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일회 2

2009. 7. 19. 09:57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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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접속하지 말고 접촉하라

   - 2007. 4. 15   봄 정기 법회 -


0 접속과 접촉은 발음이 비슷하지만 뜻이 전혀 다릅니다. 접속은 간접적이고    일방적입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입니다. 정이 오고 갈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비인간적입니다. 가끔 외국에 있는 분들로부터 인터넷을 통해     저의 소식을 접한다는 소식을 듣곤 합니다. 그때마다 저는 약간 씁쓸한 기    분이 듭니다.

   그러나 접촉은 상호간의 직접적인 만남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    접속이 아닌 접촉을 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의 표정을 살피고, 눈길을 마주    하고, 목소리를 듣고, 분위기를 함께 누립니다. 때로는 손을 마주 잡거나     미소를 짓거나 쓰다듬는 일을 통해 인간의 정이 오갑니다. 접촉은 이렇듯    인간적입니다.  


0 휴대전화와 컴퓨터, 텔레비전이 나오기 전에 사람들은 지금보다 더 많은     행복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지능적인 사기꾼도 덜 극성스러웠습니다. 신속    하고 편리한 정보 매체를 곁에 두고 사는 이 시대의 우리들은 무엇 때문    에 전보다 행복할 수 없는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편리한 정보 수단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왜 전 보다 행복할 수 없는가?     

   데이터 스모그란 말이 있듯이 과도한 정보는 공해입니다. 정보가 인간 영    혼의 자리를 빼앗기 때문입니다. 접속에 중독된 사람들은 인터넷 연결이     안 되거나 해커들에게 방해를 받을 때면 마치 세상에 종말이라도 온 양     야단을 떨고 어찌할 바를 모릅니다.

   참고 기다리는 것은 인간의 미덕입니다. 그러나 신속하교 편리한 기계장    치에 의존해 살다 보니 무엇이든 즉석에서 해답을 꺼내려고 합니다. 젊은    이들의 자살률이 높은 이유도 한때의 고비를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그는 자신이 영혼을 지닌 인간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습니다. 자신    이 인간임을 망각하고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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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우리에게는 그립고 아쉬운 삶의 여백이 필요합니다. 무엇이든 가득 채우려    고 하지 마십시오. 포만 상태는 곧 죽음입니다. 그리움이 고인 다음에 친    구를 만나야 우정이 더욱 의미 있어 집니다. 인간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너    무 많은 것을 보고 듣고 아는 것은 우리 영혼에 공해와 같은 것임을 깊이    새기기 바랍니다.


0 얼굴이란 무엇입니까? 그 사람의 업의 모습이고, 인생의 이력서입니다. 그    가 어떻게 살았는가 하는 것이 얼굴에 나타납니다. 아름다운 얼굴에 표준    형이 있습니까? 저마다 자기 얼굴을 가지고 살면 됩니다. 덕스럽게 살면     덕스러운 얼굴이 되고, 선한 행동을 하면 그것이 축적되어 아름다움으로     드러납니다.


0 우리는 이 풍진 세상을 살면서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불필요한 말들    을 쏟아 내며 삽니다. 이 생각 저 생각 하면서 노후를 걱정하고, 온갖 근    심 걱정을 미리 가불해서 쓰느라 밤잠을 못 이룹니다. 그 결과 사람들이     왜소하고 무기력해져서 인간으로서의 기상을 지니지 못하게 됩니다. 내 삶    을 뜻대로 살지 못하고 세상의 흐름에 떠밀려 표류하는 실정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본질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찮은 생각을 제쳐두고 삶    의 본질에 눈을 돌려야 합니다. 그래야만 인간으로서 당당하게 살 수 있습    니다.


■ 지금 있는 바로 그 자리

   - 2007. 3. 4. 겨울안거 해제 -


0 지난 결제일에 저는 이 자리에서 도량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곧은 마     음, 직심(直心)이 곧 도량이라고 말했습니다. 어디에도 오염되지 않은 순수    한 마음, 정직한 마음, 분별과 집착을 떠난 평온한 마음이 도량입니다. 거    듭 말씀드리지만 ‘수행이 있는 곳’은 어디나 도량입니다.

   원래 도량(道場)이라는 말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도를 이룬 인도 보드가야    의 ‘보리도량’에서 나온 것으로, 깨달음을 얻은 장소, 도를 이룬 장소를 가    리킵니다. 흔히들 어떤 특정한 장소에 집착하여 꼭 그곳을 찾아가야만 기    도와 수행이 이루어진다고 착각합니다. 이는 도량의 본래 뜻에서 벗어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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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본질적인 관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0 해인사 장경각 법보전 주련

  원각도량하처 (圓角道場何處) : 원만하게 깨달은 부처님 계신 도량이 어디                                  인가?

  현금생사즉시 (現今生死卽是) : 오늘 이 자리가 바로 그 자리이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기도하고 수행하는 도량을 어떤 특정한 장소로 한정     짓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처한 삶의 현장이 곧 도량입니다. 우리가 몸    담고 있는 가정이나 일터가 진정한 도량이 되어야 합니다. 어수선하고 갈    피를 잡을 수 없는 이 혼돈스러운 세상에서 도량이 없으면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 버립니다. 분별과 집착을 떠나 내가 내 마음을 다스리는 깨달음을    얻는 곳이 곧 도량입니다. 좌청룡, 우백호 다 갖춘 명당에 있어도 직심이     없으면 진정한 도량이 아닙니다. 

   

   이상적인 도량은 어디에 있는가?

   지금 그대가 있는 바로 그 자리!  


■ 나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린 다음에 먹는다.

   - 2006. 10. 15. 가을 정기 법회 -


0 초기 경전 ‘숫타니파타’ 에 있는 농부와 부처님의 대화입니다.

- 바라드 바자라는 사문이 부처님에게

   “사문이여 나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립니다. 씨를 뿌린 후에 먹습니다. 당    신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리십시오. 갈고 뿌린 다음에 먹으십시오.” 

- 그러자 부처님이 말합니다.

   “나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립니다. 갈고 뿌린 다음에 먹습니다.”

- 바라문이 되묻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신의 쟁기나 호미, 소를 본 적이 없습니다. 당신은 어    째서 ‘나도 갈고 뿌린 다음에 먹는다.’ 라고 하십니까?”

- 부처님이 대답합니다.

  “나에게 믿음은 씨앗이요. 고행은 비이며, 지혜는 쟁기와 호미, 의지는 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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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를 매는 줄입니다. 몸을 조심하고 말을 삼가며 음식을 절제하여 과식하    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는 진실을 김매는 일로 삼고 있습니다. 또한 부드    러움과 온화함이 내 소를 쟁기에서 떼어 놓습니다.

   즉, 부처님은 자신은 마음의 밭을 간다는 소식입니다.


0 전통적으로 베다 시대(BC 1500-BC 600, 인도 문명 원형의 완성기)부터    수행자들은 걸식을 했습니다. ‘비구(比丘)’라는 말은 고대 경전 용어인 팔    리어 ‘바쿠’를 소리로 옮긴 것입니다. 걸인이라는 뜻입니다. 결코 좋은 이    름은 아닙니다. 남이 피땀 흘려 농사지은 수확물을 얻어먹는 것은 떳떳한    일이 못 됩니다. 다만 수행자가 일반 걸인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밖으로 밥    을 빌어 몸을 돕고 유지하고 안으로는 법을 빌어 이웃을 돕는다는 것입니    다. 수행을 통해 이웃에게 이로움을 전하고 중생을 가르친다는 뜻입니다.


