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걷는다

2009. 10. 25. 10:24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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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도 걷는다

                          - 고은 산문집 -


■ 고은

0 1958년 이래 시인 생활 50년

0 고은 시선, 고은 시선집, 고은 전집, 서사시 ‘백두산’

  연작시 ‘만인보’ 등..

0 경기대 대학원 교수, 미국 버클리대 초빙교수, 하버드대 옌칭 연구소 연    구교수, 현재 서울대 초빙교수, 단국대 석좌교수

0 세계 22개 언어로 시집 번역 출판, 국내외 문학상 15개와 훈장 2개


■ 책 앞에서


0 아직도 마음이 놓아먹인 말이라 날뛰기를 마다하지 않은 날들이었다. 쓰는    것도 읽는 것도 네 발굽 소리였다. 그러다가 문득 뉘우치듯 쓰기와 읽기의    울이 생겼다.

     쓰기보다 읽기가 더 간절했다. 읽기에 목말랐다.

     읽고 나서도 자꾸 읽고 싶었다.

     그러다가 배의 이물인가 고물인가 홱 돌아쳐

     읽기보다 쓰기에 빠졌다.


     아 백지의 에로스!


     그렇더라. 백지의 유혹은 어떤 유혹도 능가했다.

     어제도 오늘도 세상의 암흑 물질인 백지 위에 쓰고 있는 나 자신을 내       가 놀라서 본다.  


0 나는 무엇이고 길다. 꿈조차도 점이 아니라 선이다. 별도 점이 아니라 몇    백 광년의 별빛이라는 길고 긴 선이다.

   이런 우주의 시간 속에서 새삼 내 먼지의 가난이야 어디에 여밀 옷깃이    갖춰지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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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도 걷는 것 말고 어쩌겠느냐.

   오늘도 걷는다.


■ 돌아온다는 것


0 한 놈의 불개미로도 좋으리라. 한 놈의 비루먹은 노새로도 좋으리라. 제가    살던 곳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지난 1년 남짓 하버드와 버클리 생활을 보내고 나도 그렇듯이 돌아왔다.    때마침 겨울 풍경은 안성맞춤으로 착 가라앉아 있었고 눈길 닿는 데마다    여기저기 휑뎅그렁 빈 들녘이었다.

   내 심사도 그런 풍경의 표면에 따라 능히 적적해지기 마련이었다. 한 동    안은 들어야 할 소리도 없고 들려줄 소리도 없을 것만 같았다. 모처럼 그    런 허심의 감회가 좋았다.

   그런데 다음 날부터 내가 돌아온 곳은 즉각 그따위 수작 한 오리도 어림    없다는 듯 ‘동란’ 그것이었다. 감히 말하건데 내 조국의 이 같은 현실이야    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조악하게 현실적이었다. 


0 켜켜히 쌓인 시대의 영구 미제들이 이길세라 질세라 당장 눈앞에 시끌시    끌하고 살벌하고 거칠기 그지없다. 거리에서도 서로 어깨를 부딪쳐야 앞으    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비오는 날 우산과 우산의 충돌들은 또 무엇인    가. 농사짓던 시절의 옛 두레는 고사하고 어제 오늘 가장 많이 들리던 공    동체라는 말은 실상 아무런 구실도 못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함께 사는 관계이기보다 너무나 선혈 낭자의    경쟁 관계로 노출돼 있다. 아니 경쟁이 아니라 각개 백병전 그것인지 모른    다. 이런 세상의 막가는 판국에 굳이 현실 정치 그것 하나만 떼어서 질타    한들 얼마나 옳겠는가.      

   한 마디 내뱉는다면 우선 정치인이라는 사람들을 몽땅 의사당 본회의장    에 몰아넣고 문에 못질을 해버리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석굴암을 본떴다    는 볼품없는 몸으로 된 그 의사당을 실컷 삿대질하고 멱살잡이하는 무기    수 수용소로 만들고 싶은 것이다.


0 우리는 미국이나 다른 지역보다 훨씬 더 급성모방적이고 더 감염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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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레니엄이라는 말도 우리만큼 혓바닥으로 말하는 곳도 없을 지경이다. 내    가 이 현상에서 희망 대신 절망을 본다는 게 지나친 것일까. 

   어디 그것만인가. 도시든 농촌이든 그 많은 쓰레기 더미야말로 우리 자신    의 얼굴이다. 어디 산야의 쓰레기만인가. 사람들의 마음도 쓰레기로 채워    져 가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우리 사회도 싱가포르처럼 담배꽁초 하나에    중벌을 내려 세계에서 가장 청결한 도시를 만들어 낼 수 없을까.


0 어쩌다 누가 국제무대에서 한때 날리는 영광으로 덩달아 들 뜰 일이 아니    라 국민 각자의 이름 없는 분신들 하나하나가 인간의 엄중한 성실 혹은     진실을 새로 구현하는 처절한 전환의 힘을 찾아내야겠다.  

   아, 단 하루만이라도 1주일만이라도 멋진 나라에서 살고 싶다.


■ 가을을 맞으면서


0 들에 나선다. 논곡식이 고개를 푹 숙였다. 저쪽 밭에서는 두 번갈이 수수    밭 수수 목아지들이 수런거리고 있다.

   하늘이 커졌다. 살갗에 닿은 선득선득한 서슬이 제법 정신이 나게 한다.    세들이 떼를 나눠 서넛씩 너덧씩 하찮게 날아가고 있다. 곧 여기를 떠날     나그네 채비인 듯했다.

   논두렁에 발을 디뎌 보았다. 벼 낱알들이 애써 영글었다. 이 낱알을 새라    면 그냥 쪼아 먹으면 된다. 하지만 인간은 이것을 홀태로 훑어 내어 쌀로    찧고 그 쌀로 눈부신 밥을 지어 먹는 것이다. 벼도 스스로 자라났다기보다    누구의 손에 의해서 길러낸 것이다.  


0 몇천 년 동안의 농경 사회란 자연에 가한 이 같은 노동의 연속으로 가능    했다. 특히 한 민족은 아무리 척박한 곳에도 물을 끌어 들이고 그 물을 가    두어 무논을 만들어 냈다. 저 내버려진 만주 땅에 가서도 벼논을 만들어     냈고 저 스탈린이 실어다 내팽개친 중앙아시아 황무지에서도 이윽고 워이    워이 새 쫓는 소리가 들렸던 것이다.

   이런 오랜 논농사의 역사 의지가 담긴 한국인의 유전적 체질은 아직 끊    긴 것은 아니나 농업을 삶의 기본으로 삼았던 현실은 어디서도 찾아볼 길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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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그래서인지 모를레라. 장차 고개 숙인 벼로 인간의 품위를 나타내던 비유    는 유효하지 않을지 모른다. 시대는 어떤 겸양이나 내적 충실에 값을 매기    는 대신 오직 나 만이라는 오만에 더 많이 기울어져 있다. 정치도 문화도    본질적으로 욕망의 산물이기 십상이다. 모든 가치는 시장의 가치일 때에만    그것을 추앙하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에게는 궁핍의 시대에 대한 기억이 있다. 하지만 그런 시대를 살아     오는 동안의 고민과 성찰들은 결코 궁핍하지 않은 인간 정신의 풍요를 열    어 주었다. 이제 고개 숙인 자기 자신의 본연으로 돌아가 있는 모습은 찾    아보기 어렵다.  


■ 나의 5월 5일


0 5월에 죽고 싶다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

  이토록 간곡한 5월 예찬은 달리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니체라는 사람이 하    도 가을을 좋아한 나머지 제 생일을 가을의 어느 날로 바꾼 것과도 어금    버금이다.

   봄바람에 꽃들이 지고 나면 그 꽃자리에 어김없이 연둣빛 잎새들이 피어    난다. 이런 아침나절 눈 아린 초록 세상이 어찌 꽃에 뒤지랴. 밤의 버들     신록이 가로등 불빛에서도 아롱지면 그 가슴시린 빛깔의 떨림에 무엇을     견주랴. 걸어가던 발걸음이 땅에 붙어 버린다. 죽을 수도 없고 살 수도 없    다는 생각이 거기에 있다.

   이런 5월의 행복이 어찌 나에게도 없으랴.


0 허나 저 소파 선생의 ‘어린이’로서의 5월은 내 어린 시절의 어디에도 있을    턱이 없다. 그저 민둥민둥 5월은 4월의 뒤이고 6월의 앞일뿐이다.

   오랜 가난의 굴레는 막 보릿고개를 허위단심 넘어야 한다. 이른 봄의 논    두렁  뚝새플로 죽을 쑤어 먹어야 하고 냉이와 벌금자리 나물을 캐어 겨    울 양식이 떨어진 하루하루를 넘기는 입맛을 냈다. 묽은 된장 국물은 서러    웠다.

