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일회 (一期一會) 1

2009. 7. 19. 09:54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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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기일회 (一期一會)

     - 지금 이 순간은 생애 단 한 번의 시간이며

                   지금 이 만남은 생애 단 한 번의 인연이다 -


■ 법정 스님 법문을 책으로 펴내며


0 장소에 상관없이 법문의 주제는 이것이다.

   “삶에서 가장 신비한 일은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생애 단 한 번뿐인 인연이기 때문이다.” 

   삶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순간순간 살고 있는 이 삶은 무엇인가? 무엇을    위해 우리가 살아야 하는가? 나는 진정 인간답게 살고 있는가? 이런 근원    적인 물음을 지녀야 한다고 스님은 말한다.

   우리는 때로 어부의 그물에 갇힌 물고기처럼 어쩔 줄 몰라 한다. 삶의 애    증과 희로애락이 우리를 가두고. 욕망이 빈틈없는 그물 속으로 우리 영혼    을 몰아간다. 불타고 있는 집 안에 앉아 있으면서도 시간이 촉박함을 깨닫    지 못한다.

   


  법문마다 스님은 일깨운다.

   “언제 어디서 자기 생의 마지막 날을 맞이할지 알 수 없다는 자각을 잃    지 않아야 한다. 언제 어디서 살든 한 순간을 놓치지 말라.


  “죽은 화두를 가지고 헛되이 시간을 보내지 말라. 순간순간 깨어 있어 바    로 그 자리에서 살아 있는 화두를 가지고 정진하라. 나는 무엇이며 어디에    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가.”      

   

0 1956년 당대의 선승 효봉 스님의 제자로 출가한 이래. 법정 스님의 삶은    지금까지 철저한 ‘수행자의 자세’와 ‘무소유’의 실천으로 일관되어 있다.     시대가 어두웠을 때 승려로서는 유일하게 함석헌, 정준하, 김동길 등과 함    께 민주화 운동에 참여 했으며, 한글대장경 역경위원과 불교신문사 주필,    송광사 수련원장을 역임했으나. 1970년대 후반 그 모든 것을 떨치고 송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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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 뒷산에 손수 불일암을 지어 홀로 살았다. 그러나 명성을 듣고 찾아오는    이들이 많아지자 다시 출가하는 마음으로 1992년 강원도로 떠나, 심지어    제자들에게조차 거처를 알리지 않고 오늘에 이른다.


0 우리 시대 삶의 교과서로 일컬어지는 ‘무소유’를 비롯해 ‘서 있는 사람들’    ‘버리고 떠나기’ ‘산에는 꽃이 피네’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 하라’ ‘ 아름    다운 마무리’ 등의 여러 저서들에서 얻어진 인세 수입도 다 어려운 이웃에    게로 돌아갔다. 일정 금액이 모일 때마다 스님은 “이 돈은 수행자에게는     지나친 재산이다.” 라며 필요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래서 정작 자    신이 중병에 걸렸을 때는 치료비 일부를 절에서 빌려 써야만 할 정도였다.    “수행자의 삶은 칼날 위에 서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 스님의 변함없는     정신이다. 병이 재발하자 많은 돈이 드는 치료를 거부하고 그 돈으로 가난    한 사람들을 도우라고 하셨다. 예나 지금이나 화장지를 절반으로 잘라서     쓰고, 종이 한 장도 허투루 버리시지 않는다. 스님의 붓글씨를 선물로 받    은 이들은 그것이 물건을 쌌던 포장지에 쓰인 것을 보고 놀란다. 어쩌면     그러한 삶이 더 가치 있는 법문인지도 모른다.


   살 만큼 살다가 세상과 작별할 때 생에서 남는 것은 무엇일까? 결국 홀    로 있는 자신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고 스님은 말한다. 삶을 소유물    로 여기기 때문에 우리는 소멸을 두려워한다. 삶은 소유가 아니라 순간순    간의 있음이다.

                           - 2009년 봄 / 덕인, 덕현, 덕진, 류시화 -


■ 자신과 진리에 의지해 꽃을 피우라

    - 2009. 4. 19.    봄 정기 법회-  


0 제가 말하지 않더라도 눈부신 봄날입니다. 이런 자리에서 다시 만나게 되    어 감사하고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이런 기회가 우리 생애에서 늘 주어    지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한 때이기 때문에 이런 자리에 설 때마다 고    맙게 여겨지고, 언젠가는 내가 이 자리를 비우게 되리라는 것을 예상하게    됩니다. 그래서 더욱 더 오늘의 만남이 고맙고 기쁘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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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꽃이 피어나기 때문에 봄을 이루는 것    입니다. 흔히 우리들은 봄이 오면 꽃이 핀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꽃이 피    어나기 때문에 봄이 오게 됩니다. 꽃이 없는 봄을 우리는 상상할 수 없습    니다. 만일 이 대지에 꽃이 피지 않는다면 봄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지    구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침묵의 봄을 두려워합니다.

   꽃은 우연히 피지 않습니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서 꽃이 피고 지는 것 같    지만, 한 송이 꽃이 피기까지의 그 배후에는 인고의 세월이 받쳐 주고 있    습니다. 참고 견딘 세월이 받쳐 줍니다. 모진 추위와 더위, 혹심한 가뭄과    장마, 이런 악조건에서 꺾이지 않고 꿋꿋하게 버텨 온 나무와 풀들만이 시    절 인연을 만나서 참고 견뎌 온 그 세월을 꽃으로 혹은 잎으로 펼쳐 내는    것입니다.


0 이와 같은 꽃과 잎들을 바라보면서 우리들 자신은 이 봄날에 어떤 꽃을     피우고 있는가 한번 되돌아볼 수 있어야합니다. 꽃이나 잎을 구경만 할 게    아니라 나 자신은 어떤 꽃과 잎을 피우고 있는지 이런 기회에 살필 수 있    어야 합니다. 꽃으로 피어날 씨앗을 일찍이 뿌린 적이 있었던가?

