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륜 스님의 행복

2016. 7. 18. 16:10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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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 스님의 행복

■ 법륜 지음

0 2002년 라몬막사이사이상 수상 - 국제평화와 이해부문

0 2007년 민족화해상

0 2011년 포스코 청암상 - 봉사부문

0 저서 : 스님의 주례사, 엄마수업, 인생수업, 방황해도 괜찮아, 새로운 백년, 지금여기 깨어있기, 야단법석 등

■ 머리말 :

어떤 삶을 살고 있더라도 당신은 행복해질 권리가 있습니다.

제가 강연장에서 사람들에게 “지금 행복하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라고 대답하는 분이 거의 없습니다. 저마다 개인적인 고민과 상처, 관계 맺기에서 오는 갈등,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좌절과 스트레스,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괴로워합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온갖 일이 다 생깁니다. 대부분 내가 바라는 대로 되지 않

지요. 가령 사랑받고 싶은데 오히려 상처받고, 엄청나게 배려해 줬는데 상대

에게 뒤통수를 맞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저절로 일어나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신의 뜻도 아니고, 전생의 죄 때문도 아니고, 우연

히 일어난 일도 아니에요. 단지 내가 그 원인을 모를 뿐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 괴로움이 어디서 오는지 알게 된다면 문제해결의 길도 쉽

게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원인 가운데 많은 부분이 내려놓지 못하는 데서 비

롯됩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나에게 욕을 했어요. 그것은 그 사람이 나에게

쓰레기 봉지를 건넨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더러운 봉지를 움켜쥔

채 “그 사람이 나한테 욕을 했어” “그 사람이 나를 무시했어” 하면서 평생

그 쓰레기를 뒤지며 삽니다.

우리의 행복을 방해하는 원인은 다양합니다. 내 생각에 사로잡혀 스스로 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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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움을 확대 생산하는 것일 수도 있고, 채워지지 못한 욕구 탓일 수도 있고, 잘못 길들여진 습관 때문일 수도 있고, 어쩌면 공정하지 못한 사회 탓일 수도 있겠지요.

온전한 행복의 길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이제부터라도 내 삶의 주인이자 이 세상의 주인으로서 내 행복은 누가 가져다주는 게 아니라 내가 만든다는 생각으로 살면 좋겠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우주의 티끌같이 작은 존재이지만 이런 주인의식을 가질 때 나를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나 혼자만 성공하겠다거나 나만 잘살아보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이 세상에 필요한 사람, 세상에 기꺼이 쓰이는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자기도 행복하고 세상에도 보탬이 됩니다. 그때 행복은 꿈이 아닌 현실이 되고, 이것은 우리가 행복해질 권리를 실천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2016년 1월 새해를 시작하며, 법륜

1. 왜 내 삶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을까

■ 선택과 자기모순

우리는 누구나 그때그때 ‘이것이 좋은 일이다’ 하는 것을 선택하고 삽니다. 그런데 살고 나서 결과를 보면 그때 좋은 일이 나중까지 꼭 좋은 일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 행복하려고 결혼했는데 결혼 생활이 오히려 불행의 원인이 되고, 더 행복하려고 자식을 낳아 키웠는데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할 정도로 자식 때문에 괴로워합니다. 돈을 벌려고 사업을 시작했는데 벌기는커녕 빚만 떠안게 되는 일도 부지기수예요. 이렇듯 의도와 결과가 맞지 않아 후회하고 괴로워하는 일이 많습니다.

사람이 결혼했으면 그 도리에 맞게 살아야 하고, 스님이 수행자로 살겠다고 출가했으면 또 그 도리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인생의 목표를 분명히 하고 살아야 괴로움이 적어요. 그런데 우리는 세상살이가 고달프면 “나도 머리 깎고 출가하고 싶다”라고 말하고, 출가한 다음에는 “수행하는 게 너무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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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다”라며 오히려 세속의 삶을 부러워합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돈만 있으면 행복할 것 같다” “결혼만 하면 행복해질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돈을 벌어서 결혼을 해도 마냥 행복하지는 않습니다. 이번에는 “아이 하나만 낳으면”하고 바라고 막상 아이가 생기면 “애가 초등학교에만 들어가면”하고 말해요. 그걸로 끝나지 않습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니면 “애가 중학교만 가면”하고 말하고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면 또 “애가 대학에 갈 때까지만”하고 행복을 미뤄요. 그래서 아이가 대학에 합격하면 행복해지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취직만 하면” “결혼만 하면”“손자만 낳으면” 손자가 다 크면 등…….

평생 이렇게 행복의 조건만 바꿔가며 살다가 제대로 행복의 맛도 보지 못하고 죽는 게 우리 인생입니다.

부와 명예와 가족과 친구는 고통의 원인도 아니고 행복의 조건도 아닙니다. 우리가 어떤 때는 그것 때문에 행복하다고 했다가, 또 어떤 때는 그것 때문에 괴롭다고 하는 거예요. 이렇게 양 극단을 오락가락해서는 괴로움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습니다.

만약 결혼해서 가정이 있다면 이런저런 고민하지 말고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아내(남편)있겠다. 집 있겠다, 직장 있겠다, 천하에 부러운 게 없다. 내 인생이 최고다.’

현재의 자기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 삶이 자유롭고 행복해 집니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자기가 선택한대로 사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는 것은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것은 선택의 결과를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은 인연의 과보를 받아들이면 어떤 일이 일어나도 괴로워하거나 원망할 일은 없습니다.

■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면

남들은 꿈을 좇아 열심히 사는 것 같은데 왠지 나만 뒤처지는 기분이 들 때가 있습니다. 게다가 이루고 싶은 꿈,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도 현실적인 여건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다면 마음의 갈등이 더 크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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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적성은 과학에 맞으니까 나는 반드시 과학에 관련된 일을 해야 한다.’

이런 생각은 고정관념일 뿐입니다.

내 적성이 어떤 직업에만 딱 맞는다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무슨 일을 하며 살든 어떤 직업을 선택하든 최선을 다하다보면 그 일에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적성을 발휘하게 됩니다.

직업을 선택할 때 젊은이들에게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하라” “가슴 뛰는 일을 하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의 참뜻을 잘 새겨들어야 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돈과 명예, 안정만을 좇아 의사나 변호사, 공무원이 되려하지 말고 자기 적성에 맞는 일을 찾으라는 뜻입니다. 자기가 잘할 것 같고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잘나가는 직업’인지 아닌지를 너무 따지지 말고 당장 돈이 되지 않더라도 도전하라는 의미예요 세상에서 좋다고 평가되는 것이 나에게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무조건 세상 사람들이 좋다는 길로 따라가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밥 할 일이 있으면 밥하고, 빨래할 일이 있으면 빨래하고, 강의할 일이 있으면 강의하고, 농사지어야 한다면 농사짓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높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 길만이 내 길’이라며한 가지를 고집하지 않고 가리지 않는 자세야 말로 최상의 자유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수준에 이르지 못하기 때문에 다만 하나라도 붙들고 제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당장 하고 싶거나 좋아하는 일이 없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꿈을 찾는다고 현실을 등한시하고, 미래의 행복을 위해서 좋아하는 것만 찾아다니면 인생을 허황하게 살기 쉽습니다. 그렇다고 현재의 밥벌이에만 급급하다보면 미래에 희망이 없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이상을 좇을 것인가, 현실을 중요시할 것인가를 놓고 항상 갈등합니다. 그런데 이상과 현실은 모순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두 발은 현실에 딱 딛고 서서 두 눈은 이상을 향해서 한 발씩 한 발씩 나아가면 됩니다.

제가 30여 년 전에 처음으로 포교당을 열었습니다. 그때 복을 비는 기복신앙이 아니라 부처님의 바른 법을 가르치는 수행도량을 만들겠다고 서원(誓願)을 세웠습니다. 그래서 어느 절에 들어가 처음에는 제 나름의 뜻을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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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전법활동을 시도했는데, 그곳 신도들과 계속 갈등이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재를 지내고, 기도를 하고, 복을 비는 것이 자연스러운 신앙 활동이었는데, 제가 기복 신앙을 버리고 수행하라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보니 주변에서 주지스님께 “저러다 신도 다 떨어진다”라고 항의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 절에서 나와 조그만 법당을 내고 새롭게 포교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길거리에서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을 공부합시다’라는 광고 전단지부터 돌렸습니다.

- 처음에 2명이 참석했다가 한명이 떨어져 나가고 한명이 남았는데 그 한명을 데리고 계획된 3개월의 강의를 마쳤음

- 그 한 명이 지인 몇 사람을 데려오고, 또다시 전단지를 돌려서 몇 명이 더 참석하게 되었고 이들에게도 3개월의 강의를 함

- 법문을 하지 않는 날에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운영비용을 마련하는 방식으로 4년을 운영하다가 그만 둠

-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이 모여서 오늘이 되었음.

좋은 미래는 막연히 기다린다고 오는 게 아니에요. 연구하고 도전해 가는 과정에서 꿈꾸던 미래를 현실로 만들어 가는 겁니다.

■ 허위의식의 감옥에서 걸어 나와라

우리가 자기 자신에게 불만을 갖는 것은 뭔가 부족해서라기보다 스스로에 대한 기대가 너무 높기 때문입니다. 기대는 높은데 현실의 자기 모습은 거기에 미치지 못하니까 못마땅한 것이지요.

자기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바탕에는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거나 아니면 대단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기대가 깔려 있어요. 또 이런 자기의 자아상에 집착해서 자기를 우월하게 여겨요. 그런데 현실의 자기가 그만큼 따라주지 않으니 답답해하는 것이지요. 그러다보면 어느 때는 남을 탓하며 원망했다가, 어느 때는 자기 자신의 무능력을 한탄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현실에 있는 자기를 자의식이 원하는 수준까지 끌어 올려야만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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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자기 자신에 만족할 때까지 너무나 힘들고 어렵습니다. 행복은 현재의 자기 상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됩니다. 나는 원래 이 정도 되는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고, 또 긍정하면 되는 거예요.

넘어지면 넘어지는 것이 나고, 성질내면 성질내는 것이 나입니다. 그런데 나는 쉽게 넘어지거나 성질내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성질내는 자기를 보는 것이 괴로운 거예요. 내가 생각으로 그려놓은 자아상을 움켜쥐고 고집하니까 현실의 내가 못마땅한 겁니다. 나는 잘났다는 허위의식이 꽉 차 있으니까 현실의 자기가 부끄러운 거예요

현실의 나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에요. 다만 자아상을 현실의 나보다 크게 그려놓으면 내가 부족하게 느껴지고, 좀 작게 그려놓으면 대단하게 느껴지는 것뿐이에요.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나는 이런 사람이 돼야 한다.’

‘나는 실수하면 안 된다.’

‘나는 미워하면 안 된다.’

이런 식의 자기규정은 다 허상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려놓은 자아상이 강하면 현실의 나를 용납하지 못하고 자책하게 됩니다. 머릿속으로 그려놓은 자아상과 현실의 내가 별 차이가 없어야 정신적으로 건강합니다. 이런 사람은 어려운 문제에 부딪쳐도 쉽게 주저앉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은 관점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행복도가 크게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서 내 실제 능력이 100미터를 20초에 달리는데, ‘내가 100미터를 13초에 달릴 수 있는 사람이다’라고 자기를 과대평가하면 어떻게 될까요? 현실의 나는 13초에 못 달리잖아요. 그런데 아무리 노력해도 13초에 이르지 못하면 ‘나는 안 돼, 나는 문제야’하고 자책하게 됩니다.

자신감이 없거나 열등의식을 갖는 것은 과대망상에서 비롯됩니다. 즉 인생이 굉장한 것이라고 여기는 허위의식과 자만심이 자신을 괴롭게 합니다.

인간을 비롯해서 모든 존재는 본래 특별한 의미가 없습니다. 의미는 인간의 의식이 만들어낸 겁니다. 가치가 있다 없다. 선하다 악하다, 잘한다 못한다, 천당이다 지옥이다, 부처다 하늘이다. 하는 것은 다 인간의 의식이 만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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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누에가 제 입에서 나온 실로 고치를 만들고 그 속에 갇혀 살듯이 인간은 공연히 뭘 만들어 놓고 거기에 매달려 살고 있습니다.

‘저 사람은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이렇게 답답한 마음이 드는 것은 상대방도 내가 미리 그려놓은 그림과 맞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러니 내 기준에서 보면 상대방이 부족하고 잘못한 것 같아서 불만스럽지만 사실 그 기준 자체가 허상일 뿐입니다.

‘내 배우자는 이런 사람이어야 한다.’

‘내 아이는 이래야 한다.’

자기 나름대로 그림을 그려놓고 현실의 배우자와 아이들을 보니까 실망스러운 것이지요.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를 버려야 하듯이, 다른 사람에 대한 지나친 기대도 버리고 있는 그대로 보고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나도 별거 아니고, 남도 별거 아니에요. 상대방이 내 기준에 맞지 않아서 실망스럽다면 그건 상대방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눈높이 때문이에요.

혹시 걷다 넘어졌다면 툭툭 털고 일어나서 가던 길을 가되, 다시는 넘어지지 않도록 주의하면 됩니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서 조심할 뿐이지 넘어진 나를 문제삼지 마세요. 그리고 오늘부터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면 됩니다. 스스로에게 너그러워지는 거예요.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도 따듯해집니다.

이 세상 모든 존재는 부족한 것도 아니고 넘치는 것도 아니에요. 존재는 다만 존재일 뿐이에요.

■ 행복의 비결

세상살이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면 좋겠지만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지지 않는 게 현실입니다. ‘원하면 다 이루어진다’는 말은 환상이고 욕심일 뿐이에요 이때 원하는 것은 매달려 울고불고 하면서 불행하게 살 것인가, 아니면 그런 가운데서도 행복하게 살 것인가. 이것은 선택의 문제입니다.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인생이 괴로운가요?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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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롭지, 이런 생각이 없다면 이루어지면 좋고 안 이루어져도 그만이에요.

어떤 일이 이루어지든 이루어지지 않든 그 과정에서 이미 행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내가 원하는 대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되는 게 행복이고 자유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세상일은 내가 원한다고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객관적인 상황이 그렇게 될 때도 있고 그렇게 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따라서 외적인 조건과 상황에 따라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한 행복은 기껏해야 반쪽짜리에 불과 합니다. 그런데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기만을 바라는 마음을 움켜쥐고 있으니까 당연히 불행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생기는 거예요.

