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에 읽는 니체 (Nietzsche) (2)

2022. 12. 13. 13:57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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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에 읽는 니체 (Nietzsche) (2)

- 지금 이 순간을 살기 위한 철학 수업 -

■ 장재형 지음

◎ 04 제대로 잘 된 인간이 되어라

- 인간 말종 -

나 저들에게 더 없이 경멸스러운 것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다. 인간말종이 바로 그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직장인 열 명 중 아홉 명이 ‘번아웃 증후군’을 경험한다. 과도한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로 몸과 마음이 탈진된 것이다. 번아웃 증후군은 일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에너지를 소진하여 극도의 신체적, 정신적 피로감을 느끼며 무기력해지는 증상이다. 1974년에 뉴욕의 정신분석가 프로이덴버거가 최초로 사용한 데에서 유래했다.

번아웃 증후군의 증상이 계속되면 우울증과 공황장애, 수면장애 등에 시달릴 수 있다. 또한 자신감이 저하되고 의욕을 상실하여 패배감과 소외감 같은 부정적인 감정의 지배를 받기가 쉽다. ‘과연 나는 지금 무엇을 하는 건가?’ ‘이렇게 살아가는 게 맞는 건가?’ 하며 삶에 대한 의구심과 공허함이 밀려온다. 삶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번아웃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을 니체가 제시한 ‘초인’과 ‘인간 말종’이라는 인간 유형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 제대로 잘된 인간과 인간 말종의 차이

인간 말종은 초인과 달리 자기 자신을 극복하려는 창조적 의지가 없다. 오로지 현실 안주적 삶을 살아갈 뿐이다. ‘최후의 인간’ ‘마지막 인간’이라고도 번역되는 인간 말종은 초인과 뚜렷이 구별되는 대척점에 서 있다. 인간은 초인과 인간 말종 중 하나를 양자택일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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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인간 말종이 아닌 초인으로서의 삶을 살 수 있는가?

■ 제대로 된 인간은 욕망한다

이성을 중시했던 플라톤은 욕망을 이성으로 억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니체는 이성보다 욕망을 더 중요시했다. 니체는 자신의 감각에 집중하라고 한다.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다’, ‘좋은 직장에 취직하고 싶다’등 욕망이나 욕구를 억제하거나 숨기면 안 된다. 삶은 욕망의 연속이다. 제대로 잘 된 인간은 자신의 욕구나 욕망을 통해 진정한 자신을 재발견한다. 다시 말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려면 자신이 원하는 것, 삶에서 체험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반면에 인간말종은 그저 즐거운 소일거리에만 매달리는 삶을 산다. 인간 말종도 ‘우리는 행복을 찾아냈다’고 말은 한다. 사실 그들이 찾아낸 행복이란 단순하고 편안하고 소소한 즐거움만 준다. 인간 말종은 초인과 달리 자신의 내면에 잠자고 있는 창조적 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들은 일하는 기계일 뿐이다.

■ 제대로 잘된 인간은 오로지 유익한 것만을 추구한다

니체는 “제대로 잘 된 인간은 자신에게 유익한 것의 한계를 넘어서면 그의 만족감과 기쁨은 중지해 버린다”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제대로 잘 된 인간은 자신에게 유익한 것만을 추구한다.

물론 인간 말종도 건강은 끔찍이도 생각한다고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인간 말종은 낮에는 낮대로, 밤에는 밤대로 자신들의 조촐한 쾌락을 즐기면서 살아갈 뿐이다. 이러한 인간 말종의 쾌락적인 삶은 때때로 약간의 독을 마신 것처럼 안락한 꿈을 꾸게 만들지만, 자칫 많은 독을 마시게 되어 안락한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오늘날 40대 가운데 우울증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신적인 허기는 아무리 맛있는 음식으로 배를 가득 채워도 충족되지 않는 법이다. 대신 명상이나 요가, 자전거 타기, 수영, 춤, 골프, 등산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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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으로 내면의 결핍을 채워보는 것은 어떠한가? 번아웃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렇게 나를 위한 시간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 제대로 잘된 인간은 해로운 것의 치유책을 안다

■ 제대로 잘된 인간은 신중하고 여유롭다

■ 제대로 잘된 인간은 탓하지 않는다.

* 몸과 마음이 불타 버리는 시기라도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잊지 마라.

◎ 05 역풍을 만나 보아야 어떤 바람에도 항해할 수 있다

- 몰락 -

오늘날 거의 모든 사람이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삶의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진정한 자아로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해 봄 직하다. 물질적으로 부족한 것이 없는 데도 문득문득 내가 원했던 대로 살고 있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청춘 시절에 간절히 원했던 꿈을 이루었을 때는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삶에[ 도달했다는 생각으로 자부심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점점 나이가 들수록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리가 꿈꾸는 진정한 삶이란 도착해야 할 종착역은 아니라고들 말한다. 그런 삶을 위한 종착역 같은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에게 끝은 오로지 죽음뿐이다. 그래서 인생이 허무한 것이다. 인생의 끝에는 무언가 대단한 것이 있을 것 같아서 숨을 헐떡이며 달려가 보지만, 아무 것도 없을 수 있다.

■ 경멸과 몰락이라는 위대한 순간

인간은 니체가 설정한 ‘신의 죽음’이라는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해 기댈 곳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지금까지 믿어왔던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허무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 인간은 홀로 삶을 헤쳐 나가야만 한다. 초인에 이르는 길은 고독하고 험난하다. 니체는 이러한 무(無)의 감정인 허무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초인이라는 새로운 인간 유형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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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없는 세상에서 인간은 자신이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에 깊이 절망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런 목적도 없는 절망스러운 삶이 경멸스럽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자신이 절망에 빠져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사람이 더 위험하다. 자신이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스스로 극복도 할 수 있다. 따라서 경멸의 순간을 맞이하는 것은 새로운 삶의 출발점에 서는 것이다.

매년 발표되는 OECD 주요 국가의 우울증 지수에 대한민국은 최상위권을 차지한다. ‘마음의 감기’라고 부르는 우울증은 중년에게는 불현듯 찾아오는 불청객이다. 우울 상태를 치료하지 않고 방치한다면 극단적인 경우 ‘절망사’에 까지 이를 수 있다. 절망사는 반복되는 절망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죽음에 이른 것을 말한다.

■ 상승만 하는 인생도 없고 하강만 하는 인생도 없다

차라투스트라는 저녁을 향해 나아가는 그의 길을 최고의 희망으로 축복하게 되는 때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몰락하는 자는 드디어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여 인간의 온전한 모습인 초인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인간은 인간 이전의 존재인 짐승으로 퇴락할 것인가. 아니면 삶을 극복하여 초인으로 상승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여기 인생을 아름답게 만드는 니체만의 비결이 있다.

