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1. 28. 12:15ㆍ독서후기
궁핍한 날의 벗 (2)
- 병든 사회의 깨어 있는 지성 박제가,
그의 날카로운 비판, 고결한 감성, 멋스러운 취향 -
■ 박제가(朴齊家) 1750 – 1805
■ 안대회(安大會) 옮김
◎ 제3부 붓과 벼루를 버려두고 어디를 갔는가
- 제문과 행장
■ 외사촌 누이 : 제문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에 고종사촌 동생 박제가는 삼가 술과 과일을 차려놓고 광주(廣州)이씨의 혼령에 곡하고 아룁니다.
오호라! 부모님이 계시지 않으면 바깥일은 숙부께 여쭙고, 집안일은 고모나 큰누님께 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직접 어른을 모시지 않은 이가 그분들에 대해 말할 것이 뭐라도 있을까요?
저는 불행히도 늦둥이로 태어나 아버지를 일찍 여의다 보니 선친의 만년 행적을 말하고 싶어도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더구나 할아버지와 큰아버지 때의 옛일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누님은 많은 사촌 형제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고 현명하셨습니다. 제가 열댓 살 때 선친의 의복을 가지고 도성 남쪽 집을 찾아가 뵌 일이 생각납니다. 제 머리를 쓰다듬고 떡과 엿을 주며 제게 옛일을 줄줄 말해주시며 그칠 줄을 몰랐습니다. 용모나 성품의 특이한 점이나 의복과 제사의 품격, 혼사와 족보의 근원으로부터 벼슬한 자세한 날짜까지 들었는데 그중에는 비명과 묘지명, 기록과 견문에서 얻어듣지 못하던 이야기가 심심찮게 있었습니다. 제가 당시에는 나이가 어려서 대충 넘기고 새겨듣지 못했습니다.
얼마 뒤에 누님은 남쪽 충청도 남포로 이사하였고 저 또한 의지가지없는 신세로 자주 이사를 다니다 보니 소식은 한 해에 한 번쯤 들었습니다.
계사년(1773)에 저는 홀어머니를 여의었고, 기해년(1779)에는 임금의 은총을 입어 내각에 뽑혀 들어갔습니다. 그때 누님이 서찰을 보내셨는데 거기에서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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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 “벼슬에 첫발자국을 뗀 것은 귀할 것이 없고, 자립하여 큰일을 이루어야 훌륭하네. 끝까지 노력하여 청렴하고 신중하여 집안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말게.”라는 취지로 당부하였습니다. 당시에 누님의 연세는 거의 일흔으로 검은 머리칼이 하나도 없다고 들었으나 필체가 굳세고 단단하여 여전히 평상시와 똑같았습니다.
금년(1783) 봄 제가 규장각 직함을 유지한 채 충청도 이인(利仁)의 찰방(察訪)으로 나가게 되었습니다. 남포와는 이웃한 고을이라 머지않아 얼굴을 뵐 수 있으리라 다행으로 여겼습니다. 그때 저는 한창 집안에 전해 오는 옛 사적을 정리하여 편찬하던 중이라 또 선대의 일을 물을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그렇건마는 안부를 여쭌 서찰에 돌아온 답장이 갑자기 해를 넘겨 전달된 부고가 되고, 보내드린 선물이 제상에 올릴 제물이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중략)
오호라! 새 무덤에는 흙이 채 마르지 않았으나 누님의 음성과 모습은 영영 가로막혔습니다. 이곳에 근무하면서 자주 여기로 나온다 한들 또 누구를 보러오겠습니까? 붓을 잡고 또 한 번 통곡하려니 눈물이 샘처럼 솟아납니다. 오호라! 애달픕니다. 흠향하소서.
<제심외자문 祭沈外姊文> (1783년, 34세)
□ 외사촌 큰누님의 추억
30여 세 이상 차가 나는 외사촌 누이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이다. 34세 되던 1783년 본에 충청도 이인찰방에 재직할 때 지었다. 족보에서는 이 누이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어 자세한 관계를 밝히지 못했다.
집안의 옛일을 잘 알고 어른답던 여사풍(女史風)의 누이를 추억하는 내용이 글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 장인 이관상의 제문
경인년(1770) 10월 정축(丁丑)일에 첫째 사위 밀양 박제가는 삼가 향을 사르고 술을 따라 띠풀에 뿌리고서 장인어른이신 고 절도사 이관상 공의 관에 두 번 절하고 곡한 뒤에 아룁니다. 오라! 천하에서는 장인과 사위가 무덤덤해진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평범한 사람도 사위를 자랑할 줄 알고 장인을 사랑할 줄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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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장인을 사랑한다고 해서 장인을 잘 이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릇 장인과 사위 사이의 즐거움은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 소중하지, 딸자식의 남편이고 아내의 아버지라는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서로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고 사위니 장인이니 부르면서 되는대로 그 집안을 출입합니다. 그것은 가정 안에서 옷과 음식을 떠받들어 모시는 것을 즐기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서로 간에 무덤덤하기가 너무 심합니다.
그렇지만 장가드는 날에는 기럭아비가 앞에서 길을 안내하고, 수종꾼이 골목을 가득 메우며, 신랑을 맞아들이는 이들이 길에 줄지어 서 있습니다. 의복과 안장 지운 말, 병풍과 초례상, 온갖 그릇은 모두 금은이나 색채로 화려하게 꾸밉니다. 사위를 이끌어 대청위에 오르게 하여 장인에게 절을 시키면 장인은 사위에게 눈길이 박힌 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릅니다. 좌우를 둘러보다가 아끼지 않고 물 쓰듯 사위에게 물건을 건네주면서 혹시라도 받지 않을까 되레 걱정입니다. 사위가 말 한마디 꺼내면 거스르는 것이 없습니다. 대관절 이는 누가 베푼 힘입니까? 모두가 장인이 사위를 사랑하여 그런 것입니다.
그러다가도 장인의 부음을 듣게 되면 창피하다며 눈물도 흘리지 않고 날이 저물어야 조문하러 갑니다. 그마저도 겨우 세 번 곡소리를 내면 그만이고, 제삿날이면 먼저 고기를 집어 먹습니다. 그 때문에 세상에서 자기와 상관없는 일을 비꼬아 장인 제사라고 합니다. 이것은 살아서는 사랑을 독차지하다가 죽어서는 의리를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또 어쩌면 그리 무덤덤하단 말입니까!
(중략)
오호라! 저는 세상 물정에 어두운 선비입니다. 키는 칠 척이 되지 않고 이름은 동네 밖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공께서는 한 번 보시고 딸자식을 제 아내로 주셨습니다. 풍류와 기개가 친구처럼 들어맞았습니다. 제가 껄껄 웃으면 생각이 있어서 그런 줄로 이해하셨고 장난친다고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쿨쿨 잠에 빠지면 마음이 편해서 그런 줄로 이해하셨고 게으르다고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중략)
공께서 언젠가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갓은 굳이 가릴 것 없이 검고 둥글면 되고 신은 굳이 꾸밀 것 없이 삼태기만 아니면 신는 게지.” 그 말에 저는 일어나 이렇게 대꾸했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이 사위에게는 너무 불우한 삶입니다. 저는 속으로 늘 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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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향(沈檀香)으로 제 소상(塑像)을 만들고 오색실로 제 모습을 수놓아 열 겹 보자기에 싸서 영원토록 전하여 사람마다 볼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산과 물, 구름과 안개가 아름다운 풍경이나 꽃과 나무, 새와 짐승이 고운 것을 보면 불쑥 기쁘고 사랑스러워 저도 그렇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제가 오늘날 휑뎅그레 아무것도 없는 집에서 주먹밥에 맹물 마시고 누더기옷을 입는 꼬락서니라 나쁜 것도 모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마음까지 설마 그렇겠습니까? 단지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을 뿐입니다.”
공께서는 남에게는 화낼 일도 제게는 웃어넘기셨고, 남에게는 가식으로 하실 일도 제게는 진심으로 대하셨습니다. 마음으로 서로 통해 각자 하지 않는 행동이 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중략)
옛날에 세숫물로 얼굴은 씻지 않고 도리어 들이마신 사람이 있었습니다. 친구가 큰 미치광이라고 요란하게 헐뜯었더니 그 사람이 “남들은 걷을 씻고 나는 안을 씻네.”라고 답했답니다. 오호라! 공께서는 안을 씻은 광인인가 봅니다. 마음은 미치지 않았고, 행동은 미치지 않았으며, 아는 이에게는 미치지 않았고, 오로지 모르는 이에게만 미쳤을 뿐입니다. 오호라! 공께서는 아는 이를 만나지 못해 광인인가요? 썩은 선비는 글줄이나 읽을 줄 아는 것으로 활과 화살을 잡은 무인을 업신여깁니다. 무인이라 공을 비웃고, 광인이라 공을 조롱하였습니다. 공께서도 광인의 처지로 그들을 대하여 한층 더 광인답게 행동하였습니다.
