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5. 9. 15:20ㆍ독서후기
보통의 존재
■ 이석원 산문집
0 1971년 생
0 대중음악가, 모던 록밴드 ‘언니네 이발관’ 리더
- 1995년부터 활동, 5장의 정규 앨범
0 저서
- 보통의 존재 (2016. 3 현재 12판 48쇄)
- 실내인간, 언제 들어도 좋은 말 등
■ 나는 오늘도 느리게 달린다
도로에서 가장 느리게 달리는 차는 항상 나다.
그래서 내 뒤에 오는 차는 거의 어김없이 클랙슨을 누르며 답답해하다가 쌩, 하고 추월을 하곤 한다.
‘너네는 좋겠다. 그렇게 급한 일, 중요한 일, 가치 있는 일이 있어서. 그렇게 미친 듯이 가야 할 곳이 있어서.’ 나는 오늘도 가장 느리게 달린다.
■ 사생활
사람은 혼자 있을 때 이루 말할 수 없이 더럽고 이루 말할 수 없이 한가롭다.
하나의 글이 완성되기까지 그것이 장편이든 단편이든, 소설이든 수필이든 간에 상관없이 어떤 글이건 완성되기 전 작업과정에 있어서만은 그 내밀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독자는 완성되기 전 채 여물지 않은 글의 모자람을 애써 엿보려 해서는 안 되고 작자는 중간에 섣불리 공개하는 실수를 범하지도 말아야 한다. 과정은 언제나 비밀에 붙여져야 하며 사생활은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누구든 외출을 한다고 했을 때 이른바 준비라는 것을 한다. 준비라는 게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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른 것 없다. 집에 있는 동안 묵혀진 몸을 씻어 깨끗하게 하고 얼굴과 몸에 이것저것을 발라 윤기를 준 후, 마지막으로 나갈 옷을 고르는 등 한마디로 본연의 몸 상태 이상의 것을 보여주려고 치장하고 다듬는 과정의 작업이다. 그런데 세상의 많은 일들이 그렇듯 그 과정 자체는 별로 아름답지 못하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배우들의 삶이 보기에 산뜻하고 간편해 보이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과정의 추함과 번거로움이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여주인공이 샤워 후 욕실을 나설 때면 하얗고 두툼한 가운을 두르고 머리엔 수건을 말아 올린 채 흐트러짐 없는 차림으로 우아하게 나온다. 하지만 현실이 어디 그런가? 보통 사람들은 가운 자체도 없을뿐더러 머리 위로 수건을 예쁘게 말아 올리는 법 같은 건 절 알지 못한다. 가운을 두르기 전 단계만 해도 그렇다 가운을 입기 전에 그녀는 필히 몸의 물기를 제거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기 위하여 한번쯤은 보기 흉한 자세로 다시 그 서혜부(사타구니)를 닦아야 했을 것이고 그보다 더욱 추한 자세로 똥꼬의 물기를 수건으로 꼭꼭 눌러가며 닦아냈을 것이다.
이것은 두 발로 서는 인류라면 그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보편 공통의 과정으로 제아무리 아름다운 여배우라 한들 피해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들이 낱낱이 공개된다고 생각해보라. 준비자가 추구했던 최종 결과물의 상태가 그 노력만큼 아름다워 보일 수 있을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생활은 보장되어야 하고 과정은 비밀에 붙여져야 하는 것이다.
사생활의 주요 거점은 아무래도 집일 수밖에 없다. 자신의 집이 아무리 남루하고 누추하다 해도 피로에 지쳐 집에 들어선 순간 느껴지는 안도감과 편안함은 언제나 ‘내 집이 최고’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만든다. 내 집은 정말로 최고다. 편하기 때문이다.
내 집에 배어 있는 나로 인해 오랫동안 묵혀진 몸 냄새도 내 코에는 감지되지 않으니 나로선 불쾌할 일이 없고, 어느 구석 혹여 더러운 곳이 있다 한들 내가 쓰는 공간이고 물건이므로 별 상관이 없다.
오랫동안 청소를 하지 않아 먼지가 자욱이 쌓여 있는 내 방 창틀의 불결함도 나로선 그리 불쾌하지 않게 묵과할 수 있는 것도 다 내 생활 범주 안의 더러움이기 때문이다. 더러운 것이라도 내 것이라면 괜찮은 법.
집에서 누리는 행동의 자유란 사생활이 극치라 할 수 있다. 그 안에서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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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벌거벗은 맨몸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고 평소 촌스럽다는 이유로 선택받지 못하던 티도 맘 편히 입을 수 있다. 밖에 있는 동안 바지 속에서 하루 내내 구겨진 팬티인지 비닐 봉다리인지 구분도 잘 가지 않게 된 볼품없는 트렁크 때문에 눈치가 보이거나 자신감이 허락하지도 않는다. 그곳에서는 생리현상을 비롯한 많은 것들이 자유다.
결혼이란 엄청난 일이다.
그 모든 사적 영역이 공개, 공유되기 때문이다. 머릿속의 지극히 은밀한 내용들이 담겨 있는 모든 개인적인 기록물들과,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과거의 모습이 선명히 남아 있는 사진첩 등을 더 이상 숨겨두기란 불가능해지는 탓에, 결혼이란 남녀 간의 사랑의 합체이기 이전에 무엇보다 사생활과 사생활의 결합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비밀이 없어졌을 때, 상대의 신비로움도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하루에 문자가 한 통도 안 오는 외톨이 임을 세상에 밝히지 않을 권리가 있고, 남들에겐 절대로 알릴 수 없는 치졸하고 계산적인 고민을 털어 놓을 수 있는 상대를 가질 자유가 허용되며, 어떤 상황에서든 수세에 몰려 있다는 것을 굳이 밖으로 드러내지 않아도 결코 법적으로나 도의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이 당신만의 사생활이기 때문에.
잘대로 드러나지 않을 만큼 안전한 비밀은 사생활이 되고 위험에 노출되는 순간 그것은 콤플렉스가 되어 버린다. 콤플렉스에 맞닥뜨렸을 때 사람들은 그것에 대처하기 위해 각양각색의 노력을 하게 되는데 결국 이 모든 것들은 사생활이 사생활에 머물러 있지 못하기 때문에 생기는 비극이다. 나에겐 내가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모든 과정과 비밀이 안전하게 보호된 채 내가 드러내도 괜찮다고 승인한 모습만 세상에 보여줄 권리가 있다. 그리고 그것이 위태로워질 때 우리는 커다란 스트레스를 받는다.
공개되지 않는다는 느낌은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 그래서 나의 공간과 머릿속 생각, 물건들의 안전은 소중하다. 그러나 아무도 없는 혼자 있는 집에서 조차 혹 어떤 존재가 나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망상을 한번쯤 가져본 사람이라면 완벽한 비공개의 자유란 얼마나 갖기 어렵고 소중한지 공감할 것이다. 일탈이란, 아무도 모르는 머나먼 타지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나의 집, 아무도 들여다 볼 수 없는 곳에서 언제든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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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
언젠가 본 MBC <무릎팍도사>에 배우 황정민이 나왔을 때였다. 평소 그를 좋아했기 때문에 관심 있게 보고 있는데 인상적인 건 꿈에 관한 두 사람의 대화였다.
황정민은 어렸을 때부터 연기에 대한 열정이 너무 강해 그 어린 나이에 직접 극단을 차릴 정도였다고 한다. 강호동이 대단하다고 치하하자 황정민은 별것 아니라는 듯이 누구나 하고 싶은 건 있는 법이니까, 라고 대답했다. 그때 강호동이 말했다.
“그럼 하고 싶은 게 없는 사람은 어떡하지요?”
나는 무릎을 쳤다. 그래 저게 진짜 얘기다. 나도 꿈 같은 건 없던 청소년이었으니까.
하지만 황정민은 거듭 주장했다. ‘그렇지 않다’고, ‘누구나 하고 싶은 게 있는 법’이라고. 그러자 강호동은 자신의 얘기를 했다. 자기는 어렸을 때 하고 싶은 게 없었다고. 다만 부모의 권유로 운동을 시작했을 뿐이라고.
돌이켜보면 나는 선생님들이 ‘누구나 한 가지씩은 잘하는 게 있다’ ‘누구나 꿈은 있기 마련이다’ 등등의 사기를 안 쳤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그랬으면 ‘왜 난 꿈이 없을까?’ 이런 고민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너는 커서 뭐가 될래?”
만약 지금 누가 다시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겠다.
“살다보면 생기겠죠. 끝까지 안 생길 수도 있겠지만.”
내 나이 서른여덟. 나는 아직도 생의 의미를 명확하게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무엇을 하며 살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여전히 고민한다. 다만 분명한 건 누구나 배우가 되고 감독이 되고 싶어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나 배우나 감독이 될 자격이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 그러니 남은 생을 사는 동안, 내가 그저 관객의 안온한 자리를 지키며 살아간다 한들 꿈이 없다 뭐라 할 수 있을까.
청소년들이여, 꿈이 없다고 고민하지 마라.
그럼 관객이 되면 되니까. 그뿐이다.
■ 이어달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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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란 이 사람한테 받은 걸 저 사람한테 주는 이어달리기와도 같은 것이어서 전에 사람한테 주지 못한 걸 이번 사람한테 주고 전에 사람한테 당한 걸 죄 없는 이번 사람한테 푸는 이상한 게임이다. 불공정하고 이치에 안 맞긴 하지만 이 특이한 이어달리기의 경향이 대체로 그렇다.
며칠 전 친구를 만났다. 오랫동안 연락이 없다가 갑자기 부른 것이라 어리둥절해가며 나갔더니 술친구가 필요하단다. 토요일 저녁, 그 많은 친구 중에 하필 그동안 연락이 끊겼던 나와 술을 마시고 싶어한 이유를 처음엔 몰랐었다. 굳이 의례적이라고 할 것까진 없었지만 어쨌든 서로의 안부를 물은 다음 그 애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얘길 하면서 눈물을 왈칵 쏟는다. 많이 좋아하는구나…싶었다. 문제는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시작할 수가 없다고 했다.
“왜? 뭣 땜에?”
두렵단다. 자기가 처음 좋아했던 사람이 짝사랑이었기 때문에 너무 아팠는데 또다시 짝사랑이 될 것만 같아 무섭단다. 심지어 휴대폰 번호도 바꾸고 연락을 끊겠다고 했다.
“그렇구나. 하지만 왜 이 얘길 나에게?”
그 애는 잠시 후 그 이유를 말해 주었다. 자신의 첫사랑이 바로 너였노라고, 네가 나를 받아주지 않아서 자긴 너무 힘들었노라고.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러니까 그 친구에게 맨 처음 고통의 바통을 안겨준 선행 주자가 바로 나였다는 얘기다.
사랑이란 게 또 이렇게 얄궂을 수 있을까. 내가 너 대신 택했던 사람은 나를 정말이지 참혹하리만치 괴롭혔는데 넌 나 때문에 그렇게 힘들었다니. 결국 나의 그 사람은 날 힘들게 했고, 나는 이 애를 힘들게 했으며 이 애는 덕분에 지금 좋아하는 사람과 시작도 못하고 있으니 이것이야말로 이어달리기가 아니고 뭔가.
■ 산책
산책이란 대개 한가롭고 여유 있는 상황에서 하게 되는 경우가 많지만 때때로 고통이나 고립감을 잊기 위한 방편으로 선택되는 수도 있다. 그럴 때 산책은 일종의 마취제나 안정제 같은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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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행위는 걷는 것이다. 달리는 것을 산책이라 하지 않으면 자전거나 자동차로 움직이는 것 또한 다른 의미와 명칭이 부여된다. ‘걷는다’라는 것은 두 발로 땅을 디뎌 그것을 몸으로 느끼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자동차에 앉은 채 달리는 것과는 다르며 풍경이 음미할 새도 없이 달아나버리는 달리기와도 다른 행위이다.
내가 움직일 때, 세상의 풍경도 발맞춰 이동한다. 앞으로 나아가는 만큼 시야에 주어지는 풍경들은 뒤로 흐르는 것이다. 풍경이 움직이면 마음은 안정된다. 왜인지는 모른다. 다만 사람은 정지 상태에서 더 많은 불안을 느낀다는 것. 그래서 불안해진 사람은 가만히 있지를 못하게 된다. 오래전 정신과 폐쇄병동에 입원하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마주쳤던 광경은 긴 복도를 일렬로 늘어선 채 끝없이 원을 그리며 돌고 있는 환자들의 기이한 행렬이었다. 마치 좀비(부활한 시체, 살아있는 시체)들처럼 혹은 경보 선수들처럼 그들은 트랙을 돌듯 제각기 복도를 걷고 있었다. 처음에는 답답함을 이기려고 그러는가보다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약기운을 참지 못해 하는 행동이었다. 정신과 치료에 필요한 약물들은 사람을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게 만든다. 나 또한 약을 먹기 시작했으므로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산책에는 풍경이 필요하다. 병동 안에서 복도를 걷는 행위를 산책이라 부르지 않는 이유도 풍경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자리걸음 또한 산책이 아니다. 산책에 길이 필요한 것은, 길이란 풍경을 동반하기 마련이고 좋은 길은 좋은 산책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좋은 길이란 어떤 길일까? 공기 좋은 지방 어느 관광지의 산책로도 좋은 길이 될 수 있겠고, 가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질 만큼 사람들이 활기로 가득 찬 명동이나 압구정 거리도 좋은 길일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 길은 많고, 모든 길은 저마다의 특색이 있다. 여행지에서의 산책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 근처를 거닐게 된다. 그리고 그날그날 산책의 용도에 따라 코스 또한 다양하게 선택된다. 운동을 겸해 약간 빠르게 걸을 수 있는 길, 생각할 것이 있을 때 찾는 인적이 드물고 조용한 길, 기분 전환에 좋은 불빛이 많고 사람들이 자주 오가는 길 등등. 길은 그렇게 여러 가지 모습을 지녔다. 곧은 길, 구불구불한 길, 정돈이 잘된 길, 돌들이 곳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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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박혀있어 뒤뚱뒤뚱 걸어야 하는 거친 길, 길가의 나무가 그림처럼 둘러진 조경이 잘된 길, 황량하고 메마른 풍경을 가진 길, 늘 다니는 익숙한 길,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 길은 풍경이고 풍경은 우리에게 생각과 느낌을 준다. 길을 걸으며 흐르는 풍경을 목도하는 것이 바로 산책이다.
누구나 산책을 한다. 그러나 산책을 하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다. 산책은 누군가에겐 즐거움이요, 또 어떤 이에겐 건강을 위한 몸의 움직임이기도 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고민과 생각의 장이 되어주기도 한다. 이렇듯 사람마다 다른 산책의 모습은 그들 각각의 삶의 모습과 닮아 있다. 누군가에겐 잠시 동안의 여가인 일이 누군가에겐 삶의 전부가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겐 느긋하게 동네 전경을 살피는 한가로운 일이 다른 누군가에겐 고통을 잊으려 집을 뛰쳐나온 절박한 행위가 되기도 하는 것.
오늘도 산책을 나간다. 오늘 나의 산책은 어떤 풍경들이 장식하고, 나는 그것을 보며 어떤 느낌과 생각들을 갖게 될까. 이제 거리로 나간다. 그리고 나또한 풍경의 일부가 된다.
■ 친구
잘 생각해 보세요.
내가 듣기 좋은 말만 하거나 당신에 대해 어떤 반대도 하지 않았다면 난 당신을 정말로 좋아하는 것은 아니에요. 친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거죠. 솔직하다는 말을 많이 듣는 편이지만 정확히 말하면 난 나에 대해서만 솔직해요.
잘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싸운 적이 있거나 내가 한 말 때문에 당신이 열 받은 적이 있었는지, 그런 적이 있다면 우린 친구예요.
좋아해서 그런 겁니다.
■ 여행보다 긴 여운
2004년. 우리는 두 번째로 일본을 찾았다. 3년 전 유서 깊은 아카사카 블릿츠에서의 공연 이후 3년 만의 일본행이었다. 이른바 ‘재팬투어’라 해서 도쿄의 클럽 몇 군데와 후쿠오카의 작은 페스티벌에 참가하는 스케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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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풀 새도 없이 시부야에 있는 클럽에 가서 공연을 하고는 숙소가 있는 시에나 마치로 향했다.
물론 이번엔 지난번 갔을 때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이곳저곳 많이 돌아다녔기 때문에 아오야마 명품거리의 화려함에 감탄하기도 하고 그 밖의 많은 거리를 다녀보기도 했지만 여전히 하라주쿠의 진가는 느낄 수 없었다. 다시 찾은 일본의 도심은 여전히 서울과는 다를 바 없었기에 역시 일본의 진가는 도시 한복판이 아닌 민가에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숙소에 도착. 일본 주택가의 밤은 여전히 조용했다. 우리가 묵을 곳은 한국인 부부가 사는 집이었는데 집주인이 자릴 비워서 우리만 잔다고 했다. 매니저에게 원래 사는 사람들은 어딜 갔냐고 물으니 7년간 남편 유학 뒷바라지를 하던 부인이 남편이 도망을 가버려 이혼 수속 밟느라 한국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 얘길 듣고 집 안에 들어서서 그랬는지 곳곳에 정갈하니 놓여 있는 살림살이들이 어쩐지 측은하게 다가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다 본 냉장고에 붙어 있는 메모 한 장.
‘우리 귀여운 오리 새끼들, 엄마 아빠 없어도 잘 지내야 한다. 항상 건강하구 앞으로 나아가거라.’
모르겠다. 사실 처음에 일본에 왔을 때 동경의 민가는 내게 그저 예쁘고 깨끗한 동화 속 공간이었다. 그러나 그곳을 두 번째 찾았을 때, 일본의 민가는 더 이상 동화 같은 공간이 아니라 비로소 정말 사람들이 살고 잇는 공간으로 다가왔다. 거기엔 설명 못할 쓸쓸함과 가라앉음이 있었고…그렇게, 처음 일본을 찾았을 땐 느끼지 못했던 그것은 동경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후쿠오카로 이동해서까지 계속되었다.
