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그램의 용기(2)

2015. 4. 22. 12:38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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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그램의 용기(2)

■ 한비야 지음

3장 각별한 현장

■ 우리가 몰랐던 아프리카

아프리카 하면 나도 좀 할 말이 있다. 세계여행을 할 때 배낭 하나 달랑 메고 많은 나라를 육로로 거치며 다양한 현지인을 만나고 수없이 민박하면서 아프리카의 속살을 살짝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구호활동을 시작한 후, 아프리카는 내게 더욱 각별한 대륙이 되었다.

지난 15년 구호 활동 중 가장 자주 가고 길게 일했던 대륙은 단연 아프리카다. 각종 회의나 행사차 1년에 두세 차례 가는 건 기본이고 2주일 정도 단기 근무는 수십 차례, 3개월에서 7개월 동안 장기 근무도 여러 번 했다.

하도 다녀서 아프리카의 주요 관문인 케냐 나이로비 공항이나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공항은 손금 보듯 훤하다. 어느 커피숍 카페라테가 맛있고, 어느 식당 어느 자리에서 와이파이가 잘 터지고, 공항 한구석 어느 의자가 장시간 죽치기에 편한지 속속들이 알고 있다. 이렇게 익숙한 곳이지만 누가 “아프리카 어때요?”라고 물으면 순간, 말문이 막힌다. 아프리카를 한 마디로 어떻다고 말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기엔 너무나 크고 변화무쌍하고 다채로운 대륙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아프리카 하면 어떤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가? 국제구호와 개발협력을 가르치는 내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같은 질문을 해 보았다. 1분 안에 써낸 단어들은 이랬다.

- 사바나와 열대우림, 나일 강과 킬리만자로, 사하라 사막, 동물의 왕국, 가뭄, 기아, 쿠데타, 내전, 에이즈, 노예무역, 인류 발생지, 마사이족, 낼슨 만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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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이태석 신부님,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 <블러드 다이아몬드>, <라이온 킹> 여성할례 등

- 적어낸 키워드 들은 대부분 동아프리카에 한정 되는 내용

- 한비야가 처음 접한 아프리카도 모두 동 아프리카의 이미지 : TV프로그램 <타잔>, 밀림의 왕자 레오, 동물의 왕국, 사자나 치타 등

■ 이렇게 큰 곳에 이렇게 다채로운 사람들이

0 아프리카 대륙

- 세계 면적의 20%, 남북한을 합친 우리나라 면적의 135배, 그 안에 미국, 중국, 인도, 유럽 전체를 넣고도 남을 정도의 면적

- 아프리카의 인구 : 2014년 현재 11억 명(세계 인구의 15%

- 흑인이 제일 많지만 사하라 사막 부근은 갈색 피부에 서구적인 이목구비 로 아랍 사람과 다름없음, 남아프리카 공화국이나 짐바브웨에는 백인 후 예들도 많음. 에티오피아 사람들처럼 옅은 까만색부터 수단 사람들처럼 먹물같이 까만색까지 천차만별

- 밀림과 열대초원으로 덮여 있다는 오해 : 동아프리카나 대륙의 중남부에 서만 볼 수 있음 , 모래사막인 사하라가 아프리카 면적의 1/4, 6700Km 의 나일강과 2만 9000Km의 해안선도 있음

- 인류의 탄생부터 450만년 동안 살고 있는 땅, 아프리카는 동,서,남,북, 중 앙 아프리카로 나누어 생각해야 함

0 사하라 사막 북쪽

- 이집트, 리비아,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는 아랍에 더 가깝고 국민 소득도 높음. 기원전 3000년의 이집트 문명부터 세계사를 장식

0 사하라 사막 남쪽은 15세기부터 세계사에 등장.

0 포르투갈

- 1440년대부터 아프리카 서해안 항구도시를 중심으로 노예무역 시작

0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의 영국과 프랑스

- 영국 : 이집트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잇는 남북 종단 정책

- 프랑스 : 사하라 남서쪽을 중심으로 동서 횡단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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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1차 세계대전 이후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으로 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 - 1975년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앙골라와 모잠비크를 마지막으로

0 독립은 했으나 종족갈등, 종교갈등, 군부들의 세력 다툼으로 끊임없는 내 전으로 고통

0 아프리카의 풍부한 석유, 우라늄 등의 에너지 자원과, 다이아몬드, 금, 등 풍부한 지하자원으로 서구 열강과 미국 중국 등의 각축장이 되어 있음

0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뭄, 사막화, 물 부족, 기근, 에이즈, 에볼라등이 이 들의 발전에 결정적인 걸림돌이 되고 있음 : UN인권 보고서에 의하면 세 계 경제수준 최하위 25개국이 아프리카 국가들임

■ 서아프리카로 들어가는 키워드 4

동,서,남,북, 중앙아프리카 중에서 왜 하필 서아프리카냐 하면 이곳이 다른 지역보다 일반적인 관심과 정보가 상대적으로 떨어져서다. 육로로 몇 달간 아프리카 여행을 하며 나름 아프리카 빠꼼이를 자처했던 나도 서아프리카에 대해서는 깜깜했다. 내가 못하는 불어권이라 심정적 거리감도 컸다.

2012년, 파견 근무지가 서아프리카로 결정되고 나서야 울며 겨자 먹기, 억지 춘향으로 사전 공부를 하다가 어느 순간 무릎을 탁 쳤다.

그리고 ‘배워서 남 주자’는 원칙에 따라 서아프리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과장해서 말한다면, 전 세계 카카오의 40%를 생산하는 코트디부아르에 가뭄이 들면 밸런타인데이 초콜릿 값이 올라 갈 거고, 다이아몬드 생산국인 시에라리온과 라이베리아에 에볼라가 확산되면 다이아몬드 값이 너무 올라 신부들의 예물 계획이 바뀌어 질 것이다.

0 서아프리카

- 북쪽으로 사하라 사막, 서쪽으로는 대서양, 남쪽으로 기니만, 동쪽으로는 카메룬을 경계로 하는 14개국

- 이 지역을 이해하는 4개의 키워드 : 1) 사하라 사막, 2) 이슬람교

3) 노예무역, 4) 프랑스 식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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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제르 강을 젖줄로 삼아 기원전 5,000년 경부터 사람이 살았음

- 8세기부터 사하라 사막을 가로질러온 무슬림과 교역 : 금, 상아, 노예를 주고 소금, 장신구, 무기 등과 바꿈, 그리고 서아프리카에 무슬림 전파

- 서아프리카를 호령했던 왕국들

첫 번째가 가나 왕국, 두 번째가 말리 왕국, 세 번째가 송가이 왕국

특히 13세기부터 200여 년 동안 번창했던 말리 왕국은 강력한 군사력과 막대한 부를 자랑

- 말리에 있는 젠네(Djenne) 사원 : 진흙으로 지은 이슬람 사원으로 세계 자연유산, 아프리카를 상징하는 테마파크로 피라미드, 스핑크스와 함께 꼭 들어가는 건물

동쪽에서 아랍 상인들이 들어왔다면 서쪽 해안을 통해서는 서유럽 상인들이 들어왔다. 처음에는 이들도 서아프리카를 인도로 가는 길목쯤으로 여기고 금, 상아 등을 교역했지만 곧 노예장사가 가장 이익이 많이 남는다는 걸 알았다. 그 결과 노예제도가 폐지된 1870년까지 400년 동안 서아프리카에서 끌려간 흑인 노예는 최소한 1500만 명, 이들은 대서양을 건너 쿠바 등 카리브해, 브라질 등 남미, 미국 등으로 가서 당시 돈 되는 사업이었던 담배나 사탕수수 농장에서 죽도록, 아니 죽을 때까지 일했다.

노예제도가 사라지면서 대규모 노예무역은 사라졌지만 아직도 그 그림자는 남아 있다. 1980년 세계에서 가장 늦게 노예제도가 폐지된 모리타니는 아직도 인구의 20% 남짓인 10만 명이 노예 상태로 살고 있다.

■ 프랑스의 민낯

다음 살펴볼 키워드는 프랑스.

그 영향력은 한마디로 무지막지하다. 프랑스는 서아프리카 대부분을 장악했는데 식민지 시대가 끝나고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서아프리카에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0 불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국가 : 54개국 중 23개국 (영어는 20개국)

- 서아프리카에서도 나이지리아, 가나, 라이베리아를 제외 하고는 불어 사용

- 돈도 세파 프랑이라는 프랑스 기반의 화폐 사용(8개국)

- 수천 명 단위의 프랑스 군대 주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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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프랑스가 지배하던 국가의 독립을 승인할 때 맺은 식민지 협약의 내용

- 불평등 조약

1) 프랑스에서 지정한 화폐인 세파프랑만 사용

2) 이들 국가의 외환 보유고의 85% 이상을 의무적으로 프랑스 은행에 예치

3) 유사시 프랑스 군대가 주둔할 수 있음

4) 이들 국가에서 새로 발견된 천연자원 개발권이나 대규모 공사는 프랑스 가 독점 우선권을 갖는다.

1960년데 이후 몇몇 서아프리카 국가의 지도자들이 이 협약을 반대했지만 이들은 쿠데타에 의해 쫓겨남 : 쿠데타의 배후는 불을 보듯 뻔함

또 하나의 키워드 사하라 사막.

0 세계에서 가장 큰 사막

- 니제르 영토의 80%, 모리타니의 75%, 말리의 50% :미국의 영토 만함

- 이곳을 통해 교역을 하고, 이슬람 문화를 받아들임

0 관광 개발 : 사막 마라톤, 낙타여행 등

0 기후 변화의 직격탄 : 주변의 빠른 사막화, 가뭄 반복, 메뚜기 떼 창궐

0 이슬람 무장세력, 세계적인 마약상, 조직적인 인신매매단의 거점

과거의 모순과 현재의 문제와 미래의 염려가 모여 있는 서아프리카가 언제쯤 평화롭고 풍요로운 땅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서아프리카 국가와 국민들만이 만들 수 있다. 그리고 누가 뭐라고 해도 그들은 그렇게 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 거미줄도 모이면 사자를 묶는다

‘빨리 가려면 혼자서 가고 멀리 가려면 여럿이 가라’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아프리카 속담일 거다. 동아프리카 마사이족 속담이라는데, 소를 치느라 매일 수십 킬로미터씩 걸어 다녀야 하는 일상에서 캐낸 보석 같은 말, 들을 때마다 무릎을 치게 하는 말이다. 450만 여 년 전, 현생 인류의 조상이 출현했던 곳인 아프리카에서 무릎 치게 하는 속담이 어찌 이 뿐일까? 그 오랜 세월 생존을 위해 채집, 수렵, 농경, 목축, 어업 등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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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평화로운, 때로는 모진 시대를 살아낸 아프리카 사람들의 지혜가 듬뿍 담긴 속담이 많고도 많을 것이다.

내 맘대로 뽑은 아프리카 속담 베스트 5를 소개한다.

1. ‘거미줄도 모이면 사자를 묶는다.’

아무리 작은 힘이라도 뭉치면 안 되는 일이 없다는 말인데 동아프리카 에티오피아 깡촌마을 할머니에게 처음 들은 말이다.

2. ‘잔잔한 바다는 노련한 사공을 만들지 않는다.’

아프리카에는 세계에서 가장 긴 2만 9,000킬로미터의 해안선을 따라 수많은 항구 도시와 어촌이 있다. 그 바닷가 어부들의 인생철학이 이 한 줄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어떻게든 견뎌내자. 이 성난 파도가 나를 괴롭히는 것 같지만 실은 날 가장 노련한 사공으로 만들고 있는 거다. 이 거친 바다를 지나 반대편 항구에 닿을 때면 나는 떠나기 전보다 훨씬 단단하고 노련한 사공이 되어 있을 거니까’라고.

3. 셋째로는 ‘우기에는 모기도 많다.’

서아프리카 말리에서 근무할 때 수없이 들은 속담이디. 말리에 길고 고통스런 건기가 끝나고 우기가 시작되면 사람들 얼굴에도 생기가 돈다. 날씨도 선선하고 동물이 마실 물 걱정을 안 해도 되고 수수농사도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고대하던 우기가 되면 모기도 극성을 부리면서 말라리아가 창궐하여 수많은 아이들이 목숨을 잃는다.

세상에는 다 좋은 것도 다 나쁜 것도 없는 법이다.

4. ‘동이 트면 가젤도 뛰고 사자도 뛴다.’

