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위바위보 문명론

2015. 10. 2. 14:27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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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바위보 문명론

- 물고 물리는 한중일 관계, 새 아시아 문명의 답이 여기 있다. -

■ 이어령 지음

0 서울대 국문과, 동 대학원졸업, 문학박사

0 소설가, 문학평론가, 에세이스트, 초대 문화부 장관

0 서울올림픽 개폐회식 주관,

0 새천년준비위원회 위원장 - 문화행사 기획 및 실행

0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중앙일보 상임고문, (재)한중일 비교문화 이사장

0 흙속에 저 바람속에 / 축소 지향의 일본인 / 디지로그 / 지성에서 영성으 로 / 생명이 자본이다 / 젊음의 탄생, 등

■ 허숙 옮김

0 건국대 일어교육과 졸, 일본회사에서 통역 및 번역 업무

0 일본문학 및 에니메이션 전문번역가

■ 한국어판에 부치는 글

‘번역자는 배신자’라는 유명한 격언이 있다. 내가 일본말로 쓴 <가위바위보 문명론>을 내 자신이 번역한다면 내가 나를 배신하는 경우가 된다. 이 책이 일본에서 출간된 뒤 10년이나 더 지나 이제야 번역본이 나오게 된 이유도 그 때문이다.

<축소 지향의 일본인>한국어판도 실은 내 자신이 번역한 게 아니다. 남의 나라말로 쓴 글을 모국어로 환원한다는 것은 도저히 맨정신으로 할 일이 못 된다. 언어 체계 전체를 바꾸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남의 글이라면 배신자가 되는 것도 마음 먹기에 달린 것이지만 내가 쓴 글을 내 손으로 그럴 수는 없다. 번역이 아니라 새로 써야 할 것이다. 그래서 번역본이 아닌 새 책으로 고쳐쓰려 하다가 결국은 남의 손을 빌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그런 결단을 하지 않았다면 영영 이 책은 일본 귀신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 일본에서 가위바위보의 학술명은 ‘권(拳)’이다. 우리가 ‘주먹 권’자를 쓸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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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 태권도의 권, 중국 무술의 권 등과 구별이 되지 않음

- 일본에서 ‘권’이라고 할 때의 그 뜻은 가위바위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수권(數拳), 충권(虫拳), 호권(虎拳)등 손으로 하는 여러 종류의 게임을 통틀어 하는 말

- 일본에서 가위바위보는 에도(江戶)시대 이후에 생긴 것

- 일본의 삼국권 : 일본의 신도, 중국의 유교, 인도의 불교가 가위바위보처럼 물고 물리는 손 놀이 게임, 신도는 불교에, 불교는 유교에, 유교는 다시 신도에 지는 순환관계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또다시 아시아가 중국 또는 일본이 패권을 다투는 각축장이 되고 있는 오늘의 동아시아 상황 때문이다. 주먹과 보자기만 있는 이항 대립의 동전 던지기 같은 서구식 게임으로는 과거의 중화주의, 대동아주의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반은 열리고 반은 닫힌 가위가 있기에 비로소 주먹과 보자기는 양국의 문명 대결에서 벗어날 수 있다. 금, 은, 동의 서열을 탈구축한다. 바위는 가위를 이기지만 가위는 보자기를 이긴다. 그리고 보자기는 최하위가 아니라 최상자에 있던 주먹을 이김으로써 동그란 순환의 고리를 만든다. 동그랗게 동그랗게 순환하는 가위바위보의 관계가 대륙, 해양 사이에 낀 반도의 절묘한 세 문화의 상생, 순환의 한중일 관계로 새 문명을 열게 된다. 2015. 7. 이어령

■ 가위바위보 ‘세 가지 이야기’

호모 하빌리스(도구적 인간)의 자손이 순수하게 자신의 손을 보는 순간은 가위바위보를 할 때 뿐이다. 자신의 손과 타인의 손이 만나 마치 다이아몬드 반지를 낀 것처럼 손가락이 반짝일 때, 처음으로 손은 날개가 되어 자유롭게 하늘을 난다.

공작(孔雀)이 밀교(密敎)의 명왕(明王)으로 숭배되던 것은 아름다운 날개 때문이 아니다. 독사에게 물려도 그 독을 해독하는 정화능력이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분명 우리가 살아온 근대 산업 문명은 이브를 유혹한 독사에 비유될 수도 있다. 독은 어디까지나 실체가 아닌 상대적인 관계 속에 있는 것이다. 관계에 따라 독이 되기도 하고 약이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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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은 명주실로 샤미센을 만들어 연주하지만 서양인은 그것을 체로 만들어 정도(精度) 높은 화약을 만들었다. 또 같은 화약이라 하더라도 축제의 불꽃놀이가 되기도 하고 전쟁의 폭탄이 되기도 한다.

무언가를 결정할 때, 서양 아이들은 동전을 던지지만 아시아 아이들은 가위바위보를 한다. 앞이냐 뒤냐 그 단면만으로 결정하는 동전은 ‘실체’이며 ‘독백’이다. 하지만 상대의 손과 만났을 때 의미가 생기는 가위바위보는 ‘관계’이며 ‘대화’이다.

동전던지기냐 가위바위보냐. 어느 쪽으로 기우느냐에 따라 다른 문화가 나타나고 다른 미래문명이 등장한다. 가위바위보는 혼작서는 할 수 없다. 또한 동시에 손을 내미는 평등한 게임이다. 상호 의존하는 네트워크 시대에는 ‘가위바위보’가 공작처럼 문명의 독을 정화하고 아름다운 꼬리를 펼친다. 21세기는 가위바위보의 세기이다.

이 책은 ‘아시아 삼국’의 이야기이다.

가위바위보는 강한 것보다 약한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쳐 준다. 거대한 중국과 강력한 일본이 힘자랑만 한다면 가위바위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주먹 아니면 보자기의 뻔한 싸움에는 양자택일의 대립밖에는 생기지 않는다.

부드러운 보가 딱딱한 바위를 이기는 가위바위보의 덕(德)이 동아시아 평화의 엔진이었다. 하지만 가위바위보는 ‘바위’와 ‘보’만으로는 성립될 수 없다. 대륙인 중국과 섬나라인 일본 사이에 한반도라는 ‘가위’가 존재함으로써 비로소 끊임없이 경쟁하면서도 절대 승자 없는 아시아의 다이내믹한 둥근 원이 만들어진다.

유럽 제국의 국기는 프랑스의 삼색기처럼 모두 선조형으로 되어 있다. 미국의 성조기에도 13개의 직선이 있다. 그에 비해 동아시아 삼국의 국기는 청천백일기를 포함해 모두 원형이다. 단순한 우연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아시아는 똑바로 읽어도 거꾸로 읽어도 아시아이다.

01 왜 지금 가위바위보인가

■ 표 파는 곳에서 생각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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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신칸센은 빠르다. 지금도 세계 최첨단 과학기술을 자랑한다. 그러나 증기기관차가 달리던 옛날과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것이 있다. ‘신칸센 표 파는 곳’이라고 큼지막하게 쓰여 있는 역 내의 안내판이다.

이 ‘표 파는 곳’은 어디까지나 파는 쪽이 중심이고 승객의 입장에서는 ‘표 사는 곳’이 되어야 한다. 몇 백만 명의 손님이 매일 표를 사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더욱이 현대는 손님을 왕이라고 부르는 시대인데 말이다. 이런 현상은 주체를 완전히 잃어버린 자신에게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된 습관이다.

- 교실(敎室), 교과서(敎科書) : 교사 중심의 표현

- 학실(學室), 학습서(學習書) : 학생중심의 표현

이것 하나만 봐도 학교는 가르치는 쪽에 치우쳐 있고, 학생보다 가르치는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시장은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이 존재한다. 학교는 가르치는 교사와 배우는 학생의 관계가 있어야 비로소 성립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입장에 따라 양쪽의 관계는 단절되고, 단절된 양쪽은 제가끔 홀로 걸어간다. 거대화, 대량화, 관료화의 근대 문명 속에 학교가 교육이 침몰한다.

■ 차가운 기차

‘교실’이라는 말에서 학생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표 파는 곳’이라는 말에는 승객의 얼굴이 없다. 근대 산업문명과 함께 나타난 기차는 더 이상 한가로운 시골의 승합 마차가 아닌 것이다. ‘철마’라 불리던 차가운 기차는 사람이 타고 있든 안타고 있든 시간표대로 출발한다. 그리고 정해진 궤도 위를 달려 정해진 역에 정차한다. 승객 한 사람 한 사람의 편의나 사정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 익숙해진 현대인들에게는 당연한 일이지만 처음 기차를 탄 옛날 승객들은 그 몰인정함과 무례함에 당혹감과 분노를 느꼈다. 가마를 타고 점잖게 역에 들어온 양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큰 소리를 내며 요란스럽게 지나가는 열차를 향해 ‘나 좀보소(멈추시오)’라고 외쳤다. 또 승객들은 역이 가까워지면 열차가 채 멈추기도 전에 황급히 뛰어 내렸다. 기차가 서지 않고 그대로 지나칠지도 모른다고 걱정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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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도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성을 우습게 아는 기차와 다를 게 없다. 이미 정해진 철길에 맞춰 초등학교부터 대학교라는 종점까지 학생들을 실어내린다. 기차라면 그래도 괜찮다. 초, 중, 고, 대학에 이르는 교육과정은 컨베이어벨트를 따라 일관되게 움직이는 공장인 것이다. 공장의 품질관리와 같은 시험이 행해지고 그것을 통과한 학생만이 공장 제품의 합격품 딱지처럼 졸업장을 받을 수 있다.

단 공장 제품과 다른 점은 불량품이 나와도 애프터서비스와 리콜 제도가 없다는 점이다. 교과서의 내용도 틀에 박힌 공장 매뉴얼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오직 한 방향으로만 향하는 깔끔한 직선형이다. 그래서 ‘갓코아타마(學校頭 : 사고가 굳은 것을 뜻함)’라는 일본어나 ‘교과서적’이라는 한국어 표현도 생긴 것이다. 사회에 나와 교과서대로 행동하면 당장 바보 취급을 받는다.

■ 엘리베이터와 승강기

0 엘리베이터는 ‘올리다’라는 뜻의 영어 동사 ‘elevate’에 ‘or’을 붙인 것

0 옛날 교회 라틴어에서는 지옥에 떨어진 죄인을 끌어 올려 구원해 주는 구 세주를 의미

0 미국에서는 키높이 구두를 ‘엘리베아터 슈즈’란 부름

0 엘리베이터는 ‘올라가는’ 쪽을 메인 컨셉으로 삼고 ‘내려가는’ 쪽은 무시, 그래서 ‘올라가는’ 것을 타고 ‘내려오는’ 터무니없는 표현

0 프랑스의 ‘아쌍쇠르(ascenseur)’ 독일어의 ‘파슈툴(fahrstuhl)’도 같은 표현

0 엘리베이터가 일본에 들어오면서 ‘승강기(昇降機)’라는 제대로 된 호칭으 로 바뀜, 중국에서도 전기로 움직이는 사다리라는 의미로 ‘디엔티(電梯)’ 라고 해 승강의 뜻을 포함

0 영어의 마운틴(mountain)에도 ‘오르다’라는 일방적인 의미 밖에 없음

엘리베이터라는 기호는 양쪽 면 중에서 주된 한쪽 면만을 잘라낸 것으로 배타적인 직선형 사고방식을 나타내고 있다. 이에 반해 승강기라는 개념는 양면성을 동시에 나타내는 포괄적인 사고방식이다.

이제 더 이상 엘리베이터를 승강기라 부르는 사람은 없다. 한국과 중국에는 ‘동도서기(東道西器)’, 일본에는 화혼양재(和魂洋才)‘라는 표현이 있지만 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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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器)과 재주(才)가 바뀌면 도리(道)와 정신(魂)도 함께 바뀌기 마련이다.

아시아의 근대화를 한 마디로 말하면 승강기에서 엘리베이터로 기호의 시스템이 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 사람을 의미하는 말, 남자

사람을 의미하는 영어의 ‘맨(man)’이 정확히 엘리베이터와 똑같은 코드이다. 남성을 의미하는 ‘맨man’과 여성을 의미하는 ‘우먼woman’은 반의어 관계에 있지만 둘을 합친 ‘사람’을 말할 때도 역시 ‘맨’이라고 한다. ‘우먼’은 남성을 의미하는 ‘맨’에 종속되어 그 모습이 사라졌다.

아시아에는 남녀 양쪽을 포괄하는 인(人)이라는 독립적이고 공평한 단어가 있고, 남男 과 여女가 있어서 상보적인 관계를 나타낸다.

영어는 이슬람 여성들이 차도르를 벗는 것보다 훨씬 더 극복하기 어려운 성차별을 안고 있다. ‘맨’을 ‘휴먼human’이나 ‘맨카인드mankind’ 라고 불러도 여전히 ‘맨’이 들어 있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페미니스트(여성주의자)들이 ‘잉글리시english’를 ‘맨글리시manglish’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남성은 결혼을 하든 안 하든 ‘미스터Mr’이지만 여성은 ‘미스Miss’와 ‘미시즈Mrs’로 엄연히 구분되어 있다. 이러한 이유로 ‘미즈Ms’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도 계속해서 차별어가 나타난다.

0 역사를 의미하는 ‘히스토리history’를 ‘허스토리herstory’라고 쓰는 페미니스트도 있다. 히스토리는 his + story로 ‘남성의 역사’라는 의미를 풍기므로……. 여성을 의미하는 ‘woman’도 남성을 의미하는 ‘man’이라는 글자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womin’이라고 철자를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음

‘개’ 라는 뜻의 ‘도그dog’도 모든 개를 나타내는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수케를 의미, 암캐는 ‘SOB son of a bitch’의 ‘비치’가 암캐를 의미함

남성을 가리키는 ‘맨’이 사람을 의미하고, ‘수캐’를 의미하는 ‘도그’가 개 전체를 나타낸다. 그래서 ‘DOG를 거꾸로 읽으면 GOD가 된다’는 말이 단순한 언어유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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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들지 못하는 원숭이 - 낮과 밤

헤라클레이토스는 ‘신은 낮과 밤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유럽 문명에서는 낮의 ‘데이day’와 밤의 ‘나이트night’를 균등하게 통합할 수 없다.

- 영어에서는 ‘낮’도 day이고 하루를 의미하는 일(日)도 ‘day’이다.

- 라틴어 ‘디엠diem’, 프랑스어 ‘주르jour’, 이탈리아어 ‘조르노giorno’, 독일어의 ‘탁Tag’에 이르기까지 모두 ‘낮’과 ‘일(日)’을 같은 말로 사용

- 그래서 휴전에 동의한 적군이 밤마다 쳐들어오는 해프닝이 일어난다. 조약문서의 ‘일’은 하루를 의미하는 ‘일’이 아니라 낮을 의미하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밤에 공격을 하는 것은 휴전협정 위반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로마시대의 이야기다.

그리스의 철학자들도 낮이 먼저냐 밤이 먼저냐의 문제를 놓고 언쟁을 벌였다고 한다. 하지만 낮이 하루를 대표하는 지금의 유럽 문명은 토머스 에디슨의 백열등 발명에 의해 완성된다. 밤의 어둠을 쫓아내는 불빛의 발명은 도시를 불야성으로 바꾸었고 근대인에게는 연간 500시간의 깨어 있는 시간을 선물해주었다.

하지만 스탠리 코렌(Stanley Coren)의 말처럼 24시간 사회를 살아가던 현대인들은 자신들이 잠을 도둑맞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수면부족으로 일어나는 사고로 인해 미국에서만 연간 560억 달러의 손실을 입었으며, 2만 5,000명이 목숨을 잃었고, 250만 명이 상해를 입었다고 한다.

동화 <모모>의 작가 미하엘 엔데(Michael Ende)의 말을 빌리자면, 현대 문명은 시간 도둑이다. 우리 아이들이 파멸하는 제3차 전쟁은 이미 일어났다는 것이다. 다만 우리가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은 그것이 이전과 같은 ‘영토 전쟁’이 아니라 ‘시간 전쟁’이기 때문이다.

■ 바다와 육지의 지정학

엘리베이터의 기호체계는 지구의 스케일로까지 확대된다. 육지를 의미하는 단어 ‘어스earth’는 ‘바다와 육지 sea and earth’처럼 바다의 반의어지만, ‘태양과 지구 sun and earth’라고 할 경우에는 바다까지 포함해 지구 전체를 의미하는 말이 된다. 대륙이 자기보다 넓은 대양을 집어삼킨 것이다. 바다는 지구의 7할을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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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지에 사는 인간은 바다를 단지 그 종속물로만 생각한다. 성서의 창세기를 읽어보자 신은 노아의 방주에 탄 생물 이외에 다른 모든 생물은 대홍수로 전멸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대홍수에도 익사하지 않는 어류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설명도 없다. 물속에 사는 물고기들에게는 강과 바다가 이미 노아의 방주가 아닌가. 그렇다면 노아의 방주가 상징하고 있는 것은 바다가 누락된 지구이다. 노아의 방주도 바다에 뜬 거대한 엘리베이터였던 것이다.

‘천지인(天地人)’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한자 문화권에서도 바다는 육지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산해진미(山海珍味)’라는 표현처럼 산해는 항상 한 쌍의 반의어 형태로 모든 말에 붙어 다닌다. 또 수많은 용궁 전설은 바다와 육지의 상대적 공간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상상의 세계에서는 중국 대륙마저 커다란 바다거북 등에 얹혀져 있는 땅이라고 믿고 있다.

■ 문명충돌론의 근원

표 파는 곳, 교실과 교과서, 그리고 엘리베이터 등은 평소에는 신경도 쓰지 않는 말이지만, 이렇게 파고들면 그것들이 실은 근대 문명이라는 거대한 공룡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비늘’임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면 엘리베이터의 코드를 뒤집으면 되는 걸까. 그렇다. 베르너 좀바르트(Werner Sombart)의 경제이론이 한때 신선하게 받아들여진 것도 지금까지의 생산 중심 경제를 소비 중심으로 역전시켰기 때문이다. 또한 1960년대 후반 미국의 얼터너티브Alternative(대안) 교육이 인기를 끈 것도 교육 시스템을 가르치는 쪽에서 배우는 쪽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는 쪽에서 사는 쪽을 패러다임을 바꾸고 가르치는 쪽에서 배우는 쪽으로 그 중심을 옮겨도 문제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history’를 ‘herstory’로 바꾸는 것과 똑같다. 어차피 거지가 왕관을 쓰는 미하일 바흐친 광장의 카니발과 같은 소동일 뿐이다. 승자와 패자를 바꾸어도 결국은 지배와 종속의 관계를 뒤집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이항대립의 기호체계에서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택밖에 없다.

■ 티켓과 텍스트 - 사물의 지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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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원점으로 돌려보자. 서양에서는 ‘표 파는 곳’과 ‘교과서’를 뭐라고 부를까. ‘표 파는 곳’은 의외로 간단하다. 표를 파는 곳도 사는 곳도 아니다. 역에는 그냥 ‘티켓’이라고 표시되어 있다. 파는 사람도 사는 사람도 아니다. 그저 ‘사물’만이 있는 것이다.

말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정말로 얼굴 없는 자동판매기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세상이 됐다. 일본의 경우 자동판매기의 수가 22명당 한 대이다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의 관계가 단절된 사물의 교환시스템에 의해 사회전체가 바코드화되고, 또 바코드 판독기에 의해 관리되는 편의점적인 생활방식으로 변했다.

말하자면 티켓이라는 말이 자동판매기와 바코드로 확대되어 이제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 사이에는 흥정이라는 커뮤니케이션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교과서도 마찬가지다. 서양에서는 가르치는 책도 배우는 책도 아니다. ‘텍스트북’이라고 한다. 그 말에는 가르치는 사람도 배우는 사람도 없다. 그저 사물이 있을 뿐이다.

파는 사람과 사는 사람,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벗어난 사물은 중립적인 가치를 지니게 된다. 이러한 세계에 익숙해지면 시스템에 맞지 않는 것은 모두 노이즈(잡음)로 처리한다.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일정 규격에 맞지 않으면 잘라내 버린다.

그 결과 인간의 마음이나 생체의 움직임까지 기계와 흑백의 이항대립으로 정리되고, 그것에서 벗어난 것은 돌연변이로 간주해 배제한다.

현대인이 후각의 80%를 잃어버린 것도 근대 문명의 영향이라고 한다. 원래 인간은 1만 종 이상의 냄새를 구별해내는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대 미국인의 경우 많아야 2,000종 안팎의 냄새만을 구별해 낸다고 한다.

냄새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이어주는 것은 선향(線香, 향료 가루를 가늘고 긴 선 모양으로 만들어 풀로 굳힌 것)) 냄새이다. 한자 문화권에서 흔히 사용하는 ‘기(氣)’라는 개념에 가장 가까운 물질이다.

일본어로 병을 뜻하는 ‘뵤우키(病氣)’, 기력을 듯하는 ‘겐키(元氣)’처럼 ‘기’가 붙은 말은 모두 한방 의학과 연결되어 있다. 자크 아탈리(Jacques Attali)가 <21세기 사전>에서 미래의 의학은 동양 의술이 이끌어 갈 것이라고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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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한 것은 거기에 ‘기’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시장에서 , 교실에서, 그리고 도시 전체에서 사람 냄새가 사라져 가고 있다는 깨닫게 된다.

■ 사람과 ‘사물’

‘팔다-사다’, ‘가르치다-배우다’등의 인간관계로부터 ‘티켓’, ‘텍스트북’과 같은 사물관계로 그 중심이 옮겨진 현대 사회에서는 대낮의 시장에서 돈을 훔친 제(齊)나라 사람의 고사(故事)와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 시장에서 그것도 대낮에 돈을 훔친 것인가?’라고 관리가 힐문하자 죄인은 떳떳하게 대답했다. ‘제 눈에는 오직 돈만 보이고 사람이 모습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서양의 사물에 마음을 빼앗긴 아시아인들은 모두 제나라 고사의 죄인과 같은 상태로 변해버렸다. ‘구화주의(歐化主義)’는 사람에서 사물로 시선을 옮겨가는 ‘물화주의(物化主義)’라고도 할 수 있다.

■ 아시아의 지혜의 나무

옛날 아시아인들은 사물을 하나의 독립된 개체라기보다는 상호적인 관계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표 파는 곳’이나 ‘교과서’처럼 일방적인 입장에서 이름을 붙이는 것을 싫어했으며, ‘매매(賣買)’, ‘교습(敎習)’과 같은 복합어를 좋아했다. 또한 그것을 용이하게 만든 것이 비대칭의 양변을 동시에 포용하는 한자의 특징이기도 했다. 세상 만물은 음과 양의 상보적인 성질을 지니고 있다.

반드시라고 해도 문제가 없을 만큼 한자의 명명법은 서로 다른 양면을 두 글자로 결합시키고 있다.

- 한자의 출입구(出入口) - 알파벳 문화권 사람들은 하나의 문을 ‘입구 entrance’와 ‘출구exit’로 구별

- 세계(世界) - ‘세(世)’ 30년을 나타내는 시간의 의미, 계(界)는 경계를 나타내는 공간 개념으로 영어의 ‘월드world’와는 다른 개념

- 스페이스space 와 우주(宇宙) - ‘우’는 끝없는 공간, ‘주’는 무한한 시간으로 공간만을 의미하는 스페이스와는 다른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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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자(孔子)의 테일러메이드 교육

학교(學校)라는 단어는 ‘맹자(孟子)’에서 유래한 것으로 ‘배우다’의 학(學)과 ‘비교하다(較)’, ‘가르치다(敎)’를 합친 말이다. 또 근대 이전에 많이 쓰이던 ‘학당(學堂)’, ‘학원(學院)’이란 이름은 모두 배우는 사람을 주체로 한 말이다. 하지만 현대 사전을 펼쳐보면 ‘학교는 교사가 아동을 가르치는 곳’ 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교육의 주체가 ‘배우는’ 쪽에서 ‘가르치는’ 쪽으로 바뀌고 일방적으로 교과서를 밀어 넣는 일괄 교육으로 바뀐 것은 근대 이후이다.

- 교사가 일정한 교과내용을 학생 전원에게 가르치는 수업 형태는 메이지(明治) 시대에 구미의 교수법을 도입하면서 부터다.

- 데라코야(서당)에서는 일괄적인 수업 형태가 아니어서 아이들 한명 한명의 발달 단계에 맞게 가르칠 수 있었다.(학생 중심의 수업)

공자는 똑같은 질문을 받은 두 제자에게 정반대의 대답을 한 적이 있다.

- ‘좋은 이야기를 들으면 곧 실천해야 합니까?’라고 묻는 자로(子路)에게 공자는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은 후에 행해야 한다고 대답.

- 다음날 같은 질문을 한 염유(冉孺)에게는 ‘망설일 것 없다. 바로 행해야 한다.“라고 대답.

- 이상하게 여긴 공서화(公西華)가 묻자 공자는 ‘자로’는 조급한 면이 있으므로 신중함을, 염유는 우유부단하므로 행동력을 강조한 것이라 대답

- 자로에게는 ‘退’를 염유에게는 ‘進’을 가르침

옛날 우리나라 서당에서는 학생 개개인의 적성에 맞춰 평가를 한 후 본인에게 통지했다. 재주가 과민한 자에게는 우(愚),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는 독선가에게는 인(仁), 효행심이 부족한 자에게는 어미 새에게 은혜를 갚는 오(烏), 성급한 자에게는 느리게 걷는 우(牛)라는 문자를 나눠줬다.

공자의 ‘인’, 선종의 줄탁동시(啐啄同時)의 관점에서 보면 ‘가르친다’는 의미의 ‘교육’이라는 말 자체가 틀린 것이다. 입장을 바꾸어 ‘학습’이라고 해도 역시 마찬가지다. 가르치는 곳과 배우는 곳은 교학실(敎學室), 가르치고 배우는 책은 교학서(敎學書)라는 개념으로 바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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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양의 가위바위보와 서양의 동전 던지기

도구와 신체성

동전 던지기는 말 그대로 동전과 같은 사물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인간을 호모 하발리스라고 부르듯, 놀이든 일이든 모든 인간의 행위에는 도구가 사용된다. 하지만 가위바위보는 어떠한 도구도 사용하지 않는다. 손만 있으면 된다. 가위바위보는 인간이 네발로 기어 다니던 생물에서 두 발로 직립했을 때의 손, 그 자체의 신체성을 살려 움직인다.

그러나 동전 던지기는 사물을 사용하므로 혼자서도 할 수 있지만 손(手)을 사용해 승부를 내는 가위바위보는 말 그대로 상대가 없으면 할 수 없다. 따라서 동전을 던질 때는 떨어져 굴러가는 사물의 움직임을 주목하지만, 가위바위보를 할 때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

◈ 실체와 관계

가위바위보 구조에서는 금, 은, 동메달과 같은 수직적, 계층적 구조와는 다른 원형의 순환 구조를 이룬다. 절대 승자도 절대 패자도 없다. ‘삼자견제’의 역학관계에서는 절대적인 강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 택일과 병존

동전은 앞면이냐 뒷면이냐 둘 중 하나밖에 없다. 동전이 바닥에 수직으로 선다면 원형이 선이 되어 양면인 앞뒤가 병존하지만, 동전 던지기에서 동전이 서는 경우는 절대로 있을 수 없다. 반면에 가위바위보는 주먹의 ‘바위’와 손바닥의 ‘보’가 정확히 동전의 앞뒤 관계와 일치하지만, 그 대립항의 한가운데에 ‘가위’가 있어 반은 열리고 반은 닫힌 모양을 하고 있다.

◈ 서열성에서 공시성으로

어려서부터 몸에 익힌 또 하나의 언어인 가위바위보는 ‘줄탁’처럼 동시에 해야만 한다. 손을 먼저 내거나 나중에 내면 가위바위보는 성립하지 않는다. 정보가 누설되기 때문이다. 구령에 맞춰 1초의 차이도 없이 동시에 손을 내민다. 서열에서 자유로워진 만남의 언어라는 것이 가위바위보의 특징이다.

◈ 아시아의 가위바위보와 기러기 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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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동서문명이라고 하는가? 왜 서동이면 안 되는 걸까. 왜 한중일이라고 하는가. 중일한, 일중한이면 왜 안 되는 걸까. 공동개최라고 하면서 한일 월드컵이냐 일한 월드컵이냐를 놓고 양국이 분쟁을 일으켰다. 천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다

그렇다 유일한 해결책은 가위바위보 코드를 사용하는 것이다. 한중일 삼국이 가위바위보를 한다. 한국 아이들은 ‘가위바위보’ 중국 아이들은 ‘차이차이차이’ 그리고 일본 아이들은 ‘장켄폰’이라고 한다. 말은 달라도 호흡만 맞추면 동시에 손을 내 밀 수 있다. 절대 승자도 없고 절대 패자도 없는 가위바위보에서는 기러기의 편대비행처럼 날 수 있는 것이다.

