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7. 9. 12:23ㆍ독서후기
우리가 어느 별에서
■ 정호승 산문집
0 1950 경남 하동 출생, 대구에서 성장
0 경희대 국문과 졸, 동 대학원 졸업
0 1972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시. 1973 대한일보 신춘문예 시
0 1982 조선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0 시집 :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 새벽편지, 별들은 따뜻하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등
0 시선집 : 흔들리지 않는 갈대, 내가 사랑하는 사람 외
0 어른을 위한 동화집 : 항아리, 연인, 모닥불 외
0 산문집 : 내 인생에 힘이 되어 준 한 마디,
당신이 없으면 내가 없습니다. 외
0 소월시 문학상, 정지용 문학상, 편운 문학상, 상화시인상, 공초문학상 등
■ 작가의 말
0 책은 인간이다. 책의 운명은 인간의 운명과 같다.
0 하루살이는 하루만 살 수 있는데 불행히도 하루 종일 비가 올 때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도 그들은 감사한 마음으로 열심히 살아간다고 합니다. 저도 그 하루살이의 마음으로 오늘을 열심히 살아가고자 합니다.
◉ 1부 십자가를 품고 가자
■ 나를 먼저 용서합니다
우리는 수많은 상처를 입고 살아간다. 상처받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으며, 상처 주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도 없다. 우리는 매일 밥을 먹으면서 살지만 실은 상처의 밥과 국을 먹고 산다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그 상처의 밥과 국을 어떻게 소화하느냐 하는 문제만 남아 있을 뿐, 밥을 먹지 않고 살 수 없듯이 상처 또한 먹지 않고는 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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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는 친밀함을 먹고 자라기 때문에 친하고 가까운 사람, 그것도 가장 가까운 사람한테서 가장 큰 상처를 받는다. 아내는 남편한테 남편은 아내한테, 어머니는 아들한테 아들은 어머니한테 가장 깊고 아픈 상처를 받는다. 오늘의 삶이 고통스러운 것은 돈이 없어서라기보다 바로 그 상처에서 오는 고통의 독소 때문이다.
최근 성바오로딸수도회에서 나온 <상처와 용서>라는 책을 열심히 읽은 적이 있다. 책은 비록 작은 문고판이었지만 상처를 극복하고 치유하는 데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크고 값진 책이었다.
예수회 송봉모 신부가 쓴 그 책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구체적 방법을 제시한다.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용서밖에 다른 길이 없으며, 용서한다는 것은 추상적인 행위가 아니라 구체적인 의지의 행위이며, 일단 용서하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결단을 내리라고 말한다.
남을 용서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을 용서할 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이성적 지식의 습득물일 뿐 그것이 진정 어떠한 것인지, 왜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인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다행히 <상처와 용서>에서 송 신부는 스승 예수를 배반한 가리옷 유다와 베드로의 삶을 비교함으로써 왜 우리가 자신의 잘못을 먼저 용서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제시한다.
스승 예수를 배반한 사실은 둘 다 똑같으나 삶의 결과가 천국과 지옥만큼 다른 것은 바로 자신을 용서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하는 문제 때문이라는 것이다. 가리옷 유다는 자신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에 괴로워 하다가 나무에 목메어 자살해 버렸고 베드로는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용서했기 때문에 순교를 통해 스승과 교회를 위한 초석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 나 자신을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먼저 나 자신을 용서하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나 자신을 용서함으로써 나 자신을 사랑하고, 나 자신을 사랑함으로써 남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남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부처님도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존재라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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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고통스러운 내 삶의 상처가 더 이상 썩어가게 방치해 둘 수는 없다. 용서 잘하는 사람이 건강하다고 하지 않는가.
■ 태풍에 대하여
여름이 오면 폭염보다 사나운 태풍을 먼저 생각한다. 첫눈이 내리기 때문에 겨울이 더 아름답듯이 천둥 번개가 치는 폭풍의 밤이 있어 여름은 더 아름답다. 여름이 와도 폭풍우가 몰아치는 밤이 없다면 그 여름은 진정한 여름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봄이 와도 꽃이 피지 않거나 가을이 되어도 낙엽이 떨어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번개 치는 하늘을 보면 무섭다. 마치 잘 익은 수박이 칼을 대기만 해도 저절로 쫙 갈라지듯 하늘이 갈라진다. 하늘의 어디에 그런 강력한 빛줄기가 숨어 있다가 한순간에 내리치는지 절대자의 걷잡을 수 없는 분노의 눈길처럼 느껴진다.
태풍이 몰아쳐야 고여 있던 생태계도 새로운 숨을 쉬고, 사나운 천둥 번개가 몰아쳐야 인간도 고개를 숙이고 겸손해진다. 인생의 여름에도 폭풍우는 몰아친다. 폭풍우가 몰아치지 않는 인생은 없다. 누구의 인생에도 폭풍우가 몰아쳐서 고통스럽다. 문제는 그 폭풍우를 어떻게 이겨내느냐에 달려 있다. 두려워 피하고 싶다고 해서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언젠가는 다가올 폭풍우를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하다.
나무들도 아무런 시련 없이 고요히 자라는 것이 아니다. 비바람이 몰아칠 때 온몸이 뒤흔들리는 나무의 고통을 보라. 나무도 그런 고통과 시련을 통해 더 튼튼하고 아름다운 나무로 자란다. 한여름의 폭풍을 통해 꽃과 나무와 새들도 삶의 인내를 배우는 것이다.
만일 천둥과 번개가 치는 고통의 밤을 참고 견디지 못했다면 꽃은 열매를 맺을 수 없었을 것이다. 또 이듬해 봄에 더 많은 꽃을 피울 수 없었을 것이다. 이렇듯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킨다. 세상의 누구든 고통을 참고 견디지 못한다면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폭풍우를 견딜 수 있는 꽃과 나무와 새들만이 살아남듯이 사람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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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 생을 살면서 따스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만 맞으며 살아갈 수는 없다. 따스한 햇살을 맞기 위해서는 혹한의 추운 겨울이 있어야 하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살기 위해서는 뜨거운 폭염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
■ 사막의 가르침
사막을 생각하면 왠지 현실적 갈등이 없어지고 마음이 평온해지다 못해 경건해진다. 사막의 황량함이, 그 황량함으로 이루어진 아름다움이 끈질기게 부여잡고 있는 내 욕망의 밧줄을 한순가 놓아버리게 만든다. 아마 사막을 통해 가난하다고 느껴지는 오늘의 내 삶이 실은 그 얼마나 풍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둔황의 모래산 명사산과 둔황에서 우루무치까지 가면서 보았던 사막을 생각한다. 문득 사막의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던 고깔 모양을 한 모래무덤들이 떠오른다. 무서운 황사나 흑사바람이 불어오면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무덤들, 둔황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사막 아무데나 묻고 싶은 곳에다 묻는다고 한다. 우리처럼 비싼 돈을 내고 호화 유택을 마련하지 않는다. 간혹 우리가 뗏장을 입히듯 돌로 모래를 꾹꾹 눌러놓고 있는 게 보일 뿐이다. 나의 삶이 저 황량한 사막의 모래무덤 같은 것이라면 오늘 나는 좀 더 겸손해져야 한다.
일생에 한 번쯤은 광야나 사막에 홀로 서 있어보아야 한다고 한다. 일생에 한 번쯤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사막화해봄으로써 존재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사막을 생각하면 그 말을 긍정할 수밖에 없다.
실은 누구의 인생이든 그 안에는 황량한 사막이 하나씩 존재해 있다. 다만 두려워 그 사막에 가지 않으려고 할 뿐이다. 그곳에는 사랑의 부재, 이해의 부재, 용서의 부재 등 온통 부재의 덩어리가 모래만큼 쌓여 있다. 그 사막을 걸어가 봄으로써 비로소 삶의 절대적 조건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절대적 조건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아무도 선뜻 그 사막에 가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아침마다 사막을 묵상하면서 내 존재의 참모습을 느낀다. 나는 사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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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한 알보다 못한 존재다. 그동안 내 가슴이 기름진 옥토였기 때문에 오히려 고통스러웠다. 나도 선한 눈을 가지고 사막을 건너는 야생 낙타가 되고 싶다. 인생은 언제 어느 순간에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말을 굳게 믿으며, 사막의 물이 되면 더욱 좋겠다. 그러나 사막의 신기루는 되고 싶지 않다. 젊을 때는 산을 바라보아야 하고, 나이가 들면 사막을 바라보아야 한다.
■ 십자가를 품고 가자
어떤 사람이 자기가 지고 가는 십자가가 너무나 무겁고, 다른 사람이 지고 가는 십자가보다 더 큰 것 같아 하느님께 불만을 터뜨렸다.
“하느님, 왜 저에게만 이렇게 무거운 십자가를 지게 하십니까? 다른 사람의 십자가를 보십시오. 얼마나 작고 가벼워 보입니까.”
그 말을 듣고 하느님은 빙그레 미소를 띠며, “그래? 그렇다면 네 십자가를 바꾸어 주마, 마음에 드는 다른 십자가를 골라보아라”하고 말했다.
그 사람은 수많은 십자가가 쌓여 있는 창고에 가서 가장 가볍고 편해 보이는 십자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나 좀처럼 자신이 원하는 십자가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하루 종일 고르고 고르다가 이거다 싶은 십자가 하나를 골라 하느님께 나아갔다.
“그래 마음에 드느냐?”
그는 기쁨에 넘치는 얼굴을 하고서는 하느님께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하느님이 한동안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세히 보아라. 그 십자가는 본시 네가 지녔던 십자가다.”
이 이야기는 송봉보 신부의 저서 <광야에 선 인간>에 나오는 우화다.
송봉모 신부는 십자가는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안거나 품고 가는 것이라고 말한다. 십자가를 어깨에 짊어지고 가면 그것은 고통이나, 십자가를 가슴에 안고 가면 그것은 곧 포옹이자 기쁨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결코 버릴 수 없다. 신이 인간을 사랑하는 방법은 고통의 방법이다. 어차피 우리에게 주어진 고통의 십자가라면 이제 엄마가 아기를 껴안듯이 껴안고 가자. 불가에서도 내 안에 부처가 있다고 말하지 않는가. 어쩌면 나 자신이 바로 내가 껴안고 가야 할 가장 고통스러운 십자가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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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를 먼저 보세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불행을 통해 자신의 불행을 위로 받을 때가 많다. 나도 마찬가지다. 내가 배고플 때는 나보다 더 배고픈 자를 생각하고, 내가 외로울 때는 나보다 더 외로운 자를 생각한다. 사랑하는 여자가 나를 버릴 때는 사랑하는 애인에게 버림받은 자를 생각하고, 누가 나를 배반할 때는 사랑하는 아들에게 배반당한 아버지를 생각한다. 이것은 아주 이기적인 방법이지만 인간인 나로서는 어쩔 수가 없다. “위를 보고 살지 말고 아래를 보고 살아라”고 하신 어머니의 말씀을 늘 되새김질해야 하루하루 고통을 견디며 살 아갈 수 있다.
■ 땅 위의 직업
살아가기 힘들 때마다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그는 강원도 탄광 마을인 고한에 사는 한 평범한 광원으로 내가 잡지사 기자 시절에 단 한 번 취재를 위해 만났던 김장순이라는 사람이다.
김장순씨는 경북 안동에서 농사를 짓다가 농협 빚을 갚지 못해 빚잔치를 하고 탄광촌으로 뛰어든 사람이다.
나는 그가 일하고 있는 광업소의 허락을 받아 지하 막장까지 그를 따라가 본 적이 있다. 먼저 탈의실에 들어가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헤드램프가 달린 헬멧을 쓴 뒤 작업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700미터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갱차를 타고 수평으로 1,200미터까지 가서 다시 갱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미로와 같은 갱은 춥고 어두웠다. 갱 양 옆으로는 탄가루가 섞인 검은 지하수가 급히 흘러갔다. 장화 신은 발이 푹푹 빠졌다.
그렇게 30여분 걸어갔을까. 더 이상 갱도가 없는 곳이 나타나고, 갱벽 한가운데를 비스듬히 위로 뚫은 갱도가 하나 나왔다. 두 세 사람이 겨우 드나들 수 있을 만큼 좁은 갱 속을 제대로 고개도 들지 못하고 거의 기다시피하면서 들어가자 그곳이 바로 지하 막장이었다. 광원들은 좌우로 버팀목을 세우며 안으로 안으로 파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곡괭이질을 하는 김장순씨를 비켜보면서 막장에 널브러져 있는 버팀목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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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 안은 지열 때문에 몹시 더웠다.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땀이 흐르고 가슴이 답답했다. 아무도 없는 땅 속 저 깊은 곳, 어딘지 모르는 한 지점에 한 마리 작은 벌레처럼 앉아 숨을 헐떡이고 있는 기분이었다.
“막장에서는 잠을 못 자게 합니더. 담배도 못 피우게 하지예. 그런데 어떤 때는 앉은 채로 깜빡 졸 때도 있습니더.”
나는 곡괭이질을 하는 중간중간에 한 마디씩 던지는 김장순씨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를 취재한다는 일이 나로서는 너무나 건방지고 부끄러운 일이라는 생각부터 먼저 들었다.
김장순씨가 막장을 나온 것은 점심시간이었다. 그는 다시 갱 속 지하 사무실로 가 그곳에 보관해 둔 도시락을 꺼내 먹었다. 어둠 속에서 손도 씻지 않고 작업복도 입은 채였다.
그때 그의 이야기 중에 가장 충격적이었던 이야기는 그의 소원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이런저런 질문 끝에 소원이 있다면 무엇이냐고 물어 보았다. 그러자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물론 그건 땅 위의 직업을 갖는 거지예. 땅 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직업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잘 모릅니더.”
나는 꽁보리밥을 몇 점 입에 넣고 우물거리다가 이 말을 듣고는 그만 목이 꽉 메었다. 온몸에 전기가 통하듯 화들짝 놀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땅 위의 직업’ 갖기를 소원하고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땅 위의 직업을 갖고 일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던 나에게 그 말은 하나의 커다란 깨우침이었다.
그 이후로 나는 ‘땅 위의 직업을 갖고 싶다’는 그의 말을 단 한 번도 잊어 본 적이 없다. 세상살이가 고달프고 힘들 때마다 그를 생각하고, 땅 위의 직업을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나 자신이 그 얼마나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는 것인가 하고 스스로 위안 받는다.
■ 한 일본인의 정직
1989년 여름, 관광차 일본 오사카 성에 들렀을 때였다. 성 입구에 선물 가게가 있어 성을 구경하기전에 오코시 한 상자를 샀다. 일제 강점기시대를 산 아버지가 평소 퍽 좋아하던 과자라 일본에 온 김에 사가는 것이 좋겠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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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들어서다. 그런데 오사카성 안으로 막 들어가려고 할 때 가게 주인 여자가 헐떡거리며 달려와 1천 엔짜리 지폐 아홉 장을 펼쳐 보이면서 내게 건네주려고 들었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어 그 돈을 받지 않겠다는 의사 표시를 했다. 그런데도 그녀는 자꾸 내게 돈을 건네주려고 들었다. 일본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으므로 그녀가 왜 그러는지 얼른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이상하다 싶어 지갑을 꺼내 보았다. 있어야 할 1만 엔짜리 지폐가 보이지 않았다. 가게에서 과자를 살 때 1천 엔짜리 지폐를 준다는 게 그만 1만 엔짜리 지폐를 준 모양이었다. 나는 그제야 그녀가 왜 막무가내로 돈을 주려고 했는지 얼른 알아차리고 그녀가 건네주는 돈을 받았다. 그러자 그녀가 활짝 웃는 얼굴을 하고는 고맙다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다시 가게로 급히 뛰어갔다.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면서 큰 감동을 받았다.
그 뒤 나는 일본인이라면 생래적으로 싫어하는 민족적 고정관념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고객을 대하는 일본인의 기본자세가 우리와는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것은 일본에서의 그런 경험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물건을 살 때의 경험과 너무 비교되기 때문이었다.
이제 우리는 낯모르는 관광객에게 거스름돈을 전해 주기 위해 1백 여 미터나 되는 길을 급히 달려와 전해주고 가는 일본인의 정직함과 친절함을 본받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지 않고서는 남을 먼저 생각하고 남과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들 수가 없다.
“나는 요즘 서울에서 지하철을 탈 때마다 정말 스트레스를 받아. 도쿄나 서울이나 지하철이 만원인 것은 똑같아. 그런데 일본 사람들은 전동차 안으로 들어오면 어떻게 해야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수 있을까 하고 자기 몸을 웅크리며 축소시키기 바쁜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 반대야. 어떻게 하면 자기 영역을 확보할까 하고 몸을 확대 시키려 든단 말이야. 그러니 내가 스트레스를 안 받겠어? 만원 전철 안에서 다리를 쩍 벌리거나 두 손으로 신문을 활짝 펼치고 보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화가나.”
이 말은 회사 업무상 7년 동안 일본에서 살다 온 친구한테서 들은 말이다. 왜 이 말이 그리 잊히지 않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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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모난 수박
네모난 수박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어릴 때 동화적 상상의 세계에서나 존재했던 네모난 수박이 물리적 현실의 세계에 존재하게 된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수박을 둥글다’는 기본 개념을 파괴시켜버린 일이다.
수박이 네모지면 운반하기에 편할 뿐만 아니라 보관하기에도 좋고 썰어 먹기에도 좋다고 한다. 그러나 수박의 입장에서는 여간 화가 나는 일이 아닐 것이다. 네모난 수박은 유전공학자들에 의해 유전 인자가 변형되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네모난 인공이 틀 속에서 자라게 함으로써 단순히 외형만 바뀌도록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둥글다는 내면의 본질을 그대로 둔 채 인위적으로 외형만 바꾼 것이다.
네모난 수박을 만든 이들의 말에 의하면, 철제와 아크릴로 네모난 수박의 외형틀을 만드는데 무려 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수박꽃이 지고 달걀 크기만 한 수박이 맺히기 시작하면 특수 아크릴로 만든 네모난 상자를 그 위에 씌우는데, 놀랍게도 수박이 자라면서 네모난 상자를 밀어내는 힘이 지그마치 1톤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수박의 생장력이 너무나 강해 만드는 족족 외형 틀이 부서져 그 힘을 견딜 수 있도록 만들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네모난 수박 재배의 성공여부가 전적으로 수박의 생장력을 견뎌낼 만큼 튼튼한 아크릴 상자를 만들 수 있느냐에 달려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이 말을 들으면서 네모난 틀 속에서 자라게 되는 한 알의 수박씨가 겪게 되는 고통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비록 햇볕과 공기와 수분을 예전과 똑같이 공급받을 수 있는 상태라 하더라도 어느 순간부터는 그만 네모난 틀의 형태에다 자신의 몸을 맞추어야만 하니, 그 고통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
나는 네모난 수박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비록 겉모양은 네모졌으나 수박으로서의 본질인 맛과 향은 그대로일거라고 생각하면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야말로 바로 이 네모난 수박과 같은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의 우리 삶이 둥근 수박과 같은 자연적 형태의 삶이었다면, 지금은 외형을 중시하는 네모난 수박과 같은 인위적 형태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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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직도 냉장고에서 꺼내 먹는 수박보다 어릴 때 어머니가 차가운 우물 속에 담가 두었다가 두레박으로 건져주셨던 수박이 더 맛있게 느껴진다. 이제 그런 목가적인 시대는 지나고 말았지만 모깃불을 피우고 평상에 앉아 밤하늘의 총총한 별들을 바라보면서 어머니가 쟁반가득 썰어주신 둥근 수박을 먹고 싶다. 까맣게 잘 익은 수박씨를 별똥인양 마당가에 힘껏 뱉으면서, 칼을 대기만 해도 쩍 갈라지는 둥근 수박의 그 경쾌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 손
손은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할 때 아름답다. 놀고 있는 게으른 손은 추악하다. 많은 사람들이 일하지도 않는 손을 정성껏 가꾼다. 그런 손은 겉으로는 아름다운 것 같으나 실은 아름다움을 상실한 가공의 손이다.
