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7. 5. 11:35ㆍ독서후기
자존감 수업
■ 윤홍균 지음
0 정신건강 의학과 의원
0 중앙대 의대 졸업, 동 대학 박사
0 경향신문, 한국일보, 레이디 경향, 월간 생로병사 등에 연재
0 EBS <부부가 달라졌지요> 자문의,
0 교통방송 <귀로 듣는 상담의>로 활약
Prologue 문제는 자존감이다
어느 덧 머리가 희끗한 중년 의사가 되었다.
생각해 보면 참 행복한 시간이다. 나는 아직 건강하고,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은 나를 존중한다. 부모님은 나를 신뢰하고, 하나 뿐인 형은 늘 나를 지지한다. 총체적으로 무척 행복한 인생이라고 말할 만하다. 하지만 이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어린 시절 나는 유약한 아이였다. 몸은 약했고, 마음도 여렸다. 걸핏하면 눈물을 보이는 울보에 머리는 평범했고 손재주도 없었다. 자신감도 없고 끈기도 없었다.
시간은 거침없이 흘렀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나는 지금의 나에게 상당히 만족한다.
나는 수많은 의사들이 지독히도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와 같은 정신과 의사들의 자살률이 다른 분야 의사들보다 높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다. 그래서 “당신은 누구나 부러워하는 의사 아닌가? 그러니 남들보다 행복한 게 당연하다”는 의견에는 동의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내가 내 삶에 만족하는 이유’를 찾아보기 위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고민의 퍼즐이 조금씩 맞춰질 때마다 어김없이 ‘자존감’이라는 단어가 수면위로 떠올랐다. 정신과 차트에 self-esteem 이라고 표기되는 단어, 사전적으로는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고 만족하고 있는지에 대한 지표’를 뜻하는 단어다. 나는 ‘자존감’이라는 표현에 주목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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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존감이 매우 낮은 사람이었다. 의과대학을 다닐 때 유급을 당한 적이 있다. 물론 낙방이 처음은 아니었다. 과학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한 적도 있고, 대학입시에도, 심지어 재수학원 입시에도 떨어졌다. 의과대학 낙제는 그 중에서 제일 견디기 힘들었다. 인생의 경로 자체를 수정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회의가 밀려왔다.
술을 마시고 담배와 게임에 빠져들었다. 아침이 되면 친구들은 학교로 가고 나는 PC방으로 출근했다. 당구장을 다니고 포장마차를 전전하고…. 그러면서 포기하고 싶고, 희망을 놓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곤 했다.
돌아보면 자존감을 제자리에 올려놓으려고 그렇게 힘겹게 지냈나 싶고, 자존감이 건강해진 지금에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행복갑을 느끼고 사는 것 같다. 자존감은 행복의 결과물이기도 하고, 자존감의 결과가 곧 행복이기도 했다. 자존감이 회복된다는 말과 행복해진다는 말은 같은 의미였다. 그래서였을까? 자존감을 되찾기 위한 길은 다소 힘들고 불편했지만 기꺼이 견딜 수 있었다.
이 책을 끝까지 써보자고 맘먹은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나의 자존감이 언젠간 떨어질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자존감을 유지하는 일은 수영과 비슷하다. 제자리에 멈춰 있으면 중력이 우리를 자꾸 끌어 당긴다.
둘째, 나의 가족과 지인들이 인생에 한두 번은 반드시 자존감 위기를 겪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딸들이 태어나고 자라면서 해주고 싶은 얘기가 참 많았다. 그러나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아서 말하지 못했다. 이 책은 ‘딸들에게 들려주는 ’자존감 이야기‘ 이기도 하다. 아이들도 아마 좋아할 것이다. 말로하면 잔소리로밖에 안 들릴 테니까.
셋째, 어차피 한 번은 정신과 의사로서 하고 싶던 얘기이기 때문이다.
◉ Part 1. 자존감이 왜 중요한가?
1. 자존감의 세 가지 축
자존감의 가장 기본적인 정의는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이다. 곧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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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높게 평가 하는지 또는 낮게 평가하는지에 대한 레벨을 의미한다. 100점 만점에 70점이라는 숫자로 표현할 수도 있고 높이로 표현할 수도 있다.
■ 자존감의 3대 기본 축
1, 자기 효능감 : 자신이 얼마나 쓸모 있는 사람인지 느끼는 것을 의미
2. 자기 조절감 :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본능, 이것이 충족돼야 자존감도 높아진다. 명문 대학을 나온 사람이 시골에서 자유롭게 뛰논 사람보다 자존감이 떨어지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자기 조절감이 부족한 경우이다.
3. 자기 안정감 : 자존감의 바탕. 흔히 자존감을 ‘자신을 사랑하는 정도’라고 하는데 스스로 쓸모 없다고 느끼거나, 자기 조절을 못하거나, 마음 상태가 안전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은 물론 남을 사랑하기도 어렵다.
■ 자신감, 자만심, 자존심의 차이
자신감 : 나의 능력과 과업의 난이도를 상대적으로 비교한 개념이다. 능력을 높게 평가하고 난이도를 낮게 보면 자신감은 저절로 올라간다. 반면 능력은 적절하게 평가 했는데 과업의 난이도를 높게 잡으면 자신감은 떨어진다.
자만심 : 나의 능력을 지나치게 높게 잡거나 과업의 난이도를 지나치게 낮게 잡을 때 생기는 마음
자존심 : 자존감과 연관된 감정. 자존감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대한 생각의 개념이라면 이에 수반되는 감정을 자존감이라 한다.
2. 자존감에 대한 오해와 편견
■ 자존감은 부모에게서 온다?
정보 과잉에서 빚어진 오해다. 부모의 양육 방식이나 어릴 적에 받은 대우는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자존감이 순전히 부모의 영향이라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흔히 ‘부모님의 사랑을 덜 받아서 자존감이 낮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자존감은 셀프로도 회복할 수 있다.
■ 칭찬이 부족하면 자존감이 떨어진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한때 유행을 했다. 이 말을 칭찬은 무조건 좋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 잘못된 공허함만 키운다. 칭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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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환상과 갈망 또한 자괴감을 자극한다.
■ 자존감만 회복되면 행복해진다?
자존감은 감정이 아니다. 감정과 연결돼 있지만 정확하게는 이성의 영역이다. 자존감의 회복했다고 해서 기분이 방방 뜨고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 드는 것은 아니다.
■ 자존감이 회복되면 나르시시스트가 된다?
자존감 회복의 목표는 흔히 말하는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 을 갖거나 ‘자뻑남, 자뻑녀’ 가 되는 게 아니다. 이들처럼 지나치게 자신을 높게 평가하는 사람을 ‘자기애성 인격장애인(나르시시스트)’이라고 부른다.
이들은 겉으로는 거만한 척 하지만 사실은 창피를 당할까 봐 노심초사한다. 자존감을 회복하면 오히려 자신의 허물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못난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고 발전할 수 있는 에너지도 함께 갖출 수 있다.
■ 자존감은 정말 회복 가능한가
자존감은 자신을 어떤 높이로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느낌이다. 이 느낌은 생각이며 판단이지만 감정에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유동적이고 시시때때로 변한다. 게다가 자존감 정도가 변할 때마다 그 느낌은 확연히 달라진다. 그만큼 공포감도 커진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떨어진 자존감은 회복 될 수 있다. 다만 시간이 좀 걸리는 사람이 있고 쉽게 되찾는 사람도 있다. 물론 그 과정이 쉽지 않아 번번이 낙심할 수도 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노력하면 분명히 회복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자존감을 회복하는 과정은 자전거를 타는 과정과 비슷하다. 자존감은 자전거처럼 쉴 새 없이 움직인다. 우리는 자존감에 올라타 중심을 잡고, 핸들을 조종하며, 바퀴를 굴리는 과정을 터득하게 될 것이다.
자전거를 타는 동안 우리는 분명 한두 번 이상 넘어질 것이다. 자전거를 배운 지 30년이 넘은 사람도 가끔 넘어지고 깨지는 이치다. 하지만 자전거를 일으켜 다시 올라탈 줄 알며 상처를 치료할 줄 아는 사람은 더 이상 자전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자주 타고 싶고, 애용하며, 즐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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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왜 지금 자존감이 중요한가
자존감은 우리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한 마디로 우리가 하는 말, 행동, 판단, 선택, 감정 등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
특히 요즘처럼 힘들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을 때 자존감은 더욱 중요해진다. 흔히 자존감을 ‘정신 건강의 척도’ 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 자존감이 중요해진 시대
“남들은 다들 결혼도 잘하고, 애도 잘 키우고, 일도 척척 잘 해내는데 왜 저에겐 이 모든 게 힘들게만 느껴질까요?”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몇 년 새 부쩍 부쩍 늘었다.
남의 인생은 모두 쉬워 보인다. 때가 되면 다들 좋은 짝을 만나 사랑을 하고, 아니다 싶으면 헤어지기도 잘하고 며칠을 울적하다가 다시 씩씩해진다. 결혼도 순탄한 것 같고, 취업도 잘하는 것 같다.하지만 정말 그럴까? 세상은 멀쩡히 장 돌아가는데 유독 나만 혼자이고 힘든 걸까? 결론부터 말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
■ 경계가 사라졌지만 더 외로워진 사람들
과거에 비해 우리의 삶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부모 세대에 비해 밥 굶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고 저마다 수십만 원짜리 스마트폰을 갖고 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기술이 발달하면 할수록 정신 건강을 지키기는 쉽지 않다. 이것은 역사적으로도 반복되는 사실이다. 17세기 영국의 산업혁명이 일어났을 때 정신병 환자는 대폭 늘었다. 특히 IT산업이 빠르게 발전한 우리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눈을 뜨자 마자 뉴스와 날씨를 확인하는 것부터 잠이 들 때까지 스마트폰 세상과 접속해 있는 우리는 과연 행복하고 건강할까? 스마트폰과 SNS의 발달은 분명 유익한 점이 많다.
근사한 인테리어, 맛있는 음식, 해외여행, 책읽는 삶, 따라하고 싶은 취미생활 ,어쩜 그렇게 다 잘 살고 있는지 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죽는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행복한 것 같아 비교가 되고 우울해 진다. 부러움은 잠시고 그만큼 내 삶이 위축되고 초라해 보인다.
우리는 타인과 가까워졌지만 마음의 거리는 그만큼 멀어진 세상에 살고 있다. 친구라고 생각해 다가갔는데 적이기도 하고, 힘들게 마음을 열었는데 더 큰 상처를 받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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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사람들은 함께 있으면서도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린다. 우리는 모두 외떨어진 섬처럼, 각자의 고민을 안고 외로워한다. 어쩌면 사통팔달로 연결되어 있되 꽉 막힌 고립의 시대인지도 모르겠다.