   그러므로 어린 시절의 5월이 나에게 없는 것은 죄가 되지 않는다. 벌써     만경강 기슭까지 펼쳐진 들녘은 어린모들이 자라나 그것대로 어여쁜 초록    세상을 이루고 있다. 그런 들녘의 한 구석에 우리 논도 있어서 거기에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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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라기가 내려와 있으면 그 해오라기도 우리 식구같고 일가붙이 같았다.


0 앞산도 뒷산도 칙칙한 소나무 사이로 연둣빛 상수리나무 잎새와 오리나무    잎새 밤나무 너도밤나무 잎새들이 피어나서 비릿비릿한 초록 내음을 가뭇    없이 훈풍에 풍겨내노라면 어린 나는 배가 고팠다. 이런 고향을 떠났다.     그 뒤로 여러 고장에서 맞이하는 해마다 5월의 풍경속에 나는 들어 있지    않았다.


0 지난날의 나에게는 계절이 도무지 없었다. 첫 여름이건 찬 겨울이건 그것    은 그저 나와는 그다지 상관없는 시간이었다. 선정(禪定)은 달력을 버렸다.    이런 나의 귀머거리 같은 삶에 5월이 뒤늦게 왔다. 한꺼번에 꽃밭의 벌 소    리로 부릉부릉 온 것이다.    

   하필이면 나는 5월 5일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 이것이 나에게 어린이날    이 나의 날도 되는 처음이다.


0 1983년 5월 5일 나는 내 아내 이상화(李相華)를 그 집 정원에서 차린 혼    례상 앞에서 맞았다. 100명 하객 앞이었다. 주례 함석헌(咸錫憲)은 주역의    한 괘를 풀어서 우리가 잘 살기를 바랐고 문익환(文翼煥)은 ‘고은이 장가    간다네’ 라는 긴 두루마리 축시를 읽었다. 백낙청(白樂晴)은 이상화의 영문    학을 들어 민족문학과 세계문학이 만났다는 축사를 했다. 사회는 막 산에    서 내려온 옷차림 그대로의 리영희(李泳禧)가 맡았다. 천주교 신부 김승훈    (金勝勳)은 내가 자기와 함께 독신으로 살지 않고 결혼하게 된 것을 배신    이라고 투덜거리며 축하해 주었다.  


0 비공개 결혼이었으므로 나를 감시하는 기관에서도 당일 아침에나 알게 되    었고, 이 결혼식의 하객은 제한된 친지만으로 되었으나 또 하나의 하객은    바로 그 정원의 나무들이 한창 피워낸 연둣빛이었다. 어젯밤까지 비가 오    다가 개어준 날씨가 고마웠고 그 비 온 뒤의 생기있는 여린 잎새들의 내    음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을 내려 주었다. 

   신혼과 신록은 우리에게 동의어가 되었다. 아내는 그 당시의 험악한 시국    에 거스르고 있는 나와의 결혼 자체가 문제였으므로 대학교 보직자들의     회의에서 교수직 의원면직이라는 형식으로 내보내기로 했으니 영락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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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업자로 돌아가야 했다. 그때 아내는 담담하게 그것이 운명이라면 받아들    이겠다고 말하며 대학의 학문을 집의 학문으로 옮길 결의까지 내보였다.

   그런데 당국이 이 사실을 알고 대학의 의결 사항을 취소시킴으로써 아내    의 교수직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2년 뒤 아기가 태어났다. 공교롭게도 이 아이도 5월에 태어남으로써 우    리 집은 5월의 집이 되었다. 1985년 5월 12일이 아이의 생일이다.

   그러므로 해마다 5월은 우리 집의 달이고 우리 집 잔치의 달이 되었다.     이런 5월의 하루하루가 더디 가기를 바라기까지 했다. 


■ 학생으로서의 생애


0 제삿날 밤에는 의레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라고 쓴 지방을     모신다. 증조할아버지도 할아버지도 다 같이 ‘학생부군’인 것이다. 어린 시    절 내가 뵌 적이 있는 증조할아버지는 이런 지방 속의 학생부군으로 오셔    서 제상 앞에 차려놓은 음식들을 잡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저세상의 어른들을 학생이라고 칭하는 것을 한편으로 기이하    게 여기기도 했다. 조선조 제례에서 나라의 요직을 지낸 정승들의 지방은    ‘현고좌의정...’ ‘현고영의정...’ 으로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웬만한 양반이    나 평민들은 두루 ‘현고학생’ 이었던 것이다. 언제부터 조상신의 남성을 학    생으로 칭했는지 분명치 않다. 아마도 주자가례이후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    던 것 같다.

  

0 이 같은 ‘학생부군’에서 나는 한동안 야릇한 느낌이 들었던 것과는 달리     학생의 의미를 아주 좋아하기 시작했다. 사람이란 살아있는 동안 내내 무    엇인가를 배우는 학생이므로 ‘인생 즉 학생’이라는 등식이 가능하지 않겠    는가. 어디 어린 시절의 초등학교와 젊은 날의 대학 학부에 다닐 때만 학    생이겠는가. 나이 60세에 이르러서도 시대와 산천초목으로부터 배우는 바    있을진대 예순 살 학동이 아니겠는가.

   바로 이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평생 교육 개념으로 다가갈 수 있다. 사실    인즉 교육이란 일정한 교육의 틀로 제도화하는 것 그 이상의 가치 실현인    것이다. 이렇듯이 평생 학생으로 사는 일로도 모자라 죽은 뒤에도 학생이    되어, 배우는 귀신으로 제삿날만 오신다면 자손에 대한 산 교육이기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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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 않겠는가. 나는 고육을 교사가 있고, 학교가 있고, 교육을 이수한 증거    로서의 졸업장이 있는 교육보다 사람의 생애 전체가 교육으로 말해지는     것이야말로 교육의 본래적인 의미라고 생각하고 있다.


■ 두 여자 이야기


0 어떤 사람의 집에 아리따운 여자가 찾아왔다. 옷맵시도 눈부셨다. 주인은    그 여자에게 반했다. 

   “그대는 누구인가?” 라고 물었다.

   “저는 공덕천(功德天)이라합니다. 제가 가는 곳마다 그 집에서는 보배가    불어나게 해 드립니다.” 

   이 말에 주인은 더욱 좋아라 하며 그 여자를 맞아들여 꽃과 향을 공양하    고 갖은 대접을 다했다.

   그런데 조금 뒤에 또 한 여자가 찾아왔다. 그녀는 흉측했다. 옷도 누더기    였다.

   “그대는 누구인가?” 라고 주인은 사나운 소리로 물었다.

   “저는 흑암천(黑暗天) 이라합니다.”

   “무엇하는 사람인가.”

   “제가 가는 곳마다 그 집의 재물을 없어지게 합니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주인은 당장 칼을 들고 외쳤다.

   “이년 썩 물러가라. 그렇지 않으면 이 칼로 쳐 죽이겠다.”

   그러자 흑암천이라는 여자가 끄떡없이 말했다.

   “아 당신은 어리석은 사람이오. 아까 당신 집에 온 여자는 제 언니라오.    나는 언제나 언니와 헤어지지 않으므로 나를 쫓아내면 언니도 함께 쫓아    내야 하오.”

   주인은 집 안에 있는 여자한테 가서 물었다.

   “저년이 말하는 것이 사실이오?”

   “그렇습니다. 나를 사랑하려거든 내 동생도 사랑하야 합니다.”

   주인은 털썩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0 우리는 이 공덕천 흑암천 이야기에서 부와 빈이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    삼 깨닫게 된다. 아니 부와 빈에 대한 우리 마음이 둘이 아닌 것도 깨닫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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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된다.

   그동안 우리는 개발과 성장으로 인해서 오랫동안 우리의 삶에 육화(肉化)    되어온 가난을 너무 빨리 망각했고 이와 함께 갑작스러운 부의 허상이 되    고만 것이다. 


■ 밤


0 어느 시인은 밤은 어머니라고 노래한 적도 있는지 모릅니다. 밤은 어머니    처럼 모든 것을 그 품 안에 안아 새로운 힘을 낳아주는 어둠이므로 그것    은 밝은 낮과 함께 이 세상을 이어가는 바탕입니다. 낮이 아버지라면 밤은    어머니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이런 밤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    들은 깊은 밤까지 텔레비전을 보고 비디오의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는 것    입니다. 그래서인지 밤 0시가 되어도 부엉이나 소쩍새처럼 잠들 줄 모르고    지내기 일쑤입니다.

  

0 그러다가 아침이 오면 부랴부랴 헤드폰이나 삐삐 따위를 가지고 다니며     몸이 두 개라도 모자라게 이리 뛰고 저리 뛰기 시작합니다. 거리를 꽉 메    운 자동차들은 서로 앞서 가려고 빵빵 경적을 울려댑니다. 그러다가 교통    사고가 생겨 사람의 목숨이 대번에 끊어지기도 합니다.