못 자국이 난 예수의 손에도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에 목수로 일하면서 생긴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나는 누구를 처음 만났을 때 그 사람의 손을 먼저 살펴본다. 손이 그의 삶의 전부를 말해줄 때가 있기 때문이다. 처음 만난 사람과 악수를 해보고 그의 손에서 느껴지는 여러 가지 감도를 통해 그가 어떠한 직업을 가지고 어떠한 삶을 살아왔으며 성격 또한 어떤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은 손이 바로 인간의 마음의 거울이자 삶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나는 어머니의 손처럼 다른 사람의 눈물과 상처를 닦아주는 손을 소중히 여긴다. 가을 들판의 볏단처럼 고요히 머리 숙여 기도하는 겸허한 손을 소중히 여긴다.
골고다 언덕에서 가시관을 쓴 머리에 피를 흘리며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하늘을 우러러 간절히 기도하는 예수의 손이야말로 우리 인간의 눈물과 상처를 닦아주고 어루만져 주기 위한 사랑의 손이다.
나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손이 있다. 그것은 그림 속의 손으로, 한 조각 빵을 앞에 두고 식사하기 전에 눈을 감고 고개 숙여 기도하는 한 노인의 손이다. 누구의 그림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림 속의 노인은 붉은 수염이 길게 자라 있고, 식탁 위에는 성경과 안경이 놓여 있다. 나는 그 그림을 볼 때마다 한 조각 빵 앞에서도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한 인간의 겸손하고 경건한 손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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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또 하나, 화순 운주사 석불들의 손을 빼놓을 수 없다. 천불천탑이 있었다는 운주사에는 아직 70여 기의 석불들이 남아 있다. 여인인 양 다소곳이 가슴께로 두 손을 모으고 사랑하는 님을 영원히 기다리고 있는 듯한 석불들의 모습은 내게 기다림의 진실된 자세를 가르쳐 준다. 와불님을 뵈러 올라가는 길에 만날 수 있는 한 좌불 석불은, 텅 빈 두 손바닥은 하늘을 향해 드러내 놓고, 감은 듯한 두 눈은 멀리 영원을 바라보는 듯해서 자못 감동적이다. 세상사 모든 욕망을 벗어 버린 듯한 그 석불의 모습에서 무엇을 포기하고 오늘을 살아야 하는지를 뒤미쳐 깨닫는다.
사람은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간다.
내가 누구의 손을 잡기 위해서는 내 손이 빈손이어야 한다. 내 손에 너무 많은 것을 올려놓거나 너무 많은 것을 움켜쥐지 말아야 한다. 내손에 다른 무엇이 가득 들어 있는 한 남의 손을 잡을 수는 없다. 소유의 손은 반드시 상처를 입으나 텅 빈 손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한다. 그동안 내가 빈손이 되어 다른 사람의 손을 얼마만큼 잡았는지 참으로 부끄럽다. 내가 처음으로 아버지가 되어 아기의 손을 잡았을 때 아기는 내 손가락 한 끝을 꼭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나는 그러한 아기의 손을 지니고 싶다.
■ 운주사 와불님
운주사는 첩첩산중에 외따로 숨어 있는 절이 아니었다. 시외버스를 타고 가다가 문득 내려 들른 외갓집처럼 한가한 시골의 큰길 한편에 있는 절이었다.
나는 외갓집을 찾아가듯 운주사 경내로 들어섰다. 높은 석벽 앞에 말없이 서 있는 석불들이 먼저 나를 맞았다. 다소곳이 두 손을 가슴께까지 모으고 있는 그들의 모습에서 몇천 년 전부터 간곡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한 여인의 모습이 느껴졌다. 아내를 버리고 고향을 떠나 멀리 도시로 가서 온갖 고생을 하다가 지쳐 돌아온 남편을 따뜻한 미소로 대해주는 속내 깊은 한 여인의 모습이 거기 있었다.
대웅전 왼편 산기슭 한편에 ‘와불님 뵈러 가는 길’이라는 나무 표지판 하나가 외로이 서 있어 먼저 그곳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와불에 ‘님’자를 붙여 부르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탓에 나는 맞선이라도 보러 가는 총각인양 마음이 떨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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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불은 집채만 한 바위 전체에다 하늘을 보고 똑바로 누워 있는 형상으로 돋을새김되어진 부처님이었다. 그것도 한 분이 아니라 두 분이었다. 세속적인 생각이지만 그들은 마치 부부 부처님처럼 느껴졌다. 바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부처님이 남편 부처님이고, 나머지 부분을 차지한 부처님이 아내 부처님으로 생각 되었다. 아내 부처님은 두 손을 가슴께까지 고요히 모으고 살짝 남편 부처님의 어깨에 기대어 있었다.
나는 와불님 곁을 쉽게 떠날 수가 없었다. 와불님을 둘러싸고 있는 솔숲에서 간간이 불어오는 푸른 솔바람을 들이켰다. 와불님은 너무 커서 발치 부분에 서면 그 모습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다행히 와불님의 머리 부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얼굴 부분이 보였는데, 무엇보다도 단아한 눈매가 감동적이었다. 그것은 마치 불효한 나를 나무라지 않고 그저 인자하게 웃으시는 내 늙은 어머니의 눈매 같았다.
아마 그들 부부 와불님은 그렇게 천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나란히 누워 서로를 위하고 아끼며 사랑했을 것이다. 나도 누구를 진정 사랑한다면 부부 와불님처럼 변함없는 사랑을 해야 할 것이다.
나중에 서울로 돌아와 책을 일다가 운주사 부부 와불님이 미완성 돌부처님인 데다 누워 있는 자세가 북극성을 바라보는 자세라는 사실을 알고는 더욱더 가슴이 떨려왔다. 그들은 사랑을 완성시키기 위해 천년이 지나도록 그렇게 부단하게 노력하고 계신 거였다.
■ 영정 사진
상가에 가면 꼭 나 혼자 하는 일이 있다. 그것은 술 마시는 일도, 밤새워 고스톱을 치는 일도 아니다. 그것은 나 혼자 영정을 바라보는 일이다.
그것은 죽음을 맞이한 한 인간의 마지막 얼굴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그때 뿐이기 때문이다.
영정에 쓰인 사진은 분명 살아 있을 때의 모습이나 그것 또한 검은 리본이 드리워진 쓸쓸한 죽음의 얼굴이다. 나는 그 얼굴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고 배우고 싶은 것이다. 죽음이 삶의 결과라면, 그 결과에 다다른 이의 얼굴에 어떤 진실이 있는 것일까.
이 세상에 슬프지 않는 영정은 없다. 모든 영정은 다 슬프다. 한없이 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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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하고 절망적이다. 말 또한 없다.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다. 웃지도 않는다. 영정 사진 중에 빙그레 미소를 띠고 있는 사진은 드물다. 거의 대부분 막막하고 심각하다. 아니 쓸쓸하다. 사진 속의 인물이 던지는 시선의 끝을 따라잡을 수가 없다.
부모님은 매주 일요일이 되면 교회에 나가시는데, 한 번은 어머니가 평소와 달리 화장을 곱게 하고 한복으로 싹 차려 입고 나가셨다. 아버지 또한 평소에 잘 입지 않는 새 양복을 꺼내 넥타이를 매고 가셨다. 나는 두 분이 꼭 참석해야 할 누구 결혼식이라도 있나 했으나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그분들은 교회 가까운 사진관에 가서 영정 사진을 찍고 오신 거였다.
“자, 사진 준비했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까 미리 준비했다. 나중에 일 당하면 이 사진을 쓰도록 해라.”
그런 말씀을 하시는 어머니 표정은 쓸쓸했다. 아버지 또한 그러했다.
나는 한참 동안 부모님이 건네주신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두 분 다 무표정한 표정이었다. 굳이 말을 하자면 쓸쓸하고 적막한, 어디로 부는지도 모르는 한겨울 바람 앞에 선 그런 표정이었다. 어머니는 아예 사진을 액자에 넣어 건네주셨는데, 액자 상단에 검은 리본만 얹는다면 그것은 영락없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영정 사진이었다.
나는 부모님이 건네주신 그 사진을 가능한 한 사용하지 않게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욕심일 뿐 그리 오래가지 않아서 그 사진을 사용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 자신도 그분들이 그랬던 것처럼 새 양복을 꺼내 입고 평소 좋아하던 넥타이를 매고 영정 사진을 찍게 될 것이다.
상가에 들러 바라보는 영정사진, 그것은 남의 사진이 아니라 어쩌면 나 자신의 사진인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그런 얼굴로 남 앞에 놓일 나 자신 말이다.
■ 고요함을 찾아서
고요함이 사라져 간다. 지하철을 타든 음식점에 가든 좀처럼 고요함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어디를 가든 이미 우리 사회에는 고요함을 소중히 여기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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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망하는 욕구가 거의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초등학생 막내 아들 후민이와 제주도를 찾아간 그해 여름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아들과 단둘이 제주도 협재해수욕장에서 하룻밤 민박을 하게 되었다.
늦은 밤에 굳이 조용한 집을 안내받아 찾아든 민박집은 들어가는 골목부터 무척 아름다웠다. 아침에 일어나서야 그 꽃이 문주란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어둠 속에 모가지가 긴 하얀 꽃이 모래밭으로 이어진 골목 양편에 줄줄이 피어 있었다. 구멍이 숭숭 뚫린 화산석으로 쌓아 올린 야트막한 돌담 아래 고요히 피어 있는 문주란을 보는 순간 나는 아들과 단 둘이 서울을 떠나온 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아마 그것은 잠자리에 들어도 차 소리가 들리는 서울에서는 맛볼 수 없는 고요함을 아들에게 느끼게 해 줄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을 것이다.
마침 민박집 마당에 평상이 펼쳐져 있어서 아들과 함께 누워 하늘을 쳐다보았다. 아, 밤하늘엔 별들이 무수했다. 별들이 그렇게 많다는 것을 그제야 처음 알았다는 듯 아들의 가슴은 놀라 뛰었다.
그러나 그런 기대와 행복은 잠자리에 들자마자 곧 깨어져 버렸다. 맞닿은 이웃 민박집에서 젊은이들이 고스톱을 치면서 계속해서 떠들어 댔기 때문이었다. “아빠, 시끄러워서 잠이 안 와” 하고 말하는 아들의 말을 듣고 나는 할 말을 잊었다.
그래도 아침에 일찍 일어났다. 아침 바닷가를 산책하자고 굳게 약속한 탓이었다. 제주의 아침 바다는 더 없이 맑고 푸르렀다. 나는 아들과 손을 잡고 천천히 바닷가를 걸었다. 어젯밤 고스톱을 치던 무리들이 떠들어대던 소리 따위는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이란 말인가. 아들과 나밖에 없는 이른 아침 바닷가에 먹다 남은 수박과 맥주 캔 서너 개가 그대로 버려져 나뒹굴고 있는 게 아닌가. 한없이 푸른 제주의 바다를 보여주고 싶었던 내 마음도 그대로 쓰레기가 되는 것 같아 씁쓸했다.
아들과 나는 서둘러 해수욕장을 떠났다. 우리나라 최남단 마라도로 가기 위해서였다. 배가 움직이자 한 젊은 승무원이 마이크 잡고 마라도까지 항해 하는데 30여 분이 걸린다는 안내 방송을 먼저 했다. 그러면서 엉뚱하게도 배 안에 노래방 시설이 잘 돼 있다고 자랑하면서 항해하는 동안 노래를 부르고 싶은 사람은 얼마든지 나와서 마음껏 부르라는 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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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건 뭐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라도로 가는 배 안에서 고요히 바다를 바라보아야 할 시간에 메들리로 대중가요의 반주 소리를 계속 들어야 하다니, 그 시간은 분명 뱃전을 스치고 우리의 가슴을 스치는 바다의 소리에 고요히 귀를 기울여야 할 시간이었다. 그러나 마라도로 가는 배는 나를 그렇게 고요하게 놓아두지 않았다.
그래도 마라도는 아름다운 섬이었다. 30여 가구가 살고 있는 마라도에 올라서자 사방에서 바다가 한순간에 내 가슴속으로 흘러들어왔다. 나는 아들과 우산을 쓰고 마라도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폭우가 쏟아진다 하더라도 섬 가운데로 난 소로를 따라 10여분만 걸어가면 될 것 같아 천천히 등대가 있는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10여 걸음쯤 걸었을까. 등 뒤에서 자동차 경적 소리가 “빵!”하고 들렸다. 설마 하고 돌아보니 그곳엔 낡은 봉고차 한 대가 빨리 비켜서지 않고 뭐하느냐는 듯 앙버티고 있었다. 마라도에 자동차라……. 그리고 여기서도 마구 경적을 울려대다니…….
나는 더 이상 걷기를 포기하고 비도 피할 겸 정자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곳에는 더 비극적인 정경이 벌어져 있었다. 그곳엔 이미 중년 남녀 몇 명이 버너에 고기를 구워먹으며 목이 터져라 노래 부르고 있었다.
나는 마라도에서도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우리는 고요함을 통해 우리의 삶을 성숙시킬 수 있다. 사랑에 있어서도 격정 다음에는 고요함이 그 사랑을 성숙시키고 지속시켜준다. 인생의 진정성은 시끄러운 데 있는 것이 아니고 고요한 데에 있다. 석가도 고요한 나무 아래서 인간의 삶을 생각했고, 예수도 고요한 산상에서 인간의 사랑을 생각했다.
■ 엔도 슈사쿠의 <침묵>
일본작가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은 한국어 번역본이 여러 권 있다. 그 중에서 내가 읽은 책은 성 바오로출판사에서 김윤성씨가 번역한 것이다.
<침묵>은 내게 직접 소설 쓰기에 대한 꿈과 열망을 부여한 책이다.
어느 일요일 한 낮, 무심코 서가에 꽂힌 책들을 훑어보다가 유독 <침묵>이 눈에 띄어 별다른 기대감을 가지지 않고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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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이 강한 종교소설인가 하는 느낌이 들어 읽는 데 인내심이 다소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다가 곧 깊숙이 빠져들고 말았다.
<침묵>은 1600년 이후 포르투갈 예수회에서 일본에 파견한 신부들이 포교 과정에서 겪게 되는 순교와 배교에 관한 이야기를 쓴 소설로 내겐 무척 충격적이었다. 그것은 신이 침묵의 방법으로 인간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개달을 수 있게 된 데서 오는 충격이었다. 인간을 사랑하는 신의 방법이 침묵이라는 사실을 나는 이 책을 통해서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또 신을 사랑하는 인간이 방법 또한 궁극에 가서는 신을 부정하는 데까지 다다를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당시 나는 사랑과 용서의 문제로 큰 갈등을 겪고 있었다. 사랑하던 사람을 몹시 증오하게 돼 증오하는 일에만 하루를 보내는 데에도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러면서 ‘신은 왜 고통과 침묵의 방법으로 인간을 사랑하는가, 신의 사랑의 방법은 꼭 그런 방법이 아니면 안 되는가’하고 몹시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 주는 신의 존재를 외면하고 싶었다. 내게 고통만 주는 예수의 존재 또한 싫었다.
<침묵>은 나의 그런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는가를 깨닫게 해 주었다. 신은 증오의 대상이 아니었다. 아니, 증오의 대상이 되어줄 수 있을 정도로 나를 사랑하는 존재였다. 고통 가운데서 증오의 완벽한 대상조차 없었다면 내 삶이 그 얼마나 황량했을 것인가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깨달음의 눈물이 났다.
나는 <침묵>을 통해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해답을 얻었다. 그것은 자애로운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였다. 때때로 잘못을 범하는 아들이 우리 인간의 모습이라면, 신은 언제나 아들의 잘못을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모성이 신의 마음과 닮았다’는 말은 맞는 말이었다. <침묵>에서의 신은 상처 입은 자를 사랑하는, 그를 증오하고 배반하는 자마저 위로하고 격려하는 그런 위대한 사랑의 신이었다.
■ 낡은 슬리퍼 한 켤레
시만 쓰고도 먹고 살 수 있는 게 내 꿈이다. 시만 쓰고도 한 집안의 가장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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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게 되는 일, 그것이 내가 이루고 싶은 꿈이다 아직도 그런 꿈을 버리지 않고 있는 나 자신이 기특해 때로는 나를 칭찬해주고 싶을 때도 있다.
나이 마흔 하나가 되었을 때 나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오랫동안 다니던 조선일보사 출판국을 그만두었다. 시사월간지 <월간 조선>기자직을 차장대우라는 직급에서 그만 둔 것이다. 어차피 글을 써서 먹고 산다면 내가 쓰고 싶은 글만 쓰자는 생각을 하고 사표를 내었다. 좀약처럼 사라져간 내 꿈을 되찾기 위해서는 직장 생활을 그만 둘 필요가 있었다.
나는 해가 거듭될수록 나 자신에게 내가 지시하고 결정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은 내 집 마련을 위해 대출받은 몇 천만 원의 은행 빚을 갚음으로써 가계에 빚이 없게 하고 회사에 사표를 낸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나갔다. 큰일에서든 작은 일에서든 철저히 절약하고 저축해 나가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회사 사원식당에서 점심을 먹었고 가급적 술자리도 피했다. 회사 측에서는 점심과 저녁을 사원 복지 차원에서 무상으로 제공하고 있었는데, 기자들은 무슨 까닭인지 그 밥을 잘 먹으려 들지 않았다. 아마 사원식당에서 밥을 먹으면 후배들에게 짠돌이라고 눈치가 보이고 자존심이 좀 상하는 측면이 있다고 여기는 듯했다. 그러나 나는 그런 데서는 자존심을 찾지 않았다. 내 꿈을 이루는 것만이 내 자존심이었다.
그 뒤 사표를 써낸 건 3년 만이었다. 회사 측에서 사표를 수리해 주지 않아 두 달이나 더 출근하면서 기어이 내 뜻을 관철시켰다.
얼마 동안 부장은 나를 설득시키려 들었다. 그러나 나는 설득 당하지 않았다. 다음 달 편집 회의가 시작되었을 때 편집 회의 에 들어가지 않고 서랍 속에 들어 있는 낡은 볼펜 한 자루까지 다 정리해 버렸다. 그리고 혹시 미처 정리하지 못한 게 있나 하고 책상 밑 전화선이 있는 곳을 살펴보았다. 그곳에 미처 챙기지 못한 슬리퍼 한 켤레가 놓여 있었다. 조선일보사에 근무하는 8년 동안 신고 다닌 낡은 슬리퍼였다. 나는 그 슬리퍼를 보는 순간 나 자신을 보는 것 같아 누런 업무용 봉투 속에 담아 들고 나왔다.