■ 자존감이 가장 강력한 스펙
정보가 폭발하면서 우리는 고유의 정체성조차 비교당하고 산다. 내가 하는 생각, 살아가는 과정, 판단, 결과들도 비교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인지 그럭저럭 잘 살고 있는 사람들조차 마음 한구석에 ‘내가 정말 잘 살고 있는 걸까 의문을 안고 살아간다.
이런 환경은 자존감에 큰 영향을 미친다. 끊임없이 비교하며 열등감을 조장하고 내 환경을 원망하게 하고, 내 성격이 이산한지 자꾸 점검하게 한다. 답을 찾기도 쉽지 않다. 뭔가 문제가 있다고 느끼기도 하지만 고민할 시간은 부족하고 점점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되면서 떨어진 자존감은 방치되기 일쑤다.
바야흐로 셀프로 자존감을 지켜야 하는 시대다. 행복해지기 위한 온갖 방법과 글귀가 난무하지만 진짜 행복은 튼튼한 자존감에서 나온다. 건강한 자존감이야말로 요즘처럼 복잡한 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가장 강력한 투자이다.
Part 2. 사랑 패턴을 보면 자존감이 보인다.
1. 사랑받을 자격을 의심하는 사람들
성장 소설에는 어김없이 사랑이야기가 등장한다. 이유가 뭘까? 사춘기가 성욕이 가장 왕성할 때라서가 아니다. 성장은 자존감을 획득하는 과정이고, 자존감을 갖추면 사랑부터 찾기 때문이다. 반대로 자존감이 무너지면 사랑에 대한 능력부터 의심하게 되어 있다.
■ 연애할 준비가 안 됐다는 말의 속마음
‘나는 사랑을 받을 수 없어’ 라는 생각이 확고한 사람들이 있다. 멀쩡하게 생겼고 누가 봐도 매력적이건만 왜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지 이해가 안 가는 사람들 말이다. 이런 사람은 좋은 사람을 소개해 줘도 사소한 핑계를 대며 퇴짜를 놓기 일쑤이다. 속내가 궁금해 “말은 그렇게 해도 눈이 너무 높은 거 아냐?”라고 떠보면 진심으로 정색을 한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눠보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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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빈말이 아님을 알게 된다. “처음에는 나를 좋아 할 수도 있어. 하지만 나에 대해 더 알게 되면 실망할 게 뻔해.”
놀랍게도 자신의 가치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 사랑을 놓친 후 찾아오는 자기비하
같은 맥락에서 자신의 사랑스러움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아무리 괜찮은 사람이 대시를 해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겉으로는 “아직 연애할 준비가 안 되어 있다” “우리는 성격이 너무 다른 것 같다” 등 좋은 말로 거절하지만 마음 안에는 ‘내 성격을 알면 떠나갈 게 뻔해’ ‘너처럼 똑똑한 사람은 결국 나를 무시하고 질려버릴 거야’ 라는 생각이 가득하다.
낮은 자존감 때문에 사랑을 놓치고, 사랑을 놓친 후에 자존감은 더 떨어진다. 이들의 문제는 사랑하는 사람을 놓치고 후회하면서도 자신이 사랑 부적격자라고 믿는 데 있다. 이런 악순환이 반복될수록 자기 비하는 더욱 견고해 진다. 궁극적으로 자신을 더 믿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비극이다.
■ 기초 믿음의 부재
자신이 사랑받을 가치가 있음을 인정하는 일은 ‘신뢰’라는 감정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덕목이다. 인간은 제각각 독립적인 존재지만 서로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이 있어서 팀을 이루고 사회를 이뤄 살 수 있다.
승객은 기관사를 믿어야 몸을 맡기고 여행할 수 있다. ‘이 기관사가 운전면허는 있을까?’하고 의심하기 시작하면 절대 편안하게 여행하지 못한다. 이렇듯 누군가에 대한 본능적인 믿음을 ‘기초믿음’이라고 부른다.
■ 자기 불신은 인간관계도 망친다
자신의 매력이나 능력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과의 관계에도 문제가 생기기 쉽다. ‘나를 사랑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 왜 나를 사랑한다고 할까’라는 의심을 품기 때문이다. 기혼자의 경우 자기 불신은 의처증이나 의부증으로 발전한다. 대개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열등감이나 마음 상태는 못 보고 상대를 탓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고 든다. 겉으로는 상대를 사랑해서 힘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을 믿지 못해서 괴로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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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 자신에게 관심 갖기
이 모든 문제는 자신을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으로 인식하기 때문에 생긴다. 하지만 세상에 사랑받을 만한 자격과 가치로 똘똘 뭉친 사람은 없다. 모든 면에서 완벽한 사람도 없다. 마찬가지로 아무데도 쓸모가 없는 사람도 없다. 단지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쓸모없다고 믿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내가 정말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려면 자신을 솔직하게 들여다보는 작업을 해보면 된다.
방법은 쉽다. 종이 한 장을 꺼내 자신의 장단점을 적어보면 된다. 특히 대체 자신의 어떤 점이 사랑받을 수 없다고 믿는지, 어떤 점을 믿지 못하는지 마음속에서 꺼내 바라보자.
■ 아는 만큼 더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은 감정이다. 원한다고 억지로 생기지 않는다.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나는 사랑스러워!” 라고 아무리 외친들 사랑이 갑자기 솟아날 리 없다. 따라서 당장 자신을 사랑하라고 강요할 수도 없고 그렇게 되지도 않는다. 다만 자신의 단점과 장점을 적어보는 것만이라도 해보자.
이런 행위는 자신에게 관심을 갖게 한다. 세상의 모든 사랑은 관심에서 시작된다. 집이 어딘지. 무엇을 했는지 등 사소한 관심이 번져 존경과 사랑이 싹튼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도 똑 같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참으로 재미있지 않은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능력이 결국 내가 누구인지 알아가는 능력에서 시작된다니 말이다. 나를 아는 만큼 사랑 능력도 커진다.
2. 자신의 가치를 부정하는 사람
자신을 사랑하면 인생이 심플해진다. 혼자 길을 걸어도 좋아하는 친구와 함께하는 느낌이 든다. 외로움이 느껴져도 많이 괴롭지 않고, 방황할 때도 사랑하는 ‘나’에게 조언을 수할 수 있다. 그렇다고 외톨이가 되는 것도 아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혼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감이 있다. 이 자신감이 타인과 있을 때 생기는 불안감을 없애준다. 그리고 자신감이 매력으로 작용해서 주변에서 인기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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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나
나도 내가 몹시 싫었던 때가 있다. 고등학교 1학년이 끝날 때쯤 무기력증에 빠졌다. 아침에는 일어나기 싫고 식욕도 없고 만사에 흥미를 잃었다. 씻지도 않고 겨우 학교에 가서는 맨 뒷자리에 앉아 잠을 자거나 멍하니 있었다.
평소 모범학생으로만 살아온지라 스스로도 이런 모습이 낯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잠깐 따라오라고 했다. 그러곤 동네에 있는 작은 서점으로 나를 데려갔다. “사고 싶은 책이 있으면 아무거나 다 사.”늘 그렇듯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책장을 여기저기 둘러보던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기>라는 책을 골랐다. “나를 사랑하지 않고는 누구도 사랑할 수 없다”라는 글에 눈이 꽂혔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기운이 생기면 그 책을 뒤적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책 내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열일곱 살 고등학생인 내게 ‘나 자신을 사랑하기’에 관한 글은 적잖이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러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 처음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중에 혼란에 빠질 때마다 용기를 얻었다. ‘지금 상황에서 나를 사랑하는 길’을 기준으로 삼을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 나는 다른 이의 마음을 달래주는 정신과 의사가 되었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해 괴로운 사람들이 도움을 받기 위해 찾아온다. 나는 이들에게 유난히 신경이 쓰인다. 아마 지독하게 앓았던 경험 때문이 아닐까.
내가 싫어지는 감정은 대학에 가서도 나를 괴롭혔다. 의과대학에는 멋진 아이들 투성이였다. 어쩜 그렇게 다들 머리도 좋고 술도 잘 먹고 성실하기까지 한지 나와 심하게 비교가 됐다. ‘도대체 나는 왜 저들처럼 세련되지 못했을까’ ‘왜 난 한 번에 외우지 못할까’하는 열등감은 점점 커져갔다.
돌아보면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외로운 감정인지 그때 처음 알게 된 것 같다.
■ 가장 가까운 친구는 바로 나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알게 모르게 짜증이 나 있다. 무기력한 내가 싫고, 키가 작은 내가 싫고, 성격이 모난 나에게 화가 난다. 그럴 때마다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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슴지 않고 자신을 비난하고 남들과 비교한다. 생각해 보라 누군가 내 등에 업혀서 하루 종일 나를 비난하고 남들과 비교하면 어떻겠는가. 어떤 장치가귀에 꽂혀 속삭이듯 ‘너는 못났어, 너는 남들보다 무능해“라고 세뇌한다면 어떻게 될까?
자신을 미워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남에게 비난을 들으면 도망이라도 칠 수 있는데 자신을 미워하면 그게 안 된다. 하루 종일 잔소리를 듣게 되고 그 경험이 쌓인다. 숱한 비교와 비난 속에서 자존감이 낮아진 사람은 생각이 자꾸 비관적인 쪽으로 흐르기 쉽다.
이에 반해 자신을 사랑하는 이의 인생은 상당히 수월해진다. 자신을 사랑한다는 건 마치 마음이 잘 통하는 친구와 함께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외로움이 찾아와도 크게 동요하지 않고, 혼자 여행을 가서도 마치 둘인 양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거울을 볼 때마다 위안이 되고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스스로를 위로할 수도 있고 격려할 수도 있다. 특히 자신이 했던 어떤 행동을 되짚어보며 상대가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근심과 불안에 빠질 일이 없다.
■ 나에게 “괜찮아!”라고 말해주자
인생을 조금 편하게 살고 싶다면 평소 자신에게 “괜찮아”라는 말을 자주 해줘야 한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남들과 경쟁하고, 비교하고, 비난당하며 살아왔다. 그래서 필요 이상으로 스스로를 이상하고 부족한 사람으로 매도해 왔다. 우리의 자아는 억울함과 슬픔에 빠져 있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위로를 해주어야 한다.