한 때 일본은 아시아의 안행(雁行)형 경제발전론을 제창했다. 일본이 제일 선두에서 날아가면 한쪽에서는 그 뒤를 이어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라는 네 마리 용이 쫓아가고, 다른 쪽에서는 아시아 제국의 여러 나라들이 줄지어 일본 뒤를 쫓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 생각하는 안행은 제일 선두에 언제나 일본이 날고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실제로 기러기들은 그런 비행방법을 취하지 않는다. 조류학자는 말한다.

기러기는 선두에 선 기러기가 지치면 스스로 무리의 맨 뒤로 물러나고 다른 기러기에게 선두를 양보한다. 다음 기러기는 하늘에 그려진 역V자의 정점으로 날아간다. 모든 기러기가 차례차례 무리의 선두와 후미를 맡게 된다.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다음이다. 그러므로 어떤 기러기도 선두에 있다고 우월감을 갖거나 맨 뒤에 있다고 열등감을 갖지 않는다.

가위바위보 구조에서 가위-바위-보의 승부는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둥글게 회전한다. 똑바로 읽어도 거꾸로 읽어도 아시아는 아시아인 것과 똑같다.

02 손과 가위바위보의 탄생

■ 숨어 있는 수염

긴 수염을 가진 할아버지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수염을 가슴까지 늘어뜨린 할아버지가 길을 지나던 중 한 아이를 만났다. 아이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할아버지는 주무실 때 그 수염을 이불 속에 넣고 주무세요? 아니면 밖으로 내놓고 주무세요?’하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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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갑작스런 질문에 ‘글쎄다 오늘밤 자고 나서 내일 알려주마.’

그날 밤, 할아버지는 수염을 이불 속에 넣고 자려니 어쩐지 답답하고 내 놓고 자려니 왠지 불안하여 밤새 수염을 넣었다 뺐다를 반복하다 한숨도 자지 못했다.

비웃음을 샀지만 누구에게나 잊고 있는 수염은 있는 것이다. 몸에 붙어 있는 것, 당연한 것, 일상적으로 반복해 온 것, 의식하지 않은 채 지나친 것, 이야기를 듣고서야 비로소 깨닫는 것, 그리고 대답할 수 없는 것, 생각하면 할수록 멍해지는 것들이다.

우리가 ‘문화’라고 부르는 것도 사실은 ‘잊어버린 수염’, ‘숨어 있는 수염’인 경우가 많다.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클라이드 클럭혼의 조사에 의하면 ‘문화’의 정의만도 150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문화론이란 것은 어쩌면 숙면을 방해하는 쓸데없는 질문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으로 괜찮다. 숨어 있던 수염을 의식 위로 불러온 것은 어느 천진난만한 아이의 목소리가 아니었던가.

■ 권(拳)의 문화사

몇 년 전에 오스트리아 빈 대학의 학자 제프 린하르트(Aepp Linhart)가 저술한 <권의 문화사>라는 책이 일본에서 발행되었을 때 아마 많은 사람들은 이것이 홍콩 액션 영화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권’이라고 하면 바로 소림사의 권법을 떠 올리는 것이 지금의 상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권’이란 취권도 태극권도 아닌 에도 시대에 유행했던 본권(本拳), 충권, 호권(狐拳), 호권(虎拳) 등 수많은 가위바위보 종류를 총칭한 말이다.

나 같은 외국인 일본 연구학자가 노(能 일본 전통 가면극의 일종), 가부키(일본 전통 연극), 겐지모노가타리(일본 고전 문학의 최고봉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장편소설)와 같은 일본 문학의 뛰어난 유산과 업적에 대하여 책을 쓴다고 하면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충분히 납득할 것이다. 반면 권과 같은 ‘시시한’ 놀이는 외국인들이 주목할 필요가 없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30여 년 전 일본 연구를 시작한 이래 평생 단 한 번도 ‘노’를 본 적이 없다는 일본인은 많이 만났지만, 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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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가위바위보를 한 적이 없다는 일본인은 아직 만난 적이 없다. 이것을 생각해보면 ‘노’ 보다는 오히려 가위바위보가 일본 문화의 근본적인 요소로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 가위바위보의 신체성

-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우키요에(풍속화)’ : 빈센트 반 고호가 이 그림을 모사하기 전까지는 단지 도자기의 포장지에 그려진 그림으로 서양에 전해짐

- 브루노 타우트가 <일본미의 재발견>을 쓰기 전까지 가쓰라리큐가 얼마나 멋진 건축물인가를 평가한 사람이 없었음

- 외국학자들에게 일본 문화의 근본적인 요소라고 주목 받았던 노와 가부키에 비해 가위바위보는 여전히 그 지위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이유는 매우 단순하다. 가위바위보는 어떤 기구도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손’으로 하는 게임이라도 도구를 사용하는 경우는 ‘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바둑, 화투, 장기, 트럼프, 쌍륙 모두 그렇다. 저권(著拳 각각 3개의 젓가락을 내밀어 개수를 맞추는 놀이)만 예외다.

권(拳)이 동전 던지기와 다른 결정적인 이유 역시 ‘사물’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동전 던지기는 동전이 없으면 할 수 없지만 가위바위보는 상대만 있으면 언제나 가능하다.

■ ‘문자 게이샤(文字藝者)’는 가위바위보를 논하지 않는다

가위바위보는 하드웨어도 아니고 소프트웨어도 아닌 휴먼웨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손을 문화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손으로 만들어낸 사물을 문화 또는 문명이라고 생각한다. 학자도 예외는 아니다. 문자나 사물과 관계가 없으면 아무런 가치도 없으며 연구 대상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린하르트 교수의 <권의 문화사>를 가능하게 한 것은 역시 가위바위보의 지도서격인 <겐사라에스마이즈에> 등의 고문서와 <잇피스가후 一筆畵譜>를 비롯한 수많은 니시키에(다색 목판화)등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료들은 ‘권의 문화’를 문자나 그림으로 남겨 놓은 흔적에 지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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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는다. 그것만으로는 문학사의 하나의 지류, 회화사의 하나의 장르, 또는 풍속사의 사례연구라는 범위를 넘어서기 힘들다.

그러나 인터넷으로 눈을 돌리면 풍경이 달라진다. 가위바위보 프로그램을 만드는 경기를 개최하거나 가위바위보의 삼자견제 룰을 도입해 펀치·킥·던지기 등의 기본 기술을 사용하는 온라인 격투게임을 만들어 즐기고 있다. 가위바위보가 컴퓨터프로그래머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그것이 도구나 문자의 아톰atom보다 비트bit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세계 각국의 가위바위보를 모아놓은 일본의 홈페이지를 보면 어느 언어를 사용하든 어느 종교를 믿든 가위바위보만큼 전 세계에 폭넓게 퍼져 있는 문화는 없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가위바위보’(한국), ‘장켄폰’(일본), ‘차이차이차이’(중국), ‘카이트 타쉬 마카스’(터키), ‘락 페이퍼 시저스’(영국), ‘로샹보’(미국), ‘슈니크 슈나크 슈누크’(독일)처럼 풍부하고 다채로운 권의 울림이 사이버 공간을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다. 가위바위보 사전에 ‘문명의 충돌’이란 말은 없다.

0 웹사이트 게시판 리포트에 4,000년 역사의 가위바위보에는

- 진나라 시황제가 신하와 승부했다는 기록

- 아편전쟁의 원인이 된 아편 금수조치를 실행한 것은 중독자 두 사람의 가위바위보 결과라는 기록

-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도 가위바위보 결과였다는 이야기 등

0 캐나다에 본부를 두고 있는 세계 가위바위보 협회의 홈페이지

- 1842년 런던에 본부가 설립되었으나 캐나다로 옮김

- 매년 가위바위보 토너먼트를 열고 세계 챔피언을 선출하여 시상

- 가위바위보에 대한 질문에 응답하거나 세계 각국에서 모은 정보의 아카이브도 구축 중 : 그 종류는 포츠담 회담 당시 처칠, 트루먼, 스탈린이 함께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는 사진부터 다양

■ 문명의 화석

오늘날 가위바위보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면 그것은 사물과 기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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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향했던 사람들이 지금까지 멸시해온 바로 그 요소를 뒤집은 것이기 때문이다. 가위바위보 문화는 ‘손’이라는 신체성을 텍스트로 삼고 있다. 그리고 그 점에서 어떠한 문헌이나 어떠한 도구보다도 원초적이고 선명한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다.

‘손은 인간이다. 날개가 새인 것처럼’이라고 말한 시인 제르맹 누보(Germain Nouveau)의 말은 단순한 비교가 아니다. 생물학적으로도 별개로 보이는 인간의 손과 새의 날개는 원래 같은 기관이 변화한 것으로 상동관계에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가위바위보를 논하는 것은 손을 논하는 것이며, 손을 논하는 것은 인간 그 자체에 대해 논하는 것이 된다. ‘권의 문화’는 인간 문명의 원형과 만나는 ‘정신의 화석’이며 미래 문명을 향해 떠나는 ‘어음’이다.

가위바위보 기원을 둘러싸고 중국, 페르시아, 또는 그리스 등이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그 기원은 장소를 특정 짓기에 앞서, 인간이 직립보행을 하고 네발 동물의 앞다리가 손으로 변한 그 순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따라서 특정 근원을 찾는 노력보다 지금 눈앞에서 가장 널리 그리고 깊이 흐르고 있는 ‘권의 문화’로 뛰어드는 것이 중요하다.

그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이 동아시아지역, 그중에서도 일본일 것이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일본을 ‘기호의 제국’이라 불렀지만 좀 더 깊이일본문화를 접했다면 ‘권의 제국’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 TV 프로그램에 매주 가위바위보를 즐기는 모습

- 인터넷의 ‘가위바위보’라는 홈페이지

- 지금까지도 매주 방영되고 있는 후지TV의 인기 에니메이션 ‘사자에 씨’의 마지막 장면에 매회 등장하는 것도 가위바위보이다.

- 서적을 ‘데혼 (손책 手本)’ 편지를 ‘데가미 (手紙 손종이)

- 중국으로 유학 갔던 일본인이 귀국하면서 현지에서 사귄 애인에게 ‘데가미 보낼게’라고 했다가 오해를 받아 헤어졌다는 이야기. 중국에서 수지(手紙)는 휴지를 의미

일본인은 남을 구슬려 무언가가 자기 뜻대로 되도록 하는 것을 ‘데노우치니 마루메코무(손 안에 말아 넣다는 뜻)’라고 표현한다. 따라서 손안에 넣을 수 없는 일에 대해선 ‘니가테(苦手 서툴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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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니아마루모노 : 손에 넘쳐난다. 힘에 겹다.

- 데니오에나이모노 : 손에 들어오지 않는다. 감당이 안 된다.

제등은 ‘데조친(손에 드는 초롱)’, 우산은 ‘데가사(手傘 손우산)’, ‘데도리나베(손잡이 달린 냄비)’

- 물건뿐이 아니다. 절대로 손을 쓰면 안 되는 축구 경기에서도 그 플레이어를 ‘선수(選手)’라고 부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은 손이다’라고 말했고 임마누엘 칸트는 손은 ‘밖으로 노출된 뇌’라고 말했다. 일본인이라면 위대한 철학자가 아니라도 누구나 이 정도는 알고 있다.

역시 ‘가위바위보는 손에서, 손은 일본에서!’라는 생각을 하다 보니 일본인이 좋아하는 시구절 중에도 아주 유명한 손이 있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 이시카와 다쿠보쿠의 두 가지 손

일을 해도 일을 해도 여전히 나의 생활은 옹색하구나.

물끄러미 손만 바라보네.

메이지 43년에 이시카와 다쿠보쿠가 도쿄 아사히신문에 발표해 유명해진 시이다. 이 시는 마쿠보쿠가 ‘신문 교정 담당자로 야근까지 하며 열심히 일했지만 삶은 여전히 고달프고 아무리 일을 해도 도시 생활은 편해지지 않는 것에 대한 한탄을 노래하고 있다.’라고 해석됐다.

그러나 이 시를 가위바위보의 빛으로 조명해보면 의미가 다른 두 손이 보인다. 하나는 ‘일을 해도’라는 시구에 나타나 있는 대로 ‘일을 하는 손’이고 또 하나는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손’이다.

일하는 손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인간이 땀을 흘리며 경작하는 노동의 손이다. 그 손은 생활과 생계를 이어가는 수단이다.

- 여전히 : 일하는 손이 생활과 모순되고 있음을 강조

- 생활을 의미하는 ‘구라시’라는 말은 ‘날이 저물고’라고 할 때의 ‘구라떼’와 똑같다. 편하다는 의미의 ‘라구(樂)’를 거꾸로 읽으면 ‘구라’이다.

- 영어 ‘살다 live’를 거꾸로 읽으며 악(惡)을 의미하는 ‘evil’ 또 ‘lived’를 뒤집으면 악마를 의미하는 ‘devil’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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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과 생활의 모순을 깨달았을 때, 그리고 그 부조리가 해결되지 않을 때 ‘물끄러미 손만 바라보게’ 된다. 그 시선에 의해 일하던 손은 멈춘다. ‘물끄러미’라는 의태어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모습을 나타낸다. 사람이 움직이는 것을 나타내는 ‘일하다’와는 정반대의 상태이다.

조금 전까지 일하던 그 손이 아니다. 가래도, 칼도, 펜도 들고 있지 않다. 더 이상 아무런 도구도 갖고 있지 않다. 무위(無爲)의 손 펼쳐져 있는 텅 빈 손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 운명의 손과 기도하는 손

손 안에서 세계의 연령과 의미를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미신적이고 무익한 시도라고 간주될 수도 있겠지만, 그 의도가 갖는 의미에 대해서는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다쿠보쿠가 물끄러미 바라보던 손은 ‘개인이 살아온 개인적 생활과 세계 역사의 결합을 개시’하는 손이며 ‘인간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알고자 하는’ 신체지도로서의 의미도 갖는다. ‘도구의 손’은 결코 잡을 수 없는 깊은 영혼과 끊임없이 요동치는 생명의 기호를 읽는 손이다.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눈은 머지않아 감길 것이다. 명상의 시간, 기도의 시간이 다가온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운명을 넘어 ‘세속(世俗)’에서 ‘성(聖)의 공간으로 손을 뻗는다.

들판에서 일을 하던 부부의 손이 만종의 울림과 함께 기도하는 손으로 바뀌는 장 프랑수아 밀레의 그림과 완전히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괭이를 들고 수레를 밀던 손은 대지로부터 떨어져 하늘을 향한다. 밀레는 결코 목가적인 전원을 그린 풍경화가가 아니었다.

‘일을 해도 일을 해도 옹색한’ 인간의 삶을 바르비종이란 마을에 사는 가난한 농부의 손에서 읽어냈다. <만종>의 기도하는 손은 ‘이삭을 줍는 손’이기도 한 것이다.

일하는 손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을 때, 쓸쓸하게 저녁노을이 퍼져갈 때, 먼 곳에서 만종이 울릴 때, 양손이 잡아야 할 것은 더 이상 도구가 아니다.

■ 노니는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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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운명의 손’이 보이고 눈을 감으면 ‘기도하는 손’이 떠오른다. 그렇다면 눈에서 눈물이 흐를 때는 어떤 손이 보이게 될까.

그 해답은 먼 곳에 있지 않다.

다쿠보쿠 자신이 ‘동해의 작은 섬 갯벌의 흰 모래밭에 내 눈물에 젖어 게와 노닐다’라고 노래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게와 ‘노니는 손’이 있었던 것이다. ‘노닐다’는 ‘일하다’의 반대말이 아닌가.

일하다 지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의 공간에서 벗어나 쉴 방법을 찾으려 한다. 에도 시대의 천재들은 심심풀이로 하는 놀이와 동작을 ‘데니구사미(손 위로 라는 말로 심심풀이로 하는 일이라는 뜻)’라고 불렀다. 때로는 노름까지도.

기도하며 합장하는 손은 먼 과거의 사건인 원죄(原罪)의 인과까지 거슬러 올라가 ‘창세기적’ 시간에 도달해야만 한다. 점치는 손은 막연한 미래에 일어날 사건인 예언과 신탁을 받는 ‘묵시록적’시간까지 연장해야 한다. 그러나 ‘노니는 손’은 과거도 미래도 아니다. 지금 여기 흰 모래밭에 떨어지는 눈물 속에서 연출하는 ‘엑소더스’의 시간이다.

그렇다면 ‘노니는 손’을 가장 극명하게 표징(表徵)하는 것은 다름 아닌 가위바위보를 하는 손이 아닐까. 점치는 손, 기도하는 손과 마찬가지로 가위바위보를 하는 손은 무언가의 도구로서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일하는 손은 도구를 필요로 하지만 가위바위보를 하는 손은 들고 있던 도구를 내려놓게 한다. 그리고 순간이긴 하지만 프로그램화된 일상적인 규칙에서 자유로워진다.

일하는 손은 정치적 권력, 경제적 재력, 사회적 계층의 신분에 따라 정해진다. 그 게임에서는 반드시 힘 있는 자가 이긴다.

그러나 재벌이든 천하장사든 가위바위보라는 시장과 씨름판에서는 돈도 없고 힘도 없는 사람에게 질 수 있다. 나이 성별과도 무관하다.

차원은 다르지만 점치는 정보의 손, 기도하는 초월의 손과 가위바위보가 같은 그루터기에서 싹튼 것이라는 사실을 찾아내는 것은 나무에서 떨어진 작은 사과에서 별의 움직임을 읽어내는 것보다 훨씬 더 쉬운 일이다.

■ 노동에서 커뮤니케이션으로

철학자와 과학자들이 지금까지 강조해 온 것은 일하는 손, 도구로서의 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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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랠프 월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이 손을 도구의 도구 라고 말한 것처럼, 인간의 손은 ‘모든 도구의 어머니’라고 일컬어져 왔다. 지금껏 100년 가까이 사회과학을 지배해온 것은 인간의 주된 행위를 노동의 생산요소로 취급했던 카를 마르크스(Karl Marx)의 손이었다.

그래서 인간의 손(행위)을 ‘노동’과는 별개의 독립된 ‘상호작용’으로 생각하는 위르겐 하바머스(Jurgen Habermas)의 커뮤니케이션 행위이론과 같은 비판이 등장한다.

가위바위보를 하는 손은 호모 파베르가 이상으로 여기는 ‘노동하는 동물’에서 ‘호모 커뮤니쿠스(소통적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극적인 삶을 나타낸다. 이것을 코그 윌러비(Cogg Willoughby)는 이렇게 노래했다.

당신은 인생을 두 번 산다.

한 번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또 한 번은 가위바위보를 할 때.

또 페리 프리드먼(Perry Fredman)은 ‘가위바위보, 그것은 종교이다. 그것은 갈등이 해결법이다. 그것은 개인의 우상이다. 그것은 삶의 방식이다. 그것은 가위와 바위와 보가 고양시키는 기쁨이다’라고 찬미한다.

또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에 그린 것처럼, 신의 손가락에서 아담의 손가락으로 전해지는 생명의 접속점으로서의 손이다. 언어와 만남의 시원(始原)에 있는 것이다.

■ 손과 입

‘손이 비면 입이 열린다’라는 일본 속담이 있다. 손이 한가해지면 수다가 시작된다는 의미이다. 실제로 이 속담을 교훈 삼아 빗자루의 자루를 짧게 만든 것이 오사카 상인 이즈쓰야이다. 빗자루의 자루가 길면 집 앞을 쓰는 하녀들의 손이 비게 된다. 빗자루에 기대어 기나긴 수다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루가 짧으면 쓸어야 하는 땅바닥만 보이므로 손이 바빠지고 자연히 입은 다물게 된다는 것이다.

먹는 입밖에 모르는 사람에게는 말을 하는 입은 쓸모없는 것으로 보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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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른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수다를 떠는 것을 쓸데없는 말, 잡담이라는 의미의 ‘무다구치’라고 하는 것이다. 손을 일하는 생산 도구로만 생각하는 사람에게도 가위바위보 같은 노니는 손이나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의 손은 무다테(쓸모없는 손)에 불과하다.

손과 입은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일을 할 때도 말을 할 때도 신체기관 중 서로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이 바로 손과 입이다. 사람이 이야기를 할 때도 손은 결코 쉬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인다. 손짓으로 말에 형태를 부여하거나, 방점을 찍듯 손동작을 통해 의미를 강조하기도 한다. 이렇게 손짓은 말에 리듬과 색채를 실어주기도 하고, 때로는 입보다 우위에 서서 손짓 하나로 이야기를 중단 시킬 수도 있다.

손가락 중에서도 검지는 그 이름대로 ‘이것’, ‘저것’, ‘그것’을 가리키는 지시대명사 이상의 역할을 한다. 일하는 손이 먹는 입에 봉사하는 것처럼, 손짓이라는 보디랭귀지는 말하는 입의 완벽한 파트너이다.

그러나 손은 입의 하인도 아니고 대리자도 아니다. 가위바위보를 할 때는 손이 주인공이고 구령을 외치는 입은 보조자이다.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인공적으로 고안된 수화와는 달리 자연발생적으로 전해져 온 ‘손의 언어’가 있었다.

- 로마 : 손동작이나 수신호가 수백개에 달할 만큼 분화되고 발전

- 중세 수도원 : 엄격한 침묵의 규정 때문에 교묘한 수화규칙을 고안

말이 귀와 짝을 이루는 것처럼, 손의 언어는 인체의 최대 지적기관인 눈과 짝을 이루고 있다. 지금도 여행객이 외국에 가서 의지하는 것은 손(보디랭귀지)이지 입(말)이 아니다.

손은 말보다 더 보편성을 갖는 언어로서 전 세계에서 통용되고 있다.

■ 천의 손 - 원융회통(圓融會通)

아시아의 손의 기호는 서양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풍부하다. 천의 입을 가진 불상은 본 적이 없지만, 천의 손을 가진 관음상은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나라 현에 있는 도쇼다이지 금당 천수관음상은 실제로 1000개의 손을 갖고 있다. 그 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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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삭(羂索), 삼고(三鈷), 보궁(宝弓), 보주(宝珠)등 인간을 구원하는 40여 가지의 도구를 들고 있다.

-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 오른손 시무외(施無畏) : 중생의 두려움을 없앰

-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 왼손 여원인(與願印) : 중생의 소원을 들어줌

그리고 그 손은 ‘원융회통’의 가위바위보 코드와 부합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불교만이 아니다. 유교, 불교, 도교의 삼교를 절충한 동아시아의 문화코드이다.

바위는 가위를, 가위는 보를, 보는 바위를 이기는 순환관계가 ‘원(圓)’이다. 열린 손바닥과 닫힌 주먹이라는 양극의 한가운데에 반은 열리고 반은 닫힌 가위가 있다 이것이 ‘융(融)’이다.

혼자서는 가위바위보를 할 수 없다. 또 서로 동시에 손을 내민다. 이것이 ‘회(會)’이다. 서로 상대의 마음을 읽고 손을 내민다. 그리고 그 결과인 승부를 불만 없이 받아들인다. 그것이 통(通)이다.

글자 그대로 ‘원융회통’의 특성을 손동작을 보여주는 것이 가위바위보이다.

인류가 직립한 순간 신체를 옮기는 의무에서 자유로워진 손은 마음을 이어주는 손짓의 언어를 발견했다. ‘소召’는 입으로 부르는 것을 나타내지만, 손수변이 붙은 ‘초招’는 손짓으로 부르는 것을 가리킨다.

신체어와 관계가 있는 부수를 갖고 있는 한자를 조사해보면, 눈목(目) 변이 740개, 발족(足) 변이 670개, 귀이(耳) 변이 217개인 것에 비해 손수(手) 변은 1,307개, 입구(口) 변은 1,458개로 월등히 우위에 서 있다.

14개의 손가락 관절을 지닌 손의 구조는 4개의 손가락과 직각 방향에 위치한 엄지손가락으로 그 어떤 동물도 흉내 낼 수 없는 ‘잡다’, ‘쥐다’, ‘치다’등의 행위를 자유자재로 할 수 있게 해준다. 엄지손가락 하나만 봐도 신의 존재를 믿을 수 있다고 칭송한 뉴턴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손의 해부학적 특성은 물건을 잡거나 쥐는 ‘일하는 손’뿐만 아니라 마음과 생각을 읽고 전달하는 ‘말하는 손’에도 똑같은 특권을 부여해 주었다. 손을 쥐거나 펴고 손가락 하나하나를 자유롭게 움직이는 유연성을 지닌 인간 특유의 손동작이 가위바위보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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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가위바위보의 구조

■ 지장보살과 가위바위보

지장보살이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는 희화(戱畵)가 있다. 그림 속 지나가던 취객은 길가에 있는 석불을 향해 두 손가락을 내밀며 기뻐하고 있다. 길가에는 벗겨진 채 나뒹구는 짚신 한 짝과 갈지자로 걸어온 발자국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천칭을 맨 상인과 양산을 쓰고 아이와 함께 나온 여인은 그 광경을 보며 우습다는 듯 웃고 있다. 분카 6년(1809년)에 나온 ‘겐사라에스마이즈’에 등장하는 쇼코사이가 그린 그림이다.

지금은 어린 아이들의 놀이로만 여겨지는 가위바위보이지만, 에도 시대에는 권 놀이가 무사를 비롯해 상인 등 일반 서민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그 모습이 한 장의 판화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는 것이다. 이 그림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웃음 이상의 심오한 가위바위보 코드를 읽을 수 있다.

- 그림 속 취객은 가위바위보에 져서 엄청난 양의 벌주를 마신 것으로 보임

■ 권(拳)과 술의 관계론

권은 왜 술자리와 관계가 있고, 왜 진 사람에게는 술을 주는가. 여전히 남아 있는 수수께끼를 풀어가다 보면 한국, 중국, 그리고 일본에 걸쳐 1,000년 이산 발효된 동아시아인의 마음과 연결된다.

서양의 맥주병은 모두 작은 크기로 혼자 마시는 한 컵 사이즈이다. 그러던 것이 아시아로 들어오면서 바로 큰 병으로 바뀌었다. 그렇다 술을 자기 혼자 따라 마시는 서양과는 달리 손님을 상대로 대작하는 것이 동아시아의 관습이었기 때문이다. 서양인의 음주 방식이 혼자서도 할 수 있는 동전던지기라면, 동아시아인의 음주 방식은 일대일의 상대가 없으면 할 수 없는 가위바위보와 같은 것이다.

각자 자신의 잔을 들고 다 같이 건배를 하거나 모두 입을 맞춰 노래 부르는 서양과 달리, 권하고 사양하는 대화양식, 마치 단 둘이 있는 것처럼 여기저기서 서로 술을 권하고 노래를 부를 때도 반주에 맞추어 한 명씩 부른다. 이것이 전통적인 아시아형 만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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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바위보의 규칙과 동아시아인의 음주 방식이 동일한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은 인(仁)이라는 문자에서도 알 수 있듯이 두 사람의 인간관계를 기본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원래 ‘인세지간(人世之間)’을 줄인 말이라고 하는데, 사람(人)을 굳이 인간(人間)이라고 부르며 사람과 사람의 사이를 중시하는 것이 한자 문화권에서 사람을 보는 감각이다.

혼자서 할 수 없고 너무 많아도 하기 힘든 것이 가위바위보의 혈통이다.

■ 이인칭의 문화 모델

가위바위보와 동아시아인의 전통적인 음주코드는 동일하다. 독자형의 일인칭 문화도 아니고 집단형의 3인칭 문화도 아니다 상호관계라는 서로의 사이를 축으로 한 대면적인 커뮤니케이션의 2인칭 문화코드이다. ‘나’라는 1인칭이 있어도 보통은 1인칭 주어를 생략하는 것이 동아시아 삼국의 공통점이다. 또한 그보다 더 눈이 띄는 것은 3인칭 대명사(타칭)이다. 우리나라의 ‘그/그녀’, 일본의 ‘가레/가노조’, 중국의 ‘타(他 )/타(她:아기씨 저, 그녀 타)’는 모두 개화기의 산물로 ‘he/she’의 번역에서 만들어진 조어이다.

그에 비해 2인칭은 홍수를 이룬다. 너, 자네, 당신, 그리고 ‘님’ ‘새여, 꽃이여’라고 부르는 이인칭 호격까지 넣으면 전 세계가 2인칭 코드가 된다.