0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등 남쪽 불교권에서는 걸식의 전통이 지금까지 이    어지고 신도들도 스님에게 공양하는 것을 공덕을 쌓는 것으로 믿습니다.     그러나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는 부처님의 말씀보다도 뜻을 받들어서 수    행자들도 생산해서 먹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자기가 먹을 식량은 자급해야    한다는 취지로 바뀝니다. 대단히 혁명적인 발상입니다. 제자들의 스승의     가르침을 극복해 보다 생산적이고 창조적으로 한 걸음 발전한 것입니다.     이것이 대승불교입니다.    


0 백장 선사

- 중국 최초로 불교 수도원을 새운 사람

- 수도원의 기본적 생활 규범을 ‘일하지 않으면 먹지 말라.’로 정함

- 백장 문하의 인재들 : 황벽, 위산, 임제, 향임, 앙산 등


0 우리나라에서도 예전부터 큰 절에서는 식량 자급을 위해 스님들이 직접     농사를 지어 왔습니다. 일손이 모자라면 일꾼을 사서라도 자경을 했습니     다. 직접 갈고 뿌리고 먹는 것을 매우 떳떳한 일로 여겼습니다. 큰 절들에    가보면 절 아래 땅을 개간해 논밭으로 일군 곳이 많습니다. 농사짓는 사람    들이 흘리는 땀을 귀하게 여길 줄 알아서 낟알 한 알까지도 소중히 생각    했습니다. 시주 물건을 무섭게 여겼습니다. 함부로 버리면 큰 허물이었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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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다. 이것은 절마다 약속처럼 지켜졌습니다.  


0 4, 50년 전만 해도 오후에는 늘 울력 시간이 있었습니다. 울력은 여러 사    람이 힘을 합쳐 농사짓고 작업하는 것을 뜻합니다. 작물만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일을 통해 수도원에 사는 사람들이 정신적인 일체감을 갖게 됩니    다. 그런데 지금은 모두가 게을러져서 일을 하려 들지 않습니다. 울력을     하기보다 오히려 마을 일꾼을 사서 일을 시키는 것이 경제적으로 이롭다    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렇게 되면서부터 불교가 점점 쇠퇴해 가고    있습니다. 


0 학명(鶴鳴)스님의 반선반농(半禪半農)

   “이 선원의 목표는 반선반농에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 조는 것만을 능사로 여기지 않습니다. 논밭에 가서 성성적적    (惺惺寂寂 : 활짝 깨어 있고 번잡하지 않은 상태) 하게 일하는 것이 바로    참선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생산을 위한 노동이 곧 수행이라는 것입니다.     창조적인 노동이고 창조적인 수행입니다.   

   “오전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경전을 보고, 오후는 노동, 야간은 좌선으로    일과를 삼는다.”는 것입니다. 


■ 부처님 오신 날이 아니라 부처님 오시는 날

   - 2006. 5. 5. 부처님 오신 날 -


0 어느 날 어떤 사람이 기원정사로 부처님을 찾아와 말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을 바라고 있습니다. 으뜸가는 행복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어떤 것이 인간 삶에 으뜸가는 행복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이에 대한 부    처님의 대답이 ‘숫타니파타’의 ’으뜸가는 행복‘에 실려 있습니다. 오늘은     그 경에서 몇 구절을 뽑아 같이 읽어 보려고 합니다.

  

0 어리석은 사람을 가까이 하지 말고,  어진 사람과 가까이 지내며

  존경할 만한 사람을 존경하라.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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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에서 존경할 만한 사람을 존경하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존경    의 요소가 움트는 일입니다.  존경할 만한 대상이 없는 인생은 삭막한 인    생입니다. 자기 성장을 할 수할 수 있는 발판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0 분수에 알맞은 곳에 살고,  일찍이 공덕을 쌓고

  바른 서원을 세우라.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니라.


   사람은 저마다 자기 몫이 있습니다. 남의 갓을 가로채거나 남의 자리를     흉내 낼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자기 삶이 소멸됩니다. 자기다운 삶을    살려면 먼저 자기에게 주어진 몫을 확실하게 알아야 합니다. 


0 반야심경에 보면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 일체의 고난과 재난을 건넌      다.)’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보살은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는가? 모든 중생    의 고통과 재난을 건넌다는 말입니다. 건넌다는 말은 곧 건진다는 의미입    니다. 타인의 고난과 고통을 함께 나눔으로써 자기 자신도 구원받는 것입    니다.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차안에서 피안으로 고통의 세계에서 고통    을 벗어난 세계로 넘어 간다는 뜻입니다. 내가 타인에게 헌신함으로써 나    자신도 구제를 받는다는 소식입니다. 그것이 보살의 원입니다.


0 부모를 섬기고, 아내와 자식을 사랑하고 보살피는 것.

  일에 질서가 있어 혼란스럽지 않은 것.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니라.


0 남에게 베풀고, 이치에 맞게 행동하며

  비난을 받지 않게 처신하라, 이것이 더 없는 행복이니라.


0 악을 싫어해 멀리 하고, 술을 절제하고

  덕행을 소홀히 하지 말라.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니라.


0 존경과 겸손과 만족과,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때로는 가르침을 들으라.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니라.


0 세상일에 부딪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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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걱정과 근심이 없어 편안한 것. 이것이 더 없는 행복이니라.


0 이와 같은 일을 한다면, 어떤 일이 닥쳐도 좌절하지 않는다.

  어느 곳에서나 행복할 수 있다. 이것이 더없는 행복이니라.


0 부처님은 ‘숫타니파타’의 ‘천한사람’ 편에서 이런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날 때부터 천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날 때부터 귀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그 사람의 행위에 의해서 천한 사람도 되고 귀한 사    람도 되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는 신분의 벽이 높은 사회였습니다. 2,500년 전의 세상입니    다.


0 제가 강조하고 싶은 점은 부처님 오신 날이 과거 완료형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신 날’이라는 것은 이미 오셨다는 뜻입니다. 과거에     일어난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에 지나지 않습니다. 거기엔 종교적인 의미가    없습니다. 종교적인 의미를 지니려면 ‘오신 날’로 그쳐서는 안 됩니다.       ‘오시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현재 진행형이 되어야 합니다.  

   

   부처님은 신앙의 대상이 아닙니다. 길을 가리키는 스승입니다. 그 가르침    을 통해서 내 안의 불성을 일깨우고 꽃피워야 합니다. 이것이 불교이고 부    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불자들은 각자 이 시대 부처의 분신임을 자    각하고 자신이 부처의 한 화신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지혜와 자비로 충    만한 삶을 통해서 세상의 빛이 되어야 날마다 ‘오시는 날’이 될 수 있습니    다. 

  

■ 추위가 뼈에 사무치지 않으면 매화 향기 어찌 얻으랴.

   - 2006. 2. 12.   겨울안거 해제 -


0 여느 때 같으면 도끼로 얼음장을 20센티미터 정도 깨면 물이 흘렀습니다.    덕분에 물을 떠다 쓰곤 했지만 금년에는 도끼로 바닥까지 파도 물이 없었    습니다. 그만큼 추웠습니다. 제가 그곳에서 산 지 15년이 다 되었는데 올    겨울처럼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개울물 소리도 못 듣고 온통 얼어붙은 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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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0 흔히 물 쓰듯 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 말이 얼마나 무례한 표현인    가를 새삼 깨달았습니다. 물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토록 부드럽고 맑고 투명한 물이 한 번 굳게 얼어붙으니 도끼로 깨도     잘 깨지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도 주변 상황에 의해 한번 얼어붙으면 그처    럼 견고해 집니다. 모진 마음을 먹으면 누가 무슨 소리를 해도 들리지 않    습니다. ‘심여수(心如水)’ 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은 물과 같다는 뜻 입니    다. 물은 흘러야 합니다. 그것이 살아 있는 물의 징표이고 생태입니다. 물    은 흐름으로써 자신도 살고 만나는 대상도 살립니다.


