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방

2017. 6. 13. 12:42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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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방

■ 박완서 지음

0 1931 - 2011. 1.22 (80)

0 경기도 개풍군 출생

0 1970년 40세 때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나목>으로 당선

0 소설 : 휘청거리는 오후, 도시의 흉년,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아주 오래된 농담, 그 남자네 집 등

0 산문집 : 노란집, 호미, 모독, 꼴지에게 보내는 갈채, 어른노릇 사람노릇,

두부, 못가 본 길이 더 아름답다 등

0 한국문학 작가상, 이상문학상, 대한민국 문학상, 이산 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등

■ 책을 펴내며

이 책은 1996년부터 1998년 말까지 천주교 <서울주보>에다 그 주일의 복음을 묵상하고 쓴 ‘말씀의 이삭’을 모은 것이다. 지금까지 연재의 형식을 빌려 소설이나 산문을 쓴 적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만 ‘말씀의 이삭’처럼 시작하기 전에 덜컥 겁부터 났고, 쓸 때마다 떨리고 송구스러웠던 적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주보의 지면이 저에겐 그렇게 두려웠고 그곳을 차지한다는 책임감이 어찌나 버거웠던지 연재를 끝마치고 나니 몸과 마음이 붕 뜨는 것처럼 홀가분했습니다.

들어가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문

■ 우리 안에 공존하는 동방박사와 헤로데

-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마태 2장 1-12)

아기들은 어쩌면 그렇게 하나같이 아기 예수를 닮았는지요. 인종이나 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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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깔, 성별까지도 초월해서 말입니다.

물론 저는 아기 예수를 직접 본 적이 없습니다. 성화를 통해 본 것이 전부이고 그 그림을 그린 화가 또한 아기 예수를 만나본 적이 있어서 그렇게 그린 것은 아닐 터이나, 아기 예수가 그러했으리라는 걸 의심치 않는 것은 상상 속의 예수와 똑같기 때문이고,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아기들과 닮았기 때문입니다.

아기들은 그 연약하면서도 굳셈은 흙을 뚫고 갓 돋아난 새싹과 같고, 그 새롭고 눈부심은 새해 아침 불끈 솟는 태양과 같아서 아무리 메마르고 굳어진 어른의 마음도 감동시키며 희망을 품게 만듭니다.

갓 태어난 아기에게만은 좀 더 나은 세상을 주고 싶어 자기가 못 누린 것, 못 가진 것도 아낌없이 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덕담이 저절로 나옵니다.

책임 질 필요가 없는 남의 아기에 대해서는 그 덕담이 더욱 풍성하고 후해집니다. 대통령 감, 장군 감, 재벌 감, 박사 감 아닌 아기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예수님을 믿는 이조차도 아기가 장차 예수님을 닮기를 원치 않습니다. 만일 남의 아기를 보고 “너 앞으로 예수님처럼 살아라” 하면 덕담이 아니라 악담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아기 예수의 진정성이 꽃피기 전에 잘라버리려고 작심을 합니다. 얻어맞는 아이가 될까봐 먼저 때리길 부추기고, 행여 말석에 앉는 아이가 될까 봐 양보보다는 쟁취를 가르치고, 박해받는 이들 편에 설까봐 남을 박해하는 걸 용기라고 말해주고, 옳은 일을 위해 고뇌하게 될까봐 이익을 위해 한눈팔지 않고 돌진하기를 응원합니다.

모든 아기들은 태어날 때 아기 예수를 닮게 태어났건만 예수님을 닮은 어른은 참으로 드뭅니다. 있을 리가 없지요. 우리가 용의주도하게 죽였으니까요.

그래도 가끔 풍문으로지만 예수님을 닮은 이를 만났다는 소리가 들립니다.

저는 아직 그런 복된 경험을 못 해봤습니다만 그 사람들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겉보기엔 위아래 없이 골고루 다 썩은 우리 사회가 그래도 안 망하고 유지되고 있을 뿐 아니라 아직도 정의에 대한 희망이 시퍼렇게 살아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를 받쳐주고 있는 어떤 힘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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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된 첫사랑의 추억

- 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 양이 저기 오신다.

(요한 1장 29-34절)

사랑을 해 본 사람은 아마 알 것입니다. 특히 청순한 나이에 첫사랑의 열병을 경험한 사람은 자신의 영혼을 사로잡은 상대방의 아름다운 점이 실은 그의 모든 것이 아니었다는 환멸의 쓰디쓴 맛을 말입니다.

상대방의 아름다운 눈빛에 한눈에 반하고 나면 그 아름다움이 그의 모든 것처럼 보이다가 어느 날 문득 그의 코는 납작코에다가 입술은 두둑한 밉상이라는 게 눈에 보이게 됩니다. 그때 속은 것처럼 느낀다면 사랑은 끝장난 것이고, 남는 것은 환멸의 비애밖에 없을 것입니다.

또는 상대방의 용기에 반해서 울렁이던 가슴이라도 중요한 고비에 그가 실은 형편없는 겁쟁이라는 걸 알고 나면 배신감으로 소태삼킨 가슴이 되겠지요. 그러나 아름다운 눈빛, 출중한 용기를 그의 모든 것으로 확산시킬 수만 있다면, 그 사랑이 이루어지고 못 이루어지고에 상관없이 그가 살아가는데 있어서 힘이 될 테고, 그 만남은 아름다운 발견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제가 신약성서를 처음 통독한 것은 거의 사십을 바라볼 나이였는데 감동 없이 읽어가다가 문득 발목이 잡힌 것처럼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건 예수께서 굳이 사양하는 요한으로부터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시는 대목이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요한이 “그 분은 나보다 훌륭한 분이어서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다.”라고 말할 정도의 예수에게 요한이 세례를 주는 것은 참으로 이상했습니다.

제가 예수에게 사로잡힌 건 바로 그 말도 안 되는 대목에서였습니다. 사로잡혔다고는 하나 곧이곧대로 믿은 건 아니었습니다. 이건 분명히 위선일 것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예수의 위선을 까발리기 위해서 성서를 통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그분이 위선을 부렸다는 증거를 끝내 잡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보통 사람, 병든 사람, 미천한 사람, 천대 받는 사람과 진정으로 더불어 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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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알겠습니다. 어떤 계층의 사람과도 입장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하느님의 아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하느님이 그를 보내심은 보통 사람을 하느님의 자녀로 편입시키기 위한 큰 역사였음을.

■ 부르는 소리 있어…

-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마태 4장 12-23절

통행금지가 있을 때 였습니다. 성탄절과 연말연시에만 반짝 통금이 해제되던 시절이었습니다. 하룻밤 자유를 만끽하려는 아이들을 붙잡지 못하고 중년 고비를 넘긴 우리 부부만 쓸쓸히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바탕 사람구경이라도 하고 들어와야 잠이 올 것 같은 이상한 밤이었습니다. 드디어 부부가 팔장을 끼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날 우리가 마지막으로 찾아간 데가 성당이었습니다. 말이 상당이지 상가 4층에 자리 잡은 초라하기 짝이 없는 성당이었습니다. 생전 처음해보는 자정 미사는 거의 세 시간이나 걸렸고 미사가 끝나고 밖으로 나오니 지독한 추위였습니다.

그러나 참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안에서 폭발하는 기쁨 때문에 추위조차 쾌적하게 느껴졌습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순전히 자유의사로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에서 태어난 아기 예수를 마중하러 갔다는 게 그렇게 기뻤습니다. 생전 처음 착한 일을 한 것처럼 소리내어 뽐내고 싶게 자랑스럽기도 했습니다.

그 후 교리 공부를 하고 영세를 받기까지는 다시 몇 년이 걸렸고 열심히 이끌어준 교우의 덕도 있었지만, 제가 순전히 내 자유의사로 영세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싶어 하는 건 그때의 기쁨을 잊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차츰 나이 들어가며 알겠습니다. 제가 순전한 자유의사라고 생각한 것이야말로 그분의 부르심이었다는 것을.

예수께서 갈릴래아 호숫가를 걸어가시다가 그물을 던지고 있는 어부들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고 하셨을 때 그 어부들은 무슨 마음으로 당장 그물을 버렸을까요. 사람 낚는 어부가 별것인줄 알고 그렇게 승복했다면 예수님이야말로 사람 꼬시는 도사요, 그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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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을 겁니다. 그때 예수는 그들 안에 깊숙이 숨은 오랜 소망, 고귀한 자유의사를 꿰뚫어 보고 그걸 정통으로 건드린 것이 아니었을까요.

자신 속에 내재한 자유의사가 힘차게 깨어나는 환희로 존재가 흔들리는 경이를 맛보지 않고서는 그렇게 당장 생업을 버리고 고난의 길로 들어설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 이의 없습니다

-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마태 5장 1-12절)

마음이 가난한 자…로부터 시작되는 산상수훈처럼 널리 알려지고, 신자 아닌 일반인들도 즐겨 인용하는 성경 구절도 아마 드물 것입니다. 인간에게 말이 있어온 후 말하여진 말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말이라고 하더군요. 처음엔 저도 남들이 좋다고 하니까 덩달아서 좋게 들렸습니다. 좋은 시를 읽을 때 그 뜻을 일일이 따지지 않더라도 마음에 들어오는 몇 구절과 음률만으로도 감동을 느낄 수 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군중들에게 그렇게 설교하신 것은 새겨듣고 그대로 실행하라는 뜻이지 입술로 읊어대기만 하라고 하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저는 빈한한 농촌,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집안이나 마을 어른들로부터 가장 자주 들어온 말이 아무리 없이 살아도 마음만은 넉넉해야 한다는 소리였습니다. 말로만 그렇게 한 게 아니라 실제 생활에 있어서도 자신을 위해서는 허리띠를 졸라맬지언정 남에게는 후하게 나누는 것을 사람 노릇의 으뜸으로 쳤고, 그런 전통적인 미덕에 의해 아무리 혹독한 흉년이나 전쟁 중에도 마을 공동체기 와해되지 않고 더불어 살아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마음 씀씀이야말로 마음의 부자 노릇이라고 믿어왔는데 예수님은 어찌하여 마음이 가난한 이에게 최고의 상을 준다고 하는지 혼란스럽습니다.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겸손한 마음도 될 것 같군요. 또 보물이 가득 찬 창고를 가진 부자는 한시도 마음 놓을 날이 없을 것입니다. 튼튼한 자물쇠를 채워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심복으로 창고지기를 삼고 나니 한시름 놓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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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아 생전 처음 여행을 떠납니다.

그러나 창고로부터 몸이 멀어질수록 마음은 창고한테 얽매이게 될 것입니다. 믿기로 한 창고지기가 못 미더워지면서, 내 재산은 내가 지켜야지 이 세상에 누굴 믿나 싶어 다시 집으로 되돌아옵니다. 결국 죽을 때까지 창고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듯으로 마음이 가난한 이는 자유인을 일컫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진실로 열린 마음을 가진 겸손한 자유인이라면 하늘나라를 상으로 받을 만하군요. 예수님, 당신 말씀에 의의 없습니다.

■ 차라리 해바라기가 되게 하소서

-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 (마태 5장 13-16절)

주님, 하필 왜 소금이 되라 하십니까. 저는 싫습니다. 저는, 내가 나로 태어난 것에 보람도 느끼고 싶고, 또 나름으로 남의 눈에 띄는 뭔가가 되고 싶습니다. 될 수 있으면 남보다 우뚝 서서 칭찬도 받고 싶고, 남들이 저를 부러워하거나 찬양하면 더욱 좋겠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빛나고 싶고 존경도 받고 싶습니다. 꽃이고 싶고, 별이고 싶고, 나무이고 싶고, 파도이고 싶습니다. 세상 만물 하고 많은 것 중에 하필 소금이라니요. 아무리 생각해도 소금이 되려고 이 세상에 태어나지는 않았다고 생각됩니다. 왜 그렇게 싫으냐고요?