행복의 기준을 미리 정해 놓고 그 길만 고집한다면 도리어 행복에서 멀어집니다. 반대로 내가 기대한 대로 돼야 한다는 고집을 내려놓고 인연따라 지혜롭게 대처할 때 행복도 찾아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움켜쥔 마음은 그대로 두고 자꾸 특별한 행복의 비결을 요구하는데, 왜 그럴까요? 자기가 세워둔 기대는 허물지 않고 그 위에 무언가를 더 쌓고 얻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해서 얻고 싶고 저것도 해서 얻고 싶고, 이렇게 하면 빨리 얻을 것 같고 저렇게 하면 더 빨리 얻을 것 같기 때문이에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놓기 싫은 마음을 그냥 움켜쥔 채 당장의 뜨거움만 피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놓아라”라고 말하면 “현실성이 없다”하고, “왼손으로 옮겨 쥐어라”라고 가르쳐 주면 “참 좋은 방법이다”라고 말하지만 결국 다시 뜨거워집니다.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옮기는 것은 그저 하나의 임시처방일 뿐입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뜨거운 줄 알면 그냥 놓아버려야 합니다. 물론 이런 이치를 깨달았다 하더라도 그동안 살아온 습관이 남아 있기 때문에 순간순간 움켜쥐고 괴로워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내려놓으면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괴로움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집착할 때만 잠시 괴로울 뿐 그 괴로움은 지속되지 않아요. 그는 이미 이전과는 다른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 욕심은 내려놓고 원은 세운다

불교에서는 보통 ‘욕심을 내려놓아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을 잘못 이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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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현실의 괴로움을 회피하는 것을 내려놓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려놓는 것과 현실회피는 어떻게 다를까요? 가장 큰 차이점은 결과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내려놓으면 같은 문제가 재발하지 않지만 현실회피는 재발합니다. 예를 들어 애인과 헤어져서 속상한 사람이 현실의 괴로움을 잊으려고 저녁마다 술을 마시면 문제가 해결되나요? 아니에요. 아침에 술 깨면 다시 괴롭습니다. 그러니 “아이고 그동안 저와 함께 있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하고 집착을 내려놓을 수 있다면 더는 괴롭지 않습니다. 즉 놓아버리면 문제가 해결되고, 회피하면 같은 문제가 계속 되풀이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내려놓아서 문제가 해결된 것 같다가도 이따금 다시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그것은 마음이 다시 그 문제를 붙잡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이미 내려놓았기 때문에 문제가 일어나더라도 전보다 다소 약하게 나타나서 능히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반대로 회피하는 것은 단지 참는 것이기 때문에 갈수록 더 강도가 세게 나타납니다. 한 번 참고, 두 번 참고, 세 번 참다가 나중에는 결국 터지게 되지요.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면 단순히 회피하기 보다는 정면으로 맞닥뜨려서 해결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일반적으로 네 가지 경우의 수가 있어요.

1. 하고 싶은데 해도 되는 상황 : 하면 됨

2. 하고 싶은데 못 하는 상황 : 아무리 하고 싶어도 마음을 내려놓아야 함

3. 하기 싫은데 안 해도 되는 상황 : 안 하면 그만

4. 하기 싫은데 해야 하는 상황 : 하기 싫은 마음을 내려놓고 해야 함

우리 인생의 절반 정도는 자기 좋을 대로 하고 살 수 있음(1.3번)

이럴 때 하고 싶은 마음(갈애), 하기 싫은 마음(혐오)을 내려놓는 것을 ‘욕심을 버린다’ ‘마음을 비운다’고 합니다.

‘대통령이 되겠다’ ‘부자가 되겠다’하는 마음 자체가 욕심은 아닙니다. 욕심이라는 것은 원하는 것이 크냐 작냐의 문제가 아니에요. 하나의 사실을 두고 모순된 태도를 보일 때 그걸 욕심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돈을 빌려놓고 갚기는 싫고, 저축은 안 해놓고 목돈은 찾고 싶고, 공부는 안 하고 좋은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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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에 가고 싶은 게 바로 욕심입니다. 이치로는 맞지 않은데 내가 바라면 바라는 대로 이루고 싶은 헛된 생각을 욕심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자기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괴로워합니다. 그 괴로움의 밑바닥에는 욕심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욕심을 내려놓고 대신에 원(願)을 세우라고 합니다.

노력은 조금하고 결과는 많이 얻으려고 욕심을 부리다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채워지지 않는 마음 때문에 괴로운 거예요. 그러니 욕심은 목표를 달성하는데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장애가 됩니다.

반면 원을 세운 사람은 바라는 바를 이루려고 노력은 하되 실패해도 낙담하거나 괴로워하지 않아요. 안 되면 다름 장법을 찾아 다시 도전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욕심을 버리라는 뜻은 무조건 부자가 되지 말라. 출세하지 말라는 게 아니에요. 만약 정말로 원하는 것이 있다면 욕심으로 하지 말고 원을 세워 성취해보라는 것입니다. 원을 세우고 그 원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할 때 삶에 재미가 붙고 활력이 생깁니다. 그러면 바라는 게 이루어질 가능성도 높아집니다.

■ 인연 과보에도 시차가 있다

어느 날 한 부자가 부처님께 물었습니다.

“부처님, 브라만들이 말하길 ‘나쁜 짓을 많이 했어도 브라만들이 제사를 잘 지내고 복을 빌어주면 죄가 없어져 하늘나라에 태어난다’고 합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 돌을 집어 연못에 던지시며 제자에게 되물었어요. “만약에 브라만들이 ‘돌아, 물위로 떠라’하고 빌어준다면 저 돌이 물 위로 뜨겠느냐?”

부처님의 물음에 제자는 자기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깨닫습니다. 무거운 돌이 물에 가라앉고 가벼운 기름이 물 위에 뜨듯이, 나쁜 인연을 지으면 나쁜 과보가 일어나고 좋은 인연을 지으면 좋은 과보를 받게 되는 것은 자연의 원리이고 이치이지요. 불교에서는 이것을 인과법이라고 합니다.

인연과보는 즉시 나타나는 것도 있고, 열흘 후에 나타나는 것도 있고, 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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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나타나는 것도 있습니다. 어떤 것은 내 대에 안 나타나고 내 후손 대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부모나 더 윗대조상들이 지은 과보를 받는 경우도 있어요.

이와 같이 인연 과보는 시차를 두고 일어납니다. 이것은 자연의 이치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 1년 중 해가 가장 긴 날은 하지로 6월 21일 경이고, 가장 더운 날 그보다 한 달 정도 뒤다. 그리고 1년 중 해가 가장 짧은 날은 동지로 12월 22일 경이며, 가장 추운 날은 그보다 한 달 정도 뒤이다.

그것은 지구가 더워지거나 식는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연이 지어지고 과보를 받기까지 시차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좋은 일을 했는데도 나쁜 과보가 온다면 그것은 전에 나쁜 짓을 한 과보가 지금 오는 것이고, 지금 좋은 일을 한 인연의 과보는 아직 때가 멀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시작하자마자 바로 좋아지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이에요. 모든 기대를 내려놓고 100일을 계속 수행 정진한다면 자기에 대해서 조금 알게 됩니다.

‘내가 조금 고집이 있는 사람이구나!’

‘내가 짜증이 꽤 많은 사람이구나!’

‘내가 끈기가 참 없는 사람이구나!’

‘내가 잔소리가 심한 사람이구나!’

‘내가 분별심이 아주 많은 사람이구나!’

이렇게 자신에 대해 조금 알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하지 말라고 해도 스스로 기도를 하게 되요. 한 1,000일 쯤 기도를 하면 다른 사람들도 그 변화를 알아보고 “요즘 너 좀 변했다”하고 말합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원을 세운 날은 동지와 같고, 100일 쯤 지나서 내 카르마를 아는 때는 입춘과 같고 3년 정도 1,000일 기도를 하고 나면 꽃피고 움트는 춘삼월 과 같아 주위에서 “변한 것 같다”고 얘기하기 시작해요. 꽃 피는 춘삼월이 오기 전까지 봄은 이미 왔으나 사람들이 봄이 왔다고 느끼지 못하듯이 아무리 수행해도 3년이 되기 전까지는 자기 생각에는 변한 것 같은데 주위에서는 인정을 잘 안 해줍니다.

내가 나쁜 인연을 지었을 때, 나쁜 과보가 금방 안 나타난다고 좋아하지 마세요. 그게 다 빚으로 남아 있다가 결국은 돌아오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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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인연을 짓고 과보가 일어나는데 시차가 있다는 것을 알아서 좋은 일을 한다고 ‘금방 좋은 일이 일어날 것이다’고 기대하지 말고, 어려움이 닥쳐도 ‘내가 과거에 알게 모르게 지은 인연의 과보를 다 받아내야 되겠다’고 다짐해야 합니다.

이처럼 어떤 일을 시작할 때는 ‘공덕을 쌓겠다’고 생각하기보다 ‘빚을 갚는다’는 마음으로 시작하는 게 좋습니다. 그러면 살다가 온갖 어려움이 닥쳐도 ‘내가 빚을 많이 졌구나’ ‘내가 지금 빚을 열심히 갚고 있구나’라는 생각에 어려움을 쉽게 넘어갈 수 있어요.

이런 마음으로 좋은 일을 열심히 하되 결과에 연연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면 나중에는 조금만 노력해도 결과가 바로 나와요. 그게 전부 공짜로 생긴 게 아니고, 그동안 쌓아온 노력의 결과물로 나타나는 겁니다.

2. 감정은 만들어진 습관

■ 좋고 싫음의 감정에서 자유롭기

우리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 (불교에서 말하는 육근六根으로 눈, 귀, 코, 혀, 몸, 뜻을 가리킴)으로 사물을 접하면서 순간순간 기쁘다, 슬프다, 두렵다, 외롭다 하는 갖가지 감정을 경험합니다. 좋아하고 사랑할 때는 너무 기뻐서 천국을 경험하고, 미워하고 원망할 때는 너무 괴로워 지옥 속에 허우적대지요.

그렇다면 우리를 기쁘게도 하고 괴롭게도 하는 감정은 어떻게 일어나는 결까요?

감정은 부싯돌이 부딪치면 불꽃이 피어나듯 순간적으로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길을 가다가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 아무리 낯선 사람이라도 순간 마음이 동요합니다. 그리고 이내 슬퍼집니다. 그게 만약 불의(不義)의 결과하면 분노를 느끼겠지요.

이렇듯 감정은 외부 자극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기 때문에 본래 타고난 것이고, 고유의 실체가 있어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꽃을 보고 기분이 좋아지는 때를 생각해봅시다. 지금 내가 장미 한 송이를 보며 ‘참 예쁘다’는 생각이 들면 이내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리고 그 좋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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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에는 아무런 부작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꽃이 나를 좋아해주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꽃이 참 예쁘구나!’하는 마음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사람을 좋아할 때 마음이 두근거리는 것은 상대가 나를 좋아할까 아닐까를 분별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좋아하듯이 저 사람도 날 좋아할까?’

‘어떻게 하면 저 사람도 나를 좋아하게 만들까?’

이렇게 요구하기 때문에 머릿속이 혼란스럽고 심장이 뛰는 겁니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것과 그가 나를 좋아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예요. 그러니 앞으로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가슴이 뛸 때는 ‘내가 지금 이 사람을 좋아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기보다 ‘지금 저 사람이 나를 좋아하길 바라고 있구나’라고 자신의 감정을 바로 봐야 합니다.

결국 똑같은 빛깔인데 내가 어떤 색안경을 쓰고 보느냐에 따라서 내 눈에 다른 색깔로 보이는 것뿐이에요. 그래서 좋고 싫음이 나로부터 비롯된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 느낌이 나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정확히 안다면 좋다 싫다 시비할 게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감정이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그 감정에 빠지지는 않게 됩니다.

나와 사고방식과 관점이 다른 사람이 있을 때 굳이 그 사람에게 다가가서 사귀려고 할 필요도 없고 그 사람을 회피하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또 상대방을 내 마음에 맞게 고치려고도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면 됩니다.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카르마에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나의 관점에서 보면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들이 그 사람 편에서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 됩니다. 따라서 어차피 만날 수밖에 없는 인연이라면 상대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나를 편안하게 하는 길입니다.

‘내 성격도 못 고치는데 내가 어떻게 남의 성격을 고치겠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으면 상대를 인정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 나와 맞지 않는 사람과도 같이 일할 수 있고 같이 살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좋아하면 반드시 가져야 되고 싫어하면 반드시 버려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주어진 객관적 상황은 좋아지는데 가질 수 없고, 싫어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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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릴 수 없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는 겁니다. 그럴 때 하루하루가 지옥처럼 느껴집니다.

따라서 상대가 좋지만 헤어질 수밖에 없고 싫지만 함께 있을 수밖에 없을 때는 그 좋아하고 싫어함에 내가 속박 당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조금 더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 화, 상대와는 무관한 내 안의 도화선

감정 가운데서도 화는 스트레스와 후회라는 후유증을 남깁니다. 화를 내고나면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하고, 상대방에 상처를 주었다는 자책감에 후회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왜 화를 참지 못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화를 벌컥 내고 난 다음에 흔히 하는 말이 있지요.

“나도 모르게 그랬다.”

“습관적으로 그랬다.”

“무의식적으로 그랬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실제로 감정이란 무의식에서 나오는 습관화된 반응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화가 난다는 건 누구의 잘못이 아니라 내가 옳고 네가 틀렸다는 내 분별심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사건건 옳고 그름을 가르려는 습관이 내 안의 도화선에 자꾸 불을 댕기는 겁니다. 화낼 일이 아닌데 내 기준에 맞지 않으니까 화가 나는 것뿐이에요. 나를 세상의 중심에 놓고 그 주변 상황과 사람들을 판단하니까 내 기준에 맞지 않을 때 화가 올라오는 겁니다.

사실 잘잘못을 따질 수 있는 절대적인 잣대 같은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옳고 그름은 본래 없습니다. 나를 기준으로 삼으니 상대가 잘못한 게 되는 겁니다. 그래놓고 객관적이라고 주장해버리면 자기를 절대화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고집이 세다’ ‘독불장군이다’ ‘꽉 막혔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요.

화가 날 만한 절대적인 상황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화가 일어날 요인이 있고, 거기에 내가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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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세상엔 별일이 다 일어나고 별의별 사람이 다 있어요. 그런데 내가 원하는 상대만 골라 만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정말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내 기준을 상대에게 내세우기보다 내 업식에서 일어나는 분별하는 마음 자체를 순간순간 알아차리고 내려놓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상황이든, 어떤 사람을 만나든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서 생기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습니다.

■ 참지도 성내지도 않는 제3의 길

우리는 화가 날 때 보통 두 가지의 행동을 합니다. 즉 화를 내거나 참지요. 그런데 화가 일어나면 참느냐, 내느냐 두 길밖에 없는 것 같지만 화를 내지도 참지도 않는 제3의 방법이 있습니다.

어떤 분이 화를 다스리는 방법을 알려달라며 이렇게 물었습니다.

“저는 화가 나면 말을 하지 않고 속으로 삭이는 편입니다. 말을 하자니 사안이 너무 사소한 것 같고, 안 하자니 화가 나요. 화가 날 때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는 것이 나을까요? 아니면 지금처럼 속으로 삭이는 것이 나을까요?”

화가 난다고 화를 다 내어버리면 상대도 덩달아 화를 내기 때문에 화를 더 확대 생산하게 되니 이 방법은 제일 하수입니다. 반대로 화를 참는 것은 갈등을 확대 생산하지는 않지만 참으면 자기가 스트레스를 받아 병이 드니 이 역시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참는 것이 누적되면 화병이 생깁니다. 화병이 생기면 목이 뻣뻣해지고 뒷골이 아프다가, 조금 더 심해지면 눈이 침침해지고 머리도 아픕니다.

세상에서는 화를 참는 사람은 화를 안 내니까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행복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예요. 행복은 괴롭지 않은 것인데, 화를 참으면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에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니 결코 행복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부처님의 말씀이다.