이 쓸쓸함의 진원이 어디일까. 나는 그곳에 있는 동안 줄곧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일본에 있는 동안 공식적인 스케줄이 아니면 개인 시간은 거의 혼자 보내다시피 했는데 사실 그건 내 온전한 자의는 아니었다. 여행 속에서 친구와 동료들은 이상하게 내 곁에 있길 거부했고 다른 곳으로 저이들끼리 떠돌았다. 둘씩 짝을 맞춰 다닐 때에도….
후쿠오카 스카이코트 하카다 호텔 512호에서, 나는 그렇게 다시 혼자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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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그때는 책도 읽지 못하던 때라 자연스레 노트를 꺼내 들고 메모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여행은 내게 여전히 힘들고 많은 생각을 안겨준다. 나는 정말 아직도 여행을 잘 모르겠지만 알 수 없는 오기 같은 것이 생겨 다시는 가고 싶지 않다. 집에만 있을 거야, 라는 생각은 하지 않게 되었다.”
“여행과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언제나 책을 읽을 수 있으며 통신 수단이 없어도 답답해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그런 사람.”
서른세 살 가을. 나는 그렇게 혼자였던 곳에서 돌아왔고 고향의 바쁜 일상 속에서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그리고 5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어느새 서른여덟이 되었다. 여전히 책을 읽지 못하며 여행도 가지 않고 휴대폰만 쥐고 살던 나는 불혹의 나이를 2년 앞두고 마침내 그동안 전혀 읽지 못하던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후쿠오카에서 바랬던 소원 중 한 가지를 이루게 된 셈이다.
두번째 소원이었던 여행은 이 핑계 저 핑계로 아직까지 변변히 떠나 본 곳은 없지만 욕구만은 점점 간절해져 그토록 싫어하던 여행기를 볼 수 있을 정도까지는 되었다. 요즘도 때때로 그곳에서 메모를 끄적이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 옛길
아버지는 하급 공무원이셨다. 그런데 대인관계가 워낙 좋으셨던 데다 성북동이라는 부자동네에서 근무하시는 바람에 지인들은 모두 갑부급의 부자나 고관대작들이었다. 덕분에 가족모임이 있을 때면 남산의 하이야트 호텔에서 뷔페를 먹고, 프랑스 요리 전문 식당에서 하는 계모임에 따라가고, 삼청동의 으리으리한 갈빗집 대원각에서 일 년이면 두 번씩 공짜로 갈비를 뜯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가 그런 좋은 곳으로 우리를 데려가실 때면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차 넘버 5323을 단 포니 자동차에 우리 가족들을 태우고 늘 성북 북악스카이웨이로 해서 가셨다. 커다랗고 아름다운 주택가 사이에 난 그 길은 봄이면 개나리와 벚꽃들이 무성하게 피어 달리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싱그러워지는 곳이었고, 밤이면 서울의 야경이 쏟아내는 무수한 불빛이 내려다보이던 멋진 풍경을 지닌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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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원아, 저기 야경 좀 봐. 멋지지.”어머니는 당신도 들떠서 말씀 하시곤 하셨다.
성북동에 관한 추억은 많다. 출입이 금지되어 있던 꿩의 바다에 특별히 들어가 꿩 사냥을 구경하던 일, 수백 평짜리 윤 회장 아저씨네 집에 갔을 대 마당에 있던 몇 십 마리의 개를 보고 충격을 받았던 일, 고래등 같은 기와 지붕이 있던 어떤 큰 집의 단장이 잘 된 잔디밭 마당에서 갈비 파티를 벌이던 일 등등. 그렇게 성북동은 우리 가족에게 특별한 곳이었다. 아버지가 우릴 태우고 그런 성북동 길을 달릴 때면 누나들은 노랗고 하얀 원피스를 차려입고, 난 할아버지 칠순 잔치 때 받은 새 옷으로 모두들 중무장을 하고는 남산으로 혹은 평창동으로 가곤했다.
나의 끊임없는 우스갯소리에 누나들이 싫증내지 않고 웃어주던 좋았던 순간들.
초등하교 때. 난 항상 친구들을 집에 데려오기 좋아하는 아이였는데 어느 날인가는 같은 반 남자 아이들을 전부 데려온 적도 있을 정도로 우리집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지금과는 달리 성격도 활달해서 언제나 모든 일을 주도하였고, 앞장서길 좋아했다. 그러나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우리집보다 더 큰 집에 사는 아이들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난 후 그때부터 늘 데려오던 친구들을 더 이상 집에 데려오지 않게 되었다. 우리집이 반에서 제일 큰 집이라고 생각했던 당연한 믿음이 깨어졌던 것이다.
내가 좀 더 자라고 아버지가 성북동을 떠나실 즈음, 우리 가족은 더는 하이야트 호텔이나 대원각 같은 곳은 가볼 수 없게 되었고, 도로 확장으로 반 이상이 잘려나간 우리 집은 더없이 초라한 모습으로 마치 폐허처럼 그렇게 남게 되었다.
난 여자친구가 생기면 언제나 하이야트 호텔의 테라스라는 식당을 찾는다. 하이야트는 어릴 적 우리 식구들이 유일하게 자주 찾던 호텔로, 푸른 집도 대원각도 없어진 지금 성북동 길과 더불어 내가 어린 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소다 그래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기념할 일이 있을 때면 자주는 아니지만 하이야트 호텔에 가고 싶어한다. 친구들은 돈이 어디서 나서 만날 이런 데 오냐고 난리를 치곤 하지만 내가 호텔에 드나들 형편이 되
느냐 안 되느냐 하는 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잠시라도 어린 시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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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얼마가 됐든 지불할 용의가 있기 때문에.
사람이 일평생 유년의 기억에 지배를 받는다는 사실은 불행일까 행복일까. 그리움에 젖어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을 그리워한다는 것으로만 보면 불행일 것이고, 그리워할 대상이 있다는 것은 또한 행복일 것이다.
■ 연애
거대하고 적막한 바닷가가 온통 핏빛으로 물들 때 태주와 상현은 오로지 단 둘이 앉아 있습니다.
아무도 없는 세상에 나 홀로 있다가 아무도 없는 세상에 둘이서만 있게 되는 게 연애입니다. 그래서 연애를 해도 외롭지 않게 되는 건 아니지요. 아무도 없는 세상에 기껏해야 한 사람이 더 생기는 것에 불과하니까.
■ 세상 밖의 두 표류자
며칠 전, 같이 저녁을 먹고 싶어서 저녁 먹었냐고 문자를 보냈더니 방금 먹었다고 답장이 와 실망하고 있는데, 몇 시간이 지나서 다시 연락이 왔다.
왜 부르지 않았냐며.
그래서 먹었다는데 뭘 부르냐고 하니까
먹었어도 네가 먹는 모습을 지켜봐주면 되지 않느냐는 거다.
“그런 거구나…몰랐어…”
“그 나이 먹도록 어떻게 그런 것도 몰라요?”
아…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도 없구나.
우리는 세상 밖의 두 표류자…
손을 꼭 잡고 함께 무지개다리 앞에 서 있다.
■ 해파리
여기는 수족관
28인치 평면 TV만한 작은 수조 안에 깨알 같이 작은 해파리들이 저마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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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살고 있습니다. 나는 친구에게 유난히 활발한 몸짓을 보이며 물속을 부유하고 있는 한 녀석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우리 인생이 저 위에서 보면 결국 이런 것일 거야. 이렇게 작고, 단지 여러 개체 중의 하나일 뿐인 아무것도 아닌 삶.”
흔한 말로 이 넓고 광활한 우주에서 우리 각각의 존재란 정말로 작고 보잘것없는 점과 같은 것이겠죠. 과학자들에 따르면 우리에겐 이렇게 긴 역사도, 어떤 시공간의 차원에서는 그저 찰나에 불과한 순간 밖에 되지 않는다면서요, 이 작은 해파리의 운명도 예외는 아닐 겁니다. 이토록 힘찬 움직임도 언젠가 정지하고 존재는 흔적조차 없이 소멸해 버리겠죠. 우주에 적용되는 이러한 가차 없는 생성소멸의 법칙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아련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인간의 노화란 조금 더 더디게 진행될 필요가 있다. 요즘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 남녀 불문하고 대략 80세 정도 된다고 했을 때, 정확히 반 가까이 살아온 나의 경우에 비춰보면 지금까지 지내온 세월만큼 더 살기엔 몸의 노화가 너무 빨리 진행된다는 느낌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 너무 긴 세월이 ‘여생’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아무런 관리를 하지 않아도 무한정으로 쓸 수 있었던 많은 것들이 어느 새 너무 빨리 바닥을 보였다. 아무리 뛰어 놀아도 지치지 않던 체력은 이십대를 넘어서면서 단지 오분 정도의 농구 게임을 뛰기에도 버거운 상태가 되었고 무한대로 먹어도 소화에 문제가 없던 위장은 이제 밥 한 공기를 채 온전히 소화하기도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죽음은 한순간에 이뤄지는 듯 하지만 내 안의 많은 것들은 이미 사망을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끼니를 해결해야 할 때마다 난감함을 느낀다. 먹을 수 있는 게 너무 없어서, 고기도 안 좋다고 하고 밀가루 때문에 빵이나 면류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 좋아하는 회도 날 것이라 좋지 않고 오로지 밥, 그것도 쌀밥과 잡곡밥의 중간쯤을 섞어 먹어야 한다니 이렇게 한정된 경우의 수를 놓고 사실상 고민할 여지도 없는 고민을 매번 반복한다. 고민의 내용 또한 서글퍼서 내가 먹을 수 있는 것 중에서 무엇을 먹을까가 아니라 먹을 수 있지만 먹기 싫은 것과 먹고 싶지만 먹어선 안 되는 것들과의 갈등일 뿐이다. 이제 나의 인생
에서 먹는 즐거움은 돌아올 수 없는 강 저편으로 떠났다.
인생사 새옹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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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일찍 사라져버린 많은 것들 중에 특히나 아쉬운 것으로는 정서적 퇴화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좋아하던 비가 어째서 이제는 단지 맑은 기분을 어지럽히는 흙탕물 같은 존재가 되어 버렸을까. 아름답고 환상적이며 푸근했던 눈은 어찌하여 그저 교통을 방해하고 곧 있으면 세상을 지저분하게 만들 뿐인 번거로운 존재로 전락하게 되었는가. 마음의 노화는 미래에 대한 기대와 꿈을 앗아가 현식 밖에는 남지 않는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더 이상 로맨틱 코미디를 즐길 수 없게 된다. 언젠가 저런 영화 같은 일이 내게도 닥칠 수 있다는 설렘과 희망이 사라진 로맨틱 코미디란 얼마나 부질없는가.
늙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나이를 먹으면 많은 욕구들이 사그라들어 젊어서는 가져보지 못한 안정감을 갖게 되는데 그 욕구라는 것이 왜 사그라드는가를 생각해보면 또 서글프다.
젊어 생리적으로 왕성히 생성되던 호르몬이 줄어든 탓에 성욕을 비롯한 다른 많은 욕구들이 동반하여 줄어들고, 따라서 젊은 활기를 잃어버린 대가로 화분을 가꾸거나 읽지 않던 책에 손이 가곤 하는 것이다. 물론 나는 이미 그 시기에 들어선 사람으로서 그 안정감이 주는 장점과 위력을 잘 알고 있다. 그동안 보지 못하던 세계에 눈을 뜨게 해주니까. 다만 그 시기가 너무 빨리 온다는 것이다. 물론 느리거나 빠르거나 사람은, 아니 생명은 언젠가는 늙는다. 그러나 늙음을 감당하는 방식은 다들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사랑의 종말에 대처하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한 가지 물어 봅시다.”
“사랑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하는 겁니까. 아니면 사랑해서 하는 겁니까?”
“정말 몰라서 물어보시는 거예요? 당연히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하는 거지요. 전 결코 상처받지 않는 것, 두려움 속에 자신을 지키려는 것이 사랑에 자신을 던지는 것보다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상처는 사랑보다 몇 배나 더 크고 오래 가니까. 사랑하는 마음이 크면 클수록 더 그러하니까.”
그러나 종말과 상처에 대한 이 모든 확실하고 불안하며 어두운 전망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아랑곳없이 피어납니다. 씨앗이 바람을 타고 사람의 발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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닿지 않는 곳 어디라도 날아가 생존이 불가능해 보이는 암벽 틈이나 낭떠러지 위에서까지 얼마든지 꽃을 피우듯, 사랑은 그렇게 어디서든 피어납니다. 원하든 원치 않든 일단 시작되고 나면 누구든 바로 모든 사랑의 단계 중에서 가장 황홀하고 아름다운 ‘처음’의 순간을 피할 수 없게 되죠.
‘다시는 이런 기분 느끼기 싫었는데… 한줌 재만도 못한 이런 허망한 신기루 따위 결코 다시 맛보기는 싫었는데.’
이제 조금 있으면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으로 차올라 믿을 수 없을 만큼 벅찬 기분이 되어 버릴지도 모릅니다.
■ 고통이 나에게 준 것
어렸을 때부터 내게 집이란 쉬거나 안식을 구하는 곳이 아닌 불안 속에 안도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곳이었다. 사람의 인생에도 팔자가 있듯 집안 굴러가는 데에도 그 비슷한 운명의 패턴 같은 것들이 있더라. 우리집은 바로 그런 집안 팔자가 드셌고 그것은 내 나이가 마흔이 되어가는 지금도 다르지 않아, 아직도 크고 작은 일들이 끊이지 않고 칠순이 넘은 아버지 어머니는 여전히 힘든 세월을 보내고 계신다. 요즘엔 그런 부모님을 지켜보다 괴로워질 때면 결국 허탈하게 웃으며 속으로 그런다.
‘아버지 어머니 감사합니다. 여전히 제게 이런 끔찍한 불안과 스트레스를 주셔서.’
내가 만들어 온 많은 것들은 불안과 고통의 산물이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상상력과는 무관하다. 나의 인생에서, 또 내가 속한 집안 환경 속에서 겪은 수많은 일들이 고스란히 나의 창작물이 되어 세상에 던져진 것이다. 고통을 잊기 위해 8월의 폭염속에서 아파트 지하주차장을 달리며 만든 다섯 번째 작품은 내가 만든 것들 중 가장 많은 성과를 안겨다 주었고 반면 별다른 사건이 없을 때 만든 것들은 그다지 많은 환영을 받지 못했다.
이것은 결코 아이러니한 일이 아니다. 나뿐만 아니라 누구든 창작자라면 창조는 천재성이 아닌 고통에서 더 많은 것이 비롯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평탄한 삶을 살아온 사람은 좋은 작품을 내기가 쉽지 않다. 인생의 굴곡이 험준할수록 작품에도 그만큼 진한 드라마가 담기기 마련이니까. 잘 아는 음악 하는 동생은 아버지에게 전화를 해서 왜 그렇게 우리를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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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게 키웠냐고 반 농담 투정을 부린다고 한다. 자기들이 아무리 음악을 짜내봐도 안 된다면서.
나의 소원은 사막처럼 고요한 곳에서 살아보는 것이다. 조용하고, 아무도 귀찮게 하지 않으며 자고 일어나면 놀랄 일이 생기지도 않는 그런 평화로운 곳에서 마음의 평화를 누리며 사는 것이다. 고통은 나에게 영감을 주었지만 대신 이렇듯 사막처럼 고요한 안식처를 갈망하게 하였다.
현실은 고통스럽고 꿈속의 사막은 달콤하다. 그렇기에 나는 사막을 꿈꾸는 노래를 짓고 부른다. 고통이 아니었던들 내게 평화로운 삶 같은 것들이 의미를 가질 수 있었을까. 생의 중요한 것들이 이처럼 고통 속에서 주어진다는 사실이 내겐 아직도 낯설게 느껴진다.
■ 위대한 유산
나의 이 탐욕스럽고 본능적이며 게걸스러운 먹성과 식탐은 누구에게서 물려받은 것일까요. 음식을 좋아하셨지만 말년에 드실 수 있었던 건 백김치뿐이었던 할머니와 고기와 밀가루를 좋아하시는 아버지, 결국 두 분은 모두 당뇨에 걸리셨죠. 저는 그분들의 체질과 식성을 물려받긴 했지만 그러나 저의 음식에 대한 집착은 두 분의 것을 훨씬 뛰어 넘는 것이기에 그 정확한 연원을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저 또한 그분들처럼 세상의 맛있는 것들을 포기하고 살아가야할 운명인지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저와는 달리 할아버지는 절제가 몸에 베인 분이셨습니다. 할아버지가 드시는 밥상에서는 늘 밥과 반찬의 양이 정해져 있었고 매 끼니마다 반주로 소주 한 잔을 어김없이 곁들이셨지만 그 외에는 결코 입에 술을 대시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할아버지는 기상시간, 잠드는 시간, 식사시간을 언제나 정확히 지키셨고 모든 일과를 정해진 시간에 실행하셨습니다. 시계처럼 정확하셨죠. 할아버지는 그런 기질을 둘째 아들에게, 즉 저의 작은아버지에게 물려주셨습니다.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건 기질만이 아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오똑하고 잘생긴 코까지 당신의 둘째 아들에게 내려주셨어요. 반면 넓고 펑퍼짐했던 할머니의 코는 아버지에게 그것은 다시 저에게로 하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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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는 우리에게 하드웨어뿐만 아니라 소프트웨어도 물려줍니다. 지능, 성격, 기질, 성품 같은 것들, 저희 어머니는 일종의 광기를 갖고 있는 분이셨어요. 무슨 일을 할 때면 불꽃이 튀었죠. 저는 저의 어머니가 좀 더 온화하고 차분한 분이길 바랬기 때문에 뭔가 판이 벌어지면 오로지 그것밖에 보지 못하고 달려가는 모습에 언제나 질려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커서 나의 일이라는 게 생기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작업할 때 눈이 뒤집혀서 달려드는 나를 발견하곤 아득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그건 아무리 거부하고 싶어도 내 힘으로는 떨칠 수 없는 어떤 숙명 같은 것이었어요.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무슨 일을 하든 광적으로 매달리는 나의 이 헌신과 정성은 제 삶의 자세로 굳어져 저를 저답게 살게 하는 밑바탕이 되어 주었습니다. 바로 어머니가 제게 물려주신 것이지요. 튀어나온 입과 함께.
