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이 버린 천재들

2016. 8. 30. 18:17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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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버린 천재들

- 역사의 선각자로 부활하다 -

■ 이덕일 지음

0 1961년생

0 한국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한국 사학자로 평가

0 기업체 중앙공무원교육원의 고위공직자 과정 최우수 강사

0 저서 : 사도세자가 꿈꾼 나라,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 조선왕 독살사건, 이회영과 젊은 그들,

조선 왕을 말하다. 정도전과 그의 시대, 역사를 바꾼 여인들,

김종서와 조선의 눈물, 칼날 위의 역사,

당쟁으로 보는 조선 역사, 등

0 현재 한가람 역사문화 연구소장으로, 식민사관 척결과 21세기 한국을 이 끌어갈 신주류 사학의 정립에 노력

◉ 프롤로그 : 신념을 위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들의 유 쾌한 결기를 읽는다

0 아계(丫溪) 김일경(金一鏡) 1662~1724(영조 즉위년)

- 아(丫) ; 가장귀 아, 두 가닥, 가장귀지게 묶은 머리

- 조선 후기 누구 못지않게 유명했던, 유명했던, 그리고 금기시됐던 인물

- 소론 강경파로 경종 원년(1721) 12월 경종의 왕권을 위협하는 노론 사대신을 내몰고 신축환국을 달성한 주역, 그러나 3년 후 경종이 의문의 죽임을 당하고 노론의 지지를 업은 영조가 즉위하자 가장 먼저 사형당한 인물로 영조와 노론이 경종을 독살했다고 믿은 그는 영조에게 “시원하게 나를 죽이라”고 맞섰다. 그는 공초를 바칠 때마다 반드시 선왕의 충신이라 하고 ‘나(吾)’라고 했으며 ‘저’라고 하지 않았다. 곧 영조를 임금으로 여기지 않았다.

- 부대시처참(不待時處斬)당함 :옛날에는 사형을 집행할 때 봄 여름에는 집행하지 않고 추분까지 기다리는 것이 원칙인데 큰 죄의 경우에는 즉시 집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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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경의 후손은 철저하게 가려내어 사형을 시켰는데 그 중 한 명이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아 명맥을 이어옴, 현재 경북 봉화 물야면의 광산 김씨들이 그들이라 한다.

노론은 그 이후 나라가 망할 때까지 계속 집권을 했고 조선 멸망에 협조한 대가로 일제강점기 때도 그 세력이 온존했으며, 특히 역사학계는 노론 유력가문의 후예로서 조선총독부 직속의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했던 한 사학자가 해방 이후 국사학계의 태두 지위를 누리는 바람에 김일경은 사육신과 달리 아직껏 학문적으로 신원되지 못했다.

아계 김일경처럼 왕권을 위협하는 거대 정당에 맞서 싸웠다든지, 윤휴(尹鑴)처럼 주자학 유일사상 체제에 맞서 싸우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든지, 윤증(尹拯)처럼 증오의 시대에 사랑의 정치를 역설하다가 은둔했다든지, 이가환 이승훈처럼 폐쇄된 사회에서 개방된 사회를 지향하다가 사형당했다든지, 소현세자처럼 열린 미래를 지향하다가 독살되었다든지, 김개남처럼 민중이 주인이 되는 남조선 개창을 꿈꾸었다든지 해야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다.

■ 어떻게 살 것인가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을 쓰면서 수없이 되물었던 질문이 있다. 정약전, 약종, 약용 형제 중에 굳이 선택 한다면 누구의 인생을 살 것이냐의 질문이었다.

정약용과 큰형 약전은 천주교를 버렸지만 둘째 약종은 그러지 않았다. 그는 정조 사후 노론이 남인들을 천주교도로 몰아 멸절시키고자 설치한 죽음의 국청에서 나라에서 천주교를 금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당당히 꾸짖고 형장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노론의 나라를 떠나 하늘로 간 정약종의 인생은 범인이 쉽게 따를 수 있는 길은 아니었다.

정약용이 소내(苕완두 초, 풀이름 소 川) 고향집의 당호를 ‘여유당(與猶堂)’이러고 붙인 것은 그의 속내를 잘 보여준다. “망설이면서(與) 겨울에 냇물을 건너는 것 같이 주저하면서(猶)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한다”는 <노자>의 구절에서 따왔다. 그가 정조 없는 노론의 세상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짐작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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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는 대목이다. 겨우 죽음을 면하고 귀양길에 오른 그는 세상과 절연한 대가로 훗날 ‘다산학’이라 불리는 학문의 성을 쌓을 수 있었다.

반면 정약전은 정약용이 ‘선중씨(정약전) 묘지명’에서 “공(정약전)이 바다 가운데 들어온 때부터는 더욱 술을 많이 마셨는데 상스러운 어부들이나 천한 사람들과 패거리가 되어 친하게 지냈다”라고 쓴 것처럼 민중의 삶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 역사가의 붓

연산군 때 사관 김일손(金馹孫)은 사림 영수 김종직의 제자였다. 그는 죽은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성종실록>에 실으려다가 화를 입게 된다. 항우에게 죽임을 당한 의제를 단종에 비유하고 수양대군을 항우에 비유한 조의제문’을 실은 것은 “신하(수양대군)가 임금(단종)을 찬시(簒弑 자리를 빼앗고 죽임)했다”는 기록을 후대에 남기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김일손은 ‘조의제문’에 “충분(忠憤)이 깃들어 있다”고 덧붙였는데, 이것이 유자광 같은 훈구공신들에게 간파되면서 무오사화가 발생한다. 사화(士禍)는 ‘선비가 화를 입었다’는 뜻이지만 무오사화를 사화(史禍)라고도 쓰는 이유는 김일손, 권경유, 권오복 같은 사관들이 사지가 찢겨 죽는 능지처참을 당했기 때문이다.

김일경의 핏줄은 우여곡절 끝에 보존됐지만 김일손의 핏줄은 폭군 연산의 거듭된 추적으로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가 자식보다 소중하게 전하고자 했던 ‘조의제문’은 <연산군 일기>에 그의 국문 기록으로 고스란히 남았다.

<사기>를 쓰기 위해 살아남은 사마천, 사초를 전하기 위해 죽어야 했던 김일손, 사대주의를 버리고 민족 주체 역사관을 되살렸던 여러 독립운동가 겸 역사학자들, 그들의 공통점은 그 시대가 아니라 다음 시대와 대화한 데 있다. 그 시대의 논리를 뛰어 넘는 역사 인식이 이들에게는 있었다. 역사의 진정한 목소리는 그 시대가 아니라 다음 시대에 전해지는 것이란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시대의 상식에 도전한 천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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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필자는 그 시대와는 불화했던 사람들에게 우리 시대로 걸어오라고 작은 오솔길을 놓았다. 그러자 주자와 다르게 경전을 해석했고 사문난적으로 몰렸던 윤휴, 양명학자임을 선언했던 정제두, 지역 차별에 맞섰던 홍경래, 인조반정을 쿠데타라고 꾸짖었던 유몽인, 서얼 출신으로 새 세상을 지향했던 유득공과 박제가, 오랜 귀양생활 끝에 유배지에서 죽어간 이광사, 그리고 새로운 나라를 개창하려던 동학의 영수 김개남 등 스물 두 명이 우리 시대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그들을 하나의 이름으로 묶기는 쉽지 않다. 때로는 시대를 바꾸려던 혁명가일 수도 있고, 다수가 상식이라고 믿던 신앙에 반기를 든 시대의 이단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 모두의 공통점은 그 시대의 상식에 도전했던 천재들이라는 점이다.

천재란 많은 것을 외우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천재란 대다수 사람이 상식이라고 믿는 개념과 구조에 반기를 들고 싸운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반기가 나중에는 주류의 깃발이 된 것이 인류 발전의 역사였다.

2016. 4월 한강 변에서 천고(遷固) 이덕일 기(記)

1부 틀을 깨다

1장 왕도정치를 꿈꾼 비운의 혁명가 정도전

정도전(鄭道傳)은 고려 우왕 1년(1375) 북원(北元) 사신의 접대를 거부했다가 지금의 전남 나주 지방인 회진현 거평부곡에 유배된다. 당시 고려는 신구 세력 간의 외교정책 갈등이 한창이었다. 친명 정책을 주장하던 그에게 권신 이인임. 경홍복이 사신 접대를 맡기자 “나는 원나라 사신의 목을 베든지, 오라를 지워서 명나라로 보내겠소”라고 반발했다가 유배를 가게 된다. 그는 부친이 형부상서를 지낸 정운경이었지만 모친이 서녀여서 벼슬길에 오르는 과정에서 많은 고초를 겪었다. 그런데도 신념에 따라 친명 외교를 추구했고 결국 유배형에 처해졌다.

그는 유배지에서 화려한 벼슬길보다 더 큰 교훈을 얻었다. 그가 부인에게, “예전의 내 친구들은 정이 형제보다 더 깊었는데 내가 패한 것을 보더니 뜬 구름처럼 흩어졌다.”고 답한 것처럼 그는 친구들을 잃었지만 대신 민중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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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지에서 천민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정도전은 백성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다. 이것이 중요한 전기였다. 정도전이 토지개혁에 집착한 것은 토지 문제를 백성의 시각으로 바라본 결과였다.

■ 토지제도 개혁과 조선의 개창

유배에서 풀린 그는 우왕 9년(1383) 함경도 함주로 이성계를 찾아가 그의 군대를 보고, “이 군대로 무슨 일인들 성공하지 못하겠습니까?” 라고 말한다. ‘무슨 일’이 무엇인가는 이심전심으로 통했다. 둘의 만남은 정도전의 혁명 이념과 이성계의 혁명무력의 만남이자 결합이었다. 이듬해인 우왕 10년(1384) 10년 만에 다시 벼슬길에 오른 정도전은 이성계의 후원으로 승승장구한다. 1388년 5월 위화도 회군으로 어수선한 정국은 정도전의 기획에 의해 토지개혁 정국으로 전환된다.

정도전이 구상하는 토지개혁은 국가가 토지를 몰수하여 공전(公田)으로 만든 다음, 백성들의 수대로 나누어 주는 계구수전(計口授田)방식이었다. 그래서 공양왕 2년(1390) 기존의 모든 토지문서를 서울 한복판에 쌓은 후 불을 질렀다. 그 불이 여러 날 동안 탔다는 고려사 <식화지>의 기록처럼 모든 토지문서를 불태운 뒤 그 토대위에서 공양왕 3년(1391)새로운 토지제도인 과전법(科田法)을 반포했다.

그러나 과전법은 모든 백성에게 토지를 나누어주지는 못하고 직역자에게만 토지를 주는 방식으로 후퇴했는데 이는 권세가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정도전은 “백성에게 토지를 분배하는 일이 비록 옛사람에게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토지제도를 정제하여 1대의 전법을 삼았으니 전조(고려)의 문란한 제도에 비하면 어찌 만 배나 낫지 않겠는가?”라고 토지개혁의 성과를 자부했다. 토지개혁의 혜택을 입은 백성들이 새 왕조 개창을 지지했기에 조선건국의 기반이 조성되었다.

■ 표전문 사건과 요동 정벌

정도전은 불교를 극력 비판하는 <불씨잡변>을 썼지만 과전법 시행에서 보

듯이 보수적 인물이 아니었다. 또한 친명 외교정책을 주장하다가 유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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갔지만 사대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사대주의는커녕 요동 수복을 모색했던 인물이 정도전이었다.

정도전이 개국 직후인 1392년 10월 계품사(啓稟使) 및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간 것은 표면상 새 나라 개창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지만 속내는 달랐다. 명 태조 주원장은 조선의 태조 이성계에게 1393년 5월 흠차내사(중국 임금의 명을 받들어 파견되는 대신) 황영기 등을 사신으로 보내 “사람을 요동으로 보내 포백과 금은으로 우리 변경을 꾀었다”고 비판하고 또 “요사이 몰래 사람을 보내어 여진족을 꼬여 500여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넜으니 죄가 이보다 큰 것이 없소”라고 항의했다. 정도전이 요동 수복을 위해 사람을 포섭하고, 여진족을 회유하는 첩보활동을 했다는 항의였다.

드디어 명나라는 태조 5년(1396) 2월 ‘표전문(表箋文)사건’(조선이 중국에 보낸 국서의 형식을 문제 삼아 정도전의 압송을 요구한 사건)을 빌미로 정도전의 압송을 요구했다. 정도전은 명의 의구심을 풀기 위해 그해 7월 판삼사사(종1품)에서 봉화백으로 물러났으나 주원장은 정도전의 인도를 거듭 요구했다.

정도전과 함께 북벌에 적극적이었던 남은(南誾)은 “사졸이 이미 훈련되었고 군량이 갖추어 졌으니 동명왕의 옛 강토를 회복할 만합니다”라고 상서했다.

정도전은 태조 6년(1397) 12월 22일 동북면 도선무순찰사가 되어 함경도 지역의 주군 구획과 호구 정리, 성보 수리, 그리고 군관의 재품 등을 파악하고 정비했다. 이 역시 전쟁 준비였다. 이성계는 재위 7년(1398) 함경도에 있는 정도전에게 서신과 옷 등을 내려주면서 임금이란 명칭 대신에 ‘송헌거사(松軒居士)’라는 당호(堂號)를 사용할 정도로 깊은 신임을 보였다.

■ 사병 혁파와 목전에서 좌절된 요동 수복

그러나 요동 정벌을 위해 각 왕자와 공신들이 소유한 사병(私兵)을 혁파하고 군제를 단일화하려 하자 커다란 반발이 일어났다. 사병 개혁에 대한 반발이었다. 요동 정벌에는 고토 회복이라는 역사적 당위성뿐만 아니라 사병 혁파라는 국내 정치적인 요소도 들어 있었다. 정도전은 요동 정벌이란 대의명

분으로 군제를 단일화함으로써 여러 왕자와 공신들이 갖고 있던 사병을 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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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으로 편재하려 한 것이다.

이때 대다수 왕자는 이성계의 강력한 명에 복종하여 사병 혁파에 응했지만 이방원과 방간이 거부해 난을 일으키면서 요동 수복은 목전에서 좌절 되었다. 태조 7년(1398) 이방원은 이성계가 와병 중인 틈을 타 전격적으로 난을 일으켰다. 제1차 왕자의 난이었다. 이방원과 방간이 군사를 일으켰을 때 정도전은 남은의 첩 소동(小洞)의 집에서 이직과 술잔을 나누고 있다가 살해된다. 그만큼 전격적인 쿠데타였다. 정도전뿐만 아니라 남은, 심효생, 이근, 정지화 등 북벌을 주장하던 인물들은 모두 살해됐다.

새나라 개창에 성공했던 정도전이 꿈꾸었던 요동 정벌은 이렇게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모든 백성에게 ‘지극한 정치’의 혜택을 주고자 했던 정도전, 요동수복으로 중화 사대의 틀을 깨고자 했던 그의 꿈들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2장 칼을 찬 선비, 칼을 품은 선비. 조식

언제부턴가 선비와 칼은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달랐다. <남명선생 별집> ‘언행총록(言行總錄)’은 조식이 “칼을 차는 것을 좋아했다”고 전한다. 경상감사 이양원(李陽元)이 조식에게 부임 인사를 하며 무겁지 않으십니까? 라고 묻자 “뭐가 무겁겠소. 내 생각에는 그대 허리춤의 금대(돈주머니)가 더 무거울 것 같은데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런 그의 칼에 검명(劍銘)이 새겨져 있었다.

義內明者敬 의내명자경

안으로 마음을 밝게 하는 것은 경이요.

外斷者義 외단자의

밖으로 시비를 결단하는 것은 의다.

증조부가 한양에서 경상도 삼가현(三嘉縣)으로 이주하면서 조식의 집안은 이 지역에 정착했다. 그는 이곳에서 과거 공부를 했으나 곧 과거 시험이 자신에게 맞지 않음을 알게 된다. 스무 살 때인 중종 15년 문과 초시에 합격했으나 “과거 시험은 애초에 장부가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이 되지 못한다”라고 했다. 열아홉 살 때인 중종 14년(1519)에는 조광조가 죽는 기묘사화기 발생하는데, 여기에 연루되어 숙부 조언경이 파직된 것도 그가 이런 생각을 하는데 일조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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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과 모친의 권유로 몇 번 더 과거에 나가기는 했으나 <대학> 발문에, “문장이 과거 문장(科文)의 형식에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라고 적고 있는 것처럼 이미 마음은 과거를 떠나 있었다.

■ 과거와 주자학의 굴레를 벗어던지다

서른 살 때 김해로 이주해 신어산(神魚山)에 산해정사(山海精舍)를 짓고 마흔 다섯 살 때까지 거주했는데, ‘산해’는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큰 학문을 하겠다는 뜻으로 주자학의 굴레에 갇히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조식은 서른일곱 살 때인 중종 32년(1537) “세상의 도리가 어긋나고 시속이 흐려져 과거로 출세한다는 것은 곧 이에 가담하는 것이란 생각을 하고, 어머니께 예를 갖추어 아뢰고 과거공부를 영영 하지 않았다”라고 전하고 있다. 바로 그해 학문을 가르쳐 주기를 청하는 정지린(鄭之麟)을 제자로 받아들였는데, 그가 훗날 북인(北人)이란 당파를 형성하는 첫 제자였다.

서른여덟 살 때 이언적(李彦迪)의 천거로 헌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거절했다. 당시는 척신 윤원형(尹元衡)이 주도하는 사회의 시대였다.

마흔다섯 살 때인 인종 1년(1545), 을사사화로 그의 여러 친구가 희생됨

- 병조참의 이림, 사간원 사간 곽순.

- 조식의 이웃사촌이었던 성운의 형 성우

- 1547년에는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친구인 송인수가 사사

명종 3년(1548) 전생서 주부에 제수되었으나 거절, 명종 6년(1551) 종부시 주부에 제수되었으나 거절

■ 온 나라를 뒤흔든 단성현감 사직상소

조식의 거듭된 출사 거부는 뜻밖에도 퇴계 이황과 작은 논쟁으로 이어진다. 명종 8년(1553) 이황은 조식에게 편지를 보내 벼슬을 사양한데 대한 섭섭한 검정을 드러냈다. 그러자 조식은 이황에게 답장을 보내 ‘식(植)과 같이 어리석은 사람이 어찌 자신을 아껴서 그랬겠습니까’라고 답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단지 헛된 이름을 얻음으로써 한 세상을 크게 속여 성상에게까지 잘못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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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지게 된 것입니다.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도 도둑이라 하는데, 하물며 하늘의 물건(관직)을 훔치는 데 있어서겠습니까?” (퇴계에게 답합니다)

퇴계 이황은 조식의 편지에 마음이 상했다. 사림의 종주인 자신의 천거마저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식에게 중요한 것은 누가 천거했는지가 아니라 그 시대의 의미였다.

* 퇴계 이황(1501년~1570), 남명 조식(1501~1572)은 동갑내기

조식이 명종 10년(1555)에 단성현감으로 임명되었으나 고사하면서 올린 을묘사직상소 즉 단상현감 사직상소에서 조식이 단성현감 제수를 사양하는 이유로 먼저 든 것은, 자신은 헛된 명성만 있지 벼슬을 감당할 만한 인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뒤이어 명종 즉위 뒤의 정사에 대해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혹평했다.

전하의 국사(國事)가 이미 잘못되고 나라의 근본이 망하여 천의(天意)가 떠나갔고 인심도 떠났습니다. 소관(小官)은 아래에서 히히덕거리면서 주색이나 즐기고 대관(大官)은 위에서 어물거리면서 오직 재물만을 불립니다. 백성들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신은 이 때문에 깊이 생각하고 길게 탄식하며 낮에 하늘을 우러러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며, 한탄하고 아픈 마음을 억누르며 밤에 멍하니 천장을 쳐다본지 오래되었습니다.(<명종실록> 10년 11월 19일)

이는 명종 10년 치세에 대한 전면 부정이었다. ‘나라의 근본이 망하여 천의와 인심이 떠났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뒤이어 더 놀라운 표현이 등장한다.

자전(문정황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지만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寡婦)에 지나지 않으시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단지 선왕의 한낱 외로운 후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천백가지의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하며 무엇으로 수습하겠습니까?

■ 문정왕후는 ‘궁중의 과부’일 뿐

문정왕후에 대한 언급은 당대의 금기였다. 명종 2년(1547) 경기도 광주의 양재역에 “여왕이 집정하고 간신 이기(李芑)등이 권세를 종간하여 나라가 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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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려 하는데 보고만 있을 것인가?”라는 벽보가 붙은 것이 양재역 벽서 사건인데, 조식의 친구 송인수를 비롯해 많은 사림이 죽었고, 이에 문정황후에 대한 언급은 금기 중의 금기가 되었다. 그런 문정황후를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지칭하고 명종을 ‘선왕의 한낱 외로운 후사’라고 했으니 평상시라도 목숨을 부지하기가 어려웠을 텐데 하물며 문정황후와 윤원형이 실권을 장악한 시절이었다.

그러나 윤원형과 문정왕후는 조식을 죽이지 못했다. 은거 선비의 사직상소를 문제 삼아 죽이려 하는 것은 도리어 그를 영웅으로 만들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단성현감 사직상소는 은거처사 조식을 단숨에 전국 제일의 선비로 만들었다. 그러나 <퇴계집> ‘언행록’에 따르면 이황은 오히려 조식의 상소를 비판했다.

‘대개 소장은 원래 곧은 말을 피하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모름지기 자세하고 부드러워야 하며 뜻은 곧으나 말은 순해야 하고, 너무 과격하여 공손하지 못한 병통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아래로는 신하의 예를 잃지 않을 것이요. 위로는 임금의 뜻을 거스르지 않을 것이다. 남명의 소장은 요새 세상에서 진실로 얻기 어려운 것이지만 말은 정도를 지나 일부러 남의 잘못을 꼬집어 비방하는 것 같다.임금이 보시고 화를 내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 나라의 명운을 쥔 것은 백성이다

백성이 나라를 엎어버리기도 하고 천자가 되는 것도 백성에게 달렸다고 생각하는 조식과 백성은 사대부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피지배층이라고 생각하는 주자학자들과는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조식의 사상은 주자학에 매몰되지 않았다. 단성현감 사직상소에서 “불씨(佛氏)의 이른바 진정(眞定)이란 것은 다만 이 마음을 보존하는 것일 뿐이니, 위로 천리(天理)를 통달하는 데는 유교와 불교가 한가지 입니다”라며 불교와 유교의 근본원리가 같다고 공개적으로 말한 인물이 조식이었다.

■ 학문의 산실 산천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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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식은 예순한 살 되던 명종 16년(1561) 지리산 덕천동에 산천재(山川齋)를 지어 이주해 죽을 때까지 머물며 강학(講學)에 힘썼다

그는 갓 즉위한 선조가 교지로 부르자 올바른 정치의 도를 논한 상소문 무진봉사(戊辰封事)를 올려 사양하면서 개혁을 주문했다. 이때 향리의 횡포문제를 지적한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은 이후 조선의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한편, 조식이 예순네 살 때인 명종 19년(1564) 이황에게 보낸 편지에는 마치 21세기 학자들의 학문하는 자세를 꾸짖는 듯한 대목이 나온다.