“우둔한 자는 욕과 비방을 늘어놓고서 자기가 이겼다고 한다. 그러나 진정한 승리는 올바른 인내를 아는 이의 것이다. 성내는 자에게 되받아 성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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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은 어리석은 짓임을 알아야 한다. 상대의 감정에 말려드니 상대에게 진 것이고, 자기 분을 못 이기니 자기 자신에게도 진 것이다. 결국 이중으로 패배한 셈이다.”

화가 일어나는 그 근본을 살펴 알게 되면 아예 화가 일어나지 않는 단계에 이를 수 있습니다. ‘너 때문에 화가 난다’는 생각이 들 때 ‘정말 그럴까?’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는 거예요.

‘아이가 저런다고 내가 왜 화가 날까?’

‘남편(아내)이 저런다고 내가 왜 괴로울까?’

‘상사가 저런다고 내가 왜 스트레스를 받을까?’

이렇게 자기감정의 근원에 문제 제기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감정에 휩쓸리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화낼 일이 아니란 것 알 수 있어요. 화를 돋우는 건 아이도, 배우자도, 직장 상사도 아니고, 바로 나 자신 때문입니다. 내 의견을, 내 취향을, 내 생각을 고집하기 때문에 답답하고 화가 나고 괴롭고 슬픈 것이지요.

이것을 깊이 관찰해서 화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면 비로소 어떤 일에도 화가 일어나지 않는 단계로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기감정을 절대적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제로 감정이란 습관에 의해 형성된 결과물일 뿐이에요. 결국 습관이 나를 끌고 가는 거나 다름없어요. 습관이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는 겁니다.

그런데 습관적으로 화가 일어나더라도 호흡을 가다듬고 ‘너 또 미치는구나!’ ‘너 또 너만 옳다고 성질부리는구나!’하고 알아차릴 수 있다면 감정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부싯돌이 불꽃을 일으켜도 종이를 갖다 대지 않으면 불꽃은 이내 사라지고 말듯이, 화도 마찬가지입니다.

■ 상대의 말에 되받아치지 못해 억울하다면

누군가에게 부당하게 욕을 먹거나 어떤 일을 하다가 억울하게 누명을 썼는데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섰다면 나중에 이런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때 내가 이렇게 되받아쳐야 했는데.’

당할 때는 적절한 말이 생각나지 않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할 말이 떠오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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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려는 생각을 버리고, 이기려고 하지 않는 게 가장 자유로워지는 길입니다. 이기는 방법을 찾아서 대응하다 보면 남의 가슴에 못을 박게 됩니다. 내 가슴에 못이 박히면 내가 깨닫고 뉘우치면 되는데, 남의 가슴에 못을 박는 말을 하면 내가 참회하고 뉘우친다고 소멸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진짜 현명한 사람은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것보다 차라리 상처 받는 게 더 낫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야 괴로움에서 더 빨리 벗어날 수 있으니까요.

또 내가 누군가를 미워하면 스스로 괴로워질 뿐만 아니라 내가 상대방 만나기를 꺼려하니까 스스로 그 사람을 만날 자유를 잃어버리는 겁니다. 미움이라는 것은 상대를 만나기 싫다는 말이기 때문에 ‘나는 그곳에 가지 않겠으니 너도 이곳에 오지 마라’는 출입금지와 같아요.

결국 미워하는 마음을 갖지 않아야 이 세상 어디라도 자유롭게 갈 수 있고, 누구라도 편하게 만날 수 있는데, 우리는 우리자신을 자꾸 감옥으로 몰아넣습니다. 따라서 자유롭게 살고 싶다면 상대를 이기려는 생각, 미운 상대에게 적절한 말로 되받아치고 싶다는 생각 자체를 버려야 합니다.

말로 이기는 걸 너무 좋아하지 마세요. 또 말로 지는 것을 패배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기려는 생각이 있기 때문에 패배도 있습니다. 이기려는 생각이 없으면 패배할 일도 없습니다.

■ 과거의 상처를 인생의 자산으로 만드는 법

우리는 의외로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를 많이 받습니다. 그러나 상처를 받을 일이 아닌데 상처로 기억하거나 설령 정말로 상처받을 일이 있었더라도 이미 지나간 일인데 붙잡고 놓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에요. 예를 들어 부모에게 상처를 받았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동안 부모가 베풀어준 은혜는 당연하게 생각하고 “오빠는 대학에 보내주고, 나는 안 보내줬다” “형제가 싸우면 늘 나만 혼냈다”와 같은 과거의 기억을 꼬집어내서 부모를 원망합니다. 얘기를 들어보면 상처를 준 사람은 별로 없는데 상처받은 사람은 부지기수로 많아요.

우리의 괴로움은 주로 과거에 대한 기억에서 비롯됩니다. 옛날에 누군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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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서운했던 일, 누구한테 해코지 당했던 일을 떠올리면서 괴로워합니다. 이미 지나간 일들을 사진이라도 찍어둔 듯 마음속에 고이 간직한 채 그 잔영에 집착하고 매달려서 스스로 고통을 확대하고 재생산하는 것이지요. 스스로를 어둠의 동굴에 가두는 꼴입니다.

과거의 나쁜 기억을 놓지 않고 마음속 깊은 곳에 품고 있다가 시시때때로 되새기며 괴로워하는 것은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것과도 같아요. 우리가 옛날 일을 떠올리면 우리 뇌는 그 일이 실제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착각합니다. 그래서 좋은 일을 떠올리면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나오지만, 괴롭고 슬펐던 일을 떠올릴 때는 눈물이 주르륵 흘리기도 하고, 가슴이 답답해지면서 숨이 꽉 막히기도 하지요.

이렇듯 우리의 감정은 무의식적으로 반응을 일으키기 때문에 지나간 일들을 상처로 간직하면 현재를 사는 게 고통스러워져요. 과거는 내 생각 속에 있을 뿐이지, 지금 이 순간 실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습관처럼 과거의 기억에 빠져든다면 녹화방송만 찾아서 보는 것과 같아요.

결국 모든 상처는 그 기억을 붙들고 있는 나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괴로운 것은 누가 상처를 줘서가 아니에요. 상처받을 일이 아닌데 상처받고 그 상처를 내면에 품고 있다가 때때로 꺼내 보면서 괴로워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나를 괴롭히는 사람, 고통에 빠뜨리는 사람, 불안하게 하는 사람들이 따로 없습니다. 내가 과거의 나쁜 기억을 놓지 않고 마음속 깊은 곳에 품고 있어서 생긴 문제예요. 그것을 자각하는데서 상처가 치유되기 시작합니다.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다 행복할 수 있습니다. 어릴 때 어떤 경험을 했든 그것은 다 지나간 과거의 일입니다. 과거의 영상만 틀지 않으면 나는 어떤 순간에도 행복할 수 있어요. 살아 있는 지금, 숨이 들어오고 숨이 나가는 이 순간만이 현재입니다. 현재에 집중하면 괴로움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현재에 집중할 수 있다면 과거에 겪었던 모든 일은 인생의 경험이 되어 큰 자산으로 남게 됩니다. 설령 사업에 실패했든, 실연을 당했든,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았든 그 모든 것들은 내 인생을 이해하는 소중한 경험으로 삼는다면 앞으로 어떤 일이 닥치든 지혜롭게 헤쳐나갈 수 있는 밑거름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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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회는 지나간 실수에 매달리는 것

‘내가 그때 그런 실수만 하지 않았더라도.’

‘내가 그때 그렇게만 했더라면.’

누군가 이렇게 지나간 일들을 후회하는 얘기를 한다면 자기반성을 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사람 말에는 지금 행복하지 않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후회할 때는 과거에 저지른 잘못에 대한 반성도 있지만 자신의 실수를 자신이 용납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괴로움이 더 큽니다. 그래서 후회할 때의 자기 마음 상태를 잘 살펴볼 필요가 있어요.

지나간 잘못을 후회하며 자책하는 것은 어리석은 겁니다. 후회한다는 건 실수를 저지른 자기를 미워하고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스스로를 미워하는 마음이에요. 후회는 자기에 대한 또다른 학대입니다. ‘나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아야 할 훌륭한 인간인데, 내가 그런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용납 할 수 없는 거예요. 이렇게 ‘잘난 나’라는 게 마음속에 있기 때문에 후회를 하는 겁니다.

남을 용서 못하는 게 미움이라면 자기를 용서하지 못하는 게 후회입니다. 후회는 반성이 아닙니다. 후회는 ‘내가 잘났다’하는 것을 움켜쥐고 있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나처럼 잘난 인간이 어떻게 바보처럼 그때 그걸 못했을까’ 이게 후회예요. 그러나 이제라도 그때 그런 수준이 나라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됩니다.

후회에 빠져 있으면 또다른 집착이 됩니다. 정말 반성을 했다면 ‘아, 그때 내가 잘못했구나’하고 깨달았을 때 앞으로 다시는 그런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고 넘어가면 됩니다. 넘어지면 넘어진 채 울고만 있는 게 아니라 벌떡 일어나서 ‘다시는 넘어지지 말아야지’하고 결심하는 것이지요. 이것을 참회라고 합니다. 즉 ‘참(慘)이란 지나간 허물을 뉘우침이요. 회(悔)란 다시는 허물을 짓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것입니다.

■ 불안은 미래에 대한 집착에서 온다

우리는 되돌릴 수 없는 과거를 붙잡고 괴로워할 뿐만 아니라 아직 오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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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은 미래를 미리 걱정하고 불안해합니다. 미래는 오지 않았고 실현되지 않은 시간이에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알 수 없는 미래 때문에 걱정하고 두려워합니다.

‘시험에서 떨어지면 어쩌나?’

‘병이 들면 어쩌나?’

‘자식들 다 키우고 나면 노후를 어떻게 보내나?’

이런저런 걱정에서 잠시도 떠나지를 못합니다.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를 붙들고 괴로워하는 것도 모자라 미래의 일을 염려해 안절부절못합니다.

자연계를 한 번 살펴보세요. 지구가 태양을 돌 때 무엇을 목표로 두고 돌까요? 몇날 며칠도 아니고 몇 십 년도 몇 백 년도 아니고, 얼마나 오랫동안 돌았을까요? 무슨 재미로, 무슨 목적으로 돌까요? 지구는 그냥 돕니다. 지구상에 있는 생물들도 보세요. 식물은 싹을 틔우고 자라고 꽃피우고 죽지 않습니까? 무슨 목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을까요. 다람쥐나 토끼는 무슨 목적으로 그렇게 열심히 산을 뛰어 다닐까요? 땅 속에 돌아다니는 두더지는 무슨 목적으로 그렇게 땅굴을 파고 있을까요? 그냥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예요. 풀이 한 포기 자라고, 토끼 한 마리가 나듯이 사람도 태어나서 자연의 일부로 살다 떠나는 겁니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산다고 해서 인간의 존엄성을 떨어뜨리는 것도, 자연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도 아니에요. 그러니 인생에 목표가 없다고 해서 불안해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자꾸 ‘인생에는 목표가 있어야 해’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인생이 괴로운 겁니다. 인생에 의미를 너무 많이 부여하기 때문에 불안하고 초조하고 괴로운 거예요.

이렇듯 불안한 마음은 80~90퍼센트 이상이 미래에 대한 자기 생각에서 옵니다. 미래에 대한 초조, 불안감을 잠재우려면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한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되묻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오늘만 생각하고 살아요? 내일도 생각하고 모래도 생각하고 1년 후, 10년 후도 생각해야지요.”

그렇게 미리준비하며 사는 건 좋은데, 그 생각에 너무 집착하면 머릿속에서는 지금 그런 상황을 경험하는 것과 동일한 정신 작용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마음이 불안해지고 초조해지는 거예요. 이것은 마음에서 오는 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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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준비든, 인생설계든, 건강문제든 모든 불안은 미래에 대한 집착 때문에 생깁니다. 미래에 일어날 일을 걱정하지 말고 지금 여기서 일어나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 보세요. 그리고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다 괜찮다고 자기 암시를 해보세요. 그러면 불안한 마음이 조금씩 가라앉게 됩니다.

우리는 늘 현재를 놓치며 삽니다. 과거를 생각하다 현재를 놓치고, 미래를 걱정하느라 또 현재를 놓칩니다. 행복이란 어디서 뚝 떨어져 내게 오는 게 아이에요. 지금 이 시간에 집중해서 최선을 다할 때, 그 하루하루가 쌓여 행복한 미래가 되는 겁니다.

■ 열등감과 우월감은 뿌리가 같다

우리는 보통 타인과 비교하면서 자신을 판단합니다. 다른 사람보다 조건이 좋으면 우월감을 느끼고, 다른 사람보다 조건이 나쁘면 열등감을 느낍니다.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와 비교하느냐 하는 데서 일어나는 내 마음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 있는 이 물병이 커요? 작아요?

“작은 것 같아요.”

“물병을 책상과 비교하면 커요? 작아요?”

“작아요.”

“물병을 손목시계와 비교하면 커요? 작아요?”

“커요.”

“그럼 이 물병 자체만 놓고 보면 커요? 작아요?”

“보통 아닌가요?”

우리는 사물을 비교해서 인식하기 때문에 어떤 때는 크다고 인식하고, 어떤 작다고 인식합니다. 그러니 크니 작니, 새것이니 헌것이니, 잘났느니 못났느니, 늙었느니 젊었느니, 길다느니 짧다느니 하는 것은 존재의 객관적 실재 같지만 사실은 인식의 문제입니다.

얼굴 크기도 누구와 비교하는냐에 따라 인식이 달라지는 것이지, 어디서부터 큰 얼굴이고 어디서부터 작은 얼굴인지 정해진 게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어릴 때 철없는 아이들에게 “네 얼굴 참 넓적하고 크다”라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아직까지 깊은 상처로 남아서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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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등감이나 우월감은 모두 삶의 기준을 타인에 두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내 삶은 내가 산다는 주인의식 없이, 내 삶을 남과 비교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심리적 현상입니다. 그래서 열등감과 우월감은 뿌리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볼 때 소위 예쁘고 잘났다는 배우들을 만나보면 오히려 얼굴에 대한 열등감이 더 큽니다. 왜냐하면 열등감이 자기 자신에 대한 과대평가와 환상, 높은 기대감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열등한 존재도 우월한 존재도 없습니다. 존재는 서로 다를 뿐이에요.

조선시대 과거시험에서는 오직 문장을 잘 쓰는 것으로 점수를 매겼어요. 그런데 현대사회에서는 노래 잘하고, 춤 잘 추는 것도 굉장한 능력으로 인정받습니다. 50년 전에 태어났으면 공 잘 던지는 것이 아무 쓸모가 없었겠지만 지금은 야구 선수로 활약해서 엄청나게 큰돈을 법니다. 이처럼 능력이라는 것도 기대에 따라 무엇을 평가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겁니다.

열등의식이 허상임을 알아야 열등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가령 신체장애는 열등한 것이 아니라 불편한 것일 뿐이에요. 팔이 하나 없는 것은 다만 불편할 뿐이라는 생각을 하며 의족을 해서 편리한 방향으로 극복하면 됩니다.

존재는 다만 다를 뿐이라는 것을 알아서 주어진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열등감과 우월감을 넘어 행복으로 가는 첫걸음이에요.