우선 소금이 소금된 보람을 느끼려면 자기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 있어야 하니까요. 모습이 드러나 소금버캐라도 앉아 보세요. 다들 그 음식은 먹어보지도 않고 맛없다고 얼굴을 찡그릴 것입니다. 물론 소금이 모든 음식에, 하다못해 단 음식에 까지도 알맞게 들어가야 제 맛을 제대로 낼 수 있다는 것은 압니다. 그러나 소금 그 자체로는 볼품도 없거니와 독립되어 혀에 닿는 맛을 즐기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짠 맛을 잃어보세요. 주님 말씀대로 당장 버림받겠지요. 제 구실을 해도 인기 없고, 그 단 한 가지 구실 외엔 다른 아무짝에도 쓸모없고, 제 몸을 숨기고 남에게 스며듦으로써 비로소 남을 썩지 않게도 맛나게도 만드는 게 되라니요. 억울해서 못하겠습니다. 어떻게 태어난 인생인데 남 좋은 일만 하라 하십니까? 문득 소금에 대한 가장 긍정적인 말이 한 가지 생각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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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상들이 음식 맛을 평할 때 쓰는 말 중 최고의 찬사는 ‘간이 맞는다’였습니다. 곱씹을수록 마음에 드는, 꾸밈도 과장도 없는 질박한 칭찬입니다. 주임, 저는 주님처럼 소금이 될 자신은 없지만 주님의 언행을 소금 삼아 간이 맞는 인간은 되려고 노력하겠으니 저더러 다시는 소금이 되라고는 마옵소서.

주님의 다음 말씀은 제 허영심에 딱 들어맞습니다. 세상의 빛이 되라고 하셨죠? 촛불 정도의 빛만 된다고 해도 얼마나 근사한 일일까요. 겸손을 떨면서 숨으려 해도 당장 드러나고 말테니까요, 인류는 원초적 본능으로 빛이 없이는 목숨의 유지도 불가능 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빛 앞에 공구하고, 빛한테 아양떠는 걸로 종교의 시초로 삼았을 겁니다.

그러나 주님 어떻게 빛이 되죠? 저더러 촛불이나 횃불, 등잔불처럼 제 몸을 태워 빛을 내라고는 마옵소서. 어떻게 태어난 인생인데 제 몸을 태우라 하십니까. 허나 아무리 찾아봐도 몸을 태우지 않고 빛을 발하는 물건은 눈에 띄지 않는군요. 우리가 거저 진정한 빛이 될 수 없는 거라면, 빛이 되라는 말씀은 이웃을 위한 자기희생을 돌려서 그렇게 말씀하신 게 아닌가 싶어집니다.

그렇다면 주님, 빛이 되는 것도 사양하겠습니다. 그 대신 제 언행이 주님의 빛을 기리며, 부지런히 따라 움직이는 해바라기가 되게 하소서. 금력이나 권력을 따라 움직이는 해바라기가 안 되는 것만도 저로서는 얼마나 힘든 일인지 헤아려주소서.

■ 두 번 못 박긴 싫습니다

-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마태 5장 17-37절)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신자들을 비웃거나 야유할 때 흔히 쓰는 말 중에 이런 게 있지요. 저 사람들은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주님 주님, 하면서 용서만 청하면 다 용서해줄 줄 아니까 비신자보다 나쁜 짓을 더 잘한다느니, 말솜씨만 휘번드르르 청산유수면 공산당이 아니면 예수쟁이더라느니 하는 말입니다.

신자들이 이렇게 만만하고 파렴치하게 비쳐졌다면 그건 전적으로 신자들의 책임이지 그리스도교의 본질과는 무관하다는 건 성경을 단 몇 구절만 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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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당장 드러나고 맙니다. 특히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의 말씀을 없애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로 시작되는 마태오 복음 5장 17-37절을 읽으면 감히 그리스도를 본받겠다고 약속한 게 잘못 걸려들어도 된통 잘못 걸려든 것처럼 억울해지기까지 할 정도로 엄혹합니다.

그분은 정말 사람 나고 율법 난 게 아니라 율법 나고 사람 난 것처럼 인간을 율법에 맞춰 왜곡하고 재단하려는 경직된 율법에다가 숨결을 불어 넣으려 오셨습니다. 껍데기에다 알맹이를 채워주러 오셨습니다. 그게 있음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알맹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아아, 그건 사랑일 거라고 쉽게 정답을 알아맞혀 봅니다.

우린 누구나 그리스도교가 사랑의 종교라는 것과 사랑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것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사니까요. 그래 그런지 세상은 온통 사랑 천지고 사랑 타령은 천하도록 범람하고 있습니다. 씹다 버린 껌보다 더 흔하고 천한 게 사랑입니다. 껌은 입안에라도 들어갔다 나오지만 사랑은 입술 끝에 매달려 침도 안 묻히고 별별 요사를 다 부립니다. 만날 때도 사랑, 헤어질 때도 사랑, 배신할 때도 사랑, 사랑의 이름으로 온갖 무책임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이러다간 사랑을 완성하러 예수님이 또 한 번 오실까봐 두렵습니다. 두 번 오시는 건 좋지만 두 번 못 박긴 싫습니다.

■ 아아, 그렇군요

-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마저 돌려 대라. (마태 5장 38-48절)

아이고, 주님, 왜 이랬다 저랬다 하십니까? 저는 헷갈려서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오른 눈이 죄를 지으면 그 눈을 빼어 던져버려라. 오른손이 죄를 짓거든 그 손을 찍어 던져버려라. 하시길래 저는 당신으로부터 숨고 싶었습니다. 차라리 당신을 모른다 하는 게 났지, 마음으로 약한 생각을 좀 품었기로서니 어떻게 제 몸의 한 부분을 잃겠습니까? 당신을 만나러 오는 도중에도 아름다운 이성을 향해 한눈파는 재미, 쇼윈도에 진열된 고급스러운 물건에 대한 나의 욕심, 나보다 잘된 친구에 대한 질투로 마음이 산란했지만, 또한 그런 잡념으로 인하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여기까지 이를 수 있는 활력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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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말씀대로 하자면 우리가 천수천안(千手千眼)을 타고났다고 한들 어찌 털끝 하나라도 남아나리까. 이렇게 무섭기만 한 주님이라면 그의 눈에 띄기 전에 얼른 도망쳐버리자, 괜히 어물쩡거리고 있다가 그의 수제자라도 되는 날엔 큰일이다. 싶어 막 꽁무니를 빼려는 차에 원수를 사랑하라니요? 누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까지 내주고 오 리를 가자거든 십 리를 같이 가주라니요? 누구를 바보 천치로 아시나 봐. 아니면 도망치려는 우리를 슬그머니 붙들어 보려는 미소 작전이든지.

문득 아아, 그렇군요. 당신으로부터 멀어지려던 발길이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당신은 이랬다저랬다 하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당신이 일관되게 설하신 것은 자신에 대한 엄격함과 이웃에 대한 한없는 너그러움과 사랑이었습니다. 자신 속의 악을 가차 없이 무섭게 다루라는 뜻이지, 남에게 그토록 무섭게 굴란 말씀이 아니셨습니다.

오죽해야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겠습니까. 마치 가장 가까운 이웃끼리 동포끼리 척을 지고 사는 우리 사정을 꿰뚫어 보신 것처럼 말입니다.

“아이고 이 웬수야.” 그건 미워서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예전부터 가장 친한 애정을 그렇게 표현해 왔습니다.

원수야말로 사랑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사이입니다. 가장 무서운 건 원수지간이 아니라, 사랑도 미움도 없는 무관심입니다. 주여, 바로 벽 하나 사이로 무관심 속에 방치된 이웃을 발견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이 웬수야. 여기서 혼자 뭐하고 있었느냐고 욕하며 따뜻하게 부등켜안게 하소서.

■ 주님, 정말 이러시깁니까?

-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 (마태 4장 1-11절)

나이 먹어가면서 자신에 대해 가장 한심하게 여기는 건 뭐니뭐니 해도 건망증이다.

이러다 치매가 되어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공포감에 사로잡힐 적이 있다. 생전 이별이 불가능한 자기 자신이 못 미더운 것처럼 불행하고 참담한 일은 없다. 그러나 남들에게만은 나의 이런 약점을 들키지 않기 위해 내가 철저하게 지키고 있는 것은 기록하는 습관이다. 꼭 가야할 초대나 지켜야 할 원고 마감 날짜는 받는 즉시 달력에다가 기록을 해놓고, 가족 모임이나 전화로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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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친구들과 만날 약속도 빠짐없이 달력에다가 써 넣기 때문에 아무것도 안 들어가 있는 빈칸은 혼자 있을 수 있는 휴일이 되는 셈이다. 그래서 그 혼자 있을 수 있는 날을 만들기 위해 외부 약속을 한 날로 모으게 된다. 얼마 전이었다. 아침에 그렇게 한 날로 빽빽하게 모은 시간 약속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요즘 젊은 애들이 흔히 쓰는 말로 새끼줄이 꼬였다고나 할까.

중첩돼 있는 빽빽한 약속 시간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내 정신 상태를 의심하는 것밖에 할 일이 없었다. 겁이 났다. 그날은 다행히 시간을 앞뒤로 잘 조정하여 아무에게도 큰 피해를 주지 않고 볼 일을 다 볼 수 있었고, 온종일 조바심을 하느라 돌아오는 길에는 몹시 피곤했다.

그래서 기도를 했다. “주님 지금 전 몹시 피곤합니다. 저한테 자리 하나만 내어 주십시오.”그러나 웬걸 성내역까지 올 동안 내 근처에서 빈자리가 하나도 나지 않았다.

■ 놀랍고 황홀한 순간

-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요한 4장 5-42절)

주님, 저는 복음서 중에서도 요한복음을 가장 좋아합니다. 그 서술 방법이 특이하고도 힘찰 뿐 아니라 당신을 보는 시각도 다른 복음과 뚜렷하게 구별될 정도로 특이하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다른 저자나 제자들이 미처 포착 못한 당신의 가장 고결하고 깊은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진정한 용기가 무엇이라는 게 드러난 부분까지 실로 섬세하게 보여주어 읽을 때마다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듭니다.

특히 당신의 여성관을 여러 각도로 깊이 있게 보여줬다는 걸로 요한 복음이 당신의 인격과 신격을 비로소 완성시켰다는 느낌마저 듭니다.

당신이 사마리아 여자와 만나는 얘기도 요한 복음에만 나옵니다. 그 여자에게 먼저 말을 건 당신과의 대화가 그 여자에게 얼마나 놀랍고 황홀한 경험이었을까를 상상하는 것은 그 여자의 입장을 바꾸어 생각할 능력이 없이는, 즉 그 당시의 사회상에 비춘 그 여자의 신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는 충분치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유대인이고 저는 사마리아 여자인데 어떻게 저더러 물을 달라하십니까?”라는 여자의 대답에서 선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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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으로 가득 차 있던 당시의 유대인에게 사마리아인이 얼마나 상종하기 싫은 천민이었나 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여자가 아닙니까? 구약 도처에서 우리는 여자 신분이 거의 가축이나 종과 진배없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 여자가 감히 유대 남자에게 당돌할 정도로 평등하게 대들 수 있었다면 주님의 태도가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주님, 그때 당신은 유구하고도 철옹성보다 단단한 인종적 편견, 성차별의 관행을 유연하게 뛰어 넘어 하나의 자유인으로 그 여자 앞에 홀연히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 여자에게 당신과의 만남의 경험은 아마 생전 처음 받는 인간 대접이었을 겁니다. 어찌 놀랍고도 활홀하지 않았겠습니까.

주님께서 천하고 팔자 사나운 사마리아 여자에게서 집어낸 것은 마실수록 목마른 동물적 갈등이 아니라 인간 정신의 오지를 흐르는 영원한 진리, 영적 평화, 정신의 고양, 진정한 사랑에 대한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갈증을 보신 것입니다. 그것을 보셨다는 것만으로도 그 여자에게는 최고 인간 대접이었을 테고, 그것을 보신 당신 안에 흐르는 마르지 않는 샘물을 아끼실 주님이 나이심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 그 말씀만은 도저히 못 알아듣겠습니다

- 저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요한 9장 1-41절)

역 앞에서 노래를 부르며 구걸하는 하반신이 없는 맹인을 만났습니다. 무슨 까닭으로 그가 하반신을 절단하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장애 정도는 몸을 바르게 하고 앉을 수도 없을 정도로 심해서 그는 엉덩이도 다리도 없는 몸으로 땅을 기어다닙니다. 따라서 그의 얼굴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어쩌면 맹인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디를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든 걸 못 봤으니까요. 머리끝에서 복부까지 그의 전신을 완전하게 땅과 같은 방향으로 기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제일 먼저 생각하는 것은 저 정도로 심한 장애라면 마땅히 국가에서 수용하여 돌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맨날 잘 살게 됐다고 으스대면서 그 정도도 못하는 우리 사회에다 비판과 원망의 화살을 돌립니다. 그러다가 문득 그가 주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를 때 저는 너무 듣기 싫어서 그만 귀를 막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나라를 원망하던 우리의 마음이 주님한테로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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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을 바꿉니다. 주님 저 불쌍한 이한테까지 찬양을 받으셔야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너무 잔인하십니다. 그가 몸으로라도 자유롭게 식구를 부양하는 데 보람을 느끼는 당당한 정신의 소유자라면 매일 한두 번쯤은 하느님이 있긴 어디 있느냐고, 있으면 나와 보라고 악을 써야 마땅하지 않을까요.