동이 트면 가젤은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사자보다 더 빠르게 달려야 하고, 사자는 굶지 않기 위해 가젤 보다 더 빨리 달려야 한다. 즉 초원에서 가장 약한 가젤이든 제일 힘센 사자든 살아남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

5. ‘사자가 말하기 전에는 모든 사냥꾼은 영웅이다.’

아프리카에서 지내다 보면 맨손으로 사자를 때려잡는다는 용맹한 부족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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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기를 자주 듣는다. 그러나 죽은 사자에게 물어볼 수 없으니 진실은 알 수 없다.

이 속담도 두 가지 해석이 있다. 하나는 어떤 상황을 판단할 때 양쪽 얘기를 다 들어봐야 한다는 거고 다른 하나는 확인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마구 허풍을 떠는 사람을 빗대어 하는 말이다. 내가 보기에는 두 번째 해석이 압도적으로 많이 쓰이는 것 같다.

베스트 5 후보에는 올랐으나 탈락한 속담들

- 악어에게 먹히지 않으려면 무리지어 강을 건너라.

- 길을 잃는 것도 길을 찾는 방법 중의 하나이다.

- 거친 강을 건널 때는 돌덩이를 안고 가라.

- 바나나는 원숭이가 먹고 싶다고 익지 않는다.

- 얼룩말을 쫓는다고 다 잡는 건 아니지만, 쫓은 사람만이 얼룩말을 잡을 수 있다.

우리나라 속담과 비슷한 것

- 인내는 돌덩이도 삶는다.(참을 인자 셋이면...)

- 으르렁거리는 사자는 사냥감을 잡지 못한다. (짓는 개는 물지 않는다)

- 코끼리가 싸우면 뭉개지는 건 발아래 풀.(고래 싸움에 ...)

- 춤 못 추는 사람이 마당에 돌 많다 한다.(일 못하는 목수가 연장 탓한다)

■ 남수단 파견 일지

◉ 2012. 8월 와랍 주(州) : 소가 있어야 장가간대요

여기는 아프리카 남수단 와랍 주.

‘울지 마, 톤즈’로 우리에게 친숙한 톤즈가 있는 지역이다. 여기서 내년 1월까지 7개월 동안 긴급 구호 본부장으로 근무한다.

지난 2년 반 동안 미국 유학과 중국어 연수, UN자문위원 역할 등으로 못 갔던 현장에 드디어 다시 온 것이다. 한동안 도시와 책상 앞에만 있으려니 얼마나 현장이 그리웠던지……. 떠나기 2주일 전부터는 달력에 X표시를 해가며 손꼽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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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남수단

- 2011년 7월 9일 50여 년간의 전쟁 끝에 수단에서 분리 독립

- 전쟁의 원인은 종교 : 수단은 아랍계 이슬람교도, 남수단은 그리스도교와 토속 종교를 믿는 아프리카 주민

- 영국 식민지를 벗어나면서 힘과 조직을 가진 북수단이 남수단을 무슬림화 하려는 과정에서 인종 청소에 가까운 전쟁을 치름

- 영토의 점유 및 거기에 묻혀 있는 석유도 관계 된 정치적 경제적 전쟁

- 남수단의 석유를 수출하려면 북수단의 송유관을 사용해야 하는데 북쪽에서는 국제 통용가격인 1배럴당 1달러를 무시하고 36달러를 요구, 최근 25달러로 합의

0 문명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한 남수단 주민

- 문맹률 75%, 여자 문맹률 90%, 영유아 사망률 1000명 당 135명

산모 사망률 1만 명당 205명

- 만성적 식량부족, 영양실조, 더러운 물, 말라리라 창궐지역

0 수단이라는 나라 이름은 ‘검다’라는 토속어에서 나왔는데 주민들의 피부는 숯덩이처럼 까맣다.

0 소를 둘러싼 부족 간의 갈등 심화 : 소 강탈 풍습, 성인식 하거나 결혼할 때 남자의 용감함을 보여주려는 의도 , 결혼할 때 신랑 집에서 신부 집에 소를 주는 풍습이 있음(50마리에서부터 200여 마리까지), 소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이 지역의 남자들은 대낮에도 총을 들고 다님

0 한비야가 활동하는 NGO는 이곳에서 150만 주민을 대상으로 물, 식량, 피난처와 보건의료 등을 제공

2012년 9월, 아름답고 무서운 나일 강 이야기

세계에서 가장 긴 강이자 아프리카의 젖줄인 나일 강을 직접 본 건 30대 중반 세계 일주 할 때다. 이집트 룩소에서 순전히 바람으로만 가는 배를 타고 천천히 나일 강을 따라가는 여행을 했다. 3박 4일간 강물로 밥해먹고 차 끓여 마시고 강변으로 떨어지는 해와 둥실 뜬 보름달을 하염없이 보다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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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되면 모래사장에 텐트를 치고 자고 다음 날 강물로 세수한 후 다시 배에 오르면서 원 없이 강 위에서 놀았다.

그리고 20년 후, 다시 나일 강에서 3박 4일을 보내게 되었다. 이번에는 긴급구호 본부장으로, 남수단에서 일하던 당시 도움이 가장 필요한 곳이 수단과의 국경인 나일 강 상류 지역이었는데 우리 단체도 그곳에서 많은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다.

0 이 지역 사업장을 방문하기 위해 출장

- 그늘 한 점 없는 땡볕을 가는 6인승 스피드 보트, 6시간 소요, 화장실도 갈 수 없으니 물도 마음대로 먹을 수 없음, 엔진 소리가 하도 커서 정신이 없음

- 현장 숙소에는 물도 전기도 없음 : 모기와 체체파리와 독을 가진 도마뱀, 샤워는 빗물을 받아서하고, 손전등에 의지해 잡은 나일 강 물고기로 식사하고, 허름한 간이 건물에 텐트치고 숙박

- 여기선 체체파리가 가장 무섭다. 한 번 물리면 혼수상태에 빠진다.

- 이곳 주민들은 정수 시설을 만들어 주었는데도 강물을 마신다 : 소독약 냄새 때문이란다. 그리고 나일 강의 영혼이 자기들을 더욱 튼튼하게 만들어 준다는 전통적 믿음(?) 때문에, 그래서 설사 사망률이 세계에서 제일 높다.

0 이곳 주민들의 의식구조

- 구호 물품을 하역하는 데 돈을 그것도 당일 당일 달라고 항의한다 : 자기네들에게 돌아갈 구호품인데도 ...

0 그래도 나일 강 풍경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 가도 가도 사람의 흔적이 없는 원시의 강변, 그 위를 날아다니는 색색의 새들, 강물 위에 떠 있는 워터 히야신스의 꽃들

- 악어는 잡은 동물을 습지 나무 밑동에 숨겨 놓고 썩은 다음 먹는 습관, 그래서 배를 타고 가다가 썩는 냄새가 나면 악어를 조심해야 함

- 현지에서는 악어보다 하마를 더 두려워함

◉ 2012년 10월 와랍주 딩카족의 성인식

우리 현장 사무소 마비울은 전형적인 딩카족이다. 키가 장대같이 크고 군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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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점 없이 호리호리하다. 새까만 피부에 얼굴이 조막만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남이다. 아랫니가 네 개 없고 이마에는 세 줄 칼자국 문신이 있다.

- 30대 중반, 부인 두 명에 아이들이 다섯

- 결혼할 때마다 소 50마리씩, 소만 있다면 부인을 한 명 더 두고 싶다고.

- 딩카 족은 남수단 인구 1000만 명 중 약20%

- 소는 부의 상징, 물물교환의 수단, 춤과 노래의 소재, 일상생활의 중심

0 딩카족의 성인식

- 십대 초반, 보름달이 떴을 때 망고나무 아래서 거행

- 아랫니 네 개를 제거하고 한 달 동안 벌거벗은 채 공동생활

- 또래그룹과 친밀한 동지의식 및 개인의 용감성 고양

- 칼자국 문신하기

◉ 2012년 12월 주바 내 생일을 묻지 마세요

“한국에선 새해 첫날이 되면 모두 한 살 더 먹어요.”

“네? 그럼 12월에 태어난 사람은요?”

“그 사람은 이틀 만에 두 실이 되는 거예요. 한국에선 태어나자마자 한 살이예요. 열 달간 뱃속에 있었던 시간을 나이로 치는 거죠.”

“와, 참으로 철학적이고 과학적이네요.”

인사과 현지 직원의 말이다.

“남수단에는 1월 1일이 생일인 사람이 아주 많아요. 우리 사무실에도 현지직원 700여 명 중 50명이 넘어요.”

그 이유인즉 이렇다. 이 나라 사람들 특히 시골 사람들은 자기가 언제 태어났는지 잘 모른다. 실제로 시골에서 나이를 물으면 다들 난감해 한다. 기껏 들을 수 있는 대답은 큰 가뭄이 들었던 해, 우리 동네 소를 다른 마을에서 몽땅 훔쳐 갔던 해, 정도니 태어난 날을 물어 보는 건 순전히 사간 낭비다. 남수단 출신으로 모든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이곳 천주교 대주교님도 홍수가 나던 해, 비오는 날에 태어났다고 한다.

수백 년 내내 생년월일을 몰라도 큰 불편이 없었는데 재작년 남수단 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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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을 위한 국민투표를 하면서 투표를 위한 유권자 등록을 하려니 생년월일이 필요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생년월일을 모르는 사람들을 일괄적으로 1월 1일을 생일로 하게 되었다.

◉ 2013. 1월 주바 미사 중에 동이 튼다

요즘 나는 매일 아침 미사를 드린다. 한국에서도 하지 않던 일인데 벌써 세 달째다. 쓰나미, 지진, 전쟁 등 엄청난 재난을 당한 곳에서 구호 활동을 벌이는 구호요원들은 현장에서 일하는 동안 믿음이 더 깊어지거나 아니면 완전히 믿음을 일허버린다고 한다. 다행히 나는 첫 번째 경우이다. 지금처럼 현장에 있으면 기도해줘야 할 사람과 간절히 기도해야 할 일이 차고도 넘친다. 그래서일까? 평소에는 대충 읽던 성경을 현장에 오면 곱씹으며 읽게 되고 기도 시간이 점점 더 길어진다.

나 역시 밥 한 그릇, 물 한 모금이 없어 죽는 아이들 말라리아나 설사 같은 하찮은 병에 걸려도 살아남지 못하는 아이들, 반군들이 마을에 불을 지르고 잡아가거나 죽이는 게 무서워 고향을 등지고 멀리 도망가야 하는 선하디 선한 사람들을 볼 때마다 “하느님은 어떻게 이 사람들을 이 지경이 되도록 내버려두시나요? 정말 너무하시는 거 아니예요?”라는 원망의 기도가 절로 나온다.

다행히 주바 숙소에서 20분 거리에 자그마한 성당이 하나 있다.

미사 시간에 맞추려면 동트기 전에 집을 나서야 한다.

성당은 소박하면서도 단정하다. 제단과 십자가 고상은 단순하고 신자용 나무의자는 닳고 닳아 연륜이 배어 있다. 작은 성당 평일 아침 미사인데도 고정적으로 오는 사람이 100명도 넘는다. 근처에 UN등 국제단체가 많아서인지 그 중 20명 정도는 나 같은 외국인이고 20여 명은 수녀님들인데 이분들은 ‘수녀님 밴드’로 변신한다.

미사 중에 동이 튼다. 매일 미사를 드리는 사람들이 그렇듯 내게도 지정석이 있다. 성당 맨 앞줄 의자의 중앙에 앉는데 그곳은 제대와 가까워 분심이 덜 들뿐만 아니라 제대 뒤에 있는 창문을 통해 동트는 게 잘 보인다. 매일 아침 미사 중에 둥실 떠오르는 해를 보면서 그 맑은 햇살을 온몸으로 받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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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세상에 몇 명이나 될까? 난 정말 남수단에 와서 만복을 누리고 있다.

2013년 2월 서 에콰토리아 주, 땡볕의 미사, 헌금은 망고

여기는 남수단 남동부 서 에콰토리아 주의 수도, 얌비오다. 이 나라 북쪽은 주로 유목을 하는데 비해 남쪽은 대부분 농사를 짓는다. 주바에서 열 시간 정도 떨어진 이곳은 이 나라에서 가장 전쟁의 피해가 적은데다 토양이 비옥하고 날씨까지 농사에 알맞아 남수단의 식량창고라고 불린다.