앞으로 ‘나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도대체 뭔가?’하고 지괴감이 들 때는 ‘나는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된다’라고 바꿔 생각해 보세요 자기가 가진 조건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때 일도 더 잘 풀리고, 자기 삶도 더 당당하게 살 수 있습니다.

■ 마음은 생주이멸(生住異滅)

우리 몸은 원소의 물질적 결합으로 조건에 다라 변해 갑니다. 일순간도 머무르지 않고 낡은 세포는 소멸하고, 그 빈자리는 새로 생성된 세포로 메워져요. 우리는 항상 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생성소멸을 되풀이 하면서 끊임없이 변해갑니다. 이런 우리 몸의 변화를 ‘생로병사’라고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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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가지 생각이 일어나면 계속 머물러 있을 것 같지만 이내 흩어지고 사라져 버려요. 이것을 ‘생주이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상대의 마음이 한결같기를 바라지만 사실은 불가능한 기대입니다. ‘죽을 때까지 서로 사랑하자’고 아무리 굳게 약속을 해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그 마음은 변하게 마련이에요. 이게 마음의 성질입니다. 그런데 이런 성질을 알지 못한 채 마음이 변하지 않기를 바라니까 그렇게 되지 않으면 괴로워지는 거예요.

마음은 매 순간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집니다. 그래서 ‘이것이 마음이다’하고 내 놓을 실체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기쁘다, 슬프다, 두렵다, 외롭다 하는 갖가지 마음에 집착해서 걱정과 근심을 합니다.

마음의 성질은 원래 꾸준하지 않습니다. 금방 좋았다가 금방 싫어지고, 금방 천생연분이었다가 금방 철천지원수가 되고, 늘 그렇게 왔다갔다 죽 끓듯이 변하는 게 마음입니다.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를 떠나 마음의 성질 자체가 그렇습니다. 똥 누러 갈 때의 마음과 똥 누고 올 때의 마음이 다르고, 돈 빌릴 때 마음과 돈 갚을 때 마음이 다르고, 결혼하자고 따라다닐 때 마음과 결혼한 뒤의 마음이 다릅니다.

행복으로 가는 길은 우리 마음이 바뀌지 않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마음이 바뀌는 줄 알고 그 변화에 구애받지 않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좋아도 너무 들뜨지 않고, 싫어도 너무 가라앉지 않고, 평온한 삶이 됩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일관되게 지속적으로 유지하라는 것은 아무리 강요해도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이 변하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먼저 받아들이고, 그래도 그 사람과 계속 살지 말지 선택하는 길밖에 없어요.

■ 만들어진 습관은 고칠 수 있다

소나무가 절벽 위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남기 까지는 소나무의 성질과 주변 상황과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이 있었을 겁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예요. 지금 우리의 습관과 행동은 오래전부터 주변 환경과의 상호작용으로 형성되어 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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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 습관이라는 것은 쉽게 바뀌지 않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종의 관성이지요. 그런데도 금방 바꾸려고 하니까 잘 안됩니다. 그러면 “나는 문제다”라고 자책하기 쉽습니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의 성격이 빨리 안 바뀌어도 답답해하고 버럭 화를 내기도 합니다.

성격은 습관이고 습관은 본래 쉽게 바뀌지 않는데, 잘 안 바뀐다고 조급해 하니까 화가 나고 미워하고 좌절하는 거예요.

마음은 무의식에서 일어나고, 의지는 의식에서 일어납니다. 의식이 무의식을 통제하려면 대부분 실패해요. 그래서 ‘작십삼일’이라는 말이 있는 겁니다. 의식으로 무의식을 통제하려니까 잘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윤리나 도덕으로는 안해야 되는 줄 알면서도 마음이 끌려가는 경우가 있잖아요. 또 알긴 다 아는데 행동이 안 따라준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결국 우리의 말과 행동은 생각이나 의지보다 무의식인 마음의 영향을 더 강하게 받는다는 의미예요.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습관을 바꾸려면 꾸준한 노력이나 강력한 의지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꾸준히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강하게 마음먹지도 않습니다. 조금 도전하다가 ‘에잇,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안 그래도 다 사는데’하고 포기합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지만 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고 꾸준하게 밀고 나가야 합니다. 의식적으로 꾸준하게 변화를 추구하면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이 습관으로 자리 잡아 무의식화 됩니다.

그러면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면서 비로소 운명이 바뀌게 됩니다.

3.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과 사는 법

■ 모든 갈등은 관계 맺기에서 시작된다

인생을 살다보면 수많은 사람과 만나고 헤어집니다. 그럴 때 좋아하는 사람과 만나는 인연이면 문제될 게 없습니다. 또 싫어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인연일 때에도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런데 좋아하는 사람과 헤어지거나 싫어하는 사람과 만나는 인연이 되면 괴로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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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께서는 인생의 괴로움을 8만 4천 번뇌망상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인간의 번뇌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뜻입니다. 그것을 줄여서 백팔번뇌(百八煩惱)라고도 하고 더 줄여 팔고(八苦)라고도 하는데, 그 여덟 가지 괴로움 가운데 애별리고(愛別離苦)와 원증회고(怨憎會苦)가 있습니다.

- 애별리고 :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

- 원증회고 : 미운 사람과 만나는 고통

우리는 흔히 관계 때문에 괴로움이 생겼으니 그 관계를 끊어버리면 문제가 해결될 거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있으면 안 보려고 하고, 결혼을 했다가도 쉽게 이혼하고, 가족간에도 불화가 있으면 집을 뛰쳐나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행복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외롭고 괴롭습니다. 괴로움은 관계를 맺어도 생기고 그 관계를 끊어도 생깁니다. 행복하려고 맺은 관계가 괴로움을 일으키는 것은 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가 잘못 맺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생긴 모양을 한 번 보세요. 다르게 생겼을까요. 똑같이 생겼을까요? 같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습니다. 눈은 두 개, 코와 입은 각각 한 개씩인 것은 같지만, 생긴 모양을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 제각각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마다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까운 사람일수록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마음이기를 바랍니다. 그러다보니 상대가 내 마음 같지 않다고 서운해 하고, 자신의 뜻대로 해주지 않는다고 원망합니다.

인간관계에서 서로 생각이 달라 어쩔 수 없이 갈등이 생길 때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기입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게 되면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너는 그렇게 생각하는 구나!”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내가 옳고 네가 틀리다”는 뜻도 아니고 “네가 옳고 내가 틀리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냥 “우리는 서로 다르다”는 걸 인정한다는 거예요.

서로 다름을 인정하게 되면 “나는 이런데, 너는 이렇구나!”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나와 다른 상대를 인정하는 것을 존중한다고 합니다. 이때 존중이란 옳고 그름을 가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거예요.

둘째는 이해하기입니다. “저 사람 입장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하고 이해하는 거예요. “아이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겠구나” “남편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겠구나” “아내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겠구나” “일본 사람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겠구나!” 이것이 이해하기예요.

나와 다른 상대를 인정하고 이해하기, 이것이 모든 인간관계 맺음에서 가장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인간관계를 맺을 때 이 두 가지를 명심한다면 갈등의 대부분을 줄일 수 있습니다.

■ 좋은 사람 VS 나쁜 사람

사람마다 대상을 좋다, 나쁘다 인식하는 틀이 달라요. 기독교인과 불교인은 사물을 인식하는 틀이 다릅니다. 이를테면 안경의 색깔이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한국 사람과 일본 사람도 인식하는 틀이 다릅니다. 한국 사람은 안중근을 독립운동가 애국자로 인식하지요. 그런데 일본 사람의 눈으로 보면 테러리스트가 되는 것입니다.

또 남편이 열심히 돈을 벌어서 노후에 대비하려고 저축을 해 놓았어요. 그런데 부인이 절에 열심히 다니다가 남편 몰래 1억을 보시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절에서는 그 사람을 훌륭하다고 하겠지요. 하지만 가족들은 뭐라고 할까요? 미쳤다고 하겠지요. 이렇게 똑같은 행동을 놓고도 어떤 입장에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다른 반응이 나옵니다.

우리가 흔히 좋은 사람이라고 할 때의 기준은 대부분 나에게 얼마나 잘해주는지 여부예요. 그리고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은 크게 두 부류로 나누어볼 수 있습니다. 첫째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이익이 되는 사람이에요. 둘째, 내 생각에 따라주는 사람이에요. 반면, 내가 싫어하는 사람은 그 반대가 되겠지요.

내 마음에 딱 든다고 반드시 좋은 사람이라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내 기준에 따라 좋게 보이기도 하고 나쁘게 보이기도 하는 것이지, 그 사람 자체가 좋거나 나쁜 건 아니에요.

이 세상에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도 있고 안 드는 사람도 있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내 마음에 드는 사람만 사귀려면 천 명 중에 열 명도 못 사귑니다. 즉 자기의 취향에 집착하면 사람들의 가치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다보면 스스로 관계 범위를 좁히게 됩니다. 두루 사귀어 봐야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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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 다 갖춘 사람은 없다

연애 경험이 한 번도 없는 사람을 ‘모태솔로’라고 하지요. 그런데 그들이 무언가 부족해서 연애를 못하는 게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공통으로 통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첫째, 눈이 너무 높을 수 있습니다.

둘째, 어렸을 때 부모님의 사이가 좋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일 수 있습니다. 부부간에 갈등이 심해서 엄마가 아이를 안고 “아이고, 내가 네 아버지 때문에 못 살겠다”라면서 자주 불평을 하는 경우가 있지요. 그러면 아이의 마음에는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인 의식이 심어집니다. 그래서 결정 적인 순간에 심리적으로 도망치게 되지요.

셋째, 어릴 때 성인 남자로부터 성추행 같은 안 좋은 경험을 한 것이 원인이 될 수 있어요.

마지막으로 주변 친구들이 남자 친구와 사귀다가 헤어지고 안 좋은 경험을 한 것이 원인이 될 수 있어요.

보통 이성을 사귄다든지 결혼 상대자를 찾을 때는 사람을 너무 고르게 됩니다. 아무하고나 사귈 수도 없고 아무하고나 결혼할 수도 없으니까 자꾸 고르는 거죠. 이해가 됩니다만 그렇게 나이, 학벌, 재산, 등을 너무 따지면 눈에 들어오는 적임자가 별로 없어요. 그래서 결혼하기가 힘든 겁니다.

세상에 모든 걸 다 갖춘 사람은 없습니다. 마치 칼이 아주 날카로우면 부엌에서 일할 때 좋지만 잘못하면 손을 베일 위험이 있고, 잘못 쓰면 흉기가 됩니다. 반면에 솜은 부드러워서 좋지만 강함이 없어요. 이처럼 항상 사물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이 똑똑하기도 하고, 부드럽기도 하고, 착하기도 하고, 리더십도 있기를 바라지요.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에요. 그런데도 우리는 남편이나 아내가 그러길 바랍니다. 다재다능하길 원해요.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상대가 내 마음에 쏙 들지 않는다고 아쉬워할 게 아니라, ‘아, 다 갖춘 사람은 없구나. 세상은 공평하구나!’ 이렇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산에 어디를 둘러봐도 베어다가 바로 기둥으로 쓰기에 좋은 나무는 없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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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아무리 튼튼하고 색깔이 좋아도 손질하고 다듬어야 사용할 수 있어요. 그러니 잘 맞추어 같이 지내볼 생각을 하면 누구와도 인연을 맺을 수 있지만, 한 눈에 딱 맞는 사람을 찾으면 천하를 둘러봐도 찾기가 어렵습니다.

2016. 7. 10

* 다음에 법륜 스님의 행복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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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 스님의 행복(2)

■ 법륜 지음

■ 남 보기 좋은 인생 말고

요즘 취직하기 어려워서 청년들이 많은 것을 포기하는 시대입니다. 만약 취직을 했다면 본인도 기쁘지만 주위의 축하도 많이 받겠지요. 그런데 입사한 지 4개월이 되었다는 어느 직장인은 회사 생활이 너무 괴로운데 대기업이라 그만두지도 못하고 있다며 하소연했습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싶은데, 주위에서는 요즘처럼 취업이 안 되는 시기에 그런 대기업에 다시 들어가기도 힘들고, 또 여자로서 오래할 수 있는 직업이니까 버텨보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하루하루가 너무 괴롭고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좋은 직장이라고 말해도 내가 싫으면 그건 좋은 직장이 아니에요. 정 괴로우면 그만 두면 됩니다. 내 인생인데 왜 남의 눈치를 보며 살아요? 회사에 가서 “안녕히 계세요”하고 그만 두면 됩니다. 그런데 그만 두지 못하겠거든 ‘왜 미련이 남을까?’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직장에 들어갔는데, 왜 이렇게 힘들어 하는 걸까요? 자기가 가진 능력은 적은데 과대평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과소평가를 받았으면 좀 섭섭하고 말지만, 과대평가를 받으면 처음에는 인정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만 조금 지나면 엄청난 스트레스가 쌓입니다. 과대평가된 자신의 모습에 맞추려면 자기 능력보다 훨씬 힘들게 일해야 하니까요.

직장에서 과대평가를 받으면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항상 노심초사하게 됩니다. 능력이 탄로날까봐 전전긍긍하면서 늘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어요. 심하면 그로 인해 정신 질환을 앓는 경우도 있습니다.

따라서 인생을 살 때 자신의 능력이 100이라면 바깥에 알릴 때는 아무리 많아도 80쯤만 알리는 게 좋습니다. 이것이 인생을 편안하게 사는 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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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내 능력이 100인게 바깥에 50으로 알려져 있으면 나를 욕하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처음에는 별 기대를 하지 않다가 같이 일하면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능력이 있어 보이고 사람도 괜찮아 보입니다. 그러면 주위 사람으로부터 인정도 받게 되지요.

반면에 내가 가진 능력이 100인데 120이나 150으로 알려져 있다면 어떨까요? 막상 같이 일을 해보면 기대에 못 미치니까 능력 부족으로 평가됩니다. 그러다보면 윗사람이 실망하게 되고, 결국 한직으로 돌거나 회사를 그만두게 돼요. 따라서 자신의 능력을 과대포장하지 않는 게 현명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능력 펴아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수 있을까요? 첫째는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말고, 너무 잘 보이려고 하지 말고 그냥 내 능력껏 하는 게 좋습니다. 내가 가진 능력보다 잘하려고 하니 긴장되고 힘이 드는 거예요. 둘째는 결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일을 하는 것은 내 몫이지만 결과는 평가하는 사람의 몫이니까요. 옛말에 ‘일은 사람이 하고 뜻은 하늘이 이룬다’는 말이 있습니다. ‘최선을 다하되 결과에 연연하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이렇게 생각을 하더라도 칭찬받기 좋아하는 내 업식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발하려고 기대하면 실망하는 마음도 커지니까 잘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가볍게 도전하다보면 어느새 실력이 늘게 됩니다.

■ 중도의 길을 알려주는 직장 상사

하루 24시간 중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회사에서 동료끼리 서로를 이해하고 맞출 수 있다면 직장 생활이 얼마나 즐겁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에서는 직장인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게 업무처리가 아니라 인간관계라고 합니다.

