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의 독서

2021. 8. 14. 12:38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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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의 독서

- 김형석 교수를 만든 -

■ 김형석 지음

0 1920년 평안남도 대동에서 출생

0 일본 조치대학교 철학과 졸, 연세대학교 철학과 교수

0 사카고대학교와 하버드대학교 연구교수

- 1960년대~1970년대 : 고독이라는 병, 영원과 사랑의 대화, 외 다수의 베스 트셀러 집필

0 저서

<예수> <백년을 살아보니> <선하고 아름다운 삶을 위하여>

<왜 우리에게 기독교가 필요 한가> <교회 밖 하나님 나라>

<기독교, 아직 희망이 있는가> 등

0 연세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현재도 방송과 강연, 집필 등 왕성한 활동

이 책을 읽는 분에게

시람들이 종종 좋은 글을 쓰는 방법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물론 내가 좋은 글을 쓰는 편은 못 되지만, 그때마다 나는 좋은 글을 많이 읽으라고 권한다. 그러면 자연히 좋은 글을 쓰게 될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다독(多讀)과 정독(精讀)의 조화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묻는다. 나는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책을 많이 읽을수록 좋다”고 대답한다. 전공분야의 독서는 자연히 정독이 될 테니까.

또 어떤 이들은 “오늘날과 같은 각종 미디어와 정보사회에 살면서도 예전처럼 독서가 필요한가?”하고 묻는다. 나는 “그렇기에 독서는 더욱 필요하다”고 대답한다. 정보는 생활에 필요한 보도일 뿐 내 삶을 키워주지는 못한다. 신문과 텔레비전 등은 살아가는 데 상식을 제공할 수는 있으나 내 영혼을 살찌게 하고 삶의 내용을 풍부하게 해 주지는 못한다. 역시 독서는 인간적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가장 풍요한 방법임을 의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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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을 품고 반세기에 걸친 세월을 이어오고 있을 무렵, 한 출판사에서 나의 독서 이야기를 정리해 주기를 청해왔다.

그즈음 ‘한우리 독서운동’에 작은 뜻이나마 모으고 있던 때여서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27회에 걸쳐 연재된 내용이기 때문에 적지 않은 양의 원고가 되었다. 연재를 끝내고 이렇게 단행본으로 엮어 독자들 앞에 책으로 내놓게 되고 보니 독자들을 위해 체계적인 내용과 뜻있는 길잡이가 되는 글들을 썼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없지는 않다.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내가 대학 강단에 있으면서 더 많은 관심과 열정을 갖고 있었던 전문서적들은 일반 독자와 호흡이 맞지 않아 대부분 실을 수 없었던 점이다. 또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지금 젊은 세대들이 즐겨 읽는 책들을 취급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독서란 고전적 의미가 있어 값진 것이며 지성적 교양을 갖춘 독자들과 의 대화가 가능할 때 그 가치가 있을 것 같다. 나도 신문에 연재되고 있거나 연재되었던 문학책 등을 여러 권 읽었지만, 그런 책들은 왜인지 재음미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책은 언제나 살아 있어서 객관적 생명력과 의의를 지니고 있을 때 그 가치를 인정받는 것이 아닐까 한다.

이 책을 처음 쓴 2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 자신의 마음이 그렇게 늙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좀 지나친 표현인 것 같지만 나는 책만 손에 잡으면 그 책의 주인공이 되고 책의 내용과 같은 삶을 호흡하게 된다. 20대의 연애 감정에 잠기거나 종교적 고뇌에 빠져 들기도 하며 철학적 사색의 심연에 머물기도 한다.

14살 때 독서를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그 독서가 나에게 젊음과 꿈을 계속 안겨주고 있다는 사실에 한없는 감회와 감사를 느낀다. ‘독서의 길은 영원하다’는 말이 독자들의 고백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2021년 5월 김형석

◎ part 1. 책을 만나 꿈을 키우다

■ 철없던 시절에 만난 톨스토이의 대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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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던 나는 책을 읽는다는 것은 모르고 자랐다. 시골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의 숭실중학에 입학했다. 처음 1년 동안에도 교과서 외의 독서는 모르고 살았다.

<마음 저리며 탐독했던 「전쟁과 평화」>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당시에는 숭실중학과 숭실전문학교 중간에 이층짜리 기와집으로 된 크지 않은 도서관이 따로 있었다. 주로 전문학교 학생들이 이용하는 도서관이었다.

나는 한 선배를 따라 여기저기를 둘러보다가 「전쟁과 평화」라는 3권으로 된 책을 발견했다. 당시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거쳐 만주와 중국 북동부를 침략하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터라,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문제는 전쟁과 평화라고 생각하며 저 책을 한 번 읽어보자는 무모한 욕심을 냈다.

나는 그날 저녁부터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철없는 모험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책에 굶주려 있던 때문이었을까. 나는 무조건 읽어 내려갔다. 일본어로 번역된 데다가 내 일본어 실력도 부족해서 그 내용을 파악하기에는 능력이 달렸다.

그때는 나의 기억력이 왕성한 시기였다. 한국 남자의 기억력은 17세가 절정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어려워서 이해하지 못한 부분도 있었지만 이해할 수 있는 장면과 내용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가장 인상 깊게 남아 있는 주인공은 안드레이 공작이다. 그가 나이 어린 애인과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전쟁터로 나가는 장면, 심한 부상을 입고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 때 나폴레옹을 보면서 유구한 하늘에 비하면 인간이 얼마나 왜소한 존재인가를 느끼는 장면, 누이동생이 목에 걸어준 십자가 메달을 만지면서 삶의 의미를 희구하는 장면, 다시 러시아 군대로 되돌아가 치료를 받은 후 귀족사회와의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참된 삶이 무엇인지 번민하는 모습, 결국은 전쟁이 끝나기 전 모스크바 동북쪽으로 피난을 가다가 영원히 눈을 감는 장면들이 지금도 화면을 보는 것처럼 떠오를 때가 있다.

<전쟁과 평화>에는 작가 톨스토이(L. N. Tolstoy)의 역사관이 상당히 강하게 깔려있다. 지금도 역사나 역사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 책의 내용을 인용해 설명하기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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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속에는 어째서 나폴레옹의 강력한 군대가 패배와 도주의 쓴잔을 마셔야 했는지가 잘 설명되어 있다. 당시 러시아의 사령관은 모스크바를 사이에 두고 프랑스 군대에 강한 반격을 가한다. 그러고는 결전을 끝내지 않고 수도 모스크바를 비워둔 채 동북쪽으로 후퇴한다. 몇몇 부하들이 더 이상 후퇴는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사령관은, “성난 호랑이 면전에서 덤벼드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지혜로운 포수는 그 호랑이의 목덜미에 치명타를 안길 화살을 꽂은 뒤에 어디론가 숨어버린다. 호랑이는 이곳저곳을 헤매다가 스스로 죽음을 재촉하는 법이다.

 

모스크바 앞 산지에서 크게 치명상을 입은 나폴레옹의 군대는 모스크바로 들어와 승리의 개가를 부른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도 잠시, 그들은 곧 후퇴한다. 러시아 군인들에 의해 화염에 휩싸인 모스크바 시가지에는 당장 먹을 것도, 잠잘 곳도 없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승리의 기쁨은커녕 살아남기 위해 앞 다투어 프랑스를 향해 도주하기 시작한다. 그때 러시아의 군대는 군사요지에 잠복해 있다가 프랑스군을 습격해 나폴레옹의 군대를 거의 전멸시켜버린다. 러시아에 승리를 안겨준 것은 광대한 대자연의 위력이었다.

학교 공부는 거의 중단했을 정도로 시간만 허락되면 하루 종일 그 책을 읽었다. 한동안 나는 평양에서 집 가까운 기차역까지 기차로 통학을 한 적이 있다. 기차 안에서는 물론, 기차를 기다리며 정거장에서도 읽고, 시골 논두렁길을 걸으면서도 읽었다.

이렇게 <전쟁과 평화>를 끝내고 나니 나 자신이 인생의 한 고비를 넘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어른이 된 것 같아, 학교 교과서에서 배우는 내용들이 유치해 보이기도 했다.

일본어에 대한 자신감도 생겨 앞으로는 어떤 책도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문학적 감성에 눈뜨게 해 준 「안나 카레니나」>

<전쟁과 평화>를 끝낸 뒤 나는 잠시 방향을 바꾸어 기독교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종교 서적들을 읽었다.

그중에서도 가가와 도요히코의 종교소설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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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한다. 그 책은 ‘사선을 넘어서’, ‘태양을 쏘는 사람’, ‘벽의 소리를 들을 때까지’의 3부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참 신앙과 가치 있는 삶을 느끼게 하는 저자의 <한 알의 밀>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책을 읽으면서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처럼 깊은 감명을 받지는 못했다.