사람이 저리된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제 물음은 이천 년 전 당신의 제자의 물음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한 채입니다. 물론 당신의 대답도 똑같습니다.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고요.

주님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말씀만은 못 알아듣겠습니다. 못 알아들었기 때문에 같은 질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 주님도 편애를 하시나요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요한 11장 1-45절)

제가 아는 분 중에 이런 분이 있습니다. 그는 젊어서 고생고생 많은 재산을 모아 자식들을 다 훌륭하게 교육시키고, 자신도 탄탄한 기업을 가지고 있고, 사회적으로 존경받을 만한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수성가한 사람답게 돈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만, 죽을 때 돈을 짊어지고 갈 수 없다는 것도 모르지 않아, 가난하고 불쌍한 이웃들과 나누는 데도 얼마나 적극적인지 모릅니다.

그가 직접 운영하는 장학재단도 있고, 집중적으로 돕는 사회사업 기관도 몇 개나 됩니다. 그리하여 그는 부유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존경도 한 몸에 모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가족이나 친척, 친구 등 주변 인물들의 평가는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를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고 혹평하는 사람까지 있습니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이웃을 돕는 데는 그렇게도 솔선수범 적극적인 분이 친구나 친척 중 곤경에 처한 이가 도움을 청할 때는 어쩌면 그렇게 단칼에 거절을 하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심지어 자식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도 “교육을 시켜줬으니 나는 부모로서의 의무를 다했으니까.”라고 냉정하게 모르는 척 했다고 합니다.

그의 닫힌 박애가 존경스럽다기 보다는 측은 합니다. 가족도 죽마고우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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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할 줄 모르는 박애는 자기도취나 명예욕이지 어찌 사랑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널리 공평하게 사랑하기 위해 더 중요한 것, 누군가를 더 사랑하는 특별한 느낌이 주는 기쁨을 생전 못 느껴볼지도 모르니 얼마나 불쌍합니까? 주님은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설하셨으니까, 절대로 편애 같은 건 안 하셨을 것입니다.

■ 최초의 크리스트 세일즈 맨

-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 (마태 26장 14-27절)

유다라면 천하에 몹쓸 배반자라는 데 아무도 이의가 없을 줄 압니다. 예수께서도 그가 얼마나 괘씸했으면 그런 배반자는 차라리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은, 하는 심한 말씀으로 개탄을 하셨겠습니까. 그러나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힌 후 이천 년 동안 어마어마하게 번성한 것은 유다의 후손들이 아닐까요. 유다는 당신을 팔아먹을 수도 있다는 당신의 상업적 가치에 눈 뜬 최초의 크리스트 세일즈맨이었습니다.

유다가 당신의 육신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먹은 후 오늘날까지 장장 이천년 동안에 당신에 관한 온갖 것을 팔고 사는 기업은 불황을 모르는 기업으로 성장 발달해 왔습니다. 성경 말고 세상의 어떤 책이 이천 년 동안이나 변함없이 베스트셀러 자리를 누릴 수가 있었겠습니까. 당신의 모습을 본뜬 온갖 미술품, 당신을 예배하기 위한 건축물들은 당대의 예술가들을 먹여 살렸을 뿐 아니라, 오늘날엔 값을 매길 수도 없는 관광 자원이 되어 유럽 여러나라들의 주요 수입원이 되고 있습니다.

당신의 말씀을 각기 자기 좋은 대로 해석하여 분파를 만들고, 신자를 확보하고 신자의 머릿수에 비례하여 권리금을 받고 넘기는 교회장사도 당신의 유관 산업이 아닙니까? 그 수법에 있어서도 비슷한 내용의 상품을 포장만 바꾸는 상업주의적인 신제품 개발과 다르지 않습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당신이 태어난 거룩한 날을 기한 소란스러운 축제 분위기와 급조한 이웃 사랑은 바겐세일의 소용돌이와 무엇이 다릅니까.

적어도 주일마다 교회에 거르지 않고 나갔으니까 나야 큰 재난을 당하지는 않겠지, 하고 바라거나 수입의 일정액을 꼬박꼬박 헌금했으니 언제고 몇 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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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받을 날이 있겠거니 은근히 기다리는 평범한 사람들의 소박한 믿음도 유다가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긴 게 인간의 한계일 뿐 당신의 정신이나 신성은 아니었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회개하는 죄인, 애통해 하는 에미. 박해받은 의인, 신음하는 병자, 슬퍼하는 선한 이가 아주 없어지지 않는 한 당신은 줄기차게 부활하시어 그들 가운데 계시리라 ale습니다.

주여 당신을 사고 파는 데 이골이 난 이들도 불쌍히 여기소서.

■ 은행나무보다 큰 봄까치꽃

- 누군가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요한 20장 1-9절)

우리 집은 아파트지만 낮은 층이라 뜰이 잘 보인다. 남향으로는 낙엽이 깃털 같다고 해서 낙우송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진 키큰 나무가 떡 버티고 서 있어서 그 뒤에 키 작은 나무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북쪽은 차도에 면하고 있어서 창문도 작다. 비록 작은 창문이지만 그쪽은 가로수가 은행나무여서 가을마다 찬란하고도 장엄한 금빛 축제를 연출했었다.

그러나 그 두 가지 나무들은 다 같이 봄기운에는 매우 둔감한 편이다 가장 돋보이는 낙우송은 겨우내 떨구고도 아직도 다 못 떨군 암갈색의 칙칙한 옷을 누더기처럼 걸치고 있을 뿐이고, 북창 밖 은행나무도 작년 가을의 영화가 한 바탕의 꿈이었던 양 쭉쭉 뻗은 가장귀는 철사처럼 완강하기만 하여 뭔가 움틀 생명력이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그리고 예년에 비해 꽃 소식이 적어도 일주일쯤은 더디게 오리라는 신문 방송의 영향이 더 커서인지, 나는 어느 틈에 봄도 신문방송이 먼저 호들갑을 떨고 나야 오려니 여기고 있었나보다.

도타운 햇살 속에서 베란다에 있는 장독 뚜껑 위에 머물렀던 공기가 꼼지락꼼지락 아지랑이가 되어 피어오르는 게 선연하게 보이는 한낮이었다. 불현듯 이불을 내다 걸고 싶단 생각이 났다. 오랫동안 장 속에 처박힌 채 납작해진 이불도 단박 아지랑이처럼 둥실 가볍고 부숭부숭하게 부풀어 오르게 할 것 같은, 뭔가 걷잡을 수 없는 햇빛이었다.

이불을 널려고 새시 문을 열다가 비로소 바로 창 밑에 핀 노란 산수유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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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보았다.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산수유나무는 너무 가까이 있어서 거실 소파에 편안히 앉아서는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산수유 꽃을 시작으로 봄이 일단 보이기 시작하자 발밑에 널린 게 봄의 생명력이었다.

그날 나는 갓난아기의 손톱만한 연보랏빛 꽃을 밟고 지나갈 뻔했다. ‘봄 까치꽃’이었다. 그 꽃의 이름은 그럴듯하지만 실은 꽃이랄 것도 없는 작고 미미한 꽃이었다. 그러나 그 꽃의 이름을 알기까지는 곡절이 있었다. 어느 해 봄 나는 내가 좋아하는 어느 아름다운 이와 식물도감을 펴들고 식물 이름을 알려고 비교해 본적이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알게 된 그 꽃은 나에게 특별한 꽃이 되었다.

주님, 당신을 입으로는 믿는다 하면서도 아직 부활하신 당신을 뵌 적은 없습니다. 뵙기 전에 당신이 누구인지 온전히 느끼게 하소서. 그러면 당신이 아무리 낮은 곳에 보잘것없는 이들과 더불어 계시더라도 능히 알아뵐 수 있겠나이다.

■ 에미 마음, 여자 마음

- 나를 보지 않고도 ale는 사람은 행복하다 (요한 20장 19-31절)

자식을 앞세운 에미는 밤에 편히 잠들지 못한다. 추운 날은 내 자식이 얼어붙은 딱딱한 땅속에서 추위에 떨 것 같아 따스한 잠자리가 오히려 가시방석처럼 고통스러워 전전반측 잠 못 이루고, 더운 날은 더운 날대로 그 깊은 땅속에서 답답하고 무서워 어찌 견디나 싶어 쾌적한 냉방을 거부하고 홀로 가슴을 쥐어뜯는다.

아침에 개었던 날이 낮부터 흐려져서 오후엔 장대비가 내리자, 그런 날이면 우산 갖고 학교로 마중 가던 버릇대로 나섰다가 그 애가 이젠 학교에 다닐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막막해졌지만 내친 김에 무덤이 있는 산으로 달려가 봉분 위에 우산을 받쳐주면서 흐느껴 울다가 돌아온 에미의 얘기를 들은 적도 있다. 죽으면 육신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랑하는 자식이 그렇게 됐다는 걸 차마 인정하지 못하는 게 모성이다.

6·25 때는 거의 대부분의 청년들이 자진해서 전쟁터에 나가거나 끌려가지 않으면 도망 다녀, 자식의 행방을 모르는 에미들이 숱하게 많았다. 그런 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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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들은 거의가 다 지식이 집에 있을 때와 마차나지로 끼니때마다 자식의 밥그릇에 밥을 퍼놓고 기다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건 단지 자식이 집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은 슬프고도 어리석은 모성의 차원을 넘어, 하늘도 감동시킬 신성한 의식이 되었고, 자식들로 하여금 기적처럼 위기를 넘기게 하거나 믿을 수 없을 만큼 용감한 죽음을 맞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기쁜 소식을 가장 먼저 들은 것도 여인들이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처음 뵌 것도 여인이었다. 왜 그랬을까?

여인들이 먼저 갔으니까 기쁜 소식도 먼저 들은 건 당연하다. 왜 먼저 갔을까. 별로 좋은 데도 아닌 무덤에를 겁도 없이. 제자들도 무서워 문 닫고 모여 있는데.

밤사이에 아무 일 없었나 걱정이 되어 도저히 집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갔을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는, 아무렇게나 취급해도 그만인, 목석과 다름없는 시신이 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막강한 죽음의 세력도 진리요 정의이자 사랑이신 주님을 아주 죽게 할 수는 없으리라는 여인들의 믿음이 그분의 살아계심을 가장 먼저 보고 듣고 느끼고 증언할 수 있는 특권이 되었다.

■ 미처 알아보지 못한 만남들

- 너희는 어리석기도 하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그렇게도 믿기 어려우냐?

(루카 24장 13-35절)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천 년이나 이천 년이 얼마나 긴 세월인지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천 년 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게, 현재의 우리와 똑같은 사고체계와 정서를 가진 인간의 일이라는 것도 발 믿어지지 않았다.

신앙의 문제에 있어서도 구약시대는 물론이고 신약시대까지도 정말 그러했을까, 확신이 안 설 때마다 그 옛날 사람들은 우리보다 훨씬 영적이었을 거라는 걸로 신비화시키거나 상징으로 받아들이려 들었다.

그러나 내 나이가 육십을 훨씬 넘기고 보니 황혼길의 나그네처럼 쓸쓸히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볼 적이 많은데, 어쩌면 그리도 산 자취는 없는지. 그 덧없음이 꿈 같기도 하고 불과 며칠의 고달프디 고달픈 여정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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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장수가 허락되어 백세를 누린다고 해도 돌이켜본 지난날이 길다 할 것인가. 백년이 순간이거늘.