직장에서 갈등이 있을 때 해결하는 방법은 두 가지예요. 첫째. 괴롭히는 상사와 같이 있지 않으면 됩니다. 사표를 내고 직장을 옮기는 거예요. 둘째 그럴 수 없다면 받아들여야죠.

농사에 비유하면, 종자는 괜찮은데 밭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거잖아요. 그러면 밭을 갈아엎든가. 아니면 다른 밭으로 옮겨야 하는데, 그 형편이 못되거나 밭에 아쉬움이 남아 있으면 내가 적응하는 수밖에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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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분의 관계는 이기심에서 시작 된다

사람은 대부분 이기적이에요. 그래서 누구나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관계를 맺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누군가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 유지하려고 할 때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이기심이 작용합니다.

결혼 상대자를 고를 때도 견제적인 조건이나 학벌, 신체조건, 성격 등을 두루 고려해서 자기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을 선택해요. 부모자식 간에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기심이 작용합니다. 자식이 부모를 좋아하는 것도 단지 낳아주고 길러주어서일 뿐만 아니라 부모만큼 자식에게 이익을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에요. 이렇듯 인간관계에는 이기심이 숨어있게 마련이라 한두 번 만날 때는 별 문제가 없는 것 같다가도 시간이 흐르면 서서히 갈등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기심을 갖고 누군가를 만나는 것 자체가 나쁘다는 게 아니에요. 다만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이기심을 갖고 인간관계를 맺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내가 이익을 따져서 사람을 만나듯이 다른 사람들도 다 이해관계를 따져보고 사람을 만난다는 걸 이해하면 이기적인 사람을 나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으므로 사람 사이의 갈등이 대부분 줄어들게 됩니다.

예를 들어 내가 3을 주고 7을 받을 생각이었으면 상대방도 마찬가지예요. 그러면 서로 3밖에 받지를 못하니 서로 실망하겠지요. 상대에게 불만스럽고 실망스러운 건 7을 기대했던 내 마음 때문이지, 상대방의 잘못이 아니에요.

앞으로 남자를 사귈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좋아했는데 상대가 날 안 좋아한다고 미워하면 안 돼요. 왜냐하면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고, 상대가 나를 좋아하든 안 좋아하든 그것은 상대의 마음이기 때문이에요.

또 나를 좋아하다가 나중에 딴 여자를 좋아해도 미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상대의 마음이 그렇게 가는 걸 어떡해요. 그럴 때 미워하지 말고 ‘그래, 지난 2년 동안 너 때문에 행복하게 잘 지냈다. 고맙다’ 이렇게 생각해야 해요. 그러면 배신이니 어쩌니 하면서 괴로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심성에는 이타심도 이기심도 있습니다. 위기에 처하면 이타성이 발휘되기도 하지만, 사람이 늘 이타적일 수는 없어요. 이타심은 저 무의식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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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에 있고, 이기심은 그보다 위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기심이 더 쉽게, 더 자주 드러나는 거예요.

남이 어떻다고 못마땅해 하지 말고 고치려고도 하지 마세요. 자기가 자기를 바꾸려고 해도 잘 안 되는데, 남을 어떻게 바꾸겠어요. 다만 내가 보기에 못마땅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을 위하는 마음으로 고치도록 해보는 것은 괜찮습니다.

이때는 쉽게 고쳐지지 않을 것임을 알고 시작해야 해요. 대개는 한두 번 지적했는데도 상대방의 행동이 고쳐지지 않으면 불쾌해 합니다. 기껏 생각해서 충고해주었는데 무시를 당했다고 느끼고 가분 나빠해요. 이런 감정이 들 때는 그 사람이 아니라 내 자신을 점검해봐야 합니다.

상대가 내말을 안 듣는다고 내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 됩니다.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말을 안 들으면 그만이지, 내가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는 없어요. 만약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말로는 ‘그 사람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내 필요 때문에 한 조언에 불과합니다.

“네 생각은 틀렸으니 그 생각을 바꿔라.”

이렇게 상대에게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아는 사실을 그 사람에게 알려줄 수는 있지만 그 얘기를 듣고 판단하는 건 그 사람 몫으로 남겨놓아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상대의 생각이 틀렸다고 지적하고 고치려고 하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고, 안 고쳐지니까 짜증이 나는 거예요.

“저 인간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이렇게 생각하면서 화를 버럭 내면 괴로워지는 것은 나 자신입니다.

■ ‘기브 앤 테이크’는 거래지 관계가 아니다

서로 주고받는 다는 뜻의 ‘기브 앤 테이크’라는 말이 있지요. 이것이 관계에서는 공평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거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상대를 위해 이런저런 일을 해준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자꾸 대가를 바라게 되고, 바라는 그 마음이 채워지지 않으면 괴로워져요. 더군다나 상대가 원하는 걸 해주는 것도 아니고 자기 생각에 좋아 보이는 걸 해주면서 ‘내가 너를 위해 이렇게 애쓰고 있다’는 생각에 빠지면 갈등은 피하려야 피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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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에 대한 서운함으로 괴로워하다가 이런 질문을 한 분이 있었어요.

“가족과 떨어져 외국에 살다보니 고국에 있는 형제들에게 자주 전화를 거는데, 그들은 명절이 되어도 제게 전화 한 통 없으니 섭섭합니다. 형제들의 소식이 궁금하면서도 ‘매번 왜 나만 전화를 걸어야 하나’싶어 저도 지금은 전화를 안 하고 있어요. 그래서 마음이 답답합니다.

이것은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 그러니 내가 열 번이나 전화를 했으면 상대방이 한 번쯤은 해줘야 할 것 아니냐”는 말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많이들 공감할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착각하는 게 있어요. 가족들에게 전화하는 것은 내가 궁금하고 걱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필요해서, 내가 좋아서 하는 것이지 상대방이 좋으라고 하는 게 아니에요. 형제에게 전화를 안 해도 괜찮고, 부모에게 전화를 안 해도 죄가 아닙니다. 내가 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안 하면 그만이에요. ‘나는 너를 위해서 이렇게 해주는데 너는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냐’하는 것은 거래에 불과합니다. 내가 좋아서 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대가를 바라면 그때부터는 원수가 되기 쉬워요. 바라는 그 마음이 채워지지 않으면 섭섭한 마음이 쌓이고 갈등이 불거집니다. 이럴 땐 차라리 가족에게 전화해서 “계속 나만 전화하게 되니 서운하다”고 솔직하게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현명해요.

이렇게 사랑하는 마음이 미움이 되고 실망하는 마음으로 바뀌는 것은 상대방 때문이 아니라 준 만큼 받고 싶어하는 내 마음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 어딘가에 ‘너를 위해서’라는 생각이 있으면 ‘나는 너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데 너는 도대체 뭘 해준 거냐’하는 원망하는 마음이 따라 붙습니다.

■ 책임감으로 살면 인생이 공허해진다

부모가 자식에게 베푸는 사랑은 대가를 바라지 않는 순수한 사랑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부모도 힘들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를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이 말에는 ‘내가 너를 키우느라 이만큼 애를 썼으니 너도 노후에 나한테 보상해라’하고 바라는 마음이 깔려 있어요. 그래서 부모가 자식을 원망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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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되어서 자식을 키울 때 키우는 재미를 마음껏 누렸다면, 자식이 다 커서 효도를 하지 않아도 조금도 서운하지 않을 거예요. 자식을 키우는 동안 부모로서 이미 기쁨을 누렸기 때문에 아이에게 사랑을 베풀었다는 생각도 없습니다. 그러니 그 자식이 독립해 제 가정을 잘 건사하는 것만으로도 부모는 행복하고 고맙게 여깁니다.

인생을 책임감으로 살면 본인은 열심히 산다고 하지만, 돌아보면 인생 전체가 허무하고 공허하게 느껴지기 쉽습니다.

‘자식을 위해서 어떤 아버지가 될 것인가?’ 이런 생각은 겉으로는 훌륭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는 의미가 숨어 있어요. 시간이 흐르면 결국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인생 자체가 불행해집니다.

결국 부부가 화목하게 사는 것이 부모 노릇 제대로 하는 거예요. 그러니 부부는 가능하면 같이 사는 것이 좋습니다. 부부가 떨어져 살면서 아이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는 것보다 아무 학교나 보내더라도 화목하게 사는 것이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 훨씬 좋습니다.

아이는 아무 곳에서나 키워도 잘 자랍니다. 아이 걱정은 하지 마세요. 그런데 부모가 자식 키우는 것이 너무 괴롭다고 하소연하면 자식은 잘되기가 어렵습니다. 부모를 괴롭히는 아이가 어떻게 잘 되겠어요?

부모 노릇도 자식을 위한 희생이라고 생각하면 굴레가 됩니다. 그러니 ‘너를 위해 내가 이렇게 하고 있다’는 생각을 버려야 자식 인생도, 부모 인생도 다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 의지하는 마음은 원망하는 마음의 씨앗

요즘 사람들은 영화와 드라마, 소설을 많이 봐서 그런지 결혼에 대한 기대가 크고 환상을 많이 갖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결혼만 하면 행복의 깨가 막 쏟아지는 줄 알아요. 그렇게 기대하는 마음이 크면 실망하는 마음도 커서 조금 살아보고 못 살겠다고 아우성입니다. 결혼생활도 그냥 둘이 밥 먹고 살면 되는데, 영화나 소설처럼 아기자기하고 가슴이 늘 짜릿짜릿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상대가 나에게 관심이 없다고 괴로워하고 힘들어하는 거예요. 연애할 때는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했는데 막상 결혼해서 살아보면 대화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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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없고 무미건조하다는 거지요. 그렇다고 남편이 특별히 나쁜 것도 아니고 아내가 부족한 것이 아닌데도 ‘연애할 때보다 대화도 별로 없고 무미건조하다. 결혼 생활이 이런 건 아닌데 ……’라는 식이에요.

밥은 특별한 맛은 없지만 몸에는 좋고, 인스턴트식품은 입에는 달지만 건강을 해칩니다. 이처럼 결혼한 부부가 “우리 남편(아내)은 나를 끔찍이 사랑해. 나 없이는 못살아”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할는지 몰라도 그것은 남편(아내)이 그어놓은 울타리 안에 갇힌 행복입니다. 내가 남편(아내)이 쳐둔 울타리로부터 한 발만 밖으로 나가도 남편(아내)은 큰일 날 것처럼 생각하잖아요. 그것이 바로 새장에 갇힌 새의 행복이에요.

집착이 큰 것은 의지심 때문입니다. 의지한다는 것은 좋게 말하면 상대를 신뢰하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노예근성이 있는 거예요. 상대의 일거수일투족에 나의 희로애락이 좌우되니까요. 본인은 관심과 사랑이라고 착각하지만 집착에 불과합니다. 집착은 대상을 바꾸어 옮겨갈 수 있어요.

남편에 대한 집착을 놓지 못하고 서운한 마음에 외면하면 남편에게 향했던 집착이 자식에게 옮겨가서 이것이 나중에는 자식에게 큰 짐이 되고 부모자식 사이에 갈등의 원인이 됩니다.

보통 어린 시절에 부모로부터 제대로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사람은 누가 조금만 잘해주면 그 사람에게 푹 빠져버립니다. 부모에게서 충족되지 못한 사랑을 애인이나 배우자에게서 채우려는 것이지요.

그래서 처음에는 부모로부터 받지 못한 사랑이 채워지는 것 같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상대에 대한 실망과 원망하는 마음이 올라옵니다. 나아가 부모와 배우자에게서 충족되지 못한 욕구를 다시 자식에게서 채우려고 합니다.

이렇게 의지하고 기대하다보면 내 생각, 내 판단, 내 주체성은 사라지고 늘 주변 사람들에게 매여서 매사가 혼란스럽고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사랑은 보통 상대에게 의지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러나 상대를 사랑하면서도 홀로 설 수 있어야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오히려 상대에게 도움을 주고 의지처가 되어 주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자기중심 없이 희생하는 사랑은 기대하는 마음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원망하는 마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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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얼굴도 모르는 사람하고는 원수가 되는 일이 별로 없어요. 사랑하기 때문에 철천지원수가 되고, 기대하고 의지하는 마음이 사랑을 원수로 만드는 겁니다. 이제라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 구속하고 의존하는 마음에서 벗어나 ‘내 인생의 주인공은 바로 나’라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 남의 인생에 간섭하지 마라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인생. 특히 가까운 사람에 대해 관심이 지나쳐 때로는 간섭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자식이라는 이유로, 부모라는 이유로, 가족이라는 이유로 남의 인생에 간섭할 때가 많아요. 도움을 준다는 생각으로 지나치게 간섭해서 오히려 상대가 짐스럽게 여기거나 서로에게 큰 괴로움을 주기도 합니다.

도와주고 싶지만 상대가 어떻게든 혼자 해보겠다고 할 때는 지켜보는 게 좋습니다.

남녀 사이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감정이 생기면 상대방이 싫다는데도 자꾸 가서 도와주려는 경우가 있어요. 그건 어리석어서 그런 겁니다. 누군가에게 호감이 있고 호감을 얻고자 한다면 자신의 욕구를 조금 절제하고 지켜봐야 해요. 상대에게 도움이 필요한 때를 기다리거나 상대의 요청이 있을 때 도와주는 게 진정한 사랑입니다.

우리가 남을 도와줄 수 있다거나 내가 남을 가르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자칫 자기과시나 욕심으로 하기가 쉽기 때문이에요. 내가 어떤 말을 해줘야 저 사람에게 위로가 될까 하는 마음도 잘 살펴보면 내 욕심입니다. 따라서 남을 돕고자 할 때는 먼저 상대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내 경험이 있으면 그것을 들려주는 가벼운 마음이 좋습니다.

쓸데없이 남의 인생에 간섭하면 일거리만 많아져요. 부모든, 형제든, 자식이든 그들 인생에 간섭하기 시작하면 인생이 피곤해집니다. 누군가를 돕다가 지쳤다는 건 자기 능력을 넘어서 지나치게 간섭했다는 거예요.

그러니 남의 인생에 간섭하는 것을 조금 줄이고, 각자 자기 나름대로 살도록 놓아주세요. 도움이 필요 없다는데도 가서 도와주겠다고 하지 말고, 도와달라고 요청하면 그때 능력껏 도와주세요. 그때 비로소 남에게도 도움이 되고, 내 인생도 한가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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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는 서로 어울려 숲을 이룬다

산에 가면 소나무만 빽빽이 자라거나 키 큰 나무만 자라는 게 아니고, 소나무와 낙엽송이 섞여 자라기도 하고 키 큰 나무 아래 키 작은 나무가 자라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갈등 없이 잘 자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로 좋아서 만나고 결혼까지 한 부부 사이에 갈등이 왜 생길까요? 남편이 술 먹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고, 아내가 잔소리하기 때문에 갈등이 생길까요? 아니에요. 남편이 술 마시고 왔을 때 “왜 술 먹니? 건강 해치고 돈 없애고 바보 같은 짓을 왜 하니?” 이렇게 반응하고 아내가 잔소리 할 때 “또 그 소리야? 적당히 좀 해!”하면서 반감을 갖기 때문입니다.

이때는 내가 옳고 너는 그르다는 거잖아요.

더불어 살려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는 가고 싶지만 저 사람은 가고 싶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 되고 나는 널 좋아하지만 너는 날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해요.