한나라였던 수단이 남, 북으로 갈라진 여러 이유 중 북 수단은 아랍의 영향으로 이슬람교를 남수단은 서구의 영향으로 개신교와 천주교를 믿는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도 주바를 포함한 남쪽은 천주교가 훨씬 강한 곳이다. 특히 전쟁 당시 주교를 비롯한 천주교 성직자들이 피신하지 않고 끝까지 주민들과 함께 넘겨서 더욱 사랑을 받고 있다.

여기서 맞은 첫 주일 아침, 성당에 가려고 나섰다가 깜짝 놀랐다. 같이 가기로 한 현지 직원들 손에 플라스틱 의자가 하나씩 들려있는 게 아닌가? 성당이 좁아서 자기 의자는 자기가 가져가야 한다는 거다. 얼떨결에 나도 의자 하나를 들고 길을 나섰다.

30분 쯤 걸어서 도착한 성당 마당은 미사를 시작하기 훨씬 전인데도 100개 정도 되는 각양각색 의자로 발 디딜 곳 없이 가득 차 있었다. 성당 안에는 들어갈 생각도 말아야 했다. 일단 건물이 100명도 못 들어갈 만큼 비좁은데 선풍기는커녕 창문도 변변치 않으니 그 안이 찜통이나 다름없을 테니까 왜 자기 의자를 가져와야 하는지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차양도 없는 땡볕 아래서 드리는 ‘땡볕 미사’는 괴로웠지만 매우 특별했다. 성당 안에서 신부님이 미사를 집전하고 바깥에는 그냥 스피커로만 들렸는데 가족 단위로 온 사람들은 잔치에 온 것처럼 즐겁게 노래 부르며 미사를 드렸다. 봉헌 시간에는 미사 예물로 가지고 온 계란, 망고, 파인애플 등을 어찌나 정성스레 바구니에 넣는지 그 자체가 감동이었다.

이 중에는 두 시간 이상 걸어 온 사람들도 많다는데, 미사 한 번 드리려고 매 주일 두 시간을 꼼짝없이 앉아 있어야 하다니……. 지극정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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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 아프리카 리포트

◉ 2013년 8월 바마코 세상에는 말리라는 나라가 있었다

우리에겐 이름도 생소하지만 사하라 사막 아래에 위치한 이 나라는 13세기부터 17세기까지 400년 이상 수많은 속국을 두고 이 지역을 다스리던 강력한 이슬람제국이었다. 사막을 관통하는 독점 카라반 무역과 해안지방에서 캐내는 막대한 금 덕분에 만사 무사라는 황제는 인류 역사상 가장 부유했던 사람으로 꼽히기도 한다. 이런 말리도 서 아프리카 다른 국가들과 비슷하게 19세기 프랑스 식민지가 되었다가 1960년 독립했다.

독립 이후 비교적 평화로웠던 말리에 전쟁이 났다. 작년 4월, 분리 독립을 원하는 북쪽 반군이 외부 이슬람 세력과 힘을 합해 북쪽 지역을 완전히 장악해 버렸다. 이들은 곧바로 장악한 지역에서 샤리아 법을 적용

- 여자들은 모두 베일을 써야 하고, 남자들은 술과 담배 및 음악과 스포츠를 엄격히 금지

- 어길 시에는 채찍으로 때리거나 손발을 자르고 돌로 쳐 죽이는 공개 처형

- 북쪽 주민 50만 명 이상이 전쟁과 전쟁만큼 무서운 샤리아 법을 피해 난민이 됨

서아프리카의 많은 나라가 그렇듯 말리도 프랑스 식민지였고 불어가 공용어인데 나는 불어를 못한다. 불어를 못해도 괜찮다더니 웬걸, 우리 사무실 직원부터 영어를 거의 못하고 UN 회의 등 외부 회의가 불어로 진행되며 모든 문건이 불어로만 되어 있어 통역 없이는 도저히 일을 할 수가 없다.

꿀 먹은 벙어리!

◉ 말이 안 통하는 덕분에

그런데 문제는 불어만이 아니다. 수도인 바마코만 벗어나면 대부분 불어가 아니라 현지어인 밤바라어를 쓴다. 설상가상으로 내가 일하는 곳은 지난 내전 중 정부군과 프랑스군이 파죽지세로 남진하던 반군을 막았던 북쪽 지방인데 여기선 밤바라어와는 전혀 다른 이 지역 언어를 쓴다. 게다가 내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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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에 남으로 피난 온 30여만 명의 난민들은 각자 자기 고향 말만 할 줄 안다. 그러니 불어를 잘하는 외국인 직원들도 북쪽 현장에 오면 모두 나처럼 꿀 먹은 벙어리 신세를 면치 못한다. 그래서 현장에서는 서너 명의 각각 다른 언어 통역사가 움직여야 일을 할 수 있다.

지난주에는 한국교육방송에서 말리 내전 난민들의 상황을 찍으러 북쪽 현장에 왔다. 촬영 시간은 예상보다 훨씬 많이 걸렸다. 언어 때문이다.

- PD가 한국어로 질문 - 영어 - 불어 - 밤바라어 - 현지 지역 언어 이렇게 5단계로 통역해서 다시 되돌아오면 10단계의 통역이 되는데 그 중간에 엉터리 통역이 하나만 끼이면 엉뚱한 답이 돌아온다.

하지만 이런 혼란스런 상황에서 나는 오히려 아주 특별한 경험을 하고 있다. 말이 안 통하니까 저절로 입을 다물게 되고 대신 귀는 활짝 열어 놓게 된 것이다. 그러자 돌봐야 하는 피난민들의 눈빛과 표정이 더 잘 보이는 것 같다. 그들 얼굴만 보고 있으면 그들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말로 하는 수다가 적어지니 아프리카의 예쁜 하늘과 구름이 이제야 제대로 보이는 것 같다.

뭉게구름, 새털구름, 양떼구름, 조개구름…….

어떤 구름은 손에 닿을 듯 낮게, 어떤 구름은 고개를 뒤로 완전히 젖혀도 보기 힘들 정도로 높게 떠 있다.

이렇게 시시각각 변하는 구름이 궁금해서 틈만 나면 니제르 강변으로 튀어나간다. 사방이 탁 트인 강변에 설 때마다 그 그림 같은 풍경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치열한 구호현장에서 처음 느껴보는 호사다.

◉ 2013년 9월~10월 몹티, 해가 지면 감옥살이

전쟁 난 이 나라에 긴급구호 총책임자로 왔지만 말리는 세계일주 중 만난 장기 배낭여행자들에게 수없이 들었던 아름답고 신비로운 나라였다. 돛단배를 타고 도도한 니제르 강을 따라 일주일 정도 올라가면 어느덧 강이 끝나는 곳에 영화같이 광활한 사하라 사막이 펼쳐진다는 말에 침을 꼴깍 삼키며 언젠가는 꼭 가봐야지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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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이 공식적으로 끝나고 대통령 선거 후 안정을 되찾았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북쪽에선 반군들과 정부군 및 프랑스군들 간의 총격전이 간헐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요즈음 나는 ‘몹티’라는 북쪽 지방에서 일하는데 이웃 지역에 사제 폭탄이 떨어지는 바람에 첫새벽에 남쪽을 긴급 철수 한 적도 있다.

사무실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젠네 사원도, 돛단배가 유유히 떠다니는 코앞 니제르 강도 여기서 일한지 두 달이 넘은 지금까지 안전요원에게 잠깐만 돌아보면 안 되느냐는 말조차 못 꺼내고 있다.

심지어 숙소 근처에 사는 친한 현지직원 결혼식 피로연에도 해지기 전까지 반드시 숙소로 돌아와야 한다는 규칙 때문에 갈 수 없었다. 내게는 감옥살이도 이런 감옥살이가 없다.

덕분에 나는 매일 일기를 길게 쓰고 있다. 메모 형식으로 몇 줄 적어 놓는 현장 방문 기록도 요즘은 대학 노트로 두세 페이지가 훌쩍 넘어가도록 자세히 쓴다.

◉ 2013년 10월 두엔자, 밥보다 학교

9월 들어 피난민들이 북쪽 고향으로 돌아가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다. 문제는 그들의 고향이 난리 통에 쑥대밭이 되어 생계수단이 몽땅 사라졌다는 거다.

유목민들은 양 한 마리 염소 한 마리가 없고 농부 손에는 호미도 종자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이 귀향민들이 원래의 생계수단을 하루빨리 회복할 수 있도록 돕는 일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나는 지난 전쟁 때 북쪽 두엔자 지방에서 초등학교 교사였던 20대 아이 엄마, 파투마다를 만났다. 그녀의 말이다.

- 짐승처럼 살았다. 장마철에 가축우리로 쓰던 곳을 비닐로 지붕을 얹었다. - 생쥐, 진드기, 모기가 득실거리는 곳에서 아이를 낳았다.

- 단돈 1,000원을 벌려고 갓난아이를 업고 하루 종일 남의 집 빨래했다.

- 남편도 아픈 몸으로 남의 야채 수레 끌고, 다섯 살짜리 큰 아이가 깡통 들고 구걸 나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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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어떤 도움이 필요하냐고 내가 물었을 때 그녀는 말했다.

- 사는 건 어떻게든 살아요. 그런데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는 학교와 농사지을 종자와 새끼 염소 한 마리만 지원해 주세요. 그리고, 딱 1년만.

◉ 2013년 10월 몹티, 고통의 냄새, 눈물의 냄새

오늘 늦은 오후, 사무실로 남자 아이 둘이 날 찾아왔다. 우리가 돌보는 난민촌에 사는 열두 살 알라우와 열 살 압둘라마다. 피난 중에 엄마 아빠를 잃고 할머니와 사는 형제인데 볼 때마다 생글생글 웃으며 살갑게 굴어 우리가 예뻐하는 아이들이다. 여기까지 웬일이냐고 불어볼 것도 없다. 온 몸이 불덩이 같이 뜨겁다. 말라리아다.

그때가 토요일 늦은 오후라 시내 진료소는 이미 문을 닫았다. 월요일까지는 도저히 기다릴 수가 없었다. 시골 보건소장이 생각났다. 열 통의 전화 끝에 간신히 연결이 되어 아이들을 데리고 갔다.

가는 차 안에서 아이들을 살폈다. 허름한 티셔츠에서는 쉰내가 진동했다. 얼핏 본 두 다리에는 군데군데 진물이 흐르거나 상처가 나 있다. 내가 움직이면서 어디를 잘못 만졌는지 아이가 짧게 비명을 지른다.

“어머, 미안해, 압둘라마!”

그렇다. 꼬마 난민 압둘라마에게는 땀 냄새가 난다. 눈물 냄새, 고통의 냄새가 난다. 말리의 35만 난민, 아니 세상 모든 난민에게는 이런 냄새가 난다.

그러나 나는 코를 막지도 현장을 떠나지도 않을 거다. 구호현장 요원들은 이 냄새를 잘 맡아야 한다. 동시에 수많은 압둘라마에게 우리가 가져온 희망의 냄새를 전해줘야 한다. 그게 내가 여기 있는 유일한 이유이다.

◉ 2013년 11월 ~ 12월 세네갈과 모리타니, 달콤한 설탕 속 쓰디쓴 역사

명색이 ‘바람의 딸’인데 지난 5개월 동안 변변히 가 본 곳이 없다. 말리에선 서아프리카의 백미로 꼽히는 도곤 계곡과 젠네 사원 등을 코앞에 두고도 갈 수 없었고, 모리타니에서는 살인적인 모래바람 때문에 계획했던 사하라 사막 여행은 시작도 못했다.

아무튼 한국으로 돌아갈 날도 몇 주 안 남았으니 마지막 근무지인 세네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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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는 열심히 다니리라 굳게 마음 먹었다. 그리하여, 세네갈에서 맞는 첫 주말, 보고서 제출 마감일임에도 불구하고 서아프리카 노예무역의 거점 고래 섬에 다녀왔다. 이 골목 저 골목을 기웃거리다 노예상 건물이었던 곳에 들어가 보았다. 겉보기엔 여느 건물과 크게 다르지 않은 그곳이 서아프리카 각처에서 잡혀 온 흑인들을 가뒀던 곳이다.

처음에는 족장들이 부족 간의 전쟁 중 전쟁 포로들을 럼주나 총을 받고 백인에게 팔아 넘겼는데 이 후에는 그야말로 무자비하게 ‘인간 사냥’하듯 잡아 들였다고 한다.

