ‘방향 센서’가 없어 매우 불편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얻어 걸리는 게 많고도 많다. 오지 여행 중 길을 잃으면 원래 가려던 이름난 동네 대신 잘못 간 평범한 동네에서 며칠 묵으며 동양인을 처음 보는 순박한 마을 사람들과 살가운 정을 주고받기 일쑤였다.

- 8 -

백두대간 종주 중에도 길을 잃어 멋모르고 들어간 깊은 산속에서 악, 소리가 나도록 아름다운 경치와 맞닥뜨리기도 하고 약초, 산삼 캐는 아저씨들을 만나 그들만의 신비롭고도 흥미진진한 산 얘기를 듣기도 했다. 무엇보다 예약한 산장을 못 찾은 덕분에 괴산 은티산장에서 우연히 만난 세 명의 산 친구들과 종주 후반부를 함께 끝낼 수 있었다. 내가 길치가 아니면 어쩔 뻔했나 말이다. 타고난 결핍이 그 사람을 훌륭하게 만든다고 하던가, 나 역시 길눈 어두운 유전자 덕에 이렇듯 크고 작은 뜻밖의 행운을 누리고 있다.

최근에 생긴 후천적 결핍, 건망증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깜빡깜빡 해도 꼭 해야 할 일은 다시 생각나지만, 문득 떠 오른 좋은 글감과 표현은 그날 밤 일기장에 쓰려면 이미 까마득하게 사라져버린 뒤다. 아이고, 아까워라. 그래도 어쩌랴. 나도 이제 50대 중반이니 받아들여야지.

그래서 최근에는 ‘또렷한 한 기억보다 희미한 연필 자국이 낫다’라는 말을 굴뚝같이 믿으며 수첩이나 휴대폰 메모장에 스쳐가는 생각들을 빠짐없이 적는다. 그야말로 ‘적자생존’이다. 그런데 기억력 감퇴로 어쩔 수 없이 적어 놓은 메모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 타고난 장점과 단점이 있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는데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랴. 우리가 이 둘 중 어디에 집중할 것인가는 순전히 우리 선택이다. 굼벵이가 느린 걸음을 탓하며 빨리 움직여보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타고난 신체 구조상 빠르게 갈 수는 없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야 좋아지겠지만 들이는 노력에 비해 그 효과가 너무나 미미하다.

내가 굼벵이라면 타고난 단점인 느리게 가는 건 인정하고 대신 타고난 구르는 재주에 시간과 에너지를 집중할 거다.

■ 타고난 무한긍정

나 또한 내가 길치이고 말이 빠르고 건망증이 있는 걸 인정하지만 그걸 완전히 고치려는 노력은 더 이상 하지 않는다. 길치면 스마트 폰의 GPS 기능을 활용하고, 말이 빠른 건 발음을 정확히 하면 되고 잘 잊어버리는 건 적으면 그만이다. 대신 내 최대의 장점인 ‘타고난 무한 긍정’에 집중하고 있다.

세상 모든 일을 일단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머리,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장

- 9 -

점이 먼저 보이는 눈, 어려운 일이 닥쳐도 세상은 노력하는 사람 편이고 그러니까 내편이라며, 솟아날 구멍이 반드시 있다고 ale는 마음은 노력하고 연습해서 얻어진 게 아니라 내 천성이다.

또 다른 유리한 DNA는 잠을 조금만 자도 되는 거다. 나는 하루에 네 시간만 자면 충분하다. 충분한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은 허리가 아파서 누워 있을 수가 없다. 나같이 선천적으로 서너 시간만 자고도 무리가 없는 사람들을 ‘숏 슬리퍼(short sleeper)’라고 한다는데 이들은 수면 양이 적음에도 에너지가 넘치고 활동적이고 낙천적이며 목표의식이 뚜렷한 게 특징이란다.

- 에디슨, 벤저민 프랭클린, 토마스 제퍼슨, 레오나르도 다빈치, 나폴레옹 등

타고난 장단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활용하는가는 더 이상 유전자의 문제가 아니라 오롯이 본인이 풀어야 할 숙제이자 과제라고 생각한다. 한정된 시간과 에너지를 못하는 것에 집중해서 최고가 될 것인가는 우리가 선택하기 나름이다. 그건 매우 중요하고도 본질적인 선택이니 정신 바싹 차려야 할 것이다.

■ 낙타는 사막에, 호랑이는 숲에

앞에서는 각자 태어날 때 받은 장단점을 인정하고 적극 수용하는 차원으로 DNA에 저항하지 말자라고 했는데 이번에는 한 발짝 더 나아가 타고난 기질이나 특성을 잘 알고 북돋워주는 ‘DNA의 극대화’에 대해 말해볼까 한다.

지난 봄, 베란다 화분들이 내게 가르쳐 준 인생의 지혜이자 법칙이다.

아파트에 사는 나는 늘 꽃이 그립다. 그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느라 계절별로 꽃 화분을 마구 사들여 베란다에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다. 여러 해 해 봤으니 지금쯤은 어떤 꽃이라도 잘 돌보는 도사가 됐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꽃들의 장의사’라고 불릴 만큼 꽃들을 수없이 죽였다. 도대체 왜 내 손에만 들어오면 시들시들 힘을 못 쓰는지…….

그런데 지난 봄 우리 집 베란다에서는 뜻밖에 꽃 잔치가 벌어졌다. 신기했다. 햇볕과 바람과 물만으로 어떻게 이토록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을 피워낸단 말인가? 알고 보니 호사는 물을 잘 준 덕분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어떤 꽃에 어떻게 물을 주어야 하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 10 -

작년에 꽃을 살 때 그 꽃의 성질과 키우는 방법에 대해 일일이 불어본 후 그대로 했다. 이태리 봉숭아는 매일매일, 미니 장미는 화분의 흙이 말랐을 때 듬뿍, 치자꽃은 통풍이 잘 되고 햇볕 좋은 곳에서 충분히 그리고 양란은 가엾어도 꾹 참았다가 열흘에 한 번씩만 물을 주었다. 그랬더니 연일 꽃 잔치였다. 꽃의 특성에 맞게 물을 주면 이렇게 싱싱하고 예쁘게 자라는 걸 여태껏 이틀에 한 번씩 일괄적으로 물을 주었으니 내가 꽃들에게 무슨 폭력을 가한 건가.

■ 무엇이 내 피를 끓게 하는가

어느 날, 꽃에 물을 주며 생각했다. 꽃도 각각 타고난 특성을 잘 파악해서 키워야 좋은 꽃을 피울 수 있는데 하물며 사람은 어떻겠는가? 전 세계 70억 인구 한 사람 한 사람마다, 자기라는 꽃이 가장 예쁘게 필 수 있는 조건은 다 다를 게 분명하다. 어떤 사람은 칭찬을 많이 해 주어야, 어떤 사람은 가만히 지켜보아야 활짝 피어난다. 어떤 사람은 목표를 비현실적으로 높게 잡아야, 또 어떤 사람은 목표를 낮게 잡아 조금씩 이루어가는 재미를 느껴야 더욱 분발하게 된다. 그러니 나라는 꽃을 활짝 피우기 위해서는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아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이 내 가슴을 뛰게 하고 내 피를 끓게 하는가?

안타까운 건 우리 사회의 꽃봉오리인 중·고등학생들, 심지어 대학생들조차도 이런 근본적인 질문들을 비현실적으로 느끼는 현실이다. 아이들은 이렇게 세뇌당하고 있다.

“가슴 뛰는 일? 그런 건 다 쓸데없어. 너흰 딴 생각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해. 그래서 좋은 대학가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거야. 이런 생각은 나중에 해도 돼. 아니, 안 해도 상관없어.”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가진 호랑이는 숲에 있어야만 제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며, 동물의 왕 노릇을 할 수 있다. 그런 호랑이도 사막에 가는 순간 열등한 존재가 되고 만다. 사막에선 물이 없어도 견딜 수 있는 혹이 있고, 넓적한 발바닥으로 모래 위를 걸을 수 있는 낙타가 동물의 왕이다. 낙타도 숲에 있다면 최대의 장점인 혹과 넓적한 발바닥이 최대의 장애물이 될 뿐,

- 11 -

그러니 능력과 특성의 최대치를 발휘하고 살려면 낙타는 사막에, 호랑이는 숲에 있어야 한다.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 집 베란다 꽃처럼 제자리에서 가장 예쁘고 향기롭게 피어나려면 말이다.

■ 다 내 거야!

북한산은 내게 특별한 산이다. 이제까지 적어도 1,000번은 올랐을 거다. 아버지 따라 대여섯 살 때부터 다니기 시작한 이래 일주일에 한 번 정도 꾸준히 갔는데, 그것으로 성에 안 차서 10여 년 전, 아예 북한산 밑인 불광동 독바위역 근처로 이사를 했다. 덕분에 주중에도 자주 갈 수 있으니 앞으로 최소한 1,500번은 오르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북한산은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하다. 길도 길이지만 철따라 어느 길이 최고인지 샅샅이 알고 있다. 봄에는 진달래 능선의 진달래, 여름에는 진관사 계곡의 물소리, 가을에는 대성문에서 구파발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의 단풍, 겨울에는 의상봉 능선에서 바라보는 눈꽃…… 코스마다 사연이 있고 능선과 계곡마다 갖가지 추억이 있다. 구석구석 내 맘대로 이름 붙인 바위와 나무들까지 있다.

나와 처음 북한산을 가는 사람들은 잔뜩 흥분해서 산 이곳저곳을 소개하는 나를 보며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꼭 자기가 주인인 것처럼 말하네요.”

그럴 때마다 이렇게 대답한다. “몰랐어요? 북한산, 내 거예요.”

다들 농담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그건 진심이다. 물론 땅문서도, 울타리도, 문패도 없고, 세금도 안 내지만 지난 수십 년 동안 수없이 오르며 수많은 사연을 만들고 무한한 위로와 용기와 감동을 얻은 내가 북한산의 진정한 주인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따지면 하늘도 내거다. 난 어렸을 때부터 하늘에 있는 것 다 좋아한다. 그냥 좋아하는 게 아니라 친구들 말을 빌리면 ‘병적으로’ 좋아한다. 해, 달, 별, 구름, 해돋이, 해넘이, 노을, 맑고 푸른 하늘, 도화지처럼 하얀 하늘, 먹물처럼 깜깜한 밤하늘…….

북한산과 하늘이 내거라니. 부자도 이런 부자가 없다. 이렇게 자연은 누리

- 12 -

고 즐기는 자의 것이다. 그런데 요즘 부자 되길 포기하는 사람이 많아서 안타깝다. 자연을 제 대접하기는커녕 홀대하거나 불만을 품은 채 거스르고 조종하려고까지 하니 말이다.

■ 아름다운 것들은 다 공짜

언제부턴가 나를 포함한 현대인들은 자연을 순응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 혹은 싸워 이겨야 하는 대상이라 여기기 시작했다. 비가 오면 비 한 방울 맞지 않아야 하고, 해가 나면 어떻게 하든 햇살을 피해야 한다. 날이 밝으면 너무 밝다고 커튼을 치고 날이 저물면 너무 어둡다고 전등을 대낮처럼 환하게 켜둔다.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도 창문을 꼭꼭 닫아 놓고 진짜 자연풍 대신 ‘자연풍 선풍기’를 틀어 놓기도 한다. 왜 그럴까? 왜 우리는 자연 그대로는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걸까?

얘기하다 보니 설악산에서 만난 대학생 두 명이 생각난다. 백담사에서 봉정암까지 가는 길에는 기린초, 꿀풀, 엉겅퀴, 애기똥풀, 큰까치수염 등 온갖 종류의 야생화가 활짝 피어 있었다. 설악산이 난생 처음이라는 이 학생들은 스마트폰으로 꽃들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거기까지는 좋은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두세 시간 탄성을 연발하면서 깔깔대고 사진을 찍던 학생들이 어느 순간 조용해져서 봤더니 이 학생들 바로 코앞에 예쁘게 핀 야생화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꽃들을 화면으로 보면서 즐거워했다.

