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11. 16. 13:06ㆍ독서후기
궁핍한 날의 벗
- 병든 사회의 깨어 있는 지성 박제가,
그의 날카로운 비판, 고결한 감성, 멋스러운 취향 -
■ 박제가(朴齊家) 1750 - 1805
0 조선 후기 실학자, 18C 북학파 거장
0 본관 밀양, 자는 차수(次修), 호는 초정(楚亭) • 정유(貞蕤, 드리워질 유)
0 규장각 검서관 (이덕무, 유득공, 서인수 등과 더불어)
- 국왕의 저술과 언론 편집 및 교정
0 1778 사은사 채제공의 수행원으로 북경여행, 중국 관료 및 학자들과 교유
0 1800년 정조 사망 후 낙향
0 1801년 윤가기의 옥사에 연루, 함경도 종성에서 5년 유배
0 저서 : 북학의, 정유집 등
■ 안대회(安大會) 옮김
0 연세대 국문과, 同 대학원 문학박사
0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
0 저서 : 궁극의 시학, 벽광나치오, 담바고 문학사, 선비답게 산다는 것,
정조의 비밀 편지, 18세기 한시사 연구,
0 옮긴 책 : 해동화식전, 채근담, 소화시평, 완역정본 북학의 등
◎ 제1부 맑은 인연을 추억하다
- 회고와 인물평 -
■ 어린 날의 <맹자>
바람에 책을 말리던 날 저녁, 다섯 살부터 열 살 적까지 장난치며 가지고 놀던 물건을 담은 상자가 나왔다. 뭉툭해진 붓, 쓰다 남은 먹, 호박 구슬, 새 깃털, 등잔 장식품, 송곳 자루, 바가지 배, 싸리나무 말 등이 책상 높이만큼 쌓였
- 1 -
다. 간간이 기와 조각도 좀 벌레 사이에서 나왔다. 하나같이 내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장난치던 물건이었다. 물건을 보니 슬픈 것도 아니고 기쁜 것도 아닌데 어쩐지 문득 내가 낡은 사람이 된 듯했다. 오늘과 같이 장성한 나 자신이 놀랍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겪은 변화가 새삼스럽기도 했다.
거기에는 손바닥만 한 책 10여 권이 섞여 있었다. 대학, 맹자, 시경, 이소(離騷), 진한문선, 두시(杜詩), 당시, 공씨보(孔氏譜), 석주오율(石洲五律) 등 내 손으로 평점을 찍은 책이었다.
* 이소 : 중국 전국시대 초나라 굴원이 지은 부의 제목
그러나 책은 다 흩어지고 온전하지 못했다. 네 권으로 나누어 엮은 <맹자>는 한 권이 간 데 없었다. 그러자니 어릴 적 일이 머리에 떠올랐다.
나는 글씨 쓰기를 좋아하여 언제나 붓을 입에 물고 다녔다. 측간에 가서는 모래 위에 글씨를 썼고, 어디든 앉으면 허공에 글씨를 썼다.
병자년(1756. 7세)에 청교(靑橋)로 집을 옮긴 뒤로는 하얗게 남아 있는 벽이 없었다. 선친께서는 달마다 종이를 내려주셨고, 나는 날마다 종이를 잘라 공책을 만들었다. 아홉 살 때 이 <맹자> 책을 만들었다. 이 무렵 내가 만든 책이 한 말(斗)을 채웠다. 열한 살 나던 해 선친께서 돌아가셨다.
옛 물건은 낡은 그대로의 모습을 잃지 않는 것이 더 좋다. 안타깝게도 폭이 좁은 책을 매다가 칼로 글자 뿌리를 갉아 먹고 말았다. 이날 어머니는 장롱 속에서 푸른 비단으로 지은 한 폭짜리 반 팔 옷을 꺼내시고는 “이것이 네가 세 살 적에 입던 저고리란다.”라고 하셨다. 나는 이 책을 보여드리며 “똑같은 물건이네요.”라고 말씀드렸다.
<열유시소서맹자서 閱幼時所書孟子叙> (1766년, 17세)
□ 어릴 적에 필사한 책이 불러일으킨 미묘한 회상
누구나 어린 시절의 아름다운 추억을 한두 가지 간직하고 있다. 박제가는 햇볕에 책을 말리다가 낡은 상자에서 어린 날의 물건을 발견하고 회상에 잠겼다.
유독 작은 책으로 만든 <맹자>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아홉 살 때 만든 그 책은 그의 옛 모습 자체였다. 마지막 대목에서 어머니와 나눈 대화는 유희적 산문을 즐긴 박제가의 문체답다.
- 2 -
■ 백탑의 맑은 인연
도회지를 빙 두른 한양성 중앙에 탑이 솟아 있어 멀리서 바라보면 우뚝한 모습이 눈 속에서 대나무가 대순을 터뜨린 것처럼 보인다. 바로 원각사 옛터이다. 지난 무자년(1768), 기축년(1769) 어름, 내 나이가 18, 19세 나던 때 박지원(朴趾源) 선생이 문장에 뛰어나 당세에 이름이 높다는 소문을 듣고, 탑 북쪽으로 선생을 찾아 나섰다.
내가 찾아왔다는 전갈을 들은 선생은 옷을 차려입고 나와 맞으셨다. 오랜 친구라도 본 듯이 손을 맞잡더니 지은 글을 전부 꺼내어 읽도록 하셨다. 이윽고 몸소 쌀을 씻어 다관(茶罐)에 밥을 안치고 흰 주발에 퍼서 옥소반에 받쳐 내와 술잔을 들어 나의 장수를 빌어 주셨다. 뜻밖의 환대인지라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였다.
그 무렵 이덕무(李德懋)의 사립문이 북쪽에 마주 서 있었고, 이서구(李書九)의 사랑채가 서편에 솟아 있었다. 수십 걸음 떨어진 곳에는 서상수(徐常修)의 관재(觀齋)가 있었고, 또 거기서 꺾어져 북동쪽에는 유금(柳琴) 유득공(柳得恭)의 집이 있었다.
나는 한 번 방문하면 돌아가기를 잊고 열흘이고 한 달이고 머물렀다. 그래서 여기서 지은 시문과 척독(尺牘 : 떨어져 있는 상대에게 자기의 안부나 소식을 전하기 위해 보내는 글)이 걸핏하면 책을 만들어도 좋을 만큼 많았다. 술과 음식을 찾으며 낮을 이어 밤을 새우곤 했었다.
그로부터 예닐곱 해가 지나면서 벗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날이 갈수록 가난 과 병이 찾아들었다. 어쩌다 만나면 서로 탈이 없음을 다행으로 여기곤 했으나, 풍류는 지난날보다 줄었고, 낯빛은 옛날의 빛이 아니었다. 벗과의 교유도 참으로 피하지 못할 성쇠가 있어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임을 그제야 깨닫게 되었다.
친구 이희경(李喜經, 1745~?)이 박지원과 이덕무 등 여러분과 나의 시문과 척독을 한데 합해 베껴서 몇 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나는 그 책에 ‘백탑청연집(白塔淸緣集)’이란 제목을 붙이고 서문을 짓는다. 이 서문을 통해 우리가 당시에 얼마나 활발하게 교유하였는지를 알리고 그 김에 옛날에 있었던 일 한 두 가지를 소개한다. <백탑청연집서 白塔淸緣集序> (1775, 26세)
- 3 -
□ 동인들과 함께 학문과 예술을 한껏 누리던 날의 회상
백탑(白塔)은 서울 탑골 공원에 있는 원각사지 10충 석탑이다. 대리석 탑이어서 백탑이라 불렀다. 이 탑은 기와집과 초가집이 빼곡히 들어찬 당시에는 멀리서도 뚜렷하게 보이던 사울의 대표적인 랜드마크였다.
박지원, 이덕무, 유득공, 서상수 등 이른바 북학(北學)을 주장하던 문인 예술가들은 이 멋진 백탑 주변에 모여 살았다.
백탑은 18세기 중반 시대를 앞서가는 학문과 예술이 꽃핀 장소였다. 이들의 주 무대가 백탑이고, 동인적 결속을 보여주는 저술이 <백탑청연집>이며, 그 사연을 밝힌 대표적인 글이 이 서문이다.