□ 인생의 흐름에 맞추어 리듬을 타라

니체는 “힘의 느낌, 힘에의 의지, 용기, 긍지 같은 것들은 추한 것과 더불어 하강하며, 아름다운 것과 더불어 상승한다”라고 말한다. 당신은 인생의 흐름에 얼마나 맞출 수 있는가? 우리의 인생은 상승과 하강의 연속이다. 그래서 인생을 롤러코스트에 비유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의 감정은 롤러코스트와는 정반대이다. 롤러코스트가 상승했다가 하강할 때 가장 큰 짜릿함을 맛보는 반면 인생의 롤러코스트는 상승했다가 하강할 때 큰 죄절감을 맛본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추구하는 것에 지치게 된 이후로 나는 발견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역풍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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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난 이후로 어떤 바람이 불어도 항해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역풍을 이겨낸 배처럼 크고 작은 실패를 발판으로 역전승을 거둘 수도 있다. 그러므로 지신의 실패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때로는 막다른 길에 이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골목길에서 다시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새로운 길을 찾을 수도 있다. 새로운 지아를 찾아가는 삶은 직선이 아니다. 곡선이다. 또한 시작은 있으나 그 끝은 알 수 없다.

 

□ 자신에게 맞는 인생의 속도를 찾아라

□ 행복은 천천히 그리고 느리게 온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경멸과 몰락, 인생의 하강과 막다른 길은 변화의 성장통이다.

◎ 06 이미 정해진 것은 없다

- 우연과 팔연 -

■ 니체의 인생을 바꾼 세 가지 사건

□ 라이프치히대학 리츨 교수와의 만남으로

고전 문헌학 교수가 된 것

니체는 라이프치히대학에서 고전 문헌학의 선구자였던 테오도르 리츨 교수의 지도하에 고전 문헌학을 공부했다. 리츨 교수는 박사학위도 없는 니체에게 바젤 대학에서 그리스어와 문학을 강의하도록 추천했다. 또한 니체는 리츨 교수의 소개로 당대 최고의 음악가로 명성을 떨친 바그너를 만나는 행운을 누렸다.

□ 우연히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자유>를 발견한 것

젊은 시절 니체는 아주 고통스럽고 불안한 삶을 이어갔다. 니체는 그 당시 ‘인간은 왜 이 세상을 고통스러운 운명으로 살 수밖에 없을까?’라는 숙명적인 질문에 답을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때 니체의 삶이 운명과도 같은 철학적 스승을 만나는 일이 생긴다. 라이프치히 대학 다니던 1865년 10월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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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한 고서점에서 쇼펜하우어의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우연히 발견한다.

니체는 쇼펜하우어의 책이 마치 자신을 위해 쓰여진 것처럼 느껴졌다고 말한다. 아무런 신념과 희망도 없이 무기력하고 실망감과 가득한 삶에서 갈피를 못잡고 있던 니체에게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위안이 되었다. 결국 니체는 쇼펜하우어와의 우연하고도 운명적인 만남으로 고전 문헌학자가 아닌 철학자의 길로 들어섰다.

□ 루 살로메와의 만남과 사랑 그리고 처절한 상실

니체는 친구 파울 레의 소개로 루 살로메와 만났다. 니체는 루 살로메를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어느 별에서 와서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까?”라고 말했다. 니체는 그녀를 사랑했고, 레에게 루 살로메에게 청혼할 테니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그녀는 니체가 한 두 번의 청혼을 모두 거절했다.

그녀와 헤어진 후 심한 우울증과 자살에 대한 충동, 끔찍한 괴로움에 빠졌다. 그리고 이러한 절망감에 빠진 상태에서 그의 주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탄생했다.

■ 주사위가 던져진 그 순간이 우리의 인생

□ 아무리 사소한 것, 사소한 만남이라도 놓치지 마라

시간이 흐른 뒤 과거에 일어났던 우연한 일들을 돌아보면 아무리 사소한 것, 사소한 만남이라도 소중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작은 행복에 감사해하는 사람에게 더 큰 행복이 찾아오는 법이다. 일상생활에서 아주 사소하다고 넘겨 버리는 것들이 인생을 아름답게 만든다.

 

□ 우연을 두려워하지 말고 받아들여라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우연과 필연의 문제를 ‘주사위 놀이’에 비유한다. 니체는 우리의 삶은 신성한 우연을 위한 무도장이며, 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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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사위와 주사위 놀이하는 자들을 위한 신들의 탁자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하늘로 던진 주사위는 땅에 떨어지기 전까지 어떤 눈이든 나올 수 있다. 또한 6이라는 숫자를 원한다고 해서 꼭 주사위의 눈이 6이 나오게 할 수 없다. 즉 사람들이 던진 주사위가 뒤집히는 하늘은 우연의 영역이다. 그리고 주사위가 떨어져 1부터 6까지 하나의 숫자가 반드시 나올 수밖에 없는 대지는 필연의 영역이다.

니체가 삶을 주사위 놀이에 비유한 까닭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주사위가 우리의 삶과 닮았기 때문이다.

□ 일단 나아가라 그리고 때를 기다려라

우리의 인생은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어서 불안하지만, 삶의 순간순간에 내딛는 매 발걸음은 중요하다. 삶이 반복되는 주사위 놀이라면 주사위가 던져진 그 순간순간이 나의 운명이고 인생이다. 중요한 건 탁자 위에 떨어진 주사의의 숫자가 아니라 일단 주사위를 하늘을 항해 던지는 주사위 놀이 자체이다.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일단 주사위를 던져야 한다. 그리고 때를 기다려야 한다. 긍정은 우연을 필연으로 만드는 강력한 에너지이다.

제3장 어떻게 인생을 여행할 것인가

- 니체의 자극제 -

◎ 01 너는 네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 자유정신 -

- 너는 너의 주인이며 동시에 네 자신의 미덕의 주인이 되어야만 했다. 과거에는 미덕이 너의 주인이었다. 그러나 그 미덕은 다른 도구들과 마찬가지로 오로지 너의 도구여야 한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니체는 1878년에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Ⅰ>에 “자유 정신을 위한 책”이라는 부제를 붙여 출간한다. 이 작품은 니체가 각 장에 번호를 매겨 잠언 형식의 아포리즘 문체로 쓴 첫 번째 작품이다. 니체는 자서전에서 <인간적인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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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나 인간적인>은 어떤 위기의 기념비라고 말한다.

니체는 그 당시 두 가지의 삶의 위기에 처했다. 하나는 지난 10년간 무의미했던 바젤대학 고전 문헌학 교수로서의 생활로 건강이 나빠진 것, 또 다른 하나는 바그너와의 이별이었다. 니체는 젊은 시절부터 바그너의 음악이 없었다면 견디기 어려웠다고 고백할 만큼 그에게 의존했지만, 그런 바그너와 사상적 차이로 결별해야 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은 니체가 이렇게 자유 정신을 찾아 떠났던 악조건에서 출간된 것이다.

니체는 그의 자서전 <이 사람을 보라>에서 삶에서 결정적인 위기를 느낀 것은 총체적으로 길을 잃고 있다는 본능적인 생각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바그너와의 절교나 바젤 대학의 교수직 같은 실책은 단지 길을 잃었다는 징조에 불과했다.

니체는 삶의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는 바로 지금이 다시 “내 정신으로” 돌아올 절호의 시기라고 생각했다. 비록 당시의 니체는 질병으로 건강하지 못했지만, 오히려 그는 자신의 병이 잃어버린 길을 되찾게 해 주었다고 한다.

■ 자유정신을 찾기 위한 과정

□ 1단계 : 사막처럼 황량한 시험기

첫 번째 단계에서 자유정신은 자기를 가장 단단히 묶고 가장 지속적으로 의무를 느끼게 만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는 미지의 세계를 향한 격렬하고 모험적인 호기심으로 불타올라 “여기에서 사느니 차라리 죽어버리겠다”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여기’는 지금까지 자기가 사랑해 왔고 숭배해 왔던 모든 것을 의미한다.