한 식구가 끌려 와도 아빠는 남자 방, 엄마는 여자 방, 아이는 아이 방에 갇혀 같은 건물에 있어도 얼굴도 못 보고 각각 다른 곳으로 팔려 갔다고 한다.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몇 달을 갇혀 있었던 방은 하나같이 깜깜하고 축축하고, 한 방에서 100여 명이 지냈다고 믿을 수 없을 만큼 비좁았다. 건장한 남자 노예들이 가장 비싸게 팔리고 여자들은 남자 가격의 1/4, 초경 전 여자는 남자 가격의 반이었다고 한다.

- 동 아프리카는 제외하고 서아프리카에서만 1440년 포르투갈인이 열 명의 흑인을 잡아간 이래 1848년 공식적인 노예제도가 폐지되기 까지 400여 년 동안 포르투갈, 영국, 스페인, 프랑스 등 유럽의 열강이 대서양 너머로 끌고간 흑인은 1,500만 명

- 이건 잔인하게 잡히는 과정, 족쇄를 채워 수십일 간 끌고 오는 과정, 질병이 만연하는 곳에서 배를 기다리는 과정, 통조림처럼 포개져 두세 달간 배를 타고 가는 과정에 죽은 사람 600만 명을 제외한 숫자임

- 이들은 강도 높은 노동력이 필요한 설탕 농장에서 채찍을 맞아가며 하루 열일곱 시간씩 중노동에 시달렸고 아무리 건장한 흑인이라도 5년을 버티지 못했다.

그런 비인간적이고 반 인륜적인 역사의 중심에 달콤한 설탕이 있었다.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내가 지난달까지 일했던 모리타니는 1981년 세계에서 가장 늦게 노예제도를 폐지했지만 아직까지도 수백 년 전 이곳을 정복했던 갈색 피부의 무어인들이 흑인 노예를 거느리고 있는데 인구의 10~20%인 60만 명 정도가 노예 생활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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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고 팔고, 죽이거나 살릴 수 있는 소유물, 노예세습, 여성 노예의 성적 착취가 지금까지 행해지고 있다.

■ 현장, 그 괴로운 천국

동가숙 서가식(東家宿 西家食)이라더니, 아시아 지역에서 구호활동을 하던 넉 달 내내 사흘이 멀다 하고 짐을 쌌다. 한국에서 태국으로, 태국에서 필리핀으로……. 같은 나라 안에서도 한 현장에서 다른 현장으로 옮겨 다녔다. 필리핀에서도 수도인 마닐라에서 작년 하이옌 태풍 피해 현장으로, 지진 현장으로. 모슬림 과격단체들과 대치 중인 지역으로 다녀야 했다.

다른 구호 현장에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서아프리카에서 구호 활동 중일 때도 말리에서 세네갈로, 세네갈에서 모리타니로 왔다 갔다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지만 이렇게 잦은 이동은 여전히 힘겹기만 하다.

-비행기로 움직이는 나라간 이동보다 국내 이동이 더 힘든다. : 20시간 이상 차로 가기. 오토바이 뒤에 매달려 비포장 길 가기. 짐을 가득 실은 아슬아슬한 배에서 마음 졸이기 등

- 숙박 시설, 샤워시설이 없는 곳, 물이 귀한 곳, 말라리아 창궐지역

- 치안이 불안하여 주말 내내 자기 집에 갇혀 있어야 하는 경우 등

- 구호 활동 중 가장 까다로운 건 안전 : 이라크전 전후 복구를 위해 북부 모슬에서 일할 때는 섭씨 45도가 남는 지독한 더위 속에서 쇠로 만든 방탄 조끼를 입고 다니다 온 몸에 땀띠가 나서 엄청난 고생을 하기도 함 - 남수단에 있었을 때 겪은 일 : 난민촌 책임자로 고충 조사를 위해 난민 대표를 만난 자리였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고기를 달란 말이야, 고기를! 만날 콩만 주지 말고!”

그래서 내가 그럴 수 없는 사정을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는데 한 청년이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웃기고 있네. 너희들은 우리 난민들 얼굴을 팔아서 걷은 돈으로 월급 받아 잘 살고 있잖아? 그러니 시키는 대로 하란 말이야!”

그 순간 피가 가꾸로 솟았다. 같이 갔던 안전요원이 아니었더라면 그들과 무슨 일이 생겼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돌아오는 차안에서도 억울해서 눈물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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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저런 놈들을 위해 내 청춘을 바치고 온갖 어려움과 오해를 이겨내며 이 일을 하고 있단 말인가!”

어느 때는 꿈이 생시보다 더 나를 힘들게 한다. 괴롭기 짝이 없는 꿈의 발단은 언제나 어떤 냄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시체 썩는 냄새다. 우리나라가 전쟁 중도 아닌데 어디서 그런 냄새가 나나 하지만 한국 음식 중에 그 냄새를 연상시키는 젓갈류가 있다.

우연찮게 들른 토속음식점에서 그 냄새를 맡게 되면 그날 밤에는 영락 없이 건물 더미에 갇히는 악몽을 꾼다.

2004년 쓰나미 현장을 근무하면서 하루에도 수십 구의 시신을 보고 그 냄새를 맡았던 게 트라우마(일종의 정신장애로 비슷한 상황에서 불안감을 느끼는 질환)로 남았기 때문이란다.

이 트라우마는 쓰나미 현장에서 돌아온 직후 치료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란다. 이 말은 죽을 때까지 어떤 냄새를 맡을 때마다 마음 깊숙한 곳에 웅크리고 있는 치료되지 않은 상처가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을 치고, 그래서 그때마다 지금처럼 악몽에 시달리고 잠옷이 진땀에 흥건히 젖을 것이다.

■ 그럼, 3일을 더 굶길까요?

‘이건 또 누가 만든 거야?’

현장 근무할 때마다 입에 달고 사는 말이다. 현장에서 나를 괴롭히는 게 어찌 사람뿐이랴. 어느 때는 너무 어이없고 어느 때는 너무 화가 나고 또 어느 때는 화만 내고 있는 나를 한심하게 만드는 게 있으니 그건 다름 아닌 구호 현장과 국제구호 정책 사이의 괴리다.

괴로움을 주는 주체가 개인이라면 그 개인을 미워하며 오늘 재수 없어서 그런 인간을 만났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지만 그것이 일개 구호 활동가가 어찌 해 볼 수 없는 거대한 시스템과 정책의 문제라면 얘기가 전혀 달라진다.

현장에서 일하다 보면 당랑거철(螳螂拒轍), 거대한 전차 앞에서 그 전차를 멈추게 하려 애쓰는 작은 사마귀가 된 느낌이다. 구호 시스템과 갖가지 정책이 과연 현장을 잘 아는 사람이 만든 것일까라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그 반대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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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과 동떨어졌거나 현장에서 일하는데 발목을 잡는 시스템과 정책에 관한 대표적인 예는

0 지원 국가나, UN 기구들을 통한 긴급 자금 집행의 속도가 빨라야 3개월, 늦으면 6개월이 걸리기 일쑤다. 마치 큰불이 나서 소방차를 출동 시켜야 하는 데 시동조차 걸 수 없다면?

- 소방대원 전원이 불끄는 데에도 정신이 없을 판에도 피해 상황과 구조 상황에 대한 비슷한 보고서를 여러 건 만들어서 국가와 단체마다 보내야 한다.

- 그 복잡한 절차에 따른 산더미 같은 서류를 만드느라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면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된 거다.

0 이른바 ‘CNN’현상 즉 구호인력과 자원의 쏠림 현상 ; 예를 들면

- 2013. 10. 15일 필리핀 세부에 강도 7.2의 지진 발생

- 히로시마 원폭의 32배가 넘는. 33초간 지진으로 1200여 명의 사상자와 7만 3천 여 채의 건물 파괴

- 그런데 3주 후 강력 태풍 하이옌이 필리핀 중부를 강타, 7000명이 넘는 사상자와 400만 명 이상의 이재민이 발생.

- 재난 발생 후 CNN과 BBC등이 앞다투어 태풍 피해를 집중적으로 특집 보도한 덕분에 전 세계로부터 막대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 문제는 3주전의 지진 피해현장은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국제 미디어가 집중 보도하는 태풍 피해 현장에만 관심과 자원이 쏠렸다. 이른바 CNN현상이다.

그러면 관심과 자원과 인력을 독점한 하이옌 현장은 어땠을까?

- 각 나라 정부, UN, 세상에 있는 모든 NGO 들의 현수막과 차량들 그리고 구호요원과 신문 방송팀이 넘쳐나고 있지만 발생 1년이 지나도 피해 주민들은 여전히 임시 숙소에서 생활하고 있다.

- 그들 단체들과 각국의 대형 창고에는 몇 달 전 배분 되었어야 마땅할 긴급구호물자와 건축자재들이 산더미 같이 쌓여 있다.

- 각 단체들 저마다의 시스템절차 때문이란다. 안타깝고 화가 나는 일이다.

■ 누구를 위한 시스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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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의 손실은 시간뿐만이 아니다.

국제 구호금 시스템에 따라 지원금이 여러 단체와 여러 단계를 거쳐야 현장에 내려오는데 그 자금이 각 단계를 거칠 때마다 행정비를 제하느라 정작 현장에서는 지원금의 반도 못 받는 경우가 흔하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현장을 빌미로 한 ‘국제구호’ 거간꾼이나 중간상이 많다는 말이다. 왜 국제 사회는 모든 지원금의 80% 이상을 반드시 현장에 써야 한다는 규정을 만들지 못하는가?

현장 주민들의 식량이 되고 물이 되고 약이 되고 피난처가 되어야 마땅한 돈으로 출장 갈 때마다 비즈니스석을 타고 최고급 호텔에 묵고 현장 근무 중 받는 눈 돌아갈 만큼 많은 월급도 모자라 승용차, 주택, 자녀교육비 지원, 특별휴가 등 듣도 보도 못한 온갖 혜택을 받고 있는 UN을 비롯한 많은 국제기구 구호 직원들을 볼 때마다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그런 혜택을 누리는 개인이 아니라 그 시스템 말이다.

각 단체나 기구에 직접 낸 후원금은 물론 국가에 낸 세금이 그렇게 허접하게 허무하게 쓰이는 걸 볼 때마다 속이 쓰리다 못해 분노가 치민다. 우리가 낸 세금의 일부는 공적개발원조금(ODA)으로 나도 모르게 국제기구로 흘러들어가 인도적 지원금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말 나온 김에 현장에서 겪는 괴로움을 털어놓아볼까? 국제 구호단체를 돈주머니, 호구, 봉, 물주로 알고 어떻게든 돈을 뜯어내려는 부패한 정부 관료 및 현지인들도 큰 문제이자 골칫거리다.

몇 년 전 남아프리카 짐바브웨에서의 일이다. 그때 나는 식량 담당으로 기근 피해 주민 수십만 명에게 구호 식량을 배분하는 등 식량 지원 사업을 하고 있었다. 한 번은 창고에 있는 밀가루, 콩가루, 식용유를 운송 트럭에 옮겨 실으면서 약간 착오가 발생, 현장으로 출발하는 시각이 늦어졌다. 시간은 5시 5분 그날은 금요일이었고 식량 트럭 운송 허가를 받아야 하는 공무원들은 5시 칼퇴근이었다.

헐레벌떡 사무실로 달려가니 50대 후반의 End뚱한 남자 담당 공무원이 밖으로 나오는 참이었다. 나는 웃으며 그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그런데 그는 서류를 본 척도 안 하고 돌아서서가려고 하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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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렇게 가면 어떡해? 내일도 아니고 3일 뒤에나 오라고?”

통행 허가증 없이는 여기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으니 그동안 식량을 트럭에 그냥 실어 놓을 수도 없고…….

“늦게 온 건 정말 죄송합니다. 그러나 저 트럭에 실어 놓은 식량을 기근 주민들에게 한시바삐 가져다주어야 하지 않겠어요? 3일이나 더 굶길 수는 없잖아요?”

돌아오는 말이 가관이었다.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니죠. 나는 공무원이니까 5시에 퇴근할 권리가 있어요.”

한참을 다투었다. 그러던 그가 약간 흠칫 하더니 아주 많이 해본 솜씨인듯 미소를 지으며 그럼 허기증을 해 줄 테니 자기가 근무시간 이외로 하는 일이니까 돈을 달란다. 그것도 500달러. 그 돈은 자기 한 달 월급보다 더 많은 돈이다.

그날 나는 읍소를 하며 그 돈을 깎고 또 깎아 내 생돈으로 100달러를 주고 다섯 대의 트럭과 함께 떠날 수 있었다.