■ 절제의 미덕
한평생을 마칠 때까지 실천해도 좋을 한마디 말이 있으니 바로 절제다. 절제는 결코 비루함과 인색함을 일컫는 말이 아니다. 비루하고 인색한 사람은 재물을 뒤좇느라 제 천성까지 바꾸는 자이니 어떻게 절제라는 말을 붙이겠는가?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대화를 주고받는 사소한 일에서 조금이라도 정도가 지나치면 절제가 아니다.
나는 조여극(趙汝克) 군과 함께 어울려 놀았다. 활발하게 마음껏 노니는 사이 그 풍류며 멋스러움이 더할 나위 없었다. 이덕무의 집에서 긴 이불을 펴 나란히 덮기도 했고 악청(遻 만날 악, 靑)의 깨끗한 물가에서 목욕을 하기도 했다. 돈냥이 생기면 으레 주머니를 톡톡 털었고, 술을 마시면 기어코 흠뻑 취했다.
모두가 기쁨에 겨워했으나 여극은 늘 아쉬움이 남는 듯했다.
나는 <시경>의 관저편(關雎篇)은 즐거워하되 음란에 이르지 않고, 몸이 상하지 않는다는 공자의 말이 바로 절제의 도리이다. <주역>에서는 “끝까지 올라간 용에게는 뉘우침이 있으리라.”고 하였거니와 가득하여 넘치는 것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절제의 도리를 알기는 알면서도 실천하지는 못했다. 바야흐로 술자리가 절정을 넘겨 피하려 할 때면 옷깃을 끌어당기며 술을 따르는 사람이 혹시나 없나 하고 기대하곤 했다.
오호라! 꽃피는 청춘은 시들고, 모이고 흩어지는 인생사는 무상하다 예전에는
- 4 -
풍류와 멋스러움을 절제하자고 말했으나, 이제는 절제하지 않아도 되련만 술 마시고 놀 기회조차 사라졌다. 풍류와 멋스러움은 도를 넘지 않아야 한다. 더구나 더 아래로 내려가 그릇된 행동을 한다면 말해 무엇하랴? 절제에 관한 글을 적어 길 떠나는 여극에게 주고 나도 앞으로 나 자신도 깨우치려 한다.
<색설증조군 嗇說贈趙君> (1769, 20세)
□ 길 떠나는 벗에게 부치는 한마디 충고
여극(汝克)은 조덕민(趙德敏)의 자(字)이다. 여극은 박제가와 이덕무가 절친하게 지내던 벗으로, 서얼 신분의 문사였다. 소석산방(小石山房)이라는 서재의 소유자로, 뜻이 맞는 벗과 격의 없이 즐기는 것을 지상의 낙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는 과음하는 버릇이 있었던 모양이다. 모두가 취한 뒤에도 더 마시자고 하는 사람이 없나 아쉬워했고, 남들은 집으로 돌아가도 더 같이 있기를 바랐던 천성의 소유자로 보인다. 훗날 박제가는 여극을 위해 위트와 기지 넘치는 시를 부쳐주었다. 다음과 같다.
그대 위해 한가지 생각해 뒀지 爲君設一想
그대 깜짝 놀라 자빠질 걸세. 令君狂欲顚(꼭대기 전)
그대 뜻하지 못한 틈을 타 乘君不意際
그대 문으로 불쑥 들어가겠네 直入君門前
■ 비어 있음을 기르는 집
양허(養虛) 선생께서 중국에 들어가 절강(浙江)의 명사를 만났으니, 육비(陸飛), 엄성(嚴誠 ), 반정균(潘庭筠)이다. 세분 모두 지극히 훌륭한 성품의 소유자로서 한 번 보고 몹시 기뻐 천애의 지기, 다시 말해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음을 알아주는 친구 사이가 되었다. 이분들이 귀국하는 양허 선생에게 시문과 서화를 많이 선물하여 지금까지 그들의 풍류와 문헌이 해외에서 빛을 뿜고 있다.
저 비어 있다(虛)는 것은 채워져 있다(實)는 것의 반대이다. 군자는 오로지 채워져 있는 학문(實學)에 힘쓸 뿐이니 비어 있는 것을 숭상해서야 되겠는가? 그렇지만 장자(莊子)는 “사람에게 비어 있는 공간이 없으면 여섯 개의 감각 기관이 서로 다투게 된다.”고 말했다. 저 산과 물을 보지 못했는가? 흐르는 물은 스스로 흐르고, 우뚝 솟은 산은 스스로 솟아 있어 인간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 5 -
듯하다. 그러나 저녁 안개가 피어오르고 봄 물결이 퍼져 나갈 때 산과 물을 바라보면 누구나 삼삼하게 기쁨이 솟아나고, 뭉클하게 부러움이 솟구친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다. 이 마음이 저속함을 고치고, 욕망을 줄인다. 비어 있음을 기른다는 양허(養虛)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이때 마음이 비어 있지 않다면 그만이지만, 비어 있다면 선생은 반드시 무언가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니 하늘도 비어 있음을 길러야 천성을 온전히 지킨다.
<양허당기 養虛堂記> (1766년. 17세)
□ 만날 수 없는 벗을 그리며 비어 있음을 기르는 공간
김재행(金在行)이 자신의 집에 양허당(養虛堂)이라는 새 당호(堂號)를 붙이고는 박제가에게 그 의미를 밝히는 기문(記文)을 써 달라고 부탁하였다. 김재행은 1765년에 홍대용과 함께 연경을 방문하여 중국의 명사와 교유한 지식인이었다. 박제가는 그 특이한 경력을 당호와 연결하여 글을 썼다.
“왜 비어 있음을 길러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글의 요지인데, 무엇이든 비어 있어야 채울 수가 있다는 말로 대답하였다. 실용적 가치가 없어 보이는 산과 물이 인간의 저속함과 욕망을 고친다. 무가치해 보이는 비어 있음을 길러야 인간의 천성을 제대로 보존할 수 있다. 만리타국에서 한 번 만난 벗은 다시 만날 수 없고 내 인생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지만,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한다. 그 역시 비어 있음을 기르는 행위이다. 천성에 뿌리박힌 벗을 사귀는 도리의 발현이다.
■ <풍수정기>의 뒤에 쓰다
누군가의 부모가 살아계시는 동안 부귀와 다복함을 실컷 부렸고 자손을 둔 영화와 세상살이의 즐거움을 한 몸에 모두 누렸으며 게다가 또 천수까지 누렸다고 해보자. 그렇더라도 그 자식 된 이는 만족스럽게 여기지 않고 부모의 죽음을 슬퍼하고 부모를 사모하는 마음이 여느 사람보다 덜하지 않다. 그것은 사사로운 욕심이 아닐까? 그렇지 않다. 이는 하늘로부터 타고난 마음이다.
또 누군가의 부모가 살아계시는 동안 빈천으로 고생하고 굶주림에 허덕이며 유리걸식하면서 떠돌아다녔으며, 또 불행히도 일찍 돌아가셨다고 해보자. 그렇기에 그 자식 된 이는 부모의 죽음을 슬퍼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여느 사람보다 훨씬 더하다. 이것 또한 하늘로부터 타고난 마음이 아닐까? 그렇지 않다.
- 6 -
이는 사사로운 욕심이다. 골육 사이의 감정은 외적인 행복이나 불행으로 덜해지거나 더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이 돌아가시게 되면 여한이 남을 수밖에 없으니 살아계시는 동안 겪은 다복함과 불우함으로 따질 성질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는 홀로 사사로운 욕심이 저절로 생기니 어째서인가? (후략)
<서풍수정기후 書風樹亭記後> (1773년, 24세)
□ 온갖 고초를 겪은 어머니의 추억
1773년 10월 15일 어머니 전주 이씨가 죽고 난 뒤에 쓴 글이다. 박제가의 나이 24세 때의 일이다. 이 글은 <풍수정기 風樹亭記>라는 작자 미상의 기문(記文) 뒤에 쓴 서후(書後)라는 문체이다. 풍수정(風樹亭)이라는 정자 이름은 “나무가 잠잠해지려 하나 바람이 자지 않고, 자식이 봉양하려 하나 어버이는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말에서 나왔으므로, 어버이를 여읜 자식의 슬픔을 표현한다. 어머니가 사망하고 난 뒤 박제가는 이 기문을 읽고서, 한평생 고생만 하다 돌아가신 불쌍한 어머니를 애통해하는 마음을 담아 이 글을 지었다.
