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스님이 두고 간 이야기

2016. 6. 22. 16:04독서후기

반응형

법정 스님이 두고 간 이야기

- 30여 년간 법정 스님 곁에서 보고 배운 것들 -

■ 고현

0 1949 전남 장흥 출생

0 고2때부터 불교와 인연

0 조선대학 미술대학 학장, 디자인 대학원 원장 역임

0 불교미술 현대화, 불교디자인 개척화에 노력

- 대한민국 산업디자인 초대작가, 심사위원

- 일러스트, 단청, 탱화, 디자인 등 200여 회 발표

* 일러스트 : 삽화 또는 도해. 본문의 내용을 강조하기 위해 첩부하는 그림 또는 삽화

■프롤로그 : 스승을 그리며…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제가 저지른 허물은 생사를 넘어 참회하겠습니다….” 대국민 사과를 하고 법정 스님께서 육신을 바꾸셨다. 그리고 가까이 있었던 승속의 제자들에겐 몇 가지 유훈을 남기셨는데 그 끝자락에 이런 말씀이 있었다.

“말빚을 남기고 싶지 않으니 모든 책은 더 이상 출간치 말라.”

그래서 당신의 모든 책들은 출판이 금지되어 버렸다. 그리고 벌써 6년….

많은 날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은 끝에 몇 가지 변명을 찾게 되었다. 갈수록 독서가 외면당하는 인터넷 세상에 어느 누가 시간을 붙잡아 놓고 출판금지 되어버린 30여 권에 이르는 스승의 저서를 찾아서 읽을까? 이렇게라도 개인적인 인연을 풀어 놓게 되면 갈수록 희미해져 가는 스승의 존재감과 가르침이 다소나마 속도가 늦춰지지 않을까? 그래서 법정 문하 도반들의 거친 눈매가 건너올 줄 알면서도 ‘너 마저?’ 기어이 붓을 들고 말았다.

그리고 이쯤에서 나 자신을 되돌아보고도 싶었다. 젊은 시절 스님께서 격려해주셨던 ‘불교미술 현대화, 불교 디자인 개척화’의 화두를, 지난 세월 얼마

- 1 -

나 제대로 챙기며 살아왔는지 한번 쯤 자기 점검을 해보고 싶었다. 이제 스승의 유지가 지켜보는 남은 후반생, ‘시각포교와 나눔의 삶’을 위한 자성의 시간을 가져보기 위해 스승의 화두이기도 했던 ‘나는 누구인가’를 더 내밀하게 찾아보고 싶었다.

스님과 함께했던 빛바랜 세월을 늘 회상해보다가 30여 년 동안 일기장에 박제된 묵은 추억들을 되살려보았다.

그리고 당신께 배운 ‘무소유’에서 ‘아름다운 마무리’에 이르기까지 ‘영혼의 모음(母音)’을 안고 미력한 졸작이지만 본인의 소품도 함께 실어 열반 6주기를 맞아 스님의 영전에 바치고 싶었다.

* 시각포교 : 음성포교에 맞서는 말로 일러스트, 단청, 탱화, 디자인 등의 시 각적인 것을 통한 포교활동

2016년 3월 6주기를 앞두고 우천 고현 드림

제1부 불일암 시절

■ 스님의 능청

야산 계곡에는 아직도 잔설이 남아 있는 2월 말의 조계산 자락, 봄은 아직인데 겨울은 이미 열반에 들고 있었다. 개학이 되기 전에 스님을 한 번 더 뵙고 싶어 불일암에 올랐다. 마침 스님은 털벙거지를 쓰고 대나무에 낫질을 하면서 어떤 정장 차림의 낯선 처사분과 대화중이었다. 내가 몇달만에 인사를 하는데도 받는 둥 마는 둥 대화내용이 엉뚱했다.

“스님 그랑께 법정 스님을 모른다 그 말이지라우?”

“아, 글쎄 몇 번을 말해야 아시겠소. 법정인지 법당인지, 그런 스님 안 계시니 법정을 찾으려면 재판소나 법원으로 가실 일이지 왜 산에서 찾으시오?” “다 알고 왔어라우. 지금 가면 계실거라고 종무소에서 알아보고 왔당께요.”

“그래요? 할 수 없구먼. 사실 그 법정 스님, 점심 공양 끝내고 산으로 나무하러 가셨습니다.”

시치미 딱 떼고 오리발 내미는 스님의 능청, 007 가방을 들고 서 있는 한 처사의 난감한 표정, 나는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질 것 같아서 슬며시 자리를 피해드렸다. 처사는 스님의 얼굴을 잘 모르고 있었다.

“워매, 베레부렀구마잉. 새로 나온 세계위인전집이 워낙 잘 나와서 스님한

- 2 -

테 권해 볼라고 여기까지 올라왔는디, 에이 참! 날 새 부렀구마. 날 새 부렀어.”

“누가 법정 스님한테 가면 그 책 사주실 거라고 하던가요?”

“누구긴 누구여라우, 그분은 유명한 스님 아니시오. 나도 해남이 고향인디(스님 속가도 해남이다), 까마구도 고향 까마구가 반갑다고 안합디여. 법정 스님은 진짜 사줄 것 같아서 이 산꼭대기까정 왔는디, 에이 참, 환장하겄네 잉. 거시기 스님은 책 안 필요하시오? 내가 싸게 해드리께라우.”

“나는 책만 보면 머리가 깨질 것 같아 경전도 잘 안 봅니다.”

토굴 모퉁이에서 몸을 가린 채 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나는 웃음을 참느라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아, 스님한테 저런 능청스러운 모습도 있었던가.

“법정 스님 아까 마을 인부 데리고 설해목 치러 간다고 올라 갔으니 해 떨어진 후에나 내려오실 거요.”

“법정 스님 오시면 내가 전해 드릴테니 뭐, 명함이라도 한 장 놓고 가시던지요 .”

“워매, 그래 주실라요. 고럭게만 해주신다면 허벌나게 감사해 블지라잉. 이거 우리 출판사에서 이번 봄철에 전략적으로 맹근 것인디요. 세계위인전집 말고도, 이건 한국문학전집하고 브리테니카 사전 찌라시구만이라우. 그라고 이건 지 명함인디. 잘 좀 전해주시요잉. 진짜 꼭, 잘 좀 부탁합니다잉.”

“알았습니다. 틀림없이 전해 드리겠습니다. 산에서는 해가 일찍 떨어지니 저물기 전에 서둘러 내려가십시오.”

“고맙구만이라우. 그란디, 스님은 법명이 뭣이당가요?”

“알아서 뭐하시게요? 그저 키 큰 중으로나 알아두시오.”

“아 불일암에 키가 큰 스님. 키 큰 스님. 큰 스님!…그럼 또 뵙겠습니다.”

■ 얼음선사 일갈

서울에 일이 있어 상경을 준비하던 차에 갑자기 스님의 연락을 받게 되었다. 일을 끝내고 약속한 시간에 송광사 서울 말사인 법련사에 들러서야 송광사 회보 편집 디자인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불일암도, 내 화실도 아닌 제3의 장소에서 뵙기는 처음이었다.

스님은 이미 낯선 불자 세 사람과 만나고 계셨다. 들어오라 해서 방으로 들

- 3 -

어갔으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스님은 세 사람의 면상을 번갈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표정이 굳어져 계셨다.

“종단의 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서 큰 스님께서 꼭 나서주셨으면 합니다.”

“차나드시오.”

“큰 스님, 결심만 굳혀주시면 뒷일은 저희가 책임지겠습니다.”

“어서 차나 드시오.”

스님의 목소리가 점점 팽팽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큰 스님! 큰 스님 정도의 영향력이며 큰 돈 들이지 않고도 가능합니다. 지금 움직이고 있는 몇몇 스님들은 결코 합당한 인물들이 아니기에 염려되어 찾아온 것입니다.”

종단의 어려움은 이해가 되었으나 스님의 유명세만 염두에 두고 권력승이 되라고 총무원장 출마를 권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님의 성품이나 빛깔을 너무도 모르는 이들이 어쩐지 불안 불안 했다.

“쓸데없는 말씀 그만하시고 차나 듭시다.”

“큰 스님,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주십시오. 이런 기회 두 번 안 옵니다. 저희들이 한두 번 생각하고 여기 찾아온 게 아닙니다. 큰 스님!”

스님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봐요. 나는 전생에 총무원장뿐만 아니라 종정까지 다 해먹은 중인데 이생에 와서 뭘 또 하란 말이오?

“……”

“그리고 거 자꾸 큰 스님, 큰 스님 하시는데 내가 키가 커서 큰스님이오? 목소리가 커서 큰 스님이오?”

“네에? 큰 스님,너무 하십니다. 큰 스님 정도 되시는 분이 이도 저도 싫다 팽개치시면 장차 이 나라 불교는 어쩌란 말입니까?”

“뭐요? 이 나라 불교!”

드디어 스님은 아예 표정관리를 포기하신 채 눈빛에 칼날을 얹어 확 쏘아보셨다. 아, 저 눈빛! 처사들은 더 이상 그 칼빛에 버티지 못하고 아무 소득도 없이 일어서서 하직인사를 드리려 자세를 취하자 마지막 쐐기를 박아버렸다.

“당신들이 걱정 안 해도 한국 불교는 여기가지 왔소! 또 누구한테 가서 장

- 4 -

사할지 모르겠지만, 그 따위 행동이 불자들이 할 짓이오?”

냉혹하게 한 마디 찍어놓고 인사고 뭐고 당신이 먼저 방을 나가 버렸다.

■ 회상기(回想記)

요즘은 일반화된 디자인, 그래픽, 비주얼 등의 용어가 상업미술, 도안, 응용미술 등으로 불리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그 분야의 추천 작가가 되기 위해 학부 학생 때부터 피 말리는 경쟁에 뛰어 들었다. 추천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특선 이상의 수상을 연속 세 번을 하거나 입선, 특선, 낙선이 섞이게 되면 아홉 번 입선 이상의 경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일 년에 고작 한 두 명이 추천에 오르는 평균 3백 대 일의 바늘구멍을 통과해야 하는 어려운 일이었다. 국가에서 시행하는 50년이 된 ‘대한민국 산업디자인’, 이 전람회는 디자인을 전공하는 사람들의 등용문으로 그때나 지금이나 경쟁은 여전히 치열하다.

그 무렵 한 젊은 스님으로부터 ‘부처님 오신날’ 기념카드를 만들어 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게 되었다.

나름대로 불교 일러스트레이션을 꾸준히 습작해왔고 워낙 젊고 과문한 때라 겁도 없이 9점을 그려서 9만 장을 찍었다. 불교에 처음 그래픽 테크닉을 도입했던 탓인지 인쇄 3주 만에 완전 매진 없어서 못 팔았다. 그리고 관심 갖고 찾아와준 기자들 덕분에 불교계에 이름이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디자인 불교를 만나다’, ‘응용미술이 불교를 깨우는 신선한 충격’, ‘불교계에 부는 디자인 바람’등의 기사 제목은 나를 ‘자고 일어나니 스타’로 만들어 놓았고 어쩌면 당연한 것처럼 아상(我相)과 교만의 늪에 빨려들고 있었다.

발표한 기념카드에서 한 번 주목을 받게 되자 주문이 줄을 이었다. 다시 연말에 연하장 10점을 발표하고 나니 조계종단에서 부처님 오신 날 봉축 포스터 의뢰기 들어왔다. 종단 포스터가 전국 사찰에 도배가 되자 이번에는 캘린더, 카탈로그, 책 표지, 캐릭터에 이르기 까지 대박이 나고 있었다. 수요는 넘치는데 혼자 일을 하다 보니 오라는 곳도, 갈 곳도 많았던 오지랖 펄럭거린 천방지축이었다.

낙하를 모르는 승승장구의 기린아, 겸손의 실체가 무엇인지도 몰랐던 풋내기 강사, 나의 30대 출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5 -

그 무렵 한 중견스님으로부터 프러포즈가 왔다. 불가에서는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을 그 스님으로부터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이라. 먹장난’이라고 휘갈겨 쓴 ‘닥종이 손부채’ 선물이 한 젊은 스님을 통해 전해져 왔다. 생각지도 못했던 관심표명이었다.

생면부지인 나한테 부채를 보낸 건 무슨 의미일가, 조계산 호랑이라 하던데 정말 그런 눈빛일까. 부채에 쓰인 ‘먹장난’이란 표현처럼 넉넉한 성품일까. 첫 만남의 기대 반 설렘 반이었다. 아득히 들리는 뻐꾸기 소리가 산 안에 가득했던 남도의 늦봄 오후였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첫 대면 첫마디치고는 어딘지 차가웠다. 그래도 첫 만남이라 두 손을 모으고 인사를 올렸다.

“스님께서 부르지 않았습니까?”

이젠 습(習)이 붙은 시건방진 선문답이 바로 튀어나왔다. 그 순간 나를 확 쏘아보는 그 눈빛! 팽팽한 긴장도 찰나였다.

* 습(習) : 몸에 붙은 습관, 관습, 여기서는 좋지 않는 버릇

“나 당신 같은 사람 부른 일 없소!”

눈빛도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아차! 싶었다.

“저어…스님, 저는 광주에서 찾아온 ….”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매서운 칼날 같은 일갈이 다시 날아왔다.

“일없소! 내 거처에서 당장 나가시오!”

“저어…스님 제가 실수를 했…….”

“당장 나가라는 말 못 들었소!”

노기마저 번진 완강한 거절, 찌르는 듯한 눈빛 때문에 혼이 빠져버렸다. 더 머물다간 어떤 사단이 벌어질지 모를 단칼의 기세였다. 문전축객(門前逐客)!

이런 경우도 있는 것인가? 한마디 말이 거슬린다고 이렇게 막대해도 되는 것인가. 허어, 문전박대도 아닌 문전 축객! 이것이 스님의 실체였던가…. 내 평생 처음 당한 어처구니없는 굴욕이었다. 한 달쯤 지나 부채를 전해준 젊은 스님이 찾아왔다. 내가 감정을 숨기지 않고 본능대로 폭발하자 그는 나를 위로했다.

30대 초반 국가에서 인정하는 추천작가에다 이미 교계에서 모셔지는 잘나

- 6 -

가는 교수의 시건방은 전혀 자기성찰의 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있었다. ‘흥, 이해 좋아하네, 사람 개 쫓듯 해놓고 이제 와서 이해? 그 따위 무자비로 무슨 중노릇 해!’

자존심에 대한 심각한 상처는 굴욕감, 모멸감 때문에 바늘로 건들기만 해도 터질 지경이었다. 어디서 그 중 법명만 들어도 끓어오르는 용광로가 되어 분노심이 지글거렸다. 무슨 뜻으로 보냈는지 모르지만 그가 보내준 그림 부채는 며칠 동안 내 화실에서 신주 단지 모셔지듯 하다가 어느 사이 신발장 구석에 처박히게 되었다. 난행난고(亂行難苦)의 시절이었다.

1년이 가고 2년이 지났다. 내게 부채를 전해 준 젊은 스님은 눈치가 있는지 없는지 기회만 있으면 내 화실을 찾아오곤 했다.

“한 달에 한 번씩 절에서 화보를 찍는데 그 스님께서 반드시 교수님께 자문을 받아 작업을 하라 하십니다.”

또 어느 날은 이런 말도 전해 주었다. ‘불교는 과거만 있지 현재가 없다. 불교의 시각포교도 만날 울긋불긋한 원색이나 어쭙잖은 달마 초상화 가지고 현대인들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겠는가. 고 교수 같은 젊은 인재들이 교계에 계속 충격을 줘야 한다.

또 2년이 지났다. 나를 그렇게 내쫓아 놓고 마음에 걸렸던지, 아니면 젊은 놈 하나 꺾어놓은 것이 안쓰러웠던지, 이도 저도 아니면 당사자는 말이 없는데 이 젊은 스님이 나를 화해시키기 위해 부단히 애쓰고 있는 것인지…. 기회 있을 때마다 소식을 전해주거나 새로 나온 책을 보내주곤 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이미 시멘트처럼 굳어져 그 어떤 위로도 들리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으로 일관한 채 그들만의 짝사랑이 4년째 이어지고 있었다.

어느 날 주한 스리랑카 초대 대사 마헨드란과의 인연으로 스리랑카 문화성의 초청을 받게 되었다. 나는 박물관, 유적지, 고찰 등으로 답사를 다니며 지내는 동안 한국에서 유학 온 현음 스님, 옥스퍼드 출신의 미산스님, 보스턴의 미타사와 김포 홍원사 주지를 겸하고 있는 성오 스님 등 눈 푸른 인연을만나 같이 행동했다.

스리랑카는 사찰 경내에 들어서면 승속 모두가 맨발로 다니게 되어 있다. 우리 일행은 문화성 배려로 사전에 연락이 되어 있어 그쪽 스님들과 만나 차담을 나누고나오는 길에 한 가족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포야 데이 때는 모

- 7 -

두가 하얀색 전통의 사리를 입는데 그들도 아이들을 포함한 온 가족이 품위 있는 깔끔한 차림이었다.

그쪽 스님들은 짙은 오랜지색 가사였으나 우리 스님들은 한국에서 입던 평상복의 회색 상하 동방 차림이었다. 그러나 삭발 모습이 승려로 보였던지 처음 본 젊은 내외가 유창한 영어로 몇 마디 말을 붙여왔다. 그러더니 어! 부부가 동시에 맨땅 위에 정중하게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닌가. 그러곤 두 손으로 스님들의 발을 조심스럽게 감싸안고 그 발등 위에 이마를 내렸다. 말로만 들었던 두면예족(頭面禮足), 가슴 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세분 스님들도 합장한 채 머리 허리를 굽혀 반 배로 답례했다. 우리들도 법당 안에서 부처님께 오체투지로 큰절을 올리지만 맨땅에서흙발 위에 올리는 이들의 하심(下心)은 처음 본 것이다.

잠시 후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두 명의 어린 고사리 손들도 부모가 하는 모습 그대로 스님들의 흙발 위에 머리를 숙여 이마가 닿았다. 가슴 조여든 충격이었다. 이때 두세 걸음 뒤 휠체어에 앉아 있던 한 노인이 젊은 내외와 싱활리어로 몇 마디 주고받더니 이내 몸을 움직였다. 젊은 내외의 부축을 받아 서리같은 하얀 머리가 천천히 스님의 발등위에 내리는 순간 아! 나도 모르게 울컥 눈시울이 젖어버렸다. (젊은 남자는 캔디 대학 교수, 84세의 노모는 영국을 상대로 독립운동을 했던 여걸로 20년 전 적십자사 총재를 지냈던 분)

처음 만난 자식 또래의 이국 손님들에게 정성을 다해 올리는 하심의 모습, 부모를 모시는 아들 내외의 지극한 효심, 내 발등을 닦아주던 일곱 살, 다섯 살 어린남매의 수정 같은 눈빛들….

이 모든 모습들은 먹먹한 목멤으로 나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3대 가족이 이룬 감동과 충격, 그것은 진정한 부처님의 제자들만이 행할 수 있는, 그 어떤 아상도 교만도 끼어들 수 없는 순수한 바라밀의 참모습이었다.

* 아상 : 몸과 마음에 참다운 자신이 있다고 여기는 잘못된 생각. 자기의 처지를 자랑하여 다른 사람을 무시하거나 업신여기는 마음

* 바라밀 : 열반에 이르고자 하는 보살의 수행

그날 나 스스로 지니고 있던 분노의 덩어리가 3대가 보여준 하심의 모습과 겹치고 또 겹치면서 내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통한의 아픔으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 8 -

4년 동안 콘크리트 벽 속에 갇혀 있던 자존심이라는 아상이 백발노인의 하심 앞에 무너지고 어린 남매의 눈빛 앞에서 조각조각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분노와 상처의 자리에 스리랑카의 눈물비가 자리를 바꾸면서 하심과 겸손의 단어를 뼛속에 새기는 성지 순례의 참회였다.

과거를 뉘우치는 것이 참(懺)이고 다가올 잘못을 예방하는 것이 회(悔)라고 배웠다. 또 진실된 참회란 인간의 내면에서 가장 승화된 정신적 현상이며 참회에 동반된 눈물 또한 자기초월적 정서라고들 한다. 나는 지금껏 어떤 기억을 해체해봐도, 아마 평생 흘렸어야 할 눈물을 스리랑카에서 다 쏟아버렸지 않나 싶다.

스리랑카 충격 이후 나는 지난 세월을 살아오면서 몇 가지 바뀐 습(習)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두 번 다시 아상에 갇히지 않고 상을 멸할 수 있는 나만의 방법이었다.

우선 매사에 자제하고 참는 진심(嗔心) 다스리기를 위해 ‘결코 그래서는 안 되는 마음’ 즉 불인지심(不忍之心)의 습관을 지금도 길들이며 살아간다.

사람들 마음에는 경중의 차이는 있어도 대부분 탐, 진, 치(貪瞋癡) 3독이 있어 그 독으로 서로를 괴롭힌다. 그리고 모두들 ‘저놈 때문’이라고 다툼의 원인을 상대방 책임으로 돌린다. 그러나 이 또한 수많은 과거 생부터 내가 저축해온 나의 아상으로 인정해야만 그 자리에 하심이 채워지게 됨을 늦게나마 깨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감히 중생을 사랑하는 (慈), 부처의 슬픔(悲)을 배우고자 역지사지를 연습하다보니 마찰의 슬픔과 허용의 기쁨을 또한 터득하게 되었다. 상대방이 어떤 자세와 언행으로 다가오건 그것은 그들의 상이고 그들의 마음이지만 그 또한 젊어 한때 내 모습이기도 했다. 그래서 스리랑카 가족들처럼 하심의 폭을 넓히고자 애써 불인지심을 하고 나면 감사하게도 맑고 투명하게 정화된 나만의 평화와 고요가 거기에 있다.

하심은 내게 있어 약자의 지위가 아니라 강자의 지혜였다.

