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기 혁 명 2

2011. 12. 9. 17:58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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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의사 박경철의

       자   기   혁   명


제3장 나를 감동시키는 자기혁명


◉ 자기 삶의 혁명가가 돼라


습관은 제2의 천성으로 제1의 천성을 파괴한다.   - 파스칼 -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은 단순한 습관이나 버릇이 아니라 사물을 대하는 태도에 관한 이야기다. 실제 모든 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일을 대하는 자세 혹은 태도다. 우리는 대개 성과의  차이가 능력 차이 때문에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태도의 차이, 즉 집중력의 차이 때문이다. 또한 자신이 하는 일에 몰입하는 모습을 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좋은 태도는 일생을 통해 교정해 나가야할 중요한 과제다.


■ 어떤 태도를 지녔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


많은 사람이 꿈과 현실의 거리를 느끼는 순간, 자신의 문제가 아닌 외부의 문제를 먼저 떠 올린다. 자신이 꿈을 이룰 수 없는 가장 큰 걸림돌이 자신의 노력 부족이 아니라 사회구조적 문제와 환경, 여건 등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외적인 요인은 나 스스로 최선을 다한 다음에야 거론할 수 있는 문제다.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에서조차 최선을 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외적인 요인을 거론하면서 최선을 다해도 소용없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다. ‘해야 한다’는 이유로 ‘할 수 있다’면 좌절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삶은 시행착오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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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이루는 방법은 오로지 실천뿐이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인간이 신이 아닌 이상, 꿈은 항상 멀리 있고 실천은 당장의 문제다. 아무리 많은 꿈을 꾸고 결심을 해도 시간이 지날수록 꿈은 줄어들고 실망은 커지며 자기연민만 쌓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우리가 실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태도의 변화다. 태도는 영어로는 애티튜드((attitude)라고 번역하지만 심리학 용어로서 애티튜드는 ‘태도’라는 우리말과 살짝 뉘앙스가 다르다. “애티튜드는 라틴어 앱투스(aptus)에서 기원한 것으로 ‘준비’ 혹은 ‘적응’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말이며, 어원적 의미로 따지면 무언가를 행할 준비가 된 상태쯤을 지칭하는 말”이라고 설명한다.

어쨌건 애티튜드 혹은 태도는 전 생애에 걸쳐 나의 삶을 좌우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다. 이는 타인의 관점에서 나를 평가할 때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 는 속담이. 또 나의 관점에서 나를 볼 때는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떠오르는 말이기도 하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나의 태도는 남이 나를 평가하는 기준이자 내가 성공에 이르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겠다.


■ 나쁜 습관을 버리는 데서부터 시작하자


주변을 돌아보면 우리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정신과 육체와 시간을 갉아먹는 것들이 널려 있다. 이런 것들을 버리지 못한다는 것은, 인생이라는 먼 길을 가야 하는 나그네가 어깨에 모래주머니를 주렁주렁 매달고 가는 것과 같다.  먼 길을 떠날 사람에게 필요한 애티튜드는 최대한 단출한 짐을 차리는 것이다.


필자는 2000년 1월 1일 술, 담배, 골프 등을 동시에 끊기로 결심했다. 서기 2000년이라는 뉴 밀레니엄을 맞아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선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쉽지 않았다. 술과 골프는 비교적 쉽게 끊었지만, 담배는 그 후에도 몇 년간은 흡연자와 비흡연자의 경계를 오락가락 했다.

그 후 나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평소 취미로 읽어왔던 경제 관련 서적들을 좀 더 맑은 집중력으로 공부할 수 있게 되었고, 여유 시간에 틈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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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이라는 에세이를 두 권이나 출간할 수 있었으며, 주말에 아이들과 함께하는 귀중한 시간을 얻게 된 것이다. 세상이 달라진 경험이었다.

그렇게 10년이 지나고 2010년이 되자 나는 나에게 다이어트라는 새로운 선물을 주고 싶어졌다. 당시 나는 체중이 100Kg을 넘나들고 있었고 석 달만에 20Kg의 감량에 성공했다.  그 결과 아침 라디오 진행 등 다른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6월부터 100일간 진행한 ‘청춘 콘서트’를 무리 없이 진행할 수 있는 지구력이 생겨났다. 그렇게 전국 3만 명의  청년을 만나고 그들과 호흡하며 보냈던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얻게 된 것이다.

그 후부터 청년들이 필자에게 고민을 상담하면 제일 먼저 자신의 장점과 단점 10가지씩을 적어보라고 주문한다. 그러면 대개 장점은 서너 가지밖에 적지 못하지만 단점은 10가지를 다 채운다. 뜻밖에도 우리는 자신의 장점보다 단점을 더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를 앞에 놓고 당분간 장점을 채우려 하지 말고 항목에 적힌 단점 중에서 가장 버리기 쉬운 것을 버리려는 노력을 해보라고 조언한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나서 다시 자신의 장단점을 다시 적어보라고 하면 놀랍게도 줄어든 단점의 숫자만큼 장점이 늘어나서 그 수가 비슷해진다. 단점을 줄인 자신감이 장점을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만든 것이다. 물론 이 단계가 완성은 아니다. 결심이 강한 초기 단계에서는 이런 변화가 쉽게 일어나지만 자칫하면 금세 원위치가 되기 쉽다. 이는 습관의 힘이 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시기만 잘 극복하면 그 후로는 자신이 극복해온 성과에 애착이 생기며 태도가 달라진다. 그렇게 새롭게 얻어진 태도가 새로운 습관으로 대치되는 것이다.


그러니 긍정적 애티튜드를 만드는 출발은 내일부터 무엇인가를 하겠다가 아니라 내일부터 무엇인가를 하지 않겠다가 먼저인 셈이다. 즉 나의 목표를 이루는데 필요한 애티튜드는 버리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차차 걸음이 빨라지며 그 과정에서 새로운 애티튜드가 형성되어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긍정적 애티튜드다.


■ 자기 자신의 주인으로 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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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Che Guevara)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곳은 전 세계에서 가장 뜨거운 격전지다. 나는 우리가 콩고에서 제국주의자들에게 일격을 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레방아를 향해 질주하는 돈키호테처럼 나는 녹슬지 않는 창을 가슴에 지닌 채 자유를 얻는 그날까지 앞으로만 앞으로만 달려갈 것이다.


필자가 혁명이라는 단어를 화두로 들게 된 것은 2010년 말 법륜 스님을 만난 이후다. 스님은 생활불교를 주창하며 대중속으로 들어온 성직자다. ‘법정’이라는 이름이 우리가 잃어버린 본질적인 가치에 대한 성찰을 떠올리게 한다면, ‘법륜’이라는 이름은 어느새 실천과 삶이라는 영역을 표상하는 이미지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필자는 불자가 아니지만 올해 초에 법륜 스님을 만나 고민하고 있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해 질문을 드렸다. 그때 돌아온 것은 답이 아니라 “당신은 자기 자신의 주인인가?” 하는 반문이었다. 순간 말문을 잃고 말았다. 허를 찔린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만든 틀에 스스로를 가둔다. 성취한 사람도,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자신이 규정한 틀 안에서 살아간다. 사람은 어떤 틀 안에 있는 것을 안정적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국가나 사회도 마찬가지다. 모두 자신이 만든 틀 속에 자신을 가두고 그 틀을 유지하느라 애를 쓴다. 물론 사람에 따라 그 틀이 클 수도 작을 수도 있지만 크든 작든 경계는 있기 마련이고 그 경계는 결국 그의 사유와 행동을 제약하게 된다.


혁명성은 자신의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것, 새로운 가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렇게 기존의 것을 타파하는 행동이 바로 혁명성이며, 그것을 행한 결과가 바로 혁명이다.

혁명의 두 번째 대상은 한계다. 경계가 안주하려는 자신의 틀이라면 한계는 확장성을 제약하는 심리적 감옥이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무의식의 장난이다. 심하게 말하면 내 스스로 나의 한계를 잘 알고 있다는 말은 반듯한 자기 성찰의 결과물이 아니라 무의식에 농락당한 에고의 비명 소리에 불과하다. 우리는 막연히 자신의 한계가 콘크리트와 같이 단단한 성벽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누구에게든 처음부터 한계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나의 한계는 내가 가다가 쓰러지는 바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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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인 셈이다. 한데 우리는 그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한 두려움으로 섣불리 갈 수 있는 거리를 가늠해버린다.


삶의 본질이 바로 그와 같다. 혁명가의 삶은 늘 진취적이고 의욕이 넘치지만 안주하는 사람의 삶은 늘 회의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혁명가로 살아야 하고 이런 혁명가의 삶만이 자기가 주인인 삶인 것이다.


◉ 경계를 넘어서야 진보가 온다


변화는 우리가 늘 누군가를 또는 무엇인가를 기다린다고 해서 찾아오는 게 아니다. 우리 자신이 우리가 기다리던 사람이고 우리가 바로 우리가 추구하는 변화다.                     -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


■ 보편성을 깨는 것이 진보의 시작이다


모두가 평균에 서면 진보는 없다. 예술에서 새로운 사조는 누군가가 당대의 경향을 깨고 나옴으로써 탄생하고, 과학은 기존의 원리를 부정하고 새로운 법칙을 찾으려는 도전의 결과로 발전한다. 그런 측면에서 보편성을 부인하고 특수성을 갖는 것은 혁명가의 그것과 같은 초월성을 드러내는 행위다. ‘앤트로피(Entropy)’의 저자 제러미 리프킨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회학자들은 지난 20만 년 간의 인류문명의 발전이 그동안 이 땅에 살아온 모든 인류의 노력의 결과라고 말한다. 이것은 모든 인류에게 경의를 표하는 우아한 시각이지만 진실은 아니다. 지금까지 문명과 문화의 발달은 0.1%의 창의적 인간이 다fms 사람은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꿈꾸지 않는 것을 꿈꾸며, 모두가 보지 못하는 어두운 곳에 깃발을 꽂고 이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새로운 땅이라고 외치면, 0.9%의 안목 있는 인간만이 그것을 알아보고 그들과 협력하고 후원하며 새로운 문명을 건설한 결과다. 나머지 99%는 이 1%가 모든 것을 기초를 닦고, 새로운 계단을 놓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그 위에 올라와 세상 참 많이 달라졌다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또다시 그곳에 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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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사회를 규정하는 원리는 늘 다수의 뜻, 즉 평균의 힘에 의지하게 된다. 왜냐하면 그것이 실패에 대한 책임을 모면할 수 있는 가장 무난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혁명가는 다르다. 그들은 태생적으로 초월성을 갖고 있다. 모두가 척박한 땅에서 굶주리고 살아갈 때, 이대로 앉아서 죽느니 가다가 죽더러도 차라리 저 바다 건너 다른 땅을 찾아나서겠다며 여정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렇게 태생적으로 초월성이 잠재되어 있는 사람들이 예술가가 되고 과학자가 되며 시대를 이끄는 정치가나 창의적인 사업가가 된다. 그들에게 도전은 영혼이고 안주는 정신의 죽음이다.


그러나 소극적인 사람들은 나를 초월하기 위한 수단으로 머리를 깎고 산사에 들어가거나 니체처럼 스스로를 고립시켜 자신의 세계에 빠져든다. 사회의 일원으로 평범하게 살아가는 이들도 삶에 진지한 사람이라면 언젠가 한번쯤 이런 정신적 초월에 대한 갈망을 느끼게 된다. 삶에서 도전하고 나아가고 지치는 과정이 반복되면, 나중에는 가시적인 것이 아닌 피안의 영역에 대한 열망이 생기기 때문이다. 철학이나 종교, 명상에 심취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연주의자가 되어 현실을 등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패배주의에 물든 무력한 초월이다.


사회와의 긴장과 협력을 유지한 초월


사람은 애벌레가 허물을 벗고 나비가 되듯 자기변화의 과정을 수차례 겪으면서 성숙한다. 그러나 사회적 존재라는 특성상 그 과정에서 일정 부분 내가 속한 사회와의 긴장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만약 나의 초월성이 그것마저 완전히 넘어서기를 바란다면, 내가 속한 사회적 한계를 넘어 사회와 창조적인 관계를 수립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사회적 파탄자, 반사회적 인간형으로 분류될 수도 있다. 같은 혁명가였지만 빈 라덴과 체 게바라에 대한 평가가 다른 것은 바로 이 차이 때문이다.


초월이 내가 속한 사회의 미래가치와 같은 방향이라면 영웅이 되겠지만, 사회의 긍정적인 발전방향과 어긋나면 정신병자 취급을 받게 될 수도 있다. 물론 우리가 모두 체 게바라, 스티브 잡스가 될 수는 없고 또 그럴 필요도 없다. 인간은 사회와 긴장과 협력을 유지하면서 ‘of the world'가 아닌 ’in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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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rld'를 자각하며, 그 안에서 창의성을 개발하고 창조적 행위자로서의 자신을 만들어 가야 하는(변화해야 하는) 숙명적 존재일 뿐이다. 그러므로 두드러진 성과 자체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 내면의 불길을 가다듬는 시간, 청춘


열정이 끓어오르지 않으면 가르치지 않고, 표현하려고 더듬거리지 않으면 말을 거들어 주지 않는다. 하나를 가르치는데 세 개를 깨우치려 하지 않으면 더는 가르치지 않는다.        - ‘논어’ 술이 편 -


청년의 시기는 가치관에 입각해서 실존적 결단을 내려야 하는 중요한 때이므로  먼저 뜻을 세우는 일이 중요하다. ‘입지(立志)’는 향후 자신의 길에 대한 선언이자. 그것을 위해 어떻게 노력할 것인가에 대한 자기개혁의 출발이다. 바른 언어로 뚜렷하게 나의 길을 선언하는 순간 비로소 내가 실존적인 인간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 열정은 인생이라는 여정의 동반자다


그 길은 지식을 익히고 지혜를 쌓으며 실천하는 길이며 그 길을 가기 위해서는 열정이 함께해야 한다. 하지만 청년기는 이렇게 뜻을 향해 나가려는 의지보다 유혹하는 것들에 대한 욕망이 더 큰 시기다. 사실 이것은 평생을 괴롭히는 문제이기도 하다. 분명히 바른 길이 있고 가야할 길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매번 유혹을 떨치기가 어렵다. 하지만 ‘논어’는 스스로 이기려는 열정이 없는 자는 가르칠 필요조차 없다는 가혹한 선언으로 답을 대신한다.