생각해보면 살아가면서 내가 정말 사랑해야 하는 것들은 하나같이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들뿐입니다. 만약 내가 직접 고를 수 있었다면 나는 내 얼굴을 이렇게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고, 내 몸, 내 키, 내 머리와 재능, 우리 집, 내 나라, 그 어떤 것도 지금과는 다른 선택을 했을 것입니다. 뿐입니까. 나의 성별 또한 내가 택한 것이 아니며 나의 이웃, 나의 가족, 친척, 친구 등 어느 것 하나 내 의지대로 고른 것은 없죠. 인생이라는 게임이 왜 이렇게 모순되고 불공평한지 38년을 살아왔지만 아직 잘 모릅니다. 다만 분명한 건 인생이란 사랑할 대상을 골라서 사랑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뿐.
그러나 그 불공평함이 결국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을 보면, 게임의 승부는 누가 하루라도 더 빨리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긍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에 달려 있는지도 모릅니다. 만약 그렇다면 어렸을 때부터 우리 집은 왜 이럴까. 나는 왜 이것밖에 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저처럼 많이 한 사람들은 승부에서 꽤나 뒤처진 셈이 되지요.
해답을 알 수 없는 오랜 물음을 던진 끝에 어느 날 내가 그토록 달아나고 싶고 회의하던 것들로부터 나와 내 삶이 이루어져 왔다는 사실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순간, 나의 모든 아쉬움들은 그제야 비로소 위대한 유산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바로 잘나지 않은 내 가족과 친구들, 무엇보다 늘 부끄럽게 여기던 내 자신까지, 바로 내가 선택하지 않았던 수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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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들이 내게 건넨 힘과 그들과 함께했던 세월 덕택이었습니다. 비록 조금 뒤늦긴 했지만, 이제 내겐 이 화려한 유산을 마음껏 쓰는 일만 남았습니다.
■ 이별 뒤의 사랑
워낙에 이별이 횡행하는 세상이 되다보니 이제는 이별이라는 게 정말로 이별이 아닌 세상이 되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헤어진 연인이나 부부가 완전히 인연을 끊지 않은 채 친밀감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일이 빈번해졌다는 말입니다.
때로는 재결합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친구로 오래도록 지내기도 합니다. 좋게 헤어진다는 말이 결코 연예인들이 헤어짐을 포장하기 위해 하는 빈말만은 아닌 세상이 된 것이죠.
이별 후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서 다시 관계를 맺는 것은 나름대로 장점이 있는 일입니다. 저는 그중 최고의 장점으로 서로에게 솔직해질 수 있다는 점을 꼽겠습니다. 사실 사귀는 동안은 상대에게 100% 솔직하기란 힘듭니다. 하지만 헤어져 더 이상 서로에 대해 연연해하지 않게 되었을 때 솔직해질 수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고, 그제야 두 사람은 사귈 때보다 더욱 편하고 진실한 대화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때문에 서로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솔직할 수 있는 헤어진 이성 친구는 대단히 친밀한 사이가 되기도 합니다.
많은 연인들이 사랑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이며 연애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씁쓸하지만 헤어짐이 쉬워진 대신 이제는 헤어짐조차 영원하지 않게 된 것을 위안으로 삼아야 하는 걸까요? 오늘날 이별 뒤의 사랑은 이렇게 다시 볼 수 없는 그리움이 아닌 담담함으로 곁에 남게 되었습니다.
■ 연애의 풍경
“맞아, 그때도 그랬어…”
우리는 서로에 대한 환희에 들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었지. 같은 서울 안에 있는 곳이 아니라 대구까지 운전을 해서 너를 데리러 갔었고 동생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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께 만난 것은 만나 게 아니라며 이미 만났던 날 밤 둘이 다시 만나서는 기쁨과 사랑으로 얼굴엔 웃음이 가득한 채 마주 잡은 두 손을 놓을 줄 몰랐었지.
‘맞아, 그때 그 사람도 그랬었어…’
너는 집에 다 도착해놓고는 내가 보고 싶다며 다시 학교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었지. 우리가 볼 수 있는 시간은 단 십 분, 너는 그 십 분을 위해 같은 곳을 두 번이나 왕복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어.
난 여자가 사랑에 완벽하게 빠졌을 때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안다. 상대방에
대한 애정과 사랑이 너무 충만해서, 기쁨에 겨워 눈은 반쯤 감긴 채 마치 꿈
을 꾸는 듯한 얼굴로 누군가를 한없이 바라보는 바로 그 표정.
‘그래, 모든 것이 예전에 봤던 장면이야.’
나를 위해 힘든 것도 마다하지 않고 시장에 들러 내게 필요한 것들을 대신
사다주던 일, 낙산의 붉은 바다를 바라보며 서로에게 굳게 다짐하던 순간,
더 없이 사랑을 느끼고, 마음이 아플 정도로 애틋함을 느끼던 이 모든 것들
이 다 예전에 경험했던 일들이었어. 그리고 난 그것들의 결말도 알고 있지.
순간을 즐기지 못해서 미안해. 그리고 사랑한다.
우리는 반드시 헤어질 테지만 내 일생의 연인은 바로 네가 될 거야.
■ 세잔
서른여덟이 되던 해 생일날, 나는 세잔의 전기를 선물로 받았다. 그리고 그
것은 내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주었다. 세잔이라는 위대한 화가가 일생을
통해 구현하려 했다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는 것’에 대한 강렬한
호기심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나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에서 주관성을 배제
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나는 지극히 주관적인 사람이었고 그런 점을 당연
하게 생각해 왔기 때문에 세상의 사물과 사람을 오로지 나의 시각으로 보고
나의 관점에서 판단하고 생각해 왔던 것이다. 그러니 세상의 모든 것들은 내
게 필요한 것과 아닌 것, 내가 관심 있는 것과 아닌 것으로 나눠질 수밖에
없었고, 내 편인 사람과 아닌 사람으로 구분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러
한 나의 주관성이야말로 나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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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라니. 도대체 왜? 나는 의문에 빠졌
다. 그리고 알고 싶었다. 태어난 날, 나는 태어나서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물음을 선물 받았다.
여기 사과가 있다. 사과는 사람에게 장차 자신의 입속으로 들어갈 식용의 대상으로밖에는 비치지 않는다. 그것은 사과를 보는 사람의 시각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저 사과의 빛깔이 얼마나 곱고 붉은 빛을 띠고 있는지, 윤기는 얼마나 나는지, 크기는 먹기에 얼마나 적당하며 값은 얼마나 하는지와 같은 점들이 고려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과의 본질이 정말 이런 것에 불과할까 하는 의문을 품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사과를 인간의 시각으로서가 아닌 사과 그 자체가 갖고 있는 본질로 보고 싶어 했으며 그것을 그리기 위해 무려 40년이란 시간을 바쳤다. 그런데도 그는 실패했다.
의문은 계속됐다.
사과의 본질이 그런 인간의 시각과 입장에서 보는 것과는 다른 고유의 존재적 특질을 가졌을 것이라는 발상 자체가 또 다른 인간중심적 상상력의 결과는 아닐까? 대체 사과의 본질은 무엇인지. 사과의 본질이 정말로 있기는 한 것인지. 사람이 사과의 입장이 될 수 없는데 누가 어떻게 알아낼 수 있단 말인가. 설사 사과가 된다 한들 나조차도 내가 누군지, 나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무엇인지 모르는데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다는 것인가.
세잔은 그것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하늘을, 날아가는 새를, 나무를, 농부를, 태양을, 해바라기를, 철저히 자신의 시각으로 넘치는 주관을 담아 상상력으로 그려낸 고흐와는 달리, 이 세잔이라는 화가는 사과라는 하잘것없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려내기 위해 무려 40년을 바친 것이다.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존중한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사람은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자신의 입장과 시각으로 타인을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존재의 본질이란 어쩌면 타인에 의해 인식되는 것 외에 다른 답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세잔은 실패한 것 아닐까?
서른여덟의 생일날, 나는 아주 관념적인 선물을 받았다. 그것은 옷이나 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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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향수와는 달리 나로 하여금 많은 생각에 잠기게 했다. 세잔이 40년에 걸쳐 고민했던 것을 하룻밤 안으로 결론을 내기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선물은 내게 결론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본질을 아는 것보다, 본질을 알기 위해, 있는 그대로를 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그것이 바로 그 대상에 대한 존중이라고.’
■ 열아홉, 스물아홉, 서른아홉
요즘 나의 상태는 별로 좋지 않다. 그 이유를 찾기 위해 애쓰고 있는 형편이기 때문에 왜 그런지는 속 시원하게 말할 순 없지만, 현재까지 파편적으로 드러난 것은 매일의 실상이 똑같고 하루가 공허하며 무언가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아무리 열심히 하루는 보내도 성취감을 느낄 수 없다는 정도가 되겠다. 도무지 불안과 결핍의 이유를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왜 그럴까?
내 나이 우리 나이로 서른아홉, 내년이면 마흔이 되니 이젠 누가 뭐래도 적은 나이는 아니다. 마흔이 되면 죽을 만큼 진한 사랑을 해볼 확률도 현저히 떨어질 테고 세상의 주인공이 될 일은 더더군다나 많지 않을 것이다. 피천득 선생님이 쓰신 글 중에 이런 내용이 있다.
“‘인생은 사십부터’라는 말은 인생은 사십까지 라는 말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내가 읽은 소설의 주인공들은 93%가 사십 미만의 인물들이다. 그러니 사십부터는 여생인가 한다.”
그래,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헤쳐 나가야 할 펄떡펄떡 뛰는 세월이 아니라 그저 잔여 인생에 불과하다는 것 아닌가. 나는 생각했다. 그렇다면 요즘 나의 우울함은 나의 나이에 기인한 것일까?
돌이켜 보면 열아홉, 스물아홉, 서른아홉. 사람은 아홉 살이 될 때마다 이제 바뀔 나이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지. 나도 이젠 어른인 것인가, 정말 이젠 늙는 건가…
물론 나이라는 것이 오로지 숫자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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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또한 요즘 서른아홉의 홍역을 앓고 있는 중이니까.
돌이켜보면 열아홉이나 스물아홉에 느꼈던 걱정과 불안들은 지나고 나서는 웃음이 나올 정도로 지레 겁을 먹은 것 같다고 느꼈었는데 또다시 서른아홉이 되니 이번에야말로 그저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기분이 들어.
조금 더 현실적인 느낌이랄까.
최근 들어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나의 입장과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었을 때 사뭇 다른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다.
누가 나에게 마음을 열었을 땐 어차피 헤어질 거 뭐 하러 사귀냐고 냉소적인 태도를 취했으면서 친구가 사랑의 시작을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면 너무도 확신에 차 그러지 말라고 충고한다.
사랑은 무조건 해야 하는 거라며.
사십이라는 나이를 목전에 둔 덕분에 홍역을 앓고 있으면서 나이 때문에 섣불리 조로하는 동생을 보고는 흥분한다. 화를 낼 정도다.
나이 따위가 다 뭐냐고.
어찌된 일일까. 이것이 남의 일로 충고를 해줄 때와 본인 일로 닥쳤을 때의 차이인 걸까?
분명한 것은 저런 말들을 사실은 놀랍도록 무심해지고 나약해진 요즘의 나 자신에게 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조언이란 남의 상황을 빌어 자신에게 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달으며.
■ 오, 나의 음식들아!
야채는 순둥이, 고기는 못됐다. 기름이라는 녀석들은 능글능글하고 고춧가루는 집요할 정도로 표독스럽다. 먼 나라 미국에서 방부제를 잔뜩 머금은 채 건너온 밀가루들, 그들은 빵이나 면발이 되어 전국의 제과점과 분식집을 통해 미욱스럽게도 사람의 건강을 꾸역꾸역 좀먹는다. 밀가루는 이처럼 음험하다.
오돌도돌 닭살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닭고기는 징그럽고 육덕지지만 지지자들이 광범위한 탓에 늘 인기가 식을 줄 모른다. 그들은 물과 함께 삼계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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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되어 복날 몸보신용으로 제공되며 기름으로 튀겨지면 술안주로도 각광 받는다. 방부제로 키워진 닭이 많긴 하지만 손쉽게 단백질을 섭취할 수 있다는 장점도 무시할 수는 없다.
또 서민들이 즐겨 찾는 고기로는 돼지고기를 빼놓을 수 없는데 녀석은 영양이 풍부하고 싸고 맛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대신 장이 약한 사람에게는 독이 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른바 ‘찬’음식인 돼지고기는 밀가루와 더불어 장의 건강에는 좋지 않은 콤비이기 때문이다.
가격만큼 부티가 나는 회의 맨살, 바다 냄새가 날 것만 같은 영양만점의 미역국과 시원한 콩나물국, 도라지, 고사리, 각종버섯, 호박과 각종 야채들, 뭐니 뭐니해도 음식의 꽃이라는 소고기 요리까지.
그러나 짐작했겠지만 나는 이제 일생토록 즐겨온 이 음식들을 더는 양껏 즐길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속이 예전 같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을 절제 없이 과하게 탐해온 죄로 이리 된 것은 알겠으나 아무리 그래도 음식이란 기본적으로 나쁜 놈들이다. 왜냐하면 맛있는 건 전부다 몸에 안 좋으니까. 세상에 맛있는 양념갈비도 안 좋다고 하지 회는 날것이라 조심하라지, 온갖 맛있는 것들엔 죄다 들어가 있는 밀가루는 최고로 안 좋다고 하지. 그러니 이런 것들을 다 빼고 나면 도대체 무엇을 먹으라는 말인가.
꾀나 오래전 일이다. 어릴 적 TV에서 중견 탤런트 김성원 씨의 당뇨 투병기를 본 적이 있는데 그분이 한 말 중에 잊히지 않는 의문이 드는 것이 있었다. ‘먹고 싶은 걸 못 먹는 고통은 안 당해본 사람은 결코 알 수 없는 극한의 고통’이라고. 어린 마음에 그 말이 잘 와 닿지 않았던 이유는 과연 음식 못 먹는 게 여자 못 만나는 것보다 더 힘이 드는 일일까 하는 점이었다.
그런데 나이 들어 겪어보니 이제야 그분들의 말뜻을 알겠다. 우리집 내력이 장은 약해도 위는 튼튼해서 서른일곱이 될 때까지 소화제 한번 먹어본 적이 없을 정도였는데, 작년부터 매운 걸 먹거나 술을 좀 마시면 어김없이 탈이 나곤 하니 툭하면 뭔가를 먹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올해에만 벌써 두 번째. 아, 그런데 이게 정말 사람을 외롭게 하는 거라. 먹을 것이 왜 중요한지 이제야 알겠다. 먹을 것은 친구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불안과 두려움을 동반하지 않았던 나의 마지막 식사를 기억한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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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회사에서 회식을 하자고 했다. 얼마 전 장염을 심하게 앓았기 때문에 조금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지만 별다른 내색 없이 참석했다. 이미 보름이나 흘렀으니 지금쯤이면 괜찮을 것이라 판단했던 것이다 나는 실로 오랜만에 고추장 소스가 잔뜩 뿌려진 막국수를 두 그릇이라 먹었다. 그리곤 삼겹살로 배를 채운 후 다시 2차로 자리를 옮겨 또 돼지고기를 안주 삼아 밤새 술을 마셨다. 그것이 나의 정상적인 마지막 식사였다. 그리고 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나의 속은 다음날 아침 완전히 뒤집어져 응급실로 실려 갔고 그때 병원을 들락거리던 3일 동안 몸무게가 무려 6킬로나 빠졌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난 지금 체중은 마이너스 14킬로가 되었다. 그 이후로 나는 사랑했던 음식과의 이별이 갑작스럽게 나를 찾아왔다.
일주일의 식사가 총 스물한 끼라 했을 때 그중 단 몇 끼만이라도. 아…하루는 시원한 고기육수에 두텁고 탄력 있는 면발을 입안에서 뚝뚝 끊어가며 냉면을 먹고…또 하루는 나의 영원한 동반자들이 빵과 떡볶이, 라면 등 밀가루 음식들과 눈물 어린 재회를 하고 …나머지 한 끼는 고기나 회를 술과 곁들여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약속한다. 그 외의 식사에서는 단호히 절제할 것이다.
오 음식들아. 사랑하는 나의 음식들아. 내가 다시 너희와 만날 날이 올 수 있을까? 만약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지금 먹고 있는 이 멋없는 죽도 기꺼이, 기쁘게 먹으며 기다리리라.
■ 내시경
얼마 전 일이다. 속이 좋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무서워서 내시경 검사를 미루고 있던 어느 날. 어머니가 위내시경을 받으러 간다는 것이다. 아버지도 안 계신데 혼자 가신다고 해서 내내 마음에 걸렸지만 워낙 바쁜 탓에 전화만 드리고 말았다.
“엄마 전화 받았어?”
“응.”
“수면내시경으로 했지?”
“아니 그냥 일반으로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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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왜?”
“돈이 얼마냐. 그냥 받으면 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돈 몇만 원 때문에 그 힘든 내시경을 수면으로 안 받고 맨정신으로 받았다니. 그 후 시간이 지나 나 또한 도저히 더 이상은 버틸 재간이 없어 일원동에 있는 삼성병원으로 내시경 검사를 받으러 가게 되었다. 엄마가 검사를 받았던 곳과 같은 병원이었다.
나는 그날 병원에 가서야 알았다. 그 병원에서는 보호자가 오지 않으면 수면내시경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언제부턴가 나는 엄마의 상전이 되었다. 아들이 원하는 무엇인가로 걸러내어 억압하고 채근하던 엄마는 이제 행여 자식 일에 지장을 줄까봐 노심초사하는 늙은 어머니가 되어 있었다. 늘 뭔가를 시키던 입장에서 이제는 그 어떤 작은 부탁을 하는 것도 그렇게 어려워하는 분이 되셨다. 그렇게 자식들에게 조금이라도 짐이 되는 것을 싫어하시기 때문에 엄마는 나에게 혹은 누나들에게 같이 병원에 가 달라는 말을 하기가 부담스러웠던 거다. 그러면서 엄마는 내가 삼성병원에 다녀온 날. 내 검사일을 꼼꼼히 적어 놓으셨다.