■ 꽃에 미친 김군
벽(癖 고질병)이 없는 사람은 버림받은 자이다. 벽(癖)이란 글자는 질병(疾)과 치우침(壁)으로 구성되어, 편벽된 병을 앓는다는 뜻을 가진다. 벽이 편벽된 병을 의미하지만, 고독하게 새로운 것을 개척하고 전문적 기예를 익히는 일은 오로지 벽을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다.
김군이 화원을 만들었다. 김군은 꽃을 주시한 채 하루 종일 눈 한 번 끔쩍하지 않는다. 꽃 아래에 자리를 마련하여 누운 채 꼼짝도 않고 손님이 와도 말 한마디 건네지 않는다. 그런 김군을 보고 미친놈 아니면 멍청이라고 손가락질하고 비웃는 자가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비웃음 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비웃은 사람은 생기가 싹 사라진다.
김군은 마음속에서 만물을 스승으로 삼고 있다. 김군의 기예는 먼 옛날의 어느 누구와 비교해도 훌륭하다. <백화보 百花譜>를 그려 꽃의 역사에 공헌한 공신의 하나로 기억될 것이며, 나라에서 제사를 받드는 위인의 하나가 될 것이다. 벽의 공훈으로 참으로 헛되지 않다.
아아! 벌벌 떨고 게으름이나 피우면서 천하의 대사를 그르치는 사람은 편벽된 병이 없음을 뻐기고 있다. 그자들이 이 그림을 본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 7 -
을사년(1785) 한여름에 초비당(苕翡堂) 주인이 쓴다.
<백화보서 百花譜序> 1785년, 36세
□ 만물을 스승으로 삼은 고독한 예술가의 벽
평범하고 상식적인 세계에 안주하며, 틀에 짜 맞춘 규격품같이 사고하는 인간을 혐오하는 관점이 돋보인다. 당시 서울 지성인의 시대정신을 표현하는 상징적인 글이다.
이 글에 나오는 김군은 김덕형(金德亨)이란 화훼 전문 화가로, 호는 삼양제(三養齊), 자는 강중(剛仲)이다. <진휘속고 震彙續考>에는 “김덕형은 글씨와 그림을 잘했고, 또 시와 부를 잘 지었다. 특히 화훼를 뛰어나게 잘 그렸다. 그가 화훼 한 폭을 그리면 사람들이 서로 가지려고 다투었다.
표암 강세황이 그를 몹시 소중히게 여겼다. <백화첩 百花帖)을 남겨 집에 보관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여기서 말한 <백화첩>이 바로 <백화보>이다. 이 화첩은 20세기 초반까지 전해왔다.
■ 박제가 소전(小傳)
조선이 개국한 지 384년째를 맞는 해는 그가 살고 있는 때이고, 압록강에서 동쪽으로 1천여 리 떨어진 곳은 그가 살아가는 지역이다. 신라에서 나와 밀양을 본관으로 삼은 것은 그의 족보이다. <대학>에서 뜻을 취하여 제가(齊家)라고 이름하였고, <이소 離騷>의 노래에 뜻을 부쳐 초정(楚亭)이라 호를 지었다. 사람됨은 물소 이마에 칼날 같은 눈썹을 가졌고, 눈동자는 검고 귀는 하얗다. 고독하고 고매한 사람만을 골라서 남달리 친하게 사귀고, 권세 많고 부유한 사람은 멀리서 보기만 해도 사이가 멀어진다. 그러니 뜻에 맞는 이가 없이 늘 가난하게 산다.
어려서는 문장가의 글을 배웠으나 성장해서는 국가를 경영하고 백성을 구제할 학문을 좋아하였다. 몇 달째 집에 돌아가지 않고 연구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이제는 훌륭한 인물에 마음을 빼앗겨 세속적인 일을 버리려고 하지 않는다. 개념과 아치를 함께 고민하고, 그윽하고 오묘한 세계를 깊이 사색한다. 백 세대 이전 인물과는 흉금을 터놓고 대화하고, 만 리 밖 먼 땅 사람과 거침없이 어울리고자 한다.
< 중 략 >
- 8 -
그를 찬미하여 쓴다.
책을 지어 기록하고 초상화로 그려놓아도 세월이 도도이 흘러가면 그 사람과는 멀어진다. 더욱이 자연스러운 정화(精華)를 버리고 남과 똑같이 진부한 말로 추켜세운다면 어떻게 그를 불후의 인물로 만들겠는가?
전(傳)이란 전해주는 것이다.
그의 조예와 인품을 최대한 드러내지는 못해도 천 명 만 명과는 다른 오직 하나의 그를 또렷하게 알도록 해야만 하늘 끝 타지에서나 긴 세월 흐른 뒤에라도 그를 만나면 누구나 분명히 알아차리리라. <소전 小傳> (1776년, 27세)
□ 1776년에 쓴 스물일곱 살 정년 사상가의
‘소전’이란 이름의 자전(自傳)이다.
■ 고중암의 변(辯)
청장관(靑莊館) 이덕무 선생이 문을 닫아건 채 저술에만 몰두한 지 50년 가까이 되었다. 선생이 어느 날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백방으로 생각을 해보아도 옛것보다 나은 것이 없구나!”
그러고는 거처하는 집에 고중암(古中庵)이란 이름을 붙였다. 내가 물었다.
“중中이라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요?”
“중화中華란 뜻이지요.”
“어째서 중화를 사모하나요?”
“제가 저들의 서책을 읽어보았고, 저들의 나라에 들어가 보기도 했지요. 땅은 넓기도 넓고 서책은 쌓이고 쌓여 있더군요. 바다를 깊으니 얕으니 헤아릴 수 없는 격이고, 신비한 용이 변화를 부리면 그 한계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격이었지요. 없는 것이 없음을 일러 풍부하다 하고 사람들이 뜻대로 함을 일러 즐긴다고 합니다. 오래전에는 옛사람의 서책을 읽고서 거기에 쓰인 글이 모두 우리나라에서 나온 것인 줄로만 알았지요. 이제야 시서예악(詩書禮樂)이 중화에서 즐기고 있음을 깨달았답니다.
<고중암기 古中菴記> (1790년, 41세)
□ 옛것과 중국의 문물을 배우는 까닭
- 9 -
절친한 벗 이덕무가 서재 이름을 <고중암 古中庵>이라 짓고 박제가에게 기문(記文)을 써 달라고 부탁하였다. 박제가는 자기 생각을 밝히기보다 서재 주인에게 이름을 지은 이유를 물어 글을 완성하기로 했다. 이덕무가 오랫동안 학문을 연마하여 얻은 결론은 옛것을 배우고 중국 것을 익혀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이덕무가 중국을 사모하고 나아가 천년 이전 과거로 가자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조선에서는 이들을 서출이라 하여 배척하고, 북학(北學)을 주장한다 하여 백안시하였다. 하나의 인간, 빼어난 지식인으로 대우받지 못했으니 조선에서는 사귈 친구가 없었다. 그러면 어디로 가야 할까? 천년 전 과거로 가서 옛 사람과 대화하거나 만리 먼 중국에 가서 벗을 사귈 수밖에 없었다. 이 짧은 글에 서출 지식인의 답답함과 그 한계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함께 보인다.
◎ 제2부 나귀를 팔아 그대 가까이 살고 싶소
- 편지와 척독 -
■ 관헌 서상수에게
□ 첫 번째 편지
제가 외진 골목에 살고 있어 세상 서식을 듣지 못하는 터에 백영숙(白永叔 백동수)이 사람을 보내 그대가 북관으로 유배를 떠났다고 전하더군요. 제가 급히 대사동(大寺洞 인사동)으로 달려가 보니 떠난 지 벌써 나흘이나 되었더군요. 즉시 알려주지 않았다고 무관(이덕무)을 나무라자 당연히 벌써 알고 있으리라 생각하여 알리지 않았노라고 하더군요. 오호라! 이미 떠난 마당에 또 어쩌겠습니까? 무더위가 맹위를 떨치는 길을 어찌 가셨는지요? 집은 판잣집에다 풍토도 다른 곳에서 어떻게 잠을 자고 식사를 하는지요? 변방 사투리를 쓰고 가죽옷을 걸친 주민 속에서 어떻게 지내는지요?
(중략)
돌이켜 생각하니 지난날에는 어울려 놀던 일이 별처럼 드문드문 이어졌더군요. 요즘 저는 날랜 말을 타고 육진(六鎭)의 산천에 가서 그대를 만나보고 돌아올 생각뿐입니다. 다만 아무 소용없는 망상일 뿐입니다.