오호라! 공께서 선비를 좋아하지 않는 성품이라 그렇게 광인의 행동을 하셨겠습니까? 단지 속된 선비를 좋아하지 않으셔서 저와 같이 행동하셨을 뿐입니다. (중략)
오호라! 사람들은 한가로울 때 악한 짓을 못 하는 것 없이 하면서 시치미를 뚝 떼고 남을 속이려 듭니다. 제 딴에는 잘된 꾀라 자부하지만 공의 광인다운 눈길에는 간파당하지 않을 자가 거의 없습니다.
오호라! 죽음이란 잊는 것이고, 잊으면 정이 없어집니다. 죽음이란 깨닫는 것이고, 깨달으면 후회가 없어집니다. 그러나 망자의 처지로 망자를 본다면 어찌 슬프다 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종일토록 술잔을 올린들 어찌 한 모금이라도 마시며, 종일토록 관을 어루만진들 어찌 말씀 한마디 하겠습니;까? 슬퍼해도 알아차리지 못하시니 곡을 한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그러니 산 자의 처지로 망자를 본다면 도리 없이 답답하여 다시 곡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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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라 제가 곡하는 것은 사위로서 장인을 슬퍼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공에게 지기(知己)로서 감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호라! 슬프도다! 흠향하소서!
<제외구이공문 祭外舅李公文> (1770년, 21세)
□ 장인과 사위 사이의 사랑과 이해
박제가가 21세(1770)에 쓴 장인 제문이다. 그는 17세(1766)에 경상좌병사 이관상(李觀祥)의 서녀와 결혼하였다. 글에도 나오듯이 1769년에는 영변도호부사로 부임하는 장인을 따라 영변에 가서 한참을 머무르며 과거 공부를 했는데 그때 묘향산을 유람하였다. 그러나 다음 해 8월 19일 장인은 임지에서 갑자기 사망하였다.
장인이 사망한 뒤 박제가는 장인의 행장(行狀)과 혼유석명(魂遊石銘) 그리고 제문을 지었다. 이 글들은 20세 무렵의 예민한 감수성과 참신한 문체, 진정성 있는 글쓰기가 용해된 명문이다.
박제가는 장인과 사위 두 사람의 독특한 개성을 진정성 있게 표현했다. 가식을 싫어하고 남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는 직선적인 무인 기질이 광인(狂人)의 행동으로 나타난 점을 인상 깊게 묘사하였다.
■ 이사경 제문
계사년(1773) 8월 말일에 초정 박제가는 창라(蒼蘿) 이사경(李士敬)의 영구 앞에서 통곡하고 다음과 같이 말하노라
슬프다 사경이여! 표연히 멀리 떠났구나. 오랜 세월 이곳에선 그 누가 살았던가? 거문고와 서책, 붓과 벼루는 그대가 쓰던 물건, 어째서 다져가지 않고 여기에 버려두었나?
옛날 이 방에서 웃고 찡그리며 지냈으니 터럭 모습 거울에 비추면 생전 모습 왜 아닐까마는 홀연히 하늘로 돌아가니 꿈인가 생시인가? 하루살이 인생이라 조금 뒤에 죽을 자가 조금 전에 죽은 이를 슬퍼하네.
옛 친구는 여전히 벗을 찾아 부르고 옛 친척은 여전히 친척을 찾아 부르지만 나무를 찾아 나무를 부르고, 돌을 찾아 돌을 부르는 격, 정이 이미 떠났으니 사람을 어찌 알아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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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내가 찾아오면 북을 쳐서 소리가 나듯 질문하면 응답하여 전혀 어김이 없었건만 오늘 내가 찾아오니 그늘에 들어간 그림자마냥 방황하고 두리번거리며 갈 곳을 모르겠네.
슬프다 사경이여! 지난날 시 짓기를 좋아하여 역관에 천 편을 지어 읊느라고 수척해졌지. 지론이 매우 높고 낮은 수준 따르지 않아 당시를 높이고 송시를 내치며 준엄하게 배격했네.
내가 그대에게 말하기를 “그렇게 하지 말게나! 시란 사물은 본디 정해진 실체가 없어 치우쳐 좋아하면 아무리 잘해도 정체되네.”
그대 나를 반박하여 “기이함에 미혹되지 말게! 지나친 기이함은 상서롭지 않고 시운(時運)을 쇠하게 하네.”
내가 그대에게 말하기를 “한번 뱉은 말은 되돌리기 어렵네. 글은 본연의 중심이 없어 물처럼 여기저기 흐르며 바닥이 생긴 대로 넘실거려 기이하고 평평한 데를 가리지 않네. 재잘재잘 새의 울음 음악 소리 아니고, 톡톡 튀는 벌레 움직임 꾸민 맵시 아니네.
슬퍼지면 우는 것이 어찌 미리 생각해 두고 가려우면 긁는 것이니 긁을지 말지 선택할까? 동국 사람은 어리석어 손 있어도 쓸 줄 모르고 제 신령한 정신은 내버리고 저 진흙 소상을 본뜬다네.
시는 생생할수록 좋으니 수은이 쟁반에 구르듯 하고, 시는 새로울수록 좋으니물감이 산(酸)을 만난 듯하네. 선입견을 고집하지 말고 속인의 방해를 두려워말며, 늘 스스로 깨어 있어 오묘함을 잃지 말게나!”
슬프다 사경이여! 지난해 여름에서 가을 무렵에 그대 시가 크게 변해 남은 책망하고 나는 축하했지. 내가 그대에게 말하기를 “시란 마음속에 있는 것, 마음이 신령함에는 과거와 현재의 구분이 없네. 당송(唐宋)과 원명(元明)은 과거의 문서일 뿐. 산천의 초목은 아직 글자가 안 된 시구이네.”
그대 처음 의심하다 이를 드러내고 웃었으니 마음으로 허락한 것을 죽었다고 달라지랴? 내게 이 글이 있으니 그대 위해 읽어주고, 내게 이 술이 있으니 그대 위해 따라 주리라.
하늘 끝에서 바람 불어와 오싹하게 추워지는데 정을 모아 아득히 생각하니 그대 넋이 돌아오는 듯 슬프다 사경이여! 살아생전에 원고를 불태웠으니 열에 하나 남은 글로 뒷날의 평가로 기다리노라.
<제이사경문 祭李士敬文> (1773년, 2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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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절한 시인의 영전에 올린 제문
이승운(李承運)이라는 젊은 시인을 애도한 제문으로, 그의 호는 사경, 호는 창라이다. 자세한 인적 사항은 밝혀져 있지 않으나 박제가와는 마음이 통하는 친구이자 시인이었다. 그런 전도유망한 친구가 요절하였다. 죽기 전에 그는 짧은 생애 동안 젊음을 쏟은 시고를 불태웠다. 박제가는 친구가 가고 없는 집 구석구석에서 그의 흔적을 찾으며 가슴 아파하였다. 24세의 젊은 박제가가 도전적으로 전개한 시론의 핵심이 친구의 제문에 잘 드러난다.
■ 둘째 딸 묘지명
내 나이 스물일곱(1776) 나던 해 섣달 27일에 네가 태어났고, 내가 쉰 살을 넘긴 해(1800) 5월 6일에 네가 죽었다. 네가 태어난 지 15년(1790) 겨울에 윤후진(尹厚鎭)에게 시집갔으니 남편은 잘 아는 집안의 아들이었다. 그해 5원 나는 사신의 임무를 받들고 열하(熱河)에 가서 건륭제의 만수연(萬壽宴 팔순잔치)에 참가하였다. 9월에 돌아와 압록강을 건넜더니 왕명이 내려와 3백 리를 파발마를 타고 날 듯이 달려 서울에 도착하였다. 급히 입은 복장 그대로 편전에 들어가 뵈었더니 성상께서는 노고를 크게 위로하시며 군기시정(軍器寺正)으로 벼슬을 올리시고는 다시 연경에 갈 것을 명하셨다. 그리고 비단과 솜을 하사하시어 네 혼례에 치를 비용에 보태게 하시었으니 이는 특별한 예우였다. 그때 네 혼례날이 이틀 앞으로 다가왔으나 나는 왕명을 받들어 즉시 떠나느라 감히 혼례를 지켜보지 못했다.
이듬해(1791) 네 신랑이 남궁시(南宮試)에 합격하였다. 당시에는 양가 부모가 모두 생존하여 신랑의 빠른 성취와 너의 복으로 가정이 화목해졌음을 경하하였다. 또 이듬해(1792) 가을 내가 부여현감으로 재직할 때 네 어미가 서울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또 4년 뒤(1796), 너는 시아버지를 따라 경상도 단성(丹城) 임지로 갔다. 또 1년 뒤(1797) 시어머니의 상을 당했다. 너는 마침내 집안 일을 도맡게 되었고, 살림 재간이 좋다는 칭찬을 자못 받았다. 하지만 나는 그다지 기쁘지 않았다. 네가 어린 나이에 슬픈 일을 자주 겪은 데다 또 집안일까지 감당하려면 기력을 잃을 수밖에 없어서였다. 상을 겨우 마치자 정말 병이 들었다. 시집에서는 네가 임신한 줄로만 알았을 뿐 몸속에 몹쓸 덩어리가 생겨난 병인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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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에 나는 너를 영평현 내아(內衙)로 데려갔다. 자애로운 어미가 없어서 시집보다는 더 나은 거처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힘든 일에서 벗어나게 해 줄 요량이었다.