“사진은 집에 가서 보고 지금은 진짜 꽃을 감상하는 게 어때?”

내 말에 학생들이 이렇게 대답했다.

“진짜 꽃보다 사진 속의 꽃이 훨씬 선명하고 예뻐요.”

뭐라고!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어느 여름날 우리 집에 놀러온 귀염둥이 대학생 조카가 이런 찜통 날씨에 에어컨 안 틀어 놓는 집이 어디 있냐고 하도 징징대기에 좀처럼 안 하던 잔소리가 나도 모르게 터져 나왔다.

“얘가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 여름이 덥지 그러면 추워? 그리고 지구 온난화 때문에 앞으로 점점 더 더워질 텐데 지금 이 정도는 좀 참아봐야 하지 않겠어?”

- 13 -

지금 생각해도 말 참 잘했다. 나는 대자연은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오묘한 질서와 규칙을 가지고 순환하며 균형을 찾아간다고 믿는다. 첨

단기술 운운해봤자 그 사람도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그래서 자연이 우리를

위협하고 해치지 않는 한 더불어 사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거대한 자

연을 완전히 피하거나 개조할 수 없다면 견딜 수 있는 한, 순응하며 사는 것

이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도 북한산을 오르며 생각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은 다 공짜

라고 백 번 맞는 말이 아닌가? 사랑, 우정, 의리, 신뢰 등은 천만금을 주어도

살 수 없다. 그 대신 노력과 시간을 들이고 온 마음을 쏟지 않으면 절대로

가질 수 없는 것들이다. 눈만 돌리면 마주치는 자연도 마찬가지다. 돈이 들

진 않지만 순응하고 감사하며 누리면 그 아름다운 것들은 고스란히 내 것이

된다. 내가 하늘도, 북한산도 만날 “다 내 거야”라고 우기지만 사실 그것을

누리고 즐기는 모든 이의 것이기도 하다. 세상 참 공평하다.

■ 백두대간, 1천 킬로미터를 걷다

“대한민국 만세!”

여기는 금강산 향로봉. 2012년 7월 27일, 2년에 걸친 백두대간 종주가 드

디어 끝났다.

종주 마지막 구간인 설악산 진부령부터 금강산 향로봉까지는 군사지역이

라 못 가겠구나, 아쉬워하고 있는데 우연히 향로봉 군부대 부대장을 아는 사

람을 알게 되었다. 지체 없이 알아낸 군부대 정보처로 전화했다. 그곳 병사

들에게 특강을 제안하고, 특강하러 향로봉 부대에 갈 때 차를 타는 대신 걸

어갈 수 있겠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더니 단박에 “네 좋습니다”라는 시원시원

대답이 돌아왔다. 그리하여 진부령에서 그늘 한 점 없는 뙤약볕 길을 네 시

간 반 동안 걸어 마침내 향로봉 정상을 밟았다. 2010년 9월 16일, 지리산에

서 시작해 덕유산, 속리산, 태백산, 오대산, 설악산을 거쳐 남한 구간 백두대

간 종주에 마침표를 찍는 순간이었다.

그날 장병 100여 명과 함께 향로봉 정상에서 금강산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

으며 축하 인사를 받았다.

한국 산쟁이로서 꼭 한 번 해보고 싶었던, 그래서 수십 년간 벼르기만 했던

- 14 -

백두대간 종주였다. 일단 시작하면 언젠가는 끝나겠지 하는 배짱으로 어느

날 불현듯 시작했는데 진짜로 어느덧 끝나버렸다. 역시 시작이 반이다. 첫걸

음의 힘이다.

■ “산이 그리워서요.”

백두대간!

1980년대부터 산에 다니는 사람들 사이에 백두대간 종주 붐이 일었다. 대

학 산악부에서는 방학을 이용해 중주를 했고 많은 산악회에서도 종주 팀을

꾸렸는데 그들을 따라 몇 구간씩 찔끔찔끔 걷기도 했다. 백두대간을 종주했

다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책방에서 새로운 백두대간 종주기를 볼 때마다 나

도 언젠가는 하고야 말거라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나 그것도 그때

뿐, 세상에 ‘언젠가’라는 시간은 없다. 결심을 하고 언제부터라고 딱 못을 박

은 후 용기를 내어 한 걸음을 떼기 전에는.

이번 백두대간 종주는 보스턴 유학 때 시작되었다. 그 시절 제일 힘든 건

공부가 아니라 산에 못가는 거였다.

특히 계절이 바뀌는 시기에는 몸서리치게 산에 가고 싶었다. 그럴 때면 살

짝궁 미친 짓을 하곤 했다. 마치 등산을 가는 것처럼 등산복에 등산 신발에

등산 스틱에 배낭까지 완전무장을 하고 등교해서는 교내에 있는 고작 몇 십

미터짜리 언덕을 히말라야 오르듯 오르락내리락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보면 이렇게 대답했다.

“산이 그리워서요.”

등산복 차림으로 수업에 들어가 배낭 안에서 수업 자료와 등산용 보온병과

컵을 책상 위에 떡하니 꺼내놓으면 교수들도 놀라고 재미있어하며 한 마디

씩 했다.

“오늘 수업은 산 정상에서 하겠습니다.”

어느 날 이 논문을 끝내면 무얼할까를 생각하다가 문득 백두대간 생각이

났다. 망설이지 않고 서울에 있는 친구에게 메일을 썼다. 등산 중 만난 ‘대간

꾼’ 손에 들려 있던 ‘백두대간 수첩’을 보내달라고 며칠 후 수첩이 도착했

다. 나는 그 수첩에 한 구간한 구간 잘 정리되어 있는 대간 길을 생각하면서

- 15 -

용기를 냈다. 힘내야지. 힘내서 얼른 끝내고 산에 가야지.

여기서 잠깐 백두대간 종주에 대한 미니 강의.

백두대간 종주란 지리산부터 백두산까지 한반도의 등뼈를 따라 약

1,600Km 산길을 걷는 거다. 그 중 남한 구간은 약 700Km인데, 이것을 보

통 24구간에서 50구간 정도로 나눠 걷는다. 24구간만 해도 한 구간당 1~3

일씩 하루 열 시간 이상을 걸어도 6개월 이상 걸리는 만만찮은 프로젝트다.

종주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나는 백두대간의 남한 구간, GPS상 거

리 697m, 지도상 거리 800m, 실제 종주 거리 약 1,000Km를 30구간 정도

로 끊어서 한 구간 당 1박 2일, 혹은 2박 3일 일정으로 하루 열 시간에서

열두 시간 정도로 걸었다. 도중에 7개월간 중국에 가 있었기 때문에 2년이

걸린 거다.

백두대간 전반부인 처음 1년은 혼자 걸었는데, 다행히 종주 후반

부 1년은 혼자가 아니라 네 명이 같이 다녔다. 중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종주

를 다시 시작할 때 우연히 묵은 이화령 구간 은티 산장에서 멋진 산 친구

세 명을 만난 것이다. 50대인 산장지기부부와 40대인 타고난 총각 산쟁이

였다. 이들은 이미 백두대간 종주를 했지만 산악회와 다니느라 종주하는 재

미를 제대로 못 느꼈다며 나와 함께 하기로 한 거다. 그리하여 우리는 BB4

(비야와 백두대간을 함께하는 4인)라는 미니 산악회를 꾸리고 봄, 여름, 가

을, 겨울 사계절에 걸쳐 종주 후반부를 같이 하면서 한국의 아름다운 산을

만끽했다.

산은 정말 이상하다. 무릎이 녹아날 만큼 많이 걷고 내려와도 돌아서면 또

가고 싶으니 말이다.

산에 가면 정말 즐겁다. 아니 무조건 좋다. 여럿이 가면 여럿이라 좋고 혼

자 가면 혼자라서 좋다. 야트막한 능선은 그래서 좋고, 험한 바위 능선은

또 그래서 좋다. 날씨가 맑으면 능선이 잘 보여서 좋고 비가 오면 구수한 라

면이 훨씬 맛있어서 좋다. 하루에 열 시간 이상 오르막 내리막을 걸으면서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정도 힘든 건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 하고

싶은 걸 하고 있으니까. 그래서 산행 내내 싱글벙글 웃음과 감탄이 절로 나

오는 모양이다.

- 16 -

■ 힘겹게 오른 산이 더 아름답다

어려움 없이 얻어지는 기쁨은 없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말이다. 백두대

간 종주도 예외가 아니다. 내게 이런 멋진 세상을 보여주는 백두대간에게 나

는 무엇을 바쳤던가? 무엇을 해 주었던가?

우선 나는 내 무릎을 바쳤다. (산이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산에 다니는

사람은 무릎이 생명인데 나는 무릎이 별로 좋지 않다. 30대에 세계 일주할

때 너무 오랫동안 무거운 배낭을 지고 다녔기 때문이라는 의사의 소견이다.

그 덕에 하산 길에는 무릎이 끼익 끼이익 비명을 지르면서 퉁퉁 부어오른다.

어쩌다 발을 잘못 디디면 한순간 전기송곳으로 찌르는 것처럼 식은땀이 날

정도로 아플 때도 있다.

동네 정형외과 의사는 백두대간 종주는 고사하고 등산 자체를 하지 말라고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산과 나는 이미 떼려야 뗄 수가 없는 사이,

아니, 서로 없으면 못 사는 사이가 되어버렸는데 그래서 의사 몰래 다니다가

견딜 수 없으면 지청구 들을 각오로 또 병원에 간다.

그래도 백두대간 종주 중에는 혹사당하는 무릎을 위해 좋다는 건 다 했다.

- 매일 글루코사민 먹기, 제주도 조랑말뼈 가루 먹기, 닭발 먹기, 무릎 체조,

- 등산 때 소염진통제 먹고, 무릎 보호대 착용, 스틱 사용, 등산 후에 찬물

더운물 찜질하기, 가끔 연골주사 맞기 등

- 매번 짐을 줄이기 위해 칫솔 꼭지도 잘라 들고 다니는 등 적극적인 노력

그럼 내가 백두대간에 해준 건 뭐가 있을까? 사람이 산에게 해줄 수 있는

최대의 것을 해주었다고 자부한다. 그건 아낌없이 표현하는 산에 대한 고마

움과 경외감, 끈임 없이 쏟아낸 찬미와 찬사다. 그리고 산 자체를 누리고 즐

기려는 마음을 바쳤다.

백두대간 종주를 하면서 본 호화 야영꾼들 얘기를 좀 해 볼까? 우리 대간

꾼들은 그들을 ‘산 밑 클럽’이라고 부른다. 짐이 너무 많아 도저히 산속까지

지고 올 수 없어서 야영은 산 밑에서만 하는 사람들이다. 한 번은 그들과

어울릴 기회가 있었다. 네 명이 다니는 그 팀은

- 텐트 : 스무 명이 자고도 남을 초대형 다용도 텐트

- 가스레인지에 프라이팬, 각종 용도의 칼과 컵과 그릇

- 17 -

- 대낮같이 환한 텐트 안, 접는 의자에 앉아 불판에 구워 먹는 오리구이 등

귀족 야영이었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 BB4는 난민촌처럼 초라하기만 했다.

명색이 야영인데 이렇게까지 편해도 되는 건가?