먼 변방에는 인편이 드물어 편지를 보낼 길이 없습니다. 객지에서 숱한 고생을 겪는 와중에 부디 한 몸 소중히 지키시기 바랍니다. 종이 한 폭이라 허다한 사연을 다 싣지 못합니다.
- 10 -
□ 두 번째 편지
북관의 명산 백두산은 두만강과 압록강이 발원한 땅입니다. 나무는 자작나무가 많고 물고기는 넙치가 많습니다. 여인은 주로 삼으로 실을 잣고, 남자는 주로 사냥을 합니다. 황량한 벌판의 물줄기와 풀밭 사이로 야인(野人 만주족)이 사는 인가를 볼 수 있습니다. 짐수레가 덜컹덜컹 다니고, 말과 같은 가축이 떼지어 있습니다. 조선 한 모퉁이에서 오로지 이곳에만 중국 풍속이 있습니다. 2천리 길을 걸어 나그네가 된 지 수십일이 됐으니 고적과 명승을 꽤 많이 훑어 보았겠지요 이 또한 임금의 은덕입니다.
(중략)
제가 예전에 듣기로는 북관에서는 처서날에 서리가 꼭 내린다고 하더군요. 그대는 이른 추위를 맞이했을 텐데 억지로라도 식사를 더 챙겨 드시기 바랍니다. 먼저 쓴 편지를 옆에 놓아둔 지가 오래인데 또 이어서 편지를 씁니다. 판잣집 아래 무료한 저녁에 펼쳐보고 위안거리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 세 번째 편지
저는 지은 죄가 깊고도 무거워 열한 살 때는 아버지를 여의었고, 스물네 살 된 지금 또 어머니를 잃었습니다. 이른바 나를 낳고 나를 기르신 부모님의 은혜를 보답할 길이 모조리 없어졌으니, 애통하고 쓰라린 심정이 천지간에 사무칩니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홀로되어 가난하게 지내신 10여 년 동안 온전한 옷을 몸이 걸치지 못하셨고, 입에 맞는 음식을 들지 못하셨습니다. 새벽닭이 울 때까지 잠들지 못한 채 삯바느질하여 아들에게 스승을 찾아 공부하도록 했습니다. 아들이 교유한 분 중에는 선생과 어른으로 세상에 이름난 명사가 꽤 많았는데, 기어코 힘을 다해 초빙하여 술과 안주를 갖추어 대잡하곤 했습니다. 이들만 보고서는 남들은 가난한 집안 사정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제가 공부에만 전념하여 오늘날의 꼴을 갖춘 것은 모두가 어머니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입니다.
(후략)
□ 네 번째 편지
<회우기 會友記>를 보냅니다. 저는 평소에 중원(中原)을 대단히 흠모해 왔으나, 이 글을 보고 나서는 다시 걷잡을 수 없이 미친 사람이 되어 밥을 앞에 두고서도 수저 드는 것을 잊고, 세숫대야를 앞에 두고서도 얼굴 씻는 것을 잊
- 11 -
을 지경입니다. 아아! 정녕 이곳이 어떤 땅이란 말입니까? 그 땅이 조선일까요? 제가 보니 절강(浙江)이고 서호(西湖)입니다. 그곳은 남북으로 멀고 좌우로 광활하여 도로의 거리를 계산하지 못할 정도로 끝 간 데 없이 넓디넓은 땅입니다.
(중략)
저나 유득공 같은 무리는 타고난 천성 자체가 중원을 좋아할 뿐 아니라 하는 짓도 중원 사람과 은연중 일치합니다. 누가 가르치고 누가 전해주어 그렇겠습니까? 만약 우리를 보고 억지로 배워서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를 진정으로 이해한 것일까요?
아아! 우리 조선 3백 년 역사 동안 중국 땅에서 사절이 계속 오갔으나 명사 한 명도 보지 못하고 돌아왔을 뿐입니다. 이제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 선생이 하루아침에 저 하늘 끝 먼 곳에서 지기(知己)를 맺어 그 풍류와 시문과 서화가 멋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사귄 사람들은 모두 풍모가 의젓하여 지난날 서책에서 본 듯한 인물이고, 주고받은 말은 모두 제 마음속에 또렷하게 새겨져 있던 것입니다. 저분들이 비록 조선과 천리 멀리 떨어져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 해도 우리가 사모하고 사랑하며 감격하여 울면서 의기투합하지 않을 도리가 있겠는지요? <여서관헌상수 與徐觀軒常修> (1766-1773, 17~24세경)
■ 형암 이덕무에게
듣자니 선생께서 지붕을 새로 엮었다 하니 볏짚이 아주 정갈하여 하루하루 상큼하게 지내겠군요. 제가 <집에 머문 생활, 절구 세 수>를 지었으니 이에 평점(評點)을 구하고자 합니다. 저는 문장에 선생의 평점이 없으면 장사 지낼 때 한유(韓愈)의 묘지명(墓誌銘)을 얻지 못한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선생께서는 설마 아끼고 내놓지 않다가 지혜가 서린 먹을 그대로 마르게 하거나 오묘한 글자가 허공에 사라지도록 하지는 않으시겠지요?
<기형암 寄炯痷> (1769, 20세)
□ 작품에 평점을 부탁하는 정갈한 글
간결하고 운치가 넘치는 척독(尺牘)이다. “집에 머문 생활, 절구 세수 家居絶句三首는 시집 권 1”에 실려 있다. 집에 머물 때의 일상사와 단상을 표현한 단순한 작품이다. 시 세 편을 짓고 나서 이덕무에게 평점을 달아 달라고 부탁
- 12 -
하였다. 이덕무는 작품의 실제 비평에 뛰어난 능력을 지닌 비평가로 지금도 그의 평점이 달린 시문이 다수 전해 온다.
* 尺牘 : 서로 떨어져 있는 상대에게 안부나 소식, 하고 싶은 말을 전하기 위 해 써 보내는 글
■ 혜보 유득공에게
소 가래침 같은 빗줄기가 사흘 내내 끊어지지 않는군요. 효자가 사는 동네 골목길은 틀림없이 진창일 테지요. 이 아우가 혜보와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한 지가 오래입니다만, 나귀를 타자니 오래 앉아 있기가 힘들겠고 타지 않자니 멀리 걷기가 힘들 듯합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망설일 뿐입니다. 그냥 나귀를 팔아 집을 사서 가깝게 살 수 있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여유혜보 與柳惠甫> (1771년경, 22세경)
□ 만나고 싶은 간절함을 익살스럽게 표현한 편지
절친한 친구 유득공에게 보낸 짧은 편지이다. 비가 내려 진창길로 변해서 친구를 찾아보기가 힘들다. 차라리 나귀를 팔아 친구 집 가까이 집을 장만하여 자주 오가고 싶다. 그 말에는 벗을 향한 진한 우정이 담겨 있다. 유득공과 주고받았을 많은 편지 가운데 20대에 쓴 이 짧은 척독 한 편만을 문집에 남겨둔 까닭이다.
■ 추성관장인에게 답하는 편지
□ 첫 번째 편지
저물 무렵 귀한 분의 편지가 문에 이르렀으니, 어찌 정겨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우레가 잠든 벌레를 깨우는 봄철에 편안히 지내신다니 경하하는 마음 금힐 길 없습니다. 못난 저는 긴긴 낮에 할 일 없이 낮잠을 이웃 삼아 지냅니다. 서책을 늘어놓고 부들자리(부들로 만든 돗자리)에 뒹구는 것도 그럭저럭 아치(아담하고 우아한 운치)가 있더군요.
그대가 사립문을 닫아걸고 밖을 나가지 않으시니 이야말로 서생 본연의 모습이지요. 대개 볼 만한 것은 조용히 앉아 지내는 사람에게서 많이 나타나더군
- 13 -
요. 못난 저는 그대의 관처사(管處士, 붓)가 40년이나 책상 위에 머물며 한 일을 보지 못해 한스러우니 간직하고 계신 것을 제게 보여 주지 않으시렵니까?
이무관(李懋官)도 편안하고 한가롭게 지냅니다만, 진창이 길을 몹시 가로막아 생각만 간절할 뿐 찾아가지를 못합니다. 못난 제가 어쩌다 문을 나서 산보하다가 서글피 그만둘 뿐입니다. 때마침 딴 일이 생겨서 보내신 사람을 오래 세워 두었으니 거듭 죄송합니다.