(중략)
너는 시집간 지 10년이 넘었으나 자식을 낳지 못하고 죽었다. 지금 보면 슬퍼할 피붙이 하나 보태지 못한 것이다. 훗날에 보면, 아, 네 핏줄이 끊어졌구나! 나는 이제 막 노쇠해 가기에 슬픔 또한 오래가지 않을 것이다. 그저 조물주가 정이 많은 나를 괴롭히느라 이렇게 주었다가 빼앗은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아무 달 아무 날에 천안군(天安郡) 삼거리 주막 아무 방면의 언덕에 묻는다. 네 시집 선영이다. 나는 가고 싶었으나 직책상 다른 도의 경계를 넘어갈 수 없다. 묘지명을 지어 무덤에 넣으니 후세 사람에게 네가 정유 박제가의 딸임을 알도록 한다면 좋겠다. 명(銘)은 아래와 같다.
아득하게 두터운 대지에 묻힌
어리고 예쁜 딸을 슬퍼하노라.
살아서 영결하던 그때
아비 얼굴 보지 못했구나.
<망녀윤씨부묘지명 亡女尹氏婦墓誌銘> (1800년, 51세)
□ 25세로 일찍 죽은 둘째 딸의 삶
1800년 영평현령으로 재직할 때 지은 둘째 딸의 묘지명이다. 25세의 청춘에 병으로 요절한 딸에 대한 애틋한 심경을 담았다. 묘지명에 흔히 나타나는 과도한 예찬 없이 아버지가 본 딸의 삶을 중요한 사건 중심으로 진실하고 간결하게 서술하였다.
전체 내용은 시집가던 때의 일화, 시집간 뒤의 애환과 발병, 영평에서 요양한 일과 병세의 악화 임종 전후의 사연 등이다.
인상적인 것은 딸의 삶에서 결정적인 순간마다 아비가 함께하지 못한 데 대한 회한이다. 혼례식에도 나랏일로 참석하지 못했고, 병이 위중해 졌을 때 영평에 데려가 간호하지 못했으며, 마지막으로 임종조차 하지 못했다. 딸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아비를 보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긴다.”는 말이 작자의 가슴을 아리게 하였다. 명사를 그 사연으로 끝맺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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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것이 시
- 예술론과 문학론
■ 청장관 이덕무의 초상
몸은 허약해도 정신은 견고하여
안에 있는 마음을 잘 지키고
겉모습은 차가워도 속마음은 따뜻하여
밖의 처신을 독실하게 한다.
현세에 살면서 숨어 산다고 하니
먼 옛날 고사(高士)의 풍모이다.
글을 보고 누구나 <세설신어 世說新語>임은 알아도
뱃속 가득 <이소 離騷>로 차 있음은 모르네.
<이무관상찬 李懋官像贊> (집필 연도 미상)
□ 평생지기 이덕무의 초상에 붙인 인물평
이덕무의 초상화를 보고 쓴 글이다. 문체는 찬(贊)으로 인물을 찬미한 내용을 담았다. 한평생 지기(知己)로 흠모했던 친구 차라리 스승으로 모셨다고 고백한 이덕무의 초상에 글을 얹었다.
세설신어, 이 책은 위진(魏晉)시대 고매한 인물들의 독특한 언행을 짤막하게 기록한 일화집이다. 박제가는 남들이 무심코 넘겨 버리는 한 가지 면을 초상에서 읽어냈다. 문필의 이면에 굴원의 <이소>가 숨어 있다는 것이다. <이소>는 고결한 인품과 충성심에도 간신의 모략으로 쫓겨나 방랑하는 굴원의 슬픔을 노래한 서정적 장편 시이다. 뛰어난 능력에도 서족이라는 굴레를 쓴 채 무시당하는 이덕무의 울분을 <이소>로 대변하고 있다. 이덕무의 울분은 박제가 자신의 울분이기도 하다.
■ 진사 이소의 초상
웃음은 소리로 터져 나옵니다마는 눈썹으로 웃기도 하고, 광대뼈로 웃기도 하며, 수염으로 웃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초상을 그릴 때 웃는 표정을 그려야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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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웃는 표정을 그려야 한다면 반드시 눈썹으로 웃는 표정을 그리거나 아니면 광대뼈로 웃는 표정을 그려야 하고, 그도 아니면 수염으로 웃는 표정을 그려야 인물의 정신을 표현하는 추상화의 본령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습니다.
저는 십삼(十三 이희경)이 부친인 하유재(何有齋) 어른을 그린 작은 초상화를 보았습니다. 침묵은 하실 말씀이 있는 듯했고, 시선에는 기쁜 일이 있는 듯 했습니다. 웃는 표정으로 미루어 보면 마음이 응당 그랬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저는 어른이 종신토록 산수 사이에서 격앙된 심경으로 술 마시고 시 짓는 사이에 은연중 세상을 경멸하여 멀리 떠나 노닐려는 뜻을 드러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이진사소소상찬 李進士熽小像贊> (집필 연도 미상)
□ 웃는 모습을 그리는 법
초상화의 주인공과 그림을 높이 평가한 글이다. 문체는 찬(贊)이고, 더 좁혀서는 초상화찬이다. 그림의 주인공은 이소(李熽 1728~1796)로 작자의 절친한 친구 이희경의 부친이다. 호는 하유재(何有齋)로 진사에 급제하였으나 한평생 향촌에 은거하였다. 박제가는 <이소 어른의 제문>에서도 그의 삶과 내면을 정감을 담아 기록하였다.
■ 그림을 읽는 법
글씨와 그림은 기예의 하나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하여 선비가 글씨와 그림을 버려둔 채 입에 담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 요사이 인물의 옆모습을 그린 그림을 보고 다른 쪽 귀 하나는 어디에 붙어 있나 찾는 사람이 심심찮게 보인다. 그런 사람에게는 특별한 안목이 없음을 잘 드러낸다.
주암 鑄菴(이정재) 공은 선비이면서 기예에도 통달한 분이다. 소장한 문징명 (文徵明)의 <간정춘수도 澗亭春水圖) 한 폭과 화폭에 붙인 절구 한 수는 비록 진짜인지 가짜인지 감별하기는 힘들어도 화가의 가슴속에 담긴 산천의 멋은 상상해 볼만하다.
가을볕이 방 안에 쏟아져 들어올 때 화폭을 펼치고 상상을 해 본다. 꽃과 나무의 그윽하고 깊은 정취, 안개가 피어 강물이 굽이굽이 흘러가는 풍경, 신록에 멋진 바위가 있는 아름다움 정경, 그리고 술동이를 꺼내 놓고 창문을 열어놓은 사람이 보인다. 아! 그 사람과 더불어 그 즐거움을 함께 누릴 방법은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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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까? 경자년(1780) 한가위 좋은 아침에 위항도인은 발문을 쓴다.
<제문형산화첩후발 題文衡山畵帖後跋> (1780년, 31세)
□ 그림을 해석하는 안목의 깊이
문징명(文徵明 1470~1599)은 심주(沈周), 당인(唐寅), 구영(仇英)과 함께 명나라 후반기의 저명한 화가이다. 징명은 자(字)이고, 호는 형상(衡山)이다. 묘사가 세밀한 산수화를 잘 그렸다. 주암(鑄菴) 이정재(李定載)가 문징명의 그림을 소장하고 있다가 발문을 써 달라고 부탁하였다. 20대에 교유가 잦았던 바로 그 이정재이다.
박제가는 전문적 화가나 감상가만이 아니라 선비도 그림을 볼 줄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림의 소장자인 주암을 위한 말이다. 그 그림을 펼쳐놓고 산수 속에서 한가롭게 살아가는 은사의 정취 넘치는 삶을 읽어내고 상상하고 있다. 그림의 여백에서 보이지 않는 멋진 세계를 상상하는 즐거움이 그림 감상의 묘미이다. 측면 인물을 그린 그림을 보고 다른 쪽 귀 하나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를 찾는 단순하고 무지한 속물과는 달라야 한다.
■ 시선집 서문
시를 뽑는 방법은 온갖 맛을 다 갖추고 한 가지 맛으로만 채우지 않는데 있다. 뽑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가려서 뽑되 뒤섞지 않는 것이다. 온통 한 가지 맛으로만 채우면 뽑았다가 다시 뒤섞은 것이니 뽑은 의미가 아예 없다.
맛이란 무엇인가? 저 노을 지는 구름과 비단 자수를 보지 못했는가? 순식간에도 마음과 눈이 함께 노을 지는 구름으로 옮아가고, 가까운 거리에서도 기분이 달라진다. 대충 보면 실정을 포착할 수 없지만 세심하게 음미하면 무궁한 맛이 있다.