그런데 사람들은 매사를 자기 식으로, 자기 입장에서 바라봅니다. 저마다

자기 관점을 고집하다보니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와 다를 뿐인

데 잘못됐다고 하니까 싸움이 일어나는 거예요.

자기를 세상의 중심에 놓고 상대에게 잣대를 들이대면 아무리 사랑하는 부

부 사이라도 싸우게 마련입니다. 반대로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하면 길

가는 사람하고 살아도 싸울 일이 없어져요.

서로 생각이 달라 부딪치는 것도 사실은 잠꼬대를 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서로 자기 생각에 사로잡혔거나, 아직 무지에서 깨어나지 못해서

그런 줄 알면 빙긋이 웃고 넘어갈 수 있어요. 상대를 고치려고 들기보다 이

해하는 게 우선이에요. 개선이 필요하면 스스로 일깨우도록 기회를 마련해

줘야 합니다. 만약에 남편이 부엌일을 안 한다고 한다면 “그래, 바깥일만 잘

하면 되지”하고 이해해주는 방법이 하나 있어요.

지금 인간관계에서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시선을 한번 달리해 보세요. 상대

의 나쁜 점 말고 좋은 점도 찾아보는 겁니다. 그렇게 상대의 장점을 찾는 시

선으로 긍정적으로 보려고 노력하다보면 상대에게 감사할 것들이 더 눈에

들어오고, 그러면서 행복에 조금 더 다가 설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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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남의 불행 위에 내 행복을 쌓지 마라

■ 진정한 행복이란

사람들은 모두 성공한 인생을 꿈꿉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성공이란 어떤 것

일까요? 스물일곱 살 청년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제 경우 해마다 성공의 기준이 변해왔습니다. 2년 전에는 연봉 3천 만 원

이상이었고, 1년 전에는 세무사가 되는 것이었고, 지금은 감정평가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현재 성공의 기준을 합격이러고 잡긴 했는데, 인생에서

진짜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제가 청년에게 물었습니다.

“합격이면 성공이고 떨어지면 실패일까요?”

많은 사람들이 성공을 위해 열심히 달려가지만, 막상 왜 성공하고 싶으냐고

물으면 그 대답은 굉장히 막연합니다. 그런데 자꾸 물어보면 결국 이렇게 대

답합니다.

“행복하려고요.”

그렇습니다. 결국 행복하고 자유롭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행복을 위해 많

은 시간을 낭비하고도 평생 그 맛도 보지 못하고 죽는다면 어떨까요?

이 청년은 성공의 기준을 준비하는 시험에 합격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 공부하고 있다면 공부하는 것 자체가 행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공부하는 동안 내내 괴로워하다가 합격할 때만 성공했다고

생각합니다. 산에 오르는 과정이 행복인데 꼭대기에 도달해서만 행복하고 산

을 오르는 내내 힘들어해요 꼭대기까지 못 가면 실패인가요? 아니에요. 중간

까지만 가도 올라간 만큼 이룬 겁니다. 그런데 오늘도 우리는 앞뒤 안 가리

고 열심히 달려갑니다. 과연 어떤 성공을 위해서일까요?

어느 날 의사 한 분이 제게 와서 환자가 없어서 고민이라고 푸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 돈벌이 하라고 사람들이 아파야하겠습니까?”

의사가 사람 아프길 바라니 어떻게 진정한 의사라고 할 수 있을까요? 요즘

에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돈을 벌기 위해 의사가 되려는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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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습니다. 그렇게 의사가 돼서 매상을 올리기 위해 과잉 진료와 과잉 치료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의사를 믿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겁니다.

또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시에서 돈을 많이 벌어 큰 아파트에서 살면 성공

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시골에서 농사짓고 살면서도 “좋은 공기 마시면

서 자유롭게 일하니 나는 참 행복하다”이렇게 만족할 수 있다면 성공한 인

생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공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자기 인생을 타인

의 기준에 맞추고 살아갑니다. 그러면 타인으로부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을

지는 몰라도 자기 삶이 피폐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이가 들거나 병이 들었을 때 과거에 자신이 한 일이 보람 있었다고 느끼기보다 허망함을 느끼는 것은 그 까닭입니다.

진정한 성공은 매순간이 값지고 소중하다는 것을 아는데서 시작됩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현재 주어진 조건에서 삶을 만끽할 수 있어야 해요.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나는 행복한가를 점검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런 관점을 갖고 인생을 산다면 어제도 성공하고, 오늘도 성공하고, 내일도 성공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 남의 불행위에 내 행복을 쌓지마라

많은 사람들이 성공을 인생의 목표로 삼습니다. 흔히 좋은 학교를 나오고, 좋은 직장에 다니고, 좋은 배우자를 만나서 사는 것을 성공이라 말합니다. 이때 좋은 학교란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한 관문과 같고, 좋은 직장이란 적게 일하고도 많은 돈을 받으며 편히 일하고 대우받을 수 있는 곳, 남에게 권세를 부릴 수 있는 곳, 남이 부러워하는 곳을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주위 사람들보다 더 많은 재물과 지위, 명예와 인기를 갖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직설적으로 얘기하면 어떤 사람들은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라고 고개를 내저을지도 몰라요.

우리는 흔히 자신의 성공이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만약 내가 30평 아파트에 사는데 주변에서 나를 부자라고 말한다면 주변의 아파트는 30평 미만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나를 보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낍니다. 이 또한 누군가의 불행 위에 선 행복에 속하는데,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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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그렇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살아갑니다.

문제는 더 많이 소유한다는 것이 상대적 개념이라는 겁니다. ‘남보다’ 더 많이 소유하려면 누군가는 ‘나보다’ 더 적게 소유하는 사람이 있어야 해요. 재물을 예로 들면 누군가 일을 적게 하고 많이 받는다면 누군가는 많이 일하고 적게 받기 마련입니다.

권력도 마찬가지예요. 누군가 앉아서 명령한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는 그 명령을 받아 처리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성공이 빛나려면 수많은 사람들의 실패가 있어야 하고, 한 사람이 소유하는 재화의 양이 크면 클수록 기본적인 욕구조차 해결할 수 없는 빈곤한 사람들이 늘어납니다.

결국 우리가 추구하는 성공은 본질적으로 남에게 고통을 떠넘기고 얻은 대가라고 할 수 있어요.

우리 사회는 구조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모두 함께 성공할 수는 없게 되어 있습니다. 내 이익을 위해서는 타인에게 손해를 끼칠 수밖에 없는 피라미드 구조이기 때문이에요. 저마다 이 피라미드의 꼭대기를 차지하려고 달음박질을 하고, 누군가 정상에 오르려면 다른 누군가(대다수의 사람들)는 경쟁에서 밀려나 꼭대기를 떠받치는 신세가 되어야 합니다.

어느 날 프라세나짓 왕이 부처님에게 물었습니다.

“훌륭한 왕이 되는 길은 무엇입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외아들을 사랑하듯 백성을 사랑하십시오. 타인의 불행 위에 자신의 행복을 쌓아서는 안 됩니다. 왕의 지위를 특별한 것으로 여기지 마십시오. 항상 가난하고 병든 이를 구호하며 외로운 이를 위로한다면 굳이 출가하여 고행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왕이 어리석으면 한 나라의 운명은 말할 것도 없고 자기 자신의 생명조차 온전히 보존하기 어렵습니다.

보통 우리는 훌륭한 지도자라고 하면 세력이 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왕의 지위를 특별한 것으로 여기지 말고, 백성을 잘 보살피는 공덕이야 말로 지도자의 가장 중요한 자질이자 덕목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우리가 삶의 이치를 안다면 출세는 출세대로 하고, 인생은 인생대로 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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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돈은 돈대로 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치를 모르고 어떻게든 남을 이기려고만 하니까 인생이 피곤한 겁니다.

이기려는 마음이 없다면 어디서 누구와 사회생활을 해도 긴장 하거나 초조해 할 필요가 없어요. 무슨 일을 하며 살든 편안하게 일할 수 있고, 구성원들과도 화목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 욕망은 장작불과 같다

사람의 욕망은 채운다고 해도 만족하기는커녕 커지기만 할 뿐 줄어들지 않아요. 예를 들어 늘 걸어다니던 길도 한 번 자동차를 타고 가보면 이후로는 걸어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집니다. 또 일반 고속버스를 타다 우등고속버스를 타면 일반고속버스를 타기 싫어지는 게 사람의 마음이에요. 안락함과 신속함에 맛을 들이면 이전 생활로 되돌아가기가 어렵습니다.

우리가 욕망에 사로잡히면 그다음부터는 욕망이 우리를 끌고 갑니다. 욕망이 충족되면 만족해하며 그로 인해 생기는 일시적 기쁨에 들떠 즐거워합니다. 많이 가진 만큼 더 큰 쾌락을 누리고 자유롭고 행복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삶이 초조하고 불안하거나 욕구불만이 있으면 중독에 빨려들 확률이 더 높습니다. 소비하고 싶은 욕망을 참을 수가 없고 점점 더 많이 소비하고 싶어집니다. 그것을 감당하려면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돈을 더 벌 수 있는 조건을 발견하면 이 일 하다 저 일 하고, 저 일 하다 이 일 하면서 돈을 더 주는 쪽으로 자꾸 바꾸겠지요. 그건 돈에 팔려다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불법적이거나 비윤리적이라고 하는 일들을 처음부터 오래 할 생각으로 시작한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다들 돈이 급해서 ‘딱 한 번만’이라고 생각하면서 시작합니다. 그렇게 한 몫 챙기면 그걸로 몇 달 지낼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수입이 늘어나면 소비 욕구는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커져요.

소비중독은 그런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막다른 골목으로 치달을 때까지 버티지 말고, 문제라고 인식했을 때 당장 끊어야 합니다.

중독이 심해지면 사고방식도 바뀌게 돼요. 그래서 자기가 자기에게 속게 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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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다. 자기가 어떻게 변해가는지 스스로 점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합니다. 그래서 지금 문제를 자각했을 때 딱 끊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토끼를 사냥할 때 보면 토끼들이 여름보다 주로 겨울에 미끼를 잘 뭅니다. 그만큼 곤궁하기 때문이죠. 사람도 마찬가지여서 욕망에 굶주리면 마치 쥐가 쥐약이 든 음식을 먹듯이 큰 손실을 보는 줄도 모르고 욕망을 좇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즉 배고픈 사람을 상대할 땐 식량이 무기가 될 수 있고, 재물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뇌물이 힘을 발휘하고, 권력욕이 강한 사람에게는 아부가 통합니다. 욕심에 눈이 어두워지면 올바른 선택을 못하게 됩니다. 올바른 선택을 하려면 욕구 충족을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하는데, 눈앞의 당근만 보고 쉴새없이 달리기 때문이지요.

이제라도 멈춰 서서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혹은 벼랑 끝을 향해 무작정 달려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 욕구의 3단계 : 욕구와 욕망 그리고 탐욕

사람은 각자 자기 욕구가 충족되어야 즐거워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해야 기분이 좋아요. 또 자기가 바라는 대로 세상이 돌아가야 만족해합니다. 욕구가 충족되면 행복하다고 느끼고,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면 불행하다고 느껴요. 이때 행복과 불행은 모두 욕구로부터 파생된 것입니다.

욕구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생존적 욕구예요. 배고프면 먹으려 하고 졸리면 자려하고 추우면 따뜻한 곳을 찾으려 하고 더우면 시원한 곳을 찾고자 하는 생존을 위한 기본적 욕구를 말합니다. 기본적 욕구는 충족되지 않으면 생존이 위협받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자신이 스스로 지켜내야 할 권리이고, 사회적으로도 이 욕구는 보장해 주어야 합니다.

다음으로는 상대적 욕구인 욕망이 있습니다. ‘더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 ‘남보다 더 많이 갖고 싶다’ ‘ 더 높은 지위에 올라가고 싶다’ ‘더 좋은 옷을 입고 싶다’ ‘더 편하게 살고 싶다’와 같은 것은 상대적 욕구입니다. 이런 상대적 욕구는 비교에 의해서 생겨나는 욕구이기 때문에 어느 선까지 라고 정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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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지나친 욕구인 탐욕입니다. 만약 과식을 했다면 입은 만족할지 몰라도 몸에는 나쁘잖아요. 과음을 했다. 과로를 했다. 이것은 다 탐욕이고, 탐욕은 자기를 해치는 행위입니다. 개인은 스스로 탐욕을 버림으로써 자신을 보호해야 하고 사회는 개인의 탐욕을 규제해야 사회전체를 보호할 수 있습니다.

입에는 맛있는데 몸에 안 좋은 음식이 있는가 하면, 입에는 쓴데 몸에는 좋은 음식도 있습니다. 몸을 생각하면 먹고 싶더라도 때로는 먹지 말아야 하고 때로는 입맛이 없어 먹기 싫지만 먹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음식을 먹는 것은 몸이 중심이 되어야지 입맛이 중심이 되면 안 됩니다.

옷을 입을 때도 마찬가지예요. 옷이란 몸을 보호하기 위해 입는 겁니다. 그런데 소위 값비싼 명품 옷을 입는 사람들 중에는 옷이 망가질까봐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그러다보면 옷이 나를 보호하는 게 아니라 내가 옷을 보호하게 됩니다. 내가 옷의 종이 되는 거예요.

거주하는 집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이 나를 지켜주는 게 아니라 내가 집을 지키게 됩니다. 집이 주인이 되고 내가 종이 되는 거예요. 소유하려는 욕망을 무작정 따라가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이렇듯 주객이 전도되고 맙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옷이며 음식이며 집이며 세상 모든 물건에 종노릇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욕망에 끌려가지 말고 깨어있으라는 거예요.

인생은 자기 좋을 대로, 자기 가치관대로 살면 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함께 사는 세상이기에 지켜야 할 몇 가지 제한은 있습니다.

1. 누구나 다 자기 나름대로 살아가지만 남을 헤칠 자유는 없다.

2. 누구나 다 자기 이익을 추구할 권리가 있지만 남의 이익을 침해할 권리는 없다 .

3. 누구나 다 행복하고 사랑할 권리가 있지만 남을 괴롭힐 권리는 없다.

4. 누구나 다 마음껏 말할 자유가 있지만 남을 괴롭힐 자유는 없다.

5. 술을 마실 자유는 있지만 술에 취해 주정하며 남을 괴롭힐 자유는 없다.

■ 개인은 씨앗, 사회는 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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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 한 움큼을 가져다 자갈밭에 뿌렸더니 2개가 살아 싹을 틔웠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보통 이렇게 말해요.

“봐라, 살 놈은 그래도 살지 않느냐!”

똑같이 콩 한 움큼을 가져다 기름진 밭에 뿌렸더니 2개가 죽고 나머지는 다 살았습니다. 이번에는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봐라, 죽을 놈은 죽지 않느냐?”

잘되든 못되든 전부 씨앗 탓으로 돌려요.

농사가 잘 되려면 씨앗이 좋아야 하지만, 밭도 좋아야 하는 거예요. 우리 삶에 빗대어보면 씨앗은 개인이고, 밭은 우리 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개인의 수행은 좋은 씨앗을 만드는 것과 같고, 밭을 가꾸는 것은 좋은 사회를 만드는 것과 같아요.