   준비된 나무와 풀만이 때를 만나 꽃과 잎을 열어 보입니다. 준비가 없으    면 계절을 만나도 변신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준비된 사람만이 계절을 만    나서, 시절인연을 만나서 변신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0 주관적인 견해인지는 모르겠지만, 매화는 반개(半開)했을 때가, 벚꽃은 만    개(滿開) 했을 때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또 복사꽃은 멀리서 바라볼 때가    환상적이고, 배꽃은 가까이서 보아야 꽃의 자태를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매화는 반만 피었을 때 남은 여백의 운치가 있고, 벚꽃은 남김없이 활짝     피어나야 여한이 없습니다. 반만 핀 벚꽃은 활짝 핀 벚꽃에 비해 덜 아름    답습니다. 복사꽃을 가까이서 보면 비본질적인 요소 때문에 본질이 가려집    니다. 봄날의 분홍빛이 지닌 환상적인 분위기가 반감되고 맙니다.  이렇듯    복사꽃은 멀리서 보아야 분홍빛이 지닌 봄날의 환상적인 분위기를 누릴     수 있고 배꽃은 가까이서 보아야 꽃이 지닌 맑음과 뚜렷한 윤곽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0 꽃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꽃이나 사물만이 아니라 인간사에도 적용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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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습니다. 멀리 두고 그리워하는 사이가 좋을 때가 있고, 가끔씩은 마주     앉아 회포를 풀어야 정다워지기도 합니다. 아무리 좋은 친구 사이라 할지    라도 함께 엉켜 있으면 이내 시들기 마련입니다. 때로는 그립고 아쉬움이    받쳐 주어야 그 우정이 시들지 않습니다.


0 ‘천수경’에 ‘도량이 맑고 깨끗해서 더러움이 없으면 도량신(道場神)이 상주    한다.’는 가르침이 나옵니다.

   어느 절이나 그 도량을 보살피고 지키는 도량신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김    없는 사실입니다. 미신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도량신이 그 도량에 사    는 사람이나 그곳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낱낱이 보살피고 지켜줍니다.

   신앙심이 지극한 사람들은 일주문에 들어서자마자 그 도량이 지닌 분위    기를 감지할 수가 있습니다. 식(識)이 많은 사람들. 정신이 맑고 투명한 사    람들은 어떤 절이든지 도량에 들어서자마자 그 절의 분위기나 신성성을     감지할 수가 있습니다. 도량신은 그 도량의 귀한 존재는 사람이든 나무든    그 도량에 머물도록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그 도량에서 필요로 하지 않는    존재는 거부합니다. 


0 이런 현상은 굳이 예를 들출 것도 없이 반세기 남짓 크고 작은 도량의 은    혜를 입고 살아 온 저 자신의 체험적인 진실입니다. 개인의 의지만 가지고    는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습니다. 도량신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모든 것    을 주관합니다. 그 도량신의 의지가 개인의 의지에 작용해서 모든 일이 이    루어 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0 절이 생기기 전에 먼저 수행이 있었습니다. 절이 생기고 나서 수행이 시작    된 것이 아닙니다. 절이 생기기 전에 수행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절이나     교회를 습관적으로 다니지 마십시오. 절에 다닌 지 10년, 20년 되었다는    신도들을 보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습관적으로 다니는 경우가 매우 많    습니다. 이분들은 절의 재정에는 보탬이 될지 모르지만 각자의 신앙생활의    알맹이에는 소홀합니다. 절이나 교회를 습관적으로 다니면 안 됩니다. 습    관적으로 다니니까 극단주의자들이 “종교는 마약이다.”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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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깨어 있어야 합니다. 왜 절에 가는가? 왜 교회에 가는가? 그때그때 스스로    물어서 어떤 의지를 가지고 가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삶이 개선됩니다.     삶을 개선하지 않고 종교적인 행사에만 참여한다고 해서 신자가 될 수 있    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명심하십시오. 무엇 때문에 내가 절에 나가는가.    그때그때 냉엄하게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상적인 타성에    젖어서 신앙적인 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보다 훨씬 어리석은 짓을 할 수    가 있습니다.


0 도량은 눈에 보이는 건물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도량에 사는 사람들과    도량을 의지해서 드나드는 여러분의 삶이 맑고 향기롭게 개선되어야만 비    로소 도량으로 거듭날 수가 있습니다. 스님들은 한때 머물다가 떠나가는     나그네들입니다. 스님들한테는 원래 자기 집이 없습니다. 물론 자기 절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절은 개인의 소유물이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러나 재가(在家) 불자들은 자자손손 대를 이어가면서 그 도량을 가꾸고 보    살핍니다. 표현을 달리하자면, 신앙심이 지극한 여러 불자들이 곧 도량의    수호신입니다.


0 흔히 “나만 믿고 살라.” 면서 신도들에게 무책임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더    러 있습니다. 중은 믿을 것이 못됩니다. 자기 집도 떠나온 이들을 어떻게    믿습니까? 언제 변할지 모르는데 믿을게 따로 있지. 그런데 속지 마십시     오. 그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디에    의지해 살아야 합니까?” 라는 질문을 받고 부처님이 “나만 믿고 살라.” 같    은 소리는 절대 하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기 자신을 의지하고 진리에 의지하라.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진리    를 등불로 삼으라.”

   그 밖의 것은 다 허상입니다. 여기에 불교의 참 면목이 있습니다.

   자귀의 법귀의 (自歸依 法歸依) 즉 의지하고 기댈 것은 자기 자신과 진리    밖에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 법문 자리에 돈 얘기 들이지 말라

    - 2009. 2. 9.   겨울안거 해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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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새해 복 많이 받으셨습니까? 수많은 말 중에서도 하필이면 새해 인사로     복을 받으라고 하는 까닭은 우리들 삶에서 복이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험난한 세상에 복이 우리를 받쳐 주지 않는다면 제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복이 우리를 받쳐준     덕분에 오늘 여기 이렇게 모일 수 있었습니다.


0 새해 달력을 바꾸어 걸어 놓은 지 어느새 한 달 하고도 아흐레가 되었습    니다. 금년 365일 중에서 이미 9분의 1이 지나갔습니다. 세월이 덧없다는    소리를 실감합니다. 지나가는 세월을 두고 옛사람들은 전광석화 같다고 했    습니다. 번개나 부싯돌의 불이 번쩍이는 찰나처럼 몹시도 짧음을 비유한     말입니다. 이런 표현이 나온 것도 실제로 시간의 덧없음을 깊이 체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0 시간의 덧없음이 굳이 노년에만 해당되지는 않습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누구에게나 똑같이 하루 24시간이 주어지고, 그 24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갑니다. 순간순간의 삶이 얼마나 엄숙한 것인지, 정신이 번쩍 들지 않    을 수 없습니다. 이같이 귀중한 시간을 매 순간 어떻게 맞이하며 보내고     있는지 깊이깊이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 시간 속에서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합니다.

   또한 살아가면서 이와 반대로 우리 자신이 시간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    도 합니다. 친구를 만나서 서로에게 유익하고 정다운 자리를 이루었다면     그것은 시간을 살리는 일이 되고 쓸데없는 소리나 하고 남의 흉이나 보면    서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자리를 가졌다면 그것은 시간을 죽이는 일    입니다. 


0 오늘이 맺은 것을 푸는 해제일이라 한 가지 곁들이겠습니다. 평소에 제가    마음에 두고 있던 생각인데 해젯날이고 해서 풀어 버리려고 합니다. 