무릇 사물이 변화하는 단서와 조짐에서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눈을 즐겁게 하는 모든 것이 다 맛이다. 혀로 맛보는 것만이 맛은 아니다. 시를 뽑으면서 어째서 맛을 말하는가? 짜고 시고 달고 쓰고 매운 이 다섯 가지 맛은 혀가 느껴서 얼굴과 눈에까지 전달된다. 맛을 속일 수 없는 것이 이와 같다. 이와 같지 않으면 맛이 아니다. 맛을 느낄 수 없는 음식은 먹지 않는다. 그러니 시를 뽑는 방법과 무엇이 다른가?
온갖 맛을 다 갖추어야 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한 가지 맛만 뽑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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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맛 중에서 각각 한 가지씩을 뽑으라는 말이다.
신맛은 알면서 단맛을 모른다면 맛을 아는 자가 아니다. 단맛과 신맛을 저울로 달아서 재고, 짠맛과 매운맛을 규격에 짜 맞추어 옹색하게 채워 넣는 자는 뽑는 법을 모르는 자이다. 신맛이 필요할 때는 극히 신맛을 택하고, 단맛이 필요할 때는 극히 단맛을 택해야 한다. 그렇게 한 뒤에야 맛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다.
공자께서는 “음식을 먹지 않는 사람은 없으나 맛을 잘 아는 자는 드물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을 통해 볼 때 성인은 마음이 세밀하여 혀로 느끼는 맛을 통하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이치를 터득한다. 반면에 속인은 한 가지 맛으로만 채우기에 날마다 맛을 보면서도 분간할 줄은 모른다.
어떤 사람이 “물은 어떤 맛인가?”라고 물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물은 아무 맛이 없기는 하다. 그러나 목마를 때 마셔보라! 그러면 천하의 어느 맛도 이보다 더 나은 것이 없다. 지금 그대는 목마르지 않다. 그러니 저 물맛을 어떻게 알겠는가? <시선서 詩選序> (집필 연도 미상)
□ 시의 맛과 시선집
시를 뽑아 선집을 만드는 방법을 논한 글이다. 문체는 서문이다. 어떤 시를 뽑았는지, 뽑은 이는 누구인지 분명하지 않다. 박제가는 선집에 시를 뽑아 넣는 기준으로 맛을 제시하였다. 맛이라 하면 맛을 느끼는 사람의 주관적인 입맛이 있고, 또 신맛, 짠맛 등 객관적인 다섯 가지 맛이 있다. 선집이란 모름지기 다채로운 맛을 느길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박제가는 이 책에 수록된 <집집마다 울려 퍼지는 드문 소리의 송가>에서도 시문을 논하며 그 기준을 맛에 두었다. 그 글에서 남과 나는 서로 다른 취향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입맛의 차이에 비유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을 박제가의 입맛론 비평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입맛론은 획일주의를 극도로 혐오한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학문이고 문학이고 사상이고 사회고 다양한 가치를 존중하여야 한다는 다원주의에 기초한 박제가의 열린 관점을 찾아볼 수 있다.
■ 소리와 글자는 하나다
감정은 소리가 아니면 전달되지 않고, 소리는 글자가 아니면 소통되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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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감정, 소리, 글자 이 세 가지가 하나로 합치되어야 비로소 시가 된다. 그렇기는 하지만 글자는 각기 그 의미를 갖고 있는 반면 소리가 반드시 말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시의 길은 오로지 글자에만 속하게 되었고, 소리는 말이 갈수록 시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글자가 소리로부터 멀어지는 것은 물고기가 물을 벗어나고 아들이 어머니를 떠나는 것과 같다. 나는 시의 생생한 정취가 날이 갈수록 말라가고 천지의 이치가 날마다 식어가는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저 옛날의 <시경> 3백 편 역시 글자는 여전히 남아 있으나 그 소리는 얻어 들을 수 없다. 내 생각으로는 옛날에는 말이 입밖으로 나오면 바로 글자가 만들어 졌다. 따라서 어조사나 허사(虛詞)도 모두 곡절이 있어 맛이 있었다.
지금은 그때의 예법과 음악, 정치와 형벌에 쓰인 기물이나 짐승과 초목의 명칭이 모두 파괴되어 흩어진 뒤라서 더는 실물을 고증할 수 없다. 설령 지금 사람이 옛 중국의 하(夏), 은(殷), 주(周)나라 선비와 갑작스레 대면한다고 해도 나라의 풍속이 다르고 방언의 차이가 커서 중국에 들어간 외국인 보다 훨씬 더 차이가 심할 것이다. 그렇기는 해도 우리는 간절하게 그 말을 암송하고 감탄하여 읊조리면서 “이야말로 진정 <관저 關雎>로다!” “이야말로 진정 <아송雅頌>이로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지금 사람의 글자 소링리 뿐 옛날의 본래 소리는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중력)
그렇지만 소리와 글자는 하나다. 시를 잘하는 사람은 소리와 글자를 결합하고, 잘하지 못하는 사람은 소리와 글자를 떼어 놓는다. 왜 그런가? 글은 글자에서 시작하고 소리는 글자 밖에서 완성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이렇게 말한다.
“글자는 하학(下學)이고, 소리는 상달(上達)이다.”
병신년(1776)8월에 벗 박제가가 짓는다.
<유혜풍시집서 柳惠風詩集序 > (1776년, 27세)
□ 소리와 글자를 융합하여 새로운 감정을 표현한 시의 창작
절친한 벗이자 백탑시파 동인인 유득공의 젊은 시절 시집에 붙인 서문이다. 유득공의 숙부이자 박제가의 벗인 유금(柳琴)이 <한객건연집 韓客巾衍集>을 중국 문단에 소개한 해에 유득공 또한 작은 시집을 엮었던 모양이다. 박제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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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문에서 유득공 시의 특징을 포착해 냄과 동시에 자신의 시론을 전개하였다. 박제가는 시의 도구인 글자(字)와 시인의 감정(情), 소리(聲), 세 가지가 합일되어야 좋은 시가 된다고 하면서 시의 “소리와 글자는 하나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 관점에서 유득공의 시가 화석화된 옛 글자에 소리를 통하여 생명과 검정을 불어넣었다고 평가하였다. 무당의 가사, 판소리의 사설 같은 민간의 시를 한문으로 옮겨 놓으면 진실한 감정을 느낄 수 없다고 한 것 또한 매우 가치있는 논의이다.
박제가나 유득공은 우리 일상의 생활 감정과 언어 감각을 한시로 생생하게 구현하는 것을 시 창작의 목표로 삼았고, 유득공의 시가 그 한 가지 모델을 보여 주었음을 박제가는 인정하였다. 백탑시파의 핵심적 시론을 설파한 문장일 뿐 아니라 일반 시론으로서도 참신성을 지닌 비평문이다.
■ 시는 무엇을 쓰는가
나의 벗 형암(炯庵) 이덕무(李德懋) 선생의 시 약간 편을 내가 직접 뽑아 쓰고서 목욕하고 향불을 피우며 읽었다. 시를 읽고 나니 입에서는 저절로 감탄이 흘러나왔다. 곁에 있던 사람이 “시에서 무엇을 얻으셨나요!”라고 물었다. 나는 이렇게 대꾸하였다.
“저 산과 물을 바라보니
아득하여 끝이 없는데
고요한 물은 맑음을 머금고
외로운 구름은 깨끗하게 떠가네.
기러기는 새끼 데리고 남쪽으로 날아가고
매미는 쓸쓸하게 울음을 그치려 하네.
이런 정경이 바로 형암 선생의 시가 아니겠습니까?”
그 사람이 말했다.
“이것은 가을의 징후입니다. 시가 정녕 그 정경을 다 얻어서 포착할 수 있을까요?”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못 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가을의 경계(際)를 말하면 됩니다. 그렇게 되려고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되는 것이 자연(天)이요. 그런 줄을 알고서 그렇게 행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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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찬 모든 것이 다 시입니다. 사계절은 변화하고, 온갖 소리는 웅성거리는데 그 몸짓과 빛깔, 소리와 가락은 제 스스로 존재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것을 살피지 못하지만 지혜로운 자는 그것으로부터 말미암습니다. 따라서 다른 시인의 입술만 우러러보고, 케케묵은 종이쪽지에서 찌꺼기나 줍는 글쟁이는 근본에서 너무도 많이 벗어나 있습니다.”(하략) <형암선생시집서 炯菴先生詩集序> (1776년, 27세)
□ 하늘과 땅에 가득한 모든 사물을 읊는 시
유득공의 시집에[서 서문을 쓸 때와 같은 시기에 이덕무의 시집에도 서문을 썼다. 백답시파가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던 이 당시 각 동인이 그간의 작품을 개별적으로 엮은 다음 이를 <한객건연집>으로 묶어 중국 문단에 소개하였다. 이 무렵 동인끼리 상대의 시문집에 서문을 써 주었다.
이 서문에서는 이덕무의 시가 가을의 정서를 많이 담고 있다는 것, 그리고 소박한 데에서 치밀한 묘사로 가는 것이 시의 발전 과정이라는 점을 밝혔다.