요즘 공부하는 자들을 보건데 손으로 물을 뿌리고 빗질하는 법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를 담론하여 헛된 이름이나 훔쳐서 남들을 속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남에게서 사기나 당하고 그 피해가 다른 사람에게까지 미칩니다.

조식은 선조 5년(1572) 일흔두 살을 일기로 산천재에서 생을 마쳤다. 세상을 떠나기 전 제자들이 사후의 칭호를 묻자 “처사(處士 벼슬을 않고 초야에 묻혀 살던 선비)로 쓰는 것이 옳다”라고 말했다.

칼을 찬 선비 조식의 진가는 임진왜란 때 발휘되었다. 그의 제자들이 대거 의병장으로 활약한 것이다. 제자이자 외손서인 홍의장군 곽재우를 비롯해 수제자 정인홍과 김면, 그리고 조종도, 이노, 하락, 전치원, 이대기, 박성무 등 쟁쟁한 의병들이 모두 조식의 제자였다.

그의 제자들로 형성된 북인은 의병장을 대거 배출하며 정권을 창출했고, 처사 조식은 선조 36년(1602)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그러나 광해군과 전란 극복에 힘쓰던 북인은 인조반정으로 정계에서 축출되고, 주요 인사들이 사형당하면서 정계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3장 사대부에 맞서 주화론을 제기하다 이경석

(1595, 선조 28년 ~ 1671 현종 12년)

인조 14년(1636) 봄, 후금(後金)은 청(淸)으로 국호를 바꾸고 황제를 칭하면서 마부대(馬夫大)를 사신을 보내 양국의 형제관계를 군신관계로 바꾸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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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구했다. 이에 분개한 척화론자, 즉 주전론자들은 마부대를 죽이자고 주장했으나 당시 조선은 전쟁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이때 척화론을 배격하고 주화론(主和論)을 주청한 인물이 대사헌이었던 백헌(白軒)이경석(李景奭)이다.

“척화 일사가 어찌 정대하고 명쾌하지 않겠는가마는 국사와 민심이 한가지로 믿을 것이 없는 상황에서 사세를 돌보지 않고 강적에게 분을 돋우는 것은 계책이 아니다.”

척화론이 아니면 사대부 대접을 못 받던 때 주화론 주창은 용기 있는 시도였으나 현실적인 그의 주장은 척화론에 묻혀버렸다. 쿠데타로 집권한 인조 정권의 한계이기도 했다. 광해군 폐위교서의 “우리나라가 중국 조정을 섬겨온 것이 200여 년이라, 의리로는 곧 군신이며 은혜로는 부자와 같다”는 구절이나 “광해는 배은망덕하여 천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속으로 다른 뜻을 품고 오랑캐에 성의를 베풀었으며……”(인조실록 1년 3월 14일)라는 구절이 이를 말해준다.

광해군의 실리 외교를 상국에 대한 배신이라며 쿠데타를 일으킨 인조 정권으로서는 척화론 외에 길이 없었다. 주화론은 광해군의 실리 외교가 옳은 것이었음을 인정하는 반정(反正)의 자기부정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 병자호란과 도망가는 인조

1636년 12월 청태종은 여진군 7만, 몽골군 3만 도합 12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고, 인조는 정묘년에 그랬던 것처럼 강화도로 몽진 하려 했으나 이미 길이 끊겨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40여일 뒤 성안의 양식이 떨어지고 수많은 군사가 얼어죽자 강화를 요청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이것이 병자호란이다.

이듬해 1월 30일 인조는 소현세자를 비롯한 백관을 거느리고 삼전도(三田渡 지금의 송파구)로 나가 황옥(黃屋)을 펼치고 앉은 청태종에게 세 번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이른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행했다. 그리고 훗날 ‘삼전도의 치욕’이라 불리는 조약을 체결했다. 그 자리가 수항단(受降檀)인데 청나라는 여기에 ‘대청황제 공덕비’건립을 요구했다. 이것이 세칭 삼전도비(三田渡碑)인데, 누가 비문을 짓느냐가 문제였다. 우여곡절 끝에 이경석이 글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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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전도 비문의 찬술

국왕 인조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던 이경석은 비문 일부를 개찬하고는 공부를 가르쳐준 형 이경직에게 편지를 보내, “글공부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됩니다”라고 썼다. “수치스러운 마음 등에 업고 백 길이나 되는 어계강에 몸을 던지고 싶다”라는 시는 그의 고통을 잘 말해준다.

훗날 이경석은 비문 찬술을 이유로 송시열과 그 제자들로부터 수많은 수모와 공격을 당했으니, 그야말로 소절(小節)이 대의(大義)를 꾸짖는 격이었다.

■ 세 가지 신조

이경석은 정종의 열 번째 아들인 덕천군(德泉君) 이후생의 6대손으로 부친의 임지인 제천 관아에서 태어났다. 광해군 10년 문과 별시에 급제했으나 인목대비 폐위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합격이 취소되고, 인조 1년(1623)다시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왔다.

그가 평소에 지키려던 한 덕목을 보면 그의 인격을 알 수 있다. 검덕(儉德), 불편부당(不偏不黨)과 함께 무무출(無廡出)이 그것이다. 무무출은 후실, 즉 축첩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니 축첩이 일반화된 사회에서 특이한 일이었다.

그는 전란의 시대를 산 선비답게 국가와 고난을 함께 했다. 인조 19년(1641) 세자 이사(세자시강원의 벼슬)가 되어 소현세자가 있는 심양으로 가서 병자호란 때 끌려온 사람들의 석방에 노력한다. 이후 잠시 귀국했다가 인조 20년(1642) 다시 심양으로 가는데 이때 사건이 발생했다. 명나라 선박이 선천에 정박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청나라에서 수사에 나서고 조정의 연관 사실을 부인했으나 구금되었다. 그는 8개월 만에 ‘영원히 다시 벼슬자리에 등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석방되어 귀국했다.

그는 인조 23년 그의 영불서용 조처가 풀림에 따라 이조판서로 임용되었고, 송시열, 송준길 같은 사람들을 대거 등용해 한 때는 그들의 주인으로 불렸다.

■ 북벌계획의 책임을 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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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 1년(1650)김자점이 역관 이형장을 시켜 북벌계획을 밀고 하면서 청나라 사문사(査問使) 6명이 조사차 의주로 나왔다.

이경석은 “저들이 만일 무리한 일로 힐책을 할 경우 신이 직접 담당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라가 무사하다면 신이 어찌 감히 몸 하나를 아끼겠습니까?”

청나라 사신은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이경석을 ‘대국을 속인 죄’로 몰아 극형에 처하려 했다. 이에 효종이 그의 구명을 간청하며 막대한 뇌물을 전달했다. 이 덕분에 이경석은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의주의 백마산성에 감금당해 앞일을 기약할 수 없게 된다.

이경석은 다시 ‘영원히 서용하지 않는다’는 서약을 하고 투옥 1년 만에 석방되었는데, 그의 귀국길에는 사민(士民)들이 몰려들어 환호했을 정도로 백성의 신망이 두터웠다.

■ 송시열과의 시비

청나라의 감시 때문에 명예직에 가까운 영돈령부사나 영중추부사 같은 자리만 맡아 국사를 자문하는 것이 정치 활동의 전부였으나 그는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국가 원로가 되었다. 일흔네 살이던 현종 9년(1668) 신하의 영예인 궤장(几杖 연로한 대신에게 왕이 하사하는 의자와 지팡이)과 잔치가 내려졌는데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이후 50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듬해 현종은 온양온천에 거동하면서 이경석을 유도대신(임금이 서울을 떠났을 때 정무를 맡아보던 대신)으로 삼았는데 이때 현종에게 올린 상소가 뜻밖에도 송시열과 분쟁이 되면서 시비에 휩싸인다.

이경석의 상소 내용은 ‘임금이 있는 행궁에 신하들이 달려가 문안하는 신하가 없다’는 내용이었다.

송시열은 이 상소를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생각했다.

이경석은 현종 12년(1671) 취현동 자택에서 사망했는데, 숙종 28년(1702)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이 이경석의 신도비를 쓰면서 이경석을 옹호하고 송시열을 비판한 것을 계기로 논란이 재현되었다. 정권을 장악한 노론은 아직 발표도 되지 않은 박세당의 사변록(思辨錄)에 주희와 다른 경전 해석이 있다면서 사문난적으로 몰아 삭탈관직했다. 이 때문에 이경석의 신도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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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여년 뒤인 영조 30년(1754)에야 이광사의 글씨를 받아 겨우 세워졌으나 송시열을 따르는 노론은 신도비를 갈아서 없애버렸다. 불편부당과 무비방을 신조로 삼은 이경석도 노론의 당심(黨心)을 비켜가지는 못했던 것이다.

4장 북벌과 사회 개혁을 꿈 꾼 비운의 정치가, 윤휴

- 1617(광해군 9년) ~ 1680(숙종 6년) -

임진왜란, 병자호란 양란(兩亂)은 조선 사회체제의 파탄을 의미했다. 더 정확히는 양반 사대부 지배체제의 파탄이었다. 지배층의 무능을 여실히 목도한 피지배층은 체제 변화를 요구했다. 체제 변화 요구는 두 가지로 압축 될 수 있다. 하나는 주자학(성리학) 유일사상 체제의 폐기이고 다른 하나는 신분제의 완화이다. 이런 요구에 대해 사대부는 두 세력으로 나뉘었다.

- 서인 영수 송시열로 대표되는 세력은 주자학 유일 체제와 신분제를 강화하는 복고적 노선, 조선 성리학의 주류는 이들에 의해 예학(禮學)으로 바뀜

- 백호(白湖) 윤휴(尹鑴)로 대표되는 사대부들을 중심으로 성리학에서 탈피하려는 세력

■ 주희와 배치되는 견해

윤휴는 왜 주희와 배치되는 견해를 갖게 되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단 그의 가계와 학맥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윤휴는 광해군 7년(1617) 윤효전(尹孝全)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광해군 때 사헌부 대사헌을 지낸 북인으로서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이었다. 윤휴의 외조부 김덕민(金德敏)은 북인의 정신적 지주였던 남명 조식의 친구 성운(成運)의 제자였다. 성운은 성리학자들이 이단으로 보았던 노장(老莊)에 심취했던 인물이다. 윤휴는 양명학을 소개한 이수광(李睟光)의 차자 이민구(李敏求)에게도 사사했다. 부친과 외조부, 이민구는 모두 정통 성리학자들과는 거리가 있는 인물들이었다. 이들에게 학문을 배운 윤휴는 주희를 금과옥조로 떠받들지 않게 되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영민해서 곧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윤휴와 숙명적 맞수가 되는 송시열도 한때는 “백호는 학문이 높아 다른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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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들이 따를 수 없으며 전인(前人)들이 미처 생각지도 못한 것을 추구하고 새로운 이치를 발견해낸다”라고 칭찬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윤휴가 <중용>, <대학>등의 경전을 주희와는 달리 해석하면서 두 사람은 충돌하게 된다.

윤휴의 일생에 큰 충격을 주었던 것은 스무 살(1636) 때 겪었던 병자호란이었다. 이듬해 강화도가 함락되자 윤휴는 속리산 복천사에서 송시열을 만나, “지금 이후로는 다시 과거에 응시하지 않을 것이오”라고 말했다. 오늘의 치욕을 잊지 말고 북벌을 단행하자는 다짐이었다.

이후 그는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만 열중했다. 문명이 높아가자 효종 6년(1655) 우의정 심지원의 추천으로 세자시강원 자의에 제수된 것을 비롯해 여러 차례 벼슬이 내려졌으나 끝내 사양했다. 그의 명성은 높아져 갔다.

그러나 그의 학문체계가 주희와 다른 사실이 밝혀지면서 서인 내부에서 그를 둘러싼 사문난적 논쟁이 벌어진다.

집권 서인에게 주희는 일개 학자가 아니라 성인이었는데, 윤휴가 그와 다른 학문체계를 수립하자 격하게 반발했다. 그러나 모든 서인이 윤휴를 비판한 것은 아니다. 윤선거는 윤휴의 학문을 지지했는데, 이 때문에 큰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송시열이 “하늘이 공자를 이어 주희를 냈음은 진실로 만세의 도통(道統)을 위한 것이다. 주자가 난 이후로 현저해지지 않은 이치가 하나도 없고 밝아지지 않은 글이 하나도 없는데 윤휴가 감히 자기 소견을 내세워 마음대로 억설(臆說)한다”고 비판하자 윤선거는 “의리는 천하의 공적인 것인데, 지금 희중(希仲 윤휴의 자)에게 감히 말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은 무슨일인가?”라고 답했다. ‘천하의 공적인 의리를 어찌 주희 혼자 독점할 수 있느냐’는 말로, 주희 혼자 경전 해석을 독점해서는 안 된다는 반발이다. 이는 주자학 유일사상 체제에 대한 공격이기도 했다.

송시열에게 주자학은 종교 교리였으나 윤휴에게는 일개 학문에 불과했다. 이런 점에서 둘의 화해는 불가능했다. 이런 상황에서 윤선거는 시종일관 윤휴의 사상을 지지했다. 그래서 송시열과 윤선거는 현종 6년(1665) 계룡산 자락의 동학사에서 다시 만나 논쟁을 벌였다. 송시열과 윤선거를 비롯한 이유태, 송주석 등 서인 중진들이 모였는데 <송자대전> ‘혹인에게 답함’에는 그 내용이 자세히 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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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송 논쟁

1659년 북벌 군주 효종이 재위 10년 만에 마흔 살의 젊은 나이로 승하했다. 효종은 승하 한 달 전쯤 송시열과 독대를 청해 북벌에 적극적으로 나서줄 것을 요청했다. 이때 효종은 혈기와 지기(志氣)가 손상 될 것이 두려워 내전에도 들어가지 않는다며, “주색을 끊고 경계하여 정신이 맑고 몸도 건강해졌으니 어찌 앞으로 10년을 보장할 수 없겠는가?”라며 북벌에 강한 의지를 보였다. 하지만 겨우 한 달 만에 그는 급서했다. 효종의 죽음은 엉뚱하게 예송(禮訟)논쟁을 낳았다.

효종의 계모 자의대비 조씨가 얼마간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이었다. 예송 논쟁은 일제 식민학자들이 조선 역사를 당쟁 망국론으로 규정지은 대표적인 소재다. 그러나 예송 논쟁은 어느 것보다 현실적인 정쟁이었다. 바로 효종의 왕통 계승이 정당한가 하는 문제를 배후에 깔고 있었기 때문이다.

- 효종은 왕통을 이었지만 소현세자 다음의 차자이므로 1년 복이 맞는다고 주장하는 송시열의 주장

- ‘제일 장자가 죽으면 본부인 소생의 제이 장자를 세워 또한 장자라 한다’며 3년 복을 주장한 윤휴의 반론

- 서인이 1년 복을 주장하고 남인은 3년 복을 주장

- 서인의 주자학적 정치이념은 신권(臣權)중심의 지배구조로서, 국왕은 사대부의 제1사대부이지 사대부를 초월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견해,

- 반면에 남인들은 국왕을 사대부 위에 존재하는 초월적 존재로 인정

■ 삼번의 난과 북벌

오삼계는 청나라와 싸우던 명나라의 마지막 주력군으로 1673년(현종 14년) 윈난성에서 명의 부흥을 명분으로 군사를 일으켰고 주변의 여러 성이 합세해 삽시간에 중국 남부 전역이 전쟁터로 변하는 삼번의 난으로 발전했다.

이때 북벌의 기치를 든 인물이 윤휴였다. 조선은 삼번의 난이 일어난 지 4개월 뒤 사신들을 통해 이 정보를 입수했다. 대만에서도 정경(鄭經)이 봉기 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러자 현종 15년 7월 1일 윤휴는 비밀 상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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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렸다. 북벌을 주장하는 상소였다. 그는 오삼계의 난을 하늘이 준 기회라면서 즉각 군사를 일으키자고 주청했다.

윤휴는 “병사 1만을 뽑아 북경을 향해 나아가 등을 치고 목을 조이는 한편, 바다의 한쪽 길을 터 정경과 힘을 합쳐서 심장부를 교란해야 한다”는 전략을 제세했다.

당황한 것은 정권을 쥐고 있는 서인들이었다. 좌의정 정지화는 현종에게 이렇게 말했다. “요즘 윤휴의 밀소 때문에 바깥이 꽤 시끄럽습니다. 인조조에서는 저들(청나라)과 관계된 문제이면 ‘상소문은 절대로 받아들이지 말라’하신 하교가 있었는데 지금도 그렇게 단속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현종실록 15년 7월 5일)

북벌을 주장하는 상소문은 받아들이지 말자는 주청이었다. 서인 정권에 북벌은 말뿐이지 실제 시행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2002년 국정 국사교과서는 “효종은 청에 반대하는 입장을 강하게 내세웠던 송시열, 송준길, 이완 등을 중용하여 군대를 양성하고 성곽을 수리하는 등 북벌을 준비했다(115쪽)”라고 그릇 기록하고 있었다. 검인정 국사교과서에서는 이런 기술이 많이 빠졌지만 아직도 일부 교과서에는 이런 기술을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다.

효종이 기해독대 때 송시열에게 “경이 은밀히 동지들과 의논해 보도록 하라”고 부탁하자, 송시열은 ‘몸을 닦고 집안을 다스린다’는 뜻의 ‘수기형가(修己刑家)가 북벌의 선결조건 이라고 답했을 뿐이다.

훗날 송시열은 ‘수기형가’ 넉 자로 북벌의 책임을 때우려 했다는 비난을 받았음에도 그간 국사 교과서들은 사실과 다른 서술로 그를 북벌의 화신인 것처럼 학생들을 호도해왔던 것이다.

윤휴의 북벌론은 상당한 반향을 낳았으나 다음 달 현종이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나 2차 예송 논쟁을 계기로 남인이 정권을 잡음에 따라 윤휴는 드디어 집권당의 일원으로 조정에 진출하게 되었다.

■ 호포법 주장과 좌절

윤휴가 숙종 3년(1677)에 주장한 호포제(戶布制)와 구산제(口算制)는 모든 양반들도 군포를 부담하자는 것이었다. 호포제는 양반과 상민을 구분하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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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모든 호(戶)에 부과하자는 것이고, 구산제는 각 호의 인구에 따라서 차등 부과하자는 것이었다. 윤휴의 이런 주장은 양반 사대부들의 격렬한 반대를 받았다. 양반들에게도 호포를 징수하는 것은 양방과 상민을 구분해 놓은 자연의 질서와 상하관계의 질서를 부정하는 처사라는 것이었다. 남인 온건파였던 영의정 허적은 호포제 자체는 찬성했으나 어린 임금의 즉위 초에 민심을 동요시킬 수 없다고 주장했다.

윤휴는 정면 돌파를 택했다. 양반 사대부의 계급 이기주의를 강하게 비판한 것이다.

이당규(李堂揆)와 김석주(金錫冑)등 호포제에 찬성하는 양반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호포제는 대다수 양반의 반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이 미완의 개혁은 영조 때 균역법으로 낙착 되었다가, 대원군 때 호포법으로 최종 결정되었지만 이미 때는 늦은 것이었다.

숙종 6년(1680) 경신환국으로 정권이 다시 서인에게 넘어가면서 정국은 급변했다. 숙종은 윤휴를 사사(賜死)시키고 말았다.

■ 주자학 세상에 저항한 중농주의 실학자, 박세당

- 1629, 인조 7년 ~ 1703 숙종 29년 -

조선 후기 타인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갖고 산 사대부라면 피할 수 없는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청나라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와 주자학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서계(西溪) 박세당(朴世堂)은 이 두 문제에서 현실과 크게 부딪친 사대부였다.

- 인조 7년(1629) 부친 박정(朴炡)이 남원 부사로 있을 때 출생

- 박정은 광해군 11년 정시 문과에 급제했지만 광해군의 폐모론에 반대해서 벼슬에서 물러남, 그 후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정사공신에 오름

- 박세당이 4세 때 부친 사망, 7세 때 형 박세규 사망

- 박세당이 8세 때 병자호란 발발, 조부 박동선이 강화도에서 왕세자를 호위하고 있는 동안 조모, 모친 등과 함께 원주, 청풍, 안동 등지로 옮겨 다님

- 가난해서 제때 배우지 못하고 열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중형에게 수업함

- 16세 때인 인조 22년(1644) 명나라가 망한 이듬해 박세당은 의령 남씨와 혼인해 처가살이를 함, 10여 년 동안 처가살이를 하다가 비로소 따로 살림을 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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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 때 모친 사망, 24세 때인 효종 3년(1652) 유생정시에 합격했으나 형이 급제할 때까지 과거를 포기. 현종 1년(1660) 32세 때 장원급제. 사간원 정언에 제수

이후 박세당은 사헌부 홍문관 등 주로 대간직에 있었는데, 홍문관 교리로 있던 현종 5년(1664) 홍문관 수찬 김만균(金萬均)사건과 관련해 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현종 4년 청나라 사신이 왔을 때 현종은 스스로 사신을 접대 하려고 했다. 이때 현종을 따라가서 임무를 수행해야 할 김만균이 병자호란 때 할머니가 강화도에서 피살되었다면서 청나라 사신을 접대 할 수 없다고 면직을 요청했다. 도승지 서필원이 면직 요청 상소를 물리쳤지만 김만균은 끝내 어가를 따르라는 명령을 거부했다. 김만균은 하옥 되었다가 파직하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 되었다.

다음해 우찬성 송시열이 제자였던 김만균의 행위를 옹호하고 나서면서 사건은 확대되었다. 서필원이 송시열의 상소를 비판하자 송시열을 따르는 무리가 서필원의 탄핵을 주장하고 나섰는데 박세당이 서필원을 옹호하면서 논란의 복판에 서게 되었다.

이때 박세당은 “임금도 청나라 사신이 오면 원통함을 머금은 채 직접 왕림해서 접대하는 이유가 있다면서 국가가 항복해서 청나라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 속에 들어간 상황에서 청나라 사신 접대를 거부하는 것은 소절개이자 관념상의 숭명배청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의 실세였던 송시열에 맞선 것은 이 사건 이후 박세당의 진로에 큰 영향을 주었다.

■ 석촌동에서 찾은 소박한 삶

그는 양주 수락산 석천동(石泉洞)에 은거했다. 박세당의 연보는 당시 송시열이 물러나 향리에 거처하면서 조정의 의론을 좌지우지 했는데, “한마디라도 거스르면 연못에 떨어뜨릴 것처럼 하고 뜻이 맞으면 무릎 위에 올려놓을 것처럼 했지만 선생은 홀로 강직한 의론과 곧은 도를 견지하면서 그 뜻을 따르려 하지 않았다”고 설명하고 있다.