술이 그렇다. 혼자 술을 마실 때에도 이태백(李太白)의 유명한 ‘월하독작(月下獨酌)’이라는 시처럼 자신과 그림자, 그리고 그 그림자를 만들고 있는 달과 함께 잔을 기울이며 대작한다. 술에 취하면 애니미즘(모든 사물에는 영혼이 있다는 생각)처럼 생명과 생명이 없는 것, 하늘과 땅과 사람, 모든 대상이 2인칭인 당신과 나의 관계가 되어 버린다.

사물은 나누면 작아지지만 마음의 감동은 나눌수록 그 크기와 깊이가 증가한다. 누군가 ‘음악은 귀로 마시는 술이며, 술은 입으로 듣는 음악이라는 말을 했는데, 확실히 술은 사물이라기보다는 마음에 가깝다.

이탈리아의 학교에서 작은 기적이 일어난 것도 지금까지 1인칭, 3인칭의 교실을 쌍방향의 2인칭 공간으로 바꾸었기 때문이었다. 보급률 100%에 가까운 휴대전화의 문자를 이용해서 학생 한 명 한 명에게 숙제를 낸다. 그리고 그 답을 선생님의 휴대전화로 보내도록 한다. 새로 부임한 젊은 선생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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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방법으로 한 달 만에 성적이 가장 낮았던 반을 선두로 이끌었다. 선생님과 학생의 관계를 ‘나-너’의 2인칭으로 바꾼 것만으로 학생들에게 의욕이 생긴 것이다.

일본의 사이타마 현립 오가와 고등학교에서도 이 방법을 실험해봤다. 사자성어를 숙제로 내면 보통 50%의 회답율을 보이던 것에 비해 100% 전원이 문자로 답을 보내왔다. 90%가 만점이었다. 이모티콘을 사용하는 휴대전화의 문자가 마치 놀이처럼 선생님과 학생 사이를 친밀하게 이어 주었다. 가위바위보 문화가 얼굴 없는 매스(집단)문화를 이긴 것이다.

■ 지는 게 이기는 게 되는 권주(拳酒)의 원리

*권(拳) : 주먹 권. 권법. 공손하다. 일본에서는 가위바위보를 일컫기도 함)

동아시아에 있어서 권과 술의 문화가 같은 구조라고 해도 진 사람이 술을 마시는 권주의 규칙은 패자에게 축배를 건넨다는 모순을 풀지는 못한다. 역시 이 문제에 대해서는 동아시아인의 독특한 행동 양식과 가위바위보 문화의 특성을 알자 못하는 한 대답할 수 없다.

군주에게 소명을 받으면 세 번 사양하는 것이 관례였던 것처럼, 유교 문화권에서는 일상생활에서도 한쪽이 권하면 한쪽은 사양하는 겸양지덕을 몸에 익히며 살아 왔다.

만약 이긴 사람에게 술을 준다고 하면 권에서 이기려 하는 것은 술을 마시기 위해 서로 다투는 모양새가 되어버린다. 배려 깊은 아시아 군자들의 체면에 맞지 않는다. 그러나 진 사람이 술을 마시도록 하면 졌으니 어쩔 수 없이 술을 마시는 것이 되므로 체면이 선다.

■ 유일하게 술을 못 마시는 아시아인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다. ‘일하는 손’의 생산 측면에서 보면 술을 마시는 것은 가위바위보와 마찬가지로 네거티브(negative)한 소비행위이므로 술을 이긴 사람에게 주는 상이라고 하면 원칙과 명분이 위험해진다. 따라서 술자리라 하더라도 상품을 건 가위바위보 시합에서는 이긴 사람이 상품을 받는다.

아니, 그보다 가위바위보의 승부가 엉터리인 것처럼 승부의 보상 역시 엉터리라는 사실에서 이중의 우연성을 즐길 수 있다.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은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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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바위보에서 지면 괴로워지지만 반대로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져서 기쁜 것이다. 이러한 무작위의 사건과 반응이 술자리의 흥을 배가한다.

술을 못 마시는 원인은 알코올에서 만들어지는 아세트알데히드를 분해하지 못하는 유전자다형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 대만인 등 아시아인은 거의 절반에 이르는 사람이 이 유전자다형을 갖고 있다. 하지만 백인에게는 거의 없다.

생리학적 관점에서도 권주는 동아시아 고유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이 없는 서양인에게 벌주의 의미로 술을 마시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 불상의 손과 수권(數拳)

다음은 취객이 왜 지장보살과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는가에 대한 답이다. 아무리 술에 취했다 해도 양손이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예수상을 향해 가위바위보를 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여러 가지 모양을 하고 있는 불상의 손은 마치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수상과 불상의 차이 중 하나는 손의 모양에도 있다.

고대 인도에는 손의 모양으로 의지를 나타내는 ‘무드라’라 불리는 문화가 있었는데, 이것으로 불상과 무용에 특정한 메시지를 부여했다. 일본에서는 계인(契印) 혹은 인상(印相)이라 불리는 것이다. 열 손가락이 있는 인간의 손은 무엇을 만들거나 세는 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부처의 열 손가락은 엄지손가락에서 새끼손가락까지 다양한 조합을 보이고 있으며, 그 조합에 따라 은덕이나 여러 가지 다른 의미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보통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오른손 엄지와 검지 등을 맞대어 동그란 원을 만들고 있는 내영인(來迎印)과 왼손을 정면을 향해 펼치고 있는 여원인이다.

지금의 가위바위보와 달리 에도 시대에 유행했던 수권은 1부터 5까지의 숫자를 손가락으로 나타내는 것인데, 불상의 손 모양은 권을 하는 모습과 매우 닮아 있었던 것이다. 취객이 지장보살을 향해 내민 권은 지금의 가위바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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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와는 손 모양도 다르고 규칙도 다른 것으로 훨씬 더 복잡했다.

어쨌든 가위바위보는 인간끼리 하는 게임일 수밖에 없다. 수학과 무드라가 발달했던 인도에 왜 가위바위보가 없었던 것일까. 가위바위보를 탄생시킨 술 문화가 없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 비밀은 수평적 인간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가위바위보는 신도 동물도 마음이 없는 목석도 아닌, 사람과 소통하는 게임이다. 아무리 친한 사람이라고 해도 타인의 마음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려고 하는 것이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동시에 한편으로는 자신의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 숨기려고 한다. 마지막 베일은 그 누구 앞에서도 절대 벗지 않는다. 사람은 그저 ‘생각하는 갈대’가 아니라 ‘가위바위보를 하는 갈대’이다. 가위바위보는 어쩌면 가장 인간다운 몸짓이라 할 수 있다.

예나 지금이나 권을 할 때는 조금이라도 상대보다 손을 늦게 내려고 한다. 만약 가위바위보에 필승전략이 있다면 그것은 눈치 채지 못할 정도의 빠르기로 상대보다 손을 늦게 내는 것이다.

모든 경쟁은 선제, 선점하는 쪽이 유리하지만 가위바위보만은 정반대이다. 그래서 전쟁의 규칙을 가위바위보의 규칙으로 바꾸는 것이 영구 평화론의 방안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 선제공격이 지는 법칙

바보가 아닌 이상 가위바위보를 할 때 먼저 손을 내는 사람은 없다. 이것이 전쟁과는 다른 가위바위보만의 독특한 규칙이다. 전쟁과는 반대로 가위바위보에서는 먼저 내는 쪽이 패배한다.

‘세계 가위바위보 협회’의 자료 중에는 클린턴 대통령과 옐친 대통령이 가위바위보를 하고 있는 사진이 있다. 옐친 대통령이 먼저 ‘보’를 내고 클린턴 대통령이 ‘가위’를 내서 클린턴 대통령이 이기는 장면이다. 마음을 읽힌 소련이 냉전에서 패배했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그래서 가위바위보의 조건은 먼저 내는 것도 나중에 내는 것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서로 호흡을 맞춰 상대의 리듬과 마음을 읽으며 동시에 손을 내는 것이 기본 규칙이다. 구령과 가위바위보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도 이 이유 때문이다. 가위바위보가 다른 게임과 구별되는 특성이 바로 이 공시성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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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이 권으로 술을 마실 사람을 정했던 것처럼 아이들은 가위바위보로 술래를 정한다. 권이 일상공간에서 ‘술의 나라’라 불리는 이공간으로 들어가는 어음이었다면, 가위바위보는 놀이공간으로 들어가는 패스워드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권은 다른 놀이와는 차원이 다르다. 순서나 선후를 정하는 가위바위보는 ‘놀이의 텍스트’를 넘어선 ‘메타 텍스트’로서의 중요한 의미 작용을 갖는다.

■ 아훔(阿吽 범어 흠, 소울음 후, 개짖을 우)의 호흡

여기서 구령이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 서로 호흡을 맞추기 위해서는 노래와 춤, 그리고 구령 같은 신호가 불가결한 것이기 때문이다. 시대가 흘러 권의 방법은 변했어도 그 구령과 타이밍을 맞추는 동작은 변하지 않았다.

지금 일본의 가위바위보 구령은 ‘장켄폰’ 또는 ‘장켄포이’로 정해져 있지만 국정 교과서의 영향으로 이것이 표준어로 인정되기 이전에는 지역에 따라 풍부하고 다양한 구령이 있었다고 한다. 일본의 지붕이라 불리는 나가노 현에는 마을에 따라 ‘칫치포이 칫칫파’부터 ‘친다라 호이 셋셋노세’에 이르기까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일본 전국에서 모은 자료에 따르면 수천 수백가지가 넘는다고 한다.

승부가 있는 경쟁이면서도 동시에 손을 내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 것이 가위바위보이므로 서로 협력해서 타이밍을 맞추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가위바위보는 경쟁과 협력이라는 대립관계가 하나가 되어 있는 불가사의한 시합이다.

바로 이 부분에 협력하며 경쟁하는 ‘아훔’이라는 권 문화의 신비함이 있다.

아훔의 ‘아’는 산스크리트어(범어)로 입을 열어 발음하는 자음의 시작이며, ‘훔’은 입을 다물 때의 음성으로 자음의 끝을 뜻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양쪽의 호흡이 절묘하게 일치하는 것을 일러 ‘아훔의 호흡’이라고 불러온 것이다.

일본어로 호흡의 ‘마(間 : 박자)’를 맞추는 가위바위보의 구령을 ‘조시(調子:장단)’라고 부르는데, 이 말은 일본인이 흔히 사용하는 말 중 하나다. 건강이 안 좋거나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조시가 나쁘다’라고 말한다. ‘마’와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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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서양의 기계적인 템포, 즉 메트로놈 같은 규칙적인 리듬과 달리 미묘한 차이와 흔들림이 있는 움직임으로, 감이 없으면 맞추기가 어렵다.

아훔의 호흡을 모르는 미국에서도 최근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코피티션(coopetition)’이라는 이상한 신조어를 사용하고 있다. ‘협력’이라는 의미의 단어와 ‘경쟁’이라는 의미의 단어를 융합시틴 합성어이다.

전혀 희한한 일이 아니다. 원래 호흡이라는 말 그 자체가 ‘뱉다’와 ‘마시다’라는 정반대의 작용을 하나의 컨셉으로 결합한 것이다.

경쟁 상대와 호흡을 맞추고 구령으로 박자와 장단을 조절하는 가위바위보 코드의 하나인 코피티션은 아시아의 음양과 중용, 그리고 둘이면서 하나인 불교의 불이 사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 엉터리와 비틀거림의 미학

문명화된 사회에서는 이론적인 면에서나 효율적인 면에서나 엉터리는 기피해야 하는 것이었지만, 사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잘 가르쳐 준다.

사람은 이쪽을 택할지 저쪽을 택할지 모를 때, 혹은 어느 쪽을 택해도 상관 없을 때 동전을 던지거나 가위바위보를 한다.

논리적으로 어찌할 수 없을 때, 일상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힘(완력, 권력, 재력, 또는 신분 등)에 구애받지 않고 공평하게 일을 처리하려고 할 때는 우연의 힘에 맡길 수밖에 없다. 주사위를 던지거나 제비뽑기를 하는 원리와 같은 것이다.

서양의 문명 비평가인 대니얼 J. 부어스틴(Daniel J. Boorstin) 교수는 미국이라는 나라와 그 역사는 우연이 준 선물이라고 말했다. 미국 대륙의 발견 자체가 예상외의 사건이었으며 항해사 몇 명의 무지와 계산 착오에 의한 것이었다. 국가주의 역시 서로 싸움을 하던 13개 주의 독립전쟁의 부산물이며, 이민자들이 몰려온 것도 유럽의 종교 탄압, 봉건제도의 차별과 빈곤 등에서 생긴 것으로 예상된 결과물이 아니다. 서부 개척의 행진은 근거 없는 소문을 뒤쫓다 생긴 일이었다. 모든 것이 반결정론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만약 무작의성이라는 가위바위보의 원리가 없었다면 자본주의의 자유원리도, 사회주의의 평등원리도 긴장을 풀 수 없는 기계적인 사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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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역사만이 아니다. 그것이 가위바위보와 역사의 매력이다.

로제 카이와(Roger Caillois)의 고전적 정의에 의하면 가위바위보는 제비뽑기처럼 우연에 속하는 경기이다. 복싱이나 바둑, 체스와 같은 기량 경쟁과는 다르다 . 아이들의 소꿉장난 같은 무의도 아니고, 그네나 회전목마 같은 현기증 나는 놀도 아니다. 가위바위보야말로 모든 것을 하늘의 운에 맡기는 일상성 초월한 우연의 승부이지만, 그렇다고 도박처럼 반사회성을 띠는 것은 아니다.

가위바위보의 어원이 ‘요간법의(料簡法意)’라는 불교어에서 왔다는 설은 그 진위와 상관없이 가위바위보가 갈팡질팡하는 상태로부터의 구원이라는 사실을 훌륭하게 시사한다. 요간은 ‘추량하다’, 법의는 ‘법의 의지’라는 뜻으로, 망설임이 있을 때 인지를 초월한 우주의 근저에 흐르는 하늘의 의향을 추량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가위바위보는 사람의 자의가 들어가기 어렵다. 그래서 가위바위보의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도 불만을 갖지 않고 승복한다. 상대를 원망하거나 자신의 무능함에 절망하지 않는다. 가위바위보는 운(우연)에 의해 승부가 결정되는 것이므로 져도 자신이 무능하다든지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창피함도 분함도 느끼지 않는다.

개미는 먹이를 찾아 움직일 때는 완전히 엉망으로 일정한 방향도 없이 허둥대며 돌아다닌다. 그런데 실로 신기한 것은 무언가 먹을 것을 찾으면 그것을 입에 물고 집까지의 최단 거리를 찾아 일직선으로 돌아간다는 점이다. 개미는 우연과 필연을 혼합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무언가 미지의 것을 찾고 추구하는 창조의 원천은 개미가 먹이를 찾는 것과 마찬가지로 엉터리 움직임에 있다는 것이다. 아르키메데스가 목욕을 하다가 비중을 계산하는 원리를 발견하고 플레밍 박사가 실험실 창문을 열어둔 조수의 실수 덕분에 페니실린을 발명한 것처럼, 그것이 과학 발명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세렌디피티(뜻밖의 발견, 재수좋게 우연히 찾아낸 것)라는 것이다.

도예는 자기주장(自己主張)이 아니라 자기멸각(自己滅却)의 예술이라고 일컬어져 왔다. 아무리 자신의 의도를 밀어붙여도 결국은 구워지는 과정 즉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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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안에서 일어나는 흙과 열, 그리고 그것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대화에 의해 달라진다는 것이다. 돌을 부숴 유약을 바를 때 도공은 그것이 어떤 색으로 변해갈지 결코 알지 못한다. 자신의 행위와 가마의 우연이 빚어내는 그 신묘한 아름다움을 옛날 도공들은 요변(窯變)이라 불렀다.

보통 서양의 경우 예술가는 자신이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 작품 속에 들어가면 그것을 노이즈로 간주하고 배제해버린다. 하지만 민예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의 도자기가 그토록 아름다운 이유는 불규칙 속에 규칙이. 미완성 속에 완성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불규칙을 갖지 않는 규칙은 단순한 기계에 불과하다. 규칙을 포함하지 않은 불규칙은 문란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일본이 많은 작품들은 완성이라는 관습에 치우친 나머지 종종 생기를 잃고 있다’고 평가했다.

- 근대 산업문명에서 노이즈는 방해물이며 불안한 불청객

- 가위바위보 문화에서는 노이즈를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을 극복

- 바이올린은 노이즈를 빼고 필요한 소리만 남김

- 한국의 가야금, 일본의 고토는 자연스럽게 노이즈를 포함

- 서양의 펜, 동양의 붓이 사용된 것도 같은 이치

서양에서도 옥타비아누스 황제가 포로였던 친자의 생사를 건 전쟁을 미카레(로마시대 가위바위보)로 정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가축의 매매를 금지하는 포고 기록을 보면 가축의 매매가 미카레로 결정됐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근대 문명은 우연성을 추방하고 예측 가능한 안정을 지향하며 필연성에 의존하고 있다.

■ 왜 에도인(江戶人)은 가위바위보 마니아였는가

같은 한자 문화권이라 해도 일본에는 일본 독자의 한자 사용법이 있다. ‘사(士)’라고 하면 한국과 중국에서는 선비를 의미하지만 일본에서는 ‘사무라이(侍)’를 의미한다. 일본에서 11월을 사무라이의 달이라고 하는 것은 한자의 십(十과 일(一)을 세로로 합치면 ‘사(士)’라는 글자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사람 ‘인(人)’을 더하면 섬길 ‘사(仕)’라는 글자가 생겨난다. 이 글자 역시 한국과 중국에서 사용하는 ‘사’와 다른 의미로 상업과 제조업의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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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를 만들어 낸 ‘숨은 문자’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시고토(일), 시카케(장치), 시호(방법), 시요(수단, 규정), 시타테(만드는 일, 교육) 그리고 모든 것을 시아게(마무리, 완성) 하기 까지 일의 모든 라인에 ‘사(仕)’라는 한자가 할당되어 있다.

‘사’라는 글자는 근대 서구문명을 수용하기 전 일본의 독자적인 방법론과 그 정신을 나타낸 것이다.

구대륙에는 없었던 노하우(know-how)라는 미국의 영어가 미국 독자의 프래그머티즘(미국에서 일어난 실용주의 철학)을 만들었듯이 한자 문화권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일련의 ‘사’라는 글자를 사용한 단어군이 일본만의 독특한 실용주의와 기술주의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에서는 지금도 산업현장에서 ‘시아게’라는 일본말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가위바위보는 어떨까. ‘도리가 없을 때’나 ‘방법이 없을 때’ 가위바위보를 한다. 그리고 시고토, 시카케, 어떠한 시와자(짓, 소행)도 통하지 않을 때 가위바위보로 정하고 승부를 낸다. 그렇다 일본에서는 ‘배우(俳優)’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 ‘배’와 ‘우’라는 두 문화가 있다.

배우의 ‘배’는 희극을, ‘우’는 비극을 연기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말이다. 즉 ‘배’는 비속한 것과 코믹한 것을 의미한다. ‘우’는 성실하고 우아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둘은 대립을 이루고 있다.

일본 문화는 국화와 칼의 이중성보다 ‘배’와 ‘우’의 이중구조에 그 특성이 더욱 강하게 나타나 있다. 가위바위보는 일본의 ‘우’에 대한 ‘배’의 문화를 정확히 보여주는 것이다.

진지한 차(茶)문화만을 일본의 이미지로 믿는 것은 큰 잘못이다. 엉망진창이라는 의미의 또 다른 메차쿠차(目茶苦茶)의 ‘차’문화와 무사도의 ‘검(劒)과는 다른 ’권‘ 문화가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가 진지한 ’차‘와 ’검‘ 이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잊고 있다.

그래서 일본 버전의 이솝우화 속 개미는 여름 내내 너무 성실하게 일만 한 탓에 겨울이 왔을 때 먹을 것을 잔뜩 쌓아 놓고 과로사하고 만다. 그리고 마침 구걸하러 온 베짱이가 그것을 부지런히 먹는다.

미국 버전에서는 문전박대 당한 베짱이가 죽음을 앞두고 즐거웠던 기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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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올리며 마지막으로 바이올린을 연주한다. 따분한 겨울, 우울했던 개미들은 그 선율에 감동 베짱이 곁으로 모여들자 베짱이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티켓을 팔아 부자가 된다.

구 소련 버전에서는 개미가 문을 열고 베짱이와 먹을 것은 나누어 먹는다. 그리고 겨울이 끝날 무렵 식량이 바닥나 개미와 베짱이 모두 굶어 죽는다.

이 우화는 모두 동전던지기의 코드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이다. 가위바위보 코드의 개미와 베짱이는 하나로 이어져 ‘개짱이’가 된다. 그리고 일과 놀이는 대립이 아니라 순환하는 원형으로 바뀐다. 에도 사람의 생활은 ‘돈벌이’와 ‘놀이’라는 두 공간을 시계추처럼 왕복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돈 버는 사람의 나막신은 앞굽이 닳고 노는 사람의 나막신은 뒷굽이 닳는다’고 말했다.

에도의 문화는 앞뒤 2개의 굽이 달린 나막신을 신고 세상을 균형있게 걸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일본 문화는 ‘배’와 ‘우’의 문화가 가위바위보 코드의 수레바퀴에 이어져 있었기에 도요타 자동차뿐 아니라 전 세계의 어린이들에게 애니메이션과 포켓몬스터를 안겨준 것이다.

■ 두더지의 결혼

길 가에 세워진 지장보살이라고 하면 바로 떠오르는 옛날이야기가 있다.

두더지가 세상에서 가장 높고 강한 태양에게 가서 사위가 되어 달라고 말했다. 그러자 태양은 자신보다 강한 것은 구름이라고 말했다. 구름이 태양을 덮어버리면 빛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두더지는 구름에게 가서 똑같은 부탁을 했다. 그러자 구름은 바람에게는 이길 수 없다고 말했다. 바람이 불면 구름이 날아가기 때문이다.

두더지는 바람에게 가서 부탁했다. 하지만 바람은 지장보살에게는 당할 수 없다고 말했다. 아무리 바람이 강하게 불어도 지장보살은 꿈쩍도 하지 않고 서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지장보살에게 가서 부탁을 했다. 그러자 지장보살은 말했다. ‘아니, 내 발 아래로 파고드는 두더지한테는 당해낼 재간이 없단다. 두더지가 파고들면 금방 쓰러지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두더지는 자기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 두더지를 사위로 맞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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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동양인의 순환적 사고를 나타내는 우화이다.

두더지가 발견한 세상은 피라미드형이 아니다. 모든 가치는 상대적이며 절대자가 없는 원형으로 되어 있다. 두더지의 구조에서 만물은 베스트 원(best one)이 아니라 모두가 유아독존인 온리 원(only one)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순환논리와 상대론을 퍼포먼스로 직접 나타낸 것이 가위바위보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2015. 9. 23

* 다음에 4~5부가 이어집니다.

가위바위보 문명론(2)

- 물고 물리는 한중일 관계, 새 아시아 문명의 답이 여기 있다 -

■ 이어령 지음, 허 숙 옮김

04 동전 던지기형 문명과 가위바위보형 문화

■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e)의 가위바위보

최후의 만찬(La ultima cena)은 누구나 다 아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유명한 그림이다. 하지만 그림 속 예수의 양손이 어떻게 그려져 있는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실은 그 손도 ‘모나리자’의 미소처럼 모순되고 복합적인 이미지를 품고 있다. 이렇게 예수의 대립된 양손 이미지에 처음으로 주목한 사람은 프랑스의 미술사가 르네 위그(Rene Huyghe)였다.

쥐고 있는 오른손이 유다의 배신에 대한 거부의 자세라면, 손바닥을 펴 보인 왼손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모든 죄를 포용하는 것이다. 개-폐, 표-리의 이항대립 체제로 되어 있는 예수의 양손은 ‘가위’와 ‘보’의 관계와 닮아 있다.

불상의 손도 가위바위보의 기호와 유사한 점이 많다. 인간을 구제하는 여원인(與願印 아무 것도 들고 있지 않은 왼손, 중생의 소원을 들어 줌) 과 시무외(施無畏 : 아무 것도 들고 있지 않은 오른손, 중생의 두려움을 없앰)의 인상은 모두 부드럽게 펼쳐져 있다. 이에 비해 분노로 불타오르는 부동명왕(不動明王)은 주먹을 꽉 쥐고 있다. 일상생활에서도 주먹과 손바닥은 공격과 포용, 강함과 부드러움, 응축과 확산 등 다양한 레벨에서 대극적인 의미를 나타낸다. 로마시대의 수사학 교과서에는 손바닥이 그려져 있고 논리학 교과서에는 주먹이 그려져 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인간은 미움을 품은 상대에게는 주먹을 쥐고 친한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대할 때는 악수를 하듯 손을 펼친다. 무언가를 요구하는 같은 말이라고 해도 상대를 향해 주먹을 내밀면 불량배의 협박이 되고 펼친 손을 내밀면 걸인의 애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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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건대 주먹은 손바닥의 뿌리인 팔에 가까운 것이다. 망치나 도끼처럼 자루가 있는 공격적인 도구는 모두 팔에 붙어 있는 주먹을 투영한 것으로 여겨진다. 한자의 ‘아버지 부(父)’는 양 손에 도끼 같은 무기나 형구(形具)를 들고 있는 사람을 본뜬 상형문자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분명 ‘도끼 부(斧)’자에도 ‘부(父)자가 들어 있다. 쥐고 있는 주먹은 도끼이자 아버지로, 힘과 지배의 상징이다.

- 어머니의 손 : 부드럽게 열려 있음, 약손

- 갈퀴 : 손가락을 전부 펼친 손바닥을 모방해서 만든 것

- 꽉 쥐고 있는 주먹이 부성(父性)의 원리라면, 펼쳐진 손바닥은 모성(母性)의 원리

■ 왜 바위가 보에 지는가

바위는 석기시대의 돌도끼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보자기는 딱딱한 바위를 감싼다. 산에 가면 담쟁이 종류의 나뭇잎이 커다란 바위를 감싸고 있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생명 그 자체는 부드러운 것이다. 그러나 죽으면 바로 바위처럼 딱딱해진다. 부드러운 피부와 살로 딱딱한 뼈를 감싸고 있는 것이 우리 인간의 몸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이솝우화를 통해서 북풍의 힘이 따뜻한 태양에게 지는 이야기를 기억하겠지만, 부드럽고 평면적인 손바닥이 강한 주먹을 이기는 가위바위보의 규칙은 역시 오래된 동양의 냄새가 난다. 루쉰의 소설 <출경(出關>에 묘사되어 있는 노자(老子)의 모습이 떠오른다. 노자는 입을 벌려 보여준다. 단단한 이는 세월과 함께 썩고 빠져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부드러운 혀는 어떤가 여전히 태어났을 때 그대로가 아닌가. 바위는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부서져버리지만 높은 폭포에서 떨어진 물은 아무런 변화가 없다.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을 이기는 것이다.

■ 중국 3대 소설의 리더

0 삼국지연의에서 가장 강한 인물은 관우와 장비이지만 그들의 리더는 덕으 로 그들을 이끈다.

0 수호전에서 양산박 108명 도적들의 우두머리는 현덕과 같은 스타일의 송 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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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서유기에서도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을 다스리는 자는 힘이 없는 삼장법사이다. 그는 손오공이 머리에 쓰고 있는 금고아(머리띠)를 조여 그를 제압한다. 가위바위보의 규칙대로 손오공은 부처님의 손바닥을 벗어날 수 없다.

0 동아시아 에서는 ‘문승지효(文勝之効 문이 무를 제압함)’를 이상으로 삼았고 실제로 문인이 세상을 지배했다.

0 일본 무가사회에서도 에도 시대에는 도쿠가와(德川)이라는 성씨에서 볼 수 있듯이 덕치가 무력지배보다 중시 되었다.

동아시아 문화의 특색이 국가 제도뿐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도 종이와 보자기로 감싸는 문화가 발달했다는 것이다. 보자기는 싸는 것뿐만 아니라 사용하는 방법에 따라서는 깔기도 하고 입기도 하고 매기도 하고 접기도 한다. 도둑이 얼굴을 가리고 들어와 물건을 싸서 나가는 것이 보자기이다.

서양에서도 RPS(Rock, Paper, Scissors)라고 하는 동양과 똑같은 가위바위보가 있지만 보가 바위를 이긴다는 규칙을 적용하지 않은 경우도 많다. 여러 명이서 가위바위보를 할 경우에는 가위, 바위, 보중 적게 낸 쪽이 지게 된다. 쉽게 말하면 모두 바위를 냈을 때 혼자만 ‘보’를 내면 ‘보’가 바위에 지는 구조이다. 다수결 원칙과 같은 것으로 이것이야말로 선거 민주주의를 탄생시킨 서양 문명다운 규칙이다.