니체는 이 단계를 ‘최초의 승리’, ‘최초의 폭발’, ‘자유로운 의지를 향한 의지’라고 표현한다.

□ 2단계 : 강인한 건강을 향한 의지에 지배되는 긴 회복기

사람들은 사랑과 증오의 속박에서 벗어나 아무런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사람으로 변하게 된다. 니체는 그 시간을 강인한 ‘건강에의 의지’에 지배되고 규제되는 시간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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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단계 : 잊고 있었던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성숙기

자유정신의 주변은 추운 겨울을 보내고 포근한 봄이 오듯 다시 따뜻해지고 노란빛을 띤다. 이제야 그는 비로소 자신의 주변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되고 자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깨닫게 된다. 또한 친근하고 가까운 것들이 달라 보이기 시작한다.

니체는 이러한 자유정신의 기질은 모든 것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모든 염세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치료법 이라고 말한다. 마치 병에 걸려 한동안 앓고 난 후에 더 오랫동안 더 건강하듯이 자유정신에 들어있는 삶의 지혜는 건강을 위한 약을 처방하는 것과 같다.

□ 4단계 : 자유정신이 삶의 주인이 되는 완성기

지금까지는 ‘네 이웃을 사랑하라’, ‘겸손하라’, ‘거짓말하지 마라’ 등의 미덕이 절대적 가치로서 나의 주인이었다. 이제 니체는 서구의 전통적인 형이상학과 기독교 교리의 밑바탕이 된 초월적인 가치들의 절대성을 부정한다. 모든 가치 평가의 기준은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 니체는 미덕이 자기 자신의 관점에서 볼 때 옳을 수도 그를 수도 있다는 상대주의 입장을 취한다.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에서 “자유 정신은 스스로 자기 자신을 다시 소유하는 자유롭게 된 정신인 것이다”라고 말한다.

누구나 젊은 시절에는 삶의 주인공이 되어 대단한 일을 해내고 싶어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에 둘러싸여 현실에만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삶에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위기는 기회의 또 다른 모습이다. 길을 잃었다고 느꼈을 때가 바로 익숙한 상황에 작별을 고할 때이다. 그때에 맞추어 우리 자신도 변화해야 한다. 닫힌 문을 뒤로 한 채 자신만의 새로운 철학 세계로 문을 연 니체처럼 평범한 일상에 의문을 던져보자. 자유정신은 일상에 의문을 던짐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야 비로소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만나게 될 것이다.

이제 삶의 한 가운데에서 인생의 근본적인 질문을 마주할 때가 되었다.

‘과연 무엇이 나를 살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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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해야 불만족스러운 삶과 이별을 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해야 내 삶의 기준을 찾을 수 있는가?’

◎ 02 고결한 귀족이 되어라

- 거리의 파토스 -

● pathos : 격정, 열정, 노여움 따위의 일시적인 정념의 작용,

말이나 글 속에 깃든 비장감. 감성적인 것

고귀한 종류의 인간은 자신을 가치를 규정하는 자라고 느끼기 때문에 타인에게 인정받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나에게 해로운 것은 그 자체로 해롭다.”라고 판단하면서 자신을 사물들에게 처음으로 가치를 부여하는 자로서 인식한다. 그는 가치를 창조하는 자인 것이다. <선악의 저편>

중국 전국 시대의 사상가이자 철학자 장주의 <장자> 첫 번째 <소요유> 편은 곤(鯤)이라는 거대한 물고기가 붕(鵬)이라는 거대한 새로 변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북쪽의 깊은 바다에 몇 천리나 되는지 모르는 곤이라는 물고기가 살고 있었다. 물고기는 나중에 등의 길이가 몇 천 리인지 알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새로 변한다. 이 붕새가 힘껏 날개를 펼쳐 날아오르면 마치 하늘을 드리운 구름과 같았다. 구만리 창공에 오른 붕새는 푸른 하늘을 등에 지고 큰 바람을 타고 거침없이 남쪽으로 날아간다. 매미와 새끼 비둘기는 그런 붕새를 보고 함께 비웃는다. 매미나 새끼 비둘기는 기껏해야 느릅나무나 박달나무 위에나 올라갈 뿐이거나 때로는 거기에도 못 미치고 땅에 떨어지고 마는데, 무엇 때문에 붕새가 구만리를 날아 남쪽으로 갔는지 그들은 이해할 수가 없다.

장자는 이 이야기를 통해 “지식이 짧은 사람은 박식한 사람의 세계에 미치지 못하고, 수명이 짧은 것은 장수하는 것의 경지에 미치지 못한다”라고 말한다. 즉 매미와 새끼 비둘기 같은 평범한 인간은 도저히 거대한 세계를 지향하는 붕새 같은 고귀한 존재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 거대한 붕새 이야기는 니체가 말한 ‘고귀한 인간’과 상통하는 면이 있다.

■ 고귀한 인간의 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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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의 작품 <선악의 저편> 마지막 장의 제목은 <고귀함이란 무엇인가>이다.

‘고귀함’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할까? 건강한 자아상, 즉 건강한 자존감이라고 할 수 있다. 자존감이란 자신을 스스로 가치 있는 존재로 생각하는 감정을 의미한다. 결국 니체가 말한 고귀한 인간이란 건강한 자존감을 소유한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니체는 고귀한 인간의 특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1. 고귀한 인간은 자기 자신에 외경심을 가지고 있다

<선악의 저편>에서 니체는 “고귀함이란 무엇인가?”, “고귀한 인간은 무엇에 의해서 드러나고 인식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니체는 어떤 인간이 고귀한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고 말한다.

고귀한 인간은 타인의 인정을 받으려는 생각을 하기보다 자기 자신을 먼저 인정한다. 다시 말해 고귀한 인간은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존중한다. 자기 자신에게 외경심을 갖는 것이 자존감을 높이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자지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다.

2. 고귀한 인간은 허영심을 싫어한다

고귀한 인간은 자신에게 외경심을 가지고 싶어하는 반면에 허영심은 실속이 없이 겉모습만 반지르르하고 자기 분수에 넘치게 사는 사람이 가지는 마음이다. 허영심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타인으로부터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한다. 고귀한 인간처럼 자존감이 높은 사람도 타인이 자신을 좋게 평가할 때 기쁨을 느낀다. 니체는 이것은 결코 허영심이 아니라고 말한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자신에 대한 세상의 평판에 온통 귀를 기울인다. 니체는 이런 사람을 “즉각 그 평판 앞에 무릎을 꿇는 노예”라고 지적한다.

3. 고귀한 인간은 자신의 이기심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선악의 저편>에서 니체는 ‘이기심’은 고귀한 영혼 본질에 속한다고 말한다. 이기심은 나에게 다른 인간들이 당연히 복종해야 하고 자신을 바쳐야만 한다는 확고한 믿음을 말한다. 하지만 고귀한 인간은 타인도 자신과 동등한 권리를 가졌다는 것을 인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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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가치를 창조하는 고귀한 인간이 되어라

고귀한 인간이 될 수 있는 방법으로 니체는 ‘깊은 고뇌’를 겪어 보라고 말한다. 깊은 고뇌를 겪은 사람은 자신이 겪은 고뇌 덕분에 가장 현명하다고 큰소리치는 인간보다 더 많은 것을 알게 된다.