송시열이 배후에서 좌지우지하는 조정 현실에 한계를 느끼고 관직을 내놓고 은거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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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 박세당은 여러 관직을 제수 받았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다만 현종 11년(1670) 8월 통진 현감에 제수되자 지방관은 내직과는 다르다면서 나가 때마침 든 흉년 극복에 앞장섰다.

- 현종 12년 사간원 헌납에 제수되자 사양, 현종 14년(1673) 영릉 천장도감이 제수되자 나가서 목공 감독을 함

- 이처럼 박세당은 모두가 바라는 내직은 거부하고 다들 꺼리는 지방관이나 목공 감독 같은 험한 일은 기꺼이 수행.

- 숙종 2년(1676) 농업 백과사전 이라고 할 수 있는 <색경 穡經>저술.

- 여러 경전에 대한 주석에 노력 : 논어사변록, 맹자사변록, 중용사변록 등

- 노자도덕경 주해, 장자 주해 등

이후 그는 주자학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학문 경향 때문에 반대파로부터 곤경에 처하기도 했지만 그가 석천동에 ‘관란정 觀瀾亭 ’과 ‘괴산정 蕢山亭’을 열고 제자를 받자 문생들이 대거 몰려온 것은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주자학 유일사상 체제에 대한 불만이 적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문명이 높아 가면서 숙종 14년(1688)에는 부제학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나가지 않았다. 다만 아들 박태보가 소론의 핵심 인물로 노론과 맞섰다.

■ 아들 박태보에게 날아든 화

숙종 15년(1689) 정권이 노론에서 남인으로 넘어가는 기사환국 때 박태보가 화를 입는다. 박태보는 인현왕후 민씨를 폐하고 희빈 장씨를 왕비로 승격시키려는데 반대 하여 유배 도중에 사망했다.

박태보는 소론이지만 왕비 교체 문제는 국가의 기강을 흔드는 원칙적인 문제라고 해서 반대에 앞장섰다가 목숨을 잃은 것이었다.

이후 박세당이 예순여섯이 되는 숙종 20년(1694)이 되어서야 비로소 다시 벼슬이 내려졌는데, 이해 숙종은 왕비 장씨를 내쫓고 민씨를 다시 왕비로 삼는 갑술환국을 단행했다. 왕비 교체과정에서 아들 박태보를 잃었던 박세당은 이제 소론뿐 아니라 노론에서도 거부할 수 없는 인물이 되어 있었다.

그 후로 혼문관 제학, 정2품인 의정부 우참찬, 예조판서와 이조판서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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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시련

그가 74세 때인 숙종 28년(1702) 백헌 이경석의 비문을 찬술하면서 다시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송시열의 문인들이 상소를 올려 박세당을 비난하고 나서자 일흔다섯의 박세당은 성밖으로 나가 대죄해야 했다.

박세당에 대한 비난의 포문이 열리자 이경석의 신도비문 뿐만 아니라 그가 저술했던 <사변록>에도 이념 공세가 가해졌다. 주희의 학설과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주자학이라는 하나의 사상만을 정설로 만들려는 세상에 박세당은 저항했다. 공자 맹자 같은 성인들의 사상을 주희가 이기론 같은 이론들로 설명하는 것은 성인들의 참뜻과 어긋난다고 보았다. 박세당의 사변록은 주자학에 대한 비판의 효시이자 실학의 선구라는 평을 받았다.

자신과 다른 사상을 가지면 없는 사실까지 날조해가면서 비판하고 매장하려는 풍조가 횡행하는 지금의 우리 사회와 그때는 얼마나 다른 것인지 일흔 다섯의 나이에 도성 밖으로 나가서 대죄하던 박세당의 인생은 ane고 있는지도 모른다.

6장 나는 양명학자 로소이다. 정제두

- 1649, 인조 27년 ~ 1736, 영조 12년 -

조선 후기는 주지하다시피 주자학 유일사상의 시대였다. 송시열이 “하늘이 공자를 이어 주자를 냈음은 진실로 만세의 도통(道統)을 위한 것이다. 주자가 난 이후로 현저해지지 않은 이치가 하나도 없고 밝아지지 않은 글이 하나도 없다”라고 말한 것처럼 주자학은 완전무결한 사상체계이자 정치 이론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대학>은 주희(주자)가 <대학장구 大學章句>라는 주석서를 내면서 사서의 하나로 편입되었다. <대학> 자체보다 <대학장구>가 더 중요하게 취급되었던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런 시대에 주자를 비판하는 것은 섶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이런 위험을 무릅썼던 인물이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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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민’과 ‘신민’의 차이

정제두는 대학서(大學序)에서 당시의 시대 상황을 감안하면 간담이 서늘해질 주장을 펼친다.

주희가 대학에 주석을 붙이면서 경문 본래의 뜻을 어겼기 때문에 원래의 뜻을 되찾기 위해 글을 짓는다는 것이다. 정제두는 <대학> 본문도 주희와는 달리 읽는다.

“대학의 도는 명덕(明德)을 밝힘에 있으며 백성과 친(親)함에 있으며 재친민(在親民), 지선(至善)에 그침에 있다.……친(親)은 본자대로 따른다.(대학서>”

‘친(親)은 본자대로 따른다’라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원래 <예기>에 속해 있을 때 이 구절은 재친민(在親民), 즉 ‘백성과 친함에 있다’였는데, 정자(程子)가 “친(親)자는 마땅히 신(新)자로 써야 한다”면서 재신민(在新民), 즉 ‘백성을 새롭게 하는 데 있다’로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재친민과 재신민은 외형상 ‘친’과 ‘신’이라는 글자 한 자 차이이지만 그 내용은 하늘과 땅처럼 크다. ‘백성을 새롭게 한다’는 사대부 자신이 백성보다 우위에 놓고 백성을 교화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것인 반면 ‘백성과 친함에 있다’는 사대부 자신과 백성을 동일 선상에 놓고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민에는 인간을 존비(尊卑)나 상하(上下)관계로 구분하는 신분제를 옹호하는 속뜻이 숨어 있다. 정제두는 신민을 다시 친민으로 돌려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정제두가 이런 과감한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명나라 왕양명(王陽明1472~1528)의 학설을 지지하는 양명학자였기 때문이다.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이 열일곱 살 때 <양명집(陽明集)>을 구해 읽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조선에서 양명학이 처음부터 금기였던 것은 아님을 의미한다. 그러나 퇴계 이황이 <전습록변>에서 양명학을 ‘사문(주자학)의 화’라고 비판한 다음부터 금기시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황의 비판에는 왕양명의 핵심인 ‘치양지설(致良知說)’에 관한 내용이 빠져 있으니 <전습록>전체를 보지 못하고 비판한 셈이 된다.

■ 양명학자임을 밝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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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의 11대 손인 정제두는 종형이 영조의 부마이고, 부인이 윤선거(尹宣擧)의 종질이었던 서인 명가의 후손이었다. 이런 그가 시대의 이단이던 양명학에 심취하게 된 것은 고단했던 개인사가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 5살에 부친 여의고 16세에 아버지 역할을 하던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남, 백부도 세상을 떠나고 종손마저 어려서 그가 모든 장례를 주관하여 치름

- 17세에 맞이한 부인 윤씨는 23세 때 잃고, 어린 아들이 있는데 자기 자신마저 지병이 있었음

과거는 포기했으나 문명이 높아가자 서른 두 살 때인 숙종 6년(1680) 영의정 김수향의 천거로 사포서 별제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서른 네 살 때는 뒷 일을 아우에게 맡긴다는 글을 쓸 정도로 병이 위중했다. 이때 박세채(朴世采)에게 남긴 유언 비슷한 편지글에서 그는 스스로 양명학자 임을 밝힌다.

죽음을 앞두고 양명학자라고 선언한 것인데, 예상과는 달리 병에서 회복되자 양명학자를 자처한 그에게 수많은 시비가 인다. 비판의 유형은 다양했지만 양명학을 깊이 연구하지도 않고 비판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제두는 양명학의 본질을 이해하는 대신 이단의 딱지를 붙이려는 사람들에게 강하게 대들었다. 정제두가 바라는 것은 서로 다른 사상들을 용인하자는 것이고, 그것이 바른 학문의 자세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시대는 주자학 이외의 모든 사상은 이단으로 몰던 폐쇄된 시대였다. 숙종 22년(1696) 예순 아홉 살 노구의 윤증이 마흔여덟 살의 정제두에게, “전일 양명의 책들은 사우(士友)들이 걱정하던 바인데 지금은 혹 버렸는지 알 수 없습니다”라고 우려한 것은 소론 영수였던 윤증조차 이런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얘기다.

■ 이단의 딱지

조선에서 양명학 연구가 억압되었던 진정한 이유는 양명학이 가진 사민평등(四民平等)사상 때문이었다. 양명학은 사민(사,농,공,상)의 우열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사민의 역할에 대해서 이업동도(異業同道)라고 표현한다.

“사민은 직업은 달랐지만 도는 같이 했으니, 그것은 마음을 다하는 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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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하다. 선비는 마음을 다해 정치를 폈고, 농부는 먹을 것을 갖추었고, 장인은 기구를 편리하게 하였으며, 상인은 재화를 유통시켰다.” 중요한 것은 이런 직업이 타고난 신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는 점이다.

‘타고난 자질에 가깝고 능력이 미칠 수 있는 것’을 직업으로 선택하면 된다는 것이다. 주자학자들이 겉으로는 양명학의 ‘심과 성과 천’에 대한 사상을 비판했지만 속으로는 사대부의 계급적 이익을 인정하지 않는 철학사상에 거부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는 천거로 몇몇 벼슬을 지냈지만 평택 현감으로 있던 숙종 15년(1689) 기사환국으로 남인 정권이 들어서자 벼슬을 내려놓고 안산으로 내려가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 숙종 20년(1694)의 갑술환국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차지한 뒤 여러 벼슬이 제수되었으나 모두 거절했다. 도리어 그는 예순한 살 때인 숙종 35년(1709) 학문의 자유를 위해 강화도 하곡으로 이사했다.

그 뒤 이광명(李匡明), 신대우(申大羽) 등 소론계 인사들이 이주하면서 강화도는 주자학 유일사상 체제의 조선에서 학문의 자유가 숨 쉬는 유일한 공간이 되었다. 양명학은 이후 정제두 집안의 가학(家學)으로 전승 되면서 그 맥을 이어갔다.

그러나 스스로 역사의 음지를 찾았던 양명학이 끼친 영향은 가학을 뛰어 넘는 것이었다. 조선이 멸망의 위기에 처하자 강화학파의 후예들은 대거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초기 독립운동의 거물이었던 이상설(李相卨), 임시정부 2대 대통령 박은식(朴殷植)등이 모두 강화학파의 후예였으니 한 선비의 진실 지향 정신이 끼친 영향은 실로 크다 할 것이다. 정제두가 젊은 시절의 잦은 병치레에도 불구하고 여든여덟 살의 장수를 누린 것 또한 특기할 만하다.

7장 발해사를 우리 역사로 인식하다. 유득공

- 1749, 영조 25년 ~ 1807, 순조 8년 -

조선 후기 성리학자들은 조선을 소중화라고 불렀다. 청나라에 망한 명나라가 다시 서기를 갈망했으나 끝내 명나라가 다시 서지 못하자 조선이 작은 중국이 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소중화 사상을 일부에서는 문화적 자부심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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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하기도 하지만 그 사상은 사대주의의 극치에서 나왔다. 조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작은 중국이 되겠다는 것으로 자신의 몸은 물론 영혼까지 중국인이라는 사대주의 중의 사대주의에서 발로한 것이었다.

소중화 사상 속에서 민족사의 영역은 극도로 협소해졌다. 과거 중국에서 동이족(東夷族)의 범주로 보았던 만주(여진), 몽골, 거란, 숙신족 등은 오랑캐가 되었고, 그들의 활동 무대인 만주는 오랑캐의 땅이 되었다. 이런 시대에 오랑캐들의 땅을 우리 강토로, 오랑캐들의 역사를 우리 역사로 인식한다는 것은 가히 혁명적인 인식의 전환이었다.

신라 통일 이후를 통일신라 시대라고 인식하던 시절에 유득공(柳得恭)은 그 역사를 남북국 시대라고 인식했다. 유득공이 남북국 시대라고 인식한 것은 북방 강토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다.

■ 불운한 유년 시절

혁명적 역사 인식의 소유자 유득공의 유년 시절

- 영조 25년(1749) 몰락한 사대부 집안의 서얼로 출생, 출생 직전 전염병으로 가족 8명이 사망. 부친은 그가 다섯 살이 되던 해에 27세로 사망

- 유득공까지 죽을지 모른다고 우려한 모친 남양 홍씨는 “큰물은 피하는 것이 좋다”면서 그를 데리고 남양 백곡의 친정으로 내려감

- 외가는 무인(武人) 집안이었는데 유득공이 외가에서 무술을 익히는데 몰두하자 모친은 너희 집은 원래 문필을 일삼던 집안이라며 그를 데리고 다시 서울로 이사하여 고관이 많이 살던 경행방(낙원동 일대)에 터를 잡고 삯바느질을 하며 유득공을 가르침

- 유득공이 모친의 행장에서 “내게 서책을 끼고 서당에 나가 배우게 하였는데 의복이 미려하지 않은 적이 없어서 보는 사람들이 내가 빈한한 집안의 아이인줄 알지 못했다.”라고 할 정도로 어머니는 아들을 배려했다.

그는 스물여섯 살 때인 영조 49년(1773) 생원시에 급제하는데,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던 것은 서얼 출신이던 영조가 서얼허통을 시행해 응시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속 조치가 뒤따르지 않아 서얼 출신들은 문관직에 나갈 수 없었고 그의 삶은 곤궁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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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 이덕무와 유득공 등은 이미 조선 전체는 물론 중국에 까지 이름이 알려진 지식인 이었지만 조선은 서얼 출신인 그들에게 문을 열지 않았다.

■ 정조, 서얼의 등용을 허하다

그러나 정조가 즉위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정조는 서얼 출신이 아니었으나 서얼과 노비, 북쪽 사람들 등 소외된 이들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재위 1년 서얼허통절목을 만들어 서얼들도 관직에 나갈 수 있게 법제화했다. 하지만 정조가 부르기 전 그의 생계는 어려웠다. 정조 즉위 초 유득공은 한백겸(韓百謙)의 <동국지리지>를 탐독하고 ‘스물하나 도읍지를 시로 읊다’라는 역사 시를 남기는데 여기에 그의 당시 상황이 잘 묘사돼 있다.

“회고하면 무술년(정조 2년)에 종강(鐘崗)의 쓰러져가는 낡은 세 칸 집에 살았는데, 붓, 벼루, 칼, 자 들이 뒤섞여 고통스러웠다. 자주 작은 남새 밭에앉으니 콩과 부추 꽃에 벌과 나비가 날아다녔다. 비록 끼니는 자주 걸러도 기색은 태연자약했다. 때로 <동국지리지>를 보고 시 한수를 읊으며 하루를 보냈다. 어린아이와 어린 계집종이 듣고 외웠으니 매우 고심했음을 알 수 있다.”

유득공은 정조 3년(1779)에 규장각 검서관에 임명되면서 그의 인생이 꽃피게 된다. 이덕무, 박제가, 서리수 등 다른 서얼 학자들과 함께 발탁되었는데, 이때부터 이들은 ‘규장각 사검서(四檢書)’란 보통명사로 불리며 조선의 지식계를 주도한다.

또한 이때부터 경제적 고통에서 벗어난다. 그는 교서동관(명동, 저동 일대)으로 이사하는데, 당시 상황을 “기해년(정조 3년) 이후 성주(聖主)의 은혜로 7년 동안 일곱 번 관직이 바뀌었는데, 녹봉은 입고 먹기에 족하고 집은 붓과 벼루를 늘어놓기에 족했다”라고 말했다.

정조는 규장각 검서관들에게 지방 관직을 겸임하게 해 주었다. 그는 금정 찰방을 비롯해 정조 10년부터 포천현감, 양근군수, 가평군수, 풍천부사를 두루 역임했는데, 지방관으로 내려가서는 양반 사대부들과 많은 갈등을 빚었다.

당시 많은 백성이 양역(良役)을 피해 사대부 집으로 들어갔다. 당연히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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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의 대가는 양반 사대부가 모두 가져가고 국가에는 세금 한 푼 안냈다. 이를 은정(隱丁)이라고 하는데, 유득공은 이를 찾아내 명부에 등재했다. 양반 사대부의 사실상 노비를 일반 백성으로 환속시킨 것이다. 포천현감 시절 이들을 찾아내 국가의 양정(良丁)으로 되돌리자 양반 사대부들의 반발이 적지 않았다.

양근 군수로 있을 때는 양반도 법을 어기면 매를 때렸다.

그가 파직까지 당하는 등 지방관 생활이 순탄하지 못했던 것은 양반 사대부들과의 이런 마찰 때문이었다. 지방관을 위협할 정도의 호족들이면 중앙에 일가붙이가 있게 마련이었다. 현실과 타협해야 하는 일이 유득공에게는 맞지 않았다. 비록 몸은 고되지만 규장각 검서관이 그의 체질에 맞았다.

■ 혁명적 역사인식

그는 <발해고> 서문에서 “나는 규장각에 있으면서 비장(秘藏)된 책을 쉽게 읽어 볼 수 있었다”라고 말했는데 이런 책들을 읽으며 우리 역사에 대한 혁명적 인식의 전환을 이룩했던 것이다. <발해고>뿐만 아니라 ‘스물하나 도읍지를 시로 읊다’, 한사군 역사를 다룬 <사군지(四郡志)>등이 그가 남긴 저술들이다. 또한 24절기에 따른 세시(歲時)에 맞춰 각종 의례 풍속을 다룬 세시풍속지인 <경도잡지(京都雜志)>도 저술했다. 조선사회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주는 중요한 자료다.

그러나 규장각의 검서관 15년을 보내자 그의 시력은 돋보기 없이는 작은 글씨를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정조는 특별히 입직과 글 베끼는 일을 면제해주었다. 그리고 재위 23년(1799) 유득공과 박제가를 종신 규장각 검서로 임명했다. 평생 규장각 서책을 마음껏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이듬해 정조가 독살설 속에 사망하면서 운명은 뒤바뀌게 된다. 순조가 열 두 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면서 정조의 정적이던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시작한다. 이로써 정조때 성장한 세력들에 대한 정치 보복이 자행되는데 남인들은 천주교신자로 몰려 대거 사형 당하고, 유득공과 가까웠던 박제가도 유배를 가게 된다. 유득공은 비록 유배는 가지 않았지만 풍천부사에서 파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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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조 1년(1801) 유득공은 내각(규장각)으로부터 북경에 가서 <주자서> 선본(善本)을 구해 오라는 명을 받는다. 여러 경로로 책을 구하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한다. 중국에서는 이미 <주자서>를 보지 않은 지 오래였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은 정조 사망 이후 다시 주자의 나라로 회귀했던 것이다. 귀국 후에 유득공은 더는 관직에 등용되지 않았다. 그는 순조 7년(1807)에 사망하는 데 이때까지 그가 무엇을 했는지 유추할 수 있는 글이 있다.

‘나는 농사일이야말로 수고롭되 원망하지 않고, 즐겁되 지나치지 않아서 부드럽고도 도타운 이치를 체득한 시도(詩道)와 서로 통한다고 생각한다. 나 같은 사람이야 물러나 거처하며 몸소 밭을 갈아 시인이 읊조리는 작품 속의 한 농부가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전원잡영서)’

8장 당파성을 배제한 역사서를 짓다. 이긍익

- 1736, 영조 12년 ~ 1806, 순조 6년 -

이긍익(李肯翊)은 이광사(李匡師)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기 6년 전인 영조 6년(1730) 소론 강경파였던 백조부 이진유(李眞儒)는 귀양지에서 끌려와 국문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영조의 역적으로 몰려 장사(杖死 곤장 맞다 죽음) 당하고 말았다. 이후 그의 자식은 물론 조카들도 과거 응시가 금지된 폐족이 되었는데, 이긍익의 부친 이광사가 과거 응시를 포기한 채 집에서 학문과 글씨 연마로 세월을 보낸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긍익에게도 한때 희망은 있었다.

■ 환란 속에 꾼 꿈

내가 열세 살 때 선군(이광사)을 모시고 잘 때, 꿈에 임금이 거동하셨기에 아이들과 길가에서 바라보는데 임금께서 홀연히 연(輦)을 멈추시고 특명으로 나를 앞으로 오라고 하시더니 “시를 지을 줄 아느냐?” 라고 물으시기에 “지을 줄 압니다” 라고 답했더니 “지어올리라”라고 명하셨다. <연려실기술>

이긍익은 운(韻)을 내달라고 청했고, 영조는 “사(斜), 과(過), 화(花) 석자를 넣어 지으라”라고 명했다. 잠시 후 시가 완성되었느냐는 영조의 질문에 이긍익은 “두자가 미정이어서 감히 아뢰지 못했습니다”라고 답했고, 영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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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말하라”고 하자 미완성의 시를 읊었다.

비가 맑은 티끌에 뿌리는데 임금 타신 연(輦)이 길에 비끼니

도성 사람들이 육룡(六龍)이 지나간다고 서로 말하네

미천한 초야의 신하가 오히려 붓을 잡았으니

□□학사의 꽃이 부럽지 않네.

이긍익이 짓지 못한 두 자에 영조는 “거기에 ‘배란(陪鑾)’ 이라고 넣어 ‘임금 모시는 학사의 꽃이 부럽지 않네’로 하면 될 것 같다”고 말한다. 이 일화는 이긍익이 열세 살 때 이미 수준 높은 시를 지을 정도로 학식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 이긍익이 22세인 영조 31년(1755) 나주벽서사건 발생으로 집안이 멸문의 위기에 놓임, 나주벽서 사건의 주모자 윤지, 윤광철 부자와 부친 이광사가 편지를 주고받은 것이 원인

- 모친 문화 유씨는 42세로 자결, 이광사는 함경도 부령으로 귀양

- 이긍익은 동생 영익을 부친에게 보내 시중을 들게 하고 자신은 7세 여동생을 데리고 가계를 꾸림

이긍익은 서울에 남은 한 살 위의 종형 이문익과 치심(治心, 마음 다스림)의 방도에 대해서 토론한다. 이문익의 부친 이광현도 경상도 기장에 유배중이었는데 동생 충익이 봉행하고 문익은 서울에서 모친을 모셨다. 며칠 굶은 문익에게 모친이 배고프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배고픔을 잊기 위해 책을 읽습니다”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렇게 궁핍한 생활속에서도 이들은 치심의 근원에 대해 서로 토론했다.

이광사는 이때 긍익에게 편지를 보내 “마땅히 먼저 사물(四勿)을 행해야 한다고 훈계한다. 사물이란 공자가 안회에게 가르친 자신을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는 ‘극기복례(克己復禮)’의 네 가지 계율을 말하는데, 예가 아니면 보지말고(非禮勿視),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非禮勿聽),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非禮勿言)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非禮勿動)는 것이다. 유배와 곤궁한 생활속에서 치심을 논하고 사물을 논하는 데서 이 집안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긍익이 천착한 것은 바로 역사였다.