0 물이 한 곳에 갇혀 있거나 고여 있으면 그 생명력을 잃고 부패하고 맙니    다. 우리의 마음도 이와 같습니다. 마음 역시 굳어 있거나 어디엔가 갇혀    있으면 온전한 마음이 아니고 병든 마음입니다. 물이 흘러야 그 생명을 유    지 하듯이 마음도 살아서 움직여야만 건강한 마음이 됩니다.

  

0 ‘법구경’ 첫머리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마음이 근본이다. 마음에서 나와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나쁜 

  마음을 가지고 말을 하거나 행동하면 괴로움이 그를 따른다. 수레바퀴가

  소의 발자국을 따르듯이.“

   가령 우리가 생각이 뒤틀려서 가시 돋친 말을 친구에게 던졌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것이 친구에게 가 닿기 전에 내 마음에 가시가 박힙니다. 내

  가 괴롭습니다. 마음을 잘 쓰는 것은 사람답게 살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입

  니다.

   “맑고 순수한 마음으로 말하거나 행동하면 즐거움이 그를 따른다. 마치

   그림자가 실체를 따르듯이.“  이 역시 ‘법구경’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0 황벽 선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차례 추위가 뼈에 사무치지 않으면 코를 찌를 매화 향기 어찌 얻으랴”


■ 부자보다 잘 사는 사람이 되라

   - 2005. 12. 11.   길상사 창건 8주년 -


                             - 33 -

0 세월은 오는 것이 아니라 가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끔씩은 그 말

  이 실감납니다. 하지만 그런 데 속지 마십시오. 세월은 가지도 오지도 않

  습니다. 시간 속에 있는 사람이, 사물과 현상이 가고 오는 것입니다. 철학

  자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시간 자체는 항상 존재 합니다.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있을 뿐입니다. 시간 속에 사는 우리들이 오고 가고 변해 가

  는 것입니다. 무상하다는 것은 시간 자체나 세월이 덧없다는 소리가 아닙

  니다. 그 속에 사는 우리들이 예측할 수 없는 삶을 살고 늘 한결같지 않고

  변하기 때문에 덧없다는 것입니다.


0 우리는 가진 것만큼 행복한가? 물론 어느 정도 관계는 있겠지만 행복은

  가진 것에 의해서 추구되지 않습니다. 행복은 결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

 라 마음 안에서 찾아지는 것입니다. 똑 같은 조건에 있으면서도 누군가는

  행복을 느끼며 살고 누군가는 불만 속에서 평생을 살아갑니다.


0 누가 진정한 부자인가? 가진 것이 많든 적든 덕을 닦으면서 사는 사람입

  니다. 덕이란 무엇인가? 남에 대한 베려 입니다. 남과 나누어 갖는 것입

  다. 우리에게 주어진 물질은 근본적으로 내 소유가 아닙니다. 단지 어떤

  인연에 의해서 우주의 선물이 내게 잠시 맡겨졌을 뿐입니다. 바르게 관리

  할 줄 알면 그 기간이 연장되고, 마구 소비하고 탕진하면 곧 회수당합니

  다. 뜻밖의 물건이 생기면 조심 하십시오. 옳게 쓰면 덕을 쌓고 잘못 쓰면

  복을 감하게 됩니다.


0 우리가 살 만큼 살다가 세상과 작별하게 될 때 무엇이 남습니까? 홀로 있

  는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가지고 가는가?

  평소에 지은 업을 가지고 갑니다. 좋은 업이든 나쁜 업이든 평소에 지은

  업만 그림자처럼 따라갑니다.


0 길상사를 일부에서 부자 절이라고 한다니, 과연 그렇게 불릴 만한 절인지

  이곳에서 수행하는 스님들과 신도들 모두 반성해야 합니다. 어려운 이웃을

  보살피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어 가질 때, 청정한 수행과 올바른 가르

  침으로써 믿고 의지하는 도량이 될 때, 그때 비로소 아름답고 길상스러운

  부자 절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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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를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잊어버림이다.

   - 2005. 11. 15. 겨울안거 결제 -


0 여기 길상사의 나무들엔 아직도 잎이 남아있는데, 11월의 산중은 잎이 다

  지고 빈 가지들뿐입니다. 또 바람결도 매워지고, 하늘은 맑게 개어, 여름

  동안 가려져 있던 산과 계곡이 그 모습을 다 드러내는 계절입니다. 산에

  사는 저 역시도 11월을 가장 좋아합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11월을 가

  리켜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고 말했습니다. 다 사라진 듯하지만, 또

  다시 소생할 여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0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아무 분별없이 선뜻

  나서서 돕는 일을 보리심이라고 합니다. 불교 수행의 첫걸음은 이 보리심

  을 발하는 것입니다. 보리심을 발하지 않고서는 불도를 제대로 수행할 수

  가 없습니다. 발보리심을 줄여서 발심(發心)이라고 합니다. ‘발’이란 본래

  지니고 있는 마음을 밖으로 드러내어 널리 펼친다는 것입니다.

   옛 선사의 법문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불도를 배운다는 것은 곧 자기를 배우는 것이다. 자기를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자기를 잊어버릴 때 모든 것은 비로소 자기가

  된다.“


0 선방에서는 참선할 때 화두를 가지고 합니다. 살아 있는 화두는 어디에 있

  는가? 진짜 살아 있는 화두는 사거리나 동네 길목 또는 아파트 엘리베이

  터 안에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늘 있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

  찾기 때문에 삶의 절실한 명제인 화두를 놓치게 됩니다. 순간순간 깨어 있

  는 사람은 바로 그때 그 자리에서 삶의 문제이자 과제인 화두와 맞닥뜨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살아 있는 화두입니다.


0 풋중 시절에 수덕사 조실(절에서 최고 어른) 금봉 스님이 제가 있던 해인

  사에 오셨습니다. 저는 금봉 스님에게 화두가 잘 안된다고 말하면서 이렇

  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화두를 잘 들 수 있겠습니까?”

   이때 금봉 스님이 물었습니다.

   

                                - 35 -

   “무슨 화두를 들고 있는가?”

   “본래면목(本來面目)입니다.”

   본래 면목이란 부모에게서 태어나기 이전, 본래의 자기 자신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금봉 스님이 큰 소리로 물었습니다.

   “본래 면목은 그만두고 지금 당장 그대 면목은 어떤 것인가?”

   곁에서 듣고 있던 저는 정신이 번쩍 났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참선에 재

  미를 붙였습니다.

   불교는 과거나 미래에 있지 않습니다. 진리는 과거나 미래에 있지 않습니

   다. 지금 이 순간. 지금 이 자리에 있습니다. 우리가 참선과 염불을 하고

  기도를 하는 것은 과거와 미래에 있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 있습니다.

   삶 역시 그렇습니다. 다음 순간의 일을 누가 압니까? 한 번 숨 들이 쉬었

  다가 내쉬지 못하면 굳어지는 것이 육신입니다. 공부하는 사람에게 내일은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0 불자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서원이 있습니다.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

  願度)‘입니다. “끝없는 중생을 기어이 다 건지고 어려운 이웃들을 다 뒷바

  라지 하고 보살피겠습니다.“ 라는 서원입니다. 이것이 발보리심이고 부처

  님의 가르침입니다.


■ 수행자는 늙지 않는다.