야영이란 모름지기 대자연 속에서 최소한의 물건으로 자연을 최대한 느끼

고 즐겨야 하는 게 아닌가? 몸 편한 야영도 그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야 자연을 가까이 할 수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라도 해야겠지. 그

러나 호화 야영 팀은 싸늘한 침낭 속에서 뜨거운 물을 안고 자며 추위를 이

기는 재미를 알 수 있을까? 춥게 자고 난 새벽, 텐트 바깥으로 나가 곱은 손

으로 버너를 켜고 눈을 녹여 끓인 물로 만든 따뜻한 커피 맛을 알 수 있을

까? 이른 아침, 텐트가 든 무거운 배낭을 지고 힘겹게 산을 오르다보면 온몸

에서 아지랑이처럼 연기가 모락모락 날 때 밀려드는 충만감을 알 수 있을

까?

■ 최고의 야영, 알짜 기쁨

백두대간 종주 중 최고의 야영을 꼽으라면 단연 BB4와 함께한 점봉산 겨

울 아침이었다. 그날은 여덟 시간 정도의 당일 산행을 했는데, 원숭이도 나

무에서 떨어진다고 잘 아는 지름길로 내려온다는 게 그만 눈 덮인 산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길은 험하지, 눈은 허벅지까지 쌓였지. 사방은 깜깜해지

지. 더 이상의 진행은 위험하다고 판단, 야영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우리에

겐 야영 장비가 하나도 없었고 먹을 것도 똑 떨어졌다.

일단 모닥불을 지펴 흠뻑 젖은 옷과 양말을 말리고, 두 개 남은 양갱을 나

누어 먹으며 허기를 달랬다. 밤이 깊어갈수록 칼바람이 불면서 몹시 추워졌

지만 젖은 나뭇가지로 지핀 모닥불은 연기만 나고 온기는 거의 없었다. 비상

용 우비를 입고 머리에는 까만 비닐봉지를 뒤집어쓰고, 배낭을 비워서 그 안

에 다리를 넣어보았지만 찬바람은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그 와중에 산짐승이 나오거나 밤새 기온이 더 떨어지면 어쩌나 걱정되어

귀에서 쇳소리가 날 정도로 긴장했지만 우리 네 명은 미지근한 모닥불 주

변에 둘러 앉아 서로를 의지하며 무사히 새벽을 맞을 수 있었다. 곱씹을수록

짜릿하고 감동적인 야영이었다.

- 18 -

공들여야 비로소 누릴 수 있는 기쁨, 불편함을 견뎌야만 얻을 수 있는 기

쁨, 온몸으로 부딪혀봐야 깨달을 수 있는 기쁨, 이런 기쁨이 ‘알짜 기쁨’이라

고 백두대간은 내기 가르쳐주었다.

물론 백두대간 종주 중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던 건 아니다. 도중에 눈살 찌

푸리고 마음 불편한 적도 많았다. 무엇보다 마음이 불편했던 건 종주 구간

탐방 금지로를 만날 때였다.

이상하지 않은가? 산림청은 영문 책자까지 발행해가며 백두대간 종주를 권

장하는데 국립공원관리공단은 여러 곳에 출입 금지 구간을 정해 놓고 걸리

면 벌금까지 물린다.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추란 말인가?

산길도 마찬가지다. 어느 구간에서는 안내 표지판이 돌아서면 나오고 돌아

서면 또 나온다. 불필요하게 많은 거다. 또 어느 구간에서는 몇 십 미터 간

격으로 벤치가 있고 심지어는 지붕을 올린 정자까지 떡하니 있다. 산중에 그

런 게 꼭 필요한가? 그렇게 까지 필요 없는 과잉 안내판과 휴식 공간을 만

드느라 그 주변 숲만 훼손시킨 걸 안타까워하는 산꾼들이 수두룩하다.

백두대간 종주 후, 우리 BB4는 야영 100박 프로젝트를 하는 중이다. 내가

한국에 있을 때는 꼬박꼬박 2주일에 한 번 산으로, 들로, 섬으로 1박 2일 야

영을 하는데 벌써 24번째다. 이게 끝나면 100대 명산 프로젝트도 할 거다.

100개는 너무 적나? 한 500개로 할까? 해외 등반 계획도 세워두었다.

1) 스위스 뚜르드 몽블랑 트래킹 2) 네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래킹 3)

미국 요세미티 국립공원 트래킹 일단 이 세 곳을 순서대로 갈 생각이다. 계

획을 세웠으니 언젠가는 할 거다.

보스턴에서는 한국 산이 나를 부르더니 한국에 오니까 전 세계 산이 나를

부른다. 산이 부르는데 내가 어쩌겠나. 등산화 끈 바짝 매고 나서는 수밖에.

■ 가다가 중지해도 간 만큼 이익이다

“이그, 저 계획쟁이. 또 붙여대기 시작하는 군.”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나의 방학은 온갖 모양의 계획표를 방 벽에 붙이는

걸로 시작되었다.

같은 방을 썼던 작은 언니의 증언에 따르면 자기 말은 물론 엄마나 아버지,

- 19 -

큰언니가 아무리 말리고 혼내도 한 번 붙인 계획표는 절대로 떼지 않았다고

한다. 한번은 “벽에다 한 번만 더 붙이면 혼 날 줄 알아.”라고 했더니 다음

날 도화지에 큰 글씨로 쓴 계획표를 벽이 아닌 천장에 떡하니 붙여놓았단

다.(이 사건은 나도 기억난다. 엄마한테 칭찬 받았던 것 같다.)

세 살 적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더니, 나는 지금도 수없이 많은 계획의 세우

며 산다. 일주일, 한 달, 1년, 10년 단위로.

새 책을 쓰고 있는 지금도 거실 벽에는 새 책의 각장 원고 최종 마감일, 출

간 일정표, 임시 목차 그리고 ‘왜 이 책을 쓰는가?’, ‘무엇이 본질인가?’, ‘이

온기를 어떻게 전할 것인가?’, ‘나의 꿈을 넘어서 우리의 꿈으로’라는 키워드

가 붙어 있다. 책에 쓸 재미있는 에피소드, 좋은 비유, 멋진 문장들도 떠오를

때마다 색색의 포스트잇에 써서 사방에 붙여 놓아 지금 우리 집 거실은 ‘무

당집’을 방불케 한다.

계획의 첫 단계로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쓸 수 있는 시간, 돈, 에너지, 예상

되는 외부 도움 등의 목록을 씨줄로 만든 후 일의 순서 단계별 성취 목표,

실행 계획 등을 날줄로 만든다. 이 씨줄과 날줄로 촘촘히 짠 계획을 큰 도화

지에 세부 일정을 곁들여 색색의 펜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으면 어떤

크고 복잡한 일이라도 손 안에 들어 온 것처럼 안심이 되어 일할 엄두가 난

다.

40년 묵은 이런 습관이 긴급구호 활동에 이렇게 큰 도움이 될지 누가 알았

겠는가? 긴급 구호 현장 책임자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앞으로의 일을 예

상하고 그에 따른 계획을 세우는 일이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해야 할 일보다 하고 싶은 일의 계획을 세울 때 훨

씬 가슴이 뛰고 머릿속 혈관이 팽팽해진다. 특히 남들 보기에 너무나 허황되

어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일이면 더욱 그렇다. 좋은 예가 세계일주다.

열 살 전후부터 시작된 세계 일주 계획은 처음에는 막연했지만 중·고등학교

와 대학교 시절을 거치면서 구체적인 계획을 추가하고 유학에서 돌아와 회

사에 다니던 3년 동안 예산에 맞게 매달 저축까지 하면서 점차 확고해져 내

나이 서른셋에 마침내 세계 일주에 올랐으니, 이야말로 계획의 승리가 아니

겠는가?

- 20 -

■ 날마다, 달마다, 해마다

물론 이게 계획의 힘만은 아니다. 일기장 속의 계획과 꿈을 현실로 만드는

나만의 독특한 방법이 있다. 나한테는 효과만점이어서 혹시 여러분께도 도움

이 될까하여 천기를 누설해 보겠다.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동네방네 소문내기’, 계획 중인 일을 주위 사람

들에게 마구 알리는 거다. 그럴 때마다 그 계획이 가시화되면서 내 의지도

굳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된 일이니 꼭 이루어야한다는 의무감도 생긴

다. 세계 일주를 예로 들어보자.

1) 초등학생 때부터 주변의 가족들과 친구들에게

2) 학교 글짓기 과제도 세계일주를 소재로

3) 유학에서 돌아와 홍보회사에 출근한 첫날 부장에게 3년 후에는 세계일주

를 떠난다고 선언

어느 때 부턴가 “세계일주는 언제 가세요?”라는 인사말이 나오게 되니 떠

나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된 것이다.

동네방네 아는 사람이게 말하는 것도 모자라 급기야는 책을 통해 독자들에

게까지 계획을 공개하기에 이르렀다.

<그건 사랑이었네>의 120살까지의 인생설계라는 꼭지에서 나이별로 정리

해 놓았는데 놀라운 건 6년 전에 쓴 계획 중 여러 가지를 이미 이루었다는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1) 구호 현장 최전선에서 일하기 (지난 3년간 1년 중 절반)

2) 백두대간 종주(2010. 9월부터 2012년 7월까지)

3) 학교나 연구소에서 체계적인 후진 양성(2012부터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4) 구호현장에 기반을 둔 인도적 지원에 대한 정책 연구(지난 3년간 UN중

앙긴급대응기금 자문위원으로 활동)

5) 스칸디나비아 3국 여행

6) 인도적 지원에 관한 체계적인 공부(2009~2010 미국 터프츠대학 플레쳐

스쿨에서 석사 학위)

이런 과도하고 무리한 계획이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고 자괴감을 줄 수 있으

- 21 -

니 그러지 말라는 사람도 있다. 일리 있는 충고지만 계획을 세운 덕분에 단

한 발짝이라도 나갈 수 있다면 그만큼은 남는 거라고 굴뚝같이 믿는다. 내가

세운 계획 중 반의 반만 이루어도 그게 어딘가. 계획한 일마다 이룬 건 아니

지만 단언컨대 내가 이룬 일 중에서 계획 없이 이룬 일은 단 하나도 없다.

■ 할까 말까 할 때는

“내 이럴 줄 알았다니까.”

오랜만에 집 안을 정리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터져 나왔다. 늘

간소하게 살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하지만 왜 이렇게 집안 가득 쓸데없는 물

건들을 잔뜩 쟁여 놓고 사는지.

사 놓고 한 번도 입지 않은 이 노란색 블라우스가 그렇다. 친구 따라 백화

점에 갔다가 전 품목 50% 세일이라는 말에 솔깃해서 산 것이다.

살까말까 할 때는 사지 말기!

이건 오랜 경험을 통해 깨달은 내 일생의 중요한 원칙이다. 한국에서 정착

민 생활을 할 때도 그렇지만 해외를 유목민처럼 이리저리 돌아다녀야 할 때

는 더욱 그렇다. 외국 생활을 하면서 나 역시 한 동안은 특이하고 예뻐서,

나중에 쓸모 있을 것 같아서, 가격이 싸서 등 이런 저런 이유로 갖가지 물건

들을 사 들였지만, 별로 필요도 없는 물건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데 귀

한 시간과 에너지를 무한정 든다는 걸 절감한 후부터는 이 원칙을 지키려고

나름 애쓰고 있다.

반대로 할까 말까 망설일 때 꼭 하는 것도 있다. 바로 여행과 산책이다.

1박 2일 이상의 국내 여행이나 해외여행은 물론 30분짜리 동네나들이까지

모두 그렇다. 갈까 말까 망설일 시간에 일단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가 동네

한 바퀴를 돌다보면 몸과 마음이 시원해진다.

그래서 나는 대학 수업 시간 사이에 30분이라도 시간이 나면 얼른 연구실

을 튀어나와 교정을 한 바퀴 돌면서 여러가지 꽃과 나무 구경을 한다.