■ 역사가가 되기로 마음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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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긍익이 역사가가 되기로 한 것은 부친 이광사의 영향이 컸다. 이광사는 동국악부(東國樂府)에서 국조(國祖)단군부터 두문동에 은거한 고려 충신들의 이야기까지 30가지 일화를 30수로 읊을 정도로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깊은 관심을 두고 있었는데, 부친의 역사에 대한 이런 관심이 이긍익에게도 이어져 조선 후기 3대 역사서의 하나로 손꼽히는 방대한 <연려실기술>을 편찬한 것이다. 연려실(燃藜室)은 이긍익의 호이다.

놀라운 것은 <연려실기술>에 일체의 당파성을 배제했다는 사실이다. 역사 기술의 객관성을 그만큼 중시 했던 것이다. 영조 때의 일은 제외하고 태조부터 숙종 때까지만 저술한 이유도 집안이 직접 관련된 영조 때의 일을 서술하면 객관성을 해칠까 우려한 것이다.

■ 다른 시각의 역사서 서술

<연려실기술>은 연대순으로 엮는 편년체(編年體)사서가 대부분인 우리나라에서 특이하게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역사서이다. 그는 해당 사안에 대한 상반된 견해의 사료를 수록함으로써 ‘사료로 말하게 하는 저술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는 “각 조에 인용한 책 이름을 밝혔으며, 말을 깎아 줄인 것은 비록 많았으나 감히 내 의견을 붙여 논평하지는 않아 삼가 ‘전술(傳述)하기만 하고 창작하지 않는다(述而不作)’는 공자의 뜻을 따랐다”고 밝히고 있는데 ‘술이부작’은 <논어> 술이편에서 공자가 “나는 옛것을 전하기만 할 뿐 창작하지는 않았다”라고 한데서 나온 말로 사료만 제공하고 판단은 독자들에게 맡기는 저술방법이다. 이긍익이 이런 편찬 방법을 택한 것은 극심한 당쟁 때문이었다.

이긍익은 현실의 승자인 노론뿐만 아니라 패자인 남인의 시각과 움직임까지

모두 제시했다. <연려실기술>이 없었다면 우리는 현실의 승자인 노론쪽에서

저술한 역사서밖에 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노론과 다른 역사서 서술은 시

대의 금기였기 때문이다. 이긍익은 객관성이라는 명분아래 집권 노론뿐만 아

니라 야당인 소론과 재야였던 남인의 견해까지 모두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연려실기술> 편찬자를 둘러싼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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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기술>이 이긍익이 아니라 부친 이광사의 저술이라는 지적도 있다. 현전하는 필사본에 이긍익이 편찬했다는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과 귀양지의 정약용이 아들 정학연에게 <연려실기술>을 읽으라면서, “이도보(李道甫 이광사의 자)가 편찬했다”라고 주석한 것, 홍한주(洪翰周)가 “원교(圓嶠 이광사의 호)가 편찬한 <연려실기술>만은 대개 기사본말체를 본뜬 것”이라고 진술한 것 등이 근거로 제세된다.

그러나 이광사는 정조 즉위년(1777)에 이미 사망했는데 <연려실기술> ‘의례’의 “경술(庚戌 정조 14년 1790)에 금강산에 놀러가면서 전질을 남에게 빌려주고 갔다”는 구절이 나오는 것을 보면 이는 이광사가 아니라는 얘기다. 또한 <연려실기술>에는 많은 비문이 인용되어 있고 어떤 비문은 직접 가서 보았을 것인데 유배지의 이광사가 답사를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긍익은 <의례>에서 “내가 자료를 얻어 보지 못하여 미처 기록에 넣지 못한 것은 후일에 보는 이가 자료를 얻는 대로 보충하여 완전한 글을 만드는 것이 무방할 것이다”라고 썼다. 역사는 한 개인의 것이 아니라 한 시대의 것이란 열린 생각이다. 그래서 불우한 인생을 살았던 이긍익의 초야의 붓은 ‘임금 수레를 모시는 학사의 꽃’이 부럽지 않도록 오래도록 살아남은 것이다.

2부 죽음으로 맞서다

9장 사대의 나라에서 황제를 꿈꾸다, 이징옥

- ? ~ 1453, 단종 1년 -

태조 7년(1398) 요동정벌을 진두에서 지휘하던 정도전을 이방원이 주살한 뒤 명에 대한 사대(事大)는 조선의 가장 큰 외교 정책이 되었다.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왕위를 꿈꾸던 수양대군은 단종 즉위년(1452)8월 명나라 이부낭중 진둔(陳鈍)이 사신으로 왔을 때 하마연(下馬宴)을 주관하면서 사신의 자리를 임금의 자리인 북쪽에 설치하고 자신의 자리는 동쪽에 설치할 정도였다. 명 사신의 거듭된 양보로 동서로 대좌하게 되었으나 수양대군은 같은 해 10월 명나라에 사은사로 갔을 때도 일개 낭중인 웅장(熊壯)이 전하는 물품을, “황제께서 내리는 것이니, 의리로 보아 앉아서 받을 수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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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며 일어나서 공손하게 받아서 “조선은 본디 예의의 나라지만 예의를 아는 것이 이와 같다”는 칭찬을 들었다. 수양대군은 자신이 중국을 극진히 섬기는 사대주의자임을 분명히 각인시켜 훗날 일으킬 정변을 추인받고자 한 것이다.

이런 사대의 나라, 문약(文弱)의 나라 조선에서 경상도 양산 출신 이징옥(李澄玉)은 특이한 존재였다. 조선 중기의 문인 차천로(車天輅)가 쓴 오산설림(五山說林)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한다.

- 이징옥이 14세, 형 이징석이 18세 때 어머니가 살아 있는 산돼지기 보고 싶다고 말하자, 형은 그날로 산돼지를 활로 쏘아 잡아왔는데, 이징옥은 이틀 뒤 산돼지를 산채로 잡아옴

- 국왕을 호위하는 갑사로 근무 하던 중 태종 16년(1416) 무과 친시에 장원, 사복소윤으로 임명, 주로 함경도에서 벼슬 생활, 9년 동안 모친을 뵙지 못함

- 세종 6년(1424) 여진족 공격을 막아낸 공로로 정3품 경원절제사로 승진

■ 명나라 사신의 횡포

이징옥은 세종 14년(1432) 병조참판에 임명되어 오랜만에 서울 근무를 하게 되었다. 이때 이징옥은 명나라 사신 윤봉(尹鳳)과 부딪치게 된다. 윤봉은 조선출신 환관인데, 중국 출신들 보다 더 조선을 괴롭혔다. 윤봉은 태종에게 조선에 있는 자신의 형제들에게 벼슬자리를 주라고 요구해 형제 10여 명이 모두 서반(무관)의 벼슬을 받았다.

세종 12년(1430)에 사신으로 왔을 때는 뇌물을 주지 않는다고 소동을 부렸다. 세종 14년 윤봉이 다시 사신으로 왔을 때 접반사로 임명된 사람이 이징옥이었다. 이징옥은 윤봉의 횡포에 분개해 맞섰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이징옥은 세종 14년 11월 의금부의 국문을 받고 외방에 부처되었다가 1년 뒤에 풀려나 영북진 절제사로 임명 되었다. 거기서 함경도 관찰사 김종서를 처음 만난다.

■ 국경을 지키는 충신

세종은 재위15년(1433) 1월 최윤덕을 평안도 절제사로 삼고, 그해 12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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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서를 함길도 관찰사로 삼아 압록강 유역의 4군과 두만강 유역의 6진 개척에 나섰다.

김종서가 6진을 개척할 수 있었던 데는 이징옥의 도움이 컸다.

이징옥은 무력만을 앞세우는 인물이 아니었다. 세종 16년(1434)에는 영북진 남면 고산성 근처에 250여 호가 경작할 땅이 있으니 군사와 백성을 이주시켜 국경 방어의 요충지로 삼자고 조정에 건의했다. 둔전을 갈아서 먹을 것을 있게 해야 북방 영토를 계속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세종 20년(1438) 모친상을 당한 이징옥이 사직을 청하자 세종은 100일간 휴가를 주며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김종서가 이징옥이 오랫동안 풍증을 앓고 있다면서 2~3년간 병을 치료하게 하자고 청하자 이징옥을 경상우도 절제사로 임명했다.

세종 22년(1440)에는 여러 차례 부친을 모시게 해 달라는 사직상소를 올렸지만 허락받지 못하고 중추원사 겸 평안도 도절제사로 임명 되었다.

세종 29년(1447) 부친이 96세 때 관직에서 물러나 봉양할 기회가 왔으나 세종 31년(1449) 몽골대군이 침공한다는 첩보가 잇따르자 그는 다시 함길도 도 절제사가 되었다.

문종 즉위년(1450) 8월 부친이 사망하자 이징옥은 3년상을 치르겠다며 사직을 청했으나 이때도 허락받지 못했으며, 단종도 재위 1년 그의 사직 요청을 허락하지 않았다.

■ 수양대군을 토벌하라

단종 1년 10월 계유정난으로 김종서 등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수양대군은 상호군 송취(宋翠)를 의정부 진무로 삼아 함길도 도절제사 이징옥을 체포해 평해에 안치하라고 명했다. 계유정난에 반발할 무장으로 분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직 도절제사를 체포할 경우 저항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김종서와 앙숙이었던 평안우도절제사 박호문을 함길도 도절제사로 임명해서 그 자리를 빼앗은 뒤 체포하게 했다.

박호문에게 절제사 자리를 내주고 귀향하던 이징옥은 여러 차례의 사직 요청을 거부하던 조정이 갑자기 사람을 보내 교체시킨 것이 이상하여 다시 돌아갔다. 이징옥이 다시 나타나자 당황한 박호문이 큰 돌로 문을 막고 문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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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활을 쏘며 저항했으나 이징옥 휘하의 장사가 쏜 화살에 되레 죽고 말았다.

이런 소동을 통해 수양대군이 난을 일으켜 김종서 황보인 등을 죽이고 사실상 국권을 장악했다는 소식을 들은 이징옥은 군사를 일으켜 수양을 토벌하기로 결심한다.

■ 대금을 세우고 황제에 올랐다

<해동야언> 세조조는 “이징옥이 글을 야인(여진족)에게 보내어 대금황제라 자칭하고, 오국성(五國城)에 도읍을 정한다고 하니 야인이 모두 복종하였다”라고 전한다. 오국성은 고구려 국내성 자리이다.

이징옥이 대금황제를 자칭한 사건을 <단종실록>의 조작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조선 정조 때의 채제공(蔡濟恭)은 <번암집 樊巖集>에서 이징옥은 수양의 불법성을 명나라에 직소해 단종의 실권을 회복시키려는 것이었지 대금황제가 되려는 것이 아니었다고 적고 있다.

20여 년간의 북방 생활을 통해 그는 기마민족인 여진족을 규합하면 수양을 무찌르고 나아가 명나라와 한판 대결도 전개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징옥은 단종 1년 종성 판관 정종(鄭種)과 이행검(李行儉)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과연 그는 사대의 나라 조선에서 대금제국 재건과 황제를 꿈꾸었을까? 광개토왕비가 있는 국내성을 흐르는 압록강은 그 진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10장 천하에 두려워할 바는 오직 백성이다. 허균

- 1569, 선조 2년 ~ 1618, 광해군 10년 -

교산(蛟山) 허균(許筠)의 생애처럼 수수께끼에 쌓이고, 생전은 물론 사후까지 끝없는 논쟁의 대상이 된 경우를 찾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그의 부친 허엽(許曄)은 동인의 영수였으며 이복형 허성과 동복형 허봉 그리고 누이 난설헌(蘭雪軒)허초희(許楚姬)는 모두 당대의 유명 문사였고, 허균의 조카사위(허성의 사위)는 선조와 인빈 소생의 의창군으로서 왕가의 사돈이었다. 그런데도 허균의 일생은 순탄하지 못했다. 유몽인은 <어우야담>에서 “역적 허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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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명하고 재기가 뛰어났다”면서 어린 시절의 일화를 소개했다. 아홉 살에 능히 시를 지었는데 작품이 아주 좋아서 여러 어른이 칭찬하며, 이 아이는 나중에 마땅히 문장하는 선비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어우야담>

■ 순탄하지 못한 운명

당대 명사였던 우성전이 어린 아이의 시에서 ‘허씨 문중을 뒤엎을’ 그 무엇을 봤는지는 몰라도 그만큼 허균은 어린 시절부터 남달랐다.

그의 운명은 사주처럼 순탄하지 못했다.

- 12세 때 경상도 감사였던 부친 객사

- 15세 때 친형 허봉이 율곡 이이를 탄해가다가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 감

- 김성립에게 출가한 누이 난설헌은 시댁과의 불화와 자식들의 잇따른 사망으로 눈물로 세월을 보냄

- 허균이 20세 때인 1588(선조 21년) 친형 허봉 사망

허균의 인생에 큰 영향을 준 이는 두 사람으로, 둘째형의 친구였던 손곡(蓀谷) 이달(李達) 과 누이 난설헌이다. 허균에게 학문을 가르쳤던 이달은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한 명으로 꼽혔으면서도 서얼이란 이유로 출사하지 못했다 허균이 훗날 서얼들과 친하게 지내고 <유재론 遺才論>에서 ‘천한 출신과 서자들도 중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은 이달을 통해 서얼도 평등한 사람이란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허난설헌 또한 사회의식이 강했는데, 그녀가 죽은 뒤 허균이 유작 시집을 간행한 것은 그만큼 깊은 감화를 받았음을 뜻한다.

이런 와중에 겪은 임진왜란은 형과 누이의 죽음만큼이나 큰 충격이었다. 허균은 모친 김씨와 만삭의 아내 김씨를 데리고 덕원과 단천 등으로 피난 갔는데, 피난 중에 부인 김씨와 어린 아들이 모두 죽고 말았다. 이때 허균 일가는 하루 한끼 먹기도 어려웠다고 한다. 이런 경험을 통해 허균은 백성들의 고통스러운 삶을 남 일로 보지 않게 되었다.

허균은 스물여섯 살 때인 선조 27년(1594) 정시 문과 을과에 합격해 벼슬길에 나서게 된다. 선조 30년(1597)에는 문과중시에 장원해 벼슬이 정6품 예조좌랑으로 뛰어오르고 중국에 다녀와 병조 실세인 병조좌랑으로 승진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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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체제 내에 안주해도 미래가 보장되는 인생길에 접어든 셈이었다.

선조 32년(1599) 황해도사가 되었으나 경창(서울 기생)을 데리고 부임했으며 중방이라는 무뢰배를 거느리고 왔다는 이유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 당했다.

선조 34년 충청, 전라 지방의 세금을 받는 전운 판관이 되었을 때는 유명한 시인이자 기생인 매창(梅窓 1573~1610)과 교류한다.

그는 정계를 떠나지 못했고 사복시정(司僕寺正)과 공주목사 등을 역임하면서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다가 광해군 1년(1609) 형조참의(정3품)로 승진한다. 그러나 이듬해 전시(殿試)의 대독관이 되어 과거 시험 답안지를 채점하면서 조카와 조카사위를 합격시켰다는 혐의로 탄핵받고 42일 동안 의금부에 갇혀 지내다가 전라도 함열로 유배갔다. 이에 대해 허균이 죄를 뒤집어썼다는 여론도 있었다.

■ 왜 이이첨의 수하가 됐을까?

광해군 5년(1613) ‘칠서(七庶)의 옥(獄)’이 일어나면서 그의 운명은 칼 끝에 서게 된다. 박응서, 서양갑, 심우영 등 명가 출신의 서자 일곱 명이 여주 남한강 가에 토굴을 파고 무륜당(無倫堂)이라 이름짓고 자신을 강변칠우라고 불렀다. 이 중 박응서가 한 은상(銀商)을 살해했다가 체포되는데, 북인 모사 이이첨이 이를 영창대군의 외조부 김제남을 제거하기 위한 계축옥사로 확대했다. 살인강도 사건이 역모로 확대된 것이다.

이 서자들과 가까이 지내던 허균이 큰 공포를 느낀 것은 당연했다. 김제남과 서자들은 모두 사형됐지만 허균은 무사했는데, <광해군일기>의 사관은 이 사건의 불똥이 자신에게 튀는 것을 피하고자 허균이 이이첨에게 접근한 덕분이라고 적고 있다.

바로 이 대목에서 허균 인생의 수수께끼가 시작된다. 이이첨에게 붙어 목숨을 부지하고 출세를 도모한 것이다. 허균은 왜 이이첨의 수하가 되었을까? 이이첨의 후원을 얻은 뒤부터 허균은 출세가도를 달렸다. 광해군 6년(1614) 호조참의, 이듬해에는 요직인 동부승지가 되고, 문전 정시에서 1등을 하여 종2품 가정대부가자를 받았다. 그리고 광해군 8년에는 형조판서까지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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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목대비 폐출 논의

허균은 광해군 9년(1617) 말부터 시작되는 인목대비 폐출 논의에 앞장서서 두고두고 논란거리를 제공한다.

이런 와중에 허균과 이이첨이 멀어지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이첨의 외손녀인 세자빈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허균의 딸이 양제(세자의 후궁)로 내정된 것이다. 이이첨이 허균을 제거대상으로 보고 있는데, 광해군 10년(1618) 8월 10일 남대문에 “포악한 임금을 치러 하남대장군인 정 아무개가 곧 온다……”는 내용의 벽서가 붙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벽서의 작성자가 허균이란 소문이 돌자 광해군은 과거 기준격의 상소문을 국청에 내려 조사하게 한다. 허균은 8월 16일 자신의 문집인 <성소부부고>를 딸의 집으로 옮겨 놓고 다음날 체포된다.

* 기준격의 상소문 : 폐모에 반대했던 북인 영수이자 영의정인 기자헌이 귀양에 처해지자 아들인 기준격이 허균이 역모를 했다고 비밀상소를 올렸는데 광해군은 왠일인지 진상을 조사하지 않고 묻어두었음

■ 정말 율도국을 세우려 했는가?

허균은 8월 24일 하인준 등과 함께 사형을 당하는데, 이를 기록한 사관은 그의 죽음에 의문이 있음을 곳곳에서 암시하고 있다. “허균은 아직 승복하지 않았으므로 결안을 할 수 없다면서 붓을 던지고 서명하지 않으니, 좌우의 사람들이 핍박하여 서명케 하였다”라는 내용이나 “기자헌은 허균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예로부터 형신도 하지 않고 결안도 받지 않은 채 단지 공초만 받고 사형으로 나간 죄인은 없었으니 훗날 반드시 이론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다. 라는 평들이 그런 예이다. 게다가 광해군이 협박에 못이겨 사형에 동의 했다고 적고 있다.

사관은 이이첨이 그 전에 “심복을 시켜 몰래 허균에게 말하기를 ‘잠깐만 참고 지내면 나중에는 반드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고, 또 허균의 딸이 곧 후궁으로 들어갈 참이므로 다른 근심이 없으리라는 것을 보장한다면서 온갖 수단으로 사주하고 회유했으나 이는 허균을 급히 사형에 처하여 입을 막으려는 계책이었다”라고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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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속았음을 깨달은 허균은 “크게 소리치기를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하였으나 국청의 상하가 못 들은 척하니, 왕도 어찌할 수가 없어서 그들이 하는 대로 맡겨둘 따름이었다.” <광해군일기 10년 8월 24일> 라고 적고 있다. 허균은 실제 역모를 꾸몄을까?

<광해군일기>는 “허균이 마침내 군대를 일으켜 궁을 도륙하려다 자신이 거꾸로 역모에 걸려 죽었다”라며 군대를 일으킨 내용을 비교적 자세히 적고 있으나 알 수 없는 일이다.

<호민론>에서 “천하에 두려워해야 할 바는 오직 백성일 뿐이다.”라며 “견훤, 궁예 같은 사람이 나와서 몽둥이를 휘두른다면, 시름하고 원망하던 백성들이 가서 따르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보장하겠는가?” 라고 썼던 허균 그는 진정 율도국을 건설하려 했던 것일까?

2016. 8. 23

* 다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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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버린 천재들(2)

- 역사의 선각자로 부활하다 -

■ 이덕일 지음

11장 폭정이 낳은 영웅, 홍경래

- 1780, 정조 4년 ~ 1812, 순조 12년 -

조선말기 관변 쪽은 홍경래(洪景來)를 서적 또는 경적이라 불렀다.

- 서적(西賊) : 관서지역의 역적, 경적(景賊) : 홍경래의 경자를 따옴

- 북한의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에서 출간한 <조선통사>는 ‘평안도 농민전쟁’, 남한에서는 ‘홍경래의 난 (순조 11년, 1811)’으로 칭해 왔으나 <한국사> 36권(1977년 판)에서는 ‘서북지방의 민중항쟁’이란 제목 아래 ‘홍경래의 난’이라고 절충적으로 표현

이 유명한 사건에 대한 사료는 뜻밖에 소략하다. <순조실록>, <일성록>과 관군 쪽 박기풍(朴基豊)이 쓴 <진중일기>등 진압군 쪽의 사료가 대부분이다. 반대쪽 시각은 주로 소설 속에 구현돼 왔다.

철종 12년 경(1861) 작성된 것으로 추측되는 역사소설 <신미록 辛未錄)은 관군쪽의 시각으로 서술되었지만 <홍경래 실기>나 한문소설인 홍경래전은 민중의 시각으로 이 사건을 바라본다.

■ 스승도 놀란 기질

홍경래는 정조 4년(1780)평안북도 용강군 다미면에서 태어났다. 그는 여덟살 때 이미 한시를 지을 정도로 비범한 아이였다. 어린시절 중화(中和)에 있는 외숙 유학권(柳學權)에게 가서 공부했는데, 한문 소설 <홍경래전>은 이 무렵에 관한 소식을 전한다.

‘사략(史略)을 읽다가 ’왕후 장상이 어찌 씨가 따로 있겠는가. 장사가 죽지 않으면 큰 일을 이루고, 죽으면 큰 이름을 남긴다‘같은 대목에서는 반드시 두 번 세 번 읽고 감탄하며 칭송해 마지않는 것이었다.’

유학권은 홍경래의 총명함에 기뻐하면서도 은근히 걱정했다. 그리곤 그의 집으로 돌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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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온 홍경래는 혼자 경사(經史)를 통독하면서 시를 지었는데, 그중에 “달이 뭇 별을 거느리고 하늘에 진을 치니, 바람은 나뭇잎을 몰고 가을 산에서 싸우도다.”라는 것이 있다. 이때만 해도 홍경래는 체제내의 입신을 꿈꾸었다. 평양 향시를 통과한 그가 한양으로 올라와 대과에 응시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그러나 대과는 홍경래 같은 지방 출신이 통과할 수 있는 등용문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서북 출신, 그 중에서도 평안도 사람들은 더욱 쓰이지 못했다. 조선 초에는 고려 유민(遺民)이라 하여 위험하게 여겨 쓰이지 않았고, 나중에는 천하게 여겨 쓰지 않았다. 서울의 하인배나 충청도의 졸개들까지도 서북인을 ‘사람(人)’이라 부르지 않았고, ‘놈(漢)’이라 불렀다. 서북 지방의 감사, 수령들이 백성의 재물을 다반사로 토색한 것도 서북민을 내심으로 천시한 까닭이다.(홍경래전)

<홍경래전>은 사마시(생원과 진사를 뽑는 시험)에 낙방한 홍경래의 모습을 이렇게 그린다.