   - 2005. 10. 20.   운문사 초청 법회 -


0 조선시대에 불교가 박해를 받았을 때 조성된 이곳 비로전 부처님은 어느

  시골의 논둑이나 밭둑에서 일하다 온 할아버지를 보는듯한 느낌입니다. 그

  리고 다른 불상에서는 볼 수 없는 형태인데, 저는 처음 운문사에 와서 이

  비로전 불상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대개 불상들은 석굴암 본존불을 비

  롯해서 한결같이 가부좌를 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운문사의 비로전 부처님

  은 좌선을 오래 하셔서 발이 저린지, 오른발을 앞으로 내 놓은 모습입니

  다.


0 구도자는 자기반성으로 순간순간 깨어 있어야 합니다. 불교라는 것이 무엇

  

                               - 36 -

  입니까? 깨달음입니다. 늘 깨어 있는 상태입니다. 본래의 자기로서 늘 깨

  어 있는 것입니다.

   선방에 가면 신발 벗는 곳에 ‘조고각하(照顧脚下)’라는 표찰이 있습니다.

  신발 벗는 섬돌에서 자기 발 뿌리를 살피라는 뜻입니다.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 놓으라는 말이 아니라, 과연 오늘 내가 이 자리에서 출가 수행자로서

  어떤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는가,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스스로

  돌아보라는 교훈입니다. 자기가 서 있는 자리, 자신의 현 존재를 늘 살피

  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절에 있는 주련, 현판, 표지들이 다 법문입니다. 세월의 두께와 무게가 실

  려 있습니다.


0 문자와 글은 지혜가 아닙니다. 다만 문자로서 지혜를 드러낼 뿐입니다. 불

  립문자(不立文字)라고 하니까 문자를 무시하는 것 같지만 불립문자 자체도

  하나의 문자입니다. 거기에 현혹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문자의 근원과

  가르침의 근원으로 들어가라는 것입니다. 아직 활자화되지 않은 소식을 자

  자기 안에서 일깨우라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배우고 있는 경전과 조사의

  말씀에 자신을 비추어 보면서 내 안에 잠들어 있는 부처의 말과 조사의

  가르침을 스스로 일깨워 실천하라는 뜻입니다.


0 먼 길을 가려면 그 길에 대해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우리가 한 평생 이

  길을 가려면 굳은 확신을 가지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야 합니다. 각자

  원을 세워야 합니다. 원의 힘으로써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습

  니다. 물론 각자 원이 있겠지만 수행자로서 청정한 원을 세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원과 행이 일치해야 제자리로 들어섭니다. 원만 있고 행이 없는

  것은 공허하고 관념적입니다.


0 수행자에겐 늙음이 없습니다. 늘 그 자리입니다.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에

  게는 늙음과 죽음이 있지만, 수행에는 늙음이 없습니다. 늘 깨어 있기 때

  문에 세월이 비켜 갑니다. 간절한 소망과 원, 행이 없기 때문에 세월이 그

  곳에 앙금을 이루어서 안주하는 것이지, 늘 살아 있는 존재에게는 세월이

  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늘 초심(初心) 이기 때문입니다. 초심이 중요합니

  다. 그런 간절한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세월이 붙지 않습니다.


                              - 37 -

0 법랍은 수행자의 나이입니다. 수행자에게 있어 진짜 법랍은 수행자로서 깨

  어 있는 시간의 나이입니다. 선방에 가서 한 철 두 철 지낸 것이 법랍이

  아닙니다. 스님이 죽으면 세수 얼마, 법랍 얼마 하고 형식적으로 말하는데

  그것은 거짓 법랍입니다. 그 사람이 한 생애에 걸쳐 수행자로서 얼마만큼

  깨어 있었는가. 오직 이것만을 통해 진정한 법랍을 매길 수 있습니다.


0 저는 마음이 흐트러지려고 하거나 이것저것 물건과의 관계에서 갈등이 생

  길 때마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이라는 법문을 떠올립니다. 모든 선사

  들이 본래무일물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빈손으로 왔습니다.

  또 우리가 한 생각을 일으켜서 절에 들어 올 때 계산을 가지고 오지는 않

  았습니다. 빈 몸으로 옵니다. 살 만큼 살다가 인연이 다해서 갈 때도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합니다. 결국 무일물은 물건과 관계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래 아무 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수행자에게는 내 집이 없습니다. 모두가 시주가 지어 놓은 집에서 삽니

  다. 어느 물건을 아무개 스님이 지었다고 표기를 합니다만.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아무개 스님 때 지은 것이지 아무개 스님이 지은 것

  이 아닙니다.


0 우리들의 청정한 본성이 곧 자비심입니다. 자비심은 우연히 생겨나지 않습

  니다. 참선 잘하고 경전 잘 외운다고 해서 자비심이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

  다. 남과의 관계 속에서 자비심이 길러집니다. 자비심과 보리심을 기르는

  것은 수행자에게는 본질적인 길이며 핵심입니다. 보리심은 진리를 깨달아,

  그 깨달음으로 모든 존재를 구하겠다는 원입니다. 불교에서는 흔히 지나가

  는 짐승들을 보면 “발보리심 하라.”고 말합니다.

   즉 “여시축생발보리심(如是畜生發菩提心 : 너는 비록 짐승이지만 보리심

  을 일으키라.)에서 온 말입니다.


0 한국 불교에서는 지혜를 우선시하고 자비를 소홀히 하는 것은 잘못된 일

  입니다. 지혜와 자비는 둘이 아닙니다. 청정한 마음에서 나오는 가닥입니

  다. 굳이 차례를 이야기 하자면 자비심에서 지혜가 싹 틉니다. 자비가 없

  는 지혜는 지극히 메마른 것입니다. 한국 불교는 깨달음을 우선시 하면서

  도 깨달음의 행을 할 줄 모릅니다. 행을 통해 깨달음을 이루는 것이지 깨

  

                                 - 38 -

  달음의 행 없이 정상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이것이 수행의 길입니다.


■ 직선으로 가지 말고 곡선으로 돌아가라.

   - 2005. 10. 16.   가을 정기 법회 -


0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길은 앞날을 미리 예측할 수 없기에 하루하루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만약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의 일을 미리 예측

  할 수 있다면 살맛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입니

  다.


0 여기 직선과 곡선의 상징이 있습니다. 사람의 손으로 빚어 놓은 문명은 직

  선입니다. 그러나 본래 있는 그대로의 자연은 곡선입니다. 나뭇가지, 흐르

  는 강물, 산맥, 해와 달을 보십시오. 다 곡선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만든

  집이나 그 밖의 구조물들은 거의 직선입니다. 직선은 조급하고 냉혹하고

  비정합니다. 곡선은 여유와 인정과 운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곡선의 묘

  미‘에서 삶의 지혜를 터득할 수 있어야 합니다. 


0 세상을 자기중심적으로 살려고 하면 그 길이 막힙니다. 여럿이 어울려 사

  는 세상이기 때문에 남의 처지를 살펴야 합니다. 관계의 이웃을 고려하여,

  그 속에서 자신을 찾고 닦아야 합니다.

   다른 표현을 빌리자면 직선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 곡선적인 사고로 전

  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보다 앞서 살다 간 선인들의 여유로운 생활

  태도를 배우십시오. 목표를 향해 줄곧 달리지 말고 때로는 천천히 돌아가

  야 합니다. 가는 도중 여기저기 눈을 팔면서 느긋함을 즐기기도 하고, 더

  러는 길을 잃고 헤맬 수도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삶의 기술입니다.

   티베트 속담에 “서둘러 걸으면 라싸에 도착할 수 없다. 천천히 걸어야 목

  적지에 도착한다.“ 는 말이 있습니다. 티베트는 지역이 매우 넓고 지형이

  험준합니다. 사람들은 얼마나 멀리 떨어진 데 살든지 중부 지역에 있는 수

  도 라싸로 성지순례 가는 것이 평생소원입니다.