내가 원해서 퇴사하는 것임에도 마음이 무거웠다. 낡고 낡아서 더 이상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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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다닐 수 없는 슬리퍼 한 켤레를 달랑 들고 어디취재라도 가듯 마지막으로 출판국 편집실을 빠져 나오자 마음은 착잡했다. 갑자기 어디로 가야할 지 망연했다. 나는 한동안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가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광화문으로 가는 큰 길로 빠져나가지 않고 성공회 성당으로 가는 골목길로 내려갔다.
나는 그날 슬리퍼를 성공회 성당 뜨락에 있는 휴지통에 버렸다. 그리고 그 다음 날부터 봉천동 서울대입구역에 집필실로 마련해 놓은 오피스텔로 출근했다. 직장을 그만두었다고 가만히 집에 있을 수는 없었다. 아침이 되어 눈을 뜨면 어디론가 밖으로 나갈 곳이 있어야 했다.
첫날부터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했다.
나는 그런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선 책읽기를 시도했다. 그동안 읽고 싶었던 책들을 목록화해서 한 권 한 권 독파해 나갔다. 물론 읽으면서 시 쓰기를 위한 메모도 열심히 해 나갔다.
오직 책읽기만을 한 지 6개월쯤 지나자 조직에서 일탈되었다는 감정에서 오는 불안이나 두려움에서 차차 벗어날 수 있었다. 나만의 공간에서 나만의 자유를, 나만의 평화와 함께 맛볼 수 있게 되었다. 10여 년 동안 제대로 쓰지 못했던 시가 씌어졌다. 이제 내 꿈을 이룰 수 있는 첫 계기는 마련했다는 기쁨이 조금씩 느껴졌다.
몇 해 전 어느 문학평론가가 문예지 월평란에 쓴 글의 일부이다. 나는 요즘 이 글을 내 책상 앞에 붙여놓고 하루를 맞는다.
‘문학은 결사적이어야 한다. 외롭고 배고프다고 해서 모두 생활로 떠나고 견디지 못한다면 문학도 망하고 문인도 망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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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부 꽃에게 위안 받다
■ 꽃은 왜 피는가
봄이 오자 남녘에 사는 벗이 꽃소식을 전해왔다. “여긴 매화가 피었어! 정말 천지가 다 환하다야”하고 말하는 벗의 목소리에 기쁨이 가득 담겨있다.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고 안부 전화를 하면 “그저 그렇지 뭐”하고 늘 시큰둥하게 대답하는 벗의 목소리에 오랜만에 생기가 돈다. 바람에 떨리는 매화 꽃잎 같은 목소리다. 벗과 전화를 끊고 나자 갑자기 눈앞이 환해진다. 어느 새 나도 연분홍빛 매화가 만발한 들길에 들어선 기분이다.
나는 조금 이른 점심을 먹고 산책을 나간다. 햇살이 따스하다. 대모산 아래 아파트 단지에 사는 벚나무에는 아직 꽃이 피지 않았다. 그렇지만 저 벚나무에도 꽃은 곧 피어날 것이다. 벚꽃이 피면 서울에도 꽃이 피었다고 남녘의 벗에게 전화해야 하리라.
매화나무나 벚나무는 잎보다 꽃이 먼저 핀다. 목련도 개나리도 진달래도 잎보다 꽃이 먼저 핀다.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부터 먼저 보여준다. 참으로 순수한 열정이다. 나뭇가지의 어디에 그런 꽃이 숨어 있었는지 알 수가 없다. 겨울에 그들은 한낱 볼품없는 나뭇가지에 불과하다.
지난겨울에 뜻밖에 커다란 꽃바구니 하나를 선물받은 적이 있다. 꽃은 연분홍 장미꽃이었는데, 그 장미꽃을 감싸며 백합 몇 송이와 마른 나뭇가지 두어개가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꽃이 시들지 않도록 꽃대가 꽂혀 있는 스펀지 부위에다 부지런히 물을 주었다. 그러나 꽃은 며칠 안 가 곧 시들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시들지 않으면 꽃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시든 꽃은 치우지 않으면 추한 법이다. 시든 꽃은 빨리 치워버리는 게 꽃에 대한 예의다. 그런데 그날 시든 꽃을 치우다가 마른 나뭇가지에 눈길이 머물렀다. 왜 꽃바구니에 나뭇가지를 꽂아 놓은 것일까. 혹 꽃이 피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그 나뭇가지를 버리지 않고 컵에 물을 붓고 꽂아놓았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하룻밤을 자고 나자 마른 나뭇가지에 어린 매화 같은 연분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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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들이 연달아 피어났다. 나뭇가지의 어디에 그런 아름다운 꽃들이 숨어 있었는지 한동안 꽃의 신비 앞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이제 나의 육체는 시들어 나뭇가지처럼 거무튀튀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듯 한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나도 이제 그런 나뭇가지처럼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싶다. 나뭇가지와도 같은 나의 육체속에도 아름다운 꽃들이 숨어 있게 하고 싶다. 잎보다 꽃을 먼저 피우는 매화와 같은 순수한 열정을 지니고 싶다. 나뭇가지가 나무의 육체라면 꽃은 나무의 맑은 영혼이다.
봄은 꽃을 피우기 위해서 오고, 꽃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핀다. 봄이 오지 않는데 꽃 피는 법 없고 꽃이 피지 않는데 열매 맺는 법 없다. 추운 겨울을 이기고 견뎌낸 매화나무만이 아름다운 매화를 꽃 피운다. 하늘을 바라보는 자만이 별을 바라볼 수 있듯이 꽃을 피우고 싶은 자에게만 봄은 찾아온다.
■ 꽃에게 위안 받다
하루하루가 고단한 날들이다. 오늘을 사는 이들 중에 고단하지 않은 삶을 사는 이는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한 해가 지날 때 제야의 종소리를 울리며 다사다난했던 한 해라고 하는 말을 다사다난했던 하루라는 말로 대신해도 그리 과장된 말은 아닌 듯싶다. 그만큼 하루를 사는 일이 한해를 사는 일처럼 힘들고 고단하다.
이렇게 사는 일이 힘들 때 우리는 누군가로부터 위로를 받고 싶고 위안의 말을 듣고 싶어 한다.
나는 누군가로부터 말없이 위안을 받고 싶을 때는 노모에게 전화를 한다. 어머니의 목소리는 항상 따뜻하고 반가움에 차있다. 그저 어머니의 음성을
듣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고 힘이 솟는다.
어머니는 내가 지하철을 타고 몇십 분 걸려 점심을 먹으러 가면 기뻐하신다. 있는 거 아무거나 먹어도 된다고 해도 굳이 쌀을 안치고 생선을 굽고 이것저것 묵은 반찬을 꺼내 놓으신다. 그러고는 조용히 내 곁을 지키고 앉아 그저 내가 맛있게 밥을 먹는 모습만 보고도 기뻐하신다.
그러나 어머니가 떠나면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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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며, 고통을 위안받고 싶어 하는 것이 또한 인간
인데, 어머니가 안 계시면 나는 어디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내가 궁극적으로 위안받을 수 있는 곳은 자연뿐이다. 한 송이의 제비꽃이, 한 송이의 해바라기가, 한 송이의 홍색 나리꽃이 최후에 나를 위안해 줄 때가 있다. 푸른 숲길이 내 가슴을 쓰다듬어줄 때가 있고, 머리 위로 날아가는 새 한 마리가 내 눈물을 닦아 줄 때가 있다.
자연에는 위안의 힘이 있다. 인간을 위로하는 어머니 같은 사랑의 힘이 있다. 하루를 다사다난하게 사는 우리에겐 늘 자연이 주는 위로와 위안의 손길이 필요하다. 고통스러울 때 인간은 자연을 통해 위안을 받는다. 인간이 자연을 통해 위안을 받을 때가 가장 고통스러울 때다.
■ 춘란 이야기
춘란이 피었다. 내가 가꾸던 난에서 10년 만에 처음으로 꽃이 피었다. 얼마 전에 난에 물을 줄 때 꽃대가 올라오기 시작했으나 그게 꽃대인 줄을 몰랐다. 그저 새로 촉이 돋는 줄만 알았다. 꽃대 끄트머리에 연분홍 꽃망울이 삐죽이 얼굴을 내 미는 것을 보고 비로소 꽃이 피려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가슴이 뛰었다. 신혼시절 아내한테 “저 아기 가졌어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와 같이 마냥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하루 속히 아버지가 되기를 기다리는 심정으로 꽃이 활짝 피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꽃이 피었다. 평소보다 일찍 출근해서 사무실로 들어서는 순간 갑자기 먼동이 트듯 실내가 환하게 밝아왔다. 어느새 난이 꽃을 피우고 꼿꼿한 잎새 사이로 부끄러운 듯 살며시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얼른 난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난은 밤새워 나를 기다린 눈빛이었다. 난의 입가엔 밤새워 나를 기다린 한 여인의 맑고 고요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나는 첫 아기를 낳았을 때 “축하합니다. 아들입니다”라는 말을 간호사로부터 들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가슴 저 깊은 곳에서부터 기쁨이 치솟아 올랐다. 급히 전화기를 들었다. 그때 “어머니, 아들이에요. 순산했어요”하고 전화했던 것처럼 어머님께 전화를 걸어 “어머니 난에 꽃이 피었어요”하고 소리쳤다.
내가 키우던 난에 꽃이 핀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10여 년 전부터 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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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류의 난을 키우기 시작했으나 지금껏 단 한 번도 꽃 피는 것을 볼 수 없었다. 나는 그게 늘 불만이었다. 난이 나를 외면할 만큼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 것일까. 혹시 꽃을 피울 수 없을만큼 내가 뭔가 크게 잘못된 사람이 아닐까. 나는 늘 그런 생각이 들어 한번은 동화작가 정채봉 형에게 “형, 왜 난을 키우면 꽃이 안 피는지 몰라. 나는 꽃을 피울 수 없는 사람인가 봐”하고 말했다. 그러자 형이 말했다.
“물을 안 주고 학대하면 꽃이 핀대. 너무 사랑하지 말고 한 번 홀대를 해봐.”형은 사랑도 지나치면 사랑이 아니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런데 그 기다림 끝에 처음으로 10년 만에 제주 춘란에 꽃이 핀 것이다. 기다리면 봄이 오듯이 기다리면 꽃이 핀다. 봄은 왜 오는가. 꽃이 피기 위해서 온다. 꽃은 왜 피는가. 세상과 인간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 핀다. 만일 우리가 사는 세상에 봄이 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또 봄이 온다 하더라도 꽃이 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다시 한 번 꽃이 핀 춘란 곁에 앉아본다. 못난 내가 그지없이 아름답다. 인간이 꽃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 아니라 꽃이 인간을 아름답게 한다.
■ 봄바다
화창한 봄날. 문득 바다가 보고 싶어 서해안 서천 가까이에 있는 춘장대 해수욕장으로 갔다. 버스를 타고 마을 입구에서 내려 터벅터벅 20여 분을 걸어가자 소나무 가지 사이로 언뜻언뜻 푸른 바다가 보였다. 때는 썰물이었다. 바다는 젊은 여인이 치마를 걷어 올리고 허옇게 허벅지를 드러낸 듯 백사장을 드러내고 있었고, 그 넓은 백사장 위로 승용차 몇 대가 신나게 달리고 있었다.
눈부신 봄바다를 옆구리에 끼고 달리는 자동차들은 아름다웠다. 숨막히는 서울에서 매연을 뿜어대는 차들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일찍이 바다를 달리는 자동차를 보지 못한 나로서는 그 아름다운 풍경에 한동안 넋을 잃었다. 그것은 마치 어린아이들이 천진하게 바닷가에서 장난감 차를 몰며 장난을 치는 것 같았다.
나는 버려진 나무상자 위에 걸터앉아 자동차들이 달리고 있는 바다를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바람은 차가웠지만 햇볕은 따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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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포장마차에서는 불에 구운 굴과 대합을 안주 삼아 소주를 들이켜는 사람과 허리를 굽히고 컵라면을 먹는 처녀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때였다 느닷없이 타이탄 트럭 한 대가 바다를 향해 달려갔다. 트럭의 운전석 옆에는 운전자의 부인과 그 아이들이 타고 있었다.
‘아, 타이탄 트럭도 저렇게 아름답게 느껴질 때가 있구나.’
나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타이탄 트럭의 아름다움이 바로 바다 때문임을 이내 알아차렸다.
바다는 스스로 배경이 되어 모든 사물을 아름답게 만든다. 고맙게도 타이탄 트럭조차도 아름답게 만든다. 타이탄 트럭은 가난한 이들의 벗이다. 내 친구인 시인 박해석은 <타이탄 트럭>이라는 그의 시에서 ‘변두리로 쫓겨가는 일가족의 비 맞은 이불 보따리도 싣고 달리고’라고 노래한 바 있다.
나도 한 때 타이탄 트럭을 타고 이사를 참으로 많이 다녔다.
이사할 때 타이탄 트럭에 짐을 다 싣고 나면 내가 탈 자리가 없어 어떤 때는 트럭에 짐짝처럼 실려 서울 시내를 달리게 된다. 그때 바라보게 되는 거리의 풍경은 쓸쓸하다 못해 서러웠다. 그래서 그때 타이탄 트럭에 짐짝처럼 실려 도시 한복판을 달려보지 않은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지금도 내 마음속에는 가난한 가장이 운전하는 타이탄 트럭이 바다를 배경으로 달리고 있다. 멀리 암벽이 있는 해안까지 달려갔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몇 차례나 반복한다. 나는 타이탄 트럭까지 아름답게 해주는 봄바다가 고맙다. 바다는 가난의 추억까지 아름답게 해준다.
■ 봄의 강가에서
이제는 꽃들도 인간을 닮아 제 삶의 속도를 잃어버리고 보다 빨리 피어난다. 예년에 비해 보름이나 빨리 피어난 꽃들이 반갑고 기쁘기는 하지만, 그 빠름 속에 오만함과 성급함도 함께 피어난 듯해서 어지럽다.
늦게 피어난 꽃보다 빨리 피어난 꽃들이 먼저 시든다. 어제 아침에 피어난 꽃들이 오늘 저녁에 이리저리 흩날린다. 꽃은 아름답게 낙화함으로써 존재적 완결성을 드러내지만, 인간은 꽃처럼 낙화하지 못하면서도 빨리 피어나고 빨리 이루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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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꽃을 보고 강가로 나가 느린 강물을 바라본다. 강물은 완만히 흐름으로써 비로소 새소리와 벌레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급류가 되어 급하게 흐를 때는 자신의 욕망의 물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물은 깊게 못을 이룬 곳에서는 소리가 없는 법, 이제 저 강물이 느리게 느리게 바다에 이르면 제 이름조차 없어질 것이다.
인생은 물리적 시간이다. 신이 우리에게 준 시간의 양과 질은 공평하다. 다만 신은 우리 각자에게 시간을 요리하는 재량권을 주었을 뿐이다. 어떤 이는 시간을 급하게 요리하다가 불에 태워 제대로 먹지 못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천천히 노릇노릇 알맞게 잘 구워 맛있게 먹기도 한다.
■ 하루살이에 대한 명상
여름 저녁 해거름에 양재천을 산책하면 하루살이 떼가 얼굴을 덮친다. 맹렬하다. 양손을 휘저어 흩어지게 해도 소용이 없다. 계속 산책길을 방해해 제대로 앞으로 걸어갈 수가 없다.
실은 하루살이들이 무리지어 춤추듯 날아다니는 것은 수컷과 암컷이 서로 혼인 비행을 하는 것이다. 하루살이의 일생 중 가장 소중한 삶의 순간을 사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인간인 내가 군무를 이루어 나누는 뜨거운 사랑의 비행을 방해하니 하루살이인들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하루살이 애벌레는 짧게는 1개월, 길게는 3년간 물속에서 자란다. 다 자란 애벌레가 성충이 되면 주로 물가에 살면서 밤이면 공중에 떼지어 날아다닌다. 그러면서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3주 정도 사는데 대부분 하루라는 짧은 생을 살아 하루살이라고 부른다.
신은 왜 하루살이에게 하루의 삶밖에 허용하지 않은 것일까. 하루살이의 입장에서는 신이 원망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인 나의 생각일 뿐 하루살이는 그 하루라는 일생 동안 짝짓기를 하고 알을 낳고 열심히 살다가 죽는다. 아침에 태어났다가 저녁에 죽는다고 신을 원망하지 않는다. 주어진 운명에 순응해서 최선을 다해 찰나라는 짧은 순간을 영원처럼 산다.
인생이라는 시간은 짧다 누구나 죽음에 이르면 지나온 한평생이 하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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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겨진다. 백마가 문틈으로 휙 지나가는 짧은 시간, 새 한 마리가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옮겨 앉는 그 짧은 시간이 바로 인생이라는 시간이다. 지금 건강하게 살아 있다 해도 누구나 짧고 덧없는 인생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따라서 하루살이의 하루라는 시간과 인간의 평생이라는 시간은 서로 같은 의미와 가치를 가진다.
죽음과 삶은 동의어이다. 삶이 있기 때문에 죽음이 있다. 죽음은 삶의 결과다. 어떻게 잘 사느냐에 따라 어떻게 잘 죽느냐 하는 문제가 결정된다.
죽음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주기 위해 존재한다. 따라서 오래 살기를 바라는 것보다 사는 동안 어떻게 열심히 최선을 다해 보람되게 사는가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 만일 하루살이가 하루밖에 살지 못한다고 원망만 하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무리 단 하루밖에 살지 못해도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열심히 살아야 한다. 아무리 주어진 시간이 없다 하더라도 사랑하는 짝을 찾아 공중 비행을 해야 한다. 그래야 하루살이의 일생은 가치 있는 생이 된다.
이제 나는 저녁 해거름에 산책을 나가더라도 내 앞에 난무하는 하루살이 떼를 미워하지 않기로 한다. 하늘 높이 사랑을 찾아 난무하는 그들을 미소를 띠고 묵묵히 응원하기로 한다. 내가 하루살이만큼이라도 열심히 살아왔는지 성찰의 시간을 갖기로 한다.
■ ‘어린왕자’같은 사람
정채봉 형을 입관하던 날, 나는 형의 임종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마지막으로 형의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 입관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관 뚜껑이 덮이고 나자 나는 손가락으로나마 형의 관을 두드려보고 싶었다. 관 두껑을 닫은 뒤 ‘탕’하고 관을 두드렸을 때 나는 소리의 청탁에 따라 그 사람의 일생을 평가할 수 있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형의 관을 두드렸다면 무슨 소리가 났을까. 아마 산사의 맑은 종소리가 났을 것이다. 아니면 솔바람 소리나, 노을 지는 강가를 거니는 물새들의 고요한 발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형은 곧잘 나더러 ‘족보에 없는 동생’이라고 말했고, 나 또한 그를 ‘족보에 없는 형님’이라고 생각했다. 크든 작든 힘들든 힘들지 않든, 나는 형이 부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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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일을 거절한 적이 없었고, 형 또한 내가 부탁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었다. 형이 발병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매년 제야의 밤이 되면 꼭 만나 소주잔을 나누면서 살아온 날들과 살아갈 날들을 두런두런 이야기하곤 했다.
당시 수원 화서역에서 전철을 내리면 논길을 따라 족히 20여 분은 걸어가야 형 집이 나왔다. 한번은 형이 술에 취해서 무논에 사는 물고기 한 마리를 신고 있던 구두짝에다 물하고 같이 찰랑찰랑 넣어 담아가지고 집으로 돌아간 적이 있다.