“당일 방에 이름이 오른 자들을 보니 거개가 귀족의 자질(子姪)들이었다. 경래의 노한 눈에서는 불꽃이 일었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가 감히 위를 범해 세상을 바꿀 결심을 하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

■ 혁명의 도모

동지 탐색에 나선 홍경래는 가산(嘉山)의 청룡사에서 태천(泰川)의 명가 출신 서얼 우군칙(禹君則)을 만났다. 동지가 된 둘은 가산의 역속(역리와 역졸)으로 있는 부호 이희저(李禧著)를 포섭 대상으로 삼았다. 이희저의 포섭과정은 이렇다.

- 우군칙의 아내를 점쟁이로 변장시켜 이희저에게 보냄 - 10년 내에 대운을 만날 것인데 반드시 수성(水姓)을 가진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말함

- 1년 뒤 우군칙이 이희저의 부친 묏자리를 봐주면서 당대 발복을 하겠지만 수성 가진 자를 만나야 한다고 말함

- 이런 이희저 앞에 수성을 가진 홍(洪)씨가 나타나자 이희저는 귀인으로 여겨 거사에 합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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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산의 김창시(金昌始)도 비슷한 방법으로 포섭했다. 이밖에도 홍총각, 이제초, 김사용, 등 장사를 포섭했다. <홍경래전>은 홍경래가 순조 11년 모친과 형을 모시고 가산의 다복동으로 들어갔다고 전하는데, 바로 혁명의 전초기지였다.

홍경래는 금광을 한다는 명분으로 다복동에 장정들을 모아 군사훈련을 시켰다. 장정들에게 땅을 파게 해서 기운을 평가하고, 새끼줄을 쳐놓고 높이 뛰게 해 날램을 평가했다. 사격, 기마, 검술을 가르쳐 병졸의 등급을 정하고, 후한 상급을 베풀어 환심을 샀다. 그리고 순조 12년(1812) 임신년을 거병의 해로 잡았다.

홍경래는 임신년에 거병한다는 내용의 파자를 널리 퍼뜨리게 했다. 그와 함께 다복동에 1,000여 명이 모여들자 거사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그래서 홍경래는 거사계획을 앞당겨 순조 11년 12월 15일 평양의 대동관을 불태우는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 거사

12월 15일 밤 많은 장졸을 평양에 보내 내응토록 하고 대동관에 불을 질러 관민이 불을 끄는 틈을 타서 관서에 불을 지르고, 관장의 겁박하여 죽이고 평양을 점령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대동관 밑에 매설했던 화약통과 도화선이 눈에 젖어서 약정한 시간에 폭발하지 않고 16일 오후에야 폭발했다. 계획이 빗나가 성사치 못하고, 도리어 군교들의 수색이 삼엄해지자 파견했던 장사들이 위험을 느껴 각자 다복동으로 도주했다.<홍경래전>

수색이 심해져 일부 동지들이 체포되자 홍경래는 순조 11년 12월 18일에 다시 거병했다. 평서 대원수에 홍경래, 총참모에 우군칙, 참모 김창시, 선봉장 홍총각, 이제초, 후장군 유후험, 도총 이희저, 부원수 김사용 등이 주요 지휘부였다.

드디어 봉기가 시작되자 선봉장 홍총각은 정병 100여 명을 거느리고 홍경래의 본진보다 앞서 가산으로 진군해 단숨에 점령하고 군수 정시와 그 부친을 처단했다. 첫 전과였다. <홍경래전>은 “홍경래군이 추호도 백성을 범하는 일이 없고, 본진의 장졸들 가운데서 규칙을 범한 자 두세 명을 노변에서 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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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하고 각 방면에 전령하여 이 사실을 방으로 널리 알려 기울을 엄격히 지키게 하였다”고 전한다. 의군(義軍)의 면모를 보이려 한 것이다. 민심을 얻은 봉기군에게 평안도 각 현이 우수수 떨어졌다. 가산과 곽산은 물론 삽시간에 정주, 선천, 박천, 태천, 철산, 용천을 점령했다.

이때 전략적 실수가 발생했다. 여덟 개 군현을 점령한 여세를 몰아 요충지인 안주를 점령하기 위해 조기 남하했어야 하는데, 때를 놓친 것이다. 안주는 평안병사의 본영이 있는 군사상 요충지였다. 애초 태천을 치기 전에 안주를 치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 사이 관군이 집결해 수성태세를 갖추었다.

<홍경래전>에는 안주 공략을 적극 주장했던 김대린 등은 홍경래가 듣지 않자 초조해져 ‘대사는 끝났다’며 홍경래의 목을 베어 관군에 투항하려다 홍경래에게 되레 죽임을 당했다고 전한다.

한숨을 돌린 조정은 병조참판 정만석을 관서위무사 겸 감진사로 삼아 현지로 급파하고, 뒤이어 이요헌을 관서순무사, 박기풍을 중군 등으로 임명해 현지로 보냈다.

12월 27일 1,000여명의 관군과 봉기군이 안주 대안에 있는 박천의 송림에서 맞붙었는데, 초전에는 홍총각이 이끄는 봉기군이 승리했지만 관군이 계속해서 증원되는 바람에 패해서 정주성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관군들의 노략질에 분개한 백성들이 대거 홍경래를 따라 정주성에 입성했다.

그러나 한겨울 식량이 떨어져 가축을 다 잡아먹고 소나무 껍질까지 벗겨먹는 형편이 되고 관군의 귀순 종용 심리전이 효과를 거두면서 아사자가 속출하자 홍경래는 두 차례에 걸쳐 백성들을 성 밖으로 보냈다.

홍경래는 무작정 농성만 한 것이 아니었다. 경래가 고단한 성에서 버티고 있었던 것은 기다리던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는 박종일이 서울에서 난을 일으키기로 한 것이요, 둘은 북쪽 각 고을로부터 원병이 오기로 한 것이요. 셋은 정시수가 호병을 이끌고 오기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세가지는 하나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 오지 않는 원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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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에서 ‘호병’ 즉 만주족 병사의 동원 여부가 주목이 된다. 정시수는 다섯 살 때 만주로 들어가 마적 두목이 된 인물로서 홍경래가 요청하면 동조 거병하기로 했으나 연락을 맡은 강계의 향임 송지렴이 김사용의 궤멸 소식을 듣고 관군 쪽에 가담하면서 무산됐다. 그 사이 관군의 공격으로 정주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순조 12년 4월 19일이었다.

홍경래는 이희저 등과 끝까지 싸우다가 전사했으나 이는 관군 측의 기록이고 야담에는 “경래가 성벽이 무너질 때 몸을 날려 성을 넘어서 먼 곳으로 달아났으며 그날 살해된 것은 가짜 홍경래 였다고 한다”라고 전한다. <홍경래 실기>는 “도망하야 잡지 못하고”라고 전하고 있다. 홍경래의 불사를 바라는 민중의 마음이 소설 속에 담긴 것이다.

<홍경래전>은 “성이 함락될 때 관군들은 함부로 총질하고 창질하여 남녀 노유를 가리지 않고 죽여서 쌓인 시체가 성중에 가득하였다"라고 전한다. 이때 2,000명 가까운 봉기군 이 참살당했다. 바로 이런 폭정이 홍경래를 민중의 가슴속에 영원한 영웅으로 살아 있게 한 것이다.

12장 천주교를 지키다. 정하상(丁夏祥)

- 1795, 정조 19년 ~ 1839, 헌종 5년 -

부친 정약종(丁若鍾)과 이복형 정철상(丁哲祥)이 사형 당하던 순조 1년 (1801) 2월 25일 정하상은 여섯 살에 불과했다. 부친이 사형 당하던 날 어머니 누이동생과 함께 옥에 갇혀 있었다. 1800년 정조가 사망하자 수렴청정 하게 된 정순왕후는 정조때 성장한 남인들을 제거하기 위해 순조 1년(1801) 천주교도를 역적으로 다스리겠다는 사학(邪學)엄금 교시를 내렸는데, 정하상의 부친이 이때 사형당했다. 재산은 몰수되었고 옥에서 풀려난 그들은 갈 곳이 없었다. 정하상과 모친 류소사(柳召史), 두 살 어린 누이 정정혜(丁情惠)는 이리저리 유랑해야 했다.

정하상은 세례명 바오로를 따서 정보록(丁保祿)이라 불리는데, 1890년 홍콩 주교 약망(若望)이 정하상이 쓴 ‘상재상서(재상에게 올리는 글)’을 간행하면서 ‘정보록 일기’를 덧붙였는데 그것이 그에 대한 기초 사료이다. 여기에 따르면 “(석방된 뒤)향곡(鄕曲)을 유랑하다가 숙부 집에 들게 되었는데, 이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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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당한 고초는 붓 하나로 쓰기가 어려웠다”라고 쓸 정도로 많은 고초를 겪었다. 숙부는 다산 정약용을 뜻하는데, 정약용은 백부 정약전과 함께 유배중이었다.

■ 천주교를 버리지 않다

숙부 집에 얹혀살게 되면서 밥은 굶지 않게 됐지만 문제는 여전했다. 어머니 류소사가 천주교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약용은 정조 21년(1797) ‘동부승지를 사양하는 상소’에서 천주교에 대해 “애초에 서학에 물든 자취는 아이의 장난과 같았는데 지식이 자라자 문득 적수로 여기고, 분명히 알게 되어서는 더욱 엄하게 배척하였다”라고 밝혔음에도 귀양갔다. 이런 상황에서 천주교를 버리지 않은 일가를 따뜻하게 대해줄 수는 없었다.

‘정보록 일기’는 “정하상은 이미 폐고(廢固)되었기 때문에 친척과 노복들의 박해를 심하게 받았다”라고 전하는데, 실상은 천주교를 버리지 않아서 박해받은 것이었다.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인 샤를 달레(1829~1878)는 이때의 상황을 더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여러 사람이 아직도 귀양살이하고 있던 정씨 일가는 천주교란 말만 들어도 벌벌 떨며, 그런 교를 계속 믿으려 한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친척들은 정하상과 그 집안 식구들이 천주교를 버리게 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통렬한 비난, 협박, 멸시, 조소, 심지어 학대까지도 모두 동원되었다.(한국천주교회사)

그러나 ‘정보록 일기’에서 “귀 기울여 어머니의 가르침을 따라 기도문을 배울 수 있었다”라고 쓰고 있는 것처럼 정하상은 모친 류소사에게 천주교 신앙을 전수받았다.

10대 후반의 정하상은 무산에 유배중이던 조동섬을 찾아 떠났다. 조동섬은 정씨 일가의 고향인 마재 부근의 양근 출신으로 신유박해에 연루되어 북방으로 유배된 인물이었다.

달레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여러 달 동안 그(조동섬)와 함께 지내면서 교리 연구와 한문 연습에 끊임없이 전심했다”며 “그에게서 자기의 크나큰

계획을 격려를 받고 돌아왔다”고 전하고 있다. ‘자기의 크나큰 계획’이란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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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에 신부를 다시 입국시키는 일이었다. 신유박해 때 순교한 주문모 신부 이후 조선에는 신부가 없었다.

■ 베이징을 오가며 신부 파견을 요청하다

정하상은 ‘자기의 크나큰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역관의 종이 되었다. 그래야 북경에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정하상은 만 21세 때인 순조 16년(1816) 드디어 북경에 들어가 북경교구의 신부들을 만났으나 신부 파견을 약속 받지는 못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북경으로 가서 신부 파견을 요청했다. ‘정보록 일기’는 “처음에는 허락해 주지 않을 것 같더니 다섯 번째에 허락을 받고 변문(邊門)에서 기다리면서 맞이하러 나갔으나 신부는 오지 않았다.”

1805년 중국에서도 천주교 박해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정하상은 포기하지 않았다.

1824년 부터는 역관 유진길이 가세하면서 상황이 호전됐다. 신부 파견을 요청하는 유진길의 장문 편지를 받은 교황 레오 12세가 조선을 독립된 포교지로 지정해서 교황청에 직속시키고 포교사업은 파리 외방전교회에 맡기기로 결정한 것이다.

- 1831. 9. 9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조선교구를 설정하고 브뤼기에르를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

- 브뤼기에르는 싱가포르, 필리핀, 마카오를 거쳐 조선으로 오는 도중 모방 신부, 샤스팅 신부와 합류하고 조선입국의 기회를 엿보았으나 쉽지 않았음

- 1833(순조 33년) 유방제 신부의 입국에 성공

- 1835년 10월 브뤼기에르 신부는 만주에서 사망

- 헌종 2년 1월(1836), 모방 신부 입국

정하상은 조선 천주교도의 중심인물이었다. 모방 신부는 정하상의 집을 숙소로 삼고 유방제의 문제점을 추궁한 뒤 중국으로 되돌려 보냈다. 그리고 1836년 4월 교황은 앙베르 신부를 새 주교로 임명했다.

헌종 3년(1837)1월에는 샤스탕 신부가 입국하고, 그해 12월에는 앙베르 주교까지 입국함으로써 신부는 3명이 되었고 1838년에는 교인 수가 9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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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6년 헌종 2년에는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가 신부 후보로 선발되었는데 정하상이 이들을 국경까지 인도했다. 이들은 우여곡절 끝에 마카오로 가서 신부 수업을 받게 된다.

■ 다시 드리운 박해의 그림자

조선 천주교는 1801년의 박해를 딛고 다시 성장하기 시작했다. 모친이 전해준 신앙의 씨앗이 크게 성장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 정세가 다시 어두워졌다. 신유박해를 주도한 노론 벽파 정순왕후가 1805년에 죽은 뒤 정권을 잡은 순조의 장인 김조순은 노론 시파로서 천주교 억압에 그리 저극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가 풍양조씨 조만영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이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풍양조씨는 천주교 배척에 적극적이었다.

- 순조 30년(1830) 효명세자 사망, 순조 34년 순조 사망

- 효명세자의 아들(헌종)이 8세의 나이로 즉위하고, 순조의 왕비였던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

- 조정은 순원왕후의 안동 김씨 세력과 헌종의 외가인 풍양조씨 세력의 각축장이 됨, 풍양 조씨 세력이 우세해 지면서 천주교 억압이 다시 시작됨

- 헌종 5년(1839) 4월 18일 사학퇴치령(주자학에 배치되는 학문)이 내려짐

■ 양심선언이자 신앙고백, ‘상재상서’

오가작통법(다섯 집을 하나로 묶어 도망가는 것을 감시하고 조세 납부를 독려하던 제도)이 강화되면서 천주교도 검거 선풍이 일자 정하상은 주교 앙베르를 지방으로 피신시킨다. 정하상은 체포가 임박했음을 느낀다. 그는 체포를 각오하고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문서를 작성했는데 이것이 바로 ‘상재산서(上宰相書)’ 곧 재상에게 올리는 글이다. ‘상재상서’는 순교를 각오하고 작성한 양심선언이자 신앙고백으로서 이벽의 ‘성교요지’, 부친 정약종의 ‘주교요지’와 더불어 조선 천주교도들의 천주교 인식과 신앙관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정하상의 예상대로 헌종 5년(1839) 6월 포졸들이 집에 들이 닥쳤다. 정하상은 스스로 붉은 오라로 결박하고 나갔다 모친과 누이동생이 함께 체포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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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정하상은 미리 작성한 ‘상재상서’를 전했다. 관원이 “너는 어째서 조선의 풍속을 따르지 않고 다른 나라의 도리를 행하는가?”라고 묻자 “다른 나라의 훌륭한 물건은 사람들이 모두 골라 사용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유독 천주성교는 다른 나라의 도리라고 말하면서 그 참되고 올바르며 훌륭한 것을 채택하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했다.

헌종 5년(1839) 8월 14일 조선 천주교회의 중심인물이었던 정하상은 역관 유진길과 함께 서소문에서 사형당했다. 세 명의 프랑스 신부는 새남터에서 사형당했다.

‘정보록 일기’는 “정바오로가 형장으로 나갈 때 수레 위에 매달려 서서 흔쾌히 웃으며 즐거워할 따름이었다”고 전한다. 정하상은 1984년 성인으로 시성(諡聖)됐는데 모친과 여동생도 함께였다.

13장 새로운 남조선을 열다. 김개남(金開男)

- 1853, 철종 4년 ~ 1894, 고종 31년 -

흔히 동학농민 혁명의 지도자 하면 전봉준(全琫準)을 떠올리지만 손화중(孫華仲)과 김개남 까지 ‘동학 삼걸(三杰)’을 손꼽는다.

동학(東學)은 교주 최제우(崔濟愚)가 철종 11년(1860) 경주 구미산의 용담정에서 창시한 민족종교였다. 이는 우리 전통 사상을 바탕으로 유교 사대주의의 틀을 깨는 획기적 민족종교의 출현이었다. 여기에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은 ‘사람이 본래 한울이니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 섬기듯이 하라(人是天事人如天)’고 설법했는데 이는 종교를 넘어 사회 변혁이론으로 받아들여졌다.

동학이 처음 집단적 모습을 드러낸 것은 교조 신원운동이었다. 고종 1년 ‘사도로써 바른(성리학) 도를 어지럽혔다’는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사형당한 교주의 억울함을 풀어 달라는 운동이었다.

- 고종 29년(1892) 12월 동학교도들이 전라도 삼례역에 모여 제1차 교조 신원을 요구

- 1893년 3월, 박광호, 손병희 등 40여명이 광화문에서 교조 신원을 요구하는 복합상소 (대궐 앞에 엎드려 임금께 호소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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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3년 12월 전봉준은 고부 백성 40명과 군수 조병갑을 찾아가 만석보 수세 중복 징수 등 탐학을 중지 할 것을 요구

- 1894년 2월 전봉준 등 농민 500여 명이 고부관아 점령. 동학농민운동의 시작

■ 농민혁명의 시작

동학농민군은 그해 5월 초 고부 백산(白山)에서 ‘백산대회’를 개최하고 농민혁명군 조직. 전봉준이 총사령관인 동도대장에, 손화중, 김개남이 총관령에 추대되었다. 농민혁명군은 이 자리에서 “우리가 의를 들어 이에 이름은 그 본의가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창생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위에 두자 함이다”라는 유명한 창의문을 발표했다. 그간 수탈의 대상이었던 농민들이 변혁의 주체임을 스스로 선언하면서 역사의 전면에 나선 것이다.

- 부안 점령에 이어, 5월에는 황토현에서 관군을 대파하고 정읍 점령. 이어서 전주성 점령

- 조정은 농민들의 요구를 담은 원정서(原情書)를 받아들여 시간을 버는 한편 청국군의 파견 요청

- 그해 6월 전주 화약이 성립되어 전라도 53개소 관아 안에 일종의 민정기관인 집강소 설치, 전봉준은 전주에 집강소 총본부인 대도소(大都所)를 설치하고 탐관오리 처벌, 노비문서 소각, 천인들의 처우개선, 토지분할 등 폐정개혁을 실천에 옮김

- 전봉준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은 전라우도에 한정

- 전라좌도는 남원 관아에 도회소(都會所)를 설치한 김개남이 주도함

- 매천 황현이 쓴 동학농민에 관한 기록인 오하기문(梧下記聞)에는 “김개남이 임실에서부터 남원에 들어 왔을 때 남원부사 윤병관은 도망간 지 한 달 쯤 되었고, 전라좌도의 적은 대부분 남원부에 모였는데 그 숫자가 대략 7만 명이었다”라고 전한다.

이때 김개남과 직접 만났던 유생 정석모는 <갑오약력>에서, ‘전봉준은 수천 명의 군중을 끼고 금구 원평에 틀고 앉아 전라우도를 호령했으며 김개남은 수만 명의 군중을 거느리고 남원성을 타고 앉아 전라좌도를 통솔했다’ 라고 적고 있는데 김개남의 군사가 훨씬 더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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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남에 대해 정석모는 “개남이 가장 심하였다”라고 표현했는데 황현도 그를 “사납고 자못 무단하다”고 묘사했다. 이런 묘사들은 모두 양반 사대부의 시각에서 본 것으로 이는 김개남의 농민혁명군이 매우 급진적이었음을 의미한다.

■ 다른 나라를 세우는 혁명을 꿈꾸다

실제로 전봉준과 김개남 사이에는 노선 대립이 존재했다. 전봉준이 국체는 보존한 채 고종 주위의 벼슬아치들을 처벌하고 자신들이 실권을 잡는 개혁을 꿈꿨다면 김개남은 조선을 무너뜨리고 다른 나라를 세우는 혁명을 꿈꿨다. <오하기문>은 본명이 김기범인 그가 “꿈에 신령이 나타나 손바닥에 ‘개남(開南 남쪽을 열다)’ 두 자를 써주었다면서 스스로 호를 ‘개남’으로 삼았다고 전하는데 <뮈텔주교 일기>는 김개남이 새 왕국의 왕이 되고자 했다고 적고 있는 등 여러 기록은 김개남이 조선 왕조를 개창하려 했다고 적고 있다.

김개남은 엄정한 군기로 약탈을 금하고, 지방 수령도 함부로 대하지 않았지만 동학농민군을 와해시키려는 공작에 대해서는 가차없이 응징했다.

그해 6월 민씨 정권의 요청에 따라 청군이 진주하자, 일본도 즉각 군대를 파견했다. 일본군은 나아가 7월 말 경복궁을 점령하고 대원군을 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고 갑오경장을 시작했다. 아울러 일본은 충청도 풍도 앞바다에 진주한 청국 군함 제원호 등을 격침시키는 것으로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소식을 들은 농민혁명군 지도부는 재봉기를 결심했다. 이때 가장 먼저 재봉기를 결심한 인물도 김개남이었다.

그는 전라 좌도의 동학 농민군 약 7만 명을 소집해 남원대회를 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전봉준과 손화중이 남원으로 달려와 시기상조임을 역설하며 때를 더 기다리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김개남은 “이 큰 무리가 한번 흩어지면 다시 합하기가 어렵다”면서 둘의 제안을 거부했다. 김개남은 즉각 전쟁 준비에 나섰다. 부패하고 무능한 조선정부를 타도하는 반봉건 운동에 일본을 격퇴하는 반외세 전쟁이 결합한 것이었다.