보자기가 바위를 이기는 직선적인 논리에서는 그 누구도 지는 쪽을 선택하지 않는다. 보자기는 바위를 이겨도 가위에게는 잘리고 만다. 바위의 무력도 보자기의 문덕도 세상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힘은 아니다. 가위의 개입에 의해서 비로소 누구나 이길 수 있고, 동시에 누구나 질 수 있는 바위바위보 코드의 리얼리티가 가능하게 된다.

■ 숨바꼭질의 아동 심리학

아동 심리의 관점에서 분석해 보면 숨바꼭질은 동전 던지기와 똑같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이들은 술래가 되면 혼자만이 세상에 버려진 기분이 되고 사막을 홀로 헤매는 느낌을 받는다.

주위의 친구들이 모두 자신에게서 도망쳐 숨어버리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소외 체험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은 숨은 친구들을 찾는 것이다. 혼자 남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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졌다고 집에서 어리광을 부리듯 울거나 화를 내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 놀이를 통해서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다른 아이가 술래가 되면 서로의 입장이 역전되는 것을 배운다. 바로 그때 이번에는 힘의 강약에 상관없이, 몸집의 크기에 상관없이 모두 평등하다는 것을 느끼고 몸으로 익힌다. 자신보다 불운하거나 가난해도 그것이 결정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누구나 술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술래 체험’이 실제 세계에 나타난 것이 ‘집단 따돌림’이다. 누군가를 집단에서 제외시키며 살아남는다. 또 자신이 술래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타인을 술래로 만들어야 한다.

가위바위보의 공간에서는 ‘자르다’, ‘감싸다’, ‘치다’라는 세 가지의 다른 역학관계에 의해 승부가 순환하고 있다. 분별하여 ‘자르는 힘’인 지혜, 부드럽게 ‘감싸는 힘’인 덕, 그리고 적극적으로 공격해 가는 ‘치는 힘’ 체력, 이와 같은 ‘지,덕,체’가 다양한 변화를 탄생시킨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 주먹과 손바닥은 ‘역(易)’의 음양이다

던진 동전은 바닥에 떨어진다. 반드시 앞면과 뒷면 중 한 쪽은 아래를 향하게 된다. 배제되고 소거되는 것이다. 사람이 동전의 양면을 동시에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단 동전을 세워서 보면 양면의 경계가 직선으로 보인다. 하지만 동전이 바닥에 떨어졌을 때 서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바위’와 ‘보’의 대립 사이에는 ‘가위’가 있다. 더 이상 금,은,동이 아니다. 피라미드의 각진 모서리들은 둥근 구체가 되고 정점은 회전한다. 따라서 무엇을 내든 절대 강자는 될 수 없다. 모든 가위바위보는 ‘삼자 견제’의 질서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가위바위보를 하는 아이는 자신의 손을 꽃처럼 바라본다. 손가락을 펼치면 꽃봉오리가 꽃이 되는 것처럼 주먹이 손바닥이 된다. 손에서 손가락을 접으면 꽃은 시들고 주먹은 과실처럼 둥근 모양으로 단단해진다. ‘주먹’에서 ‘손바닥’으로, ‘손바닥’에서 ‘주먹’으로 변해가는 그 프로세스 사이에 ‘가위’의 손가락이 나타난다.

이 손가락은 밤과 낮 사이에 있는 새벽이며 저녁노을이다. 여름과 겨울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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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있는 봄이며 가을이다. 그리고 ‘바위’와 ‘보’는 동전 던지기의 이항대립에서 ‘삼자견제’의 코드로 바뀐다. 가위바위보의 손은 형태가 있는 것을 넘어 ‘태극(太極)’ 또는 ‘삼태극(三太極)’이 된다.

‘바위’와 ‘보’는 음과 양이 되어 자신의 손이 우주처럼 커지는 것을 느낀다. 봄이 되면 음과 양이 나뉘고 양기가 점점 강해져 여름이 된다. 그리고 가을이 되면 양은 음으로 나뉘고 음기가 증가해 겨울이 된다. 이것이 한자 문화권에서 지금까지도 사용하고 있는 춘분과 추분, 하지와 동지이다.

가위는 바로 음과 양이 나뉘는 춘분과 추분의 ‘분’이며, ‘서(署)’와 ‘한(寒)’이 오버랩되는 그레이존이다. ‘가위’는 대립하는 양자를 조화, 융합, 변화시키는 매개의 역할을 한다. 그래서 인공적인 ‘문(文)’과 자연적인 질(質)‘은 양극으로 치닫지 않는다.

그러나 유교의 중용과는 달리 세상사는 끊임없이 흔들리며 변화한다. 동양의 문화코드로서 수천 년을 유지해 온 ‘역(易)’이라는 기반이 있기 때문이다.

역의 원리는 지금까지 이야기해온 가위바위보 코드와 여러 면에서 부합한다. 정확히 말하면 역의 사상은 언어를 초월한 하나의 우주론이므로 보통의 언어형식으로는 표현할 수 없다. 그래서 역의 언어는 지금까지 태극 도형의 그래픽이나 팔괘와 같은 기호로 표상화되어 왔다. 그것을 가장 단순화시켜 삼자견제의 퍼포먼스 형태로 만든 것이 가위바위보라는 것이다.

■ ‘삼자견제’와 일본의 마인드 모델

가위바위보는 일상적인 의사결정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의미를 갖고 있을 까? 가위바위보의 이면에 있는 ‘삼자견제’ 사상은 일본 사회에 있어 힘의 구조를 나타내는 하나의 모델이다. 일본은 유난히 세 쌍을 좋아한다.

- 일본의 3대 경승지를 뜻하는 일본삼경(日本三景)

- 석가를 중심으로 좌우에 불상을 배치하는 석가삼존(釋迦三尊)

- 지방의 세 계급을 뜻하는 무리카타산야쿠(村方三役)

- 무악이나 가면극을 서(序) 파(破) 급(急)의 세 부분으로 나누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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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과 달과 꽃(雪月花)

- 화투에서의 저록접(싸리, 멧돼지, 홍엽을 뜻함)

- 일본의 대표적이 관리자 타임 : 노부나가, 히데요시, 이에야스 형 관리자

- 3개 정당의 연합을 뜻하는 ‘자사사’, ‘자자공’ 등

- 공적의 단계를 수훈, 감투, 기능으로 분류

- 임원의 단계를 전무, 상무, 평(平) 등으로 분류

확실히 가위바위보의 ‘삼자견제’ 코드는 일본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폭넓게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위의 예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그것은 단지 3종 세트처럼 3개를 늘어놓는 것과는 다른 점이 중요하다. 서양에서도 ‘3’이라는 숫자는 특별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기독교에서의 창조주, 그리스도, 성령인 신은 유일신의 세 가지 성격이며 이 삼자에는 우열이 없다는 뜻에서 ‘삼위일체’라고 한다. 이 삼위일체에서 나왔다고 일컬어지는 음악의 ‘세 박자’는 13세기에 ‘완벽한 박자’로 불렸다.

확실히 ‘삼자견제’의 모델은 일본 사회의 구조를 밝히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삼자견제의 사상과 그 구조가 도교에서 왔다고 일컬어지듯 일본 고유의 독특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아시아와 유럽 문명을 탐색하는 유효한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삼자견제’의 사고방식은 전 세계에 퍼져 있다. 따라서 가위바위보는 가장 보편한 게임으로서 세계아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자연의 생태계가 ‘삼자견제’의 균형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은 ‘먹이사슬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약한 것도 강한 것도, 작은 것도 큰 것도 모두 자신의 강함과 약함을 지니고 강대한 우주의 길(규칙)속에서 살아간다.

동아시아의 자연관은 서양의 근대 약육강식 사상과는 다르다. 자연에는 절대적으로 강한 지배자가 없다. 자연은 긍정적 의미의 삼자견제처럼 상부상조하는 공생관계로 맺어져 상보와 조화를 유지하고 있다.

■ 지진에서 외교까지

삼자견제의 권은 에도 시대 유곽을 비롯해 일상에서 일탈하는 오락문화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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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법이며 그 주류였다. 삼자견제 코드는 일본뿐만 아니라 동아시아가 공유하고 있는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이며 사물을 분별하는 비판력이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나아가 삼자견제 코드는 사회의 경쟁원리 이기도 했다.

에도 시대의 서민들은 지진, 역병 등 사회적 재해에서 외교문제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모든 현상을 삼자견제 코드로 풀어내고, 나아가 요나오시권을 통해 그 불안과 위협에서 도망치려했다.

1862년 홍역이 일본 전역에 퍼졌을 때 우키요에 화가들은 ‘홍역, 의사, 환자’가 호권을 하는 장면을 그림으로 남겼다. 홍역은 환자에게는 이기지만 의사에게는 진다. 그러나 의사는 돈을 내는 환자에게는 진다. 이러한 ‘삼자견제’ 외에도 홍역의 유행으로 의사가 큰돈을 버는 것에 비해 기녀와 목욕탕은 곤란한 지경에 빠졌던 당시의 사회현상도 풍자했다.

■ 정(政), 관(官), 업(業)의 아이언 트라이앵글

가장 잘 알려진 일본 사회의 삼자견제 구조는 ‘아이언 트라이앵글(철의 삼각형)’이라고 불리는 정계, 관계, 업계의 관계이다.

에도시대부터 유행하여 지금도 도하치권이라는 이름으로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는 호권(狐拳)이 그 원형이다. 쇼야는 총(사냥꾼)을 이기고, 총은 여우를 이기고, 여우는 쇼야를 이긴다. 이러한 삼자견제의 관계와 똑같은 구조가 일본의 권력구조로 정착된 것이다.

쇼야는 영주로부터 마을의 납세와 그 밖의 사무를 위임받은 마을의 장이다. 당연히 마을 사람들을 다스리는 지배자이다. 사냥꾼이나 소작인은 겨울이 되면 총을 들고 여우나 너구리를 잡는다. 하지만 쇼야를 쏠 수는 없다. 총에 맞은 여우는 사냥꾼에게는 약하지만 사냥꾼을 지배하는 쇼야는 감쪽같이 속일 수 있다.

정치가는 쇼야와 같은 권력자이다. 관료의 인사권을 쥐고 있다. 따라서 관료는 정치가에게는 약하지만 기업가에게는 인가권, 허가권을 행사하므로 강하다. 또 기업가는 정치가에게 자금을 주고 돈의 힘으로 선거를 좌우한다. 돈은 여우처럼 정치가를 홀리는 힘이 있다.

즉 정치의 이면에는 업계가 있고 관료의 이면에는 정계가 있다. 어느 한쪽도 절대적으로 강하지 않으므로 서로 상부상조하는 삼자견제의 구조를 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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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다. 따라서 가위바위보 코드를 분석하지 않고는 일본의 정치를 이해할 수 없다. 그냥 단순한 가십기사가 아니라 정계, 관계, 업계의 ‘관계’를 <중의원의 탄생>이라는 논문으로 정리한 것이 컬럼비아 대학교의 제럴드 L. 커티스라는 정치학자였다. ‘아이언 트라이앵글’이라는 키워드도 그의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첫 번째는 절대적 권위의 부정이다. 삼자견제에서는 삼자 중 제일 강한 자가 없다. 강자에게도 약점이 있고 약자에게도 강점이 있다. 즉 강약이 서로 보완하는 ‘추렴’의 사상이며 ‘협력’의 원리이다. 두 번째가 ‘납득’의 원리이다. 승부라고 하면 보통 양자가 대립하지만 가위바위보의 삼자선택은 자주적 판단이므로 져도 상대를 원망하지 않고 ‘어쩔 수 없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게다가 가위바위보에는 ‘비기는 경우’가 있으므로 승부를 결정짓는 과정에서 심리적 침적 작용이 일어난다. 가위바위보의 ‘협력과 납득’의 구도를 일본의 구조 개혁으로 치환시키자는 것이다.

■ 본보기는 니노미야 긴지로(二宮金次郞)

전쟁 전, 초등학교 학생들이 ‘우리가 배울 것은 니노미야 긴지로’라며 목청 높여 부르던 창가가 있었다. 노래뿐만이 아니다. 초등학교 교정에는 손에는 책을 들고 등에는 나뭇짐을 짊어진 니노미야 긴지로의 동상이 서 있었다. 지금의 감각으로 말하자면, 그저 길을 걸어가면서 휴대전화로 문자를 보내는 것처럼 보이는 평범한 모습이지만 니노미야 진지로는 지금까지도 일본, 아니 아시아의 본보기로 남아 있다. 600여 곳에 이르는 황폐한 마을을 부흥시키고 빈곤과 역병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한 긴지로의 힘은 과연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것을 추적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삼자견제 원리의 가위바위보 코드와 만나게 된다.

소설 <니노미야 긴지로>에는 길가에서 짚신에게 절을 하는 노파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 짚신의 재료는 볏짚이었단다. 벼일 때는 쌀이 되어 우리 인간들을 먹여 살려줬어. 그 뒤 쌀알이 털린 볏짚은 이번에는 짚신이 되어 우리의 발을 지켜줬지. 하지만 이렇게 너덜너덜해지니 더 이상 발을 지켜주는 역할도 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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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게 되었단다. 그래도 말이다. 이 짚신은 아직도 쓸데가 있단다. 짚신을 흙으로 돌려주면 이번에는 다시 벼를 기르는 거름이 되어 우리를 먹여 살려 준단다. 참 고마운 일이지. 오늘은 짚신을 흙으로 돌려주기 전에 오랫동안 신세진 고마움을 표하는 거란다.’

본래 새끼나 짚신은 벼농사에서 생겨난 것이다. 쌀을 만들려면 여든여덟 번의 손이 간다고 할 만큼 정성과 근면이 필요했다. 그래서 쌀미(米) 자에는 ‘팔십팔 (八十八)’이라는 글자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니노미야 긴지로가 곡물을 개량하는 되의 치수를 통일하려고 했을 때, 그 깊이를 88치로 정하여 막부에 올린 것도 바로 쌀이라는 글자에서 가져온 것이다. 되를 마음대로 만들어 농민의 조세를 늘리지 않도록 마음을 쓴 것도 ‘보’가 ‘바위’를 이기는 가위바위보의 원리인 ‘덕’이 있었기 때문이다.

■ ‘일원융합(一圓融合)’과 ‘원견(圓見)

가위바위보 코드 중 하나는 상호성의 관계론에 있다. 주먹의 실체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상대가 내미는 손과의 관계에 의해 비로소 그 의미가 생겨난다. 그것을 긴지로는 이렇게 말했다.

‘해가 있는 것은 달이 있기 때문이고, 달이 있는 것은 그 상대인 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해와 달은 서로의 존재에 의해 자신의 존재가 정해지는 것이다. 일원일원(一元一圓)이며, 둘은 하나이고 하나는 둘이다. 이와 같은 이치를 깨달으면 적도 아군도 없다. 높은 것은 낮은 것이 존재하기에 있는 것이며, 낮다는 것은 높은 것에 비해 낮은 것이다. 긴 것은 긴 것이 필요할 때만 쓸모가 있고, 짧은 것은 짧은 것이 필요할 때만 도움이 된다.(중략)’

‘멀다 가깝다 말하는 것 역시 자신이 있는 곳을 기준으로 하는 말이다. 또 10리를 멀다고 하는 것은 1리에 비해 먼 것이며, 10리를 가깝다고 하는 것은 100리에 비해 가깝다는 것이다. 바라보면 멀고 가까움이 없으며 모든 것은 자신이 존재하는 곳에 있다. 이같이 상이한 두 현상이 더해져 하나의 새로운 현상을 낳는다. 물과 불이 일원융합하여 음식을 끓이고 강철을 단단히 만들며, 음양이 합해져 만물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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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고저(高低), 장단(長短), 원근(遠近) 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두 자신이 있는 한 지점에서 사물을 보는 편견이다. 손토쿠(긴지로)는 이런 자기중심적 이항대립을 초월한 시점을 ‘편견’에 대한 ‘원견’이라 불렀다. ‘삼자 견제’의 관계를 도형으로 그려보면 선이 아닌 둥근 원형이 된다. 긴지로 식으로 말하자면 그것이 ‘원견’이며 ‘일원융합’이라는 것이다.

즉 차이는 갈등하고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융합을 통해 ‘생생발전(生生發展)’하는 것이 된다. 만물은 개체가 아닌 상호관계에 이해 의미를 갖는다. 그것이 땅과 농작물, 그리고 사람의 내면에 있는 덕이다.

손토쿠는 ‘돈’에도 ‘덕’이 있다고 생각했다. 흙과 마찬가지로 돈 안에 있는 그 덕을 캐냄으로써 풍요로워진다. 무사는 돈의 소중함을 모르기 때문에 돈을 무시하고 돈을 빌리거나 발려주는 것을 수치라고 생각한다.

‘추양(推讓, 남을 추천하고 자기 자신은 사양함)’의 정신을 갖고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빌려주는 것은 ‘돈’의 ‘덕’을 발굴해 내는 것이다. 그 돈이 사람에게 돌아와서 다시 그 사람의 덕을 끌어낸다. 그리고 다시 ‘돈’의 ‘덕’이……이와 같이 끝없이 ‘덕’의 반복이 계속되면서 돈은 돌고 돌아 발전으로 이어진다.

돈을 빌리고 빌려주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약속을 지키는 ‘신’이다. 그것만 있으면 누구에게나 돈을 빌려준다. 하지만 빌려준 사람에게 몸과 마음의 여유가 없으면 다른 사람을 추양할 수 없다. ‘인’이 있어야 한다. 또한 빌린 사람은 약속한 날을 지켜 돈을 갚는 ‘의’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돈을 빌려준 사람은 거만하게 굴지 않는다. 빌린 사람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명가금(冥加金)을 낸다.

* 명가금 : 부처님의 명가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치는 돈

명가 : 신령이나 부처가 중생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그를 도움 또는 그렇게 입은 도움

■ ‘근로(勤勞)’, ‘분도(分度)’, ‘추양(推讓)’

‘근로’는 돈을 벌어서 풍족해지고자 하는 욕망으로 ‘천도(天道)’와 대조를 이루는 인도(人道)이다. ‘분도(分度)’는 무한히 질주하는 욕망의 한도로 자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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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를 알고 조절하는 천도와 인도의 융합이다. 그리고 ‘추양(推讓)’은 축적

한 부의 여분은 세상을 위해 써야 하는 것으로 타인과 함께 나누어 ‘근로의 생산을 돕는 이타행위이다.

이러한 근로, 분도, 추양은 가위바위보의 삼자견제와 같은 형태가 되어 서로 상보적인 관계를 이루며 균형을 유지하며 순환한다. 근로가 소유의 주먹이라면 추양은 쥐고 있던 것을 놓는 손바닥이다. 이 둘은 정반대의 것이지만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이항대립의 택일적 강박관념은 아니다 .일부는 소유하고 일부는 내놓는, 반은 열리고 반은 닫힌 분도라는 그레이존(gray zone)이 그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부에 대한 욕망은 분도의 프로세스를 통해 축적에서 분배로 바뀌어 간다.

* Gray zone : 어느 세력권에 있는지 불분명한 지역. 애매한 범위, 회색지 대, 이도 저도 아닌

■야구의 퍼시픽리그와 사자견제

삼자견제의 문화 사회 코드는 일본인에게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프로야그 리그전에도 삼자견제의 가위바위보의 코드가 살아 있다. 만약 강력한 힘을 가진 절대 강자 팀만 있다면 리그전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관람하는 재미도 없다. 또 그 승부가 금,은,동과 같이 정해진 순위표대로 진행된다면 흥미를 끌 수 없다. 우리가 야구에 빠지는 것은 역시 삼자견제의 관계와 결과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95년도 일본 프로야구 퍼시픽리그전 일정 팀별 승패 수에 따른 데이터를 보면 오릭스, 다이에, 롯데, 세이부가 어느 한 팀에는 강하지만 비슷한 다른 팀에게는 약한, 서로 물고 물리는 사자견제의 관계였음이 나타난다.

야구에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다. 축구나 스모경기도 마찬가지다. 리그전에서 누가 이길 것인가, 그 승자를 가리는 과정은 동전 던지기처럼 양자택일로 정해지는 토너먼트형과는 다르다.

■ 닐스 보어의 태극문장(太極紋章)

근래 문화 인류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명암쌍쌍의 이치적 사고는 ‘역사상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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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오래된 호모 사피엔스의 남녀 양성의 상위(相違, 서로 틀리거나 어긋남), 오른손과 왼손의 비대칭, 외혼 쌍분제(外婚 雙分制), 적과 흑의 색체 등 자연의 이항대립에 이미 결부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라스코(Lascaux 프랑스, 선사시대 인류 생활 모습을 그린 벽화, 기원전 1만 5000년 ~ 1만 4500년 전)나 엘 카스티요(El Castillo, 멕시코, 마야 달력을 읽는 열쇠) 벽화에는 여성의 기호는 빨간 색으로 칠해져 있고, 남성의 기호는 검정색으로 칠해져 있다고 한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화장실의 빨간색(여)과 검정색(남)의 색 구분법의 기원을 찾아 올라가면 수만 년 전의 구석기 시대가 나타난다는 이야기이다.

아니, 네안데르탈인의 유적에서 검은색과 빨간색의 상징색을 만드는 황토가 발견되었다고 하니, 네 발로 다니던 동물이 직립한 순간부터 이항대립의 기호를 사용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바이너리코드는 이것을 대립하는 별개의 것으로 보느냐 또는 상보하고 교향(交響)하는 것으로 보느냐에 따라 문화, 문명 코드가 달라진다. 전자가 동전 던지기 코드라면 후자는 가위바위보 코드라 할 수 있다.

동아시아의 사고체계를 구축해 온 ‘역경’에는 명확하게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라고 적혀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음과 양이란 ‘대립하면서도 그것을 넘어 상보성을 행하는 비대칭적인 변화’를 나타내는 코드이다.

닐스 보어의 양자론은 말할 것도 없이 서양의 이항대립 시스템에서 음과 양의 상보성으로 눈을 돌린 획기적인 연구의 시작이었다.

아인슈타인도 양자론은 납득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앞에서도 언급했으나, 보어는 양자론의 해석을 거의 완성한 1937년 중국을 방문한다. 그때 그는 자신이 주장해온 대립자(對立者)의 상보성 개념과 2,500년 전 중국의 음양사상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람과 동시에 깊은 감명을 받게 된다.

음과 양은 원형적인 양극성을 지닌 것으로 대립자의 상보성을 표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 현상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생활현상의 본질이라는 것은 그것들의 역동적인 상호작업에 불과하다’는 역의 세계 모델은 그야말로 그가 연구하고 있던 양자론의 해석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보어는 과학적 업적을 인정받고 귀족의 작위를 받게 되는데, 그때 예복의 문장 무늬로 그가 선택한 것은 다름 아닌 음양론을 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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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한 태극도였다. 그리고 예복에 달았던 리본에는 라틴어로 ‘대립적인 것은 상보적이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가위바위보의 손바닥은 우리나라에서는 ‘보(보자기)’이지만, 일본에서는 ‘파(종이)’이며, 중국에서는 ‘뿌(옷감, 천)’라고 부른다. 또 주먹은 우리나라에서는 ‘바위’, 일본에서는 ‘구(돌)’, 상하이에서는 더욱 공격적인 ‘추안토우(망치)’이다.

하지만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가위바위보의 ‘주먹과 손바닥’은 대립하는 기호로 작용하고 있으나, 그 대립은 양극화하는 것이 아니다. ‘양단불락’의 ‘가위’의 개입으로 원형적인 순환성을 갖게 된다.

이항대립의 문화 코드가 지배적이었던 서양의 문명사회에서 가장 당혹스럽고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이 기독교의 ‘삼위일체설’이었다. 유럽에서는 삼위일체의 교리를 둘러싼 논의와 항쟁으로 인해 교회가 분열되고, 신자들은 서로 상대를 이단자라고 배척하면서 엄청난 박해와 살상을 저질렀다.

■ 가위바위보의 경영학

유럽과 아시아 두 문명의 대략적인 차이를 한 마디로 한다면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or)’와 ‘이것과 저것 둘 다(both-and)’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A와 B의 이항관계가 OR에서 AND로 바뀌게 되면 다른 문명 시스템이 출현한다.

짐 C. 콜린스(Jim C. Collins)와 제리 포라스(Jerry Porras), 이 두 경영학 교수가 100년 이상 번영을 이어온 미국 기업을 조사 분석한 결과 얻어낸 것은 놀랍게도 우리나라 국기에 그려진 태극 도형이었다. 그들은 저서의 각 장에 태극 도형을 상징적 로고로 사용하고 있다.

중국의 음양 사상에서 가져온 음과 양의 문양, 비저너리 컴퍼니(visionary company, 시대를 초월하여 뛰어난 존재로 존재할 수 있는 기업)는 ‘OR 의 억압’에 굴하지 않는다. ‘OR의 억압’이란 역설적인 사고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고, 일견 모순되는 힘이나 사고방식은 동시에 추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성적인 견해이다. ‘OR의 억압’에 굴복하면 모든 일이 A와 B 둘 중 하나여야만 하고, A와 B 둘 다 택하는 것은 안 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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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그 예로 변화냐 안정이냐, 신중이냐 대담이냐, 저비용이냐 고품질이냐 - 가치관을 중요시하는 이상주의냐 이익을 추구하는 현실주의냐 등의 8개의 대립항을 제시하고 그 중 어느 한쪽만을 선택하는 것이 either-or의 컴퍼니라고 말했다.

이에 비해 비저너리 컴퍼니는 이와 같은 ‘OR의 억압’에 굴하지 않고 ‘AND의 재능’에 의해 모든 일을 자유롭게 생각한다. ‘AND의 재능’이란 다양한 측면의 양극에 있는 것을 동시에 추구하는 능력이다. ‘A와 B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A와 B 모두를 손에 넣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라고 정의한다.

어쨌든 주목해야 할 것은 음양의 사상을 이른바 가위바위보 코드의 본고장인 아시아인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A와 B 양쪽을 모두 손에 넣는 태극의 의미는 둘을 합쳐 중간을 취하는 절충이 아니라, 모순되는 양쪽을 그대로 살려 동시에 나아가는 것을 뜻한다. 즉 A에서 B로 전환하는 C의 ‘가위’를 살리는 것이다.

태극도의 음양은 쉽게 말해 해병대와 같은 것이다. 해병대는 해군과 육군 을 반반씩 모은 집단이 아니다. 바다에서는 해군의 역할을 하고 육지로 올라오면 육군이 되어 싸우는 두 가지의 다른 특성을 지난 하나의 군대조직이다.

■ 네덜란드 모델과 제3의 길

네덜란드 모델이란 ‘바위’와 ‘보’만 있는 양극이 아니라 ‘가위’라는 그레이존을 살린 가위바위보 코드와 같은 것이다.

- 특정 장소에 마리화나나 매춘 등을 인정하고 특별관리

- 안락사도 플렉시블(융통성 있는)하게 적용하는 법안을 만들어 적용

- 구조조정도 해고냐 고용이냐 양자택일이 아니라 워크셰어링이라는 파트타임 제도를 도입해 대량실직 예방

- 여성도 가정이냐 직장이냐 둘 중 하나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기르면서 동시에 직장에 다닐 수 있는 제도를 모색, 그 결과 기혼여성의 취업률이 40% 증가

- 정부, 기업, 시민NGO등이 상보적으로 해결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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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사회주의에도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자택일주의에서 ‘제3의 길’에 대한 주장이 나타났다.

‘제3의 길’이 옳은가. 과연 성공했는가를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이 20세기의 역사를 ‘극단의 시대’라고 이름 붙였듯, 주목해야 할 것은 균형과 조화의 감각을 잃어버리고 양극회된 현대 문명에 대한 대안 문명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05 삼국권(三國拳)의 새로운 아시아 문명

■ 동북인가 북동인가

2000년 서울에서 한중일 세 나라의 지식인 밀레니엄 토론화가 열렸을 때의 이야기다. 강단 현수막에는 ‘동북아세아 문화의 지역성과 세계성 東北亞細亞 文化의 地域性과 世界性’ 이라는 제목이 한글과 한자 혼용으로 쓰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Localism And Northeast Asian Cultures'라는 영문이 병기되어 있었다.

같은 지역을 가리키는 말인데도 한자는 ‘동북’이고 영어는 거꾸로 ‘북동’으로 되어 있다. 짧은 제목 속에도 한자 문화권과 알파벳 문화권은 이 정도로 차이가 있는 것이다.

- 우리나라에서는 미국의 ‘노스웨스트 항공’을 ‘북서항공’이라 하지 않고 ‘서북항공’이라 부른다.

- 중국에서 발명된 자석은 남북을 동시에 가리키고 있지만 지남철(指南鐵)이나 지남차(指南車)라고 불렀다.

‘방향(方向)’과 영어의 ‘디렉션(direction)’은 말의 뿌리 자체가 다르다.