그런데 구호자금을 투명하고 공정하게 써야 한다는 원칙에 따라 어떤 경우에도 뇌물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이 있는데 현장에서 이런 부패한 공무원들과 일하려면 ‘피할 수 없는 비용’이 발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달러라도 뇌물을 준 게 알려지면 시말서를 써야하고, 윤리위원회에 회부되는 등 조치가 따른다. 일이 되게 하려고 자신의 쌩돈까지 바친 죄가 이리도 크단 말인가? 내 돈 돌리도!!!

■ 현장에 답이 있다

허나, 현장 근무 중 이런 괴로움만 있다면 그동안 어떻게 이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나도 나름 약은 사람인데 그럴 리가 없다. 당연히 현장 근무에는 이 모든 괴로움을 상쇄하고도 남을 기쁨이 있다.

소방관이 불구덩이에서 사람을 꺼내 오는 것처럼 결정적인 시기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는 기쁨, 엄청난 재난 앞에서 삶의 끈을 놓으려는 사람들과 그 끈을 부여잡고 같이 버티고 있다는 기쁨, 그럴 수 없는 상황에서도 재난민들의 인권과 존엄성을 지킬 수 있도록 돕는 다는 기쁨, 도움 주는 선한 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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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과 도움 받으며 고마워하는 얼굴을 모두 볼 수 있는 기쁨, 그동안 확 바뀐 우리나라 사람들의 해외 원조에 대한 인식을 체감하는 기쁨 그저 도와주는 나라에서 잘 도와주는 나라가 되려는 정부 차원의 노력을 가까이서 지켜보는 기쁨 …….

솔직히 괴로움은 길고 기쁨은 짧긴 해도 그 기쁨은 농도가 짙고 본질적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1년에 6개월은 현장에서 일하고 있다.

과분하게도 나는 2006년부터 2012년까지 7년간 국제개발 협력위원회의 민간 위원으로 일할 기회를 주었다. 이 위원회는 국무총리가 주재하고 외교부, 기획재정부를 비롯한 열세 개 부처 장관, KOICA 이사장과 수출입은행장 그리고 여섯 명의 민간 위원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우리나라의 인도적 지원과 국제개발협력에 관한 정책을 토론하고 심의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

7년간 여섯 번 바뀐 위원장 국무총리를 비롯, 위원들이 회의 때마다 “한비야 위원님의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의견을 들어보겠습니다.” 라거나 “현장을 다녀본 사람이 저렇게 강력하게 말씀하시니 그 안건을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라며 진지하게 들어주고 정책 수립에 적극 참고해 주었다.

또한 현장의 힘 덕에 2012~2014년 까지 3년간 UN 자문위원 역할까지 하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UN의 인도적 지원 기구인 UNOCHA의 CERF(중앙 긴급대응기금)의 자문위원이다.

전 세계의 인도적 지원 전문가 열여덟 명이 한 해에 미화 600만 달러 한화 6,600억 원의 긴급 구호 기금을 어느 나라의 어느 분야에 쓰는 것이 좋을 까에 대해 UN사무총장에게 직접 자문하는 일이다.

다른 자문위원들은 전직 국무총리, 적십자사 총재, 현직 고위 외교관 등으로 NGO 출신은 나 외에 한두 명뿐인데 아직도 현장 근무를 하고 있는 사람은 나 뿐이다.

현장의 힘은 학교 수업에서도 진가를 발휘한다. 앞서 말한대로 나는 2012년부터 이화여자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수업을 맡고 있다. 학부에서는 ‘국제구호와 개발협력’ 대학원에서는 ‘구호와 개발의 연계점’이라는 과목이다.

봄학기 수업 바로 직전에 다녀온 따끈따끈한 현장 경험을 사례 삼아 가르치는데 대학원생들과는 현장에서의 문제점을 사례로 연구해서 집중 토론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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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을 바탕으로 한 학문적 연구는 내가 앞으로 적어도 10년은 집중해야 할 분야라고 생각한다. 풍부한 현장 경험이 단지 ‘흥미로운 에피소드’, ‘감상적인 얘깃거리’, ‘눈물샘을 자극하는 스토리’가 아니라 통계와 분석, 비교를 거친 ‘객관적인 연구 결과물’이 되어야 비로소 관련 정책을 만드는데 바람직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몇 년 전 한 방송에서 현장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이런 말을 했다. “지금은 설계도대로 집을 지어야 하는 목수지만 언젠가는 설계도까지 그리는 목수가 되고 싶어요.”

■ 누구를 위한 구호인가

‘누구를 위한 구호인가?’

내가 현장에 갈 때마다 현장에서 쓸 수첩 맨 앞에 써 놓는 글귀다. 긴급구호 팀장으로 아프가니스탄에 간 첫날, 어리바리 햇병아리에게 백전노장 네덜란드인 보스가 한 질문이다. 항상 재난민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그의 당부이자 명령이기도 하다.

인도적 지원의 현장, 연구, 정책에 관여하는 모든 사람들도 끊임없이 자문해야 할 말이다.

‘누구를 위한 구호인가?’라는 질문을 곰곰이 생각하면 할수록 답은 현장에 있다는 게 확실해진다. 이름하여 우,문,현,답(리의 제는 장에 이 있다.)이다.

얼마 전 필리핀 현장에서도 뼈저리게 깨달았다. 앞에서 말했듯이 3주 간격으로 보홀 지역 지진과 하이옌 태풍이라는 참사를 겪은 필리핀에서도 ‘CNN효과’가 심각했다. 게다가 현재 진행형 재난에만 관심이 쏠리면서 새로운 재난지역에서 몰려든 구호 단체들은 서로의 의견과 지원책을 조율하느라 정작 도와야 하는 재난에는 신경도 쓰지 못하고 있었다.

■ 중국과 아프리카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나

어느 정도 예상을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지금 아프리카는 단 한순간도 중국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중국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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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든 공항에서 내리고 중국인이 만든 도로를 달리고 중국인이 건설한 항만을 통해 중국 배가 가져온 중국제 물건을 사서 쓰고 중국인이 만든 댐에서 생산한 전기로 선풍기를 돌리고 중국집에서 밥을 먹고 좋은 환율로 돈을 바꾼다.

어느 아프리카 대도시에서든 조금만 눈여겨보면 중국 사람과 중국가게 간판이 보이고 중국말이 들린다. 그도 그럴 것이 10년 전만 해도 아프리카에 체류하는 중국인이 수만 명 정도였는데 지금은 수백만 명이 넘는다.

나이지리아만 봐도 2000년에는 대사관 직원을 포함, 체류 중국인이 100명 남짓이었는데 지금은 2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20여 년 전 아프리카 배낭여행을 할 때 현지인들은 나를 ‘무중구(하얀사람)’, ‘파르시(외국인)’, ‘헬로’라고 불렀지만 지금은 백이면 백 ‘치나(중국 사람)’라고 한다. 큰 도시에서는 유창한 중국어로 말을 걸어오는 아프리카 젊은이들도 적지 않고 심지어 몇 년 전 서아프리카 말리에서 일할 때 나는 그곳 공용어인 불어보다 중국어를 훨씬 더 많이 썼을 정도다. 일과 후나 공휴일 마다 어울렸던 사람들이 말리에 파견 나온 중국인 의사와 간호사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아프리카와 중국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리고 나는 이 일에 왜 이토록 관심이 있는가?

중국은 같은 아시아이자 한자 문화권이라는 공통점과 더불어 엄청난 규모나 성장 속도에서도 주목할 수밖에 없는 나라다. 8개월간 배낭여행과 두 번에 걸쳐 2년 정도 중국어 연수를 다녀온 덕에 중국내에서의 숨 가쁜 변화, 국제적으로 커지는 영향력과 높아지는 위상을 목격할 수 있었는데, 그건 자주 드나들며 마음 쓰고 있는 아프리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남수단 근무 중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자격으로 ‘아프리카에서의 중국의 영향력’이라는 논문을 쓸 기회를 얻었는데 그 내용 중 일부

0 1978년 시장 경제를 도입한 이후 중국의 입장

- 전 세계 쌀과 담배 생산량의 1/3, 석탄의 40%, 시멘트 소비량의 40%, 아연과 구리의 40%, 철강석의 30%, 알루미늄의 25%를 사용하고 있음

- 이런 에너지와 원자재의 구입처 : 중남미, 중동, 아프리카

- 중국은 ‘세계로 나가자’라는 구호 아래 서방세계와 경쟁이 상대적으로 적은 아프리카에 직접투자와 원조를 늘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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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과 함께 G2라 불리는 중국 입장에서 아프리카의 지정학적 입지 필요

0 아프리카의 입장에서

- 1950년대 이후 대부분 국가가 독립했지만 홀로서기가 역부족

- 엄청난 부채, 끊임없는 내전과 굶주림, 에이즈 확산 등으로 도움이 절실

- 서방국가들의 횡포 : 이행 불가능의 불평등 조건

- 벼랑 끝에서 도움의 손길을 잡는 나라가 중국 : 따지지도 묻지도 않고 통큰 무상지원, 갚을 수 없는 빚의 탕감 등

- 서구의 소프트웨어 중심의 지원에서 벗어나 도로, 항만, 댐 같은 하드웨어와 인력개발에 중점

이렇게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중국과 아프리카의 관계는 짧은 시간 내에 눈부시게 진전, 2006년 후진타오 주석이 대규모 방문단을 이끌고 순방 한 이후 풀어놓은 선물 보따리

- 아프리카 발전 기금 50억 달러(한화 5조 5000억)

- 30억 달러 우대차관, 20억 달러 우대 신용대출. 극빈 국에 채무탕감, 향후 3년간 15,000명의 인재 양성을 위한 연수제공 등

- 나이지리아와의 9조원짜리 프로젝트를 비롯, 42개국에서 800조원 규모의 대 아프리카 원조사업 진행 중 : OECD국가의 3배 이상

*아프리카 국가들은 IMF나 세계은행에만 의존할 필요가 없어졌음

■ 중국도 할 말이 있다

세상 모든 일은 주고받는 것, 그럼 중국은 무엇을 얻었을까?

0 석유만 보면 앙골라가 생산하는 원유의 40%, 수단의 60%, 나이지리아의 16.7% 등 중국 전체 원유 수입량의 25% 이상을 아프리카에서 충당

0 중국은 원조와 함께 광산과 댐, 수력발전소, 철도, 제련소 등의 대형공사를 묶는 이른바 패키지 원조로 도로, 항만 등 국가 기간 시설의 대형 공사를 싹쓸이

- 싸고 우수한 중국의 노동력

- 짐바부웨 현지 정부 관리에게 들은 말

“영국은 아직도 우리를 가르치려고만 들죠. 도와주겠다면서 고급호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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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라 회의만 하지만 중국을 보세요. 말이 아니라. 온몸으로 보여 주며 눈에 보이는 결과를 내고 있잖아요?”

■ 기대 반 우려 반

그렇다면 중국의 아프리카 진출이 모두에게 좋기만 한 걸까?

그럴 리가 없다.

내가 몸담고 있는 원조부분만 봐도 제일 큰 문제는 중국이 짐바브웨 무가베 정부나 수단의 오마르 알 바시르 등을 직, 간접으로 도와 독재 정권이 유지되도록 도움을 준다는 점이다. 겉으로는 중국이 내정 불간섭과 상호 이익 원칙에 따른 원조라지만 속으로는 자국의 이익만 따지고 있다는 거다. 예를 들면

- 수단에서의 100억 달러(한화 11조원) 패키지 원조의 실상 : 석유 기반 시설, 석유 시추, 165Km의 송유관, 국제공항과 항만 건설은 자원을 중국으로 쉽게 가져가기 위한 전략

- 무기 거래 : 독재자들에게 소총 같은 소형무기를 비롯 전투기 까지, 2005년에만 1억 달러어치

이 때문에 아프리카 내에서도 독재정권이나 반군들을 군사적으로 지원하고 무기를 팔며 자원을 거저먹는 다른 강대국과 중국이 무엇이 다르냐고 반발이 나오고 있다.