전봉준과 손화중의 신중론도 물론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당시 교주 최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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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따르는 충청도의 북접이 무장투쟁에 나서기를 꺼리고 있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추수가 끝나 군량이 확보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드디어 오지영 등의 조정으로 충청도의 북접 10만 농민군도 손병희 지휘하에 논산에서 남접과 합세했다. 동학 전체의 재봉기가 시작된 것인데, <오하기문>은 “김개남은 전주에서 삼례로 향하면서 전봉준을 성원했다”고 전하고 있다. 이는 전봉준이 이끈 농민혁명군과 김개남이 이끄는 농민혁명군이 역할 분담을 했다는 뜻이었다.

■ 북상

전봉준은 전주에서 북상해 공주로 향했는데, 일본군이 직접 전투에 나섰다는 소식에 상당수가 이탈해 혁명군의 숫자는 대폭 줄어들고 있었다. 북접 김복명이 이끄는 동학농민군 선봉대가 목천에서 일본군 및 조선정부군과 맞섰으나 김복명을 비롯해 수백 명이 전사하고 패배했다. 기세를 올린 일본군은 논산에서 공주로 향하는 길목 우금치에 진을 쳤다. 정봉준이 여러 차례공격했으나 화력이 우세한 일본군에 당해내지 못해 전투가 끝났을 때는 1만 여명 중 남은 병력은 고작 500여 명이었다.<동학란 기록>

반면 김개남의 초기 북상길은 순조로웠다. 김개남 부대는 총통을 가진 자가 8,000명이었고 치중(군대의 여러 가지 물품)이 100리를 이었다고 할 정도로 정예군사여서 전주와 삼례를 거쳐 금산까지 손쉽게 점령했다.

김개남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의 다음 목표는 청주였다. 전봉준은 충청 감영이 있는 공주를 점령하고 김개남은 충청 병영이 있는 청주를 점령하는 것으로 역할분담이 이루어졌다. 1894년 12월 9일 김개남은 농민 혁명군을 이끌고 청주성을 공격했으나 이미 방비태세가 갖추어진 청주성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청주성을 포기한 김개남은 퇴각했다가 12월 14일 연산에서 다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역시 꺾지 못하고 노성과 논산 쪽으로 퇴각했다.

12월 10일 전봉준과 합류한 김개남은 이튿날 3,000여 명의 병력으로 일본군 및 정부군과 맞서 싸웠으나 역시 패배하고 전주 쪽으로 퇴각했다.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치명적 타격을 입은 농민혁명군은 두 방향으로 퇴각했다. 전봉준은 고부, 태인 방향으로, 김개남은 재기를 도모하기 위해 남원 방향으로 퇴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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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인 산내면 종송리에 사는 매부 서영기의 집에 은거해 있던 김개남은 1894년 12월 27일 임모의 고변으로 체포되었다. 황헌주가 김개남을 전주로 이송하자 감사 이도재는 서울로 이송하다가는 탈취당할 염려가 있다는 이유로 서교장에서 참수하고 수급만 서울로 보냈다.

■ 개남을 두려워한 사람들

김개남에게 원한이 있는 사람들이란 물론 양반 사대부들이었다. 그는 새로운 왕조를 꿈꾸었기에 그가 통치하는 지역에서는 양반 사대부들의 재산을 몰수해 서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동학의 창시자 최재우는 사대주의에 찌든 유교에 맞서는 새로운 사상체계를 만들었고, 최시형은 전 민중이 평등하다는 이상을 설파했다. 최시형을 직접 만나 가르침을 받은 김개남은 모든 사람이 평등한 이상사회를 실제로 구현하기 위해서 농민군을 일으켰다. 탐학과 착취의 대상이던 농민들은 그와 함께 잠깐이지만 세상의 주인이 되었고 변혁의 주체가 되었다. 김개남의 손자 김환옥은 도망갈 때 박씨로 성을 바꾸었다고증언했다. 도강 김씨라면 모두 죽였다는 것이다.

3부 가난을 구제하다

14장 죽어서도 대동법을 외치다. 김육(金堉)

- 1580, 선조 13년 ~ 1658, 효종 9년 -

효종 즉위년 (1649) 9월 영의정 정태화가 모친상으로 사직하자 효종은 조익을 좌의정으로 김육을 우의정으로 임명했다. 잠곡(潛谷) 김육은 와병을 이유로 세 번이나 사직상소를 올렸으나 효종이 윤허하지 않았다. 김육은 우의정 자리는 더는 피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그해 11월 자신을 쓰려면 대동법(大同法)을 확대 시행하라는 내용의 상차(上箚 일정한 격식을 갖추지 않고 사실만을 간략히 적어 올리던 상소문)를 올려 대동법 정국을 열었다. 김육은 백성을 편안하게 해 주기 위해서는 대동법을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동법은 역(役)을 고르게 하여 백성을 편안케 하기 위한 것이니 실로 시대를 구할 수 있는 좋은 계책”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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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성을 구할 계책, 대동법

대동법은 지방의 특산물을 납부하는 공납(貢納)을 대체한 법으로서 광해군 즉위년(1608) 경기도에서 시범 시행되다가, 인조 원년(1623)강원도로 확대 됐지만 더 이상 확대는 어려웠다. 대토지를 소유한 양반 지주들의 반대 때문이었다. 지방의 특산물을 국가에 바친다는 소박한 충성심에서 시작된 공납은 국가 수입의 60%를 차지하는 주요 세원(稅源)이 됐으나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종류가 수천 가지인데다 그 지방에서 생산되지 않는 산물이 부과되기도 했으며, 상공(常貢 정해진 것을 납부하던 공물)과 별공(別貢 상공의 부족분으로 부정기적으로 납부하던 공물)으로 나뉘어 시도 때도 없이 부과됐다. 더 큰 문제는 불평등한 부과 기준이었다.

- 각 군현의 백성수와 토지 면적이 달랐음에도 공안의 부과액수는 비슷했음

- 양반 지주와 가난한 전호(소작인)가 같은 액수를 부담 하거나 소작인에게 더 많이 부과

- 방납업자(공물을 대신 납부해 주고 수수료를 받는 업자)들의 농민 착취

- 농민들이 도망가면 가족에게 대신지우는 족징, 한 가족이 모두 도망가면 이웃에게 지우는 인징 등이 횡행

공납폐의 해결책은 사실 간단했다. 부과단위를 가호에서 토지 소유의 많고 적음으로 바꾸면 되는데, 이것이 바로 대동법이었다. 이렇게 바꾸면 토지를 많이 가진 지주는 많이 내고 토지가 없는 전호는 안 내게 된다.

■ 양반 지주들의 반대

대동법 시행은 양반 지주들뿐만 아니라 아전들도 꺼렸다. 대동법을 시행하면 김육의 상소대로 ‘다시 징수하는 명목이 없을’ 정도로 투명해지기 때문에 부패의 여지가 적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 인조는 충청도로 확대 시행하는 데 찬성했으나 다른 관료들의 반대로 실행되지 못했다.

그 뒤 와병으로 물러났던 김육은 효종 때 우의정에 제수된 것을 대동법을 다시 촉발시키는 계기로 삼기 위해 배수진을 친 상소를 올렸던 것이다.

상소의 내용은 대동법을 시행하려면 자신을 쓰고 그렇지 않으면 ‘노망한 재상’으로 여겨 쓰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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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법 시행으로 더 많은 세금을 내게 된 양반 지주들과 부패한 아전들, 그리고 방납으로 배를 불리던 방납업자들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갖가지 명목을 들어 반대했다.

비록 숫자는 적어도 반대하는 세력이 양반 지주들이었기 때문에 그 확대는 쉽지 않았다. 효종즉위년 12월 좌의정 조익이 대동법 시행을 주청하고 우의정 김육은 “대동법은 지금 모든 조례를 올렸으니, 전하께서 옳다고 여기시면 행하시고 불가하면 신을 죄주소서”라고 가세했으나 효종은 대답하지 않았다.

<효종실록>즉위년 12월 3일 “대소를 참작하여 시행하라”던 효종이 대답을 하지 않는 것으로 바뀐 것은 양반 지주들의 반대가 심했다는 뜻이다.

효종 초의 조정은 이 문제로 둘로 갈려 집권 서인이 분당되기도 했다. 대동법 시행에 찬성하는 김육, 조익, 신면, 등 소수파는 한당(漢黨)이 되고, 반대하는 이조판서 김집과 이기조, 송시열 등 다수파는 산당(山黨)이 됐다.

김육 등이 한강 이북에 살고 송시열 등이 연산 회덕 등 산림에 살기 때문에 붙은 당명이었다.

■ 100년 만에 전국에 시행되다

조정 내에서는 반대론자 들이 다수였지만 김육은 대동법에 대한 소신을 꺾지 않았다. 그는 효종 2년 영의정에 임명되자 충청도에 대동법을 확대 시행하는데 성공했다. 이어서 대동법을 호남에 확대하려 했는데 그 시행을 앞두고 효종 9년(1568) 9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후 대동법은 전국으로 확대 시행되었다. 대동법이 시행되고 100년의 세월이 흘렀다.

대동법에 모든 것을 걸었던 잠곡 김육, 대동법의 경세가라고 불렸던 능력 있는 한 양심적 경제 관료의 신념이 역사에 남긴 자취는 이처럼 컸다. 서민 경제가 무너졌다고 아우성치는 오늘 어찌 김육 같은 경제관료가 그립지 않겠는가.

15장 혁명을 꿈꾸며 농사를 짓다. 이익(李瀷)

- 1681, 숙종 7년 ~ 1763, 영조 39년 -

성호(星湖) 이익(李瀷)은 당쟁과 뗄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의 가문은 서울의 정동이 기반이던 남인의 명가였으나 정작 그의 출생지는 평안도 벽동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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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 이하진(李夏鎭)의 유배지였다. 출생 한 해 전에 서인이 남인을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하는 경신환국(1680)이 일어나면서 부친이 유배된 것이다. 대사간을 지낸 부친은 이익을 낳은 이듬해(1682) 배소에서 쉰다섯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갓 난 이익에게 당쟁은 운명이었다. 이익에게 학문을 가르쳤던 둘째 형 이잠(李潛)이 숙종 32(1706) 장희빈의 아들인 세자를 옹호하며 집권당 노론을 강하게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이익은 당쟁의 소용돌이로 휘말려들었다.

이잠의 상소에 격분한 숙종은 일개 유학(幼學)에 지나지 않는 이잠을 친국하면서 분개했다.

이잠은 형장만 열여덟 차례 맞다 장사(杖死)했다.

이잠은 노론이 세자(경종)를 내쫓으려 한다고 주장하다가 사형당한 것인데, 이 주장은 경종 2년 목호룡 고변을 통해 실제로 노론에서 경종 독살을 시도했던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장희빈을 죽인 노론으로서는 그 아들까지 제거해야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왕조 국가에서 저군(儲君)이라 불리는 세자의 지위를 흔드는 것도 반역이란 점에서 이잠의 상소는 남인 당론을 뛰어넘는 우국충정일 수 있었다. 그러나 숙종 스스로 노론의 정견을 가지면서 세자의 충신이었던 이잠은 숙종의 역적이 되어 죽어갔다.

■ 과거 공부에 뜻을 접고 ‘성호농장’으로 가다

이잠의 상소 사건이 나자 ‘이잠의 친척이나 친구들은 혹시 화가 미칠까 두려워 손을 흔들며 피했다’고 전하는데, 당시 스물여섯 살이었던 이익은 그때 선영이 있는 첨성촌으로 이주했다. 성호(星湖)라는 호는 여기에서 딴 것인데 행정 구역상으로는 광주(廣州)에 속했지만 실제로는 서해에 가까운 안산에 속한 지역이었다.

첨성촌으로 이주한 그는 과거 공부에 뜻을 접었다. 그러나 “집에 장서 수천권이 있어서 때로 이것 보는 것을 소일거리로 삼게 되었다”할 정도로 공부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또 벼슬길이 막혔다고 골방에 처박혀 책만 파는 머리만 큰 지식인의 길을 걷지도 않았다. 그는 '성호농장'에서 몸소 경작했다'는 기록처럼 스스로 농사를 지으면서 독서를 병행하는 사농일치의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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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노동의 철학 속에서 그는 사회개혁을 주장한다. "법이 오래 되면 폐단이 생기고, 폐단이 생기면 반드시 변혁이 따르게 마련인데, 이는 통상적인 이치이다"라며 개혁을 시대의 요구라고 주장하고 '몸소 농사의 어려움을 아는 자 가운데 덕망있는 인재'를 등용하자고 주장했다.

그는 "왕도 정치는 전지(田地)의 분배를 근간으로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구차할 뿐이다. 분배가 균등치 못하고 권리의 강약이 같지 않은데 어찌 국가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라면서 균전제(均田制)와 더불어 한전제(限田制)를 주장했는데 한전제는 한 집안에서 생활유지를 위한 일정 규모의 농토는 일절 매매할 수 없게 해서 생활에 안정을 기하고 파산을 막자는 것이었다.

■ 최고의 정치는 무엇인가?

이익은 집권 노론의 정치 보복으로 부친과 형을 잃었으나 남인의 자리에서 세상을 보지는 않았다. 이익은 부친과 형의 정견을 올바르다고 할 수 있었다. 실제로 남인들의 정견은 노론보다 객관적으로 시대정신에 부합했다. 그러나 이익은 남인 자리라는 현상을 뛰어 넘어 부친과 형을 죽인 당쟁의 본질에 천착했다. 그러다보니 정치의 본질에 대해서는 오히려 소박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백성들이 좋아하는 것을 하고,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최고의 정치라는 것이다.

■ 노동의 가치를 아는 자가 정치해야

당쟁의 구조를 간파한 이익이 강하게 비판하는 것은 편당심이다. 이익은 '편당 속에서 성장하면 비단 남에게 밝히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자신 또한 깨닫지 못한다. 참으로 밝은 지혜에다 결단성을 지니지 않으면 이를 뛰어넘어 높은 경지에 오르기 어렵다'며 편당심을 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조선 후기 들어서 시대의 요구와는 거꾸로 소수 벌열(나라에 공로가 많고 벼슬경력이 많음, 또는 그런 집안)에게 권력이 집중되는데, 이익은 이런 왜곡된 정치구조를 개혁하기 위한 획기적인 제안을 한다. '오늘의 벼슬아치들은 모두 종당(宗黨)과 사돈 붙이가 아님이 없어서, 서로 결탁하여 대를 이어가면서 벼슬을 독차지'하는 직업 정치인들의 문제에 주목하면서 노동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 정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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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은 사대부만이 아니라 서얼, 농민, 나아가 노비까지도 등용하자는 획기적인 방안을 내 놓는다. 세습적 직업 정치가인 소수 벌열에게 집중된 정치 구조를 깨트리고, 노동의 어려움을 아는 덕망있는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방안으로 이익은 천거제를 주장한다. '전형(銓衡)을 맡은 자로서 시골 인재를 추천하지 않은 자는 벌을 주자'고 까지 주장한 것이다.

■ 주자학을 뛰어넘어 서학도 수용

이익의 이런 주장들이 그 시대의 상식을 뛰어 넘은 것처럼 그의 사상 역시 주자학을 뛰어 넘었다. 다산 정약용은 중형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에서 "우리가 능히 천지가 크고 일월이 밝은 것을 알게 된 것은 모두 이 선생(이익)의 힘입니다" 라고 말했다. 정약용은 또 이익의 옛집을 방문하고, '이익이 추구하는 바가 공자, 맹자에 접근했으며 주석은 마융, 정현을 헤아렸다' 라는 시구를 남겨 이익이 주희를 거치지 않고 공맹에게 직접 다가가고, 주희 이전 고대 한(漢)나라 학자들의 주석으로 유학을 해석했다고 평가했다. 주자학에 매몰되지 않았던 이익은 사신을 통해 들어온 서학에 대해서도 개방적이었다.

그는 한 때 열심히 농사 지어 다소 여유 있는 생활을 누리기도 했지만 만년에 흉년이 계속되면서 "1년 중 친척 중에 스무 살 된 자로 죽은 사람이 열두 명인데 그 태반이 기병(飢病 굶주림)으로 인한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어려움에 부닥치게 된다. 게다가 외아들 맹휴(孟休)의 와병 때, 늙은 몸으로 일찍부터 밤까지 간호하여 근력도 다하고 가산도 탕진할 정도로 노력했으나 아들은 먼저 세상을 떠난다. 영조 39년(1763) 여든세 살의 고령이 된 이익에게 첨중추부사직이 내려졌으나 그해 12월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떻게 보면 불행으로 점철된 인생이었지만 그가 스스로 농사지으면서 세웠던 사상체계는 조선후기 철학의 혁명이었다.

16장 사농공상은 다 일하라. 유수원(柳壽垣)

- 1694, 숙종 20년 ~ 1755, 영조 31년 -

2002년 국정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는 '상공업 중심의 개혁론'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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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후반에는 농업뿐만 아니라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혁신을 주장하는 실학자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서울의 노론 집안 출신이 대부분이었으며, 청나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부국강병과 이용후생에 힘쓰자고 주장했으므로 이들을 이용후생학파 또는 북학파라고 한다. 상공업 중심 개혁론의 중심개혁론의 선구자는 18세기 전반의 유수원이었다. 그는 우서를 저술하여 중국과 우리나라의 문물을 비교하면서 여러 가지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또한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혁신을 강조하고 사농공상의 직업평등과 전문화를 주장하였다.<고등학교 국사 314쪽>

- 실제로 유수원은 노론에 의해 사형당한 소론 강경파였다. 비판이 일자 2007년 국정교과서는 '노론'이란 용어를 삭제했다.

- 농업중심의 개혁론은 남인이 맞다.

- 그의 저서 우서(迂書)는 "저자 미상"으로 되어 있다가 20세기 중반(1942) 위당 정인보의 노력으로 그의 저서로 확인 되었다.

■ 경종과 연잉군의 세제 책봉

유수원은 갑술환국으로 남인들이 몰락한 숙종 20년(1694) 출생했다. 이무렵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되는데 그의 집안은 소론이었다. 노론은 소론의 반대 속에서 장희빈을 사사하고 그의 아들인 경종까지 제거하려 했다.

경종이 즉위하자 노론은 자신들이 지지하는 경종의 이복동생 연잉군(영조)을 옹립하기 위해 왕세제 책봉을 추진한다. 집권 노론은 경종 1년(1721) 소론 대신들이 모두 퇴궐한 틈을 타서 경종을 위협해 왕세제 책봉을 전격적으로 단행했다. 이때 경종은 서른 넷, 경종의 계비 선의왕후 어씨는 열일곱 살에 불과했으므로 젊은 왕에게 왕세제 책봉을 주장한 것은 명백한 쿠데타였다.

이때 왕세제 책봉 취소를 주장하고 나선 인물이 유수원의 종숙 유봉휘(劉鳳輝)였다.

■ 경종독살설과 흔들리는 정국

이런 상황에서 노론은 경종의 병약함을 이유로 세제 대리청정을 주장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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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서 더 큰 풍파를 일으킨다. 결국 세제 대리청정을 밀어붙이던 노론은 소론 강경파 김일경의 역습으로 정권을 빼앗기고 나아가 노론인 목호룡의 고변 사건으로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체등 노론 4대신이 사형 당하는 신임옥사를 맞는다. 이런 상황에서 세제의 지위를 인정하는 소론 온건파인 조태구가 영의정이 되자 소론 강경파는 세제 연잉군의 왕위 계승이 기정사실로 될 것을 우려해 조태구를 탄핵하고 나서는데 이때 공격수가 바로 유수원이었다. 그 1년 후 경종이 세상을 떠난다.

경종 독살설 속에 즉위한 영조는 즉위 뒤 노론과 소론을 모두 포용하는 탕평책을 표방했다. 그러나 소론 강경파 영수였던 김일경을 사형시킨 데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속마음은 노론에 있었다. 영조 즉위 초 우의정과 영의정을 역임하던 유봉휘가 영조 1년(1725) 경원에 유배됐다가 2년 뒤 끝내 배사(配死 유배지에서 죽음)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유봉휘의 조카였던 유수원의 처지 또한 궁색해질 수밖에 없었으나 이런 정치보복에 대한 반발로, 경종이 독살 당했다고 믿은 소론 강경파들이 영조 4년(1728) 이인좌의 난을 일으키자 영조는 소론도 끌어안기로 방침을 바꾼다.

이인좌의 난에 가담하지 않은 유수원은 영조 4년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지만 노론의 반대로 실제 그 임무를 수행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 백성 중에서 우수한 자를 선발하라

벼슬에서 소외된 그는 <우서>를 편찬하는 것으로 울적한 심사를 달랬다. <우서>는 이광좌, 이종성 등 소론 대신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읽히다가 영조 13년(1737) 영조에게도 추천된다. 이는 소론대신들도 글의 논지에 공감했음을 뜻하는 것으로서 소론의 정치 철학을 짐작하는 단서가 될 수 있다.

유수원은 <우서>에서 “백성이 그 직업을 잃었기 때문에 가난해졌고, 백성이 가난해졌기 때문에 나라가 텅 비었다”면서 사민(四民 사농공상)이 각기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 그의 사고가 획기적인 것은 지배층인 사(士) 계급에 대한 규정 때문이다.

“무릇 백성의 자제 중에서 준수한 자를 뽑아서 교육해 사를 선발한다”는 주장이 이를 말해준다. 양반 사대부 계급의 자식들만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의 자식들 중에서 준수한 자를 교육해 벼슬아치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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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면서 그는 현재의 사 계급을 군역에 종사하지 않고, 농공상에도 종사하지 않으면서 백성들의 토지와 노비를 약탈하거나 고리대 또는 노비소송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자들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무엇보다 그는 상공업의 진흥책을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그의 상공업 진흥책에서 흥미로운 것은 부상(富商)과 세약소민(細弱小民 가난한 백성들)의 결합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즉 간자와 약자가 서로 제휴하면 모두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부상과 빈상(貧商)의 제휴를 ‘동과’ 또는 ‘합과’라고 불렀는데, 요즘 말로 하면 대기업과 협력업체의 공생관계 같은 것이다. 그는 서울의 시전(市廛)같은 상업시설을 작은 군읍에도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농본상말(農本商末)사고에 젖어 있던 당시로써는 놀라운 주장이었다.

■ 나주 벽서사건에 연루되다

이후 11년 동안 유수원에 대한 기록은 <영조실록>에서 사라진다. 그러다가 영조 31년 (1755) 나주 벽서사건의 연루자로 충격적으로 등장한다. 소론 강경파가 일으킨 나주 벽서 사건으로 수많은 소론 인사들이 죽어나가는 와중에 체포된 그는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지 않는다. 윤혜 등과 함께 이 사건의 주모자인 신치운 등과 친했다고 시인하면서 묻지 않는 말까지 진술했다.

나주 벽서사건으로 처형당한 인물은 무려 500명을 헤아리는데, 이 비극적인 사건의 뿌리는 집권 노론의 장희빈 사사와 경종 독살에 있었다. 유수원은 처형되었고 일족 또한 모두 연좌되어 집안이 폐고 되고 말았다. 경종에 대한 충성심을 간직했던 한 선구적 실학자의 비극이었다.