   이 절을 처음 만들고 창건법회 할 때 저는 가난한 절이 되었으면 좋겠다    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절이나 교회가 너무 흥청망청 하기 때문에 조촐    한 절이 되었으면 싶어 가난한 절을 표방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누    가 봐도 가난한 절은 결코 아닙니다. 제가 보건데 넘치기 직전에 이르렀습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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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이 자리에서 법문을 하고 나면 그 끝에 의례 불사를 내세워 돈 이    야기를 꺼내는데 그때마다 몹시 곤혹스럽습니다. 물론 절을 운영하는 입장    에서는 부득이 사람들이 많이 모였을 때 불사의 내용을 알리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방법을 달리해야 합니다. 제가 방법을 제시 하    겠습니다. 길상사의 경우 달마다 나오는 소식지가 있습니다. 거기에 얼마    든지 불사의 내용을 알릴 수 있습니다. 게시판에 실으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신성한 법회를 돈 이야기로 먹칠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모처럼 절에 와서 그동안 쌓인 짐을 부리고 가려는데, 도리어 짐을 지고    가는 결과가 된다고 하는 불자도 있습니다.

   법회는 이름 그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법다운 모임이 되어야 합니다. 그날    들은 법문 내용을 차분히 음미 하면서 마음에 담아 두어야 합니다. 그런데    법문 끝에 바로 돈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법회와 법문에 대한 일종의 모    독입니다. 


0 제 나이도 있고 건강도 전만 못해서 이런 자리에 앞으로 자주 나오지 못    할 것 같은 마음에, 그동안 속에 고였던 말을 오늘 쏟아 놓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서운하게 듣지 말고 또 다른 법문으로 받아들였으면 합니다.


■ 추울 때는 추위가 되고 더울 때는 더위가 되라

    - 2008. 11. 12.     겨울안거 결제 -


0 추울 때는 추워야 하고 더울 때는 더워야 합니다. 겨울에 춥지 않고 덥다    면 이상한 일입니다. 또 한 여름에 덥지 않고 춥다면 그 역시 이변입니다.    겨울은 겨울답게 추워야 하고, 여름은 여름답게 더워야 합니다. 인간만이    사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계절 변화 속에서 식물과 동물이 자    라고, 곡식과 과일이 열매 맺습니다. 겨울에는 어느 정도 추위가 있어야     생태계가 온전하게 보존 됩니다. 겨울이 춥지 않고 더우면 생활비는 덜 들    지 모르지만 이상난동으로 인해 생태계에는 큰 이변이 찾아옵니다. 


0 ‘벽암록’에 다음과 같은 문답이 있습니다. 한 수행자가 동산(洞山) 선사에    게 묻습니다.     

   “몹시 춥거나 더울 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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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진리의 세계에 대해 묻고 있습니다. 그에 대해 선사가 말합니다.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으로 가면 되지 않는가?”

   그러자 수행자가 다시 묻습니다.

   “어느 곳이 추위와 더위가 없는 곳입니까?”

   선사의 답입니다.

   “ 추울 때는 그대 자신이 추위가 되고, 더울 때는 그대 자신이 더위가 되    라.”

   이것이 추위도 더위도 없는 곳입니다. 더위를 피하려면 나 자신이 직접     더위가 되라는 것입니다. 추위를 피하려면 옷만 껴입고 불만 땔 것이 아니    라 나 자신이 추위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추위도 더위도 미치지 않는    다는 말입니다.


0 더위를 피하려면 자신이 곧 더위가 되라는 가르침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    아가는 데 하나의 길잡이가 되어 줍니다. 나고 죽는 일, 괴롭고 즐거운 일,    사랑하고 미워하는 일, 또는 가난과 부 등도 모두 상대적인 비교에서 오는    현상입니다. 그것들에는 절대적인 기준이 없습니다. 상대적인 비교를 통한    분별일 뿐입니다. 


   옛 스승의 가르침인 ‘보왕삼매론’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으면 오만한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일어난다.

   그래서 옛 스승들이 이르시기를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 하신 것이다.


   이는 순경계(順境界 즐겁고 행복한 일) 가 아닌 역경계(逆境界 괴롭고 슬    픈 일) 속에 삶의 깊은 의미가 실려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부와 물질이 넘    치면 인간이 오만해지고 사치스러워집니다.


0 오늘은 동안거 수행을 시작하는 첫날입니다. 수행의 첫 번째 과제는 자기    가하는 일을 늘 살피는 것입니다. ‘이 무엇인가?’의 참구가 바로 그 의미     입니다. 참선과 염불. 간경(看經 독경, 경전을 읽는 것) 을 통해서 자기 자    신을 주시하라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살피면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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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 짓눌리거나 흔들리지 않습니다. 힘과 지혜가 그 안에서 싹 틉니다. 자    기 자신을 주시하면서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 일기일회 (一期一會)

   - 2008. 10. 19.   가을 정기 법회 - 


0 법회에 앞서 가까운 이들과 차를 나누는 자리에서 스님은 야운(野雲) 선사    의 ‘자경문’에 나오는 구절 “삭비지조 (數飛之鳥)는 홀유이망지앙 (忽    有罹網之殃) 이다” 를 인용했다. ‘자주 나는 새는 그물에 걸리는 재앙이    있다.’는 뜻으로 삶에서 자주 침묵하고, 홀로 있으면서 자신을 들여다 보    는 시간을 가지라는 가르침이다.


0 오늘처럼 화창한 날엔 마음이 활짝 열려서 무척 즐겁습니다. 연일 청명한    가을 날씨 덕에 저도 여러 가지로 흥겨운 일상을 지냈습니다. 빨래를 널면    서 곧잘 서정주의 ‘푸르른 날’ 이라는 시를 외우곤 했습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처 단풍 드는데,


   눈이 내리면 어이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이렇게 두런두런 시를 외고 있으면 마음이 더 즐거워지고 사는 일이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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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 고맙게 여겨집니다. 가을날 외는 시는 마음을 더 없이 그윽하게 합니     다. 시는 언어의 결정체입니다. 그 안에 우리말의 넋이 살아 있습니다.  나    지막이 시를 외고 있으면 우리말의 아름다운 속 얼굴이 투명하게 드러 납    니다. 가끔은 바쁜 일상 속에서 시를 읽으십시오. 지난날 학창 시절에 더    러 시를 외우지 않았습니까? 세상 살다 보면 문학에서 멀어져 시가 무엇    이고 소설이 무엇이며 산문이 무엇인지 망각하게 됩니다.


0 때로는 시를 읽으며 자기 삶을 새롭게 가꿀 필요가 있습니다. 시를 읽으면    피가 맑아집니다. 무뎌진 감성의 녹이 벗겨집니다. 험한 세상을 사느라 우    리들의 감성이 얼마나 무뎌졌습니까? 달이 뜨는지 해가 돋는지 별이 있는    지. 도시의 환경자체가 우리들 감성을 무감각하게 만듭니다.