검사 당일 . 민망하게도 엄마가 동행해 주었다. 나는 엄마의 보호자 구실을 해드리지 못했는데 나이 마흔이 되어가는 아들은 늙은 어머니의 에스코트를 받고 있었다.
다 큰 아들은 그렇게 칠순 노모의 보살핌을 받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아직도 어른이 아니었고,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건 엄마에게 다음부터 다시는 병원에 혼자 가지 마시라 당부하는 것뿐이었다. 그 말을 건네는 나의 입이 부끄러웠다.
■ 내편
한때는 이른바 ‘처세’라는 걸 잘 하는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적도 있었지. 순수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내 편을 만드는 일은 정말 중요하더라구.
너무 약삭빠르게 처신을 하는 것도 좀 그렇지만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건 자신에게 죄를 짓는 일인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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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과 선언
더 이상 타인에게 기대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내가 되었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순간
거짓말처럼 나를 옴짝 달싹 못하게 하는 상대가 나타난다.
이제 담배를 완전히 끊은 것 같다고 말하는 순간
이제 나는 너에게서 완벽하게 자유롭다고 말하는 순간
깨닫는다.
결코 이직은 그럴 수 없음을.
선언의 허망함은 결심을 토하는 것에서만 비롯되지는 않는다.
감정을 표현할 때도 마찬가지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은 얼마나 많은가.
왜 사랑한다고 말하고 나면 그 순간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허망함이 밀려오는 걸까. 왜 그것을 입에 담는 순간,
그토록 복잡한 생각이 들며 마의 말의 진위가
스스로 의심스러워지는 걸까.
‘보고 싶어’ ‘좋아해’ ‘사랑해’
아무런 의심이나 회의 없이, 정말로 순수하고 영원하게
느껴지는 그 말들을 듣고 믿어 의심치 않던 그 순간들이 그립다.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 다시금 듣는 사랑해, 라는 말은
여전히 애틋하지만 어쩐지 지금의 그 말 속에는 슬픔이 배어 있다.
참 희한한 일 아니냐.
사랑한다는데, 세상에서 내가 제일 좋다는데,
이처럼 아름답고 소중한 말을 내가 그토록 귀히 여기는 사람에게서
듣고 있는 데도 어째서 기뻐 웃지 못하고
슬픔으로 아득한 기분이 되어버리는 것일까.
말이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기억될 뿐이다.
나를 황홀하게 했던 수많은 말들은 언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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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귀에 들어오는 순간 사라져 버렸다
말이란 이처럼 존재와 동시에 소멸해버리기에
그토록 부질없고 애틋한 것인지도 모른다.
2 장
■ 여행의 시작
여행이라는 것은 본래부터 사람의 기분을 감상적으로 만들어 주는 행위인
것일까. 나는 알고 싶었다. 내가 그간 가본 곳이라고는 강원도와 경주, 또 런
던과 일본의 크고 작은 도시와 민가 몇 군데가 전부인데, 그나마도 일 때문
에, 혹은 신혼여행 덕택으로 간 곳들뿐이다. 나는 여행 자체를 목적으로 떠
나는 여행은 거의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곳들은, 원래부터 여행지로서의 감상적인 외로움을 느끼기에 적합
한 곳들이라 여겨졌다. 이를테면 늘 기후가 흐린 탓에 도시 전체가 갖고 있
는 기운이 애시당초 저조할 수밖에 없는 런던과, 섬나라 특유의 가라앉은 분
위로 인해 활기와는 거리가 먼 일본이 그러했으며, 강원도만 해도 지역 전체
를 감싸고 있는 애잔한 기운 덕택에 늘 쓸쓸한 기분을 던져주는 곳이고, 사
시사철 마치 눈이 내린 듯 고요한 경주 또한 엇비슷한 감정을 자아내기는
마찬가지인 도시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내가 찾았던 곳이 동해가 아닌 서해나 남해였다면 어땠을까.
또, 런던이나 일본이 아닌 남아프리카 공화국이나 뉴질랜드였다면 어땠을
까. 과연 그곳에서도 강원도 동해 바다에서 느껴지는 그 설명할 수 없는 감
정과 기분을 맛볼 수 있었을까. 다시 말해 어떤 곳이건 모든 여행자들이, 단
지 낯설고 먼 곳이라는 이유만으로 한결같이 쓸쓸한 감정을 자아내리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서해와 남해에서는 동해의
그것이 아닌 그곳 고유의 영혼과 기운이 존재할 테니까.
사실 나는 강원도를 여러 번 갔으되, 결코 여러 곳을 다녀본 적이 없다. 숙
소는 거의 설악산 근처 K호텔에 잡고, 도착해서 짐을 풀고 나면 설악산 비
룡 폭포에 올랐다가 저녁이면 대포항에 가서 술과 회를 먹고 잠을 잔 후 다
음날 서울로 돌아오는, 이것이 몇 번을 가든 판에 박은 듯 되풀이 되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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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진부한 강원도행의 전부였다. 사실 진짜 여행은 무엇인지 나도 잘은 모
른다. 다만 지금 내게 중요한 것이 가보지 않은 곳을 가는 것이라면 그런 의
미에서 내게 강원도는 ‘가보지 않은 곳’이나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나는 강
원도의 진짜 모습, 내가 보지 못했던 모습을 보고 싶었다. 비록 내가 알고
있는 강원도가 그곳의 전부라 해도 말이다.
아침부터 병원에 들렀다가 오랜 시간 운전을 하고 오느라 몸은 피곤했으나
시간이 아까워 방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었다. 우리는 우선 바로 옆에 있는
낙산사부터 찾기로 했다. 낙산의 바닷가를 정면에서 바라보고 있는 이 특이
한 절은 몇 해 전 큰불이 나서 사찰전체가 커다란 피해를 입었던 곳이다.
화마의 흔적은 잔인했다. 절의 골조를 이룬 나무들이 모조리 새것이었으니
까, 우리는 ‘입장료는 무료’라고 쓰여 있는 팻말을 지나 낙산사 경내로 진입
해 들어갔다.
어느새 뉘엿뉘엿 해가 져 바다는 붉게 물들고 있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
었다. 왜 바다는 산에 비해 이처럼 쓸쓸하고 무서우리만치 적막한 기분을 전
해 주는 것일까. 왜 산에 오르면 산은 나를 포근하게 감싸안아주는 것만 같
은데 저 검고 깊고 두려운 바다를 보고 있으면 언제라도 나를 그 속으로 빨
아들이기라도 할 것처럼 무섭고 황량한 기운이 느껴지는 걸까.
시커먼 바다 속은 언제나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을 느끼게 해준다. 그것은
바로 종말,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 그날도 어김없이 바다는 마치 종말처
럼 다가왔다.
새 나무로 다시 지어진 대웅전 앞으로 가니 한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며 수
행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나는 절대로 도 같은 건 닦지 못할 거야. 속세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인간이니까 그러니 난 수없이 닥쳐올 끝과 마주하며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겠지.’
태양이 바다 속으로 사라져 갔다.
다시 여행을 시작하며, 나는 이렇게 강원도에서 첫날을 보냈다. 강원도가 갖고 있는 이 고유의 느낌은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되는 걸까. 왜 이곳에 오면 언제나 거부할 수 없는 이토록 애잔한 기운이 나와 동행한 이를 감싸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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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정한 친구를 가리는 법
친구가 슬프고 불행한 일을 당했을 때 함께 슬퍼하고 위로해 줄 수 있는 친구와 좋은 일, 기쁜 일이 생겼을 때 진심으로 축하해 주고 기뻐해줄 수 있는 친구 중 어느 쪽이 더 크고 진한 우정이라 할 수 있을까.
누구는 묻겠지. 그 둘이 다른 거냐고. 하나가 되면 당연히 다른 것도 되는 것 아니겠냐고.
하지만 이 문제는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세상엔 저 둘 중 하나밖에 해줄 수 없는 우정이 훨씬 많거든. 슬프지만 그게 진실이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친구의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문상을 가게 되었을 때, 마치 그 순간만큼은 원래부터 친했던 사이인 것처럼 진심이 발동해 위로했던 경험을 누구나 몇 번씩은 갖고 있다. 그것은 결코 가식이 아니다. 슬픔의 위로는 대단한 우정이 아니라도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좋은 일이 생겼을 때, 어느 날 친구가 로또를 맞았다고 치자. 그걸 내 일처럼 기뻐하기가 쉬울까? 언젠가 한번 그런 일을 겪은 적이 있었다. 어느 날 제일 친한 친구였는데, 그에게 믿을 수 없는 행운이 찾아왔다. 친구는 내게 실시간으로 일의 진행 상황을 전하다 마침내 대박을 알려왔는데, 거짓말처럼 일이 풀려가는 걸 보며 놀랍고 기쁘면서도 내 마음 한 구석에 한 10%쯤의 질시의 감정 또한 커져가던 걸 난 또렷이 기억한다. 내 제일 친한 친구이자 나와는 상관없는 분야에서 일하는 친구였는데도 말이다. 그러니까 그의 일이 잘 되어도 내 몫이 줄어들거나 나와 비교될 일 같은 건 없을 텐데도 말이다. 내 맘이 그렇게 되더라는 것이다.
사실 그런 감정이 드는 게 꼭 나쁜 마음에서만은 아닐 것이다. 이제 친구와 나의 처지가 사로 달라질 테니 예전처럼 지내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한 마음도 있을 것이고, 그런 것들을 다 떠나서 그저 곁에 있는 누군가의 갑작스런 성공을 목격하게 되면 자연스레 본능적인 질시의 마음이 들 수도 있는 것 아닐까?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해도 말이다.
솔직히 나는 내 자신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그때 알게 된 거다. 슬픔을 위로하는 것보다 기쁨을 나누는 것이 훨씬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난 반성했다.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때 생겼던 나의 질투심은 축하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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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10% 정도에 불과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90%는 진심으로 기뻐했으니까. 근데 20%아니었냐고? 사실 톡 까놓고 50% 아니었냐고? 아니, 솔직히 말하면 은근히 그 일이 엎어졌으면 하고 바라기까지 하지 않았냐고? 너무 자세한 것은 묻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만약에, 만에 하나 정말로 그랬다면 그건 모두 내 안의 악마가 벌인 일일 뿐이라는 걸 알아줬으면 한다. 그 애의 가장 친한 친구인 내가 그랬을 리는 없을 테니까.
■ 이사
이사를 많이 다닌 편은 아니다. 스물여덟 살에 결혼을 하기 전까진 한 번의 이사도 없이 한 집에서 줄곧 살았다. 그러다가 결혼을 하게 되어 두 번 정도 이사를 했고 이혼해서 다시 부모님과 합친 후 지금까지 5년 남짓 살아온 것이 나의 이사 이력의 전부이다. 때문에 이제, 또 한 번의 이사를 앞두고 있는 나의 마음은 그리 평온하지 못하다. 원래부터 이사를 좋아하지 않는데다 좋은 이유로 더 좋은 곳으로 가는 것도 아니었고, 더구나 아파트에서 살다가 주택으로 가는 만큼 주차문제라든가 관리 문제 같은 여러 번거로움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익숙한 곳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힘들었다.
마음이란 뭐든 떠나게 된 후라야 관대해지는 것인가 보다. 그동안 살던 곳에서도 층간 소음이며 사용법이 복잡한 보일러 때문에 꽤나 불편을 느끼며 살아왔는데 이사가 결정되고 나자 자기 집이 너무나 아늑하고 편하게만 느껴지는 거다. 이곳이 이렇게 조용했었나? 이제는 벽보까지 써 붙여가며 고통을 호소했던 앞 동 개 짓는 소리쯤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을 것 같았고 윗집 쿵쾅거리는 소리엔 왜 그렇게 날을 세웠었는지 내 자신이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한 달, 이별을 앞두고 나서야 나는 이곳에서 살던 5년 중 가장 행복하고 아쉬운 시간들을 보낼 수 있었다.
한 달은 이별을 준비하기엔 부족하지 않은 시간인 줄 알았다. 5년간 산책하고 달리기 하던 아파트 앞뜰을 다시 한번 찬찬히 둘러보고, 거리에서 늘 지나치던 행상하는 아주머니들에게 마음속으로 인사도 하고, 마지막으로 나와 가족의 손때가 묻어 있는 집 안 구석구석을 음미해보고도 싶었지만, 늘 그렇듯 일상에 쫓겨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어지간하면 피하고 싶었던 이사였다. 그러나 사정상 그럴 수가 없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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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새 집이 조용하기만을 바랄 뿐, 다행히 새 집, 새 동네는 조용했다.
우리 집은 망했다. 그래서 살림 규모를 줄이기 위해 이곳에 왔다. 따라서 우리가 이곳에 얼마나 살게 될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운이 좋아 형편이 풀린다면 미련 없이 떠나겠지만 그런 보장이 없는 지금으로선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년이 될지 아니면 오 년이 될지…그것도 아니면 영영 머물게 될지. 낯설고 정이 가지 않는 곳, 운동을 위해 동네를 산책할 때마다 어쩐지 이곳이 서글프게 느껴진다. 내가 이처럼 정을 주지 않으니 아마 이곳 또한 나에게 정을 주지 않을 것이다. 이곳에서의 모든 내 시야의 기억들은 결코 추억으로 남지 않게 될까? 새집에서의 한 달, 어쨌든 새로운 둥지에서, 나는 또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 사랑했던 사람
누군가 이런 말을 해 주었다.
“사람은, 전생에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로 다시 태어난대요. 전경린(소설가)이 그랬어요. 나는 누구를 사랑해서 지금의 내 얼굴이 되었나. 당신은 또 누구를 사랑해서 당신의 얼굴이 되었을까.”
내가 전생에 이 얼굴을 사랑했다고?
이 얼굴을…?
믿기지가 않는다.
■ 함께 산다는 것
스물여덟 살에 결혼이라는 걸 하게 될 때까지, 엄마는 젊은 날의 내 모든 불행과 고통의 원천이었다. 안 그래도 고된 시집살이에 아들 손자마저 안겨드리지 못해 더더욱 힘겨웠던 세월, 덕분에 딸만 내리 셋을 낳은 후 7년 만에 태어난 나에 대한 엄마의 집착과 기대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때 나는 하루에 무려 일곱 군데의 학원을 다녔다. 지금은 어떨지 몰라도 당시에 그렇게 하는 아이는 전교에서 나 하나뿐이었고 그 덕분에 난 어른이 된 지금도 뭔가를 배우는 일, 특히나 뭔가를 배우러 어딘가로 가야 하는 일이라면 진저리를 칠 정도로 싫어하게 되었다. 어렸을 적에 울 어머니는 나에 대한 구속이 너무나 심하셔서 그 때문에 난 소아정신과 신세를 져야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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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였다.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내게 엄마의 허락을 받지 않은 외출이란 건 허용되지도 상상할 수도 없었다. 아니 상상은 너무 많이 했었지. 하지만 상상에 그쳤을 뿐이다. 그런 엄마 때문에 결국 스무 살이 넘어서는 정신병원 폐쇄병동에 입원하기까지 했지만 엄마는 지금까지도 내가 무엇 때문에 의사 앞에서 그렇게 괴로워했는지 알지 못한다.
말을 한다고 해서 이해할 수도 없는 일이고, 굳이 연로한 부모 마음을 이제 와서 못을 박는 것도 다 부질없는 일이다. 그래서 어린 날, 나를 그렇게 힘들게 했던 그 모든 사연들은 언제까지나 나만의 기억으로, 아니 이젠 나 스스로조차 언제 그랬던가 싶을 만큼 희미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병원을 다닌 4년 동안 난 약을 먹지 않았는데 내 병은 약으로 치료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의 뇌 안의 어떤 부분이 생리적으로 잘못되어 그로 인해 내 마음, 생각, 또는 기분과 판단이 이유 없이 어그러지는 것이라면 모를까 나처럼 명백한 원인이 있는 사람에게는 처방이란 한 가지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함께 사는 게 문제라면 두 사람을 떨어져 살게 해야 낫는 것이지 여전히 같은 집에 살면서 아무리 병원에 다니고 약을 먹고 해봐야 백약이 무효가 아니겠는가. 처방은 맞아들었다. 결혼을 해서 처음으로 엄마와 떨어져 살게 되자 고통이 거짓말처럼 눈 녹듯 사라진 것이다. 문제가 해결된 게 아무것도 없는데, 엄마와 나 사이에 결론이 난 게 없는데 단지 떨어져 산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갈등이 사라지고 다만 애틋한 마음만이 남더라. 기가 막혔지만 산다는 게 그렇게 단순했다.
나는 다행히도 독립을 하게 되면서 떨어져 사는 것의 위력을 체험한 바 있다. 과연 떨어져 살게 되자 엄마에 대한 모든 불만은 사라지고 오직 인륜으로서의 감정, 애틋함과 효도하고 싶은 마음만이 충만하게 되었던 것이다. 만약 떨어져보지 않았던들 이러한 마음을 가져볼 수 있었을까? 문제는 내가 이혼을 하면서 다시금 부모님과 함께 살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제는 나도 어른이 되고 엄마도 어느 정도 연로하셨으니 그래도 예전보다는 서로 지낼 만하지 않겠는가. 조심스레 기대를 해보면서 그렇게 다시 엄마와, 또 아버지와 동거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이번엔 엄마가 ‘너 때문에 못 살겠다’ ‘미치겠다’를 연발하게 된 것이다. 어릴 적에 나를 일방적으로 통제하던 엄마가 이제는 아들에게서 끊임없는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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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들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고나 할까.