하지만 핵심은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찬 것이 모두 시입니다.”라는 주장에 있다. 시인이 직접 경험할 수 있는 현실과 자연에서 소재를 찾아 자기 개성대로 시를 쓰자는 주장은 18세기 시론의 핵심 주제를 담고 있다. 그러면서 “다른 시인의 입술만 우러러보고, 케케묵은 종이쪽지에서 찌꺼기나 줍는 글쟁이는 근본에서 너무도 많이 벗어나 있습니다.”라고 말하여 복고적 창작 태도에 거부감을 표시하고 새로운 창작 노선을 취할 것을 주장하였다.
■ 집집마다 울려 퍼지는 드문 소리의 송가(頌歌)
신은 지난해(1792) 11월 10일에 유신(儒臣) 이동직(李東稷)의 상소에 대해 성상께서 내려보낸 비답(批答) 한 통을 엎드린 채 받들어 보았습니다. 하늘의 문장은 찬란하였고 상상의 비평은 정중하였습니다. 지방 고을의 낮은 벼슬아치로서 신이 이런 특별한 예우를 받으니 황공하기도 하고 감격스럽기도 하여 몸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랐습니다. 또 올해(1793) 정월 초사흘에 내각(內閣)에서 보내온 관련 공문을 엎드린 채 받들어 보았습니다. 여러 문신이 시나 문장을 지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친 사례에 의거하여 신에게 시나 글을 지어 올리라고 특별히 하명하셨습니다.
우리 성상께서는 문풍(文風)이 예스럽지 않은 점을 두고 조정에 나오셔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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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한탄하셨습니다. 신처럼 재주가 변변치 않은 자에게까지 하찮은 재능이라도 채택하는 은덕을 베푸셨고, 차근차근 이끌어서 크고 넓은 길을 보여 주셨습니다. 마치 손을 끌어 나아가게 하면 더불어 일을 같이 할 만한 자로 보시는 듯 하였습니다. 신이 비록 억세고 어리석으나 어찌 자신을 다잡고 분발하여 공을 이루도록 노력하지 않겠습니까?
신은 약관의 나이에 미약하나마 뜻한 바가 있어 쓸쓸한 처지에서 한두 명의 벗과 어울려 고문(古文) 창작에 앞장선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이웃에 사는 어떤 사람도 저를 찾아와 물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 뒤에 헛된 명성으로 잘못 발탁되어 베옷 입은 선비에서 조정 관리로 등용되었습니다. 그 뒤로는 또 책을 베껴 쓰거나 글을 교정하는 일을 직무로 삼았습니다. 이때만 해도 글을 짓는다는 평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홀연히 근년에 이르러 외람되게도 특별한 은총을 입어 때로는 서적을 편찬하는 임무를 도맡아 하기도 했고, 어명을 받들어 글을 짓는 반열에 끼어들기도 하였습니다. 이따금 문예를 맡은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름을 드러내면서 당세 문인의 한 자리를 버젓하게 차지하였습니다. 만에 하나도 신이 감당할 자리가 아니기는 합니다만, 속으로 다행스럽게 여기는 점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중략)
주역에서는 “인간의 문장을 관찰하여 천하를 감화시켜 완성한다.”고 하였고, 공자께서는 “문장이 찬란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문장이 어찌 문예문의 문장이겠습니까? 신이 지난 수십년 사이에 문장을 잘 짓는다고 일컬어지는 자를 살펴보니 모두 과거 시험용 문장의 우두머리일 뿐이었습니다. 문예문의 문장을 잘 짓는다는 사람조차 들은 적이 없습니다. 몹시 두려워하고 조심하고 있는 처지라 신은 감히 드러내 놓고 그들을 배척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유행하는 속된 문체를 힘껏 배척하여 오염되지 않고 깨끗한 문장을 쓴다고 신은 자부하는 바입니다. 그 솜씨의 도움을 받아 임금님을 섬기고자 하였습니다.
(중략)
세상에 떠도는 말에는 간혹 신의 문장을 헐뜯으며 명나라 세상의 습관이 있다고 하기도 합니다. 이 말은 그저 시대를 좇아 견해를 세운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문인의 글에는 시대의 특징이 있으나 지사(志士)의 글에는 시대의 특징이 없습니다. 신이 감히 문인으로 자처하지 못하기는 합니다만 문인이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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싶은 뜻만은 가지고 있습니다. 13경(經)을 날줄로 삼고 23사(史)를 씨줄로 삼아서 종합하고 추론하며 근원을 탐구하여 실용으로 귀결하고자 힘쓰는 길을 신은 배우고 싶습니다.
*13경 23사 : 13경은 유가의 경서 13종, 23사는 <사기>이하 중국의 정사 23 종으로, 경학과 사학의 모범적인 저술을 가리킴
(중략)
제 허물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학문이 높은 수준에 이르지 못한 것은 참으로 신의 허물입니다만, 천성이 같지 않은 것은 신의 허물이 아닙니다.
문장의 길은 한 가지 기준으로 논할 수 없습니다. 다만 문장이 오래 전해지려면 반드시 학문에 깊이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독서를 귀하게 여깁니다. 이것이 신이 날마다 부지런히 독서하기를 그만두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신이 삼가 성상의 말씀을 취하여 <집집마다 울려 퍼지는 드문 소리의 송가> 한 편을 짓고서 두 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바칩니다. 송가는 아래와 같습니다.
해가 뜨는 동방의 나라는 / 예로부터 문명의 세계였네.
“벼와 기장 영글었다.”는 노래가 / 우리나라 바른 소리의 시작이었네.
상제가 청구 땅을 돌려주니 / 거룩하도다 우리 임금님!
대대손손 거듭 빛나서 / 온갖 복을 내리셨네.
대왕께서 백성을 보살피니 / 누구에겐 웃고 누구에겐 찡그리랴?
입혀주고 먹여주되 / 고르지 않은 일이 없네.
대왕께서 정치의 잘잘못을 살필 때는 / 백성의 소리를 들어보시네.
백성에게 마음의 소리가 있으니 / 그것을 일러 ‘바람’이라 하네.
‘바람’에 허물이 나타나면 / 백성이 병든 탓이거니
대왕께서 백성에게 물으시고 / 백성의 병을 구하려 하셨네.
엄숙한 명당은 / 성인이 계시는 곳이니
성인께서 어찌 잊으리오 / 구들장 위에 살던 먼 옛날 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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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용을 수놓은 옷 / 성인께서 입으셨으니
어찌 옷이 없으랴마는 / 이 큰 베옷을 좋아하시네.
꾸밈이 질박함을 압도하니 / 이는 몹시 위태로운 조짐이라
저 소리는 음탕하건마는 / 뉘우칠 줄 왜 모를까?
옛날에 악기가 하나 있어서 / 그 이름을 슬(瑟)이라 했네.
한 사람이 선창하면 세 사람이 화답하니 / 붉은 줄에 소리가 느렸네.
신호용 종은 기교를 없앴고 / 대나무 악기는 현란함을 싫어했네.
그랬던 세대는 벌써 멀어졌으나 / 그 시절 곡조는 여전히 남아 있네.
(하략)
<비옥희음송(병인) 比屋希音頌(幷引> (1793년 44세)
*비옥희음송 : 집집마다 울려퍼지는 드문 소리의 송가
□ 문체를 보는 박제가의 생각
이 글은 국왕에게 올리는 송가이다. 두 부분으로 구성된 글로 앞부분은 산문으로 된 인(引)이고 뒷부분은 운문으로 된 송(頌)이다. 인은 서(序)와 비슷한 문체의 이름이다. 인에서는 글을 쓰게 된 동기와 과정, 그리고 자신의 견해를 밝혔고, 송에서는 국왕의 문체 정책을 찬송하는 내용을 펼쳤다.
서얼 계층의 신분 철폐문제를 다룬 <통색촬요 通塞撮要> 권4에는 부여 현감 박제가가 교지를 받들어 지어 올린 <송건문 訟愆文>이란 제목으로 전문을 수록하였다. 이 제목은 허물을 자책하는 반성문이란 의미이다.
(중략)
박제가가 자신의 잘못으로 인정한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학문이 깊지 못한 것인데 앞으로 더욱 열심히 독서를 하여 채워나가겠다고 했다. 하나는 천성이 남들과 같지 않은 것인데 이것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고 했다. 천성 또는 개성을 그는 음식의 비유를 들어 해명하였다. 음식을 조리하려면 짠맛, 신맛 등이 필요하고 그 맛은 소금과 매실에서 얻는다. 그런데 소금에게 너는 왜 맹물이 아니고 하필이면 짜냐고 추궁할 수는 없다고 했다. 소금은 짜야지 맛이 없거나 시거나 달아서는 안 된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짜고 시고 단 온갖 맛의 개성이 모여 한 사회, 한 국가의 문학이 펼쳐지므로 국왕은 소금처럼 짠 문학을 하는 박제가에게 너는 맹물 같은 문학을 하라고 요구하면 옳지 않다고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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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반성하라는 정조의 지시에 대해 자신은 반성할 잘못이 본디 없었고, 신하의 개성을 탓하는 것은 옳은 지시가 아니라고 거부하였다.