   나는 이런 사람들의 하루하루를 지켜보며 지난날 사람들이 좀 느릿느릿    듬성듬성 보도 위를 걸어가는 시절을 떠올립니다.

   사람이 스스로 돌아보거나 닦는 시간을 가지지 못하고 스스로 쉬는 시간    을 다 빼앗기는 것이 오늘이라면 이 오늘은 꼭 고쳐야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길을 가다가 한동안 서 있는 모습이 그립습니다. 그것이 아름다    운 사람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 봄과 더불어


0 내 인조 고막으로도 봄이 오는 소리가 들려온다. 봄은 자유 같다. 고대 그    리스 신화이래 봄은 황금마차를 타고 온다고 말하지만 나에게는 그렇게     오는 것은 봄이 아니다. 얼음장 사이 졸졸 흐르는 호젓한 눈석임물이나 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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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 벌름거려지는 풋풋한 공기 속 무슨 내음으로도 그것은 오고, 보리밭에    서 솟아오를 드높은 노고지리 소리 떨어지며 그것은 온다.

   아니 나라의 영토가 비좁아서인가, 고층 아파트 투성이인데 그런 아파트    에서 사는 아가씨의 재빠른 봄 옷차림으로도 그것은 이미 와 있다.

   저 건너 긴 아지랑이를 보아라.

   이제쯤 태백산맥 중허리 여기저기에 걸려있는 황태 덕장도 하나 둘 치워    지리라. 치워진 자리 몇 군데에는 미처 다 실어가지 못한 황태들이 싱겁게    남아 있으리라. 

   해발 800미터쯤의 높이면 사람에게도 짐승에게도 허파를 찬란하게 바꾸    고 남도록 공기가 그만이겠다.

   논두렁 뚝새풀은 진작 질기게 푸르고 언덕배기 밭 모서리의 쑥도 히뿜한    빛깔로 쑥국 맛을 나게 한다. 

   불쑥불쑥 뻗어난 산수유나무에 산골 소경의 딸이나 간직하고 있는 듯한    슬픔인가. 그런 노란 산수유꽃이 달리는가 하면 그와 함께 산당화도 꽃봉    오리를 터뜨린다. 

   지난시절 일제 식민지 말기의 가난에는 겨울 땔감으로 캐어가기 때문에    봄에 피어날 진달래가 없었던 일도 있었다. 이제 산에 들에 진달래는 그런    한을 다 풀어서 지천으로 피어난다.  


0 지난날 나는 몇 해 동안 감옥에서 긴 겨울을 보냈고, 몇 겹으로 껴입은 옷    을 벗어버리는 봄이야말로 봄다웠다.

   봄이 오면 꽃이 있다. 꽃이 있으면 나비가 온다. 아니다 꽃이 있기 전에    이미 나비가 와서 봄을 담뿍 기다리는지 모른다.

   그 나비는 이 세상에서 자유와 해방의 비유가 되는지 모른다. “시인은 제    비처럼 자유롭다.”라고 횔덜린은 말했으나 그 자유는 너무 속도와 직선에    의존하는 듯하다.

   그래서 나는 나비의 그 절묘한 가벼움과 그 점칠 수 없는 방향으로 하여    금 실로 목적이 없는 행위로서의 자유를 알게 한다.


0 이렇듯이 봄은 모진 추위와 겹겹의 옷으로부터 떠나서 새로움 혹은 젊음    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것은 어떤 속박으로부터 뛰쳐나온 해방의 의미    를 지니고 땅속 깊이 들어 있던 것들이 그 생명을 땅위로 나타내는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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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의미이기도 하다. 

   봄은 젊음의 세계이다. 10대 후반이나 20대의 젊음은 40대가 아무리 영    광으로 넘친다 하더라도 그것과 바꾸지 못할 삶의 보석인 것을 어쩌랴.

   피천득은 한 수필에서 “‘인생은 사십부터’라는 말은, 인생은 사십까지라는    말이다.” 라고 썼다. 그렇기도 하다. 그래서 40부터란 끝내 인생의 여생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젊음으로서의 봄은 오로지 젊다는 사실만을 예찬하는 게 아니다.    봄은 여자의 계절이고 가을은 남자의 계절이라고 한다면 그 생리적 계절    론 이상으로 봄과 젊음 그리고 여성적인 매혹은 오직 그 환희로만 정의될    수 없다.

   봄은 그래서 젊음이라는 고뇌와 꿈 그리고 용기라는 꽃을 피워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심장이 뛰노는 나날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젊음은 자주 유리같고 크리스털 같다.     심장 대신 머리가 있다. 인터넷 놀이에는 진실보다 장난이 너무 많다.

   봄의 풍경을 새로 그리고 싶다.


■ 내 시를 말한다.


0 지난 97년 12월 미국 버클리 대학에서 내 시 낭송 행사가 있었을 때 시    에 대한 평설을 맡았던 미국의 계관시인 로버트 하스는 한국을 서구의 폴    란드와 견주고 나를 그 나라의 시인 체슬라브 밀로즈와 대비시키기도 했    습니다.

   

  한국의 심성(心性) 가운데는 지난날의 오랜 고행과 오늘에 이르기까지 타    파하지 못한 민족 분단의 비극과도 관련되는 한(恨)이라는 슬픔이 자리 잡    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것에 주저앉을 수 없는 자각과 공동체 의식이    어우러지는 축제로서의 흥(興)과 신명(神明)이라는 비작위적인 열정도 갖    추고 있습니다. 신명이란 어떤 경우 서구의 데몬(魔性)과도 남남이 아닌     생명의 내적 율동입니다.

   그런 심성의 은전(恩典)이 나에게도 얼마만큼 유전되어서 한 시인의 불가    피성으로 태어나게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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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내가 살아온 시대는 일제 식민지 시대로부터 시작했습니다. 1930년대는     중일 전쟁이 벌어졌고, 이어서 그것에 병행해서 1940년대는 태평양에서     전쟁이 일어나 세계대전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그 전쟁은 한반도를 집중적    으로 피폐시켰습니다. 그 절대 궁핍의 전시체제가 바로 내 소년 시절이었    으며 모국어인 조선어를 금지시키고 일본어를 국어로 배워야했고 성과 이    름도 일본식으로 고쳐야했던 시기였습니다.  

   모든 산의 나무들을 일본 군대가 남벌해 감으로써 민둥산의 진달래나무    뿌리까지 캐어다가 아궁이의 땔감으로 썼고 그 때문에 봄에는 진달래꽃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 뒤 일본의 패전에 의해서 한반도는 해방되었으나 곧 미ㆍ소 두 체    제의 군대가 주둔한 이래 각각 단독 정부를 만들어 끝내 통일된 나라가     되지 못한 채 분단 시대가 개막되었습니다.


0 한국 전쟁과, 서로 다른 노선으로인한 갈등으로 농경사회의 인정은 깨어진    채 적대관계로 변하였고,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참극이 겹겹의 보복으로    되풀이되었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살아남아 우연히 만난 것이 불교입니다. 비록 내가 그것을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과 만난 뒤 그곳의 안정되지 못한 선원(禪院)에    서 나마 나는 지독한 내적 상처를 아물게 할 수 있었습니다.     


0 일체의 언어를 다 죽이는 일이야말로 선의 존재 이유입니다. 내가 선 수행    의 과제로 삼은 것도 무(無)입니다. 무! 그것만을 추구하는 마음속의 치열    한 작업을 통해서 내 시의 가능성은 처음에는 무척 당황한 적이 있었고,     반대로 언어의 비언어화라는 직관의 육화(肉化)를 조금씩 경험할 수 있었    습니다. 

   실로 우연히 50년대 후기에 화가인 친구가 내가 쓴 시 한 편을 막 창립    된 한국시인협회에 보내는 바람에 나는 시인이 되었고, 그 뒤 내 시가 한    꺼번에 발표되면서 전후의 신인으로 내 이름에 시인이라는 장식이 달리게    되었습니다.


0 사회적 모순에 갈등, 10년 동안의 불면증, 몇 번의 자살소동으로 사람들은    나를 허무주의의 기수라 말했다. 그리고 70년대 혹은 80년대의 번잡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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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 싸우는 자의 삶을 지속하는 동안 내 시는 감옥에 갇혔고 또 내 시는     감옥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거듭했습니다.


0 몇 차례의 감옥 생활 중 가장 힘들었던 세 번째의 감옥 생활은 광주 학살    사건 당시 내란음모죄라는 죄명으로 육군교도소 암실 감옥에서 보냈습니    다. 그때는 죽음에 직면했습니다. 

   바로 그런 극한 상황의 암실에서 나는 많은 얼굴들을 떠올려 그 얼굴과    의 가상(假想)의 대화를 계속함으로써 하루하루를 견딜 수 있었습니다. 만    약 살아 나간다면 그 얼굴 하나하나를 노래해야겠다고 결심했고 다른 긴    서사시들도 구상했습니다.