어렸을 때, 왜 함께 사는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미움을 사고 떨어져 사는 자식들은 예쁨을 받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엄마를 사랑하는 것과 새벽 두 시에 일어나서 소리를 내며 집안일을 하는 엄마 때문에 잠을 못 이루는 건 별개의 문제라는 것,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과 하루 종일 미친듯이 커다란 볼륨으로 마루와 온 방안의 TV를 켜놓은 채 생활하는 아버지를 감내해야 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라는 것을. 그런 일상의 불가항력 속에서 부모님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점점 휘발되어 가고 있는 것을 느낄 때 나는 슬프다. 떨어져 사는 누나들은 그런 일상의 부대낌 없이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애틋함을 온전히 간직할 수 있겠지. 나도 부모님과 떨어져 살고 있었더라면 더욱 잘해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 현실은 아침부터 떠들썩한 TV소리에 잠이 깰 때면 어떤 때는 발작을 할 것만 같다.
모르겠다. 그렇다고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각기 떨어져 혼자 살아야만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다만 할아버지 할머니로부터 아버지 어머니로 이어져왔던, 이 함께 살기 때문에 생길 수밖에 없는 미움의 사슬을 물려받지 않기 위해선 어떡해야 하는지, 나의 부모만큼은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 좀 더 행복하고 따스한 기억이 가득했으면 하는데 그것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일지 알고 싶다.
2016. 5. 6
* 다음에 2부의 중반부터 3부, 4부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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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존재 (2)
■ 이석원 산문집
■ 어느 보통의 존재
누구나 자신에 대한 기대라는 것이 있고 그것이 실제로 오르기 어려운 산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세월이 필요하다. 그 깨달음을 스물다섯에 얻는다면 그건 바보 같은 일일 것이고, 서른이라 한들 속단하긴 마찬가지다. 그러나 마흔 언저리쯤 되면 반드시 포기하고 받아들여야 할 때가 온다. 그때가 되면 마지막 몸부림도 쳐보고 온몸으로 거부도 해보지만 결국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나 자신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확인이다.
자신을 안다는 것, 그 잔인한 일 말이다.
어릴 적 나는 꾸미고 감추는 데 헌신적이었다. 외출을 할 때면 발걸음이 아무리 불편해도 신발 안쪽에 겹겹이 밑창을 쌓아 올려 키높이 운동화를 만들었고, 만나는 사람에 따라 거주지는 시시때때로 바뀌었으며, 어디를 가도 누구를 만나도 모르는 것을 아는 척, 가지지 않은 것을 가진 척 하느라 거짓말도 서슴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그렇게 나를 부정하고, 가리고, 아닌 척하기 위해 들였던 많은 공들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건 철이 들어서가 아니었다. 결국 있는 대로 드러내는 것이 가장 훌륭한 감추기이자 꾸밈이라는 진리를 터득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비로소 그 모든 콤플렉스들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나는 이제 안다. 내 키는 크지 않다는 걸. 난 결코 잘 생기지 않았다는 걸. 난 잘나지도 똑똑하지도 않은 사람이라는 걸. 어쩌면 진작부터 알았을지 모른다. 다만 진짜 내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을 뿐.
누군가에게 ‘당신은 소중한 존재’ 라고 말해주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다. 사람의 인생이 공평한 지위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뿐더러 귀하고 대접받는 삶을 사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날 때부터 하찮거나 혹은 별 볼일 없는 존재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도 많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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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이 희망을 노래하고 거의 강요에 가까운 긍정을 이야기 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사람이란 저마다 타고난 인격과 재능에 격차가 있고, 그것을 가지고 각자 귀천이 분명한 직업을 선택하게 되며, 그에 따라 개개인의 사람을 품을 수 있는 꿈의 한계 또한 정해져 있다. 세상의 감춰진 진실이 이러할진대 그러나 사람들은 그러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목도하길 원하지 않는다.
■ 죽음에 관한 상상
사람이 죽으면 장례라는 걸 치른다. 3일 혹은 5일 경우에 따라 7일까지 영안실이 마련돼 생전 돌아가신 분의 가족 친지 지인들의 조문을 받고 마지막 날 발인을 한 후 화장을 하거나 아니면 무덤에 관을 넣고 봉분을 울린다. 그 이후로는 종교적 선택에 다라 49제가 있기도 하다.
사람이 죽으면 죽는 그 순간에 우리가 영혼이라 부르는 것은 어떻게 될까. 정말로 영혼이 있어서 장례를 치르는 동안 이승에 머무르며 자신의 장례를 지켜보다 마지막 절차가 끝나면 하늘로 올라갈까. 아니면 그런 것은 다 사람들의 추측과 바람에 불과하고 그저 완벽한 소멸만이 있을까.
미궁은 죽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세상에는 죽음 이후에 대해 수없이 많은 추측과, 연구와 상상에서 비롯된 온갖 이야기들이 있지만 그 누구도 죽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죽음을 앞 둔 사람의 의식이 점점 흐려지다. 어느 순간, 그러니까 사람들이 죽었다고 말하는 바로 그 순간 심장이 멈추고 뇌의 기능이 최종적으로 정지하고 나면 과연 그 순간부터 죽은 사람의 내면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하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은 결코 알 수 없는 세계인 것이다.
관건은 소멸이냐 아니냐 하는 점.
‘죽으면 다 끝이다. 영혼이고 뭐고 없다’라는 말이 맞다면 정말이지 인간적이지도 않고 허탈하기만 할 것 같다.
반면 ‘영혼이 있다’는 가정이 사실이라면 조금 위안이 된다. 먼저 혼이라는 것이 유체를 이탈해서 공중을 부유하며 죽은 자신의 모습을 보겠지. 그리곤 이리저리 날아다니다. 이내 자신의 죽음을 발견하는 사람들을 하나 둘 지켜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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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어나서 처음 가족의 죽음을 접했던 건 스물네 살 때였다. 할머니는 오랫동안 당뇨, 중풍을 포함한 온갖 병을 앓으셨는데 나중에는 흔한 말로 벽에 똥칠 할 때까지 사셨다.
이제 가실 시간이 되어 할머니의 자식과 손자들이 전부 모였다. 아버지는 아는 경찰들에게 연락해 사망신고 절차에 관해 부탁을 하시고 서울대학병원 영안실을 예약하는 등 분주하셨고 고모들은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며 슬퍼하는데 내가 맡은 일은 오랫동안 굳어버린 할머니의 굽은 다리를 펴드리는 일이었다.
이윽고 아들 둘과 딸 넷을 낳으시고 그 자식들이 다시 수십의 손자 손녀들을 낳아 저마다의 삶을 살게 한 할머니는 팔십몇 세를 일기로 하늘나라로 영면하셨다.
죽음이 사람을 슬픔으로 열 오르게 하는 건 다시는 볼 수 없는 영원한 헤어짐이기 때문이다. 영원히 헤어지는 것만큼 슬프고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또 있을까. 그런데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건 당시 나에겐 슬픔도 슬픔이지만 문제는 슬픔의 지속 시간이었다. 장례를 마친 후 집에 있자니 너무 쓸쓸하고 마음이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누나들에게 이렇게 영원히 슬프면 우울해서 어떻게 사냐고 진심으로 걱정이 돼서 물어보니 다들 대수롭지 않다는 듯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고 하는 게 아닌가. 난 너무 슬퍼서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는데 한 일주일인가 지나니 마치 거짓말처럼 감정이 스르륵 페이드아웃 되는 걸 경험했을 대, 그때의 그 황당한 기분을 잊을 수 없다. 마치 슬픔이무슨 물체라도 되어서 누가 그걸 갖다 줬다가 도로 가지고 간 것만 같은 그런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슬픔과 상실감은 시간이 지나면서 풍화된다. 어떤 것은 풍화가 되다, 되다 결국엔 마지막 한 줌 가루가 되어 그마저도 바람에 쓸려가지만 또 어떤 것은 종래에도 완전히 다 쓸려가지 않고 최후의 덩어리로 남아 화석이 되기도 한다. 나는 죽음과 함께 모든 것이 사라지길 바란다. 그래서 내겐 앨범이란 것이 없다. 기록은 내 머릿속에 있는 기억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나는 죽음 이후의 세계가 존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만 소멸 직전에 약간의 절차를 기대할 수 있다면 장례를 치르는 동안 영혼이 죽음을 준비하고 세상과 이별할 시간을 가질 수 있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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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죽으면 어떻게 될까.
해답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다.
■ 나의 사랑했던 게으른 날들
그렇게 열심히 살지도 않았고 많은 사람을 만난 것도 아니었지만
바라는 게 많지 않았으므로 마음은 평화로울 수 있었던,
가진 것 없어도 별로 쫓기지 않고
뭔가를 해내야 한다는 강박도 초조도 없었던
돌아가라면 돌아갈 용기는 없어도
그리운 것은 분명한 그때.
나의 사랑했던 게으른 날들.
■ 친구가 없어요
어려서는 아무런 이해타산 없이 그저 한동네에 살고 같은 유치원에 다닌다는 이유만으로 친하게 지낼 수 있었던 존재들이 커가면서 본격적인 자신만의 관계망을 맺어감에 따라 순수라는 단어는 점차 사라지고 세속적인 고려와 취향의 문제 등을 따져가며 친구를 만들게 됩니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주사 맞는 건 여전히 무섭듯이 사람 사귀는 법 또한
저절로는 터득이 안 됩니다. 제 경험에 의하면 돈과 친구의 공통점은 갖고
싶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언젠가는 고민을 하다하다. 그저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 하고 인정을 하고 말았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아버
지는 원래부터 친구가 중공군처럼 많은 분이셨고 나는 단지 소수의 친구만
을 가진 채 살아가야 하는 성격과 팔자를 갖고 태어났을 뿐이라고 말입니다.
정말로 친구가 하나도 없어서 누구 하나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세월이 이십 년쯤 지난 지금의 나는 그때보다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는데도 때때로 혼자 다니던 그때가 그립다는 생각을 꽤나 자주 한다는 사실입니다. 늘 친구가 없는 상황에 쫓기고 두려움을 갖고 있으면서도 혼자인 시절이 그리운 것은 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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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 왜 나는 이처럼 많은 지인들 틈에서 '친구'라는 존재를 발견하기가 힘든 것일까.
제 주변에 제법 발이 넓은 두 사람이 어느 날 각각 저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난 친구가 없어."
몇 년 전 얘기입니다. 그리고 둘은 잘 살았죠. 한 친구는 직장 다니면서 책도 내고 자식도 낳고 또 한 친구는 방송일, 시나리오 작업 하면서 자리를 잡고. 이 둘은 성격이나 하는 일의 특성상 분명 주변에 사람이 많은 인간들이라 당연히 친구도 많아 보였기 때문에 전 그 두 사람을 볼 때면 왜 친구가 없다고 생각하는지 궁금할 때가 많았습니다. 얼마 전 그중 한 명이 내게 또 이런 말을 하더군요.
"이런 얘길 할 수 있는 친구는 석원이 너밖에 없어."
예전에 친구가 없다고 털어놓았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과 지내게 된 지금도 그 친구는 여전히 이런 고백을 합니다. 그렇다면 그 친구의 결혼식에 왔었던 백 명도 넘던 그의 친구들은 도대체 그에게 무엇이었던 걸까요.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타인이란 존재는 절대적입니다. 나의 말은 들어주는 사람이 있을 때라야 비로소 말이 될 수 있고, 나의 행동과 내가 빚어내는 모든 결과물들은 지켜봐주는 사람이 있을 때 비로소 '의미'라는 것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그렇게, 내가 지금 어느 곳에 서 있는지, 어떤 사람들과 어울려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해답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들을 우리는 친구라 부르며 이런 중요한 일을 해주어야 하는 사람이 없거나 그 수가 많지 않을 때, 우리는 외롭고 또 고민하게 됩니다.
제 나이 서른여덟, 그러나 아직도 저는 남은 세월, 저의 새로운 친구들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정의 거미줄을 촘촘히 쳐놓은 채 단 한 사람이라도 나와 생각과 취향이 비슷하며, 나에게 동류라는 동질의 행복감을 느끼게 해 줄 수 있는 사람, 같은 것을 보고 웃을 수 있는 유머의 코드가 맞는 사람, 나를 이해해 주고 내편이 되어 줄 수 있는 사람을 묵묵히 기다리다 언젠가 그물에 누군가 걸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최선을 다해서 나를 보여주고 마음을 열 생각입니다. 역시 친구를 만드는 최고의 방법이란, 다가오길 기다리는 것보단 내가 먼저 다가가는 것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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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가 말을 걸면 왜 화부터 날까
내가 나이도 있고 나름 효심도 있는 편이어서 엄마를 생각하는 마음도 깊은데 이상하게 엄마가 말을 걸면 밑에서부터 뭔가가 치밀어 올라온다.
'이제 내일 모래도 아닌 내일' 마흔이 되는데다 효심도 깊은 내가 왜 그러는 걸까. 이런 상황이 닥칠 때마다 사실 엉뚱한 말을 하는 엄마보다도 내가 더 이해가 안 간다. 아니라고 말하면 될 것을, 좋게 설명하면 될 것을, 다른 사람에게는 그토록 예의바르게 대하면서 정작 내 어머니한테만 이러는 이유를 나도 정말 모르겠다.
■ 두 사람
"계속 내 생각만 나지?"
"네."
""어려서 그래."
"나도 계속 네 생각만 나."
"왜요?"
"늙어서 그런가봐."
■ 공격과 수비
어떤 사람이 생활비가 없어서 몰래 회사의 기물을 내다 팔았다.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은 만 원짜리 120장. 그는 두툼해진 지갑을 들고 밥을 먹으러 갔다. 유명한 집이었는데 이상하게 맛이 없었다. 식사를 마치곤 집으로 돌아가는데 아뿔싸, 120만 원이 든 지갑을 그곳에 두고 온 것이다. 서둘러 먼 길을 돌아가 찾아봤지만 현금 가득한 지갑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그는 미쳐버릴 것 같은 자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그것은 120만 원을 받아들었을 때 느꼈던 약간의 안도감과는 비교도 안 되는 강도였다.
어릴 적 비슷한 말, 반대말을 공부할 때 얻는 것의 반대말을 잃는 것이라 배웠는데 이 둘의 강도가 왜 서로 등치되지 않는 건지 모르겠다. 왜 같은 값이면 기쁨보다는 슬픔, 혹은 불안, 걱정이 더 센 것이며 사랑보다 미움과 원망이 더 진하고, 획득하는 것보다 상실이 더 크게 와 닿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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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독
어릴 적 나는 집에서 가족들이 이탈자 없이 모여 도란도란 옥수수를 쪄 먹고 대화 나누는 것을 큰 낙으로 여기던 아이였다. 늘 바쁘던 누나들이 모처럼 다 모이고 엄마까지 함께 누워 야밤에 이야기판이라도 벌어지는 날에는 그렇게 흥분이 되고 즐거울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시간이 영원히 계속되길 바랬다.
하지만 밤은 깊어가고 한 명 두 명씩 잠이 들면 이내 대화는 시들어 갔다. 그럴 때면 나는 혼자서 그 어둡고 무거운 적막을 감당해야했다. 통행금지가 끝나고, 도로를 지나는 자동차의 그림자가 방안 천장에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새벽이 되면 나는 그제서야 잠이 들었다.
지금도 이해되지 않는 한 가지는, 왜 내겐 대화판에 낄 자격이 주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즐겁고 빠르게 오가는 말들 속에서 신중히 타이밍을 노려 한 마디를 던져봐도 내 말은 언제나 보기 좋게 묵살당하기 일쑤, 나는 지금까지도 그게 분하다.
자기들 대화에 방해가 되지 않을 만큼 충분히 생각해서 주제에 걸맞은 질문을 던졌고, 말이 끊어지지 않도록 적절한 타이밍을 잡아 한마디를 했을 뿐인데도 도대체 왜 누나들은 내 말엔 대꾸를 해주지 않았던 걸까. 나의 안타까운 말들은 언제나 혼자서 허공 속에 울려 퍼졌다간 끝끝내 저 혼자 민망하게 사라지곤 했다.
■ 목
커피는 수분을 빼앗아가기 때문에 금물, 탄산음료도 당연히 금물, 홍차 등 차 종류도 좋지 않고 녹차 역시 입을 마르게 하므로 피해야 한다. 결국 물밖에 허용되는 게 없단 얘기다. 불가피하게 술을 마시게 됐을 때는 물을 끝없이 마셔주고 우유를 포함한 대부분의 유제품도 성대에 좋지 않기 때문에 먹지 않으며 당연한 거지만 담배는 안 된다. 매운 음식 또한 좋지 않다.
침을 삼키는 행위는 목에 무리를 주므로 가급적 하지 않고 무엇보다 전화를 자제한다. 왜냐하면 노래하는 것보다 말하는 것이 목에 더 큰 혹사를 가하고, 말하는 것 중에서도 전화를 할 때 성대에 가장 많은 부담이 가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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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속삭이는 것이 오히려 더 안 좋다는 얘기가 있지만 아무래도 제대로 말을 하는 것보단 목을 아낄 수 있다. 또한 노래를 하다가 목에 무리가 가거나 통증이 생기게 되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조금이라도 노래를 해서 풀어주는 게 그대로 목이 경직되는 것보다 회복이 빠르다.
목을 관리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수분의 충분한 공급이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잘 자는 것이다. 충분한 수면 시간의 확보는 정말이지 중요한데 중간에 깨더라도 다시 잘 수 있으면 그리 큰 문제는 없다. 그리고 피해야 할 것은 소리를 심하게 지르거나 슬픈 일을 당하더라도 결코 울어서는 안 된다는 점인데, 그랬다가는 목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어 버릴 수 있다.
무대 위에 여러 연주자가 있지만 가운데 서 있는 보컬이란 자리는 다른 이들과 차별이 된다. 제 몸이 악기인 탓이다. 보통 기타라는 악기를 관리 보관하기 위해 기타리스트들은 습도계를 준비하는데 기타에 가장 민감한 것이 습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세심한 관리를 필요로 하는 악기라 할지라도 사람의 몸에 비하면 그건 진짜 비행기와 종이비행기의 격차만큼이나 차이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의 몸은 기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예민하거니와 특히나 목이라는 신체 기관은 사람의 여러 기관 중에서도 으뜸으로 민감하며, 무엇보다 사람에게는 마음이란 것이 있어서 이것이 잘못되기라도 하는 날엔 곧바로 몸에, 특히 목에 치명타가 가해지게 된다. 가수는 제 몸이 악기이다.