- 한자의 ‘방’은 사각을 나타내는 문자로 동서남북 전방위를 포함 하지만 영어의 디렉션은 그 어원대로 화살표라는 직선 의미밖에 없다.

- 우리가 말하는 동남아시아는 동북아시아인 우리나라나 일본에서 보면 서남아시아가 되어야 하지만 유럽을 기점으로 한 동남아시아를 불편 없이 그대로 사용한다.

■ 아시아라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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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언급한 현수막으로 다시 한 번 눈을 돌려보자. ‘아세아’라는 말이 눈에 들어온다. 한자이므로 한중일 참가자들은 누구나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기원전 500년에 헤카타이오스(Hekataios)가 만들었다는 최초의 세계지도를 복원한 그림을 보면 유럽과 아시아가 대칭적으로 그려져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유럽은 북쪽에, 아시아는 남쪽에 배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도만이 아니다. 페카 호르호넨(Pekka Korhonen)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아시아와 유럽이라는 말은 모두 4,500년 전 메소포타미아의 아카드어(Akkad語)에서 비록된 것이라고 한다.

즉 아시아는 ‘해가 뜨다’라는 의미의 ‘아수(asu)’에서 나온 것이고 유럽은 ‘해가 지다’라는 의미의 ‘에레브(erebu)에서 유래한 말이라는 것이다.

중앙아시아라는 말이 있는데도 북아시아나 서아시아라는 말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것을 봐서도 아시아는 유럽인이 생각한 이항대립적 산물이었던 것이다.

원래 아시아에는 아시아라는 말 자체가 없었다. 한자의 ‘아세아(亞細亞)’는 설명할 필요도 없이 16세기 후반 마테오리치(Matteo Ricci)가 중국으로 건너간 후 한자로 음역한 지명이다. 아류라고 할 때의 ‘아(亞)’자나, 가늘고 자잘한 것을 뜻하는 ‘세(細)’나 대명제국 중국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중국인이 아세아라고 말할 때는 동이(東夷)나 북적(北狄)이 살고 있는 중화의 주변 지역을 생각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유럽인은 무지하다고 말했을 때 그리스가 유럽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외치던 때나 대동아공영권을 외치던 때나 일본에게 있어서 아세아는 들락날락하는 바다의 저편에 있는 것이었다.

지금도 아시아 공동체를 논의하는 심포지엄 회장에는 ‘글로벌한 세계 속의 일본과 아시아’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다. ‘Japan in Asia’나 ‘Japan of Asia’가 아니라 ‘Japan and Asia’이다. 일본은 세계속에 있지만 아시아 ‘속’에는 없다.

일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이나 중국인 가운데도 자신을 아시아인이라고 의식하고 있는 젊은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지도 안에서는 아시아 지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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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있지만 의식의 공간에서는 아시아의 바깥에 있다. 그러나 아세아라는 말이 없었던 때부터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는 세계 어느 지역보다 뚜렷한 문화적 동질성을 공유하며 2,000년 가까이 살아온 것이다.

■ 문화는 단수인가 복수인가

다시 한 번 현수막의 영어에 주목해주길 바란다. 놀랍게도 ‘Asin culture’가 복수형인 ‘cultures’로 되어있지 않은가. 물론 실수가 아니다. 문명 충돌이 일어나고 갑자기 문화의 다원주의나 다문화 문제 등이 시끄러워진 후부터 문화라는 말도 복수형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 지금 지구상에는 약 3,000여 가지의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역 200여 국가에 흩어져 살고 있음

- 한국과 일본처럼 단일민족이라는 동질성을 가진 국가는 15, 16개국

- 구소련은 1991년 해체 후 12개 국가로, 같은 문화적 기반을 가진 유럽의 25개국은 EU라는 하나의 초국가로 통합

부국강병을 지향했던 세기에는 정치와 경제 이데올로기가 분쟁을 일으키는 씨앗이지만, 냉전 후의 세기에는 문화와 문명이 분쟁의 방아쇠 역할을 한다고 한다.

특히 문화, 문명의 충돌은 1,2차 세계대전과는 그 형태가 달라서 내란, 태러, 게릴라전 등과 같은 산발적 국지전이며 선전포고도 전선도 없는 끝없는 전쟁이다. 현재 이런 싸움이 전 세계 3분의 1에 달하는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다.

- 지금 전 세계에서는 매일 22억 달러가 죽음을 양산하는 데 소비

- 고작 9일분의 군사지출 비용만 있으면 식량, 의료, 교육 시설이 부족한 전 세계 아이들에게 그것을 충분히 나누어 줄 수 있음

- ‘WWW’라고 하면 ‘월드 와이드웹(world wide web)’이 아니라 ‘월드와이드워(world wide war)’를 가리키는 상황이 되어버렸음

- 냉전시대에는 NATO의 일원으로 서쪽에서 활동하던 터키지만 EU에 들지 못한 이유는 역시 다른 문화권에 속해 있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지배적

- 9·11 테러에 대한 언쟁도 단수의 문화코드로 보면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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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보편적 인류 문화에 대한 도전이지만, 복수의 문화코드로 보면 서구의 기독교 문명 대 이슬람 문명의 충돌이다.

- 지금 중동지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테러전쟁’에 대해서도 ‘야만’과 ‘문명’의 싸움이냐, 중세의 종교전쟁과 같은 성전(聖戰)이냐의 두 가지 의견 중 한 쪽으로 치우치게 된다.

동북아시아인의 문화의식은 상대적이냐 보편적이냐를 일도양단하여 택일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문화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말과 문자를 보면 알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은 한자를 사용하면서 동시에 각각 한글과 가나라는 고유문자를 사용하고 있다. 체계가 전혀 다른 이질적인 문자를 혼용해서 쓰는 전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양도(兩刀)구조의 문화이다. 미국은 세계 여러 인종이 모여 인종의 도가니라고 불리지만 그 문화는 획일적이다. 반대로 한국과 일본은 인종은 거의 단일민족에 가깝지만 문화는 세계의 다양한 문화가 모여 있는 샐러드 볼(salad bowl 샐러드를 담거나 섞을 때 쓰는 그릇)이다.

■ 무지개 색은 무슨 색인가

무지개 색은 시대와 나라에 따라 다르다.

- 아리스토텔레스 : 네 가지 색

-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 다섯 가지 색

-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 : 여섯 가지 색

- 나라에 따라서도 두 가지색, 세 가지 색부터 시작해 현대 유럽의 여섯 가지 색, 일곱 가지 색까지 그야말로 가지각색이다.

이러한 차이는 어느 쪽이 옳다고 말할 수 없다.

뉴턴은 프리즘 실험을 통해 스펙트럼의 색을 빨, 주, 노, 초, 파, 남, 보의 일곱 가지로 분류했다. 하지만 정말로 일곱 가지 색일까. 또 과학적 사실이라고 할 수 있을까.

뉴턴은 신앙심 깊은 기독교인이었다. 그의 눈은 프리즘뿐 아니라 성서의 내용에 의해 굴절됐다고도 말할 수 있다. 7일 동안 천지 창조가 완성되고 교회에는 7개의 가지가 달린 촛대가 장식되어 있다. 그리고 7명의 천사가 나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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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불며 심판의 날을 고한다. 이처럼 신성성을 나타내는 7이라는 숫자와 관계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7일을 1주일로 부르거나 자연의 음을 7음계로 나누는 등 기독교 문화권의 의식이 투영된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오행사상의 영향으로 많은 것을 5분절로 나눴던 것과 똑같은 이치다. 서구 음악이 7음계이고 아시아 음악이 5음계인 것도 자연의 연속체를 인위적으로 나누는 분절의 차이에서 나온 것이다.

색깔의 문제를 좀 더 파고 들어가 보면 보통 동아시아인은 청색과 녹색을 구별하지 않는다. ‘끼리끼리 모인다’는 것을 우리나라 속담에는 ‘초록은 동색이다’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글로벌 스탠다드인 교통신호에서도 구미의 그린라이트(green light)를 한자 문화권에서는 ‘청신호’라고 부른다.

그러나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말에도 나타나 있듯 동아시아인이 확실하게 구별하고 있는 청색과 남색을 구미인은 그다지 구별하지 않는다. 남색을 영어로 인디고 블루(indigo blue)라고 부르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게다가 이것마저도 17세기 이후의 이야기이다.

아니 똑같은 색을 표현하는 말도 그 이미지와 상징은 나라에 따라 다르다. 동아시아에서 청색이라고 하면 청춘을 떠오르게 하는 젊음의 청색이자 청운의 꿈을 상징하는 희망의 색이지만, 구미에서는 블루스(blues)나 블루 먼데이(blue Monday)처럼 무기력하고 우울한 느낌의 색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지개는 몇 가지 색이라고 해야 할까. 지금까지 이야기 한 것처럼 답은 하나가 아니다.

■ 피시스(physis), 세미오시스(semiosis), 노모스(nomos)

원래 자연의 방향은 네모난 것이 아니다. 나침반은 둥근 모양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의 세계와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 문명의 세계는 다른 것이다.

그리스인의 방향감각에서 볼 때 북쪽은 신화의 큰곰자리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실제로 선원이 항해를 할 때는 작은곰자리를 향해서 갔다고 한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더블 스탠다드를 갖고 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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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피시스

- 작은곰자리를 북쪽으로 보는 자연계

- 자연계의 무지개는 컴퓨터 화면에 비친 수천수만의 무한한 색으로 분류

0 세미오시스

- 큰곰자리가 북쪽을 상징하는 신화와 같은 기호계

- 세미오시스의 무지개는 나라와 민족에 따라 다른 색으로 분류

0 노모스

- 법률이나 제도에 둘러싸인 법칙의 세계

- 뉴턴의 무지개 같은 교과서에 있는 무지개 색

뉴턴이 ‘광학(Opticks)’을 발표하기 전에는 서양에서도 보통 무지개는 남색을 뺀 여섯 가지 색이었다.

앞에서 이야기 했듯 교통신호의 그린 라이트는 글로벌 스탠다드가 되어 있지만 한자문화권에서는 초록색이 아니라 청신호라고 한다.

글로벌화에 의해 노모스는 바뀌지만 세미오시스 쪽은 좀처럼 변동되지 않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문명은 글로벌화 되지만 문화는 로컬(국내의, 지역의)화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지개의 색을 하나의 기준으로 나눌 수 없는 것처럼 글로벌과 로컬의 문제도 그 세 가지 영역에 따라 다른 관점에서 논해야 한다.

마르크스를 고민에 빠뜨린 것처럼 피뢰침이 세워진 시대에도 여전히 뇌신(雷神) 제우스가 현대인의 생활 속에 엄연히 살고 있는 것이다.

■ 중국 대륙의 ‘보’

그 세 가지의 법칙은 명확하게 구분된다. 피시스(자연법칙)를 어겼을 경우에는 누구도 생존할 수 없지만, 노모스(규정, 체제)를 위반한 경우에는 법에 의해 심판을 받고 처벌을 받는다. 또 세미시오스(기호, 언설)를 거스르면 타인과 소통이 불가능해져 고립되고 만다.

중국은 대륙, 일본은 섬, 한국은 반도이다 피시스는 인간의 힘으로는 바꿀 수 없는 자연의 질서와 법칙을 따르고 있다. 옆에 아무리 사이가 나쁜 나라가 있어도 이사를 갈 수는 없다.

이처럼 대륙-반도-섬이라는 서로 다른 자연적 특성을 가진 삼국이 수천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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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함께 살아온 지역은 아마도 지구상 또는 인류 역사상 동북아시아가 유일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중국 대륙의 지리적 조건은 가위바위보의 ‘보’에 가깝다. 손을 최대한 펼친 상태가 대륙의 ‘보’이다. ‘보’의 손바닥은 넓음과 동시에 관용의 덕을 만들어 낸다. 중국의 진나라는 흉노의 공격을 받았고, 송나라 시대에는 몽골(원)로부터, 대명제국은 만주족에게 멸망해 청나라가 되었다. 그리고 청나라가 망하기까지 750년간 한족이 중국을 지배한 것은 300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침입자에게 무너지고 그들의 지배를 받는다고 해도 중국은 그 무력의 주먹을 ‘보’로 감싸버린다. 원나라도 청나라도 그렇게 감싸져 흔적도 없이 분해되어 버렸다. ‘마른 잎은 굴러도 대지는 살아 있다’는 말대로 대륙의 풍토는 개체를 초월하는 생명력을 갖고 세계를 감싸 안는다. 중국인은 모든 것이 흡입되어 버리는 광활한 대지 위에 조화와 균형의 힘을 지닌 인자(仁者)와 군자(君子)를 이상으로 하는 상문주의(尙文主義), 그리고 자연에서 직접 혜택을 받는 농본주의를 바탕으로 오랜 역사의 길을 걸어온 것이다.

이와 같은 중국 대륙의 민족성을 긍정적으로 표현한 것이 용(龍)이다. 자연의 만물과 중국 황제의 힘을 상징하는 용은 여러 동물의 신체부분을 모아 융합시킨 상상의 생물이다. 뿔은 사슴, 머리는 낙타, 발은 호랑이, 발톱은 독수리와 닮아있다. 또 돼지의 코, 토끼의 눈을 가지고 있으며 몸통은 뱀과 잉어의 비늘 혹은 양자강의 악어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용의 힘은 개체가 아니라 다양한 생물들을 하나로 융합시킨 자연의 힘을 표상한다. 일부에서는 옛날 중국 대륙에 살고 있던 부족들을 하나로 결속시키기 위해 각자가 신앙으로 믿고 있던 동물을 통합해 하나의 형태로 만든 것이 용이라는 설을 믿기도 한다.

요컨대 용은 지금도 쉰 가지가 넘는 다민족이 공생하고 있는 중국 대륙의 상징으로 살아 있는 것이다. 그리스인들 역시 조화와 균형을 중시했다고 일컬어지지만 그들이 다양한 생물을 모아 만든 키메라는 용과 달리 흉측한 괴물 형상이다. 그러나 용은 이질적인 것을 합친 것인데도 부자연스럽지 않다. 오히려 통일성과 조화를 갖춘 아름다움과 위엄이 있다. 이러한 용의 모습을 만들어 낸 것은 포용의 힘을 의미하는 바위바위보 코드의 손바닥, 바로 ‘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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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주먹, 바위 문을 여는 힘

일본은 중국 대륙과는 대극에 위치해 잇는 해양 열도국이다. 해양 일본론자인 가와카쓰 헤이타 교수는 전 국토를 의미하는 일본어 쓰쓰우라우라(전국의 항구와 포구라는 뜻)라는 말에 일본의 지역적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고 말한다. 일본에서 가장 많은 성씨 중의 하나가 쓰쓰우라우라와 같은 의미인 ‘와타나베’이다. 점점이 흩어져 있는 섬과 섬을 오가는 해변의 등대 불빛이 보이는 듯하다.

한국과 중국에서 정국의 의미할 때 쓰는 표현은 ‘방방곡곡(坊坊曲曲)’으로 구불구불한 골짜기의 이미지이다 사람의 성씨도 모두 육지와 관계가 있는 것들뿐이다.

가위바위보 코드로 말하자면 일본은 대륙의 손바닥과 대립되는 주먹이다. 여유보다는 긴장, 확대보다는 축소 지형이다.

물론 옛날 일이기는 하나 일본이 주먹의 바위였던 이유는 무엇보다 한국과 중국이 문민통제였던 것에 비해 유일하게 무사가 지배하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주먹은 힘이다. 힘을 신봉하는 일본을 가장 잘 뒷받침하는 상징이 그 유명한 바위 문에 숨은 태양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天照大神) 신화이다. 만 명의 신들은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바위문 뒤에서 나오게 하기 위해 한 자리에 모여 의논했지만 헛일이었다.

신들은 바위 문 앞에서 아침을 만들기 위해 거울을 비추거나(시각적 이미지), 나가나라도리(장명조)를 울게 하거나(청각적 이미지), 춤을 추는(육체적 이미지)등의 트릭으로 천조대신을 끌어내려고 하지만 모두 실패한다.

바위 문을 연 것은 아마노다지카라오노미코토라는 역사(力士)의 힘에 의해 빛이 돌아온 것이다. 바위 문을 연 역사(力士)는 사무라이가 된다.

사무라이의 부활은 군국시대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서양과 무역마찰을 일으켜 일본 때리기라는 말이 유행했을 때 다른 나라들이 품었던 일본의 이미지는 사무라이의 모습으로 쳐들어오는 일본 비즈니스맨의 모습이었다.

도요다가 중국에 뿌린 ‘PRADO’광고가 소비자로부터 거센 집단 항의를 받은 것도 우연은 아니다. 강한 인상을 주기위해 차 이름을 사납다 라는 뜻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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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도(覇道)’라 붙이고 그것을 광고 카피로 사용한 것이 ‘지뢰를 밟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무사집단이 힘으로 정권을 잡는 일본에서 패도는 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말이다.

벤츠가 중국 시장에 가면 ‘빈스(賓士)’가 되지만 도요타의 프라도는 ‘패도’ 가 되어 물심양면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그리고 심한 항의 끝에 결국은 사죄까지 하는 처지가 되었다.

■ 한국의 가위 - 반도(半島)의 밸런서(Balancer)

요컨대 동아시아의 대륙-반도-바다라는 자연적인 지리적 조건은 중국은 ‘보’, 일본은 ‘바위’, 그리고 한국은 ‘가위’라는 가위바위보 코드를 초래했다. 우연이라고 하나 가위바위보를 부르는 방법에 있어서도 일본과 중국은 바위가위보의 순서인 반면 우리나라는 가위가 가장 먼저 나온다. 지금처럼 핵을 보유하고 있는 중국이 ‘바위’가 되고 평화헌법에 의해 일본이 ‘보’로 바뀌는 일이 생기더라도 한국은 언제나 ‘가위’이다.

‘가위’가 정상적으로 움직이면 동아시아는 선형적인 이항대립의 시스템에서 벗어나 원형적인 순환과 생성의 시스템을 만들어 낸다. 대립하는 물과 불 사이에 가마솥이 있으면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다. 한국이 이와 같은 가마솥의 역할을 수행하던 시기에는 동아시아에 평화가 찾아오고 아름다운 문화의 꽃이 피었다.

그러나 원나라 군사들이 일본을 침략하려 했을 때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륙을 공격하려 했을 때는 반도의 특성이 파괴되고 그 존립의 의미를 잃고 말았다.

대륙과 해양의 두 세력이 충돌할 때는 반도인 한국의 힘이 약해졌을 때였다. 반도가 동아시아의 밸런서로서 가슴을 펴고 당당히 있으면 일본은 카미카제에 의지하지 않아도 안전했다. 야마가타 아리모토는 ‘조선반도’를 일본의 생명선이라 불렀지만 그것이 동아시아 전체의 생명선이라는 사실을 몰랐기에 비극이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한일합병이 일어났고 그 이후에는 사실상 동아시아에서 반도는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반도라는 말 자체가 차별어로 변해 버린다. 일본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던 가쓰 가이슈 등은 탈아와 대륙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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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반대하는 의견을 피력하며 지금의 조선은 최쇠약기에 있지만 결국은 강해질 때가 올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의 말대로 한국은 경제력이나 정치력은 물론 IT나 문화면에서도 세계 10위권 안에 들 만큼 강한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잃어버린 반도성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회복되지 않고 있다.

지오컬처 면에서 보면 분단된 한국은 북측은 중국의 대륙문화의 연장선상에 있어 대륙의 나라로 변해버렸고, 남측은 인공적인 섬나라가 되어 해양문화의 영역으로 전환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분단은 한민족만의 비극이 아니다. 동북아시아 전체의 비극이기도 하다. 가위가 절단되어 반도성을 잃었다는 것은 오랫동안 대륙-반도-섬(바다)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순환해 온 바위바위보 코드의 종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반도성(半島性)의 회복

반도성의 회복은 한민족만의 일은 아니다. 중국과 일본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전체가 ‘삼파’의 역학관계를 회복하고 독특한 로컬리즘(지역주의)을 살리는 일이다.

지리적 특성만이 아니다. 한국 문화는 세계 어느 문화보다 양극을 융합하는 그레이존(어느 세력권에 속해 있는지 불분명한 지역)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 비빔밥, 승강기, 빼다지, 나들이 등 우리나라 말은 정반대의 두 개념이 하나의 말로 결합하고 있는 양방향성이다.

- 프랑스의 자크 아탈리 : 동북아시아가 EU와 같은 연합 국가가 만들어 진다면 수도는 서울이 될 것이다.

- 미국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 : 만약 유럽 연합 모델이 아시아로 수출된다면 한국이야말로 아시아 연합을 주도할 이상적인 국가다.

거대한 나라와 강대한 나라 사이에서 그 밸런서 역할을 수행하는 작지만 강한 나라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침략은 받았지만 침략을 한 적은 한 번도 없는 나라가 이웃에 잇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바위’와 ‘보’ 사이에 ‘가위’가 있다는 것은 경쟁과 협력이 함께 이루어질 수 있는 기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새로운 동아시아 네트워크 국가가 만들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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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는 중국의 대륙도 아니고 일본의 섬도 아니다. 반도가 반도의 독자성을 회복하려고 하는 것은 단순한 민족주의와는 다른 것이다. 반도의 독자성 회복은 대륙문명이냐 해양문명이냐의 이항대립 코드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는 일이며 절대 승자의 동아시아 파워를 상호의존의 패러다임으로 바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 세미오시스 - ‘함삼위일(函三爲一)

피시스(자연계-지리)에서 세미오시스(기호-상징계)로 옮기면 이번에는 세 종교를 하나로 습합한 ‘함삼위일’이라는 모델이 나타난다.

중국을 비롯해 한국, 일본에서는 세 종교가 가위바위보를 하듯 경쟁과 협력의 관계를 유지하며 공존해 왔다.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 왕조시대에도 살아 있을 때에는 유교를 믿고 죽은 후에는 불교에 귀의한다는 선유후불(先儒後佛)의 종교관이 유행했다. 물론 현세의 이익을 추구하거나 병에 걸렸을 때는 무속 신앙에 의지하기도 했다.

결혼은 신도식으로, 장례는 불교식으로 치르는 일본도 예외는 아니다.

홍콩 역시 마찬가지로 유,불,도를 하나로 합쳐 제를 지내는 사원이 많다는 것을 현지에 가면 바로 확인 할 수 있다.

일본에 유교와 불교가 들어오자 일본의 신도는 불교에 밀리고 불교는 유교에 밀리고 유교는 신도에 밀리면서 절대 승자 없는 상보의 역학관계를 나타냈다.

일본에서는 노부나가, 히데요시, 이에야스라는 삼자견제의 가위바위보 코드가 천하를 통일했다. 두견새 이야기로 이 세 사람의 성격이 비교되기도 하지만 가위바위보 캐릭터로 말하자면 노부나가는 ‘바위’, 히데요시는 ‘가위’, 이에야스는 ‘보’라고 할 수 있겠다.

■ 동아시아의 세 가지 문자

동아시아의 함삼위일은 종교의 영역만은 아니다. 세미오시스(기호-상징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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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핵이라 할 수 있는 언어, 문자에 있어서도 한.중,일 삼국은 이상적인 가위바위보 코드를 보이고 있다. 한글, 한자, 가나라는 세 언어가 가위바위보와 같은 관계로 맺어져 있다. 그리고 한국은 한글과 한자를, 일본인은 가나와 한자를 혼용해 왔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택일 밖에 없는 세계에서 보면 실로 희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자는 시각적인 아이콘의 문자이다. 이에 비해 한글이나 가나 문자는 청각적인 음성문자로 디지털적이다. 체계도 형태도 다른 두 문자가 사이좋게 그 기능을 고양시키고 상보해온 것 역시 종교의 습합 정신과 똑같은 것이다.

만화에서는 시각적인 영상과 함께 청각적인 소리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서양의 회화처럼 그림 구석에 작가의 사인만 작게 써 놓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동양의 문인화에는 그림의 여백에 반드시 그림 제목을 쓴 문자가 아름답게 배치되어 있다.

만화에도 단순히 대사뿐 아니라 장면을 강조하는 의성어 효과가 빈번히 사용된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귀에는 들리지 않는 눈이 내리는 소리까지 말로 표현한다. 한국어로는 ‘사락사락’, ‘펄펄’ 눈이 내리고, 일본어로는 ‘신신’, ‘코코’눈이 내린다.

일본에서는 닭우는 소리를 ‘고케콧코’라고 하는데, 이것은 메이지 시대 이후의 것으로 옛날에는 ‘도텐코’였다고 한다. 닭이 새벽을 알린다는 뜻의 한자 ‘동천홍(東天紅)’에서 연상된 의성어이다.

이처럼 영상과 소리 그리고 문자의 의미가 잘 융합되지 않으면 애니메이션은 만들 수 없다. 또 한 컷 한 컷의 그림은 정지해 있지만 그걸 연결함으로써 움직임이 만들어진다. 시각과 청각, 정(靜)과 동(動) 모두 반대의 일치를 나타내는 것이 애니메이션의 특성이다. 한글과 한자 또는 가나문자와 한자를 함께 병용하는 것은 애니메이션 문화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양립하는 다른 문화를 수용하는 문화의 복합성과 관용성 덕분이다.

이와 같이 종교, 언어, 문장에 대해 비교적 관용적이었다는 것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별(or)이 아닌 ‘이것도 저것도’의 both-and 배합이 동아시아를 관철했기 때문이다. 미래의 멀티미디어 문화는 이렇게 출현한다.

■ ‘飛鳥’를 왜 ‘아스카’라고 읽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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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문화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아스카(飛鳥)라는 말은 한자로 ‘나는 새(飛鳥)’라고 쓰고 왜 ‘아스카’라고 읽는 것일까. 그리고 왜 또 그것을 다른 한자인 ‘명일향(明日香)이라고도 표기하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을 추적해 가다보면 과거뿐 아니라 동아시아 삼국의 문화 공동체의 의미까지 알 수 있다.

‘날다(飛)’라는 말도 하루를 나타내는 ‘일(日)’도 우리나라에서는 모두 ‘날’이다. 또 하늘을 나는 새를 ‘새’라고도 하지만 날이 샌다고 할 때의 ‘명(明)’도 ‘새’라고 한다. 결국 한자어에서는 ‘나는 새(飛鳥)’도 ‘날이 새다(日明)’도 모두 같은 소리인 ‘날새’가 된다. 이것은 곧 ‘飛鳥’와 ‘明日’은 동음이의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어의 고어에는 마을을 ‘골’이라 했으므로 일본어의 ‘가오루(香)’와 발음이 같다. 일본어인 아스카 마을을 한국어로 읽으면 ‘날새골’이 되고 그것은 그대로 ‘明日香’가 된다.

요컨대 ‘아스카’는 ‘내일의 마을(明日村)’이라는 의미가 된다. 미래의 마을 새롭게 ‘개척한 마을’이라는 상징이다. 또 ‘아스카 사람’이라고 하면 ‘내일의 사람’, ‘도래할 개척민’이라는 의미도 되는 것이다.

문자는 중국어, 말은 일본어, 그리고 의미는 한국어에 의해 구축된 것이 아스카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즉 한국, 중국, 일본의 말과 문자가 하나로 조화를 이루어 ‘미래의 마을’을 구축한 것이 다름 아닌 야마토(大和)의 모습이다.

■ <겨울연가>의 한류

지금 동아시아의 하늘에 떠오른 무지개 중 하나가 ‘한류(韓流)’문화라는 것이다. 이 유행어는 중국의 젊은이들 사이에 열풍을 일으킨 한국의 TV드라마와 대중가요 붐에 대한 경고의 뜻으로 1999년 11월 베이징칭녠바오(北京靑年報)에서 처음 사용한 신조어이다. 이른바 ‘한류’라는 말에는 똑같은 발음인 ‘한류(寒流)’라는 의미가 숨은 그림처럼 감춰져 있는 곳이다.

- 일본의 대중문화에 열광하는 대만의 젊은이들을 ‘하르주(일사병)’라 부르거나 ‘하한주(열병에 걸려 추위에 떠는 병자)’라고 이름붙인 것과 같은 현상

일본에서도 한류(韓流)가 한류(寒流)가 될 우려는 얼마든지 있다.

- 욘사마는 님을 의미하는 ‘사마(樣 모양 양)’를 네 번 반복한 ‘樣樣樣樣’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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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배용준의 ‘용’이 일본어로 숫자 4를 의미하는 ‘욘’과 발음이 같으므로 ‘욘사마’가 된 것이다. 하지만 욘사마 붐을 냉정한 눈으로 응시하던 일본인들은 욘사마를 독감을 뜻하는 영어 ‘인플루엔자’와 결합하여 ‘욘플루엔자’로 부르기도 했다. 제목이 겨울연가이기에 더욱 절묘하게 느껴진다.