불교에 섭수문(攝受門)과 역화문(逆火門)의 가르침이 있다. 스승이 제자를 지도할 때 부드럽고 온화하게 순리대로 단계를 올라가는 가르침을 섭수문이라 했다. 역화문은 반대로 개성과 고집이 강한 제자들에겐 과격, 처벌, 욕설, 매질, 추방 등 상대를 자극과 흥분으로 몰아 지도하는 방법이다. 만약 나의 30대 초반, 가르침의 시작이 섭수문이었다면 과연 내가 이 정도라도 깨칠

- 9 -

수 있었을까 거듭거듭 생각해 본다.

젊은 시절 문전축객 당했던 역화문의 가르침은 스리랑카에서의 통렬한 참회를 거쳐 깊은 사제지간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나의 인생에 전환점을 긋는 이정표가 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내 삶을 지켜주는 받침돌이 되고 있다. ‘어떤 중’이었던 나의 스승, 법정(法頂)스님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비에 젖은 해후

스리랑카에서 돌아온 다음 해 늦봄, 나는 성지순례의 소감을 담은 내용으로 광주와 서울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어떻게 아셨는지 광주전을 할 때 초대도 하지 않았는데 법정 스님은 젊은 스님과 함께 일부러 찾아오셨다.

“그때 먼저 신분을 밝히시지….”

민망해하시면서 위로해주셨다. ‘그때’ 먼저라 하신 말씀은 벌써 5년 전의 일이었는데 스님 역시 내내 그때의 일을 내려놓지 못하고 계셨다.

전람회도 끝나고 뒷정리가 마무리되자 불일암을 찾아 나섰다. 출발할 때 광주 날씨는 은빛 구름이 때 이른 초여름을 부르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포장길 절반에 신작로 자갈길이 절반, 2시간 거리였다. 완행버스가 송광사 초입에 들어설 무렵 아차, 빗방울이 후두둑 버스 창을 때렸다.

너절한 사하촌 점방에는 그 흔한 우산은 없었다. 부득이 여름 한철 스님들이 즐겨 쓰는 밀짚모자 하나를 샀지만, 잠시 망설임이 왔다.

대숲을 지나 불일암 지붕이 보이자 망살임은 다시 나를 돌계단 위에 주저 앉혔다. 예전처럼 내치지야 않겠지만 과연 나를 반기실지 어떠실지. 애써 담담한 마음으로 마당에 들어섰으나 차마 스님을 부를 수가 없었다. 만감이 교차했다.

이때의 심상을 스님께서 1999년 5월에 있었던 나의 두 번째 개인전 서문에 이렇게 써주셨다.

“내가 고현 교수를 처음 만난 것은 십 수 년 전 불일암에서였다. 비가 내리던 여름날 오후 마루에 앉아 비에 젖은 대숲에 눈을 팔고 있는데 그때 한 나그네가 불쑥 우산도 없이 밀짚모자를 쓰고 뜰에 들어섰다. 그가 바로 고현 교수였다. 그날의 첫 대면이 하도 선명해서 아직도 내 기억의 바다에 그가 떠 있다.(하략)

- 10 -

스님께서는 나와의 첫 만남을 ‘문전축객 서건’이 아닌 이날로 잡으셨던 것이다. 이것은 문전축객 사건을 내가 고백하지 않는 한 스님은 결코 개봉하지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이기도 했다.

그랬다 스님의 글처럼 이날 나는 비를 맞은 채 말없이 마당에 들어섰고, 스님은 단박에 나를 알아보시고 반가워하셨다.

“참 어려운 걸음 하셨군요.”

나도 모르게 빗물인지 눈물인지 이슬이 번졌다. 우리는 한참 동안 비에 젖은 대숲을 바라보고 있었다.

“스님의 역화문 가르침을 깨치는 데 5년이나 걸렸습니다. 제가 매사에 이렇게 어둡습니다.”

“그렇게 이해하고 비워버린다면 오히려 내가 감사해야지요.”

“스님, 제가 가끔씩 찾아와 친견 드려도 되겠습니까?”

“삼 대 일! 세 번 와서 한 번 만나도 괜찮다면 언제든 오십시오.”

스님과 나는 처음으로 눈길을 나누며 함께 웃었다. 조계산 호랑이한테도 이런 눈빛과 장난기가 있으셨던가. 나는 부채에 쓰였던 ‘먹장난’을 떠올리고 있었다.

“스님, 말씀 낮추십시오, 제가 어렵습니다.”

“그래요? 앞으로 하시는 거 봐서요.”

스님과 나는 두 번째 눈길을 같이하며 웃었다. 비는 어느덧 멎어가고 이따금 풍경소리가 아득하게 점을 찍으며 사라져 갔다.

그날 쪽마루에 앉아 젖은 옷을 입은 채 스님이 따라주시던 그 때의 그 차 맛,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 삼촌과 조카

스님께서 서울 봉은사 다래헌 생활을 접고 조계산 송광사로 다시 입산 하시던 때가 1975년의 일이다. 고려시대에 세워졌다가 폐사지기 된 예전 자정암 터에 다시 불일암(佛日菴)을 중창하실 때 법정 스님을 도와 함께 일했던 분이 현장 스님이시다.

두 분 사이는 남다르게 세연이 깊어 속가 항렬로는 법정 스님의 사촌누님의 아들이니 조카가 되고, 부처님 항렬로는 송광사 효봉 문중의 법(法)자 다음 현(玄) 자 돌림이니 사숙지간이 된다.

- 11 -

앞글에서 부채를 전해준 ‘젊은 스님’이 바로 현장 스님이시다.

법정 스님 열반 이후에도 늘 삼촌 스님의 자취와 흔적을 말없이 지키며 지금은 전남 대원사에 회주(법회를 주관하는 법사)로 수행중이시다.

내가 그때 그 시절을 회상했을 때 젊은 스님이시지 그 동안(童顔)의 푸르름도 환갑 진갑이 다 지나 이젠 서리 내린 세월이 되어 버렸다.

어느 날 현장 스님께서 연락을 주셨다. 법정 스님과 인연이 닿은 지인이나 승속의 제자들에게 스님의 흔적을 지니고 있으면 빌려달라고 했다. 국내외 흩어져 있는 자료들을 모아 선묵집 발행도 하고 전람회, 연구소, 기념관, 독서모임 등 법정 스님과 관계된 문화 사업을 하고 싶어 하셨다.

첫 인연의 부채 그림과 몇 통의 편지 중에서 하나를 골라 보내드렸다.

평소에도 조카 삼촌이었지만 두 분 성격은 남과 북이다. 법정 스님은 여러 책을 통해 우리가 익히 알듯이 생각도 생활도 습관도 인간관계도 간소화, 담백화, 최소화가 기준이 되어 ‘무소유’로 이어진다. 그것들에 습이 붙어 언행일치(言行一致) 필행일치(筆行一致)의 대쪽 같은 삶을 사셨다.

반대로 현장 스님을 친견한 사람들은 착각할 정도로 체구나 얼굴이나 목소리가 단아하고 부드러운 성품이시다.

그의 끈덕진 부지런함은 불교 포교의 물레방아였다. 종교를 초월한 비구니, 수녀, 정녀들로 구성된 ‘삼소회 합창단’이 30년 전에 그가 주선하여 생겨났고, 티베트, 네팔, 인도, 중국, 부탄 등으로 뛰어 다니시더니 대원사 경내에 ‘티베트 박물관’이 문을 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시청으로, 문광부로, 국회로 줄기차게 발품을 팔고 다니시더니 ‘아시아문화교류 재단’이 만들어지고 출판사도 ‘불일출판사’에서 ‘다래헌’에 이르기까지 개폐업 신고가 세 번에 이를 만큼 일을 몰고 다니셨다.

* 정녀(貞女) : 숫처녀, 원불교의 여성성직자

* 삼소회 : 불교의 비구니, 가톨릭의 수녀, 원불교 정녀들의 모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발견하고 그 일에 빠져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법정 스님께서 열반하시고 난 후 ‘맑고 향기롭게’ 법인 이사장을 맡는가 했더니 어느 날 갑자기 모든 것을 내려놓아버렸다. 그리고

- 12 -

지금은 오로지 조용한 수행승의 모습으로 돌아가 계신다.

삼촌 스님이 떠나시면서 그의 포교 열정까지 거두어가 버린 것인지. 허무가 불교를 만나면 공심(空心)과 무상(無常)이 됨을 보여주는 것인지, 상황에 따라 어떤 일에 몰입했다가도 한순간에 내려놔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오히려 더 아름답게 느껴지게 함을, 현장 스님을 통해 배웠다.

■ 괴팍한 사람들

1986년에 출간된 스님의 저서 <물소리 바람소리> 수상집 글 속에 이런 내용이 들어 있다.

“홀로 있기를 좋아한 사람들은 대개가 성격이 괴벽스럽다. 홀로 있고자 하기 때문에 누구나 사람 대하기를 몹시 싫어한다. 이런 괴물들의 공통점은 먼 데 사람은 사랑할 수 있어도 가까이 있는 사람은 사랑할 수가 없다.

휴가철인 요즈음 불쑥불쑥 찾아오는 사람들 때문에 나는 내 인내력의 바닥을 자주 들여다본다. 나는 오늘 두 번이나 문전축객의 결례를 범했다. 이 칼럼의 마감 날이 박두하여 아침부터 책상 앞에 앉아 ‘숙제’를 하려고 뒤척이는 참인데, 오늘따라 불청객들이 자꾸 밀려드는 바람에 번번이 일에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방 앞에 입선(入禪)의 패를 내걸고 막 일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또 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있었다.(중략) 자 이러니 숙제인들 제대로 할 수가 있겠는가. 이렇게 두 차례나 문전축객을 하고나니 내 속 뜰은 말할 수 없이 거칠어진 셈이다. 나는 오늘, 남은 고사하고 내 스스로도 구제하지 못했구나 하는 자책이 따랐다.”

오래전에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혼자 피식 웃음이 터졌다. 나 이전에도, 나 이후에도 당신 만나러 갔다가 쫓겨난 사람이 한 둘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글(文), 환(畵), 창(曲), 굿(劇) 즉 ‘쟁이’라고 불리는 소위 ‘끼’로 사는 사람들 또한 독거인 못지않게 성격이 괴팍하다고들 한다. 평소에는 누구보다 친절하고 다감하지만 일단 작업에 몰입하게 되면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만큼 한 꼭짓점에 필이 꽂히면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하기에 대부분 작업 중에 불청객이 찾아오게 되면 괴팍한 사람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13 -

원고지가 되었건, 오선지나 캔버스가 되었건, 자신의 섬세한 감각을 조율하여 타인의 감동으로 연결시켜줘야 하는 것이 예술인들의 타고난 팔자이고 업(業)이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를 격리시켜 산야에 묻혀버리거나 때론 한 작업이 끝날 때까지 잠적해 버리는 경우도 흔히 볼 수 있는 모습들이다.

스님도 독거인에 예술인 기질을 보태면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출가 이유를 묻는 사람들에게 한결같이 ‘내 식대로 살고 싶어서’라고 대답하셨다. 당신 뜻대로 사고 싶어 모진 결심으로 속정(俗情)마저 버리고 떠나기를 시도하신 스님으로선 더욱 ‘나 홀로’가 간절하셨을 것이다.

■ 재앙 덩어리

스리랑카를 다녀온 후 세 번째 찾아뵈었을 때다.

스님은 몇 년 전의 기억을 풀어 놓으셨다. 어느 날 미국에서 교포 한분이 스님을 찾아왔다. 그 불자는 그동안 살아왔던 이민 생활 중에 힘들고 괴로울 때마다 스님이 쓰신 <무소유>와 <서 있는 사람들>을 거듭거듭 읽었다고 한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옳게 사는 것이며, 재물이 모아지면 어떻게 써야 하는 것인지, 또 어려운 이웃을 위해 어떤 마음을 내야하며, 힘들게 사는 조국을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 등을 늘 생각하며 자신의 작은 성공담을 목메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어려울 때마다 자신을 지탱해준 보약과 같은 스님의 저서에 대한 감사함을 고민하다가 여기까지 찾아오게 되었다고 한다. 어느 정도 대화가 마무리될 즈음에 이 처사는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무례’를 용서하라며 작은 봉투 하나를 내놓았다. 스님은 당황스러웠다.

스님은 산중에 홀로 사는 중이 무슨 돈이 필요하겠느냐고 정중히 거절했다. 그러나 이 불자도 여기 불일암까지 찾아올 정도라면 하루 이틀 생각한 일이 아니라서 한 고집이 있었다.

막무가내로 밀어대는 이 횡재 덩어리 때문에 스님은 슬슬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부담 주지 말라고 언성도 높여보고, 사람 시험하는 거냐고 면박도 줘보고, 차라리 산 아래 큰 절 주지에게나 주라고 달래보기도 했다.

이 교포 불자는 스님의 완강한 눈빛 앞에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봉투를 집어넣고 일어섰다. 쪽마루에 걸터앉아 신발을 신는가 싶더니 스님이 잠깐

- 14 -

방심한 사이에 봉투를 헌식대(새나 들짐승을 위해 물과 먹이를 놓는 넓은 오지그릇) 밑에 슬쩍 찔러놓고는 도망치듯 나가버렸다.

그 불자는 쏜살같이 한참을 내려간 후 뒤에서 쫓아오며 부르는 스님께 합장을 하면서 큰 소리로 “어디에 쓰시더라도 제 이름만큼은 끝까지 숨겨주십시오”라고 인사한 후 다시 비호같은 뜀박질로 산을 내려가 버렸다.

스님도 더는 어쩌지 못하고 봉투를 손에 든 채 망연자실하다가 도대체 무엇이 들었나 내용물을 확인해 보았다. 먼저 명함 한 장이 툭 떨어졌다.. 명함 뒷면에는 ‘미국에 오시거든 꼭 연락주십시오’라는 메모가 적혀 있었고, 수표 한 장이 들어 있었다. 5천만 원…. 거금 5천만 원의 가치는 지금도 무거운 돈이지만 도시의 집 한 채 값이 천만 원 전후였던 1970년대 말이고 보면 기와집 다섯 채 값! 엄청난 거금이었다.

도대체 이 거금을 어디에 어떻게 써줘야 그 불자의 공덕을 돕게 될 것인가? 잠시 출타할 때는 이 물건을 몸에 지녀야 되나, 텅 빈 암자에 그냥 두고 가야 하나?

갑자기 횡재가 들면 횡액이 따른다 했던가. 예전엔 그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살았는데, 갑자기 부스럭거리는 소리에도 귀를 세우게 되고, 밤에는 마음이 더욱 편치 않았다.

‘허어 참, 이 무슨 마구니(魔軍)란 말인가?’

스님은 이틀 동안 속을 끓이다가 3일째 되던 날 아침, 결국 그 봉투를 들고 산을 내려갔다. 도대체 보이는 것, 들리는 것, 생각하는 것 등 모든 것이 제자리를 이탈하니 견딜수가 없었다. 스님은 큰 절 주지를 찾아갔다.

“이 재앙 덩어리 때문에 마음이 불편해서 못 살겠습니다. 절대로 출처는 묻지 말고, 스님께서 알아서 선용(善用)해 주십시오.”

미국 불자가 스님 앞에서 그랬듯이 등 뒤에서 부르는 소리도 아랑곳없이 뛰다시피 산길을 되짚어 올라오고 있었다. 스님은 키가 크고 걸음이 빨랐다. 제제소를 돌아 내를 건너고 전나무 숲에 이르자 갑자기 스님은 걸음을 딱 멈추셨다. ‘어? 내가 언제부터 휘파람을 불고 있었지….’

“재앙 덩어리가 무섭긴 무섭나 봐요. 그때서야 길섶의 들꽃이 보이고, 못 들었던 뻐꾸기 소리가 다시 들리더라니까. 우천 거사를 보면 이따금 미국 그 처사가 생각납니다.”

- 15 -

스님은 그때를 생각하시며 파안대소하셨다. 교포가 시주한 그 정재(淨財)는 훗날 송광사 대웅전 중창불사 때 크게 선용되었다고 들었다.

■ 발바닥과 빨래판

스님은 그림을 보기도, 그리기도 매우 좋아하셨다. 그것도 온갖 열정으로 캔버스를 가득 채운 화려한 대작보다는 단숨에 그려버린 담백한 소품의 묵화나 판화 쪽을 더 좋아하셨다. 성품대로였다.

어느 해 가을, 내 화실에 처음 오셨다. 걸려 있는 완성작도 보시고 제작 중인 작품도 한참을 눈여겨보시더니 ‘불교 미술 현대화, 불교디자인 개척화’라는 화두를 안고 작업한다고 들었는데 그것이 어떤 의미냐고 물으셨다.

20대 후반 대학 조교 시절이었다. 연례행사로 학기가 끝나가는 12월 중순쯤에 미술대학 교수님들의 합동 전람회가 열리곤 했다. 조교들도 참여하게 되었는데 처음 낸 작품이 부처님의 수인(手印)이 소재가 된 내용이었다.

1970년대 후반 풍경화, 인물화, 산수화로 도배가 된 자리에 생뚱맞게 손바닥이 등장했으니 모두들 썰렁해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해는 그럭저럭 넘어갔다.

다음 해 그맘때 또 전람회가 열렸다 이번에는 족상(足相)이 소재가 되었다. 결코 의도적인 작업이 아니었다. 불상이 출현하기전인 원시불교 시절 경배의 대상이 되었던 수인, 보리수, 족상, 법륜, 만(卍) 등을 작품의 소재로 삼았을 뿐이다. 그런데 사단이 나려고 그랬던지 평소에도 농을 잘하는 전임강사 최모 선배가 오픈 때 출품작을 설명해가다가 내 작품 앞에서 큰 소리로 엉뚱한 일갈을 해버렸다.

“어이! 어디 아파? 작년에는 손바닥, 올해는 발바닥? 내년에는 뭐가 나올지 겁나네, 이 사람아!”

전람회장은 순식간에 엄청난 폭소가 터져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초청된 인사 대부분이 작년에도 내 그림을 본 잔상이 남아 있는 사람들이라 최선배의 농담에 충분히 긍정하는 웃음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다. 도지사. 시장 법원장 등 내로라하는 초청인사들, 수많은 교수들, 미술대학 학생들 그렇게 200여 명 앞에서 공개적

- 16 -

으로 총살을 당하고 만 것이다. 나는 도망치듯 전람회장을 빠져 나왔다.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정신없이 걷다가 어느 낯선 주점 앞에 발길이 멎었다. ‘무식하게 수인과 족상을 손바닥 발바닥이라니, 예수쟁이 눈구멍으로 평소에도 내 종교를 곧잘 시비하더니!’ 나는 최 선배를 안주 삼아 폭언과 폭주로 울분을 삭혔다.

다음 날 새벽, 심한 갈증으로 눈을 떴다. 정신도 몰골도 내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비몽사몽 간에 번개 같은 한 생각이 내 뒤통수를 쳤다.

‘그렇지! 불자들에게나 수인이고 족상이지 일반 사람들에겐 손바닥 발바닥이 당연하겠지. 아무리 종교를 의식한 작품이라 해도 동감도 감동도 없다면….’

나는 벌떡 일어나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초겨울의 싸한 새벽 냉기가 정신이 번쩍 들도록 온몸을 조이며 파고들었다.

‘지금의 불교 미술은 구태의 모방과 답습으로 전통이라는 가면 뒤에 안주하고 있을 뿐이다. 또 불교에 있어 디자인이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렇다! 작가 자신만 만족하는 그런 작업이 되어서는 안 되겠다. 불교미술을 현대화시키고 불교에 디자인을 접목시켜 조잡 반복에서 탈출시켜야 한다.

불교미술 현대화, 불교 디자인 개척화‘란 화두는 그렇게 해서 스스로 세우게 되었다는 어쭙잖은 말씀을 드렸다. 스님께서는 한 참을 진지하게 들으시더니 나를 지긋이 바라보셨다.

“고 교수는 그 망신 준 최 선배를 지금도 미워하십니까?”

엉뚱한 질문이셨지만 사실이 그러하기에 아무 대답도 못했다.

“일찌기 선지식을 만나 한 소식 했군요.”

“네에? 지금 선지식이라 했습니까?”

“약관 20대에 평생의 양식거리를 얻었으니, 큰 복을 지으셨구먼. 길은 찾았으니 서두르지 마세요. 뚜벅뚜벅 가다 보면 시절 인연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최 선배야말로 고 교수의 눈을 틔워준 선지식임을 잊지 마세요.”

‘그 빌어먹을 최 선배가 선지식? 그것이 그렇게….’

그때 스님께서 갑자기 큰 소리로 웃으셨다. 어리둥절한 나를 보시더니 당신도 젊은 시절 비슷한 경험이 있다고 털어 놓으셨다.

내게도 풋중 시절이 있었어요. 해인사 선방에 있을 때인데 방선 시간에 장

- 17 -

경각으로 포행을 갔는데, 마침 장경각 안에서 나오던 시골 아주머니 같은 분

과 마주쳤어요. 그 아주머니 말이 팔만대장경이 있다고 해서 왔더니 아무것도 없다고 혼자서 투덜대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그 안에 모셔진 대장경을 보지 못했느냐고 물었더니 웬 ‘빨래판’만 잔뜩 있더라는 거예요. 빨래판?

그때 나는 크게 깨쳤어요. 무슨 번쩍번쩍한 금부처쯤 기대하고 들어갔겠지요. 팔만대장경이 아무리 국보라 해도, 국난 극복의 발원이 담긴 부처님 말씀이라 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눈에는 한낱 빨래판밖에 안 되는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한 소식 굳히게 되었지요. ‘경전을 우리말로 번역해야겠다. 다시는 빨래판 소리 안 듣도록 해야겠다’고 자각하게 되었지요.