이 밖에 주로 전도(傳道) 문고로 보급되는 짧은 신앙 수기나 전기 같은 책을 주문해 읽었다. 그런 책들은 신앙적인 체험과 고백이 주된 내용이었기 때문에 나의 신앙생활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런데 유감스러운 것은 우리나라 기독교 지도자들이 남겨준 책 중에는 읽을 만한 책이 눈에 띄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상급반이 되면서 다시 톨스토이를 읽었다. 그 당시에는 톨스토이의 <부활>이 유행가의 제목이나 되듯이 보편화 되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춘원 이광수 등이 톨스토이를 업고 계몽주의 운동을 일으켰던 것 같다.

어쨌든 나는 종교적인 몇 권의 책을 끝낸 뒤 다시 톨스토이로 돌아가 <부활>을 읽었다. 그 당시 <부활>은 일본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많이 읽혔던 책이다. 나는 지금도 어째서 그 책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는지 궁금하다. 마치 톨스토이와 <부활>을 모르면 지성인에 끼지 못하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하지만 나는 <부활>을 읽으면서 <전쟁과 평화>에서 느꼈던 감명과 흥분을 얻지 못했다.

그리고 얼마 뒤에 <안나 카레니나>를 읽을 때는 <전쟁과 평화> 못지않은 자극과 감명을 받았다. 그때는 약간씩 문학의 예술성 같은 것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에 톨스토이의 문예적 우월성을 상당히 강하게 느꼈고, <부활>보다 높이 평가할 만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는 지금도 톨스토이와 <전쟁과 평화>, 그리고 <안나 카레니나>를 알게 된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무척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닫게 해준 작가의 작품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 중학교 시절 맛본 한국 문학과 그 작가들

생각하며 사는 습관이 있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으면 우연한 일이 계기가 되어 자기 변화와 성장을 뒷받침해 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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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2,3학년 때 일이다. 전임 선생 대신 한 학기 동안 국어 작문(당시에는 조선어 작문)을 담당했던 전재경 선생이 최학성의 <담요>를 비롯한 몇 작품을 소개하면서 설명해 준 일이 있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나는 문학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되었다.

톨스토이의 작품들을 이미 읽었으나 그것은 독서를 위한 독서라는 편이 맞을 것 같다. 문학에 깃든 예술작품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했었다. 예술로서의 문학을 미처 몰랐던 것이다.

그 일을 계기로 나는 한국 문학에 눈뜨게 되었고, 그 당시까지 전해지고 있던 한국 문학들을 읽기 시작했다.

 

<이광수와 심훈과 김동인의 작품을 읽으며>

처음 읽기 시작한 것은 춘원 이광수의 작품들이었다. <흙>을 제일 먼저 읽은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무정>을 읽고 <유정>을 읽었다. 당시에는 그다지 높이 평가되지 않았지만 오히려 나는 이 <유정>을 열성적으로 읽었다. 친구 안병욱 교수도 <유정>을 가장 감명 깊게 읽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소년기의 우리에게는 뭔가 통하는 점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당시에는 이 소설이 낭만(주의)적 작품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후일에는 그런 생각이 어릴 적의 인상이었던 것을 인정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당시 읽었던 춘원의 여러 가지 작품의 내용은 거의 머릿속에 떠올릴 수가 없다.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인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춘원의 작품을 읽으면서, 그가 계몽주의자로서 우리나라 정신계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과 휴머니즘의 미래를 열어주었다는 점은 분명히 느꼈다.

이상한 표현일지 모르지만, 나는 이광수에게서 ‘작은 톨스토이’ 같은 맥락을 느끼곤 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춘원을 읽은 것은 한국 문학을 읽고 이해하는 데 이정표가 되었다. 고마운 일이다.

심훈의 <상록수>와 <영원의 미소>도 읽었다. 집이 시골이었고 농촌에서 자랐기 때문에 <상록수>는 생소한 느낌 없이 읽었다. 당시 뜻있는 젊은이들 가운데는 농촌으로 가서 조국을 살리자는 꿈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나는 그 두 책을 여름방학 동안 시골집에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여러 해 전, 우리 학생들이게 <상록수>를 소개해 주었더니 그것을 읽은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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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쑥스러울 정도로 소박한 작품이었다고 평했던 기억이 있다. 마치 당시의 젊은이들은 <상록수>처럼 유치한 작품에 심취할 정도로 소박했느냐는 표정이었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유치한 이상주의’를 빨리 버려야 할 사치품으로 여기는 것 같다.

나도 김동인의 단편들을 읽으면서 그 예술적 분위기에 빠져들곤 했었다. 그러나 톨스토이와 같은 대작을 읽은 뒤였기 때문에 깊은 감동은 느끼지 못했으나 그래도 우리 문학과 작품이라는 점에서 애착심 같은 것을 간직하면서 읽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러한 나의 독서 순서가 좋은 편은 못 되었던 것 같다. 그것은 스위스의 알프스산이나 아메리카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로키산맥의 봉우리를 본 사람이 우리나라의 산들을 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숭실학교 시절 이효석 · 윤동주에 대한 회상>

내가 숭실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같은 캠퍼스 동쪽에 있는 숭실전문학교에 국문학자 양주동(梁柱東)과 작가 이효석(李孝石) 선생이 출강하고 있었다. 나는 양주동 선생의 강연이나 글을 읽을 기회는 있었으나 이효석 선생을 직접 대면한 일은 없었다. 가냘플 정도로 깡마른 체구에 영국 신사 차림으로 출퇴근했던 이효석 선생은 마치 누구에게 들키면 안 될 것처럼 조용히 같은 길을 거닐었다고 전해 들었다. 이효석 선생은 일찍 폐환(肺患)으로 세상을 떠났다.

나도 당시에는 이효석 선생의 애독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문학이 예술이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해 준 작가였다. <메밀꽃 필 무렵>은 강원도 일대의 자연과 서정적인 장면들을 보여주는 듯해 인상적이었다.

그 당시 상급반에는 작가 황순원(黃順元)이 재학 중이었고, 시인 윤동주(尹東柱)는 같은 반에서 수학했다. 만일 그때 그런 이들과 친구가 되었다면 나도 상당히 큰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불행하게도 그런 기회를 놓쳤다. 당시의 숭실학교는 어느 정도 미국식 교육으로 운영 되어서 학생들이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었다. 기숙사에 머무는 동안에 깊은 우정이 싹텄고, 신앙의 동지들이 뭉쳤는가 하면, 음악 · 체육 · 문학의 정신적 동지들이 생기곤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 내가 기숙사 생활을 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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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당시 널리 알려져 있던 대표적 장편 문학들은 거의 읽은 셈이었고 시(詩)들도 읽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수필이나 수상문들은 많이 읽지 못했다.

<한국의 문화와 얼을 느끼지 못한 아쉬움>

이제와 생각해 보면 일제의 정치적 식민지가 되었다는 것보다 경제적 예속 국가가 되었다는 것이 더 우려스러운 문제였고, 그보다도 문화적 식민지로 퇴락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았다는 것이 더 큰 잘못이었다.

내가 자란 일제강점기의 분위기가 그러했다. 나 자신이 한국 문학과 우리글로 된 책을 읽으면서 언제나 느낀 것은, 우리 것보다 일본 것이 앞 서 있으며, 일본의 문화보다 서양의 학문과 문화가 더 높은 차원에 있다는 것을 인정치 않을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슬픈 일이며 잘못된 생각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우리는 정치적 독립이 최대 과제라고만 여겼지, 경제나 문화적 독립은 미처 생각지 못한 채 자랐다. 철이 없었다기보다는 사회적으로 그런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지 못했다.

지금 회상해 보면 그때 우리 문학과 책을 읽으면서 좀 더 한국적인 문화와 ‘얼’을 느낄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후회가 가시지 않는다.

그런 문제에 대해 직접 대화를 나눈 일은 없었지만, 윤동주 같은 이는 그런 과제를 느끼고 있지 않았을까 싶다. 한국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은 그 길을 찾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 뜻과 길을 깨닫지 못한 채 지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다는 생각은 있으면서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불행하게도 나는 다시 우리문학 작품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내 좁은 소견에 한국 문학보다 더 훌륭한 문학의 세계가 밖에 있는 것 같았고 유감스럽게도 문학 외에는 한글로 쓰여진 책들은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실정이기도 했다. 당시의 나로서는 읽고 싶어도 읽을 책이 없는 듯 했다.