“논둑을 걸어가는데 말이야. 달빛이 참 고와. 아, 그런데 논에 피라미 녀석들이 있잖아 그래서 내가 한쪽 구두를 벗어 한 마리 떠왔지.”
그런 말을 하며 머쓱 웃던 형의 맑은 미소를 나는 잊지 못한다. 아무리 술에 취했기로서니 신고 있던 구두에다 피라미를 넣어 달빛 아래 맨발로 걸어갈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렇게 형은 동심을 잃지 않은 ‘어린왕자’같은 사람이었다.
■ 성철 스님
성철 스님이 돌아가시기 10여 년 전에 스님께서 사시던 백련암 손님방에서 하룻밤을 잔 적이 있다. 잡지사 기자로 일하고 있던 나는 그때 스님을 인터뷰하고자 했으나 스님은 인터뷰를 허락해 주시지 않았다. 그 대신 서면 질문을 해주면 스님께서도 서면으로 답변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그날 밤 무슨 질문을 할까 곰곰이 생각하면서 백련암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백련암의 초가을 밤은 깊고 고요했다. 큰스님 주무시는 곳에서 함께 밤을 맞이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보름달처럼 벅차올랐다.
물론 잠은 오지 않았다. 해인사의 종소리가 은은히 들려오는 깊은 새벽에 벌떡 일어나 스님 주무시는 방을 바라보았다. 스님 방엔 어느새 맑은 불이 켜져 있었고, 얼핏 스님께서 별빛 아래 마당을 거니시는 모습이 보였다.
그날 나는 해인사에서 하안거 해제 설법을 마치고 백련암으로 걸어 올라가시는 성철 스님과 함께 가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나는 사진 기자와 함께 부지런히 스님 뒤를 따라갔다. 스님은 젊은 청년처럼 훠이훠이 빠른 걸음으로 산을 올라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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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가는 길, 호랑이가 그려져 있는 백련암 표지판 앞 큰 바위에 앉아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자연스럽게 포즈도 취해 주시면서 “왜 그렇게 사진을 많이 찍느냐”고 물으셨다.
그래서 내가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많이 찍어야 한다”고 말씀드리자 스님께서는 “그러면 천 번을 찍어라”하고 말씀하셨다. 그때 나는 ‘아이구, 천 번이나?’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차차 시간이 지나고 나자 그 말씀이 ‘무슨 일을 하든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하라’는 뜻이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뒤 스님께서 돌아가셨을 때 나는 해인사에 다시 들렀다. 해인사 입구에서 내가 가장 먼저 만난 사람은 나이 많이 들어 뵈는 어느 걸인이었다. 두 다리가 없어 허벅지에다 낡은 타이어 조각을 친친동여매고 있던 그는 해인사로 올라가는 산길 한 모퉁이에 제법 큼직해 뵈는 플라스틱 바구니 하나를 놓고 엎드려 있었다.
그런데 바구니 속에 든 돈이 제법 많아보였다. 얼핏 눈으로 헤아려 보아도 천 원짜리 지폐가 스무여 장은 넘어 보였다. 그래서 “오늘 돈 좀 벌었어요?” 하고 말을 걸어 보았다. 그러자 걸인의 대답이 뜻밖이었다.
“네 우리 큰스님 덕분에 아주 많이 벌었습니다. 스님은 돌아가셔도 이렇게 많은 자비를 베푸십니다.”
그의 목소리엔 힘이 있었고, 얼굴 또한 환해 보였다.
성철 스님의 법체를 다비하는 날에 10만여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몰려들 줄 알았다면, 성철 스님께서는 아마 돌아가시지도 않으셨으리라는 생각이 다 들었다.
나는 제자 스님들이 기다란 작대기로 연화대에 불을 붙이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들은 늘 세속을 초탈하는 마음을 지니고 수도 정진하시는 분들이기 때문에 울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그런 모습이 마치 아버지를 멀리 떠나보내는 어린 아들들의 모습 같아 내 마음도 눈물에 젖었다.
밤이 깊어가자 늦가을 산속은 무척 추웠다. 사람들은 하나 둘 자신도 모르게 불길 곁으로 모여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깨달았다. ‘아! 지금 이 불길은 무엇인가. 바로 스님의 법체를 태우는 불길이 아닌가. 스님께서는 자신의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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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태워서 나를 추위에 떨지 않게 해 주시는구나.’
이제 큰스님 가신 지 10여 년이 지났다. 얼마 전에는 큰스님이 태어나신 고향땅에 ‘성철 스님기념관’과 ‘겁외사(劫外寺)’라는 이름의 절도 지어졌다.
내가 생각하기에 성철 스님은 평생 동안 어린이의 마음을 결코 잃지 않으신 분이다. 평소 어린이라면 참으로 귀여워하셨는데, 그 까닭을 곰곰 생각해보면 바로 당신 자신이 맑고 깨끗한 어린이의 마음을 항상 지니고 계셨기 때문이다.
사진을 찍으려면 천 번을 찍어라.
나는 스님의 이 말씀을 잊은 적이 없다.
시를 쓰려거든 천 번을 써라.
아무리 생각해도 바로 이 말씀이기 때문이다.
■ 시인은 죽어서도 시를 쓴다
- 윤동주 시인의 무덤을 찾아서 -
나는 윤동주의 무덤을 처음에 사진으로 미리 보았다. 1980년대 말 어느 시사 잡지를 뒤적이다가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누런 겨울 풀들이 흔들리고 있는 황량한 벌판을 배경으로 북간도의 파란 겨울 하늘이 쓸쓸히 무덤을 쓰다듬고 있는 그런 한 장의 사진이었다. 나는 그 사진을 오려 호주머니 속에 넣고 다녔다.
1989년 여름에 백두산 천지를 보고난 후 연길시로 돌아온 그 다음 날, 나는 윤동주의 무덤을 찾아 용정으로 가는 버스에 몸을 싣게 되었다. 시인의 이름으로 윤동주의 무덤을 찾아간다는 사실 앞에 내 가슴은 한없이 떨렸다.
버스가 해란강이 흐르는 ‘룡문교’를 지나 용정 지명의 기원이 되는 우물인 ‘룡두레 우물’터에 잠시 멈췄을 때 나는 윤동주가 이 우물물을 먹고 자랐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은 뚜껑을 덮어 아무도 쉽게 물을 마실 수 없게 만들어 놓았으나, 예전에 서울이나 평양에서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온 윤동주는 이 용두레 우물터에 먼저 들러, 한 바가지 시원한 고향의 샘물부터 마셨을 것이다.
해란강 구두점, 발해반점, 봉선화 식당, 옥란꽃 음식점, 발해 자동차 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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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 연길눈꽃아이스크림 공장, 귀염둥이 탁아소, 아리랑파마, 천사 미장원 등 한글 간판이 즐비한 용정 거리는 마치 우리의 고향과 같은 포근함을 주었다. 용정 시민들은 윤동주 시인의 영향을 받아 거리의 간판에도 시를 쓰는 모양이었다.
- 윤동주는 용정에서 30리 남쪽의 명동촌에서 출생, 고종사촌이자 친구인 송몽규와 함께 해란강 강가에서 물장구 치며 자람
- 용정중학교 :윤동주의 모교, 윤동주의 업적을 기리는 글과 그림이 전시된 용정중학교 력사박물관이 있음
어두컴컴한 역사관에서 내가 만난 것은 윤동주의 대형 초상화였다. 용정중학교 미술 교사인 한극남씨가 1985년에 그린 그 그림엔 후쿠오카 감옥의 쇠창살을 쇠사슬에 묶인 두 손으로 꽉 움켜잡은 청년 윤동주가 애처로이 창살 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그 초상화를 보는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윤동주의 고통에 찬, 한없이 맑고 슬픈 눈빛이 한 순간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아 부끄러웠다.
윤동주의 중학교 학적부도 보여 주었는데 학적부는 낡은 미농지를 한서(漢書)처럼 묶어 놓은 것이었다. ‘보호자 윤영석(尹永錫), 직업 상업(포목상), 순위 4학년 18/38, 5학년 6/8, 발육-온순 성실 온건 방정 단정 등의 글씨가 펜글씨로 씌어 있었으며’, 5학년 졸업 할 때의 과목별 성적은 ‘독본 50, 문법 62, 작문 52, 조선어 88, 영어 81’ 등으로 나타나 있었고 일본어 세 과목은 낙제점이었다. 용정중학교 전임 학교장이자 ‘윤동주 장학금 위원회’ 회장이기도 한 류기천씨는 “윤동주의 일본어 점수는 일부러 의지적 저항을 한 것이므로 낙제점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버스가 둔덕을 넘어가자 우리 선조들이 쪽박 차고 아기 업고 북간도로 올 때 넘었던 원한의 오랑캐령이 보였으며, 노래 <선구자>의 무대인, 지금은 용주사도 일송정도 없어진 비암산이 보였다.
윤동주는 키 작은 소나무들이 듬성듬성 자란 솔밭 곁에, 용정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동산기독교묘지에 말없이 누워 있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살다간 그는 어쩌면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며’ 언젠가 찾아올 조국의 동포들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모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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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바라는 윤동주는 죽어서 잡초가 무성한 북간도 땅에 조용히 누워 있었다.
나는 윤동주 무덤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은 뒤, 1945년 6월 14일 단오절에 일주, 광주 두 동생의 이름으로 세운 윤동주의 묘비 뒷면을 살펴보았다. 거기엔 윤동주의 일생을 기록한 글이 짧게 적혀 있었다. 그 중 한 구절을 훈독해 보면 다음과 같다.
‘죽을 때 그의 나이 스물아홉, 사람됨이 당대에 큰 인물이 됨 직했고, 그의 시 비로소 사회에 울려 퍼질 만했는데, 춘풍무정, 꽃은 피우고도 열매는 맺지 못하였나니, 아아 애석하도다, 그대여.’
일본 제국주의의 칼날 앞에 무참히 쓰러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사랑했던 사람, 한 시대의 괴로움을 슬프고도 아름다운 언어로 노래했던 시인 윤동주, 그는 지금 남의 땅 북간도 용정에 묻혀 해란강을 굽어보며 잠들어 있으나, 그를 사랑하는 우리들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있다.
아, 나도 윤동주의 발밑에라도 드는 그런 시인이 될 수 있었으면…….
■ ‘광야’의 시인 이육사
예전에 시인 김명수 형과 함께 이육사 시인의 한 점 혈육인 이옥비 여사를 찾아간 적이 있다. 당시 명수 형은 창비아동문고로 출판할 이육사 전기를 쓰고 있었는데, 마침 형이 육사의 따님을 만나러 간다기에 나도 따라나섰다. 이옥비 여사는 육사가 서울 문화촌에 살면서 본격적으로 시를 쓰던 서른여덟 때쯤 뒤늦게 얻은 딸로 강동구 길동에 있는 한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그날 그녀는 동근테 안경을 쓴 젊은 날 육사 사진과 친필 시 등을 보여 주었으며 아버지 육사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단 하나의 장면을 약간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해 주었다.
그것은 아버지 육사가 청량리역에서 일경들에게 온몸이 오랏줄에 꽁꽁 묶인 채 붙들려 가는 장면이었다. 그때 육사는 어린 딸 옥비를 업고 울고 있는 아내를 바라보았는데 당시 옥비는 다섯 살이었다.
“제가 아버지를 기억하는 것은 그것밖에 없어요. 아버지는 그때 북경으로 끌려가 모진 고문 끝에 해방되기 한 해 전 정월에 돌아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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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육사가 내 모교인 대륜고등학교(당시는 교남학교)선배라는 사실을 생각하고 있었고 형은 나라를 위해 목숨마저 초개같이 버린 육사의 생애에 대해 깊은 감동을 느끼는 듯 했다.
그리고 얼마 후 명수 형이 이 육사 전기를 다 썼다고 하면서 얼핏 지나가는 말로 이런 말을 덧붙였다.
“이번에 이육사 전기를 쓰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게 있어. 그건 시인한테는 시도 중요하지만, 시인으로서 어떠한 삶을 살았느냐 하는 것도 아주 중요하다는 점이야. 우리도 이제 한 사람의 시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보다 깊이 생각해야 될 때가 되었어. 육사를 한 번 봐. 그의 시는 그의 삶에서 나왔어. 아마 육사가 조국 광복을 위해 차가운 중국 대륙에서 항일 운동을 벌이지 않았다면 <광야>같은 시는 나오지 않았을 거야.”
나는 그때 형의 말이 비수처럼 가슴에 날아와 박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시인에게 있어서는 시도 중요하지만 그 삶 또한 중요하다는 점은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 책 예찬
<타임머신>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확실하지는 않지만 한 소년이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가서, 미래의 여러 세계를 두루 경험하고 다시 현재의 집으로 돌아오는 내용의 영화로 기억된다.
그런데 그 영화를 통해 본 미래의 장면 중에 지금도 잊히지 않는 장면이 하나 있다. 그것은 어느 파괴된 도서관 서가에 꽂혀있던 책들에 대한 장면이다. 타임머신을 타고간 소년이 서가에 꽂힌 책을 꺼내면 책들은 모두 꺼내는 족족 먼지가 되어 바스러져 버린다.
나는 그때 폭삭 사그라지는 책의 소멸을 보며 몹시 충격을 받았다.
미래엔 책들이 없어지다니! 미래의 사람들은 책이 없어도 행복하게 잘 살 수 있다니! 하는 충격에서 잠시 동안 헤어나오지를 못했다. 나는 그것을 처음엔 미래는 책조차 필요없을 만큼 행복한 세계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라고 이해했다. 미래인들의 행복을 역설적으로 책의 소멸을 통해 나타낸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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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책의 소멸 장면은 미래의 행복보다는 불행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책조차 버리고 살게 된 미래인들의 불행한 모습, 정신의 괴로움 보다는 물질의 편안함을 추구하는 미래인들의 삶의 한 단면을 통해 현재인들에게 책의 소중함을 경각시킨 것이었다. 인간은 책과 더불어 살 수밖에 없으며, 책과 더불어 살아가야만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인간에게 책이 없으면 돈이 없는 것과 같다. 돈이 없으면 배가 고파도 밥을 먹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책이 없으면 마음의 배가 고파도 그 고픔을 달랠 길이 없다. 나는 육체의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지만 마음의 배고픔은 더더욱 견딜 수가 없다. 무엇이든 읽지 않고는 단 하루도 살지 못한다. 때가 되면 밥을 먹어야 하는 것이 인간인 것처럼 때가 되면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이 또한 인간이다.
책에도 운명이 있다. 이제 곧 이 지상에서 종이책이라는 매체의 한 형태가 사라질 것이라는 주장도 대두되고 있고, 또 전자종이와 전자책의 등장으로 그 조짐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책이 사라진 세상, 책이 필요 없는 세상이 오게 될까. 책 읽는 인간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없는 날이 오게 될까.
나는 단연 그런 날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날이 바로 인간의 죽음의 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책의 죽음은 곧 인간의 죽음이다. 만일 그런 날이 온다면 인간은 영혼을 잃게 될 것이다.
책은 인간 영혼의 한 구체적인 모습이다. 인간의 영혼을 찾아볼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책이다. 우리는 책을 통해서 인간의 가장 순수한 영혼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책은 인간의 영혼의 먹이이자 모유다.
가야산에서 열반한 성철 스님도 책이라는 모유를 통해서 큰스님이 되었다.
그는 열 살이 되기 전에 사서삼경 등의 경서를 독파했고, 청소년기에는 서울총독부도서관을 찾아가 책읽기에 대한 갈증을 풀었으며, 읽을 책이 다 떨어지자 현해탄을 건너가 동경대학도서관에서 몇 달씩 책에 파묻혔다. 당시 수백마지기의 땅을 팔아 불교 서적만 사들였던 천석꾼 김병연씨는 자신이 사 모은 책을 읽고 이해할 만한 사람을 찾고 있다가 성철 스님에게 아낌없이 그 책을 전부 물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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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성철 스님이 출가를 결심한 것도 한 권의 책 때문이었다. 우연히 노승이 지나가다가 그에게 영가대사의 <증도가>한 권을 주었는데 그는 그 책을 받아 읽고 심안이 밝아짐을 느껴 “시원한 것이 여기 있구나”하고 수행자의 길로 들어섰다.
책은 한 인간의 일생과 영혼의 모습을 결정짓는다. 우리는 책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름다워질 수 없다. 인간은 책을 읽을 때가 참으로 아름답다.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인간의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라면, 책을 읽는 노인의 모습 또한 아름다운 모습이다. 햇볕이 따스한 뜰에 나와 손자가 노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슬그머니 의자에 앉아 돋보기안경을 끼고 책장을 펼치는 노인의 모습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도 가끔 한권의 책이 되고 싶다. 이른 아침 창가로 햇살이 스며들 때 책상위에 놓여 있는 한권의 책, 시집이면 더 좋겠다. 시집이 되어 사랑하는 여인의 책상위에 놓여 봄햇살을 받고 싶다. 나를 넘기는 여인의 손가락과 눈빛의 향기를 마음껏 맡고 싶다.
■ 죽음도 외로워서는 안 된다
미국의 외과의사 셔원 B. 누랜드가 쓴 <우리는 어떻게 죽는가>라는 책이 있다. 그는 그 책에 외과 의사로서의 오랜 경험, 각종 질병으로 죽어간 수많은 환자들에 대한 40여 년 동안의 경험을 기록해 놓았다. 심지어 자신의 가족들이 죽어가는 과정마저도 섬세하게 관찰하고 치밀하게 기록해 놓았다. 자연과학도라기 보다는 문학도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문장이 수려하고 사고의 폭이 깊고 넓었다.
그는 죽음을 인생의 실패로 보지 않고 승리로 보았다. 그에게 죽음은 인생의 또 하나의 출구이며 희망이었다.
“각자의 인생이 다르듯 죽음 또한 다르며, 각자에게 각기 알맞은 죽음이 있다. 우리는 누구나 편안한 죽음,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해야 할 권리가 있으며, 죽어가는 사람을 외롭게 해서는 안 된다.”
그 책에서 크게 감동받은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다. 죽어가는 사람을 외롭게 해서는 안 되며, 죽음에도 품위가 있어야 한다는 부분에 밑줄을 그었다.
나는 지금껏 노인의 일상을 외롭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만 했지, 한 걸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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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아가 노인의 죽음을 외롭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해 본적이 없다. 도구나 죽음의 품위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어떻게 하면 죽음을 준비하는 내 부모님이 품위 있게 죽을 수 있을까. 그것은 그들을 외롭게 하지 않음으로써 이룰 수 있는 게 아닐까.
“죽음 가운데 있는 자를 외롭게 하지 말라. 외로움 가운데서 혼자 죽게 하지 말라. 의식이 불명한 상태에서도 영혼은 서로 교류된다. 죽어가고 있는 자에게 고독만큼 무서운 것은 없다.”
■ 첨성대
첨성대와 나는 참으로 인연이 깊다. 나는 중학생 때 방학만 되면 첨성대 바로 앞에 있는 초가집에 가서 며칠씩 지내곤 했다. 사촌형제들이 경주와 불국사 사이에 있는 동방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경주 시내에 있는 중학교를 다니게 되자 외할머니가 아예 집을 하나 사서 사촌들 뒤치다꺼리를 하셨는데, 그 집이 바로 첨성대 앞에 있는 초가집이었다.