남과 나를 비교하지 않고 자신의 힘을 긍정하는 것, 고귀한 영혼이 가져야 할 태도이다.

◎ 03 섬광처럼 내리치면서 자르고 분쇄하라

- 망치 -

니체는 <이 사람을 보라>에서 우상이란 이상을 표현하는 말이라고 한다. 우상은 사람들이 지금까지 진리라고 믿어왔던 이상적 세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것은 한 시대의 우상들이 아니라 유럽인에게 큰 영향을 준 철학, 문화, 도덕, 정치, 예술 등 모든 영역의 사상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상을 파괴하려는 니체는 현실주의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니체가 말하는 우상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서는 먼저 플라톤이 주장한 이데아론을 알아야 한다.

■ 동굴 안의 세계와 동굴 밖의 세계

플라톤의 대화편 <국가>에 나오는 ‘동굴의 비유’는 서양철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비유이다.

플라톤은 세계를 동굴 안의 세계와 동굴 밖의 세계로 구분한다. 동굴 안의 세계는 인간의 감각으로만 아는 세계이고 동굴 밖의 세계는 이성으로만 아는 세계이다. 플라톤에게 감각의 세계는 변화하고 상대적이며 불완전하므로 가상 세계이고 불변하며 절대적이고 완전한 이데아만이 참된 세계라고 말한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처럼 감각으로 얻은 지식은 참된 지식이 아니라 견해, 즉 독사(Doxa)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오로지 이성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지식, 즉 에피스테메(Episteme) 만이 참된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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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사 : 억견, 감각에 의한 지식, 어떤 근거에 의하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상 상하는 소견

* 에피스테메 : 과학적, 기술적, 전문적 지식 등의 일반 지식을 이르는 말

■ 망치를 든 철학자, 세계를 부수다

니체가 우상으로 규정하고 망치로 부수는 대상은 세계를 참된 세계와 가상 세계로 나누는 플라톤 철학이다. 니체는 플라톤의 이원론을 토대로 하는 그리스도교와 칸트 철학도 데카당스로 규정하고 몰락의 대상이라고 말한다.

*데카당스(Decadence) : 병적인 감수성, 탐미적 경향, 전통의 부정, 비도덕성 등의 퇴폐주의, 19세기 프랑스, 영국에서 시작

■ 헛된 것이 미혹되지 않는 법

이상주의가 극단적으로 흘러갈 경우 거기에서 비롯되는 헛된 망상은 자신을 가두는 감옥이 된다. 모든 근심과 걱정은 헛된 생각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어느 정도 안정이 되면 극단적인 이상주의자가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사람은 현실 감각이 너무 떨어진다. 방구석에 박혀서 지금까지 자신이 옳다고 믿었던 생각을 의심하거나 반박하지 않는다.

공허한 꿈을 니체의 쇠망치로 부수어라. 하루 종일 헛된 망상과 관념에 빠져 지내지 마라. 삶이 괴롭고 힘들더라도 끊임없이 시도하는 자만이 자신이 꿈꾸는 이상을 현실로 드러나게 할 수 있다.

현실주의자는 헛된 망상에 빠진 이상주의자를 향해 현실을 직시하라고 말한다. 꿈만 꾸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현실 사회에 적응하기 힘들다. 이러한 이상주의자들은 편협한 고정관념에서 해방될 때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다. 따라서 이상주의자는 현실주의를 약간은 받아들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와 아직 오지 않는 미래야말로 가상의 세계이다. 우리는 과거와 미래의 쓸데없는 것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워질 때 현재 지금 여기에 충실할 수 있다. 이러한 삶이 바로 ‘현재를 잡아라’로 번역되는 라틴어 카르페 디엠(Carpe Diem)이다. 과거의 안 좋은 기억이나 미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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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지 말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자는 것이 현실주의자 니체의 정신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후회와 염려의 마음, 그것을 부술 수 있는 니체의 망치를 준비하자.

◎ 04 행복을 행복으로 만드는 것은 잊는 것이다

- 망각과 기억 -

나이가 들수록 지나간 일들을 하나하나 꺼내 보다가 잠 못 이루던 밤이 얼마나 많아지는가. 지난날 추억들이 한 편의 영화처럼 생생하게 그리고 선명하기 스쳐 지나간다. 과거로 여행하다 보면 잊은 줄로만 알았던 일들이 기억 어딘가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것을 깨닫고는 새삼 놀란다. 고통스러워서 잊으려 했던 비참했던 기억도 너무나 소중해서 마음속 깊이 숨겨 둔 추억도 되살아나 현재의 삶을 붙잡는다. 그러다 잊으려고 발버둥을 쳐도 잊을 수 없는 수많은 기억의 무덤 속에 갇힌 나를 발견하곤 한다.

과거의 기억에 매여 있는 삶은 모든 것의 기준이 과거가 된다. 몸은 현재에 살면서도 마음은 과거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좋은 기억이든 아니면 좋지 않은 기억이든 거기에 구속되고 자유롭지 못하다면 우리는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없다.

■ 망각이라는 힘

우리는 앞서 낙타, 사자, 그리고 아이로 비유되는 초인에 이르는 세 변화를 살펴봤다. 니체는 우리가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초인이 되기 위해서는 변화의 마지막 단계인 아이처럼 살기를 원한다. 아이의 특징으로는 ‘순진무구함’, ‘망각’, ‘새로운 출발’, ‘놀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최초의 움직임’ 그리고 ‘성스러운 긍정’을 들 수 있다. 특히 망각, 즉 잊어버릴 수 있는 능력은 어린아이만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망각이란 우리가 선별하고 선택한 것만 받아들이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저지 능력이다. 니체는 망각의 과정을 육체적 소화에 비유한다. 우리가 음식을 먹고 소화할 때 수천 가지의 과정 전체를 의식하지 않듯이 망각도 우리가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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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에 경험하고 받아들여 기억된 것들을 소화해서 의식에 떠오르지 않게 하는 과정이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망각이 갖는 세 가지의 효용을 설명한다.

 

1. 망각은 우리가 잠시 휴식할 수 있도록 한다.

니체는 망각할 수 있는 힘에 문제가 생긴 사람을 소화 불능 환자에 비유한다. 만약 망각하는 저지 능력에 문제가 생겨 우리의 머릿속에 수많은 쓸데없는 생각들로 가득 차게 된다면, 아마도 정신 분열증이나 편집증에 시달릴 것이다.

2. 망각은 조형력과 함께 상처를 치유하고 성장하는 시간을 준다

트라우마는 ‘큰 상처’를 의미하는 라틴어 “Trauma”에서 유래했다. 트라우마는 과거에 경험한 사건, 예를 들면 어린 시절 겪은 부정적인 경험, 자동차 사고 같은 여러 가지 사고, 폭행이나 폭력 같은 다양한 사건에서 비롯된다.

니체는 조형력이란 스스로 고유한 방식으로 성장하고, 과거의 것과 낯선 것을 변형해 자기 것으로 만드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상실한 것을 대체하고 부서진 형식을 스스로 복제할 수 있는 힘이 바로 조형력이다.

조형력은 회복력과 같은 의미로, 과거의 상처가 만들어 낸 고통과 시련을 자기 자신에게 의미있는 것으로 만들어 내는 능력이다. 우리는 망각과 조형력을 통해서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그 상처를 통해서 성장할 수 있는 것이다.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이렇게 말한다.