□ 두 번째 편지
비췻빛 숲에 묻혀 먼 옛날의 역사를 마음껏 말하는 것은 멋진 일이라 하겠지요. 그대의 책상은 부처님 머리처럼 깨끗합니다. 못난 제 시를 올려놓아 오래 더럽히는 것은 어울리지 않으니 돌려주시기 바랍니다.
□ 세 번째 편지
허신(鄦愼)의 <설문해자 說文解字>를 예전에 열람할 때는 설렁설렁 넘겨 본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대가 소장한 책을 제가 빌리지 못한다면 남의 집에 소장된 책이야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책을 빌려주는 바보라는 말이 세상에 와전된 채 전해지지만, 바보 치(癡)는 사실 술병 치(瓻)의 잘못입니다. 황정견(黃庭堅)이 “나에게 천 권 책을 기꺼이 빌려준다면 나중에는 그대에게 술병 하나로 갚아 주리라.”고 했지요. 시에 나오는 치는 술병이니 그대는 한 번 더 살펴보시지요.
<복추성관장인 復秋聲館丈人> (1773년 이전, 24세 이전)
□ 위트와 익살을 섞은 짧은 편지
추성관장인은 이정재(李定載)이다. 이 책에 실린 <공주로 떠나는 이정재를 보내며의 해설에 그의 내력을 자세하게 밝혀놓았다. 노론 청류 계열 김종후(金鍾厚)의 제자로 1774년 공주로 낙향하기 전에는 이덕무 박제가 등과 자주 교류했다. 낙향하기 전 남산 저택에 정원을 꾸미고 살던 이정재에게 보낸 세 편의 척독은 안부를 물어 온 벗에게 전하는 근황과 자신의 시고를 돌려달라는 부탁, 구하기 힘든 <설문해자>를 빌려달라는 내용이다. 짧은 편지에 위트와 익살 분위기를 조금씩 담아서 구체적 사연을 장난기 어리게 표현하였다. 정취가 담긴 척독 소품들로, 20대 초반 재기발랄한 시기의 필치가 보인다.
■ 상중(喪中)의 낙서 이서구에게
- 14 -
가랑비와 아지랑이 속에서 남은 봄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효자는 어떻게 지내시는지 못내 궁금합니다. 제 아내의 병은 조금 나아졌습니다. 무릉선생(武陵先生, 박지원)은 만월대로 유람을 떠났고, 무관(懋官 이덕무)은 황주를 들렀다가 평양으로 가고 있는데, 다들 한 달 안팎이면 돌아올 것입니다. 혜보(惠甫 유득공)와 그대는 모두 칩거한 상주의 처지고요. 혜보는 또 송씨(宋氏)마을에 마물고 있답니다. 그러니 저는 문을 나서도 갈 데가 없습니다.
우리는 청춘으로 약관의 나이에도 오히려 이처럼 드문드문 보니 차츰 나이를 먹어 세상사에 깊이 젖어 든 뒤에는 형편이 어떻게 바뀔지 짐작할 만합니다. 한두 해 전만 해도 훌쩍 오가며 술 마시고 왁자하게 지냈었지요. 깨고 난 꿈을 다시 이어 꾸지 못하고 흘러간 물을 다시 잡지 못하는 꼴이 돼 버렸군요.
저는 근자에 마음을 둘 데가 없어서 책을 읽지 않은 지도 벌써 몇 달째입니다. 꽃과 나무를 구경하고 누대를 찾고자 하는 마음도 심드렁할 뿐이니 어쩌면 좋을까요? <평양에 가는 무관을 배웅한 시>를 보내니 한 번 살펴봐도 좋을 겁니다. <여낙서애 與洛書哀> (1771년, 23세)
□ 벗들이 떠나고 없는 헛헛한 기분
1771년 음력 3월 24일에서 30일 사이에 절친한 친구에게 쓴 짧은 편지이다. 박지원, 이덕무, 유득공, 이서구 등 친구가 다들 여행을 떠나거나 상중에 있어 어울리지 못하는 답답함을 토로하였다. 갑자기 닥친 이 고적함과 쓸쓸함을 견디기 힘들다.
■ 장임에게 부친다
□ 첫 번째 편지
나는 24일에 귀양지에 도착했다. 중간에 만 개의 산을 넘고 천 개의 강을 건넜는데 그래도 버틸 힘이 있었다. 다리의 곪은 상처는 조금 나아서 이제는 측간에 갈 때 부축을 받지 않아도 된다. 다만 의원과 약이 없고 또 침놓는 이가 없어 상처가 온전히 아무는 것이 더딜 수밖에 없으니 걱정이다. 좁쌀밥과 찬 김치일망정 평소 먹던 것처럼 편안하다.
너는 내 걱정일랑 조금도 하지 말고 두 아우를 부지런히 가르쳐라. 공부를 그만두지 않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우선이다. 너희가 오는 것도 급하지 않다.다만 내년 봄에 한 번쯤 다녀간다면 그것은 인정상 막기 어렵다. 삼사(三司)에
- 15 -
서 준엄하게 죄를 따지니 너희들은 마음에 위기의식과 두려움을 품고 있어야 한다. 또 기회를 틈타 몰래 해코지하는 무리가 있으니 정말 두려운 이들이다.
이 천지에는 아직 공론이 살아 있어 내 억울함을 위관(委官 재판장) 이하 모두가 알고 있더라. 운명이니 어쩌겠느냐? 그저 천명을 순순히 받아들여야 한다. 오로지 선을 행하는 것이 액운을 물리치고 재난을 벗어나는 길이다. 너희는 결코 자포자기해서는 안 된다.
내가 2천 리 밖에 머물다 이곳에서 생을 마친다 해도 내 집 안방과 다름없이 여길 것이다. 무엇을 한스럽게 여기겠느냐? 한두 해쯤 기다려 너희가 이리로 와서 서로 만나 가족끼리 단란하게 살아간다면 그 또한 우리 임금의 땅에서 우리 임금의 신하로 살아가는 것이니 혜주(惠州)가 하늘 위에 있지 않다는 말이 바로 이 말이다.
관아에서는 내 죄가 무겁다 하여 외부인과는 오도 가도 못하게 한다고 한다. 무서워하고 겁내는 이 집 주인을 괴상히 여길 일이 전혀 아니고, 이번 사건의 속사정을 모르니 관아에서 닦달하는 것도 괴상히 여길 일이 아니다. 서찰에는 평안하다는 글이나 적되 그마저 한 해에 두 번 전하면 충분하다.
여기서는 외부인과 오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니 서책도 빌려볼 수 없다. 백편구경(片璧九經)과 가는 베 안경집에 들어 있는 유리 안경 극상품을 가져오면 좋겠다. <주서(朱書)> 같은 책은 대단히 무거우니 무슨 수로 가져오겠느냐? 한번 읽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지만 그럴 수 없구나.
둘째 누님의 병은 숙환인데 내가 돌아갈 기약을 헤아리지 못하니 이렇게 못 본 채로 돌아가실까 걱정이다. 이것이 가장 마음 아프다. 남서방 아내가 제일 걱정이니 약골에 아비 걱정에 속만 태우겠구나.
□ 두 번째 편지
(앞부분 생략)
얼마 전에 새로 급제한 진사를 통해 <규벽사서 圭璧四書>를 얻었다. <중용>은 읽어서 거의 다 외우게 됐으나 그때그때 생각나는 바를 기록할 수 있는 종이와 붓이 전혀 없다. 앞서 보낸 편지에서는 이 말을 미처 하지 못했다. 줄을 친 크고 작은 공책을 조금 부쳐 보내거라. 한 번 서찰을 보내면 걸핏하면 두 달을 넘기니 해가 가기 전에는 서울 소식을 얻어듣기가 어려울 듯하구나.
뱃속의 횟병이 몸시 심하여 통쾌하게 제거해 버리고 싶다. 저번에 나열해 적
- 16 -
은 물목 가운데 후추가 들어 있는데 꿀에 버무려 환약을 만들 수 있다. 대두(大豆) 크기로 환약 수십 개를 만들어 가져오면 좋겠다. 내 건강을 크게 신경 쓸 것까지는 없다. 아우 둘을 잘 가르치고, 집안일을 잘 처리하여 뒤죽박죽되지 않게만 하면 된다. 긴말하지 않으련다.