(중략)
국가와 사회가 서족(庶族) 문인의 문체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취지의 글이다. 이 글을 보면, 정조는 본디 검서관의 문체를 문제시할 생각이 없었다.
박제가의 글은 유가 경전의 어휘를 대폭 사용하고 시경체의 운문과 격식을 갖춰서 장중하게 썼다. 기회만 준다면 얼마든지 유가 경전에 뿌리를 둔 장엄한 글을 짓는다는 실력을 보여주었다. 그렇다고 반성하는 마음을 밝힌 글로 볼 수는 없다.
◎ 제5부 이 땅에 수레를 보급하라
- 현실 진단과 개혁안
■ 궁핍한 날의 벗
천하에서 가장 친밀한 벗으로는 곤궁할 때 사귄 벗을 말하고, 우정의 깊이를 가장 잘 말한 것으로는 가난을 상의한 일을 꼽습니다. 아! 청운(靑雲)에 높이 오른 선비가 가난한 선비 집을 수레 타고 찾은 일도 있고, 베옷 입은 선비가 고관대작의 집을 소맷자락 끌며 드나드는 일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절실하게 벗을 찾아다녀도 마음에 맞는 친구를 얻기는 어려우니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벗이란 술잔을 잡고 은근한 정을 나누며, 손을 부여잡고 무릎을 바짝대고 앉는 자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벗이 있고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 있어도 저도 모르게 저절로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벗이 있습니다. 이 두 부류의 벗에서 우리는 우정의 깊이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중략)
<시경>에는 “옹색하고 가난한 내 처지! 힘든 줄 아는 자 하나도 없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내가 아무리 가난하게 살아가도 남들은 털끝만큼도 자기 것을 보태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남이 베푼 은혜에 감동하거나 원한에 사무쳐 하는 세상사가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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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하던 이야기를 이것저것 두루 꺼내면서도 정작 지척에 놓여있는 쌀궤의 자물쇠를 여는 일에 대해서는 감히 묻지 못합니다. 하지만 머뭇머뭇하는 사이에 대단히 꺼내기 힘든 말이 숨어 있습니다.
정말 부득이하게 조금 운을 떼기 시작하여 잘 끌어가다 쌀이나 돈을 꾸어 달라는 본론으로 화제를 돌릴 찰나 상대방의 미간에서 마뜩지 않은 반응이 은근히 나타나는 낌새를 눈치챕니다. 그러면 앞에서 말했던, 하고 싶어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말을 설령 꺼낸다 해도 실상은 꺼내지 않은 것과 똑같아집니다.
(중략)
나는 이 일을 통하여 알았습니다. 우정의 척도로 가난을 상의한다고 한 말이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고, 무언가에 격분하여 그렇게 한 것임을….
곤궁할 때의 벗을 가장 좋은 벗이라고 말하는 까닭이 허물없고 시시콜콜한 관계라고 경시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또 요행으로 얻을 수 있다고 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처한 사정이 같은 고로 지위나 신분에 얽매일 필요가 없고, 근심하는 바가 같은 고로 서로의 딱한 처지를 이해한 것뿐이지요.
(중략)
저의 벗 백영숙(白永叔)은 재기(才氣)를 자부하며 세상에서 살아온 지 30년이로되 여태껏 곤궁하게 지내며 세상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분이 이제 양친을 모시고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 생계를 꾸려가려 합니다. 오호라! 그와의 사귐은 곤궁함으로 맺어졌고 그와의 사귐은 가난함으로 채워졌습니다. 저는 그것이 못내 슬픕니다.
(중략)
이제 영숙이 또 집안 식구를 거느리고 기린협(基麟峽 인제麟蹄)으로 들어갑니다. 제가 듣기로는 기린협은 옛날에는 예맥(獩貊)의 땅이었는데 험준하기가 동해 부근에서 제일이라 합니다. 수백 리나 되는 땅이 모두 큰 산봉우리와 깊은 골짜기로서 나뭇가지를 부여잡고서야 들어갈 수 있다고 합니다. 주민들은 화전으로 곡식을 가꾸며 판자로 집을 짓고 살 뿐이요 사대부는 살지 않는다고 합니다.
영숙이여 떠나십시오! 저는 지난 날 궁핍 속에서 벗의 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렇지만 영숙과 제 사이가 어찌 궁핍한 날의 벗에 불과하겠습니까?
<송백영숙기린협서 送白永叔基麟峽序> (1774년경. 25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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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핍한 시절에 드러나는 우정의 깊이
인제로 낙향하는 백동수(白東脩 1743-1816)를 보내며 써 준 송서(送序)이다. 영숙(永叔)은 백동수의 자이고, 호는 인재(靭齋) 또는 야뇌당(野餒堂) 또는 점재(漸齋)이다. 이덕무의 처남으로, 무과에 급제한 무인이고, 의협심이 대단했으며, 사람 사귀기를 좋아한 쾌남아였다. 이덕무가 그를 위해 지어준 <야뇌당기>에서 호협한 기질을 엿볼 수 있다. 박제가를 박지원, 이덕무에게 소개한 사람도 바로 백동수였다. 그 역시 서족 인물로 후에 장용영의 장관(將官)을 지냈고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하였다. 그런 그가 현실 세상에 발을 못 붙이고 기린협, 곧 지금의 인재로 들어간다.
■ 공주로 떠나는 이정재를 보내며
추성관(秋聲館) 이정재(李定載) 선생이 식솔을 데리고 한양을 떠나 머나먼 남쪽 충청도 고을로 낙향하려 한다. 나는 약산정(約山亭) 초당으로 가서 선생과 이별하였다. 산세를 이용하여 정원을 만든 초당은 풍경을 멀리까지 굽어보는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였다.
드디어 선생과 함께 처당 앞 멧부리에 앉아 아득히 날아가는 기러기를 부럽게 바라보기도 하고 이별을 아쉬워하는 시도 읊었다. 마침 들국화가 곱게 피기 시작하였고, 가을바람이 불어와 나뭇잎을 흔드는 때였다. 북녘 하늘을 바라보니 도봉산은 하늘에 꽂힌 채 달리듯이 뻗었고, 백악은 밝고 아름다우며 힘찬 산세가 서로 어우러져 있었다.
높고 수려한 궁궐, 저잣거리를 왕래하는 인파, 북한산과 필운대의 구름과 안개, 성곽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끝에서 보일락 말락 숨었다 나타났다.
(중략)
이 선생은 진재(眞齋) 김종후(金鐘厚) 선생의 문인이다. 기이한 기상을 지니고 옛 도리를 실천하는 분이다. 틀림없이 세상에 나가고 들어가는 군자의 큰 의리와 나아가고 물러가며 줄어들고 성장하는 음양의 기미를 들었고, 세상의 도를 만회하고 나라 백성을 다스리는 일에 뜻을 두었다. 어째서 무리를 떠나 외롭게 살 곳을 찾고, 제 고집만 내세우며 세상 밖에서 홀로 지내는 처신을 하려는 것일까?
옛사람 중에도 바위동굴에 거처하며 흐르는 물을 구경하거나, 풀로 옷을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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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고 나무 열매를 따 먹으면서 번화한 곳을 싫어하여 척박한 땅을 찾아든 사람이 있었다. 그들이 정말 과감하게 세상을 잊고서 제 한 몸 잘 처신하려 한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현세에서 뜻을 펴지 못해 시름하고 답답해하며 강호에 몸을 붙여 심회를 풀려고 한 사람이었을까? 도대체 이 선생은 무엇 때문에 여기를 버리고 멀리 떠나려 할까? 연잎 옷을 입고 떠나는 자를 붙잡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며, 오늘이 훌쩍 가 버림을 슬퍼한다.
(중략)
“아! 사람이 이곳에서 태어나 죽고, 나왔다가 사라지건마는 아무도 그런 줄을 깨닫지 못하고 있네. 우리 두 사람이 높은 곳에 올라 아래를 굽어보고 웃네. 그래, 그대는 어떤 생각이 드는가? 또 더구나 이곳을 떠나 멀리 가는 사람이 보면 어떻겠나?”
이날 해가 져서 어둠이 짙어지고 흰옷도 분간되지 않을 무렵이 돼서야 헤어졌다. <송이정재왕공주서 送李定載往公州序> (1774년, 25세)
□ 서울 떠나는 서울내기의 슬픔
“남에게 말을 주는 것이 금석이나 주옥을 주는 것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박제가는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떠나는 벗을 배웅하며 간곡하게 아쉬워하는 말로 이별을 대신하였다. 떠나는 이는 이정재(李定載)로 자는 지경(止卿) 호는 주암(鑄菴),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그의 아버지는 이규위(李奎緯 1731~1788)이다. 이규위는 김귀주 심환지 등과 어울려 노론 남당 계열의 정치적 행보를 하였다. 영조 말엽인 1774년 이규위는 임육(任焴)을 시켜 북당의 영수 홍봉한(洪鳳漢)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위기를 느껴 이해 가을 온 가족을 이끌고 고향인 공주로 내려갔다. 자세한 과정이 이규상의 외손자로 육촌 사이인 심노숭의 <자저실기>에 보인다.