열심히 사느라고 살았건만 문득 뒤돌아볼 때, 도무지 산 자취 없음은 생애를 스쳐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오묘한 순간들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하필 우리 엄마 아빠처럼 자애롭고 푸근하고, 우리 가족처럼 사람을 아낄 줄 아는 집안에서 태어났다는 것은 얼마나 큰 복인가. 가난한 집안에 태어난 것도 아무한테도 양보하고 싶지 않은 지극히 나다운 조건이다. 또한 우리부모나 가족에게도 난 꼭 있어야 할 자식이었다. 누구나 이 세상 몇 억 쌍 부모 중에서 그가 꼭 있어야 할 자리에 아무하고도 바꿔치기 할 수 없는 유일한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나는 주위에서 돌출되는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시냇가에 널린 조약돌 중의 하나처럼 남들과 조화를 이루면서 살아왔던 것이다.

주님, 저의 임종의 자리에도 임하시어 저로 하여금 저 높은 곳으로부터 안배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많은 아름다운 만남을 기억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고 미소 짓게 하소서. 제 생전에 허물이 막중하여 비록 천국을 약속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족하겠나이다.

■ 들어가지 않고는 나올 수도 없는 문

-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요한 10장 1-10절)

그는 천성적으로 악기나 오기라고는 없이 다만 착하고 너그러웠습니다. 그는 드물게 좋은 사람, 참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임종의 순간까지 당신 하나만 믿고 어떤 고통도 참아 받은 신실한 교우였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느님이 있긴 뭐가 있냐고 비웃어 쌀 만큼 그의 고통은 억울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원망 끝에 문득 뭐가 떠올랐는지 아십니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당신의 시신이었습니다. 십자고상이라는 걸 우러를 때 우리는 당신을 직시하기 보다는 늘 환상적으로 미화시켜 왔습니다. 그러다가 막상 당신의 시신을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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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으로 내려서 널 위에 뉘었을 때 피묻고 찌그러지고 너덜너덜해진 당신의 육신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비참의 극치군요. 어찌 육신의 고통뿐이겠습니까. 세상의 비웃음, 제자들의 배반, 권력으로부터 받은 굴욕으로 극도로 외로워진 당신의 표정은 또 어떻고요. 그걸 피하지 못했으니 당신은 철두철미 인간이었고 그걸 피하지 않았으니 당신은 정말로 인간도 아니군요. 당신의 참혹한 죽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하느님이 계신가 안 계신가는 그닥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이란 바로 제 자식도 이렇게 죽일 수 있는 아버지, 엄혹 그 자체라는 깨달음이 전율처럼 등줄기를 스쳤습니다. 그러자 당신의 말에 솔깃해서 당신의 자녀가 되겠다고 약속한 걸 당장 파기하고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주님, 제가 도망쳐 나갈 문은 어딥니까. 들어온 문이 있으면 나갈 문도 있어야 하는 게 아닙니까. 도대체 문을 어디다 숨겨 놓으셨습니까. 뭐라고요? 아직 들어오지도 않았다고요?

오오, 주님. 나가기 위해서라도 일단 들어가게 하소서.

■ 옳고도 아름다운 당신

-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요한 14장 1-12절)

안개도 같고 이슬비도 같은 습기로 천지가 눅눅한 어느 봄날이었다. 시내에서 과히 멀지 않은 그 골짜기에 눈보라가 치고 있었다. 오두막에서 바라다본 밤나무 숲이 장관이었다. 쌓일 정도의 눈은 아니었지만 간간이 세게 휘몰아치는 회오리바람이 밤나무 위에 츱츱하게 매달려 있던 쭈그러진 이파리들을 공중으로 한바탕 말아 올렸다가는 떨구고 하는 모습이 장엄하고도 신비스러워보였다.

봄눈이 흔히 그렇듯이 순식간에 개고 바람도 지나갔다. 좀 전에 보았던 게 꿈이 아니었던 가 싶게 하늘은 시침 딱 떼고 푸르렀다. 그리고 비로소 완전히 잎을 떨군 밤나무 숲이 드러났다. 어쩌면 가랑잎을 그냥 매달고 있는 밤나무는 하나도 없었다.

나는 끌리듯이 숲속으로 들어가 보았다. 지천으로 쌓인 가랑잎이 적당한 습기를 머금고 조용히 땅을 향해 침잠하고 있었다. 발목이 빠지는 두터운 깊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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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바닥에는 재작년, 작년, 금년 그리고 방금 떨어진 낙엽까지 차례로 쌓여 있을 터였다. 그러나 그 순서 따져서 무엇하랴. 이제 그들의 운명이 나무에 속하지 않고 땅에 속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사람도 자식 기르는 어려움, 자식 때문에 받는 영광보다는 수모나 고초만 늘어가는 세태 때문에 자식이 웬수라는 한탄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다시 태어나고 싶으면 원수를 위해서 양분이 될 수밖에 없다는 섭리 앞에 인간이라고 해서 가랑잎보다 나을 것이 없다.

“하느님, 당신은 옳으실 뿐 아니라 이름다우십니다.”라는 탄성이 절로 나오는 봄기운 충만한 숲속이었다.

■ 참으로 좋은 날

-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을 것이다.

(요한 14장 15-21절)

파는 음식과 엄마의 손맛이 든 음식과의 차이를 모르고 자라는 아이들을 고아처럼 여긴 것이 손맛 든 음식밖에 먹일 게 없었던 때를 겪은 저 같은 늙은이의 고역한 심술이라면 주님, 용서하세요. 그렇지만 주님, 나이를 먹고 늙어빠졌다고 해서 자신을 고아처럼 느낄 때가 없는 줄 아십니까. 학교 갔다 온 손자가 어딘지 걱정이 있어 보이길래 무슨 일이냐고 물어 봤다가 할머니는 몰라도 된다는 핀잔만 들었을 때. 할미가 손수 딴 햇쑥으로 만든 버무리를 거들떠도 안보고 피자를 먹고 싶다고 할 때, 나잇값도 못 하고 고아가 된 것처럼 노엽고 서글퍼진답니다. 손맛에 대한 자신감을 잃었다는 게 곧 사랑에 대한 자신감을 잃은 것만치나 자신을 외롭고 초라하게 만듭니다.

주님, 그러나 잠 안 오는 깊은 밤, 고아처럼 오갈 데 없는 마음으로 내려설 뜰도 없는 아파트 마당을 서성이다가 아직도 꺼지지 않는 불빛을 발견했을 때, 뜻하지 않게 충만해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그때까지 잠을 못 자고 있다면 그는 틀림없이 수험생일 겁니다. 꾸뻑이며 책장을 넘기다 말다 하는 소년이 보이는 듯합니다. 그가 안쓰러워 그의 창가를 떠날 수가 없습니다. 잠깐만이라도 단잠을 잘 수 있도록 이불을 덮어주고 싶기도 하고, 할 공부를 잔뜩 남겨 놓은 채 곯아떨어진 거라면 조금만 더 힘내라고 일으키고 싶기도 합니다. 이렇게 스르르 마음이 열리자, 이웃에 대한 관심뿐 아니라 한 집 안의 딴 방에, 또는 멀리 가까이에 흩어져 사는 자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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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손자들의 숨결까지 잡힐 듯 가까워집니다. 설사 자식들이 지구 반대편에 있다고 해도, 제가 지구 반대편을 여행 중이라 해도 숨결이 느껴지도록 가깝게 맺어진 느낌은 변함이 없습니다.

사랑은 그 까짓 손맛 같은 것, 또 거리 같은 것 때문에 달라지는 게 아니더군요. 또한 그것이 옛날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져 가는 것 따위도 아닙니다. 예나 지금이나 늘 있어왔고, 만일 앞으로 그게 없어진다면 우린 사람도 아니게 되는 그런 것입니다.

주님 제 마음이 그 좋은 것으로 늘 충만 할 수 있도록 항상 열려 있게 하소서.

■ 눈물 그렁한 당신의 시선

-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 28장 16-20절)

어떤 책 광고에서 이런 구절을 보았습니다. “나는 어머니라는 말만 들어도 눈물이 납니다.”라고 했더군요. 그 소리가 광고 말답지 않게 가슴에 와 닿는 것은 그 작가의 어머니를 알아서가 아니라 늘 마음 속에 있는 내 어머니와 세상 모든 어머니의 진수를 건드렸기 때문일 겁니다. 지난 어버이날이었습니다. 아침나절 전철역 앞에서 가슴에 색종이로 만든 꽃을 달고 떡을 파는 아주머니를 보았습니다. 떡장수를 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 종이꽃 때문에 그 아주머니가 더 초라해 보였습니다. 웬만큼 사는 사람들은 아무리 비싸도 한두 송이, 또는 한 바구니의 생화도 어머니에게 바치는 게 요즈음 어버이날의 풍속도니까요.

저녁나절 시내에서 일을 보고 들어오다 보니 그 아주머니는 아직도 거기 있었습니다. 떡이 조금밖에 안 남아서 참 다행이었습니다. 가슴의 꽃도 그동안 생명이 깃든 것처럼 자랑스럽고 싱싱했습니다. 나는 조화를 좋아하지 않지만 그 순간만은 너무 좋아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그 떡을 떨이한 것은 물론이지요. 나이 들면서 괜히 눈물이 나려고 할 때가 왜 그렇게 많은지요.

외지고 조촐한, 하객도 많지 않은 예식장에서 약간은 서툴게 치는 웨딩마치 소리가 더욱 가슴에 와 닿으면서 까닭모를 눈물을 자아냅니다. 병원 신생아실 근처도 까닭 모르게 눈물이 나는 장소 중에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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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날 때의 완벽한 무소유, 서로 아무하고도 닮지 않은 그 다양성 등 생명에 대한 경외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들을 맞이하는 이 세상의 거짓 화려함과 잡스러움을 반성하며 어쩔 수 없이 사로잡히게 되는 깊은 연민 때문입니다.

주님 그럴 때는 잠깐 동안이지만 제 자신 속에서 당신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제가 느끼는 당신의 시선은 늘 그렁한 눈물과 함께 한없이 깊은 연민을 담고 계십니다.

■ 당신의 상흔을 알아보게 하소서

- 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주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요한 20장 19-23절)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따르던 여인들은 하나같이 당신의 죽음을 애통해하고 절망했지만, 막상 부활하신 당신을 만났을 때는 반기지도 기뻐 날뛰지도 않았습니다. 두려워 떨기도 하고, 안 믿기도 하고, 심지어는 당신과 더불어 온종일 먼 길을 동행하면서 세상 돌아가는 얘기까지 나누고 나서도 못 알아보는 이까지 있었지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나? 성경에서 가장 잘 이해가 안 되는 대목이 바로 그 부분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부활을 못 알아보거나 못 믿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 보이신 방법이 어찌나 당신 다웁던지 거기 매료되고 나면 여태껏 잘 이해가 안 되던 대목이 그닥 큰 걸림돌이 되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당신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용모와 권위와 설득력을 갖춘 웅변과 부드럽고 따뜻한 손길을 몽매에도 잊지 못하였으련만 그것만 가지고 당신을 알아보기엔 충분치가 못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당신과 닮은 사람이 이 세상에 없으란 법이 없을 테니까요. 당신의 가장 당신다움은 결코 자신을 위해서 하느님의 아들에 합당한 능력을 행사하지 않았었다는 데 있습니다. 당신의 가장 당신다움은 폭력에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적인 운명에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배고플 때는 겸손하게 빵을 나누며, 사지를 못 박고 옆구리를 찌르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적인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임으로써 제자들로 하여금 주님이 틀림없다는 것을 알아보도록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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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제 엄살 섞인 비명을 미워 마시고 제 상처에도 호호 당신의 입김을 불어넣어 주소서, 아니, 그보다 먼저 당신 사지의 못 자국을, 옆구리의 깊은 상처를, 그때 그렇게 당신을 박해하고도 부족하여 그 후 오늘날까지 인류의 역사가 시시때때로 기회만 있으면 당신의 어디든지 함부로 할퀴고 찌르고 모욕을 준 그 수많은 상흔을 제가 직시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

■ 아이고, 하느님. 그것만은 못 하겠습니다

-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주셨다. (요한 3장 16-18절)

운전을 배우고 나서 처음 차를 끌고 나가는 초보에게 몇 년 경험자들이 으레 하는 말이 있다. 접촉 사고가 나거든 잘잘못을 가릴 생각 말고 상대방보다 더 크게 목청을 높이고, 상대방의 인상이 험악해 보이면 이쪽에서 먼저 삿대질이라도 하면서 날뛰라는 식의 조언이다. 운전의 경우만이 아닌 우리 사회의 총체적인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섬뜩해진다. 목청부터 높이라는 건 전혀 잘못이 없는 것처럼 당당하게 굴라는 소리고, 삿대질이라도 하라는 것은 법보다 힘으로 겁부터 주고 보라는 뜻이 된다. 그건 어떡하면 잘못을 저지르지 않나가 아니라, 잘못을 저지르고도 어떡하면 안 저지른 것처럼 굴 수 있느냐가 된다. 그게 통한다고 생각하는 건 곧 자기가 몸담고 있는 사회에 정의가 부재함을 믿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뒤집어씌우기 다음으로 우리가 흔하게 쓰는, 자기 잘못에서 빠져 나오는 또 하나의 수법은 더 큰 남의 잘못과 비교하는 일이다. 신문에서 몇억 원의 뇌물 수수 기사를 보면 자기의 지위를 이용해 청탁을 들어주고 받은 몇백만 원은 그까짓 거 뇌물이라고 부르기도 자존심이 상한다.