□ 세 번째 편지
김군이 벌써 편지를 전달했으리라 생각한다. 내가 돌아갈 날짜는 아직도 결판나지 않았나 보구나. <시경>에 나오는 <고사리를 캐자>와 <병거출동>이라는 두 편의 시는 집안사람을 상대로 말하고 있다. 내가 나랏일로 얽힌 고생만 없어진다면 장차 아무 대립도 없는 무하유(無何有)의 땅에서 소요하면서 옛사람과 이웃하여 살고 싶구나. 그렇게만 된다면 만족이다. 그밖에 바라는 것은 너희들이 하류의 사람이 되지 않는 것뿐이다.
(중략)
만사를 모조리 끊어버렸다마는 오로지 차와 코담배만은 끊으려 해도 끊지를 못하겠구나. 구하지 못하면 병이 날 지경이다. 아직도 그런 고질병을 가지고 있다니 못 말리겠다! 여기서 20여 리 떨어진 곳에 행화촌(杏花村 술집)이 있단다. 문인 한 사람이 닭고기와 밥을 장만해 놓고서 나를 청하는구나 자고 돌아와야만 할 게다. 경황이 없어 길게 적지 않는다.
<기임아 寄稔兒> (1801~1804년, 52~55세)
□ 유배지에서 큰아들에게 보낸 사연
1801년 이후 유배지 함경도 종성에서 서울의 맏아들에게 보낸 세 통의 편지이다. 박제가는 장임(長稔), 장름(長廩), 장엄(長馣 향기로울 암) 세 아들을 두었고 유배지에서 많은 편지를 보냈는데 문집에는 십여 편만 전해지고 있다. (중략)
경서를 새로 공부하여 저술이 전념하느라 서책과 종이를 구하는 문제를 자주 언급하고 있다. <사서지설 四書只說>을 지었다고 다른 편지에서 밝혔으나, 현재는 <주역> 해설서인 <주역해 周易解>가 남아 전한다.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박제가의 <정유해 貞蕤解>가 있음을 밝혀서, 실제로 많은 경학 저술을 남겼음을 알 수 있다.
■ 사위 윤겸진에게 답하는 편지
- 17 -
자네의 편지 한 통을 받았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숨어지내는 이가 사람 발자국 소리를 들은 기쁨도 이보다 낫겠는가? 모친을 모시고 편안하게 지낸다니 마음에 곱절이나 더 위로를 받네. 또한 강가에 거처를 장만 했다니 벌써 심신을 추스렸으리라 짐작하네. 이웃한 마을을 오가지 못하고 궁벽하고 황량한 곳에서 외따로 살며 도깨비를 막아야 한다니 유감일세.
기막힌 재앙을 당한 사람이 예로부터 얼마나 많겠는가? 내가 어찌 감히 죄가 없노라고 하겠는가? 다만 평소에 남의 뜻을 거스른 일이 쌓이고 쌓여 이런 처지에 이르렀네. 부끄러운 마음은 없으나 어찌 다른 잘못이 없다고야 하겠는가? 평생 지은 허물을 모아 보면 틀림없이 한 번 귀양 가고도 남음이 있을 걸세. 하지만 남들은 아무도 귀양을 가지 않고 나만 홀로 귀양을 가게 됐네. 이것이 이른바 하늘이 내게만 후하게 베푼다는 말이니, 그나마 하늘이 나를 싹둑 끊어 버리지 않은 인연은 남아 있나 보네.
이곳에는 책이 없어서 그냥 <규벽사서(奎璧四書)를 가져다 읽고 있네. 백여 일 만에 그때그때 얻은 바를 담은 적바림 수백 조항을 지었네. 언제나 자네들과 더불어 이런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중략)
입고 먹는 것이 순조로움을 잃고 거처하는 것이 편치 않은 자질구레한 일쯤은 마음에 두지 않은 지가 벌써 오래됐네. 비자나무 열매를 먹었더니 배가 아픈 병이 사라졌네. 그 뒤로는 정신과 기운을 제법 차렸고, 수염과 머리털이 더는 희어지지 않으니 나는 분명 죽지 않을 걸세. 자네들은 아직 젊으니 단란하게 모이는 기회를 다시 얻지 못할 리야 있겠는가? 구태여 조바심 내지 않아도 되네.
하늘이 아직도 재앙 내리기를 끝내지 않아서 임씨 집 누님의 상을 또 치렀으니 살고 싶은 마음이 어찌 다시 나겠는가? 그만두세. 그만둬. 오직 노력하여 독서에 진보가 있기를 바랄 뿐이네. 서울에서 오는 소식도 드물고 또 친지들 소식마저 끊겼으니 어쩌면 좋단 말인가?
<답윤생겸진 答尹甥兼鎭> (1801년, 52세)
□ 사위에게 밝히는 정조 사망 이후의 고난
맏사위 윤겸진(尹兼鎭)이 유배지로 보내온 위로 편지에 쓴 답장이다.
(중략)
- 18 -
기막힌 재앙을 당한 현실을 원망하기보다는 자위하고 체념하는 심경을 토로하였다. 평소에 자신을 미워한 이들이 쌓아둔 원한이 작지 않아 “한 번 귀양 가고도 남음이 있다.”고 한 말은 의금부에 갇혀 고문당하고 유배를 온 것이 운명이라고 체념하는 자세를 보여준다. 그를 끝까지 지원한 정조의 사망은 그를 보호하는 울타리가 사라진 것이었다. 정조의 사망에 살고 싶은 의욕이 사라졌다고 한 것은 그의 본심이었다. 이 무렵 지은 시에도 같은 심경을 밝혔다. 아들에게도 표현하지 않았던 비감하고 비통한 심경을 맏사위에게는 털어놓고 있다.
■ 갱당 이조원에게
조선의 괴짜 박제가는 갱당(羹當) 이조원(李調元) 선생 문하에 삼가 두 번 절하고 편지를 올립니다. 저는 보잘것없는 해외의 서생으로 올해 나이 스물여덟입니다. 일가친척도 제 얼굴을 본 이가 드물고 이웃에도 제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뜻밖에 이번에 제 벗 탄소(彈素) 유금(柳琴)이 저희 시를 뽑아 만든 <한객건연집 韓客巾衍集)이 중국의 대인으로부터 칭찬의 말을 들었습니다. 자리를 함께하여 나눈 대화보다, 수레를 멈추고 주고받은 이야기보다 훨씬 더 후련하게 속을 터놓은 셈입니다. 이야말로 평생에 처음 보는 큰 행운이자 세상에 다시없는 기이한 인연입니다.
그랬다는 말을 처음 듣고는 분수에 넘치는 일이라 놀라기도 하고 어리둥절하여 단지 큰 군자의 사람을 포용하는 융숭한 도량 덕분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평하신 말을 보니 살갗을 깊이 파고들고 마음에 쏙쏙 들어서 심드렁하게 지나칠 평가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런 뒤에는 훨훨 가볍게 날개가 돋아 북경의 저택으로 날아가 뵙고 향을 사르고 절을 한 다음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습니다. 아!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
(중략)
하늘이 제 속마음을 헤아려, 해마다 조공 가는 사신을 수행하여 말고삐를 잡은 비천한 병졸로라도 만들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저는 중국에 가서 웅장한 산천과 인물들이며 주택과 수레와 배의 제작법, 그리고 농업과 공업과 기예를 다루는 무리를 두루 두루 구경하고 싶습니다. 배우고 싶고 견문하고 싶은 사항을 하나하나 책자에 써 두었다가 선생을 앞에 두고 질문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 19 -
하고 난 뒤 귀국하여 밭도랑 사이에서 죽는다 해도 아무 여한이 없겠습니다. 선생께서는 제가 드린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탄소가 하시는 말을 곁에서 들어보니 선생께서 <한객건연집>을 간행하고 싶어 한다고 하더군요. 한두 해 안에 인쇄한 책을 얻어 볼 수 있다면 눈앞의 한 잔 술이 주는 상쾌함보다 훨씬 나을 것입니다. 탄소는 이 책이 간행되면 우리나라 사람의 눈과 귀에 거슬릴 것이라 보더군요 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무지한 자는 아무리 읽어도 보이지 않으므로, 책을 전해 주고 전해 받을 적에는 마땅히 진심을 알아주는 사람을 선택하면 될 것입니다.