“상처에 의해 정신이 성장하고 힘이 솟는다.”

3.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위한 의식에 빈자리를 마련한다.

니체는 망각이 없다면 어떠한 행복도, 어떠한 명랑함도, 어떠한 희망도, 어떠한 긍지도 지닐 수 없고, 현재라는 이 순간도 있을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약간의 빈자리를 마련해야 한다. 잘 잊어버릴수록 우리의 행복지수는 높아진다.

과거의 부정적인 감정들을 버릴 때 비로소 현재의 삶이 들어올 공간이 생긴다. 우리는 망각할 수 있기 때문에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시달리지 않고 현재 이 순간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니체는 망각은 ‘강한 건강의 한 형식’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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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강하게 사는 데 꼭 필요한 두 가지 도구

망각과 반대 능력인 ‘기억’이 반드시 아픈 상처가 된 과거처럼 지워야 할 대상인 것만은 아니다. 니체는 기억은 약속을 지켜야 하는 경우처럼 망각을 제거하고 오히려 절대로 잊지 않으려는 “능동적인 의욕 상태”라고 말한다. 기억은 상처에 대한 기억인 트라우마같이 일단 새겨진 인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수동적인 상태가 아니다. 기억은 ‘나는 하고 싶다’ 내지 ‘나는 할 것이다’와 같이 긍정적인 의지의 작용이다. 따라서 니체는 본래적인 의지의 기억을 잘 사용한다면 미래도 자신의 뜻대로 형성할 수 있다고 말한다.

니체는 “가장 작은 행복에서나, 가장 큰 행복에서도 행복을 행복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잊을 수 있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망각과 행복은 정비례 관계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순간순간의 삶의 문턱에서 지난 과거를 잊지 못하고, 후회와 두려움으로 멈추어 서 있다면 결코 이 순간이 행복할 수 없을 것이다.

제때 기억할 줄 알아야 한다. 제때 잊을 줄 알아야 한다.

◎ 05 피로 써라

- 아포리즘 -

나는 모든 글 가운데서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피로써라. 그러면 그대는 피가 곧 정신임을 알게 되리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니체를 만든 글쓰기

1. 온몸으로 써라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나는 모든 글 가운데서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피로써라”라고 말한다. 여기서 ‘피’는 생명의 본질 또는 삶 그 자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피로 쓴다는 것은 살아 ‘살아 숨 쉬는 글을 쓰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한 마디로 피로 글을 쓴다는 것은 ‘온몸’으로 글을 쓴다는 것이다. 온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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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한 삶의 지혜가 혈관 속으로 녹아들어 그 피가 글로 표현될 때 ‘정신’으로 영원히 존재하게 된다. 니체는 죽었지만 피로 쓴 니체의 글은 정신이 되어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고 있다.

니체는 <우상의 황혼>에서 이렇게 말한다.

“죽치고 앉아 있는 것이야말로 성스러운 정신을 거스르는 죄다. 걸으면서 얻은 생각만이 가치가 있다.”

좋은 글이란 삶이 지향하는 다양한 모습을 반영한 글이다.

니체는 건강상의 이유로 바젤대학 교수직을 사임한 후에는 글을 쓰기 위한 자신만의 서재도 없었다. 그는 10년 동안 여름에는 알프스 고산지대에서, 겨울에는 따듯한 지중해 연안에서 방랑의 길을 걸으며 글을 썼다. 그는 삶의 의미를 찾아 떠난 여행에서 극심한 육체적 정신적 질병과 치열하게 싸우며 얻게 된 생각을 수많은 글과 아포리즘으로 남겼다. 니체의 사상은 길 위에서 탄생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니체는 <즐거운 학문>에서 “나는 손으로만 쓰는 것이 아니다. 발도 항상 글 쓰는 사람과 함께하길 원한다.”라고 말한다.

2. 절실한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위한 글을 써라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Ⅱ>에서 충분한 사색도 진지함도 영혼도 없는 글을 쓰지 말고 스스로 사상가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이와 반대로 펜과 잉크와 책상, 즉 글을 쓸 수 있는 사정만으로 글을 쓰려는 사람이 많다. 이렇게 생겨난 부류의 책은 지식을 전달하는 하나의 통로밖에 되지 않는다고 니체는 지적한다.

3. 쉽고 간결하게 써라

아포리즘(Aporism)이란 잠언이나 경구 격언을 의미하며, 자신이 체험으로 깊이 깨달은 진리를 수비고 간결한 문장으로 표현하는 방식을 말한다. 니체가 아포리즘이라는 표현 형식을 좋아한 이유는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 니체는 건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짧고 강렬한 방식의 아포리즘 문체로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니체는 글을 중언부언 길고 어렵게 쓰지 말라고 했다. 좋은 글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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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결하면서도 많은 내용을 함축하는 짧은 글을 의미한다.

세 번째, 니체는 자신의 글이 한 가지로 해석되는 것을 원하지 않고, 독자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해 다양하게 해석하기를 바랐다. 아포리즘은 독자가 열린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제4장 어떻게 이 삶을 사랑할 것인가

- 니체의 마지막 질문 -

◎ 고통에 대한 처방은 고통이다

■ 삶의 고통에서 해방되는 방법

삶은 고통이라는 철학적 입장을 염세주의라고 부른다. 먼저 서양철학사의 대표적인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입장을 살펴보자.

쇼펜하우어는 부와 명성에 대한 욕망은 바닷물과 같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목이 마를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렇듯 인간의 욕망이 충족되지 못할 때 고통이 생겨난다. 다시 말해 우리 삶이 고통스러운 이유는 채워지지 않는 욕망 때문이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는 데다가 대부분의 욕망이 충족되는 데에는 많은 제약이 따른다. 또한 욕망이 계속해서 충족되더라도 그 행복감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권태로움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삶은 시계의 추처럼 고통과 권태로움 사이를 왔다 갔다 한다”고 한다.

쇼펜하우어는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방법으로 두 가지를 제시한다.

첫 번째 방법은 ‘예술’이다. 하지만 예술은 일시적인 진정제에 불과하다.

두 번째 방법으로 의지 자체를 ‘부정’하는 방법 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가 의지를 부정하기 위해 제시한 길은 바로 금욕과 고행이다.

□ 삶에의 의지와 욕망을 제거하라 VS 고통을 정면으로 응시하라

금욕주의적 성직자들은 고통을 완화하는 방법으로 ‘생명력을 최저점으로 끌어내리는 수단들’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가능하면 의욕하지도 소망하지도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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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 흥분하거나 피를 끓게 하는 모든 일을 피할 것, 사랑하지도 증오하지도 말 것, 평정심을 유지할 것, 복수하지 말 것, 부자도 되지 말 것, 정신적인 면에서 “바보가 되어야 한다”라는 파스칼의 원리를 따를 것 등이다. 의지나 욕망 자체를 부정한 쇼펜하우어의 방법이 여기에 해당한다.

니체는 ‘힘에의 의지’를 통해 인간에게 주어진 고통스러운 삶 자체를 적극적으로 긍정한다. 니체는 맹목적 의지가 야기하는 고통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쇼펜하우어와는 달리 고통은 단지 회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므로 직면할 것을 요구한다.