   다행히 80년대 중반 나는 감옥에서 나와 늦은 결혼생활과 요양 생활을     겸하면서 그 시들을 써왔습니다.

   세계체제의 변화는 그 세계 속의 나에게도 하나의 ‘세계 내 존재’의 자기    성찰을 요청하는 것 같았습니다.  

   여기에서 나는 시에 대한 다양성과 종합성 혹은 조화로서의 시를 추구하    기 시작했습니다. 내 사색은 인간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과의 상생 또는 공    생으로서의 중생의 언어를 꿈꾸기에 이르렀습니다. 


■ 시 ‘광야’를 생각하며


0 시 ‘광야’는 한 시골 두메 마을의 소년에게 일약 세계를 알려 주었다. 거    기에는 ‘까마득한 날’과 ‘천고(千古)’라는 커다란 시간이 들어 있다. 오늘이    나 내일 따위, 한 시나 한 시 반 따위의 그런 시간이 아니다. 또한 시 제    목 그대로인 ‘광야’라는 커다란 공간이 있다. 어디 이뿐이겠는가. ‘초인’이    라는 커다란 인간까지 있었다. 그것도 그냥 초인이 아니라 백마를 타고 달    려오는 초인이 아닌가. 말하자면 한 어린이의 아주 작은 향토 환경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벅찬 세계인 시간 공간 인간을 아무런 준비 없이 만나게    한 것이 시 ‘광야’였다.

   나는 그것이 무서웠다. 그 시를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만    큼 나에게 가당치 않은 외경의 언어 전당이었다. 하지만 내 삶의 항로에서    그것은 내 숙명 또는 운명의 한 단초를 열어준 힘의 기호를 뜻하기도 한    것이다. 이 시가 준 전율은 이제 기억의 저편으로 흘러갔건만 그 여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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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도 살아있다.   


0 지난해 나는 수교 20주년 기념으로 중국작가협회 초청에 부응해서 한국     작가들과 함께 베이징에 갔다. 나는 그곳 행사의 대표 연설에서 베이징에    온 목적의 절반은 한 시인의 죽음을 추도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아니,     베이징대 강연에서도 나는 내 시 따위를 말하지 않고 이육사의 시와 죽음    을 개진함으로써 나의 의도대로 이육사의 세계만을 알렸다.

   해외의 여러 문학 행사에서 한국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 선전에 급급하는    행태를 보면서 나는 늘 씁쓸했다. 어쩌면 베이징에서 내가 내 시 세계 대    신 ‘광야’의 이육사의 시를 고양시킨 것도 그런 행태가 지겨워서였는지 모    른다.

   이육사는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했다. 1944년이니 해방 1년 전이다. 그는    20대 이전부터 나라 잃은 시대의 나라 찾기에 나섰다. 아니 그만이 아니    라 그의 형제들이 다 그렇게 나라 찾기 겨레 찾기에 몸을 던졌다.  

   이육사는 열여섯 번이나 일제 감옥을 드나들었다. 그 마지막 투옥이 일본    군 진주의 베이징 형무소 감방 생활이었다. 거기서 그는 고문사 내지 옥사    로 세상을 마친 것이다. 그뿐 아니라 베이징은 그의 시 세계의 중요한 발    생 공간이기도하고 그의 학문 연고지이기도 하다. 오늘의 신중국 베이징대    는 그 이전의 베이징에 널린 여러 고등교육시설을 종합한 것이기도 하다.


        ‘광  야 曠 野’     - 이 책의 본문에는 없음 -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에도

     차마 이곳은 범(汎)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을

     부지런한 계절들이 피어선 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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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白馬)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曠野)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육사(李陸史   1904-1944)


■ 가을 그리고 시 그리고 철학


0 혼자 있을 때는 내가 세 살인지 몇 살인지 모르겠습니다. 시간, 나이, 나    이테 따위는 애당초 오랜 삶의 장난인지 모르겠습니다. 이 장난이 무릇 세    상의 엄연한 목숨에 직면한 현실인 것이 놀랍습니다.

   나는 오늘 스무 살쯤으로 돌아가 스무 살쯤의 글을 쓰고 싶습니다.

   그 시절, 가을은 자주 ‘아 가을인가’였습니다.

   그런 가을이 이번 가을에도 쭈르륵 미끄러져 내려와 닿아 있는지 모릅니    다.


   아 가을인가.

   가을은 나의 내면입니다. 아니 나의 내면의 노을 진 아픔입니다.

   그동안의 몸이 끝나고 마음이 시작합니다. 가을은 어떤 음험한 거짓조차    진실로 만들어 주는지 모릅니다. 온통 참다운 대면이 아니면 안 됩니다.     어쩌면 좀처럼 떨어지지 않던 삶에의 애착도 한 번쯤 어디론가 슬며시 떠    날 채비를 하는 것인 양 하늘의 푸른 침묵 아래 울바자 밖으로 내 마음은    나서는 것입니다. 지금 내 마음 밖에서는 가을은 두 가지를 한꺼번에 다     보여줍니다. 조락과 결실, 하지만 내 마음의 뒤안에는 지난여름의 눈먼 관    능과는 달리 이름 지을 수 없는 비애가 이슬 다음의 서릿발 어린 유리창    으로 깨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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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는 잎새의 무심

  숨어 있던 개울물 소리의 빛나는 각성

  한 자락의 낯선 바람의 추위

  저만치 혼자 걸어가는 그 누구의 뒷모습

  아직 떠나지 못한 한 떼의 근심스러운 철새들의 빨랫줄

  갈꽃 흔들리는 냇둑

  개미 행렬

  자동차 행렬

  비행운


   이런 풍경 단면들의 소소한 감회로부터 눈을 돌려 냉큼 쳐다보는 푸른     하늘이 지상의 모든 불안과는 좀 남남인 듯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구    는 하늘을 크다고 말하고 또 누구는 하늘이 많다고 했거니와 정작 하늘은    그런 일원론도 다원론도 아니겠습니다. 천도무심입니다.


0 가을은 하나의 슬픔입니다. 그 슬픔의 이유를 누가 묻겠습니까. 옛사람들    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고 말하지 않고 응당 봄 여름 슬픈 가을 겨울이    라고 말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가을은 귀환의 시간인지 모릅니다. 어떤 행복한 둔재가 불행한 천재가 되    어 돌아옵니다. 한자 귀(歸)는 시집간 여인이 친정에 가는 것을 상형(象形)    한 것이라 합니다. 지금의 기혼 여성에게는 들어맞는 글자가 아닙니다. 옛    농경 사회에서의 여자는 한 번 시집가면 그것으로 삶의 시말이 결정되어    버립니다.


0 나 자신을 돌아보고 나 자신으로 돌아가는 행위야말로 그러므로 가을의     행위입니다. ‘지난여름은 위대하였습니다.’ 라는 어떤 절창 역시 그 여름은    이미 와 있는 가을의 어제를 확인하고 있습니다.  

   오동잎 하나로 천하의 가을을 안다는 그 커다란 깨달음은 거꾸로 천하의    가을을 잎 하나가 응축하고 있다는 깨달음이기도 하겠습니다. 이런 가을의    한 겨를에 삶의 행로를 애워싼 삼라만상의 철리(哲理)를 만나게 되는 것도    가을의 은전(恩典)입니다. 그래서 가을은 그저 가을이 아닌 슬픈 가을이고    깊은 가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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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저 쑥부쟁이나 구절초의 언덕은 아무런 까닭 없이 슬픕니다. 먼 산맥의 아    슴푸레한 프르름도 자못 슬픔을 자아냅니다. 몇 날 몇 밤을 울고 난 듯 푸    른 하늘의 그 액체감 역시 슬픔의 저승으로 느껴진 때가 왜 없겠습니까.     가을밤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어찌 가슴속 에어드는 서슬이 아닙니까. 바로    이런 비애들과 함께 내 뻣뻣한 자만의 고개는 숙여지고 지난날 턱없이 나    뒹굴었던 그 허세들도 더 이상 남아 있을 수 없게 사뭇 겸허와 공의 시간    안에 잠기게 됩니다. 어쩌면 가을은 나에게도 자아에의 성찰이 세계의 통    찰이 가능케 되는 어떤 사색의 빌미를 내주기도 할 것입니다.