때마침 대책문(對策文)으로 과거 시험에 선발되어 곧 회시(會試)를 보러 가야하니 속된 일이 어지럽게 몰려듭니다. 천 마디 만 마디 하고 싶은 말을 붓으로는 다 적을 수 없습니다. 선생께서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이갱당조원 與李羹堂調元 > (1777년, 28세)
□ 북경의 이조원에게 보내는 편지
북경에 있는 이조원에게 보내는 편지다. 1777년 3월 24일 북경에서 돌아온 친구 유금으로부터 당대의 저명한 학자 이조원과 반정균이 <한객건연집>에 가한 비평과 시문을 받고서 박제가와 이덕무 등은 만리타국의 지성인에게 깊은 감동을 받았다.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으나 오히려 작품을 주고받은 것으로 더 큰 친밀감을 느끼고 이렇게 무턱대고 편지를 썼다.
이 편지에서 박제가는 자신을 인정해 준 후의에 감사하는 동시에 마부가 되어서라도 북경에 가서 선진 문물을 견문하고 배우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드러낸다. 소망은 다음 해에 실현되었다.
이덕무 역시 이조원에게 여러 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첫 편지에서 박제가를 두고 “박초정(朴楚亭)은 키가 작으면서 야무지고, 비분강개한 때가 매우 많으며, 재기가 발랄하고, 초서와 예서는 좌중을 놀라게 하며 중국을 사모하는 뜻이 있고, 기이한 기상이 특출합니다.”라고 소개하였다. 이덕무가 소개한 박제가의 이 같은 성품이 이 편지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조원이 이 편지를 받고 보낸 답장이 전하고 있다.
■ 추루 반정균에게
조선의 괴짜는 추루(秋루) 반정균(潘庭筠) 선생의 문하에 두 번 절하고 아룁
- 20 -
니다. 선생께서는 <한객건연집>으로 저를 알게 되었으나, 제가 선생과 교분을 맺은지는 벌써 10년이나 됩니다. 저는 담헌 홍대용 선생과 처음에는 아는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담헌 선생이 추루 선생을 비롯해 철교(鐵橋), 엄성(嚴誠), 소음(篠飮), 육비(陸飛)와 더불어 천애지기(天涯知己)의 사귐을 맺고 돌아왔다는 소문을 듣고서 먼저 찾아가 뵙고 교분을 맺었습니다. 선생들께서 주고받은 필담과 시문을 모두 얻어서 읽고는 손에서 놓지를 못하고 그 아래서 며칠 동안이나 잠자고 쉰 적이 있습니다.
아! 저는 정이 많은 사람인가 봅니다. 눈을 감으면 선생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고, 꿈을 꾸면 선생이 사는 마을을 노닐고 있었습니다. 편지를 써서 저를 소개하면 보자마자 바로 알아볼 것만 같았습니다.
(중략)
소음(篠飮) 선생은 현재 어떤 관직에 있고, 언제 북경에 머물게 되는지요? 이 뒤로는 추루 선생의 얼굴을 한 번 뵙고 속마음을 터놓을 수 있기만을 고대합니다. 그것이 10년 동안 글만 읽는 것보다 당연히 낫겠지요. 이 뜻을 끝내 이루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소음 선생께도 소식을 전할 편지가 있으니 제 뜻을 전달해 주시기 바랍니다. 산천이 사이를 가로막아 나중에 만날 것을 기약하지 못합니다. 종이를 앞에 두니 서글픈 마음이 일어 까마득한 곳을 넋이 빠지도록 바라만 봅니다. 어쩌면 좋을지요? 너무도 경황이 없어서 속에 담긴 생각을 다 쓰지 못합니다.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여반추루정균 與潘秋루庭筠> (1777년, 28세)
□ 북경의 반정균에게 보내는 편지
앞에 수록한 이조원에게 보낸 편지와 함께 북경에 있는 반정균에게 보낸 편지다. 1773년 3월 24일 북경에서 돌아온 친구 유금으로부터 이조원, 반정균이 <한객건연집>에 가한 비평과 서문을 받고서 썼다. 이미 10년 전에 반정균 등이 홍대용과 교류한 필담과 시문을 통해 그를 알고 있었음을 밝히고, <한객건연집>에 평점을 가하고 문집에 서문을 써서 인정해 준 은덕에 감격하는 마음을 담았는데, 이 소망대로 다음 해 북경을 방문하게 되었다. 반정균 역시 이 편지에 답장을 보내어 현재 전하고 있다.
이 밖에도 박제가가 중국인에게 보낸 편지는 많다. 현재 문집에는 곽집환(郭執桓)에게 보낸 편지가 실려 있다. 이러한 편지와 시문, 관련 사실을 정리한
- 21 -
책<호저집 縞紵集)이 1809년 5월에 셋째 아들 박장암(朴長馣)에 의해 6권 2책으로 엮어졌다.
■ 내한 서유구에게 보내다
박제가는 아룁니다. 저는 세상에서 보기 드문 은혜를 입어, 규장각에 검서관을 처음 설치한 이래 깊고 삼엄한 궁궐을 14년째 출입하고 있습니다. 맡은 일은 하나같이 지극히 엄중하고, 받은 은혜는 하나같이 지극히 영광스러운지라, 파뿌리처럼 백발이 되고 거북등처럼 허리가 굽을 때까지 이 일에 종사하여 만에 하나라도 임금의 은혜에 보답하기를 기약하였습니다.
불행하게도 5년 전부터 밤마다 잠을 놓치더니 눈이 침침해져 돋보기를 써도 효과가 없어서 믿을 것이라곤 오른쪽 눈 하나뿐이었습니다. 갑자기 몇 달 전부터는 눈이 흐려지는 증세가 또 도졌습니다.
등불이 가물가물해도 심지를 자를 줄 모르고, 붓이 잘 나가지 않아도 털을 묶지 못했습니다. 가끔 눈을 조금 혹사하면 금가루가 허공에 가득한 증세가 여러 날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동전도 같고 물결도 같은 것이 눈에 어른어른하거나 주근깨 같고 얼룩 같은 것이 나타나 뭐라 형용하기가 어렵습니다. 또 눈이 시려와 자꾸 잠기고 눈초리가 꺼칠하여 자꾸만 손으로 비비게 됩니다. 쇠약해진 몸 상태를 그대로 드러낸 증상이니 우연히 생겨난 백태는 아닙니다.
(중략)
열 개의 눈으로 한 개의 일을 해도 오히려 온전하지 못할까 두려운데, 한 개의 눈으로 열 개의 일을 하려 하니 그 형편이 어떻겠습니까? 이렇게 억지로 직책을 맡아 하면 맡은 직책은 반드시 어그러질 것입니다. 많은 직책이 어그러졌는데도 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면 책임은 앞으로 누구에게 돌아가겠습니까? 이로 말미암아 두려움에 떨며 사직을 허락받고자 하니, 일도 하지 않으면서 녹봉만 챙겨 먹어 처벌되는 불행을 모면하고자 합니다.
(중략)
악공의 쓸모는 귀에 있고, 변사의 쓸모는 혀에 있습니다. 악공이 귀머거리인데도 악기를 다루고, 변사가 벙어리인데도 적국에 사신으로 갔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지금 검서관의 쓸모는 눈에 있으니 눈이 잘 보이지 않으면
- 22 -
물러나는 것이 정말로 마땅한 처신입니다. 지난밤에 무릎을 맞대고 드린 말씀이 우연히 나온 것이 아님을 헤아려주십시오. 머뭇거리다가 현재에 이른 까닭은 정말 직책의 크기와는 무관하게 임금께 가까이 있고, 기밀을 다루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설령 업무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고 해도 훌쩍 떠나려는 낯밫을 감히 보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략)
아! 한 집안의 생계도 일과 관련이 있고, 한 몸의 거취도 일에서 나옵니다.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이라 해도 내각에 있지 않으면 물을 떠난 물고기에 둥지 잃은 새의 신세로 혈혈단신 갈 곳이 없고, 구렁텅이를 구르다 곤궁하게 굶어 죽을 처지임을 알 것입니다. 그런데도 차마 이렇게 면직을 바라는 데는 부득이한 사정이 분명히 있음을 잘 알 것입니다.
먼 옛날 사람 심인사(沈驎士)는 조용히 지내고 말을 적게 하여 몸의 힘을 길렀더니 나이가 여든이 되어 두 눈이 다시 밝아졌습니다. 장적(張籍)은 절동(浙東) 관찰사에게 편지를 보내 “다시금 하늘의 해를 보게 된다면 지금부터 누리는 삶은 모두 각하께서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현재 관원 중에 결원이 생겨 형세상 곧 새 관원을 임명할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데 집사 께서는 상의를 거친 뒤에 임금께 아뢰어서 제가 맡은 직책의 교체를 허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심인사처럼 소원을 이루고 절동 관찰사가 베푸는 은혜를 양보하지 않도록 해 주신다면 정말 다행이겠습니다.