자존감이 낮아져 있어도 괜찮다. 그 덕에 더 노력할 수 있었고, 때론 무기력에 빠져 쉬는 시간도 가질 수 있었다. 그저 “괜찮아, 그동안 수고했어”라고 얘기해 주면 된다. 지금 당장 그게 되지 않는다 해도 괜찮다. 우린 이제 첫발을 떼었을 뿐이니까.
3. 끊임없이 묻고 확인하는 사랑
사랑을 많이 받거나 인기가 있는 사람들은 자존감이 높을 거라고 여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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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다. 하지만 인기 연예인들 중에 우울증을 앓는 이들이 적지 않다. 대중의 사랑과 관심을 받는 연예인들도 인기와 무관하게 정작 본인은 불안하고 외롭고 사랑받을 리 없다고 여기곤 한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포장과 과장을 반복하지만 그럴수록 내면은 더 황폐해진다.
■ 사랑과 집착은 함께 온다
이런 사람들은 괜찮은 사람에게 사랑 고백을 받아도 의심부터 한다. 처음엔 의심하며 만나다가 나중엔 매달리는 형국이 된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강렬한 사랑이라고 믿는데 사실은 집착이다. 집착은 병이다. 긴 병에 효자 없듯 집착은 굳건한 사랑도 떠나게 한다.
법정 스님의 저서 <무소유>를 보면 난초 키우는 이야기가 나온다. 누군가 선물해준 화분 하나를 키우기 시작하면서 스님은 행복감에 젖는다. 물을 주고 볕을 쬐어주고, 눈길을 주는 일이 일상의 큰 즐거움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머지않아 딱 그만큼 걱정도 함께 따라왔다. 집을 비우게 되면 혹시 말라 죽지나 않을까. 얼어 죽지는 않을까하고 없던 걱정이 생긴 것이다.
강아지나 화초 등 살아 있는 뭔가를 길러본 이라면 스님의 이야기에 공감할 것이다. 어떤 것에 애착이 생기면 행복감과 동시에 두려움도 싹튼다. 그 대상이 사람일 때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 사랑한다며,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자존감이 건강한 사람들에게는 ‘나는 사랑스러운 존재야. 그래서 누가 나를 사랑하는 건 자연스러워’ 라는 전제가 있다. 이 느낌은 사랑을 유지하는 중요한 보호막이 된다. 반면 자신의 매력과 가치를 잊은 사람들에겐 사랑도 어렵다.
연인들이 다투는 이유는 상대가 나를 사랑한다는 명제에 의심이 생기기 때문이다. 기념일을 안 챙겨줘서, 약속을 안 지켜서, 전화를 자주 안 해서 등 이유는 다양하지만 ‘그렇게 행동하는 건 사랑이 식었기 때문’ 이라는 결론은 똑같다.
이렇게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존재라는 사실에 확신이 없으면 상대를 의심하게 된다.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를 키우는 데에도 에너지와 노력이 필요한데, 상대가 지속적으로 ‘나를 사랑하긴 하니?’라는 의문을 제기 한다면 버텨낼 장사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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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의 말에는 다양한 의미가 담겨 있다. 예컨대 “왜 이렇게 늦었어?”라는 말에는 시간을 안 지켰다는 질책만이 아닌 ‘내가 가치 없는 존재니까 약속을 어기는 거야’라는 의미까지 숨어 있다. ‘사랑에 취했을 땐 그러지 않더니 내 정체를 알아버려서 사랑이 식은 거지’라는 불신도 섞여 있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연애를 하는 동안에도 상대에게 집중을 하지 못한다. 대신 자신의 모난 성격, 외모, 상처, 애정결핍 등 부족한 점들을 떠올린다. 누가 봐도 사랑 문제가 아닌 자존감 문제다.
■ 사랑싸움에도 차이가 있다
반면 자존감이 건강한 사람의 연애는 다르다. 스스로 사랑스러운 존재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 문제에 오래 빠져 있지 않는다. 간혹 기분이 나쁘고 초조해져도 ‘나는 사랑받을 만한 존재야’라는 믿음은 견고하다. 이들은 말다툼을 해도 상대방의 특정 행동만 문제 삼는다.
사랑을 한다는 건 거기서 얻는 행복만큼이나 큰 에너지를 요하는 감정이다. 이때 그가 진짜 나를 사랑하는가. 내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인가 하는 고민을 하지 않으면 그만큼 에너지 소모를 줄일 수 있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건강한 관계를 만드는 데 쓰인다.
■ 잘 사랑하기 위한 기초공사
‘자신을 사랑스러운 존재로 인식하기’는 사랑을 지속하는데 꼭 필요한 기초공사다. 이것이 무너지면 안정된 사랑을 이어갈 수 없다. 사랑을 지키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매번 고개를 떨구는 이유 중 하나는 결정적으로 ‘내가 사랑스러운 사람’이라는 사실 하나를 잊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 노력한다. 외모를 보기 좋게 가꾸고, 말투나 행동, 심지어 능력과 직장까지 바꾼다. 하지만 이 모든 노력에 앞서 ‘내가 나를 사랑하기’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사랑을 할 때 상대와의 관계에 집중할 수 있다. 나에 대한 확신이 약하면 상대를 생각해야 할 때 나를 생각하고 나를 생각할 때 상대를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 나를 위한 선물 고르기
선물은 사랑에 대한 징표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자꾸 선물을 하고 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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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애인이 준 선물을 보며 ‘맞아, 그 사람이 나를 이만큼 사랑하지?’라며 미소 짓는다. 선물의 힘은 강력하다.
지금부터 자신에게 선물을 줘보자. 나에게 가장 적당한 선물은 무엇이고 무엇을 받으면 가장 기뻐할까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일단 선물을 골랐다면 “잘 골랐어! 난 참 선물도 잘 골라!” 라고 칭찬까지 해주자. 나 자신을 사랑하는 길에 한 발 더 다가설 것이다
4. 싸우면서 끊지 못하는 관계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말이 있다. 나는 대한민국의 이혼율을 높이는 데 이 속담이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부부싸움은 으레 하는 일, 많이 해도 상관없는 일쯤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말이다.
이 속담에서 중요한 것은 물이 아닌 칼이다.
칼을 들고 여기저기를 베고 있으니 얼마나 위험한가. 칼로 돌이나 나무를 베면 칼끝이 무뎌지기라도 한다. 그런데 베는 것이 물이라고 한다. 물을 뚫고 닥치는 대로 이것저것 해칠 수도 있지 않을까.
살면서 한 번도 싸우지 않을 수는 없다. 하지만 자주 싸우는 게 당연하다고, 사랑하니까 싸운다고 합리화해서는 곤란하다.
■ 1년이 지나도 싸운다면
대다수의 평범한 연인들은 3~6개월 정도가 지나면 싸움이 줄어들고 안정을 찾는다고 한다. 반면 이 시기까지 타협을 이루지 못한 커플은 헤어지는 수순을 밟는다. 그런데 커플 중 한 사람이 자존감이 확연히 떨어지는 경우, 상황은 애매하게 흐른다. 사랑하지도, 헤어지지도 못한 채 서로를 비난하거나 공격하는 관계가 된다.
사귄지 1년이 지나도 싸움이 줄어들지 않는다면 각자 자존감을 체크해야 한다.
커플은 팀이다. 아무리 좋은 팀이라도 불화와 갈등은 있다. 하지만 팀킬은 가장 어리석다. 시비를 가리고 공격을 주고받는 사이 팀이 패배하기 때문이다. 자신은 억울하고 속상하겠지만 남의 눈에는 ‘저 팀은 형편없는 팀’으로 보일뿐이다.
■ 싸우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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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현재 연애하고 있는 자신도 믿지 못한다. 우선 상대와 사귀기로 한 결정 자체에 자신이 없다. 그래서 자꾸 묻는다. ‘내가 지금 과연 연애하기에 적합한 때인가?’ ‘과연 이 사람이 나에게 적합한 사람일까?’ ‘이 사람도 곧 떠나지 않을까?’
혼자 연정을 품거나 호감을 느끼는 건 본능적인 감정이다. 그런데 연애는 다르다. 느낌이 아니라 판단이다. 짝사랑은 감정이지만 연애는 결정이다. 그래서 자신의 판단력을 믿지 못하면 불안할 수밖에 없다.
■ 더 큰 상처를 남기는 사랑싸움
싸움이 대화와 다른 점은 공격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이다. 사랑싸움도 예외가 아니다. 오히려 낯선 사람과 싸우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 사랑하는 만큼 가깝고, 남들이 모르는 부분까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작심하고 싸우자면 상대에게 지울 수 없는 고통을 남길 수 있다. 쥐꼬리만큼 남은 자존감마저 앗아가는 게 사랑싸움이다.
그래서 연인이나 부부간의 싸움은 큰 비극으로 번지기 일쑤다. 아이러니하게도 가까운 사이일수록 공격할 거리도 많고 의심할 것도 많다.
사랑하는 이와 제대로 된 사랑을 주고받지 못한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아픔이다. 타인에게 속 시원히 털어 놓은 수 없는 고민도 생긴다. 사랑을 하면 자존감이 올라갈 줄 알았는데 오히려 자괴감만 커지는 셈이다.
■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우리는 누구나 사랑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다. 사랑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 것이란 환상이다. 이런 믿음은 백설 공주 이야기부터 춘향전에 이르기 까지 동사고금을 막론하고 널리 퍼져 있다. 진정한 사랑을 만나면 모든 고통이 치유될 것이라고 믿는 것 같다.
자존감도 비슷하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을 통해 자존감이 회복될 수 있다고 믿는다. 과거가 불행했던 사람일수록 사랑을 통해 상처를 회복하고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 자존감을 획득하면서 가장 먼저 찾는 게 사랑이듯이 자존감이 떨어질 때도 사장 먼저 의지하는 게 사랑이다.
내가 상담을 하면서 놀랐던 것 중 하나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슬픔과 사랑을 혼동한다는 사실이다. 화가 나서 눈물이 나고, 불안해서 우울해지고, 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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픔에 가슴이 미어지는 경험을 사랑으로 인한 아픔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그냥 아픈 거다. 노래 가사처럼,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이별이 행복의 지름길일 때도 많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사랑할 필요는 없다. 빨리 헤어지는 게 좋은 경우도 있다. 하지만 지금 사랑하는 데 굳이 이별을 앞당기는 행동을 할 필요는 없다. 사랑이 끝나면 어떻게 하나 미리 걱정할 필요도 없다. 사랑하는 상대를 시험하거나 괴롭히지 말고, 지금 사랑하고 있다면 더 사랑하게 해달라고 빌어야 한다.