- 2004년 일본의 대중문화 개방

- 일본에서 겨울연가가 공전의 히트를 한 후 한국의 드라마, 영화 등이 맹렬한 기세로 일본의 거실에 침투

- 욘사마가 만들어낸 3조 엔에 이르는 거대한 문화마켓 : CF, 미디어 산업, 관광, 캐릭터, 패션, 출판, 음식문화, 욘사마 다이어트, 그리고 <그 사람의 나라, ‘한국’이 좋다>라는 책의 출판, 넘쳐나는 한글교실 등

- 놀랍게도 겨울연가 촬영지 관광을 성지순례라고 부르는 욘사마 팬들은 춘천에 와서 기꺼이 빗자루를 손에 들고 거리청소를 한다.

- 빗자루를 손에 든 일본 여성은 칼을 든 군국시대의 남성보다 강하다.

일본인은 오랫동안 서양에 대해서는 열등의식을 품고 아시아 주변인에 대해서는 우월의식을 갖고 차별을 해 왔다. <겨울연가>의 ‘한류’는 이 두 가지 콤플렉스의 안개를 보기 좋게 날려버린 것이다.

조선인과 마찬가지로 차별어였던 마늘 냄새 나는 김치가 지금의 일본에서는 ‘이것만 있으면 밥을 먹을 수 있다’는 TV설문 조사에서 2위를 차지하고 있다. ‘일본 여성이 외국인 남성과 결혼한다면’이라는 설문에서도 한국 남성이 1위이다.

아시아에서 EU와 같은 AU가 탄생하지 않는 것은 경제적 차이가 아니라 감정의 차이와 민족의 차별 때문이었다. 이제 그 장벽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겨울연가’는 ‘봄의 연가’였다.

■ 아시아의 관용과 융통성과 개방성

사회주의 제도의 도입으로 외래문화에 대해 굳게 문을 닫았던 인도는 요즘들어 IT산업 등을 중심으로 문화의 다양성, 개방성이 진행되고 경제도 신장하기 시작했다. 중국, 러시아, 인도 등 최근 경제가 신장하고 있는 나라는 모두 문화의 관용성과 개방성을 채택해 지금의 성장을 달성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역사상 오랫동안 네발 달린 짐승을 먹는 것을 터부시해왔지만 근대화와 함께 소고기를 식문화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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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천황 시절 소고기를 황실에 받아들이기로 한 이래 얼마 되지 않아, ‘스키야키’는 세계적인 일본 식문화의 브랜드가 되었으며, 한국의 불고기 요리를 받아들여 서구 못지않은 소비국가가 되었다. 소고기를 먹기 시작한 후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 마쓰사카우시, 고베비프 등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맛있는 소고기를 탄생시킨 것이다.

15세기의 중국은 350년 뒤 실제로 일어난 산업혁명에 필요한 기술을 이미 보유하고 있었다. 풀무가 있는 용광로를 만들고 700년간 세계 최다 철을 생산했던 나라이다. 화약, 대포, 나침반, 지식을 전하는 종이와 활자, 바퀴가 달린 운송수단을 만들었고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상회하는 대선단과 항해술로 탐험대 2만 8,000명을 아프리카 동안(東岸)까지 보냈다. 콜럼버스의 네 배에 달하는 선단으로 인도양을 탐험한 적도 있다.

그런데 산업기술, 수학, 지리학 분야에서 모두 영국보다 우위에 서 있던 중국은 왜 산업혁명을 일으키지 못한 채 끝난 것일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한마디로 말하면 가위바위보 코드를 노모스의 세계, 이른바 법률과 체제의 시스템으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중국은 기술을 발전시키는 특허법 등을 제도화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황제는 칙령을 내려 원양선의 건조와 항해를 금지시켰다.

동아시아의 윤리도덕은 가위바위보 코드처럼 모든 것이 상대적이며 인터랙티브한 것이었다. 자식은 부모에게 ‘효(孝)’를 다하고 부모는 자식을 ‘자(慈)’로 대한다. 신하는 임금에게 ‘충(忠)’을 다하고, 임금은 신하에게 ‘인(仁)’을 베푼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인륜이 사회의 제도권 안으로 들어가면 ‘인과 자’는 사라지고 ‘충과 효’라는 일방적인 절대 논리로 변해버린다. 그래서 아시아의 심오한 사상과 유연한 상상력은 경직된 관료주의 제도에 의해 점술이나 민간치료와 같은 지하문화로서 생명을 연장해 온 것이다.

■ 새로운 지정학

영국의 역사 지리학자 핼포드 매킨터(Halford Mackinder)의 하트랜드 이론에 의하면 오랫동안 세계의 문명을 결정한 중심지역은 중앙아시아 대륙이었다. 그러나 이 세력은 15세기 북유럽 및 서유럽의 해양세력의 도전을 받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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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장해 갔다. 그 후 400년간 연해국가의 강력한 해군력으로 파워가 이동해 갔다. 산업혁명과 함께 영국이 주도권을 잡고 그 해양 파워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팍스 아메리카나의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지금 세계의 지각에 변동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더 이상 해양라인이 아니다.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EU를 비롯해 러시아, 중국, 인도 등의 대륙 국가들이다.

이처럼 해양 대 대륙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동아시아뿐 아니라 영국, 미국의 해양 라인이 서쪽으로 돌았을 때 마지막 포인트가 되는 일본과, 유라시아 대륙 라인이 동쪽으로 돌았을 때 제일 끝이 되는 중국이라는 양 세력이 그 접점에 있는 한반도에서 만나게 된다.

삼국의 관계가 항상 똑같이 ‘가위, 바위, 보’로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때와 장소에 따라 각각 결합 방법이 달라진다.

■ 휴대전화의 미래

지금 문명은 ‘동전 던지기형’에서 ‘가위바위보’형으로 이동하고 있다. 어린 시절의 환상도 아전인수(我田引水)의 편애도 아니다. 좋든 나쁘든 탈산업문명 또는 초산업문명이라 불리는 글로벌상황은 더 이상 지배 = 종속의 패러다임으로 지속할 수 없는 위기를 맞고 있다. 독립이냐 의존이냐의 이항대립관계는 상호존중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치환된다.

산업문명을 대표하는 자동차와 문명정보를 상징하는 휴대전화를 비교해 보면 누구나 그 변화가 금방 눈에 들어올 것이다.

- 자동차는 혼자 타고 달릴 수 있다.

- 휴대전화는 혼자 들고 다녀봤자 아무 쓸모없다. 거는 것 받는 것 둘 다가 존재해야 비로소 작용하는 기능이다.

내 휴대전화는 나에게 전화를 거는 타인의 것이며, 내가 걸면 타인의 휴대전화는 내가 사용하는 것이 된다. 휴대전화는 누구의 것인가. 소유 자체의 모델이 자동차와는 다르다. 휴대전화는 나와 상대와의 접속 사이에 존재하며 네트워크라는 관계의 틈새에 존재한다. 이것이야말로 인터넷의 인터(inter 사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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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시대를 대표하는 자동차와 정보문명을 상징하는 휴대전화를 비교해보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도구’에서 ‘신체’로, ‘소유’에서 ‘접속’으로 ‘실체’에서 ‘관계’로 ‘사물’에서 ‘마음’으로, 세상의 가치와 기능의 축이 이동중이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다.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가위바위보 모델의 문명에서는 가장 새로운 휴대전화와 아주 오래전 쓰레기통에 버려진 ‘인(仁)’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흔히 ‘인(仁)은 인(人)이다’라고 일컬어져왔다. 사람인 변에 두 이자를 붙인 글자 뜻대로 사람은 혼자가 아니라 둘의 ‘인터’이며 그 관계 사이에 나타나는 존재이자 움직임이다. 즉 ‘인’이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그리고 사물과 사물이 교신을 하는 문자이다.

■ 아시아인이여, 엘리베이터에서 내려라

가위와 바위와 보자기 중에서는 누구도 피라미드의 정점에 오르지 못한다. 동시에 누구도 맨 밑에 깔리지 않는다. 경쟁은 있으나 절대 승자도 절대 패자도 없다. 상대적인 대전에 따라 A는 B를 이기고, B는 C를 이기고, C는 또 A를 이기는 끝없는 승패의 순환이다. 점점 어두워지면 밝아지는 하루, 점점 추워지면 따뜻해지는 사계절의 순환처럼 ‘삼자견제’, ‘사자견제’의 질서는 직선적인 인과율로는 설명할 수 없다. 명암과 한난의 바이오리듬으로 움직이고 있는 세계에서는 확률과 정보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점쟁이처럼 가공의 시뮬레이션으로 시나리오를 써야 하는 상상력과 직관력이 무게를 갖는다.

가위바위보를 하는 사람은 더 이상 동전 던지기를 할 때의 개인이 아니다. 상대가 무엇을 낼지 슈퍼컴퓨터로도 예측할 수 없는 무작위의 승부지만 결코 상대를 묵인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을 우연과 부조리의 어둠 속으로 내던지지 않는다. ‘가위바위보’중에 무엇을 낼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선택한다. 서로 상대의 의표를 찌르며 손을 내민다. 같은 것만 내면 반드시 진다. 섞어 내기와 다양성이 승리한다. 순간의 만남에 의해 불꽃이 튀는 삶이다.

아시아인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세계인들은 모두 갇힌 채로 계속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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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를 향해 한없이 속도를 올리는 엘리베이터로 인한 현기증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어서 엘리베이터에서 내려라. 승상기라 불렸던 예전처럼 지면을 향해 내려오는 것이다. 교실이 아니다. 교학실에 들어가 새로운 교학서로 공부를 시작하자. 이번에는 파는 곳도 사는 곳도 아닌 새로운 곳에서 표를 구하자. 그리고 문명의 현기증과 구역질을 치유해 줄 새로운 여행을 떠나자. 길은 시작과 끝이 없다. 끝나는 곳이 시작하는 곳이다.

무거운 짐은 버려라. 걱정할 것 없다. 문명의 풍향이 바뀐 것을 느낀다. 내 손이 휴대전화이다. 나는 세계의 발신자이며 동시에 수신자이다. 옛날 문어체여도 상관없다.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을 떠올려보자. 분명 무슨 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한께 했던 가위바위보의 구령소리일 것이다. 한국 아이들은 ‘가위바위보’ 중국 아이들은 ‘차이차이차이’, 그리고 일본 아이들은 ‘장켄폰’이라고 외칠 것이다. 전 세계 어린이들이 손을 흔들며 달려오는 모습이 보인다.

서로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격렬한 싸움처럼 보이지만 승부를 경쟁하며 즐겁게 할 수 있는 놀이이다. ‘아이는 어른의 부모’라고 했던 시인의 역설은 무지개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공장에서 전쟁터에서, 시장에서 들려오는 땀투성이, 피투성이의 외침이 아니다. T. S. 엘리엇의 트릭을 빌려 말하자면 ‘기억 속의 희미한 발소리’이다.

한 번도 간 적 없는 길, 한 번도 열어본 적이 없는 문을 향해 다가가는 발소리가 들린다. 하나가 된 반도가 보이고 아시아가 보이고 세계가 보일지도 모른다.

2015. 10. 11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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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바위보 문명론(2)

- 물고 물리는 한중일 관계, 새 아시아 문명의 답이 여기 있다 -

■ 이어령 지음, 허 숙 옮김

04 동전 던지기형 문명과 가위바위보형 문화

■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e)의 가위바위보

최후의 만찬(La ultima cena)은 누구나 다 아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유명한 그림이다. 하지만 그림 속 예수의 양손이 어떻게 그려져 있는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실은 그 손도 ‘모나리자’의 미소처럼 모순되고 복합적인 이미지를 품고 있다. 이렇게 예수의 대립된 양손 이미지에 처음으로 주목한 사람은 프랑스의 미술사가 르네 위그(Rene Huyghe)였다.

쥐고 있는 오른손이 유다의 배신에 대한 거부의 자세라면, 손바닥을 펴 보인 왼손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모든 죄를 포용하는 것이다. 개-폐, 표-리의 이항대립 체제로 되어 있는 예수의 양손은 ‘가위’와 ‘보’의 관계와 닮아 있다.

불상의 손도 가위바위보의 기호와 유사한 점이 많다. 인간을 구제하는 여원인(與願印 아무 것도 들고 있지 않은 왼손, 중생의 소원을 들어 줌) 과 시무외(施無畏 : 아무 것도 들고 있지 않은 오른손, 중생의 두려움을 없앰)의 인상은 모두 부드럽게 펼쳐져 있다. 이에 비해 분노로 불타오르는 부동명왕(不動明王)은 주먹을 꽉 쥐고 있다. 일상생활에서도 주먹과 손바닥은 공격과 포용, 강함과 부드러움, 응축과 확산 등 다양한 레벨에서 대극적인 의미를 나타낸다. 로마시대의 수사학 교과서에는 손바닥이 그려져 있고 논리학 교과서에는 주먹이 그려져 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인간은 미움을 품은 상대에게는 주먹을 쥐고 친한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대할 때는 악수를 하듯 손을 펼친다. 무언가를 요구하는 같은 말이라고 해도 상대를 향해 주먹을 내밀면 불량배의 협박이 되고 펼친 손을 내밀면 걸인의 애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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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건대 주먹은 손바닥의 뿌리인 팔에 가까운 것이다. 망치나 도끼처럼 자루가 있는 공격적인 도구는 모두 팔에 붙어 있는 주먹을 투영한 것으로 여겨진다. 한자의 ‘아버지 부(父)’는 양 손에 도끼 같은 무기나 형구(形具)를 들고 있는 사람을 본뜬 상형문자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분명 ‘도끼 부(斧)’자에도 ‘부(父)자가 들어 있다. 쥐고 있는 주먹은 도끼이자 아버지로, 힘과 지배의 상징이다.

- 어머니의 손 : 부드럽게 열려 있음, 약손

- 갈퀴 : 손가락을 전부 펼친 손바닥을 모방해서 만든 것

- 꽉 쥐고 있는 주먹이 부성(父性)의 원리라면, 펼쳐진 손바닥은 모성(母性)의 원리

■ 왜 바위가 보에 지는가

바위는 석기시대의 돌도끼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보자기는 딱딱한 바위를 감싼다. 산에 가면 담쟁이 종류의 나뭇잎이 커다란 바위를 감싸고 있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생명 그 자체는 부드러운 것이다. 그러나 죽으면 바로 바위처럼 딱딱해진다. 부드러운 피부와 살로 딱딱한 뼈를 감싸고 있는 것이 우리 인간의 몸이기도 하다. 아이들은 이솝우화를 통해서 북풍의 힘이 따뜻한 태양에게 지는 이야기를 기억하겠지만, 부드럽고 평면적인 손바닥이 강한 주먹을 이기는 가위바위보의 규칙은 역시 오래된 동양의 냄새가 난다. 루쉰의 소설 <출경(出關>에 묘사되어 있는 노자(老子)의 모습이 떠오른다. 노자는 입을 벌려 보여준다. 단단한 이는 세월과 함께 썩고 빠져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부드러운 혀는 어떤가 여전히 태어났을 때 그대로가 아닌가. 바위는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부서져버리지만 높은 폭포에서 떨어진 물은 아무런 변화가 없다.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을 이기는 것이다.

■ 중국 3대 소설의 리더

0 삼국지연의에서 가장 강한 인물은 관우와 장비이지만 그들의 리더는 덕으 로 그들을 이끈다.

0 수호전에서 양산박 108명 도적들의 우두머리는 현덕과 같은 스타일의 송 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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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서유기에서도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을 다스리는 자는 힘이 없는 삼장법사이다. 그는 손오공이 머리에 쓰고 있는 금고아(머리띠)를 조여 그를 제압한다. 가위바위보의 규칙대로 손오공은 부처님의 손바닥을 벗어날 수 없다.

0 동아시아 에서는 ‘문승지효(文勝之効 문이 무를 제압함)’를 이상으로 삼았고 실제로 문인이 세상을 지배했다.

0 일본 무가사회에서도 에도 시대에는 도쿠가와(德川)이라는 성씨에서 볼 수 있듯이 덕치가 무력지배보다 중시 되었다.

동아시아 문화의 특색이 국가 제도뿐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도 종이와 보자기로 감싸는 문화가 발달했다는 것이다. 보자기는 싸는 것뿐만 아니라 사용하는 방법에 따라서는 깔기도 하고 입기도 하고 매기도 하고 접기도 한다. 도둑이 얼굴을 가리고 들어와 물건을 싸서 나가는 것이 보자기이다.

서양에서도 RPS(Rock, Paper, Scissors)라고 하는 동양과 똑같은 가위바위보가 있지만 보가 바위를 이긴다는 규칙을 적용하지 않은 경우도 많다. 여러 명이서 가위바위보를 할 경우에는 가위, 바위, 보중 적게 낸 쪽이 지게 된다. 쉽게 말하면 모두 바위를 냈을 때 혼자만 ‘보’를 내면 ‘보’가 바위에 지는 구조이다. 다수결 원칙과 같은 것으로 이것이야말로 선거 민주주의를 탄생시킨 서양 문명다운 규칙이다.

보자기가 바위를 이기는 직선적인 논리에서는 그 누구도 지는 쪽을 선택하지 않는다. 보자기는 바위를 이겨도 가위에게는 잘리고 만다. 바위의 무력도 보자기의 문덕도 세상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힘은 아니다. 가위의 개입에 의해서 비로소 누구나 이길 수 있고, 동시에 누구나 질 수 있는 바위바위보 코드의 리얼리티가 가능하게 된다.

■ 숨바꼭질의 아동 심리학

아동 심리의 관점에서 분석해 보면 숨바꼭질은 동전 던지기와 똑같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이들은 술래가 되면 혼자만이 세상에 버려진 기분이 되고 사막을 홀로 헤매는 느낌을 받는다.

주위의 친구들이 모두 자신에게서 도망쳐 숨어버리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소외 체험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은 숨은 친구들을 찾는 것이다. 혼자 남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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졌다고 집에서 어리광을 부리듯 울거나 화를 내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 놀이를 통해서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다른 아이가 술래가 되면 서로의 입장이 역전되는 것을 배운다. 바로 그때 이번에는 힘의 강약에 상관없이, 몸집의 크기에 상관없이 모두 평등하다는 것을 느끼고 몸으로 익힌다. 자신보다 불운하거나 가난해도 그것이 결정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누구나 술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술래 체험’이 실제 세계에 나타난 것이 ‘집단 따돌림’이다. 누군가를 집단에서 제외시키며 살아남는다. 또 자신이 술래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타인을 술래로 만들어야 한다.

가위바위보의 공간에서는 ‘자르다’, ‘감싸다’, ‘치다’라는 세 가지의 다른 역학관계에 의해 승부가 순환하고 있다. 분별하여 ‘자르는 힘’인 지혜, 부드럽게 ‘감싸는 힘’인 덕, 그리고 적극적으로 공격해 가는 ‘치는 힘’ 체력, 이와 같은 ‘지,덕,체’가 다양한 변화를 탄생시킨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 주먹과 손바닥은 ‘역(易)’의 음양이다

던진 동전은 바닥에 떨어진다. 반드시 앞면과 뒷면 중 한 쪽은 아래를 향하게 된다. 배제되고 소거되는 것이다. 사람이 동전의 양면을 동시에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단 동전을 세워서 보면 양면의 경계가 직선으로 보인다. 하지만 동전이 바닥에 떨어졌을 때 서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러나 ‘바위’와 ‘보’의 대립 사이에는 ‘가위’가 있다. 더 이상 금,은,동이 아니다. 피라미드의 각진 모서리들은 둥근 구체가 되고 정점은 회전한다. 따라서 무엇을 내든 절대 강자는 될 수 없다. 모든 가위바위보는 ‘삼자 견제’의 질서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가위바위보를 하는 아이는 자신의 손을 꽃처럼 바라본다. 손가락을 펼치면 꽃봉오리가 꽃이 되는 것처럼 주먹이 손바닥이 된다. 손에서 손가락을 접으면 꽃은 시들고 주먹은 과실처럼 둥근 모양으로 단단해진다. ‘주먹’에서 ‘손바닥’으로, ‘손바닥’에서 ‘주먹’으로 변해가는 그 프로세스 사이에 ‘가위’의 손가락이 나타난다.

이 손가락은 밤과 낮 사이에 있는 새벽이며 저녁노을이다. 여름과 겨울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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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있는 봄이며 가을이다. 그리고 ‘바위’와 ‘보’는 동전 던지기의 이항대립에서 ‘삼자견제’의 코드로 바뀐다. 가위바위보의 손은 형태가 있는 것을 넘어 ‘태극(太極)’ 또는 ‘삼태극(三太極)’이 된다.

‘바위’와 ‘보’는 음과 양이 되어 자신의 손이 우주처럼 커지는 것을 느낀다. 봄이 되면 음과 양이 나뉘고 양기가 점점 강해져 여름이 된다. 그리고 가을이 되면 양은 음으로 나뉘고 음기가 증가해 겨울이 된다. 이것이 한자 문화권에서 지금까지도 사용하고 있는 춘분과 추분, 하지와 동지이다.

가위는 바로 음과 양이 나뉘는 춘분과 추분의 ‘분’이며, ‘서(署)’와 ‘한(寒)’이 오버랩되는 그레이존이다. ‘가위’는 대립하는 양자를 조화, 융합, 변화시키는 매개의 역할을 한다. 그래서 인공적인 ‘문(文)’과 자연적인 질(質)‘은 양극으로 치닫지 않는다.

그러나 유교의 중용과는 달리 세상사는 끊임없이 흔들리며 변화한다. 동양의 문화코드로서 수천 년을 유지해 온 ‘역(易)’이라는 기반이 있기 때문이다.

역의 원리는 지금까지 이야기해온 가위바위보 코드와 여러 면에서 부합한다. 정확히 말하면 역의 사상은 언어를 초월한 하나의 우주론이므로 보통의 언어형식으로는 표현할 수 없다. 그래서 역의 언어는 지금까지 태극 도형의 그래픽이나 팔괘와 같은 기호로 표상화되어 왔다. 그것을 가장 단순화시켜 삼자견제의 퍼포먼스 형태로 만든 것이 가위바위보라는 것이다.

■ ‘삼자견제’와 일본의 마인드 모델

가위바위보는 일상적인 의사결정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의미를 갖고 있을 까? 가위바위보의 이면에 있는 ‘삼자견제’ 사상은 일본 사회에 있어 힘의 구조를 나타내는 하나의 모델이다. 일본은 유난히 세 쌍을 좋아한다.

- 일본의 3대 경승지를 뜻하는 일본삼경(日本三景)

- 석가를 중심으로 좌우에 불상을 배치하는 석가삼존(釋迦三尊)

- 지방의 세 계급을 뜻하는 무리카타산야쿠(村方三役)

- 무악이나 가면극을 서(序) 파(破) 급(急)의 세 부분으로 나누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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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과 달과 꽃(雪月花)

- 화투에서의 저록접(싸리, 멧돼지, 홍엽을 뜻함)

- 일본의 대표적이 관리자 타임 : 노부나가, 히데요시, 이에야스 형 관리자

- 3개 정당의 연합을 뜻하는 ‘자사사’, ‘자자공’ 등

- 공적의 단계를 수훈, 감투, 기능으로 분류

- 임원의 단계를 전무, 상무, 평(平) 등으로 분류

확실히 가위바위보의 ‘삼자견제’ 코드는 일본의 역사와 문화 속에서 폭넓게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위의 예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그것은 단지 3종 세트처럼 3개를 늘어놓는 것과는 다른 점이 중요하다. 서양에서도 ‘3’이라는 숫자는 특별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기독교에서의 창조주, 그리스도, 성령인 신은 유일신의 세 가지 성격이며 이 삼자에는 우열이 없다는 뜻에서 ‘삼위일체’라고 한다. 이 삼위일체에서 나왔다고 일컬어지는 음악의 ‘세 박자’는 13세기에 ‘완벽한 박자’로 불렸다.

확실히 ‘삼자견제’의 모델은 일본 사회의 구조를 밝히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삼자견제의 사상과 그 구조가 도교에서 왔다고 일컬어지듯 일본 고유의 독특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아시아와 유럽 문명을 탐색하는 유효한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삼자견제’의 사고방식은 전 세계에 퍼져 있다. 따라서 가위바위보는 가장 보편한 게임으로서 세계아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자연의 생태계가 ‘삼자견제’의 균형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은 ‘먹이사슬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약한 것도 강한 것도, 작은 것도 큰 것도 모두 자신의 강함과 약함을 지니고 강대한 우주의 길(규칙)속에서 살아간다.

동아시아의 자연관은 서양의 근대 약육강식 사상과는 다르다. 자연에는 절대적으로 강한 지배자가 없다. 자연은 긍정적 의미의 삼자견제처럼 상부상조하는 공생관계로 맺어져 상보와 조화를 유지하고 있다.

■ 지진에서 외교까지

삼자견제의 권은 에도 시대 유곽을 비롯해 일상에서 일탈하는 오락문화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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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법이며 그 주류였다. 삼자견제 코드는 일본뿐만 아니라 동아시아가 공유하고 있는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이며 사물을 분별하는 비판력이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나아가 삼자견제 코드는 사회의 경쟁원리 이기도 했다.

에도 시대의 서민들은 지진, 역병 등 사회적 재해에서 외교문제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모든 현상을 삼자견제 코드로 풀어내고, 나아가 요나오시권을 통해 그 불안과 위협에서 도망치려했다.

1862년 홍역이 일본 전역에 퍼졌을 때 우키요에 화가들은 ‘홍역, 의사, 환자’가 호권을 하는 장면을 그림으로 남겼다. 홍역은 환자에게는 이기지만 의사에게는 진다. 그러나 의사는 돈을 내는 환자에게는 진다. 이러한 ‘삼자견제’ 외에도 홍역의 유행으로 의사가 큰돈을 버는 것에 비해 기녀와 목욕탕은 곤란한 지경에 빠졌던 당시의 사회현상도 풍자했다.

■ 정(政), 관(官), 업(業)의 아이언 트라이앵글

가장 잘 알려진 일본 사회의 삼자견제 구조는 ‘아이언 트라이앵글(철의 삼각형)’이라고 불리는 정계, 관계, 업계의 관계이다.

에도시대부터 유행하여 지금도 도하치권이라는 이름으로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는 호권(狐拳)이 그 원형이다. 쇼야는 총(사냥꾼)을 이기고, 총은 여우를 이기고, 여우는 쇼야를 이긴다. 이러한 삼자견제의 관계와 똑같은 구조가 일본의 권력구조로 정착된 것이다.

쇼야는 영주로부터 마을의 납세와 그 밖의 사무를 위임받은 마을의 장이다. 당연히 마을 사람들을 다스리는 지배자이다. 사냥꾼이나 소작인은 겨울이 되면 총을 들고 여우나 너구리를 잡는다. 하지만 쇼야를 쏠 수는 없다. 총에 맞은 여우는 사냥꾼에게는 약하지만 사냥꾼을 지배하는 쇼야는 감쪽같이 속일 수 있다.

정치가는 쇼야와 같은 권력자이다. 관료의 인사권을 쥐고 있다. 따라서 관료는 정치가에게는 약하지만 기업가에게는 인가권, 허가권을 행사하므로 강하다. 또 기업가는 정치가에게 자금을 주고 돈의 힘으로 선거를 좌우한다. 돈은 여우처럼 정치가를 홀리는 힘이 있다.

즉 정치의 이면에는 업계가 있고 관료의 이면에는 정계가 있다. 어느 한쪽도 절대적으로 강하지 않으므로 서로 상부상조하는 삼자견제의 구조를 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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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다. 따라서 가위바위보 코드를 분석하지 않고는 일본의 정치를 이해할 수 없다. 그냥 단순한 가십기사가 아니라 정계, 관계, 업계의 ‘관계’를 <중의원의 탄생>이라는 논문으로 정리한 것이 컬럼비아 대학교의 제럴드 L. 커티스라는 정치학자였다. ‘아이언 트라이앵글’이라는 키워드도 그의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첫 번째는 절대적 권위의 부정이다. 삼자견제에서는 삼자 중 제일 강한 자가 없다. 강자에게도 약점이 있고 약자에게도 강점이 있다. 즉 강약이 서로 보완하는 ‘추렴’의 사상이며 ‘협력’의 원리이다. 두 번째가 ‘납득’의 원리이다. 승부라고 하면 보통 양자가 대립하지만 가위바위보의 삼자선택은 자주적 판단이므로 져도 상대를 원망하지 않고 ‘어쩔 수 없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게다가 가위바위보에는 ‘비기는 경우’가 있으므로 승부를 결정짓는 과정에서 심리적 침적 작용이 일어난다. 가위바위보의 ‘협력과 납득’의 구도를 일본의 구조 개혁으로 치환시키자는 것이다.