0 외부적인 조건만 가지고 행복과 불행을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많이 가졌    으면서도 살 줄 모르면 불행하고, 적게 가졌으면서도 살 줄 알면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행복과 불행은 외부적인 상황이나 조건에만 있지 않    고 내적인 수용, 즉 받아들이는 삶의 자세에 달려 있습니다.  

  

0 옛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그 자취를 살펴보면 후손인 우리들이 배울     점이 참 많습니다. 250여 년 전 서울을 배경으로 활동한 장혼(張混)이라는    선비가 있었습니다. 선비라고 하면 그 당시의 지식인입니다. 장혼 선비는    자신의 ‘평생의 소망’이라는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 맑은 복 여덟 가지

첫째 : 태평시대에 태어난 것

둘째 : 서울에 태어난 것

셋째 : 자신이 선비라는 신분을 가진 것

넷째 : 문자를 대충 이해하는 것

     - 그는 많은 저술을 남겼고 예서, 초서에 뛰어났음

다섯째 : 산수가 아름다운 곳 하나를 차지한 것

여섯째 : 꽃과 나무 천여 그루를 가진 것

일곱째 : 마음에 맞는 벗을 얻은 것

여덟째 : 좋은 책을 소장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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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도 각자 자기 자신이 어떤 맑은 복을 누리고    있는지 한번 돌이켜 보십시오. 삶 속에서 내가 정말 조촐하게 지니고 싶은    맑은 복이 있다면 어떤 것인지 돌아보십시오.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살아왔고, 맑은가 흐린가 하는 분별조차 없이 살았기 때문에 갑자기 생각    이 나지는 않겠지만 이다음 한가한 시간에 자신에게 주어진 맑은 복을 어    떻게 받아쓰고 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0 나는 내(법정) 둘레에 무엇이 있는가. 한 번 돌아보니 이런 것들이 있었습    니다.

첫째 : 스승과 말벗이 될 수 있는 몇 권의 책이 있습니다.

둘째 : 입이 출출하거나 무료할 때 개울물을 길어다 마시는 차가 있습니다.

셋째 : 제가 굳어지려고 할 때 삶에 탄력을 주는 음악이 있습니다. (건전지         를 사용하는 소리통) 

넷째 : 제 일손을 기다리는 채소밭이 있습니다.


   책과 차와 음악과 채소밭이 제 삶을 녹슬지 않게 받쳐 주고 있다는 사실    이 새삼 고맙게 여겨졌습니다. 여러분도 한가한 시간에 자신의 삶을 녹슬    지 않게 받쳐 주고 있는 맑은 복이 몇 가지나 되는지 한번 씩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0 소동파는 ‘적벽부 赤壁賦’ 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저 강물 위의 맑은 바람과 산중의 밝은 달이여.

   귀로 들으니 소리가 되고 눈으로 보니 빛이 되는구나.

   가지고자 해도 말릴 사람 없고 쓰고자 해도 다할 날 없으니.

   이것은 천지자연의 무진장이로다.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또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이 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젊은 사람들은 그저 ‘또     달이 떴구나.’ 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요즘은 텔레비전을 통해 달을 봐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나이 든 사람들은 저절로 ‘내 남은 평생에 둥근 달을    몇 번이나 볼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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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한번 지나가 버린 것은 다시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때그때 감사하게 누    릴 수 있어야 합니다.l또 달은 기약할 수가 없습니다. 이다음 달에는 날이    흐리고 궂어서 보름달이 뜰지 말지 알 수가 없습니다. 달뿐 아니라 모든     기회가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일기일회입니다. 모든 순간은 생애 단 한     번의 시간이며, 모든 만남은 생애 단 한 번의 인연입니다.    

  

0 목숨처럼 귀하고 소중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단 하나뿐이고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일회적인 갓입니다. 그런 목숨을 우리는 너무도 소홀히 여기고 있    습니다. 이 순간에도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며 단 몇 분만이라도 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산소 호흡기를 떼지 못하는 환자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환    자의 가족들은 또 얼마나 가슴 졸이면서 그가 단 몇 분이라도 더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이런 존엄한 목숨을 너무 손쉽게 포기하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자기 혼자만을 위해서 살거나 죽는 것은 더 따질 것도 없이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결코 자랑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개인적인 이유가 무엇이든, 자    기 혼자만을 생각하고 스스로 목숨을 내 던진다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사람은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설령 떨어    져 지낸다 하더라도 그는 가족과 친구, 수많은 이웃들과 함께 삶의 흐름을    이루고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그러한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    다. 함께 어울려 흐름을 이루는 삶의 대열에서 자기 감정대로 이탈하는 것    은 결코 명예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0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해서 고통스런 일들이 해결될 수 있습니까? 죽음    은 결코 끝이 아닙니다. 또 다른 삶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깊이깊이 헤아려    야 합니다. 이것은 동서고금의 선각자들이 몇 생을 겪으면서 자기 체험에    서 우러나서 하는 소리입니다. 자살은 자기의 목숨을 자신의 손으로 끊는    자해 행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자신을 해친 자해의 업(業)을 짊    어지고 다음 생으로 건너갑니다. 윤회의 사슬 같은 것입니다. 윤회에는 고    통이 따릅니다. 그런데 그 고통에 스스로 자기 목숨을 끊은 자해의 업을     하나 더 추가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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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우리가 겪고 있는 막막한 고통은 언제까지나 지속되지 않습니다. 흐린 날    이 있으면 반드시 맑은 날이 있듯이 삶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늘 유동적    입니다.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고 늘 변합니다. 외부적인 상황도 변하고     자기 내면적인 생각도 변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늘 변합니다. 어제는 죽고    싶어 하지만 오늘은 살고 싶어 합니다.


0 우리는 지금 살아 있다는 사실에 참으로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삶    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이 일기일회, 한 번의 기회, 한 번    의 만남입니다. 이 고마움을 세상과 함께 나누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이렇    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 중노릇 하면서 빚만 많이 졌다.

   - 2008. 8. 15.    여름안거 해제 -


0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 (一日不作 一日不食)’ 는 생활 규    범으로 널리 알려진 백장(百丈) 선사에게 

   “어떤 것이 기특한 일입니까?” 한 수행자가 묻자 백장스님은 말합니다.