5. 이별이 무서워 떠나지 못하는 사랑
이별을 유난히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더 이상 만나길 원치 않는 데도 헤어지기 두려워서 관계를 못 끊는다. 주변에서 보다 못해 그만 헤어지라고 충고하고 자신도 언젠가는 파국으로 치달을 걸 알면서도 이별을 결심하지 못한다. 행복하지 못한 사랑을 힘겹게 이어간다. 심지어 무시받거나 폭행을 당하면서까지 상대를 떠나지도 못하고, 적잖은 돈을 빌려주고는 갚으라는 말을 못하기도 한다. 자기 권리를 주장하면 상대가 떠날까봐 두려워서다.
■ 이별 클리닉을 찾는 사람들
내 블로그에는 ‘이별 클리닉’이라는 코너가 있다. 거기에 쓴 글을 읽고 상담실을 찾아오는 분이 적지 않다.
이별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이별을 무조건 부정적인 것으로 낙인찍는다. 헤어지면 인생을 곧 끝나기라도 할 듯이 여긴다. 그래서 뭐가 힘든지 실감하기도 전에 좌절부터 한다. “이 엄청난 일을 당했으니 난 이제 어떻게 살죠?” 하는 식이다. 이 사람들이 지닌 핵심 감정은 대개 ‘외로움’이다. 혼자 있는 것은 외로운 것이며 외로움은 곧 괴로움이라고 간주한다. 혹은 자신은 혼자서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다고 믿는다.
이들은 자신을 ‘나약하고 여려서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존재’라고 단정하기 때문에 상대가 못났어도 이별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자신을 너무 낮게 평가하기 때문이다. ‘저 사람이라도 있어야 해’ ‘저 사람은 그래도 나를 사랑하잖아. 나를 사랑해줄 유일한 사람이야’ ‘저 사람만큼 나를 사랑해 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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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없었어’라며 의지하고 관계를 유지한다.
■ 혼자 남겨졌던 기억에 대한 공포
이별에 대한 두려움은 대개 상처와 깊은 연관이 있다. 혼자 남겨진 것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경우인데 특히 일곱 살에서 열 살 무렵에 혼자 집에 남겨진 경험을 한 경우가 많다. 이때 뭔가 무섭거나 불쾌한 일을 겪으면 ‘혼자 있음’은 곧 불쾌한 경험으로 각인되기 쉽다. 또 혼자 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부모를 향한 원망과 이어지곤 한다. “그때 왜 나를 혼자 뒀어?”하는 원망. 방치되고 보호받지 못했던 기억이 강하게 남아 있어서 또다시 그런 연약한 존재가 될까봐 두려워한다.
그 외에 따돌림이나 괴롭힘, 소외를 당한 경우 트라우마가 된다. 그런 일이 또 생기고 무시를 당할까봐 두려운 것이다.
■ 이별은 누구에게나 어렵다
이별은 쉽지 않다. 오래 지녔던 물건이 없어져도 불안하고 허전한데 하물며 사람과 헤어지는 일임에랴. 이별을 하지 못해서 힘들다는 사람들, 이별한 후가 너무 괴롭다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그것이다. 이별은 누구에게나 원래 힘든 일이다.
그러니 자신이 이별에 어떤 식으로 반응하는지에 대해 너그러워지기를 바란다. 몇 날 며칠 우는 사람도 있고, 괜찮은 듯 웃고 사는 사람들도 있다. 화를 내는 사람들도, 무덤덤한 사람들도 있다. 그렇게 화를 내면 안 된다거나, 어떻게 해야 한다는 규칙 같은 건 없다.
■ 이별은 자신을 돌볼 소중한 기회
이별을 너무 나쁜 것으로 낙인찍을 필요도 없다. 세상에 절대적으로 좋은 일이 없는 것처럼 절대적으로 나쁜 일 또한 없다. 이별 후 혼자가 되면 외로워지게 마련이지만 그만큼 자유로워지기도 한다. 나는 우울증을 앓는 30대 아기 엄마들을 만나면서 이 사실을 깨달았다. 이들이 고민은 엇비슷하다. “혼자 있어보고 싶어요”라며 찾아온다. 엄마들은 아이를 임신하는 순간부터 자유를 빼앗긴다. 뭘 먹고 마실지는 물론이고 잠자고 움직이는 행동 하나하나까지 아이들의 건강 상태를 염두에 둬야 하고, 아기가 태어나 돌보다 보면 기본적인 생리 현상조차 해결할 시간이 없기 일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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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킹맘이나 전업주부도 자유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들은 혼자 있고 싶고 외롭고 싶다. “그냥 아무도 없는 공원에서 원 없이 달려보고 싶어요”라며 눈물을 흘린다.
나는 이별한 사람들에게 여행을 하라고 권한다. 혼자 떠나는 여행은 다소 쓸쓸해 보이지만 막상 떠나보면 다들 만족한다. 자신이 떠나고 싶은 시간에, 원하는 교통수단을 타고, 일정 역시 누구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도착한 여행지가 별로여도 상관없다. 그 자유를 한 번 느끼고 나면 “혼자 지내는 것도 썩 괜찮은데요?” 라며 자유의 가치를 고백해 온다.
■ 나쁜 습관과 이별하기
이별은 고독력(혼자 사는 삶을 버티는 능력)을 키울 기회다. 지금 아무리 행복해도 언젠가 마음 아픈 이별을 맞게 마련이다. 그때 받을 심리적 타격을 줄이기 위해선 연습이 필요하다.
- 늦잠 자는 습관, 술이나 담배에 의존하는 습관, 등의 중독에서 벗어나기
- 영어로 중독자를 뜻하는 ‘addict’는 로마시대에 노예를 뜻했던 ‘ict’에서 파생된 단어다. 그러니까 나쁜 습관은 우리를 거기에 종속 시킨다.
5. 미움받을까 두려워 자신을 포장하는 사람
유난히 밝고 호의적인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런 사람은 등장할 때부터 남들의 시선을 끌고, 사람들도 관심을 보인다. 처음 만날 때 그는 평생 우정을 함께 할 것처럼 행동한다. 내게 반하기라도 한 듯 무척 친밀하게 대하고 성적인 매력을 어필하기도 한다. 나도 금세 그와 친한 사이가 된 것 같다. 그런데 막상 뒤돌아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이들은 우리에게 좋은 모습만 보여주려고 한다. 그러다 보면 진짜 친해졌다는 느낌을 주기가 어렵다. 인간관계란 게 좋은 모습만 보이면 쉽게 친해질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정말 친한 관계란 나쁜 모습도 용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사랑받고 싶다 VS. 사랑을 잃을까 두렵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받기’를 원한다. 혼자서 자유롭게 사는 것도 행복하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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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인간은 어디까지나 사회적인 동물이다. 타인에게 가치를 인정받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자존감의 첫 번째 요소다. 자기 자신을 ‘사랑스러운 존재’로 인식하기 위해 가장 쉽게 떠올리는 방식은 사랑을 받는 것이다.
시험에 합격하려는 열망이 지나치다 보면 불합격에 대한 부담감도 커진다. 경기에서 꼭 이겨야 한다는 압박감이 너무 커지면 정상적인 경기력이 나오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자기 아이가 모두에게 사랑받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지나치면 “그러다가 친구한테 왕따 당할라” “네가 그러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니? 하는 공격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 행복해 지고 싶다 VS. 불행해 지고 싶지 않다
원하는 것을 정해 놓고 그곳으로 향하는 사람들은 계속 원 하는 것을 떠 올린다. 공부를 잘하고 싶은 사람들은 공부를 잘할 때의 자기 모습을 늘 떠올리며 그 모습에 따라 행동하려고 한다. 기대보다 성적이 나오지 않을 때도 그렇다. 다소 실망하고 자기 능력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기도 하지만, 모범생 다운 결론을 내린다. 무엇이 문제였는지 파악하고 다음 시험에는 보완하려고 노력한다.
목표를 공부 잘하는 사람으로 잡았을 때는 공부 잘하는 사람들의 행동 패턴에 관심이 간다. 공부 잘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위기를 극복했는지 궁금해 한다. 반대로 성적이 나쁜 사람에게 집중했을 때는 공부 못하는 사람의 특징에 대해 많이 알게 된다. 어떤 대우를 받고 어떤 마음을 갖는지 연구한다. 그리고 어떤 나쁜 결과를 만나는지 알고 공포를 느낀다.
■ 두려움은 예방주사가 아니다
가족이나 친구들이 말한다. “사람들이 왜 너에게 실망할 거라고 생각해. 너를 봐. 얼마나 예쁘고, 능력이 있고 착한데.” 이 말에 이성적으로 답할 수 있다면 다행이다. “맞아, 내가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나 봐. 나 이상한 거 아니지?”하면서 극복해내곤 한다.
그런데 두려움에 휩싸이면 설득이 불가능하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명을 해도, 감정에 갇혀 있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안 된다. 대화란 논리적인 과정인데 “그냥 불안해. 사람들은 실망할 거야”라는 말에는 논리적인 대응과 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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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이 불가능 하다. 자신이 사랑받지 못한 사건 때문에 두려움이 폭발해버렸기 때문이다.
자존감의 결여는 인간관계를 망치는 원인이 되지만 그 결과가 되기도 한다. 관계에서 트러블을 경험하고 그걸로 속상해 하는 자신을 보면서 스스로 깎아 내리면 그렇게 된다. ‘나는 쿨하지 못해’ ‘프로답지 못해’ ‘한번 혼난 걸로 이렇게 오래 꿍한 거 보면 너무 감정적이야’라며 자신을 못마땅해 하는 식이다.
애석하게도 이것은 어린 시절부터 축적된 두려움이 폭발한 경우가 많다. 부모는 아이가 사랑받는 존재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계속 예방 주사를 놓는다고 생각한다. “너 이러면 사람들이 싫어해. 외톨이가 될 거야”라며 핀잔을 준다. 그 순간에는 아이가 두려워해도 그래야 사랑스러워 노력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예방주사가 아니다. 거절이라는 병균이 침입했을 때. 항체가 되어 싸워야 할 자존감을 소진 시켰기 때문이다. 오히려 두려움과 불안이 핵심감정이 되어 폭발해버리고 만다. 자기 머릿속의 오류들을 수정할 기회가 날아가 버리는 셈이다.
■ 당당한 사람이 사랑스럽다
모든 이에게 언제나 사랑받는 존재가 되고 싶어도 우리는 그렇게 될 수가 없다. 누구나 훌륭한 인생을 살고 싶지만 문제는 늘 생기게 마련이다.
모든 사람들에겐 자아가 있고, 그것을 통제하는 선량한 나 즉 초자아가 있다.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이 초자아라면, 그 반대편에는 이드가 숨 쉬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나 사랑받는 사람들 누구에게나 이드가 있다. 그러니 자기한테 이드가 있다고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다.