그러나 죽음조차도 구원이 안 되는 죄의식에 대해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당신이 이 세상에 온 것은 세상을 단죄하려고가 아니라 구원하려는 것이고, 구원 받고 싶으면 하느님의 아들을 믿기만 하면 된다고. 참 마음도 좋으신 하느님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분이 아니다. 죄인의 속성을 날카롭게 간파하고 있다. 죄상이 드러날까 봐 빛을 멀리한다고. 그건 결국 용서받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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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한 진정한 회개는 자기가 한 일을 백일하에 낱낱이 드러내는 일이라는 말씀이었다. “아이고, 하느님. 죽으면 죽었지 그것만은 못하겠습니다.”라는 비명을 누가 안 지를 수 있으랴.

■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 입곱 번 뿐만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 하여라.

(마태 18장 19-22절)

국토가 분단된 지도 어언 반세기가 넘는 동안 분단의 고통이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분들이 내 주위에서 하나 둘 사라지더니 이젠 거의 다 세상을 뜬 것 같아 그게 새삼 적막하게 느껴지는 요즈음이다. 그 중에서도 잊히지 않는 분은 내 어머니도, 친척이나 내가 가깝게 지낸 어느 누구도 아닌 고 장기려 박사이다. 나는 그분에 대해 보통 사람들이 아는 만큼, 이를테면 6·25 난리 통에 부인과 여러 자녀를 북에 남겨둔 채 아드님 하나만 데리고 황급히 피난을 내려온 후, 팔십 평생 독신으로 지내면서 돈과는 거리가 먼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무료진료에 헌신한 착한 의사라는 것 이상은 안다고 할 수 없는, 생전에 일면식도 없는 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생전에 그분이 남긴 몇 마디 말씀 때문이다.

어떤 인터뷰 기사였다고 기억하는데, 그분은 자신의 의술로 재산을 모을 생각은 추호도 없이 오로지 가진 것 없는 소외된 이들을 위해 일생을 바쳤다. 자기가 여기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능력껏 도우면 북에 남은 가족들도 가장 없이 살아내야 하는 인생의 여러 막막하고 어려운 고비마다 도움을 주는 사람을 만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까닭이었다.

그 소리가 어쩌면 그렇게 아름답고 힘 있게 들렸던지 잊을 수가 없었다.

그의 생각은 한낱 약자의 자기 위안으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걸 믿었을 뿐 아니라 그걸 실행해왔다. 그분은 결코 허황한 걸 믿은 게 아니었다. 사랑의 신비, 기도의 힘을 믿은 거였고, 그쪽도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걸 믿은 거였다. 미약한 것 같으면서도, 철옹성 같은 분단의 벽에도 스며들어 숨구멍을 틀 수 있는 유일하게 현실적인 방법이었다.

우리 민족성 중 가장 아름다운 ‘내가 남의 귀인이 돼주지 않고 어떻게 길 떠난 내 자식이 귀인을 만나기 바라랴.’ 라는 모성적인 정서와는 또 얼마나 잘 맞아떨어지느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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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차 쌀 지원 때 북이 보인 태도를 보고 난 우리 여론에서 우리라고 양식이 썩어나는 것도 아닌데 그 배은망덕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게 말이 되느냐는 식으로 나타났다. 그들의 태도가 보도된 내용대로라고 해도 그들이 누구인가?

주님, 다시 대북 쌀 지원을 시작할 거라고 합니다. 형제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당신의 말씀을 명심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생색을 내기보다는 주고도 수모 받는 무수한 고비를 슬기롭게 넘기도록 도와주소서. (2010년 전후 북한에 대한 쌀 지원 문제가 논의 되던 때)

■ 숨을 곳을 모르겠나이다

-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받을 것이다.

(마태 10장 37-42절)

저의 삶에서 그 무엇보다도 참으로 잘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주님을 알고 주님을 따르기로 약속한 것입니다. 세상에는 본받을 만한 사람, 추종하고 싶은 사람이 오죽이나 많습니까? 명석하고 위대한 과학자, 하늘의 성좌보다 높게 빛나는 예술가, 무소불위의 막강한 권력자, 대중의 환호와 박수갈채가 공기보다 더 흔해 빠진 인기인, 자손 대대 몇십만 년을 두고도 써도 못다 쓸 돈을 당대에 모은 재벌, 이런 사람 다 제쳐놓고 하필이면 삼십대 젊으나 젊은 나이에 십자가에 못 박혀 인류사상 가장 억울하고 처참하게 죽은 당신을 믿고 따르고 닮아볼 엄두를 내다니요. 이런 것을 신앙의 신비라고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이 세상을 거쳐 간 잘난 사람 다 제쳐 두고 당신에게 매료된 자신이 저는 기특하고 자랑스럽습니다.

당신이 밟고 간 발자취조차 나의 길엔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있는 힘을 다해 당신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주여 어디 계시나이까? 지금 어디만큼 가고 계십니까?” 라고요. 그러나 돌아보는 얼굴은 다 당신의 얼굴이 아닙니다.

저는 당신을 쫓고 있었던 게 아닙니다. 기득권, 고정관념, 위선, 이기심, 이런 것을 좇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족 같은, 피붙이 같은 이런 동반자들 때문에 이 길이 이렇게 편했던 거로군요. 그들과의 유대감은 참으로 편안하고 달콤해서 좋았습니다. 그러나 저를 한없이 편안하게 한 그 좋은 것들과의 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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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를 끊지 않고서는 주님의 따를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주여 저에게 그 질긴 유대관계를 끊을 수 있는 칼을 주소서. 기왕에 준 칼은 어쨌느냐고요? 그건 남의 허물을 단죄하는 데 하도 부지런히 써먹어 무디어지고 말았습니다. 그게 아니라 남을 단죄하는 데는 칼날을, 저를 단죄하는 데는 칼등을 쓰고 있기 때문이라니요?

오오, 주님 어찌 그리 무서운 말씀을…. 너무 무안하여 숨을 곳을 모르겠나이다.

이 고해에서 익사하지 않은 까닭

- 예수님은 베드로를 믿고 깊이 사랑하셨습니다. 약점까지 포함한 있는 그대로의 베드로를 사랑하셨습니다.

■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마태 20장 17-22절)

도시의 대기오염이 극에 달했다는 보도 끝에 한 차례 큰 비가 오고 나서였다. 외출을 하려는데 그렇게 상쾌할 수가 없었다. 가로수 이파리는 막 목욕을 끝낸 피부처럼 싱그럽게 빛나고 있었고, 먼 산들은 수채화처럼 산뜻하고 선명해 보였고, 인도의 보도블록은 먼지 하나 없이 정결하고 공기는 심호흡을 하고 싶게 감미로웠다. 이 거대한 도시의 구석구석은 물론, 천만 인구가 쓰고 사는 대기층까지 이다지도 깨끗이 청소 한다는 것은 신의 능력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 후 곧 장마가 졌지만 늘 이맘때 졌음으로써 이 땅에 벼농사가 발달했다는 걸 생각할 때, 장마 또한 경건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문득 다음과 같은 워즈워스의 시가 생각났다.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 내 마음 뛰노나니 / 내가 어렸을 때 그러하였고 / 어른이 된 지금도 그러하거늘 / 만일 늙어서 그렇지 아니할 진대 / 차라리 나를 죽게 하소서 /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원컨대 나의 하루하루를 / 타고난 경건으로 이어가게 하소서.

자연과의 교감으로 동양에서도 널리 사랑받고 있는 이 영국의 계관시인은 어린이가 어른의 아버지인 까닭을 자연에 대한 천성의 때묻지 않은 경건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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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찾고 있다. 천성, 즉 타고났다는 건 뭔가? 그거야말로 신이 인간에게 공평하게 주어서 내보낸 신의 산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요새 우리어린이들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는 것들은 하늘의 무지개나 별자리도, 누가 보건 말건 열심히 꽃 피고열매 맺는 들꽃의 애련함도, 미운 번데기에서 방금 비상한 아름다운 곤충의 첫 날갯짓도 아니다. 남한테 이기고 남보다 앞서가는 아이를 만들어야겠다는 어른들의 욕심과 과학 기술에 대한 맹신은 과학도 자연의 이치에서 나왔다는 건 저만치 덮어두고, 오로지 과학이 만들어 낸 도구에 길들이도록 교육시키는 데 급급하고 있다.

그 결과 자연은 완전히 어린이들로부터 소외되고, 컴퓨터 게임속의 가상 세계만이 아이들의 전부가 되고 말았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아버지, 저희들을 통해 당신을 나타내 보이실 수 있도록 저희들을 철없고, 순하고, 정직하고, 깨끗하고, 겸손한 본바탕으로 돌아가게 하소서.

■ 서 말의 구슬보다 한 톨의 씨앗으로 족하게 하소서

-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서서 마침내 나한테 온전하 게 고침을 받으리라. (마태 13장 1-23절)

성경 말씀을 무슨 복음 몇 장 몇 절에 나오는 말씀이라는 것까지 빠싹하게 외고 있는 사람을 보면 여간 부러운 게 아닙니다. 마치 학교 다닐 때 반에서 전 과목에 걸쳐서 막히는 것 없이 공부 잘하는 아이가 무작정 부럽고 존경스럽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도대체 어떤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 상상을 해볼 때, 아무리 미련한 머리로도 예수님 말씀과 하신 일을 남김없이 외우고 있는 사람일거란 생각이 들지는 않습니다. 하늘나라 들어가는 관문에도 지능이나 암기 능력을 시험해 보는 고사장이 있을 것 같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은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라는 구절입니다. 그밖에도 물론 좋아하고 어루만지고 음미하는 구절이야 많지요. 그러나 가장 좋아하는 말조차도 그 말씀대로 행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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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많고 잘난 사람들과 유쾌하고 고상한 대화를 즐기노라면 이 세상에 못사는 사람, 고통받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생각조차 싫어집니다.

발 고린네 나는 사람은 내 집에 들이기 싫고, 버스나 전철 안에서는 땀내나는 사람 옆에 서는 것도 싫고, 정체모를 사람에게는 콘크리트처럼 딱하게 굽니다. 그게 제 정직한 마음입니다.

저는 예수님의 말씀을 매우 귀하게 여기고 사랑합니다. 보석처럼요. 그러나 생명으로 비긴다면 한 알의 보석이 어찌 한 톨의 밀알만이라도 하오리까? 움트지 않은 신앙을 어찌 참 신앙이라 하겠습니까?

주여, 생명으로 움트라고 뿌리신 넉넉한 씨앗 중 겨우 몇 알을. 그것도 고작 구슬처럼 겉에다 달고 싶어 하는 이 어리석고 딱딱한 마음에 작은 균열이라도 가게 하소서. 저에겐 그것이 곧 기적이 되겠나이다.