‘논어’뿐 아니라, 새뮤얼 스마일스의 ‘자조론(自助論)’에 등장하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속담 역시 같은 맥락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열정은 모든 것의 근원인 셈이다.


지금 우리사회는 청춘이 좌절하고 기성세대가 체념하고 있는 사이 충동이 사라진 열정의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 충동은 열정과는 반대의 장벽이다. 청년의 열정은 종종 충동과 오인되기 쉽고 그 둘의 중간에 있는 애매한 말이 정열이다. 정열은 대상이 무차별적이고 심지어는 자기파괴적 행동마저 정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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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포장된다. 열정이 대상을 뚜렷이 하며 바른 길을 가기 위한 열망이라면 정열은 감정적이고 도취적이다. 특히 청년기는 바람직한 역량을 강화하려는 의지보다 감각적인 것들을 향한 욕망이 더 강한 시기이므로 열정과 정열 그리고 충동을 구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침묵과 사색, 교양과 문화다. 이런 것들은 대개 호흡을 가다듬는 역할을 한다.


■ 내면의 불길을 가다듬는 인고의 시간이 청춘이다


어느 강연에서 ‘청춘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답변한 요지다.


청춘은 ‘발산’이 아니라 ‘응축’의 시기다. 실패를 용인하는 문화가 필요하다는 말은 좌충우돌에 대해 책임질 필요까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청춘의 가슴에는 활활 타는 불길이 있지만, 그것이 뜨겁다고 함부로 토해내며 이리저리 방황하는 것은 의미없는 소진에 불과하다. 뜨거운 불길을 쉽게 토하지 말고 뱃속 깊숙이 삼켜라. 그리고 다듬고 응축해라. 그 불길이 뜨거운 구슬이 되어 가슴속에 여의주를 품게 될 때, 어느 한순간 벼락처럼 쪼개며 천둥처럼 울리는 것이 청춘이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이때 쓰는 말이다.

준비된 자에게만 기회가 온다. 그런데 기회는 일정부분 행운과 함께한다. 때문에 준비된 도전이 행운을 만나지 못했을 때 그 실패는 가치있고 다음에 다른 기회를 기다릴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절치부심이다. 하지만 좌충우돌에는 기회도 행운도 없으며 방종에 대한 가혹한 대가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이렇듯 청춘은 무작정 발산하고 소비하는 시기가 아니다. 뜨거운 열정으로 내면의 불길을 가다듬는 인고의 시간이 바로 청춘이다.

청춘은 특권이다. 실패는 경험이 되고 기회는 늘 손에 닿는 거리에 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청년의 도전은 미숙하기 쉽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은 좌충우돌도 용인된다는 말이 아니다. 치열하게 뜻을 세우고 뜨거운 열정으로 내 달리다가 자신의 노력이 자신을 감동시키는 순간, 일거에 함성을 지르며 벼락처럼 쪼개는 것이 청년의 도전이다. 행운의 여신은 바로 그런 도전에만 깃드는 까다로운 수호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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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통해 사유의 경계를 넓혀라

■ 철학은 사유의 방법을 알게 해 준다


학생들과의 강연과 질의응답이 마무리가 될 즈음 내가 하는 말은 늘 좋은 책을 많이 읽으라는 것이다. 단 많이 읽되 잘 읽으라고 말한다.

책은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 중에서 부실한 부분을 지우고 새로운 부분을 입력하는 메모리반도체 같은 것이다. 새로운 지식이 들어오면 기존의 지식 중에서 진부한 것이 지워지고 그 위에 새로운 지식이 덧입혀지는 것이다. 좋은 책을 읽고 새로운 사유를 만나 지식을 얻게 되면 기존의 지식체계가 수정되고 덧칠된다. 그렇게 독서를 통해 내가 가진 지식체계를 계속 수정해 나가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책읽기는 나를 연마하는 것이다. 때문에 좋은 책이 아닌 나쁜 책(정의 하기는 어렵지만)은 이미 갖추어진 나의 지성에 오물을 덧씌우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또 하나 학생들에게 강연할 때 꼭 빠뜨리지 않는 이야기가 ‘철학의 중요성’이다. 철학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많지만 청소년기에 철학이 필요한 첫 번째 이유는 ‘사고’ 아니 ‘사유’의 방법을 알게 해 주기 때문이다.

정보사회가 되면서 지식은 점점 세분화되고 깊어졌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남에게 배우는 공부는 넘쳐나지만 스스로 익히는 공부가 사라졌다. 그 결과 ‘통섭(統攝)’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한여름 나무를 뒤덮고 있는 보이지 않는 수백 개의 가지가 하나의 둥치로 합쳐진다는 사실을 아는 것. 각각의 현상을 합쳐서 이해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 바로 통섭의 사유다.

하지만 통섭이라는 것이 말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자기 자리에서 한 발 물러나 그 자리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을 ‘객관적 사유’라고 할 때 그것이 잘 이루어진 것을 가리켜 비로소 통섭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통섭, 직관, 통찰을 기르는 가장 좋은 학습이 바로 철학을 공부하는 것이다.


■ 인문학의 존재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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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접하는 무든 학문의 근본은 수학과 철학이다. 수학적 지식은 정교해야 하고 한 치의 오차도 있어서는 안 되며 그것이 검증되면 원리가 되고 부정되면 폐기되며 다른 누군가의 업적 위에 새로운 업적이 쌓이는 것이다. 그 결과 시간이 지날수록 탑은 점점 높아지는데, 그것이 소위 과학문명의 발달이다.


반면 철학이 바탕이 되는 학문은 수평적이고 산발적이다. 문학, 사학, 철학 같은 인문학들이 그러하다. 이런 학문들의 특징은 드넓은 들판에 넓게 펼쳐지는 것이다.

철학적 사유는 개별적으로 존재한다. 미적분을 모르면 로케트를 발사할 수 없지만 데카르트를 몰라도 칸트를 논할 수 있다. 따라서 철학적 사유는 독립적이며 수평적이고 자유롭다. 인문학은 이런 철학적 특징을 바탕으로 한다.

과학기술의 시대에 ‘높이 더 높이’를 외치며 첨탑만을 쌓아 올리고 인문학이라는 땅을 다지지 않는다면 정작 그 탑을 어디에 놓아야 할지.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를 끝없이 고민할 수밖에 없다. 즉 과학기술이 하드디스크라면 인문학은 운영체제에 해당하는 셈이다. 이것이 우리가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해야 하는 당위고, 과학에서 수학을 인문에서 철학을 중시하는 이유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과학기술의 경쟁에 내몰려 통찰과 안목은 소멸되고 첨탑쌓기에만 몰두하여 이성을 잃고 방황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이것이 천문대인지 망루인지 송신탑인지, 또 이 탑을 여기에 새우는 것이 맞는지 틀리는지조차 잊어버리고 헤매게 된 것이다. 과학 우위의 시대에 철학 부재의 사회가 낳은 비극이다.           


최근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인문학 아전에 먼저 철학을 접해야 한다. 철학적 사유를 도외시하고 인문학을 이야기하는 것은 인수분해를 하지 못하면서 혜성의 궤적을 추적하려는 것만큼이나 부자연스럽다.


■ 결과가 아닌 과정의 중요성을 이해하는 게 철학이다


철학은 문자 그대로 사유의 학문이다. 자연과학 실험실이 약품과 기구들을 이용해 결과를 낸다면, 인간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사유의 실험실은 그가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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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하기에 따라 우주를 창조하기도 하고 세상을 가로지르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철학은 그런 사유의 실험실이다. 하지만 철학은 자연과학처럼 결과를 두고 평할 수 없다. ‘절대적 진리’라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형이고 실체가 없다. 


철학은 결과를 말하지 않는다. 또 내일의 철학은 오늘의 철학과 다르다. 과학은 앞선 연구자의 업적 위에 새로운 연구자가 벽돌을 쌓아나가는 것이지만, 철학은 순식간에 선각자의 사유가 뒤집어지거나 분열하고 다시 합체되기도 한다. 인간의 사유란 경계가 없기 때문이다.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철학사를 먼저 공부해야 한다. 철학사는 사유의 흐름이다. 인간의 사유가 어떻게 변해 왔는지 그 시대에는 왜 그런 철학이 등장했는지 짚어보고 그 다음에 알고 싶은 철학자를 골라 산을 오르면 된다.


◉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균형 잡기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하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가슴으로 사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머리로 사랑하는 것이다. 굳이 표현하자면 ‘열정’과 ‘이성’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 가슴으로 하는 사랑과 머리로 하는 사랑


가슴으로 하는 사랑의 방식을 우리는 흔히 ‘반했다’라고 말하는데.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왜 그녀(그)를 사랑하는 거야?” 라고 물어도 대답을 하지 못한다. 반하는 데는 원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감정은 사실 영원하지 않고 곧바로 ‘싫증’으로 이어진다.

깊은 우정과 사랑은 오랜 시간이 필요하고 그런만큼 쉽게 변하지도 않는다.

한 때 유럽에서는 순간적인 감정에 충실한 문화가 있었는데, 후세 사람들은 이를 가리켜 ‘퇴폐적’ 또는 ‘세기말적’ 이라고 표현했다. 순간적으로 반하는 감정에는 머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물적이 될 수밖에 없다.


■ 규율을 통해서 사회를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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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태어나는 순간에는 이성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아기는 욕망에 따라 움직인다. 즉, 인간은 태어날 때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차차 눈을 뜨고 귀가 열리면서 엄마가 말하는 “지지”나 “안 돼”같은 ‘금지’를 먼저 배우게 되는데 그것은 아이가 위험을 모르기 때문이다.

약 7세가 되면 학교에 들어가 작은 사회를 배운다. 여기서는 물론 우선되는 것은 금지다. 무엇을 ‘하라’보다 해서는 ‘안 된다’는 규율이 더 강력하게 교육된다. 지각을 하면 안 된다. 공부 시간에 졸지 마라. 선생님께 버릇없이 굴면 큰일난다. 나쁜 친구를 사귀면 안 된다. 친구들과 싸우지 마라. 담배를 피면 큰일난다…….


그런데 요즘 우리 사회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진취성을 기른다는 이유로 이런 금지 교육을 의도적으로 멀리하기도 하고 또 학교가 단지 상위학교로 진학하기 위한 학원으로 전락해버리면서 이런 사회적 규율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있다. 금지 교육은 지나치면 독이 되지만 교육에서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다. 학교에서 금지 교육을 통해 몸에 밴 사회적 규율들이 졸업 후 사회라는 더 큰 광장으로 나아갈 때 ‘공존’의 지혜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다음에 기다리는 것은 사회다. ‘사회’라고 불리는 성인의 세계에 진입하면 이런 금지가 사라질까? 자유롭게 내 마음대로 하며 살 수 있을까? 물론 그렇지 않다. ‘자율’이라는 이름의 더 무거운 금지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이렇듯 인간이 사회를 구성하고 살아가는 이상 금지와 제약은 응당 겪어야 할 일상사다.


◉ 자신의 잠재력을 찾는 법


■ 재능의 파악이 노력보다 우선한다


다니엘 레비턴 박사의 ‘만 시간의 법칙’은 베를린 뮤직아카데미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해서 8,000시간을 연습한 학생과 1만 시간을 연습한 학생의 실력차가 크더라는 연구결과를 BBC 과학메거진을 통해 발표했다. 핵심은 최소 1만 시간은 연습을 해야 뇌가 거기에 적응하고 한계를 넘어서게 된다는 것이었다.

‘만 시간의 법칙’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우공이산(愚公移山)’의 고사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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럼 우직하게 노력하는 것만을 중요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물리가 트이는 최소한의 지점을 이야기 하고 있다.     


여기서 논점은 노력과 재능의 문제이다. 노력은 실천력의 문제여서 자신의 결심에 따라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재능은 복잡한 문제다. 자신이 어떤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 알기란 쉽지 않다. 심지어 평생토록 자신이 어떤 분야에 재능이 있는지 모르고 사는 사람도 많다.

필자는 멘토링을 받으러 오는 청년들에게 제일 먼저 “당신이 잘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 반 정도는 우물쭈물 답을 하지 못하고 답을 한 사람의 반은 자신의 취미나 특기를 말한다. 이처럼 자신의 잠재적 재능을 파악하고 그에 대해 주의깊게 생각해본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안타까운 일이다. 노력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하더라도 무엇을 위해 노력할지 모른다면 그야말로 산을 옮기겠다는 우직한 각오만 되뇌게 될 테니 말이다. 결국 노력과 재능의 문제여서 핵심은 스스로의 재능을 파악하는 것이 우직한 노력보다 우선한다는 것이다.  