   "홀로 우뚝 대웅봉에 앉는다.“

   대웅산은 백장 스님이 머물던 산 이름입니다. 안거 중에 저마다 자기 삶    의 현장에서, 자기 존재 안에 홀로 우뚝 앉아 있었다면 지난 여름이 결코     헛된 여름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럼 어떤 것이 과연 기특한 일인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삶에서 무엇    이 가장 기특한, 두고두고 기억할 만한 신비한 일인가? 지금 이 순간 우리    가 이렇게 살아 있다는 사실이 기특한 일입니다. 모든 것은 삶에서 시작되    고 삶을 바탕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살아 있기 때문에 행복도 불행도    기쁨도 슬픔도 따릅니다. 우리가 살아 있지 않다면 모든 것이 무(無)입니    다. 더위든 추위든, 행복이든 불행이든, 걱정이든 근심이든 모든 것이 우리    자신과는 무관계한 일입니다. 


0 인간은 누구나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욕망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    다. 그 욕망이 때로는 사람을 더 나은 길로 밀어 올리는 추진력이 될 수     있습니다. 의욕이 없으면 나아감과 나아짐이 없습니다. 삶에 탄력을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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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해서라도 적당한 욕망이나 욕구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탐욕은 인간을 옴    짝 못하게 얽어매고 병들게 합니다. 


0 행복의 비결은 적은 것을 가지고도 만족할 줄 아는 데 있습니다. 자기가     담을 수 있는 그릇의 크기를 정확히 알고 그것에 맞게 채워야지, 욕망이     지나치면 넘칩니다. 넘치면 자기 것이 아닙니다. 넘친다는 것은 남의 몫을    내가 가로채고 있다는 뜻입니다. 자기 목으로 만족하지 않고 남의 몫까지    내가 가로챘기 때문에 넘치는 것입니다.


0 오늘이 승가에서는 여름안거 해제일인데, 일명 자자일(自恣日)이라고 합니    다. ‘자자’란 안거가 끝나는 날 대중들이 안거 중에 지은 자신의 허물을 서    로 고백하고 참회하면서 용서를 비는 일입니다. 부처님 당시부터 전해 내    려오는 행사입니다. 해젯날 부처님 스스로 자기 먼저 고백을 했습니다. 누    가 잘못을 저질러도 안거 중에는 전혀 탓하지 않습니다. 서로의 정진에 방    해되기 때문입니다. 안거를 마치는 날. 자신이 지은 허물을 대중 앞에 고    백하고. 지적할 사항이 있으면 지적해 달라고 말합니다. 승가의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오늘이 자자일이기 때문에 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지난 세    월을 돌이켜 보니 “중노릇이란 다른 게 아니라 마치 장애물 경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출가 후 50여 년 동안 장애물 경주를 아슬아슬하게    용케도 해 왔다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절에 들어와 살면서 이것저것 시주(施主)의 물건을 너무 많이 축내며 시    은(施恩)을 무겁게 졌습니다. 이것은 솔직한 저의 고백입니다. 50년을 밥    이며 집이며 옷이며 공짜로 얻어 쓰고 심지어 자동차까지 타고 다니면서    많은 빚을 졌습니다. 오늘 아침 부처님 앞에 차를 올리면서 나 자신을 되    돌아보니 참으로 많은 시은을 지며 살아왔습니다. 제가 고생한 것보다는     거저 얻은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몹시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매사에 좀 더 너그럽지 못하고 옹졸하게 처신한 점을    뒤늦게 후회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한 일에 비해서 받은 것이 너무 많다    는 사실을 생각할 때 ‘ 내가 중노릇하면서 빚을 많이 졌다.’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은 해제일이고 또 제가 중이 된 날입니다. 1956년 7월 보름 하안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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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제일에 미래사(彌來寺 : 경남 통영시 산양읍 미륵산에 있는 절)에서 사    미계를 받고 중이 되었습니다.


■ 홀로 우뚝 자기 자리에 앉으라.

    - 2008. 5. 24 여름안거 결제 -


0 결제(結制) : 어떤 결의로써 지낼 것인지 결정하는 것. 제도를 맺음


0 엄양이라는 학자가 조주(趙州) 스님에게 묻습니다.

   “저는 모든 것을 버리고 한 물건도 갖지 않았습니다. 이런 때 어떻게 하    면 좋겠습니까?”

   조주 선사는 답합니다.

   “방하착(放下着)”

   이것은 승가의 용어로 “내려놓으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엄양이 다시 묻습니다.

   “이미 한 물건도 갖고 있지 않은데 무엇을 내려놓으라는 말씀입니까?”

   조주 선사의 답입니다.

   “그렇다면 지고 가라. (着得去)”


0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부분은 이것이 말장난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생각. 이것을 불교 용어로 상(相)이라고 합니다.    내려놓았다고 해서 내려놓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    다. 진정으로 내려놓았다면 그 생각과 관념에서조차 벗어나야 합니다. 그    것은 분별이기 때문입니다. 기록에는 학자가 조주 선사의 말을 듣고 크게    깨우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그 생각조차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텅    빈 속에서 무엇인가 움이 틉니다. 그런데 대개의 경우는 그런 상에 집착합    니다. 이름에 집착하고, 명예에 집착하고, ‘왕년에 이렇게 살았는데’ 하는    이미 지나간 부질없는 과거사에 집착합니다. 그 어떤 것보다 지금 이 순간    이 중요합니다.


0 십자가의 성 요한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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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것을 알고자 하는 이는 어떤 지식에도 매이지 않아야 한다.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이는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아야 한다. 모든 것이     되고자 하는 이는 어떤 것도 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모든 것을 가지려    면 어떤 것도 필요로 함 없이 그것을 가져야 한다.”


0 육조 혜능(六祖慧能)을 눈뜨게 한 구절이 ‘금강경’에 있습니다.

   “응무소주 이생기심 (應無所住 而生其心)”

   어디에도 머물지 말고 그 마음을 내라. 어디에도 메이지 말고 그 마음을    일으키라는 말입니다. 움켜쥐었던 것을 놓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것을 늘 움켜쥐고 있으면 거기에 갇혀 사람이 시들어 버립니다. 그 이상의    큰 그릇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


0 우리가 살다보면 언젠가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할 때가 반드시 찾아옵    니다. 그때 가서 망설일 것 없이 내려놓는 일을 미리부터 연습을 해야 합    니다. 내려놓는 일도 하나의 수행이고 정진입니다. 단지 물건이나 생각을    내려놓는 데서 벗어나 그 자체가 하나의 수행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거    듭거듭 털고 일어서는 수행이 되어야 합니다. 


0 백장 선사는 “독좌 대웅봉 (獨座 大雄峰)”이라고 말합니다.

  선방에서 정진을 하든, 절의 후원에서 일을 거들 든, 사무실에서 사무를     보든,  달리는 차 안이나 지하철에 있든 어디서나 홀로 우뚝 자신의 존재    속에 있을 수 있다면 그 삶은 잘못되지 않습니다.  


■ 하루 낮 하루 밤에 만 번 죽고 만 번 산다.