“고 교수 작업 저 안쪽에 수상족상이 있듯이, 내게도 지금껏 글쓰기로 이어지는 저 밑바닥에는 ‘빨래판’이 동행하고 있는 거예요. 사람은 누구나 늘 일상의 화두와 부딪히며 살아가지만 그것을 안으로 굴려 지혜를 얻은 사람은 복을 많이 지은 사람이지요.”

나는 비로소 스님의 말씀에 번쩍, 확신의 눈을 뜨게 되었다.

아, 이래서 스승의 인가(認可)가 필요한 것인가, 스승의 인가를 받은 선방 수좌의 심정이 이런 것인가? 나는 스님의 면전에서 당신의 육성으로 빨래판 말씀을 직접 들었다. 그리고 내가 세운 ‘불교미술 현대화, 불교디자인 개척화’에 대한 나름의 확신은 평생 잊지 못할 소중한 법문으로 내 삶을 받쳐주는 이정표가 되었다.

한마디 가르침으로 평생의 양식을 얻었으니 그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으랴. 나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 모기 자부(子婦) 가르침

처서, 백로가 지나 추분이 코앞인 9월 중순, 절기를 모른 듯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날이었다. 스님께서 화실에 잠깐 들러도 되겠느냐고 전화가 왔다.

완성된 소품이나 제작 중인 작품을 한참 둘러보신 후 차탁이 있는 곳으로 모셨더니 ‘웬 모기향인가’를 궁금해 하셨다. 보름쯤 전부터 하수도 토관 교체공사를 한다고 온 동네를 파재낀 뒤로 갑자기 모기들이 기승을 부려 향을 피울 수밖에 없었다. 스님은 살충제나 다른 독극물은 쓰지 않는지를 물으시더니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하시겠다며 ‘모기 자부 이야기’를 꺼내셨다.

- 18 -

“해 질 녘이 되어 시어머니 모기가 외출을 하면서 며느리 모기에게 말했어요. ‘얘야, 오늘 내 밥은 하지마라’고 당부를 하자 며느리 모기가 그 이유를를 물었어요. 시어머니 모기가 ‘마음씨 고운사람 만나면 잘 얻어먹을 것이고, 모진 놈 만나면 맞아 죽을 테니 이러건 저러건 내 저녁은 하지 마라’고 했다는 우스갯말이 있습니다.”

“스님 그 말씀은 <서 있는 사람들>에선가?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만.”

“그래요. 그 책 ‘모기 이야기’편에 들어 있어요. 어느 노승한테 들었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는 나도 모진 놈 안 되려고 가끔은 헌혈 보시하고 삽니다.”

“스님, 말씀이 나왔으니 하나 여쭙겠습니다. 우리 일상에 파리, 모기, 바퀴벌레 등 해악을 끼치는 벌레나 유충들에 대해 솔직히 불자로서 어디까지 자비행을 해야 합니까?”

“교수님 정도 되시는 분도 그 경계를 두고 고민하십니까? 그럼 다른 의미로 한 말씀 드리지요. 우리나라 국사 책에는 어디를 봐도 을지문덕 장군이 당나라 대군을 ‘쓸어버렸다’, 이순신 장군이 23전 23승을 하면서도 ‘왜군을 물리쳤다’ 등으로 표현했지 ‘죽였다’, ‘전멸 시켰다’ 등의 말은 쓰지 않았습니다.”

“듣고 보니 정말, 저도 그렇게 배운 것 같습니다.”

“왜 그런 줄 아세요? 빗자루로 쓸어버렸다거나, 왔던 저리로 다시 물리쳤다. 그것은 다분히 ‘살생’이란 단어를 쓰고 싶지 않다는 우리 민족의 불교적 정서를 뜻하는 것입니다. 모기나 파리도 그래요. 옛 어른들은 우리 생활을 불편하게 했던 미물일망정 마당에 모깃불을 피우거나 방문을 이중으로 설치하여 접근을 못하게 했지 죽이지는 않았습니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스님의 여담이나 조크 속에는 생각과 마음의 차이가 분명한 촌철살인이 들어 있었다. 우리가 보았거나 읽었거나 느꼈던 그 어떤 내용도 당신을 통해서 다시 걸러져 듣게 되면 전혀 다른 무게로 다가오곤 했다.

* 촌철살인(寸鐵殺人) : 한 치 쇳조각으로 사람을 죽이다. 짤막한 경구나 단어로 사람을 감동시키거나 사물의 핵심을 찌르는 것을 비유하는 말

■ 화상(畵想)을 얻다

아직 물안개가 산 안에 가득한 6월말 초여름 아침, 이때쯤이면 하계 수련회

- 19 -

관계로 아래 절에 내려와 계심을 알기에 헛걸음을 줄일 양으로 혹시나 싶어 큰 절 쪽으로 먼저 발길을 잡았다.

일주문을 지나 부도전에 반 배 하고 천왕문을 거쳐 종고루 앞에서였다.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과 마주쳤다. 송광사 총무 소임을 보고 계시는 현고 스님이셨다. 효봉, 구산 스님의 직계 반열인 ‘현’자 돌림으로, 왜 하필이면 남의 속명을 뒤집어 법명을 삼았느냐며 서로 맑은 눈빛 나누던 사이였다.

법정 스님 안부를 물으니 ‘그 스님 언제는 큰 절에서 주무시더니 한밤중에도 기어이 당신 토굴로 가버리는 분이시다. 무슨 우렁각시 숨겨 놓은 것도 아니고…. 한바탕 파안대소하고 헤어졌다.

스님이 불일암에 계실 거라는 귀띔만으로도 마음은 이미 선경(仙境)이다. 계곡의 산길은 아직 햇살이 닿기 전이라 풀숲엔 영롱한 구슬들이 물방울 은하수다. 산 중턱에 접어들면 스님이 직접 쓰신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는 낯익은 팻말이 눈에 잡힌다.

초행자들이 가끔 길을 잃기에 써놓은 것이지만 그걸 볼 때마다 이정표로만 읽혀지지 않았다. 어려운 말이 아닌데도 우리들 세상살이의 뼈 있는 지침처럼 묘한 여운을 느끼게 하곤 했다.

죽림을 지나 돌계단 위에 올라서니 마당 한 켠에 아뿔싸, 스님께서 이상한 자세로 하고 계셨다. 가랑이 사이로 머리를 넣은 채 나를 거꾸로 보고 계시다가 순간 자세를 풀고 반가워하셨다.

“어서 와요. 아직 이른 시간에 어쩐 일입니까?”

“주암댐 근처에 동아리 제자들과 MT 왔다가 혹시나 싶어 왔는데 오늘은 운이 좋은 날인가 봅니다. 그런데 스님, 조금 전 그 제세는…?”

“아, 세상을 거꾸로 보고 있는 중이었소. 마침 다로에 물을 올려놨는데 잘 오셨소.”

“스님 어린 시절에나 하던 그런 놀이를 지금도 즐기시나요?”

“왜 그러면 안 됩니까? 모양새는 좀 꼴사납지만 어린 시절 느낌과는 전혀 달라요.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으로 편중되어 있는 고정관념 치유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스승은 없어요.”

“네에? 거꾸로 보기를 통해 고정관념을 치유한다고요?”

“보는 각도를 달리함으로써 대상에 대한 새로운 면을 인식할 수 있어요. 우리들 인식 속에 들어와 이미 굳어져 버린 선입견을 벗어나야 하는데, 내 눈

- 20 -

이 열리면 열린 눈으로 보는 세상도 달라 보이지요. 고정관념 지우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의사는 없어요.”

스님의 말씀을 이해는 하면서도, 한편 조금 전의 민망스러운 자세와 지금의 모습이 교차되어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

나는 결국 스님의 말씀에 감동되어 차를 마시다 말고 한 번 해보겠다고 일어섰다. 그리고 내가 가랑이 사이로 얼굴을 넣은 채 군대에서 했던 ‘대가리 박아’를 실시하자 내 자세가 어설펐던지 스님이 다가오셨다. ‘무릎을 똑바로 펴라. 다리를 더 벌려라. 양손으로 벌목을 잡아라’등 세련된 가르침이 이미 숙달된 조교가 따로 없었다.

처음엔 몹시 어지러웠다. 그러나 가르쳐주신 대로 심호흡과 쉬엄쉬엄 몇 번을 거듭하다 보니…아, 어린 시절 경험과는 정말 전혀 다른 세계가 다가왔다.

스님은 고정관념으로 보지 말고 새로운 열림으로 보라 하셨다. 일어섰다 구부렸다를 반복할 때마다 모든 것이 감동을 넘어 충격으로 다가왔다. 대상(對象)들의 시각적 이상향이 열려가고 있었다. 평생 양식의 또 다른 세계를 견인하게 된 것이다.

스님은 이미 가셨지만 그날 불일암에서 당신의 거꾸로 보기 가르침은 더 이상 나의 방황을 끝내게 만드셨다. 스님은 나에게 ‘불교미술 현대화, 불교 디자인 개척화’에 대한 확신뿐만 아니라 시각의 대상을 투명, 고요, 열림, 원근, 생략, 침묵 등 붓을 들어 표현하기 이전에 더욱 넓고 깊은 사유(思惟)의 뜰을 먼저 채집하게 만드셨다.

지금도 내 작품 속에는 스님의 눈빛이 화필 영감의 중심에 서 있다.

■ 버리고 떠나기

스님은 젊을 때 민주화 운동을 할 때를 이렇게 회고 하셨다.

“민주화 운동을 할 때 박해를 받으니까 증오심이 생기더군요 내 마음에 독을 품은 게 증오심인데 그때, 이래서는 안 되겠구나 하고 느꼈어요. 순수한 마음에서 이탈하는 게 괴로워, 중노릇의 내 본분이 뭐냐고 스스로 물었지요. 결국 본래 자리로 되돌아가자 해서 산으로 들어갔어요. 하지만 지금도 세상일에 관심을 안 가질 수는 없지요.”

- 21 -

스님은 1954년 6·25 전쟁 직후, 전남대 상과대학 3학년을 끝으로 출가하셨다. 그때는 속(俗)을 접고 승(僧)으로 가신 최초의 ‘버리고 떠나기’였다. 혈육의 생살을 찢는 출진(出進)이라 일생일대의 비장한 초심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1975년 10월, 민주화운동 동지들과 당신을 따르던 수많은 눈빛들을 남겨둔 채 봉은사 시절을 접고 두 번째 ‘버리고 떠나기’를 시도 하셨다 그러나 세상은 결코 그를 내버려두질 않았다.

조계산 불일암의 17년…. 일 년 전엔가? ‘이젠 불일암과도 인연이 다 된 것 같다. 세인들에게 너무 많이 노출되어 더 이상 독거가 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실 때 나는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스님의 법명은 전국구가 되어 있었다. 종무소에서는 송광사를 찾는 사람들보다 불일암을 찾아오는 이들이 더 많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결국 세 번째 ‘버리고 떠나기’를 시도하면서 오죽했으면 삭발한 일곱 제자들에게 조차 얼음장 같은 선언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지금 가고자 하는 곳은 한겨울에 영하 20도가 오르내리는 강원도 첩첩선중, 해발 8백 고지쯤 된다. 그곳은 전기, 수도, 전화 어느 것도 되지 않는 거의 원시적인 삶이 될 것이다. 만약 그곳마저 세인들에게 노출되면 나는 더 깊은 곳으로 잠적해 버리겠다.

필요하거나 도움 받을 일이 생기면 내 쪽에서 연락하겠다. 정말 나를 생각하고 이해해준다면 나 살고 싶은 대로 내버려두라. 가까이 있는 그대들부터 또 속가의 지인들에게도 그렇게 이해시켜 주고, 불일암은 너희들이 서로 돌아가며 살도록 해라.”

1992년, 스님은 그렇게 해서 세 번째 ‘버리고 떠나기’를 시도하셨다. 그리고 그곳에서 18년을 그렇게 사시다 가셨다. 어느 삭발 유발 제자도 스님의 거처를 몰랐고, 나 역시 불일암을 떠나신 이후 단 한 번도 스님의 거처를 찾을 수가 없었다.

- 22 -

제2부 맑고 향기롭게

■ 작은 등불 하나

“40년 동안 속가에 신세만 지고 살다보니 무언가 밥값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만약 불교가 중심이 된 ‘사회 모임’ 하나를 만들고 싶다. 한다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벌써 10여 년을 뵙다보니 번거롭고 머리 무거운 일은 일부러 피하시는 성품인데 이 무슨 뜻밖의 말씀일까.

“모임의 명칭은 ‘나누는 기쁨’으로 하고 싶어요. 삭막한 세상에서 이웃과 더불어 나누며 산다. 특히 어려운 삶을 사는 이웃들에게 정신적 물질적 위로가 될 수 있는 그런 모임을 하나 만들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되는가 말입니다.”

2년이 지났다. 스님은 세 번째 ‘버리고 떠나기’를 시도하여 이미 불일암을 떠나 강원도로 옮기셨고, 나 역시 일 년 동안 연구 교수로 미국에 나가 있다 돌아왔다. 어느 날 스님께서 찾는다는 연락을 받았다.

“내가 예전에 모임 하나 만들고 싶다는 말 기억하시지요?”

“‘나누는 기쁨’ 말씀이신가요?”

“그래요. 내용과 성격은 그대로인데 명칭은 ‘맑고 향기롭게’로 바꿨습니다. ‘나누는 기쁨도 오래도록 생각해 왔는데 의미전달을 보다 확실하게 하고 싶다보니 바꾸게 되었는데, 왜 느낌이 별로인가요?”

“아닙니다. 스님. 다만 표어나 슬로건에 주어가 빠지면 호소력이 떨어지지 않을까 해서….”

“바로 그거예요. 생략된 주어 대신 어떤 주어를 앞에 붙여도 뜻이 통하도록 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 우리들의 ‘정신을’ 맑고 향기롭게, ‘세상을’, ‘환경을’ 어떤 주어를 앞에 붙여도 뜻이 통하는 그래서 오히려 구체적으로 담아낼 수 있지 않겠어요? 거기다 진흙탕 속에서도 맑고 향기로운 꽃을 피워내는 연꽃의 생리와 아름다움을 접목시켜, ‘맑고’는 마 자신의 마음을 먼저 맑히고 ‘향기롭게’는 바깥세상을 향한 자비행의 실천으로.” 나도 모르게 무릎을 치며 탄성을 내고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당신 가슴속에 담고 계셨을까. 얼마나 오랫동안 사유하고 고심하셨을까. 강원도로 옮기자마자 연꽃 한 송이 피워내셨구나. 내게 설명하시는 스님의 열정과 눈빛에서 가슴이 절절이 아려왔다.

- 23 -

■ 천주의 호감

요한, 로사, 토마스, 세실리아, 야곱, 도밍고, 바울, 유리안나… 필자의 집안은 모두 가톨릭 집안이다. 양친 부모, 4남매, 조카들 그리고 친인척들까지 천주학 소굴(?)이다. 90이 넘어 영면하신 선친께서 장남의 사행(寺行)에 대해 ‘고등학교 때부터 이상하게 산으로만 파고들더니, 그때 말렸어야 했는데’하시면서 내가 불교로 향함을 늘 아쉬워하셨다. 그러면서도 생전의 아버지는 당신 머리맡에 법정 스님이 쓰신 <버리고 떠나기>, <아름다운 마무리>를 밑줄까지 그어가며 거듭거듭 읽고 계셨다.

어느 날 부모님이 다니시는 지산 성당 박 신부와 차담을 나누는 자리에서 ‘맑고 향기롭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박 신부와는 어지간히 질긴 인연이다. 젊은 시절 부모님이 다니시던 성당의 보좌신부 때부터 40년 지기로 서로 다른 동네와 성당으로 옮겨 다니면서 헤어졌다 다시 만나기를 세 번째, 나와는 나이도 동갑에, 대화도 잘 통하고, 때로는 주석(酒席)에서 천선생, 부선생(천주님, 부처님) 도 함께 만나면서 둘만의 자리에서는 격을 내려놓고 지낸지 이미 오래다.

“그 집구석에 딱 한 사람, 유다 같은 놈이 있어 양질의 교장 선생님 댁 천주 집안에 당신은 옥에 티야.”

“자꾸 그러면 두 노인네 모시고 산으로 가버리는 수도 있다! 착한 사마리아인 건들지 말게.”

지난 세월 그렇게 지내온 처지다. 천주교에서는 이미 ‘내 탓이오’ 운동이 시작되고 있었고 우리 불자들 사이에도 높은 긍정과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맑고 향기롭게’는 아직 첫 단추도 채우지 않은 상황이니 공식화되기 전까지는 대외비로 해줄 것을 부탁하며 박 신부에게 가톨릭에서 보는 시각과 느낌을 솔직하게 말해주길 바랐다.

“우리 쪽은 항상 직설적이고 명쾌한 편인데 맑고 향기롭게라…. 불교는 역시 소리 없이 흐르는 깊은 강처럼, 여운이 있어 좋군. 백합과 연꽃의 차이랄까? 그래, 깊이가 느껴져….”

“아니 그럼, 말 타고 창검 든 채 강제로 순례길 확보하는 십자군 종교 따위와 같은 줄 아나? 비록 평생 구걸하며 맨발로 살았지만 중생과 아픔을 함께

- 24 -

했던 고등 종교와의 차이를 아직도 모르시나.”

“또 시작한다! 관둬!”

“아, 미안! 하던 말씀 마저 하시지.”

“글쎄 뭐랄까, 차라리 주어를 생략하여 오히려 더 많은 주어를 담아낸다‘ 무한대로 펼치며 무엇이든 포용한다?”

“이제야 제대로 이해해 가시는 구먼.”

“역시 법정 스님다운 명상적 발상이야. ‘내 탓이오’는 듣기에 따라 너무 단정적이고 선언적인 느낌이지? 말고 향기롭게라…느낌이 좋아. 우리에게 없는 깊이가 느껴져.”

■ 독대의 시절

한 달에 두 번씩, 스님은 강원도에서 나는 광주에서 각자 출발하여 ‘맑고 향기롭게’ 연꽃은 피어나기 시작했다. 지금은 변해 버렸지만 그때의 허름한 법련사 골방에서 스님과 함께 했던 내 추억의 바다위에 그 연꽃은 아직도 피어있다.

가을이 가고 심동(深冬)을 거쳐 다시 꽃샘바람이 불어오던 반 년 동안의 주기적인 밀회, 거듭된 친견에 의미를 두다보니 제작 과정의 고생이나 왕복 8시간씩 걸리는 당일치기 장거리 피곤함은 내 일이 아니었다. 스님께서는 버스 여행이 피곤하지 않는지 염려하셨다.

스님과의 만남이 거듭될수록 불일암 시절엔 몰랐던 새로운 것들이 돋아나고 있었다. 그 중에 가장 큰 변화는 화법의 이변이었다. 스님은 누구에게나 그러하셨지만, 늘 깍듯한 존대어 때문에 편치 않았다. 그런데 어느 사이에 ‘교수’가 ‘우천’으로 호칭되고 ‘하십시오’가 ‘하게나’로 내려가고 있었다. 만남이 거듭될수록 격은 사라져 가고 인간 법정으로 더욱 선명하게 다가오셨다.

작업이 거듭될수록 역시 무서운 안목이셨다.

미술이나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 대상의 펼침과 확대의 다름, 맑음과 탁함의 차이, 축소와 생략의 구별, 선과 둔(鈍)과 예(銳), 색채의 어둠과 무거움과 깊이의 분별 등 미세한 차이의 감각까지 채집해내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 25 -

스님을 뵐 때마다 그래픽을 보는 날카로운 지적은 역시 당신 문장 수준이셨다. 그렇게 해서… 12월 초 일곱 번째 시안을 보여드렸을 때였다.

“아, 우천! 이거야 이거! 너무 좋다! 고생했어!”

“나 어지간히 까탈스럽지? 감히 전문가 교수님을 이렇게 부려 먹어도 괜찮은지 모르겠어.”

“이젠 됐어! 이 3번으로 결정하자구. 너무 좋아! 이젠 끝내자구. 그동안 수고했어. 그래 그래 됐어!”

그 후로도 맑고 향기롭게 글씨체 결정, 캐릭터의 용도별 크기조절, 뒷면에 들어갈 문안작성, 종이와 비닐코팅 여부, 지금 느낌과 인쇄 후 느낌 조절, 캐릭터에 대한 가까운 언론계 여론조사. 인쇄소 지정 및 인쇄수량 조절 등의 작업은 9월에 시작하여 다음해 2월까지 이어져 갔다.

그러면서 당신이 왜 그토록 맑고 향기롭게를 주창하시게 되었는지, 당신이 소망하신 비움과 무소유적 의미, 웬만큼 밀착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당신의 발효된 지혜, 대상을 직관할 때 드러나는 취모검(吹毛劒, 불성을 뜻하는, 털이 날아와서 붙어도 잘리는 매우 예리한 칼) 같은 분석적 언어, 그리고 당신의 감추어진 내면의 세계나 인간적 느낌까지 나는 스님의 모든 것을 훈습(薰習 좋은 향을 베게하면 그 향기가 풍기게 되는 것)하고 있었다.

지금도 변함없이 사용되고 있는 ‘맑고 향기롭게’ 그 연꽃 캐릭터는 20여 년 전에 스님의 눈길과 마음을 담아 그렇게 만들어졌다. 예술은 식견이 높은 사람보다 감동을 가진 사람이 더 행복한 사람이라는 말도 있지만 스님은 역시 바늘과 우주를 다 가진 어른이셨다. 결코 비범하지 못했던 나의 평범을 당신의 바늘을 통해 깨우쳐주신, 나의 40대 중반은 행복의 절정에 있던 시절이었다.

■ 마음과 마음

나는 여행을 할 때 가급적 혼자 다닌다. 특히 서울을 오고 갈 때 상경 4시간 하향 4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를 유체이탈하며 사유를 즐기곤 하기 때문이다. 작업이 마무리되어갈 무렵 오늘도 상경하는 버스 안에서 문득 불일암과 조계산을 추억하고 있었다.