그 집에서는 창호문만 열면 바로 코앞에 첨성대가 있었다. 그러니까 첨성대는 외할머니 집 앞마당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그 초가집이 없어져 여간 아쉬운 게 아니지만, 다행히 초가집 바로 앞에 있던 우물은 아직도 첨성대 울타리 안에 남아 있다.
그때만 해도 첨성대 기단 바로 앞에까지 채소밭이 있었고 나 같은 장난꾸러기들의 놀이터였다. 나는 사촌들과 곧잘 첨성대 창문 안으로 기어들어가 놀곤 했다. 첨성대를 기어오르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첨성대는 화강암을 한 단 한 단 조금씩 안으로 디밀어 원형을 만들면서 쌓아 놓았기 때문에 몸을 밀착시키면 사람 하나는 충분히 기어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안이 그렇게 아늑하다는 것이었다. 그 안은 마치 닭둥우리처럼 오목하고 아늑했다. 여름에 무더위가 기승을 부려도 그 안은 시원하다 못해 서늘했다. 겨울에는 아무리 찬바람이 휘몰아쳐도 그 안만은 따뜻하고 포근했다. 마치 어머니의 품속 같았다. 그 무렵 첨성대는 우리들의 어머니이자 할머니였다. 우리는 마치 어머니의 품속을 파고들 듯 첨성대 품속을 파고들었다.
나는 가끔 밤에도 첨성대에 올라가 보았는데, 첨성대 창문을 통해 계림숲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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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월성 너머로 보이는 밤하늘엔 유난히 별들이 찬란했다. 천장의 사각의 구멍 사이로 보이는 밤하늘에서는 와르르 별이 쏟아지는 것만 같아 몇 번씩 몸을 낮추곤 했다. 그러다가 살짝 첨성대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면 어느 집에서인지 모깃불 사그라지는 불빛이 몇 점 보이기도 하고, 먼 데 초가 마을 어느 창문에서는 누가 공부를 하는지 밤늦게까지 호롱불이 가물거리기도 했다.
사촌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외할머니가 사시던 초가집은 문화재보호지역으로 수용되어 허물어져버렸다.
그후 나는 하얀 보름달이 떠 있는 날, 첨성대 꼭대기에 소복입은 여인이 올라가 훌쩍 뛰어내려 자살하는 꿈을 꾸곤 하면서 늘 첨성대를 그리워했다. 그리고 그 그리움은 나로 하여금 <첨성대>라는 제목의 시를 쓰게 했고, 그 시는 마침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그러니까 어느 편으로는 첨성대가 나로 하여금 시인이 될 수 있도록 해준 셈이다.
■ 에밀레종
어릴 때 에밀레종 속에 들어가 본 적이 있다. 당시 에밀레종은 경주 시내 구 박물관에 있었는데, 마침 외갓집이 그 가까이 있어 여름 방학에 놀러 갔다가 에밀레종을 보러 간 적이 있다. 에밀레종은 외벽이 없고 기둥만 있는 기와집 같은 종각 안에 매달려 있었는데, 어린 내 마음에 크기만 집채만 했지 어떤 감흥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런데 그날은 어디서 고위직 관리가 와서 에밀레종 소리를 직접듣기를 원한 모양이었다. 박물관 관리인 한 사람이 그 사람 앞에서 직접 종을 쳐 보였다. 열쇠로 종각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 몇 번이고 힘껏 종을 쳤다. 덕분에 나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에밀레종 소리를 들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지금은 종신에 균열 현상이 나타나 더 이상 종을 치지 않는다.)
에밀레종 소리는 장중했다. 깊은 산골짜기에 낙뢰와 폭풍이 메아리치는 것처럼 격정적이었다가 차차 잦아든 여운의 끝은 한없이 길고 부드러웠다. 그쳤는가 싶으면 또 계속 가늘게 소리가 나고, 소리가 나는가 싶으면 또 어느새 그쳐있었다. 쇳물에 어린 소녀 한 명을 집어 던져 종을 만들었다는 전설을 들은 탓인지 종소리가 가늘어질수록 그 소녀가 ‘에미 때문에, 에미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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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하고 어미를 원망하는 소리처럼 들려 또한 신기했다.
관리인은 두 팔로 종메(종을 치는 나무봉)를 길게 뒤로 빼내었다 힘껏 내리치곤 했는데, 한 열댓번 치고 나서는 그대로 종각 출입문을 열어 놓고 고위직 관리를 다른 곳으로 안내했다.
나는 종각문이 열린 것을 보자 순간 호기심이 일었다. 크게 망설일 것도 없이 같이 간 사촌에게 망을 보게 하고 얼른 에밀레종 속으로 기어 들어갔다. 종은 바닥에서 50Cm 정도 높이에 매달려 있었는데,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었다.
나는 종속으로 들어가자마자 공포감에 휩싸였다. 얼마나 무서운지 몸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어른 손가락 굵기 만한 쇠줄에 종이 매달려 있다는 사실을 그때는 알지 못했으나, 내가 종 안에 있는 상태에서 그대로 종이 쿵하고 내려앉아버릴 것만 같아 무서웠다. 만일 종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면 나는 영원히 종 속에 갇혀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런 공포감도 차차 시간이 지나자 가라앉았다.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종 속을 살펴보았다. 종 안 벽엔 온갖 낙서가 쓰여 있었다. 분필로 이름을 쓴 것이 가장 많았다. 여자 나체 그림을 조잡하게 그려놓은 것도 있었고, 누구하고 누가 뭐 뭐 했다는 성적 표현이 상스러운 낙서도 있었다. 그러니까 나 같은 개구쟁이가 그 이전에도 많았던 모양이었다.
지금도 내 가슴속에는 에밀레종 소리가 메아리칠 때가 많다. 처음에는 노을 진 아침 하늘을 뒤흔들어 놓듯이 장엄하고 웅장하게 울려 퍼지다가 차차 맑고 가는 소리가 연꽃잎에 이슬 구르는 소리로 이어질 것 같으면서도, 그치고 그칠 것 같으면서도 계속 이어진다.
나는 내 가슴속에 하나의 종이 매달려 있는 것 같아 늘 기쁘다. 내 가슴이 종각이라면 그 종각 안에는 에밀레종이 달려 있다. 언젠가 에밀레종에 대해 이야기해 주시던 경주 외삼촌의 말씀을 나는 늘 잊지 않고 있다.
“에밀레종은 사람의 새끼손가락으로 쳐도 소리가 난다는 신비의 종이다. 에밀레종 소리는 우리 인간의 마음의 소리이자 영혼의 소리라고 할 수 있다.
에밀레종 소리를 귀로 듣는 사람은 많지만 정작 마음으로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종도 소중하지만 종메도 소중하다는 것을 늘 잊지 않도록 해라. 사람들은 종만 생각할 줄 알지 종메를 생각할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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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른다. 종메가 없으면 아무리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종이라 할지라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없는데도 말이다. 사람들은 다들 종이 되려고만 하지 종메가 되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게 왜 그런지 아니? 그건 종메가 되면 종을 칠 때마다 제 몸을 쇠붙이에 아프게 부딪쳐야 하는 고통이 따르기 때문이다.
앞으로 세상을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종보다는 종메로서의 삶이 더 중요하다. 이 세상에 고통 없는 삶이 어디 있겠느냐 말이다.
2015. 7. 1
* 다음에 3부 4부가 이어집니다.
우리가 어느 별에서 (2)
■ 정호승 지음
◉ 3부 우리는 언제 외로운가
■ 우리는 언제 외로운가
요즘 가까운 이들에게 외롭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그들은 차를 마실 때나 전화를 할 때나 이메일을 보낸 때 요즘 왜 그렇게 외로운지 모르겠다는 말을 곧잘 한다. 마치 그렇게 말이라도 하고 나면 조금이나마 외로움이 덜어진다는 듯이.
“그건 당연한 거야. 외로우니까 사람이잖아.”
나는 그들이 그런 말을 할 때마다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사람은 다 외로워 안 외로운 사람 어디 있어”하는 말도 덧붙인다.
나의 그런 말에 그들이 위안을 받는지 어쩐지는 모른다. 그러나 나 자신은 그렇게 말함으로써 스스로 위안을 받는다.
나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왜 이렇게 외로운지 모르겠다. 봄에 꽃이 피는 것을 봐도 외롭고, 꽃이 지는 것을 봐도 외롭다.
비행기 안에서 장렬하게 지는 서해의 저녁 해를 보아도, 풀 한 포기 없이 끝없이 이어지는 모래사막을 보아도 나는 외롭다. 성당에 들어가 장궤대에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에는, 친구와 밤늦도록 술잔을 나눌 때에는, 시를 쓰려고 혼자 책상에 앉아 있을 때에는 더더욱 외롭고 처절하다.
이렇게 나에게도 외로움이란 내가 매일 먹는 물과 밥과 같다. 물을 마시지 않고 밥을 먹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에 매일 그 밥과 물을 먹는다.
우리는 이 외로움의 당연함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이 당연함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삶은 고통스럽다. 인간은 외로운 존재라는 이 당연한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인간의 삶을 이해할 수 없다.
어쩌면 외로움을 이해하는 데서부터 인간의 삶은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태어날 때도 혼자 외롭게 태어나지만 죽을 때도 혼자 외롭게 죽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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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말 우리에게 외로움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는 것일까. 생각해보면 한 가지 길은 있다. 그것은 사랑을 하는 일이다. 혼자 있어도 마음속에 사랑이 가득 있으면 외롭지 않다. 우리가 단순히 물리적으로 혼자 있기 때문에 외로운 것은 아니다. 마음속에 사랑이 없기 때문에 외로운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을 때 외롭다. 우리는 사랑하지 않을 때 혼자이고, 혼자일 때 바로 외로움을 느낀다.
■ 잊을 수 없는 사랑
사람은 누구나 사랑이 없으면 살지 못한다. 누구를 사랑하거나 누구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하면 단 하루도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한다. 만일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없고 나 또한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면 나는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등에 무덤을 지니고 다니는 홑껍데기에 불과하다.
나에게는 잊히지 않는 사랑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외할머니의 사랑이다. 외할머니는 며느리가, 그러니까 내게는 외숙모가 일찍 세상을 뜨는 바람에 코흘리개 손자 손녀를 네 명이나 손수 길러내신 분으로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사탕 한 알도 제대로 잡수시지 않으셨다. 낮잠은커녕 편안히 손을 놓고 앉아 쉬는 법이 없었으며, 몸져눕지 않는 대낮에 자리에 누워 있는 일이란 없었다.
나는 경주에 있는 외할머니 댁에 방학만 되면 가서 며칠씩 놀곤 했다. 한 번은 겨울 방학에 내가 경주에 갔을 때였다. 외할머니가 나를 보고도 그리 반가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나는 못내 섭섭했다.
그날 새벽이었다. 소변을 보고 싶어 일어나 마당 한 귀퉁이에 있는 변소를 찾아갔다. 바람은 몹시 찼다. 마침 하늘에는 진눈깨비가 흩날리고 있었다. 그런데 오줌을 보고 돌아오다 보니까 누군가 내가 자는 방 아궁이 앞에 쭈그리고 앉아 군불을 때고 있었다. 누군가 하고 보자 바로 외할머니였다. 가슴이 뭉클했다. 외할머니는 나를 위해 혹시라도 방구들이 식었을까봐 첫새벽에 일어나 말없이 군불을 지피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이란 이런 것이다. 우리들 사랑의 원형은 바로 이런 것이다. 사랑은 그리 호들갑스러운 것이 아니다. 사랑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 이러한 희생을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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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한다. 나는 사랑의 가장 중요한 본질을 희생이라고 생각한다. 희생이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희생이 바탕이 되지 않은 사랑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 고통 속에 사랑이 있다.
누구의 사랑이든 고통 없는 사랑은 없다. 사랑에는 으레 고통이 따른다. 그러나 그 고통을 진정으로 감사하며 견디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물론 나 자신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나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자 자신이 잘못했음을 인정하지 않고 일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운명적 계기나 상황에다가 그 원인을 돌렸다. 나 자신이 살아가고 싶어 하던 삶과 지금까지 살아온 삶 사이에서 벌어진 그 틈을 모두 다른 무언가가 잘못되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될 때마다 다른 사람을 원망했다. 때로는 부모 형제를, 때로는 아내와 친구들을 원망했다. 심지어는 신을 원망하는 날들도 많았다. 신이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 꼭 고통의 방법이라는 것이 싫었다.
인간에게 고통이 없다면 그게 어디 인간이겠는가. 고통 없는 인간이 그 어디 있겠는가. 고통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신은 제대로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하며 나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다.
사랑은 고통이다. 한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따르는 것은 고통이다. 대개의 경우 그 고통을 외면하거나 두려워하는 자는 고통 그 자체가 되고, 고통을 정면으로 맞서서 받아들이거나 싸워 극복하는 자는 그 사랑을 자신의 소중한 인생으로 만든다.
■ 고통에 대한 세 가지 생각
1.
사람이 한 세상을 살면서 평탄하고 편안한 삶을 사는 이는 아무도 없다. 거지에서부터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통과 불행 속에서 한 생을 살게 마련이다. 만일 고통 없는 삶을 바라는 이가 있다면 그는 인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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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를 바라지 말아야 한다. 그만큼 고통은 우리가 먹고 마시는 밥과 물과 같은 것이다.
그렇지만 가능한 한 고통을 피하고 싶은 게 인간의 마음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피하면 피할수록 더 피할 수 없는 게 바로 고통이다. 고통을 어떻게 이해하고 견디고 극복하느냐 하는 문제만 주어져 있을 뿐 우리는 결코 고통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늘을 살고 있다.
지금 내가 먼 들판을 달리기 위해 말안장 위로 훌쩍 올라탄다고 생각해본다. 이때 말에 제대로 올라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그것은 말을 탈 때 발돋움용으로 쓰이는 노둣돌이 아닐까. 만일 노둣돌이 없다면 말을 탈 때 그 얼마나 힘들겠는가. 생각해보면 고통은 노둣돌과 같은 것이다. 내게 고통이라는 노둣돌이 있음으로써 보다 쉽고 안전하게 말에 올라타 인생이라는 들판을 힘차게 달릴 수 있다.
2.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고통을 피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피한다고 해서 고통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그것이 고통의 본질이다. 우리가 비를 피하기 위해 황급히 어느 집 처마 밑으로 들어갔다고 해서 하늘에서 비가 오지 않는 것이 아니다. 비가 오는 것이 원래 푸른 하늘의 본질이다. 하늘이 늘 푸르기만 하다면 그것은 하늘의 본질이 상실된 것이다. 우리가 고통이 없기를 바라듯이 다만 하늘이 푸르게 개어 있기만을 바라는 것일 뿐, 지금 하늘이 맑게 개어 있다 해도 언젠가는 또다시 바람이 불고 비가 오게 마련이다.
자연 상태에서 사는 금붕어와 어항 속에서 사는 금붕어를 서로 비교해보면,자연 상태에서 사는 금붕어가 1만여 개의 알을 낳는 데 비해 어항 속에서 사는 금붕어는 3천 내지 4천여 개의 알밖에 낳지 못한다고 한다. 아무런 위험도 없이 적당한 온도와 먹이를 자연 상태와 똑같이 공급받는데도 그렇다고 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바로 어항이 고통이라는 자연법칙의 진리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통을 수반하는 사람이 자연의 삶이므로 어항 속의 금붕어는 삶의 실재를 잃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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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금 자연 상태의 금붕어이길 원하는지 어항 속의 금붕어이길 원하는 지 곰곰 생각해본다. 비록 위협과 불안이라는 고통이 있다 하더라도 자연 상태의 금붕어이길 원한다.
3.
고통이야말로 진정한 어머니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생명을 선사하지만 고통도 선사한다. 신도 마찬가지다. 신은 우리에게 생명의 기쁨을 주지만 또한 죽음의 슬픔도 준다. 이 세상에 고통 없이 태어나는 생명은 없다.
■ 탈북시인 장진성 시집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
슬프다. 이토록 슬픈 시집이 어디 있으랴. 아프다. 이토록 아픈 시집이 어디 있으랴. 눈물이 난다. 이토록 눈물 나는 시집이 어디 있으랴. 시집 어디를 펼쳐도 붉은 피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다. 그 눈물이 끝내는 내를 이루고 강을 이룬다.
그렇다 이건 시집이 아니라 ‘통곡’이다. 이것은 시집이 아니라 ‘분노’다. 이것은 시집이 아니라 ‘고통’과 ‘절망’과 ‘비극’이다. 그래도 짐승 아닌 인간으로서 마지막으로 부여잡고 놓지 않은 희망이다.
이 시집은 탈북 시인 장진성 씨 한 개인이 쓴 것이 아니다. 이 시집은 고통과 절망 속에 사는 북한의 모든 인민들이 쓴 시집이다. 북한에서의 삶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한 탈북자들의 아리고 쓰라린, 상처투성이의 마음이 저절로 모여 쓴 시집이다.
서정(抒情)은 시의 중요한 본질 중 하나다. 나는 지금까지 시를 써 오면서 서정의 물기가 촉촉이 배어 있는 시를 쓰려고 노력해왔다. 서정이 있어야 시가 문학적 완성미를 지닌다는 믿음을 저버린 적이 없다. 그러나 이 시집에서는 서정을 찾기가 어렵다. 서정도 생존의 문제가 해결되고 나서야 존재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일깨워줄 뿐이다. 그동안 내가 쓴 시들의 서정이 이 시집 앞에서는 너무 사치스럽고 부끄럽다.
구체(具體) 또한 시의 중요한 구성 요소 중 하나다, 나는 평소 시는 추상보다 구체의 산물이라고 생각하고 가능한 한 구체의 힘에 의해 시를 쓰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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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해 왔다. 그러나 이 시집에 나타난 구체의 힘 앞에서 그동안 내가 쓴 시의 구체는 참으로 초라하다. 이 시집은 장진성 씨가 겪은 체험의 구체적 힘만으로도 읽는 이의 가슴을 벼랑 끝에 세운다.
이 시집을 다 읽고 나서 가장 먼저 떠오른 한 마디는 바로 ‘생존’이다. 그리고 또 한 마디를 더 덧붙인다면 바로 ‘밥’이다. 생존과 밥은 동질의 의미와 가치를 가진다. 인간은 밥이 있어야 생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집에는 생명, 즉 밥이 없다.
이 시집은 전체 5부로 나뉘어져 있는데 1부에서 3부까지 40여 편의 시가 온통 밥과 굶주림, 그 굶주림에 의한 죽음을 있는 그대로 가감 첨삭 없이 드러낸다. <우리의 밥은> <밥알> <밥이 남았네> <우리는 밥을 먹는다> <밥이라면> 등 밥이라는 낱말 자체가 그대로 시의 제목이다.
이시들은 굶주림에 의해 생존을 위협당하는, 아니 결국 생존하지 못하고 축생처럼 죽어간 참상을 노래한다. 300만 명이 굶어 죽은 이 참상 앞에 굶주림을 경험해보지 못한 남한의 시인인 나는 그저 고개를 숙이고 옷깃을 여밀 수밖에 없다.