원조방법도 그렇다 소프트웨어를 돕는 것이 아니라 대형 토목공사 중심으로 자국의 인력과 자재, 운반수단 등을 제공함으로써 원조한 금액의 75%를 본국을 도로 가져간다는 것

중국인들의 수가 10여년 만에 수백만 명 단위로 기하급수적으로 늘면서 나라마다 기존 상권을 쥐고 있던 인도와 레바논 상인들과의 상권 다툼이 늘고있고 또한 중국인들의 인종차별적인 태도와 임금격차, 도박, 마약, 매춘 등으로 반 중국 정서가 확산되고 테러 단체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

유럽 열강이 떠난 자리에 중국이란 새 주인이 들어와 자리를 잡으면서 잠비아의 야당 지도자는 “아프리카는 중국의 일개 성이 되어가고 있다”고 일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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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멋진 말로 꾸미든 모든 국가는 자국의 이익이 최우선이기 때문에 서구보다는 쉬운 조건으로 거액을 투자하는 중국을 편하게 생각하는 것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나 자신의 자원을 한 군데에 50% 이상 수출하고 있다는 건 분명 문제가 있다.

어찌 되었든 지금 아프리카에는 중국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현지인들은 중국산 비누나 치약부터 텔레비전과 냉장고까지 품질은 떨어지지만 반값에 살 수 있다는 것에 환호하고 있다.

아프리카 젊은이들은 공자학원에 다니며 중국말을 배우고 해마다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중국으로 유학을 가고 각 나라 정상들은 중국 정부 및 지도자들과 가까이 지내는 것이 능력으로 평가 되기도 한다.

■ 필리핀의 마욘화산 이야기

2014년 10월. 여기는 필리핀

산 정상에서 하얀 연기가 무럭무럭 피어나는 활화산, 마욘화산을 바라보며 이 글을 쓴다. 필리핀의 활화산 중 가장 활동이 활발하다는 해발 2,460m 마욘화산은 완벽한 원뿔 모양의 화산이 주변 야자수 숲과 기막힌 조화를 이루며 전 세계 관광객을 유혹하는데 이 나라 열여덟 개 활화산 중 가장 폭발이 잦은 산이기도 하다.

가까이서 지켜보니 활화산이란 이런거구나! 싶다. 글자 그대로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 내 숙소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분화구에서 하얀 가스와 돌덩이가 뿜어져 나오고 붉은 마그마는 산비탈을 따라 불꽃처럼 흘러내리고 하루에도 수십 차례 온몸을 뒤틀며 땅을 진동시킨다. 명백한 폭발 조짐이다.

화산에 대해 나는 문외한이다. 여태껏 화산이 폭발하면 1,000도 이상의 뜨거운 마그마가 가장 위험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돌이 녹아 있는 상태인 마그마는 점도가 높기 때문에 6Km 이상 흐르지 못해 그 밖으로만 대피하면 안전하단다.

그보다 치명적인 건 수 킬로미터까지 치솟는 화산가스, 화산재 그리고 쏟아지는 돌덩이란다. 특히 그 시기에 태풍이 겹치면 위에서 말한 모든 것들이 물과 뒤섞여 시속 70Km 이상으로 흘러내리면서 화산 일대를 순식간에 초토화 시키는데 주민들은 이걸 제일 두려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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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월 16일 지역 정부가 재난 경고 수준 3단계를 발표했는데 이는 24시간 또는 수 주일 내에 폭발 가능성이 있는 상황으로, 화산 주변 8Km 이내 거주민 들은 모두 대피해야 하기 때문에 그곳 주민 5만 여명이 인근 학교 등으로 피해 있는 상태다

워낙 자연 재난이 잦아 재난 대비와 대응에 능숙한 지역 정부는 긴급 구호 자금을 풀어 비상식량 지원을, 소방서는 소방차를 동원해 물 배급을, 군인들은 취사용 땔감 공급을, 간호사 및 공중보건요원들은 위생보건에 만전을 기하고 있지만 피난 민 숫자가 많고 언제 돌아갈지 모르는 상황이라 외부 도움이 절실하다.

따라서 우리 단체도 30여 명의 미니 긴급 구호팀을 꾸려서 지역정부와 2주일 전부터 1만 5,000여 명의 이재민을 대상으로 구호활동을 펴고 있다. 다행히 다른 현장 근무에 비해 이곳 일이 훨씬 쉽게 느껴지는 것은 이미 발생한 재난의 뒤치다꺼리가 아니라 앞으로 발생할 재난을 대비하는 일이라 수월하다.

■ 화산이 노래를 부르는 거예요

이 정도 열악한 환경에서 3주일 이상 지냈다면 피난민들은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서 조그만 일에도 짜증을 내고 언성을 높이며 크고 작은 싸움이 끊이지 않기 마련인데 여기서는 그와 반대로 서로에게 최대한 친절하고 어떻게든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이 인상적이다. 예를 들면 앞다퉈 자발적으로 청소를 해 5,000여 명이 넘는 대피소 교실 안팎이 얼마나 깔끔한지 모른다.

세계 어디든, 대형 난민촌이나 대피소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피난민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물가가 오르고 치안이 불안하고 동네가 지저분해지기 때문이다. 이곳도 피난민 때문에 인근 동네의 물 사정이 열악해 졌다. 그럼에도 많은 동네 사람들이 피난민들에게 자신의 화장실이나 욕실을 쓰게 하고 있다. 갓난아이나 노약자, 장애인이 있는 가족들을 자기 집에 묵게 하자는 캠페인이 확산되고 있어 마음이 훈훈하다.

이런 아름다운 캠페인의 중심에는 가톨릭 사제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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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구호 현장이라고 늘 숨 가쁘게만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마욘화산에서도 그랬다. 어느 날 마욘화산이 고화질 사진처럼 선명하게 보이는 대피소에서 교사 출신 70대 ‘반장’ 할머니랑 수다가 벌어졌다.

수다 중 할머니가 뜬금없이 산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마욘화산, 참으로 아름답지요?”

“아름다우면 뭐해요. 성질이 사나워서 저렇게 주기적으로 화를 내고 있는데.” 짐짓 투덜대는 투로 대답했더니 할머니가 정색을 하며 말을 잇는다.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노래를 부르는 거예요. 이루지 못해 가슴 아픈 사랑의 노래를….”

“아니, 무슨 사랑의 노래가 저렇게 요란해요?”

달변의 할머니 버전 ‘요란한 사랑’의 얘기는 흥미로웠다.

옛날 옛적, 이 지역 대족장에게 마가욘이라는 딸이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에 반한 인근의 왕자와 전사들은 공주와 결혼하길 원했으나 정작 마가욘은 철천지 원수 부족의 왕자와 사랑에 빠진다. 양쪽 집안의 엄청난 반대를 견디다 못한 두 사람은 먼 곳으로 도망갈 계획을 세웠지만 이 계획은 들통이 나버렸고 이로 인해 두 부족 간에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벌어졌다.

두 사람은 죽음으로 사랑을 이루기로 결심하고 함께 ane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나란히 생을 마감한다. 그러나 두 부족은 두 사람의 사신을 따로따로 묻어버렸는데 몇 달 후 마가욘을 묻은 자리가 점점 커지더니 완벽한 원뿔 모양의 아름다운 화산으로 변했다. 한편 왕자를 묻은 자리에서는 흰 구름이 솟아나 화산 꼭대기에 머물기 시작했다고 한다. 마치 구름이 된 왕자가 화산으로 변한 연인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그러나 두 남녀는 이루지 못한 사랑을 주체할 수 없다는 듯 울부짓는데 그것이 바로 화산 폭발이란다. 그리고 그 붉은 마그마는 왕자와 공주의 눈물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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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씩씩한 발걸음

■ 쑥쑥 커가는 세계 시민학교

UN 중앙긴급대응기금 자문위원, 이화여자대학교 국제대학원 초빙교수, 국제구호 현장 전문가, 작가, 특강 강사……. 지난 몇 년간 ‘한비야’라는 이름 앞에 많은 직함이 붙었다.

그 중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직함은 ‘월드비전 세계시민학교 교장 한비야’이다. 좀 뜬금없지 않은가? 자유롭고 즐겁게 기왕이면 남 도와주면서 사는 게 인생 최대의 목표인 내가 고리타분한 대명사인 ‘교장 선생님’이 되었다니 말이다. 여기에는 말 못할 사연이 있다.

발단은 2005년 파키스탄 대지진 긴급구호를 다녀온 직후였다. 현장에서 돌아오자마자 TV 모금 방송에 출연해서 매달리듯 도움을 호소했는데 그 밤중에 몇 억 원이 걷히면서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하지만 전화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바람에 일단 전화번호만 받아놓았던 사람들에게 다음 날 다시 연락했는데 하룻밤 사이에 마음 변함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정기 후원이 일시 후원으로, 1만원이 몇 천원으로, 아예 후원 철회를 하기도 하는 등…….

당장 죽어가는 생명을 구하기 위한 돈과 인력도 부족한 상황에서 한가하게 교육 이야기를 하기는 어려웠지만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든가. 놀랍게도 어느 대기업으로부터 광고 제안이 들어왔다. 광고료는 1억 원. 상업 광고는 절대 안 한다는 내 원칙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깨고 그 돈을 받아 드디어 ‘지도 밖 행군단’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시민학교를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한국 월드비전은 2007년에 세계시민교육을 시작했지만 국제 세계시민교육의 역사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UN교육문화기구인 유네스코가 전쟁이 끝난 직후 세계공동체를 위한 교육을 시작한 것이다. 그 후 세계가 정치, 경제, 문화, 사회적으로 점점 긴밀하게 연결되면서 타 문화에 대한 이해와 국제협력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이런 추세에 발맞추어 한국에서도 월드비전과 같은 국제구호개발 단체 30여 곳을 포함해 인권, 평화, 시민사회, 환경 등 많은 단체들이 국제이해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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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시민교육, 글로벌 시민교육, 글로벌 리더교육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세계시민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어떤 단체가 어떤 이름으로 세계시민교육을 실시하든 핵심은 딱 두 가지다. 첫째는 ‘자신의 소중함 깨닫기’이고 둘째는 ‘우리의 범위 넓히기’이다.

우리학교에서는 지구를 서로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유리로 된 집, 지구집이라고 부른다. 70억 인구는 이 집에 사는 한 가족이므로 서로를 돕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말한다. 또한 우리 집의 문제인 빈곤과 불평등, 인권, 환경, 평화문제 등을 함께 고민하고 해결책을 찾자고 가르친다.

그리고 열심히 일하는 이들이 왜 이런 지독한 가난에 시달려야 하고 경제구조는 왜 이렇게 불평등하고 불공정한가를 생각하면서, 이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를 고민하고 작은 것이라도 실천하는 세계시민으로 만드는 게 우리학교의 목표다.

■ 10년만 두고 보라

여기서 한 가지 꼭 집고 넘어갈 게 있다. 세계시민학교를 ‘학교’라 부르긴 하지만 우리 학교는 일반 학교와는 달리 운동장도 교실도 없다. 교복도, 시험도, 조회도, 수업료도 없고, 나이 제한은 물론 학생 수와 재학 기간에도 제한이 없는 활짝 열린 학교다. 교장인 나는 사무실도 없고 월급도 0원이고 교사들 역시 교무실도 책상도 없다.

그뿐 아니다. 우리 학교 학생들은 학교에 올 필요가 없다. 교사들이 직접 학생들을 찾아가서 수업을 하니까.

없는 게 이렇게 많은 학교가 2007년 ‘지도밖 행군단’이라는 청소년 프로그램을 통해 5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그 후 7년이 지난 2014년 한 해에만 650명 강사들의 ‘찾아가는 수업’으로 무려 50만 명의 학생들이 우리 학교를 거쳤고 지금까지 누적 학생 수는 100만 명이 넘는다.

학교 업무도 수업 교재 개발은 물론 교육강사 양성, 일선 교원들이 직무연수, 청년활동가 지도밖 행군단 운영, 세계시민교육관 운영으로 다양해 졌는

데 특히 2012년에 교육부와 교육기부 MOU를 맺은 후에는 초, 중, 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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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 수업 과정 안에서의 세계시민교육 요청까지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빛이 있으면 그늘도 있는 법 세계시민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들리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 엘리트 교육으로 변질 될 우려

- 스펙으로 사용될 우려

- 가난한 나라를 돕고 있다는 도덕적 경제적 우월감 등

나는 2012년 1월 정식으로 세계시민학교 교장으로 임명장을 받던 날, 같이 일할 친구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10년만 두고 보자고요. 그때 우리가 어떤 세상을 보게 될 지 벌써부터 궁금해요.”

내가 쓴 책 <그건, 사랑이었네>의 ‘이제 세상에 나가겠습니다’ 꼭지에 썼던 세계시민교육에 대한 나의 바람 중에 실천 된 내용

- 그때는 고작 100명 정도였지만 지금은 연간 50만 명이 월드비전 세계시민학교를 통한 교육을 받고 있고 다른 단체들도 열심히 하고 있다.