■ 낙향하는 원중거를 보내며
오늘날 사대부는 과거에 붙지 않으면 벼슬자리에 들어갈 수 없고, 문벌이 높지 않으면 청요직(淸要職을 차지할 수 없습니다. 과거에 꼭 붙고자 하면 선비가 자신을 파는 행실을 해야 하므로 입신하기도 전에 염치가 땅에 떨어집니다. 문벌을 숭상하다 보니 관직의 적임자를 선택하는 실무가 사라져 태어나기 전부터 사람의 귀천이 판가름 납니다. 세상 도리가 쇠퇴하게 된 연유가 오로지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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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관직과 품계가 높은 관료 한 사람 우연히 배출했을 뿐이거늘 친인척이 관직을 그대로 이어받는 것을 막을 수 있을까요? 방정(方正)한 선비를 한 사람 발탁할 뿐이거늘 벼슬자리에 혈안이 된 시정잡배들이 진출하는 것을 제지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국가가 선비를 양성하여 발탁해 쓰는 정책이 요행수와 혼탁하고 모호한 상황에 내맡겨졌음을 의미합니다. 명분을 따져 벼슬과 녹봉을 정하는 제왕의 큰 도구를 대대로 사적인 집안에 빌려주고 천하와 더불어 공평하게 운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청요직으로 가는 길은 하나로되 벌열 집안은 나날이 번성해 가고 벼슬자리는 수가 늘지 않건만 과거의 명목은 나날이 불어납니다. 나날이 번성하고 나날이 불어나는 벌열 집안과 과거 합격자가 하나뿐인 청요직의 길과 늘지 않는 벼슬자리를 차지하려고 몰려듭니다.
(중략)
아아! 오늘날의 사대부는 모두 때만 잘 얻고 지체만 잘 타고나면 저절로 굴러드는 관직을 마치 방안에 놓인 물건인 양 움켜쥡니다. 또 제각기 자제들에게 허겁지겁 공령문(功令文)이나 익히고 장구(章句)나 공부하여 나머지 이익을 다투도록 가르칩니다. 또 제각기 사사롭게 자기편 사람을 거느리고 명분과 당색을 제한하여 남들과 오가지 못하게 막고 조정에서 세력을 뽐냅니다.
이 정도는 아니라도 증조부, 고조부가 남겨 놓은 음덕을 팔아 한 지방에서 호령하며 비옥한 땅을 차지하여 재산을 불리고 편안히 앉아서 놀고 먹습니다. 몇만 명이나 되는 많은 수의 사람이 수백 년을 그렇게 지내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토지와 인민은 국가의 소유가 아니요, 관리의 임용과 파직, 벼슬과 녹봉의 수여는 국가의 관리가 아닙니다.
(중략)
현천(玄川) 원중거(元重擧) 어른께서는 진사가 되어 집안을 일으키셨습니다. 낭관직에서 20여 년간 부침하다가 늦게야 역참의 찰방 직책을 받았으나 곧 파직되어 자리를 떴습니다. 가난과 굶주림, 곤궁과 실패속에서 세상 사람과 어울려 살되 그 물결에 휘말리지 않았고, 분수를 지키며 시세를 이해하였습니다. 그 사이에 통신사 서기 직책에 충원되어 바다 건너 일본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일본 인사들은 입을 모아 현천 선생을 칭송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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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천 선생은 문학에 뛰어난 분이요 덕이 있는 어른입니다. 사람들도 점차로 선생의 어짊을 칭송하였으나 조정에 천거한 이는 끝내 없었습니다.
(중략)
아아! 오늘날의 사대부는 과거가 아니고 문벌이 아니고 붕당이 아니면 위로는 벼슬자리에도 오르지 못하고 아래로는 상공업에 종사하지도 못한 채 마치 부용(附庸 대국에 딸려서 지내는 소국, 남에게 의지하여 살아가는 사람)의 나라처럼 사람 틈에 묻혀 살아갑니다. 굶주려 죽을 처지일망정 저 사대부라는 이름을 뒤집어쓰고서 농부가 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습니다. 저들은 또 무엇하는 사람일까요?
<송원현천중거서 送元玄川重擧序 > (1775년 26세)
□ 인재를 배척하는 사회를 향한 비분
경기도 지평, 지금의 양평군 물천(勿川)에 전답을 마련하여 낙향하는 현천 원중거(1719~1790)를 배웅하며 써 준 송서(送序)이다. 원중거는 서족으로 무관 집안 출신이다. 세태에 휘둘리지 않는 특립독행(特立獨行)으로 서족 지식인에게 존경을 받았다. 홀대받는 서족 출신의 비운을 그도 감내하였거니와, 1763년 통신사 서기로 일본에 가서 문명을 떨친 뒤에 국내서도 명성이 나기 시작하였다. 1770년 종6품의 송라도찰방(松羅道察訪)에 임명되었으나 60일 만에 교체되었고, 1776년 이후 장원서주부(掌苑署主簿)로 15년간 봉직하였다.
이 글은 1775년 가을에 지은 것으로 보인다. 글의 서두는 과거 제도와 벌열, 붕당의 악습에 젖은 채 편을 갈라 권력을 독점하는 조선 지배층의 폐해를 폭로하고, 진정한 인재를 배척하는 사회를 비분에 차서 공박하였다. 이 대목은 지배 체제의 썩은 부위를 예리하게 분석한 분세질속(憤世嫉俗)의 명문이다.
* 벌열 : 나라에 공을 세우거나 큰 벼슬을 지낸 사람이 많은 집안
* 분세질속 : 세상의 불합리한 모든 것에 분개하고 증오하다.
■ 적성현감 이덕무를 배웅하며
근래에는 각 고을의 좋고 나쁨을 대체로 녹봉과 수입을 기준으로 판가름하고 있습니다. 고을 수령이 된 사람이 그 기준으로 기뻐하거나 슬퍼하고, 전형을 맡은 이조에서 지방관을 파견할 때도 그 기준으로 고을의 우열을 재는 듯 합니다. 그러나 똑같은 외직이고, 똑같은 품계이며, 똑같이 백성이 있고 사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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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습니다. 고을을 구별하는 것이 군주의 걱정을 나눠 받아서 고을을 함께 다스린다는 수령의 본래 취지에 부합하겠습니까?
(중략)
청장관 이덕무 선생은 검서관의 직책에서 적성(積城)현감에 발탁되셨습니다. 내직 외직을 드나든 지 6년 동안 여태 한 번도 벼슬자리가 좋으니 나쁘니 말하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단지 저술하기를 좋아하여 이르는 고을마다 지은 책이 수북하였습니다. 고을의 고적과 명승, 풍속, 토산물, 관리의 치적, 백성의 숨은 고통을 질문하면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오듯 답변하여 끝없이 술술 나옵니다. 이른바 재능을 명물과 도수의 학문에 발휘하고, 학문을 도덕과 문장에 옮겨 쏟은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제가 들은 바로는, 적성 고을은 지역이 50리를 넘지 않고 호구는 겨우 1300호에 지나지 않으나 사대부가 많아서 분묘와 군정(軍丁), 벌목과 관련한 소송이 뻔질나게 발생한다고 합니다. 관아의 건물은 기울고 무너져 버팀목을 대어 유지하고, 고을 문에는 북과 나팔을 갖추지 못해 입으로 나팔 불고 발로 뛰어다니며, 한 사람이 두 가지 사무를 겸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 까닭에 척박한 고을을 헤아릴 때 적성은 반드시 그중 하나에 꼽힙니다.
그렇지만 이 선생이 만약 저술을 짓는 재능으로 정사를 베풀면, 백성과 사직에 대한 책임을 부끄럼 없이 수행할 것입니다. 녹봉과 수입을 묻지 않는 마음으로 관직 생활을 한다면 고을의 크고 작기가 자신과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송이무관출재적성현서 送李懋官出宰積城縣序> (1784년, 35세)
□ 척박한 고을의 원님이 된 이덕무
이덕무는 44세 되던 1784년 6월29일에 경기도 적성현감에 임명되어 49세까지 6년간 봉직하였다. 검서관을 겸직하면서 내내 적성과 서울을 왕래하였다. 박제가는 지방관으로 부임한 벗을 위해 적성현이 아무리 척박한 고을이라도 재간을 잘 발휘하리라는 소망을 피력하였다.
서두에 당시 외지에 나가는 수령이 선치(善治)보다도 녹봉과 수입에 더 관심을 두어 제사보다 잿밥에 더 관심이 많은 세태를 꼬집었다. 이는 이덕무의 처신과 또렷하게 대비되었다.
이덕무는 6년을 봉직하는 동안 10차례의 고과에서 모두 최고 등수를 받았다.