니체는 고통도 쾌락과 마찬가자로 그 안에 많은 지혜를 지니고 있으므로 종족 보존을 위한 커다란 요건으로 보았다. 결국 우리가 지금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면 잘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 기계적 활동에 몰입하라 VS 단순한 삶을 추구하라

금욕주의에서는 고통이 들어설 여지가 없도록 기계적 활동을 반복해서 계속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빡빡한 일정으로 채워진 시간을 아무런 생각 없이 시키는 일에 복종만 하며 보내는 고정된 생활 방식이 정말로 노동이 주는 축복일까?

니체는 단순하고 고정된 삶을 추구했다. 그는 건강한 삶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단기적 습관에 맞추었다. 그의 삶을 둘러싼 모든 것이 질병 등 고통스럽고 비참하고 불완전했기 때문에 여러 가지를 지속적으로 할 수 없었다.

□ 이웃 사랑으로 작은 기쁨을 얻어라

VS 고통을 열망으로 바꾸어라

니체는 약한 자들은 본능적으로 서로 뭉치는 데서 쾌감을 느끼고 만족한다고 지적한다. 금욕주의적 성직자들이 이러한 본능을 간파하고 이웃 사랑과 무리를 형성할 것을 장려했다는 것이다. 힘들고 괴로울 때는 세상에 나 홀로 남겨진 느낌이 든다. 사람들 대부분은 고통으로 인해 불행할 때 친구들을 만나거나 모임에 참여한다. 그 순간 고통과 불쾌감을 잠시 잊을 수는 있겠지만 다시 혼자가 되었을 때 밀려오는 상실감과 소외감은 더욱 커진다. 사실 다른 사람들과 함께한다고 해서 근본적인 고통과 외로움이 치유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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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삶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철저히 고독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는 고독한 사유의 여행에서 새로운 동반자를 발견한다. 바로 니체 자신의 그림자였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Ⅱ>에서 제2장 <방랑자와 그림자>는 자기 그림자와 대화한 결과물이다. 니체는 그 이후로도 철저히 고독속에서 내면의 그림자와의 대화를 통해 멋진 작품들을 완성했다. 외롭고 고통스러울수록 나를 따라다니는 내면의 그림자와의 대화가 필요하다.

□ 고통의 원인을 전환하라 VS 고통에 대한 처방은 고통이다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삶이 우리를 단련한다.

고통에 대한 처방은 고통이다.

거대한 고통이야말로 영혼의 최종적인 해방자이며 이러한 고통이 우리의 생각을 좀 더 심오하게 만든다. 고통에도 곤혹과 불안에 빠져들지 않는 자만이 위대함에 도달할 수 있다.

◎ 02 고독을 감당할 힘을 보여 주어라

1879년 5월 2일, 니체는 바젤대학 교수직을 그만두고 6월 14일에 연금을 받으며 퇴직한다. 니체는 이제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방랑의 길을 떠난다. 그가 방랑의 길을 떠난 이유는 점점 나빠진 건강 때문이었다.

그는 아무 것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안구 통증이 계속되었다. 질병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으므로 홀로 지내야만 했다. 그에게 찾아온 것은 외로움이었다.

니체에게 재산이라고는 원고와 몇 권의 책이 든 커다란 여행용 트렁크 뿐이었다. 그는 어디에도 정착하지 않았다. 자신의 건강과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장소를 찾아 끊임없이 어딘가를 여행했다.

1879년은 니체에게 삶의 전환점이 되었다. 니체는 그해에만 118일이나 질병으로 인해 심한 고통을 겪었다. 그는 죽음을 직면하고서 자신을 둘러싼 모든 세계를 깨뜨리고,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한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 여행은 자기 자신을 찾는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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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Ⅱ>에서 인생의 여정을 걷는 인간을 여행자에 비유하며 여행자를 여러 단계로 구분한다. 가장 낮은 등급의 여행자는 여행할 때 남들에게 관찰당하는 대상에 불과한 사람이다. 니체는 그를 순전히 수동적인 인간으로 눈먼 자라고 말한다. 가장 높은 등급의 여행자는 여행을 통해 배운 것을 내면화하여 삶에 적용하는 창조자이다.

여행에서 중요한 것은 여행을 통해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이다. 그는 고독을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고독을 추구해야 할 대상으로 여겼다.

■ 길을 걸으며 깨달은 삶

니체는 온전히 혼자 산과 바닷가에서 길을 걸으며 자기 자신과 끊임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책상에 가만히 앉아 사색의 시간을 갖는 것도 좋지만, 산이나 바닷가에서 걷고 뛰고 춤추면서 사색했다. 니체는 “우리는 책 사이에서만, 책을 읽어야만 비로소 사상으로 나아가는 그런 인간들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가브리엘 바르셀은 인간을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즉 여행하는 인간이라 정의한다. 인간은 삶의 의미를 찾아 떠나는 존재라는 것이다.

■ 창조자의 길을 가기 위한 고독의 길

차라투스트라는 자기 자신에 이르는 길을 찾기 위해서는 고독 속에 머물러야 한다고 말한다. 내면의 나와 만나기 위해서는 ‘무리 본능’에서 벗어나 고독한 길을 가야 한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렇게 묻는다.

“형제여, 그대는 고독 속을 들어서려 하는가? 그대 자신에 이르는 길을 찾으려 하는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홀로가 된 창조자는 많은 사람에게 시달릴 수 있다고 말한다. 창조자의 길은 고난의 길이다.

■ 고독한 15분이 주는 청량감

니체는 자신의 가장 내적인 샘에서 솟아나는 가장 강한 청량제를 마시기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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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15분의 고독한 시간이 필요했다. 고독은 우리가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시간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바로 자신의 감정과 내밀한 접촉을 위해서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는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그래서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Ⅱ>에서 자신과 자연속에서 가장 깊이 반성하는 15분의 시간을 가지라고 말한다.

날마다 잠깐이라도 번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혼자만의 공간에서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을 가져보라. 내 안의 또 다른 나는 항상 침묵하고 있다. 어느 날 침묵이 나에게 말을 걸어 올 때, 우리는 자신과 진심으로 함께할 수 있다.

고독을 즐기지 않고서는 결코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주변에 아무 것도 두지 않은 채 내 안의 고요함에 귀를 기울여라.

혼자라는 것은 남들과 다르다는 뜻이고,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혼자라는 뜻이다.

 

◎ 03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모른다

- 르상티망 -

연애, 결혼, 출산 세 가지를 포기한 세대를 ‘3포 세대’, 여기에 내 집 마련과 인간관계까지 포기한 세대를 ‘5포 세대’라고 불린다. 이후 꿈과 희망을 추가로 포기한 ‘7포 세대’에서 더 나아가 건강과 외모까지도 포기한 ‘9포 세대’에 이르렀다.

결국 아예 여러 가지를 완전히 포기한 세대를 자칭하는 ‘N포 세대’라는 신조어가 등장했다. 중산층은 사라지고 소득계층의 양극화가 점점 심해지고 있다. 슬프지만 치솟는 물가와 불안정한 고용 시장 속 생존의 벼랑 끝에 내몰린 우리 세대가 내 뱉을 수 있는 말은 결국 ‘이번 생은 망한 것 같다’이다.