■ 자신의 잠재력을 스스로 찾아라


사람들은 제각각 손재주, 말재주, 그리는 재주, 공부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지만 우리 사회는 공부하는 재주를 가진 사람만 성실근면하고 우수한 자원이라고 말한다. 때문에 다른 분야에 빛나는 재주를 가진 사람들까지 모두 공부라는 재능의 줄에 서서 자신의 재주를 사장시키고 있다. 이는 사회적으로도 엄청난 낭비다. 이런 사회는 공부에 재능이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실패의 구렁텅이로 몰고 가는 자기파괴적 사회다. 세상은 대량생산의 시대를 지나 각자가 가진 다양한 창의성이 씨줄과 날줄로 엮이면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런 시대에 우리는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는 셈이다.


사람은 각자 다른 우주다. 또 누구나 자신의 눈으로 타인을 바라본다. 따라서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잠재력을 정말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가늠하기란 기본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이경규 씨는 방송인 강호동의 재능을 알아 보았고, 김연아와 박태환 선수의 부모는 어린 자녀의 재능을 발견했다. 또 다른 사람의 잠재력을 발견하고 다듬어서 꽃봉오리가 터지게 도와준 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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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난 스승이나 멘토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대개 우연한 경우거나 스스로 성숙하지 못한 어린 시절에만 가능한 일이다.

청년의 경우 자신의 잠재력은 자신이 판단하는 것이 옳다. 그러나 이때 자기를 바라보는 인식능력의 부족이 걸림돌로 작용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받아온 교육이나 경험의 폭이 너무 좁은 탓이다. 스스로 재능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체험을 하고 그 결과 자신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를 알아채는 과정이 필요한데 현대사회의 복잡하고 분업화된 시스템 속에서 다양한 체험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의 일상은 주어진 과제를 해결하기에도 벅차기 때문이다.


■ 잠재력은 체험을 통해 발견된다


현실이 이렇다 해도 자신의 잠재력을 발견하는 일은 다양한 체험뿐이다. 체험을 통해 성과를 가늠해봄으로써만 자신의 잠재력을 발견할 수 있다. 피카소 옆에 스케치북이 없었거나 모차르트에게 피아노가 없었다면 지극히 평범하게 삶을 마감했을지도 모른다. 기회를 찾지 않고 기회를 잡을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모든 일을 체험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때 중요한 것이 바로 간접체험이다. 광범위한 독서를 통해 다양한 분야를 간접적으로 체험해볼 수 있고 문화예술을 접함으로써 자신의 영감을 테스트해볼 수도 있으며, 새로운 곳에 여행을 다니고 봉사활동에 참여해서 다양한 사람들과 사귀고 어울리는 재능이 있는지 가늠해 볼 수도 있다.

자신의 잠재력을 발견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준비는 호기심이다.

늘 읽던 분야의 책만 읽는다면 그것은 익숙한 놀이다.

늘 다니던 곳만 여행한다면 그것은 호기심이 아니고 산책이다.

인생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도발이고 혁명이다.  

◉ 자기 호기심을 자극시켜야 진정한 노력이다


최선을 다했다는 말을 함부로 쓰지 마라. 최선이란 자기의 노력이 스스로를 감동시킬 수 있을 때 비로소 쓸 수 있는 말이다.    - 조정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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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조정래 선생님을 뵈었을 때 필자에게 해 주신 말씀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노력 혹은 최선이라는 말을 참 자주 쓴다. 하지만 노력에는 경계나 한계가 없다. 사막을 여행하던 사람이 쓰러지는 순간까지 걸었다고 해서 그것을 노력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을 뿐이다. 천재가 놀라운 발명을 했다고 해서 그것을 노력이라고 보지 않는다. 대신 재능이라고 할 뿐이다.


■ 스스로를 감동시키는 게 노력이다


그럼 노력의 정의는 무엇일까? 조정래 선생님에 따르면 어떤 일을 할 때 스스로 감동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노작가의 삶을 대하는 진정성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조정래 선생은 집필의 과정을 ‘황홀한 글 감옥’이라는 비유로 표현했다. 글을 쓰는 과정을 감옥으로. 창작의 기쁨을 황홀함으로 표현한 셈이다. 10년 이상 자신을 좁은 집필실에 가두고 스스로 감옥에 갇혔다고 생각하며 이루어낸 성과가 ‘태백산맥’인 것이다. 그래서 그분이 내린 최선에 대한 정의는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천둥소리가 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노력은 힘들다. 힘들지 않다면 그것은 노력이 아니다. 하지만 노력은 꿈에 다가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 고통에 맞서는 도전은 성장의 과정이다.

하늘이 어떤 이에게 장차 큰일을 맡기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 마음을 수고롭게 하고 그 근육과 뼈를 지치게 하며 육체를 굶주리게 하고 생활을 곤궁하게 해서 행하는 일이 뜻대로 되자 않도록 가로막는데, 이것은 그의 마음을 움직여 그 성질을 단련시키며 예전에는 도저히 할 수 없었던 일을 더 잘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사람은 언제나 잘못을 저지른 뒤에야 바로잡을 수 있고, 곤란을 당하고 뜻대로 잘되지 않은 다음에야 분발하고 상황을 알게 되며, 잘못된 신호가 나타난 뒤에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 내부적으로 법도 있는 집안은 제대로 보필하는 선비가 없고, 외부적으로 적이나 외환이 없는 나라는 언제나 망하게 된다. 우리는 그 다음에야 우환이 사는 길이고, 안락이 죽는 길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 맹자(孟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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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에 따르면 만약 내가 고민 때문에 고통스럽다면 그 고통은 그것을 넘어서려는 의지의 발현이고 내가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는 증거인 셈이다. 역으로 내가 안락하고 고민이 없고 아무런 걸림 없이 편안하다는 것은 이미 내리막이 시작되었거나 혹은 안주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신호인 셈이다. 또 시련에 봉착하는 것은 무엇인가 문제가 생겼거나 장벽이 나타났음을 알려주는 파수꾼이다.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작은 시련이 닥쳤을 때, 그것이 개선과 극복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간과해 더 큰 시련에 맞닥뜨리기도 한다.


같은 맥락에서 하인리히 법칙은 많은 점을 시사한다. 트레블러스 보험사에서 리스크관리 업무를 맡고 있던 하인리히는 보험사에 보상 요청된 산업재해들을 분석해본 결과 일정한 통계적 법칙이 존재함을 밝혔다. 그에 따르면 산업재해로 인한 중상자가 1명 나오기 전에 이미 같은 사유로 29명의 경상자가 발생했고, 또 그 전에 같은 사유로 상해를 입을 뻔했던 잠재적 부상자가 300명 있었다고 한다. 즉, 큰 사고는 우연의 결과로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에 이미 그 사고를 경고하는 사소한 사고들이 반복적으로 발생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소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주의를 기울여 원인을 파악하고 고치면 더 큰 사고를 막을 수 있지만 작은 사고를 가볍게 여겨 무시하면 나중에 대형 참사로 이어진다는 의미다.


따라서 우리는 늘 자신에게 닥친 작은 시련을 외면하거나 무시하지 말고 반드시 바로잡아 나가야 한다. 사냥꾼은 참새를 잡을 때조차 최선을 다하듯이 우리 역시 작은 문제건 큰 문제건 신중하게 원인을 분석하고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야만 기회라는 결과가 찾아온다. 어떤 위기가 닥쳤을 때 무조건 그 순간을 모면하려 들지 말고 오히려 나에게 그와 관련된 나쁜 습관은 없는지 점검하고 개선하면서 주변환경을 우호적으로 돌려놓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적은 외부에 있다고 믿지만 진짜 큰 적은 내부의 적이다.


◉ 자기주도적 선택의 힘


만약 어리석은 사람이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는다면 그가 곧 슬기로운 사람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이 스스로 슬기롭다고 생각하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어리석은 것이다.          - 법구경(法句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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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예술가는 있지만 청년 경륜가는 드물다. 청년기에 탁월한 재능을 꽃피우며 예술적 혹은 학문적 업적을 이루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세상을 보는 경륜, 즉 올바른 선택의 안목을 갖기란 쉽지 않다.


■ 선택과 딜레마


우리의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특히 청년기의 선택은 더욱 중요하다. 로켓의 궤도가 1도만 어긋나도 달과 화성만큼의 오차가 생기듯, 청년기의 잘못된 선택은 인생에 큰 오류를 낳는다. 그래서 선택은 늘 딜레마다. 세상의 모든 선택에는 딜레마적 요소가 있고 그 딜레마는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선택의 딜레마를 조금이라도 완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선택을 강요받지 않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즉, 나를 둘러싼 환경이 나에게 선택을 강요하도록 놔두지 말고. 스스로 상황을 만들어 가면서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다양하게 늘리는 것이 중요하다.

*딜레마 ;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해도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가 나올 곤란한             상황


의과대학 시절 필자에게 경제학은 그저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경제학과 친구의 ‘경제학원론’을 재미삼아 읽으면서 느꼈던 흥미가 시간이 자나면서 큰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고 그 관심은 졸업 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그러던 어느날 내가 비록 경제에 대한 정규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복잡한 경제학 용어들을 비교적 쉽게 이해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데 작은 재능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의사로서의 삶에 경제분야 전문가로서의 삶이 함께 하게 된 것이다. 즉, 의학의 길에서 경제를 공부한 것은 나 스스로의 선택이었고, 그로 인해 만나게 된 또 다른 선택의 순간 역시 나 스스로 만들어 낸 상황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선택 중에 어느 것이 최선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필자가 그냥 의사로서의 길을 갔더라도 최소한 후회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 준비와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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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 나는 愚公移山의 노력을 경제학에 쏟아 부었다. 그냥 취미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희생해야 하고 몰입

을 하기 위한 준비가 필요했다. 이때 필자의 선택은 달콤한 것들을 버리는 것이었다. 그 선택은 술, 담배, 골프처럼 시간을 허비하던 것들을 끊고 그렇게 아낀 시간에 체계적으로 경제공부를 하는 실천으로 연결되었다.

선택의 기로에서 어느 쪽이 더 나은 선택일지 확신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그런 상황을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 낸 경우라면 결과가 어떻든 최소한 후회는 남지 않을 것이다. 반면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이라면 어떤 선택을 해도 후회가 남게 된다.


■ 상황에 이끌려 하는 선택은 위험하다


우리의 선택은 대부분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되기 쉽다. 나그네를 집에 데려와서 키가 침대보다 짧으면 다리를 잡아 늘리고 길면 잘랐다는 이 끔찍한 이야기는, 인생의 중요한 선택이 상황에 의해 강요될 경우 우리가 처할 수 있는 난관을 상징한다.

그래서 청년들에게 선택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무언가 새로운 길을 탐색할 때 무조건 현재를 포기하고 다른 길을 선택할 것이 아니라 먼저 지금 하는 일에 대한 자신의 노력부족을 감추기 위해 내가 이 일에 재능이 없거나 재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라고 말한다. 그리고 만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일이 아닌 다른 일에 도전하겠다는 판단이 선다고 해도 지금 당장 현재를 버리고 그 일에 뛰어들 것이 아니라 현재를 바탕으로 새로운 일을 위한 준비를 충실히 한 다음 선택의 상황에 서라고 조언한다.


‘시간이 없다’는 말은 위선이다. 시간은 늘 충분하다. 단지 우리가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에 새로운 것에 도전할 시간이 없는 것이다. 무언가 새로운 도전을 꿈꾼다면 잠을 희생하든, 놀이를 포기하든 달콤하지만 의미없는 일들을 포기하고 새로운 시간을 만들어서 충분히 준비해야 한다. 그래야만 상황을 만들어가면서 후회없는 선택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만약 선택했다면 산을 옮기는 우공의 태도로 그 일에 몰두하는 것이 진정한 도전이다.        

■ 자본의 탐욕이 만든 기회의 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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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시대는 험난한 시대다. 희망의 세대인 청년이 절망하고 사회는 분열되어 증오의 언어들이 난무한다. 원인은 여러 가지고  원인의 원인 역시 복잡하지만 본질은 탐욕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기회의 문제는 자본의 탐욕이다. 누군가 공장을 여러 개 지어 돈을 많이 벌게 되면 그것에 감사하기보다는 새로운 탐욕에 사로잡힌다. 공장을 지키는 일을 남에게 맡기지 않고 내가 경비 회사를 하나 차려 그 돈까지 벌고 싶고, 노동자들의 점심 값으로 식당에 돈을 주느니 내가 식당을 차려 그 돈도 벌고 싶고, 광고를 맡기느니 그것도 직접 하고 싶고 나중에는 공장에서 쓰는 문방구도 직접 조달해서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은 탐욕에 빠져드는 것이다.

이렇게 자본이 탐욕에 빠지면 경비 일을 하던 사람, 광고를 만들던 사람, 식당을 운영하던 사람, 문방구를 팔던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거나 거기에 취직해서 살아가야 하는 상황이 된다. 사람들이 각자의 꿈을 갖고 도전해 볼 기회가 사라지고 모두들 그 앞에 줄을 서서 처분만 기다리는 신세로 전락하는 셈이다.