■ 사랑
아끼고 아끼느라
입속에 꾹꾹 눌러 몇 번이고 참고 또 참으며 담아 둔 말
사랑..해.
나는 알았다. 정말로 사랑을 하게 되면
사랑은 무엇일까
라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되는 게 사랑이구나.
하게 되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게 사랑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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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한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려 노력할 것이다.
■ 조카 이야기
한식날 성묘 갔다가 괜히 큰누이 얼굴 한번 보고 싶어 누나네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큰 누나는 '바우'라는 아명의 초등학교 2학년짜리 아들 하나를 두고 있는데 이 녀석은 비명지르기와 게임을 좋아하고 특기는 식당 같은 공공장소에서 뛰어다니기, 떠들기, 눕기 등 조카라서 그런지 정말 내가 질색하는 행동을 많이 하는 아주 개구쟁이 녀석이다.
깐깐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 누나가 이상하게 자기 아들한테만은 쩔쩔매는 이유를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지만 나라면 엄하게 키울 것 같은데 나야 애 낳을 일 없으니 실천해볼 기회는 없다고 할 수 있겠다.
그날 누나 집에는 바우와 친구도 와 있었는데 두 녀석이 하도 시끄럽게 뛰어다니기에 내가 목소리를 잔뜩 깔고 "야! 너희들 조용히 못해?"하고 한 마디 했지만 무안하게도 아이들 떠드는 소리에 파묻히고 말았다.
한마디로 애들은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다. 밥을 먹을 때도 밥은 안 먹고 딴 짓만 하기에 "야 조용히 하고 어서 밥 좀 먹자"했더니 바우는 들은 척도 안 하고 바우 친구는 "옌 뭐야"하는 표정이다.
아…다정한 삼촌과 조카 사이를 구현해보리라 다짐해온 나였건만 어쩐지 요즘 조카들을 보면 거리감이 느껴진다.
요즘 애들 정말 무섭다. 바우 친구가 누나 다리에 자기 다릴 걸치는 것만 해도 그렇다. 정말 나 어렸을 때 친구 어머니란 어렵기만 한 존재였는데 눈을 의심케 했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런 생각도 들었다. 왜 난 누가 시킨 적도 없는데 어른들 앞에서 그렇게 어려워하고 긴장해야 했을까, 왜 남의 집에만 가면 얼어붙었을까. 좀 더 편하고 솔직하게 행동할 수도 있었을 텐데.
■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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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잠을 깨면 누운 채로 처음 드는 생각
외롭다.
그럴 때면 반사적으로 '역시 결혼을 해야 하는 건가?' 하고 생각한다. 문제는 과연 결혼이란 걸 하면 외로움에서 해방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나는 결혼을 해봤기 때문에 싱글들보다는 경험적인 면에서 다소 유리한 편이라 할 수 있는데, 기억이 잘 나진 않지만 더듬거리며 그때의 감정들을 떠올려보면 그 결론이 그렇게 밝은 것은 아니다. 결혼 생활을 하는 동안 누군가 곁에 있어서 외롭지 않다고 느낀 적은 많지 않았던 것 같으니까. 사람이 외로워서 연애를 해봐도 여전히 외로운 것처럼 외롭지 않으려고 결혼을 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처방, 혹은 선택이 될 수 없을 확률이 높다. 결혼이라는 게 뭘까. 결혼이란 이를테면 영화는 평생 이 사람하고만 보겠다는 약속이다. 물론 지켜질 가능성은 희박하다. 또 결혼이란, 두 사람이 만나서 데이트를 한 후 각자 집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한 집으로 들어가 여전히 함께 있는 것. 즉, 데이트를 한 이후에도 쭉 같이 있다가 나중엔 데이트 자체가 없어지는 것 그게 바로 결혼이었다.
98년에 결혼을 해서 2004년 이혼했으니까 나의 결혼 생활은 6년 동안 지속된 셈이다. 헤어지고 처음 자유의 몸이 되었을 때는 해방감에 뼛속까지 시원할 지경이었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니 누구나 그렇듯 다시 결혼에 대한 유혹과 의무감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성과 경험은 다시 결혼해서는 안 된다고 매 순간 일러주지만 불행히도 나이를 먹어갈수록 그 결심은 흔들리게 된다. 번식에 대한 생물학적 본능과 사회적 관습이 주는 압박감들, 흐르는 세월 등 그 모든 것들이 복병인 탓이다.
결혼이라는 게 정말 뭘까. 사랑과는 결코 동의어일 수 없는 두 글자 결혼. 결혼에 대한 나의 결론은 간단하다. 생물학적으로 말이 안 되는 행위라는 것이다.
어떻게 한 사람하고만 평생 잘 수 있을까.
어떻게 한 사람하고만 평생 지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한 사람만을 평생 좋아할 수 있을까.
이것은 감정과 기호, 또는 성적인 문제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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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일대일만의 소통으로 만족하며 살아가기란 근본적으로 힘든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이 결혼이란 제도는 오로지 한 사람하고만 소통하라고 강제한다. 맞든 맞지 않든, 죽을 때까지, 오직 한 사람하고만.
우리는 사랑했다. 그래서 결혼했다. 하지만 슬프게도 서로를 갉아 먹는 햄스터가 되었다. 모든 것은 짧았다. 신혼의 재미도, 로맨스도, 애틋함도, 왜 옛날 사람들은 헤어지는 게 싫어서 죽을 때까지 함께 있고 싶어서 결혼을 했다는데 어째서 요즘 세상에서는 그 모든 것들의 유효기간이 이토록 짧아졌는가. 왜 함께 살게 되니까 오히려 떨어져 있고 싶고 영원히 함께 살아야 한다는 사실은 그토록 아득한 짐이 되었나. 누구나 그렇듯 나의 결혼생활도 처음엔 조심스러운 발 디딤으로 출발했다. 신혼 때는 소꿉장난 같은 행복도 느끼며 결혼이 꼭 어두운 것만은 아니구나, 하는 순진한 기대도 가져봤지만 그것도 잠시, 종내는 거부할 수 없는 일상에 치이고 서로에게 치이다 점점 극한으로 충돌하여 마침내 이혼을 선택, 헤어지고 말았다.
돌이켜보면 씁쓸한 것은 사람이 결혼하자고, 우리같이 살자고 하는 마음이 아무리 간절해도 제발 헤어졌으면 하는 마음보다 강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가 되고 싶다고 눈이 멀어서 맹렬히 다가갔다가 나중에는 다시 혼자가 되고 싶어 더 무서운 속도로 돌아오는 것. 그게 사람의 이기심이란 것일까.
사실 혼자 산다고 해서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다. 로맨스는커녕 외로움에 찌들어야 하고 그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기회는 나이가 들수록 작아진다. 게다가 아무도 없는 빈집에 들어설 때의 그 적막감, 하지만 조물주는 얄궂은 분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당신이 당신의 짝을 데려와 둘이 한 집에 갇히는 순간, 그곳은 지옥으로 변할지 모르니까.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그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기도한다.
‘신이여, 결혼하고 싶어질 만한 상대가 나타나지 않게 하소서. 이대로 혼자 살다가 늘그막에 동반자 같은 사람을 만나 만혼을 이루게 허락하소서. 부탁드리오니 제발 젊어 섣불리 결혼하지 않게 하소서.’
명심하라. 결혼이란 당신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열쇠가 아니다. 오히려 당신에게 수많은 새로운 문제를 던져준다. 당신이 당신의 동반자와 기꺼이 그 문제를 풀 각오가 되어 있다면 그때 감행하라. 그 무섭다는 결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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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
저는 하루하루가 희망으로 넘쳐흐른다는 사람을 보면
정말로 의아한 생각이 들어요.
희망이란 절망 속에서 생기는 것인데
저렇게 희망만이 가득한 사람의 희망이란 대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죠.
■ 엄마의 믿음
봄이면 엄마는 점집에서 식구들마다 맞춤 처방된 부적을 받아와 방마다 붙여 놓곤 하셨다.
계단식 아파트에 살 때, 우리집과 마주보고 있는 앞집 대문엔 늘 무슨 교회나 성당의 표식 같은 것이 붙어 있었지만 유독 우리집 문에는 커다랗고 샛노란 부적에 시뻘건 글씨가 새겨진 채 붙어 있곤 했었다. 나는 이웃들 보기에 민망해서라도 떼라고 하고 싶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어차피 씨알도 안 먹힐 테니까.
우리집의 공식적인 종교는 불교였다. 그래서 엄마는 늘 절에 다니셨다. 그러나 절에 시주하고 부처님께 비는 것만으로는 우리 가족의 안위를 지키기애는 부족하다고 느끼셨는지 엄마는 점도 자주 보러 다니셨다. 엄마가 단골로 찾던 점쟁이의 이름은 ‘칠선녀’. 나는 그분을 한 번도 뵌 적은 없다. 다만 그분이 이야기해준 나와 우리 가족에 대한 점괘만은 늘 듣고 자랐다. 돌아가신 분에겐 죄송한 말씀이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분의 점괘, 즉 미래 예측이 맞는 것을 본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물론 그분뿐만이 아니라 나는 어떤 점쟁이건 미래를 맞힌다는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칠선녀는 내가 커서 국무총리가 된다고 예언했었다.
엄마의 미신에 대한 믿음은 굳건했다. 때문에 우리들은 지켜야 할 규칙이 많았다. 우선 나는 노란색 옷을 입을 수 없었다. 칠선녀가 나에겐 노란색이 ‘멸망의 색깔’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또 아직까지 그 의미를 알지 못하는 이른바 ‘손 없는 날’이란 건 하늘이 두 쪽 나도 지켜졌고 그밖에도 먹으면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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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는 것, 해서는 안 되는 일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하지만 불행히도, 엄마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집은 운이 따르지 않았다.
얼마 전 가세가 기울어 원래 살던 집을 버리고 초라한 곳으로 이사 하던 날. 엄마는 버려지는 세간 앞에서 더는 버티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셨다.
얼마 후 엄마가 일평생 믿어왔던 신념이 스스로 틀렸음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을 때, 난 오히려 슬퍼지고 말았다. “나 성당에 가고 싶어. 이런 거 지켜서 뭐 하나 된 것도 없구…”
이사 온 지 며칠 되지 않던 어느 날, 엄마는 새 집에 들어오셔서는 침대에 풀석 엎어지며 이런 말씀을 하셨다. 한 집안에 종교가 둘이 있으면 망한다면서 둘째 누나의 성경책을 내다 버리기까지 했던 엄마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다니.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당신은 이미 부적이나 손 없는 날이니 하는 것들이 당신과 당신 가족의 안위를 별달리 지켜주지 못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종교는 무엇이고 믿음이란 무엇일까. 어머니가 부적 같은 거 챙기지 않고 교회엘 다니거나 다른 종교를 가졌더라면 우리집은 지금쯤 부자가 되었을까. 생각해보면 엄마가 자신의 믿음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스스로 알았으면서도 평생 지켜왔던 그것들을 끝내 놓지 못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숙연하기까지 한 행동이었다.
■ 로망
* 로망 : 무언가 원대하고 대단한 것을 갈구, 욕망하는 심리적 상태
어릴 때 하이야트 호텔로 점심식사 자리에 초대된 아버지를 따라 갔을 때 로비엔 젊은 아버지의 후배가 서 있었고 그 옆엔 멋진 청년 실업가에 어울리는 미녀 애인이 함께 있었다. 내게는 마치 그녀가 전쟁에서 승리한 장군의 전리품처럼 보였다. 그때 이런 곳에 오는 사람들은 저렇게 돈 많고 세련된 부자에다 자심감도 넘치고 그래서 저런 멋진 여자도 데리고 올 수 있는 건가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근사해 보였던지 나 또한 커서 여자 친구가 생길 때면 항상 하이야트 호텔에 데려가곤 했다. 나는 성공한 청년 실업가도 아니었고 자신감이 충만한 편도 아니었지만 그곳의 테라스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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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을 찾아 저녁식사를 함으로써 나도 호텔 같은 곳에 일상적으로 드나드는 부류의 사람이 되고 싶어했다. 그때 내가 동경했던 그 기분을 맛볼 수 있도록.
그러나 어른이 된 내겐 어릴 적 보았던 아버지 후배의 자신감이나 돈, 사회적 배경이 없었기 때문에 애초부터 그것들은 흉내내기에 그칠 수밖엔 없었다. 나는 그저 구석 한켠에서 조용히 밥을 먹고 나올 뿐이었고, 그럴 때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이 호텔의 진짜 손님들인데 나만 이방인인 것 같은 기분을 느낄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그저 그렇게 함으로써 조금이나마 어릴 적 로망을 실천해보는 데에 만족하였다. 내가 정말로 ‘그런’ 사람이 되었더라면 더 좋았겠지만 말이다.
로망이란 어쩌면 단지 꿈꾸는 단계에서만 아름답고 행복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토록 바라던 많은 것들이 실제로 내 것이 되었을 때, 상상하던 만큼의 감흥을 얻었던 적은 많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중요한 건 이루어낸 로방보다는 아직 이루지 못한 로망이 얼마나 남아 있는가.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꿈을 품게 될 것인가 하는 점일 것이다.
다행히 내게는 로망이 아직 몇 개 더 남아 있고 앞으로도 조금 더 생길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리고 그것들은 힘 닿는 대로, 비록 실망하는 일이 있더라도 시도해 볼 것이다. 왜냐고?
로망이니까.
■ 두 얼굴의 사나이
가끔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이 사람 어때요?”
그럴 때면 나는 약간 당황하곤 한다. 단순히 대수롭지 않은 호기심에서 던진 질문인 건 알지만, 나로서는 누군가에 대해서 한마디말로 설명하기가 쉽지 않은 때문이다.
물론 “사람 좋아요” “좀 까칠한데 그래도 뒤끝은 없어요” 등등 간단히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어려운 사람도 있다. 바로 나 같은 사람.
한번은 누군가 나에 대해서 이렇게 물어본다면 사람들은 어떤 식의 대답을 할 것인가 예상해본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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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가기 어렵다.’
‘까다롭고 까칠하다.’
‘마음을 잘 열지 않는다.’
‘직설적이고 공격적인 성격이다.’
나에 대한 평판이란 대체로 이런 것들이고 사람들은 나에 대해서 아주 단정적으로 규정해 왔다. 물론 저런 평가들도 분명히 내가 갖고 있는 모습 중에서 나온 것일 테지만, 그것은 내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사람들은 잘 모른다.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실상은 이렇다. 나는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누군가 나에게 다가와주기를 기다리는 사람에 더 가깝다. 마음을 열고는 싶지만 방법을 알지 못해서 오히려 외로운 사람이다. 직설적인 구석도 있지만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나 남을 도우려는 마음은 누구 못지않은데 그런 것은 소문이 나지 않더라.
타인에 의해서 이처럼 쉽게 규정되어온 처지로서 한마디 하자면 뭐든지 단정짓는 것은 별로 좋은 일은 아니다. 누군가의 성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저 사람은 착한 사람, 이 사람은 못된 사람, 이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것보다는 ‘저 사람은 착한 면도 있고 못된 구석도 있는 사람’ 같은 표현이 훨씬 더 정당하게 그 사람을 평가해 준다고 생각한다. 물론 정말이지 착한 면밖에 없는 천사인 사람도 있을 테고 오로지 사악한 마음밖에는 없는 악인도 있을 테지만 그런 사람들조차 자신을 대표하는 본성과는 다른 모습을 자기 내면 어딘가에 조금씩은 감추고 있을 것이다.
3장
■ 개별성
미안하고 난처하면 웃음이 터지는 사람,
선물을 받고도 좀처럼 고마움을 드러낼 줄 모르는 사람,
사랑에 빠지면 오히려 차가와 지는 사람.
같은 언어를 쓰지만
표현은 서로 다른
우리는 이토록 개별적인 존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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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건돌리기
“둥글게 둥글게 노래를 부르며 랄라랄라 즐거웁게 춤을 춥시다. 노래를 부르며 손뼉을 치면서…다섯!”
긴장 속에 원을 그리며 돌던 아이들이 갑자기 다섯씩 짝을 이루느라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그리고 무안한 미소를 지으며 퇴장하는 탈락자들. 이건 마치 무슨 낙오에 대한 리허설이라도 하는 것 같다.
또 있다. 수건돌리기. 술래가 원을 그린 채 앉아 있는 아이들 뒤를 빙글빙글 돌다가 살짝 누군가의 등 뒤에 수건을 놓고 달아나면 당사자는 황급히 일어나 술래를 쫓지만 원망의 미소를 던지면서도 자신이 선택 되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반면 한 번도 선택되지 못한 아이는 박수치고 노래를 하며 차례를 기다려 보지만 게임이 끝날 때가 가까워올수록 초조해짐을 느낀다.
모르겠다. 이런 게임을 외국에서도 하는지 우리만 하는 건지.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린 어려서부터 비정상적으로 의무적인 관계 맺기를 강요당해왔다는 것이다. 왜 친구가 많으면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지, 왜 혼자 극장엘 가면 다른 사람의 눈치를 봐야 하는 건지 난 알 수가 없다. 친구가 백 명 있는 사람도 있는 거고 친구가 두 명 있는 사람도 있는 거다. 밥을 혼자서 먹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거다. 그런데 왜 우리는 늘 두 줄로 줄을 서며 짝을 짓도록 강요받았을까. 왜 혼자 다니면 놀림의 대상이 되어야 했을까.
나는 우리나라의 결혼을 앞 둔 예비신랑들이 하객 모으기에 얼마나 강박적으로 시달리는지 잘 안다. 우리는 결혼식 때 친구들이 얼마나 오는가를 놓고 그 사람을 판단하려 하기 때문이다. 친구가 많이 온 신랑은 성품이나 대인관계 면에서 인정받는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은 인간성이나 사회적인 능력에 뭔가 문제라도 있는 것처럼 여기는 시선들.