■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싶은 근원적 물음

- 하늘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에 비길 수 있다. (마태 13장 44-52절)

시골로 이사해서 텃밭농사를 하고 있는 친지 예기를 다시 한 번 해야겠다. 어느 면으로 보나 전형적인 서울내기인 그들이 어느 날 갑자기 서울 살림의 일부를 정리해 시골로 내려가는 걸 본 주위의 반응은 보나 마나 땅 투기가 목적일 거라는, 다분히 냉소적이고 속물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란 것이 곧 드러났다. 그는 학교 때문에 서울에 남겨 놓았던 아이들까지 전학을 시키고. 부부가 함께 가지고 있던 좋은 직장을 그만 두고 남편만 시골서 통근할 수 있는 직장으로 옮겼다. 원래의 직장보다 혹사를 덜 당하는 대신 보수도 낮고 끗발도 별로 없는 직장이라고 했다. 일부 남겨 놓았던 서울 살림을 이렇게 완전히 정리하기 까지 아이들의 동의를 얻는 데도 일 년 가까이 걸렸다니 남이 그들의 처사를 쉽게 이해할 리 만무했다.

그런 결단을 내리게 된 동기를 그들은 너무도 단순하게 말했다. 어느 날 문득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될 것 같더라는 거였다. 누구나 사노라면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싶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자기가 정말 원하는 것을 발견하긴 쉽지 않다.

사람이 호강에 겨우면 사서 고생한다는 말이 있긴 해도 그들이 고생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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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위해 잃은 건 너무도 막대했다. 그들이 그때까지 이룩하고 소유한 거의 모든 것을 희생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들 그들이 미쳤다고도 하고, 곧 후회할 테니 두고 보자고 벼르기도 했다.

그러나 후회하는 것하고는 달랐다. 그들에게 정신적으로 충족된 사람 특유의 근원적인 명랑함이 있었다.

어쩌면 저렇게 맑고 맑을 수가 있을까? 은근히 샘이 나면서도 어느 틈에 그들의 명랑함이 나에게도 어느 만큼은 옮아 붙은 것처럼 느끼곤 한다. 그집 사는 걸 보고 오면 며칠은 괜히 기쁘고 살맛이 난다. 물론 갈 때마다 무공해 채소를 얻어 오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그건 핑계일 뿐, 진짜 매력은 그 집 특유의 근원적 기쁨이 전염성에 있었다.

지지리도 고생만 하면서도 행복해 보이는 그들이 왜 그렇게 부러운지 우리는 그까짓 손바닥만 한 밭에 보물이라도 묻혀 있더냐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비아냥거리는 것으로 질투심을 대신하고 있다.

■ 측은지심

-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 마태 14장 13-21절)

예수님은 바리사이파 사람들로부터 흉을 잡힐 정도로 아무하고나, 세리나 창녀, 죄인들과도 거리낌 없이 음식 들기를 즐기셨습니다. 불의와 위선에 추상같이 노하시고, 병들고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의 장엄한 모습도 물론 우러러 좋아합니다만 아무도 층하하지 않고 고루 식탁에 앉히시고 식사를 즐기시는 소탈한 모습을 상상할 때처럼 예수님이 친근하게 느껴질 적도 없습니다. 너무 친숙해서 지금이라도 우리 주위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는 현존하는 분으로 느끼게 될 뿐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의 육신을 한 신비가 헤아려질 듯도 합니다.

즉 식사를 더불어 함으로써 미천한 이는 높이시고 죄인은 용서하고자 한 높고 깊은 포함된 것이 아니었을까요. 돌아온 탕자를 맞아 기쁨에 넘친 아버지의 외침도 너를 용서해주마, 가 아니라 크게 잔치를 베풀자 였습니다.

잘못한 아들을 아주 잘 먹이고 싶은 아버지의 마음은 용서는 이미 하고난 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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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만찬이 가장 슬프고 숙연한 식사라면, 가장 장엄한 대 만찬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다 먹이고도 남은 기적의 만찬이 될 것입니다. 그건 기적이 아니라 군중들이 각자 몰래 소지하고 있던 먹을 것을 내놓았을 거란 설도 있습니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기적에는 틀림이 없지 않을까요. 물질이란 나누면 나눌수록 적어진다는 엄연한 수학적 진리를 뒤엎고 나누면 나눌수록 많아지는 걸 보여준 실로 감동적인 기적이고말고요. 그런 기적에 앞서 예수님이 행하신 일은 사람의 고통 중 가장 큰 배고픈 서러움을 마음속 깊이 측은히 여기시는 마음이었습니다.

■ 이 고해에서 익사하지 않은 까닭

-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마태 14장 22-33절)

영세받기 전에는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는 이들 중에서 예수만 잘 믿게 되면 아무것도 걱정할 게 없다. 믿음으로 못 고칠 병도 없거니와 믿고 매달리면 망해가던 사업도 불 일듯 일어나게 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게 제일 듣기 싫었다. 그런 식의 신앙을 혐오스러워했을 뿐 아니라 경멸까지 하지 않았나 싶다.

내가 신자가 됐다고 해서 불의의 재난이나 고통이 결코 나를 비켜가지 않았고 그럴 때마다 기도도 간절히 해보았지만 기적을 체험해 보진 못했다. 열심히 기도하면 안 들어 주시는 게 없더라는 남들의 신앙체험이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수님이 불치의 병을 고치실 때마다 한 번도 당신이 고쳤노라고 뽐내지 않으시고, 네 믿음이 그 병을 고쳤다고 하신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고 정말 그랬을 거라고 믿으며, 물 위를 걸으셨다는 것도 베드로가 잠깐이나마 물위를 걸었다는 것도 사실이라고 믿고 있다.

나도 그런 불행을 눈앞에 두고 정말이지 열심히 기도했다. 현대의학으로는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았을 때 누가 마음으로부터 간절히 기도하지 않겠는가.

이런 내 기도에는 손톱만큼의 거짓도 없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주님이 정말로 그 병을 고쳐주시리라고 믿은 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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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속 깊이에는 이미 그 병이 나을 수 없는 병이라는 의사의 말이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나는 주님의 자녀인 동시에 과학의 신봉자였다.

사람이 아무도 서서 물위를 걸을 수 없다는 것은, 사람은 누구나 안 죽을 수 없다는 것만치나 예외가 없는 진리건만 감히 그렇게 생각할 수 없는 건 체험 때문이다.

바다가 공포스러운 것은 기상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만은 아니다. 허무의 심연, 불운의 암초, 불안의 노도, 절망의 농무, 자포자기의 격랑 또한 무수히 맞닥뜨려야 한다. 아직도 익사하거나 떠내려가지 않고 최소한의 인간다움이나마 유지한 채 거의 피안을 바라보게 되었음은 아슬아슬한 고비마다 손을 내밀어준 분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건 나의 가장 값진 신앙 체험이다.

■ 예수의 사랑법

-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마태 16장 13-20절)

작명소가 꾸준히 성업 중인 걸 보면 이름에다 포함 시킬 수 있는 부모의 욕심 중에서 좋은 운명도 빼놓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예전엔 가문에 따라 항렬자라는 것이 따로 있어서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이름자는 한 글자 밖에 안 남게 되어 그 한 글자에다 온갖 정성과 기원을 다 기울였지만 항렬자는커녕 성씨도 없는 노비들의 이름은 순 우리말로 된 것이 많았습니다.

- 마당쇠, 돌쇠, 딸 그만, 개똥이 등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를 베드로 즉 반석이라고 명명하신 장면은 마치 자식의 이름을 지을 때의 어버이 깉은 자애와 소망과 함께 예수님다운 날카로운 통찰력까지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빛나는 장면입니다.

그때가 마침 베드로가 처음으로 예수님께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신앙 고백을 한 직후라 모처럼 마음에 든 말을 한 제자가 신통해서 즉흥적으로 지어준 이름 같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어디 아부하는 말을 좋아할 분입니까? 그리고 왜 하필 반석이겠습니까. 성경의 기록에 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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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베드로는 우리네 보통 사람과 다름없이 겁이 많고, 상황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마음이 잘 흔들리는 약점 투성이의 인간에 불과합니다. 실로 반석과는 얼토당토 않습니다. 베드로가 그런 줄 알면서도 하필 반석이란 이름을 내리신 건 반석처럼 굳건하기를 바라시는 소망과 함께 약하디 약한 그의 인간성을 반어적으로 표현하신 것이 아닐까요?

결국 예수님은 인간이 얼마나 약하다는 것까지를 포함해서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꿈이 없다면 그건 진정한 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그리고 우리인간 모두에게 거는 꿈은 약한 듯하다가도 때에 따라서는 옳은 일을 위해 목숨을 내던질 수 있는 용기, 양심의 자유,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요? 예수님의 꿈이 마침내 베드로에게서 이루어졌듯이 저희들에게서도 이루어지소서.

■ 헤아릴 길 없는 신비

- 너는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마태 16장 21-27절)

이런 옛날이야기가 있습니다. 벼슬이 높고 돈도 많은 명문대가 댁에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손이 늦어 걱정하던 차에 태어난 장손이었습니다. 고추가 달린 것만도 황홀할 텐데 금상첨화로 관옥같이 잘생긴 아이였습니다. 이 크나큰 경사에 어찌 큰 잔치가 없었겠습니까.

삼칠일에 초대된 하객 중에는 일가친척이나 동네 사람은 물론 그 나라에서 이름난 학식과 덕성을 겸비한 당대의 현자들도 다수 포함돼 있었습니다. 태어난 아기의 장래에 대한 현자들의 덕담을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맛 좋은 음식과 향기로운 술로 흥청망청 즐기고 난 후 마침내 아기를 대면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모두 다 입의 침이 마르게 아기의 장래를 축복했습니다.

마침내 현자들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첫째 현자 : 높은 벼슬에 막강한 권력

둘째 현자 : 선대의 몇 배 가는 갑부

셋째 현자 : 백세토록 건강하게 장수 할 것을 기원

현자들은 넘치도록 많은 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직 덕담을 안 한 현자가 남아 있었습니다. 주인이 그에게 덕담을 권했습니다. 그러나 그 현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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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가 안 와서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거였습니다.

불행하게도 그 현자는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아기의 장래에 대해 알고 있는 가장 확실한 진실은 그도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 집에서 두들겨 맞고 쫓겨났습니다.

인간은 시간적으로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다는 불안한 존재이므로 더 불확실한 예언도 불길한 건 다 피하고 보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게 인간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당할 고난을 확실하게 내다보면서도 아버지에 의해 규정된 인류 구원의 길이었기 때문에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나 베드로한테 부리신 변덕을 보면 또 너무도 인간적이십니다. 하느님의 아들이면서도 인간의 몸을 취한 당신의 신비는 헤아릴 길이 없군요.

■ 내 이름으로 모인 곳

-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마태 18장 15-20절)

아주 오래 전에 본 영화인데 지금까지도 못 잊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잠수를 주제로 한 영화였다고 기억하는데 “잠수부에게는 어느 만큼 깊게 잠수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떡하면 다시 수면으로 떠오를 수 있는 최대 깊이 까지 잠수하느냐가 문제이다.” 라는 뜻의 말이었다.

그 말이 자주 생각나는 건 세상이야 어찌 돌아가든, 이웃이야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살든 조금도 개의치 않고 자기 천착에만 편입되어 몰두하는 경우를 볼 때도 그가 고고하다는 생각보다는 앞서 말한 짧은 대사가 더 생각나곤 한다.

자기가 속한 사회라는 수평적인 관계로 돌아올 수 없을 정도로 그 문제에만 몰두한다면 거기서 발견한 진리가 독선에 불과할 수도 있다.

“너희 중의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모아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든 다 들어주실 것이다. 단 두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오늘날까지도 교회야말로 예수님이 현존하는 거룩한 장소라는 굳건한 믿음의 근거가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고립돼 있으므로 빠지기 쉬운 이기심, 독선, 독재에의 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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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지양하고 이타심, 공동선, 민주주의에 높은 가치를 두도록 우리를 고무시키는 힘이 있다. 그래도 혼자 착하게 살면 되지 교회는 나가서 뭘하냐고 말하는 사람한테 교회에 나와야 구원 받는다고 설득하는 데 자주 인용되는 말씀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늘 보잘것없는 군중 사이에 계셨지만 중요한 고비에는 제자들과도 떨어져 고독하게 아버지와 만나곤 하셨다. 우리에게 아름다운 산상수훈 중 단식에 대한 가르침에서도 단식하는 것을 남에게 드러내지 말라고 하셨다. 남이 알게 풍기면서 하는 것을 위선자라고 하신 것만 봐도 정말 절실한 기도는 외롭게 하라는 뜻이 담겨 있을 것이다.