0 사람 사는 세상은 하나의 메아리입니다. 불교에서는 개인이 지은 업을 ‘별

  업(別業)‘이라 하고 여럿이 함께 지은 업을 ’공업(共業)이라 말 합니다. 우

  

                                - 39 -

  리가 겪고 있는 지구의 재앙은 인류의 오만한 공업에서 초래된 것입니다.

  한정된 지구 자원으로 앞다퉈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를 한 결과 입

  니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지진과 해일과 태풍은 우연한 현상이 아닙

  니다. 명상가들은 공통적으로 이야기 합니다. 이것을 교만한 인류의 공업

  에 대한 경고의 소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갈수록 이러한 현상이 심해

  질 거라고 말합니다.


■ 날마다 좋은 날

   - 2005. 8. 19.    여름안거 해제 -


0 2,500년 전 우기가 끝난 뒤 곳곳에서 안거 정진을 하던 수행자들이 부처

  님 계신 곳으로 모여 들어 수행의 경험담을 나누면서, 자신의 깨달음을 점

  검하고, 혹시 실수한 것이나 허물이 있으면 전부 드러내 놓고 참회하던 것

  이 전통으로 이어져 오늘날의 안거 해제일 의식을 갖게 되었다. 불교에서

  는 이날을 우란분절(盂蘭盆節)이라 하여 중요하게 여긴다. ‘우란분’이란

  거꾸로 매달려 있는 사람의 고통을 풀어 준다는 의미이다.

   7월에는 스님의 저서 ‘무소유’가 대만에서 출간되어 한 달 보름 만에

  4쇄를 찍었다.


0 당나라 말엽의 운문(雲問)선사 - 그의 ‘운문록’ 이라는 어록에서 

  “15일 이전의 일은 묻지 않겠다. 15일 이후에 대해 한마디 해보라.”

   이미 지나간 과거사는 그만 두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대중들 사이에서 아무 말이 없자 스님 스스로 답합니다.

   “날마다 좋은 날이다. (日日是好日)이다.”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날마다 좋은 날이란 귀합니다. 또 좋은 날

  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들 스스로가 그 좋은 날을

  만들어 가야 합니다.


0 노후에 대한 불안을 미리 가불해 쓰지 마십시오. 자신에게 주어진 순간

  순간을 맑은 정신을 지니고 관조하면서 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지혜

  롭고 조촐한 노년을 보낼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일야현자경(一夜賢者經)’에서 이렇게 법문합니다.

  

                            - 40 -

   “어느 누가 내일의 죽음을 알겠는가. 진실로 그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이

  를 바로 알아차린 사람은 낮과 밤이 한결같이 정진하나니 이런 사람이 하

  룻밤의 현자이다. 또한 고요함에 이른 사람이다.“

   또 같은 경전에서 부처님은 말합니다.

   “ 과거를 따르지 말고 미래를 기대하지 말라. 한번 지나가 버린 것은 이

  미 버려진 것, 또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오늘 할 일을 부지런히 행

  하라 누가 내일의 죽음을 알 수 있으랴. 지나가 버린 것을 슬퍼하지 않고

  오지 않은 것을 동경하지 않으며 현재를 충실히 살고 있을 때 그의 안색

  은 생기에 빛난다. 분수 바깥 것을 탐내어 어리석은 사람은 그 때문에 꺾

  인 갈대처럼 시든다.“


■ ‘너’는 ‘나’의 동의어 반복

   - 2005. 5. 22. 여름안거 결제 -


0 7세기 인도의 신티데바(寂天 적천) 스님의 법문

  

   세상의 모든 행복은 남을 위한 마음에서 오고

   세상의 모든 불행은 이기심에서 온다.

   하지만 이런 말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어리석은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 이익에만 매달리고

   지혜로운 사람은 남의 이익에 헌신한다.

   그대 스스로 그 차이를 보라.


- 신티데바는 왕위 계승권을 가진 왕자로 문수보살의 계시를 받고 출가

 

0 수행이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보살행입니다. 남을 위해서 헌신하

  는 것, 이것이 진정한 수행입니다. 불교의 수행은 행보리심이고 보살행 입

  니다. 행의 궁극적인 종점이 곧 깨달음입니다. 신해행증(信解行證)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믿고, 이해하고, 행하면 그 행의 결과로 깨달음에 이른다

  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억할 점은 깨닫고 나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행의

  완성이 곧 깨달음이라는 사실입니다. 행 속에 이미 깨달음이 들어 있습니

  다. 마치 과일 속에 씨앗이 들어 있듯이.


                                  - 41 -

0 팔상도(八相圖) : 부처님의 일생을 여덟 가지로 나누어 놓은 그림


1.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 : 부처가 도솔천에서 흰 코끼리를 타고 어머니의

   태속으로 들어가는 꿈의 장면

2.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 부처가 4월 초파일 룸비니에서 탄생하는 장면

3.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 부처가 생노병사를 유람하는 장면

4.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 왕궁을 넘어서 출가하는 장면

5.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 설산에서 수도하는 장면

6.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 보리수 아래에서 악마들에게 항복받는 장면

* 성도상(成道相) : 깨달음을 얻는 순간의 모습은 없음

7.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 : 녹야원에서 설법하는 장면

8.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 : 쌍림에서 열반하는 장면


0 가장 중요한 성도상이 빠진 것은 아마도 수행과 항마 속에 이미 깨달음이

  들어 있어서 따로 성도상을 넣을 필요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본래성불(本來成佛 : 모두가 다 불성을 지닌 같은 존재 이므로, 깨닫고 보

  면 중생도 본래부터 부처라는 말) 이기 때문입니다.


0 지장보살은 “고통 받는 모든 중생을 다 제도한 다음 성불 하겠다.”는 원을

  세웠습니다. 단 한 명의 중생이라도 고통 받고 있는 한 자신은 성불하지

  않겠다는 서원입니다. 이 서원 안에 이미 깨달음의 씨앗이 들어 있는 것입

  니다. 그래서 지장보살 같은 분을 성불을 원하지 않는 보살이라 해서 ‘비

  증보살(悲增菩薩) 이라고 합니다.


■ 어디서 왔으며 무엇을 위해 왔는가.

   - 2005. 5. 15.   부처님 오신 날 -


0 보통은 누구의 생일 또는 누구의 탄생일이라 하는 데 ‘부처님 오신 날’ 이

  라고 이름 붙인 데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부처님은 어디서 왔을까요?

  전설적인 이야기에 따르면 도솔천 내원궁에서 오셨다고 합니다. 고대 인도

  인들의 세계관 속에서 착한 사람들이 태어나 기쁨을 누리는 곳이 도솔천

  인데, 세속적인 어원 해석으로 ‘만족시키다.’는 뜻을 가졌다고 해서 도솔천

  

                                - 42 -

  을 ‘지족천(知足天)’ 이라고도 부릅니다. 우리나라에도 산중 높은 곳에 가

  면 도솔암 또는 지족암 이라는 이름을 가진 암자가 많습니다.

   삶에서 어떤 것이 가장 높은 경지 입니까? 만족할 줄 아는 것,  즉 ‘지족’

  입니다. 도솔암이나 지족암이 산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 것은 만족

  할 줄 아는 지족의 경지가 가장 높은 경지임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오신 날’이라고 할 때 어디서 왔는가는 어떤 장소를 가리키는 것

  이 아닙니다.


0 ‘자비심이 곧 여래’ 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자비심이 부처다.’ 이 구절은

  열반경 ‘범행품’에 실려 있습니다.