할까 말까 망설일 때 꼭 하는 게 또 있다. 공부다. 대학교나 석·박사 학위만

그런 게 아니라 취미로 배우는 단소, 암벽등반, 외국어도 마찬가지다. 일단

- 22 -

시작만 해 놓으면 매일매일 조금씩 느는 게 신기하고 재미있다.

최근 우리 성당에서 만난 팔순의 글로리아 할머니는 이 결심을 더 굳게 만

들었다. 두어 해 전, 최고령으로 한글학교에 입학하시면서 “이제라도 글을

배우면 앞으로 10년은 써 먹을 수 있으니 남는 장사지, 안그래?”하실 때만

해도 연세도 많으신데 사서 고생하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1년 사이에 한글

을 깨치시고 신약성서 필사를 끝내셨다고 한다.

혹시 지금 무엇인가 할까 말까 망설인다면 이 기준으로 한번 생각해 보시

기 바란다. 다시 말해 볼까요? 한 만큼 이익이라니까요!

2장 단단한 생각

■ 보스턴, 뜨겁게 몰두했던 순간들

2009년 8월, 9년간 다니던 월드비전을 그만두고 보스턴 행 비행기에 올랐

다. 드디어 늦깎이 유학이 시작된 거다.

터프츠대학교 인도적 지원학 석사과정. 현장 경험이 풍부한 사람을 우선으

로 뽑는 과정이지만 입학 원서를 내놓고 두 달간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현장에서 일할 때마다 구호 정책과 매뉴얼이 현장 사정과 동떨어져 답답한

마음에 꼭 해보고 싶었던 공부라 입학 허가 통지를 받고 정말 기뻤다.

아는 사람 한 명도 없는 보스턴에 숙소도 정하지 않은 채 달랑 인터넷에서

찾은 보스턴 한인성당 주소와 신부님 이름 석 자만 가지고 떠난 나도 강심

장이지만, 생면부지인 나를 새벽에 공항까지 손수 마중까지 나와주시고 숙소

를 구할 때까지 손님방에서 묵게 해주시고 유학 생활에 꼭 필요한 정보와

사람들을 소개해준 본당 신부님과 사무장님, 지금 생각해도 정말로 고맙고

황송하다.

일주일 후인 대학원 오리엔테이션 첫날, 같이 공부할 학생들을 직접 보니

살짝 긴장이 되었다. 하나같이 어찌나 똘똘하고 발랄하고 자신감 넘치게 생

겼던지. 입학생은 200여 명, 70여 개국에서 왔고 나이는 대학교를 갓 졸

업한 20대 중반부터 50대 초반까지인데 내가 그해 최고령 신입생이었다.

- 23 -

여러 과정 중 인도적 지원학 과정에는 에리트레아, 싱가포르, 한국, 루마니

아, 그리고 미국인 두 명까지 총 일곱 명으로 모두 자기 분야의 현장 경험이

9년 이상이었다. 이런 현장 경험이 있기 때문에 우리과정 학생들은 통상 2

년 과정을 1년으로 압축해서 끝낸 수 있었다. 대신 한 학기 수강과목이 다른

학생들의 1.5배이고 첫 학기부터 졸업 논문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긴장과 두려움으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등장한 노교수가 한 말

이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여러분이 우리 대학원을 다니면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학위를 받고

좋은 인맥을 쌓는 것이 아닙니다. 읽고 또 읽고, 그 읽은 것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입니다. 인터넷 시대에 필요한 정보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죠.

그러나 그 정보도 생각을 거치지 않으면 절대로 여러분 것이 될 수 없습니

다. 이곳에서 여러분 생각의 뿌리가 더욱 깊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 엉덩이의 힘으로 버티다

물론 공부 자체는 힘들었다. 토론식 수업도, 논술식 시험도, 한 시간 수업

을 준비하기 위해 읽어야 하는 막대한 양의 자료도 그랬다. 그것도 영어로

말이다. 나이 오십이 넘었으니 집중력과 암기력, 정보 수집력이 떨어지는 건

당연한 일, 믿을 건 엉덩이 뿐이었다. 유학은 99% 엉덩이와의 싸움이라는

말은 누구의 명언인가? 나 역시 첫 수업시작 시간인 오전 8시 15분부터 도

서관이 문을 닫는 새벽 한 시까지 도서관 3층 창밖이 잘 내다보이는 ‘내 지

정석’에 1년 내내 껌딱지처럼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었다.

우리 학교에는 학생들이 밤길 걱정 없이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학교

경찰이 경찰차로 집까지 데려다 주는 안심귀가 서비스가 있는데 내가 그 서

비스를 1년간 제일 많이 이용한 학생이었다.

‘껌딱지 작전’의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두 달도 지나지 않아서 극도로 피

곤할 때 나타나는 모든 현상이 종합세트로 나타났다. 왼쪽귀가 아프고, 얼굴

에 울긋불긋 열꽃이 피고, 눈밑이 지속적으로 떨리고, 결정적으로는 치질이

도졌다. 이건 새 책 집필의 최종단계에서 마지막 피치를 올릴 때 나타나는

현상인데……. 이래서 다들 나이 들어 공부하는 게 쉽지 않다고 하는건가?

- 24 -

각오는 했지만 이런 말기 현상들이 이렇게 빨리 나타날 줄 몰랐다.

그러나 아무리 용을 써도 시간은 늘 모자랐다. 이게 모두 한 학기에 여섯

과목이나 듣는 죄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잠을 줄이는 수밖에. 하루에 서너

시간 자고 일주일에 한두 번은 날밤을 새워야 했으니 항상 잠이 부족했다.

학교 가는 길에 하늘이 노래지며 빙빙 돈 적도 많았다.

토론 수업도 어려운 건 마찬가지였다. 내가 다녔던 대학원은 각 나라 학생

과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섞여 있어 토론이 매우 풍성했다. 30

여 명이 수강하는 ‘근현대 중국 외교사’라는 수업에서는 공교롭게도 원수로

지내야 마땅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중국과 대만, 에티오피아와 에리트레

아(1993년 에티오피아로부터 독립한 아프리카 북동부 국가) 학생들이 나란

히 앉아 들었다.

처음에는 선입견 때문에 그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큰 논쟁으로 번질까봐 살

얼음을 딛는 듯 아슬아슬했다. 그러나 토론이 시작되면 입씨름이나 자기 주

장만 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든 접점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낯설면서

도 아름다웠다. 현실에선 어렵지만 적어도 교실 안에서는 평화적인 대화와

타협이 가능하지 않겠냐며.

만약 우리 반에 북한 학생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내 토론 수준으로 보아

토론이 아니라 언쟁을 했을 확률이 높다. 정말 이상하다. 내 의견을 주장하

고 설득하는 건 그런대로 하겠는데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 말을 차분

히 듣고 내 주장을 수정하거나 허점을 인정하는 건 수업 시간 중이라도 너

무나 어렵다. 토론 중 조금만 논리가 달리면 당장 말싸움 모드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논지 흐리기, 말꼬리 잡기, 인신공격, 얼굴 붉히며 언성 높이

기……. 내가 수업 시간에 어떤 식으로 토론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

끈해질 만큼 부끄럽다.

앞으로도 많은 반성과 연습과 훈련이 필요한데 이것 역시 내 개인의 문제

라기보다는 토론은 없고 논쟁만 있는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라고 생각하면

너무 아전인수일까?

■ 나를 키운 여덟 시간

- 25 -

내 잘못이든 아니든 질문과 토론은 잘 못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현장 근무

9년차라 전공 수업 시간에는 따끈따끈한 현장 얘기를 보태며 학생들과 교수

님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한 번은 교수님이 현장 구호 식량 지원의 문

제점에 대해 언급하면서 곡물을 나눠주면 배급받는 그날 즉시 원래 가격의

10%로 시장에 내다팔아 비누, 치약, 학용품 등의 생필품을 사는데 쓰는 현

실을 지적했다.

내가 손을 들고 말했다.

“제가 국제 NGO출신인데 그 건에 대해 우리 단체에서 올해 나온 연구보고

서가 있으니 다음 시간에 저에게 15분만 주시면 그 보고서를 요약해서 발

표하겠습니다. 교수님은 반색했다.

“아. 비야 한, 당연히 좋습니다.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 기대하고 있겠습니

다.”

나는 각국의 NGO 현장에 전화를 해서 자료를 받아 그럴듯한 PPT를 만들

어 발표했고 박수를 받았다. 그 자료는 졸업 후 몇 년 동안 그 수업에서 사

용되었다는 후문이다. 그리고 그때 모운 자료는 나중에 논문을 쓸 때에도 크

게 도움이 되었다.

뭐니 뭐니 해도 학생에게 제일 무서운 건 시험이다. 매번 두려웠던 그 시험

을 그때 그때 잘 치러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멋지고 잠재력이 풍부

할지 모른다. 그러니 섣불리 나는 이정도의 사람이라고 단정 지어서는 안

된다. 해보지도 않고 자기가 아디까지 할 수 있는지를 어떻게 알겠는가?

내 경험상 해보는 데까지가 자기 한계다. 이 한계의 지평을 계속 넓히고 싶

다. 그러려면 아무리 두렵고 고통스러워도 그런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말아

야 한다.

사족인데 그 70여 명의 기라성 같은 학생 중에 상위 10%만 받는다는 A+

는 내가 받았다. 교수님은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식량 지원 활동 중에 부수

적으로 벌어질 수 있는 인권 침해에 관한 내 페이퍼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며 학기가 끝나고 점심까지 사 주시며 칭찬해 주셨다. 고진감래(苦盡甘來)!

■ 깨지고 무너지고 몸부림치다

- 26 -

시험도 시험이지만 석사과정의 꽃이자 가장 큰 난관은 논문이다. 1년 과정

이라 수업과 논문 준비를 병행해야 했던 2학기가 시작하자마자 논문 지도교

수 대니얼은 나와 눈만 마주치면 이렇게 물었다. “Any evidence? Any

progress?(출처는 어디고 근거는 뭔가요? 진전은 있나요?)

석사학위 논문인데도 엄청나게 많은 참고자료를 읽어야 하고 한 줄 한 줄

누가 언제 말했는지 정확히 밝혀야 하고 돌이서 합의하에 세운 논문 제출

스케줄을 하루라도 어기면 당장 이런 메일이 온다. “Any progress?” 다른

교수들에게 논문 지도를 받는 우리 과정 다른 학생들은 그렇게까지 쪼이지

않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나만 잘못 걸린 것 같다.

언젠가는 하도 쫄려서 대니얼에게 내가 이렇게 열심히 3개월 정도 글을 써

서 책을 한 권 내면 수십만 명 이상이 읽는데, 이번에 1년에 걸쳐 쓴 이 논

문은 독자가 단 한 사람, 당신이라고 했더니 박장대소하면서 허리를 굽히는

시늉을 하면서 영광이라고 한다. 이 사람이 수십만 명 이상의 무게를 가지

고 있는 건 사실이다. 이 선생님을 기쁘게 해 줄 논문을 열심히 그리고 제대

로 쓰고 싶었다. 적어도 내가 있는 힘을 다하고 있다는 건 보여주고 싶었다.

논문 쓰는 동안 괴롭고 속상하고 자괴감을 느끼며 쓴 논문 초고를 마감일

에 가까스로 맞춰 보냈더니 대니얼은 문장마다 일일이 빨간 펜으로 토를 달

아 ‘불바다’를 만들어 놓고는 이런 손글씨 메모를 달아 보내서 나를 울렸다.

“비야. 그동안 큰 진전이 있었네요. 수고했어요. 우리가 연구하는 목적은 현

장에서 너무나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것을 정말 그럴까 라는 의문을

가지고 캐내고 밝혀내는 거죠.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물고 늘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마침내 유의미한 결론이 나오죠. 비야는 제대로 가고 있어요. 건투를

빕니다.”