■ 조선인의 편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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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사람들은 아교로 붙이고 옻칠을 한 속된 눈꺼풀을 달고 있어 아무리 애써도 떼어 낼 도리가 없다. 학문에는 학문의 눈꺼풀이, 문장에는 문장의 눈꺼풀이 단단하게 붙어 있다. 큰 문제는 제쳐두고 수레부터 말을 꺼내 보자. 수레를 사용하자고 하면 우리나라는 산이 험하고 물이 가로막아 사용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산해관(山海關)에 걸린 편액은 이사(李斯)의 글씨로 10리 밖에서도 보인다고 우긴다. 서양인은 초상화를 그릴 때 사람의 검은 눈동자를 즙으로 내어 눈동자를 찍기 때문에 서로 다른 방향에서 봐도 눈이 마치 살아있는 듯하다고 떠벌린다. 되놈은 부모의 생존 여부에 따라 한 개 또는 두 개로 변발을 땋는데 옛날의 머리 땋는 방법과 동일하다고 고집한다.
이것만이 아니다. 백성의 성씨를 황제가 낙점하고, 책을 진흙판으로 찍는다는 낭설도 떠돈다. 이따위 소문이 난무하여 낱낱이 들어 말할 수 없다. 아주 친해서 나를 신뢰하는 사람일지라도 이 안건만은 나를 믿지 않고 저들의 말을 믿는다.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랑캐라는 말 하나로 천하의 모든 것을 말살하고 있다. 반면에 나만은 “중국의 풍속은 이래서 너무나 좋다”고 말한다. 내 말은 그들이 기대하는 말과는 너무 다르다. 그래서 그들은 나를 믿지 않는다.
내 판단은 무엇으로 입증해 보일까? “중국 학자 중에도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 같은 자가 있고, 문장가에는 간이(簡易) 선생 같은 자가 있으며, 명필에는 한석봉(韓錫琫)보다 뛰어난 자가 있다”고 시험 삼아 말해 보라. 그들은 반드시 발끈 성을 내고 낯빛을 바꾸며 대뜸 “어찌 그럴 리가 있겠소?”라고 라고 말하리라. 심한 경우에는 그런 말을 내뱉은 사람에게 죄를 물으러 들 것이다.
이번에는 이렇게 말해 보라!
“만주 사람들은 말하는 것이 개 짖는 소리와 같고, 먹는 음식은 냄새가 나서 가까이하지 못한다. 심지어 뱀을 시루에 쪄서 씹어먹고, 황제의 누이가 역졸과 바람을 피워 가남풍(賈南風)이 했던 추잡한 음행을 곧잘 행한다.”
그들은 틀림없이 크게 기뻐하여 내가 한 말을 여기저기 전달하느라 바쁠 것이다.
(중략)
어짊을 추구하는 자는 모든 것을 어짊의 관점에서 보고, 지혜를 추구하는 자는 모든 것을 지혜의 기준으로 잰다고 한다. 정말 맞는 말이다. 내가 여러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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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과 논쟁을 벌였는데 나를 비방하는 자가 제법 많았다. 그래서 이 글을 써서 나 자신을 경계하고자 한다. <만필 漫筆> (1778년경, 29세경)
□ 편견과 고루함에 사로잡힌 조선 지식인들
원제목 만필(漫筆)은 특별한 주제 없이 소회를 자유롭게 쓰는 형식이다.
제목의 뜻과 달리 담긴 주제가 신변 잡담에 머물지 않고 심층적 사유를 담는 경우가 많다. 이 글 역시 그렇다.
이 글은 당시 조선 지식인을 비좁은 소견에 빠져있고, 극심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몇 가지 구체적 사례를 들어 편견의 실정을 드러냈는데 설득력이 있어 그 주장에 공감하게 만든다.
오랑캐라는 편견을 버리고 청나라와 일본, 서양의 발전상과 문화를 직시하자는 것이 박제가의 주장이었고, 그 주장을 수용하지 못하겠다는 것이 당시 다수 지식인의 생각이었다. 조선 지식인의 고루한 편견과 반대에 맞서는 박제가의 고군분투를 보여 주는 글이다.
■ <발해고> 서문
나는 일찍이 중국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압록강을 건너서 애양(靉陽) 길을 경유하여 요양(遼陽)에 이른 적이 있었다. 그 사이 5, 6백여 리가 되는 길이 모두 큰 산과 계곡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낭자산(狼子山)을 벗어나자 비로소 끝없이 펼쳐진 평원이 보였다. 평원은 까마득하고 망망하여 해고 달이고 나는 새고 간에 모든 것이 벌판의 허공에서 떠올랐다 사라졌다.
머리를 돌려 동북쪽 여러 산을 바라보았더니 산맥은 하늘을 둥그렇게 감싸고 대지를 가로막고 버텨 선 채 마치 선을 하나 그어 놓은 듯이 뻗어 있었다. 앞에서 말한 큰 산과 깊은 계곡은 모두 요동 천리의 바깥 담이었다.
이에 나는 탄식을 토하며 말했다. 이것이 하늘이 만든 경계선이로다. 저 요동은 천하의 한 모틍이이다. 영웅과 제왕이 흥성한 곳으로 여기보다 융성한 데가 없다. 땅이 연(燕)나라, 제(齊)나라와 인접해 있어 중국의 형세를 엿보기가 쉽다.
따라서 발해(渤海)의 대씨(大氏)가 보잘것없이 뿔뿔이 흩어진 고구려 유민을 모아 낭자산을 경계로 바깥 지역을 포기하고서도 한 지역에서 영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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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림하고 천하에 대항할 수 있었다. 고려의 왕(王) 씨는 삼한을 통합하고 고려가 망할 때까지 압록강을 감히 한 발자국도 나서지 못했다. 여기서 산천을 할거하여 얻는 득실의 발자취를 대략 알 수 있다.
무릇 아낙네의 견해는 자기 집 지붕 밖을 넘어서지 못하고, 어린아이의 놀이는 겨우 문지방을 넘나드니 담장 밖의 일에는 말할 자격이 없다. 옛 신라 땅에서 태어난 선비는 중국 안에서 벌어진 일에는 눈을 꽉 감고 귀를 틀어막고 있다. 한당(漢唐)과 송명(宋明)의 흥망과 전쟁의 역사도 알 턱이 없으니, 더구나 발해의 옛일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나의 벗 혜풍 유득공 선생은 박학하고 시를 잘한다. 옛 문물제도에 조예가 깊다. 이미 <이십일도회고시주 二十一都懷古詩註>를 편찬하여 나라 안의 탐방할 만한 곳을 상세하게 밝혔다. 또 관심을 확대하여 발해고(渤海考) 한 권을 지었는데, 발해의 인물, 군현, 세계, 연혁을 조목조목 빠짐없이 서술하되 체계를 잘 잡아서 내용이 볼만하다.
이 책에서는 왕씨의 고려가 고구려의 옛 강토를 회복하지 못하였고 그 결과 계림과 낙랑지역이 마침내 천하와 관계를 스스로 끊어버려 미개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나는 이 주장이 내가 전부터 가지고 있던 견해와 서로 맞아떨어짐을 알아차렸고, 선생의 재능이 천하의 형세를 파악하고 제왕과 패자의 지략을 엿보고 있음에 감탄하였다. 그러니 이 책이 어찌 겨우 한나라의 문헌을 갖추어서 섭륭례(葉隆禮)와 왕즙(汪楫)의 저술과 우열을 다투는 정도에 그치고 말겠는가? 그러므로 서문을 지어 위와 같이 논한다.
<발해고서 渤海考序> (1785년, 36세)
□ 발해를 한국의 역사로 편입한 탁월한 안목
이 글은 막역한 친구 유득공이 편찬한 <발해고>에 붙인 서문으로 1785년 가을에 지었다. <발해고>는 발해를 우리나라 역사로 확고하게 편입시켜 통일신라와 발해가 대치한 시기를 남북국 시기로 해석한 탁월한 저서이다. 박제가의 서문뿐만 아니라 유득공의 저서와 성해응(成海應)의 서문도 있다. 성해응의 서문은 이 책이 지리학과 경세학(經世學)에 이바지한다는 점을 밝혔다.
박제가의 서문은 요동을 누차 왕복하며 갖게 된 견해를 만강(滿腔 마음속에 가득 차다)의 비장미를 가지고 서술하였다. 발해 옛 영토를 조선의 잃어버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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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토로 간주하였고, 고토를 잃어버림으로써 조선이 문명의 미개지로 낙후한 현실을 개탄하였다. 발해의 역사와 요동 지역을 보는 그만의 독특한 시각을 잘 드러낸 글이다.
박제가는 연경에 갈 때 요동을 거치며 지은 시에서 “당은 주몽의 옛 강역이고, 문헌으로도 발해를 징험할 수 있다”고 하여 고구려와 발해의 고토회복을 꿈꾸었고, 또 “변방의 개척을 군주께서 허락하시면, 집안을 이끌고서 이 땅에서 농사를 지으련만”(구련성에서 자면서)이라고 하여 아예 압록강을 넘어 이주할 생각까지 밝혔다.
2022.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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