우리의 밥은 / 쌀밥이 아니다 / 나무다 / 나무 껍질이다 // 우리의 밥은 / 산에서 자란다 / 바위를 헤치고 자라서 / 먹기엔 너무 아프다
- <우리의 밥은 > 부분
쌀이 없는 집이어선지 / 그 집엔 숟가락이 없다. - <숟가락> 부분
멀건 죽물에 / 쌀알이 얼마나 섞인다고 / 어머니는 매끼마다 쌀 다섯알 씩 절약하셨네 // 알알이 모아지고 / 한 줌이 되었을 때 / 어머니는 밥을 지으셨네 // 나에게 생일 밥 차려 주셨네 // 더운 밥 / 목메어 세어보니 / 어머니가 그동안 못 드셨던 / 450개의 밥알이었네 - <밥알> 전문
옥수수 몇 알씩 놓고도 / 우리는 말한다 / 밥 먹자고 // 씁쓸한 나무껍질 씹고도 우리는 생각한다 / 밥 먹었다고 // 소금 탄 맹물 / 한숨에 마시고도 / 그것도 밥이라고 한다 // 밥 / 그 말조차 없다면 / 먹은 날이 없기에
- <우리는 밥을 먹는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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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이는 오늘도 / 배고픈 우리에게 / 큰 소리로 자랑했다 / 자기는 어제도 그제도 밥 세 끼 먹었다고 // 애들은 소리 내어 웃었다. / 한 끼면 몰라도 / 새하얀 쌀밥을 / 세끼나 먹었다는 그 말은 / 새빨간 거짓말
- <새빨간 거짓말> 전문
밥이라면 / 시퍼런 풀죽으로만 알던 아이 / 생일날 하얀 쌀밥 주었더니 / 싫다고 발버둥치네 / 밥 달라고 내 가슴을 쥐어 뜯네
- <밥이라면> 전문
꿈속에서 / 아이는 무엇을 보았기에 / 간밤에 밖으로 달려 나갔을까 //
꿈속에서 / 아이는 무엇을 보았기에 / 총을 쏘는 군대도 무서워 안했을까 //
꿈속에서 아이는 무엇을 보았기에 / 손에 그것을 꼭 쥐고 죽었을까 //
그 꿈은 / 죽으면서도 놓지 않은 그 꿈은 / 작은 옥수수 하나
- <아이의 꿈> 전문
이렇게 옥수수 하나 손에 쥐고 총에 맞아 죽은 아이, ‘제 목숨하나 덜면 / 밥 한 술 남는다며’ 사과나무에 스스로 목을 맨 손녀, ‘시체조’에 의해 역전마다 열차가 도착하면 죽어나가는 사람들, 학생에게 ‘굶어도 배워야 한다고’ 애타게 호소하다가 죽어간 백발 교수, ‘눈 감겨줄 / 작은 손도 없어 / 제 그림자 깔고 / 여기저기 / 누워 있는 시체들’ 등 시인이 목격한 죽음의 참상은 참혹하다.
더구나 시인은 자신도 살인자라고 말한다. ‘출근할 때 / 눈물밖에 가진 게 없어 / 동냥손도 포기한 사람 앞을 / 악당처럼 / 묵묵히 지나쳤다 / 하여 퇴근할 땐 / 그 사람이 죽었으니 ’ 시인은 ‘스스로의 심판에 / 이미 처형당한 몸’이라는 것이다. 어찌할 방도가 없어 그냥 지나친 것에 불과한데도 그 자체가 이미 살인과 마찬가지라는 인식은 시인이 이 시를 쓰게 된 깊은 내면의 한 단면이다. 그리고 시인은 이러한 깊은 사랑과 자책은 김일성 시신을 보관한 금수산 기념궁전에 대해 이렇게 분노한다.
그 궁전은 / 산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다 / 수조 원을 벌려고 / 억만금을 들인 것도 아니다 // 죽은 한 사람 묻으려고 / 삼백만이 굶어 죽는 가운데 / 화려하게 일어서 / 우뚝 솟아서 // 누구나 침통하게 쳐다보는 / 삼백만의 무덤이다. - <궁전>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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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까지 ‘얼어 죽지 않고 자는 법’은 ‘패트병에 더운물 채우고 / 이불안에 넣고 자는 것’이라며 ‘이 혹한에도 / 시민들은 집에서 안잔다. /패트병 안에서 잔다’고 고발한다. 또 ‘내 딸을 백원에 팝니다’라는 글씨가 써진 ‘종이를 목에 건 채’ 시장에 서 있던 벙어리 여인이 ‘한 군인이 백원을 쥐어 주자 / 딸을 판 백 원으로 / 밀가루빵 사 들고 어둥지둥 달려와 / 이별하는 딸애의 입술에 넣어주며 / 용서해라!’하고 통곡하는 모습도 놓치지 않는다.
오늘도 대중 앞에서 / 누군가 또 공개 처형을 당한다 // 절대로 동정해선 안 된다 / 죽었어도 격분으로 또 죽여야 한다 // 포고문이 다 하지 못한 말 / 총소리로 쾅 쾅 들려주는 그 앞에서 // 어째서인가 오늘은 / 사람들의 침묵이 더 무거웠으니 / 쌀 한 가마니 훔친 죄로 / 총 90발 맞고 죽은 죄인 // 그 사람의 직업은 농사꾼
- <사형수> 부분
탈북자
우리는 먼저 온 미래
오고야 말 통일을
미리 가져온 현재 - <탈북자> 부분
나는 시집의 마지막 페이지에 있는 이 시를 소중히 가슴에 품는다. 그가 진정 ‘먼저 온 미래’ ‘통일을 미리 가져온 현재’가 되기 위해서는 북도 변하고 남도 변해야 한다. 특히 북한의 인권 문제에 대해 정치적으로 눈치만 보고 말 한 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남한 정부는 반성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생존의 밥, 자유의 밥 한 그릇을 위해 짐승처럼 죽어간 북한의 인민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특히 우리들이 배불리 한 끼 밥을 먹을 때, 우리는 굶주리는 그들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탈북 시인 장진성이 이 시집을 굳이 남한에서 펴낸 의미는 상실될 것이다.
■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 김수환 추기경을 떠나 보내며
김수환 추기경의 운구 행렬이 떠나간 뒤 조문 행렬이 길게 이어졌던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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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따라 걸었다. 이 길은 지난 며칠 동안 48만 여명의 조문객들이 서너 시간씩 추위에 떨며 기다렸던 조문의 길이다. 우리는 도대체 무엇에 목말라 하고 있었기에 그토록 긴 행렬을 이루며 유리관에 안치된 추기경을 찾아뵈었는가. 우리의 목마른 혀에 추기경께서 죽음을 통해 한 방울 떨어뜨린 것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이다. 우리는 그분이 선종하시고 나서야 비로소 사랑의 실체를 본 것이다. 막연히 관념적이고 추상적으로 이해하고 있던 사랑에서 벗어나 비로소 사랑의 구체적 모습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늦었지만 자기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시간을 갖게 되고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 것이다. “머리와 입으로 하는 사랑에는 향기가 없다.”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데 칠십년이 걸렸다”는 그분의 말씀이 지닌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홀연히 깨닫고 뒤늦게나마 그분을 찾아간 것이다.
틈만 나면 달동네 판잣집을 찾아간 추기경께서는 도자기 필통에도 자필로 ‘서로 밥이 되어주십시오’하는 말씀을 남기셨다. 평소엔 늘 “노점상에서 물건을 살 때 깎지 말라. 부르는 대로 주고 사면 희망과 건강을 선물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가난한 이들의 손을 잡아줄 때 내가 위로하기보다 스스로 위로를 받는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우선적 사랑’에서 더 나아가 그들과 ‘함께하는 사랑’으로 가야 한다”고도 말씀하셨다.
명동 성당 입구에 플래카드로 내걸린 그분의 마지막 말씀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는 실은 평범한 말이다. 그러나 그 말이 우리의 가슴마다 종소리처럼 울려 퍼지는 까닭은 바로 그분의 삶에 사랑의 실천과 행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의 아들로서의 예수보다. 사람의 아들로서의 예수가 때로는 우리에게 더 깊은 감동과 믿음을 주듯 김수환 추기경 또한 그러하다. 추기경께서도 이태 전에 다른 신부님을 통해 고해성사를 하셨는데 “내 몸이 아프니까 어느 순간에는 하느님을 잊게 되더라. 그게 내 죄다”라는 내용의 고해를 하셨다고 한다. 이 얼마나 인간적인 고해인가. 또 그 무렵 가까운 이에게 “처음에는 몸이 아픈 걸 낫게 해달라고 기도하다가 고통에 동참하게 되고 이웃의 고통도 진정으로 알게 된다”는 말씀도 했다고 한다. 이 얼마나 따스함의 깊이가 느껴지는 말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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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김수환 추기경을 보내면서 우리는 만해 한용운 시인의 <님의 침묵>을 빌려 고개 숙인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우리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 ‘성 라자로 마을’의 봄날
내 생각에 봄은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하나의 깨달음을 주기 위해 오는 것 같다. ‘삶이라는 계절 속에는 겨울도 있을 수 있고, 봄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아무리 추운 겨울이 계속된다 할지라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봄을 맞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찾아오는 것 같다.
나는 봄을 맞을 때마다 어느 해에 경기도 안양에 있는 ‘성 라자로 마을’에서 맞이한 봄을 떠올리곤 한다. 나환자들의 천국이라고 일컬어지는 그곳을 봄날에 찾게 된 것은 정말 다행한 일이었다. 관악산 기슭 한 자락에 자리 잡은 그곳엔 개나리, 진달래, 홍철쭉, 백목련, 벚꽃 등이 연둣빛 새순을 막 돋아낸 나무들과 어울려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햇볕마저 왜 그렇게 따스하던지…….
그날은 한국가톨릭나사업가협회 주최로 제1회 ‘다미안 신부상’ 시상식이 있는 날이었다. 다미안 신부상은 지금부터 1백여 년 전, 나환자를 격리시키는 하와이 몰로카에 섬에 혼자 들어가 16년 동안 나환자들을 돌보다가 결국 나병에 감염되어 숨진 벨기에 신부 다미안을 기리는 상으로, 한국의 나환자들을 위해 일해온 사람에게 수여하는 상이었다.
그해 다미안 신부상은 일본의 여성작가 소노 아야코 여사가 수상했다 그런데 나는 수상자가 누구며, 그 수상자가 한국의 나환자를 위해 어떤 일을 했는가 하는 데에는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그날 나는 온통 딴 데다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라자로 마을의 봄 풍경이었다. 나는 라자로 마을의 봄 풍경에 거의 넋을 빼앗기고 있었다.
그날 시상식이 있는 장소로 가는 길, 나균에 의해 맹인이 된 눈 먼 할머니 한 분이 지팡이를 짚고 더듬 걸음으로 걸어나오는 것을 보았다. 할머니 등 뒤로 진달래꽃이 만발한 산이 있어서 할머니는 마치 붉은 진달래 더미 속에서 걸어나오는 것 같았다. 나는 혹시 할머니가 천상에서 걸어 나오시는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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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감동이란 이렇게 위대하다. 자연만이 인간을 아름답게 한다. 인간은 인간으로서만 아름다울 수 없다. 인간은 자연과 한데 어우러져야만 아름다울 수가 있다. 인간도 자연이다. 봄이 올 때마다 나도 봄이 되었으면 한다. 이 땅에 봄은 왜 오는가. 그것은 우리 인간을 아름답게 하기 위한 자연의 배려이기 때문이다.
■ 형수의 죽음
미국에 사는 가형이 25년 만에 형수와 함께 한국을 찾아왔다. 나는 25년 만에 형을 만난다는 기쁨 보다는 휠체어에 탄 채 공항 출구를 빠져 나오는 형수를 만나야 한다는 슬픔이 더욱 컸다.
형수는 미국에서 어쩌면 한 달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는 위암 말기 진단을 받고, 아이들과 남편 곁에서 투병할 것인가, 아니면 친정 부모와 형제들이 있는 한국으로 가서 투병 생활을 할 것인가 고민하다가 결국 한국행을 택했다. 한의사인 형부의 권고를 받아들여 한방 치료에 한 가닥 희망을 건 것이다.
미국에서 두 아이들과 헤어질 때 형수는 그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어쩌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고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니 형수의 마음은 오죽이나 아팠을까. 아이들 또한 언제 다시 만날지도 모르는 병든 엄마를 떠나보내며 속으로 참으로 많이 울었을 것이다.
형은 열흘 정도 병원 입원실에서 형수와 함께 있다가 직업상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 때문에 다시 급히 미국으로 떠났다.
아, 그때 죽음을 목전에 둔 아내를 두고 다시 떠나야 했던 형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어쩌면 영원히 못 만나게 될 아내를 두고 발길을 돌려야 했던 형의 마음은 그 얼마나 아팠을까.
결국 형은 장례식을 치르기 위해 보름 만에 다시 한국에 오게 되었다. 아이들이 방학을 하면 성탄절날 같이 오겠다고 한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
형은 출상하는 날 아침에 겨우 미국에서 장녀만 데리고 급히 영안실로 달려왔다. 그리고 눈물 가운데서 영결 예배를 보고 형수를 땅에 묻었다.
나는 형이 장례를 치르고 다시 미국으로 떠나는 날 공항 출국장 입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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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하고 생각하지 말고 나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라”고 말했다. “우주의 크기를 생각해 보고 인간이 그 얼마나 미미한 존재인가를 생각해보라”고 말했다. 그리고 신의사랑에 대해서는 침묵했다. 신의 사랑이 침묵 가운데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형은 신을 많이 원망했을 것이다. 그의 얼굴엔 원망의 그림자가 무겁게 드리워져 있었다. 내겐 형의 그러한 원망의 마음이 퍽 소중하게 생각되었다. 신을 원망해보지 않은 사람은 신을 진정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신의 사랑을 깨닫기 위해서는 인간에게 원망이 필요하다. 신은 원망과 절망 가운데서 자신의 사랑을 깨닫게 한다.
■ 반지의 의미
내가 대학생 때이던가. 형이 “반지가 왜 둥근 링의 형태를 지니고 있는지 아느냐”고 내게 물었던 일이 떠올랐다.
“글쎄, 손가락이 둥그니까 그렇겠지.”
내가 깊게 생각하지 않고 건성으로 대답하자 형이 진지한 얼굴을 하고 말했다.
“아니다. 반지에는 서로 링 밖으로 벗어나지 말자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러니까 서로 사랑을 약속하고 결혼을 했으면 어떠한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그 약속을 꼭 지키자는 뜻이 숨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때 형은 한 여자를 사랑하고 청혼의 의미로 반지를 선물하려고 한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때 형이 한 말뜻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른이 되어 여자에게 반지를 주고 나서 비로소 형이 말한 참뜻을 알게 되었다.
반지가 둥근 것은 서로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링 밖으로 벗어나지 말고 최소한 지킬 것은 지키자는 속뜻이 숨어 있는 것이었다. 적어도 반지의 원형, 그 테두리 밖으로 뛰쳐나가지 않아야 한다는 무언의 약속만은 꼭 지켜가면서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었다. 세상을 살면서 때로는 반지를 빼 강물에 휙 던져버리고 싶은 일이 있을지라도.
■ 만남을 위하여 기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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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에게 20대 젊은이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 한마디를 지금 하라고 한다면 나는 이 말을 하고 싶다.
‘만남을 위하여 기도하라.’
누가 나에게 20대 젊은이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 한마디를 지금 또 하라고 한다면 나는 이 말을 하고 싶다.
‘만남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라.’
인생에는 비밀이 있다. 나는 인생에는 비밀이 있다는 사실만 알 뿐, 어떠한 비밀이 있는지 잘 모른다. 별이 왜 어둠 속에서 빛나는지 아는 데에 평생이 걸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 인생의 비밀을 아는 데에도 평생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사람들은 자기 인생의 비밀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평생을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전혀 눈치챌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내 생각에 인생의 비밀을 크게 나누어보면 태어나는 일과 사랑하는 일과 죽는 일이 아닐까 한다. 인생은 이 세 가지 비밀 속에서 이루어지고 소멸되어 간다. 그리고 이 비밀 속에는 반드시 만남이라는 비밀이 존재한다.
그렇다. 그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그 인생이 결정된다. 어떠한 부모를, 어떠한 스승을, 어떠한 친구를, 어떠한 배우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은 그 모습을 달리한다. 한 인간이 이루는 인생은 그 만남의 연속적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회나 국가도 어떠한 지도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그 운명이 달라진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늘 우리의 삶이 만남의 결과라는 사실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특히 20대 때의 만남이 한 인간의 일생을 결정지어버리고 만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대체로 무감각하다. 올바른 만남, 진실된 만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 얼마만큼 중요한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나는 아직도 좋은 만남을 위한 기도를 포기하지 않는다. 좋은 친구와 좋은 자녀를 만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기도의 시간을 고요히 갖는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만남을 위하여 기도하라. 잘못된 만남이 있으면 고치고 다듬고, 내팽개쳐버린 채 돌보지 않는 만남이 있으면 돌아보고 돌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인생은 운명을 낳고, 운명은 만남을 낳고, 만남은 결혼을 낳고, 결혼은 가정을 낳고, 가정은 인생을 낳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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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남과 헤어짐
“삼촌, 나 그 남자하고 헤어졌어.”
조카가 싫다고 한 것은 아니었다. 남자 쪽에서 부모 형제들이 반대 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결혼할 의사를 번복했다는 것이다.
조카의 온몸에서는 증오의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고 있었다.
“혼인빙자 간음으로 고소라도 하고 싶어.”
조카의 말에 내가 대답했다.
“니가 그렇게 어리석나? 실망스럽다. 흔한 말이지만 사랑은 주는 거다. 니가 사랑했으면 그것으로 족한 거다.”
“억울해요.”
“억울하긴. 그 남자는 널 사랑하지 않아. 만일 널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했다고 한번 생각해봐라. 니 인생이 우예 되겠노?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하고, 사실을 사실대로 받아들여. 헤어졌다는 것은 이미 기정사실이야. 헤어짐을 너무 두려워하지 마. 헤어짐은 또 다른 만남이야. 헤어짐이 없으면 만남이 없어. 넌 그 사람과 헤어져야 다른 남자를 만날 수 있어.”
나는 조카에게 헤어짐을 받아들일 줄 아는 슬기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헤어짐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으며, 인생에는 원래 헤어짐이 준비돼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켰다. 그러나 조카는 헤어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 앞에서 끝내 눈물을 보였다.
인간은 조카처럼 배반에 의한 헤어짐이든 죽음에 의한 헤어짐이든 헤어짐 없이는 살 수가 없다. 끝없는 만남만 있는 인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나면 반드시 헤어지는 게 정해진 인간의 이치다. 헤어짐의 중요성을 알아야만 만남의 소중한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있다. 만남보다 헤어짐이 더 중요한 게 우리들 인생인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봄이 오는 것도 겨울과의 이별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겨울과 헤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봄을 만날 수 없을 것이고 꽃도 바라볼 수 없을 것이다. 결국 꽃이 아름다운 것도 피었다가 지기 때문이다. 꽃이 지지 않고 계속 피어있다면 그 꽃은 이미 아름다움을 잃은 꽃이다. 꽃의 향기 또한 마찬가지다. 향기는 사라지기 때문에 향기다 만일 사라지지 않는 향기가 있다면 그것은 이미 역한 냄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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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쓴 연애편지
밤이 깊었습니다. 잠은 오지 않습니다. 자정이 지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오늘도 당신을 생각하며 지냈습니다. 밥을 먹다가도 길을 가다가도 당신의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자기, 밥 잘 챙겨 먹고 다녀. 너무 아파하지 말고.”