■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를 해 주어야 합니까?

(마태 18장 21-35절)

신자가 아닌 이들이 기독교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 중 가장 흔한 오해는 아마 용서와 회개에 대해서가 아닌가 싶다. 교인이기 때문에 더 착하게 살겠지. 혹은 더 정직하려니 하고 신뢰해주는 경우보다는 저들은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을 테니까 옳지 못한 짓을 예사로 할 거라고 여기는 경우가 더 많다. 심지어는 예수쟁이는 용서받을 수 있다는 전제하에 나쁜 짓을 밥 먹듯이 할 수도 있는 사람이라고 비웃는 이까지 있다.

베드로가 예수님한테 가서 제 형제가 저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느냐고 묻고 나서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하고 덧붙인다.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신다. 거의 무조건적이고 무진장한 용서를 설하신 것이다. 그 대목만 읽을 때 우리의 잘못에 대해 기독교처럼 후한 종교도 없다.

또 이 말은 비신자들이 주님 주님, 하고 용서를 빌 요량으로 나쁜 짓을 비신자보다 훨씬 수월하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빈정거릴 수 있는 근거가 됨직한 말씀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말씀을 한 번만 새겨들으면 우리더러 무진장 용서해주라고 하셨지 우리를 무진장 용서해주겠다는 말씀은 결코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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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우리가 알아듣기 쉽게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지만 그 모든 길은 결국은 주기도문을 통하는 길이었다. “우리가 이웃을 용서해야 하는 까닭은 우리가 무진장 용서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용서받고 싶으면 먼저 용서할 줄 알아야 한다.”이렇게 말하긴 쉬워도 실행하기 어려움이 곧 우리에게 하늘나라가 멀기만 한 까닭도 되리라.

■ 주님의 잣대

-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루카 9장 23-26절 )

성경을 처음 읽었을 때 너무 이치에 맞지가 않아서 분노마저 느꼈던 구절이 바로 하늘나라를 포도원 일꾼과 품삯에 비유한 마태오 복음 20장 1-16절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가장 좋아하는 말씀 중의 하나가 되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참을 수 없는 부조리는 결코 의롭고 높은 정신, 근면한 이, 착한 이가 잘살고 대접이나 존경을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라는 점이다. 만약 이 세상이 일한 만큼 잘살고 의로울수록 존경받는 공평한 사회라면 하느님에게 호소하여 의를 구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바로 여기가 천국일 테니까. 죽은 후에라도 심판이 있고 하늘나라가 있다고 믿고 싶은 건 바로 이 세상이 불공평하기 때문이었다.

포도원 일꾼이라면 몸 힘 하나만으로 식구를 먹여 살려야 하는 막노동꾼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 임금을 온종일 뼈 빠지게 일한 사람이나 나중에 나와서 조금 일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적용한데 있다. 포도원 주인이 늦게 나온 사람을 처음부터 탐탁하게 여긴 것은 아니다. 왜 하루 종일 빈둥거렸느냐고 물었고 그들은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안 주었다고 말한다. 왜 그들은 온종일 일을 못 얻었을까. 아마 옷차림이 유난히 초라해 보였을 수도 있고 몸이 남보다 작거나 약해 보였을 수도 있으리라. 아무튼 남을 밀치고 앞으로 나서서 주인 눈에 띌 만큼 영악하고 똘망똘망한 사람은 못 되었을 것은 쉽게 짐작이 간다.

그 일꾼이 비실비실하면서도 초조한 모습과 그를 바라보는 예수님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연민의 시선과의 만남은 슬프고도 아름답다. 예수님은 그 꼴찌 인생들에게도 똑같이 일용할 양식을 주라고 말씀 하신다. 마치 자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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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햇빛과 비바람을 내리듯이, 그것이 곧 사랑이고 사랑은 공평 이상의 가치인 것이다.

■ 말과 행동

-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다.

(마테 21장 28-32절)

행락철로 접어들자 말 못하는 자연이 큰일이다.

개인적으로 얘기를 해보면 우리 중 아무도 자연보호 주의자가 아닌 사람이 없다. 식자들 사이에서뿐 아니라 보통 사람들끼리도 자연을 함부로 오염시키는 자들에 대한 성토가 시작됐다 하면 입심이 모자랄 정도로 한도 끝도 없이 계속될 때가 많다. 그만큼 우리 환경에 대한 위기의식이 팽배해 있다는 증거다. 그럼 도대체 행락 철 그 많은 쓰레기는 누가 버렸단 말인가.

환경오염이 심각하다고 아무리 떠들어도 행동이 뒤따르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나. 떠드는 건 누군가를 깨우쳐주기 위해선데 모르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다. 행동을 안 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티끌 모아 태산은 재물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다. 쓰레기 더미가 아무리 어마어마해도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 우리 모두의 한 움큼이 만든 것이다.

떠들어대기로야 민주주의 하자고 떠든 것처럼 요란하고 지속적인 아우성도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민주투사가 더 비민주적인 사람으로 구는 것을 쓰디쓴 마음으로 지켜봐야 할 적도 적지 않다. 민주주의가 개인의 권리나 자유를 존중해줘서 좋은 제도라면, 개개인이 민주화되지 않고서는 결코 실현될 수 없는 제도라는 소리이기도 하다.

■ 내 친구 이야기

-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

(마태 21장 33-43절)

내 친구 중에 팔자가 좋기로 소문난 이가 있다. 유복한 집에 태어나 고생 모르고 사랑만 받고 자라서 부잣집 남자와 결혼하고 아들, 딸 낳고 성공한 남편의 사랑받는 아내로, 똑똑한 자녀의 존경받는 어머니로 지금까지 고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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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걸 모르고 노후를 맞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위에서 팔자까지 들먹여 가며 그를 부러워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환갑이 될 때까지 손수 밥 한 번 지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노동이라는 걸 모르고 살아왔다는 데 있다. 워낙 잘 사는 집이기도 했지만 그에게는 늘 부리는 사람이 따랐다. 가정부를 식모라고 업신여기던 시절에도 그의 집에 가면 웬만한 집 새댁처럼 깔끔하게 차려입은 식모가 입에 혀처럼 바지런하게 시중을 들고, 식모가 한 음식이 대갓집 찬모의 솜씨처럼 맛깔스럽고 고급스러웠다. 우리의 60, 70년대는 식모가 흔할 때였지만 그만큼 살림이 번잡스러울 때여서 내 친구의 경우는 모두가 부러워할 만했다.

식모가 가정부로, 가정부가 가사 도우미로 격상된 후까지도 그 친구는 여전히 사람을 부리고 살 수 있는 경제력을 유지하더니 90년대로 들어서기 전 맞이한 며느리는 또 어쩌면 그렇게 유능한 살림꾼인지, 그의 팔자는 정말 죽는 날까지 빗자루 한 번, 행주 한 번 안 들고 말 것 같았다.

그러니 맏아들이 미국 지사장으로 발령이 나자 노부부만 커다란 집에 달랑 남게 되었다. 그 밑의 자녀들은 이미 그 전에 외국에 나가 있었다.

시간제 파출부를 쓰게 되었다. 그의 마음에 드는 파출부란 있을 수 없었다.

사흘이 멀다 하고 갈아들이는 파출부 중에 서도 가장 일을 잘 못하는 파출부가 걸린 날이었다. 소정의 수고비만 주어 보내려는데 그가 현관에서 가지 않고 미적거리고 있었다. 뭐 할 말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언제 또 올까요?” 라고 묻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와의 대화속에서 그 파출부 한사람의 어깨에 병든 남편과 어린 자식들의 밥줄이 걸려 있음을 알았다.

그 후 팔자 좋은 그 친구는 그 파출부를 단골로 쓰면서 이제는 칭찬이 자자하다. 그 파출부가 그동안 일을 잘하게 돼서가 아니라 여전히 일을 못하기 때문에 주인이 해야 할 일을 여기저기 안 흘려놓은 데가 없다. 그게 그렇게 좋다는 것이다. 내 친구는 그 일 못하는 파출부에 의해 처음으로 자기가 이 집안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걸 발견했다는 것이다.

■ 어떤 교만

-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많지만 뽑히는 사람은 적다. (마태 22장 1-1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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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자주, 그야말로 귀에 못이 박이도록 설하신 말씀은 하늘나라가 가난하고 굶주리고 억눌린 사람들의 것이라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연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밑바닥 인생을 깊이 사랑하신 나머지 제일먼저 그들에게 해방을 선포하셨고 하늘나라가 그들 가운데 있다는 희망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모든 계명을 충실하게 지켰기 때문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데 하등 부족한 게 없다고 믿는 젊은이들에게도 예수님은 말씀하셨지요, 당신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그러고서야 비로소 하늘나라의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요. 그 말씀에 그만 젊은이는 풀이 죽어 근심하며 물러갑니다. 사실 그 젊은이는 재산이 많았던 것입니다. 포기하기 어려웠겠지요. 예수님도 젊은이가 물러간 후 제자들에게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빠져나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씀 하십니다. 구태여 그 대목이 아니더라도 하늘나라와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는 뜻의 말씀은 예수님이 가장 자주 반복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문득 제가 아는 어느 노총각 생각이 나는 군요. 그는 인물 좋고, 학벌 좋고, 어느 한 군데 나무랄 데 없는 조건을 갖추고 있는데도 아직 결혼을 못했고 변변한 연애 경험도 물론 없답니다.

하기 싫어 안 하는 거면 괜찮지만 갈망하면서도 안 된다니 불행한 노릇입니다. 대학 때 미팅을 해도 애프터 신청부터 딱지를 맞았다니 딱하군요.

딱지를 맞는 이유는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모든 여성이 원하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걸 과신한 나머지, 처음부터 그걸 나타내려고 옷차림에 일부러 신경을 하나도 안 쓰는 척 평소보다 더 데데하게 입고 시큰둥한 표정으로 나가는 버릇이 있답니다. 그의 신경 안 씀은 소탈함이 아니라 계획된 교만과 허세의 표현이었던 것이지요. 그런 남자를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딱지 맞아 싸죠.

■ 빈 무덤

-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 28장 16-20절)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먼저 발견한 건 여인들이었습니다. 여인들이 제일 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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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무덤에 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덤에서 곧장 예수님의 부활을 본 건 아닙니다. 여인들이 부활보다 먼저 확인한 건 빈 무덤이었습니다. 시신이 없는 빈 무덤은 공허의 극치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상징적입니까. 예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 있지 않다는 장엄하고도 충격적인 표시입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던 이들이게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건은 너무나 믿어지지 않은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직접 죽음을 목격한 사람들뿐 아니라 소문으로만 들은 사람이라고 해도, 예수님이 선포한 나라의 도래를 믿고 기다린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의 죽음에 의해 빈껍데기처럼 허망하고 절망스러워진 마음을 가누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흔적도 없이 무덤을 비우셨습니다. 인종을 초월해 모든 민족 가운데 살아 계시기 위해, 시간을 초월해 세상 종말까지 계시기 위해선 그럴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그분이 제자들을 통해 우리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분은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그분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살아계십니다. 그분의 현존을 느끼는 건 우리가 사는 보람이기도 하고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타락한 세상에서 그분의 현존을 느낀다는 건 고통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종종 그분을 부정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지만 그분을 부정하고 나면 이 세상의 무의미성과 사람이 버러지처럼 비천해지는데 그만 소스라치고 맙니다. 왜 그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에서조차 예수님의 현존을 증명한 사람이 있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마태 22장 34-40절)

휴전 후 얼마 안 돼서니까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게 어려울 때였다. 생활비에서 쌀값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고, 밥걱정 안 하면 그게 부자였다. 내가 시집간 동네는 열서너 평 정도의 고만고만한 기와집이 처마를 맞대고 늘어선 전형적인 서울 서민층 동네였다. 골목이 좁아서 한 골목 안에서는 서로 사는 형편이 뻔했다. 어쩌다가 불고기 꺼리를 사도 나누어 먹기에는 넉넉지 못하고 혼자 먹자니 냄새가 남의 집으로 넘어갈 것이 송구스러워 숯불에 굽지 못하고 냄비에 볶아 먹던 일이 지금도 가슴 따뜻한 옛날 얘기처럼 회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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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빈곤할 때라 비록 쇠고기를 나누어 먹지 못했지만 그래도 일 년에 몇 번씩은 음식을 나눌 기회를 서로 마련하곤 했었다. 그 중에도 음력 시월에 날을 받아 고사를 지내고 나누는 고사떡이 가장 풍성했다. 길고긴 초겨울 밤 출출할 무렵 뜨끈뜨끈한 고사떡은 어린이 뿐 아니라 어른도 은근히 기다려지는 맛있고 든든한 먹거리였다.