   슬픈 가을은 그저 슬픔으로 마감되는 것을 넘어 그 슬픔이 이윽고 하나    의 사상, 하나의 철학을 낳는 힘이 되겠습니다. 저 참담한 시절 나는 우리    들의 슬픔이야말로 유일한 힘이다. 라고 여러 번 외쳐댄 적이 있는데 그때    와는 다른 소리 없는 외침이 있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0 어떤 뜻으로 모든 철학은 이런 가을의 슬픔이라는 사색의 자궁에서 태어    난 마음의 아들이기도 하겠습니다. 이를테면 니체의 습관이기도 한 그 강    렬한 선언의 힘이 한 가닥의 비애도 허용되지 않는 대신 그가 가을을 너    무 좋아해서 자신의 탄생일을 가을의 어느 날로 옮겼다는 전설로 미루어    보면 그의 경이적인 세계 인식이 가을의 사색과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짐    작합니다.

   아니 고대 현자들의 철학은 무미건조한 진리에의 정의가 아니라 삶과 죽    음, 세계의 시작과 끝이라는 감당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진리의 비애를 불    러 일으킨 것이 아니겠습니까. 

   철학은 슬픔 없이 태어날 수 없습니다. 비극 밖의 철학론은 관념입니다.    이 같은 내 단언이 어찌 철학에만 해당되겠습니까. 바로 시야말로 슬픔의    모성에서 태어나는 철학 이전 또는 철학 이후의 원초적인 신생아입니다.     그래서 가장 철학적인 철학은 시의 세계 없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하이데    거가 유난스레 자신의 주요 저작을 통해 시의 세계를 자신의 철학으로 재    현한 사실이나 자신의 철학이 시 한 구절보다 못하다는 고백 역시 얼마나    거짓 없습니까. 거기에서 우리는 시와 철학의 만남이라는 궁극의 시 세계    를 발견합니다.


0 가을 하늘은 깊은 마음의 은유입니다. 또한 내 사색의 오지에서 건져 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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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어의 결정들은 하염없는 가을 산천을 뜻하고 있겠습니다.

   시, 말이되 말놀이만이 아닙니다. 시, 이것이 말일수록 말을 낳고 말을 파    묻는 마음의 심연입니다.

   아, 가을의 시는 봄날이나 여름밤의 시가 아닙니다. 삶은 어느새 삶의 뒤    인 죽음을 불러내고 가을은 이미 겨울의 그 가혹한 인내의 본체를 내다봅    니다.

   당신의 지상에 시가 내려오기를. 당신의 지상에서 시가 내년 봄의 노고지    리로 오르기를.


■ 시를 부르면서


0 어떤 의미에서 신학이 신을 죽이고 시학이 시를 죽일 때가 있습니다. 시에    대한 이론이나 그 해석적 행위는 한밤중에도 꺼지지 않는 불빛처럼 진지    하지만 본디 생명으로서의 시를 잘라 내어 그것을 토막토막 분석하고 그    것이 굳이 문이 쾅 닫힌 것 같은 설명의 의미를 부여하는 동안 새벽에는    그 연구실에 시의 시체가 널려 있기도 하는 것입니다.

   나는 지난 1년 동안 미국의 서부와 동부에서 한국 시에 대한 강의 및 시    낭독회를 개최할 기회가 있었는데, 첫날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시는 책 속에 있지 않다. 시는 사람의 가슴 속에 있다. 이 시간은 여러    분의 가슴속에 들어 있는 시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 시간이다. 그러므로 이    방 안에는 시가 가득하다.” 그러고 나서 “시는 심장의 뉴스다.”라고 정의    하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시 혹은 한국의 시에 관한 강단 담론을 인문학적 차원의 긴장으    로 기대했던 학생들은 처음에는 당황했을지 모르지만 학기 말에는 시에     관한 한 그들과 나는 꼬빡 정이 들어서 아쉬워했습니다.

   시에 대한 내 생각은 지금이라고 해서 달라지지 않습니다. 시를 죽음으로    부터 살려 내는 일이 시인이 시를 쓰는 일과 같은 의미이기를 나는 열망    하고 있습니다.


0 내 어린 시절은 일제 식민지의 굶주림이 잦은 날들이었습니다. 한밤중이     되면 바닷가의 나문재를 뜯으러 간 어머니를 기다리던 어린 나는 영양실    조에 걸린 시집 안 간 고모의 등에 업혀서 별을 바라보았습니다. 우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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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부와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또한 내 존재 의식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나는 배고픈 상태였으므로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바라보게 된 별을 먹을    것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고모에게 “별 따 줘! 별 따 줘!”라고 소리쳤습니    다. 뒷날 별을 노래하는 시인이 될 아이가 별을 밥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별이라는 이상과 밥이라는 현실은 서로의 절실성으로 합치되어야    한다는 내 문학 노선은 어린 시절의 체험으로 어느만큼 진행되기 시작했    다고 여겨집니다.


0 나는 밤이 좋습니다. 태양의 역사와 밤의 신화를 사랑합니다. 내 생뚱한     해석으로는 동북아시아에서 ‘이름(名)’이라는 글자는 태양이 진 뒤의 ‘저녁    (夕)’과 ‘입(口)’을 합성 시키고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 존재를 불러내는 것    이 이름입니다. 그래서 내 시는 어둠 속에서 누군가를, 어떤 것을 불러내    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나는 최근 ‘시 일기’를 씁니다. 매일 작은 시 몇 편씩을 쓰는 일기 말입니    다. 시를 쓰지 않을 때도 시인이라고 말해지는 것이 죄스러워서인지도 모    르겠습니다.

   고난 속에서의 한국 근대시 100년 이전과 이후의 수많은 시인들 가운데    서 나도 한 시인으로 실재하고 있다는 축복을 늘 새롭게 기억하고 있습니    다. 또 많은 다른 시인들과 함께 시적 연대를 이어 가는 영광도 뒤따릅니    다.


■ 내 시의 고전적 환경


0 아시아는 시의 오랜 장소이다. 시가 태어났고 시가 뛰놀았고 시가 죽기도    했다.

   여기 동아시아의 시와 페르시아의 시 그리고 인도 아리안의 시는 만년설    의 산기슭과 사막과 대지의 푸른 가슴 모든 곳에 걸쳐 자신의 장소 밖의    여러 고장의 시와 더불어 고전의 현재를 이루어 왔다.

   어느덧 시는 시의 역사이고 시의 미래이다.

   마침내 이러한 시의 누대(累代)를 지나서 시인 타고르는 “진리는 오직 시    에 의해서만 드러난다.”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시는 시 이상이다.    아니 근대 문학의 한 장르를 넘어 그 이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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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찌 이토록 시의 숭엄한 역할이 아시아의 시에만 해당하겠는가. 여기에서    우주의 한 지방인 지구 위의 시가 바로 궁극의 언어인 진리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시는 우주의 사투리다. 나는 여기서 외친다. 시의 죽음을 함부로    말하지 말라. 시의 죽음은 바로 이 행성의 죽음과 함께이리라.

   나는 이 행성을 떠돈다. 이 행성의 공전과 자전은 행성 대기권의 바람과    구름을 낳고 그렇듯이 시를 낳는다.


0 아시아는 서유럽 기독교 문명과 산업혁명의 근대를 받아들인 나머지 제 2    의 서방으로 되고 서유럽 또는 미국은 동양의 불교와 요가와 도교를 받아    들이는 문화의 상호 교환 무역시대를 맞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아시아는 서유럽의 산업화 300년 이상의 시간을 압축한 몇십 년    안팎의 근대화에 의해서 개발과 성장의 미망에 사로잡혀 있다. 아니 동아    시아의 경제 활동은 세계 경제를 좌우하는 축이 되고 만 것이다.


   아시아의 우주와 자아의 합일이나 자연과 인간의 다원적 일원론 등 일련    의 고도의 경지는 이런 근대화의 욕망 속에서 형해(形骸)로 남아 있기 십    상이다. 자본의 논리는 무엇보다 생태 파괴와 문화유산에 대한 훼손을 일    상화하고 모든 가치를 시장에 내다 놓는다.

   이에 대해서 서유럽의 근대적 합리주의는 오랜 이원론의 문명에도 불구    하고 자연 유산이나 전통과 고전에 대한 옹호가 철저한 것이 사실이다. 이    는 사상은 있으나 실천이 없는 아시아의 맹점에 대한 세계적 양식(良識)의    전범(典範)일 것이다. 


0 한국은 올해 근대시 100년을 맞이하고 있다. 아시아의 다른 나라 역시 좀    더 이르거나 늦거나 할 뿐이다. 

   시 정신으로서의 혈연성은 전통과의 소통을 뜻하지만 그 형식은 단절됨    으로써 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종종 나의 시 세계를 고아의 세계라고 말한    다. 어떤 시적 조종(祖宗)의 영적(靈的)인 흔적도 과거의 유산도 두드러지    지 않는 나 자신만의 발상(發祥)으로서의 자각이 사뭇 비장하다.

   특히 1950년대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의 3년간 몇백만 명의 죽음이 폐허    에 쌓였다. 이 폐허가 내 시의 고향이다. 