그래서 다시 외국 책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고 그 대상은 자연히 러시아 문학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영·독·프 문학보다 러시아 문학이 훨씬 동양적이고, 우리의 정서와 통하는 바도 컸던 것 같다. 지금도 나는 외국 문학 중에 러시아 문학을 좋아하는 팬의 한 사람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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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의 길로 들어서다

나의 인생에서 비극은 너무 일찍 찾아왔다. 중학교 3학년 때였다. 내가 다니던 숭실중학은 일제강점기 때 신사 참배를 거부했고 민족주의자들을 배출하는 학교라는 이유로 폐교의 운명에 직면하게 되었다.

결국 학교를 운영하던 미국 북장로교의 선교사 윤산온(George Shannon McCune) 교장이 물러나고, 신사참배를 수용하는 사립재단 학교로 바뀌게 되었다. 여러 선생님이 학교를 떠나게 되었는가 하면 학생들 중에도 자퇴하는 수가 작지 않았다. 윤동주를 포함해 북간도에서 왔던 학생들은 학교를 떠나 만주로 다시 돌아갔고, 일부 학생들은 정처 없이 자진 퇴학을 했다. 나도 그 중의 하나였다.

<독서로 공부를 대신하던 전화위복의 시기>

아직 철없던 어린 나이에 자퇴서를 내고 시골집에 있자니 어떻게 할 바를 몰랐다. 그래서 매일 아침 등교 시간에 평양 시립도서관으로 가 독서로 공부를 대신하다가 하교 시간이 되면 돌아오는 방법을 택했다. 시골 사람들은 내가 계속 학교에 다니는 것으로 알았고, 교회의 몇몇 어른들은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독학을 하는 것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전화위복이라는 말처럼 나는 그 1년 동안의 독서가 나에게 그렇게 큰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내가 읽은 책의 대부분은 철학에 관한 것들이었다.

내가 연세대학교에서 강의하기 시작한 몇 해 후에, 물론 출판사의 요청에 응한 것이기는 해도 <철학입문>을 저술하게 된 것은 내가 그 시절 읽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은 내용의 책을 소개하고 싶어서였다.

유감스러운 것은, 그렇게 여러 권의 철학책을 읽으면서도 한국 철학에 관한 책을 일기 못했던 점이다. 한국 철학에 관한 책은 거의 찾아볼 수 없던 시기였다. 우리말로 쓰여진 철학책은 한치진의 <철학개론>과 <인생과 우주> 밖에는 없었다. 그의 <철학개론>은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과학적 진보주의애 바탕을 두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운명을 바꾼 1년 동안의 도서관 칩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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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일본의 철학자들은 자신도 모르는 어려운 내용을 얘기하고 글로 써야 인기가 있었던 것 같다. 어떤 외국 사람이 한때 일본 대학생들 사이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산타로의 일기>라는 책을 읽고, 자신의 일본어가 부족해서인지 모르겠지만 무슨 뜻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고 비꼰 일이 있었다.

그런 일은 우리 주변에도 없지 않다. 연세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강의한 홍이섭 교수가 한 때 <사상계>에 여러 차례 글을 실어 유명한 필자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런데 당시 같은 대학교 정법대학의 이극찬 교수의 말을 빌리면 홍교수의 글은 전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아마 당시의 일본 학생들은 읽어서 다 알 수 있는 책은 책답지 않다고 무시했을지 모른다. 더욱이 철학은 이해할 수 없어야 근사한 것으로 인정받았다. 그 시기에 철없는 내가 어려운 철학 책을 읽었으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문학에 비하면 철학이 심오한 문제의식을 지닌 것 같았고, 종교적 신앙에는 지성적 비판이 따라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을 갖기에 이르렀다. 학교에 나가지 못했던 한 해가 학교를 계속 다녔을 1년 보다 더 소중한 전환점을 만들어 주었던 셈이다. 대학에 갈 때 고민의 여지없이 철학을 택하게 된 것은 이 기간의 독서 때문이었다.

나는 여러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으나 신학교에 다닐 의욕과 기회는 갖지 못하고 말았다. 내가 연세대학교에서 처음 한 강의는 ‘기독교 윤리’였고 고려대학에서도 처음 맡았던 강의가 윤리학과 종교철학이었다. 1992년 <종교의 철학적 이해> 라는 종교 철학서를 저술하게 된 것도 그 시절 선택의 결과였는지 모른다.

지금도 나는 신학을 전공하지 못한 것과 목사가 되지 못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한철학도로서 성경을 읽고 이해한 것이 신앙의 참신한 면과 깊이를 갖추게 해주기 때문이다.

<일본을 싫어하면서도 일본 책을 많이 읽어야 했던 모순의 시대>

철학 이야기는 이만 끝내야 할 것 같다. 내가 당시 공감한 생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사람은 어떤 학문을 하든지 그 학문에 관한 개론과 역사는 알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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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그것이 학문으로 가는 최선의 길이라는 생각이었다. 경제학을 공부하기 원하는 사람은 ‘경제학 개론’과 ‘경제학사’를 읽어야 하고, 정치학을 전공하기 원하는 이는 ‘정치학 개론’과 ‘정치사상사’를 우선 읽어야 한다는 뜻이다.

모든 학문의 기초가 철학적 사고와 역사적 고찰이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사실 선진 국가에서는 그 두 가지를 대학의 기초과목으로 삼아왔다.

그 무렵 평양 시립도서관에는 일본의 대표적인 신문이 비교적 신속히 배달되곤 했다. 나는 그 신문에 실린 정치면이나 사회면의 기사에는 관심이 없었다.

대신 <아사히신문>이나 <마이니치신문>에 연재되는 소설들은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일본에서 널리 알려져 있던 기쿠지 칸의 작품들도 읽었다. 일본을 싫어하면서도 일본 책들을 읽어야 했던 모순에 찬 시기를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당시에는 그길 밖에는 책을 읽을 방법이 없었다.

■ 인생론을 통해 인생을 배우며

1년 동안 학업을 중단했던 나는 할 수 없이 복교를 결심했다. 민족 전체가 시련과 수난을 겪고 있는데 이제 겨우 중학교 상급반에 다니던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여러 어른이 다시 학교를 다녀야 하지 않겠느냐고 충고하기도 했다. 우리 학교 교장으로 있던 선교사 마우리(E. M. Mowry 한국 이름 모의리) 목사도 자신과 미국 선교부는 공식적으로 신사참배를 하지 않아도 되지만, 학생들은 형식적으로 신사참배를 하더라도 학업을 계속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고 권고했다.

<일제 치하의 참담했던 교육 풍토>

복학을 한 뒤 내 생활에는 약간 변화가 있었다. 그중 하나는 지나칠 정도로 무계획적이었던 독서 시간을 줄이고 학교 공부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던 점이다. 인문사회 분야는 독서를 통해 보충했기 때문에 수학 분야에 시간과 노력을 쏟았다. 그러나 우수한 성적은 얻지 못했다. 그건 지금까지의 독서나 사고가 수학보다 인문 분야에 치우쳐 있었고 종교나 문학적인 독서와 사고가 자연히 그러한 경향을 더욱 굳힌 때문이었다.

그러나 비극은 1년 후에 다시 터지고 말았다. 일제 총독부는 학교가 신사참배를 수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숭실중학을 완전 폐교 시켰다. 그리고 평양 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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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립중학교로 개편하면서 완전히 일본학교로 만들어 버렸다.

- 평양 제1중학교 : 일본인들을 위한 학교

- 평양고보라는 제2중학교 : 한국인들이 다니는 학교

- 내가 편입한 제3중학교 : 한국 학생과 일본 학생이 함께 다니는 학교

* 교장과 선생들 전원이 떠나야 했고 그 자리에 일본 선생들로 채워졌다.

‘황국신민(皇國臣民)’을 만들기 위한 교사로 편성

물론 나는 새 학교의 5학년이 되었다. 교문에 들어온 다음부터 교문을 나설 때까지 일본말을 써야했다. 우리말을 쓰는 학생은 여지없이 처벌을 받았다. 학교라기보다는 사상 전환의 수용소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이 시기에 평생 잊을 수 없는 두 가지를 깨달았다. 하나는 잘못된 교육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알게 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가와 민족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배운 것이다.

불행하게도 젊었을 때의 반일 감정 때문에 대학에 가서도 일본 교수들과 격의 없는 친분을 맺기가 어려웠다. 오히려 서양 교수들이 더 가까이 느껴지는 것은 어찌 할 수가 없었다. 잘못된 교육이 낳은 불행한 결과였다.

숭실중학 졸업은 남다른 해방감을 안겨 주었다. 1년 동안 쫓겨나지 않고 다닐 수 있었다는 고마움, 더는 이런 수용소 같은 생활은 없으리라는 기대감 우리말을 마음대로 쓸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 한숨과 더불어 안도의 숨을 쉬게 해 주었다.