뜨거운 자갈밭을 맨몸으로 구르듯 몸부림친 끝에 2010년 5월 23일! 드디

어 빛나는 졸업장을 받았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석사학위를 받아서가

아니라 공부하는 내내 뜨겁게 몰두하고 스스로에게 최선을 다했다고 당당하

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 내 학위 공동 수여자들

- 27 -

앞의 글만 읽으면 보스턴에 있는 동안 내가 마치 1년 열두 달 하루 24시

간, 오로지 공부만 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물론 열심히 공부를 하긴 했

지만 명색이 노는 게 전문인 ‘바람의 딸’인데 공부만 했을 리가 있나 그럴

의사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 내 삶의 금과옥조 중의 하나

는 ‘아무리 바빠도 놀 시간은 있다!’ 이다 어디든지 틈새는 있는 법.

시간이 남아돌아 언제든 지 놀 수 있을 때보다는 바쁘면 바쁠수록, 시간이

없으면 없을수록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서 틈새를 찾아 노는 게 훨씬

재미있고 짭짤하다는 게 내 경험이다. 앞에서 잘 시간도 없다고 징징댔지만

그 와중에도 놀 틈과 쉴 틈은 있었던 거다.

유학 내내 매일 아침 30분 요가가 그렇다.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있느라

경직된 몸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쫙 풀어주는 일명 ‘한비야 요가’ 수년간

국민체조, 인도 요가, 기 운동, 필라테스, 태극권 등 좋다 하는 스트레칭을

연구하여 그 중 내게 맞는 자세를 골라 만든 요가를 틈틈이 해오고 있는데

유학 와서 매일 하는 습관이 붙었다.

- 요가 덕분에 사귄 친구 : 30년 경력의 베테랑 사서 엘런

햇볕 좋은 어느 가을날 잔디밭에서 중국과 일본 학생 몇 명에게 재미 삼아

요가 시범을 보이고 있는 데 그가 와서 내 얘기를 듣고 함께 함, 나이도 같

고 몸매도 비슷해서 그 뒤로 단짝이 됨, 그녀와의 커피 타임, 사서로서의 정

수집능력은 큰 도움이 됨

매일 오후 하는 30분의 교정 걷기도 요가만큼 중요하다. 이걸 안 하면 집

에 못 갈 만큼 필수 중의 필수다. 게다가 부잣집 정원처럼 가꿔 놓은 아기자

기한 교정은 철철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그걸 모른척하고 책에 코만 박고 있

는 건 범죄에 가까웠다.

아침 요가와 오후 산책만큼 중요한 건 한 달에 한 번 하는 반나절 외출이

다. 이 외출은 만나고 싶은 사람들과 충분한 시간을 보내며 잠시라도 공부

스트레스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힐링 타임이었다.

이 시간을 함께한 분들은 하버드대학교 정치학 교수였던 베이커 씨 부부

다. 70대 중반의 이 부부는 20대 초반 결혼하자마자 평화봉사단으로 한국에

와 신혼을 한국에서 보낸 것으로 시작 1970~90년대 한국의 격동의 세월을

고스란히 우리와 함께하신 분들이다.

- 28 -

마침 한국 교환교수를 마치고 돌아오신 이분들과 보스턴에서 한 시간 거리

의 월든 호수를 자주 찾았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칩거하면서 <월든>이라

는 걸작을 쓴 바로 그 호수다. 같이 거닐었던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월든

호수는 경건할 만큼 아름다웠다.

늦가을 호수에 비치는 눈부신 단풍들, 초겨울 눈을 뒤집어 쓴 커다란 나무

들, 한여름이면 호수로 풍덩 뛰어들어 수영도 했다. 이 부부에게 듣는

1970~90년대의 한국은 흥미로웠다. 한국과 미국의 정치, 문화, 사회, 전통

에 대해 서로 의견이 다를 때는 격하게(!) 토론도 할 수 있는 어른들이라 신

기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또 다른 월례 행사는 한인 성당 가기다. 여기에 가려면 버스와 지하철을 갈

아타고도 한 시간 반 이상이 걸리기 때문에 주일 미사는 개신교, 유대교, 천

주교가 같이 쓰는 학교 예배당에서 밤 열 시 미사로 해결했는데, 한 달에 한

번은 여기로 와야 한다는 본당 신부님의 엄명이 있었다.

아이고 무서워라! 그러나 그 덕에 세계를 떠다니며 허구한 날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과 섞여 미사를 드리다가 오랜만에 사순절, 부활절, 성탄절을 한

성당에서 보내면서 본당 신자의 소속감을 누릴 수 있었다. 그뿐인가. 주일

오후 미사가 끝나면 유학생을 위해 한식으로 저녁밥도 해주었다. 가끔씩 떡

뽂이, 어묵, 김밥도 나와서 매주 올까, 라는 유혹에 빠지기도 했다.

자연스레 본당 신부님을 비롯해 보스턴에서 유학 중인 신부님들, 방문 신부

님, 학생 수녀님이랑도 가깝게 지냈는데 어찌나 죽이 잘 맞았던지.

여기서 내가 전염시킨 우리 조직의 모토는 두 가지. ‘아무리 바빠도 놀 시

간은 있다’, 그리고 ‘잘 놀아야 잘 산다’ 였다.

■ 보스턴에서 한 공공근로

보스턴에서는 유학생이 아닌 전직 긴급구호 팀장이자 ‘바람의 딸’이자 내

책 독자들의 언니, 누나로서의 삶도 있었다. 많은 분들이 내게 베풀어준 친

절을 갚는 한 가지 방법이기도 했다. 우선은 진로 및 인생 상담자 역할이었

다. 새 학기가 되고 한 달쯤 지나니까 도서관 내 자리로 유학생들이 한두 명

씩 찾아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얼마나 고민이 되어 물어물어 왔을까, 짠해서 기꺼이 시간을 냈

- 29 -

는데 나중에는 너무 많아져 ‘영업 방해’ 수준에 이르렀다. 생각 끝에 아예 금

요일 오전 시간을 그들을 위해 비워 놓았다. 내 최소한의 재능기부이자 공익

근무인 셈이다.

상담이 1:1 활동이라면 여러 명을 대상으로 하는 특강도 세상이 베풀어준

친절에 보답하는 ‘공공근로’의 한 방법이었다. 유학 내내 대외활동 없이 조용

하게 지내려고 했는데 어떻게 알아냈는지 우리 대학원 여학생회에서 나에게

긴급구호현장에 관한 특강을 요청했다. 거절할 수가 없어서 특강을 한게 화

근, 아니 복의 근원이 되었다.

- 보스턴과 뉴욕 지역 한국 학생들을 대상으로 특강

- 워싱턴 DC에서 월드뱅크와 IMF 및 국제기구에서 일하는 한국 직원들을

대상으로 특강

- 로스앤젤레스와 뉴욕 한인 성당에서

* 시간은 논문 초고 작성 후 피드백을 기다리던 기간과 논문 끝내고 귀국

하기 전 기간이용

- 성당 청년들이 부활절 행사로 연극공연을 하면서 수익금 전부를 탈북자

지원 단체에 보내기로 했는데 행사명에 내 이름을 넣고 싶다해서 기꺼이

동참. 이름하여 ‘한비야와 함께하는 탈북자 돕기 행사.’

‘한비야와 함께하는 탈북자 돕기’ 행사 당일 보스턴의 주요 종교단체, 교민

회와 한글학교 등에 관련된 거의 모든 분들이 모이셨다. 그날 예상했던 것보

다 훨씬 많은 금액을 모금할 수 있었다.

그날 내가 제일 뿌듯했던 건 이번 행사에서 처음으로 보스턴에 있는 불교,

개신교, 천주교의 지도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인사하고 같은 목적으로 마

음을 합했다는 점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내 시간과 노력과 돈을 들였다고 해서 내가 받은 석사

학위가 온전히 내것만이 아니다. 많은 이들의 도움과 마음 씀과 기도가 없었

다면 어땠을까?

‘도울 기회가 생기면 절대 놓치지 말 것.’

이번 유학을 통해서 다시 한 번 다지게 된 커다란 인생 원칙이다. 알게 모

르게 수많은 사람들의 친절 덕분에 살고 있으니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 기

- 30 -

회가 오면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원칙이다.

대학생 때 했던 영어 연극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맨 마지막 장면, 내

가 맡았던 주인공 블랑쉬의 대사가 생각난다.

“I have always depended on the kindness of strangers.”(저는 항상 낯

선 사람들의 친절 덕분에 살아왔어요.)

지금 생각해도 명대사다.

■ 여러분은 제 첫 학생이자 첫사랑입니다

여러분 , 정말 반갑습니다.

2012년 1학기 ‘국제구호와 개발협력’ 강의를 맡은 한비야입니다.

제가 웬만하면 안 떠는 사람이에요. 초등학교 때 서울시장배 웅변대회 나

간 이후 무대공포증이 완전히 사라졌거든요. 그래서 아무리 많은 사람들 앞

에서 아무리 중요한 강의를 해도 안 떨죠.

그런데 지금은 떨리네요. ‘호랑이도 제 숲 떠나면 두리번거린다’라는 속담

이 딱 맞아요.

제가 지금 마치 이화여자대학교 강의실이라는 낯선 숲에 온 호랑이 같은

느낌이에요. 초청연사가 아니라 교수로서, 특강이 아니라 정규 대학수업은

처음 해보는 낯선 일이니까요.

우리 학생들에게 지난 10년간 현장에서 보고 듣고 겪었던 그 많은 일들과,

플레처와 제네바 IDHA에서 지난 2년 동안 배웠던 걸 어떻게 정확하게 전해

줄까, 무엇을 어떻게 전해 주는 것이 나도 즐겁고 여러분도 즐겁고 세상에도

도움이 되는 걸까?

어떻게 하면 매 수업, 뜨겁게 몰두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까 생각해서 그

런 것 같아요.

이 전공 필수도 아닌 교양과목을 수요일 아침 8시에 듣겠다고 온 여러분은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아요.(웃음) 이 수업이 학습량도 많고 과제도 많은 걸

알고 수강 신청한 거죠? (네~~)

그러니 이 수업을 듣기로 한 여러분은 이미 가슴속에 불덩어리를 갖고 있

는 거죠. 저는 거기에 불만 살살 붙여주면 되는 거예요.

- 31 -

맹자의 군자삼락(君子三樂)이 뭔줄 아세요? 좋은 제자 만나서 가르치는 기

쁨이에요. 그 제자들이 커가는 걸 보는 기쁨도 있을 거고요. 저 역시 그 기

쁨, 마음껏 누려볼 생각입니다.

오늘 강의는 한비야 ‘교수’로서 첫 강의이고, 여러분은 제 첫 학생이자 첫사

랑이자 마루타입니다.(웃음) 2012. 3. 3

첫 수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내가 교수가 되다니……. 현장의 풍부한 경

험을 학생들에게 나눠 달라는 이화여자대학교 국제대학원 김은미 원장님의

간곡하고도 끈질긴 요청이 아니었다면 생각도 못할 일이었다. 나 역시 국제

구호와 개발 협력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지만 지금까지 국내에는 이 둘

을 묶을 강의가 없는 게 아쉽던 참이었다. 그래서 한 학기 총 16회의 수업

중 반은 내가 국제구호를, 나머지 반은 김원장님이 개발협력을 가르치기로

하면서 일이 성사된 거다.