   한국의 남과 북 어디도 온전한 곳이 없이 파괴되었다. 오랜 공동체는 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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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의 적대관계로 되어 전선과 후방에서 살벌한 광기가 찼다. 이런 상황에    서 인간의 정신환경 역시 하나의 폐허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에도    지난날의 위엄이나 고전적 긍지가 허용되지 않았다. 나는 어제와도 끊어졌    고 내일에도 이어지지 않는 폐허의 오늘이 내 시의 우연한 시작이었다.


0 모든 것이 끝난 곳에서 모든 것을 시작하는 그런 시대의 영점(零點)에서의    시가 이제 50년을 지난 것이다.

   한국의 18세기 문학적 각성은 과거를 비판적으로 계승함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창시하는 개혁의지를 내세웠다. 

   나는 이러한 것조차 부정함으로써 그 계승을 거절한 창조를 일삼았다. 어    쩌면 노자가 명시한 바 진실의 언어는 무엇에 반대함으로써 있다는 것에    도 내 의식은 닿아 있는 듯 했다. 마침 나는 불교의 반야사상과 선(禪)의    세계를 체험하는 중이었다. 여기에 폐허에서의 허무도 내 정서의 심연에     자리 잡았다.    

   이런 10년이 지난 뒤 나는 하나의 사실에 부딪쳤다. 그것은 아무리 내     시 세계가 과거의 시적 전통과 단절되었거나 고전과 무관한 것이라 하더    라도 결코 내 시 쓰기는 지난날의 시 행위로부터 동떨어지는 것이 아니     라는 사실이다.


   나는 옛 시인과 다를 바 없는 한 시인의 자화상의 나 자신을 뒤늦게 만    난 것이다. 시의 세계란 하나의 시간 공간 그리고 거기에 담긴 시적 정신    의 연면성(連綿性:오래 연이어서 끊어지지 않음)을 담보한다. 이전의 시와    나의 시는 어쩌면 하나의 자기동일성을 향유하는 상호 연관의 가치를 배    양하고 있다. 그리하여 고금동서는 비로소 하나의 공감 언어를 실현하는     것이다.

   아무리 내가 지난날의 방대한 시 세계 없이 살아남은 궁핍의 세계를 열    었다 하더라도 이제 나는 우주 혹은 세계로서의 유구한 과거로부터 분리    된 존재가 아니라는 것. 나는 전생의 유전으로 한 현전(現前)이라는 것으    로부터 등을 돌릴 수 없었다.  

   여기서 나는 한 시대의 고아로부터 역대 조상의 계보에 속해 있다는 사    실에 나의 시를 놓을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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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시의 꿈


0 웬일인지 모를레라. 오늘밤 고요하고 고요하다.

   하도 고요하므로 저 머나먼 실크로드 돈황 명사산(鳴沙山) 비탈의 모랫바    람 소리가 사뭇 여기까지 칼날져 들려오는 듯.

   고요 몇만 리!

   행여 이 바람 소리가 허공이 허공을 부르고 이름이 이름을 부르는 소리    그것은 아닐까. 무기(無記)의 길. 혹은 무류(無謬:잘못이 없음)의 길을 걷는    그 고요의 소리 ‘적(寂)’ 말이다. 미도 추도 선악 따위도 다 떠나버린 빈     동그라미의 그 소리. 아니 그 소리조차 사라져버린 그곳 말이다.


   이런 고요에 삼가 시비를 건다.

   이 세상 첫 질문으로서의 ‘시란 무엇인가’가 있었던가. 그래서 여러 삶의    고비마다 시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낡은 질문의 되풀이를 마다하지 않고    있는가.


0 지금으로부터 6만 년 전 네안데르탈인들은 죽은 사람을 매장할 때 나뭇가    지나 보랏빛 히아신스, 노랑 개쑥갓, 접시꽃, 가새풀 꽃 따위로 꽃 침상을    만들어 거기에 주검을 안치했다. 이라크 샤니다르 동굴에서 그 유적이 발    굴되었다. 2만 년 전의 구석기 시대의 한 소년의 주검도 동굴 속에서 발굴    되었는데, 그 주검의 이마 부위에 국화꽃 화석이 함께 있었다. 한국 충북    지방에서의 일이다. 3,300년 전 이집트 소년 파라오 투탕카멘의 머리에도    꽃다발이 놓인 사실이 밝혀졌다. 

   이런 꽃을 바치는 마음이 바로 시의 마음이라고 나는 믿는다. 고대 이래    동서의 시학 또는 시론 따위는 실은 뒷날의 군더더기이기 십상이다. 그런    것에 훨씬 앞서서 인간은 실재와 부재 사이의 슬픔을 꽃으로 표상하는 시    심으로 꽃이 핀 저 세상에 다시 태어나기를 빌었던 것이다. 


0 모든 시인들이 꿈꾼 것이 바로 내가 저세상과 이 세상에서 꾼 꿈이 아니    었을까. 이렇듯이 시인에게는 꿈이 생시이고 생시가 꿈이다. 시인에게 넋    은 물질이다. 시인에게 세상살이 전체는 그 하나하나가 영감이다.

   나귀 등에서도 시를 짓고 기침할 때 튀어나온 침이 그대로 시가 되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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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다. 어디 그뿐이랴. 시를 마신다고 말한 시인도 있다. 어떤 이는 나를 일    컬어 시로 숨쉰다고 말하기도 했다.


0 가던 구름이 멈추었다. 옛 시는 거지반 노래였다.

   달밤은 천리 밖까지 한집안이다. 그런 달밤에 시를 읊다가 피리를 불면     가던 달이 하늘길을 멈춰 지상의 시에 오래 귀를 기울였다. 고대 한국의     떠돌이 시승(詩僧) 월명도 그런 시의 삶이었다.  

   어디 하늘의 일만 그렇겠는가. 어디 하늘의 해와 달, 별들만이겠는가. 지    상의 아무개네 집 대들보에도 그 하염없는 시가 휘휘 감겨 오랫동안 여운    이 이어졌던 것이다.

   시가 하늘에 있다가 지상에 내려왔다. 그래서 시인은 하늘에서 도망쳤거    나 추방당해서 지상의 시련 많은 운명을 받았다. 지상의 침략과 압제와 가    난 앞에서 시는 무엇인가. 탐욕과 무지와 질병이 있는 현실에서 시는 무엇    인가라는 고통스러운 자기 부정도 없지 않았다.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    가 어떻게 가능한가’ 라는 가책이 있음에도 시가 고개를 들었다. 나 또한    3년 동안 400만 명이 죽은 한국전쟁의 폐허에서 그 폐허의 풀 한 포기인    양 시를 쓰기 시작했다. 아, 한 마디의 말, 한 구절의 시에 나는 만겁토록    묶여 있는 것이다. 이로부터 내 꿈은 해방의 길이다.


■ 올림피아에서의 발언


0 올림피아 축제 경기의 선수들이 1개월 동안 기숙을 하던 곳을 지나서 종    점 올림피아는 뜻밖에 적적했다.


   왜 이런 벽지에 올림픽 경기가 있게 되었는지 모른다. 거기에는 놀랍게도    그리스 최대 경기장이 있고 최대의 조각 전시장이기도 했다.     

   올림피아는 고대 정치와 문화에서 소외된 곳이었다. 말도 우아한 아테네    언어가 아닌 두메 마을의 거친 사투리였다. 다른 지역은 도시국가를 세웠    는데도 이곳은 그냥 여기저기 흩어져 사는 자연부락이었다. 사람들도 소박    한 백성과 지주로 단순하게 구성되고 있을 뿐이다.  

   다만 이 지역은 이민족의 침입이나 여러 세력의 갈등이 별로 없어서 그    런 점이 정치적 중립을 유지하는 경기에 적합했던 것 같다. 또한 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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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는 지중해 연안에 널리 퍼져 있으므로 선수들이 모여 들기에도 좋    은 교통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다.

   올림피아, 이곳은 제우스 신전 축하 행사의 하나로 올림피아 경기가 정기    적으로 거행된 곳이다. 그것이 오랫동안 단절되었다가 근대 올림픽으로 세    계적인 올림픽 축제가 된 것이다.

   그리스는 이 경기의 발상지라는 긍지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곳의 가장    큰 항공사는 선박왕 오나시스가 정부 출자를 이끌어 내어  창립한 올림픽    항공이다. 그 밖에도 올림픽이라는 이름의 기관이나 시설이 적지 않다.

  

0 그런데 고대 올림픽 축제는 1년에 한 번씩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데도 어    느 날로 정해지지 않고 그때마다 시기를 정했던 것이다. 대략 8월 6일부    터 9월19일 사이의 보름날이기 십상이었다. 이것은 올림픽 주기의 태음력    과 관련이 있다.