17장 놀고먹는 자들은 나라의 좀이다. 박제가(朴齊家)

- 1759, 영조 26년 ~ 1805, 순조 5년 -

박제가는 “어린 시절을 생각하니 글씨 쓰기를 좋아해서 항상 입에 붓을 물고 있었다. 화장실에서는 모래에 글씨를 썼고, 앉기만 하면 허공에 글씨를 썼다” 라고 회상할 정도로 어린 시절부터 학문하기를 좋아했다. 그는 일곱 살 무렵인 영조 32년(1756) 청교동(을지로 5가)으로 이사를 갔는데 흰 벽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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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하나도 남아나지 않았다. 모두 글씨를 쓰는 데 사용됐기 때문이다. 이런 때문인지 어린 박제가는 나이보다 어려운 책들을 읽어 수재로 소문났다.

부친 박평(朴坪)은 우부승지였는데, 박제가는 “선군(돌아가신 아버지)께서는 매달 종이를 내려주셨고 나는 날마다 종이를 잘라 책을 만들었다”라고 회상했다. 부친은 이 영특한 아이가 서자라는 사실을 못내 안타까워 했다.

박제가가 열한 살 되던 해 부친이 세상을 떠나고 가세가 기울었다. 어머니 전주 이씨는 삯바느질로 생계를 유지하며 주위 사람들이 박제가의 가난을 눈치 채지 못하게 길렀다.

박제가는 곧 세상이 자신 같은 서류들에게 문을 닫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폐쇄적인 나라 조선에서 그의 학문은 세상을 위해 사용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비굴하지 않았고, 세상에 아첨하지도 않았다. 그가 자신을 평가한 대목이다.

“뜻이 높고 고독한 사람만을 골라서 남달리 친하게 사귀고 번화(繁華)한 사람과는 스스로 멀리하니 뜻에 맞는 이가 없어 늘 가난하게 산다.<소전>”

■ 백탑파 친구들

이런 박제가와 뜻이 같았던 선배, 친구들이 바로 백탑파(白塔派)였다. 현재 서울 탑골공원 자리의 백탑(원각사 십층석탑) 부근에 사는 지식인 그룹이 그들인데, 영조 43년(1767)에 서얼 지식인 이덕무(李德懋)가 백탑근처로 이주하고, 이듬해 양반 출신 박지원이 뒤따라 이주하면서 백탑파라는 하나의 유파가 형성되었다. 백탑파는 조선의 주류 양반들과 생각이나 행동거지가 달랐다. 박제가는 영조 44년(1768) 열아홉 살 무렵 장년(33세)의 박지원을 찾아간다.

박지원의 부친 박사유(朴師愈)는 비록 벼슬을 하지 않았으나 조부 박필균은 경기감사, 병조참판, 돈녕부지사를 역임한 노론 유력가문 출신이었다. 이런 박지원이 어린 서자 박제가의 학문을 높이 사 버선발로 맞이하고 직접 밥까지 해 대접했던 것이다.

박제가는 정조 2년(1778) 사신 채제공(蔡濟恭)을 따라 북경에 가게 되었다. 백탑파의 이덕무도 함께 갔는데, 이 여행에서 박제가는 평소 자신들의 생각이 다르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행 뒤 박제가는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랑캐(胡)’라는 한 글자로 천하의 모든 것을 말살하고 있지만, 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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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중국의 풍속은 이래서 좋다’고 말한다.”

나아가 그는 청나라의 장점을 흡수해 국부 증진에 매진할 것을 주장하는 <북학의 北學議)를 저술했다. <북학의> 서문에서 박제가는 “무릇 이용(利用)과 후생(厚生)은 하나라도 닦지 않으면 위의 정덕(正德)을 해치게 된다”라며 이용후생으로 국부를 증진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나라와 적극적인 문물교류를 주장하는 세력을 북학파라고 지칭하게 된 것은 <북학의> 때문이었다.

■ 규장각 사검서의 탄생

정조 즉위 원년(1777) 1월, 서얼들도 벼슬길에 등용할 수 있는 법제를 만들라고 명령했다. 이에 그해 3월 ‘서류소통절목(庶類疏通節目)’이 제정되어 서류들도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나아가 정조는 재위 3년(1779)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서리수 등 네 명의 서얼을 규장각 검서관(檢書官)으로 전격 임명해 고식에 젖은 조선 사상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이들은 ‘규장각 四檢書’란 보통명사로 불리며 조선의 사상계를 주도했다.

정조 재위 10년(1786) 신하들에게 국정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밝히라고 명하자 6품 전설서 별제로 있던 박제가는 “지금 나라의 큰 폐단은 한마디로 가난입니다.”라고 진단하며 대안을 제시했다. “가난을 어떻게 구제하겠습니까? 중국과 통상하는 길밖에 없습니다”라는 것이었다. 중국과의 국제무역이 백성들의 가난을 물리치고 국부를 증진하는 첩경이라고 주장한 것이었다. 그는 이 글에서 사족(士族)에게 장사 시킬 것도 주장했다.

전통적인 사농공상의 개념에 젖어 상업을 천시하는 사대부들을 상업에 종사시키자는 주장이었으니 혁명적이 발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여기는 사회분위기에서 박제가의 주장은 채택될 수 없었다. 대신 정조는 박제가에게 다시 청나라를 경험할 기회를 주었다. 재위 14년(1790) 건륭제의 팔순을 축하하기 위한 진하사 일행으로 청나라에 보냈고, 다시 원자(순조)의 탄생을 건륭제가 축하한 데 대한 답례사의 일원으로 또 보냈다. 이때 정조는 검서관인 박제가를 정3품 군기시정으로 임시 승진시켜 별자(별도로 보내는 국서)를 가지고 가게 하는 특전을 베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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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가는 이런 경험들을 조선을 위해 쓸 방법을 연구하려고 밤낮으로 공부했다. 그러나 눈병이 도져 정조 16년(1792)검서관 직을 사직해야 했다.

정조는 그를 부여 현감에 임명했다.

■ 무과로 다시 벼슬길에 나가다

문관의 길이 막히자 박제가는 무과로 방향을 전환해 정조 18년(1794) 무과별시에 응시해 급제한다. 그는 4년 전인 정조 14년(1790) 이덕무 백동수 등과 <무예도보통지>를 간행했는데, 그의 무과 급제는 그가 이론뿐 아니라 실제 무예에도 능했음을 말해준다. 정조 19년 경기도 양평 현령으로 나간다. 지방관으로 백성들과 부대끼던 중 정조가 재위 22년(1798)농서(農書)를 널리 구한다는 윤음을 반포하자 ‘북학의를 올리는 응지상소를 올려 20년 전 <북학의>에서 주장했던 내용을 다시 피력했다.

1. 일하지 않는 유생을 도태시켜 농업에 종사하게 하자.

2. 수레유통 주장. 농사는 물과 곡식이요 수레는 혈맥이다.

3. 둔전(屯田)시행. 일종의 병농일치제로 서울 근교에 땅을 마련해 농업 전문가를 양성하고 이들을 전국에 파견하여 농업지도를 하자는 것. 정조가 수원 화성에 ‘대유둔’이라는 둔전을 만들어 큰 효과를 본 예가 있음

■ 정조 사후에 유배당하다

정조 21년(1797) 종3품 오위장을 맡고 있던 박제가는 노론 정권의 실세였던 동지경연사 심환지(沈煥之)와 부딪쳤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소 현릉원에 행차했을 때 박제가가 호상(胡床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을 심환지가 수하를 시켜 나무라자 발끈한 것이다. 심환지가 박제가의 파직을 요청하자 정조가 “뭐 나무랄 것 있겠는가?”라고 옹호해 무사히 넘어갔으나 정조가 재위 24년(1800) 6월 갑자기 승하하면서 상황은 반전된다.

이듬해 박제가는 사돈인 윤가기(尹可基)가 시국에 불만을 표출한 흉서 사건에 연루되면서 아무런 물증도 없이 사형위기에 몰렸다가 함경도 종성에 유배된다. 박제가는 유배지에서 장남에게 “삼사의 논란함이 준엄하니 너희들은 위험하고 두려운 마음일 것이다. 또 기미를 보아 은밀하게 공격하는 무리가 있을 것이니 진실로 두려워해야 한다”라고 편지했을 정도로 삼사로부터 사형 주청이 계속되어 목숨이 풍전등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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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가는 3년 뒤인 순조 4년(1804) 방축향리(放逐鄕里 벼슬을 삭탈하고 제 고향으로 내쫓음)의 명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왔고, 이듬해 3월 사면됐으나 한 달 뒤인 1805년 4월 쉰여섯 살을 일기로 생을 마쳤다. 서얼로 태어나 이용후생으로 국부 증진을 꿈꿨던 경세가의 죽음이었다.

4부 절개를 지키다

통곡하며 책을 불태운 천재, 김시습(金時習)

- 1435, 세종 17년 ~ 1493, 성종 24년 -

김시습에게 가장 많이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신동’이란 단어다. 어숙권의 <패관잡기 稗官雜記>에는 김시습이 유양양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요약한 내용이 전한다.

-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능히 글을 알아서 일가 할아버지 최치운(崔致雲)이 시습(時習)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 세 살에 지은 글이다. ‘복숭아는 붉고 버들은 푸르르니 봄이 저무는구나/ 푸른 바늘로 구슬을 꿰니 솔잎 이슬이로다.’

도홍유록삼춘모, 주관청침송엽로 (桃紅柳綠三春暮, 珠貫靑針松葉露)

- 다섯 살 때 중용과 대학을 수찬 이계전의 문하에서 배웠다.

또 다섯 살 때 정승 허조(許稠)가 집에 찾아와 ‘내가 늙었으니 노(老)자를 가지고 시를 지으라’ 고 하기에, 곧 ‘늙은 나무에 꽃이 피었으니 마음은 늙지 않았네 (老木開花心不老)’라고 지어서 허 정승이 무릎을 치면서 “이 아이는 이른바 신동이다”라며 감탄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김시습이 전국적인 명성을 날리는 ‘국민신동’이 된 계기는 세종과의 일화이다. <해동잡록>은 세종이 다섯 살 때의 김시습을 부른 이야기를 전한다.

세종이 승정원으로 불러, 지신사 박이창에게 명해 물었다. 박이창이 무릎위에 앉히고 세종을 대신해 “네 이름을 넣어서 시구를 지을 수 있느냐?”라고 묻자 곧 “올 때 포대기에 쌓인 김시습 (來時襁褓 金時習)”이라고 대답했고, 또 벽에 걸린 산수도를 가리키면서 “네가 또 지을 수 있느냐?”라고 하자, 곧 “작은 정자와 배 안에는 누가 있는고(小亨舟宅何人在)”라고 지었다.

세종이 이 이야기를 듣고 “성장하여 학문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려 장차 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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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기용하리라”라는 전교를 내리며 매우 칭찬하고 비단 30필을 주면서 가져가게 했더니 그 끝을 서로 이어서 끌고 나갔다 전한다. 그는 ‘김오세’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졌다.

김시습의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열경(悅卿)인데 동봉(東峯) 또는 청한자(淸寒子) 혹은 벽산청은(碧山淸隱)이라 하였다. 그의 선대는 태종무열왕의 후손으로 명주(강릉)군왕으로 봉함을 받았던 김주원이고 부친 김일성(金日省)은 충순위(忠順衛)를 지낸 사대부였다.

■ 승려가 되다

촉망 받던 김시습의 인생은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단종 폐위 사건이 그의 운명을 예기치 못한 길로 끌고 간다.

- 21세 때 단종이 손위(遜位)하였다는 말을 듣자 문을 닫고서 나오지 않다가 3일 만에 크게 통곡하면서 책을 불태워버리고 나가 행적을 불문(佛門)에 붙이고 그 호를 바꾸었다.

- 이때부터 승려가 되어 전국 각지를 방황

- 관서, 관동, 호남을 유람한 기록 등의 시문집은 이런 방랑의 자취들이다.

- 그러나 그의 기행도 “머리를 깎은 것은 세상을 피하려는 뜻이고, 수염을 기른 것은 장부의 뜻을 나타내려 함이다”라는 그의 말을 보면 세상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

■ <금오신화>를 쓰다

김시습은 서른한 살 때 경주 남산 금오산(金鰲山)남쪽 동구 용장사에 머물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곳이 바로 금오산실이며 당호가 매월당이었다. 그는 “금오산에 살게 된 이후 멀리 나가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라고 쓸 정도로 안정을 되찾았고, 서른일곱 살 때까지 이곳에 머물며 최초의 한문 소설인 <금오신화> 비롯해 여러 시문집을 지었다. 이 시절 김시습은 서울을 객관, 서울에서 꾸는 꿈을 객몽이라고 할 정도로 금오산을 마음에 들어 했다. 그러나 이곳도 영원한 안식처는 아니었다.

율곡 이이가 선조의 명으로 지은 <김시습 전기>는 김시습이 마흔 일곱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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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되던 성종 12년(1481) “홀연히 머리를 기르고 글을 지어서 조부와 부친에게 제사를 지냈다”며 제문까지 실었는데, 이는 한 때 입산했다는 이유로 수많은 시비에 휘말렸던 이이가 김시습을 유학자로 치장하기 위한 것이리라.

그러나 그는 이후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충청도 홍산의 무량사에 주석했다가 이곳에서 쉰아홉 살 되던 성종 24년(1493) 2월 병사했다. 현재도 무량사에는 작자 미상인 김시습의 초상화가 남아 있다.

김시습에 대한 후대의 평가

- 퇴계 이황 : “매월당은 한갓 괴이한 사람으로 궁벽스러운 일을 캐고 괴상스러운 일을 행하는 무리에 가깝지만 그가 살던 시대가 어지러웠기 때문에 그의 높은 절개가 이루어졌을 뿐이다”라면서 낮게 평가

- 율곡 이이 : “절의를 표방하고 윤기(倫紀)를 붙들었으니 그의 뜻을 궁구해 보면 가히 일월(日月)과 빛을 다툴 것이며 백대의 스승이라 하여도 또한 근사할 것이다”라고 극찬

■ 사대부의 상식 주리론을 거부하다

두 대유(大儒)의 서로 다른 평가는 실상 김시습의 사상에 대한 서로의 판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김시습은 불교에 입도해 선도에 심취했지만 정작 그 철학적 기초는 물질을 중시하는 기(氣)철학이었다.

이는 만물의 본질이 기, 즉 물질이라는 주기론(主氣論)으로서 그 시대 사대부의 상식인 주리론(主理論)을 정면에서 거부한 것이다.

이익(李瀷)은 <성호사설> ‘신동 神童’조에서 “어려서 총명하고 영리했던 수재가 차츰 성장해서는 도로 그 빛나던 재질이 줄어든 것을 보았으니 공명과 사업이 반드시 이런 사람들(신동)에게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뛰어난 머리로 세상을 속이고 백성들을 등친 사람들이 부지기수인 역사에서 끝내 세상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을 버렸던 김시습이 진정한 천재가 아니겠는가?

19장 흔들리지 않는 사관의 길, 김일손(金馹孫)

- 1464, 세조 10년 ~ 1498, 연산군 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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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4년(1498) 7월 1일 의금부 경력(經歷) 홍사호와 의금부 도사(都事)신극성이 명령을 받고 달려간 곳은 경북 청도군인데 말 잘 타는 자를 보내 의금부 도사가 잡아오는 걸음이 빠른지 느린지를 보고하게 할 정도로 재촉했다. 그렇게 체포된 인물은 김일손인데, 마침 풍병을 앓고 있었다. 의금부 경력 홍사호가 나타나자 김일손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 내가 잡혀가는 것이 과연 사초(史草)에서 일어났다면 반드시 큰 옥(獄)이 일어날 것이오.”(<연산군 일기> 4년 7월 12일)

그의 예견대로 일어나는 큰 옥사가 바로 무오사화(戊午士禍)이다

무오사화는 실록청 기사관(정6품) 김일손과 직속상관인 실록청 당상관 이극돈 사이의 갈등에서 시작되었다. 김일손은 이극돈이 세조 때 전라 감사가 된 것은 불경을 잘 외웠기 때문이고, 또 정희왕후 상(喪) 때 향을 바치지도 않고 장흥의 관기 등을 가까이 했다고 사초에 기록했다. 이극돈이 고쳐 달라고 했으나 김일손은 단칼에 거절했다.

발단은 두 사람의 갈등이지만 그 배후는 복잡했다. 이극돈은 수양대군의 즉위를 계기로 등장한 훈구파의 일원이고, 김일손은 훈구파에 불신감을 가진 사림파였다. 양자의 가장 큰 차이는 세조 즉위에 대한 정 반대의 입장 차이 였다.

■ 사관이 비사를 아는 연유

발단은 이극돈에 대한 사초였지만 정작 문제가 된 것은 김일손의 사초에 ‘세조가 의경세자의 후궁인 귀인 권씨를 불렀으나 권씨가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적은 것 때문이었다. 이는 세조가 며느리를 탐했다는 의혹을 살 소지가 있는 내용이었다. 훈구파의 논리는 세조가 사망할 때 김일손은 다섯 살에 불과했으므로 궁중 비사를 알 수 없는데도 이를 적은 것은 배후가 있다는 것이었다.

연산군이 김일손에게 “세조의 일을 어디에서 듣고 기록했는지 대라”고 말하자 김일손은 “들은 곳을 하문하심은 부당한 듯 하옵니다”라고 거부했다. “사관이 들은 곳을 만약 꼭 물으신다면 아마도 <실록>이 폐하게 될 것입니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연산군은 국왕이 볼 수 없었던 사초까지 강제로 본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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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은 훈구공신 윤필상, 유자광 등에게 김일손의 국문을 맡겼으니 가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애초 이 사건은 조선 최초의 사화로까지 번질 일은 아니었다. 유자광이 이를 세조 체제를 부정하는 대역죄로 몰고 가면서 사건이 확대되었다.

유자광은 김일손을 심문할 때, “황보인과 김종서의 죽음을 절개라고 쓴 것은 누구에게 들었느냐?”, “소릉(단종의 모후)의 제궁(시신)을 파서 바닷가에 버렸다고 쓴 것은 누구에게 들었느냐?”라는 등 세조의 정통성과 관련된 문제를 주로 물었다. 황보인과 김종서는 세조가 계유정난을 일으키던 날 죽인 인물들이었다. 소릉은 단종 모후 권씨의 무덤인데 그가 세조의 꿈에 나타나 “네가 내 아들을 죽였으니 나도 네 아들을 죽이겠다”고 말한 이후 파헤쳐졌다.

■ ‘조의제문’ 해석

소릉 복위 문제도 사소한 사건이 아니었지만 조의제문 건과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연려실기술> ‘무오사화’조는 “유자광은 옥사가 점차 완화되어 제 뜻대로 다 되지 않을까 염려하여 밤낮으로 죄 만들기를 계획했는데, 하루는 소매속에서 책 한 권을 내 놓으니 곧 김종직의 문집이었다”라고 전하는데 문집 속에 든 글이 바로 ‘조의제문’이다. 김종직은 성종 23년(1492) 이미 사망한 뒤였다.

조의제문은 “정축년 세조 3년 10월 나는 밀양에서 성주로 가다가 답계역에서 잤다. 꿈에 신인(神人)이 칠장(七章)의 의복을 입고 헌칠한 모습으로 와서, ‘나는 초나라 회왕(懷王) 손심(孫心)인데, 서초패왕(항우)에게 살해되어 빈강(중국 남방의 강)에 잠겼다’라고 말하고는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라고 시작하는 그리 길지 않은 글이다.

문제는 이 글의 정축년 10월이 단종이 세조에게 살해당한 세조 3년 10월을 뜻한다는 점이다. 김종직은 항우에게 죽은 의제를 단종에 비유하고 항우를 세조에 비유해 단종을 죽인 인물이 수양임을 암시한 것이다. 의제의 시신이 ‘빈강에 잠겼다’라는 내용도 ‘노산이 해를 당한 후 그 시신을 강물에 던졌다’는 <아성잡설>등의 기록을 후대에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유자광은 은유로 가득찬 ‘조의제문’의 내용을 연산군에게 상세히 해석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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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광의 설명을 듣고 연산군은 흥분했다. 그 역시 훈구파처럼 항상 반대하기를 좋아하는 사림파를 제거할 호기로 생각했다.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이 사림을 등용한 것은 사림의 성향을 몰라서가 아니라 왕권을 능가하는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림파의 존재 자체가 왕권을 강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이런 대국적 흐름을 보는 안목이 부족했다. 그는 사림파의 쓴소리 자체가 듣기 싫었다.

연산군이 유자광이 가르쳐준 대로 어전회의에서 ‘조의제문’을 풀이하자 자리에 참석한 신하들은 입을 모아 “김종직의 ‘조의제문’은 입으로만 읽지 못할 뿐 아니라 눈으로도 차마 볼 수 없습니다. 그 심리를 보면 병자년(단종 복위 사건이 일어난 해)에 난역을 꾀한 신하들과 무엇이 다르리까?”라고 외쳤다.

‘난역을 꾀한 신하들’이란 사육신을 비롯해 단종 복위운동을 일으켰던 인물들을 뜻한다. 이런 ‘조의제문’에 대해 김일손은 거꾸로 “충분(忠憤)이 깃들어 있다”고 공개적으로 정의했다. 충성스런 분노가 깃들어 있다는 뜻이다. 이렇게 서로 반대되는 생각을 가진 사림파와 훈구파가 한 하늘 아래 살기는 어려웠다. 연산군과 훈구파는 이미 죽은 김종직의 관을 꺼내어 시신의 목을 베었다. 이 판국에 산 인물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 서른넷에 능지처사 되다

김일손, 권오복, 권경유 세 사신(史臣)은 대역죄로 몰려 능지처사(陵遲處死)를 당했다. 사화(士禍)는 선비가 화를 입었다는 뜻이지만 무오사화는 사관(史官)들이 화를 입었기 때문에 사화(史禍)라고도 불린다.

죽을 때 김일손의 나이 만 서른네 살에 불과했다. 김종직의 문하에는 김굉필, 정여창 처럼 개인 수양인 수기(修己)를 강조하는 계열과 좀 더 적극적 사회참여인 ‘치인(治人)’을 강조하는 계열이 있었는데, 김일손은 바로 치인계열의 대표이다.

■ 흐린 물에 갓끈을 씻으려 한 대가

김일손은 정5품 정도의 벼슬을 하다가 젊은 나이에 죽었으나 자신의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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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최선을 다해 자신의 세계관을 펼쳤다. 그의 호 탁영자(濯纓子)는 ‘갓끈을 씻는 사람’이란 뜻으로 초나라 굴원(屈原)의 ‘어부사’중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나의 발을 씻으리”에서 따온 것이다. 창랑의 물이 흐린데 갓끈을 씻으려 한 김일손, 그만큼 세상에 분노했고 그만큼 세상을 사랑한 것이리라.