   

   모든 보살과 여래는 자비심이 근본이다.

   보살이 자비심을 기르면 끝없는 선행을 할 수 있다.

   누가 무엇이 온갖 선행의 근본이냐고 묻거든

   자비심이라고 대답하라.

   자비심은 진실해서 헛되지 않고

   착한 일은 진실한 생각에서 일어난다.

   진실한 생각이 곧 자비심이고

   자비심이 곧 여래다.


   ‘부처님이 어디서 오셨는가?’ 하는 물음의 답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부

  처님은 도솔천이 아니라 자비심에서 왔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기 위해

  왔는가? 바로 그 자비심을 실현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0 알베르 카뮈의 말입니다.

   우리들은 이 세상을 함께 살고 있습니다. 나 혼자만 사는 세상이 아닙니

  다. 나 자신이 선하게 살면 남에게 그 덕을 나눕니다. 나 자신이 선하게

  살지 못할 때에는 남에게 근심, 걱정, 피해를 끼칩니다. 세상 돌아가는 모

  습을 보십시오. 남을 의식하지 않고 저마다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에 세상

  이 이렇게 혼란스럽습니다. 자기 혼자 살아가는  세상이라면 자기밖에 몰

  라도 상관없겠지만, 이 세상은 함께 어울려 사는 곳이기 때문에 서로가 상

  대방을 배려해야 합니다. 자기밖에 모르는 삶은 바람직한 삶이 아닙니다.

  

                                 - 43 -

   결국 한 생애에서 무엇이 남습니까? 얼마만큼 사랑했는가. 얼마만큼 나누

  고 베풀었는가. 그것만이 재산으로 남습니다. 그 밖의 것은 다 허무하고

  무상합니다.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 부처님께 용돈 20만 원

   - 2005. 4. 17. 봄 정기법회 -

   

0 일흔 살 된 할아버지 인데 3년 전 쯤 부인이 세상을 떠나고 아들 내외가

  자기 집으로 들어오면 잘 모시겠다고 사정을 해서 아파트를 팔고 아들집

  으로 들어갔습니다. 물론 들어갈 때는 빈손으로 가지 않고 지참금 같은 것

  을 가져갔을 것입니다.

   그렇게 한동안 지내다가 어느 날 무슨 일이 있어서 아들 며느리 방에 우

  연히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무얼 찾다가 가계부가 펼쳐져 있어서 무심히

  훑어보게 되었는데 ‘촌놈 용돈 2만 원’ 이란 기록이 보이더랍니다. 자기

  시아버지한테 용돈 주는 것을 그렇게 한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큰 충격을

  받고 그날로 그 집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이것은 실화입니다. 저도 이 말

  을 들으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너무나 이기적이고 자기 본위로 살아가기 때문에 가족 간 단절 현상이

  발생합니다. 행복한 가정은 가족끼리 서로 닮아 갑니다. 그러나 불행한 가

  정은 저마다 따로 삽니다.


0 그릇가게 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요새 그릇이 잘 팔리지 않는다

  고 합니다. 외식문화의 영향일 것입니다. 밖에 나가 먹길 좋아하기 때문입

  니다. 또 옛날과 달리 집에 손님을 거의 초대하지 않습니다. 가까운 친구

  끼리도 밖에서 만나지 집으로 불러들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

  친구네가 어떻게 하고 사는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연속극의 아무개 집

  소식은 잘 알면서도 막상 가까이 지내는 친구의 집안 사정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덕분에 사생활은 보호 받을지 모르지만 인간의 영역은 점점 왜

  소해 집니다. 인간의 설 자리가 자꾸 비좁아집니다.

   옛날과 달라서 요즘 사람들은 출생부터 자기 집에서 태어나지 않습니다.

  집 밖의 병원에 가서 태어납니다. 돌잔치, 생일잔치, 환갑잔치, 칠순 등 모

  두 바깥에서 합니다. 죽음까지도 자기 집에서 맞이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

  

                                 - 44 -

  이 오늘 우리의 실상입니다. 그렇다면 집은 무엇 때문에 존재 합니까? 집

  은 무엇하는 곳입니까? 내 집 마련을 위해 수십 년 동안 애쓰다가 집이

  생기면 좋아 합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따뜻한 가정은 사라지고 차디찬 가

  옥만 남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0 얼마 전에 누가 불쑥 저한테 물었습니다.

   “스님 중노릇 하는 데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입니까?”

   저는 “인간관계입니다.”하고 선뜻 대답했습니다.

   세상살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 풍진 세상을 살아가는 데 가장 힘

  든 일이 있다면 복잡 미묘한 인간관계일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

  계가 가장 어렵습니다.


0 20년 전 제가 어떤 분을 만나 상담해 준 적이 있습니다. 아이 셋에 40대

  초반인 여인은 너무나 이기적인 남편에게 시달리다 못해 이혼을 결심하고

  상담을 하러 왔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식사 준비할 때도 얄미운 인간한테 밥 준다고 생각 말고 부처님께 공

  양 올린다는 마음가짐으로 하라. 밖에 나갈 때 뒷모습을 보고도 부처님 뒷

  모습이라 생각하고 저녁때 퇴근 할 때도 부처님 돌아오신다고 반겨라.“

   그 분은 처음에는 전혀 내 말이 마음에 와 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음

  공부 삼아서 하루하루 하다 보니 자기 마음도 변하고, 남편도 태도가 바뀌

  더라는 것입니다. 자연히 남편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0 삶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해답은 그 물음 속에 들어 있습

  니다. 과일 속에 씨앗이 박혀 있듯이. 그러나 묻지 않고는 해답을 끌어 낼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삶을 저마다 꽃피우면서 사는 따듯한 가정의 가계부에는 ‘촌놈 용

  돈 2만 원‘ 이 아니라 ’부처님께 용돈 20만 원‘이라는 기록이 남겨질 것입

  니다.


■ 물속의 물고기가 목마르다 한다.

   - 2005. 2. 23. 겨울안거 해제 -



                              - 45 -

0 지난 겨울안거 동안 생긴 일 중에서 가장 놀랍고 두려웠던 일은 잘 아시

  다시피 쓰나미입니다. 이제껏 해일이나 지진 소식은 들은 적은 있지만. 한

  순간에 22만 명이 목숨을 잃는 참혹한 재난은 일찍이  상상도 못했던 일

  입니다. 이것은 전 지구적인 재난입니다.


0 전문가들은 이런 재난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 아메리카

  영적 지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 현대 사회의 모든 문제는 인간이 물질적인 추구에 너무 집착하기 때문

  에 발생한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살아 있는 모든 생명

  체와 자신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곧 탐욕이 문제입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보다 크고 많은 것만을 원합니

  다. 물속에 있으면서도 목말라 하는 격입니다.


0 우리들은 지구의 자식들입니다. 그 인디언 영적 지도자는 이와 같이 충고

  합니다.

   “날로 늘어만 가는 전쟁과 폭력, 그리고 인간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일어

  나는 자연재해 등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보다 단순하고

  간소한 생활과 정신적인 추구에 있다.“

   진리는 이토록 간단명료합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덜 쓰고 덜 버리면서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0 ‘구르는 천둥’ 이라는 인디언 영적 지도자는 또 이런 말을 합니다.

   " 대지는 지금 병들어 있다. 인간들이 대지를 잘못 대해 왔기 때문이다.

  머지않은 장래에 큰 자연 재해가 닥칠 것이다. 대지가 자신의 병을 치료하

  기 위해 몸을 크게 뒤흔들 것이다.“

   이것은 벌써 수십 년 전, 1950년대에 한 말입니다. 대지를 못살게 하는

  물것들은 털어 낼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마치 짐승들이 물것들이 있으면

  이내 털어 내듯이.