   이 무렵이면 더운 여름이다. 대체로 보리 수확과 탈곡이 끝나고 포도수확    도 어지간히 끝날 무렵의 농한기이기도 하다. 그뿐 아니라 고대 그리스에    서는 여름이 새해의 시작이었다. 

   그래서 올림픽 축제가 거행되는 때는 7월과 무더위가 비껴간 때이며 지    중해 항해에 가장 좋은 적기이기도 하다. 배가 잘 다닐 수 있어야 이오니    아 지방과 에게해 여러 섬들의 선수가 모여들 수 있다.

   본래 이 경기는 8년마다 열렸다. 8년 주기가 농민이나 목축 생활에서는    삶의 중요한 단위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네 10년 단위와 같은 것이다. 이    8년마다의 경기가 뒷날 4년제로 바뀜으로써 경기의 지속성을 강화한 사실    이 오늘에 이르렀다.


0 고대 그리스 올림픽이든 근대 올림픽이든 그것은 승리 혹은 승전을 궁극    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신과 영웅들을 이상으로 삼고 자신들이 거기에 속    해 있기를 염원했다. 불패의 체력과 남성적인 힘, 그리고 파란만장의 역정    을 찬미하는 일이야말로 그들에게 삶의 최고 형식이 되었다.  

   일단 경기에서 승리자가 되고 1등을 차지하면 토지와 가축, 노예 그리고    재보를 차지하게 되고 조상의 무훈에 버금가는 명예를 얻는 것이다.

   이처럼 이기는 자를 위한 경기는 몇 가지 기원설을 가지고 있다. 제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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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 아들 중 가장 힘이 센 헤라클레스가 간악한 아우게이아스 왕을 물리치    고 나서 제우스를 위한 신역(神域)을 정하고 4년마다 제전을 거행할 때 여    러 종류의 경기와 격투 등의 시합을 시작했다 한다.


0 그런데 이 같은 스포츠 경기는 아무리 고상한 운동정신으로 강조하더라도    언제나 그 성화는 그리스 신전에서부터 인도되어 오는 성스러운 제례의     불이더라도, 겉으로는 올림픽 위원들의 기사적이며 신사적인 위풍이 그럴    싸하더라도, 주최국의 대통령이 참석하고 참가국의 수상이 참가하더라도,    그 경기는 이기느냐 지느냐. 사느냐 죽느냐라는 극한 상황에서 행해지는     것이다.

   현실은 언제나 이긴 자의 것이다. 진 자의 얼굴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많은 승리자,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을 받은 선수들은 우선 그들의 상대를    물리친 존재들이고 그들에게 진 선수들도 수많은 사람들을 떨어뜨리고 올    라온 사람들이다. 한 승리는 많은  패배를 딛고 일어선 것이다.

   이렇듯이 누군가를 싸워 이겨야만 되는 올림픽 축제는 그 세계적인 영향    력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슬픈 사회 원리를 반복하는 것이 되고 있는 것이    다.


0 이러한 근대 올림픽에서 지적되는 현실과 달리 인간의 의지, 기술 그리고    힘의 미학이 다른 형태로 어우러지는 축제, 즉 어느 누구와도 싸우지 않고    대결하지 않는 문화올림픽을 제창한다. 승리를 위한 이기적 긴장과 투지가    아니고도 인간은 얼마든지 비경쟁적인 우정과 평화의 고조된 축제 속에     존재할 수 있다.


■ 정주영의 소떼


0 장관이었다! 그것은. 그리고 어떤 시작이었다! 그것은.

   소떼 500마리가 분단 이래 남북 쌍방의 참을 수 없는 환호와 국민적 지    지를 받고 휴전선을 넘어 남으로부터 북으로 간 사실은 그렇게 장관이었    고 그렇게 무엇인가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뜻하고 있는 것이다.


0 하필이면 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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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는 한국 사람 누구에게도 고향을 뜻하고 있다. 증조할아버지 할아버지    의 무덤과 논밭과 ‘음매’의 그 누런 울음소리의 소는 하나였다.

   고춧가루 버무린 김치와 판소리가 기껏해서 200년밖에 안 되는 것인데도    우리의 삶과 문화의 표상이 되고 있을진대 최소한 2,000년 이상 이 땅의    농경 사회는 소와 함께 살아옴으로써 소는 소였고 사람은 사람이었던 것    이다.

   바로 이 같은 소의 오랜 역할을 통해서 우리는 그 농경 사회를 마감하고    새로운 산업사회 혹은 첨단 문명의 시대에 진입하고 있게 되었다.   

   그러나 소는 푸줏간에 내 걸린 고기로만 규정되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아직도 우리는 어미 소 옆에 송아지가 있는 풍경을 고향의 절경으로 삼고    있다.

   어느 시절에는 눈먼 고아에게까지 마음을 써서 제 꼬리를 잡게 해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앞 못 보는 고아에게 밥을 얻어 먹였다.

   이승의 생애 거의 전부를 사람을 위해서 땅을 갈아주고 짐을 실어다 주    었다. 그런 뒤 이승을 그만두면 안심 등심 생등심 그리고 내장탕 뼛국과     가죽까지 다 바치는 것이다. 


   그런 일생을 통해서 소처럼 걸어가는 아름다움을 안달과 조급으로 내달    리고 있는 사람들의 삶에 아픈 교훈으로 삼게 한다. 이런 소의 무한한 덕    성과 함께 살아옴으로써 한반도의 사람들은 그나마 이만큼의 삶의 미풍을    존속시킬 수 있었는지 모른다.

   과연 2,000년 이상의 우리 역사 동반자인 소야말로 우리 모두에게 영혼    의 친족임에 틀림없다.

   함께 밥을 먹고 살기에 식구이고 함께 눈비를 막고 살아가기에 생구(生     口)라면 옛 사람들이 소를 생구라고 한 까닭이 여기 있다.


0 바로 이 같은 소를 몰고 가는 일이라면 가로막힌 분단의 사슬도 언젠가는    말짱 걷어내는 날이 오리라는 향토적 확신이 시작되어 마땅하다.

   이번 정 회장 일행의 소몰이 귀향 축제는 그것이 한 재벌 총수의 꿈을     이루어준 사건임에 틀림없다.

   젊은 날 몇 번의 가출을 거듭한 나머지 아버지가 기르는 소 한 마리를     내다 팔아서 출분(出奔)한 이래 가슴 깊이 묻어둔 그 기억이 서산 농장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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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넓은 목장을 만들기에 이르렀고 그것은 소를 돌려 드림으로써 마침내     아버지와 고향에의 찬란한 귀성을 실현한 것이다.


■ 향수와 우수 - 군산에의 기억


0 내 고향 군산항은 차라리 식민지 시대의 활력을 추억하는 정체된 도시로    상당한 시기를 지탱했다. 인구 증가가 멈춘 경험도 무릅썼다. 아직껏 일본    식 절 건물이 남아 잇고 일본식 주택과 세관, 병원 창고 따위의 건물 잔재    가 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그 문화적 의의에 앞서 그 시대를 온전히 넘어    서지 않았다는 사실을 드러낼지 모른다. 

   하지만 군산 역시 이전의 군산이 아니다. 내 스무 살 무렵까지의 고향인    군산의 정서적 흔적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군산 교외가 새로운 번화가가    되고 새로운 주거지가 되어 버렸다. 또한 군산항도 내항이라는 퇴락한 어    선 계류지 말고 바다를 메운 광대한 외항이 따로 군림하고 있다. 실지로     내 어린 시절에 강한 인상을 심어준 노래섬 따위는 이제 그것이 어디쯤인    지 알 길이 없다.


0 군산이라는 이름은 많은 구릉들이 이어져 있거나 흩어져 있는 상태를 그    대로 표현한 이름이다. 이것은 육지만이 아니라 바다위의 여러 섬들도 그    렇게 ‘군산’으로서 널려 있는 것을 포함한다. 그런 섬들의 하나로 무인도     노래섬이 있었다. 겨울 서북풍이 거세게 부는 날이면 그 섬의 소나무나 바    위나 벼랑들이 마치 통곡하거나 애절한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들린다. 그    런 소리가 유난히 마음 깊이 박힘으로써 그 섬 일대의 어부들이 노래섬이    라는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서북풍의 풍랑으로 많은 난바다와 연해 어선    들이 전복되면서 그 어부의 원혼들이 겨울바람 속에서 노래하는 것으로     여긴 나머지 그것을 섬의 이름으로 삼았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 노래섬이    내 고향에 있다는 것 때문에 내가 노래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여긴 적이     있다. 그래서 내 시 ‘노래섬’을 해외에 초청되는 낭독회에서 자주 읽기도     한다.


   바로 이 노래섬뿐 아니라 1950년대 초 1.4후퇴 당시 내가 아버지를 따라    부산을 목적지로 하고 피난하던 중에 기착한 비응도도 지금은 육지가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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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었으며 거기서 더 나아가 머물렀던 고군산 선유도 역시 언제 육지로 될지    모르도록 고향의 자연 변화는 놀랍기 짝이 없다.