나는 한 달도 넘게 강의를 준비하면서 현장에서 10년도 넘게 해 온 일을 확

인하고 또 확인했다. 그뿐인가. 대학원에서 배운 내용을 총 복습하고 최신

논문이나 연구보고서를 꼼꼼히 찾아 읽고 인터넷 검색도 모자라 친한 현장

구호 요원들에게 메일도 무수히 보내고 전화도 수없이 걸며 들들볶았다. 용

어건 사실 확인이건 통계건 흐름이건 전망이건 절대로 틀리거나 맥락 없는

소리를 하면 안 된다. 이건 대학교 정규 수업이고 나는 한비야 교수니까.

■ 몽땅 털어주고 싶다

내가 수업에 열정을 쏟는 만큼 학생들도 그러길 바랐다. 그래서 이 분야 혹

은 나에 대한 단순한 호기심으로 수강 신청하는 걸 막으려고 일부러 강의

시간을 제일 이른 오전 여덟시로 잡았다. 정말로 공부하고 싶은 학생들만 들

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내 작전은 성공이었다.

첫 수업에 100명이 넘는 학생들이 그 아침에 초롱초롱 눈을 뜨고 나에게

집중했다. 눈에서 불꽃이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그 환하고도 진지한 얼굴들

을 마주하면서 얼마나 떨리던지, 얼마나 설레던지, 그리고 또 얼마나 어깨

가 무거웠던지, 정말로 잘 가르치고 싶었다. 내 머릿속에 가슴속에 있는 것

을 몽땅 털어주고 싶었다.

- 32 -

다양한 수업 방법으로 재미있게 배워서 좋긴 하지만 학생들은 과제가 살짝

많다고 한다. 그래서 이 수업의 별명이 ‘원형탈모 수업’이다. 머리가 빠질 만

큼 열심히 해도 될까 말까 하다는 엄살과 어리광과 원망이 섞인 별명이지만

나는 과제를 줄일 생각이 없다.

그러나 그 덕에 강의 개설 첫해부터 우리 학생들은 국제구호개발 관련 각

종 대학생 논문 대회에서 상이란 상은 다 싹쓸이 해 온다. 더욱이 이듬해부

터 우리 강의가 필수 교양과목이 되고 KOICA(한국국제협력단)의 대학교 국

제개발협력 이해증진 사업의 하나로 선정되어 KOICA의 지원으로 학생들이

해외 현장에 직접 가볼 기회도 생기면서 점점 그 내용이 풍성해지고 있다.

수업 때마다 학생들의 기발하고도 반짝이는 생각에 깜짝깜짝 놀란다. 한번

은 난민들의 임시 거처에서 일어나는 성폭력 문제에 대해 토론할 때였다. 밤

에 공중화장실에 가는 길에 발행하는 여성 성폭력에 대해 얘기하자 한 학생

이 그건 집집마다 ‘접는 요강’만 있으면 간단하게 해결되지 않겠냐고 했다.

머리를 쿵,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정말 그러면 되는 거였구나. 접는 요

강은 접는 플라스틱 물통을 만드는 곳에서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그 학기

가 끝나고 말리 현장에 갔을 대, 접는 요강 얘기를 하자 현장 직원들이 모두

좋은 생각이라며 손뼉을 쳤다. 가르치는 게 배우는 거라더니 옛말 그른 게

없다.

■ 검색 대신 사색을

“제가 뭘 하고 싶은지 잘 모르겠어요.”

얼마 전, 대학 새내기에게 받은 질문이다. 원하는 대학의 소위 전망 좋다는

학과에 들어갔지만 이게 정말 자기가 원하던 공부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단

다. 좋은 학점 따며 학점 관리를 잘 할 자신은 있지만 뭔가 허전하고 불안하

다며 장문의 편지를 보내왔다.

얼마나 막막하고 답답할까? 그러나 한편 기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드디어

이 친구가 생각하기 시작했구나!’

생각하기! 요즘 젊은이들은 이걸 참 어려워한다. 검색을 통해 남이 만든 답

은 잘 찾는데 사색을 통해 스스로 답을 찾는 데는 영 서툴다. 생각이 본격적

으로 시작되는 사춘기 때 스스로에게 물어야 하는 질문, 나는 누구인가? 어

- 33 -

떤 삶을 살고 싶은가? 언제 기쁘고 무엇을 할 때 행복한가? 등을 치열하게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사회에서나 한목소리로 이렇

게 말한다.

“딴 생각 말고 공부나 해!”

내게 편지를 보낸 학생도 자기는 여태껏 죽을힘을 다해 엄마, 아빠의 꿈,

담임선생님의 꿈을 대신 이루어준 것 같다며 이제는 진짜 내 꿈을 찾고 싶

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었다. 내 대답은 딱 한 마디다.

생각하라! 생각만이 네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게 해줄 뿐만 아니라, 그걸

찾아가는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을 견디게 해 줄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뒤늦게 시작한 대학 입시를 비롯해서 오지로만 찾아다니는

육로 세계일주, 세계 험악한 곳이란 곳은 다 찾아다니는 구호 활동가로 지내

는 동안 어찌 어려움이 없었을까? 너무 힘들어서 딱, 놓아버리고 싶을 때도

많았다.

하지만 이 모든 게 내가 한 결정이었기에 힘들다는 엄살도, 더 이상 못 견

디겠다는 하소연도, 너 때문이라는 남 탓도 할 수 없었다. 내가 판단하고 내

가 선택한 일이니 그 과정과 결과도 내 몫이고 최종 책임도 오롯이 내가 져

야 했다.

수십 년간 그런 과정을 겪다보니 이제는 어려운 일이 닥칠 때마다 ‘그때 그

것도 해봤는데, 이것쯤이야’라는 배짱이 생긴다. 경험이 주는 단단한 자신감

이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은 ‘내 인생이라는 배의 선장

은 바로 나’라는 사실이다.

나는 누구인가?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어떤 세상을 꿈꾸고 있으며 누구와 그 세상을 만

들어 갈 것인가? 이런 본질적인 물음에 답을 찾는 방법은 단 한 가지다. 생

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이다. 간단한 인터넷 검색이나 달콤한 자기

계발서가 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단언컨대 스스로 생각하고 답을 찾아내느라

몸부림치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인생을 항해로 비유하자면 생각하기는 나무에 비유할 수 있다. 나는 사람마

다 머릿속에 ‘생각나무’가 한 그루씩 있다고 믿는다.

- 34 -

나는 사색도 연습이고 훈련이라고 생각한다.

생각하기에 대해 간절한 조언을 구하는 기특한 학생들을 만나면, 내가 수십

년간 쓰고 있는 ‘생각 훈련법’ 두 가지를 소개해 주곤 한다.

첫째는 일기 쓰기다. 일기는 그날 있었던 일 중 한 가지에 대해될수록 길게

자세히 쓰는 거다. 일기를 쓰고 있으면 생각이 저절로 정리되면서 내가 겪은

일들이 객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둘째는 혼자 하는 여행과 산책이다. 혼자 다니면서 부딪히는 사람들과 사건

사고를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간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생각 나무의 뿌리를 내리면서 지금 내 배의 방향키를 누

가 쥐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더 이상 미룰 수가 없다. 혹시 여태까지 공

부하느라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 자기 삶의 방향키를 맡겼다면 이제는 돌려

받아야 한다.

방향키를 잡았다면 명실공이 당신 배의 선장은 당신이다. 세상이라는 거친

바다에 맞서야 하는 두려움과 외로움도 당신 것이고 그것을 헤쳐 나갈 힘

과 용기도 당신 것이며 힘든 항해 후에 마침내 닿을 항구도 당신 것이다. 내

인생의 주인으로 살고 싶다면 어렵지만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고, 불안하지

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자, 내 배의 선장이 되어 떠날 준비 되었는가?

Von Voyage! (순항 하시길!)

■ 길 위의 기도

내가 가당치도 않게 피정 지도를 시작한 건 순전히 이해인 수녀님 때문이

다. 2012년 여름, 서로의 왕팬이자 내 ‘신앙의 왕언니’ 해인 수녀님한테 이

메일이 왔다. 소속 수도회가 운영하는 제주도 ‘성 이시돌 피정의 집’ 피정을

지도해 달라며 바쁘겠지만 꼭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아니, 피정 지도라니.

내가 어떻게……. 게다가 요청한 날짜에는 몇 달 전 여러 사람과 잡아놓은 2

박 3일 야영 계획이 있었다. 당연히 못한다고 말해야 했지만 의지와는 무관

하게 내 손가락은 이런 답 메일을 쓰고 있었다.

“와, 해인 수녀님 제가 피정 지도를요? 영광무지로소이다. ㅋㅋㅋ 떨리는

마음으로, 그러나 기쁜 마음으로 해보겠습니다. 대신 수녀님이 피정 기간 중

- 35 -

에 기도 ‘세게’ 해 주셔야 해요 . 오케이?”

여기까지 쓰고는 마음이 변할까봐 얼른 보내기 버튼을 눌러버렸다.

그 순간 ‘어머,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후회했지만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난 뒤였다.

피정(避靜)이란 피할 피, 조용할 정, 글자 그대로 일상생활을 피해 조용한 곳

으로 가서 묵상과 성찰 기도 등을 하는 영적 수련이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 동안 단식하며 기도했던 일을 그 제자들이 본뜨면서 시작된 피정은 성

당에 열심히 다니는 천주교 신자라면 1년에 한 번 정도는 하게 된다. 보통

성당, 수도원, 피정의 집 등에서 하는데 기간은 짧게는 1박 2일, 길게는 40

일 등 다양하다.

제주도 한림에 있는 성 이시돌 피정의 집은 인기 만점 피정지다. 우선 장소

가 제주도이고, 피정의 집 안에 ‘새미 은총의 동산’이라는 매우 아름답고 성

스러운 야외기도 공간이 있고 이곳 수녀님들과 꽁지머리 피정 교육팀장의

감동적이면서도 능수능란한 진행은 이미 정평이 나 있었다. 밥도 무진장 맛

있다는 입소문!

이번 피정 연령층이 확 낮아졌어요. 보통은 50~60대인데 이번에는 20~30

대는 물론 중·고등학생에 초등학생도 여럿 있답니다.”

담당자의 이 말에 기분은 좋았지만 동시에 스트레스가 확 밀려왔다. 아, 잘

해야 할 텐데…….

야영 가기로 했던 팀에 싹싹 빌고, 제주도행 비행기에서 이렇게 다짐했다.

“어차피 1년에 한 번은 피정하는 거니까 스트레스 받지 말자. 3박 4일 프

로그램 중 내가 해야 하는 특강이나 요가 만 지도하고 나머지는 피정 참석

자의 한 사람으로 최대한 침묵하자.”

하지만 단단히 먹었던 이 마음은 피정 첫날, 30초 자기소개‘시간에 녹아내

렸다. 자그마한 성당을 꽉 메운 참석자들 대부분은 내 책을 읽었거나 <무릎

팍 도사>를 봤거나 <좋은 생각>이나 <생활성서> 혹은 ‘서울주보’에서 내

글을 읽고 이 피정에 왔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수녀님이 내 이름을 부르니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불경스

럽게(!) 휘파람 소리도 들렸다. 단상에 서니 나를 바라보는 140명의 얼굴이

- 36 -

하나같이 활짝 핀 꽃같이 환했다. 갑자기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준비했던 말

과는 완전히 다른 말을 하고 말았다.

“반갑습니다. 저도 피정 참석자로서 피정 중 될수록 침묵하며 하느님과 많

은 대화를 나누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려고 했는데 “반갑습니다. 피정 중 여

러분들과 될수록 많은 대화를 나누겠습니다.” 해버린 거다.

첫날 소개 시간이 끝나고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 사진찍기, 사인하기, 갑자기 친구나 아이들에게 전화를 걸어 한 마디 해달

라는 사람

- 밥을 먹을 때도 : 하도 말을 시켜서 …….