당신이 사랑받지 못한다고 해도 그것은 당신 잘못이 아니다. 시험을 못 봤다고 해서 나쁜 학생이 아닌 것처럼.
■ 저가 자신에게 사과하기
오늘 저녁엔 거울 앞에 서서 사과를 해보자. “미안해. 그게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나를 미워했어” “미안해! 안 그래도 마음이 힘들었을 텐데, 그걸 숨기려고 했어. 당당하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라고 소리내어 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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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동안 자신에게 만족을 못했다. 나를 그대로 받아주지 못했다. 우리의 외모를 사랑하지 못했고, 성격을 불만스러워 했고, 처지를 비관했고, 처한 현실을 부끄러워했고 꿈을 숨겨 왔다.
자신에게 참 미안한 일이다. 따라서 일단 사과부터 해야 한다. 그것이 자존감이 낮았던 ‘과거의 나’와 노력중인 ‘현재의 나’의 차이점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변화하기 시작할 것이다.
Part 3. 자존감이 인간관계를 좌우한다
1. 나는 얼마나 인정받고 있을까
자존감의 가장 대중적인 의미는 ‘자아 존중감’이다. 말 그대로 자신을 얼마나 존중하고 가치 있는 존재로 받아들이는가를 뜻한다. 자존감의 중요성이 날로 커지고 있기 때문인지 최근 나오는 육아 서적을 보면 칭찬을 강조하며, 자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주라는 메시지가 많이 나온다.
안타깝게도 지금 성년이 된 대다수는 부모에게 그런 말을 듣고 자라지 못했다. “너는 소중한 사람이야”라는 말을 듣기는커녕 잘못했다고 혼나거나 심지어 발가벗겨져 문밖으로 쫓겨났던 경험이 더 많을 터. 그렇게 직접 지적하거나 창피함을 유발해 복종하도록 하는 육아법이 일반적이던 시절이었다.
우리는 자신의 가치에 대해 잊고 산다. 누구나 인정받고 사랑받아야 할 존재라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막상 “당신은 가치있는 사람인가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자신있게 대답하지 못한다.
자신의 가치란 반드시 누구에게 인정받아야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의 다른 표현
상담을 해 보면 부부생활에서 만족도가 떨어지는 남편들은 대부분 자존감이 저하되어 있다. 부인이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한다. 쓸모 있는 존재, 유용한 존재로 인정받고 싶은데 번번이 그 욕구가 좌절되기 때문이다.
부부 치료는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를 깨닫는 과정이다. 성숙한 부부들은 배우자의 자존감을 지키는 일이 곧 나의 자존감을 지키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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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받는 것에 관한 얘기를 하니 학회에서 처음으로 강연을 하던 날이 기억난다. 긴장을 많이 했다. 강연이 시작되자 목소리는 갈라졌고 손발이 떨렸다. 근심어린 마음으로 준비한 슬라이드를 보며 읽어 내려갔다. 그때 청중 사이에서 ‘찰칵’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준비한 자료를 누가 촬영하는 소리였다. 이어서 찰칵, 찰칵 소리가 연달아 들려왔다. 청중 쪽으로 몸을 돌리자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설명에 집중하고 있었다. 연세가 지긋한 선생님들도 흐뭇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긴장이 풀렸다. 허리가 펴졌고 그제서야 평소 목소리를 되찾았다.
나는 청중을 실망시킬까 봐 걱정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핑계에 불과했다. 사실은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면 어떡하나 등 온통 내 걱정으로 가득했다.
■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
내가 그랬듯 전문직 종사자나 성공한 사람들 중에도 자신의 능력이나 성취를 의심하며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의 강박증은 실은 어릴 때부터 이런 생각에 휩싸여 있던 경우가 많다. ‘1등을 하지 못하면 넌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야’‘ ’너 이번 시험에서 떨어지면 엄마 아빠한테 혼날 거야‘ 등등. 성공한 사람들의 뒤에는 헌신적인 부모도 있지만 이처럼 강박증을 심어놓을 정도로 자녀에게 불안을 강조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부모는 그런 영향을 끼치지 않았는데 자녀혼자 그런 생각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내가 과연 인정받을 수 있을까’하는 고민은 에너지를 일으킨다. 이 방법은 꽤나 중독성이 있어서 나는 지금 이 순간도 이 방법을 쓴다.
사회생활에는 시험 기간이 없고 담임선생님도 없다. 1년 내내 평가에 시달려야 하고 인정받아야 할 대상도 한 두 사람이 아니다. 게다가 특정인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면 정치적이라는 평가까지 듣기 십상이다.
■ 평가가 아닌 과정에 몰입하라
사회생활에는 뚜렷한 가이드라인이 없다. 언제, 어디까지, 어떻게 해야 가치를 인정받는지 알려주는 길잡이가 없다. 뚜렷한 성적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인기투표를 할 수도 없다. 그래서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인정하기도 어렵고 그것을 느끼기는 더 어렵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해답은 과정에 있다. 과정에 몰입하면 된다. 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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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나중의 일이고 과정은 현재의 일이다. 과정에 집중한다는 건 결국 오늘 할 일에만 포커스를 맞추는 일이다. 가령 취업을 하고 싶다면 취업을 하기 위해 ‘오늘 할 수 있는 일’만 생각해야 한다. 좋은 대학에 가고 싶다면, 평가는 수능 시험 당일이고 과정은 오늘 공부를 하느냐 마느냐 이다. 오늘 공부할 언어 영역이나 수리 영역에만 집중하는 것 말이다. 평가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고 현재의 영역도 아니다.
자존감은 ‘내가 내 마음에 얼마나 드는가?’에 대한 답이다. 그러기 위해선 타인의 평가가 아닌 ‘자신의 평가’에 집중해야 한다. 다시 내 강연예기로 돌아가자면 요즘 나는 강연이나 발표를 할 때 예전과는 사뭇 다르다. 오로지 나 자신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책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누구에게 인정 받기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힘들 때마다 펼쳐보기 위해서, 내 딸들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서 쓴다. 그러다 보니 그전에 비해 훨씬 나에게 몰입하게 됐다.
2. 자존감을 깎아 내리는 직업이 있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라 직업에 회의를 느낄 때도 많다. 일하는 동료는 좋은데 병원에 부도가 나버렸을 때도 있었고 돈은 잘 버는데 다른 면에서 갈등이 생길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 내가 견딜 수 있었던 건 직장과 직업이 엄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직장과 직업은 다르다. 직장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직업은 좋아할 수 있다. 또 직업과 꿈도 다르다. 나는 직업이 의사지만 작가가 되는 꿈을 버린 적은 없다.
무슨 말인가 하면 자기가 하는 일의 가치가 의심스러울 땐 직업, 직장, 꿈을 분리해서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자칫 세 가지 모두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다.
■ 삼포 세대의 자존감
찢어지게 가난하고 궁상맞던 시절이 좋았다고 말하는 어른들이 있다. 먹을 것도 부족하고 난방도 되지 않던 시절이 좋았다니, 처음엔 나도 거짓말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내가 막상 중년의 나이가 되어 보니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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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엔 목표가 단순했다. 많이 갖고 편하면 얼추 행복했다. 배불리 먹고, 농사 지을 땅을 많이 갖고, 아이를 많이 낳고, 적당히 돈을 벌면 족했다. 지위가 올라가고 오래 일하면 더 바랄 것이 없었다. 또 이 모든 것이 지금처럼 어렵지도 않았다.
하지만 요즘 젊은이들은 방향까지 고려해서 뛰어야 한다. 이른바 명문 대학을 나오고 성적이 좋다고 해서 행복이 보장되지 않는다. 대학에 입학해도 학자금 융자 걱정, 취업 걱정을 해야 한다. 운 좋게 대기업에 들어가도 언제 잘릴지 몰라 불안에 떨어야 한다. 어른들은 열심히만 하면 된다고 했는데 막상 아무리 달려도 행복한 세상이 펼쳐지지 않는다.
이러니 당연히 자신이 뛰고 있는 방향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된다. ‘이 길이 과연 내가 생각했던 그 길인가?’ ‘여기서 일을 하는 게 어떤 의미가 있을 까?’ 자꾸 질문하게 된다.
우리는 혼란스러운 시대에 살고 있다. 월급을 수십 년 모아도 집을 살 수 없는 세상, 열심히 준비해도 원하는 직장에 취업하기 힘든 세상, 메뉴얼대로 일해도 부사장 한 마디에 비행기를 돌리는 세상에 살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 지금 여기 어딘가. 과연 이 일을 꼭 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떠나지 않는다.
경제적으로 안정된 직종이라고 해서 힘든 의대 생활을 견뎠는데 파산 신청 1위가 의사라고 하니 혼란이 올만도 하다. 법조계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수년 준비 끝에 겨우 고시를 통과해도 막상 취직이 되지 않는 변호사들이 수두룩하다니 말이다.
과거엔 열아홉이 되면 대략적인 직업이 정해졌다. 의대생은 의사가 되고, 법대생은 법조계로, 공대생은 대기업에 무난히 취직해 고유한 인생을 살 수 있었다. 장래희망이 곧 직업이고, 그 직업을 가진 이상 인생은 무난하게 흘러갔다. 하지만 지금은 그 경계가 무너졌다.
■ 자존감을 훼손하는 직업
우리는 직업과 직장에 만족해야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자신이 원했던 대로 가고 있고 경제적인 안정감도 함께라면 더할 나위 없다. 하지만 요즘은 자존감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 널려 있다. 자신의 선택에 회의가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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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력 부족이나 자괴감에 시달리는 환경이 수두룩하다. 개인 탓이 아니라 사회적 환경이나 제도가 만들어 낸 것이 많은데 애먼 자기 탓과 죄책감에 빠져드는 사람도 많다. 이중에서도 유독 자존감이 떨어지는 직업군이 있다.
- 계약직 비정규직, 워킹 맘, 전업주부, 감정 노동자, 동료의 사직을 바라보는 직장인, 수험생, 대학생, 취업 준비생,
- 전문직 : 격무에 시달리고 정년도 없다
■ 직장 만족도, 직업 만족도, 자기 만족도를 구별하라
직장은 낭만적인 곳이 아니다. 힘든 곳이다. 그래서 월급을 준다. 그것도 날짜를 정해 놓고 규칙적으로 준다. 안 그러면 남아 있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직장이 그렇게 달콤한 곳이고 가치 있는 곳이라면 우리에게 돈을 줄 리 없다. 미안하니까. 나가지 말라고 돈을 쥐어준다. 물론 행복을 안겨 줄 때도 있다. 힘들 때마다 힘이 되어주는 동료도 직장에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시적이라 궁극적인 행복과는 거리가 멀다.