   - 2008. 5. 12 부처님 오신 날 -


0 불기 2552년 부처님 오신 날. 이날 로마교황청 종교간 대화 평의회는 부    처님 오신 날을 맞아 전년도에 이어 또다시 축하 메시지를 발표하면서     “불교도들과 그리스도교도들이 모든 생명을 가진 존재를 존중하고 감시하    는 마음으로 지구를 돌보자.” 고 말했다. 스님의 잠언집 ‘살아 있는 것    은 다 행복하라’가 지난주 중국과 대만에서 번역 출판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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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잘 아시다시피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일 뿐만 아    니라 동시에 우리들 자신이 부처에 이르는 길입니다. 타 종교와 불교의 다    른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타 종교는 교조를 신앙의 대상으로 섬기고 따를    뿐이지 스스로 그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가르침이 없습니다.  불교는 부    처님의 가르침인 동시에 우리들 자신이 부처의 경지에 이르는 길입니다.


0 석가모니 부처님은 한평생 많은 위대한 가르침을 펼쳤습니다. 그 가운데     핵심은 ‘자비’입니다. 곧 사랑입니다. 부처님은 자비를 이야기 했고 그것을    실천했습니다. 자비의 실천이 있었기에 불교가 종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깨달음만을 주제로 삼았다면 불교는 종교로서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0 자비란 무엇입니까? 자비는 사람에 대한 사랑뿐 아니라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에 이르게 하는 사랑입니다. 불교 초기 경전인 ‘숫타니파타’에는 여    러 경전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 ‘자비경’에 다음의 내용이 있습니다.


   사물에 통달한 사람이 평화로운 경지에 이르러

   해야 할 일은 다음과 같다.   

   유능하고 정직하고 말씨는 상냥하고 부드러우며

   잘난 체하지 말아야 한다.

   만족할 줄 알고 많은 것을 구하지 않고

   잡일을 줄이고 생활을 간소하게 한다.

   또 모든 감각이 안정되고 지혜로워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으며

   남의 집에 가서도 욕심을 내지 않는다.


   마치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 외아들을 보호하듯이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하여 한량없는 자비심을 발하라.               

   또한 온 세상에 대해서 무한한 자비를 행하라.

   위로, 아래로, 옆으로

   그 어떤 장애도 원한도 적의도 없는 자비를 행하라.

   서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앉아 있을 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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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워서 잠들지 않는 한 이 자비심을 굳게 가지라.

   이 세상에서는 이런 상태를 신성한 경지라 한다.


0 한마디로 말해 부처는 무엇인가? 자비심입니다. 자비심이 곧 부처입니다.

  자비의 ‘慈’는 함께 기뻐한다는 뜻이고 ‘悲’는 함께 신음한다는 뜻입니다.    남이 잘 되는 것을 더불어 기뻐하고, 남의 고통을 그냥 바라보지 않고, 더    불어 신음합니다. 자비에는 함께 기뻐함과 함께 슬퍼함의 양면성이 있습니    다.

   자비의 실천은 혼자서는 불가능합니다. 만나는 대상을 통해서 자비가 실    현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중생이 없으면 부처가 될 수 없습니다. 중    생이 있기에 부처를 이루는 것입니다. 만나는 대상으로 인해 비로소 내 안    에 잠들어 있는 자비의 움이 틉니다. 때문에 우리가 만나는 이웃은 나를     일깨워 주는 선지식(善知識 : 바른 도리를 가르치는 사람) 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때그때 마주치는 타인을 통해서 나 자신이 활짝 열린다는 사    실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0 “일일일야 만사만생 (一日一夜  萬死萬生) 하루 낮 하루 밤에 만 번 죽고    만 번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하루에도 수없이 생사를 거듭합니    다. 수행을 하지 않아 깨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루하    루의 삶 자체가 수행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수행을 통해서, 자비의 행    을 통해서 인간이 성숙해 집니다. 수많은 세월을 지나며 순간순간 새로워    지고,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 나 자신을 향상시킬 수 있어야 새롭게 눈이    열리고, 또한 세상을 맞이할 수 있는 기량이 갖추어집니다.


0 똑같은 되풀이. 그것은 지겹습니다. 언제나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오늘    은 어제의 연장이 아닙니다. 새날입니다. 내일 일을 누가 압니까? 그날그    날을 새날로 맞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일상에 찌들지 않고 나     자신이 새롭게 움틀 수 있습니다.  


■ 한 생각이 집을 짓고 한 생각이 집을 허문다.

   - 2008. 5. 4.   설법전 점안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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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길상사는 역사가 매우 짧으면서도 불교사상 전례 없는 과정을 거쳐 절이    되었다. 원래 이곳은 1960년대부터 장안의 세력가와 정치인이 드나들던     ‘대원각’이라는 이름의 고급 요정이었는데, 그 주인이던 김영한 여사가     10여년에 걸친 간청 끝에 법정 스님에게 시주해 1997년 12월 14일 창건법    회를 열었다.        

   처음에는 그 건물을 그대로 이용하기로 하였으나 10년여의 세월이 지나    면서 건물이 낡고 불편하다는 지적에 따라 대대적인 보수를 거쳐 새 불상    을 모시고 이날 점안식을 갖게 되었다.


0 여기 모인 여러분의 도움으로 이렇게 훌륭한 설법전이 완성되었습니다. 우    리가 한 생각을 어떻게 내는가에 따라서 이런 집도 세울 수 있고, 또 있던    집도 허물 수 있습니다.



0 내 마음이고 내가 하는 생각이지만 삶을 통해 그 마음과 생각을 어떻게     갖는가가 중요합니다. 생각을 밝게 가지면 내 삶이 밝아지고, 한순간 무엇    인가에 휩쓸려 생각을 어둡게 가지면 내 삶이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어    두워집니다.

   마음은 먼 데서 찾아지지 않습니다. 바로 내 안에 늘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밖에서 찾고, 다른 대상에서 찾기 때문에 그 마음이 제대로    꽃을 피우지 못합니다. 


0 저는 점안식을 할 때마다 경건해야 하는데 웃음이 나옵니다. 팥을 던져 잡    귀를 몰아내고, 부처님 눈동자 에다 점을 찍는 시늉을 하고 솔가지로 물을    뿌립니다. 내가 풋중 시절에 처음 이 의식을 보고 경악하면서 ‘야, 이거 불    교도 무속이구나.’ 했는데 지내면서 보니까 나름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불상이나 십자가라는 하나의 형상, 외부에 나타나는 형상을 섬기는 것이    곧 우상입니다. 실상(實相)이 아닌 것은 모두 우상입니다. 하지만 그런 매    개물을 통해 실상을 볼 수 있다면 그 매개물은 단순한 우상이 아니게 됩    니다.