■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의 생각

니체는 <도덕의 계보> 첫 번째 논문 10절에서 도덕에서의 노예반란은 ‘르상티망(ressentiment)’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니체가 제시한 ‘르상티망’은 약자가 강자에게 품는 원한이나 증오 복수심 등이 되풀이되면서 쌓인 감정을 뜻한다.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노예는 힘으로 강자를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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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의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하여 르상티망이라는 감정을 사용했다. 그 결과 니체는 르상티망으로부터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냈다.

주인 도덕은 지배자의 도덕을 의미한다. 주인 도덕은 자신이 피지배 종족과는 다르다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 지배 종족에서 발생했다. 주인 도덕에서는 ’좋음‘이 무엇인지를 지배자가 스스로 결정한다. 그들이 바로 ’고귀한 인간‘이다. 고귀한 인간은 자신에게 긍지와 자부심을 느낀다.

두 번째 유형인 노예 도덕은 지배받는 자, 즉 노예들 사이에서 발생했다. 예를 들면 학대받는 자, 억압받는 자, 고통받는 자, 자신에게 확신이 없는 자, 피로에 지친 자들의 도덕이 바로 노예 도덕이다. 그런데 이러한 노예는 주인 도덕을 호의적인 시각으로 보지 않고 증오한다. 이 감정이 바로 르상티망이다. 원한에 찬 노예는 자신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강자였던 지배자에게 반감을 가진다. 노예는 강자를 부정하다가 결국 ’악한 인간‘으로 규정하고 이와 대조적인 ’선한 인간‘을 생각해 낸다. 그리고 그 선한 인간을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노예 도덕에서 ’선악 이분론‘인 도덕을 만든 것이다. 노예 도덕은 약자는 무조건 ’선‘이고 자기보다 강한 지배자는 모두 ’악‘으로 규정했다.

 

■ 강자는 악하고 약자는 선하다는 시선

니체는 인류의 전체 역사에서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의 대표적인 대립의 예로 로마인과 유대인을 들었다. 유대인은 로마의 지배를 받은 노예민족이다. 로마인은 고귀하고 귀족적이며 강인했던 반면에 유대인들은 천민이자 성직자 민족이었다. 힘으로는 이길 수 없었던 유대인에게는 자신의 정복자에게 원한이 있었다.

니체는 유대인이 힘이 없는 약자, 가난한 사람, 고통받는 사람, 궁핍한 사람,에 대한 기독교의 사랑과 용서를 도덕적으로 ’선‘으로 규정하며 노예반란을 시작했다고 말한다. 마음이 가난한 자만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성서에 따라 가난한 유대인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고, 부유했던 로마인은 결국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논리를 내세운 것이다. 역사를 보면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었으니 유대인의 노예 도덕의 승리로 끝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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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주인 도덕에서 ’좋음‘이 노예 도덕에서는 ’악‘으로 규정되고, 주인 도덕에서 ’나쁨‘이 노예 도덕에서는 선으로 규정되어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의 근본적인 대립이 발생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잘 나가는 부자들을 바라보면 자신도 모르게 상대적 박탈감과 열등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타인의 행복을 바라보면서 열등감에 빠지고 분노를 느끼는가?

그 이유는 ’강자는 악하고, 약자는 선하다‘, ’부자는 악하고, 가난한 자는 선하다‘같은 노예 도덕이 오늘날에서도 보편화 된 현상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좋음과 나쁨, 선과 악’이라는 대립하는 두 가지 도덕 가치는 역사 속에서 수천 년간 지속되어 온 무서운 싸움이라고 말한다. 노예 도덕에 빠져 있는 사람은 자신의 열등감을 스스로 극복하지 못하고, 단순히 나보다 잘난 사람들을 부정하거나 비난하는 데 그치고 만다. 그렇다면 우리는 르상티망의 원인인 열등감을 어떤 식으로 극복할 수 있겠는가?

■ 생각의 노예에서 생각의 주인으로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창조하는 자가 아니라면 그 누구도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모른다!”

초인은 가치의 기준이 외부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있다. 주인 도덕에서 삶을 스스로 극복하려는 강한 자, 고귀한 인간, 귀족적 인간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초인과 연결된다. 반면에 노예 도덕에서 약한 자, 비천한 인간, 천민은 니체가 말한 초인과 반대되는 인간 유형인 인간말종의 모습과 연결된다.

당신은 지금까지 생각의 주인으로 살았는가, 생각의 노예로 살았는가? 지금 당신의 모습은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끼는 능동적인 인간인가, 아니면 원한과 증오의 감정이 곪아 터져 고통을 느끼는 인간인가?

자신의 나약함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 원인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고 있는가, 아니면 고귀한 인간처럼 행운의 여신의 앞머리 털을 잡기 위해 적절한 때를 기다리고 있는가?

우리에게는 열등감을 무기력하게 받아들이는 태도는 버리고 정면으로 맞서는 자세가 필요하다. ’르상티망‘을 해결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이란 열등감을 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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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아 도약하는 삶이다. 외부의 가치보다 자신의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생각의 노예에서 생각의 주인으로 변할 수 있다.

우아하고 고귀하게 사는 것은 곧 의욕적이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사는 것이다.

* 르상티망(Ressentiment) : 약한 입장에 있는 사람이 강지에게 품는 질투, 원한, 증오, 열등감 등이 뒤섞인 감정

고귀한 인간은 자신을 존중하며 능동적인 삶을 산다. 비천한 인간은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며 수동적인 삶을 산다. 당신은 삶의 주인으로 살텐가. 노예로 살텐가.

◎ 04 나만의 작은 행복 정원을 꾸며라

니체는 인간의 삶이 불행하게 된 원인을 판도라 상자 안에 마지막으로 남겨졌던 ’희망‘에서 찾는다.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Ⅰ>에서 판도라의 상자 안에 남아있던 희망에 대해 “희망은 참으로 재앙 중에서도 최악의 재앙이다. 희망은 인간의 괴로움을 연장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니체가 말하는 희망은 이중적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희망은 기대감과 괴로움을 동시에 준다. 사실 어떤 불행한 일이 닥쳐와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면 다시 행복한 삶을 이어갈 수는 있다. 하지만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는 막연한 희망은 우리의 삶을 좀먹게 할 뿐이다.

■ 두 종류의 행복한 사람

니체는 <즐거운 학문>에서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행복한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 첫 번째는 젊은 나이에도 감탄할 만큼 삶을 즉흥적으로 연출할 줄 아는 사람이다. 그는 끊임없이 대담한 일을 하지만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두 번째는 자신이 원하고 계획했던 모든 일에 실패한 사람이다. 그는 성공을 위해 열심히 노력했지만 여러 번의 몰락과 파멸을 경험한 사람이다. 니체는 하는 일마다 실패한 두 번째 유형의 사람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니체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대들은 그가 불행하다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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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인생은 실패로 인해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을 정도로 밑바닥까지 내려갈 수 있다. 니체는 성공보다는 실패를 했을 때 더 감사할 의무가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삶을 잃을 만큼 위험한 순간을 겪다 보면, 그런 인생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읜 니체는 외로운 청소년기를 보냈다. 스물다섯 살에 박사학위도 없이 스위스 명문 바젤대학의 교수가 될 만큼 천재였지만 다른 천재들과 마찬가지로 니체의 삶도 펑범하지는 않았다.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Ⅱ)에서 행복을 식물의 생장에 비유한다. 인간은 세상의 슬픔 바로 옆에, 그리고 온갖 재앙을 쏟아내는 화산지대 위에 행복이라는 작은 정원을 건설해왔다. 이는 행복이라는 나무는 불행이라는 나무와 함께 자랄 수 밖에 없다는 뜻이다.