꿈, 성장, 자아실현, 가족 같은 분위기는 죄다 사장들이 꾸며낸 환상이다. 직장은 일을 끊임없이 시키고 그 대가를 쥐꼬리만큼 쥐여주고 생색이나 내는 곳일 뿐이다. 그러니 부디 직장에서 자존감을 실험하지 말 일이다.
직장과 인생은 분리해야 한다. 우리는 직장에 출근하기 위해서 사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직장이 우리 삶의 전체가 아니다. 직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현재 자신의 인생까지 불만족스럽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회사에서 조금 잘 나간다고 타인의 자존심을 함부로 짓밟아서는 안 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직장에 출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퇴근 이후의 삶을 위해 살아간다.
직장은 직장이다. 우리는 직장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가끔은 직장에서 떨어져 머리를 완전히 비워야 할 때도 있다.
■ 퇴근 후 회사 생각 금지
직장은 우리의 에너지를 빼가는 곳이다. 월급은 우리의 신체가 직장 안에 있는 시간을 돈으로 환산한 것이다. 근무 시간이 길면 길수록, 업무 강도가 세면 셀수록, 월급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많은 에너지를 뺏긴다. 방법은 하나다. 직장 문을 나서는 순간 직장에 관한 생각의 스위치를 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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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쉽지 않다. ‘직장인의 입장을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타박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연습을 해야 한다. 회사를 그만 둘지 말지 고민해야 한다면 그 고민조차 근무 시간에 해야 한다. 그 고민까지가 월급에 포함된다.
3. 나는 얼마나 쓸모 있는 존재인가
자존감을 얻기 위해서는 자신이 사회에 필요한 존재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가정이라는 작은 사회, 나아가 세계라는 사회에서 말이다. 성장기에 부모님의 칭찬에 목마르거나 투표에 참가하고 나면 뿌듯한 것이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가는 세상
나의 대학 생활은 단체 생활이었다. 아침부터 강의실에 모여 앉아 수업을 듣고 나면 조별 실습과 실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늘 동기와 선후배, 교수님에게 둘러싸여 혼자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방학이 되면 혼자 여행을 가곤 했다. 무작정 터미널에서 막차를 타고 가능한 한 먼 곳을 향했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울산이나 포항, 진주 같은 곳에서 아침을 맞았다. 그리고는 정해진 목적지도 없이 또 다른 도시로 이동했다. 맛집이나 특별한 장소를 찾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혼자 있고 싶었다.
낯선 도시를 돌아다니는 일은 자유로웠다.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은 생전 처음 보는 이들이었다. 미워할 필요도 없고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하루를 보내면 지친 마음에 다시 여유가 찾아오곤 했다. 그렇게 혼자 지내다 보면 며칠 뒤 좋아하는 사람들이 생각났다. 보고 싶은 사람, 얘기 나누고 싶은 사람, 만나고 싶은 얼굴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나와 부대끼던 사람들도 생각났다. 나를 부러워하던 사람들, 비난하던 사람들, 이용하던 사람들도 생각났다. 모든 사람이 그립지는 않았지만 외로움이 깊어질수록 그들에 대한 반감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신기한 체험이었다.
그렇게 혼자 다니던 여행을 끝낸 건 외로움이나 사람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니었다. 조바심, 내가 없어져도 세상이 나를 찾지 않는다는 생각에 조금씩 조바심이 났다. 나 하나 없다고 세상이 발칵 뒤집히는 일 따위는 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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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지 않았다. 여행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나는 자유로워졌지만 그만큼 불안했다. 가끔은 나를 아랑곳하지 않고 평화롭게 돌아가는 세상에 마음이 서럽기까지 했다.
■ 성공은 사회적 가치를 획득하는 행위
사회에서 얼마나 그 사람을 필요로 하는가를 살펴보면 그 사람의 성공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직원들 중 누군가 아프면 다른 이가 대신할 수 있다. 하지만 직급이 높거나 중요한 사람이 자리를 비우면 대체할 사람이 줄어든다. 없으면 큰일 나는 사람, 도저히 대체할 사람이 없는 사람, 우리는 그를 성공한 사람이라고 부른다. 자존감에 문제가 생기면 '나는 이 사회에 필요한 존재인가?‘ 라는 질문이 고개를 든다.
‘사회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느낌은 사회적 본능을 충족시킨다. 나에게 문제가 생겨도 사회가 거두어줄 것이라는 안도감을 주기 때문이다. 반면 사회에서 거부당하거나 무관심이 지속되면 불안이 커질 수밖에 없다.
타인의 낮은 시선은 그대로 자신에게 투사되어 스스로를 낮게 평가하는 결과를 낳는다.
■ 외도하는 사람의 심리
결혼 생활도 마찬가지다. 가족이나 배우자에게 필요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면 자존감이 흔들린다. 직장 생활을 오래하면 회사에서 살아남는 법이나 인간관계에서 오는 갈등을 푸는 요령에는 웬만큼 숙련이 된다 하지만 내 경험상 그런 사람일수록 배우자나 가족에게 존재감이 약한 경우가 많다. 오랜 관찰 끝에 알게 된 사실 하나는 ‘회사원으로서 꽤 괜찮은 나’가 배우자에게는 전혀 인정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피스 와이프나 오피스 허즈번드를 둔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한다. 배우자는 인정해 주지 않는 자신의 존재를 그들이 알아준다고, 배우자가 ‘일 중독자’라는 독설을 쏟아낼 때 그들은 반대편에서 위태로운 자아를 일으켜 세워준다.
실제로 외도에 빠진 사람들을 만나보면 상당수가 자존감이 떨어져 있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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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죄다 넘치는 바람기를 주체할 수 없어서, 성욕이 남아서 일탈을 하는 게 아니란 뜻이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은 본능이 그들도 모르는 사이 일탈의 주인공으로 만드는 면이 있다. 가족이 인정해 주지 못한 자신의 가치를 밖에서 찾는 것이다.
■ 내 정체성은 하나가 아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자식이자 배우자고, 부모이며 직장인이고, 지역 사회의 일원이자 배우자고 부모이며 직장인이고, 지역사회의 일원이자 동호회 회원이며, 친구이자 아파트 주민이고 대한민국 국민이기도 하다.
이 많은 역할 정체성 중에 어떤 것에서는 자존감이 낮고 어떤 것에서는 자존감이 높을 수 있다. 자녀에게는 무뚝뚝한 아빠지만 아내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남편일 수도 있고 회사에서는 평범한 대리이지만 동호회에서는 최고의 리더일 수도 있다. 어차피 모든 역할에서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는 얘기다. 한 곳에서 존재감을 확인받지 못했다고 해서 인생 전체의 문제로 확대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4. 결정 장애에 빠진 사람들
결정을 잘해야 자존감이 올라간다. 그런데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사소한 것도 잘 결정하지 못한다. 자신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살면서 어떤 고민이 생기면 우리는 누군가를 찾아간다. 믿을 만한 사람을 떠올리고 그중에서도 내 마음을 가자 잘 알아줄 것 같은 사람에게 고민을 털어 놓는다. 고민이 해결되든 말든 그건 나중 문제다. 일단 털어놓기라도 하면 기분이 나아지고 고민도 해결되는 것 같으니까.
그런데 언제 어디서든 손을 내밀면 받아줄 사람이 있다. 바로 나 자신이다. 그러니 나를 믿을 수만 있다면 인생은 참으로 편해진다.
■ 결정을 잘하기 위한 조건 세 가지
어른이 되는 과정은 크고 작은 선택과 결정의 연속이다. 아이는 부모가 결정해 주는 시기를 지나면 곧 학교, 전공, 직업, 연애, 결혼, 독립 등 수많은 결정을 해야 하고 그러면서 인생을 배우게 된다.
현명한 상담자라면 결국 마지막엔 ‘스스로 결정할 일’이라는 조언을 해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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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살면서 마주치는 수많은 선택 상황 앞에서 혼자 결정할 수 있다면 그게 현명함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결정을 잘 한다는 의미는 뭘까?
1. 적절한 타이밍 : 아무리 옳은 결정이라도 시간이 너무 걸리면 퇴색
2. 자신이 결정하는 범위 : 모든 결정은 자신의 범위 안에 있다. 남이 내 결 정을 해줄 수 없고 나의 미래를 결정할 능력도 없다.
3. 세상에 옳은 결경은 없다 : 결정 당시에 그 결과를 확신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결정의 결과는 오직 신만이 알 수 있을 텐데, 우리는 신의 뜻을 모른다. 인생사 새옹지마라는 말은 그래서 생겼을 게다. 결정을 잘 하는 사람들은 어떤 결정을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결정한 후에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결정을 잘 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능력은 ‘자신의 결정에 만족하는 힘’이다.
■ 뇌과학으로 본 옳은 결정
올바른 결정을 하는 과정은 감성과 이성이 어우러지는 과정이기도 하다. 보통 어떤 결정을 할 때 자신이 알고 있는 상식과 판단력을 총동원한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자신이 결정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감정적으로 동의하는 과정을 거친다. 결정을 잘하는 사람은 이때 무조건 자신의 결정이 맞다고 우기지도 않고, 웬지 틀린 것 같다고 불안해하지도 않는다.
■ 결정할 기회를 박탈당한 사람들
우리 사회는 이성적인 판단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이것이 지나치게 경쟁이 치열하고 교육열이 높은 데서 오는 문제라고 본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아이들은 맞는 답만 찾느라 분주하다. 충분히 생각하고 자신의 의견이 정립되기도 전에 괄호 안에 들어갈 정답을 찾는데 골몰하는 것이다. 학교에서도 아이들의 생각이나 감정은 뒷전이고 수학, 과학 문제의 정답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아이들은 이 과정을 통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성적인 다 고르기에 익숙해진다. 다시 말해 감정을 외면하거나 타인의 상태에 무관심해야 경쟁에서 이기고 성공할 수 있다고 믿으며 자라난다.
충분히 생각지도 못했는데 어른들이 답을 미리 정해주고 외우라고 하니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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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결정할 기회도, 결정 능력을 키울 기회도 함께 잃어버리고 만다. 이런 교육의 폐해를 우리는 심심찮게 목격한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아이가 후회를 할까 봐 혹은 나중에 부모를 원망할까봐 어른이 대신 결정을 내려주는 실수를 범해선 안 된다.
하지만 어릴 때 결정한 경험이 없었다고 평생 결정 능력이 저하된 채로 사는 것은 아니다. 뒤늦게라도 결정 능력을 키우는 방법들이 있으니, 너무 좌절할 필요는 없다.