<인생론 이해에 도움을 준 ‘참회록’과 ‘고백록’>

다시 독서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이렇게 급변을 거듭했던 2년 동안은 독서다운 독서를 하지 못했다. 또 지도를 해줄 만한 선생도 없었다. 사실 욕심을 내서 독서를 했을 뿐이지 정신적으로 그 뒤처리를 하고 있지도 못했다.

그래서 읽기 시작한 것이 지금까지 읽지 못했던 영역인 인생론 문야였다. 톨스토이의 <참회록>을 읽었고, 루소의 <참회록>과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읽었다. 당시에는 톨스토이의 사상을 묶은 <인생론>이라는 책도 있어 즐겁게 읽었다. 그리고 톨스토이의 <우리는 무엇을 믿을 수 있는가>라는 종교 문제에 관한 책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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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렵 내 독서에 도움을 준 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과 루소의 <참회록>이었다. 루소의 <참회록>은 루소가 어떤 인물이며 어떤 삶을 살았다는 것보다 그를 중심으로 전개된 시대상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루소에 대해 연구한 학자들의 책도 많이 나와 있어서 그런 책이나 글들도 읽게 되었는데 <참회록>을 읽었던 것이 그 내용을 이해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지금 회상해 보면 천재성을 가진 작가나 사상가들에게는 적지 않은 바보성도 섞여 있음을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사람이 모든 면에서 고르게 잘하는 것은 모두의 소망이지만, 하나의 값진 업적을 남기는 것 또한 얼마나 소중한가를 배울 수 있었다.

역사를 봐도 그런 인물이 자주 등장한다. 톨스토이는 상당히 병적인 면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예술가들 중에는 그런 결격한 인물이 다른 면에서는 값진 업적을 남기곤 했다. 그래서 천재와 천치는 통하는 바가 있다고들 한다.

대학에 다닐 때 한 프랑스 사람이 쓴 루소 전기에 대한 평을 읽은 적이 있었다. 지금 그 책의 제목은 기억하지 못하나 그 작가는 루소를 정신병적인 인물로 취급했다.

마틴 루터를 상세히 연구한 사람은 그의 타고난 외고집 성향이 없었다면 종교개혁을 성취하는 대업은 불가능 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간디 자서전에서 배운 네 가지 교훈>

그 무렵 몇 권의 전기와 자서전을 읽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간디(M. K. Gandhi)의 자서전과 전기였다. 상당히 많은 것을 배웠고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간디의 자서전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 면에서 전적으로 공감하고 큰 감명을 받았다. 모든 식민지는 독립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역사의 교훈, 비폭력이 마침내는 폭력보다 더 큰 결실을 거둘 수 있다는 신념, 정의는 결코 패하지 않는다는 용기, 인간은 영원한 가치와 목표를 위해 불굴의 투자를 가져야 한다는 교훈 등을 깨달았다. 그 신념과 생각에는 지금도 큰 변화가 없다.

프랑스의 작가 로맹 롤랑은 대표적인 서양적 영웅이 나폴레옹이라면 동양적 위인은 간디와 같은 인물이라고 말했다. 둘은 확실히 대조적 인물이다. 나는 한 번도 나폴레옹을 존경해 본적이 없다. 그러나 간디는 지금도 존경하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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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여행하는 도중에 봄베이를 방문했던 것도 간디 선생의 거처를 보고 싶어서였고 뉴델리에 있을 때는 그의 묘소를 방문하기도 했다.

간디 선생의 서거가 뉴스로 전해지던 날 아침, 서울에는 많은 눈이 내렸다. 나는 그 비보를 접하고 하루 동안 여러 가지 생각을 되새겨보았다. 고맙게도 나는 확실히 그로부터 적지 않은 것을 배웠다 그는 자신이 만든 진리를 그대로 실천에 옮긴 사람이었다.

우리 주변에도 간디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많이 있다. 작고한 함석헌 선생도 그런 이들 중 한 사람이다. 오늘날과 같이 실리주의와 현실주의에 빠져 있는 젊은이들에게는 간디의 사상이 좋은 교훈을 줄 것으로 생각한다.

■ 훌륭한 인물의 자서전 읽기가 주는 유익들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자랄 때 위인전이나 영웅들의 이야기를 읽는다. 그것은 동·서양의 차이가 없을 것 같다. 부모는 자신의 자녀를 훌륭한 인물로 키우고 싶어 한다. 어린이 역시 자라서 그런 존경 받는 위인이 되고 싶다는 꿈을 안고 있다.

나는 시골에서 자랐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위인전 같은 것은 읽지 못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평양 책방에서 사다주는 위인들의 사진은 보면서 자랐다. 그것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몇 사람의 얼굴은 기억하고 있다. 조지 워싱턴, 에이브러햄 링컨, 톨스토이, 셰익스피어, 예수 그리스도, 나폴레옹 등이 그런 인물들이었다.

물론 그들에 관한 짤막한 기록들은 읽었으나 나이 들어서 그들의 자서전과 전기를 읽었다는 것은 인생의 큰 혜택이 아닐 수 없다. 간디가 바로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다.

<정신적 성장을 도운 프랭클린 · 슈바이처 · 밀의 자서전>

내가 감명 깊게 읽은 자서전들 중에는 벤저민 프랭클린 <프랭클린 자서전>과,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나의 생애와 사상>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프랭클린, 아직도 미국인들은 그를 ‘아메리카의 스승’으로 받들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 더 큰 도움을 준 것은, 그의 전기를 읽으면서 아메리카 합중국의 건설 초기에 그들은 어떤 환경에 처해 있었는가를 배운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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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클린 자서전>은 그가 세계적인 과학자이고 독립선언문을 기초했으며,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창설자일 뿐 아니라 아메리카의 정신적 전통을 만들고 이끌어 준 지도자였음을 보여준 책이다. 아마 조지 워싱턴 못지않게 미국 창건에 위대한 공로를 남긴 인물이리라.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에는 지성적인 청년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자서전이 슈바이처의 <나의 생애와 사상>이었다.

나 지신도 그의 자서전을 읽은 후 감격에 휩싸여 며칠 동안 어떤 사명감을 찾고 싶어 인생의 진로를 놓고 고민했을 정도였다. 아마 그런 흥분 섞인 감격은 서구인은 물론 동양인들 사이에서도 팽창되어 있었던 것 같다. 간디와 슈바이처, 이 두 사람은 20세기 전반기를 장식한 위대한 인물이었다고 보아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대학 예과 때 존 스튜어드 밀(J. S. Mill)의 <자서전>을 읽었다. 내가 그 책을 읽을 때는 어느 정도 지적으로 성숙되어 있던 터라 여러 가지로 큰 도움을 얻었다. 미국의 심리학자 캐서린 콕스(C. Cox)는 죤 스튜어트 밀에 대해 괴테, 파스칼, 라이프니츠와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머리가 좋은 인물이라고 평한 바 있다.

그는 논리학자이자 철학가였으며 정치·경제·사회 모든 면에서 탁월한 사상과 학문을 개척한 인물이다. 당시 영국 사회를 이끌었던 공리주의가 그에 의해 완성되었을 정도니 그의 업적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는 10세 때 고전 작품 독서에 필요한 라틴어와 그리스어 등 고전어와 외국어를 모두 습득했을 만큼 영특했다.

<선생다운 선생이 되고 싶었던 고향 초등학교 교사시절>

나는 평양 제3공립중학교를 졸업한 뒤 다시 한 번 좌절감에 빠졌다. 졸업과 동시에 전문학교나 대학으로 진학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가난한 가정의 맏아들이었고 건강이 좋지 못한 부친과 여러 동생이 있었기에 대학진학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게다가 고향에 있는 초등학교의 교장이 부모님에게 내가 졸업을 하면 고향학교 교사로 채용하고 싶다는 제안을 해 놓은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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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주장을 내세우지도 고집을 부리지도 못한 채 1년간 고향의 초등학교 교사로 지냈다. 그리고 1년 후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정신건강을 돕는 독서와 해치는 독서>

독서의 목적은 더 새로운 것을 알고 더 높은 가치를 지향하며 자기 성장에 도움을 얻는 데 있다. 별 의미 없는 대중 소설, 그것도 에로문학 같은 것을 읽는데 시간과 노력을 쏟는 것은 지혜로운 선택이 못 된다. 너무 일찍 그런 내용의 독서에 빠지게 되면 그 사람은 더 귀한 것을 얻지 못하는 불행에 빠지며, 인간적 성장은 물론 학문이나 예술적 가치를 상실하는 과오를 범하게 된다.