- 잠을 잘 때에도 찾아오는 사람, 같이 야식 먹자는 사람, 묵주, 손수건, 커

피콩 등의 선물을 가져오는 사람 등

첫날 밤, 일기를 쓰면서 생각했다. 사진 한 컷, 사인 한 장에 좋아하는 교우

들을 보면서 이렇게 작은 일로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할 수 있다는 게 고맙

고도 신기했다. 그러고는 생각이 스쳤다. 이와 하는 팬서비스라면 좀 더 본

격적으로 해볼까?

■ 눈물을 매단 채 활짝 웃다

다음 날, 처음 눈에 띈 사람은 초등학교 6학년 다희(가명)였다. 아침 미사

후, 네 시간 정도 순례 길을 걷는 일정이었는데 오전 침묵시간이 끝나마마자

고개를 숙이고 걷던 초등학교 6학년생 다희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 이 아

이는 자기소개 시간에 내 책을 전부 다 읽었으며 작가가 되는 게 꿈이라고

했다. 전날 엄마한테 다희가 학교에서 심한 왕따를 당해 정신과 차료를 받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터였다.

“선생님처럼 작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해요?”

“음. 우선은 많이 읽고, 써보고, 생각하고 그리고 경험은 많이, 특이할수록

좋겠지?”

“전 지금 특이한 경험 중이에요.”

“뭔데?”

“왕따요.”

- 37 -

나는 걸음을 멈추고 “얼마나 힘들었니, 다희야?” 그리고 꼭 안아 주었다.

왕따 때문에 괴로워하는 아이는 다희뿐만이 아니었다. 여중생 은정이도,

여고생 현주도 그날 걸으며 따로따로 들어보니 모두 왕따 피해자였다. 언어

폭력, 물리적 폭력……. 그리고 이어지는 자퇴 또는 우울증……. 아이들은 피

를 철철 흘리고 있었다. 아이들만이 아니었다. 어른들도 하나같이 커다란 돌

덩이를 가슴에 안고 있었다.

하루 종일 들었던 인생의 무게에 눌려서일까, 둘째 날 밤은 정말 피곤했다.

그러나 기뻤다. 하느님이 애썼다며 칭찬하실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는 이

들과 함께 울고, 웃는 이들과 함께 함께 웃으라’하셨으니까.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한 사람씩 따로 걸으며 얘기를 할 때마다 갖

가지 사연과 눈물 바람이 이어졌고 해맑은 웃음도 뒤따라 왔다.

그중에서도 우리 피정의 막내 다섯 살짜리 수진이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 꼬마는 선천성 시력장애로 양쪽 눈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수술을 하기로 했다는 데 성공할 경우, 빛을 구별할 정도로

시력이 회복될 가능성도 있지만 실패할 경우 더 빨리 실명하게 될 수도 있

었다.

“수진인 뭐가 되고 싶어?”

“특수교육학과에 가서 교수가 될 거예요.”

마지막 저녁 기도시간, 기도를 바치는 꼬마의 목소리가 더욱 간절하고 낭랑

했다. 그래서 아름다웠고 그래서 짠했다.

피정 마지막 날, 강연을 마칠 때, 내가 이들을 위해 깊게 그리고 꾸준히 기

도할 것을 약속하면서 나를 위한 세 가지 기도도 부탁했다.

첫째는 곧 떠나게 될 구호현장에서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둘째는 내 영향력이 있다면 그것이 좋은 곳에 쓰이도록

셋째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하는 말에 상처받지 않도록

세 번째 기도를 부탁하는 순간 그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크고 작

은 상처가 떠올라 수녀님도 나도 그들과 함께 울었다.

■ 악플에 대처하는 법

- 38 -

2009년 가을, 보스턴에서 공부할 때의 일이다. 서울에 있는 친한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목소리는 다급했다.

“오늘 인터넷에 널 마구 욕하는 글이 올라왔어 네가 무심코 인터넷 보다가

놀랄까봐 미리 전화하는 거야.”

“뭐라고? 내가 한국에 있지도 않은데…….”

바로 내 이름을 검색해보았다. 세상에! 한 눈에 들어오는 글의 제목들이 너

무나 기가 막혀 얼굴이 화끈했다.

사기꾼이라니, 거짓말쟁이라니, 내 세계 여행기가 거짓과 과장으로 가득 차

있고 ,월드비전이 구호개발단체가 아니라 선교단체인데도 아닌 척하면서

전 국민을 상대로 사기 모금을 했고, 내 이름이 본명이 아니고, 세계를 세

바퀴 반 걷지도 않았는데 책 제목을 그렇게 했고, 지금 다니는 대학원도 돈

만 주면 들어가는 후진 학교인데 명문인 것처럼 말하고 다니고…….

너무나 놀라서 손발이 덜덜 떨리고 피가 가꾸로 솟는 것 같았다. 귀에 들릴

만큼 가슴이 쿵쿵 뛰고 숨이 턱까지 막혔다. 그러나 놀랍게도 악플을 읽어

내려가면서 점점 차분해지는 나를 발견했다. 20분 후 검색창을 닫으면서 굳

게 마음을 먹었다. 다시는 나에 대한 악플을 찾아 읽지 않겠다고.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니 주위 사람들이 걱정하면서 어떻게라도 악플에 대

응해야 하지 않겠냐고 했지만 나는 정말 그러기 싫었다. 문제의 핵심은 악플

을 읽은 대중들이 누구의 말을 믿느냐라고 생각했다. 내 말을 믿느냐, 악플

러의 말을 믿느냐.

무엇보다 나는 진심으로 네티즌의 자정능력을 믿고 싶었다. 할 만큼 하다보

면 종국에는 논란의 진위가 드러날 테고 그러면 자연스럽게 가라앉을 거라

는 믿음 말이다.

그 사이 좀 놀라웠던 건 나에게 소위 불로거라는 사람과 인터넷 댓글 아르

바이트생이 접근해 왔다는 점이다. 자기들이 글과 댓글로 내 검색어를 싹

‘청소’해 주겠으니 얼마를 달라는 거였다. 큰돈은 아니었지만 악플이 난무하

는 시대에는 이런 신종 아르바이트도 있구나. 신기하면서도 씁쓸했다.

일부러 찾아보지는 않는다 해도 악플이 괴롭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성가시

- 39 -

고 신경 쓰이고 흘려듣는 소리에도 얼굴이 화끈하고 마음이 상한다. 우리 가

족들, 내 친구들, 나를 아끼는 지인들, 나를 좋아하는 우리 학생들이나 독자

들도 나만큼 괴롭고 가슴 아플 거다. 특히 우리 식구들은, 대학생인 조카들

까지도 단 한 번도 나에게 이런 악플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다. 그들도 귀가

있으니 나에 대한 이런저런 소리를 많이 들었을 텐데 모른 척하느라 얼마나

조심스럽고 힘들까? 이 생각만 하면 너무나 미안하고 고맙다.

그러나 이런 악플은 나만 겪는 괴로움이 아닌 듯하다. 요즘은 알려진 사람

들은 말할 것도 없고 페이스북이나 블로그, 트위터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누

구라도 어처구니없는 악플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순전히 인터넷의 산물일까? 당연히 아니다. 세상 모

든 사람도 모든 사람에게 사랑 받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

어느 연구 결과, 100명이 모여 사는 방에 낯모르는 사람이 들어가면 100명

중 30명은 첫눈에 그 사람을 좋아하고, 30명은 이유 없이 싫어하며 40명은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고 한다. 소위 3대 3대 4 법칙인데 이론 대

로라면 우리를 알고 있는 30%가 잠재 악플러인 셈이다.

사람마다 악플 대처방법은 각양각색이다. 어떤 이는 악플러를 찾아내 건건

이 고소하고, 또 어떤 이는 악플러를 찾아내 건건이 고소하고, 또 어떤 이는

오해가 풀릴 때까지 친절히 설명하며 이해를 구한다. 악플러와 논쟁을 벌이

는 사람, 내가 그런 욕먹을 짓을 했다고 자책하는 사람, 그리고 나처럼 완전

무시하는 사람도 있다. 어떻게 왕무시할 수 있냐고? 지난 7년간 연습과 훈

련을 거듭하면서 맷집을 키웠다니까요!

■ 맷집 훈련 3단계

1단계, 유명해졌으니 유명세를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2단계, 일명 KTX와 짓는 개 이론 : KTX가 지나가는데 개가 짓는다고 일

일이 내려서 설명할 필요가 없음

3단계, 유학에서 돌아온 직후 좋아하는 노수녀님께 이런 이야기를 하며 괴

롭다고 하니 수녀님이 내 눈을 똑바로 보며 두 손을 꼭 잡고 하시는 말

“그 마음 잘 알아요. 마음이 얼마나 아플까요? 그러나 하느님이 아시는 죄

- 40 -

보다 사람들이 아는 죄가 훨씬 적지 않나요? 그렇죠? 그러니 사람들이 그

정도 일을 가지고 비난하는 걸 외려 다행이라고 생각하세요. 언제나 지은 죄

보다 드러난 죄가 훨씬 적은 법이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 마음에 보약이 되는 충고

이렇게 쓸모없는 쓴 소리는 어떻게든 마음속에서 지우려고 하지만 애정 어

린 쓴 소리, 건설적인 비판, 마음을 담은 뼈아픈 충고는 당연히 보약이라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인다.

내가 보기엔 좀 똘똘해 보일지 모르지만 실은 매우 허술하고 어리바리하다

는 사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나 또한 인정한다. 또한 한 살 두 살 나

이 들면서 나에게 쓴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다행히 내게는 어떤 말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 아무리 듣기 싫은

소리, 얼굴이 화끈하도록 가슴 아픈 소리를 해도 고맙기만 한 사람들이 있

다.

생각해보면 ‘무자비’(無慈悲)한 비난에 시달리는 것도 나쁘기만 한 건 아닐

거다. 세상에는 다 좋은 것도 없지만 다 나쁜 것도 없으니까 말이다. 비난도

마찬가지다. 내가 이런 마음 상하는 일을 겪으면서 비슷한 일을 겪는 사람들

의 마음을 잘 살필 수 있고 내 경험에 비춰 적당한 조언까지 해 줄 수 있게

되었다.

지난 학기. 내 학생 중 총학생회 활동을 하는 친구가 있었다. 한번은 연구

실로 찾아와 그야말로 대성통곡을 하면서 하는 말.

“시험기간인데도 자기들을 위해 이런저런 행사를 기획하고 실행했는데 사

방에서 이런 무지막지한 욕을 먹고 있는 게 너무나 분하고 억울해요.”

내가 말했다.

“뭔가를 열심히 하니까 욕을 먹는 거야.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누군가는

욕을 하지. 나는 뭐 욕 안 먹는 줄 알아? 잘 알잖아?”

그랬더니 이 학생 “맞네요, 교수님도 억울하시겠어요.”하면서 눈물이 그렁

그렁한 채 환하게 웃었다. 나의 고통이 다른 사람에게는 위로가 되는, 기분

좋은 순간이었다.

- 41 -

■ 그래서 그들은 행복했을까?

지난 일요일 저녁, 오랜만에 느긋하게 책을 읽으며 곁눈으로 개그 프로그램

을 보는데 한 코너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식당 주인이 냉장고를 수리하러 온

사람들에게 몹시 심하게 구는 장면이었다. 수리공들에게 큰소리로 반말을 하

질 않나, 손찌검을 하질 않나. 무릎을 꿇리지 않나, ‘평생 수리나 해먹고 살

아라’라는 폭언도 서슴지 않았다. 갑질도 그런 갑질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온갖 모욕을 참으며 일을 끝낸 수리공들이 그 식당 손님이 되면서 한

순간 처지가 역전 되었다. 조금 전 호되게 당한 이들은 손님은 왕이라면서

자기들이 당한 대로 식당 주인에게 신나게 갑질을 했다. 막말을 하고 외모를

조롱하고 빰을 때리면서, 관객들은 통쾌한지 크게 웃었지만 나는 마음이 몹

시 불편했다.