이렇게 되면 창의성과 열정이 사라진다. 자기 사업을 꿈꾸는 경우 열정과 재능만 있으면 도전할 수 있지만 줄을 서서 생존하려면 전혀 다른 것 이를테면 토익점수와 각종 증명서를 준비해야 한다. 창업자로서의 재능이 아닌, 조직의 일원으로서 무난한 태도를 기르기 위해 자신의 끼를 모두 죽여야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사라진 것이 바로 이런 생태계다.


청년은 자신이 진정으로 바라는 삶이 이미 많은 사람이 줄지어 가고 있는 길의 끝에 서서 그들과의 경쟁에 몰두하는 것인지, 아니면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그 길 위에서 자유롭게 자신의 뜻을 펼치는 사회의 중심으로 살아갈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남이 가는 길을 따라가면 종속되지만 남이 가지 않는 길은 험난하다. 당신은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그 답은 당신의 안목이 아니라 그 안목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선택을 할 수 있는 준비를 얼마나 충실히 해 왔는가에 달려 있다.


◉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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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극적인 인생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우리의 삶은 그 자체가 구절양장의 곡절이 있는 대하소설이며 삶을 살아온 방식은 각자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다. 세속적인 측면에서 보면 극적인 인생과 평범한 인생이 달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가장 극적인 인생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수많은 우연과 우연이 만나 필연이 되고, 온갖 우여곡절을 겪어가며 존재하는 것이 바로 지금의 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다른 사람의 파란만장한 삶에 경탄할 일이 아니라 지금 내 인생의 서시에 주목해야 한다.


삶도 연극처럼 다양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비극도 있고 희극도 있다. 처음부터 몰입하는 이야기도 있고 마지막에 뜨거운 눈물을 쏟아내는 감동도 있다. 처음에는 희극이지만 비극적 결말로 마무리하는 경우도 있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인생이 연극과 다른 점은 작가도 연출도 배우도 관객도 모두 나 자신이라는 점이다. 내 삶의 관객은 바로 나인 셈이다. 따라서 나의 이야기는 남이 아닌 내게 설명되어야 하고 내게 공감되어야 한다. 주연인 내가 플롯의 개연성을 무시하고 편법으로 건너뛰거나 막연한 행운을 기대하면 관객인 나의 호응을 얻을 수 없다. 나는  철저한 주관이자 완전한 객관이다.     

■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 내 삶이 있다


지금 나의 이야기는 그 이전의 이야기에서 당위성을 얻는다. 우리는 이 점을 가끔 잊는다. 지금까지의 내가 바로 내일의 나다. 어제와 오늘의 결과가 바로 내일인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내일을 이야기 하고 미래를 꿈꾼다면 당장 달라져야 할 것은 바로 오늘이다. 어제는 이미 지나간 역사이고 내일은 미래이며 그 사이 간극을 메우는 것은 ‘바로 이 순간’인 것이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이 외친 ‘카르페 디엠(carpe diem)’은 지금을 즐기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이 바로 당신의 미래요 꿈이라는 의미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인생은 ‘지금’의 가치를 너무 간과하고 있다. 우리는 늘 과거에 사롭잡혀 있거나 미래에 대한 망상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늘 지금이다. 지금은 순식간에 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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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된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이 책장을 덮는 순간 바로 과거다. 지금이라는 것은 찰나이며 섬광처럼 사라지는 존재다. 하지만 사라진 섬광의 다음에는  새로운 섬광이 등장한다. 그 섬광과 섬광이 이어지면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고 그 빛의 밝기는 지금 이 순간의 섬광과 다음 섬광의 밝기에 달려 있다.

그래서 늘 지금 이 순간이다.


제4장 자기혁명을 위한 배움과 성장


◉ 자기만의 색깔로 도전하기


버트런드 러셀은 인간을 원죄형, 자아도취형, 과대망상형 인간으로 구분했다. 그동안 많은 심리학자와 교육학자가 마치 혈액형으로 성격을 구분하듯 신뢰성 없는 분류들을 만들어왔지만 러셀의 이런 구분은 단순하면서도 직관적이어서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다만 러셀이 살았던 당시와 지금의 세상은 다르기 때문에 그 분류법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으나, 논지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 세 가지 인간형 - 원죄형 인간


먼저 원죄형 인간은 나름의 교육과 도덕성을 알고 있는 우리 보통 사람들의 전형이다. 이들은 어른은 공경해야 하고 질서는 지켜야 하며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혀서는 안 되고 우정과 사랑은 목숨처럼 지켜야 하는 가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원죄형 인간은 태생적으로 나약해서 작은 유혹에도 쉽게 금기를 넘어선다. 원죄의식의 대상은 윤리나 도덕률만이 아니다. 결심과 의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거짓말에 대한 원죄의식이 그 원인이다. 종교가 율법으로 거짓말을 금하듯, 사회 역시 안정성을 위해 거짓말을 죄악시하지만  그것은그만큼 강렬한 유혹이기도 하다. 타인을 기망하는 나쁜 거짓말뿐 아니라 자신과의 약속 혹은 방어기제에 거짓말은 중요한 도피처다.

심리학에서 ‘신포도 우화’가 중요 방어기제의 하나로 인정되듯, 방어기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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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적으로 거짓 혹은 자신에 대한 위선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결심한 것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이나 자신을 통제 관리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실망도 원죄의 일부인 것이다.    

   

이런 원죄형 인간은 니체가 그렇게나 경멸했던 ‘나약하지만 심성이 착한’우리들의 보편적인 모습을 상징한다.  하지만 우리는 살면서 보통 큰 죄나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고 적극적인 범죄나 탈법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체적인 내 삶을 도덕적 기준에서 볼 때 일탈은 몰라도 이탈은 아니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렇게 이탈하지 않았다고 믿는 나는 같은 일탈을 행하는 타인을 이탈로 규정하며 쉽게 돌을 던진다.

이런 의식은 정치사회적으로도 수동과 외면 혹은 방관으로 일관하면서 적당히 눈감고 적당히 외면하게 만든다. 가끔 분노하고 가쁨 결심하고 또 가끔 자각하기도 하지만 그것 역시 습관의 변화로 이어져 태도화하기보다는 삶의 호수에 던져진 작은 파장으로 치부하게 된다. 아마 소시민이라고 불리는 우리의 모습이 이럴 것이다.


■ 세 가지 인간형 - 자아도취형 인간


두 번째, 자아도취형 인간은 약간 비겁한 출세주의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타인에게 칭송받고 선망받는 것에 관심이 많다. 이들의 모든 행동은 타인의 시선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자신의 자유의지나 갈망보다는 타인에게 비쳐지는 자신의 모습에 관심을 둔다. 그래서 이들은 늘 행복해 보이지만 사실은 불행하다. 경쟁심에 사로잡혀 있고 상대적 우월감을 느끼지 못하는 상황을 견디지 못하며 쉽게 드러나지 않는 내면보다는 겉으로 나타나는 외면에만 신경을 쓴다. 옷과 가방은 명품으로 치장되어야 하고, 약점은 철저히 감추면서 자기를 위장하는 데 급급하다.

자신에 대한 자긍심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자존심은 타인과 비교해서 우월감을 느끼려는 감정이고 자긍심은 자신의 내면적 충족감을 느끼는 것인데, 이들에게 존재하는 것은 자존심뿐이다.    


■ 세 가지 인간형 - 과대망상형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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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과대망상형 인간은 상당히 곤란한 존재다. 그는 자신이 완전하거나 스스로 꾸미지 않아도 약점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과 견해가 다른 사람은 어리석다고 여긴다. 이런 유형의 리더들은  흔히 역사가 자신을 평가할 거라는 터무니없는 장담을 늘어놓곤 한다.

겉으로는 적극적이고 자신감에 넘치며 역동적인 모습으로 비치고, 책임이 주어지지 않았을 경우에는 자신의 과제를 과감하게 처리하는 실천력도 강하다. 하지만 그 결과 성취를 이루거나 작은 힘이라도 리더십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르면 서서히 부작용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런 과대망상형 인간은 극단적으로는 히틀러와 무솔리니 같은 독재자나 종교지도자가 되기도 하는데, 사람들은 이런 유형의 성격에 대해 쉽게 지도력을 인정하는 경우가 많다.


■ 자기만의 색깔로 도전하는 네 번째 인간형이 되자


사실 인생에서 성공이란 이전에 99번을 성공했어도 현재 실패했으면 실패고, 과거에 99번을 실패했어도 현재 성공했으면 성공이다.  청년은 미래의 성공을 위해 99번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지만, 기성세대는 도전의 기회가 적다고 여기므로 한 번의 실패가 두려워 도전을 시작하지 못하고 잔뜩 움츠러들어 있다. 그런데 만약 청년이 한 번의 실패가 두려워 움츠린다면 그는 청년이 아니고, 반대로 기성세대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새로운 여정을 시작한다면 그는 아직 청년인 것이다. 다만 기성세대의 도전은 과대망상이 아닌 합리적인 도전이어야 하고, 청년의 도전은 위의 세 가지 유형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는 네 번째, 즉 자신만의 색깔을 가진 도전이어야 한다.


앞서 세 가지가 아닌 네 번째 유형은 주인의식을 가진 사람이다. 우리는 가을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살아간다. 주변의 시선, 주변의 기대, 주변과의 비교 등 늘 외부를 의식하며 자신의 승패를 규정한다. 하지만 승패를 가리는 심판관은 내부에 있다. 설령 우리가 강하게 불어닥친 태풍에 흔들리고 휘더라도 바닥에 뿌리 내린 갈대가 되어야지, 봄바람에 휘날리는 낙엽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내 가치관을 정립하고 거기에 맞는 삶을 살아가며, 사람과 사회에 관대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of the world로 살지 않되 for the world도 꿈 꿀 필요가 없다.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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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시민으로서 나의 삶을 견고하게 유지하는 in the world로 살아가는 것이다.  다만 그 과정 속에서 world가 당신의 삶을 인정하고 당신의 지혜를 구하고 손을 내밀면, 그때 for the world로서의 역할을 고민하면 되는 것이다. 이 길 외에는 우리의 삶이 러셀의 세 가지 분류로부터 벗어날 도리가 없고 이렇게 함으로써만 당신의 ‘다름’을 만들 수 있고 제4의 삶의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다.   


◉ 경쟁심을 자기발전의 토대로 만들어라


경쟁은 인간의 본성이고, 우리가 가늠하는 모든 성공과 실패는 절대적이 아닌 상대적인 것이다. 이런 상대성은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달리 자연을 지배할 수 있게 된 주요 원인이지만, 대신 인간이 행복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 경쟁심 부추기는 사회


사람의 상대적 욕망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사회의 발전을 위해 경쟁심을 부추김으로써 학습된 결과일 뿐이다.

그런데 이런 경쟁심은 인간의 무의식에 뿌리를 내리고 평생 감정을 지배한다. 그 결과 사람은 위를 보고 결핍을 느낄 뿐, 아래를 보고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평생을 무한경쟁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이다. 경쟁의 결과 생산성과 효율성이 증가하고 발전과  진보가 이루어지는 측면도 있기 때문에, 적당한 상한선만 존재한다면 경쟁심이 사회적인 측면에서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의 경쟁심은 한계가 없고 욕망은 무한한 것이 문제다.


■ 질투를 선망으로 바꾸면 새로운 기회가 열린다.


사람들은 타인의 장점을 선망하기보다는 타인의 성과를 질투한다. 질투와 선망은 천지차이임에도 그 차이를 모르는 것이다. 사실 이런 경쟁심을 버리기는 몹시 어렵지만, 질투가 아닌 선망으로 전환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나보다 나은 사람을 만나는 것에 가슴이 떨려야 한다. 사람은 대부분 자신만의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내가 낫지만, 다른 사람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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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나은 점도 반드시 있다. 이때 타인의 장점을 질투하면 그의 장점은 가려지고 약점만 두드러지는데, 이 경우 나는 나를 개선시키거나 긍정적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기회를 차버린 셈이 된다. 하지만 그것을 선망으로 전환하면, 그 사람의 장점을 내가 긍정적으로 수용함으로써 나를 발전시키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가 나와 계약을 맺거나 동업을 할 사람이 아니라면 단점을 찾고 그것을 비웃는 어리석은 행동보다, 어떤 부분이건 장점을 찾아 내 것으로 흡수하는 것이 훨씬 유익하다. 그런데 가끔 이런 경우에도 자기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자기보다 객관적으로 못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에게는 관대해서 그의 장점을 칭찬하고 인간적으로 훌륭한 척하면서 정작 자신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대상으로는 질시하고 투기하며 인정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가장 나쁜 행동이다.

한 가지 더. 그가 큰 성취를 이루긴 했지만 나보다 나은 점이 보이지 않아 더 질투가 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때에는 그의 성취를 단지 운이나 과대포장의 경과로 여기지 말고, 오히려 그렇게 내 눈에 보잘것없어 보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위치에 올라갈 수 있었던 그만의 장점이 무엇인지 발견조차 못하는 나의 안목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고, 그의 성취에 진심어린 경외를 보여야 한다. 이렇게 상대를 경외하고 선망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바로 진정한 겸손이며, 이로써 타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두자.


◉ 청년에게 예의가 필요한 이유


공자가 생전에 가장 싫어한 두 부류의 사람이 있는데, 바로 향원과 예의 없는 사람이었다. 여기서 향원(鄕員)이란 겉으로는 정의롭고 현명하며 바른말을 하지만 실천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키는데, 공자는 잠시 나랏일을 맡았을 때 ‘향원을 죽이라’는 살벌한 명령을 내릴 만큼 향원을 싫어했다.