■ 문 없는 문의 빗장

   - 2004. 11. 26.   겨울안거 결제 -



                               - 46 -

0 무문관(無門關“은 원래 ‘문 없는 문의 빗장’ 또는 ‘문 없는 문’이란

  뜻으로  중국 송나라의 無門 선사가 48개의 화두를 모아 풀이한 책 ‘무

  문관‘에서 비롯되었다. 안거 결제처럼 문을 걸어 잠근 채 문밖에 나가지

  않고 수행할 때, 그 장소를 이르는 말이다. 깨닫기 전에는 나오지 않겠다

  는 각오로 스스로 문에 빗장을 지르고 들어 앉는 곳이 무문관이다.       

     

0 거동이 불편한 노스님이 한밤중 깨어나자 몹시 목이 말랐습니다. 옆방에

  자는 시자를 불렀지만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잠시 뒤 누군가가 시자의

  방문을 두드리며 “노스님께서 물을 찾으시오.” 하고 말하자 시자는 벌떡

  일어나 물그릇을 받쳐 들고 노스님 방으로 들어갑니다.

   스님이 놀라 “누가 물을 떠 오라고 하더냐?” 하고 물으니 사자가 대답합

  니다.

   “누가 방문을 두드리며 노스님께서 물을 찾으신다 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노스님은 탄식합니다. 

   “ 이 늙은이가 수행하는 법을 모르고 있었구나. 참으로 수행할 줄 알았다

  면 사람도 느끼지 못하고 귀신도 알지 못해야 하는데, 오늘 밤 나는 도량

  신에게 내 생각을 들키고 말았다.“

   이것은 당나라 때의 큰스님인 백장 선사 어록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청

  정한 도량에는 그 도량을 지키는 도량신이 반드시 있습니다. ‘천수경’에는

  ‘도량청정무하예(道場淸淨無瑕穢) 삼보천룡강차지(三寶天龍降此地) 라는 구

  절이 나옵니다. 도량이 청정해서 때가 없으면 옹호 신장인 천룡팔부가 강

  림 한다는 뜻입니다.


0 절에서 살다 보면 가끔 경험하는 일입니다.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스

  님!“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있습니다. 깜짝 놀라 눈을 떠 보면 일어날 시

  간입니다. 나 자신을 지켜보는 어떤 존재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스님

  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어떤 존재가 나를 그때그때 일깨웁니다.

  그런데 그 삶이 청정해야 그런 메아리가 있습니다. 생활 자체가 흐리고 탁

  하면 그런 반응이 전혀 없습니다. 그것은 맑음에 대한 울림입니다.


0 백장 스님은 95세까지 살았고 중국 선종 사원의 조사전에는 한 가운데 달

  마스님, 좌보처로 마조 스님, 우보처로 백장 스님 이렇게 세 분을 모시고

  

                               - 47 -

  있습니다.


0 서산대사의 법문에 나오는 말입니다.

  ‘수본진심 제일 정진(守本眞心 第一精眞)’

  수행이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본래 천진한 마음을 지키는 것, 이것이

  으뜸가는 수행이라는 뜻입니다. 지킨다는 말에 속지 마십시오. 본래 청정

  한 마음을 써야 합니다. 지키고만 있으면 그것은 죽은 수행입니다.


0 ‘법구경’에도 같은 내용의 법문이 나옵니다.

   “마음은 들 떠 흔들리기 쉽고 지키기 어렵고 억제하기 어렵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마음 갖기를 활 만드는 사람이 화살을 곧게 하듯 한다.“

   남이 이 말하면 이리 기울고, 저 말하면 저리 기울고, 멀쩡하던 사람이

  말 한마디에 갑자기 화를 내기도 합니다.

   또 ‘법구경’은 설합니다.

   “ 마음이 번뇌에 물들지 않고 생각이 흔들리지 않으며 선과 악을 초월하

  여 흔들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두려움도 없다.“


■ 용서는 가장 큰 수행

   - 2004. 10. 17.   가을 정기 법회 -


0 우리나라에도 몇 차례 다녀간 틱낫한 스님의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

  습니다.

   “그대가 시인이라면 종이 안에 떠다니는 구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구름

  이 없으면 비도 없을 것이고, 비가 없으면 나무들은 자라지 못한다. 그러

  므로 구름은 종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이 세상에 독립된 존재는 없다는 표현입니다. 모두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

  다. 종이를 통해 그 안에 담겨 있는 관계를 넘어다보는 것입니다. 한 장의

  종이를 통해 가을 하늘에 떠다니는 구름을 봅니다.


0 나무가 없으면 우리가 어떻게 숨을 쉽니까? 나무는 산소를 만들어 냅니다.

  나무를 통해 집을 짓고 종이를 만듭니다. 나무 아래서 친구와 만나 대화를

  나누고 사랑을 속삭이고, 또 어떤 사람은 나무 아래서 우주의 실체를 깨닫

  

                               - 48 -

  습니다. 나무만이 아닙니다. 모든 존재는 그렇게 전체 생명계를 받쳐 주는

  역할을 합니다.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어느 한 가지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입니다. 모두 있을 자리에 있습니다. 서로 주고받으며 살아갑니다.


0 옛 스님의 글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옳거니 그르거니 상관 말고 (시시비비도불관 是是非非都不關)

   산이든 물이든 그대로 두라. (산산수수임자휴 山山水水任自閑)

   하필이면 서쪽에만 극락세계랴. (막간서천안양국 莫間西天安養國)

   흰 구름 걷히면 청산인 것을 (백운단처유청산 白雲斷處有靑山)


   시시비비를 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될 대로 됩니다. 다 제

  길을 가게 됩니다. 모든 것은 있을 자리에 있을 것이기 때문에 참견하지

  말고 그대로 두라는 말입니다. 극락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분별

  망상을 쉬면 본래 자기 모습이 드러납니다.


0 달라이 라마의 대화집 ‘용서’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중국이 티베트를 점령하자 달라이 라마는 인도로 망명하고 그가 잘 알고

  있던 한 스님은 중국 경찰에 체포되어 18년 동안 감옥에 갇힙니다. 그 동

  안 온갖 고문을 당하며 티베트를 비판하라고 강요받지만 그는 요지부동

  입니다. 그 후 가까스로 석방되어 인도로 탈출하여 달라이 라마를 만납니

  다. 달라이 라마가 그 스님에게 묻습니다.

   “스님 18년 동안 그토록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 두려웠던 적은 없습니

  까?“  그러자 그 스님은 이렇게 답합니다.

   “나 자신이 중국인들을 미워할까 봐. 중국인들에 대한 자비심을 잃게 될

  까봐, 그것이 가장 두려웠습니다.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했습니다.“    

   저는 이글을 읽으면서 몹시 부끄러웠습니다. 나 자신이 그런 처지에 있었

  다면 과연 이렇게 생각할 수 있었을까? 그러지 못했을 것입니다. 거듭 말

  씀 드립니다. 용서는 가장 큰 수행입니다. 타인에 대한 용사를 통해 나 자

  신이 용서받게 됩니다.


■ 행복은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

   

                             - 49 -

   - 2004. 8. 30.   여름안거 해제 -


0 ‘꾸뻬 씨의 행복 여행’

- 프랑스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학자인 프랑수아 를로르의 자전적 실화 소설

- 실제로는 불행하지 않은데도 불행하다고 여기는 환자들을 상대하던 정신

  과 의사는 어느 날 자신도 역시 행복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림

- 마음의 병을 안고 찾아오는 사람들은 어떤 치료로도 진정한 행복에 이르

  게 할 수 없다는 한계를 느낀 의사는 마침내 병원 간판을 내리고 행복을

  찾아 미국, 아프리카, 중국 등지로 세계여행을 떠남

- 한 번은 중국에서 이름난 노스님을 만나서 가르침을 청하자 노스님은 이

  렇게 말합니다.