2월 말, 해를 바꾸어 작업해 오던 맑고 향기롭게 캐릭터 작업도 이제 접혀

- 26 -

져 가고 있었다. 지난 반 년 동안 내 인생에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스님과 의 독대였다. 헤어져야 할 시간이 점점 다가오자 나도 모르게 말을 잃어가고 있었다. tm님께서도 지난주에 뵈었을 때 차 한 잔 하자셨지만 대답만 하고 그냥 하향해버렸다. 그것이 마무리 차담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기에 슬그머니 피하고 만 것이다.

나는 어느 사이 ‘나만의 스님으로 그를 품고 있었던가?’ 스스로 놀랐다. 더 이상 철없는 집착과 감상을 내려놓고 오늘은 스님과 버리고 떠나기를 해야한다. 야무지게 다짐하고 상경을 했다.

왠지 말이 나오지 않아 찻잔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차 한 잔의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우천, 조선시대에 사명 스님이 스승이신 서산 노사를 찾아 묘향산에 갔을 때 일화, 이미 알고 있겠지?”

“네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 웬만한 불자라면 그 의미 모르진 않을 거예요. ‘지금 어디서 오는가?’ ‘옛길을 따라서 왔습니다.’ ‘옛길을 따르지 말라!’ 딱 세 마디였지. ‘오직 너의 길을 가라’는 이보다 더 준엄한 가르침이 없었기에 지금도 불가에서 회자되고 있어요.”

“네, 저도 학생들 앞에서 이따금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래, 우천도 교육 현장에 있으니 잘 알겠지만 제대로 된 사제관계라면 빛깔과 향기는 분명 달라야 해요. 제자들이 스승의 복사품이 되거나 스승에게 붙잡혀 있다면 그건 도로(徒勞)아미타불! 혼 빠진 공부요, 헛 세상 산거야!”

“그간 고생 많았어요. 내가 큰 빚을 졌어.”

“아, 아닙니다. 저는 스님과 함께했던 시간이 제 평생….”

더 말을 잇지 못할 만큼 목이 메어버렸다.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고마운 일이고… 맑고 향기롭게가 계속되는 한 우천의 연꽃도 계속 피어날 게야.”

“그리고 강원도 토굴에 있건 전라도 광주에 있건 공간적 거리가 무슨 장애가 되겠나. 다 마음과 마음인 게지.”

스님의 다독거린 시선이 온몸으로 건너왔다.

- 27 -

■ 스님의 직무유기

경복궁 정문 앞 법련사가 큰 화주의 보시로 기존의 허름한 한옥이 철거되고 새로 공사가 시작되자. 맑고 향기롭게 창립준비 모임은 부득이 다른 곳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

법련사를 비롯한 주변의 비슷비슷한 한옥들은 청와대 근처라는 태생적 불행으로 고도 제한에 걸려 전혀 꿈쩍도 할 수 없었다. ‘문민정부’들어서서야 증축이나 확장공사가 가능했다. 지금의 법련사는 1994년 여름 그렇게 해서 완공 되었고 우리는 도리없이 그해, 연초에 방을 비워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비원 건너편에 있는 허름한 9평짜리 오피스텔로 이사를 했다. 살림이라야 책상 3개, 철제 접이식 의자와 나무의자 몇 개가 전부였다. 그래도 모두들 뜨거운 열정들이 있어 스님을 비롯한 창립 발기인들은 왕복 8시간, 10시간씩 걸리는 장거리 지방에서도 마다하지 않고 모여들었다.

어느 날이었다. 몇몇 스님, 처사, 보살 등 전국에서 올라온 15인 정도가 회의를 하고 있는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전화를 받던 보살의 목소리가 갑자기 버벅거리더니 스님께 전화를 넘겨준 표정이 확연히 긴장되어 있었다.

“여보세요. 전화 바꿨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네, 3월 말에서 4월 초쯤으로 잡고 있지만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 맑고 향기롭게 창립 이야기를 들은 청와대 영부인이 사무실로 올려고 하는 전화였음, 경호원이 뒤따르는 등 번거롭고, 순수한 종교적 모임에 그 방문이 반갑지 않았음.

“글쎄요 관심을 가져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지금은 회의 도중이라 미안합니다. 저희들끼리 상의해 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스님은 그날도 그 이후로도 그 일에 대해서는 일체 말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청와대로 전화하는 일도 없었다.

우리는 이따금 전설 같은 일화들을 입에 올린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 총독 앞에서 주장자를 내리치며 독설로 당당히 맞섰던 만공스님, 유엔군 사령관과 이승만 대통령에게 법당 안에서는 모자를 벗으라고 일갈했던 동산스님, 이승만 대통령 생신장치에서 ‘생불생 사불사(生不生

- 28 -

死不死 살아도 산 것이 아니요,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닌데 생일잔치 따위가 무슨 필요가 있는가)’의 법어를 던졌던 효봉스님, 자신을 만나고자 하면 누구에게나 요구했던 대웅전 3천배를 감히 박정희 대통령에게도 예외없이 요구했던 성철 스님 등….

이것은 결코 선지식들이 교만해서도, 순교를 자청해서도 아니다. ‘모든 중생은 평등하다, 차별심 분별심을 갖지 말라’는 불조의 가르침을 실천했을 뿐이다. 법정 스님 또한 평생을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되돌아보면서 현장에 있었던 나는 진정한 청안납자(靑眼衲子)의 눈 푸른 당당함이 무엇인가를 똑똑히 배우고 있었다.

■ 따라서 해봐

추적추적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맑고 향기롭게 회의가 있어 비원 건너편 오피스텔 사무실을 찾았다. 한참 회의가 시작되고 있는데 지켜보고 계시던 스님이 갑자기 손을 들어 “잠깐! 긴급동의!”회의를 중단 시켰다. 그러곤 참석자들을 둘러보시더니 앉아 있는 오른쪽 순사대로 갑자기 ‘맑고 향기롭게’ 중에 ‘맑고’를 발음해보라 하셨다.

“막고! 말고! 막꼬! 말꼬! 막고!”

“뭘 막으라는 소리야! 향기롭게를 하지 말고 말자고?”

여기저기서 키득키득 웃음이 터졌다.

“두 사람 빼고는 다 틀렸어! 물론 팔도강산에서 다 모였으니 그 지방 사투리발음을 이해 못하는 것도 아니고, 그동안 길들여진 언어 습관이 하루 아침에 바뀌지도 않겠지만 장차 맑고 향기롭게를 이끌고 갈 사람들이 발음 하나 제대로 못해서야 원! 나를 따라 해봐요. 맑고 향기롭게!”

돋보기를 썼다 벗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초로의 법우들이 갑자기 말 배우는 유치원생들이 되어 스님의 선창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때 한 법우가 경상도 사투리로 일갈을 해버린 바람에 박장대소하며 뒤로 넘어졌다.

“야, 마꼬 바름 한 번 디기 어렵데이.”

■ 호안호상

맑고 향기롭게를 준비하면서 사단법인으로 등록할 무렵 우리들은 첫 시련

- 29 -

을 겪게 되었다. 등록을 하려면 여러 가지 서류에 여러 가지 내용을 기록해야 하는데 스님의 속명과 대표자 선정 및 명칭 부분에서부터 곤욕을 치르게 된 것이다.

스님은 법정(法頂)이란 이름으로 살아온 세월이 40여 년인데 까마득히 잊어버린 속명이 왜 튀어나와야 하며 시민 모임 하나 만들면서 무슨 대표자나 대표자 명칭이 왜 필요한가에 대한 불편함이셨다. 즉 수직적 관계가 아닌 수평적 입장에서 발기인 이름도 가나다순으로 등록하자는 말씀이셨다.

국가에서 요구하는 서류는 비록 비영리 단체라 하더라도 주민 등록표에 기재된 속명을 쓸 수밖에 없음은 마지못해 이해하셨으나 대표자 명칭에서 기어이 사단이 나고 말았다.

“이거 정말! 등록하지 않고는 일 못하는 겁니까? 첩첩산중에 홀로 사는 중에게 무슨 놈의 의장이고 총장이란 말입니까?”

등록하지 않으면 불법 단체가 됨을 뻔히 아시면서도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숨기지 않은 채 호랑이 눈에 호랑이 상을 짓는 바람에 그날 회의는 도중에 무산되어버렸다.

스님으로부터 맨 처음 부채 그림을 선물 받고 불일암에 갔을 때나, 낯선 처사들의 총무원장 출마를 권유받았을 때 보았던 호안호상(虎眼虎相)을 또 보게 된 것이다.

며칠 후 다시 회의가 소집되었다.

표정은 편치 않았으나 대표자 성명 칸에 속명과 명칭은 기입하게 되었다. 박재철(朴在喆) 성씨도 속명도 처음 알게 되었다. 서류상 ‘이사장’으로 겨우 올리긴 했으나 절대 그 명칭으로 부르지 못하게 하니 대표자 호칭문제에서 또다시 표정이 일그러졌다. 속가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명칭을 일절 배제하고 보니 참으로 난감했다.

십 수 명이 머리를 짜내고 또 짜서 겨우 선택한 단어가 ‘회주(會主)’라는 낯선 명칭이었다. 스님께서도 또다시 회의를 무산시킬 수는 없었다. 서류상 어쩔 수 없이 이사장으로 기입은 하고 호칭은 회주로 하되 가급적 종전대로 ‘법정 스님’, ‘불일암 스님’으로만 불러줄 것을 모든 참석자들에게 다짐받은 후 마지못해 수락하셨다. 그런데 재미있는 일은 그 후에 터졌다. 주변에서 대표자 호칭이 애매모호 하다고들 하더니 이것이 절 안에서 유행이 되어버렸다.

- 30 -

평소에도 인사드린 사람이 ‘큰 스님, 큰 스님’하고 호칭하면 스님은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큰 중, 작은 중이 따로 있답디까? 분별심, 차별심, 갖지 말라는 불가에서 오히려 상(相) 짓는 짓들 하지 마세요.”

또 친견자가 삼배(三拜)라도 드릴라치면 일배만 맞절하고 더 이상 못하게 하거나 상대가 고집을 부리면 외면하거나 일어나버리신다. 전국 임원들이 합동 세배를 드릴 때였다.

“죽은 자한테나 재배고 삼배지, 살아 있는 놈이 무슨 부처님하고 동격이라고 뻣뻣하게 앉아서 삼배를 받는다는 말입니까? 그건 하는 자나 받는 자나 불가에 없는 비례(非禮)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일배만 드린다.

스님은 산속에서 홀로 지내면서도 일 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대부분 스님들이 귀찮아하는 바지 무릎 아래를 여미는 ‘행전’ 착용도 반드시 하셨으며, 겨울 모자, 목도리, 신발 등도 반드시 흰색 회색 검정색등 무채색만 사용하셨다. 시자도 없이 혼자 사시면서도 평상시 입는 동방 상하복은 언제봐도 빳빳하게 풀이 매겨져 도끼날이 새겨져 있고, 여름 한철 쓰시는 삼천 원짜리 밀짚모자 하나를 한 40년 쓰셨을까. 드시는 것도 철저한 채식 중심의 공양이었고 기껏 즐기시는 것이라곤 물미역과 국수 정도였다. 마치 진정한 자유인일수록 자신의 내부에 나름의 규칙이 있고 부처님 계율은 지키라고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불가 귀감의 표본이셨다.

■ 스님과 여인

호암아트홀에서 맑고 향기롭게 송년 음악회가 열리는 날이다. 여러 법우들과 함께 스님을 모시고 홀 입구에 들어서는데 넓은 로비에는 객석으로 들어가지 않은 많은 관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이때였다. 갑자기 큰 소리로 “저기요! 스님 잠깐만요!” 어떤 중년 부인이 다급하게 스님의 앞길을 막고 서더니 재빠른 손놀림으로 자신의 손가방을 열었다.

로비 안에 있던 많은 관객들의 시선이 스님과 여인에게 꽂혔다. 순식간에 벌어진 당황, 흥미, 놀람, 관심이 교차했다. 가방 안에서 꺼낸 것은 한 권의

- 31 -

책이었다. 얼핏 보니 스님의 저서인 듯했고 그 보살은 책 표지를 재빨리 넘겼다. 그리고 참으로 어처구니없게도 ‘한 말씀만 써달라고’ 스님 코앞으로 책을 내밀었다. “이 무슨 경우 없는 짓이냐?”고 동행인들이 보살을 밀쳐내려 하자 스님께서 만류하셨다.

“정말 한 말씀만 쓰면 됩니까?”

“ 네, 스님 자필로 한 말씀만 부탁드립니다.”

스님께서 만년필을 꺼내 들자 이 보살은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다 박수를 치다 발을 동동 구르는 등 어쩔 줄 몰라 했다. 저렇게 좋을까. 스님과 여인주변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스님은 빠른 속도로 몇 자 쓰신 후, 책을 보살에게 건네주고 총총히 홀 안으로 들어 가셨다.

책을 되받은 보살은 스님의 뒷모습을 향하여 두 번 세 번 합장을 하고 있었다. 주변의 구경꾼들이 뭐라고 쓰셨는지 궁금하여 보살에게 빨리 책을 펴보라 했다. 보살이 잠시 버벅거리자 곁에 서 있던 한 처사가 재빨리 보살의 책을 낚아채 펼쳐보더니 “푸하하”웃음보를 터트렸다.

“진짜 ‘한 말씀’이라고만 쓰셨다.”

구경꾼들은 보살의 표정과 한 말씀이라고만 써버린 스님의 능청 사이에서 포복절도하며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름다운 추억이었다.

■ 대원각과 길상사

대원각 김영한 보살께서 건강이 악화되어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기별이 들려왔다. 본부 이사급들은 스님과 노보살 사이의 인연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고 재산 상속문제에 대해서도 스님의 뜻을 이미 아는 터라 대부분 벙어리냉가슴들이었다. 거론 자체가 금기였다.

‘아무런 조건 없이 시주할 테니 부처님 일에만 써달라’는 노보살의 숭고한 뜻이 ‘지금까지 어떤 일에도 얽매여 살아오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없다’는 스님의 벽 앞에 막혀 있었다. ‘반드시 법정 스님께만 드리겠다’와 ‘내 삶을 번거롭게 하지 말라’는 강제와 거절이 10년이 다 되도록 계속되고 있었다. 무주상보시와 ‘무소유’ 사이의 고집과 냉전은 여전히 평행선을 긋고 있었다.

- 32 -

결국 여기에 맑고 향기롭게 법인 이사들과 전국 본부장들로 구성된 이사급들이 작심을 하고 끼어들 수밖에 없었다. 집단적으로 파문을 당하거나 인연을 접고 내쳐질 각오로 집요하게 스님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스님을 모셔왔고 후일 길상사 초대 주지가 되었던 청학 스님을 중심으로 심지어 ‘무소유’ 철학까지 걸고넘어지는 파상공세의 대반란이었다.

“날이 갈수록 가족수는 불어나는데 손바닥만한 사무실에서 무얼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해마다 행사 때가 되면 이 절 저 절 떠돌며 동냥질도 한두 번이지, 어디 기댈 곳도 없으면서 이 모임은 무엇 때문에 만드셨습니까?”

“만약 그 재산이 잘못 전해져 사회의 순기능 역할을 하지 못하고 역기능으로 작용하거나 개인적 사유물로 전락해 버린다면 스님의 도의적 책임 또한 벗어나기 어려울 겁니다. 노보살의 10년 발원 소망을 끝까지 외면하는 것이 스님의 자비행입니까?”

“80 노보살이 병원에 입원하신 후 그토록 스님을 찾으신다는데 재산 상속의 부담으로부터 ‘무소유’를 지킨답시고 문병 한 번 가지 않는 것이 스님의 인사법이고 무소유의 실체입니까? 그 무소유는 철학을 위한 무소유입니까 실천을 위한 무소유입니까?”

설득, 협박, 고언, 압력, 읍소가 몇 달 째 계속되었다., 결국 노보살님의 생명이 경각에 달려 위독하다고 침소봉대할 수밖에, 무슨 말씀을 드려도 요지부동이다 보니 노보살님의 목숨을 담보로 고육지책을 쓸 수밖에 없었다.

만남 자체를 거부하시니 대화가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스님께서 문병 가신 현장에는 동행하지 못했지만 후일 노보살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전해 들었다.

“법정 스님이 아니더라도 여러 스님들이 다녀가셨습니다. 심지어 법정 스님만 스님이냐는 원망도 들었고, 다른 스님들 얘기도 들어보면 그들도 훌륭한 일에 잘 쓰실 수 있으리라 믿고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오로지 법정 스님만 찾았던 이유는 스님의 ‘무소유 정신’을 이어갈 이 시대의 도량다운 사찰 하나 남기고 싶은 소망을 지금껏 발원했기 때문입니다. 또 그 무소유 정신을 실천하는 ‘맑고 아름답게’ 모임이 스님의 사후에도 계속 이어지려면 그 뿌리는 하나 있어야 할 게 아닙니까?”

병상에 누운 노보살의 간절한 호소 앞에 ‘이것도 시절인연인가’ 당신의 고

- 33 -

집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1986년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마음을 굳힌 김영한 보살의 발원으로 우리나라 3대 요정중의 하나였던 대원각(大苑閣)의 대변신이 이루어진 것이다.

1995년 6월 송광사 말사 ‘대법사’로 우선 조계종 등록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요정 자리에 분냄새 고기냄새를 털어내고 어느 정도 가람으로서의 모습이 갖춰지자 1997년 12월, 오늘의 ‘맑고 향기롭게 근본 도량 길싱사(吉祥寺)’는 전설같은 우여곡절 속에서 거듭나게 되었다.

노보살의 소망이 이루어지던 날 그녀는 어느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소회를 남겼다.

“만들어서 드려야 되는데 있는 것을 드렸을 뿐, 도리어 민망할 뿐입니다. 그 재물이란 게 그분(백석)의 시(詩) 한 줄만도 못합니다.”

그 엄청난 재산을 시주하면서 시 한 줄의 가치만도 못하다는 이 여장부의 불심(佛心)한마디. 그래서 그녀를 사람들은 기녀 만덕(萬德)과 곧잘 비교하곤 했다. 18세기 정조대왕 때 가뭄과 흉년으로 굶어 죽어가는 제주도민들을 위해 평생 모은 재산을 다 털어 살려냈던 기생 만덕을 떠올리며 ‘감영한’ 그녀의 공덕과 칭송은 온 국민의 화제가 되었다.

■ 자야의 순애보

1997년 12월 14일, 요정 대원각이 길상사로 거듭나던 날이다. 서울 성북구 성북동 323번지, 대지 7천여 평에 가옥 30여 채, 1천 2백억(요즘 시가로는 약 1조 원)상당의 재물을 길상화(吉祥華) 라는 불명 하나와 바꿔버린 김영한(金英韓) 노보살님.

그녀는 살아생전 ‘재물 쓰는 법’의 큰 가르침을 국민에게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또 ‘맑고 향기롭게’ 모임을 위한 텃밭을 만들어준 감사의 마음은 세월이 이만큼 지났는데도 필자의 가슴 속에 지문처럼 살아 있다.

길상화 보살은 1999년 84세를 일기로 이승을 떠나셨고, 당신의 마지막 유언대로 그의 육신은 화장된 후 길상사 뜨락에 한 줌의 재로 뿌려졌다. 나는 그분이 살아온 한 생애에 대해 여기저기서 읽고, 들은 조각글들과 귀동냥이 있어 아직 내 기억에서 사라지기 전에 독자들과 동심(同心) 나누고자 그분을 추억해본다.

- 34 -

예로부터 기적에 이름을 올린 대부분 기녀들의 기구한 사연이 그러했듯이 김영한 보살님도 본래 서울 관철동의 반듯한 반촌 출신이었다. 그러나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조모, 모친, 과부들 사이에서 어렵게 살다보니 16세의 나이에 경성에 있는 권번(券番)을 스스로 찾을 수밖에 없었다.

* 권번(券番, 권반 또는 검변) : 조선시대의 기생제도는 궁중의 약방이나 상방 등에 소속되어서 약을 달이거나 바느질하는 일을 하다가 궁중의 연향이 있을 때는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국권을 상실한 뒤 관기 제도가 없어지면서 기생들이 모인 조합이 권번이다.

- 일제시대 기생들이 기적을 두었던 조합으로 전통무용, 악기, 판소리, 정가 등의 교육도 담당

0 김영한

- 기명 진향(眞香)으로 당대 명창 하규일 문하에서 가무를 익힘

- 문학적 재능도 뛰어나서 기생 신분으로 삼천리 문학지에 수필 발표, 조선 어학회 가입

- 독립운동가 신윤국 선생이 그녀를 일본에 유학을 보냄, 2학년 때 신윤국 선생이 체포 수감되자 귀국함, 선생의 옥바라지를 하기위해 함흥에서 다시 관기로 나섬

- 이때 함흥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영어교사이던 백석은 동료교사 송별회 참 석코차 함흥관에 갔다가 원삼 족두리를 하고 춤을 추던 기생 진향을 만남

0 백석(白石)

- 1912년 평북 정주출신, 본명 백기행, 민족시인 김소월의 오산중학교 후배

- 일본 유학 청산학원 영문학과를 나온 엘리트, 1935년 조선일보에 작품 <정주성 定州城>을 발표 문단의 주목

- 영어교사이며 귀공자 타입의 26세 미남자 백석과, 22세의 기생 진향 사이 에 운명적 첫사랑이 맺어짐

- 백석은 권번에서 얻은 진향이라는 이름대산 ‘자야’라는 자기만 부르는 이 름을 지어줌

- 함흥에서 동거하던 그들의 사랑을 백석의 부모가 반대하자 백석은 고민 끝에 학교를 그만두고 자야와 함께 서울로 내려와 창진동에 새 보금자리 를 차림

- 35 -

- 가족의 반대로 결혼을 이룰 수 없었던 영어, 일어, 중국어, 러시아어 등 5 개 국어에 능통했던 천재시인 백석은 자야에게 누구도 찾을 수 없는 중국 으로 도피하자는 제안을 한다.