<여서내한유구 與徐內翰有榘> (1792년, 43세)
□ 시력이 나빠져 검서관 사임을 요청하는 편지
1972년 검서관의 상급 관료인 규장각 대교(待敎) 서유구에게 면직되기를 요청한 편지이다. 면직을 요청한 사유는 바로 과로로 인한 눈병이다. 책 교정이나 국왕과 관련한 문서의 필사를 주 업무로 하였고 정조는 특히 많은 글을 썼기에 검서관은 많은 문사를 보는 일에 과도하게 시달려 결국에는 시력에 무리가 찾아왔다. 더는 업무를 볼 상태가 아니라고 판단하여 사임하려 하니 국왕에게 잘 말해 달라는 취지로 부탁하였다.
박제가를 비롯한 검서관이 한 일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이 편지에서는 업무량이 얼마나 과중했는지도 잘 나타나 있다. 시집 3권에 실린 <눈이 어두워져
- 23 -
관직을 사직하고 여러 동료에게 보이다>라는 시 또한 사력이 몹시 나빠진 고충을 토로하는 작품이다. 다른 편지가 주로 정서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면 이 편지는 상대방을 설득하면서 자신의 처지와 고충을 실감나게 드러낸다.
■ 이길대를 만나 보려는 이조참의 정지검에게
서찰을 받아보고, 지난번 빼어난 기술의 소유자를 열성으로 구하는 공에게 제가 이길대(李吉大)를 천거하지 않아서 의아하게 생각하는 줄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길대는 제가 벗으로 사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선비로 대우해야지 기술자로만 대우해서는 안 됩니다. 공에게 인재를 천거할 때도 옛 법도를 따라서 해야지 기술자를 천시하는 법에 맞춰 천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공께서 인재를 얻어 국사를 함께 하고자 할 때도 큰 능력을 앞세우고 자잘한 흠집은 버려야하며, 깊은 식견을 묻고 모자란 점을 따져서는 안 됩니다.
지금 공께서 인재를 찾고 계시는데, 적임자를 찾아서 지혜를 발휘하여 물건을 만들게 하고, 중국의 제도를 배워서 국가에 이익을 주고 도를 펼치도록 하려는 것인지요. 그게 아니라면 눈앞에서 시험해 보고 완성할 수 있는지 여부를 가늠하여 작은 이익을 얻으려는 것인지요?
지금 이 일을 말하는 이가 적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수레와 착유기, 베틀, 작두 등 기계의 제작에 큰 뜻을 가진 듯이 부산을 떨지마는, 한 달만 지나면 그저 장난삼아 한번 관심을 기울여 본 것으로 판명되지 않는 경우가 드뭅니다. 그런 취지라면 목수나 바퀴와 수레를 만드는 장인은 세상에 많으니 구태여 인재를 천거할 필요까지 있을까요?
(중략)
저 이길대라는 사람이 변수(卞隨)나 백이(伯夷) 같은 청렴한 부류인 것은 아닙니다만, 마음속에는 지기(知己)를 한 사람 만나서 이름도 얻고 몸도 의탁하려는 소망이 없지는 않습니다. 저만 해도 굶주림에 허덕이며 온 식구가 우왕좌왕하는 이길대가 재간과 기예를 발휘할 기회 한 번 만나지 못하고 죽음에 이를까 걱정이 태산입니다. 처지가 그렇기는 합니다만 이길대는 이 시대에 사람을 사귀는 자세로 남의 눈치를 살피는 일은 끝까지 하지 않으려 합니다. 정녕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기 때문이지요.
- 24 -
지금 나라 안의 현자 가운데 한가지 기예로 명성을 얻은 사람은 제가 거의 다 접해 보았습니다.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은 더불어 사귀기도 했고, 접해 보거나 사귀지는 않았다 해도 그 이름만 들으면 반드시 어떤 사람인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빈한하고 신분이 낮은 이가 많습니다. 기예를 본래부터 천시합니다만 오늘날 기술을 멀리하는 풍토는 한결 더 심합니다. 천시당하는 신분과 기예를 멸시하는 풍토가 극심한 시대에 처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으니 세상으로 나올 수 없습니다. 공께서 인재를 구하는 자세가 이와는 다르고, 제가 인재를 소개하는 자세가 세상의 인재 천거와는 같지 않다고 한들 누가 믿어줄 것이며, 누가 알아주겠습니까?
(중략)
누군가를 데려다 쓰고자 한다면 먼저 그 사람의 마음부터 굴복시켜야 하며, 그 사람의 기예를 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음으로 굴복했다면 선비란 본디 자기를 인정해 준 지기를 위해 목숨이라도 바칠 준비가 돼 있습니다. 기예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만약 기예만을 구한다면 기예조차도 다 얻지 못할 것입니다.
(중략)
지금 공께서는 군주에게 인정을 받아 청요직에 있습니다. 백성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도구를 강구하여 편리하게 쓸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강개한 마음으로 중국의 제도를 써서 미개한 상태를 바꿔보려는 의지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땅히 마주(馬周)나 염거(冉璩) 같은 인재를 얻어 예우하고 조정에 천거하여 국가와 함께 활용해야 합니다. 고작 선비 한 사람을 사사로이 사귀어 기계 한 대를 사사로이 만드는 일이나 하려 하십니까?
저는 언젠가 이길대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자네는 기예를 좋아하여 이름이 많이 나 있네. 기술자를 구하는 사람들이 자네 문 앞에 모여들 걸세. 그렇게 되면 날마다 수레 천 대를 만든다고 해도 자네가 배운 것을 한 번도 시험해 보지 못할 것이나 진배없을 걸세.”
저는 이길대에게 기예에 더욱 정진하기를 권고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어려서 열심히 배우고 장년이 되어 배운 것을 펼쳐보려는 의지는 사람이면 다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공께서 이런 사람을 찾으신다면 제가 보아온 사람이 겨우 이길대 한 사람에 불과하겠습니까?
<사정이의지검구현이길대서 謝鄭吏議志儉求見李吉大書> (1781년경, 32세경)
- 25 -
□ 기술자의 인식과 대우
관리 임용의 실무를 담당하던 이조참의 정지검(鄭志儉)에게 보낸 답장 편지이다. 정지검은 1780년 7월에 이조참의에 임명되어 1782년 교체되었다. 정지검은 박제가에게 수레 만드는 기술자를 추천해 달라고 의뢰하였다. 이길대를 추천하기에 한번 그를 만나보았으나 제대로 예우하지 않았고, 그에 실망한 이길대는 그냥 돌아온 듯하다. 기술자를 천인으로 대하는 당시 풍습대로 그에게 위압적으로 대한 듯하다. 이조참의가 상황을 설명하고 다시 추천을 요구하자 박제가는 추천하지 않겠다는 거절의 답장을 보냈다.
이 편지에서 박제가는 기술자를 단순히 기능인으로 보지 말고 선비로 보라고 하면서, 이조참의에게 인재를 대하는 인식과 태도를 바꾸라고 하였다. 이길대가 뛰어난 수레 기술자이지만 그는 단순한 기능인이 아니라 그만의 기술을 통해 사회의 발전을 꾀하는 도를 추구하는 자라고 하였다.
이 글은 일반 산문에서는 접하기 쉽지 않은 기술자의 생활과 대우 문제를 다루고 있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봉건적 질서 체계가 공고히 유지되고 있는 당시 실정에서 공인(工人)을 선비로 대접할 것을 주장한 의의가 있다. 기술의 진보와 그 중요성을 상업의 그것만큼이나 강조한 혁명적 발상을 읽을 수 있는 글이다.
2022. 11. 15.
* 다음에 2부가 계속 됩니다.
- 26 -
'독서후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흔에 읽는 니체 (Nietzsche) (1) | 2022.12.05 |
---|---|
궁핍한 날의 벗 (2) (2) | 2022.11.28 |
이런 사람 만나지 마세요(2) (0) | 2022.11.04 |
이런 사람 만나지 마세요 (0) | 2022.10.28 |
신인류가 몰려온다 (2) (0) | 2022.1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