   “사람들이 행복하지 못한 것은 그 행복을 목표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깊이 음미 하십시오. 노스님은 덧붙여 이런 격려의 말을 해 줍니

  다.

   “당신이 행복에 대한 배움을 얻기 위해 여행에 나선 것은 무척 잘한 일

  입니다. 여행을 다 마치면 다시 나를 만나러 이곳으로 오십시오.“

   의사는 새로운 교훈을 얻을 때마다 잊어버리지 않도록 수첩에 메모를 합

  니다.


- 이렇게 다니며 여러 사람을 만나서 새로운 교훈을 얻을 때마다 행복의 비

  결이 하나씩 기록되어 갑니다.

  첫째 :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는 것

  둘째 : 행복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

  셋째 : 집과 채소밭을 갖는 것

  넷째 : 내가 다른 사람에게 쓸모 있는 존재가 되는 것

  다섯째 : 행복은 사물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

  여섯째 : 행복은 다른 사람의 행복에 관심을 갖는 것

  일곱째 : 행복은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


0 의사는 여행을 마무리 하면서 노스님을 찾아갑니다. 노스님은

   “ 당신은 마음공부를 훌륭히 해냈습니다. 모든 내용은 무척 훌륭합니다.”

   노스님은 그와 작별하며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깁니다.

  

                                - 50 -

   “ 진정한 행복은 먼 훗날에 이룰 목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것입니다.“

   행복은 은퇴하고 자식들 키워 다 결혼시킨 후, 나이 들어 시골에 집이라

  도 한 채 마련한 다음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는 친절

   - 2004. 6. 2.   여름안거 결제 -


0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는 바로 ‘친절’입니다. 친절은 자비의 구체

  적인 모습입니다.

   ‘사랑하다.’는 매우 아름다운 말입니다. ‘사랑하다.’ 다음으로 세상에서 가

  장 아름다운 동사는 이웃과 남을 ‘돕다’입니다.


0 친절은 두 존재의 연결이며, 가까워지려는 소망이고, 자신의 가장 깊은 자

  아를 타인과 나누려는 것이다. 우리가 삶에서 추구하는 것이 행복이라면

  친절은 행복한 삶을 위한 중요한 요소이다.


0 달라이 라마는 불교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친절한 마음’이 곧 불교라고 말

  합니다. 작은 친절과 따뜻한 몇 마디 말이 지구를 행복하게 합니다. 지구

  를 행복하게 한다는 것은 지구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존재들이 행복감을

  누리게 됨을 의미합니다.


■ 자신을 등불 삼고 진리를 등불 삼으라.

   - 2004. 5. 26.   부처님 오신 날 -


0 로마 교황청 종교간대화평의회 의장 마이클 피츠제럴드 대주교의 ‘부처

  님 오신 날‘ 경축 메시지입니다.(1995년부터 시작된 아름다운 전통임)

   “부처님 오신 날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불교를 따르는 친구와 이웃을

  방문해 서로 인사를 나눌 수 있는 기회입니다. 저는 우리의 이런 우정 어

  린 관계가 세대와 세대를 이어 계속 성장해 나가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

  서로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걱정거리를 나누면서 말입니다.“   

     


                               - 51 -

0 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이라고 흔히 말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일찍이

  오지도 않았고 가지도 않았습니다. 우리가 찾아서 만나야 할 존재입니다.

  그럼 부처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내가 부처님을 만난 적이 있는가. 스

  스로 물어 보십시오. 부처님을 어느 특정인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2,500년 전 인도 석가족 출신의 성자라고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부처라는

  말은 단 한 사람밖에 없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입니다. 누구든 부

  처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0 박카리라는 제자가 중병이 들어 앓고 있었습니다. 그는 죽기 전 부처님을

  꼭 한 번 뵙는 것이 원이었습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부처님이 앓고 있는 박카리를 찾아갑니다. 이때 박카

  리가 부처님에게 소원을 말합니다.

   “죽기 전 부처님을 꼭 한 번 뵙고 인사를 드리는 것이 제 소원 이었습니

  다.“ 이 말을 듣자 부처님은 정색을 하고 말합니다.

   “언젠가는 썩어질 이 몸뚱이를 보고 예배를 해서 어쩌자는 것인가? 법을

  보는 자는 나를 보아야 하고, 나를 보는 자는 법을 보아야 한다. 진정한

  나를 보려거든 법을 보라.“

   여기서 말하는 법이란 진리, 혹은 도리입니다. 부처님을 본다는 것은 부

  처님의 육신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정신과 가르침, 세상의 도리를

  보는 것입니다.


0 불타 석가모니는 육신의 나이 여든이 되어 생을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제

  자들에게 이렇게 설법합니다.

   “ 자기 자신에게 의지하고, 진리에 의지하라. 자기 자신을 등불 삼고, 진

  리를 등불 삼으라.(自燈明 法燈明)“

   여기서 자신이라는 것은 성내고, 화내고, 삐뚤어진 자기가 아니라, 본래적

  인 청정한 자기입니다. 이것이 불교가 타 종교와 다른 점입니다.  

      

0 여래(如來)라는 이름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진리에 도달한

  자라는 뜻이고 또 하나는 진리에서 온 자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리

  를 말하러 온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 52 -

   부처님 탄생게에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天上天下

  唯我獨尊).“  태어나자마자 갓난아기가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며 한

  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 하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후

  세에 부처님을 신격화한 데서 온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깊은 불교적

  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를 현대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하늘과 땅 사이에 살아 있는 것은 다 존귀하다.”

   이 세상에 귀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뜻으로 생명의 존엄성을 선

  언한 말입니다.


■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면 신도 우리를 용서한다.

   - 2004. 4. 18.   봄 정기 법회 -


0 한 제자가 스승에게 묻습니다.

   “ 전 생애를 두고 제가 행할 수 있는 가르침을 한 마디 내려 주십시오.”

   스승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용서이다.”

   용서란 남의 허물을 감싸 주는 일입니다. 또 너그러움이고 관용입니다.

  용서는 인간의 여러 미덕중에서도 가장 으뜸가는 미덕입니다.


0 ‘법구경’에 이런 법문이 있습니다.


   남의 허물을 보지 말라.

   남이 했든 말았든 상관하지 말라.

   다만 너 자신이 저지른 허물과 게으름만 보라.

   

   한 제자가 스승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해야 참된 수행자가 될 수 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스승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네가 진정으로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싶거든 언제 어디서나 ‘나는 누구

  인가?‘ 하고 물으라. 그리고 누구의 허물을 들추지 말라.“



                            - 53 -

0 옛날 사막지방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수도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의 일화

  를 모아서 엮어 놓은 글이 ‘사막 교부들의 금언집’입니다. 그 책을 보면 수

  도자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수도했는가를 엿볼 수 있습니다. 한 수행자

  가 선배인 원로에게 묻습니다.

   “내 이웃의 잘못을 보았을 때 그것을 지적하지 않고 그대로 덮어 두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요?“

   누구나 지닐 수 있는 의문입니다. 이때 원로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웃의 잘못을 덮어 주면 그럴 때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의 잘

  못을 덮어 주신다네. 그리고 우리 이웃의 잘못을 폭로할 때마다 하느님께

  서 우리의 잘못을 폭로하시지.“

   용서가 있는 곳에 신이 계십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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