공자가 향원 다음으로 나쁘게 본 부류가 예의없는 사람이었다. 알다시피 공자는 禮樂을 중시했는데, 그것은 훗날 유교의 폐단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공자가 이처럼 예의에 주목했던 것은, 그것이 바로 자기완성의 매뉴얼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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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 사회는 예의 중요성이 완전히 경시되어 인내심과 자제력을 기를 수단을 상실해버렸다. 타인에 대한 배려를 배우지 못한 아이들은 음식점에서 마구 뛰어다니고, 스승에 대한 예를 익히지 못한 아이들은 체벌이 없으면 스스로를 정돈하지 못한다. 예 교육이 가정과 사회에서 실종되면서 우리 아이들의 참을성과 배려, 인내심도 사라져버린 것이다. 

예는 좋은 교육에 의해 자발적으로 생성되는 것이므로 강요될 수 없고 강요되어서도 안 된다. 예는 타인에게 나를 대하는 방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향한 나의 습관화된 태도의 일종이다.


◉ 안과 밖의 태도가 나를 말해준다


아우라(Aura)는 ‘신체에서 발산하는 보이지 않는 기나 은은한 향기, 혹은 사람이나 물건을 에워싸고 있는 고유의 분위기’다. 습관적인 타성에 젖은 사람에게서는 아우라가 느껴지지 않는다.


■ 자기만의 아우라를 만들어 보자


아우라는 나에 대한 타인의 관대함을 이끌어낸다. 어떤 사람에게 그만의 독특한 아우라가 있다면 우리는 그를 존경하거나 존중하고 때로는 그를 위해 무언가 기꺼이 도와주고 싶어진다. 아우라는 한 가지 장점이 아닌, 사람을 대하는 정중하고 우아한 태도와 미소, 일을 처리하는 열정과 집중력, 언어에서 느껴지는 신뢰감 등 여러 가지 요소가 결합되어 나타나므로 좋은 습관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쌓인 퇴적물과 같다.


아우라는 사람들이 가진 단점들이 제거된 상태다. 즉 자신의 삶에서 단점들이 제거된다는 것은 삶에 자신감이 있다는 뜻이고 자신의 장점이 햇살에 드러나는 반짝이는 상태가 바로 아우라인 것이다. 자신의 내면에서 발휘된 이런 발전은 외면적인 능력을 강화하고 타인의 관대함을 이끌어 낸다. 기억해 두자. 당신은 장점 덩어리다.


■ 관념이 아닌 관성이 태도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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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너무 관념적인 것을 선호한다. 무언가 목표를 세우면 이를 깨물고 실행할 다짐을 하고 산에 올라 일출을 보면서 “그래, 결심했어!”를 외치지만 그 결심은 며칠이 안 돼 오뉴월의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리기 일쑤다. 왜 그럴까? 관념은 허무한 것이기 때문이다.

관념이 나의 행동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평소에 해오던 습관이 관성이 되고, 관성이 태도를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태도의 작은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한 환경을 조성하는 게 사실은 더 실효성 있는 실천의지인 것이다.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고 마음먹은 학생의 우선순위는 구호를 외치는 것이 아니라 책상을 정리하고 주변에서 자신을 유혹하는 것들을 없애고 책상에 앉을 때 의자를 당겨앉는 것이다. 또 직장에서 성과를 내고 싶으면 책상에 작은 선인장을 하나 놓고 볼펜과 메모지부터 정리하는 것이 우선이다.

이미 성장을 멈춘 부자나라 일본의 트럭기사들은 자신의 삶에서 발전보다 쾌적함이 더 중요한 가치라고 여겨 매일 트럭을 청소하는 것이지만. 미래를 향한 꿈과 열정이 가득한 우리나라의 청춘들은 당장 자신의 몸가짐과 주변환경을 정돈하고 사회적으로도 좋은 환경을 만들어 나감으로써 능력의 최대치를 이끌어내는 첫걸음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 시간의 가치는 밀도가 결정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를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습니다.   - 성경 베드로의 두번째 서간 -


이 구절은 우리가 시간에 대해 갖고 있는 고정된 생각을 뒤흔든다.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 는 말은 3차원적 사고에 익숙한 우리에게 ‘시간’이라는 개념에 대한 초월적 시각을 제시한다.


■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다


우리의 직선적 시간관은 ‘물리적 시간은 속도에 따라 달라진다’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에 의해 이미 부정된 바 있다. 물론 최근 들어 운동이 빛의 속도를 넘어설 수 없다는 점이 증명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만약 빛의 속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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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주선이 존재한다면 그 안에서 시간은 정지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는 시간은 대체 무엇일까? ‘시계시간’이라 불리는 절대적 시간은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될까 아니면 다르게 적용되고 있을까? 또 운동량이 엄청난 하루살이의 수명인 하루와 운동이 느린 거북의 수명인 300년은 물리적으로 같은 시간일까? 이런 의문들만 모아봐도 시간이 우리가 습관적으로 생각하는 단순한 개념이 아닌 것은 분명해 보인다.


현재에 몰두하면 시간은 온전하게 현재 그 자체일 뿐이지만, 문득 정신이 들어 주변을 돌아보며 과거를 비교하고 미래를 떠올리면서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도낏자루가 썩는 원리다.

예를 들어 기차를 놓칠까봐 꽉 막힌 도로의 택시 안에서 초조하게 마음을 태우면 기간은 번개처럼 빨리 지나가지만, 일찍 도착해서 기차가 출발하기를 기다리면 시간은 느릿느릿 지루하게 흘러간다. 이렇게 내가 인식하는 시간의 속도는 늘 다른데 이때 시간의 밀도를 결정하는 것은 집중이다. 어떤 일에 골똘하게 몰두하면 시간은 쏜살같이 흐르지만 망상에 사로잡혀 빈둥거리면 시간은 느리게 흘러간다. 또 재미있는 일을 하면 시간은 화살이지만 재미없는 일을 할 때 시간의 흐름은 더디기만 하다.

그러니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다.


어떤 사람은 시간을 아코디언처럼 접어서 밀도를 높이지만 어떤 이는 엿가락처럼 늘려서 밀도를 낮춘다. 시계시간으로는 똑같은 시간이지만 내용은 완전히 다르다. 인간의 평균 수명이 80년이라고 해도 그것은 시계시간의 문제일 뿐, 각자의 실제 삶의 길이는 열 배 또는 백 배의 차이가 날 수도 있다.


■ 시간의 가치는 집중력과 밀도에서 온다


삶의 태도에서도 마찬가지다. 필자는 ‘시간이 없어서’라고 변명하는 사람을 가장 싫어한다. 해야 할 일을 하는데 시간이 부족하다면 그것은 곧 나태함이다. 시간은 누구든 열 배, 백 배로 압축할 수 있다. 파편처럼 흩어져버리는 수많은 시간의 조각과 망상의 시간을 붙들거나 정돈함으로써 더 많은 시간을 낼 수 있으며, 집중력과 밀도를 높임으로써 시간의 효율성을 제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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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맥락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 역시 진리다. 시계시간으로 나이라는 개념은 모임의 상석에 앉거나 주민등록증을 만드는 데 필요한 사회화된 기준일 뿐, 내면화된 나의 관점에서는 의미가 없다. 그런 점에서 ‘서른 살이 되기 전에 해야 할 100가지’ 등의 이야기는 내면적인 것을 사회화시켜 불안감을 파는 시간 장사꾼들의 불안마케팅에 불과하다.


한편 시간을 재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황후장상의 아들이건 노동자의 아들이건 시간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민주적인 재화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언젠가 끝을 맞이한다. 시간의 끝인 죽음은 인간으로 하여금 겸허하게 살도록 만드는 축복이라고 할 수 있다.

시간은 자연의 질서다 인간의 태어남과 죽음 역시 질서일 뿐이다. 시계가 없을 때도 사람은 태어났고, 나이를 셀 수 없을 때도 사람은 죽었다.

이렇게 습관화된 시계시간의 관점에서 벗어나보면 시간은 곧 가능성의 크기라고 할 수 있다. 태어나는 순간 모든 인간의 가능성은 100%다. 외적 환경에 따라 조건이 다를 수는 있지만…….

태어났을 때 100%였던 가능성의 공간은 죽음과 함께 0이 된다. 그러나 이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가능성은 감소하는 대신 성취는 증가하는 것이다.

이때 문제가 되는 것은 곳간이다.

누군가는 감소한 가능성보다 더 많은 성취로 곳간을 채웠을 것이고. 누군가는 가능성의 감소에 비해 턱없이 적은 성취를 곳간에 채웠을 것이다. 성취의 곳간에 쌓인 곡식의 차이는 내가 시계 시간에만 의지해서 살아왔는지. 시간을 아코디언처럼 차곡차곡 접어가면 밀도있게 살아왔는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 자기관리의 출발은 나태와 태만의 찌꺼기를 버리는 것


시간은 무엇인가? 변화의 시작에서 변화의 끝을 향해 달리는 말과 같다. 인간의 생명도 마찬가지다. 0세에서 시작해 나이를 먹다가 죽는 순간 시간은 다시 0이 된다. 우리가 70세 80세에 죽었다고 말하는 것은 과거의 기록일뿐, 그 순간 그의 절대시간은 0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시간은 철학적인 고민을 하게 만드는 중요한 주제인데, 우리가 늘 시간에 쫓기는 것은 이렇게 유(有)이기도 하고 무(無)이기도 한 시간의 속성 때문이다. 우리는 시간 여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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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없다는 말을 많이 한다. 하지만 필자는 “시간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 중에서 성공에 이른 이를 만난 적이 없다. 우리가 쫓기는 시간에는 찌꺼기가 너무 많아서 시간이 더 필요하다면 그만큼 찌꺼기를 버리면 된다. ‘시간이 없다’는 말은 달콤하지만 쓸모없는 것들을 끌어안고 놓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때문에 불필요한 것들을 버리고 필요한 것들로 채우는 과정을 ‘시간관리’라고 할 수 있다.                   


■ 시간활용, 계획보다 금기를 세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우리가 뷔페에서 음식을 먹을 때에도 상대가치가 큰 음식을 선택하려면 다른 걸 줄여야 한다. 먹을 수 있는 양은 정해져 있는데. 모든 것을 욕심껏 다 취하려고 하면 마음만 초조하고 배탈이 나기 십상이다.

결국 시간활용은 계획이 아니라 뷔페에서 먹지 않거나 줄여야 할 것 즉 금기를 세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을 먼저 정하고 해야 할 것을 계획하면 그것은 실천 가능한 계획이 되지만, 해야 할 것만 정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알코올 중독자가 소주공장에서 일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런 다음 해야 할 것들은 비중을 정해 하루 중 어느 때든 반드시 그만큼 수행하면 된다.

기차 시간에 맞추듯 시계시간에 쫓겨다니면 계획만 세우다 마는 어리석음을 반복할 수 있음을 명심하자.


◉ 지식과 지혜, 영감과 창의   


청년기는 한 인간이 전방위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기본능력을 배양하는  기간이다. 성인에 대한 교육은 기본적으로 직무나 기술교육이 될 수밖에 없고 노년의 교육은 인생의 다양성을 제공하는 문화교육이 중심이지만, 청년에 대한 교육은 전방위적 발전을 도모하는 것이어야 한다.


■ 지식과 지혜


청년기에 우리가 익혀야 하는 것은 지식과 지혜다. 지식은 특정한 이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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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워가는 것이다. 공학이라면 반도체, 기계기술, 전지전자에 대한 이론들을 배우는 것이고, 인문학이라면 대가들의 사상과 철학, 사회구조와 심리 등을 배우는 것이다. 지식은 계주다. 누군가가 앞서 증명한 이론을 배우고 익혀서 내 것으로 만든 다음, 내가 다시 이어달리면서 그것을 늘려가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이 이런 식으로 발전해왔다.


반면 지혜는 그것을 활용하는 역할을 한다. 지혜가 없다면 불필요한 것을 만들고 어리석은 기술을 발전시키게 된다. 이를테면 원자력 발전을 연구하고 건설하는 것이 지식이라면, 인간이 통제하기 어려운 원자력의 위험성을 인식하고 그것에 제동을 걸 수 있는 판단은 지혜에 속한다.

그래서 지식은 사회적이고 지혜는 개인적이며, 지식은 전해줄 수 있지만 지혜는 가르칠 수가 없다. 일본의 유명한 무사 미야모토 무사시는 자신의 검법에 대해 “가르칠 수는 있지만 전할 수는 없다.”고 했다. ‘학습’의 본질을 꿰뚫는 촌철살인의 한마디다.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가 그들의 지식을 남에게 가르치고 들려줄 수는 있지만 그것을 들은 모두가 그들처럼 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식은 사물을 대상으로 하지만, 지혜는 삶 자체를 대상으로 한다. 또 지식은 나에게 할당된 분야의 기술을 내 것으로 삼는 것이지만, 지혜는 내가 주체적으로 외부와 맞서면서 키워나가는 것이다. 사람은 이 두 가지가 함께 함으로써 발전한다.

습관적으로 사는 사람은 100년을 살아도 지혜가 없고,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사는 사람은 서른 살에도 지혜의 포도나무가 주렁주렁 열리게 된다. 청년의 공부는 지식을 열심히 탐구하되 늘 치열하게 고민함으로써 지혜와 지식이 균형을 이루는 것이어야 한다.         