독서는 몸의 건강을 위한 좋은 음식물과 같아야 한다. 달콤하다고 해서 건강과 성장에 해로운 독서에 빠져서는 안 된다.

■ 자유롭게 독서를 즐긴 유학 시절

나는 20세를 넘기면서 고향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끝내고 오랫동안 꿈꿔오던 유학의 길을 떠났다. 여러 친구가 이미 유학 가 있던 도쿄로 가기로 했다. 도쿄에는 여러 대학들이 있었고, 당시 동양에서는 최고의 문화도시이기도 했다.

나는 유학을 떠나기 전부터 철학과를 지망했다. 철학과가 아니면 역사학과를 갈 생각도 있었지만 역사학과는 철학과의 5분의 1만큼도 비중을 두지 않았다.

대학을 선택할 때 중요한 것은 학과였지 어느 대학인가는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무슨 학과를 가느냐가 첫 번째였고 그 다음에 대학을 고르는 것은 당연하게 여겼다. 아마 대학을 먼저 고르는 것은 우리나라밖에 없는 것 같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학문할 자격이 없는 학생이 대학을 가는 것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가톨릭계의 대학에서 누린 혜택들>

어쨌든 나는 일본에 하나밖에 없는 가톨릭 대학인 조지(上智)대학교를 택했고 입학이 허락되었다. 그 당시 내가 사숙(私淑)하고 있던 외세다대학교에 호아시 이치로라는 철학교수가 있었는데 그가 나에게 조치대학교를 추천해 주었다. 지금 생각해도 여러 가지 면에서 적절한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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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가지 조치대학교가 독일 교구의 가톨릭 대학이라는 점이었다. 그런 이유로 대학의 운영방식이 예수회에 속한 천주교의 전통과 독일 대학의 제도에 따르고 있었다. 대학 책임자를 비롯한 서양의 교수들이 상당수 있었다. 일본 내 독일 대학 같은 인상이 짙었다고나할까.

당시는 태평양 전쟁 중이었고, 일본에서는 국수주의 사상이 팽배했던 시기에, 그런 시대적 흐름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서구적이며 종교적인 분위기에 머물게 된 것은 내게 큰 축복이었다. 그때 교련훈련을 맡았던 배속 장교는 학생들 앞에서 노골적으로 황국(皇國)속에 기독교 대학이 존재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성토하곤 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과 독일이 동맹국이었기 때문에 우리 대학이 보존될 수 있었던 것 같다.

조치대학교의 핵심 학과는 철학과였다. 당시에는 천주교를 위한 신학과가 따로 없었다. 그래서 철학과 동창들 중에는 신부님이 여럿 있었는데, 그중에 선배인 정욱진 선배는 정약용의 후손이었다. 서강대학교에 재직했던 김태관 신부도 선배였고 김수환 추기경은 후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외에도 한 두 사람이 더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어려서부터 개신교 집안에서 자랐으나 같은 과의 한국 학생들은 대부분 기독교와는 관계가 없었다.

<톨스토이를 과시하려는 욕구에서 벗어나다>

대학 예과 첫 여름방학을 지낸 뒤였다. 학기가 시작되는 첫 주에 서양사를 담당했던 교수가 “오늘 첫 시간이기도 하니 약 15분 정도 방학 동안에 읽은 책을 발표할 사람이 있으면 해보라”는 제안을 했다. 다들 망설이고 있는데, 교수가 출석부를 훑어보더니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별 준비는 안했지만 중학교 때부터 톨스토이를 많이 읽었던 데다, 교편을 잡은 1년 동안에도 몇 권 더 읽었기 때문에 톨스토이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20분 정도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끝내려고 했는데 계속하라는 학생들의 청에 결국 90분에 걸친 강의 시간을 몽땅 잡아먹고 말았다. 교수가 흔쾌히 허락해 주었으며 학생들도 흥미롭게 들어주었다. 지금은 그때 어떤 내용을 소개했는지 기억하지 못하지만, 딱딱한 서양사보다는 재미있는 시간이 되었음에는 틀림없었다.

그 일이 있고 난 다음부터 학생들이 나를 톨스토이 전문가로 여기는 듯인 인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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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시마·아쿠타가와 작품에 매료돼>

대학 예과 기간은 비교적 독서하기에 좋은 분위기였다. 외국어와 교양 과목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남는 시간에 책을 읽는 것이 곧 공부였다. 나는 줄곧 아르바이트를 했기 때문에 시간이 자유롭지는 못했으나 아르바이트의 업종이 육체노동이었으므로 공부와 독서에는 지장이 없었다. 아르바이트를 운동시간으로 여기면서 지냈다. 독서삼매경이란 그것을 체험해 본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의 경지이다. 그러면서도 고전음악을 많이 들을 수 있었던 것을 회상하면 무척 짜임새 있는 일과를 보냈던 것 같기도 하다.

나에겐 큰 도움은 주지 못했으나 몇몇 일본 작가를 접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기간, 특히 방학 동안의 독서 덕분이었다. 그 당시 도호쿠(東北)대학교를 중심으로 전개되던 문학 흐름에 속하는 아리시마 다케오의 작품을 두세 권 읽었다. 상당히 감명 깊은 작품이었다. 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인도주의적 작품을 시도했던 그가 결국 자신의 문학 정신과 인생관을 따라 유부녀와 동반자살을 했던 사건은 당시 독자들에게 적지 않은 화제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나는 누군가의 작품을 읽을 때 작가의 사진을 살펴보는 습관이 있다. 톨스토이의 사진을 수없이 보았지만, 한 번도 다정한 친밀감을 느껴 본 일이 없다. 그러나 산기하게도 프랑스의 앙드레 지드와 아리시마의 사진을 보면 매력이 느껴졌다. 특히 아리시마가 그러했다.

여기서 내가 소개하고 싶은 또 한 사람의 작가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로 그는 <설국 雪國>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선배이다. 나는 아쿠타가와의 작품에 상당히 매료되어 여러 권을 읽었다. 그리고 아쿠타가와의 대선배인 나쓰메 소세키의 몇 작품에도 손을 댈 수 있었다. 물론 당시 나는 도쿄대학교를 중심으로 완성된 이들의 문학적 흐름에서 노벨상 작가가 나오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가와바타의 후배인 미시마 유키오도 일본도로 자살했고, 아쿠타가와와 가와바타도 자살을 했다. 나쓰메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지는 않았지만, 말년에 약간 정신분열증에 빠져 있었다. 일본의 유명 작가들이 자살을 택한 것이 예술의 한계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일본미의 극치와 자살의 동질성을 찾았기 때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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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공부의 기초를 다지기 위한 독서

나의 대학 생활은 그래도 행복한 편이었다. 계속되는 아르바이트 때문에 시간적 제약이 많았지만, 나같이 가난하게 자란 팔자로 그 옛날 대학을 다닐 수 있었다는 것은 감사히 여겨야 할 일이었다. 또 1년간 교편을 잡았던 것이 새 출발을 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다. 학생의 처지에서 교수들을 대하는 것이 아니라 선생의 위치에서 교수들을 대하는 태도에는 분명 다른 점이 있었고 교수의 입장을 이해하는 측면도 컸을 것이다.

부족하고 미숙한 상태에서 할 수 없이 선생이 되었다가 더 높은 차원의 삶을 찾게 된 것은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내 마음은 열려 있었고 무엇이든 받아들여 소화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당시 대학생들이 꼭 읽어야 하는 몇 권의 책이 있었다. 고맙게도 가와이 교수가 주관하는 <학생과 독서>라는 책이 있었는데, 우리는 거기에 소개된 책들을 무조건 읽었다. 또 읽고 나면 더 좋은 책을 소개해 주었기 때문에 독서의 광맥은 무한히 뻗어가는 금광 캐기와 같았다.

도쿄대학교의 이데 다카시 교수의 <철학이전 哲學以前>은 철학 입문에 해당하는 책으로 우리 모두가 읽었다. 내가 1960년대 초반에 내놓은 <철학입문>을 집필할 때 그 책을 연상해 보기도 했다.

<철학관련 필독서들을 섭렵하던 시절>

니시다 키타로 교수의 저서는 철학 전공 학생 및 지성적인 지도층과 대학생이 주로 읽었고 외국에도 많아 알려졌다 그의 철학적 장점은 서구 철학의 내용과 장점을 연구하는 데 불교적이고 동양적인 견해가 짙게 깔려 있어 철학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는 데 있었다.

니시다 교수의 <선(善)의 연구>는 그의 철학 입문서나 개론을 겸한 내용으로 비교적 쉬운 책이었다.