- 자야는 기생 신분인 자신 때문에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청년의 발목을 잡 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백석에게 역제안을 한다. 당신은 중국으로 떠나라. 그리고 10년 후에 다시 만나자. 그때도 우리의 생각이 변함없다면 그때는 어떤 난관이 오더라도 영원히 함께하자고….

- 그때가 1939년, 백석은 만주를 떠돌다가 1945년 해방이 되자 그의 고향 정주로 돌아갔고, 곧이어 남북의 길이 막혔다.

- 그 후 백석은 선친과 교분이 두터운 민족주의자 조만식 선생의 통역비서 로 일 하다가 김일성 종합대학 교수가 되었다.

- 1957년 백석은 대지주 집안 출신, 조만식의 비서, 당과 맞지 않는 퇴폐적 작가로 지목, 반동분자로 낙인, 농장 노예로 살다가 1995년 84세로 사망

0 경성에 홀로 남겨진 자야

- 1953년 38세의 만학으로 중앙대학 영문학과 졸업

- 한국전쟁 후 그동안 모아두었던 거금 650만 원으로 성북동 배밭골을 매입

- 이때부터 김숙(金淑)이라는 비즈니스 네임 사용

여기가 대원각이자 지금의 길상사 터이다.

- 기생에서 요식업 경영인으로 거듭나던 자야는 1980년대 후반 일선에서 손을 떼고 모처럼 망중한을 보낼 때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만나게 됨

- 젊은 백석과 헤어진 후 미친 듯이 재물만 좇았고 그녀의 유일한 벗은 줄 담배였다. 결국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은퇴 후 백석을 기리기 위해 2 억 원을 쾌척 ‘백석 문학상’을 제정하고 어려운 청소년을 위한 장학사업에 노력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내린다”로 시작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백석의 시, 그녀는 그 시를 품에 안고 한 남자만을 애절하게 사랑했던 60년의 세월이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이 과연 자야와 백석의 사랑을 이해나 할 수 있을까? 그녀의 생애 자체가 한 편의 소설이고 드라마이며 지고지순한 순애보였다.

- 36 -

죽은 자가 마지막 입고 가는 옷을 ‘수의’라고 한다. 그런데 그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 망자가 생전에 누렸던 권력, 재물, 명예 그 어떤 것도 가지고 갈 수 없음을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불가에서는 오직 ‘업(業)’만이 끝까지 동행한다고 가르친다. 선업이 되었건 악업이 되었건 그래서 심동왈업(心動曰 業)즉, 마음이 움직이면 바로 업이 따른다는 무서운 경책이 존재한다.

김영한에서 출발하여 진향, 자야, 김숙을 거쳐 ‘길상화’란 부처님 이름을 얻기까지, 기구했던 한 여인의 마지막 보시행은 그래서 온 국민에게 더욱 뜨거운 감동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역사는 현재의 거울이고 미래의 나침반이라 배웠다. 또 승자는 역사 속에서 정사로 남고, 패자는 야사속에서 전설로 남는다고도 한다. 그러나 내가 현장에서 체험했던 ‘길상사, 법정, 길상화’는 각각 독립된 단어지만 하나로 묶인 채 일지삼화(一枝三花)가 되었다. 먼 훗날에도 맑고 향기롭게 피어난 연꽃의 주어가 되어 불가의 정사와 야사 속에서 두고두고 전설처럼 회자될 것이다.

* 1,2부 끝. 다음에 제3부 부터 이어집니다.

2016. 5. 29

- 37 -


법정 스님이 두고 간 이야기(2)

- 30여 년간 법정 스님 곁에서 보고 배운 것들 -

■ 고현 지음

제3부 사자후로 이끌다

■ 국어 공부 다시 하다

스님을 모시고 맑고 향기롭게 일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일은 바깥 일이 아니라 내부의 일이었다.

우선 언어 사용에서 제동이 걸렸다.

당신 스스로 수십 년간 글을 써온 터라 무심코 사용한 단어 하나하나에 새로운 해석을 내리셨다. 예를 들어 ‘자연보호’ 운운하면 무안할 정도로 친절하게 설명하셨다.

“자연이 언제 우리에게 보호해 달라고 부탁한 일이 있습니까? 그것은 인간이 자연에 대한 오만한 태도에서 나오는 소립니다. 자연은 보호의 대상이 아니라 보존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 모임에서만이라도 자연보호가 아니라 ‘자연보존’으로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0 몇 가지 사례

- 맑고 향기롭게 운동 : ‘운동’이라는 용어가 생색내는 모임으로 오해 소지가 있으니 ‘모임’으로 고쳐 부르게

- 자원봉사자 : ‘봉사’라는 용어 속에 아상이 보인다고 ‘활동’으로 부르게

- 불우 이웃돕기 바자회 : ‘우리 이웃 서로 돕기 바자회’로

- 자연생태환경 : ‘자연생명존중’으로

우리가 하는 일에 행여 겸손, 하심, 검소, 침묵, 평등 대신에 교만, 아상, 풍족, 자랑, 군림의 언행이 끼어들까 철저히 감시하셨다. 상황이 이러다보니 각 지방에서 행사 한 번 계획해도 중앙본부에 일일이 보고하고 점검을 받아야 했기에 도대체 조심스러워 일을 못하겠다는 볼멘소리가 나올 법도 했다.

- 1 -

이런 상황에 대해 스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불편한 줄 저도 압니다. 사회적으로 이미 일반화된 용어를 내가 자꾸 제동을 거니 당연히 불편하겠지요. 그러나 우리 모임의 목표가 마음을, 세상을, 자연을 맑고 향기롭게 하자고 되어 있습니다. 그중에 첫 번째가 ‘마음’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마음은 타인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마음을 뜻합니다.

회의 때마다 매번 느끼는 일이지만 스님의 말씀을 듣다 보면, 선방 수좌들에게나 퍼붓는 서릿발 같은 입정(入定)의 사자후가 따로 없었다. 스님은 논리에 밝고 글만 쓰는 학승(學僧)을 뛰어넘어 당신의 깨침을 현실에 적용시켜 언행일치 필행일치로 이끌고자 했던, 모셔지는 고불(古佛)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진정한 선사(禪師)였다. 얼음선사 만난 업으로 우리는 출발부터 국어 공부를 다시 해야만 했다.

■ 이면의 모습

나는 법정 스님을 지근거리에서 30여 년을 지켜보았다. 처음 인연이 닿았을 때는 폭언과 함께 쫓겨나기도 했고, 헤어지기 힘들어할 때는 서산 스님의 일화로 깨우쳐 주기도 하셨다. 때로는 칼날 같은 할이 날아오고, 때로는 조크나 능청 때문에 웃음을 참느라 입을 막기도 했다.

스님에게는 ‘얼음선사’라는 별병이 있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란 뜻일 게다.

스님은 서양 명상음악의 거장 바흐의 리듬에서 영화음악이나 오케스트라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셨다. 불일암에 계실 때 혼자 흥이 나시면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 왔건만 세상사 쓸쓸하더라…’ 남도창 사철가를 구성지게 부르시기도 했다. 다르게 표현하면 음악 하나만 놓고 봐도 1965년 가수 최희준 씨가 부른 ‘하숙생’에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23번 ‘열정’에 이르기까지 동서고금을 알고자 하셨다.

산야에 오래 묻혀 사시다보니 뻐꾸기부터 머슴새에 이르기까지, 철새인지 텃새인지 뿐만 아니라 집새, 산새, 물새의 습성까지 꿰고 계셨다. 식물 하나를 보시더라도 들꽃과 야생화를 포함, 한해살이 풀인지 다년생 나무인지, 열

매와 잎과 뿌리의 약리작용까지 섭렵하시어 가히 조류학자나 식물학자 수준이셨다.

- 2 -

우리는 흔히 바느질 솜씨 좋은 옷을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 한다. 더러 스님들이 팔꿈치, 엉덩이, 무릎, 등 빨리 닳고 해어진 부분을 유사한 천으로 덧대어 꿰매 입으시는데 스님도 예외는 아니시다. 다만 그 바느질 솜씨가 어찌나 정교한지 보통의 시각으론 흔적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완벽하시어, 그 어디에서도 궁상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팥이 들어 잇는 아이스캔디를 좋아하시어 ‘아00’, ‘비00’의 40년 고객이셨고. ‘빠삐용’ 영화를 세 번씩 보시는 영화팬이시기도 했다. 다른 선승들도 그러하셨지만 특히 어린이들을 매우 좋아하시어 당신 만나고 떠날 때면 문밖까지 극진히 배웅하고 그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서 계시곤 했다.

■ 못 해 먹겠다

우리는 마음을, 세상을, 자연을 맑고 향기롭게 하자는 세 가지 큰 무지개를 안고 출발했으나 날이 갈수록 힘이 빠졌다. 각 지방은 그 지방대로 일의 추진 과정에서 크고 작은 애로사항이 있기 마련이다. 또 어느 단체나 지방의 어려움은 중앙 본부가 도와주거나 측면지원해주는 것이 우리 사회의 관례인데 우리는 오히려 그 반대로 가고 있었다.

특히 다른 봉사단체에서 일을 해 본 경험자일수록 불만은 더욱 컸다. 그들은 스님을 향해 산속에서 몇십 년을 홀로 살다보니 현장과 현실을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다. 각 지역 일꾼들의 불만은 대부분 하나로 모아졌다. 원인은 스님에게 있었고 이유는 ‘하지 말라’에 있었다.

어려운 고비 때마다 해당지역 매스컴에서 한두 번만 홍보를 도와줘도, 봉사 단체들을 돕고 있는 각 지역 지자체의 협조를 조금씩만 받아도, 행사를 앞둔 경제적 어려움도 후원단체나 개인의 도움을 조금만 받아도 쉽게 해결할 수 있는 일 등, 스님의 눈치만 살피다가 그만 접어버린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홍보나 광고하지 말라. 관(官)의 힘에 의지하지 말라. 부자단체에 구걸하지 말라.”

“침묵 속에서 일하되 아상 드러내지 말라. 즉흥적, 일회성, 선심용, 칭찬성으로 일하려거든 차리리 그만 두라.”

- 3 -

무엇을 하라고 독려하는 것이 아니라 ‘하지 말라’는 말씀이 반복되다 보니 각지부마다 어려움이 많았다. 특히 지역이 넓은 강원도 춘천 모임과 이제 막 출발하려는 전주 모임이 크게 흔들렸다.

스님은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도움을 받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다. 처음부터 남의 도움으로 시작하면 나중엔 타성에 젖어 도움 없이는 움직이지 못한다. 우선은 힘들어도 홀로서기를 연습해야 한다. 우리가 하는 일의 목표는 부피가 아니라 내용이다. 어느 정도 자력이 생길 때까지는 어렵더라도 회원들 회비 중심으로만 이끌어라.” “마음이 일을 하면 극락이지만 의무가 일을 하면 지옥이 된다. 일을 머리로 하지 말고 가슴으로 하라. 우리는 ‘마음공부’가 우선이기에 일반 NGO 단체들과는 그 성격을 달리할 뿐 서로 연대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아상 드러내고 자기 이름 키우려는 사람은 우리 모임의 취지와는 맞지 않다. 가난하고 외롭고 병든 자의 진정한 벗은 첫째도 둘째도 겸손과 하심뿐임을 절대 잊지 말라.”

“여기 길상사가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들의 쉼터가 아니라 시주나 받아먹고, 있는 자들이나 챙기는 부자절로 변해가고, 남에게 자랑하기 위해 온갖 행사로 번거로워지면 나는 발길을 끊겠다.”

얼음선사가 이끌었던 초창기의 맑고 향기롭게, 우리에겐 두 가지 선택 밖에 없었다. 마음을 텅텅 비우고 뛰어 들든지, 자신이 없으면 아예 뜻을 접든지.

스님은 그저 무소의 뿔처럼 뚜벅뚜벅 가자고 하시지만 글쎄, 쇠붙이도 불속에 있을 때 두드리라는 말이 있는데, 지나치게 팽팽한 원칙과 정도만 고수하다가 혹여 실기하는 건 아닌지…함께 일했던 초창기 법우들, 그때는 참 갈등도 많이 했었다.

■ 무언의 압력

호남은 불교의 교세가 의외로 빈약한 지역이다. 근세 불교의 중흥조로 일컬어지는 전주 태생의 경허 스님을 비롯하여 만공, 용성, 한영, 만암, 탄허, 구산, 전강, 청화, 법전 그리고 법정 스님에 이르기까지 역대 고승대덕들의 절반이 호남이다. 속가의 태(胎) 자리는 유별스레 호남지방이 전국의 절반이지

- 4 -

만 이상하게 교세만은 유독 취약 지역이다. 호남은 일제 강점기부터 들어온 개신교가 워낙 큰 세력을 이루고 있어 52대 23이다. 불교는 그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고 맑고 향기롭게 모임 또한 그 결성이 늦어지고 있었다. 그러다 중앙 모임이 출발한 지 3년 만인 1997년 6월에야 그 결실을 보게 되었다.

1 년여의 준비기간을 끝내고 며칠 뒤 창립 초청 법회가 열려 법정 스님을 비롯 전국의 관계 인사들이 광주에 오게 되었다. 그래서 행사준비 관계로 10여 명의 운영 위원들이 자주 모이게 되었다.

초대 본부장은 이 지방 건설업계를 이끌고 있는 상당한 재력가가 추대되었고 내가 운영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본부장은 늘 본인이 경험해온 기준에서 의견을 내놓았다.

- 검정색 그랜저급 세단 5대와 무전기 휴대한 검정색 정장 차림의 경호원 및 운전기사는 자기 회사에서 차출

- 귀빈실에서 호텔로. 지역 주요 인사들과의 만찬, 그리고 기자회견 현장으 로 옮겨서 …

“작년 봄 춘천 모임 결성 때, 행사를 잘 치르고 식당으로 옮겨서 저녁 공양이 끝날 무렵 스님이 슬며시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습니다.” 나는 그때의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모두 볼 일 끝났으면 더 이상 민폐 끼치지 말고 어서 헤어지라는 ‘무언의 압력’으로… 결국 밤 9시경에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진 전례가 있었다.

그때 춘천지부 사람들은 낭패를 봤다.

- 10개씩의 호텔방 예약, 2차 주석 및 아침 식사 예약, 호반도시 드라이브를 위한 차량준비 등 내일 오전 스케줄까지 줄줄이 취소하는 대소동

신임 본부장은 내 설명을 듣고도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그렇지, 우리 어른을 우리가 소홀히 모시면 누가 귀하게 생각하겠습니까? 우리에겐 우리의 예법이 있는데 그래도 어느 정도 격은 갖춰야 할 게 아닙니까?”

결국 호텔방 예약, 호텔 간담회. 기자회견 등을 모두 취소하고 본래의 계획을 대폭 축소하고, 만약 일이 잘못되면 모든 책임은 운영위원장인 내가 지겠다고 말하자 겨우 납득하는 눈치들이었다.

- 5 -

‘무소유와 나눔’을 평생 삶의 지표로 살아온 스님이 힘들고 외롭고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러 오시는데, 경호원이 붙은 호화판 영접을 했다가는 내가 살아남지 못할 것 같아 극구 막았던 것이다. 광주 전남 모임이 출발 때부터 호안호상의 할을 당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 후 다른 지방 행사가 있을 때마다 스님께서는 광주 전남 모임 때처럼 간소하게 하라는 지시를 반복해서 말씀하셨다. 광주 전남 본부장은 비로소 스님의 진심을 이해하고, 공부 많이 했다면서 내게도 고마워했다.

■ 서문을 쓰다

1995년 5월, 나는 부처님 오신 날을 전후하여 두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조계사 건너편 공평 아트센터를 시작으로 서울, 부산, 광주 등 지방 순회전을 갖게 된 것이다.

무리한 경비를 투자해가며 순회전을 계획한 것은 ‘불교미술 현대화, 불교 디자인 개척화’라는 화두를 안고 그동안 고심해온 흔적들과 독존(獨存)에 대한 검증된 에너지가 필요해서였다.

그래서 스님께서 큰 힘을 보태주셨다. 몇 번을 망설이다 작품집 서문을 부탁드렸더니 ‘내가 살다보니 미술에 대해 무엇을 안다고 화가 작품집에…. 그러나 우천에게는 마음의 빚이 있어 잔소리 한 마디 한 할 수 없구나’하시며 이렇게 써 주셨다.

“…불교 미술은 시대에 뒤떨어진 구태의연한 복제품으로 알고 있는 것이 일반적 시각이다. 그런데 여기 도전이라도 하듯 그는 달력, 그림, 일러스트, 포스터, 탱화, 벽화, 단청, 심지어 스티커 한 장에 이르기까지 불교회화 전반에 걸쳐 현대적 감각의 ‘디자인 미술’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이 땅에서 처음으로 외롭게 개척한 사람이다.

그의 작품 속에는 흔히 바람, 안개, 물방울, 대숲 그림자 등이 나오고 다기와 죽비와 섬돌 위에 놓인 신발과 처마 끝의 풍경 등 밝고 고요한 산사 승방의 분위기가 짙게 배어 있다. 이와 같은 고요와 침묵의 세계는 곧 그 자신이 기대고 있는 청정한 정신공간이기도 할 것이다.

이 자리에서 밝히고 싶은 일이 하나 있다.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일에 처음 마음을 냈을 때 선뜻 떠오른 사람이 고현 교수 였다. 그의 그림으로 로고

- 6 -

를 만들고 싶어서였다. 지금의 연꽃 스티커는 까다로운 몇 차례의 눈길을 거쳐 이루어 놓은 그의 솜씨다.”

나는 그때 내 전람회의 제목을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이라는 쉽지 않은 불교 용어를 썼다. 그리고 그 제목을 풀어서 이렇게 정리했다. ‘차안의 세계도 피안의 세계도 모두 맑은 심안(心眼)으로 보면 둘이 아니고 하나로 통하는 불이문(不二門)이다. 마음의 눈으로 일체를 유심조하면 열반의 저 언덕이나 사바의 이쪽이나 모두가 하나다.’

일찍이 읽었던 <어린 왕자>는, 사막을 아름답게 보는 사람은 그 마음 속에 이미 물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말을 불교식으로 표현한다면 ‘모든 씨앗은 마음 속에 있다’가 된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할 뿐이다’, 러고들 한다. 그렇다면 내 작품의 이미지는 내 마음일 것이고 내가 체험한 불교의 모습이 것이다.

화업세계에 난화골(難畵骨)이라는 용어가 있다. 본시 출처는 <명심보감>의 화호화피 난화골(畵虎畵皮 難畵骨) ‘호랑이를 그릴 때 가죽은 그릴 수 있어도 뼈까지 그리기는 어렵다’에서 유래된 용어다. 보는 대로 표현한 것과 아는 대로 표현한 것의 차이점을 뜻한다. 겉으로 보이는 대상이야 누구나 표현할 수 있지만 작품 속에 감추어진 실상(實像)이 표현되려면, 종교화 작업에 있어 그만큼 축적된 기도와 수행이 받쳐주지 않으면 어려운 일이다.

■ 관음심 관음행

맑고 향기롭게 광주 전남 모임은 부산, 대구 영남지역 모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조촐한 살림이다. 그러나 가족은 빈약하지만 숨은 보살행을 실천하는 관음행들이 많다보니 진정한 나눔의 기쁨이 무엇인가를 뜨겁게 체험하곤 한다.

우리가 하는 몇 가지 일 중에 70세 이상의 지체부자유 독거노인을 위해 매일같이 도시락 1백 개씩을 만든다. 자원활동자 20여 명이 일주일에 하루 평균 3,4명씩 팀을 짜서 도시락을 만들고 있다. 그러나 이 지원활동을 나온 보살들 중에는 오히려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적지 않다.

- 남편이 교통사고로 일을 못하자 병원 간병인 일을 나가면서 일주일에 한 번씩 나오는 보살

- 7 -

- 도시락을 3년째 받고 계시는 친정어머니 부탁을 받고…

-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고 두 딸과 어렵게 살아가는 젊은 보살

- 박사 학위를 가진 교수 부인, 교감으로 퇴직한 전직 선생님 등

- 새벽 수산물 시장에서 상품 가치는 떨어지지만 경매하고 남은 생선을 보내주는 사람, 무, 배추 각종 채소를 상인들에게 넘기고 밭에 남은 채소를 보내주는 사람, 정미업을 하는 사람이 보내 준 쌀 싸라기 등

마음이 움직이면 손발이 따라오는 진리, 관음심에 관음행을 보태면 못 할 것이 없음을 새삼스럽게 체득한다. 그런데 이렇게 저렇게 도와준 분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 정품을 주지 못하고 부실한 것들만 주게 되어 한결같이 미안해 한다는 것

- 언론에 기사화 하거나 감사패라도 드리겠다하면 단호히 거절 한다는 것

법정 스님의 법문이다.

“아무리 가난해도 마음이 있는 한 나눌 것은 있습니다. 진실된 마음을 나눌 때 물질은 그림자처럼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관음심 관음행들이 있기에 이 사회는 아직도 건강하게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 우리의 세상을 맑고 향기롭게 받쳐주고 있는 것은 머리 좋은 정치가나 돈 많은 재벌들보다도 바로 이웃에 숨어서 ‘나누는 기쁨’을 실천하는 서민의 천사들인 것입니다.”

이 땅의 수많은 마이너리티들, 굶주린 자. 병든 자, 장애우, 새터민, 고독자, 이방인들이 더 이상 배격, 차별, 격리, 외면의 대상이 아니라 이 사회의 다양한 구성원으로 인정받을 때까지, 우리 사회가 그들을 품어주는 것이 정답으로 인식될 때까지, 그래서 우리 모임이 할 일이 없어져 버릴 때까지, 마음을, 세상을, 자연을 맑고 향기롭게는 계속될 것이다.