■ 인생의 차트
가치란 대립하는 것이라 했다. 하나밖에 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건강을 택하자니 일을 할 수 없고 일에 최선을 다하자니 몸을 돌볼 수 없다면?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는 것과 좀 더 좋은 간판이 되어줄 수 있는 조건 중 하나만을 택해야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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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동안 이러한 선택의 순간은 멈추지 않고 찾아온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나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고 결정은 저마다의 가치 기준에 따라 다르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보다 중요한 가치, 그보다 덜 중요한 가치들을 구분해 중요도에 따라 순위를 매겨두는데 이것을 ‘인생의 차트’라 한다. 보편적으로 생각해볼 때 상위에 랭크되는 것들은 건강, 가족, 일, 돈과 같은 것들일 것이다. 나 또한 다르지 않다. 그런데 결코 어떤 순위에도 함부로 놓을 수 없는 초월적인 가치가 있다. 바로 ‘사랑’이다. 사랑을 일반적인 기준으로 다른 것들과 저울질하면 순위는 말도 안 되게 내려간다.
당신은 친구를 포기하고 사랑을 택할 수 있는가? 왜 항상 사랑은 다른 무엇을 포기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일까.
그것은 사랑이 많은 가치 중에서도 가장 호전적이며 배타적인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사건건 다른 많은 곳들과 대립한다. 일, 친구, 다른 존재에 대한 갈망, 돈, 가족, 자아실현과 같은 많은 주요한 가치들은 사랑 앞에서 선택을 종용받곤 한다.
■ 과학자들에게
과학자들은 그간 성행위를 할 수 있도록 돕는 보조 장치의 개발에는 열을 올려왔으나 성행위를 막는 장치의 개발에는 소홀히 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들은 비아그라나 시알리스 같은 발기부전용 치료제를 만들어 하고 싶은데도 못하는 사람들을 구원해준 바 있다.그런데 어째서 원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약품은 만들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일까. 세상에 그걸 원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할지 모르지만 욕구가 거추장스러워 생활에 불편을 받는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다. 중요한 시험을 앞둔 수험생들, 반드시 합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고시생, 금욕을 요구받는 승려들, 가족을 멀리 떠나보낸 기러기 아빠 등등. 이러한 사람들에게 성욕 억제제와 같은 약이 제공된다면 모르긴 해도 비아그라 이상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을까?
극단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세상에 섹스가 없다면 사라질 문제들이 얼마나 많은가. 모든 연인 간의 갈등, 전쟁, 욕망에 관한 상당한 문제들을 이 약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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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른다. 당신이 당신의 무한한 에너지를 본능이 아닌 이성적 욕구를 통해 쓸 수 있다고 생각해 보라. 마음의 평화는 물론이고, 쾌락을 좇던 지친 영혼은 생기를 되찾아 자아의 실현을 위해 몰두하거나 불쌍한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위대한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어 성욕이 수그러들었을 때 느꼈던 자유로움과 해방감을 맛본 사람이 다시 질풍노도의 시기로 돌아가길 원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누구라 해도 그 혼란 스럽고 나 아닌 무언가에 정신을 빼앗겨 있는 듯한 시기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이렇듯 욕망은 사람을 지치게 하기에 사람은 나이가 들고 나서야 비로소 긴 터널을 빠져나온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시기를 마음대로 앞당길 수 있고 원하면 복용을 중지함으로써 언제든 젊음과 욕구를 되찾을 수 있는 간편함이 주어진다면 굳이 마다할 사람이 있을까.
과학자들의 감성적 변환은 사랑과 욕구 같은 거대한 주제뿐 아니라 일상의 자잘한 상황에서도 그 쓰임새는 다양하게 요구된다. 예를 들어보자 화를 자주 내는 사람에게 ‘화를 내지 않게 되는 알약’이 처방되고 중증인 사람에게는 덧붙여 ‘이마에 살짝 바르기만하면 무슨 일이든 민감해지지 않는 연고’까지 곁들여진다면 얼마나 유용할까. 나아가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위로’라는 이름의 알약을, 희망이 필요한 사람들에겐 ‘희망’이라는 이름의 ‘희망 유발제’ 혹은 ‘희망 보조제’가 약으로 개발된다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커다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자들이여. 여러분은 너무 과학 공부에만 몰두하지 말고 만화책과 소설, 그리고 영화를 보는 데에 많은 시간을 투자해 보는 것은 어떨까. 여러분의 감성이 커지면 커질수록 세상은 더욱 풍요로워질 테니.
■ 결속
진정으로 굳은 결속은
대화가 끊기지 않는 사이가 아니라
침묵이 불편하지 않은 사이를 말한다.
■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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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순이 넘은 부모님들이 악다구니로 싸우는 모습을 볼 때마다
괴로워하고 절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밤에는 손을 잡고 주무신다.
나로선 이것을 설명할 길이 없다.
그것 하나로 다툼과 지긋지긋한 갈등을 미화할 생각도 없다.
하지만 정말로 설명이 안 된다.
행복 중의 으뜸이 평범한 행복이다.
왜냐하면 삶이, 세상이 우리를 가만 놔두질 않는다.
일상에서 무사히 하루를 보내는 것 만한 행복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날, 당신의 인생은 안타깝다.
■ 돈
허영만 화백이 그랬다.
자기는 아무리 젊음이 좋다 해도 30대로 돌아가기는 싫다고.
늙었어도 돈 걱정 안 하고 살 수 있는 지금이 좋다고.
누구나 밥벌이는 지겹다.
대개는 한 달을 벌어 그다음 한 달을 살고
혹 누구는 하루벌이로,
또 누구는 일 년 벌이로 각자의 능력과 팔자대로 살아간다.
하루하루 밥벌이에 허덕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막연히 염원하던 큰돈이 생겼다고 치자.
그때의 기분은 아마도 이럴 것이다.
개학을 하려면 아직 제법 많은 날이 남아 있는데
방학숙제를 미리 다 해놔서 아무런 마음의 짐이나 부담이 없이
편안하게 아침 눈을 뜨고,
뜨고 나서도 뭔가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
다시 한번 곱절의 편안함을 느끼며 온돌바닥에 나른히
몸을 뉘던 어린 시절 그때 그 순간 말이다.
순도 100%의 마음의 평화, 여유. 뭐 그런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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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엔
(설사 방학 숙제를 다 해놓지 않았더라도)
1월의 이즈음이면 저절로 얻어지던 그런 여유를
이제는 엄청난 돈을 지불해야 맛볼 수 있다는 건
어른으로서의 슬픔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여유를 대부분의 사람들이 좀처럼 누려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한다는 건 인간으로서의 슬픔일 것이다.
■ 서점
아무리 외톨이라 할지라도 단지 친구인 ‘사람’이 없을 뿐 누구든 위안이 되어줄 자기만의 무언가를 하나씩은 갖고 있다. 그것이 책이나 영화가 될 수도 있고, 다른 어떤 취미 생활일 수도 있으며 기르는 고양이나 개가 될 수도 있을 테지만, 나에겐 오래전부터 서점이라는 공간이 최고의 안식처이자 벗이었다. 비록 책을 읽는 데는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어려서부터 서점에 가는 것을 워낙 좋아해 마흔이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었고 앞으로 죽기전까지 그러할 것이다. 왜 서점이란 공간이 그토록 좋은 걸까.
- 무엇보다 서점은 편하고 자유롭다.
혼자 가도 남의 시선 의식안하고 누가 보든 안 보든 편하게 있을 수 있는 곳이 생각해보면 정말 많지 않다. 백화점에 쇼핑을 가도 혼자서는 뭔가 쓸쓸하고 극장은 당연하고, 심지어 전시회를 가도 혼자 다니려면 어쩐지 초라한 기분이 든다. 밥 한 끼를 먹어도 동행이 필요한 세상에서 유독 서점만큼은 혼자 돌아다녀도 자유로우니 얼마나 편한가.
- 그곳은 일단 들고 나는 것부터가 자유롭다.
입장료가 없으니 대가 없이 들어갈 수 있고 몇 번을 들락거려도 누구하나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도 없으며 그 넓은 공간은 다 나의 서가이다. 내 맘대로 돌아다니다 내키는 책들을 뽑아 볼 수도 있고 또 아예 책을 보지 않아도 상관없다.
- 그곳은 평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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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는 큰 소리로 떠드는 사람도 없고 앞자리를 발로 차는 사람도 없으며 팝콘을 우적우적 씹으며 책을 읽는 사람도 없다. 필요하신 것 없느냐고 부담스럽게 접근하는 직원도 없고 책을 해설해 가며 읽어주는 사람도 없다.
- 서점은 신기하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북적이는데 다른 사람들과 거추장스럽게 부대끼거나 시선을 의식하게 되는 일도 별로 없다. 모두 각자 책을 보는 일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일까? 그래서 서점에서는 사람이 많으면 많은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어쨌든 좋다.
- 서점의 낮은 문턱은 정말이지 매력적이다.
비단 입장료가 없기 때문만은 아니다. 입장료가 없어도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는 공간은 많으니까. 나는 자신감이 바닥나 있을 때 강남의 고급 매장에 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날따라 나의 행색에도 어쩐지 신경이 쓰이고 동행인 없이 가기라도 하는 날엔 더더욱 맘이 편치 않다. 그런 곳에 가면 손님인 나보다 물건 파는 점원이 오히려 상전처럼 굴 때도 많지 않은가. 그러나 서점은 다르다. 행색 따위 아무래도 좋다.
- 왜 그곳에서는 감정을 마음대로 놔두어도 괜찮은 걸까.
외롭거나 슬프고, 우울하거나 지쳐있을 때도 그곳은 내가 누구든 누구도 아니든 외롭든 외롭지 않든 상관없이 다 받아준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고 사람들의 발소리, 말소리가 결코 소음으로 들리지도 않으며 타인의 존재가 거추장스럽게 느껴지지도 않는 그곳은 진정한 나의 오아시스임에 틀림없다.
■ 프로포즈
사랑하자는 건 헤어지자는 거지, 안 그래?
너와 내가 사랑만 안 하면 평생을 볼 수 있는데
뭣 때문에 사랑을 해서 일이 년밖에 안 봐야 돼?
나는 그게 납득이 안가.
나는 그래서 너의 프로포즈가 이해가 안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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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사람 세상을 지옥에서 천당으로 바꾸는 방법
신기한 것은 살면서 누구 때문에 신경 쓰여 죽겠다. 그 인간 좀 안 봤으면 하는 생각은 많이 해도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떠올리면서 행복을 느끼고 그 존재의 고마움을 되새겨보는 경우는 많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그 정도만 해줘도 사람 세상이 한결 좋아질 수 있을 텐데 말이죠. 그래서 언젠가는 한번 나를 좋아하는 사람은 누가 있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한 사람… 두 사람…
놀랍게도 조금 전 찌푸려졌던 기분이 펴지면서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고 입가엔 흐뭇한 미소가 지어집니다. 이렇게 손쉬운 방법이 있었다니. 앞으론 이런 습관을 자주 들여야 겠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내 마음을 표현해야겠어요. 나를 싫어하는 사람의 마음을 돌리기는 힘들어도 나를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을 지키는 것은 조금만 노력하면 가능한 일이니까요.
나의 사람 세상은 오늘, 현재 지옥일까요. 천당일까요. 죽어서는 염라대왕의 판단과 의지로 판가름 나겠지만 살아 있는 지금은 노력 여하에 따라 어느 정도 바뀔 수 있으니 저는 노력을 좀 해보려 합니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을 거예요. 나 자신을 위해서.
■ 사람
한 명의 사람을 만나는 일은
한 권의 책을 읽거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일과도 같다.
누구든
얼굴에는 살아온 세월이 담기고
모습과 말투, 행동거지로 지금을 알 수 있으니
누군가를 마주 한다는 것은 어쩌면
한 사람의 일생을 대하는 것과 같은 일인지도 모른다.
■ 연애는 패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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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게도 조물주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일생 동안 여러 번의 사랑을 하게 하셨다. 그러므로 누구나 여러 번의 사랑을 한다. 그런데 연애를 끝내면서 ‘아, 이번 사랑은 정말 좋았어. 다시 이런 사람하고 만나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대부분 ‘다시는 안 만나야지’하기 마련이다. 그리고는 마치 놀림을 당하듯이 또 그런 사람을 만난다.
이게 참 신기하면서도 당연하다 싶은 게 나란 인간이 애초부터 그런 사람을 좋아하니까 자꾸 반복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를 괴롭히는 사람에게만 열정이 생기는데 어떻게 마음을 편히 해주는 사람을 만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언제나 만나는 사람도 비슷하고 상대방에 대한 태도 또한 늘 비슷하기 마련이다.
누가 그런다. 내가 마음을 열면 상대는 항상 달아나더라고. 난 그런 이들에게 묻고 싶다. 그렇다면 세상이 문제일까. 당신이 문제일까.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여는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못한다. 그렇다 내가 늘 비슷한 사람을 만나는 것도, 그 사람들이 늘 내게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모두 내 탓이다. 내가 변하지 않기 때문에 그 사람들도 변하지 않는 것이다.
연애는 패턴이다. 그리고 그 패턴은 다 내가 만드는 것이다. 내가 바뀌면 패턴도 바꿀 수 있다. 쉽진 않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 앓는 이를 빼는 법
나는 앓는 이를 단박에 빼지 못한다.
어릴 적 유치가 흔들거리기 시작할 때면 난 몇 달에 걸쳐서 혀로 그놈을 단지 살살 문지르기만 했다. 아주 조금씩, 놈을 움직이며 잇몸에서 가능한 고통 없이 빠지기만을 기다리는 것이다. 얼마가 걸리든.
커서 어른이 되어보니
사랑을 하고 난 뒤 나의 이별 방식 또한 다르지 않았다.
마침내 빠지기 전까지,
나는 앓는 이가 되어 살살…가능한 오래도록 잇몸에 머물러 있었다.
아주 오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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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만 그런 건 아니야
하고 싶은 게 없다고 너무 고민하지 마.
고민되는 건 이해하지만 너만 그런 건 아니야.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선생님들이
누구나 재능과 꿈이 한가지씩은 있는 법이라고
사기를 치는 바람에 그렇지, 없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당신은 글을 쓰지 않냐고?
나 하고 싶은 일이 생기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어.
38년 만에 겨우 하나 건진 거라구.
하고 싶은 일, 꿈, 생의 의미 이런 것들…
그렇게 쉽게 찾아지는 게 아니더라고.
동갑내기 친구 중에 런던에 유학 가 있는 애가 있어. 그 친구한테 내가 이 나이에 처음으로 하고 싶은 게 생겼다고 하니까 누구보다 축하를 건네는 거야, 자기는 아직도 찾고 있다며. 늦도록 공부하면서도 정말 이 길이 내가 가야하는 길이 맞는지 100% 확신하지 못하는 것 같더라구.
근데 말이야. 나는 겨우 이제야 겨우 작은 할 일을 찾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전과는 다르게 엄청나게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었다.
한 때는 정말이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좋으니까 내가 세상을 살아가야 할 이유를 달라고 간절히 기도한 적도 있었거든.
근데 막상 이유가 생겨도 여전히 힘들고, 무료할 때도 많고, 일을 마치고 나면 허탈하고…. 그런 건 똑 같은 것 같애.
단지 마음속에 예전엔 없던 어떤 희미한 무언가, 그저 작은 거 하나 들어 있는 기분은 들어.
그게 바로 생의 의미라는 거겠지.
이 작은 걸 찾기 위해서 다들 그렇게 애쓰고 있는 걸까.
■ 매뉴얼
매뉴얼이란 무엇인가. 매뉴얼은 흔히 가전제품을 샀을 때 사용설명서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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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로 접할 수 있지만 새로 산 자동차를 관리하거나 회사에 들어갔을 때 부여받는 행동지침과 근무수칙 같은 것들, 하다못해 작은 카페 하나를 운영하게 되더라도 가게를 관리하는 데는 나름대로의 운영방침이 필요한데 이러한 것들을 통틀어 매뉴얼이라고 한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름대로 자신만의 매뉴얼을 갖기 마련이지만 나 같은 경우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매뉴얼을 일찍부터 구축해왔다. 즉, 매뉴얼이라는 것이 하나의 프로젝트를 안전하고 성공적으로 수행하거나, 새로 산 벽걸이 TV의 사용법을 익히는 데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인생 전반에 걸쳐 거의 모든 부문에 적용된다는 인식을 진작부터 가져왔던 것이다.
그것은 남들보다 세상을 더 조심스럽게, 실수 없이 살고자 하는 마음과 내가 거북이라면 세상으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등딱지를 남들 것보다 좀 더 두텁고 강하고 정밀한 것으로 만들고 싶어서였다. 그만큼 알맹이가 약했기 때문이리라.
매뉴얼은 어떨 때 필요할까.
컴퓨터를 사거나 휴대폰을 살 때 나는 늘 같은 고민의 과정을 거친다. 지금 당장은 필요 없지만 언젠간 필요할지도 모를 수많은 기능들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고 좀더 고사양의 비싼 모델을 살 것인가, 아니면 꼭 필요한 기본 기능만 탑재되어 있는 저렴한 기본 사양의 모델을 선택할 것인가. 38년 동안 나는 늘 전자를 택했고, 늘 후회했다. 이런 것이 매뉴얼이 정립되지 않아서 벌어지는 일이다.
EX, 컴퓨터를 살 때
1. 문서작성과 인터넷 이외의 기능은 결코 쓰지 않으므로 최소 사양의 가장 저렴한 컴퓨터를 살 것.
2. A/S 만 확실하다면 중고를 사서 비용을 더욱 줄일 것
3. 매뉴얼은 지켰을 때라야 의미가 있다. 지켜지지 않는 매뉴얼은 무용지물
4. 새 물건을 살 때 불필요한 대가를 지불함으로써 쇼핑의 욕구를 채우려 하 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을 막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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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매뉴얼 신봉자이다. 매뉴얼이 만능은 아니지만 그것은 정말로 삶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필요하며 또 유용하게 쓸 수 있다. 돈, 연애, 대인관계, 사업, 심지어 자잘한 일상생활의 수백 가지 영역에 이르기까지, 그 쓰임새는 실로 다양하며 누구나 알게 모르게 몇 가지씩은 자신만의 매뉴얼을 갖고 있다.