- 내가 약속했던 ‘책의 인세 중 일부를 세계시민학교를 위해 쓰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인세 중 1억 원을 세계시민학교에 기부해서 교재를 개발하고 보급하는데 매우 요긴하게 썼다.

-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세계시민교육을 위해 내가 가진 어떤 힘도 아끼지 않을 생각이다’라는 소신은 지금도 조금도 변치 않았다.

머릿속에는 세계를, 가슴에는 견딜 수 없는 뜨거움을 품고 두 손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잘 아는 우리 아이들과 젊은이들이 한국을 베이스캠프로 그러나 세계를 무대로 맹활약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오른다.

■ 구호활동가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우리 딸 좀 말려 주세요.”

얼마 전 어떤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이 담긴 메일을 받았다. 사연인즉 이렇다. 소위 명문대학을 다니면서 대기업 입사 시험을 착실히 준비하던 졸업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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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이 돌연 유니세프에 들어가 전 세계 어려운 아이들을 돕는 일을 하겠다고 선언하고는 매일 그 단체 사이트만 들여다보고 있단다. 이러다 자기 아이가 진짜 유니세프에 들어가 위험한 곳으로만 나다닐까 봐 걱정이라며 내 책을 보고 결심을 했으니 나더러 아이를 좀 말려 달라는 내용이었다.

얼마나 급하면 일면식도 없는 내게 이런 편지를 보냈을까마는, 내 경험상 그 아버지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일단 유니세프라는 UN기구는 다른 국제기구와 마찬가지로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단체가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다. 또한 그런 어려운 관문을 뚫고 들어갔더라도 딸이 위험한 현장에 꼭 가야 하는 건 아니다. 한 단체의 모든 직원이 현장에서 일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재난 최전선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지만 유니세프 경우 UN 본부, 각 대륙 혹은 각 나라 사무소에서 사무를 보거나 연구하는 사람이 훨씬 많다.

결정적으로 만약 딸이 원하는 단체에 들어가 현장 근무를 한다고 해도 재난 현장은 그분이 생각하는 것만큼 위험하지 않고 위험에 대한 대비 또한 아주 엄격하고 철저하다.

구호활동에 대한 오해

0 세계를 다니며 구호 활동을 하고 싶지만 가난하게 살긴 싫어요.

- 국제구호 활동은 무료 자원봉사가 아니라 합당한 보수를 받는 직업이고 급료도 생각보다 높다.

- 무보수로 단기 자원봉사를 오는 사람 특히 의료진, 중장비 기사, 심리 치료사 등은 스스로의 성과에 만족도가 높다.

- 식수, 의료, 영양, 난민촌 운영 프로그램 운영자, 행정, 재무, 인사, IT 프로그램 등의 담당자들은 무보수의 자원봉사자들이 아니라 그 분야의 전문가들로 지금은 최소한 석사 학위를 가진 전문가 집단이다.

- 재난 현장에서 일하면 월급뿐 아니라 위험지 근무 수당, 식비 보조, 교통및 통신비 보조, 의료보험 및 생명보험 보조, 자녀 학비 전액 지원등 복지 시스탬이 엄청나다.

- 6주일에 한 번 일주일 휴가를 주는데 왕복 항공권, 및 약간의 용돈 지원

0 물론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하는 어려움은 있다. 일반적으로 재난 현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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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함께 살 수 없는 근무지이기 때문이다. 또한 재난 구호 활동이 장기간 계속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짧게는 6개월, 적어도 1~2년에 한 번씩은 직장을 찾아 다시 근무지를 옮겨야 한다.

구호활동가를 꿈꾸는 친구들은 내게 묻는다.

“이 일을 하려면 뭘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요?”

이 분야도 다른 전문 분야와 마찬가지로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이 필요하다. 그러나 구호라고 해서 식수, 식량, 보건의료 등을 전공한 사람만 필요한 게 아니다. 장비, 재무, 식당 등 각종 직업군이 필요하니 지금 하고 있는 일이나 전공과 어떻게 연결 지을 것인지를 생각하는 게 중요하다.

여기서 한 가지, 국제구호가 사회복지와 크게 연계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실제로 구호 현장에 가면 사회복지를 전공한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이 외에도 국제 구호는 전 세계를 무대로 하는 일이니 당연히 영어는 필수고 다양한 국적의 사람과 일해야 하는 경우가 많으니 타문화를 존중하고 잘 적응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구호활동가가 되려는 학생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재난 현장에서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는 구호팀장, 남을 도우면서 늘 칭찬을 받는 구호팀장, TV에도 나오는 유명한 구호팀장, 베스트셀러 작가도 될 수 있는 구호팀장이 아니라 가난한 구호팀장, 오해를 받고 욕을 먹어도 죽을 힘을 다해 소신을 다하는 구호팀장, 뜨거운 자갈밭에 피멍이 들도록 굴러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구호팀장…. 이런 구호팀장이라도 그 일을 하고 싶다면 그건 너의 길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그 길을 가라고, 그 마음 변치 말고 가라고, 진심으로 건투를 빈다고.

■ 특강의 괴로움과 즐거움

최근 들어 대중 강연이 각광을 받고 있다. 해외에서는 TED라는 짧은 강의가 인기 폭발이고 국내에서도 각급 학교, 관공서, 기업은 물론 종교단체, 각종 회의 등 사람이 모이는 행사마다 특강이 빠지지 않는다.

아무튼 나 역시 첫 책이 나오자 인터뷰 요청과 함께 강연 요청이 들어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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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했다. 처음에는 도서관이나 대형 서점에서 주최하는 강연이었는데 독자들을 직접 만나는 일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여행 다닐 때는 여행 이야기, 긴급구호 팀장일 때는 세계 구호 현장이야기, 세계시민학교 교장이 되고 나서는 세계시민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무슨 얘기를 하든 ‘무엇이 내 가슴을 뛰게 하는가?’라는 물음이 내 강의의 주제이자 핵심이다.

강연주제 때문인지 강연 열풍 때문인지 해가 거듭될수록 강연 요청이 점점 늘고 있다. 그러나 강연이 본업이 아니라서 시간을 쪼개고 쪼개도 할 수 있는 강연보다 못하는 강연이 훨씬 많아 늘 죄송하다.

■ 산에서 만나는 놈, 사람, 분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걸 세 가지만 꼽으라면 어떤 게 있을까?

각자의 인생관이나 가치관, 현재 처한 상황에 따라 천차만별의 대답이 나올 거다. 돈, 명예, 인기, 건강도 있겠고 부모형제, 아이들, 가족 간의 화목도 있겠고 신앙인이라면 그가 믿는 신과 경전, 나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재난과 전쟁 없는 세계 평화를 꼽을 것이다.

최근 발표된 권위 있는 논문에 따르면 생명공학적으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다름 아닌 햇빛, 물, 공기라고 한다.

이 논문이 덧붙이기를 사람이 정신적, 육체적, 영적으로 건강하게 살기 위한 필수요건은 하루에 30분 이상 햇볕을 쬐고 1.5리터 이상 물을 마시고 좋은 공기를 깊숙이 들이 마시는 것이라고 한다.

아니 이런 기쁜 소식이 있나.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세 가지가 누구나 어디서라도 돈 한 푼 안 들이고 얻을 수 있는 것이라니 말이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난 잘 하고 있는 거네’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왜냐하면 내가 자다가도 등산 하면 벌떡 일어나는데 평소대로만 해도 이 세 가지를 정기적으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누가 시간이 있어야 등산을 할 수 있다고 그러는가? 모든 등산은 낼 수 있는 시간에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우리나라의 자연은 내게 축복이나 다름없다. 한국에서 태어난 게 얼마나 다행인가. 2011년 산림청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산은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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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 4,400개로 국토의 70%를 차지하고 있다. 그야말로 눈만 돌리면 산이고 신만 신으면 산에 오를 수 있는 나라다. 그래서인지 등산 인구도 2,000만 명에 육박한다. 한국인 다섯 명 중 두 명은 인간에게 제일 중요한 세가지를 정기적으로 누리는 혜택을 받고 있는 거다.

평생 산에 다니면서 온갖 좋은 것을 얻어서일까? 요즘에는 산에 갈 때마다 산의 아름다움에 탄복하는 만큼, 이 아름다운 산을 어떻게 유지해야 하나, 하는 염려가 든다. 산에 다니는 사람이라고 다 같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산에서 사람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의 하나는 쓰레기를 어떻게 처리하느냐다. 이를 세 부류로 나누면

1)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놈’

2) 자기는 버리지 않지만 남의 쓰레기를 줍지 않는 ‘사람’

3) 자기가 버리지 않는 것은 물론 남의 쓰레기 까지 줍는 ‘분’이다.

일단 산이 좋아 친구가 좋아 산에 왔다면 적어도 첫 번째 부류에 속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그런데도 멀쩡하게 생긴 ‘놈’들을 보면 욕이 절로 나온다. 그런 사람들도 집에 가면 엄마, 아빠랍시고 아이들에게는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고 할 것이 아닌가.

■ 산에 좋은 일 한가지 씩

그런데 최근 만난 외국 산악인을 통해 한 차원 높은 쓰레기 처리법을 알게 되었다. 이‘분’은 일반 쓰레기는 말할 것도 없고 자기의 대소변 까지 용기에 담아 가지고 내려온다는 거다. 이건 미국, 캐나다 등 북미와 유럽에서 이미 보편화되어 있어 용기도 일반 등산용품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놀랐다. 흔히 우리는 대소변이 거름이 된다고 생각하지만 산의 환경과 생태계를 해치는 쓰레기 중의 쓰레기란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햇빛, 물, 공기를 한꺼번에 얻을 수 있는 산. 그 산에 다니면서 정신적, 육체적, 영적 건강함을 누리는 우리들이 산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할 방법은 많고도 많다. 일단 한 명 한 명이 산에 좋은 일 한 가지씩 생각해내서 다음 산행부터 한 번 시도해 보는 거다. 너무 거창한 것 말고 당장 할 수 있는 작은 것부터 시작해 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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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백락, 오재식 회장님

몇 해 전, 중국의 그랜드캐년이라 불리는 태행산에 다녀왔다. 베이징에서 열 시간 정도 떨어진 이 산은 웅장하고도 수려한 태행산맥의 일부로 누구나 한 번 가볼 만한 곳이다.

깎아지른 듯 가파른 바위 절벽과 천 길 깊은 계곡 하나하나 전설이 있을 법한 기암괴석, 영화 <아바타>나 <쿵푸팬더>의 배경이 여기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게다가 사방으로 흐드러지게 핀 5월의 야생화와 방금 돋아난 연두색 나무 이파리들이 생기와 활기를 더해 주었다.

무엇보다 반가운 건 산 친구들이다. 중국어 어학연수를 하러 베이징에 머물렀던 주말마다 어김없이 같이 산에 가던 산악회 친구들을 거의 1년 만에 다시 만난 거다.

태행산에는 천리마가 소금 마차를 끈다는 말로 훌륭한 인재가 그 재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걸맞지 않은 일을 한다는 뜻의 기복염거(驥服鹽車)라는 고사성어의 유래가 숨어 있는 곳이다.

옛날에 말(馬) 감정사로 이름이 높아 백락(伯樂)이라 불리는 손양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말을 보는 안목이 워낙 높았는데 그가 관심을 가지면 말 갑이 열 배로 뛰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어느 날 소금마차를 힘겹게 끌고 태행산 고개를 넘어가던 비쩍 마르고 늙은 말 한 마리를 보게 된 백락이 마차에서 내려 이 늙은 말을 붙잡고 울며 자기 옷을 벗어 말에게 덮어 주었다. 한 눈에 이 비루먹은 말이 천리마라는 것을 알아보았기 때문이다. 그 말도 고개를 들어 허공을 향해 절규하듯 울부짖었다. 드디어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난 인재라도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으면 세상에 드러날 수 없는 법. 그래서 당나라 한유도 천리마는 항상 있지만 백락은 항상 있은 것이 아니라고 말했던 거다.

“당신의 백락은 누구이십니까?”

중국 사람들끼리 자주 묻는 말이다. 특히 정치인, 연예인 등 유명인들은 자기의 백락이 누구라고 말하는 걸 좋아한다. 한 사람의 일생에서 백락을 만난다는 건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은 엄청난 사건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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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첫 번째 백락은 미국인 양부모 위튼 씨 부부다. 재수 막바지 학력고사를 앞두고 깜깜한 클래식 다방 DJ 박스에서 정신없이 문제집을 풀고 있는 나에게 무엇을 보셨는지 미국에서 공부할 기회를 주셨다.