■ 돌덩어리에서 다비드를 발견하는 창의성


아무리 정교한 기술을 가진 석공도 다비드 상을 조각하지 못하는 것은, 큰 돌덩어리에서 정해진 모양으로 깎아내는 기술만 익힌 탓이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같은 돌덩어리에서 피에타의 성모나 다비드를 발견했다. 이것이 바로 창의적 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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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창의적’이란 하늘 아래 없던 것을 창조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을 드러내고 결합하고 빛내는 능력을 가리킨다. 예술가의 발상 역시 새로운 창조라기보다는 플라톤의 이데아(idea)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영감(靈感)’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국의 사학자 이중텐(易中天)은 영감을 철학자의 영감, 시인의 영감, 종교적 영감으로 분류했다. 영감이란 말 그대로 ‘신의 느낌’이니 인간이 쉽게 닿거나 염탐할 수 없다.


청년들은 학교와 사회에서 근육을 키우고(필수적인 지식을 익히고), 스스로 순발력을 키우며(다양한 간접경험과 새로운 세계와의 조우를 통해 지혜를 쌓으며), 새로운 발전을 위한 영감의 언어를 이해하기 위한 탐색을 지속해야(문화예술에 대한 이해력을 높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나의 가능성을 극대화하는 최적화된 준비인 셈이다.


◉ 학(學)과 습(習)이 병행되어야 진짜 공부다   


공부에 대한 가장 인상적인 글을 꼽으라면 당송8대가 중 한 사람인 한유(韓愈)의 부독서성남(符讀書城南)을 꼽겠다. 한유가 아들 성남에게 독서를 권하는 글로 구구절절 사무치는 깊이가 느껴진다.


나무가 둥글게 혹은 모나게 깎이는 것은

단지 목수의 손에 달려 있고.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것은

뱃속에 글이 얼마나 들어 있느냐에 달려 있다.

열심히 공부하면 글을 자기 것으로 할 수 있지만

게으름을 피우면 뱃속이 텅 비게 된다.

배움의 이치란

태어났을 때엔 누구나 현명함과 어리석음이 같지만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그 들어가는 문이 달라지는 것이다.


두 집안에서 아들을 낳았다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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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다 어린 시절에는 별 차이가 없고

조금 자라서 같이 모여 놀 때에는

무리지어 헤엄치는 물고기와 다름이 없다.

그러나 나이가 열 두서넛이 되면 서로 능력을 나타내는 점이 달라지고

스무 살 경이 되면 그 차이가 점점 더 벌어져

맑은 냇물과 더러운 도랑을 비교하는 것처럼 차이가 난다.

그 후 서른 살, 골격이 굵어질 나이가 되면

하나는 용이 되고 하나는 돼지가 된다.


신마(神馬)와 비황(飛黃)은 높이 뛰어 내달릴 뿐

두꺼비 따위는 돌아보지도 않는다.

결국 한 사람은 말의 고삐를 잡는 시종이 되어

채찍 맞은 등에서는 구더기가 끓게 되고

다른 한 사람은 삼공(三公) 재상(宰相)의 고귀한 사람이 되어

대저택의 깊은 곳에서 의기양양하게 지내게 된다.


여기서 묻는다. 무슨 까닭으로 이렇게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배우고 배우지 않은 차이다.

금(金)이나 옥(玉)이 귀한 보배라고들 하지만

너무 쉽게 쓰게 되고 깊이 간직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학문은 몸에 간직하는 것이다.

그 몸만 있으면 아무리 써도 남음이 있다.


군자(君子)가 되고 소인이 되는 것은

그 부모와 관계있는 것이 아니다.

보아라.

삼공(三公)의 후예들이 헐벗고 굶주리면서

몸을 실을 당나귀 한 마리 없이 문밖에 나서는 것을


문장(文章)은 귀한 것이다.

경서(經書)가 가르치는 것이 곧 전답(田畓)과 다름이 없다.

길바닥에 고인 물은 근원이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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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엔 구덩이에 가득 찼다가도

저녁이면 말라 없어지는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 고금(古今)에 통하지 않으면

말과 소가 사람의 옷을 입은 것이나 다름없다.

자신이 불의(不義)에 빠진 상태에서

어떻게 명예를 바라겠는가.

지금 계절은 오랜 장맛비가 갠 가을이다.

맑고 시원한 기운이 들판에 일어나니

점점 등불을 가까이할 만하고 

책을 펼칠 만한 시절이다.

어떻게 아비가 아침저녁으로 너를 걱정하지 않겠느냐.

너를 생각하면 세월이 빨리 지나가는 것이 아쉬울 지경이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에

엄하게 교육시키려는 마음은 서로 일치하기 어려워서

이렇게 시를 써서

네게 머뭇거리지 말고 공부에 정진하라 말하고자 한다.


아들에게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를 조언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절절하다. 이처럼 옛 사람들은 왜 공부를 해야 하고,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를 깊이 고민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공부’라는 말에서 점수를 떠올리고, 점수를 높이는 방법이 곧 공부법이라고 생각한다. 또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는 스펙을 높여 좋은데 취직하고 둔을 많이 벌기 위해서라고 여긴다. 이는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 깨달음이 있어야 진짜 공부다


공자는 학이불사즉망(學而不思則罔) 사이불학즉태(思而不學則殆)라고 했다. 이는 ‘논어 위정(爲政)’편에 나오는 구절로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리석어지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로워진다.’는 뜻이다. 인류가 세상에 글을 남긴 이래 ‘공부’에 대한 말 중에서 이보다 압축적이고 탁월한 것이 또 있을까. 공부를 생각할 때 뼈에 새겨두어야 할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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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는 사서집주(四書集注)에서 이 말을 해석하기를 ‘진리를 마음에서 구하지 않기 때문에 어리석고 깨달음이 없게 된다.’ 고 했다.

‘진리를 마음에서 구한다.’는 말은 ‘아무리 배워도 생각하고 이치를 고민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의미다. 

■ 신분상승의 욕구가 만들어 낸 스펙문화


지금은 모방의 시대가 아니라 창의의 시대다. 다른 사람들이 시작한 일을 무작정 뒤따라가면 낙오자가 되기 십상이다. 시대의 선두에 서서 혁신으로 이끌고 창의로 개척해야 하는 시대에 단지 배우기만 해서 쌓아올린 지식은 별 소용이 없다.

그런데도 기존의 질서는 아직도 모방시대의 인재 선발방식을 고집한다. 그러니 학생들은 저절로 점수‧학벌‧자격증‧토익 등 스펙쌓기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과 나의 차이를 단지 점수나 자격증 개수로 말할 수밖에 없는 사회분위기 속에서 스펙문화의 문제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공부는 배우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이며 국가의 미래를 좌우한다. 배우는 것이 벽돌이라면 생각하는 것은 쌓는 것이다. 벽돌을 아무리 많이 찍어내도 쌓지 않으면 집을 지을 수 없다.


■ 진정한 학습이란 배우고, 익히고, 실천함으로써  완성된다


‘시서집주’에서 두 번째로 강조한 ‘배운 것을 익힌다’는 말은 우리가 흔히 쓰는 한자어 ‘학습(學習)’의 의미로 연결된다. 우리는 흔히 배우는 것, 즉 누군가 가르치는 내용을 흡수하는 것을 공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공부는 반드시 학에 습이 병행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는 오로지 학만 중시하며 습의 중요성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살아간다. 청년의 공부는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가슴 뛰는 열정을 품고 근육을 길들이며 시야가 꽉 차도록 넓은 세상을 탐험하며 그것을 내 안으로 끌어 들이는 것이 진짜 공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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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통해 저자의 진짜 생각과 만나다


■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이 독서다. 지방 소도시에서 태어나 지극히 평범한 청소년기를 보낸 필자가 이처럼 한 권의 책이라도 낼 수 있는 원동력의 8할은 독서다 독서는 타인의 지식을 빌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지식의 변별력이다. 소위 공통의 교육과정에서는 성과의 높낮이, 즉 차이만 강조된다. 그러나 독서는 완전히 차별적인 성과의 잣대를 제공한다.

더구나 독서는 간접체험을 통해 정규교육에서 얻을 수 없는 지혜를 연마하게 해주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을 키워주며, 다양한 분야를 통섭하는 방법을 알려 준다.

독서가 이렇게 방대한 기회를 주는데도 독서를 통해 발전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독서의 대상이 편협하거나 생각을 읽지 않고 문자에만 의존하는 기계적인 독서를 하거나 저자의 논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순히 사건이나 이야기에만 몰입하는 나쁜 독서 습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독서는 먼저 문자(텍스트)를 읽고 거기에 담긴 저자의 생각과 사상과 지식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이해한 것들을 기반으로 나를 변화시키는 내면화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 독서는 도전이고 좋은 경험이며 가능성이다   


독서는 우연의 씨앗을 뿌리는 과정이다. 스티브 잡스에게 아이폰을 만들 기회가 주어진 것은 이전이 그가 디자인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결과다. 찰리 멍거가 위대한 투자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동안 쌓아온 인문‧사회‧철학에 대한 방대한 관심이 시대의 패러다임을 읽는 통찰적인 안목으로 발산된 결과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일생을 통해 독서를 해나간다는 것은 언젠가 새로운 기회를 만날 씨앗을 뿌리는 행위이며 나를 준비된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독서는 가능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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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법


우리가 책을 읽는 방법에는 간독, 속독, 발췌독, 정독, 숙독이 있다. 간독(看讀)은 말 그대로 간과하면서 읽는 것이다. 이것은 대충 읽는다는 것과는 다른데, 세세한 것보다 줄기를 파악하는 데 주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속독(速讀)은 읽는 기술의 문제로 연습이 조금 필요한데, 문장이나 단어가 아닌 문단 단위로 읽는 방식이다. 이것은 그다지 권할 방법은 아니지만, 이미 읽은 책을 리마인드할 필요가 있을 때 유용하다. 발췌독(拔萃讀)은 문자 그대로 필요한 부분만 읽는 것이다. 인문학 책이나 교양서를 읽을 때 자주 하게 된다.

정독(精讀)은 꼼꼼하게 토씨까지 읽는 방법으로, 공부가 목적일 때는 정독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 숙독(熟讀)은 가장 어려운 방법인데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문장이 지시하는 바를 벗어나서 사유로 연결하는 독서방식이다.

필자의 서재와 책창고에는 대강 만 권의 책이 있는데, 독서가 몸에 배서 요즘도 대략 이틀에 한 권 이상은 책을 읽는다. 물론 물리적으로는 정독하기 어려운 양이다. 그럼에도 매일 그 정도의 양을 읽는 것은 필자 나름의 책 읽는 방식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책을 읽기 전에 가능하면 그 책에 대한 정보를 구해서 어떤 부류에 속하는지를 결정한다.      

그리고는 그 책의 내용과 내 개인의 필요성에 따라 읽는 방법을 정한다.

필자는 책을 읽을 때 3-4일을 끌면서 단어 하나 음절 하나를 물이 될 때까지 꼭꼭 씹어 삼키는 경우도 있고 마치 쌈밥을 먹듯이 한 시간에 책 한 권을 그냥 삼켜버리는 경우도 있다. 이것이 길지 않은 시간에 많은 책을 읽는 비결이다.


■ 독서의 원칙 


0 독서 1 : 좋은 책을 읽는 것보다 나쁜 책을 읽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

0 독서 2 : 지금 읽기에 편안한 책은 오락에 불과하다. 항상 지금 읽기에 조    금 버겁고 힘든 책을 고르는 것이 좋다. 

0 독서 3 : 저자의 논리에 매몰되지 말것! 한 권의 책에 매료되면 가능한 한    그 반대 논리의 책도 함께 읽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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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독서 4 : 늘 새로운 것에 선의를 가질 것. 익숙한 것의 포로가 되면 독서    에 의한 자기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0 독서 5 : 완독, 다독보다 중요한 것은 독서 후의 사유다. 책을 읽는 데 투    자한 시간 이상 책에 대한 생각을 하라. 성찰의 실마리를 던져주지 못하는    책은 시간은 파먹는 좀벌레다. 

0 독서 6 : 쓰기도 같은 맥락이다. 먼저 좋은 글을 골라 수차례 필사하고,     그 글에서 아쉽게 느껴지는 것을 고쳐 써 보고, 마지막으로 같은 주제로     다시 써서 내 글이 원본보다 낫다고 여겨질 때까지 같은 과정을 반복한다. 


0 독서 7 : ‘좋은 책’과 ‘나쁜 책’에 대한 판단은 의식보다 무의식의 반응을    살펴야 한다. 저자가 논지를 왜곡하거나 내용이 저급할 때 의식은 해석하    고 이해하려 들지만 무의식은 금방 불쾌감을 느낀다.  

0 독서 8 : 오락인지 학습인지 독서의 목적성을 분명히 할 것! 후자라면 약    간 버거운 것으로.

0 독서 9 : 시기별로 읽을 책

- 중학생 : 감각적인 고전문학을 배울 시기

  펄벅의 대지, 루쉰의 아Q 정전, 위화의 가랑비 속의 외침, 데미안, 싯다르    타, 좁은 문, 변신, 오만과 편견, 노인과 바다 등

- 고등학생 : 의식과 인지력 확산을 위해 시와 한국문학, 제3세계 고전 등

  시는 서정주로 시작해서 김수영까지(근작은 대학 때), 한시는 정민의 책,     우리 근 현대 소설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죄와 벌 등의 러시아 문학,    그리고 제3세계문학과 삼국지 등... 그리고 역사와 철학 등 인문학에 대한    가벼운 책

- 대학생 : 역사, 철학, 사회학 등 인문학과 현대문학, 과학서적 등

  철학의 경우 관념론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시작해 데카르트 스피노자 에    서 끝내고, 니체 이후로 전환한 다음 경제사회학과 심리학으로 확장.