■ 본보기는 니노미야 긴지로(二宮金次郞)

전쟁 전, 초등학교 학생들이 ‘우리가 배울 것은 니노미야 긴지로’라며 목청 높여 부르던 창가가 있었다. 노래뿐만이 아니다. 초등학교 교정에는 손에는 책을 들고 등에는 나뭇짐을 짊어진 니노미야 긴지로의 동상이 서 있었다. 지금의 감각으로 말하자면, 그저 길을 걸어가면서 휴대전화로 문자를 보내는 것처럼 보이는 평범한 모습이지만 니노미야 진지로는 지금까지도 일본, 아니 아시아의 본보기로 남아 있다. 600여 곳에 이르는 황폐한 마을을 부흥시키고 빈곤과 역병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한 긴지로의 힘은 과연 어디서 나온 것일까. 그것을 추적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삼자견제 원리의 가위바위보 코드와 만나게 된다.

소설 <니노미야 긴지로>에는 길가에서 짚신에게 절을 하는 노파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 짚신의 재료는 볏짚이었단다. 벼일 때는 쌀이 되어 우리 인간들을 먹여 살려줬어. 그 뒤 쌀알이 털린 볏짚은 이번에는 짚신이 되어 우리의 발을 지켜줬지. 하지만 이렇게 너덜너덜해지니 더 이상 발을 지켜주는 역할도 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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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게 되었단다. 그래도 말이다. 이 짚신은 아직도 쓸데가 있단다. 짚신을 흙으로 돌려주면 이번에는 다시 벼를 기르는 거름이 되어 우리를 먹여 살려 준단다. 참 고마운 일이지. 오늘은 짚신을 흙으로 돌려주기 전에 오랫동안 신세진 고마움을 표하는 거란다.’

본래 새끼나 짚신은 벼농사에서 생겨난 것이다. 쌀을 만들려면 여든여덟 번의 손이 간다고 할 만큼 정성과 근면이 필요했다. 그래서 쌀미(米) 자에는 ‘팔십팔 (八十八)’이라는 글자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니노미야 긴지로가 곡물을 개량하는 되의 치수를 통일하려고 했을 때, 그 깊이를 88치로 정하여 막부에 올린 것도 바로 쌀이라는 글자에서 가져온 것이다. 되를 마음대로 만들어 농민의 조세를 늘리지 않도록 마음을 쓴 것도 ‘보’가 ‘바위’를 이기는 가위바위보의 원리인 ‘덕’이 있었기 때문이다.

■ ‘일원융합(一圓融合)’과 ‘원견(圓見)

가위바위보 코드 중 하나는 상호성의 관계론에 있다. 주먹의 실체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상대가 내미는 손과의 관계에 의해 비로소 그 의미가 생겨난다. 그것을 긴지로는 이렇게 말했다.

‘해가 있는 것은 달이 있기 때문이고, 달이 있는 것은 그 상대인 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해와 달은 서로의 존재에 의해 자신의 존재가 정해지는 것이다. 일원일원(一元一圓)이며, 둘은 하나이고 하나는 둘이다. 이와 같은 이치를 깨달으면 적도 아군도 없다. 높은 것은 낮은 것이 존재하기에 있는 것이며, 낮다는 것은 높은 것에 비해 낮은 것이다. 긴 것은 긴 것이 필요할 때만 쓸모가 있고, 짧은 것은 짧은 것이 필요할 때만 도움이 된다.(중략)’

‘멀다 가깝다 말하는 것 역시 자신이 있는 곳을 기준으로 하는 말이다. 또 10리를 멀다고 하는 것은 1리에 비해 먼 것이며, 10리를 가깝다고 하는 것은 100리에 비해 가깝다는 것이다. 바라보면 멀고 가까움이 없으며 모든 것은 자신이 존재하는 곳에 있다. 이같이 상이한 두 현상이 더해져 하나의 새로운 현상을 낳는다. 물과 불이 일원융합하여 음식을 끓이고 강철을 단단히 만들며, 음양이 합해져 만물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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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고저(高低), 장단(長短), 원근(遠近) 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두 자신이 있는 한 지점에서 사물을 보는 편견이다. 손토쿠(긴지로)는 이런 자기중심적 이항대립을 초월한 시점을 ‘편견’에 대한 ‘원견’이라 불렀다. ‘삼자 견제’의 관계를 도형으로 그려보면 선이 아닌 둥근 원형이 된다. 긴지로 식으로 말하자면 그것이 ‘원견’이며 ‘일원융합’이라는 것이다.

즉 차이는 갈등하고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융합을 통해 ‘생생발전(生生發展)’하는 것이 된다. 만물은 개체가 아닌 상호관계에 이해 의미를 갖는다. 그것이 땅과 농작물, 그리고 사람의 내면에 있는 덕이다.

손토쿠는 ‘돈’에도 ‘덕’이 있다고 생각했다. 흙과 마찬가지로 돈 안에 있는 그 덕을 캐냄으로써 풍요로워진다. 무사는 돈의 소중함을 모르기 때문에 돈을 무시하고 돈을 빌리거나 발려주는 것을 수치라고 생각한다.

‘추양(推讓, 남을 추천하고 자기 자신은 사양함)’의 정신을 갖고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 빌려주는 것은 ‘돈’의 ‘덕’을 발굴해 내는 것이다. 그 돈이 사람에게 돌아와서 다시 그 사람의 덕을 끌어낸다. 그리고 다시 ‘돈’의 ‘덕’이……이와 같이 끝없이 ‘덕’의 반복이 계속되면서 돈은 돌고 돌아 발전으로 이어진다.

돈을 빌리고 빌려주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약속을 지키는 ‘신’이다. 그것만 있으면 누구에게나 돈을 빌려준다. 하지만 빌려준 사람에게 몸과 마음의 여유가 없으면 다른 사람을 추양할 수 없다. ‘인’이 있어야 한다. 또한 빌린 사람은 약속한 날을 지켜 돈을 갚는 ‘의’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돈을 빌려준 사람은 거만하게 굴지 않는다. 빌린 사람은 감사하는 마음으로 명가금(冥加金)을 낸다.

* 명가금 : 부처님의 명가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치는 돈

명가 : 신령이나 부처가 중생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그를 도움 또는 그렇게 입은 도움

■ ‘근로(勤勞)’, ‘분도(分度)’, ‘추양(推讓)’

‘근로’는 돈을 벌어서 풍족해지고자 하는 욕망으로 ‘천도(天道)’와 대조를 이루는 인도(人道)이다. ‘분도(分度)’는 무한히 질주하는 욕망의 한도로 자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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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를 알고 조절하는 천도와 인도의 융합이다. 그리고 ‘추양(推讓)’은 축적

한 부의 여분은 세상을 위해 써야 하는 것으로 타인과 함께 나누어 ‘근로의 생산을 돕는 이타행위이다.

이러한 근로, 분도, 추양은 가위바위보의 삼자견제와 같은 형태가 되어 서로 상보적인 관계를 이루며 균형을 유지하며 순환한다. 근로가 소유의 주먹이라면 추양은 쥐고 있던 것을 놓는 손바닥이다. 이 둘은 정반대의 것이지만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이항대립의 택일적 강박관념은 아니다 .일부는 소유하고 일부는 내놓는, 반은 열리고 반은 닫힌 분도라는 그레이존(gray zone)이 그 사이에 있기 때문이다. 부에 대한 욕망은 분도의 프로세스를 통해 축적에서 분배로 바뀌어 간다.

* Gray zone : 어느 세력권에 있는지 불분명한 지역. 애매한 범위, 회색지 대, 이도 저도 아닌

■야구의 퍼시픽리그와 사자견제

삼자견제의 문화 사회 코드는 일본인에게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프로야그 리그전에도 삼자견제의 가위바위보의 코드가 살아 있다. 만약 강력한 힘을 가진 절대 강자 팀만 있다면 리그전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관람하는 재미도 없다. 또 그 승부가 금,은,동과 같이 정해진 순위표대로 진행된다면 흥미를 끌 수 없다. 우리가 야구에 빠지는 것은 역시 삼자견제의 관계와 결과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95년도 일본 프로야구 퍼시픽리그전 일정 팀별 승패 수에 따른 데이터를 보면 오릭스, 다이에, 롯데, 세이부가 어느 한 팀에는 강하지만 비슷한 다른 팀에게는 약한, 서로 물고 물리는 사자견제의 관계였음이 나타난다.

야구에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다. 축구나 스모경기도 마찬가지다. 리그전에서 누가 이길 것인가, 그 승자를 가리는 과정은 동전 던지기처럼 양자택일로 정해지는 토너먼트형과는 다르다.

■ 닐스 보어의 태극문장(太極紋章)

근래 문화 인류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명암쌍쌍의 이치적 사고는 ‘역사상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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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오래된 호모 사피엔스의 남녀 양성의 상위(相違, 서로 틀리거나 어긋남), 오른손과 왼손의 비대칭, 외혼 쌍분제(外婚 雙分制), 적과 흑의 색체 등 자연의 이항대립에 이미 결부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라스코(Lascaux 프랑스, 선사시대 인류 생활 모습을 그린 벽화, 기원전 1만 5000년 ~ 1만 4500년 전)나 엘 카스티요(El Castillo, 멕시코, 마야 달력을 읽는 열쇠) 벽화에는 여성의 기호는 빨간 색으로 칠해져 있고, 남성의 기호는 검정색으로 칠해져 있다고 한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화장실의 빨간색(여)과 검정색(남)의 색 구분법의 기원을 찾아 올라가면 수만 년 전의 구석기 시대가 나타난다는 이야기이다.

아니, 네안데르탈인의 유적에서 검은색과 빨간색의 상징색을 만드는 황토가 발견되었다고 하니, 네 발로 다니던 동물이 직립한 순간부터 이항대립의 기호를 사용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바이너리코드는 이것을 대립하는 별개의 것으로 보느냐 또는 상보하고 교향(交響)하는 것으로 보느냐에 따라 문화, 문명 코드가 달라진다. 전자가 동전 던지기 코드라면 후자는 가위바위보 코드라 할 수 있다.

동아시아의 사고체계를 구축해 온 ‘역경’에는 명확하게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라고 적혀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음과 양이란 ‘대립하면서도 그것을 넘어 상보성을 행하는 비대칭적인 변화’를 나타내는 코드이다.

닐스 보어의 양자론은 말할 것도 없이 서양의 이항대립 시스템에서 음과 양의 상보성으로 눈을 돌린 획기적인 연구의 시작이었다.

아인슈타인도 양자론은 납득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앞에서도 언급했으나, 보어는 양자론의 해석을 거의 완성한 1937년 중국을 방문한다. 그때 그는 자신이 주장해온 대립자(對立者)의 상보성 개념과 2,500년 전 중국의 음양사상이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람과 동시에 깊은 감명을 받게 된다.

음과 양은 원형적인 양극성을 지닌 것으로 대립자의 상보성을 표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 현상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생활현상의 본질이라는 것은 그것들의 역동적인 상호작업에 불과하다’는 역의 세계 모델은 그야말로 그가 연구하고 있던 양자론의 해석을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보어는 과학적 업적을 인정받고 귀족의 작위를 받게 되는데, 그때 예복의 문장 무늬로 그가 선택한 것은 다름 아닌 음양론을 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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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한 태극도였다. 그리고 예복에 달았던 리본에는 라틴어로 ‘대립적인 것은 상보적이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가위바위보의 손바닥은 우리나라에서는 ‘보(보자기)’이지만, 일본에서는 ‘파(종이)’이며, 중국에서는 ‘뿌(옷감, 천)’라고 부른다. 또 주먹은 우리나라에서는 ‘바위’, 일본에서는 ‘구(돌)’, 상하이에서는 더욱 공격적인 ‘추안토우(망치)’이다.

하지만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가위바위보의 ‘주먹과 손바닥’은 대립하는 기호로 작용하고 있으나, 그 대립은 양극화하는 것이 아니다. ‘양단불락’의 ‘가위’의 개입으로 원형적인 순환성을 갖게 된다.

이항대립의 문화 코드가 지배적이었던 서양의 문명사회에서 가장 당혹스럽고 이해하기 힘들었던 것이 기독교의 ‘삼위일체설’이었다. 유럽에서는 삼위일체의 교리를 둘러싼 논의와 항쟁으로 인해 교회가 분열되고, 신자들은 서로 상대를 이단자라고 배척하면서 엄청난 박해와 살상을 저질렀다.

■ 가위바위보의 경영학

유럽과 아시아 두 문명의 대략적인 차이를 한 마디로 한다면 ‘이것이냐 저것이냐(either-or)’와 ‘이것과 저것 둘 다(both-and)’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A와 B의 이항관계가 OR에서 AND로 바뀌게 되면 다른 문명 시스템이 출현한다.

짐 C. 콜린스(Jim C. Collins)와 제리 포라스(Jerry Porras), 이 두 경영학 교수가 100년 이상 번영을 이어온 미국 기업을 조사 분석한 결과 얻어낸 것은 놀랍게도 우리나라 국기에 그려진 태극 도형이었다. 그들은 저서의 각 장에 태극 도형을 상징적 로고로 사용하고 있다.

중국의 음양 사상에서 가져온 음과 양의 문양, 비저너리 컴퍼니(visionary company, 시대를 초월하여 뛰어난 존재로 존재할 수 있는 기업)는 ‘OR 의 억압’에 굴하지 않는다. ‘OR의 억압’이란 역설적인 사고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고, 일견 모순되는 힘이나 사고방식은 동시에 추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성적인 견해이다. ‘OR의 억압’에 굴복하면 모든 일이 A와 B 둘 중 하나여야만 하고, A와 B 둘 다 택하는 것은 안 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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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그 예로 변화냐 안정이냐, 신중이냐 대담이냐, 저비용이냐 고품질이냐 - 가치관을 중요시하는 이상주의냐 이익을 추구하는 현실주의냐 등의 8개의 대립항을 제시하고 그 중 어느 한쪽만을 선택하는 것이 either-or의 컴퍼니라고 말했다.

이에 비해 비저너리 컴퍼니는 이와 같은 ‘OR의 억압’에 굴하지 않고 ‘AND의 재능’에 의해 모든 일을 자유롭게 생각한다. ‘AND의 재능’이란 다양한 측면의 양극에 있는 것을 동시에 추구하는 능력이다. ‘A와 B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A와 B 모두를 손에 넣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라고 정의한다.

어쨌든 주목해야 할 것은 음양의 사상을 이른바 가위바위보 코드의 본고장인 아시아인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A와 B 양쪽을 모두 손에 넣는 태극의 의미는 둘을 합쳐 중간을 취하는 절충이 아니라, 모순되는 양쪽을 그대로 살려 동시에 나아가는 것을 뜻한다. 즉 A에서 B로 전환하는 C의 ‘가위’를 살리는 것이다.

태극도의 음양은 쉽게 말해 해병대와 같은 것이다. 해병대는 해군과 육군 을 반반씩 모은 집단이 아니다. 바다에서는 해군의 역할을 하고 육지로 올라오면 육군이 되어 싸우는 두 가지의 다른 특성을 지난 하나의 군대조직이다.

■ 네덜란드 모델과 제3의 길

네덜란드 모델이란 ‘바위’와 ‘보’만 있는 양극이 아니라 ‘가위’라는 그레이존을 살린 가위바위보 코드와 같은 것이다.

- 특정 장소에 마리화나나 매춘 등을 인정하고 특별관리

- 안락사도 플렉시블(융통성 있는)하게 적용하는 법안을 만들어 적용

- 구조조정도 해고냐 고용이냐 양자택일이 아니라 워크셰어링이라는 파트타임 제도를 도입해 대량실직 예방

- 여성도 가정이냐 직장이냐 둘 중 하나를 택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기르면서 동시에 직장에 다닐 수 있는 제도를 모색, 그 결과 기혼여성의 취업률이 40% 증가

- 정부, 기업, 시민NGO등이 상보적으로 해결해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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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사회주의에도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자택일주의에서 ‘제3의 길’에 대한 주장이 나타났다.

‘제3의 길’이 옳은가. 과연 성공했는가를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이 20세기의 역사를 ‘극단의 시대’라고 이름 붙였듯, 주목해야 할 것은 균형과 조화의 감각을 잃어버리고 양극회된 현대 문명에 대한 대안 문명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05 삼국권(三國拳)의 새로운 아시아 문명

■ 동북인가 북동인가

2000년 서울에서 한중일 세 나라의 지식인 밀레니엄 토론화가 열렸을 때의 이야기다. 강단 현수막에는 ‘동북아세아 문화의 지역성과 세계성 東北亞細亞 文化의 地域性과 世界性’ 이라는 제목이 한글과 한자 혼용으로 쓰여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Localism And Northeast Asian Cultures'라는 영문이 병기되어 있었다.

같은 지역을 가리키는 말인데도 한자는 ‘동북’이고 영어는 거꾸로 ‘북동’으로 되어 있다. 짧은 제목 속에도 한자 문화권과 알파벳 문화권은 이 정도로 차이가 있는 것이다.

- 우리나라에서는 미국의 ‘노스웨스트 항공’을 ‘북서항공’이라 하지 않고 ‘서북항공’이라 부른다.

- 중국에서 발명된 자석은 남북을 동시에 가리키고 있지만 지남철(指南鐵)이나 지남차(指南車)라고 불렀다.

‘방향(方向)’과 영어의 ‘디렉션(direction)’은 말의 뿌리 자체가 다르다.

- 한자의 ‘방’은 사각을 나타내는 문자로 동서남북 전방위를 포함 하지만 영어의 디렉션은 그 어원대로 화살표라는 직선 의미밖에 없다.

- 우리가 말하는 동남아시아는 동북아시아인 우리나라나 일본에서 보면 서남아시아가 되어야 하지만 유럽을 기점으로 한 동남아시아를 불편 없이 그대로 사용한다.

■ 아시아라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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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언급한 현수막으로 다시 한 번 눈을 돌려보자. ‘아세아’라는 말이 눈에 들어온다. 한자이므로 한중일 참가자들은 누구나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기원전 500년에 헤카타이오스(Hekataios)가 만들었다는 최초의 세계지도를 복원한 그림을 보면 유럽과 아시아가 대칭적으로 그려져 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유럽은 북쪽에, 아시아는 남쪽에 배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지도만이 아니다. 페카 호르호넨(Pekka Korhonen)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아시아와 유럽이라는 말은 모두 4,500년 전 메소포타미아의 아카드어(Akkad語)에서 비록된 것이라고 한다.

즉 아시아는 ‘해가 뜨다’라는 의미의 ‘아수(asu)’에서 나온 것이고 유럽은 ‘해가 지다’라는 의미의 ‘에레브(erebu)에서 유래한 말이라는 것이다.

중앙아시아라는 말이 있는데도 북아시아나 서아시아라는 말은 거의 사용하지 않는 것을 봐서도 아시아는 유럽인이 생각한 이항대립적 산물이었던 것이다.

원래 아시아에는 아시아라는 말 자체가 없었다. 한자의 ‘아세아(亞細亞)’는 설명할 필요도 없이 16세기 후반 마테오리치(Matteo Ricci)가 중국으로 건너간 후 한자로 음역한 지명이다. 아류라고 할 때의 ‘아(亞)’자나, 가늘고 자잘한 것을 뜻하는 ‘세(細)’나 대명제국 중국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중국인이 아세아라고 말할 때는 동이(東夷)나 북적(北狄)이 살고 있는 중화의 주변 지역을 생각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유럽인은 무지하다고 말했을 때 그리스가 유럽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과 똑같은 것이었다.

일본도 마찬가지이다.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외치던 때나 대동아공영권을 외치던 때나 일본에게 있어서 아세아는 들락날락하는 바다의 저편에 있는 것이었다.

지금도 아시아 공동체를 논의하는 심포지엄 회장에는 ‘글로벌한 세계 속의 일본과 아시아’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다. ‘Japan in Asia’나 ‘Japan of Asia’가 아니라 ‘Japan and Asia’이다. 일본은 세계속에 있지만 아시아 ‘속’에는 없다.

일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한국이나 중국인 가운데도 자신을 아시아인이라고 의식하고 있는 젊은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지도 안에서는 아시아 지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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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있지만 의식의 공간에서는 아시아의 바깥에 있다. 그러나 아세아라는 말이 없었던 때부터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는 세계 어느 지역보다 뚜렷한 문화적 동질성을 공유하며 2,000년 가까이 살아온 것이다.

■ 문화는 단수인가 복수인가

다시 한 번 현수막의 영어에 주목해주길 바란다. 놀랍게도 ‘Asin culture’가 복수형인 ‘cultures’로 되어있지 않은가. 물론 실수가 아니다. 문명 충돌이 일어나고 갑자기 문화의 다원주의나 다문화 문제 등이 시끄러워진 후부터 문화라는 말도 복수형으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 지금 지구상에는 약 3,000여 가지의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역 200여 국가에 흩어져 살고 있음

- 한국과 일본처럼 단일민족이라는 동질성을 가진 국가는 15, 16개국

- 구소련은 1991년 해체 후 12개 국가로, 같은 문화적 기반을 가진 유럽의 25개국은 EU라는 하나의 초국가로 통합

부국강병을 지향했던 세기에는 정치와 경제 이데올로기가 분쟁을 일으키는 씨앗이지만, 냉전 후의 세기에는 문화와 문명이 분쟁의 방아쇠 역할을 한다고 한다.

특히 문화, 문명의 충돌은 1,2차 세계대전과는 그 형태가 달라서 내란, 태러, 게릴라전 등과 같은 산발적 국지전이며 선전포고도 전선도 없는 끝없는 전쟁이다. 현재 이런 싸움이 전 세계 3분의 1에 달하는 지역에서 일어나고 있다.

- 지금 전 세계에서는 매일 22억 달러가 죽음을 양산하는 데 소비

- 고작 9일분의 군사지출 비용만 있으면 식량, 의료, 교육 시설이 부족한 전 세계 아이들에게 그것을 충분히 나누어 줄 수 있음

- ‘WWW’라고 하면 ‘월드 와이드웹(world wide web)’이 아니라 ‘월드와이드워(world wide war)’를 가리키는 상황이 되어버렸음

- 냉전시대에는 NATO의 일원으로 서쪽에서 활동하던 터키지만 EU에 들지 못한 이유는 역시 다른 문화권에 속해 있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지배적

- 9·11 테러에 대한 언쟁도 단수의 문화코드로 보면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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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보편적 인류 문화에 대한 도전이지만, 복수의 문화코드로 보면 서구의 기독교 문명 대 이슬람 문명의 충돌이다.

- 지금 중동지방에서 일어나고 있는 ‘대테러전쟁’에 대해서도 ‘야만’과 ‘문명’의 싸움이냐, 중세의 종교전쟁과 같은 성전(聖戰)이냐의 두 가지 의견 중 한 쪽으로 치우치게 된다.

동북아시아인의 문화의식은 상대적이냐 보편적이냐를 일도양단하여 택일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문화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말과 문자를 보면 알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은 한자를 사용하면서 동시에 각각 한글과 가나라는 고유문자를 사용하고 있다. 체계가 전혀 다른 이질적인 문자를 혼용해서 쓰는 전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양도(兩刀)구조의 문화이다. 미국은 세계 여러 인종이 모여 인종의 도가니라고 불리지만 그 문화는 획일적이다. 반대로 한국과 일본은 인종은 거의 단일민족에 가깝지만 문화는 세계의 다양한 문화가 모여 있는 샐러드 볼(salad bowl 샐러드를 담거나 섞을 때 쓰는 그릇)이다.

■ 무지개 색은 무슨 색인가

무지개 색은 시대와 나라에 따라 다르다.

- 아리스토텔레스 : 네 가지 색

-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 다섯 가지 색

-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 : 여섯 가지 색

- 나라에 따라서도 두 가지색, 세 가지 색부터 시작해 현대 유럽의 여섯 가지 색, 일곱 가지 색까지 그야말로 가지각색이다.

이러한 차이는 어느 쪽이 옳다고 말할 수 없다.

뉴턴은 프리즘 실험을 통해 스펙트럼의 색을 빨, 주, 노, 초, 파, 남, 보의 일곱 가지로 분류했다. 하지만 정말로 일곱 가지 색일까. 또 과학적 사실이라고 할 수 있을까.

뉴턴은 신앙심 깊은 기독교인이었다. 그의 눈은 프리즘뿐 아니라 성서의 내용에 의해 굴절됐다고도 말할 수 있다. 7일 동안 천지 창조가 완성되고 교회에는 7개의 가지가 달린 촛대가 장식되어 있다. 그리고 7명의 천사가 나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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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불며 심판의 날을 고한다. 이처럼 신성성을 나타내는 7이라는 숫자와 관계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7일을 1주일로 부르거나 자연의 음을 7음계로 나누는 등 기독교 문화권의 의식이 투영된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에서는 오행사상의 영향으로 많은 것을 5분절로 나눴던 것과 똑같은 이치다. 서구 음악이 7음계이고 아시아 음악이 5음계인 것도 자연의 연속체를 인위적으로 나누는 분절의 차이에서 나온 것이다.

색깔의 문제를 좀 더 파고 들어가 보면 보통 동아시아인은 청색과 녹색을 구별하지 않는다. ‘끼리끼리 모인다’는 것을 우리나라 속담에는 ‘초록은 동색이다’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글로벌 스탠다드인 교통신호에서도 구미의 그린라이트(green light)를 한자 문화권에서는 ‘청신호’라고 부른다.

그러나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말에도 나타나 있듯 동아시아인이 확실하게 구별하고 있는 청색과 남색을 구미인은 그다지 구별하지 않는다. 남색을 영어로 인디고 블루(indigo blue)라고 부르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게다가 이것마저도 17세기 이후의 이야기이다.

아니 똑같은 색을 표현하는 말도 그 이미지와 상징은 나라에 따라 다르다. 동아시아에서 청색이라고 하면 청춘을 떠오르게 하는 젊음의 청색이자 청운의 꿈을 상징하는 희망의 색이지만, 구미에서는 블루스(blues)나 블루 먼데이(blue Monday)처럼 무기력하고 우울한 느낌의 색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지개는 몇 가지 색이라고 해야 할까. 지금까지 이야기 한 것처럼 답은 하나가 아니다.

■ 피시스(physis), 세미오시스(semiosis), 노모스(nomos)

원래 자연의 방향은 네모난 것이 아니다. 나침반은 둥근 모양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의 세계와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 문명의 세계는 다른 것이다.

그리스인의 방향감각에서 볼 때 북쪽은 신화의 큰곰자리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지만, 실제로 선원이 항해를 할 때는 작은곰자리를 향해서 갔다고 한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더블 스탠다드를 갖고 살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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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피시스

- 작은곰자리를 북쪽으로 보는 자연계

- 자연계의 무지개는 컴퓨터 화면에 비친 수천수만의 무한한 색으로 분류

0 세미오시스

- 큰곰자리가 북쪽을 상징하는 신화와 같은 기호계

- 세미오시스의 무지개는 나라와 민족에 따라 다른 색으로 분류

0 노모스

- 법률이나 제도에 둘러싸인 법칙의 세계

- 뉴턴의 무지개 같은 교과서에 있는 무지개 색

뉴턴이 ‘광학(Opticks)’을 발표하기 전에는 서양에서도 보통 무지개는 남색을 뺀 여섯 가지 색이었다.

앞에서 이야기 했듯 교통신호의 그린 라이트는 글로벌 스탠다드가 되어 있지만 한자문화권에서는 초록색이 아니라 청신호라고 한다.

글로벌화에 의해 노모스는 바뀌지만 세미오시스 쪽은 좀처럼 변동되지 않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문명은 글로벌화 되지만 문화는 로컬(국내의, 지역의)화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지개의 색을 하나의 기준으로 나눌 수 없는 것처럼 글로벌과 로컬의 문제도 그 세 가지 영역에 따라 다른 관점에서 논해야 한다.

마르크스를 고민에 빠뜨린 것처럼 피뢰침이 세워진 시대에도 여전히 뇌신(雷神) 제우스가 현대인의 생활 속에 엄연히 살고 있는 것이다.

■ 중국 대륙의 ‘보’

그 세 가지의 법칙은 명확하게 구분된다. 피시스(자연법칙)를 어겼을 경우에는 누구도 생존할 수 없지만, 노모스(규정, 체제)를 위반한 경우에는 법에 의해 심판을 받고 처벌을 받는다. 또 세미시오스(기호, 언설)를 거스르면 타인과 소통이 불가능해져 고립되고 만다.

중국은 대륙, 일본은 섬, 한국은 반도이다 피시스는 인간의 힘으로는 바꿀 수 없는 자연의 질서와 법칙을 따르고 있다. 옆에 아무리 사이가 나쁜 나라가 있어도 이사를 갈 수는 없다.