니체는 <즐거운 학문>에서 행복과 불행의 관계를 함께 커가는 두 명의 오누이와 쌍둥이에 비유한다. 즉 행복과 불행은 서로 반대말이 아니다. 행복과 불행은 언제나 함께 성장하고 함께 성장을 멈추어 버리는 그런 관계이다.

■ 평생 행복하게 사는 법

□ 운명은 기대하지 말고 우연은 환영하라

우리는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미래를 계획한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모든 사람이 추구해야 할 궁극의 목적이자 최고의 선으로 보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노력하는 만큼 목표들이 기대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자신을 불행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운명처럼 생각한 일, 꼭 이루고 말겠다던 목표, 기대했던 경험들 보다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일들이 오히려 우리를 기쁘게 한다는 것이다. 무의미하고 사소한 것들에서 즐거워하고 웃음이 터질 때, 소소한 행복이 찾아온다.

□ 행복에 이르는 단 하나의 길이란 없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과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어라”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19세기 중반 영국의 대표적 사상가 벤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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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최대한 많은 사람에게 최대한 높은 쾌락이 주어져야 행복한 사회가 된다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양적 공리주의 사상을 주장했다.

하지만 벤덤의 양적 공리주의는 육체적, 양적 쾌락만을 중시했기 때문에 ‘돼지를 위한 학설’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왜냐하면 다수가 상대적으로 질이 낮은 쾌락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리주의처럼 많은 사람에게 단순한 안락이나 쾌락을 주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다시 말해 행복에 이르는 단 하나의 길이란 있을 수 없다.

□ 행복하고자 한다면 삶에 의욕을 가져라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Ⅰ>에서 행복한 시대가 있을 수 없는 두 가지 이유를 말한다. 하나는 사람들이 단순히 그것을 원하기만 할 뿐 가지려고는 하지 않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평화로운 날들이 찾아오면 오히려 불안과 비참함을 기원하기 때문이다. 행복하고자 한다면 행복한 삶에 대한 의욕을 가져야 한다. 즉 매 순간 행복한 사람의 태도로 행동해야 한다.

나 자신의 행복은 스스로 행복해지려는 의지에 달려있다. 니체는 <아침놀>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행복의 공통점은 두 가지, 즉 충만한 감정과 그것에 수반되는 자부심이다.” 삶은 끊임없이 변하고, 무엇하나 확실하지 않다.

영원히 행복할 것 같지만 한 순간에 부서지기 쉬운 것이 우리의 삶이다. 역설적으로 영원한 행복이 없다는 사실은 우리가 현재 행복한 이 순간에 더 집중하게 해 준다. 지금 당장 행복해지기 위하여 자신의 내면을 충만함과 자부심으로 가득 채워보자. 행복한 시대는 없지만 언제든 지금 이 순간 행복할 수 있다.

◎ 05 죽음을 맞이하는 법을 배워라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능력을 개선하려는 트랜스 휴머니즘 사상가들은 2050년경에는 인간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장애, 고통, 노화 같은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예찬한다. 불멸의 삶을 꿈꾸어 왔던 인간에게 죽음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기술적 문제일 뿐이다. 이제 많은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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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학자는 죽음이 희귀한 시대 즉 ‘죽음의 죽음’시대가 임박했다고 예고한다. 하지만 …….

■ 뭉크와 니체가 바라본 죽음

노르웨이의 대표적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가 그린 <프리드리히 니체>라는 니체의 유명한 초상화가 있다. 노란빛의 하늘에 붉은빛의 구불거리는 선이 표현된 강렬한 색감, 배경을 대각선으로 분할하는 난간에 서 있는 니체를 보면 뭉크의 대표작 <절규>와 분위기가 비슷하다. <절규>는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에게 잘 알려진 작품 중의 하나로 뭉크의 삶에 자리한 근원적인 공포와 불안을 잘 표현했다.

뭉크의 작품은 그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뭉크는 어린 시절부터 불안과 공포로 가득 찬 자신의 내면을 작품에 표현했다. 그가 다섯 살 때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고 열네 살 때는 누이, 또한 비슷한 시기에 어린 여동생이 정신병에 걸렸다. 20대에 아버지도 잃었고 30대에는 남동생마저 죽었다. 그로 인해 그는 우울증, 공황장애, 정신 분열에 시달렸다. 뭉크는 자신의 내면에 자리 잡은 불안 공포 등 부정적 검정을 그림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니체 역시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했고 평생 질병에 시달렸으며 심각한 정신병을 앓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뭉크는 <즐거운 학문>등 니체의 작품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으며 니체의 사상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뭉크는 이러한 니체의 사상을 탐독하면서 자신의 삶을 위안했을 지도 모른다.

‘죽음’이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두려움’ 또는 ‘공포’라는 감정일 것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왜 그토록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로잡히는 것일까? 아마도 죽음이 인간에게 주는 의미를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니체는 어린 시절부터 가족의 죽음을 경험했고 평생 죽음에 대한 공포가 따라다녔다는 점에서 뭉크의 삶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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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재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 제때에 죽기 위해서는 초인의 삶을 추구해야 한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제때에 죽도록 하라”라고 말한다. 여기서 제때에 죽는 것이란 자신이 원하는 때에 죽음을 맞이하는 ‘자유로운 죽음’을 의미한다.

니체는 많은 사람들이 제때에 살지 못하고 잇다고 지적한다. 제때의 삶이란 바로 ‘초인’으로서의 삶이다. 자기 자신을 극복하려는 초인이야말로 제때에 살고 제때에 죽을 수 잇다. 우리는 무미건조한 현실 안주적 삶을 영원히 살 것인가 아니면 쩨때의 삶을 살 것인가 하는 양자 택일의 문제에 놓여 있다.

□ 제 때에 죽기 위해서는 매 순간 ‘메멘토 모리’해야 한다

니체는 죽음을 맞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죽음을 맞이하는 태도에서 삶의 태도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고대 로마인들은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말을 했다. 살아가면서 지금 당장 죽을 것처럼 이 순간을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이다.

□ 죽음은 삶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삶을 완성하는 것이다

누구도 나의 죽음을 대신해 줄 수 없다. 죽음은 오로지 홀로 맞이해야만 하는 두려운 사건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죽음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깨달았다. 죽음이란 삶의 파멸이 아니라 삶의 완성이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인생을 낙관적으로 볼 수 있고, 숨이 붙어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깨닫게 된다.

평생을 경쟁 속에서 살아온 우리는 불확실하고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늘 불안감과 걱정에 시달린다. 가난과 질병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동이나 명예 등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변화에 대한 두려움, 성실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혼자 남는 것에 대한 두려움, 등 수많은 두려움으로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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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토리노에 살던 니체는 1889년 1월 3일 카를로 알베르토 광장에서 한 마부가 자신의 말을 심하게 채찍질하는 장면을 보았다. 그 순간 니체는 비명을 지르며 달려가 말의 목을 끌어안은 채 울다가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하숙집 주인이 니체를 발견하고 집으로 옮겼으나, 1900년 8월 25일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오랫동안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니체는 10여 년간 정신적 암흑기를 보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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