   나에게 군산은 꿈이었다.


0 군산은 식민지 시대의 개항도시다.

   고대에는 한 갯마을이었다. 마한 54개국의 한 샤먼 사회였다. 백제시대     마서량(馬西良)이었다. 고대 후기에는 옥구현이라는 서해안 변경의 한 지    역이었다. 당연히 금강 입구이므로 당나라의 군대와 백제군의 치열한 전투    가 있던 곳이다. 오늘날에도 당나라 침략군 총수인 소정방의 자취가 금강    연안이나 김제 부안에까지 남아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아니, 백제와 일    본연합군이 다시 한 번 신라와 당 연합군과 백강 전투를 한 현장이 바로    군산 일대였다. 이런 금강 하구 일대를 진포(鎭浦)라고 총칭했다. 고려 말    왜구의 군선 오백 척을 최무선의 화약 작전으로 침몰시킨 진포대첩 이래    이곳을 고려 조선의 주목받는 국방의 요충으로 만들었다.  


   군산이라는 이름은 오늘날의 고군산군도 속의 선유도를 군산도라고 부른    것을 옮겨온 것이다. 선유도가 많은 봉우리의 섬들 중의 하나이고 그 섬     자체도 여러 봉우리로 이루어 졌으므로 군산도라는 이름은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그 군산이 군산진으로 옮겨오고 그래서 새 이름 선유도가 그 섬에    붙여졌다.

   군산은 나라 안의 역할로는 금강 일대의 전북 충남의 조세의 세곡선이     모여 있거나 경창으로 실어가는 천 석 적재의  배 여섯 척을 거느린 진성    창(鎭城倉)이었다. 그래서 군산의 속명은 군창(群倉)이기도 하다.


0 군산 개항이 일제의 식민지 전략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 자체가 근대 도시    가 하나의 ‘외국’이라는 문명적인 지적 이외에도 정치적인 의미가 강하다.    그뿐 아니라 군산이 ‘쌀의 도시’ ‘쌀의 항구’로 불리는 것 자체가 그 쌀이    일제 수탈에 의한 조선 농민의 피땀임을 간과하고 있다. 군산으로 이주한    일본인들은 토지와 운송, 금융 등을 자신들의 의지로 전단하며 군산 일대    의 농민들을 착취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군산은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고향    이름을 붙이거나 자신들의 왕 이름으로 거리와 학교 이름을 붙여서 살아    가는 곳이었다. 초등학교도 명치국민학교였고 소화국민학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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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또 필리핀을 점령하는 대가로 일본의 조선 통치를 지지한 미국의 언론이    그 당시 조선 일대, 특히 군산 교외의 일본인이 개간한 간척지와 새 농지    에서 조선인이 그전보다 잘 살고 있다고 현지 취재로 강조함으로써 일제    식민주의를 국제적으로 선전해 준 일도 있다. 그 새 농지들의 이름도 미야    자키 농장, 구마모토 농장 그리고 후지농촌이었다. 1943년 초등학교에 들    어가 군산 시내의 극장에도 들어가고 일본인 교사의 인도로 신사참배도     해야 했다. 이미 내 이름은 일본 사무라이 이름답게 다카바야시 도라스케    (高林虎助)였다.  


   이런 소년 시절의 나에게 군산은 내 꿈의 도시이기도 하지만 더 분명한    것은 그곳이 외국이고 외국으로서의 일본이라는 사실이었다. 자동차는 겨    우 몇 대만이 지나다니는 거리를 소가 모는 달구지가 지나가기도 하지만    일본 여인의 하오리와 게다짝 소리의 거리였고 국민복을 입은 일본 관리    가 거들먹대는 거리였다. 그런 곳에 어느 날 해방이 온 것이다. 그 해방이    도둑처럼 왔든 거지처럼 왔든 그것으로 인해서 갑자기 하나의 도시는 외    국으로부터 자신의 조국으로 바꾸어진 것이다.


0 내가 군산에 가는 것은 부모의 무덤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모르는 그곳     사람들의 언어 속에 남은 고향의 운율을 귀 기울여 듣는 일 때문이다. 이    제 고향은 향토가 아니라 도시의 구조물로 바뀌었다. 다시 한 번 도시는     나의 외국이고 타자이다. 

               

■ 내 고향 앞바다 선유도


0 선유도는 여러 섬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황금 어장인 칠산 바다의 어업     때문만이 아니다. 옛 수군절제사가 주재하는 국가 해상방위의 군산진이 바    로 이 섬에 있기 때문이었다. 이 군산진이 뒤에 육지로 옮겨졌기에 이곳은    고군산이 된 것이다. 

   오랫동안 중국과 일본의 수적들이 자주 출몰한 곳이므로 고대 이래로 고    충 어린 안보의 전초 기지였던 이 섬은 한 대(漢代)에는 중국의 망명 세력    이 머물던 곳이기도 했다. 당대(唐代)에는 백제를 치는 당군이 덕적도와     이곳 일대에서 상륙 병력을 정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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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선유도는 선유 8경을 말한다. 그 여덟 경치 중에 ‘선유낙조’가 꼽힌다. 과    연 이 섬의 망주봉에서 해 지기 전의 낙조는 인간을 옴짝달싹 못하게 하    는 심미의 극치를 보여 준다.

   하루의 끝은 이렇게 장엄한 아름다움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해 지는 곳이 어찌 이곳뿐이겠는가. 어찌 서해뿐이겠는가. 한반도 동해     난바다에서도 백두대간 등뼈 너머로 지는 해의 낙조는 장관이다. 그 산줄    기에서 동해 쪽으로 물이 흐르므로 옛사람들이 그것을 ‘서출동류수(西出東    流水)’라 했다. 그 물은 투명하고 이끼가 끼지 않는다. 외금강 외설악의 물    이 맑은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한반도의 주요 하천은 거의 동에서 서로 흘러가 서해에 접어들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서해는 남해와 함께 한반도의 모든 물과 삶의 흔적들    을 다 받아들이는 하나의 거대한 종합이다. 그래서 동해가 예술의 전당이    라면 서해는 삶의 마당인지도 모른다.

   이런 서해 일대의 일몰은 그만큼 인간의 삶과 함께한다. 그래서 서해 낙    조에는 인간 서사의 여러 요소가 잠겨 있는 것이다.

   어디 하나 막아설 것도 없는 창망한 바다 수평선 그 위와 아래 전체를     낙조로 채워 거기에 하루를 마친 사람의 흉금에 무늬 진 애조가 더할 때    그 낙조의 순간순간은 한층 더 현란해진다.


   감히 어떤 예술이 이 낙조를 흉내 낼 수 있는가. 그 예술이 흉내 낼 수     없기에 낙조의 저편에서 자신의 예술을 독립시키는 것이 아닌가.

   지난날 나라의 명운이 위태로운 시절의 한 소년이었던 내가 보았던 낙조    의 기억은 더듬어지지 않았다. 이제 새삼스럽게 만나는 이곳 낙조의 절경    은 늦게 찾아온 나에게 종교적이기까지 하다.

   풍경의 진정한 의미는 그 풍경에 감정을 더할 때에만 가능한 것인지 모    른다. 그래서 지는 해가 내일 다시 떠오를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낙조    는 이 세상 최후의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군산 일대와 고군산도에는 고운 최치원의 탄생설이 있다. 실지로 그의 시    호 문창(文昌) 그대로 문창리가 있고 문창초등학교가 있다. 고군산도 여러    섬에도 그가 한 시기를 머물렀던 흔적이 있다. 이 섬에서 그가 글을 읽는    소리로 바다 건너 중국의 학도들이 글을 배웠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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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실로 오랜만에 나도 낙조의 시간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 말도 의    식도 다 두고 온 자의 넋이 필요했다. 낙조에는 수많은 넋의 찰나들이 들    어 있다. 이 낙조 전체가 밤의 시간에 묻혀 버린 다음날 나는 내 삶의 현    장인 육지로 가야 한다. 그 육지가 끔찍하다. 

   내가 돌아갈 사회는 무엇인가. 내가 돌아가서 살아야 할 국가는 지금 어    떤 곳인가. 해가 뜨는 아침의 희망도 해가 지는 저녁의 회한도 다 오염된    인간의 발악이 지속되고 있는 곳이 아닌가. 오직 나만이 있고 나의 이익만    이 정당하고 다른 신념들은 모두 나의 신념의 적이 되는 그 증오가 세상    의 힘으로 행사되고 있는 곳은 아닌가. 


   이런 시대에 나는 누구의 진지한 이웃이 되어 본 적이 있는가. 누구의 진    실에 다가선 적이 있는가.

   한 해를 보낸다. 보내고 난 빈 터에 새해에는 무엇으로 오는가.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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