이렇듯 개인이 행복하고, 사회 조건이 개선될 때 우리는 온전하게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정의로운 사회, 복지사회를 만드는 것은 내 행복과 별개가 아니에요.

어차피 주어진 환경이라면 내 마음가짐을 바꿔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행복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이 바로 수행이에요. 예를 들면 술 좋아하는 남편과 살면서 10년 넘게 술 먹지 말라고 잔소리해도 변함이 없다면, 차라리 “그래 실컷 먹어라”이렇게 마음을 바꿔버리면 내가 덜 괴롭습니다. 술 먹는 남편은 그대로인데 내가 관점을 어떻게 두느냐에 따라 내 행복도가 달라지는 거예요.

그런데 남편이 매일같이 술을 먹는 것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가정형편 때문이고, 그 원인이 사회구조적인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남편의 마음을 잘 헤아려서 이해하고 미워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거기에서 더 나아가 남편이 술 먹을 일이 줄어들 수 있는 사회로 바뀌어야 합니다.

행복은 살아가면서 일어나는 이런저런 문제에 내가 어떻게 대응하느냐 하는 삶의 자세와 주변 환경이 어떤가 하는 이 두 가지가 함께 맞물려서 오는 거예요. 행복이 오랫동안 꽃을 피우려면 개인이라는 씨앗과 사회라는 밭이 모두 건강해야 합니다. 개인과 사회는 행복이라는 수레를 끄는 두 바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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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냥꾼 두 사람이 토끼 세 마리를 잡았다면

우리는 일정한 몫을 두고 서로 더 많이 차지하려고 다투면서 대체 왜 함께 모여 사는 걸까요? 사람이 혼자 살지 않고 여럿이 모여 살게 된건 그 편이 좀 더 유리하기 때문이에요. 예를 들어 혼자서 사냥할 때는 종일 토끼 한 마리밖에 못 잡는데, 둘이 힘을 모으면 토끼 세 마리도 잡을 수 있으니까 협력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렇게 협력하는 것이 늘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에요. 사냥을 할 때는 여럿이 함께 하는 게 이익이지만 막상 사냥감을 나누려고 하면 분배 갈등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지요. 특히나 이익을 나눠 가져야 할 사람이 많아지면 갈등이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우리 사회는 한동안 경제를 이야기할 때 생산만 생각했습니다. 개인이 혼자서 수렵 채취할 때 경제는 생산만을 가리키는 게 맞아요. 분배 개념이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둘 이상이 협력할 때는 생산만큼이나 분배가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면 이 분배를 어떻게 하느냐? 기본적으로 너 한 마리, 나 한 마리는 먼저 가지고 증산된 한 마리를 갖고 어떻게 나눌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내가 가질 수 있는 최소는 한 마리이고, 최대는 세 마리가 아니라 두 마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개인적으로는 과욕을 버려야 하고, 사회 제도적으로는 과욕을 못 부리도록 규제를 해야 합니다. 특히 한 마리를 갖겠다고 하는 기본적 욕구는 제도적으로 보장을 해줘야 합니다.

따라서 분배를 할 때는 한 마리와 두 마리 사이에서 어떻게 적절하게 나눌 것이냐를 놓고 경쟁해야 합니다. 이상적인 것은 1.5마리를 갖는 것이지만, 현실적인 변수가 있습니다. 가령 오늘 토끼를 잡는데 상대는 게을렀고, 나는 열심히 일했는데 똑같이 나눈다면 기분이 나쁘거나 좀 섭섭해서 불평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분배는 1.2대 1.8이 될 수도 있고, 1.7대 1.3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상적인 것은 1.5이지만 현실이 반드시 1.5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혼란스러운 것은 약자의 기본 권리를 보장해 주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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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면서 강자의 과욕마저도 규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존을 위협받는 사람들과 상대적 박탈감에 힘겨워하는 사람들이 많은 겁니다.

■ 남을 비난하기 전에 나부터

우리는 대체로 일은 조금하고 수입은 많기를 원하고, 능력은 없어도 승진하기를 바라면, 공부는 못해도 좋은 대학에 가고 싶어 합니다. 또 늦게 도착하고도 좋은 자리에 앉기를 원하고, 잘못을 저질러도 눈감아주길 바랍니다.

그런데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만약 다른 사람들은 일을 거의 안 하면서 돈만 많이 받아 챙기고, 능력도 없으면서 인사철만 되면 승진하며, 공부도 못하는 아이가 부정한 방법으로 좋은 대학에 입학했다고 하면 어떨까요? 저런 인간 때문에 내가 고생하고 저런 애들 대문에 우리 애가 대학에 떨어졌다며 억울해 하겠지요.

우리는 어떤 바람을 가질 때, 그것이 이루어지면 어느 한쪽이나 다른 누군가는 피해를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을 못합니다. 어쩌면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세상살이가 다 그렇지 뭐” “나만 아니며 돼” 하면서 눈 질끈 감는지도 몰라요.

나와 가치관이 다르다고 반드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나올 필요는 없습니다. 회사에서 나가라고 할 때까지 다니면서 그 안에서 바른 길을 가면 돼요. 예를 들어 내가 그만둘지 말지를 결정하려고 하면 자꾸 망설이게 됩니다. 반면 회사에서 결정하게 두면 내가 고민할 필요가 없어져요.

그리고 자꾸 남에게 “너 잘못됐다” ‘너 글렀다“ 하고 문제를 지적하니까 갈등이 생기는 거예요. 살다보면 어디나 문제가 있습니다. 다만 남을 비난하기 전에 나부터 그러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자세가 중요해요.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것이 돈과 출세보다 더 중요하다면 두려울 게 없어야 합니다. 이때 어느 정도 손실과 비난은 감수해야 해요. 그런데 그게 잘 안되지요. 대체로 도중에 포기하고 맙니다. 그건 자기 삶의 원칙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또 내 마음이 흔들리니까 자꾸 그 비난이 귀에 들어오는 거예요. 우리는 남의 얘기를 귀담아 듣기도 해야 하지만 너무 구애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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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에 자꾸 신경 쓰는 건 비난을 받기 싫기 때문이에요. 비난받기 싫어서 늘 남한테 잘 보이려고 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서 작은 이익을 갖고 죽기살기로 경쟁하다가 어느 날 덜컥 큰 병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되거나, 젊음을 바쳐 충성한 회사에서 예고도 없이 밀려나면 얼마나 분하고 억울하겠습니까.

‘지난 세월 나는 뭘 위해 살았나?’

이렇게 허무한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절대로 잘사는 길이 아니에요.

모순된 현실을 극복하고 다 함께 행복해지는 길로 가려고 할 때는 나부터 먼저 해본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남을 비난하기 전에 나부터 시작하면 삶에 희망이 보이고 의미가 생길 겁니다.

■ 나도 행복하고 남도 이롭게 하는 길

우리는 누구나 행복하기 위해 열심히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 행복이 욕망에 뿌리를 두고 있는 한 쏟아부은 모든 노력이 결국은 불행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기막힌 모순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내 욕망만을 채우기 위해 애쓰는 삶이 아니라 나도 좋고 남도 좋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는 좋은데 상대는 손해인 것은 상대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이 좋음은 오래 지속될 수가 없습니다. 상대한테는 좋은데 내가 희생하면 내가 오래 참지 못해요. 따라서 나도 좋고 남도 좋고, 나도 행복하고 남도 더불어 행복해질 수 있는 길만이 이 행복을 지속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사회적 토대를 만드는 노력을 함께해야 합니다.

그런데 나도 좋고 남도 좋은 삶을 살려면 지혜와 용기가 필요해요. 예를 들면 회사에서 늘 긍정적으로 생활하면서도 부당한 관행을 보는 순간에는 “부장님 이거 안 됩니다”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궂은일에 묵묵히 솔선수범하면서도 중요한 순간에는 삶의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야 해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불평등한 세상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가능한 평등해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진보’일 터이고요. 그러나 현실의 불평등 또한 인정해야 합니다. 현실의 불평등을 인식하지 않고 평등만을 주장하면 그것은 ‘이상(理想)’이 돼버립니다. 그러면 현실에 발을 못 붙이게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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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현실의 불평등만 인정하고 미래의 평등을 지향하는 노력 없이 현실에 안주하게 되면 우리 인생과 세상은 발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내 두 발은 비록 불평등한 현실일지라도 늘 그곳을 딛고 있어야 하고, 내가 나아가야 할 목표는 평등의 세계를 향해야 합니다. 그러면 나는 이 불평등한 현실에서 한 발 한 발 평등한 세상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놓이게 됩니다. 이런 관점을 가져야 꿈이 있으면서도 현실적인 인간이 될 수 있어요. 더 나아가 현실 속에서 꿈을 실현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세상을 좀더 따뜻하게 만들어보겠다고 노력한다고 해서 성과가 금세 나타나는 건 아니에요. 우리는 뭔가를 시작하면 그것에 대한 결과가 바로 나타나길 바라지만 세상은 그렇게 돌아가지 않습니다. 노력을 해서될 수도 있고 안 될 수도 있어요. 되면 다행이고 안 되면 다시 연구를 해서 도전하면 됩니다. 부단히 노력해도 안 되면 그때는 포기하고 다른 걸 하면 돼요.

좋은 일을 한다고 위대하게 생각할 것도 없고,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할 것도 없습니다. 가볍게 생각해야 결과에 상관없이 행복할 수 있어요.

세상에서는 남의 위하는 마음을 ‘이타심’이라고 해서 무조건 좋게 평가하지만, 남을 위해 애쓴다고 생각하면 나중에 반드시 보상 심리가 생기고 원망하는 마음을 내게 됩니다.

따라서 희생보다 더 좋은 것은 ‘내가 너를 돕는 것이 나한테 좋다’는 마음가짐이에요. 이것을 ‘자리이타(自利利他)’라도 부릅니다. 자기를 이롭게 하는 ‘자리’와 남을 이롭게 하는 ‘이타’가 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꽃은 벌에게 꿀을 주고, 벌은 꽃가루를 옮겨 꽃이 열매를 맺게 해주잖아요. 이렇게 너도 좋고 나도 좋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희생이라는 생각 없이 남을 돕는 게 나에게도 좋을 때 함께 행복해지는 길을 가는 겁니다.

5. 어제보다 오늘 더 행복해지는 연습

■ 시비분별의 마음을 내려놓고

우리는 흔히 ‘이것은 옳고 저것은 틀리다’ ‘나는 맞고 너는 그르다’는 분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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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관점으로 세상을 봅니다. 그래서 늘 시시비비에 끌려 다니고, 자꾸 경계를 지어서 스스로를 답답하게 묶어 놓지요.

그런데 화단에 피어 있는 꽃들을 보세요. 형형색색으로 예쁘게 피어 있는 꽃들은 서로의 아름다움을 시비하거나 경쟁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 꽃들을 보면서 ‘장미는 진짜 예쁜데 채송화는 왜 저렇게 못났을까?’하는 생각이 든다면 그 한 생각으로 그치지 않고 수많은 번뇌가 줄지어 일어납니다.

‘전생에 복을 많이 지으면 장미꽃이 되고 못된 짓을 많이 하면 채송화가 되나보다.’

그런 분별에 따라 ‘전생’이라고도 하고, ‘사주팔자’라고도 하고, 하늘이 내린벌’이라고도 이름붙이는 거예요. 그러나 장미는 다만 장미일 뿐이고 채송화는 다만 채송화일 뿐이에요.

각종 분쟁의 협상에서는 항상 유리한 쪽, 조금이라도 더 힘이 있는 쪽에서 먼저 양보를 해야 실마리가 풀립니다. 테러조직이나 깡패조직도 살살 회유를 해야지, 전쟁을 선포하고 몰아붙이면 끝까지 저항하잖아요. 강자가 약자에게 조금 숙이고 들어가면 양보이고 포용이지만, 약자가 숙이면 그건 굴복이고 굴욕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정말로 문제를 해결하고 싶으면 강한 쪽에서 뭔가 대승적으로 양보의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각종 분쟁이 일어나기까지 비극의 씨앗이 언제 뿌려졌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드러난 현상만가지고 상대를 단죄하려는 것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데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이에요. 진정한 평화는 상대의 고유성과 특성을 이해하고 인정할 때 찾아옵니다.

세상의 분노는 상당 부분이 이 순서를 뒤집어서 생각하기 때문에 생기는 겁니다. 이미 일어난 현실을 인정하고 이해하려고 하기보다, 내 기준을 고집하면서 옳고 그름을 따지려고 드니까 시비가 붙고 다툼이 벌어지고 화가 나는 거예요.

개인문제든 사회문제든 먼저 자기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아야 진전이 있지. 남만 탓해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어려워요. 설사 근본 원인을 찾지 못한다 해도 감정적으로 맞대응하지 않는 것이 더 큰 화를 피하는 방법입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감정을 뛰어 넘는 선택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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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전부 내 문제로 껴안거나 무조건 참으라는 의미는 아니에요. 감정에 치우쳐 문제의 본질을 놓치지 말라는 뜻입니다.

내가 억울한 일을 당했으니 똑같이 되갚아 주겠다는 생각은 원수가 원수를 낳고 폭력이 폭력을 부르기 때문에 절대 내가 이기는 길도 아니고 문제해결을 위한 올바른 길도 아니에요.

■ 통찰력, 고통에서 벗어나 사물의 전모를 보는 지혜

우리는 어떤 사물을 볼 때 주로 한 측면만 봅니다. 내 입장에서, 부모입장에서, 한국 사람입장에서만 봐요. 그래놓고 사물의 전모를 안다고 착각합니다. 이것이 결국 편견인데, 당사자는 소신이라고 말하지요.

제가 법문을 할 때 듣는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고 스님 말이 옳아요”하면 제 말을 이해했다는 뜻일까요? 반대로 고개를 저으며 “에잇 아니에요”하고 하는 사람은 제 말을 이해 못해서 그런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은 제 의견이 자기 생각과 같다는 뜻이고, 고개를 젓는 사람은 저와 생각이 다르다는 뜻이에요.

결국 우리는 제 나름대로 소신이라고 믿는 각자의 편견으로 세상을 봅니다. 그리고 그 편견에 비친 세상을 옳다. 그르다 판단해요. 마치 자기만의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서 제 눈에 보이는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의 색깔이 진짜라고 우기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늘 자기 주위의 좁은 범위만을 보고 또 자신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고 ‘이것이 진리다’ ‘이것이 정의다’라고 말합니다. 자기만 보니까 자식도 보이지 않고, 부모도 보이지 않고, 아내도 남편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우리집만 보니까 이웃집이 보이지 않고, 우리나라만 보니까 남의 나라가 보이지 않습니다. 내 종교만 보니까 이웃 종교가 보이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는 늘 한 측면만 고집하면서 내가 옳다고 주장합니다.