두 번째 백락은 월드비전 오재식 회장님이시다.

이제 막 세계여행을 끝낸 오지 여행가였을 뿐, 업무 능력이 하나도 검증되지 않은 내게 그분은 긴급구호 팀장이라는 중책을 제안하셨다.

덕분에 긴급구호의 ‘ㄱ’자도 모르는 햇병아리가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어느 날 뜬금없이 전화해서 “한국월드비전 회장 오재식입니다”라고 할 때까지 나는 이분이 어떤 분인지 전혀 몰랐다. 월드비전이 뭐하는 곳인지도 몰랐다. ‘월드’는 세상, ‘비전’은 보인다니까 안경점 주인인가 했을 정도다

꼭 만나서 할 긴요한 얘기가 있다기에 귀찮은 마음에 내가 살던 홍대 근처로 오실 수 있으면 짬을 내보겠다고 했더니 단숨에 달려오셨던 분, 웃음 띤 얼굴로 반갑게 악수를 청하고 내 세계여행기를 재미있게 읽었다며 이제는 ‘세계 아픔의 구경꾼이 아니라 그 아픔을 없애는 일꾼이 되어야 하지 않겠냐’ 하셨던 이분이 누구인지는 나중에야 알았다.

■ 회장님의 눈물

안경점 주인인 줄 알았던 오재식 회장님은 나 따위가 오라 가라 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한국 현대사의 여러 분야에서 그 이름이 제일 앞서 거론되어야 마땅한 분이었다.

우리나라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의 선구자이자 교회 간의 일치운동인 에큐메니컬 운동 및 한국 기독학생운동의 대부셨다.

늘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 편에 서느라 어렵고 궂은일은 도맡아 하시면서도 영광의 순간에는 늘 한발 뒤로 물러서 있던 분이다.

그러기는 얼마나 어려우셨을까? 늘 환하게 웃는 얼굴이지만 나는 그분의 눈물을 본 적이 있다. 복잡한 북한 사업을 진행하면서 안팎에서 쏟아지는 말할 수 없는 비난으로 마음고생이 심했던 시기였다.

오 회장님을 아는 사람들은 그분의 회고록 <나에게 꽃으로 다가오는 현장>을 읽고는 모두 깜짝 놀랐다. 한 사람의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험하고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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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그렇게 긴 세월에 걸쳐서 드러나지 않게 하실 수 있었을까?

오회장님은 이렇게 한 마디로 정리해주셨다.

“현장이 시켜서 한 일일 뿐이다.”

오회장님의 특기는 느닷없이 전화하셔서 “몇 날 며칠 어디로 나오시오”라고 하거나 “100만 원만 빨리 보내 주시오.” 하시는 거다.

그건 분명 내가 꼭 가야할 자리가 갑자기 생겼거나 누구를 급하게 도와주어야 하는 순간이다.

세상에는 ‘오꼼모’라는 비밀조직이 있다. ‘오재식 회장님 부탁은 꼼짝 못하고 들어주는 사람들의 모임’인데 나도 그 조직원 중의 한 사람이다. 내가 ‘조직의 규칙대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알겠습니다”하면 “하하하, 한 선생 고맙소”라고 딱 한 마디 하신다.

■ 꽃으로 남은 당신

그런데 어느 날부터 쟁반처럼 동그란 오회장님 얼굴이 해쓱해지셨다. 간단히 치료할 수 있는 피부암이라고 염려 말라시더니, 그 항암치료가 끝나자 췌장과 대장에도 차례로 문제가 생기고, 장장 4년에 걸친 사투가 시작되었다. 어느 날 함께 식사를 하고 회장님이 식당 앞에서 사진을 찍자고 하셨다. 그 사진이 마지막 사진이 되었다.

2014년 1월 3일 나는 남수단 파견 근무 중에 이메일로 회장님 부고를 받았다.

남수단에서 돌아오자마자 오 회장님 묘를 찾았을 때, 깜짝 놀랐다. 오 회장님 묘지가 우리 부모님 묘지 지척에 있는 거다. 얼마나 다행인가.

묘비에는 ‘오재식의 묘’라는 다섯 글자만 새겨져 있고 그 옆 추모비에는 직접 쓰신 글 한 문단이 적혀 있었다.

‘그 숱한 사람들! 내 곁에 머물렀거나 지나갔거나 여전히 남아 있는 사람들이 그 현장에 서서 나를 불러주었다. 나는 그 사람들의 삶에 씨줄과 날줄로 엮이면서 그 세월을 살아 올 수 있었다.’

■ 바람의 딸 그리고 빛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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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야는 내 세례명이다. 지금은 외래어 표기법을 통일해서 ‘비아’라고만 쓰지만 전에는 비야, 삐야, 삐아, 비아를 섞어 썼다. 나는 그 중에 ‘비야’로 영세를 받아 한비야가 되었는데 그 후 날비(飛), 들야(野)라는 한문 이름으로 개명해서 주민등록증과 여권에 쓰이는 공식 본명으로 쓰고 있다. 특이한 이름 덕에 세상 어디를 가든 이름만큼 특이하고도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생기곤 한다.

“비야 어디갔어요?”

“아침부터 왜 비야를 찾아요? 더군다나 사무실에서?”

“네? 저는 긴급구호 총책임자 비야를 찾고 있는데요.”

“앗, 비야가 그 비야였어요? 난 비어(beer)를 찾는 줄 알았네. 하하.”

남수단 근무 중 우리 사무실에서 있었던 일이다. 남수단 사람들은 beer의 r을 발음하지 않아 비야라고 들리기 때문에 날 찾던 캐나다 직원과 남수단 직원이 서로 헷갈린 거였다. 그날 하루 종일 우리 직원들이 나만 보면 눈을 찡긋하고 손을 꺾으며 맥주 마시는 시늉을 했다.

카메룬이서 온 신입 직원은 내 이름을 듣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카메룬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이름이란다. 30년째 독재를 하고 있는 자기나라 대통령과 이름이 같다나.

반면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내 이름을 아주 좋아한다. 자기 고향 사투리로 비야는 ‘내 모든 것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이란다. 여자 이름으로는 최고라면서 자기 부인이 다음 달에 낳는 아이가 만약 딸이면 비야라고 이름을 짓겠다고 벼르고 있다.

몇 년 전, 7년간 가뭄이 들어 살인적인 물 부족을 겪고 있는 케냐와 소말리아 국경 지역에 갔을 때, 내가 이름을 말하자마자 동네 사람들이 처음 보는 나를 다투어 껴안으며 뛸 듯이 반가워했다. 알고 보니 그 지역 말로 한비야는 커다란 물항아리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날 밤, 기다리고 기다리던 비가 내려서 얼떨결에 ‘이름값’을 하게 되었다.

내 세례명 비야는 이태리 성녀 이름으로 본뜻은 ‘무엇이든 정성껏, 열심히 하다’이다. 이름의 뜻처럼 나름 있는 힘을 다해 살고는 있지만 솔직히 늘 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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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부족하고 그래서 항상 성에 차지 않는다. 더 많이 했어야 했는데, 더 잘해야 했는데, 용기내서 한 발짝 더 나갔어야 했는데, 하며 나를 들볶는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성에 찰까? 내 성에도 안 차는데 이 일을 시키신 하느님은 더 잘 할 수 있는 사람을 시키시지 왜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 나에게 이 일을 맡기셨을까? 하며 또 나를 들들 볶는다.

이름 얘기를 더 하자면 내 별명 ‘바람의 딸’이 있다. 각종 인터넷 사이트 아이디로도 쓰고 있는데 영어로는 Daughter of the Wind 다. 외국 친구에게 내 아이디를 말해주면 인디언 이름 같다는 사람, 환경운동가냐는 사람도 있지만 열에 아홉은 와우! 라며 놀란다. 멋지다는 말이겠지.

내 아이디가 된 바람의 딸을 첫 제목으로 쓸 때는 오지 여행가로 바람처럼 떠돌아다닌다는 뜻이었지만 15년 전 구호 활동가가 된 후에는 ‘무엇이 되기를 바랍니다’라고 희망을 말하는 ‘바람(hope)의 딸’로 불리고 있다. 지금 하고 있는 일과도 처음부터 그렇게 맞춘 것처럼 딱 어울리는 별명이다.

■ 빛의 딸로 살고 싶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바람의 딸보다 빛의 딸 역할에 훨씬 마음이 끌리고 있다. 내 주위의 세상을 환하고 따뜻하게 비추는 사람, 같이 있으면 괜히 기분 좋고 힘이 나는 사람, 서로를 진심으로 응원하면서 긍정적인 자극을 주는 사람, 생각만 해도 정신이 번쩍 들면서 동시에 온기가 느껴지는 사람, 이렇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고 딱인데.

그리고 또 생각한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지금 이 세상에서 빛의 딸 아들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은 누가 있을까? 누구에게 길을 물어봐야 좋을까? 오랫동안 이런 생각을 해서일까, 최근 들어 같은 꿈을 자주 꾼다.

나도 참말이지 빛의 딸이 되고 싶다. 한여름 한낮의 태양처럼 너무나 뜨겁고 눈부시고 위협적이기까지 한 강렬한 빛이 아니라 겨울 아침 햇살처럼 맑고 따뜻하고 다정한 빛이 되고 싶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마다 하느님께 받은 온기와 생기를 전해주고 싶다. 세상 어디를 가건 거기서 무슨 일을 하건 나의 가장 중요한 역할과 임무, 아니 존재의 이유는 바로 빛의 딸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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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내 글이 아침 햇살 같기를 바란다. 내 글로 인해 조금이라도 마음이 따뜻해지고 환해졌기를, 힘이 없을 때 작은 힘이, 위로받고 싶을 때 작은 위로가, 지쳐 있을 때는 자극이 그리고 용기를 내야 할 때는 작은 용기를 보태주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 나의 기도는 이러하게 하소서

어느 패전 병사의 기도(작자 미상)

무엇이나 얻을 수 있는 강한 체력을 달라고

하느님께 간구했으나

나는 약한 몸으로 태어나

겸손히 복종하는 것을 배웠습니다.

큰일을 위하여

건강을 구했더니

도리어 몸에 병을 얻어

좋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큰 부자가 되어

행복하기를 간구했으나

나는 가난한 자가 됨으로

오히려 지혜를 배웠습니다

한번 세도를 부려

만인의 찬사를 받기 원했으나

나는 세력이 없는 자가 되어

하느님을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바라고 원하는 것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은연중에 나는 모든 것을 얻었나니

내가 구하지 않은 기도까지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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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부족하되

만인 중에서

가장 풍족한 은혜를 입었습니다.

하느님의 방법으로 기도에 응답해 주셨음을 고백하고 깊이 감사하는 이 기도가 참으로 아름답다. 간절한 부탁도 솔직한 고백도 중요하지만 기도의 핵심은 뭐니 뭐니 해도 주님께 감사한 마음을 고하는 일인 것 같다.

■ 나가는 글 - 그럼에도 불구하고, 딱 한 발짝만

1그램의 용기! 지금 내게도 딱 그만큼 용기가 필요하다.

올해부터 오랫동안 망설이던 한 가지 일을 시작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화여자대학교 국제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밟기로 한 것이다. 논문 주제는 <재난 대비를 중심으로 한 인도적 지원과 개발 협력의 연계점>이다.

현장에서 일하면서 늘 궁금했다. 인도적 지원에 쏟아 붓는 그 많은 돈과 에너지는 왜 개발 협력으로까지 이어지지 않는가? 분명히 두 분야를 연계할 방법이 있을 터, 그걸 밝혀내고 싶은 거다

앞으로 적어도 3~4년은 또 죽자하고 공부를 해야 한다.

나와 함께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국제구호 동료들은 열에 아홉은 반대다. 지금 하는 일에 박사 학위가 필요한 것도 아닌데 현장에서 가장 왕성하게 일할 나이에 왜 연구실에 처박히려 하느냐고 극구 말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용기를 내어 한 발짝 내딛기로 했다. 길이 있어서 한 발짝 내딛는 게 아니라 한 발짝을 내 디뎌야 비로소 길이 열린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만약 여러분도 꼭 하고는 싶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망설이는 일이 있다면 두 눈 질끈 감고, 되는 쪽으로 한 발짝만 내디뎌 보시기 바란다.

그럼 용기가 필요하신가. 그 용기, 내가 기꺼이 보태 드리고 싶다.

1그램이면 충분하다. 부디 받아주시길. - 끝 -

2014. 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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