■ 노보살의 사자후

이곳저곳에서 자주 거론되고 있지만 법정 스님의 ‘언행일치 필행일치’는 당신 삶의 등뼈이자 그림자였다. 길상사 창건 법회 때 길상화 보살과 김수환 추기경 앞에서 ‘맑고 향기로운 근본 도량을 만들겠다’ 다짐한 약속 때문일까? 아니면 길상화 보살의 순수한 무주상보시를 그녀의 공덕으로 이어주어

- 8 -

야 한다는 스스로의 다짐 때문일까? 아무튼 해를 거듭할수록 당신 삶의 빛깔을 더욱 투명하게 드러내다 보니 특히 지근거리에 있는 법우들일수록 심히 힘들어 했다.

한번은 맑고 향기롭게 본부 사무실 직원들이 기동성 보충을 위해 업무용으로 소형 중고차 세피아 한 대를 구입하고자 조심스럽게 말씀드렸다 그런데 돌아온 말씀은 “그 따위로 편하게 일하려거든 당장 그만두라!”는 얼음장이 떨어지는 바람에 하마터면 쫓겨날 뻔한 일이 있었다.

또 스님이 오시는 날을 기다렸다가 찾아오는 내방객들의 불편을 덜기 위해 허름한 방 한 칸을 스님 전용 공간으로 꾸미자고 제안드렸다. 그러나 ‘사치와 낭비, 시주의 무거움, 수행자의 자세’등에 대해 삭발 제자들은 행자 시절에 받았던 정신 교육을 다시 받아야 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두 달에 한 번 정도 나오시는 스님을 위해 공양주 보살이 몇 가지 반찬을 추가했다. 그래봐야 기껏 풀반찬이겠지만 스님께서는 그마저도 용납하지 않으셨다. 시자가 민망해서 ‘요즘 어느 사찰에서나 이 정도는 해 먹고 산다’고 공양주를 거들었다가 혼이 빠져버렸다.

“세상 모든 절이 다 그렇게 해 먹고 살아도, 안돼! 이곳 길상사만큼은 그렇게 살아선 안돼!”

얼음장 같은 면박이 날아 왔다. 이 상 저 상에서 함께 대중공양을 하던 방 안 공기가 갑자기 썰렁해졌다. 그때 조금 떨어져서 공양을 하시던 백발의 노보살 한 분이 사자후를 토해버렸다.

“으이그! 징그럽다 법정 스님! 으이그 징그러워!”

“네?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으이그! 해도 해도 너무하시네! 우리 집에서는 이 반찬 두 배는 해 먹고 산다우! 으이그, 징그런 영감탱이! 어이그, 징그러!”

노보살이 큰 소리로 침묵을 깨는 바람에 공양을 하던 법우들이 밥알이 튀어 나올 정도로 빠앙 웃음폭탄이 터져버렸다. 그 폭소에는 충분히 긍정적인 부분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졸지에 일격을 당한 법정 스님도 결국 그 웃음에 동참하고 말았다.

도대체 일 년 열두 달, 스님의 저 팽팽한 일상의 습을 어떻게 평생 견지하고 사시는 건지…. 길상사에 오셔도 볼일이 끝나면 당일로 바람처럼 떠나셨

- 9 -

다. 당신 사찰이나 다름없는 길상사였지만 끝내 열반하실 때까지 당신 소유의 방 한 칸이 없었고, 단 하루밤도 주무신 일이 없었다.

길상화 보살이 죽어도 법정스님에게만 드리겠다고 10년을 버티던 그 의미를 이따금 회상해 본다. 그리고 지금은 떠나고 안 계신 두 분을 생각하며 나의 흐트러진 자세를 다시 추스르곤 한다.

■ 타산지석

오래전 충청도 어디쯤에 갈 곳 없는 부랑아 10여명을 데리고 종교단체에 붙어 있던 텃밭에 천막을 쳐놓고, 신(神)의 일을 대신했던 거룩한 사람이 있었다. 10년, 20년 세월이 흐르면서 그의 선행이 전국적으로 알려지자 종교와 관계없이 자기희생과 봉사에 감동한 수많은 사람들이 동참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덧 국내 제일의 봉사단체로 자타가 인정하게 되었다.

호사다마였을까. 어느 날 충격적인 사건이 터졌다. 그 봉사단체에서 일하던 천사표들이 줄줄이 검찰에 불려 나가게 된 것이다.

2003년 8월 1일, 결국 몇 달 동안의 내사가 진행되던 그 단체는 그 동안의 공적을 인정하여 대표자가 불구속되는 결과로 사건은 종결되었다.

아, 40여 년 전 그 숭고했던 초심은 어디로 간 것인가. ‘재물과 명예를 탐하지 말라. 거기에는 아상과 교만이 따르게 되나니, 그 끝은 반드시 파멸을 부르게 된다.’는 법구경의 가르침이 등골 서늘하게 파고들었다.

너 나 할 것 없이 우리 쪽 관계자들은 씁쓸하고 허탈해했다. 상대의 불행이 결코 나의 행복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건이 터진 후 우리 모임에서는 미묘한 변화가 감지되고 있었다.

“홍보나 광고하지 말라. 관청에 의지하지 말라. 부자 단체에 구걸하지 말라. 즉흥적, 선심성, 일회용으로 일하지 말라. 겸손과 하심이 아니면 차라리 하지 말라. 하지 말라. 하지 말라.….”

이미 얼음선사 별명에 ‘말라 선사’ 별명이 하나 더 붙을 만큼 매사를 감독하셨던 스님에 대한 이해의 폭이 갑자기 넓어진 것이다.

또 10주년 기념행사를 언론에 띄워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정부 인사 초청 세미나, 가수 초청 음악회, 기업 협찬 바자회, 모범사례 이벤트 등 화려한 행

- 10 -

사를 끈질기게 주장하던 입들도 어디론가 가버렸다. 무엇보다 스님의 소극적 자세를 늘 아쉬워했던 ‘적극적 발언’들이 소멸되어 가는 타산지석을 배우고 있었다.

결국 스님께서 기념행사 슬로건을 ‘돌아보는 10년, 자성하는 10년’으로 정하시고 길상사 경내에서 조용히 치르자는 의견에도 누구 하나 토를 달지 않았다. 저쪽의 이번 사건은 자기를 잃어버리고 저쪽 모습을 부러워하며 따라가던 ‘자기상실병’을 고치는 단초가 되었다.

지관 스님이 쓰신 <신행 365일>에 ‘우인제경불망심(愚人除境不亡心) 지자망심불제경(智者亡心不除境)’이란 말씀이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자기 마음에 맞는 환경을 찾아 헤매고,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마음을 주어진 환경에 맞춘다는 가르침이다.

유사한 일을 하면서 저쪽 봉사단체의 아픔에는 동병상련이다. 미안하고 안된 일이지만 우리는 그들을 통해 우리들의 문제점을 치유하는 값진 교훈을 얻게 되었다. 일의 양과 부피에 집착하지 말라 하시던 스님의 호안 호상을 말없이 따라가게 된 것이다.

■ 10주년 행사

2004년 3월 26일 맑고 향기롭게 모임을 시작한 지 10 년. 캐릭터 제작 때문에 반년 동안 스님을 독점 독대했던 때가 어제 일 같은데 벌써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추적추적 봄비가 내리던 날인데도 10주년 행사에 참여코자 서울 경기뿐 아니라 전국에서 올라온 차량들로 길상사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돌아보는 10년, 자성하는 10년’의 행사는 스님 법회를 중심으로 여법하게 잘 끝났고 ,점심 공양 후 대부분 불자들은 돌아간 뒤였다.

몇 가지 토의 안건이 있어서 전국 운영위원 100여 명만 설법전으로 재소집되었다.

한 시간쯤 지나 회의가 끝나갈 무렵 진행을 맡은 사회자가 마무리 멘트를 했다.

“더 이상 이견이나 질문 없습니까? 그럼 오늘 문중 회의는 불일암 스님 한 말씀 듣는 것으로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힘찬 박수와 환호 속에서 마이크가 스님에게 넘겨졌다. 모두들 스님의 ‘한

- 11 -

말씀’을 경청하려고 기침 소리 하나 없었다.

“……….”

스님은 장내를 지긋이 둘러보신 후 소리 없이 씨익 웃으시더니,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끝!”

전국에서 올라온 운영위원들 대부분의 나이가 20대 전후였던 1960, 70년대 일이다. 당시 밀리언셀러가 된 전혜린 선생의 일기 형식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가 있었다. 그 당시 독일 유학을 다녀온 천재 여성이 젊은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충격과 함께 학생들의 필독서로, 이 책 제목 또한 사회적 유행어가 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스님의 입장에선

이미 오전 법회에서 할 말은 다 했는데 또 무슨 말씀이냐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 그 의미를 아는 세대들이라 그 책 제목으로 단 10초 만에 끝내버린 것이다.

가끔씩 경험한 일이지만 스님의 메가톤급 조크는 가히 달인의 경지였다. 스님과 동시대를 살면서 국민스승을 가까이 모셨던 필자는 참으로 행운아였다.

제4부 노을이 지다

■ 앞서간 언론

우리 모임에서 매달 발행하는 소식지 <맑고 향기롭게> 2004년 12월 호에 ‘내 그림자에게’라는 제목이 붙은 스님의 글이 실렸다.

“……할 수만 있다면 유서를 남기 듯한 그런 글을 쓰고 싶다. 옛글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다. ‘나이 칠십에도 어떤 직위에 있는 것을 통행금지 시간이 되었는데도 쉬지 않고 밤길을 다니는 것과 같아서 그 허물이 적지 않다.’ 이 구절을 나는 요즘 깊이 음미하고 있다. 요즘의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아서 참으로 고맙게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나라 모든 조직에는 정년제가 행해지고 있는데 정치인과 스님들만 예외다. 정치인들은 자기네가 법을 만들 때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래서 노탐(老貪)에서 벗어날 줄 모르는 추한 정치인들이 더러 있다. 목사도 신부도 70이 정년이므로 때가 되면 현직에서 물러나 은퇴한다는 말을 들었다.”

- 12 -

그리고 문장 끝부분을 “내 남은 삶을 추하지 않고 아름답게 가꾸고 싶어 한 말이니 그대로 받아주기 바란다”라고 쓰셨는데 이 부분이 문제가 되어버렸다.

발단은 문장의 끝부분을 확대해석한 불교계 언론들이 한결같이 무거운 제목들을 올려버렸다.

‘법정, 모든 직함에서 사퇴’, ‘맑고 향기롭게 회주 법정, 돌연 사임’, ‘법정 신변정리, 문제 있는가?’ ‘길상사 법정, 전격 사퇴’ 언론 쪽에서 마치 무슨 문제가 있다는 듯이 너무 앞서 가 버린 것이었다.

며칠 후 맑고 향기롭게 연말 결산을 겸한 정기 총회가 있었다.

스님의 본의는 아니었지만 그때의 그 오보사태는 스님 이후의 대비에 대해 무방비 상태 였음을 모두들에게 깨우쳐 주었다.

“그럼 내가 80, 90까지 계속 할 줄 알았습니까?”

“스님, 그래도 이렇게 칩거하시게 되면 언론에 보도된 것처럼 내부에 무슨 문제가 있어 그만둔다는 식의 오해를 인정해버리는 꼴이 되고 맙니다.”

“내가 신문 기사를 다 챙겨보지는 못했지만, 내 건강에도 한계는 있어요.”

“아무리 그렇지만 저희들과 상의 한 마디 없이 일방적으로…그 생각을 거두어 주십시오. 매우 당혹스럽습니다.”

맑고 향기롭게 모임에도 겨울이 오고 있었다. 거대한 침묵의 그림자가 서서히 조여오고 있었다. 스님이 계시지 않는 맑고 향기롭게? 이날 회의 내내 우리들 가슴에는 한겨울의 매서운 삭풍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 사벌등안(捨筏登岸) ‘언덕에 오르면 뗏목을 버린다’

2005년 2월 길상사 행지실(行持室, 법정 스님이 쓰시던 집의 당호), 신년도 정기 총회가 있었다. 신년 세배를 드리고 가족끼리 인사가 끝나자 스님은 마치 ‘내가 없다고 생각하라’는 듯이 처음부터 한 마디 말씀이 없으셨다. 그렇게 침묵 속에서 회의 진행을 지켜보시다가 마무리에 이르자 조용히 한 말씀으로 회의를 종결지으셨다.

“나는 그동안 말을 너무 많이 한 것 같습니다. 기회 있을 때마다 침묵의 미덕과 그 의미를 강조해 온 사람이 침묵보다는 말로 살아온 것 같은 모순을 돌이켜 봅니다. 앞으로 지방 순회 법회는 더 이상 기대하지 마십시오. 지상

- 13 -

에 발표할 글도 더는 쓰지 않겠습니다. 다만 여러분의 뜻에 따라 길상사에서 짝수 달로 해 오던 법회도 금년부터는 붐, 가을 두 차례만 하겠습니다. 그리고 매달 써 오던 <맑고 향기롭게> 회보에 실은 글도 계절에 한 편으로 줄이겠습니다.

또 무엇보다, 그동안 써오던 ‘회주’라는 호칭도 더 이상 쓰지 말 것을 당부드립니다. 회주라는 자리도 내 놓고 회원의 한 사람으로만 남겠습니다. 섭섭하게들 생각지 말고 나 이후에 대해서 마음 준비를 하시기 바랍니다.”

이미 두 달 전 언론 보도로 한바탕 회오리를 경험했던 터라 이번 총회 때는 누구도 스님 말씀에 이견을 내놓지 못했다. 그렇게 서서히 마무리해가다가 앞으로 2,3년 뒤에는 완전히 떠나겠다는 선언적 말씀으로 이해되었다.

지방에 있던 나는 나중에야 알았지만, 2년 전에 스님께서는 평생 처음으로 병원에 입원하신 일이 있었다고 맏상좌 덕조 스님한테 귀띔을 받았다. 계속된 잔기침과 기관지염이 심해 삭발 제자들 등쌀에 거의 강제로 병원에 가셨다고 한다. 종합진찰 결과 상태는 의외로 심각했다. 당장 수술을 하고 장기치료를 해야 한다고 제자들이 성화를 해대자 ‘병마도 찾아온 손님이다. 잘 토닥거리며 살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끝까지 거절하셨다고 들었다.

문제는 스님의 병에 가족력이 있었고, 70대 중반의 적지 않은 나이에도 강원도 산중에서 홀로 얼음을 깨며 살고 있으니 언제 어떤 상황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에서 오늘 거인의 퇴장에 대한 예고편을 듣고 만 것이다.

매달려 있던 마른 잎 하나가 ‘맑고 향기롭게’와 인연을 접으려 한다. 세월이란 언제나 우리네 소망을 앞질러 가곤 했다. 인생은 전광석화(電光石火), 목숨은 여로여전(如露如電), 그 진리 앞에서는 누구도 비켜갈 수 없는 중생계의 일이다.

불가에 사벌등안(捨筏登岸)이라는 가르침이 있다. ‘언덕에 오르면 뗏목을 버린다’ 즉 강을 건네준 뗏목이 아무리 고마워도 메고 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부처님의 가르침과 은혜가 아무리 깊고 감사해도 기본 바탕이 닦였으면 이젠 너 자신을 이루기 위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준엄한 가르침으로 배웠다. 그래서 불교는 자력의 종교다. 의지할 수 있는 신의 존재가 다 알아서 해 주는 타력의 종교가 아니라 스스로 완성을 향해 홀로 나아가는 마음의 종교다.

- 14 -

그동안 스님께서 뗏목이 되어 강을 건네주셨다. 이젠 우리 힘으로 홀로서기

를 해야 한다. 스님께서 만들어 주신 맑고 향기로운 그 텃밭에 무엇을 심고 가꾸며 어떤 농사를 지어야 할 것인가는 이제 점점 우리 몫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 천주의 초파일

1991년, 인촌(仁村) 김성수 전 부통령 ‘탄신 백 주년 행사’ 때 전통 제례에 참석했던 김수환 추기경께 기자가 물었다.

“가톨릭 수장 되시는 분이 어떻게 음식이 차려진 제사상 앞에서 목례도 아닌 무릎을 꿇고 큰절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추기경께서 답하셨다.

“왜요? 이상합니까? 이건 우리 문화잖아요. 문화와 종교를 혼동해서는 안 되지요. 전통문화는 문화로서 존중되어야 합니다.”

나는 그 신문기사를 읽고 추기경님의 열린 시각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법정 스님께서도 어떤 종교에 대해서나 열린 눈을 가지셨다.

평소에도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에 대해 자주 거론하셨고 그뿐 아니라 사막의 교부들 일화, 랍비와 탈무드, 힌두교의 시, 크리슈나무르티가 쓴 <마지막 일기>등의 책을 우리들에게 권하기도 하셨다.

1997년 12월 10일, 길상사가 개원하던 날 길상사 법당 안 부처님 정면 가운뎃줄 맨 앞자리에 추기경님과 법정 스님이 나란히 앉아 계셨던 ‘ 한 폭의 인물화’를 잊지 못한다.

그 후 일 년 뒤 ‘명동 성당 축성 백 주년 기념 미사 자리에 이번에는 추기경님께서 법정 스님을 초청하셨다. 불교 승려가 한국의 대표 성당 기념 미사에 초대되어 천주의 제단 앞에서 법회를 주관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두 분의 교분은 이미 1970년대 군사독재와 싸우실 때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으신 추기경께서 “이 책이 아무리 무소유를 말해도 이 책만큼은 소유하고 싶다”고 극찬하시기 훨씬 이전부터 늘 함께해오셨다.

2005년 5월 15일 부처님 오신날.

맑고 향기롭게 가족들은 결코 잊을 수 없는 날로 기억될 것이다. 부처님 오신 날을 축하해 주기 위해 추기경께서 또 길상사를 찾아주신 것이다. 이번에는 아예 신부님, 수녀님들까지 무려 40여 명의 사제단을 이끌고 마치 길상

- 15 -

사를 접수하러 오시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대가족이 찾아준 것이다.

길상사 경내에 있던 수많은 불자들은 일제히 환호하며 기립박수를 보냈고 두 분은 또다시 뜨겁게 손을 잡으셨다.

이날 봉축 음악회 자리에는 개신교 가수 임형규 씨의 ‘아베마리아’가 있었고 이해인 수녀님의 부처님 오신 날 봉축 시 낭독도 있었다. 원불교 박청수 교무님도 오셨고, 가수 김수철 씨가 부른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회한의 노래 ‘황천길’도 있었다.

이날 길상사에 들어온 시주금 전액은 근처에 있는 천주교 사회복지 시설인 ‘성가정 입양원’에 쌀 뒤주만한 시주함이 통째로 다시 시주되는 뜨거운 우정도 있었다. 주고도 즐겁다. 그래서 ‘나누는 기쁨’인 것이다.

불교식으로 말한다면 두 분은 ‘마음의 현상이 곧 우주의 현상’임을 일찍이 깨친 아라한(阿羅漢 : 번뇌를 끊어 더 닦을 것이 없으므로 마땅히 공양을 받을 만한 덕을 갖춘 사람, 수행을 완성한 사람)들이다. 그런 능력과 서원으로 평생 중생계를 위해 슬픔, 독재, 폭력, 재난, 민심, 불의, 갈등 분규들로부터 우리 사회를 토닥거리고 이끌어주셨던 희생의 등불이었다.

왜 우리는 평소에 이처럼 살 수는 없는 것일까. 왜 우리는 타 종교를 디딤돌이 아니라 걸림돌로 보려 하며, 서로가 경직되어 다름에 대한 배려를 못하는 것일까. 왜 우리는 타종교를 친구가 아닌 박멸의 대상으로 보려하며 ‘하느님은 사랑이다’와 ‘자비심이 곧 부처’라는 동의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필자만의 괴벽이겠지만 ‘베풀라’는 말보다 ‘바치라’는 말을 많이 하는 종교, 나와 다른 종교를 이웃으로 보지 않고 공격의 대상으로 규정하는 종교, 다른 산오름은 절대 인정하지 않고 정상에 오르는 길은 오직하나뿐이라고 독선을 가르치는 종교가 아직 존재한다는 말을 들을 때면 까닭 없는 비애감에 젖기도 한다.

■ 구참과 신참

스님들을 친견하다 보면 자기 단속이 엄한 스님일수록 “속정(俗情) 이 깊으면 도심(道心)이 멀어진다”는 구산 스님의 말씀을 의식해서인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스님들이 계신다.

- 16 -

행정승이나 도심지 포교당 일선에 계시는 사판(事判)스님들보다 특히 선방 수좌 생활만 몇십 철씩 거듭한 이판(理判) 쪽 스님들이 훨씬 더 무심하고 말씀이 적다.

법정 스님도 예외가 아니다. 초발심 시절엔 쌍계사, 해인사, 봉은사, 송광사 등 대중 생활도 많이 하셨지만 불일암 이후 강원도 토글에 이르기까지 수십 년, 독거를 더 많이 하셨다. 스님이 쓰신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의 수상집 ‘겨우살이 이야기’ 편에 이런 얘기가 나온다.

“내 오두막에는 유일한 말벗으로 나무로 깎아 놓은 오리가 한 마리 있다. 전에 살던 분이 남겨 놓은 것인데 목을 앞으로 길게 뽑고 있는 것이 그 오리의 특징이다. 누구를 기다리다 그처럼 목이 길어졌을까. 방 안 탁자위에서 창을 바라보고 있는 형상이 그야말로 학수고대(鶴首苦待)의 모습이다.