흐린 물에 갓끈을 씻으려 한 대가는 사후에도 가혹했다. 연산군은 재위 10년 (1504) 갑자사화 때 ‘김일손의 집 땅을 깎아 평평하게 하라’고 명하고, 이미 사망한 김일손의 부친을 부관참시하고, 김일손의 첩자(妾子)인 김청이, 김숙이 까지도 목을 베어 죽였다. 이들을 죽이며 연산군은, “세조께서는 가문을 변화시켜 임금이 되신 분인데, 이와 같은 말을 차마 하였으니, 어찌 이보다 더한 난신적자가 있겠는가?”라고 비판했다.

임금이 될 수 없었던 수양대군이 임금이 되었던 무리수는 이렇게 먼 훗날까지 역사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중종반정 뒤 김일손은 복관되고 문민공(文愍公)이란 시호도 내려졌지만 중종 때 다시 김일손과 같은 사림, 조광조가 죽는 기묘사화가 일어난 것처럼 역사의 어둠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20장 광해군에 대한 의리를 지키다. 유몽인(柳夢寅)

- 1559, 명종 14년 ~ 1623, 인조 1년 -

유몽인은 정여립의 옥사가 일어나던 선조 22년(1589) 서른 한 살의 나이로 증광시(增廣試 임금 등극 같은 큰 행사에 임시로 시행한 과거)에서 장원급제함으로써 관직에 발을 들여 놓는다. 그의 앞길은 탄탄대로였다. 그러나 그는 <어우야담>이란 야사집을 펴낸 데서 알 수 있듯이 기존의 가치관에 머물지 않는 인물이었다.

유몽인의 호 어우자(於于子)는 자신이 숭상하는 것을 호로 삼은 것인데 어우(於于)란 장자(莊子) 천지조에 나오는 말로서 밭을 돌보는 노인이 공자의 제자 자공에게 공자를 빗대 “허망한 말로 세상을 속이고 홀로 악기를 연주하며 슬픈 노래를 불러 천하에 이름을 파는 사람이 아닌가?”라고 비웃으며 “밭 가는 일을 방해하지 말고 가라”고 조롱하는 데서 나온 말이다. 유학의 나라 조선에서 공자를 비웃은 장자의 한 구절로 자호(自號)한 데서 그의 기질이 우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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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의 충격

유몽인은 열다섯 살 때 판관 신식의 딸과 혼인했는데, 신식의 며느리가 성혼(成渾)의 딸이었으므로 잠시 성혼에게 가서 공부할 기회를 얻는다. 성혼은 서인들이 종주로 삼는 학자로서 유몽인으로서는 서인이 될 기회였지만 그에게 성리학은 잘 맞지 않았다. <연려실기술>에서 유몽인이 “젊었을 때 성혼의 문하에서 배웠는데, 가르침을 잘 지키지 않고 행실이 경박하자 꾸짖고 끊어버렸다”라고 전하고 있는데 장자처럼 활달한 처신이 성리학자의 눈에는 경박하게 보였을 것이다.

벼슬길에 오른 지 3년 만에 임진왜란 발발, 그때 사신 일행으로 북경에 가 있던 그는 귀국한 뒤 세자시강원 사서로 광해군을 보좌해 적진을 헤집고, 암행어사로 전란에 피폐해진 백성의 생활도 돌본다.

임진왜란은 그에게 큰 충격이었다. 어머니를 모시고 피난하던 형이 일본군에게 죽는 등 아픔을 겪자, 그는 <어우야담>에서 양반 뿐 아니라 많은 평민, 노비들의 이야기와 함께 기독교에 관한 기록으로 기존의 가치를 바꾸어야 한다고 비판했다.

■ 광해군 즉위 도우며 승승장구

유몽인은 선조 41년 (1608) 1월 28일에 도승지가 되어 광해군이 왕위를 이어받는 데 일조한다. 다음달 1일 선조가 세상을 떠나는데, 이무렵 영의정 유영경이 세자 광해군 대신 어린 영창대군에게 보위를 잇게 하려고 획책하면서 조정에 큰 파랑이 일고 있었다.

이런 비상시국에 유몽인은 도승지로서 세자시강원 때부터 여러 번 모셨던 광해군의 즉위를 돕는다. 이 때문인지 광해군 시절 유몽인은 집권 북인의 유력인사로서 승승장구 한다. 그러나 집권 대북(大北)이 인목대비 폐위에 나서면서 그는 다른 길을 걷는다. 유몽인은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 후, 광해군 12년(1620) 8월 예문관 제학에 임용되었으나 그는 출사하지 않았다.

■ 금강산으로 들어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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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몽인은 예순세 살 고령으로 금강산으로 들어간다. 이때 그는 “신선과 부귀를 모두 갖기는 어렵네 / 세월은 흐르고 인간 세상의 계책은 어그러졌네”라는 시를 지어 속세를 떠나 출가하는 심경을 밝혔다. 금강산에서 혹독한 병을 앓으며 한겨울을 난 유몽인은 이듬해(1622) 서쪽의 보개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런데 그해 바로 정변이 일어나 광해군이 쫓겨나고 인조가 즉위했다.

새 세상이 열리자 광해군 때 배척받았던 사람들이 대거 몰려 벼슬자리를 구했다. 그러나 유몽인은 달랐다. 영은사의 두 승려가 “지금 새로운 성군께서 나라를 다스리자 벼슬을 구하는 자들이 시장에 몰려드는 것 같은데, 왜 중로에 배회하십니까?” 라고 묻자 “내가 산에 들어온 것은 세상을 가볍게 여김이 아니라 산을 좋아했기 때문이고, 지금 산을 떠나는 것은 관직을 위해서가 아니라 식량이 떨어졌기 때문이다”라고 답하며 역시 출사를 거부했다.

■ 신하로서 임금을 내쫓을 순 없는 법

유몽인에게 인조반정은 반정이 아니라 쿠데타일 뿐이었다. 자신은 비록 광해군 말년 조정을 떠났지만 신하로서 임금을 내쫓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신하로서 임금을 내쫓는 것은 삼강의 군위신강(君爲臣綱)이나 오륜의 군신유의(君臣有義)에 어긋난다고 본 것이다. 평생 장자를 좇았던 그가 불의한 현실에 유자의 사생관으로 돌아선 것이었다. 반정 정권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유몽인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당시 서인들의 쿠데타에 불만을 품은 많은 인사가 유몽인이 백이숙제처럼 광해군을 위해 절개를 지키겠다고 맹세한 것에 큰 영향을 받았다. 유몽인은 정조 18년(1794)에야 복권되는데, 정조는 유몽인에 대해 “혼조(광해군) 때는 바른 도리를 지켜 은거하였고, 반정한 후에도 한 번 먹은 마음은 바꾸지 않았다.”라고 그의 절개를 높이 사고 있다 한마디로 참선비의 처세란 뜻이다.

21장 정말 오랑캐에게 투항했을까? 강홍립(姜弘立)

- 1560, 명종 15년 ~ 1627, 인조 5년 -

인조반정 다음 날인 인조 1년(1623) 3월 14일. 인목대비의 광해군 폐위교서는 외교정책을 극력 비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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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 광해는 배은망덕하여 오랑캐(청)에게 성의를 베풀었으며, 기미년(광해군 11년, 1619)오랑캐를 정벌할 때에는 은밀히 수신(帥臣)을 시켜 동태를 보아 행동하게 하여 끝내 전군이 오랑캐에게 투항함으로써 추한 소문이 사해에 펼쳐지게 하였다.” (<인조실록> 재위 1년 3월 14일)

여기에서 말하는 수신이 바로 강홍립이다. 강홍립은 후금과 전쟁에 나섰을 때 광해군의 밀명을 받고 투항했다는 이유로 수백 년간 비판받았던 인물이다.

명나라가 원병을 요청하자 이이첨 같은 대북까지 이구동성으로 찬성했다. 임란 때 원병을 보내준 재조지은(거의 멸망하게 된 것을 구원하여 도와준 은혜)을 갚아야 한다는 논리였다. 당시 강홍립은 의정부 좌참찬이었는데, 광해군이 “비국(비변사)에서도 모두 경을 천거했으므로 내가 마음속으로 흡족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한 것처럼 비변사에서도 그를 추천했다. 강홍립은 선조 30년(1597)알성문과에 급제한 문관이면서도 선조 39년에는 어전통사를 수행할 정도로 중국어에 능했는데, 이 때문에 도원수로 선발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강홍립의 운명은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결정되었다.

■ 싸움터로 나서다

애초 조선군은 포수 3500명, 사수(소총수)3500명, 살수(창검사용 보병 1000명으로 도합 1만 명 규모였다. 세 번의 사양 상소가 모두 거부되면서 강홍립은 광해군 11년 2월 부원수 김경서와 1만 3,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창성(昌城)에서 압록강을 건넜다.

- 2월26일 큰 눈보라 속 행군으로 병사들이 가진 군장과 의복이 모두 젖음

- 강홍립이 명군 도독 유정(劉綎)에게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왜 군대를 요청하지 않느냐”고 묻자 “명나라 총사령관 양호 도독이 자기와 사이가 좋지 않아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 명군 진영이 허술하고 대포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오직 우리 군사들을 믿고 있을 뿐임

- 조선군의 상황도 심각한 군량부족으로 사기가 저하

<광해군 일기>는 “박엽(朴燁)과 윤수겸(尹守謙)이 군량길을 끊어서 강홍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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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이 큰 곤경에 빠진 것이다”라고 덧붙이고 있는데 평안감사 박엽과 분호조 참판으로 관향사(군량공급 책임자)에 임명된 윤수겸이 군량 수송을 제때 안 한 것이었다. 명군과 조선군 모두 심각한 내부 문제를 안은 채 욱일승천하는 후금과 싸워야 하는 상황이었다.

■ 투항

조선군은 3월 2일 심하(深河)에서 처음으로 후금군 600여 명을 격퇴했다. 그러나 승리한 조선군은 승전의 기쁨 대신 양식을 찾아 헤매야 했다.

조선군이 후금의 주력부대와 맞딱뜨린 것은 3월 4일 이었다. 공명심이 눈이 먼 명나라 총병 두송(杜松)이 계획보다 하루 일찍 출발했다가 복병을 만나 전멸했고, 그 부대가 강홍립과 함께 진군했던 도독 유정의 선봉부대까지 전멸시켰다.

조선군 중 이들과 맞선 것은 선천부사 김응하가 이끄는 좌영이었다. 조선군은 화포를 쏘아 후금의 기병을 격퇴했으나 갑자기 서북풍이 거세게 불면서 화약을 잴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때 후금의 철기군이 공격해 왔고 결국 조선군은 패하고 말았다.

당시 조선군은 이틀을 굶은 상태였으나 최후의 결전을 준비했다.

박엽의 장계에 따르면 “적이 무리를 다 동원하여 일제히 포위해오자 병졸들은 필시 죽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분개하여 싸우려 하였다”고 전한다. 바로 이런 현장 상황 때문에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형세를 보아 유리한 쪽에 붙으라’는 밀명을 내렸는지, 그 여부가 논란이 된다.

- <광해군 일기> 11년 4월 2l일 내용이다

“이에 앞서 왕이 비밀리에 회령부의 장사꾼 호족에게 이 일을 통보하게 하였는데, 그 호족이 미처 돌아가기도 전에 하서국(조선역관)이 먼저 오랑캐의 소굴로 들어갔으므로 노추가 의심하여 감금하였다. 얼마 후 회령의 통보가 이르자 마침내 하서국을 석방하고 강홍립을 불러들이게 하였다. 강홍립의 투항은 대체로 예정된 계획이었다.”

광해군이 일개 여진족(호족) 장사꾼에게 국가 대사를 비밀리에 통보했다는 이야기인데 신빙성이 없다. 박엽의 장계는 “조선군이 싸우려 하였는데, 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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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오랑캐 말 역관인 하서국을 불러 강화를 하고 무장을 풀자는 뜻으로 말하였습니다.”라고 후금이 먼저 강화를 요청했다고 전하고 있다.

광해군 일기가 본문이 아니라 사관의 평으로 계획적 항복을 말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광해군일기> 11년 4월 8일조는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비밀리에 하유하여 노혈과 몰래 통하게 했기 때문에 심하의 싸움에서 오랑캐 진중에서 먼저 통사를 부르자 강홍립이 때를 맞추어 투항한 것이다”라고 후금에서 하서국을 부르기 전에 먼저 후금과 통했다고 주장했으나 이 역시 물증이 없는 사관의 일방적 주장에 불과하다.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독자적인 판단을 요구한 사실은 있다. 재위 11년 2월 3일 명나라 경락 양호의 요구에 따라 일부 포수를 명나라 진중으로 보내자. “중국 장수의 말을 그대로 따르지만 말고 오직 패하지 않을 방도를 강구하는 데 힘쓰라”고 질책한 것이다. 조선군의 지휘권은 도원수가 행사해 보존의 최우선적 가치로 생각하라는 질책이었다. 게다가 이는 밀령이 아니라 공개된 명령이었다. 전투 현장에 있었던 이민환의 <책중일록>도 투항이 우발적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 8년의 억류생활

현장의 기록은 일관되게 후금이 먼저 강화를 요청했다고 전한다. ‘이번 출병은 부득이한 것이다’라는 말도 강홍립이 아니라 황연해의 말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연려실기술>은 강홍립이 황연해를 보내면서 그에게 ‘지금의 일은 부득이한 것이다’라는 말을 전하게 했다고 달리 기록하고 있다.

강홍립과 김경서는 항복함으로써 전력을 보존했고 3월 5일 흥경(興京)으로 들어가 후금 국왕 누르하치를 만났다. 하지만 강홍립. 김경서는 흥경에 억류되었고, 나머지 장수들은 조선으로 송환되었다 이로써 기나긴 8년 동안의 억류생활이 시작되었다.

억류된 강홍립은 비밀 장계를 써서 종이 노끈 등을 만들어 보냈는데, ‘화친을 맺어 병화를 늦추자는 뜻’을 담은 내용이었다. 광해군은 이런 밀서 때문에 후금에 대한 생생한 정보를 입수하고 명과 후금 사이에 등거리 외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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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할 수 있었다. 이는 조선을 전란에 휩싸이지 않게 하는 최선의 방책이었다.

그러나 광해군 15년(1623)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과 대북이 쫓겨나고 인조와 서인들이 집권하자 상황은 일변한다.

■ 고국에 돌아오자 병에 걸리다

서인 정권이 광해군의 외교정책을 명에 대한 배신으로 비판하며 후금과 단절하면서 인조 5년(1627) 후금군이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왔다. 정묘호란이었다.

인조는 부랴부랴 강화도로,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신했으나 평산까지 남하했던 후금군은 더는 내려오지 않았는데 그 배경에는 강홍립이 있었다.

인조 5년 2월 비변사에서 “강홍립은 적에게 함몰당한 지 10년이 되도록 신하의 절개를 잃지 않았으며 지금은 또 화친하는 일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으니 종국(宗國)을 잊지 아니한 그의 마음을 이에 의거하여 알 수 있습니다”(<인조실록>5년 2월 1일)라고 말한 것처럼 강홍립은 후금의 남하를 저지하면서 화의를 맺도록 종용했다. 정묘호란 때 부원수를 지낸 정충신은 ‘그대의 혀끝으로 수만의 후금군이 물러갔으니 조선 백성 가운데 누가 그의 덕에 감사하지 않겠는가’하는 편지를 보냈다.

두 나라는 형제의 의를 맺는 화약을 맺었고, 강홍립도 오랜 억류생활을 끝내고 석방되었다. 그러나 고국에 정착하자 진장이 풀린 탓인지, 그해 7월27일 68세의 나이로 병사하고 만다.

강홍립의 신산스런 삶에 아무 교훈도 얻지 못한 조선은 여전히 친명 사대주의 명분론이 우세했고, 이는 10년 뒤인 인조 14년(1636)에 정묘호란보다 훨씬 뼈아픈 병자호란으로 되돌아왔다.

22장 유배속에 살다, 이광사(李匡師)

- 1705, 숙종 31년 ~ 1777, 정조 1년 -

원교(圓嶠) 이광사는 서예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중국과 다른 우리나라의 독특한 서체인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완성한 서예가이자 <원교필결 圓嶠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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訣>과 <원교서결 圓嶠書訣>이란 서예이론서를 저술한 이론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부는 그를 박하게 평가하는데 대부분 추사 김정희의 악평에 기반을 둔 것이다. 전남 해남 대흥사의 초의(草衣) 선사에게 쓴 편지에서 김정희는 이광사가 쓴 대웅전 편액에 대해 혹평했다.

청나라를 자주 드나들었던 김정희는 청에서 습득한 서예이론으로 이광사를 비평했다. 또한 이광사는 소론인데 비해 김정희는 노론이었으니 당파심도 작용했을 것이다. 8년간의 유배생활을 제하면 순탄하고 화려한 인생길을 걸었던 추사로서는 전 인생이 쓰라렸던 이광사의 삶을 이해할 수 없었고 삶을 이해하지 못하니 글씨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광사는 조선 2대 임금인 정종과 성빈 지씨 사이에서 낳은 10남 덕천군의 후손으로 조부는 호조참판을 지낸 이대성이고 부친은 대사헌을 지낸 이진검이었다. 명가였으나 이광사의 집안도 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요동쳤다.

■ 당쟁의 소용돌이

경종이 즉위하자 거대당파 노론은 경종의 이복동생 연잉군(영조)을 왕세제로 책봉할 것을 강요하고 나아가 연잉군에게 대리청정을 시키라고 압박하는 무혈 쿠데타를 자행했다. 경종의 왕위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있자 소론 강경파였던 김일경이 소두(상소문의 우두머리)로서 세제 대리청정을 강요하는 이이명 등 노론 사대신을 사흉(四凶)으로 모는 강경한 상소문을 올렸는데, 이광사의 백부였던 이진유 등 여섯 명과 함께 소하(상소문의 연명자)가 되었다. 이 신축소를 계기로 소론이 정권을 잡으면서 이진유는 사헌부 대사헌 성균관 대사성, 이조참판 등을 역임했으나 경종이 독살설 끝에 세상을 떠나고 노론이 추대하는 영조가 즉위하면서 상황이 반전된다.

영조 즉위 뒤 김일경은 사형당하고 이진유는 귀양길을 전전하다 영조 6년(1730) 서울로 끌려와 곤장을 맞다 물고(物故 죽음) 당하고 만다. 이광사의 부친은 영조 즉위 뒤 전라도 강진에 유배 되었다가 영조 3년(1727)죽었다. 이후 이광사의 가문에는 ‘역적 집안’이라는 꼬리표가 따라 다녔다.

이광사는 과거를 포기하는 대신 학문에 몰두했다. 그는 영조 8년(1732)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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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 정제두를 찾아가는데 정제두는 당시 유일사상이던 주자학에 맞서 양명학을 공부하던 학자였다.

■ 위기에 빠지다

과거를 포기한 채 양명학과 서예에 몰두하던 그는 만 쉰 살 때인 영조 31년(1755) 발생한 나주 벽서사건에 연루됨으로써 위기에 빠진다. 나주 벽서사건은 나주 객사에 영조의 치세를 비판하는 벽서가 붙으면서 시작된 것인데 벽서의 작성자 윤지는 곧 체포된다. 윤지는 영조 즉위 뒤 소론 강경파로 몰려 김일경과 함께 죽은 훈련대장 윤취상의 아들로 연좌제에 걸려 31년째 유배생활을 한 인물이었다. 이 사건에 분노한 영조는 수많은 관련자를 사형 시키는데, 윤지는 물론 그의 아들 윤광철도 능지처참했고, 이미 사망한 소론 강경파 대신들에게 역률(逆律 역적을 처벌하는 법률)을 추가하고 이미 죽은 소론 온건파는 관직을 삭탈했다.

이광사는 윤지의 아들 윤광사와 몇 차례 서신을 주고받은 것 때문에 의금부에 하옥되었는데, 나주 벽서와는 전혀 무관한 내용이었으나 이성을 잃은 국문에서 그의 목숨은 풍전등화였다.

그가 3월 6일 체포되자 그달 12일 부인 문화 유씨가 마흔 둘의 나이로 두 아들 긍익과 영익, 일곱 살 된 딸을 두고 자결한 것도 이런 절망스러운 상황 때문이었다. 영조는 3월 30일 이광사를 유배형에 처했다.

■ 유배, 유배, 유배

이광사는 부령에 유배되었으나 의기가 꺾이지는 않았다. 그는 ‘두만강의 남쪽’ 이란 뜻의 ‘두남(斗南)’으로 자호(自號)하고 학문과 서예에 정진했다. 부령 근처 갑산에 유배된 종형 이광찬과 서신을 주고 받으며 학문에 관해 토론했는데, 이광사가 양명학에 기초해 주자를 비판하자 이광찬은 “공자의 뜻은 주자가 얻었으니 그가 곧 공자이고, 주자의 뜻은 후인이 얻었으니 그가 곧 주자”라고 꾸짖기도 했으나 그는 뜻을 꺾지 않았다.

유배지에서 이광사는 늘그막에 낳은 막내딸을 얼마나 예뻐했는지를 절절하게 토로한다. 그는 딸에게도 한글과 한자를 가르치며 기존 가치에 얽메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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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영조 8년(1732) 진도로 이배된다. 이광사는 진도를 거쳐 신지도로 이배 되면서 친형 이광정을 만나는데 이것이 형제의 마지막이었다. 이광정은 영조 49년(1773) 유배 19년 만에 세상을 떠났고, 이광사도 정조 1년(1777)유배 23년 만에 신지도에서 숨을 거둔다.

■ 신기 어린 글씨

그의 글씨에 관한 일화는 여럿 남아있다. 전남 구례의 지리산 천은사는 원래 이름이 감로사(甘露寺)인데 숙종 때 중건하면서 샘가의 구렁이를 잡아 죽이자 샘이 사라졌다고 해서 ‘샘이 숨었다’는 천은사(泉隱寺)로 개명했다. 그 뒤 원인 모를 화재가 자주 일자 절의 수기(水氣)를 지켜주는 구렁이를 죽였기 때문이라고 두려워했는데, 이광사가 물 흐르는 듯한 수체(水體)로 ‘지리산천은사(智異山泉隱寺)라고 써준 글을 일주문에 건 뒤부터 화재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이광사가 동국진체(東國眞體)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역사를 그만큼 사랑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국조(國祖)단군부터 두문동에 은거한 고려충신들의 이야기까지 30가지 일화를 30수로 읊은 ‘동국악부(東國樂府)’를 지었는데 그와 처지가 비슷했던 정약용은 ‘해동악부 (海東樂府) 발문’에서 “문장이 깨끗해서 즐길만하다”라고 호평했다.

이광사의 장남이 방대한 역사서인 <연려실기술>의 저자 이긍익인데, 연려실(燃藜室)이란 호는 이광사가 서실 벽에 써준 것으로 한나라의 유향(劉向)이 옛 글을 교정할 때 태일선인(太一仙人)이 청려장(靑藜丈 명아주 지팡이)에 불을 붙여 비추어 주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이긍익이 평생을 고초 속에 산 부친을 얼마나 흠모 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 끝 -

2016.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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