0 독서 10 : 돌아가신 분의 책을 읽어라. 선택의 여지없이 좋은 책이다.


■ 책을 고르는 요령    


진짜 읽고 싶은 책을 서점에서 직접 고른다. 안목 높은 주인이 경영하는 중소형 서점을 단골로 두면 좋다.  또 인터넷에 올라오는 개인 서평도 주의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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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살핀다. 세상에는 내공 깊은 독서가가 별처럼 많고 그들의 집단 지성은 개인의 지성이 닿을 수 없는 결과들을 공짜로 나눠주고 있다.

그렇게 고른 책을 읽어 나가다가 처음 3분의 1이 기대에 못 미치면 그 다음은 간독하고 넘어 간다. 세상은 넓고 읽을 책은 많은데, 돈 주고 산 책이라고 해서 억지로 다 읽을 필요는 없다. 반면 읽어나갈수록 점점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책도 있다.

또 책을 고를 때는 신간과 고전을 교대로 읽는 것이 좋다. 특히 고전 읽기는 대단히 중요하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고전(古典)이라 불리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다.


첫째, 고전은 시대를 넘어 언제든 읽혀야 한다. 고전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당대의 언어로 재해석되고 당대의 의미로 다시 이해된다.

둘째, 고전은 인류의 사상이 오늘에 이르게끔 한 책이다. 오늘 그 책이 있든 없든 미래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책이라면 고전이 아니다. 고전은 만약 그 책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사상이 지금의 모습이 아니었을만큼 역사발전과정에 중요한 고리를 형성하는 책이다.

셋째, 고전은 살아남은 책이다. 오랜 기간 검증되고 전 세계적으로 계속 전해지며 읽히는 그만한 힘이 있는 책이다.

고전을 소홀히 하는 것은 인류의 지혜를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리는 것과 같다. 특히 아이들의 책읽기 교육에서 고전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또 하나 강조하고 싶은 것은 얼마나 많이 읽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무엇을 얻었느냐가 중요하다는 점이다. 수천수만 권의 책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컬렉터에 불과한 경우도 있다. 장좌불와(長坐不臥) 동구불출(洞口不出) 30년에도 진리를 깨치기는커녕 밥만 축내는 수행자가 있는 반면, 하루 만에 문고리를 잡고 깨친 사람도 있다. 독서는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권의 책을 읽었더라도 저자의 사상을 이해하고 그것을 나에게로 끌어들여 내 생각을 교정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하자.

마지막으로 조금 민망한 이야기지만 책의 띠지나 뒤표지의 추천사는 무시하는 것이 좋다.


◉ 글쓰기와 말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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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교 시인의 ‘물길의 소리’를 읽어 보자. 그는 물소리는 물이 내는 소리가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렇군, 물소리는 몰이 돌에 부딪히는 소리, 물이 바위를 넘어가는 소리, 물이 바람에 항거하는 소리, 물이 바삐바삐 은빛 달을 앉히는 소리, 물이 은빛 별의 허리를 쓰다듬는 소리, 물이 소나무 뿌리를 매만지는 소리…… 물이 햇살을 핥는 소리, 핥아대며 반짝이는 소리, 물이 길을 찾아가는 소리……. 가만히 눈을 감고 귀에 손을 대고 있으면 들린다. 물끼리 몸을 비비는 소리가. 물끼리 가슴을 흔들며 비비는 소리가. 몸이 젖는 것을 모르고 뛰어 오르는 물고기들의 비늘 비비는 소리가……

심장에서 심장으로 길을 이루어 흐르는 소리가. 물길의 소리가. 

-  강은교 ‘시간은 주머니에 은빛 별 하나 넣고 다녔다’ (주) 문학사상 -

 

■ 시인의 시선과 언어, 배울 수 있다


음악적 재능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하면 타고난 음치라도 어느 정도는 노래를 잘하게 되고 그림 그리는 법을 배우면 웬만큼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듯이 글쓰기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도 음악이나 미술보다 훨씬 잘할 수 있다. 음악이나 미술은 우리의 일상이 아니지만 언어와 문자는 일상적으로 접하고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 훈련이 되어 있다.

물론 우리가 노력으로 강은교의 시를 쓸 수는 없다. 하지만 그에 근접한 수준으로 잘 쓸 수 있는 기능을 연마할 수는 있다. 이것이 글쓰기의 한계이자 가능성이다.

물론 대상을 분석하는 능력은 강은교를 넘어설 수 있다.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 통찰력이 깊어진다. 어린 시절에는 제아무리 아름다운 명산에 가도 아름답다는 인식을 하기 어렵다. 그저 과정이 즐거울 뿐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바람소리에도 눈물이 난다. 같은 사물을 바라보더라도 관점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제5장 미래를 여는 변화와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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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시대의 희망 부재와 우울


■ 인간이 가진 행복 추구의 본성


히르슈 하우젠은 ‘행복은 혼자 오지 않는다’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본성이 있다. 하지만 그것을 만족시키려는 노력은 절대 성공하지 못한다. 사람은 어떤 것에 대한 욕구가 충족되면 금세 새로운 충족을 위해 눈을 돌리게 되기 때문이다. 통렬한 관찰이라고 할 수 있다. ‘갈망하되 얻지 말라’는 금언과 상통한다.


■ 희망부재가 가져온 우울증, 사회구조에 원인이 있다.      


기본적으로 우울증이 급증하는 원인은 사회구조에 있다. 첫 번째 요소는 외로움이다. 우리나라는 향우회, 동창회, 동호회 등 온오프라인상의 네트워크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발달해 있다. 일견 외로움과는 거리가 먼 사회처럼 보이지만 군중 속의 개인은 고독하다. 그 이유는 신뢰부족이다.

두 번째는 희망 부재다. 행복이 소득 수준에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은 통계만 봐도 알 수 있다. 부탄이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나라라고 알려져 있지만 부탄은 세계 최빈국 중의 하나다.  

일본과 우리나라는 우울지수가 높다. 급격한 상향기를 거쳐 정체상태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미래의 개선에 대한 기대가 꺾이면서 우울 상태로 돌아선 것이다.

세 번째는 개인의 문제다. 원래 사람의 태도와 성향은 사회적 학습 이전에 유전적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 좌뇌형과 우뇌형 인간으로 구분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좌뇌 전두엽이 발달하면 긍정적인 자극에 민감하고 흥이 많다. 반대로 우뇌가 발달하면 우울한 반응과 부정적 자극에 민감하다.


■ 개인의 긍정성도 사회와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사회가 발달하면서 일정부분 우뇌형 개인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고, 지금과 같은 고도산업사회에서 농경시대처럼 이웃의 숟가락까지 꿰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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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우리가  들판에 홀로 선 존재가 아니라는 격려와 위안을 사회가 줄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의 화두는 welfare(복지)가 되고 있지만, 진정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정치적으로 논쟁하는 복지보다 wellbeing(참살이)에 대한 근본 인식이다. 이때 wellbeing은 단순히 유기농 음식을 먹고 피톤치드를 마시며 숲길을 걷는 개인화된 것이 아니라, 정신적 위안과 연대의 회복과 같은 사회적 wellbeing에 대한 자각을 말한다.

이런 자각의 바탕이 없이 지속가능한 welfare는 없을 것이며 우리의 우울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 운명론적 사고가 지배하는 사회의 위험성 


■ 거듭된 실패가 만들어 낸 운명론적 사고


지금은 우리의 인생이 신의 설계에 따라 레일을 달리는 장난감기차와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즉 인간이라고 해서 생물학과 물리학의 법칙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각자의 삶은 자유의지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성적 사고도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흔들리곤 한다.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도 실패를 거듭하는 경우에 특히 그렇다. 더구나 이런 운명론적 사고가 사회적 운명론으로 이어질 때는 위태로운 상황이 만들어지기도 한다.

지금은 어려운 상황이다 이런 어려운 상황이 우리시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마키아벨리의 시대에도, 애덤 스미스의 시대에도 체념적 한탄들이 하늘을 찔렀고 그때마다 사람들은 섣부른 운명론에 사로잡혀 개선의 의지를 잃어버렸다. 하지만 그래도 지나고 보면 역사의 수레바퀴는 계속 굴러가고 있었다.


■ 우리 삶은 자유의지에 따라 결정된다     


이에 주목한 차가운 지략가 마키아벨리는 운명에 맞서는 인간의 힘(virtu. 비르투)를 강조했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도덕이란 욕망이나 유혹을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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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힘으로 통제함으로써 달성되는 가치지만 마키아벨리의 비르투는 이런 욕망과 유혹의 불꽃이 견제나 억압 없이 그대로 드러나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는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운명적 체념을 함으로써 그것에 복종하는 어리석음을 질타하면서 “운명이 행위의 결과물에 반 이상 작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운명 역시 나머지 절반은 바로 우리 인간에게 맡겨 놓았다.”고 말했다. 즉 운명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잡아채는 것이며, 기회가 포착되면 놓치지 않고 거머쥠으로써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대표작인 ‘군주론’에서 운명에 순응하지 말고 적극적이고 과감한 자유의지를 내세우고 여건이 어렵다고 해서 그것에 복종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운명을 개척하라고 외치며 이렇게 말한다.


운명의 신은 여신이므로 그녀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가끔은 쓰러뜨리거나 제압할 필요가 있다. 운명은 거리를 두고 망설이는 사람보다 이런 사람들에게 승리의 면류관을 씌워준다. 즉 운명은 여자와 같아서 젊은 청년의 편이다. 왜냐하면 혈기 왕성한 청년은 좌고우면하지 않고 민첩하고 과감하게 여자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 건강한 사회를 위한 시민의식  

■ 민주사회 시민의 책임과 의무


시민은 사회의 건강성을 유지할 책임과 의무가 있으며, 계층간에 균형을 이루고 개인들이 누구나 사회에 기여할 수 있도록 건강한 감시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 특히 청년은 현대 사회의 시민이 되어야 한다. 개선은 이미 시스템에 길들여진 기성세대의 몫이 아닌 장차 개선의 수혜를 입게 될 청년들의 몫이다. 자신들의 문제를 남에게 맡겨서는 안 된다.


■ 분노는 개선의 노력이며 시민의 의무다

관리자본주의에서 시장(금융)자본주의로 전환되는 지난 몇십 년간의 과정에 문제가 생기면서 산업자본의 발전이 근로자와 대중의 삶의 질도 개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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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수 있다는 전통적인 믿음이 사라졌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은 자본권력이 대의민주주의적 절차에 의해 대중의 위임을 받은 정치권력을 누르고 국가사회의 어젠더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골드먼삭스를 가버먼트삭스(government socks)라 부르는 미국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미국은 겉으로는 완전한 민주주의체제인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부권력이 자본이 제공하는 정치자금과 인력풀로부터 대단히 자유롭지 못한 나라다.

     <중   략>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상대적 빈곤 문제가 심각하더라도 지금 이 시점에서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부정하고 사회주의로 갈 수는 없음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지난 세월 지구의 반쪽에서 사회주의를 실험해본 결과, 절대적 빈곤과 독재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제3의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빌게이츠가 말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기반한 ‘사람의 피가 흐르는 자본주의’도 하나의 대안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제도가 아닌 개인의 선의를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성공 가능성이 낮다. 제도적인 문제를 그대로 두고, 소수 개인들의 선량한 기부가 문제를 해결하리라 기대하는 것은 위선적 타협안에 불과하다.

결국 제도의 문제다. 선의를 가진 사람의 기부는 존경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공동체의 행복을 위해 누구나 시민의 의무를 다하도록 강제하는 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 소셜 네트워크가 만드는 스마트 월드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열풍이다. 언론은 트위터에 누가 무슨 글을 올렸는지 살피기 바쁘고, 정치인들과 기업인들도 나서서 계정을 개설하느라 정신이 없다. 소셜네트워크의 영향력이 그만큼 빠르게 확신되고 있다는 증거다. 하지만 SNS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가십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막연하게 향후 여론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심봉사 점괘’만이 난무하고 있다.

그렇다면 SNS가 정말 현실세계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여론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을 만큼 막강한 대안체계로 안착할 수 있을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것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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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셜네트위크의 순기능과 역기능 바로 알기


먼저 SNS는 ‘병렬성’의 특징을 지녔다. 과거 여론은 오피니언리더(집단 내에서 다른 사람의 사고방식, 태도, 의견 따위에 강한 영향력을 주는 사람)  와 언론에 의해 형성되었다. 대중의 견해는 ‘국민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왜곡되기 일쑤였고 언론은 보여주고 싶은 것, 비추고 싶은 곳만 보도했다. 이런 정보의 불균형성(직렬성)은 상장하는 시민의식과 유리되고 대중의 불만을 증폭시켰다. 시민사회에서 정작 시민의 의견이 도외시되고 소위 오피니언리더들의 주장이 여론으로 포장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SNS는 대중의 갈증을 일거에 해소했다. 높은 데서 낮은 데호 흐르던 여론의 강물이 바다를 만난 셈이었다. 그가 누구건 무슨 일을 하건 같은 기회를 가졌고, 그의 의견이 대중의 지지를 받는지 배척되는지는 팔로어 수와 반응으로 ‘계량화’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 제시한 내용까지는 SNS의 순기능이다.