종일 가야 말 한마디 할 일이 없는 나는 가끔 이 오리를 보고 두런두런 말을 건다. 끼니를 챙기러 나갈 때나 아궁이에 군불을 지피려고 방을 나설 때 ‘나 공양하고 올게’ ‘군불 지피고 오마’하고 알린다. 외출할 때는 ‘아무 데 다녀올 테니 집 잘 보거라’ 하고, 돌아와서는 ‘나 다녀왔네. 잘 있었는가?’ 하고 안부를 묻는다.”

이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스님의 일상은 침묵여일(沈黙如一)이다. 유일한 말벗이 나무로 깎은 오리라면 그런 생활이 수십 년이 넘었으니 이따금 속가에 내려오셔도 별로 말씀이 없다. 그러다보니 처음 다가온 이들은 스님의 청량함에 다소 움츠렸을 것이다.

“그 청량감을 뛰어넘어 안으로 파고들면 생각지도 못했던 스님의 물기와 만나게 됩니다. 그 한랭을 공부로 삼고 나면 의외의 능청과 조크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스님은 구참이건 신참이건 늘 공부하라 당부하셨다.

“욕심(貪 탐할 탐 心)은 자신의 분수를 알고 지키려는 계율에 의해서, 성냄(嗔 성낼 진 心)은 자신의 분노를 삭일 수 있는 선정에 의해서, 무지(痴 어리석을 치 心)는 자신의 마음을 조복(몸과 마음의 조화로써 굴복시키다) 받을 수 있는 지혜에 의해서만 극복될 수 있다. 탐진치(貪嗔痴) 삼독과 계정혜(戒定慧)의 삼학은 동의어이니 같이 닦아야 한다.

* 계정혜 : 나쁜 짓을 하지 않고, 마음을 안정되게 하고, 진리를 깨달음)

- 17 -

이론상으로 알고 있어도 행(行)이 받쳐주지 못한 공부는 꽃만 보았지 열매는 얻지 못한 환상일 뿐임을 늘 강조하셨다.

근일에 스님의 건강에 대해 여쭈면 ‘하처래(下處來) 하처거(下處去)’라 하셨다. 인연따라 왔다가 그 인연 다해 떠나는 것이 인생유전의 한 질서일 뿐이라고 담담하게 말씀하시곤 했다.

당신 정도의 수행력이라면 육신의 헌 옷 벗을 정도는 훤히 내다보실 것이다. 어느 날 깃대가 부러지는 충격을 흡수하려면 아픔도 미리미리 나누어서 시나브로 준비해야 할 것 같다.

■ 거인의 행보

나는 맑고 향기롭게 광주 전남 모임의 본부장과 운영위원장 소임을 잠시 내려놓고 2006년 2월에 일본 구주산업대학 객원교수로 일 년 동안 나가 있게 되었다. 2007년 봄 귀국 이후 스님을 뵙지 못했는데 10월 정기 법회를 끝으로 갑자기 건강이 악화되어 수술을 받기 위해 미국으로 출국하셨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다 보니 2년 가까이 스님을 뵙지 못한 것이다.

미국 체류가 길어지자 서울 법우들이 걱정을 했다.

“3,4년 전이라면 또 몰라도 지금껏 수술과 치료를 거부하시다가 이제 와서 수술을 받아봐야 이미 늦어 부질없는 것임을 당신 자신이 더 잘 알고 계실텐데, 또 수술을 받으러 떠난 줄 알면 평생 삶과 죽음을 동일시했던 자기 철학의 자기부정 이미지나 세평 또한 모르지 않을 텐데…. 수술 받자고 매달리는 삭발 제자들의 젖은 눈빛을 끝까지 외면할 수 없었던 스님의 인간적 모습을 속 모른 사람들이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지….”

나의 오랜 지인이었던 타종교의 한 친구도 아쉽다는 듯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조금은 놀랐다.

“80을 바라보는 노승이 살면 얼마나 더 사신다고, 평생 무소유 언행을 존경해 왔는데, 하나밖에 없는 목숨 앞에서는 그 양반도 별수 없었다는 얘긴가? 아무튼 ‘미국 수술’이라는 법정 스님답지 않은 행보는 아쉬움으로 남으이.”

몇 년 전에도 검진 결과를 걱정하자 ‘병마도 찾아온 손님이니 내가 잘 알아

- 18 -

서 토닥거리며 살겠다’고, 입원도 수술도 끝까지 거부하시어 주변에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또 스님은 미국 떠나기 바로 전에도 건강에 대해 걱정을 하면 이렇게 말씀하셨다.

“살 만큼 살다 보면 부품이 고장 나서 덜컹거릴 때가 있지요. 그게 자연스러운 거예요. 살 만큼 살다가 목숨이 다하면 누구나 몸을 바꾸게 됩니다. 그게 순리예요. 이쪽 정거장에서 저쪽 정거장으로 건너가는 것뿐이에요. 그냥 조용히 인연의 순리를 지켜보면서 평상심을 잃지 마세요.

평생을 그 무엇에도 걸림이 없이 살아왔던 그가 마지막 인생 4악장에 와서 무엇이 두렵고 무엇이 아쉬워 제자들이 하자는 대로 따라갔을까? 그래도 한 가닥 의문이 남는다면 나는 감히 이렇게 이해를 돕고 싶다.

스님은 미국에 동행하시기 이미 오래전에 모든 것을 비워버리셨다. 그는 그 어떤 비판도, 후평도, 명예도, 이름도 다 놓아버린, 심지어 평생의 고유명사가 된 ‘무소유’조차 비워버린 망아(忘我)의 무아애(無我愛) 경지에 계시지 않았을까.

그런데 다만 한 가지, 세상에 남겨질 명예와 이미지를 걱정하는 유발 제자들보다, 다소 늦은 시절에 받아들인 일곱 삭발 제자들의 공부가 더 눈에 밟히셨을 것이다. 하루라도 더 살아 계시기를 소망하는 그들의 마지막 공부를 위해 때늦은 미국행을 결행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도리(道理)와 사정(師情)에서 차마 벗어나지 못하는 그들에게 제행무상의 실체를, 이론이 아닌 현장을 확인시켜주고 싶었던 ….

그래서 자신의 육신을 실험용 마루타로 제공하여 수술을 하건 해부를 하건, 껍질의 한계를 깨우쳐주기 위한 마지막 탁마의 가르침이었다고 나는 조심스럽게 예측해본다.

■ 마지막 조크

촛불이 꺼지기 직전 더 밝은 빛을 발하듯 미국 수술을 다녀오신 후 법안은 창백했으나 표정은 매우 밝으셨다. 그래서 잠시 법회 주관도 하시고 내방자도 접견하셨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결국 삭발 제자들은 따뜻한 남쪽 지방 이곳저곳으로 스승을 모시고 요양을 다녔으나 회복의 가망이 보이지 않자 마지막임을 예상하고 삼성병원에 입원을 시켰다.

- 19 -

말기암 환자의 고통속에서도 스님은 신음소리 한 번 없이 오히려 주변 지인들의 걱정을 배려한 조크를 끝까지 잊지 않으셨다.

의사들이 아침에 회진을 와서 스님께 물었다.

“스님, 좀 어떠신가요?”

“아프니까 여기 누워 있지요?”

의사들이 나가자 간병인이 스님께 가만히 여쭈었다.

“스님, 지금 왔다간 사람이 누군지 아시겠어요?”

“염라……대왕.”

돌아가시기 나흘 전, 서울 본부장 윤 선배께서 문병을 갔다.

“스님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어서 와, 바쁘실 텐데…….”

“몸은 좀 어떠십니까?”

“그보다도 내 장례일자는 며칠로 잡혔다던가?”

“네에? 장례일자요?”

죽어가는 사람이 자신의 장례일자를 상대방에게 묻다니? 죽는 것이 무슨 소풍가는 날도 아니고, 스님의 조크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스님은 그렇게 가셨다.

■ 촛불은 꺼지고

2010년 3월 11일 낮 1시 51분, 세수 79세, 법랍 56세, 송광사 서울 분원,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에서 열반하셨다는 속보 뉴스가 전국으로 타전되었다. 입적하시기 직전 대중들에게 임종게를 말씀하셨다.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제가 저지른 허물은 생사를 넘어 참회하겠습니다. 만약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해 주십시오.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다시 한 번 온 국민을 감동시킨 또 한 번의 무소유 철학 ‘하지 말라’는 4불가를 열반송처럼 남기셨다.

1. 사람들에게 수고만 끼치는 거창한 장례식을 일절 행하지 말라.

2. 관도 만들지 말고, 수의도 입히지 말고, 입은 옷 그대로 다비하라.

- 20 -

3. 화장 후 사리도 찾지 말고, 탑이나 부도도 절대 세우지 말라.

4. 말빚을 남기고 싶지 않으니 모든 책은 더 이상 출간치 말라.

그리고 40여 년 전 봉은사 시절 <무소유>속에 등장하는 당시 신문배달을 했던 그 꼬마를 찾아 당신이 보다 남긴 책들을 전해 달라고 마지막 유언을 남기셨다. 혼자 스스로 한 다짐마저도 지키고자 하셨다.

덕조(德祖), 덕인(德仁), 덕문(德門), 덕현(德賢), 덕운(德耘), 덕진(德眞), 덕일(德日) 칠형제는 은사의 유지를 그대로 행했다.

입고 계셨던 옷 그대로, 별도의 관도 없이 스님이 손수 만들어 쓰셨던 대나무 침상위에 누우신 그대로 운구 되었다. 종이 한 장, 천 조각 하나, 나무토막 하나도 함부로 쓰지 않았던 무소유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 향을 사르며

오늘은 어제의 결과이고 내일 또한 오늘의 결과이다.

이것이 세월이라는 강을 끼고 흐르다보면 거기에 전생이 생기고 금생도 다음 내생도 형성된다. 그 사이 금생에서, 업을 통한 인연의 결과로 같은 시대에 스님과 내가 사제제간으로 엮인 것이다. 그리고 이생에 왔던 순서대로 스님이 먼저 이번 생의 업을 풀고 내생에 들었을 뿐이다.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불자라면 누구나 죽는 것이 끝이 아니며 또 다른 삶의 시작임을 잘 알면서 살아왔고 스님 또한 늘 그것을 깨우쳐주셨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삶을 소유물로 여기고 생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생에 대한 집착과 소유의 개념에서 벗어나야만 우주의 질서를 알게 되고 그 흐름을 만나게 된다. 죽음이란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 묵은 허물을 벗는 것’이라 늘 스님께 배우지 않았던가.

나는 과연 구체적인 제자로 자리매김했던가, 아니면 겉돌기만 했던 추상적인 나그네에 불과 했던가.

나는 당신에게 동화되어버린 그림자였던가, 아니면 반듯하게 나의 빛깔로 조화(造化)를 이룬 제자였던가.

나는 맑고 향기롭게에 이름만 올린 허상이었던가, 아니면 진실된 나눔을 실천하고 있는 유발 수행자인가.

- 21 -

나는 당신의 복사품이나 모방자인가. 아니면 나만의 대웅봉(大雄峰)을 향해 똑바로 가고 있는 참된 제자인가. 밤이 이슥하도록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으면서 나만의 영정을 조용히 지키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맑고 향기롭게 광주 전남 모임 임원 몇 사람과 서둘러서 송광사 다비장으로 향했다. 대원사 입구까지는 주행할 만 했으나 주암댐 근처에서 부터는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우리도 차를 버리고 걸을 수밖에 없었다. 다비장에 도착했을 때 다비는 이미 끝나가고 있었다.

이따금 눈물을 훔치는 보살들, 한숨을 쉬며 허무를 삼키는 처사들, 사대부중은 무거운 침묵 속에 빠져 있었다. 사그라지는 숯덩이 위로 잿빛 연기만 조계산을 덮고 있었다.

다비가 끝났다. 거창한 영결식도 없고, 그 흔한 만장 하나도 없고, 연꽃 상여도 없이 스승은 입고 있던 그대로 그렇게 떠났다.

손상좌가 스님의 영정을 모시고 가장 앞장을 섰고 맏상좌 덕조 스님이 위패를 모셨으며 그 뒤를 유골을 나누어 든 여섯 제자가 따르고 방장 스님, 주지 스님, 3직 스님들이 뒤를 이었다. 그리고 강사 스님이나 선방 수좌들, 강원 학인 스님들은 전국에서 조문 오신 비구, 비구니 스님들과 뒤섞여 대열을 이루고 있었다. 고맙고 감사하게도 검은 제복의 신부님, 수녀님들도 간간이 섞인 채 함께하고 있었다. 그 뒤로 끝이 보이지 않는 수많은 대중들이 스님의 유골을 따랐다. 스님이 평생 존경했던 고불 조주(趙州) 스님의 말씀처럼 필자를 포함해 ‘수많은 죽은 사람이, 한 사람의 산 사람을 따라가는’ 하산이 줄을 잇고 있었다.

* 3직 스님 : 사찰의 운영을 돕는 총무, 교무, 재무 국장을 말함. 여기에 포교, 호법, 사회, 문화 등을 합쳐 7직을 두는 경우도 있음

전생에 누구로 걸었을 이 길을 또 다음 생에는 누구의 이름으로 이 길을 걸을까. 스님은 수많은 조객들에게 제행무상의 실체를 증명하면서, 법정은 이제 과거완료형으로 그렇게 접혀져 가고 있었다.

‘스님! 그럼 편히 다녀오십시오.’

하늘을 건너는 맑은 바람 사이로 3월의 초봄이 내리고 있었다.

- 22 -

제5부 무소의 뿔처럼

■ 집안의 내력

법정 스님이 떠나신 지도 해가 바뀌었다. 어느 날 현장 스님과 차담을 나누게 되었다. 현장 스님 또한 속가 집안의 내력인지 법정 스님 못지않은 조커(joker) 였다.

“스님 지금 쯤 법정 스님 새 몸 받아 어느 댁으론가 오셨겠지요?”

“그렇겠지요. 살아생전 한국 사회에 쌓은 공덕으로 봐서도 아마 상당한 집안의 귀한 손으로 오셨을 겁니다.”

“다시 불교와 인연을 맺고 싶어 할까요?”

“당신이 평소 새 육신 받아오면 다시 출가하여 종노릇 한번 더 하고 싶다 하셨어요.”

“우리가 새 몸 받아오신 은사 스님을 찾을 수 있을까요?”

“같이 한 번 찾아봅시다.”

우리의 웃음 속에는 스님에 대한 애틋함이 묻어 있었다. 혹자들은 이 무슨 귀신 씻나락(볍씨의 방언) 까는 소린가 할 것이다. 굳이 티베트 라마 환생까지 가지 않더라도 절 집안에서는 여담으로 나눌 수 있는 대화다.

“스님, 법정 스님의 유언에 따라 책을 찍어낸 출판사들과 모조리 ‘절판‘시키기로 서약해 버렸으니, 다음 세대들이 스님의 존재나 기억할 지 앞으로가 걱정입니다.

“시절인연 만나면 누가 또 알겠습니까? 절에서 찍어야 ‘절판’이지.”

“네에? 절에서 찍어야 절판?”

우리는 또 한바탕 폭소했다. 떠난 사람을 추억할 때는 괴로울 때나 슬플 때나, 힘들 때나 아플 때에도 가급적 기억의 저편에서는 아름답게 회상되어야 한다. 내 곁에 없다는 것만 떠올려 허무, 고독, 비관, 회한 쪽으로만 반복하다 보면 슬픔의 씨앗만이 싹을 틔운다. 추억이 아프면 사는 것도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 치멸 수행

- 23 -

나는 불가의 초석인 탐·진·치 3독의 번뇌 중에 특히 치심 닦음에 방점을 두고 살아 왔지 싶다. 해도 될 말인지 해서는 안 될 말인지, 서 있을 자리인지 앉아도 될 자리인지, 마음을 열 때인지 비울 때인지 등을 깨치게 되면 어리석음이 지혜로 바뀐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치심의 정체만 정확히 알게 되면 이것이 곧 정견(正見)의 씨앗이 되고, 정견 속에서는 탐욕도 분노도 다스릴 수 있다고 확신했기에 치멸(痴滅)을 수행이 근본으로 삼고 살아왔던 것 같다.

이 치심이 가장 좋아하는 벗이 교만의 씨앗인 아상이고, 가장 싫어하는 놈이 겸손의 씨앗인 하심이다. 내가 젊은 시절 법정 스님께 최초로 배운 혹독한 공부가 치심의 정체였다. 스리랑카 참회를 통해 콘크리트벽 같은 아상의 실체를 견인 할 수 있기까지 무려 4년이 걸릴 만큼 나의 어리석음도 만만치 않았다.

깨쳤다면 거듭거듭 반복된 실천의 습이 따라야 한다. 금강경 제10분에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基心)이란 말씀이 나온다. ‘머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지금도 내 생각이 옳지 못함을 알고 색, 성, 향, 미, 촉, 법, 육근육경 그 어디에도 머물지 말며 즉시즉시 마음을 내어 상(相)을 깨뜨리라는 가르침이다. 이론상으로는 알면서도 몇십 년을 닦고 또 닦아가지만 누겁의 억장이 얼마나 두터웠을까. 이 나이에도 실수하고 후회할 때가 있다. 아마 이번 생에 머무는 동안은 평생 수행해야만 할 나만의 숙제이기도 하다.

법정 스님이 떠난 빈자리가 워낙 커서였겠지만 삭발 유발 할 것 없이 제자들 사이에 서로가 크고 작은 상처를 남긴 안타까운 시절이 있었다.

1세대의 경험과 2세대의 열정이 화합하지 못한 채 염려가 간섭이 되고, 연륜과 무시가 아상이 되고, 고집과 변화가 충돌하고 원칙과 예외가 타협하지 못했던 불변과 가변의 갈등이었다.

특별히 어느 한쪽을 탓할 수 없는 우리 모두 미처 덜 닦인 치심의 부스러기들이 일을 그렇게 몰고 가지 않았나 돌이켜본다.

그러다 결국 더 이상 추해지기 싫어서 양쪽 모두 은사 스님께 배운 대로 ‘버리고 떠나기’를 시도해버린 아픈 과거가 있었다. 나는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크게 배우고 자성하게 되었다.

- 24 -

나는 ‘맑고 향기롭게 모임’에 관해서 만큼은 법인이 설립되기 몇 년 전인 ‘나누는 기쁨’ 말씀 때부터 캐릭터 부탁에서 불발했으니 제1세대 그 어떤 이사들보다 군번이 빠른 편이다. 그리고 모두가 떠나버린 지금까지도 최전방 일선을 지키며 가급적 침묵 속에서 스승의 유지만 받들어 일할 뿐이다.

불신과 불만 보다는 긍정과 희망을 얘기하고 소통과 합의의 틀을 계속 만들어가야 한다. 명령과 패권의 헤드십이 아니라 하심과 겸손의 하트십이 지켜질 수 있도록 받쳐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고정관념을 내려놓아야 한다.

자에는 표준이 아니라 탄력이 있어야 한다고, 옛날의 자로 지금 세상을 재지 말라고 은사 스님께서는 내개 ‘거꾸로 보기’를 가르치셨고 나의 법명이 끊임없는 맑은 샘물이 되라고 ‘우천’이란 부처님 이름이 주어지지 않았던가.

■ 스님의 메시지

“본부장님, 궁금한 것이 하나 있는디, 거시기 그 뭐냐, 출입구 계단 우게 걸려 있는 포스터에 ‘여러분이 주신 천 원은 밥값이 아닙니다. 우리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위해 쓰일 헌금입니다.’ 카아! 불 때마다 감동시러운데 어떻게 그런 문장을 생각해부렀당가요잉?”

“그거요 사실은 법정 스님 메시지예요.”

이른 아침 동국대학교 행사장에 가는 길에 나는 스님과 같은 차에 동승하고 있었다. 주행 도중 신호대기 때, 어떤 건물 앞에 커다랗게 걸어 놓은 현수막을 보게 되었다. 스님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시더니 혼잣말을 하셨다. “불우이웃 돕기 무료급식, 저건 어려운 사람들 두 번 상처 주는 말인데, 불우이웃에 무료급식이라….”

나는 조금 이해가 짧아 스님 혼자말씀에 끼어들었다.

“스님, 불우 이웃은 이해가 되지만 ‘무료급식’이란 단어도 문제가 되는 겁니까?”

“당연히 문제가 되지요. 무료급식을 제공하는 쪽은 아상을 키울 수도 있고 불우의 대상인 받는 쪽은 ‘나는 거지다’는 생각을 갖기 쉽지. 그러다 얻어먹는 일에 습이 붙어버리면 자포자기를 부추기는 꼴이 될 수도 있어요.”

“스님, 죄송합니다만, 너무 비약하시는 게 아닌지요?”

- 25 -

“우천! 얻어먹어 봤어? 중생살이에 가장 어려운 게 뭔줄 알어? 어떤 도움도 포기해 버린 의욕상실병이야!”

“그럼 앞으로 우리 모임에서는 무료급식 사업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겠군요.”

“그건 내 말을 잘못 이해한 거야! 예수님께서는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가르치셨어요. 좋은 일 하면서도 꼭 저렇게 써 붙여야만 했을까? 지금 줄 서 있는 대상자들 입장에서 생각해 볼 수는 없었을까. 그게 아쉽다는 거예요.”

“아, 네. 그런 의미셨군요.”

“그리고 또 하나는, 밥값으로는 어림없는 돈이겠지만 5백 원이나 천 원쯤 ‘자발 헌금’을 받아서 나도 돈 내고 먹는다는 자존심을 세워주는 거예요.”

“아, 그렇습니까?”

“무료급식 수준은 아예 바깥출입을 못하는 극노인이나 병자들에게 도시락이나 밑반찬을 만들어 배달해주는 상황을 말하는 거예요. 그러나 줄 서 있는 저 사람들 정도라면 동정받고 있다는 좌절감, 비애감이 들지 않도록 배려함이 먼저라는 의미예요.”