그래서 고사떡 할 형편이 안되는 집도, 또는 그런 것을 해 본 적이 없는 새댁도 남에게 얻어먹은 것을 갚기 위해서라도 고사라는 걸 지내야 마음이 편해지곤 했다. 그러니까 그 시절의 고사는 미신적인 기복의 의미보다는 이웃과의 나눔과 친교의 의미가 더 깊은 것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에도 어느 날 사건이 생겼다. 새로 이사 온 집에 고사떡을 드렸는데 다음날 아침에 보니 떡이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었던 것이다. 먹을 거라고는 콩나물 대가리 하나도 안 버릴 때, 여봐란 듯이 떡을 버렸으니 동네 사람들이 놀랄 수밖에, 누구의 입에서 나왔는지 “저 집은 지독한 예수쟁이래, 아이들이 모르고 받아 놓은 떡을 어른들이 귀신 들린 떡이라고 저렇게 내다 버렸대.” 하는 소리가 떠돌았다.

그날부터 그 집은 이웃으로부터 소외됐고, 예수쟁이라는 말은 혐오감을 불러 일으켰다.

설사 그 떡이 귀신한테 빈 떡이라 해도 예수그리스도를 이 세상 모든 가치 기준의 최고로 삼기만 했다면 그 떡을 다만 귀한 음식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으련만 하는 아쉬움 때문이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한 번쯤 의논하는 마음만 있었어도 그렇게 하진 못했으리라.

■ 최초의 경이

- 항상 깨어 있어라 (머태 25장 1-13절)

이미 가을이 깊었습니다. 엊그저께는 친구하고 전화하다가 단풍 얘기가 나왔습니다. 지리산 청학동의 어느 골짜긴가에 기막히게 아름다운 단풍길이 있답니다. 그 길이 어찌나 황홀하던지 천국으로 통하는 길이 저러하다면 지금 죽어도 한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랍니다. 전화를 끊고 보니 우리 집 부엌 창분 밖으로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보였습니다. 그날 갑자기 물든 게 아니련만 내 눈에 띈 건 그날이 처음이었습니다. 아! 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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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있으면 으스스 몸을 떨며 그 고운 잎을 아낌없이 떨구겠지요. 은행나무가 헐벗고 나면 그 밑의 보도가 얼마나 아름답고 푹신한 황금빛 융단을 깔게 되는 지 우리는 압니다.

가을은 이렇게 우리가 마중을 가도 오고, 안 가도 옵니다. 지리산이나 설악산을 안 가도 부엌문 밖에 은행나무가 늘어서 있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이에게 가을은 어디서 신호를 보내며 아! 하는 경탄을 자아냅니다. 때로는 붉은 감잎 하나로도 천하의 가을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김영랑 시인도 이렇게 읊었습니다.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붉은 감닙 날러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들것네.”

자연의 신비와 우리의 느낌이 만나 ‘아!’ 또는 ‘오메’하는 순간이 신의 축복이고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 했다 싶은 감사의 시간입니다.

어렸을 때 생각이 납니다. 우리 시골집 뒤란에는 꽃나무가 참 많았는데 백일홍이나 맨드라미처럼 줄창 피어 있는 꽃이 있는가 하면 나팔꽃이나 분꽃처럼 아침에만, 또는 저녁에만 피는 꽃도 있었습니다. 나팔꽃은 아침에 아무리 일찍 일어나도 벌써 피어있으니 할 수 없지만 분꽃은 그 피는 모습을 내눈으로 한번 똑똑히 봐두고 싶었습니다.

어느 순간 갑자기 꽃봉오리가 활짝 벌어질 줄 알았는데 지키고 앉았으니 왜 그렇게 안 벌어지는지요. 나는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쳐서 약간 느슨해진 순간이 지니고 다시 와보니 분꽃은 “용용 죽겠지” 하는 얼굴로 활짝 피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글쎄 내가 억지로 피우려 했던 한 송이만 피지 못하고 늘어져 있었습니다. 어른들이 손독이 올랐다고 하더군요. 내 어린 손도 독이 되는데 어떤 인자한 힘이 꽃을 피웠을까? 그건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내 최초의 경험이었습니다.

■ 다양해서 아름다운 세상

- 있는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해지고 없는 사람은 있는 것 마저 빼앗길 것이다. (마태 25장 14-3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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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속담에 “저 먹을 건 타고난다.”는 말이 있지요. 그건 먹을 것이 넉넉하지 못한 집에서 자식 복만 많을 때, 태어난 이상 굶어 죽는 일이야 있을라고, 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고 싶을 때 흔히 쓰던 말이지요. 그러나 자식을 낳아 사람 노릇 시키기까지 먹이는 것이 다가 아닌 세상이 되고, 또 지구의 자원은 유한한데 인구만 무진장 늘어난다는 것은 인류의 자멸을 재촉할 게 뻔하다는 걸 인식하게 된 후부터는 그 말은 마치 우리가 못 사는 원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웃기는 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먹이고 입히는 건 서로 나눌 수가 있지만 오직 하나밖에 없는 최고 자리는 싸우고 빼앗아야 되니까요. 나눔을 통해서 우리는 화해에 도달할 수 있지만 싸워서 이기는 일은 모든 또래들을 적으로 돌리지 않으면 안 되는 가혹하고도 고독한 일입니다.

먹을 게 넉넉하면 싸울 필요가 없을 줄 알았는데 도리어 경쟁은 더욱 치열해집니다. 의식이 풍족해지니까 명예나 권력을 얻고 싶고, 이미 자신이 그걸 얻기엔 늦은 부모가 자식으로 인해서 빛나고 싶고 으스대고 싶은 욕망이 자식을 어려서부터 무한 경쟁의 싸움터로 밀어 넣고 있습니다.

옛날 속담이라고 무시할 게 아니라 다시 한 번 “저 먹을 건 타고난다.”로 돌아갈 수는 없을까요.

■ 가장 부끄러운 고백

-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 25장 31-46절)

주님, 저는 이달에 한 번도 주일미사를 거르지 않았습니다. 속이 상할 때나 무슨 일이 뜻대로 안 될 때는 주님 주님, 하면서 오로지 주님하고만 의논을 했습니다. 친척이나 친구 중 병든이나 힘든 일을 당한 이, 수능 시험을 치는 아이들을 위해 생각날 때마다 화살기도도 열심히 바쳤습니다. 이만하면 주님, 착한 일을 한 초등학생이 학교에서 타 오는 상장감이 아닌가요? 주님은 상장을 주시지는 않지만 별의별 쑥스러운 비밀을 다 털어놓아도 남한테 전하실리 없으니 참으로 좋으신 분입니다.

좋으신 주님을 믿고 한 가지 고백을 더 하겠습니다.

백화점 슈퍼에서 물건을 살 때에는 누구나 그렇겠지만 한 푼 깎을 엄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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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내지요, 깎기는커녕 물건 값이 얼마인지도 확인해 보지도 않고 대충 필요한 걸 바구니에 담게 됩니다. 그렇게 굴다가도 전철역 앞 노점에서 할머니가 벌여 놓은 푸성귀 하나라도 흥정을 할 때에는 별안간 이악해집니다. ‘고객은 왕’노릇을 제대로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할머니 앞에서, 다 팔아야 일이만 원어치 밖에 안 되는 대도요.

주님 제가 만일 주님께 심판 날 “제가 앉을 자리는 왼편입니까. 오른편 입니까?”라고 묻는다면 저는 죄인 중에도 가장 얼굴 가죽이 두꺼운 죄인이 되겠지요. 주여 저를 불쌍히 여기시고 부끄러움이 뭔지 깨닫게 하소서.

■ 외치는 소리

-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라. 그러면 죄를 용서받을 것이다. (마르 1장 1-8절)

세상이 어떻게 이렇게 빠른 속도로 좋아지는지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다. 집에 전화를 놓고 좋아서 어쩔 줄 모르던 게 삼십여 년 전이다. 전화 있는 집이 얼마 안 돼 큰 부자에다 특권층까지 된 기분이 들던 게 엊그제 같은데 요새는 중고등학생까지 휴대폰을 갖고 다닌다. 셋방살이에도 집집마다 차 한 대씩은 있던 게 요새는 어린이만 빼고 부부 따로 자식 따로 차를 갖는 집도 적지 않다.

아파트가 생기는 속도도 꼭 장마 뒤에 버섯 돋아나듯 순식간이다. 힘든 일을

이렇게 기계에 내 준 인간은 여유 있게 하고 싶은 일이며 인생을 즐기냐 하

면 그렇지도 않다. 내남 없이 사람은 사람대로 바쁘다. 연탄 갈고 빨래할 때

도, 책도 읽고 꽃 피면 즐겁고 별 보면 가슴이 울렁거린 적도 있었건만, 요

새는 어떻게 된 게 좋은 걸 좋다고 느낄 새도 없을 정도로 바쁘다. 다들 바빠서 방방 뛰니까 시간까지도 덩달아서 바쁘게 흐르나 보다.

설 쇠고 나면 꽃놀이, 여름휴가, 추석, 성탄절이 마치 며칠만큼씩 돌아오는 것처럼 빠르게 순환한다. 평균 수명이 늘었다지만, 시간에도 이렇게 가속이 붙는다면 오래 사는 게 아닌 게 된다.

차량정체로 약속 시간에 늦어지자 서울 한복판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이 맹수만 으르렁거리는 불모의 광야나 다름없이 보이다니.

이럴 때 누구라도 외쳐야하지 않을까. “조금만 더 느리게 조금만 더 못살자.”라고 . 이렇게 급하게 이렇게 잘 먹고 잘살기만 하다가 우린 도대체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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떻게 되는 걸까. 나중엔 인간이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은 실은 우리 자신의 정직한 외침에 귀 기울이기 위해서라도 고요한 밤은 있어야겠다.

■ 두들겨 깨우소서

-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루카 1장 26-38잘)

주님 저는 정말 왜 이런지 모르겠습니다.

성탄절을 앞두고 판공성사를 볼 때마다 마치 제가 아무런 잘못도 없이 야단을 맞아야 하는 것처럼 곤혹스러워 지는 거 있죠. 그러니 고백할 잘못이 생각날 게 뭡니까. 생각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제가 저지른 잘못은 남들이 저지르는 잘못에 대면 새발의 피 같고, 제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가책에다 대면 이 세상은 온통 양심에 털난 사람들로 이루어진 것만 같아 저 정도면 제법 준수한데 뭣하러 마음을 졸여가며 성사를 봐야 하나, 반발하는 마음까지 생기곤 합니다.

저는 주님과 외롭게 단독 면담을 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있지도 않은 가상의 타인들을 불러들여 그들과 비교함으로써 자신의 잘못을 축소하려고 안간힘을 썼던 것입니다. 그렇게 엉터리로 성사를 보고 거리로 나오니 갑자기 외로움이 엄습하며, 미처 헤아리지 못한 잘못들이 줄줄이 생각나더군요. 연말이라 거리거리마다 더욱 풍성해진 쓰레기 더미만 봐도 제가 일년동안 배출한 엄청난 쓰레기가 떠올라서 양심이 켕겼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밥알이나 쌀알을 버리는 건 하늘 무서운 짓이라는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국민소득이 높아지면서 음식 찌꺼기가 자꾸 늘어나고 근래에는 냉장고에서 며칠 묵은 밥 정도는 무심히 쏟아버리는 일도 드물지 않게 되었습니다.

마더 테레사의 말이 생각납니다.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에게 필요한 건 물질적인 시혜보다는 사랑과 관심, 따뜻한 포옹이라고요.” 이거야말로 몇 푼의 후원금을 빠뜨리지 않고 송금한 걸로 면죄부를 삼으려는 저의 털 난 양심을 수치심으로 화끈하게 만드는 무서운 말씀입니다.

2017.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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