문제는 역기능이다. SNS의 약점은 역설적으로 ‘대중성의 부족’에 있다. 기본적으로 SNS는 온라인상의 친분이 우선되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나에게 호감을 가진 사람들만 반응한다. 때문에 SNS상에서 나의 견해는 늘 옳은 것처럼 보인다. 관계를 맺지 않은 대중들이 모두 자유롭게 반응하는 기존의 방식과 달리 집중적이고 확산성이 강한 SNS는 정작 같은 견해를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동종교배가 일어날 수 있는 폐쇄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트위터에서 나의 팔로어는 기본적으로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고 나와 성향이 비슷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혹은 오프라인에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 서로 신분을 공개하며 온라인상에서도 관계를 이어가는 경우도 많다. 때문에 이 그룹에서 나의 견해에 반대하는 비율은 지극히 낮을 뿐 아니라 동의하지 않는 경우에도 반대의사를 드러내지 못하는 침묵의 나선구조를 형성하게 된다.

때문에 SNS에서 오고 가는 담론은 서로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통되고 소비되며, 한 가지 견해를 두고 모두 옳다고 착각하는 ‘무오류성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만약 정치인이라면 자신의 정책이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다고 착각할 것이고 언론사라면 자사의 논조가 대중의 중심을 대표

한다고 오해하게 될 것이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못마땅한 사람은 입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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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 동의하는 사람은 적극적으로 맞장구를 친다. 그래서 SNS상의 의견들은 비판에 민감하고 그래서 비판은 암암리에 위축된다.   

개인화의 관점에서도 그렇다.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을 그리워한다. 과거에는 사람 사이의 관계가 끈끈해서 사람으로 지탱하고 사람으로 위로받았지만, 이젠 사람을 두려워한다. 강한 공동체 안에서는 이웃의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 정도로 친밀하게 지내면서 서로를 온전히 이해했지만 공동체의식이 약한 지금은 서로 각자의 페르소나(persona : 사람을 뜻하는 person에 a가 붙은 것으로 ‘사회적 가면’ 즉 진정한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는 성격)를 앞세울 뿐 진면목으로 상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상대가 나에게 위로보다는 상처를 줄 거라고 생각하며 두려워하게 된 것이다. 


사람은 누군가 자신의 말을 들어주기를 바라지만 내 말을 하려면 상대의 말도 들어줘야 한다. 이것이 바로 소통이다. 하지만 지금은 누구도 진실을 말하지 않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익이 우선인 사회에서는 가능하면 자신의 본심은 숨긴 채 상대의 본심을 간파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우리는 모두 각자 고립되어 있다. 도시속의 섬처럼 각자 외롭게 누에고치를 짓고 상대를 경계하며 마음의 문을 닫아 건 것이다.             


■ 소통에 대한 인간의 욕구가 소셜네트워크의 진화를 이끌다


소통하려는 인간의 본능이, 비록 체온은 아니더라도 언어로서 소통할 수 있는 창구를 열고, 그것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주고받고 관계를 맺는 소셜네트워크가 장차 어떤 식으로 발전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어떤 형태로든 소통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은 소셜네트워크의 진화를 이끌어낼 것이다. 소셜네트워크상에서는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내 말을 듣고, 내가 가만히 있어도 다른 사람이 말을 걸어온다. 굳이 표정을 드러내지 않아도,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줘도, 길거리에서 돌을 맞을 만한 말을 해도 누군가는 들어주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이것의 부작용을 지적한다. 루머의 온상이고 불온한 사상이 떠다니며 악플러들이 지배하는 곳이라고 한다. 또 상대가 강도인지, 사기꾼인지도 모르고 관계를 맺는 것은 위험하다고 경고한다.

하지만 소셜네트워크에서 주고받는 관계는 우리의 욕망, 의지, 불안, 무의식, 위선의 총합이다. 없는 생각이 소셜네트워크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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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 원래 가지고 있었지만 애써 눌러왔던 생각과 말들이 터져나온 것이라는 뜻이다.          


결국 소셜네트워크는 이런 기반 위에 서 앞으로 더 다양하게 진화할 것이다. 소통과 관계. 그리고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성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사회에 불어닥친 SNS열풍은 사람이 부가가치의 핵심이 되는 시대에 사람의 만남, 그 플렛폼이 갖는 잠재력을 보여주는 상징이자 증거다. SNS를 그저 단순한 오락으로 여기지 않고 그것에 내포된 상징성에 주목한다면, 거기에 펼쳐진 새로운 패러다임의 한 장면이 뚜렷하게 보일 것이다.


◉ 전 세계적 슬로건, 공존과 공생


거래는 이익을 위해 싫은 일을 억지로 행하는 것이고, 희생은 이익을 바라지 않고 힘든 일을 행하는 것이며, 헌신은 이익을 바라지 않고 힘든 일을 기쁜 마음으로 행하는 것으로 헌신은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느낄 수 있는 최고 단계의 감정이다.


■ 선한 영향력의 두 가지, sympathy(동정심)와 empathy(공감력)


선한 영향력의 정의는 단지 타인에게 이익이 되는 선택을 함으로써 선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착각이다. 선량함의 근원에는 두 가지 핵심 기재가 작용하는데 하나는 동정심이고 하나는 공감력이다.

진심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감사하는 것은 empathy가 발휘된 때이다.


■ 독존이 아닌 공존을 위한 영향력  


우리는 흔히 ‘값싼 동정’이라는 표현을 쓴다. 인간은 자존감을 가진 유일한 존재이며, 인간으로 구성된 사회 역시 자존감이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타인의 자존감에 대한 인정, 내가 아닌 그의 관점에서 이해하고 같은 눈높이에서  상대의 마음이 되어 진심을 보이는 것 이것이 empathy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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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력은 바로 이런 마음에서 행사되어야 하고 이를 가리켜 ‘선한 영향력’이라고 부른다.

이때 선한 영향력은 단순히 ‘착해 빠진’ ‘바보 같은’이라는 말이 지시하는 의미를 가리키지 않는다. 단지 분노를 억제하고 권리를 포기하며 대항할 의지를 삭임으로써 ‘착하다’는 평가를 받는 수동적 태도를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적극적인 자유의지와 강한 자존감을 바탕으로 나의 그것만큼 타인의 자존감도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empathy다. 우리 모두가 독존이 아닌 공존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 바로 empathy인 것이다.


◉ 인문학적 상상력으로 통섭하라


최근 통섭 열풍이 불고 있다. 진화론은 인정하지만 진화론의 출발인 생명의 탄생은 설명할 수 없고, 우주의 질서와 법칙은 하나하나 비밀을 벗어가지만 그 질서를 구성하는 태초의 출발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듯 과학기술의 발전만큼 그 한계에 대한 곤혹감도 동시에 커졌다. 맹목적인 과학기술중심주의에 대한 일대 도전이 시작된 것이다.

실험실에서 성장해온 과학자의 직선적 사고는 실용성의 한계에 부딪혔고, 이제는 과학기술의 속도 못지않게 그 쓰임새에 대한 상상력이 필요한 과학 발효의 시대가 되었다. 결국 과학에도 머릿속의 실험실, 즉 상상력이 더해져야 한다. 이미 발달해버린 1,2,3차 산업을 대체할 4차 산업의 지적도가 그려져야 하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우리는 그 해법을 가리켜 ‘통섭’이라고 부른다.


그 결과 과학이 도살해버린 철학이 부활하고 한 손에 아이패드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철학책을 든 전문경영인이 인문학적 상상력을 이야기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동안 맹렬하게 질주해온 과학의 허점을 간파하고 버려진 기술들을 재조합하며 쓸모없는 우주왕복선을 만들기보다 컬럼비아호 제작과정에 축적한 이론과 기술을 바탕으로 지금 당장 필요한 분야에 새로운 장을 여는 상상력, 즉 통섭의 시대가 온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지금 청년들에게는, 지금까지 없던 것을 새로 창조하는 천재성이 아닌 기존의 것들을 재조합하는 통섭의 능력과 안목을 키우고 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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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적 상상력을 통해 자신의 세계관을 확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었다.      


◉ 패러다임을 읽어내는 주인공이 돼라


‘변화’는 사실 우리가 습관처럼 쓰는 말이다. 기업이나 정치권에서는 ‘변화’와 ‘혁신’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있고 개인들도 비슷하게 ‘변화’를 추구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가장 변하지 않는 말이 있으니 바로 ‘변화해야 한다’는 말 자체다. 늘 변화를 외친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그만큼 변화를 두려워하고 변화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의 반증인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슬로건은 콤플렉스의 방영이다.

어떤 이가 반복적으로 무언가를 외친다면 그의 최대의 약점이 바로 그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정치권이나 기업이 내거는 구호를 살펴봐도 이런 사실은 금세 드러난다.


■ 변화의 물결을 읽어야 중심에 선다


원시시대부터 변화는 인류의 DNA속에 깊숙이 새겨져 있고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변화는 인류의 화두다.

변화에는 수동적인 변화와 능동적인 변화가 있다. 수동적인 변화는 죽음에 이르는 길이지만, 능동적인 변화는 나를 실존케 하는 증거이자 내 삶의 면류관이다.

또 사회의 일원으로서 그 역할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시대와 사회의 변화, 산업의 변화를 주의깊게 지켜보고 변화의 큰 물줄기가 바뀔 때 그 맥을 짚어 바른 자리에 서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물줄기가 바뀌는 지점을 가리켜 ‘패러다임 시프트’라고 부른다. 이런 지점에서는 그것을 파악하고 새로운 물결의 중심에 서는 사람은 리더가 되고, 과거의 물줄기를 타고 사라져가는 사람은 낙오자가 된다. 청년은 이런 패러다임의 변화를 읽고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

■ 변화는 스스로 찾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무지개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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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는 스스로 변화하는 사람에게만 모습을 드러내는 무지개와 같다. 매일 스스로 변화해 어제와 다른 오늘, 오늘과 다른 내일 아침과 다른 저녁을 맞는 사람에게 변화하는 패러다임 혹은 세상은 속속들이 들여다보이는 느린 장면이 된다. 하지만 모니터 앞에 앉아 습관처럼 연예기사나 살피면서 무의미한 논쟁을 벌이고, 매일 갖는 술자리에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한탄만 늘어놓는 사람에게는 ‘번쩍!’하고 지나가버리는 번갯불처럼 실체를 보여주지 않는다. 

스스로 변화의 중심 패러다임의 주인이 된 청년에게 스펙이란 그야말로 길거리에 날리는 휴지조각에 불과하다. 변하자. 오늘의 나를 어제의 나와 다르게 만들고. 내일의 나를 오늘의 나와 다른 사람으로 발전시키자. 그것이 바로 우리의 희망이다.


■ 능동적 변화를 말하는 책, 주역


이렇게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필자가 청년에게 추천하는 책이 바로 주역(周易)이다. 영어권에서는 주역을 ‘변화의 책(the book of changes)’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易’자가 ‘바꿀 역’자여서 영어로 직역한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주역이 실제 ‘변화’를 말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주역’의 주제는 우리 속담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다’와 사자성어 ‘새옹지마(塞翁之馬)’ 등과 같은 맥락이다. 그 때문에 주역을 소극적으로 해석하면 ‘참고 기다리며 늘 자숙하라’는 의미가 되는데, 바로 이점 때문에 형이상학적 논리의 교범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원래 형이상학이란 자연의 원리와 법칙을 이해하지 못한 인간이 질서를 자연 그 자체에 두지 않고 저 너머에 존재하는 신적인 자리에 두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 지배계층이 좋아할 수밖에 없었고, 대개의 지배원리는 형이상학적 논리 위에 서 있다.

어쩌면 이것이 유가(儒家)에서 주역을 경전으로 인정한 까닭이고 공자가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로(韋編三絶)’로 주역을 읽은 이유이며, 왕필(王弼)을 비롯한 많은 학자가 ‘주역’에 주석을 달고 평생을 탐구한 진짜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일반대중이 주역을 점쟁이 책으로 여기며 관심을 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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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은 반면 지배계층과 그들을 수호하는 지식인들이 탐독하며 사서오경의 한 권으로 인정한 진짜 이유였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현대사회에서 취해야 할 ‘주역’의 기본원리는 계사전(繫辭傳)의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窮則變, 變則通, 通則久)’라는 구절에 모두 녹아 있다. 이 아홉 글자의 뜻을 우리말로 풀면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영원하다’는 뜻으로 이 말은 사실 인류사에 길이 남을 빛나는 선언이기도 하다. 여기서 궁하다는 것은 난관에 부딪혔다는 뜻이다.


◉ 이 책의 끝부분에는


■ 새 시대의 패러다임 이해하기

0 1,2차 산업화 시대의 추격과 질주로 잃어버린 것

0 이제 선두에 선 우리는 추격이 아니라 앞길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것

0 미래의 핵심은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


■ 공공의식을 가진 공감형 리더십의 요구

0 내 아이가 행복하려면 이웃집 아이가 행복해야 한다.

0 공공의식을 가진 사람이 승리자가 되는 사회

0 정의와 공정이 결핍된 사회


등에 대한 필자의 날카로운 성찰이 개진되고 있습니다.    

                       


                       2011. 12. 7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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