4장
■ 미래의 자식에게 바란다
“야~ 이 책 재미있겠다!”
신나게 소개글을 다 읽고나니 맨 끝에 적혀 있는 ‘5~9세 대상’….
가끔 만들지도 않을 자식에 대한 상상을 해볼 때가 있다. 주로 만약에 낳는다면 어떤 식으로 키울 것인가에 관한 부분인데 무엇보다 내 자신이 너무나 책을 안 읽고 살았기 때문에 내 아이만큼은 TV보다는 책을 좋아하는 아이였으면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나는 일평생 책과는 담을 쌓고 살았다. 다른 애들이 세계 명작을 읽을 때 난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사랑과 진실>같은 당대의 드라마를 보았고, 다른 애들이 이순신 장군의 <난중 일기>를 읽을 때 대신 이미숙 주연의 <장희빈>에 빠졌었다. 여기에 후회는 없다. 다만 내 새끼만은 다르길 바랄 뿐.
나는 TV가 특별히 사람의 창의력을 말살시키는 바보상자라고 생각지는 않지만, TV밖엔 볼 수 없는 사람보다는 TV와 책을 같이 즐길 수 있는 인생이 더 즐거울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내게 TV를 가르치셨듯이 나는 내 아이에게 독서를 가르치려 한다.
그렇지만 아이가 책을 너무 많이 읽어도 고민일 것 같다.
내가 아는 책을 많이 읽는 애들은 자신이 체험한 삶이나 상상력보다는 자기가 살아오면서 읽어온 책이나 학습의 내용에 더 크게 영향 받는 모습을 종종 보아왔기 때문이다. 이건 누군가의 사유와 감각의 기반이 그 자신의 체험과 삶에 중심을 두고 있는가, 아니면 다른 사람의 창작물에 더 많이 기대어 있는가를 가르는 중요한 문제이다. 물론 그 둘을 무 자르듯이 자르거나 경중을 두는 것도 위험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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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배우거나 타인의 저술 물을 접했을 때 스스로에게 녹여내지 못하고 그 안에 갇혀버리는 경우를 적잖이 봐왔기 때문이다.
■ 바우
이번 주엔 모처럼 누나네 가게엘 들렀다 조카 바우를 봤거든. 역시나 평소처럼 꽥꽥대고 뭔가를 집어 던지고 정신이 없었어. 난 아이들이 그러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내 조카라 해도 옆에서 그러면 힘들어 하는 편이야.
그래 못 참고 누나 들으라고 한 마디 했지.
“우리 바우, 역시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구나.”
그랬더니 누나가 그게 아니래. 내가 와서 저러는 거래. 평소엔 안 그런다며.
“아니, 내가 왔는데 왜 그래?”
난 이해가 안 가서 물었어.
“흥분해서 저러는 거야. 좋아서.”
난 곧 일어서야 했고 그 편에 바우를 스쿼시하는 데까지 데려다 주기로 했어. 차 있는 곳까지 가면서 찻길을 건널 땐 바우의 손을 꼭 잡고 조심해서 길을 건넜지. 근데 말이지 내가 아는 바우라면 내 손을 뿌리치고 지 맘대로 길을 건너려 하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그랬을 텐데 뜻밖에 얌전히 내 손을 잡고 따라오는 거야. 그러고 보니 내가 조카 손을 잡고 길을 건너본 것도 처음인 것 같았어. 우린 손을 꼭 잡고 함께 길을 건넜다
차에 바우를 태우고,
“그러고 보면 바우랑 단 둘이 있어본 것도 오랜만이네.”
우린 얼마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이런 저런 얘기를 했어.
너무 신기했던 건 언제나 소리만 지르고 정신없어 보이던 아이가 둘만 있으니까 조근조근 말을 너무 잘하는 거야.
바우를 내려주고 돌아가면서 단지 삼촌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 좋아서 얼굴이 상기되어버린 조카의 얼굴이 자꾸만 생각났어. 정말 나처럼 이해심이나 다른 사람에 대한 관용이 부족한 사람도 드물지 않을까?
왜 바우의 이런 모습을 몰랐지?
내 비록 어린이들의 친구는 못돼도 사랑하는 조카의 친구는 될 수 있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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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야, 다음에 만나면 삼촌하고 얘기 더 많이 하자.
그리고 삼촌 김C한테 안 밀려, 말은 적게 해도 삼촌이 더 웃기잖아. 알았지? 그럼 잘 자라.
■ 트루먼 쇼
* 영화의 제목,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이 알고 보니 다분히 조작이었다는 설정, 조작된 삶에서 살아가는 한 남성이 그것을 뚫고 나오는 상황을 트루먼 쇼라 함
죽은 이후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생을 마친 후 나의 생을 장식했던 모든 출연자들이 나타나 축하의 꽃다발과 함께 박수를 치며 나를 격려하는 그런 순간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웃으며 내게 이렇게 말해준다.
“모든 게 쇼였어.”
내가 세상을 살아오는 동안 나를 멸망 시켰던 그 모든 모순되고 불합리하며, 잔인했던 수많은 일들이 사실은 사실이 아니었다는 것, 모든 게 다 인생이라는 연극이자 쇼에 불과했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부터가 진짜라고 해주면 좋겠다.
어디든 사랑과 평화가 가득하고 누구든 병들거나 죽지 않으며 사랑은 결코 시들어 소멸하지 않아 이별 따위 없는, 모함과 오해와 갈등 같은 것 없는 진짜 천국.
그런 세상에서 살아봤으면 좋겠다. 지금의 이 현실은 모두 연극이었으면 한다는 것이다.
■ 어떤 여자
그 여자는 너무나 아름답고 우아해서 나 같은 건 절대로 사귈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말본새부터가 교양이 넘치는 게, 사실 난 이런 부류의 여자는 어릴 적 아버지친구였던 모 기업 사장의 딸들(너무나 공주 같아서 본능적인 계급적 자각을 하게 만들었던)과 저녁 식사를 한 이후로 처음 만나보는 것 같다. 더구나 그 여자는 그렇게 예쁘면서도 내게 가장 치명적인 성품(친절하고 배려심 넘치는) 까지 갖고 있어서 그야말로 완벽한 여신과도 같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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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여자는 내게 완벽하지 않은 신기루가 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나를 너무 잘 알고 누가 나와 어울리는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 윤 회장 아저씨
“큰 아들은 공부로 빠졌기 때문에 애가 센치하잖아. 그래서 견디지 못하고자살을 했다구. 둘째는 아버지 돈으로 화려하게 살다가 지금은 택시운전하구.”
지금은 몰락한 윤회장 아저씨의 얘기를 하는 아버지의 표현이 퍽 인상적이었다. 공부로 ‘빠졌다’라든가. 공부를 잘하기 때문에 센치할 것이라는 단정, 센치하니까 자살하기 쉬웠을 거라는 분석 등이 뭔가 아버지다우면서 어른들의 특유의 단순함 같은 거…암튼 귀여웠다. (내용은 어두웠지만)
윤회장 아저씨를 생각하면 빠지지 않고 드는 두 가지 기억이 있다.
어릴 적 아저씨네 집에 갔을 때 그 집 마당에서 본 수없이 많은 개들…한 삼십 마리쯤?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너무도 강렬하다.
다른 하나는, 돈이 너무 많아서 사는 낙이 없다던 아저씨의 푸념이었다.
세상에 얼마나 돈이 많으면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사는 낙이 없을 정도로 재산이 많았던 아저씨가 도박으로 전 재산을 날리고 지금은 허름한 동네에서 나이 칠순에 ‘빠찡고’가게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묘한 기분이 들게 한다.
■ 편지
버림받았다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워, 나는 어떻게든 이 모든 것들을 지워야만 했었다. 어느 날, 너에게 받은 편지를 휴지통에 모두 모아 넣고 불을 붙였지. 이제나 저제나 난 참 상식이 없어서 그저 휴지통 안에 알루미늄 호일을 두르기만 하면 별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불을 붙이고 얼마 동안은, 불은 얌전히 타들어갔어. 그러다 어느 순간 거대한 불길이 확 솟구쳤는데 또 조심성은 많아가지고 마침 갖다 놓은 소화기로 서둘러 불을 껐다.
아마도 그때 그 편지들 아직도 다 타지 않았나봐.
여전히 이렇게 생각나는 걸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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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련
사람이 나이를 먹어간다는 건 하나 둘 포기해야 하는 것이 그만큼 늘어남을 뜻하고 결국엔 그렇게 커져가는 빈자리를 감당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바로 어른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평소에 스스로에게 선택에 관한 질문을 자주 던진다.
‘이것과 저것 중에 무엇을 택할 것인가, 고로 너는 어떤 사람인가’하는
사그라들지 않는 욕망은 사람을 고통스럽게 한다. 감당하고 받아들였다고 안도한 순간 다시 욕망이 맹렬하게 또아리를 틀 때, 나는 파고다 공원을 배회하는 불쌍한 노인이 된 듯하다. 그럴 때의 나의 글쓰기란 어쩌면 방황하는 노인의 그것과 같을지 모른다. 진정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으면 굳이 그것을 글로써 추상화할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 가지 않는 길
오늘 아침 머리를 자르기 전에 시간이 남아 근처에서 점심을 먹는데 문득 절인 고추가 보였다. 순간 젓갈을 움직여 한입 베어 물었다. 맛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결행이었지만 실로 몇십 년 만의 일이다. 난 절대 고추를 먹지 않거든.
베르나노스는,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어린 시절의 모습대로 충실하게 남고 싶은 것.’
이라고 했지만 이미 그 시절로부터 머무나 멀리 떨어져 온 내겐 세상의 유한함만이 점점 더 선명해질 뿐이다.
더 늦기 전에 안 먹어 본 것도 먹어보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야지 만나보지 않은 사람도 만나고 해보지 않은 노래도 해야 한다.
* 베르나노스
-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라는 소설의 작가, 1930년대 프랑스에서 반 교권주의와 무신론이 번져 가던 시대에 앞장서서 그 시대 교회의 부패와 관료주의 등을 비판한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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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인이 직접 쓴 그의 묘비명
‘마지막 심판 날, 천사들께서는 나팔을 아주 크게 불어주시기 바랍니다. 이곳에 묻힌 자는 가는귀를 먹었습니다.’
■ 홍대 앞 비밀 주차 요원들
사람들은 베일에 감춰진 특수기관 같은 걸 상상할 때면 흔히 스위스에 있는 세게 비밀 정부나 미국에 있는 UFO 전담 연구반 뭐 이런 걸 떠올릴 테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이 세상에는 그보다 더 은밀하고 섬뜩한 기관이 많은데, 그중 하나가 바로 다른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 방법만을 전문적으로 교육해 주는 곳으로 그 기관의 명칭은 알지 못하나 그곳을 비밀리에 수료한 사람들이 주로 파견되는 곳이 아파트나 건물의 경비직들이며, 그중 수석졸업자들이 특별히 배치되는 곳이 바로 홍대 앞 주차골목의 주차요금 징수원이라는 사실이다.
내가 이곳을 이용한지 10년 쯤 되는데 그들의 행동 양태가 한결같은 걸로봐서 이건 교육의 산물이라고 밖엔 판단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첫째, 그들은 차를 댈 때나 뺄 때는 절대로 눈에 띄지 않는다. 다만 항상 주차를 하고 시동을 끈 후 차에서 내려 5미터 이상 걸어가고 있을 따라야 슬며시 나타나 “차를 다시 대 주세요”라고 말한다.
나는 단 한 번도 그들이 내가 차를 댈 때 지켜보면서 ‘이렇게 대주세요’ ‘조금만 더 앞으로’라고 말하는 걸본 적이 없다. 항상 그들은 운전자가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리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그 말을 한다.
무서운 건 차를 대고 갈 때 귀신같이 나타나던 사람들이 요금을 내려고 하면 절대로 나타나지 않는다.
아무튼 그래서 운전자가 짜증을 머금고 차를 다시 댄 후 돌아서 가려고 하면 꼭 다음과 같은 내용을 물어본다.
“얼마쯤 계실거죠?”
나는 언젠가 한번은 그 질문이 너무나 이해가 안 가서 되물어본 적이 있다.
“아저씨. 도대체 그건 왜 물어보시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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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허…그냥요. 알고 있어야 되니까요.”
이 사람들 무섭다. 아주 제대로 배운 사람들이다. 아무튼 아까도 말했지만 그들은 누군가 차를 빼려고 다가오면 어디론가 재빨리 숨어서 그 운전자를 지켜본다.
그래서 운전자가 클랙슨은 몇 번 누르나 세어본 다음, 급기야 요금표에 적혀 있는 전화번호로 화가 난 채 전화를 할 때쯤에라야 어디선가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미소를 동반한 채 나타난다.
난 진짜 이해가 안 간다. 왜 돈을 내는 사람이 돈을 받을 사람을 애타게 찾아야 하는 건지.
장담하지만 이건 매뉴얼이다.
그들은 매뉴얼대로 움직이는 게 틀림없다.
■ 남년 사이 친구
뭐든지 단정짓는 걸 싫어하기 때문에 이것도 꼭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남녀 사이 친구라는 게 정말 어렵다. 영화에서 해리가 했던 말이 난 정답이라고 봐. 남자와 여자는 친구가 될 수 없다고 했었지. 그래, 우리가 손을 잡는 게 아니었어. 오랜 친구를 바랬건만…
손을 잡다보면 또 잡고 싶고 그러다보면 결국 또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게 되잖아, 스킨쉽하는 친구 사이? 말이 안 되지.
서로가 분명한 거리를 유지한 채 그렇게 편안하게 지내던 그때가 좋았는데…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정말이지 우리가 손을 잡는 게 아니었어.
■ 연애는 학습이다
연애는 학습이다. 할 때마다 늘 새로운 것을 배우게 되니까. 문제는 배운 것을 써먹게 되는 건 언제나 지금 ‘이 사람’이 아닌 미래의 ‘다음 사람’이라는 것이다. 연애는 그래서 이어달리기이다. 이어달리기의 규칙을 아는 사람이라면 지금 이 사람에게 받은 것을 그 사람에게 다시 돌려줄 수는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바통은 언제나 상관없는 다음 사람에게 전달되기 마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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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출발선에 서 있는 한 사람이 있다. 그는 두려움에 떨고 있다. 지난 경주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누군가 말한다. “이봐, 예전에 받았던 바통 같은 건 던져버려, 첫 번째 주자가 되어보라구.”
과연 그는 출발할 수 있을까?
■ 순간 속의 사람들
영화 <아웃오브 아프리카>에서
로버트 레드포드가 메릴 스트립에게 말하길
마사이족에겐 특별한 것이 있다고 했다.
그들은 절대로 길들여질 수 없는 존재들이어서
만약 감옥에라도 갇히게 되는 날엔 죽을 수도 잇다는 것이다.
그들의 머릿속엔 오직 현재라는 개념밖엔 없기 때문에
앞으로 이곳을 지나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말을 듣고
처음엔 황당할 정도로 희망이 없는 사람들이구나 싶었는데 이내 누구보다 순간에 충실할 수 있다는 점이 부럽게 느껴졌다.
결코 내일이란 없는 사람들. 오로지 지금 이 순간뿐인 그들에게 세상이란
아마 내가 살고 있는 여기와는 다른 곳이겠지.
■ 해바라기
그러니까 어렸을 때는 ‘후두둑’ 창문을 때리며 내리는 빗소리만 들어도 내 마음은 너무나 뜨겁게 반응했다. 그럴 때면 난 해바라기의 <저 빗속으로>를 틀어 놓고 반복해서 들으며 종로 세운상가 앞길을 비를 맞으며 뛰고 또 뛰었지. 뛰다가 비를 피해 모여든 사람들 틈을 헤치고 버스 정류장에 들어서면, 교복을 입은 여중생이, 그러니까 여주인공이겠지. 나를 의식하며 서 있는거야.
우리는 모르는 남남인데 아직 사귀지도 않았고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는데도 우린, 이미 사귈 거 다 사귀고 벌써 가슴 아픈 이별이라도 한 것처럼 괜히 아프고 마음은 들뜨고 그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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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단지 집에 가만히 있다가 비 한줄기 내렸다고 내 마음속 내 머릿속에서 벌어진 일이야.
그 일은 비가 올 때마다 벌어졌지.
그런데 지금은 어떠니? 비가 오면 어떠냐구?
‘아, 비는 왜 오고 지랄이야’ 하겠지. 그래도 아직 한여름에 내리는 소나기는 좋아해. 소나기는 정말로 운치와 재치가 있거든, 짧고 굵게 낭만적으로 쫙 한 번 내려주고 바로 해가 뜨니 말이야.
우리집 마당 화단엔 할머니가 가꾸던 갖은 꽃들과 채소들이 있었지. 내 얼굴만큼 큰 해바라기도 몇 그루나 있었어. 그런데 지금 내가 사는 집에는 마루에 엄마가 기르는 화분들이 좀 있고 내 방 컴퓨터 옆에 전자파를 막아준다는 화초가 한 두 녀석이 있긴 하지만 아무 느낌이 없어. 왜 어렸을 때 혼자서 화단 근처에서 놀다 꿀벌이 앵앵거리며 왔다갔다 하는 걸 잽싸게 신발로 잡아 빙빙 돌려서 질식시킨 다음, 마지막으로 바닥에 패대기를 쳐 확인 사살까지 시킨 후 바라보던 그 해바라기
“나 잘했지?” 하고 바라볼 수 있던 그 해바라기가 지금은 없어.
그러니까 이렇게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사람을 만나고 여행도 꿈꾸고 하지만 아무리 해도 해바라기는 다시 생길 수 없는 거지. 이미 어른이 되어 버렸으니까.
2016. 5.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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