사물의 한 단면만 보는 것을 편견이라고 하고, 총체적으로 보는 것을 통찰력 또는 지혜라고 합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한 측면만 보는 것,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의 편견을 극복하고 두 눈을 뜨고 전체를 보는 겁니다. 나와 남을 같이 보고, 우리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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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을 같이 보고, 네 종교와 네 종교를 같이 보고, 내 나라와 네 나라를 같이 보고 남과 북을 같이 보는 것이 깨달음이에요. 전체를 봄으로써 진실을 바로 볼 수 있기 때문에 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편견을 가지고 사물을 바라보면 마치 깜깜한 방에서 손으로 더듬어 물건을 찾는 것과 비슷합니다. 찾다가 부딪쳐 넘어질 수도 있고 결정적으로 목표물을 못 찾거나 엉뚱한 것을 가지고 찾았다고 착각할 수가 있어요. 그런데 불을 켜고 사실을 보게 된다면 “아, 저기 있었네”하고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차람 통찰력을 갖게 되면 세상만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요. 그러면 이게 옳은가 그른가. 이래야 하나 저래야 하나 갈팡질팡 하던 마음이 금세 가벼워집니다. 어두웠던 마음이 금방 밝아져요 따라서 우리는 이 사회에 고정관념으로 자리잡은 지식과 정보에 연연하기보다 사물의 전모를 보는 지혜를 키워야 합니다. 그러면 주변 조건의 노예로 살지 않고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 타인을 위로할 때 얻는 공덕

제 마음에서 분단의 장벽이 무너진 것은 1996년 8월, 중국역사 기행을 다닐 때 겪은 일 덕분이었습니다. 그때 안내를 맡았던 조선족 청년이 제게 “북한 아이들이 굶어 죽고 있다”라며 도움을 요청했어요. 몇 번이나 호소를 했는데도 저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 청년이 거듭 “사실이니 직접 확인해보라”고 하기에 제가 ‘설마’하는 마음으로 압록강에 배를 타고 나갔어요. 그랬더니 정말로 북한쪽 강변에 깡마른 아이들이 힘없이 앉아 있는 거예요. 너무 놀라서 제가 “얘들아”하고 불렀는데도 아이들은 고개를 들지 않았습니다.

보통 배고픈 아이들은 낯선 사람이 지나가면 사탕 하나라도 얻으려고 따라다니는데 북한 아이들은 너무 반응이 없어서 이상했어요. 조선족 청년의 설명을 들어보니 북한 아이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교육을 받아서 배가 고프더라도 나라 망신시키면 안 된다고 외부 사람에게 구걸을 절대 안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일을 계기로 제 마음속 분단의 장벽이 허물어졌어요. 그날 이후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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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고, 어떤 비난을 해도 북한 동포 돕기를 멈출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제가 어려운 사람을 도울 때의 원칙은 세 가지입니다.

“배고픈 사람은 먹어야 하고, 병든 사람은 치료 받아야 하며, 어린 아이는 제때 배워야 한다.”

이것은 부처님의 마지막 유언에 나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아난존자가 “부처님께서 열반 하시고 나면 누구에게 공양을 올려야 큰 공덕을 지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래에게 올리는 공양과 똑같은 공덕이 있는 공양이 네 가지 있느니라. 첫째, 배고픈 사람이게 먹을 것을 줘서 배부르게 하고, 둘째, 병든 이에게 약을 줘서 치료하고, 셋째, 가난하고 외로운 자를 도우며, 넷째, 청정한 수행자를 잘 외호하는 것이다.”

지금 지구상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는 사람, 굶어 죽지는 않더라도 영양실조에 걸린 사람이 무척 많습니다. 지구 전체 인구가 약 70억이라고 하는 데, 그 가운데 20퍼센트 정도가 하우 일해서 버는 돈이 1달러가 채 안되는 극빈자라고 합니다. 그걸로 본인은 물론 가족까지 먹고 살아야 해요.

이런 사람들은 영양실조 상태가 심각하고, 학교교육은커녕 병의 치료를 받을 엄두조차 못냅니다. 전 세계인의 20퍼센트가 이런 극빈층에 속합니다.

북한에서도 불과 몇 년 전 (1995년~1998년)에 30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굶어 죽고 병들어 죽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은 살아남은 사람들도 가족이나 이웃이 굶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엄청난 아픔과 고통을 겪었다는 얘기입니다.

어려운 사람을 돕자고 하면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나도 먹고살기 어려운데 남을 어떻게 돕나?’

‘우리나라에도 가난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들부터 도와야 하지 않나?’

‘내가 가진 것으로 조금 도와봤자 표시나 나겠어?’

내 힘으로 한 명밖에 도울 수 없는데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열 명이라면 자신의 힘이 미약하다고 느껴질 거예요.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됩니다. 여건이 되는 대로 한 사람이든 두 사람이든 돕기 시작하면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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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남을 돕는 마음을 내면 그보다 몇 배나 더 큰 행복이 나에게 돌아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의 행복관은 내가 도움을 받는 쪽에 치우쳐 있습니다.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얻는 것이 행복’이라고 세뇌가 된 탓이에요.

하지만 받는 것을 행복으로 알고 살면 지금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더 잘살게 되어도 늘 밖으로 복을 구하게 되고, 그러면 평생 경제적 빈곤감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운좋게 일시적 행복을 누릴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지속가능한 행복을 만들기는 어렵습니다.

남에게 도움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만큼 종속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시간이 흘러 살 만해지면 어려운 시절에 도움을 받았던 사람을 만나기 싫어하는 경우가 많아요. 자신의 과거를 들추어내기가 싫기 때문이지요.

또 얻기를 바라는 사람의 소원이 성취되려면 남에게 도움받을 상황에 처해야만 합니다. 남에게 도움받을 상황이 된다는 것은 남이 보기에 불쌍한 사람,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에요. 결국 도움받는 것을 기쁨으로 삼는 사람은 자기 존재를 불쌍하게 만드는 겁니다.

우리는 저마다 괴롭고 힘든 문제들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삶의 기본적인 조건도 갖추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아요. 우리가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위로하는 마음을 가지면, 단순히 남을 돕는 데서 그치지 않고 내 문제가 가벼워집니다.

‘아, 내 문제는 별것 아니구나!’

‘나는 참 가진 게 많은 행복한 사람이구나!’

남을 돕다보면 사소한 것에 연연하며 괴로워하던 마음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뀌면서 내가 행복해집니다. 이것이 바로 남을 돕는 공덕이에요.

■ 사랑에도 차원이 있다

매년 1월이면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인도 성지순례 행사가 있습니다. 순례를 하다보면 아이들이 새카만 손을 내밀며 ‘박시시 박시시’하며 구걸을 합니다. 인정이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은 불쌍하다면 호주머니를 뒤져서 1루피 동전을 나눠줍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처음에 불쌍하다며 가장 열심히 동전을 나눠주던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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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들이 조금 지나면 짜증을 내기 시작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한 번 받았으면 돌아가야 하는데 또 달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너 아까 줬잖아.”

“쟤는 빼라, 쟤 방금 전에 나에게서 받은 애야.”

이렇게 난리에요. 나눠준 동전은 우리 돈으로 치면 100원 정도 됩니다. 동전 하나 줘놓고 그것도 두 번 받으면 난리를 칩니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남을 돕는 수준입니다.

제가 인도에 가서 불가촉천민을 돕게 된 계기는 1991년 부처님의 발자취를 따라 인도 여행을 처음 갔을 때 경험한 일 때문입니다. 캘커타에 도착한 첫날밤에 물을 사러 밖에 나갔는데, 어떤 여자가 아이를 안은 채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를 보자마자 옷을 잡아 당겨서 따라갔더니 조그만 구멍가게에 가서 아이 분유통을 가리켰습니다. ‘저걸 사달라고 하는구나’ 싶어서 주인에게 얼마냐고 물었어요. 그러니까 주인이 60루피라고 했어요.

그런데 제가 여행을 오기 전 사전교육을 받을 때 ‘구걸하는 애들에게 절대 1루피 이상 주면 안 된다’ 여기서는 1루피도 큰돈이다‘라고 들었던 것이 생각나서 굉장히 큰돈 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순간 깜짝 놀라서 사주지 않고 그냥 와버렸어요.

필요한 물만 두 병사서 게스트하우스에 돌아와 안내해주던 교수님에게 “60루피면 우리 돈으로 얼마나 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2,400원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 순간 머리가 띵해졌습니다. 그 사람은 2,400원짜리 분유를 사달라고 하는데 저는 마치 전 재산을 다 달라고 하는 것처럼 놀라며 와버렸거든요.

그 뒤 보드가야 근교의 수자타 템플을 찾아가는데, 이번에는 다리가 없어서 두 손을 짚고 다니는 아이가 제게 구걸을 했습니다. 제가 계속 안주니까 1킬로미터 이상을 계속 따라오는 겁니다.

‘이 아이는 볼펜 하나든 껌 한 통이든 사탕 하나든 얻기 위해서 이렇게 노력을 하는데 내가 안 주는 것이 과연 잘하는 것인가?’

이런 의구심이 들면서 그때 또 제 생각이 바뀐 겁니다.

결국 이 고민은 아이들의 문제가 아니라 제 문제였어요. 그래서 제가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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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는 나는 반성을 하되 거지가 되지 않게 해주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되었고, 이것이 인도 불가촉천민 마을에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짓고 우물 파주는 일을 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가 시행착오를 저지르고 뉘우친 것이 오히려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된 셈입니다.

처음부터 베풀었으면 이런 생각도 못했겠죠. 그러니 잘못한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잘못했을 때 잘못한줄 알고 뉘우치면 그게 오히려 진정한 사랑과 자비로 발전될 수도 있으니까요.

■ 행복은 재미와 보람 속에 있다

지금 우리나라는 경제적으로 살기도 좋아졌고 의식도 열린 편이지만 여전히 무언가 매여 산다는 점에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옛날에는 종의 신분으로 주인을 잘 만나거나 농노의 신분으로 좋은 땅을 배정받으려고 신분이나 토지에 매여 살았다면 요즘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을 벌기 위해 돈에 매여 살아가고 있어요. 신분에 매여 있으나 땅에 매여 있으나 자본에 매여 있으나 매여 있는 것은 똑같습니다.

사람이 기쁨을 느낄 때는 두 가지 경우가 있어요. 하나는 자기가 원하는 일

을 할 때, 다른 하나는 남에게 뭔가 도움을 줄 때 기쁨을 느낍니다.

그런데 현재의 재미만을 너무 추구하면 미래에 후회하거나 공허감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삶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겠지만, 저는 제가 가진 재능이 어느 곳에 쓰이면

가장 효과적일까를 늘 연구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000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굉장히 적은데, 인도에서는 1,000원이면 아이들 다섯 명이 한 끼를 먹

을 수 있어요. 같은 천원이라도 몇 배의 효과를 내기 때문에 여기서 절약했

다가 거기 가서 쓰면 돈의 가치가 커져서 보람이 더 커집니다. 그래서 저는

사람들이 가장 어려워하고 힘들어 하는 곳에 더 찾아가려고 합니다. 효과적

이면서 재미도 있고 보람도 크기 때문이에요.

사람들은 보통 천국에 가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저는 천국에 가고 싶은 생

각이 별로 없어요. 천국은 살기 좋다는데 그런 곳이면 제가 가서 할 일이 없

잖아요. 반대로 지옥에 가면 할일이 많을 거잖아요. 그곳에 가면 제 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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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이라도 보탬이 될 테니까 필요에 따라 쓰이면 훨씬 재미있고 보람 있을

겁니다.

그래서 가끔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며 전도 하시는 분들이 저더러 “당신,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하면 저는 “아이고, 감사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저는 강의할 때 강사료를 받지 않습니다. 강사료를 받고 강의하면 노동이

되지만 그냥하면 봉사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대가를 받지 못하면서도

강제로 노동을 계속해야 한다면 그것은 ‘노예 생활’이고 자기의 재능이나 능

력을 돈 받고 팔면 ‘노동’이라고 합니다. 100원을 받기로 하고 100원 어치

노동을 해줬는데 50원밖에 못 받는다면 그건 ‘노동착취’예요. 하지만 공익

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일을 하고 아무것도 받지 않으면 그것을 ‘봉사’라고

합니다.

행복한 삶은 돈에 매이지 않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돈을 얼마 더 받고 안

받고를 기준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내 쓰임새가 어디에 있는가를 중심으로

판단하고 실천하는 겁니다. 그래서 내 꿈과 이상을 실현할 수 있으면 돈을

내고서라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행복은 재미와 보람 속에 있기 때

문입니다.

■ 인생의 시간을 행복하게 나누어 쓰는 법

인생에 주어진 시간이 100이라면 80 정도는 현재의 자기 삶에 충실하면서

도 20정도는 세상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세상에서 필요로 하는 일을 해보라

는 것입니다. 그러면 직장도 다니고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봉사 활동도

할 수 있어요.

일상생활 속에서 20퍼센트의 사간을 내면 자기 삶을 더 복되게 살수 있습

니다. 보람 있는 일을 하면 즐거운 에너지가 샘솟기 때문에 나머지 80 퍼센

트의 시간만 가지고도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어요. 이렇게 살면 설거지를 하

든 청소를 하든 회사에서 일을 하든 언제 어디서나 즐겁게 살 수 있습니다.

인생의 시간에서 일부를 떼어 잘 활용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세계적인 기업 구글에는 ‘20 퍼센트의 법칙’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전체 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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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 시간의 20퍼센트를 직원들이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제도입니다. 구글

의 대표적인 상품이나 서비스의 대부분이 자유 시간에 만들어 졌다고 합니

다.

■ 어떤 순간이라도 우리는 행복을 선택할 수 있다

우리는 스스로 불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자꾸 내세웁니다. 그러나 어떤

삶을 살고 있더라도 우리는 행복해질 권리가 있고 행복을 선택할 수 있어요.

어머니가 나를 버렸든, 아내와 이혼을 했든, 남편이 바람을 피웠든 관계 없

이 행복해질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자신이 불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자꾸 내세워서 자신의 불행을 합리화합니다.

우리가 행복하고 불행한 것은 누구 책임인가요? 모두 자기 책임입니다. 자

기 인생은 자기 외에 책임져줄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시험에 떨어져도, 실

연을 당해도, 심지어 소중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도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괴로울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은 인생을 낭비하는 거예요.

우리는 아무리 상황이 어렵고 힘들어도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습니다. 이것

을 삶의 원칙으로 중심을 잡고 자기 인생을 남편이나 아내, 혹은 신에게 맡

기지 않아야 해요. 자기 인생의 행과 불행은 자기가 결정한다는 것을 꼭 기

억하세요. 부처님께서는 행복과 불행에 대해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행복도 내가 만드는 것이네

불행도 내가 만드는 것이네

진실로 그 행복과 불행

다른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네.

‘이렇게 되면 행복할 거다.’

‘이렇게 되면 자유로울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꿈이고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 처하든 지금 행복할 수 있어야 하고 지금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시간이 흘러도 늘 해결이 안 됩니다. 그래서

행복하기 위해서 사는데 죽을 때까지 행복을 맛보지도 못하고 꿈만 꾸다

가 죽는 사람이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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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더 이상 꿈만 꾸지 말고 직접 행복을 경험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내

인생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다면 그때부터는 다른 사람의 아픔에도 시선

을 돌려보세요. 한 달에 몇 시간, 아니면 1년에 며칠은 자기 재능을 돈 받고

팔지 말고 남을 위해, 세상을 위해 써보세요.

나 혼자만 성공하겠다거나 나만 잘 살아보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이 세상에

필요한 사람, 세상에 기꺼이 쓰이는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자

기도 행복하고 세상에도 보탬이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행복해질 권리를 실

천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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