이처럼 대륙-반도-섬이라는 서로 다른 자연적 특성을 가진 삼국이 수천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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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함께 살아온 지역은 아마도 지구상 또는 인류 역사상 동북아시아가 유일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중국 대륙의 지리적 조건은 가위바위보의 ‘보’에 가깝다. 손을 최대한 펼친 상태가 대륙의 ‘보’이다. ‘보’의 손바닥은 넓음과 동시에 관용의 덕을 만들어 낸다. 중국의 진나라는 흉노의 공격을 받았고, 송나라 시대에는 몽골(원)로부터, 대명제국은 만주족에게 멸망해 청나라가 되었다. 그리고 청나라가 망하기까지 750년간 한족이 중국을 지배한 것은 300년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침입자에게 무너지고 그들의 지배를 받는다고 해도 중국은 그 무력의 주먹을 ‘보’로 감싸버린다. 원나라도 청나라도 그렇게 감싸져 흔적도 없이 분해되어 버렸다. ‘마른 잎은 굴러도 대지는 살아 있다’는 말대로 대륙의 풍토는 개체를 초월하는 생명력을 갖고 세계를 감싸 안는다. 중국인은 모든 것이 흡입되어 버리는 광활한 대지 위에 조화와 균형의 힘을 지닌 인자(仁者)와 군자(君子)를 이상으로 하는 상문주의(尙文主義), 그리고 자연에서 직접 혜택을 받는 농본주의를 바탕으로 오랜 역사의 길을 걸어온 것이다.

이와 같은 중국 대륙의 민족성을 긍정적으로 표현한 것이 용(龍)이다. 자연의 만물과 중국 황제의 힘을 상징하는 용은 여러 동물의 신체부분을 모아 융합시킨 상상의 생물이다. 뿔은 사슴, 머리는 낙타, 발은 호랑이, 발톱은 독수리와 닮아있다. 또 돼지의 코, 토끼의 눈을 가지고 있으며 몸통은 뱀과 잉어의 비늘 혹은 양자강의 악어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용의 힘은 개체가 아니라 다양한 생물들을 하나로 융합시킨 자연의 힘을 표상한다. 일부에서는 옛날 중국 대륙에 살고 있던 부족들을 하나로 결속시키기 위해 각자가 신앙으로 믿고 있던 동물을 통합해 하나의 형태로 만든 것이 용이라는 설을 믿기도 한다.

요컨대 용은 지금도 쉰 가지가 넘는 다민족이 공생하고 있는 중국 대륙의 상징으로 살아 있는 것이다. 그리스인들 역시 조화와 균형을 중시했다고 일컬어지지만 그들이 다양한 생물을 모아 만든 키메라는 용과 달리 흉측한 괴물 형상이다. 그러나 용은 이질적인 것을 합친 것인데도 부자연스럽지 않다. 오히려 통일성과 조화를 갖춘 아름다움과 위엄이 있다. 이러한 용의 모습을 만들어 낸 것은 포용의 힘을 의미하는 바위바위보 코드의 손바닥, 바로 ‘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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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주먹, 바위 문을 여는 힘

일본은 중국 대륙과는 대극에 위치해 잇는 해양 열도국이다. 해양 일본론자인 가와카쓰 헤이타 교수는 전 국토를 의미하는 일본어 쓰쓰우라우라(전국의 항구와 포구라는 뜻)라는 말에 일본의 지역적 특성이 잘 나타나 있다고 말한다. 일본에서 가장 많은 성씨 중의 하나가 쓰쓰우라우라와 같은 의미인 ‘와타나베’이다. 점점이 흩어져 있는 섬과 섬을 오가는 해변의 등대 불빛이 보이는 듯하다.

한국과 중국에서 정국의 의미할 때 쓰는 표현은 ‘방방곡곡(坊坊曲曲)’으로 구불구불한 골짜기의 이미지이다 사람의 성씨도 모두 육지와 관계가 있는 것들뿐이다.

가위바위보 코드로 말하자면 일본은 대륙의 손바닥과 대립되는 주먹이다. 여유보다는 긴장, 확대보다는 축소 지형이다.

물론 옛날 일이기는 하나 일본이 주먹의 바위였던 이유는 무엇보다 한국과 중국이 문민통제였던 것에 비해 유일하게 무사가 지배하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주먹은 힘이다. 힘을 신봉하는 일본을 가장 잘 뒷받침하는 상징이 그 유명한 바위 문에 숨은 태양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天照大神) 신화이다. 만 명의 신들은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바위문 뒤에서 나오게 하기 위해 한 자리에 모여 의논했지만 헛일이었다.

신들은 바위 문 앞에서 아침을 만들기 위해 거울을 비추거나(시각적 이미지), 나가나라도리(장명조)를 울게 하거나(청각적 이미지), 춤을 추는(육체적 이미지)등의 트릭으로 천조대신을 끌어내려고 하지만 모두 실패한다.

바위 문을 연 것은 아마노다지카라오노미코토라는 역사(力士)의 힘에 의해 빛이 돌아온 것이다. 바위 문을 연 역사(力士)는 사무라이가 된다.

사무라이의 부활은 군국시대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서양과 무역마찰을 일으켜 일본 때리기라는 말이 유행했을 때 다른 나라들이 품었던 일본의 이미지는 사무라이의 모습으로 쳐들어오는 일본 비즈니스맨의 모습이었다.

도요다가 중국에 뿌린 ‘PRADO’광고가 소비자로부터 거센 집단 항의를 받은 것도 우연은 아니다. 강한 인상을 주기위해 차 이름을 사납다 라는 뜻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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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도(覇道)’라 붙이고 그것을 광고 카피로 사용한 것이 ‘지뢰를 밟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무사집단이 힘으로 정권을 잡는 일본에서 패도는 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말이다.

벤츠가 중국 시장에 가면 ‘빈스(賓士)’가 되지만 도요타의 프라도는 ‘패도’ 가 되어 물심양면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그리고 심한 항의 끝에 결국은 사죄까지 하는 처지가 되었다.

■ 한국의 가위 - 반도(半島)의 밸런서(Balancer)

요컨대 동아시아의 대륙-반도-바다라는 자연적인 지리적 조건은 중국은 ‘보’, 일본은 ‘바위’, 그리고 한국은 ‘가위’라는 가위바위보 코드를 초래했다. 우연이라고 하나 가위바위보를 부르는 방법에 있어서도 일본과 중국은 바위가위보의 순서인 반면 우리나라는 가위가 가장 먼저 나온다. 지금처럼 핵을 보유하고 있는 중국이 ‘바위’가 되고 평화헌법에 의해 일본이 ‘보’로 바뀌는 일이 생기더라도 한국은 언제나 ‘가위’이다.

‘가위’가 정상적으로 움직이면 동아시아는 선형적인 이항대립의 시스템에서 벗어나 원형적인 순환과 생성의 시스템을 만들어 낸다. 대립하는 물과 불 사이에 가마솥이 있으면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다. 한국이 이와 같은 가마솥의 역할을 수행하던 시기에는 동아시아에 평화가 찾아오고 아름다운 문화의 꽃이 피었다.

그러나 원나라 군사들이 일본을 침략하려 했을 때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륙을 공격하려 했을 때는 반도의 특성이 파괴되고 그 존립의 의미를 잃고 말았다.

대륙과 해양의 두 세력이 충돌할 때는 반도인 한국의 힘이 약해졌을 때였다. 반도가 동아시아의 밸런서로서 가슴을 펴고 당당히 있으면 일본은 카미카제에 의지하지 않아도 안전했다. 야마가타 아리모토는 ‘조선반도’를 일본의 생명선이라 불렀지만 그것이 동아시아 전체의 생명선이라는 사실을 몰랐기에 비극이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한일합병이 일어났고 그 이후에는 사실상 동아시아에서 반도는 사라져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반도라는 말 자체가 차별어로 변해 버린다. 일본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던 가쓰 가이슈 등은 탈아와 대륙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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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반대하는 의견을 피력하며 지금의 조선은 최쇠약기에 있지만 결국은 강해질 때가 올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의 말대로 한국은 경제력이나 정치력은 물론 IT나 문화면에서도 세계 10위권 안에 들 만큼 강한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잃어버린 반도성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회복되지 않고 있다.

지오컬처 면에서 보면 분단된 한국은 북측은 중국의 대륙문화의 연장선상에 있어 대륙의 나라로 변해버렸고, 남측은 인공적인 섬나라가 되어 해양문화의 영역으로 전환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분단은 한민족만의 비극이 아니다. 동북아시아 전체의 비극이기도 하다. 가위가 절단되어 반도성을 잃었다는 것은 오랫동안 대륙-반도-섬(바다)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순환해 온 바위바위보 코드의 종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 반도성(半島性)의 회복

반도성의 회복은 한민족만의 일은 아니다. 중국과 일본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전체가 ‘삼파’의 역학관계를 회복하고 독특한 로컬리즘(지역주의)을 살리는 일이다.

지리적 특성만이 아니다. 한국 문화는 세계 어느 문화보다 양극을 융합하는 그레이존(어느 세력권에 속해 있는지 불분명한 지역)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 비빔밥, 승강기, 빼다지, 나들이 등 우리나라 말은 정반대의 두 개념이 하나의 말로 결합하고 있는 양방향성이다.

- 프랑스의 자크 아탈리 : 동북아시아가 EU와 같은 연합 국가가 만들어 진다면 수도는 서울이 될 것이다.

- 미국 미래학자 제러미 리프킨 : 만약 유럽 연합 모델이 아시아로 수출된다면 한국이야말로 아시아 연합을 주도할 이상적인 국가다.

거대한 나라와 강대한 나라 사이에서 그 밸런서 역할을 수행하는 작지만 강한 나라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침략은 받았지만 침략을 한 적은 한 번도 없는 나라가 이웃에 잇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바위’와 ‘보’ 사이에 ‘가위’가 있다는 것은 경쟁과 협력이 함께 이루어질 수 있는 기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새로운 동아시아 네트워크 국가가 만들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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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는 중국의 대륙도 아니고 일본의 섬도 아니다. 반도가 반도의 독자성을 회복하려고 하는 것은 단순한 민족주의와는 다른 것이다. 반도의 독자성 회복은 대륙문명이냐 해양문명이냐의 이항대립 코드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는 일이며 절대 승자의 동아시아 파워를 상호의존의 패러다임으로 바꾸는 것이기 때문이다.

■ 세미오시스 - ‘함삼위일(函三爲一)

피시스(자연계-지리)에서 세미오시스(기호-상징계)로 옮기면 이번에는 세 종교를 하나로 습합한 ‘함삼위일’이라는 모델이 나타난다.

중국을 비롯해 한국, 일본에서는 세 종교가 가위바위보를 하듯 경쟁과 협력의 관계를 유지하며 공존해 왔다.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국가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 왕조시대에도 살아 있을 때에는 유교를 믿고 죽은 후에는 불교에 귀의한다는 선유후불(先儒後佛)의 종교관이 유행했다. 물론 현세의 이익을 추구하거나 병에 걸렸을 때는 무속 신앙에 의지하기도 했다.

결혼은 신도식으로, 장례는 불교식으로 치르는 일본도 예외는 아니다.

홍콩 역시 마찬가지로 유,불,도를 하나로 합쳐 제를 지내는 사원이 많다는 것을 현지에 가면 바로 확인 할 수 있다.

일본에 유교와 불교가 들어오자 일본의 신도는 불교에 밀리고 불교는 유교에 밀리고 유교는 신도에 밀리면서 절대 승자 없는 상보의 역학관계를 나타냈다.

일본에서는 노부나가, 히데요시, 이에야스라는 삼자견제의 가위바위보 코드가 천하를 통일했다. 두견새 이야기로 이 세 사람의 성격이 비교되기도 하지만 가위바위보 캐릭터로 말하자면 노부나가는 ‘바위’, 히데요시는 ‘가위’, 이에야스는 ‘보’라고 할 수 있겠다.

■ 동아시아의 세 가지 문자

동아시아의 함삼위일은 종교의 영역만은 아니다. 세미오시스(기호-상징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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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핵이라 할 수 있는 언어, 문자에 있어서도 한.중,일 삼국은 이상적인 가위바위보 코드를 보이고 있다. 한글, 한자, 가나라는 세 언어가 가위바위보와 같은 관계로 맺어져 있다. 그리고 한국은 한글과 한자를, 일본인은 가나와 한자를 혼용해 왔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택일 밖에 없는 세계에서 보면 실로 희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한자는 시각적인 아이콘의 문자이다. 이에 비해 한글이나 가나 문자는 청각적인 음성문자로 디지털적이다. 체계도 형태도 다른 두 문자가 사이좋게 그 기능을 고양시키고 상보해온 것 역시 종교의 습합 정신과 똑같은 것이다.

만화에서는 시각적인 영상과 함께 청각적인 소리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서양의 회화처럼 그림 구석에 작가의 사인만 작게 써 놓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동양의 문인화에는 그림의 여백에 반드시 그림 제목을 쓴 문자가 아름답게 배치되어 있다.

만화에도 단순히 대사뿐 아니라 장면을 강조하는 의성어 효과가 빈번히 사용된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귀에는 들리지 않는 눈이 내리는 소리까지 말로 표현한다. 한국어로는 ‘사락사락’, ‘펄펄’ 눈이 내리고, 일본어로는 ‘신신’, ‘코코’눈이 내린다.

일본에서는 닭우는 소리를 ‘고케콧코’라고 하는데, 이것은 메이지 시대 이후의 것으로 옛날에는 ‘도텐코’였다고 한다. 닭이 새벽을 알린다는 뜻의 한자 ‘동천홍(東天紅)’에서 연상된 의성어이다.

이처럼 영상과 소리 그리고 문자의 의미가 잘 융합되지 않으면 애니메이션은 만들 수 없다. 또 한 컷 한 컷의 그림은 정지해 있지만 그걸 연결함으로써 움직임이 만들어진다. 시각과 청각, 정(靜)과 동(動) 모두 반대의 일치를 나타내는 것이 애니메이션의 특성이다. 한글과 한자 또는 가나문자와 한자를 함께 병용하는 것은 애니메이션 문화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양립하는 다른 문화를 수용하는 문화의 복합성과 관용성 덕분이다.

이와 같이 종교, 언어, 문장에 대해 비교적 관용적이었다는 것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선별(or)이 아닌 ‘이것도 저것도’의 both-and 배합이 동아시아를 관철했기 때문이다. 미래의 멀티미디어 문화는 이렇게 출현한다.

■ ‘飛鳥’를 왜 ‘아스카’라고 읽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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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문화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아스카(飛鳥)라는 말은 한자로 ‘나는 새(飛鳥)’라고 쓰고 왜 ‘아스카’라고 읽는 것일까. 그리고 왜 또 그것을 다른 한자인 ‘명일향(明日香)이라고도 표기하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을 추적해 가다보면 과거뿐 아니라 동아시아 삼국의 문화 공동체의 의미까지 알 수 있다.

‘날다(飛)’라는 말도 하루를 나타내는 ‘일(日)’도 우리나라에서는 모두 ‘날’이다. 또 하늘을 나는 새를 ‘새’라고도 하지만 날이 샌다고 할 때의 ‘명(明)’도 ‘새’라고 한다. 결국 한자어에서는 ‘나는 새(飛鳥)’도 ‘날이 새다(日明)’도 모두 같은 소리인 ‘날새’가 된다. 이것은 곧 ‘飛鳥’와 ‘明日’은 동음이의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어의 고어에는 마을을 ‘골’이라 했으므로 일본어의 ‘가오루(香)’와 발음이 같다. 일본어인 아스카 마을을 한국어로 읽으면 ‘날새골’이 되고 그것은 그대로 ‘明日香’가 된다.

요컨대 ‘아스카’는 ‘내일의 마을(明日村)’이라는 의미가 된다. 미래의 마을 새롭게 ‘개척한 마을’이라는 상징이다. 또 ‘아스카 사람’이라고 하면 ‘내일의 사람’, ‘도래할 개척민’이라는 의미도 되는 것이다.

문자는 중국어, 말은 일본어, 그리고 의미는 한국어에 의해 구축된 것이 아스카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즉 한국, 중국, 일본의 말과 문자가 하나로 조화를 이루어 ‘미래의 마을’을 구축한 것이 다름 아닌 야마토(大和)의 모습이다.

■ <겨울연가>의 한류

지금 동아시아의 하늘에 떠오른 무지개 중 하나가 ‘한류(韓流)’문화라는 것이다. 이 유행어는 중국의 젊은이들 사이에 열풍을 일으킨 한국의 TV드라마와 대중가요 붐에 대한 경고의 뜻으로 1999년 11월 베이징칭녠바오(北京靑年報)에서 처음 사용한 신조어이다. 이른바 ‘한류’라는 말에는 똑같은 발음인 ‘한류(寒流)’라는 의미가 숨은 그림처럼 감춰져 있는 곳이다.

- 일본의 대중문화에 열광하는 대만의 젊은이들을 ‘하르주(일사병)’라 부르거나 ‘하한주(열병에 걸려 추위에 떠는 병자)’라고 이름붙인 것과 같은 현상

일본에서도 한류(韓流)가 한류(寒流)가 될 우려는 얼마든지 있다.

- 욘사마는 님을 의미하는 ‘사마(樣 모양 양)’를 네 번 반복한 ‘樣樣樣樣’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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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배용준의 ‘용’이 일본어로 숫자 4를 의미하는 ‘욘’과 발음이 같으므로 ‘욘사마’가 된 것이다. 하지만 욘사마 붐을 냉정한 눈으로 응시하던 일본인들은 욘사마를 독감을 뜻하는 영어 ‘인플루엔자’와 결합하여 ‘욘플루엔자’로 부르기도 했다. 제목이 겨울연가이기에 더욱 절묘하게 느껴진다.

- 2004년 일본의 대중문화 개방

- 일본에서 겨울연가가 공전의 히트를 한 후 한국의 드라마, 영화 등이 맹렬한 기세로 일본의 거실에 침투

- 욘사마가 만들어낸 3조 엔에 이르는 거대한 문화마켓 : CF, 미디어 산업, 관광, 캐릭터, 패션, 출판, 음식문화, 욘사마 다이어트, 그리고 <그 사람의 나라, ‘한국’이 좋다>라는 책의 출판, 넘쳐나는 한글교실 등

- 놀랍게도 겨울연가 촬영지 관광을 성지순례라고 부르는 욘사마 팬들은 춘천에 와서 기꺼이 빗자루를 손에 들고 거리청소를 한다.

- 빗자루를 손에 든 일본 여성은 칼을 든 군국시대의 남성보다 강하다.

일본인은 오랫동안 서양에 대해서는 열등의식을 품고 아시아 주변인에 대해서는 우월의식을 갖고 차별을 해 왔다. <겨울연가>의 ‘한류’는 이 두 가지 콤플렉스의 안개를 보기 좋게 날려버린 것이다.

조선인과 마찬가지로 차별어였던 마늘 냄새 나는 김치가 지금의 일본에서는 ‘이것만 있으면 밥을 먹을 수 있다’는 TV설문 조사에서 2위를 차지하고 있다. ‘일본 여성이 외국인 남성과 결혼한다면’이라는 설문에서도 한국 남성이 1위이다.

아시아에서 EU와 같은 AU가 탄생하지 않는 것은 경제적 차이가 아니라 감정의 차이와 민족의 차별 때문이었다. 이제 그 장벽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다. ‘겨울연가’는 ‘봄의 연가’였다.

■ 아시아의 관용과 융통성과 개방성

사회주의 제도의 도입으로 외래문화에 대해 굳게 문을 닫았던 인도는 요즘들어 IT산업 등을 중심으로 문화의 다양성, 개방성이 진행되고 경제도 신장하기 시작했다. 중국, 러시아, 인도 등 최근 경제가 신장하고 있는 나라는 모두 문화의 관용성과 개방성을 채택해 지금의 성장을 달성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은 역사상 오랫동안 네발 달린 짐승을 먹는 것을 터부시해왔지만 근대화와 함께 소고기를 식문화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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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천황 시절 소고기를 황실에 받아들이기로 한 이래 얼마 되지 않아, ‘스키야키’는 세계적인 일본 식문화의 브랜드가 되었으며, 한국의 불고기 요리를 받아들여 서구 못지않은 소비국가가 되었다. 소고기를 먹기 시작한 후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 마쓰사카우시, 고베비프 등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맛있는 소고기를 탄생시킨 것이다.

15세기의 중국은 350년 뒤 실제로 일어난 산업혁명에 필요한 기술을 이미 보유하고 있었다. 풀무가 있는 용광로를 만들고 700년간 세계 최다 철을 생산했던 나라이다. 화약, 대포, 나침반, 지식을 전하는 종이와 활자, 바퀴가 달린 운송수단을 만들었고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상회하는 대선단과 항해술로 탐험대 2만 8,000명을 아프리카 동안(東岸)까지 보냈다. 콜럼버스의 네 배에 달하는 선단으로 인도양을 탐험한 적도 있다.

그런데 산업기술, 수학, 지리학 분야에서 모두 영국보다 우위에 서 있던 중국은 왜 산업혁명을 일으키지 못한 채 끝난 것일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한마디로 말하면 가위바위보 코드를 노모스의 세계, 이른바 법률과 체제의 시스템으로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중국은 기술을 발전시키는 특허법 등을 제도화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황제는 칙령을 내려 원양선의 건조와 항해를 금지시켰다.

동아시아의 윤리도덕은 가위바위보 코드처럼 모든 것이 상대적이며 인터랙티브한 것이었다. 자식은 부모에게 ‘효(孝)’를 다하고 부모는 자식을 ‘자(慈)’로 대한다. 신하는 임금에게 ‘충(忠)’을 다하고, 임금은 신하에게 ‘인(仁)’을 베푼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인륜이 사회의 제도권 안으로 들어가면 ‘인과 자’는 사라지고 ‘충과 효’라는 일방적인 절대 논리로 변해버린다. 그래서 아시아의 심오한 사상과 유연한 상상력은 경직된 관료주의 제도에 의해 점술이나 민간치료와 같은 지하문화로서 생명을 연장해 온 것이다.

■ 새로운 지정학

영국의 역사 지리학자 핼포드 매킨터(Halford Mackinder)의 하트랜드 이론에 의하면 오랫동안 세계의 문명을 결정한 중심지역은 중앙아시아 대륙이었다. 그러나 이 세력은 15세기 북유럽 및 서유럽의 해양세력의 도전을 받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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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장해 갔다. 그 후 400년간 연해국가의 강력한 해군력으로 파워가 이동해 갔다. 산업혁명과 함께 영국이 주도권을 잡고 그 해양 파워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팍스 아메리카나의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지금 세계의 지각에 변동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더 이상 해양라인이 아니다.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EU를 비롯해 러시아, 중국, 인도 등의 대륙 국가들이다.

이처럼 해양 대 대륙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동아시아뿐 아니라 영국, 미국의 해양 라인이 서쪽으로 돌았을 때 마지막 포인트가 되는 일본과, 유라시아 대륙 라인이 동쪽으로 돌았을 때 제일 끝이 되는 중국이라는 양 세력이 그 접점에 있는 한반도에서 만나게 된다.

삼국의 관계가 항상 똑같이 ‘가위, 바위, 보’로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때와 장소에 따라 각각 결합 방법이 달라진다.

■ 휴대전화의 미래

지금 문명은 ‘동전 던지기형’에서 ‘가위바위보’형으로 이동하고 있다. 어린 시절의 환상도 아전인수(我田引水)의 편애도 아니다. 좋든 나쁘든 탈산업문명 또는 초산업문명이라 불리는 글로벌상황은 더 이상 지배 = 종속의 패러다임으로 지속할 수 없는 위기를 맞고 있다. 독립이냐 의존이냐의 이항대립관계는 상호존중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치환된다.

산업문명을 대표하는 자동차와 문명정보를 상징하는 휴대전화를 비교해 보면 누구나 그 변화가 금방 눈에 들어올 것이다.

- 자동차는 혼자 타고 달릴 수 있다.

- 휴대전화는 혼자 들고 다녀봤자 아무 쓸모없다. 거는 것 받는 것 둘 다가 존재해야 비로소 작용하는 기능이다.

내 휴대전화는 나에게 전화를 거는 타인의 것이며, 내가 걸면 타인의 휴대전화는 내가 사용하는 것이 된다. 휴대전화는 누구의 것인가. 소유 자체의 모델이 자동차와는 다르다. 휴대전화는 나와 상대와의 접속 사이에 존재하며 네트워크라는 관계의 틈새에 존재한다. 이것이야말로 인터넷의 인터(inter 사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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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시대를 대표하는 자동차와 정보문명을 상징하는 휴대전화를 비교해보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도구’에서 ‘신체’로, ‘소유’에서 ‘접속’으로 ‘실체’에서 ‘관계’로 ‘사물’에서 ‘마음’으로, 세상의 가치와 기능의 축이 이동중이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다.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가위바위보 모델의 문명에서는 가장 새로운 휴대전화와 아주 오래전 쓰레기통에 버려진 ‘인(仁)’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 흔히 ‘인(仁)은 인(人)이다’라고 일컬어져왔다. 사람인 변에 두 이자를 붙인 글자 뜻대로 사람은 혼자가 아니라 둘의 ‘인터’이며 그 관계 사이에 나타나는 존재이자 움직임이다. 즉 ‘인’이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그리고 사물과 사물이 교신을 하는 문자이다.

■ 아시아인이여, 엘리베이터에서 내려라

가위와 바위와 보자기 중에서는 누구도 피라미드의 정점에 오르지 못한다. 동시에 누구도 맨 밑에 깔리지 않는다. 경쟁은 있으나 절대 승자도 절대 패자도 없다. 상대적인 대전에 따라 A는 B를 이기고, B는 C를 이기고, C는 또 A를 이기는 끝없는 승패의 순환이다. 점점 어두워지면 밝아지는 하루, 점점 추워지면 따뜻해지는 사계절의 순환처럼 ‘삼자견제’, ‘사자견제’의 질서는 직선적인 인과율로는 설명할 수 없다. 명암과 한난의 바이오리듬으로 움직이고 있는 세계에서는 확률과 정보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점쟁이처럼 가공의 시뮬레이션으로 시나리오를 써야 하는 상상력과 직관력이 무게를 갖는다.

가위바위보를 하는 사람은 더 이상 동전 던지기를 할 때의 개인이 아니다. 상대가 무엇을 낼지 슈퍼컴퓨터로도 예측할 수 없는 무작위의 승부지만 결코 상대를 묵인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을 우연과 부조리의 어둠 속으로 내던지지 않는다. ‘가위바위보’중에 무엇을 낼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선택한다. 서로 상대의 의표를 찌르며 손을 내민다. 같은 것만 내면 반드시 진다. 섞어 내기와 다양성이 승리한다. 순간의 만남에 의해 불꽃이 튀는 삶이다.

아시아인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세계인들은 모두 갇힌 채로 계속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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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를 향해 한없이 속도를 올리는 엘리베이터로 인한 현기증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어서 엘리베이터에서 내려라. 승상기라 불렸던 예전처럼 지면을 향해 내려오는 것이다. 교실이 아니다. 교학실에 들어가 새로운 교학서로 공부를 시작하자. 이번에는 파는 곳도 사는 곳도 아닌 새로운 곳에서 표를 구하자. 그리고 문명의 현기증과 구역질을 치유해 줄 새로운 여행을 떠나자. 길은 시작과 끝이 없다. 끝나는 곳이 시작하는 곳이다.

무거운 짐은 버려라. 걱정할 것 없다. 문명의 풍향이 바뀐 것을 느낀다. 내 손이 휴대전화이다. 나는 세계의 발신자이며 동시에 수신자이다. 옛날 문어체여도 상관없다.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을 떠올려보자. 분명 무슨 소리가 들려올 것이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한께 했던 가위바위보의 구령소리일 것이다. 한국 아이들은 ‘가위바위보’ 중국 아이들은 ‘차이차이차이’, 그리고 일본 아이들은 ‘장켄폰’이라고 외칠 것이다. 전 세계 어린이들이 손을 흔들며 달려오는 모습이 보인다.

서로에게 주먹을 휘두르는 격렬한 싸움처럼 보이지만 승부를 경쟁하며 즐겁게 할 수 있는 놀이이다. ‘아이는 어른의 부모’라고 했던 시인의 역설은 무지개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공장에서 전쟁터에서, 시장에서 들려오는 땀투성이, 피투성이의 외침이 아니다. T. S. 엘리엇의 트릭을 빌려 말하자면 ‘기억 속의 희미한 발소리’이다.

한 번도 간 적 없는 길, 한 번도 열어본 적이 없는 문을 향해 다가가는 발소리가 들린다. 하나가 된 반도가 보이고 아시아가 보이고 세계가 보일지도 모른다.

2015. 10. 11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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