그의 뒤를 계승한 교토(京都)대학교의 다나베 하지메 교수의 책도 좋았고 윤리분야에서 도쿄대학교의 와쓰지 데쓰로의 책(전 3권)도 독창성이 뛰어났다.

<우리 독서 풍토에 대한 아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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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학생들 사이에는 약간 사상적 깊이를 가진 책이 베스트셀러었다. 구라타 하쿠조의 <사랑과 인식의 출발>, <출가와 그 제자> 등과 아베 지로 교수의 <산타로의 일기>등이 그것이다.

어떤 외국인이 그 당시 일본의 독서분위기에 대해 “일본 학생은 철학 바람을 타고 있고 철학은 어려워야 한다는 유행병에 걸린 채 책을 읽는 것 같다”고 평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기에 난해한 내용의 일본 철학서들을 애써 읽다가 내던지고 말았다. 친구인 김태길 교수도 그 당시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내용도 모르는 채, 허세와 오기로 읽은 것들이 많았다고 얘기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1920년대부터 20~30년 동안이 일본에서는 독서의 전성기였던 것 같다. 정확한 통계자료를 바탕으로 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지금껏 세계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그 당시의 일본 사회만큼 책을 많이 읽는 나라는 좀처럼 경험해 본적이 없다.

<파스칼의 ‘팡세’, 읽은 만큼 사색해야 하는 책>

 

그 즈음 내가 읽은 책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책은 <팡세>였다. 그 책은 읽은 만큼 생각을 해야 하는 책이기 때문에 독서 기간이 오래 걸렸던 것 같다. 물론 부분적으로 자주 들춰보곤 했으나 한번 통독한 것이 1960년의 일이었으니 비록 20년 후일지라도 나 자신과의 약속은 지킨 셈이다.

짐작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나의 위치에서는 <팡세>가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다. 우선 나 자신이 기독교 신앙을 지켜왔다는 점, 그리고 파스칼이 너무나 감동적인 신앙의 체험을 거쳤다는 점, 그만큼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색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는데다 신앙에의 논리를 명료하게 밝혀주고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의 종교적 과제가 항상 독창적이면서도 인간적인 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 등은 나의 관심을 끌고도 남음이 있었다.

뒤에 이야기가 나오겠지만 나의 신앙과 종교관은 파스칼, 아우구스티누스, 키르케고르, 도스트옙스키 등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지금은 팡세가 여러 판본으로 번역되어 나와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점점 독자가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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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말의 말대로 “삶의 고뇌에서 벗어나기 위해 토끼 사냥을 떠나려는 사람에게, 토끼 고기를 줄 테니 사냥을 나갈 필요가 없다고 권하는 것”같은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현대인들은 야구시합에 열광할 수 있으면 된다. 그래서 정신적 고뇌, 실존적 과제 등은 외면한다. 그래야만 즐겁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몸을 흔들며 노래하는 젊은이들에게 베토벤을 들으라고 권하는 것이 잘못일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 왠지 우울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 Part 2, 책읽기, 위대한 사상가들과의 행복한 조우

■ 사상적 자아 성장의 두 기둥, 니체와 키르케고르

내가 대학에 다닐 때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읽혔던 책은 쇠렌 키르케고르(S. Kierkegaard)와 프리드리히 니체(F. W. Nietzsche)의 것이었다.

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의 대표적인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K. Jaspers)는 그의 유명한 <이성과 실존> 책머리에서, 생존해 있을 때는 그렇게 유명하지 않았으나 세상을 떠난 후 지금까지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두 사상가가 있는데, 하나는 키르케고르이고 다른 하나는 니체라고 서술했을 정도이다.

니체는 1844년에 태어나서 1900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말년의 11년 동안은 정신질환으로 정상적인 활동을 못했기 때문에 실제로 그가 산 나이는 45세까지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모두 목사였고, 그의 조모와 모친도 목사의 딸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키워준 기독교적 분위기 속에서 기성 기독교를 누구보다도 강렬히 파괴하려 했고 전 생애를 걸고 기독교에 도전한 사상가였다. 마치 그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가치관을 파괴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인 듯 그것에 모든 삶을 바쳤다.

<세계 젊은 지성인들의 정신적 우상 니체>

니체가 택한 정신적 주체는 무엇인가. 그는 대학시절 그리스 사상과 문헌학을 연구했다. 그래서 그의 세계관 속에는 기독교보다 그리스 정신이 자리를 잡았고, 그리스 정신의 뿌리와 통하는 동양적 사상을 남달리 터득하고 있었다.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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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 그는 철학도가 될 생각은 없었다. 우연한 기회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A. Schopenhauer)를 읽고 크게 감명 받았는데 쇼펜하우어의 철학적 뿌리는 동양철학이었다.

또 젊은 니체는 목사의 가정답게 음악적 분위기에서 자랐다. 피아노를 즐겼으며 음악에 조예가 깊어 사는 동안 70여 곡을 작곡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시인다운 정신과 예술성이 풍부한 문장은 타고난 천분이기도 했으나 어려서부터 그런 소질을 갖춘 덕분이기도 했다.

니체는 자신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최고의 문장이라고 자부했다. 니체는 독일어를 피와 눈물로 서술한 사람은 하인리히 하이네와 자신이 있을 뿐이라고 자부했다.

청년시절 내가 심취했던 책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였다. 정열을 가진 젊은 지성인들이 빠져들지 않을 수 없는 내용으로 그 영향력은 대단히 컸다.

내가 대학 다닐 무렵 히틀러의유일한 맹우였던 무솔리니가 연합군의 포로가 되었다. 당시까지는 세계 어느 나라도 헬리콥터를 그때 히틀러는 헬리콥터를 보내 무솔리니를 산장에서 구출해 내 전선의 전방으로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하는 사건이었다.

이렇게 실의에 찬 무솔리니에게 히틀러는 가장 좋은 장정으로 꾸며진 니체 전집을 선물로 보냈다. 히틀러는 니체의 애독자였다.

영국의 유명한 희곡 작가 버나드 쇼(G. B. Shaw)의 걸작 <사람과 초인>이 런던에서 공연된 적이 있다 100일 동안 계속 되었는데 언제나 만원이었다고 한다. 그 작품이 100일에 걸쳐 상연된 후에는 런던 사람들의 신경쇠약이 말끔히 가셨다고 한다. 버나드 쇼도 니체의 애독자였고 그의 초인정신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니체의 초인사상과 운명애>

니체는 잡다한 생각과 관념의 노예가 되어 버린 현대인들에게 수많은 말초적 가치관과 세분화된 도덕관념을 버리고 한두 가지 강자의 윤리와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에게 초인은 신들의 존재보다 더 위대하고 값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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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초인은 세계운명에 대한 순응과 운명애(運命愛)의 철학을 갖추고 있다. 태양은 떠오름도 위대하지만 몰락 또한 장엄하다. 초인은 세계 운명과 더불어 영구회귀의 정신을 사랑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외한, 제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내세우는 약자의 윤리와 노예근성을 정당화하려는 교리를 배격했다. 예수는 구약에 대한 파괴자였고 혁명가였으나 그를 추종하는 소위 기독교인들은 복종과 자기기만의 허울을 쓰고 자족한다고 보았다.

니체 자신이 표현했듯이 ‘망치를 들고’ 기성문화와 가치관을 파괴하고 새로운 철학을 재건하는 데 온 정열을 바쳐 혼신의 투쟁을 다했으나 결국 자신은 정신 장애인으로 귀착하는 운명이 되었다. 그는 결혼을 생각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모친의 보호를 받았고 후에는 누이동생의 보살핌을 받으며 여생을 보냈다.

독일의 철학과 사상을 좋아하지 않는 미국에서도 니체의 책은 수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었으며 일본 젊은이들의 니체에 대한 애정 역시 대단했다.

<가장 심오한 자아성찰자 키르케고르>

키르케고르는 니체에 비해 시대적으로는 선배였지만, 그의 조국이 덴마크였기에 세계무대에 소개되기까지 긴 세월이 필요했다. 1905년을 기점으로 그의 저서들이 독일어로 번역되기 시작하면서 그가 세계 사상계에 본격적으로 등단하게 된다.

키르케고르의 생애도 니체와 흡사한 점이 많았다. 1813년에 태어나 1855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40새를 겨우 넘긴 짧은 생애를 살았다.