■ 결정력을 키우는 방법들
결정력이 좋다는 것은 이성과 감성이 조화롭게 발달했음을 뜻한다. 다시 말해 전두엽과 변연계가 각각 잘 활성화 되고, 그 둘의 교류가 원활해야 한다. 지금부터 결정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는 방법들을 소개한다.
- 예술하기 : 전두엽과 변연계가 조화롭게 활성화되는 과정은 주로 예술 활동에서 나타난다. 예술은 많은 경우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다. 그렇다고 슬픔이나 기쁜 감정을 아무렇게나 표현한다고 예술이 될 수는 없다. 전두엽을 활용해 표현하기에 가장 좋은 방식을 찾아내야 한다.
- 결정저울 만들기 : 결정 저울이란 어떤 행동을 했을 때의 장단점, 그리고 하지 않았을 때의 장단점을 비교해 무게를 재는 도구다. 결정 저울을 객관적으로 풀어 표현해 보면 추상적인 감정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
-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할 것을 나누기 : 정작 꼭해야 할 것은 하지 않은 채 꿈만 꾼다면 문제다. 뭘 해야 할 지 머릿속으로만 고민하다 보면 막연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럴 때는 구체적으로 하고 싶은 것과 반드시 해야 할 것을 나눠보면 도움이 된다.
- 둘 다 하기 : 해야 할 것과 하고 싶은 것 중 반드시 하나를 고를 필요는 없다. 이 둘의 교집합을 찾으면 된다.
5. 심리학 책을 아무리 읽어도 자존감이 그대로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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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든 생각은 ‘이걸로 나의 유년 시절도 끝이구나’였다. 나를 “우리 손주”라고 불러주던 이가 세상에서 사라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내게 할머니, 할아버지는 특별한 존재다. 성장하면서 수시로 자존감이 떨어지고 낙담할 일이 많았지만 그 순간들을 버텨낸 것은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어서였다. 그분들의 얼굴이 떠오를 때면 나는 참으로 행운아였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 어린 시절의 기억이 상처로 남다
불행했던 어린 시절이 몸과 마음에 각인되어 있다면 현재의 지신을 부정적으로 자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무엇에든 이유와 결과를 찾으려 드는 습성이 있다. 자신을 ‘이혼한 부모의 자식’ ‘아빠의 폭력을 보고 자란 아들’ ‘눈만 뜨면 싸움질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이라고 낙인을 찍은 이상, 그런 스스로를 존중하기란 쉽지 않다.
■ 심리학에 의존하는 심리
성장기가 불우했던 사람들은 많은 경우 걱정거리를 안고 산다. 무의식적으로 과거의 경험이 현재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특히 그 불행이 가정에서 비롯했거나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면 말할 것도 없다.
이들의 걱정은 부모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한다. 자주 싸운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은 자신도 결혼 생활을 제대로 하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감을 갖고 있고. 폭력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폭력의 가해자나 피해자가 되면 어쩌나 하는 불안에 시달리며, 도박이나 술 중독에 빠진 부모를 둔 자녀는 자신도 중독자가 되거나 배우자가 중독자가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에 시달린다. 나아가 이런 감정 상태로 제대로 된 사랑이나 결혼을 할 수 있을지 끊임없이 의구심을 품는다.
이들은 여러 심리학 책들을 탐독한다 그리고 책에서 도움을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치는 것 같다.
1. 보편화 : ‘나만 이런 게 아니었구나’ ‘책에는 나보다 더 심한 사람도 수두룩하구나’ 그래서 위안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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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죄책감 탈피 : 내가 겪는 문제가 나의 노력이 부족해서 또는 못나서 빚어진 결과가 아니라는 주장을 보고 ‘아, 내가 잘못해서 생긴 일이 아니었구나’ 라며 죄책감을 내려 놓는다.
3. 지식화 : 감정으로 느끼던 것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며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리고 뿌연 안개 속 같던 마음이 어느 새 정리된다.
■ 자존감 회복은 몸짱 되기와 비슷하다
심리학 책만 읽은 사람은 몸짱 트레이닝 교본만 읽은 것과 같다. 하지만 실천이 없는 이론은 지식에 불과하다. 몸짱이 되려면 직접 땀을 흘리고 근육운동을 하는 수밖에 없다.
심리학을 독학한 사람들을 만나보면 유난히 부모에 대한 원망이 큰 사람이 많다는 데 놀란다. 그들은 놀랍도록 유사하게 자신이 가진 문제의 원인을 부모에게서 찾는다. 그리고 자신의 미래까지 변함없을 거라고 쉽게 단정 짓는다. 참으로 안타깝다.
■ 기억이 감정을 부른다
당연한 말이지만 불행했던 기억에 사로잡혀 있으면 부정적인 감정이 든다. 그런데 부정적인 감정에 빠지면 자연스럽게 과거의 기억 중 부정적인 사건만 떠오른다. 분명 중간에 좋았던 일도 있었지만 그것들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오랜 기간 싸우고 있는 부부를 만나면 이 현상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 사람은 늘 나를 속여요.” “아내가 매일 저런 식이니 내가 밖으로 나돌밖에요” 결혼 만족도가 낮은 부부는 ‘항상’ ‘언제나’ ‘매일’같은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
어떤 경험 때문에 괴로움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감정적인 문제를 겪고 있지 않은지 살펴봐야 한다. 나쁜 기억 때문에 우울한 게 아니라 우울하기 때문에 나쁜 기억만 붙잡고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런 사람은 당연히 자존감도 떨어진다.
■ 불행했던 과거와 거리두기 혹은 떠나보내기
아픈 과거를 안고 살기란 쉽지 않다. 뜨거운 불덩이 하나를 품안에 넣고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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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는 것과 같다. 자존감이 건강할 때 그 불덩이는 안전한 히터 역할을 한다. 하지만 자존감이 떨어질 때 이 불덩이는 나를 활활 태워버리는 위험한 무기로 돌변한다.
자존감이 강한 사람 중에도 과거가 불행한 사람은 많다. 이들도 과거를 회상할 때마다 괴로워하고 자기 연민에 빠진다. 하지만 비교적 쉽게 빠져 나온다. 과거의 불덩이로부터 멀찍이 떨어질 줄 안다. 괴로웠던 기억은 과거일 뿐이라는 사실을 오랜 연습 끝에 깨닫게 된 이들이다.
반면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지나치게 가까운 곳에 불행을 놓아둔다. 가슴 한가운데나 어깨에 불운한 과거를 짊어지고 다닌다. 가만 내버려두면 자연스럽게 잊힐 일인데 무슨 일만 생기면 자꾸 꺼내 본다. 그럴 때마다 번번이 데고 상처를 입는다.
모든 아픔은 과거형이다.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간의 힘으로 절대 할 수 없는 일이 시간을 돌이키는 일이다. 어차피 시간은 흘러가게 되어 있다. 아팠던 과거와 현재 사이에는 시간이라는 선물이 들어찬다. 이 선물은 세상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주어진다. 이 선물을 애써 거부할 까닭이 있을까? 기꺼이 받아 챙겨야 하지 않을까?
6. 나는 특이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 다른 건 나쁜 게 아니다
정신치료 요법 중 ‘보편화’라는 기법이 있다. 내담자가 겪는 갈등이나 고통이 본인만의 문제가 아님을 일깨우는 방법이다. 많은 사람들도 겪고 있는 문제라는 사실만 알려줘도 안정을 찾는다. 이를 반대로 생각해보면 자신이 처한 상황이 혼자만의 문제라고 느끼면 외롭고 괴로운 감정까지 추가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힘든 일을 겪은 사람들이 비슷한 사람들을 모아 모임을 만들고 경험을 공유하는 걸 볼 수 있다. ‘나랑 같은 사람도 있구나’ ‘나를 이해해줄 사람도 있구나’ 하는 생각은 위안이 된다. 그리고 시련에서 벗어날 에너지가 생긴다.
과거 얘기를 들어보면 ‘감정이 드러나는 것은 아주 창피한 일이다. 그런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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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마음이 약하고 의지가 부족하다’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주로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예민하다고 혼나거나 남자인 경우 사내답지 못하다며 야단 맞은 상처가 있다. 이들은 두 가지 편견에 사로잡혀서 온다. 첫 번째는 ‘나는 남들과 다르다’ ‘두 번째는 ’남들과 다른 것은 나쁜 것이다‘ 그래서 삼단 논법에 의해’ 나는 남들보다 나쁘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남들과 다른 것은 절대로 나쁜 것이 아니다. 남들보다 예민한 것도 괜찮고, 감성적인 것도 좋은 특징이다. 남들이 느끼는 감정도 빠르게 파악할 수 있고 시대 흐름을 읽어내는 능력도 뚜렷하기 때문이다.
■ 특별히 불행하다는 신념
나쁜 경험을 안고 있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다. 수치심으로 인해 자신의 경험을 숨기고, 자신의 인생을 특이하다고 단정 짓는 사람들이 많다. 여기서 나쁜 경험이란 부모님이 사이가 좋지 않았다거나 어릴 때 심한 비교를 당한 경우, 장기간 비난에 시달린 경우, 학대를 당했거나 가족과 떨어져 자란 경우 등을 말한다. 그런 경험을 한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숨기고 타인의 인생에 환상을 품곤 한다.
여기에 가족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환상을 부풀리는 우리문화가 문제를 증폭시킨다. 특히 지고지순한 모성애는 과대 포장되고 미화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
자신의 인생이 특별하게 불행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설득하기는 쉽지 않다. 불행의 크기는 상대적이지 않다. 누군가에겐 가벼운 감기쯤으로 보이는 불행을 안고 평생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고, 그보다 훨씬 더한 고통을 안고도멀쩡히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그 고통이나 불행이 남과 견주어 얼마나 초라하고 큰지는 아무리 설득해도 효과가 없다. 한번 믿은 신념은 그만큼 공고하다. 만약 누군가 자신의 불행이 특별하다고 믿는다면, 그렇게 생각할 만한 이유가 있다고 보면 된다. 그리고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보다 훨씬 괴롭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 망각을 더디게 하는 말 ‘왜 나만?’
‘왜 나만 이런 일을 겪을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를 잡으면 문제는 복잡해진다. ‘나는 불행하다’라는 부정적 인지에 비논리적인 감정이 겹쳐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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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왜’라는 단어는 비난을 추가한다. 내 인생과 운명을 비난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기억 구조는 상당히 불안정해서 웬만한 기억은 잊히게 되어 있다. 하지만 ‘왜 나만?’이라는 생각은 기억을 감정과 연결한다. 그래서 잊는 것이 더뎌진다. 그냥 두면 저절로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텐데 잊을 만하면 자꾸 스스로 끌어 올리는 모양새다.