오늘도 당신이 내게 한 말을 생각하며 물을 마시고 밥을 먹었습니다. 물론 아파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사실 오늘은 당신의 집 앞에서 당신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그냥 돌아왔습니다. 대관령에 첫눈이 내렸다더니 갑자기 날씨가 추워져서 그대로 서 있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가까운 편의점에 가서 캔맥주를 사들고 돌아와보니 그사이에 당신의 창에 불이 켜져 있었습니다. 당신을 부를까 하다가 그냥 돌아왔습니다. 당신의 창에 손톱만한 돌멩이라도 던져볼까 하다가 골목에서 혼자 캔맥주만 들이켜고 돌아왔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인생은 성공한 것이라는데 아마 내가 그런 모양입니다.
며칠 전이었습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당신과 이제 더 이상 만나지 말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지하철을 탔습니다.
나는 지하철이 삼성역에 다다랐을 때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오는 고통을 견딜 수 있도록 해달라고 ‘화살기도’를 했습니다. 짧은 기도가 하늘에 닿는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가장 짧고 다급하게 하는 기도를 ‘화살기도’라고 하는데 나는 마음속으로 “하느님, 이 고통을 견딜 수 있도록 해주세요”하고 짧게 소리쳤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당신은 내 곁을 떠난 것이 아닙니다. 내 곁에 있습니다. 나도 당신 곁을 떠난 것이 아닙니다. 당신 곁에 있습니다.
“우리 안 만나면 못살 것 같아.”
당신은 그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그렇습니다.
오늘 밤에도 별들이 보입니다. 언뜻언뜻 별 속에 당신이 보입니다. 당신이 별 속에서 창을 여는 것 같아 나도 창을 열고 인수봉 너머로 빛나는 별들을 바라봅니다.
우리가 어느 별에서 만났기에 이토록 밤마다 별빛으로 빛나는지 알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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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습니다. 당신은 지금 어느 별의 오솔길을 걷고 있습니다. 나는 그 뒤를 소년처럼 묵묵히 따라갑니다. 내가 별 없는 밤하늘이라면 당신은 그 밤하늘에 빛나는 별빛입니다.
오늘밤에도 당신을 사랑해서 미안합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 일보다 사랑하지 않는 일이 더 어렵습니다.
■ 우리가 어느 별에서
우리가 어느 별에서 만났기에
이토록 서로 그리워하느냐
우리가 어느 별에서 그리워하였기에
이토록 서로 사랑하고 있느냐
사랑이 가난한 사람들이
등불을 들고 거리에 나가
풀은 시들고 별은 지는데
우리가 어느 별에서 헤어졌기에
이토록 서로 별빛마다 빛나느냐
우리가 어느 별에서 잠들었기에
이토록 새벽을 흔들어 깨우느냐
해 뜨기 전에
가장 추워하는 그대를 위하여
저문 바닷가에 홀로
사람의 모닥불을 피우는 그대를 위하여
나는 오늘밤 어느 별에서
떠나기 위하여 머물고 있느냐
어느 별이 새벽길을 걷기 위하여
마음의 칼날 아래 떨고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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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느 별에서>는 만남과 헤어짐에 관한 시다. 이 시는 내가 30대 초반에 썼다. 20대를 지나 드디어 인생의 징검다리를 힘차게 내 디뎠을 때 뜻하지 않게 남남의 징검다리에서 이별의 징검다리를 건너게 되었다. 만남의 징검다리를 딛고 청춘이라는 인생의 강을 채 건너가기도 전에 이별의 징검다리를 건너지 않으면 안 되었던 나는 이 한 편의 시로 청춘의 무늬를 그려보았다.
일찍이 만해 한용운 시인께서는 <님의 침묵>에서 “만날 때는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는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만남이 있으면 반드시 헤어짐이 있다’는 회자정리(會者定離)의 세계를 말씀하셨지만, 그때는 만남과 이별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내 삶 속에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이 시를 쓰면서 만남이 소중한 만큼 이별도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이별을 통해 만남의 의미와 가치를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는 우리 시대의 노래꾼 안치환 씨가 1993년에 노래로 만들었다. 내가 노래를 처음들은 것은 어느 후배 시인의 결혼식장에서였다. 안치환 씨가 직접 키타를 치며 축가로 불러주었다. 그런데 그날 신부가 그 노래를 들으며 정성을 들여 했을 눈화장이 다 지워질 정도로 눈물을 흘렸다.
오랜 세월이 지나 2008년에 안치환 씨가 ‘안치환, 정호승을 노래하다’라는 제목의 앨범을 우정의 선물로 내게 만들어 주었다. 그동안 불리어진 내 시노래 중에서 10여 곡을 골라 편곡하고 새로운 노래도 작곡해 모두 안치환 씨의 목소리로 녹음된 음반이었다.
그 음반이 계기가 되어 나는 안치환 씨와 수년간 문화적으로 소외된 지역을 찾아 ‘시노래 콘서트’를 하게 되었다. 그때마다 그는 ‘우리가 어느 별에서’를 빼놓지 않고 불렀다.
지금 우리는 지구라는 별에서 살며 사랑한다. 나는 때때로 내가 어느 별에서 살다가 지금 지구라는 별에서 태어나 만남과 이별의 삶을 사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어쩌면 나는, 만남은 지구에서 했지만 이별은 다른 별에서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별이란 지구라는 별을 떠나 다른 별로 이동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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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영화배우 줄리아 로버츠는 “사랑은 온 우주가 한 사람으로 좁혀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의 말에 기대어 생각해보면 사랑을 하는 한 나 자신이 바로 우주, 즉 별이다. 따라서 별인 나 자신의 가슴 속에 항상 가득 필요한 것은 사랑이다.
■ 마더 테레사 수녀님께 보내는 편지
마더 테레사 수녀님! 어떻게 그렇게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셨는지요? ‘사랑의 선교회’ 건물 발코니에 나와 87세 생신을 축하하는 축하객들에게 가슴께로 두 손을 모으고 미소를 띠며 답례하는 모습의 사진을 신문에서 본 게 바로 며칠 전인데 돌아가셨다니요.
사람은 늙으면 마음만 추해지는 게 아니라 얼굴 또한 추해져서 결코 아름답지 않은데, 아무리 보아도 당신의 모습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평생 농사만 짓고 살아온 할머니나 할아버지의 주름진 얼굴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이 바로 당신의 얼굴에서 느껴집니다.
저는 당신이 존재하고 계심으로써 그나마 우리 인간들이 인간으로서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일 이 세상에 당신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인간은 여전히 추하고 악한 존재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당신의 죽음을 통해서 가장 먼저 깨닫게 된 것은 인간의 아름다움입니다. 인간도 어떤 삶을 살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아름다운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아름다움을 통해 느껴지는 한 인간으로서의 존재적 자긍심입니다.
그동안 저는 제 자신을 비롯해서 아름답지 않은 인간들만 보고 살아왔습니다. 사람만큼 추하고 사악한 존재가 없다고 느끼면서 하루하루를 사는 일, 그것은 크나큰 불행이자 비극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죽음은 인간과 인생에 대한 저의 부정적인 인식을 긍정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죽음을 통해 한 인간의 고요한 아름다움을 보게 된 기쁨 때문입니다. 그 기쁨 때문에 덩달아 저마저도 이름다워지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고 맙니다.
당신은 가정과 가족을 먼저 이웃으로 생각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진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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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출발은 가정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부모 형제를 먼저 사랑할 수 있어야 병들고 헐벗은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고 하신 말씀 앞에 저는 고개를 숙입니다.
사랑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책임을 싫어합니다.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사랑, 돌아서면 그뿐인 무책임한 사랑은 할 수 있어도 정작 자신이 책임지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랑은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기심의 발로일 뿐, 사랑이 아닙니다. 당신께서 먼저 가족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것은 책임지고 싶어 하지 않는 우리의 거짓 사랑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책임질 수 없는 사랑은 할 수 있어도 책임지는 사랑은 하기 싫어하는 우리의 마음을 꿰뚫어 보신 당신 앞에 저는 지금 겸허히 반성합니다.
테레사 수녀님! 제게 진정한 부자가 되는 길을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쌓아두면 둘수록 줄 수 있는 것은 적어지고, 가진 것이 적으면 적을수록 더 많이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돈에 의존하거나 돈 때문에 노심초사하는 사람은 진정 가난한 사람이며, 다른 사람을 섬기는 데 돈을 쓰는 사람은 진정 부자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 상처받을 때까지 사랑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 희생당할 때까지 사랑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이 무엇인지 비로소 당신을 통해 깨닫습니다.
■ 노인이라는 자리
젊음의 한 때가 지나면 누구나 노인이 되고 만다. 꽃 같던 청춘의 아름다움도 시들어 땅바닥에 떨어진 꽃잎과 같아진다. 인생이라는 시간의 힘 앞에 누구나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삶은 종국에 가서는 평등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의 젊은이들은 자신도 나이가 들어 늙게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는 듯하다. 언제까지나 젊음의 형태로 인생이 지속되는 것처럼 여긴다. 심지어 노인들을 처음부터 그렇게 노인으로 태어난 사람처럼 여긴다.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제대로 된 노인의 자리는 찾기 어렵고 갈수록 노인들의 설 자리가 없어진다. 멀리 찾을 것도 없이 우리 집만 봐도 그렇다. 일흔일곱 되신 내 아버지는 TV 채널권도 손자 손녀에게 빼앗긴지 오래다. 식사 시간이 되어도 할아버지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아이들이 밥을 먼저 먹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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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한 인척 여동생은 자기 집에서 일하는 파출부 한 분이 지닌 합의 각서를 우연히 본 일이 있다고 했다. 그 각서는 일해주고 있는 다른 집에서 작성한 것으로 여든이 넘은 아버지를 죽을 때까지 돌보아 줄 경우 그 아들이 2천만 원을 지급하겠다는 합의각서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각서의 마지막 조항에는 ‘만일 성적 희롱을 당한다 하여 돌보아주지 않을 경우, 약속한 금액을 지급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내용이 기재되어 있었다고 한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새삼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노인들의 삶이 얼마나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는지 알 수 있었다. 부모가 늙고 병들면 자식이 돌보아드려야 하는 그 천륜의 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를 내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이 세상에 노인이 되지 않은 젊은이가 어디 있으랴. 이 세상에 노인이 존재한다는 것은 누구나 노인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만일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이것만큼 큰 인간의 불행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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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부 첫눈 오는 날 만나자
■ 실패 없는 삶은 없다
10년 가까이 정성껏 키우던 난 하나를 쓰레기통에 버려버린 적이 있다. 제때에 물을 주고 아무리 정성을 기울여도 꽃 한 번 피우지 않는 게 너무나 밉고 야속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곧 크게 후회하게 되었다. 10년 동안 죽지 않고 내 곁에 살아 있었다는 그 자체가 바로 한 송이 꽃을 피운 거였다. 비록 눈에 보이는 꽃은 피우지 않았지만 건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것만으로도 춘란은 성공한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것도 모르고 눈에 보이는 꽃을 피우는 것만이 춘란이 성공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멀쩡하게 살아 있는 춘란을 쓰리기통에 버려버렸다.
오늘을 사는 많은 사람들은 내가 눈에 보이는 춘란의 꽃을 바랐듯이 눈에 보이는 성공을 바란다. 그러나 성공은 눈에 잘 보이는 것이 아니다. 성공은 거대한 것이 아니고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사소한 데에 있다. 성공은 형식과 물질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삶에 대한 이해와 긍정 속에 있다. 사실 건강한 육체와 마음을 지니고 열심히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성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의 외형적 삶에다 자신을 비교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 자신의 내면적 삶을 찾는데 주력하지 않고 남의 외형적 삶을 들여다보고 부러워하면 우리의 삶은 늘 불행하다.
곰곰 생각해보라. 실패 없는 삶이 어디 있는가.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실패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 성공하지 못하면 인생이 곧 끝난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은 실패가 인생이 시작이다. 보다 실패 없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실패를 통해 슬픔과 비애보다는 기쁨과 감사를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실패에서 성공의 향기가 난다.
성공도 남이 만들어 주는 성공은 성공이 아니다. 성공에는 실패를 통한 자신의 노력과 정성과 눈물이 들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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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싹
벗으로부터 크리스마스이브 날 생고구마 한 봉지를 선물로 받았다. 그는 검은 비닐봉지에서 고구마를 하나 꺼내 깨끗하게 물로 씻어 껍질째 그대로 한 번 먹어보라고 권했다., 고향 해남에서 어머니가 손수 가꾸신 고구마라고 하면서 배가 촐촐한 오후 서너 시 때쯤 깎아 먹으면 여간 맛있지 않다는 말을 곁들였다.
나는 벗이 건네주는 고구마를 한입 베어 먹었다. 상큼한 단맛이 미각을 자극했다. 어릴 때 고향에서 제대로 먹을 게 없을 때 어머니가 깎아 주시던 생고구마 맛 그대로였다. 여름 내내 땀흘려 농사지은 고구마를 고향 떠나 멀리 외지에 나가 있는 아들에게 보낸 어머니의 마음이 그대로 전해졌다.
나는 벗의 말대로 오후 서너 시쯤 배가 촐촐할 때 깎아 먹을 요량으로 고구마를 비닐봉지째 그대로 깊숙이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 그러고는 그만 고구마를 까마득히 잊고 말았다. 새해가 되고 설날이 지나서야 무심코 서랍정리를 하던 중 검은 비닐봉지를 발견하고 속에 무엇이 들어 있나 하고 들여다보다가 무슨 나쁜 짓이라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 속엔 고구마가 들어 있었다. 나는 한 달도 넘게 고구마를 잊고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 미안해서 당장 하나 깎아 먹으려고 고구마를 집어 들었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고구마엔 연보랏빛 싹이 제법 굵게 돋아나 있었다. 유독 그 고구마만 그런가하고 다른 고구마들을 살펴보자 다른 고구마들도 다들 연보랏빛 싹을 틔우고 저마다 수줍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참으로 놀라운 생명력이 아닐 수 없었다. 그동안 고구마는 부드러운 흙속에 있었던 게 아니라 햇빛 한 줄기 들어오지 않는 좁고 답답한 서랍의 어둠속에 있었다. 그것도 한 달이나 넘게 물 한 모금 얻어먹지 못하고 바짝 마른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도 썩기는커녕 푸른 싹을 한 껏 틔워 올린 것이다.
나는 지금도 생고구마 한 봉지를 선물로 준 벗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견디기 힘든 고통이 나를 찾아올 때마다 절망의 순간에도 싹을 틔우던 그 고구마의 성실한 인내와 용기를 생각한다.
■ 나무를 사랑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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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사랑하는 한 사람을 알고 있다. 내가 국어교사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의 일이다. 당시 내가 재직하고 있던 숭실고등학교엔 사립학교라서 그런지 비교적 나이가 지긋함 교사들이 많았다. 보통 40대에서 50대가 교사의 주축을 이루었으며 그중에 신현득 지리 선생님이 계셨다. 그분은 지리부도 교과서를 직접 편찬하신 분으로 우리나라 지리학계에서는 이미 자리매김이 분명한 분이었다. 내가 그분을 처음 뵈었을 때 그분은 이미 예순에 가까운 나이였다. 그 분은 평생 교직에만 몸담고 살아오신 분으로 성격이 꽤 까다로운 편이었다. 늘 겸손하고 얼굴에 밝은 미소를 잃지는 않았으나 매사에 철저하신 분으로 마치 ‘남산골 딸깍발이’ 같은 인상을 주었다. 나는 그분이 매사에 원칙을 내세우는 데다가 융통성이 없고 너무 꼬장꼬장해서 가까이하지도 멀리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해 식목일 아침이었다. 나는 출근길에 교문을 들어서다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교문 진입로 양쪽에 그 전날 퇴근할 때까지만 해도 보이지 않던 1백여 그루의 소나무 묘목이 심어져 있었다.
그날 동료 교사들로부터 하룻밤 사이에 묘목이 심어지게 된 전후 사정을 듣고 나서는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시교육청 측에서 각 학교에 할당된 묘목을 밤늦게 학교 운동장에다 그냥 두고 갔는데, 마침 그날 일직 교사였던 신현득 선생님이 그 묘목을 밤새도록 혼자 다 심었다는 것이었다. 묘목이 고사 직전에 있어 그대로 두었다가는 혹시 밤사이에 다 말라 죽어버릴까 봐 그렇게 했다는 신 선생님의 겸연쩍은 변병이었다.
그날 이후부터 신 선생님을 바라보는 나의 눈과 마음이 달라졌다. 그는 단순한 원칙주의자가 아니라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할 줄 아는 원칙주의자였다. 하찮은 묘목 한 그루에도 자신의 전부를 던질 줄 아는 사랑의 사람이었다. 고사 직전에 있던 묘목을 버리지 않고 밤새도록 정성껏 심음으로써 나무에 대한 인간으로서의 본분을 다한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날 이후 아직까지 신현득 선생님이 내게 준 교훈을 잊어본 적이 없다. 아직 신 선생님만큼 나무를 사랑하는 분도 만나지 못했다.
나무는 인간이다. 어쩌면 우리보다 더 나은 인간인지 모른다. 나는 나무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나무를 사랑하는 사람만큼 아름다운 사람은 없다. 나무를 사랑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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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무들은 하루를 한 해처럼 산다
서울에 첫눈이 내리기 며칠 전,내가 다니던 대학 교정에 가본 적이 있다.
졸업한 지 30여 년 만에 가 본 캠퍼스는 변해도 너무 많이 변해 있었다. 특히 버스가 다니는 큰길에서부터 대학 정문에까지 이르는 학교 주변의 변화는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건물은 대부분 대형화되고, 주택가마저도 상업지역으로 변해 예전의 그 꾀죄죄하고 구질구질하지만 정겨웠던 풍경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변했다고 느껴지지 않는 것이 단 한 가지 있었다. 그것은 나무들이었다 .나무들만은 30여 년 전 내가 학교에 다닐 때의 모습과 조금도 다를 바 없어보였다. 30여 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났지만 나무들만은 그때 그 키에 몸피 또한 그대로였다.
“어째 나무들이 많이 굵어지지 않은 것 같아.”
내가 이렇게 중얼거리자 동행한 친구가 말했다.
“나무들은 그리 급할 게 없잖아.”
나는 친구의 말에 마음이 뜨끔했다. 친구의 말은 맞는 말이었다. 아무리보아도 나무들이 나보다 더 풍요로워 보였다. 잎을 다 떨어뜨려 겉으로는 비록 앙상하고 거무튀튀하게 메말라 보였으나 정작 나무들은 그동안 나보다 더 보람된 삶을 살아온 것 같았다.
시간이 나무나 인간을 늙고 병들게 해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 결국에는 다 똑같다면, 나는 진정으로 나무들처럼 느긋하고 여유 있는 삶의 태도를 배울 필요가 있었다.
인생은 시간이다. 시간은 변화라는 무서운 힘을 우리들에게 행사하고, 우리는 또 어쩔 수 없이 그 힘에 굴복당하고 만다. 따라서 결국 모든 것은 변한다. 오늘의 아름다움도 오늘의 사랑마저도 내일에는 미움과 증오로 얼룩진다.
이제 나무들의 여유 있는 삶의 태도를 한번쯤 생각해보자. 나무들처럼 급하게 서두르지 말고 여유 있는 삶을 한번 살아보자. 나무들은 우리 사람들처럼 한 해를 한 달처럼, 한해를 하루처럼 살지는 않는다. 나무들은 하루를 한해처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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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와, 눈 왔다! 일어나!”