말년에는 정신 및 심리적 질환을 앓은 것으로 보아 니체처럼 시대적 사상을 파괴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데 전 생애를 바친 뒤, 스스로의 신체적 한계와 패배를 자청한 결과를 낳았던 것 같다. 이 두 사람을 가리켜 예외자, 소외자, 고독한 파괴자라고 부르는 데에는 아마 그런 의미도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키르케고르는 한 인간으로서의 생활의 폭이 대단히 좁았다. 그의 삶과 사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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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의 관계와, 너무나 사랑한다는 이유로 파혼한 약혼녀 레기네 올센과의 관계를 통해 형성되었다. 그 두 인물이 없었다면 키르케고르의 철학과 사상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는 기독교적 신앙문제 때문에 아버지를 등졌다가 죄에 대한 공동의식을 가지면서 아버지와 화해했다. 둘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지고 난 뒤에 부친이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을 크게 감사했다.

한편 그는 30세가 넘은 나이에 14세의 소녀 레기네를 사랑했다. 결혼이 허락되는 법적 연령인 17세 까지 기다려 그녀와 약혼을 했지만, 약혼 1주년에 일방적으로 파혼을 선언했다. 그로 인한 키르케고르의 고뇌는 대단한 것이었다.

그의 저서 <이것인가 저것인가>는 애인에게 자신의 심정을 알리고 싶어 집필한 방대한 양의 기록이었다. 그 뒤 레기네와의 사랑을 다시 결혼으로 회복시킬 수 있으리라 다짐하면서 쓴 책이 <반복>이다. 그러나 레기네는 가정교사였던 남자와 결혼하고 키르케고르는 죽을 때까지 레기네를 정신적으로 사랑했다. 임종하는 순간까지 그는 레기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의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기독교적 고뇌가 녹아있는 키르케고르의 책들>

그 뒤 키르케고르는 자신이 사회적으로 비난과 비판의 대상이 되자 기성세대와 세속에 물든 기독교 정신계를 반격하는 저서를 남겼다. 아마 역사에 길이 남을 명저 <불안의 개념>과 <죽음에 이르는 병>이 그 대표작이며,<철학적 단편>과 <철학적 단편 후편>은 그의 철학과 사상을 입증하는 훌륭한 저서가 되었다.

니체는 동양과 그리스 철학을 대신하는 사상가였고, 키르케고르는 전통적인 기독교 정신을 그 근본에서 재정립한 종교 사상가였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들은 각기 세계정신의 두 가지 측면을 대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카를 마르크스(K. Marx)의 사회주의와 대조되는 개인주의를 지켜준 위대한 인물이기도 했다. 니체는 인간(개인)을, 키르케고르는 자아를 문제 삼았기 때문이다.

내 입장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죽음에 이르는 병>은 지금도 여전히 읽기를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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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말과 글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

요사이 조기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어려서부터 영어를 가르치는 일이다. 어떤 부모는 자녀가 초등학생일 때부터 미국에 보내 현지 풍습과 더불어 생활 영어를 배우도록 이끌어준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어려움도 있다는 사실을 미리 알아둘 필요가 있다. 영어를 아주 잘 하려면 영어로 생각해야 한다. 만일 영어로 생각할 정도가 되면 우리말은 그만큼 서툴러질 수밖에 없다. 두 가지 말을 다 최고의 경지에 올려 놓는 다는 것은 불가능 하다.

이 다음에 작가나 시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가장 우수한 우리글과 문장을 쓸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은 일찍부터 영어나 외국어를 잘 하는 데 차질이 생긴다.

나는 내 친구들 가운데 영어를 한국어보다 더 잘하는 이들을 알고 있다. 그들의 고민은 논문을 쓰거나 어떤 문장을 발표할 때 항상 어려움을 겪는데 있다. 우리글로 적절한 문장을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이 작품을 쓰거나 시인이 되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불가능 하다. 최고의 문장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말과 글을 쓸 수 없었던 일제 치하의 비극>

내가 이런 얘기를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우리말로 살았다. 일본어를 별로 쓰지 않았다. 그러나 중학교에 간 뒤로는 일본어가 주된 언어로 변했다. 일본어를 국어라고 했고 우리말과 글은 조선어시간에 배웠다. 그러다가 중학교 마지막 1년은 학교에서 우리말을 사용할 수 없었다. 우리말을 쓰면 징계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그러는 동안에 우리말과 글을 재대로 배우지 못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일본에서 대학을 다녔기 때문에 우리 한글을 사용할 기회가 생기지 않았다.

해방을 맞이한 뒤에야 다시 우리말로 복귀한 셈이다. 그러니까 당분간은 일본어도 쓰지 못했고 수준 높은 한국어를 구사하지도 못했다. 솔직히 말해서 부끄러운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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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상황에서 해방의 소용돌이를 겪었고 한국전쟁을 치렀기 때문에 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도 우리말과 글에 대해 체계적인 공부를 하지 못했다.

우리말을 자유롭게 입 밖에 낼 수 없었던 상황에서 자란 내가 일본에 가서 공부를 했다는 것은 우리 것에 대한 깊은 관심과 자신감을 잃게 한 원인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말 일본의 식민정책이 한국 것을 말살시키려는 데 있었던 점을 미루어본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역사적 비극의 원인이 되었던가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때 손을 잡은 것이 우리나라의 역사소설이었다. 역사적 교양을 쌓는 동시에 우리 문장의 세련된 흐름을 접해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철학적 사색에서 벗어나 정신적 휴식 같은 여유를 얻고 싶은 기대도 있었던 것 같다.

<세련된 우리글 접하고 싶어 읽었던 역사소설>

그 당시에는 춘원의 역사소설이 대표적이었다. <단종애사>를 읽으면서 정권에서 비롯되는 비극의 기록을 보기도 했고, <마의태자>와 <원효대사>를 읽으며 과거 우리 역사에 대한 반성과 후회가 뒤섞인 느낌을 받기도 했다. 박종화의 <금삼의 피>도 읽었고 그 밖의 책들도 읽었다.

그리고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삼국지>도 읽었다.

<기독교 사상과 신앙의 바탕이 된 “고백록”>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도 대단히 좋은 책이다. 지금은 우리말로 훌륭한 번역이 나와 있지만, 당시에는 제대로 된 번역본이 드물었다. 고백록의 전반부는 저자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에 관한 고백이다.

그의 고백록은 지금도 수많은 신학자와 철학자가 지금도 인용하고 있다. 후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의 나라>라 불리는 방대한 저서도 서술했다.

최민순 신부가 단테의 <신곡>을 번역한 것도 그 무렵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고대 정신과 철학을 총 망라한 뒤, 그것을 중세기 사상으로 전개시켜준 역사적 전환기의 거장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그와 더불어 고대가 끝나고 중세기가 시작된 것이 서양의 정신사 및 철학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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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인비와 니부어의 사상에 감명 받아>

한때 영국인들은 아널드 토인비(A. J. Toynbee>의 저서를 즐겨 읽었고 미국인들은 니부어의 책을 많이 읽었다.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는 방대한 책이다.

내가 1947년 삼팔선을 넘어 서울에 왔을 때 서점에 들러 보니 제2차 세계대전과 해방의 혼란기였음에도 불구하고 토인비의 책들은 번역본으로 나와 있었다. 그 당시에는 서점도 별로 없었고 책다운 책을 찾아볼 수 없는 문화적 황폐기였다.

나는 토인비를 접하면서 철학을 전공하지 못하게 된다면 역사학을 공부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진 적이 있다. 대학에서 오래 역사철학을 강의했고 <역사철학>을 쓰게 된 것도 토인비의 역사책을 읽은 것이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것 같다.

나는 영국이나 미국이 선진국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게 된 데에는 높은 수준의 지성적 지도자들이 있어 국가의 사회적 병폐를 지적하고 시정을 요구하며 국가와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그의 강의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것이 선진사회를 이룩하고 사회적 지도력을 유지하는 원동력이 되어 왔다고 생각한다.

생각해 보면 국민 대중의 지도자로서의 정치가, 기업가, 행정가는 있어도 정신적지도자로서의 종교인, 역사가, 학자가 없다는 것이 우리의 슬픈 현실이다. 더욱이 그런 임무를 맡아야 할 지성인들이 국회의원이나 장관으로 전락하는 것을 보면 지성의 타락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지금 정신적 지도자가 아쉬운 시대에 살고 있다.

■ 칸트와 헤겔 : 독일 관념론의 시작과 끝

칸트 ⇒ 피히테 ⇒ 프리드리히 셸링 ⇒ 게오르크 헤겔로 이어지는 철학자들은 모두 스승의 학설을 뒤집었고 스승은 그의 제자를 폄하했다.