0 당시의 제자들이 부처님을 연상할 수 있는 간절한 매개물로서 보리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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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륜, 부처님 발바닥 또는 부처님이 앉아서 설법한 좌대 등을 신앙의 대상    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이 불상은 외형만 가지고 보면 하나의    우상이지만 실상에서 보면, 다시 말해 이러한 매개물을 통해 부처의 실체    를 우리 스스로가 인식하게 되면 결코 단순한 사물이 아닙니다.  

 

0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모신 곳을 적멸보궁이라 부릅니다. 한국에도 몇 군    데 있습니다. 오대산 상원사, 사자산 법흥산, 설악산 봉정암, 양산 통도사,    태백산 정암사 등은 부처님의 진신 사리를 모셨다고 해서 법당에 다른 불    상을 설치하지 않습니다. 좌대 같은 것만 놓아두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곳을 일러 적멸보궁이라 합니다. 지극히 고요해서 맑고 투명한 보배로운     궁전이라는 뜻입니다. 부처님 계신 자리를 매우 신성시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늘 바쁘기 때문에 수고롭게 적멸보궁에 다닐 수 없습니다.    오늘 여기 설법전 부처님 점안식에 동참하는 인연으로 이 자리에서 저마    다 마음속에 하나의 적멸보궁을 세우십시오. 지극히 고요하고 맑고 투명     해서 보배로운 궁전을.

   바깥에 있는 부처를 찾지 마십시오. 우리 자신이 곧 부처입니다. 마음 속    에 적멸보궁을 세워 늘 지니고 있다면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크게    빗나가지 않습니다. 마음에 중심이 없기 때문에 바깥 현상들에 늘 흔들리    는 것입니다.  


■ 생명 자체가 하나의 기적

   - 2008. 4. 20. 봄 정기 법회 -


0 스님은 투병기간 동안 체중이 45킬로그램까지 줄어 뼈와 가죽만 남은 부    처님 고행상 같았지만 이제 조금씩 회복해 가고 있었다. 스님의 대표 산문    선집 ‘맑고 향기롭게’가 이달 초 일본에서 출간 되었다. 번역자 고노 스    스무 선생이 한국을 방문했으나 스님의 병환으로 만나지 못했다.


0 생명 자체는 실제로 죽지 않는 것이지만, 개체로 보면 단 하나 뿐입니다.    우리가 가족과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유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영원한    이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와서 이러한 생명의 존엄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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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게 손상되고 있습니다. 걸핏하면 어린 생명들을 유괴해 폭행을 가하고     죽입니다. 이유 없이 무작위로 살해합니다. 생명을 다루는 농경사회에서는    감히 생각조차 해 볼 수 없던 끔찍한 일들입니다.  


0 제가 제 몸의 부픔을 수리(치료) 하면서 느낀 소감을 몇 가지 말씀 드리겠    습니다. 치료하면서 음식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50일이 넘도록    거의 단식 상태였습니다. 저를 간호한 사람들은 갈비뼈만 앙상히 남은 제    모습이 마치 6년 고행한 부처님 같다고 했습니다. 그때 저의 체중이 45킬    로그램을 조금 넘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앓으면서 생각했습니다. ‘그날그날을 즐겁게 살자.’ 내일은 기약할 수 없    습니다. 오늘 우리가 만나서 눈부신 봄날 이렇게 마주 앉아 오랜만에 이야    기를 주고받고 있지만 내일 일을 누가 압니까? 하루하루를 잘 살고 후회    없이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내 마음이 활짝 열려야 합니     다.


0 문제를 극복하기 어려울 때마다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영원히 사    는 존재가 아니다. 이 세상과 작별할 것이다.’ ‘내일 내가 이 세상을 하직    할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이때, 내가 나를 비워야 한다. 타인과의 매듭을    풀어야 한다.’      

   이런 생각을 철저히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저절로 마음의 메아리가    전달되어 마음도 풀립니다.                 

   마음을 찾는 일 보다 용심(用心 마음을 제대로 쓰는 것)이 더 중요합니     다. 온전하게 쓸 줄 알 때 내 마음이 열리고, 잘못 쓰면 겹겹으로 닫힙니    다. 순간순간 마음을 열고 산다면 둘레의 모든 것이 긍정적으로 나를 반깁    니다. 나를 받아들입니다. 


0 달마 스님의 법문 ‘관심론’에 나오는 말을 음미해 봅시다.

   “마음, 마음이여 알 수 없구나. 너그러울 때는 온 세상을 받아들이다가도    한번 옹졸해지면 바늘 하나 꽂을 자리 없구나.” 


■ 승복 입은 도둑들

   - 2007. 10 .21.   가을 정기 법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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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주지 자리를 놓고 다투는 이유는 한마디로 출가 정신의 부재에 있습니다.    출가란 단순히 집에서 뛰쳐나오는 것이 아니라 온갖 욕심과 집착에서 벗    어남을 뜻합니다. 매 순간 참선하고 기도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 지    니고 있다면 결코 세속적인 유혹이나 욕망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안팎으로    자신을 갈고 닦지 않고 수행 정진하지 않으면, 그 누구를 막론하고 비리에    물들기 쉽습니다. 

   더 말할 것도 없이 승가의 생명은 청정함에 있습니다. 그래서 지극한 마    음으로 청정 승가에 귀의하는 것입니다. 청정성을 잃었을 때는 더 이상 승    가가 아닙니다. 


0 만일 겉으로만 수행자 차림을 하고 속으로는 돈이나 명예를 생각한다면     그는 누가 보아도 결코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그에게서 무지와 욕망의 기    운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은 불자가 아니라 가사(袈裟) 입은 도    둑입니다. 서산 스님의 선가귀감(禪家龜鑑)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돈과 명예를 추구하는 수행승은 초야에 묻혀 사는 시골 선비만도 못하    다.”


0 인간의 삶에 아름다움이 없으면 너무 삭막하고 건조합니다. 오늘 우리들은    돈과 관계된 것에만 눈을 파느라고, 경제 생각만 하느라고 삶의 가장 내밀    한 영역인 아름다움을 등지고 삽니다. 아름다움이야말로 삶의 기쁨이고 행    복에 이르는 길목입니다. 우리들 삶이 아름다움을 만나지 못한다면, 우리    들 삶이 아름다움으로 채워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습    니다. 행복은 아름다움이 그 삶을 받쳐 주어야만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0 아름다움은 결코 소유할 수 없습니다. 남이 가졌다고 해서 충동적으로 가    지려고 하면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소유로부터 자유로울 때 비    로소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습니다.