개그는 개그일 뿐이라지만 ‘이 시대의 수퍼갑’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기내

땅콩 서비스가 맘에 안 든다며 승무원의 무릎을 꿇리고 회항하게 한 항공사

부사장, 대리점에게 재고를 떠맡기면서 막말을 서슴지 않은 우유회사, 폭언

을 일삼다 결국 경비원을 죽음으로 내몬 ‘압구정동 사모님…….’

나 역시 지금은 갑인 경우가 많지만 ‘수퍼을’로 살았던 긴 시절이 있었다.

내 나이 열아홉 살, 대학 입시에 떨어지고 고졸 신분으로 클래식 다방 DJ,

세무서 임시직원 등 갖가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세무서에서 임시직원

으로 일 할 때 나는 직속상사였던 계장님의 수퍼을이었다.

- 아침마다 계란 노른자가 든 커피 타 바치기 : 노른자가 색깔이 흐리다느

니. 퍼졌다느니...

- 오후 6시에 클래식다방 DJ를 하러 가는 데 꼭 다른 일을 시키거나 ‘고졸

인 주제에 클래식은 무슨...’ 얼굴이나 반반하게 가꿔서 나이 많은 사장님 재

취로 가든지... 등

- 야, 라는 반말에 서류 뭉치로 머리 때리기 등

그래서 나는 이를 악물었다.

‘저런 인간은 세상 어디에도 있다니 훈련이라 생각하고 어떻게든 견디자.

이 고비는 넘어갈 것이고 나는 더욱 단단해질 것이다.

약자 중의 약자, 수퍼을 중의 을이었던 열아홉, 스무 살 한비야는 수퍼갑의

- 42 -

갑질을 어렵게 견뎌내며 보내야 했고 그 후에도 오랫동안 혹독한 갑들의 이

런저런 갑질을 당하며 살아야 했다.

■ 자기보다 약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가

몇해 전 소개팅을 했다 친한 언니에게 소개받고 그날 저녁 바로 시간을 내

어 만났다.

괜찮은 남자는 정말 괜찮았다.

- 유머 감각 뛰어남, 등산 캠핑 등 취미도 비슷, 좋은 것은 여기까지

- 식당을 나와서 사람이 돌변 : 운전기사가 조금 늦으니 돌변하여 반말로

욕하고 짜증을 냄

- 결정적이 사건 : 내가 택시로 가겠다고 하자 택시를 잡아준다고 내리면서

마침 그 앞을 지나는 시각장애인과 만나자 내뱉는 혼자말로 “아이, 재수없

어.”

내 얼굴이 화끈했다. 그 순간 친절이란 가면을 벗은 그의 민낯을 보아버렸

다. ‘재수 없다니, 재수 없는 사람은 바로 너다. 이놈아!’ 때마침 건널목 신호

가 바뀌어서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도망치듯 맞은편에 있던 택시에 올라

탔다. 5분도 안 되어 소개팅을 주선했던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 직업이 재난민 등 약자를 돌보는 일이라 그의 이런 행동이 특별히 거슬

려서 과잉 반응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허나 한 사람의 인품과 성숙도는 자기

보다 약한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 가름된다고 믿는 사람은 나만

이 아닐 것이다.

나는 식당 종업원, 택시 운전사, 환경미화원, 아파트 관리인 등 매일 대하는

사람들에게 함부로 하는 사람들이 제일 싫다. 나도 사람인지라 이런 힘없는

사람들에게 해야 할 말의 범위를 넘은 ‘갑질’을 하고 나면 나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고 허접하게 느껴져서 마음이 매우 불편하다.

나는 을로서 쩔쩔 매는 것도 싫지만 갑이 되어 내게 주어진 힘과 권리를

마구 휘두르는 가혹한 갑, 재수 없는 갑, 부끄러운 갑, 그래서 허접하고 초라

한 갑이 되는 게 더 싫고 무섭다.

■ 나이 들수록 잘할 수 있는 일

- 43 -

지난 봄에는 꽃구경 복이 터졌다. 일부러 그러기도 어려울 텐데 특강 가는

곳마다 그곳의 유명한 봄꽃 절정시기와 딱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꽃샘추위가

한창이던 3월 초, 제주도에선 샛노란 유채꽃을 실컷 보았다. 3월 말에는 전

라도 선운사에서 피보다 붉은 동백꽃을, 4월 초에는 해군사관학교가 있는 진

해에서 등불처럼 환한 벚꽃을 그리고 그 다음 주에는 강화도 고려산을 완전

히 뒤덮은 진분홍색 진달래를 원 없이 즐겼다. 정말 내가 ‘노는 복’이 있기는

한가보다.

이상하게도 얼마 전부터 활짝 피어 있는 꽃만큼이나 떨어진 꽃들에게도 눈

길이 갔다. 선운사에서 본 수십만 송이의 동백꽃, 기름을 바른 듯 싱싱한 초

록색 이파리 사이로 붉게 핀 꽃은 여전사나 되는 양 당당했지만 그 밑동에

는 활짝 핀 채 떨어져 있는 꽃송이들로 가득했다. ‘핏방울처럼 뚝뚝 떨어지

는’ 동백꽃이라더니……. 어찌나 예쁘고 싱싱한지 도로 나무에 붙여놓고 싶

은 심정이었다. 안타까웠다. 좀 더 붙어 있어도 될 텐데 뭐가 저렇게 급했을

까. 혹시 아름다운 모습으로만 기억되고 싶어 꽃다운 나이에 자살을 택했다

는 외국 여배우의 심정이 이런 거였을까?

진해의 벚꽃터널에서도 그랬다. 눈이 온 것처럼 아니, 등불을 켜놓은 것처

럼 환하게 피어있는 벚꽃, 그러나 가볍게 바람이 부니 꽃잎은 순식간에 수백

마리의 하얀 나비로 변해 머리 위로 날아와 사뿐히 앉았다.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꽃잎들! 이걸 보고 축복의 꽃비라고 하는 걸 거다. 이리저리 흩날리

던 잎들은 어느새 나무 밑에 수북이 하얀 꽃방석을 만들었다. 벚꽃이 활짝

필 때는 물론 떨어질 때와 떨어진 후의 모습도 이렇게 예쁜 줄 미처 몰랐다.

내가 그 아름다운 마무리에서 찬사를 아끼지 않는 꽃이 있다. 우리 집 뒷산

에서 만나는 무궁화다. 이른 아침 활짝 핀 모습도 귀엽지만 이삿짐 싸듯 꽁

꽁 싸맨 후 꽃봉오리 채로 똑, 떨어지는 모습이 야무지고 사랑스럽다.

해바라기의 뒷마무리도 마음에 든다. 꽃도 꽃이지만 시든 후에는 꽃판 가득

맛있는 씨를 맺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꽃 중의 꽃은 역시 장미다. 나는 이런 저런 이유로 꽃다발을 받는데

다른 꽃보다 장미를 받으면 제일 기분이 좋다. 싱싱한 장미도 향기롭고 아름

답지만 꽃다발을 말리면 그 도도한 자태를 오랫동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44 -

활짝 피어서도 완전히 시들어도 처음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건 아마 장미뿐일 거다.

친구와 나는 나이 들수록 잘 할 수 있는 것과 나이 들면서 잘해야 하는 것

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우리는 ‘나이 들었다’를 60대 이

상으로 정의하고 단단히 마음먹고 정리해 나갔다.

1) 많이 웃을 것 - 웃은 얼굴이 제일 예쁘니까

2) 지갑은 열고 입은 닫을 것

3) 돈뿐만 아니라 시간을 내주는 일에도 너그러울 것

4) 뭔가를 끊임없이 배울 것 : 60대에 새로 배워도 90세까지는 30년이다.

5) 한창 필 때는 어느 꽃인들 아름답지 않으랴. 지는 모습까지 봐야 그 꽃의

진가를 알게 되는 거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떠날 때 이름답게 마무리하는

게 중요하다.

어느 꽃처럼 마무리하고 싶은가? 적어도 목련처럼은 되지 말아야지. 동백

꽃의 마지막도 너무 처연하고 안타까워서 싫다. 무궁화처럼 깔끔하게 혹은

장미처럼 살아서도 죽어서도 아름다움을 간직하는 것도 좋겠지만, 원컨대 나

는 해바라기처럼 소박하게 살다 무엇인가 유용한 것을 남기고 싶다. 해바라

기 씨처럼 작지만 입 안을 가득 채우는 단단함으로.

■ 그때 그 일, 미안했어요

해마다 연말이면 나는 특별한 송년회를 준비한다. 나와 단둘이 보내는 송년

회! 1년 내내 사람들과 뒤섞여 들뜨고 숨 가쁘게 살아왔으니 마무리만큼은

혼자 조용하고 차분하게 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12월 마지막 주에는

될수록 약속을 잡지 않고 특히 마지막 2~3일은 아예 집 밖으로 나가지도

않으면서 본격적인 나만의 송년회를 준비한다. 30대부터 해왔으니 적어도

20년째고, 이만큼 하다 보니 자연스레 ‘송년회 매뉴얼’도 생겼다.

- 첫 번째 순서는 집안 정리다. 지침은 ‘미련 없이 신나게 버릴 것’이

다. 책, 옷, 각종 기념품, 서류며 명함 등

- 다음 순서는 컴퓨터 정리다. 바탕화면에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깔려있는

- 45 -

문서, 사진, 원고, 회의자료 등을 정리해서 내문서와 외장 하드에 저장

- 그 해에 쓴 일기 모두 읽기, 지난 1년의 회고, 반성

- 그 다음 순서는 감사하기와 용서 구하기. 고마웠던 사람에게 전화나 이메

일로 인사하기와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에게 용기를 내어 용서 구하기, 그리

고 용서할 사람에게는 통크게 용서하고 털고 가기

하지만 고맙다는 말보다 미안하다는 말이 훨씬 어렵다. 쑥스러워 메일이나

문자로 할 때가 많다. 그러나 두 눈 질끈 감고 그야말로 1그램의 용기를 내

어 직접 말하는 게 제일이다.

송년회의 마지막 순서는 촛불을 켜면서 시작된다. 12월 31일 밤 11시쯤 집

안 전등을 다 끈 후 기도상 앞에 촛불을 밝히고 푹신한 방석과 눈물을 닦을

휴지를 한 통 준비한다. 그리고 편안한 자세로 앉아 기도를 드린다. 그러고

는 편안한 자세로 앉아 기도를 드린다. 우선은 한 해 나를 눈동자처럼 보살

펴 주신 하느님께 감사와 알게 모르게 지은 죄에 대한 용서의 기도를 올린

다. 그 후 가족들과 친구들, 같이 일하는 동료들의 영육간의 건강과 마음의

평화를 위해 한 명 한 명 이름을 불러가며 기도한다.

다음으로는 한 해 동안 내 책을 읽은 독자들 특강을 들은 분들과 내가 가

르친 학생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 외 내가 싫어하는 사람과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 전 세계 지도자들 그리고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한다.

이런 기도를 하는 중에 어느 덧 1월 1일 새해가 밝아 온다. 2년에 걸쳐 기

도한 셈이다. 기도로 가는 해와 오는 해를 잇는 나만의 송년회는 지난해를

잘 정리했다는 만족감과 새해에 대한 기대감, 그리고 앞으로 다 잘될 거라는

용기를 주는 내게는 참말로 완벽한 송년회다.

2015 3. 31

다음에 ‘3장 각별한 현장’ ‘4장 씩씩한 발걸음’편이 이어집니다.

- 46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