<튀빙겐대학교의 삼총사 셸링, 헤겔, 휠더린>

이상한 것은 데카르트에서 칸트까지 대부분의 철학자가 애정 또는 결혼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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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경제문제에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들의 뒤를 잇는 철학자들은 상당히 세속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사람들은 셸링과 헤겔, 그리고 헤겔의 친구였던 철학적 시인 프리드리히 휠더린(F. Hoderlin)을 튀빙겐 대학교의 삼총사라고 얘기한다. 이들은 대학에서 같이 공부했다. 그런데 세 사람 모두 여성문제로 고난을 겪었다. 셰링은 친구의 부인을 아내로 삼았고, 헤겔은 정식으로 결혼하기 전에 남편을 여읜 하숙집 부인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얻었다. 휠더린은 가정교사 시절 제자의 어머니를 사랑했다. 그래서 그 집을 떠난 뒤 걷잡을 수 없는 충격으로 정신적 질환까지 앓는 비참한 말년을 보내야 했다. 헤겔도 그 아들의 양육문제로 오랫동안 고민해야 했다. 반면 피히테는 자신보다 훨씬 연상인 여인과 결혼했으나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갔다.

어쨌든 독일 관념론의 대표적 인물은 역시 칸트와 헤겔로 통한다. 칸트는 독일 관념론을 시작한 학자이고 헤겔은 그것을 끝낸 학자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칸트를 읽는 사람은 차례대로 읽어 나가면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있어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별로 없다. 그러나 헤겔은 전체를 알아야 부분을 알 수 있고 부분을 모르고는 전체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독자들의 고충이다. 일본 학자들이 헤겔 연구에 빠졌지만 결국은 헤겔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철학공부를 끝내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두 가지 길>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두 가지 길이 있다고 말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모순과 혁명’이론을 따른다. 그러나 영·미 계통의 민주주의는 갈등을 넘어 그것의 해결을 택한다. 어느 사회에나 갈등은 있다. 그 갈등을 잘 개선해서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사회가 발전한다.

그러나 적절한 개선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한 단계 높은 개혁을 택해야 한다. 또 그 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역사는 자연히 혁명의 과정을 밟는다. 그러나 개선과 개혁을 잘 이루어 낸 사회는 혁명 없이도 사회적 갈등을 잘 극복할 수 있고 그러면 민주주의가 성장할 수 있다.

정치도 마찬가지이다. 지나치게 보수적인 사람들은 개선을 원하지 않는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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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서 사회 상장과 발전을 가로막는다. 그러나 미국 민주당의 노선을 보면 계속해서 개선과 개혁을 주도해 가고 있다. 따라서 혁명은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영·미의 정치 철학이 그렇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눈에 보이는 갈등이나 부조리를 모순의 원리로만 끌어들인다. 그래서 곧 혁명의 절차를 호소한다. 지금도 일부 재야세력들이 그런 노선을 비판 없이 따르고 있다. 그 결과 선배나 남들이 하는 것은 모두가 잘못됐고 자신들이 하는 것만이 옳다는, 또 하나의 ‘흑백논리’에 사로잡히게 된다.

정치도 마찬가지이다. 지나치게 보수적인 사람들은 개선을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회 성장과 발전을 가로막는다. 그러나 미국 민주당의 노선을 보면 계속해서 개선과 개혁을 주도해 가고 있다. 따라서 혁명은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영·미의 정치철학이 그렇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눈에 보이는 갈등이나 부조리를 모순의 원리로만 끌어들인다. 그래서 혁명의 절차를 호소한다. 지금도 일부 재야세력들이 그런 노선을 비판 없이 따르고 있다. 그 결과 선배나 남들이 하는 것은 모두 잘못됐고 자신들이 하는 것만이 옳다는 또 하나의 ‘흑백논리’에 사로잡히게 된다.

■ ‘삶의 철학’의 원천 쇼펜하우어

<칸트의 인식론 본받았지만 독자적 철학체계 정립>

쇼펜하우어의 가문에는 정신 장애인이 몇 명 있었고, 쇼펜하우어의 부친도 정신착란증으로 급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쇼펜하우어 부모는 20년 정도의 나이 차가 있었는데 둘은 모든 점에서 대조적이었다. 아버지는 거대한 체구에 말이 없는 권위적인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왜소하고 섬세한 감정을 지닌 사교성이 풍부한 여성이었다. 아마 쇼펜하우어 가문의 막대한 재력이 명문가 딸과의 결혼을 성사시켰던 것 같다.

쇼펜하우어가 18세 때 아버지가 작고하고 잠시 동안 어머니와 동거 했으나, 결국은 성격의 차이라기보다 어머니의 병적인 질투심과 경계심 때문에 별거하기에 이른다.

아버지가 죽은 뒤, 쇼펜하우어는 어려서부터 꿈꿔왔던 학문의 길을 택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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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평소의 소원이었던 여류작가의 길을 평탄하게 이어나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작가로서의 어머니와 철학자로서의 아들 사이의 라이벌 의식은 심지어 적대감정으로까지 번져 모자가 결별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칸트에게서 철학적 인식론을 받아들여 자신의 철학체계의 일부로 삼은 쇼펜하우어는 플라톤을 연구했다. 그는 플라톤을 높이 평가해 ‘신과 같은 계시의 철학자’라고 불렀다. 그는 플라톤의 이데아를 존재의 원형으로 해석하면서 그 본질을 자신의 예술철학의 본질로 수용했다.

<생명에의 의지와 성적 욕망을 철학적으로 분석>

지금도 사람들은 쇼펜하우어의 예술철학에 대해 높은 평가를 아끼지 않는다. 다른 철학자들이 칸트의 예술철학을 비판 없이 받아들인 데 비해, 쇼펜하우어는 예술의 이념적 원형을 깊이 있게 설명하면서 예술의 창조자는 천재라고 높이 평가했다.

쇼펜하우어는 ‘예술 중의 예술은 음악’이라고 보았다. 그는 심지어 음악은 ‘우주의 멜로디’라고까지 평했으며 음악은 동물과 태아에게까지도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 그가 높이 평가한 음악은 이탈리아 작곡가 조아키노 로시니(G. Rossini)의 것이었다.

쇼펜하우어만큼 성적 본능을 철학적으로 강렬히 긍정한 사람도 드물다. 그는 인간에게 가장 극단적인 대립을 만드는 것은 대뇌와 생식기라고 말한다. 대뇌는 사고력에 의해 인간 및 성적 본능을 끝까지 약화시키려 하며, 성기(性器)는 일말의 사고와 반성도 없이 성적 충동에 붙잡혀 있다. 그는 남성에 비해 여성이 훨씬 더 높은 성적 충동의 노예라고 평한다.

그는 꽃은 식물의 자기 번식을 위환 생식기에 해당하며, 꽃가루가 바람을 타고 결실을 맺기 위해 한없이 먼 거리를 날아다니는 모습은 생명욕을 채우려는 한 현상이라고 보았다. 그러면 그러한 의지는 무엇인가. 그것은 맹목적인 충동과 운동일 뿐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생명욕을 충족시키며 종족을 번식시키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약육강식은 당연한 존재의 법칙이며 서로가 서로를 해치고 잡아먹기 때문에 생명세계는 끝없는 비참함과 비극의 역사를 이어간다. 오직 인간만이 대뇌라는 특수 기능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이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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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하며, 때로는 지적 사고력을 갖고 의지적 욕구를 억제하려고 하나 결국은 실패를 되풀이할 뿐이다.

<해탈사상과 의지의 철학 제시>

사람들은 라이프니츠를 대표적인 낙천주위자로 쇼펜하우어를 세계 최대의 염세주의자라고 부른다. 라이프니츠는 ‘이 세계는 존재할 수 있는 최선의 세계’라고 본다. 신의 질서와 조화가 이루어진 완성된 세계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이 세계는 존재할 수 있는 최악의 세계’라고 단정한다. 이 세계보다 더 악한 세계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마치 정글 속에서 서로를 해치며 잡아먹는 생존을 위한 전쟁터 같은 곳이 인간세계라고 보았다.

대학에 있을 때 생물학과 박물학을 연구했던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모르는 생명 세계의 신비와 생명체들 간의 경쟁이라는 베일을 벗기면서 그의 논리를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면 최악의 세계를 해결하는 길은 무엇인가. 쇼펜하우어는 그것을 동양의 사상, 특히 인도의 <배다>에서 찾는다.

베다 정신은 해탈의 사상이다. 번뇌와 무상의 세계를 극복함으로써 세계 및 삶의 고뇌와 올무에서 벗어나는 것이 곧 해탈, 서구적인 표현을 빌리면 ‘구원의 가능성’이 되는 것이다.

아마 독일 철학자들의 입장에서 헤겔이나 칸트를 언급하는 것은 자랑스러워 해도 쇼펜하우어를 소개하는 것은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쇼펜하우어를 읽지 않은 사람은 드물었다. 그런 예외적인 철학자가 존재 했다는 것이 오히려 독일 철학계의 다양성을 증명하는 것이 될지도 모를 테니까.

2021. 7.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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