   따뜻한 사랑의 눈으로 보면 보이는 것마다 모두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습    니다. 그것은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는 우리의 본성이기도 합니다. 베토벤    이나 모차르트 또는 바흐의 음악을 들으면서 좋아하는 것은 우리가 그것    들을 소유해서가 아니라 그 작곡가의 감성과 우리의 감성이 일치하기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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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입니다. 동일한 음악을 들으면서도 그저 그렇다고 느끼는 이가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황홀경에 빠집니다. 그것은 작곡가나 연주자와 듣는 사    람 자신이 일체감을 이루는가 못 이루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0 모든 예술품은 그것을 만드는 사람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예술가도 자기 작품에 100퍼센트 온전한 아름다움을 집어넣을 수 없습니    다. 그는 그 작품에 절반의 혼만을 불어 넣을 수 있습니다. 나머지 절반은    소장자에 의해, 감상하는 사람에 의해, 그 대상을 사랑하는 사람에 의해     채워집니다. 하나의 음악이 완성을 이루려면 작곡가나 연주자와 듣는 사람    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사물을 보고 인식하고 경험하려면, 그것이 도자기이든,    그림이든, 건축물이든 우리 존재가 그것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분    별을 떠나서. 욕심을 떠나서 하나가 될 때 아름다움의 극치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0 누구나 자기 나름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투명한 감수성이, 사랑    이 있어야 그 아름다움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마치 조각가가 아무 표정도    없는 돌덩이에서 아름다움을 캐내듯이.

   임제 선사 어록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무사시귀인 단막조작 (無事是貴人  但莫造作)”

   ‘있는 그대로가 귀하다. 일부러 꾸미려고 하지 말라.’ 는 뜻입니다. 존재    자체는 있는 그대로가 귀하다는 뜻입니다. 그 독특함은 누구도 모방할 수    가 없습니다. 저마다 그 나름의 모습을 지니고 있고,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 남과 비교해서 그걸 꾸미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꾸    미면 가짜입니다. 천연성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무엇에도 걸림 없는 자    연스러움이 귀하다는 말입니다.  


0 “아름다운 얼굴이 추천장이라면, 아름다운 마음씨는 신용장이다.”라는 말    이 있습니다.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얼굴에, 맹목적인 유    행에 속지 말라는 소리입니다. 추천장은 믿을 것이 못됩니다. 신용장인 마    음씨가 고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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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걸림이 없는 무애의 시를 한 편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대 그림자 뜰을 쓸어도 먼지 일지 않고

     달이 연못에 들어도 물에는 흔적이 없네.

     죽영소계진부동(竹影掃階塵不動)   월륜천소수무흔(月輪穿沼水無痕)

     

   ‘금강경오가해’에 나오는 야보 선사의 송(頌)입니다.

   바람이 불어 대나무가 일렁거려서 마치 뜰을 쓰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도 먼지 하나 일지 않습니다. 또 밤에 달이 연못 속에 들어가도 물에는 아    무 흔적이 없습니다.


0 이 가을에 무엇인가 새롭게 시작하시길 권합니다. 그날이 그날인 것처럼     지내지 마십시오. 이 가을은 다시 만날 수 없는 일기일회. 생애 단 한 번    뿐인 가을입니다. 누구도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것이 삶입니다. 이 가을    날. 그저 대상만 보고 즐길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도 샘솟는 아름다움이     있어야 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그 아름다움을 남과 나누는 데서 움이    틉니다. 이 가을에 다들 아름다움을 만나고 가꾸면서 행복해지시기 바랍니    다.


■ 불타는 집에서 빨리 나오라.

   - 2007. 5. 24.   부처님 오신날 -


0 절에 들어오면 맨 처음 배우는 원효 스님의 ‘발심수행장’이라는 글이 있습    니다. 그 첫머리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부제불제불 (夫諸佛諸佛)이   장엄적멸궁 (莊嚴寂滅宮)은    어다겁해     (於多劫海)에 사욕고행(捨欲苦行)이요.   중생중생(衆生衆生)이   윤회화택    문 (輪廻火宅門)은   어무량세(於無量世)   탐욕불사(貪慾不捨)니라.”


   알아듣기 쉬운 말로 하면 이렇습니다.

   “부처님이 세상에 나와 우리들을 이롭게 하는 것은 오랜 세월 동안 욕심    을 버리고 견디기 어려운 수행을 겪었기 때문이요. 중생들이 불타는 집에    서 나오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것은 끝없는 세월을 두고 탐욕을 버리지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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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기 때문이다. ” 


0 ‘법화경’에서도 우리가 사는 세상을 불타는 집에 비유합니다.

   “삼계에 편안함이 없음이 마치 불타는 집과 같다.” 생사윤회의 근본은 탐    욕에 있습니다. 탐욕이란 무엇입니까? 분수에 넘치는 욕망입니다.

   오늘날 지구환경의 위기도 따지고 보면 인간들의 끝없는 탐욕에 그 원인    이 있습니다. 한정된 자원을 무제한으로 퍼 쓰는 탓에 재앙이 찾아 왔습니    다. 지구의 재생 능력을 자정 능력이라고 하는데, 전문가들의 조사에 따르    면 이 자정능력이 1980년대 초에 이미 한계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해마다    인간들은 자연이 생산해 내는 것보다 20퍼센트나 더 많은 자원을 소비하    고 있습니다. 자연이 낳는 이자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원금까지 빼앗아    쓰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지금 지구가 신음을 하고 있습니다. 


0 현재 지구상의 농경지 중 절반이 가축 사료에 쓸 작물을 만드는 데 사용    되고 있습니다.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서양의 육식 위주의 식습    관 때문입니다. 서양인만이 아니라 우리들도 육식을 많이 하지 않습니까?    한 쪽에서는 식량이 없어서 하루에도 수만 명의 사람들이 굶어 죽어 가는    데 곡식의 절반을 짐승 사료로 쓰고 있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전문가들    의 연구에 의하면 1킬로그램의 쇠고기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십만 리터의    물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1킬로그램의 쇠고기가 우리식탁에 오르기 까지     십만 리터의 물이 소비된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식습관  때문에 귀한 수자    원이 고갈될 형편입니다.   


0 모든 생물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상호작용을 합니다. 최근에 들은    이야기인데, 현재 지구상의 벌의 숫자가 과거에 비해 40퍼센트나 감소되    었다고 합니다. 휴대전화의 전자파로 인해 벌 열 마리 중 네 마리는 죽고    겨우 여섯 마리가 남는다는 것입니다. 벌이 사라지면 식물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벌이 매개 역할을 해야 식물이 열매를 맺을 텐데. 벌이 없어 가    루받이를 제대로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0 누구의 말을 빌릴 것도 없이, 세상은 우리의 필요를 위해서는 풍요롭지만    탐욕을 위해서는 궁핍한 곳입니다. 우리가 필요한 만큼은 자연이 공급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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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 분수에 넘치는 탐욕 앞에서는 궁핍해 집니다. 탐욕을 억제하려면 소비    를 줄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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