“올해 첫눈이야! 첫눈이 내렸어.”
사람들은 왜 첫눈이 오면 만나자고 약속을 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왜 첫눈이 오면 그토록 기뻐하는 것일까. 왜 첫눈이 오는 날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하는 것일까. 아마 그건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이 오기를 기다리기 때문일 것이다. 첫눈과 같은 세상이 두 사람 사이에 늘 도래하기를 기다리기 때문일 것이다. 첫눈과 같은 세상이 두 사람 사이에 늘 도래하기를 희망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한 때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있다. 첫눈이 오는 날 돌다방에서 만나자고, 첫눈이 오면 하루 종일이라도 기다려서 꼭 만나야 한다고 약속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하루 종일 기다렸다가 첫눈이 내린 밤거리를 밤늦게까지 팔짱을 끼고 걸어본 적이 있다. 너무 많이 걸어 배가 고프면 눈 내린 거리에 카바이드 불을 밝히고 하나의 풍경이 되어 서 있는 군밤 장수한테 다가가 군밤을 사 먹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약속을 할 사람이 없다. 그런 약속이 없어지면서부터 나는 젊음을 잃기 시작했다. 약속은 없지만 지금도 첫눈이 오면 나는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 서성거린다.
오늘은 오래전에 내가 쓴 시 <첫눈 오는 날 만나자>를 다시 읽으며, 나는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이 된다.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어머니가 싸리빗자루로 쓸어 놓은 눈길을 걸어
누구의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순백의 골목을 지나
새들의 발자국 같은 흰 발자국을 남기며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러 가자
팔짱을 끼고
더러 눈길에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가난한 아저씨가 연탄 화덕 앞에 쭈그리고 앉아
목장갑 낀 손으로 구워놓은 군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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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 사 먹기도 하면서
첫눈 오는 날 만나가로 한 사람을 만나
눈물이 나도록 웃으며 눈길을 걸어가자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린다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한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
세상에 눈이 내린다는 것과
눈 내리는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큰 축복인가
첫눈 오는 날 만나자
첫눈 오는 날 만나기로 한 사람을 만나
커피를 마시고
눈 내리는 기차역 부근을 서성거리자
■ 맹인의 촛불
나는 춘천시 우두동에 있는 한 공병부대에서 군종사병으로 군복무를 마쳤다. 남이 보기에 무슨 대단한 신앙이 있어서 군종사병으로 보낸 것 같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매주 군목이 설교하는 시간 동안만이라도 마음놓고 잠이라도 좀 자려고 군인교회에 빠지지 않고 나간 것이 인연이 되어 군종사병이 되었을 뿐이다.
군종사병으로 복무하는 3년 동안 해마다 봄이면 부활절 예배를 보았다. 당시 부활절 예배는 꼭 군민 합동으로 춘천 시청 광장에서 새벽촛불 예배로 보았는데, 나는 아직도 처음 촛불 예배를 보던 날의 감동을 잊지 못한다.
그날 내무반에서 일어난 시간은 새벽 네 시였다. 단 1초라도 더 자고 싶은 마음을 달래고 군인교회로 가자 부지런한 병사들은 벌써 군인교회 앞마당에 모여 있었다. 나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초를 한 자루씩 그들에게 주었다. 그리고 군목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가 4열 종대로 줄을 맞추어 시청광장을 향해 춘천 시내를 구보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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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 광장에는 부활절 예배를 보러 온 시민들로 가득 차 있었다. 다fms 부대에서 온 군인들의 모습도 더러 눈에 띄었다. 우리들은 민간인들 틈에 섞여 예배 시간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예배는 촛불을 밝히는 의식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촛불은 단상에서 처음 붙여져 맨 앞자리에 있는 사람의 초에 옮겨졌다. 그리고 곧바로 뒷사람에게 연달아 옮겨졌다. 하나씩 촛불이 옮겨질 때마다 어둠이 조금씩 옷을 벗고 사라져 갔다.
나는 줄의 한끝에 서서 긴장된 마음으로 내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내게 불을 붙여준 사람은 어느 주름투성이의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뒤돌아서자마자 내게 미소를 보냈다. 그리고 꺼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손바닥을 펴 촛불을 감싸면서 가만히 내 손을 거머쥐었다. 나도 할머니의 손을 살며시 거머쥐었다. 순간 마음이 떨려왔다.
이번에는 내가 촛불을 옮겨줄 차례였다. 내 뒤에는 중학생 모자를 쓴 한 소년이 서 있었다. 나도 할머니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소년에게 맑은 미소를 보냈다. 그리고 할머니가 가만히 촛불을 감싸면서 동시에 내 손을 거머쥔 것처럼 나도 소년의 손을 거머쥐고 불을 붙여주었다. 춘천 시청 광장은 어느 새 촛불 광장이 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아까 그 소년은 또 누구에게 불을 붙여주고 있을까 하고 고개를 돌려보았다.
소년은 검은 안경을 쓴 한 맹인의 초에 불을 댕겨주고 있었다. 한 손엔 흰 지팡이, 또 한 손엔 초를 든 맹인이 두 손을 모아 소년으로부터 촛불을 옮겨받고 있었다. 순간, 내 가슴은 심하게 뛰었다. 맹인의 손에도 촛불은 켜져 있었다. 빛을 볼 수 없는 그의 손에도 촛불은 어둠을 밝히며 타오르고 있었다. 맹인의 손에 들린 부활의 촛불! 그것은 바로 새 생명의 촛불이 아니었을까.
지금도 봄이 오면 맹인의 초에 불을 붙여주던 소년과, 비록 볼 수는 없지만 촛불을 들고 예배를 보던 그 맹인이 떠오른다. 해뜨기전이 가장 춥듯이 나는 늘 봄이 오기전이 왠지 춥고 두렵다. 그러나 그 맹인의 촛불을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봄을 기다리는 일도 두렵지 않다.
■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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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시인은 인간의 가슴에 창을 달아주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볼 때가 있다. 원래 사람은 태어날 때 마음속에 열 개 정도의 창을 신으로부터 부여받고 태어난다고 한다. 그런데 고통스러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마음속에 있는 창을 전부 부서뜨리거나 잃어버리고 만다고 한다. 나는 사람들이 잃어버린 그 창을 다시 가슴속에 달아주는 일을 시인이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러면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면 또 이런 생각도 해 본다. 우리에게 주어진 1년이라는 열두 달, 그 한 달 한 달이
바로 우리들의 마음속에 주어진 또 하나의 창이 아닌가 하는 생각…….
우리가 산다는 것은 그 한 달 한 달의 창에 열심히 입김을 호호 불어가면
서 먼지를 털고 닦는 행위가 아닌가 싶다. 따라서 한 해를 잘 산 사람은 12월이 되어도 열두 개의 창이 모두 맑고 깨끗하게 햇빛에 빛날 것이고, 한 해를 제대로 보내지 못한 사람은 창에 먼지가 끼어 더럽거나 아니면 부서지고 망가져 몇 개 남아 있지도 않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지난 한 해 동안 나는 누구를 제대로 사랑해본 적이 없다. 어머니와 친구들로부터 사랑을 받기만 했지 내가 그들에게 준 사랑은 거의 없다. 어머니와 아내에게는 짜증과 신경질을, 친구들에게는 무관심과 귀찮음을, 아들에게는 거친 눈길과 채찍을 주었을 뿐, 뭐 하나 뜨거운 내 가슴을 전한 게 없다.
아, 맞다. 나는 지금까지 남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일에 깊이가 없었다. 실수하지 않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으며 실수하기 때문에 우리 모두 인간임에도, 남의 작은 잘못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남의 작은 실수조차 용서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또 한 해를 보내는 12월의 창가에 서 있다. 바람이 차다. 느낌표가 아니라 마침표를 찍듯이 눈이 내린다. 눈을 맞고 가는 사람의 뒷모습이 아름답지 못하다. 아마 나처럼 마음의 창이 다 부서진 사람들인가 보다
그러나 아직 절망하지는 않는다. 우리에겐 또다시 마음의 창을 달 수 있는 1월이 기다리고 있다. 이것은 신이 우리에게 준 추복이다.
■ 내 인생을 움직인 한 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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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동대구역에 도착하자 가슴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가끔 고향 대구에 가는 일이 있었으므로 기차가 대구에 도착했다고 해서 그리 가슴 떨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날만은 달랐다. 중학교를 졸업한 지 33년 만에 동대구역에서 은사이신 김진태 선생님을 만나기로 약속이 돼 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자택이나 자택 가까운 커피숍으로 찾아뵙겠다고 해도 굳이 당신께서 동대구역으로 마중을 나오시겠다고 했다. 여든이 넘으신 선생님께서 나 같은 하찮은 제자를 역까지 마중 나오신다는 것이 경우에 맞지 않고 너무나
황송해서 몇 번이나 그러지 마시라고 해도 선생님은 막무가내였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기차도착 시간에 맞추어 동대구역 구내 커피숍에서 선생님과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선생님은 검소한 점퍼 차림새로 커피숍에 일찌감치 자리를 잡고 앉아 계셨다. 국어 시간에 김영랑의 시를 가르치실 때의 그 잔잔한 미소로 나를 따뜻하게 맞아 주셨다.
1964년, 대구 계성중학교 2학년 국어 시간 때의 일이다. 당시 소설을 쓰시던 (만선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가. 그때는 알지도 못했지만> 김진태 선생님께서 우리들에게 느닷없이 시를 한 편씩 써 오라는 숙제를 내어주셨다. 그때 우리는 교과서에 실린 김영랑의 시, ‘돌담에 속삭이는 햇빛같이 / 풀 아래 웃음짓는 샘물같이 /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길 위에 /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등을 배우고 있었다.
나는 일주일 내내 걱정을 하다가 하루 전날 <자갈밭에서>라는 제목의 시를 한 편 써서 학교에 갔다.
지금은 확실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린 날 내 가난의 체험을 여름날 자갈밭에 나뒹구는 자갈들에 비유해서 쓴 시였다. “으음, 아주 잘 썼군.” 선생님은 교단에 서서 수업을 하지 않고 꼭 학생들이 앉아 있는 책상머리로 내려와서 수업을 하셨는데, 대뜸 선생님의 손이 고구마처럼 생긴 내 까까머리를 쓰다듬었다. 뜻밖이었다.
“열심히 노력한다면 넌 훌륭한 시인이 될 수 있을 것 같구나. 앞으로 열심히 한 번 써봐.” 그 말 한 마디는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선생님의 그 한마디 말씀이 내 인생을 바꾸어 놓을 줄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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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동대구역 커피솝에서 나와 어느 조용한 음식점으로 들어가 선생님께 먼저 큰 절을 올렸다. 그리고 술도 한 잔 올리면서 “제가 시를 쓰게 된 것은 다 선생님 은혜입니다.”하고 말했다.
선생님은 그저 웃으시기만 하셨다.
■ 똥을 누던 소년
어린 시절에 내가 직접 겪은 자연에 대한 체험에서부터 내 시가 시작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누구에게나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어린 시절에 자연스럽게 경험한 자연에 대한 체험이 있다. 나에게도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그런 체험의 한 장면이 시를 위한 하나의 밑그림으로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한 소년이 한밤중에 사과나무 아래에서 똥을 누다가 밤하늘 달과 별을 바라보는 장면이다. 나는 초등학교 때 과수원을 하는 외삼촌네 식구들과 한울타리 안에서 살았다. 밤중에 갑자기 똥이 누고 싶어 밖에 나가면 무서워서, 꼭 귀신이 나올 것만 같아서 뒷간으로는 가지 못하고 마루에 켠 호롱불의 불빛이 닿는 사과나무 아래에 가서 똥을 누었다.
그런데 똥을 누다가 문득 밤하늘을 쳐다보면 밤하늘엔 초승달이 떠 있었고 별들이 빛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밤하늘이 아름답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게 된 것 같다. 사과나무 아래 쪼그리고 앉아 똥을 누다가 밤하늘을 바라보는 소년이 있는 한 폭의 그림! 그 그림이 바로 내 시의 밑그림이다.
사실 사람은 어릴 때 자연 그 자체다. 어릴 때만큼 자연과 일치된 삶을 살 때가 없다. 그러나 정작 어린 시절에는 그것을 잘 알지 못한다. 차차 삶에 대한 인식의 눈이 확대되면서 자연으로부터 독립되거나 유리된 존재라고 생각한다. 아니 자연 그 자체를 잊고 산다.
봄이 와서 꽃이 피어도 아름다운 줄 모른다. 한 송이 꽃이 우리의 영혼을 아름답게 한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다가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문득 자연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요즘 나도 나이가 들었기 때문일까. 매일매일 자연을 새롭게 만나는 기쁨을 느낀다. 꽃 한 송이를 봐도 그저 기쁘기 한량없다. 언제 이렇게 꽃과 풀이 아름다웠던가 하고 새삼 내 삶의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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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자연을 이해할 때 아름다워진다. 사람은 자연과 하나가 되었을 때 아름다워진다. 시인은 자연을 새롭게 만나지 않거나 자연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시를 쓸 수 없다. 시는 인간과 자연을 이해하는 데서 나온다. 자연으로서의 인간과 인간으로서의 자연을 이해하는 데서 시는 시작된다.
■ 희망을 주는 기도문
이 기도문은 기도의 시인 이해인 수녀님께서 쓰신 기도문이다. 혹시 절망에 빠진 분이 있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 바란다. 스스로 희망의 물고기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주님! 겐네사렛 호수에서 당신의 제자들이 많은 물고기를 잡은 것처럼 저는 날마다 마음의 호수에서 많은 물고기를 낚아 올립니다.
지느러미 하늘대며 펄펄 살아 뛰는 그 싱싱한 물고기들의 이름은 희망, 기쁨, 겸손, 인내……. 모두가 당신의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호수 깊은 곳에 그물을 쳐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이 잡힌 물고기에 제자들이 놀란 것처럼 저도 당신의 크신 사랑과 능력에 할 말을 잃어버린 작은 어부입니다.
주님! 때로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제가 절망의 한가운데서 빈 그물을 씻을 때마다 당신은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깊은 데로 가 그물을 쳐라.”
그리고 당신의 말씀대로 마음 깊은 곳에 기도의 그물을 치면 비늘이 찬란한 희망과 기쁨의 고기가 잡혔습니다. 삶에 필요한 겸손과 인내도 많이 얻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저의 뜻에 따라 살지 않고 멀리 떠날 준비를 하게 하소서. 배와 그물조차 버리고 당신을 따라나선 제자들처럼 모든 정든 것을 버리고도 기쁠 수 있는 사랑의 순명만이 승리할 수 있도록…….
■ 인생이 문학이다
나는 늘 문학을 인생의 상위개념에 두었다. 언제나 문학은 인생의 우위에 있는 것이며, 인생은 문학에 수반되는 것쯤으로 여기고 인생을 문학의 하위개념에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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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하고 추구하는 문학을 위해서는 나의 인생이 희생되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나 자신의 삶의 형태야 어떠하든 내가 원하는 문학의 형태만 구축되면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나 자신의 인생을 위해서 문학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의 문학을 위해서 인생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 나의 이런 생각들은 차차 나이가 들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인간을 알고 인생의 비밀을 하나 둘 알게 되면서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문학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문 학은 어디까지나 인생의 바탕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으며, 문학의 본질은 인간의 삶 그 자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끄러워 고개를 들기 어렵다. 내 문학의 자양분이야말로
내 인생이라는 사실을 왜 몰랐던가. 문학이 삶의 지극히 작은 한 부분이라는 것을 왜 알지 못했던가. 왜 문학과 삶의 위치를 전도시키고 말았는가. 삶이 없으면 문학도 없다는 이 분명한 사실을 깨닫는 데 나는 40여 년이나 걸렸다. 최소한 문학과 인생을 대칭관계 정도라고 파악했어야 옳았다. 적어도 문학을 위하여 나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야 했다.
나는 이제 문학은 인간을 위해. 인간의 삶을 위해 존재하는 것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문학만을 위한 인생이 없듯이 인생만을 위한 문학도 없다고 생각한다. 문학은 자기의 인생을 얼마나 열심히, 성실하고 진실하게 잘 살았느냐 하는 데에 달려 있다. 인생이야말로 문학이다. 나의 인생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시다.
“인생은 모든 예술보다 위대하다. 한걸음 더 나아가 완벽에 가까운 인생을 영위하는 인간이야말로 가장 위대한 예술가다. 그 까닭은 숭고한 인생이라는 확실한 토대와 틀 없이는 예술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 날, 인도의 성자 간디 옹의 이 한 말씀을 접하고 나는 심한 부끄러움과 충격에 휩싸였다. 나는 인생의 예술성을 모르고 있었다. 아직까지 인생을 예술의 차원으로까지 끌어 오려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문학이 인생이 아니라, 인생이 문학이기 때문에.
■ 어머니는 늙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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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다 늙는다. 이 세상에 늙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이 땅의 어머니들만은 늙지 않았으면 한다. 나에게 소원이 하나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이 땅의 어머니들이 늙어가는 모습은 왠지 애잔하고 눈물겹다.
이제는 어머니가 즐겨 가꾸시던 꽃밭도 없다. 어머니가 가꾸시던 우리 집
꽃밭에는 장미, 달리아, 채송화, 분꽃, 봉숭아, 달맞이꽃, 수국 등의 꽃들이
겨울이 될 때까지 늘 그치지 않고 피었다 졌다.
그러나 이제 늙으신 어머니가 가꾸실 꽃밭은 없다. 어머니 인생의 꽃밭에 있는 꽃들은 모두 시들어버렸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석류나무 아래에서 찍은 옛 사진을 꺼내놓고 보면 지금의 어머니는 세월이 흐른 만큼이나 그 모습이 변해 있다. 어머니는 흑백 사진 속에서만 영원히 젊을 뿐. 지금은 허리도 꼬부장하고 걸음마저 활발하지 못하다. 틀니를 빼고 혼곤히 잠들어 주무시는 모습을 보면 입 주위가 유난히 합죽하고, 키가 더욱 줄어든 것 같아 문득 눈물이 고인다.
어머니가 늙으신 것을 깨닫게 된 것은 어머니의 한마디 말씀 때문이다. 언제부터 어머니는 나에게 ‘고맙다’라는 말을 곧잘 하신다.
“어머니 무슨 그런 말씀을 다하세요, 자식한테 고맙다니요.” 내가 못마땅하다는 듯이 한마디 하면 그래도 어머니는 그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때 문득 깨달을 수 있었다. 부모가 자식에게 고맙다는 말을 할 때쯤이면 부모는 이제 몸도 마음도 다 늙으신 갓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때쯤이면 자식들이 어머니의 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내가 진정으로 어머니가 늙지 않기를 바란다면, 영원히 늙지 않으실 것이라고 진정으로 믿는다면, 이 땅의 어머니들은 영원히 늙지 않으실 거시다. 왜냐하면 어머니도 하느님처럼 우리에게 사랑의 존재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다음과 같은 글을 늘 기도처럼 읊조리고 되뇌어본다.
‘하느님은 아름다운 어머니를 만드셨습니다. 어머니의 미소를 햇빛으로 만들고, 어머니의 눈 속에 밝게 빛나는 별을 심으시고, 양 볼에는 예쁜 장미를 심으셨습니다. 하느님은 아름다운 어머니를 이렇게 만들어 저에게 주셨습니다. 결코 늙지 않는 아름다운 어머니를 주셨습니다.’
2015. 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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