따라서 자신이 겪은 특이하고도 나쁜 경험을 잊고 싶다면 감정으로 연결되지 않고 저절로 가라앉도록 가만 두어야 한다. ‘왜 나만?’ 혹은 ‘난 왜 이렇게 됐을까?’같은 질문은 멈추자.
7. 눈치 보는 사람의 심리
‘왜 나만?“이라는 생각을 파고들다 보면 원망이 들게 마련이다. 부모를 원망하고, 이렇게 살고 있는 나를 원망하고, 사회를 원망하고, 불특정 다수를 원망하고, 급기야 신에 대한 분노로까지 이어진다. 자기가 틀렸다는 생각으로 이어질 경우 자기 비난이 되고, 못났다고 생각하면 창피함이 밀려든다. 남들을 다 하는 일을 나만 못한다고 생각하면 무가치감이 올라온다.
그중 대인관계와 관련해 ‘나는 남들보다 쿨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자주 본다. 남들은 각자 자기 주관과 여유를 갖고 살아가는데 왠지 나만 소심하고 찌질한 것 같다고 느낀다. 아마도 세상이 점점 개인화 개별화하면서 생겨난 감정이 아닐까 싶다. 다른 사람들은 남과 적당한 거리도 유지하고 관계도 곧잘 정리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점점 내게서 멀어져 가는 것 같다. 하지만 내 마음엔 항상 사람들, 남들이 꼭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든다. ‘나만 남들을 생각해.’
■ 친절인가 눈치보기인가
한 친절한 남자 대학생이 있었다. 학교에서 어려운 일이 생긴 친구가 있으면 적극 도왔고, 힘든 과제는 도맡아 해결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그는 훌륭한 직원이 되었다. 회사 일도 척척 잘했고, 깔끔한 매너에 부드러운 말투로 동기들에게도 친절했고, 배려도 많았다.
특히 그의 헌신적 업무 수행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하지만 그런 그를 모두가 좋아한 건 아니었다. 이런 그의 성격에 넌덜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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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내는 사람이 있었다. 다름 아닌 그의 여자친구였다. 누구나 인정하는 그를 두고 그 여자 친구만은 “너는 친절한 게 아니야 그냥 남의 눈치를 보는 거야!”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 지나친 친절이 폄하되는 이유
친절은 미덕이다. 친절한 사람을 싫어할 사람은 많지 않다. 문제는 자신을 돌보면서 친절한지, 남의 눈치를 보느라 일부러 친절한 건지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처음엔 여자 친구의 주장을 한사코 거부하던 남자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문제를 조금씩 직시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여자 친구의 말대로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한 것이다. “늘 타인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여자 친구의 주장이 생각할수록 일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친절한 남자는 남에게는 친절했지만, 자기 자신을 돌보는 일에는 서툴렀다. 자기시간, 자기 행복,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고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이런 경우 자신뿐 아니라 가까운 사람들도 소홀히 하는 습관이 생긴다.
학교에서 모범생들이 무시를 당하고 회사에서 일을 많이 하거나 착하기만 한 사람이 험담의 주인공이 된다.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갖고 타인을 배려했다 해도 모든 사람들이 곱게 해석하는 건 아니다. 특히 직장은 암묵적으로 경쟁 관계에 있는 곳이기 때문에 열심히 하면 할수록 ‘당신이 그렇게 열심히 해버리면 우리는 뭐가 돼?’ 하는 인식이 생기기 쉽다.
물론 친절한 사람을 대놓고 탓하지는 않는다. 그러면 자기만 나쁜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든 사람들은 그의 행동과 의도를 폄하하고 싶어한다. 일종의 자기방어 본능 같은 것이다.
■ 까칠남의 인기 비결
가족 전체를 ‘나’로 인식하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타인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염려는 그대로인데 가족 모두를 나의 범주로 묶어버리면 이웃의 평판이나 아는 사람의 감정에 더 많은 비중을 두게 된다. 결국 아이들에게 “남들이 뭐라고 하겠니?” 라는 말을 자주 한다. 자신의 마음을 돌보지 않고 남의 마음을 먼저 생각하는 습관이 말로 표현되는 것이다. 이런 표현은 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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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히 대물림된다. 이런 말을 듣고 자란 아이는 자신보다 타인의 평가에 민감해지고, 자신의 감정이나 욕구를 중심에 두지 못한다. 겉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친절하지만 정신건강은 매우 불편한 상태가 반복되는 셈이다.
남을 배려하는 것이 미덕인 시대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농경사회에서 통하던 방식이다. 농사를 짓기 위해서 협동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시대, 남을 위해서 하는 일이 곧 나를 위하는 시대에는 배려가 중요했다. 하지만 사회가 개별화되고 분리되면서 미덕의 개념도 변했다. 어설프게 남을 위했다가는 오지랖 넓다는 평을 듣기 쉽다. 나름대로 배려했는데 돌아오는 건 ‘눈치 본다’는 평가나 “왜 남들만 챙겨?”하는 원망이다. 시대가 달라지면 가치관도 변한다.
■ 이기적인 이타 행동이 필요하다
사실 나만 생각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남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얘기는 조심스럽다. 하지만 나는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하세요”라고 자주 말한다. 어떤 땐 “이기적으로 판단하고, 그렇게 행동하세요”라고 직접적으로 조언할 때도 있다. 그것이 순리를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게 자연스럽고 성숙한 자세라고 생각한다. 물론 세상에는 남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도 많다. 이들이 남을 돕는 이유는 무엇일까? 기쁘기 때문일 것이다. 남을 돕는 데에서 기쁨을 느끼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이들의 행동을 폄하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나는 봉사하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남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남을 돕는 즐거움’을 아는 성숙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내면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들이다.
중요한 것은, 남의 행복만을 위해서 하는 행동은 상대에게도 부담을 주고 결국은 배신감과 서운함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봉사를 하더라도 자신을 위한 봉사여야 하고, 자녀를 사랑할 때도 ‘나의 행복’을 추구하는 수준에서 이뤄져야 후회나 뒤끝이 없다. 인간이 원래 이기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바란다. 그래야 조간 없이 사랑할 수 있고, 진심으로 타인을 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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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지나치게 의존하는 사람들
‘의존’이라는 단어는 자존감만큼이나 다양한 의미로 소비된다. 또 사람에 따라 다르게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의존적’이라는 말은 대개 부정적으로 쓰고 받아들인다는 건 공통적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특히나 ‘의존하지 않는 사람’ 또는 ‘자립심이 강한 사람’을 건강한 사람이자 바람직한 인간상으로 보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
솔직히 나는 의존하는 게 그렇게 나빠 보이지 않고 자립심이 강하다는 게 그렇게 좋은 건지도 잘 모르겠다. 갈수록 살기 어려워지는 세상에서 여기저기에 의존해가면서 사는 것이 정말 문제일까?
■ 우리는 모두 의존적이었다
아기가 부모를 필요로 하는 이유는 단지 먹여주고 씻어주고 배설물을 치워주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기는 스스로 잠들기 어렵다. 부모다 토닥거리고 자장가를 불러줘야 잠에 든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아기에게도 희로애락의 감정이 생기는데, 이마저도 혼자 다루지를 못한다. 보채고 우는 아기는 어른이 달래주어야 한다.
어른이 되어서도 이 의존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청소년기 이후 남녀가 끊임없이 서로를 갈구하는 것이 그 예다. 혼자 있기 보다는 둘이 있으려고 하고 속내를 털어 놓기를 바란다. 사랑과 애착은 신생아 시절부터 지녀온 의존성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 세련되지 못한 의존들
의존성은 하나의 본능이자. 아주 어린 시절에는 누구에게나 있었고, 그것은 생존과 직결되는 필수 요소였다. 하지만 성인이 되어감에 따라 의존성을 다루는 방식도 성숙하고 세련되어야 한다.
세련되지 못한 의존은 크게 세 경우로 나뉜다. 너무 많이 의존하는 것, 의존할 방향을 잘못 잡는 것, 자신이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세련되지 못한 의존의 경우, 대부분 자신이 의존한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인정을 하지 않는다. 부모들이 흔히 “나는 우리 애만 행복하면 돼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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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곤 하는데 무의식중에 자신의 의존성을 드러내는 말이다 이러면 자녀는 자신의 인생에 어른 즉 부모의 삶도 매달려 있음을 인지한다. 결과적으로 아이는 부담을 느끼고, 자신의 행복과 부모의 만족 사이에서 혼란을 겪게 된다. 세련되지 못한 의존성은 배우자나 연인과의 관계도 악화시킨다.
■ 지나친 의존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깨져야 할 믿음들
의존성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크게 세 가지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
우선 혼자 있는 것은 외롭고 괴로운 일이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애인이 없는 것, 가족이 없는 것, 자신이 속한 조직이나 모임이 없는 것에 과도한 공포를 느낀다. 혼자 있다고 해서 어디가 아픈 것도 아니고 누가 괴롭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의존성에 갇힌 사람들은 뭔가 자신에게 문제가 있어서 혼자라고 여긴다.
다음은 남이 자신을 구해줄 것이라는 환상이다. 그들은 자기가 무언가 결핍되고 모자라는 특이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처한 상황을 특별하다고 여기는 데에서 비극은 시작된다. 자신과 달리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족한 게 없고 그래서 남들이 나를 도와줄 수 있을 거라는 믿음 말이다. 이들은 “난 평범한 사람이 부러워요”라는 말을 곧잘한다. 그런 이유로 지기보다 열악한 조건에 있는 사람에게까지 의존하고 결과적으로 실망만 얻게 된다.
세 번째 잘못된 믿음은 의존이 상당히 나쁜 일이라는 생각이다. 의존 자체를 나쁘다고 치부해버려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는 것도, 사람을 사귀는 것도, 종교 활동을 하는 것도 꺼리게 된다. 게다가 자신이 의존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
만일 이 글을 읽고 ‘내가 의존적인가보다’ ‘내가 미성숙한 의존을 하나보다’ 하는 생각이 든다면 딱 그 정도로 두면 된다. 나쁘지 않다.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고 인식했다는 자체가 중요한 과정이다. 이 과정을 수행했기에 앞으로 서서히 세련되고 성숙한 의존으로 변해 갈 것이다.
반대로 자신이 의존적이지 않다거나 세련된 의존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그것도 괜찮다. 그렇게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는 것도 아주 중요한과정이다. 자존감이 조금씩 높아진다는 방증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2017.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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