“내가 우리 가족들에게 ‘무료’나 ‘불우’니 ‘봉사’니 하는 말을 못하게 하는 것은 항상 차별, 분별하지 말고 평등한 입장을 잊지 말라는 겁니다. 늘 받는 쪽을 생각해서 ‘나누는 기쁨’, ‘나눔의 집’, ‘나눔의 쉼터’등. 산다는 것은 나눠 갖는 것인데, 나눔이란 누군가에게 끝없는 관심을 기울이는 일인데….”

행사장에 거의 도착하자 스님의 말씀은 그쯤에서 거두셨지만 나는 그날 스님의 깊은 뜻을 충분히 채집할 수 있었다.

무료로 베푼다고 행여 교만심 드러낼까, 무료로 받는다고 하여 행여 상처받지 않을까, 양쪽을 다 염려하신 스님의 자비행을 배우던 시절이었다.

어둠이 짙으면 짙을수록 별들이 더욱 밝아보이듯이 숨어 계셔도 시대를 움직이고, 침묵하고 계셔도 시대의 어른이었던 스승이셨다. 소주 몇 잔에 또 스님의 모습이 아련해진다.

■ 복 많이 지으세요

<잡아함경>에서 이런 말씀을 보았다. 부처님 재세시 인도에 한 부자가 네

- 26 -

명의 아내를 두고 꿈같은 세월을 살고 있었다.

첫째는, 잠시도 떨어져서는 못사는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아내

둘째는, 다른 사람과의 처절하게 다투어 경쟁 끝에 겨우 얻은 아내

셋째는, 이따금 생각나면 찾아가 만나는 그만그만한 아내

넷째는, 어쩌다 저런 여자를 만났나 후회하며 하인 취급하는 아내

이 부자는 죽을 때가 되자 돌아올 수 없는 먼 여행을 떠나게 되었음을 네 명의 아내에게 설명하고 함께 동행해주길 부탁했다.

첫째는, 어떤 경우에도 절대 동행할 수 없다.

둘째는, 여행 준비물은 챙겨 주겠지만 동행만은 못한다고 거절했다.

셋째는, 성문까지 배웅은 하겠지만 그 이상 동행은 거절했다.

넷째는, 당신을 끝까지 따르겠다며 여행 준비를 바쁘게 서둘렀다.

끔찍이 사랑했던 세 여인에게는 모두 거절당했지만 그토록 미워하고 하인 취급했던 넷째 부인이 끝까지 동행하겠다고 따라 나선 것이었다.

부처님은 그 모습을 이렇게 풀어 말씀 하셨다.

“첫째 아내는 내가 가장 사랑했던 나의 육신이고, 둘째는 재물, 권력, 명예인 나의 ‘재산’이고, 셋째는 부모, 형제, 피붙이인 내 ‘혈육’이고, 넷째는 평생 내가 지어놓은 ‘업(業)’이었느니라.

비구들이여! 나의 육신, 재산, 혈육은 그토록 귀히 여기면서 어찌하여 선업 쌓는 일만은 하인 취급하며 미워했으니 다음 생에 무엇을 더 기대하리오. 모름지기 마음을 잘 닦아 수행의 덕을 쌓고 선업 또한 항상 행할지니라”고 가르치셨다.

연초가 되면 모두들 ‘복 많이 받으세요’ ‘부자 되세요’하고 인사들 한다. 받을 만큼 복들 지으셨는지…. 지어놓지 않은 복을 어떻게 받을 수 있으며 닦지 않은 지혜를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지혜는 스스로의 수행을 통해서, 복은 타인을 위해 지어야만 쌓인다. 바로 선업을 뜻한다. 그래서 공부가 적당히 익은 불자들은 그 의미를 잘 알기에 ‘복 많이 지으세요’라고 인사한다.

좋은 일에 원인 지으며 좋은 결과를 얻는다 해서 복인복과(福因福果)라 했고, 복이란 착하고 좋은 일과 인연을 맺게 해준다 하여 복연선경(福緣善慶)이라는 단어가 생겼다.

복전(福田)은 누구에게나 주어진다. 내가 무슨 농사를 지을 것인가는 일체

- 27 -

유심조(一切唯心造)인 내 마음이고 내 뜻이다.

선과 악은 한 밭, 한 자리에서 나오기에 복과 죄는 지은대로 간다던가. 복 장사꾼 자주 만나는 것도 그대 복이다. 복 많이 받고 싶거든 새해에도 “복 많이 지으세요.”

■ 함께 사는 세상

내가 금생에 받은 가장 큰 행운은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고 사는 ‘마음의 종교’를 만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 인연의 길에서 법정 같은 큰 스승을 만나 야망과 욕망의 추구가 아닌 소망과 수행의 삶, 즉 보시행을 체득케 해주신 것이 가장 큰 복이었지 싶다.

스님은 보시의 개념을 돈이나 물질로 베푼다는 사전적 의미가 아니라 ‘나누는 일’로 해석하셨다. 베푸는 마음에는 높고 낮은 아상이 끼어들 수 있지만 나눔에는 수직이 아닌 수평적 유대를 이룬다는 말씀으로 우리들의 마음을 이끌어주시곤 했다.

전남 광주 모임에서 ‘점심 공양 나눔집’을 열었다. 처음 며칠은 음식을 버리지 않으려고 5인분, 20인분씩 조막 살림으로 시작했으나 한 달 만에 40인, 두 달이 되기 전에 80인분, 지금은 주말을 뺀 주 5일간의 도시락과 밥집, 2백 명의 공양을 준비하게 되었다.

그동안 장이 약한 노인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단 한 번도, 단 한 사람도 식중독을 일으키거나 불량식품 시비가 일어나 본 일이 없음을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런 게 바로 부처님의 가피이며, 자원활동자 법우들의 순수한 보시행의 결과이며, 돌아가신 은사 스님의 음덕이 도와주고 계시기 때문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다. 여유만 있다면 천 명이라도 받고 싶지만 천 원짜리 식당은 계속해서 적자였다.

그런데 도시락만 할 때는 몰랐는데 밥집까지 하다 보니 찾아 온 천태만상의 또 다른 모습을 통해 공부거리가 계속 생겼다.

- 혼자 와서 한 끼에 식판을 두 번, 세 번을 먹어치우는 사람

- 만날 고기반찬은 없고 풀만 준다고 화를 내는 안면신경마비증 환자

- 매일 와서도 헌금함에 천 원짜리 한 장을 넣는 일 없는 금테 안경 아저씨

- 28 -

- 절반 쯤 먹고 무엇이 불만인지 남은 음식을 마구 섞어 다른 사람이 먹을 수 없게 꼬장을 부리는 사람(꼬장 : 술 마시고 주정을 부리는 사람)

- 빈자리가 없는데도 끝까지 버티고 앉아 계모임을 하는 아줌마 부대

- 나갈 때까지 욕을 섞어 큰 소리로 떠드는 수라계 대장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

- 한 할머니는 음식이 깔끔하고 맛있다고 오실 때마다 민망할 정도로 칭찬

- 소형트럭으로 동네 장사다니는 어떤 부부는 매번 지나칠 때마다 푸성귀 를 한 아름씩 주고가고

- 고등학교 퇴직교사 부부는 매일 식당 바닥을 청소해 주고

- 유구르트 아줌마 다섯은 돌아가면서 매일 만원씩을 넣고 가고

- 눈매가 무서운 한 할아버지는 식사 태도가 불량한 사람들에게 군기반장 역할을 하고

오래전에 열반하신 서암 스님 법문에 이런 말씀이 있었다.

“독하고 무지한 말로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도 살생이고, 물건을 함부로 사용해서 없애버리면 이 또한 죽이는 것이기에 살생이 된다. 먹다 남은 음식을 버리는 것도, 하나면 되는 것을 두 개 세 개 사는 것도, 멀쩡한 옷 유행이 지났다고 버리는 것도 살생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살생의 의미를 중생의 목숨에만 국한시키지 말라. 그래서 종이 한 장, 낡은 물건 하나라도 가치있게 사용하고, 부드러운 미소, 다정한 말 한마디, 따뜻한 마음 한 자락이 바로 방생(放生)이 되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금은 보석과 모래 자갈이 함께 섞여 돌아가는 그래서 사바(娑婆)세계인 점심 공양 나눔집은 우리를 공부시키는 또 다른 법당이었다.

■ 절약과 궁상

30년 전 쯤으로 기억한다. 노염(老炎)이 한창이던 8월 말, 안거철을 피해 스님을 뵈러 불일암에 올랐다. 날이 워낙 더워 샘터에 갔다가 세숫대야 가장자리를 못으로 찍어 쓴 ‘67. 12. 3’이란 숫자를 본 일이 있다. 20년이 다 된 대야였다. 스님께 여쭈었더니 “세월이란 옷은 아름다운 거예요”라 하셨다.

- 29 -

대야가 쉬 닳는 물건도 아니고 싫증나서 버릴 스님도 아니다. 필자의 셈법으로 당신 열반 때까지 쓰신다면 한 50년? 그리고 그 제자가 다시 쓰고, 그다음 대가 또 쓰고 또 쓴다면 세숫대야 하나로 한 2백 년? 그것이 불가의 가르침이다.

그 후 나도 새로 구입한 물건이면 무엇이 되었건 날짜를 새겨 넣는 버릇이 생겼다. 표시하다보면 3개월짜리 샴푸도 반년을 쓰면 스스로 행복했고 두 달 만에 바닥이 나면 긴장을 하게 되었다. 전기면도기가 한 10년을 썼나 확인해 보니 12년째였다. 항상 느낀 바지만 세월이란 우리 예상보다 늘 앞질러가고 있었다.

- 옛날 양복 윗도리 안주머니가 터지고 안감이 빠져 나와서 양복 수선집에 갔더니, 양복 안주머니 이름 옆에 써놓은 ‘93. 12. 20 이란 날짜를 보고

“머시냐. 20년이 넘어버렷구만요. 워메 시상에 뭔 일이당가.”

“수선할 수 있겠어요?”

“ 그러먼이라우 너무나 반가워서…….”

- 정장에 받쳐 입는 흰색 와아셔츠 두 장이 다fms 곳은 멀쩡한데 땀에 절어 목둘레만 누렇게 변색되어 고민하다가 허름한 수선 집에 갔다. 수선을 부탁했더니 주인은 나를 외계인 보듯 쳐다보면 말했다.

“허어, 환장해불것네! 옷쟁이 30년에 와이사쓰 칼라만 바꿔 달라는 사람도 있구만 잉. 나가 돌아불것네!”

“이양반아! 묵고 살랑께 해주기는 한디. 시상 그렇코롬 살지 마쇼잉!”

- 어느 날 교편을 잡고 있는 큰딸애가 나를 매몰차게 공격했다.

“아빠는 만날 중용, 중도를 말씀하시면서 왜 물질 앞에서는 극단으로 가세요? 그건 절약이 아니라 궁상이에요! 제발 적당히 좀하세요!”

내가 정말 궁상을 떠는 것일까? 6·25전쟁 이후 70, 80불 시대에 어린 시절을 보냈던 우리 세대와, 3만 불을 바라보는 시대에 살고 있는 자식들의 세대와 경제 개념의 차이가 이렇게 큰 것일까? 나는 벙어리 냉가슴으로 소리없이 외쳤다.

‘이놈들아! 오늘날 이 나라 경제 기초를 누가 세웠는데! 굳이 법정 스님까지

- 30 -

가지 않아도 강냉이죽, 공돌이 공순이, 베트남 파병, 중동 근로자, 파독 광부 간호사, 원양어선단…. 너희들이 그런 단어를 들어나 봤어? 우리 6,70세대가 눈물과 피땀으로 세운 거야! ‘국제시장’ 그건 영화가 아니고 현실이었어! 우리 세대는 일 년 먹을 양식을 3년간 먹었지만, 네 녀석들은 3개월이면 거덜낼거야! 사치와 낭비는 온갖 무리의 근본이란 말이다. 이 애비는 부처님 누더기 분소의(糞掃衣 똥묻은 헝겊이나 헝겊을 주워 모아 지은 옷. 가사를 이르는 말)나 빈자일등(貧者一燈 가난한 사람이 바치는 등 하나. 물질의 많고 적음보다 정성이 중요함을 비유하는 말)의 철학을 잊지 않는 한, 꼰대는 절대로 내 식대로 살겠다. 이 개념 없는 놈들아!

■ 임은 떠났지만

어린 시절 벗이었던 두 친구가 나를 찾아 광주에 왔다. 나는 60년대 후반기에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나왔기에 서울 사는 이들은 모처럼 지방 나들이를 한 셈이다. 한 친구는 건설회사 이사로 있다가 퇴직한 상태이고, 또 한 친구는 개인 사업을 하다가 아들에게 물려주고 한 발 물러나 있는 50년 지기지우 들이었다. 저녁이 되어 나는 그들을 허름한 단골집으로 안내했다.

“근데 지난 봄 임자 서울에 왔을 때, 법정 스님 무소유의 세속개념이 어디까지냐고 내가 물었잖아. 그때 나 꾀나 충격 먹었어.”

“아, 인연 없는 물건과 친구 접대 얘기?”

“그래 그 말을 집 사람과 진지하게 의논해봤지 그리고 1년은 도저히 자신이 없고 2년 이상 손대지 않는 물건을 둘이서 한 열흘간 정리했는데 와아……진짜 그렇게 많은 살림이 나올 줄은 정말 몰랐어.”

“좀 어려운 조카들, 고모네, 아파트 경비실, 노인당 등 여기저기 연락을 해서 필요한 것 있으면 가져가라했더니 정말 주시는 거냐고 몇 번이나 묻더니 지네들 승용차로 한참을 실어 나르더라고.”

“크고 작은 그릇, 접시며 주방 기구들이 3백 개가 넘고, 자질구레한 손지갑에서 여행용 가방까지 20개 에다, 이방 저 방 시계들이 12개나 되는 거야. 그뿐이 아니야. 옷이며 책상이며 가구며, 아아……우리가 그렇게 낭비하고 물질 속에 갇혀 살았더라고.”

- 31 -

“2년 이상 것으로만 해도 임자 집이 운동장이 되어버렸을 걸? 자네 내외 밖에 나갔다 들어올 때마다 ‘이거 우리 집 맞어?’ 소리 깨나 했겠군.”

어쩌면 그렇게 잘 아느냐고 파안대소를 했다.

그때 곁에서 듣고만 있던 장 사장이 입을 열었다.

“법정 스님은 일 년이 지나도록 내 손길이 닿지 않는 물건은 필요한 사람과 나누며 살라는 무소유 말씀 아니야? 그래 그건 이해가 되는데 거뭐? 친구 접대. 그건 또 무슨 얘기야.?”

“응 그 말은 어느 날 회의 말미에 한 선배가 질문을 했어. 스님은 산에서 혼자 지내시니 자기 절제가 가능하시겠지만, 저희들은 가족들과 얽히고 설켜서 함께 사는데 속가에서 무소유 실천을 위한 ‘재물의 소유’는 어느 정도 지녀야 되는지를 여쭙더라고.”

“스님은 이런 비유법으로 말씀하시더구먼. 임자들처럼 먼 곳의 벗이 찾아왔을 때 내 형편에 맞는 내 기준에서 식사 대접하고, 잠자리 제공하고, 떠날 대 교통비 수준의 노잣돈을 챙겨줄 수 있는 정도, 사실 그건 불가에서 객승들이 만행을 왔을 때 해 오던 오랜 관습이지.”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 말씀이야. 소욕지족하면서 그래도 여유가 있으면 나머지 재물은 무연대비 하라 권하시더군.”

- 소욕지족 : 작은 것에 스스로 만족하라

- 무연대비 : 아무런 인연도 없는 모르는 사람들에게 순수한 마음으로 나누는 보시와 봉사를 뜻함.

■ 사람의 가치

스님께서 지난 50여 년간 쓰신 30여 권의 저사는 발표될 때마다 베스트셀러를 넘어 밀리언셀러가 된 책이 대부분이었다. 청소년 국어 교과서에 실린 글뿐만 아니라, 번역되어 소개된 나라도 한 두 나라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 인세만 해도 수십 억에 이를 것이다. 그 많은 재물은 어디에 다 쓰셨기에 열반하시기 직전 서울 삼성병원에서 퇴원비가 없어 곤혹을 치를 때 삼상그룹 홍라희 여사의 시주가 없었더라면 큰 낭패를 볼 뻔했다. 그 당시 이미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했지만 다시 한 번 홍여사님께, 스님의 제자로서 깊은 감사를 올린다.

- 32 -

돌아가시기 얼마 전 서울 본부장 윤 선배께서 스님께 여쭈었다.

“지난 50년간 책에서 얻은 인세를 생활이 어려운 전국의 학생들을 위해 평생 쓰신 것으로 짐작하는데 그 명단이라도 갖고 계신지요?”

“그것만은 묻지 마시게. 결코 알려고도 하지 말게. 그들에겐 그들만의 입장이 있으이.”

그래서 우리는 스님 자신이 숨어서 지은 ‘사람 농사’에 대해선 그저 짐작만 하지, 돌아가셨을 때 조문을 와서 스스로 밝힌 몇 명만 기억할 뿐. 아무도 모른다.

이미 앞에서도 거론했지만 몇천만 원의 시줏돈이 들어오고, 대원각이라는 재물이 들어오고, 당신 능력으로 생긴 인새가 들어오고. 그밖에 내가 모를 또 다른 물질도 있었겠지만, 도대체 그 많은 재물을 얼마나 철저하게 ‘무소유와 나눔’으로 분해해 버렸으면, 병원비가 없어 쩔쩔 매야 했고, 풋고추와 된장 수준으로 먹이를 삼고, 깁고 꿰맨 누더기 옷 몇 벌로 평생을 사셨을까. 지인들에게 보낸 편지도 문 바르다 남은 창호지 조각을 쓰셨고, 이젠 이름조차 생소한 스텔라 똥차를 도대체 얼마나 끌고 다니셨으며, 엄동설한에 얼음을 깨고 살았으면서도 없는 티를 보이거나 궁색스런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이신 일이 없다.

그토록 철저하게 사신 것도 모자라 혹여 당신 떠난 뒤에라도 당신 이름으로 남은 것이 있다면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일’에 써 달라고 유언까지 남기면서도 당신 공덕에 대해서는 단 한 줄도, 단 한 마디 귀띔도 없이 끝까지 침묵 속에서 그렇게 가셨기에 우리는 그를 ‘국민 스승’이라 했을 것이다.

중국 양나라 무제(武帝)가 어느 날 달마대사에게 물었다.

“나는 평생 부처님을 지극정성으로 섬겼고 전국의 사찰 건립이나 불사를 위해, 또 스님들께 해마다 시주하느라 국고가 바닥이 날 지경입니다. 과연 내 공덕은 얼마나 되겠소?”

달마대사께서 한 마디로 할을 토했다.

“무공덕(無功德)!”

지금 우리 모임은 20년이 넘었지만 매스컴 근처에도 못 가게하신 바람에 별로 아는 사람이 없어 신규회원 모집에 어려움이 많다. 아마 이 글도 당신

- 33 -

살아 생전에 발표했다면 처음 만났을 때와 당했던 문전축객 정도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의 차이일 뿐이다. 자선과 봉사의 후반생을 산 영화배우 오드리 햅번은 “한 손은 자신을 보살피고 다른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보살피라고 손이 두 개다”라는 말을 남겼다. 우리가 법정 스님처럼 살지는 못하더라도 매슬로우의 5단계 ‘자아실현의 욕구’즉 머리가 아닌 가슴의 삶을 살자고 종교와 직업에 관계 없이 누구나에게나 권하고 싶다.

남도에는 사람이 죽었을 때 꽃상여 위에서 리더가 부르는 이별가인 상쇠 소리가 있다.

어~어~어야리~어와라~.

산천초목 젊어가고 우리네 인생 늙어가네.

어~어~어야리~어와라~.

이팔 청춘 소년들아 백발 보고 웃지마라.

어~어~어야리~어와라~.

나도 어제 청춘인데 오늘날에 이리됐네.

어~어~어야리~어와라~.

팔십평생 초로인생. 바람처럼 나는 간다.

■ 에필로그, 되돌아 보다

그 옛날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어떤 미술실기대회에 나가 장원을 하는 바람에 ‘미술 인생’의 평생업이 정해져 버렸다. 그리고 고등학교 2학년 때 현몽 따라 찾아간 고창 선운사 참당암에서부터 나의 ‘불교 인생’ 또한 결정되었다. 그러다 보니 일찍이 10대 청소년 시절부터 미술이 불교를 만나고 있었다.

그리고 20대 후반, 수상족상의 법매를 거쳐 법정스님과 인연이 닿으면서 자기 철학의 확신과 신념, 나름의 해석과 사유의 세계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 30년, 법정 스님의 다독거림에 기대어 여기까지 외길로 걸어왔지만 겨우 이 정도의 쭉정이 농사밖에 짓지 못했다. 참으로 부끄러운 수확이다.

- 34 -

이제 남은 후반생 ‘불교미술 현대화, 불교 디자인 개척화’라는 화두를 그만 내려놓을 생각이다. 스승에게 배웠던 ‘무소유와 나눔의 삶’ 또한 내려놓을 생각이다. 이제 이순(耳順)에서 종심소욕으로 건너가는 징검다리 위에서 아직도 유유자적의 실체를 견인하지 못했다면 이 또한 헛 세상 살았던 게 아니겠는가.

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 대로, 그리고 행동해도 그것이 불화가 되고 보시가 되지 않는다면 나는 스승에게 무엇을 배웠단 말인가. 지금 이 글 이후부터는 모두를 내려놓고 더는 목매임 없이 그저 달빛 향기처럼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낙엽들이 간 자리에 겨울이 내리고 있다.

- 끝 -

- 35 -



반응형

'독서후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법륜 스님의 행복  (0) 2016.07.18
자전거 여행  (0) 2016.06.22
보통의 존재  (0) 2016.05.09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  (0) 2016.04.16
내 안에서 나를 만드는 것들  (0) 2016.0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